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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의원 4선의 한국계 ‘개혁기수’/자살한 아라이 의원은 누구인가

    ◎동경대 나와 73년 대장성 입성/86년 38세 나이로 중의원 당선/94년 자민 탈당후 작년 재입당 【도쿄=강석진 특파원】 자살한 아라이 의원은 중의원 4선 가도를 달리고 있는 유일한 한국계 일본의원으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었다. 오사카 출신 교포 2세로 16세때 귀화했으며 동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뒤 신일본제철,대장성을 거쳐 86년 38세에 자민당 공천으로 중의원 의원에 첫 당선됐다. 자민당 시절인 92년 다케시타 노부루(죽하등) 전 총리의 자민당 탈당 결의에 앞장서는 등 자민당의 금권정치를 과감히 비판하면서 소장 개혁파로 이름을 날렸다.이같은 이미지를 업고 도쿄 선거구에서 4선에 성공하는 등 발판을 다졌으나 지난해말 불거지기 시작한 증권거래 의혹으로 정치 생명을 위협받아 왔다. 장래 각료 입각대상이란 기대를 모으기도 했던 그는 그러나 94년 자민당 탈당후 자유당,신진당,무소속을 거쳐 지난해 자민당에 재입당하는 등 소속이동이 잦았다. 항간에는 그가 궁지에 몰린데는 이같은 정치행적과 연관이 깊다는 소문도 떠돈다.이와함께주식거래 등을 통한 정치자금 조달이 공공연한 사실로 돼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그가 정계로까지 검찰의 수사가 확대된 금융계 비리의 희생양이 됐다는 지적도 있다. 이를 반영하듯 그는 최근 국회에서 자신이 한국계라는 이유로 비난받아 왔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슬하에 3남1녀를 두고 있으며 부친 등 그의 일가는 지금도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다.
  • 제2,제3환란 대비하자(우홍제 칼럼)

    ○망치소리를 들려주자 “당신의 채권자가 새벽이나 밤늦게 당신의 망치소리를 듣는다면 빚갚는 기한을 흔쾌히 늘려 줄 것이다.그러나 이와 반대로 술집에서 흥청대며 놀거나 소란을 피우는 당신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는 이튿날 아침 찾아와서 빚독촉을 해대며 당신이 미처 준비할 겨를이 없는데도 자기 돈을 찾아가려 할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벤저민 프랭클린 연설문 ‘젊은 상인에게 주는 조언’에 실린 말이 생각나는 것은 우리의 상황을 그대로 압축한 듯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남의 돈을 빌어 장사하는 사람이 모름지기 취해야 할 태도와 그러하지 않을 경우의 결과를 한마디 비유로 잘 그려내고 있다. 우리는 지금 과연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1이 훨씬 넘는 1천5백억달러 외국빚을 갚으려고 모두가 망치를 두드리고 있는가.안타깝게도 그렇질 못하다.지난달 말 외채협상은 위기 해소가 아니고 시간벌기로 아슬하게 위험한 순간을 피한 데 불과하다.그럼에도 마치 이제는 큰 걱정 안해도 된다는 식의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아니면 그동안 별쪼들림없이 잘 놀고잘 쓰던 타성을 미처 떨쳐내지 못해서 아직 국제통화기금(IMF)종속체제의 쓰라림을 느끼지 않는 탓인지. 강성 노동운동단체인 민노총의 총파업 위협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각종 개혁입법의 국회표류는 도저히 국가 파산의 치욕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벌어질 수 있는 현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다.우리가 외국채권단에게 단기외채 상환의 조건으로 수락한 것은 크게 노동시장 유연성제고·기업구조조정·부실금융기관정리 등 세가지다.이 가운데 고용조정을 통한 노동시장 유연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외국자본의 직접투자유치 및 대외신인도 회복노력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파업위협·국회표류 유감 게다가 정부지급보증이 안된 민간기업의 1천억달러 가까운 외채는 언제 또다른 외환위기를 촉발시킬지 모를 화약고같은 요인이다.3월말 결산을 앞둔 일본은행들의 자금상환압력과 인도네시아 사태 등 해외의 악재도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그러니 한창 해외의 호의적인 반응을 끌어내고 있는 노·사·정 대타협을 뒤집는 것은 망국을재촉하는 행위에 다름아닌 것이다. 이처럼 흐트러지기 쉬운 우리사회의 외채경각심을 부단히 일깨워 주고 환란의 재발을 막기 위해선 이번 사태를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외채의 실상을 국민앞에 낱낱이 공개하는 ‘외채 백서’도 만들어야 한다. ○외채백서 만들어 공개하자 외채도입 금융기관이나 기업체명단은 물론 외채가 어떤 목적으로 제대로 쓰였는지,아니면 받을 길없이 떼어 먹히거나 중복·과잉투자로 헛되이 낭비되었는지 등을 소상히 밝혀야 마땅하다. 마지막에 가서 외채상환의 부담을 지는 최종 채무자가 바로 국민이기 때문이다.과거 70,80년대에도 외채 망국론이 거세게 일었던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외채는 일부 부정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국가경제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해 중요한 생산적 기능과 역할을 담당했던 종자 돈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국내에 이렇다 할 부존자원이 없고 자본축적도 미약했기 때문에 외채부담은 불가피한 선택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90년대 들어서는 금융기관·재벌은 물론 국민들까지 외채불감증의 행태에 휩쓸려 해외여행 한번 안가본 사람은 팔불출로 치부되기도 했다.확고한 철학과 목표설정없는 세계화의 왜곡현상이 만연했던 탓이며 이를 시정해야 할 당국은 문제의식없이 방관한 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다.이제 앞으로 정부나 기업·가계·근로자 등 모든 경제주체들은 잠재적인 성장나르시즘의 틀을 과감히 깨뜨려야 한다. ○성장 나르시시즘 깨자 막연히 “우리경제는 괜찮아 질 것”이라고 과거 고도성장에의 향수나 기대를 갖는 것은 금물이다.국내시장이 협소한 우리경제의 대외지향발전전략은 차라리 숙명적인 것이다.그리고 이 전략의 핵은 주로 미국 달러로 대변되는 외환이다.풍족한 외환보유만이 국난해결의 수단이다.모든 국민들의 단합된 힘이 실린 망치소리에 외채상환의 길이 열리고 채권단의 빚독촉도 미뤄져서 제2,제3의 외환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다.
  • 어느 운수회사 간부의 죽음/이지운 사회부 기자(현장)

    ◎“직원 해고보다 차라리 내가”… 번민 끝 목매 서울 H운수회사 상무 조용식씨(60)가 31일 상오 경기도 고양시 벽제화장터에서 한줌의 재로 스러졌다. 조씨는 IMF 한파가 몰고 온경영난으로 직원을 정리해고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자 이를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엊그제만 해도 직원 5백여명에 2백여대의 버스,11개의 노선을 보유한 중견 버스회사의 노무 및 총무담당 임원이었다. 이 회사는 연 2백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던 탄탄한 회사였다. 조상무는 회사 살림과 법에 정통해 지난 96년 정년퇴직을 한 뒤에도 지금까지 촉탁근무를 해 올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그가 퇴직하면서 펴낸 ‘운수계통의 경영관리 이론과 현실 및 과제’는 버스업계에서 필독서로 꼽힐 정도였다. 조씨는 성격도 호방하고 담백해 노조로부터도 신임을 얻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조씨도 최근 IMF 여파로 유류값이 지난해 상반기보다 갑절 이상 오르면서 경영에 어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매달 5억여원의 추가부담이 늘었고 자금난으로 직원들 봉급조차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급기야 지난해 말 본의 아니게 관리직원 3명의 사표를 받았고 적자폭이 계속 커져 추가 감원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조상무는 부인과 슬하에 1남2녀를 둔 가장으로서 직원들에게 고통을 강요해야 하는 현실을 비관해왔다. 부인 이모씨(48)는 “남편이 종종 ‘나도 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직원을 해고하는 것은 정말 못할 짓’이라고 말했다”며 오열했다. 그는 지난 29일 서울 강북구 미아9동 집에서 점심과 저녁도 거른 채 술을 마시며 “회사를 살리려면 감원도 해야하고 … 차라리 내가 죽어야지”라며 번민하다 하오 11시30분쯤 안방 문 손잡이에 목을 매고 말았다. 같은 회사 권모 전무(63)는 “조상무는 회사운영에 아무런 실질적 책임도 없고 채무관계도 없었는 데 이렇게 회사운영에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 줄 몰랐다”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 어느 농민의 이웃사랑 11년/정읍시 내장동 이춘조씨

    ◎“아무리 가난해도 도울 힘은 있지요”/넉넉지못한 살림에도 무의탁노인 10명에 성금 【정읍=조승진 기자】 “살기가 어렵다고 해서 매년 해 오던 이웃돕기를 멈출 수는 없지요.조그만 정성일 뿐입니다” 11년째 이웃돕기를 실천해 온 이춘조씨(63·내장동 553)가 19일 정읍시 내장동사무소에서 10만원씩 든 봉투 10개를 수줍게 꺼내 설 명절이 더욱 쓸쓸한 10명의 무의탁 노인들에게 전달했다. 이씨는 “직접 찾아 뵙지 못하고 추운 날씨에 동사무소까지 나오시도록 불편을 끼친 게 오히려 송구스럽다”고 했다. 4천여평의 논 농사가 고작인 이씨의 자선은 슬하의 3남 2녀가 모두 장성해 서울 등지로 독립하면서 내외만 남은 87년부터 시작됐다. 17살때 부모를 여윈 이씨는 막노동 등 맨몸으로 자수성가하면서 자녀들의 교육과 결혼 등 앞만 보고 살아왔으나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과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한 한을 간직해 오다 주변의 소년소녀 가장과 홀로사는 노인 돕기에 나섰다.처음에는 추석과 설에 자신이 직접 농사지은 쌀을 10가구에 한가마씩 기증했다.그 뒤 일년에 두번씩 한차례도 거르지 않고 이제까지 200가마 상당의 쌀이나 현금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도왔다. 특히 이번 성금은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아내 정인순씨(58)가 1년전부터 고혈압 증세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있는 등 우환중에 이루어진 것이어서 주위를 더욱 감동케 하고 있다. 이씨는 “아내 병간호로 시간이 없어 예년처럼 방문 전달을 못했다”며 “어릴때부터 이웃들에게 받은 도움에 비하면 부끄러울 뿐”이라고 말했다.
  • 노동계가 양보할 차례(경제평론)

    ○아직 안심할 단계 아니다 한국경제는 지금 국민의 선택여하에 따라 살아나느냐,파국을 맞느냐는 기로에 서 있다.지난해 말 국가부도를 가까스로 모면했지만 지금도 아슬아슬하게 외환위기를 넘기고 있다.오는 3월말 만기가 도래되는 단기외채 2백50억달러의 상환연기와 선진 7개국의 협조융자금 80억달러 도입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절박한 시점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1백30억달러를 지원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이미 국가부도(대외채무불이행)가 났고 지금 논의되고 있는 대기업 구조조정과 노동시장 유연성문제도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IMF가 다행히 구제금융을 지원해줌으로써 외국 금융기관이 만기가 도래되는 단기외채를 연장해주기 시작,지금은 연장률이 70%선까지 올라가 있는 상황이다. IMF와 미국 등 선진국은 한국이 대외신인도를 회복하는 길은 한국의 각 경제주체가 맡은 바 책무를 얼마나 충실히 이행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캉드쉬 IMF총재는 13일 KBS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대외신인도를 복원하려면 정부는 IMF프로그램을 강력히 추진하고 기업은 투명성 제고와 원가절감을 통해서 수출을 늘리며,노동계가 정리해고를 수용하는 것 밖에는 없다고 강조했다. 캉드쉬 총채는 특히 ‘노조문제는 매우 중요한 갈림길에 있다’면서 한국경제의 ‘성패여부’가 근로자의 손에 달려 있다고 역설했다.근로자의 행동여하에 따라 고용창출·기업형태·국민경제가 달라질 것이라는 점을 거듭해서 강조했다.IMF와 미국은 ‘임금삭감을 통한 고용수준 유지’에 매우 회의적이다.정리해고라는 완전한 방법을 통해 구조조정을 하라는 경고를 계속해서 보내고 있다. IMF와 선진국은 임금과 근로시간을 줄여서 근로자 고용을 유지하는 기업은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경제연구기관은 미국이 지난 24년만의 최저실업률(4.6%),32년만의 최저 물가상승률(0.1%)이라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은 80년대말의 대량 감원과 임금인상 자제 등 근로자의 희생의 기여에 힘입은바 크다고 밝히고 있다.폴 크루크먼 미국 MIT대학 교수도 ‘지난 10년간 미국 근로자의 실질임금이 동결됐다는 사실이 미국의 경쟁력을 회복한 유일한 이유’라고 단언할 정도다. ○미 정리해고로 고용창출 독일이 지난 연말 실업자수가 4백52만명으로 전후 최대치를 기록한것은 지난 96년 노·사·정이 ‘고용을 위한 연대’에 합의안을 마련했으나 해고제한법 개정에 대한 견해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2년여동안을 허송세월한데서 비롯되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지금은 야당과 노조가 독일식 고용유지정책이 오히려 실업자를 양산하고 있다며 정부를 몰아 세우고 있다. 미국의 정리해고방식은 일시적으로 근로자에게 고통을 주나 장기적으로는 기업 경쟁력을 강화,고용을 창출한다는 것이 하나의 가설로 굳어져가고 있다.독일과 프랑스식의 근로시간 단축과 임금삭감을 통한 고용유지정책은 실효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노동계는 경제위기의 책임이 사용자측에 있다며 사측이뼈를 깍는 자구노력을 한 다음 인력감축을 하라고 주장해왔다.다행히 13일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와 재계 4대그룹 회장은 결합재무제표(재무제표) 작성의무화·상호지급보증 조기해소·부실기업 경영진퇴진·구조조정 자발적 추진·재무구조의 획기적 개선 등 5개항에 합의했다. ○재계·정부의 개혁 착수 재계는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마련,17일 범정부차원의 투자협상단이 미국을 방문하기 전까지 정부에 전달키로 했다.재계가 그동안 온갖 로비를 통해 미뤄오던 결합재무제표작성과 상호지급보증 조기해소 등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은 외채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결국 상위 재벌그룹도 생존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개인자산을 기업에 투자하라는 김대통령당선자의 주문을 재벌총수들이 수용한 것은 생존을 위한 선택의 단적인 예로 보인다.대기업부도가 금융기관 부실화­외채위기­초고금리와 환율급등 등 경제전반에 악순환을 초래했고 현재 ‘발등의 불’로 되어있는 외채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국민경제가 파국을 면하기 어렵다는 데 이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경제 살리기 우선 공감을 정부는 공무원 봉급동결과 부 처축소 등 개혁에 착수했고재계가 자기혁신에 동의함으로써 이제 남은 과제는 노동계가 개혁에 착수하는 것이다.IMF와 미국은 노동계가 정리해고를 수용하지 않으면 금융지원을 중단할 우려가 있다.비록 중단은 하지 않는다해도 외채상환연장률이 낮아진다. 만약 연장률이 낮아져 외환위기가 재연되면 환율과 금리가 천정을 모르고 오를 것이다.올해 시중금리가 계속해서 20%를 넘으면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부도율이 사상 최대치인 1.1%를 기록,월평균 6천개의 기업(개인사업자 포함)이 도산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노동계는 정리해고문제로 인해 외채도입이 지장을 받고 이로인해 환율폭등과 초고금리가 지속된다면 기업도산으로 대량 실업사태가 자연적으로 발생,정리해고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없어지게 된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기 바란다.노동계는 국가부도가 발생,국민생활이 도탄에 빠지기전에 양보와 협력을 아끼지말 것을 간곡하게 당부한다.이제 노동계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양보해야 할 때다.
  • 대선주자들 온라인 성폭력 토론회/“여성문제 적임자” 한목소리

    ◎‘노출과 성폭력의 관계’엔 모두 비판적 대선주자들이 성폭력 토론회에 ‘접속’했다.한국성폭력상담소와 컴퓨터통신 유니텔이 97 세계성폭력추방주간(11월25일∼12월10일)동안 사이버공간에 마련한 ‘온라인 성폭력 토론회’에 뛰어든 것.이들은 성폭력문제가 여성에게 민감한 관심사임을 감안,자신이 여성문제해결에 적임자라는 점을 앞다퉈 강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오랜 판사경력을 보고 제가 모든 사물에 굉장히 보수적일 거라고 믿는 분들이 많다.하지만 각계각층 다양한 인생을 간접 경험하다 보니 오히려 사회적으로 힘없는 약자,피해자입장에 서게 된다”면서 “성폭력문제도 여성 정조침해가 아니라 인간존엄성 말살차원으로 보고 피해여성들의 권익회복,성폭력없는 세상만들기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주장했다.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세상의 반인 여성여러분을 누구보다 사랑해 여성들을 위해 열심히 뛰었는데 여성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낮아 섭섭하다”면서 “평소 ‘아내의 권리가 남편과 같고,어머니의 권리가 아버지와 같고,딸의권리가 아들과 같은 세상’을 강조해왔다”고 홍보.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자신이 “할머님과 어머님,누님의 사랑속에 자란데다 슬하에 딸만 둘”이라며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을수 밖에 없는 가족사를 공개. ‘노출은 성폭력의 주범이고,끝까지 저항하면 강간은 불가능한가’라는 첫주제(11월25∼31일)에 이들은 입을 모아 반박했다. 한나라당 이후보는 “대법원 판례는 피해자가 강하게 저항했으나 극복할수 없는 폭행·협박이 가해졌어야 강간죄로 본다”며 판사출신답게 법지식을 과시한뒤 “하지만 강도높은 반항은 ‘강간치사’를 부를 수도 있어 강간기준으로 적합치 않다”고 역설. 국민회의 김후보는 “성폭행 가해자 70%가 면식범 소행이며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 가운데 34.3%가 어린이 성추행”이라는 자료를 인용하며 “성폭행원인을 여성노출에 돌리는 것은 본질호도”라고 지적. 국민신당 이후보는 성폭력 요인으로 “여성을 성적 쾌락의 대상으로 보는 남성중심사고,대중매체의 역할방기,여성순결에만 치중한채 남성의 성충동 자제에는 무관심한성교육” 등을 꼽았다. 유니텔에서 go DISCUSE하거나 초기화면에서 통신광장을 거쳐 토론마당으로 들어가면 토론회에 참가할 수 있다.
  • 몽골 어느 탈북자의 삶과 고백(흑룡강 7천리:9)

    ◎노동·농사·목부… 고독한 이방인/“자본주의가 나쁘다는 말만 듣고 살아서리 눈으로 보겠다는 생각에 고향을 뛰쳐 나왔디요 외몽골·소련을 거쳐 구라파로갈 타산으로…” 중국으로 넘어오는 북한 동포들이 꽤나 되는 모양이다.탈북자라고 부르는 북한 동포들의 중국 월경은 오늘날의 일만이 아니다.식량난으로 허덕이는 북한의 현실을 고려하면 요즘의 탈북은 설득력을 갖는다.그런데 중국 보다 살기가 좀 나아서 밥술이나 먹던 시대에도 탈북자가 있었다.금을 캐는 노구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이한우씨(62·가명)가 그런 장본인이다.그것도 두차례에 걸친 탈북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역마살이 끼었는지 지금도 떠돌아 다니는 신세다.내몽골에 처자가 산다고 얼버무릴뿐 가족 이야기는 더 하지 않았다.다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대륙에서 살아온 힘겨운 시절만을 털어놓는 것으로 일관했다.그러면서도 연신 주변을 경계하는 눈초리로 목소리를 낮추었다.그가 살아온 처지를 생각하면 그럴수 밖에 없겠지만,신분노출을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조선땅이 가까운데서 온 작가선생이라 내레 믿고 얘기합네다.내 이름을 구태여 알라고는 하지 마소.수소문만 하면 형제들이 조선에 살지 않갔수.어디 살던 아무개가 중국에 산다는 것이 소문나면 좋지 않을 것입네다.내레 처음 압록강을 건너 단동에서 화물차를 탔으니까,고향이 어디쯤이라는 것은 짐작하실 거우다.선생도 그쪽 사람들 다 굶어 죽게 되었다는 소리 들었디요.내 가족들은 죽지나 않았는지…” 그는 1961년 10월 압록강을 건너 단동에서 무작정 화물열차를 탔다.화물차에 숨어 꼬박 이틀을 달려 어느 역에 닿았다.지금 생각하면 아성이었다는 것이다.중국말을 모르는 지라 벙어리 흉내를 내면서 밥을 빌어 먹었다.그리고 걸어서 하얼빈에 온 그는 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화물차에 올랐다.열차는 쉬지도 않고 하루낮 하루밤을 달린 끝에 내몽골 하이라얼(해라이)에 도착했다. 중국은 당시 살기가 어려웠다.나무껍질과 같은 먹을수 있는 것이라면 다 먹었던 이른바 대식품시대라서 빌어먹기도 어려운 때였다.주린 배를 움켜 쥐고 역 대합실에서 새우잠을 잘 수 밖에….그러다 경찰에 잡혔다.조선인민군 정찰병으로 권투에도 능했던 그였지만,석탄차를 타고온 주제 꼴은 말이 아니었다.자신이 보아도 의심을 받기 딱 좋았다.붙잡히고 나서 곧바로 수용소로 직행했다.그러나 수용소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식량난이 극심해서 죄수가 도망가도 찾지 않았다.그는 수용소에서 만난 몽골족과 함께 탈출한 뒤 말을 훔쳐타고 외몽골로 들어갔다.조선인(북한인)넷에 몽골족 둘을 합해 일행은 여섯이었는데,몽골족 도움으로 조선족들도 모두 몽골족 차림을 했다.중국에는 당시 먹을 것이 없어서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떼지어 들어가던 시절,그는 왜 탈북자가 되었는가.그의 말을 들어보면 탈출 목적지는 중국이 아니었다. ○“가족들 죽지나 않았는지…” “외몽골과 소련을 거쳐 서구라파로 들어갈 타산을 댔디요.자본주의가 하도 나쁘다는 말만 듣고 살아서리 눈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네다.지금은 부자로 사는 남한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네다.여하간 호기심이 많아서리 고향을 뛰쳐나왔디요.중국과 몽골공화국은 다 같은 공산국가고 우호 인방이라 그랬는지 몰라도 내몽골 들어가기가 쉬웠드랬습네다.순라병은 그림자도 없고 철조망 서너 가닥을 늘여 놓았더라 이겁네다.” 그는 일행과 초원 풀더미속에서 잠을 청하다 또 붙잡히고 말았다. 하이라얼 감옥에서 꼬박 두달을 살았다.그리고 나서 추방을 당했다.그를 기다린 곳은 함경도 아오지탄광이었다.그래도 하루 쌀 300g을 배급받았다. 북한은 당시 중국에 비해 사정이 좋아 노동개조를 받는 죄수에게도 쌀을 주었다.요즘 북한과는 천양지판이었으나 그는 또 탈북을 꿈꾸었다.1961년이 돌아오고 음력 설날을 며칠 앞둔 어느날 아오지를 탈출했다.두만강을 건너 도문에 와서 화물열차를 탔다.그래도 있던데가 좋았는지,다시 하이라얼에서 내렸다. ○아오지탄광서 또 탈출 그는 배가 무척 고팠다.자신도 모르게 식당 앞을 서성거리다 식사를 하던 노년의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때를 놓치지 않고 손짓 발짓으로 식사를 구걸했다.여인은 측은한 눈길을 주면서 얼결에 말을 걸었다.조선말이었다.내몽골에서 조선말을듣는 것은 엄동설한에 불을 만나는 것과 같았다.모든 사연을 실토하고 밥 한 그릇을 얻어먹었다.그 여인은 당시 쉰 살의 조선족이었는데,몽골족 남편과 산다고 했다.이름은 이영숙,슬하에는 자식이 없었다. “내 딱한 사정을 듣고 자기를 따라가지 않겠느냐고 묻습데다.내 거절할 이유가 없었디요.하이라얼에서 90리가 떨어진 그 집을 따라 갔더니,몽골족 남편이 양자를 삼겠다고 제의를 해왔디요.그분은 자기 이름을 투린자라고 소개합데다.촌의 당서기고 해서 사는 것도 그만했디요.몽골 초원에서 당서기 양아들로 사니끼니 누가 뭐라는 사람도 없고….모처럼 좌정을 하게 되었다 이겁네다.” ○넓은 초원서 3년을 목부로 몽골 유목민들은 양자를 두거나 데릴사위를 들이는 일을 해운으로 여기기 일쑤다.그래서 여남은 살을 먹은 소년을 소나 말,양 따위와 바꾸어 데려다 키우는 경우도 있다.이는 초원에서 노동력을 확보하는 수단의 하나인데,온정을 베푼다는 의미도 지녔다.‘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속담처럼 양쪽 모두가 손해볼 것이 없는 양속인지도 모른다.어떻든 초원에서 석 삼년을 목부로 살았다.그러는 동안 몽골말도 배우고 짐승을 방목하는 일에도 이골이 났다.이웃에는 28가구가 사는 조선족 마을이 있었으나 가난하기가 이루 말할수 없었다. 초원에 겨울이 오면 유목민들은 정거생활에 들어간다.그 때에 반드시 필요한 시설은 우물이다.그래서 이한우씨는 목축을 하면서 우물을 파는 일에 매달렸다.우물을 파서 돈도 제법 번 일이 있다는 그는 노다지 소문을 듣고 흑룡강상류로 들어왔다고 했다.그러나 어디까지나 고독한 이방인으로 초원을 잊지 않았다. “몽골 노래가 왜 음이 길고 높은지 아오? 망망한 초원엔서 방목을 하다 보면 고독할 때가 많디요.그 고독을 달래기 위해 노래를 길고 구성지게 부르는 겁네다.”
  • ‘힘든 추석’ 넘기기(사설)

    올 추석은 여러가지로 힘든것 같다.전반적인 경제형편이 여의치 않아 추석보너스를 못주는 회사가 적지않고 주더라도 다른 때보다 줄여주는 곳이 많은 모양이다.보너스는커녕 봉급도 못주는 기업 또한 적지 않아서 보너스라도 나오는 것은 다행한 셈이다.따라서 시장도 백화점도 모두 울상이다.임금이나 보너스를 받지 못하는 사람도 우울하지만 지불해야할 것을 지불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괴로울 것이다.이래저래 밝지않은 느낌이다. 우리에게 추석처럼 좋은 명절은 없다.뜨거운 여름의 힘든 세월을 보내고 들녘의 결실을 바라보며 소슬하고 맑은 날씨를 누리는 명절이다.그리고 1년중 가장 밝은 달이 뜨는 날이어서 고마움을 표하고 좋은 일을 빌기에 합당한 날이다.그런 날이므로 이날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고 친척이며 이웃이 모여 친화를 나눈다.광에 여유가 생기면 어려운 이웃을 돕고 더불어 나누기를 좋아하는 우리 민족에게는 알맞은 명절인 것이다.그래서 거렁뱅이조차 “더도 덜도 말고 일년 365일이 모두 오늘만 같고지고‥”한다는 날이다.이 아름다운 명절이 힘들 것이라는 예고는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그러나 이 명절의 뜻은 풍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형편이 여의치 못해도 맑고 밝은 날 조상에게 차례는 지낼수 있고 이웃을 위해 마음을 나눌수 있다.고향의 어른들을 찾아보고 동기간에 우애를 돈독히 할수도 있다.그러므로 흥청거리는 일은 오히려 추석명절에 맞지않다.추석은 힘든대로 뜻깊게 보낼수 있는 명절이기 때문이다. 올 추석은 연휴가 길다.여름휴가 이후 금방 다가와 근로의욕에 방해가 될까 걱정스러울 만큼 길다.이 연휴를 생각 없이 행락만으로 보내는 것은 악덕이다.그런 계획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꼭 자동차를 몰고 즐겨야 좋은 명절이고 연휴는 아니다.현실을 사려깊게 돌아보고 당면한 어려움을 이기는 노력을 생각하고 이웃의 고통을 생각하는 미덕이 추석에는 어울린다.
  • 괌운항 조종사들 ‘저고도 공포증’ 심각

    ◎표식 없고 계기착륙시설도 부실 대한항공 801편 추락사고 이후 괌의 아가냐 국제공항에 착륙을 시도하는 항공기 조종사들이 고도를 너무 낮게 잡은 것이 아닌가하고 불안해하는 ‘저고도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다.때문에 진입고도를 지나치게 높게 잡아 착륙에 실패하는가 하면,위험하다 싶으면 아예 회항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18일 상오 2시35분쯤 (이하 한국시간) 아가냐공항에 착륙하려던 오사카발 전일공(ANA) 소속 여객기가 폭우와 강풍속에서 착륙을 시도하다 활주로를 지나쳤다.이 여객기는 20분뒤 재착륙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는 진입고도를 너무 높게 잡아 관제사의 경고로 다시 급상승했으며 3번째 시도 끝에 에정시간을 45분 넘긴 상오 3시20분에야 착륙했다. 또 서울을 출발,사이판을 거쳐 이날 상오 2시55분쯤 아가냐 공항에 착륙하려던 컨티넨탈 항공 소속 928편 여객기도 진입고도를 너무 높게 잡은채 착륙을 시도하다 복행한 뒤 두번째 시도에서 착륙에 성공했다. 지난 8일에는 일본항공(JAL) 소속 여객기 1대가 정상 진입각도를 넘긴상태에서 착륙하려다 랜딩기어가 땅에 스치듯 아슬아슬하게 급상승하는 사고도 발생했다. 그런가 하면 지난 12일 하오 7시15분부터 1시간15분 동안 아가냐공항의 활주로 유도등이 정전사태로 꺼져 나우로항공 소속 여객기 1대와 컨티넨탈 항공소속 여객기 2대가 착륙을 포기하고 사이판 공항으로 돌아갔다. 아가냐공항의 활공각 유도장치(글라이드 슬로프)는 고장났고 최저안전고도 경보시스템(MSAW)마저 작동하지 않아 조종사들은 육안과 방향 및 거리지시기(VOR/DME)에 의존해 착륙해야 한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아가냐 공항 진입로에는 기준을 삼을만한 뚜렷한 지형지물이나 불빛이 없고 계기착륙시설도 부실해 야간이나 악천후 속에서는 조종사들이 착륙에 어려움을 겪는다”면서 “801편 사고로 조종사들의 공포감이 커져 복행이나 회항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 현대시인 애청의 금화(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15)

    ◎생가어귀엔 수령 500여년 느티나무가…/절강성 중심부에 위치한 비산비야/대시인 기리는 3층높이 방려 이채 이제 발걸음을 강소성에서 훌쩍 절강성으로 옮겼다.옛날 춘추때 같으면 오나라에서 월나라로 건너온 것이다. 금화는 절강성의 중부,그 수도인 항주에서도 남쪽으로 약 170㎞.그토록 멀리 깊숙이 나래를 편 것은 거기가 매력적인 작가로 명말 청초의 희곡가요,소설가인 이어와 중국 현대시 80년사에 가장 많은 독자를 지녔던 공산당 당적을 가진 시인 애청(1910∼1996·중국발음 아이칭)을 낳았기에 말이다. 애청은 필자가 맨처음 해후했던 사회주의 시인이다.아직도 냉전시대였던 83년1월,싱가포르정부가 주최한 제1회 세계중국어작가회의에서 만난뒤,우리는 여러차례 감격의 회동이 있었음에도 막상 그의 고향을 찾은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65년간 시집 20여권 남겨 금화는 비산비야였다.금화시에서 북으로 30여㎞를 달렸을때 작은 소읍 부성을 만났다.부성에서 애청의 생가가 있는 반전장으로 좌회전할때 난데없이 하늘을 뚫을듯 커다랗게세워진 방려을 보고 나를 동행하던 아동문학가요,전 절강사대 총장이었던 장풍씨는 내 어깨를 쳤다. 과연 놀랍도록 높았다.족히 삼층 높이였다.필자가 문학기행하는 동안 처음 보는 시인을 위한 방려다.사실 애청이 이 나라 이 체제에 끼친 문학적인 지위는 이 방려의 높이에 상당했다.1932년부터 지난해까지 65년동안 벌써 스물몇권의 시집에,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이란 감투도 그러했다.그러나 그의 외형적인 간판보다는 중국이 가장 암울했던 30년대와 40년대,50년대를 겪는 동안 중국인에게 민족의 긍지와 광명의 추구를 절규함으로써 중국인의 정서를 비장하게 무장시켰던 시인이다.특히 30년대,그의 출세작인 ‘따옌허,나의 유모여!’를 비롯해 ‘북방’‘횃불’‘태양에게’‘눈은 중국의 대지에 내리고 있다’‘거지’‘나는 이땅을 사랑한다’‘나팔수’ 등 중일전쟁때의 작품들은 모든 중국인에게 눈물없이는 읽을수 없었던 민족의 감동이었다. 방려에서 서쪽으로 5리 남짓.편편한 농촌으로 차를 돌렸다.여기가 ‘반전장’이다.애청의 본명 장해징대로 여기는 장씨의 집성촌이다. 그는 여기 장씨 마을에서 대농이요,지주의 아들로 태어나서 1928년 항주의 국립미술대학에 진학하기까지 18년동안 살았다. ○대농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차가 이윽고 마을 복판에 있는 공터에 닿았다.바로 그 앞 2층집 하얀 흙벽 까만 대문위에 ‘애청고거’라는 글씨가 붙어있다.필자는 왈칵 치미는 감개에 목이 메었다.우선 생전에 깊었던 교분때문이요,다음은 최근 10년동안 그는 매년 10월마다 노벨문학상의 후보로 마지막까지 각축을 벌였던 석패의 주인공이었다는 점, 거기다가 그는 지방 토호의 아들이요,전위적인 화가였고,애국적인 당원이었지만 한 평생 울분과 불우속에 살다 간 비국의 화신이었다.사실 필자는 그의 뜨거운 눈물을 여러차례 보았다.다만 그의 만년이 순풍이었지만 그것은 욕된 안일이었다. 애청은 출생과 함께 미신의 희생물이었다.그의 명줄이 짧아서 남에게 출양해야 오래 산다는 점쟁이 말대로 그는 장씨 마을에서 10리쯤 떨어진 따옌허(대언하)’라는 빈촌,거기서 빈농으로 살아가는 조(1878∼1924)씨라는 아낙네에게 4년을 입양,다섯살때에야 부모의 슬하로 돌아왔다. 또 한번의 울분,1932년,그가 상해에서 ‘중국좌익미술가연맹’에 가입,‘춘지예술사’를 조직했다가 국민당 정부에 체포,4년이나 옥살이한 것이다.그는 비록 옥중에서 그의 출세작 ‘따옌허­나의 유모’등 많은 명작을 썼지만 국민당에 대한 설원이 깊어 그의 필명을 ‘애청’으로 정했는데 바로 애자는 국민당의 수령인 장개석의 장씨 그 초두를 가위표로 부정한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4년동안 옥살이도 또 한번은 중공이 건국한 뒤,‘중국문학예술가연맹’을 발족하고 중국 대표적인 문학지인 ‘인민문학’이나 ‘시간’ 등을 창간하고 그를 편집하는 등 활동을 펴던 1957년 뜻밖에 우파로 몰려 1978년 복권되기까지 20여년 흑룡강·신강 등 변방지역에서 강제노동을 당했던 것이다. 필자는 문안으로 들어섰다.목조 2층,약 80평의 생가는 입구자 구조,작은 마당 복판에는 우물,우물가 건넌방이 애청의 공부방이란다.그때 쓰던 홍목 책상과 걸상이 당년의 부잣집 흔적임이 역연했지만 벌써 70여년전 소년 장해징의 쓸쓸한 휘파람 소리가 어디선지 들리는 듯했다. 애청의 생가를 나와 뒷 터로 나갔다.거기는 커다란 연못에 500∼600년 수령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수호신인양 서있다.애청의 시집속에 나오는 ‘두그루 나무’나 애청의 그림속에 자주 나오는 고목이 바로 여기서부터 얻은 시상이요,화상임을 확인했다. ○무덤엔 황량한 풀더미만… 실상 필자가 애청의 생가를 찾은 것은 애청 문학의 발화점인 따옌허를 찾기 위해서였다.따옌허는 애청 유모가 살던 고을 이름이요,동시에 애청 유모의 이름이기도 했다.우리 나라도 그렇지만 시집온 아낙네를 그 친정 고을로 부르는 택호를 썼기 때문이다. 그 따옌허는 농촌 개조로 원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현지의 말때문에 그만 두고 그대신 따옌허의 무덤이 생가에서 불과 5리 떨어진 논가 작은 언덕에 있다는 것이다.귀가 번쩍 트였다.사실 말이지 따옌허같은 여인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애청은 없었을지 모른다.애청이 그녀의 젖을 먹고 그녀의 두꺼비같은 손으로 지어준 밥을 먹고 자랐기에 겨레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것이다. 그 무덤은 황량한 풀더미였다.하지만 그의 ‘대연하지묘’라는 묘표와 ‘따옌허는 나의 유모입니다.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하는 비명이 모두 당대 최고의 시인 애청의 친필로 세워졌다는 사실도 필자를 감동시켰다.
  • “3김시대 마감” 대쪽신화 막오른다/이회창 후보 선출­누구인가

    ◎정계입문 18개월만에 집권당 평정/소신·원칙 앞세워 정계 새바람 기대 ‘대쪽총리’ 이회창이 신한국당 차기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오랜 공직생활 동안 원칙과 소신으로 일관한 이후보는 3김정치의 청산을 기치로 새로운 정치 한마당을 펼쳐 나갈 전망이다.그것은 21세기 선진대국을 향한 화합과 통합의 정치로 요약된다.그의 일대기와 정치철학,국가관 등을 2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죽룡(대쪽 용)의 승천­.‘정치인 이회창’신화의 막이 올랐다. 지난해 1월 정계 입문 이후 불과 18개월만에 그는 집권 여당의 차기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는 영광을 안았다.그를 선택하기 위해 21일 열린 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그는 인물위주의 새로운 정치마당을 마련하려는 ‘이회창식 정치 실험’을 선언했다.파벌과 지역주의로 대변되던 ‘3김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이대통령후보는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평생의 애독서로 삼고 있다.그는 전쟁터를 옮겨 다니던 마르쿠스 황제를 “위태로운 권력 암투 속에서도 맑은 샘물처럼깨끗하게 자신을 지켜내고자 노력했다”고 평가한다.이전투구의 정치판에서 소신과 초심을 지켜 나갈 그의 행보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이회창식 정치실험 선언 이후보의 호는 경사­‘곧은 역사’다.호에 걸맞게 그는 타협해서는 안될 것과 타협하지 않고 굴복하지 말아야 할 것에 당당했다.때문에 60년 25세의 나이로 인천지법 판사로 임관한 이후 30년이 넘는 공직생활 기간동안 항상 ‘대쪽’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다.서슬퍼런 5공시절 대법관으로서 주심을 맡은 전원합의체 사건 16건중 10건에 ‘소수의견’을 낼 정도로 소신과 원칙이 뚜렷했다. 문민정부의 초대 감사원장으로 발탁된 그는 ‘소신 감사’를 밀어붙이다 청와대와 갈등끝에 백의종군한다.당시 그는 청와대 비서실,감사원,안기부 등 ‘성역’을 감사의 도마에 올렸다.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도 평화의 댐,율곡감사와 관련해 서면조사를 받아야 했다.93년 국무총리로 기용된 뒤에는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 운영 등 헌법상 총리의 역할과 대통령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마찰을 일으켜 4개월7일만에 다시 사표를 던진다. 그러나 그의 강성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지인들은 그를 “가슴이 따뜻한 사람” “만나면 편한 사람”이라고 말한다.아랫사람에게 결코 화내는 일이 없고 무슨 말이든 경청하는 습관이 있어 그를 상관으로 모신 사람들은 그를 후하게 평가한다. 판사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판결도 유명사건이 아니라 배추장사를 하던 어느 청년의 절도혐의를 벗긴 것이었다.경찰서장 집 도난사건과 관련,혐의를 받던 젊은이에게 당시 이판사는 “범인이 아니라면 진실을 제대로 밝힌 재판제도에 감사해야 하지만 범인이라면 판사를 용케 속였다고 좋아할게 아니라 스스로 부끄러워 해야 한다”고 무죄를 선고했다.“항상 약자를 눈여겨 보고 약자가 부당하게 억울함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틈만나면 그는 후배 법관들에게 충고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불의와 타협않는 성품 이후보는 35년 6월2일 황해도 서흥에서 아버지 이홍규옹(93)과 어머니 김사순씨(86)의 4남1녀중 2남으로 태어났다.고향은 선영이 있는 충남 예산이다.본관은 전주이며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안사공의 셋째형 영습공을 중시조로 분파되었다. 이후보의 큰 아버지 이태규 박사(1902∼1992)는 우리나라 자연과학계의 태두이며 아버지 이옹은 서울법대의 전신인 경성법전 출신으로 검찰지청 사무원으로 일하다 해방후 광주지검검사로 특임,20년간 봉직했다.이옹은 충북도지사 구호물자 횡령사건,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 등을 담당하면서 강직한 소신을 보였고 이승만 대통령과 친한 충북지사를 구속하는 바람에 괘씸죄에 걸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조사받기도 했다. ○노부모와 매주말 식사 어머니 김사순씨(86)는 전남 담양의 천석꾼 집에서 태어났다.외삼촌 3명이 모두 이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뼈대있는 가문이다.형 회정씨(65)는 삼성의료원 병리학과장이고 서울대 상대를 나온 동생 회성씨(52)는 에너지경제연구원 고문이다.막내동생 회경씨(48)는 연세대와 미국 뉴욕주립대 경제학박사를 거쳐 현재 과학기술원 교수로 재직중이다.형제들은 요즘도 매주 토요일 저녁 혜화동성당에서 노부모와 함께 미사를 드리고 식사도 같이 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다. ○부인과 슬하에 2남1녀 어린 시절 이후보는 아버지의 잦은 전근으로 이사를 자주 다녔다.그는 광주 서석초등학교에 입학,5학년때 월반해 광주서중학교에 진학했다가 곧바로 청주중학교로 전학했다.그리고 경기중학 2학년에 편입,경기고를 거치게 된다.그는 청주중학 시절 가출경험을 자주 회고한다.60점 만점의 수학시험에서 20점을 받고 그 길로 조치원역 대합실에서 밤을 새우다 헌병에게 발견됐다.헌병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아버지가 아무 말없이 자신을 가슴에 안았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크고 넓고 따뜻한 가슴으로 기억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되뇌었다고 한다. 이후보는 부인 한인옥씨(59)와 2남1녀를 두고 있다.큰 아들 정연씨(35)는 서울대 수학과를 거쳐 대외경제연구원에서 근무중이며 둘째아들 수연씨(32)는 동국대를 졸업,유학준비중이다.딸 연희씨(34)는 출가했다. 이후보는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당내 지지위원장이 10명 미만이었다.그러나 그 숫자는 불과 6∼7개월만에 1백40여명으로 불어났다.쿠데타나 민중봉기가 아니면 이처럼 단기간에 집권당을 ‘접수’한 사례는 세계 정치사에 유례가 없다고 한다. 정가에서는 이를 이후보의 독특한 퍼스낼리티와 정치권의 기대심리가 묘하게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해석한다.이후보가 단기필마로 당에 몸을 담긴 했지만 이미 ‘대쪽’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각인돼 있었고 정치권내에서도 3김정치에 대한 염증으로 새로운 정치구도의 등장에 대한 컨센서스가 물밑에서 형성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주요 고비마다 운도 따라 특히 주요 고비마다 시운은 이후보의 편에 섰다.대표 임명 과정이나 정치발전협의회(정발협)와의 마찰때도 그랬고 경선후보간 전선이 ‘이대 반이’로 단순화되는 바람에 한결 승부가 쉬웠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김심의 중립도 이후보에게는 큰 힘이 됐다.지금까지 이후보의 정치역정은 김대통령과 묘한 공조관계를 유지해 왔다.김대통령은 민주계와 이후보의 ‘불편한 관계’를 의식하면서도 정치고비때마다 ‘대쪽’에게 중책을 맡겼고 4·11총선 이후 대망을 품은 이후보도 김대통령에게서일정 거리 이상 벗어나지 않았다. 이후보가 문민정부 초대 감사원장으로 발탁되면서 시작된 두사람의 인연은 93년 쌀파동과 대형사고 등 곤혹스런 정치상황 속에서 이후보가 총리에 전격 기용되면서 계속 이어졌다.6·27 지방선거에서 대패한 김대통령은 4·11 총선직전 삼고초려끝에 ‘대쪽’을 당 선대위의장으로 영입했고 지난 3월 노동법사태와 한보사건으로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도 김대통령은 예상을 뒤엎고 그를 당 대표에 앉혔다. 이후보는 학창시절 체구가 작아 권투와 당수를 배웠다.골프와 테니스,탁구실력은 수준급이다.독실한 천주교도인 그의 세례명은 ‘올라프’.노르웨이 수호성인 이름이다.정치 고비때마다 “사람이 못하면 하느님이 할 것”이라며 앞날을 낙관하는 것도 깊은 신앙심때문으로 여겨진다.
  • 수호전 저자 시내암의 흥화(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11)

    ◎시씨 집성촌 시가교장에 유채화 만발/뒤집은 팽이모양의 시내암 모역 성지단장 한창/생명걸고 저술한 수호전은 발분저서의 사표로 나처럼 평생 주먹 한번 써보지 못한 샌님에게는 차라리 무송같은 주먹이 부러울 때가 있다.그래선지 「수호전」그 파란만장의 송강취의를 좋아했고,시내암(1296∼1370)이 살고 그의 유택이 된 강소성 흥화현 신타향 시가교장은 관심을 끌던 곳이다.그럼에도 거기 가는 길은 몹시 불편해서 엄두를 내지 못했다.상해에선 어림 잡아 400㎞쯤이지만 꼬불 꼬불 지방 도로를 몇번인가 갈아타면서 거푸 물어야 겨우 찾을수 있었다.북으로 양자강을 건너 남통과 동대를 거쳐 대풍현 백구진에 이르면 시가교장의 문턱에 닿은 셈이다. 「수호전」의 저자와 저자의 고향과 무덤,그리고 저작 연대에 대한 쟁론은 분분했다.그것은 「수호전」이 비록 북송 말년에서 원말명초에 이르기까지 250여년동안,평화나 희곡의 형식으로 민간에 전래됐던 양산박일대의 관핍민반의 설화를 소설화함으로써 결코 온전한 창작은 아니지만 그를 두고 농민폭동설을비롯 송강투항설·시정 서민의 반란설·충간설·영웅설·악한설등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의 고향을 두고도 소주·항주·흥화·양주·회안·백구 등의 이설이 있지만 그 어느 것도 틀리다고 할 수는 없다.그의 고향이 소주나 항주·흥화라는 설이 구구하지만 소주는 그의 고향이요 출생지라면 항주는 벼슬하던 곳이다.흥화와 백구는 그가 성장하면서 「수호지」를 완성했던 곳이면서 그가 묻힌 곳이다.다만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흥화현 신타향 시가교장으로 불린다.흥화는 옛날 양주에 속했던 군현의 하나요,회안은 시내암이 죽은 곳,그러니까 그 어느쪽에도 인연이 있고 족적이 닿았다. 「수호전」의 저자를 두고도 말이 없지 않았다.「삼국지」의 저자인 나관중과의 공저설이나 나관중의 편집설,심지어 나관중의 저작설이 있지만 시내암의 단독 저작설은 신중국 건국이래 1958년과 1978년,시씨들의 집성촌인 시가교장 근교에서 출토되거나 발견된 시내암의 잔비를 비롯 시씨 종가의 지권기록·시씨 종친들의 묘갈명·시씨 족보·시씨 선영에서 출토된 부장품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 결과,시가교장의 시씨 선영에 시내암의 무덤이 있고,그 저자 또한 시내암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필자가 근 10시간을 털털이 버스에 시달리다가 백구진 작은 읍내에 내렸을때 몹시 낯 설었다.심지어 으스스한 느낌이었다.글쎄 양산박의 건달로 뵈는 시커먼 청년 서너사람이 일시에 몰려 와서 나를 에워쌌다.내가 그물에 걸린 물고기로 보였던 것이다.그들은 저마다 오토바이를 몰고 와서 호객을 하는 것이다.여기서는 오토바이가 택시나 삼륜차를 대신하는 모양이다.시가교장까지 왕복하기로 차삯을 인민폐 35원으로 흥정했다. 백구진에서 시내암 무덤까지 약 10㎞는 밀밭을 뚫고 가는 흙길이다.마침 유채화가 한창이다.길옆으로 누런 유채꽃,유채꽃 너머 짓푸르게 키가 훌쭉한 전나무,그 전나무가 휘휘 흔들리는 그림자밖으로 끝없이 아득한 밀밭이 너울거리고 있다.그 세가지 원색은 일망무진의 평행선을 긋고,나는 그 시커먼 녀석이 호마처럼 쿨렁거리는 꽁무니에 붙어 요동을 치고 있다.그 녀석 궁둥이에 깔린 비닐 끈을 꾹참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이따금 짝눈으로 뵈는 풍경은 취할만 했었다.그렇게 꼬박 반시간을 달렸다.대영이란 마을에서 우회전,한참 달리다보니 시가교장이라 했다.풍요로운 농가 40,50채가 넘었다.물어보니 지금도 죄다 시가 들만 산다고 했다. 연당이 있고 둥그렇게 시내가 맴을 그리면서 훤칠한 형국을 만들었는데 그중앙에는 시내암의 무덤,그 왼편에는 사당,사당앞에 정각,다시 오른편에는 자료실,자료실뒤로는 칙칙하게 나무들을 심었다.시내암 봉분은 엊그제 묻은듯 밋밋한 흙더미,팽이를 거꾸로 세운듯 했다.그 봉분앞에 우뚝 세운 묘표,「대문학가시내암선생지묘」. 이는 일찍이 1942년과 1957년,흥화현 현청에서 문화유적지로 지정되었던 것을 최근의 발굴과 고증을 거쳐 드디어 그 성역화를 결정,묘역의 확대와 미화에 피치를 올리고 있는데 올 7월에 준공 예정이라고 한다. 좌우를 둘러 보아도 물론 청룡백호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오직 기름진 평야일 뿐이다.거기다 사통팔달의 물줄기들,농토의 관개용이다.그런데 여기서시내암은 630여년전,흉중의 분개를 안고 문을 걸어 잠근채 「수호전」을 완성했던 것이다.물론 그 분개는 그의 짧은 관로와 원군의 무도한 압박때문이었다.벼슬은 내동댕이 치고 원군을 피해 여기 궁벽한 흥화까지 피란했던 것이다.더구나 주원장의 간곡한 청마저 물리친채 오직 「수호전」 완성에 성명을 건 것은 「발분저서」의 사표가 아닐수 없다.여기서 영웅의 무기는 붓이요 또 그것이 불후하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된다. 필자는 다시 밀밭길을 달려서 백구진으로 건너가는 나루터에서 오토바이를 내렸다.나루터를 건너면 행정구역으로 대풍현 백구진.하지만 백구진은 옛날 흥화현에 예속되었다. 나루터를 건너 다시 다리를 건너면,두둥실 두채의 건물,그 왼쪽 이층은 「백구문화원」,그 오른쪽에 「시내암기념관」.시내암의 하얀 입상이 서있는,시내암 연구를 위한 자료전시실이다.주로 신중국 건국이래 이 지역에서 발굴된 자료와 연구실적을 통해 흥화의 시가교장이 시내암의 유택이요 「수호전」의 산실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전시물을 참관하는 동안왠지 씁쓸한 생각이 스쳤다.역사적인 인물의 이름이나 뼈다귀를 서로 팔아먹고 있다는 생각이다.흥화현청이 시내암의 묘로 관광수입을 올린다면 백구진은 시내암의 기념관으로 한몫을 보고 있다.이런 일은 「개혁개방」중인 중국 어디서고 보이는 일이다.
  • 클린턴전용기 공중충돌 모면/지난달 26일 아일랜드서

    ◎화물기와 스치듯 비껴가 빌 클린턴 대통령을 태운 미 대통령 전용기가 지난달 26일 아일랜드 연안 상공에서 미화물기와 「스치기 사고」를 냈던 것으로 미 CBS 방송이 3일 보도했다. CBS는 한 미 조종사협회의 보고서를 인용해 나토 정상회담에 참석하는 클린턴 일행을 태우고 파리로 향하던 보잉747 개조 「공군 1호기」가 당시 아일랜드 연안 상공에서 미 UPS 소속 보잉747 화물기와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고 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대통령 전용기 조종석에는 당시 다른 비행기가 근접했음을 알리는 경보가 울렸으며 이에 따라 조종사들이 긴급히 고도를 바꾸는 소동이 빚어졌다고 전했다.
  • 욕쟁이 할머니/이원종 서원대 총장(굄돌)

    『여든여덟번째 생일날에 저 세상으로 다시 가시게 되었으니 부디 오고 감을 슬퍼 마시고 삶의 무거운 짐 벗으시고 하늘나라에 임하소서!』 이것은 사고무친 혈혈단신으로 떡장사하며 살아가던 욕쟁이 할머니를 마지막 보내는 영결식에서 충북대 이낭호 총장이 읽은 조사의 한 토막이다. 1910년 충북 진천에서 유복녀로 출생한 김유례 여인은 꿈많던 16세때 노름빚에 팔려 시집을 간 후 청춘에 남편을 사별하게 되었고 슬하에 있던 삼남매마저도 모두 잃어야 하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다. 그후 거친 세파에 시달리며 식모살이와 날품팔이 등 어려운 삶을 거쳐 천신만고끝에 빈대떡장수와 설렁탕집을 열게 되었는데 식당을 찾아온 손님이 맛있게 먹으면 『그 새끼 잘 처먹는다』며 국물을 더 처주고 깡마른 손님이 오면 『비루먹은 새끼 살좀 쪄라』며 더 떠주었다. 언젠가 기자가 『평생 무슨 욕을 잘했느냐』고 물었더니 『이거 병신일세! 욕은 정해놓고 하는게 아녀』라고 해 파안대소했다고 한다.파란만장했던 삶속에 응어리져 맺힌 한과 다하지 못한 정열을욕으로 토해낸 것일까?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것이 한이 되어 그동안 손마디 부르트게 한푼두푼 모았던 전재산을 충북대학교에 장학금으로 몽땅 내놓아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김유례할머니.충북대는 지난 4월25일 그 할머니의 의로운 삶을 기리면서 학교장으로 모셨는데 한많은 한 여인이 이승을 떠나는 꽃상여뒤에 평소 그를 어머니라 불러오던 수많은 장학생들이 뒤를 따랐고 교수와 학생들이 기꺼이 마련한 캠퍼스 한쪽 나지막한 언덕에 고이 묻혔다. 이제 조문객들 다 돌아간 묘소에는 적막감이 감돌지만 아낌없이 베풀고 간 그 삶은 각박한 세태에 메말라 있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으며 세상을 사랑했던 뜨거운 그 마음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 날림공사… 완공 2년만에 “폭삭”/돈암동 「한진」 축대붕괴

    ◎며칠전 주민 안전진단 거의 묵살/“멋대로 설계변경” 준공검사 못받아/무리한 증축·호우에 하중 못견딘듯 서울 돈암2동 한진아파트 축대 붕괴 사고도 부실공사 및 사후 안전관리 미흡때문에 일어났다. 한진건설과 한신공영 등 이름난 건설회사가 지은지 2년밖에 안 된 아파트의 축대가 3일동안 내린 비에 주저앉았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다. 어떤 식으로든 사고는 이미 예고됐었다는게 주민들의 주장이다.입주 당시부터 내·외부 벽면과 복도 등에 균열이 생기는 등 부실의 냄새가 짙었다는 것이다. 지상 20층짜리로 지어진 이 아파트는 완공 직후인 95년 6월부터 주민들이 입주하기 시작했으나 아직 준공검사는 물론 가사용 승인조차 받지 못했다.관할 성북구청은 건설사가 계단 등을 설계도와 달리 시공했다는 이유를 들어 준공검사를 내주지 않았다.하지만 시정조치도 없이 입주를 시키자 해당 건설회사와 재개발 조합을 고발해둔 상태다. 이 아파트는 「동소문재개발조합」에 의해 91년에 착공됐다. 하지만 무너진 축대 바로 앞 209동은 시공사인 한진건설이 당초 「­」자 설계와 달리 「ㄴ」자형으로 구조를 변경,60가구 규모의 건물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증축,문제가 되기도 했다. 주민 지모씨(38·가정주부)는 『무너진 축대는 이번 비가 내리기 전에도 벽면이 약간 기우는 등 이상징후를 보여 건설회사와 아파트 관리회사,구청측에 여러차례 진정했으나 이를 무시해 사고를 불렀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두차례나 안전진단이 실시됐으나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판정이 내려져 당국의 사후관리도 허점을 드러냈다. ◎축대붕괴 이모저모/“아파트도 붕괴될까” 공포감 확산/유가족 “어떻게 지었길래…” 통곡 휴일 낮 아파트단지에서 발생한 축대붕괴 사고는 주민들을 순식간에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폭격을 맞은 듯한 엄청난 굉음에 주민들은 가재도구도 챙기지 못한채 긴급대피했다. ○…붕괴 지점은 209동에서 불과 1m밖에 안되 아파트는 마치 낭떠러지 바로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모습. 숨진 김미성씨(27·여)는 과외를 하러왔다가 전화부스에서 전화를 걸다가 변을 당했으며 공중전화 부스는 종이가 구겨진 것처럼 부서져 있었으며 축대 아래에 있던 상가는 뒷부분이 완파됐다. ○…한편 숨진 김미성씨의 아버지 김영호씨(62)와 남편 채완석씨(29) 등 유가족들은 이날 하오 사고현장에 달려와 『도대체 아파트를 어떻게 지었길래 축대가 무너지고 사람이 죽느냐』며 통곡. 남편 채씨는 결혼 1년6개월째인 아내가 중학생 과외수업을 다녀오다 참변을 당한데 대해 『열심히 살아보려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면서 사고현장에서 찾아낸 아내의 흙묻은 갈색 가방을 껴안은 채 울먹였다. ○…축대 붕괴 직후 우촌·돈암초등학교 등으로 긴급대피했던 209동 428세대 주민 1천5백여명 가운데 붕괴 지점과 가까운 곳에 사는 100여세대를 제외하고는 저녁이 되면서 대부분 귀가.그러나 귀가하지 못한 주민 250명은 아파트 단지내 노인정과 유치원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조순 서울시장은 사고 발생 1시간여뒤인 하오 3시20분쯤 현장에 도착,우촌초등학교에 대피해 있던 주민대표를 만날 것을 희망했으나 주민들은 『조시장이직접 우리 쪽으로 오라』고 요구하는 등 평소 안전관리를 소홀히 한 당국에 대해 분노를 표출.
  • 「이」총리는 중동평화 위해 노력하라/리처드 코언(해외논단)

    ◎연정내 우익에 이끌려 강경노선 견지 중동평화과정의 최대위기는 이스라엘 우익의 대팔레스타인 강경자세와 평화추구보다는 권력유지에 연연해 이들을 무마하는데 더 신경을 쓰는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태도에 있다고 칼럼니스트 리차드 코언이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서 주장했다.그의 기고문을 요약한다. 아무도 베냐민 네타냐후의 용기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그는 군에 복무할 동안 그가 매우 용감한 사람임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용기는 다른 문제이다.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네타냐후는 평화를 이룩할 배짱을 갖지않은 것처럼 보인다.나는 지금 팔레스타인국 창설과 같은 것이 아니라 우익정치인들의 분노를 무릅쓰고 뭔가를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있다.이것이 왜 네타냐후가 한 순간에는 오슬로 협정의 목표를 받아들이면서 그의 우익들이 거칠게 나올 때는 팔레스타인이 자신의 파트너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등 이 정책에서 저 정책으로 왔다갔다 하는지에 대한 이유이다.네타냐후는 평화과정을 해치는데 한 몫을 했다.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도 그가 우려할 만한 수준의 우익을 가지고 있다.그래서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테러범들의 석방과 같은 일들을 단행했다.그 직후 아마도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겠지만 텔아비브의 한 카페에서 자살폭탄테러로 3명의 이스라엘인들이 죽었다.네타냐후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자살 폭탄테러는 평화과정이 진행되고 있을때 발생한 것이었다.그것은 지난 3월과 4월 59명의 이스라엘인들을 사망케한 자살폭탄테러의 물결을 뒤따라 일어난 것이었다.하지만 이번의 폭타테러는 동예루살렘의 하르 호마 언덕에 유태인 정착촌을 건설키로한 이스라엘의 결정,즉 평화과정에 대한 심각한 타격에 뒤이은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이 3만채의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을 추진할 법적인 권리는 갖고 있다.그러나 타이밍이 아슬아슬하며 폭발성이 있다.그런 행동은 팔레스타인사람들에게 그들의 항의는 중요하지 않으며 이스라엘은 그것이 원하는한 현상을 바꿀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이런 성향은 네타냐후 정부의 특징이다.여러 차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네타냐후 정부는 지난 9월 예루살렘의 회교성지옆으로 터널을 뚫었다.그리고 작은 전투가 잇따랐다.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에 요르단강 서안의 2%만을 양보했다.아라파트 수반은 그 당시 『겨우 2%라고.그는 내가 천치라고 생각하는거 아냐』라고 소리질렀다. 여론조사는 테러를 지지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비율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해 자극하는 경향이 있었다.이는 그가 헤브론으로부터 철군한 뒤 연립정부내의 강경파들을 가라앉히기 위한 것이었다. 네타냐후는 워싱턴을 방문한다.이제 클린턴 대통령의 차례이다.네타냐후는 클린턴 행정부내에 있는 반대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미국은 유엔에서 반이스라엘 결의를 거부해왔다.유엔은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한 불만을 나타낼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백악관은 클린턴이 이스라엘에 대한 거친 사랑을 외교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곳이다.유태사회의 대부분을 포함,미국인의 대다수는 그것을 찬성하고 있다.네타냐후의 정책은 미국의 유태사회에서 인기가 없다.이츠하크 라빈 전총리가 문자그대로 죽음으로 헌신해온 평화는 지금 최대의 위기에 빠져있다.아랍국들은 다시 경제 제재를 논의하고 있고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이스라엘에 매우 적대적이어서 그의 반유태적 감정을 언론에 표현할 정도이다.요르단의 후세인 국왕만이 지속적으로 평화에 눈을 돌리고 있다.3월초 후세인은 네타냐후에 보낸 편지에서 『이스라엘이 내가 믿고있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비난했다.그리고는 『왜 팔레스타인 파트너를 계속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욕보이느냐』고 질타했다. 클린턴도 똑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나의 추측은 해답이 이스라엘의 국내정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즉 평화과정이 성공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을 달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네타냐후는 그의 권력을 잃기보다는 평화과정을 잃는 위험을 무릅쓰려는 것같이 보인다.그것은 지도력과 용기 두가지 모두의 실패이다.〈미 칼럼니스트/정리=유상덕 기자〉
  • 김송죽 소설 「번개치는 아침」(송화강 5천리:17)

    ◎북만일대 조선족 삶과 투쟁 생생히/비적의 약탈에 맞서 결성한 무장지위대/후일 공산군부대 편입… 국민당군 토벌나서/항일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반동으로 찍혀/중국 문혁시기 혹독한 핍박·고초겪어 흑룡강성 화천면 성화향 성화촌에 사는 김송죽 선생(59)은 퇴직교원이다.자식들은 모두 대학을 나와 하얼빈에서 직장생활을 하느라 나가있다.그래서 두 내외가 넓은 한족식 집을 지켰다.그는 80년대 초에 처녀작 장편소설 「번개치는 아침」을 발표한데 이어 90년대 초에는 장편실화 「혈전」을 내놓았다.이미 문명을 얻은 그는 요즘 「관동의 밤」이라는 장편소설을 탈고했다. 처녀작 「번개치는 아침」은 그의 부친을 모델로 한 소설이다.광복직후 조선족부대가 비적과 싸운 투쟁의 역사를 그렸다.국민당군 별동대 성격의 비적은 광복직후 북만일대에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다.공산당을 적으로 싸워야했던 당시 국민당에 북경에서 먼 북만은 사실상 통치지역 밖이었는지 모른다.그런 탓에 국민당을 돕는답시고 나선 별동대속에는 만주국시절 헌병이나 경찰관도끼여있었다는 것이다. ○피땀어린 농토 등지고 유랑 그리고 실제 국민당 비호를 받았다.국민당 제15집단군 총사령 상장 사문동과 제1집단군 총사령 상장 이화당,국민당 동북 정진군 총지휘 중장 장우신이 별동대를 조종했다.당시 그들의 횡포를 고발한 노래말에 「사(사문동),이(이화당),장(장신우)은 불지르고 살인하니」라는 내용이 들어갈 정도였다.북만일대의 주민들은 이들에게 등을 돌렸다.공산당이 일찍 뿌리를 내린 이유도 이들 때문이었다. 이들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마을이 불타버리고 주검이 들판을 덮었다.더구나 조선족은 늘 사냥의 대상이 되어 무참한 죽음을 맞았다.그런 일로 해서 조선족들은 피땀으로 일군 땅을 버리고 다시금 유랑을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이 무렵 조선족 선각자들이 일어났다.무장자위대를 만들어 마을을 지켰던 것이다.그러고 나서 얼마있다가 공산당 군부대에 속속 편입되었다. 그러한 무장자위대 가운데 맨 먼저 공산당 군부대에 편입한 조선독립대대는 1945년 11월25일 연안에서 주덕해와 손을 잡았다.조선의용군 제3지대로 개편한 조선독립대대는 다음해 4월28일 하얼빈에서 국민당군과 싸웠다.하얼빈이 국민당군 손에서 떨어져나오자 당기관과 발전소,송화강철교,비행장 경비를 담당했다가 국민당군 토벌에 나섰다.1946년 9월2일 하얼빈시 향방구 사리툰전투에서는 제3지대 소속 조선족 21명이 전사했다. 김송죽 선생의 부친이자 소설 「번개치는 아침」의 모델 김병념은 광복직후 동북민주연군에 참가했다.제1연대 조선족대대인 제2대대 5중대 1소대에 배속되었다.소대에서 3반장 직책을 맡은 그는 1946년 가을 대대를 따라 흑룡강성 화남현 발전소로 이동했다.그해 11월6일 주변정찰을 나갔다가 국민당군 병력과 교전이 붙었다.그 전투에서 김병념은 대대참모 김해정 등과 함께 전사했다.그리고 얼마뒤인 11월20일 국민당 제15집단군 총사령 사문동이 붙잡혔다.사문동은 12월23일 벌리현에서 총살되었다. 김송죽 선생은 소년시절을 부대에서 보냈다.부친 김병념이 전사한 이후에도 모친이 부대 재봉대에서 군복을 짓는 일을 하고 있어서 그냥 영내에서 살았다.그러다 부대가 북한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모친과 함께 벌리현에 남았다.할아버지 김석길이 아직 생존해있던 때로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애국계몽운동가이자 교육자요,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 밑에서 비교적 엄하게 자랐다. ○소년시절 군부대서 생활 할아버지 김석길은 1884년 평남 수난 태생이었는데,1912년부터 계몽운동에 참여했다.3·1운동에 적극 가담한 연고로 지명수배를 받자 제자 9명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넜다.집안과 휘남을 거쳐 왕청에 와서 대종교에 입교하고 북로군정서의 일원이 되었다.그리고 1925년 신민부에 들어갔다.1928년에는 김좌진 장군이 파견한 의란현에서 이도강 등에 4개의 학교를 세웠다. 김송죽 선생이 스무살 나던 해인 1958년에 할아버지 김석길은 흑룡강성 화남현에서 세상을 떴다.그러나 독립운동에 참가한 민족의사들은 대접을 못받고 있다.항일운동을 했으면서도 공산당이 이끈 투쟁대열에 서지 않은 사람은 모두가 배제되었다.오늘날 흑룡강성 항일열사 가운데 민족독립운동가는 한 사람도 없다.물론 김석길 같은 분들도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 후손들은 오히려 모진 핍박을 받았다.더구나 문화대혁명시기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겪어야했던 고초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김송죽 선생은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는 이유로 반동민족주의자가 되었다.그의 죄목은 반동민족주의자 말고도 역사반혁명분자의 아들,반혁명집단의 두목,반당분자,반사회주의분자 등 10가지에 이르렀다.부친 김병념이 국민당군과 투쟁한 사실도 깡그리 무시해버렸다.부친이 광복전 강제로 끌려가 철도경호대에 있었다는 사실만 들추어 혁명열사가 계급의 적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김송죽 선생 자신이 써놓았던 소설 「번개치는 아침」의 원고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비적토벌을 내용으로 한 것까지는 그런대로 넘어갔으나,김동철·김해정이 조직한 조선족부대를 문제로 삼았다.김동철과 김해정은 본래 항일연군 8군에서 일제와 싸웠다.그러다 1939년 군장 사문동이 일제에 투항하자 숨어있다가 광복과 더불어 조선족부대를 창설했던 것이다.그 뒤에 동북민주연군 제1연대 제2대대에 편입되었던 조선족부대가 1949년북한으로 건너갔다는 사실을 반동으로 몰았다.문화혁명 당시 중국에서는 북한을 수정주의로 보았던 터라 조선족부대는 반동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농사일 틈틈이 습작 그는 옹골진 4년을 감옥에서 보냈다.모진 매를 맞고 이른바 돌림투쟁을 숱하게 당했다.그래도 푸른 대나무처럼 곧게 살라는 뜻에서 지어준 자신의 이름(송죽)에 먹칠을 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감옥생활 4년을 버티었다.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소설 「번개치는 아침」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1965년 탈고하고 하얼빈 조선족문화관에 원고를 보내놓은 상태에서 날벼락을 맞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출판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내 문학수업은 어떤 의무감에서 이루어졌디요.청소년기를 할아버지와 함께 하면서리 독립운동 이야기를 숱하게 들어서 그걸 언젠가 정리한다는 생각을 했습네다.할아버지 유언도 일제에 대항한 독립운동과 비적의 횡포를 역사로 기록하라는 것이었디요.할아버지한테 듣고,어렴풋하나마 어려서 실제 보아왔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의미에서 소설을썼던 것이외다.1957년 벌리중학을 나와 농사일 틈틈이 그런 꿈을 키우면서 실제 습작을 해왔디요.할아버지 유언과 내 꿈은 실로 오랜만에 이루어졌습네다』 김송죽의 「번개치는 아침」은 1983년에 출판되었다.원고를 탈고한지 꼭 18년만에 햇빛을 본 것이다.그에게는 물론 가족사를 문학적으로 정리했다는 뿌듯한 성취감을 안겨주었다.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억속에서 차츰 멀어지고 있는 조선족들의 삶과 투쟁을 복원한 대서사시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요즘 탈고한 장편소설 「관동의 밤」도 북만의 독립운동사를 형상화한 것이다.자그마치 75만자나 되는 작품을 출판할 길이 없어 애를 태우고 있다.
  • 김신조 목사(외언내언)

    『박정희 머리를 까부스러 왔수다』­ 「무장공비 김신조」가 옛날 「중공군」 같은 누비군복에 발싸게를 신고 막 투항한 그대로 TV뉴스에 비쳐진 적이 있었다.남쪽에는 무엇하러 왔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그는 서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그 모습은 흡사 뭍에 오른 한마리 상어 같았다. 그것은 충격이었다.지독한 무장간첩의 실물에 접한 두려움보다는 거침없이 쏟아놓는 그의 『표현의 자유』가 주는 충격이었다.60년대인 당시의 우리가 앓고 있던 변비증세를 풀어주는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었다. 북한에서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만을 양분으로 공급받으며 살아온 청년 김신조가 남쪽의 삶에서 겪었을 정신의 갈등과 평화를 압축해서 말해주는 것이 그의 「성직의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도시의 세련되므로 늠름하게 자란 남매도 슬하에 두었고 금실좋은 아내도 거느린 그의 「서울 살이」가 「고난」에 찬 것만은 아니었을듯 한데도 마침내 목회자의 길을 선택한 것을 보면 그의 남다른 인생역정이 많이 고달팠던 듯하다는 짐작이 들기 때문이다. 그가 「김신조목사」로 거듭난 것은 그가 『박정희의 목을…』어쩌러 온지 한해 모자라는 30년만의 일이다.그가 목사로 태어나던 날 이땅에는 또하나의 「소년 김신조」 같은 탈북소년이 찾아들었다.『지도자의 품』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줄로 알며 자라온 북한 땅을 마지못해 떠나와 언젠가 고향친구들과 만날날을 위해 틈틈이 탈북기를 적어가며 제3국을 전전하다 찾아온 소년이다. 신앙처럼 믿었던 「지도자」의 정체도 알게 되고 「속았던 세월」의 허망함도 알게 되고 그리고 『두고온 그리운 사람들의 추억』을 한처럼 간직한채 살아갈 소년의 남쪽 앞날이 김신조목사의 인생역정과 겹쳐지는 것을 느낀다.이제 이런 2세들의 탈북이 늘어나고 있다는 일에 각별한 관심이 기울어져야 할 것 같다.우리 7천만민족은 참으로 남다른데가 있다.
  • 췌장암 투병 70대 할머니/모교 숙대에 42억대 땅 기증

    ◎방배동 김경애씨/“살아있을때 좋은일 해야죠” 췌장암으로 투병중인 70대 할머니가 모교에 42억원 상당의 땅을 기증,화제가 되고 있다. 지난 44년 숙명여전 가사과를 졸업(4회)한 김경애씨(72·서울 서초구 방배동 방배 삼호아파트)는 6일 하오 1시30분 숙명여대 본관 5층 회의실에서 자신의 소유인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 일대 대지 530여평(평당 8백만원)의 문서를 숙명여대 이경숙 총장에게 전달했다. 이 땅은 김씨가 10여년전 한국토지공사로부터 헐값으로 불하받은 것으로 주변에 안산시청이 들어서면서 값이 크게 올랐다. 김씨는 서울에서 직물업을 하던 유복한 가정의 맏딸로 태어나 숙명여전을 졸업했다.슬하에는 국제결혼을 해서 호주 시드니에 살고있는 딸 영희씨(46)가 있다. 수술에 들어가기 직전 유언장까지 썼다는 김씨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 살아 있을때 후배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지난해 10월 창학 90주년 행사인 동문 전시회에 기증품을 건네러 갔다가 땅도 기증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말했다.
  • 호은 김규식 장군의 딸(송화강 5천리:12)

    ◎박해·모진 가난속 넝마주이로 생 마감/독립운동하던 부친 자객들에 피살/5남매중 홀로 남아 남편도 잃고 “박복한 삶”/“독립운동가 자손” 한때 아들도 억울한 옥살이/어려운 살림에 상지시에서 “가장 유명한 거지”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김규식이라는 두 독립운동가를 만날 수 있다.우사 김규식(1881∼1950년)과 호은 김규식(1882∼1931년)이 그들이다.두 분은 모두 동만주와 북만주,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그러나 우사 김규식은 광복이후 남한에서 건국 기초작업에 참여하는 바람에 널리 알려졌지만 호은 김규식을 아는 이들은 흔치 않다.말하자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질 수도 있는 독립운동가인 것이다. 호은 김규식은 오늘의 중국 동북지방인 만주에서는 김규식 장군으로 더 유명했다.1910년 경술국치때 만주로 망명한 그는 흑룡강성 주하현 하동에서 최후를 마쳤다.흑룡강성 연수에서 학교를 꾸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인재를 양성하던 중에 교사를 초빙하러 하동에 왔다가 죽음을 맞았다.이붕해라는 사람 집에서 죽음을 당했는데 그 집자리는 지금 온데간데 없고 논으로 변했다.논 한가운데에 콘크리트 전주가 말없이 서있다. 그를 죽인 사람들은 한족총연합회 경비대원 유희춘 등 5명의 흉한들이었다고 한다.그들은 장군의 시신을 마을앞으로 흘러가는 마의하에 던졌다.그는 슬하에 5남매를 두었으나 광복을 전후한 시기에 아들 넷은 모두 죽었다.세째 현이(1912∼1931년)는 아버지 원수를 갚겠다고 집을 나갔다가 주하현 석두자하에서 피살되었다.맏아들 현욱(1901∼1931년)은 밖에 놀러나간 아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나갔다가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둘째인 현성(1904∼1946년)과 넷째인 현윤(1919∼1945년)은 병사했다. 그렇게 아들 넷은 세상을 떴다.장군의 혈육이라고는 딸 하나가 달랑 남게되었다.지난 3월 흑룡강성 상지시에서 80살 노령으로 모진 삶을 마감한 김현태 할머니다.그 할머니를 만난 일이 있다.독립운동가 오수암 의사의 딸 오금손 여사와 연변사회과학연구원 강용권 선생(서울신문 12월5일자 11면)과 동행한 자리에서 만났다.일행은 목단강시에서 기차를 타고상지시로 갔다.상지시 민족사무위원회 책임동지의 안내로 할머니가 사는 집을 찾았다. ○마을앞 하천에 시신버려져 상지시 시교에 있는 집은 낮은 벽돌집들이 촘촘히 들어앉은 줄집이었다.집은 아주 비좁았다.한족식 가옥구조라서 봉당이 크고 온돌이 작은데다 부엌까지 따로 있기 때문에 집은 한마디로 북통만했다.살림이라고는 낡은 식탁과 궤짝 몇개가 있을 뿐 흔한 흑백TV 수상기 하나가 안보였다.김현태 할머니는 손님이 온다는 전갈을 받고 아들 김무위(63)의 부축으로 간신히 서서 우리를 기다렸다.허리가 잔뜩 굽어서 지팡이를 놓으면 금새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래도 총기가 좋아서 지나간 일들을 또렷이 기억해냈다.한국에서 찾아온 손님 오금손 여사의 아버지 오수암 의사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있는 판이니 자신의 아버지 김규식 장군의 죽음을 어찌 잊겠는가.이제 눈물도 메말랐을 법한데 연신 눈물을 흘렸다.눈물을 훔치는 손이 삭정이처럼 앙상했다.한참만에 눈물을 거둔 할머니는 옛날을 이야기했다. ○낡은 식탁·궤짝살림 전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기별을 받고 둘째 오빠와 같이 하동으로 갔디요.마의하 물에서 며칠을 지냈으니 시체가 말이 아닙데다.집을 나가실때 입은 옷을 보고 아버지라고 생각했습네다.얼굴은 못 알아보게 부어있습데다.명주수건으로 얼굴을 싸고 새옷을 갈아 입힌 뒤 입관을 했디요.그리고서리 마의하 버들방천에서 화장하고 유골은 물에 뿌렸수다.묘소도 없디요』 김현태할머니는 광복 이듬해 남편 김순철과 사별했다.지난 1974년에 작고한 어머니(주명수)와 아들(김무위)을 데리고 어렵게 살았다.한국 같으면 독립운동가 자손이면 대접을 받았겠지만 중국은 사정이 달라 오히려 박해를 받았다.아들 김무위는 한때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 나와 이혼녀와 늦장가를 들었다.그리고 쌍둥이 손자를 보았다.그러나 며느리는 쌍둥이를 낳아주고 집을 나가버렸다. 일가는 거지나 다름이 없었다.상지시에서 김규식 장군의 딸로 소문난 연유도 알고보면 가장 유명한 거지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모자는 아침 일찍부터 넝마를 주웠다.장군의 외손자인 김무위는 끼니를 지어 먼저 모친을 대접하고 그 다음 한창 먹성좋은 쌍둥이를 먹이고 나면 자기 배를 채울 것은 늘 없게 마련이었다.한번은 배가 하도 아파서 병원엘 갔더니 창자가 붙어서 그렇다는 진단을 받은 일도 있다. 오금손 여사는 김현태 할머니를 만나고 나서 일가족을 식당으로 불렀다.식당에서 한상을 차려내왔지만 그들 일가족은 음식을 축내지 못했다.난생 처음 대한 기름진 요리가 비위를 거슬렸던 것이다.오여사는 다음날 중국돈 500원과 옷 한벌씩을 건네주고 작별했다.그런데 이듬해 오여사는 김현태 할머니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생전에 한번 더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받자마자 오여사는 부랴부랴 중국을 찾았다.자식도 없이 연금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처지로 버거운 것이었지만 다시 할머니를 만났다.현금도 얼마 내놓고 밀가루와 쌀을 듬뿍 사놓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독립운동 연락책으로 활동 오금손 여사는 김현태 할머니 생애에서 처음으로 생활의 깊은 구석까지를 보살펴준 사람이었다.두 여인의 아버지들이 일찍 이청천장군 휘하의 투사로 한 배를 탔던 동지들이라 할수 있다.특히 김현태 할머니는 어린 시절 오여사의 오수암 의사에게 무기보관장소를 연락해주는 등 실제 독립운동을 도왔다.그래서 두 독립운동가의 딸들은 남다른 애정을 느꼈을 것이다.이러한 사실이 강용권 선생의 글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손자 쌍둥이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아이들의 학비를 감면해주었다. 강용권 선생도 현금 200원과 한국에서 출판한 「만주 항일유적 답사기」를 할머니 아들 김무위에게 보내주었다.그로부터 석달이 지나서 이런 답장이 왔다. 「선생님이 보내신 돈과 책을 잘 받았습니다.아깝고 쓰라린 것은 선생님의 서신을 받기 3일전 불쌍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입니다.사흘만 더 사셨어도 선생님의 저서를 보시고 기뻐하셨을 텐데….선생님,돌아가신 어머니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틈 나시면 소식주시기 바랍니다.그렇게 해주신다면 더 이상 고마운 일이 없겠습니다」 그 김무위의 편지가 오던날 독일국적의 한국인 안풍길씨(65)가 연길 강용권 선생 사무실에 들렀다.그는 독일에 간 한국인 광부 출신이었는데 역시 독일에서 간호원으로 일했던 함청자여사와 동행했다.부부는 편지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그들 부부는 중국돈 1천원을 내놓고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독립운동 유가족들이 사회 무관심속에 사는 것은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지금은 좋아졌다고 하나 더 관심을 가져야지요.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여긴 독립유공자들의 후손이 근근덕식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방법이 있으면 도와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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