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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숲 손 볼 곳 많다

    지난 18일 시민들에게 공개한 뚝섬 서울숲에 대한 전반적인 재점검이 이번 주말까지 이뤄진다. 개장후 이틀동안 45만명의 시민이 서울숲을 찾으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점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원세훈 행정1부시장은 20일 정례간부회의에서 서울숲의 문제점을 보고받고 이같이 지시했다.●쓰레기통·화장실등 태부족 19일 서울숲에 30만명의 인파가 몰렸다. 시민들이 얼마나 ‘푸른공간’을 원하는지에 대한 단적인 증거다. 그러나 많은 곳곳에서 허점이 드러났다. 우선 서울숲에 음수대와 안내표지판, 쓰레기통, 화장실 등 기본 시설들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공원 전체에 34개가 설치돼 있는 쓰레기통과 6개뿐인 화장실도 추가로 설치돼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음수대도 5곳뿐이다. 지하철에서 서울숲으로 이어지는 진입로가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것도 문제다. 비포장도로로 말 그대로 ‘흙먼지 길’이었다. 최용호 푸른도시국장은 “진입로는 역세권 매각 대상지여서 민간이 개발해야 할 곳”이라면서 “서울숲 담당자로서 정비하고 싶었지만 시 예산이 투입되면 오히려 감사에서 지적당하게 된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그는 화장실·음수대 등 각종 기본시설 부족에 대해서는 “시민 불편을 최소하는 방향에서 임시시설들을 최대한 확보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많은 인파에 놀란 고라니 한 마리가 바닥에 설치된 폭 4m의 탈출 방지용 격자망(캐틀 그리드)을 뛰어 넘어 도망가는 사고도 발생했다. 다행히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대에 의해 50분만에 붙잡혔다. 서울숲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똑같은 탈출사고를 막기 위해 격자망의 폭을 조정하는 등 보완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배달 오토바이´ 휘젓고 다녀 일부 시민들의 시민의식 실종도 눈에 띄었다. 서울숲 문화예술공원내 연못에서는 수영이 금지돼 있는데도 아이들은 물론 일부 어른들까지 물에 들어가 수영을 했다. 수심 2∼3m의 연못에서 수영을 하던 초등학생 2명이 익사 위기에 놓였으나 한 시민이 구해내기도 했다. 시는 연못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안전펜스를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공원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자장면 배달 오토바이’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일부 시민들이 공원에서 자장면을 시키면서 이같은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서울숲은 출·입구가 없는 ‘완전 개방형’이서서 오토바이 통제가 불가능하다. 오로지 시민들의 의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특히 주말에는 여러 대의 오토바이가 어린아이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쳐가는 위험천만한 모습이 수차례 목격되기도 했다. 금지구역인 생태숲에 일부 시민들이 들어가 사슴, 고라니 등을 놀라게 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이에 따라 시는 당분간 생태숲 통행제한 시간을 저녁 8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로 확대할 방침이다. 최 국장은 “시민들이 높은 시민의식을 발휘해 자발적으로 나서주지 않는다면 서울숲은 ‘오토바이 출입 금지’‘연못 수영금지’‘생태숲 진입금지’ 등 ‘…금지 숲’이 될 수 있다.”며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했다.김기용 서재희기자 kiyong@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SK家 (2)-2세경영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SK家 (2)-2세경영

    손길승 회장과 최태원 회장의 ‘쌍두 체제’로 포스트 재벌을 향해 순항중이었던 SK그룹은 2003년 2월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소위 ‘SK사태’로 불리는 일련의 악재로 오너가(家)인 최 회장이 전격 구속됐기 때문이다.2세 체제의 성공적인 착근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비상벨’이 울린 것이다. 그러나 ‘카운터 펀치’는 이것이 다는 아니었다. 투기펀드인 소버린자산운용이 경영권 탈취를 목적으로 그룹의 지주회사인 SK㈜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결국 ‘보스’의 부재와 채권단의 압박, 소버린의 흔들기는 ‘SK호’의 최대 위기를 가져왔다. 한 임원은 긴박했던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시민단체의 공격과 채권단의 위협, 소버린의 가세는 그야말로 내부 구성원들을 갈팡질팡하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시중에는 그룹 해체설까지 나돌았습니다. 또 소버린의 지분 매입 의도는 최 회장이 보석으로 나온 뒤에나 대책이 세워질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할까. 산전수전 다겪은 최 회장은 ‘뉴SK’ 기치를 내걸고, 난제를 정공법으로 하나씩 헤쳐나가고 있다. 포스트 재벌을 지향한 지배구조 개선은 경영투명성과 윤리경영을 핵심으로 강도를 더 하고 있다. 최 회장이 지난해 10월 SK㈜ 창립 42돌에서 밝힌 내용이다.“나는 재벌이라는 말이 싫습니다. 그룹이라는 말도 재벌이라는 지배구조에서 나온 것인데 그런 지배구조가 과거엔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기업을 이끄는 시스템입니다. 누가 주식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독립된 각 기업이 얼마나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일을 추진하는 시스템을 가졌느냐는 것입니다.” ●경영 ‘대표선수’ 패밀리 4인방 “내 아들은 5명이다. 경영능력이 있는 대주주는 경영인으로 키울 것이다. 적임자라고 판단되면 아들이든, 조카든 가리지 않고 경영을 맡기겠다. 나는 자식들 누구에게나 밥상(경영권 승계 후보)을 차려주겠지만 먹은 것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고 최종현 회장) 최씨가에서 현재 SK 경영에 참여하는 인물은 최신원(53) SKC 회장과 최태원(45) SK㈜ 회장, 최재원(42) SK엔론 부회장, 최창원(41) SK케미칼 부사장 등이다. 최씨가의 장남인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은 2000년 8월 지병으로 별세했다. 최태원 SK㈜ 회장이 그룹 승계자로 확정된 것은 1998년 8월 가족회의에서다. 최종현 회장이 별세하자 최씨가의 차세대 5인방인 사촌 형제들이 모여 당시 최태원 SK㈜ 부사장을 그룹의 경영권 승계자로 합의했다. ‘패밀리 5인방’이 별다른 갈등없이 신속하게 후계구도에 합의한 것은 고 최종현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지분이 많지 않아 ‘뭉쳐야 산다’는 묵계가 있었기 때문. 동생인 최재원 부회장과 기원씨는 아예 상속포기 각서를 썼을 정도였다. 또 연장자인 최윤원·신원 형제가 경영권에 욕심을 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맏이인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은 최태원 회장이 가족대표로 경영권을 승계를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적극 유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 회장은 가족회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룹 회장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훗날 “대주주라는 이유만으로 최고경영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문경영인으로서 능력과 자질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SK그룹은 98년 9월 계열사 사장단회의격인 수펙스(SUPEX·슈퍼 엑셀런트의 준말)추구협의회에서 손길승 회장을 ‘그룹 회장’으로 선임하고, 최 회장은 SK㈜ 회장직을 맡았다. 국내 재벌가에서 보기 드문 대주주와 전문경영인이 이끄는 ‘파트너십 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최 회장의 경영 스타일은 ‘토론해서 분석하고, 협의해서 합의한다.’로 요약된다. 합리적이며, 틀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한다. 고려대 물리학과를 거쳐, 미국 시카고대 경제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최재원 SK엔론 부회장은 ‘파이낸싱’의 귀재로 통한다. 뉴욕 월스트리트의 일본계 증권사에서 18개월가량 근무한 경력도 있지만 그의 진면목을 드러낸 것은 2000년 SK텔레콤의 신세기통신 인수에서였다. 당시 신세기통신의 최대주주는 27.6%의 지분을 보유한 포항제철(현 포스코).SK가 이를 매입하려면 1조 7000억원의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최 부회장은 이를 SK텔레콤 지분 6.5%와 포철의 신세기통신 지분을 교환하는 방식의 스와핑(주식 맞교환)으로 해결했다. 최 부회장은 미국 브라운대 물리학과, 스탠퍼드대 재료공학과 석사, 하버드대 경제학 석사 출신이다. 최창원 SK케미칼 부사장은 94년 선경(현 SK)그룹 경영기획실로 첫 발을 내디뎠다. 구조조정과 사업 재편에 뛰어나다는 평이다. 특히 재무구조가 좋지 않은 계열사를 일부러 찾아다니며, 경영수업을 받아왔다. 그가 96년 선경인더스트리(현 SK케미칼) 기획관리실장으로 있을 때는 국내 최초로 명예퇴직제를 도입했으며, 쉐라톤워커힐호텔과 SK상사에서도 잇따라 명퇴를 통한 감량 경영 바람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그는 ‘구조조정 리베로’라고 불렸다. 특히 최 부사장이 계열사로 내려온다는 소문이 들리면 해당 임직원들은 긴장했다고 한다. 서울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미국 미시간대 경영대학원을 나왔다. 고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은 90년대부터 ‘나는 경영에 자질이 없다.’며 경영일선에서 한발짝 비켜섰었다.SK케미칼 회장 때는 아예 회장 결재란을 없애고, 전문경영인에게 권한을 일임했다. 사교와 대외활동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그룹의 원로 경영인들을 많이 챙겼다고 한다. 우석대와 미국 엘론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고 최종현 회장의 2세 교육 “선친은 자식들이 결코 풍족하게 살 수 있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유학시절엔 용돈이 항상 부족해 가정교사로 뛰고, 학교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한번은 중고차를 샀는 데, 이것도 어떻게 구입했는지 일일이 현지 지사장으로부터 자금 출처(?)를 확인 받기까지 했죠. 그리고 집도 제일 싼 곳에서 살아 일주일에 쥐를 40마리까지 잡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쥐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잡을 수 있을지 연구까지 했답니다.” 차남인 최 부회장은 남들처럼 어렵게 공부했던 미국 유학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고 최종현 회장의 자식 교육이 얼마나 엄격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 최 회장은 자식들과 토론을 즐겼다. 주제는 사회·경제가 아닌 과학 분야. 가끔은 난센스 퀴즈와 같은 질문을 들이대, 자식들을 곤혹스럽게 하기도 했다. 최 부회장은 “부친이 살아계셨으면 최근의 토론 주제는 아마도 황우석 서울대 교수와 관련됐을 것”이라며 “그 만큼 과학을 중시했다.”고 설명했다. ‘화학도’인 고 최 회장은 아들들은 모두 이과 전공을 권했다. 최종현 회장은 장남이 진학 문제로 고민할 때 “자신의 진로는 자신이 선택해라. 하지만 어떤 직업을 갖든 합리적 논리를 펼 수 있는 객관적 지식을 갖춰야 한다. 경제의 기본원칙은 ‘합리(合理)’다. 경제를 잘 알려면 ‘리(理)’와 관련된 분야로 물리나 화학, 생물 가운데 하나를 공부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장남인 최 회장은 문과 지망생이었지만 선친의 뜻에 따라 물리학을 전공하게 됐다. 최 부회장도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고 최 회장은 또 자식들에게 최종 학력만큼은 최고를 주문했다. 최 부회장은 “선친은 최고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대학은 아무 곳에서 졸업해도 괜찮지만 최종 졸업장은 최고 수준의 ‘학벌’이 필요하다.”면서 “그래야 최고가 뭔지 경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SK가 3세들은 ‘공부 중’ 최씨가의 2세들은 대부분 연애 결혼했다. 최 회장은 미국 시카고대에서 노소영(44) 아트센터 ‘나비’ 관장을 만났다. 최 회장의 설명이다. “대학 테니스 동호회에 선수가 많이 부족하더라고요. 그래서 와이프를 적극 끌어들였죠.” 그러나 둘 사이의 관계가 진척될수록 SK가는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노 관장의 부친이 당시 여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 체육부 장관으로 정경 유착에 대한 의혹의 시선이 쏟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모친인 고 박계희 여사가 미국에 건너가 맏며느리감인 노 관장을 직접 살펴봤으며, 고 최 회장도 미국 출장중에 노 관장을 면담했다. 고 최 회장은 사돈인 노 장관이 대통령이 되자 임직원을 모아놓고 “이제부터 SK는 해외에서 사업을 벌일 생각을 해야 한다.”면서 “조금이라도 정경유착이라는 오해를 사지 않도록 경영전략을 새로 짜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주위의 이목속에 결혼한 탓일까. 부부간 ‘애정 전선’은 세간의 이목 이상으로 견고하다는 평이다. 한 지인의 얘기다.“최 회장이 2003년 ‘SK글로벌’ 사태로 구속 수감됐을 때입니다. 노 관장은 공판 때마다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1주일에도 세 차례씩 면회를 꼭 갔었어요. 당시 수감중인 최 회장은 노 관장의 생일에 사람을 통해 장미꽃을 전달하기도 했고요.” 최 회장과 노소영씨는 장녀 윤정(16)양과 차녀 민정(14)양, 장남 인근(10)군 등 1남 2녀를 두고 있다. 차남인 최 부회장과 채서영(41) 서강대 영문과 교수의 인연은 누이동생인 최기원씨 소개로 맺어졌다. 채 교수와 기원씨는 친구 사이다. 자녀는 2남1녀. 장남 성근(14)군과 장녀 원정(8)양, 차남 동근(6)군이다. 고 최윤원 회장과 김채헌(51)씨는 슬하에 1남3녀를 두었다. 장녀 서희(28)씨는 미국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으며, 지난해 7월 평범한 집안 출신인 최성훈씨와 결혼했다. 최씨는 세계적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에서 근무하고 있다. 차녀 은진(22)씨와 3녀 현진(20)씨, 장남 영근(18)씨는 모두 학생이다. 최신원 SKC 회장은 1남2녀를 두고 있다. 장녀 유진(27)씨는 미국에서 디자인 공부를 마치고, 현재 한국에 머물고 있다. 차녀 영진(25)씨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장남 성환(24)씨는 중국 복단대에서 학업을 하고 있다. 최창원 SK케미칼 부사장과 최유경(38)씨는 장녀 경진(8)양과 장남 민근(7)군을 두고 있다. 모두 초등학생이다. ●‘SK호’ 이끄는 전문경영인 조정남(64) SK텔레콤 부회장은 SK텔레콤의 기술력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은 ‘산파’로 통한다. 또 ‘CDMA 전도사’라 불린다. 조 부회장이 밝힌 1995년 CDMA(부호분할다중접속)의 개발 성공 일화다.“당시 손길승 부회장이 저에게 지속적으로 CDMA 성공 여부를 물어오셨지만 답답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드디어 수천명이 동시에 통화를 시도할 수 있는 상업화 규모의 투자를 결심해야 하는 판국에 몰렸습니다. 그때 제가 손 부회장에게 ‘제게 400억원을 주십시오. 항상 물으시던 CDMA 성공 여부에 대해 확실한 답을 드리겠습니다.’고 했습니다. 손 부회장은 과감한 지원을 약속했고, 결국 세계 최초의 CDMA 상용화라는 신화가 탄생하게 됐습니다.” 조 부회장은 외모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친근감이 넘친다. 자칭 ’리버럴리스트’로 말한다. 전북 전주 출신으로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나왔다. 김창근(55) SK케미칼 부회장의 별명은 ‘마징가’다. 매일 서너 시간만 잠자며, 일에 매달리는 엄청난 체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쏟아지는 잠을 쫓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으며 업무를 했다고 한다. 일처리와 관련, 손길승 전 SK그룹 회장 후계자로 불릴 정도다. 그는 마지막 구조본부장으로서 1974년 ‘경영기획실’로 출범한 SK 구조조정본부를 30년 만에 직접 ‘간판’을 내리기도 했다. 그는 1974년 입사 이후 SK케미칼 외환과장·자금부장·재무담당 상무를 거쳤고,1997년에는 그룹 구조본 재무팀장을 맡는 등 SK를 대표하는 재무전문가다. 서울 출신으로 연세대 경영학과, 미국 USC(남가주대) 경영대학원을 나왔다. 신헌철(60) SK㈜ 사장은 소탈한 외모와는 달리 일처리가 꼼꼼하다는 평과 함께 노력형 CEO(최고경영자)로 불린다. 상고 출신으로 주판알만 튀기던 그가 이효석의 단편 소설 ‘메밀꽃 필 무렵’ 때문에 대학 입시에 떨어지자, 아예 작품을 통째로 암기해 버릴 정도다. 그는 지금도 기분이 좋아지면 ‘메밀꽃 필 무렵’을 술술 읊어댄다. 신 사장은 본인을 ‘운 좋은’ CEO라고 평가한다.SK㈜ 사장도 운 때가 맞아 떨어진 것이지, 능력으로 뽑았다면 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고 겸손해한다. 신 사장의 얘기다.“최 회장으로부터 SK㈜를 맡아달라고 했을 때 고민이 많았습니다. 능력도 부족한 내가 맡아서 잘 이끌어 갈 수 있을까. 그러나 최 회장이 지금의 SK㈜는 ‘아버지’ 같은 CEO보다 상처를 보듬아주고, 이것 저것 챙겨줄 수 있는 ‘어머니’ 같은 CEO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CEO를 맡을)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그러나 ‘능력없다.’는 말과 달리 SK㈜는 신 사장이 CEO로 취임한 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매출과 수출, 순이익 면에서 역대 실적들을 갈아치우고 있다. 신 사장의 운과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 신 사장이 1998년 5월 SK텔레콤 수도권본부장으로 일할 때다. 당시 서정욱 사장은 국제전화 식별번호 추첨식에 참가할 SK텔레콤 제비뽑기 ‘대표선수’로 신 본부장을 선택했다. 가서 모든 경쟁사가 희망하는 ‘00700’ 번호를 뽑아오라는 특명과 함께. 그런데 이 업무는 신 본부장의 직무와 전혀 상관없는 무선사업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임직원이 염원했던 대로 기어이 ‘00700’번호를 뽑아내는 기염을 연출해냈다. 신 사장은 경북 포항 출신으로 부산상고와 부산대 경영학과, 연세대 경영학과 대학원을 나왔다. 김신배(51) SK텔레콤 사장은 논리적이며 날카롭다는 인상을 주지만, 의외로 가사를 외운 팝송이 100여곡에 이를 정도로 감성적인 면도 적지 않다. 또 순탄하게 CEO까지 오른 듯 보이지만 이공계 출신의 기획통 CEO로서 만년 하위권이던 수도권영업을 SK텔레콤 지사 중 1위로 올려 놓을 정도로 ‘야전 경험’도 많다. 그는 당시 현장 직원과 친해지기 위해, 또 바닥권이던 점유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매일 ‘술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그는 사석에서 “평소에 즐겨하지 않던 술이었지만 그때 마셨던 술이 그 전 동안 마셨던 술보다 더 많았을 것”이라고 했다. 또 신세기통신과의 통합작업을 2년간 잡음없이 해 낼 정도로 사업 조정 및 대인 관계에도 능수능란하다는 평이다. 그는 애창곡으로 분위기를 띄울 때에는 ‘오늘같은 밤’(이광조)이나 ‘골목길’(신촌블루스)을, 분위기를 탈 땐 ‘사랑이 지나가면’(이문세)이나 ‘사랑일 뿐이야’(김민우)를 부른다고 했다. 학창시절엔 팝송 100곡 정도는 가사를 안보고 부를 정도였다고. 김 사장은 충남 부여 출신으로 경기고, 서울대 산업공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을 나왔다. 정만원(53) SK네트웍스 사장은 ‘위기를 기회로’ 바꾼 대표적인 CEO다.2003년 그룹이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 사태로 위기를 맞았을 때 SK글로벌 정상화추진본부장으로 뛰어난 위기 관리 능력을 보여줬다. 이같은 활약 덕분에 SK네트웍스 사장으로 취임, 채권단 조기 졸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정 사장은 21회 행시 수석 출신으로 1994년 통산산업부 과장에서 ‘SK맨’으로 변신했다. 그는 사령장을 받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가 관련 서적 40권을 구입했다고 전한다.95년부터 OK캐쉬백 사이트의 원형인 쇼핑몰을 구상했으며,OK캐쉬백과 그 사이트를 기획해 SK에서 입지를 다졌다. 그는 서울 출신으로 중앙고, 연세대 경영학과,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박장석(50) SKC 사장은 오너가(고 최종건 회장의 둘째 사위)의 일원이지만 전문경영인으로 불리기를 더 좋아한다. 솔직함과 친근감을 바탕으로 강한 추진력과 빈틈없는 일처리 능력을 보유한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의 CEO라는 평이다. 그는 1979년 ㈜선경 미주본부로 입사, 경영지원본부장, 관리총괄 부사장을 거치며, 방송·통신 장비업체인 SK텔레시스 인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서울고와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 미국 스티븐스대 경영학 석사 출신이다. golders@seoul.co.kr ● ‘맏형’ 최신원 SKC회장 “분가요?시기상조입니다. 여건도 성숙치 않았는 데 무슨 분가입니까. 지금은 형제간에 서로 협력해서 SK를 더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훗날 때가 됐다고 판단되면 제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 것입니다.” 최신원(53) SKC 회장은 최근 재계의 이슈로 떠오른 ‘SK분가설’을 이렇게 일축했다. 이어 “형님(고 최윤원 SK케미칼 회장)이 돌아가신 이후 최씨가(家)의 맏이로서 형제간의 협력과 우애를 돈독히 하는 것이 저의 책무”라며 “이를 위해 형제간에 자주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모임을 자주 갖는다.”고 말했다. 밖에서는 ‘패밀리 미팅’으로 알려진 형제간 모임은 실상 집안 제사 행사인 경우가 많다. 또 해외 출장을 빼곤 형제들 모두 참석하는 것이 최씨가의 오랜 전통이다. 최 회장은 ‘음지’에서 동생들을 지원하는 소리없는 ‘카리스마’로 유명하다. 지난해 ‘소버린사태’로 경영권을 위협받았을 때 SK㈜의 대주주인 SK케미칼 지분을 확대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형은 형답게, 동생은 동생답게 행동하면 불협화음이 나올 수 없어요. 사업이야 다들 알아서 잘 하니까. 또 어려운 일이 닥치면 서로 뭉치면 되고요. 선친과 숙부께서 상호신뢰 속에서 그룹을 키워오신 것처럼 우리 2세 형제들도 서로 협력해 SK그룹을 세계적인 그룹으로 키울 것입니다.” 최 회장은 또 “몸은 부실해도 부친을 닮아 통뼈”라며 선친인 고 최종건 회장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선친은 언제나 돈을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사실 죽으면 돈 갖고 갑니까. 살아있을 때 좋은 일을 많이 해야죠.” 그는 앞으로 무엇이 되기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은 듯했다.“제 소박한 꿈은 이렇습니다. 재단법인 ‘선경 최종건 재단’의 장학사업을 전국으로 확대해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공부할 기회를 더 많이 주는 것입니다. 여건이 허락된다면 한국에 영국의 ‘이튼스쿨’과 같은 명문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전문 기술학교를 세워 선친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최 회장은 “선친은 평소 교육에 열정이 대단했지만 일찍 돌아가신 탓에 실천에 옮기지 못하셨다.”면서 “선친의 이름으로 재산을 지속적으로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국내 재벌가에서 보기 드문 해병대 출신이다. 부친이 그의 내성적인 성격을 고치기 위해 해병대 입대를 권유했기 때문. 그는 이런 경험을 살려 자신이 대표이사로 있었던 회사의 임직원은 반드시 해병대 교육을 받도록 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직원들 사이에서 ‘해병대 CEO’로 불린다.CEO(최고경영자)로 나선 지 8년째인 최 회장은 신속하면서도 과감한 업무 추진력, 강한 리더십을 가졌다는 평이다. 이는 위기관리 능력으로 이어져 SKC 회장에 취임한 이후 한계사업의 과감한 철수와 정보통신 관련 사업 진출 등 적극적인 ‘턴어라운드’ 작업을 통해 SKC를 우량기업으로 변신시키고 있다. golders@seoul ● 최씨가 며느리·딸 ‘경영불참 불문율’ 국내 재벌가에서 며느리들을 경영에 참여시키는 경우는 많지 않다. SK가(家)는 이보다 한 술 더 떠 딸들까지 아예 배제한다. 한 임원의 얘기다 “최종현 회장이 한번은 가족 회의를 열고 최씨가의 여성은 딸이든, 며느리든 경영 참여는 안된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남자만 경영에 참여시키기로 한 거죠. 그래서 큰 집(최종건가)과 작은 집(최종현가)의 5남 5녀 가운데 ‘대표선수’ 5명(윤원, 신원, 창원, 태원, 재원)만 경영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이런 불문율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요.” 큰 집 조카들까지 포함해 10남매의 가장 역할을 했던 고 최종현 회장(그는 생전에 형의 3남 4녀와 자신의 2남 1녀를 합한 ‘5남 5녀의 아버지’로 자처했음)이 기업 경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며느리와 딸들을 경영진에 참여시키지 않았는지 가늠할 수 있는 일화 한토막. 최 회장이 병마와 막바지 씨름할 때였다. 하루는 저녁 식탁에 앉았는 데 큰 아들(최태원 SK㈜ 회장)이 보이지 않자, 큰 며느리(노소영 관장)에게 “오늘도 못 온대.”라고 물었다. 노 관장은 시아버지에게 어리광 부리듯 “네∼”라고 답했다. 이어 “요새 그 사람 얼굴 보기도 어려워요.” 그러자 최 회장은 무뚝뚝하게 “사업을 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아니. 사업이란 장난이 아니다. 전력투구해야 한다. 사업을 위해서 희생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최씨가의 맏며느리인 김채헌(51·고 최윤원 SK케미칼 회장의 부인)씨는 최씨 2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집안 안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항상 소리 안나게 일을 처리한다는 평이다. 시동생 얘기다.“집안을 화목하게 하는 데 형수님으로서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하는 일은 없지만 애들도 어느 정도 커서 이제는 뭔가 해 보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시동생의 평은 이렇다 “워낙 말이 없고, 착하기만 합니다. 마음도 대단히 여리고요.” 노소영(44) 아트센터 ‘나비’ 관장은 최씨가의 며느리 가운데 가장 활동적인 편이며, 사람 만나는 것을 즐긴다. 국제적인 감각이 뛰어나고 예술쪽에 관심이 많다. 최태원 회장도 노 관장의 바깥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한 지인은 “최 회장과 성격이 비슷한 데다 외국에서 오래 생활해서인지 대단히 합리적인 분”이라며 “서로 바쁘기는 해도 주말에는 같이 시간을 보내며, 테니스를 치거나 요리를 하는 등 부부 금슬이 대단히 좋다.”고 설명했다. 시아버지인 최종현 회장은 큰 며느리를 어떻게 봤을까. “저래도 아이들 교육은 잘 시킨단 말이야. 제 시어머니(고 박계희 여사)를 닮은 데도 많고….”고 최 회장과 50년 지기인 언론인 홍사중씨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겉으로는 제법 쌀쌀하면서도 조금도 표리가 없고, 야무지게 집안 살림을 꾸려나간다는 뜻으로 최 회장이 며느리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고. 최재원 SK엔론 부회장 부인인 채서영(41)씨는 야무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서강대 영문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최 부회장은 “집 사람이 좀 바쁘죠. 그래서 저는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 보내기 위해 가능한 한 골프를 치지 않으려고 해요. 집안 일은 좀 거드는 편인데…. 와이프 눈에는 많이 부족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저만 쓰는 주방용 칼이 있으면 된 것 아닙니까.”라며 웃는다. 최창원 SK케미칼 부사장 부인 최유경(38)씨는 치과의사다. 개업을 않고 가끔씩 지인들 병원에서 일손을 거들고 있다. golders@seoul.co.kr .co.kr
  • [마광수의 섹스토리] ③ 나이트클럽에서

    [마광수의 섹스토리] ③ 나이트클럽에서

    나는 희진을 우연히 카페에서 만났다. 나는 그녀와 함께 하얏트 호텔에 있는 나이트 클럽 ‘제이 제이 마호니’에 갔다.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 홀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왁시글거리는 게 남대문시장을 방불케 했다. 나와 그녀는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구석의 스탠드 바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그녀가 핸드백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향수였다. 코끝에 감도는 독한 향수 냄새와 함께 연노란색의 액체가 호박색의 맥주잔에 섞여 들어갔다. 건배! 멋진 아이디어였다. 왠지 모르게 에로틱한 느낌이 왔다. 블루스 음악이 나오자 우리는 서로의 술잔에 남은 것이 없음을 확인한 후, 춤을 추러 플로어로 나갔다. 그녀가 밍크 코트를 벗지 않고 플로어로 나갔기 때문에 나는 좀 어리둥절했다. 희진이가 내 목에 두 손을 걸고 살며시 몸을 기대왔다. 앞이 여며지지 않는 밍크코트 사이를 헤집고 들어간 내 손에 전해지는 희진의 몸매는, 내가 겉으로만 보고 상상했던 것 이상의 명품이었다. 내 손은 희진의 허리를 감싸안고 있다가 이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내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원피스 안에서 나는 그녀의 팬티를 느낄 수 없었다. 희진의 젖가슴이 내 가슴에 밀착되는 순간, 나는 그때까지 내가 희진의 젖가슴에 신경써서 주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부드럽고 신축성 있는 희진의 쫄쫄이 원피스 위로 그녀의 가슴을 감촉할 수 있었다. 희진은 브래지어를 안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맨몸뚱이 위에 한 장의 얇은 원피스만을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매미 허물 같은 얇은 천을 통해 만져지는 그녀의 젖가슴은 정말로 부드러웠다. 그녀의 날씬한 체격에 비해 훨씬 크게 느껴지는, 그러면서도 탄력 있는 젖가슴이었다. 그녀의 뜨거운 입김이 내 목에 와닿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나를 쏘아보며 내 목에 감은 팔을 당겨 내 얼굴을 자기의 이마 앞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희진의 이마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리고 이마 다음으로 그녀의 관자놀이, 뺨, 감은 눈, 예쁜 입술 순서로 입술을 가져갔다. 내 입술은 그녀의 입술에서 한참 동안 머물렀다. 나는 내 혓바닥이 희진의 이빨에 부딪치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혓바닥과 엉켰다. 나는 그녀의 엉덩이를 끌어당겨 내 불두덩과 그녀의 불두덩이 서로 밀착되도록 했다. 우리는 스텝을 멈추고 춤을 추는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서로의 은밀한 곳을 느끼고 있었다. 희진은 긴 손가락을 내 머리카락 사이로 미끄러지듯 넣으면서 혓바닥으로는 내 입술을 탐닉하고 있었고, 내 오른손은 원피스 위로 튀어나와 있는 그녀의 유두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왼손은 희진의 엉덩이로 가 스펀지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살을 계속 어루만지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긴 밍크코트 안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희진은 손을 내리더니 내 바지의 지퍼를 내리고서 내 심벌을 밖으로 꺼냈다. 내 심벌은 이미 충분히 발기된 상태로 있었고, 심벌에서 흘러나온 점액이 바지를 살짝 적시고 있었다. 그녀가 길디긴 손톱이 매달린 가느다란 손가락들로 내 심벌을 감아쥐자 온몸의 힘이란 힘이 그곳을 통해 빠져나가는 듯했다. 전신을 감싸고 도는 절정감에 가까운 흥분상태가 나를 가만히 못 있게 했다. 나는 희진의 젖무덤을 모두 다 원피스 밖으로 노출시켰고, 그것만 가지고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아 원피스를 아예 그녀의 배꼽 아랫부분까지 끌어내렸다. 그녀의 알맞게 풍성한 젖가슴이 밍크코트에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상태로 내 시야에 들어왔다. 희진의 탄력있는 젖가슴은 도도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고, 유두 또한 뽈딱 솟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왼쪽 젖꼭지에 반지만한 크기의 링이 꿰어져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더욱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링 때문인지, 그녀가 유방을 애무받을 때 느끼는 쾌감이 다른 여자들에 비해 월등히 민감한 듯했다.   나는 그녀의 유방을 젖꼭지고리를 단 유두를 중심으로 집요하게 애무했다. 그녀의 숨이 가빠옴에 따라 유두가 단단해져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손을 아래로 미끄러뜨려 원피스 위로 그녀의 불두덩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도톰하게 솟아오른 둔덕이 아련하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손을 치마 속으로 집어넣어 그녀의 사타구니를 애무했다. 부드러우면서도 상당히 탄력이 있는 피부였다. 나는 그녀의 원피스를 아래에서 위로 훌러덩 올려버렸다. 그녀의 아랫도리가 밍크코트에 살짝 감춰진 채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의 원피스는 골반 언저리에서 돌돌 말려 뭉쳐 있었다. 마치 맨몸에 두껍고 검은 요대를 한 모습이었다. 귀족스러운 얼굴을 가진 희진이가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렇게 벌거벗고 있는 것을 보니까(물론 밍크코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전혀 눈치를 못 채지지만), 흡사 순진한 야성녀(野性女)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야릇한 쾌감이 왔다. 정장을 차려입고 있는 나 또한 야(野)한 상태에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심벌이 밖으로 튀어나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희진은 내 심벌을 부드럽게 잡고서 몇 번 왕복운동을 하더니, 자기의 하반신을 밀착시켜 오면서 내 심벌을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안내했다. 페니스에 뿌듯이 전해오는 만복감(滿腹感) 비슷한 느낌과 함께, 그녀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심벌을 더 깊숙이 그녀의 살 사이로 밀어넣었고, 그녀도 그것을 더욱 은은하면서도 깊숙이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희진과 나는 블루스 음악(하필이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인 바버라 스트라이샌드의 ‘Memory’였다)에 맞춰 서로의 하복부를 부드럽게 움직여 나갔다. 스텝에 따라 때로는 좌우로, 때로는 전후로 내 심벌은 그녀의 아랫도리 입술 부근에서 무념무상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희진은 나의 미세한 애무에도 가늘게 몸을 떨었는데, 성감이 무척이나 예민한 여자 같았다. 드디어 나는 내 고환 같은 곳에서 정액이 마치 분수의 물줄기처럼 치달아 오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마침 블루스 음악이 끝나고 귀청을 때리는 디스코 음악이 스테이지를 감싸기 시작했다. 음악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일껏 외출 준비를 하고 있던 내 사랑스러운 정충(精蟲)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끼며 분수의 조정 장치를 오프 쪽으로 틀었다. 정충 제군(諸君)들이 투덜대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듯했다. 그녀 역시 빠른 속도로 내 페니스를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서 꺼내어 내 바지 속에 집어넣고 지퍼를 채워주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밍크코트 앞섶을 가리고 스테이지를 내려왔다. 우리는 출입구의 계산대로 가서 술값을 치르고 나서 나이트클럽을 빠져나와 주차장 쪽으로 갔다. 나는 정액을 미처 배출시키지 못해 계속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차에 올라타 조수석에 앉자마자 밍크코트를 벗어던졌다. 그녀의 원피스는 또르르 말린 채 여전히 그녀의 허리께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 역시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부풀어 오른 젖꼭지가 아직 그대로 뽈딱 서 있었고, 내 눈에 애교스러운 추파를 흥건히 흘리고 있었다. 조수석과 운전석을 최대한 뒤로 밀고 조수석의 등받이를 젖혔다. 희진은 벌거벗은 채로 누웠고, 실내등이 그녀의 온몸을 샅샅이 비쳐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실내등 덕분에 그녀의 온몸 구석구석을 눈으로 읽을 수 있었다. 우단으로 만든 검은색 ‘울트라 하이힐(ultra high heel)’ 구두를 신고 유방과 치부를 모두 드러낸 희진의 모습은, 그녀의 우아한 얼굴과 암팡진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한 언밸런스 자체가 무척이나 도발적이었다. 그녀가 서서히 입술을 벌렸다. 이빨 하나하나마다 중간에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정말 이채로운 페티시였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고, 나 또한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나의 더운 입김이 그녀의 입 안 구석구석에 전해지자마자 그녀의 긴 손가락들이 내 머리를 거세게 잡아당겼다. 나는 희진의 코와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서, 혓바닥 끝으로 모가지를 부드럽게 마찰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은밀하고 깊은 가슴 속에서 솟아나오고 있는 긴장된 박동의 느낌이 혀끝에 느껴졌다…. ■마광수는 1951년 경기 수원 출생 연세대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현재 연세대 국문과 교수 ▲저서 ‘윤동주 연구´ ‘상징시학´ ‘카타르시스란 무엇인가´ ▲장편소설 ‘권태´ ‘즐거운 사라´ ‘불안´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
  • 儒林(367)-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67)-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인산이 끝나기도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퇴계의 태도에 대해 그 ‘출처대의(出處大義)’가 의심된다고 여론이 들끓자 당시 홍문관의 응교(應敎)로 있던 기대승은 일반여론의 분위기를 편지로 전한다. 이때 퇴계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장을 보내고 있다. “…나의 처신은 참으로 어렵다. 왜냐하면 나는 첫째로 대우(大愚:크게 어리석음)하고, 둘째는 극병(劇病:병이 심함)하며, 셋째로 허명(虛名:빈 이름)만 내었고, 넷째로 오은(誤恩:그릇되게 임금의 은총을 받음)만 받아왔다. 이 네 가지가 한 곳에 몰려 서로 모순되고 방해되니 옛사람에 비춰보아도 나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었고 지금사람에 견주어보아도 나처럼 병이 심한 사람이 없다. 허명을 피하려 하면 허명이 매양 따라오고 오은을 사퇴하려 하면 오은이 오히려 더 가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대우로써 허명을 채우려하나 그것은 망령된 일이요, 극병으로써 오은을 받아 당하려 하니 그것 또한 염치없는 짓이다. 염치없는 자로서 망령된 일을 한다는 것은 덕에 있어서 상서롭지 못하고 사람에게 있어서 길한 것이 아니요, 나라에 있어서도 해가 되는 것이다. 내가 벼슬맡기를 꺼려하고 항상 물러서려 하는 것이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오직 이 네 가지 결함과 두 가지 걱정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자신이 세운 중요한 원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하고 있다. “…. 옛 군자는 진퇴의 명분이 밝아서 조금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맡은 직책을 조금이라도 다하지 못하면 반드시 몸을 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는 것이다. 그 임금 사랑하는 점에 있어서는 차마 하지 못할 일이지만 그러나 이 때문에 물러감을 그만두지 않는 것은 그 의에 있어서 몸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반드시 그 몸을 물러나게 해야 의에 따르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이런 때를 당하면 차마 못하는 정이 있다 하더라도 의에 굴하지 않을 수 없다….” 명종이 승하하였을 때 인산이 끝나기도 전에 곧바로 귀향해버린 자신에 대해 나쁜 여론이 들끓자 퇴계는 변명하기보다는 오히려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다. 퇴계의 편지에 나오는 ‘옛 군자는 진퇴명분이 밝아서 조금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구절 역시 죽령고개를 넘을 때 퇴계가 깨달은 중요한 진리였다. 이는 주자가 편찬한 ‘송명신언행록’이라는 책 속에 나오는 옛 군자들의 진퇴를 퇴계가 심사숙고하고 이들의 태도를 본받은 것이었다.주자가 편찬한 ‘송명신언행록’은 송나라 때의 유명한 신하들의 언행을 기록한 책으로 제왕학의 교재로서 널리 읽힌 책이었다. 여기에는 두범(杜範)이란 명신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두범은 자기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임금 이종(理宗)에게 이를 항의하는 상소문을 쓰고 즉시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임금은 정성껏 만류하였으나 두범은 오히려 더 물러가기를 마지않았기 때문에 임금은 두범을 막기 위해서 성문을 닫을 것을 명령하였던 것이다. 이는 공자의 불사가(不俟駕)정신에 위배되는 불충한 신하로서의 태도였다. 그러나 보다 큰 대의를 위해서는 임금의 어명이라 할지라도 이를 단호히 물리칠 수 있는 용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퇴계는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의 제자들은 이에 대해 여전히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제자들은 퇴계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언행록은 기록하고 있다. “벼슬하는 사람으로서 의로써 마땅히 물러나야 할 경우에는 임금이 비록 만류한다고 하더라도 글만 올리고는 그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가 버릴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임금에게 나아가는 것이 옳겠습니까”
  • 儒林(366)-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66)-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불사가(不俟駕). 이는 유가에서 말하는 오륜 중의 하나인 군신유의에 관한 중요한 내용이었다. 이 구절은 논어의 향당(鄕黨)편에 나오는 말로 공자의 다음과 같은 태도를 가리키고 있음이었다. “병이 들었을 때 임금이 문병오시면 머리를 동쪽에 두시고 조복을 위에 덮고 큰 띠를 그 위에 걸쳐놓고 맞으셨다. 임금이 오라는 명이 내리면 수레가 준비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셨다.(疾 君親之 東首加朝服 拖紳君命召 不俟駕行矣)” 지금까지 퇴계는 공자의 가르침을 본받아 임금이 오라는 명이 있으면 물러가기를 청하였다가도 어쩔 수 없이 수레를 타고 기다리지 않고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죽령을 넘어 풍기군수를 끝으로 퇴계는 더 이상 임금의 부르심이 있다 하더라도 유의(有義)에 매달려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퇴계는 죽령을 넘기 전과 죽령을 넘은 후를 ‘앞과 뒤’로 나누고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의 인생에 있어 나아가고 물러감에 있어서 ‘앞과 뒤(前後)’가 다른 듯하다. 전에는 임금의 명령을 듣기만 하면 곧 달려갔으나 뒤에는 부르시면 반드시 사양하였으며, 가더라도 굳이 머무르지 않았다. 자리가 낮으면 움직임이 가벼우므로 한번 나가볼 수도 있지만 벼슬이 높으면 책임이 큰데 어찌 가벼이 나갈 수 있겠는가. 옛날 사람들은 벼슬을 받으면 곧 가서 ‘임금의 은혜가 하늘처럼 무거운데 어찌 물러가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만약 나아가고 물러가는 대의(大義)를 돌아보지 않고 임금의 사랑만을 따를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을 예의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작록(爵祿)으로 하는 것이니 그 어찌 옳겠는가.”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퇴계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기를 맞게 한다. 그전까지 퇴계는 공자의 ‘학문을 하면 녹이 그 가운데 있다.(學也祿在其中)’라는 말과 자하(子夏)의 ‘벼슬하고 여유 있으면 학문을 하고, 학문을 해서 여유 있으면 벼슬한다.(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라는 말에 충실하여 벼슬과 학문을 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는 마침내 단양군수를 떠나는 죽령 고갯마루에서 그것이 불가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어차피 작록이란 벼슬과 학문 사이에 개재해 있으므로 전념할 수 없으면서도 임금의 사랑을 이유로 해서 벼슬을 하는 것은 곧 작록을 훔치는 도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 때의 결심이 퇴계의 인생을 ‘앞과 뒤’로 나누며 퇴계의 학문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는 분기점이 되는 것이다. 후반기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제자들은 다소 의아해하였다. 제자들은 스승이 사직원서를 내고서도 회보를 기다리지 않고 무단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사실이 국법을 어긴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갖고 있었고, 특히 명종이 승하하였을 때 인산(因山)도 마치기 전에 서울을 떠나 귀향에 나서 시론이 분분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산’이란 임금이 승하하였을 때 하는 국장으로, 신하는 마땅히 장례가 끝날 때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조의를 표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였기 때문이었다.
  • 열차안전 ‘총체적 비상’

    열차 안전에 ‘총체적 비상’이 걸렸다. 수도권 전철에서는 동일 노선에서 똑같은 장애가 잇따라 발생하고 있으나 근본적인 처방은 뒷전인 채 땜질식 복구에만 급급해 빈축을 사고 있다. 고작 부실 복구작업의 책임을 물어 영등포전기사무소장을 직위해제하는 데 그쳤다. ●과천선 금정역 송전장애 닷새동안 3번 지난 6일과 9일에 이어 10일에도 과천선(금정∼남태령) 금정역에서 송전장애가 발생해 금정∼선바위역 구간 상행선 열차 운행이 20여분간 중단됐다. 앞서 9일에는 34분간 열차 운행이 중단됐었다. 닷새 동안 3번이나 같은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열차사고가 빈번한 것은 사고가 날 때마다 임기응변식 처방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전철화된 노선에서 사고가 발생할 때는 고압선 등의 장애물로 인한 기중기 투입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사고수습 대책에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조치원역선 화차 분리작업 직원 사망 최근 들어 열차사고는 줄지어 발생하고 있다. 지난달 14일 대전역에서 화물열차 2량이 탈선한 데 이어 26일 중앙선 동화역에서도 화물열차 탈선사고가 일어났다. 이에 앞서 지난달 21일에는 올해 철도공사 1기 사원으로 입사한 직원이 조치원역에서 화차 분리작업중 열차에 치여 숨졌다. 이달 초 경부선 영동역 부근에서는 작업 중이던 열차와 기중기가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같은 사고가 빈발하는 데는 철도청이 철도공사로 전환된 뒤 도입한 3조 2교대 근무 등이 안착되지 못한 것도 이유로 꼽힌다. 신규 인력이 투입되다 보니 현장 근무체계가 아슬아슬하다는 것이다. 또 승진에 필요한 교육시간마저 공사전환과 함께 20시간에서 10시간으로 줄었다고 한다. 게다가 러시아 유전사업 파문으로 조직이 크게 흔들리면서 정신적으로 해이해진 것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철도公 전환후 3조2교대 근무 안착 못해 이에 대해 철도공사 관계자는 “열차 안전은 교육과 직원들의 여유가 수반돼야 하는데 공사 설립 후 약화된 것이 사실”이라며 “교육도 예산과 결부돼 있어 ‘즉시성’ 있는 현장지도에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했다. 정부대전청사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 황영애 대담 : 주례 7천번 선 한글학자

    황영애 대담 : 주례 7천번 선 한글학자

    한갑수(韓甲洙)씨 <한글학회 이사> 황영애(黃英愛) 대담(對談) 첫번 25년 전 여고교사 때 그 제자 지금은 쉰 할머니 - 몇 년 동안에 주례 7천번의 기록을 세우셨어요? 『내가 32세에 첫 주례를 섰으니까, 꼭 25년입니다. 그때는 여학교 선생이었는데 졸업생인 내 제자가 결혼을 한다고 주례를 부탁해서 서울 삼판동에 있는 예배당 같은 목조 건물에서 처음으로 주례를 섰죠.「이사진」이란 그 제자는 벌써 나이가 쉰이 되어 대학을 졸업한 아들 딸들이 여럿이에요』 - 지금이야 주례계의「챔피언」이니까 노련하시겠지만 처음에는 좀 떨리셨죠? 『예, 며칠 전부터 잠을 못 자고 준비를 했는데도 떨리더군요. 그러나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종로 예식장에서 그러는데 예식장에 가장 빈번히 주례를 하러 드나드는 사람은 이갑성, 조동식, 황성수, 한갑수… 이렇게 네 사람인데 그 중에도 내가 제일 많이 드나든다는 거예요』 5, 10월엔 보통 40번 넘어 - 이제 결혼「시즌」이 왔으니 또 맹활약을 하셔야겠군요. 이 예식장에서 저 예식장으로…. 대개 한 달에 몇 번이나 주례를 서세요? 『5월, 10월 같은 달은 한 달에 보통 40번을 합니다. 매일 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대통일에는 하루에도 세 번, 네 번씩 주례를 서는 날도 있어요. 방송국에 가랴, 주례를 서랴, 종일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면 아무 일 못하고 하루가 넘어갑니다.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 한선생님이 주례로선 자격 만점이시니까 그런 즐거운 수난을 겪으시잖아요? 『자격이라야 내가 결혼한지 오래됐고 3남 1녀를 두고 있으니까 남이 보기에 다복하다면 다복하다고 할 수 있죠』 - 결혼하신 지는 몇 년이나 되셨어요? 『35년 됐습니다. 우리는 3남 1녀를 아주 일찍 낳았어요. 내 아내가 나하고 결혼한 것이 18세 땐데 그때부터 아기를 낳기 시작해서 29세에 단산을 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런지 내 아내는 나이에 비해 퍽 젊고 건강해요. 모두들 10년은 젊게 봅니다. 뭐니 뭐니 해도 여자가 미와 건강을 오래 유지하는 비결은 아기를 일찍 낳아 버리는 거예요. 내 아내는 3남 1녀를 낳았지만 열두 번 소파수술을 했어요』 - 어머나…. 나는 모체 건강유지란 미명 아래서도 열두 번씩이나 살인(소파수술)을 감행하다니 끔찍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다음 물음으로 옮겼다. 이기붕씨 대신 선 적엔 헌병, 형사 배치해 놓고 - 수천 번 주례를 서시는 동안 겪으신 일들이 많으실 텐데요. 몇 가지「에피소드」만 공개해 주세요. 『글쎄 하도 많아서… 우선 기억에 떠오르는 것은 내가 이기붕씨의 비서실장을 하던 때의 얘긴데 이기붕씨가 대한부인회의 간부 양모씨의 주례를 맡았어요. 그런데 내일이 결혼 날이라면 오늘 이상한 정보가 들어오는 거예요. 신랑이 어떤 여자와 관계를 가졌었는데 그 여자가 신랑의 아기를 배어 가지고 결혼식장에 한바탕 소란을 벌인다는 겁니다. 결혼식도 결혼식이지만 주례의 입장은 어떻게 됩니까?』 -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이기붕씨가 날더러 주례를 대신 서라고 하면서 그날 결혼식장에는 헌병 10명과 사복 형사 10명을 배치해 놨죠. 이상한 사람만 나타나면 그냥 입을 틀어막고 차에 실어가라는 겁니다. 그래 놓고 내가 주례를 서는데 어떻게 조마조마한지… 결국 식이 끝나도록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만 그때의 결혼식이 잊혀지지 않는군요』 신문 3면의 단골 기사거리를 한갑수씨 자신도 겪을 뻔했으니 아슬아슬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인회 간부에게 장가를 든 그「뻔뻔스러운」신랑은 철통 같은 보호를 받고 그에게 짓밟힌 약한 여자는 끝내 분도 한 번 풀어보지 못하고 그늘에서 울기만 했으려니, 하고 생각하니 공연한 의분심이 솟구친다. 그런 사실을 안 다음에는 주례 서기를 거절해야 옳지 않았을까? 신랑 신부 이름 바꾸기도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주례를 서다 보니 신랑 신부 얼굴을 모르는 것은 예사라 예식장 사무실에서 간혹 실수로 신랑 신부 이름을 잘못 적어 놓으면 내가 이름을 틀리게 부를 때가 있어요. 신랑 아무개 군이여! 하고 부르다 보면 어쩐지 이상하단 말예요』 『그래서 작은 소리로 신랑에게 당신 이름이요? 하고 묻지 않습니까. 아니라고 대답한단 말예요. 그럴 때는 등에 진땀이 부쩍부쩍 나죠. 또 예물교환을 할 차롄데 예물이 없단 말예요. 신부의 아버지가 그것을 호주머니에 넣고 선물과 부조금 들어온 것을 감시하느라고 식장 밖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어요. 결혼식보다 선물에 더 관심이 많은 겁니다. 그래도 이건 나은 편이에요. 예물을 아주 집에다 놓고 오는 사람도 있었어요. 장롱 깊숙이 감추어 둔 거죠. 자, 당장 예물을 교환할 텐데 어떻게 하겠어요. 하는 수없이 손님 중의 아무나 반지 낀 것을 뽑아 오게 하고 만년필도 하나 가져오게 해서 식을 치릅니다』 만삭(滿朔)신부가 졸도하자 의자에 얌전히 앉아서 - 흥분해서 서두르다 보면 실수하는 일도 많을 거에요. 『아, 그리고 이런 일도 있었어요. 신부가 식을 하는 도중 갑자기 졸도를 했는데 마침 앞줄에 앉았던 사람이 어찌나 재빠르게 날아와서 착 받아 안지 않아요. 그대로 넘어졌더라면 뇌진탕을 일으켜서 죽었을 지도 모를 텐데 다행히 받아줘서…』 - 몸이 아프던 모양이죠? 『신부가 만삭이었어요』 - 속도 위반이었군요! 그래서 식은 중도에서 그쳤나요? 『아니죠. 앞에 사람이 받아주자 신부가 곧 정신을 차려서 미안하다고 그럽디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시켜서 의자를 가져오게 하고 신부는 그 의자에 앉힌 채로 식을 마쳤죠. 그때 아주 몹시 놀랐어요』 조혼(早婚)하고 일찍 단산(斷産)해야 - 주례 박사이신 한선생님의 결혼관을 듣고 싶군요. 『외국에서는 차차 조혼의 경향이 늘어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만혼들을 하고 있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결혼은 빨리 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여자가 늙지 않고 건강과 미를 오래 간직할 수 있으니까요』 - 그래도 환경이나 여건이 갖추어져야…. 『그야 물론이지만 가능한 한 빨리 하는 게 좋다는 얘깁니다』 - 행복의 문을 연 신랑 신부가 행복을 가꾸어 나가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있어야 할까요? 『초대 전화기 제작회사의 사장 이름이「벨」입니다. 이 사람 부부가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주고받는 말은「소리, 달링! 소리, 스위트·허트!」예요. 주는 것이 많고 받는 것이 적다고 불평하지 말고 언제나 뉘우치는 마음,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 선데이서울 68년 10/13 제1권 제4호 ]
  • 儒林(363)-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63)-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퇴계를 태운 말은 마침내 버들밭을 지나 죽령고개에 이르렀다. 오르막 30리의 길을 다 올라 이제 내리막 30리의 고갯마루에 이른 것이었다. 아침 일찍 떠난 길이라 산마루턱에 이르렀어도 아직 해가 많이 남아 있었다. 오르는 중간고비마다 퇴계는 산신당에 들러 보기도 하고 한때는 거대한 석굴사원이 있었던 보국사 절터를 둘러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꼬박 하룻길 죽령을 넘으면서 퇴계는 지금까지 살아온 오십 평생의 과거를 돌이켜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숙고하고 있었으므로 마부가 이끄는 대로 말위에 앉아 줄곧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퇴계의 모습은 진흙으로 빚은 석인처럼 보였다. 퇴계는 말이 죽령고개에 이르자 마부에게 일러 말을 세우고 잠시 쉬어 가기로 하였다. 지친 말에게 물을 먹이고 짐을 들고 가는 종자도 쉬게 할 요량이었다. 이제 고갯마루를 넘으면 그대로 경상도. 그러므로 버들밭을 지난 고갯마루는 충청도와 경상도의 갈림길인 것이다. 퇴계는 종자가 가져온 찬물을 마시고 묵묵히 산 아래로 펼쳐 보이는 아득한 벌판을 바라보았다. 옛 속담에 ‘마루 넘은 수레 넘어가기’란 말이 있듯이, 이제 풍기까지는 삼십 리의 산길이라 하더라도 꼬불꼬불 내려가는 길이었으므로 지척지간인 것이다. 퇴계는 연화봉에서부터 연결된 백두대간이 도솔봉으로 이어져 산맥을 이루고 있는 소백산의 준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험준한 산맥 사이로 죽령의 고갯길이 아슬아슬하게 펼쳐져 있었다. 소백산. 퇴계는 단양과 풍기 사이에 있는 소백산을 특히 사랑하고 있었다. 해발 1440m의 소백산은 일찍이 한국의 노스트라다무스라 불리던 예언자, 남사고(南師古:1509∼1570)가 ‘사람이 살 만한 산’이라고 넙죽 절하고 갔다던 명산. 백두대간인 태백산 어름에서 문득 서해를 향해 말머리를 돌려 내륙으로 달리다가 한껏 가뿐 숨을 몰아 쉬는 곳이 바로 소백의 연봉들인 것이다. 퇴계가 소백산을 사랑하였다는 사실은 죽령고개를 넘어 풍기군수로 전근한 이퇴계가 당시 충청감사로 있던 형이 고향 예안으로 다니러 갈 때면 죽령에 쉼터를 마련하고 마중하고 배웅하던 두 곳의 주호자리가 남아 있었다는 것을 통해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잔운대’와 ‘촉령대’로 불렀다는데 지금은 그곳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알려진 바 없다. 퇴계가 소백산을 사랑하였다는 것은 제자 김성일이 쓴 ‘언행록’의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선생이 두 고을(단양과 풍기)에 있을 때에는 맑은 바람이 씻어간 듯이 조금도 사사로운 일에는 개의하지 않았다. 공무의 여가에는 책으로써 스스로 즐기고 혹은 초연히 혼자 나가서 수석(水石) 사이를 거닐기도 하였는데 들의 농부들이 이를 바라보고 마치 신선같이 생각하였다. 군(郡:풍기군·그때 선생은 풍기의 군수로 있었다.)에 소백산이 있으니 곧 남쪽 갈래의 명산이다. 선생은 일찍이 말을 타고 혼자 가서 그 봉우리에 올랐다가 여러 날 만에 돌아오시곤 하였다. 표연(飄然)히 남악(南嶽)의 흥(興)이 있었다.”
  • 105세 前 전남지사 53년만에 ‘출근’

    105세 된 이을식 전 전남지사가 오는 11일 도지사를 떠난 뒤 53년만에 전남도청을 방문한다. 이옹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2월17일 51세로 제 3대 전남지사로 부임, 휴전협정을 맺은 53년 11월22일까지 2년 남짓 도백으로 일했다. 초대 도지사(이남규)가 여·순 사건으로 부임 두 달만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독립운동 당시 친분을 쌓은 이승만 대통령의 권고로 지사에 임명됐다. 지사를 마친 이후 강원도로 가 석회석 광산에 손을 댔고 지금도 이 광산을 갖고 있다. 백수를 넘긴 이옹은 전화통화 중에도 옛일을 모두 기억하는 등 남다른 기억력을 과시했고 알아듣는 데 조금 불편할 뿐 발음도 아주 또렷했다. 이옹은 지사 재임 때 “화학비료 대신 퇴비증산에 힘쓰도록 직원들을 독려했던 일이 새롭다.”고 회고했다. 건강비결에 대해 “5살 때부터 일평생 잡곡밥만을 먹는다. 맘 편하게 먹고 밥 잘 먹는 게 건강을 지켜준 것 같다.”고 소개했다. 이옹은 지금도 역대 전남지사들의 모임인 ‘지우회’ 회장을 맡고 있고, 건강을 염려한 외손자(30·정시채 전 전남부지사의 아들)의 차편으로 광주에 온다. 이번 나들이는 현 박준영 지사(34대)가 역대 도지사를 초청해 도청에서 도정 보고회를 하면서 이뤄진다. 그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서 살고 있고 슬하에 3남 5녀를 뒀으며,86년을 함께 산 부인과는 15년 전 사별했다.. 한편 전남지사 34명 가운데 생존자는 16명이고 이들 중 14명이 이번에 참석한다. 참석자는 16대 김재식,18대 고건,19대 장형태,21대 김창식,22대 전석홍,23대 문창수,24대 송언종,25대 최인기,26대 백형조,27대 이효계,28대 이균범,30대 조규하,31·32대 허경만 지사 등이다. 광주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어떻게 지내세요] 칠순 넘어서도 은퇴 모르는 ‘원조 한류열풍’ 한명숙씨

    [어떻게 지내세요] 칠순 넘어서도 은퇴 모르는 ‘원조 한류열풍’ 한명숙씨

    “요즘 가수들은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 같아요. 우리 때만 해도 가슴 잔잔히 들려주는 것을 멋으로 알았거든요.” 원로 가수 한명숙(71)씨. 추억의 노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로 유명하다. 아직도 40대 이상은 이 노래를 얘기하면 ‘아, 그거’ 하면서 엉덩이를 들썩거릴 만큼 여전히 인상 깊다.‘노오란 샤쓰입은 말없는 그 사람이/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미남은 아니지만 씩씩한 생김생김/그이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아 야릇한 마음 처음 느껴본 심정/아 그이도 나를 좋아하고 계실까/노오란 샤쓰 입은 말없는 그 사람이/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한씨는 1961년 데뷔곡으로 이 노래를 불러 공전의 히트를 쳤다. 노래가 나오자마자 전국을 노란색으로 물들인 것은 물론 일본과 타이완 프랑스 미국 등에까지 번져 한류 열풍의 원조로 가요사에 기록된다. 당시 언론에도 “한명숙의 트위스트 곡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미8군 가수들의 인기 신호탄으로서, 자유당 정권의 3·15부정 선거와 4·19혁명 등으로 우울했던 사람들의 기분을 전환시켜 주었다. 또 타이완, 태국 등 동남아 국가에서도 열광적 반응을 얻었다.”고 보도했다. ●“요즘 가수들은 들려주기보다 보여주기만 해” 현충일인 지난 6일 오후 경기도 파주의 ‘필리핀 6·25참전기념탑’ 공원에서 돗자리를 깔고 한씨를 만났다. 작곡가로 활동 중인 장남 이일권씨, 어린 손자도 함께 나왔다. 이씨의 대표곡은 ‘내사랑 영아’(이명훈 노래). 먼저 지난해 12월 칠순잔치 때의 사진을 건네준다.60대 초반으로 보인다고 하자 한씨는 “다들 그래요.”하며 소녀처럼 수줍게 미소짓는다. 근황을 들려준다. 지난 1일부터 3박4일 동안 전남 완도와 진도 등에 여행을 다녀왔단다. 사단법인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회(위원장 박일서)에서 원로 가수 40여명을 초청한 연례행사였다.‘대전부르스’를 부른 안정애씨,‘파도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서∼’로 시작되는 ‘바닷가에서’의 안다성씨 등 왕년의 스타 가수들과 오랜만에 만났다. 앞서 지난달에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원로 연예인들을 위한 초청행사에도 참가, 존경하는 작곡가 손석우씨 등을 만나기도 했다. 손씨는 ‘노오란 샤쓰∼’를 작사·작곡했다. “그때(61년) 최희준씨가 손 선생님을 소개해줘 ‘노오란 샤쓰∼’를 만났지요. 이후 ‘우리마을’‘그리운 얼굴’‘사랑의 송가’ 등 300곡 정도를 불렀습니다.” 한씨는 당시 ‘노오란 샤쓰∼’의 영화에 신영균 엄앵란 김희갑씨 등과 함께 출연했으며 이때 신영균씨가 노란셔츠를 입어 유행을 더욱 부추겼다. ●“가수에게 은퇴란 없어… 9일 호주서 교민 위로공연” 한씨는 “가수에게는 은퇴란 없다.”고 강조하면서 최근 10여년 동안 외국공연을 20여차례 다녀왔다고 했다.1년전에는 캐나다 밴쿠버 공연을 했고 9일에는 호주 교민회를 방문,‘노오란 샤쓰∼’ 등 히트곡을 들려줄 예정이다. 한씨는 “외국에 갈 때마다 교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손을 꼭 붙잡고 고국생각에 눈물을 흘린다.”고 만난 소감을 전했다. 건강관리를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그저 밝게 웃고 또 노래는 즐거운 것이 아니냐.”고 대답했다. 평남 진남포 출신인 한씨는 남편과 일찍 사별(70년)했으며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딸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 국방장관을 지낸 고(故) 신성모씨의 손자와 결혼, 미국 시애틀에서 산다. 차남 이일준(43)씨는 미 샌디에이고에서 일식집을 운영하고 있다. 한씨는 경기도 파주에서 장남과 함께 살고 있다. 글 김문기자 km@seoul.co.kr 사진 최해국기자 seaworld@seoul.co.kr
  • [오늘의 눈] 靑 ‘정무기능’ 부활해야/오풍연 공공정책부장

    당·정·청 관계가 아슬아슬하다. 과거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그것도 여권안에서 공개적으로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3축(軸)이 한 목소리를 내도 모자랄 판인데 네 탓 공방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이해찬 총리가 직격탄을 맞는가 싶더니, 노무현 대통령을 직·간접 겨냥한 말들도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여권 내부에서 대통령에 대한 공격은 금기(禁忌)시돼 왔다. 더군다나 한참 물이 올라야 할 집권 3년차에 자중지란이 있는 것처럼 비쳐지는 것은 불행이다. 왜 이런 지경까지 오게 됐는가.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되돌아 보아야 한다. 먼저 원인을 찾아낸 뒤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 순서다. 무엇보다 국정을 책임진 그들이기에 그렇다. 선결 조건은 철저한 자기 반성이다. 물론 대통령부터 그 심각성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청와대 비서실장 등을 통한 우회적인 경고나 비판으론 문제를 풀 수 없다. 오히려 ‘면피성’ 해명이 될 경우 사태를 보다 악화시킬 수도 있다. 실제로 최근 “위원회가 희망”이라는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 등의 발언은 여론과도 한참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이다. 노 대통령은 취임 이전부터 당·정 분리를 약속했다.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정무수석 자리를 없앤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동안 우리 정치사에서 정무수석의 이미지가 좋게만 반영되지 않았기에 이같은 실험이 성공을 거둘까 기대를 모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역대 정무수석 가운데 일부는 깨끗한 정치의 대척점에 있었던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무수석의 명맥을 유지시킨 것은 과(過)보다는 공(功), 나아가 당·정을 아우르는 그 역할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참여정부는 가교(架橋) 역할자가 없는 것이 최대 약점인 듯 싶다. 그러니 일이 터질 때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할 형국이다. 최근 사태를 두고도 벌써부터 노 대통령이 나서 해결할 것을 촉구하고 있지 않은가. 이래서는 대통령의 영이 서지 않는다. 지금은 대통령을 대신해 중재를 하고, 기강을 잡을 사람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무수석을 부활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오풍연 공공정책부장 poongynn@seoul.co.kr
  • 고추장 단지를 보내니/ 박지원 지음

    범접이 어려울 만큼 준열하고 꼿꼿하다. 그러다 넌지시 넉살을 부리고, 돌연 농과 해학을 질펀하게 늘어놓고는 쪼글쪼글한 얼굴로 파안대소한다. 흔히 이런 이미지로 떠오르는 옛 선비지만 그것은 한두 측면일 뿐 선비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그리기는 쉽지 않다. 사대부란 기질적으로 사생활을 감춘 부류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열하일기’ 등으로 친숙한 연암 박지원(1737∼1805)도 이런 부류의 선비였다. 그런 까닭에 그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그의 행적과 사상을 캐고, 뒤집었지만 도무지 진면목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 연암의 맨얼굴이 ‘형틀에 묶여 궁둥이가 까인 것처럼’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는 1787년 부인 이씨와 사별했다. 슬하에 종의, 종채 두 아들을 두었으나 아내를 먼저 보냈으니 타관에서 벼슬살이를 하는 처지이면서도 집안 일에 마음을 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내와 사별한지 9년째 되는 해, 안의현감으로 있던 그는 서울의 두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어미 잃은 처지’라는 데 생각이 미쳤던지 뜬금없이 고추장 얘기를 꺼낸다. 그냥 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 두고 어떻게 먹으라.’며 시시콜콜 적어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은 약과다. 글 말미에 고추장을 손수 담갔다고 적은 것은 진솔을 넘어선 큰 선비의 파격적 일탈 아닌가. 이런 내용은 서울대 박희병(국어국문학) 교수가 최근 펴낸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돌베개)에 담겨 있다. 처음 공개된 이 서간첩에는 연암이 안의현감으로 재임했던 정조20년(1796년) 정월부터 이듬해 8월 사이에 적은 편지글 32통이 수록됐다. 글을 읽다 보면 그의 사소함이 더할 나위없는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중요한 것은 그가 맨 얼굴을 드러냈지만 무엇도 그의 대단함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박 교수는 “연암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다.”고 했다.8500원.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儒林(359)-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59)-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16살 때 지은 퇴계의 오도송이 주자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를 모방하고 있을 정도로 퇴계는 주자를 자신의 사표로 삼고 있었다. 이러한 퇴계의 태도는 언행록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그 내용을 대충 헤아려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학문에 힘쓴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밝은 스승과 벗을 얻지 못하여 의혹된 것을 질문하여 풀지 못하였기 때문에 도리에 있어서 진전을 본 것이 없고, 또 학문이 성취되기도 전에 문득 벼슬길에 오르게 되어 또 학문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읽고 조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 ‘문장’이 길고 그윽한 것이야 어찌 감히 엿볼 수가 있겠느냐.” 퇴계가 말하였던 문장(門墻)이란 ‘대문과 울타리’를 말하는 것으로 일찍이 논어에 나오는 자공의 말에서 비롯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공을 빗대어 스승 공자보다 더 낫다고 빈정거리자 자공은 다음과 같은 말로 스승의 위대함을 증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문과 울타리는 겨우 어깨에 미치는 정도라 바깥에서 들여다 볼 수가 있지만 부자(夫子:공자)의 문장은 높이가 두어 길이라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못하면 그 안의 모든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퇴계는 스승의 위대함을 칭송한 자공의 말을 인용하여 주자의 ‘길고 그윽한 경지’를 찬탄하고 있는 것이다. 퇴계는 이 ‘주자전서’를 자신의 교본(敎本)으로 삼았다. 일찍이 한여름에 ‘주자전서’를 구해 읽다가 누가 더위로 몸을 상할까 걱정하면 ‘이 글을 읽으면 가슴속에서 문득 시원한 기운이 생기는 것을 깨닫게 되어 저절로 더위를 모르게 되는데 무슨 병이 생기겠는가.’라고 대답하였던 것은 이미 상기한 내용이고, 언행록에 보면 퇴계가 이 주자전서를 얼마나 정독하였는가를 알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을 정도이다. “선생의 집에 ‘주자전서’수사본(手寫本:손으로 일일이 베껴 쓴 책)이 한 질이 있었는데, 매우 오래된 것으로 글자의 획이 거의 희미하여졌으니 선생이 읽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 뒤에 사람들이 ‘주자전서’를 인출(印出)한 것이 많았는데, 선생은 새 책을 얻을 때는 반드시 교정하면서 다시 한 번 읽음으로 장(章)마다 환하고 구(句)마다 익숙해져 그것을 몸과 마음에 수용(受用)함이 마치 직접 손으로 잡고 발로 디디듯,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듯하였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 있어서 말하고 침묵하며, 동(動)하고 정(靜)하며, 사양하고 받으며, 취하고 주며, 나아가 벼슬하며(進), 들어와 집에 있고(退) 하는데 있어 ‘주자전서’의 글에 들어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어쩌다 남이 질문하는 일이 있으면 선생은 반드시 이 책에 의거해서 대답하여 사정(事情)과 도리(道理)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것은 모두 자기가 실제로 알고 실제로 믿어 정신이 융합(融合)된 소치로써, 한갓 책에만 의지하고 귀와 입으로만 따르는 자의 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수사본으로 베껴서 책을 만들만큼 금과옥조로 삼았던 ‘주자대전’. 너무나 정독해서 글자의 획이 희미할 정도로 닳아졌던 ‘주자대전’. 이러한 스승에 대해서 제자 우성전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선생의 학문은 대게 주자로써 근본을 삼았으니 공리(攻利)에도 그 뜻을 빼앗기지 않으셨고, 이단에도 현혹되지 않으셨다. 널리 알면서도 잡되지 않았고, 간략히 잡아도 고루하지 않았다. 학문을 의논할 때에는 반드시 성현을 근본으로 하면서 자신이 얻은 바의 진실을 참고하였다.…”
  • “韓·日관계 추가악재 될라”

    ‘신풍호’ 대치 사건이 일어난 1일 외교통상부는 하루종일 잔뜩 긴장한 분위기였다. 담당 직원들에겐 함구령이 떨어진 듯 취재진의 접근이 쉽지 않았다. 정부로서는 이 사건이 가뜩이나 아슬아슬하게 진행되고 있는 한·일 관계에 추가 악재가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눈치였다. 야치 쇼타로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의 발언 파문이 당사자의 유감 표명으로 가까스로 봉합국면에 있는 가운데 터진 이번 사건이 조기에 해결되지 못하고 장기화되거나 확대될 경우 이달 하순으로 예정된 한·일 정상회담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외교 “日순시선 빨리 돌아가라” 이날 반기문 장관과 아이사와 이치로 일본 외무성 부상의 면담에서도 느닷없이 신풍호 사건이 화제에 올라야 했다. 반 장관은 “해당 선박에 대해 문제가 있으면 우리가 조사하고 조치를 취할 테니 일본 순시선은 빨리 돌아가야 한다. 기상 악화 등으로 인명 피해가 생기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이에 아이사와 부상은 “일본 국내법령과 국제법에 따라 처리해야겠지만 한국측 입장을 즉각 본국에 전달해 잘 처리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만 답했다. 일각에선 이번 사건이 양국간 영해분쟁과 나아가 독도 영유권 문제로 비화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제기된다. ●신풍호의 처벌권은 신풍호의 처벌권이 국제법상 한·일 양국 가운데 어느 쪽에 있을 것인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신풍호의 현재 위치가 한국 영해가 아니기 때문에 지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국으로 견인해 조사한 뒤 처벌하겠다는 게 일본측의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 당국자는 “신풍호의 불법조업 여부를 추후 확인해 봐야 하겠지만 우리나라 EEZ에서 발생한 상황이고 선주가 우리나라 국민인 만큼 형사관할권 행사는 우리측에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다시 떠오르는 자르카위 부상說

    지난 2년 동안 이라크에서 무장 공격을 주도해온 국제 테러단체 알 카에다의 이라크 내 지도자인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가 정말 다쳤을까.24일(현지시간) 유명 이슬람 웹 사이트에 알 자르카위가 부상당했다는 알 카에다 공보국 명의의 성명이 오르면서 신빙성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부관인 아부 카라르와의 인터뷰를 통해 알 자르카위가 지난 21∼22일 라마디에서 전투 도중 어깨와 가슴 사이에 총을 맞았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그는 자르카위가 부상 이후 두 차례 정신을 잃었으나 안전한 장소에서 의사로부터 치료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알 자르카위의 핵심 참모들이 만약의 경우에 대비, 후계자 선정 문제를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알 자르카위의 부상 소식은 알 카에다가 소식을 전하는 데 이용하는 웹 사이트를 통해 알려졌다. 성명은 “오, 이슬람 국가여… 알라(신)의 길을 걷다 부상한 우리의 셰이크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라.”고 촉구했다. 미군은 알 자르카위의 부상을 확인할 수는 없다고 밝혔으며, 일부는 부상설이 그의 인기를 띄우거나 추격으로부터 피하려는 책략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요르단에 사는 알 자르카위의 누이도 AFP통신 회견에서 “아무 소식도 들은 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랍 분석가들은 성명의 문장이나 어법이 알 자르카위 추종자들이 과거 성명에 사용했던 것과 일치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동안 알 자르카위는 여러 차례 아슬아슬하게 체포의 순간을 피해갔다. 지난 2월 미군의 라마디 북쪽 유프라테스 강 공습 당시 알 자르카위는 운전기사, 노트북 컴퓨터,10만달러의 현금을 두고 도주했다. 지난 13일에는 국경도시 카임에 대한 미군의 폭격에서 그가 머리를 다쳤다고 그를 치료한 의사가 밝힌 적도 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고종황제 증손자 이혜원씨 고궁박물관 자문위원 위촉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아들인 의친왕(義親王)의 손자 이혜원(본명 全惠源)씨가 문화재청 산하 국립 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고궁박물관 측은 혼례·국장의례 등 황실의 생활·문화사와 관련한 자료를 수집, 해석하고, 박물관에 소장된 대한제국 당시의 황실 유물 정리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 이씨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고 24일 밝혔다. 이씨는 의친왕이 타계한 1955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인 의친왕은 슬하에 13남 9녀를 두었는데, 이씨는 그중 9남인 고(故) 이종의 장남이다. 의친왕은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보다 손위였으나, 일제가 그의 반일을 두려워해 어린 영친왕을 순종의 후계자인 황태자로 책봉하고, 유학을 명분으로 일본에 인질로 억류해 일본 귀족과 혼인을 시키는 등 비운을 겪은 주인공이다. 의친왕은 이후 3·1운동 뒤 상하이 임시정부로 탈출을 시도하다 발각돼 강제소환되는 등 일제 강점기 내내 일본에 협력하기를 거절했다. 이런 의친왕을 할아버지로 둔 이씨는 천신만고 끝에 해방을 맞았으나 이승만 정권의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탄압 때문에 아버지 성 대신 할머니의 전(全)씨 성을 사용해야 했다. 국립 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으로 위촉된 이씨는 별도의 연구실을 두고 생존해 있는 황실 후손들을 만나 이들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과 사진자료, 황실생활과 가족사에 대한 증언 등을 수집, 정리하게 된다. 박물관측은 이들 자료는 고증을 거쳐 추후 연구자료집으로 발간하기로 했으며, 특별전을 통해 일반에도 공개할 예정이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인간시대] 평생교육시설 양원주부학교 학생 염성려 할머니

    [인간시대] 평생교육시설 양원주부학교 학생 염성려 할머니

    “그래도 4학년까지 다녔으니,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은 편이지요.”(염성려·79·서울시 서대문구 창전동) 햇님 사이로 빗방울이 오락가락하는 18일 오후 1시 서울 서대문구 대흥동 18의4 지하철 2호선 대흥역 쪽 한갓진 골목에 들어서 있는 양원주부학교. 학교 입구에는 ‘경축, 대검(대학입학 검정고시) 전국 최고령 합격 신평림(75세)’이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3층 높이로 건물과 건물을 이어 나부끼고 있었다. ●가정형편 어려워 초등학교 4학년 중퇴 늦은 점심 도시락을 챙겨 먹느라 약간은 시끄러운 가운데 얼핏 보기에도 늦깎이 학생인,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차분한 발걸음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1시35분쯤 3층 304호 교실에서 수학 수업시간으로 접어들자 ‘어르신 초등학생’ 50여명은 진지하게 ‘손아래뻘 선생님’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자, 계산을 시작해요.…. 분모는 분모끼리, 분자는 분자끼리 곱하는 것 아시죠. 그럼 얘는 누구랑 곱해요?” 수학을 맡은 손미진(35·여) 선생님이 유치원 아이들 앞에 서듯 똑 부러지는 말로 묻자, 대부분 언니뻘일 듯한 학생들 사이에서는 “7요,7요.”라고 대답하는 소리가 교실 구석구석에서 메아리처럼 잇달아 터져나왔다. 평생교육시설인 양원주부학교는 대검 최고령 합격자를 낸 데다, 올해 초 성인을 대상으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학력인정 초등과정이 생긴 덕분에 더욱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학생은 졸업만으로 학력을 인정받는 초등부, 염 할머니의 경우처럼 그렇지 못한 기초부와 중등부, 고등부, 전문부, 교양부, 평생부 등 7개 부문에 2425명이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다. 50분 수업이 끝나고 복도에서 양원주부학교 ‘초등생’인 염 할머니를 만났다.21일 용산고등학교에서 중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를 치르는 염 할머니는 “글쎄, 주위에서는 다들 (합격이) 될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큰 일”이라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출생한 염 할머니는 고향에서 4학년까지 다니다 학업의 뜻을 접어야만 했다. 어려운 집안살림에 당시만 해도 딸들에게 공부를 시켜 무엇 하랴는 편견 탓이었다. 염 할머니는 “그래도 오래 전이나마 그 때 배워둔 게 적잖게 보탬이 되는 것 같다.”고 수줍게 웃었다. ●배움 앞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 6·25전쟁 전 미리 서울로 시집와 2남2녀를 뒀지만 36살 때 병약한 남편이 별세해 홀몸이 됐다. 이후 삯바느질과 시장통 배달 등으로 자녀들을 키우느라 때를 한참 넘기고 나서야 배움에 대한 ‘허기’가 느껴져 지난해 이 학교에 입학했다. 슬하에 4남매 가운데 막내만은 아직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살고 있다는 염 할머니는 “신문에 나가면 애들이 ‘왜 뒤늦게 이름을 알리느냐.’고 핀잔을 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염 할머니는 지난해 2년제인 중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고검 준비를 하고 있는 양정자(80) 학생을 빼고는 2400여명 중 최고령에 속한다.“충남 서산 등 멀리서 몇 시간 들여가며 공부하러 오는 분들에 비하면 난 행운아”라고 한다. 창전동 집에서 지하철로 한 정거장이니, 운동삼아 걸어오기도 한단다. ●빠짐없이 하루 4시간 예·복습 “나만 해도 학생 신분으로 배우는 입장이니, 나이는 당연히 잊어야지요. 진학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공부해야 하는데….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는데, 학교 다니면서도 게으름 피우는 것은 철없는 탓이어서 나중에 분명 후회하게 됩니다.” 특히 음악과 자연이 어려우면서도 좋다는 염 할머니는 4시간짜리 수업을 마치고 귀가한 뒤엔 저녁 8시부터, 하루 4시간 동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예·복습을 한다며 각오를 되새겼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스리랑카에서 佛心을 배우다

    스리랑카에서 佛心을 배우다

    고요함과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나라, 스리랑카를 아십니까. 열대성기후의 홍차가 많이 나는 나라 스리랑카는 찬란한 고대 불교문화와 태곳적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7곳이나 있는 보물 같은 나라가 바로 스리랑카이기도 합니다. 인도양에 외로이 한 점 떠있는 스리랑카, 홍차 향기가 그윽한 고요와 자비의 나라를 소개합니다. 스리랑카는 전국이 문화유적지라고 할만큼 고대 문화가 잘 보존돼 있다. 유적지는 아누라다푸라와 폴로나루와, 그리고 캔디를 잇는 이른바 문화삼각지대와 시기리야에 몰려 있다. 그중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문화유산은 모두 7곳.200m 높이의 커다란 바위산 위에 지어진 왕궁인 ‘시기리야락’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곳. 우선 바위산으로 달려갔다. ●비명과 탄성을 지르는 4시간 수도인 콜롬보에서 시기리야까지는 169㎞. 자동차로 4시간이 넘게 걸린다. 콜롬보를 빠져나가자 도로가 장난이 아니다. 편도 1차선 국도는 울퉁불퉁해 자갈밭을 달리는 것 같다. 달려오는 자동차와 부딪칠까봐 아슬아슬하다. 그렇게 좁은 도로를 추월하며 질주하는 버스. 앞에 마주 달려 오는 툭툭(오토바이를 개조해서 만든 스리랑카의 근거리 교통수단)은 알아서 피해가라는 듯 마구 추월하며 경적을 울려댄다. 이방인의 눈에 도로는 무법천지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나름의 룰이 있다고 한다. 이 룰을 모르고 운전대를 잡았다가는 5분도 못가서 사고가 난다고 한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푸른 야자수와 이름 모를 나무들로 뒤덮여 있는 순수한 자연의 아름다움은 세계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스리랑카만의 자랑이다. 짐짝처럼 이리저리 휩쓸리며 어렵게 도착한 시기리야는 천둥과 벼락이 한창이었다. 서둘러 호텔로 들어갔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아침에 눈을 떴다. 붉은빛을 잔뜩 머금은 태양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카메라를 챙겨 스리랑카의 아침을 담으려고 서둘러 7층으로 뛰어올라갔다. 눈을 뗄 수 없는 황홀경에 숨이 막혔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한 칸달라마 호수가 붉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지저귀던 새들도 잠깐 숨을 고르는 듯 조용했다. 아니 거대한 대자연 앞에서 서니 하나의 점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우리나라보다 크기는 작지만 태곳적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스리랑카, 그 아름다움을 둘러싸고 있는 고요함. 시간이 멈춘 듯한 나라, 스리랑카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세계 제8대 불가사의 누가 높이 200m 바위 위에 궁전을 지었을까. 이야기를 듣고 보니 궁금증에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5세기, 아누라다푸라를 지배하던 다투세나왕의 장남 카샤파는 왕족 출신 어머니를 둔 이복동생 목갈라나와는 달리 평민 출신 어머니를 둔 탓에 동생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을 몹시 우려해 아버지를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동생 목갈라나의 보복이 두려웠을까, 아버지를 살해한 후회와 고통 때문이었을까 카샤파는 신들린 사람처럼 시기리아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 위에 궁전을 세웠다. 그러나 11년 후 인도에서 군대를 이끌고 온 이복동생과 싸움에서 패한 카샤파는 자살하고 말았다. 젊은 왕자의 광기어린 행동이 후대에 세계 문화유산을 남겼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임에 분명하다. 밑에서 올려다보니 거대한 바위산만이 보였다. 올라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 저렇게 큰 바위산 위에 궁전이 있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1500년 만에 깨어난 미녀들 정상까지 계단은 1200개. 무더운 날씨에 20분 오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기리야 벽화가 기다리고 있다. 1875년에 우연히 이 바위산을 망원경으로 바라보고 있던 영국인에 의해 처음 발견된 ‘시기리야 레이디’는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벽화이다.1400년 긴 잠에서 깨어난 미녀들은 사람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처음에는 500명이 넘는 여인들의 그림이 있었지만 지금은 훼손되어 18명밖에 남지 않았다. 2000년이 지났건만 빛나는 색채는 아득한 시간의 흐름조차 잊게 한다. 가슴을 훤히 드러낸 미녀들의 농염한 자태와 신비스러운 표정은 오히려 현대적이라 놀랍기까지 하다. 광기 어린 젊은 왕이 남겨놓은 최고의 걸작품은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니 참 재미있다. 벽화 밑쪽에 있는 ‘미러 월’은 달걀 흰자와 꿀, 석회를 섞어 칠한 다음 표면을 문질러 밝게 빛나는 벽을 만들었다. 신기하게 거울처럼 보이진 않지만 언뜻언뜻 비치는 자신의 형체가 보인다. 조금 더 걷자 드디어 평지가 나온다. ●사자 입속으로 올라가는 궁전 발톱이 날카로운 사자 두 발 사이에 궁전 입구가 있다. 예전에는 다리와 머리가 있어 사자가 크게 입을 벌리고 앉아 있는 형상었다. 바로 여기 때문에 이곳의 이름이 시기리야로 정해졌다. 사자를 의미하는 ‘싱하’와 산을 의미하는 ‘기리얀’이 합쳐진 단어다. 또한 스리랑카의 국기도 칼을 든 사자가 자리잡고 있듯이 스리랑카인의 70%가 넘는 싱할라족은 스스로를 사자의 후예라고 생각한다. 수직에 가까운 절벽을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철계단을 통해 올라간다.10여분만 올라가면 정상이다. 발아래를 내려다보니 오금이 저린다. 난간을 잡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도대체 철계단으로 올라가도 이렇게 힘든데 2000년 전 그들은 어떻게 바위 정상까지 벽돌을 나르고 음식을 나르며 궁전을 만들었을까.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다. 정상에 오르니 4800평 평지에 궁전과 연회장, 수영장 등 나타내는 벽돌들이 가득 박혀 있어 당시의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200m 높이의 바위 꼭대기에 수영장이라니…. 어이가 없다. 물이 지상에서 공급된다고 하는데 그 방법은 현대 과학으로도 풀지 못해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천륜을 어기고 얻어 권력의 두려움에 암벽 꼭대기로 도망쳐 온 카샤파. 불안과 고독에 몸부림쳤을 그는 세찬 바람을 맞으며 스스로를 안쓰러워했을까. 카샤파가 앉아 무희들의 공연을 감상했다는 돌 평상이 그대로 남아있다. 권력욕 때문에 허망하게 생을 마친 왕의 평상에 앉아보니 욕심에 차서 살고 있는 세상사가 모두 허무해진다. ●이름처럼 예쁜 도시 캔디 몇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싸우고 배신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이 끊이지 않는 인류를 향해 시기리아락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헛되도다. 헛되고 헛되도다.” 스리랑카가 동방의 아름다운 정원이라면 캔디는 그 중에서 가장 빼어난 멋을 가진 곳이다. 완만하게 경사진 지붕을 얹은 전통 건축물들과 아름다운 호수, 푸른 나무와 풀들 등으로 인해 가장 스리랑카다운 도시로 꼽힌다. 캔디는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서 북쪽으로 129㎞ 떨어져 있고 해발 465m에 자리잡고 있다. 인도의 잦은 침략에 남쪽으로 도시를 계속 옮기던 싱할라 왕조는 14세기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을 수도로 정했다. 무려 350여년 동안 이곳에서 고대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특히 캔디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겐 정신적인 고향이자 안식처다. 바로 부처의 치아 사리를 모셔놓은 불치사가 있기 때문이다. 공양을 올리는 의식이 볼 만하다. 흰옷을 입고 연꽃과 향을 두 손에 든 순례자들의 행렬이 인상적이다. ●자비가 흐르는 황금사원 담불라는 캔디와 아누라다푸라를 연결하는 간선도로변에 있는 작은 마을이지만 순례자와 관광객들로 붐빈다. 산중턱에 위치한 석굴사원까지 맨발로 오르는 사람들이 많다. 담불라의 석굴사원은 커다란 바위를 파내어 만든 5개의 석굴이 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제1석굴 안의 황금빛 와불. 길이 15m의 와불이 열반에 들 자세로 누워 있다. 발바닥에 그려놓은 불꽃 같은 꽃무늬도 강렬하고 현란하다. 나머지 석굴에도 수십개의 불상들과 벽화 등이 있다. 담불라는 180m 높이의 흑갈색 바위산이지만, 석굴안의 불상과 벽화는 온통 황금빛으로 빛난다. 그래서 담불라를 ‘황금빛으로 빛난다.’는 뜻이 담긴 ‘란 기리’라고도 부른다. ■ 미리 알고가세요 스리랑카는 연 평균 30도에 가까운 고온다습한 열대성 기온으로 습도가 매우 높다. 햇빛이 강해 선글라스, 자외선차단제와 모자 등은 필수. 현지 시간은 우리나라보다 3시간 늦다. 화폐는 주로 루피가 쓰이며 미국 1달러가 96루피 정도다. 환전은 공항에서 하는 것이 좋다. 음식은 커리(인도식 카레)와 라이스(안남미)가 주를 이룬다. 밀크라이스라는 전통 음식은 우유와 안남미를 넣고 찐 것으로 우리나라 백설기와 맛이 비슷하다. 석가모니가 열반을 했을 때 제일 먼저 공양을 했던 음식이라 이곳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 직항은 없고 싱가포르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가야 한다. 혹시 배낭여행이나 개별여행을 하고자 한다면 콜롬보에 있는 한국인가이드 정은희(001-94-776-322-589,eunicejung@hotmail.com)씨에게 연락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가야여행사에서는 스리랑카 문화유적 탐방 5일 상품을 129만원에 판매한다. 모든 일정에 식사를 포함한 옵션이 포함되어 있다. 일정도 캔디, 시기리아락, 석굴사원과 네곰보 해변 등 스리랑카의 전반을 둘러볼 수 있게 알차게 꾸며졌다.(02)536-4200,www.kayatour.co.kr 글· 사진 스리랑카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왕좌는 내것… 양보 없다”

    우즈,‘한달 천하’ 될까. ‘황제’ 타이거 우즈(미국)의 세계 정상 자리가 아슬아슬하다. 지난달 12일 마스터스에서 네번째 그린재킷을 입으며 랭킹 1위에 복귀한 우즈는 9일 끝난 와코비아챔피언십을 포함,2승을 보탠 비제이 싱(피지)에게 턱밑까지 쫓겼다. 10일 발표된 세계랭킹에선 포인트 13.06으로 2위 싱(12.88)과의 격차는 불과 0.18. 시즌 다승부문에서도 공동 선두(3승)를 허용,‘황제’의 자리는 위태롭기만 하다. 수성 여부는 오는 13일 열리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EDS바이런넬슨챔피언십에서 판가름날 전망. 우즈가 시즌 4승째를 올린다면 순위 변동은 없다. 그러나 싱이 이 대회에서 우승할 경우, 우즈는 단독 2위에 오르지 않는 한 랭킹 1위 자리를 한달 남짓 만에 다시 싱에게 넘겨주게 된다. 또 싱이 준우승에 그치더라도 9위 밖으로 밀려날 경우 우즈는 ‘한달 천하’로 정상에서 물러난다. 만약 56위 이하로 처질 경우엔 싱이 3위에 머물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 우즈로선 ‘무조건 우승’이라는 배수진을 쳐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다. 우즈에 견줘 싱은 상대적으로 느긋한 입장. 선두권만 유지하면 우즈의 성적에 따라 거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올시즌 벌써 두 차례나 막판 뒤집기를 연출하며 한껏 키운 자신감도 정상 재탈환의 꿈을 부풀린다.6타차를 극복하고 역전 우승을 차지한 와코비아챔피언십에서 싱은 드라이브샷 비거리를 제외하고 페어웨이와 그린 적중률 등 모든 기록에서 우즈에 우위를 보였다. 한편 지난 8일 한국프로골프(KPGA) SK텔레콤에서 우승한 최경주(35·나이키골프)는 이날 랭킹에서 5계단 위인 27위로 뛰어올랐다. 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儒林(335)-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儒林(335)-제3부 君子有終 제3장 慕古之心

    제3부 君子有終 제2장 慕古之心 특히 늙은 어머니의 권유는 퇴계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미 큰형 해(瀣)가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퇴계의 모친 박씨부인이 퇴계에게까지 대과에 급제하기를 원하였던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박씨부인은 아들들이 벼슬길에 올랐어도 이를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시끄러움을 걱정하던 능간(能幹)한 여인이 아니었던가. 퇴계의 인격형성이나 그의 학구열에 큰 영향을 미쳤던 퇴계의 어머니 박씨부인. 퇴계는 ‘묘갈문’에서 어머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군(퇴계의 아버지 식(埴))이 병으로 돌아가셨을 때 오직 백형(伯兄) 잠(潛)만이 겨우 결혼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어린것들로서 슬하에 가득 찼다. 부인께서는 아이들이 많은 데다가 일찍이 과부가 된 것을 뼈아프게 느끼시고, 장차 가문을 유지하지 못할 것 같아서 여러 아들들을 성혼시켜 주는 일 때문에 몹시 걱정하셨다. 선군의 삼년상을 필한 뒤에 제사 받드는 일은 맏아들에게 맡기고, 부인은 그 곁에 집을 따로 짓고 살면서 농사짓기, 누에치기에 더욱 힘쓰셨다. 갑자년(甲子年), 을축년(乙丑年) 같은 해에는 나라에서 세금 징수가 몹시 혹독하고 다급하여 가계가 파산되고 가문이 영체해지는 사람이 많았는데도, 부인께서는 능히 먼 앞을 내다보면서 목전의 난관을 처리해 나갔기 때문에 구업(舊業)을 잃지 않고 지켰으며, 여러 아들이 점점 자라남에 이르러서는 또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자금을 변통하여 먼 데나 혹은 가까운 데 가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매양 자식들을 훈계하시되, 문예에만 힘쓰지 말고 더욱 몸가짐과 행실을 삼갈 것을 중요하게 부탁하셨다. 당해 오는 사물을 비유로 든다든가 어떤 일을 붙잡아서 교훈을 삼는다든가 하시는 일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친절하고 절실하게 경각심을 높여 주지 않음이 없었다. 늘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과부의 자식은 교육이 없다고 조소하는데, 너희들이 글공부를 백배로 힘쓰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조소거리를 면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 뒤에 두 아들 해(瀣)와 황(滉)이 대과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어도 부인께서는 그 영진(榮進)으로 기쁘다 아니하시고 항상 세상의 시끄러움을 걱정하셨다. 비록 문자는 익히지 않았어도 평소 선군의 정훈(庭訓)과 여러 아들들이 서로 강습하는 말들을 자주 들어 왕왕 깨닫는 바 있었으며, 그 의리에 들어맞고 사리에 통하는 식견과 사려는 사군자(士君子)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부인께서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항상 마음속에 함축하여 두시면서 오직 조용히 겸양하는 태도를 지킬 뿐이었다.” 퇴계로부터 사군자란 경칭을 받은 어머니 박씨. 그러한 어머니의 권유를 물리칠 수 없어 34세의 퇴계는 바로 이 죽령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알성시를 보기 위해서 떠났던 것이다. 그것이 벌써 15년 전의 일. 퇴계에게 과거시험 볼 것을 권유하였던 어머니 박씨는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필마 위에 몸을 싣고 마부가 이끄는 대로 흔들흔들 고갯 길을 넘는 퇴계의 가슴속에 형형할 수 없는 감회가 물결치고 있었다. 과거를 보기 위해서 한양으로 길 떠나는 퇴계에게 어머니는 몇 번이고 다음과 같이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반드시 죽령고개를 통하여 한양에 이르도록 하여라.” 그러한 어머니의 당부에는 깊은 뜻이 숨어 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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