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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수표교 풍경/최태환 수석논설위원

    몇해 전 김성환 화백이 작품전을 가졌다. 연재만화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했던 그다. 청계천변 풍경이 주제였다.50·60년대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던 판자촌, 빨래터 아낙들, 드럼통에서 막대로 염색바지를 건져내는 노인, 야바위꾼에 홀린 구경꾼들의 무심한 표정. 복개 이전 천변풍경과 우리 형제, 부모의 삶의 속살을 그의 애잔한 기억으로 살려냈다. 담백한 펜 스케치 위의 오일 파스텔이 따뜻함을 더했다. 며칠 전 출근하다 ‘다시 탄생한’ 청계천에서 각설이패를 만났다. 수표교 입구에서다. 거지왕 김춘삼의 노제(路祭)패거리였다. 유족과 김씨를 따르던 사람들인 모양이다.“낯설은 타향땅에 그날 밤 그 처녀가, 나를 나를 못잊게 하네….” 거지 차림이 고인의 애창곡이었다며 ‘울어라 기타줄’을 구슬프게 불렀다. 유랑걸식한 ‘자유인’에게 붙박이 거처가 있었으랴만, 수표교는 그래도 포근한 아지트였다고 한다. 추억 속의 그가 떠나는 길에 구슬픈 비가 내렸다.“기타 줄에 실은 사랑, 뜨네기 사랑…” 어찌 사랑만 뜨네기랴. 뜨네기 삶을 마감한 고인의 잔잔했던 영정이 노랫말과 함께 머릿속을 맴돈다. 최태환 수석논설위원 yunjae@seoul.co.kr
  • 경북 경산시 공무원들 ‘1직원 1가정 후견인제’

    정성오(56) 경북 경산시청 행정지원국장은 한 달에 열번쯤 시내 사정동 윤모(73) 할머니 집을 찾는다. 안부전화는 거의 매일 빼놓지 않는다. 김 국장은 할머니 집에 갈 때마다 박하사탕, 음료수, 빵 등 간단한 먹을거리와 반찬을 챙겨 간다. 매주 한 차례는 아내와 함께 할머니를 찾아 빨래와 청소를 한다. 입동을 이틀 앞둔 지난 5일엔 할머니에게 겨울내의 한 벌을 선물했다. 최근 할머니로부터 “머리 통증이 심해 MRI(자기공명 단층 촬영 장치)촬영을 해봤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은 정 국장은 현재 병원측과 진료를 협의 중이다. 기초생활수급권자인 할머니는 남편과 사별하고, 슬하에 자녀 5명을 두었으나 부양을 전혀 받지 못한 채 경산시로부터 매달 25만원씩을 지원받아 생활하고 있다. 이재영(51) 시청 청소과장도 올해 초 하양읍 대조리에 사는 소년가장 박모(11·초등5년)군과 자신의 자녀를 의형제 맺도록 한 뒤 수시로 ‘홈스테이’를 갖고 있다. 이 과장은 “박군의 꿈이 훌륭한 선수인 만큼 실현될 수 있도록 적극 뒷받침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들의 만남은 지난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시의 5급 이상 전간부 50여명이 주위의 어려운 이웃 50여가정과 결연, 후원활동에 나선 것이 계기가 됐다. 일명 ‘사랑 베푸리’사업이다. 시는 이 같은 사업이 어려운 이웃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자 이에 힘입어 다음달부터 결연사업을 940여 전직원으로 확대, 시행에 들어간다고 28일 밝혔다. 결연대상은 ▲혼자사는 노인 ▲저소득 장애인 ▲만성질환자 ▲소년소녀가장 ▲차상위계층 가정 등이다. 시는 최근 직원들과 결연을 맺을 저소득가정 등을 선정, 개인별 1가정씩 통보했다. 후견인이 된 공무원들은 1차로 다음달 중 결연 대상자 가정을 직접 방문, 생활상태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지원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분야는 생활비 지원에서부터 목욕, 도배, 빨래, 김장 담가주기, 보일러 및 전기안전 점검 등이 망라돼 있다. 후견인은 앞으로 수시 또는 정기적으로 결연가정을 직접 방문하거나 전화로 각종 복지욕구를 수렴, 적극 해결에 나선다는 것이다. 특히 시는 결연가정이 언제든지 후견인의 교체를 희망해 올 경우 상담 등을 실시한 뒤 적합한 직원으로 대체 결연해 주는 ‘애프터 서비스’도 제공키로 했다. 시는 이번에 책임후견을 맡은 직원들에 대해 매분기 개인별 방문 및 지원내용을 보고토록 해 단순한 1회성 행사가 아닌 꾸준한 지원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한다는 복안이다. 채종수 경산시 주민생활지원과장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공무원과 민간인이 따로 있을 수 없다.”며 “앞으로 시민들에게도 이를 확대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한편 경산에는 현재 60명의 사회복지사들이 일선 15개 읍·면·동사무소에서 기초생활수급자 4900여가구를 담당하고 있다. 경산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한진해운 경영권 향방 ‘BW’가 변수?

    한진해운 경영권 향방 ‘BW’가 변수?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이 26일 별세함에 따라 한진해운 경영권의 향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진해운은 표면적으로는 한진그룹 계열사다. 한진그룹 회장은 고(故) 조 회장의 맏형인 조양호씨다. 그러나 한진해운은 일찌감치 고 조 회장 몫으로 분류돼 독립경영을 펴왔다. ●외국계주주 적대적 M&A 시도 가능성 한진해운의 지분구조를 보면 고 조 회장이 6.87%로 개인 최대주주다. 외국계가 34%로 상당히 높다. 특히 이스라엘 해운갑부인 새미 오퍼가 본인 소유 투자회사로 알려진 필릿매러타임을 통해 최근 지분율을 12.76%까지 올려 적대적 인수 및 합병(M&A) 가능성이 제기됐었다. 한진해운측은 “자사주(8.78%)와 대한항공(6.25%) 등 우호지분을 모두 합하면 26.78%나 돼 경영권 방어에는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조양호 회장 ‘백기사´ 역할 언제까지 조양호 회장의 대응이 변수다. 그동안 누누이 공언해온 대로 ‘백기사’ 역할을 한다면 회사측 설명대로 M&A 위험은 없어보인다. 하지만 백기사를 넘어 더 ‘욕심’을 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 회장이 당분간 후견인 역할을 하면서 지분을 늘리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한진해운을 ‘접수’할 것이라는 관측도 없지 않다. 고 조 회장은 슬하에 두 딸을 두었지만 아직 경영을 맡기에는 어리다. 큰딸은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 둘째딸은 고등학생이다. 2001년 발행한 신주인수권부 사채(BW)도 변수다. 한진해운 주식발행물량의 18%나 된다. 주식 전환은 지금도 가능하지만 아직까지 행사된 적은 없다. 행사기간은 2009년까지. 문제는 이 BW의 실제 소유주가 확실치 않다는 점이다. 발행 당시 소유주는 말레이시아계 투자회사(PVP)였다. 한진해운측은 “설사 주식전환이 이뤄지더라도 고 조 회장이 공동 의결권을 갖고 있고 이 권한을 유족이 상속받게 돼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고 조 회장이 일찌감치 전문경영인 체제를 정착시켜 당장 경영 공백도 없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당분간 박정원 사장 체제가 유지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정인숙(鄭仁淑)-그여자의 일생

    정인숙(鄭仁淑)-그여자의 일생

    3월 17일 밤 11시30분께. 서울 강변3로서 울린 3발의 총성은 죽은 정인숙(鄭仁淑)양의 신원이 밝혀짐에 따라 뜻밖의 파문을 몰고 왔다. 저명인사들과의 접촉이 잦았으며 아버지의 이름이 밝혀지지않은 3살짜리 어린애를 가진 처녀 엄마라고해서 이러쿵 저러쿵 파다한 후문을 일으킨 것. 타고 난 미모 하나로 밤의 요화로 군림, 각계 실력자들과 어지러운 관계를 가졌던 정인숙(鄭仁淑)양. 45구경 권총탄환 2개로 26세의 나이로 비명에 숨져야했던 그녀의 「짧고도 긴 생애」는 어떤 것이었을까? 다음은 가족 ·친구들의 말을 바탕으로 한 「정본(正本) 정인숙전(鄭仁淑)傳).」 옛 이름은 정금지(鄭金枝). 해방되던 해인 1945년 2월 13일 대구시 남산동 681의 2에서 전 대구부시장을 지낸 정도환(鄭道換)씨(65)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인숙(仁淑)양의 아버지 정(鄭)씨는 12살 때 일가 중 후손이 없었던 정남수(鄭南洙)씨의 양자로 입양했다. 그러나 입양한 해에 양부 정남수씨가 돌아가자 정(鄭)씨는 호주상속을 받아 바로 그해 11월 인숙양의 어머니인 전(全)씨(61)와 결혼했다. 당시 정씨가 살던 곳은 경북(慶北) 김천(金泉)군 (금릉군) 개영(開寧)면. 정(鄭)씨 일가는 해방되기 전 해까지 줄곧 이 곳에서 살며 슬하에 4형제를 두었다. 이 4형제 중 4남이 바로 인숙양 살해혐의를 받고 있는 종욱(宗旭)씨다. 생전 인숙양이 주장하던 것처럼 「뼈대있는 집안」은 아니었다는 게 김천(金泉)일대 주민들의 말이다. 정씨는 행정관리로 출발, 대구(大邱)부시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자수성가형. 인숙(仁淑)양의 출생에 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아들만 넷을 둔 정씨의 부인은 어떻게든 딸을 보고 싶어 절에 다니며 『딸자식 하나만 낳게 해달라』고 불공을 드렸다는 것. 과연 불공의 효험이 있었던지 45년 정씨의 아내 전씨는 딸 자식을 낳았다. 그것도 인숙양 하나가 아닌 딸 쌍동이였다. 그래서 바라던 딸을 한꺼번에 둘이나 얻게 되자 「금이야 옥이야」기르며 이름조차 금지(金枝)·옥지(玉枝)로 지어주었다. 아들 4형제의 막내딸로 태어난 금지·옥지 두 쌍동이는 온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며 자라났다. 그러나 생후 1년 반만에 옥지는 죽고 금지만 살아 남게 되었다. 옥지가 죽은 다음해 정씨는 자식을 또 보았으나 이번 역시 아들. 그래서 금지의 외동딸의 위치는 변함이 없었고 그녀를 아끼는 일가의 귀여움을 독차지. 특히 어머니 전씨가 금지를 위하는 것은 딴 가족들보다 더 심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귀여움을 받으며 자라난 인숙(仁淑)양이 자존심 강하고 오만한 성격을 갖게 된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인숙(仁淑)양이 대구(大邱)서 국민학교 다닐 시절 인숙(仁淑)양에게 몸종이랄 수 있는 여자아이하나를 따로 두었다. 학교 갈때 따라가는가 하면 세수할때, 밥먹을때 등 노상 인숙(仁淑)양의 옆에 붙어 잔심부름과 시중을 들게 했다. 인숙(仁淑)의 성격은 더욱 오만해 졌다. 인숙(仁淑)양의 윗 오빠 네 사람은 이런 인숙(仁淑)양을 가리켜 『어머니가 너무 쟤만 위해 주니까 계집애가 버릇이 나빠진다』며 불평, 이따금 여동생 인숙(仁淑)에게 기합을 주었으나 그때마다 인숙(仁淑)양을 감싸고 도는 어머니 때문에 인숙(仁淑)양의 성격을 끝내 뜯어 고치지 못했다는 둘째오빠 종구(宗九)씨의 말이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인숙(仁淑)양은 대구(大邱) S여중에 진학했다. 이 때 아버지 정(鄭)씨는 경북(慶北)도청의 고급 관리로 집안형편이 넉넉할 때였다. 인숙(仁淑)양의 오만한 성격은 더욱 심해지고 이에 따라 오빠들과의 의는 점점 나빠졌다. 호랑이같은 오빠 4명이 인숙(仁淑)양이 조금만 늦게 귀가해도 때리고 꾸지람하기 일쑤. 이래서 정(鄭)씨집은 오만한 인숙(仁淑)양의 기를 꺾으려는 오빠 4명과 인숙(仁淑)을 편들어 주는 어머니 전(全)씨와 인숙의 두 패로 갈리게까지 되었다. 대구 S여고시절 인숙(仁淑)양의 학교성적은 중 이하. 그러나 영어실력만은 대단해 이때부터 이미 외국손님이 오면 안내역을 맡곤 했다. 인숙(仁淑)양이 영어에 능하게 된 데는 오빠들의 도움이 컸다. 현재 일본「도꾜」 의 「아까사끼」서 전기 부속품상을 하고 있는 큰오빠 종원(宗源)씨나 H무역의 대표로 현재 「인도네시아」에 있는 세째오빠 종인(宗仁)씨가 모두 영어라면 귀신. 이런 오빠 밑에서 익힌 인숙(仁淑)양의 영어실력이 뒷날 요정 「선운각」 에서 외국인들에게 술을 따르며 쓰이게 될 줄이야. S여고에 남은 인숙(仁淑)양의 학적부를 들추어보면 『명랑하고 성실하나 안일하고 책임감이 없다』고 되어있다. 인숙(仁淑)양이 S여중 3학년에 올라갔을 때 4·19가 터졌다. 대구 부시장으로 있던 아버지 정(鄭)씨가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가세는 기울기 시작. 이 때무터 인숙(仁淑)양의 집 살림은 어머니 전(全)씨가 계 등으로 꾸려 나갔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실직은 인숙(仁淑)양에게도 심한 충격을 주었다. 낭비벽 심하고 화려했던 인숙(仁淑)양의 생활은 집안 형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쪼들리기 시작했다. 살고 있던 대구(大邱) 남산(南山)동 집을 팔고 삼덕(三德)동으로 이사, 집 규모를 줄여야 하는 등 집안형편이 어려워지면서부터 인숙(仁淑)양의 성격도 비뚤어지기 시작. 62년 S여고를 졸업한 인숙(仁淑)양은 E大 영문과에 진학하겠다면서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서울엔 인숙(仁淑)양의 세째오빠 종인(宗仁)씨가 S 무역에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응시했던 E大 영문과 입시에서 인숙(仁淑)양은 깨끗이 낙방. 세째 오빠 종인(宗仁)씨가 주는 돈으로 M초급대학에 입학했으나 등록금만 내고 학교에는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실직, E大 낙방 등의 겹친 불운은 콧대 센 아가씨 인숙(仁淑)양의 자존심을 꺾어놓기에 충분했다. 집안의 외동딸로 귀여움을 독차지 하며 자라온 인숙(仁淑)양이 두차례에 겹친 좌절끝에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곤 태어날 때부터의 타고난 미모뿐. 콧대 꺾인 방년 19세의 아가씨 인숙(仁淑)양은 마지막 남은 재산인 미모를 마음껏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당시로선 요정의 「호스테스」란 생각지도 못했고 『나 정도의 얼굴이면 영화배우가 될 수 있지 않느냐?』하는것. 그래서 인숙(仁淑)양은 등록한 M여대엔 나가지도 않고 서울 충무로 영화가를 기웃거렸다. 이 때 만난 사람이 「시나리오」작가인 장(張) 모씨. 당시 장(張)씨는 KBS에 『태양은 늙지 않는다』란 연속극을 집필하고 있었는데 인숙(仁淑)양은 친구들을 만나면 자주 『우리 애인은 유명한 작가야』하며 뽐냈다. 張씨 자신도 張씨가 인숙(仁淑)양의 첫 애인이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콧대꺾였던 인숙(仁淑)양의 자존심은 유명작가를 애인으로 둠으로써 어느 정도 보상을 받은듯 했다는게 그녀 친구들의 이야기다. 당시 인숙(仁淑)양은 친구를 만날 때마다 張씨를 자랑했다고. 인숙(仁淑)양은 1년남짓 장(張)씨와 동거생활을 하기도 했다. 친구들에겐 『장(張)씨와 약혼한 사이며 곧 영화에도 출연하게 될 것』이라고 비치기도했다. 장(張)씨와 동거할 때도 인숙(仁淑)양의 타고난 사치벽은 버리지 못했다. 이래서 이따금 장(張)씨와 말다툼을 하고 장(張)씨 집을 뛰쳐나온 인숙(仁淑)양은 친구들 집을 찾아 하룻밤씩 자고 가기도. 그러면서 옛날 외동딸로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것을 잊지 못해 어떻게든 상처입은 자존심을 되살리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 때 인숙(仁淑)양이 알게 된 것이 지금 신촌(新村)모처에서 비밀요정을 경영하고 있는 K「마담」. K 「마담」은 한때 배우 윤(尹)모씨와 동거, 「패션·모델」생활도 한적이 있는 멋장이 「마담」으로 인숙(仁淑)양은 K 「마담」의 소개로 「디자이너」조(趙)모씨를 통해 「패션·모델」로 몇차례 나서기도 했다. 인숙(仁淑)양과 K 「마담」의 관계는 그뒤 줄곧 계속되어 K 「마담」이 경영하는 한남(漢南)동 비밀요정에 인숙(仁淑)양은 1급 「호스테스」로 나갔었다. 인숙(仁淑)양은 몇차례 「패션·모델」로 나가는 한편 동거하던 장(張)씨의 소개로 S영화사와 접촉이 되어 2,3편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신촌(新村), 수유리등을 전전하며 하숙생활을 하던 인숙(仁淑)양과 장(張)씨의 동거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인숙(仁淑)양의 타고난 허영과 장(張)씨의 사업실패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은 원인이 되었다. 결혼까지 생각했던 두 사람의 사이는 동거 1년만에 끝장을 보고 말았다. 그러나 장(張)씨가 인숙(仁淑)양으로선 첫 남자였던 만큼 장(張)씨를 향한 인숙(仁淑)양의 마음은 어지간히 강했었다. 피살되기 한달전 인숙(仁淑)양을 만난 한 친구는 『여러가지로 골치 아픈 일이 많아 못 살겠다』면서 『그래도 장(張)씨가 제일 잊혀지지 않고 그립다』고 털어 놓기도 했다. 장(張)씨와 헤어진 인숙(仁淑)양이 다음에 발 디딘 곳이 바로 요정 선운각(仙雲閣). 타고 난 미모와 영어실력이 그녀를 선운각(仙雲閣)의 1급 「호스테스」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선운각(仙雲閣)에서 인숙(仁淑)양이 만난 사람이 바로 A씨. 미남이자 이름이 알려져 있는 A씨라 인숙(仁淑)양의 허영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A씨를 만나면서부터 인숙(仁淑)양은 저명 인사들의 노리개감으로 전락, 밤의 꽃으로서의 진면목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A씨와 인숙(仁淑)양의 관계는 석달남짓 계속되었다는게 당시 인숙(仁淑)양 동료들의 이야기다. A씨를 알게 될 때 인숙(仁淑)양을 가운데 두고 A씨와 역시 A씨만한 실력자 B씨가 한달 남짓 열띤 각축전을 벌였다는 소문도 있다. 그 뒤 인숙(仁淑)양은 선운각(仙雲閣)을 떠나 활동무대를 비밀요정으로 옮겼다. 전부터 아는 K 「마담」이 경영해 오던 한남(漢南)동 비밀요정을 주무대로 2류급 여배우들을 잘 불러내는 것으로 소문난 S 「마담」집등에 단골로 불려 다녔다. 그러나 비밀요정 「호스테스」로 나가는 동안에도 인숙(仁淑)양은 콧대가 높아 반드시 「마담」들에게 그 날 참석자들을 알아보고 웬만한 이름이 아니면 응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밤이면 이름있는 사람들과 접하는 인숙(仁淑)양은 낮이면 필동2가에 자리잡은 집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지냈다. 어렸을 적부터 인숙(仁淑)양 편이었던 어머니 전(全)씨는 남편 정(鄭)씨가 일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도 남편집에서 살지 않고 인숙(仁淑)양과 단둘이 살며 딸의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필동에서 살때 인숙(仁淑)양은 아들(3)을 낳았다. 인숙(仁淑)양의 가족들은 그 아이가 인숙(仁淑)양의 아이가 아니고 인숙(仁淑) 양의 배다른 동생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①가족 주장대로 배다른 동생이며 대구(大邱)서 낳아 서울로 데려다 길렀다면 최소한 5살은 되었어야 하는데 3살이라는 점 ②배 다른 동생이라면 미국 갈때 굳이 인숙(仁淑) 양이 아기를 함께 데리고 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점등을 보면 인숙(仁淑) 양의 아이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럼 이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시체해부에서도 드러났듯이 인숙(仁淑) 양은 임신중절 수술을 받은바 있다. 더우기 비밀요정가에선 「호스테스」가 아이를 낳는 것은 「터부」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숙(仁淑)양이 아기를 낳았을 때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 충분한 이유란 사후보장. 처녀(?)가 호적에도 올리지 못할 아기를 낳을땐 어딘가 굳게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란건 틀림없는 일이다. 워낙 남자관계가 복잡한 인숙(仁淑)양이라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것은 인숙(仁淑)양 자신만이 알 일이지만 항간에선 일본에서 요정을 경영하고 있는 갑(甲)씨, 을(乙)씨, 병(丙)씨등 알만한 이름들이 나돌고 있다. 그러나 인숙(仁淑)양이 아이를 낳은 후부턴 『내 말 한마디면 안되는 일 없다』혹은 『 서교동집도 아기 아빠가 사준 거야』등의 말을 한 것으로 보아 세사람중 한사람일것이라는 소문. 68년 12월 30일자로 발급된 수속서류 없는 회수여권 MA 10647이 발급된 경위만 하더라고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고선 어림도 없는 일이란 것. 어쨌든 아기를 낳은 인숙(仁淑)양의 주변은 전보다 눈에 띄게 달라졌다. 우선 본거지인 비밀요정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68년 8월엔 싯가 7백만원이 넘는 단층 석조주택을 사 서교동으로 이사했다. 평소 친하던 K 「마담」 이외엔 좀체로 그녀를 만날 수 가 없었다. 비밀요정 대신 「타워 · 호텔」, 「사보이 · 호텔」, 반도 ·조선 「아케이드」에 자주 나타났다. 69년 봄 일본에 다녀온 인숙(仁淑)양은 그해 5월에 K 「마담」의 소개로 한남동 조(趙)모씨로 부터 문제의 「코로나」를 사들였다. 이 때 부터 인숙(仁淑)양은 다시 남성편력을 시작했다. 이번엔 전과는 달리 주로 돈 잘쓰는 사람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재일교포인 갑(甲)씨 등 적지않은 사람들이 인숙(仁淑)양을 거쳐 갔다. 아마도 『 아이를 낳고 보니 무엇보다 돈 걱정이 앞섰던것 같다』는게 인숙(仁淑)양을 아는 친구와 「마담」족의 중론이다. 지난 69년 10월 10일 인숙(仁淑)양은 아기를 데리고 미국행을 했다. 이 때 인숙(仁淑)양이 친구에게 밝히기론 『 잠시 골치아픈 일이 있어 외국에 나갔다 와야겠다』는 것. 인숙(仁淑)양은 미국서 석달 있다가 되돌아 왔다. 1월21일 다시 돌아온 인숙(仁淑)양의 주변은 의문투성이뿐. 『 곧 미국에 갈테니 차를 팔아야 겠다』는가 하면 『 돈 달라는 사람 많아 귀찮아 죽겠다』고 하기도 했고 한때는 『 이젠 미국 안갈래』하기도 했다. 사건당일만 해도 자동차매매업소에 나타나 「시보레」6기통 짜리 흥정을 했다는데 미국에 갈 생각이었다면 한국에서 차를 바꿀 이유가 없다. 이래서 그녀의 주변에서 『 미국에 가 있으라』는 「그이」의 요구와 이를 선뜻 응낙치 않은 인숙(仁淑)양의 태도에 이번 사건의 수수께끼가 숨어 있지않나 보기도 했다. 어쨌든 3월 17일밤 11시 20분 한강변에 울린 3발의 총성으로 한때의 요화(妖花)정인숙(鄭仁淑)양은 비명에 갔다. 아빠 이름도 모르는 아이를 홀로 남겨 놓은채. [선데이서울 70년 3월 29일호 제3권 13호 통권 제 78호]
  • [특집 Travel] 가을 속으로 푹푹 빠져드는 만추 서정

    [특집 Travel] 가을 속으로 푹푹 빠져드는 만추 서정

    가을이 깊어갈수록 술 취한 새우와 전어 굽는 냄새로 서해안 일대가 고소하다. 영양 많은 굴밥과 알이 꽉 찬 꽃게 등 푸짐한 먹거리 외에도 다양한 볼거리가 기다리는 서해안을 비롯해 산 능선 전체가 억새꽃으로 뒤덮이는 명성산 억새꽃 축제는 가을 풍경의 하이라이트를 보여준다. 이 무렵 황금비 날리는 수묵빛 추사 고택은 만추(晩秋)란 바로 이런 모습임을 절감케 하는 풍경이다. 아름답지만 그만큼 짧은, 눈부신 만추 풍경 세 곳을 추천한다. ★ 추천 1 : 술 취한 새우, 가을전어… 맛있게 익는다 서해안 일대가 맛있게 익어 가는 계절이다. 고소하기가 ‘깨가 서 말’이라는 가을 전어가 쏟아져 나오고, 펄펄 살아 뛰는 대하 꼬리에 힘이 넘친다. 알이 꽉 찬 서산 꽃게와 곰삭은 젓갈, 고소한 조선김 등 갖가지 향토 미각이 줄을 잇는다. 푸짐한 먹거리 외에도 이맘때 서해안 나들이는 어느 곳보다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다양한 볼거리가 기다리는 안면도와 태안반도 일대며 천수만의 낙조,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무창포와 대천 앞바다가 한 걸음에 닿는다. 전어는 특히 가을 생선을 대표한다. 바닷물이 차가워지는 이때 지방 함량이 3배쯤 높아지면서 고소한 맛이 돌기 시작한다. 뼈째 숭덩숭덩 썰어먹는 전어는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진하다. 오죽하면 ‘가을전어 대가리는 깨가 서 말’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전어는 너무 작으면 씹는 맛이 없고, 너무 크면 뼈가 억세서 회로 먹기에 거칠다. 또한 갓 잡은 펄펄 뛰는 신선한 전어일수록 그 맛이 부드럽고 고소하다. 하지만 전어는 성질이 급해 그물에 잡혀 육지로 올라오자마자 죽어버린다. 서해안 일대를 여행하면서 만나는 전어는 적어도 신선도에 있어서는 으뜸인 셈이다. 대하는 매년 9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가 제철이다. 물이 차가워지면 더 이상 양식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무렵 서해안 곳곳에는 일제히 대하 굽는 냄새로 가득하다. 조리방법도 가지가지. 강화도와 대부도, 제부도 등지에서는 청주를 살짝 뿌려 굽는’술 취한 대하구이’를 선보이는가 하면 홍성, 보령 일대에서는 왕소금을 뿌려 빨갛게 구워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펄펄 살아 뛰는’ 대하를 구워낼 때면 뜨거운 불판 위에서 튀어 오르는 새우를 막기 위해 뚜껑을 덮는다. 솥 안에 갇힌 새우가 뚜껑을 때리는 소리가 마치 콩 볶듯 요란하다. 이 일대 주변 포장마차 쪽으로 슬쩍 눈을 돌리면 구이법이 또 다르다. 화덕에 알루미늄 포일을 깐 뒤 여기에다 굵은 소금을 뿌려 그 위에다 대하를 구워 먹는다. 그 모습이 더욱 군침을 돌게 한다. 양식대하는 어린아이 팔뚝만한 크기도 있다. 11월 중순을 넘기면 산 새우를 만나기 어렵고 급속 냉동시킨 대하가 기다린다. 굴 단지가 있는 천북면으로 방향을 틀면 향긋하고 고소한 ‘굴밥’이 기다린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보령시 천북면 앞바다에서 채취되는 굴은 성장은 느리지만 맛과 영양 면에서는 탁월한 것으로 이름 나 있다. 광천읍의 그 유명한 토굴새우젓과 조선김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광천은 한때 각종 고기잡이배들이 몰려드는 서해안의 대표적인 수산물 집산지였다. 그러나 60년대부터 대천항 등 해안과 가까운 항구에 물동량을 빼앗긴 뒤 이를 만회할 방법을 찾다가 옛 폐광 속에서 100여 일간 발효, 숙성시킨 토굴새우젓을 개발해 그 명성을 전국에 알리고 있다. 이곳에서 추천하는 맛있는 새우젓은 약간 붉은 색을 띠어야 하며 껍질이 얇고 속살이 있는 것이라고. 멸치액젓은 붉은 포도주 빛깔과 투명성, 구수한 향을 두루 갖추어야 최상품이다. 황석어젓은 색깔이 노랗고 알이 들어 있는 것이 좋다고 한다. * 맛있는 집| 천북면 하만리에 있는 가든단호박(041-641-3072)은 인근에서 소문난 굴밥집이다. 굴과 콩나물을 실하게 넣어 고슬고슬하게 밥을 짓고 오색채(신김치, 도라지, 시금치, 호박, 당근)에 참기름, 김가루를 넣고 갖은 양념을 한 달래간장으로 비빈 굴밥은 향긋한 굴 향이 그대로 살아나는 별미다. 거기에 시원하고 담백한 바지락 국물을 곁들이면 금세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낸다. * 가는 요령|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마음 내키는 곳 어느 곳에서든 빠져나가면 서해안 별미와 만날 수 있다. 홍성 인터체인지에서 빠져 나와 지방도 622번을 타면 대하구이로 유명한 남당리에 이른다. 또 이곳에서 안면도로 방향을 잡기에도 좋다. 광천 인터체인지를 이용할 경우 광천 읍내 토굴젓갈 기행과 천북면 굴단지를 찾아가는 데 수월하다. 굴밥집 ‘가든단호박’은 광천 인터체인지에서 벗어나 광천 읍내와 반대쪽인 천북면으로 방향을 잡는다. 천북지서 지나 3km 남짓 더 가면 오른쪽 길가에 자리잡고 있다. ★ 추천 2 : 황홀한 억새꽃 축제와 평강식물원 구름 위를 걷는 것일까, 은빛 융단을 밟고 있는 것일까? 경기도 포천과 강원도 철원에 걸쳐져 있는 명성산(922.6m) 능선을 따라 오르다보면 그런 착각을 하게 된다. 6만여 평의 드넓은 능선을 따라 펼쳐지는 은빛 억새밭은 황홀하고도 눈부시다. 태봉국을 세운 궁예가 망국의 슬픔을 통곡하자 산도 따라 울었다는 전설이 있는 이곳은, 산자락에 산정호수를 끼고 있어 등산과 호수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전국 5대 억새 군락지로 손꼽히는 명성산 정상에 오르면 끝없이 펼쳐지는 은빛 억새밭의 장관이 말문을 막는다. 특히 산 아래 산정호수의 잔잔한 물빛과 드넓게 펼쳐진 은빛 억새밭이 어우러진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를 방불케 한다. 바람이 불 때면 마치 산이 살아 움직이듯 넘실거리는 은빛 물결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이곳에서 매년 가을이면 산정호수 명성산 억새꽃 축제가 열린다. 올해로 10회째를 맞는 축제는 오는 10월 12일(목)~15일(목)까지 4일간 열린다. 축제 기간 동안에 명성산 등반대회를 비롯해 산정호수 상동에 설치된 야외무대에서 초청 공연과 풍물놀이, 난타 등 다양한 문화 공연들이 관광객들의 흥을 돕는다. 이곳에 최근 새롭게 떠오르는 명소가 있다. 지난 5월 문을 연 동양 최대 생태식물원인 평강식물원이 바로 그곳. 꽃보다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을 한눈에 보여주는 평강식물원의 가을은 가슴 저 밑바닥으로 번져오는 감동을 체험할 수 있다. 포천시 영북면 우물목 마을에 위치한 평강식물원은 18만 평의 공간에 4,500여 종의 다양한 식물을 보유하고 있다. 7년 동안 준비한 정성이 곳곳에 배어 있는 이곳은 철저하게 식물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식물원이다. 식물들에게 그들의 고향을 찾아준 셈이다. 평강식물원은 이곳을 처음 찾는 이들에게도 고향처럼 편안하고 익숙한 느낌을 준다. 해발 300m의 고원 분지인 공간은 어머니 품속처럼 포근하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12개의 테마 가든이 저마다의 개성을 자랑하며 멋을 간직하고 있다. 고지대 습한 땅에서 자라는 희귀식물들을 볼 수 있는 고층습지와 세계 각처의 진기한 습지식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고산습원이 있다. 어른들에게는 그 옛날 뛰놀던 뒷동산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들꽃동산은 야생화들이 자연스럽게 얽히고 설켜 피고지고를 반복하면서 사계절의 변화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바위와 돌 틈을 뚫고 자라나는 식물의 강인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암석원은 백두산, 한라산, 로키산맥, 히말라야, 알프스 지역에서 자생하는 희귀고산식물을 모두 볼 수 있다. 크고 작은 연못을 조성해 물에서 피는 수생식물과 다양한 꽃을 감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연못정원은 한동안 발걸음을 움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문의 031-531-7751) * 맛있는 집| 억새꽃 축제가 열리는 동안에는 포천 특산물과 별미를 맛볼 수 있는 웰빙 먹거리촌이 형성된다. 평소에도 산정호수 주변, 이동의 갈비촌, 파주골 순두부촌, 신북 오리촌 등등 무엇을 먹어야 할지 고민일 만큼 소문난 별미가 줄을 잇는 곳이다. 평강식물원 내에 위치한 레스토랑 ‘엘름’에서는 식물원에서 재배한 채소를 사용해 약선 비빔밥과 산채육개장, 평강약계탕 등 몸에 좋은 약선 요리들을 선보이고 있다. 특급요리라고 할 수 있는 이 요리들은 일류 호텔 출신 주방장이 직접 개발해 찾는 이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 가는 요령| 동부간선도로가 가까운 경우 의정부 방향으로 진입하고, 장흥이 가깝다면 동두천 방향에서 진입하는 게 빠르다. 의정부에서 국도 43번을 타고 포천, 철원 방향으로 향하다가 성동 삼거리에서 직진해 운천 제1교차로→문암 삼거리에서 우회전한다. 한화콘도를 지나 산정호수 매표소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정수식당이 보인다. 식당을 끼고 우회전해 조금 가면 평강식물원 주차장이다. 혹은 성동 삼거리에서 우회전하거나 국도 47번을 타고 수입교차로에서 산정호수 방향으로 접어든다. 산정호수 매표소를 지나 오른쪽으로는 명성산,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평강식물원이다. ★ 추천 3 : 묵향 가득한 추사 고택 바람이 불 때마다 은행잎이 우수수 우수수 비처럼 날린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에 위치한 추사 고택은 온통 가을 속에 서 있다. 수묵빛 고택과 어우러진 황홀한 가을빛은 잘 그린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황금비를 내리는 은행나무와 붉은 단풍나무, 토담 아래로 수북수북 쌓인 낙엽들, 뒤뜰 감나무엔 주홍빛 감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그림처럼 매달렸다. 만추란 바로 이런 모습임을 절감케 하는 풍경이다. 조선조 헌종 때의 문신이었던 김정희(1786~1856)는 실사구시의 실학을 전개했던 선각자로 벼슬이 대사성, 이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고증학 금석학에 밝았고 추사체를 완성한 서법의 대가이다. 추사 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진이 건립한 것으로, 18세기 중엽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 동안 추사의 후손이 거처했으나 1968년 타인에게 매도되는 것을 충청남도에서 매수했다. 76년 1월 9일 지방문화재 제43호로 지정하고 그해 9월 유적정화사업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고택은 모두 80.5평으로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사당채가 있다. 안채는 6간 대청과 2간통의 안방, 건넛방이 있고, 안방 및 건넛방의 부엌, 안대문, 협문, 광 등을 갖춘 입구(口)자형의 집이다. 안방과 건넛방 밖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 천장은 다락으로 되었다. 안방과 건넛방 사이에 있는 대청은 6간으로 그리 흔하지 않는 규모이다. 이런 입구(口)자형 가옥은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이른바 대갓집형이다. 특히 바깥 솟을대문을 지나 자리잡은 ‘ㄱ’자형 사랑채에는 추사 선생의 유품이 남아 있어 당대의 명필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사랑채는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마루로 되었다. 사랑채 댓돌 앞에 석년(石年)이라 각자된 석주가 세워져 있는데 이 석주는 그림자를 이용해 시간을 측정했던 해시계이다. 옛 대갓집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추사 고택 외에도 이곳에는 추사묘, 추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묘, 천연기념물 제106호인 ‘예산의 백송’과 추사가 수도했던 절 화암사가 근처에 있다. 화암사에는 추사의 친필 편액이 남아 있다. 추사의 묘는 고택 남쪽에 잘 가꿔져 있다. 근처에 증조모인 화순옹주(영조의 2녀)의 묘와 열녀문도 있다. 화순옹주 열녀문인 홍문에서 북쪽으로 400m 가면 영의정을 지낸 고조부 김흥경의 무덤과 그 앞에 보물 제106호로 지정된 희귀종 백송이 서 있다. 백송은 중국 북부 지방이 원산지로 우리 나라에 몇 그루 없는 희귀한 수종이다. 이곳의 백송은 추사 선생이 25세 때 청나라 연경에서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와 고조부 김흥경의 묘 입구에 심었다고 한다. 원래는 밑에서 50cm부터 세 줄기로 자라다가 서쪽과 중앙의 두 줄기는 부러져 없어지고 동쪽의 줄기만이 남아서 자라고 있다. 1980년에 줄기의 피해 부분을 외과 수술하여 치유하였고, 그 후부터는 철저하게 보호, 관리하고 있다. * 맛있는 집| 예산 읍내로 나가면 별미집이 기다리고 있다. 50여 년 동안 갈비를 구워온 유명한 소복갈비집(041-335-2401)이 바로 그곳. 여느 갈비집과 달리 큰 석쇠에 갈비를 통째로 얹어 구운 후 뜨겁게 달군 돌판에 담아 먹는 집이다. 50년 농익은 손맛이 색다른 갈비 맛을 보여준다. 또한 자연산 생굴을 국물과 조리한 굴탕을 자랑한다. * 가는 요령| ①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경우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인터체인지에서 빠져나와 국도 45번을 타고 예산읍으로 향한다. 예산읍에서 21번 국도(외곽도로)를 타고 구충방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 32번 국도(합덕 방면)-고택주유소를 지나서 좌회전하면 추사 고택 주차장이다. ② 경부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경우 경부고속도로 천안 인터체인지를 빠져나가 우회도로를 타고 온양 → 국도 21번을 타고 17km 가면 신례원역 앞 삼거리. 우회전해 국도 32번으로 옮겨 타고 두곡리 삼거리까지 가면 왼쪽으로 추사 고택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을 따라 얼마쯤 들어가면 추사 고택 주차장이다. 글 사진 김혜숙 여행 칼럼니스트     월간 <삶과꿈> 2006.11 구독문의:02-319-3791
  • 아파트 상가도 ‘버블’ 위험수위

    아파트 상가도 ‘버블’ 위험수위

    아파트 단지 상가 투자에도 ‘버블(거품)’경계가 내려졌다. 아파트와 달리 상가에 대해서는 분양가 규제 수단이 전혀 없다는 점을 틈타 업체들이 내정가를 턱없이 올리고 있다. 부동산가격이 폭등하는 상황에서 무엇이라도 잡아둬야겠다는 투자자들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 내정가를 높게 책정하고 일반 경쟁입찰방식으로 치열한 청약 경쟁을 유도하는 것이다. 경기도 화성 동탄 신도시의 경우 아파트 단지 상가 평당 내정가는 4000만원을 넘었다. 낙찰가는 평당 9000여만원에 이를 정도로 과열됐다 상가는 흔히 건설업체가 내부적으로 평당 공급가를 정한 뒤 일반 경쟁에 부쳐 최고가를 써낸 사람에게 공급한다. 아파트와 달리 원가 개념이 없다. 건설사가 알아서 분양가를 정하면 그만이다. 이 과정에서 건설사들이 최근 부동산 시장 환경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부동산값이 치솟는 상황에서 조바심이 가득한 묻지마 투자자들에게 높은 분양가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다. 동탄 신도시에서 1층을 기준으로 지난 7월초 공급된 롯데캐슬 아파트 상가 최고 내정가는 평당 3800만원이었다. 업체가 분양가를 턱없이 올렸다는 비난이 들끓었지만 묻지마 투자자들이 몰리면서 평당 7000만원에 가깝게 낙찰됐다. 그러나 고분양가 책정 기록은 3개월 만에 깨졌다. 한화·우림 아파트 상가 평당 내정가가 3900만원으로 뛰었고 낙찰가 역시 8000만원에 육박했다. 낙찰가 상향 조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3일 공급된 우미·제일건설 아파트 상가 내정가는 평당 무려 4300만원까지 올랐다. 낙찰가 역시 8625만원을 기록하는 등 상가 분양가 전반에 거품이 잔뜩 끼었다. 아파트 단지 상가는 주변에 대형 상업시설이 들어서지 않아야 독점 상권이 만들어진다. 주변에 할인점 등이 생기면 단지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부동산중개업소, 약국, 세탁소 등 몇몇 업종을 빼고는 상권이 형성되지 않는다. 박대원 상가정보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업체들이 책정한 높은 내정가가 낙찰가 고공비행의 숨은 요인”이라며 “투자에 앞서 적정 내정가와 수익률을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평당 내정가 4300만원짜리 상가(1층 12.77평)의 경우 내정가대로 분양받았다고 치자. 이 지역 상가 평균 임대금액을 기준으로 보증금 7000만원에 월 300만원을 받을 경우 세금, 감가상각비 등을 빼고 아슬아슬하게 연 수익률 8%선을 맞출 수 있다. 그러나 내정가의 120%에 낙찰받을 경우 수익률은 5% 이하로 떨어진다. 이 상가는 128%에 낙찰됐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한승원 토굴살이] 멀리 데려다 줘!

    [한승원 토굴살이] 멀리 데려다 줘!

    어제 해저물녘에는 갯벌 밭 모래등으로 나가서 파도와 놀았다. 썰물로 인해 드러난 갯벌 밭을 한 뼘씩 두 뼘씩 삼키면서 올라오는 밀물과 더불어 우쭐우쭐 달려와 철썩거리는 파도가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그 울렁거림을 주체하지 못한 채 불그죽죽해진 나문재(海洪菜)와 푹신푹신한 갯잔디를 밟으며 걸어 다녔다. 먹황새와 검은댕기두루미가 밀물 따라 올라오는 자잘한 고기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토굴 앞 잔디밭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늙은 감나무의 회갈색 낙엽들하고 놀았다. 그것들 밟히는 소리에 가슴 속의 한 쪽 벽이 저릿저릿하게 긁혔다. 파도 소리 낙엽 밟히는 소리는 시(詩)읊는 소리나 음악으로 들리기도 한다. 소리로 말미암아 가슴 저려지는 감각은 아직 덜 늙은 모양이다. 바야흐로 한 후배로부터 걸려온 축하전화를 어색해하며 받고 나서 밖으로 나온 참이다. 전화들은 늘 물 흐르듯 하는 생각의 가락을 싹뚝 잘라먹어버리곤 한다. 밟히는 회갈색 낙엽이 한 친구를 생각나게 했다. 직장 퇴임 후 낙향하여 운전 못하는 나의 기사 노릇을 자청하고 열심히 운행해주곤 하던 그 친구는 읍내 병원에서 폐암 뇌암 말기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혼한 다음 슬하의 남매를 부산과 미국에 둔 채 적막강산에서 살던 그 친구는 3000만원 들어 있는 통장을 나에게 주면서 자기 삶의 뒤처리를 부탁했다. 그의 차를 타고 부산의 한 대학으로 강연을 하러 가서,‘살아 있는 한 글을 쓸 것이고 글을 쓰는 한 살아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단상에서 내려온 그날 밤 술자리에서 그는 ‘아니, 이 사람, 아까 그 마지막으로 한 말, 글을 쓰지 못하게 된다면 자네 스스로 죽어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여, 뭐여?’하고 추궁을 했고, 나는 ‘그래 나 그렇게 살고 있어.’하고 대답했었다. 하늘은 높푸르다. 바다에는 잿빛 갯벌 밭이 질펀하게 드러나 있다. 갯벌 밭처럼 가슴이 텅 빈다. 뒤란 언덕 위로 간다. 거기에는 40㎝쯤의 두 살배기 차나무들이 씩씩하게 자라고 있다. 내 손자들 다음으로 예쁜 차나무들이다. 명년 봄부터는 이놈들이 나에게 차를 몇 통쯤 제공해줄 것이다. 이놈들을 위하여 지난여름 내내 나는 예초기를 짊어지고 잡초들과 싸웠다.‘그 차 몇 년이나 따 먹고살려고 그렇게 땀을 흘리시오?’하는 아내의 추궁을 들으면서. 차나무들을 쓰다듬다가 마당으로 내려오는데 무엇인가가 정강이와 발목을 아프게 쑤셔댔다. 무엇이 이럴까 하고 내려다보니 까만 도깨비바늘과 표창 모양의 푸른 우슬(쇠무릎지기) 열매들이 양쪽 바짓가랑이와 양말에 박혀 있었다. 발을 굴러대기도 하고 한 손으로 옷자락을 털기도 했는데, 그놈들은 오히려 더 깊이 머리를 처넣으면서 내 살갗을 아프게 했다. 마당의 평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이런 고연 놈들, 하고 투덜거리며 하나씩 떼어냈다. 떨어져 나가는 그놈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멀리 데려다줘요!’ 픽 웃으며 ‘이만큼 왔으면 멀리 온 것이잖아!’하고 빈정거리는데 평생 동안 매화 그리기에 미친 화가 조희룡이 생각났다. 추사의 문하를 들락거린 조희룡은 늘그막에 들면서부터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괴석을 수집했고, 그것을 화폭에 그렸다. 창백하고 작고 빼빼 마른 허약한 체구 때문에, 한 처녀의 집안으로부터 결혼을 거절당한 바 있었던 조선 토종의 화가 조희룡은 평생 묵향(墨香) 어린 매화의 향기만 맡으며 산 까닭인지 다른 건강한 친구들보다 오히려 더 오래 살았다 한다. 중국의 고대 화가 황대치와 미우인은 안개와 구름만 먹고 산 까닭으로 늙어서도 홍안이었다고 한다. 도깨비바늘 우슬 열매 다 떨어내고 일어선 나의 발아래 낙엽이 밟힌다. 그 친구는 나에게 3000만원 들어 있는 통장을 건네주면서 ‘멀리 데려다 줘.’하고 말했는데, 나는 지금 미욱하게도 내가 쓰는 소설 한 대목 한 대목을 향해 ‘멀리 데려다 줘.’하고 말하며 살고 있다.
  • 경민중 아이스하키부 ‘새로운 실험’

    경민중 아이스하키부 ‘새로운 실험’

    땅거미가 내려 앉은 지난 1일 의정부실내빙상장. 큼지막한 가방을 둘러멘 10대 소년들이 하나 둘씩 들어섰다. 이들은 지난 7월 창단한 의정부 경민중학교 아이스하키부 선수들. 소년들이 얼음판을 지치기 시작하자 링크는 이내 거대한 놀이터로 변했다. 지역 초등학교 클럽인 ‘의정부 리틀위니아’의 동생들과 뒤섞여 있어서인지 훈련이라기보다 영락없는 ‘놀이’였다. ●스포츠는 ‘놀이’다? 훈련은 오후 7시부터 시작이지만 도착시간은 제각각. 평소 봐왔던 학교 운동부의 엄한 규율과 너무나 달랐다. 경민중 이종훈(33) 감독은 “학원 끝나는 시각이 달라서 그래요. 대부분 학원 1∼2개씩 다니거든요.”라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을 던진다. 삼삼오오 뭉쳐서 제 멋대로 퍽을 갖고 놀던 아이들은 감독의 휘슬과 함께 지도가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진지한 자세로 돌변했다. 감독의 고함 따윈 없다. 아이들은 최대한 많은 것을 얻으려는 듯 귀를 쫑긋 세웠다. 한국 엘리트체육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해온 학원스포츠는 해외 전지훈련때 출입국 카드조차 쓸 줄 모르는 ‘운동기계’들을 양산한다는 비판에 시달려 왔다. 대학 진학에 직결된 전국대회 성적에 ‘올인’한 결과, 스스로의 토대를 조금씩 허무는 자기 모순의 시스템을 만든 것. 특히 자녀가 비인기종목을 지망할 경우 부모 입장에선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말릴 수밖에 없는 현실은 등록선수의 감소, 즉 선수 수급 부족으로 이어졌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탈출구가 없는 현실에서 사회체육과 엘리트체육의 접목을 시도하는 경민중의 실험은 신선한 충격이다. 경민중 선수 6명은 초교 시절 지역 클럽인 리틀위니아에서 취미로 아이스하키를 즐겼다. 아이들은 점점 아이스하키의 매력에 빠졌고,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고민 끝에 ‘제도권’ 진입을 결심했다. 취미가 직업으로 바뀔지도 모르는 상황을 부모들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학교 측에서 학업과 운동을 충실히 병행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민중 선수들은 학교 수업은 물론 본인이 원하면 학원까지 다닐 수 있다. 평일 훈련은 월·수·금요일(오후 7∼9시)이 전부인 대신 부족한 부분을 만회하기 위해 주말 저녁(오후 6∼9시) 시간을 낸다. ●사회체육과 엘리트체육의 접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초교 4학년 때부터 스틱을 잡은 류건(13·경민중1)군도 같은 경우다. 한국의 간판스타인 송동환(안양 한라·군복무)을 좋아한다는 건이는 경민중 아이스하키팀이 창단되자 부모를 졸라 전학왔다.“공부랑 운동을 같이 하는 게 힘들죠. 하지만 좋아하는 아이스하키를 계속하려면 어쩔 수 없잖아요.”라고 똑부러지게 말했다. 핀란드에서 프로선수가 되고 싶다는 당찬 소망도 내비쳤다. 이종훈 감독은 “조기계발도 중요하지만 초·중학교 때부터 엘리트 체육으로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는 몸으로 즐기면서 운동을 해야 숨겨진 가능성과 잠재력을 키울 수 있죠.”라고 설명한다. 그는 “지금 아이들은 아슬아슬하게 생활 체육과 엘리트 체육의 경계선에 서 있는 셈입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공부든, 운동이든 뒤지지 않도록 돕는 것이 제가 할 몫입니다”고 덧붙였다. 의정부 글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사진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K-리그] 수원 안방서 후기우승 ‘축포’

    프로축구 수원 삼성이 안방에서 시원한 축포를 쏘아올리며 2006년 K-리그 후기 우승을 차지했다.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수원은 25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후기 11라운드 경남FC와의 경기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한 ‘테리우스’ 이관우의 맹활약에 힘입어 2-0으로 이겼다. 이로써 3연승을 달린 수원은 후기리그 8승2무1패(승점 26)로 1위를 질주했다. 또 호시탐탐 역전 우승 기회를 엿보던 포항,FC서울, 인천이 이날 모두 비기거나 패하는 바람에 이들 팀과 최소 승점 7점차 이상을 유지하게 된 수원은 남은 2경기에 상관 없이 후기 우승을 확정했다. 전·후기 통합 순위에서도 승점 42(11승9무4패)로 포항(승점 41·11승8무5패)을 제치고 2위로 올라섰다. 1998년과 1999년,2004년 K-리그를 제패한 수원은 통산 네 번째 챔피언에 도전하게 됐다. 차 감독은 2004년에 이어 2년 만에 다시 후기 정상에 올라 왕관까지 노리게 됐다. 수원은 올해 출범한 시민구단 경남에 유독 약한 모습을 보였다. 상대 전적 1무1패. 이 때문인지 김남일 송종국 백지훈 이관우로 이어지는 막강 허리 등의 압도적인 전력을 지녔으나 쉽게 골을 낚지 못했다. 연이은 슈팅은 아슬아슬하게 상대 골문을 스쳐갔다. 평일 저녁임에도 경기장을 찾은 2만여 수원 시민의 답답함을 풀어준 것은 이적생에서 팀의 기둥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관우였다. 이관우는 전반 42분 이현진의 패스를 받은 김대의가 문전 오른쪽에서 올려준 공을 상대 골문 구석으로 정확하게 찔러넣었다. 수원은 후반 43분 경남 문전 오른쪽에서 프리킥을 얻었다. 이관우가 공을 옆으로 살짝 내줬고, 크로아티아 출신 수비수 마토가 강하게 감아 찬 공이 재차 경남 골망을 뒤흔들며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포항은 대구와의 원정 경기에서 상대 중고 신인 진경선에게 선제골을 내줬으나 후반 오승범이 동점골을 터뜨려 1-1로 비겼다. 포항은 후기 우승의 꿈을 접어야 했으나 승점 1을 보태며 최소 통합 3위를 확정,4강 플레이오프(PO) 진출 티켓을 거머쥐었다. 성남과 서울은 상암벌 혈투에서 2-2로 비겼다. 성남은 전반에만 브라질 특급 이따마르와 ‘캐넌 슈터’ 김두현이 2골을 터뜨리며 갈 길 바쁜 서울을 손쉽게 제압하는 듯했다. 하지만 서울은 후반 28분과 경기 종료 직전 각각 김은중과 박주영이 릴레이골을 낚는 뒷심을 발휘해 무승부를 이뤘다. 성남은 통합 1위(승점 47·14승5무5패)를 달렸다. 반면 승리가 절실했던 서울은 통합 승점 35를 기록, 이날 하위팀 광주에 0-2 충격패를 당한 인천과, 울산(이상 승점 32), 대구(승점 31), 전남, 부산(승점 30)과 PO 마지막 티켓 경쟁을 이어가야 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신방에서 동거 시어머닌 너무하셔

    신방에서 동거 시어머닌 너무하셔

    부산시 부산진구 당감(堂甘)동 김모씨 부부는 결혼을 하고도 1년이 넘도록 달콤한 신방 한번 꾸며보지 못하고 그만 이혼을 결심했다는데-. 편모슬하에서 외동아들로 자란 김씨가 결혼하자 아들을 며느리에게 빼앗긴 어머니가 몇개월 동안 신방의 방문에 구멍을 뚫어 놓고 엿보다가 요즘에 와서는 아예 자기 방은 세를 놓고 아들 부부 방에서 함께 잠을 자기에 이르렀다는 것. 시어머니의 주착스런 질투에 견디다 못한 며느리가 결국 눈물을 머금고 보따리를 싸기로 했다는 것. 가운데서 바작바작 마르고 있던 아들이 호소하길-『어머니, 당신이 혼자 사실 때의 기분을 왜 모르십니까?』 [선데이서울 70년 3월 1일호 제3권 9호 통권 제 74호]
  • [난 이렇게 공부했다] (8) 경희대 한의예과 계은준씨

    [난 이렇게 공부했다] (8) 경희대 한의예과 계은준씨

    “문제집 위주로, 취약한 부분을 철저히 대비했습니다.” 경희대 한의예과 1학년 계은준(26)씨는 새내기라고 하기에는 조금 나이가 많다. 경희대 한의예과에 가고 싶어 재수에 재수를 거듭하다 보니 20대 중반을 넘어섰다. 한의예과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경희대 한의예과에 도전장을 던진 지 6년, 그는 이미 ‘수능 박사’가 돼 있었다. 상위권 학생들을 위한 수능 공부법을 들어봤다. ●경희대 한의예과는 수능 전형 2006학년도 경희대 한의예과 정시모집 일반전형은 수능과 내신이 각 70%,30% 반영됐다. 학생부 성적은 평어만 반영하다 보니 실질 반영률이 4∼5%로 높지 않은 편이다. 사실상 수능 성적만으로 결판나는 셈이다. 논술과 면접은 치르지 않았다. 수능은 수리와 외국어, 과학탐구 등 세 영역 성적만 반영했다. 언어는 반영하지 않았다. 일반전형에서 수능 비중이 절대적이다 보니 마지막 시험에서 수능에 전력했다. ●풀고, 또 풀고…, 시중 문제집 완독 내 공부 방식은 수능 문제 유형에 대한 감각을 완벽히 익히고, 출제가능한 모든 유형을 공략하는 식이라고 할 수 있다.(최상위권 성적대 학생의 경우) 전반적인 공부보다는 수능 유형과 감각을 익히고, 취약한 부분에 공부 역량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은 철저히 문제집 위주의 공부였다. 시중에 나온 수능 관련 문제집은 다 풀었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책 값만 400만원 들었다. 문제집도 푸는 방법이 있다.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은 실전 모의고사 문제집이었다. 실전 수능처럼 구성된 모의고사 문제집은 여름 이후 후반기에 많이 다뤘다. 전반기에는 평범한 문제집 위주로 풀면서 문제 유형을 익히고, 어려운 문제에 대비했다. 전반기에는 매주 한 차례 정도 내가 문제집에서 문제를 뽑아 실전 모의고사 형태로 만들어 실전처럼 연습했다. 후반기에는 매일 한 차례 풀고,11월 이후에는 하루에 두 차례까지 풀기도 했다. 문제집을 풀 때는 수능처럼 시간을 똑같이 재 가며 풀어야 효과가 있다. ●취약 부분은 집중적으로 내 공부 방식 가운데 하나는 집중 학습이다. 시험에서 아슬아슬하게 맞았거나 틀린 부분, 자신없는 과목에 대해서는 단 기간에 모든 시간을 투자해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수리 영역의 경우 고3 때까지만 해도 쉬운 편이어서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5학년도 이후 수능이 상당히 까다로워졌다. 지난해 6월까지도 수학에서 틀리는 문제가 줄어들지 않자 비상대책으로 10월 한 달간 수학만 했다. 경희대 한의예과의 경우 수리 영역에서 한 문제만 틀려도 당락이 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어도 마찬가지다. 난 시험 초반 듣기평가에서 너무 긴장해 몇 문제를 흘려듣는 경향이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듣기평가만 모아놓은 문제집을 사서 꾸준히 실전연습했다. 시중에는 MP3파일 형태로 된 실전문제가 많은데 비교적 가격이 싸 이용하기에 편하다. 영어 단어도 실전문제를 풀면서 뜻을 몰라도 이해할 수 있는 연습을 꾸준히 했다. 혼자 공부할 때는 시간이 아닌 양을 기준으로 계획을 세워 공부했다. 그렇다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다. 때에 따라 ‘여기까지 풀고 쉬자.’라는 생각으로 공부했다. 경희대 한의예과에 입학하려는 후배들이 많은데, 실전문제 풀이에 주력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특히 지금 시점에서는 과학탐구 영역에 신경써야 한다. 경희대 한의예과에 지원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수능 성적은 거의 비슷하다고 봐야 한다. 결국 당락은 어려운 문제에서 갈리는데 과탐의 경우 한 문제라도 점수 차이가 벌어질 수 있다. 하루에 한 과목씩만이라도 시간 맞춰서 실전연습을 해야 한다. ●은준씨는… 2000년 서울 당곡고를 졸업하고 수능만 네 차례 치른 ‘장수생’(長修生)이다.2000학년도 첫 해 경희대 한의대에 지원했다 낙방하고, 서울대 약대에 입학했다. 이후 한의사의 꿈을 위해 ‘반수’(半修)를 결심했지만 또다시 떨어져 군에 입대했다.2004년 제대한 뒤 평소 실력으로 또다시 수능에 도전했지만 실패하고,2006학년도 경희대 한의대 정시모집 일반전형에서 수석 합격했다. 균형과 조화라는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한의학과를 고집한 그는 전통적인 한의학 기술을 새롭게 되살려내는 한의사가 되는 것이 꿈이다. 김재천기자 patrick@seoul.co.kr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비둘기집’의 황손가수 이석(2)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비둘기집’의 황손가수 이석(2)

    68년 10월, 월남에서 상이군인이 되어 돌아온 가수 이석씨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무대 활동을 재개, 당시 최고 대우의 ‘워커힐’ 전속가수로 들어간다. “워커힐 무대에서 이석은 준수한 외모와 부드러운 노래로 관객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습니다. 이 때 재기할 곡을 만들어 달라 해서 준 곡이 ‘두마음’과 ‘비둘기집’으로 마침 성음레코드사로부터 음반 제작을 의뢰받고 녹음작업에 들어갔는데 하필 ‘비둘기집’을 불러줄 이석씨가 잠시 LA에 가 있어 대신 이 노래를 남성듀엣 ‘투에이스(멤버 오승근, 홍순백)’가 먼저 취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워커힐악단장이었던 작곡가 김기웅(70)씨의 회고다. 이후 이석씨에 의해 다시 ‘비둘기집’이 재취입되어 발표될 즈음 새마을 운동이 본격화되고 동시에 ‘건전가요부르기 운동’도 전국적으로 확대되어갔다. 이 때 ‘비둘기집’은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로 인해 당시 새마을합창경연대회의 지정곡으로 선정된 데 이어 KBS 라디오의 건전가요부르기 공개방송 ‘삼천만의 합창’의 시그널로 결정되면서 순식간에 ‘삼천만의 노래’로 자리한다. 지금도 여전히 결혼축가로, 그리고 가족 화목의 상징으로 불려지는 이 노래, 그러나 정작 이 노래 주인공의 삶은 그리 축복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비둘기집처럼 다정한 가정,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결코 짓지 못했던 것이다. “어릴 때 살던 궁에서 내몰린 이후 답답해질 때마다 혼자 숲 속에서 마구 소리를 내질렀던 탓에 ‘목이 틔어’ 그 때문에 되레 가수가 될 수 있었다.”는 그의 회고처럼 때때로 신분이 주는 여러 가지 제약을 이겨내게 한 것이 바로 노래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왕의 핏줄’이 오히려 그에겐 아킬레스건이었다. 때때로 세상과 현실에 적응하기 힘든 족쇄로 작용하며 운명처럼 그를 괴롭혔다. ‘비둘기집’으로 정상에 올랐을 즈음 중앙시장과 영등포시장을 옮겨가며 ‘국수장사’를 하던 어머니 남양홍씨가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의 타계는 그나마 황실의 법도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은연중 강요하던 ‘끈’마저 그로부터 끊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정치적, 사회적 상황은 여전히 급변하고 있었고 그럴수록 심화되는 갈등은 그에게 더욱 노래에 몰입하게 해 계속해서 ‘어머니(71년)’,‘외로운 조약돌(72)’,‘차라리 돌이 되어(73)’ 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시대는 계속 바뀌어갔다. 박정희 정권 때까지만 해도 황손들을 삼청동의 ‘칠궁’에서 기거하도록 배려해주었지만 10·26사태 이후 이들은 궁에서마저 밖으로 내몰린다. 어쩌면 황손이 천연기념물 진돗개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참담한 몰락이 현실로 깊게 각인되자 다른 황손들도 대부분 그러했던 것처럼 그 역시 미국으로 떠난다. 미국에서는 우선 운신이 자유로울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캘리포니아에서 지내면서 정원사, 빌딩청소부, 경비원에 이르기까지 온갖 일을 해가며 5년간 5만달러를 모아 ‘리커 스토어’를 차리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 후 무려 열세차례나 강도를 당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을 살다가 89년, 이방자 여사 장례식 참석차 귀국했다가 미국 영주권을 포기하고 대한민국 국적을 다시 찾는다. 그러나 바뀐 현실과 쉽게 타협하지 못한 그는 ‘바둑판 위의 알’처럼 세상을 겉돌며 몇 번의 좌절 끝에 여덟 번이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한동안 ‘지프’에 짐을 싣고 전국을 떠돌던 그는 현재 ‘황실보존국민연합회’ 총재로 조선왕조의 발상지인 전주에 기거하고 있다.‘빛을 계승하는 집’이라는 뜻의 전주 ‘승광재(承光齋)’에서 ‘조선 역사 알기’ 등 역사와 전통의 맥을 잇는 문화유산 계승자로, 아울러 전주대학에서 ‘구한말 이후의 황실가족사’라는 교양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는 그, 최근 딸 이홍씨가 탤런트로 데뷔해 ‘2대 연예인가’를 이루며 어느덧 65세 이상에게 주어지는 ‘경로우대증’까지 받게 된 ‘마지막 황손’ 이석씨. 그는 ‘황실보존연합회’를 통해 기나긴 방황을 접고 본래 자신의 위치로 스스로 한걸음 더 다가가며, 이제 ‘장미꽃 넝쿨 우거진 그런 집’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sachilo@empal.com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IQ 210의 천재소년서 야학교사로 김웅용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IQ 210의 천재소년서 야학교사로 김웅용씨

    인생에 있어서 숫자란 과연 무엇일까. 태어나고 죽음이 다들 같을진대 굳이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을 가려내는 것도 틀에 박힌 숫자의 장난은 아닐까. 문득 생각해본다. 묘비의 글을 ‘진달래가 만발한 봄날 태어났고 오곡백과가 무르익은 어느 청명한 가을날 조용히 잠들다.’라고 하면 어떨지. 지능지수(IQ) 210, 흔치 않은 숫자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재라 했다.1980년도판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의 지능지수로 등재될 정도였다.5세에 4개국어를 구사하고,6세때 일본 후지TV에 출연, 수학 미적분을 척척 풀어냈다.7세까지 청강생으로 한양대에서 물리학을 공부했고 8세때 미국 항공우주국(NASA) 초청으로 콜로라도 주립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12세부터는 5년간 NASA 선임연구원으로 일했다. 당시 언론은 연일 ‘신동’‘대단한 천재소년’으로 보도했다. 그러던 78년, 갑자기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한 천재는 81년 지방대인 충북대에 입학했다. 언론과 주위에서는 ‘실패한 천재’로 표현했다. 전공 역시 물리학에서 스스로 토목공학으로 바꿨다. 그뒤 국토환경연구소 연구위원으로 근무하다 현재는 충북개발공사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지낸다. 최근 그는 세계 3대 인명사전, 즉 미국인명연구소(ABI)의 ‘21세기 위대한 지성(Great Minds of the 21st Century)’에, 미국 마퀴스 세계 인명사전(Marquis Who’s Who in the World) 23판과 영국 케임브리지 국제인명센터(IBC)가 선정하는 ‘21세기 우수 과학자 2000’에 각각 이름을 올렸다. 그러자 언론은 ‘60년대 신동’이 ‘세계의 지성’으로 인정받았다고 보도했다. 김웅용(44)씨. 귀국하기 전까지 천재라는 ‘박제’ 속에 살았다. 주위 시선도 내내 부담스러웠고 인명사전 등재도 정작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저 ‘보통 사람’이고 싶었고 그렇게 사는 게 행복이라고 했다. 알고 보니 그는 3년째 야학교사로 남모르게 봉사활동하고 있다. 직장인으로, 아이 둘을 키우는 평범한 가장으로 살면서 미처 배움의 기회를 놓친 50∼60대의 아주머니들을 위해 아름다움을 베풀고 있는 것. 쇄도하는 언론 인터뷰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며 거부하는 그에게 ‘진실한 인생 얘기 한번 해보자’며 설득했다. 지난달 27일 낮 그가 다니는 직장 근처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청주시 사창동에 위치한 ‘성암야학’입니다. 중학과 고교과정의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나이든 아주머니들이 대부분이죠. 매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2교시를 가르치는데 과학과 수학을 맡았습니다.” 야학교사가 된 동기가 궁금했다. 충북대학에 다닐 적에 ‘청심회’라는 봉사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대학 졸업후에는 이 대학에서 시간강의를 맡게 됐는데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야학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선뜻 지원했다. 그러나 야학교사의 기준이 ‘대학 재학생’으로 정해져 있어 탈락했다.3년 뒤 어느날 규칙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어 다시 지원했다. 자신이 초·중·고교과정의 검정고시를 거쳤기에 누구보다 그 심정을 잘 알고 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됐다. 그렇게 시작된 지 3년. 나이든 제자들도 많다. 그는 “합격한 아주머니가 휴대전화 메시지로 ‘소주 한잔 사겠다.’는 연락이 올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면서 어른들도 영어나 수학 등 암기과목을 싫어하더라며 빙그레 웃는다. 아울러 야학교사들 중에는 대학 제자들도 있으며 비록 열악한 환경일지라도 만학의 자세가 다들 진지하다고 강조했다. 자신도 “어른 분들을 가르치다 보면 오히려 배우는 것도 많다.”고 의미부여를 했다. 화제를 바꿔 ‘천재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 무엇이냐고 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숫자로 성적 매기는 것, 그리고 공부를 얼마만큼 빨리 하느냐 등등 자꾸 비교하는 것, 또 천재가 왜 그 대학에 안 가고 지방대학에 갔느냐 하는 시선들이 정말 싫었다.”고 털어놨다. 충북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그 자체로 봐줘야지 자꾸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느낌이 못마땅했다고 토로했다. 특히 일부 사람들이 “연세대 나온 부인이 충북대 졸업한 사람과 어떻게 결혼했느냐.”고 질문할 때는 정말 황당했단다. 자신은 현재 가정적으로나 직장에서 행복과 보람을 만끽하며 지내는데 그런 식의 편견을 접할 때마다 많은 실망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러면서 숫자나 성적순이 결코 행복이 아닐 텐데 왜 자꾸 이상한 잣대로 평가하려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영재교육과 관련,“우리나라의 영재학교는 자기실력을 계발하는 곳이 아니라 좋은 대학에 보내려는 수단이 되고 말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다 보니 영재학원이 난립하고 부모들은 아이들의 소질이 어디에 있는지 관찰하고 기다려주지도 못한 채 그저 박제된 틀에 밀어넣는 꼴이 되고 말았다고 했다. 예를 들어 아이를 무조건 소문난 피아노학원에 보내면 한두달 뒤 아이는 ‘손가락 아파서 못하겠다’는 광경이 그렇다고 했다. 또 “1∼100까지 써오라는 숙제를 왜 그렇게 많이도 주는지….”라고 덧붙였다. 김씨 자신도 뼈저리게 경험했듯이 또래 집단과 잘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지 무조건 시킨다고 될 일이 아니며 오히려 역효과만 초래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영어단어 암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배워야 하는 까닭을 알려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가끔 똑똑한 아이들이 자살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스트레스 때문에 그렇다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김씨도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초·중·고교 과정을 거치지 않고 미국에 건너갔다. 주위의 부추김과 화려한 시선에 짓눌려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어린 나이에 홀로 된다는 것도 그렇지만, 매일 쳇바퀴처럼 꽉 짜여진 일정 속에서 대학원 공부를 해야만 했다. 이어 NASA 연구실에서 일하면서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할까’ 하는 회의감에 빠졌다.NASA에서는 ‘계산과 예측’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는 그의 재능을 필요로 했다. 결국 미국에서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스스로 귀국결심을 했다. 이후 끌려다녔던 시절을 뒤로 하고 다시 처음부터 목표를 세워 진정한 자신의 길을 걸었다. 초·중·고 검정고시를 연이어 치렀다. 이때에도 천재가 검정고시를 보느냐며 언론에서는 카메라를 들이댔다. 이 때문에 20점 만점에 13점밖에 못받았다고 했다. 어린 시절 학교를 건너 뛰다 보니 검정고시 보면서 생소한 것을 많이 접했다. “노천명의 시 중에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은 어느 동물인가요’ 하는 문제가 있었어요. 사슴과 기린 중 기린에 동그라미를 쳤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사슴이더군요.” 이런 과정을 거친 후 김씨는 자신을 특별하게 봐주지 않는 지방대에서 비슷한 또래들과 어울리고 봉사활동하며 모처럼 인간다운 참맛을 체험했다. 김씨는 요즘 생활이 즐겁다고 했다. 새롭게 시작하는 직장에서의 무한한 기대감, 그리고 8명의 팀원들과 동고동락하는 생활이 무척 만족스럽다고 했다. 천재라는 말도 잊은 지 오래고, 또 잊어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주위에서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한다는 얘기를 들을 때가 가장 부러웠다.”고 했다. 충북대 재학시절 원주고 출신들과 자주 어울렸는데 나중에는 동창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허용해줘 너무 고마웠단다. 이에 보답하기 위해 원주고 교가를 배웠고 원주고 25회 모임에 나갈 자격증(?)까지 땄다며 밝게 웃었다. 부인이 연세대 연구교수(인지과학)로 재직 중이어서 주말부부로 청주에서 지낸다. 충북대 봉사활동 중에 부인을 만났으며 슬하에 아들만 둘을 두었다. 초등 2년생인 첫째는 운동을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라고 귀띔한다. 건국대와 이화여대 교수였던 부모는 정년퇴임하고 서울에서 살고 있다. “어떤 맞춰진 틀에 사는 것이 과연 인생일까요? 지금 이대로가 진실이고 가장 행복합니다.” ■ 그가 걸어온 길 ▲1962년 서울 출생 ▲66년 한양대 물리학과 특별입학 ▲69년 건국대 4년 편입 ▲70년 콜로라도대학원 물리학과 입학 ▲74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 선임연구원 ▲78년 귀국, 이후 초·중·고교 검정고시 합격 ▲81년 충북대 토목공학과 입학 ▲85년 동대학 졸업 ▲91년 육군병장 만기제대 ▲98년 동대학원 토목공학 박사학위. 이후 충북대 시간강사, 카이스트 대우교수, 국토환경연구소 연구위원 근무 ▲2006년 7월∼현재 충북개발공사 근무 km@seoul.co.kr
  • [국악인] 단소음악의 최고봉 이용구 명인

    [국악인] 단소음악의 최고봉 이용구 명인

    글 최종민 철학박사, 국립극장 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이용구는 대금 전공자로 국립국악관현악단 악장이고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겸임교수다. 대학시절부터 각종 국악경연대회에서 대금으로 큰 상을 휩쓸었고 대금 연주자로 활동하며 대금으로 KBS국악대상을 받기도 했다. 1967년생이니까 아직 30대의 젊은 나이지만 그가 성취한 음악 업적은 대단하다. 연로한 명인 명창들이 출연하는 조선일보 국악대공연 무대에 20대의 나이로 출연하여 단소 산조를 연주하기도 했고, 역시 20대에 중요무형문화재 45호 대금 산조를 이수하기도 했다. 각종 공연에서 그는 독주자로 활동했고 초청연주회에 여러 차례 초청되기도 했다. 개인 발표회도 3회나 했다. 그런데 그의 음악생활 중 아주 중요한 것이 단소 분야라는 것을 발견하게 됐다. 단소는 초등학교 음악 교과 과정에 필수악기로 되어 있다. 과거 리코더를 피리라는 명칭으로 배우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단소를 모두 배우게 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어린이들이 단소를 배우고 단소와 관련되는 교재들이 개발되고 있지만 정작 단소음악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학의 국악과에 단소 전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소를 전공하면서 활동하는 음악가도 없었다. 단소음악은 옛날식대로 영산회상의 단소가락을 연주하거나 민요를 적당히 편곡하여 연주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이용구는 단소음악에 새 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단소라는 조그마한 악기를 가지고 큰 무대에 나가 당당하게 독주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5년 연강홀에서 젊은 산조 정기공연으로 단소 산조를 연주했고 1996년에는 조선일보 국악대공연에서 단소 산조를 연주했다. 이처럼 이용구는 단소로 연주하기 어렵다고 하는 단소 산조를 연주하여 단소의 악기영역을 한층 높이는 역할을 했다. 하기는 단소를 가지고 산조를 처음 연주한 사람은 전추산이었고 그 후 이생강이 그 전추산의 녹음을 듣고 단소 산조를 재현한 바 있다. 그 다음 세대에서 단소 산조를 재현한 것은 이용구이기 때문에 3세대를 맞는 단소 산조에 있어서 이용구의 위치는 중요하다. 헌데 지금 이용구의 단소음악은 정악이나 산조에 머물지 않고 북한음악이나 창작음악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을 엄청나게 넓혀가고 있다. 심지어는 서양의 현대음악까지 단소로 연주해 내고 있다. 그런 12음계의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이용구는 직접 단소의 구멍을 더 뚫고 주법을 개발하여 필요한 음을 모두 만들어내고 있다. 기존의 음악가들이 단소로 기존의 음악을 연주했던 것과 달리 이용구는 창작음악과 서양음악까지 연주하도록 단소를 개량하고 주법을 개발하여 단소의 악기 기능을 확장했다. 그리고 단소음악으로 독주회를 하고 단소음악의 멋진 음반을 내기도 했다. 한국음악 역사상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음악 영역을 개척하여 발전시키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단소라는 악기를 통해서 하고 있기 때문에 단소음악의 최고봉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보았다. 최근 그가 건네준 이용구의 단소 연주곡집 <簫>를 들어보면서 나는 이용구의 단소음악이 정악과 산조는 물론이고 창작음악과 서양음악까지 수준 높게 연주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단소는 이제 단순한 교육용 악기이거나 제한된 영역에만 사용되는 악기가 아니라 거의 모든 영역의 음악에 사용될 수 있는 악기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이용구가 어떻게 이처럼 단소음악에 큰 업적을 쌓게 되었을까? 이용구의 음악인생은 바로 그 단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충북 단양이라는 시골에서 9남매 중 8째로 태어난 이용구는 적성초등학교와 단양중학교를 마치고 청주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청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청주 YMCA를 지나다가 단소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대학생 서클에서 단소 강습하는 소리였다. 그때 플라스틱 단소를 구해 단소를 불기 시작했지만 같은 해 칠석날부터 청주에 대금동아리가 생겨 대금을 배우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대금을 사려고 이생강 선생님을 찾아갔다가 이생강의 제자가 되었는데 지금까지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대학은 추계예술대학을 다녔고 그곳에서 김정수 교수와 김성진 명인을 만나게 되었다. 특히 김성진 선생님에게 배운 것은 이용구의 음악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김성진 선생님은 정악대금의 인간문화재였지만 어떤 곡을 꼭 선생님이 하는 대로 연주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본인도 이렇게 연주했다 저렇게 연주했다 하면서 경우에 따라 좀 다르게 연주했지만 제자에게도 “너의 가락을 만들고 너의 음악을 만들어 연주하라”고 타이르곤 하셨다. 전통시대 훌륭한 선생님의 모습을 보여주셨던 김성진 선생님이시다. 그렇게 훌륭한 선생님에게 정악을 배우고 기량이 대단한 이생강에게 민속악과 산조를 배우며 이용구는 탄탄한 실력의 음악가로 성장했다. 대학생 때 나가는 콩쿠르마다 큰 상을 휩쓸었는데 1990년 전주대사습놀이 국악경연대회에 나가 기악부 장원을 한 것은 지금까지 최연소(21세)라는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1993년 국악을 전공한 유경화와 결혼했다. 유경화 역시 대단한 끼를 가진 음악가여서 요즘은 ‘상상’이라는 그룹을 만들어 거문고의 허윤정, 해금의 강은일과 함께 활발한 연주활동을 하고 있다. 슬하에 딸과 아들 두 자녀를 둔 이용구·유경화는 남부러워 할만한 음악가 부부이기도 하다. 이용구는 한 인간으로 또 촉망되는 음악가로 창조적인 삶을 살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개량하는 단소와 그가 개발하는 단소음악은 미래 한국 단소음악의 지표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거는 기대도 크고 그의 활동에 더 많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월간 <삶과꿈> 2006.09 구독문의:02-319-3791
  • 儒林(686)-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2)

    儒林(686)-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2)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32) 그러나 정지운이 지은 ‘천명도설’과 퇴계의 의견을 따라 수정한 ‘천명신도’에 관한 내용은 그 무렵 유학자 사이에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당대의 유학자들은 거의 모두 이 책을 구해 통독하는 한편 이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 자신도 ‘천명신도’가 나오기까지의 경위를 후서(後序)에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자술하고 있다. “…나는 벼슬하면서부터 한양 서성문(西城門) 안에 우거한 지 전후 20년이 되어도 이웃에 사는 정지운과 면식도 내왕도 없었다. 하루는 질자(姪子) 교가 ‘천명도’라는 것을 구해 와서 나에게 보이는데, 그 그림과 학설이 자못 틀린 데가 있었다. 그래서 교에게 ‘이것은 누가 그린 것이냐.’하고 물으니, 모르겠다 하였다. 그 뒤 수소문하여 비로소 그것이 정지운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사람을 시켜 정지운에게서 본도(本圖)를 구해보고 다시 지운을 만나보려고 몇 차례 왕복걸음을 한 뒤에야 만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자신과 정지운 두 사람 간에 오간 주요한 내용에 대해 다시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하고 있다. “…나는 지운에게 물었다. ‘지금 이 그림이 교가 전한 것과 다른 것은 무슨 까닭인가.’ 지운은 대답하였다. ‘전에 모재(慕齋:김안국), 사재(思齋:김정국) 두 선생 문하에서 공부할 때 그 서론을 듣고 물러나와 사제(舍弟)와 더불어 종지를 강구하였으나 성리가 미묘한 까닭에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시(試)하여 주자의 설을 취하고 제가의 설을 참고로 하여 하나의 그림을 그려 보았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모재 선생께 가서 질의하였더니, 선생께서는 잘못이라고 꾸지람하시지 않고 그것을 책상머리에 놓아두시고 여러 날을 골몰히 생각하셨습니다. 착오된 곳이 없는가 물으니 오래 더 연구해 보지 않고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간혹 배우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이것을 내보이고 이야기를 해 주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윽고 다시 사재 선생께 질의해 보았으나 역시 책망하시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양 선생께서 후진을 달래어 나아가게 하는 뜻이요, 그 그림이 잘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때 동문생들이 이것을 베껴 가지고 사우(士友)들 간에 전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뒤에 잘못된 것을 깨닫고 고쳐 놓은 곳도 많았습니다. 이것이 전후가 달라진 이유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초고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지만 원컨대 정정하여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지운의 말을 듣고 나는 대답하였다. ‘양 선생이 함부로 시비를 논하지 않음은 물론 깊은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오늘날에 있어서 우리들이 학문을 강구하면서 타당치 못하다고 생각되는 점이 있으면 어찌 그대로 두고 남을 따르거나 잘못을 그대로 변명만 하고 시비를 가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사후 간에 전해진 것이 이미 양 선생의 시정을 받은 것임에도 여전히 착오가 있음을 면치 못했다면 사문에 누됨이 또한 크지 아니한가.’”
  • 폭 800m 한강 외줄타고 건넌다

    서울 한강에서 ‘세계 외줄타기 대회’가 개최된다. 서울시는 3일 내년 개최를 목표로 기네스북 기록을 갈아치울 수 있는 한강 도하 800m 외줄타기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시를 문화·관공도시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다. ●기존 최장기록 400m… 성공땐 기네스북에 서울시 관계자는 “기네스북 외줄타기 최장 기록은 400m여서 800m의 한강에서 외줄을 성공적으로 타면 기네스북 기록감”이라면서 “외줄타기가 서울을 대표하는 세계적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시는 토목 전문가와 영화 ‘왕의 남자’에 출연한 외줄타기 명장 권원태씨 등과 한강에 외줄을 설치하는 방법 등 기술적 부분을 논의하고 있다. ●‘왕의 남자´ 권원태씨등 세계명인 40∼50명 시는 세계적인 외줄타기 명인은 40∼50명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은 두 팔이나 장대 부채 등 도구를 이용해 균형을 잡는다. 명인마다 독특한 개성을 발휘하면 보다 다채로운 행사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04년 일본 니혼TV 주최로 미국 플로리다와 경기도 안성에서 세계줄타기대회가 개최됐지만 정기 대회는 현재 없다. 지난해에는 한 곡예사가 캐나다 온타리오주 나이아가라 폭포를 외줄을 타고 건너 주목받았다. 시 관계자는 “외줄에 의지해 한강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아슬아슬하지만 흥미진진한 볼거리를 제공할 것”이라며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특색 있는 행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박지윤기자 jypark@seoul.co.kr
  • 儒林(683)-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29)

    儒林(683)-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29)

    제6부 理氣互發說 제2장 四端七情論(29) 퇴계가 임금 선조에게 고봉을 ‘성리학을 깊이 연구해서 그 견해가 유학에 정통하다.’라고 서슴없이 추천하였던 것은 일찍이 두 사람 사이에 오간 격렬한 논쟁에 따른 결과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유학이론의 발전에 있어서 하나의 분수령이 된 퇴계와 고봉간의 논쟁은 이른바 ‘사단칠정논변’이라고 불린다. 이는 유학이론의 발전에 있어 분수령이 된 논쟁이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철학적인 대격돌이었던 것이다. ‘사단칠정논쟁’을 줄여서 ‘사칠논변(四七論辯)’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논쟁 역시 고봉이 퇴계에게 먼저 강력한 의문점을 제기함으로써 점화되었던 대사건이었다. 만약 고봉의 이러한 이의제기가 없고 강력한 도전이 없었더라면 퇴계는 그의 대표적 사상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정립하지 못했을 만큼 퇴계에 있어서 고봉과의 만남은 운명적인 해후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격렬한 ‘사칠논변’의 발단은 고봉이 32세 때인 명종13년 가을,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가 마침 서울에 와있던 퇴계를 찾아가 대뜸 논쟁을 던진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미 고봉은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큰 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이항(李恒)을 잇따라 만나 ‘태극도설’을 비롯한 성리학의 중요한 주제들을 놓고 격론을 벌일 만큼 열혈청년이었는데, 퇴계는 그해 겨울 식년 문과 을과에 장원급제하였으나 아직 서생에 불과하였던 고봉이 나이가 26살 차이가 났으나 물리치지 않고 하나의 대학자로서 존중해 주었던 것이다. 고봉은 편지에 자신이 고백하였던 대로 ‘거친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으므로 퇴계를 만나자마자 퇴계가 주장하였던 ‘사단칠정론’에 대해 직격탄을 날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퇴계는 손자 제자뻘에 해당되는 고봉의 직격탄에 대해서 열린 자세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봉이 다녀간 다음날 퇴계가 고봉에게 쓴 편지에 자상하게 나타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간 100여 통이 넘는 편지 중의 제일 먼저 시작된 편지가 고봉이 아니라 퇴계로부터 비롯된 사실은 ‘만약 배울 것이 있으면 세 살 난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것이다.’라는 참된 유자로서의 태도를 엿보게 하는 명장면이며,‘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그들에게서 좋은 점은 가려서 따르고 옳지 못한 점은 거울삼아 고치기 때문이다.’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른 감동적인 장면인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최초의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기선달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씁니다.” 퇴계가 쓴 선달(先達)이란 용어는 문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아직 벼슬하지 아니한 사람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이를 보아 알 수 있듯이 그 무렵 고봉은 과거에는 장원급제하였으나 아직 벼슬에 오르지 않은 백면서생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 “훌륭한 사람 만드는데 보탬될 수 있어 기뻐”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해 평생 배우지 못한 설움을 안고 살았는데, 이렇게 서울대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어 기쁩니다.” 70대 할아버지가 21일 고철 모으기, 채소·꽃 가꾸기, 자동차 운전 등으로 평생 일해 모은 돈 2억원을 서울대에 기탁했다. 사연의 주인공은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사는 김영업(75)씨. 김씨는 이날 아무런 사전 예고 없이 갑자기 서울대 총장실을 방문해 거금을 맡겼다. 처음엔 남루한 김씨의 행색을 본 건물 경비담당 직원들이 총장실을 찾는 김씨를 제지했을 정도였다.김씨는 “서울대는 우리나라 최고 대학으로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나오는 곳”이라면서 “훌륭한 사람을 만들어 내는 일에 도움이 됐으면 해서 직접 찾아왔다.”고 말했다. 충남 천안이 고향인 김씨는 아내와는 사별하고 슬하에 자식 없이 조카들과 함께 살아온 김씨는 “언젠가는 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조카들과 친지들의 동의를 얻어 이제서야 실천에 옮기게 됐다.”면서 “액수가 적어서 부끄러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이장무 총장은 “김 선생님의 고귀한 뜻을 접하게 되니 그저 감사하고 고마울 뿐”이라면서 “서울대가 세계 속의 대학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서울대는 김씨를 위해 발전기금 안에 ‘김영업 장학금’이란 별도 계좌를 만들어 어려운 학생들의 장학사업 등에 사용할 계획이다.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성인오락 바다이야기 상장회사 노대통령 조카 한때 이사 재직”

    “성인오락 바다이야기 상장회사 노대통령 조카 한때 이사 재직”

    사행성 성인오락인 ‘바다이야기’의 판매업체가 코스닥에 우회 상장하기 위해 인수한 회사에 노무현 대통령의 친조카가 이사로 재직했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MBC가 18일 보도했다. MBC는 이날 밤9시 뉴스에서 머리기사로 “(바다이야기 판매업체인)지코프라임이 코스닥 등록업체인 우전시스텍을 인수하면서 코스닥 우회상장에 성공했고 주가도 올랐다.”면서 “우전시스텍 법인 등기부 등본에는 노지원이라는 이름이 있다. 노 대통령의 친조카”라고 밝혔다. 이어 “두 회사의 합병 과정에서 노씨가 무슨 역할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서 “노씨는 이사직을 사임하기 전에 스톡옵션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노씨는 노 대통령의 사망한 형의 아들로 노건평씨 슬하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청와대측은 “지원씨는 지난 2003년 IT업체인 우전시스텍에 입사했으며, 지난 7월 지코프라임이 우전시스텍의 대주주로 등기변경시 자진해 (오해를 받을까봐)우전시스텍을 퇴사했다.”고 노씨가 바다이야기 우회상장에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 제기를 일축했다. 청와대측은 이어 “우전시스텍과 바다이야기는 관계 없으며 노씨는 회사가 인수되자마자 그만둬 무관하다.”면서 “MB C가 부풀려 허위보도했다.”고 말했다. 특히 “지원씨는 우전시스텍 기술 이사 당시 스톡옵션으로 주식 10만주를 받았을 뿐 지코프라임 인수 관련 스톡옵션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해명했다. 노지원씨측은 MBC에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노 대통령은 지난 13일 서울신문 등 일부 언론사 간부들과의 오찬회동에서 “내 집권기에 생긴 문제는 성인 오락실·상품권 문제뿐”이라고 밝혀 관심을 끌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성격이 청와대가 직접 다룰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했으나 정책상의 문제인지, 각종 의혹과 관련된 문제인지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다. 이와 관련, 감사원은 18일 “게임장 및 PC방의 불법 사행행위 만연실태 전반에 대해 감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감사원 관계자는 “게임 사업에 대한 전반적 감사인 만큼 바다이야기도 살펴보겠지만, 바다이야기만 타깃으로 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 유기준 대변인은 “노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가 ‘바다이야기’ 게임기 제조업체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가 허가를 밀어 붙였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우상호 대변인은 “여당 관련 인사들의 개입설은 전혀 근거 없으며, 야당이 또다시 부풀리기 공세를 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한편 명계남 노사모 전 대표는 자신이 도박산업을 통해 차기 대선을 위한 정치자금을 마련하고 있다는 내용의 인터넷 소문과 관련, 이날 측근을 통해 “악성 루머를 퍼뜨린 네티즌들에게 법적 대응을 하겠다. 확인 없이 기사를 쓴 일부 언론사에 대해서도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서울중앙지검 마약·조직범죄수사부는 바다이야기 관련 수사 결과를 이르면 21일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박홍기 전광삼 장세훈기자 hisam@seoul.co.kr
  • 달콤한 맛의 리더 ‘체리’

    달콤한 맛의 리더 ‘체리’

    상큼하고 달콤한 맛있는 체리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체리를 맛보지 못하셨다면 세상의 많은 행복 중에 하나를 놓쳐버린 것이랍니다. 시원한 얼음에 재워놓은 체리를 먹으며 영화나 책을 보는 즐거움은 무더운 여름을 이기는 맛난 ‘보약’이랍니다. ‘체리’를 아시나요. 나이트 클럽에서 과일 안주를 시키면 맨 위를 장식한 빨간 과일, 먹었을 때 ‘물컹’ 씹히며 설탕의 맛이 강하게 묻어 나오는 과일이라고 이야기하시겠지요. 그건 감히 체리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형 할인점이나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체리를 맛 보세요. 빨간 예쁜 모양에다 아삭아삭 씹히며 달콤한 맛이 그야말로 과일 중에 최고랍니다. 참 체리는 꼭꼭 숨겨놓고 어른들만 먹어야 한답니다. 아이들이 한번 맛보면 너무 맛있어서 계속 찾아 주머니가 거덜나거든요. 우리 땅에서 나는 과일은 아니지만 요즘 수입 과일 중에서 뜨고 있는 것이 바로 체리다. 보통 국내에 6∼8월까지 수입되며 미국 북서부 지역(일명 워싱턴 체리)에서 생산된 것을 최고로 친다. # 맛이 끝내줘요 생과일 체리는 가공된 통조림과는 확연한 맛의 차이를 보인다. 일단 앵두보다 훨씬 알이 크고 색깔도 붉고 예쁘다. 씹히는 맛이 사각사각하고 달콤한 과즙이 가득하다. 아주 단 대추를 먹는 느낌에 상큼함이 더해진 듯하다. 너무 맛있어서 앉은자리에서 몇십 개는 후딱 먹어치운다. # 팔방미인 체리 미국에선 체리를 스테이크 먹을 때 꼭 함께 곁들이는 과일 중 하나인데 이유는 간단하다. 체리의 붉은 색이 식욕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암을 예방하는 붉은 과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체리에 들어있는 대표적 항산화 물질인 케르세틴은 폐암 발생을 억제하는 성분으로 이를 함유한 식품을 많이 먹은 사람은 폐암에 걸릴 확률이 현저히 낮아진다. 또한 안토시아닌의 경우 고기 구울 때 탄 부분에 생기는 발암 물질의 생성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체리는 더운 여름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주는 과일이다. 잠을 청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인체 내의 멜라토닌이라는 호르몬이 부족하면 그렇다. 체리에는 여느 과일보다 이 멜라토닌이란 성분이 많이 들어있다. 또 체리는 관절염 환자에게 아주 좋은 과일이다. 서양의 민간 요법으로 체리나 체리 주스가 관절염 등으로 인한 통증과 부종을 줄이는데 체리에 다량으로 포함된 안토시아닌 성분이 염증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 미국 미시간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안토시아닌은 아스피린보다 10배 높은 소염효과를 나타낸다고 한다. 여름철은 높은 습도와 잦은 비로 관절염을 앓고 있는 부모님을 위해 체리로 만든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보자. # 체리 알고 먹읍시다. 체리를 흔히 ‘서양버찌’나 ‘버찌’라고 하는데 그건 좀 틀린 표현이다. 체리와 버찌는 재배하는 지역, 생산시기는 물론 맛과 색깔 크기가 전부 다르다. 또 체리는 종류도 다양하다. 과실이 크고 단단하며 과즙이 풍부하고 익을 때 적갈색을 띠는 체리가 ‘빙(bing)이란 품종이다. 미국 북서부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며 흔히 우리가 먹는 체리가 대부분 ‘빙’이다. 핑크빛과 빨간색이 감도는 황금빛인 ‘레이니어’는 당도가 가장 높고 속살이 노랗다. 아마 체리 중에 가장 맛있는 품종이다. 근데 좀 비싼 것이 흠이다. 이밖에 스위트하트, 래핀스, 티톤 등 다양하다. 영양도 듬뿍, 맛도 좋은 체리는 씻어서 냉장고에 보관했다 먹거나 냉동실에서 살짝 얼려 먹는 것도 좋지만 다양한 요리의 재료로도 응용이 가능하다. 쿠킹아트센터의 장경진 팀장이 여러분을 위해 체리로 만든 다양한 요리를 선보인다. (1) 체리 셰이크 딸기나 바나나 등 여러 가지 재료로 셰이크를 만들지만 요즘처럼 땀을 많이 흘리고 더울 때 체리로 만든 셰이크는 잠을 편하게 이루게 할 뿐 아니라 부족한 비타민까지 채워준다. 재료:손질 된 체리(씨 제거 한 체리) 1컵(분량은 많으면 많을 수록 진하고 맛있는 셰이크가 된다.), 플레인요구르트 1통, 우유 1/2컵, 레몬즙 1큰술, 각 얼음 10개 만드는 법 (1)체리는 씨를 제거한다. (2)손질 된 체리에 얼음을 뺀 모든 재료를 블랜더나 믹서기에 넣고 간다. (3)얼음을 넣고 다시 한번 간다. 팁:(2)번까지만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보관하다 필요할 때 얼음만 넣고 갈아먹으면 편리하다. (2) 체리머핀 체리의 달콤함과 쫄깃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체리머핀. 아이들의 간식으로 그만이다. 재료:손질된 체리 1컵, 우리밀가루 240g, 버터 180g, 달걀 3개, 베이킹파우더 1작은술, 꽃소금 1작은술, 설탕 70g, 메이플시럽 100g 만드는 법 (1)체리 씨를 제거 한 후 큼직하게 썬다. (2)밀가루, 베이킹파우더를 섞어 체에 친다. (3)볼에 버터를 넣어 거품기로 잘 저은 다음 설탕을 조금씩 넣으면서 섞고 마지막에 메이플시럽과 소금을 넣고 잘 젓는다. (4) (3)에 달걀을 조금씩 넣어가며 거품기로 저어 섞는다. (5)반죽에 체 친 밀가루와 체리를 넣어 살짝 저은 후 머핀 틀에 2/3정도 채워 넣은 다음 180도의 예열된 오븐에서 25분간 굽는다. 막 구워낸 머핀은 밀폐용기에 두시간 정도 담아두면 촉촉하고 부드러워진다. (3) 체리빙수 색깔이 무척 곱다. 얼음도 향이 좋고 아주 맛있다. 재료:손질된 체리 1/2컵, 물 5컵, 키위, 빙수용 팥, 연유, 체리시럽 만드는 법 (1)체리는 씨를 제거해 믹서기에 물과 체리를 넣어 곱게 갈아 냉동실에서 얼린다. (2)그릇에 간 체리얼음, 팥, 체리, 키위 순으로 담는다. (3)위에 연유를 얹어 완성한다. 체리의 향과 맛을 많이 느끼려면 체리 얼음을 만들 때 체리를 좀 더 넣고 팥이나 연유의 양을 줄인다. 그러면 영양도 좋고 보기에도 그만인 빙수가 만들어진다. (4) 체리스콘 담백하고 칼로리가 낮은 스콘은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에게 인기가 있는 빵이다. 여기에 체리를 넣으면 향긋한 체리향과 달콤함이 어우러져 아주 고급스러위진다. 재료:손질된 체리 1컵, 우리밀가루 300g, 버터 80g, 꽃소금 1작은술, 베이킹파우더 1작은술, 설탕 30g, 달걀 1개, 플레인요플레 1팩, 달걀물 약간 만드는 법 (1)체리는 씨를 제거 한 후 큼직하게 썬다. (2)밀가루, 베이킹파우더를 섞어 체에 친다. (3)체에 친 밀가루에 버터를 넣고 양손으로 보슬보슬하게 만든 뒤 꽃소금, 설탕을 넣고 가볍게 섞는다. (4) (3)에 달걀, 플레인요플레, 체리를 넣고 가볍게 뭉쳐 반죽한 뒤 동그랗게 뭉쳐 볼에 담고 랩을 씌운다. 냉장고에 30분간 휴지시킨다. (5)휴지시킨 반죽을 꺼내어 덧밀가루를 뿌리며 가볍게 주무른 뒤 두께 2.5㎝ 정도 되도록 밀대로 민다. 모양이 있는 둥근 틀로 찍어낸다. (6)틀로 찍어낸 반죽을 철판에 간격을 두어 얹는다. 윗면에 달걀물을 고르게 바른 뒤 180℃로 예열 된 오븐에 15∼20분 정도 구워낸다. (5) 체리 타르트 갑자기 손님이 찾아 왔을 때 간단하고 보기 좋게 내놓을 수 있는 간식. 또한 홍차나 커피랑 잘 어울리는 쿠기로 타르트에 보기 좋게 체리를 올려보자. 타르트는 만들어도 좋지만 대형 할인점에 팔기도 하고 타르트가 없으면 담백한 과자를 이용해도 된다. 재료:체리, 생크림(럼, 설탕), 타르트 만드는 법 (1)볼에 생크림을 넣고 거품기로 거품을 내다가 럼, 설탕을 넣고 단단하게 거품을 올린다. (2)타르트에 생크림을 약간 담고 체리를 살짝 얹어 완성한다. 글 사진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도움말:북서부체리협회·촬영협조:쿠킹아트센타(www.foodcod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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