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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 자민당 지방선거 공약「침략·식민지배 인정」 삭제

    【도쿄 연합】 일본 집권 제1여당인 자민당은 오는 4월 통일지방선거를 앞두고 마련한 「우리당의 공약」에서 과거 침략행위와 식민지지배를 인정한 대목을 삭제할 방침인 것으로 2일 알려졌다. 이는 최근 세불리기를 거듭하고 있는 자민당내 부전및 사죄 국회결의에 반대하는 「종전 50주년 국회의원연맹」(회장 오야성량)의 강력한 요구에 따른 것이나 보수우익세력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음을 증명함과 아울러 시대착오적 보수회귀및 국수주의화로 향후 자민당의 움직임이 크게 주목된다. 자민당 소식통은 3일 열리는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총무회에서 「우리당의 공약」에 포함된 『우리나라의 침략행위와 식민지배 등으로 많은 사람에게 참기 어려운 고통과 슬픔을 초래했다는 인식에 바탕해』라는 표현을 빼기로 했다고 밝혔다.
  • 사체발굴 형사들 “이럴수가…”/국교생 3남매 살해 스케치

    ◎맏딸 졸업장 보관 담임교사 오열 ○…3남매 살해·암매장 사건이 알려지자 대구 시민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데 대해 기가 막히고 어이 없어 하는 모습. 이 사건 수사를 지휘해온 이대원 수성경찰서장은 『사건을 해결하고도 영 꺼림칙하다』며 『사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어 언론이 범인과의 인터뷰를 하지 않는게 좋겠다』고 한숨. 이들의 살해소식을 들은 황금국교 교사들과 급우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며 큰 슬픔에 잠겼다.지난 17일 졸업식을 가진 이 학교는 졸업예정인 혜정양이 돌아오지 않아 담임인 남순자씨(45·여)가 졸업장을 보관하고 있는데 남교사는 『혜정이가 돌아오면 전해주기 위해 졸업장을 가지고 있는데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갔다니…』라며 끝내 오열. 범인 김씨는 범행날인 지난달 30일 하오 『산에 나무를 캐러 가자』고 아이들을 속여 범행장소까지 유인,잔인하게 살해했으며 결국 경찰수사에서도 앞뒤가 맞지 않는 거짓말을 계속하다 거짓말탐지기에 양성반응을 보여 경찰로 하여금 범인임을 확신케 했다. ○…수사초기부터 김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김씨와 줄다리기를 하던 경찰은 본격수사 15일이 지난 20일 밤 거짓 알리바이를 대다 지친 김씨에게 거꾸로 『범행에 사용한 흉기에서 아이들의 혈흔반응이 나타났다』고 거짓증거를 대며 『꿈에 자식들이 나타나지 않느냐』고 설득,결국 자백을 받아냈다고. 김씨의 계속된 거짓말로 반신반의하던 경찰은 21일 0시쯤 김씨가 그린 약도를 보고 암매장 현장에 찾아갔으나 나뭇잎등으로 은폐돼 사체 발견에 실패한뒤 김씨와 함께 다시 현장에 가서 막내 승일군의 사체를 확인. 설마 아버지가 자식들을 죽였을까 하며 발굴작업을 하던 형사들은 이장한 옛묘터 자리를 1.5m쯤 파내려 가다 승일군의 고사리같은 손이 얼핏 나오자 모두 눈시울을 붉히며 허탈해 하는 모습.
  • 가슴 설레임과 쓰라림/문희자 시인·서울대어학연(굄돌)

    『당신 하고싶은 것 있으면 꼭 하라구』 박사학위를 받고 취직이 되어 임지로 향하는 차안에서 남편이 말했다. 『나도 공부를 하고 싶어요』 남편이 공부하는 동안 나는 줄곧 일을 했다. 외국에서,외국어로 공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당신 나이가 또 얼마나 많은 가 등,남편은 누누이 설명했지만 나는 남편이 부임한 학교의 대학원 입학 허가를 받아내고야 말았다. 첫날의 강의실.50명쯤 되는 학생들은 모두 나보다 어렸다.그러나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강의실을 팽팽하게 채운 새학기의 긴장감.대학을 졸업한지 20년만에 외국의 강의실에 내가 앉아 있다는 황홀감.다시는 배울 수 없으리라는 실의로 부터의 해방감,그무엇보다도 내가 여기 앉아있다는 실존적 기쁨. 나는 마침내 밥짓기,청소하기,심지어는 남편과의 대화마저 하기 싫었고 나혼자만의 세계에 매몰되고 싶었다.그때부터 나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갈등 속으로 빠져들어갔다.남편의 하루 일이 끝나는 밤 11시까지는 절대로 책을 펴지 않고 그 후의 모든 시간은 내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으로 정했다.그러나 이런 「시간의 분할제」를 시도했지만 나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가슴 설렘과 가슴 쓰라림의 틈바구니에서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나는 설렘과 쓰라림의 흔적을 담은 학위를 얻었다. 며칠전 60대 「할아버지 대학생」의 보도에 접했다.이 보도는 웬일인지 나로 하여금 「설렘」과 「쓰라림」을 슬픔이라는 색깔로 물들게 한다.「60에 시작해 봤자」라는 생각과 「60이 시작이지」라는 생각 사이를 맴도는 슬픔이라고나 할까.
  • 대마초 피운 가수 심신 구속

    서울지검 강력부(김승연 부장검사)는 4일 인기가수겸 탤런트 심신(28·서울 서초구 우면동 동부그린빌라)씨를 대마관리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심씨는 지난해 11월 평소 알고 지내던 김모씨(33·구속)와 함께 자신의 집에서 대마초 1g으로 담배 2개피를 만들어 피운데 이어 지난달 16일과 19일에는 용산구 이태원동 C아파트 주차장에 세워둔 김씨의 승용차안과 자신의 집에서 대마초를 피우는 등 모두 6차례에 걸쳐 대마초를 흡연한 혐의를 받고 있다. 심씨는 『지난해 6월 관광목적으로 미국에 갔다가 재미교포의 권유로 대마초를 처음 피워보고 귀국한 뒤 야생대마를 소지하고 있던 김씨와 함께 자주 대마초를 흡연해 왔다』고 밝혔다. 심씨는 90년 「그대 슬픔까지 사랑해」로 연예계에 데뷔,「욕심쟁이」,「오직 하나뿐인 그대」등을 히트시켜 스타덤에 올랐다.
  • 화가 천경자/화려한 색조…꽃·뱀·여인집착(이세기의 인물탐구:68)

    ◎독창적 화풍… 한색깔 고르려 수십번씩 검토/91년 「미인도사건」뒤 잠적… 심한 우울증 앓아/묵화 능한 어머니 곁에서 그림 시작… 글솜씨도 뛰어나 천경자 「깊은 우물속에 깔린 신비한 보라색과도 같은 「한」과 「찬란한 절대 고독」의 이미지,꽃과 뱀과 여인과 화려한 파스텔조의 환상적인 색조라면 누구라도 쉽게 화가 천경자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화면은 날이 갈수록 청청하여 영혼과 빛과 눈부신 색채의 향연을 변함없이 변주하고 있다.그림 외에 글솜씨로도 유명한 그는 수필집 「한」의 경우 「한이 한없이 나간다」는 말을 유행시킬 정도였고 70년대 남태평양 풍물전을 비롯한 해외스케치전은 관람객이 줄을 짓는 이변을 낳았다.어쨌든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중에서 대중적인 인기스타가 아닌 이상 글과 그림으로 이처럼 폭넓게 회자된 인물은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지난 91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움직이는 미술관」이 전시한 그의 「미인도 모사품사건」이후 그는 한때 화단에서 모습을 감춰버렸다.당시 이 작품의 진위여부를 놓고 『내그림이 아니라』는 작가의 주장과 『작가의 그림이 틀림없다』는 미술계와의 팽팽한 대립속에서 작가를 믿지 못하는 세태에 심한 환멸을 느낀 나머지 그는 오랫동안 심적 타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대인관계 비사교적 그의 성품은 그가 좋아하는 미모사만큼이나 민감하다.작은 바람소리 하나에도 무심하지 않아 옳지 않은 것을 동조하거나 싫은 것을 적당히 수용하는 법이 없다.대인관계도 다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로서는 전혀 비사교적일 뿐만 아니라 사람을 가리고 낯가림이 심한 편이다.그림도 그렇다.색깔을 쓸 때도 발색을 억제하는 반대색을 쓰기 위해 연보라·남보라·황토에서 녹청을 동원하고 그것이 이 그림에서 얼마만큼 확실한 효과를 나타내는가를 까다롭게 따진 다음 이를 선택한다.그러고 나서도 멀리서,가까이서 수십번씩 견주어보고 3∼4개월이 지나 썩 괜찮다는 결론이 나올 때 비로소 화폭 앞을 떠난다. 이른바 동양적인 정조를 바탕으로 하는 그의 작품에서의 조형적 특징은 「천경자풍의 인물을 전형화」하는 데 결정적 성공을 거둔 점이다.평론가 심항섭은 동양화의 인습에서 벗어나 섬세한 감각과 신선한 착상력을 지닌 그의 그림에 대해 『화가로서의 최종적인 꿈인 자기만의 화풍을 선명히 세웠고 색채선택과 배치에도 그만의 확고한 독창성을 성취하고 있다』고 단적으로 평한다.즉 「새로운 조형적 가치실현」과 「개별적 형식의 완결」이라는 어려운 등식을 동시에 갖추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초기에는 주로 뱀(사)의 무리에서 느낀 감흥을 사실적인 기법으로 표현했고 특히 부산 피란시절에 발표한 서른다섯마리의 뒤엉킨 뱀의 「생태」는 풍경과 정물에 집착하던 화단에 커다란 충격의 논란을 던졌다.이후 초현실적인 시적 이미지들이 화면을 지배하면서 그는 자전적 요소를 띤 모티브로 아네모네·라일락·팬지·아스파라거스 같은 요요한 이향이 가득한 꽃무리 속에 화사하게 떠오른 여인의 희구를 그려내고 있다. 그의 운명은 그가 항상 예감한대로 줄기차게 쏟아져내리는 폭포수와 같진 않았다.세차게 흘러내리다가 어느 대목에선가 브레이크가 걸리듯 곤두박질치는 아픔과 정면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는 마치 파란을 자초하는 것처럼 비치기도 했다.따라서 한이 많고 고독하다고 하지만 그의 한은 그가 스스로 선택한 한이며 고독 또한 그러하다. 어릴 때는 연극배우를 꿈꾸기도 하고 노랑·파랑·분홍색등 밀랍냄새가 코를 찌르는 오사마(왕양)크레용과 미쓰보시수채화물감을 으깨고 주무르면서 묵화·서도에 능한 어머니 박운아여사 곁에서 그는 하루종일 그림그리기를 지루해 하지 않았다. ○여동생 죽음에 충격 광주농고 졸업후 군청에 다니던 부친(천성욱씨)은 딸이 의과대학에 가기를 원했으나 그의 심성과 감성을 이해한 어머니가 패물과 논을 팔아 마련해준 여비로 어렵게 도쿄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3년만에 돌아오자 집안은 몰락했고 그의 결혼실패에 이어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의 죽음,그 불운의 소용돌이에 말려 시련을 견디고 있을 때 부친마저 세상을 떠나는 불상사가 겹쳤다.언젠가 그는 「낙인」이란 수필에서 「나의 인간성에 배어 있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적요한 낙인은 바로 부친의 불행과 이 여동생의 죽음 때문에 박힌 슬픔의 표적」임을 밝힌 적이 있다. 화가의 일생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젊은 시절에는 가정과 인간에의 정이 스민 화면에 「고통과 황홀감을 공존」시켜왔고 자녀가 모두 출가하고 평생의 반려이던 어머니마저 85년 타계후 가정도 혈육도 떨쳐버린 상황에서 그는 「꽃도 피고 가족도 많던 시절에는 생기찬 리듬감이 화면에 넘쳤으나」 이제는 대양에 뜬 섬처럼 오로지 홀로 남아 「화가」로 존재하는 자신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설령 찬란한 미래가 또 있다 하더라도 그는 「비오지 않은 가문 봄날,움트려고 파닥거리는 라일락나무 같은 과거에 더 깊은 애착과 미련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자녀는 2남2녀. 모사품사건이후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글은 쓰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빛과 색채의 순례자로서 그는 정밀(정밀)한 시적 정취와 아름다움을 넘어선 승화된 고독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9년전부터 살고 있는 압구정동 한양아파트의 모든 방은 그가 그린 그림만이 가득,그속에서 지난 4년간 예술원 회의에 나간 외에 올 11월1일부터 한달간 호암미술관이 초대한 화력 50년전과 80년이후 15년만의 개인전을 위한 작업에만 온통 매달려 있다.회고전 성격을 띤 이 전시에는 그가 직접 소장하고 있는 42년 선전 입선작들과 부산시절의 「생태」,최근작인 「우수의 티나」 「누가 울어」시리즈등 평생의 화업이 한눈에 펼쳐진다. 거의 하루종일 화폭 앞에 대좌한 채 이제로부터 몸속에 침잠한 예술적 기운을 한점 미련없이 출산시키는 순간이다.그 외엔 영화광이던 젊은 시절을 되살려 공포영화·공상영화를 보거나 겐자브로의 소설을 읽는다.여전히 걸어다니는 화폭처럼 화려한 옷차림을 즐기고 아침시간에 커피 한모금,지난해부터 술은 하지 않는다. ○화사한 옷차림 즐겨 그는 특유의 호남사투리로 아무리 괴롭고 슬픈 것을 말할 때도 웃고 또 별로 슬프지 않은 일도 그가 한을 담아 말하면 왠지 콧날이 시큰해지는 순수한 감동과 감상을 잃지 않는 점이 특징이다.그러나 나이에 따라 슬픔이나불행은 역시 세월의 금사망속에 망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버리고 관유온자한 자세로 자신에게 얼마나 더 충실할 수 있는가를 때때로 자문하기를 잊지 않는다. 그의 삶은 그대로 예술에 집결하고 귀결하고 있으며 그의 그림들은 「서정적인 분위기」와 「서정시적인」 내용을 함축하면서 작품 하나하나가 「천경자사」라는 하나의 커다란 물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남과 다르다.그리고 지금 「고독으로 미채(미채)된 삼림속에 그가 꿈꾸는 예술의 전당을 짓기 위해」 화폭이라는 그만의 광산에서 그는 진짜 보석을 캐내고 있는 것이다. 사치하리만큼 눈부신 색채의 범람으로 그의 화면은 한층 탁마된 다이아몬드를 구사하고 어느때는 투명한 루비며 사파이어가 그림의 창안에서 언뜻언뜻 상서로운 광채를 발한다.인물의 눈이라든가 중요한 부분에 미점으로 사용하는 금분조차도 단순히 호사스러운 치장이 아닌 것이 세상사로부터 절연된 듯한 순화된 감정과 표정은 그 자체가 그대로 「극미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연보 ▲1924년 전남 고흥 출생 ▲1941년광주욱고녀 졸업 ▲1944년 도쿄녀미전졸업, 일본문전 무감사작가 소한천청·부산금성사사.재학중 일본문전·청금회전 입선,조전(선전)「조부상」(23회)「노부」(24회)연입선 ▲1946년 첫개인전(광주여고 강당) ▲1949년 서울개인전(동화백화점화랑) ▲1949∼52년 조선대 교수 ▲1952∼74년 홍익대 교수 ▲1953년 부산 개인전 ▲1954∼74년 홍대교수 ▲1955년 대한미협전서 「정」으로 대통령상 수상,백양회 창립멤버 ▲1960∼81년 국전 초대작가및 추천작가 심사위원 심사위부위원장 운영위원역임,국전 초대출품 ▲1963년 도쿄개인전(서촌화랑) ▲1965년 도쿄개인전(이토화랑) ▲1967년 말레이시아 초대전 ▲1969년 프랑스 파리 아카데미 고에즈 연수,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사모아 타이티 첫스케치 여행,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 ▲1970년 남태평양 풍물전 ▲1973년 현대화랑 초대전 ▲1974년 아프리카 풍물전 ▲1977년 한국현대동양화 유럽순회전 ▲1978∼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정회원,이후 예술원 회원전 출품 ▲1979년 인도 중남미 풍물전 ▲1980년 개인전(현대화랑) ▲1981년 하와이등 미주지역스케치 ▲1990∼94년 권옥연 변종화 윤중식과 4인전(이목화랑),멕시코여행 오월문예상(65년) 서울시문화상(71년) 3·1문화상(75년) 예술원상(79년) 은관문화훈장(83년) 수필집 「언덕위의 양옥집」「여인소묘」「유성이 가는곳」「한」「자유로운 여자」「쫑쫑」「캔맥주 한잔의 유희」「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자서전 「내 슬픈전설의 49페이지」,기행문 「천경자 남태평양에 가다」「아프리카 기행화문집」 등
  • 소설가 강신재(이세기의 인물탐구:67)

    ◎「젊은 느티나무」로 60년대 낭만주의 새바람/주제설정 명확하고 작중인물 심리파악에 민감/오페라 가수가 아리아 부르듯 혼신의 창작작업/“언제나 깨어있는 작가”… 최근엔 역사재조명 작업 전념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냄새가 난다.아니,그렇지는 않다.언제나라고는 할 수 없다­ 이렇게 시작되는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는 1962년 이 소설이 발표되자 문단은 한동안 「젊은 느티나무 감동」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듯했다.당시 카뮈 사르트르의 반항과 부조리문학에 감염되어 기진하고 황폐하던 젊은이들에게 이 한편의 명편은 푸르른 낭만과 사랑의 절제를 심어줬으며 「비누냄새」는 지금까지도 싱그러운 젊음의 상징으로 대변되고 있다. 강신재소설은 현대적 감각과 단편소설만의 「영롱한 완벽성」을 추구하면서 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화섬의 문체가 특징이다.그의 글은 독자에게 긴장된 추적을 강요하지 않는다.난해한 관념을 함축하기보다 간결하고 명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을 설명해낸다.사랑에 빠진 한 소녀가 상대방 청년에게 느끼는 미묘하고도 애틋한 감정을 「그에게서 비누냄새가 난다」고 표현한 것이 그 예다. ○천분의 재질 갖춘 작가 일찍이 월탄은 그의 소설을 향해 『주제설정이 명확하고 작중인물의 다면적·복합적 심리파악에 특히 민감하다』고 했고 남의 작품평에 까다로운 박화성도 『인물들의 개성을 신기에 가깝도록 그려내기 때문에 그의 소설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찬사를 보냈다.평론가 김윤식은 그의 첫장편소설인 「임진강의 민들레」에 이르러 『천분의 재질로 황홀한 경지를 이룩한 작가』임을 전제,『만일 불모성을 향한 소멸의 미학이 사랑이라면 한국문학은 이 작가에 의해 종종 양식에의 도전을 받게 될 것』을 예고했다. 작가자신은 「언제나 깨어 있는 작가」이기를 원한다.그리고 작품을 쓸 때마다 자신의 슬픔이나 기쁨을 『마치도 오페라가수가 전심전력을 기울여 아리아를 부르듯,혹은 해변의 빛과 볕에 마음을 그을리듯』 그렇게 함몰된 상태에서 혼신을 다했다고 말한다.이런 투철한 문학정신으로 63년 「현대문학」에 연재한 「파도는 노소층을 막론한 이례적인 절찬을 모았고 그후 20여개에 이르는 신문연재소설도 일과성이 아닌 문학작품의 범주에서 독자의 수준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의 삶을 이리 밀치고 저리 밀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사회기구의 힘을 어떻게 느끼지 않을 도리가 있으며 그것의 포악과 비정과 어리석음을 작가로서 어찌 무심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모든 시대상의 아픔을 가족사나 남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승화시키면서 작품의 진실과 완벽성에 천착할 뿐 이리저리 가꾸어 맵시나게 만들자는 생각은 애초부터 갖고 있지 않았다.그런 만큼 「감각적」이라거나 「아름다운 수채화」란 말을 듣기보다 「이지적인 필치」「냉정한 태도로 대상을 간파한 문학작품」이란 평을 들을 때 그는 비로소 작가로서의 긍지를 느낀다. 그에게선 시류에 휩쓸리거나 감정에 복받치거나 상황에 따라 모습을 변환시키는 속물근성은 찾아볼 수 없다.불가근불가원으로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세상을 냉철하게 정시하고 어떤 소설에서든지 적시에 삶의 진실과마주치는 필연을 제시해나간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따뜻한 표정은 실은 무한히 다정할 것 같지만 은근히 까다롭고 은근히 고집과 자존심이 세어서 하지 않는다고 마음먹은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60년대말 조선일보에 「유리의 덫」을 연재할 때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당시 편집국장으로 있던 선우휘가 그에게 연재소설을 부탁했고 『원고료는 작가에게 실례가 되지 않게 대접해드리겠다』고 단서를 붙였다.그러나 연재 한달만에 붙여온 고료는 결코 섭섭지 않게 대접하겠다는 약속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그는 편집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일년동안 쓰겠다고 약속했으니 그 약속은 지키겠다.그러나 원고료는 보내지 말라.이번에 보낸 고료도 다시 가져가라』고 했다.이 전화를 받은 선우휘는 혼비백산하여 사정을 알아보고는 그에게 백배사죄한 후 그의 부군인 서임수씨를 만나 『서선생,애 많이 잡숫갑시다』했다는 것이다.「그처럼 까다로운 여류작가를 부인으로 모셨으니」 부군으로서 참으로 고달프리라는 우려였다. ○남편의 식사는 손수준비 그러나 실은 그는 누구보다 가정적인 여류로 유명하다.번거로운 모임이나 단체에 관여하지 않고 어쩌다 문단모임에 나와서도 시간이 되면 소리없이 빠져나가 부군의 식사를 손수준비한다.미식가이며 특히 무청과 배추줄거리를 좋아하는 부군을 위해 새벽마다 시장에 나가 채소상이 길에 버린 무청을 거둬들이자 시장사람들이 오죽하면 『집에서 토끼를 기르시나보다』고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그런 그를 문단에서는 「쌀쌀이」란 별명을 붙이고 있지만 낯모르는 후배가 책을 출간하여 증정하면 잘 받았다는 축하카드와 함께 반드시 문학의 정진을 격려하는 글을 써서 보내준다. 언젠가 「북간도」의 작가 안수길은 『강신재가 있으면 장미꽃밭처럼 화사하고 향기롭다』고 말한 적이 있다.원로·중진들이 엄숙하게 모여앉은 자리에 그가 나타나면 무겁고 지루하고 낡아보이던 모든 것이 금가루를 뿌린 듯 금세 현란해진다는 것이다.그것은 무엇보다 그의 타고난 미모탓일 수도 있다.지금도 여전히 섬연하여 만모의 기색이나 비풍이 없이 사람을 반기고 감싸면서 그가 쓴 「레이디 서울」처럼 만년숙녀의 모습을 변함없이 간직한다. 그는 지금의 남대문근처인 용산구 어성동에서 태어났다.부친은 세브란스병원 의사인 강태순씨이고 어머니는 숭의학교를 졸업한 신여성으로 풍금·피아노가 있는 환경에서 비바람을 모른 채 곱게 성장했다.경기고녀에 다닐 때는 영미문학에 심취했으나 일본인 교사가 『귀축미영과 전쟁을 하고 있는데 영문학을 한다는 것은 사상이 불건전해 보이기 쉽다』고 경고하여 이전 가사과에 가게 되었다.그러나 염색이니 자수·재봉은 체질에 맞지 않아 대학재학중에 만난 서임수씨와 결혼,우연히 써본 단편소설을 손소희를 통해 김동리에게 보였고 과찬의 추천사와 함께 문단에 등단했다. ○아직도 청랑의 미모간직 그가 소설을 쓰기까지는 서임수씨(남성해운 이사)의 보이지 않는 외조를 빼놓을 수 없다.서임수씨는 경향신문부사장·국회의원·국민대학장등을 지낸 저명인사로 그는 소설집필에 필요한 모든 자료와 책들을 일일이 구입해주어 서재에 산적해 있는 수천여권의 장서중작가의 손으로 산 책은 한권도 없을 정도다.자녀(건축가 기영씨와 피아니스트인 타옥씨)는 결혼후 따로 나간 지 오래이고 동호가 내려다보이는 옥수동 한남 하이츠빌라에서 부부가 새벽산책과 음악과 미식을 즐긴다. 그에게도 어쩔수없이 세월이 스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이제는 청랑의 미문이나 감각의 번뜩임을 휘두르기보다 「육성에 닮아 있을수록 문학이 우수하다」는 것을 지키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사실로 존재하던 소설이며 소설은 존재할 수 있던 역사』라는 공쿠르의 말에 공감하여 최근에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재조명하는 작업에 계속 전념해 있다.지난해말 아홉번째 역사소설인 「광해의 날들」을 펴냈고 이번 겨울 조선조말을 무대로 하는 다음 작품의 구상을 끝냈다. 별은 딸 수 없는 물건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며 웃고 울고 생각하는 인간의 행위는 이후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그리고 그런 행위에 많은 시간과 힘을 바치는 사람들의 행렬에 끼어 그는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별빛 같은 화섬의 광채를 언제까지나 비쳐줄 것이다. □연보 ▲1942년 경기고녀 졸업 ▲1944년 이화여전 중퇴 ▲1949년 「문예」지 소설「얼굴」「정순이」추천 ▲1958년 단편집 「희화」(계몽사) ▲1968∼82년 문협 PEN이사 ▲1982년 한국여류문학인 회장,한국소설가협회 분과위원장 ▲1992년 소설가협회 대표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예술원 정회원, 소설가협회 대표위원 단편집 「여정」(중앙문화사 59년)「젊은 느티나무」(대문출판사 72년)「황량한 날의 동화」(삼중당 76년) 장편집 「청춘의 불문률」(여원사 60년)「임진강의 민들레」(을유문화사 62년)「이 찬란한 슬픔을」(신태양사 64년)「그대의 찬손」(신태양사 65년)「오늘과 내일」(을유문화사 66년)「신설」(대문출판사 67년)「숲에는 그대 향기」(대문출판사 69년)「유리의 덫」(삼성출판사 70년)「파도」(대문출판사 72년) 강신재대표작전집 8귄(삼익출판사 74년)「레이디 서울」(선일문화사 75년)「서울의 지붕밑」(문리사 76년)「그래도 할말이」(서음출판사 77년)「마음은 집시」(태창문화사 77년)「밤의 무지개」(청조사 77년)「천추태후」(동화출판사 78년)「불타는 구름」2권(지소림 78년)「우연의 자리」(명서원 78년)「모험의 집」(범조사 79년)「사도세자빈」3권(행림출판사 81년)「사랑의 묘약」2권(중앙일보사 86년)「신사임당,문정왕후 아수라」(한벗 87년)「간신의 처」(문학세계사 89년)「명성황후」3권(세명서관 91년)「광해의 날들」(창공사 94년) 수필집「사랑의 아픔과 진실」(중앙문화사 66년)「모래성」(서문당 74년)「거리에서 내마음에서」(평민사 76년)「무엇이 사랑의 불을 지피는가」(나무사 86년) 한국문협상 여류문학상 중앙문화대상 예술원상
  • 체첸 “항전 계속” 선언/두다예프 특사는 「무조건 휴전」 촉구

    【그로즈니·모스크바 AFP AP 연합】 체첸 분리독립의 상징이던 수도 그로즈니의 대통령궁을 점령한 러시아군이 20일 체첸군 거점을 분쇄하기위한 맹포격을 퍼붓는 가운데 체첸군은 수도 중심가 동쪽 구역에서 철수,서쪽의 순자강 서쪽에 새 방어선을 구축,항전을 계속했다. 아슬란 마사도프 체첸군 참모총장은 AFP 통신과의 회견에서 러시아군의 맹렬한 포격으로 그로즈니 중심부의 진지를 지킬 수 없다면서 수도 방어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철수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그는 또 체첸군이 현재 그로즈니를 남북으로 흐르는 수도 서쪽 부근의 순자강을 따라 배치된 상태라고 덧붙였다. 조하르 두다예프 체첸 대통령은 앞서 러시아의 대규모 군사작전이 실패로 끝났다고 주장하고 『체첸 주민들은 이보다 더한 고통도 감수,슬픔을 안겨주었던 사람에게 그 슬픔을 되돌려줄 준비가 돼있다』면서 러시아에 항전을 계속할 뜻임을 밝혔다. 또 모블라디 우두고프 체첸 대통령 대변인도 체첸내 군사 행동이 이제 막 시작됐다면서 옐친 대통령의 대체첸 군사작전 종료 선언은 러시아의 「소망사항」일 뿐이라고 일축했다고 인테르팍스 통신이 전했다. 우두고프 대변인은 체첸군이 대통령궁에서 철수한 것은 그간의 포격으로 진지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됐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이 때문에 체첸군 사령부를 대통령궁에서 근접한 지역으로 옮기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두다예프 대통령의 특사자격으로 헤이그에 머물고있는 아슬람벡 카디예프는 소수민족권한보호에 관한 한 국제회의를 앞두고 기자들과 만나 『대통령궁의 포기는 인명피해를 막기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러시아측에 아무런 전제조건없이 휴전에 들어가자고 촉구했다. ◎전면전 “끝”­게릴라전 “시작”/반러 감정 삼화… 자유총선 성사 미지수/복구비 조달 난제·크렘린정국 변수로/러의 체첸자치공 장악 이후 체첸군의 상징적 저항거점이던 대통령궁이 함락됐지만 「진짜」 전쟁은 이제 시작이라고 해야 옳을 것같다.옐친 대통령은 전쟁 1단계인 군사작전이 종료됐음을 선포하고 곧 수도 그로즈니 일대의 피해 복구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그러나 체첸군은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있고 여러 정황으로 보아 전쟁의 매듭이 러측의 희망대로 끝날 가능성은 희박한 것같다. 물론 체첸군 주력이 시외곽으로 옮겨감에 따라 전쟁 양상은 종전과 달라지게 됐다.그러나 앞으로 체첸군이 펼칠 작전은 체첸 영토 대다수를 차지하는 산악을 거점으로 시가전을 병행하는 게릴라식 전쟁이다.러군으로선 자칫 「제2의 아프간」을 연상케 하는 악몽에 빠져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러당국은 일차적인 피해복구 작업이 끝나는대로 모스크바에서 임명하는 행정관을 파견해 「자유총선」을 실시,새로운 체첸정부를 출범시키겠다는 계획이다.그러나 현지주민들의 반러시아 감정을 감안할 때 이런 정치적 수순이 순조롭게 진행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 러시아 재정 형편상 복구 작업이 제때 착수되기는 힘들 것같다.러정부 보고서는 피해복구액수가 10억달러 정도로 밝히고 있으나 도로,주택,전기시설 등 각종 사회기반 시설이 거의 완파돼 실제 복구비용은 이를 훨씬 웃돈다는 지적이다.러정부에 당장 이를 감당할 돈이 없다. 체첸 현지사정 못지않게 우려되는 사태는 이번 전쟁을 계기로 러정국 전반이 엄청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이다.뚜렷한 명분도 없는 이번 전쟁을 시작함으로써 옐친은 국민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이던 민주개혁,지식인층이 등을 돌렸고 몇차례 정치적 위기 때마다 자신을 지원해준 군부로부터도 지지를 기대하기 힘들게 됐다.국방차관 3인을 비롯,사령관급 장성들이 전쟁에 반대하다 무더기로 해임된 점이 단적인 예이다. 옐친이 기대고 있는 유일한 세력은 이번 전쟁을 부추긴 강경일색의 측근보좌관 몇명 뿐이다.옐친이 이들의 정치적 「포로」가 돼 강경 일변도로 국정을 운영하면 그의 정치적 파국은 오래 남지 않았다는 분석이 유력하다.군부쿠데타,95·96년 양대선거 패배 등 여러 시나리오가 거론되고 있다. 이곳 관측통들은 체첸과 게릴라전이 계속돼 러군의 인명 피해가 계속 늘고 체첸침공으로 악화된 반러시아 감정이 코카서스 일대 체첸 주변의 다른 회교공화국들로 확산될 경우 크렘린 안에서 어떤 정치적 변고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다.그래서 이번 체첸침공을 옐친의 정치적 「자살 행위」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유일한 출구가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체첸측과 정치적 해결을 모색하는 일이다.물론 이를 위해선 옐친 대통령이 측근의 강경보수파 보좌관들 대신 민주개혁 세력들과 다시 손을 잡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그러나 이런 반전을 기대하기에는 옐친 자신이 지나치게 「독단적」「권위주의적」이고 러시아의 정치제도 전반이 너무 후진적이다.
  • 고신라 흙인형 남자상(한국인의 얼굴:14)

    ◎금방울음 터뜨릴듯 비통한 모습/주인사망 슬퍼하는 하인을 묘사/입벌린채 망연자실… 몸도 뒤틀려 신라의 흙인형은 조형술이 뛰어나 일찍부터 예술성을 인정받았다.과감한 생략기법을 구사했음에도 표정과 동작에서는 제작자의 의도가 확연히 드러난다.얼굴에 나타난 감정과 몸둥이를 통해 묘사한 율동이 그것이다.이러한 작품들 가운데는 별 다른 구분없이 그저 흙인형(토우)으로 부르는 한 떼의 유물들이 전해진다.말을 탔거나 끄는 사람,악기를 다루는 주악상,여러 표정의 남녀 인물상이 있다. 이들 흙인형들 중에서 슬퍼하는 남자인물상은 아주 감동적이다.무릎을 꿇고 슬픈 얼굴을 한 인물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과 서서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인물상(국립경주박물관)이 있다.이들 인물상은 두손을 모아 한껏 예의를 갖춘 자세다.그러나 얼굴은 금새 울음을 터뜨릴 듯 비통해 보인다.슬픔을 못 견딘 나머지 몸 마저 뒤틀렸다.무릎을 꿇은 인물상이 더욱 그렇다. 무릎꿇은 인물상은 슬픔이 너무 커서 망연자실한 것인가,눈을 크게 뜬채 입도 다물지 못하고있다.우람한 어깨 한쪽이 올라간 것은 슬픔을 추수릴 수가 없는 탓이리라.손은 비록 대담히 생략되었을 지라도 그 끝에 까지도 슬픔이 포개어 졌다.소박한 솜씨 뒷전에 생동감 넘치게 살아난 동작과 표정은 가히 신라 흙인형미술(토우미술)의 진수라 할 수 있다. 서 있는 인물상은 오랜 슬픔으로 해서 거친 모습이다.입을 다물 힘도없고,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기력을 잃었나보다.이들 흙인형은 주인을 평생 모셨던 봉사자들이 그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라고 한다.죽음을 슬퍼하는 인물상 중에는 줄(현)이 달린 비파모양의 악기를 타면서 만가를 부르는 주악상도 있다.주인의 저승길을 탄주로 인도하는 이 인물상의 슬픔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자에 대한 봉사자들의 슬픔이 이쯤되고보면 주종관계가 보통이 아닐 것이다.이들 흙인형은 불행히도 출토지가 밝혀지지 않은채 막연히 경주출토품으로 전해질 뿐이다.그러나 공식적인 발굴조사에서 흙인형들은 주로 신라 지배자급 무덤들에서 나온다.이 같은 사실을 고려하면 무덤에 묻힌 주인공들을 위해 껴묻거리로 만들었을 것이다.결국 흙인형은 죽은 주인공의 사후세계 동반자 구실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흙인형이 출토되고 있는 이른 시기의 무덤형태(묘제)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경주에서 널무덤(토광묘)이 사라지면서 4세기 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돌무지 덧널무덤은 고신라특유의 무덤이다.한반도 전체는 물론이고 영남지방에서도 경주분지에만 존재하고 있다.시신을 넣은 나무널 위에 다른 큰 나무덧널을 씌우고 돌멩이로 덮은 뒤 흙을 쌓아 만들었다. 이 돌무지 덧널무덤은 신라가 연맹왕국으로 발전하는 시기에 나타났다.
  • 일본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임춘웅칼럼)

    아주 어렸을 적 이야기다. 일본여행을 하고 돌아오신 선친께서는 도쿄에서 목격한 일화 하나를 두고두고 들려주셨다.당시 일본에서는 2차대전 말기여서 거의 모든 식료품이 배급제였던 모양이다.일본 사람들은 배급을 받기 위해 긴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기가 예사였는데 줄을 서있다 B­29미군기의 폭격이 시작되면 줄은 순식간에 헤쳐지고 만다는 것. 선친께서 들려주고 싶었던 얘기는 그다음 부분이다.그런데 폭격기들이 사라지고 공습경보가 해제되면 앞서 흩어졌던 줄이 그전의 차례대로 그대로 복원되더라는 것이다.그러면서 선친께서는 우리가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됐는지를 그것을 보며 느끼게 됐다고 말씀하셨다. 선친께서는 이어 우리도 국민수준이 그들 수준에 가지 않으면 일본을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며 침울해 하시던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그런데 지금 계산을 해보면 선친이 감동을 받고 독립을 비관해 하신지 1년도 채안돼 우리는 해방을 맞았다.선친은 국민수준이 아니라도 미국이란 거대한 힘앞에 일본이 무너질 수 있다는 국제적감각은 없으셨던 것 같다. 지금 일본은 사망·실종자가 이미 4천을 넘어선 간사이(관서)대지진이란 천재를 당해 넋을 잃고 있다.그런데 외신들은 이런 재앙속에서도 일본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침착성과 질서의식이 어떤 수준인가를 잘 전해주고 있다.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꺼내 생사여부를 가려야 할 긴박한 상황의 인명구조작업에서도 서로 다투지 않고 차례차례 작업을 하는 극도로 감정이 절제된 질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외신들은 또 그 엄청난 사고현장에서 일본인들은 패닉(공포)과 같은 혼란상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치안부재 상태에서도 약탈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1년전 미국 LA의 지진 때는 약탈사건이 얼마나 많았던가. 피해가 제일 큰 고베에서도 교통질서가 정연하게 지켜지고 있다고 한다.우리나라의 한 특파원은 난민수용소에서 먹을 것이 부족해 모두가 굶주린 상황에서 얼마의 주먹밥이 제공됐을 때 공평하게 쪼개 나눠 먹는 감동적인 모습을 전하고 있다.또 그들은 시신을 붙들고 통곡하거나 몸부림치는 흉한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있다.일본인들이라고 어디 슬픔이 우리보다 덜하랴. 일본 사람들이 이런 천재를 의연하고 질서있게 대처하는 데는 지진에 대비한 오랜 훈련과 준비,그리고 그것을 맞는 마음의 대비가 있었던데도 한원인이 있을 것이다.그러나 그보다는 그들 특유의 질서의식과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인간이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가르치는 국민교육이 체질화된데 더큰 까닭이 있을 것이다. 이런 얘기를 접할 때 마다 되돌아 보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다.수도 서울에서 버스타는데 줄서기 하나도 아직 못하고 있는 우리들 말이다.
  • 과로순직 김정룡 차관보/미망인도 “장기기증”서약

    ◎장갑생씨, “남편과 같은길 걸으려 결심”/오늘 발인때 순애보 담긴 헌시 낭송 『당신은 나에게 아픔이었습니다/사랑의 아픔이었습니다/나는 당신으로 기쁨과 희락과 환희를 나누었고 함께 웃고 즐거워 할 수 있었습니다/(중략)생의 한 가운데서 표표히 나를 떠난 당신은 나에게 아픔이었습니다/영원히 사랑해요/여보』 평생을 공무원으로 봉직하다 지난 16일 과로로 쓰러져 뇌사판정을 받은 남편 김정룡 농림수산부차관보의 장기기증을 결정했던 부인 장갑생(52)씨가 자신도 사후에 장기를 기증할 것을 서약하면서 남편을 잃은 슬픔과 사무치는 그리움을 담은 애절한 헌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남편의 뜻에 따라 안구와 심장판막 등 장기 일부를 6명에게 기증,새생명으로 태어나게 한 장씨는 19일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를 통해 각막 등 이식 가능한 장기일체를 사후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장씨는 『기독교 집안이라 평소에도 장기기증에 대한 의견을 자주 교환,항상 장기기증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해왔었다』며 『사후기증을 서약함으로써 남편과 같은 길을 걷게 돼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특히 평소 고인이 「공무원은 끝까지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는 투철한 신념을 갖고 있어 더욱더 장기기증문제에 관심이 있었다는 장씨는 『남편의 육신은 이 세상을 떠났지만 성실과 신뢰로 따뜻하게 감싸주던 마음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며 애써 눈물을 감췄다. 장씨는 20일 상오 10시 이화여대 목동병원에서 열리는 발인예배에서 「당신은 나에게」라는 이 헌시를 낭송할 예정이다. 한편 정부는 김정룡 농림수산부 차관보(추서)를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키로 결정했다.
  • 매캐한 잿더미속 「평화고무」 간판만…/“지진 시름” 일 교민사회

    ◎신발공장·철공소 수백곳 폐회로/거의 영세업체… 하루벌이 교민 큰 걱정/민단 옷·식량 제공… “동포애 한가락 위안” 효고현 지진발생 3일째인 19일 낮.교포공장과 주택이 밀집해 있는 고베시 나가타구 오가이도로는 폭격을 맞은듯 폐허더미로 변해 있었다.벽돌더미와 전신주등이 지진으로 쓰러지면서 골목길들을 막고 있었다. 상가주택가 한쪽편에서는 경찰과 군인 10여명이 모여 있었다.대형 크레인과 굴착기를 동원,무너져 내린 지붕위에서 뭔가 구조작업을 하고 있었다.지진 3일째인 이날까지도 아직 흙더미에서 깔려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의 운명에 맡기기로 하고 다음 발길을 재촉했다.스가하라(관원)시장을 통과했다.이 시장은 연기속에 불길이 3일째 계속해서 솟고 있었다.연기가 사라진 쪽으로는 『가족의 시신이라도 찾는다』며 몇몇 젊은이들이 시장 이곳 저곳을 바삐 오갔다.한국인 공장의 상징과도 같은 「평화고무」에 다다랐다.화학공장이 많아서인지 매캐한 냄새가 구역질을 일으켰다. 「평화고무」라고 쓴 큰 간판이 무너진 지붕위에 걸쳐있었다.평화고무는 30년전 우리 교포가 세운 신발공장으로 이국땅에서 받은 차별의 한과 내일을 위한 꿈이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4층건물로 모두 16개사가 입주한 평화고무.한국인의 피와 땀으로 깃든 한국인의 터전이 하루아침에 재로 변한 것이다.대부분 종업원이 10∼20명 안팎이었다.영세 신발공업주들은 그러나 『경영하는 사람도 그렇지만 하루벌어 하루먹는 근로자들이 더 걱정이다』면서 한숨을 지었다. 「평화고무」에 세든 박주영씨(55·삼지제화대표)는 『나만 해도 피해액이 1억엔이상 될 것이다.하지만 이 공장에 모든 생계를 건 우리 근로자들의 생활은 정말 캄캄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 주변 5백여개의 군소 신발공장 가운데 80%인 4백여개의 공장이 전파됐다』고 말하고 『일본 케미컬 슈스의 80%를 생산하는 이곳의 공장피해만도 1천억내지 2천억엔에 달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평화고무」와 비숫한 「고쿠에이철공소」「다이큐우가공소」도 사정은 비슷했다.모두 한국인 땀이 밴 한국인의 생활터전이라는 점에서.교포 김상복씨(65·신발가공업)는 『각 공장등이 현재상태로 재개되려면 15년이 걸릴 것』이라며 『중국인과 한창 경쟁하는 시점에서 지진이라는 또하나의 적을 맞았다』고 하소연 했다. 가와니시(천서)도로를 빠져 큰길인 오미치(대도)길을 건넜다.아스팔트가 2백여m 가량 엿가락처럼 휘어진 채 푹 꺼져 있었다.교포가 많이 수용돼 있다는 가구라(신락)소학교를 찾았다.강당·복도·는 물론 들어선 로비에도 「피난민」이 가득했다.5백여명의 수용자가운데 30%가 한국인이라는 설명이었다.입구 정문에는 수용자명단과 함께 사람을 찾는 광고문도 보였다. 우리말이 서툰 김마사코(70)란 할머니는 『세간살이 하나라도 더 꺼내려다 노인들이 많이 죽었다』고 말했다. 오미치 길옆 한 블록을 건너 하스이케(연지)마을.재일대한기독교 고베교회가 눈에 들어왔다.이곳은 별다른 피해가 없어 한 관계자는 『피해 교포를 돕기 위해 모금활동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다시 한 블록을 건너 고베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유도대회가 열렸다는 현립 문화체육관을찾았다.로비에서부터 「수용소」였다.이곳 저곳에서는 노인들의 신음소리가 들렸다.대부분이 지진 충격을 벗어나지 못한듯 얼빠진 모습이었다. 체육관을 빠져 나오며 시야에 들어온 것은 마쓰노(송야)지역의 불에 타버린 목조2층주택들.바로 이곳은 월세 1만엔 안팎의 우리 근로자의 안식처였으나 모두 사라져버렸다. 시모야마테 민단건물로 향하는 동안 민단 구호물자를 싣고 어디론지 가고 있는 소형 마이크로버스가 눈에 들어왔다.본격적인 교포구호활동이 시작된 것이다.오사카 관서은행은 19일 6백만엔의 성금을 민단에 기부했다.관서제조협회,재일동포대한기독교회등 각종 단체와 교포들도 모포·옷·비상식량·의약품등을 민단으로 보냈다.대지진의 폐허 속에서도 동포애가 비극의 슬픔을 조금은 달래는 듯 했다. ▷신원확인 교포 사망자◁ ◇고베(신호)시 ▲김현수(72)▲진옥려(73)▲심일춘(32)▲최수광(20)▲진강작(71)▲장경자(40)▲박정옥(77)▲박열기(63)▲김효구(61)▲남관자(41)▲고수정(68)▲박영호(72)▲김무부(55)▲김상권(81)▲김순자(39)▲박영치(70∼75)▲신순이(연령불명) ◇니시노미야(서궁)시 ▲한동래(70)▲김일수(67)▲박용령(23)▲김천수(42)▲임숙혜(66)▲임정부(64)▲오행강(연령미상) ◇아시야(호옥)시 ▲김두오(75) ◇효고(병고)현 ▲이일평(연령미상) ◇이단시 ▲박금자(47)▲장순갑(70·서궁시)▲김군자(59·장전구)▲김성기(8·〃)▲안화대(33·〃)▲김향일(36·〃)▲고태윤(70·〃)▲김선주(60·〃)▲남홍(63·명석시)▲박옥용(44·장전구)▲박윤생(64·〃)▲정외선(56·〃)▲김서거(81·〃)▲현양순(67·〃)▲정우연(56·〃)▲이학선(83·〃)▲박열재(50·탄구)▲여양일(53·이기시) ◎교포기업 피해 1천억∼2천억엔/민단,전국 지부·지회에 생필품 지원 지시/효고현 피해규모·구호 현황 이번 효고현의 최대 피해지역인 고베시의 우리 교민은 모두 8만4천여명(외무부집계).이 가운데 한국국적으로 재외 국민등록을 마친 사람이 4만1천3백명.나머지는 조총련계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19일 현재 고베시 민단본부가 밝힌 인명 피해는 사망이 23명.그러나 효고현 경찰측은 이날 까지 사망한 한국인의 수가 19일 상오 현재 15명이라고 공식 집계하고 있다. 지진피해가 가장 컸던 고베시 나가타구의 우리교포는 1만여명인데 바로 이들 가운데 사망자는 적어도 50명에 이를 것으로 민단 관계자들은 밝히고 있다.교포들의 피해는 나가타구에 집중돼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어 이들 교포들의 피해액을 집계해보면 교포들의 전체 피해액을 추정할 수 있을 것으로 민단관계자들은 보고 있다. 나가타구에는 평화고무(대표 강순찬)·국영고무(대표 남창웅)·대구라버(대표 김해수)등 우리교포 기업들이 약 5백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대부분은 고무·화학계통의 기업.고무·화학계통으로서는 전일본을 통틀어 약 80%의 생산량을 맡고 있다.나가타시의 공업생산량은 효고현 전체의 60%로 일본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바로 이 지역의 교포대부분은 고무·화학계통의 영세기업을 운영하고 있거나 한국인이 경영하는 이 기업들에 취업하고 있다. 효고현의 한국인 기업관계자들에 따르면 현재 비공식집계로 교포의 전체 기업피해액만 1천­2천억엔이 이를 것으로 밝히고 있다. 이같은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지진이 발생한 지 사흘째인 19일 아직 이렇다할 복구에는 엄두도 못내고 있다.효고현 당국의 복구가 대부분 전기·전화등 공공시설의 회복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또 일본 당국도 복구를 위해 최선은 다하고 있으나 피해지역이 광범위한데다 통신·교통수단이 두절돼 이렇다할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시 관계자들은 『복구보다도 현재 실종된 인명을 구조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까지 밝히고 있다.따라서 당분간 전기·통신·가스등 공공기반시설의 복구외에는 개별적인 복구착수에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현재 민단측은 18일부터 일본 전국 각지부·지회를 통해 구호활동지시를 내려놓고 있다.19일 현재까지 고베시의 시방(서번)지부와 와카야마(화가산)현지방본부에서 생수·라면·손전등·모포 두 트럭분을 보내와 교포들이 수용돼 있는 각 수용소별로 구호활동에 여념이 없는 상황이다.구호품의 수집이나 배분에 있어서도 곳곳에서 교통소통에 애를 먹고 있어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있는 상황이다.
  • 김정룡 농림수산차관보 순직/남부가뭄지역 시찰하다 과로사

    ◎고인뜻 따라 장기기증… 6명 새삶 16일 아침 출근길에 갑자기 쓰러져 뇌사상태에 빠진 김정룡 농림수산부 차관보가 17일 하오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끝내 순직했다.향년 52세. 숨진 직후 고인의 장기일부는 『죽으면 장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내 육신을 나눠주겠다』던 생전의 뜻에 따라 6명의 중환자에게 이식돼 새생명으로 태어났다. 신촌 세브란스병원 이규창박사의 집도로 3시간여의 적출수술끝에 기증된 장기는 신장 2개,안구 2개,심장판막 등 6개로 모두 성공적으로 이식됐다. 김차관보는 16일 상오7시30분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자택 근처에서 조깅을 하다 머리에 갑작스런 통증을 느끼고 집에 돌아와 식사를 한 뒤 출근하려다 쓰러져 병원으로 가던 길에 승용차안에서 의식을 잃었다. 집에서 가까운 서울 영동 세브란스병원으로 먼저 가 뇌단층(CT)촬영을 한 결과 뇌출혈을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고 다시 앰뷸런스를 이용해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진 뒤 정밀검사및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회생하지 못했다. 부인 장갑생(52)씨와 가족들은 이날하오 최종적으로 뇌사판정이 나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속에서도 곧바로 가족회의를 열고 평소 독실한 기독교신자이던 고인이 입버릇처럼 되뇌곤 하던 장기기증을 결정해 병원측에 이같은 뜻을 전달했고 곧바로 이식수술이 이뤄졌다. 서울법대 행정학과와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고시행정과 7회에 합격,27세의 나이로 농수산부에 처음 몸담은 그는 24년간을 줄곧 농수산부에서 일해온 확실한 「농수산부맨」이었다. 양정국장·농업협력통상담당관·축산국장·농정국장 등 요직을 두루 걸쳤다. 지난해 5월 산림청차장으로 발령받아 잠시 타의에 의한 외도를 한 그는 12월28일 다시 「친정」인 농수산부로 돌아와 업무에 더욱 강한 의욕을 보여 쉴새없이 일해왔다고 동료직원들은 전했다. 가족과 동료들은 『고인이 최근 영·호남지방의 극심한 가뭄 때문에 몹시 고민해왔으며 지난주에는 2박3일 일정으로 영·호남 가뭄현장을 직접 시찰하고 14일 밤 돌아온 뒤 걱정하느라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일요일인 15일에도 집에서 쉬라는 가족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과천청사로 출근,가뭄대책과 채소류수급대책을 마련하는 등 농민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전력투구했다』고 말했다. 동료들은 『지난해 농안법파동과 농수산물물가안정대책,WTO체제준비 등으로 어려운 고비를 겪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뜨다니 너무 안타깝다』고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또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대학시절에는 산악반장을 맡았고 최근까지도 일요일이면 늘 산을 찾아 매우 건강한 체질이었는데 이렇게 졸지에 가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고 넋을 잃었다.
  • “신세계 열자” 상업성 벗기 힘찬 몸짓(브로드웨이 “새바람”:1)

    ◎뮤지컬·미술·춤·패션… 창조의 수도/1백년 영화거부,인간성 회복 도전/문화·경제적 흡인력 바탕… 뉴욕의 심장으로 자리매김 미국의 심장이자 세계의 심장을 자처하는 뉴욕 맨해튼의 브로드웨이에 새시대를 맞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세계금융의 중심인 월스트리트를 시발로 하고 있는 브로드웨이는 1894년 첫 뮤지컬 아도니스의 대히트 이래 미술·건축·뮤지컬·영화·오페라등을 꽃피우며 「20세기 세계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아 왔다.이제 1995년으로 문화의 꽃밭으로서 새세기의 원년을 맞은 브로드웨이.그 약동의 현장을 나윤도 뉴욕특파원의 취재로 약 20회에 걸쳐 싣는다. 『나를 살게 해주오 모든 불빛이 붉게 빛나는 브로드웨이에/오가는 사람 모두가 행복에 넘쳐 보이는 그곳에/사람들은 어리석은 꿈을 말하며 그 꿈의 실현을 기도하는/꿈이 헛됨을 알아도 결코 떠날수 없는 마을에//브로드웨이 불빛마다에 상심한 가슴들이 달려있고/불빛들은 수많은 슬픔을 이야기 하네/머리위의 불빛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을/무엇인가를 갚아야 할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인데』(하워드 존슨 「브로드웨이 불빛」) 브로드웨이의 새세기는 서설로 시작된다.세계인의 꿈과 기대,사랑과 동경,그리고 이별과 슬픔,절망과 좌절을 한데 받아온 브로드웨이 1백년을 「아메리칸 드림의 부활」로 승화시키는 대서사시의 첫장은 현란한 불빛보다도 고즈너기 내려앉아 제막을 기다리는 하얀 광목천 처럼 소담스런 백설축제로 와닿는다. ○정형의 구속 거부 새세기를 여는 오늘 브로드웨이의 첫아침은 지난 1백년의 역사를 거부한다.상업성을 지상최고의 덕목으로 쌓아온 브로드웨이의 영화(영화)는 또 하나의 바벨탑에 불과한지도 모른다.뮤지컬 1백년,영화 1백년으로 응축돼온 브로드웨이에 『인간은 어디로 갔는가』의 외침이 메아리져 온다.그러나 새세기는 인간상실에서 벗어날 설렘에서 어느때 보다 힘찬 발걸음으로 다가온다.신성과 인간의 모독을 청산하고 신성과 인간의 경건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브로드웨이는 맨해튼의 남쪽끝 배터리파크에서 북으로 북으로 뻗어올라가 맨해튼섬을 종단하여 브롱스까지 30여㎞ 길이로 이어져 있으며 지난 1백년동안 수많은 가지에 자양분을 공급해온 맨해튼의 척추이자 뉴욕의 심장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브로드웨이는 그 길의 생김새부터 정형의 구속을 거부하고 변형의 자유를 추구한다.남북으로 뻗은 애브뉴와 동서로 뻗은 스트리트로 바둑판 처럼 구획된 맨해튼 한복판을 굽이굽이 헤치며 남북으로 달리는 브로드웨이는 많은 애브뉴들과 만나면서 스퀘어(광장)라는 독특한 공간을 창출해왔다. 이는 결국 도전의 역사이고 그 숱한 도전 속에서도 브로드웨이는 새로운 만남에 대해 질시와 반목보다는 관용과 융화를 통해 거대한 용광로처럼 포용해 나감으로써 브로드웨이의 신화를 만들어왔다. 자유의 여신상을 마주하는 배터리파크 북쪽의 1번지 「볼링 그린」공원을 출발한 브로드웨이는 왼쪽으로는 월드트레이드센터,오른쪽으로는 월스트리트를 거느리며 국제 금융의 중심가로 당당하게 시청앞 광장까지 북상한다. 여기서 브로드웨이는 미술의 거리이자 패션의 발상지인 소호로부터 첫번째 도전에 직면한다.차이나타운과 리틀 이태리도 작은 도전이다.미로처럼 퍼져나간 구시가의 골목들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는 도전을 모두 포용하여 브로드웨이는 4번가와 만나는 워싱턴 스퀘어에서 하나의 용광로를 이룬다. 히피들의 퍼포먼스 혹은 반전주의자들의 반전집회는 물론 몰려드는 관광객들을 상대로한 스트리트 퍼포먼스의 본고장인 워싱턴 스퀘어는 백남준의 굿판을 주제로한 비디오 아트 예술도 훌륭하게 융화시킨다. 워싱턴 스퀘어를 떠나 또 북상하던 브로드웨이는 예술의 도시 그리니치빌리지를 지나며 14번가에서 파크애브뉴(4th.)와 만난다.이는 두번째 도전이며 거대한 유니언 스퀘어를 만들어낸다.이어서 23번가에서는 세번째 도전인 피프스(5th.)애브뉴와의 만남이 이뤄지며 여기서 만들어진 매디슨 스퀘어는 남부 브로드웨이 최대 오아시스인 메디슨 스퀘어 파크를 이루고 있다. ○수많은 인파 몰려 네번째 도전은 아메리카스 애브뉴(6th.)와 만나는 34번가에서 이뤄지며 헤럴드 스퀘어를 창출한다.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으로 이어지는 이곳은 맨해튼 상업문화의 표본인 메이시백화점의 생스기빙(추수감사절) 퍼레이드의 종점이기도 하다. 다섯번째 도전은 브로드웨이에 가장 큰 충격을 주었으며 세븐스(7th.)애브뉴와 만나는 42번가의 타임스 스퀘어가 바로 그 현장이다.맨해튼의 40여개에 달하는 뮤지컬극장이 몰려있는 이곳은 브로드웨이 생명력의 원천으로 늘 수많은 인파로 밤낮없이 북적댄다. 여섯번째 도전은 에잇스(8th.)애브뉴와 만나는 59번가로 맨해튼 최대의 오아시스인 센트럴파크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한 이곳에는 콜럼버스 동상이 높이 받들어진 콜럼버스서클이 자리잡고 있으며 교통의 요지를 이루고 있다. 일곱번째 도전은 콜럼버스 애브뉴(9th.)와 만나는 65번가에 위치한 링컨 스퀘어에서 이뤄진다.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뉴욕주립극장을 비롯,줄리어드음대 등으로 구성된 링컨센터는 타임스 스퀘어의 뮤지컬에 비길수 있는 미국음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여덟번째 도전은 암스테르담 애브뉴(10th.)와 만나는 72번가로 이탈리아 음악가 베르디의 동상이 서있어 베르디 스퀘어라고 불린다.부근에 미국자연사박물관이 위치하고 있으며 바브라 스트라이센드,아놀드 슈와르제네거등 수많은 인기스타들이 몰려 살고 있다. 브로드웨이는 베르디 스퀘어를 지난후에는 107번가에서 웨스트엔드애브뉴(11th.)와 만나면서 줄곧 함께 올라간다.모닝사이드 하이츠라는 지역으로 불리는 이곳은 콜럼비아대학이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브로드웨이의 다른 곳과는 전혀 다른 학구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어서 브로드웨이는 할렘의 중심가인 125번가와 만나 랩과 힙합등 흑인음악과 만난후 줄곧 북상하여 168가에서 세인트 니콜러스 애브뉴와 만나면서 미첼 스퀘어를 형성한후 폭도 좁아지고 조용한 거리로 변하여 브롱스로 연결된다.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모여들게 하는 브로드웨이의 엄청난 흡인력은 오늘날 맨해튼을 인간의 창조력으로 만들어낸 모든 것들의 수도로 만들었다.뮤지컬의 수도,오페라의 수도,출판의 수도,건축의 수도,미술의 수도,박물관의 수도,고전음악의 수도,춤의 수도, 재즈의 수도, 패션의 수도, 광고의 수도, 금융의 수도, 법률의 수도, 경영의 수도, 신문의 수도, 잡지의 수도가 되고 있으며 또 다이아몬드의 수도, 레스토랑의 수도이기도 하다.혼잡함의 수도,범죄의 수도,세금의 수도,오만의 수도,경멸의 수도등 악명도 따라다닌다. ○상업주의 중병 앓아 맨해튼이 이같은 수도로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17세기 중반 신성모독의 도시로 신대륙의 타도시들과 차별화되면서부터였다.청교도의 도시 보스턴, 퀘이커의 도시 필라델피아에서 볼때 맨해튼섬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건설한 뉴암스테르담은 신성보다도 이윤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신성모독의 수도였던 것이다. 1643년의 한 선교보고서에는 당시 뉴암스테르담의 5백명 거주자들의 언어가 18개에 달할 정도로 뉴암스테르담은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이들의 유일한 공통가치는 상업이윤이었다고 적혀 있다. 그후 17세기말 네덜란드 세력이 밀려나고 영국의 지배권이 강화되면서 맨해튼은 뉴암스테르담에서 뉴욕으로 이름이 바뀌고 해적의 수도로 변모했다.당시 부패한 영국 총독은 세계각국의 보화를 강탈해 오도록 해적활동을 장려했기 때문이다. 이후 맨해튼은 조선의 수도,산업의 수도로 발전해왔으며 1830년 대에는 금융의 수도로,1860년 대에는 공업의 수도로,19세기말에는 문화의 수도로 변해왔다.2차대전 이후에는 유럽세의 약화로 맨해튼은 유엔의 수도가 되면서 명실공히 세계의 수도로 등장했다.그러나 극도의 상업주의를 바탕으로 구축된 맨해튼은 최근 십수년간은 세기말의 중증을 앓아왔다. 이제 새세기를 맞는 맨해튼은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인간을 회복하는 인간의 수도로,절망의 도시가 아니라 소망의 도시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새해아침 브로드웨이는 누구보다 먼저 스스로 잠에서 깨어나 서설의 의미를 깨닫는다.이제 브로드웨이 구석구석을 찾아 심연에서 우러 나오고 있는 재탄생의 벅찬 고동과 몸짓을 생생하게 독자들과 함께 느끼고 싶다.
  • 국회의장·대법원장·여야대표 신년사

    ◎“모두 힘모아 통일­복지국가 실현/황낙주 국회의장 지난 한해는 참으로 다사다난했습니다.유감스럽게도 궂은 일도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우리 국회,우리 정치의 수준도 아직 국민의 기대에 못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그 어려운 조건속에서도 민주주의의 꽃을 피워 올렸고 번영의 금자탑을 쌓아 올렸습니다.지금 필요한 것은 자책이나 자탄보다는 자신감과 의욕입니다. 올해는 광복 50주년입니다.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온갖 어려움을 딛고 많은 것을 성취했지만 우리 앞에는 더 많고 더 높은 목표들이 있습니다.민족 최대의 비원인 통일,민주주의의 내실화,경제선진국으로의 진입,복지사회의 실현등이 그것입니다.이러한 목표는 우리에게 더욱 결연한 의지와 치밀한 계획,보다 많은 땀을 요구합니다.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양적인 축적이 아니라 질적인 비약이기 때문입니다.광복 50주년이 그러한 질적 도약의 원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올해는 북녘땅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어나기를 기대해마지 않습니다.북한은 개혁과 개방을 서둘러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남북대화를 하루 빨리 정상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새해 새아침에 우리 모두 다같이 올 한해를 바르게 시작하도록 다짐합시다. ◎“무력감 떨치고 힘차게 새출발을”/윤관 대법원장 을해년 새아침에 국민 여러분의 가정에 행복과 건강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지난해는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렵고 중대한 일들이 일어났고 잇따라 발생한 대형사건·사고들은 우리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해 아침을 맞아 지난해의 불행했던 사건들로 인한 무력감을 떨쳐버리고 다시 힘차게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느슨해진 기강을 바로세워 건강하고 활기찬 사회를 만들고 우리의 참된 도덕성과 미풍양속을 되찾아야 합니다. 국가간의 경쟁에 슬기롭게 대처함으로써 국제화·세계화의 실질적인 주역이 되도록 준비해야 하고 통일의 기반도 다져나가야 합니다. 또 올해 실시될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선거를 통해 지방자치시대의 기반을 다져야 합니다. 올해는 광복50년이 되는해이면서 우리 사법부로서는 근대사법제도를 도입한지 꼭 1백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동안 추진해오던 사법제도 개혁작업은 이제 열매를 맺어 마침내 본격적인 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나라가 더욱 발전하고 국민 여러분 모두에게 축복이 있기를 다시한번 기원합니다. ◎“세계화 물결에 우리모두 동참을”/김종필 민자당대표 을해년 새아침을 맞이하여 국민 여러분께 평안과 건강이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지난해에는 마음과는 달리 여러가지 일들로 인해서 국민 여러분께 걱정을 끼쳐드린 것을 집권당에 몸담고 있는 저로서 무척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지난날의 뉘우침 속에서 내일을 위한 의지와 열정을 새롭게 다져봅니다. 새해에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세계화의 물결이 더욱 굽이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슬기와 정성을 다하여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국민 여러분께서 큰 힘 보태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새해에도 여러분께 신의 가호와 건강과 보람과 평화가 늘 함께하기를 희원합니다. ◎“참된 지방화시대열기에 총력”/이기택 민주당대표 을해년 새해는 광복 5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올해에는 최소한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구축되고 남북정상회담과 경제협력,그리고 이산가족 상봉이 성사될 수 있도록 국민 여러분과 함께 모든 노력을 다해 나갈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94년 갑술년 한해는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도 많았습니다.개혁이 실종되고 한강다리만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법치주의가 무너지고 역사의 정의가 유린당했습니다. 새해에는 달라져야 합니다.더 늦기전에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합니다. 특히 오는 6월 전면적으로 실시되는 지방자치제는 보다 성숙한 민주화시대의 도래를 준비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우리당은 지방자치선거 승리를 통해 지방화시대 개막과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 해방거리 김활란식 개량한복 “물결”/유행으로 본 세태변화

    ◎6·25땐 밍크코트·귀금속 걸치면 처벌/드럼통펴 만든 첫 국산차 「시발」 등장/군낙하산으로 만든 여성속옷 “불티”/45∼50년대/붕어빵 먹고 걷는 「재건데이트」 유행/정전·단수 빈번… 집마다 양초필수품/60∼70년대/5공시절 9시 TV 「땡전뉴스」에 국민 “신물” 역사란 거창한 사건의 나열만은 아닐 것이다.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이란 역사의 책갈피 속에 숨어있는 그 시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투영일 뿐이다.우리의 현대사도 마찬가지다.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뭉뚱그리면 아마 책에 씌어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근엄하게 씌어진 역사책만으로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지 못한다.흔히 흥미거리로만 치부되기 쉬운 과거의 생활상은 이처럼 깊이있는 역사인식을 위해 더없이 훌륭한 보조수단이 된다.광복 50주년을 맞아 그 반세기 동안 생활상의 조각들을 한데 모아보기로 한다. 1945년8월15일 일왕 히로히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자마자 터져나온 것이 가수 남인수의 「감격시대」였다.그 시대 한일관계는 곧 「너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인 셈이었다. 광복은 여성들의 의복에도 왔다.「김활란 스타일」의 개량한복이 거리를 휩쓴 것도 이 무렵이다.그러나 물자가 귀했던 만큼 일본식 「몸뻬」도 사라지지 않았다.「몸뻬」차림의 여자들이 왜색을 일소하자는 운동이 벌어지자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미군정이 실시되자 미군부대 주변을 전전하는 새로운 여성층이 등장했다.이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민족의 체면을 팔아먹는 천박한 여성들은 깨끗한 삼천리 강산으로부터 말소시켜야 한다』는 담화를 냈다.이 담화는 「말소」해야 할 여성을 「외인 승용차에 동승하는 여자,껌을 씹으며 거리를 방황하는 여자,괴상한 두발(파마머리)과 화장을 하는 여자」로 예시했다.요즘 이 기준을 적용하면 삼천리 강산에 남아있을 여성이 거의 없는 셈이다. 이런 상황 아래 6·25가 일어나자 「감격시대」를 불렀던 남인수는 다시 「가거라 삼팔선」을 지어야 했다.「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하는 「전우야 잘자라」가 전우를 잃은 슬픔과 함께 잃었던 땅을 다시 찾는 안도가 담겨 있었다면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이산가족의 아픔 그 자체였다.그 아픔은 다시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로 이어졌다.또 전국 각지에서 임시수도로 모여든 피란민의 애환을 담은 「이별의 부산 정거장」은 이북 출신의 이른바 「삼팔 따라지」들에게는 더더욱 남달랐다. 그러나 그 피란의 와중에서도 정치판에는 사사오입,막걸리 선거,피아노 표가 판을 쳤다.시중에는 또 마카오 복지 등 사치스런 옷감이 범람해 당시 신문에는 「당신의 옷차림은 전시생활에 알맞습니까」라는 글이 실리고 「전시생활 개선법」이 만들어져 밍크목도리와 귀금속을 착용하면 처벌당하기도 했다. 물론 대다수 국민들은 극도의 내핍에 적응했고 이에따라 유엔군으로부터 흘러나온 「유엔잠바」와 「KJP패션」이 가장 유행하는 옷차림이었다.「KJP」란 바로 「구제품」의 약자였다. 1953년경에는 나일론이 들어왔다.값싸고 질긴 나일론은 순식간에 보급됐고 반투명의 흰 나일론으로 된 군용 낙하산 기지가 젊은 여성들의 블라우스와 속옷으로 「화려한 변신」을 하기도 했다. 1955년에는 국산자동차 제1호인 「시발」이 나왔다.「시발」은 미군으로부터 불하받은 지프의 뼈대에 드럼통을 펴서 씌운 차였다.엔진과 변속기 등 중요부품은 물론 미제 지프 것을 썼지만 국산화율은 50%나 됐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은 1960년3월15일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당시 야당의 구호는 『썩은 정치 물러가라』.이에 대한 자유당의 반응은 『썩었으면 어떠냐,별 놈 다봤다』라는 한마디로 「막가는」것이었다.이같은 후안무치는 곧 이승만 자신의 외침처럼 「한데 뭉친」 국민들에 의해 4·19로 응징됐다. 4·19는 1년만에 「중단없는 전진」을 내세운 박정희의 5·16으로 물거품이 된다.「혁명정부」는 「재건」으로 「민생고를 해결」하겠다고 다짐했다.이 때 유행하던 「재건 데이트」는 기껏 붕어빵이나 먹으며 하루종일 걸어다니는 데이트를 의미한다.그 만큼 국민들에게 고통을 요구하는 시기였다. 박정희 정권은 출범 2년이 채 못된 1963년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을 일으킨다.최초의 국산차 「시발」이 운명을 다한 것도 이 사건 때문이었다.한창 인기를 끌던 국산차 「시발」은 일본 닛산의 「블루버드」를 조립한 세단형 「새나라」가 나오자 운명을 다할 수 밖에 없었다.박정희 정권은 당시 국내사업가도 아닌 재일동포에게 자동차공업을 독점하는 특혜를 주었던 것이다.김종필씨가 이 사건으로 국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 외유길에 오르며 남긴 「자의반 타의반」은 지금 고사성어의 반열에 들만한 고전이 됐다. 60년대는 아직 전반적으로 사회가 안정되지 못했다.지금은 몇시간만 정전이 되어도 신문 사회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 되지만 당시는 정전이나 단수는 항다반사였다.집집마다 양초가 필수품이었고 밤에만 물이 나오는 고지대 주부들은 물을 받느라고 새벽을 밝혀야 했다. 그런가하면 70년대까지 입석버스에는 문이 두개로 차장도 둘이었다.여차장들은 저임금속에 끊임없이 수입을 가로챈다는 이른바 「삥땅」의 의심을 받으며 버스회사의 남자직원들보터 몸수색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그래서 어느차장의 『청량리 중랑교가요』라는 외침이 『차라리 죽는게 나요』라는 절규로 들리던 시절이었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에 본격화되었다.「새마을노래」를 귀가 따갑게 듣기시작한 것도 이 때다.「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1990년대 초반까지도 마을의 새마을회관에 높이 내걸린 스피커를 통해 국민들의 새벽잠을 깨웠다.이 노래는 어느 틈엔가 폐차 직전의 낡은 쓰레기차에서나 가끔 들을 수 있는 노래가 됐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유신」을 선언하고 국민들을 더욱 옥죄어 나갔다.1975년에는 금지곡이 양산됐다.「아침이슬」은 물론이고 『자 떠나자 고래잡으러…』로 시작하는 「고래사냥」까지 묶였다.박대통령을 「고래」로 착각했던 것일까. 박정권은 마침내 「그 때 그사람」이라는 노래가 흐르는 가운데 울린 몇발의 총성으로 1979년10월26일 막을 내렸다. 전두환대통령이 취임한 것은 1980년9월1일이었다.TV에서 9시 시보가 울리자마자 곧 『전두환대통령께서는…』하는 「땡전뉴스」가 시작된 것도 같은 날이었다. 그러나 이날부터 대통령과 닮았다는 이유로 「금지인물」이 된 탤런트도 있었다.1960년대 중반에 발표된 김상희의 「대머리 총각」도 이 시기에 나왔다면 금지곡이 되었음은 물론 작사가 작곡가 가수 모두가 보안사가 운영하는 「서빙고호텔」에서 한동안 숙식을 제공받았을 것이다. 이어지는 군 출신 대통령에 대한 편치 않은 국민감정은,당시 청와대에서는 영화 「사관과 신사」를 「토관과 신토」로,미당 서정주선생을 「말당선생」으로 읽는다는 우스개를 낳았다.연희동에서는 아직도 「신사불이」를 위해 수입식품을 먹지 않는다던가. 전대통령으로부터 배턴을 이어받은 노태우대통령과 그 이후 시대는 과거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현실이다.그러나 이 시대도 불과 얼마뒤면 다시 과거사가 될 것이다.한 시대의 평가는 이처럼 공식적인 역사기록 속에만 남는 것은 아닌 것 같다.
  • 「세계화 원년」 미래로 달리자/김 대통령 신년사

    ◎21세기 신질서 적극 대비/지방선거 가장 깨끗하고 공명하게/남북화해로 통일역양 결집 친애하는 7천만 내외 동포 여러분! 희망의 새해,새아침이 밝았습니다. 여러분의 가정마다 기쁨과 행복이 넘치고,모든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국가적으로도 큰 발전을 이루는 보람찬 한 해가 되리라는 믿음을 온 국민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북한 동포들에게도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에 대한 희망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국민 여러분! 21세기를 눈앞에 두고,세계에는 지금 새로운 질서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새해와 더불어 WTO체제가 출범합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지역과 지역 사이에 치열한 무한경쟁이 벌어지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세계 속에서 우리의 앞날을 개척해야 할 상황이 도래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화의 용단을 내리고 「작지만 강력한 정부」로 개편하여 새로운 출발을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계화는 우리 민족이 세계로 뻗어나가 세계의 중심에 서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제 더이상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경쟁에서 한발 뒤떨어지면 우리 자녀들의 시대에서는 10년,100년 뒤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올해는 정부는 물론,모든 국민이 세계화를 본격 추진하는 해가 되어야 할 것 입니다. 올해는 또한 지방시대가 활짝 열리는 해입니다. 지역주민이 주인이 되어 자율과 창의를 마음껏 펼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이해 먼저,다가오는 지방선거를 역사상 가장 깨끗하고 공명한 선거로 치러야 합니다. 지방화 없이 세계화가 있을 수 없으며,선거혁명 없이 세계화 또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1995년을 우리 모두 「세계화의 원년」으로 만듭시다. 내외 동포 여러분! 올해는 「광복 반세기」를 맞는 뜻깊은 해입니다. 우리는 숱한 역경 속에서도 민주화와 근대화를 이룩했습니다. 이제 못다이룬 꿈과 더 큰 목표를 향해 당당한 발걸음을 내딛어야 할 때입니다. 분단 반세기가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비운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폐허 위에서 민주와 번영을 이룩했듯이,내실을 다지고 역량을 키워우리의 오랜 염원인 민족통일을 반드시 성취해야 합니다. 동족간의 불신과 대립이라는 비극은 이제 막을 내려야 합니다. 세계사의 흐름에 맞게 남과 북은 화해와 협력의 새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20세기를 마감하는 또 한해를 여는 이 아침에,저는 지난 세기말 선열들이 가슴에 품었던 「개화」의 열정을 생각합니다. 역사를 바꾸려던 그 큰 뜻은 불행히도 소수 선각자들의 것이었을 뿐,뭉치지 못한 민족 앞에 찾아온 것은 나라 잃은 슬픔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세계화」는 결코 일부만의 것,모아지지 않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정부와 국민,중앙과 지방,사회 각계,… 온 국민이 주역이 되는 「참여」의 정신이자 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계층과 지역,정파와 세대를 뛰어넘어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힘을 합하는 「단합」의 정신이자 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새해 새아침을 맞아 우리 모두 「참여와 단합」의 결의를 새로이 하여 세계로,미래로 함께 달려 나갑시다. 저 역시 취임 당시의 심정과 각오로신한국 창조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겠습니다. 그리하여 1995년이 나라의 선진과 번영,민족의 통일과 영광을 앞당긴 「참다운 광복의 시대」를 열어 나간 해로 기록되게 합시다. 감사합니다.
  • 장교길들이기·총기난사(94년 충격의 365일:5)

    ◎“군기 확립” 재점검 계기로/하극상·탈영… “국민의 군이 어쩌다”/부대운영·교육 혁신적 전환 있어야 「화려하지도 평탄하지도 않은 푸른제복의 길을 나는 소명이라 여기고 기꺼이 택했다.푸른제복을 명예롭게 하기 위하여 촛불의 정신을 익히고…」 지난 10월31일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석우리 육군 ○○기계화사단 사격장에서 사격훈련을 지휘하던 중 부하 사병의 어이없는 총기난사로 비명에 간 김수영(30·육사44기)대위가 육사 졸업앨범에 깨알같은 글씨로 적어놓은 글귀다. 김대위의 부인 최성의(29)씨는 앨범을 펴놓고 남편의 글을 몇번이고 되뇌다 갓 말을 하기 시작한 외아들 방환군(2)이 『아빠,아빠』라고 부르자 아이를 얼싸안고 소리없이 흐느꼈다. 『그동안 사는게 지옥이었어요.이제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나요』 그동안 부대 근처 군인아파트에서 살아온 최씨는 남편이 숨진뒤 집을 비워야 했다.의지할 곳이 없어 이삿짐은 임시로 큰 시숙이 살고 있는 전남 광주에 맡겨놓고 시댁이 있는 장흥과 광주를 오가며 괴로운 나날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다. 최씨는 『청춘을 군을 위해 보내겠다며 가정도 돌보지 못하고 남달리 군에 열성이었던 남편이 추서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파 매일 밤잠을 설치고 있다』고 울먹였다. 최근에는 큰 시숙이 동생의 평소 업적을 모아 호소문을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해 각계에 띄우는 등 동생의 명예회복을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영내에서 「장교 길들이기」 사건이 일어난 나흘뒤 지난 10월 27일 발생한 사격장 총기난사사건. 이 두 사건을 보고 국민들은 『군기를 목숨보다 소중히 해야하는 군이 왜 이토록 무법천지가 됐으며 기강이 해이해진 군대가 어떻게 국토방위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느냐』며 충격과 경악에 휩싸였다. 군기와 관련된 일련의 군부대사고는 구태의연한 부대관리와 교육에 군이 안이하게 대처한데서 비롯됐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때문에 군이 기강을 확립하고 「전대미문의 하극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부대 운영 및 지휘,장교교육,사병교육 방식이 혁신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군수분야 최우수상,장병정신교육 유공상,강재구상 등 남편 김대위가 받은 상이 나란히 걸려있는 방안에서 외아들을 꼭 껴안고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최씨의 모습이 결코 우리 군의 자화상으로 남아서는 안될 것이다.
  • 충주호 유람선참사(94년 충격의 365일:4)

    ◎“졸지에 가장 잃으니 생계 막막”/친목회 관광길서 어이없는 죽음/가족들,“내년농사 누가 짓나” 한숨 『늙은이들이 농사를 짓겠어요,그렇다고 어린 것들이 뭘 하겠어요』 충주호유람선 화재사고로 장남 선모(35)씨를 잃은 강원도 홍천군 결운리 곽수연(64)씨 가족은 요즘도 집안의 기둥을 잃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그렇다고 마냥 단장의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수도 없다.생계를 이어나갈 사람이 없는 현실이 너무나 막막할뿐이다. 고향인 홍천군 내촌면 광암리에 군부대가 들어서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지게 된 주민들은 헤어진 뒤에도 형제처럼 사이좋게 살자며 만든 「형제친목회」의 부부동반 관광이 엄청난 재앙이 될줄은 아무도 몰랐다. 또래 청년들이 서울을 향해 고향을 등질때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많지 않은 밭뙈기나마 감자·콩·팥·잣나무등을 가꾸고 닭을 길러 82세된 조모와 부모·처자식등 일곱식구를 혼자 부양하며 착실히 행복을 가꿔왔던 평범한 농부 곽씨. 곽씨가 정성껏 지어놓은 농사는 동네주민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수확했지만 남은 가족들은 내년부터는 보상금으로 받은 돈으로 농사를 계속해야할지 장사를 해야할지 결단을 못내리고 있다. 성수대교붕괴가 남겨준 생채기가 모든 이의 마음에 생생히 남아있던 10월24일 하오 또다시 국민들을 전율케했던 충주호참사.29명의 애꿎은 목숨을 앗아갔던 이 사고는 올 한해 국민들 가슴속 깊이 메아리쳤던 「부실 한국」의 또다른 거울로 남았다. 공무원들의 감독소홀 및 업체와의 유착,유람선회사의 정비불량,허술한 승선관리라는 해묵은 지적들이 복합돼 일어났던 이 사고는 이밖에도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불이 난뒤 승무원들이 승객들을 신속히 대피시키는 커녕 객실로 밀어넣었고 사고후 1시간30분이 지나서야 본격 구조활동이 전개돼 인명피해가 컸다. 승객의 안전을 책임져야할 승무원,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공무원.그러나 이같은 상식선의 기대는 곽씨와 같은 평범한 이웃의 어이없는 죽음속에서 우리 국민들이 누구도 책임을 질 능력과 의사가 없는 책임부재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을 뼈저리게 확인하게 해주었다. 『우루과이라운드인가 때문에 앞으로가 큰 일이라고 걱정하더니 지금은 저 혼자서 맘편히 누워 있을거야』 나이에 비해 무거운 잣 가마니를 마당으로 옮기는 숨진 곽씨의 어머니 이봉래(66)씨의 발걸음이 힘겨워 보이는 것은 단순히 주인없이 수확된 잣의 무게때문만은 아니었다.
  • “김정일 강등 당해 승계 지연”/북한문제 권위자 이명영교수 분석

    ◎김일성이 작년 정치국상무위원 자격 박탈/“정일 수련필요” 김일성 「징계」가 유지로/일부서 집단지도체제 거론… 권력다툼/9일 중대방송 해프닝은 정일계기습 실패 북한의 김정일이 숨진 김일성으로부터 당정치국 상무위원 자격을 박탈,강등됐기 때문에 권력승계가 지연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돼 국내외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같은 주장을 한 북한 김일성문제 권위자인 이명영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기고를 싣는다. 김일성이 죽은지 다섯달로 접어든다.그런데도 평양은 당과 국가의 최고책임자 자리를 메우지 못하고 있다.민주국가 같으면 권한대행이 나왔거나 보궐선거를 한다해도 두번은 너끈히 했을 세월이다. 평양의 당규약이나 헌법에는 최고책임자의 유고시에 대비한 규정이 없다.「수령」의 유고를 상정한다는 것은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그랬을 것이다.그러나 그들은 일찍이 1974년2월의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을 후계자로 결정해 놓은 이래로 20년동안 세습체제의 공고화를 위해 온갖 정력을 쏟아왔었다.당권과 국권을김정일이 세습토록 한 결정은 지난 7월20일의 김일성사망 중앙추도대회에서 한 김영남의 추도사대로 「어버이 수령님께서 우리 혁명의 미래를 위하여 이룩하신 가장 특출한 공적」이었을 터인데 왜 그 정해진 사람이 정해진 자리에 정식으로 오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평양에서 나오는 소리는 김일성 사망전이나 후나 똑같이 당과 국가의 영도자는 김정일로 되어있다.그러나 정식취임은 아니 하고 있다.일당독재의 전체주의국가에서 당과 국가의 최고책임자가 비어 있다는 것은 대단한 비상사태이다.이미 김정일체제로 되어있기 때문에 자리에 오르는 것이 급하지 않다느니,또 무슨 인민들이 아직도 슬픔에 잠겨 있는데 축하분위기로 바꾼다는 것이 마땅치 않다느니 하는 식의 소리들은 사사집에서나 통할 말이지 당과 국가의 논리로는 도저히 통용될수 없는 것이다. 김정일의 정식취임이 늦어지는 데는 곡절이 있다.김일성의 교시가 매사의 최고원리로 되는 것이 평양이었다.그 강대한 힘이 홀연히 사라지고만 허탈상태에서 모든 결정에서 기본기준으로 되는 것은 그의 유지일 수밖에 없다.그런데 그 김일성이 아들을 후계자로 정해는 놓았으나 나라 일을 맡기기에는 더많은 수련을 쌓아야 한다는 결정을 내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중대한 일은 평양은 발표하지 않는다.그러나 세밀히 분석해보면 알수 있다. 1993년 6월을 고비로 김정일의 직함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있다.그 전단계에서는 예컨대 조선인민군 창건60돌 행사(92년4월25일),조선지식인대회(92년12월9일),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4차회의(92년12월11일),동 제5차 회의(93년4월7일) 등등 공석상에서의 김정일의 직함은 「정치국 상무위원이시며 중앙위원회비서이시며」하는 당의 직책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또는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이신」이라고 하는 군의 직책이 반드시 붙어 있었다. 그랬는데 93년6월 후단계에서는 예컨대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6차 회의(93년12월9일),동 제7차회의(94년4월6일),전국노병대회(93년7월24일),전승40돌행사(93년7월27일),당창건 48돌행사(93년10월10일),김정일 생일행사(94년2월16일) 등등 공석상에서의 그의 직함은 「정치국 상무위원이시며 중앙위원회 비서이시며」는 빠지고 그냥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만으로 된다.김일성의 영결식에서도 그랬고 1백일 추도대회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이는 직함이 길어서 짧게 부르느라고 그런 것이 아니다.국가위에 당이 있는 나라에서 당의 직함을 뺀다는 것은 여간 딱한 사정이 아니고서는 아니된다.가능한 분석은 93년6월경에 있었던 정치국회의에서 김정일은 한단계 강등되어 그냥 「정치국위원」으로 되었다는 것이다.이를 그대로 발표하면 후계자의 위신에 여간 큰 상처가 되지 않는다.그래서 당직은 빼고 군직만을 쓰기로 한 것이다.마침 국방위원장이 국가서열로는 주석 다음 자리이니 그런대로 체모는 지킬 수 있었다. 김일성은 과거에도 김정일을 견책처분한 일이 있다.70년대 중반에 김정일이 3대혁명소조를 거느리고 전국을 휩쓸 때 젊은것들이 행동이 지나쳐서 노년 간부들과의 사이에 마찰이 심했고 사회에 불만·비난이 비등했다.그래서 김일성은 김정일을 나서지 못하게 하고 부자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던 것에서 아들 사진을 철거시켰다.민심을 수습하고 아들을 반성·수양케 하는데 있어서 김일성은 민첩한 대응을 했던 것이다. 그는 필요에 따라서 사람들을 하방했다가 상당한 기간뒤에 복권시키는 일을 예사로 했다.그의 처 김성애,동생 김영주,조선인민군 총참모장 최광등도 이런 일을 당했다. 강등의 이유는 알수 없다.제6기 제21차 전원회의에서 제3차 7개년계획을 총괄할 때 사상 처음으로 당은 그 실패를 자인했다.그 책임을 물었을 수도 있겠으나 다른 여러가지 사연이 겹쳤을 것이다.지난 4월에 김일성과 면담했던 미국의 전략연구소 윌리엄 테일러 부소장은 후계체제의 완결이 아득히 멀다는 심증을 얻었다 했고 6월에는 김일성이 카터에게 10년은 더 일을 해야겠다고 했다니 김정일이 신임을 얻는데 실패한 것은 확실하다. 지금 평양은 김일성의 유지대로 김정일을 최고책임자로 하되 전권을 맡길수는 없고 집단지도체제로 하자는 유지파와 전권을 쥐겠다는 김정일파와의 갈등의 와중에 있다.무슨 회의든 전원일치로 결정을 보는 저들인지라 군계일학이 없는 오늘에서는 건강상 이유로 김정일이 양보하든 아니면 유지파가 양보해야 한다.또 아니면 김일성의 장기를 빌려 선제기습공격으로 일거에 상대편을 침묵케 하는 쪽이 이긴다.이에 있어서는 호위총국장 이을설,제8특수군단의 지휘관등이 중요 변수다. 지난 11월 9일에 있은 「중대방송」예고는 김정일이 이 수를 쓰려다 불발로 그친 사건이지 다리를 놓으라는 것이 중대방송일 수는 없다.어차피 오는 12월 10일 전후에 있을 제6기 제22차 전원회의와 제9기 제8차 최고인민회의에서 당 총비서와 국가주석의 선출이 있을 것이다.그때까지 결론이 없으면 평양정권의 망조는 돌이킬 수 없으며 김정일이 수위에 오르더라도 권력의 독점은 있을수 없고 공유가 있을 뿐이다.
  • 문형렬의 「바다로 가는 자전거」(이작가 이작품)

    ◎뇌성마비 아이 둔 부모의 갈등 극복기/88이후 우리사회 정신적 공황 묘사/삶 자체를 몸으로 사는 진지한 자세 보여줘 인간의 존재와 구원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작가 문형렬씨(39)가 네번째 장편 「바다로 가는 자전거」를 문학과 지성사에서 냈다. 「바다로 가는 자전거」는 3살짜리 뇌성마비 아이를 둔 젊은 부모가 자식의 비정상으로 인한 고통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작가의 세상 바라보기가 선명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제철소 용광로의 기능공인 남편과 그의 아내는 신혼의 장미빛 꿈을 만끽하기도 전에 뇌성마비 아이를 갖게 된다.남편은 정신적인 고통을 잊기 위해 야근을 자청해 근무하며 이름도 짓지 말라는 장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이름을 아내 몰래 지어 혼자 부르곤 한다.그러면서도 자신이 일하는 용광로에 아이를 던지는 생각을 할 정도로 고민에 빠진다.아내 역시 가망 없는 아이를 위해 구덩이를 파놓았다며 결단을 부추기는 친정부모의 채근에 괴로워한다.아이로 인한 냉랭한 분위기를 애써 피하려는 부부는 무의식중 아이를 구덩이에 묻는다는 결단에 이를 뻔하지만 결국 아이를 기르기로 결정한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남편이 야근에서 퇴근한 후 다시 야근에 들어가기까지의 하루.그동안 젊은 부부가 겪는 심리상태를 작가는 집요하게 파고든다. 『본질은 너무 투명해 볼 수도 알 수도 없다.따라서 본질은 더럽힐 때만 그 실체를 알 수 있다』는 것이 이 작품을 통한 작가의 주장. 부모의 선택과 결정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비정상아는 이 작품에서 인간의 불행으로 등장하지만 이같은 불행은 늘상 인간이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과는 달리 오히려 「신이 인간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라는 게 문씨의 설명이다. 여기서 인간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즉 상대적인 불행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문씨는 삶의 무력함에 대해 엄숙한 자세를 견지하던 한국인의 얼굴을 제시한다.삶이 어떤 식으로 닥쳐오건 외면하지 않고 묵묵히 삶 그자체를 몸으로 살아낸 한국인의 엄숙한 자세는 바로 삶과 역사를 이어주는 뿌리였고 존재 자체를 중시하는 철학이었음을 비추고 있다.『서구의 철학과 역사는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파악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인간은 절대로 존귀한 존재가 아닙니다.우리자신을 더 낮춰 자연의 한 모습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이 정신박약아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될 때가 많다』는 문씨는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부터 우리사회가 고유의 정신적인 그릇을 다 던져버린 것 같은 안타까움을 갖게 됐고 이 작품을 구상해오다가 5년만인 지난해 11월에야 완성했다고 털어놓았다. 문씨는 82,8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소설이 당선돼 본격적인 작가활동을 시작했다.영남일보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다 90년 불교방송 개국때 불교방송으로 옮겨 지금까지 근무중이며 취재과정에서 장애인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돼 작품속에 비정상적인 인간들을 자주 등장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작품집 「언제나 갈 수 있는 곳」 「슬픔의 마술사」와 장편소설 「그리고 이세상이 너를 잊었다면」 「아득한 사랑」 「눈먼사랑」등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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