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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르메니아­아제르 영토분쟁 5년(포연속의 코카서스에 가다:상)

    ◎이기동특파원 한국기자 최초 현지취재/요충 아그담시에 피난민·패잔병 물결/카라바흐지역만 53만명 “끝없는 유랑”/35도 폭염·허기·폭격 삼중고에 시달려 아르메니아인자치주 나고르노 카라바흐의 독립운동으로 시작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간의 영토분쟁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채 5년여 계속되고 있다.이 지역은 독립국연합(CIS)내 유사한 여러 분쟁해결의 하나의 선례가 된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한국기자로는 최초로 분쟁현장에 특파된 서울신문 이기동모스크바 특파원이 최일선에서 취재한 아제르바이잔정정과 전쟁에 시달리고 있는 현지인들의 참상을 3회에 나누어 싣는다. 35도를 오르내리는 폭염,폭격으로 불타는 마을들,죽은 가족과 재산을 남겨두고 통곡하며 마을을 떠나는 피란민들,가재도구를 닥치는대로 실은 차량행렬,후퇴하는 병사들,영문도 모른채 피란대열에 합류한 양떼들.지난달 23일 아르메니아군의 공격에 무너진 아제르바이잔의 전략요충지 아그담시 외곽은 연옥을 방불케 했다. ○양국 전면전 양상 아그담은 지난 88년부터 시작된 나고르노 카라바흐자치공을 둘러싼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분쟁의 막바지 전선이다.아르메니아군은 이미 카라바흐 전역을 점령했고 여기에다 켈바자르,라친,피줄리 등 아제르 영토 상당부분을 차지했다.전쟁은 아제르 영토 깊숙이서 진행되며 양국간 전면전의 성격을 띠고 있다. 아제르바이잔군은 사실상 전쟁수행능력을 상실한 것 같았다.4일째 아그담시에 대한 아르메니아군의 공격이 계속되는데도 수도 바쿠에서는 지난 6월말 정권을 탈취한 반란군 구세이노프대령의 새 지도부가 쫓겨난 대통령 엘치베이의 신병처리문제로 시끌시끌했다. 아르메니아군은 아그담주의 남서북 3개 방향에서 진격해들어와 3일동안 이 주의 1백10개 마을중 40여개 마을을 점령해버렸다.주도인 아그담시를 차지함으로써 아르메니아군은 이제 아제르바이잔의 수도까지 진격할 수 있는 주요 국도 2개를 모두 확보했다. ○곳곳에 임시천막 아그담시에 이르는 국도는 피란행렬과 철수하는 군차량으로 완전히 뒤덮였다.도로주변 땡볕을 가려줄 나무 몇그루라도 있는 곳이면 난민들의 임시천막이 새카맣게 들어차 있다.혹시 전황이 뒤바뀌어 마을로 되돌아 갈 수 있을까 싶어 멀리 가지 않고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솟는 아그담쪽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이다. 마스블루마을에서 왔다는 10여명의 난민들은 21일 새벽 밤새 로켓포를 퍼붓던 아르메니아군이 마을을 점령,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자 이불보따리만 겨우 챙겨 마을을 빠져나온 사람들이었다.호스도로(37)라는 사람은 『군대는 이틀전 철수하고 마을남자들 30여명이 군대서 자위수단으로 지급해준 자동소총을 들고 대항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죽었을 것』이라며 마냥 흐느꼈다. 찰리크마을에서 왔다는 난민들 가운데는 양 발이 몽땅 잘린 사람 수명이 한구석에 모여 있었다.지난 92년 2월 아르메니아군의 공격을 받아 아제르인 주민 1천여명이 살해당한 호잘리시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산속에서 12일을 헤맬 때 동상에 걸려 다리 절반씩을 절단한 사람들이었다.모두 반쯤 넋이 나간 사람들 같았다.이런 난민이 카르바흐지역에서만 53만여명으로 집계돼 있다.5년 전쟁에서 죽은 사람의 수가 쌍방 합쳐 6천여명을 헤아린다. 나고르노 카라바흐는 국가·민족·종교간 분쟁 등 소위 냉전종식 이후의 여러 문제가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곳이다.볼셰비키혁명뒤 소련정권은 연방내에 거주하던 각 민족들에게 마치 「떡주듯」 영토를 나누어 주었다. 1923년 스탈린은 당시 이곳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카라바흐자치공을,서쪽 아르메니아 영토내 아제르인들에게는 나키체반자치공을 허용해주었다.지금의 전쟁은 카라바흐내 아르메니아인들이 구차한 자치공이 아니라 당당한 독립국으로서의 제몫을 찾겠다는 몸부림에서 시작된 것이다. ○러 남부 비화 우려 이 일대의 지도를 펴놓고 보면 마치 거대한 장기판을 보는 것 같다.장기말 대신 여러 민족·종교집단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말 하나를 섣불리 움직이면 엄청나게 불행한 연쇄반응이 일어나게 돼있다.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군이 점령했지만 이제 곧 나키체반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그리고 불은 내전중인 북부 그루지야의 압하지아로 옮겨붙을 것이다.그루지야는 아제르바이잔과 상호원조조약이 체결돼 있고 반면 아르메니아는 러시아를 비롯,독립국가연합(CIS)과 공동방위협정을 맺고 있다. 전술핵이 배치돼 있는 러시아 남쪽영토로 불이 옮겨붙을 경우 그 결과는 예측불허가 될 것이다. ○지루한 「땅빼앗기」 분쟁은 이제 거창한 이념대결 대신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죽이는 원초적인 「땅빼앗기 싸움」으로 나타나고 있다.
  • 대하장편소설 「텐산산맥」 출간 백한이씨(인터뷰)

    ◎“소련 해체 됐지만 한인 탄압 계속”/지난해 연해주등 돌며 한인 생활상 취재 『스탈린은 연해주의 한인들을 무자비하게 이주시켰습니다.비극이었지요.그런데 공산주의도 무너지고 소련도 해체됐지만 한인들에 대한 탄압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오히려 더 큰 비극은 이제부터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백한이씨가 최근 재러시아 한인들의 수난사를 그린 5권짜리 대하장편 「텐산산맥」을 펴냈다.그는 『내가 태어난 해가 바로 스탈린의 강제이주가 있었던 1937년』이라면서 『이 소설을 쓴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던 것같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 대하장편은 백씨가 지난해 구소련의 서쪽 끝에 해당하는 성페테르부르크에서부터 한인들이 모여사는 알마아타 타슈켄트를 거쳐 하바로프스크등 연해주 일대를 돌며 직접 취재해 최근 완성한것. 『이 작품은 한말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재소한인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담은 것입니다.나라잃은 백성의 항일투쟁기이기도 하지만 오늘날까지 문제가 되는 동족 사이 분열의 폐해를 짚어본 것이기도 하지요』 주인공은 일제하 카프문학운동에 참여하다 소련 땅으로 망명한 작가 조명희를 모델로 한 백명희. 『이 작품은 현재의 시점에서 끝을 맺고 있지만 아직 미완입니다.구소 한인들의 비극이 아직 끝나지 않은 때문이지요.또 정치적 이유 이외에도 그곳에 살고있는 내또래의 중늙은이들까지 우리말을 거의 잊어버리는등 충격적인 기억이 많았던 만큼 쓸거리도 무궁무진합니다.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도 5권 분량은 되리라고 봅니다』 이 작품을 대하장편이라고 한 것은 일반적인 대하소설과는 달리 4권의 소설과 한 권의 장시라는 특이한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그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전달할수 있는지를 고민하다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이런 체제를 택한 것』이라고 말했다.
  • 구소련의 고려인 물리학자들/전일동 연대교수·핵물리학(해시계)

    구소련의 공산주의체제 하에서는 고려인 물리학자가 있는지 없는지 어떤 정보도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물론 북한에 대해서도 거의 정보가 없는 상태가 지속되어 왔다.그러나 최근에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짐에 따라 서서히 철의 커튼속의 실체가 서방국가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스탈린에 의해 사할린에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를 강요 당한 고려인들은 끈질긴 생활력으로 낯선 땅에서 자립하여 한민족 특유의 교육열로 자녀들이 고등교육을 받도록 노력해 왔던 것이다. 며칠전에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크공화국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팩스로 편지가 한 통 날아왔다.그곳에 있는 우즈베크과학원에 근무하는 겐나디 김박사가 보낸 것이다.그는 핵물리학자라고 자기 소개를 한후 발표된 내 논문 몇편을 봤는데 자기가 지금 연구하고 있는 과제와 연관이 있어서 학문적 의견교환을 하고 싶다고 했다.팩스밀리 번호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서신을 받고 보니 전혀 알지 못하는 외국인으로부터 받았을 때와는 무언가 다른 기분이 든다. 현재내가 아는 구소련 고려인 물리학자로서 김박사 이외에 샌트 피터스부르크의 핵물리학연구소(LNPI)에 근무하는 빅토르 김박사와 미하일 박박사가 있다.박박사는 작년 4월에 LNPI를 방문하였을때 처음 만났는데 3세이며 한국말을 거의 못하고 또한 영어도 미숙하였다.그는 핵의 방사선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으며 같은 고려인 부인과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있고 고려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있다.모국에서 물리학자가 방문하였다고 하여 연구소를 안내해주었고 또한 소장과의 면담도 주선해 주었다.빅토르 김박사는 입자물리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우리가 방문하였을 때는 스위스에 있는 유럽공동핵물리학 연구소(CERN)에 출장중이었기 때문에 만나보지 못했으나 그 후 컴퓨터 교신을 통하여 국제자문위원 명단에서 내 이름을 봤다며 오는 8월 하순께 개최되는 극동지역 핵물리학 학술대회에 참석하겠다고 연락을 해왔다.그들은 소장 물리학자로서 이국 땅에서 완전히 뿌리를 내렸지만 역시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에 대한 동경심은 대단한 것이다.그래서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한국인 명단이나 학술지에 실린 한국 물리학자의 논문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게 되는 것이고 또한 접촉을 가지려고 시도도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방문을 희망하기도 한다.그러나 한국방문의 길은 그렇게 많지 않다.러시아에 진출하고 있는 회사들도 많다고 하지만 이러한 순수학문분야에 도움을 주려고 하는 회사가 거의 없는 우리나라 실정이 답답하기만 하다.
  • 연해주 한인 10만여명 거주/자치공 선포로 관심 고조

    ◎개발 잠재력 엄청… 경제 파장 클듯 러시아 극동 연해주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수도로 하는 자치공화국을 8일 선포,다시 주목을 받게됐다.연해주는 구한말 굶주림과 일제의 핍박을 피해 우리선조들이 정착한 한맺힌 땅이며 지금도 10여만명의 한인들이 이곳에 흩어져 살고있다.전체인구 2백30만명에 면적은 16만㎢. 물론 연해주가 러시아 연방으로부터 떨어져나가더라도 불가분의 관계로 남겠지만 독자적인 국가체제 구성권 및 독립적 대외무역 결정권을 행사할 경우 아시아·태평양지역 경제권에 미칠 파장은 클 수밖에 없다.특히 블라디보스토크는 한국과의 지리적 근접성과 엄청난 개발잠재력으로 인해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이곳은 비탈과 언덕으로 이루어진 계단식 지형으로 우리의 부산과 흡사하며 지난해 6월에는 두 도시가 자매결연을 맺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총인구 68만명중 약 2천명의 한인들이 살고있는데 대부분이 교육수준이 높고 사무원 학자 의사등 지식층이 많은 편이다.한국 뿐만아니라 미국 인도 호주 등이 이미 이곳에 영사관을 개설했고 나홋카에 있는 일본·베트남 영사관도 곧 이 도시로 이전할 예정이다. 개방과 함께 이 도시에는 현재 2천여개의 회사,10개의 상품교환소,70여개의 은행 본·지점들이 들어섰으며 외국 투자무역사절단이 잇따라 방문하고 있다.한국기업으로는 현대건설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있다. 한편 러시아정부는 최근들어 스탈린 통치시절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한인들에 대해 손해배상을 하기로 확정,연해주는 이제 우리에게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앞서 지난 4월에는 37년의 강제추방당시 18만명으로 추산되는 한인들에게 러시아당국이 정치적 명예회복조치를 취한바 있다. 연해주의 자치공화국 설립 움직임과 관련,현지언론은 이미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이같은 연해주의 「딴살림」선포 계획은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고향인 스베르들로프스크와 볼로드가등이 활발히 추진하고 있는 자치공화국 움직임과 맞물려 러시아의 새 연방헌법이 조만간 채택되면 더욱 가시화 될 것으로 보인다.
  • 러,「강제이주 한인」에 배상/최고회의 의결

    ◎액수·수혜대상등 구체논의 【모스크바=이기동특파원】 러시아 정부는 스탈린 통치시절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한인동포에 대해 지난 4월 정치적 명예회복조치를 취한데 이어 손해도 배상하기로 방침을 확정했다. 옐친 대통령 직속 민족문제국가위원회(위원장 샤흐라이 제1부총리)의 최보리스 피압박민족담당주임은 6일 지난 37년의 강제추방당시 18만명으로 추산되는 한인들이 받은 정신적·물질적인 피해를 배상해주기로 했다고 밝혔다. 최주임은 러시아 정부의 배상방침이 최고회의의 의결에 따른 것이라면서 그러나 구체적 배상액수와 수혜대상에 대해서는 정부와 의회사이에 의견이 엇갈리고 있어 최종결정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앞서 러시아 최고회의는 지난 1일 「피압박민족 명예회복법」에 대한 개정안을 통과시켰는데 개정법에 따르면 강제이주당한 한인을 포함한 피압박민족과 각 개인이 받은 피해를 단계적으로 보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 스탈린시절 강제수용 참상 기록/계가진 「자유」 창간

    ◎생존 1천명 모임 결성… “인권신장 노력” 스탈린 집권시절 강제수용소의 악몽을 겪었던 사람들이 모여 잡지를 창간했다.앞으로 계간으로 발행될 이 잡지의 이름은 「자유」라는 뜻의 러시아어 「볼랴」로 「전체주의 수용소 재소자들의 저널」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6월초 창간호 4천부가 모스크바에서 발간된 뒤 찾는 사람이 많아 최근 또다시 3만부를 추가로 인쇄했다. 잡지 발행처는 스탈린수용소를 경험한 사람들의 모임인 바즈브라세니예(귀향)회로 지난 5월 중순 모스크바에서 제2회 강제수용소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한 뒤 잡지발행의 필요성에 뜻을 모으고 그동안 준비한 글들로 이번에 창간호를 내게된 것이다. 바즈브라세니예회는 페레스트로이카가 한창 진행중이던 지난 89년 전체주의의 폐해를 폭로하고 세계 전역의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한다는 취지로 스탈린수용소 생활을 했던 1천여명의 사람들이 결성한 기구이다.이들은 지난해 5월 제1회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한데 이어 금년 5월에도 모스크바에서 「강제수용소에서의 저항운동」이라는 주제로제2회 국제심포지엄을 가진 바 있다. 바즈브라세니예회의 회장 시몬 벨렌스키씨(65)는 창간호 서문에서 『형태는 바뀌었지만 굴락(수용소)은 러시아에 지금도 존재한다』고 지적하고 『개인의 인권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면 스탈린주의는 언제든 부활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벨렌스키회장은 스탈린 강제수용소의 정확한 피해자수는 솔제니친이 소설 「수용소군도」에서 4천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 바 있으나 『신만이 알 것』이라고 말하고 『피해자수는 물론 수용소에서의 생활의 실상을 파헤치는데 잡지발행의 1차적인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벨렌스키는 자신도 1949년 모스크바대학 재학중 『어느날 갑자기 스탈린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끌려가 7년동안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에서 영문도 모르는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말했다. 창간호에는 프랑스·독일인들중 나치수용소를 체험한 사람들의 글도 싣고 있는데 기벤스브루흐·부헨발트·아우슈비츠수용소의 체험기들이 그것이다.창간호는 스탈린 집권시절 강제수용소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 가운데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꼽히는 「노릴스크 폭동의 진상」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이 사건은 북극 부근 시베리아에 위치한 노릴스크수용소 재소자들이 1953년 5월부터 8월까지 인간적인 대우등을 요구하며 불복종운동을 벌이다 1백50명이 처형당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정확한 진상이 지금껏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당시 노릴스크수용소는 예니세이강 하구에 위치,코발트·주석 채굴작업에 강제 동원된 재소자들이 처우개선 등을 요구하며 장기간 비무장 저항운동을 벌였으나 당국이 결국 강제진압에 나서 피의 처형을 감행한 것으로 밝혀졌다.그러나 이 사건은 스탈린 강제수용소의 체제를 근본부터 뒤흔들어 이후 강제수용소의 건설이 중단됐다고 이 잡지는 밝히고 있다.
  • 러,6·25관련 문서목록 전달/외무부 인수

    ◎김일성­스탈린 외교전문 포함 수백건/사전 남침준비·중개입경위 밝혀질듯/“김 대통령 방러때 문서사본 제공” 러시아정부는 6·25한국전쟁 발발 43주년을 맞아 당시 소련의 스탈린과 북한 김일성 사이에 주고받은 전문을 비롯해 러시아 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한국전쟁 관련문서의 목록을 우리 정부에 전달해왔다고 홍순영외무부차관이 24일 발표했다. 이 목록에 들어있는 문서들은 북한이 전쟁발발 전해인 49년1월부터 전쟁준비를 위해 구소련과 주고받은 전문을 포함,중공군이 참전한 50년 10월까지 소련의 군투입및 무기제공 내용을 밝혀주는 것들이라고 홍차관은 말했다. 이들 문서 내용 자체가 공개되면 한국전쟁이 한국군과 미군의 북침에 의한 것이라는 북한측의 주장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고 북한측이 일찍부터 남침준비를 해왔다는 사실과 아직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중공군의 개입경위가 밝혀지는 등 한국전쟁의 진상이 드러날 것으로 기대된다. 40페이지 분량의 이 목록은 한승주외무장관이 유럽을 순방하면서 러시아를 방문중이던지난 7일 옐친러시아대통령을 예방했을 때 옐친대통령이 직접 한장관에게 건네준 것이다. 옐친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러시아정부는 한국전쟁 관련 문서의 발굴과 수집및 정리작업을 하고 있으나 워낙 방대한 분량이어서 우선 목록을 전달한다』면서 『목록외의 문서 사본은 김영삼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하면 직접 전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문서목록은 러시아정부 문서보관소와 국방부,구KGB등에 산재해 있는 한국전쟁 관련 문서 수백건의 제목과 이에대한 간단한 요약설명이 첨부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이 문서목록은 물론 앞으로 러시아측으로부터 전달받을 문서사본도 일단 국사편찬위에 넘겨준 뒤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정부는 한국전쟁의 진상규명 차원에서 중국 정부측에도 보관중인 관련 문서 사본의 공개와 인도를 요청할 방침이다.
  • 이런 전쟁(외언내언)

    「6·25」에 대한 역사적 정의라든가 전쟁사적 규정은 우리에게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 있다.그래서 동란이니 사변이니 하기도 하고 한국전쟁·조선전쟁 또는 그냥 「6·25전쟁」이라고도 쓴다. 「6·25」는 이를 체험한 세대에겐 민족적 비극이며 악몽이다.휴전선철책과 판문점,국립묘지와 녹슨 훈장,빛바랜 사진 한장이 그 비극의 실체다. 19 49년 4월13일 당시 38선을 시찰한 미 전권대사 필립 C 제섭은 『실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최전선에 서니 전율을 금할 수 없다』고 소감을 밝혔다.50년 6월초에 주한미대사 존 무초는 『북한군이 38선에 집결되고 있다.남한군은 형편없이 약하다』는 내용의 전문을 본국정부에 보냈다.그는 그 직전 워싱턴에서 『한국군이 전차와 장비로 증강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서울로 귀임한 터였다.국무차관 딘 러스크는 무초의 전문을 읽고는 같은 소리거니 판단하고 서랍속에 처박았다. 50년 6월19일의 정보보고에 따르면 38선 부근으로 소제 전차와 중포가 대량으로 이동완료됐으나 병사들의 동태는 「쥐죽은 듯이」고요했다는 게 당시 미국방장관 존슨의 훗날 증언이다.바로 엿새후 일요일 새벽에 북한 인민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총공격을 감행했다. 남침공격에 앞서 김일성이 공격계획을 마무리할 무렵 소련의 스탈린은 계획승인과 동시에 인민군의 사단·연대에 배치됐던 소련측 군사고문단을 모두 본국으로 소환했다.그 당시 소련공산당 초급간부였던 흐루시초프가 의아해서 까닭을 물었다.『고문단을 그대로 거기에 두는 것은 너무 위험해.잘못하면 포로로 잡힌단 말야.우리가 끼어들었다는 증거를 보여선 안되지.그건(전쟁)모두 김일성의 일이지 우리일은 아니니까』흐루시초프회고록에 나오는 스탈린의 대답이다.또다시 「6·25」를 맞는다.아니 벌써 43년전의 일이다.
  • 북침론·남침유도론 논거 상실/러 극비목록 전달 의미와 전망

    ◎49년부터 중공군 개입전까지 기록/구소군 투입·지원무기 등 밝혀질듯 냉전시대의 산물인 한국전쟁은 어떻게 해서 일어났고 누구에 의해 저질러졌는지가 멀지않아 역사적 확인 절차를 거칠 것 같다. 정부가 러시아로부터 앞으로 우리에게 건네줄 6·25관련 외교문서들의 목록을 전달 받은 것이다. 우선은 목록만을 전달받았으나 옐친러시아대통령은 김영삼대통령의 러시아방문때 문서사본을 모두 건네주겠다고 지난 8일 러시아를 방문한 한승주외무장관에게 약속했다.향후 문서가 공개되면 6·25를 둘러싼 모든 논쟁들이 종지부를 찍게되고 실상이 보다 분명해질 것으로 점쳐진다. 현재까지 전해진 바에 의하면 문서목록은 49년 1월부터 중공군이 개입하기 전인 50년 10월까지의 기록이다.약 40페이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를 의식한 러시아측의「비밀요청」으로 정부는 받았다는 사실외에는 내용 일체를 비밀에 부치고 있다.한외무장관도『내용은 너무 앞서가지 않는 것이 양국관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무척 조심스런 반응이다.한장관이 옐친대통령에게 목록을 건네받은뒤 직접 챙겨 귀국후 김대통령에게 단독 보고한 것도 이때문이다. 따라서 현상황에선 외교문서의 내용을 파악하기는 아직 이르다.다만 이 자료 정리 책임자인 볼코고노프대통령보좌관이 그동안 언론등을 통해 밝힌 사실로 미뤄보면 한국전쟁 개전부터 정전협상이 시작된 배경까지의 모든 과정이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특히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스탈린을 만난 자리에서 『2년안에 전쟁을 끝낼수 있으니 지원해 달라』는 부분,50년 5월 김과 스탈린이 개전일자를 결정한 부분,김이 북한주재 소련대사에게 남침동의 요청대목등이 들어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러한 문서들은 상투적인 북침론이나 일부 소장학자들의 남침유도론이 더이상 자리할수 없게 만들 것이라는 게 외무부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여기에 그 기간으로 보면 전쟁직전 소련이 「북침설」을 위한 국제 여론 조성과정,전쟁계획 수립과정,소련군 투입상황등도 포함된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볼코고노프보좌관은 『스탈린은 북한군이 궤멸적타격을 받게되자 2개 항공사단과 2개 고사포사단으로 특별 편성된 소련군을 투입했다』고 밝힌바 있다.이를 감안하면 49년 9월부터 50년 4월까지 소련이 북한에 지원한 무기내용과 군투입상황도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구체적인 내용을 아직 파악할수는 없지만 이번 외교문서가 우리에겐 「현대사의 확실한 정립」이라는 측면에서,러시아와의 관계증진 차원에서 커다란 외교적 성과라 할수 있다.그러나 중국으로부터도 관련 서류를 전달받아야 한다는 점이 여전히 외교적 숙제로 남아있다.
  • 우즈베크공(중앙아의 한인사회:중)

    ◎국회현지조사단 이부영의원의 실태보고/민족화합정책으로 이민초기 고충 해소/극면성 바탕 경제발전 기여… 자긍심 높아 현재 독립국가연합(CIS)에는 약45만명의 한인 동포들이 살고 있다.그들 가운데 3분의2에 달하는 30여만명은 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1937년,18만여명에 달하는 연해주 거주 동포들이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되어 온 이후 그들은 황량한 박토 중앙아시아를 옥토로 일구어낸 주역이었다.강제이주 과정에서 수많은 형제들,아들 딸들이 죽었지만,그리고 이주된 후 창문도 없는 토굴집에서 살아야 했지만 우리 동포들은 천부적인 근면성과 탁월한 농사 기술로 콜호스(Kolkhoz)라고 하는 수많은 협동농장을 건설했고 지역을 불문하고 성공적으로 농사를 지어냈다. 현재는 그곳의 정부나 공·사기업에 진출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동포도 많이 있고 대학교수 등의 전문 인텔리들도 그곳 사회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그들은 지금까지의 중앙아시아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고 대체로 중류 이상의 다소 여유있는 생활을 누리고 있다.카자흐공화국에서 동포지도자들을 직접 만났을때 그들의 표정에서 한인으로서의 자부심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알마아타에서의 일정을 끝낸 우리 조사단은 우즈베크공화국의 수도 타슈켄트로 향했다.우즈베키스탄의 국기가 선명히 그려진 아에로플로트기는 기내 방송을 러시아어에 앞서 우즈베크어로 시작하고 있었다.우즈베크공화국은 TV나 라디오 방송,상점의 간판이나 공문서 작성 등을 이미 우즈베크어로 공식화했다.총인구 2천만명중 70%에 달하는 우즈베크민족의 비율과 카리모프 대통령의 강력한 독재가 급속한 탈러시아화 및 우즈베크화 정책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사회발전 모델은 카자흐공화국과 마찬가지로 터키식의 발전방식을 지향하고 있는데 이는 세속적 이슬람을 바탕으로 한 종교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인접한 이란 등지의 회교 근본주의(fundamentalism)와는 달리 온건하고 대중적인 성격의 종교문화는 카리모프 대통령의 민족화합 정책과도 잘 부합하고 있었다.그러나 현지의 우리나라 교회들이 십자가를 옥외에 걸지 못할 정도로 타종교,특히 기독교에 대해서는 경직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대통령 민족문제 담당 비서관 사이도프와 우즈베크 공화국 의회 국제외교위원장 지야모프를 차례로 면담했다.그들은 한결같이 한인들의 우수성과 근면성에 대해 칭찬하고 한인들은 우즈베크공화국 국민으로서 다방면에 많은 기여를 하면서 잘 살고 있음을 강조했다. 카리모프 대통령의 강력한 민족화합 정책을 설명하는 가운데 그들은 올해 초 일부 국내언론에 보도된 우즈베크 민족주의자들이 금년내로 한인들에게 이 지역을 떠나라고 협박했다는 내용을 강력하게 부인하면서 이에 대해 대단히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또한 「재CIS 고려인연합회」가 자치주 추진과 관련하여 우즈베크 안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사실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기도 했다.민족화합정책이 다민족국가에서 필수적이라는 사실 이외에도 그들은 경제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민족분규가 장애 요인으로 작용할 것을 대단히 우려하고 있는 듯했다. 우리는 한인인 블라디미르박이 회장으로 있는 치르치크시의 비철금속내열합금 공장과 지모페이황이 회장인 타슈켄트주의 폴리타젤 협동농장을 방문했다.그곳을 방문케된 것은 민족문제에 대한 우리의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하는 우즈베크 정부의 배려때문이었다.우리동포들은 한결같이 몸집이 크고 건장해 보였다.지도급 인사여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여유가 몸에 밴 듯했고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특히 우리는 폴리타젤 농장에서 1937년 강제이주후 눈물겨운 노력으로 정착지를 개간하고 훌륭한 터전으로 변화시킨 동포 1세들을 만날 수 있었다.칠순이 넘었음에도 아주 건강한 모습이던 그들은 인심 또한 후하여 농장에서 재배한 갖은 과일과 고기를 보드카와 함께 대접해 주었다. 사실 필자는 그들의 여유 있는 표정에서 강제이주 초기의 파란만장한 신산고초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단,술자리에서의 어우러짐으로 이역만리 타국에서 마저 그들이나 우리들이나 같은 민족이라는 연대감,이유없이 즐겁고 흥겨운 마음을 확인한 것은 두고두고 기억될 만한 일일 것이다.안무혁 의원과 필자는 합금공장에서는 우즈베크 전통의 칼을,폴리타젤 농장에서는 우즈베크 전통의상을 선물로 받았다.우리 문화와 우리 풍습을 느끼게 하는 선물이었으면 더 좋았으리라.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이미 우즈베크공화국 국민인 것이다.
  • 구소의 한국전개입 비사:상

    ◎“소 2개비행사단 50년11월 첫 참전”/극비특명… “계급장없이 중공군 위장”/당시 비행단 정보장교 올로프전사특별기고/중국 안동에 본부… 총병력 2만6천명 투입/51년3월 증파… 미기와 북 상공서 공중전/스탈린,해군출전도 계획… 미 자극 우려 포기 ▷남침 초기◁ 러시아가 개방·개혁정책추진으로 철의 장막을 걷고 한국과의 교류를 확대함에 따라 한국전쟁관련 비밀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6·25발발 43주년을 맞아 당시 소련군 정보장교(대위)로 9개월동안 소련의 제64비행단에 근무했으며 현재 러시아군사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세묘노비치 올로프박사(69)의 증언을 3횡에 걸쳐 게재, 구소련의 한국전 참전비밀을 파헤쳐본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51년 3월 초순 어느 날 모스크바 군사영어학교에 근무하던 나는 새 임지로 전출명령을 받았다.그렇게 해서 그해 10월까지 8개월여동안 한국전에 참전하게 됐다.근무지는 한국전 지원임무를 맡은 소련공군 제64비행단이 주둔하던 중국의 안동. 정보장교로 참모본부에 근무한 덕에 나는 당시 비행단의 병력규모,위치등을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었다.우선 참모본부 아래 미그 15기 3개사단이 있었다.제1,2사단은 1950년 11월 최초로 안동에 자리를 잡았고 제3사단은 이듬해 3월 배치됐다.그외 구경 85㎜,37㎜로 무장한 대공포 2개사단이 별도로 있었다. ○미그­15 3개사단 병력수는 참전초기부터 종전을 맞아 철수할 때까지 2만6천명선이 계속 유지됐다.이는 조종사 3백명이 포함된 숫자이다.보유무기로는 주력기종인 미그­15기가 1백80∼2백대,야간전투기인 LA­11(재래기종)25∼30대,대공포구경85㎜가 1백40∼1백60문,37㎜포가 1백30∼1백50문이 있었다. 당시 소련당국은 이 전쟁에 불개입을 선언한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비밀로 부쳐졌다.그래서 여러가지 비상수단이 취해졌다.모든 병력이 기장,계급장이 없는 중국군복을 입었고 조종사들은 비행중 무선교신시 절대 러시아어를 쓰지 못하게 했다.물론 이런 지시들은 애당초 지켜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조종사들이 초기에 조종간옆에다 간단한 교신어를 한국어나 중국어로 음을 적어놓고 발음만 흉내내기도 했으나 작전시 이로 인한 혼란이 커서 대부분 러시아어로 교신을 했던게 사실이다.물론 전투기들도 모두 중국·북한표지를 했다. ○중국·북한기 표지 보다 중요한 점은 혹시 격추돼 참전사실이 탄로날 것에 대비해 작전지역이 철저히 제한됐다는 사실이다. 이 원칙은 종전때까지 지켜졌다.동으로 동해,남으로는 전선에서 1백80㎞ 떨어진 39도선이 우리의 작전한계선이었다.즉 북한영토내에서는 압록강을 끼고 청진과 신안주사이가 우리의 작전지역이었다.미군측은 이 지역을 「미그앨리(소로)」라고 불렀다. 전쟁개시 2개월 전인 1950년 4월 김일성이 당시 외교부장 박헌영과 함께 극비에 모스크바로 스탈린을 찾아가 전쟁지원을 요청한 이래 스탈린은 참전에 끝까지 적극적인 태도롤 보이지 않았다. 미국과의 직접무력대결을 원치않았기 때문이다.마지막에 스탈린으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리게 만든 것은 모택동의 참전결정이었다.김일성은 전쟁준비를 착실히 진행시켜왔고 특히 중국내전에 참여해 혁명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한 1만4천명의 북한출신 공산주의자들이 50년초 귀국,정규군에 합세한 것을 계기로 북한군의 사기는 상당히 드높았다. 이런 여러 고무적인 정황들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의 참전을 두려워했다.개전 이튿날인 6월26일 대련항을 떠난 소련군함들이 참전의혹을 받지 않도록 즉시 귀항명령을 받았고 이후 전쟁기간 내내 소해군은 한국전에 개입치 않았다. ○중 개입 영향받아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됐을 때도 스탈린은 크게 낙담하면서도 무력개입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당시 정치국원으로서 모스크바 시 당제1서기였던 흐루시초프가 무력개입을 의미하는 「즉각적인 방어정책수립」을 강력히 권유했으나 스탈린은 이도 묵살했다.스탈린의 마음을 돌리게 한 것은 결국 중국군의 개입이었다. 모택동은 중국의용군의 한국파병을 결정하며 스탈린에게 병력이송과 물자보급을 위해 압록강 교량6곳의 안전이 긴요하고 이를 위해 소공군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누차강조했다. 1950년 11월 말 소공군 2개 전투비행사단이 실전에 투입되자 미군의 B­29기들이 압록강 철교들에 엄청난 폭격을 가했다.주 목표는 안동과 신의주를 잇는 교량 2곳이었다.하나는 복선철교였고 또 하나는 자동차·철도 겸용 다리였다. 당시 북한은 임시수도를 신의주에 두고 있었고 김일성도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중국군·북한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B­29기 폭격이었다.그래서 그 해 11월 12월 사이 미그­15기의 최대공격목표도 이 B­29였다.안동에서는 40∼50대의 미그­15기가 당시 압록강을 넘어 출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950년말 소련군지도부는 제공권을 되찾기 위해 64비행단의 보강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그 결과 이듬해 3월 소련공군의 영웅 이반 코제두프 대령이 이끄는 새 비행사단이 안동에 도착했다.이렇게 해서 그해 봄 북한상공에서는 보강된 소군기와 미군기 사이에 전례없이 치열한 공중전이 전개됐다. ▷필자 약력◁ ▲1924년생 ▲러시아군사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역사학박사) ▲소공군 64비행단 정보장교로 한국전참전 예비역대령 ▲저서 「절대무기의 개랍」(1988)「제3제국과 제3의 법칙」(1993)
  • “경원확대 등 북한개방 지원절실”/일「국제포럼」북한관련 보고서요지

    ◎“권력세습후 비극적 격동 가능성/개혁파 도와 국제사회동참 유도를” 일본의 저명한 학계·재계인사 등으로 구성된 민간정책연구기관 「일본국제포럼」은 최근 미야자와(궁택희일)총리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북한의 권력세습과정에서 루마니아와 같은 비극적 격동의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고 북한의 개혁파를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다음은 「아시아 사회주의경제의 변화와 일본의 대응」이라는 제목의 보고서 가운데 북한관련 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북한의 개방정책 지원=중국의 강택민총서기는 90년 중국을 방문한 연형묵 당시 북한총리에게 대외개방과 사회주의가 양립할 수 있음을 설득했다.북한은 중국의 설득으로 부분적 개방을 단행했다. 북한은 94년부터 경제개발 4차7개년계획에 들어간다.그러나 자금부족으로 경제계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일본은 북한의 8백억엔에 달하는 무역대금 미지급및 핵문제 등으로 공적자금을 지원할 수 없으며 민간기업의 직접투자도 어려운 상황이다.그러나 일본은 북한이 한국에 대해 자금과 기술협력을 적극 요청하고 있는 상황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평양정권 내부의 개혁파 지원=북한의 권력세습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경제적 어려움을 반영한 경제각료의 빈번한 교체와 인사를 통한 김정일서기 측근의 등용이다.정치·경제 양면에서 국제정세를 잘 아는 젊은 테크너크랫이 중용되고 있다. 강성산총리는 지난 84년부터 86년까지 총리직을 맡았던 개혁파다.당시는 개혁파들이 상당수 있었으며 84년9월에는 「합영법」이 제정되었다.북한은 그러나 합영법제정을 국내에는 알리지 않았다.이데올로기적 전제주의를 유지하며 외자도입의 「과실」만 따먹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는 외국자본도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때문에 김정일정권의 새로운 지도자들은 경제난 타결을 위해 이데올로기적 제약을 뛰어넘는 시도를 단행할 것으로 예상된다.일본은 평양정권내부에 이같은 개혁·개방지지자들이 존재하고 있음에 유의,이들의 정책과 주장이 현실화할 수 있도록 외부환경조성에 노력해야 한다. ▲북한을 아시아·태평양국가들과 공통의 대화의장으로=북한은 최근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를 선언,국제적 비난을 감수하며 「핵카드」라는 전형적인 강경노선을 채택했다.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외자도입 등 대외개방을 지향하고 있다.이같은 움직임은 북한정권내부에 강경한 스탈린주의자들과 개방파가 공존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북한의 NPT탈퇴선언은 경제적 어려움을 위기의식의 고양으로 참도록 하며 정치·군사적 목표를 관철시키려는 조치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북한의 이같은 강경책으로 미루어 볼때 개방정책이 정권내부의 일치된 노선으로 확정됐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81세인 김일성 생애에 많은 개방이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북한의 정치적 경직성과 경제난으로 김일성후계체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루마니아와 같은 격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정권세습의 혼란을 극복,김정일정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더라도 수년내에 정치·경제적 요인으로 붕괴될 가능성이 있다.이는 한반도의 전면적인 위기사태로 일본의 국익에도 반하는 것이다. 한반도통일은 한국인들이 선택할 장래문제지만 당장의 과제는 북한이 개혁·개방흐름에 합류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이를 위해 우선 북한이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이 되도록 하고 NPT탈퇴 등 독선적인 행동은 통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갖도록 할 필요가 있다. 국제사회는 북한의 국제적 책임요구와 함께 북한을 회원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국제포럼에 초청해야 한다.구체적으로는 북한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각료회의(APEC)가입 등이 검토될 수 있다.
  • 시민 주체적 개혁과 정치권 물갈이/김동성(정경문화포럼)

    ◎부패척결에의 대응… 주인의식 긴요/민주절차인 선거 통해 부도덕 척결 김영삼식 개혁 추진은 현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시켜 주면서 신한국건설의 구호가 환상이 아닌 실현가능한 목표라고 국민들은 믿기 시작하는 것같다.그러나 우리 주변의 그늘진 곳에서는 개혁의 방법과 진행과정에 대해 시비하는 목소리가 있다.그리고 많은 논객들이 언론매체를 통해 무심하게 이러한 불평들에 동조하고 있다. 개혁에 대한 비판논리의 핵심은 현 개혁정책이 총체적 프로그램이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개혁대상세력의 설정에 있었서의 불분명성,그리고 법적·제도적장치를 만들지 않은 채 개혁을 진행시킨다는 등이다.그리고 이러한 비판의 소리는 권위주의 체제에서 수동적으로만 사고해 온 보통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는다.그러나 개혁정첵과 방식은 역사적인 특정시점과 정치체제의 성격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 소수의 권력 엘리트들이 국가의 목표와 민족의 이상을 정해놓고 특정 정치·경제및 사회 구조와 양식의 변화를 프로그램화하면서 개혁을 진행시켜 갈 수가있다.그러나 이러한 개혁방식은 히틀러나 스탈린의 전체주의적 모형으로 귀착되기가 쉽다. 다음으로 정치,경제,군 엘리트들이 경제성장과 정치적 효율성을 강조하면서 정권이 설정한 발전 목표로 국민을 동원하면서 개혁을 추진해 나가는 제3세계 군부통치체제에서의 발전모델이 있다.이 경우 이미 설정된 발전방향에 저해된다고 생각되는 민간·사회부문과 반대세력을 개혁이라는 이름하에 탄압하게 마련이다.그리고 그 결과 성장과 질서라는 미명하에 개혁주도 세력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스스로가 사회·경제적 비리와 부패를 구조화시켜 나가게 된다. 현 시점에서의 우리나라 개혁은 반드시 소수에 의해 설계되는 개혁일 필요가 없다.우리의 개혁목표는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경제사회 발전을 꾀하는 과정에서 많은 공직자와 기업가들이 공동체적 이상을 망각하고 탐욕에 빠졌던데에서 일차적으로 기인한 구조적 부패를 척결하자는 것이다. 국민 전체가 썩은 것이 아니다.구조적 부패상황하에 평범한 시민들은 비정상을 정상이라고 믿도록 강요받아 왔던 것이다.따라서 일차적 개혁과정은 국민들로 하여금 무엇이 정상이고 상식인가를 일깨워 주는 정신 개혁으로 충분하다.그리고 현 단계에서의 개혁은 기존의 법률과 제도의 틀속에서도 가능하다.물론 새로운 법적·제도적 장치를 준비해야하나 개혁논의의 초점이 법적·제도적차원에만 집중된다면 이는 현재의 개혁과제를 왜곡시킬 뿐이다. 만일 우리가 개혁의 다음 단계를 생각한다면 이는 정치권의 물갈이에 초점이 맞춰져야만 한다.지금까지의 구조적인 부정부패의 일차적 책임은 공직자에게 있어왔기 때문이다.정치권의 물갈이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으나 민주적절차에 따라야 한다.민주적 절차란 선거와 시민적 감시에 의존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앞으로의 국회의원과 지방의회선거에 대비하여,그리고 새로운 공직자의 임명과정에 대비하여 국민들은 공직자의 모든 면을 속속들이 평가하고 있어야 한다.비리에 연류되어온 개인과 그룹,그리고 최근에 드러나고 있는 부도덕한 양심들에 대해 국민들은 망각하지 않고 있어야만 한다.그리고 상식과 정의를설파하는 시민단체들의 활성화와 양심적언론,그리고 정의로온 정치지도자의 유기적 협력관계의 지속만이 성공적 개혁의 관건이 된다. 선출된 공인이든 임명된 공직자든 국민의 세금으로 녹을 받는다.그리고 명예를 유지한다.따라서 국민앞에 스스로를 노출하는 것은 괴로움도 아니요,치욕도 아니다.오히려 의무이다.공직을 배경으로 축재한 부는 설령 법망을 피했다하더라도 이를 사회에 환원하여 국민의 재심을 기다리는 것이 순리다. 현 단계에서의 개혁은 김대통령과 부패세력 간의 대결도 아니오,여야간 대결도 아니요,여권내 계파 간의 싸움도 아니다.국민과 일부 부패세력간의 문제이다.앞으로의 개혁향방은 국민의 건전한 상식과 주인의식에 달려 있다.그리고 개혁의 목표와 미래는 국가의 주인인 국민의 뜻과 의도에 따라 정해져야만이 정도인 것이다.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우리 자신의 운명을 누군가가 대신 이끌어 줄 것을 기대하며 살아왔다.
  • 쇼스타코비치의 부정/유혜자 수필가(굄돌)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밤늦게 길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면 지나던 어른들이 『빨리 집에들 가거라 부모님이 걱정하신다』며 아이들의 등을 떠밀었다.그리고 가난한 친구의 집에 몰려갔을 때 끼니때가 되면 자신들은 못먹더라도 개떡이나 수제비를 나눠 먹여주던 어머니들.그때의 부모들만 해도 내 자녀만이 아니라 남의 자녀에게도 관심과 애정을 나눠주었다고 생각된다. 오로지 내 자녀만 잘되라고 부정을 저지른 저명인사들의 경우를 문명이 발달하고 경쟁사회에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두둔하는 이는 별로 없다.그 명사들의 부모세대야말로 소박한 정성으로 자녀들의 성공을 빌었을 것이다.적어도 자신들부터 하늘에 부끄러운 일이 없게하고 착한 일을 하며 덕을 쌓아야만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기원이 이뤄지리라고 믿었던 이들이었으리라. 정당하게 노력한 사람들이 차지할 자리를 빼앗고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가책도 없이 금전으로 자녀의 입학을 산 사람들이 자녀의 밝은 장래를 기원할 자격이 있을까 의심이 된다. 러시아의 작곡가 디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협주곡 2번 F장조의 멜로디를 들으며 시대적으로 어두운 스탈린시대의 작가의 음악답지 않게 밝고 경쾌한 느낌을 받았다.나중에야 그 협주곡이 아들의 데뷔연주회를 위하여 만들어준 곡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음악전공이 아닌 애호가의 귀로 들어도 기교적으로 쉬울 것 같고 경쾌한 멜로디. 어린 날의 즐거운 운동회를 연상할 만큼 신나게 시작되는 1악장,그윽하고 시적인 분위기의 2악장,3악장은 빠르고 힘찬 도약을 느낄 수 있었다. 쇼스타코비치가 작곡가이면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간결한 형식으로 연주하기 쉽고 즐거운 곡으로 배려한 것이었다.그리고 연주가로서 갓 출발하는 아들에게 일러두고 싶은 무언의 메시지까지 느껴진다. 전문인이 아니면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이 난해해서 접근하기 어렵다는 선입견을 피아노협주곡 2번에서는 씻을 수 있겠다.모스크바 음악원생인 아들에게 밝고 빛나는 세계를 누릴 것을 바라는 아버지의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다. 스탈린 독재하에서 마음의 고뇌를 겪고 있던 예술가아버지의 깊은 부성애. 예술가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밝고 따뜻한 사랑으로 부성애의 의미를 되새겨 볼 5월이다.
  • 김일성/“건강악화” “건재” 양론(오늘의 북한)

    ◎악화설/관례깬 10대강령 발표 대독은 와병증거/건재설/이인모 병문안·외빈 연쇄접견들어 일축 지난 15일로 81회 생일을 맞은 김일성의 건강이 최근 악화되고 있다는 소문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김은 그동안 고령에 비해 비교적 정력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었다.그러나 최근들어 몇가지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노쇠현상이 나타나고 있는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때문에 현재로선 그가 북한 권좌에서 전권을 휘두르는데 건강상 문제는 없다는 관측과 이제는 무리라는 설이 엇갈리고 있다. 지난 1월 신년사를 낭독할 때나 이달 7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석상에서 대외적으로 드러난 김일성의 외양은 영락없이 기력이 쇠잔한 8순노인의 모습이라는 게 대다수 관측통들의 중론이다.부자연한 몸놀림과 눈꺼풀의 둔한 움직임등 완연한 노쇠현상을 보였다는 것이다.특히 지난 7일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의 발표는 관례를 깨고 이를 총리 강성산에게 대독케 한 사실이 이같은 관측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의 일간 쿠란티지는 김이 앞으로 3년밖에 더 못살 것으로 보도하기도 했다.이 신문은 최근 김주석을 면담한 한 외국대표의 말을 인용해 그의 건강상태가 힘겹게 오른손을들 정도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김은 조선적십자병원에 입원중인 이인모노인을 병문안한다든가 농업기계화연구소에 대한 현지지도등 최근 동정을 통해 노쇠설을 일단 일축하고 있다.김은 지난 15∼19일간 생일축하단으로 방북한 시아누크 캄보디아 민족회의의장과 마사리카 시리아부통령 등 외빈들과의 연쇄회동을 통해 대외적으로도 건재를 과시하기도 했다. 정부측은 김주석이 시아누크의장을 영접할 때 보여준 불편한 거동에 주목하고 있다.즉 그의 건강이 최근 급속히 악화된 것으로 조심스레 관측하고 있는 것이다.정부의 한 당국자는 27일 『최근 김주석을 만난 한 외국인사로부터 김이 하루 평균 3∼4시간 밖에 잠을 자지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며 김주석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등 건강이 크게 나빠진 것으로 분석했다. 북한에선 김의 건강상태에 대해서 운위하는 것 자체가 금기사항이다.그의 추종세력들은 『솔방울로 총알을 만들고 가랑잎으로 큰 강을 건넜다』는 식으로까지 김을 영생불사의 존재로 신격화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 자신은 정작 이를 믿지않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김이 그의 건강문제만을 전담하는 이른바 장수문제연구소까지 만들어 건강유지에 발버둥치고 있는 현실이그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연초에 언론에 보도되어 실소를 자아내게 했었던 「호르몬목욕」「만담조」등의 장수비결이 모두 장수연구소의 연구결과이다.「호르몬목욕」은 김주석이 18∼20세 전후의 숫 처녀들과 온탕에서 함께 목욕하도록 함으로써 처녀들의 기를 자연스럽게 흡수토록 한다는 일종의 회춘비법이다.만담조는 우스개소리로 김주석의 심기를 편하게 해 건강유지에 도움이 되게 조직된 7인조 혼성 개그팀을 가리킨다. 이같은 장수비법들의 효과는 미지수다.분명한 것은 김일성도 자신의 수명이 이미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다는 점이다.아들인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에 앉혀 군부를 장악케 하는등 후계 세습구도를 조기에 정착시키려는 움직임을보이고 있는 것이 이같은 추론을 뒷받침한다.왜냐하면 김은 과거 소련이나 중국에서 스탈린과 모택동의 사후 대대적인 격하운동이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정황들을 종합할 경우 김은 세습체제를 조기정착시키는 움직임을 더욱 가속화하는 수순을 밟을 것으로 예상된다.김일성은 올해 생일 행사에서도 자신보다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등 김정일의 위상강화에 주력했었다.이는 건강에 결정적인 이상이 생겨 권력일선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부자 양두체제로 북한을 이끌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 러시아 한인(외언내언)

    러시아인들은 그곳 한인들을 카레스케라 부른다.한인스스로 고려인이라 자칭한데 연유한다.공산 소련때부터 그리 불렀다니 일제에 나라잃고 해방후엔 분단·대립됐던 조국의 비극을 말하는것 같다.조선인도 아니요 한국인도 아닌 하필이면 고려인인가.광복과 통일의 염원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러시아 한인이민의 시작은 1863년 보리고개때부터다.가난과 기아의 한인13가구가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땅에 정착한 것이 효시다.월경자가 늘어나자 러시아측은 설득과 처벌의 위협으로 귀환시키려 했으나 돌아가도 굶어죽거나 처벌받을수 밖에 없다며 버티는 그들을 어쩔수 없었다. 강인한 이주민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수공업을 일으켜 기어이 러시아정부의 신임을 얻었으며 1917년엔 연해주와 시베리아 일대의 한인이 22만5천여명에 이른 것으로 전해진다.일제가 조국을 강점하자 독립군을 일으켜 투쟁에 나서기도 했던 이들은 그러나 또한차례 시련을 겪게 된다.스탈린의 강제이주인 것이다. 스탈린은 연해주 한인들을 「불온인민」으로 낙인찍어 37년 9월부터 4개월간 18만이나 중앙아시아 황무지로 강제이주시킨 것이다.나치스의 유태인호송을 연상시키는 화물열차에 실려가면서 기아와 질병으로 희생된 자가 무릇 수천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망국민의 수모요 비운이었다. 오늘의 구소련 중앙아시아일대 거주 한인들이 바로 그들이며 그 후예인 것이다.러시아의회가 31일 통과시킨 「러시아한인 명예회복법」은 바로 그들의 수난과 수모에 대한 56년만의 공식사죄요 명예회복조치인 것이다. 아쉬운 것은 이 법이 러시아한인에만 해당된다는 점이다.정작 강제이주민의 뿌리가 있는 중앙아 우즈베크(18만)와 카자흐(10만) 한인에게도 연해주 이주자격등 같은 사죄와 명예회복조치가 있었으면 한다.이들지역은 지금 유혈분쟁의 위기에 처해있다.러시아와 관계공화국의 배려가 있어야 할것이다.
  • 한인 명예회복법안 통과/러 의회/중앙아동포 연해주이주 허용

    【모스크바 연합】 러시아 최고회의 민족원(하원)은 31일 스탈린시대 중앙아시아로 강제추방당한 한인들의 정치적 명예회복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재러시아 한인 명예회복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이 최종 확정되기 위해서는 최고회의 상원격인 공화국원의 의결을 거쳐야 하는데 일반적 관례로 보아 통과가 확실시됨에 따라 사실상 채택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로써 러시아는 지난 37년의 한인 강제추방과 관련,56년만에 공식적으로 잘못을 인정한 셈이며 앞으로 50만 한인민족문제 해결에 전향적으로 나설 것으로 기대된다. 국제고려인연합회의 김영웅회장은 이 법안통과에 따라 50만 한인들의 오랜 숙원인 명예회복문제가 해결됐으며 그동안 묵시적으로 허용돼온 연해주 이주가 법적으로 보장됐다고 말했다.
  • 중국 확고한 기숙관료시대로/강택민 전권장악의 의미

    ◎혁명원로 국가요직서 모두 퇴진/정 후계체제 출범… 개혁·개방 가속 중국공산당총서기 강택민이 당원로 양상곤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에 선출됨에 따라 중국정치는 혁명1세들의 지배체제를 벗어나 명실상부한 기술관료 통치시대로 진입하게 됐다.양상곤뿐 아니라 그동안 정치 일선에서 활약하던 만리 요의림 송평등 모든 혁명원로들이 지난해 10월 당대회때 당직을 떠난데 이어 이번에는 국가요직에서도 모두 물러나게 된것이다.이같은 원로들의 제2선 퇴임과 당고문위원회의 폐지,그리고 지난해부터 이선념 등영초 왕진등 이른바 8대원로들이 차례로 타계함에 따라 원로들의 섭정도 사실상 모두 사라졌다.이제 본격적인 혁명이후 시대를 맞았다 할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택민은 최고지도자 등소평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났다고는 할수 없다.지난해 당대회에서는 등의 개혁개방과 시장경제 노선을 당헌에 채택했을 뿐 아니라 이번 전인대에서는 이 노선을 헌법에까지 집어 넣기에 이르렀다.따라서 강은 자기 철학의 실천가가 아닌 등소평철학의 대리실천가라 해야 옳다.바꾸어 말하면 등소평후계체제가 출범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강은 앞으로 당분간은 2단계 개혁개방을 착실히 추진하면서 사회주의시장경제를 무리없이 도입해야 할 책무를 안게 됐다. 그는 당·정·군 3분야의 전권을 장악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모택동이래 가장 강력한 권한을 거머쥐었음에도 과거와 같은 강력한 통치력의 발휘는 어려울뿐 아니라 그럴 처지도 아닌것 같다. 그는 지난 89년 천안문사태이후 상해당서기에서 일약 당총서기에 오른 이래 온건 개혁노선을 걸어오면서 모나지 않은 처신을 함으로써 혁명원로등 보수파나 젊은 개혁파들로부터 무난하다는 평을 받아왔다. 1926년8월17일 강소성 양주에서 태어난 그는 상해교통대학 전기과를 졸업했다.공산당에는 대학졸업 1년전인 46년7월에 가입했으며 55년 모스크바의 스탈린자동차공장에서 1년간 연수를 거친뒤 장춘 상해 무한의 공장이나 연구소등지에서 근무해왔다. 문혁때 그의 활동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없으며 등소평집권이후인 80년대초 전자공업부의 부부장과 부장등을 거쳐 85년7월부터 일약 상해시장으로 뽑히는 행운을 안았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45)

    ◎길림시절:4/「공산서적 탐독」의 허구/“「국가와 혁명」 「자본론」 등 27년초 탐독” 주장/중국어번역판 29년께야 나온 사실과 상반/「타고난 공산주의자」 행세하려 날조 『길림에서의 나의 활동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더 깊이 연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나는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보다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의 저작들을 탐독하는데 더 열중하였다.당시의 중국은 대혁명기여서 소련이나 일본에서 발간되는 좋은 책들을 많이 번역출판하였다』 ○만주반입 시일 걸려 회고록에서는 김일성의 길림시절이 이상과 같이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헌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쓰고 있다.그는 이 시기 「공산당선언」 「자본론」 「국가와 혁명」 「임금노동과 자본」등 고전과 그 해설서,그리고 고리키의 「어머니」 로신의 「축복」 「아Q정전」 기타 「철의 흐름」「압록강가에서」 「소년방랑자」같은 혁명적인 소설을 많이 읽었다는 것이다. 물론 중학생시절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책 읽는데에 눈을 뜨는 시절이므로 김일성도 책은 일정하게 읽었을 것이다.그러나 적어도 이상의 책들은 거의 읽지 않았다.이러한 책은 길림에서는 구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당시 중국은 대혁명기여서 번역물이 많았다고 쓰고 있지만 중국혁명은 먼저 화남에서 시작되고 그것이 화중·화북으로 번졌다.따라서 좌익출판물도 맨처음은 광동,그 다음에 상해,그리고 북경과 같은 순서로 출판되어 나갔다.그러한 출판물이 만주에 반입되더라도 그것은 심양,하얼빈에 먼저 들어가고 이보다 오지인 길림에는 그후에야 반입되었다. 이러한 상식을 안 다음에 회고록의 선전을 분석해 보자. ㈀김일성은 길림에 온 27년에 「공산당선언」 「자본론」 「국가와 혁명」 그리고 「자본주의 최고단계로서의 제국주의」 즉 「제국주의론」을 읽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78년의 「불멸의 자욱을 따라」부터 그렇게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육문중학교에서 그가 직접 배웠던 공산주의자 상월은 상해에서 길림에 온 것이 29년 초였고 그가 휴대한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영문판이었다는 것,이 영문판을 중학생용으로 쉽게 풀어서 비밀소조에서 강의한 인물은 김일성이 아니라 상월 자신이었다는 것을 밝힌 바 있었다. ○상해서만 부분 출판 그런데 이번에는 레닌의 이 책을 일부러 그의 「독서목록」에서 빼고 있다.그 이유는 여러가지 추측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겟다. ㈁필자는 앞에서 화성의숙 시절에 「공산당 선언」을 읽었다는 회고록의 주장에 대하여 이 시절 화전에서는 그러한 책은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다는 점을 들어 그것이 헛된 주장임을 밝혔다.그런데 상월은 길림에 올 때 「제국주의론」이외에 다른 공산주의 서적을 가져온 흔적이 없다.이 점을 보면 김일성은 29년에 가서도 이 책은 읽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크게 된다. ㄷ)필자는 일찍이 중국에서 자본론이 부분적으로나마 번역출판된 것은 1930년 상해에서 있은 일이었고 따라서 26년의 화전이나 27년의 길림에서 김일성이 이 책을 읽었다는 말은 성립이 안된다고 비판하였다. 그런데 김일성은 이번에는 이러한 자기 주장을 대폭적으로 바꾸어 버렸다.자기가 동대탄에 숙소를 정하고 있을 때,와서 같이 생활한 박소심이 일본어판 자본론을 읽고 있다가 자기에게 해설해 주었다고 변경한 것이다. 일본문헌에서는 박소심은 조선공산당 재건파의 하나였던 서울­상해파의 중진으로 되어 있다.김일성으로 보면 「종파」였던 박소심이 과연 그와 동숙하고 있었겠는가부터가 의문이 되지만,하여간 그는 이런 말을 끄집어 냄으로써 오히려 자본론을 자기가 읽지 않았다는 것을 고백한 셈이 되었다. ㄹ)레닌의 「국가와 혁명」은 27년,광동의 영동민국일보 부간 「혁명」에 이춘번(가백년)이 번역,연재하기 시작하였고 그 단행본은 29년에 출판되었다.김일성은 고리키의 「어머니」도 읽었다고 하는데 이 책 역시 29년 10월에 심단선(하연)이 「모친」이란 이름으로 번역하여 상해에서 출판하고 있다. 이런 책을 길림에서 27년에 읽어치웠다는 주장은 무식한 김일성이나 그의 아첨꾼인 어용작가들 이외는 아무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ㅁ)이 밖에 이번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읽었다고 새로 선보인 책이 있다.「임금노동과 자본」「철의 흐름」「축복」「아큐정전」「압록강가에서」「소년방랑자」 등등이 그것인데 일일이 고증하지 않더라도 읽지 못하거나 읽지 않았던 것을 금방 알 수 있는 책들이 대부분이다. ○재경분자이었을뿐 김일성은 이상과 같이 당시 중국에서는 번역되지도 않았던 마르크스·레닌주의 고전을 러시아어나 일본어가 아닌 「중국어 번역본으로 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그것도 그가 길림에 있지도 않았던 27년 상반기,「길림에서 혁명활동을 벌이는 첫 사업」으로 이러한 독서를 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러한 조작을 일삼는 것은 그 이유가 뻔하다.그는 당시 좌경화되어 있었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그런데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그는 지금 자기가 타고난 공산주의자처럼 행세하고 있다.이 때문에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문헌을 읽었다고 내세움으로써 당시의 자기를 「공산주의자」로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①「세기와 더불어1」207면 ②평전 131면 ③평전 129면 ④평전 217면 ⑤평전 135면
  • “레닌은 유태인혈통의 편집광”

    ◎새 전기 출간… “혁명중 문화재 조직적 파괴” 공산주의가 막을 내렸다지만 볼셰비키혁명을 이끈 레닌에 대한 존경심만은 좀처럼 버리지 못하는게 러시아국민들이다.붉은 광장의 레닌묘소에는 지금도 매일 수많은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고 스탈린,KGB 창시자 제르진스키의 동상은 모조리 철거돼도 레닌동상만은 꽤나 건재한 게 러시아의 현실이다. 이처럼 아직도 「소련의 국부」로 남아있는 레닌을 유대인·위선자·편집광적인 권력욕에 사로잡힌 인물로 묘사한 전기가 발간돼 화제가 되고 있다.지난달 중순 벨카출판사가 발간한 「햇빛속에서」가 바로 화제의 책으로 저자는 러시아민족주의 경향의 책을 주로 써온 블라디미르 솔로우힌. 우선 표지에서부터 레닌의 얼굴 절반을 마귀의 형상으로 묘사,책의 성격을 단적으로 짐작케 한다.소련시절 정형화된 레닌전기들이 공통적으로 담고있는 레닌의 사상·연설 등에 대한 언급은 생략하고 곧바로 레닌에 대한 인신공격부터 시작한다.주된 줄거리는 레닌이 광폭하고 주변의 심복 몇사람의 말만 듣는교활한 과대망상증 환자로 그려가고 있다.『레닌은 어린시절부터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게 뒤틀려있었고 이것이 뒷날 혁명전후 러시아문화를 조직적으로 파괴하는 작업으로 나타났다』는게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레닌의 모친 마리아 블랑크가 유대인이었다고 단정짓고 그 때문에 레닌이 어릴적부터 자신에게 적대적인 러시아문화·러시아인에 대한 증오감을 키워왔으며 혁명뒤 소비예트건설이라는 이름아래 전통러시아문화에 대한 조직적인 파괴행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한다.정치적으로도 레닌은 혁명뒤 러시아인 다수가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라트비아인들을 주요 지지기반으로 삼았다고 이 책은 쓰고 있다. 구체적인 증거로 초대 소비예트 인민위원회 구성원 22명 가운데 유대인이 20명이었고 국방위원회는 43명 가운데 34명이 유대인,KGB 전신인 체카의 지도자 45명 가운데 43명이 유대인이었다고 주장한다. 한편 이 책이 논란을 불러일으키자 일부에서는 초기혁명지도부 인사들 가운데 유대인 분류숫자등 책 내용의 상당부분이 정확하지 않은자료를 근거로 삼고 있고 러시아민족주의를 의도적으로 부추기려는 의도 또한 너무 노골화 돼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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