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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까레스키 식품의 확산(중앙아시아를 가다:12)

    ◎유목민족의 식탁 점령한 김치/“입맛을 산뜻하게 하는 별미”/양고기·양젖 위주 식사에 적합/신강성­카즈흐­티베트까지 ‘침투’/우루무치 교포 절반이 김치장수 그 끝 없이 멀고 먼 서역에도,어디를 가나 우리 교포들이 살고 있다.그들은 한국의 음식을 먹고 전통식생활에서도 전통을 지킨다.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유학온 카자흐스탄 학생이 밥을 물말아 먹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던 기억이 생생하다.그 학생은 고려인인 자기 할머니도 늘 그렇게 잡수신다고 했다.그들의 식생활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것은 물론 김치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도시 큰 바자에 가면 의례히 고려인 까레스키 여인들이 김치와 고사리를 비롯한 각종 나물과 샐러드를 판다.이들은 본래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브스크 지역의 원동에 살던 사람들이다.그러다 1937년 스탈린이 강제로 이주시켜 중앙아시아 곳곳에 고루 퍼져 살게 되었다. 그래서 중앙아시아에서 김치는 까레스키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공산권에 여행이 가능해지던 80년대 말부터 이러한 소식을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터이다. ○88년 봉급자의 20배 수입 그런데 이번에 신강성의 수도인 우루무치에 가서 김치가 지닌 경제적 잠재력에 크게 놀랐다.1986년 중국에서 자영업을 허용하기 전까지 우루무치의 조선족은 불과 20호 정도밖에 없었다고 한다.우루무치의 조선족은 자영업을 허용한 이후 늘어났다.심양에서 처음으로 김치장사에 나섰던 한 아주머니가 하루아침에 큰 거부가 되었다는 소문이 나고 부터다.중국의 동북삼성에 사는 조선족들은 우리의 전통식생활을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김치장사는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자영업이다.그런 점을 고려한 조선족들이 김치장수로 나서 옛날 서역이라 불렀던 신강성까지 왔다. 제일 먼저 우루무치에 온 사람들은 88년과 89년경에는 하루 중국돈으로 약 200원 이상을 벌었다.월수입도 6천원정도나 되었다. 월봉급이 많아야 500원이었던 시절 당시의 수익은 월급의 10내지 20배에 달하는 거금이었다.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90년에는 약 100세대의 김치장수가 우루무치로 몰려들어 조선족이 모두 120세대로 늘어났다.그러나 100여 세대 김치장수가 우루무치시에 있는 네개의 바자에 모여들었기 때문에 각 세대의 수입이 급속히 줄었다.그래서 그들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전업을 하든가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지금도 100세대 가운데 약 50여 세대가 김치장사를 하고 있다.월 1천여원 이상의 수익을 쉽게 올린다.이 정도면 중국에서 괜찮은 수입인데도 그들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다.우루무치를 떠나 세계의 지붕 티베트 라사까지 진출했다.조선족 김치장수들의 생활태도는 참으로 놀랍도록 도전적이다.지금도 김치가 지닌 확실한 상품성을 딛고 일어서서 기적을 현실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신강성에 우리민족이 처음으로 들어간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19세기 중엽 이전에 중국에 이주한 한국인들은 거의 중국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오늘의 조선족들은 그 이후에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또는 일제의 수탈에 못 이겨 떠난 사람들의 후예다.그 가운데는 1959년 신강성 해방군 자격으로 현지에 주둔하다가 제대하고 주저앉은 사람도 있다.1960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파견되어 의사와 병원장으로 근무하다가 몇년 전에 정년퇴직한 원로 의사 한분도 신강성에 자리잡았다. 조선족 의사는 처음으로 우루무치에 올 때,난주에서 트럭을 타고 왔는데,17일이나 걸렸다고 한다.그 때 나이 21세의 총각이었다.우루무치 초행길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가 물었더니 “다시는 못 돌아갈 것같았다”는 이야기를 했다.그 길에는 김치장사를 하기 위하여 멀리 만주에서 온 조선족 네명이 동행했다는 것이다.어떤 이는 이런 말을 되뇌었다.“집 떠난 사람들이니까 선생님의 그 말을 알지,집 떠나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를 거야”라고…,모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입에 밴 음식 기름기 제거 신강성에는 위글족 이외에 몽골과 카자흐족 등 많은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다.모두 양고기를 주식으로 하고 낭이라 불리우는 빵을 먹는 민족이다.이러한 식생활은 신강성을 포함한 전 스텝 지역,다시 말해서 투르크와 몽골의 모든 지역이 같다.스텝의 유목민족들은 말이나 양젖으로 치즈와 요구르트는 물론이고,술까지 빚어서 먹는다.이런 점은 곤륜산맥과 에베레스트 산맥으로 연결되는 고원 티베트에서도 마찬가지다.한마디로,유목민들은 양고기와 우유만을 먹고 마시며 살아간다. 유목민족들이 왜 김치를 사먹느냐고 물어보았다.우루무치의 조선족들은 “김치가 산뜻하기 때문”이라고 하나같이 자랑스럽게 말한다.고기와 우유,그리고 치즈만을 먹고 사는 유목민들이 순식물성 발효식품이기도 한 산뜻하고 시원한 김치맛을 한번 보고나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치즈나 마유주도 발효식품이다.하지만 이들 낙농식품은 우유기름 맛을 그대로 담아 입에 밴 육식의 기름끼를 가셔주지는 못한다.그러나 무배추와 파마늘과 고추가루와 생강 등 온갖 양념을 고루 삭혀 발효한 김치는 입맛을 산뜻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시원한 맛은 정신까지 맑게 해준다.김치에는 고추 매운 맛의 톡 쏘는 자극과 파마늘의 짜릿하고 알딸한 뒷맛,무배추의 살에 양념들이 배여서 숙성될 때 나오는 산뜻한 신맛이 모두 어울렸다. ○개방정책 타고 번져 김치는 어느 육류와도 잘 들어맞는다.미국 카우보이들이 즐기던티본 스테이크와 가장 갈 어울리는 식품은 뭐니 뭐니 해도 김치다.한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미국인들의 주장이 그러하다.다만 김치는 가벼운 음식에는 그 양념 맛이 너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육식만 하는 유목민족에게는 안성마춤의 별미인 것이다. 세계의 오지 타클라마칸 사막과 티베트 고원지대에까지 밀어닥친 개방정책은 시장경제를 열었다.김치도 그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김치는 오래지 않아 유목민들 식생활의 총아가 될 수 있다.김치 없이는 못사는 한국교포들이 도전적으로 김치를 팔고 있는 한은 그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 러 작가마을 페레델키노/‘문학의 산실’ 명성회복 나섰다

    ◎고리키 등 한때 작가 200명 거주/마구잡이 개발 자제 등 보존운동 지난 60여년 동안 러시아 문학의 산실로 알려져 온러시아의 작가마을 ‘페레델키노’가 옛 명성을 다시 찾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수백년된 청송과 자작나무가 어우러진 숲,그림같은 오솔길로 문학인의 발길을 멈추게 한 이곳은 50∼60년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등 한때 유명작가 100여명이 몸소 밭을 일구며 시상을 떠올리던 곳이다.모스크바시에서 서쪽으로 20㎞쯤 떨어져 있어 평소에도 유럽 여러나라의 문학예술인과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명소가 ‘페레델키노’다. 페레델키노는 러시아 ‘노동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막심 고리키가 1930년대 초반 스탈린정권 아래서 땅을 불하받아 전원주택을 지어 살면서 시작된다.당시 스탈린 정권은 공산 이데올로기에 때때로 반기를 들어 골치를 썩이던 문학인들을 이곳 한지역으로 몰아넣었다.감시체제가 용이했기 때문이다.당시 공산정부가 ‘러시아작가동맹’ 소속 작가들에게 헐값에 이곳 땅과 주택을 특혜분양해주면서 페레델키노는 작가들이 모여사는 마을로 탈바꿈한다. 50∼60년대를 거치며 페레델키노는 200여명의 시인,소설가,극작가가 모여사는 명실상부한 작가마을이 됐다.시인 파스테르나크나 불라트 아쿠자바같은 이들이 오솔길에 산책을 나오면 문학팬 수십여명이 이들의 집앞에 모여있다 함께 산책길에 나서며 시를 읊기도 했다. 70∼80년대.이른바 20세기초 러시아문학 거장들이 거의 사라지자 이 ‘작가마을’은 그 빛이 조금씩 퇴색한다.후손들간에 재산다툼의 장이 되는가 하면 후손이 끊긴 작가주택의 경우 소유권분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90년대 공산정권이 붕괴되자 변화의 시기에 한몫 거머쥔 ‘뉴러시안’(신흥부유층)들이 이곳 유명문학인의 주택을 통째로 사들이기 시작한다.페레델키노 주변 땅들이 이들에게 팔려나가고 호화별장들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페레델키노는 역사 속으로 묻히기 시작했다. 이에 국제작가동맹과 러시아문학단체들이 들고 일어났다.‘작가마을 보호’를 최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200여개 전원주택(러시아에서는 ‘다차’라고 부름) 가운데 아직 소유권이 일반인에게 넘어가지 않고 보존돼 있는 54곳의 작가다차 임대권에 대해 엄격한 새 입주기준도 만들어졌다.작가들에 대한 임대료는 ‘시대에 맞게’ 30만루블(약 50달러)정도로 다시 결정됐다. 러시아작가동맹 등 문학단체들은 일반인들에게도 입주의 길을 텃다.월 3천달러 이상의 임대료를 내면 일반인들도 임시입주할 수 있도록 규정을 바꿨다.이 돈으로는 오래된 다른 다차들을 수리하기 위해서다.
  • 일,규제완화로 세계화 서둘러야(해외사설)

    포스트 냉전 시대는 ‘앞이 보이지 않는 시대’라고 불리워 왔지만 냉전이 끝난후 9년째를 맞은 지금은 21세기 초반의 세계 정세의 대체적인 윤곽은 떠오른 듯하다.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은 정치·경제·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리더십을 계속 발휘할 것이다.이념이나 군사 보다도 경제를 중시하는 ‘포스트 냉전판 팍스 아메리카나’의 세계전략은 21세기의 항해도로서 계속 이어질 것이다. 유럽대륙은 미국에의 대항축을 확립하기 위한 유럽통합의 새 단계를 맞고 있다.러시아는 불확정 요소가 많지만 적어도 스탈린형 전체주의 체제로의 회귀는 없을 것이다.중국은 당분간 경제성장의 추세를 이어가겠지만 빈부격차 확대,도시문제,에너지 부족,환경과 치안문제 등 커다란 벽에 직면할 것이다.한국과 동남아제국은 금융위기로 힘이 빠졌지만 이것도 성숙단계 과정의 시련으로 아시아·태평양의 발전이 전체적으로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일본이다.지난해 금융위기,주가하락,엔화하락이 이어졌다.외국 매스컴에는 행정개혁에 대해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이러한 지적은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면서도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독자의 룰을 고치려 하지 않는 우유부단함과 폐쇄성,위정자의 위기감 불감증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외압이 높아지자 정부는 규제완화를 추진하고 획기적인 행정개혁을 약속했다.그러나 규제위에 발판을 마련해 놓고 있는 관료와 그들과 손을 잡고 있는 정치가 이익단체의 저항으로 유야무야돼 가고 있다.여기서 보는 것은 ‘화’의 미명하에 ‘냄새나는 것에는 뚜껑을 덮는’ 방법으로 한 때를 모면한 채 발본적인 개혁을 태만히 하는 ‘촌’사회의 행동약식이다. 시민사회와 권력,주주와 경영의 사이에 늘 긴장관계가 있는 것이 근대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본래의 모습이며 결과에 대한 책임과 투명성,공개성이 공통의 게임의 룰이다.일본은 정치인도 관료도 경제인도 국제화를 외치면서 실제는 관청가 증권가에서 밖에 통용되지 않는 구태의연한 ‘촌’ 룰에 매달려온 것은 아닌가.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일본은 세계에 통용되는 게임의 룰을 몸에 익힐 필요가 있다.용기를 불러 일으켜 변혁에 나서면 일본은 반드시 다시 설 수 있다.98년을 ‘진정한 개국’의 원년으로 삼고 싶다.
  • 카자흐공 새 수도에 아크몰라 공식 선포

    【아크몰라 AFP 연합】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10일 아크몰라(옛 스탈린그라드)를 공화국의 새로운 수도로 공식 선포했다. 인구 30만의 소도시에서 수도로 탈바꿈한 아크몰라는 기존 수도 알마아타에서 북쪽으로 1천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 위구르족의 땅 신강성(중앙아시아를 가다:5)

    ◎중국면적의 17%… 사막과 산맥으로/예부터 세갈래 무역통로의 교차로·요충지/상술 뛰어나 친구사이도 흥정하는 장사꾼 중국 신강성 타크라마칸 사막을 흔히 ‘죽음의 사막’이라 했다.그 죽음의 사막에 이르면 대자연에 압도되어 인간은 왜소해질 뿐이다.타크라마칸사막이 있는 신강성은 북으로 천산산맥,남으로는 곤륜산맥이 에워쌌다.그리고 서쪽은 카라콜룸산맥으로 막혀있다.이들 높은 산자락을 빼고나면 온통 사막인 신강성의 크기는 중국 전체면적의 6분의 1이나 되었다. 그 넓은 땅에는 위그루족과 카자흐족,기르키스탄족과 몽골족이 퍼져 산다.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위그루족이 신강성의 주인이다.투루판에서 신강성 수도 우루무치까지 두번씩 갈아탄 고장난 버스에서 만난 사람들도 거의가 위그루족이었다.차내 온도가 40도를 웃도는 만원 버스에서 그들과 꼬박 6시간을 함께 지냈다.그들은 불평 한마디가 없다.털털거리는 버스안에서 놀랍도록 인내심을 발휘하는 그들은 외국인에게 더 없이 너그러웠다. ○산자락 빼면 온통 사막 그 버스에는 일곱살 짜리 꼬마 승객이 탔다.로신이라는 사내아이였는데,차안이 덥고 지루한 탓인지 멋대로 딩굴었다.몸을 엄마한테 맡긴 로신이의 몸부림은 대단한 것이었으나 후덕한 엄마는 그 떼를 다 받아주었다.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보였던 그 사내아이의 조상은 본래 투루크의 한 갈래로 몽골지역에서 들어온 위그루라는 설이 있다.투루크,또는 돌궐은 흉노의 후예들로 모두 몽골 알타이산맥이 기원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위그루족은 몽골족과 다르다는 사실이 외모에서 드러난다.흉로와 투루크는 제 나름대로 각각 대제국을 세웠던 강력한 세력의 민족이다.그토록 큰 힘을 지녔던 민족이 몽골에서 왔다면,지금 몽골에 상당수의 투루크족이 살아야 할 것이다.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로신이의 선조가 아직은 불분명하다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비단길 한 목을 맡은 것은 분명하다.중국 서안에서 비단을 싣고 비잔틴에서 짐을 내리자면 반드시 타크라마칸사막을 거쳐야 했다.또 비잔틴과 로마의 공산품과 호탄의 옥을 서안으로 실어가는 길도 타크라마칸사막이었다.그렇듯 대상들이 동서를 오가는 목 좋은 길가에 살았던 위그루족의 상술은 뛰어났다.그것은 가히 체질적이었다. 위그루족을 장사속으로 만나지 않으면 무척 관대하다.그러나 일단 상업적인 거래라면 무자비할 만큼 안면을 바꾼다.친구 사이에서도 이익을 챙긴 흥정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라는 것이다.이슬람이 지닌 공통점이기도 한 위그루족의 상술은 물론 비단길에서 비롯되었다.농업생산에 삶을 의족한 전통적인 경사회 사람들 정서로는 헤아릴 수 없는 대목이다. 중국의 입장에서 타크라마칸은 중요한 전략요충지였다.서역의 유목민들로부터 중원을 보호한다는 것과 중국산 비단의 대외무역 주통로를 지킨다는 두가지 목적이 함축되었다.그래서 한대에 이미 신강성 장악을 서둘렀다.천산북로에는 중앙아시아로 넘어가는 길이,천산남로에는 오늘의 중동으로 가는 페르샤통로가 존재했기 때문에 타크라마칸을 중시했다.남쪽 사막을 따라 인도로 가는 길을 합하면 신강성은 세 갈래 무역통로를 거느린 물물의 교차로였던 것이다. ○동서문화매개자 역할 세계에 위용을 떨친 징기스칸의 몽골제국 뒤에도 위그루족이 숨어 있었다.그렇듯 위그루족은 동서문화의 매개자 역할을 했다.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동양인들은 위그루족이 이슬람을 대표하는 민족인 것으로 생각했다.중국과 더불어 우리는 옛날에 위그루족을 한문으로 회홀 또는 회골이라 썼다.그리고 이슬람을 지칭하는 회회교라는 말은 위그루족이 믿는 종교를 뜻하는 것이다. 이들이 사육한 말은 중국에서 첫 손가락을 꼽는 명마였다.한대나 당대에 마(천마)라고 한 명마는 위그루말을 의미했다.그 품종을 자세히 밝힐 수는 없으나 비단길을 거쳐 들어온 아랍종 혈통의 말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오늘날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말은 아랍종 피를 받지않은 말이 없다고 할 정도이고 보면 고대 중국인들 역시 위그루말을 선호했을 것이다. 중앙아시아 일대가 이슬람으로 편입한 중세 이후 이 지역은 투르크스탄이라는 통합적 개념으로 호칭되었다.그리고 신강성의 위그루는 동투르크스탄이라 불렀다. 볼세비키혁명 이후 스탈린은 범투르크주의운동을 아주 싫어했다.그래서 위그루의 땅 신강성은 급기야 소련과 중국 공산정권 사이의 주도권다툼에 휘말렸다.신강성의 석유와 광물이 두 공산세력의 각출을 유도했던 것이다. ○55년 자치지역으로 선포 그것은 20세기에 재현한 비단길 분쟁이었는지 모른다.1949년 모택동의 대장정은 신강성까지 이어졌다.1955년에는 신강위그루족자치지역으로 선포되었다.어떻든 공산정권의 중국은 1959~60년 사이에 이른바 ‘신강성 해방’을과감히 단행하고 소련과의 국경분쟁을 마무리지었다.오늘도 위그루족의 땅신강성을 가면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민족분열을 절대 반대한다’는 붉은글씨 구호가 곳곳에 널렸다.위그루족의 독립운동을 반대하는 내용이다. 그 표어는 이방인에게 혼돈을 안겨주었다.단일민족으로 살아온 우리에게는 조국과 민족이 얼핏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떼를 내놓았던 위그루족 꼬마 로신이가 어느 틈에 잠이 들었는지 조용하다.로신이가 자라 중국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알게 되는 순간 지금처럼 행복할 것인가.유구한문화와 선천적 상술을 지니고 태어났을 위그루족 장래가 자못 궁금했다.
  • 오구라 신임 주한 일 대사­서울신문과 첫 인터뷰

    ◎“한·일 어업협정 기한내 합의 안되면 실효”/“일은 북 경수로 일정액 부담… 분담률 안정해/북 국제사회 편입 한국정부와 협의해 유도” 신임 오구라 카즈오(소창 화부·59) 주한 일본대사는 6일 한국 부임후 처음으로 서울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 경수로건설비용 분담에 대해 “미국이 경수로 비용에 적절한 공헌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단호하게 밝혔다.다음은 일문일답의 요지. ○북과 첫교섭 미서 시작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서 조만간 북한 경수로건설개략사업비(ROM)를 확정지을 것으로 예상된다.KEDO 주요 이사국으로 분담액에 대한 입장은 어떠한가. ▲먼저 미국은 경수로건설 비용을 위해 적절한 공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 이유로는 첫째,경수로사업과 관련해 북한과 교섭을 처음 시작한 주체가 미국이기 때문이고,둘째 KEDO문제는 한반도범위를 넘어서 핵비확산문제로 이에 대해서도 미국이 큰 책임을 갖고 있다.또 일본은 분담율을 정하지 않고 절대액수를 부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분담율을 결정할 경우 전체 경수로경비가늘어날수록 분담액이 커지기 때문이다.물론 응분의 부담을 할 용의는 충분히 있다.또 한·미·일 3국은 경수로 전체경비를 가급적 낮은 수준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최근 개림호 나포사건을 통해 볼때 일본은 앞으로도 한국어선이 일측의 직선기선 영해침범시 계속 나포하겠다는 것으로 보인다.일본 정부의 입장은 무엇인가. ▲먼저 이번 사건은 우발적인 것으로 생각한다.일본으로서는 국제해양법에 입각해 새로운 영해를 설정,이를 일본뿐 아니라 다른나라들도 지켜줄 것을 바란다. ­개림호의 이몽구 선장이 기소되는 등 일본내에서 법적절차가 진행됨에 따라 양국간 어업협정개정을 위한 회담이 불투명한 것으로 전망되는데. ▲한국어선들이 국내법을 준수하고 조업하면 앞으로 이런 사건이 많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물론 우발적 사건은 생길수 있다.따라서 우선 국내법을 지키는게 중요하다.그러나 이 사건으로 어업교섭이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우발적 사건은 몇명의 어민이 저지른 것이지만 어업협정은 수만명의 어민들과 관련돼 있는문제다. ○국내법 지키는게 중요 ­이번 나포사건으로 한국측이 어업회담을 거부,지난 5,6일 한일 비공식 어업회의가 무기연기됐다.교섭재개의 조건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어업협정은 어디까지나 어민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중국 속담에 ‘성문의 화재로 연못의 물고기가 피해를 입는다’는 말이 있듯이 어민과 무관한 사람들간의 일이 이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된다.어민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민들이 안정된 상태에서 조업하는 것이 필요하다.지난 70년대초까지만 해도 일본 어선들이 한국연안까지 와서 조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지금 상황은 역전됐다.이 사실을 양국 국민들이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앞으로 일본정부가 어업협정을 파기할 가능성은 없는가. ▲일본으로서는 어업협정이 없는 상태를 좋지 않게 생각한다.다시말해 협정이 실효하는 일이 없도록 교섭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나 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실효할 가능성은 있다.다시말해 현재 한·일이 하고 있는 협정개정을 위한 교섭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교섭중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실효할 수 있다. ­독도주변 수역설정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은 독도주변수역을 공동관리수역 설정을 주장하고 한국은 현상태로 공해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양국의 입장이 어떤 방식으로 조율될 것으로 보는가. ▲일본은 불행히도 이웃국가와 영토문제를 겪고 있다.중국과는 조어도,러시아와는 북방열도,한국과는 독도의 영토문제가 있다.그러나 일본은 러시아와 어업협정을 체결했으며 중국과 협정개정을 진행중이다.따라서 한국과도 협정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북­일 관계 급진전 없을것 ­최근 재북 일본인처가 방일한데 이어 일본 여3당이 방북하기로 돼있다.향후 일북관계 개선에 대한 생각은. ▲일북관계가 급진전할 것으로는 생각지 않는다.그러나 최근 북한의 태도중 한국인 경수로근로자의 시신을 판문점을 통해 송환했으며 남북적십자회의에서 이산가족문제를 협의키로 하는 등 몇가지 주목할만한 것이 있다.일본으로서는 북한이 국제사회에 편입할 수 있도록한국정부와 협의아래 노력하겠다. ­북한 김정일의 당총비서 공식승계이후 정책변화에 대한 전망은. ▲옛 소련의 레닌사후 스탈린이,중국 모택동사후 등소평이,또 스탈린사후 흐루시초프가 각각 일정한 지위에 오르기까지 몇년이 걸렸는지 조사해보았다.정답은 모두 5년이다.따라서 북한의 김정일도 안정적인 지위를 얻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본다.또 북한정권의 정통성은 경제개혁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달 20일 부임,오는 18일 신임장을 받는 오구라 대사는 동경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62년 외무성 들어와 주홍콩총영사관 영사,경제협력개발기구(OECD)대표부 공사를 거쳐 지난 94년 주베트남대사를 역임했다.가족으로는 부인과 1남1녀가 있다.
  • 흐루시초프 대미 열등감에 핵전쟁 부를뻔

    ◎미 침공 가능성 우려 62년 쿠바에 핵배치/미사일기지 설치후 더 큰 공포감서 지내/소련공산당서기장 전 비서 밝혀 1962년 카리브해에서 미·소간 핵전쟁으로 치달을 뻔한 이른바 ‘쿠바미사일 위기’는 소련 최고지도부의 대미 열등감에서 사실상 비롯된 것이라고 흐루시초프 소련공산당서기장의 비서를 지낸 한 측근이 30일 공개했다. 흐루시초프의 비서였으며 후에 주유엔 소련대사를 지낸 올레그 트로야노프스키(73)씨는 러시아 일간신문 콤소몰스카야프라우다와의 최근 인터뷰에서 “흐루시초프는 항상 미국이 어딘선가 소련을 공격할 지 모른다고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으며 이같은 불안감과 열등의식때문에 쿠바에 군사 핵미사일을 배치하게됐다”고 주장했다.그는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한 것은 흐루시초프가 주도한 것이긴 하나 흐루시초프의 대미 불안감·열등의식은 오랫동안 정치국원동지로 함께 일했던 스탈린의 말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스탈린은 틈만 나면 흐루시초프에게 “내가 죽으면 그들(미국)은 자네도 목을 죌걸세”라고 말했으며흐루시초프는 이 말을 자주 되뇌이며 미국이 지구상 어디선가 소련을 공격할 것이라는 불안감속에 있었다고 트로야노프스키는 전했다. 증언에 따르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기로 논의를 시작한 것은 1962년 5월.흐루시초프는 쿠바미사일을 터키에 있던 미국 군사로켓시설에 대한 대응무기로,한편으로 ‘있을지도 모를’ 미국의 침공에 대해 쿠바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하고 미사일을 배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흐루시초프는 그러나 미국이 하는 일 이상으로 일을 크게 벌이려 들지 않았으며,실제로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한 뒤에는 공포감속에서 무척 고심했다고 한다.그는 크렘린 집무실에서 “큰일났군.때는 늦어 상황을 바꿀수도 없고…”라며 자주 되뇌였으며 그해 10월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하기로 결정하기 며칠전 카리브해의 미 U2정찰기가 소련군의 사격으로 떨어지자 “타협노력은 끝장이야”라며 공포속에 매우 놀라는 모습이었다고 회고 했다.
  • 새로운 각성(중앙아시아를 가다:1)

    ◎중국 능가했던 주체적 고구려문화/집안 오회분의 ‘달님­해님’ 그림 독창적 솜씨/중원에 업은 샅바싸움 강건한 기상의 무예 서울신문은 민족문화 원류를 탐사하는 새 주간기획물 ‘중앙아시아를 가다’를 연재합니다.중국 동북지방에서 중원을 거쳐 중앙아시아 대초원과 사막을 찾은 서울대 윤이흠 교수(세계종교사)가 엮는 로망의 문화기행입니다.이 시리즈는 현지에서 확인한 고구려와 발해문화를 통해 고대 민족문화 루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그래서 낙양과 서안,돈황을 거쳐 천산산맥 남북 기슭을 여러 차례 넘나들며 중앙아시아 곳곳을 누볐습니다.거기에는 우리 고대문화와 유사한 흔적을 간직한 옛 소련땅 독립국가들의 문화유산 모두가 포함되었습니다.민족문화를 역동적으로 끌어올린 고대문화 통로를 찾는데 물론 역점을 두었지만,중앙아시아에서 만난 동포들의 삶도 함께 다룰 예정입니다. 만주 벌판의 광활한 땅과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백두산에 이른다.그 웅비하는 산세를 접하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여기가 우리 민족의발원지려니 하는 마음을 갖는다.7년전 100명의 제천단을 이끌고 처음 백두산을 올랐을때 감격은 지금도 지울 수 없다.어째서 여기를 민족의 기원지라 믿게 되는 것일까.이 풀리지 않는 숙제를 안고 민족문화의 뿌리를 찾아 나섰다.그래서 발길을 먼저 연변지역으로 돌렸다. 우리는 흔히 문화의 뿌리와 기원에 대한 질문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과 본질을 찾으려 한다.기원과 본질을 동일시하는 것은 자칫 혼돈스러운 것이다.이는 아주 오래된 인간의 사유습관으로 정착했다.그 오래된 습관이 민족의 기원과 본질을 이해하는데 혼돈을 불러 일으키는 대표적 사례는 우리 문화와 중국문화의 관계에서 드러난다.그 관계를 컴퓨터용어를 빌려 설명하면,우리가 한문을 수용하면서 중국문화가 우리의 고유문화를 덮어씌운 것이다. ○중국시각서 탈피할때 그래서 모든 고유 개념어들이 중국문화 내용으로 대체되었다.이를테면 삼재사상같은 것이 그런 경우다.천지인을 말하는 삼재사상은 주대에 시작해서 한대에 와서 완성되었다.따라서 그 이전 단군조선 문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그럼에도 삼재사상이 한국문화의 뿌리이자 본질인 양 착각한다.이는 분명히 오래된 사유습관의 오류를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우리는 이제 중국 일변도의 시각에서 자유로워질 때가 되었다. 그런데 북방에서 만난 고구려와 발해의 문화는 중국 일변도의 오류에 대한 각성 그것이었다.집안 고구려 고분인 오회분 4,5호 묘에서 비는 달님 ‘여와’ 및 햇님 ‘복희’의 그림과 각저총의 격투기 및 씨름 그림은 중국문화에 예속하지 않은 고구려인의 솜씨다.두꺼비가 있는 달을 머리에 인 여와는 물론 중국 문헌에 나오는 내용이다.그러나 7세기에 그린 이 그림은 흐트러지고 유연한 당시 중국의 비천과는 전혀 다른 강건한 기상을 담았다. 그러니까 고구려인들은 중국으로부터 문헌전통을 받아들였으되,미의 감각 만큼은 자신들의 것을 버리지 않았다.그들은 고구려의 정서라는 그릇에 중국의 문화를 담았던 것이다.이는 고구려문화에 나타난 일관된 현상이다.무예대결의 그림수박도 고구려인들의 고유한 자기수련 전통이 배었다.또한 샅바를 맨 씨름은 중국에 없는 무예다.특히 고구려인과 대결중인 상대방 얼굴의 코는 유난히 높게 강조되었다.서역(서역)의 서양인이 분명했다.이는 고구려인들이 중국 밖에 사는 사막과 스텝의 민족들과도 교류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 그림이다. 중국 대륙은 한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일어서기 전까지는 북방 유목민족들에게 철저히 유린되었다.그 오합지졸의 상태였던 시기에 고구려는 대륙 동북방에서 강성한 제국을 이루었다.고구려는 당시 대륙에서 크게 봐야할 국가도 없었고,그렇게 해야할 이유도 없었다.그리고 문화적 주체성을 지녔던 고구려는 유교나 불교,도교와 같은 외래종교를 등거리에서 조정할 수 있었다.그러나 고구려의 태도는 왕조가 망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또 방대한 스텝지방에 자리한 돌궐제국의 칸들과 적극적인 접촉을 통해 서역과 활발한 물물교류를 가졌다. ○외래종교 등거리서 조정 고구려가 망하면서 발해가 대신 나서 그 고토를 차지했다.고구려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만주족을 끌어안고 나라를 세운 발해인들의 애환은 흔히 만주라 일컫는중국 동북지방 곳곳에 스며있다.그 많은 발해 무덤에서는 화려했던 문화의 흔적이 속속 드러났다.근·현대에 걸쳐 일어난 압록·두만강 건너로의 민족대이동은 어쩌면 귀소본능에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여 씨앗을 뿌리고 터전을 잡았다.항일독립전쟁에도 힘이 되어준 그들은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고구려 고토에 살고 있다. 북하의 중국쪽 두만강변 언덕에는 조선족 민족시인 이욱(1907∼1984년)의 시비가 서 있다.‘칠순/할아버지/나무를 심으며/어린 손자를 보고/싱그레 웃는/그 마음/그 마음’이라는 시다.그 시를 읊조려보며 내려다 본 강건너 무산시는 무척 적막했다.동양 제일이었다는 철광도시가 폐허로 변한 무산은 적막하다 못해 살벌했다.내일을 위해 나무를 심지않은 땅 무산.그의 시가 구구절절 절실하게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그 암울했던 시대에 더러는 일제를 피해 블라디보스토크의 해삼위로 들어갔다.일제의 마수에서 벗어났다 했더니 스탈린은 그들을 중앙아시아로 내몰았다. ○고려인 삶도 조명 옛날 고구려인들이 칸들과 교류하던 바로 그 스텝에서 살고 있는 오늘의 고구려인이 그들이다.그래서 중앙아시아 이방인들 틈새에서 외롭게 살아온 고구려인들도 만나기로 했다.우리 민족문화의 원초적 잔영이 어슴프레 보이는 땅으로까지 역류하여 들어간 고구려인의 이주는 우연이었을까.그러나 역사는 필연적일수 밖에 없다. 어떻든 이번 ‘민족 문화의 원류’를 탐사한 여행목적은 우선 고구려인이 서역과 문화를 교류하는데 뒤따랐던 두가지 통로를 찾는 것이었다.다시 말하면 중국 서안에서 돈황을 거치는 비단길과 그 밖의 북방통로를 살피는 것으로 압축된다.이와 더불어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먼 한반도 동남쪽 끝자락 신라와 중앙아시아의 관계를 짚어본다는 의도도 깔았다.그리고 비단길이 지나던 중국 오지의 조선족과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삶에서 세계속의 한민족 위치를 발견코자 노력했다. □필자 약력 △1940년 서울생 △서울대 종교학과졸 △미 밴더빌트대 대학원석사 △미 노스웨스턴대 대학원 철학박사(종교학) △정신문화연구원연구원 △현 서울대 교수(종교학)
  • 황장엽씨 ‘김정일 승계 비판’ 기고

    ◎북 정권 승계에 정책변화 기대는 ‘환상’/시대 뒤떨어진 세습 감추려 3년3개월간 고심 흔적 ‘역력’/쇄국·민족배타 노선 버리고 평화 통일 ‘열린 길’로 나서라 오늘 북한 통치자들은 김정일의 공식 권력승계를 놓고 마치 새로운 태양이 솟아 오른 우주의 대사변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떠들고 있다. 후계자의 권력승계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오래전에 시작되었으며 적어도 1974년 2월 노동당 조직비서로서 제2인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자기 삼촌(김영주)을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수령의 유일독재체계는 후계자의 유일적 영도체제를 통해서만 실현된다는 원칙이 전면적으로 관철되게 되어 실권은 완전히 후계자가 장악하고 수령은 더욱 신격화되었을뿐 좋은 경우에 후계자의 최고 고문의 역을 담당하게 되었다.그러므로 수령이 사망하였다고 하여 통치자가 달라진 것이 아니며 권력승계를 공식화한다고 하여 김정일의 지위가 더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김정일이 공식승계를 서두르지 않은 이유의 하나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실제 승계 23년전 마감 그러면 북한 통치자가 3년3개월이나 공식승계를 미루는 남다른 변덕을 부리다가 오늘은 또 공인된 정상적 선거절차도 밟지 않고 공식승계를 슬쩍 해버린 의도는 어디에 있겠는가? 첫째로 김정일에게 가장 아픈 약점은 현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세습승계를 한다는 점이다.이 문제를 무마시켜 보려고 매우 고심해왔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있다. 북한 통치자들은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쇠퇴 몰락이 그 이론이나 그것을 구현한 사회체제의 본질적 결함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수령의 후계자를 잘못 선발한데 있다는 그릇된 주장을 내놓고 저들의 세습적 승계를 정당화해보려고 하였다.그들은 이러한 논리적 기만술책만으로는 부족하여 후계자인 ‘광명성’은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 ‘태양’의 지위를 승계할 운명을 지니게 되었다는 허황한 미신까지 만들어 냈던 것이다.김정일은 공식승계를 미루면서 부친의 방조없이도 자체의 힘으로 능히 영도자의 지위를 지키고 나라를 통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다.○신격화된 계승 중요시 둘째로 김정일은 총비서라든가 국가주석 같은 공식적인 법적 지위보다는 절대적으로 신격화된 수령의 초법적인 지위를 계승하는 것을 더 중요시 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수령의 지위를 계승하는데서 첫째가는 조건은 수령에 대한 충실성이기 때문에 김정일은 수령에 대한 자기의 충성과 효성을 과시하여 수령의 지위 승계를 위한 도덕적 권위를 높이는데 1차적 의의를 부여하였다.따라서 수령의 사망후 굶어죽어가는 수많은 주민들은 돌보지 않고 부친의 시신을 영구보존하기 위한 화려한 궁전을 건설하는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였던 것이다. 또 그는 ‘탁월한 사상이론가’라는 영상을 높이기 위하여 글만 쓰는 학자들도 무색케 할 정도로 연이어 글을 발표하였으며 수령에 대한 우상화 수준과 후계자에 대한 우상화 수준을 비등하게 만들기 위하여 모든 선전수단들을 동원하였다. 이러한 준비에 기초하여 김정일은 당규약과 세계가 공인하는 선거절차를 무시하고 총비서 추대를 선포함으로써 자기가 초법적이며 초국가적인 존재라는 것을 시위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정권 본질은 결코 불변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기대하여야 하겠는가? 물론 우리가 바라는 것은 김정일이 봉건적인 개인독재체제를 버리고 개혁 개방의 길로 나오는 것이며 무모하고 범죄적인 무력통일노선을 버리고 남북대화와 교류의 길로 나오는 것이다.그러나 김정일 정권의 본질이 달라지지 않은 것만큼 큰 정책적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첫째로 북한통치자들은 세계 어떤 경제적 파동에도 끄떡하지 않는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하여 놓았다고 호언장담하여 왔는데 그것을 누가 다 망쳐먹고 북한땅을 가장 가난한 나라,빌어먹는 나라로 만들었는가에 대하여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권력을 다 틀어쥐고 있는 북한 통치자가 민생고에 대하여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북한 인민은 수령복을 누린다고 하는데 수령복의 내용이 주민이 헐벗고 굶주리는 것인가? 우리는 1995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만 하여도 수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굶어죽어 가고 있다. 북한당국자들은 어째서 세계 각국에 식량을 구걸하면서도 이 사실을 숨기고 있으며 실태를 조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가? 더욱이 엄중한 것은 남한동포들이 순결한 동포애적 심정으로부터 북한동포들의 민생고를 책임지고 풀어주려고 하는데 그것을 왜 가로막는가? 앞으로 남한동포들이 보내는 식량과 의약품 등 구제물자들을 판문점을 통하여 무조건 받아들이겠는가,않겠는가? 우리는 이것이 알고 싶다. 둘째로 북한 통치자들은 오늘 북한을 세계에서 가장 자유가 없고 인권이 유린된 일대 감옥으로 만든데 대하여 응당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최고 인권유린국 반성 조선민족을 ‘김일성 민족’으로 부를 권리를 누가 주었는가? 조선사람은 수령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하면서 수령을 옹위하는 총폭탄이 될 것을 강요하고 있는데 이 이상 더 큰 인권유린이 어디 있으며 인민을 노예화하는 정책이 아니고 무엇인가? 수령을 우상화하기 위하여 모든 선전수단을 동원하고 역사를 왜곡하다 못해 이제는 우리민족의 자랑인 금강산·묘향산·백두산 같은 명승지에 자연경치까지 못쓰게 만들고 있는데 이 죄과를 인정하는가? ○언제까지 굶길 것인가 셋째로,북한 통치자는 무엇 때문에 굶주린 북한주민들을 계속 전쟁준비에만 내몰고 있는가? 북한 사람들을 굶겨죽이다 못해 전쟁의 폐허 속에서 행복과 번영을 쟁취한 남한동포들까지 죽일 작정인가? 북한 주민도 먹여살리지 못한 통치자가 무슨 염치로 전조선을 통치해 보겠다는 망상을 가지려고 하는가? 청년학생들이 군사훈련과 충성의 무슨 운동 때문에 재학기간에도 공부할 시간이 없는데 13년간이나 군대에 복무하면서 수령옹위의 총폭탄이 되는 연습만 하다보면 그들이 어떻게 청춘의 희망을 꽃피울수 있단 말인가? 청년들의 희망을 짓밟는 만행을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는가? 넷째로.북한 통치자는 입으로는 ‘민족대단결’이요 ‘민족통일’이요 떠들지만 남한에 대한 적대감을 고취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고 있는데 여기에 무슨 평화통일의 의지가 있단 말인가? 미국이나 일본하고는 회담을 하자고 하면서 동족끼리는 대화조차 거부하고 있는 속셈이무엇인가? 일본인 처는 고향방문을 허용하면서 남북간에는 편지거래조차 못하게 하고 이산가족 상봉도 절대 반대하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벼랑끝’ 외교전술 중단 다섯째로 북한 통치자들은 인민들의 귀를 막고 눈을 가리우고 손쉽게 개인독재를 실시하기 위하여 쇄국정책을 계속 실시하고 있는데 쇄국정책이 망국의 길이라는 역사적 진리를 왜 외면하고 있는가? 북한 통치자들은 주변대국들의 모순을 조장시켜 어부지리를 취하고 전쟁과 테러로 평화애호 인민들을 위협하여 양보를 얻어내는 ‘벼랑끝 전술’을 김정일이 발명한 대단한 외교지략인 것처럼 떠들고 있는데 이렇게 한 모든 선행자들의 말로가 비참하였다는데 대하여 왜 교훈을 찾지 못하는가?북한 통치자들의 사상은 인간중심의 사회주의 사상과 인연이 없을뿐 아니라 스탈린주의로부터도 멀리 후퇴·변질하였다.그들의 사상은 무자비한 계급투쟁을 신봉하는 계급주의이고 쇄국주의를 주장하는 민족배타주의이며 철저한 개인숭배에 기초한 전제주의적 개인독재 사상이며 폭력을 신성화하는 군국주의 사상이다.계급투쟁과 폭력혁명의 역겨운 자화자찬으로 가득찬 이른바 ‘고전적 노작’들을 대담하게 버리고 보다 겸손한 자세로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길,조국의 평화적 통일의 길로 일대 방향전환을 하여야 할 것이다.
  • 4자회담 적극적 호응 기대/미국측 시각

    ◎실용노선으로 미·북 관계개선 가속화 미국은 마지막 스탈린식 공산 독재국가인 북한에서 김정일이 사회주의 국가 최초로 부자 권력세습을 이뤄 노동당 총비서에 취임한 것을 ‘긍정적으로’ 본다.미국은 이같은 긍정적인 평가를 배경으로 북한이 앞으로 4자회담이나 미국과의 관계개선 등에 보다 실용주의적 접근을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미국은 김정일이 ‘노동당 총비서’에 취임함에 따라 예상돼온 일이 어그러지지 않고 이뤄졌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으며 미국과 북한과의 관계에 부정보단 긍정적인 영향이 더 우세할 것으로 보고 있다. 김정일의 총비서 취임은 북한을 움직이는 기존의 메카니즘이 한단계 상승해 총결집한 것이므로 지금까지 오던 길을 거꾸로 가리라는 걱정보다는 오던 길을 더 빠르게 달릴 수도 있다는 기대를 더 강하게 한다.이것이 미국에게 우려보다는 희망사항을 피력하게끔 만들고 있다. 미국은 북한이 한층 심한 고립주의 노선을 걷는다든가,핵동결 약속을 파기하려 한다든가,4자회담 참여를 없는 것으로 한다든가,군사적 모험주의 색채를 강화한다든가 하기 보다는 김정일 ‘총비서’가 이전에 없는,변화를 인정하는 정책을 내놓을수도 있다는 기대를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 기대는 ‘일말’의 기대란 한계가 있고,더 나아가 내용상으로 잘해야 ‘실용적’ 노선을 택하리라는 것에 그치긴 한다.북한이 하루아침에 개방,개혁노선을 걷거나 남북한 관계개선을 통해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정착과 긴장완화를 꾀하리라는 그런 기대일 수는 없다.김정일의 실용노선은 지금처럼 한국을 따돌리고 미·북 관계 위주인 채 예측불가능한 성향을 그대로 안고있긴 하겠지만 보다 현실에 입각하고,점진적인 변화를 모색하고,국제사회 진출에 적극성을 띠울수 있을 것으로 미국은 기대하고 있다. 미국은 김정일 총비서 취임을 계기로 예전부터 지녀온 이런 기대를 한거풀 더 밖으로 표출하고 있다.
  • 여,DJ약점 건강문제 이슈화/대선후보 진단서 첨부 입법화 제안

    신한국당이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를 겨냥한 공세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다.건강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 높아가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우선 이회창 총재는 자신의 건강진단 날짜를 확정,발표했다.오는 10일 서울대병원에서다.이와 함께 대변인단은 6일에도 논평과 성명을 통해 김총재의 ‘아킬레스 건’인 건강문제를 이슈화했다.확전할 기미가 보인다.이사철 대변인은 김총재가 지난 5일 부산시 업무보고 도중 수차례 졸았다는 보도와 관련,“아무리 빼어난 분장사가 최고급 분칠을 한다해도 일흔다섯 나이를 감출수야 있겠느냐”면서 “기자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몇십분을 못견디고 졸 수 밖에 없었던 김총재에 대해 국민들은 연민의 정을 느낀다”고 비꼬았다.이대변인은 이 문제를 국가지도자의 건강과 직결시켰다.비상사태 발생시 최고통수권자가 건강과 체력을 견디지 못해 비몽사몽간에 화급을 다투는 중요 결정을 내린다면 국가 운명은 불을 보듯 뻔하다는 것이다.그러면서 외국 국가원수의 예도 들었다.2차대전중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스탈린은심신이 쇠약한 미국의 루즈벨트대통령을 상대로 극동진출의 이익을 챙겼다고 지적했다.국가지도자의 건강과 체력은 국민의 생명과 안위,국가 위신과 직결된다고 전제,연로한 대선주자들의 건강상태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국민적 관심이 절실하다는게 그의 맺음말이었다. 또 의사출신인 정의화 부대변인도 “9급 공무원 임용때도 건강검진은 필수인데,4천5백만 국민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대통령직에 오르려고 하는 사람의 건강은 마땅히 공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정부대변인은 “차제에 정치개혁 협상에 대선후보의 건강진단서 첨부와 공개를 입법화하자”는 제안까지 했다.
  • 강원대 카자흐·키르기스 대학생에 ‘뿌리’심어주기

    ◎한인3세 대학생 20명 초청 ‘조국 연수’/지난 여름방학기간 50여일간 함께 숙식/산업시찰·고적지·양로원·휴전선도 방문 강원대는 지난 여름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의 한인 3세 대학생 20명을 초정해 우리말을 가르치고 발전된 조국의 모습을 돌아보게 했다. ○고향할머니도 만나 올해는 러시아 연해주에 살던 한인이 스탈린 정권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지 60년이 되는 해라 더욱 뜻깊은 행사였다. 한인 학생들은 강원대 교수진에게 읽기 쓰기를 배웠고 전통악기도 다뤄봤다.우리 역사와 문학 강의를 들었고 ‘신기한’ 컴퓨터도 익혔다.경주 등 전국의 고적지와 울산 등 대단위 공단을 돌아봤다. 이들 곁에서 50일동안 도우미로 애를 쓴 심완주군(22·정치 3년)은 이를 일기를 적어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심군은 일기에서 “양로원을 방문했을 때 카자흐스탄 알마아타에서 온 심순녀양이 같은 고향에서 알고 지내다 영구 귀국한 김재순 할머니(76)를 우연히 만나 기쁨을 나눌 때 눈물이 핑돌았다”고 적었다. 학생들은학교측이 용돈으로 내준 10만원을 은행에 입금시키면서 내내 미심적은 눈초리로 은행원를 쳐다보더니 이름까지 적기도 했다.어떤 친구는 백화점을 쇼핑할 때 화려함에 크게 놀라더니 이내 돈을 다 써버렸다. ○나이트클럽선 댄스상도 휴전선을 방문했을때 모두 숨을 죽이고 북쪽을 응시하는 눈초리엔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나 춘천 인근 낚시터에서 쓰레기 청소에 나서 30분만에 대형 쓰레기봉투 25개를 다 채워고선 “끌끌“ 혀를 차기도 했다. 심군은 또 이들의 촌티를 벗어주려고 나이트클럽에 데려갔으나 모두 춤의 도사여서 되레 충격을 받기도 했다.한 친구는 무대를 석권하다 못해 즉석에서 댄스상까지 받기도 했다. 경포대에서는 인솔 교수인 진장철 교수(정치학과)가 큰 맘 먹고 회를 시켰으나 아무도 먹지 않아 심군이 이를 처리하는라 애를 먹었다. 심군은 “이들이 돌아가서 다른 친구들에게 조국의 발전된 모습을 그대로 전할 파발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모스크바 크렘린(세계 문화유산 순례:45)

    ◎탑·성곽·성당 어우러진 ‘종합건축의 완성품’/이반3세,512년전 통일러시아 과시위해 건립/탑높이 20∼95m… 나폴레옹 침입땐 진군나팔 크렘린을 어디서부터 얘기할 것인가.무척 힘든 일이다.고딕양식인 20개의 크고 작은 탑,바로코와 로코코양식을 대표하는 4개의 대성당,1천45개의 총안을 가진 둘레 2천235m의 성벽 등 모두가 값진 보물이다.모스크바 강 건너편에는 고성의 탑들이,붉은광장에는 아름다운 성벽들이,성벽사이로는 금장의 돔들이 여기 저기 솟아올라 저마다 색다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크렘린의 유적군을 굳이 분류한다면 탑,성곽,성당건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이 가운데 크렘린다운 상징건조물은 진홍빛의 크고 작은 탑과 노란 성곽이다.탑들은 15세기 이탈리아의 유명한 건축가 마르코 루포와 알레비오소 프리아지네 등이 설계했다.단순히 외장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전투용,평시용등 그 쓰임새가 다양한 건조물이다.관광객들이 입장권을 끊고 나서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은 쿠타퍄 탑이다.그리고 총안무늬의 다리를 지난 다음 트로이츠카야 탑에 다다른다.모두 5개이상 전투용 총구를 가진 이들 탑 지하2층에는 크렘린방어용 탄약을 비축하도록 설계됐다.16∼17세기에는 러시아 다른 지역의 탑들과 마찬가지로 죄수를 가두는 감옥역할도 해냈다.이들 탑 맞은편 스파스카야 탑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들을 맞는 개선문으로도 사용됐다.19세기 초 나폴레옹 군이 진입할 때 진군 나팔소리를 울렸던 곳도 여기다.높이가 20∼95m까지 다양한 이들 탑을 지을 당시 용도는 전투용의 감시초소였다. ○성벽둘레 2,235m 1937년 스탈린시대 크렘린은 사치가 대단했다.건축물에 박힌 루비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큰 루비가 크렘린안의 5개 탑 꼭대기에 설치됐기 때문이다.대형 별 모양의 이 보석은 당대 러시아 최고의 건축설계사인 표드르 페도로브스키가 제작한 것이다.가장 큰 루비별은 니콜스카야와 스파스카야 탑 꼭대기에 설치됐다.직경이 3·75m,무게는 1·5t이 넘는다.이처럼 엄청난 무게의 붉은 별보석은 바람이 부는대로 돌도록 설계됐다. 크렘린 성곽에는 노란빛이 감돌았다.원래 크렘린의 벽은 갈참나무였으나 13세기 몽고 침입후 한세기쯤 지나 화강암으로 바꾸기 시작했다.크렘린을 한때 ‘흰돌도시’로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탑과 탑사이를 잇는 크렘린 벽에는 모두 1천45군데의 총구가 있다.총구는 가로 세로 2m나 돼 적들이 크렘린을 둘러싸면 총구를 나무방패로 막았다.그 대신 이웃의 작은 구멍을 통해 화염을 내뿜었다고 한다.성벽의 두께는 3.5∼6.5m로 현대식 화기에도 끄덕없다는 것이다. 12세기 유리 돌고루키 왕자때 시작된 크렘린 역사는 1382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이때 타타르족의 침입으로 모든 것이 불에 탔다.그래서 재건에 들어가 이반3세 때인 1485년쯤 오늘의 크렘린이 완성됐다.성곽은 벽돌로 다시 치장됐고 우스펜스키 성당 등 내부 주요건물이 1백여년간에 걸쳐 복원됐다.이반3세가 크렘린을 전력투구해 복원한 까닭은 통일 러시아의 힘을 대외에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탑은 전투용 감시초소 이반3세는 블라디미르와 같은 전국 각지에서 토목기사·건축가들을 동원했다.그리고 르네상스 최고의 건축가로 꼽히던 이탈리아의 아리스토텔레 피오라반테,피에트로 안토니오 솔라리,마르코 루포등을 러시아로 불러들였다.이 가운데 12세기 러시아건축물의 대표격인 우스펜스키 성당은 바로 피오라반테가 감독한 건축물이다.이반3세는 피오라반테에게 러시아 전국을 여행시켜 주며 러시아식 건축양식으로 성당을 짓도록 독려했다.우스펜스키 성당은 조밀한 아름다움을 지녔으면서도 현대식 공법이 아니면 뽑아내기 힘든 넓은 내부공간을 지금도 자랑하고 있다. 크렘린 안 4개의 대성당은 모두 르네상스시대에 와 있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화려했다.르네상스양식의 벽화와 성화,금은 상들리에로 가득차 있다.12세기의 성화 ‘세인트 조지’‘삼위일체’,11세기 비잔틴양식으로 그린 ‘블라디미르의 여인’등은 크렘린 관광객을 사로잡는다.아르항겔스키 성당,블라고베쉬첸스키 성당에는 복원하지 못한 각종 프레스코와 성화가 아직도 많다.크렘린역사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르네상스시대 예술품 복원이 한창이다.이 대성당들은 화려했을 뿐더러 사치를 한껏 누렸다.1812년 나폴레옹이 크렘린을 점령했을 때 부하들이 마굿간에서 대량의 금·은괴를 약탈할 정도였다. ○4개 대성당 내부 화려 옛소련과 러시아정부의 크렘린 복원노력은 대단했다.재미있는 사실은 레닌조차도 혁명후 1918년 포고령으로 크렘린안의 모든 건축물과 예술품울 보호하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이다.제2차 세계대전이후 스탈린 시대에는 5개의 주요 탑 상층부 모두에 금과 구리를 입혔다. ◎여행가이드/대회의당서 ‘백조의 호수’ ‘호두까지 인형’발레 관람 크렘린은 붉은 광장과 바로 이웃했다.내부정원은 물론이지만 붉은 광장,모스크바 강위에 세워진 교각에서 크렘린을 보는 경치는 각별하다.밤시간의 조명도 화려해 모스크바 강 수면 위로 드러나는 야경 또한 일품이다.그리고 러시아에 관한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옐친대통령이 근무하는 ‘대통령궁’에도 관광객들이 15m 전방까지 접근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롭다.크렘린내 대회의당은 발레프로그램을 직접 관람할 수 있게 해놓은 유명한 극장 가운데 하나.크렘린 관광객들은 여름 휴가철만 빼놓고 ‘백조의 호수’‘호두까기 인형’ 등 러시아 고전발레도 직접 감상할 수 있다.
  • 북은 시대 착오적 신격화 중단하라/황장엽씨 특별기고문

    ◎“‘소련 붕괴’교훈 외면 수령 우상화·독재 고집/위대한 영도의 결과가 세계 최악의 민생고인가”/“50여년간 대이은 통치 대남 무력통일에 혈안/군사비 등 몇%만 아껴도 주민 식량난 거뜬 해결”/“북 사회주의는 허울뿐 실상은 봉건주의 불과/7천만 겨레 염원 부응 남북대화·교류 나서라” 북한은 자기 수령의 탈상을 계기로 ‘주체연호’를 쓰기로 결정함으로써 다시금 세상 사람들을 개탄케 하고 있다.스탈린주의와 소련의 붕괴는 북한 통치자들에게 준 심각한 역사의 경고였다. 많은 개인주의 나라들이 뜻하지 않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교훈을 찾고 개혁 개방의 길을 모색하였다.유독 북한 통치자들만은 스탈린주의의 가장 나쁜 면인 수령 우상화와 개인독재를 몇배로 증폭하여 그것을 당과 국가건설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국민생활을 지배하는 기본원리로 전환시켰다.그 결과 이번에는 북한의 통치체제 자체가 헤어날 수 없는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북한은 오늘 세계 최악의 민생고를 겪고 있으며 빌어먹는 나라라는 수치를 무릅쓰고 국제사회의 자비에 매달리고 있다. 북한체제가 겪고 있는 오늘의 위기는 북한 통치자들에게 주는 역사의 마지막 경고라고 볼 수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경고에서 응당한 교훈을 찾는 대신에 봉건주의 냄새가 그대로 풍기는 ‘주체연호’를 사용하여 김일성 왕조를 유지해 보려 함으로써 시대와 건전한 상식에 도전하고 온 겨레와 세계인민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심중한 과오를 범하고 있다. 북한 통치자들이 아직 자기반성을 하지 않고 ‘주체연호’까지 내놓고 마지막 안간힘을 다 쓰는 것은 파산된 개인독재 체제를 더욱 버림받게 하고 그 종말을 촉진하는 결과밖에 가져올 것이 없을 것이다.북한은 수령 우상화와 개인독재가 인민들에게 어떤 불행과 고통을 들씌우고 멸망하지 않을수 없는가를 생동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산 역사박물관을 방불케 하고 있다.개인독재는 민주주의를 배제하게 되고 민주주의를 배제하면 민주주의 이전 사회인 봉건사회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오늘 북한은 봉건주의와 전체주의적 통치수법이 결합되어 사회주의의 탈을 쓴현대판 봉건주의의 전형이다.독재를 반대하고 자유롭게 살 것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인간의 본성에 배치되는 개인독재는 인간의 본성에 배치되는 포악한 폭력수단과 정신적 기만수단에 의하여서만 유지될 수 있다.북한에서는 중앙으로부터 하부 말단에 이르기까지 조밀한 폭력독재망에 의하여 주민들의 생활의 구석구석이 통제되고 있으며 수령절대주의의 봉건도덕이 사람들의 자주의식을 마비시키고 있다.북한 통치자들은 주민의 삶의 목적은 수령에게 충성과 효성을 다하는데 있다고 설교하며 수령은 곧 조국이라고 하면서 ‘당신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는 노래까지 보급하고 있다.수령과 후계자는 천재적 예지와 고매한 덕성과 탁월한 영도력을 지닌 위인중의 위인이라고 떠들고 있다. 그렇다고 하자.그러면 어째서 수령과 후계자는 북한을 오늘의 비참한 상태로 이끌어 왔으며 왜 수백만 주민들이 굶어죽어가는 것을 구원하지 못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재능있고 근면한 북한동포들이 겪고 있는 오늘의 고통과 불행이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50여년간 부자가 대를 이어 실시하여온 봉건적 개인독재의 산물이라는 것은 더 논의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지금 북한의 경제는 크게 당의 경제,군대의 경제,정무원 경제의 3부분으로 갈라져 있다.외화벌이에 유리한 공장 기업소들은 당경제에 집중되어 있고 기술장비 수준이 비교적 높은 군수공장들은 군대경제에 속해 있으며 나머지가 정무원이 관리하는 일반 국민경제로 되고 있다.당경제,군대경제는 영도자의 개인소유나 다름없다.이 부분경제의 수입과 지출에 대하여서는 위대한 영도자 밖에 아는 사람이 없으며 또 감히 알아보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알맹이는 다 빼앗기고 남은 정무원 경제마저 정무원총리를 비롯한 경제일군들이 주견을 가지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영도자의 비준과 지시 밑에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북한의 영도자는 자기가 경제관리와 인민생활에 대하여 책임지지 않을뿐 아니라 경제전문가들이 경제를 합리적으로 관리할 권리마저 빼앗고 있다. 북한이 겪고 있는 현 위기는 또한 북한 통치자들의 고질적인 대남 무력통일정책과 결부되어 있다.북한 통치자들은 인민군대를 조국통일의 주력군으로 간주하고 ‘군대는 곧 국가이고 인민이며 당’이라고 하면서 철저한 군국주의와 군사독재를 표방하고 있다.북한에서는 국가를 위하여 군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를 위하여 국가가 필요하며 국가예산의 한 부분을 군대가 군사비로 쓰는 것이 아니라 군대가 쓰고 남은 것이 국가예산이 된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북한통치자들은 당장 북침전쟁이 일어나는 것처럼 허위선전을 일삼고 있는가 하면 적을 일격에 소멸하고 전쟁위험의 근원인 남한의 존재자체를 없애 버리겠다고 호언장담 하고 있다.그 누구에게 물어 보더라도 남한이 군국주의이고 전쟁을 바라고 있다고 대답할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것이며 반대로 북한이 군국주의가 아니고 전쟁과 테러로 남한을 위협하지 않는다고 대답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취약한 경제력을 의식하고 있는 북한 통치자들은 선제공격과 전격전을 기본전략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은 배신적 선제공격과 전격전의 요행수가 결코 군국주의자들에게 전쟁승리의 열쇠를 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평화적 경쟁에서 여지없이 참패한 북한이 비평화적 방법으로 이길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북한 통치자들은 현 경제위기의 원인이 자연재해와 외국의 경제봉쇄에 있는것처럼 선전하고 있지만 이는 천만부당하다.북한 영도자의 신년사를 보면 ‘매우 불리한 조건에서도 만풍년을 이룩하였다’는 말을 매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또 자립경제를 건설하여 놓았다고 장담하며 무기를 마음대로 팔아먹으면서 외국의 경제봉쇄 운운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만일 북한통치자들이 방대한 군사비와 수령 신격화에 쓰는 거액의 낭비의 몇 %만이라도 절약한다면 주민들의 식량을 해결하는 것쯤은 문제로도 되지 않을 것이다. 4천5백만의 남한동포들은 북한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부유하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으며 북한 군국주의자들의 그 어떠한 도발도 물리칠 수 있는 힘과 수단을 가지고 있다.오늘 남한동포들의 한결같은 의지는 동족상잔의비극을 절대로 되풀이하여서는 안되며 전대미문의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는 북한동포들을 하루빨리 도와주어야 하겠다는 뜨거운 동포애로 집약되고 있다.날로 융성번영하는 대한민국은 북한동포들을 손쉽게 구원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남한동포들은 이북동포들을 마음껏 도와주지 못하여 안타까워 하고 있다.지금 북한 동포들에 대한 남한동포들의 지원을 한사코 가로막고 있는것도 아름아닌 북한 통치자들이다. 우리는 북한 통치자들에게 아직도 폭력혁명론과 군국주의 망령의 포로가 되어 동족상잔의 새전쟁 도발에 몰두하고 남북교류를 가로막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으며 얼마나 큰 죄악으로 되는가에 대하여 냉정하게 심사숙고할 때가 왔다는 것을 충고하고 싶다. 출로는 명백하다.역사의 흐름에 배치되는 ‘주체연호’와 같은 우상화 놀음으로서는 오늘의 위기를 수습할 수 없다.북한통치자들은 이미 실패와 파산이 역사적 현실로 된 시대착오적인 봉건개인독재 체제와 범죄적인 무력통일노선을 버리고 개혁개방의 길로 나가야 하는 것이며 7천만 겨레의 기대와 염원에 맞게 남북대화와 교류를 실현하는데로 적극 나서야 하는 것이다. 역사와 민족앞에 더이상 엄중한 죄과를 범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북한의 모든 각성된 사람들은 눈을 가리우고 귀를 막은채 썩고 병든 개인독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여온 오랜 잠에서 깨어나 민족이 평화적 통일을 위한 투쟁에 적극 떨쳐 나설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이와 함께 우리는 북한동포들의 불행을 가슴아파하고 있는 모든 애국적 해외동포들은 북한이 그릇된 노선과 정책을 버리고 개혁개방과 평화통일의 길로 나가도록 사심없는 애국애족의 입장에서 떠밀어줄 것을 진심으로 부탁하는 바이다.
  • 미 뉴리퍼블릭지 주디스 논설위원 ‘대중국 강경론’요지(해외논단)

    ◎대중 봉쇄론 경계… 개입정책 지속해야 세계 및 동북아 안보에서 미·중 관계는 핵심 요인이다.미 정치주간지 뉴 리퍼블릭의 존 주디스 논설위원은 최근 미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대 중국 봉쇄론을 반박하면서 개입정책의 지속을 강력히 주장했다.계간지 ‘미국의 전망’에 실린 그의 ‘대중국 강경론’이란 글을 소개한다. 냉전이 끝난뒤 중국에 대한 ‘건설적인 개입정책’에 대한 불만의 소리가 일부에서 높아지고 있다.예전에 소련에 대항해 썼던 봉쇄 전략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옛 냉전때의 보수주의자들이 목청을 높이는 것이다. 봉쇄 노선 주창자들은 중국을 독일,일본,소련 등 제 뜻을 세계에 강요한 20세기 ‘수정주의자’ 세력의 최신판으로 여기고 있다.이들이 보기엔 미국과 중국은 분쟁을 피할수 없는 것이다.그들은 “중국 지도층은 한 세기 전 빌헬름 2세가 세계를 보는 것과 거의 비슷하게 오늘날 세계를 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중국이 무자비한 공산 독재국으로 남아있는 한 우리의 사고와 정책은 분쟁의 불가피성에 기반을 둬야한다”고 말한다. ○시대변화 모르는 발상 중국에 대한 최혜국대우도 그들로부터 특정한 몇몇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장기 전략의 일환으로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중국과의 경제·군사적 유대를 철회하고 중국의 세력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나토와 같은 동맹체제를 구축할 때 중국은 공산주의를 포기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예전 일본,독일,소련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위협에 대한 유일한 효과적 해결책은 정권의 변화,정치적 민주주의로의 변화 뿐이다”고 강조한다. 이같은 주장과 태도는 중국이 과거의 ‘수정주의’ 세력들과 얼마나 다르며 1945년 이래 세계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한 데서 나온다.금세기 초반 빌헬름 황제및 나치의 독일,차르 러시아,영국,일본은 전쟁으로 식민지의 분배를 바꾸고자 한 제국주의 열강이었다.중국은 이 제국주의의 희생자였다.홍콩,대만 등을 회복하려는 중국의 열망은 독일의 폴란드 합병이나 소련의 동구 지배와 동일시 할 수 없는 것이다. ○소련·나치 경우와 달라물론 중국도 제국적 과거를 갖고 있다.그러나 그 야망은 인근 지역에 한정되었다.중국인들은 19세기때의 미국인들처럼 자신들을 다른 나라들이 본받아하는 우월한 문화의 국민들로 여겼다.문화혁명 초기 임표의 급부상 시절을 빼곤 중국인은 소련과는 달리 세계 공산주의의 리더로서 메시아와 천년 왕국의 나라라는 그런 생각은 품지 않았다.그리고 중국의 현 공산주의는 ‘만국적’이란 허식에서 해방되어 있다.야망이 있다면 아시아의 대국으로서 제국주의 이전의 위세를 회복하는 것이다.이 야망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 및 미국과 갈등을 빚을수 있지만 소련이나 나치 독일의 세계 지배욕과 같게 봐서는 안된다. 설사 중국이 그런 야망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 나라는 아시아 대륙을 너머서는 거대 군사력을 유지할 능력이 없다.빈약한 장비의 육상군대가 주류를 이룬채 진정한 해군력은 거의 없는 셈이다.핵무기를 가지고 있으나 최근의 미 국방부 보고서가 지적한 것처럼 중국의 공군력은 ‘쇠퇴해가고 있는’ 것이다.또 중국의 경제력은 심하게 과대 평가되어 있다. 중국은 스프랫틀리 군도를 둘러싼 동남아 국가들과의 분쟁에서 보듯 분명 아시아에서 심대한 군사 문제를 야기할 수 있지만 이로 해서 미국이 소련에 대항해 추진한 봉쇄정책 같은 것이 요청된다고 할 수는 없다.대신,중국으로 하여금 군사 모험을 못하도록 하는 지역적 전략이 요망되는 것이다. ○군사모험 방지 전략을 이같은 제한된 전략은 미 해군력의 배치와 일본의 보다 적극적인 군사 역할을 포함할 수 있다.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건설적 개입 정책 옹호자들이 선호하는 적극적인 인센티브를 아우르는 것이다.여기에는 홍콩 등에 대한 영유권의 적법성 인정과 중국으로 하여금 지역적 및 국제적 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하는 유도책이 포함된다.이런 접근은 중국을 고립시키고,포위하며,타도코자 하는 봉쇄 전략과는 전적으로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중국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따질때 미국은 나치 독일이나 스탈린의 소련 망령을 떠올리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낯선 냉전이후,제국주의 이후 미래의 어슴푸레한 윤곽을 채워가는 그런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정리=김재영 워싱턴 특파원〉
  • 나토 동진… 유럽 현대사 새 장/마드리드 정상회담 결산

    ◎미 주도 불만 유럽국 갈등해소 시급/반감지닌 러시아와 관계조율 필요 【브뤼셀 연합】 8,9일 이틀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담은 체코 폴란드 헝가리 등 중동구 3국을 신규 회원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2차세계대전 이후 50여년간 지속돼온 ‘유럽 분단의 벽’을 허물고 유럽 현대사에 새로운 장을 장식하면서 막을 내렸다. “2차대전 이후 스탈린이 그어놓은 인위적인 선을 지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클린턴 미 대통령의 말에서 알수 있듯 이번 정상회담의 최대 성과는 2차대전 후 중·동구 지역 국가들을 옛 소련의 영향권에 편입시켰던 얄타협정에 따른 동서분단 체제를 종식시킴으로써 유럽의 현대사를 완전히 바꾼데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나토의 동진정책이 열매를 맺을수 있었던 것은 유럽평화라는 대명제를 중심으로 주변 강국으로부터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중동구 국가들의 희망과 나토의 핵심국으로서 옛 소련권에까지 영역을 확대,‘팍스 아메리카나’를 구가하려는 미국 등의 의도가 일치했기 때문이라고볼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성과와는 별도로 이번 정상회담은 나토가 안고 있는 과제들을 뚜렷이 드러내보였다는 점에서 나토의 앞날이 개운치만은 아닐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나토의 확대가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서방지도자들의 설명에도 불구,러시아의 반감이 완전히 해소되지 못해 앞으로 나토가 러시아와의 관계를 어떻게 조율해나갈 것인지가 당면과제로 떠올랐다. 또 나토의 확대가 결국 미국의 의도대로 3개국을 우선 가입시키는 선에서 합의된데 따른 미국과 유럽 국가들간의 갈등 해소도 나토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올랐다.즉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체제에 대한 유럽국가들의 좌절과 불만을 어떻게 다스려 나가느냐가 앞으로 나토의 제구실 수행에 주요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번 정상회담은 과거의 ‘얄타협정’ 체제에서 벗어났다는 점과 함께 유럽에서 ‘유럽인에 의한 유럽의 안보’란 개념이 주창되기 시작됐다는 점에서 유럽에 새 역사를 쓰는 신기원으로 기록될 만하다고 할 수있다.
  • 중 ‘한국전 남침’ 공론화/당기관 간행물 게재

    ◎“중 참전은 실수” 모택동 비판 중국당국이 ‘한국전쟁은 북침이 아니라 남침’이라는 사실의 공론화를 하부기관의 간행물을 통해 허용,이에 대한 중국측의 입장 변화가 주목된다. 중국 공산당 사학회(당사학회)가 펴내는 격월간지 ‘백년조’는 올들어 3회의 걸친 ‘한국전쟁’ 특집을 통해 북한이 먼저 남한을 침공해 들어갔다는 내용을 실었다. 이 특집은 또 “모택동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완전한 통일을 위해 대만을 공격할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결국 스탈린과 김일성의 한국전쟁 개입 요청을 받아들이게 됐다”고 밝히고 모가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더라면 미국과의 전쟁을 피할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한국전쟁 개입으로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실익을 잃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적었다. 그동안 중국 간행물들은 북한의 남침관련 부분에 대해 ‘조선내전(한국전쟁)이 발발했다’고만 기술해왔었다. 이 특집은 “한국전쟁이 미군의 참전으로 불리해지자 중국은 참전을 주저했으나 소련 스탈린의 압력,원조지원 약속 등에의해 참전하게 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모택동이 참전 이후 전세가 미국에 압도적으로 유리할 때 좋은 조건에서 정전협정을 맺을수 있었으나 좋은 기회를 놓치고 전쟁을 끌다가 어렵게 정전협정을 맺었다”는 모택동에 대한 비판 내용도 그대로 전달했다.
  • 새로운 봉사활동(외언내언)

    우리의 이민사는 부푼 꿈과 희망으로 시작됐다기보다 절망의 조국을 한으로 간직한채 떠나면서 시작됐다.첫 이민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인 진출은 19세기 중반 이후부터다.이 무렵 함경도를 휩쓴 대흉작이 닥치자 수많은 우리 농민들이 연해주지역과 북간도로 농사를 짓기위해 떠난 것이다.초기엔 여름이면 두만강을 건너가 농사를 짓고 가을이면 귀환하는 품팔이 농사꾼들이었으나 이들이 현지에 계속 눌러앉아 터전을 잡으면서 옛소련과 중국에의 이민이 시작된다.제정러시아정부의 한 자료에 따르면 1858년 함북출신 한일가씨가 포세트지방에 정착하면서 한국이민이 시작됐다고 밝히고 있다. 현재 전세계 120개국에는 5백30만명의 우리 동포가 살고있다.정치·경제·예술·체육을 비롯한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오늘의 우리 해외동포들이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까지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또 그 윗대 할아버지세대의 눈물과 땀과 피가 밑거름이 됐음은 두말할 나위없는 사실이다. 그 가운데서도 초기 이민을 떠났던옛소련과 중국 동포들의 얘기는 처절하기까지 하다.특히 일제의 침략은 이 두 지역의 우리 동포들에게도 지울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다.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침략을 두려워한 스탈린이 항일운동의 본거지였던 연해주의 우리 동포들을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킨 일과 수많은 항일투사들이 중국 곳곳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피흘린 독립투쟁이 그것이다.그 후예들이 지금 옛소련에는 약 45만명,중국에는 2백여만명이 살며 발전한 조국을 그리워하고 있다. 이들을 위로하고 모두 한핏줄임을 확인하기 위해 대학생들이 달려간다고 한다.포항 한동대학생 105명과 교직원 13명이 여름방학을 맞아 5일부터 한달동안 연변과 우즈베키스탄을 찾아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것이다.이들은 또 베트남 하노이도 찾아 월남전이 남긴 라이 따이얀들도 위로하겠다고 한다.연변 조선족과 중앙아시아의 까레리스키,베트남의 라이 따이얀,그리고 우리 대학생들의 만남에 큰 기대를 걸어본다.
  • 에커트 미 하버드대 교수 「북한의 개혁」 강연 요지(해외논단)

    ◎북한 「연붕괴」 가능성 높다 미 하버드대 한국연구소장인 카터 에커트 교수(한국사)는 24일 워싱턴 우드로 윌슨 국제센터의 아시아 프로그램이 주관한 세미나에 참석,북한의 장래에 대한 가장 가능한 시나리오는 「연붕괴」(Soft Collapse)라고 규정지었다.북한정부가 서서히 주민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가다가 결국에는 국가파멸을 맞을 것이라는 주장이다.에커트 교수의 강연「북한의 개혁 가능한가.그 역사적 조망」을 요약 소개한다. 북한의 개혁 전망은 비관적이다.먼저 역사적으로 볼때 개혁을 어렵게 만드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한국민족 특유의 민족적 자긍심이 그것이다.신라로부터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중국문화를 받아들였으나 이를 창조적으로 수용,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이뤄냈다.따라서 한국민들은 지금도 스스로를 아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북한의 경우 이같은 민족적 자긍심은 더욱 강하다.남한과 달리 오랫동안 폐쇄,고립돼왔기 때문이다.일제에 항거하면서,또한 그들이 민족해방전쟁이라고 믿었던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북한인들의 자긍심은 더 강해졌다.김일성의 주체사상도 상당부분 이같은 전통과 연결돼 있다.집권초기 김일성은 정통 스탈린주의 노선을 충실히 따랐다. 지나치게 강한 민족적 자긍심과 김일성주의는 개혁과 개방의 장애가 되고 있다.개혁을 위해서는 문을 열고 외부와 교류를 해야 하는데 북한인의 눈에 외부인,특히 서양인은 야만인이며 두려움의 대상이다.또 개혁은 김일성체제의 부정을 뜻하는데 김일성을 부정한다면 북한에서는 체제의 존재이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 된다. 북한이 중국식 개방노선을 따를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우선 양자는 비교가 어렵다.중국은 나라 자체가 거대하기 때문에 밖으로부터 변화의 바람이 불어도 이를 체제 안에서 흡수해버리고 만다.그러나 북한에게 개방은 곧 외부세력에 의해 자신들이 흡수되는 것을 의미한다.더우기 남한의 경제력과 남한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강한 보수층,즉 정치인 군부,관료,언론 등에 대한 북한의 두려움은 크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때 북한의 개혁 전망은 어둡다.김일성과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있었다면 몰라도 지금과 같은 김정일의 불확실한 체제 하에서는 개혁은 불가능하다고 볼수 있다.향후 2­5년의 단기적인 전망으로는 식량이나 핵 분야에서 미국과 협력하는 정도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한국과는 흡수통일의 두려움 때문에 협력을 피하려 할것이다. 장기적으로 볼때는 농업기술 분야 등 제한된 분야에서의 개혁은 가능하겠지만 전반적인 개혁은 그들이 전정으로 그 과정을 컨트롤 할수 있느냐애 달려 있다.그러나 홍수로 인한 식량난의 상황은 이같은 개혁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따라서 이같은 제한적인 개혁의 결과는 북한의 장래에 대한 3가지의 시나리오를 가능케 하고 있다.첫째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전쟁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일본의 진주만 공격때처럼 기습공격을 감행한뒤 협상을 하려고 나설 것이다.둘째는 바람직한 시나리오로 개방과 경제발전을 통해 급격한 변화없이 북한사회를 「연착륙」(Soft Landing)시키는 것이다.세째는 가장 실현 가능성 있는시나리오로 「연붕괴」(Soft Collapse)가 있다.정부의 통제를 점차 잃어가다 종당에는 국가 파멸의 길로 가는 것이다.〈정리=나윤도 워싱턴 특파원〉
  • 미국은 너무 자만하지 말라(해외사설)

    21세기를 앞두고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G8 정상들을 미국으로 초대했다.그러면서 번영으로 가는 유일한 선택은 세계 최고의 군사강국이자 경제대국이며 록큰롤 음악과 코카콜라뿐아니라 세계의 문화까지 지배하는 미국을 본받는 것이라며 계속해서 강조하고있다. 보리스 엘친 러시아 대통령까지 세계 선진국 모임에 끌어들여 일렬로 세워놓았다.클린턴은 물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방팽창정책을 러시아가 받아들여 준데에 대해 고맙다고 말했다.그러나 얼렁뚱땅하며 이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은 하지 않았다.러시아가 NATO에 대항할 만큼 군사 강국이지만 경제적으로 아직 상대가 되지 않은 점을 계산에 넣었기 때문이다. 클린턴이 비약적인 성장과 4.8%로 낮춘 실업율,2.8%선을 유지한 물가상승율 등을 자랑할 수 있게 된 것도 지난 7년간의 이같은 끊임없는 팽창전략 덕이다.그러면 프랑스는 어떤가.지난 91년이래 1천2백만명의 고용창출로 이제는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영국을 제외한 유럽연합국가들이 그동안 시대착오적인 과거 체제에 대한 향수에젖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유럽이 미국에 뒤진다고 말할수 없다. 따라서 클린턴은 새로운 교훈을 되새겨봐야 할 시점이다.공산주의가 사라진 뒤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되었지만 일시적이 될 것이다.과거 스탈린이 원자폭탄을 갖추는데 불과 4년이 걸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일본과 독일은 미국의 경쟁국으로서의 면모를 단시간에 갖출 것이다. 유럽도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다.철의 장막이 걷히면서 이제 재통합되고있는 유럽은 세계 최대의 시장이 될 것이다.그리고 곧 출범할 유로통화는 달라의 기득권을 부수게 될 것이며 미국도 조만간 이를 잘알게 될 것이다.모든 것은 돌고 돌기 때문이다.그러나 덴버에서 미국은 이같은 역사의 진리를 망각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지나친 거만함은 반감을 사게 된다.미국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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