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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통일은 결코 무력으로 안 된다”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통일은 결코 무력으로 안 된다”

    한국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켜 한민족의 분단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역사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나 민족의 통일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출판물과 영화로 신세대에 전해지고 있다. 전쟁이 발생한 지 60년이 지났는데도 한반도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폭발 가능성이 큰 곳이다. 불안정한 휴전하에서 남북한은 준전시 상태로 유지됐다. 금방이라도 군사적 충돌이 재현될 것 같았지만 위기를 극복했다. 그동안 남한에서는 경제발전이 우선, 군사문제는 이차적인 순위로 밀려났고, 북한은 선군 정치로 일관해 왔다. 지난 세기 러시아도 소비에트시대의 군사적 분쟁에 휩싸여 있었다. 러시아사람들 사이에서도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이 잊혀져 가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파견됐던 옛 소련 공군 출신과 한반도의 현황을 좀 더 깊이 연구해 보려고 하는 학자들만이 잊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서방세계의 정보를 자유롭게 얻는 러시아 신세대는 한국전쟁을 북한의 돌발적인 남침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한국전쟁을 그 전쟁에서 승리해 공산주의 체제를 한반도의 남쪽까지 확산시키고 미국을 중국과의 군사대결에 끌어넣는다는 것에 목적을 두고 스탈린이 직접 주도해 행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대부분의 러시아 전문가들은 한반도에서 발생한 한국전쟁은 외부적인 영향보다도 내부적인 요소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필자는 더 나아가서 제1차 대전의 마지막 단계에 일어난 제정 러시아 붕괴의 결말이었던 적군(赤軍)과 백군(白軍) 간에 벌어진 내전과 제3차 전쟁의 서곡이 충분히 될 수 있었던 남북한 간 동족상잔의 유혈전쟁, 그 두 전쟁 사이에 일종의 유사성이 있다고 본다. 결국은 러시아에서 적색테러와 백색테러, 한국의 공산테러와 반공테러 등은 우리 양국에서 시민적 자유와 민주사회의 형성과정을 수십 년 거꾸로 돌려놓았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유사성이 또 하나 있다. 러시아는 제정 러시아가 남긴 폐허 위에서 일어나 20년 만에 세계 역사상 가장 유혈적인 제2차 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반세기에 걸쳐 미국과의 군사 정치적 세력균형을 유지해온 강대국으로 변했다. 전후 한국에서도 같은 능력을 볼 수 있다. 3년 동안의 한국전쟁으로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전 국토가 폐허가 되었다. 예를 들어 민간인의 피해는 여러 통계에 의하면 150만명 내지 400만명에 달해 제일 컸다. 제2차 대전 당시 소련의 인구손실과 대비할 수 있다. 남북한은 경제적으로도 큰 피해를 보았다. 남한의 경제적 피해 규모는 30억달러로 평가되었으며 북한은 4200억원이었다. 북한의 피해는 남한보다 훨씬 더 컸다. 왜냐하면 2년 동안 미 공군의 공습으로 북한의 경제기반이 깡그리 파괴됐기 때문이다. 남한은 전쟁의 피해에도 단 한 세대 만에 아시아 국가 중에 일본에 버금가는 산업대국이라는 지위와 세계 12대 경제 강대국 대열에 드는 국가로 성장했다. 북한의 발전은 그다지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기보존과 생존에 있어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고, 핵클럽에 사실상 가입을 선언한 상태다.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60주년과 동시에 한국전쟁에 개입했던 러시아와 수교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한반도에는 1950년 전쟁 직전의 긴장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은 무력으로 할 수 없다는 교훈을 한국사람 자신들이 잘 알고 있다. 물론 그동안 힘의 배분이 변화되어 북한과 남한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예전과 비교해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60년 전에 무력통일을 실패한 대가로 수많은 희생과 고통을 치러야 했다면 오늘날은 휴전선 쌍방에서 대량 살상무기를 포함한 군비의 축적규모를 살필 때 어떤 전쟁 시나리오도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면 아예 한민족의 존재 여부 자체가 의심스럽게 될 확률이 높다고 볼 수밖에 없다. 러시아로서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극동에 평화가 유지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러 문서보관소 ‘한국전쟁사 寶庫’ 자료공개로 ‘북침설’ 사장시켜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러 문서보관소 ‘한국전쟁사 寶庫’ 자료공개로 ‘북침설’ 사장시켜

    1994년 6월2일. 당시 러시아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마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검은 서류상자 하나를 건넸다. 흔히 ‘옐친 문서’라고 불리는 이 서류는 1949년 1월부터 1953년 8월까지 옛 소련과 중국, 북한 간에 오고 간 극비자료였다. 모두 230여건, A4용지 800쪽 분량의 자료 속에는 김일성의 선제타격작전계획과 스탈린의 3단계 작전지침 그리고 마오쩌둥의 전쟁개입 과정 등이 소상하게 담겨 있었다. 이 자료가 공개되면서 김일성과 좌익진영에서 주장해 오던 ‘북침설’은 소설이 됐다.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는 옐친 문서 공개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이전까지는 미국, 일본 등 서방 측 자료에 일방적으로 의지한 탓에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전쟁발발자인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이 주고받은 극비문서에 대한 분석 없이는 한국전쟁의 기원과 발발에 대한 연구의 가치는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와 조선이 첫 수교를 맺은 1884년부터 일제에 의해 외교권이 강탈당한 1905년까지 두 나라는 긴밀한 우호 관계를 맺었다. 고종의 아관파천(1896년)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는 우리 근세사에서 10년 넘게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 같은 역할을 누렸다. 제국주의 열강 앞에 촛불처럼 흔들렸던 한반도의 정세와 이권약탈사가 러시아 비밀문서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한국전쟁 발발과 휴전 이전까지, 휴전 이후 1980년까지 남북한과 러시아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난 모든 공개, 비공개 외교문서가 포함돼 있다. 러시아라는 거울을 통해 조선후기와 대한제국, 남북 분단 시기의 내밀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러시아에는 20여개의 국립 문서보관소가 있다. 러시아 외무성 산하 제정러시아 대외정책 문서보관소와 혁명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문서를 보존하고 있는 러시아연방 대외정책 문서보관소가 한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와 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에는 부지기수의 한반도관련 문서가 소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모스크바 크렘린 러시아연방 대통령 문서보관소는 한국전쟁관련 문서의 보물창고이다. 전쟁준비 단계에서 휴전협정이 이뤄진 1949년부터 1953년까지의 극비문서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서가에 꽂혀 있다. 일반적으로 문서보관소의 출입증을 받으려면 소속 학교나 연구소에서 작성한 출입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연구할 제목을 비롯해 인적사항을 적은 신청서를 내고 나서 출입허가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연락이 오면 가서 문서목록 속에서 필요한 문서를 찾은 뒤 신청하게 된다. 외무성 연방문서보관소는 허가절차가 까다롭다. 3개월 만에 허가가 나오기도 해서 연구자들로부터 원성이 높다. 특히 한국전쟁 사료가 있는 연방대통령 문서보관소는 일반 연구자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특별허가를 받은 문서보관소 관계자의 협조를 얻어야 자료접촉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서보관소의 여러 부서에서 문서를 각각 접수하고 있고, 또 문서의 성격에 따라 담당자와 정리자가 달라 문서의 날짜가 다르거나 잘못된 사례도 허다하다. 옛 소련 국가안보위원회(KGB) 문서 보관소는 여전히 금역이다. 박종효 모스크바대 한국학 센터 명예교수가 최근 펴낸 ‘러시아연방 외무성 대한정책 자료1,2’(도서출판 선인)도 이 같은 발품의 산물이다. 러시아 내 한국사료 발굴의 권위자인 박 교수는 지난 16년 동안 문서보관소를 찾아다니면서 관계 문서를 찾아 번역하고 자료집으로 정리했다. 박 교수는 “한·러 관계사의 1차 사료인 러시아 대한정책 자료가 한국전쟁 등 한·러 관계사 연구에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1) 한국전쟁 발발 막전막후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1) 한국전쟁 발발 막전막후

    다시 유월이다. 60년 전 한반도를 선혈로 물들였던 한국전쟁 발발의 막전막후에서 남북한, 미국과 옛 소련 그리고 공산화된 중국 간의 이합집산과 동상이몽이 클라이맥스에 올랐던 바로 그 여름이다. 일갑자의 세월이 흐른 지금, 천안함 사태를 둘러싸고 전쟁의 두 당사국과 주변 4강이 편을 갈라 맞서고 있는 풍경의 흑백판이다. 한국전쟁을 어떻게 봐야 하나. 전쟁을 일으킨 발발자와 원인 그리고 전쟁의 성격에 대한 의견이 여전히 분분하다. 한국전쟁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주변 4강의 지정학적 관계와 국제정세 속에서 발발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한다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서울신문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러시아연방 대통령문서보관소에 깊숙이 감춰져 있던 한국전쟁 관련 문서발굴을 통해 전쟁의 실체에 한걸음 다가서려고 시도했다. 문서 속에는 한국전쟁의 총연출자인 스탈린과 동조자이자 막후 조종자였던 마오쩌둥, 각본을 썼지만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김일성이 노렸던 적화통일의 염원이 빛바랜 엽서처럼 남아 있다. 1949년 3월5일은 김일성에게 역사적인 날이었다. 김일성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정부대표단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마주 앉았기 때문이다. 소련군 장교출신의 풋내기 김일성이 절대적 독재자에게 첫선을 보인 날이다. 김일성으로서는 우상 스탈린으로부터 전쟁 승인과 지원을 이끌어낼 절호의 기회였다. 이 시기 평양과 모스크바 사이를 부지런히 오간 비밀문서는 겉으로는 경제협력, 문화교류 확대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전쟁준비를 위한 소련의 군사 및 군비지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2월4일 평양에서 외무성에 보낸 전문 중에는 ‘2월3일 남조선 경비대가 38선을 넘어와 북한 경비대와 교전 끝에 격퇴됐다. ’는 내용의 문서가 있다. 4월20일 소련 국방상이 스탈린에게 보낸 38선 상황에 대한 극비보고서에서도 ‘남한의 38선 침범행위는 도발적이며 체계적이다. 올 들어 지난 15일까지 모두 37건의 침범사례가 있었다. 발포는 남한이 시작했다. 남한군의 38선 집결이 계속되고 있다.’라고 보고했다. 회담을 전후해 한반도의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 1946년 대구폭동과 1948년 제주 무장봉기, 여수·순천반란사건 등으로부터 한숨을 돌린 이승만 대통령은 38선 부근에 국군을 집중적으로 배치했으며 시중에는 ‘8월 북벌론’이 팽배해 있었다. 첫 회담에서 스탈린은 남한에 미군이 얼마나 있으며, 남한군의 규모와 남한군을 두려워하는지 여부, 희망하는 차관액수 등등에 대해 김일성에게 질문을 던졌다. 김일성은 2만명의 미군이 있으며, 남한 군대는 6만명이고, 남한군보다 북한군이 강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스탈린은 빨치산의 남한 군부 침투를 주문했으며 동석한 박헌영은 ‘침투를 시켰지만 드러내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스탈린은 38선 충돌상황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스탈린은 또 ‘김일성, 박헌영 둘 다 전보다 살이 많이 쪄 알아보기가 어렵다.’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두 사람이 1946년 여름 모스크바를 방문한 사실을 염두에 둔 얘기다. 이후 스탈린은 ‘ 첫째, 북한군은 남한군대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지 못하며 수적으로도 뒤진다. 둘째, 남한에 있는 미군이 개입할 우려가 있다. 셋째, 38선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협정이 유효하다.’는 이른바 ‘3대 남침 불가론’을 내세워 김일성의 전쟁의지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데뷔는 성공작으로 평가된다. 스탈린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김일성은 항일 유격전에서 일본군이 가장 체포하고 싶어 하는 게릴라 지휘관 출신이었다. 1942년 소련군에 입대해 1945년 평양에 지도자로 나타났을 때 적군 군복에 소령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그는 중국보다 소련을 후원자로 선택한 스탈린 추종자였다. 그는 ‘나는 스탈린 동지에게 충실한 공산주의자이며, 나에게 스탈린은 바로 법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퓰리처상 수상작가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를 파헤친 최신작 ‘콜디스트 윈터’에서 스탈린이 김일성을 좋아한 이유를 ‘김일성의 지도력이 소련군보다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적인 역량과 지도력이 뛰어났다면 마음대로 다루기 어려웠을 테니 당연했다. 다소 경력이 부족하더라도 미화시킨 다음 권좌에 앉히면 그만.’이라고 분석했다. 김일성은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마오쩌둥에게 빌붙기 전까지 스탈린의 입맛에 맞게 움직였다. 김일성은 평양주재 스티코프 소련대사를 구워삶는 데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스티코프는 남한의 북침 가능성이 크며, 북의 준비는 부족하다는 점을 강조한 전문을 스탈린에게 계속해서 보냈다. 스탈린은 이 같은 스티코프의 언동에 대해 경고장을 보냈을 정도다. 스탈린은 북한의 선제공격이 미국과의 전면전을 유발할지 모른다면서 몸을 사렸다. 스탈린은 스티코프에게 ‘전쟁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남한이 먼저 북한을 공격하는 경우밖에는 없다.’라며 남한이 공격해 올 때까지 자제토록 지시했다. 김일성의 다음 행로는 마오쩌둥 설득에 맞춰졌다.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주석에 취임한 다음 날 소련과, 나흘 뒤 북한과 각각 국교를 맺었다. 김일성은 1949년 4월 북한 인민군 총정치국장 김일을 보내 원조의사를 떠봤다. 베이징 지도자의 답은 ’선제공격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만 ‘필요하면 중국군 조선인 사단 2개를 지원해 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검은 머리이니까 중국 해방군인지 북한 인민군인지 분간을 못 할 것’이라는 희망어린 메시지를 전했다. 이때만 해도 김일성은 신생 중국을 얕봤다. 소련에 매달렸고, 중국의 도움은 불필요하다고 여겼다. 전쟁을 통해 입지를 다지려던 김일성은 끈질겼다. 1950년 4월 한 달 동안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스탈린과 세 차례 만났다. 마오쩌둥의 개입 의사를 전해 들은 스탈린의 마음도 움직였다. 김일성은 ‘전쟁이 나도 미국은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20만명의 공산당원들이 들고 일어나 북한을 지지할 것’이라고 허풍을 쳤다. 스탈린은 마침내 ‘북한군을 38선에 집결시키고서 남한에 대해 평화통일을 제의할 것, 남한이 거부하면 옹진반도를 점령하되 남한이 반격하면 전선의 폭을 넓혀 나간다.’는 이른바 ‘3단계 작전지침’을 제시했다. 러시아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AV토르쿠노프 총장은 저서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에서 “전면전 허용은 아니었다.”라고 분석했지만 김일성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뜸을 들일 의사가 없었다. 마오쩌둥도 합류했다. ‘미국이 개입한다면 중국도 북한에 군대를 보낸다.’는 것이 마오쩌둥의 기본 생각이었다. 마오쩌둥은 1949년 12월16일 모스크바를 방문해 석 달 가까이 체류하면서 스탈린과 만났다. 그 때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혁명에 성공한 영웅으로 초대받지 못했다. 숱한 공산주의 국가 대표 중의 한 사람으로 스탈린의 고희연에 참석, 장기집권을 축하하도록 초대받았을 뿐이었다. 두 공산주의 국가 거목 사이에는 불화가 싹트고 있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에 따르면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전혀 믿지 않았다. 스탈린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나뉘기보다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고마워하는 단일 공산국가로 통일되기를 바랐다. 또한 일본에 맞설 정도로 강해지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일본 동양학원대학 주지안롱 교수는 저서 ‘모택동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에서 중국의 참전이유를 ‘첫째, 미국 7함대의 타이완해협 파견을 대중국 선전포고로 간주했다. 둘째, 한반도 개입이 국내 정치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셋째, 미군이 한반도 북부에 진군하면 중국 동북지역이 위협에 노출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의 한국전쟁 전문가인 선즈화 화동사범대 교수는 ‘미국의 침공을 저지하고자 미·중대결의 전장으로 한반도를 선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본토 원자폭탄투하설을 입에 올린 맥아더 장군의 쇼맨십도 마오쩌둥의 참전의지에 불을 붙였다.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책은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치면서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간 일이었다. 마오쩌둥은 미국의 원자폭탄을 종이호랑이로 깎아내렸다. 인도의 네루 수상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1000만~2000만명의 인명피해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라고 호언장담했다. 공개된 러시아 비밀문서를 유심히 살펴보면 공산진영 세 나라 지도자의 성격과 품계가 잘 나타난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직접 지시하기보다는 평양주재 대사 등을 통해 우회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썼다. ‘김일성에게 문서를 읽어주고 나서 베껴가는 것은 허용하지만 문서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마오쩌둥 역시 스탈린 앞에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갔다. 문서의 서두는 스탈린의 암호명인 ‘필리포프 동지’로 시작했고, ‘귀하의 검토와 의견을 바란다.’라고 마무리했다. 또 ‘볼셰비키적 경의를 표하며 모택동’이라고 썼다. 전쟁이 장기화하고 중국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마오쩌둥은 스탈린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휴전교섭 지침을 스탈린에게 의뢰한 1951년 6월30일자 전보에서 마오쩌둥은 ‘ 귀하에게 나의 의견을 전한다. 검토 후 김일성에게도 직접 지시하시기 바란다. 귀하가 김일성과 접촉하고 나서 나에게도 알려주기 바란다.’라고 썼다. 의례적인 칭송은 사용하지 않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우고 있다.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스탈린은 물론 김일성과 공산진영에서 ‘무시 못할 둘째 형’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이 줄기차게 주장한 ‘남침공격’을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결국 허락했지만 상호 담보를 원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베이징 지도자의 지원을 구하라고 지시했다. 1950년 5월13일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베이징 장도에 올랐다.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 등 공산진영 3자의 전쟁 합의는 이날 성사됐고, 한국전쟁은 그렇게 막이 올랐다. 노주석 논설위원·윤샘이나 기자 sam@seoul.co.kr
  • [《복에 관한 담론》(돌베개) 중에서 | 무덤을 찾아다니며] 무덤에도 시대가 보인다

    [《복에 관한 담론》(돌베개) 중에서 | 무덤을 찾아다니며] 무덤에도 시대가 보인다

    언제부터 생긴 기묘한 버릇인지, 나는 젊은 시절 외국에 나가 살 때 어느 새로운 도시를 방문하면 곧잘 그 고장의 묘지부터 찾아보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독일 하이델베르크 유학 시절에 그곳 공동묘지에 묻힌 막스 베버와 마리안네 베버 부부,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철학자 쿠노 피셔 등의 무덤을 찾은 것이 시작이 아니었나 회상됩니다. 유럽의 묘원(墓園)은 우리나라의 공동묘지와는 달리 그 꾸밈새가 아름답고 잘 정리돼 있기도 해서 꽤 볼 만하고 관광객에게도 충분히 눈요깃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자동차로 드라이브하면서 둘러봐야 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의 광대한 중앙묘지(zentralfriedhof)는 그 좋은 보기입니다. 그곳의 가령 음악가 묘역 단지에는 베토벤, 브람스, 글루크, 슈베르트, 후고 볼프,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 등 세계 음악의 기라성 같은 작곡가들이 한데 모여 묻혀 있습니다. 더욱이 그 무덤들은 천편일률적인 우리나라의 무성격한 봉분과는 달리 무덤마다 각 시대 양식의 조각 작품을 장식하고 있기도 해서 다양하고 개성적인 형상을 보여줍니다. 장엄하기도 하고 우아하기도 한 유럽의 그러한 묘지들을 우리나라의 초라한 분묘와 비교하고 나면, 과연 한국이 세계에 자랑할 조상 숭배의 나라라 할 수 있는지 자신이 없어집니다(물론 선조들의 무덤 자리로 명당을 찾으려는 한국인의 성심과 열성만은 단연 세계 제일이란 믿음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가령 프랑스의 여행 가이드북 《기드 뒤 미슐랭》에는 작곡가 베를리오즈, 시인 보들레르, 독일의 망명 문인 하이네, 또는 실존주의 작가 사르트르와 보봐르 등 명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묘역 지도까지 자세히 기재된 파리의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의 공동묘지에 관한 안내가 있습니다. 그곳은 가보신 분들도 많으시리라 믿기 때문에 그곳에 관한 긴 얘기는 생략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비교적 근래에 가본 묘지 몇 군데에 관한 얘기만 해볼까 합니다. 나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20여 년 전 처음 방문했습니다만 그때는 다른 곳은 둘러보지도 않고, 그럴 시간 여유도 없고 해서 오직 한군데만 구경하고 돌아왔습니다. 베네치아 시내에서 택시(모터보트)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산 미켈레 섬(Isola S. Michele)만을 둘러보고 온 것입니다. 그 섬의 공동묘지에 묻힌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1882~1971)의 무덤을 찾아보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 프랑스, 미국의 국적을 차례로 가진 세상이 다 아는 코스모폴리탄이었기 때문에 그가 어디에 묻히건 놀랄 일은 아니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뉴욕에서 숨을 거둔 그가 영면의 장소로 마지막 국적을 얻은 그 광활한 미 대륙의 땅이 아니라 굳이 대서양을 횡단해서까지 유럽으로 건너와, 하필이면 그것도 예전에 한동안 국적을 취득하고 살았던 프랑스가 아닌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건너와서 거기서도 다시 한참 떨어진 한적한 외딴섬에 묻혔다는 것이 내게는 도무지 궁금하기만 한 수수께끼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산 미켈레 묘지를 찾아가 봤고, 거기서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이고르와 베라 스트라빈스키 부부의 묘가 있었고, 거기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1872~1929)의 무덤이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인하고 그때 그곳에서 잔잔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발레 뤼스(Ballet Russe)’를 창단해 20세기 발레의 부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디아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에게 발레 음악의 명작 <불새>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 등의 작곡을 위촉해 그를 세계적인 음악가로 키워 준 사람입니다. 산 미켈레에 못지않게 나를 감동시킨 것은 서베를린의 첼렌도르프 공원묘지에 묻힌 전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의 무덤이었습니다. 사생아로 태어나서 서베를린 시장을 거쳐 유럽대륙 최고(最古)의 정당 당수가 돼 제2차 세계대전 후 첫 사회민주당 출신의 총리로 취임한 빌리 브란트(1913~1992), 그는 냉전시대에 동·서유럽의 화해에 기여한 업적으로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무덤에는 아무런 장식이나 가공도 하지 않은 자연석이 하나 덩그렇게 세워져 있고, 거기에는 일체의 경력이나 관직에 관한 표시 없이 - 심지어 드골 프랑스 전 대통령(1890~1970) 묘비에도 그것만은 새겨 두었다는 생년과 몰년(沒年) 표시도 없이 - 다만 WILLY BRANDT라는 이름만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나를 감동시킨 것은 브란트의 묘역 바로 뒤가 에른스트 로이터(1889~1953)의 묘역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로이터와 브란트는 둘 다 베를린 시장을 역임하면서 저마다 스탈린의 베를린 봉쇄와 흐루시초프의 베를린 장벽에 맞서 분단 도시의 자유를 지켜낸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노르웨이 군복을 입고 망명지에서 귀국한 젊은 브란트를 정치가로 키워 준 사람이 역시 터키의 망명지에서 귀국한 베를린의 선배 시장 에른스트 로이터였습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가히 압권이라 할 만한 사례를 나는 최근 모스크바의 한 공동묘지에서 구경했습니다. 그곳은 가령 정치가로는 흐루시초프와 옐친, 문인으론 고골과 체호프, 무대인으론 샬라핀과 울라노바 등이 묻혀 있는 명소 노보데비치 수도원의 묘원이었습니다. 나는 거기에 전년에 타계한 러시아의 세기적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1927~2007)가 묻혀 있다 해서 2008년 6월 초 짬을 내어 찾아가 봤습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무덤은 묘비가 완성되지 않아 가묘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치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세계에서 드림 트리오라 일컫던 파블로 카살스(첼로), 자크 티보(바이올린), 알프레드 코르토(피아노)의 3인조와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 후엔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소련의 ‘드림 트리오’를 이루었던 에밀 길렐스(1916~1985, 피아노)와 레오니드 코간(1924~1982, 바이올린)의 묘소가 오래전부터 거기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들이 형제도 부부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길렐스와 코간은 같은 자리에 묻혀 있고, 묘비도 둘이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후의 영원한 안식처로 생전에 특별히 가까웠던 은인이나 선배, 친구나 동료들 곁을 찾아간다는 것이 동북아에는 없는 서양의 기독교 문화권에만 있는 풍습인가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인 고도(古都) 가마쿠라(鎌倉)에는 도케이지(東慶寺) 묘원이 있습니다. 원래 비구니 사원이라고 하는 이 절의 후원에 마련된 공동 묘역에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근대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출판사 이와나미서점의 창업자 이와나미 시게오를 비롯해서 일본 근대철학을 대표하는 니시다 기타로와 아베 요시시게, 와쯔지 데쓰로, 다니카와 데쓰조, 문학자 고바야시 히데오와 아베 도모지, 기시다 구니오 등의 무덤이 모여 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일본 문화계의 주요 인물 가운데 그곳에 묻히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로 도케이지 묘원은 근대 일본의 지식인과 예술인의 네크로폴리스(necropolis)라 할 만한 곳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다른 나라와 같이 순국한 군인들을 위한 국립묘지는 있습니다. 가족 묘지를 마련할 땅을 매입하기가 일반 서민들에겐 갈수록 어려워진 근래에 와서는 망우리를 위시해서 여러 군데에 공원 묘지, 교회 묘지 등이 개발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음악가, 학자, 작가들을 위한 공동묘지는 없는 것 같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이 도대체 가능한지, 아니 그러한 발상부터 가능한 것인지…, 나는 회의적입니다. 살아서는 넓은 세상에 나와 이름도 군청이나 시청의 열린 호적부에 오르지만, 죽어서는 좁은 선영(先塋)의 가족묘에 돌아가 묻히고 이름도 닫힌 족보에 기록되는 것이 괜찮게 사는 한국 사람들의 생사입니다. 왜 그럴까? 그러한 궁금증을 풀어보기 위해 나는 우리나라 기복사상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글·사진_ 최정호 울산대학교 석좌교수
  • [생명의 窓]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며/김상선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 사무총장

    [생명의 窓]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며/김상선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 사무총장

    요즘 들어 부쩍 우리는 정말 대단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런 생각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매일매일 세계 각국에서 들려오는 뉴스를 접하다 보면 우리 민족이 정말 우수하다는 데 저절로 공감하게 된다. 최근에 있었던 몇 가지 사례만을 보아도 그렇다. 며칠 전 골프지존 신지애가 여자프로골프 세계 랭킹 1위 자리에 올랐다는 뉴스를 보았다. 미국 프로여자골프 대회(LPGA)마다 한국 낭자들이 10위권 이내에 대여섯명씩 포진하는 형편이고 보면 당연한 일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체력적인 면이나 우리의 짧은 골프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지난 2월 밴쿠버 동계올림픽 피겨 여자싱글에서 역대 최고점으로 금메달을 목에 건 김연아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우리를 신나게 하는 사건이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도 선정된 김연아 금메달의 경제효과만도 무려 5조 20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산악인 오은선 대장의 히말라야 정복 소식은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여성 산악인으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개봉을 모두 오르는 데 성공하였다. 14좌 완등은 그동안 엄홍길 대장 등 한국인 3명을 포함해 전 세계의 남성 19명만이 성공했던 대기록이다. 필자가 해외에 근무하면서 경험했던 몇 가지 일화를 덧붙여 본다. 해외에서 사업하는 교포들이 한국계 점원을 쓰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얼마 안 가면 회사를 뛰쳐나가서 창업, 그것도 멀지 않은 곳에서 창업을 하기 때문에 한국계보다는 묵묵히 일하고 여유시간을 즐기는 히스패닉이나 흑인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농담으로 하는 얘기이겠지만 그만큼 머리가 좋고 도전정신이 강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미국에서 돈이 많이 드는 로스쿨이나 MBA 과정에 망설임 없이 자녀를 보내는 민족도 한국인이라고 한다. 그 덕분인지 벌써부터 주정부, 연방정부 및 의회 등에 한인 2, 3세의 진출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세계 방방곡곡에서 살고 있는 680여만 재외동포들의 활약상도 눈부시다. 몇 해 전 카자흐스탄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지 7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고려일보와 고려극장이 있고 광복절 기념식을 하면서 우리 말, 역사, 문화를 지키려는 동포들의 눈물겨운 노력은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전체 카자흐스탄 인구의 0.5%에 불과함에도 고려인은 우수하고 부지런하고 경제적으로 윤택하며 부모를 잘 섬기고 가족 간에 화목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다른 민족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국내로 눈을 돌려 우리 과학기술계를 둘러보아도 희망은 넘친다. 지난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설립 이래 불과 40여년 만에 이룩한 성과들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과학기술인의 몫이다. 다음 세대를 짊어질 과학꿈나무들의 활약도 눈부시다. 우리나라는 20세 미만의 과학영재들이 과학적 창의력과 탐구능력을 겨루는 ‘두뇌올림픽’으로 한 국가의 기초과학 수준과 미래 과학기술 발전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국제과학올림피아드(수학, 물리, 화학, 정보, 생물, 천문, 지구과학, 중등과학 등 8개분야)에서 모두 14차례의 종합우승을 차지하며 과학기술강국의 위상을 높여오고 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한민족이 아무리 우수한 민족이라 해도 꿈과 비전을 가지고 신명나는 여건 속에서 마음껏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창의성을 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점수나 등수 위주의 기계적·획일적인 경쟁의 자리에 창의, 다양, 협력, 통섭, 융합 등이 대신하여야 할 것이다. 한 사람의 과학기술자가 유전(油田)보다 낫고, 빌 게이츠 같은 한 사람은 수십만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 창의적 인재 양성에는 왕도가 없다. 한걸음 한걸음 인내심을 가지고 기본에 충실할 때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다.
  • ‘광부화가들’은…30년대 英 ‘애싱턴 그룹’ 실화를 무대로

    ‘광부화가들’은 올 하반기 최대 기대작으로 꼽히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원작자 리 홀의 최신작이다. ‘빌리 엘리어트’가 광산촌 꼬마의 최고 발레리노 등극기라면, ‘광부화가들’은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활동한 영국 광부화가들의 모임 ‘애싱턴 그룹’ 실화를 연극으로 만든 것이다. 1934년 영국 북부 탄광촌인 애싱턴에 미술선생 라이언이 도착한다. 그러나 첫 수업부터 악전고투한다. 12~13살때부터 새벽 4~5시에 탄광에 나가 하루 10시간 넘게 구부리고 앉아 석탄을 캐야 했던 광부들이 그림을 알 리 없기 때문이다. 답답해진 라이언선생은 차라리 그림을 직접 그려 보자는 파격 제안을 하고, 광부들은 “그까짓것”하고 받아들인다. ‘노동’, ‘홍수’ 같은 일상적 주제로 그림을 그리면서 이들의 작업은 주목받고 전국적 유명인사가 된다. 미스 서덜랜드 같은 이가 개인적인 후원을 제안하기도 하지만, 이들은 공동작업을 하는 자신들만의 작업방식을 고집한다. 미술과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에 다다르는 올리버의 성장이 가장 눈부시고, 조금 모자란 듯 단순한 그림을 그려 되레 그림이 가장 잘 팔리는 지미와, 예술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모순을 폭로해야 한다는 스탈린주의자 해리의 익살이 눈길을 잡는다. 무대에 실버스크린 3대를 설치, 작품 전체를 슬라이드 형식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개별 그림에서 부분을 확대해 보여주는 등 그림 자체에 충실하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씨줄날줄] 김정일 고소공포증/박대출 논설위원

    2007년 7월 미 뉴욕타임스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한국처럼 첨단기술 좋아하는 나라에서 무속신앙 부활’ ‘한국인 160명당 1명이 무속인’ 대선을 앞두고 역술가를 찾는 정치풍토를 꼬집은 것이다. 역대 정치인 중 역술 신봉자를 꼽으면 황낙주 전 국회의장이 선두권이다. 그는 국회부의장 시절 의장 등극을 확신했다. 단골 역술가의 예언을 믿는다고 했다. 역대 대선 후보들의 관련 일화는 적지 않다. 1992년 옛 민자당 때 관훈동 당사를 여의도로 옮겼다. 김영삼 후보는 구 당사에 사진을 남겨놓았다. 풍수지리 전문가가 구 당사의 기를 받아야 한다고 주문한 것이다. 이명박 후보 때도 풍수·지리 전문가가 후보 거처를 둘러봤다. 지금의 한나라당 정병국 사무총장이 주선했다. 김대중·이회창 후보 때도 나름의 스토리들이 있다.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단골 보도가 또 등장했다. 유명 역술인 집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한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인도는 점술의 나라다. 점술은 인도인이 열광하는 세 가지 중 하나다. 결혼·취업부터 차를 사거나, 연인에게 고백할 때도 점을 본다. 나머지 둘은 영화와 크리켓 경기다. 1985년 11월19일 레이건과 고르바초프 간에 미·소 정상회담이 열렸다. 레이건 대통령 부인 낸시 여사의 단골 점성술사가 택일했다. 처칠, 드골, 스탈린, 히틀러도 점술을 선호했다는 기록이 있다. 미국 시사주간지 포린폴리시가 세계 지도자들의 독특한 집착증과 공포증을 소개했다. 점성술을 신봉하는 미얀마 독재자 탄 슈웨 얘기도 실렸다. 그는 양곤에서 전기와 수도조차 없는 네피도로 수도를 이전했다. 점성술사의 예언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지도자들은 주로 공포증과 관련돼 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이번 중국 방문 때도 열차를 이용한 배경이 보도됐다. 1976년 헬기 추락 사고로 생긴 비행 공포증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널리 알려진 얘기다. 카다피 리비아 지도자의 폐쇄공포증도 마찬가지다. 왕국을 호령하는 최고 독재자들에게 어째 어울리지 않는다. 메르켈 독일 총리가 개를 무서워하고,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말을 무서워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집착증은 기대는 심리고, 공포증은 도피하는 심리다. 상반되나 공통분모가 있다. 심리적 허약함을 채우고, 안정을 얻으려는 욕망이 그것이다. 과학적 근거 여부는 본질이 아니다. 일가(一家)를 이룬 인물들도 이렇듯 불완전한 존재다.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두려워한다. 범인(凡人)에겐 위안이 된다.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영화단신]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27일부터 새달 9일까지 서울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지난해에 이어 러시아 최대 영화스튜디오인 모스필름 회고전을 연다. 1953년 스탈린 사망 뒤의 해빙기를 대표하는 러시아 전쟁영화의 걸작 10편을 준비했다. 전쟁영화의 미학적인 정석을 보여주는 수작들이다. ‘컴 앤 씨’(1985) 등 6편은 ‘여성 타르코프스키’ 리사 셰피트코(1938~1979)와 그의 남편 엘렘 클리모프(1933~2003)를 기념하는 특별 섹션으로 상영된다. ●경기 파주출판단지에 위치한 멀티플렉스 씨너스 이채에서 일본 영화 정기무료상영회가 열린다. 1950년대 일본 영화 황금기 속에서 일본 고유의 영화 미학을 세계에 알린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게이샤’(1953)부터 야마자키 다카시 감독의 ‘올웨이즈 3번가의 석양’(2005)에 이르기까지 일본 영화 변천사를 살필 수 있는 12편이 준비됐다. 26일 상영을 시작으로 내년 3월까지 매달 첫 번째 월요일 오후 6시 한 편씩 소개된다. ●장철수 감독이 연출한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 제63회 칸국제영화제 비공식 부문인 비평가주간 장편경쟁부문에 초청됐다. 김기덕 감독의 조감독을 지낸 장 감독은 영화에서 작고 아름다운 섬 무도를 배경으로, 섬마을에 사는 7명이 살해되는 사건을 다룬다. 서영희가 점점 잔혹하게 변해가는 김복남 역을 맡았다. ●영화 전문주간지 씨네21이 창간 15주년 기념 ‘한국영화의 얼굴-CINE F.A.N 사진전’을 개최한다. 24일부터 새달 1일까지 서울 신사동 갤러리LF에서 열린다. 지난 15년 동안 ‘씨네21’이 국내 영화 제작현장 곳곳을 누비며 촬영한 사진 80여점과 배용준, 장동건, 이병헌, 김혜수, 고현정, 송승헌 등 배우들의 스튜디오 사진 50여점이 전시된다. 사진 판매 수익금은 시네마테크전용관, 독립영화전용관에 기부할 예정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합법적인 온라인 영화 유통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공공온라인유통망을 새달 3일 오픈한다. 영화 제작사, 배급사, 투자사 등 저작권자와 온라인 서비스 업체 사이에서 영화 매매를 중개하는 시장 역할을 하는 유통망이다. 영화 파일 재생 기간 등을 제한하는 디지털저작관리(DRM) 기술을 적용하는 등 불법 유통 방지 장치도 마련했다.
  • [씨줄날줄] 폴란드와 김광균/구본영 논설위원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하게 한다.” 최근 폴란드 카친스키 대통령 일행이 탄 비행기가 러시아에서 추락해 탑승자 전원이 횡사하는 대참사가 빚어진 후 불현듯 떠올린 시구다. 김광균 시인이 1940년에 쓴 ‘추일서정(秋日抒情)’의 첫머리다. 도룬(토룬)은 13세기 중반 프로이센의 정복과 복음 전도의 기지로 세워졌던, 폴란드의 고도다. 그 엄혹한 중세에 지동설을 처음 편 코페르니쿠스의 고향이다. 나라 잃은 가난한 청년이었던 김광균이 가봤을 리 없을 게다. 그때는 우리와 교류가 없었던 먼 나라였다. 여류화가 나혜석이 바르샤바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1933년 ‘삼천리’라는 잡지에 기고한 폴란드 인상기가 참고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도 시인은 도룬이 폴란드의 손꼽히는 중공업 도시임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포플라나무의 근골 사이로/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낸 채/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라는 구절을 보라. 물론 당시 주지주의와 이국정서를 바탕으로 한 모더니즘 사조가 유행하긴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놀라운 일이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도룬 시의 가을날의 페이소스를 이토록 성공적으로 형상화하다니! 아마 식민지 지식인이었던 시인이 강대국 사이에 끼여 오랜 역사적 질곡을 겪고 있었던 폴란드에 묘한 동류 의식을 느꼈을 법하다. 사실 폴란드는 우리와 일종의 ‘넛 크래커(Nut Cracker·호두까는 기구)’에 끼인 처지라는 역사적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우리가 중국과 일본에 번갈아 수난을 당했듯이 폴란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카친스키 대통령이 추모차 방문하려 했던 ‘카틴 숲’이 상징적이다. 독일과 비밀협정을 맺은 스탈린 정권의 구소련이 폴란드 엘리트 2만 1700여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곳이기에. 폴란드는 구소련이 무너진 후 동구권에서 시장경제체제로 연착륙에 성공한 나라로 꼽힌다. 얼마 전 미국의 미래예측가인 조지프 프리드먼의 책 ‘100년 후’를 읽었다. 저자는 21세기 중반 떠오를 3대 강국으로 일본, 터키와 함께 뜻밖에도 폴란드를 꼽았다. 폴란드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헤어나 선진강국으로,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을 이룰 것이란 예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운명은? 프리드먼의 전망이 일말의 위안이 되긴 한다. 일본과 중국 사이의, 통일된 한국도 2030년 이후 경제적 지위가 더 높아진다고 전망했기 때문이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폴란드 대통령기 추락] 러와 악연된 ‘카틴 숲 학살’은

    카틴 숲 학살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소련(현 러시아) 비밀경찰이 조제프 스탈린 소련공산당 총서기의 명령에 따라 폴란드 각계 인사 2만 2000여명을 러시아 서부 스몰렌스크 인근 카틴 숲에서 재판 없이 집단처형, 암매장한 사건이다. 1943년 독일군이 시신을 발견하면서 드러났지만 당시 소련은 독일군에 책임을 돌렸다. 1990년에야 비로소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개입을 인정했다.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 측은 공소시효가 지나 관련자 처벌은 불가능하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반면 폴란드는 반인륜 범죄로 규정, 공소시효 없이 주동자를 색출하겠다는 입장이다. 폴란드와 러시아의 악연은 깊다. 동유럽의 강국이었던 폴란드는 1795년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3국에 분할됐다. 1918년 독립했다가 1939년 서부는 독일에, 동부는 소련에 점령당했다. 2차 대전 이후 동구권이 붕괴될 때까지 폴란드는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러시아와 대립해 온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의 취임으로 양국 관계는 더 멀어졌다.2007년 12월 도날트 투스크 총리가 취임하면서 러시아와의 관계는 조금 호전됐지만 카친스키 대통령에 대한 러시아의 반감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결국 지난 7일 러시아 정부가 주최한 카틴 숲 학살추모식에는 투스크 총리만 초대됐고 카친스키 대통령은 사흘 후 비공식 방문하려다 변을 당했다. 이로써 양국간 비극의 역사를 상징하는 ‘카틴숲’은 이번 사고로 또 하나의 악연의 끈을 추가하게 됐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사진]폴란드 대통령 전용기 추락 사고 관련 사진 보기
  • [시론] 밴쿠버의 교훈과 세종시 출구전략/한희원 동국대 국가정보법 교수

    [시론] 밴쿠버의 교훈과 세종시 출구전략/한희원 동국대 국가정보법 교수

    온국민이 열광하는 밴쿠버 동계올림픽 1500m 쇼트 트랙 결승에서 금·은·동메달이 눈앞에 보이는 순간 우리 선수들끼리의 판단 잘못으로 올림픽 메달 2개가 달아났다. 최선을 다하는 스포츠맨십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부터, 매일 정치인들이 싸우는 것만을 본 당연한 귀결이라면서 차제에 정치인들이 반면교사의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많았다. 지난 여름방학에 전 세계에서 온 학생들이 참석한 하버드대학교 입학설명회의 스크린이 한국제품이고, 아이비리그와 MIT 등 유수한 대학의 입학담당자들의 손에 한국산 휴대전화가 들려 있는 것을 목격한 필자로서는 국가지도자들의 다툼 가운데 국가의 미래발전, 그리고 대외적 이미지는 어떻게 될지 참으로 걱정이 앞선다. 결론적으로 세종시 문제는 치열한 이성적 논의와 정치지도자의 진정한 결단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세종시 논쟁의 논리는 크게 4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그동안 잘 부각되지 않았지만 통일대비론이다. 두 번째는 국가안보론을 포함한 행정효율론이다. 세 번째는 지역균형발전론이다. 마지막으로 약속이행론이다. 통일대비론과 행정효율론이 우리의 현실에서 긴요하다면 행정부처 이전을 백지화한 세종시 수정론이 맞을 것이다. 수도권의 과밀화와 집중화를 염려하는 지역균형발전론과 약속이행론의 관점이라면 원안 고수의 입장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에 바탕을 둔 논쟁은 당연히 글로벌 국제사회의 변화무쌍함을 통찰하는 정치지도자의 혜안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 현실정치가의 모습을 주창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되돌아 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일국의 정치지도자는 재선만을 고민하는 정치인이나 정치를 업으로 하는 정치꾼과는 달라야 한다. 중국의 초석을 이룬 마오쩌둥, 작지만 커다란 오뚝이 덩샤오핑, 티베트의 당서기로 몰리며 변방으로 휘둘렸다가 다시 권좌에 오른 공대 출신의 후진타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대외적으로는 스탈린과 처칠을 간단히 휘어잡고 국내로는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며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4선 대통령이 되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모두 현실정치의 대가들로, 그들 정치지도자에게는 국제정치에서도 ‘약속은 국가이익을 위한 방책’일 뿐이었다.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은 2010년 다보스포럼에서 경제사학자인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가 한 주장을 곱씹어 보아야 한다. 퍼거슨 교수는 지난해 영국 더 타임스가 세계의 경영사상가 50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한 인물로 ‘차이메리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그는 “북한이 아주 갑작스럽게, 그리고 아주 빨리 10년 내에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다. 이미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기 한 달 전인 1989년 여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칼럼을 썼고, 실제로 한 달 뒤에 베를린장벽은 무너졌던 예지를 가졌던 인물이기도 하다. “중국이 더 이상 북한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때가 바로 북한이 갑작스럽게 붕괴하는 시점이 될 것”이며 “10년 후에도 한국이 여전히 분단된 상태로 남아 있다면 놀라운 일이 될 것”이라는 퍼거슨의 지적은 정치지도자들에게는 세종시 논쟁의 중심이 되어야 할 기준이다. 통일한국의 수도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미래예측과 급변하는 국제질서를 염두에 두고도 세종시에 대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는다면,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는 공동성명으로 현 단계에서의 논의 중단을 선언해야 한다. 새로운 변수로서 북한체제의 전개과정을 면밀히 살핀 후에 판단하기로 하는 국가의 미래과제로 보류하는 해법이 요구된다. 그것이 진정으로 국민을 편하게 하고 모두 승자가 되는 세종시 출구전략이 될 것이다.
  • [8일 TV 하이라이트]

    ●인간극장(KBS1 오전 7시50분)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 김진운씨부터 딸들을 눈빛으로 제압하는 부드러운 카리스마 어머니 김군숙씨. 그리고 개성만점 유쾌 발랄한 일곱 딸들. 모두 합해 여자만 아홉인 ‘소문난 칠 공주네’가 있다. 잘 키운 딸 일곱, 열 아들 부럽지 않다는 엄마와 특별한 자매애로 똘똘 뭉친 사랑스러운 그녀들을 만나 본다. ●꼬꼬마 꿈동산(KBS2 오후 4시10분) 꿈동산에서 놀던 퐁퐁 아이들은 나뭇가지 꼭대기까지 높이 올라갔다가 집에 갈 시간이 되자 한참을 내려와 집까지 날아간다. 오믈리부 친구들은 집안에서 누가 더 높이 있나 놀이를 한다. 세 명 모두 집 꼭대기까지 올라갔을 때 매카패카의 나팔 소리가 들리자 아래로 한참을 내려와서 매카패카를 만난다. ●희망특강 파랑새(MBC 오후 5시35분)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등 국제대회에 김치를 공급하며 김순자 김치의 우수성을 알리기 시작한 김순자 회장은 지금까지 무려 70여 가지 김치를 만들었고 그중에 21개의 김치 관련 국내외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김치 하나로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김치 명인 1호, 세계 김치협회 김순자 회장의 성공비결을 들어본다. ●제중원(SBS 오후 9시55분) 알렌과 함께 회진을 돌던 황정과 도양은 알렌이 환자 상태에 관한 질문을 하자 정확하게 답변한다. 알렌은 만삭의 환자가 내원하자 석란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유희서가 서양여의사를 마중 갔다는 소식을 들은 석란은 자행거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간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자행거를 탄 석란의 모습을 보고 신기해한다. ●다큐 아이(EBS 오후 8시) 복싱 세계챔피언을 꿈꾸는 문식이는 충남 예산의 한 작은 체육관에서 8명의 형들과 함께 합숙훈련을 하고 있다. 1995년 동양챔피언을 지냈던 박봉관 관장의 진두지휘 아래 아침부터 저녁까지 복싱 트레이닝을 받고 있는 문식. 진정한 복싱선수로 거듭나기 위한 꼬마 복서 문식이의 아름다운 도전 이야기를 만나 본다. ●하늘에서 본 지구2(OBS 오후 10시) 위기에 처한 세계 각지 강들의 실태와 강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들의 그 두 번째 이야기. 세계 각지에서는 농업이나 개발을 위해 인공적으로 강을 바꿔 놓아 내륙의 사막화가 이뤄지고 있다. 그중 스탈린의 명령으로 목화밭을 조성하고 강물을 끌어 내륙해가 사막으로 변한 아랄해를 소개한다.
  • 카자흐 세계역도선수권서 2위 고려인3세 감독 화제

    카자흐스탄 역도 대표팀의 알렉세이 니(48) 감독이 2009 세계역도선수권대회에서 화제다. ‘전주 이씨’가 본인의 성이라고 밝힌 니 감독이 이끄는 카자흐스탄의 줄피야 친샨로(16)는 지난 22일 여자 53kg급에서 용상과 합계에서 2관왕을 차지한 데 이어 25일 마이야 마네자(23)가 여자 63kg급에서도 용상과 합계에서 또다시 금메달을 따냈다. 이로써 카자흐스탄은 지금까지 금메달 4개, 동메달 1개 등 5개 메달을 획득하며 중국에 이어 종합순위 2위를 달리고 있다. 니 감독은 이날 경기가 모두 끝난 뒤 “금메달을 두 개 더 따서 너무 기분이 좋다.”며 “카자흐스탄 코치 네 명도 모두 고려인 출신”이라고 서툴지만 더듬더듬 한국말로 덧붙였다. 니 감독의 조부모는 1937년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에 정착한 예프레므 니와 다냐 박씨다. 1995년 한국을 처음 방문한 이후 그동안 20여 차례나 한국 땅을 밟았으며 부인도 고려인 출신으로 알려졌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광복~한국전쟁 희귀 북한사진 공개

    광복~한국전쟁 희귀 북한사진 공개

    광복 이후 한국전쟁 때까지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상 등을 촬영한 희귀 사진첩 3권이 공개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16일 이선근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정문연·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신)이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평양에서 입수한 사진첩 3권분량의 북한 사진 1062점을 공개했다. 이 사진첩은 당시 북한 문화선전성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 한 권의 표지에는 ‘8·15해방 4주년 기념 사진첩’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공개된 사진 대다수는 이미 미군이 보유한 자료이나, 일부 희귀 사진이 포함돼 있다. 사진마다 북측의 설명이 수록돼 있어 당시 상황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한 점이 눈에 띈다. 1948년 7월8일 북조선 인민회의 제5차 회의에서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의장이 당시까지 사용하던 태극기를 내리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기(인공기)를 올리는 사진, 1948년 5월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서 채택된 남북공동성명에 김규식 선생이 서명하는 장면 등은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진들이다. 또 김일성 주석의 젊은 시절 모습, 평양 시민이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을 들고 행진하는 장면 등도 포함돼 있다. 역사학자로 한국전쟁 당시 국군 정훈감이었던 이 전 원장은 1978년 정문연 초대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사진 자료들을 연구원에 기증했다. 그러나 남북 대립과 이념 갈등 등으로 공개되지 못하다 30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김정배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은 “그동안 북한 자료를 함부로 공개할 수 없었는데 국민 의식 수준의 향상에 맞춰 자료를 공개하기로 했다.”며 “위로는 김일성 주석부터 아래로는 일반 국민까지 해방공간의 면모가 담겨 있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김학준 전 한국정치학회 회장은 “북한의 문서와 사진 자료 등은 미군이 거의 다 수집해 간 걸로 알려졌는데 이번 자료는 우리 국군도 자료 수집에 손 놓고 있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라면서 “앞으로 미국 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자료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라고 말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책꽂이]

    ●역사 사용설명서(마거릿 맥밀런 지음, 권민 옮김, 공존 펴냄) 역사에서 정당성의 근거, 조언을 구하는 것이 적당할까. 조지 W 부시가 역사를 오용하고 악용하는 것에 ‘영감’을 얻어 책을 집필한 저자는 히틀러, 처칠, 마오쩌둥 등 위대하거나 악명높은 인물과 사건을 통해 인간이 역사를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파헤쳤다. 1만 5000원. ●슈퍼 글로벌 리더가 세상을 움직인다(이미숙 지음, 김영사 펴냄) 문화일보 워싱턴 특파원을 지낸 저자가 토머스 프리드먼, 빌 에모트, 라울 리베로, 기 소르망 등 세계 1%의 지성과 함께한 인터뷰를 엮은 책. 그들의 가치관, 세상을 보는 눈, 미래를 위한 전략 등을 생생하게 전한다. 1만 3000원.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유달승 지음, 한겨레 출판 펴냄) 외대 이란어과를 거쳐 테헤란 국립대학교에서 유학하며 한국인 1호 이란 유학생이었던 저자가 오늘날 국제 정치에서 절대 간과할 수 없고, 경제 교류에 있어서 대한민국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란을 이해하기 위해 그 핵심고리인 호메이니의 삶을 풀어낸다. 1만 3000원. ●개념어 총서 WHAT 시리즈 1~5(채운 등 지음, 그린비 펴냄) 재현, 권력, 공(空), 내재성, 주체 등 인문학의 개념들이 단순한 관념을 뛰어넘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어떻게 구체적으로 사용되고 작동하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린비가 앞으로 계속 출간할 이 시리즈는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가이드가 될 것으로 보인다. 6900~7900원. ●명가의 탄생(홍순도 지음, 서교출판사 펴냄) 미국 록펠러 가문, 일본 최고 기업가인 마쓰시다 가문, 존경받는 부자가 되라고 가르쳤던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 문화재 보존을 위해 전 재산을 쏟아부은 간송 전형필 선생 가문 등 인류사회에 기여도가 큰 위인 23명과 그 집안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다뤘다. 1만 2500원. ●코민테른(케빈 맥더모트·제레미 애그뉴 지음, 황동하 옮김, 서해문집 펴냄) 1919년부터 1943년까지 레닌과 스탈린 시기, 볼셰비키화와 민주주의, 인민전선 등 코민테른에 대한 역사를 에릭 홉스봄을 비롯한 저명한 학자들의 주장과 코민테른 현장의 목소리로 조명하고 있다. 1만 8000원.
  • [부고] 러 물리학자 긴즈부르크 박사

    200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옛 소련의 수소폭탄 개발에도 참여했던 러시아 물리학자 비탈리 긴즈부르크 박사가 8일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AFP가 보도했다. 93세.긴즈부르크는 양자역학 분야에서 초전도와 초유동 현상 연구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상을 공동수상했다. 소련의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와 함께 1940년대 스탈린 치하에서 수소폭탄 개발에 참여했던 그는 1951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중에 프로젝트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그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PN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확 달라진’ 부산국제영화제, 그 신선한 변화

    ‘확 달라진’ 부산국제영화제, 그 신선한 변화

    오는 8일 열리는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역대 최대 규모인 만큼 그 화려한 면면이 속속 드러나며 영화 팬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특히 지난 열 세 번의 영화제와 달리 ‘권위 있는 행사’라는 족쇄를 풀고 진정한 ‘축제’로 거듭나고 있다.이러한 변화는 장진 감독의 ‘굿모닝 프레지던트’가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만 봐도 쉽게 감지된다.‘굿모닝 프레지던트’는 ‘오아시스’(1999), ‘흑수선’(2001), ‘해안선’(2002), ‘가을로’(2006)에 이은 역대 다섯 번째 한국영화 개막작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휴먼 코미디 영화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그 외 개막작들인 ‘비밀과 거짓말’(1996), ‘차이니즈 박스’(1997), ‘고요’(1998), ‘더 레슬러즈’(2000), ‘도플갱어’(2003), ‘2046’(2004), ‘쓰리타임즈’(2005), ‘집결호’(2007), ‘스탈린의 선물’(2008)들 역시 모두 무겁고 진지한 영화였다.그동안 영화제로서의 위상과 권위를 앞세워 온 부산국제영화제로서는 이번 ‘굿모닝 프레지던트’의 개막작 선정이 상당히 신선한 변화인 셈이다.개막작은 영화제의 시작을 알리는 첫 상영작인 만큼 축제 분위기에 어울리는 ‘멋지고 재미있는’ 작품이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올해 초 칸 영화제가 에니메이션 ‘업’을 개막작으로 선정,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낸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또한 모름지기 영화제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스타 배우들의 등장이다. 이러한 점에서 장동건이라는 걸출한 스타는 축제의 첫 축포와 잘 어울린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의 이병헌, 조쉬하트넷, 기무라 타쿠야, 트란 누 엔케와 ‘호우시절’의 정우성, 그 밖에 하정우, 차태현, 장혁, 성유리, 이선균, 조재현, 영국 배우 틸다 스윈튼 등 수 많은 국내외 스타들이 부산영화제를 빛낼 예정이다.올해부터 ‘Let’s G0 PIFF’로 이름을 바꾼 공식 전야제 또한 풍성한 내용을 자랑한다.홍콩 영화감독 서극을 비롯해 이탈리아 감독인 파올로타비아니, 프랑스 여배우 안나카리나 등 3명의 핸드프린팅이 일반에 공개되고 백지영, 크라잉넛, 스윗소로우, 45RPM, DJ조 등 인기가수들의 공연이 크게 늘었다는 점도 고무적이다.8일 저녁 7시 부산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열리는 개막식은 SBS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며 레드카펫을 밟는 배우들의 모습과 실황 인터뷰까지 진행될 예정이다.사진 =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굿모닝프레지던트’ 포스터.서울신문NTN 조우영 기자 gilmong@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열린세상] 욱일승천하는 중국과 우리의 미래/오영호 무역협회 상근 부회장

    [열린세상] 욱일승천하는 중국과 우리의 미래/오영호 무역협회 상근 부회장

    1972년 2월21일 아침. 마오쩌둥 중국 국가 주석은 아픈 몸을 이끌고 몇 달 만에 면도와 이발을 했다. 젓가락질을 연습하며 태평양을 건너오는 닉슨 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냉전시대의 가장 중요한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당시 중국은 사면초가에 몰려 있었다. 1953년 스탈린 격하운동을 주도한 흐루시초프 체제가 등장한 이래 소련과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고 1968년에는 우수리 강에서 무력충돌까지 일어났다. 1958년 야심차게 출발한 ‘대약진운동’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주적이 소련으로 바뀌면서 미국과의 제휴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됐고 결국 두 나라는 정상 간의 첫 만남이 있은 지 7년 만인 1979년 1월 공식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러 오바마 정부 출범 원년인 올 7월 워싱턴에서 미·중 전략·경제대화가 개최됐다. 양국은 경제·외교·안보·환경 등 전 세계적 이슈에서 포괄적이고 긴밀한 협력에 합의해 ‘G2’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차이메리카’ 시대의 도래는 양국 수교 당시 구매력 기준 세계경제 비중에서 미국의 21.8%에 비해 5%에 불과하던 중국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음을 뜻한다. 2015년이 되면 중국의 경제비중은 미국의 17.4%와 비슷한 17.3%로 예상되고 있다. 더욱이 중국은 2조달러 이상의 외환과 8015억 달러의 미국 국채를 보유하면서 미국경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양국의 경제적 위상에 생긴 변화는 전략·경제대화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세계 소비시장이 되어 달라는 미국의 요청에 중국은 내수확대 방침을 밝혔다. 미국은 G20 회의와 국제통화기금(IMF) 등에서 중국의 활동을 적극 지원키로 했다. 미국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세웠던 위안화 환율 문제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 정부의 이런 유연한 태도는 미국 기업들에서도 똑같이 감지됐다. 얼마 전 제너럴일렉트릭(GE)이 각국의 유망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미국으로 초청해 개최한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제프리 이멜트 GE 회장은 40분간 행해진 기조연설의 절반 이상을 중국에 할애하는 등 유독 ‘중국’을 강조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GE가 생각하는 세계화는 전 세계를 상대로 단지 물건을 팔아 이익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수요자를 찾아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가장 큰 시장으로 중국을 지목하고 수처리 설비, 의료기기 등 중국이 최우선적으로 필요로 하는 품목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세계 최강대국을 이끄는 오바마 정부와 세계 최고의 기업 GE가 보는 지금의 중국은 분명하다. 세계적으로 성장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국가이고, 주변국과의 연대로 경제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중국은 타이완과 경제협력기본협정(ECFA) 등을 통해 ‘차이완 경제’의 개막을 앞당기려는 노력을 배가하고 있다. 내년에 출범할 중·아세안 자유무역지대는 19억명의 인구와 국내총생산(GDP) 6조달러의 경제력을 포괄하는 방대한 규모로 상품의 90% 이상이 무관세로 교역된다. 한국·일본과 밀접한 교역관계를 맺으면서 3국간 거래규모가 나날이 커져가고 있다. 산업혁명 이전, 세계 최고를 자부하던 중국은 근대세계의 열망과 요구를 외면한 대가로 대륙을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으로 내주어야 했다. 그러나 1816년 중국을 ‘잠자는 사자’에 비유해 “일단 깨어나면 세계가 진동하리라.”던 나폴레옹의 예언을 입증이라도 하듯 지금 중국은 개혁·개방을 앞세워 포효를 시작했고 질주를 거듭하는 중이다.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를 보이고 있는 중국경제와 그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는 우리의 입장 또한 명확하다. 중국을 바로 보는 시대적 안목을 갖고 미래한국을 결정지을 국가전략을 설계하는 일이다. 그 뒤에는 중국이라는 ‘사자’의 등에 올라타는 일만 남았다. 오영호 무역협회 상근 부회장
  • 2차 세계대전 6년 참상 재조명

    2차 세계대전 6년 참상 재조명

    1939년 9월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전쟁으로 꼽히는 제2차 세계대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NGC)은 2차 세계대전 70주년을 맞아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영상을 담은 6부작 다큐멘터리 ‘2차 세계대전’을 방영한다. 4일부터 6주 동안(10월2일은 추석 기간으로 제외) 매주 금요일 밤 12시 방송된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는 순간에서부터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기까지 약 6년에 이르는 시간을 담았다. 카틴 학살로 알려진 폴란드 장교 대학살, 독일군에 밀려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에서 후퇴하는 영국군, 포로로 잡은 프랑스군에 대한 나치의 비인간적인 대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희생당한 소련군, 나치에게서 달아나는 1000여명의 프랑스 민간인, 지하철에서 안타까운 이별을 하는 군인 가족, 폭격을 피해 지하철로 숨은 영국 민간인들의 모습 등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히틀러가 자신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한 마을을 방문했을 당시 그의 애인이었던 에바 브라운이 직접 촬영한 히틀러의 모습도 흥미롭다. 이번 다큐멘터리는 그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영상이 대거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끈다. 제작진은 지난 2007년 초부터 전 세계 17개국에서 약 600시간에 달하는 미공개 전쟁 영상을 수집했다. 전쟁 당시 공포 속에서도 기록을 남겼던 민간인의 홈비디오가 많다. 제작진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프랑스 필름보관소, 러시아 필름보관소, 일본 NHK 등에서 최근 기밀해제돼 햇빛을 보게 된 영상들도 발견했다. 수집된 흑백의 아날로그 영상들은 전쟁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역사학자들의 확인 과정을 거쳐 디지털 컬러 영상으로 복원됐다. 군복, 비행기, 탱크, 자동차, 건물 등이 전쟁 당시 색상으로 생생함을 더한다. 홀로코스트 등 너무나 잔혹한 장면은 흑백으로 남겨놨다. 올해 5월 편집을 마무리했으니 제작 기간이 약 2년 반 정도 걸린 셈. 1분 정도의 영상을 컬러로 복원하는 데 하루가 소요됐다고 한다. 루이스 보드빌 프로듀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전쟁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면서 “그동안 많은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국가주의적인 입장에서 이 전쟁을 다뤘지만 우리는 세계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고 말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스탈린이 유럽 살려” 러 역사왜곡 심화

    “전쟁? 스탈린은 아무 상관없어!”1일 제2차 세계대전 발발 70주년을 앞두고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소련의 전쟁책임론을 부인하고 나서 유럽이 격분하고 있다.논의의 핵심은 누가 진짜 전쟁을 시작했느냐는 것이다. 지난 7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는 히틀러와 스탈린 둘 다 개전의 책임이 있다며 이들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러시아는 폴란드를 지목했다.독일과 소련은 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9년 8월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으면서 양국이 동유럽을 분할 점령한다는 비밀의정서를 교환해 전쟁을 촉발시켰다.그러나 크렘린은 이제 와서 “소련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지난 30일 국영 로시야TV와의 인터뷰에서 스탈린 책임론에 대해 “새빨간 거짓말”이라며 “유럽을 살린 건 스탈린이었다.”고 반박했다. 메드베데프는 또 “외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해 3국과 우크라이나가 전체주의를 미화하고 유럽 해방을 이룬 러시아의 주도적 역할을 덮는 등 역사를 왜곡했다.”고 비난했다. 이들이 나치를 국가적 영웅으로 규정했으며, 서유럽은 관계악화 우려 때문에 동유럽의 이런 ‘괘씸한 수정주의’를 수용하고 있다는 주장이다.문제는 이 발언이 1일 폴란드 항구도시 그단스크에서 열릴 2차 세계대전 발발 70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터져나왔다는 것이다. 이 회동에는 러시아, 독일, 폴란드,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정상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러시아는 이 자리에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를 보냈다. 그러나 메드베데프의 ‘도발’로 오랜 갈등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고 영국 가디언이 지적했다.이 회동을 위협하는 건 사실상 과거나 역사가 아니라 ‘현재’라고 신문은 꼬집었다. 러시아는 지금도 옛 소련 국가들에 대한 과거의 영향력을 회복, 특권을 누리려 한다. 크렘린은 또 ‘역사 바로잡기’라는 명목 아래 과거사 미화 노력도 꾸준히 펴왔다.“2차 세계대전의 승리는 소련의 위업”, “나치주의를 무너뜨리고 세계의 운명을 결정한 건 우리”라고 주장해온 메드베데프는 지난 5월 “러시아의 국익을 해치는 역사 왜곡에 대응하겠다.”며 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역사학자들이 아닌 연방보안국(FSB) 멤버들이 장악한 이 위원회는 전쟁 당시 러시아의 ‘영웅적 희생’을 가르치는 데 역점을 둔다. 또 러시아의 통치를 받는 40여개 민족을 상대로 소련식 국가통합을 꾀하려 한다. 뉴스위크는 위대한 새 러시아의 건설을 꿈꾸는 푸틴과 메드베데프에겐 흠 없는 ‘위대한 역사’가 필수조건이라고 꼬집었다.이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별 감흥도 없다는 반응이다. 러시아의 역사학자이자 야당 지도자였던 블라디미르 리즈코프는 “매우 멍청한 논쟁”이라며 “크렘린은 자신들의 독재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스탈린 정부를 옹호하고 복권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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