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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육사 출신으로 조국 독립 위해 헌신한 ‘전설적인 항일 영웅’

    日 육사 출신으로 조국 독립 위해 헌신한 ‘전설적인 항일 영웅’

    김경천은 김좌진, 홍범도를 뛰어넘는 전설적인 항일 영웅이다. 백마를 타고 일본군을 무찔렀고 ‘진짜 김일성 장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나경석은 “조선의 유지 청년이 노령에 수천수만이 출입하였으나 김 장군같이 위대한 공적을 성취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김경천은 백범일지에 버금가는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라는 친필 수기를 남겼다. 늦게서야 발견된 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시영이 보고 싶다. 신동천이 보고 싶다. 신용걸이 보고 싶다. 안무가 보고 싶다.…” 독립군 전우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다.김경천은 1888년 6월 5일 함남 북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정우는 구한말 군기창장 등으로 일한 고위인사였다. 1900년 10월 김경천 가족은 서울 사직동으로 이사했고 김경천은 1904년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그의 진로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서점 주인이 건네준 책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다.1905년 9월 김경천은 도쿄 육군유년학교 예과 학년에 입학했다. 650명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예과를 마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23기생으로 들어가 1911년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육사 재학 중에 나라는 일본으로 넘어갔고 김경천은 엄청난 심적 갈등을 겪었다. 김경천은 그래도 실력 양성을 위해 기병학교까지 마친 뒤 1919년 2월 귀국했다. 2·8 독립선언이 선포되던 때였다. 귀국하자마자 3·1운동이 일어났고 시위 현장을 보면서 김경천은 피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자동차에 우리 청년 4~5명이 실려 있다. 모두 죄수복을 입었다. 그 근방에 나이가 40가량 되는 부인이… 그 뚫어지고 더러워진 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통곡하는 것이 보인다. 아, 나도 가슴이 막히면서 두 눈에 눈물이 흐른다.”●함남 북청서 태어나 서울 사직동 이주 김경천은 더는 일본 군인으로 살 수 없었다. 일본 육사 후배 이응준, 지대형(지청천)과 함께 서간도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응준은 중간에서 길을 달리했다. 김경천은 1919년 6월 6일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수원으로 내려가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간 뒤 압록강을 건넜다. 일본 육사 출신 군인이 망명하자 일제는 충격에 빠져 현상금 5만엔을 내걸었다. 부인 유정화를 체포해 고문했지만 부인은 남편의 행방을 발설하지 않았다. 김경천은 일단 중국 안동에서 활동하던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했다. 그러나 활동이 어려워지자 하루 20㎞ 넘게 보름 동안 걸어 봉천성 유하현 신흥무관학교에 도착, 교관으로 일했다. 그곳에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인 신팔균도 있었다. 경천(擎天) 김광서, 동천(東天) 신팔균, 청천(靑天) 지석규 세 사람은 남만주 삼천(三天)이라 불렸다. 1919년 9월 중순 김경천은 길림 서간도 군정서에서 무기구입 위원으로 선정돼 연해주로 출발, 이듬해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달 12일 소비에트 적군과 한인 빨치산부대가 아무르강 하구 니콜라옙스크의 일본군을 전멸시킨 전투가 있었다. 일본 시베리아 주둔군은 보복으로 4월 4일 연해주 신한촌을 공격, 한국인 빨치산과 민간인 5000여명을 학살한 ‘4월 참변’을 일으켰다. 독립운동가 최재형도 이때 살해됐다. 김경천은 간신히 피신했다가 한인 빨치산 근거지인 내수청 대우지미로 이동했다. 당시 간도나 연해주에는 중국 마적이 날뛰었다. 마적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민가를 습격해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납치했다. 일제는 마적단에 무기를 대주고 한인들을 괴롭히도록 했다. 김경천은 마적을 일본군과 동일시하고 대우지미에서 마적토벌대를 만들어 토벌에 나섰다. 4월 8일 마적 380여명이 침입하자 김경천의 토벌대 45명은 소비에트 적군 600명과 연합해 360여명을 몰살시켰다. 이어 창해청년단을 조직, 총지휘관을 맡아 1920년 5월 다우지미 전투에서 마적 300여명 중 60명만 살려 보냈다. 1921년 1월 김경천은 블라디보스토크 임시정부 격인 대한국민의회에 참석하라는 공문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김경천은 “독립을 하자는데 너무도 희생이 없다. 너무도 정치에만 눈이 팔리고 실천력이 적다. 너무도 자칭 영웅이 많다. 너무도 당파가 많다”고 한탄했다. 군인인 그에게는 오직 무장투쟁만이 독립의 길이었고 자리다툼만 하는 임정은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921년 4월 트레치푸진에서 혈성단 강국모의 요청으로 한인 빨치산부대 사령관이 됐다. 더불어 ‘수청의병대’를 조직했다. 각지에서 모인 한인 빨치산 병력이 800여명이었고 소총과 군마로 무장했다. 김경천은 트레치푸진에 설립된 사관학교 교장도 맡아 사관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시베리아 내전서 가장 위대한 ‘이만 전투’ 그해 8월 수청의병대는 연해주에 있는 러시아 적군(赤軍·혁명군)과 연합했다. 일본군은 러시아 백군(白軍·반혁명군)과 연합해 의병대와 적군을 공격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혁명 이후 극동 지역이 혼돈에 빠지자 시베리아를 차지할 기회라고 판단해 17만여 병력을 배치했다. 1921년 11월 수청의병대와 적군은 일본군과 백군에 포위돼 퇴각했고 카르톤 마을에서 적군 대대장이 항복하고 말았다. 이듬해 1월 김경천은 적군 패잔병과 의병대의 혼성 부대를 이끌고 이만(달레네친스크) 지역의 백군을 공격했다. 200여명의 혼성부대는 700여명의 백군과 6시간 동안 전투를 벌인 끝에 이만을 정복했다. 이 전투는 시베리아 내전에서 가장 위대한 전투라는 극찬을 받는다. 김경천은 그때의 상황에 대해 “(군사들이 지나가는) 발자국마다 피가 고이었다”고 썼다. 1922년 여름 이후 김경천은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러시아 육사에서 교관을 초청해 급여를 주며 교육시켰다. 김경천의 목표는 조국의 독립이었다. 러시아 땅에서 독립운동을 펼쳤기에 러시아인들과 협력했고 적군의 도움을 받아 한반도로 진공하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패퇴를 거듭하던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러시아는 빨치산부대도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김경천에게는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김경천은 이후 1932년부터는 하바롭스크 합동국가보안국 통역으로 일했고 블라디보스토크 고려사범대에서 군사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1935년 무렵 스탈린의 강압정치가 한인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김경천은 간첩죄로 체포돼 1936년 9월 3년형을 받았다. 1939년 2월 일단 석방됐다. 그 사이 가족은 카자흐스탄 카라간다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재회도 잠시 그해 12월 간첩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김경천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런 점이 이유가 됐을 것이다.●광복 못 보고 유배지서 심장질환 사망 김경천은 2년 동안 철도 건설 노역에 동원됐다가 1942년 1월 2일 소련의 북동쪽 끝 코미자치공화국으로 유배돼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스탈린이 죽은 뒤 김경천은 무죄 선고를 받았고 사후 복권됐다. 김경천은 수용소 근처에 집단으로 묻혀 별도의 묘소가 없다. 김경천은 2남 4녀를 두었다. 아내와 자식들은 밀항선을 타고 연해주로 가 같이 살았지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강제 이주는 더욱더 큰 고난을 주었다. 가족들은 국영농장에서 힘든 노동에 동원됐고 인민의 적으로 박해를 받았다. 후손들은 현재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1998년 정부는 김경천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막내아들 김기범(1932년생)씨와 막내딸 김지희(1928년생)씨는 정부의 초청으로 아버지 사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2015년 8월 정부는 모스크바에 사는 의학박사인 김경천의 손녀 옐레나 필랸스카야 등 후손 7명의 특별귀화를 허가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소련은 하루에 무너지지 않았다

    소련은 하루에 무너지지 않았다

    1991/마이클 돕스 지음/허승철 옮김/모던아카이브/672쪽/3만 5000원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본인은 독립국가연합 창설에 관한 정국상황에 따라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 대통령으로서의 활동을 마칩니다.”●1980년 티토 사망부터 1991년 소련 해체까지 재해석 1991년 12월 25일 오후 7시 정각,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2억 8000만 소련인들에게 했던 소련 해체 공식 선언. 볼셰비키 세력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을 습격한 지 74년 만에 공산주의 종주국이 지구상에서 사라졌다.워싱턴포스트 모스크바 지국장 출신 언론인 마이클 돕스는 ‘1991’을 통해 진부한 테마일 수 있는 ‘공산주의의 종언’을 색다르게 파고든다. 소련 해체의 시작과 과정, 종말을 12년에 걸쳐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로 재해석한 역작. 옮긴이의 말대로 ‘소련 붕괴’라는 한 주제를 놓고 수십 대의 카메라가 균열이 벌어진 곳을 찾아가 생생하게 중계하듯이 생동감 있게 풀어나간다. 그동안 소련 붕괴의 신호탄은 여러 각도에서 분석돼왔다. 1986년 소련 체제의 기술적 무능력을 노출한 체르노빌 원전 사고, 1985년 고르바초프의 소련 공산당 서기장 취임, 1953년 스탈린 사망…. 이 책의 특징은 소련의 내부적 요인보다는 동유럽 공산정권의 균열과 동요, 아프간 침공 같은 과도한 팽창이 소련 붕괴의 직접적 원인이었음을 지목하고 풀어낸 점이다. 저자는 반볼셰비키 혁명, 다시 말하면 소련 해체의 시작 지점을 1980년 5월 유고슬라비아 국부, 티토의 사망으로 잡는다. 티토의 사망 말고도 소련 몰락을 설명하는 역사적 사건들은 책에 숱하다. 레닌조선소 파업에 따른 계엄령, 대한항공 007편 격추, 미소 정상회담,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 보리스 옐친 정치국 축출, 조지아 트빌리시 대학살, 베를린 장벽 붕괴, 8월 쿠데타….●“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를 해체한 공산주의자” 책의 특장은 소련 붕괴와 관련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맛깔스럽게 버무려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현장의 ‘살아 있는’ 스토리텔링이다. 독재자 브레즈네프의 위상과 관련해선 “집권 16년 차에 들어서면서 신격화된 존재인 동시에 국가적 광대가 되었다”며 “우상화가 지나친 나머지 비웃음을 살 정도에 이르렀다”고 꼬집는다. 폴란드 노조 지도자인 레흐 바웬사와의 만남 대목도 흥미롭다. 왜 기자들을 피하는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기자를 만나주느냐는 질문에 바웬사는 “사람들에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답을 했다고 전한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상황도 눈길을 끈다. “미사일이 두 비행기 사이의 거리인 약 8㎞를 날아가는 데 대략 30초가 걸렸다. 소련 전투기 조종사 오시포비치가 오른쪽으로 벗어나는 동안 적기가 바다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스포비치가 흥분된 목소리로 보고했다. ‘목표 파괴됨’” 그런가 하면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대해 저자는 “공산주의를 해체한 공산주의자, 혁명을 시작했지만 결국 자신이 착수한 혁명의 희생자”라 평가한다. 그렇다면 소련 해체에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공산주의가 사라지게 한 공에 있어서 어떤 사건이나 인물도 결정적이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공산주의는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에 패배한 게 아니라 결국 자멸했다는 주장이다. ●“공산주의 유령 여전… 현대사회와 통합이 가장 큰 도전” 많은 전문가들은 20세기 내내 긴 그림자를 드리우다가 실패한 공산주의가 다음 세기까지 파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핵 전쟁의 위협이며 환경 재앙, 대규모 전쟁, 마피아 국가의 부상처럼 인류의 미래를 위협할 ‘재앙 시나리오’의 상당수가 과거 공산 세계에서 비롯됐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빅브라더가 죽었을지라도,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앞으로 수십년 동안 우리 앞에 출몰할 것”이라 전망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포스트공산주의 사회를 현대세계와 통합하는 일은 오늘날 국제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일 것이다. 이런 난제를 풀기 위해 우선 어떻게 그런 문제가 시작되었는지 이해해야 한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사실상 ‘종신 대통령’ 길 연 푸틴 “대선 재출마 허용 개헌안 지지”

    사실상 ‘종신 대통령’ 길 연 푸틴 “대선 재출마 허용 개헌안 지지”

    ‘30년 철권’ 스탈린보다 2년 더 집권 WSJ “시진핑·에르도안과 독재 반열”블라디미르 푸틴(67) 러시아 대통령이 2024년 끝나는 4기 집권 뒤에도 다시 대통령에 입후보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개헌안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러시아 하원 심의를 마친 개헌안이 국민투표를 통과하면 그는 83세가 되는 2036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다. 사실상 ‘종신 집권’이다. 11일(현지시간) 타스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국가두마(하원)는 이러한 내용의 개헌안을 찬성 383표, 기권 43표, 반대 0표로 채택했다. 전날 푸틴 대통령은 하원 개헌안 심의에서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하원 의원이 내놓은 제안 가운데 하나는 현직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시민의 (입후보) 제한을 없애는 것”이라면서 “원칙적으로 그런 방안은 가능하다”고 말했다. 세계 첫 여성 우주인 출신이자 집권당인 ‘통합러시아당’ 소속인 테레시코바는 이날 심의에서 “‘대통령 임기 2회 제한’ 조항이 이미 대통령직을 역임했거나 지금 대통령직에 있는 사람의 출마를 막아서는 안 된다”면서 “현직 대통령도 다른 후보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입후보할 수 있게 허용하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되면 푸틴은 2024년 대권에 다시 도전해 6년 임기의 대통령직을 두 번 역임할 수 있다. 4년 임기로 재임(2000~2008)하고 또 한 번 6년 임기로 재임(2012~2024)하고도 12년을 추가하게 된다. ‘30년 철권통치’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을 능가하는 32년 집권이 가능해진다. 뉴욕타임스는 43년간 재위한 ‘차르’ 표트르 대제보다는 짧다고 꼬집었다. 푸틴이 대통령 임기 제한을 사실상 철폐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처럼 독재자의 대열에 합류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했다. 싱크탱크인 카네기 모스크바 센터의 드미트리 트레닌 센터장은 “러시아의 민주주의는 푸틴이 무대에서 퇴장한 뒤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개헌안은 다음달 22일 국민투표에 부쳐진다. 야권은 개헌안 국민투표 전날인 21일 모스크바에서 푸틴의 2024년 대선 출마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 유해, 이르면 이달 말 대전 현충원 안장

    ‘봉오동 전투’ 홍범도 장군 유해, 이르면 이달 말 대전 현충원 안장

    문재인 대통령은 1일 독립운동가 홍범도(1868~1943) 장군 유해 봉환 계획을 밝혔다. 정부는 이르면 이달 말 공군 수송기 편으로 유해를 봉환한 뒤 대전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안을 검토 중이다. 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위대한 독립군 대장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드디어 모셔올 수 있게 됐다”며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하며 카자흐스탄 대통령 방한과 함께 유해를 봉환해 안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서울현충원은 공간이 더는 없어 대전 국립현충원을 검토하고 있다”면서 “빠르면 이달 말이거나 혹은 더 늦춰질 수 있다”고 말했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해 4월 카자흐스탄 방문 당시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에게 “유해를 봉환하고 싶다”고 밝혔고, 토카예프 대통령은 “내년까지 해결할 수 있도록 직접 챙기겠다”고 답했다. 홍 장군은 사회주의 운동에 매진한 독립운동가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을 지내면서 간도와 극동 러시아에서 일본군과 맞섰다. 특히 ‘독립군 3대 대첩’으로 꼽히는 봉오동 전투의 주역이다. 1937년 스탈린 정권의 강제이주정책으로 터전을 옮긴 뒤 고려극장 경비 생활로 생계를 이을 만큼 힘든 말년을 보냈다. 그간 카자흐스탄 정부나 동포 사회는 남북 사이에서 유해 봉환을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장군이 동포 사회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고, 직계 후손들은 세상을 떠난 점도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앞서 김영삼 정부도 1995년 유해 봉환을 추진했지만, 북한은 장군이 평양 태생이고 러시아 공산당에 가입한 이력 등을 내세우며 연고를 주장해 무산됐다.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는 “이번에는 북한이 이렇다 할 반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서 “청산리·봉오동 전투 100주년이 되는 만큼 송환 의미가 더욱 크다”고 말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글로벌 In&Out] 북한 수상보안대와 건국사 연구 동향/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북한 수상보안대와 건국사 연구 동향/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북한 정권 수립의 역사는 북한 건국 때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연구자의 주목을 받아 왔으며, 북한 건국 과정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의견을 담은 연구 성과가 발표돼 왔다. 이 해석을 간단하게 정리해 요약하자면 소위 ‘전통주의’ 세력과 ‘수정주의’ 세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물론 그 세력도 동질하지 않고 연구자 사이의 의견 차이가 존재하지만, 그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정통주의’적 학자들은 북한을 소련의 꼭두각시로 보고 ‘북괴’(北傀)라는 용어를 쓴다. 그들은 소련이 북한에 들어오는 순간 적화(赤化) 정책을 펴기 시작하면서 김일성을 지도자로 임명하고 공산주의적인 북한을 건설해 나갔다고 주장한다. 최근에 나온 하나의 연구에는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9월 20일에 소비에트 질서를 도입하지 말 것을 명령한 스탈린이 “또 하나의 명령을 내렸고, 이 명령에서 소비에트화 정책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승인했다는 것”으로 설명하는 경우까지 발견된다. 이러한 가설을 내세우는 것을 역사가가 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은 의문이다. 반면 ‘수정주의’적 학자들은 북한의 토착성을 지적하면서 북한 정부 수립을 소련의 개입보다 북한 엘리트들의 권력 투쟁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일부에서 ‘북조선 혁명’이라는 용어도 등장한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1945년 9월부터 1948년의 철군까지 북한 내정의 관리는 소련군 수중에 있었고, 토착 세력들은 오직 그가 허락하는 범위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북한 연구는 이 두 가지의 견해를 분석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방법으로 그 학파적 한계를 넘어서 보다 훨씬 더 복잡한 실상을 밝혀내고자 한다. 지난 2개월 동안 발표한 글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지만, 한 가지 예를 더 들어 보겠다. 1946년 4월 소련군이 북한의 보안국 부서 체계를 개편하면서 남한에서 바다로 들어오는 밀수품과 극우 테러 분자들의 밀입북을 막기 위해 ‘수상보안대’를 조직할 것을 결정했다. 1946년 6월과 7월에는 북한의 수상보안대가 동해수상경비대와 서해수상경비대로 분리됐으나 임무 수행을 위해 필요한 소련군의 지원을 오랫동안 받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큰 문제로는 선박의 부족이었다.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할 때 북한 해안 도시에 있었던 거의 모든 선박은 남한으로 옮겨졌거나 파괴된 상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상보안대 조직 직후 북한인들이 침몰된 일본 선박 및 쾌속정을 해저에서 인양하는 목적으로 주식회사를 설립했고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소련군 스메르시 요원들이 이에 대해 알게 되자 1946년 6월 3일 출동해서 자금과 설비를 몰수함으로써 그 회사를 폐업하게 했다. 당연히 북한 측은 소련군의 행위에 대해 항의를 표시했다. 1946년 10월 20일 김일성은 소련군 참모부에 항의서를 보내 몰수된 물품들을 돌려주고 작업을 계속할 것을 허가할 것을 요구했다. 소련의 답변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1946년 7월 1일 진행된 제2회 각도 보안부장회의에서 보안국 대표는 동서 해안 수상보안대 배치 계획을 실시 중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은 1947년 4월 15일 제25군 사령관 코로트코프 중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상보안대가 자기 기능을 수행할 수 없으며, 그 대신에 일반 보안대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소련군의 지원을 다시 요청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적어도 1946년 말까지 소련은 북한에서 독립국가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 조치의 목적은 ‘북한군의 모체’라고 불리는 철도보안대의 창설, 그리고 만주 국경 경비대의 조직과 같이 북한 점령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한정됐다. 문제 해결 외에 부합하지 않는 북한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 ‘스탈린그라드’ 빌스마이어 감독 별세

    ‘스탈린그라드’ 빌스마이어 감독 별세

    영화 ‘스탈린그라드’의 감독 요제프 빌스마이어 감독이 12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 81세. 현지 언론에 따르면 빌스마이어 유족은 고인이 독일 바이에른주 자택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밝혔다. 고인은 1993년작 ‘스탈린그라드’로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영화는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와 포로, 민간인 피해를 유발한 전투로 기록된 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현 지명 볼고그라드) 전투를 전범국 독일 시각에서 다룬 영화다. 독일군 소위가 스탈린그라드 전선으로 파병돼 겪은 비극을 생생하게 영화로 표현해 찬사를 받았다. 1939년 뮌헨에서 태어난 고인은 ‘가을우유’로 1988년 데뷔부터 세계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이외에도 ‘라마 다마’, ‘낭가파르바트’ 등 명작을 남겼다. 뮌헨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러시아서 2차대전 중 생이별한 자매, 78년만에 재회

    러시아서 2차대전 중 생이별한 자매, 78년만에 재회

    러시아에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생이별한 자매가 방송과 경찰 수색 덕분에 78년 만에 재회했다고 AFP통신 등이 7일(현지시간) 전했다. 러시아 내무부가 공개한 영상에는 여동생 율리아 카리토노바(92)와 언니 로잘리나 카리토노바(94)가 지난달 말 재회한 모습이 담겼는데 자매는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는 가운데 포옹하고 볼 키스를 나눴다. 이날 언니는 동생의 손을 잡으며 “동생을 계속해서 찾고 있었다”고 말했다. 자매는 10대 시절, 현재 볼고그라드로 알려진 스탈린그라드에서 부모와 함께 살았는데 이 도시는 2차 대전 중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 현장이었다. 이들은 1942년 나치 독일의 포위망을 피해 시민들을 대피하는 과정에서 헤어지게 됐다.1928년생인 율리아는 어머니와 함께 북쪽으로 약 500㎞ 떨어진 펜자 시로 대피했고, 로잘리나는 일하던 공장의 동료들과 함께 북동쪽으로 약 1400㎞ 떨어진 우랄지방 공업도시 첼랴빈스크로 피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 경찰 대변인은 “자매는 젊은 나이에 이별한 뒤 78년 동안 다시 만날 희망을 절대 잃지 않았다”면서 “율리아의 딸이 고모(로잘리나)를 찾기 위해 경찰에 도움을 요청한 뒤 이들 자매가 첼랴빈스크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과거 로잘리나는 실종된 가족을 찾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율리아를 찾으려 했었지만, 당시에는 재회에 이르지 못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로잘리나가 실종 가족 찾기 TV 프로그램에 출연했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덕분에 두 사람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어 이번 재회가 이뤄졌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6개월 이상 지속한 전투 가운데 양측에서 100만 명 이상의 병력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3년 2월 나치 독일의 항복은 아돌프 히틀러 군대의 궁극적인 패배로 이어지며 전쟁의 전환점이 됐다. 한편 러시아는 나치 독일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 75주년을 맞아 오는 5월 9일 대규모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대만 학술기행 현장에서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대만 학술기행 현장에서

    출국 전날까지 고민하다가,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대만에 오게 됐다. 일정 및 예약 변경이 쉽지 않았다는 점, 개인 일정이 아니라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팀의 오래전에 예정된 일정이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만, 제주, 아일랜드 등 여러 섬과 본토를 둘러싼 저항과 교섭의 역사, 폭력과 지배·종속 관계에 대해 비교 검토하기 위한 현장답사가 이번 학술기행의 목적이다. 매일 중국을 비롯한 각 나라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 수를 점검하며 하루 일정 내내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마음의 불안과 책무감, 여행의 설렘이 수시로 교차하는 여정이다. 어제는 대만의 남부 도시 가오슝(高雄)에 있는 ‘시립역사박물관’과 ‘2ㆍ28 평화공원’을 탐방했다. 박물관 직원이 입구에서 방문자 모두의 체온을 재고 손 소독제를 뿌려 준다. 제주 4ㆍ3에 비견되는 대만의 비극적 현대사인 1947년 2ㆍ28 사건의 자료와 사진, 영상을 천천히 보았다. 가오슝에서만 약 20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2ㆍ28이 발생한 원인으로 국공내전의 와중에 공산당에 쫓겨 대륙에서 대만으로 진출한 외성인(外省人)이 원래 대만에 거주했던 본성인(本省人)에 대해 지녔던 편견과 차별을 들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이즈음 중국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에서 초래된 한국사회에 팽배한 어떤 경향과 편견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물론 중국 정부의 대응 과정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의당 필요하다. 그런 한편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불어닥친 중국(인)에 대한 혐오와 편견을 통해 우리의 기구한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되짚어 보면 한인들이야말로 인종적·민족적 편견에 의해 누구보다도 상처받은 존재가 아닌가. ‘관동대학살’에서 일본인에게 희생당한 한인의 한(恨), ‘스탈린 시대의 강제이주’로 인해 연해주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카자흐스탄 등지의 황량한 오지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한인들의 비애에 대해 생각해 본다. 미국과 유럽에 의한 인종적 편견의 대상이었던 일본이 다시금 편견과 차별의 대상으로 삼았던 한인들, 그 통한의 운명은 지금도 일본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런 재일 한인들의 슬픔을 생각한다면, 우리야말로 편견과 차별에 대해 가장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타자에게 발산하는 조롱과 차별, 편견의 시선은 언젠가는 부메랑이 돼 자신에게 돌아오리라. 가오슝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이동순 시집 ‘강제이주열차’를 읽었다. 시인은 ‘고려인’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일본 쳐들어오면/고려인들 일본에 붙는다고 했대/우리를 왜놈 간첩이라 했대/골치 아픈 믿을 수 없는/고려인에겐 추방이 상책이라 했대”라고 적었다.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는 시적 진술이다. 실제로 스탈린은 일본과 전쟁이 벌어질 경우 한인들이 일본 편에 서는 걸 우려했는데, 이는 강제이주 명령을 내리게 한 중대한 요인이었다. 대만행 가방에 넣은 또 한 권의 책은 서승의 ‘옥중 19년’이다. 일본에서 차별을 받으며 생활하다가 조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서울에 유학을 온 서승은 동생 서준식과 함께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와 이어진 서슬 퍼런 군부정권하에서 간첩으로 몰려 19년 동안 감옥에 갇힌다. 설움을 피해 조국으로 향한 그는 더 가혹한 수인(囚人)의 운명에 처한다. 이 얼마나 통렬한 아이러니인가. 물론 이런 슬픔은 그만의 것이 아니다. 대만에도 그 못지않은 양심수가 존재한다. 오늘은 타이베이로 가서, 대만 2ㆍ28 사건 및 민주화의 현장과 역사를 좀더 심층적으로 탐방할 계획이다. 도착 첫날과 비교하면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대만에서의 남은 일정 동안 대만의 슬픔과 역사,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한다. 내가 태어난 땅의 운명과 역사, 설움에 대해 톺아보는 과정이기도 한 그 시간에 행운이 함께하기를.
  • 태영호 “평양시에 배낭 멘 남쪽 관광객들이 줄지어 다니면”

    태영호 “평양시에 배낭 멘 남쪽 관광객들이 줄지어 다니면”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가 18일 ‘주간 북한 동향’를 통해 북한이 우리 정부의 북한 개별 관광 허용 방침에 호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태 전 공사는 ‘김정은의 정면돌파가 한국의 단독돌파를 환영할까’란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한국 정부가 대북 개별 관광과 함께 제3국을 통한 ‘비자 방북’ 허용 가능성까지 시사하면서 사실상 북한 관광 전면 자유화에로 나아가려는 정책 방향이 명백해 졌다면서 북한이 아직 공식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긴박한 외화 사정을 개선하자면 가장 손쉬운 방법이 관광을 확대하는 것인데 한 해 30만명에 머무르고 있는 외국인 관광객을 100만명으로 늘리자면 한국인들에게 북한 관광을 허용하는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평양시를 열어 피부도 매끄럽고 체격도 큰 남쪽 사람들이 스스럼 없이 지갑을 여는 모습은 북쪽 주민들에게 충격과 선망을 불러 일으켜 체제 유지에 리스크가 크겠지만 북한이 한국인 개별 관광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며 다음의 이유를 들었다. 첫째 김정은의 ‘정면 돌파’나 우리 정부의 북한 관광 자유화를 통한 ‘단독 돌파’나 모두 미국의 대북제재 벽을 ‘돌파’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한미 동맹을 약화시키고 우리 민족끼리 정신을 한국민들에게 확산시키는 좋은 방도이기도 하다. 둘째 북쪽의 경제 난국을 볼 때 관광을 통한 외화 수입을 늘리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석탄과 광물, 해산물, 무기 등 수출은 대북제재로 매우 힘들어졌고 인력수출을 통한 외화소득 확대도 쉽지 않다. 마식령스키장, 삼지연시, 양덕온천, 원산갈마해양관광지 개발 등에 많은 투자를 했는데 제한된 내수 탓에 투자금을 회수하기 어렵다. 이미 벌여놓은 관광대상건설도 내부공사를 마치지 못해 새로운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라 관광객을 해외에서 대거 유치해야만 자금이 돌아간다. 셋째 관광에 대한 김정은의 긍정적인 생각이다. 관광을 북한 체제를 흔들 수 있는 위험으로 간주한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달리 관광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매주 토요일 김정은의 ‘말씀과 당의 방침을 전달하는 토요 정규화 생활’이라는 것을 하는데 2012년 집권 초기부터 관광업에 대단한 집착을 보였다. 김정은은 핵을 갖고 있는 한 대대적인 해외 투자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면서 자력갱생으로 외화를 벌려면 관광업도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관광을 체제 선전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외화벌이를 위한 경제적 수단으로 간주하며 관광 상품도 선전 효과가 있는 대상만이 아니라 자연, 휴식, 체육, 모험 등으로 다양화해야 한다고 했다.지난 8년 동안 김정은의 생각 중 상당히 많은 것이 현실에 구현됐는데 2014년부터 복잡한 관광 비자 발급 절차가 간소화됐고, 국가 관광 총국이 모든 것을 주관하던 독점 체계를 마스고(깨부수고) 여러 관광 회사들이 호상 경쟁하는 체계를 수립했다. 군부까지도 관광업에 나서도록 했다. 2013년 3월 김정은이 낡은 소련제 비행기가 오히려 돈벌이 수단이 된다며 공군사령부를 질타한 것, 자신이 영국에서 근무하던 2014년 소련제 여객기와 헬리콥터를 타보길 희망하는 관광객을 영국에서 모집할 수 있는지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점 등이 태 전 공사는 놀라웠다고 털어놓았다. 김씨 가문의 우상화 시설 참관만이 아니라 자연, 문화, 취미로 관광 상품을 다양화했다.매년 4월 평양 마라손 대회, 여름에는 태성호 골프 관광, 겨울에는 마식령 스키 관광, 사계절 평양 상공 비행 관광, 매해 8~9월에는 원산 에어쇼 외에 자연 경치, 역사 유적 참관 등이 새로 생겨났다. 중국 단둥으로부터 평양 사이의 일일 관광, 열차 관광이 생겼고 역사상 처음으로 북한의 최북단 나선시부터 개성, 판문점을 통과하여 서울로 내려오는 한반도 종단 자전거 관광까지 생겨났다. 예전에 외국 관광 회사들이 “세계 스탈린 국가를 체험할 기회”라거나 “신기하고 놀라운 북한을 들여다볼 기회”란 식으로 관광상품을 선전하면, 북한 외교관들이 항의하던 모습은 사라졌다. 영변 핵시설 때문에 청천강 이북을 평양 체류 외국인들이 올라가는 것을 불허했으나 이제는 평양 상주 외교관들도 북한 외무성에 일주일 전에 각서를 내면 승인해 주고 있다. 북한이 주동적으로 관광유치 활동에 나서고 있다. 관광 특별법을 제정, 원산-금강산 국제 관광 도시 개발 계획, 러시아의 연해주와 나진 선봉, 원산을 하나로 있는 관광 및 물류 확대 계획 등 장기적인 관광 발전 계획을 작성하고 외국 투자가들을 유치하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최근 3~4년 중국, 영국, 스페인, 스위스 등에서 북한 관광 설명회를 열었고, 2025년까지 원산-금강산 지구를 사계절 국제 관광지로 개발해 한 해 100만명을 유치하겠다고 발표했다. 2013~2015년까지 2억 달러의 비용을 들여 원산 갈마 군용 비행장을 국제공항으로 개조하고 앞으로 12대의 비행기로 연간 120만명의 관광객을 수용할 계획이다. 북한 주민들의 관광을 활성화하는 조치들도 취해 나가고 있다. 평양-삼지연, 청진, 함흥, 어대진, 신의주 등으로 내륙 민항기들을 운영하고, 주민들도 시민증을 보이고 미국 달러만 내면 비행기로 국내 여행도 가능하게 됐다. 평양에서 원산까지 120달러를 내면 비행기로 45분이면 갈 수 있다. 태 전 공사는 “지난 8년 동안 김정은의 정책과 추진력을 보면 상당히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산하면서 나간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면서 “김정은이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지 않고 자력갱생으로 ‘정면돌파’하겠다고 하는데 그런 정책 실현에 우리 정부의 관광 자유화가 이용될 수 있는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 개인은 북한 관광 자유화를 지지한다. 한반도의 통일을 평화적으로 이뤄내려면 남과 북의 접촉을 늘리는 방법 밖에 없다. 단일성과 다양성이 서로 부딪치고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가 한 공간에서 서로 어울리는 기회가 많아지면 될수록 전체주의는 취약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고 무기력해 진다. 평양시에 배낭을 멘 한국 관광객들이 줄지어 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뿌듯해진다”고 털어놓았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권력 못 놓는 푸틴… 개헌 통해 종신집권 꿈꾼다

    권력 못 놓는 푸틴… 개헌 통해 종신집권 꿈꾼다

    국무원 공식 정부 기관으로 헌법 명시도 외신 “푸틴 은퇴 후 국무원 원장 가능성”헌법을 고쳐 가며 이미 러시아를 20년 통치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임기 4년을 남겨 두고 사실상 ‘종신집권’을 위한 계획을 가동했다. 가디언, CNN 등의 보도를 종합하면 15일(현지시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를 포함한 러시아 내각 총사퇴는 푸틴이 2024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국가권력을 유지하려는 계획의 첫 단계다. 푸틴은 이미 러시아에서 이오시프 스탈린(1924년부터 1953년 사망까지 통치) 이후 최장수 통치자다. 2000년 이후 2008~2012년을 제외한 기간 대통령이었으며, 헌법이 규정하는 대통령 3연임 제한에 걸려 총리로 물러나 있던 4년 동안에도 심복인 메드베데프를 통해 실권을 휘둘렀다. 총리로 있던 4년 동안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늘렸다. 그런데 다시 3연임 제한에 발목을 잡히게 됐다. 그는 2024년 일단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하며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 2008년처럼 허수아비 대통령을 앞세우기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메드베데프는 4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하며 후계자로서 국민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최근 발표한 연금 개혁안으로 민심도 적대적이다. 여당인 통합러시아당은 지지율이 35%로 떨어져 있다. 대리인을 세웠다가 야당에 대통령직을 내줄 가능성이 농후하다.그러자 궁리 끝에 꺼내 든 카드가 정계 개편이다. 개헌을 통해 정치 체제를 바꾸자는 얘기인데,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고 의회와 국무원을 강화하는 게 골자다. 자신이 대통령으로 그동안 행사한 총리와 각료 임명권을 하원인 ‘두마’에 주고, 대통령을 두 번 이상 못 하게 해 자신처럼 2연임 뒤 물러났다 다시 출마할 수도 없게 한다. 현재 대통령 자문기구 역할에 그치는 국무원을 공식 정부 기관으로 헌법에 명시한다. 개헌이 성공하면 2024년 이후 그가 어떤 자리에 가든 최고 권력을 쥐고 흔들 것이라는 게 외신들의 분석이다. 권력에의 집착은 이를 내려놓는 순간 ‘자신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디언은 “그가 안전하게 은퇴할 것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고 지적했다. 푸틴이 갈 자리로 2008년 때와 차원이 다른 권한을 가진 총리나 정책 최종 결정권을 휘두를 국무원 원장 등이 꼽힌다. AP통신은 벨라루스를 합병해 새로운 연방국가를 세운 뒤 초대 대통령이 되는 방안도 있다고 보도했지만 가능성은 낮다. 야당 지도자로 푸틴의 사실상 유일한 경쟁자인 알렉세이 나발니는 “푸틴이 2024년에 떠날 것이라고 말한 사람들은 바보 아니면 사기꾼”이라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밝혔다. 현재로서는 그의 계획이 의회를 무사 통과할 수밖에 없다. 2021년 실시 예정인 총선은 의회 권한을 강화할 푸틴에게 지금까지보다 훨씬 중요한 선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진중권 “오픈북, ‘공부 많이 한 부모’ 시험 아냐”vs유시민 “檢주장”

    진중권 “오픈북, ‘공부 많이 한 부모’ 시험 아냐”vs유시민 “檢주장”

    진, ‘오픈북 대리시험 허용’ 문제 맹비난“못 배운 부모 밑에 열심히 공부한 학생 몫을 학벌 좋은 부모 잘 만난 학생이 가로채는 것”유, 유튜브서 “오픈북, 어떤 자료든 참고 가능”“모든 정보 검찰 주장, 언제나 팩트 담진 않아”진 “유시민 망상은 선동, 대중은 현실로 믿어”유 “진중권 서운하다…검찰도 사법도 썩었다”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와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1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아들 대리시험’ 의혹 등 이른바 조국 사태와 관련해 TV토론에서 설전을 벌였다. 진 전 교수는 전날 유 이사장이 조 전 장관 부부가 아들의 미국 조지워싱턴대 오픈북 시험 문제를 풀어줘 A학점을 맞은 것을 검찰이 공소장에 기록한 데 대해 “오픈북은 어떤 자료든지 참고할 수 있다”며 비판하자 “오픈북 시험은 ‘공부를 많이 한 부모’를 테스트하는 게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유 이사장은 “모든 정보가 검찰 주장”이라고 맞섰다. 진 전 교수는 이날 ‘JTBC 신년토론’에서 유 이사장의 유튜브 방송인 ‘알릴레오’ 발언을 언급하며 “아들의 대리시험 의혹을 ‘오픈북 시험’이라고 표현하면서 대중들의 윤리를 마비시켰다”고 포문을 열었다. 진 전 교수는 “저도 학교에서 오픈북 시험을 하는데 부모가 와서 보지는 않는다”면서 “시험이라는 건 그 학생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 지를 테스트하는 것이지, 그 학생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한 부모가 있는지’를 테스트하는 게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어 “만일 오픈북 시험이라고 해서 부모 대리 시험을 허용한다면, 배우지 못한 부모 밑에서 열심히 공부한 학생의 몫을 하나도 공부 안 했는데 학벌 좋은 부모 잘 만난 학생이 가로채게 된다”고 비판했다.그러면서 “이건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한 현 정부의 가치관과 너무나 배치된다”고 말했다. 검찰은 전날 조 전 장관을 불구속 기소하면서 공소장에 조 전 장관과 부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가 아들이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유학할 때 온라인 시험 문제를 사진으로 전달받아 나눠 푼 뒤 아들에게 답을 전달해 아들이 A학점을 받았다고 보고 조지워싱턴대에 대한 업무방해 혐의를 적용했다. 공소장에는 조 전 장관이 2016년 11월 1일과 12월 5일 아들이 수강한 ‘Global Perspective on Democracy’(민주주의에 관한 세계적 관점) 과목 시험의 부정행위에 가담한 것으로 나온다. 검찰은 아들이 ‘내일 Democracy(민주주의) 시험을 보려고 한다’고 하자 조 전 장관이 온라인시험 시작 무렵 ‘준비됐으니 시험문제를 보내라’고 지시했다고 파악했다. 아들이 객관식 10문항인 시험 문제를 촬영해 아이메시지(iMessage)·이메일로 보내면 조 전 장관 부부가 나눠서 문제를 푼 뒤 답을 보내줬다고 검찰은 조사했다. 국내 대학원 입시에 제출한 허위 서류에는 조지워싱턴대 장학증명서도 포함됐다.이에 대해 전날 유 이사장은 알릴레오에서 “제가 취재해보니 문항 20개의 쪽지시험인데 아들이 접속해서 본 오픈북 시험으로, 어떤 자료든지 참고할 수 있다”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러면서 “오픈북 시험서 부모가 도와줬는지는 모르지만, 부모가 개입됐단 의심만으로도 기소한 것”이라면서 “(대리시험 의혹은) 단지 검찰의 주장에 불과하고 사실관계에 대해 확인되지 않았는데 검찰의 기소가 아주 깜찍했다”고 주장했다. 진 전 교수는 “그런 불의를 저지른 사람이 법무부 장관에 어울리느냐. 이걸 ‘오픈북 시험’이라고 (알릴레오에서) 왜곡 보도를 하면 어떡하느냐”고 비판했다. 또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을 언급하며 “이런 일들이 있으면 ‘조국 일가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었구나’라고 생각하는 게 정상인데, (알릴레오 방송은) ‘그렇게 털었는데 그것밖에 안 나왔나’, ‘조국은 얼마나 청렴한가’ 이런 식을 가 버리게 된다”고 일갈했다. 그러자 유 이사장은 “우리에게 알려진 거의 모든 정보들은 검찰의 주장이고, 검찰의 주장이 언제나 팩트 또는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이어 “조 전 장관 일가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각자가 신뢰하는 정보에 입각해서 하면 되지만, 검찰은 국가의 합법적 강제력을 동원해서 어떤 시민 개인을 법정에 세워서 징벌하는 기관”이라고 강조했다. 유 이사장은 “언론에서 보도하는 것을 보면 ‘조국은 부도덕하고 비난받아 마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구속해야하고 징역을 살아야한다’는 식의 메시지를 담은 보도들이 너무 많이 넘쳐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행동을 한 것과 그 사람을 국가 권력을 동원해서 기본권을 박탈하는 것 등의 형벌을 내리는 것의 정당성에 대한 기준은 달리 적용해야한다”고 말했다. 동양대 표창장 위조 의혹을 두고도 유 이사장은 “검찰에서 주장하는 것이고 사실인지 아닌지 저는 모른다”면서 “검찰이 언론에 퍼뜨려 도덕적인 덫을 씌워 (조 전 장관에 대한) 처벌 여론을 조성하는데는 성공했다”고 비난했다.진 전 교수가 “재판에 가서 (검찰의 기소 내용이 맞다고) 결론 나면 그때는 사법이 썩었다고 하지 않겠느냐”고 하자, 유 이사장은 “검찰도 썩었고 사법도 썩었지”라고 응수했다. 유 이사장이 진행하고 있는 알릴레오 방송 자체에 대해서도 격돌했다. 진 전 교수가 전체주의의 상징인 스탈린과 히틀러를 예로 들며 “음모론적 선동”이라고 비판했다. 진 전 교수는 “저는 알릴레오를 보지 않는다. 판타지물을 싫어해서…”라고 말하자 유 이사장은 “서운하다. (진 전 교수와 함께) ‘노유진의 정치카페’ 팟캐스트를 할 때나 지금이나 저는 똑같다”고 유감을 표시했다. 진 전 교수는 유 이사장에게 “일종의 피해망상인데 검찰이 압수수색을 해서 증거를 왜곡할 수 있다는 이런 말도 안되는 것을 대중에게 믿게 한다”면서 “제가 경고하는데 유 이사장님의 망상을 대중들은 현실로 믿고 있다. 구사하시는 언어가 선동의 언어다”라고 날을 세웠다.유 이사장은 앞서 9월 24일 알릴레오 방송에서 조 전 장관의 부인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의 하드디스크 증거인멸 의혹에 대해 “검찰이 압수수색해서 장난칠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동양대 컴퓨터, 집 컴퓨터를 복제하려고 반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한 방청객이 유 이사장에 ‘편파 방송을 하신다고 했는데 장기적으로 어떤 도움이 되느냐’고 질문하자, 유 이사장은 “편파중계라고 했다. 실제 프로야구에도 있다”면서 “제 방송 하나만 보면 한쪽으로 쏠려 걱정된다고 할지 몰라도 다른 팀(보수나 극우진영) 편파중계도 있지 않느냐. 전체적으로 보면 유튜브 안에서 균형”이라고 답변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한해 두차례 전원회의-신년사 생략, 김정은 63년전 할아버지 따라하기

    한해 두차례 전원회의-신년사 생략, 김정은 63년전 할아버지 따라하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한 해에 두 차례 노동당 전원회의를 열고, 신년사도 생략한 것이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다룬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과 닮은꼴이란 지적이 나왔다. 63년 전 이 사건은 북한 정치사에서 최대 위기로 손꼽힌다. ‘초강대국’ 미국과 양보 없는 대결 의지를 밝힌 김 위원장의 행보는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에 추종하며 김일성 정권의 존립을 흔들었던 1956년 8월 종파사건 당시 김 주석의 대응과 닮았다. 미국과의 대결 국면을 엄중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반증으로도 읽힌다. 스탈린 사망 후 집권한 흐루쇼프 등 소련 지도부는 1956년 들어 수정주의를 내세우면서 북한에 자위적 국방력 강화를 뜻하는 중공업 우선 정책을 포기하고 민생을 우선 발전시키라고 압박했다. 김 주석의 노선은 ‘중공업을 우선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다 같이 발전시킨다’는 것으로, 사실상 김정은 정권의 경제·핵병진 노선과 닮았다. 당시 김일성 정권의 권력 핵심에 있었던 최창옥·박창옥 등 ‘연안파’와 ‘소련파’는 소련의 민생 우선 방침에 순응하며 김 주석에게 노선 전환을 요구했다. 그런데도 김 주석이 중공업 우선 정책을 고수하자 이들 세력은 김 주석의 외유 중 그를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동유럽 순방 중 충격적 소식을 접한 김 주석은 일정을 중단한 채 서둘러 귀국했고 8월 전원회의를 열어 반대파를 제거했다. 물론 김일성 정권에 남아있던 마지막 외세 의존 세력을 쳐냄으로써 김일성 일인 지배체제를 강화한 변곡점이기도 했다. 노동신문도 지난 4월 21일 ‘위대한 당을 따라 총진격 앞으로!’라는 제목의 정론에서 “공화국의 근본이익과 배치되는 강도적인 요구를 내세우는 적대세력들의 책동으로 시련과 난관이 끊임없이 조성되고 있는 오늘의 정세는 우리로 하여금 1956년의 그 나날을 돌이켜보게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수만 리 장정에 오르시었던 우리 수령님(김일성)께서 무거운 마음을 안고 조국에 돌아오시었던 그 준엄했던 1956년”이라고 언급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하노이 ‘빈손’ 귀환에 따른 현 국면을 김 주석의 1956년 동유럽 순방 중 귀환과 연결지었다. 김 위원장의 하노이 이후 움직임도 김일성 주석의 행보를 답습했다. 김 주석은 1956년 8월 전원회의에 이어 그해 말 다시 ‘12월 전원회의’를 열고 ‘자력갱생의 혁명정신’과 ‘혁명적 군중노선’(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라는 관점에서 대중을 불러일으키는 노선)을 선언한 후 평양 인근의 강선제강소(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를 찾아 노동자들에게 정책적 지지와 강재 생산량 증가를 호소했다. 이를 계기로 그 유명한 ‘천리마운동’이 탄생했으며, 실제 전쟁으로 피폐해진 북한 경제가 크게 성장한 계기가 됐다. 북한은 1956∼61년의 5개년계획을 2년 반이나 앞당겨 수행하고 공업 총생산액 3.5배,국민소득 2.1배 증가 등 고도성장을 이뤘다고 주장했다. 김정은 위원장 역시 하노이 이후 자위적 국방력 강화를 위한 새 무기의 잇단 시험발사와 자립경제를 위한 시찰을 이어가는가 하면 백두산을 두차례 등정하며 내부 결속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어 연말 나흘간 제7기 5차 전원회의를 열고 제재에 맞서 자립 경제건설을 지속하면서 체제 수호를 위해 핵을 포함한 새로운 전략무기의 지속적인 개발에 나설 뜻을 밝혔다. 미국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며 경고했던 ‘새로운 길’이 결국 경제·핵병진 노선의 부활을 시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김 주석이 1956년 12월 전원회의를 마치고 이듬해 1월 신년사를 하지 않았던 것처럼 김정은 위원장 역시 5차 전원회의에서 나흘간 했던 보고로 신년사를 대신했다. 1956년 권력 기틀을 다진 김 주석은 이후에도 수차례 권력투쟁과 경제 총력전을 거쳐 일인 지배체제를 공고히 했고 3대 세습 체제로 이어졌다. 그러나 당시는 동유럽 사회주의체제가 공고한 환경이어서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지만, 김정은 정권은 국제사회의 제재와 고립에 처해 있어 핵을 유지한 채 경제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사방에 포탄 터지는 소리… 지뢰 폭발로 잃은 다정했던 친구 잊지 못해”

    “사방에 포탄 터지는 소리… 지뢰 폭발로 잃은 다정했던 친구 잊지 못해”

    일시 1999년 5월 16일 장소 인천광역시 남구 숭의동 부산식당 대담 유세원(북구지대 감찰부장) 이경종(인천학생6·25 참전관 설립자) 이규원 치과원장 (이경종 큰아들)1950년 6월 25일 6·25 사변 이전 나는 화수동 281번지에서 살고 있었다. 인천에 인민군이 들어와서 학생이나 젊은이들을 의용군(義勇軍)으로 막 잡아갈 때였다. 그때 나도 신변의 위험을 느껴 화수동에서 친구들과 지하에 숨어 지내게 되었다. 이렇게 인공(人共/인민공화국의 약자)치하때 어려웠던 지하 땅굴 생활로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친구들은 ‘유문길·사철순·문호영·이용운·허용환·김유득·이희중·신현남·정명돌·노영남·주억재·이상순·유세원’ 이었다. 이들이 후일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로 활동한 핵심 멤버들이었다. 1950년 9월 15일 어느 날 하루는 포탄 터지는 요란한 소리가 여기 저기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위해 인천 앞바다에서 쏘아대는 함포탄이 인천 시내에 떨어지면서 터지는 소리였다. 그날이 1950년 9월 15일이었다. 이날 UN군과 국군이 인천에 들어와서 인민군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 북구지대 우리들은 인민군 치하에서 너무 고생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호국활동을 하게 되었고, 인천학도의용대가 창설되어 북구지대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도 다 저무는 12월이 되면서 우리 인천학도의용대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단체로 남하(南下)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것이었다.1950년 12월 18일 남하(南下) 1950년 12월 18일 남하 행진에 참여한 우리들은 안양, 수원을 거쳐서 기차 화물차 지붕에 올라타서 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밀양을 지나 마산에 도착 하였다. 마산에 도착해서는 어느 민가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는 가지고 내려왔던 여비도 다 떨어졌었다. 그런데 “해병대모집이 있다!”라는 소식이 있는 것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그 해병대 모집에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들은 해병대 모집장소에 찾아갔다. 1951년 1월 3일 해병대 6기에 지원 해병대 모집 장소는 마산국민학교였다. 그때 시험관들은 우리들을 운동장에 쭉 세우더니 10명씩 조를 짜서 운동장을 한 바퀴 돌게 하고는 1등부터 3등까지만 뽑고 나머지는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그때 간단한 학과 시험도 있었다. 이날이 1951년 1월 3일쯤이었으며 그때 나는 합격 되어 마산에서 진해로 걸어가 진해경화국민학교에 들어갔다. 1951년 1월 24일에 우리들은 정식으로 해병대 6기 입대식을 하였다. 1951년 2월 10일이 되어 우리들 6기생 전 훈련과정을 마쳤으며 6기생 중 반수는 보병으로 가고, 그 당시 처음으로 해병대에 생긴 포병과로 반이 가게 되었다. 이때 나는 포병과로 배치받아 당시 진해에 있던 육군포병학교로 포병교육을 또 받게 되었다. 이때 포병학교를 마친 나는 다시 미(美)해병대에서 또 포병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후 나는 강원도 최전방으로 배치받았다. 처음 우리 해병대 포부대가 올라가 전투한 곳이 김일성고지와 스탈린고지였다. 그 당시 이 2 고지는 적의 수중에 있었는데 이때 우리 해병대가 뺏는 큰 전과를 올렸다. 1956년 9월 21일에 가서야 만 5년 8개월 만에 나의 파란만장한 군 생활을 마감하고 명예제대를 하게 되었다. 6·25 전사 인천학생 윤운철 1933년생으로 인천송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영화중학교(현재 대건중고교) 4학년생으로 마산에서 해병6기 입대하여 1951년 7월 17일 입대한지 6개월 만에 17세로 전사하였다.전사한 동네 친구 윤운철을 추모하며 인천에서부터 같이 학도의용대원으로 내려와 6기생으로 같이 입대한 윤운철은 입대한지 6개월 만에 전사했다. 당시 나는 전포대가 돼서 포를 쏘는 직책이고 윤운철은 포를 수호하기 위해 포 전면에서 보초를 서면서 포를 지키는 임무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임무를 한 윤운철은 척후 임무를 띠고 전면 숲속으로 가다가 대인지뢰를 잘못 밟고 그 지뢰 폭발로 전사하였다. 윤운철은 성격이 유하고 온순하며 남하고 이야기할 때에는 말을 가려서 하는 아주 다정다감하고 배려 많은 친구였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런 온순한 사람이 왜 먼저 하늘나라로 가야 했는지 안타까운 생각에 가슴이 먹먹하다. 부디 이경종 이규원 2부자(父子)께서 하시는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역사 발굴사업이 유종의 미를 거두기를 바란다. 글 사진 제공 :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관유세원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감찰부장 1933년 8월 5일 인천 동구 화수동 출생 1950년 6월 25일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감찰부장(용산중학교 5학년생) 1951년 1월 24일 해병대 6기로 자원입대 군번 : 9210591 병과 : 해병대 포병 1956년 9월 21일 만기 명예 제대
  • [글로벌 In&Out] 한국 독립운동과 러시아혁명/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한국 독립운동과 러시아혁명/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올해는 러시아혁명 102주년이 되는 해다. 1917년 일어난 러시아혁명은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에 휘말린 제국주의적 세계질서에 대항하고 평등,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사상 최초의 노농국가인 소비에트 러시아가 탄생했다. 러시아혁명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반제국주의ㆍ반식민지운동은 그 투쟁을 힘있게 전개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러시아혁명이 1910년대 후반의 한국 독립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917년 러시아 10월 사회주의혁명의 시작은 같은 해 초에 발생한 2월 혁명이었다. 니콜라이 2세를 퇴위시키고 제정을 무너뜨린 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혁명은 러시아 각 민족에게 정치 활동을 위한 길을 열어 주었다. 극동을 비롯해 많은 러시아 지역에 거주하던 한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2월 혁명 발발 직후 노령(露領) 한인들은 ‘전로한족회중앙총회’라는 조직을 설립했다. 그러나 이 조직은 주로 귀화한 한인들로 구성된 임시정부 지지파와 미귀화의 한인들로 구성된 소비에트 지지파로 분열됐다. 소비에트 정권에 호의적인 한인들은 이 조직에서 탈퇴하고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한인신보’를 발간하게 됐다. 창간호 발간사는 러시아혁명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하나임의 깁흐신 뜻과 슬라브 민족의 뜨거운 피로 수삼백년 동안 졀대한 구속과 무한한 압박으로 무지막심하든 젼졔졍치를 일죠에 젼복하고 붉은 긔를 놉히 들어 국민으로 하야곰 쟈연한 리치?에셔 능히 하날에 대한 인섕의 턴직과 국가에 대한 의무를 행함에 사소한 불편이 없을 만한 팔대쟈유(八大自由)를 선언하니 우리난 로마스브황실(로마노프 왕조: 필자)을 조샹을 하난 동시에 광영이 찬 새 공하국의 쟝래를 ?복하노라.” 그러나 2월 혁명 과정에서 탄생한 러시아 임시정부가 토지 문제, 민족 문제, 제1차 세계대전 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혁명의 소용돌이가 다시 거세어져 갔다. 결국 1917년 11월 7일(러시아 구력 10월 25일) 레닌의 지도하에 발생한 봉기로 임시정부는 해산되고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넘어갔다. 1917년 11월 15일 레닌과 민족문제담당 인민위원 스탈린은 ‘러시아 제 민족의 권리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모든 민족의 주권, 분리와 독립국가의 형성에 이르기까지의 자결권을 사상 최초로 실현했다. 이것은 윌슨 미국 대통령의 유명한 ‘14개조 평화 원칙’ 발표 약 2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 결과로 핀란드를 비롯한 많은 민족들이 완전한 독립을 얻을 수 있었다.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한 민족들은 1922년 12월 30일 소련 건국 후 그와 동등한 구성원으로 가입하게 됐다.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나 러시아에서 귀국한 한국인 노동자들을 통해서 전달된 러시아혁명에 대한 소식은 한국인들에게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희망과 용기를 심어 주었다. 예를 들어 도쿄 유학생들이 3ㆍ1운동 발생 약 1개월 전인 1919년 2월 8일에 발표한 독립선언서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마지막에 동양 평화의 견지로 보건대 그 위협자이던 러시아는 이의 군국주의적 야심을 포기하고 정의와 자유와 박애를 기초로 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는 중이며, 중화민국도 또한 그러하며 더불어 이번 국제연맹이 실현되면 다시 군국주의적 침략을 감행할 강국이 없을 것이라. 그러할진대 한국을 합병한 가장 큰 이유가 이미 소멸되었을뿐더러 이로 조선민족이 무수한 혁명 전쟁을 일으킨다 하면 일본에게 합병된 한국은 거슬러 동양 평화를 교란할 화근이 될지라. (중략) 그러나 일본이 만일 우리 겨레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한다면 우리 겨레는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언하리라.”
  • 모랄레스도 멕시코行....멕시코는 어떻게 좌파 망명의 천국이 됐나

    모랄레스도 멕시코行....멕시코는 어떻게 좌파 망명의 천국이 됐나

    유명 좌파지도자들, 정치적 위기 때 멕시코와 ‘인연’‘스탈린 정적’ 트로츠키는 멕시코에서 생 마감하기도에보 모랄레스 전 볼리비아 대통령의 ‘멕시코행’으로 과거 좌파 지도자들의 망명지로 선호됐던 멕시코의 위상이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모랄레스 전 대통령은 지난 10월 대선에서 부정선거로 당선됐다는 의혹을 받고 불명예 퇴진한 뒤 지난 11일(현지시간) 멕시코 망명을 선언했다. 자국에서 정치적 위기를 겪고 멕시코로 떠난 좌파 지도자들은 모랄레스 이전에도 적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는 모랄레스의 12일 멕시코 도착 소식을 전하며 “지난 세기와 앞선 반세기 동안 멕시코는 스페인 좌파와 미국 내 사회주의자, 유럽 공산주의자들에게 안식처가 됐다”고 전했다. 멕시코 망명을 선택한 대표적인 인사로는 쿠바의 ‘건국 영웅’ 호세 마르티를 꼽을 수 있다. 19세기 스페인에 맞서 독립투쟁을 했던 마르티는 수형생활 끝에 스페인을 거쳐 1875년 멕시코로 건너가 약 2년간 생활했다. 그는 멕시코에서 ‘오레스테스’라는 필명으로 시와 글을 쓰며 활동하기도 했다. 멕시코를 거쳐간 그는 아바나 국제공항의 이름이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일 정도로 쿠바에서 최고 영웅으로 추앙받게 됐다. 1900년대 말에는 중남미 국가 인사들이 자국의 내전을 피해 멕시코로 넘어왔다. 1970년대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멕시코로 떠났고, 이가운데에는 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한 살바도르 아옌데 전 칠레 대통령도 있었다.유럽에서도 많은 좌파인사들이 멕시코 망명을 선택했다. 1930년대 스페인 내전 때 적지 않은 스페인 좌파 인사들이 멕시코로 떠났고, 이 가운데에는 초현실주의 영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루이스 브뉴엘도 포함돼 있었다. NYT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수천명의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이 멕시코에 보호 요청을 했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가 예술가와 작가들이었다”고도 소개했다. 또 미국에서 매카시즘 광풍이 불 때도 미국의 사회주의자들은 국경을 넘어 멕시코행을 택했다. 일부는 망명생활 뒤 자국으로 화려하게 복귀했지만, 멕시코에서 결국 생을 마감한 이들도 있었다. 멕시코에서 사망한 대표적인 인물은 바로 러시아 혁명의 주역 레온 트로츠키다. 러시아에서 멕시코로 추방됐던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스페인 공산주의자에게 피격돼 사망했다. 프리다 칼로의 집 바로 옆에 있는 트로츠키 박물관은 멕시코를 찾는 관광객들의 대표적인 여행코스이기도 하다.이처럼 멕시코가 좌파 망명의 주요 선택지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학자 로렌조 마이어는 “멕시코 정부가 미국의 외교정책에 표면적으로 도전하지 않는 대신 (외국의 좌파지도자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의 주권을 주장했다”고 분석했다. 미국으로서는 국경 바로 옆 국가에 좌파 지도자들이 오가는 것이 불편할 수 있지만 이를 공개적으로 문제삼기는 어려웠고, 멕시코 정부는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다. 최근 멕시코가 중남미 좌파정권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모랄레스의 멕시코 망명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지난달말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승리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당선인의 첫 해외방문국도 멕시코였다. 멕시코는 내년 중남미·카리브해국가공동체에서 의장국을 맡을 예정이기도 하다. 세계사 속 멕시코 망명 인사에 새롭게 이름을 올린 모랄레스 전 대통령이 앞으로 재기에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모랄레스는 15일 AP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자신은 여전히 볼리비아의 대통령이라며 “유엔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볼리비아의 위기에 중재자로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베를린 장벽 무너진 그날 “내 인생 최악의 밤이었다”

    베를린 장벽 무너진 그날 “내 인생 최악의 밤이었다”

    “내 인생 최악의 날이었다.” 독일 통일과 동서 냉전 와해의 기폭제가 된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모두가 축하할 때 쓰라린 기억을 떠올린 이가 있었다. 바로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동독을 이끌었던 에곤 크렌츠(82) 전 공산당 서기장이다. 서기장 임기는 딱 한달이었다. 영국 BBC의 스티브 로젠버그 기자가 역사적인 날을 맞아 만나자고 했더니 발트해 바닷가에서 조용히 말년을 보내고 있는 그가 흔쾌히 응해 자동차로 베를린시를 돌아보며 소회를 들어봤다고 10일 동영상과 함께 보도했다. 로젠버그 기자는 “내가 해본 가이드 투어 가운데 가장 괴이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독일어에 서투르고 크렌츠는 영어를 못해 둘다 아는 러시아어로 대화했다. “예전에 스탈린거리였잖아!”라고 웃으며 대화가 시작됐다. 지금의 칼마르크스 거리로 향하면서였다. 그는 이어 “스탈린이 죽은 뒤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저 너머 레닌 광장이 있었다. 커다란 동상이 서 있었는데 그들이 끄집어내렸다”고 말하며 미소지었다. 한때 이끌었던 나라보다 훨씬 정정해 보이는 그는 “독일민주공화국(GDR)이 이 모든 걸 세웠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이어 “난 러시아를 사랑하고 옛 소련(USSR)도 사랑했다. 지금도 많은 인연을 갖고 있다. GDR은 옛 소련의 자식이었다. USSR은 GDR이란 요람 곁에 서 있었는데 지금은 무덤 곁에 있다”고 말했다. 당시 동독에는 소련군 병사 50만명이 800개 기지에 주둔하고 있어 그야말로 전방 참호 같았다. 크렌츠는 “점령군 지위 여부와 상관 없이 우리는 소련 군대를 친구로 봤다. ‘소련 제국의 일부’란 전형적인 서구식 말투였는데 바르샤바 조약에 따라 우리는 스스로를 파트너로 여겼다. 물론 우리나라로 얘기하자면 소련이 결정적 발언권을 쥐었다”고 말했다. 1937년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엄청 빠르게 출세한 것으로 유명한데 “젊은 개척자였다. 자유독일청년에 가맹한 뒤 사회통일당에 합류한 지 얼마 안돼 당수가 됐다. 이 모든 걸 해냈다”고 자랑했다.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의 승계자로 일찌감치 낙점됐다. 하지만 그가 30년 전 10월에 서기장에 올랐을 때는 이미 집권당은 급속히 세력을 잃고 있었다. 폴란드부터 불가리아까지 시민봉기가 휩쓸고 있었고, 동독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장벽이 붕괴되기 일주일 전 크렌츠는 모스크바로 가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만났다. “그는 내게 소련 인민들이 동독을 여전히 친구로 여기고 있다고 말하더라”며 “내가 ‘여전히 GDR를 아버지처럼 돌보겠다는 거냐’고 묻자 ‘물론이지, 에곤’이라고 답하더라. 또 ‘독일 통일이 가능한지 힌트를 달라고 한다면 의제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 순간 그는 진심이었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 실수였다.” 소련이 배신했다고 생각하느냐고 로젠버그가 묻자 “그렇다”고 답했다. 크렌츠는 “그런 경험을 다시 하고 싶지 않다. 서구 정치인들은 인민의 축제였다고 말한다. 이해된다. 그러나 난 모든 책임을 어깨에 지고 있었다. 감정의 소용돌이 같은 순간이었다. 누군가 그날 밤 죽기라도 했다면 강대국끼리 군사적 충돌이 빚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 역시 2013년 인터뷰를 통해 “종종 내가 중부와 동부 유럽을 내줬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누가 그런 걸 주고 말고 하겠는가? 예를 들어 폴란드를 줬다면 그 국민들에게 돌려줬다는 의미다. 누구 다른 이의 소유일 수 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1997년 그는 장벽을 넘으려는 동독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이유로 기소돼 4년을 복역했다. 여전히 정치에 관심 많고 러시아를 지지한다고 했다. “고르바초프와 보리스 옐친 같은 유약한 지도자들 이후 러시아는 운 좋아 블라디미르 푸틴을 맞았다”고 말했다. 이어 냉전은 결코 끝나지 않았으며 대신 “다른 방법으로 싸우고 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크렌츠는 “지금도 GDR 시민들의 손주들로부터 많은 편지와 전화를 받으며 내가 그들의 생일을 축하하면 조부모들이 많이 좋아할 것이라고 한다. 때때로 사람들이 서명이나 셀피를 찍자고 한다”고 했다. 로젠버그 기자와 크렌츠가 자동차에서 내리자 함부르크에서 중학생들을 데리고 현장 탐방을 온 역사 교사와 마주쳤다. 얼굴을 알아본 교사가 “역사의 산 증인을 뵙다니 대단하다. 장벽이 무너졌을 때 어떤 기분이었느냐”고 묻자 “카니발은 아니었다. 아주 극적인 밤이었다”고 잘라 말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새로운 사회, 새로운 예술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새로운 사회, 새로운 예술

    대각선으로 화면을 채운 붉은 말, 중세 종교화의 인물처럼 가늘고 긴 소년의 몸, 초록색 호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러시아 초원지대의 소년들은 말을 끌고 강가에 나가 목욕을 시키면서 물놀이를 했다. 쿠지마 페트로프봇킨이 자란 볼가 강변의 작은 마을도 그랬을 것이다. 풍속화에 어울릴 만한 일상생활이 페트로프봇킨의 손에서 타는 듯이 붉은 말과 차가운 누드가 어우러진 상징주의 그림으로 탄생했다. 그는 가난한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 정교회의 성상 화가에게 미술을 처음 배웠다. 고향의 한 상인이 학비를 대주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성화를 그렸는데, 그의 그림은 교회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상징적이고 에로틱한 분위기를 띠고 있어서 마찰을 빚었다. 이 그림의 붉은 말은 전쟁과 피를 상징하는 요한 묵시록의 붉은 말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냉담한 표정의 누드는 묵시록의 기사보다 고대 그리스와 맞닿아 있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이 그림에서 보색 대비, 면의 대담한 분할, 운동감 같은 추상적 요소에 주목했다. 소비에트 비평가들은 정치적 의미를 부여했다. 붉은 말을 러시아의 미래, 다시 말해 볼셰비키 혁명을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물에서 솟아올라 앞발을 치켜든 붉은 말과 방금 태어난 듯한 알몸뚱이 소년은 혁명의 아이콘이 됐다.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러시아 제국이 두 번의 혁명 사이에 있던 때였다. 페트로프봇킨은 반동적인 사람은 아니었으나 특별히 혁명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1905년 혁명이 실패하고 사회가 암울한 분위기에 젖어 있을 때 화가가 다섯 해 뒤에 일어날 볼셰비키 혁명을 예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그림의 진정한 혁명성은 정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러시아 전통을 아방가르드 형식과 결합한 데서 찾아야 한다. 국제적인 인물이었던 칸딘스키와 달리 페트로프봇킨은 러시아의 정신적 유산을 간직한 채 추상으로 나아갔다. 스탈린 치하에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숙청당할 때 페트로프봇킨은 살아남았고 소비에트예술가협회의 초대 의장까지 지냈다. 하지만 그를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1910년대의 그림이다. 미술평론가
  •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방위비 분담금 50억弗, 이번엔 미군의 병참기지가 되라는 말인가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방위비 분담금 50억弗, 이번엔 미군의 병참기지가 되라는 말인가

    지난 10월 18일 한국진보대학생연합 회원들이 서울 중구 정동 주한미국대사관저에 침입해 방위비 분담금 폭증을 요구하는 미국을 규탄했다. 정치권과 언론은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개탄했다. 그들이 왜 대사관저에까지 들어가야 했는지에 대해선 외면했다. 미국이 강요하는 ‘분담금 50억 달러’의 의미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50억 달러는 내년도 우리 국방 예산의 12%. 한국군 전력증강사업비를 통째로 내주고 자주국방을 포기해야 하는 규모다. 2018년 미국의 주한미군 주둔경비 예산은 11억 달러. 50억 달러면 주한미군과 군속의 인건비는 물론 주한미군이 고용한 한국인 인건비, 기지 이전비, 군사시설 유지 보수비, 군수지원비 등을 모두 충당하고도 20억 달러 이상 남는다. 적어도 이 나라를 운영하는 당국자, 세금의 씀씀이를 감시하는 정치인과 언론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따져야 할 일이다. 학생들이 먼저 나설 일이 아니었다. 미국은 우리에게 왜 그런 요구를 하는지, 그 돈으로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그러면 한국은 어떻게 되는 건지, 그래도 주한미군을 유지해야 하는지 따져야 한다. 북한의 핵위협이 문제라면, 우리가 독자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안도 논의해야 한다.방위비 분담금 제도는 미국과 동맹 관계를 맺은 전 세계 35개국 가운데 한국과 일본에서만 예외적으로 시행되는 제도다. 일본은 1952년 맺은 옛 미일행정협정으로 부지 및 시설을 포함해 주일미군 주둔 경비의 50%를 냈다. 2차 대전 후 전쟁 피해 배상을 면제받은 대신 미국에 오키나와 등 미군기지를 제공하고 주둔 경비의 일부를 제공한 것이다. 일종의 점령비였다. 그마저도 1960년 미일행정협정을 개정하면서 삭제됐다. 그것이 부활한 것은 1980년대 후반. 미국은 심각한 달러 강세로 경상수지 적자가 늘고 옛 소련과의 군비경쟁으로 국방비가 폭증해 재정적자도 늘었다. 달러 가치를 절감한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엔화 가치가 절상되면서 주일미군 주둔 경비도 늘었다. 결국 미국은 1987년 방위비 분담금 제도를 불러냈다. 일본은 안보에 관한 한 미국의 요구에 전적으로 순응했다. 일본에 이어 한국에도 분담금을 요구했다. 일본 침략의 피해자이지만, 한국 정부는 버티지 못했다. 1991년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5조에 대한 예외를 규정한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을 체결했다. 다만 지원 대상을 한국인 인건비와 시설 관리 및 군수지원으로 제한했다. 1991년 합의한 1차 분담금은 1073억여원(1억 5000만 달러)이었다. 그것이 올해(10차) 1조 383억원으로 늘었다. 11차엔 6조원(50억 달러)으로 증액하라는 게 미국의 요구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입만 열면 일본의 지원 규모와 비교했다. 한국의 보수언론도 일본의 분담률이 70%인 데 반해 한국의 분담률은 40~50%라며 트럼프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한국의 주한미군 경비 분담률은 70%를 넘으면 넘었지 밑돌지 않는다. 분담금에 포함되지 않는 직간접 지원이 막대하다. 2015년의 경우 미 통신선 및 연합C4I체제 사용 비용, 카투사 병력 지원, 부동산 지원, 기지 주변 정비, 공무집행피해 배상 등 방위비 분담금에 포함되지 않은 직접 비용이 1조 5000억여원이었다. 무상공유 토지 임대료, 훈련장 사용지원 등 기회비용이 8277억원, 관세·지방세 등 세금 면제와 상하수도·전기·가스·통신 등 공공요금 감면, 도로·항만·공항·철도 이용료 면제 등 간접지원은 1312억여원이었다. 분담금까지 모두 3조 4000여억원이었다. 여기에 반환기지 오염 정화, 반환공여구역 토지 매입, 기지이전 비용 2조 700여억원을 더하면 5조 4000억여원에 이른다. 토지임대료의 경우 정부는 7105억여원만 산정했지만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2018년 용산미군기지 81만평의 임대료만 최소 1조 7000억원에서 최대 4조 4000억원으로 평가했다. 평택 미군기지가 완공되기 전 미군에 공여된 토지는 모두 3030만평이었다. 2012년 일본의 분담금은 4조 4000억원, 한국은 8361억원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직간접 지원 비용을 모두 포함한 것이어서 산술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 게다가 주일미군은 6만여명으로 우리(2만 8000여명)의 두 배 이상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규모로도 한국은 0.68%이고 일본은 0.064%이다. 예산 대비 규모는 한국이 0.254%, 일본은 0.200%이다. 함부로 비교하고 멋대로 내뱉을 말이 아니다. 주한미군은 지금의 분담금도 다 쓰지 못한다. 2014년부터 2018년(9차 협정)까지 잉여 분담금은 5317억원으로 전체의 13.1%였다. 2008년 8차 협정 협상 과정에서는 미군이 미사용액 1조 1000억원을 예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013년 4월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는 보고서에서 “미2사단 박물관을 짓는 데 분담금 1040만 달러(약 116억원)를 쓰는 등 한국의 분담금을 ‘공돈’처럼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주한미군의 혜택을 한국만 챙긴다는 것도 웃기는 주장이다. 1995년 2월 미국의 동아시아전략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미국의 납세자에게는 미군을 해외에 두는 것이 본토에 배치하는 것보다 부담이 적다. 그 좋은 예가 운영유지비를 지원하는 한국과 일본이다.” 주한미군이 본토로 철수한다면 미국 정부는 한국이 지원하던 5조여원을 대야 한다. 2016년 매케인 의원과 주한미군 사령관 빈센트 브룩스 육군 대장은 상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이렇게 묻고 답했다. “미군을 한국에 주둔시키는 게 미국에 주둔시키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든다는데 맞는가?” “물론!” 월터 샤프 전 주한미군사령관도 말했다. “미군의 한국 주둔은 반드시 필요하며 정말로 우리에게 거대한 이익을 가져다준다.” 게다가 미국은 한국을 동북아의 패권을 지키는 최전방 최선의 기지로 활용하고 있다. 한국에 배치한 사드 레이더만으로도 중국의 전략거점들을 샅샅이 훑어볼 수 있다. 신속이동군으로 전환되고 있는 주한미군은 동북아에서 중국의 도전을 억제한다. 무엇보다 유사시 한국을 대리 전장으로 쓸 수 있다. ‘방위비 분담금 50억 달러’가 더 착잡한 이유는 돈의 성격 때문이다. SOFA와 특별협정은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에 대해서만 경비를 지원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50억 달러’에는 미군의 전략자산 전개, 주한미군의 순환배치, 작전준비태세 등 미군에 대한 작전 지원도 포함돼 있다. 괌이나 오키나와에서 발진하는 전략 폭격기나 항공모함 전단의 훈련비도 지원하라는 것이다. 미군의 전략자산 전개나 준비태세는 미국의 세계 패권전략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한국을 미군의 병참기지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중국, 러시아에 맞서는 병참기지다. 일제 때 한국은 일본의 병참기지였다. 스탈린은 그 이유만으로 연해주 한인들을 잠재적 스파이로 간주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미군의 병참기지가 된다면 어떻게 할까. 미국의 의도는 한미 동맹위기관리 각서의 개정 협상에서 잘 드러난다. 미국은 ‘미국의 유사시 한국군의 참전’을 명기해 미군이 개입하는 분쟁에 한국군의 참전을 의무화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은 지금 호르무즈 해협에서 이란과 충돌하고 있으며 남중국해에선 중국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한국군은 앞으로 이란과도 싸워야 하고 중국과도 맞서야 할지 모른다. 유명무실한 유엔사의 권한을 강화해 전시작전권 이양 후 한국군을 계속 통제하려고도 하고 있다.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은 평택 미군기지(험프리스 개리슨)를 방문해 ‘원더풀’을 연발했다. 430만평 규모의 험프리스는 세계 최대, 최고의 해외 미군기지로서 대중국 전진기지다. 한국이 전체 비용의 94%(18조원)를 대서 지었다. 그러나 험프리스의 주소는 대한민국 경기도가 아니라 미합중국 캘리포니아이다. 식당에선 한국 카드도 못 쓴다. 우체통에 편지를 넣으면 미국으로 간다. 트럼프 대통령의 눈에는 한국이 주권국가가 아닐 수 있다. 그가 ‘전화 몇 통화면 5억 달러가 나온다’고 한국을 조롱할 때에도 광화문광장에서는 정치인들이 성조기를 온몸에 두르고 흔드는 자들과 대한민국 대통령 하야를 외쳤다. 우리 군이 미군의 용병이 돼 중국, 러시아, 이란 등과 맞설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야당은 국사를 작파하고 선거운동만 한다. 날로 벗겨 먹어도 정신 못 차릴 나라로 간주하는 데는 그만 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논설고문 kbc@seoul.co.kr
  • [글로벌 In&Out] 74년 전 ‘조선노동당 창건대회’의 진상/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74년 전 ‘조선노동당 창건대회’의 진상/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지난 10일 북한은 조선노동당 창건 74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를 진행했다. 이 공휴일은 1945년 10월 10에 열린 조선공산당 북조선 5도당원 및 열성자대회를 기념하는 날이다. 이 대회에서 북한 조선노동당의 전신인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창설됐다. 김일성이 정식으로 북한 정계에 진출했다고 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조선노동당의 창건일이 10월 10일이라는 것은 북한 역사가들이 오랫동안 주장해 온 것이다. 일찍이 1964년에 출판된 북한 당사 교재는 북한 노동당 창당 대회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1945년 10월 10일부터 10월 13일에 걸쳐 조선공산당 북조선 조직위원회 창설을 위한 북조선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소집되었다. 대회는 당 조직 문제에 관한 김일성 동지의 보고를 청취하고 조선공산당 북조선 조직위원회 창설에 대한 방침을 지지찬동하였다.” 또 김일성도 박헌영 같은 ‘우경항복주의자’들을 비판했다고 한다. 이런 주장을 세계 북한 전문가들이 받아들인다. 위키백과나 심지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에도 조선노동당의 창건일이 10월 10일로 표기됐다. 하지만 1990년대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면서 조선노동당 창건일의 정확한 날짜와 그 진상이 밝혀졌다. 그 대회와 관련해 가장 기본적인 자료는 1945년 11월 5일 작성된 소련군 연해주군관구 정치부의 정보 요약이라는 문서다. 이 문서는 비교적 길지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945년 10월 13일 평양시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 5도당 대회가 열렸으며 69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대회에서는 네우메이코프 소련군 대위의 ‘국제정세’, 오기섭의 ‘당과 공산주의자들의 임무’, 김일성의 ‘조직문제’, 김용범의 ‘지방위원회와 당 사업의 강화’, ‘북조선공산당 조직국 선거’ 등이 보고됐다. 상임위원회에서는 김일성과 오기섭 등 9명이 선출됐으며,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명예위원으로 뽑혔다. 회의가 열리면서 먼저 조선공산당 서기장인 박헌영에게 인사를 보냈다. 오기섭은 조선 해방에서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조선이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 단계에 있으며, 당면 과제는 통일된 공화국을 창건하는 것이라고 했다. 오기섭은 조선이 사회주의 혁명의 단계로 넘어갔다는 좌경과 조선이 미국에 의해 해방됐다는 우경을 비판했고, 좌경이 가장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그다음으로 김일성이 보고했다. 김일성은 반일통일전선의 창설, 독립적인 조선의 창건, 혁명적 이론 공부 등을 노동자들에게 선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새로운 정부에는 노동자에서 자본가까지 각 계급의 대표자들이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또 김일성은 “현재 서울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있다. 박헌영 동지는 당내의 분파주의를 극복하고 공산당을 바른길로 지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오기섭처럼 좌우경 분자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조선에서 계급투쟁을 진행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영 등 좌경 분자들’을 “일제의 앞잡이”라고 비난했다. 김일성은 북조선 모든 당조직 위원회의 선거 진행, 당규약 채택, 당증 제작, 북조선 전역 당대회 소집 등을 제안했다. 김일성의 제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마지막으로 보고한 김용범은 토지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소련군이 10월 11일 발표한 북한의 무장조직 해산 명령에 따라 공산당 적위대라는 무장조직이 해산됐음을 확인했다. 대회는 공산당 조직국 일원 17명을 선출한 뒤 폐막했다.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대회는 10월 13일 단 하루 동안 진행됐고, 김일성은 대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북한의 주장과 달리 박헌영을 비판한 것은 사실이 아니며 새로운 조선을 부르주아민주주의 단계에 있는 통일민주국가로 보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 워싱턴 포스트 알바그다디 부고 제목 때문에 혼쭐, 트럼프에 야유

    워싱턴 포스트 알바그다디 부고 제목 때문에 혼쭐, 트럼프에 야유

    미국 일간 워싱턴 포스트가 미군의 특수작전에 쫓겨 자살폭탄 조끼를 터뜨려 세상을 떠난 이슬람 국가(IS) 수괴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 부고 기사에 27일(현지시간) 제목을 달면서 “이슬람 국가를 지배한 엄격한 종교 학자 48세에 죽다”라고 제목을 달았다가 독자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들었다. 신문은 뒤늦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 이슬람 국가의 극단주의 지도자 48세에 죽다”라고 제목을 바꿨다. WP의 공보 담당 크리스틴 코라티 켈리 부국장은 “그런 식으로 제목을 달아선 안됐다. 해서 재빨리 바꿨다”고 트위터를 통해 해명했다. 사실 문제의 제목은 알바그다디를 “테러리스트 최고 사령관”으로 달았다가 바꾼 것이었는데 “이슬람 국가를 지배한 엄격한 종교 학자”라고 제목을 바꿨다가 망신살이 뻗쳤다. 주로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비난이 잇따랐다. 많은 이들은 해시태그 # WaPoDeathNotices를 달며 이런 식이라면 역사상 최악의 오명을 남긴 인물들을 이 신문이 부고 제목으로 이렇게 달지 않겠느냐고 마음껏 놀리고 있다. 어떤 이는 “평생 예술 작품을 열정적으로 끄러 모았고, 동물권 운동에도 앞장섰고 재능있는 응원가이기도 했던 아돌프 히틀러가 56세에 죽다”라고 쓸 수도 있다고 했다. 요시프 스탈린에 대해서도 “노동계급과 인구 통제의 강력한 옹호자였던 스탈린이 74세에 죽다”란 제목을 달았을지 모른다고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자 다른 이가 희대의 연쇄살인마 테드 번디에 대해 “세심한 연구자이며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 폴라로이드를 사랑한 그가 42세에 죽다”라고 제목을 달지 모른다고 비웃었다. 로마의 폭군 네로, 연쇄살인마 찰스 맨슨 같은 이들까지 소환해 잘 알려진 개인적 면모 하나를 끄집어내 얼마든지 미화하는 제목을 달 수 있다고 조롱했다. 이날 야유를 들은 사람은 또 있었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월드시리즈 5차전이 열린 워싱턴 내셔널스의 홈 구장을 찾은 그를 가까운 좌석에 앉았던 관중들이 손뼉을 마주 치며 환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헤죽 웃어 보였다. 하지만 곧바로 야유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전광판 화면에 트럼프 대통령 얼굴이 비치자 그런 것이었다. 알바그다디 제거로 한껏 기분이 들떴을 트럼프 대통령 부부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 당황한 기색이 비쳤지만 애써 아무 일 없다는 듯 박수를 보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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