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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삭막한 곳에서도 꽃 피어나길…세계 4대 명상 대가, DMZ서 평화를 소망하다

    이 삭막한 곳에서도 꽃 피어나길…세계 4대 명상 대가, DMZ서 평화를 소망하다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DMZ)에서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대규모 명상집회가 열린다. 한국참선지도자협회(회장 각산 스님)가 다음달 13일 경기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공원과 임진강변 생태탐방로 일대에서 1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하는 ‘DMZ세계평화명상대전’이 그것. 1993년 미국 워싱턴DC에서 4000여명이 참석했던 명상집회 이후 가장 큰 규모가 될 전망이다. 당시 폭력 범죄가 많이 발생하던 워싱턴DC에는 세계 60여개국에서 약 800명의 명상가가 모여들어 6월 7일부터 7월 30일까지 매일 두 차례 집단 명상을 했다. 일반인 참가자가 점점 늘어나 8주 후에는 참여자가 4000여명으로 늘었다. 조사연구 결과에 따르면 워싱턴DC의 범죄율이 이 기간 중 무려 25%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이번 명상대전은 참선 지도사 양성과 명상 대중화를 위해 창설된 한국참선지도자협회의 첫 출발을 알리면서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기를 염원하는 집회다. 참선지도자협회 측은 명상대전 장소로 DMZ를 택한 데 대해 “임진강은 분단의 강이 아닌 평화의 강”이라며 “불교에서 존재는 고해(苦海)인데, 고(苦)가 해탈로 이끈다”고 밝혔다. 그 예사롭지 않은 법석은 특히 세계 4대 명상 스승으로 꼽히는 대가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점에서 큰 관심이 쏠리고 있다. 태국 고승 아잔 간하, 영국 케임브리지대 출신의 호주 명상가이자 저술가 아잔 브람, 세계 불교 통합 운동을 펼쳐 온 대만 심도(신다오) 선사, 한국 간화선을 대표하는 혜국 스님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 태국의 아잔 간하는 소승불교 수행자 중 최고 경지에 이른 ‘아라한’으로 추앙받는 명상의 대가. ‘태국의 등불’로 불렸던 아잔 차의 직계 제자로, 50년 가까이 밀림 속에서 탁발 수행을 했으며 스승으로부터 ‘번뇌 없는 자’로 인정받았다. 밀림에서 자기 앞에 선 6m 길이의 맹독성 킹코브라를 눈빛으로 돌려보낸 일화가 유명하다. ‘푸른 눈의 성자’라고 불리는 아잔 브람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적 스승 100인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 베스트셀러 ‘성난 물소 놓아주기’,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의 저자이기도 하다. 영국의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호주 불교의 개척자’로 통하며 현재 호주에서 가장 큰 수행 커뮤니티이자 명상센터인 보디니야나 수도원을 이끌고 있다. 심도 선사는 ‘불법은 하나’라는 신념 속에 종교 간 대화를 통해 세계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해 온 대표적 선사. 대만 시내에 세계종교박물관을 열면서 세계 불자 50만명 이상에게서 후원을 받기도 했다. 한국불교를 대표해 혜국 스님도 참석한다. 13세에 해인사에서 일타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혜국 스님은 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간화선(看話禪)의 대표적인 수행자다. 젊은 시절 자신의 손가락을 태우는 소지공양으로 수행 결기를 드러냈던 혜국 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수좌회 의장을 지냈다. 명상대전은 오전 11시 혜국 스님의 한반도 평화 기원 참선법문을 시작으로 낮 12시 아잔 간하의 세계 평화 메시지, 오후 1시 아잔 브람과의 DMZ 평화 걷기 명상 등이 이어진다. 아잔 간하와 아잔 브람이 명상법을 전수하며 특히 아잔 간하가 발표할 평화 메시지에 불교계 안팎의 관심이 쏠린다. 아잔 브람은 2000명과 함께 걷기 명상을 한 뒤 각산 스님과 명상 토크를 진행한다. 주최 측의 발표대로 ‘DMZ세계평화명상대전’에 참여한 1만여 수행자들이 동시에 입정에 든다면 장관을 연출할 것으로 보인다. 참가비는 무료이며 도시락과 셔틀버스 등 부대비용은 실비로 2만원을 받는다. 신청 접수는 포털사이트에서 ‘세계평화명상대전’을 검색하면 된다. 명상 대전에 이어 다음날인 14일부터 16일까지는 강원 정선 하이원리조트에서 세계명상힐링캠프가 개최된다. 명상 대전 참가자들이 리조트로 이동해 본격적인 명상 수행 일정을 진행한다. 세계 명상 대가들이 직접 지도하는 참선 수행과 즉문즉설, 무차 토론 등이 이어질 예정이다. 14일 오전 10시 아잔 간하의 ‘입재법문’을 시작으로 좌선, 하늘등산로 걷기 명상, 각산 스님과 심도 선사 등의 수행 지도 등이 이어진다. 매일 저녁에는 아잔 간하와의 질의응답 및 수행 인터뷰도 진행된다. 각산 스님은 “DMZ세계평화명상대전과 세계명상힐링캠프가 잇달아 열리는 것은 세계 불교계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라며 “DMZ대전을 통해 불자들의 평화에 대한 소망을 모아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행사를 주최하는 한국참선지도자협회는 이론보다는 실참수행을 기본으로 봉암사, 해인사 등에서 수행한 30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스님들과 정신의학·명상심리학 등 관련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됐다. 참선과 명상의 대중화로 ‘명상 한류’의 본거지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향후 충주 석종사, 인제 백담사, 양평 상원사, 해남 미황사, 강화도 연등국제선원 등에서 ‘참선템플스테이’를 통한 집중수행을 분기별로 진행할 예정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선생님, 하늘에선 가야금 어떻게 들리나요”

    “선생님, 하늘에선 가야금 어떻게 들리나요”

    김미경·문양숙 국립국악관현악단원 오마주 공연…그를 떠올리며 보시길“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어요. 저는 이 소리가 이렇게 들리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국립국악관현악단 가야금 단원 김미경(49)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선생님이 살아계신다면….” 옆에 앉아 밝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던 같은 악단의 문양숙(43) 가야금 수석도 옛 생각이 떠오르는 듯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18~19일 국립극장 무대에 오르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의 ‘2018 마스터피스-황병기’ 공연을 앞두고 만난 두 사람은 “황병기 선생의 지인이 ‘이 공연은 꼭 너희가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제 이해가 된다”며 “선생님이 너무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고 가셨다”고 말했다. ‘2018 마스터피스-황병기’는 올해 1월 별세한 가야금 명인 고(故) 황병기 선생에 대한 오마주 공연이다. 김미경은 황 선생이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지낸 2006~2012년 가야금 수석으로 활동했고, 문양숙은 그 뒤를 이어 현재 수석을 맡고 있다. 예술감독으로 만나기 전까지 황병기는 그들에게 ‘스승의 스승’ 같은 분이었다. 다른 세계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황 선생이 예술감독에 취임하며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전성기를 맞았다. “선생님이 오시면서 연습실이 국립극장에서 가장 좋은 곳으로 바뀌고, 심지어 지방공연 때 타는 버스가 우등고속으로 ‘업그레이드’가 됐습니다. 말 그대로 ‘신분상승’이었죠.”(문양숙) 단원들은 털털한 성격의 황 선생의 매력에 금방 빠졌다. ‘정오의 음악회’, ‘사랑방 음악회’ 등 그가 기획한 공연도 큰 인기를 얻었다. 그는 직접 이들 공연의 사회를 맡아 대중과 호흡했다. 김미경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황 선생이 나오고, 관현악단으로 아이들의 팬레터가 많이 왔는데, 일일이 답장을 써 주셨다”면서 “공연이 끝나면 ‘황병기 위인전’을 들고 사인을 받으러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고 소회했다. 예술감독 임기는 3년으로 원래 2008년 끝나기로 돼 있었다. 마지막 공연이었던 제주의 한 숙소에서 초코파이에 초를 올려놓고 조촐한 파티를 하던 중 단원들은 그에게 “한번 더 같이 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 자리는 울음바다가 됐고, 황 선생이 연임한 계기가 됐다. 이번 이틀의 공연 중 18일은 ‘미궁’, ‘침향무’ 등 실내악 레퍼토리로, 19일은 ‘밤의 소리’, ‘침향무’에 대한 헌정곡 ‘심향’ 등 관현악 레퍼토리로 각각 꾸며진다. 가야금 단원 8명의 중주곡으로 편곡한 ‘침향무’는 마지막 3악장에서 수원 소화초등학교 학생들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 황 선생의 음악이 후대에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련하는 자리다. 김미경은 “황 선생의 생전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연주를 하게 되더라”며 “소리 하나하나가 자꾸만 마음에서 맴돈다”고 했다. 황 선생은 하늘에서 이들의 연주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가 생전에 했던 말을 떠올리면 조금이나마 짐작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선생님은 부모가 자기 자식을 잘 모르는 것처럼, 자기 음악도 남이 더 잘 아는 경우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죠. 어떤 질문을 해도 어렵게 말씀 안 하시고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업적과 인품을 생각하면서 함께 공연을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문양숙)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가야금 명인 고 황병기 향한 제자들의 오마주

    가야금 명인 고 황병기 향한 제자들의 오마주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어요. 저는 이 소리가 이렇게 들리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국립국악관현악단 가야금 단원 김미경(49)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선생님이 살아계신다면….” 옆에 앉아 밝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던 같은 악단의 문양숙(43) 가야금 수석도 옛 생각이 떠오르는 듯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18~19일 국립극장 무대에 오르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의 ‘2018 마스터피스-황병기’ 공연을 앞두고 만난 두 사람은 “황병기 선생의 지인이 ‘이 공연은 꼭 너희가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제 이해가 된다”며 “선생님이 너무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고 가셨다”고 말했다. ‘2018 마스터피스-황병기’는 올해 1월 별세한 가야금 명인 고(故) 황병기 선생에 대한 오마주 공연이다. 김미경은 황 선생이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지낸 2006~2012년 가야금 수석으로 활동했고, 문양숙은 그 뒤를 이어 현재 수석을 맡고 있다. 예술감독으로 만나기 전까지 황병기는 그들에게 ‘스승의 스승’ 같은 분이었다.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황 선생이 예술감독에 취임하며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전성기를 맞았다. “선생님이 오시면서 악단의 위상이 달라졌습니다. 연습실도 국립극장에서 가장 좋은 곳으로 바뀌고, 심지어 지방공연 때 타는 버스가 우등고속으로 ‘업그레이드’가 됐습니다. 말그대로 ‘신분상승’이었죠.”(문양숙)단원들은 털털한 성격의 황 선생의 매력에 금방 빠졌다. ‘정오의 음악회’, ‘사랑방 음악회’ 등 황 선생이 기획한 공연도 큰 인기를 얻었다. 그는 직접 이들 공연의 사회를 맡아 대중과 호흡했다. 그의 당시 인기는 세대를 초월했다. 김미경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황 선생이 나오고, 관현악단으로 아이들의 팬레터가 많이 왔는데, 일일이 답장을 써주셨다”면서 공연이 끝나면 ‘황병기 위인전’을 들고 사인을 받으러 오는 아이들도 있었다”고 소회했다. 예술감독 임기는 3년으로 원래 2008년 끝나기로 돼 있었다. 마지막 공연이었던 제주의 한 숙소에서 초코파이에 초를 올려놓고 조촐한 파티를 하던 중 단원들은 그에게 “한번 더 같이 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 자리는 울음바다가 됐고, 황 선생이 연임한 계기가 됐다. 이번 이틀의 공연 중 18일은 ‘미궁’, ‘침향무’ 등 실내악 레퍼토리로, 19일은 ‘밤의 소리’, ‘침향무’에 대한 헌정곡 ‘심향’ 등 관현악 레퍼토리로 각각 꾸며진다. 대표적인 독주곡을 가야금 단원 8명의 중주곡으로 편곡한 ‘침향무’는 3악장에서 수원 소화초등학교 학생들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 황 선생의 음악이 후대에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마련하는 자리다. 김미경은 “황 선생의 생전 모습을 머리 속에 그리면서 연주를 하게 되더라”며 “소리 하나하나가 자꾸만 마음에서 맴돈다”고 했다. 황 선생은 하늘에서 이 연주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가 생전에 했던 말을 떠올리면 조금이나마 짐작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선생님은 부모가 자기 자식을 잘 모르는 것처럼, 자기 음악도 남이 더 잘 아는 경우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죠. 어떤 질문을 해도 어렵게 말씀 안하시고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업적과 인품을 생각하면서 함께 공연을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문양숙)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쉽게 문 열지 않던 수도원·미술관…한양도성 품은 마을처럼 환대하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쉽게 문 열지 않던 수도원·미술관…한양도성 품은 마을처럼 환대하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7회 성북(북정마을 가는 길) 편이 지난 8일 성황리에 진행됐다. 매주 월요일 0시에 시작되는 치열한 예약전쟁을 뚫은 예약자 30명과 대기자 10명 등 모두 40명이 이날 10시 정각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에 모였다. ‘노쇼’에 대비, 대기자를 뒀지만 무단결석자가 사라지면서 예약자와 대기자 구분 없이 정원이 40명으로 늘어난 지 오래다. 걷기 좋은 날씨, 더할 나위 없는 코스에 대한 기대감이 참석자들을 들뜨게 했다.베테랑 해설자 최서향 서울도시문화지도사가 안내한 이날 코스는 한양도성 혜화동전시안내센터를 출발, 성북동 국시집~최순우 옛집~마전터 표지석~북정마을~성북동 비둘기 소공원~만해의 심우장~이종석 별장~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옛 본원 및 복자사랑 피정의집~이태준의 수연산방~쌍다리식당~간송미술관의 순서로 이어졌다. 어느 곳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역사와 사연의 손때가 묻은 곳이다. 성북동의 명소이지만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옛 본원과 성당이 이날 처음으로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에 공개됐다. 한국인이 창설한 최초의 수도원인 두 곳 모두 서울미래유산이다. 일행을 안내한 신부님의 입에서 “최초 공개”, “첫 방문”이란 말이 반복됐다. 또 매년 5월과 10월 두 차례만 일반인의 방문을 허용하는 간송미술관도 답사단이 보화각과 간송 흉상을 직접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설문에 응한 23명의 참가자는 “평소 가고 싶었던 곳, 가려운 등을 콕 집어 긁어주는 코스”, “2시간 30분도 짧은 듯”, “새록새록 앎이 즐겁다”, “신부님의 해설 감동, 해설자의 해설 만족”이라는 호평을 소감으로 남겼다.조선시대 혜화문 성곽 안과 밖은 딴 세상이었다. 성곽 안 동촌은 사대부를 중심으로 동인들이 살던 양반마을이었지만 성곽 밖은 찢어지게 가난한 자내(字內) 산골이었다. 자내마을은 성곽을 지을 때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하늘 천(天)에서 조상할 조(弔)까지 97개의 글자 구간으로 나눠 축조한 구간을 말한다. 자내마을은 지명이 없이 구간의 이름이 주소 역할을 했다. 지금도 이 구간 성곽의 안은 종로구, 바깥은 성북구 성북동과 동소문동으로 행정구역이 갈린다.해방 이후 서울의 행정구역은 종로구와 중구 등 옛 도심에 접한 지역은 사대문을 중심으로 남대문구, 서대문구, 동대문구라고 이름을 붙였고, 나머지 성저십리(성 밖 십리)마을은 도성의 동쪽과 북쪽이라는 뜻에서 성동구와 성북구로 정했다. 성북구는 말 그대로 성 밖 북쪽 마을이다. 한양도성은 성안과 성 밖 주민의 신분을 구분 짓는 엄격한 경계였다. 성곽이 해체되고, 삶의 공간이 확대되면서 성은 분리와 경계의 대상에서 삶의 질과 경관의 대상으로 변했다. 근현대 변혁의 물결 속에서 옛것이 사라져버린 성 안보다 오히려 성 밖이 각광받는 세상이 됐다. 성 안은 아파트와 빌딩이 점령했지만, 성 밖은 숲과 한옥과 골목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시인 김지하는 ‘오적’에서 성북동을 재벌, 국회의원, 장·차관, 장성, 고급공무원이 사는 도둑촌으로 지목했지만 덕분에 성북동은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서지 못하는 품격 있는 동네로 남았다. 성북동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조선시대 선잠단이 성북동의 정체성이다. 선잠단은 양잠(養蠶)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 신성한 공간이다. 농업과 잠업은 중세 사회의 두 축이었다. ‘남경여직’(男耕女織)이라고 해 남자는 논밭을 갈고, 여자는 베를 짜는 게 본분이라고 여겼다. 권농은 왕이, 권잠은 왕비가 직접 주관했다. 사람이 살지 않은 혜화문 밖 마을의 최초 이주자는 숙정문과 혜화문을 지키는 군인가족들이었다. 농사 대신에 시전에서 판매하는 포목을 잿물에 빨아서 삶아 말리는 일(마전)을 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먹고살았다. 겨울철에는 메주를 담가서(훈조) 시전에 납품했다. 둘 다 군인과 가족들을 위한 영조의 생계조치이자 특혜였다. 지금의 성북초등학교는 빨랫감을 말리는 장소였고 북정마을은 메주를 쑤는 동네였다. 빨래골, 북적골이라는 지명이 전해졌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성곽마을 북정마을이 북적골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일제강점기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는 식민지의 수도 경성이 꼴 보기 싫어서 등을 지고 사는 사람들의 본거지였다. 만해 한용운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들이 깃들고, 이태준과 박태원에 이어 청록파(조지훈·박두진·박목월) 시인의 청록집이 만들어진 문화예술인촌이었다. 한국전쟁 후 피란민과 월남민들이 도성을 따라 판잣집, 토막집을 지었고 1970년대 이후에는 고급주택이 들어섰다. 도성 밖 북쪽 성벽에 기댄 채 북향을 하고 사는 남쪽마을은 서민들이, 구준봉 아래 양지바른 언덕에 남향을 하고 사는 북쪽마을은 부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성북동의 새 정체성을 만든 사람은 간송 전형필과 혜곡 최순우이다. 간송은 만석꾼 문화재 수장가요, 혜곡은 국립박물관 학예사 출신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고스란히 넘어갈 위기에 처한 간송미술관의 소장품을 지킨 혜곡에게 간송이 큰절을 올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회자되지만 정작 두 사람의 인과 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이충렬이 쓴 ‘간송 전형필’과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라는 두 권의 책을 종합해 보면 간신히 의문이 풀린다. 두 사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두 달여 전인 1950년 4월 16일 수장가와 학예사로 처음 인사를 나눴다. 흔히 ‘천학매병’이라고 알려진 ‘청자상감운학매병’을 간송이 국보특별전시회에 출품하자 같은 해 4월 30일자 서울신문에 혜곡이 ‘역사에 빛나는 도자기’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게 계기였다. 간송이 만남을 청했으나 이때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얼마 후 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은 보화각(간송미술관)의 문화재를 평양으로 옮길 사람으로 혜곡과 소전 손재형을 지목했다, 혜곡과 소전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힐 때까지 목숨을 걸고 포장을 늦춰 문화재의 북송을 막았다. 이후 간송은 혜곡을 아우이자 애제자로 대했고 혜곡은 간송을 큰형님이자 스승으로 존경했다고 한다. 최순우는 간송이 감사의 마음으로 혜곡에게 선물한 필명이다. 혜곡의 집안 항렬자인 순박할 순(淳)에 간송 집안 아들항렬 돌림자인 비 우(雨)자를 합해 순우(淳雨)라는 필명을 만들어 준 것이다. 처음에는 최희순이라는 본명과 병행해서 사용하다가 1950년대 후반부터는 최순우란 이름을 본명처럼 썼다. 간송은 스승 위창 오세창에게서 물려받은 문화재 감식안과 필생의 안목을 혜곡에게 낱낱이 전수했다. 위창과 간송이 고졸 출신의 혜곡을 한국미의 순례자에 오르게 했다. 스물네 살 때 조선의 거부 40인에 들 정도로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은 뒤 위창으로부터 받은 ‘문화보국’의 기치를 마음에 심은 간송이 왜 하필 성북동에 최초의 사설박물관을 지었을까. 간송 또한 만해처럼 식민지의 수도 경성을 등지고, 일제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고자 했다. 1938년 4년여의 공사 끝에 최초의 조선인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박물관이 완공되자 위창은 ‘빛나는 보배를 모아 두는 집’이라는 뜻에서 미술관 건물을 보화각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박물관의 본래 이름은 북단장(北壇莊)이었다. 1934년 수장고로 사용할 건물이 먼저 완성되자 위창은 북단장이라는 당호를 붙였다. 일제가 사직단과 합친다며 선잠단을 해체하자 사람들이 박물관 터를 ‘북쪽에 있는 선잠단’이라는 뜻에서 북단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현대의 성북동을 이루는 근대의 간송미술관은 결국 중세 선잠단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송파(백제의 꿈) ●일시 : 9월 15일(토) 오전 10시~낮 12시 ●집결 장소 :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역 6번 출구 앞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홍성룡 서울시의원, 시민안전 위협하는 버스정류소 시설물 전수조사 및 대책마련 요구

    홍성룡 서울시의원(더불어민주당·송파3)은 지난 10일 버스정류소에 설치되어 있는 교통표지판, 가로수, 전신주 등 각종 시설물이 버스 승하차시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시장에게 보낸 서면질의서를 통해 전수조사를 통한 안전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시내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버스정류소 특히, 가로변 버스정류소를 보면, 교통안내 표지판, 정류소 안내표지판, 교통신호 제어기, 공중전화부스, 소화전, 분전함, 신문 배포대, 가로수, 전신주, 화단 등 각종 시설물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울시의회 도시안전건설위원회에서 활동 중인 홍 의원은 “버스를 이용하는 시민들은 시야를 가리고 승하차를 방해하는 각종 시설물들을 피해 차도까지 나와서 버스에 오르내리고 있고, 버스도 차도에 나와 있는 시민과 시설물을 피하기 위해서 정류소에서 훨씬 못 미친 곳에서 정차를 하고 있다”고 말하며 “버스 승하차 장소에 각종 표지판, 가로수, 전신주 등이 있으면 시민들이 시설물에 부딪히거나 넘어질 위험이 있고 특히,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 영유아를 동반한 사람, 어린이 등 교통약자의 비율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버스정류소에 있는 각종 시설물들은 교통약자에게 ‘흉기’나 다름이 없다”고 지적했다. 홍 의원은 이어 시민들이 장애물을 피하느라 승하차 시간이 길어지면 이는 곧 교통체증으로도 이어진다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안전사고와 교통체증을 시민의 부주의와 버스기사의 규정 미준수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홍 의원은 2017년 9월 서울시 도시교통본부에서 발간한 ‘버스이용편의 제고 및 이용환경 개선을 위한’ 「가로변 시내버스정류소 설치 및 운영 지침」에 시민들의 승하차 불편 장애물 철거(이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며, “서울시의 가로변 버스정류소 개선사업의 목표가 단순히 버스승차대의 교체나 신설인지 아니면, 시민들의 이용편의 및 안전성 향상인지 묻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 의원은 “버스정류소는 기본적으로 시민과 버스사이에 어떠한 장애물도 없는 ‘무장애(barrier free) 정류소’가 되어야 한다”면서, 시장에게 보낸 서면질의서를 통해, △ 서울시내 모든 가로변 버스정류소에 대한 전수조사 실시, △ 안전을 위협하고 있는 시설물들에 대한 개선대책 수립, △ ‘무장애(barrier free) 정류소’ 설치계획을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경계 또는 분리

    경계 또는 분리

    ‘경계’와 ‘분리’. 지난 7일과 8일 하루 차이로 개막한 광주비엔날레와 부산비엔날레의 주제어는 묘하게 닮아 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경계’와 ‘분리’의 한 양태인 북한 관련 전시가 눈에 띄는 것도 비슷하다. 비슷한 시기 두 달여 대장정에 들어간 광주와 부산, 비슷한 듯 다른 매력의 두 비엔날레에 빠져보자.●1만 6000보의 광활함… 광주비엔날레 1만 6000보. 지난 6일 열린 광주비엔날레의 프레스 오픈에 참석한 기자들의 걸음 수다. 구두 신고 나섰다가 크게 낭패를 봤다. 11명의 큐레이터를 선임한 광주비엔날레는 늘어난 큐레이터 숫자만큼이나 광활한 스케일을 자랑했다. 7개의 주제전은 기존의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까지 저변을 확대했다. 이 외에도 5·18민주화운동의 현장인 전남도청 회의실, 옛 국군광주병원, 전일빌딩 등 도심 곳곳이 전시관이 됐다. ‘상상된 경계들’이라는 슬로건 아래 43개국 165명의 작가가 참여한 광주비엔날레는 모더니즘에 기반한 건축의 효과와 갈등을 보여 주고(상상된 국가들/모던 유토피아), 동남아의 ‘국경이라는 유령’과 마주하는 한편(‘경계라는 환영을 마주하며’), 포스트 인터넷 시대 정보격차가 불러온 부작용과 폐해를 환기(‘종말들: 포스트 인터넷 시대의 참여정치’) 했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 창설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아카이빙(‘귀환’)까지 시도, ‘상상 가능한 모든 경계들’이 나열돼 산만한 느낌이었다. 기획 단계서부터 화제를 모았던 ‘북한미술: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패러독스’전은 ‘사회주의 미술은 획일적일 것’이라는 편견을 날려 버릴 좋은 기회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큐레이터 문범강 미국 조지타운대 교수는 스승과 제자의 산수화를 비교하는 것으로 답했다. “스승 정영만의 그림은 유려한 운무가 돋보이는 반면 제자 최창호는 산세의 웅혼한 기상을 그려 같은 산수화여도 그 느낌이 다르다.” 반항적이고 심술궂은 캐릭터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일본 작가 나라 요시토모의 작품도 반갑다. 10가구, 30명만 남아 있는 일본의 북쪽 경계, 도비우의 아이들을 실제 사람 크기와 흡사하게 그렸다. 그 지역에서 나는 목탄으로 그려진 그 아이들과 가만 눈을 맞추고 있노라면 곧 사라질 것들, 잊혀질 것들에 대한 슬픔이 오롯이 밀려온다.●메가 전시 시대는 끝… 부산비엔날레 “가장 전문적인 관람객들마저도 지치게 만드는 초대형 전시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다.” 부산비엔날레의 외르그 하이저 큐레이터는 지난 7일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광주를 ‘저격’한 듯한 발언이었다. 300여점의 작품을 내놓는 ‘국내 최대 규모´ 광주와 달리 부산비엔날레는 33개국 66개팀이 참여, 작품 125점을 선보인다. ‘비록 떨어져 있어도’라는 주제가 “광주와 콘셉트가 겹친다”는 질문에는 “우리는 분리된 영토로 인해 분열된 사람들의 심리에 초점을 둘 것”이라고 말했다. 집약적인 전시가 주는 서사를 표방한 부산비엔날레는 전시장 입구부터 눈길을 끌었다. 부산현대미술관 1층에는 공항 체크인 구역에서 볼 법한 철과 나일론 재질의 검은색 바리케이드가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가 에바 그루빙어의 ‘군중’이다. 작품에는 군중을 통제하기 위한 메커니즘에 따라 물류를 관리하듯 인체의 흐름을 구조화한다는 설명이 붙었다. 빠듯한 일정에 쫓기던 기자들은 바리케이드를 넘기도 했는데, 메커니즘에 반항하는 것 또한 인간의 몫인 까닭이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로 붐볐던 고장답게 부산에서도 ‘북한’은 주요한 테마다. 천민정의 ‘초코파이 함께 먹어요’는 북한에서 인기 있는 암거래 품목인 초코파이 5만개를 쌓아 관람객들이 먹을 수 있게 했다. ‘며칠 만에 동날 것 같으냐’는 질문에 작가는 “학생들이 단체로 와서 2~3개씩 집어먹으면 금세 없어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동나면 추가로 5만개의 초코파이가 긴급 수혈(?)될 예정이다. ●각자의 리듬으로 즐기는 비엔날레 프레스 오픈 내내 작가들에게 쇄도했던 질문은 “이건 무슨 의미인가요”, “이렇게 표현하신 데 어떤 법칙이 있나요”였다. 부산비엔날레에 ‘부산, 1:10,000’을 출품한 최선아 작가는 “특별한 법칙은 없고 개인적으로 사연이 있는 지역들을 지도에서 오려낸 것”이라고 답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린들 작가의 개인사까지 알 수는 없다. 그저 느낄 뿐.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만 모르는 만큼 편견 없이 마주해 나만의 스토리텔링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부산에서 만난 일본 작가 유이치로 다무라의 작품 ‘거미줄’은 붉은 글귀 아래 형형색색의 스카잔(화려한 자수가 놓인 항공 점퍼)이 인상적이었다. 그 앞에서 셀피를 찍던 기자에게 작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 주둔했던 미군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수집품이 이 스카잔”이라며 냉전 시대의 표상으로서 스카잔을 설명했다. 그날 기자는 인스타그램에 그 붉은 글귀가 찍힌 사진을 올렸다. “I´VE SPENT MY TIME IN HELL.” 글 사진 광주·부산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조성룡·심세중의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통하는 길·공존하는 삶… 사람 품은 도시, 근대 문화를 낳다

    [조성룡·심세중의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통하는 길·공존하는 삶… 사람 품은 도시, 근대 문화를 낳다

    한결 선선해진 서울 광화문의 한밤, 하수도 정비 공사 소리가 늘 같은 고요를 비집는다. 노숙자가 모로 누운 화강석 벤치, 한 칸 건너 형광색 조끼를 입은 인부들이 어둠 속에 잡담을 뿌린다. 어제는 가로등을 정비하더니, 맞은편에는 물청소차가 천천히 지난다. 폭염도 폭우도 갔나 보구나. 내일이 밝으면 또 몇 군데 크고 작은 시위가 있을 것이고, 이 가을에도 광화문 모서리에서 몇 구절 시구가 태어날 테지. 이 익숙한 도시의 밤 풍경은 150년 전 프랑스 제2제정 시대(1852~1870년) 파리에서 시작되었다.나폴레옹 3세의 독재 치하에서 오늘날 파리의 밑그림이 그려졌고, 당시 파리 시장(정확하게는 센(Seine) 구의 수장)을 맡았던 외젠 오스만의 과감한 개조 사업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편이다. 그 소개에는 언제나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못 치게 하려고 대로를 뚫은 독재의 조력자, 빈민가를 순식간에 철거하고 집세를 급등시킨 자본주의 첨병이라는 평가가 덧붙는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오스만이 잘못했다고 배웠어요. 노동자들을 쫓아내고 철거민을 만들고 부자들 좋도록 재개발을 했으니까. 그런데 요즘 돌이켜 보니까 당시에 오스만이라는 사람이 그나마 생각을 많이 했어요. 물론 오스만이 처음은 아니고, 나폴레옹 때부터 그런 구상을 했다고 해요. 파리를 유럽의 수도로 만들자. 나폴레옹 3세도 좋은 도시가 되려면 어떻게 돼야 하는가를 나름대로 연구했어요. 독재를 하면서 시위 진압하기 편하게 하려고 시작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거로 끝나지 않고 결국에는 좋은 도시가 되게 하려고 노력했거든요.” 그러나 여전히 찜찜하다. 독재자가 독재적 방법으로 만드는 것이 좋은 도시일 수 있는가? 좋은 도시라는 것은 무엇인가? “좋은 도시라면, 우선 통해야 돼.” 음, 스승의 가르침은 이렇게 간단한 것인가? 발자크와 위고의 소설에 등장하는 파리의 골목이라고 하면, 종로의 피맛골 같은 대로의 뒷골목을 상상하곤 하지만, 사실 1850년까지 파리라는 도시의 거의 모든 길은 평균 폭이 1~2m에 지나지 않았다. 4층 넘는 건물이 빽빽한 인구 백만의 도시에, 곧은 길이라고는 없이 구불구불하고 막다른 데다가 가장 넓은 도로라고 해 보았자 폭이 5m도 되지 않았으니 파리에는 오로지 골목밖에 없었다. 마차나 수레가 드나들지 못했다. 당시 한 보고서에 따르면 5㎡짜리 옥탑방 한 칸에 23명의 어른과 어린이가 바글바글 살면서 그 생활 오물과 폐수를 그냥 길 앞에 내다버렸으니, 하루 종일 해도 바람도 들지 않는 좁은 골목 환경이란, 사람들이 하수구 속에 사는 꼴이었다. 콜레라가 창궐한 것은 그 하수가 그대로 상수에 섞여들고 집들이 너무 다닥다닥했기 때문이다. 도시 생활을 견디지 못한 성난 민중들이 집앞 바닥 포장돌을 파내서 쌓으면 바로 기마대를 막을 수 있었으니 그것이 혁명기에 고안되었다는 바리케이드의 정체였다.파리를 개조해야 한다는 제안은 18세기부터 꾸준히 있었다. 그러나 어떤 전제 군주도 손댈 생각 없었던 도심을 가꾸기 시작한 것은 나폴레옹 황제였다. 콩코르드 광장부터 루브르를 지나는 리볼리 가를 닦기 시작했지만 마치지 못했다. 나폴레옹의 실각으로 유년기를 유럽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보냈던 조카 루이 나폴레옹은 자유주의에 관심을 가졌고, 영국 런던에 머물면서 그 도시 경관에 크게 감동했다. 그가 1848년 선거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데에는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의 향수에 더해 서민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공약에 힘입은 바 컸다. 파리는 프랑스의 심장이고 위대한 도시라고 열을 올리며 불로뉴 숲을 런던 하이드 파크를 능가하는 공공 공원으로 조성하고 삼촌이 못 마친 리볼리 가의 연장 공사에 착수했지만 사업이 더뎠다. 임기 내에 공약을 이행하지 못할 형편이 되자 재선이 불투명해졌고 불안감에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종신을 선언한 나폴레옹 3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신임 파리 시장을 찾는 것이었고, 그때 배짱과 열정에 충만한 오스만을 만났다. 1853년 취임 첫 주인 오스만에게 파리 지도를 펼쳐 보이며 “통하게, 통합되게, 그리고 아름답게” 만들어 보라고 명했다.“오스만이 처음에 한 일이 동서하고 남북으로 대로를 십자(그랑 크로아제)로 내요. 이렇게 하면 도시가 고르게 발전되죠. 그다음에 동서남북 네 길 끝에 역을 연결하고 도시를 순환하는 대로를 내요. 모든 게 연결되도록 만든 거지.” 6년 만에 1단계 사업이 완료되자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파리 시민들은 환영했다. 나폴레옹 3세는 오스만에게 어째서 같은 건축가와 계속 작업했는데 제대로 되지 않던 사업이 갑자기 순조로워졌는지 오스만에게 물은 적이 있는데, 자신만만하게 ‘시장이 다른 사람이니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대로는 정말 독재자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서 뚫은 것일까? 나폴레옹3세 치하 파리에서 진압할 만한 봉기는 일어난 적이 없었다(파리 코뮌은 정작 실각 후다). 오스만은 훗날 보수적 의회에서 예산을 따낼 명분으로 내세웠을 뿐이라고 변명한 바 있다. 실로 오스만은 치밀했다. 폭 20m가 넘는 대로는 시위꾼 노동자들이 우글거리는 불량 주택만 없앤 것이 아니었다. 교통 정체와 오물과 매연도 사라졌다. 거기에 인도가 생겼고, 빛과 바람과 가로수가 도로를 채웠다. 오스만의 파리 개조에서 더 중요한 것은 대로의 지하, 보이지 않는 데 있었다. “첫 번째, 위생이다. 그래서 파리의 하수도 계획이 선 거예요. 굉장히 잘한 거죠.”파리 인구 전체에 배분될 분량을 계산해 상수원을 끌어왔다. 새로 판 거대한 하수도는 가스등과 다음 세기에 지하철이 지날 관이기도 했다. 시에서 받은 제복을 입은 인부들이 매일같이 하수에 모인 빗물로 도로를 청소하고 수만 그루의 가로수를 다듬고 가스등을 켜고 끄는 도시 풍경이 처음 탄생했다. “두 번째, 도시에 빈 데가 많아야 된다. 사람들이 숨 쉴 수 있는 공원도 숲도 만들었죠. 관통하고 호흡하게 만든 거예요. 오페라 극장이며 에펠탑도 서는 건 그다음이죠.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의 파리가 탄생했습니다.” 오스만은 공원 울타리, 벤치, 신문 가판대, 공중 화장실, 광고판 같은 도시의 공공시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설계하고 도시 전체에 고루 일관되게 적용했다. 그것은 상하수도처럼 시민 모두가 누릴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중요한 것은 가로변에 철거한 다음 새로 지은 건축물들이었다. 같은 길에 면한 건물들은 서로 주인이 달라도 모두 하나로 이어져 보이도록 짓게 했다. 실내에서야 아무리 개성적으로 호화판으로 살든, 대로변 외관에 건축주의 부를 뽐내는 조각품이나 맥락을 끊는 디자인은 엄격히 금했다. 외벽 마감은 인근에 흔한 석재로 통일하고, 같은 형태의 테라스 난간을 설치하게 했다. 모든 건물은 최소한 10년에 한 번씩 일제히 보수하고 청소해야 했다. 사소한 데까지 꼼꼼하고 일관된 규제 속에 지어져 ‘오스만 건축’이라고 불리게 된 이 건물들은 하나하나 튀지는 않지만 방문객을 파리의 장대한 원근법으로 초대한다. 그러나 그것은, 관광용 유물이 아니라 삶의 풍경이다. 대로변 건물의 2~3층은 가족이 많은 부유층의 아파트고, 5층이나 6층에는 독신자나 노동자, 학생들이 살았다. 도시 전체가 상가이자 동시에 주택가고, 빈부가 한 지붕 밑에 공존했다.파리 도심에는 고층 아파트가 없지만 인구 밀도는 1㎢당 2만명이 넘어 서울보다 훨씬 높다. 근대의 수도, 파리 시민들은 추리닝 차림으로 자가용을 끌고 외곽의 대형 쇼핑몰을 가는 대신에 차려입고 1층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작은 가게들을 산책하며 쇼핑하고, 길이 끝나는 데서 저녁의 오페라를 즐긴다. 위정자의 영광을 향한 길이 아니었다. 오스만은 파리의 오래된 역사적 건축들이 돋보이는 각도로 새 길을 냈고, 도시의 구마다 고르게 크고 작은 녹지 공원과 광장을 조성했다. 이 대대적 사업을 순식간에 시행하기 위해서 권력을 등에 없고 법을 개정하고, 자본가의 도움을 빌어 투자 회사를 설립했으며 수만 명의 노동자를 동원했다. “일을 끊임없이 벌이고 세금 많이 걷으니까, 결국 오스만은 그래서 실각하죠. 자동차 시대를 예견했는지는 모르지만, 모던한 도시 계획인 거고, 유럽의 근대 도시가 여기서 출발하는 겁니다. 미국 시카고, 워싱턴, 바르셀로나, 빈…, 그런 대도시가 다 파리를 따르거든요. 그 기틀이 뭔지 자세히 봐야 할 거예요. 여러 사람을 괴롭혔지만 결과적으로 도시를 문화적으로 굉장히 성숙하게 만들었어요. 사람들이 불도저 김현옥 시장을 오스만하고 비슷하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쉽게 말할 게 아니에요. 그리고 그들은 한 세기 전에 오스만이 해 온 것을 비판도 하지만 새로 연구하고 근사하게 이어받아서 라데팡스를 만들었어요. 그러면 정도전이 만들어 놓은 서울이 확장될 때 우리는 무엇을 놓친 건가….” 르코르뷔지에를 위시한 모더니스트들이 비난을 퍼부은 오스만의 파리 개조가 왜 모던한 도시의 출발인가. 데이비드 하비는 모더니즘의 본질을 획일적 전통에 대한 ‘창조적 단절’이라고 말한다. 황현산 선생이 평생 연구했듯, 누구나 뻔히 공감할 완결된 서정성을 과감하게 뚫는 아이러니가 프랑스 상징주의의 모던한 시 정신이고, 그 정신이 제2제정기의 파리에서 태동했다. 1960년대 쿠데타 이후 반세기, 서울이 낳은 시와 도로를, 서울이 남긴 역사와 어둠을 지운 야경을 떠올려 본다. 격자 대로를 가도 가도, 600년 전 북악과 광화문에 맞먹을 비스타를 마주칠 일이라고는 없는 강남과 여의도에서 터전을 닦은 중산층은 이제 그들이 세운 도시를 깨끗이 철거하고 역사를 지우는 데 바쁘다. 폭염이 지나자 여기저기서 재개발과 폭등과 재생이 터져 겨루는 서울은 어떤 미래를 꿈꾸는가. 기획 수류산방 조성룡 건축가·도시건축 대표 심세중 수류산방 편집장
  • 미스터 션샤인을 따라간 안동의 두 정자

    미스터 션샤인을 따라간 안동의 두 정자

    드라마에서 눈에 익숙한 풍경이 어딘지 궁금하던 차에 역사다큐에 연산군과 무오사화 이야기를 보고 있자니 만휴정이라는 이름이 번뜩 떠올랐다. 스파트폰으로 “만휴정”을 검색해보니 ‘미스터 션샤인’ 촬영장소라는 제목으로 우르르 정보가 쏟아진다. 같은 안동에 ‘고산정’도 함께 나온다.실제로 그 경치가 신선놀음하기 딱 좋은 곳이라 두 정자를 소개하는 것도 괜찮다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평일 낮시간에 갑자기 가려니 동행을 못 구해 혼자 청승을 떨었다. 우리 전통조경은 마치 바람이 씨를 뿌린 듯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 그 대표적인 곳이 창덕궁의 후원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순리라 분수를 만들지 않았다. 나무와 꽃은 땅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제 위치라 분재를 만들지 않았다. 우리 건축물 중 자연 속에 있는 정자는 조경에서 나무의 위치가 그렇듯 그렇게 자연스러운 위치에 지어졌다. 자연과 완벽하게 조화되어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을 듯한 위치에 앉아있다. 그래서 그 정자에 가지 못해도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큰 아쉬움이 없다.안동에 있는 두 정자 역시 산을 오르다 멀리서 보고 지나쳐도 자연 속의 일부라는 느낌을 주는, 마치 화룡점정을 찍은 듯하다. 만휴정(晩休亭)은 글자 그대로 느지막이 쉬는 정자다. 무오사화로 친구 김종직과 제자들을 잃은 후 청렴과 강직함으로 많은 정적이 생겨 각종 모함으로 출사와 파면을 반복하던 보백당 김계행이 낙향해서 70이 넘어 지은 정자다.이이와 이황의 계보를 따라가면 김종직이 있고 김계행은 김종직과 뜻이 제일 잘 통하는 친우며 학문적 교류도 많았으니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이이와 이황에게도 그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소나무와 바위가 많아 송암계곡이고 만휴정 아래의 폭포이름 또한 송암 폭포다. 폭포의 아래쪽에서 보면 마치 낙수장(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설계한 폭포위의 집)을 연상시킨다. 등산로를 따라 오르기 5분 후에 송암폭포를 만난다. 멀리서 보기 아까워 계곡으로 내려가면 폭포 위에 떠 있는 듯 정자가 하나 보인다. 그 순간 관심은 폭포에서 정자로 옮겨간다. 50여 미터를 더 오르니 만휴정으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소박하게 숨어있다.만휴정이라는 푯말이 없어도 폭포와 너럭바위가 궁금해서 들어가 볼 수밖에 없는 진입로다. 진입로를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나무에 가려졌던 풍경이 드러나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예쁜 또 하나의 폭포가 보이고 폭포 아래 계곡을 건너는 날렵한 다리와 건너편 정자가 한눈에 들어온다. 누구라도 영화를 찍고 싶을 만한 경관이다. 다리 앞에 서니 난간도 없이 겨우 한 사람 지나갈만한 반듯한 통나무 다리는 마치 대문에 꽂힌 듯 방향성이 뚜렷하여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딛게 한다. 좀 여유가 생기는 것은 다리의 끝이 대문과 살짝 비켜있고 몇 단을 올라 서서 문이 있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여유를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드라마속 유진초이가 고애신에게 ‘나와 같이 러브하지 않겠냐’는 대사가 너무 잘 어울리는 곳이라 화면 속에 잘 녹아들어 있다. 좁고 높은 다리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에 대한 암시가 있는 듯하다. 김계행이 내려다보며 두 젊은이의 사랑이 시작되는걸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겠다 싶다.정자 자체는 소박하다. 소박한 주인공이 예뻐 보이는 걸 방해하지 않을 만큼 간결한 다리를 만든 사람은 참 배려심이 많은 사람일 듯하다. 정자는 정면이 여덟자 세 칸 합이 스물네자 7.2m에 측면 역시 여덟자 두 칸 열 여섯자 4.8m의 소박한 정자다. 여섯 간 중 뒤 협간 두 간이 방이고 네 간은 마루며 정면 세간은 기단 없이 기둥을 지반에 직접 내려 누각의 효과를 높였다. 뒤로 돌아가 정자에 오르니 물소리 새소리에 주변은 온통 녹색이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폭포가 보이고 왼쪽에는 폭포에서 떨어지기 직전 겁에 질린 물줄기가 바위 뒤로 숨는 것이 보인다. 뒤의 양쪽 협간에 방을 꾸몄다. 앞뒤 간 두 개의 대들보에 동자주를 얹어 가운데 기둥을 건너지르는 종보를 건 조금 색다른 양식이다. 평일 낮시간에도 사람들이 꾸준히 찾는 것을 보니 이제 방안에 비가 새어 흉한 모습은 곧 고쳐지겠지 싶다.고산정은 이황의 제자 금난수가 지은 정자로 그 절경에 시가 저절로 나오는 곳이라 스승인 이황을 비롯한 많은 학자가 이곳을 찾아 함께 시를 짓고 학문적 교류를 하던 곳이다. 가송마을을 지나니 작은 다리가 하나 놓여 있다. 다리를 건너 왼편으로 하천을 따라 가다보면 고산정의 왼쪽 면이 보인다. 정자 옆의 절벽과 강의 풍경에 정자가 살짝 파고들어 제 집인양 앉아있다. 가송마을과 낙동강 가송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으며 청량산을 오르는 길목에 위치한다. 자연석 축대를 높이 쌓아 정자를 만들었다. 전면 세 칸에 측면 두 칸의 정자에 왼쪽 후면은 처마 밑을 달아내었다. 정자의 마루는 높지 않고 마루의 모든 변을 판문으로 막았다. 강 건너 적벽바위 옆 정자는 그 풍경을 더 아름답게 한다. 자연 속에 짓는 건축은 이런 것이다. 자연경관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녹아들어 하나가 되는 건축이어야 한다. 많은 화가가 고산정의 풍경을 그렸으며 정자 안에는 이황을 비롯한 당시 내 노라 하는 문호들이 이곳에서 쓴 시들이 걸려 있다. 이 정자 역시 같은 드라마에 종종 등장하는 곳이다. 강 건너 나루터에서 애신과 유진이 배를 타고 가마로 출발하는 곳이다. 이곳과 가마터로 나오는 만휴정은 실제 한 시간 거리지만 드라마에서는 마치 고산정이 만휴정인 듯 보인다.칸 수는 전면 세 칸에 측면 두 칸이라 멀리서 보면 만휴정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한 간의 폭이 조금 넓고 뒤 간의 한쪽 방을 처마 밑으로 달아내었다. 전면의 판문을 열면 강이 보이지만 문이 없는 만휴정에 비하면 개방감이 떨어진다. 두 정자를 보면서 우리 건축문화유산이 현대의 문화를 만나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니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의 장소를 찾아낸 제작진의 심미안에 박수를 보낸다. 안동에 있는 이황의 묘역을 찾아 인사하는 것으로 두 정자의 기행을 마친다.글: 최세일 한건축 대표
  • ‘미스터 션샤인’ 김태리, 최무성에 반절 인사 ‘먹먹한 이별’

    ‘미스터 션샤인’ 김태리, 최무성에 반절 인사 ‘먹먹한 이별’

    ‘미스터 션샤인’ 김태리가 총포술 스승인 최무성에게 눈물이 어린, 반절 인사를 건네는 뭉클한 순간이 공개됐다. 2일 tvN 주말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측은 김태리와 최무성이 서로를 향해 깍듯하게 반절을 나누면서 각자의 길을 가는, 이별의 순간의 스틸을 공개했다. 극중 짧게 깎은 머리에 경위원 총관 복장을 한 승구(최무성)가 애신(김태리)과 마주 서 있는 장면. 승구의 달라진 외양에 애신은 감격스러우면서도 섭섭함을 내비치고, 이제는 더 이상 총포술을 가르칠 수 없는 승구에게 진심어린 마음으로 반절을 올리면서 눈물을 떨군다. 때로는 부녀지간처럼, 때로는 결연함을 지닌 동지로, 서로를 신뢰하는 두 사람의 이별 인사가 담기면서 가슴 먹먹한 울림을 전하게 될 전망이다. 눈물어린 반절 인사 장면에서는 김태리와 최무성의 돈독한 사제 케미가 더욱 빛을 발했다. 평소 장포수 시절의 분장과는 다른, 경위원 총관의 복장과 짧은 머리로 등장한 최무성에게 김태리는 다정하게 인사를 건넨 후 달라진 분위기에 대해 웃음 가득한 대화를 나눴던 상태. 김태리는 예의바르게 최무성을 챙기는가 하면, 최무성은 김태리를 다독이며 세심하게 배려하는 모습으로 현장을 훈훈하게 달궜다. 특히 촬영 기간 동안 유달리 친밀한 선후배로서 극강의 ‘연기 호흡’을 선보였던 두 사람은 큐사인과 동시에 서로를 응시한 후 눈물을 그렁거리며 감정을 이끌어냈다. 깊은 믿음을 지닌 스승에게 반절하는 애신의 감정에 김태리는 눈물을 후두둑 떨궜고, 최무성 역시 김태리의 눈물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애달픈 명장면을 완성했다. 제작사 측은 “김태리는 속 깊은 제자 애신을, 최무성은 무뚝뚝하지만 정 많은 승구를 진정성 있게 담아내고 있다”며 “티격태격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서로에 대한 믿음이 굳건한 두 사람이 각자 어떤 행보로 나아갈 지 지켜봐 달라”고 밝혔다. 한편, tvN ‘미스터 션샤인’은 2일 오후 9시에 방송된다. 사진제공=화앤담픽쳐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용산구 “어린이 안전문화 작품 공모 참가하세요”

    서울 용산구는 오는 3일부터 28일까지 ‘2018년 어린이 안전문화 작품 공모전’을 연다고 1일 밝혔다. 공모 대상은 지역 내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이다. 모집 부문은 그림과 글짓기로 나뉜다. 주제는 재난안전, 학교안전, 생활안전, 교통안전, 아동 성폭력 예방 등이다. 그림(포스터)은 도화지 8절 크기에 유화, 수채화, 크레파스화 등으로 제작한 뒤 뒷면에 신청서를 부착하고, 작품에 손상이 없도록 우편(서울 용산구 녹사평대로 150 용산구청 7층 안전재난과) 또는 방문해 제출한다. 글은 A4용지 2매 이내(초교 3학년 이하) 또는 2~3매(초교 4학년 이상)로 작성한다. 작품 파일을 ‘응모자명(학교).hwp’로 저장해 신청서와 함께 담당자 이메일(kjdlove@yongsan.go.kr)로 제출하면 된다. 학교 또는 유치원에서 작품을 취합, 단체로 접수하는 것이 좋다. 학(원)생 1인당 1작품만 응모 가능하다. 입상작 저작권은 구에 귀속된다. 접수 작품은 반환하지 않는다. 심사는 다음달 17일로 예정됐다. 중부교육지원청 추천 교사 4명이 주제의 명료성, 창의성 등을 따져 작품을 심사한다. 시상은 다음달 말이며 대상, 최우수상, 우수상, 장려상 순으로 55명에게 상장을 지급한다. 출품작 개수에 따라 인원은 변경 가능하다. 우수작품 전시회도 열린다. 시상식 전후로 용산구청 2층 종합민원실에 그림, 글짓기 작품 15점을 비치한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매년 안전문화 작품 공모전을 통해 ‘아이들은 어른의 스승’이란 말을 실감하고 있다”며 “안전이 어려서부터 생활화될 수 있도록 관련 사업을 이어갈 것”이라고 전했다. 기타 자세한 사항은 용산구 안전재난과(02)2199-7954)로 문의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일본 체육계, 계속되는 파문…이번엔 여자 체조선수 폭력

    일본 체육계, 계속되는 파문…이번엔 여자 체조선수 폭력

    대학 미식축구 악질 태클, 복싱연맹회장 장기집권 전횡, 아시안게임 농구 대표팀 매춘 등 곳곳에서 비리와 잡음이 이어지고 있는 일본 스포츠계에 또다시 핫이슈가 등장했다. 이번에는 체조다. 일본체조협회가 선수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지도자에게 중징계를 내리자 해당 선수가 스승을 옹호하고 나서고, 다시 협회가 이를 반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일본체조협회는 지난 13일 여자체조 미야카와 사에(18) 선수를 지도해온 하야미 유토(35) 코치에 대해 무기한 등록말소 처분을 내렸다. 하야미 코치는 미아카와 선수를 지도하는 도중 여러 차례 폭력을 행사한 사실이 확인돼 중징계를 받았다. 미야카와 선수는 2016 리우 올림픽 여자대표 출신으로, 올 가을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대표 후보 상태에서 연습하고 있다. 미야카와 선수는 29일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스승인 하야미 코치에게 폭력를 당했던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하야미 코치와 함께 2020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 꿈”이라며 징계의 재검토를 협회에 요청했다. 미야카와 선수는 특히 이번 협회의 결정에 대해 “하야미 코치와 나를 갈라놓으려는 세력이 개입돼 있다”며 체조협회의 쓰카하라 지에코(71) 여자강화본부장을 핵심으로 지목하고 “(쓰카하라 본부장 등) 권력에 지배되지 않는 협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발언했다. 미야카와 선수는 자신의 현재 심리적 상태나 훈련환경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올 가을 열리는 세계선수권 대표 후보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도 표명했다. 하야미 코치는 협회의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내용의 가처분 소송을 지난 20일 도쿄지방법원에 제기해 놓은 상태다. 그러자 일본체조협회는 이날 밤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하야미 코치의 미야카와 선수에 대한 폭력행위 사례들을 적시하며 “협회의 결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협회는 “선수가 코치의 폭력을 허용할지라도 협회는 그럴 수가 없다”고 밝혔다. 이어 “미야카와 선수의 폭행 사실은 외부기관의 조사를 통해 확인된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하야미 코치에 대한 무거운 징계에 쓰카하라 본부장 등이 개입돼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협회에 정식으로 제소가 있으면 대응하겠지만, 현 시점에서는 코멘트를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일본 스포츠계에는 올들어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니혼대 미식축구 선수가 지난 5월 감독의 지시를 받아 상대편 선수에 거친 태클을 해 사회적으로 큰 파문이 일었다. 이달 들어서는 야마네 아키라 일본복싱연맹 회장이 강력한 내부권력을 이용해 전횡을 일삼은 사실이 드러나 사퇴했다. 또 현재 진행되고 있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는 농구 대표 선수 4명이 현지 환락가에서 성매매를 했다가 발각돼 본국에 돌려보내지기도 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강변에 널려있는 수많은 유골… 낙동강 전투 참혹함 잊지 못해”

    “강변에 널려있는 수많은 유골… 낙동강 전투 참혹함 잊지 못해”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정대연 인터뷰 일시 1997년 8월 4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규원 치과 3층) 대담 정대연 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가 실종된 인천 학생들 나(정대연)는 인천 화도진 고개 넘어 화수동 111번지 쌍 우물 앞 배급소 집 외아들로 태어나 창영국교를 졸업하고, 인천동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서대문에 있는 감리교 신학대학교 2학년 때 6·25 사변이 터졌다. 인천을 점령한 북한괴뢰군들은 인천 지역에서 중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인민의용군에 입대시켰는데, 강제로 끌려간 중학생들은 그 후 모두 실종이 되었다. 9·15 인천수복과 인천학도의용대의 창설 UN군의 9·15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수복이 되어서, 고려대 2학년생 이계송을 대장으로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를 조직하여 치안 유지, 피난민 안내 등 호국(護國)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때 나는 인천학도의용대의 부연대장으로 추대되었다. 1950년 늦은 가을 중공군의 참전으로 우리 국군과 UN군은 후퇴하게 되어, 또다시 인천이 적화(赤化)가 되면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실종될 것 같은 두려움으로 우리들은 걱정만 하고 있었다.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 남하 1950년 12월 초 국방부 정훈국 인천파견대에서는 인천 지역의 중학생들도 남쪽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하였다. 1950년 12월 18일 제일은행 인천지점 건너편에 있었던 경기도 병사구 사령부(현재 병무청) 소속 국민방위군 소위가 선두에서 인천학도의용대 3000명 대원을 이끌고 경상남도 통영의 국민방위군 수용소(통영충렬국교)를 향하여 우리들은 걸어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1950년 12월 24일 대전역 도착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하여 처음 1박을 한 곳은 안양이었다. 우리들은 1950년 12월 20일 수원에 도착하여 수원역에 안내판을 만들어 성탄절 날까지 대전으로 오라고 알렸다. 1950년 12월 24일 인천학도의용대 본대는 대전에 도착하여 성탄절을 대전역에서 맞았다. 1950년 12월 29일 마산 도착 대구를 지나서 경산, 청도, 밀양, 삼랑진을 거치면서 우리들은 논밭에 버려진 수많은 얼거나 굶어 죽은 국민방위군 시체를 보면서 그 머나먼 남쪽 끝까지 모진 고생을 하면서 내려온 우리들은 부패한 국민방위군의 제3수용소(통영충열국교)에 어린 대원들을 입소시킬 수 없어서 마산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통영으로 남하하는 것을 정지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참모회의를 신마산역 중앙여관에서 하여, 대구 육군본부를 찾아가서 담판 짓기로 하였다.대구 육군본부에서 황헌친 인사국장 만남 이계송 대장과 나는 걸어서 대구를 가게 되었다. 낙동강에 도착했을 때는 생전에 잊지 못할 끔찍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강변에 많은 유골이 널려있는 것이 낙동강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보여 주는 끔찍한 장면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계송 대장과 나는 육군본부 인사국장 황헌친(黃憲親) 준장을 만나서 우리가 육군본부에 찾아오게 된 동기를 인사국장에게 설명하고 인천학도의용대의 진로에 대한 각서를 받았다. 황헌친 준장이 만들어준 각서 내용 ①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의 이동함에 있어 차량이나 선박을 이용할 수 있는 차량·선박 징발권(徵發權)을 준다. ②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은 부산 육군 제2훈련소에 1951년 1월 10일까지 입소하고, 포병사관학교에 응시할 기회를 준다.中 4~6학년생들이 먼저 해병으로 자원입대 이계송 대장과 나는 다시 걸어서 낙동강을 건너 인천학도의용대원들이 수용돼 있는 마산 임시 거처에 와서 보니까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그동안 마산에서 가까운 진해 해병교육대 신병으로 중학교 4~6학년생들 600여명이 자원입대했고, 인천에서 같이 출발한 국민방위군 소위가 나머지 중학교 1~3학년 대원들을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경남 통영출열국교)로 데리고 갔다. 中 1~3학년생들 부산 육군 제2훈련소 입소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에 수용돼 있는 우리 대원들을 데려오기 위해서, 이 계송 연대장과 나는 마산에서 출발하여 통영을 향하여 배를 타고 가서, 통영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인 충렬국민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우리 대원들이 마산에서 통영으로 가게 된 경위는 인천에서부터 우리와 같이 행동했던 국민방위군 인솔 소위가 자기가 받은 명령대로 2000명이 넘는 대원들을 통영의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에 입소시킨 것이었다. 육군본부에서 받은 징발증(徵發證)을 수용소 소장에게 보여주고, 우리들은 모두 배에 나누어 타고 통영에서 출발하여 부산으로 향하였다. 1951년 1월 10일 인천학도의용대원 1500여명은 육군 제2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입소하였으며 훈련병이 된 이 날부터 인천학도의용대의 조직은 사라지게 되었다. 1951년 2월 1일 육군통신학교 입교 부산육군 제2훈련소를 마치고 부산육군통신학교로 간 날이 1951년 2월 1일이다. 우리가 지휘관 옆에서 조금 안전하게 근무하는 통신병이 된 데에는 인천상업중학교 물리 교사 출신의 부산육군통신학교 신봉순 교육대장님 덕분이었다. 신봉순 교육대장님은 1951년 2월 1일 인천학도의용대 대원 중 500명을 부산육군통신학교에 입교시켰으며, 오갈 데 없었던 여학생 120명의 숙식을 해결해 주고, 다시 인천으로 여학생들이 돌아가는 것을 도와주신 인천학도의용대의 영원한 스승이시다. “반드시 살아서 고향에서 꼭 다시 만나자” 부산육군통신학교에서 통신교육을 마친 나는 인천에서부터 부산까지 같이 걸어와서 함께 자원입대한 고향 후배들에게 반드시 살아서 인천에서 다시 만나자고 말하며 울면서 헤어졌다. 처음에는 육군 제8사단으로 배치받았다. 다음에 나는 육군본부 내의 통신부분을 담당하는 561부대로 가게 되었다. 그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서, 1953년 3월 9일 군에서 명예제대하였다. ‘전쟁터의 이슬로 사라진 학창시절’ 1997년 6월 25일 자 인천일보에서 6·25 특집(特輯) ‘전쟁터 이슬로 사라진 학창시절’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내 가슴에 와닿는 것은 나하고 같이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했던 인천학도의용대 대원 이경종(인천상업중학교 3학년때 자원입대)의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이 우리 인천학도의용대의 6·25 참전역사 찾기를 시작했다는 기사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또한 나의 기억을 글로 남기게 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이경종규원 2부자(父子)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역사 편찬 사업이 잘 이루어지길 바란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참전기 14회를 마치며 23살 대학교 2학년생이었던 정대연 인천학도의용대 부연대장님은 육군 중위로 장교 현지임관 제의도 거절하고, 중학생 동생들과 사병으로 자원입대하여 참전하였습니다. 많은 인천의 중학생들을 위기에서 구했지만, 누구에게도 자랑하지 않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으나 섭섭해하지 않았던 인천의 훌륭한 형입니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정 대 연 ▲인천학도의용대 부연대장 1951년 10월 5일 강원도 향로봉전투에서의 정대연(가운데). 1928년 9월 3일 인천 화수동 출생 1949년 2월 15일 인천동산중학교 졸업 1950년 6월 25일 서울감리신학대학 2학년 1950년 9월 25일 인천학도의용대 부연대장으로 추대 1951년 1월 10일 통신병으로 입대(군번 0246202) 1953년 3월 9일 의병 제대
  • ‘진정성 마법’은 승승장구

    ‘진정성 마법’은 승승장구

    베트남 부임 뒤 빛난 ‘형님 리더십’ 선수들 한 명 한 명 아픔 함께 나눠한국 축구에 그의 이름은 늘 먹먹한 느낌표를 던졌다. 29일 김학범(58) 감독이 이끄는 한국의 23세 이하(U23) 대표팀에 1-3으로 지며 베트남 국민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사상 첫 결승 진출이 좌절된 ‘쌀딩크’ 박항서(59) 감독 얘기다. 한 살 아래 김 감독의 성가와 견줬을 때 박 감독의 경력은 보잘것없다고 할 수 있다. 김 감독은 성남 일화의 전성기를 일궜지만 박 감독은 한·일 월드컵 때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했던 것과 상주 상무를 지휘했던 2013년 K리그 대상 챌린지 감독상을 수상한 것 정도만 떠오를 정도다. K리그 역대 전적은 김 감독이 8승1무1패로 멀찍이 앞서 있다. 그러나 박 감독이 지난 2년 동안 일군 베트남 U23 대표팀은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한국에 0-3으로 뒤져 모든 것을 포기할 법한 후반 중반 이후 베트남 선수들이 보여준 패기와 근성은 박 감독이 걸어온 삶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후반 37분 우리 골문 앞을 지나치는 크로스가 베트남 선수 몸에 맞고 굴절됐지만 우리로선 간담이 서늘한 장면이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베트남 선수들의 모습은 스승의 ‘잡초’ 근성과 닮아 보였다. 박항서의 땀과 눈물, 진정성의 결실이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번 대회 내내 승승장구한 베트남 경기가 끝날 때마다 그가 옆줄 근처에서 선수 한 명 한 명을 일일이 안아 준 것은 ‘쇼’가 아니었다. 늘 선수들의 아픔을 함께 매만졌다. 그가 구사할 수 있는 베트남어는 일상적으로 쓸 수 있는 단어와 표현을 뛰어넘지 않지만 누구도 흉내 내기 쉽지 않은 진정성이란 무기가 있었다. 김 감독이 틈만 나면 유럽에 다녀와 전술 공부에 힘쓴 반면 박 감독은 늘 감성에 기대는 쪽이었다. 지난 1월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결승에서 패한 선수들이 고개를 떨구고 나오자 “고개 숙이지 마라. 너희들은 자랑스러운 선수들이다. 최선을 다했다”고 감싼 것도 마찬가지였다. 취임 1년이 안 돼 베트남 축구를 일신한 박 감독의 매직이 앞으로 아시아 축구에 어떤 메시지를 던질지 주목된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한반도 지나간 태풍 솔릭…항공기 운항 정상화, 인명 피해 3명

    한반도 지나간 태풍 솔릭…항공기 운항 정상화, 인명 피해 3명

    제19호 태풍 솔릭이 한반도를 지나 동해상으로 빠져나가면서 항공기 운항이 재개되고, 일부 지역에 내려졌던 통제가 해제되고 있다. 이번 태풍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24일 오전 11시 기준으로 실종 1명, 부상 2명 등 모두 3명으로 잠정 집계됐다. 24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현재 15개 공항 중 군산과 청주를 제외한 13개 공항이 정상 운항되고 있다. 제주공항은 국제선은 오전 6시 6분 홍콩발 익스프레스 항공, 국내선은 오전 6시 57분 부산발 제주행 항공기를 시작으로 운영이 재개됐다. 다만 여객선은 97개 항로 165척의 발이 묶여있으며, 유람선 248척도 통제 중이다. 국립공원은 21개 전 공원의 모든 탐방로 입장이 통제됐고, 제주 한라산 전 구간과 올레길 전체 코스도 역시 출입이 제한되고 있다. 전남 고흥 거금대교와 소록대교는 이날 오전 2시 30분부터 통행이 재개됐다.태풍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3명으로 집계됐다. 22일에는 제주 서귀포시 소정방폭포 인근에서 사진을 찍던 일행이 파도에 휩쓸리면서 20대 여성 1명이 실종됐고 30대 남성 1명이 다쳤다. 23일 오후에는 전남 고흥군 주공아파트 담장이 무너지면서 16세 남학생이 골절상을 입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태풍으로 인한 이재민은 경기·강원·전남에서 일시대피한 20세대 46명으로 집계됐다. 5세대 13명은 태풍이 지나간 이후 집으로 돌아갔다.태풍으로 인해 국도 77호선 절토사면 1곳이 유실됐지만 이날 오전 1시 40분쯤 복구 작업이 마무리됐다. 이 밖에도 제주에서는 위미항 방파제 공사자재가 일부 유실됐으며, 전남 완도와 진도에서는 버스승차장이 부서졌다. 제주, 여수, 장흥, 해남에서는 가로수 154그루가 넘어졌고, 가로등 3개, 신호등 97개도 파손돼 일부 복구 작업이 진행 중이다. 제주 종합경기장과 서귀포 색달매립장에서는 지붕이 파손되는 사고도 있었다. 제주에서는 농작물 2703㏊, 비닐하우스 4동과 축사 8동, 어선 6척, 넙치양식 시설 3곳도 피해를 본 것으로 집계됐다. 솔릭은 이날 오전 10시 강릉 남서쪽 20㎞ 부근 육상에 있다가 동해로 빠져나갔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끝이 없는 유배

    [양진건 유배의 뒤안길] 끝이 없는 유배

    오랜만에 배를 탔다. 비행기로 육지 나들이를 하는 까닭에 특별한 일이 아니고선 배를 이용하는 일이 거의 없다. 대학생 때만 하더라도 주로 배를 탔지만 이제는 바쁘고 편하다는 이유로 비행기 이용이 당연하게 됐다. 더욱이 저가항공사 덕분에 배를 타는 일은 정말 웬만하지 않고서는 하지 않는다.배도 타 보지 않고 어떻게 유배에 대한 글을 쓰느냐는 친구의 핀잔도 한몫했지만 남도를 찾을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덕분에 유배인들의 처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유배인을 실은 배가 제주도와 가까워지면서 무엇보다 한라산 봉우리를 맨 먼저 만났을 것이다. 배를 타 본 사람이라면 알지만 이때부터가 먼 시간이다. 잡힐 듯이 한라산 봉우리가 보이는데도 정작 제주도는 멀기만 하기 때문이다. 잡힐 듯한 것은 늘 멀기 마련이다. 돈도, 권력도, 심지어 사람도 그렇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아마도 유배인들은 제주도를 향한 뱃머리에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추사 김정희만 하더라도 유배를 올 때가 9월인 데다 날씨가 좋다 보니 바람결도 순해서 배 타는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았을 법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난날을 뒤돌아보니 속이 울컥거리고 처지가 원망스러워져 “하늘이여! 대저 나는 어떤 사람이란 말입니까?”(天乎此何人斯) 하고 자탄을 했다. 당연하다. 한때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특히 글씨를 잘 쓴다는 명성을 천하에 떨치던 당대 최고의 예술가로서 멀리 중국에서조차 명성이 아깝지 않았던 그였지 않은가. 그러던 그가 하잘것없는 권력 싸움에 버려져 졸지에 죄인 신세가 됐으니 알다가도 모를 것이 세상이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그렇고 심지어는 흥망성쇠의 나라 운명조차도 알다가 모를 일이다. 헌종 임금이 “바다의 파도 속으로 왕래하는 것이 어렵지 않더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스승을 찾아 제주도를 다녔던 제자 허련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운명을 하늘에 맡겨 버린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바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도착한 곳이 “적막한 귀양지”(寂寞之濱) 제주도였던 것이다. 이 극악의 유배지에서 과연 살아서 돌아갈 수나 있을지 어느 유배인도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절망은 제주 바다만큼이나 깊었을 것이고 한라산만큼이나 컸을 테다. 과연 살아 돌아가 다시 아내와 피붙이들을 만날 수는 있을 것인지, 흩어진 친구와 이웃들의 얼굴은 다시 볼 수나 있을 것인지 기약할 수 없는 곳이 제주도였다. “이제 몇 년을 어떻게 견디어야 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유배인들이 제주도에 첫발을 내디디며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이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그렇다 견디어야 한다. 절망이 클수록 견뎌 내야 한다. 남편과 사랑하던 아들을 졸지에 잃고 동물처럼 신음하던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극복이 아니라 그것을 견디어 냈다고 했다. 박경리 선생도 “내 조상은 역신(逆臣)이던가. 끝이 없는 유배”라고 자신의 일생을 표현했다. 견디는 것이야말로 유배인들의 자세였다. 요즘 우리 서민들의 처지가 “모진 고생과 상심 속에 구사일생으로 지냈다”고 했던 유배인들의 삶과 다를 바 없다고 하면 지나칠지 모르겠다. “저녁이 있는 삶이 아니라 저녁을 굶는 삶”이라는 자조적인 표현이 나올 정도이니 “사람 중심 국가”를 외치는 문재인 정부 자체가 유배의 상황으로 빠져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해서 어려움이 깊어지는지 촛불을 지지했던 한 사람으로서 염려스러울 뿐이다. 오랜만에 배를 타고 가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개인이나 공동체나 이 어려운 시기를 지혜로웠던 유배인들처럼 잘 견뎌 내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보았다.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일제 암흑기·근대 새벽의 경성…구보씨의 고독한 하루를 걷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일제 암흑기·근대 새벽의 경성…구보씨의 고독한 하루를 걷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4회 서울의 문학1(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편이 지난 14일 진행됐다. 여름 야행 세 번째 행사가 치러진 이날 여름의 마지막 몸부림이 느껴졌으나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진 못했다. 예약하지 않고 현장으로 직접 오거나 현장에서 일행을 따라나선 이들도 있어 준비된 오디오 가이드 시스템과 쿨 스카프가 동났다.이날 투어는 집결 장소인 청계광장의 소음을 피해 한국관광공사 2층 관광안내센터 ‘K-STAR 존’으로 이동,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쾌적하게 시작했다. 서울 중구 다동 10 한국관광공사 서울센터는 구보의 옛 집터(다옥정 7번지)이다. 청계천을 따라 광교까지 나간 뒤 화신백화점(종로타워)을 보고, 나석주 열사의 동상이 서 있는 옛 동양척식주식회사(하나은행 본점)~조선은행(한국은행 화폐박물관)~소공로 낙랑파라(더플라자호텔)~숭례문~경성역(서울로7017) 구간을 걸었다. 해설을 맡은 최서향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구보의 동선을 안내하면서 소설 속의 적절한 장면을 낭독했다. 참가자들은 문학 향기를 음미하면서 몰입했다. 1930년대 경성과 박태원이라는 소설가, 주인공 구보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구보가 배회했던 1930년대의 서울, 식민지의 수도 경성은 어떤 도시였을까. 일제강점기의 암흑과 근대의 새벽이 공존하는 이 시기는 식민 잔재라는 이름으로 혹은 근대유산이란 이름으로 서울 도시 공간 곳곳에,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다. 도시는 자연환경의 개조이고, 근대성의 임상실험이다. 이 시기 식민지 도시문화와 도시계획이 만들어 낸 지층이 우리가 사는 21세기 서울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식민통치기 경성의 외관과 도시민의 내면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주입하는 일본식 전통과 일본이 도입한 서구 문물이 혼재돼 있었다. 중국식 전통이나 중국을 경유한 서구 문물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일본으로부터 전해진 서구 문물에 눈을 뜨고, 귀가 열린 게 바로 1930년대 경성의 본질이다. 한국적 근대의 비밀은 한국인이 서구에서 직접 가져오거나, 서구에서 전해진 게 아니라 일본을 거쳐서 받았다는 데 있다. 소설 속 식민지 지식인 구보가 걸었던 소공로와 남대문로의 이국적 풍경과 우울한 독백 또한 여기에서 기인했을 수도 있다.구보가 소설에서 보고, 듣고, 생각한 경성은 사실상 새로운 도시였다. 현대 서울의 기원은 조선의 수도 한성이 아니라 경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부터 30년 동안 경성시구개수 계획과 경성시가지 계획에 따라 경성의 간선도로망을 정비한다는 명목으로 전통적 도심 공간의 구조를 재편했다. 청계천 이북 종로 중심 도시구조를 청계천 이남 경성부청(시청) 중심의 격자형 도시로 뜯어고쳤다.광화문 네거리 정동 쪽을 막고 있던 황토마루(황토현) 고개를 밀고 광화문~남대문에 이르는 남북 간 축선도로 태평로(세종대로)를 뚫었다. 종묘관통선(율곡로)을 만들고, 식민통치 기구와 일본인 거주지가 밀집한 본정통(충무로)과 황금정통(을지로) 중심의 방사상 도로망을 구축했다. 본정통과 남대문의 교차점인 조선은행(한국은행) 앞에 광장을 조성하고, 경성부청과 조선은행 앞 광장을 잇는 장곡천정통(소공로)을 뚫어 연결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하나은행 본점) 등 일제의 경제 수탈기구와 금융기관, 백화점이 명치정(명동)·본정통(충무로)과 이어졌다. 소설의 주인공 구보는 월북 소설가 박태원(1910~1986)의 분신이다. 박태원은 이념을 배제하고 도회적인 풍물과 도시성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다. 도시를 무대화하면서 전통의 몰락, 가족의 생성과 해체, 물질주의와 환락의 변주, 반복되는 일상을 묘사했다. 도시를 배경으로 개인의 일상을 그려 내면서 내면의식의 추이를 서술하는 모더니즘소설의 경향을 대변하고 있다. 도시 문학의 전형이다. 소설 속 구보는 집을 나서 경성 최고의 백화점을 둘러보고, 전차를 타고, 당대 대표적 건축물인 조선은행을 지나 경성역을 오간다. 낙랑파라로 대표되는 경성의 다방과 술집에서 오가는 대화와 친구와의 만남은 욕망과 소비문화의 분출을 나타낸다. 박태원의 생애에 대해서는 그간 여러 설이 구구했으나 2016년 구보의 장남 박일영이 펴낸 ‘소설가 구보씨의 일생’(문학과 지성사)이 믿을 만하다. 조부 때부터 약방을 운영했고 부친이 약종상으로 공애당약방을 운영했으며 숙부가 양의로서 공애의원을 개업했다는 이유로 그동안 개화한 중인가문 출신이라고 알려졌으나 밀양 박씨 양반 가문임을 족보를 통해 밝혔다. 구보의 첫 부인 김정애는 한약국집 무남독녀로 숙명여학교(숙명여고)를 수석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서울사대) 연수과를 수료한 뒤 진천에서 보통학교 교사를 지낸 신여성이었다. 슬하에 2남 3녀를 뒀다. 영화 ‘괴물’, ‘설국열차’를 연출한 봉준호 감독이 외손자이다.구보는 7살 때부터 소설책에 관심을 보여, 9살까지 춘향전과 심청전 등 집에서 구할 수 있었던 시중의 이야기책 50~60권을 독파했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 재학 중이던 17살 때 본명으로 시 ‘할미꽃’을 발표했고, 18살 때 춘원 이광수에게 사사했으며 스승의 글을 평한 ‘묵상록을 읽고’를 발표하기도 했다. “문학에 인생을 걸 천재에게 정규교육은 불필요하다”면서 휴학, 집에 틀어박혔던 시절도 공개됐다.이상한 머리 모양과 친구 이상과의 우정, 월북 후 ‘갑오농민전쟁’ 출간 스토리가 대표적 이야깃거리다. 23세에 도쿄 법정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한 구보는 빨간 넥타이에 지팡이를 짚고, 바가지 머리 모양으로 다니면서 장안의 화제 인물이 됐다. 트레이드마크였던 ‘오갑빠머리’에 대해 구보는 ‘나는 내 머리를 다른 이들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다스리고 있다.… 내 머리터럭은 그저 제멋대로 위로 뻗쳤다. 나는 수없이 빗과 기름을 가지고 이것들을 다스리러 들었다.… 이마 위에 간즈런히 추려가지고 한일자로 짜르는 방법이었다’고 고백했다. 이상과 구보에 대해 ‘자신만큼 아는 사람도 흔치 않다’고 장담한 언론인이자 작가 조용만은 저서 ‘구인회 만들 무렵’에서 ‘이상과 구보는 짝패였다. 이상의 더벅머리와 수염에 대해서 구보의 ‘오갑빠머리’가 한 쌍이었고, 언변에 있어 두 사람이 주고받는 결말을 들으면 포복절도할 만담가의 흥행을 보는 것 같았고…둘이 다 한가한 몸이므로 밤낮 붙어 다니며 노닥거렸다’고 기록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여름야행 4=성수동(서울숲 밤마실) ●일시:8월 18(토) 오후 6~8시 ●집결장소:지하철 분당선 서울숲역 3번 출구 역 구내 ●신청(무료):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한끼줍쇼’ 정상훈, 자양동 양꼬치 거리 활보 ‘중국어 대방출’

    ‘한끼줍쇼’ 정상훈, 자양동 양꼬치 거리 활보 ‘중국어 대방출’

    배우 정상훈이 가짜 중국어로 양꼬치 거리를 활보했다. 15일 방송되는 JTBC ‘한끼줍쇼’에는 배우 정상훈과 손담비로 밥동무로 출연해 자양동에서 한 끼 도전에 나선다. 최근 진행된 녹화에서 정상훈은 규동형제와 만난기 전 중국 기자로 변신해 가짜 중국어를 대방출했다. 양꼬치 거리를 활보하며 취재 투혼을 벌이는 정상훈의 열정에 현장의 제작진은 물론 지나가는 시민들도 눈길을 떼지 못했다. 이어 정상훈은 원조 ‘가짜중국어’의 달인 이경규와 즉석 중국어 대결을 펼쳤다. 강호동의 제안으로 시작된 대결에 두 사람은 한 치의 양보 없이 가짜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며 흥미진진한 대결을 이어갔다. 한편 이날 정상훈은 이경규와 강호동의 극과 극 진행스타일에 진땀을 빼기도 했다. 시작부터 ‘시청자’를 위한 방송 진행 방법을 놓고 규동형제가 티격태격하자 정상훈과 손담비는 난감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정상훈은 가짜 중국어로 통한 이경규와 호흡을 맞추다가도, 무명시절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줬던 강호동을 스승이라 칭하는 등 상황에 따라 라인을 갈아타는 모습을 보여 ‘간신배’로 낙인 찍히기도 했다. 예능감 폭발한 ‘양꼬치 앤 칭따오’ 정상훈의 활약상은 15일 수요일 밤 11시에 방송되는 JTBC ‘한끼줍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이 시대의 ‘젊은 어른’… 별이 되다

    이 시대의 ‘젊은 어른’… 별이 되다

    佛 문학 연구·비평 ‘순수 국내파’ 사회 비판한 ‘밤이 선생이다’ 인기따뜻한 시선으로 시대를 통찰한 국내 대표 문학평론가 황현산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명예교수가 8일 오전 4시 20분 별세했다. 73세. 2015년 담도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던 고인은 지난 2월 암이 재발하면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직을 취임 두 달 만에 내려놨었다. 지난달부터 병세가 악화된 고인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끝내 눈을 감았다. 1945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한 고인은 고려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기욤 아폴리네르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해외에서 유학하지 않은 순수 국내파로 남다른 입지를 다져온 고인은 프랑스 현대시의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주로 연구하며 문학평론가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80년부터 경남대, 강원대,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며 30여년간 후학을 양성해왔다. 최근 병세가 나빠지는 중에도 출간을 앞둔 산문집에 대해 편집자와 머리를 맞대고, 번역에 매달리는 등 문학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지난 6월 함께 출간된 산문집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과 번역서인 프랑스 시인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가 그의 마지막 유작이 됐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의 머리말에서 고인은 “나는 이 세상에서 문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물어왔다. 특히 먼 나라의 문학일 뿐인 프랑스 문학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늘 고뇌해왔다. 내가 나름대로 어떤 슬기를 얻게 되었다면 이 질문과 고뇌의 덕택일 것이다”라고 썼다. 고인은 우리 시대의 어른으로서 사회에 대한 조언과 일침을 아끼지 않았다. 문학과 사회 현안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담은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2013)는 6만 3000여부가 팔리며 독자들로부터 두루 사랑받았다. 젊은 감각을 잃지 않았던 고인은 수년 전부터 트위터를 통해 40만명이 넘는 팔로어들과 소통하기도 했다. 생전에 미식가였던 고인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병실을 찾은 후배 문인들에게, 고향인 목포를 그리워하듯 “민어가 먹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을 편집한 출판사 난다의 대표이자 고인과 오랫동안 교유한 김민정 시인은 “학교가 아닌 데서 만난 세상의 스승, 다시 만날 수 없는 격이 있는 어른이셨다”고 회고했다. 김 시인은 고인이 남긴 A4용지 400장 분량의 트위터 글과 2800장 분량의 번역에 관한 글을 정리해 펴낼 예정이다. 고인이 지은 책으로는 ‘우물에서 하늘 보기’, ‘밤이 선생이다’, ‘말과 시간의 깊이’, ‘잘 표현된 불행’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아폴리네르의 ‘알코올’,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 보들레르의 ‘악의 꽃’ 등이 있다. 서정시학 작품상, 팔봉비평문학상, 대산문학상, 아름다운작가상을 수상했다. 2007년 한국번역비평학회을 창립해 제1대 회장을 지냈다. 빈소는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의료원 안암병원 장례식장 301호에 마련됐다. 발인은 10일 오전 10시. (02)923-4442.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포토] 버스승강장에 설치된 선풍기

    [포토] 버스승강장에 설치된 선풍기

    울산 중구는 시민 더위 피해를 막기 위해 이용이 많은 36개 버스승강장에 선풍기 40대를 설치했다고 8일 밝혔다. 중구 성남동 버스승강장에 설치된 선풍기. 울산 중구 제공
  • ‘아이돌룸’ 화사 먹방, 곱창→김부각→박대→이번엔 ‘한치’ 특급 레시피 공개

    ‘아이돌룸’ 화사 먹방, 곱창→김부각→박대→이번엔 ‘한치’ 특급 레시피 공개

    ‘먹방 여신’으로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마마무의 화사가 한치 열풍을 예고했다. 오는 7일 방송되는 JTBC 예능 ‘아이돌룸’에는 마마무가 출연해 활약을 펼친다. 최근 진행된 녹화에서 MC 정형돈은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다”며 화사를 소개했다. 정형돈은 화사에게 곱창을 시작으로 김부각, 간장게장, 박대까지 섭렵하며 감사패와 함께 연일 ‘완판’ 신화를 이뤄낼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이에 화사는 “진심으로 먹기 때문인 것 같다”고 소감을 밝히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화사는 멤버 휘인을 통해 곱창에 애정을 갖게 된 에피소드를 언급하며 “휘인이가 곱창 스승”이라고 밝혀 궁금증을 자아냈다. 또 화사는 최근 꽂힌 음식으로 ‘한치’를 꼽아 눈길을 끌었다. 특히 한치를 맛있게 먹는 자신만의 특별한 레시피를 공개해 ‘먹방 여신’다운 면모를 뽐냈다는 후문이다. 한편 마마무는 ‘아이돌룸’에서 준비한 특별한 ‘ASMR 먹방’으로 시청자 눈과 귀를 사로잡을 예정이다. 화사와 마마무 멤버들의 특별한 먹방은 오는 7일 오후 6시 30분에 방송되는 JTBC ‘아이돌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JTBC 연예팀 seoule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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