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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오무라 마스오,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학문적 여정

    [권성우의 청파동 통신] 오무라 마스오,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학문적 여정

    한국문학 연구를 위해 평생 헌신한 일본인 노학자가 있다. 그는 1973년 한국에 유학 왔을 때의 설레는 마음을 “오랜 세월 동경해 오던 땅에 실제로 몸을 두고서, 그 대지 위를 걸어 다닐 수 있는 기쁨에 나는 취해 있었다. … 내 조국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사랑하는 대지를 밟았다”고 고백한다. 1970년에 발간한 잡지 ‘조선문학’ 창간호에는 “조선문학을 사랑하고 조선문학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는다는 오직 하나의 목표로 우리가 뭉쳤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적었다. ‘한국(조선)문학’에 대한 그의 각별한 사랑은 이후 한결같이 유지됐다. 나는 이토록 한국과 한국문학에 순정한 애정을 지니며 심혈을 기울여 탐구한 일본인 학자를 본 적이 없다.그는 1950년대 후반 대학원 시절 중국문학을 전공하던 중에 운명과도 같이 한국문학과 만났다. 님 웨일스·김산의 ‘아리랑’,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접한 것이 한국(문학)에 눈을 돌리게 만든 뜻깊은 계기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 60여년의 세월 동안 누구보다도 열정적이며 성실하게 한국문학 연구에 몰두했다.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1933~) 와세다대 명예교수 얘기다. 최근 ‘오무라 마스오 문학 앨범’(소명출판)이 발간되면서 그의 저작집 여섯 권이 모두 완간됐다. 요 며칠간 폭염과 사투하며 여섯 권을 탐독했다. 이전 판본이나 학술지에서 이미 읽은 대목도 있었지만, 여전히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감동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어떤 한국학자 못지않게 한국문학과 한국의 역사를 투명하게 인식하고 한국인의 고뇌와 상처, 투쟁과 저항, 심성과 운명을 따사로운 시선으로 응시한다. 그는 단지 서재에서 한국문학 연구를 수행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한국 유학과 방문학자 경력은 물론이거니와 1985년 조선족 문학을 연구하기 위해 연변에서 일 년 동안 체류하기도 했으며, 1991년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중국 장백 조선족 자치현을 방문한 바 있다. 연변 거주 기간에 그가 40여년 동안 고향 용정 언덕에 방치됐던 시인 윤동주의 묘비를 발견해 세상에 알린 것은 동아시아 현대문학사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이리라. 오무라 마스오 저작집을 통독하면서 엄밀한 실증정신, 연구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열린 태도, 편견 없는 지성의 향기, 인간과 문학에 대한 곡진한 애정, 소수자와 함께하는 따뜻한 정신을 느꼈다. 1권 ‘윤동주와 한국 근대문학’을 비롯해 여섯 권 모두가 소중한 성과이지만 특히 6권 ‘오무라 마스오 문학 앨범’에는 저자가 만난 한국문학의 생생한 현장과 수많은 사람의 무늬가 펼쳐져 있다. 윤동주, 김학철, 김용제, 임종국과 함께한 시간, 장소, 표정, 미소가 깊은 페이소스를 발산한다. 특히 오무라 교수의 스승이자 저명한 루쉰(魯迅) 연구자인 다케우치 요시미 교수가 결혼식 축사를 하는 인상적인 사진은 그 자체로 기억할 만한 장면이다. 나는 이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단아한 표정에 담긴 진심과 겸허한 지성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오무라 마스오 저작집이 일본이 아니라, 그 이해와 공감을 위해 평생을 바친 한국에서 출간됐다는 사실 자체가 그와 한국을 둘러싼 숙명을 상징한다. 급조된 가짜 국제 학술대회와 가짜 학술지가 요즘 학계의 화제다.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이기에 소수자, 상처받은 자에 대한 깊은 공감과 정겨운 연대의 마음으로 한국문학 연구에 온 인생을 바친 오무라 교수의 학문적 여정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오무라 마스오. 그는 일본의 양심이며, 이 시대 학자의 귀감(龜鑑)이다. 남과 북, 중국, 일본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역사적 전환기다. 그렇다면 조선족(문학)을 비롯해 남과 북의 문학에 대해 오랫동안 담담한 애정으로 응시해 온 일본인 오무라 교수의 삶과 글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우리가 온전히 되새겨야 할 문화적 자산이리라. 그의 건강을 기원한다.
  • [조성룡·심세중의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셋집도 내 집” 역발상… 런던 빈민굴, 사람 사는 동네로

    [조성룡·심세중의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셋집도 내 집” 역발상… 런던 빈민굴, 사람 사는 동네로

    우리나라 도시 인구는 2000년대 들어 전체 인구의 90%를 넘겼습니다. 한국 사람 열 명 중 아홉은 도시에서 살고, 40대 이하의 반 이상은 고향마저 도시입니다. 우리가 나고 함께 살아가는 도시란 무엇일까요? 근대는 도시의 고민에서 출발했으며, 그 근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서울신문은 출판사 수류산방과 함께 ‘조성룡·심세중의 도시와 시민의 합창’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중 한 명인 조성룡(74) 성균관대 건축학과 석좌교수와 심세중(44) 수류산방 편집장의 대담을 지면으로 옮기는 형식으로 이어 갑니다. 근대 이후 세계의 도시를 만들어 온 역사적 인물과 흐름들, 당시 중요하게 대두됐던 가치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입니다. 그 과정에서 본질적이고 중요한 질문인데도 우리가 너무 몰랐던, 타율적이고 일방적인 도시 개발 과정에서 간과했던 모더니즘의 근본 고민들을 들춰 보게 될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 드립니다. (시리즈 제목은 1949년 출간된 모더니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서 따 왔음을 밝힙니다.)“나이팅게일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쉽겠어요. 영국의 간호사 나이팅게일(1820~1910)이라고 아시죠? 우리나라에서도 백의의 천사로 유명한데, 실제로는 씩씩한 사람이었대요. 우리나라에서는 위인전을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생애 한 시절에 공이 있으면 그것만 띄우죠. 사실 나이팅게일이 전장에서 간호한 건 잠깐이거든요. 물론 나이팅게일은 그 시대 영국 사회를 개혁하는 일을 남자도 못할 만큼 해냈죠. 그런데 같은 시대를 살았던 옥타비아 힐(Octavia Hill·1838~1912) 이라는 여성은 우리한테 그만큼 안 알려졌어요. 부잣집에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 집이 갑자기 망했어요. 그래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현실을 보게 되죠. 그러다가 15살 때쯤에 당대의 인물인 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이라는 사상가를 만나요. 그 양반이 미학 얘기도 했고 고딕건축에 대해서 연구도 많이 했지요. 1900년에 죽은 사람이니까 빅토리아 시대 사람인데, 이 시대가 영국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어요. 산업혁명이 영국에서 시작했잖아요. 산업 혁명이 일어나면서 무슨 문제가 일어났냐면, 주택 말입니다.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해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지니까 집이 부족해서 집을 짓는데, 너무 엉망인 집을 마구 지어요. 그걸 봤겠죠. 나름대로 문제라고 생각했겠죠. 옥타비아 힐이 사실 러스킨하고 몇 살 차이가 안 나요. 러스킨 밑에서 그림 필사해서 그리는 일을 했거든요. 그러다가 이 사람이 20대에 자기 선생한테 도움을 받아서 집 세 채를 사요.”1887년 런던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된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 행사에 남성의 동반자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참여한 여성은 단 세 명이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조지핀 버틀러(Josephine Butler·1827~1906), 그리고 옥타비아 힐이다. 나이팅게일은 국가를 위한 전쟁에 나가 근대 의학의 개가를 알렸기 때문인지 세계적으로 위인의 반열에 올랐다. 조지핀 버틀러는 여성운동가였다. 옥타비아 힐은 우리에게 가장 이름이 덜 알려진 인물이다. 그나마 알려졌다면 문화재 보호 운동 단체인 내셔널 트러스트의 창립자로서지만, 옥타비아 힐이 평생을 바친 주제는 도시 빈민들의 주거 문제였다. 그의 부모와 외조부도 박애주의를 실천하던 부유한 사회 사업가 집안이었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병환 이후 어린 시절 런던 외곽에서 성장하면서 런던 빈민의 문제를 접하게 되었다. 절대적 빈곤 계층은 근대화와 도시화의 산물이었다. 처음에는 최악의 주택을 짓지 못하도록 규제하면 낫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 더 컸다. 옥타비아 힐도 그런 생각이었고, 나은 집을 얻어서 거기에 빈민들을 살게 하려고 계획했다. 정작 그 구상을 듣자 어떤 집주인도 선뜻 집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더럽고 위험할 것 같은 가난한 사람들을 세입자로 들이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이다. 고민에 빠진 청년 빅토리아 힐을, 마침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은 스승 존 러스킨이 도왔다. 좋은 집이 아니라 이미 빈민들이 살고 있던 최악의 주택을 겨우 몇 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러스킨의 조건은 매년 5%의 수익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임대주택 지저분하게 방치하는 게 문제 “옥타비아 힐은 임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을, 임대 아파트가 좋아지려면 뭘 해야 하는가를 연구하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아예 집주인이 된 거지. 런던의 매릴번이라는 동네인데, 집을 산 다음에 이 여자가 하는 일이 뭐였나면, 매주 임대료를 받으러 가요. 꼬박꼬박. 그런데 돈 벌려는 것보다는 연구를 하는 거예요. 임차인이 어떡하면 행복해지느냐. 가서 주민들한테 뭐가 문제인지 묻고, 어떻게 사는지 관찰하고, 옆집하고 계단을 같이 쓰려면 청소를 해야지 하고 알려 주기도 했어요. 처음에 3채에서 시작했는데 18년이 지나니까 이 사람이 관리하는 임차인이 3000명이 된 거예요.이 사람의 주장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거예요. 집하고 사람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그러니까 세입자가 행복해지려면, 삶이 고귀해지려면, 집이 그렇게 좋아져야 한다. 아름답죠. 집주인으로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를 고민했어요. 살아가면서 옆집하고 공유하는 부분을 어떡해야 하는가를 공부해야 한다는 거예요. 학생들하고 공공 임대 주택에 관찰하러 답사를 나가 보면, 임대 주택 사는 빈민들이 단지를 너무 지저분하게 방치한다고 관리인들이 불평하거든요. 바로 그 문제예요.” 옥타비아 힐의 빈민 주택에 대한 방법론은 깔끔한 새 집을 지어 빈민들을 이사시켜 주는 것이 아니었다. 매주 세를 걷으러 직접 다녔다. 체납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니 집세를 내려면 일을 해야 했다. 자신이 사는 집을 수선하고 가꾸는 일거리를 주었다. 집세도 낼 수 있었고 살림도 나아졌으며 주거 환경도 나아졌다. 야학이나 어린이 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러스킨의 투자를 받았던 최악의 빈민굴이 몇 년이 지나자 번듯한 사람 사는 동네로 바뀌어 갔다. 주민들은 도시 환경 개선을 명분으로 한 재개발에 밀려 살던 동네를 떠나지 않아도 됐고 공동체도 깨지지 않았다. 게으르고 술만 마시고 범죄를 저지를 것 같은 사람들이 빈민이 될 거라는 낙인을 찍지 말고, 자립심과 자존감을 가지도록 북돋아 주고 대화해 주자는 것이 힐의 방법론이었다. 그들은 퍼 주기 식으로 부양해야 할 불쌍한 사람이 아니며, 세 들어 사는 집은 세만 내면 그만인 남의 집이 아니다. ●난개발 반대… ‘그린벨트’ 용어 첫 사용 옥타비아 힐은 국가에서 보조금 주택을 분양하는 방식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임대 주택이 수익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입주자 가족의 규모와 성격, 집의 입지를 고려해서 가구 배치를 섬세하게 정했다. 애초에 제대로 집행되지 못할 규칙은 제정하지 않았다. 집주인은 세를 과도하게 올리지 않고 장기적이지만 적절한 이윤에 만족하되 집의 상태를 좋게 유지하고, 세입자는 감당할 만한 집세로 떠돌지 않고 정착해서 살면서 일할 수 있는 접점을 찾아 세상에 보이려고 했다. 그녀가 관리하기 시작한 집들은 그 모델이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런던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내내 놀랍게도 100년이 넘게 신자유주의 시대를 견디며 지금까지 같은 방식으로 관리되며 수익을 내는 단지들이 남아 있다. “학교에서 학생들하고 같이 책을 보다가 옥타비아 힐이라는 이름이 나왔어요. 이 사람이 누구지? 찾아보니까 우리말 자료가 너무 없어요. 처음에 나는 왜 집주인이 되었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집주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체험했다는 것이 좋은 방법 같아요. 집주인으로서 끊임없이 세입자와 친구처럼 얘기했대요. 그런데 철칙이 뭐냐면, 그 집 관리인을 전부 여성으로 고용해요. 그러니까 여성의 사회 진출하고도 관련이 있죠. 이 여성들이 몇십년 같이 일하면서 이런 일을 전파하는 전문인이 된 거죠. 그러다가 이 사람이 또 뭘 하냐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만 아니라 집 근처에 공원이나 정자 나무 그늘 같은 곳이 필요하다, 도시나 건축에서 오픈 스페이스라고 하는 공간인데, 그 중요성을 처음 말한 사람이에요. 지주는 땅이 있으니 오픈 스페이스를 가지죠. 지주가 아니어도 시골에 살 때는 오픈 스페이스가 어디에나 있지. 그런데 고향을 떠나 도시에 오면 그런 공간이 없단 말이에요. 주말이나 저녁에 가족들하고 나갈 곳이 있어야 하잖아요. 정말 중요한 겁니다.”옥타비아 힐은 실외에 ‘앉아 있을 장소, 놀이할 장소, 산책할 장소, 그리고 여가를 보낼 장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고궁이나 교외로 놀러 갈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외곽으로 놀러 간다는 것은 여행 경비를 쓰는 것뿐만 아니라 하루치 일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외 녹지의 난개발에 반대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옥타비아 힐은 ‘그린벨트’라는 말을 처음 쓴 인물 중 한 명이다. 도시민들에게 근교의 공원과 녹지를 선사하기 위해서 시작한 난개발 반대 운동이 결국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으로 성장했다. 또한 옥타비아 힐의 사업은 세틀먼트 운동(Settlement Movement)을 낳았는데, 이는 중산층이 빈민과 같은 구역에 함께 거주하면서 생활 문화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자는 것이었다.●주택 관리, 새로운 시대에 적합하게 해야 “요즘 임대 주택 한다지만, 아, 서울에 비싼 아파트에 임대 주택 넣으라고 하니까 단지 한쪽 구석에 몰아 놓고, 그 집 아이들 학교 가면 놀림 받잖아요. 그때 런던이나 지금 서울이나, 다 시골 사람들이 올라와서 노동자가 되면서 만들어진 도시예요. 산업화를 이뤘으면서, 그 노동자에 대한 생각을 사회적으로 돈 있는 사람들도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요. 150년 전 런던에 비교하면 서울에는 훨씬 집이 많잖아요. 그런데도 그 고민이 너무 적었어요. 일제강점기에는 될 리가 없었겠지만 해방 후에는 돼야 할 건데 5년 있다가 전쟁 나고, 또 몇 년 있다가 군사독재 시작해서 1988년까지 군사정권이었잖아요. 그런 시대 속에서 집을 지었다고요. 그러니까 이 집이 노동자를 위한 집이 아니에요. 내가 70대가 되고 보니까, 도대체 내가 사람들을 위해서 한 게 뭐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집 짓는 사람인데, 건축가들이 돈 있는 사람 집만 지어 줬단 말이지. 돈 없는 사람이 자기 집을 맡길 리가 없고, 국가의 임대 주택은 오로지 중산층을 위한 거였어요. 그런데 건축가들이 이런 내용을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그저 임대 놓기 좋은 집이 아니라 세입자들이 품위 있게 살도록 설계할 수도 있단 말이에요. 좋은 단지는 예쁜 집, 잘 지은 집이 있는 단지가 아니라 거기 있는 사람들이 행복한 단지예요. 그러려면 설계와 관리가 서로 이어져야 하는 거예요.”존 싱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18 56~1925)가 그린 옥타비아 힐의 초상화는 1898년에 동료 노동자들이 선물한 것이었다. 그 무렵 이미 옥타비아 힐은 서방 세계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었지만, 국가나 정부에서는 그녀의 방식을 끝까지 반기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딴 여러 단체가 생겼고, 그중에는 부작용도 많았다. 지금 서울에서 집주인이라는 이유로 세를 받으려고 일주일마다 한 번씩 가정 방문을 한다고 하면 누구도 반기지 않을 것이다. 옥타비아 힐은 무상 복지나 보조금에 완강히 반대했다. 엘리트주의에 기반해 근면이나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종교를 전파하려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5%의 수익률도 악용되기 십상이다. 집값이 오르면 그에 따라 세도 올려 두 배의 수익이 주인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초상화를 선물받았을 때 힐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벗들이 특별한 시스템을 만들려고 하지도 말고, 내가 갔던 길을 맹목적으로 따르지도 말기를 바란다. 새로운 시대 환경은 또 다른 노력을 요구할 것이므로 우리가 끝없이 추구해야 할 것은 굳은 형식이 아니라 정신이다. … 어떤 주택은 잘 수선하는 것이 낫고, 어떤 주택은 새로 짓는 것이 나을 것이다. 사려 깊고 사랑을 담은 관리를 충분히 기울여야 하며” 더 중요한 것은 “다가올 새롭고 더 나은 날들의 가장 큰 과제를 간파하는 것이다. 더 큰 이상, 더 큰 희망, 그리고 그 둘을 실현시킬 인내력”을 품고 서로의 집과 삶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이 여름밤, 에어컨 아래에서나, 맞바람이 들지 않는 대학가의 원룸이나 땡볕을 피할 길 없는 옥탑방에서나, 잠들기 어려운 도시의 밤에 말이다. 기획 수류산방
  • ‘라디오스타’ 조현아 해명 “사진 해프닝 후 밖에 나가는 대신..”

    ‘라디오스타’ 조현아 해명 “사진 해프닝 후 밖에 나가는 대신..”

    어반자카파의 보컬리스트 조현아가 MBC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화제가 됐던 사진 해프닝에 대해 본인 입으로 진지하게 직접 해명을 한다. 18일 방송되는 ‘라디오스타’는 윤상, 김태원, 블락비 지코, 어반자카파 조현아가 출연하는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 특집으로 가요계 스승들이 집합해 흥미진진한 에피소드와 입담을 방출한다. 제작진에 따르면 녹화 중 조현아는 결심을 한 듯 조심스럽게 검색어를 휩쓸었던 사진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조현아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고 사진으로 인해 혹시라도 불편함을 느꼈을 모든 이들에게 사과를 하는 등 진지하게 해명했다. 이와 관련 조현아는 사진 해프닝 후 밖에 나가는 것을 꺼리게 된 사실도 털어놨다. 조현아는 “원래는 주기적으로 나갔어요. 이젠 주기적으로 나가지 않아요”라면서 현재 명상에 빠져있는 자신의 생활에 대해 얘기를 꺼내 시선을 집중시켰다. 조현아는 MC들의 질문에 명상과 관련된 얘기를 이어갔는데 MC들은 그의 명상 방법에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고 전해져 궁금증을 자아낸다. 뿐만 아니라 오디션 프로그램 ‘더 유닛’의 멘토로 활약했던 조현아는 방송 곳곳에서 눈물을 흘렸던 이유를 설명하기도. 조현아는 애정을 쏟았던 해당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해 얘기를 하면서 참가자들에 대한 애정까지 드러냈다고 전해졌다. ‘라디오스타’는 18일 오후 11시 10분에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존재의 본질’ 치열한 탐구… 조선 양명학 체계를 세우다

    [고전의 향연-옛 선비들의 블로그] ‘존재의 본질’ 치열한 탐구… 조선 양명학 체계를 세우다

    #하곡 정제두 두 번 죽다 하곡 정제두(鄭齊斗·1649~1736)의 일생 동안 죽음은 늘 삶의 등 뒤에 따라붙어 있다가 삶과 경계를 공유하곤 했다. 그는 34세 때인 임술년(1682년·숙종 8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스승 박세채에게 그동안 자신의 입속에서 맴돌던 말을 끄집어낸다. 제가 수년 동안 고심하였던 것을 한번 선생님께 털어놓고 절충을 구하려 하였으나, 이제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유감입니다. 제 생각에 심성의 본질에 대한 왕양명(王陽明)의 학설은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찾지 못하고서는 그대로 잠자코 있을 수 없어서 감히 대강을 말씀해 올리오니 이해해 주십시오. -하곡집, ‘박남계에게 올리려던 글’ 이 글은 양명학자로서 자신에 대한 첫 번째 공식 ‘커밍아웃’이었다. 그는 주자의 성리설과 격물치지설이 성인인 공자의 뜻을 완벽하게 풀어내지 못함을 고민해 왔다. 그러다 그 끝에서 결국 양명학과 만나게 되었음을 스승에게 고백한다. 그러나 이 당시까지 정제두는 아직 양명학에 대한 논리를 완성하지는 못했다. 그는 11세 아들과 30세 된 동생 정제태에게 자신이 수행해 온 미완의 양명학 연구를 이어 나가 줄 것을 당부한다. 그러나 죽음을 예감한 순간 쏟아낸 진솔한 언어들의 수신처는 결국 자기 자신이 돼 버렸다. 그때 죽음의 위기를 넘긴 하곡은 치열하게 양명학에 몰두한다. #존재에 관한 고민, 존재를 위한 번민 하곡 정제두의 초년기는 상실의 연속이었다. 5세 때 부친을 여의고, 16세 때 백부와 조부마저 세상을 떠났다. 23세 때는 부인과도 영결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또 34세 때는 그 자신조차 죽음의 위기에 내몰렸다. 그래서 그의 고민은 ‘존재의 본질’로 향했다. 주자학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목마름을 느꼈다. 그는 1668년(현종 9년) 별시에 급제했지만, 전시에는 낙방했다. 동생 정제태가 급제한 뒤로 모친의 허락을 얻어 경전 공부에만 전념했다. 1680년(숙종 6년) 여름 김수항의 추천으로 벼슬길이 열렸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여러 차례 동지중추부사, 한성좌윤, 이조참판, 대사헌, 우찬성 등 관직에 제수됐지만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조선은 주자학 허울을 뒤집어쓴 수많은 인사가 주자를 앞장세워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크루스테스’처럼 다리를 잘라 내고 팔을 잡아 늘여 자신들에게 맞는 이들로 무리를 늘리고 있었다. 그들은 권위주의적 폐쇄성 속에서 이른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용어로 너와 나를 가르고 무리를 지었다. 이런 상황에 관해 정제두는 “오늘날 주자의 학문을 말하는 자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곧 주자를 핑계 대는 것이요, 주자를 핑계 대는 데에서 나아가 곧 주자를 억지로 끌어다 붙여서 그 뜻을 성취하며, 주자를 끼고 위엄을 지어내 자신의 사사로움을 구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1709년 8월 강화로 거처를 옮기고 본질을 찾기 위한 학문에 매진한다.#그럼에도, 결국 버릴 수 없는 마음 스스로 양명학자임을 표방하고 나서 정제두는 다양한 우려와 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그의 스승 박세채는 ‘왕양명학변’을 지어 양명학을 비판한 뒤 그에게 양명학을 버릴 것을 종용했다. 또 다른 스승 윤증 역시 ‘변설’을 지어 그를 꾸짖었다. 최석정은 ‘변학설’을 지어 그의 양명학에 대한 의지를 비판했다. 민이승, 박심도 그의 양명학에 대한 열정을 우려했다. 그러나 정제두는 양명학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왕양명의 학설에 애착을 갖는 것이 만약 남보다 특이한 것을 구하려는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결연히 끊어 버리기도 어려운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학문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성인의 뜻을 찾아서 실제로 얻음이 있고자 할 뿐입니다.” -하곡집 ‘박남계에게 답하는 글’ 스승과 친구, 주변 여러 사람의 회유와 질책에도 그는 성인의 뜻을 찾아서 실제로 얻음을 얻고자 양명학이 보여 주는 길을 선택했다. 주자학이라는 이름의 우상 뒤편이 주는 안락함, 그 아래 무리 지어 있는 대상들과의 동질감, 그것은 그에게 학문적 타협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그는 ‘마음이 곧 이치다’(心卽理)라는 양명학의 본질적 명제를 밝히는 데 투신했다. 이후 그는 양명학의 치양지설과 지행합일설을 받아들이고, ‘대학’, ‘논어’, ‘맹자’, ‘중용’ 등 유가 경전을 새롭게 해석해 주자학의 권위에 맞섰다.#강화에 심은 양명학의 씨앗 조선 후기 강화를 거점으로 양명학을 연구·발전시켜 온 학파를 흔히 ‘강화학파’라 칭한다. 강화학파의 다른 이름은 ‘하곡학파’로, 강화의 양명학이 하곡 정제두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증명하는 호칭이다. 실제로 그의 문하에서 많은 문인이 배출됐다. 그리고 그가 강화에서 양명학에 매진한 이후 강화는 조선에서 가장 진보적인 공간으로 거듭났다. 아들 정후일을 비롯해 윤순, 김택수, 이광사 등이 그의 뒤를 이었다. 이들은 정제두의 자장 안에서 역사학과 음운학, 서예와 시문을 발전시켰다. 강화학파의 특징으로는 다양한 학문에 대한 관심을 표방하는 ‘박학’과 ‘실천주의’적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움직임은 우리 문화사에서 다양한 성과로 등장한다. 글씨에 원교 이광사, 역사에 연려실, 이긍익과 황현, 한학에 석천, 신작, 훈민정음 연구에 유희, 문자학에 남정화, 문헌학에 남극관 등이 강화학파의 범위를 확장해 나갔다. 영재 이건창에 의해 계승된 조선 양명학 정신은 민족자존의 주체사상으로 구현됐고,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등에 의해 민족주의 사상으로 형성돼 항일운동과 국학 연구에 이바지했다. 하정원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하곡집은…간행되지 못한 채 총 4종 필사본으로만 존재 정제두가 남긴 문집이다. 그러나 그의 문집은 간행되지 못한 채 필사본으로만 존재한다. 필사본은 총 4종이 전한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22책본, 서울대학교도서관 소장 11책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0책본,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8책본이 있다. 문집이 인출되지 못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양명학에 대한 정제두의 긍정적 시선 때문이었다. 정제두의 현손 정문승은 하곡집의 앞머리에 붙여 “문인으로서 이 일을 맡은 사람도 함부로 손을 대어 말속의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아니하므로”라고 하곡집이 수습되지 못했던 저간의 사정을 증언한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22책본 하곡집은 정집, 부집, 내집, 외집의 4부분으로 구성됐다. 정집에는 편지글과 상소문, 잡저와 시문이 수록됐다. 특히 그의 양명학적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존언’(存言)과 ‘학변’(學辨)이 저록됐다. 부집에는 신작이 완성한 정제두의 연보 등이 수록됐는데, 이 연보에는 주자학적 측면을 강조하고자 하곡의 양명학 사상을 의도적으로 지우려 했던 흔적도 남아 있다. 내집은 경학에 관한 독립적인 저술로 구성됐다. 그러나 중복되거나 빠진 부분이 많다. 외집에는 하도(河圖)와 선후천도설(先後天圖說)에 관해 다양한 그림으로 풀이한 내용이 실렸다.
  • 손글씨로 전하는 책의 감동

    손글씨로 전하는 책의 감동

    서울 중랑구는 제20회 중랑구 독서경진대회(그림)를 개최한다고 16일 밝혔다. 새마을문고 중랑구지부가 주최하는 이번 대회는 책 읽는 중랑 프로젝트의 하나로 마련돼 올해로 20주년을 맞는다. 모집 부문은 책을 자유롭게 선택해 작성하는 ‘독후감’과 가족과 스승에게 전하는 ‘편지글’이다. 초등 저학년부, 초등 고학년부, 중등부, 고등부, 대학·일반부 등 5개로 나눠 공모한다. 독후감은 초등부인 경우 200자 원고지 6매 이상, 중·고등부는 10매 이상, 대학·일반부는 12매 이상 분량이며, 편지글은 A4 용지나 편지지 1~2매 내외로 작성하면 된다. 모든 작품은 반드시 자필로 써야 하며 응모 작품은 1인 1작품으로, 중랑구민 또는 지역 내 학생 및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입상자 발표는 오는 10월 중랑구 홈페이지에서 한다. (02)2094-1844.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졸업한 지 수십 년 된 300명 제자들, 80세 스승에게 보답하다

    졸업한 지 수십 년 된 300명 제자들, 80세 스승에게 보답하다

    은퇴한 음악교사가 평생 잊지 못할 깜짝 선물을 받았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수백 명의 학생들이 졸업한지 수십 년이 지나 그를 위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13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CBS는 이 달 80세가 되는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예전 제자들이 합심해 콘서트를 마련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로버트 무어는 미 오클라호마주 퐁카시티의 퐁카시티 합창단을 지도하며 약 900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1996년 30년의 교직 생활을 마감했지만 늘 제자들과 연주회를 다시 한 번 갖길 꿈꿔왔다. 놀랍게도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제자 약 300명이 지난 한 해 동안 무어를 위한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다. 그리고 지난 1일 그에게 특별한 밤을 선물했다. 제자들이 마련한 리무진을 타고 공연이 준비된 극장 앞에 도착한 무어는 번쩍거리는 불빛과 제자들의 기립박수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지휘자로 무대에 서서 그토록 바라던 합창 공연을 가질 수 있었다. 제자들은 “엄격하고 강인한 스승이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잠재된 능력을 끌어내셨다. 우리에게 최고를 기대했기에 우리는 최선을 다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덕분에 합창단은 그가 지휘하는 동안 매년 전국대회 우승을 놓치지 않았고, 제자들 대부분이 졸업 후 교육 또는 음악 분야로 진출했다. 실제 LA에서 전문 오페라 가수로 활약 중인 1976년 졸업생 존 앤트킨스는 “선생님을 통해 클래식 음악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됐다. 선생님 없이는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며 감사함을 전했다. 공연 후 무어는 “절대 잊지 못할 생일 선물을 받았다. 너무 고맙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너희들을 사랑한다”며 감사함을 전했다. 사진=뉴스나인 캡쳐 안정은 기자 netineri@seoul.co.kr
  • 대구지법, 제자 돈 뜯었다 해임된 교사가 낸 소송 기각

    교사 비위는 다른 공무원이 저지른 같은 형태 비위보다 더 무겁게 징계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대구지법 행정1부(한재봉 부장판사)는 대구 한 공립학교 체육 교사 A씨가 대구시교육감을 상대로 낸 해임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패소판결을 내렸다고 4일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고의 평소 행실과 근무성적, 뉘우치는 정도 등 A 교사에게 유리한 정상을 모두 참작하더라도 대구교육청의 처분이 사회 통념상 현저하게 타당성을 잃었거나 객관적으로 부당해 재량권을 일탈·남용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또 “교원은 스승으로서 항상 사표(師表)가 될 품성과 자질의 향상에 힘쓰고 학문 연찬과 교육 원리 탐구, 학생 교육에 전심전력해야 하는 점에서 일반 직업인보다 훨씬 높은 도덕성이 요구돼 다른 공무원이 저지른 같은 비위에 비해 더 무거운 징계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원고가 이 처분으로 교원의 지위를 잃게 되지만 공직사회 비위와 부조리를 척결해 공무집행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유지하고 청렴한 공직사회를 구현하려는 피고의 공익과 비교했을 때 두 법익 사이에 현저한 불균형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A씨는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복싱부 지도교사를 맡는 것과 함께 대구시 복싱협회 부회장 등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2012∼2016년 실업팀 명예감독으로 활동하며 제자 등 5명에게 “선수로 선발돼 연봉을 최대한 많이 받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며 실업팀 관계자 인사비 명목으로 1790만원을 뜯었다가 적발됐다. 그는 선수 선발과 관련한 것 이외에도 제자를 상대로 돈을 더 뜯은 것도 들통났다. 대구시교육청은 A 교사의 비위가 알려진 뒤 일반징계위원회를 열어 국가공무원법을 위반했다며 그를 해임했다. A 교사는 대구시교육청 처분에 불복해 교원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심사를 청구했으나 기각되자 대구시교육감을 상대로 ‘해임처분 취소’ 소송을 냈다. 소송에서 그는 대구교육청이 비례의 원칙을 위반해 재량권을 일탈·남용해 자신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처분을 한 만큼 그 처분을 취소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대구시체육회 등과 관련한 각 비위행위는 교사 직무와는 관련이 없는 ‘사고’로 국가공무원법에서 규정한 품위유지의무 위반 행위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A 교사는 별도의 형사 재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항소했지만 최근 기각됐고, 상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고향 친구 강기주·김우종·김덕용이 위령제 전사자 명단에 있었다”

    “고향 친구 강기주·김우종·김덕용이 위령제 전사자 명단에 있었다”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12회●장순산 인터뷰 일시 1997년 12월 3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이규원 치과 1층) 대담 장순산 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 이규원 치과 원장(이경종 큰아들)중학교 2학년 때 일어난 6·25 사변 6·25 사변은 내(장순산)가 영종중학교 2학년 재학 중일 때 일어났다. 전쟁이 터지면서 내가 사는 인천 중구 영종도에도 북한 괴뢰군(傀儡軍)이 들어와 많은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당시 제일 고통스러웠던 일은 어린 학생들까지도 북한 인민의용군(義勇軍)으로 잡아가는 일이었다.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간 많은 학생은 결국 실종되었다. 나도 인민 의용군으로 잡혀가지 않으려고 숨어 지내다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우리 영종도도 밝은 세상을 맞게 되었다. 인천학도의용대 영종지대 창설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수복이 되면서 인천에서 학도의용대가 창설되면서 각 지대가 생기게 되어, 영종지대도 조직되었다. 영종지대장은 건국대학생인 장치복이었다. 적화(赤化) 후에 영종도 지역도 공산 괴뢰군들의 탄압으로 많은 섬 주민들이 고통을 당해 수복되었을 때는 많은 학생이 학도의용대에 가입해 빨갱이와 부역자들을 색출하는데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 영종지대에는 여학생 대원들도 많았다. 그들은 주로 인천학도의용대가(仁川學徒義勇隊歌)를 보급시켜 주기도 하고 홍보도 하면서, 잔일을 도맡아 하기도 하였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1950년 12월 초 전황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우리 국군과 UN군이 매일 후퇴 중이었다.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 따라 남하 드디어 1950년 12월 18일 새벽에 영종나루터에 나가 우리 영종지대 대원들은 배를 타고 인천으로 건너갔다. 그때 내 마음은 우리들이 일단 후퇴했다가 인천이 다시 수복되면 고향에 돌아오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고향을 떠났다. 그날 인천 병사구 사령부(현 병무청)에서 나온 국민방위군 소위를 따라서 인천축현국민학교를 출발하여,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교)를 향하여 걸어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안양에서 1박을 하고, 수원까지 걸어서 갔다. 수원에서는 기차 화물차를 타고 대구까지 갔으며 대구에서 모여 있다가 대구를 출발하여 청도, 밀양을 지나 마산으로 해서 통영까지 갔다. 1951년 1월 4일 경상남도 통영에 도착 인천에서 출발한 지 18일 만에 경상남도 통영에 도착한 우리들은 곧바로 국민방위군 제3 수용소로 입소하였다. 국민방위군 제3 수용소에서 수용소 생활을 한 지 며칠 지나서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 우리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수용소에서는 우리들 전원을 학교 운동장에 집합하라 하더니 단체 기합을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들이 한참 단체 기합을 받고 있을 때 어디를 갔다 왔는지 인천학도의용대 이계송 대장이 갑자기 나타나서 통영 국민방위군 수용소 책임자한테 “지금 여기 있는 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은 인천에서부터 이곳 통영까지 걸어와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군에 입대할 예정인데, 기합이 웬 말이냐 오늘 통영을 떠나 부산으로 갈 것이니 빨리 아침 식사를 시키시오”라고 말하여 기합을 중지시켰다. 우리들은 그날 아침을 먹고, 통영에서 배를 타고 마산을 들러서 부산에 도착하였다. 1950년 1월 10일 부산에서 자원입대 인천학도의용대의 많은 중학생이 부산 동대신동에 있었던 육군통신학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당시 부산육군통신학교의 유선교육대장은 인천상업중학교 교사 출신 신봉순 대위님으로 아마도 지휘관 옆에서 군 복무하게 되는 통신병이 어린 중학생들에게는 좀 더 나은 군 복무가 될 거로 예상하시고 우리들을 통신병으로 이끌었다고 나중에 얘기를 전해 들었다. 인천상업중학교 교사 출신 신봉순 유선교육대장님의 엄한 명령으로 그 당시 우리들이 통신교육 받을 때는 기합이라는 것이 없었다. 나는 1951년 4월 말 강원도 5사단 27연대 3대대 대대본부 무전병으로 배치받았다. 참혹한 전쟁터를 보다 내가 처음 5사단에 갔을 때 5사단은 가칠봉 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고, 서하리에서 경북 풍기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그때는 전투 상황이라 야전식량을 자주 주었으며 어떤 때는 며칠 분을 한꺼번에 줘서 그럴 때는 “아… 또 후퇴로구나” 하고 미리 준비를 하곤 하였다. 그때 많은 전사자 시신과 그리고 팔다리가 잘린 중상의 부상병이 발생하는 끔찍한 전투 현장을 모두 봤다. 평소 잘 작동됐던 무전기가 전투만 벌어지면 이상하게 탈이 나서 난처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무전기가 불통되면 대대장으로부터 “야! 너 고치지 못하면, 넌 총살이야” 하는 고함 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당시 지휘관들은 무전기를 다루는 통신병들을 많이 아껴주었다.신흥동 해광사에서 거행된 위령제 참석 우리 5사단은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후 다시 최전방으로 배치되어 전투 지역에서 휴전을 맞았으며, 이후 2년을 더한 군 생활 4년 3개월 만에 파란의 군 생활을 마치고 만기제대하였다. 제대한 1955년 12월 17일날 신흥동 해광사에서 거행된 위령제(慰靈祭)에 참석했는데, 나하고 인천학도의용대 영종지대에서 함께 활동하다가, 같이 남하하여 자원입대한 강기주·김우종·김덕용 3명의 이름이 전사자 명단에 있는 것을 봤다. 남기고 싶은 말 전사한 내 고향 친구들의 이름(강기주·김우종·김덕용)과 인천학도의용대의 호국(護國)활동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에 기록으로 남겨지는, 이 큰일을 이경종, 그리고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 2부자(父子)께서 해준다고 하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다음호에 13회 계속참전기 12회를 마치며 중학교 2학년 어린 나이에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자원입대하여 조국을 지켰지만, 누구에게도 자랑하지 않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으나 섭섭해하지 않았던 장순산은 인천이 고향입니다. 이규원 치과 원장(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 68년 전 인천에서 있었던 슬픈 일 1950년 12월 18일 인천을 출발하여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1951년 1월 10일 자원입대한 인천 출신 중학생들은 약 2000명이었고, 그중 전사자는 정확히 208명이었다. ①중학교 1~3학년생 700여명은 통신병으로 참전하여, 약 35명이 전사하였다. ②중학교 4~6학년생 약 600명은 해병으로 참전하여, 100여명이 전사하였다. ③중학교 1~6학년생 약 700명이 육군으로 참전하여, 70여명이 전사하였다. ※인천학생 6·25 참전사 제1~제4권에 있는 ‘6·25전사 인천학생’편 참고.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단톡방서 ^^ 보냈다고… 학폭 가해자가 됐습니다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단톡방서 ^^ 보냈다고… 학폭 가해자가 됐습니다

    “걸면 걸리는 것은 학교폭력(학폭)”이라는 냉소가 학교에서 유행이다. 2004년에 도입된 학교폭력예방법(학폭법)이 사이버따돌림 등을 추가해 개정된 지 5년째. 사소한 다툼까지도 학폭위에 회부하는 무분별한 신고에 학교가 속병이 들고 있다. “무조건 먼저 신고해야 유리하다”는 ‘학폭 계명’이 나돈다. 제도개선 논란만 거듭한 학폭법을 이제는 정말 손봐야 한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높다. 입시제도만큼 공론화가 시급한 사안이 학폭법 개선이다.A여고 3학년 김모양은 일찌감치 대입 재수를 각오하고 있다. 학교폭력에 연루돼 지난해 2학기 내신성적이 엉망이기 때문이다. 반 친구들 단톡방의 문자 하나에 고교 생활이 뒤죽박죽 꼬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친구들 단톡방에는 B양이 평소 반 운영에 비협조적인 친구 C양을 험담하는 글이 있었다. 김양은 단톡방에서 다른 친구의 말에 ‘^^’ 이모티콘을 보냈다가 C양을 헐뜯었다는 오해를 받았다. C양의 부모는 단톡방 대화들을 캡처해 다음날 학교폭력으로 신고했다. 학교 측은 단톡방에서 대화했던 5명을 모두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에 회부했고 김양은 학폭 가해자로 징계를 받았다. 학폭 처벌은 아무리 경미해도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된다. 김양의 어머니 정모씨는 “가해자로 낙인찍혀 입시를 망치게 된 딸이 억울해하니 교육청에 재심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교사들은 “중재 나섰다가 ‘학폭 은폐’ 몰릴라” 피해 학생에게 학폭이 얼마나 끔찍한지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일명 ‘학교폭력예방법’(학폭법)은 2004년 제정돼 여러 차례 개정됐는데, 현행법은 지난 2012년 대구의 중학생 권모군이 친구들의 괴롭힘으로 목숨을 끊자 사회적 충격 속에서 추가로 개정된 것이다. 사이버 따돌림을 추가하는 등 늘어나는 학교폭력을 학교 학폭위가 중심이 되어 선제적·자율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 근본 취지였다. 학교 폭력을 축소·은폐한 교원과 학교장을 징계할 수 있고, 학폭위의 처분이 불만인 피해 학생에게도 재심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새로 부여했다. 한마디로 학폭 가해자에 대해서는 신속하고 적극적인 처벌을, 피해자에게는 구제 범위를 더 확대한 조치였다. 학폭 예방을 위한 적극적인 조치로 보완된 현재의 학폭법은 그러나 최근 학교 현장에서 의도치 않게 가해자로 내몰리는 2차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다는 우려가 쏠린다. 소소한 갈등조차 덮어놓고 학폭으로 신고하는 풍토가 확산한 탓이다. 경기도 한 중학교의 학폭 담당인 주모 교사는 “요즘 학부모들은 자녀의 학폭 피해에 극도로 예민하다. 사소한 문제도 신고서부터 제출하고 본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학폭 피해를 주장하는 학부모에게 가해 학생 측과의 화해를 섣불리 중재했다가는 학폭 은폐 교사로 내몰리기 십상이다. 학폭법(제13조)에 따르면 학교는 학폭 사실을 보고받으면 반드시 학폭위를 열어야 한다. 이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학폭을 축소·은폐했다는 사유로 학교 측은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다. 학폭 사건에 대한 일선 교사들의 화해나 중재 노력이 소홀해진 근본적인 이유다. 학폭 사건을 겪은 학생과 부모들 대부분이 교사와 학교의 무책임함에 상처를 입는 것도 그래서다. 지난해 중3 아들이 학폭 징계처분을 받았다는 학부모 박선주씨는 “아이들의 사소한 싸움이 중재 과정도 없이 일주일 만에 학폭위에 넘어가더니 학급 학생의 절반이 징계됐다”면서 “제자들을 재판에 넘기는 담임을 어느 학부모와 학생이 존경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학교의 행정편의주의적 대응을 꼬집은 것이다. ●학폭 담당은 교사들 기피 직무 1순위 이런 불신 속에서 학폭 담당 교사들의 고충은 상상을 초월한다. 교사들 사이에서는 기피 직무 1호가 학폭 전담이다. 새로 부임했거나 기간제 교사에게 학폭을 맡기는 폭탄 돌리기가 암묵적 관행일 정도다. 학부모 항의에다 스승으로서 가해학생과 피해학생 어느 쪽도 지켜줄 수 없다는 자책감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는다. 학폭 처리 결과에 불만인 학생 측에게 소송을 당하는 사례는 흔하다. 학폭 심판관으로 등 떠밀린 교사들은 언제 당할지 모르는 소송에 긴장 상태다. 일부 시·도교육청에서는 학폭 담당 교사들의 배상 책임을 덜어 주는 단체보험에 가입하고 있다. 중학교에서 학폭위를 운영하는 장모 교사는 한 달에 한 번꼴로 교육청 재심에 참석하는데 심각하게 회의한다. 그는 “학폭위의 처분에 불복한 학부모를 상대로 학생을 합당하게 처벌했다고 맞서야 하는데, 과연 스승으로서 할 일인지 자괴감이 든다”고 토로했다. 교사가 재판관이 돼야 하는 학폭법이 논란만 거듭하는 사이에 재심을 부추기는 상술은 기승을 부린다. 인터넷에서는 학폭 전문 행정사와 변호사들의 ‘학폭 상권’이 만들어졌다. 학폭위에 회부된 단계부터는 학교에 맞서야 하는 학생 측에는 행정사와 변호사의 도움이 절실하다. 학부모들은 “억울하게 가해자로 몰리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소명서 작성 등 학폭위에 최대한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전문가에게 기대지 않을 수 없다”며 공감한다. 서류 작성을 대리해 징계 수위를 낮춘 사례가 많다고 소문난 행정사들은 시간당 상담비를 따져 받을 만큼 인기가 많다. 학폭위 처분에 불복할 경우는 재심 신청 과정에서도 번번이 높은 벽에 부딪힌다. 교육청의 재심 결과가 억울했지만 법적 대응 방안을 찾지 못해 포기한 사례도 적지 않다. 경기도의 학부모 황지연씨는 “최종 단계는 행정법원에 행정심판을 청구하는 것인데 도교육청 담당 부서조차 학교에 문의하라는 답변만 했다”며 “대립각을 세우는 학교에다 그런 문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학교와 학생, 학부모 모두를 위해 현실을 감안한 학폭법 손질은 한시가 급한 실정이다. 지금의 학폭법은 신고와 처벌만 있을 뿐 교육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교육적 해결 기능을 학교에 돌려줘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학폭 사건에 대해 학교장이 종결권을 가져야 사소한 다툼은 교사들의 재량으로 중재할 수 있다. 교사들은 “학폭법 시행령 등에서 학교장 권한으로 처리할 수 있는 사안과 학폭위에 회부할 사안의 범위를 명확히 해 달라”고 주문한다. ●“공론화 기구 통한 학폭법 개정 필요” 이원화 체계로 학폭을 해결해야 한다는 각계의 제언이 쏟아진다. 학폭위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김경석 변호사는 “교사에게 사안 조사와 행정 절차를 전담시키는 현실에서는 전문성을 의심한 학부모들이 끊임없이 민원을 제기하고 재심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13년 764건이던 재심 건수는 2016년 1299건으로 폭증했다. 학폭 사안의 조사 등은 전담 경찰관이나 조사원에게 맡기고 학교는 학폭 예방 교육에 전념하게 하자는 제안도 적극 고려해 볼 만하다. 학폭위를 개별 학교가 아닌 교육지원청 산하에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관련 법안은 국회에 이미 발의돼 있다. 지난해 교육부는 올 초까지 학폭법 일부 개선안 마련을 약속했으나 아직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학폭법 개정이야말로 사회 공론화 기구를 통해 손질할 교육 과제”라고 입을 모은다. sjh@seoul.co.kr
  • ‘학도병’ 아버지 恨 풀어준 치과의사 아들… “6·25 참전역사 기록관 만들었죠”

    ‘학도병’ 아버지 恨 풀어준 치과의사 아들… “6·25 참전역사 기록관 만들었죠”

    20년 넘게 사재 털어 자료 모아 “고귀한 희생 널리 알려 나갈 것”“10대의 앳된 학생들이 왜 참혹한 전쟁에서 희생될 수밖에 없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의 궁금증을 아들 된 도리로 풀어드리고 싶었구요.” 20년 넘게 6·25 전쟁에 참여한 인천학도병의 기록을 수집해 알리는 이규원(57)씨는 25일 “아버지가 중학생 때 6·25 전쟁에 참전했는데 아버지를 도와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다 보니 기록관까지 만들게 됐다”며 이같이 말했다. ‘도대체 인천 학생들이 얼마나 참전했고 또 몇 명이 전사했는지’ 등에 대한 아버지의 궁금증이 자료 수집의 시작이었다. 인천에서 ‘이규원치과’를 운영하는 그는 아버지 이경종(85)씨와 함께 1996년부터 정부와 자치단체의 도움 없이 인천학도병 기록을 수집하고 있다. 지금까지 수집한 2500여점의 자료를 토대로 아버지의 생일인 지난해 4월 18일 인천 중구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역사 기록관’을 만들었다. 그는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중고생 2000여명이 교복 대신 군복을 입고 전쟁터에 나섰다”면서 “당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이던 아버지도 다른 학생들과 함께 혹한의 날씨에 하루 25㎞씩 20일을 걸어 훈련소가 있는 부산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이경종씨는 나이가 어려 입소 불가 판정을 받았으나 당시 훈련병 중 문맹자가 많아 나이가 어렸지만 한글과 일본어, 영어를 읽을 수 있어 자원입대를 받아줬다. 이경종씨는 46년 만인 1996년 7월 참전용사증서를 우편으로 받았다. 당시 참전했던 학생들 중 확인된 전사자만 208명에 이른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전사자의 가족들이 생존해 계신데 ‘전쟁에 참전한다’는 하직 인사도 없이 내려간 아들의 죽음이 평생의 한으로 쌓여 있다”고 전했다. 이어 “자료 수집은 아버지가 직접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참전했던 친구들을 만나 식사를 하며 사진을 찍고, 구술을 받아 모은 것”이라면서 “지금까지 205명을 만나 인터뷰를 했고 전역증과 제대증, 훈장 등을 토대로 당시 참전했던 105명을 찾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지난 4일 에티오피아 6·25 참전용사를 위한 5차 후원금 1000만원을 전달했다. 2013년부터 지금까지 후원한 금액이 5000만원에 이른다. 후원금은 150여명의 에티오피아 한 달 생활비 50달러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는 지난해 6월부터 한 달에 한 번 서울신문에 인천학도병에 대한 발굴 기획물을 연재하고 있다. 그는 “2~3시간이 넘는 구술자료와 각종 자료를 토대로 정리해 신문에 내고 있는데 앞으로 17년은 더 해야 지금까지 인터뷰한 사람들의 기록 정리가 마무리될 것 같다”면서 “다시는 이 땅에서 참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인천 학도병들의 고귀한 희생을 널리 알려 나가겠다”고 말했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아는 형님’ 하하 “서장훈은 가슴으로 낳은 자식”

    ‘아는 형님’ 하하 “서장훈은 가슴으로 낳은 자식”

    하하가 “서장훈은 내가 가슴으로 낳은 ‘예능 자식’”이라고 전했다. 23일 방송되는 JTBC ‘아는 형님’에서 노사연과 하하가 전학생으로 출연한다. 노사연은 하하가 연예계에 데뷔하기 전부터 이웃 주민으로 알고 지내 온 사이. 두 사람은 오랜 친분에서 나오는 ‘찰떡 호흡’에 힘입어 화려한 입담을 뽐낸다. 최근 진행된 ‘아는 형님’ 녹화에서, 하하는 “서장훈은 내가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다”라고 말해 궁금증을 자아냈다. 이어 “절친한 서장훈이 연예계에 발을 들인 것은 내 덕분이다”라고 밝혔다. 알고 보니 하하가 서장훈을 현재 소속사와 연결해주는 등 연예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와줬다는 사실. 한편, 이날 하하는 예능 스승으로서 서장훈에게 서운했던 점을 털어놓아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예능 치트키’ 노사연과 하하과 함께하는 형님 학교는 23일 토요일 밤 9시에 방송되는 JTBC ‘아는 형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자치광장] 서울은 학교다/김영철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장

    [자치광장] 서울은 학교다/김영철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장

    ‘서울은 학교다.’이 발칙한 구호는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이 펼치고 있는 캠페인 이름이다. 서울시민 모두가 스승이자 학생이 되고, 서울의 모든 공간과 시설이 배움터가 되도록 하자는 뜻이다. 올 초 이 구호를 내걸 때 많은 이들이 걱정했다. 의지와 꿈을 앞세우는 게 캠페인 슬로건이라지만, 어느 정도 현실성은 감안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 구호를 내건 건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평생교육진흥원이 올해부터 일찍이 볼 수 없던 색다른 학교 세 곳을 동시에 개교하면서 ‘거대한 서울을 위대한 학교’로 만드는 야무진 프로젝트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울자유시민대학’과 ‘모두의학교’, ‘동네배움터’, 이름부터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서울자유시민대학은 서울시민이 꼭 갖춰야 할 지성을 기르고 키우는 일종의 시민종합대학이다. 종로구에 본부 캠퍼스가 들어섰고, 다섯 개 지역에 권역별 학습장이 가동되고 있다. 인문·교양과 사회·경제, 문화·예술, 서울학과 생활환경, 미래학, 민주시민 등 7개 분야에 432개 고품격 강좌들이 명강사들을 앞세워 시민을 기다린다. 서울에 위치한 28개 대학과 연계해 대학별 특화 강좌까지 운영하고 있으니 ‘종합대학’으로도 손색이 없는 셈이다. 수강생들의 학습 동기를 유발하기 위해 교육과정 이수 등 일정 요건을 갖추면 총장인 서울시장 이름의 명예 석·박사 학위를 준다. 2022년까지 모두 3000여명에게 학위를 수여할 계획인데, 이렇게 배출된 ‘석·박사 시민’은 글로벌 도시 서울의 시민력을 드높이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모두의학교는 성별과 나이 등을 떠나 모든 사람이, 자신이 배우고 싶고 학습하고 싶은 내용을, 스스로 기획하고 운영하는, 신개념의 평생학습 배움터다. 금천구에 있는 중학교 건물을 주민 의견을 100% 반영해 아주 색다른 공간으로 리모델링한 뒤 지난해 가을 개관했다. 올해 3월부터 ‘모두의 앙상블 프로젝트’ 등 다양한 시민 참여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동네배움터는 말 그대로, 동네 근처 다양한 시설과 공간을 학습장으로 꾸며 주민들이 더 편하고, 더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현재 서울 15개 자치구에 53개 동네배움터가 ‘배움플래너’의 꼼꼼하고 친절한 도움으로 운영되고 있다. 주민센터부터 마을회관, 카페, 갤러리, 소극장, 공방 등 갖가지 공간에서 지역 밀착형 학습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이 세 학교는 때론 포개지고, 때론 각자 활동하면서, 서울을 위대한 학교로 거듭나게 하자는 꿈을 현실로 만들 것이다. 이들 세 학교가 문을 열고 있는 지금, 서울은 이미 학교다.
  • 박지성 “스웨덴전 수비 평가전보다 나아져. 멕시코를 상대로도 수비가 중요”

    16년 전 이탈리아를 1-0으로 제압했던 바로 그날, 축구대표팀은 후반 20분 비디오 판독(VAR)으로 페널티킥을 허용하며 스웨덴에 0-1로 무릎꿇어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 F조 통과 구상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스승과 제자로 이탈리아 격파에 힘을 합쳤던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이나 박지성 SBS 해설위원겸 대한축구협회 청소년유스본부장이 진단한 스웨덴전 패인과 멕시코전 필승 키워드는 정확히 수비에 맞춰졌다. 미국 폭스스포츠 TV의 패널로 활동하는 히딩크 전 감독은 “한국은 수비가 불안하다. 경기가 뒤로 갈수록 수비가 무너지는 경향이 있다”며 “우려한 대로 수비가 한순간에 무너져 실점했다”고 집중력 부족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박지성 위원 역시 “수비가 평가전보다 나아졌다. 상대 높이에 대항해 일차적으로 수비가 잘 이뤄졌다”고 평가한 뒤 “후반 25분쯤 스웨덴 선수들의 체력이 떨어지는 즈음에 우리 선수들이 체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더욱 밀어붙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파워 프로그램을 가동한 시점이 늦었지 않았느냐는 의구심을 지우지 못한 경기였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경기를 치를수록 체력은 좋아질 것이란 낙관론도 내비쳤다. 개인기도 좋고 스피드도 좋은 멕시코를 상대로도 수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 위원은 “분명 이겨야 하는 경기지만, 상대 전력을 보면 계속 ‘닥공(닥치고 공격의 줄임말)’을 할 수는 없다. 우리 전력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기려고 갔다가 더 많은 실점을 할 수 있다”며 “수비를 두텁게 하는 게 맞다. 무실점으로 가면서 어떻게든 한 방을 넣고 이기는 게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전술”이라고 말했다. 이어 개인기 가 좋은 멕시코 선수에게 한 쪽이 뚫렸을 때 동료가 어떻게 협력해 견제할 수 있는지 미리 게임플랜을 확실히 가져가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수비에 중점을 두고 역습을 통해 득점을 노리는 전술에서는 손흥민(토트넘)의 결정력이 중요할 수 밖에 없다. 박 위원은 스웨덴전에서 손흥민과 황희찬(잘츠부르크)이 측면을 뚫어주긴 했지만 결정은 중앙에서 하는 것인데 아무도 거들어주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나아가 “한 방을 기대하는 것은 손흥민에게 결정력이 있기 때문”이라며 “손흥민의 결정력을 이끌어내려면 더 많은 선수들이 골을 넣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신태용 감독도 스웨덴전 패인으로 높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선수들이 뒤로 물러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 위원은 나아가 “10개월 밖에 안된 신태용 감독 체제가 자기 색깔을 드러내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고 여러 전술 실험을 하느라 기회를 낭비한 측면도 있다”고 꼬집었다. 이 발언은 어쩌면 신 감독의 전술 운용이나 일부 선수의 실책을 패인으로 꼽는 일부 팬들의 비난으로부터 신 감독을 변호하는 발언으로도 읽힌다. 니즈니노브고로드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지휘자는 사회 활동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

    “지휘자는 사회 활동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

    음반 재킷이나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체격이 컸다. 떡 벌어진 어깨를 보니 어릴 적 수영선수가 될 뻔했다는 말이 이해됐다. 지역사회와 역사 속에서 오케스트라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고 말할 때는 수십년을 포디엄(지휘대) 위에 선 듯한 노장의 기운을 느끼게 했다.잘생긴 외모 덕에 더욱 인기가 높은 신예 중 한 명일 것으로 생각하고 만난 러시아 출신 지휘자 바실리 페트렌코(41)의 첫인상은 예상을 많이 빗나갔다. 지난 12일 서울시향과의 공연을 앞두고 만난 페트렌코는 “끊임없이 연구해야 하고, 사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지휘자여야 한다”며 그의 지휘 철학을 설명했다. 러시아 지휘계를 대표하는 젊은 지휘자인 페트렌코는 2006년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RLPO)의 최연소 수석 지휘자를 지냈고, 현재 오슬로 필하모닉 수석 지휘자로 재임 중이다. 그는 영국 리버풀에서 빈곤층 학생을 대상으로 한 예술교육 프로그램인 ‘인 하모니’(In Harmony)를 만든 경험을 말하며 “지역사회에서 오케스트라가 문화적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고 자부했다. 그는 또 “RLPO 음악감독으로 객석 점유율을 40% 이상 높였고, 관객의 3분의1 이상을 35세 이하의 젊은이로 채웠던 게 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점”이라고도 했다. 페트렌코는 예술이 어떻게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음악가였다. 그는 공석인 서울시향의 차기 상임지휘자의 덕목에 대해 “오케스트라는 지역사회의 일부로 존재하고, 지휘자는 관객들과 더 많은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하며 언론과도 긍정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며 “오케스트라는 높은 곳만 지향하지 말고 현실 속 사회를 좀더 빛나게 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자신의 지휘 스타일을 묻는 질문에는 ‘지휘봉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음악계의 격언을 소개했다. 러시아 출신 지휘자들의 스승인 일리야 무신의 가르침으로, “지휘자는 단원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페트렌코는 “내가 만들고자 하는 소리는 결국 단원들이 만드니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페트렌코는 14~15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첫 내한공연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제임스 에네스와의 협연으로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과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등 ‘러시아의 밤’으로 무대를 꾸민다. 그는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은 옛 소련이 붕괴될 당시 새로운 전환기의 작품이었고, 작곡가 개인으로서의 삶과 역사 속 인간으로서의 삶이 연금술처럼 융합된 작품”이라며 모국의 음악을 한국 관객에게 소개하는 것에 기대감을 나타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신은주 순천대 교수, 대학 발전기금 1000만원 기탁

    신은주 순천대 교수, 대학 발전기금 1000만원 기탁

    신은주 순천대 기초의·화학부 교수가 지난 12일 대학 발전과 후학 양성에 써달라며 발전기금 1000만원을 학교에 기탁했다. 신 교수는 지난달 열린 제37회 스승의 날 기념식에서 과학영재와 여성 과학인 지원, 화학분야 우수인력 양성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스승상(근정포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상은 교육발전에 헌신한 교육자를 발굴하기 위해 2012년부터 시상해온 최고 권위의 교육상이다. 신 교수는 대학교육 분야 일반대학 교수 중 유일하게 상을 받을 정도로 실력자로 꼽히고 있다. 그는 “이번 수상을 통해 제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며 “교육과 연구에 더욱 충실하라는 뜻으로 알고, 제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기부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진성 순천대 총장은 “대학을 대표해 진심으로 감사하다”며 “고귀한 뜻에 따라 학교 발전과 후학 양성을 위해 소중하게 사용하겠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순천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조윤선, ‘국정원 특활비 뇌물’에 “사제지간에 받은 격려금”

    조윤선, ‘국정원 특활비 뇌물’에 “사제지간에 받은 격려금”

    조윤선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이병기 전 국가정보원장으로부터 받은 특수활동비에 대해 “사제지간에 받은 격려금”이라고 주장했다. 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부장 최병철) 심리로 열린 공판에서 조윤선 전 수석 측 변호인은 이같이 주장하며 뇌물 수수 의혹을 부인했다. 조윤선 전 수석과 이병기 전 원장은 서울대 외교학과 선후배 사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조윤선 전 수석이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대변인으로 정치에 입문했을 때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이병기 전 원장은 정치특보였다. 두 사람은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캠프에서 다시 만났다. 이들은 대학 선후배를 넘어서 정치적 스승과 제자 사이로 발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 전 수석 변호인 측은 “세월호 참사 이후 힘든 정국에 부딪쳤을 때 이병기 전 원장이 제자를 격려하는 차원에서 금품을 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병기 전 원장 측도 지난 2월 “(돈을 준) 사실 관계는 인정하지만 뇌물인지에 대해서는 다투겠다”면서 “2002년에 알게 된 이후 친분·학연 관계로 챙겨준 격려금”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조윤선 전 수석 변호인은 “연배나 의전 서열이나 권한으로 봤을 때 조윤선 전 수석과 비교할 수 없는 위치인 국정원장이 준 돈을 뇌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부활 신호탄 쏜 ‘골프 천재’

    부활 신호탄 쏜 ‘골프 천재’

    체중 62㎏로 늘리자 힘·스윙 좋아져4일 US여자오픈 마지막 4라운드를 치르는 김효주(23)의 샷은 힘이 넘쳤다. 이날 김효주는 연장전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아쉬운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난도 높은 코스에서 3, 4라운드 연속 60대 타수를 적어내며 경기력을 뽐냈다. 원조 ‘천재 소녀’ 김효주는 이번 준우승으로 길었던 부진의 터널에서 벗어나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김효주가 톱10에 든 것은 지난해 8월 캐나다퍼시픽여자오픈 공동 8위에 오른 이래 1년 2개월 만이다. 이번 대회 직전까지 8개 대회에 나온 김효주의 최고 성적은 공동 24위였고, 컷 탈락도 3차례나 겪었다. ‘부활’의 비결은 몸무게와 스윙이다. 성적이 우수했던 2014년 65㎏까지 나갔던 김효주의 몸무게는 지난해 여름 50㎏ 초반까지 내려갔다. 샷에 힘이 실리지 않았고 스윙도 흐트러졌다. 김효주는 근육량 위주로 체중을 62㎏까지 늘렸고, 이는 자연스럽게 파워 증가와 스윙 안정으로 이어졌다. 김효주는 “몸무게가 늘면서 쪼그라들었던 비거리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2주 동안에는 스승 한연희 코치와 스윙도 바로잡았다. 김효주는 경기 직후 “오랜만에 마지막 날 실수 없이 좋은 성적을 거둬 만족한다”며 “(아버지께서) 그동안 성적이 너무 좋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고 걱정을 많이 하셨다. 우승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준우승이라도 차지했기에 편하게 해 드린 것 같다”고 밝혔다. 세계 랭킹 1위인 박인비(30)는 합계 1언더파 287타로 9위에 올랐고, 김지현(27)은 합계 이븐파 288타로 공동 10위를 기록해 내년 출전권을 확보했다. 첫날 공동선두였던 이정은(22)은 합계 1오버파 289타에 그치면서 고진영(23), 지은희(32)와 함께 공동 17위로 내려앉았다.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 [금요 포커스] 교육 불모지에 희망의 씨앗을 심다/송기동 국립국제교육원장

    [금요 포커스] 교육 불모지에 희망의 씨앗을 심다/송기동 국립국제교육원장

    “한국 친구들이 만든 강좌가 정말 재밌었어요. SNS를 통해 공부하는 것이 신기하고, 한국에 대해 알 수 있어 참 좋았어요. 이런 기회를 접할 수 있게 도와준 선생님께 감사드려요.” 남태평양 외딴 섬나라 피지에 파견된 우리 선생님에게 현지 고등학생이 건넨 말이다. 컴퓨터와 휴대폰 자체가 생소한 피지 학생들에게 한국의 교육영상을 활용해 학습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높였다.훌륭한 스승은 한 사람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장애를 이겨낸 기적의 주인공 헬렌 켈러 곁에 설리번 선생님이 있었던 것처럼 누구나 마음 한 곳에 큰 울림을 준 선생님의 추억을 하나쯤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난 반세기 우리나라가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를 딛고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어 낸 데에도 어려웠던 시절,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우리의 희망 ‘교육’이 있었기 때문이다. 콩나물시루 교실, 2부제 수업 등 열악한 환경에서도 사랑과 열정으로 가르쳤던 선생님들이 있었기에 많은 우수한 인재를 배출할 수 있었다. 과거 우리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미국, 독일 등으로부터 많은 교육 원조를 받았다. 교과서 제작을 위한 인쇄공장 설립, 실생활에 필요한 직업교육훈련원 지원 등은 우리 학생들이 가난과 빈곤을 딛고 배움을 이어 가도록 이끄는 희망이 됐다. 이제 우리 교육은 그 정신을 이어받아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전 세계로 눈을 돌려 우리 경제 규모와 위상에 걸맞은 책임과 의무를 다할 필요가 있다. 교육부 국립국제교육원은 한국의 우수한 교육경험을 전수하고자 2013년부터 개발도상국에 우리 교원을 파견하고 있다. 에티오피아, 카자흐스탄 등 4개국 20명 파견을 시작으로 5년여에 걸쳐 세계 곳곳에 뿌려놓은 우리 교원들의 열정의 씨앗이 어느덧 싹을 틔우고 있다. 우리 교원이 가르친 우간다 학생이 ‘전국 중등학교 과학경진대회’에서 당당히 1위에 입상하는 쾌거를 이루는가 하면 피지에서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선생님과 학생들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과학, 컴퓨터 경진대회에서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한 스와질란드에서는 교통사고로 입원해 진급시험을 포기한 학생을 위해 휴일도 반납한 채 열심히 가르쳐 최고 등급으로 합격시키기도 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한국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지난해부터 한국어를 제2외국어 선택 과목으로 지정해 정규 수업을 개설했다. 제2외국어 중 한국어 인기가 가장 높다고 한다. 또 태국은 올해부터 대학입학시험에 한국어를 채택했으며,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도 한국어 수요가 크게 늘어나는 등 한국어 학습 열기는 실로 대단하다. 우리 선생님들은 드라마나 케이팝의 높은 인기를 활용해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한복을 함께 체험해 보거나 비빔밥과 같은 한국 요리를 가르쳐 주기도 하는 등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전 세계에 전파하는 선봉에 서 있다. 현재 세계 각국에서는 한국의 우수한 교육 경험과 열정을 공유하고자 더 많은 교원의 파견을 요청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는 2016년부터 파견 규모를 확대해 장기 파견교원 140명, 교ㆍ사대생 중심의 단기 해외교육봉사 160명 등 300여명의 교원을 20여개 국가에 파견하고 있다. 올해 1월 말레이시아에 파견된 한국어 선생님은 “매일 33도를 웃도는 더운 날씨에도 냉방이 잘 되지 않는 교실에서 수업을 하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됩니다. 하지만 수업이 끝난 뒤 수줍은 미소로 다가와 고마움을 표현하는 아이들의 선한 눈빛을 볼 때면 어느새 수업의 피로감은 사라지고 제 자신이 따뜻한 감동과 위로를 받을 때가 더 많아요”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아이들이 ‘헬렌 켈러를 절망에서 끌어올린 설리번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먼 땅 어디선가 어려운 이들에게 사랑과 용기를 심어주고 있는 해외에 파견된 우리 선생님들에게 마음으로라도 카네이션 한 송이를 달아드리고 싶다.
  • “1953년 가을, 부친은 큰아들 유골함을 받고 대성통곡하셨다”

    “1953년 가을, 부친은 큰아들 유골함을 받고 대성통곡하셨다”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1926년 10월 25일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참전하여 1950년 11월 12일 24세 때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김우종 ▲인천중학교 4학년 때 자원입대 ▲해병 6기로 참전·전사 (군번 9210662) 김우종(17세 참전·18세 전사)1933년 4월 10일 : 인천 영종도 중산리 출생1947년 : 인천영종국민학교 졸업(제24회)1950년 12월 18일 : 인천중학교 4학년 재학 중에 인천을 출발하여 마산까지 20일간 걸어서 내려감.1951년 1월 24일 : 마산에서 해병 6기로 자원입대해 참전.1951년 8월 31일 : 강원도 월산령 김일성고지에서 전사.아랫글은 6·25 전사 인천 학생 김우종의 유골을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하면서 기록한 것으로 월간 서해문화 2002년 1월호에 ‘불멸의 꽃!’으로 기고한 글이다. 고(故) 김우종은 전사하였기 때문에 아래의 글로 ‘김우종 참전기’를 대신한다. ‘불멸의 꽃!’ (6·25 전사 인천 학생 사연) 인천학생·스승 6·25참전사 편찬위원회(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에서는 1996년 7월 15일 창립 이래로 그동안 제보를 받거나 혹은 기록을 찾아 많은 6·25 전사 인천 학생들을 찾았으나 아직도 미확인 6·25 참전 전사 인천 학생들이 많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확인된 전사자의 묘지를 기록에 담기 위해 본 편찬위원회에서는 그 기록의 정확성을 기하고자 여러 차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은 바 있으며 전사자 위패 또한 일일이 확인하였다. 인천 각지에 흩어져 잠들고 있는 6·25 참전 전사 학생들에 대하여 월간 서해문화에 ‘불멸의 꽃! 6·25 전사 인천학생’으로 연재하는 이유는 아래와 같다. 6·25 전사 인천 학생 묘가 여기저기 흩어져서 점차 잊혀가는 현실을 되돌아보고, 우리들이 한 번쯤 함께 그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억하는 것이 뜻 있는 길이라 기록한다.고향에 돌아온 6·25 전사 인천 학생들 유골 1950년 6·25 사변 발발 후 전쟁이 한창일 때 전사한 전사자들은 그 당시 전투가 워낙 치열했기에 정부에서는 일정한 묘지를 정하지 못하고 유골을 직접 유가족에게 전하였다. 한 줌의 재가 되어 부모님 품에 안기게 된 군대 갔던 아들들의 부모님들께서는 가슴이 베이는 마음으로 대성통곡하시고는 집 근처 아들이 놀던 양지바른 동산에 곱게 묻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5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지금 부모님들은 거의 모두 돌아가시고 그 전사자의 형제들마저 노년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전사자들의 형제들은 50여 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6·25 사변 때 전사한 동생이나 형의 무덤을 더 이상 관리하기가 어려워 자신들의 마음이 무겁다면서 국립묘지로 이장하는 길을 본 편찬위원회에 문의해 오는 것이었다. 육군본부 민원실에 알아보았던 바 이장(移葬) 양식(월간 서해문화 1998년 9월호 게재)을 참고하여 대전 현충원까지 모시고 오면 대전 현충원 묘지에 안장할 수 있다는 대답을 받았다. 첫 번째 6·25 전사 인천 학생 유골 이장 국방부 이장 양식에 따라 대전 현충원 문 앞까지 가기까지의 일은 유가족 입장에서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이런 가운데 어느 유가족이 국립묘지에 이장할 수 없는가 하는 물음이 있었다. 이에 본 편찬위원회 이규원 치과 원장은 국방부에 타진하여 이장 방법을 서해문화 1998년 9월호에 자세히 게재한 바 있다.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는 인천광역시 중구 영종도에 있는 해병 6기 전사자 김우종의 묘를 2001년 5월 27일에 국립묘지로의 이장하는 첫 번째 이장 계획을 수립하였다.故 김우종의 동생 김문종의 증언 고 김우종의 동생 김문종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 12월 18일 새벽에 김우종이 인천 영종도 집을 떠날 때 김우종 아버지는 “그 무거운 책은 왜 가져가느냐”고 물었다. 그때 김우종은 “아버지 염려 마세요. 우리들은 남하하더라도 공부는 계속할 겁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김우종은 영종 나루터까지 걸어가서, 인천학도의용대 영종지대 대원들과 같이 나룻배를 타고 인천으로 건너가 인천축현국민학교에서 출정식을 마치고 마산까지 20일간 걸어서 내려가서, 해병대 신병 모집에 응하여 해병 6기로 자원입대하였다.6·25 전사 인천 학생 김우종의 묘 이장1953년 가을 아들의 전사통지서와 유골함을 받고 6·25 전사 인천 학생 김우종의 부친은 대성통곡을 하셨다. 그리고 마을 뒷산(인천 영종도 중산리 월촌) 양지바른 곳에 묻으시고 해마다 아들을 기리는 제를 지내주셨다. 1998년 3월 29일부터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에서는 김우종 유가족의 협조하에 국방부와 대전 현충원 등에 6·25 전사 인천 학생 김우종의 유골을 이장하는 것에 대하여 승인을 받는 노력을 하였다. 2001년 5월 27일 인천광역시 영종도에 묻혀 있는 김우종 전사자의 무덤을 열어 유골을 수습한 후 대전 국립 현충원 제1 묘역 제27구역 16129에 안치하였다. 6·25 전사 인천 학생 묘의 이장 사업 계획 인천 학생·스승의 6·25 참전 역사를 발굴하기 위하여 창립된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에서는 김우종 전사자와 같이 아직도 고향 땅에 묻혀 있는 6·25 전사 인천 학생들의 유해를 국립묘지로 옮기는 이장 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글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참전기 11회를 마치며 한때 인천에 6년제 중학교에서 공부하던 중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가의 징병 모집에 대하여 한참이나 어려서 입대할 필요가 없었던 어린 중학생이었습니다. 인천중학교 4학년 김우종은 마산까지 저의 아버지와 같이 내려가서, 해병 6기로 자원입대하여 전사하였습니다. 6·25 전사 인천 학생 김우종이 학창시절을 보낸 옛 6년제 인천중학교(현재 제물포고교)의 넓은 운동장은 아직도 김우종을 기억합니다. 김우종과 같이 부산까지 걸어가서 입대하셨던 저의 아버지께서는 언젠가 김우종이 공부했던 제물포 고교 운동장 한편에 김우종을 기리는 추모비를 건립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이규원 치과 원장(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큰아들인 이규원 치과 원장(6·25 참전사편찬위원장)이 사비 4억원을 들여서 6·25 전사 인천학생스승 추모관을 건립하여 인천 중구청에 기부채납하려는 제안을 인천 중구청은 거절하였다. 추모관 기부채납이 이뤄지기를 기대해본다.” 6·25 참전 인천학생 이경종(현 85세)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때 자원입대·참전 인천학생 6·25 참전관 설립자·초대 관장
  • 발로텔리 4년 만에 A매치 골맛, 옛 스승 만치니에게 첫 승리 선물

    발로텔리 4년 만에 A매치 골맛, 옛 스승 만치니에게 첫 승리 선물

    마리오 발로텔리(27·니스)가 4년 만에 A매치 골맛을 봤다. 발로텔리는 28일(현지시간) 로베르트 만치니 감독이 처음 지휘봉을 잡은 이탈리아 축구대표팀이 스위스 생겔렌에서 맞붙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평가전 전반 21분 혼자 드리블 끝에 선제골을 넣었다. 러시아월드컵 출전이 불발된 이탈리아는 후반 13분 안드레아 벨로티의 추가 골을 엮어 야흐야 알세흐리가 4분 뒤 한 골 따라붙은 사우디아라비아를 2-1로 눌렀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맨체스터 시티와 리버풀에서도 뛰었던 발로텔리는 현재 프랑스 리그앙 니스에 몸담고 있는데 그가 A매치 출장과 함께 골맛을 본 것은 2014년 브라질월드컵 잉글랜드와의 조별리그에서 2-1 승리를 이끈 뒤 4년 만의 일이다. 맨시티 감독을 지내며 2012년 구단 최초로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일궜던 만치니 감독은 잔 피에로 벤투라 전 대표팀 감독이 월드컵 진출 무산의 책임을 지고 해고된 뒤 이달 초 부임했다. 발로텔리와는 맨시티에서 3년 동안 호흡을 맞춰봐 대표팀에서의 활약도 미미했던 발로텔리에게 기회가 열린 것일 수 있다.사우디아라비아는 본선 조별리그 A조에 속해 다음달 14일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와 공식 개막전을 시작으로 우루과이, 이집트와 차례로 격돌한다. 특히 이날 경기는 A매치 176경기 출전 끝에 잔루이지 부폰이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뒤 처음 치러진 이탈리아의 A매치였는데 그를 대신해 골키퍼 장갑을 낀 잔루이지 돈나룸마는 동료 수비수 다비데 자파코스타(첼시)가 알세흐리의 득점을 방치하는 동안 홀로 남겨졌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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