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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훔친차로 한밤 질주극/10대/순경 등 9명 치고 차량 7대 받아

    31일 하오8시55분쯤 서울 마포구 아현동 아현전철역 앞길에서 전모군(19·무직·노원구 중계동)이 훔친 경기2초3094호 그랜저승용차를 몰고다니다 민우일씨(59)등 행인 9명과 인천7노 4284호 그레이스승합차 등 차량7대를 잇따라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김세림씨(21·여·은평구 응암1동)등 3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민씨등 6명은 경상을 입어 인근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경찰은 달아나는 전군에게 실탄 5발과 공포탄을 쏘며 8백여m를 뒤쫓은 끝에 아현3동 대우전자앞 공사장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전군을 붙잡았다.
  • 도심 광란 질주/차량 11중 충돌/30대 서울종로서

    서울종로경찰서는 11일 박철진(35·개인사업·경기도 남양주군 수동면)씨를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혐의로 입건했다. 박씨는 10일 하오8시20분쯤 종로5가 182 앞길에서 경기3크8105호 외제승용차를 몰고가다 1차선에 서있던 쏘나타 개인택시를 들이받고 중앙선을 넘어 마주오던 서부운수소속 134번 시내버스 등 차량 2대를 들이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박씨는 이어 종로3가에서 서울3트3713호 프린스승용차 등 차량 3대를 들이받고 달아나다 종로1가에서 마주오던 차량5대를 잇따라 들이받는 등 종로일대에서 11대의 차량을 들이받으며 15분여동안 질주극을 벌였다. 박씨는 하오8시35분쯤 종로1가 교차로 앞길에서 뒤쫓아간 택시운전사 송청송씨(43)와 격투끝에 붙잡혔다. 경찰은 이날 박씨가 『하느님이 시켜서 청와대로 가는 길이었다』며 횡설수설함에 따라 박씨의 정신감정을 의뢰했다.
  • 운전시험 대기중 “날벼락”/강풍에 담 붕괴… 10대 깔려 뇌사

    ◎목욕탕 굴뚝·가로등도 쓰러져 하루종일 순간 최대풍속 20m의 강풍이 분 10일 서울 등 수도권일대와 충북지역에서는 담벼락이 무너지고 가로등과 목욕탕 굴뚝이 쓰러지는 6건의 사고가 발생,2명이 중태에 빠지고 차량 14대가 부서지는 등 피해가 잇따랐다. 이날 낮12시20분쯤 충북 영동군 영동읍 부용리 Y자동차학원에 자동차면허실기시험을 보러온 김민겸군(19·서울 광진구 중곡2동 24의 3)등 3명이 때마침 불어온 강풍에 무너진 학원옆 간이식당의 3m높이 담벼락에 깔려 김군이 뇌사상태에 빠지고 김군의 친구 박정필군(19)등은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또 이날 하오2시30분쯤 올림픽대로 성산대교 남단 5백m 중앙분리대에 세워진 가로등이 강풍으로 쓰러졌다.이 때문에 김포공항쪽에서 양화대교쪽으로 가던 경기 1흐 7555호 프린스승용차(운전자 하명렬·38·교사)가 쓰러진 가로등을 피하려다 중앙분리대를 들이받는 등 2건의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이날 하오2시45분쯤 강북강변도로 동호대교에서 한남대교방향 1백m지점에서도 가로등이 넘어져 도로를 가로막는 바람에 30여분동안 극심한 교통체증을 빚었다. 또 상오10시50분쯤 경기도 광명시 소하2동 설악목욕탕 건물 5층 옥상에 세워진 가로·세로 각 1m,높이 13m의 굴뚝이 강풍에 무너지면서 인근 현대파크빌라를 덮쳤다.이 사고로 이 빌라 6가구의 베란다 유리창 10여장이 깨지고 옥상과 벽의 일부가 부서지거나 금이 갔다.
  • 전위무용가 홍신자(이세기의 인물탐구:70)

    ◎거침없이 도전하는 성격… 독창적 춤사위 창출/“어릴때 죽은 언니 추모”… 73년 「제례」로 무대 데뷔/40세 넘어 연하 미술학도와 결혼… 2년전 안성에 캠프 차리고 정착 홍신자 뉴욕 타임스의 전속춤 비평가 제니퍼 더닝은 홍신자를 향해 『조각가의 조형감각을 지닌 안무가이며 인간심리의 예리한 실험자』라고 말한다.84년 「나선형의 자세」를 세번째로 공연했을때 공연평에 인색한 잭 앤더슨은 『시각예술가로서의 홍신자는 또 한사람의 시인』임을 지적했고 『몇가지 작은 동작만으로 죽음의 사자로 변신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춤은 참으로 거대한 카리스마의 모습』이라고 호평했다.1주일에 평균 7백∼8백편 이상의 엄청난 양이 공연되는 뉴욕에서 중요 신문의 평을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다.그러나 홍신자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뉴욕인들에게 그때마다 신선한 혁명을 보였고 그곳 매스컴들로부터 밀착되고 호의적인 평을 받는 몇안되는 예술가중의 한 사람이다. 중국의 저명한 춤비평가이자 중국 국립예술아카데미의 우장핑은 「세계 무용사를 만든 인물들」로 홍신자를 선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기라성같은 이사도라 던컨·마사 그레이엄·머스 커닝햄·폴 테일러·알윈 니콜라이속에 홍신자는 「동양 전통미학에 뿌리를 둔 서양 전위무용의 꽃」으로 다뤄지고 있다.한국의 홍신자 이전에 세계적 예술가의 반열에 오른 그는 86년 K­1TV가 마련한 신년특집 다큐멘터리에서 「세계정상의 한국인 홍신자편」으로 방영된바 있다. 그의 명성과 활동을 재론할 필요는 없다. ○동양 전통미학에 뿌리 영문학도에서 춤을 추기엔 너무나 뒤늦은 나이인 27세에 무용학도로 변신했고 호텔 접수일과 고양이 먹이를 주는 아르바이트로 명문 알윈 니콜라이무용학교와 컬럼비아대 대학원을 졸업,33세 되던해인 73년에 「댄스 시어터 워크숍」에서 어릴때 죽은 언니를 추모한 「제례」를 추어 당당하게 신인 안무가로 변신했다.그때도 뉴욕 타임스와 댄스매거진은 『아무도 홍신자의 앞날을 의심할 사람은 없다』고 못박았다.「제례」는 전통적인 한국의 「곡」으로 시작되어 촛불에 만장을 사르고 모호한 탄식을 허공에 퍼뜨리는 것으로 끝난다.이 작품은 한국서도 국제현대음악협회(ISCM)가 초청하여 같은 해 명동국립극장 무대에 올려졌고 전위무용에 생소한 한국무용계에 아연한 긴장과 충격,찬반양론의 시비를 빚기도 했다. 그의 춤은 형식과 기교에 얽매이지 않는다.「무용의 힘을 아는 자는 신과 함께 있는 자」라고 한 쿠르트 작스의 명언대로 육체와 영혼이 조화된 「우주적 감각」이 특징이다.그의 극미한 거동조차도 춤의 흐름이며 그의 운기는 객석에까지도 고뇌의 현란한 열기를 흩뿌린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시선과 관심의 대상이 됐을때 그는 돌연 인도로 가버렸다.76년부터 3년간 춤에 대한 회의와 삶의 근본적인 의미에 파고들었으나 「나만이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진리쪽에서도 나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다시 뉴욕에 복귀했다.결혼 같은 건 하지 않고 원도 한도 없이 하고싶은 것을 마음껏 하다가 「40세가 되기전에 자살」하겠다고 공언했던 그는 나이 사십이 넘어 열두살 연하의 젊은 미술학도와 결혼했고 딸 희야를 임신하자 「여자의 몸매는 바로 이렇게완성된다」는 메시지를 내걸고 만삭의 몸으로 무대에 올라 「입에서 꼬리까지」를 초연,하나의 덩어리(매스)로 무대를 구르면서 「돌도 웃는다」는 경이의 경지를 다시 한번 보여줬다. 결코 「평범 무미건조한 사람이 되지 않을것」이라는 패기와 인내심으로 그는 예술이 할 수 있는 모든 행위에 거침없이 도전해 왔다.그리고 「홍신자만의 독창적 세계」를 창출해 내었고 그만의 독특한 무용언어인 적멸로써 작품들을 형상화 시키고 있다.따라서 「깨어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로움의 깨달음을 주고 창작정신의 퇴적화 현상을 일시에 휩쓸어버린 회오리바람」으로 부상되었다. ○뉴욕 빈민가서도 생활 아무도 홍신자의 삶을 흉내 낼 수는 없다.주변의 시선에 아랑곳 없이 가장 자유로운 행보를 펼쳤고 아마 앞으로도 그는 그럴 것이다.물론 하루 아침에 오늘을 이룩한 것은 아니다.혹은 기적적 행운이 뒤따른 것도 아니다.쥐들이 득실거리는 뉴욕의 빈민가 스탠턴에서 더 이상 어린 딸을 키울 수가 없어 고국의 시댁에 아이를 맡겨야 했고 토큰 하나와 말라빠진 샌드위치로 연명하면서 불과 10년전까지만 해도 그의 장래에 대한 희망은 검은 연기에 휩싸인 검탄(검탄)과도 같았다.그 무렵 하와이 볼캐노 정글에 틀어박혀 그는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묻기를 멈추지 않았고 그 자신은 무용가 명상자 아내 어머니 그 모든 것이며 그 모든 것에서 완전히 해방된 자유로운 생명의 불꽃임을 재확인 할 수 있었다. 그의 무용에 영향을 준 것은 인도에서의 스승인 라즈니쉬였다.그는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라.나 자신이 춤추기전에 삶의 펄펄 끓는 에너지가 나를 통해서 춤으로 흘러나오게 하라」고 가르쳤다.「춤은 무엇을 증명하거나 제시하거나 등의 아름다움과 팔다리의 기교를 과시해선 안된다.무엇인가를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강하면 춤은 보이지 않고 춤추는 자의 몸매만 보이게된다」그래서 광대한 우주공간인 우라노스에 날아오른 신비의 피닉스(영조)처럼 불에 타죽고 나서도 다시 탄생하기 위해 그는 수십번씩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가 추구하는자유로운 삶이란 허례나 가식이 배제된 명징의 세계이며 그의 맨 끝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자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절로 겸허해지고 솔직해진다.나의 비천함을 다 알고 있는 스승에게 무엇을 더 감출 것이 있겠는가」.그러나 자유를 찾아 떠나고 또 떠났지만 가족이라는 굴레와 고향에 다시 돌아오기 위해 어둡고 긴 갱도를 혼자서 방황하고 있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딸 희야는 중학교 1년 그는 지금 안성에 있다.2년전 고국정착을 선언하고 경기도 안성군 죽산면 용설리,저수지를 끼고 올라간 척박한 야산에 토담으로 된 무용캠프를 치고 그에게 명상과 내면의 춤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움직임속의 정지」를 전수하고 있다.지난 5월에는 예술의 전당서 「돌도 웃는다」는 뜻의 그의 래핑스톤 무용단을 이끌고 「풀루토(명왕성)」를 공연,11월 뉴욕 공연에서는 「미니멀리스트이자 맥시멀리스트로서의 홍신자 건재」를 과시했다. 지난 2월부터 본격적으로 무용캠프 강좌에 들어간 그는 그가 바라던대로 자연속에 묻혀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정신의 춤을 추구하게 되었다.그의 예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남편 이상남씨(재미화가)는 그의 공연을 도맡아 판타스틱한 무대를 만들어주고 딸 희야(중1)도 부모의 자유와 자연스러운 삶을 자랑스럽게 이어가고 있다. 물론 그는 또 어떻게 변할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유성이며 소용돌이 치는 회오리 바람이다.다만 춤이 빠진 홍신자란 상상 할 수 없을 뿐이다.그는 춤추기 위해 태어났고 무대에서 춤추다가 쓰러질지도 모른다.그리하여 그의 육신이 사라질때도 그의 푸른 영혼은 폭풍속의 나무처럼 끝없이 흔들리면서 아마 그때도 「나선형의 자세」로 춤추게 될것에 틀림없다. □연보 ▲1940년 충남 연기출생 ▲1963년 숙명여대 영문과 졸업 ▲1966년 도미,뉴욕정착 ▲1970∼71년 알빈 니콜라이 무용연구소 입소 ▲1972년 미국 컬럼비아대 대학원졸업 ▲1973년 뉴욕대 입학,케이 다케이와 그룹활동, 뉴욕 댄스시어터 워크숍서 「제례」로 안무가및 무용수 데 뷔 ▲1975년 홍콩 아트페스티벌 초청공연,공간 1백호기념 초청 「이사도라 던컨의 춤」및황병기 작곡 「미궁」발표 ▲1976∼79년 인도정부 장학생으로 인도체류 ▲1981년 래핑스톤무용단 창단기념 「입에서 꼬리까지」 뉴욕 초연 ▲1982년 오하이오 더 유니언 인스티튜트 무용학 박사학위 ▲1985년 호암아트홀 개관 초청공연 ▲1986년 미국 샌디에이고 패시픽 링아트 페스티벌 「ISLE(섬)」참가 ▲1988년 미국 웨슬리언대 개최 국제음악제 존 케이지와 「네개의 벽」참가 ▲1989년 독일 베를린예술원초청 「붉은 노을」,중국문화부초청「섬0공연 ▲1990년 제16회 중앙문화대상 수상,북경 아시안 게임 서울시립무용단 「2001년」안무 공연 ▲1992년 스페인 세비야 EXPO참가 ▲1993년 플럭서스 서울 공연 백남준 비디오작업출연,사단법인 래핑스톤(웃는 돌)설립 0▲1994년 「풀루토」서울및 뉴욕공연
  • 과속승용차 급커브 돌다 중앙선 침범/버스와 충동… 4명 사망

    ◎회현고가도서 5일 상오 5시39분쯤 서울 중구 회현동 1가 194의 19 회현고가차도 서쪽끝 지점에서 서울1그5510호 엑셀승용차(운전자 최욱태·22)가 중앙선을 침범,마주오던 남부운수소속 서울 5사3405호 시내버스(운전사 유현규·38)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 사고로 엑셀승용차 운전자 최씨 등 승용차에 타고 있는 4명이 그자리에서 숨지고 버스 운전사 유씨와 버스승객 등 4명이 중경상을 입고 인근 용산 중대병원 등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경찰은 서울역쪽에서 퇴계로 방향으로 과속으로 달리던 엑셀승용차가 회현고가차도 서쪽끝 커브길에서 급하게 커브를 돌다 운전미숙으로 중앙선을 침범하는 바람에 사고가 일어난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 제주 주성전문대학장 유성종씨(향토에 산다)

    ◎무심천서 몸을 키우고 우암산은 마음 살찌워/“곧게 살라”는 고향의 가르침 끝까지 지키며 제주 흙냄새 만끽 『고향은 따스함이요 삶의 뜻이며 또한 생활의 바탕이요 울(울타리)이지요』 이 시대 교육자의 사표로 추앙받고 있는 유성종(63·주성전문대학장)선생이 고향인 청주를 아끼고 사랑하는 향토관은 60평생에서 우러나온 고해성사이다. 집 한칸 땅 한뙈기 없는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 조실부모해 불우했던 선생은 외로웠던 유년시절 주성국교(당시 영정국교)를 감싸고 흐르는 무심천에서 몸을 키웠다고 했다. 고학생활과 함께 보낸 중·고교 학창시절 청주상고(당시 청주상업중학교)가 자리잡은 우암산은 곧고 바르게 살라고 가르치고 마음을 살찌워 주었다고 했다. 어머니요 스승이었던 고향땅이었기에 평생을 청주언저리에서 맴돌았다.충주대 법대를 거쳐 국어교사로 줄곧 교육현장을 지키며 후학을 가르치는 열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지난 81년 충주고교 교장 때에는 『교복이 학생들의 개성을 말살한다』며 정부의 조치보다 1년이나앞서 교복을 폐지했다.교육감재직 때 영세 중·고교의 통·폐합,국민학교 예·체능교과 전담제,외국어고·체육고·예술고 등 특수고교 설립 등 숱한 교육개혁시책을 추진했다. 물 좋고,산세가 수려하고 사람들의 두텁고 순박한 마음가짐이 어우러진 곳 청주 고향을 떠났던 「타향살이」는 단 두번. 젊은 시절 서울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2년동안 고향을 떠난데 이은 두번째 「타향살이」는 역설적으로 『곧고 바르게 살라』는 고향산천의 가름침 때문이었다. 지난 91년11월 두번째 충북도 교육감을 지내고 있을 때였다.교육감의 선거제도가 완비되자 임기를 70여일 남겨두고도 『손해를 볼지언정 곧은 것이 인간다움』이라며 교육감직을 스스로 사퇴했다. 『후세를 위해 벽돌 한 장 놓고 떠나라는 자리에 임명된 교육감이 기득권을 누리며 욕심을 부리는 것은 스스로를 욕되게 한다고 생각했지요』 선생은 곧바로 초·중·고교 교육의 방향을 좌우하는 교육부 장학편수실장에 발탁돼 고향을 떠나게 됐다.차관급인 교육감 보다 한직급이나 낮은 장학편수실장직을맡아 두번째 기행을 기록했지만 서울로 향하는 차안에서 『명예롭게 떠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그후 차관급인 국립교육평가원장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부임 1년전의 대학입시부정과 관련,파문이 발생하자 곧바로 원장자리를 또 스스로 떠나 고향으로 향했다.「곧게 살라」는 고향의 가름침을 마지막까지 실천에 옮기며 서울 나들이가 「진정한 귀향을 위한 짧은 여정」이라는 다짐을 지켰다. 『고향을 생각하는 사람은 고향산천이 바뀌지 않고 달라지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는 선생은 매일 아침이면 고향냄새가 물씬 나는 우암산을 오르며 지난달 22일부터 맡은 주성전문대 운영을 구상한다고 했다.
  • 김상협 전총리 영결식

    지난 21일 급환으로 타계한 남재 김상협 전국무총리(고려대 명예총장)의 장례가 26일 고려대학교장으로 엄수됐다. 고인의 유해는 이날 상오 7시 서울 종로구 혜화동 15 자택에서 발인,상오9시 자신이 70∼75년,77∼82년 두차례에 걸쳐 총장으로 재직했던 고려대에서 영결식을 가진뒤 하오1시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영결식은 유족과 각계 조문객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인에 대한 묵념과 약력보고·영결사·조사·육성녹음청취·헌화및 분향의 순서로 1시간여동안 진행됐다. 영결식에는 장례위원장인 홍일식 고려대총장을 비롯,김용식 고려중앙학원법인이사장,김준엽·이준범·김희집전고려대총장 등 고려대 관계자와 전두환 전대통령,이홍구 총리,강영훈·현승종·황인성 전총리,김숙희 교육부장관,김중위 환경부장관,한승주 전외무부장관,최창윤 전총무처장관,이철승 자유수호총연맹총재,장세동 전안기부장,안현태 전대통령경호실장,정세영 현대그룹회장 등이 참석했다. 또 학계에서 권이혁 대한민국학술원회장,이수성 차기서울대총장,송자 연세대총장,한만청 서울대병원장,장덕진 대륙연구소이사장,야마시로 마사키 일본 와세다대학부총장 등이 참석했다. 정계에서는 민자당에서 민관식 상임고문,이춘구 대표,현경대 원내총무,이승윤 정책위의장,이세기·남재희 의원,민주당에서 이기택 총재,이종찬·김상현·정대철 고문,김병오 정책위의장,김덕규 의원,그리고 김동길 신민당대표 등이 참석했다. 홍일식 장례위원장은 영결사를 통해 『선생은 현대사에 길이 남을 실천적 지성의 귀감이었다』고 말하고 『이 나라의 깨어있는 정신을 대표하는 위대한 스승으로 불의를 질타하고 참다운 지성의 용기를 드높이며 역사의 올바른 방향을 밝혀주신 참 선생이었다』고 고인의 뜻을 기렸다. 강영훈 전총리는 조사를 통해 『겨레의 선각자이자 민족의 스승이신 선생께서 통일을 보고야 눈을 감겠다는 말씀을 늘 하시던 것이 귀에 쟁쟁하다』라며 애도했다.
  • 또 스승폭행 물의/조선대공전 학생들… 경찰 수사

    【광주=최치봉 기자】 광주동부경찰서는 25일 조선대병설 공업전문대학 총학생회장 김봉현군(23·공업영영과 1년)과 부학생회장 선기호군(23·기계과 1년)등 2명이 이 대학 조정환 학장(55)을 폭행,전치 2주의 상처를 입혔다는 학교측의 고발에 따라 수사에 착수했다. 학교측은 고발장에서 총학생회장 김군 등은 24일 하오 3시쯤 학교측이 등록금을 일방적으로 인상했다며 동료학생 20여명과 함께 학장실에서 조학장과 언쟁을 벌이다 재떨이로 테이블을 내리치고 조학장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등 폭행을 했다고 밝혔다.
  • 폭력배 동원 채무자 납치/20시간 감금·폭행/3명 영장,3명 수배

    【광주=최치봉 기자】 광주 북부경찰서는 19일 폭력배를 고용해 채무자를 납치한 룸살롱 주인 서지애씨(38·여·제주시 연동)와 서씨의 채무자를 납치,20시간남짓 감금하면서 폭행한 노경균씨(24·무직·광주시 서구 봉선동 5)등 청부폭력배 3명을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은 또 서씨의 채무자 납치에 가담한 노씨의 친구 김영서씨(25·무직)등 3명을 같은 혐의로 긴급수배했다. 서씨는 지난 17일 하오 4시쯤 노씨등에게 부탁해 무허가 직업소개소 주인 이모씨(28)의 광주시 북구 운암동 집에서 이씨와 이씨의 애인 윤모양(20)을 광주1구8701호 프린스승용차로 납치,서울 강남구 청담동 P호텔에 20시간남짓 감금하면서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서씨는 지난달 10일 무허가 직업소개소 주인 이씨에게 룸살롱 종업원을 소개시켜주는 조건으로 3천1백만원을 주었으나 이씨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노씨등에게 이씨의 납치를 부탁한 것으로 밝혀졌다.
  • 거문고 명인 김영재(이세기의 인물탐구:69)

    ◎흐트러짐 없는 연주… 이론·작곡 밝아/신쾌동씨에 귀사… 피나는 연습끝 정상 올라/정규교육 1세대… 가야금·아쟁에도 일가견/93년 지하실에 상설무대 설치… 발표할곳 없는 동료들에 개방 송강 정철은 거문고 대현을 타는 데 있어 그 소리를 「얼음에 막힌 물 여흘에서 우니는 듯」하다 했고 영조때의 풍류객 송계연월은 「북창송음에 거문고줄을 얹어두니 바람이 줄을 건드려 타지 않는데도 스스로 우는 소리야말로 참으로 듣기 좋다」고 노래한 바 있다. 거문고의 명주실로 꼰 여섯줄 중에서 선율을 타는 유현은 소리가 맑고 부드러운 반면 대현은 줄이 굵고 투박하여 해죽으로 만든 술대를 단단히 거머쥐고 내리쳐야만 짙푸른 소리를 얻을 수 있다.거문고의 고매한 자태와 음률은 남성적인 화평정대와 악기 중의 으뜸인 백악지장에 비유되어 연주자는 아무리 어려운 대목도 고뇌어린 표정을 짓거나 박자를 맞추거나 몸을 흔드는 일이 없어야 한다.귀에 듣기 좋게 하는 것은 저속하며 음악 자체에 몰두하는 것도 금물이다. ○지영희씨에 해금 배워 거문고연주에서 한올 흐트러짐 없이 엄격한 법도를 지켜가는 이가 바로 명인 김영재다. 그는 『음악성이 비범하여 거문고 주자로서 일급일 뿐만 아니라 지영희 문하에서 오랫동안 학습한 해금도 그를 따를 이가 없다』는 평을 받고 있다.백낙준에서 신쾌동으로 이어진 그의 「거문고 산조」는 비감과 청정을 떠나 무념무상의 흐름속에서 극청 극탁을 끌어낸다. 느린 장단인 진양조로 괘를 짚어 먼저 장엄한 우조로 소리를 울리고 슬픈 느낌의 계면조와 화평스런 우조를 교차시키다가 중모리·엇모리,마지막 자진모리에 이르기까지 가슴 한복판을 후빌 듯 두들기는 장탄식은 절묘하다.손과 줄이 얽히고 풀리면서 흥청거리는 기교와 기량으로 천변만화를 농현하면 남자가 울분을 참듯 한을 안으로 다스리듯 듣는 이도 켜는 이도 어느 샌가 눈가에 눈물이 스미는 감동에 젖는다. 우리 음악은 일시에 피어오르는 장미꽃과는 달리 부단하게 변화되기 때문에 그 선율을 일사불란하게 파악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그러나 그의 연주는 『교묘하게 꾸며진 말과 보기 좋게 꾸민 표정에는 인이 드물다』고 한 것처럼 정 가운데 동을 감춘 정중유동의 자세다. ○처음엔 무용으로 입문 또 스승으로부터의 피나는 훈련과 연습으로 전수되던 우리 국악현실에서 처음으로 정규교육을 받은 일세대이며 가야금·양금·아쟁을 고루 다루고 작곡과 이론에도 밝아 우리 고전악기가 갖는 가능성을 다양하게 타진해왔다. 그는 처음엔 「춤추는 사람」이 될 것을 꿈꾸고 있었다.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으나 변호사사무실에서 일하던 부친(김세종씨)을 따라 일찍이 서울로 이사,마포구 합정동에 정착하면서 마포 강나루터에 산재해 있던 남사당패들의 굿판에 정신이 팔려 그곳에서 하루해를 보낼 때가 많았다.이런 그를 안쓰럽게 여긴 어머니(차은식 여사)가 부친 몰래 김천흥 전통춤연구소에 보내준 것이 국악에 입문하게 된 동기다.그러나 무용특기자가 되어 국악예고에 진학하자 이번엔 「승무」를 가르치던 벽사 한영숙이 『얼굴이 예쁘고 춤태가 곱긴 하지만 춤보다 악기를 해보라』고 권했다.거문고·해금은 「연잎에 지는 빗소리」처럼 아름다운 가락을 엮지만 『악기 다루기가 너무 어려워 이를 이어갈 인재가 없다』는 것이었다. 뒤늦게 거문고산조 인간문화재인 신쾌동과 해금의 대가인 지영희를 만나 거문고의 유현한 가락과 섬뜩할 정도로 생생한 해금의 음률에 숙명처럼 잦아들어갔다.학교에서 배우는 외에도 스승의 개인연구소에 따라가서 이를테면 「스승들을 모시고 살다시피」하면서 그는 멀고 아득한 음악의 길을 걸어왔다.남성적인 거문고는 특히 연주법이 까다로워 술대(시)끝을 현침 가까이 내려치거나 거슬러 쳐도 원하는 소리를 얻을 수 없었다.무릎이 저리고 손가락에 피멍이 들어도 그는 제소리를 낼 때까지 몸에서 악기를 떼어놓지 않았다. 국악의 「국」자도 모르고 시작한 음악이지만 초기엔 스승의 열성에 감동되어 한음 한가락도 놓치지 않았고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배우는 자세로 자신이 악기가 되기를 주저치도 않았다.특히 남모를 내력이 굽이굽이 숨겨져 있는 해금을 속속들이 파고들어 손아귀의 혈맥이 악기에 이어지고 기맥이 통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제자를 기특히 여긴 스승이 하루는 자신이 못 배운 것을 한탄하며 『너희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대학에 가야 한다』고 충고했다. 『우리 민속악은 무대에서 왕인데 제대로 배운 사람이 없어 서러운 대접을 받고 있다.너희 세대에선 제자리를 찾아 반드시 무대의 주역이 되라』는 절규였다. 행운의 여신이 미소짓기 시작하더니 벌써 고교 2학년때 서울시립 국악관현악단 최연소단원이 되었고 당시 이름을 날리던 리틀엔젤스의 무용반주자가 되어 세계 45개국 순회공연에 따라나섰다.돈을 벌면서 세계무대에 서는 동안 그는 우리 음악만의 특성과 미감에 눈떴고 그때부터 체계적으로 작곡에 손대기 시작했다. 서라벌예대 졸업후 경희대 작곡과에 편입,대학원과정에서 서양음악의 발성법·지휘법·화성악을 공부하고 고전악기와 현대악기를 대비시킨 「거문고와 해금」 「해금과 기타」 「해금과 하프」등 이중주곡·독주곡·관현악곡들을 창작하여 국악의 연주영역을 넓혀나갔다. 82년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열린 개인발표회에서 그의 「거문고 즉흥곡」을 들은 황병기(이대교수)는 『마치 진흙의 뿌리에 내린 연꽃의 심도를 느끼게 하는 신기오른 솜씨』라고 호평했고 국악평론가 한명희도 『손끝의 느낌으로 음을 고르고 소리를 찾아내며 활대 아닌 눈짓만으로도 해금을 부리는 귀신 같은 실력』을 찬양해 마지않았다.그의 거문고산조가 심연과도 같은 무변광대를 누빈다면 그의 해금은 장자가 일컫듯이 「하늘의 소리처럼 신기하고 땅의 소리처럼 투박하며 인간의 속소리처럼 즐겁고 애절하여」 희비애락의 인생사를 꾸밈없이 담아낸다. ○“신기같은 솜씨다” 호평 그의 성격은 완고하다 못해 차분하다.어느 자리에서나 나대지 않아 예인 특유의 신기나 광기가 넘쳐 보이지도 않는다.한천의 난처럼 고절한 기상으로 연주에 임할 뿐 연주장이 아닌 장소에서 그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겉으로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마음이 상할 듯 섬약해 보이지만 참으로 오랫동안 방대한 학습경륜을 쌓아온 사람이라 속을 들여다보면 태산준령 같다』고 한 이보형씨(문화재전문위원)의 말은 과장이 아닐 것 같다. 남과의 번거로운 교류는 외면하지만 연주활동에는 열의가 대단하여 지난 93년 마포구 합정동 그의 집 지하층에 국악상설무대 「우리소리」를 개설,발표장을 구하지 못한 동료들에게 이를 개방해왔고 오는 3월에는 개관 2주년 기념무대를 갖는다.가족은 그의 음악을 이해하고 협조하는 부인 최광희 명지대교수와 남매. 이제 그는 스승들이 물려준 모든 것을 보존하고 계승시키는 위치다.그리고 「단순히 줄을 고르는 것만으로 이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가장 우아한 거문고 연주자는 선비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는 무위자연의 경지에서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는 현학금의 대도에 입신하는 일만이 남았다. □연보 ▲1947년 경기도 용인출생 ▲1959년 김천흥 전통춤연구소 입소 ▲1965년 서울시립 관현악단 단원 ▲1967년 서울국악예술학교 졸업,신쾌동 지영희사사,난계예술제특상 ▲1966∼75년 리틀엔젤스와 미국 유럽등 세계45개국 순회연주 ▲1971년 서라벌예대졸업 ▲1972 일본 삿포로 동계올림픽·뮌헨올림픽 세계민속예술제 참가 ▲1977년 경희대 작곡과졸업 ▲1980년 동 대학원졸업,일본 산게이홀과 한국문화원서 독주회 ▲1982년 제1회 국악발표회(국립극장 소극장),대한민국국악제 참가 ▲1985년 제2회 김영재 작곡발표회 ▲1986년 아시안게임 문화예술축전 국악제 해금독주자 ▲1988년 중요무형문화재 16호 (거문고산조)준인간문화재 지정 ▲1990년 동아일보 창사 70주년기념 소련공연 창극 「아리랑」작곡및 연주,미국 링컨센터 연주 ▲1991년 환일본해 국제예술제참가 ▲1993년 「해금명인 김영재의 밤」(국립극장 소극장) 전남대 국악과 교수,도립남도국악단 상임지도위원 「조명곡」「비」「아리랑연곡」「현금곡」「가야금 병창곡」「거문고 즉흥곡」「대금과 가야금을 위한 2중주」,창극 「수궁가」,무용곡 「그날이 오면」등 1백여곡 「현금곡전집」「가야금 병창곡집」 「남도의 창」「줄풍류 거문고 가락의 비교관찰」「한국근현대사의 음악가 열전」 국민훈장석류장(73년)KBS국악대상 작곡부문수상(89)
  • 무안선 36명 사상

    【무안=박성수기자】 1일 하오 7시5분쯤 전남 무안군 청계면 송현리 광주∼목포간 도로에서 태원여객 소속 전남5파1177호 시내버스가 전남3더1376호 세피아승용차(운전자 백경호·29·광주시 동구 황금동)와 전남5파7998호 광전교통 소속 시외버스 등 차량 2대와 잇따라 충돌했다. 이 사고로 승용차 운전자 백씨와 함께 타고 있던 이희종씨(29·광주대 행정학과4년)등 4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버스승객 32명이 중경상을 입고 인근 무안병원과 목포 한국병원 등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 아시안게임 “금” 의지의 레슬러/송성일 설앞두고 끝내 숨지다

    ◎레슬링 투혼으로 암투병 112일만에/올림픽 금도 눈앞인데…/주변인사들 망연자실 『다시 일어나 내년에 열릴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겠다고 그렇게 희망에 부풀어 있더니…』 위암 4기 판정을 받고 입원한 지 1백12일만에,위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지 1백4일 만에 일본 하늘에 한국 남아의 기개를 떨쳤던 레슬링의 송성일(26·상무)씨가 설날을 이틀 앞둔 29일 상오 서울 삼성 의료원에서 끝내 숨을 거뒀다. 이날 세상을 떠나는 아들을 곁에서 지켜 본 아버지 효선씨(53)는 『성일이가 지금도 병상에서 벌떡 일어 나 운동을 해야 겠다고 나설 것만 같다』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귀국해 3일이 지난 뒤 위출혈과 함께 심한 복통을 느껴 단순 위궤양 정도로 알고 병원을 찾았으나 진단결과 위암 4기라는 선고를 받았다. 송성일은 13년전인 82년 여름 과천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레슬링을 시작했다.고교시절에는 원양어선을 타겠다며 부산으로 가출,운동을 그만 두기도 했던 그는 92년 레슬링 첫 입문 스승인 양원모(양원모·현 상무 레슬링단 총감독)씨를 운명적으로 다시 만나면서 상무에 입단해 93년에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다. 뒤늦게 송씨의 사망 소식을 듣고 삼성의료원 영안실을 찾은 상무 소속 동료 레슬러들을 비롯해 70∼80여명의 체육인들은 『위암을 극복할 줄로 믿었는데…』라며 망연자실한 모습이었다. 한편 장례식은 2월 2일 상오 10시30분 삼성의료원 영안실에서 국군체육부대장으로 치러지며 장지는 국립묘지이다.
  • 김정일 필체/협박범과 비슷/필적감정 전문가 분석

    ◎약간 우사체… 의지 굳고 고집 센 형 변덕스럽고 충동적이며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김정일의 성격을 필적을 통해 감정해 보면 어떻게 나타날까. 김정일이 최근 자강도 전천군상업관리소장 정춘실에게 보낸 서한을 살펴본 서울 제일문서감정원 원장 김형영씨는 『글씨체 구성상의 여러가지 형태를 전체적으로 분석해 볼 때 김정일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굳은 의지의 소유자인 것 같다』면서 『매사를 우왕좌왕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는 성격도 엿보인다』고 진단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필적감정을 전담하기도 했던 김씨는 『필적으로만 보면 김정일이 현재 의욕이 넘치고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이러한 점은 그가 지시를 받는 쪽이 아니라 리더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롤 볼 수도 있다』고 밝혔다. 김씨는 『약간 우측으로 기운듯한 김정일의 필체가 일부 협박장에서 나타난 형태와 유사점이 있는 것도 흥미롭다』면서 『수년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유명식품회사 제품에 대한 독극물투입협박사건이나 유괴사건의 범인들이 보낸 협박장 중에도 비슷한 필체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에 김씨가 필적을 분석한 김정일의 서한은 지난해 12월14일 작성된 것으로 지금까지 북한에서 공개된 김정일자필 가운데 비교적 장문에 속하는 것이다. 김씨는 『필적에서도 유전적인 성향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아버지의 글씨체와 아들의 글씨체가 닮은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고 말하고 『그러나 같은 스승 아래서 배운 제자들의 글씨가 리슷한 것처럼 후천적인 영향에 의해 필적이 유사성을 보이기도 한다』고 말했다.김정일의 글씨체와 김일성의 글씨체도 닮은 데가 많다.
  • 세계질서의 중추역 꿈꾼다(일본 「21세기 야망」:1)

    ◎돈·기술·정보·인재… “일본은 있다”/하이테크산업에 전력투구… 초일류 유지/군사·정치 대국화로 줄달음/“슈퍼파워 재팬” 냉정한 직시로 「불행한 역사」 반복 막아야 일본이 전후 50주년을 계기로 새로 태어나고 있다.일본은 패전 50주년이 되는 19 95년을 맞아 과거청산을 「선언」하고 유엔상임이사국 진입을 적극화하는등 경제 뿐만아니라 정치·군사면에서도 강대국을 지향하고 있다.광복 50주년과 한·일국교정상화 30주년을 맞아 변화하는 일본과 그들의 21세기 위상을 조망해본다. 일본의 1995년을 여는 아침해는 그동안 움츠렀던 전후 반세기의 역사를 거부한다.경제적 「슈퍼 파워」 일본은 패전후 50년동안 축적한 힘을 바탕으로 이제는 과거 침략사의 굴레로부터 「자유」를 선언하며 국제정치무대의 강대국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한 일본의 하루는 해가 후지산 너머로 진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다.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는 빅토리아여왕의 영국이었지만 지금은 일본이다.일본의 첨단기업과 연구소의 하루를 마감하는 불이 꺼지기전에 태평양 건너 미국에 있는 일본 공장과 연구소의 불이 켜진다.지구촌 곳곳의 일본공장에서 세계시장을 압도하는 상품이 쏟아져 나오고 일본의 엔화는 세계경제를 「지배」하고 있다. 패전의 참담한 잿더미속에서 경제신화를 창조한 일본.그러한 저력은 어디에서 나오며 일본은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일본이란 말처럼 우리에게 착잡한 심정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도 드물다.가까우면서도 그러나 결코 가깝지않은 나라.냉정한 이성적 판단으로 보려해도 가슴속 감정이 앞서는 나라.그러나 미국·유럽과 함께 21세기 세계질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일본의 변화하는 21세기 위상을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일본이 「세기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오늘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배경은 「군사력 없는 경제대국」 실현이라는 전략적 선택의 성공에서 우선 찾을 수 있다.전후 일본정치의 틀을 만든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국가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성장에 집중투자하는 국가정책을 채택했다.일본은 미국의 전략적 우산아래 매년 국민총생산(GNP)의 1% 미만만을 방위비에 지출하며 경제분야 투자에 집중했다. 일본 경제성장의 결정적 도약의 계기는 잘 알려진대로 한국전쟁이었다.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당시 중국·소련등 공산주의세력의 팽창을 막는 방패국가로 일본의 경제건설을 적극 지원했다.미국은 이에앞서 일본군대의 광적인 팽창주의 야심과 그들을 지원했던 재벌의 유착관계가 아시아침략의 원인이었다고 판단하고 일본의 민주화란 이름아래 이들의 해체를 단행했다.재벌해체 이면에는 사실 일본경제체제를 파괴하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반공·보수주의로 급선회 일본을 아시아 반공국가 지원을 위한 군수기지로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경제지원 정책으로 전환했다. 일본의 경제발전은 그러나 미국의 지원과 군사력 없는 경제대국이라는 적절한 전략적 선택 때문만은 아니다.경제발전의 원동력은 정치적 안정과 관·민협동체제 아래 정말로 열심히 일한 일본의 근면한 손과 과학적 두뇌의 기술인맥이다.그들은 선진기술을적극 받아들이고 미국과 유럽이 지적오만에 빠져있을 때 밤을 밝히며 우수한 상품을 개발·생산해냈다. 일본은 또 미국이나 유럽이 「개인의 현재를 위한 소비」를 즐길 때 「일본이라는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저축」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맺다.전후 일본은 산업시설이 파괴됐을 뿐만 아니라 자본부족도 극심했다.그러나 국내 저축률이 세계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높아지며 많은 돈을 저축했다.미군을 상대로 돈을 벌었던 게이샤(일본기생)들조차도 미군에게서 받은 달러를 암시장이 아니라 은행으로 갖고 갔다고 한다.일본정부는 저축된 자금을 우선순위가 높은 산업발전에 집중 투자했다.지금은 자본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문제가 되고 있다. 일본은 미래를 예비하는데 있어서 저축 뿐만이 아니라 인재를 아끼는데도 탁월했다.일본은 전쟁이라는 극한상황과 전쟁의 패배라는 참담함속에서도 폐허가 된 국가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우수한 인재들을 전쟁의 죽음으로부터 보호했다.그 방패막이 역을 맡았던 것이 일본해군의 단기 장교제도다.일본은 「단기 현역해군주계과사관」이라는 제도로 우수한 인재들을 온존시켰다. 『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인재들이 육군 쫄병으로 징병되어 전장에서 이름없는 병사로 죽어가서는 안된다.그것은 일본의 손실이다.인재를 남겨놓지않으면 일본은 멸망한다』.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이다.단기 해군장교로 임관했던 3천여명의 인재들은 전후 관료·기업·경제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며 오늘의 일본을 만드는데 크게 공헌했다. 인재를 아끼는 것은 일본의 기업관에서도 잘나타난다.일본은 인간이 제공하는 노동을 단순한 상품으로 보지않는다.인간을 교육을 통해 부가가치가 더욱 높은 상품을 만들 수 있는 「가치창조자」로 보고 있다.인재를 소중히 여기는 기업관을 배경으로 일본기업은 특히 역경을 재도약의 발판으로 활용하는 놀라운 저력을 발휘했다.일본기업은 70년대 1·2차 석유위기를 맞자 에너지 절약형 산업구조로 바꾸고 하이테크화를 서둘러 경쟁력을 강화했다. 1985년 9월 22일.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선진 5개국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의가 열렸다.그 결과는 엔고의 가속화를 알리는 이른바 「플라자 합의」로 나타났다.플라자 합의 직전의 환율은 1달러당 2백40엔이었다.그러나 89년초에는 1달러에 1백20엔으로 엔의 가치가 두배나 올랐다.일본경제를 이끌어온 자동차·전자등 수출기업들은 한때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그러나 일본기업들은 경영의 합리화·하이테크화에 박차를 가하며 엔고를 극복 국제경쟁력을 더욱 높였다.그러한 노력은 지금 더욱 강도를 높이고 있다.플라자 합의는 전후 40여년간 세계경제에 군림해온 「막강한 미국」의 종언을 의미한다. 일본 첨단기업들은 80년대 기술의 스승인 미국을 제치고 세계시장을 석권했다.컴퓨터계의 거인 IBM까지도 일본전기(NEC)·히타치·도시바·후지쓰등 일본 첨단기업들의 도전으로 경영위기를 맞았다.세계의 거리에는 도요타·닛산·혼다등 일본자동차가 질주하고 있다.소니가 미국의 혼이라고 하는 콜롬비아영화사를 구입하고 미쓰비시가 록펠러빌딩을 사들인 것을 비롯,일본기업들은 엔고를 활용,「세계의 부동산」을 사들였다.중소기업에서 일하는 「기술의 광인」들도 세계 일류를지향하며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데 땀을 흘려왔다.일본은 더욱이 미국의 「정보 슈퍼하이웨이」 구상에 대응,정보분야 투자를 크게 강화하고 있다. 일본의 경제신화는 통계지표(93년)로 더욱 분명해진다.무역흑자 1천4백억달러,해외순자산 7천억달러,1인당 국내총생산(GDP)3만3천7백64달러,외환보유고 9백90억달러,차관공여 2천4백10억달러,그 앞에는 모두 세계 최고라는 접두어가 붙는다.일본의 국민총생산(GNP)은 세계경제의 거의 15%를 차지하고 있다.일본의 93년 GDP는 4조2천75억달러로 미국(6조2천8백억달러)에 이어 세계 2위다.1950년 일본의 GNP는 미국의 20분의 1에 지나지않았었다.그러나 지금은 거의 3분의 2수준이며 2000년대는 미국과 비슷해질 전망이다. 「강대국의 흥망」으로 유명한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는 그의 새로운 저서 「21세기 준비」에서 「일본은 기술에 의해 주도될 미래 변화에 가장 준비가 잘돼 있는 나라」라고 지적했다.미래학자들은 바다를 중심으로 볼때 과거의 지중해 시대에서 현재의 대서양시대를 지나 앞으로는 태평양시대가될 것으로 전망하며 일본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국가권력문제의 권위자인 조셉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과거 4반세기에 걸쳐 세계경제에서의 가장 극적인 변화는 일본의 몫이 두배로 늘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얼마전까지만해도 국제질서와 세계경제 게임룰을 만들었다.그러나 지금은 세계 제일의 무역적자국과 채무국이 되며 국가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일본에서 빌려오지않으면 안되는 처지로 전락했다.미국만이 국제룰을 만드는 시대는 지났으며 일본도 경제게임룰을 만드는 강대국이 됐다. 일본의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는 『앞으로의 세계는 국경없는 세계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냉전의 이데올로기 전쟁시대가 끝나고 국경없는 경제전쟁시대가 도래하며 일본이 쌓은 부의 축적은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일본은 세계무역기구(WTO) 발족에 따른 자유무역의 확대로 가장 많은 이익을 볼 것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보고서는 예측한다.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일은 일본이 경제대국으로만 안주하지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사실이다.경제력에 걸맞는 정치·군사적 영향력도 행사하겠다는 것이 21세기 일본의 국가전략이다. 일본의 그러한 변화를 우리는 냉정한 눈으로 보고 있는가.우리는 일본의 실체를 감정적 판단으로 덮는 오류를 반복해서는 안된다.「일본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오기에 지나지 않는다.일본은 역사속에 존재하며 강대국이 되어 다가오고 있다.일본의 그러한 변화를 바로 보고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지않도록 대비하는 것이 광복50주년과 한·일국교정상화 30주년을 뜻깊게 하는 참다운 역사인식일 것이다.
  •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세계의 명소/걸작건축 감상:8)

    ◎“살아 숨쉬는 조각작품… 거대한 성서”/가운데 「예수 종탑」… 12개탑은 열두제자 상징/1백년 넘겨 지금도 공사… 앞으로 2백년뒤에난 완성될듯 건축이 시작된지 100년이 지난 현재도 완공을 예측할 수 없는 미완성,건축물이라기보다는 돌에 새겨진 거대한 성서,정체된 구조체라기 보다는 살아 숨쉬는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건축물 등 수 많은 형용어를 지니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천주교회(성 가족교회)는 현재도 공사가 진행중이면서 관광 명소가 되고 있는 세계의 유일한 건축물일 것이다.바르셀로나의 상징적 건축물인 이 교회는(여기서 교회는 우리나라의 성당을 말함) 한 지방건축가의 집념과 바르셀로나인들의 독자적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함께 뿌리내려 싹을 틔우고,생성을 계속하는 생명체라는 느낌을 부여한다.더욱이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독창적이고 토착적인 형태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색적인 건축경험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건축가 가우디 작품 사그라다 파밀리아 천주교회는 92년 올림픽 개최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의 중심도시인 바르셀로나의 「에익삼플레」지구 즉 19세기 중엽부터 개발된 「확장구역」에 위치한다.중세의 성벽을 넘어 도시로의 모습을 갖춘 신시가지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걸쳐 바르셀로나의 새로운 양식을 추구하는 건축가들이 만든 독특한 형태의 건축물들을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그 중에서도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는 스페인이 최고로 자랑하는 근대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의 작품으로 1백30m 높이의 우뚝 솟은 종탑들과 조각군으로 이루어진 외관은 주변을 크기와 형태로 압도하고 있어 도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역사 깊은 카테드랄(중앙성당)을 제치고 대표적인 바르셀로나의 종교건축으로 알려져 있다. 이 천주교회를 비롯하여 독특한 형태를 지닌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양식이 대두하게 된 배경은 바르셀로나의 도시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바르셀로나는 지중해 연안에 자리잡고 있는 지리적 여건으로 이탈리아·프랑스 등 중앙 유럽의 문화적 영향을 쉽게 접함과 동시에 이슬람 문화또한 쉽게 접할 수 있는 지리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한편으로는 스페인의 변경에 위치하여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지속시켜올 수 있었던 점은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카탈루냐 지방의 강한 문화적 자주성의 배경이 된다.카탈루냐를 집어삼키려는 주변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과 통합,독립후의 스스로의 존재를 명확히 하기 위해 표현되는 토착성 등은 바르셀로나의 세번에 걸친 건설 중흥 시기를 거치며 독자성을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서 민족주의적 건축 형태로 표출하게 되었다.따라서 19세기말 유럽에서 태동한 다른 국제적인 양식의 만국 공통적인 스타일의 건축물과는 달리 가우디 건축의 형태가 카탈루냐 지방의 자주성과 현대성을 양립시키고,토착적임과 동시에 주변의 문화가 융합되어 매우 생소하고 강한 인상을 주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바르셀로나의 지리적·사회문화적 특성에 기인한다. ○동쪽 외관 일부 완성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천주교회는 1883년 가우디가 이 프로젝트를 의뢰받을 때는 이미 가우디의 스승에 의해 네오고딕 양식으로 설계되어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가우디는 이 설계에 만족하지 못하였지만 건축중인 구조체 또한 무시할 수 없었기에 기존의 구조체에 자신이 디자인한 설계를 접목하였고,원래의 계획안보다는 그 규모가 훨씬 확대하였으며,형태를 완전히 변경하였다.전체 구상도는 건축이 진행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최후의 계획안이 나오기까지는 가우디가 건축을 맡은지 40여년이 지난 뒤였다.현재는 전체 계획의 아주 일부분만 완성되었지만 가우디의 계획안에는 십자형의 평면은 전후 93m,좌우 53m,1천5백명의 성가대와 7백명의 어린이 성가대,7대의 오르간이 들어가는 대규모의 성당으로 계획되었다. 젊은 건축가 가우디가 31살 때부터 건축을 맡기 시작한 이 교회는 1926년 74세로 전차에 치어 갑작스런 죽음을 맞기까지 건축비로 인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43년간 진행되었다.그러나 3면으로 계획된 주된 외관 중 「성탄의 외관」이라 불리는 교회 동측 외관만이 그의 생전시에 완성되었다.동측 외관은 그가 마지막 12년 간을 다른 건물의 설계를 마다하고 오로지 이 교회의 건축에만 몰두하여 현장에서 인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여 완성된 그의 혼이 담긴 최후의 석조 조각덩어리의 견축물이라는 점에서 미완이지만 그의 대표작품으로 근대 건축사의 한 장을 장식하는데 의의가 크다.건물 입면에 하나하나 새겨진 예수 탄생에 대한 마치 살아있는 듯한 조각들은 교회는 하느님의 집을 건축하는 것이 아니고,미사를 집전하기 위한 장소도 아닌,방문자들에게 건물 전체를 통해 성경을 전달하고자 노력한 한 건축가의 집념의 산물이다.고전적인 양식의 대부분의 성당과는 매우 다른 원추형 종탑들은 처음에는 사각으로 계획되어졌으나,후에 부드러운 원형으로 변경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건축되었다.이는 계획안에서 1백67m높이의 원추형 중앙 종탑은 예수를 의미하고 그 주변을 둘러싸는 3면의 주된 외관에서 4개씩 솟아있는 12개의 종탑은 예수의 12사도를 의미하기 때문에 기하학적인 사각보다는 원형을 선택했으리라 추측된다.그중 동측 외관의 4개의 종탑만이 가우디 생전시 완성되었다. ○다양한 색채가 특징 거칠면서도 자연의 모습을 재현하는 듯한 외관형태는 대자연을 존중하고,건축을 자연의 일부분으로 생각한 가우디의 건축철학 때문이다.그는 형태표현만 자연을 모태로 추구한 것이 아니라,새로운 형태의 시도를 위해 관습적인 구조방법에서 탈피하여 건축 기술도 자연의 지지구조를 바탕으로 하였다.또한 자연계는 다양한 색채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건축물 역시 단순한 색채로 마무리 되지 않고 있다.이처럼 자연의 모든것을 존중하는 가우디의 건축관은 이 교회의 형태·구조기술·건축색채에서도 그대로 표현되어 생명이 부여된 듯한 건축물로 와 닿는다. 그러나 「성탄의 외관」의 배면은 자연주의적 형태와는 매우 달리 절제된 선으로 이루어져 추상적이고,기하학적인 형태에 어리둥절함을 느끼게 된다.이는 배면은 가우디의 제자 베런겔에 의해 디자인 되었기 때문이지만 두 상반되는 스타일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불가사의라 생각된다. 가우디의 사망 후에도 공사는 계속되어 1954년부터 시작된 서측 외관은 가우디 사망 50주년에 첨탑이 완성되었고,1985년에 서측 입면이 완성되었다.관광객들의 관람료가 주된 재원으로 2백년 후에나 완성될 수 있어 보이는 이 건축물은 번쩍이는 재능과 새로운 형태의 시공에 대한 실험을 지속하며,건설 현장에서 생활하면서 하나하나를 완성시켜 나간 가우디가 없는 상황에서 건설이 계속되는 데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교회에서 행해진 그의 장례식에 조의를 표하는 바르셀로나 시민의 행렬이 끊이지 않은 것처럼,사그라다 파밀리아 천주교회는 완성되든,미완성으로 남게 되든,건축가 가우디의 건축에 대한 열정적인 혼과 함께 영원히 인류의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을 건축물로 남아 있을 것이다.
  • 1월의 문화인물/표암 강세황 선생/서화가로 단원 김홍도의 스승

    ◎학술강연회·유고집 발간 등 기념행사 문화체육부는 조선 시대의 서화가이자 문신인 표암(작암)강세황선생을 95년 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시·서·화의 삼절로 일컬어지는 강세황(1713∼1791)선생은 기예를 겸비한 사대부 서화가로서 창작과 화평을 통해 18세기 우리나라 화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서화에 뛰어나 1784년(정조 8년)천추부사로 북경에 갔을 때 그의 서화를 구하려는 청나라 사람이 많았다고 전해 온다. 중국의 화론·서법·예술론을 수용하고 배우면서도 우리 실정에 맞게 지도하고 권장해 한국적인 남종 문인화풍이 자리잡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림으로 산수 사군자와 서체로 전서 예서에 뛰어났던 선생은 단원 김홍도를 제자로 두었다. 저서에 「표암유고」,그림에는 벽오청서도,송도기행첩,사군자병풍 등이 있다. 문체부를 비롯한 관련단체는 선생을 기리는 학술강연회,유고집 발간 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마련한다.
  • 승용차­트럭 충돌/PD 등 2명 사상

    【춘천=조한종기자】 24일 하오 2시50분쯤 강원도 춘천군 신동면 증1리 춘천외곽도로 교차로에서 서울 1로 7858호 프린스승용차(운전자 김광섭·25·KBS 드라마 제작국 섭외담당)가 중앙선을 넘어 좌회전하던 강원 14가 1871호 레미콘트럭(운전자 선문주·28·춘천군 동래면 신촌1리)을 들이받아 승용차 운전자 김씨가 그자리에서 숨지고 함께 타고있던 KBS프로듀서 한경철씨가 중상을 입고 인근 한림대부속병원에서 치료를 받고있다.
  • 발레리나 박인자(이세기의 인물탐구:65)

    ◎현란한 율동의 창작무대 쉼없이/82년 「백조의 호수」서 고난도 「푸에테」 24회 선보여/토슈즈 과감히 벗고 출연… 정통발레 변혁 시도/후진 양성하며 항상 공연주역… 내년 4월 「20년 기념작」 준비 박인자 84년 음악전문지 「객석」창간호는 발레리나 박인자를 발레계의 「비범」으로 꼽은 일이 있다.조동화·김영태·채희완등 무용평론가들의 추천이유는 이랬다. 『82년9월 「백조의 호수」3막중 오딜(흑조)에 도전한 박인자는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으로 눈이 부시도록 현란한 푸에테를 24회나 도는 저력을 보였다.83년5월 그가 춘 오데드 솔로 역시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무대였다.그후 쇼스타코비치의 「아다지오」와 「녹색의 변주곡」에서 그는 지체의 포물선을 감각적으로 금긋는 데 기여했다.개성이 돋보이는 박인자에게서 아직 노련미를 찾긴 어려우나 그의 작업은 신뢰감을 갖고 주시해도 좋을것 같다』는 요지였다. 한 다리로 서서 몸을 완전히 회전시키는 푸에테란 발레리나의 자존심이 걸린 고난도 테크닉의 하나다.최근에는 테크닉 발달로 이보다 긴 푸에테와 필루에트를 성공시키는 예가 흔히 있지만 10여년전만해도 그의 연속 푸에테는 무용계의 화제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후 개인발표와 지방공연·춤작가 12인전·대한민국무용제등 각종 대형행사에서 박인자는 클래식과 네오클래시시즘 창작발레와 재즈발레에 이르기까지 변화되고 발전된 춤의 모습을 정열적으로 펼쳐왔다.91년 국립극장에 올려진 「레이몬다」가 「클래식의 격정과 정확성」을 갖춘 무대였다면 「불새」의 경우는 모리스 베자르의 단순화된 현대발레를 「스트라빈스키 음악의 역동성을 살려 힘있고 치밀한 원형무로 만든 수작」이었다. ○격있는 화려함 과시 지난해 가을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선보인 그의 「나비부인」은 긴 부드러운 의상속에서 물흐르듯 유연한 동작을 구사하여 『40대 무용가 중에서 포르드 브라(팔의 움직임)의 정지미를 이만큼 탄력적으로 과시한 발레리나는 드물다』는 평을 받았다.더구나 창작발레 「초록의 환상」에서 토슈즈를 활짝 벗고 산뜻하게 치솟는 도약은 무중력과 부력의 이미지를 꽂으면서발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지속적인 훈련이고 기교이며 동시에 「격있는 화려함」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제시했다. 평론가들의 평이 아니더라도 박인자발레의 매력은 댄서의 묘기를 완벽하게 소화한 프로의식과 아름다움이 넘치는 무대의 회화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그리고 분홍신을 신은 것처럼 그는 신들린듯 무대를 선회하고 회전하면서 그가 춤추는 공간에 오색찬란한 빗살무늬를 뿌려나간다. 그의 발레는 60∼70년대 국립극장 무대에 올려진 정교한 클래식 발레와는 그 형식면에서 뚜렷한 차이점을 갖고 있다.즉 그의 춤은 이지적이고 극적인 움직임과 육감적인 신선미를 잃지 않는다.이른바 무엇을 추어도 활기차고 선이 선명하며 창작력과 문학성이 뛰어나다.그는 춤출 뿐만 아니라 탁월한 발레조련사이자 매우 두뇌회전이 빠른 안무의 재구성자이고 「그래서 대학권에 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재목」이라고 평론가 김태원은 한탄해 마지않는다. 박인자의 유년의 기억은 햇빛처럼 밝고 순탄하기만 하다.서울 충무로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박명근씨와 노오례여사의 6남매중 막내로 태어나 어릴 때는 피아노를 쳤고 금란여중에 다니면서 발레리나 서정자의 눈에 띄어 발레에 입문했다.1백62㎝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유연한 몸매를 타고난 그는 임성남 문하에서 본격적인 발레수업을 받았고 서울예고 2학년때인 69년부터 벌써 국립발레단 정기공연에 참가하여 스승·선배들의 기대를 한몸에 모았다. 대학4년때인 74년 동아무용콩쿠르에서 「지젤」솔로로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는 대상을 수상,신데렐라 탄생을 예고받은 그로서는 실은 더이상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그가 존경하는 선배 김혜식은 이 콩쿠르에서 금상을 받았고 조승미 역시 은상에 머문 데 비한다면 그의 대상은 발레계의 모처럼의 경사이자 자랑이기도 했다.그러나 기쁨은 잠시,그를 아끼는 국립발레단의 임성남씨와 대학의 스승인 김정욱교수 사이에서 그는 프리마 발레리나냐,대학교수냐의 양갈래 길에서 무엇인가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게 되었다.전문 발레리나로 그를 키운 임성남씨는 당연히 국립발레단 입단을 권유했고 대학 발레의 향상을 걱정하던 원로 김정욱교수는 대학에서 발레를 가르치는 일도 공연 못지 않게 중요함을 누누이 역설해왔다.더구나 그는 4년동안 모교인 수도여사대(현세종대)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한 처지였다. ○고민끝에 「대학」 선택 고민끝에 그는 결국 대학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김정욱교수의 뒤를 이어 대학에서 후배를 가르치면서 자신의 무대를 만들자고 생각했으나 박인자의 결정에 놀란 임성남씨는 『그러려면 대상수상을 되물리라』는 농담반 비슷한 격노를 나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술가중의 어떤 사람들은 위대성을 타고나게 마련이지만 또 어떤 이들은 후천적으로 이를 획득한다.그러나 아무리 타고난 위대성이라도 갈고 닦지 않는다면 한낱 범용에 그치고 말 것이다』 우연이나 요행은 절대로 훌륭한 예술가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키기 위해 지금도 「피나는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그는 미국·일본의 발레학교에 나가 다양한 테크닉을 연마하면서 발레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모든 룰들을 다시한번 생각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그중에서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은 윌리엄 포사이드와 모리스 베자르의 파격의 안무였다.특히 리옹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을 감시하기 위해 무대에 경비견까지 끌고 나온 것을 보고 그는 고질화된 형식에서 벗어나 맨발벗은 모습을 발레에 적용하는 과감한 용기를 보였다.타당성이 없이 누군가 고수하려는 것을 「누군가 깨야 한다」는 의지로 작품에 맞지 않으면 토슈즈나 튀튀 클래식 튀튀 로맨틱을 고집하지도 않았고 「나비부인」에서 창살에 비친 그림자춤이나 「피아노」에서의 파도와 달빛타기를 푸른 휘장으로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의 시도다. 박인자에겐 많은 장점이 있다.평상시의 그는 발레리나의 티는 물론 교수의 티도 내지 않는다.지젤의 분위기를 닮은 해맑은 싱그러움을 간직한 채 일상적인 대인관계를 원만하고 진지하게 풀어나간다.그가 모교를 떠나 발레전공이 없는 숙대 무용과로 옮겨간 것은 그가 지도한 후배들에게 교수자리 하나라도 내어주기 위한 배려였다.그의공연장에 장르를 초월한 수많은 무용인이 찾아들고 그의 춤을 격려하고 환호하는 것만 봐도 그의 후덕함을 엿볼 수 있다. ○무용과 음악을 분리 단지 자신의 올바른 주장은 남의 눈치를 보거나 주위를 의식치 않고 똑바로 관철시키는 주의다.문예진흥원 창작활성화 무용기금속에 음악파트가 포함된 것을 보고 무용과 음악을 따로 분리한 것도 그가 이룬 성과다.가족은 건축가인 부군 함정도(서울산업대교수)씨와의 사이에 1남(고교)1녀(여중). 우리의 본격적인 클래식 발레는 김정욱·임성남·홍정희에서 김학자·김혜식·조승미로 이어지고 이들은 대부분 대학에서 후배를 양성하거나,발레를 지도하거나 안무에 치중하는 시기다.대학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지금도 끊임없이 발레무대의 주역이라는 점에서 박인자는 단연 현역의 톱에 틀림없다.그러나 육체를 매체로 하는 무용의 세계에서 무대예술가의 활동시한은 전보다 길어지는 추세이긴 하지만 「꽃처럼 무섭게 시들어버리는 육체의 언어로 예술적 광채를 영속하기란 좀체로 쉽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더더욱 인간의 영혼을 전율케 하는 「사색의 끝」에 치닫지 않고서는 모든 움직임은 무의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그는 바람이나 파도나 봄을 맞는 대지의 꿈틀거림이 인간의 희비애락에 자연스럽게 접목되는 「마음의 춤」을 추구하는 시기다. 그래서 단순하게 허공중에 들어올린 팔 하나라도 가장 자연스러운 바람속의 흐름이기를 원하고 있다. 내년 4월3일 중앙국립극장 대극장무대에 올릴 「박인자발레 20년 대공연」을 앞두고 그는 겨울방학 시작과 함께 짙은 사색에 빠져 있다.그로서는 결국 몇 안되는 별중에서 끝까지 반짝이는 하나이고 싶은 것이다.그리고 그가 춤추고 지나간 자리에 언제까지나 긴 여운으로 불꽃 같은 극미의 항적이 남기를 스스로 기대하려는 것이다. □연보 ▲1953년 서울출생 ▲1966년부터 임성남 사사 ▲1969∼73년 국립발레단단원 ▲1971년 서울예고졸업 ▲1974년 동아무용콩쿠르 대상수상,ASTA총회참가 공연 ▲1975년 수도여사대(현 세종대)졸업 ▲1977년 동대학원 졸업,세종대강사,PATA총회참가 공연 ▲1979년 세종예술원창단 공연 ▲1980년 예무회창단 공연 ▲1982년 박인자발레,대한민국무용제·한국발레협회 창작발레공연 ▲1983년 박인자발레 공연 ▲1984년 일본 도쿄시티발레·아메리카발레센터연수,데이비드 하워드 발레스쿨 수학 ▲1985년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환교수 ▲1986년 김정욱발레페스티벌 출연,86아시아문화예술축전 안무 ▲1987년 박인자발레 공연,숙대교수 ▲1988년 88서울올림픽 문화예술축전·서울국제무용제·현대오페라단 「리골레토」중 「집시의 춤」안무 ▲1989년 박인자발레 공연(대구·서울),발레20 창단기념·임성남 발레45주년기념공연 안무·출연 ▲1990년 세종문화회관 분수대공연,중앙일보사주최「그랜드발레 페스티벌」안무 ▲1991년 박인자발레 공연(부산·서울),춤작가 12인전안무 출연,청룡영화제 오프닝 세레모니 「코러스라인」안무 ▲1993년 박인자 창작발레(창원·대구·여수) 「대지의 소리」「승천」「연습실에서」「해적 2인무」「팝을 위한 바리에이션」「나로부터 멀리」「고귀한 승리」「파키타」「불새」「나는 뭐드라?」「나비」「나비부인」「꼬리기르기」「가을저녁의 시」「피아노」등 다수 한양대 체육대 박사과정 한국발레협회및 한국무용학회 이사 국립발레단 자문위원 숙대무용과 교수
  • 포항 방사광가속기연 소장 이동영박사(올해의 인물:5)

    ◎한국과학 나래 펼 「꿈의 빛」 비추다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대쪽같은 선비의 이미지를 전하는 포항방사광가속기 연구소장 이동령박사(67). 지난 7일 방사광가속기의 준공식을 치름으로써 기초과학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이 아시아 과학계의 명실상부한 중심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도록 이끈 야전사령관이다. 서울대 물리학과와 런던대학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지난 88년 귀국하기 전까지 미국 카톨릭대,항공우주국,해군과학연구소에서 물리학자로서 한국인의 긍지를 떨치기도 했다. 포항공대 초대학장 고 김호길박사의 스승인 그는 포항방사광가속기의 핵심기술인 초정밀전자석,전원공급장치 등을 국내기술로 개발,특허를 얻는 등 한국과학계의 위상을 한껏 높여놓았다. 『내가 뭐 한 일이 있나요.한국 과학계를 일으켜 보겠다는 뜻있는 사람들과 후배들이 열심히 뛴 결과지요』 한국과학기자클럽이 선정한 「올해의 과학자」로 선정된 그는 자신의 공을 후배들에게 돌리는 스승으로서의 넉넉함을 보이기도 했다.
  • 시내버스 소매치기 2개파 9명구속

    서울경찰청 형사과는 20일 시내버스승객을 상대로 상습적으로 소매치기를 해온 조상기(53·서울 성동구 중곡동 산52)씨등 「상기파」 일당 5명과 강성웅(45·서울 송파구 신천동 17의2)씨등 「성웅파」 일당 4명등 소매치기 2개파 9명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습절도) 위반혐의로 긴급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조씨등 「상기파」는 지난 10월 하순부터 최근까지 서울 서초구 양재동 인근을 운행하는 시내버스승객들을 상대로 7백50여차례에 걸쳐 모두 1억5천만원을 절취한 혐의를 받고 있다. 강씨등 「성웅파」는 지난 11월 중순부터 서울 송파구 가락동시장을 이용하는 버스승객들을 상대로 4백여차례에 걸쳐 모두 8천만원을 훔친 혐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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