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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타까운 야학교사/차별항의 분신 故이용석씨 유서에 “학생은 나의 스승”

    서울 종묘공원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분신자살을 기도해 5일만인 지난달 31일 숨진 이용석(31) 비정규직 노조 광주전남본부장이 수년째 저소득층 학생들을 가르쳐온 야학교사였음이 밝혀졌다. 이씨는 회사 퇴근 후 매일같이 목포 창평동 목포 신협 4층에 위치한 ‘목포 청소년 공부방’을 찾았다.바쁜 회사생활에도 불구하고 이씨는 이곳에서 저소득층 자녀 20여명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이씨와 함께 학생들을 지도해온 이효원씨는 “수업을 마치고 잡무가 있다며 회사에 갈 정도로 부지런한 분이었다.”며 “공부방 대표로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말했다. 한편 사망한 이씨는 분신 기도 전 작성한 유서에서 “우리 공부방 어린 학생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내 삶의 스승이자 등대였다.”며 자신이 가르쳐온 아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글로 대신했다. 목포 임송학기자 shlim@
  • 60년 환쟁이 인생 지그재그 변주곡 같아/ 결산전시회 여는 ‘만화계의 대부’ 신동헌 화백

    “난 내 이름(憲)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어.” 지난달 31일부터 자신의 창작인생을 결산하는 ‘에디슨과 아인슈타인 & 신동헌’전을 경기도 이천 청강문화산업대학 캠퍼스내 청강만화역사박물관에서 열고 있는 신동헌(申東憲·77) 화백.홍익대 근처 자택에서 만난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지난 인생이 마치 방랑자의 삶처럼 ‘지그재그 변주곡’ 같았다.”고 잠시 회상에 잠겼다.외곬으로 한 우물을 파기 어려운 천성 탓에 만화,애니메이션,클래식 음악,음악가 드로잉 등 다양한 것들에 빠져들며 삐쭉빼쭉 여기저기 부딪치며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는 그는 “그래도 후회는 없어.지금도 후배들에게 예술가에게는 도전과 일탈이 필수적이라고 권한다.”고 말을 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만화가의 길로 1927년 태어나 자란 접경지 함경북도 회령은 외래문화에 접할 기회가 많아 나운규·신상옥 같은 예술인들이 대거 배출된 곳이다.신 화백만 해도 당시 그 지역에서 명망 높던 명필인 아버지 신기철씨부터가 이른바 ‘환쟁이’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다고 한다.신 화백은 집안의 관대한 분위기 속에서 이제는 고인이 된 막내 신동우 화백와 함께 초등학교 때부터 만화를 그리며 놀았다. 신 화백은 1942년 당시 중학생때 학생잡지 ‘형설시대’에 ‘묘안’이 첫 당선되면서 프로 만화가의 길을 꿈꾸었다.1946년 서울대학 예과에 입학한 뒤에도 충무로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그림 실력을 닦았다.스승인 ‘코주부’ 김용환 화백을 그때 만났으며 1947년 한국 최초의 만화단행본인 ‘스티브의 모험’을 내는 등,김용환 화백이 내던 주간만화신문 ‘뉴스’ 전속작가로 다양한 작품 활동을 벌였다. ●67년 한국 최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홍길동’ 제작 1960년부터는 애니메이션에 손을 대 1966년까지 제자이자 동료인 넬슨 신 감독과 함께 수백편의 TV CF용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진로소주,삐콤씨,럭키치약….그 경험이 67년 동생 신동우 화백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한국 최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홍길동’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전문 도료인 ‘비닐 컬러’가 없어 ‘포스터 컬러’로 셀룰로이드 위에 직접그렸지.그런데 이건 뜨거운 조명 밑에 가져가면 껍질처럼 그냥 벗겨지거든.”신 화백은 고민 끝에 셀화를 그리자마자 재빨리 촬영하는 방법을 썼다.나중에는 포스터 컬러에 풀을 섞어 보기도 했고,맨질맨질한 피막을 누그러뜨리려고 양잿물에 필름을 재웠다가 썼다.1967년 후속작 ‘호피와 차돌바위’를 마지막으로 극장용 애니메이션에서 손을 뗐는데 “당시 영화판의 분위기가 나와는 맞지 않았다.”고 그 시절을 돌이켰다.1981년 캐나다로 건너가 현지 회사에서 1년여 동안 근무했지만 천성인 방랑벽을 어쩔 수 없었다.2년 동안 알래스카 등 미국과 캐나다의 국립공원 20여 곳을 풍경화를 그리며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물론 여비는 풍경화를 그려 팔아 마련했다. ●“음악가 그리는 게 더 재미있던데.” 그뒤 1983년 귀국해 MBC ‘뽀뽀뽀’용 단편 애니메이션을 10년간 제작해 주기도 했지만 애니메이션과 만화 분야에서 활동은 그리 많지 않았다.그동안 취미생활이었던 ‘음악가 스케치’가 본업이 된 것이다. 신 화백이 지난 50년대 한국을 찾은 첼리스트 피아티 고르스키를 시작으로 그동안 국내외에서 스케치해온 음악가의 수는 무려 2000여명.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아이작 스턴 피아노3중주단 등 직접 스케치한 것을 선물한 음악가도 줄잡아 300명이 넘는다.“만나면 술 한잔 할 사이는 되지.” 신 화백은 “일본의 후루카와 타이센,프랑스의 와이즈 밧슈 등 스케치만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각국에 음악가 한 명씩은 있다.”면서 “내 전공은 현악4중주단 드로잉”이라고 말했다.“러시아의 보로딘(현악4중주단),영국의 린제이,아일랜드의 칠린기리안….” 대충 생각나는 대로 입에 올리는 악단만 해도 10여개.지난 99년에는 그동안 모은 스케치를 모아 예술의전당에서 ‘세계의 음악가 캐리커처전’을 열었고 ‘음악가를 알면 클래식이 들린다’ 등 관련 책들도 여러권 썼다. ●“일탈을 자주 하되 기본을 지켜라” 신 화백은 자신을 굳이 ‘한국 애니메이션의 선구자’니,‘만화계의 대부’니 하는 호칭으로 묶는 것을 꺼려했다.“난 그냥 ‘문화적 방랑자’인 것 같아.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그러나 신 화백은 “일탈과 도전은 매우 중요하지만 기본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만화가뿐만 아니라 누구든 계획대로 평생을 살 수는 없잖아? 그래도 그때까지 열심히 쌓아온 ‘기본’은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지.” ‘하루라도 스케치를 쉬어서는 안된다.’는 김용환 선생의 말씀을 50년 동안 지키고 있다는 노 화백이 지금까지 그린 스케치는 30만장이 넘는다.“‘기본’이라고 하는 것은 부지런히 노력해 쌓을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 아닐까….” 글 채수범기자 lokavid@ 사진 이언탁기자 utl@
  • 이런 책 어때요/팝콘 먹는 소크라테스

    /우도 마르크바르트지음 플라톤은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이유에서 연극을 싫어했다.플라톤은 “관객들이 실재하는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하는 한 연극은 그들의 영혼을 파괴할 따름”이라고 주장했다.마틴 하이데거보다 더 많이 연극에서 다뤄진 철학자는 없다.하이데거는 1976년 죽은 뒤,‘용서받을 수 없는 말.망각하는 존재’등 3편의 연극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1933년 프라이부르크대 학장이던 하이데거가 히틀러에 동조해 나치당에 입당한 이력을 문제삼은 것이다.철학자들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들이 실렸다.1만 2000원.
  • 선동열, 삼성 투수코치로/2년뒤 김응용감독 이을듯

    ‘동열이도 없고,종범이도 없고….’ 무려 9차례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궈냈던 ‘코끼리’ 김응용(삼성) 감독이 1990년대 후반 명문 해태가 상대 팀에 연일 뭇매를 맞으며 바닥권을 헤매자 이전의 영화를 그리워하며 넋두리처럼 내뱉은 말이다.한때 세간에 유행어가 되기도 했을 정도다. 그러던 김 감독이 ‘국보급 투수’ 선동열(사진·40·전 한국야구위원회 홍보위원)과 8년 만에 전격적으로 한솥밥을 먹게 됐다.지난 85년부터 95년까지 11년간 해태에서 감독과 선수로 함께 뛰었지만 이번에는 어엿한 코칭스태프로 한 배를 타게 된 것.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1년간 코치 연수를 한 뒤 입국해 몇몇 구단으로부터 감독 제의를 받은 선 전 위원은 11일 밤 서울에서 삼성 구단의 신필렬 사장과 만나 계약금없이 연봉 1억 2000만원에 투수코치 입단에 전격 합의했다. 선 전 위원의 삼성 입단은 이날 앞서 만난 스승 김 감독의 코치직 제의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선 위원과 형제처럼 지내는 한대화 동국대 감독의 영입 여부는 아직 결정된 것은 없지만 조만간 있을 코칭스태프 개편 때 구체화될 전망이다.또 선 전 위원은 앞으로 삼성의 성적과 맞물려 김 감독의 임기가 끝나는 2년 뒤 사령탑에 오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당초 선 전 위원은 감독으로 화려하게 국내 무대에 복귀할 것으로 여겨졌다.그러나 그의 영입에 적극적이던 두산이 우수선수 및 코칭스태프 보강,해외 전지훈련 등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해 영입을 포기했다.이후 LG 등 다른 구단의 감독 영입설이 나돌며 마음고생만 한 선 전 위원은 ‘그라운드 복귀’가 최우선 과제라고 판단해 삼성 코치직을 수락하게 된 것. 우승의 환희를 수차례 함께 나눈 김 감독과 선 전 위원이 삼성에서 다시한번 기쁨을 같이할지 벌써부터 팬들의 관심을 끈다. 김민수기자
  • [나의 건강보감]드라마 ‘올인’ 주인공 차민수

    고난을 헤쳐 꿈을 현실이 되게 한 그의 인생 역정은 ‘불꽃'처럼 치열했다. 오랜 시간 그와 얘기를 나눈 뒤, 그가 일군 꿈을 다시 설명해야 하는 일은 결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그의 삶이 너무나 극적이고,다면체적이었기 때문이다. ●드라마 같은 삶 … 사람의 향기 물씬 차민수(54·미국명 지미 차).그를 만나 먼저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대답은 “그냥 ‘올인의 차민수’라고 해주세요.”였다.얼마전 우리 사회에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TV드라마 ‘올인’을 통해 세상 밖으로 이끌려 나온 까닭이겠지만,그도 특정 직업으로 자신의 삶을 간단하게 규정하지 못하는 게 틀림없었다.라스베이거스를 쥐락펴락한 프로갬블러인가 하면, 한국기원 소속 프로 바둑기사이기도 하고,한국의 벅시(미국의 라스베이거스를 만든 사람)를 꿈꾸는 사업가인가 하면,누구보다 정(情)에 가슴 아려하는 소시민이기도 하다.이렇게 다중적인 삶을 살지만 그에게서는 항상 ‘사람의 향기’가 풍긴다. 스스로 선택한 삶이지만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는 그의 말은 우리가잊고 있었던 한 시대,혹은 한 부류의 증언이었다.“돌이켜보면 한 사람이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많은 일을 했고,행운까지 따라 성공을 거두기도 했죠.사람들이 더러 제게 묻습니다.드라마 ‘올인’에서 이병헌이 연기한 게 진짜 당신의 모습이냐고요.사실,그건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그는 TV드라마라는 특성 때문에 자신의 모습이 이병헌과 지성,그리고 마피아 중간보스 등으로 나뉘었다고 부연했다.“그들을 한 묶음으로 보면 아쉬우나마 제 모습을 그리는 데 좀 도움이 될까요? 중요한 것은 아직도 제 삶이 진행중이라는 점입니다.한 일도 많지만,할 일도 많습니다.요새 암벽을 오르는 것도 이런 제 의지를 가다듬고 싶어섭니다.” 사실,최근들어 암벽등반을 즐기지만,그가 암벽등반보다 훨씬 오랜 세월 땀흘리며 공력을 쌓은 운동은 쿵후다.암울했던 60년대,“뭐든 남에게 뒤지지 말고 살라.”며 등을 떠민 어머니 덕분에 열두살때 처음 쿵후 도장을 찾았다.잠 많은 어린 나이에도 새벽부터 도장을 찾아 신들린 듯 구르고 뛰었다.“영등포에서 나고 자랐는데,전쟁 뒤라 세상 어수선했잖아요? 운동 한가지는 해야 바보 취급 안당하는 세상이었어요.도복이나 있었나요? 낡은 유도복이 고작이었는데,한겨울에도 그걸 입고 10∼15분만 뛰면 온 몸이 흠뻑 땀에 젖곤 했지요.” ●틈만 나면 암벽 올라 세상 바라봐 이렇게 시작한 쿵후가 공인 7단,76년 도미 때는 4단이었다.“미국에서도 쿵후는 계속했어요.드라마 ‘올인’을 보신 분은 아실거예요.주유소에서 멕시칸 갱들하고 한판 붙는 거 말예요.”이름도 모르는 나라 한국에서 건너간 그가 처음 몸을 의탁한 일자리는 대륙 서부 리버사이드란 도시의 주유소였다.그곳에서 멕시칸 갱들과 실랑이를 벌이다 그만 일이 커졌다.“내 딴엔 의기양양해 있는데,나중에 30여명이 몰려와요.죽었구나 싶더라고요.붙어야지 어떡합니까? 체질적으로 꽁무니 빼는 건 질색이거든요.동전 전대를 풀어놓고 앞마당에서 맞장 뜰 준비를 했죠.”그에게는 운명의 순간이었고,동물적 감각으로 위기를 직감한 그는 미국으로 갈 때 쿵후 스승 송기천 목사가 선물한 쇠표창을 꺼내들었다.“내 명이여기까지라면 여기서 죽자.”고 마음을 다졌다.“사람이 극한 상황에 처하면 온 몸에 살기가 뻗칩니다.그때 제가 그랬어요.그들이 나 하나 살리고,죽이는게 문제겠어요? 그 순간,혼신의 힘을 다해 공중제비를 돌며 바로 뒤에 있던 느티나무 가지를 발로 차 뚝,부러뜨렸어요.그랬더니 걔들 표정이 달라져요.나중에야 이들이 유명한 리버사이드의 카사블랑카 갱단이라는 걸 알았어요.” 쿵후 실력을 드러내 보인 이 한 장면으로 그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스스로를 구명(救命)했으며,나중에 이들의 쿵후 스승이 된다.광대한 나라에 혈혈단신 몸을 던진 그에게 쿵후는 이렇듯 생존의 동아줄이었다.그래설까.그는 지금도 짬만 나면 쿵후로 심신을 추스르며 땀을 쏟는다. 그의 30년 미국 생활은 ‘월드클래스 갬블러’로 요약된다.84년 프로 도박사로 입문,세계 포커계의 성층권에 올랐다.감이 잘 오지 않는다면,하룻밤새 6억원까지 따들이는 실력에 연간 최고수입 150만달러인 승률 90%의 도박사로 이해하면 된다.그러나 이것도 결코 흡족한 설명은 아니다. “유복자로태어나 자식애가 남다른 어머니 덕분에 쿵후를 비롯,수영,탁구,당수 등 운동이란 운동은 모두 다 배웠어요.피아노,기타 등도 배웠는데 특히 바이올린은 ‘먹고 살만한 실력’이 됩니다.용산고 시절,주변에서 음대 가라고 권했을 정도니까요.” 물론 골프도 하지만 즐기지는 않는다. “모름지기 운동은 땀,그것도 머리에서 땀을 내는 운동이라야 좋다고 여깁니다.스트레스 해소는 물론 납 등 불순물이 잘 빠져나가기 때문이죠.5년 전쯤 시작한 암벽등반도 그런 점에서 아주 매력적입니다.” 그는 요새 틈만 나면 북한산 비봉이나 수문벽의 가파른 암벽에 어린 시절의 동무들과 함께 매달려 세상을 본다.“한창때 63㎏이던 체중이 지금은 85㎏으로 불어 암벽에 매달려선 숨조차 가누기 어렵지만,산정에 오르면 ‘이걸 정말 내가 올랐나.’하는 뿌듯한 성취감이 가슴을 치죠.인수봉도 곧 오를 겁니다.” ●프로바둑 4단… 89년 조치훈·오히라 등 연파 이렇듯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아온 그가 프로바둑 기사(4단)라는 사실,그것도 국수 조훈현 9단과 막역지우라는 사실을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서로 듣기 싫은 소리까지 할 만큼 가깝다.바둑은 6세때 이종사촌형인 지봉훈 목사에게서 처음 배워 대학 때인 73년 입단했다.89년 후지쓰배에 미국 대표로 출전한 그는 조치훈·야마시로·오히라 9단 등 일본의 내로라하는 강자들을 연파하고 4강전에서 당시 국내 전관왕의 조훈현 9단과 맞섰다.“마지막 계가때 16집 정도 이겼더라고요.그런데 아차,하는 순간 그 친구에게 거푸 끝내기를 당해 다잡은 승리를 놓쳤지요.그때 일본의 고바야시 9단 등이 ‘져주기로 작심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며 흥분하던 기억이 납니다.” 최근에는 “우리 대학생들이 일본보다 약해 걱정”이라며 사재를 들여 대학바둑대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산전수전 다 겪은 그의 이름에서 얼핏 ‘포커페이스’를 연상하기 쉽지만 그와 만나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내내 동안(童顔)이었고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눈꼬리가 편하게 굽은,헤프지 않고 따뜻한 그런 웃음. 글 심재억기자 jeshim@ 사진 이언탁기자 utl@ 차민수의 쿵후 건강론그에게 미국은 ‘약속의 땅’이자 ‘생존의 시험장’이었다.약육강식의 정글,그래서 언제든 준비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도태되고 마는 곳이었다. 어렵사리 차린 슈퍼마켓을 정리한 1600달러를 거머쥐고 험한 프로갬블러의 세계로 들어갔고,광기의 노력과 천부적 재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세계 포커계의 신성이었다.76년에 도미한 그가 세계를 거머쥐는 데 채 10년이 안걸린 셈이다. 그러나 ‘언제든 진검 승부가 펼쳐지는 무협지의 강호’같다는 이국에서 스스로를 곧추세우기 위해 칼처럼 벼른 것이 어디 정신뿐이랴.지금도 그는 ‘건강이 자산’이라는 믿음을 갖고 산다. 험난한 서바이벌의 밀림을 헤쳐나온 그에게 쿵후(功夫)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오로지 쿵후만 하고 지낸 건 아니지만 40년이 넘게 익혀 공인 7단에 이른 그의 공력을 누군들 만만하게 여길 수 있을까.그에게는 멕시칸 갱과의 맞대결이라는,살아남기 힘든 상황을 이겨내게 해준 쿵후다. 중국 광둥성(廣東省)이나 푸젠성(福建省) 등지의 남파권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쿵후는 매우 실전적권법으로 최근에는 권법보다 건강법으로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태극권 팔극권 팔괘장 형의권 당랑권 등이 다 쿵후의 일종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 중국 매화문 18대 제자로 대구 상무형의관을 운영하는 김만범 관장은 “일상 운동으로서의 쿵후는 전신을 활용하는 유연화 운동으로 청소년의 성장 발육은 물론 중장년의 경우 몸을 유연하게 하는데 탁월한 운동”이라며 “쿵후의 기본인 유연체조와 단전호흡만으로도 기대 이상의 체력과 정신력을 얻는 등 몸과 정신건강에 매우 유용한 운동”이라고 설명했다. 심재억기자
  • 제대로 된 만화산업 지방경제도 살립니다/만화 박사과정 개설 임청산 공주대 교수

    “만화가 더 훌륭한 창작예술 장르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학문적 접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드디어 완결된 30년의 꿈 내년 한국 최초의 만화 박사과정을 개설,새달부터 학생을 모집하는 공주대학교의 임청산(사진·61) 만화예술학부 교수는 한결같은 주장을 30여년 동안 계속해왔다.그러나 오랫동안 만화가 ‘아이들의 소일거리’에 불과했던 우리 풍토에서 되돌려지는 반응은 언제나 싸늘한 비웃음뿐이었다. 그는 그런 냉소 속에서도 묵묵히 한국 최초의 만화학과와 만화학회를 세우더니,마침내 한국 최초의 만화 박사과정까지 만들어냈다.‘만화 외길’만 걸어도 국립대학 학장까지 할 수 있음을 보여준 임 교수의 인생은 그야말로 한국 만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역정의 점철이다.“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입니다.국내에서 만화를 제대로 연구할 수 있는 전공자 생산 시스템이 이제야 마련된 거죠.” ●만화와 함께 한 반세기 42년 충남 연기 태생인 임 교수의 만화 인생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됐다.어른들의 눈을 피해 숨어서 읽어야 하는 ‘유해물’인 만화를 밤새도록 보면서 만화가의 꿈을 키운 것.그러나 미래의 비전은 고사하고,당장 배울 스승이나 교재조차 없었다.그때 임 교수가 느꼈던 ‘목마름’은 결국 나중에 국내 최초의 만화학과 창설을 주도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임 교수는 생계를 위해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만화가의 꿈은 포기할 수 없었다.공주사범 재학시절에는 몇몇 중앙일간지의 신인작가 공모전 단편만화 부문에서 당선되기도 했다.1965년 교육전문지 ‘새교실’에 여교사가 주인공인 만화 ‘개나리’를 내놓은 뒤 ‘개구리’‘투가리’ 등 ‘리’시리즈로 본격적인 만화가 활동을 시작했으며 틈틈이 야간대학을 다니며 자격증을 따 중·고등학교 교단에 서는 등 교직도 겸업했다.82년 충남대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마침내 공주전문대 영어과 교수로 발탁되었다.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만화학과 창설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던 임 교수는 89년 학교 측에 “만화과를 만들자.”는 제의를 조심스럽게 꺼냈지만 “농담하느냐?”는 핀잔만 들었다.지금이야 전국에 130여개 관련 학과가 있을 정도의 인기 분야이지만,당시만 해도 만화를 대학교에서 가르친다는 발상은 아무도 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그러나 임 교수는 학교와 교육부를 대상으로 한 힘겨운 설득끝에 결국 90년 3월 한국 최초의 만화 학과인 ‘만화예술과’를 탄생시켰다. 당시 언론들은 이 기상천외한 학과 창설을 재미삼아 연일 보도했다.처음에는 “비웃음거리가 됐다.”며 뜨악해하던 학교측도 공주전문대가 덩달아 널리 알려지고 당장 신입생이 늘어나자 임 교수를 다시보기 시작했다.“그 소란 속에서도 만화를 배우겠다고 학생들이 보여준 열의가 고마울 따름이죠.만화를 배우기 위해 다시 대학에 입학한 늦깎이 학생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96년에는 이원복,박세현,성완경 교수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만화학회를 만드는 등 ‘만화 분야의 학문적 접근’을 위해 더욱 분주하게 뛰었다.97년 9월 공주문화대(전 공주전문대) 학장으로 뽑혀 ‘만화가 학장’ 별명을 얻었고,99년 2월 대전대 대학원에서 ‘문학과 만화의 구성요소와 표현기법연구’ 논문이 통과,명실상부한 ‘1호 국산 만화박사’가 됐다.공주문화대는 2001년 초 공주대학교로 통합되었다. ●“문화산업은 열악한 지방경제에 적합한 고부가가치산업” 임 교수는 대전지역 문화예술인과 과학자들이 모여 지난 7일 발족한 ‘대전과학기술문화예술연합’의 공동대표이기도하다.평소 “만화 속에 돈이 있다.”며 문화의 산업적 측면을 강조해온 임 교수답게 지방경제 발전에 있어서 문화산업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자원도 없고,자본도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만화만큼 높은 부가가치를 가진 산업은 없어 보입니다.중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건이 열악한 지방 경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는 “대전시의 목표인 ‘과학기술도시’는 단순한 하드웨어일 뿐”이라면서 “지역경제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는 소프트웨어인 문화예술분야에 대한 접목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글 채수범기자 lokavid@ 사진 강성남기자 snk@
  • “스승 아니었으면 ‘건성건성 감독’ 됐을 것”임권택·정창화감독 해후

    “1956년 ‘장화홍련’ 촬영이 한창일 무렵 정 감독님 문하에 들었습니다.그뒤 소도구 조수로 뽑혔고 2년 뒤인 58년 조감독에 기용됐지요.”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을 하루 앞둔 9일 오후 6시 부산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한국 영화의 거장 임권택(69) 감독이 스승 정창화(75) 감독을 만났다.임 감독은 이날 ‘한국 액션영화의 전설’로 통하는 정 감독에게 영화가 무엇인지 가르쳐준 스승에 대한 고마움과 옛 기억을 허물없이 털어놓았고,정 감독은 “아주 부지런했다.”며 임 감독을 치켜세웠다. “새벽 4시 통행금지가 해제된 뒤 5시면 어김없이 출근해 당일 촬영할 것을 점검하곤 했지요.눈에 띄게 열성적이어서 누구보다 사랑했고 거목이 될 것을 짐작했습니다.” 정 감독의 칭찬에 임 감독은 스승의 열정을 이렇게 회상했다.“꼼꼼할 뿐만 아니라 끈질겼고,잔인할 만큼 일에 철저했습니다.2층에서 떨어지는 장면에서 여배우를 10여차례나 구르게 한 뒤 ‘OK’했으니까요.정 감독의 문하가 아니었으면 ‘건성건성 감독’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한우물을파면서 일가를 이룬 스승과 제자는 촬영 중 장비가 없어 실제로 쏜 기관총 유탄을 왼쪽 가슴에 맞았지만 대본 덕분에 살아난 일화 등 당시 영화판에 대해 이야기 꽃을 피웠다. 한국영화계에서 ‘액션’장르를 개척한 정창화 감독은 국제적으로도 인정을 받아 홍콩에서 모두 11편의 액션영화를 감독했는데,그중 ‘죽음의 다섯손가락’은 73년 미국에 수출돼 개봉 첫주 흥행 1위를 차지할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다. 78년 귀국해 87년까지 제작자로 활동하다 은퇴한 뒤 도미해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 살고 있으며 이번 부산영화제 ‘한국영화회고전’ 주인공으로 선정돼 한국에 왔다. 임 감독은 정 감독의 ‘비련의 섬’에 정식 조감독으로 처음 기용된 뒤,‘사랑이 가기 전에’‘햇빛 쏟아지는 벌판’‘지평선’‘노다지’‘장희빈’ 등 7편에서 감독 수업을 쌓은 뒤에야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했다. 대담이 끝날 무렵 정 감독은 후배 감독에게 “감독이 직접 무술지도까지 하던 시절에 비하면 요즘은 제작여건이 너무 좋다.”며 “얼마든지 뻗어나갈 수 있으니 한국시장만 보지 말고 세계무대에서 확실히 인정받을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달라”고 당부했다.” 부산 이종수기자 vielee@
  • 백발제자들 모여 스승 회고전 열어/故이종무 화백展 서울갤러리서

    “화단의 중진인 제자들이 모여 회고전을 잘 치르고 있는 걸 보면 아버님도 저 세상에서 흐뭇하시겠죠.”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전 홍익대 서양화과 교수 고 이종무(李種武·전 예술원 회원)화백의 회고전이 화제가 되고 있다.칠십이 다 된 제자 30여명이 고인이 된 스승을 위해 지난달 30일부터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 1층 서울갤러리에서 ‘이종무 화백 대한매일 초대 회고전’을 열고 있는 것.오는 12일까지 계속되는 이 회고전에는 고인을 기리는 제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전시회가 시작된지 열흘이 다 되가지만 제자들의 정성은 식을 줄 모른다.고인의 차남인 이경렬(48)씨는 이에 대해 부친의 제자들에게 “그저 고맙다는 것 외에 달리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이 화백이 사고를 당한 것은 ‘미수(米壽)기념전’을 준비하던 지난 5월 26일 밤 9시.지난 97년 아호를 따 건립한 충남 아산의 당림(棠林)미술관 앞에서 근처 집으로 가기 위해 건널목을 건너다 승합차에 치여 숨졌다.매일 4시간씩 캔버스 앞에서 전시 준비에 매달리던 중이었다.비보를 접한 홍익대 제자 등은 긴급모임을 갖고 스승이 마지막 순간까지 전념한 회고전을 대신 마무리 짓기로 뜻을 모았다.이들은 70점의 전시 작품 선정,팜플렛과 화집 출간 등 회고전의 실무를 도맡았다.비용도 추렴하려고 했으나 유가족들이 극구 사양해 대신 전시장 벽에 작품을 거는 등 일손을 도왔다.지금도 틈나는 대로 전시장을 찾고 있다. 이근신(64) 전 강남대 서양화과 교수는 “1958년 대학에 입학한 이래 이 화백은 예술적인 스승일 뿐 아니라 친아버지 같은 분이었다.”면서 “제자로서 스승의 회고전을 준비하는 것은 응당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
  • “개정판 만드느라 새벽까지 잠 못자요”/‘한국민법학 태두’ 곽윤직 前서울법대 교수

    ‘한국민법학의 태두’에서 ‘곽서(郭書)’까지. 후암(厚巖) 곽윤직(郭潤直·78) 전 서울법대 교수를 부르는 호칭은 다양하다.그러나 이유는 단 하나.바로 60년대 중반부터 잇따라 내놓은 ‘민법총칙’,‘물권법’,‘채권총론’,‘채권각론’ 등 민법강의 시리즈의 탁월함이다.사법시험 준비생들 사이에 ‘바이블’로 통하다 요즘에는 간단히 ‘곽서’로 불린다. ●저서 ‘민법시리즈' 사시준비생 바이블 서울 용산구 후암동 자택으로 찾아갔다.현관에서는 커다란 시베리안 허스키 3마리가 먼저 반긴다.뒤따라 나온 곽 전 교수는 “저렇게 클 줄 몰랐는데…”라며 웃는다.자녀들이 다 분가해 적적한 마음을 달래려고 5년 전쯤 종자도 잘 모르고 새끼를 받아왔다고 한다.집안의 첫 느낌은 낡았다는 것이다.겸연쩍게 말을 붙이자 별일 아니라는 듯 40년된 집이란다.체면도 생각해서 널찍한 아파트로 옮기라는 말도 수없이 들었다.“살다보니 무슨 책이 어디에 있는지 손에 익었어요.이사가면 흐트러지는 게 귀찮더라고요.” 그래도 명절 때 잊지 않고 찾아주는 제자들덕에 적적하지는 않다고 한다.자주 찾아오는 제자들 이름을 물어보니 서성 전 대법관,윤재식 대법관,손지열 대법관 등 기라성 같은 법조인 이름이 쏟아져 나온다. 주말에는 손자 7명이 찾아와 시끌벅적해진다.이제 중학생이 돼서 많이 점잖아졌다고 자랑하는 얼굴은 영락없이 이웃집 할아버지다. 2층 서재를 둘러봤다.독일·스위스 민법 전집을 비롯해 판례공보 등 각종 잡지들이 빼곡히 차 있다.깔끔하게 정리된 가운데서도 고서점 같은 묵은 책 냄새가 물씬 풍긴다.책장을 보니 외국서적은 개정판마다 구입한 책도 여러 권 된다.“꼭 필요한데 웬만한 대학도서관에도 없어요.개정판이 나오면 호기심은 생기는데….” ●이공계 원했지만 낙방후 법학공부 1층 응접실로 내려와 근황을 물었다.곽 전 교수는 요즘도 ‘곽서’를 개정하느라 바쁘다.개정판을 11월까지는 마무리하려고 강행군 중이다.전날 상속법 부분을 연구하느라 새벽 4시까지 책을 뒤적였다.현역시절처럼 새벽에 책을 보는 것이 가장 편안하단다.밤늦게 책을 보다 보니 오전 11시쯤 늦게 일어난다.식사는 오후 1시쯤,밤 10시쯤 두번이다.이런 습관 때문에 담배도 여전히 하루 1갑이다.“줄인다고 줄인 게 1갑이에요.나 같은 사람에게 담배는 밤의 벗이지.” 건강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사실 인터뷰 약속을 잡으면서 약간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전화상으로 발음이 부정확한 듯 했기 때문이다.“그때는 저녁시간이어서 의치를 빼고 있어서 그랬어요.”라며 환하게 웃는다.건강을 위해 별달리 관리하는 것도 없고 불편한 것도 없다고 한다.육류를 피하고 된장 같은 우리 음식이나 야채,생선을 즐긴다.암으로 오진받아 위절제 수술받은 것 빼고는 병원에 간 일도 별로 없다.한때 골프와 바둑을 즐겨 했다.그러나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골프는 소풍가는 기분으로 다녔고 바둑은 흥이 나는 대로 뒀다.승부에 집착하면 오락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 스스로도 재미없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다시 태어나면 법학자는 안 되겠단다.“물건을 만들거나 건물을 짓거나 직접적으로 이익을 줄 수 있는,그런 일을 해보고 싶어요.추상적인 이론과 논리는 골치가 아파서….” 이 때문인지 자녀 가운데 법과 인연을 맺은 사람이 없다.1남3녀를 뒀는데 모두 평범한 직장인이다. 곽 전 교수와 민법학의 인연은 몇차례 고비가 있었다.일제 때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해 이공계 공부를 하려 했다.결과는 색맹 때문에 낙방.어쩔 수 없이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형법 쪽에 관심이 많았다.그러나 공부하면서 민법의 중요성을 깨달아 관심을 돌렸다. 강단에 선 것도 군 제대 뒤 주변사람의 권유 때문이었다.군복무 직후 고등고시 시험이 있었는데 사법과가 두달,행정과는 석달 남았더란다.그래도 행정과가 여유있다는 생각에 시험을 봤는데 2등으로 덜컥 붙어버렸다.외교관을 권유받았지만 강의나 하겠다며 학교로 되돌아 왔다.“그때 여유가 있어 사법과를 보거나 권유를 받아들였다면 지금과는 다르겠죠.” 강의는 ‘악명’높았다.학생들은 넘쳤지만 앞자리는 항상 텅 비었다.안 들을 수는 없고 듣자니 눈초리가 매서웠기 때문이다.학점도 박했다.“일부러 아주 못되게 굴었지요.어려운 질문만 골라서 하고 학생이 질문하면 질문수준이그것 밖에 안 되느냐고 야단치고….미워했던 학생들 많았을 겁니다.” ●“학점 짜게줘 미워하는 학생들 많았죠” 곽 전 교수가 스승으로 모시는 사람은 고 김증한 교수가 유일하다.김 교수 밑에서 배운 독일어와 독일법은 두고두고 밑천이었다.혹독했던 김 교수의 강의 밑에서 살아남은 학생은 그와 그의 친구 단 2명뿐이었다.그가 ‘곽서’에 매달리게 된 것도 같은 이유다.공부할 때는 일제가 30년대 들여놓은 법전을 봤고,강의할 때는 일본학자들 책 번역서 몇 가지가 전부인 현실이 못마땅했다.우리 손으로 책을 만들어 보자는 오기가 일었다.또 우리 실정에 맞는 판례연구를 해보자는 생각에 1977년 우리나라 최초 법학학회인 ‘민사판례연구회’를 조직했다.이 모임은 지금도 연구성과를 모아 1년에 책 한권씩 내고 있다. 문제는 교수양성체계의 부실함으로 모아졌다.“일본만 해도 대학 졸업 뒤 3년간 조수로 공부하고 나면 15년간 조교수 생활을 거칩니다.이 과정을 끝내야 교수가 되어서 강의를 맡고 학생을 지도합니다.적어도 18년간의 수련과정이 있다는 거지요.” 예전에는 책을 쓰면 내용을 하나라도 더 집어넣으려 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스위스식 교재가 우리에게 적합해요.학생들을 위한 개괄적인 책과 실무자·전문가를 위한 세부적인 책,이 두 종류면 됩니다.”그래도 하나라도 더 가르치고 싶은 욕심은 여전한가보다.“요즘 사람들 두껍거나 한자가 많이 들어간 책을 너무 싫어해요.” ●“대법관 인원 더 늘려야 합니다” 논란이 됐던 대법관 제청파문과 사법개혁에 대해 물었다.전혀 다른 개혁을 얘기했다.“대법관 수를 더 늘려야 합니다.독일만 해도 대법관격인 최고재판소 판사가 150명입니다.각기 전문분야별로 재판부를 구성해 사건심리를 하고 있습니다.” “합의부 배석판사 제도를 폐지하고 판사로서의 수련을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법관의 전문성을 키워줘야 한다는 뜻이다.대법원 구성에 사회적 다양성을 반영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국 법관이래야 2000명 안팎입니다.10년차 이상이라면 이미 개개인에 대한 평가가 있다고봐야 합니다.오히려 지금 같은 시스템이 철저한 능력에 의한 인사입니다.” 부인과 만나려 했으나 끝내 보이지 않았다.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자 곽 전 교수는 “늙은이 얘기 너무 쓰지 말라.”며 다시 2층 서재로 발길을 돌렸다. 조태성기자 cho1904@
  • 관광공사 추천 가을 여행지 2곳/억새 바람에 몸을 뉘다

    태풍과 잦은 비로 얼룩진 9월이 가고 이제 10월이다.10월엔 가벼운 산행과 문화유산 답사를 하며 가슴 속에 눅눅하게 들어찬 습기를 날려보면 어떨까. 한국관광공사가 이 달에 가볼 만한 곳으로 추천한 경남 창녕의 화왕산 일원,파평 윤씨 종택과 강경 젓갈시장이 있는 충남 논산시 일대를 소개한다. ●화왕산(경남 창녕군 창녕읍 말흘리) 757m 높이의 화왕산은 ‘10리 억새밭’으로 익히 알려진 곳.10월이면 온통 산을 덮는 은빛 물결을 보기 위해 연간 30만명 이상이 찾아든다. 지난 1971년부터 매년 이곳에선 화왕산 갈대제가 열려왔는데,올해는 태풍 피해 때문에 산신제만 10월4일 올린다.갈대제란 이름은 예전에 산 정상에 갈대가 제법 있었기 때문.지금은 온 산을 덮고 있는 억새에 묻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화왕산 중턱엔 자하곡삼림욕장이 자리잡고 있다.낙엽송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삼림욕을 즐기기에 좋다.곳곳에 쉼터를 마련해 놓아 화왕산 정상에 오르기 전 땀을 식히는 등산객이 많다.이곳에서 1시간 정도 산을 오르면 화왕산 정상에 닿는다.중부내륙고속도로(옛 구마고속도로) 창녕 IC에서 빠져 창녕 시내로 가다보면 창녕여중 가까운 곳에 자하곡삼림욕장 입구가 나온다.이곳에서 차로 10여분쯤 더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삼림욕장이 있다.창녕군청 문화공보과(055-530-2236∼9). ●예학의 고장 논산 군대를 다녀온 남자일 경우 충남 논산하면 땡볕 아래서 ‘박박 기던’ 훈련소 시절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마련.그러나 논산은 유교 문화의 흔적이 뚜렷한 유학의 도시다.논산시 일원의 고택과 향교,서원을 찾아 선현들의 지혜와 멋을 느껴보자. 먼저 조선 중기의 대표적 양반가였던 파평 윤씨 종학당과 종가를 찾아보자.종학당은 선조때 윤순거가 문중의 내외척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 지은 것.건물 자체보다는 누각인 정수루에 앉아 잘 가꿔진 정원과 담장 너머 파랗게 펼쳐진 병사 저수지를 바라보는 조망이 제법 운치가 있다. 윤증고택은 노성면 교촌리 노성면사무소 가까이 있다.조선시대 상류 양반가의 표본이 되는 고택으로,안채의 ㄷ자와 사랑채가 만나 ㅁ자 모양을 하고 있다.규모는 아담하나 의젓하면서도 정갈한 선비의 풍모를 느끼게 한다. 연산면 임리엔 돈암서원이 있다.사계 김장생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사우(祠宇)를 건립한 뒤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건물 양식으로,방,대청,툇마루,행랑을 갖추고 있다.또 유생을 가르치던 강당인 응도당이 있다.건물 하나하나 배치된 것이 깔끔하고 단아하다. 논산 여행의 덤은 젓갈로 유명한 강경에서 챙겨보자.강경시내 젓갈시장에선 새우젓부터 자리젓,전어밤젓,토하젓,오분자기젓 등을 입맛에 따라 골고루 맛볼 수 있다.17일부터 21일까지는 강경포구 및 젓갈시장 일원에서 강경젓갈축제도 열릴 예정이다. 윤증고택은 천안논산고속도로 탄천IC에서 우회전해 노성면 방면으로 가다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돈암서원은 서논산IC를 나와 4번 국도를 타고 연산면 방면으로 가다가 오른쪽으로 나온다.논산시청 문화관광과(041-730-1224∼7). 임창용기자 sdargon@
  • “칼날은 온유함을 못베지”/국내 유일의 검도9단 조승룡 씨

    눈빛은 칼날보다 날카로웠고,쩌렁쩌렁 울리는 기합소리는 체육관을 휘감은 초가을 저녁의 적막을 깼다. “보잘 것 없는 촌로를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50대 제자와 목검 대련을 마친 노검객이 악수를 청했다.믿기지 않는 손아귀 힘에 또 한번 기가 질렸다. 국내 유일의 검도 9단 조승룡(76)씨.검도계의 큰 스승에게서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맹호 같던 눈빛은 검을 놓자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변했고,깊은 명상에 빠질 때면 수도승처럼 바뀌었다.참나무 장작 같은 팔뚝과 카랑카랑한 음성은 청년과 진배없다. ●최고 검객들이 추대한‘진정한 1인자’ 일제의 서슬이 퍼렇던 11세 때 죽도를 처음 잡은 그는 60년이 넘도록 검도 외길을 걷고 있다.1950년 초단에 오른 이후 전국대회에서만 50여차례 ‘검도왕’에 등극했다. 그가 길러낸 검도 사범만 500여명에 이르고,지금도 서울시검도회 수석사범으로 활동한다.매주 두 차례 제자 김시만(52·5단) 사범이 운영하는 서울 성북구의 만청관을 찾아 손자뻘 되는 후학들에게 검술을 가르친다. 대한검도회의 최고의결기구로 36명의 8단 고수들로 구성된 ‘심의위원회’는 지난해 9월 그를 만장일치로 9단에 추대했다.2000년 초 김영달 9단의 사망으로 공석이었던 검도계의 ‘상석’이 2년이 지나서야 주인을 맞은 것. 9단 추대는 그의 검도에 대한 열정과 검도 발전에 이바지한 공 때문만은 아니었다.후배들은 쉬지 않고 연마해온 그의 실력을 가감없이 평가해 한국 최고의 검객이라는 명예를 수여했다. “젊은 후배들이 대련에서 봐주지 않느냐.”는 과문한 질문에 그는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은 검이 아니라 기”라고 짧게 답했다.스승과 매주 한 번씩 목검 대련을 벌인다는 김 사범은 “선생님의 손목치기는 아직 따라갈 사람이 없다.”면서 “연륜이 쌓일수록 빛나는 게 검술”이라고 말했다. ●검도의 정신은 겸손과 예의 그가 평생 검도를 하면서 배운 것은 무엇일까.그는 “검도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고 말했다.아무리 낮은 하수와 겨룰 때도 겸손하지 않으면 머리와 손목,허리가 남아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생 승단에 마음 써본 적이 없다는 그는 “9단이라는 칭호는 늙은이에게 붙은 꼬리표일 뿐”이라면서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후배들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을까 항상 두렵다.”고 말했다.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겸손과 예의는 죽도를 대하는 마음가짐에서 시작된다.“죽도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항상 자신을 비우고,시간의 흐름에 맺고 끊는 마디를 갖출 줄 알며,구부러지지 않는 죽도처럼 살면 성공한 인생 아니겠습니까.” 죽도를 넘어 다니거나 삐딱하게 짚고 서 있다가 눈물이 쏙 빠지도록 불호령을 맞은 후배들이 한둘이 아니다. ●당당하고 여유로운 노검객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 어떤 노인이 우여곡절이 없을까마는 그의 삶도 굴곡이 많았다.그의 왼쪽 팔에는 동족상잔의 흔적이 깊게 파여 있다.지난 49년 경찰에 투신한 그는 51년 겨울 어느날 지리산에서 빨치산과 교전중에 총상을 입었다.80년에는 신군부의 공무원 숙청 작업에 휘말려 경찰복을 벗기도 했다.공무원이라기보다는 검도인으로서의 명예를 위해 청렴하게 살고자 한 그에게 강제 퇴직은 받아들이기 힘든 멍에였다. 그는 아직도 서울 도봉구 창동의 허름한 집에서 부인과 단출하게 살고 있다.지난 1월에는 나이 50이 된 아들을 백혈병으로 잃는 아픔도 겪었다.단 하루도 죽도를 놓은 적이 없는 그였지만 이때 검도를 그만둘 생각을 했다.식음을 전폐했던 그는 “너무 오래 살아서 못볼 꼴을 본 것 같다.”고 말했다.그러나 그를 다시 일으킨 것은 결국 검도였다.신새벽 죽도를 휘두르며 자식을 먼저 보낸 아버지의 설움을 베어 냈다. 그는 기회있을 때마다 노인들에게 검도를 권한다.나이가 들수록 정신수련이 필요하며,정신수련과 체력단련에 검도보다 좋은 운동은 없다는 신념 때문이다.“검도는 호구를 착용하기 때문에 부상의 염려가 없고,몸이 직접 부딪치는 격투기가 아니어서 힘이 다소 떨어져도 무리없이 계속할 수 있다.”고 말했다.특히 상대방의 죽도에 맞다 보면 자신도 공격을 하게 되며,이러한 원리 때문에 매사에 적극적이 된다고 설명한다. 그는 검도만큼이나 낚시도 즐긴다.서로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찌가 움직일 때까지 한눈 팔지 않고 기다리는 것은 상대방의 죽도를 노려보는 인내와 비슷하다.정확하게 물고기를 낚아채는 묘미는 검도에서 득점을 올릴 때와 같다.검도와 낚시가 아내와 함께 평생의 반려자가 된 셈이다. “설치지 말고,이기려 하지 말자.돈 욕심 버리고 고마워하자.옛날 일은 잊고 오늘과 내일을 위해 살자.손자 손녀에게,이웃에게 좋은 할아버지로 살자.아프지 말고 아무쪼록 오래 살자.” 남은 인생을 이렇게 살고 싶다는 그는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대접받는 것은 사양한다.”며 실랑이 끝에 소주 값을 손수 계산했다. 글 이창구기자 window2@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
  • 책 / 네오콘 -팍스 아메리카의 전사들

    이장훈 지음 미래M&B 펴냄 네오콘(neocon,neoconservative,신보수주의자)은 미국 행정부 안팎의 ‘매파’를 일컫는 말이다.그들은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미국 제일주의’를 내세우며 도덕적 우월주의를 토대로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고 믿는다.폴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을 비롯해 리처드 펄 국방정책 자문위원,루이스 리비 부통령 비서실장,엘리엇 에이브럼스 대통령 특별보좌관,존 볼턴 국무부 군축·국제안보담당 차관,프랜시스 후쿠야마 존스홉킨스대학 국제문제고등연구원장,도널드 케이건 예일대 학장,찰스 크로서머 ‘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윌리엄 크리스톨 ‘위클리 스탠더드’ 발행인,어빙 크리스톨 ‘퍼블릭 인터레스트’ 편집인,노먼 포도레츠 전 ‘코멘터리’ 편집장 등이 핵심인물이다. 대부분이 유대인들인 네오콘은 뉴욕 등 동부지역 명문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군사·외교·학계·언론계 등 각 분야에서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는 일종의 ‘도당(徒黨)’이다.이들은 한때 트로츠키주의에 경도되거나 민주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1980년대 공화당으로 이적한 뒤 40대 레이건 대통령,41대 조지 H W 부시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공화당 집권기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42대 클린턴 민주당 행정부 시절 학계와 싱크탱크로 물러났지만,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집권과 9·11 테러사건을 계기로 다시 전면에 부상했다. ‘네오콘-팍스 아메리카나의 전사들’(이장훈 지음,미래M&B)은 미국의 권부를 장악한 ‘신보수주의 그룹’의 실체와 그들의 패권전략을 입체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네오콘의 사상적 뿌리는 유대인 독일 망명학자인 레오 스트라우스 시카고대 교수에서 찾을 수 있다.토머스 홉스를 신봉한 스트라우스는 평화는 인간을 타락시키기 때문에 영구평화보다는 ‘영구전쟁’이 더 바람직하다고 믿은 인물.그의 사상은 앨런 블룸 시카고대 교수에 의해 대중화됐으며,네오콘의 대부로 불리는 어빙 크로스톨은 그의 저서 ‘한 신보수주의자의 회상들’에서 처음으로 ‘네오콘’이란 이름을 붙였다.오늘날 네오콘은 레오 스트라우스를 자신의 사상적 스승으로 삼으며 스스로 ‘스트라우시언’이라 부른다. 네오콘의 핵심은 모두 유대인이다.네오콘의 원조 레오 스트라우스를 비롯해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선임연구원인 로버트 케이건,엘리엇 고언,크리스톨 부자 등이 유대인이다.미국의 이라크 전쟁의 본질이 ‘바빌론 유수의 복수’로 비난받는 것은 네오콘의 한가운데에 바로 유대인이 있기 때문이다.이라크는 유대인들이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일로 기억하는 ‘바빌론의 유수’가 있었던 곳.네오콘은 물론 이라크 전쟁을 유대인들의 전쟁이라는 시각에 동조하지 않는다.그러나 네오콘 군사전략가 엘리엇 코언이 ‘월스트리트 저널’을 통해 유포한 ‘제4차 세계대전론’을 살펴보면 네오콘은 분명히 ‘호전적인 이슬람세력’을 주적으로 못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제문제 전문가인 저자는 네오콘의 궁극적인 목표는 중국이라고 지적한다.네오콘은 특히 중동지역을 장악,석유수급을 통해 21세기 가장 버거운 잠재 적국인 중국을 견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미국은 이미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전쟁을 통해 2010년까지 중동에서전체 석유 수입량의 80%를 들여와야 하는 중국의 목줄을 죄기 시작했다.저자는 네오콘은 21세기를 ‘미국에 의한,미국을 위한,미국의’ 시대로 만들기 위해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한다.미국은 지금 ‘지구 제국’의 길을 걷고 있다.1만 2000원. 김종면기자 jmkim@
  • 책꽂이

    ●해협:한 재일 사학자의 반평생(이진희 지음,삼인 펴냄) 1972년 일본이 광개토왕릉비문을 변조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이 주장은 일본 야마토 정권이 4세기 후반 한반도에 진출해 백제와 신라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으로 한일 역사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이 책은 당시 비문 변조설을 제기한 재일 사학자인 저자의 자서전.조총련을 탈퇴하고 전향한 뒤 한국국적을 취득하게 된 경위,한·일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계간 ‘삼천리’ 창간에 얽힌 이야기 등이 실렸다.1만 5000원. ●엣센스 영어숙어사전(손봉돈 지음,민중서림 펴냄) 코리아타임스 편집위원인 저자가 14년에 걸쳐 집필한 영어숙어 대사전.1만2000여개의 이디엄을 풍부한 예문과 함께 풀이해 영작과 회화에 도움이 되도록 꾸몄다.저자는 스포츠서울에 ‘시험에 꼭 나오는 영어’를 연재,화제를 모았던 인기 필자이자 영어학자다.4만원. ●버리고,행복하라(비노바 바베 지음,사티시 쿠마르 엮음,김문호 옮김,산해 펴냄) 간디가 인도 독립의 날 인도 국기를 맨처음 게양할 사람이라고 말했으며,간디의 후계자로 받아들여졌던 사회개혁가 비노바 바베.영국에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국제적 생태공동체인 ‘슈마허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인도 출신의 국제 평화운동가 사티시 쿠마르가 그의 스승 비노바의 진리와 비폭력에 관한 지혜를 담은 말과 글을 발췌해 묶었다.9000원. ●한권으로 보는 서양 미술사 이야기(임두빈 지음,가람기획 펴냄) 구석기시대 미술의 기원으로부터 현대미술에 이르는 서양 미술의 역사를 개관.저자(한국미학미술사연구소 소장)는 스텐실 판화가 이미 구석기시대 동굴벽화에서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혀 눈길을 끈다.구석기시대 화가들은 가죽에 적당한 크기의 구멍을 뚫은 후 그 가죽을 동굴 벽면에 가까이 대고 입으로 씹은 물감을 구멍을 통해 뿜어내어 크고 작은 점들을 그렸다는 것.이런 방법이야말로 가장 오래된 스텐실 판화기법이라는 것이다.2만 5000원. ●세계의 통화전쟁(하마다 가즈유키 지음,곽해선 옮김,경영정신 펴냄) 세계는 환율인하경쟁의 갈림길에 서 있다.원인은 달러 하락이다.기축통화국인 미국은 1980년대의 ‘강한 달러’정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채무국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의도적 무시(Benign Neglect)’와 ‘강경한 개입(Hawk Engagement)’이라는 그들의 정책기조를 양날의 검으로 사용하면서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해 왔다.이 책은 달러 일극체제에 도전장을 내민 유로와 위안 그리고 엔의 통화파워를 점검하고 그들 통화정책의 실체를 밝힌다.9800원. ●미국 인터넷 산업의 지도(한광야·송규봉 지음,한울 펴냄) 미국은 지난 30년 동안 거대한 정보기술(IT)벤처의 인큐베이터였다.이 책에서는 미국의 IT산업을 이끌어가고 있는 뉴리더 도시들을 소개한다.항공·운송·데이터 산업으로 거듭난 시애틀,컨트리뮤직의 도시 내슈빌,영화산업의 중심지 할리우드,라틴음악의 교두보 마이애미,남미 정보통신 시장의 전진기지 샌안토니오 등을 살펴본다.1만 4000원.
  • “겉멋 부리려 하지말고 자기 마음을 그리세요”/동료에 그림 강습하는 韓銀 정영남 씨

    “그림에 속기(俗氣)가 들어가서는 안됩니다.겉멋 부리지 말고 자기 마음을 그림 속에 투명하게 담아내세요.그림이 천해지면 사람도 천해집니다.” 매주 목요일 저녁 서울 남대문 한국은행 별관에 묵향이 번지면 정영남(鄭永男·57)씨의 닳고닳은 잔소리가 시작된다.언제나 듣는 얘기지만 스승의 말은 제자들의 붓놀림에 힘을 더하는 효과가 있다. 정씨는 한은에서 문서관리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1973년에 은행에 들어왔으니 올해로 31년째다. 내년이면 정년이다.요즘은 대부분 문서가 전산으로 관리돼 업무가 많이 줄었지만 우리경제의 온갖 데이터가 축적돼 있는 한은에서 문서관리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국전 수상경력·개인전 20여 차례나 정씨는 86년부터 행내 직원들에게 사군자,문인화 등 동양화를 가르쳐왔다. 매주 목요일 오후 7시부터 2∼3시간씩이다.지금까지 길러낸 제자가 200여명에 이르고 이 중 몇명은 굵직한 미술대회에서 입상을 하기도 했다. 그 자신이 화단에서 탄탄한 입지를 확보한 유명 화가다.국전 수상경력이 10여차례에이르고 개인전도 10여차례 가졌다.주로 흙냄새 나는 고향산천을 화폭에 담았다.진경산수(眞景山水)의 대가인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을 좇아 우리 산천과 그 안에 흐르는 생명력을 살려내는 게 평생의 숙제였다. 1994∼2001년에는 홍길동전,춘향전,구운몽,혈의누,정읍사,왕오천축국전 등 우리문학 우표 시리즈의 도안을 맡기도 했다.한은 미술자문위원으로서 수많은 은행내 예술작품의 가치평가 및 복원,새 미술품 구입 등에도 조언을 하고 있다. 정씨의 고향은 전북 전주.서당에 다니던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붓을 잡았다. “천자문을 떼고 소학·대학을 배울 때쯤 훈장님이 아이들에게 붓글씨와 사군자를 가르쳐주셨습니다.남다른 자질이 있다며 저한테 특히 많은 관심을 보이셨지요.그게 제 인생을 결정했습니다.” 한참 뒤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훈장은 현대서예의 대가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1913∼1999) 선생이었다.강암 선생은 고전기법에 충실하면서 현대적 아름다움이 담긴 ‘강암서체’를 창안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학(동국대 미술과)을 마친뒤 서울 장충동에 작은 화실을 냈지만 전혀 돈벌이가 안 됐습니다.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예술하는 사람들이 입에 풀칠하기는 참 어려웠습니다.” ●퇴직후에도 월연회 강습 계속할것 생업이 필요했던 정씨는 한은을 선택했다.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밤에는 그림을 연마하는 생활이 계속됐고,차츰 수상경력도 쌓여갔다.그럴수록 동료들의 강습요청도 늘어갔다. “은행 일이나 제대로 하라는 주위의 눈총도 걱정되고 해서 많이 망설였습니다.하지만 계속되는 요청을 마냥 뿌리치기는 어려웠고,그 사람들이 갖고 있던 어릴 적 미술에 대한 꿈을 실현해 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은 월연회(月硯會)라고 이름붙여진 ‘묵화반’이 86년 탄생했고,예상을 뛰어넘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제자로 들어왔다. 정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관대한 스승은 아니다.복습을 하지 않는 제자들에게는 가차없는 꾸지람이 꽂힌다.사군자→산수화→문인화로 이어지는 과정에도 철저하다.사군자의 첫 과정인 난초에서 대나무로 넘어가는 데 꼬박1년이 걸린다. 매주 강습에 참석하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그런 것이어서 국화,매화까지 모두 마치려면 통상 4∼5년이 걸리게 된다. “동양화는 투명하고 담백합니다.1회성입니다.붓이 한번 지나간 자리에는 절대로 개칠이란 게 없습니다.매일 숫자와 씨름하는 은행 직원들에게 특히 동양화는 편안함과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어 좋습니다.” 내년 정년퇴직 뒤에도 월연회 강습은 계속된다.이미 제자들과 굳게 약속을 했다. 김태균기자 windsea@
  • 대전서 또 7억 현금車 털려

    대전에서 26일 현금 7억여원이 든 현금수송 차량이 또 털렸다.대전·충남에선 지난 2001년 5월 이후 2년6개월 사이 모두 현금수송 차량이 6번 털려 25억여원을 강탈당했다.이 가운데 한 차례 범인을 검거,7억 1000여만원만 회수했다. ●범행 이날 오전 8시22분쯤 대전 중구 태평동 버드내아파트 1단지내 116동 앞 하나은행 현금자동지급기 부스 인근에서 7억 500만원을 싣고 서 있던 ㈜한국금융안전(KFS) 소속 현금수송 차량 서울85머 3090호 감청색 그레이스승합차가 도난당했다. 이 승합차를 몰고 왔던 KFS 소속 직원 윤모(29),주모(28),김모(26)씨 등 3명은 “부스 건너편 길가에 차를 세운 뒤 현금자동지급기 2대에 2000만원씩 채워넣고 밖을 내다보니 차가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부스에서 5m쯤 떨어진 아파트 경비실 경비원도 차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직원들은 이날 오전 8시쯤 가방 9개에 현금 8억 7500만원을 나눠 싣고 인근 유천동 KFS 대전영업소를 출발,버드내아파트 옆 동양아파트 현금지급기에 4000만원을 채워넣은 뒤 이곳으로 이동해왔다. ●도주 범인들은 닫힌 차문을 복제 열쇠로 따고 현금수송 차량을 탈취한 뒤 아파트 후문과 유등천변 도로를 거쳐 범행장소에서 800m쯤 떨어진 골목길의 대웅장 여관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승합차 안 금고에서 현금을 빼내 달아났다. 현금은 직원들이 돈을 채워넣기 위해 가져간 1억 7000만원이 든 가방 외에 승합차내 금고안에 8개의 가방에 담겨 있었다. 도난 수송차량은 사건발생 1시간 만인 오전 9시26분쯤 경찰에 발견됐다.당시 차량내 금고는 열쇠가 채워져 있지 않았고,돈이 들어 있던 가방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문제점 지난 1월22일 대전 중구 은행동 밀라노21에서 현금 4억 7000만원이 실려 있던 현금수송 차량이 털린 뒤 수송 직원을 2명에서 3명으로 보강,1명은 차량을 지키도록 했으나 이후에도 경비형태는 달라지지 않았다. 현금수송 차량의 도난 경보장치 리모컨이 고장나 범행 당시 경보음이 울리지 않았다.범행시 차량내 금고 열쇠도 채워져 있지 않았다. 현금수송이 끝난 뒤 차량을 대전영업소 주변에 마구 주차해 이번처럼 차량 열쇠를 복제,범행에 이용하기 쉬운 점도 문제다.KFS는 현금수송 차량이 강탈돼도 영국계 보험회사로부터 전액을 보상받을 수 있는 것도 범행이 자주 발생하는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경찰수사 경찰은 이번 범행장소에서 4∼5㎞쯤 떨어진 밀라노21에서 있었던 범행 수법과 동일한 점으로 미뤄 동일범에 의한 소행이나 이를 모방한 범죄로 보고 있다.또 내부자와 공모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를 벌이는 한편 사건현장 등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한 사람들의 명단도 파악, 행적을 추적하고 있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
  • [사설] 판사 꾸지람 들은 교장 선생님들

    교장 선생님들이 법정에서 판사에게 호된 꾸지람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근무 시간에 학교를 비우고 수뢰 혐의로 구속된 충남도 교육감의 재판에 ‘응원 방청’을 갔던 게 문제였다.공판을 심리하던 부장 판사가 방청석을 향해 “업무 시간인데도 많은 학교장들과 교육청 간부들이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으로 안다.”며 “공교육이 이래서야 되겠느냐.”고 질타했다는 것이다.학교를 지켜야 할 교장 선생님들이 얼마나 법정으로 몰렸기에 재판장이 ‘스승’을 훈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말인가. 세상의 사표라는 교장 선생님들이 근무 시간에 교장실을 떠나 법정으로 향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진다.선생님으로서 양심은 고사하고 최소한 직업 윤리마저 내팽개쳤다는 비판에 무어라고 항변할 수 있단 말인가.문제의 재판은 보통 재판이 아니다.깨끗해야 할 교육 현장에서 뇌물이 오간 혐의를 심판하는 법정이다.교장 선생님들은 교육감 선거에서 인사권을 흥정한 각서 파문은 그렇다 치더라도 문제가 된 비리 정도는 개의치 않을 만큼 의식적 공범이 되었단 말인가. 공교육이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일반 사회는 물론 학생도 학교를 믿으려 들지 않는다.가장 교육적이어야 할 교육 현장에서 반교육적 행태들이 꼬리를 물고 있기 때문이다.교육부는 즉각 이번 응원 방청의 진상을 조사해 자초지종을 밝혀야 한다.교사적 양심을 추스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행여 교육의 이름 아래 개인의 입신을 도모하는 ‘정치 교장’이 있다면 교단에서 추방해야 한다.혼탁한 윗물을 놔두고 교육 현장을 맑게 할 수는 없다.교육계 일부의 도덕 상실은 서둘러 치유되어야 한다.
  • 스승 등친 제자/ 퇴직금 4억원 투자유인 가로채

    서울 성북경찰서는 18일 의류사업에 투자해 큰 이익을 되돌려 주겠다고 고교 재학시절 스승 서모(64)씨를 속여 퇴직금 등 4억 4500만원을 가로챈 주부 곽모(53)씨를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곽씨는 “백화점에 납품하는 의류사업을 하는데 이자까지 쳐서 투자금을 되돌려 주겠다.”고 꾄 뒤 99년 10월부터 45차례에 걸쳐 돈을 받고 돌려주지 않은 혐의를 받고 있다. 구혜영기자 koohy@
  • 이런 책 어때요 /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존 버거 지음 / 박홍규 옮김 아트북스 펴냄 피카소는 이미 10대에 스페인의 미술학교에서 더 배울 것이 없었던 신동이었다.미술교사였던 아버지는 다빈치의 스승이 제자의 솜씨를 보고 그림을 포기해버렸듯이,아들의 재능에 놀라 자신의 화구를 물려주고 절필했다.피카소의 재산은 천문학적인 액수에 달하고,노년에도 젊은 여인과 해로했으며,1945년에는 공산당에 입당했다.영국의 대표적인 좌파 비평가인 저자는 유럽의 변방인 스페인에서 온 ‘침입자’이자 원시적 이상향에 기대어 근대의 야만을 비판한 ‘고상한 야만인’,진지한 사회주의자였던 피카소의 진면목을 비평가적 안목으로 파헤친다.1만 3500원.
  • 책 / 여유와 금도의 춤

    이세기 지음 푸른사상 펴냄 “불가에 유전우전(有田憂田) 유택우택(有宅憂宅)’이란 말이 있다.밭이 있으면 밭 때문에 걱정이 많고 집이 있으면 집 때문에 걱정이 생긴다는 뜻이다.이 밭을 어떻게 가꾸고 이 집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그러나 나는 재산도 없지만 단 한번도 재산 때문에 고민한 적이 없다.무용으로 얻은 재산은 무용을 위해 쓰겠다.” 한국 전통춤 1세대인 명가(明嘉) 강선영(78·본명 강춘자).자신의 말에 한 치의 오차없이 그는 무용으로 일가를 이뤘기에 무용에 모든 것을 바쳤다.지난 98년 평생 모은 사재를 털어 고향인 경기도 안성 사곡동 비봉산 자락에 마련한 ‘태평무 전수관’은 그의 오랜 소망의 결실.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보유자로 지정된 지 꼭 10년 만에 이룩한 개가다.그러나 그가 살아온 거대한 춤인생에 비하면 이 전수관은 오히려 초라한 느낌마저 준다. 대한매일 논설위원을 지낸 소설가 이세기(63·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씨가 쓴 ‘여유와 금도의 춤’(푸른사상 펴냄)은 한국 무용계의 거목 강선영의 삶과 예술을 조명한 평전이다.30년 넘게 개인적 인연을 간직해온 저자는 인간 강선영의 드러난 삶과 예술,나아가 보이지 않는 정신적 궤적까지 깊이 있게 다룬다. ●열두살 때부터 전통춤과 인연 당대 한국 무용사의 한 획을 긋는 인물인 만큼 강선영의 춤인생은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긴다.강선영은 공식적인 학교교육보다는 좋은 스승을 만나 피나는 노력 끝에 명무의 반열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그를 춤의 세계로 이끈 이는 ‘근대춤의 아버지’로 불리는 한말의 명고수 한성준.한성준은 그로 말미암아 일고수 일명창(一鼓手 一名唱)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타고난 예인이다.강선영은 열두 살때 한성준의 문하에 들어 춤과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었다.강선영이 스승으로부터 섭렵한 춤은 마흔 가지가 넘는다.검무,남무,농부춤,농악무,동자무,바라춤,배따라기춤,뱃사공춤,북춤,사공무,살풀이춤,승무,승전무,신선무,왕의춤,영남덧뵈기춤,장고춤,장군무,진사춤,창부춤,초립동 태평무,학춤,한량춤,훈령무,각도 무당춤….그가 추어 보이는 춤이라면 어느 것하나 버릴 게 없지만 그 중에서도 압권은 단연 태평무다.저자는 “강선영의 태평무는 한국적 정태미(靜態美)의 섬세함과 박진감 넘치는 춤사위,화려한 궁중의상,외씨버선의 발디딤새로 장(壯)과 한(閑)과 원화(怨和)를 춤속에 용해시킨다.”고 평한다. ●100여개국 돌며 1000여회 공연 1940년 서울 부민관 무대에 선 이래 일본과 북만주 일대까지 진출해 춤을 춘 강선영은 지금까지 세계 100여개 나라를 돌며 1000회가 넘는 공연을 가졌다.그동안 배출한 태평무 이수자는 800여명.현재 200여명의 전수생들이 춤을 배우고 있다.젊은 시절 전율처럼 전신에 퍼지는 열정으로 자신의 춤을 가꿔왔고,이제는 연륜의 무게로 영혼의 춤을 추는 ‘무용의 사제’.“인생을 달력으로 살 필요는 없다.”고 강조하는 강선영은 “새싹의 춤이 있는가 하면 조락한 나목도 바람에 흔들리면 춤이 된다.”고 말한다.능수버들처럼 흥청망청 춤을 춘다한들 누가 그것을 ‘노추(老醜)의 몸짓’이라 하겠는가.저자는 “무용가 강선영은 낮에는 명주 짜고 밤에는 베를 짜듯 끝없이 탁마하며살아온 전형적인 예술가의 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이 평전을 통해 독자들은 한 무용인의 삶의 이면에 감추어진 고뇌와 예술에의 의지를 고스란히 접하게 된다.그것은 문장 하나하나에 아우라가 담긴 저자 특유의 글힘 덕이기도 하다.2만 3000원. 김종면기자 jmkim@
  • ‘화단의 나폴레옹’ 다비드 그는 기회주의자인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유화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은 루브르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다음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세로 6.3m, 가로 9.8m의 이 대작은 나폴레옹 황제 당시 궁정 수석화가였던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것으로,나폴레옹이 그 앞에 양손을 모은 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황후 조세핀에게 관을 씌워주기 위해 두 손으로 관을 높이 쳐드는 장면을 담고 있다.19세기 초 신고전주의의 개척자 다비드.그는 ‘화단의 나폴레옹’으로 프랑스 화단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나폴레옹이 실각한 뒤에는 브뤼셀로 망명하는 등 나폴레옹과 같은 인생 곡선을 그린 인물이다. ‘다비드의 야심과 나폴레옹의 꿈’(김광우 지음,미술문화 펴냄)은 나폴레옹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다비드의 일생과 그의 작품들을 소개한다.미술비평가인 저자는 다비드의 어둡고 외로웠던 어린시절,로마 유학,스승인 조제프 마리 비엥과 개빈 해밀턴을 만나 신고전주의자로 자리잡기까지의 과정,나폴레옹과 만남,‘황제의 제1화가’로서의절정기,나폴레옹 몰락에 따른 벨기에 망명과 사망 등을 연대순으로 다룬다. 다비드를 이야기하려면 신고전주의를 빼놓을 수 없다.1750년에 시작돼 1830년까지 유럽에 널리 유행한 신고전주의는 고대의 미술,특히 고대 그리스 미술을 규범으로 삼아 단순한 형태와 색을 추구한 것이 특징이다.꾸밈이 없고 기하학적인 이 시기의 작품들은 르네상스의 마지막 거추장스러운 양식인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을 의도적으로 피했다.저자는 신고전주의에 대한 설명과 함께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경제적 혼란상을 적나라하게 그린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요청으로 그의 초상을 여러 점 그렸다.그러나 그 작품들은 순수한 미학적 동기에서 그렸다기보다는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었다.그런 만큼 적잖은 사실들이 왜곡됐다.다비드의 뛰어난 기교와 단순하고 명료한 양식은 서양미술사에 있어서 신고전주의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내용면에서는 다분히 정치선전적이었다는 비난도 면치 못한다.다비드는 천재화가인가 기회주의자인가.해답도 없고 유효기간도 없는 의문이다.2만 8000원. 김종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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