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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79)-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79)-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는 묵묵히 최수성의 말을 듣고 있었다.20여년 전 함께 한훤당으로부터 들었던 옛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한훤당의 가르침은 일관된 것이었다.즉 공자가 문학에 재능 있는 자하(子夏)에게 말하였던 것처럼 ‘너는 군자로서의 유자가 되어야지,소인으로서의 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는 가르침은 즉,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향상시켜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으로 이는 스승 한훤당의 핵심철학이었던 것이다. 최수성은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도 스승의 말을 잊지 못하네.내가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힌 것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내 자신을 향상시키기 위함이었네.그러나 정암 자네는 국가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벼슬길에 올랐네.나는 어느 쪽이 옳은가는 말할 수 없네.일찍이 채근담은 ‘권세에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은 깨끗하다.’고 말하였지만,또 이렇게도 말하였네.‘권세에 가까이 할지라도 물들지 않는 사람은 더욱 깨끗하다.’ 그뿐인가. 이렇게도 말하였네.‘권모와 술수를 모르는 사람을 높다 하나 알아도 이를 쓰지 않는 사람을 더 높다 할 것이다.’” 최수성은 말을 끊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술잔을 들고 말하였다. “어찌하여 내겐 술을 따르지 않는 건가.이보게,노천.술 한잔 가득 따르시오.” 김식이 최수성의 술잔에 술을 한가득 따라주었다.넘치도록 따른 술을 최수성은 단숨에 들이켜고 말하였다. “그런데 정암,자네는 이미 권세에 물들었네.자네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권모술수에 도통하여 있네.그러므로 진실로 볼기를 때릴 사람은 마보꾼이 아니라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그대들일세.숙청되어야 할 사람들은 정국공신들이 아니라 그대들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권세욕일세.한 잔 더 주시게나.” 최수성은 다시 빈 술잔을 김식에게 내어주었다.김식이 마지못해 다시 따라주자 이를 단숨에 비우고 말을 이었다. “헤어지기 전에 술을 마시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군.이보게,정암.자네가 마지막으로 술잔을 채워주게.” 최수성은 빈 술잔을 조광조에게 내밀었다.조광조가 술을 따라주자 최수성은 물끄러미 조광조의 얼굴을 바라보며 불쑥 수수께끼의 말을 던졌다. “나는 가라앉고 있는 배를 탔어.이제 곧 얼마 안 있어 물에 가라앉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해서 가슴이 두근두근했는데,술 석잔을 거푸 마시니 이제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구나.” 순식간에 석잔을 비운 최수성은 그 길로 방을 나가버렸다.김식을 비롯한 세 사람이 어이없는 얼굴로 조광조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가라앉은 배에 탔다니요.” 기록에 의하면 이 질문에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가 가라앉는 배라고 말한 것은 바로 우리들을 비유해서 가리킨 말이 아니겠소이까.” 결과적이지만 최수성의 비유는 그대로 적중된다.정국공신을 개정하여 승리감에 도취되어 자축연을 벌였던 네 사람은 그로부터 정확히 6일후에 붕당죄의 반역죄인으로 숙청되는데,그렇다면 이들을 가라앉는 배에 비유했던 최수성의 참위는 그대로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예나 지금이나 최수성의 충고는 정치가들은 반드시 명심해야 될 진리인 것이다.권력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한 순간부터 권력의 비극은 시작되는 것이며,미라잡이가 미라가 되듯 수구세력들을 몰아낸 개혁세력은 오래지 않아 스스로 수구세력으로 전락함으로써 가라앉게 된다.최수성의 지적처럼 정치에 있어 최고의 선은 곧 자기 자신의 개혁이며,그 어떤 권력에도 물들지 않을 수 있는 도덕의 완성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가라앉는 배. 이 지상에서의 권력은 그 어떤 권력이라고 할지라도 진수(進水)를 시작할 때부터 이미 물이 새어 가라앉는 난파선에 불과한 것이다.
  • 儒林(79)-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는 묵묵히 최수성의 말을 듣고 있었다.20여년 전 함께 한훤당으로부터 들었던 옛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한훤당의 가르침은 일관된 것이었다.즉 공자가 문학에 재능 있는 자하(子夏)에게 말하였던 것처럼 ‘너는 군자로서의 유자가 되어야지,소인으로서의 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는 가르침은 즉,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향상시켜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으로 이는 스승 한훤당의 핵심철학이었던 것이다. 최수성은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도 스승의 말을 잊지 못하네.내가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힌 것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내 자신을 향상시키기 위함이었네.그러나 정암 자네는 국가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벼슬길에 올랐네.나는 어느 쪽이 옳은가는 말할 수 없네.일찍이 채근담은 ‘권세에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은 깨끗하다.’고 말하였지만,또 이렇게도 말하였네.‘권세에 가까이 할지라도 물들지 않는 사람은 더욱 깨끗하다.’ 그뿐인가. 이렇게도 말하였네.‘권모와 술수를 모르는 사람을 높다 하나 알아도 이를 쓰지 않는 사람을 더 높다 할 것이다.’” 최수성은 말을 끊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술잔을 들고 말하였다. “어찌하여 내겐 술을 따르지 않는 건가.이보게,노천.술 한잔 가득 따르시오.” 김식이 최수성의 술잔에 술을 한가득 따라주었다.넘치도록 따른 술을 최수성은 단숨에 들이켜고 말하였다. “그런데 정암,자네는 이미 권세에 물들었네.자네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권모술수에 도통하여 있네.그러므로 진실로 볼기를 때릴 사람은 마보꾼이 아니라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그대들일세.숙청되어야 할 사람들은 정국공신들이 아니라 그대들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권세욕일세.한 잔 더 주시게나.” 최수성은 다시 빈 술잔을 김식에게 내어주었다.김식이 마지못해 다시 따라주자 이를 단숨에 비우고 말을 이었다. “헤어지기 전에 술을 마시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군.이보게,정암.자네가 마지막으로 술잔을 채워주게.” 최수성은 빈 술잔을 조광조에게 내밀었다.조광조가 술을 따라주자 최수성은 물끄러미 조광조의 얼굴을 바라보며 불쑥 수수께끼의 말을 던졌다. “나는 가라앉고 있는 배를 탔어.이제 곧 얼마 안 있어 물에 가라앉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해서 가슴이 두근두근했는데,술 석잔을 거푸 마시니 이제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구나.” 순식간에 석잔을 비운 최수성은 그 길로 방을 나가버렸다.김식을 비롯한 세 사람이 어이없는 얼굴로 조광조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가라앉은 배에 탔다니요.” 기록에 의하면 이 질문에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가 가라앉는 배라고 말한 것은 바로 우리들을 비유해서 가리킨 말이 아니겠소이까.” 결과적이지만 최수성의 비유는 그대로 적중된다.정국공신을 개정하여 승리감에 도취되어 자축연을 벌였던 네 사람은 그로부터 정확히 6일후에 붕당죄의 반역죄인으로 숙청되는데,그렇다면 이들을 가라앉는 배에 비유했던 최수성의 참위는 그대로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예나 지금이나 최수성의 충고는 정치가들은 반드시 명심해야 될 진리인 것이다.권력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한 순간부터 권력의 비극은 시작되는 것이며,미라잡이가 미라가 되듯 수구세력들을 몰아낸 개혁세력은 오래지 않아 스스로 수구세력으로 전락함으로써 가라앉게 된다.최수성의 지적처럼 정치에 있어 최고의 선은 곧 자기 자신의 개혁이며,그 어떤 권력에도 물들지 않을 수 있는 도덕의 완성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가라앉는 배. 이 지상에서의 권력은 그 어떤 권력이라고 할지라도 진수(進水)를 시작할 때부터 이미 물이 새어 가라앉는 난파선에 불과한 것이다.˝
  • 혜초의 왕오천축국전/혜초 지음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신라인 혜초(慧超·704∼780)가 중국,인도,아랍,중앙아시아를 육로와 해로로 답사한 4년 동안의 기록이다. 아시아 최초의 서역답사기이자 세계문명교류사의 중추적 연구자료로 가치가 높은 이 국보급 유물은 그러나 우리나라에 없다.1908년 중국 둔황 석굴을 뒤지던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가 1200여년간 그곳에 묻혀 있던 원문을 발견해 본국으로 가져갔다.이후 원본은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왔다. 무하마드 깐수로 잘 알려진 동서문명교류 전문학자 정수일(전 단국대 교수)씨가 국내 최초의 ‘왕오천축국전’ 역주서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학고재 펴냄)을 펴냈다.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 지역의 풍습을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유일한 기록인 데다 기존의 번역서들과는 구별되는 역주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책은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직접 답사한 기록과 가보지 않고 전해들은 기록이 원본에 섞여 있지만,역주자는 치밀한 분석으로 혜초의 서역기행 노정을 사실에 가깝게 복원하려고 노력했다. 혜초가 서역의 어느 지점까지 여행했느냐는 의문은 학계의 오랜 논란거리.역주자는 원본분석을 통해 페르시아와 대식국(大食國·아랍)까지는 실제로 답사한 게 분명하다는 주장을 펼친다.그리고 혜초가 방문한 대식국의 도시는 카스피해 동쪽으로,호라산 총독부의 소재지인 니샤푸르(마슈하드)였다고 추정한다.혜초의 기행노정을 표시한 지도를 비롯해 혜초 복원도,둔황석굴 등 ‘왕오천축국전’과 관련된 도판들을 천연색으로 실었다.처음 발견 당시 두루마리에 필사된 227행짜리 원문도 포함됐다. ‘천축’이란 인도를 뜻하는 중국식 옛 이름.인도를 동서남북과 중간지역으로 나눠 이를 합쳐 부른 이름이 ‘오천축’이다.16세에 당나라로 건너가 불가에 귀의한 혜초는 723년 스승의 권유에 따라 인도로의 구법여행에 나섰다.4만 8000원. 황수정기자 sjh@˝
  • 베르베르-현각스님 파리대담

    ‘벽안의 구도자’ 현각(40) 스님과 소설 ‘개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왼쪽·43)가 만났다. 선수끼리는 서로를 금방 알아본다는 말이 꼭 맞았다.22일 저녁 프랑스 파리의 테아트르가 31번지에 있는 베르베르의 아파트에서 처음 만난 이들은 약 2시간여 동안 인생과 종교,그리고 과학과 물질문명에 대해 격의없이,그러나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며 어느새 ‘도반’이 됐다. |파리 함혜리특파원|베르베르는 “평소 느끼고는 있었지만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현재’의 개념과 그 중요성을 스님이 일깨워 주었다.”고 말했고 현각 스님은 그에게 “당신도 아마 전생에 승려였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영어·프랑스어 통역이 자리를 함께 했지만 보다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이들은 줄곧 영어로 대화했다. 이들의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다.베르베르의 아파트를 나와 근처의 한국식당으로 걸어 가는 동안에는 도(道)에 대한 이야기를,식당에 마주 앉아서는 음식과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로 화제가 옮겨지기도 했다. 오직 ‘현재’에 충실하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파리의 서쪽 하늘에 붉게 물들었던 노을은 점차 어둠에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뉴스 들을 때면 최후의 순간 맞는 느낌 베르베르 현실에 대해 낙관적으로 생각하려고 하지만 매일 뉴스를 들을 때마다 걱정스럽기만 합니다.마치 인류 최후의 순간을 맞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양심이 없는 과학은 이렇듯 인류에게 위험을 가져오고 있습니다.물질적인 것이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합니다.새로운 영적인 방법론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어요.‘스님’(베르베르는 ‘스님’이라는 발음을 한국어로 하려고 노력했다.)께서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현각 나는 호스피스 활동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그럴 때마다 나의 대답은 “희망은 없다.”는 것입니다.희망이란 존재하지 않는 미래가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모든 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귀로 듣고,코로 냄새를 맡고 있는 지금에서 출발합니다.현재에 충실하면 현재가 쌓여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미래에 대해서는 묻지 마세요. 베르베르 내 작업은 주로 미래에 대해 얘기합니다.글을 쓰기 위해 뇌를 움직이는 동안은 지금 이 순간이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가 무엇인지,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의식도,양심도 없는 물질문명의 미래에 대해 우려하고 있습니다. ●시작과 끝은 같은 것… ‘현재’에 충실해야 현각 예수님께 누군가 물었지요.“마지막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예수님께서는 “그럼 당신은 시작은 어땠는지 이해하고 있나요?”라고 되물으셨습니다.마찬가지입니다.시작과 끝은 같은 것입니다.과거,현재,미래는 결국 ‘현재’라는 시간의 다른 모습입니다.따라서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것입니다. 베르베르 현재는 그럼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까?. 현각 (대답 대신 손바닥으로 탁자를 세게 내려쳤다.) 베르베르 알기 쉽게 설명을 해 주세요. 현각 (다시 탁자를 손으로 탁 친 뒤)과거,현재,미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베르베르 그렇다면 수백년 전에 그려진 ‘모나리자’를 현재의 우리가 바라보며 감명을 받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현각 좋은 지적이에요.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을 보면서 우리는 과거의 현재를 보는 느낌을 받습니다.바로 그것입니다.다빈치는 모나리자를 그리면서 완벽하게 ‘현재’에 충실했기 때문에 우리가 감명을 받는 것입니다. 베르베르 스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을 이제 조금 알 듯합니다.새벽에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을 할 때 나는 주변의 모든 것을 잊고 글 속에 빠져 듭니다.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하지요.명상을 하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현각 그게 바로 명상입니다.당신은 컴퓨터로 일하는 승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나는 그냥 보통 승려이고요. 베르베르 스님은 전생에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현각 신부이거나,승려이거나 그런 영적인 일을 했을 것입니다.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요.나는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가톨릭 신자였고 지금은 머리깎고 승려가 됐지만 내 자신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베르베르 가톨릭 신자였던 당신이 불교를 접하고,문화와 관습이 다른 나라 한국에서 승려 생활을 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나요? 현각 어려움도 물론 있었지요.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나의 스승이신 숭산 스님으로부터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였습니다.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책도 많이 읽었지만 그런 질문을 누구도 하지 않았거든요.결국 그 ‘엄청난’ 질문은 나를 한국으로 이끌었고 내 종교생활의 화두가 되었습니다. 베르베르 바보 같은 질문을 한가지 하고 싶습니다.불교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회피하는 것이 아닌지요? 현각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이렇게 있습니다.불교에서는 세상에 있되 집착을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 나가는 것과 같이 살아야 한다는 얘기지요. 베르베르 무저항과 비폭력,명상으로 어떻게 세상의 악을 물리칠 수 있을지요. 현각 지금 우리 두 사람이 앉아서 차를 마시는 이것이 바로 평화입니다.창 밖의 새 소리를 듣고 순수한 마음으로 순수한 현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베르베르 티베트의 많은 승려들은 중국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결국 종교가 그들을 죽인 셈인데…. 현각 그들은 종교로 인해 목숨을 잃었지만 이 생에서 몸이 사라진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가장 중요한 가치는 물질(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참 나(眞我)’에 있는 것입니다. ●관조하는 자세가 바로 불교 베르베르 스님께선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현각 순간적으로 위험이 닥쳤을 때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정신적인 두려움은 없습니다.어떠한 두려움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비어 있거든요.아무것도 없어요.멀리서 보면 구름이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그냥 물방울인 것과 같습니다.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달라이 라마도 두려움이나 욕망을 느낀다고 했습니다.하지만 인식하지 않을 뿐이지요. 베르베르 감정을 다스리시나요? 현각 아니요.감정을 다스린다는 것은 그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얘기합니다.고통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나도 명상을 처음 할 때 가부좌를 하느라 다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그런데 그 고통도 ‘아프다.’는 사고(思考)에 의해 생긴 것이거든요.(펜을 집어들면서)이 펜을 이렇게 보면 길게 보이지만 돌려서 보면 둥근 점이잖아요.마찬가지입니다.다르게 보면 고통은 고통이 아닙니다.그러나 고통은 고통으로 남아 있습니다(Pain is not pain,but pain is pain).관조하는 자세,이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lotus@seoul.co.kr ■현각이 유럽으로 간 까닭은… 현각(玄覺) 스님은 한국관광공사 파리지사 초청으로 한국 불교를 알리기 위해 프랑스를 방문 중이다. 지난 19일 프랑스의 명문 상경계 그랑제콜인 에섹(ESSEC·고등경영대학원)에서 ‘선(禪)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강연한데 이어 21일에는 프랑스 공영방송인 2TV에서 ‘부처의 음성’이라는 프로그램을 녹화했다. 2TV측은 ‘한국 선 불교의 전통’과 ‘현각 스님의 인생 행로’를 주제로 15분짜리 방송프로그램 2회 분량을 제작해 부처님 오신 날을 전후로 프랑스 전역에 방영할 예정이다. 현각 스님은 베르베르와의 만남을 끝으로 프랑스 일정을 마치고 30일까지 영국에 머물면서 공영방송 BBC에 출연하고 옥스퍼드대학 등에서 강연한다. 현각 스님은 1964년 미국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 예일대학에서 철학과 문학을 전공했으며 하버드대학원에서 종교철학을 공부했다.하버드대학원 재학 중인 1990년 5월 숭산(崇山) 대선사의 설법에 크게 감명받고 2년 뒤 출가,선 불교의 전통이 가장 잘 이어지고 있는 한국으로 건너왔다.그는 현재 화계사의 국제선원 원장을 맡아 한국 불교를 세계에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 베르베르, 가을 ‘신들의 왕국’ 탈고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1961년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서 태어났다.7살에 첫 소설 ‘벼룩의 모험’을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한 그는 만화와 시나리오,소설과 과학에 탐닉하면서 고교시절인 1978년에는 고등학생을 위한 만화신문 ‘유포리(Euphorie)’를 창간하기도 했다.툴루즈대학에서 법학을,국립언론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한 그는 83년부터 90년까지 시사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과학담당 기자로도 활동했다. 12살 때부터 개미의 생태를 관찰했다는 그는 200여차례의 개작을 거친 끝에 1991년 소설 ‘개미’를 발표,전세계 독자들을 사로잡으며 단숨에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과학적 근거와 관찰을 바탕으로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경이롭고 환상적인 필치로 펼쳐나가는 그는 자유로운 입장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펼쳐나간다.‘개미’ 외에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1993년),‘타나토노트’(1994년),‘여행의 책’(1997년),‘천사들의 제국’(2000년),‘뇌’(2001년),‘나무’(2002년) 등을 발표했으며 올 가을 ‘신들의 왕국’ 탈고를 앞두고 있다. ˝
  • 儒林(78)-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78)-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최수성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높였다. “어째서 정암이 탄 수레 앞은 막아서서는 안 된단 말인가.옛말에 이르기를 ‘큰길에는 문이 없다(大道無門).’ 하였는데,하면 정암이 가는 길은 그 누구도 문을 세울 수 없는 큰길이란 말인가.이유야 여러 가지였겠지만 상감의 부르심이 화급하다 하여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정암이 가는 길은 누구도 막아서는 아니 된다는 오만 때문이 아니겠는가.” 최수성의 말은 준엄하였다.정국공신을 개정하고 그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조광조와 김식,김정,김구 등 핵심세력들끼리 모여 술잔을 나누던 연회장은 갑자기 싸늘해졌다. “내가 정암,자네에게 무소불위라 하였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네.이제 정암 그대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능히 다 할 수 있게 되었네 그려.그뿐인가.” 최수성의 힐문은 그것으로 그치지 아니하였다.“그대는 왕조가 건국한 이래 가장 뛰어난 영주이셨던 세종대왕 마마를 ‘재(才)’와 ‘기(氣)’는 영특하나 학문에는 부족하다 하는데 이 또한 사실인가?” 최수성은 조광조의 아픈 급소를 예리하게 찌르고 있었다.조광조는 국가의 종묘에 제사 드리는 방법에 대해서 논하면서 그 제사를 시작한 세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폐단된 일이 많으니 원묘에 제사 지낼 때 전(奠) 드리는 것과 능침에 초하루,보름에 제사를 드리는 것은 모두 정도가 아닙니다.이는 모두 세종조 때부터 비롯되었으니,이로 보면 세종께서 재와 기는 영특하고 과단스러우셨으나 학문에는 다하지 못한 데가 있었던 듯싶습니다.이는 선왕을 공경하는 도가 아니요,도리어 번거롭고 더럽힘이 되는 것입니다.그러나 이런 것은 아랫사람부터 의논하여 실행될 일이 아니니,모름지기 상감께서 주야로 생각하고 헤아리셔서 성상의 마음으로 결단하시면 신을 섬기는 도를 얻으실 것입니다.” 최수성의 날카로운 질문에 조광조는 묵묵부답할 뿐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이에 다시 최수성이 말을 이었다. “자네의 권세가 하늘을 찔러 능히 대적할 사람이 없더니,이제는 선왕이신 세종대왕 마마의 가마도 자네가 가는 길 앞을 가로막지는 못하겠군.하면 정암 자네는 세종을 감히 비판할 만큼 재와 기뿐 아니라 학문에도 능하다고 자신을 평가하고 있단 말인가.” 이에 김정이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듣자 하니 자네의 말이 심히 지나치고 무례하네.” 같은 문인으로서 각별한 애정을 보이고 있던 김정의 만류에도 최수성은 물러서지 아니하였다. “지나친 것은 내가 아니라 여기에 모인 자네들이네.” 최수성은 손을 들어 승리감에 도취해 있었던 네 사람을 한 사람씩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옛말에 이르기를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였네.지나침은 미치지 못함보다 못하다는 뜻이 아닌가.이보게,정암.정암 자네와 나는 20년 전 함께 평안도의 희천에서 한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하였지.그때 나는 자네가 스승에게 물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네.자네가 한훤당에게 ‘왜 유학을 배워야 합니까?’ 하고 묻자 스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네.‘위기지학(爲己之學) 때문이다.’ 이에 내가 다시 물었었네.‘자기를 향상시키기 위한 학문,즉 위기지학 때문에 저희들이 유자가 되어야 한다면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입니까.’ 이에 스승께서는 논어의 옹야(雍也) 편에 나오는 다음의 말을 통해 답변을 해주셨네.‘너는 군자로서의 유자가 되어야 하고 소인으로서의 유자가 되어서는 안 되느니라.’”
  • [이공연 놓치면 후회]13세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0번

    베토벤이 생전에 미완성으로 남겼던 피아노 협주곡 ‘0번’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연주된다.독일 출신 피아니스트 페터 폰 빈하르트는 25일 오후 7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26일 오후 7시30분 부산 문예회관에서 서울바로크합주단(지휘 볼프강 젤리거)과의 협연으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E플랫장조 WoO4,일명 피아노 협주곡 ‘0번’을 초연한다. 베토벤이 열세살 되던 해에 오르간,작곡 등 음악의 기초를 배웠던 스승 네페의 권유에 따라 작곡한 작품.생전에 출판되지 못하고 잊혀졌다가 20세기초 스위스의 음악학자 빌리 헤스에 의해 빛을 보게 됐다.총 3악장에 연주시간은 약 27분으로,원본은 독일 본에 있는 베토벤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실험적인 연주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빈하르트는 지난 2001년 슈투트가르트 체임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이 곡을 처음 연주해 주목을 받았다.그는 지난 15일 고 김일성 주석 생일을 맞아 북한 평양에서 열린 제22차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도 참가했다.(02)2068-8000. 이순녀기자 coral@˝
  • 儒林(78)-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최수성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높였다. “어째서 정암이 탄 수레 앞은 막아서서는 안 된단 말인가.옛말에 이르기를 ‘큰길에는 문이 없다(大道無門).’ 하였는데,하면 정암이 가는 길은 그 누구도 문을 세울 수 없는 큰길이란 말인가.이유야 여러 가지였겠지만 상감의 부르심이 화급하다 하여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정암이 가는 길은 누구도 막아서는 아니 된다는 오만 때문이 아니겠는가.” 최수성의 말은 준엄하였다.정국공신을 개정하고 그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조광조와 김식,김정,김구 등 핵심세력들끼리 모여 술잔을 나누던 연회장은 갑자기 싸늘해졌다. “내가 정암,자네에게 무소불위라 하였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네.이제 정암 그대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능히 다 할 수 있게 되었네 그려.그뿐인가.” 최수성의 힐문은 그것으로 그치지 아니하였다.“그대는 왕조가 건국한 이래 가장 뛰어난 영주이셨던 세종대왕 마마를 ‘재(才)’와 ‘기(氣)’는 영특하나 학문에는 부족하다 하는데 이 또한 사실인가?” 최수성은 조광조의 아픈 급소를 예리하게 찌르고 있었다.조광조는 국가의 종묘에 제사 드리는 방법에 대해서 논하면서 그 제사를 시작한 세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폐단된 일이 많으니 원묘에 제사 지낼 때 전(奠) 드리는 것과 능침에 초하루,보름에 제사를 드리는 것은 모두 정도가 아닙니다.이는 모두 세종조 때부터 비롯되었으니,이로 보면 세종께서 재와 기는 영특하고 과단스러우셨으나 학문에는 다하지 못한 데가 있었던 듯싶습니다.이는 선왕을 공경하는 도가 아니요,도리어 번거롭고 더럽힘이 되는 것입니다.그러나 이런 것은 아랫사람부터 의논하여 실행될 일이 아니니,모름지기 상감께서 주야로 생각하고 헤아리셔서 성상의 마음으로 결단하시면 신을 섬기는 도를 얻으실 것입니다.” 최수성의 날카로운 질문에 조광조는 묵묵부답할 뿐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이에 다시 최수성이 말을 이었다. “자네의 권세가 하늘을 찔러 능히 대적할 사람이 없더니,이제는 선왕이신 세종대왕 마마의 가마도 자네가 가는 길 앞을 가로막지는 못하겠군.하면 정암 자네는 세종을 감히 비판할 만큼 재와 기뿐 아니라 학문에도 능하다고 자신을 평가하고 있단 말인가.” 이에 김정이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듣자 하니 자네의 말이 심히 지나치고 무례하네.” 같은 문인으로서 각별한 애정을 보이고 있던 김정의 만류에도 최수성은 물러서지 아니하였다. “지나친 것은 내가 아니라 여기에 모인 자네들이네.” 최수성은 손을 들어 승리감에 도취해 있었던 네 사람을 한 사람씩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옛말에 이르기를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하였네.지나침은 미치지 못함보다 못하다는 뜻이 아닌가.이보게,정암.정암 자네와 나는 20년 전 함께 평안도의 희천에서 한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하였지.그때 나는 자네가 스승에게 물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네.자네가 한훤당에게 ‘왜 유학을 배워야 합니까?’ 하고 묻자 스승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네.‘위기지학(爲己之學) 때문이다.’ 이에 내가 다시 물었었네.‘자기를 향상시키기 위한 학문,즉 위기지학 때문에 저희들이 유자가 되어야 한다면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입니까.’ 이에 스승께서는 논어의 옹야(雍也) 편에 나오는 다음의 말을 통해 답변을 해주셨네.‘너는 군자로서의 유자가 되어야 하고 소인으로서의 유자가 되어서는 안 되느니라.’”˝
  • [김영두의 그린에세이] 홀인원과 잔치

    홀인원이나 베스트 스코어는 동반자가 증거해 주지 않는 한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골퍼가 홀인원을 한다거나,첫 번째 싱글 스코어를 기록한다거나,또 60대 스코어를 기록하는 것은 경사스러운 일이다.그런 경사를 맞은 골퍼는 같이 라운드를 한 동반자와 주위의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푼다.잔치는 기쁨을 함께 나누자는 뜻이기도 하지만,홀인원 등을 널리 자랑하려는 의도가 더 많이 포함돼 있다.일요일이면 예배는 빼먹고 혼자서 라운드를 하는 목사가 있었다.이를 괘씸하게 여긴 하느님께서 목사를 혼내주기로 결심하셨다.어느 일요일,목사는 파4홀에서 홀인원을 했다.자랑을 안 할 수 있겠는가.목사는 동네방네에 자신의 홀인원을 광고했다.그러나 증인이 없는 홀인원을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마 전에 남편이 상가에 조문을 갔다가 왔다.향냄새가 풍풍 풍기는 옷을 벗으면서 내게 선물이라면서 책 두 권과 A4용지 크기의 종이 한 장을 주었다.책은 골프 칼럼집이었다.나는 책을 후르르 훑어보고 난 뒤에 반으로 접은 종이를 펼쳤다.골프라운드 기록표의 복사본이었다. “어디 보자….아들아,엄마 돋보기 어디 갔냐.냅둬라,여기 있네.흠….1자도 몇 개 있고….똥글뱅이 파가 9개에….속에 -1이라는 숫자가 채워진 하트가 옴마 6개나 되네….근데 하트,11·12·13·14홀,네 홀이 연거푸 버디네,이런 걸 사이클 버디라고 한다냐 뭐란다냐….동반자들 줄초상이 났겠구만….옴마….69타네….여보,이사람 밥 먹기 위해 공 치는 사람이야,공 치기 위해 밥 먹는 사람이야?” 기록을 먼저 보고,휘둥그레진 눈으로 골퍼의 이름을 보니 전혀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우리 여자동기의 남편이야.나하고는 안면이 있어.당신 글은 열심히 읽고 있대.” “라운드한 날짜가 1999년 여름이야.아마 100장쯤 복사를 해서 5년 동안 명함대신 나눠주는 모양인데….케케묵은 기록표를 뿌리는 이유가 뭐래? 누구 염장지르고 싶대?” “얼마나 좋고 자랑하고 싶으면 그러겠어.당신이 선전 좀 해줘봐.” “어림 택도 없는 소리 말아요.맨 입으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전해요.” 천사 같은 심성을 가진 사람은 대가 없이 남의 자랑도 들어주고 축하도 해주고 광고도 해주는지는 모르지만,나는 경제적 수지타산이 안 맞는 짓은 안한다.고린전 한 잎이라도 얻어 쓴 뒤에,술 한 잔이라도 받아먹고 나서,자랑도 들어주고 남에게 알려주라고,골프스승에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두사부일체’라고,두목과 스승과 아버지는 같은 등급이라는데,골프스승에게 교육받은 대로 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소설가·골프칼럼니스트 youngdoo@youngdoo.com˝
  • 길상사서 대중법회 연 법정 스님

    “온천지에 꽃이 피고 새 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눈부신 신록 앞에서 인간도 꽃처럼 새롭게 태어날 수는 없을까요.대지가 그렇듯 인간의 미덕중 가장 으뜸은 용서와 관용입니다.” 18일 오전 11시,서울 성북구 성북2동 길상사 마당에 모처럼 야단법석(野壇法席)이 있었다.잠시 하산한 법정(法頂·72) 스님의 법회가 열렸다.스님은 700여명의 불자 앞에서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일은 ‘용서’와 ‘관용’이라고 강조했다. “얼마 전 한 신도한테 들은 얘기입니다.신도가 우연히 수행자들이 모인 곳에 갔더니 역겨운 냄새가 확 풍기더랍니다.그래서 신도는 수행자들에게 ‘여보시오,도 닦기 전에 몸부터 닦으시오.’라고 일침을 가했다는 것입니다.이 얘기를 듣고 많은 깨우침을 받았습니다.” 스님은 이어 제자가 스승을 찾아가 ‘평생을 두고 행할 수 있는 가르침을 한마디로 내려주십시오.’라고 하자 스승은 ‘그것은 바로 용서이니라.’라고 답한 일화를 소개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허물이 많습니다.그것을 낱낱이 꾸짖는다면 결코 고쳐지지 않습니다.지적받으면 그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됩니다.선의의 충고와 꾸짖음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상대방의 허물을 감싸면 한순간에 정화를 시켜줍니다.우리 사회는 용서의 미덕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스님은 또한 “이 봄날 꽃과 나무가 눈부시게 피어나는 것은 훈훈한 봄기운 덕택이며 가을날 꽃이 지고 만물이 시드는 것은 차디찬 서리바람 때문”이라면서 “남의 결점이 눈에 띌 때는 내 스스로는 허물이 없는지,자신을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고 자기성찰론을 펼쳤다. 다음은 스님이 전하는 중국 초나라 당시의 일화 한토막. 초나라의 장왕이 어느날 밤 촛불을 켜고 질탕 놀고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촛불이 꺼지자 암흑세계로 변했다.이때 한 신하가 평소 흠모하던 왕의 애첩에게 다가가 기습적으로 키스를 했다.깜짝 놀란 애첩은 신하의 갓끈을 얼른 잡아 떼어냈다.그런 다음 왕에게 “불이 켜지거든 갓끈 없는 신하를 부디 벌하십시오.”라고 고했다.왕은 이때 예상과 달리 “갓끈 있는 신하는 모두 벌을 내리겠다.”고 거꾸로 소리쳤다.순식간에 다른 신하들도 갓끈을 모두 떼어냈다.불이 다시 켜지자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 없었다.2년후 초나라가 진나라와의 싸움에 풍전등화의 위기가 닥쳤다.이때 왕의 애첩에 입을 맞추고 용서받은 신하가 분연히 일어나 목숨으로 나라를 구했다. “용서는 위기에 처한 국가도 살려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오늘날 대통령도 이런 그릇이어야 합니다.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온세상이 반대해도 대량살상무기를 핑계로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는 정의롭지 못한 업을 지었습니다.언젠가는 그 업의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법회 끝부분에 스님은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지나간 것도 들춰내지 말라.과거를 자꾸 물으면 아물려는 상처만 덧나게 한다.”면서 “이웃의 잘못을 덮어두면 신이든 부처든 늘 곁에 있게 마련이다.”고 거듭 강조했다.아울러 스님은 “맺힌 꼬투리를 풀지 않으면 안팎으로 꼬인다.자존심은 아무것도 아니다.무거운 짐은 내려놓고 살아야 한다.”고 당부했다.법회시간은 40여분.아쉬워하는 불자들에게 스님은 “남은 이야기는 나무한테 들으십시오.”하면서 다시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4·15 한국의 선택] 관심 지역구

    ■한나라 텃밭의 ‘빛나는 1석’ -부산 하사을 조경태 부산의 한나라당 바람 속에서 힘겹게 건져올린 1석.사하을에 출마한 열린우리당 조경태 후보의 당선은 그래서 더욱 값진 ‘1석’으로 평가된다. 당초 우리당 부산시당에서는 영도구 김정길 후보,부산진갑 조영동 후보,북·강서갑의 이철 후보 등 적어도 3석은 무난할 것으로 예상했었다.그러나 이번에도 지역구도를 깨는데 역부족이었다. 선거 초반만 하더라도 탄핵바람에 힘입어 7∼8석까지 노렸으나,보수성향이 강한 부산시민의 정서와 ‘박근혜 바람’,정동영 의장의 ‘노인폄하’ 발언 등이 겹치면서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져나간 게 패인으로 분석된다.조 당선자는 부산지역 우리당 후보 중 당선 가능성이 희박했었다.여·야 모두 현역인 박종웅 의원의 아성을 깨뜨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봤기 때문.그러나 박 의원이 한나라당 공천에 탈락한 뒤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조 당선자에게 유리한 국면이 전개됐다.노인폄하 발언 이후 부산지역 대다수 선거구에서 우리당 후보들이 한나라당 후보에게 추월당했지만 조 당선자만은 부동의 1위를 고수했다. ‘공안검사’대 ‘사형수’의 한판 승부로 관심을 모았던 부산 북·강서갑에서는 공안검사 출신인 한나라당 정형근 후보가 우리당 이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이곳은 선거 초반만 하더라도 탄핵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이 후보가 앞서 갔으나,우리당 정 의장의 노인폄하 발언과 박근혜 대표의 바람몰이가 시작되면서 팽팽한 승부처로 변했다. 이 후보는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낙후한 이 지역의 발전을 이끌려고 했는데….유권자들이 머리로는 지지하면서도 몸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다.”며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싱겁게 끝난 ‘노량해전’ -‘리틀盧’ 물리친 박희태 법무부장관과 한나라당 대표를 지낸 박희태 후보와 행정자치부장관을 역임한 열린우리당의 김두관 후보가 맞붙어 전국적으로 관심을 끌었던 ‘노량해전’ 은 한나라당의 승리로 끝났다.이로써 김 후보는 16년을 별러온 ‘리턴매치’에서도 분루를 삼켜야 했다. 노량해협을 사이에 둔 경남 남해·하동선거구는 5선에 도전하는 박 후보와 ‘리틀 노무현’으로 불리는 김 후보가 치열하게 맞붙은 선거구. 당초 예상과 같이 선거전은 피를 말릴 정도였지만 결과는 싱거웠다. 선거 초반 불어닥친 탄핵정국은 김 후보의 당선이 유력시됐다. 탄핵반대 열기가 한창일 때 무려 10% 포인트를 앞서면서 주민들 사이에는 “박희태도 이젠 끝났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그러나 이 지역에서 4선을 기록한 박 후보의 저력은 대단했다. 형편없는 지지율에도 ‘큰 인물론’으로 유권자들의 표심을 파고 들었다.4선을 지낼 동안 ‘돈 문제’로 구설수에 오른 적이 없는 깨끗한 인물을 국회의장으로 만들자는 설득이 주효했다.여기에 ‘박근혜 바람’이 탄핵역풍을 잠재우면서 처음 배 이상 벌어졌던 지지율 격차를 좁혔다.이들이 처음 대결을 벌인 것은 지난 88년 13대 총선.당시 부산고검장으로 민정당의 영입 케이스로 출마한 박 후보는 대학을 갓 졸업한 무명의 김 후보를 가볍게 눌렀다.그러나 김 후보는 지난 95년과 98년 실시된 두 차례 지방선거에서 박 후보가 내세운 한나라당 후보를 누르고 군수로 당선,간접적으로 설욕했다. 창원 이정규기자 jeong@ ■‘盧오른팔’ 우여곡절뒤 재기-태백·영월·평창·정선 이광재 한나라당과 박빙의 대결을 펼친 끝에 강원도 태백·영월·평창·정선 선거구에서 당선된 열린우리당 이광재(39)씨의 감회는 남다르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의원이던 시절부터 보좌관으로 인연을 맺어오다 청와대까지 함께 입성했던 이 당선자는 이후 당·정간의 갈등과 대통령 측근비리 수사 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청와대에서 물러난 뒤 얻은 승리여서 더욱 값지다.길지 않은 몇 달이었지만 온갖 루머와 소문을 뒤로하고 평창 등의 고향산천을 돌며 마음을 정리한 뒤 이번 총선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재기에 성공한 것. 선거전은 순탄치 않았다. 선거 초반 이 지역 최대 이슈인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를 놓고 한때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열린우리당 중앙당에서 동계올림픽 유치 공약을 강원도에서 빼고 전북지역에 넣은 것이 화근이었다.이후 우리당 중앙당 공약에서 동계올림픽 유치내용을 삭제하고 강원도당 공약에 포함시키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당선자는 보수성향이 강한 두메산골 고향사람들이 지지해준 이유를 잘 알고 있다.피폐해져 가는 폐광지역 고향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기댈 희망이라는 것도 잘 안다.그는 “다시 찾은 고향을 돌아보며 가슴 아린 경험도 많이 했다.”며 “제발 우리를 살려 달라고 호소하는 소리를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새로운 고향을 꿈꾸며 열심히 뛰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앞으로 4년간 노무현 대통령의 지킴이로서,강원도 전체를 위해 땀으로 온 몸을 적시며 일하겠다.”면서 “부모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고향을 위해 애정과 책임감으로 일하겠다.”고 말했다. 평창 조한종기자 bell21@ ■한솥밥 먹던 ‘거함’ 격침-서울 강동갑 김충환 피를 말리던 ‘강동대전’은 한나라당 김충환 후보의 극적 승리로 끝났다.정치적 스승이며 이번 총선 전까지 같은 당 소속으로 한솥밥을 먹었던 ‘거함’ 열린우리당 이부영 후보를 막판에 격침시킨 것이다. 김 당선자는 이 후보의 서울대 정치학과 12년 후배.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민회의를 창당할 때 민주당에 잔류했다가 한나라당에 이 후보와 함께 입당한 뒤 강동구청장을 3연임할 동안 줄곧 한 배를 탔다.하지만 이 의원이 지난해 7월 탈당하면서 틈이 생기기 시작했고 한나라당은 이 후보를 겨냥,김 당선자를 대항마로 띄우면서 정치적 결별을 하게 됐다.이후 이들은 서로 넘어야 할 산이었다. 탄핵정국 이전만 해도 ‘김충환 대 이부영’의 싸움은 강동에서 3선 구청장을 지낸 김 당선자의 일방적 승리가 점쳐졌다.강남권인 강동갑은 한나라당 강세지역이고 10년 동안 구청장직을 수행하면서 쌓아놓은 크고 작은 치적과 조직이 탄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지형을 완전히 뒤바꾼 탄핵정국이 달아오르면서 둘의 싸움은 완전히 역전되는 형국이었다.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김 당선자는 이 후보에게 크게는 30% 이상 뒤져 ‘싸움이 끝난 게 아니냐.’는 비관론이 나오기도 했다.이런 상황은 선거막판까지 이어져 정치적 스승이며 동지였던 이 후보의 낙승이 예견되기도 했다.서울시장을 노리는 김 당선자의 숨겨둔 야망이 희망사항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최용규기자 ykchoi@ ■ ‘女多의 섬’ 제주 첫 여성의원-민노 비례대표 현애자 ‘여다(女多)의 섬’ 제주에서 헌정사상 처음으로 첫 여성 국회의원이 탄생했다.민주노동당 비례대표 6번인 현애자(42·남제주군 여성농민회장) 후보다.선거기간중 민노당 지지세가 올라가고 특히 제주지역 여성계가 그를 지원하면서 그의 원내 진출 가능성은 조용히 점쳐졌었다.경계선에 머물지 않을까 조바심났던 것도 사실이다. “성원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의정활동으로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당선 인사후 그는 “농업과 농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만큼 농림해양수산위원회에 들어가 전문성과 정체성을 살려나가겠다.해고노동자 복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차별철폐를 위해 당소속 의원들과 힘을 합치겠다.”고 다부지게 말했다.남편 이태권(44)씨와 2남1녀. 제주시·북제주갑 선거구에 출마한 정치초년생인 열린우리당 강창일(52) 후보는 학교와 정치 대선배인 5선의 백전노장 한나라당 현경대(65) 후보를 누르자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두 사람은 오현고·서울대 선후배인데다 지난 81년 현 후보가 무소속으로 처음 국회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강 당선자가 1년 6개월동안 비서관으로 일했었다.당시 현 의원은 그의 3선개헌 반대,서울대제주학우회 발기,민청학련 사건으로 인한 구속 등 자질과 역경을 높이 샀다.이런 인연도 선거 앞에서는 철저히 무시돼 지난 방송토론 때는 “사람을 잘못 가르친 것 같다.” “비서관으로 있었던 것을 후회한다.”는 막말까지 오갔을 정도였다. 제주 김영주기자 chejukyj@ ˝
  • 儒林(72)-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가 스승 한훤당의 수하에서 학문을 배운 것은 1년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한훤당이 희천으로 유배된 지 2년만에 순천으로 이배되었기 때문이었다.스승과 헤어질 무렵 조광조는 한훤당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선생님,공자께오서는 왕도(王道)를 실행하고자 하여 동서남북으로 다니며 70명의 임금을 유세하였으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하오면 공자께서 실행하고자 하였던 왕도정치는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조광조의 질문은 회남자(淮南子) 태족훈(泰族訓)에 나오는 구절이었다.왕도정치를 펼치기 위해 70여개국을 주유하였으나 실패로 끝난 공자의 행각을 사기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왕도를 밝히려고 70여 나라의 임금을 유세하였다.” 나이 55세에 왕도정치를 실행하기 위해 노나라의 사구(司寇)라는 벼슬을 내던지고 국외로 여행길에 오른 공자는 그러나 68세에 노나라로 되돌아가기까지 13년 동안 70여 나라를 주유하였으나 실패를 하게 된다.그러므로 조광조의 질문은 공자가 펼치려던 왕도정치의 핵심은 무엇이며,그것이 왜 70여 나라로부터 배척당하였는가를 묻는 질문이었다.제자의 질문을 받은 한훤당은 심사숙고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것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다만 옛말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한훤당은 대답 대신 붓을 들어 종이 위에 다음과 같이 써 내렸다.한훤당이 쓴 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至治馨香 感于神明” 그 말의 뜻은 ‘잘 다스려진 인간세계의 향기는 하늘의 신명까지도 감명시킬 수 있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이는 주서(周書) 군진편(軍陣篇)에 나오는 유명한 말로 그것이 바로 스승 한훤당이 조광조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준 유훈이 되었다.조광조는 스승이 써준 그 문장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부친의 묘소 앞에 초당과 연못을 만들어 놓고 학문에 정진할 무렵에는 이 문장이 조광조의 화두가 되었다.마침내 유배지 순천에서 스승이 사사되었다는 부음을 들었을 무렵에는 한훤당의 유훈을 통해 독특한 조광조의 정치사상인 지치주의가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주공(周公) 단(旦)은 주나라 건국의 공신이요,특히 주나라 문물제도의 창제자였다.공자는 언제나 이 주공을 꿈꾸며,주공이 제정한 문물제도를 어지러운 자신의 춘추시대에 실현하려 했던 것이다.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주공에게 걸고 있었던 것이다.공자가 주공을 얼마나 존경하고 있었던가를 술이(述而)편에서 다음과 같이 한탄하고 있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심히 내가 노쇠하였구나.오랫동안 나는 주공을 다시 꿈속에서 보지 못하고 있으니(甚矣 吾衰也! 久矣 吾不復 夢見周公).” 조광조는 공자가 펼치려던 왕도정치가 바로 주공이 말하였던 ‘지치(至治)’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지극히 훌륭한 정치의 효과는 향기와 같아 하늘도 감명시킬 수 있다는 것으로,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무엇보다 다스리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완성되어 향기를 뿜어내어야 한다는 뜻인 것이다. 지치주의(至治主義). 조광조에 의해서 전개된 독특한 정치사상인 지치주의는 이렇게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조광조의 정치사상인 지치주의는 중종이 직접 출제한 알성문과시험에 차석으로 합격한 조광조의 답안 서두에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그러므로 하늘이 사람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임금과 백성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그러므로 예전에 이상적인 임금들은 백성들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그러므로 옛날에 성인들은 하늘과 땅의 근본과 수많은 백성들의 무리를 하나로 여겼기 때문에 그런 이치에 따라 도를 행하였습니다…”˝
  • 儒林(72)-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72)-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가 스승 한훤당의 수하에서 학문을 배운 것은 1년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한훤당이 희천으로 유배된 지 2년만에 순천으로 이배되었기 때문이었다.스승과 헤어질 무렵 조광조는 한훤당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선생님,공자께오서는 왕도(王道)를 실행하고자 하여 동서남북으로 다니며 70명의 임금을 유세하였으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하오면 공자께서 실행하고자 하였던 왕도정치는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조광조의 질문은 회남자(淮南子) 태족훈(泰族訓)에 나오는 구절이었다.왕도정치를 펼치기 위해 70여개국을 주유하였으나 실패로 끝난 공자의 행각을 사기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왕도를 밝히려고 70여 나라의 임금을 유세하였다.” 나이 55세에 왕도정치를 실행하기 위해 노나라의 사구(司寇)라는 벼슬을 내던지고 국외로 여행길에 오른 공자는 그러나 68세에 노나라로 되돌아가기까지 13년 동안 70여 나라를 주유하였으나 실패를 하게 된다.그러므로 조광조의 질문은 공자가 펼치려던 왕도정치의 핵심은 무엇이며,그것이 왜 70여 나라로부터 배척당하였는가를 묻는 질문이었다.제자의 질문을 받은 한훤당은 심사숙고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것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다만 옛말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한훤당은 대답 대신 붓을 들어 종이 위에 다음과 같이 써 내렸다.한훤당이 쓴 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至治馨香 感于神明” 그 말의 뜻은 ‘잘 다스려진 인간세계의 향기는 하늘의 신명까지도 감명시킬 수 있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이는 주서(周書) 군진편(軍陣篇)에 나오는 유명한 말로 그것이 바로 스승 한훤당이 조광조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준 유훈이 되었다.조광조는 스승이 써준 그 문장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부친의 묘소 앞에 초당과 연못을 만들어 놓고 학문에 정진할 무렵에는 이 문장이 조광조의 화두가 되었다.마침내 유배지 순천에서 스승이 사사되었다는 부음을 들었을 무렵에는 한훤당의 유훈을 통해 독특한 조광조의 정치사상인 지치주의가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주공(周公) 단(旦)은 주나라 건국의 공신이요,특히 주나라 문물제도의 창제자였다.공자는 언제나 이 주공을 꿈꾸며,주공이 제정한 문물제도를 어지러운 자신의 춘추시대에 실현하려 했던 것이다.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주공에게 걸고 있었던 것이다.공자가 주공을 얼마나 존경하고 있었던가를 술이(述而)편에서 다음과 같이 한탄하고 있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심히 내가 노쇠하였구나.오랫동안 나는 주공을 다시 꿈속에서 보지 못하고 있으니(甚矣 吾衰也! 久矣 吾不復 夢見周公).” 조광조는 공자가 펼치려던 왕도정치가 바로 주공이 말하였던 ‘지치(至治)’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지극히 훌륭한 정치의 효과는 향기와 같아 하늘도 감명시킬 수 있다는 것으로,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무엇보다 다스리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완성되어 향기를 뿜어내어야 한다는 뜻인 것이다. 지치주의(至治主義). 조광조에 의해서 전개된 독특한 정치사상인 지치주의는 이렇게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조광조의 정치사상인 지치주의는 중종이 직접 출제한 알성문과시험에 차석으로 합격한 조광조의 답안 서두에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그러므로 하늘이 사람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임금과 백성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그러므로 예전에 이상적인 임금들은 백성들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그러므로 옛날에 성인들은 하늘과 땅의 근본과 수많은 백성들의 무리를 하나로 여겼기 때문에 그런 이치에 따라 도를 행하였습니다…”
  • 儒林(7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7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그 유명한 한훤당의 ‘한빙계’는 이후 조광조를 비롯하여 이퇴계,이율곡 등 모든 성리학자들이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18가지의 계심(戒心)이 되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공자가 설법한 ‘선비로서의 유행’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세운 한빙계의 계율을 철저하게 지켜나간 참 선비였다. 그러나 스승 한훤당도 조광조를 제자로 삼은 지 2년 뒤 순천으로 유배되고,그로부터 4년 뒤인 연산군 10년 갑자사화로 인해 사사된다.그 후 조광조에 의해서 우의정으로 추증되었으나 문묘에는 종향(從享)치 못하였는데,제자 조광조도 마침내 스승과 똑같이 이처럼 대역죄인이 되어 유배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 사제간에 되풀이되는 운명의 악순환이란 말인가.스승 한훤당도 신진사림파로서 유자광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숙청을 당하였듯 조광조 자신도 신진사림파로서 심정과 남곤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이처럼 숙청을 당하고 있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치란 항상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기득권의 훈구세력과 사회를 개혁하려는 신진세력간의 신구갈등에서부터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쟁탈전이 시작되는 것일까. 조광조는 잘 알고 있었다. 선조인 연산군 때에 훈구파들은 스승 한훤당을 비롯한 신진사림파들을 야생귀족(野生貴族)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광조 역시 붕당죄로 기소되지 않았던가.중종이 직접 남곤에게 받아쓰도록 내린 전교에서 조광조에 관한 유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지 않았던가.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 4인 등은 서로 붕당을 맺어 자기들에게 붙은 자에게는 관직에 나가게 하고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聲勢)로 상호 의지하여 권세가 있는 요직의 자리를 독차지하였다…(후략)…” 붕당죄.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인 죄.이는 국가를 전복하려는 대죄로 붕당죄인을 보통 대역죄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옛 중국에서는 모든 관료는 개개인이 천자에 예속되는 것이라 하여 횡적으로 결합하여 당파를 만들 때는 이를 붕당죄로 처벌하였는데,이는 사사로운 이익을 같이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결합된 정치단체였기 때문이었다.붕당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조정의 조화를 해치는 배타적인 이익집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조광조를 태운 수레는 어느덧 충청도의 공주를 지나고 있었다.그동안 어느덧 나흘 낮,나흘 밤이 흘러 가버린 것이었다.11월에 접어들어 이미 초겨울의 쌀쌀한 한풍이 조광조의 품속을 파고들고 있었고,불어오는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낙엽들만 유배 길을 뒤덮고 있었다. ―선생님. 언제 날이 밝았는지, 언제 하루가 지났는지 흐르는 세월을 깨닫지 못하고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조광조는 마침내 신음소리를 내면서 스승을 불러보았다. ―한훤당 선생님,선생님도 붕당죄인이 되어 순천에서 사사되셨는데,마찬가지로 저도 붕당죄인인 대역죄인이 되어 이처럼 능주로 유배 길 떠납니다.선생님이 순천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것처럼 저도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선생님.선생님이 사화에 휘말려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을 제가 잘 알고 있으니,저 역시 아무런 죄 없이 사화에 휘말려 이처럼 억울한 유배 길에 오르고 있음을 스승님께오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나이다. 우러러 보는 하늘 저편으로 떼 지어 따뜻한 남쪽나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들의 모습이 아득하게 보이고 있었다.
  • 儒林(7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그 유명한 한훤당의 ‘한빙계’는 이후 조광조를 비롯하여 이퇴계,이율곡 등 모든 성리학자들이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18가지의 계심(戒心)이 되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공자가 설법한 ‘선비로서의 유행’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세운 한빙계의 계율을 철저하게 지켜나간 참 선비였다. 그러나 스승 한훤당도 조광조를 제자로 삼은 지 2년 뒤 순천으로 유배되고,그로부터 4년 뒤인 연산군 10년 갑자사화로 인해 사사된다.그 후 조광조에 의해서 우의정으로 추증되었으나 문묘에는 종향(從享)치 못하였는데,제자 조광조도 마침내 스승과 똑같이 이처럼 대역죄인이 되어 유배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 사제간에 되풀이되는 운명의 악순환이란 말인가.스승 한훤당도 신진사림파로서 유자광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숙청을 당하였듯 조광조 자신도 신진사림파로서 심정과 남곤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이처럼 숙청을 당하고 있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치란 항상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기득권의 훈구세력과 사회를 개혁하려는 신진세력간의 신구갈등에서부터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쟁탈전이 시작되는 것일까. 조광조는 잘 알고 있었다. 선조인 연산군 때에 훈구파들은 스승 한훤당을 비롯한 신진사림파들을 야생귀족(野生貴族)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광조 역시 붕당죄로 기소되지 않았던가.중종이 직접 남곤에게 받아쓰도록 내린 전교에서 조광조에 관한 유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지 않았던가.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 4인 등은 서로 붕당을 맺어 자기들에게 붙은 자에게는 관직에 나가게 하고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聲勢)로 상호 의지하여 권세가 있는 요직의 자리를 독차지하였다…(후략)…” 붕당죄.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인 죄.이는 국가를 전복하려는 대죄로 붕당죄인을 보통 대역죄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옛 중국에서는 모든 관료는 개개인이 천자에 예속되는 것이라 하여 횡적으로 결합하여 당파를 만들 때는 이를 붕당죄로 처벌하였는데,이는 사사로운 이익을 같이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결합된 정치단체였기 때문이었다.붕당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조정의 조화를 해치는 배타적인 이익집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조광조를 태운 수레는 어느덧 충청도의 공주를 지나고 있었다.그동안 어느덧 나흘 낮,나흘 밤이 흘러 가버린 것이었다.11월에 접어들어 이미 초겨울의 쌀쌀한 한풍이 조광조의 품속을 파고들고 있었고,불어오는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낙엽들만 유배 길을 뒤덮고 있었다. ―선생님. 언제 날이 밝았는지, 언제 하루가 지났는지 흐르는 세월을 깨닫지 못하고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조광조는 마침내 신음소리를 내면서 스승을 불러보았다. ―한훤당 선생님,선생님도 붕당죄인이 되어 순천에서 사사되셨는데,마찬가지로 저도 붕당죄인인 대역죄인이 되어 이처럼 능주로 유배 길 떠납니다.선생님이 순천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것처럼 저도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선생님.선생님이 사화에 휘말려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을 제가 잘 알고 있으니,저 역시 아무런 죄 없이 사화에 휘말려 이처럼 억울한 유배 길에 오르고 있음을 스승님께오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나이다. 우러러 보는 하늘 저편으로 떼 지어 따뜻한 남쪽나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들의 모습이 아득하게 보이고 있었다.˝
  • 儒林(70)-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70)-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스승 한훤당은 이렇듯 자기보다 30년 가까이 어린 제자의 충고를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군자로서의 아량과 너그러움을 갖고 있던 선비였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나는 그러한가. 스승 한훤당은 공자가 설법하였던 ‘유가의 선비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행동’,즉 ‘유행(儒行)’의 도리를 철저히 지켜나갔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계율을 만들어 이를 지켜나갔던 군자였던 것이다. 한빙계(寒氷戒). 문자 그대로 ‘가난하고 얼음처럼 찬 이성으로 지켜야 할 계율’을 한훤당은 몸소 지어놓고 이를 철저히 지켜나갔던 것이다.그가 한빙계란 계율을 세운 것은 2년 전이었다. 원래 한훤당은 27세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늦게 벼슬길에 올랐었다.마흔한 살 때 이르러서야 정6품 관직인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올랐으며,품계로 보면 크게 빛을 보지 못한 셈이었다. 그러나 김종직(金宗直)으로부터 정통적인 성리학을 전수받은 대유로서 재야에 있는 훌륭한 인물인 유일(遺逸)로 손꼽히고 있었는데,특히 대사헌을 지낸 반우형(潘佑亨)은 관직이 높은데도 5살이나 많은 한훤당을 스승으로 모시기를 간청하였던 것이다. 한훤당이 여러 차례 이를 사양하였으나 반우형은 물러서지 않는다.선비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한빙계를 써주었는데 스스로 세운 율법에 엄격하였던 한훤당이 쓴 유명한 ‘한빙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동정유상(動靜有常):움직이거나 머물고 있을 때 항상 평상심을 갖도록 하라. 2.정심솔성(正心率性):항상 마음을 바로해서 착한 본성을 따르라. 3.정관위좌(正冠危坐):갓을 바로 쓰고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 꿇고 앉아,자세를 바르게 하라. 4.심척선불(深斥仙佛):신선이 되고자 하는 도교와 부처가 되려는 불교를 깊이 배척하라. 5.통절구습(痛絶舊習):낡은 습관을 철저하게 끊어버려라. 6.질욕징분(窒欲懲忿):욕심을 막고 분한 마음을 참아라. 7.지명돈인(知命敦仁):하늘의 뜻을 알고 어짐에 힘쓰도록 하라. 8.안빈수분(安貧守分):가난함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분수를 지키도록 하라. 9.거사종검(去奢從儉):사치와 허영을 버리고 근검절약하도록 하라. 10.일신공부(日新工夫):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11.독서궁리(讀書窮理):책을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 12.불망어(不妄語):망령된 말과 삿된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하라. 13.주일불이(主一不二):마음을 하나로 집중하여 절대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라. 14.극념극근(克念克勤):잘 생각하고 게으르지 말고 항상 부지런하라. 15.지언(知言):말을 아끼고 말의 의미를 깊이 새기도록 하라. 16.지기(知幾):일의 기미(幾微)를 알도록 하라. 17.신종여시(愼終如始):시작할 때와 같이 끝도 신중하게 하라. 18.지경존성(持敬存誠):공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성실함이 있으라.
  • 儒林(70)-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스승 한훤당은 이렇듯 자기보다 30년 가까이 어린 제자의 충고를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군자로서의 아량과 너그러움을 갖고 있던 선비였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나는 그러한가. 스승 한훤당은 공자가 설법하였던 ‘유가의 선비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행동’,즉 ‘유행(儒行)’의 도리를 철저히 지켜나갔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계율을 만들어 이를 지켜나갔던 군자였던 것이다. 한빙계(寒氷戒). 문자 그대로 ‘가난하고 얼음처럼 찬 이성으로 지켜야 할 계율’을 한훤당은 몸소 지어놓고 이를 철저히 지켜나갔던 것이다.그가 한빙계란 계율을 세운 것은 2년 전이었다. 원래 한훤당은 27세때 생원시에 합격하여 늦게 벼슬길에 올랐었다.마흔한 살 때 이르러서야 정6품 관직인 형조좌랑(刑曹佐郞)에 올랐으며,품계로 보면 크게 빛을 보지 못한 셈이었다. 그러나 김종직(金宗直)으로부터 정통적인 성리학을 전수받은 대유로서 재야에 있는 훌륭한 인물인 유일(遺逸)로 손꼽히고 있었는데,특히 대사헌을 지낸 반우형(潘佑亨)은 관직이 높은데도 5살이나 많은 한훤당을 스승으로 모시기를 간청하였던 것이다. 한훤당이 여러 차례 이를 사양하였으나 반우형은 물러서지 않는다.선비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한빙계를 써주었는데 스스로 세운 율법에 엄격하였던 한훤당이 쓴 유명한 ‘한빙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동정유상(動靜有常):움직이거나 머물고 있을 때 항상 평상심을 갖도록 하라. 2.정심솔성(正心率性):항상 마음을 바로해서 착한 본성을 따르라. 3.정관위좌(正冠危坐):갓을 바로 쓰고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 꿇고 앉아,자세를 바르게 하라. 4.심척선불(深斥仙佛):신선이 되고자 하는 도교와 부처가 되려는 불교를 깊이 배척하라. 5.통절구습(痛絶舊習):낡은 습관을 철저하게 끊어버려라. 6.질욕징분(窒欲懲忿):욕심을 막고 분한 마음을 참아라. 7.지명돈인(知命敦仁):하늘의 뜻을 알고 어짐에 힘쓰도록 하라. 8.안빈수분(安貧守分):가난함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분수를 지키도록 하라. 9.거사종검(去奢從儉):사치와 허영을 버리고 근검절약하도록 하라. 10.일신공부(日新工夫):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11.독서궁리(讀書窮理):책을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 12.불망어(不妄語):망령된 말과 삿된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하라. 13.주일불이(主一不二):마음을 하나로 집중하여 절대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라. 14.극념극근(克念克勤):잘 생각하고 게으르지 말고 항상 부지런하라. 15.지언(知言):말을 아끼고 말의 의미를 깊이 새기도록 하라. 16.지기(知幾):일의 기미(幾微)를 알도록 하라. 17.신종여시(愼終如始):시작할 때와 같이 끝도 신중하게 하라. 18.지경존성(持敬存誠):공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성실함이 있으라.˝
  • 儒林(69)-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공자는 말하였다. ‘선비는 자기와 같은 부류라 해서 무조건 친하지 않고,자기와 다른 부류라 해서 무조건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와 다른 부류는 배척하지 않았던가.그러므로 나는 선비이면서도 선비의 길을 지키지 못한 위선자였다.내 자신은 군자를 꿈꾸고 있으면서도,실상 나는 소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쉴새없이 흔들거리는 수레에 몸을 맡기면서 조광조는 심사숙고하였다. 내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완전한 군자였다.한훤당은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고치려고 노력하였던 선비였다. 일찍이 공자는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그들에게서 좋은 점은 가려서 따르고,좋지 못한 점은 거울삼아 고치기 때문이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스승 한훤당은 비록 제자라 할지라도 좋지 못한 점을 지적하면 이를 고치려고 애를 썼던 참 선비였다.실제로 한훤당은 17세의 제자 조광조에게 ‘네가 나의 스승이로구나.’하고 말하였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하루는 한훤당에게 꿩을 선물로 주고 간 손님이 있었다.고달픈 유배생활에 몸보신하라고 준 선물이었던 것이다.그러나 효성이 지극한 한훤당은 꿩을 보자 문득 한양에 있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유난히 꿩고기를 좋아하는 어머니에게 주고 싶어 한훤당은 직접 꿩의 털을 뽑고,내장을 꺼내어 고기를 햇볕에 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솔개 한 마리가 햇볕에 말리는 꿩고기를 물고 사라져버린 것이었다.얼마 후 이를 알게 된 한훤당은 화가 나서 집에 있는 계집종을 불러다가 꾸짖기 시작하였다. “네 이년,내가 그토록 이르지 않았더냐.혹시 개나 고양이가 먹을지 모르니 주의해서 지키라고 신신당부하였거늘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어 그것 하나 지키지 못하였단 말이냐.” 옆에는 조광조를 비롯하여 최수성 등 몇 명의 제자들이 있었으나 스승은 화를 참지 못하였으며,계집종은 땅에 무릎을 꿇은 채 울기만 할 뿐이었다. 본인의 심정이야 어떻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좀 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지엄하신 스승이었으므로 제자들은 이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어느 정도 노여움이 가라앉은 후 조광조가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선생님,선생님께오서 노모를 봉양하시려는 정성이 간절하다는 것은 저희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일찍이 공자께오서는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자를 보면 마음 속으로 스스로를 반성한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고 하였습니다.선생님께오서 효성이 지극하다 하더라도 군자가 하는 말은 언제나 가려서 해야 할 줄 압니다.선생님께서 어질지 못한 말씀을 하신다면 저희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 순간 한훤당은 일어서서 조광조의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마침 스스로 후회하고 있었는데 너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가 심히 부끄럽구나.이제야 알겠으니 이제야 네가 나의 스승이지 내가 너의 스승이 못되는구나.” 기록에 의하면 이때부터 한훤당은 조광조를 더욱 아껴 애지중지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모습을 송시열은 심곡서원기(深谷書院記)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조광조 선생의 자질은 이처럼 탁월하고 한훤당 역시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어 사제 간에 서로 계발된 바가 있었다.아직까지 희천에 살고 있는 늙은이들 간에 이 이야기는 전해오며 미담으로 삼고 있다.”˝
  • 儒林(69)-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69)-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공자는 말하였다. ‘선비는 자기와 같은 부류라 해서 무조건 친하지 않고,자기와 다른 부류라 해서 무조건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와 다른 부류는 배척하지 않았던가.그러므로 나는 선비이면서도 선비의 길을 지키지 못한 위선자였다.내 자신은 군자를 꿈꾸고 있으면서도,실상 나는 소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쉴새없이 흔들거리는 수레에 몸을 맡기면서 조광조는 심사숙고하였다. 내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완전한 군자였다.한훤당은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고치려고 노력하였던 선비였다. 일찍이 공자는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그들에게서 좋은 점은 가려서 따르고,좋지 못한 점은 거울삼아 고치기 때문이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스승 한훤당은 비록 제자라 할지라도 좋지 못한 점을 지적하면 이를 고치려고 애를 썼던 참 선비였다.실제로 한훤당은 17세의 제자 조광조에게 ‘네가 나의 스승이로구나.’하고 말하였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하루는 한훤당에게 꿩을 선물로 주고 간 손님이 있었다.고달픈 유배생활에 몸보신하라고 준 선물이었던 것이다.그러나 효성이 지극한 한훤당은 꿩을 보자 문득 한양에 있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유난히 꿩고기를 좋아하는 어머니에게 주고 싶어 한훤당은 직접 꿩의 털을 뽑고,내장을 꺼내어 고기를 햇볕에 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솔개 한 마리가 햇볕에 말리는 꿩고기를 물고 사라져버린 것이었다.얼마 후 이를 알게 된 한훤당은 화가 나서 집에 있는 계집종을 불러다가 꾸짖기 시작하였다. “네 이년,내가 그토록 이르지 않았더냐.혹시 개나 고양이가 먹을지 모르니 주의해서 지키라고 신신당부하였거늘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어 그것 하나 지키지 못하였단 말이냐.” 옆에는 조광조를 비롯하여 최수성 등 몇 명의 제자들이 있었으나 스승은 화를 참지 못하였으며,계집종은 땅에 무릎을 꿇은 채 울기만 할 뿐이었다. 본인의 심정이야 어떻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좀 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지엄하신 스승이었으므로 제자들은 이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어느 정도 노여움이 가라앉은 후 조광조가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선생님,선생님께오서 노모를 봉양하시려는 정성이 간절하다는 것은 저희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일찍이 공자께오서는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자를 보면 마음 속으로 스스로를 반성한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고 하였습니다.선생님께오서 효성이 지극하다 하더라도 군자가 하는 말은 언제나 가려서 해야 할 줄 압니다.선생님께서 어질지 못한 말씀을 하신다면 저희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 순간 한훤당은 일어서서 조광조의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내가 마침 스스로 후회하고 있었는데 너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가 심히 부끄럽구나.이제야 알겠으니 이제야 네가 나의 스승이지 내가 너의 스승이 못되는구나.” 기록에 의하면 이때부터 한훤당은 조광조를 더욱 아껴 애지중지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모습을 송시열은 심곡서원기(深谷書院記)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조광조 선생의 자질은 이처럼 탁월하고 한훤당 역시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어 사제 간에 서로 계발된 바가 있었다.아직까지 희천에 살고 있는 늙은이들 간에 이 이야기는 전해오며 미담으로 삼고 있다.”
  • 강호를 건너 무협의 숲을 거닐다/량셔우쭝 지음

    무협 바람이 거세다.우리 주변엔 알게 모르게 ‘무협’ 상품이 늘어서 있다.‘말죽거리 잔혹사’처럼 무협 코드를 빌려온 영화가 만들어지고, ‘열혈강호’처럼 몇년째 인기를 끄는 만화가 있는가 하면, ‘신영웅문’ 같은 무협 전문 게임들이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사람들은 왜 무협에 열광할까.세상살이가 어렵기 때문일까.아니면 순환론자들의 주장대로 무협 사이클이 다시 찾아온 것일까. ‘강호를 건너 무협의 숲을 거닐다’(량셔우쭝 지음,김영수·안동준 옮김,김영사 펴냄)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무협물에 등장하는 협객의 존재에서 찾는다.약한 자를 괴롭히는 악의 무리와 탐관오리,백성들의 삶을 힘들게 하는 권력자들을 통쾌하게 혼내주는 협객은 바로 보통사람들이 갈망하는 우리 시대 영웅의 다른 이름이다.사람들은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영웅의 풍모를 보며 협객의 꿈을 꾸고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랜다.무협이 늘 대중과 함께 있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2000년 무협의 역사 두루 살펴 책은 사마천의 ‘사기’에서부터 신파 무협소설의 선두주자인 김용,양우생,고룡의 작품까지 2000년 무협의 역사를 두루 살핀다.중국의 대표적인 무협소설 평론가인 저자는 무협소설의 역사와 중국의 역사를 굳이 구별하지 않는다.무협소설을 ‘중국문화의 교과서’로 간주한다.‘역경’‘남화경’‘도덕경’ 등을 통해 무협과 중국문화의 접점을 찾고 ‘협(俠)’과 영웅이라는 단어를 통해 중국인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분석한다.요컨대 무협소설은 단순한 대중의 오락거리가 아니라 중국문화의 전통을 반영하는 문화코드라는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협‘과 ‘검’에 관한 이야기는 ‘열자’와 ‘사기’에 처음 등장한다.‘열자’엔 스승과 제자가 활쏘기 기예를 겨루는 고사가 나오며,‘사기’의 ‘자객열전’과 ‘유협열전’편엔 여러 자객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하지만 이것들은 무협소설과 비슷해 보일 뿐,본격 소설로 보기는 어렵다. 무협소설은 당나라 때 전기(傳奇)소설에서 비롯됐다.당대 초기부터 씌어진 전기소설은 신선이나 귀신,애정문제 등을 주요 제재로 삼았다.학자들은 두광정의 ‘규염객전’을 무협소설의 원조로 본다.주인공 규염객이 훗날 당 태종이 된 이세민의 인물 됨됨이에 감복,천하를 다투는 것을 그만두고 국경을 벗어나 부여국을 열었다는 이야기다.단재 신채호는 규염객이 고구려 후기의 실권자 연개소문이라고 주장한다. ●당나라 ‘규염객전’이 원조 무협소설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대가 명이다.소설이 본격적인 대중 오락으로 등장한 송대를 거쳐 명대엔 장·단편 백화 무협소설이 꽃을 피웠다.이때 ‘수호전’과 ‘삼국지연의’가 소개됐고 ‘삼언이박’이라 불린 단편 백화소설이 등장했다.청대에 들어선 ‘삼협오의’ 같은 본격적인 협의소설이 나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중국 대륙에서 무협소설이 사라진 시기도 있었다.1990년대 중반 무렵이다.반면 홍콩은 무협소설의 전성기를 열어갔다.특히 김용의 ‘사조영웅전’은 새로운 구상과 수법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책은 한국 창작 무협 1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금강(와룡생)의 글을 통해 결코 짧지 않은 한국 무협소설의 역사도 살핀다.와룡생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1960년대 초반부터 팬터지와 무협이 접목된 지금의 창작 무협 3세대까지 한국 무협소설의 어제와 오늘을 점검한다.우리의 무협은 언제쯤 외국처럼 변두리문학이 아닌 ‘주류문학’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이 책은 정통 무협의 역사를 찬찬히 되돌아봄으로써 그 가능성의 단서를 찾게 한다.1만 39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儒林(68)-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68)-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스승 한훤당이 조광조에게 유훈으로 내려준 ‘선비가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에 대한 설법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선비는 세상이 잘 다스려진다고 해서 가벼이 행동하지 않으며,세상이 어지럽다고 해서 자기 뜻을 잃지 않습니다.자기와 같은 부류라 해서 무조건 친하지 않고,자기와 다른 부류라 해서 무조건 배척하지 않습니다.그들이 뛰어나게 홀로 바른 행실을 지킴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위로는 덮어놓고 천자의 신하가 되지 않고,아래로는 덮어놓고 제후들을 섬기지 않습니다.신중하고 냉정하며 관대함을 숭상하고,강직하고 꿋꿋한 자세로 사람들과 어울립니다.박학(博學)하면서도 옛 현인(賢人)을 따를 줄 알고,문장을 가까이하고 익히며 행실을 닦아 염치(廉恥)를 압니다.비록 나라의 땅을 쪼개어 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벼이 여기며,외국 신하가 되지 않고 함부로 벼슬하지 않습니다.그들의 법도를 따름이 이와 같습니다. 선비는 지키는 법도가 같은 사람과 뜻을 합치고,닦는 법술(法術)이 같은 사람과 도를 함께 추구합니다.친구와 같은 지위에 나란히 있게 됨을 즐기고,서로 남의 아랫자리에 있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오래 만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친구에 관한 뜬소문은 믿지 않습니다.그들의 행위는 반드시 올바른 법도에 근본을 두고 있고 의로움에 입각(立脚)해 있으며,그와 뜻이 같은 친구면 나아가 협력하고 그와 뜻이 같지 않은 친구로부터는 물러섭니다.그들이 친구를 사귀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온화하고 선량한 것은 인(仁)의 근본이며,공경스럽고 신중한 것은 인의 기반이며,관대하고 너그러운 것은 인의 작용이며,겸손하게 사물을 대하는 것은 인의 효능이며,예의와 절조는 인의 외모이며,말과 이론은 인의 장식이며,노래와 음악은 인의 조화(調和)이며,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은 인의 베풂입니다. 선비는 모두 이런 것을 아울러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직 감히 스스로 인(仁)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그들의 공경하고 사양함이 이와 같습니다.선비는 빈천하다고 해서 구차하게 굴지 아니하며,부귀를 누린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임금의 권세에 눌려 욕을 보지 않으며,높은 자리의 사람들 위세에 눌려 끌려 다니지 않고,관권(官權)에 눌려 그릇된 짓을 하지 않습니다.그래서 그들을 선비(儒)라 부르는 것입니다.” 노나라의 애공이 공자에게 ‘유가의 선비로서 행동은 어떠해야 하는 것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답변한 공자의 설법은 예기(禮記) 유행(儒行)편에 기록되어 있다.공자의 가르침이 다른 부분은 되도록 짧고 간결함에 비해 유독 이 부분에서만큼은 길고 상세한데,이는 공자가 선비를 도의 구현자(具現者)로 본 때문이었을 것이다.따라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올바른 사회를 이끌어 나가야 할 사명감이야말로 선비가 반드시 가져야 할 엘리트정신임을 강조하기 위함 때문이었던 것이다. 조광조도 스승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이 유훈을 평생 동안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하였음일까. 능주로 가는 멀고 먼 유배 길에서 묵묵히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보는 동안 조광조는 자신에 대해 참담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과연 그러하였음일까. 공자의 말처럼 임금이 알아주지 않고 소원히 대하더라도 은근히 깨우쳐 드리되 서두르는 법이 없었음일까.나는 과격하여 성급하게 지치(至治)를 이루려 하지 않았던가.스승 한훤당의 가르침처럼 온화하고 선량한 것이 인(仁)의 근본이고,관대하고 너그러운 것이 인의 작용이었는데,나는 과연 관대하고 너그러웠던 것이었을까. 나는 나 자신만이 옳다고 독선적(獨善的)인 행동을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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