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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111)-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다기망양(多岐亡羊).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양을 잃었다.’는 뜻으로 달아난 양을 찾으려는 데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 바람에 정작 양은 놓치고 말았다는 얘기다.이는 열자(列子)의 설부(說符)편에 나오는 고사로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양주(楊朱)가 있었다.당시에는 천하의 혼란을 다스리기 위해 ‘모두가 서로 사랑하라(兼相愛).’를 부르짖는 묵자(墨子)의 사상이 대유행을 보이고 있었다.묵자는 ‘남을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하라.’하면서 ‘겸상애’야말로 ‘돌아가면서 서로를 이롭게 하는 교상리(交相利)’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는데,이와는 달리 양주는 극단적인 개인주의,혹은 이기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양주의 개인주의는 ‘내 몸의 터럭 한 개를 가지고 세상을 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터럭 하나도 뽑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묵적,혹은 묵자의 겸애설(兼愛說)과 대비를 보여 ‘양주묵적’이라고 통칭되던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어느 날 양주의 이웃집 양 한 마리가 달아났다.그래서 그 집 사람은 물론 양주의 집 사람까지 동원되어 양을 찾으러 나서느라고 안팎이 매우 분주하였다.이 모습을 본 양주가 물었다. “양 한 마리를 찾는다면서 왜 그리 많은 사람이 나서느냐.” 그러자 하인이 대답하였다. “예,양이 달아난 쪽에는 갈림길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모두들 지쳐서 돌아왔는데,양은 찾지 못했다고 했다.갈림길마다 사람들이 찾아 나섰지만 갈림길에 또 다른 갈림길이 있어서 양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통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양주는 갑자기 우울해져서 하루 종일 말도 하지 않았다.제자들이 그 까닭을 물어도 대답조차 없었다.그래서 맹손양(孟孫陽)이란 제자가 선배인 심도자(心都子)를 찾아가 앞서 있던 일을 말하고 스승인 양주가 입을 다문 이유를 물었다.이에 심도자는 이렇게 대답하여 주었다. “그것은 선생님이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라네.곧 ‘큰 길에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리듯이 학문하는 사람들은 다방면으로 배우기 때문에 본성을 잃는다.학문이란 원래 근본이 하나인데,그 말단에 와서 이와 같이 달라지고 만 것이다.그러므로 하나의 근본으로 돌아간다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시고는 현실이 그렇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 입을 다무신 것이라네.” 여기서부터 ‘다기망양’은 학문의 길이 너무 여러 갈래로 나뉘어서 다방면에 걸쳐 지나치거나 지엽적인 것에 얽매이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비유로 쓰이게 되었는데,오늘날에도 선택할 대상이 너무 여러 가지가 있어,어느 것을 택할지 곤혹스러운 경우에도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찔끔찔끔 술을 마시면서 생각하였다. 양주가 걱정하였던 대로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린 것처럼 오늘날 문밖에는 갈림길이 많이 있어 정치가 실종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기독교에서 예수가 자신을 따르는 사람을 양이라 표현한 것처럼 양은 백성을 의미하는 비유일 것이다.정치란 양을 편안히 하고 정치가는 양을 풀밭으로 이끄는 목자(牧者)일 것이다. 양을 풀밭으로 이끄는 길이 정치의 근원이므로 이 길은 복잡하지 않고 오히려 단순할 것이다.그러나 수많은 이데올로기와 정쟁과 편가르기에 의해서 정치의 길은 수많은 갈림길로 갈라져 있는 것이다.따라서 오히려 이 수많은 갈림길 때문에 막상 우리가 찾아야 할 잃어버린 양은 찾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성영우의 탄식대로 오늘날 문밖 정가에는 갈림길이 많기도 하여 백성들은 저문 날을 근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분단 현실의 ‘이방인’ 양심적 병역거부자] “대체복무 어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을것”

    ‘낮은 소리’는 사회의 그늘진 곳의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다수의 큰 목소리에 가려 외면받고 있는 소외층의 목소리를 드러내 보이려는 것입니다.방치할 경우 사회의 대형 갈등요인으로 번질 수 있는 사안을 미리 공론화함으로써 대안을 모색해 보자는 것입니다.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제보를 기다립니다.서울신문 편집국 사회교육부(02)2000-9173,www.seoul.co.kr 또는 www.kdaily.com으로 연락 주십시오. 종교적 신앙이나 정치적 신념에 따라 징집을 거부하는 이른바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분단 현실이 낳은 한국사회의 또다른 ‘이방인’들이다. 매년 600여명의 젊은이들이 이런 신념에 따라 징집을 거부,평생을 ‘병역기피자’라는 멍에를 쓰고 살아가고 있다.병역을 대신해 젊은 시절을 감옥에서 보내고 있는 셈이다.최근들어 이들에 대한 법원의 ‘무죄 판결’에 이어 국회의 ‘대체복무제 입법 추진’ 등 사회의 시각이 급속도로 바뀌고는 있다.그러나 최근 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항소심을 헌법재판소 위헌심판제청 사건 결정 이후로 무기한 연기하는 등 이들의 고통은 언제 끝날지 장담할 수 없게 됐다. ●매년 600여명 군 대신 감옥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매년 600여명씩 생겨나고 있다.지금까지 1만명 정도가 형사처벌을 받았다.8일 현재 470여명이 전국 교도소에 복역중이며,300여명이 재판을 받고 있다.대부분이 종교적 교리에 따라 입영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지만 최근들어 정치적인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도 늘어나고 있다.정치적·사상적 이유로 입대를 거부한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지난 2001년 불교신자인 오태양(30)씨를 필두로 김도형(25),유호근(29),나동혁(29·서울대 재학)씨 등 14명에 이른다. 스승의 날이자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 인 지난달 15일에는 경북 문경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최진(27)씨가 “사회에 뿌리내린 폭력을 없애겠다.”며 병역을 거부했다.최씨의 병역거부는 공무원으로서 최초의 사례를 기록하게 됐다. 입영 후 집총을 거부할 경우 군형법상 항명죄에 해당돼 법정최고형인 징역 3년형을 받지만 입영 자체를 거부하면 민간 법원에서 보통 1년6월∼2년형을 선고받는다.최근에는 아예 입영자체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평생을 ‘병역기피자’라는 멍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본인뿐만 아니라 병역 거부자를 둔 가족들의 걱정과 고통도 이만저만이 아니다.오씨와 유씨 등은 병역법 위반으로 기소됐지만 현재 재판이 무기한 연기된 상태로 현재 ‘전쟁없는 세상’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지난달 24일 열릴 예정이던 3차 공판이 연기된 오씨는 “그동안 주변의 오해와 편견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다.”면서 “자신의 양심적 결정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 사람들은 무조건적으로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군사훈련이나 총을 들지 않는 대신 다른 형태의 ‘대체복무’를 하겠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병역 거부자들은 경축일 등 정기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가석방의 혜택에서 배제돼 왔으며,매년 몇차례씩 취해졌던 사면·복권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았다.또 출소후 전과로 인해 공무원 임용 자격이 없으며,민간 기업 취업시에도 신원 조회에서 탈락하는 등의 사회적 차별을 겪고 있다. ‘전쟁없는 세상’에서 활동하는 예비 병역거부자인 이용석(25·중앙대 졸업)씨는 “처음에는 병역거부에 대한 주변의 만류가 많았지만 지금은 이해를 해주는 사람이 더 많다.”면서 “힘들고 어려운 결정을 한 만큼 대체복무제의 도입을 통해 병역거부자에 대한 사회적인 차별을 없애는 데 힘쓰겠다.”고 밝혔다. ●대체 복무제가 유일한 해결책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문제는 대체복무제 외에 별다른 해결책이 사실상 없는 상태다. 현재로서는 헌법재판소 판결과 국회의 입법에 해결책을 기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36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는 지난 2002년 2월 출범,국회 입법을 겨냥한 대체복무제도 법안 마련과 입영을 앞둔 청년들에 대한 상담,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도를 알려 나가는 작업,국제연대를 통한 여론화 작업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 단체는 지난달 25일 이재승 국민대 교수와 이석태 변호사,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등 각계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대체복무 입법추진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서명운동과 홍보 캠페인에 돌입했다.이 단체가 제안한 ‘대체복무법안’에 따르면 병역거부자는 대체복무위원회의 판정절차에 따라 양심의 진정성이 인정되면 대체복무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연대회의 정용욱 상임활동가는 “대체복무제도만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감옥살이라는 고통속에서 구해낼 수 있다.”면서 “무엇보다 대체복무제도가 우리의 안보현실을 무시한 터무니없는 외래풍조로 간주하는 시각을 이제는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현장 이야기] 교복소동

    요즘 수도권의 일부 중학교들이 교복소동으로 어지럼증을 앓고 있다.춘추복을 하복으로 갈아 입으면서 여학생들 사이에서 교복 줄여입기가 유행하며 비롯됐다.웃옷은 품을 줄이고,치마는 길이를 짧게 한다.친구들이 모두 하니까 따라 한다는 주장이다. 말이 교복 줄여입기이지 체형은 그대로인데 옷만 줄여 놓으니 생활 불편은 제쳐 두더라도 위태위태한 장면에 옆에서 보는 사람이 민망스러울 지경이라고 한다. 학교는 언제나 그랬듯 즉각 교복 단속에 나섰다.그리고 학생들과 숨바꼭질이 시작됐다.학생들은 일단 품을 조금 줄이고,치마 길이도 조금 짧게 해서 학교에 간다.선생님의 눈치를 살핀다.지적이 없으면 그 다음날 조금 더 줄인다.선생님이 질책할 때까지 하루하루 줄여 나가다 불호령이 떨어져야 비로소 교복 줄이기 행진을 멈춘다는 것이다.6월 들어 하복으로 교복이 바뀌면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요즘 일부 학교들의 현주소다. 어디 그뿐인가.전국 학교들은 어디나 할 것 없이 휴대전화 몸살을 앓고 있다.학생들의 휴대전화 편집증 때문에 정상적인 학교 생활이 위협받고 있다.지난 1학기 중간고사에서 휴대전화로 부정행위를 저지른 게 적발되어 재시험 소동을 빚은 학교가 어디 한둘이던가.선생님들은 수업시간에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면 1주일씩 압수하고 어쩌고 해보지만 학생들의 휴대전화 편집증은 그만큼 심해진다.한편에선 휴대전화 숨바꼭질이 하루 종일 이어진다. 그러나 걱정하며 한숨을 쉴 일은 아닌 성싶다.멀리 갈 것 없이 어른들의 학창시절을 뒤돌아 보면 된다.예나 지금이나 10대들에겐 이유없는 고집 같은 게 있는 것 같다.못하게 하면 악착같이 더 하려는 청개구리 심리도 여전하다.그리고 선생님 꾸중 듣고,혼나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교복에 남달리 애착을 보였던 그 10대들이 건강한 사회의 주역이 되었다.모르면 모르지만 올 스승의 날에 선생님을 찾아 나선 상당수는 교복소동의 주연이었을 것이다. 교육은 다음 세대의 사회화 과정이라고 한다.또래들끼리 키를 재어 보듯 생각과 의식을 저울질해 가며 자기 성장의 역량을 쌓아 간다.교복소동을 벌이고 휴대전화 숨바꼭질을 하는 시행착오 가운데 건전한 상식을 체득해 간다.청소년들은 선생님의 잔소리 속에서 단련되고,선생님의 칭찬으로 벗어났던 좌표로 되돌아 오곤 한다고 한다.교육은 가르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깨우치는 과정일 것이다.청소년들을 이해하는 자세를 추슬러 볼 일이다. 정인학 교육대기자 chung@seoul.co.kr
  • “등록금 인상반대” 점거… 뒤틀린 상아탑

    ‘제자는 총장실을 48일째 점거하고,스승은 제자를 형사고발하고‘ 사제간 정은커녕 대화마저 끊긴 우리 대학의 현주소다. 명지대 학내 분규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학교측은 형사고발이 학생들의 불법행위에 제동을 걸기 위한 형식적 조치라고 주장했지만 이례적인 강수에 논란은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있다. ●“제자 고발은 반교육적 행위”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명지대 서울캠퍼스 학생들과 민주노동당 서대문을 지구당 등 10개 서대문지역 시민단체로 구성된 대책위원회는 4일 기자회견을 갖고 “학교 당국은 총장실을 점거한 학생들에 대한 징계와 형사고발을 취하하는 것은 물론 올해 등록금을 합리적으로 재조정해야 한다.”면서 “불미스러운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근본 대책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앞서 학교측은 등록금 인상에 반발하며 ‘학원자주화 승리를 위한 투쟁위원회’를 결성,지난 4월19일부터 총장실을 점거하고 있는 학생 10명에게 무기정학 또는 유기정학을 내리는 한편 이 가운데 경영대 학생회장 유원석(22·경영학과 4년)씨 등 5명을 무단침입과 업무방해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이에 학생들은 “학교가 대화를 거부한 채 강경대응으로 일관하는 것은 반교육적 행위”라고 비난하며 지난 7일부터 2771명으로부터 징계 및 형사고발 철회를 요구하는 서명을 받아 학교 당국에 제출했다. ●“고발은 위협용일 뿐” 명지대측은 “형사고발은 학생들을 처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위협용”이라면서 “고발장을 접수시켰을 뿐,아직 한차례도 경찰에 나가 고발인 진술을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학교측은 “총학생회의 등록금 투쟁은 지난 4월 초 마무리됐는데 일부 강경파가 임의기구를 만들어 극단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면서 “이들은 학내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교무위원회를 막는 등 업무와 수업을 방해했다.”고 밝혔다. 결국 사태추이를 주시하며 충분히 협의한 끝에 강경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고발했다는 것이다.학교측은 또 투쟁위원회의 등록금 동결 요구에는 “모든 협상은 정식채널인 총학생회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대표성이 없는 단체와 협상하는 것은 나쁜 전례를 남길 것”이라고 일축했다. ●“형사고발은 과민반응” 학생들은 총장실 점거라는 방법에는 이견을 드러냈지만,그렇다고 형사고발한 것은 심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국어국문과 3학년 강병호(23)씨는 “지금까지 학생들이 여러 차례 총장실을 점거했어도,바뀌는 것이 없었는데 학생운동이 왜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으면서도 “하지만 형사고발은 비인간적인 과민반응”이라고 비판했다. 명지대 학내 분규는 오는 8일 비상학생총회가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투쟁위원회는 1192명의 서명을 받아 총학생회가 주관하는 비상총회를 발의시켜 놓았다.비상총회는 재적인원 5600여명의 10분의1이 넘으면 발의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는 등록금 인상과 학생 징계·형사고발 문제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학교측은 비상학생총회를 앞두고 “다수의 학생이 의결한 사안이라면 일단 고려해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이런책 어때요]

    ● 안녕하세요 교황님/최성은 지음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의 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를 담았다.교황의 본명은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1920년 폴란드 남부 도시 바도비체에서 예비역 육군장교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 출신의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책은 ‘하늘 아래 최고 성직자’로 불리는 교황의 인간적인 면모를 살폈다.크라쿠프 지역의 주교신부를 맡아달라는 부탁에 “그렇다고 제가 카누를 못타게 되는 건 아니겠죠.”라고 되물었다는 이야기,교황 취임식 행사를 앞두고 오후에 축구경기를 봐야 하니 오전중으로 행사를 마쳐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 등이 실렸다.8000원. ●트로이수전 우드포드 지음 고대 그리스의 영웅 서사시에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은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의 탄생과 여신들(헤라,아테나,아프로디테)의 사소한 다툼에서 비롯됐다.책은 수많은 예술가들의 상상력의 원천이 된 트로이 전쟁의 신화를 복원한다.미술사가인 저자는 고대 그리스의 벽화와 암포라(몸통이 불룩하고 목이 긴 항아리) 등에 남아 있는 그림들을 통해 생동감 넘치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아킬레우스의 죽음,아이아스의 자살,오디세우스의 계책에 의한 트로이의 함락,아이네아스의 탈출 이야기에 이어 6세기 비잔틴 시인 아가티아스의 노래로 끝을 맺는다.1만 1900원. ● 영혼을 훔치는 사람들/필립 쿤 지음 중국 역사에서 청나라의 전성기라면 강희,옹정,건륭 세 황제의 치세를 꼽을 수 있다.특히 가장 뛰어난 만주족 황제였던 건륭제가 다스린 60년간(1735∼1795년)은 눈부신 경제성장과 이를 토대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시기다.그런데 1840년 아편전쟁 이후의 중국 근대사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가 갖게 되는 의문이 있다.그런 건륭년간이 끝난 지 불과 반세기 만에 어떻게 청나라가 서양 열강들 앞에서 그토록 무력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저자(하버드대 교수)는 1768년 중국 대륙을 휩쓴 ‘영혼절도’사건을 고리로 얘기를 풀어간다.1만 8000원. ● 마틴 루터 킹 / 마셜 프래디 지음 서른다섯 살에 노벨평화상을 받고 서른아홉에 극적으로 생을 마친 인권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평전.내성적인 어린 시절부터 1955∼1956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의 버스승차 거부투쟁을 통해 미국 전역의 이목을 끌며 흑인 민권운동의 지도자로 떠오른 시기,1968년 테네시의 한 모텔에서 흉탄에 맞아 절명하는 순간까지 다룬다.간간이 내비치던 킹의 자만과 허영,난잡한 혼외정사 등 도덕적 약점과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기’를 고대했을 만큼 극심했던 심적 갈등,죽기 직전까지 시달렸던 ‘순교’에 대한 의무감 등도 숨김없이 보여준다.1만 6000원. ●야만의 시대/김성진 지음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인 이라크는 20세기에 들어 오토만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나자마자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각축장이 됐다.2차대전이 끝나자 겨우 독립을 이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미국이란 새로운 적을 만나 신음하고 있다.영화 ‘왝 더 독’‘쓰리 킹즈’는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미국과 전쟁에 반대한 유럽 각국의 의도를 헤아려 보게 한다.영화를 통해 문명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야만의 실상을 파헤쳤다.‘착한 쿠르드,나쁜 쿠르드’‘살아 있는 붓다’‘마수드 아프간’ 같은 분쟁지역의 현실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분석도구로 삼았다.1만 1800원.˝
  • [눈도귀도즐거워] 연극 자객열전

    조말,예양,형가는 중국 고서 ‘사기’의 자객열전에 나오는 인물들이다.춘추전국시대에 이들은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홀몸으로 적진에 침입해 초개같이 목숨을 버렸다.극단 파티의 ‘자객열전’(박상현 작·이성열 연출)은 이들로부터 시작해 19세기말 러시아 혁명가들과 미국의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그리고 체첸 여전사들까지 동서고금의 테러리스트들을 조명한다. 극은 이들에 얽힌 에피소드를 씨줄로,백범 김구(김세동)와 이봉창(임진순)이 일왕 암살을 모의하고자 수차례 회동을 갖는 장면을 날줄 삼아 시공간을 넘나드는 한편의 가상드라마를 엮어낸다.이 연극의 묘미는 허를 찌르는 구성과 등장인물들에 대한 재해석.감옥에서 식욕을 이기지 못해 괴로워했다는 백범의 독백은 민족의 큰 스승으로서의 위대함 이면에 가려진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게 한다.방대한 사건들을 인형극과 그림자극 등으로 재치있게 처리한 무대 기법도 돋보인다.지난달 말 문예진흥원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초연된 데 이어 오는 8일부터 7월4일까지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앙코르 공연된다.(02)745-0308.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세계적 프로그래머 될거예요”

    “교수님께 스승의 날 선물을 드리지 못했는데 동탑산업훈장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최근 정부로부터 국제 장애인 기능올림픽대회 금메달 수상 공로로 동탑산업훈장을 받은 나사렛대학교 전산정보학과 2학년 지현길(20)군은 수상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지군은 지난해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국제 장애인 기능올림픽대회 워드프로세서 부문에 출전,최연소 금메달리스트가 됐다.선천성 2급 청각장애인으로 지난해 나사렛대로 진학,이 학교 전산정보학과 문현주 교수와 인연을 맺으면서 밤낮없는 노력을 기울여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지군은 “세계적인 게임 프로그래머가 되는 게 꿈”이라며 “혼자만의 공부와 노력을 통해 터득하는 컴퓨터의 매력을 많은 학생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지군을 지도한 문현주 교수는 “현길군의 청각장애가 오히려 남들보다 뛰어난 집중력을 갖게 했다.”며 “특히 창의력과 침착함은 장애를 자기 것으로 만든 가장 큰 무기”라고 말했다.한편 문 교수도 지군을 지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동부장관상을 받았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
  • 儒林(102)-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02)-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강당 천장 벽에는 송시열의 ‘강당기’를 비롯하여 ‘학규(學規)’,‘중건기(重建記)’등 많은 현판들이 걸려있었으나 대부분 일정한 규격 속에 많은 내용을 빼곡히 담고 있어 판독하기가 불가능하였지만 유독 숙종대왕의 어제만은 굵은 필체로 양각되어 있었고,마모상태도 양호하여 한자 한자 정확히 읽어 내릴 수 있었다.민진원이 추신하여 쓴 문장 제일 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崇禎後再庚戌首春 未死臣 閔鎭遠 敬識” 재경술이라면 1730년.수춘은 1월이니,민진원이 숙종대왕의 뜻을 받들어 어제를 삼가 적은 것은 조광조의 사후 200년 후의 일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나는 팔짱을 낀 채 다시 생각하였다.조광조의 사후 200년이 흐른 뒤에 숙종은 ‘늘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씀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솟아나온다’고 노래하였다.숙종이 돌아갔음에도 신하인 자신은 황공하게도 살아 있다 하여서 죽지 못한 신하,즉 미사신(未死臣)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민진원 역시 ‘한번 읊어보고 세 번 탄식하여 감동하여 눈물이 절로 솟아나왔다’고 칭송하고 있다. 또한 효종의 어명으로 이시해는 치제문을 통해 조광조를 ‘위대하다.공의 경로는 오랠수록 빛이 나서 영원히 백세토록 종주(宗主)로 떠받드니’하고 축원하고 있다. 그 뿐인가.송시열은 ‘강당기’에서 조광조를 다음과 같이 영탄(詠歎)하고 있다. “선생은 뛰어난 자질로 문장의 기운을 지니시어 스승의 전수를 받지 않고 홀로 도의 묘리를 터득하시었다.이는 순수한 성현의 도요,순전한 제왕의 법이었다.비록 일시에 행하지는 못하였으나 후세에 전하는 것은 더욱 오랠수록 없어지지 않으리라.아,이것이 어찌 인력이 관여할 일인 것인가.하늘이 실로 그렇게 한 것이다.” 송시열로부터 ‘성현의 도’와 ‘제왕의 법’을 갖추었던 하늘이 내린 인물로 찬양 받았던 조광조. 그러나 조광조는 이처럼 후세의 사람들로부터 칭송만 받았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조광조의 사후 그에 대한 복권운동이 시작되자 홍문관 직제학이었던 허흡(許洽) 등은 조광조를 ‘나라를 어지럽히는 괴수’라고 단정하고 맹렬하게 비난하였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심지어 조광조와 같은 신진사림파로 함께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기묘사화 때는 조광조 일파로 몰려 삭직당하고 유배를 떠났던 김정국(金正國)은 ‘사재척언’에서 조광조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대사헌 조광조는 항상 총애를 받아 매양 소대(召對)할 때에는 반드시 의리를 끌어와 비유하였다.종으로 횡으로 경서의 말을 인용하여 말을 정지하는 때가 없으니 다른 사람은 그 동안에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비록 한겨울과 한창 더위라도 한낮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았고,소대를 마치고 나면 윤허되지 않은 일이 없었다.같이 있던 자는 매우 괴롭게 여겼고,모두 싫어하는 기색이 있었다.일찍이 대사헌으로서 아문에 출사하다가 길에서 고형산을 만났으나 경례하지 않고 지나갔는데,대사헌을 미워하는 자는 모두 이를 갈았다.‘한서’를 상고하여 보니 소망지(蕭望之)가 어사가 된 후에는 정승을 가볍게 여겨 만나고도 예를 표하는 일이 없는 것과도 같았다.또한 장탕(張湯)도 어사가 되어 매양 밤이 늦어야 일을 파하였다.두 사람이 어질고 어질지 않음은 비록 같지 않으나 거만하고 제 마음대로 하다가 죄를 당한 것은 같다.예나 지금이나 군자의 몸가짐에는 공경하고 겸손한 것이 복을 누리는 터전이 된다.어찌 경계하지 않으리오.”
  • 儒林(102)-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강당 천장 벽에는 송시열의 ‘강당기’를 비롯하여 ‘학규(學規)’,‘중건기(重建記)’등 많은 현판들이 걸려있었으나 대부분 일정한 규격 속에 많은 내용을 빼곡히 담고 있어 판독하기가 불가능하였지만 유독 숙종대왕의 어제만은 굵은 필체로 양각되어 있었고,마모상태도 양호하여 한자 한자 정확히 읽어 내릴 수 있었다.민진원이 추신하여 쓴 문장 제일 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崇禎後再庚戌首春 未死臣 閔鎭遠 敬識” 재경술이라면 1730년.수춘은 1월이니,민진원이 숙종대왕의 뜻을 받들어 어제를 삼가 적은 것은 조광조의 사후 200년 후의 일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나는 팔짱을 낀 채 다시 생각하였다.조광조의 사후 200년이 흐른 뒤에 숙종은 ‘늘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씀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솟아나온다’고 노래하였다.숙종이 돌아갔음에도 신하인 자신은 황공하게도 살아 있다 하여서 죽지 못한 신하,즉 미사신(未死臣)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민진원 역시 ‘한번 읊어보고 세 번 탄식하여 감동하여 눈물이 절로 솟아나왔다’고 칭송하고 있다. 또한 효종의 어명으로 이시해는 치제문을 통해 조광조를 ‘위대하다.공의 경로는 오랠수록 빛이 나서 영원히 백세토록 종주(宗主)로 떠받드니’하고 축원하고 있다. 그 뿐인가.송시열은 ‘강당기’에서 조광조를 다음과 같이 영탄(詠歎)하고 있다. “선생은 뛰어난 자질로 문장의 기운을 지니시어 스승의 전수를 받지 않고 홀로 도의 묘리를 터득하시었다.이는 순수한 성현의 도요,순전한 제왕의 법이었다.비록 일시에 행하지는 못하였으나 후세에 전하는 것은 더욱 오랠수록 없어지지 않으리라.아,이것이 어찌 인력이 관여할 일인 것인가.하늘이 실로 그렇게 한 것이다.” 송시열로부터 ‘성현의 도’와 ‘제왕의 법’을 갖추었던 하늘이 내린 인물로 찬양 받았던 조광조. 그러나 조광조는 이처럼 후세의 사람들로부터 칭송만 받았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조광조의 사후 그에 대한 복권운동이 시작되자 홍문관 직제학이었던 허흡(許洽) 등은 조광조를 ‘나라를 어지럽히는 괴수’라고 단정하고 맹렬하게 비난하였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심지어 조광조와 같은 신진사림파로 함께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기묘사화 때는 조광조 일파로 몰려 삭직당하고 유배를 떠났던 김정국(金正國)은 ‘사재척언’에서 조광조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대사헌 조광조는 항상 총애를 받아 매양 소대(召對)할 때에는 반드시 의리를 끌어와 비유하였다.종으로 횡으로 경서의 말을 인용하여 말을 정지하는 때가 없으니 다른 사람은 그 동안에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비록 한겨울과 한창 더위라도 한낮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았고,소대를 마치고 나면 윤허되지 않은 일이 없었다.같이 있던 자는 매우 괴롭게 여겼고,모두 싫어하는 기색이 있었다.일찍이 대사헌으로서 아문에 출사하다가 길에서 고형산을 만났으나 경례하지 않고 지나갔는데,대사헌을 미워하는 자는 모두 이를 갈았다.‘한서’를 상고하여 보니 소망지(蕭望之)가 어사가 된 후에는 정승을 가볍게 여겨 만나고도 예를 표하는 일이 없는 것과도 같았다.또한 장탕(張湯)도 어사가 되어 매양 밤이 늦어야 일을 파하였다.두 사람이 어질고 어질지 않음은 비록 같지 않으나 거만하고 제 마음대로 하다가 죄를 당한 것은 같다.예나 지금이나 군자의 몸가짐에는 공경하고 겸손한 것이 복을 누리는 터전이 된다.어찌 경계하지 않으리오.”˝
  • [품종 로열티 비상 (下)]로열티부담 생산원가의 20%

    5월을 보내며 ‘5월의 여왕’ 장미꽃 재배농가는 오히려 우울하다.‘어버이날’·‘로즈데이’·‘스승의 날’ 등이 이어져 장미 출하가 연중 가장 많은 달이지만 경기침체로 수요가 준데다,외국계 육종회사의 집요한 로열티 요구에 맞서 치르는 ‘장미전쟁’이 버겁기만 하다. ●‘빚을 내 빚갚는 악순환’ 시달려 정부는 지난 1994년 농산물 수입개방의 파고를 넘을 대체작목으로 화훼재배를 적극 권장,농가에 모두 4조원을 지원했다.이중 1조원을 8000여 장미농가에 풀었다.농가는 지원금 중 50%를 보조받았지만 30%의 융자와 사실상 대부분 부채로 마련한 20%의 자부담이 현재 거의 다 빚으로 남았다.한국장미생산자협회에 따르면 대출금을 상환한 농가는 3%에 불과하다.대부분의 농가가 1억∼2억원의 부채를 지고 ‘빚을 내 빚을 값는’ 악순환에 시달리고 있다. 사정이 이처럼 된 데는 장미시장에 대한 정부의 장기 수요예측이 빗나가 공급과잉 현상을 빚었기 때문이다.10년 전인 94년 장미값은 겨울철 1단(10송이)에 농가출하 가격으로 5000원 선이었으나,지금은 오히려 3000∼4000원으로 떨어졌다.여기에 2002년 우리나라가 국제식물신품종동맹협의회(UPOV)의 50번째 가입국이 되면서 ‘로열티’가 발등의 불로 대두됐다.신품종 장미 육종의 지적재산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무는 로열티는 장미 한 그루에 1달러나 1유로(약 1400원)이다. 장미는 모종을 심어 보통 3∼4년 수확,다시 심는데 이때 로열티를 또 물어야 한다.한 그루에서 1기작에 평균 4송이씩 한해에 4∼5기작을 해 꽃을 따므로 3∼4년 동안 따는 장미는 평균 70송이.여름철 송이당 출하가가 50원,겨울철 400원이므로 로열티 부담이 사실상 생산원가의 20%에 이른다. 현재 전국의 장미농은 1000여명.이중 400 농가의 농민들이 로열티를 물고 있다.나머지 농가는 로열티를 내지 않고 무단 재배를 하거나,구품종 빨간장미를 주로 심는다. 농가들은 “1000평 기준으로 연간 평균 로열티가 1000만원에 이르고 그루당 삽목비 700∼800원,연간 비닐하우스 난방용 기름값 1700만원 등의 영농비를 합치면 생산원가가 4000만원을 웃돌아 대출금을 갚을 돈이 없다.”고 말한다.한국장미생산자협회 석진완(56) 회장은 “법률에 무지한 농민들이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로열티를 무는 예도 있고,육종회사의 불공정거래와 당국의 직무유기적 행정으로 이중삼중의 손해와 고통을 겪는다.”고 주장한다. ●외국 육종회사 농가상대 소송 남발 현재 국내에 진출한 장미육종회사와 에이전트들은 비탈·샤샤가 대표품종인 독일 코로데스사의 코로사㈜와 네덜란드산 레드칼립소·듀오니크 등을 분양하는 기흥통산㈜,역시 네덜란드산 로즈유미·아쿠아를 취급하는 다고원예,이탈리아산 미스파리·뉴패션 품종을 앞세운 대양종묘㈜ 등이다. 이들 업체는 지난해 12월부터 국내 장미 농가를 상대로 로열티 관련 민·형사 소송을 무더기로 쏟아내고 있다.전남 강진 김모(55)씨 등 19명은 지난 3월 코로사로부터 샤샤를 불법재배했다는 이유로 종자산업법 위반으로 피소됐으나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그러나 앞서 지난해 12월 레드칼립소 불법재배로 고소된 김모(47)씨 등 강진지역 농민 9명은 에이전트 기흥통산과 그루당 1300원의 로열티를 물기로 합의했다. 반대로 고양시의 최모(56)씨는 다고원예의 레드챔프 품질 과대광고를 믿고 분양받았다가 농사를 망쳤다며 지난해 8월 3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파주의 최모(46)씨와 전남 담양의 이모(53)씨 등 50명은 지난 3월 말 기흥통상이 2002년 레드칼립소 30만주를 한정 분양한다고 약속하고 실제로 80만주를 분양,시장의 물량과다로 가격이 떨어지는 사기를 당했다며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소장을 냈다. 장미생산자협회는 또 2002년 국립종자관리소가 레드칼립소의 출원등록 이전 1년여에 걸쳐 품종의 균일성과 안전성을 확인할 실증재배를 제대로 하지 않고 등록을 받아줬다며 80여 농가의 연명으로 로열티를 지급하지 않도록 출원등록 해지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는 한편,국립종자관리소 관계자를 직무유기로 고발하기로 결의했다.레드칼립소는 실증재배 기간 등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출원기준에는 꽃지름이 8㎝로 돼 있으나 재배현장에선 6.5㎝에 불과한 등 품질이 현저하게 차이가 있다는 것.그러나 국립종자관리소 이병묵 품질심사과장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실증재배를 거쳐 레드칼립소의 균일성·구별성 등을 종합 판단한 것으로 하자가 없다.”고 밝혔다. 장미협회는 이와함께 4개 육종회사가 로열티에 대해 세금계산서를 상당부분 누락,부가세에 대한 조세포탈 혐의가 있고 법정대응이나 불리한 진술을 하는 농가엔 묘종공급을 중단하기로 하는 등 담합행위를 했다며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할 계획이다. 국내 장미 농가가 그동안 50여개 장미 신품종에 지급한 로열티가 80억원에 이른다.농가들은 정부가 2003년 3월 종자보호법 개정을 위한 공청회에서 불법재배자에 대한 형사처벌 조항을 넣지 않았다가 불법재배자에 대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는 조항을 삽입,농민들을 일방적으로 불리한 위치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했다. ●작목입식비 지원과 육종육성책이 우선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의 장미재배농가 정찬덕(53)씨는 “6월부터 연말까지는 장미 비수기로 출하량이 격감,대부분 농가가 은행 이자 내기도 힘들 것”이라며 정부의 근본적인 대책을 촉구했다.정씨는 “토양·기후가 사뭇 다른 외국 품종에 대해 등록출원 조건을 강화하는 등 종자산업법이 개편돼야 하고,WTO 규정을 벗어나 지급이 가능한 ‘작목입식비’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작목입식비는 현재 경기도 고양,충북 진천,충남 태안 등 일부 지자체에서만 지원된다. 장미협회 석 회장은 “선진국은 식물전쟁을 예견,15년 전부터 막대한 투자를 해왔지만 우리 정부는 ‘로열티’라는 단어도 모르던 농민들이 갑자기 줄줄이 민·형사고발을 당할 때까지 안일하게 대처했다.”고 비판했다. 고양 한만교기자 mghann@seoul.co.kr˝
  • “우리 매듭, 마디마디 섬세함 배어있죠”

    “매듭은 끈 하나로 완성되는 종합예술입니다.단순한 장식품이 결코 아닙니다.일상의 미와 품격을 더해주는 전통문화이자 창작예술이지요.” 한국매듭공예연합회의 심영미(58) 회장은 요즘 제10회 국제매듭전시회(서울역사박물관·6월1∼6일)를 진두지휘하느라 눈코 뜰새 없이 바쁘지만 설렘이 가슴 가득하다.세계 최고의 솜씨를 자랑하는 한국·일본·타이완 3개국 ‘매듭 예술가’들이 대거 참가하기 때문이다. 올해로 10회를 맞는 이번 전시회는 한국 등 3국이 2년마다 순회하며 행사를 주관한다.따라서 심 회장은 이번 전시로 지난 20년을 결산하고 새로운 도약을 하겠다고 각오를 다지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의 경우 노리개와 향낭(香囊),장식성이 뛰어난 후수(後綬)와 면류관(冕旒冠)에서 현대적인 목걸이까지 매듭의 다양한 기법을 선보일 예정”이라면서 “일본의 아기자기한 생활매듭,벽걸이에 중점을 둔 타이완의 심플한 매듭실의 실루엣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면서도 우리 작품이 끈과 매듭,봉술 3가지가 잘 조화돼 일본·타이완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품위가 돋보인다고 자신했다. 그는 국내 몇 안 되는 ‘매듭장인’으로 손꼽힌다.20대 초반 서울 광희동에 시집 오자마자 곧바로 ‘매듭의 길’로 들어섰다.당시 광희동에는 매듭장인들이 많아 ‘매듭촌’으로 불리기도 했다. 특히 시아버지는 조선 궁중에서 매듭 일을 한 시왕고모에게서 기술을 전수받은 상태였다.시아버지는 그에게 엄격한 스승이었다.또 시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남편 유무웅(63)씨도 이미 숙달된 조교였다. 6·25전쟁으로 그의 가족은 금호동으로 이사하지만 ‘매듭의 끈’은 단단했다.온 식구가 매듭에 전념했다.훗날 큰 며느리인 박진영씨도 시집 오자 심 회장이 그런 것처럼 매듭을 전수받았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믈게 전형적인 ‘가업승계형’이자 3대가 함께 매듭예술가의 길을 걷는다. 현재 심 회장의 개인 제자는 전국적으로 100여명.연합회에는 전국에 있는 수천명의 ‘매듭인’ 가운데 프로급으로 인정받는 25명이 참여해 정기적으로 전시회와 봉사활동을 펼친다. 심 회장은 “예전에는 남자들이 매듭일을 많이 했다.”면서 “17세기 때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매듭은 처음에는 궁중 위주였으나 점차 사대부가,민들의 생활에 파고들었다.”고 말했다.임금의 면류관에서 군복의 광다회(廣多繪),악기,한복의 노리개,자수 벽걸이,붓 등에도 널리 애용됐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3개국의 매듭작가 63명이 400여점을 출품한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김영두의 그린에세이] 골퍼 선서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나는 치료자 아폴로 신과 하이게니아,파나케이아와 다른 신들과 여신들을 증인 삼아 나의 능력과 판단에 따라 이 선서와 서약을 지키겠음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입니다.나는 병자를 돕기 위해 내 능력껏 치료법을 사용하겠습니다.인간의 생명을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의 것으로 여겨 존중히 여기겠습니다.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중의 일부다.의사들이 면허를 취득해 환자를 돌보기에 앞서 신 앞에 서서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맹세다.나는 텔레비전에서 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한 신참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그 숭고한 정신 앞에 숙연해졌다. 내가 잘 아는 의사가 있다.그는 의사이기 전에 참다운 골퍼이고 싶어 한다.어느 날,나는 환자로서 그의 병원엘 가게 되었다.그는 전부터 내게만은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서,책상 서랍을 열고 무엇인가를 찾았다.그는 곧 졸업증서나 성혼선언문 등을 끼워 보관하는,겉면이 부드러운 천으로 감싼 서류철을 꺼내서 내게 넘겨주었다.내가 서류철을 반으로 가르자,그 안에서 나온 것은 ‘골퍼 선서’였다. “이제 골프를 허락을 받음에,다음의 서약을 성실히 지킬 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나는 나에게 골프를 전수한 사람을 나의 부모와 다름없이 존경하고 사랑하겠으며,그와 평생 동료로서 살아가겠습니다.내 자녀뿐만 아니라 나의 스승의 자녀들과,맹세와 서약에 의해 맺어진 제자들에게도 교훈·훈계·강의 등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골프를 전수하겠습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을 으뜸으로 여기어,인간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하여 골프를 행하고 가르칠 것이며,인간뿐만 아니라 하찮은 생물도 상하게 하거나 해치는 행위는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인도에 어긋나거나 자연을 훼손하는 일에 나의 기술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나의 양심에 따라서 품위를 가지고 순수와 신성으로 나의 골프를 지킬 것을 선언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타락한 행실을 억제하고,어떤 의도적인 부정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인종·종교·국적·정당 또는 사회적 지위를 초월하여 오직 다른 골퍼에 대한 나의 의무에 충실하겠습니다.나는 골프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습니다.순수함과 거룩함으로 나의 골프 생활을 영위할 것입니다.그리하여,복된 문화적인 삶을 즐기고,모든 이들로부터 명성을 얻겠습니다. 나는 자유의사로 나의 명예를 걸고,위의 내용을 서약합니다.” 소설가·골프칼럼니스트 youngdoo@youngdoo.com˝
  • 마광수 교수와 연세대 82학번들의 ‘특별한 만남’

    “너무 기쁩니다.오랜만에 생동감 있는 자리가 됐습니다.그때나 지금이나 제자들이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마광수(53)연세대 교수가 최근 20년만에 ‘즐거운 사라’들을 만나 대학사회에서 훈훈한 화제가 되고 있다.지난 21일 저녁,서울 용산의 국제빌딩 지하 호프집.마 교수가 지난 83년 연세대에 첫 부임해 가르친 제자 30여명(국문학과 82학번)이 이날 모여 ‘스승의 날’행사를 가졌다.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아주 특별한 만남’이었다. 참석한 제자들은 대학교수·사장·영화감독·가정주부 등 각자 선 자리는 달랐지만 이날만큼은 ‘한마음 한뜻’이었다.제자들은 서로 맥주잔을 권하며 안부를 묻느라 바빴다.이들 틈에 파묻힌 마 교수는 연방 싱글벙글했다.지난해 9월 대학강단에 복귀한 마 교수는 “법적 논란이 야기될 작품은 쓰지 않겠다.”며 다소 의기소침한 상태였기에 이날의 만남은 ‘보약 같은 시간’이었다. 잠시 후 이 모임의 간사인 김슬옹(또물또 통합교육연구회 회장)씨가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는 “스승의 날에 모이려 했으나 시간을 조정하느라 며칠 늦었다.”면서 “교수님은 우리에게 삶의 영감과 창조적 지혜를 심어주신 스승님이자 ‘즐거운 사라’의 창조주이시다.”라고 했다.그러자 ‘와’하며 박수가 터져나왔다.이어 꽃다발 증정식.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들 ‘스승의 은혜는 한이 없어라∼’를 목청껏 합창했다.스스로도 감격에 겨웠는지 일부는 눈가를 훔쳤다. 이 모임에서 이색적인 광경은 당시 과제물(희곡 보고서)을 돌려주는 행사였다.마 교수는 제자들에게 ‘야한 문학작품 써오기’를 단골 과제로 냈다.이 보고서를 20년만에 ‘원저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보고서는 원래 마 교수가 김슬옹 씨를 통해 돌려주려고 했으나 김씨가 미처 돌려주지 못해 보관해 왔다.보고서 겉장에는 점수가 매겨져 있었다.김○○ A, 강○○ A,이○○ A+, 김슬옹 A++,호명된 사람은 일어서서 원고를 받았고 그때마다 다들 크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성적에 관계없이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너무 즐거운 듯했다. 한 제자는 “교수님 강의는 저뿐 아니라 다른 동기들에게도 생각이 많이 트이게 해주는 파격적인 강의였다.”면서 “앞으로는 선생님을 위로해 드리고 감사하는 자리를 자주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취기가 약간 오른 마 교수는 “최근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아 좀 마셨다.”면서 “갑작스러운 일이라 어리둥절하지만 고맙고 기쁜 일 아니냐.”라며 활짝 웃었다.20년만의 ‘특별한 만남’은 자정을 훌쩍 넘겨서야 끝났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1)草衣 선사의 꿈(下)

    초의의 동다문화(東茶文化)는 한국문화론의 한 원류다.사람이 만든 음식 중에 차보다 더 고결하고 완전한 것은 없다.일반적으로 음식은 주된 재료와 양념으로 부르는 부재료가 합쳐져서 만들어진다.그러나 차는 찻잎 그 자체만으로서 완전한 음식이 된다.하나이면서 모두가 되는 귀한 물건이다.하나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차다.차의 이같은 특성 때문에 일찍이 종교 의식용으로 쓰여졌다.불교 수행자들은 차가 지닌 약리적 효능과 함께 하나이면서 모든 것을 지녔다는 상징성을 받들어 차와 함께 하는 고유의 의식을 만들고 전해왔다. 초의가 차를 이용하여 술로 찌든 조선 후기 사회의 폐습을 타파하기 위한 나름의 시도를 할 수 있게 된 데는,초의 개인의 비범한 능력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인들과 깊은 교류를 통한 깨달음도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정약용,김정희,홍현주로 대표되는 스승이자 동무들과의 만남은 초의에게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적극적인 동력이 되었다.초의는 부처의 깨달음이 집약된 화엄사상의 실체를 현실세계에서 구현하고자 했다.즉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 있고,그 관계는 평등하다.’는 존재 상호간의 상생성,연기성,평등성을 차와 차살림을 통하여 실천했다. ●당대 지식인과 폭넓은 교류 모든 것들의 관계를 결정지은 인물이 정약용이었다.초의는 정약용의 실학 사상과 홍현주의 시론(詩論)이나 문장론을 매개로 조선 문인들과 정약용 사이에 오고 간 불꽃 튀는 시론 문답,김정희와의 절절한 교우관계에서 한 지성인이 겪어내는 시대적 고뇌를 곁에서 지켜보았다.누구도 혼자 사는 것이 아님을 다시 깨달았다. 그 때 정약용이 말하기를,‘차를 알고 마시는 민족은 흥하지만,차를 모르고 마시지 않는 민족은 망한다.’는 천둥번개같은 외침이 있었다.음식에 관한 폐습을 혁신시키지 못하면 개인이든 민족이든 끝내 불행해지고 만다는 큰 깨달음에서 얻어진 빛나는 사리였다.여전히 문제는 술에 취해 사는 사회였고,그 사회의 지도자들이 넋을 처박고 사는 술이라는 음식이었고,그 음식에 대한 뒤틀린 습관이었다.중국과 일본은 차문화의 뿌리가 깊고 탄탄한데다 술만큼 차를 숭상했다.그리하여 그들은 역사 속에서 늘 강자였고,지배자로 군림했다.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강진에 유배 중일 때였다.정약용은 정치사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같은 천주교인인 이승훈,이가환과 함께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계자(系子)가 되었다.조선 후기의 대표적 정치가인 채제공은 불교와 천주교를 원칙적으로는 배격하되 그 장점만은 잘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매우 특이한 정치철학을 실천한 인물이었다.정약용이 처음으로 전라도 지역 암행어사로 나갈 때 그를 추천했던 채제공은 엉뚱하게도 천주교 교인인 정약용에게 한 승려를 만나보도록 권유했다.지리산에서 수행중인 연담(蓮潭) 유일(有一)이라는 승려였다.조선의 유생들로부터는 극단적으로 배척받는 불교와 천주교지만 두 종교가 지닌 민중교화력을 인정하는 채제공으로서는 정약용과 유일을 만나게 해줌으로써 유생들로서는 불가능한 새로운 시대를 위한 논리와 실천방안이 마련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였다. ●‘목탁대신 칼’ 호국불교의 시대 두 사람은 만났다.뒷날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된 이후 정약용에게 차를 가르쳐 준 혜장(惠藏,1772∼1811)이 유일(有一)의 제자였고,초의는 유일선사의 법통을 전수받은 제자였으며,초의와 정약용 또한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아마도 이들의 인간관계에서 우러난 시대정신이 초의의 동다문화를 탄생시키는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특히 초의가 승려로서 확립한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은 그 뿌리가 깊고 매우 현실적이다.민중의 존재와 삶을 이해하고 돕는 것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는 이른바 보살정신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매우 처절한 실천력을 요구했다.즉 유생들에 의한 불교 배척과 승려 탄압 정책으로 불교의 명맥이 위기에 처했을 때 탁월한 수행자가 등장하여 위기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보살정신을 실천했다. 조선 중기 명종 때의 보우(普愚)는 질식당하기 직전의 불교를 자신의 목숨과 바꾸어 사실상 조선 불교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보우는 불교 회생을 위해 승과(僧科)를 부활시켜 인재양성의 터전을 닦아 놓고 유생들의 손에 죽임당했다.그가 부활시킨 승과에 합격하여 새로운 인물로 등장한 사람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였다.두 분은 목탁 대신 칼과 창을 쥐고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도탄에서 허덕이는 조선민중을 구하면서 손에 피를 묻힌 불멸의 보살들이었다.살생하지 말라는 지엄한 계율을 위배하면서 동족의 생명을 지키고 구원해 낸 행위에서 우리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정신의 궁극을 읽어낼 수 있다.이 때의 차(茶)는 곧 중생을 상징하며,선(禪)은 곧 부처의 마음이니,조선불교를 호국불교라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초의의 동다문화는 이같은 역사적 뿌리 위에서 새롭게 피어난 중생구원론이기도 하다.즉 사회 지도자의 품성을 올바로 키우고,민족의식을 드높여 키우기 위해 초의가 꾼 또 다른 꿈은 중생들의 살림살이 걱정이었다. ●장 제조법 전파등 중생구제 힘써 1830년을 지나면서 조선사회는 붕괴되어 갔다.모든 세계 인류가 변하고 있는데 조선의 양반사대부들만 중국의 그늘에 스스로 갇혀서 변화를 극력 반대했다.부패와 타락이 주된 흐름이었다.가난한 민중들은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면서 두려움과 배고픔에 시달렸다.끝없는 불안에 지친 민중들은 살림살이의 핵심이 되는 장 담그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가난할수록 장이 있어야만 가난을 견딜 수 있었다.이 시기에 초의가 장 담그는 법을 보다 정확하게 정리하여 가르친 일이나 단방약을 개발하여 세속에 널리 퍼뜨린 것은 초의의 중생 사랑 그 자체였다.단방약은 민중들의 질병을 완화시켜 주기 위한 조치였다.사회 경제적 토대가 붕괴되고 신분질서가 해체되는 혼란 속에서 민중들의 질병은 더욱 심했다.병이 나도 치료할 길이 없었다.가난 때문에 약을 구할 수도 없었다.그 때 초의는 한 두 가지 약초나 조선 산천에 흔하게 자라는 풀잎이나 뿌리 혹은 열매로 간단하게 약을 만들어 먹는 법을 개발하여 널리 퍼뜨렸다.원래 조선의 사찰에는 이같은 단방약에 관한 처방이 여러 가지로 전해져 왔다.승려들 스스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하는 억불정책의 결과였다. 승려들의 질병과 세속인의 질병은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치료 방법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 초의의 생각이었다.그렇게 개발한 단방약은 매우 빠르게 조선 전역으로 파급되어 많은 민중들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덜어주었다.이같은 생각과 실천의 결과들이 한데 모여서 나온 것이 동다문화였다.언제까지 중국만 바라보고 살 수 없으며,그래서도 안된다고 믿었다.지치고 좌절한 민중들이 희망을 품게하는 일,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외우고 쓰는 일보다 내 나라에서 자라는 곡식과 풀잎을 잘 알고 가꾸어 배불리 먹고 이웃과 나누는 것이 더 급한 것임을 실천하기 위하여 살았던 초의였다.초의의 동다(東茶)는 그렇게 만들어졌다.지금 이 나라 강산에는 차문화가 흥청거린다.東茶를 말하는 이들 대부분이 아직도 중국 차문화를 선전하고 있다.더 늦기 전에 참회해야 한다.정약용 선생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새겨보면서 부끄러워해야 하느니. ˝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1)草衣 선사의 꿈(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1)草衣 선사의 꿈(下)

    초의의 동다문화(東茶文化)는 한국문화론의 한 원류다.사람이 만든 음식 중에 차보다 더 고결하고 완전한 것은 없다.일반적으로 음식은 주된 재료와 양념으로 부르는 부재료가 합쳐져서 만들어진다.그러나 차는 찻잎 그 자체만으로서 완전한 음식이 된다.하나이면서 모두가 되는 귀한 물건이다.하나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차다.차의 이같은 특성 때문에 일찍이 종교 의식용으로 쓰여졌다.불교 수행자들은 차가 지닌 약리적 효능과 함께 하나이면서 모든 것을 지녔다는 상징성을 받들어 차와 함께 하는 고유의 의식을 만들고 전해왔다. 초의가 차를 이용하여 술로 찌든 조선 후기 사회의 폐습을 타파하기 위한 나름의 시도를 할 수 있게 된 데는,초의 개인의 비범한 능력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인들과 깊은 교류를 통한 깨달음도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정약용,김정희,홍현주로 대표되는 스승이자 동무들과의 만남은 초의에게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적극적인 동력이 되었다.초의는 부처의 깨달음이 집약된 화엄사상의 실체를 현실세계에서 구현하고자 했다.즉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 있고,그 관계는 평등하다.’는 존재 상호간의 상생성,연기성,평등성을 차와 차살림을 통하여 실천했다. ●당대 지식인과 폭넓은 교류 모든 것들의 관계를 결정지은 인물이 정약용이었다.초의는 정약용의 실학 사상과 홍현주의 시론(詩論)이나 문장론을 매개로 조선 문인들과 정약용 사이에 오고 간 불꽃 튀는 시론 문답,김정희와의 절절한 교우관계에서 한 지성인이 겪어내는 시대적 고뇌를 곁에서 지켜보았다.누구도 혼자 사는 것이 아님을 다시 깨달았다. 그 때 정약용이 말하기를,‘차를 알고 마시는 민족은 흥하지만,차를 모르고 마시지 않는 민족은 망한다.’는 천둥번개같은 외침이 있었다.음식에 관한 폐습을 혁신시키지 못하면 개인이든 민족이든 끝내 불행해지고 만다는 큰 깨달음에서 얻어진 빛나는 사리였다.여전히 문제는 술에 취해 사는 사회였고,그 사회의 지도자들이 넋을 처박고 사는 술이라는 음식이었고,그 음식에 대한 뒤틀린 습관이었다.중국과 일본은 차문화의 뿌리가 깊고 탄탄한데다 술만큼 차를 숭상했다.그리하여 그들은 역사 속에서 늘 강자였고,지배자로 군림했다.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강진에 유배 중일 때였다.정약용은 정치사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같은 천주교인인 이승훈,이가환과 함께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계자(系子)가 되었다.조선 후기의 대표적 정치가인 채제공은 불교와 천주교를 원칙적으로는 배격하되 그 장점만은 잘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매우 특이한 정치철학을 실천한 인물이었다.정약용이 처음으로 전라도 지역 암행어사로 나갈 때 그를 추천했던 채제공은 엉뚱하게도 천주교 교인인 정약용에게 한 승려를 만나보도록 권유했다.지리산에서 수행중인 연담(蓮潭) 유일(有一)이라는 승려였다.조선의 유생들로부터는 극단적으로 배척받는 불교와 천주교지만 두 종교가 지닌 민중교화력을 인정하는 채제공으로서는 정약용과 유일을 만나게 해줌으로써 유생들로서는 불가능한 새로운 시대를 위한 논리와 실천방안이 마련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였다. ●‘목탁대신 칼’ 호국불교의 시대 두 사람은 만났다.뒷날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된 이후 정약용에게 차를 가르쳐 준 혜장(惠藏,1772∼1811)이 유일(有一)의 제자였고,초의는 유일선사의 법통을 전수받은 제자였으며,초의와 정약용 또한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아마도 이들의 인간관계에서 우러난 시대정신이 초의의 동다문화를 탄생시키는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특히 초의가 승려로서 확립한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은 그 뿌리가 깊고 매우 현실적이다.민중의 존재와 삶을 이해하고 돕는 것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는 이른바 보살정신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매우 처절한 실천력을 요구했다.즉 유생들에 의한 불교 배척과 승려 탄압 정책으로 불교의 명맥이 위기에 처했을 때 탁월한 수행자가 등장하여 위기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보살정신을 실천했다. 조선 중기 명종 때의 보우(普愚)는 질식당하기 직전의 불교를 자신의 목숨과 바꾸어 사실상 조선 불교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보우는 불교 회생을 위해 승과(僧科)를 부활시켜 인재양성의 터전을 닦아 놓고 유생들의 손에 죽임당했다.그가 부활시킨 승과에 합격하여 새로운 인물로 등장한 사람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였다.두 분은 목탁 대신 칼과 창을 쥐고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도탄에서 허덕이는 조선민중을 구하면서 손에 피를 묻힌 불멸의 보살들이었다.살생하지 말라는 지엄한 계율을 위배하면서 동족의 생명을 지키고 구원해 낸 행위에서 우리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정신의 궁극을 읽어낼 수 있다.이 때의 차(茶)는 곧 중생을 상징하며,선(禪)은 곧 부처의 마음이니,조선불교를 호국불교라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초의의 동다문화는 이같은 역사적 뿌리 위에서 새롭게 피어난 중생구원론이기도 하다.즉 사회 지도자의 품성을 올바로 키우고,민족의식을 드높여 키우기 위해 초의가 꾼 또 다른 꿈은 중생들의 살림살이 걱정이었다. ●장 제조법 전파등 중생구제 힘써 1830년을 지나면서 조선사회는 붕괴되어 갔다.모든 세계 인류가 변하고 있는데 조선의 양반사대부들만 중국의 그늘에 스스로 갇혀서 변화를 극력 반대했다.부패와 타락이 주된 흐름이었다.가난한 민중들은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면서 두려움과 배고픔에 시달렸다.끝없는 불안에 지친 민중들은 살림살이의 핵심이 되는 장 담그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가난할수록 장이 있어야만 가난을 견딜 수 있었다.이 시기에 초의가 장 담그는 법을 보다 정확하게 정리하여 가르친 일이나 단방약을 개발하여 세속에 널리 퍼뜨린 것은 초의의 중생 사랑 그 자체였다.단방약은 민중들의 질병을 완화시켜 주기 위한 조치였다.사회 경제적 토대가 붕괴되고 신분질서가 해체되는 혼란 속에서 민중들의 질병은 더욱 심했다.병이 나도 치료할 길이 없었다.가난 때문에 약을 구할 수도 없었다.그 때 초의는 한 두 가지 약초나 조선 산천에 흔하게 자라는 풀잎이나 뿌리 혹은 열매로 간단하게 약을 만들어 먹는 법을 개발하여 널리 퍼뜨렸다.원래 조선의 사찰에는 이같은 단방약에 관한 처방이 여러 가지로 전해져 왔다.승려들 스스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하는 억불정책의 결과였다. 승려들의 질병과 세속인의 질병은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치료 방법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 초의의 생각이었다.그렇게 개발한 단방약은 매우 빠르게 조선 전역으로 파급되어 많은 민중들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덜어주었다.이같은 생각과 실천의 결과들이 한데 모여서 나온 것이 동다문화였다.언제까지 중국만 바라보고 살 수 없으며,그래서도 안된다고 믿었다.지치고 좌절한 민중들이 희망을 품게하는 일,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외우고 쓰는 일보다 내 나라에서 자라는 곡식과 풀잎을 잘 알고 가꾸어 배불리 먹고 이웃과 나누는 것이 더 급한 것임을 실천하기 위하여 살았던 초의였다.초의의 동다(東茶)는 그렇게 만들어졌다.지금 이 나라 강산에는 차문화가 흥청거린다.東茶를 말하는 이들 대부분이 아직도 중국 차문화를 선전하고 있다.더 늦기 전에 참회해야 한다.정약용 선생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새겨보면서 부끄러워해야 하느니.
  • [서울수상] 구상 선생님의 마지막 말 “고마워”/방귀희 솟대문학 발행인 방송작가

    5월이 아픔 속에서 가고 있다. 중환자실에 계신 구상 선생님께 마지막 병문안을 갔을 때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이내 눈망울이 젖어 드셨다.그때는 하염없이 흘러내린 내 눈물이 반사된 것인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안타까우셨던 것이다.휠체어에 의지해 살아야 하는 나를 비롯해서 모든 장애인들에게 선생님은 연민을 갖고 계셨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것을 ‘연민’이라고 표현하지 않으셨다.그말이 상처가 될까봐 너털웃음과 함께 ‘연정’이라고 주장하시던 분이다. 선생님은 ‘장애인’이라는 단어도 쓰지 않으셨다.그저 “불편한 사람들이니까.”하는 정도로 말씀하셨다.난 그런 선생님이 너무 좋았다.어쩜 우리의 마음을 그토록 세심하게 이해해 주실 수 있는지 정말 존경스러웠다. 선생님은 솟대문학이 한 호 한 호 나올 때마다 “고마운 일이구먼,정말 고마운 일이야.”라고 격려해 주셨다.선생님은 우리 사회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장애인들이 뭔가를 한다는 것이 대견스러우셨던 것이다. 선생님께서 소천하신 후 각 언론에서 장애인 문예지인 ‘솟대문학’에 2억원을 쾌척했다고 선생님의 선행을 숫자로만 알렸으나,선생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수로 헤아릴 수 있는 돈이 아니다.선생님이 우리 장애문인들에게 주신 것은 사랑이고,희망이고,에너지다.선생님은 장애문인들이 자부심을 갖고 글을 쓸 수 있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셨고,장애문인들이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고,그 기반을 다져 주셨다. 선생님은 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시다.스승이란 정신적으로 영양분을 공급해 주어 성장할 수 있도록 해 주는,인간의 성숙을 관장하는 구실을 하는 분인데,선생님은 그일을 너무나 성실히,너무나 완벽하게 해 주신 최고의 스승이시다.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난 쉴 새 없이 많이 얘기를 했다.회원들 소식,솟대문학에 관한 계획,그리고 더 열심히 솟대문학을 만들겠다는 약속까지 모두 보고를 드렸다.선생님은 오른쪽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인사를 하셨다.(호흡기를 꽂아 말씀을 하실 수 없었기에 글씨를 써서 대화) “고마워.” 이 한 마디가 구상 선생님의 사상과 문학과 철학의 키워드이다.선생님은 늘 낮은 자세로 작은 일에조차 고마움을 느끼며 사셨다.선생님은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늘 격려하였고,모든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인 양 끌어안고 사셨다.그것이 진실이었기에 더욱 아름답고 더욱 빛이 난다. 요즘 장애인계는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 한 장애인 시설에서 30세가 넘은 중증 장애인을 발가벗겨 놓고 목욕 봉사를 하는 장면을 연출한 것에 거센 항의를 하고 있다.목욕 봉사 한번으로 민생을 돌보는,장애인을 사랑하는 지도자로 행세하려 한 것은 기만이다.선행은 연출이 아니고 진실이다.난 그것을 구상 선생님한테서 확인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없는 살림에 2억원을 내놓으시며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내세우지 않으신 것은 행위에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선생님의 행동은 꾸밈이 없으셨다. 구상 선생님은 비단 같이 고운 꾸며진 말(綺語)을 경계하시고 참말만을 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당신 스스로 참말과 참행동을 실천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의 가슴에 파고드는 영원한 가르침이 되었다.우리 시대의 큰 스승이 남긴 마지막 말씀인 “고마워.” 역시 선생님의 진실이 가득 담긴 교훈이다.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모든 일에 고마워하면서 서로 돕고 살라는 당부의 말씀인 것이다. 방귀희 솟대문학 발행인 방송작가˝
  • 숙대 이경숙총장 “올해는 뮤지컬”

    성년의 날을 맞은 17일 대학총장이 학내 ‘성년의 날’ 축하공연에서 뮤지컬 배우로 깜짝 출연해 눈길을 끌었다. 숙대 이경숙(李慶淑 가운데)총장은 이날 오후 학내 르네상스플라자 4층 연주홀에서 열린 ‘성년의 날’ 기념행사에서 현란한 춤 솜씨를 보여 학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이 총장은 축하공연인 뮤지컬 ‘더플레이(The Play)’의 마지막 장면에서 백댄서로 깜짝 출연했고,총장 옆에는 20여명의 교무위원 교수들이 함께했다. 이 행사는 성년이 되는 재학생들을 축하하고자 매년 마련되는 깜작이벤트로 최근 숙대의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이총장은 지난 1994년부터 이 학교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2000년에는 ‘테크노댄서’로,2002년에 ‘탭댄서’로 변신하는 이벤트를 펼쳐 학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이 총장은 “학생들의 성인됨을 축하하는 날,함께하는 총장의 모습 속에서 권위주의를 넘어 진정한 스승의 모습으로 자리잡고 싶어 용기를 냈다.”고 소감을 밝혔다. 유영규기자 whoami@˝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0)草衣 선사의 꿈(上)

    풀옷을 이은 수행자 초의(草衣) 장의순(張意恂,1786~1866).그는 조선 후기 조선의 불교문화를 상징하는 참 스승이었다.또한 불교문화에서 비롯된 차살림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침체와 변질을 겪어 온 조선의 차문화를 새롭게 정립하여 물림한 한국 차살림의 완성자다. ●초의는 우리 차문화 완성한 선승 그가 완성한 차살림은 절집 승려만을 위한 것도,조선 양반 사대부들의 한가한 멋을 위한 것도,궁중이나 왕실 혹은 부자들의 호사를 위한 것도 아니다.초의가 생애 대부분을 보낸 19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조선의 운명이 벼랑으로 굴러 떨어지려는 듯 위기감이 높아지던 시기였다.시대의 위기는 조선사회를 대표하는 지식인들과 권력층,세도가들이 만들어 냈는데,이들 대부분이 중화사대주의자들로서 스스로 중국 문화의 아류로 자처했다. 중화사대주의자들의 성리학 세계관은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이었다.세계는 화(華)와 이(夷)로 갈라서고,‘화’만이 문화와 가치이며,‘이’는 문화도 가치도 없는 야만으로 규정했다.화는 세계의 지리적 중심이기도 한 중화(中華)로서 중국 민족의 배타적 독점물이라 단정지었다.그리하여 조선은 중국의 축소판,모조,근사치로서의 소화(小華)라고 여겼다.중화사대주의자인 조선의 성리학자,유생들은 중국에 대해서는 한없는 열등의식을 가졌지만 서양에 대해서는 근거없이 심한 우월의식을 지니고 있었다.이같은 열등과 우월의 이중구조적 세계관 속에서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것을 조선 지성인의 사명감으로 여기게 된 시대였다.초의는 생애 대부분을 이러한 시대에 대한 고뇌와 번민,그에 대한 극복과 희망의 제시를 위해 보냈다. 조선의 주된 이념인 성리학이 사변철학으로 타락하고,제도 문란과 권력의 부패로 국가의 근본인 서민들의 삶이 도탄에 빠져 있을 때,초의는 엉뚱하게도 차농사 짓는 일과 차 만들기,차 마시는 이야기를 그 시대의 화두로 삼았다.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발상이며 과연 누가 공감했을지 의아스럽기도 하다. ●병든시대 희망 제시하려 고뇌 초의는 차(茶)가 음식과 더불어 인간의 운명과 역사를 바꾸는 힘의 시원임을 깨달았다.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믿음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과 행동은 그대로가 진리로 받아들여졌다.정신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이용되어 온 방법들 중에서 음식과 차가 가장 널리 쓰여온 것은 인류의 오랜 경험이기도 했다.초의는 차라는 물건으로 술에 절어버린 조선 후기의 병들고 타락한 시대를 구원하고자 한 구도자였다. 19세기의 승려는 천민으로 분류되었다.조선의 이름난 사찰은 일년 내내 경향 각지에서 유람오는 양반,사대부,세도가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던 시대였다.그들은 조용한 여행자들이 아니었다.언제나 그 지역 현감이나 절 주지에게 그들의 행차 사실을 미리 알렸다.절 아래 마을까지 사인교나 남여(藍輿),나귀 등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라는 뜻이다.승려들은 이 명령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승려들이 고관대작이나 그들 식구를 등에 업고 오르내리기도 했다.어쩌다 실수하는 날이면 능멸과 매질을 피할 수 없었으니 노예나 다름이 없었다. 절에 놀러오면서 승려들이 메는 사인교를 탔던 양반 사대부들은 허랑방탕한 조선 후기 사회와 함께 비틀거리던 중화사대론자들이었다.그들은 차를 마시지 않았거니와 차를 알지도 못했다.다만 술을 알고 취해 살았을 뿐이다.차례(茶禮)라는 설,추석 명절에 조차도 차가 아닌 술로 조상제사를 모셨을 만큼 술에 빠져 살았다.국가의 원천이자 기둥인 농사꾼들은 무거운 부역과 세금,끈질긴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데도 양반사대부들은 술에 취해 살면서 중국 섬기기에 나라의 뼈가 휘었다.농민이 땀 흘려 가꾼 곡식으로 빚은 술을 마시면서 농민의 시름과 수난은 외면했다. 뿌리가 땅에 닿지 않는 관념의 잎만 무성한 성리학의 미몽을 좆는 위선에 차고 무능한 지식인들,젊어서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늙어서는 강산을 더럽히는 세도가들 앞에 초의가 말없이 제시한 것이 차였다.술 대신 차를,독선과 아집 대신 나눔과 양보를,핍박과 죽임 대신 함께 사는 지혜를 제시한 것이다. 차는 은혜를 알게 하는 가르침이며,새로운 시대를 위해서는 새로운 꿈이 필요했다.초의가 새롭게 꾼 꿈이 ‘동다문화(東茶文化)’로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정신의 집이었다.그의 ‘동다송(東茶頌)’은 단순히 중국 차문화와 역사에 관한 서른 한 마디 노래로 편술된 책이 아니라,‘東茶’ 즉 우리나라의 차를 칭송하기 위한 것이었다. ●술대신 차·독선대신 지혜 전파 서른 한 마디 노래 중에 우리나라 차의 빛깔,향기,맛의 우수성이 결코 중국차에 못지 않다는 매우 짧은 한 구절이 숨어 있다.초의가 전혀 새롭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중국 차문화 얘기를 늘어놓다가 슬쩍 우리나라 차의 우수성을 간략하게 끼워 넣은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 역사 전체를 통틀어 놓고 보아도 조선의 것이 중국보다 우수하다고 자신있게 말한 경우는 많지 않다.아니 거의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모든 것은 오로지 중국에서 근원하고,의지해왔으며,중국으로부터 떨어져서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다고 믿어 온 중화사대주의자들은 감히 조선의 것이 중국 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아무리 조선의 것이 중국 것보다 우수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사실대로 말하고 책으로 엮어낸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는 위험이라고 여겼다.중국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했다. 그런데 초의라는 한 승려가 우리나라의 차가 중국 차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글로 적은 것이다.짧은 이 한 문장이 지닌 뜻은 참으로 위대하다.멀리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동족인 백제를 멸망시킨 그 바보짓 이후 1200여년이 지나는 동안 신라,고려,조선은 한결같이 중국 우월론자들에 의하여 좌우되어 왔다. 다만 조선의 세종임금이 중국 문자가 아닌 조선의 문자를 만들어 널리 쓰고자 했었다.그러나 한문 망령에 덮어 씌인 중화사대론자들은 한글을 암클, 즉 여자들이나 쓰는 글이니 언문(諺文)이라 깎아내렸었다.모든 것을 중국에다 의지했다.심지어 삼국사기(三國史記)라는 역사책은 우리나라 고유의 차문화를 아예 없애버린 위에 통일신라 시대인 828년에 당나라로부터 차 종자를 가져다 왕의 명령으로 지리산에 심은 것을 우리나라 차의 기원이라고 적기까지 했다. ●‘동다승’ 저술 우리차 우수성 알려 중국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고려 스스로가 무릎을 꿇고 역사 사실을 왜곡하여 중국의 무릎 아래로 기어든 수치이자 씻을 수 없는 모욕이다. 이렇듯 1200여년 동안 계속된 비굴한 태도를 처음으로 고쳐 잡은 것이 초의의 글귀였다.그것도 중국 문화의 자존심이자 세계 속의 자긍심인 차에 대하여 중국차보다 우리나라 차가 우수하다고 말한 것은 정치적 고려에서가 아닌 사실을 바탕으로 한 초의의 민족문화론이었다. 2004년 5월,지금 이 시간에도 한국의 많은 차인들은 조선의 중화사대론을 계승한 적자임을 긍지로 여기면서 중국 차문화를 선전하는 전도사로서 활보하고 있다.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140여년 전 민족문화의 선각자 초의스님의 동다문화 앞에서 어찌 고개 들고 활보할 수 있는가? 부끄러워하라.또 부끄러워하라. ˝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0)草衣 선사의 꿈(上)

    풀옷을 이은 수행자 초의(草衣) 장의순(張意恂,1786~1866).그는 조선 후기 조선의 불교문화를 상징하는 참 스승이었다.또한 불교문화에서 비롯된 차살림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침체와 변질을 겪어 온 조선의 차문화를 새롭게 정립하여 물림한 한국 차살림의 완성자다. ●초의는 우리 차문화 완성한 선승 그가 완성한 차살림은 절집 승려만을 위한 것도,조선 양반 사대부들의 한가한 멋을 위한 것도,궁중이나 왕실 혹은 부자들의 호사를 위한 것도 아니다.초의가 생애 대부분을 보낸 19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조선의 운명이 벼랑으로 굴러 떨어지려는 듯 위기감이 높아지던 시기였다.시대의 위기는 조선사회를 대표하는 지식인들과 권력층,세도가들이 만들어 냈는데,이들 대부분이 중화사대주의자들로서 스스로 중국 문화의 아류로 자처했다. 중화사대주의자들의 성리학 세계관은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이었다.세계는 화(華)와 이(夷)로 갈라서고,‘화’만이 문화와 가치이며,‘이’는 문화도 가치도 없는 야만으로 규정했다.화는 세계의 지리적 중심이기도 한 중화(中華)로서 중국 민족의 배타적 독점물이라 단정지었다.그리하여 조선은 중국의 축소판,모조,근사치로서의 소화(小華)라고 여겼다.중화사대주의자인 조선의 성리학자,유생들은 중국에 대해서는 한없는 열등의식을 가졌지만 서양에 대해서는 근거없이 심한 우월의식을 지니고 있었다.이같은 열등과 우월의 이중구조적 세계관 속에서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것을 조선 지성인의 사명감으로 여기게 된 시대였다.초의는 생애 대부분을 이러한 시대에 대한 고뇌와 번민,그에 대한 극복과 희망의 제시를 위해 보냈다. 조선의 주된 이념인 성리학이 사변철학으로 타락하고,제도 문란과 권력의 부패로 국가의 근본인 서민들의 삶이 도탄에 빠져 있을 때,초의는 엉뚱하게도 차농사 짓는 일과 차 만들기,차 마시는 이야기를 그 시대의 화두로 삼았다.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발상이며 과연 누가 공감했을지 의아스럽기도 하다. ●병든시대 희망 제시하려 고뇌 초의는 차(茶)가 음식과 더불어 인간의 운명과 역사를 바꾸는 힘의 시원임을 깨달았다.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믿음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과 행동은 그대로가 진리로 받아들여졌다.정신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이용되어 온 방법들 중에서 음식과 차가 가장 널리 쓰여온 것은 인류의 오랜 경험이기도 했다.초의는 차라는 물건으로 술에 절어버린 조선 후기의 병들고 타락한 시대를 구원하고자 한 구도자였다. 19세기의 승려는 천민으로 분류되었다.조선의 이름난 사찰은 일년 내내 경향 각지에서 유람오는 양반,사대부,세도가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던 시대였다.그들은 조용한 여행자들이 아니었다.언제나 그 지역 현감이나 절 주지에게 그들의 행차 사실을 미리 알렸다.절 아래 마을까지 사인교나 남여(藍輿),나귀 등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라는 뜻이다.승려들은 이 명령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승려들이 고관대작이나 그들 식구를 등에 업고 오르내리기도 했다.어쩌다 실수하는 날이면 능멸과 매질을 피할 수 없었으니 노예나 다름이 없었다. 절에 놀러오면서 승려들이 메는 사인교를 탔던 양반 사대부들은 허랑방탕한 조선 후기 사회와 함께 비틀거리던 중화사대론자들이었다.그들은 차를 마시지 않았거니와 차를 알지도 못했다.다만 술을 알고 취해 살았을 뿐이다.차례(茶禮)라는 설,추석 명절에 조차도 차가 아닌 술로 조상제사를 모셨을 만큼 술에 빠져 살았다.국가의 원천이자 기둥인 농사꾼들은 무거운 부역과 세금,끈질긴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데도 양반사대부들은 술에 취해 살면서 중국 섬기기에 나라의 뼈가 휘었다.농민이 땀 흘려 가꾼 곡식으로 빚은 술을 마시면서 농민의 시름과 수난은 외면했다. 뿌리가 땅에 닿지 않는 관념의 잎만 무성한 성리학의 미몽을 좆는 위선에 차고 무능한 지식인들,젊어서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늙어서는 강산을 더럽히는 세도가들 앞에 초의가 말없이 제시한 것이 차였다.술 대신 차를,독선과 아집 대신 나눔과 양보를,핍박과 죽임 대신 함께 사는 지혜를 제시한 것이다. 차는 은혜를 알게 하는 가르침이며,새로운 시대를 위해서는 새로운 꿈이 필요했다.초의가 새롭게 꾼 꿈이 ‘동다문화(東茶文化)’로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정신의 집이었다.그의 ‘동다송(東茶頌)’은 단순히 중국 차문화와 역사에 관한 서른 한 마디 노래로 편술된 책이 아니라,‘東茶’ 즉 우리나라의 차를 칭송하기 위한 것이었다. ●술대신 차·독선대신 지혜 전파 서른 한 마디 노래 중에 우리나라 차의 빛깔,향기,맛의 우수성이 결코 중국차에 못지 않다는 매우 짧은 한 구절이 숨어 있다.초의가 전혀 새롭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중국 차문화 얘기를 늘어놓다가 슬쩍 우리나라 차의 우수성을 간략하게 끼워 넣은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 역사 전체를 통틀어 놓고 보아도 조선의 것이 중국보다 우수하다고 자신있게 말한 경우는 많지 않다.아니 거의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모든 것은 오로지 중국에서 근원하고,의지해왔으며,중국으로부터 떨어져서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다고 믿어 온 중화사대주의자들은 감히 조선의 것이 중국 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아무리 조선의 것이 중국 것보다 우수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사실대로 말하고 책으로 엮어낸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는 위험이라고 여겼다.중국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했다. 그런데 초의라는 한 승려가 우리나라의 차가 중국 차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글로 적은 것이다.짧은 이 한 문장이 지닌 뜻은 참으로 위대하다.멀리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동족인 백제를 멸망시킨 그 바보짓 이후 1200여년이 지나는 동안 신라,고려,조선은 한결같이 중국 우월론자들에 의하여 좌우되어 왔다. 다만 조선의 세종임금이 중국 문자가 아닌 조선의 문자를 만들어 널리 쓰고자 했었다.그러나 한문 망령에 덮어 씌인 중화사대론자들은 한글을 암클, 즉 여자들이나 쓰는 글이니 언문(諺文)이라 깎아내렸었다.모든 것을 중국에다 의지했다.심지어 삼국사기(三國史記)라는 역사책은 우리나라 고유의 차문화를 아예 없애버린 위에 통일신라 시대인 828년에 당나라로부터 차 종자를 가져다 왕의 명령으로 지리산에 심은 것을 우리나라 차의 기원이라고 적기까지 했다. ●‘동다승’ 저술 우리차 우수성 알려 중국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고려 스스로가 무릎을 꿇고 역사 사실을 왜곡하여 중국의 무릎 아래로 기어든 수치이자 씻을 수 없는 모욕이다. 이렇듯 1200여년 동안 계속된 비굴한 태도를 처음으로 고쳐 잡은 것이 초의의 글귀였다.그것도 중국 문화의 자존심이자 세계 속의 자긍심인 차에 대하여 중국차보다 우리나라 차가 우수하다고 말한 것은 정치적 고려에서가 아닌 사실을 바탕으로 한 초의의 민족문화론이었다. 2004년 5월,지금 이 시간에도 한국의 많은 차인들은 조선의 중화사대론을 계승한 적자임을 긍지로 여기면서 중국 차문화를 선전하는 전도사로서 활보하고 있다.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140여년 전 민족문화의 선각자 초의스님의 동다문화 앞에서 어찌 고개 들고 활보할 수 있는가? 부끄러워하라.또 부끄러워하라.
  • 儒林(94)-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조광조가 소학(小學)을 열심히 읽었던 것은 그의 스승 김굉필로부터 받았던 영향 때문이었다. 소학은 남송시대 주자(朱子)의 감수 아래 그의 제자인 유청지(劉淸之)가 편찬한 책으로 대학(大學)에 대응된 말이며,초보교육을 위해 아동에게 일상적 예의범절과 어른을 섬기고 벗과 사귀는 도리를 가르치는 목적으로 어릴 때부터 유교적 윤리관을 가르치기 위한 아동의 수신서(修身書)로 장려되었던 모든 교육기관에서 필수교과서로 읽힌 책이었으며,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었던 책이었다. 특히 조광조의 스승 김굉필은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불릴 만큼 소학을 읽는 데만 열중하였다.김굉필은 소학을 읽은 후 독소학(讀小學)이란 시를 지었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문을 배우고도 천기를 알지 못하더니 소학의 글 속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네(業文猶未識天機 小學書中悟昨非).” 김굉필이 소학에 깊이 빠진 것 역시 그의 스승 김종직의 영향이었는데,김종직 역시 그의 부친이었던 김숙자(金叔滋)로부터 소학의 중요성을 전수받게 되었으므로 이로부터 소학을 중시하는 ‘소학파’란 학통(學統)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학통은 특히 고려 신하로 굳게 지조를 지켰던 길재(吉再)와 세조의 쿠데타에 항의하여 관직을 버린 김숙자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핵심적 교재로 사용되고 있었다. 조광조는 스승의 영향을 받아 소학을 중심으로 하는 경전들과 중국의 역사서인 ‘통감강목’에 의지하여 연보에서 기록된 것처럼 주위사람들로부터 미치광이란 말을 들을 만큼 이곳 일대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던 것이다. 경사진 오르막길을 오르자 곧 다시 내리막길이 나타났다.거의 다 왔는데 안내판이 나타나지 않아 잠시 차를 멈추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려 하는데 멀리 표지판이 보였다.한눈에 유적지를 나타내는 갈색 이정표였다.일단 갈색 표지판이 나타난다는 것은 가까운 곳에 유적이 있다는 반가운 신호였으므로 나는 그대로 차를 몰고 다가가 보았다. “심곡서원” 마침내 어렵사리 미로를 헤치며 찾아온 뒤끝에 목적지인 심곡서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서원으로 들어가려면 왼쪽으로 급커브를 틀어 낮은 분지로 들어가야 했으므로 나는 조심스럽게 오가는 차량이 있는가를 살피며 샛길로 접어들었다.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텃밭을 만들어 채소를 가꾸고 있기 때문일까,작은 공터들이 보이고 둘러싸인 야산에는 온통 아파트의 건물들이 병풍을 두르고 있었다.그 공터에 초라한 몇 개의 건물이 보이고 마침내 홍살문(紅箭門)이 나타났다. 보통 홍살문은 능이나 묘,궁,관가들의 입구에 세운 것으로 두 개의 둥근기둥을 올리고 지붕이 없이 붉은 살을 쭉 박고 가운데 태극 문양을 새긴 문이었다.붉은 칠을 한 것은 잡귀신을 쫓고,홍살문 안에는 위대한 사람의 신위가 있으므로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은 반드시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라는 주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도로변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우뚝 서 있었다.‘누구든지 그 앞을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가진 석비로 품귀에 따라서 1품 이하는 10보,3품 이하는 20보,7품 이하는 30보 앞에서 내려 걸어가게 되어 있는 ‘대소인원개하마비(大小人員皆下馬碑)’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홍살문 안으로 작은 주차장이 보였으므로 그대로 차를 몰고 들어가 그곳에 차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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