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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236)-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36)-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염유의 말을 듣자 자공이 대답하였다. “글쎄요. 제가 스승에게 여쭈어 보겠습니다.” 자공은 그러나 직접적으로 공자에게 물어볼 수는 없어서 간접적인 은유로서 의사를 타진해 보려한다. 직선적인 성격의 자로와는 달리 외교술에 뛰어난 자공이었으므로 우회적인 방법으로 스승의 뜻을 살펴보았던 것이다. 자공은 들어가서 공자에게 여쭈어 보았다.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 “옛날의 현인들이시다.” “허지만” 자공은 말을 이었다. “현인들이심이 분명하였지만 결국 굶어죽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백이와 숙제는 세상을 원망했을까요.” “원망하다니.” 공자는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그들은 인(仁)을 추구하여 인을 얻었는데 어찌 원망하였느냐.(求仁得仁又何怨)” 이 말을 들은 자공이 나와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 “선생님께서는 위나라의 임금을 위해 일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자공은 공자에게 ‘위나라의 임금을 위해 일을 하시겠습니까.’라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고 다만 주나라의 무왕이 천하를 통일하자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뜯어먹고 살다 죽은 백이와 숙제의 예를 들어 공자의 속마음을 타진해 본 것이었다. 이에 공자는 ‘인으로서 인을 구했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아버지 괴외를 무력으로 제지한 출공밑에서 벼슬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굶어죽은 백이와 숙제처럼 인을 추구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 이에 제자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특히 직선적인 성격의 자로는 스승의 이런 태도를 도저히 간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회적인 방법으로 스승에게 물었던 자공과는 달리 정공법으로 공자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만일 위나라의 임금이 선생님을 모셔다가 정치를 부탁하신다면 선생님은 무엇부터 먼저 하겠습니까.” 이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나 같으면 반드시 명분 먼저 바로 잡겠다.” 이 말을 들은 자로가 대답한다. “아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느닷없는 자로의 탄식에 의아해진 공자가 다시 물었다. “그것 때문이라니” “세상 사람들이 선생님이 세상일에 너무 동떨어진 생각을 하고 계시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만 생각하신다는 뜻이겠지요. 도대체 이름 같은 것을 바로 잡아서 어찌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자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고리타분하게 만사의 이름부터 바로 잡겠다는 스승의 대답을 듣는 순간 단순한 자로는 순간 화가 났던 것이다. 이에 공자는 탄식하여 말한다. “자로 너까지 이러할 수 있단 말이냐!”
  • 그림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만난다

    그림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만난다

    요즘 서점의 신간코너에 가면 ‘그림책’이 부쩍 눈에 많이 띈다. 미술작품에 그럴 듯한 이야기를 버무린 단행본들이다. 고전명화에 신화를 섞은 것, 현대작품에 에세이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 것, 화가의 삶과 그림 이야기 등등. 전통적 필자였던 미술평론가나 미술사가는 물론이고, 작가 스스로 또는 큐레이터들까지 앞다퉈 글쟁이로 데뷔 중이다. 추측컨대 큐레이터는 나름대로 자신이 쌓아온 흔적과 성과에 대한 정리의 욕구 때문에, 화가들은 작품 이면에 숨은 치열함의 흔적을 남기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이 책들은 대체로 쉽게 읽히는 것들이어서 예술에 대한 독자들의 지적 허영심 혹은 갈증을 채워주기에 안성맞춤이다. 이번 주엔 특히 각각 특색이 뚜렷한 단행본 3권이 출간됐다. 근대 200년 우리 화가들의 이야기를 묶은 ‘畵傳(화전)’,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를 서양의 고전명화와 버무린 ‘로망스’, 명화(名畵)란 널리 알려진 그림이 아니라 울적한 가을날 따뜻한 위로가 되는 그런 그림이라고 주장하는 한 젊은 큐레이터의 ‘사랑한다면 그림을 보여줘’가 바로 그것이다. 지은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풀어내며 그림속으로 들어가는지, 화가들의 삶과 예술정신의 내면을 어떻게 넘나드는지 보기만 해도 제법 흥미롭다. (최열 지음, 청년사 펴냄,2만 4000원)은 미술사가인 지은이의 말대로 ‘그림을 통해 찾아 헤맸던’ 화가들의 이야기다. 지은이는 ‘만나기로 작정했지만 이미 세상을 떠나버렸기에 문득 그들이 남겨둔 그림 속으로 걸어들어가 그들을 만났다.’고 했다. 한데 그들이 살아 있지 않기에 오히려 텅빈 마음 같아 그들의 빈터에서 편안히 만났고, 그 때마다 글을 썼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만난 그들은 누군가. 바로 19세기 묵장의 영수로 불리는 조희룡에서 격정의 시대정신을 보여준 이응노까지 200여년에 걸쳐 각기 독특한 스펙트럼을 보여준 화가 28명이다. 그 안엔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인연을 보여준 김정희외 허련, 휘황한 천재의 빛을 남긴 김수철, 단아함과 충실함에 깃든 정열의 소유자 윤희순, 우주의 질서에 도전한 유영국, 아름다운 감옥의 죄수를 연상케하는 김환기,20세기 신화의 탄생 박생광이 포함된다. 지은이는 추사 김정희와 제자 소치 허련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추사 자신은 난초 그림과 서예에 집중했으므로 회화 창작의 욕망을 구현해줄 누군가 필요했고, 그가 바로 소치였다. 소치는 김정희가 꿈꾸던 세계를 현실에 형상화했고, 이후 남도 산수화의 종장이요 문인산수화풍을 조선에 아로새긴 거장으로 우뚝 섰다.‘세한도’‘산수도’ 등 그의 거칠고도 깔끔한 화폭들은 당대에 이미 절정의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었으며, 이같은 허련에 대해 조희룡은 “그림을 통해 시에 들어가고, 시를 통해 선에 들어갔다.”고 평가했다.’시종일관 거친 듯하면서 세밀하게, 군더더기 하나 없이 지은이는 당대의 붓장이 28명의 삶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촘촘히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명옥 지음, 시공사 펴냄,1만 4000원)는 중세때 그야말로 ‘전설적인 세기의 사랑’ 이야기를 남긴 4쌍의 가슴저린 로맨스를 뼈대로 한다. 평소 ‘연애의 정수는 로망스임을 의심치 않았다.’는 지은이는 “요즘들어 신파조로 폄하하며 왕따시킨 로망스를 제자리로 복권시킬 필요가 있다.”고 집필 동기를 밝힌다. 미술관장인 그는 먼저 단테의 ‘신곡’에서 로망스의 모티브를 찾는다. 단테가 지옥의 제2원에서 연인 사이인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를 만나고, 이들의 애절한 사연에 충격을 받고 혼절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두 연인이 한 소설속 남녀 주인공의 달콤한 입맞춤에 자극을 받아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입술을 찾고, 지옥까지 함께하는 영원한 연인관계로 빠져드는 이야기를 당대의 거장들이 표현한 그림에 버무린다. 또 아더왕에게 충정을 맹세한 기사 랜슬롯과 아더왕의 부인 귀네비어의 불같은 사랑,‘사랑의 묘약’을 마시고 서로에게 매혹당하나 끝내 둘 다 세상을 떠난다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가 뒤를 잇는다. 마지막엔 다시 단테로 돌아간다. 단테는 스탕달의 이른바 ‘사랑의 결정작용’을 통해 오염된 영혼을 정화시키고,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는 베아트리체를 얻어 사랑의 완결을 이룬다는 이야기다. (공주형 지음, 학고재 펴냄,1만 5000원)에선 풋풋한 삶의 이야기를 다양한 그림을 통해 이야기한다. 다섯살과 여덟달 짜리 아이를 둔 젊은 주부 큐레이터인 지은이는 때로 왜 내 삶은 밀레의 ‘만종’이 전하는 진정한 평화를 하락받지 못할까, 나는 왜 베르메르의 ‘레이스 뜨는 여자’가 갖고 있는 숭고한 여유를 건너뛰어야 하는 것일까 의아해 한다. 하지만 절망하는 실직자와 그 옆을 지켜주는 한 남자가 등장하는 박수근의 ‘실직’은 엄마이자 아내, 딸이자 며느리인 그에게 상생의 지혜를 일깨워주었고, 김상유의 ‘세심정(洗心亭)’은 삶의 속도에 치여 사는 지은이에게 차 한 잔의 여유를 권했으며, 반복되는 일상의 우울을 하늘 높이 날려보낼 수 있었던 것은 샤갈의 ‘파란 풍경속의 연인’ 덕분이었다고 고마워한다. 어떤 그림이 있어 그 그림이 나에게 오늘 저녁 퇴근길에 동행이 되고, 그 그림 앞에서 가쁜 호흡을 고를 수 있다면 그게 명화가 아니겠느냐며 그는 독자들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마치 지은이가 그의 아이들에게 설명하듯 쉽고 다정하게 풀어가는 그림 이야기, 그리고 그림을 보는 눈이 더없이 따사롭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儒林(235)-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35)-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그러나 기다리는 사람, 공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초나라의 현인으로 알려진 미생묘란 사람이 이 무렵 공자에 대해서 혹평을 서슴지 않았는데, 그 내용이 논어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공구는 무엇 때문에 악착같이 서성거리며 살고 있는가(丘何爲是栖栖者與). 말재주를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니냐.” 미생묘가 말하였던 서서(栖栖)의 뜻은 몹시 분주하게 정신없이 살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말로, 마음이 급하여 허둥지둥하며 어찌할 줄을 모르는 ‘황황망조(遑遑罔措)’와 같은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공자를 비웃는 표현의 극치였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공자는 담담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감히 말재주나 피우려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고루함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 있을 따름이다.” 어쨌든 공자는 더 이상 초나라에 머물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또다시 위나라로 출발하는데, 이미 세 번이나 찾아갔었던 위나라를 찾아간다는 것은 그 무렵 공자의 생활이 얼마나 여의치 않았는지를 말해주는 단적인 예인 것이다. 공자가 또다시 위나라를 찾아갔을 때에는 노나라의 애공 6년(기원전 489년) 공자의 나이 63세 때였다. 56세에 시작된 주유천하가 이미 8년째에 접어든 종반기 무렵이었는데 공자는 물론 제자들도 모두 지쳐 있었다. 스승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던 제자들은 극도의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으나 공자가 다시 위나라에 입국했을 무렵부터는 각자 자생하여 자구책을 모색할 때였다. 제자들은 더 이상 스승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나가 독자적인 활로를 개척하는 시기였던 것이다. 공자가 위나라에 입국했을 때는 그나마 공자를 우대하였던 영공은 이미 죽고 그의 손자인 출공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원래는 태자 괴외가 계승하여 왕위에 오르는 것이 법도였으나 아버지의 음탕한 부인인 남자를 죽이는 것에 실패하고 외국으로 도망쳤다가 돌아오려는 것을 무력으로 막은 사람이 바로 출공이었던 것이다. 행여 왕위를 빼앗길까 하여 외국으로 망명해 있다가 돌아오는 아버지 괴외의 귀국을 무력으로 막았던 출공의 무례를 열국의 제후들은 자주 꾸짖고 있었다. 그러므로 위나라로 돌아가는 스승에게 제자들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도 지금까지 예를 보면 위나라에서만큼은 공자가 제대로 대접을 받았고 출공 역시 제후들의 비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공자를 등용하여 이를 모면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출공은) 공자의 보좌를 받아 정치를 잘해 보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야말로 공자가 등용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기대를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불안하였다. 평소에 불의를 좇지 아니하는 스승의 성품을 봐서 출공의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기대 반 불안 반의 아슬아슬한 제자들의 심경이 논어에 다음과 같은 장면으로 등장하고 있다. 스승 공자가 위나라에서 출공의 제안을 받아들여 벼슬에 나설까 말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힌 제자들 중 먼저 염유(有)가 말을 꺼내었다. “선생님께서 이번에는 위나라의 임금을 위해 일을 하실까요.”
  • [내 인생의 등대] 박홍섭 마포구청장-사생취의(捨生取義)

    [내 인생의 등대] 박홍섭 마포구청장-사생취의(捨生取義)

    “중·고등학교 시절 한 분의 선생님이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줬다면 너무 뻔한 스토리 아닌가요? 흔치 않은 이야기를 제공해야 하는데 어쩌나….”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성미산 자락 마포구청에서 만난 박홍섭(63) 구청장은 자신의 이야기는 ‘기사거리’가 될게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6·25가 발발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읜 박 구청장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아버지와도 같은 평생의 스승 고(故) 서기원(徐基元) 선생을 만났다. 서 교장은 숭문 중·고등학교의 기틀을 닦은 분으로 한국 사학교육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 “사부(師父)로 모셨어요. 내 평생의 지침이 돼 왔던 사생취의(捨生取義)란 말도 그 분으로부터 배웠고, 크고 작은 일에 대해 항상 명확하게 시비를 가려주셨던 현명한 분이셨죠.” ‘사생취의’란 의로움을 구하기 위해 목숨도 버린다는 뜻. 박 구청장은 서슬퍼렇던 시절 험난한 노동운동의 길을 걸었던 것도 모두 ‘사생취의’란 한 마디 때문이었다고 회고한다. “법대에 진학했지만 고시공부보다는 노동법 공부에만 열을 올렸어요. 사부의 말씀과 내 삶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의로움’이란 결과가 나오더라고요. 당시에는 ‘노동’이란 말만 꺼내도 ‘빨갱이’ 취급받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결단이 필요했죠.” 박 구청장은 ‘사생취의’를 실천하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목숨을 버리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오히려 의로움이 무엇인지 아는 게 더 어렵죠. 이것이 독서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책을 많이 읽어서 진정한 정의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죠.” 박 구청장은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구청공무원의 승진에 ‘책읽기’를 반영하겠다고 강조했다. 행정의 최일선에서 적극적인 대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공무원들에게는 순간적인 판단력이 필요하고, 그 능력을 배양시키기 위해서는 독서가 필수적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최인훈의 ‘광장’,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라이트 밀스의 ‘들어라 양키들아’ 등이 재밌게 읽었던 책입니다. 기본적으로 역사인식이 바탕이 돼야 현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제 신념이죠.” 김기용기자 kiyong@seoul.co.kr
  • 儒林(234)-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34)-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중국사상 최고의 해학과 비유의 천재였던 장자가 미치광이 접여로부터 질타당한 공자의 모습을 그대로 방관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장자는 접여의 노래를 인용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산에 나는 나무는 유용한 까닭에 베어지니 이는 자기가 자기를 베는 것이요, 등잔불은 불붙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제가 저를 태운다. 계수(桂樹)나무는 그 뿌리를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베어지고, 옻은 칠하는 데 쓰이기 때문에 상처를 입는다. 어찌된 셈인지 세상 사람들은 다 유용한 곳의 용도는 알면서도 무용한 곳의 용도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는가.” 불가능한 일임을 알면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가시밭길을 가는 공자. 세상을 달관하고 정신적 자유를 즐기며 사는 미친 척하는 광인 접여. 공자의 눈으로 보면 접여는 미친 사람이지만 접여의 눈으로 보면 공자야말로 진짜 미친 사람인 것이다. 사기에 보면 공자는 이 노래를 듣고 수레에서 내려 접여와 얘기를 나누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접여는 피해 달아나버림으로써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어쨌든 접여의 노래를 통해 그 무렵 공자가 가시밭길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위대함은 이 가시밭 속에서도 자신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점이었다. 소왕으로부터도 소외받은 절대 고독 속에서도 공자는 좌절하지 않고 기다렸다. 기다림은 인간만이 가진 최고의 미덕.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야말로 바로 기다림인 것이다. 인내와 기다림은 같은 뜻인 것 같지만 실은 다르다. 인내는 참는다는 자의식을 동반함으로써 고통이 따르지만 기다림은 참는다는 자의식 없이 견딤으로써 인격을 완성시킨다. 헐벗은 나무는 겨울을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봄을 기다림으로써 마침내 꽃을 피운다. 꽃은 인내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접여는 가시나무를 돌아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걸어가는 공자를 어리석다고 비웃었지만 공자가 지닌 위대함, 즉 기다림의 덕은 꿰뚫어 보지 못했던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 공자. 바로 이 무렵 논어에는 공자와 제자 자공이 나눈 대화가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공이 말하였다. ‘여기 아름다운 옥이 있습니다. 스승께서는 이것을 궤 속에 넣어 감추시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상인을 찾아 파시겠습니까.’ 이에 공자는 대답하였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그러고 나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을 덧붙였다. ‘나는 상인을 기다리는 사람이다.(我待賈者也)’” 이 말은 공자의 면모를 엿보게 하는 감동적인 말이다. 자공은 얼마 전 스승에게 ‘어째서 도를 약간 낮추어 절충하지 않습니까.’ 하고 절충안을 내놓았던 바로 그 제자. 따라서 자공이 공자에게 아름다운 옥을 궤 속에 넣어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파시겠습니까 하고 양자택일의 질문을 던진 것은 ‘좋은 상인’의 비유를 통해 현실적 타협을 재차 확인하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에 공자는 두 번이나 ‘팔아야지(沽之哉)’라는 말을 반복하여 강조하면서 자신은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공자는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기다림을 잃지 않았던 인격의 완성자였다.
  • 숭산 스님 발자취 ‘세계일화’… 해외포교 한평생

    “언제나 이 순간 밖에 없다.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마라. 우리는 오직 모를 뿐이다! 공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과 같이 있는 것이다. 우리 생활과 떨어진,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 생활의 영향을 그대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숭산 스님의 가르침은 명명백백하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니, 본래 있는 그대로에서 깨달음을 구하라는 것이다. 스님의 삶은 그 자체가 그대로 커다란 가르침이자 귀감이었다. “다 걱정하지 마라! 만고광명(萬古光明)이 청산유수(靑山流水)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열반에 든 숭산 대종사. 스님은 철저한 묵언수행을 원칙으로 했지만 일주일에 한번씩 법회를 열고 제자들과 선에 관해 편지글도 주고 받았다. 숭산 스님과 제자들 사이에 오간 질문과 대답이 ‘공안 인터뷰’다. 수행의 정도가 제각각인 제자들의 질문에 상황에 맞게 답을 들려주는 숭산 스님의 가르침은 부처님의 대기설법과도 통했다. 숭산 스님은 무엇보다 한국 선을 세계에 알린 해외포교의 선구자로 이름을 남겼다. 열반 직전까지 스님이 조실로 주석한 화계사는 한국불교 세계화의 전초기지였다. 스님의 열성적인 포교 덕에 홍콩, 미국, 캐나다, 폴란드, 영국, 스페인 , 브라질, 프랑스 등 세계 곳곳에는 어김없이 한국식 선원이 들어섰다.1989년에는 한국 선지식으로는 처음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포교 활동을 시작했고,1994년에는 베트남을 방문해 지도자급 승려들과 법거량(法擧揚, 불가의 스승이 제자의 수행 정도를 문답으로 점검하는 것)을 나누기도 했다. 숭산 스님은 1964년에는 한국 불교 최초로 승려대학교육과 종단이 학비를 제공하는 종비생 제도를 실시하는 업적을 남겼다. 한국불교 전파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던 숭산 스님의 마음 속에는 한국 근대불교 중흥의 선지식인 만공 스님의 가르침이 자리잡고 있었다. 만공은 수덕사에서 주석할 때 ‘세계일화(世界一花, 세계는 한 꽃)’라는 말을 남겼고, 숭산 스님은 이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숭산 스님의 독특한 수행지도를 통해 배출된 서양인 제자는 5만여명. 외국인 승려 가운데 직계 제자만 해도 50명이 넘는다.‘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화계사 국제선원장 현각 스님, 미국 캘리포니아 모하비 사막에서 한국식 절 ‘태고사’를 짓고 있는 무량 스님 등도 숭산의 제자다. 현각 스님은 2001년 경북 영주 현정사 주지로 취임하면서 세인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숭산 스님으로부터 “오직 할 뿐(Only Do)”이라는 가르침을 받은 무량 스님은 “숭산 스님은 대단히 융통성있는 스승이다. 미국과 미국인의 현실에 맞게 다양한 가르침의 방편을 쓰시는 분이었다.”고 회고한다. 숭산 스님은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친구들과 함께 부모님으로부터 500원을 훔쳐내 만주 국경을 넘어 독립군과 합세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의 정치적 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깨달은 스님은 결국 출가의 길을 걷게 된다. 수행승으로서의 숭산의 구도행각은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스님은 계를 받고 10일이 지나 원각산 부용암에서 백일기도에 들었다. 식사로는 솔잎을 말려 빻은 가루로 벽곡( 穀)을 하면서 매일 20시간 동안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했다. 그런가 하면 하루에도 몇번씩 얼음을 깨서 목욕을 하기도 했다. 마침내 100일이 되는 날, 스님은 갑자기 자신의 몸이 떠나 무한한 공간에 있음을 느꼈다.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스님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었으며, 모든 것이 참다운 자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숭산 스님은 “선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스님의 가르침으로부터 큰 의심 덩어리 하나 챙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족하다. ●숭산 스님 행장 ▲1927년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읍 출생 ▲1947년 공주 마곡사 출가 득도 ▲1949년 수덕사에서 고봉 선사를 법사로 비구계 수지 ▲1958년 화계사 주지로 취임 ▲1960년 대한불교 신문사 설립, 초대사장 취임 ▲1966년 일본 홍법원 개설, 초대원장 취임 1992년 홍콩 국제선원 개설 ▲1997년 대한불교 조계종 원로스님 ▲2000년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개원 ▲2001년 대한불교 조계종 법계스님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이매방 ‘춤인생 70년’ 기념무대

    이매방 ‘춤인생 70년’ 기념무대

    ‘하늘이 내린 춤꾼’ 우봉 이매방(77)의 춤인생 70년을 기리는 무대가 새달 3·4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다. 1927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우봉은 7살때 옆집에 살던 권번장의 권유로 권번 학교에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 초등학교 재학중 5년간 중국에 살면서 유명한 경극배우이자 무용가인 매란방으로부터 칼춤과 등불춤을 배웠다. 본명(이규태)대신 사용하는 예명은 스승의 이름에서 따온 것.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와 제97호 살풀이춤 보유자인 우봉은 전통춤의 원형을 누구보다 잘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승무와 살풀이춤외에 장검무, 기원무, 화랑도, 무녀도 등 15개 작품이 2시간30분 동안 선보인다. 이 중 승무는 제자 10여명과 함께 보여주고, 살풀이춤은 독무로 춘다. 스승 매란방에게서 배운 대륙적 정취가 돋보이는 ‘장검무’와 평화롭고 유연한 동작의 ‘검무’를 비교하면서 관람하는 재미도 맛볼 수 있다. 처음으로 공연하는 ‘초립동’과 ‘소고무’도 관심을 끄는 작품.1970년대 초연된 창작무 ‘일편단심’도 눈여겨볼 만하다. 무대에는 김명자, 김정녀, 진유림, 채향순 등 ‘우봉전통무용보존회’제자 100여명을 비롯해 승무와 살풀이춤 전수조교인 아내 김명자씨와 현대무용에서 한국무용으로 전공을 바꾼 외동딸 현주씨도 함께 출연한다.1만 5000∼5만원.(02)338-6420.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生生 인터뷰] 소리전수원 연 경기명창 김영임씨

    [生生 인터뷰] 소리전수원 연 경기명창 김영임씨

    소담스러운 첫눈이 쏟아진 지난 26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주택가 신축건물 지하에서는 차가운 어둠을 뚫고 ‘회심곡’ 한 소절이 새어 나왔다.“불보살님 은덕으로 아버님 전 뼈를 타고 어머님 전 살을 타고 칠성님께 명을 빌어….” 경기명창 김영임(52·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전수조교)이 최근 ‘소민(素民) 소리전수원’을 열었다.‘우리 소리꾼’으로 산 지 30여년. 후학을 길러낼 때가 됐다고 주변에서는 진작부터 채근을 했었다. 하지만 몇년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망설인 큰 일이었다. 이제, 축하 화분에서 뿜어나오는 난향(蘭香)이 그의 소리와 손잡은 실내는 구름 속처럼 아득하다. “모두를 위해 살아야겠다는 책임감 때문에요. 공연을 줄여서라도 시간을 만들자고 생각했고요. 지금까지 제게 박수를 보내준 사람들과 앞으로는 보다 많은 것을 공유하려고 합니다.” “내 나이 60줄에 들어서면 제자들이 더 좋은 소리로 무대에 설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미소 끝에 강단이 실렸다. ●소리·춤·장단 입체적으로 가르쳐 40여평 남짓한 전수원은 지난 12일 문을 열었다. 그의 소리를 배우고 싶은 열망들은 생각보다 컸다. 문을 열자마자 멀리 부산에서 찾아오는 주부수강생도 있다. 어렵사리 벌인 일, 내친 김에 강의 프로그램도 빡빡하게 짰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소리며 춤, 장단까지 입체적으로 가르친다.“제 손으로 소리 장단을 맞추는 건 당연하고, 춤도 따라야 소리의 기복을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유치부에서부터 일반부까지 수강생층도 다양하다. 멀리서 오는 어린 학생들이 많아져 조만간 스쿨버스를 마련할 요량이다. “길을 가다가도 야무지게 생긴 꼬마 아이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들곤 했어요. 저 아이의 소리를 다듬어 무대에 올릴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들을 실컷 만나게 됐으니, 소망의 한자락은 푼 셈이다. ●“좋은 소리 들려주는게 값진 보시” 김영임은 고등학교(한국국악예술학교)를 마치고 22세에 회심곡 음반을 처음 냈다. 자그마한 몸피에서 뿜어져 나오는 ‘큰 소리’에 세상사람들은 일찍부터 박수를 보내줬다. 늘 양지의 국악스타로 살 수 있었던 그다. 좋은 소리 들려주고 사는 게 얼마나 값진 보시(불교신자다)인지 모른다는 그는 “바쁘다는 핑계로 미뤘던 지방무료 공연이 요즘와선 그렇게 보람찰 수 없다.”며 웃는다. 인터뷰 전날에도 강릉문화원에서 마련한 경로무대에 무보수 위문공연을 다녀오느라 잠을 설쳤다. 지금까지 낸 음반은 20장이 넘는다. 해마다 5월이면 공연계를 설레게 하는 ‘김영임의 효 공연’도 내년이면 꼭 10년이 된다. “많이 받았으니 이젠 많이 돌려주며 살아야 될 것 같네요. 이 나이에도 ‘소리가 갈수록 좋아진다.’는 분에 넘치는 덕담을 듣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생각하죠. 나란 사람은 아플 틈도 없이 더 열심히 뛰어야겠구나 하고.” ‘소민’은 동국대 예술대학원 재학시절 스승인 목정배씨가 붙여준 아호. 김영임은 현재 중앙대 음악극과 겸임교수, 국악교육대학원 교수로 강단에도 선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이사람] 조선옥새 맥잇는 전각장 민홍규씨

    [이사람] 조선옥새 맥잇는 전각장 민홍규씨

    경기도 이천 시내를 벗어나 설성면 장천4리, 속칭 독정 마을에 이르면 가래나무가 인상적인 시골집이 하나 있다. 전통 옥새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옥새전각장 세불(世佛) 민홍규(51)씨의 집이다. 오죽(烏竹)과 어우러진 능진수원(能盡水源·생명이 다할 때까지 행한다)이라는 당호가, 집 주인이 하고 있는 일이 예사롭지 않은 것임을 일러준다. 토불(土佛) 황식에서 시불(示佛) 황소산, 석불(石佛) 정기호로 이어지는 전통 옥새의 제작기법을 계승해 오고 있는 유일한 인물인 그를 이천 집에서 만났다. ●열여섯살때 ‘석불’ 정기호 만나 인연 “서울생활을 접고 이곳에 내려온 지 10년이 됐습니다.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이곳은 용터라고 할 수 있어요. 땅의 기가 세, 아무나 살기 힘든 터라고 하지만 창작활동을 하기엔 더없이 좋은 장소이지요.” 민씨는 자신의 작업이 방해 받을까봐 동네 면사무소에서 만들어준 ‘옥새 보러가는 길’이란 집 안내 팻말도 없애 버렸다고 한다. 옥새는 왕이 사용하는 도장으로, 중국 진시황제가 옥에 새긴 도장을 쓰면서 ‘옥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옥새는 도화원 화공이나 교서관·서자관 관원 중에서 예술성과 장인정신을 인정받는 사람 한 명에게만 그 기술이 전수됐다. 위조를 막기 위해서다. 옥새의 전통을 외롭게 이어가고 있는 민씨로서는 그만큼 책임감이 클 수밖에 없다. 열 여섯 살에 석불 정기호를 만나 옥새와 인연을 맺은 민씨가 조선왕조 옥새 복원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5년 전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의 국새를 만든 전각예술의 대가 석불이 1989년 세상을 떠나자 옥새의 명맥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그는 밤잠을 잘 수 없었다. 이후 조선왕조실록, 경국대전,‘어보의궤’, 규장각 문서인 ‘보인부신총수’등 옛 문헌을 뒤지며 옥새 제작의 흔적을 찾아내는 데 더욱 몰두했다. ●옥새문화계승 우리나라밖에 없어 잘 알려진 대로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한 후 고종황제의 옥새를 찬탈하는 데 열을 올렸다. 옥새는 곧 왕권이자 국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제는 고종이 쓰던 73개에 이르는 옥새를 모두 빼돌렸다. 그중 절반가량은 현재 복원돼 있는 상태. 민씨는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은 해인 지난 98년 일제 때 소멸된 옥새 5과를 경기도 박물관에 복원 기증한 것을 비롯,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옥새를 만들어 기증했다.“돈이나 명예에는 욕심이 없습니다. 우리의 문화를 지킨다는 자부심만이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지요. 주위에서 나의 옥새 작업을 격려해 주는 분들이 쌀이며 가전제품이며 여러가지 정성어린 도움을 주고 있어요.” “전통방식의 옥새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중국은 문화혁명 이후 옥새의 맥이 끊어졌고, 일본도 국보급 전각가인 고바야시 도완이 지적했듯이 전통 옥새의 주조기술이 전수되지 않아 재현이 불가능한 상태예요. 국가를 상징하는 옥새는 소중하게 보존 계승돼야 합니다.” 민씨는 먼저 옥새와 옥새전각장이라는 이름의 내력부터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조선 고종 13년(1876)에 제작된 ‘보인소의궤’를 보면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을 보인(寶印), 그것을 만드는 장인을 보장(寶匠)이라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가 바뀐 뒤 고종이 임금의 도장이 보인, 어보(御寶)등 옥새보다 낮은 격으로 불려왔음을 알고 칙령을 내려 옥새라고 품계를 올려 부르게 된 것이지요. 이때부터 그것을 만드는 장인의 명칭도 보인을 새기는 보장에서 옥새를 ‘전각하는’ 옥새전각장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궁중문화 꽃이자 종합예술 옥새는 궁중문화의 꽃이자 명실상부한 종합예술이다.“옥새는 서예와 조각, 회화, 전각, 연금술, 도자기술, 주조기술 등 적어도 7개 분야를 모르고선 접근할 수 없다.”는 게 민씨의 말. 그런 점에서 민씨는 가히 ‘르네상스 맨’이라 할 만하다.1990년 현대서예협회를 만들어 글씨체 현대화운동을 주도한 민씨는 추상회화와 서예가 접목된 작품들을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서예 작품에 나부를 그려 넣어 ‘문제작가’ 소리를 듣기도 했다. 스무살 무렵부터 시작한 목가산(木假山) 작업은 그의 예술가적 독창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두툼한 황유목(黃油木) 판에 부조 형식으로 새겨진 산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예술이다. 민씨는 최근엔 모필 대신 죽필(竹筆)를 즐겨 쓰고, 칡뿌리 끝을 두드려 만든 갈필(葛筆)작업까지 시도하고 있다.‘자연과 호흡하는 예술’을 실현한다는 의미에서다. 또 예서와 행서, 초서, 전서, 해서 등 5체를 섞어 쓴 ‘녹서(綠書)’라는 새로운 서체의 병풍을 완성했는가 하면, 옥새가 묘사된 ‘예궐반차도(詣闕班次圖)’도 그리고 있다.“그러나 중요한 건 다시 옥새입니다. 창작의 고통과 희열은 옥새에 온전히 바쳐질 때 비로소 제값을 다할 수 있지요.” 민씨는 진흙 거푸집을 사용한 전통주조법을 계승하고 있다. 진흙용주(鎔鑄) 기법으로도 불리는 이것은 고대 주조기술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만드는 옥새는 인뉴(印 )에서 더욱 빛난다. 뉴( )는 도장 위에 새겨진 조각을 가리키는 말로, 고대에는 이것으로 관인(官印)의 등급을 표시하기도 했다. 민씨는 최근 삼족오(三足烏) 형상의 손잡이가 달린,4㎏이 넘는 옥새를 4년여 만에 완성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삼족오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해 속에 산다는 세발 달린 까마귀.“고구려 벽화에는 삼족오가 용이나 봉황보다도 그 위에 그려져 있어요. 격이 더 높다는 얘기이지요. 한 몸뚱이에 발이 세 개라 함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라는 동양사상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요. 삼족오는 태양의 상징입니다.” ●무형문화재 지정안돼 안타까워 어느새 옥새와 동의어가 된 세불 민홍규. 그에게는 요즘도 일본으로부터 귀화 요청이 끊이지 않는다.“일본은 문화가 아니라 사람을 수입하려 합니다.” 그의 쓸쓸한 한마디에서는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지금이야말로 살벌한 문화전쟁의 시대가 아닌가. 그런데도 옥새는 아직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하고 있어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민씨는 “문화상등국의 우선순위는 궁중문화의 보존과 대책에 놓여져야 한다.”는 유홍준 문화재 청장의 한 강연 내용을 들려주며 옥새문화는 결코 천민문화가 아님을 누누이 강조했다.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소돌이(小乭伊·옥새 제작용 망치)를 마치 자식인 양 대견스레 들여다보는 그에게서 장인의 체취를 느끼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는 요즘도 하루 두세 시간씩 자며 마당의 대왕가마를 지키고 또 옥새 관련 책들을 읽는다. 그 조그만 결실이 곧 ‘조선 옥새의 비밀-영새부(榮璽 )’(도서출판 인디북)라는 책으로 나올 예정이다. 영새부!옥새여 영원하라.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儒林(231)-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31)-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이심전심(以心傳心).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이 통한다는 말은 바로 가섭의 미소에서 비롯된 것. 이 미소를 보고 가섭을 자신의 정법제자임을 인증하며 석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인간이 본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묘덕)과 열반묘심(涅槃妙心:번뇌를 벗어나 진리에 도달한 마음)과 실상무상(實相無相:불변의 진리)과 미묘법문(微妙法門:오묘한 불법에 들어가는 길)과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문자나 경전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오묘한 진리)이 있다. 이것을 가섭에게 전해주마.” 석가가 가섭을 이심전심의 수제자로 삼았듯이 공자는 안회야말로 자신의 후계자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기는 공자가 미소를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그대의 말 그대로이다. 안회여, 네가 만일 부자라면 나는 너의 가재(家宰) 노릇이라도 할 터인데.” 공자는 이처럼 안회를 아끼고 사랑하였다. 논어에 보면 제자들 중에서 유독 안회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안회와 종일토록 말을 해봐도 전혀 어기는 일이 없어 어리석은 사람만 같다. 그러나 물러나면 그는 사생활을 성찰하며 내 말을 더욱 밝혀내고 있다. 안회는 절대 어리석지 않다.” 안회가 이처럼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였던 것은 가섭이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였다는 점에서 신기하게 일치한다. 이는 동쪽으로 온 달마(達磨)가 ‘지식을 버리면 버릴수록 자성(自性)이 밝아진다.’라고 말하였던 것처럼 안회가 지식을 버리고 ‘아는 것들로부터의 자유’를 얻음으로써 큰 어리석음(大愚)의 경지를 터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공자는 안회의 어리석음을 다음과 같이 찬탄하고 있다. “안회는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못 된다. 그는 내 말이면 무엇이나 기뻐한다.” 스승에게 도움을 주려고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자로나 자공과는 달리 어리석은 바보처럼 공자의 모든 말에 기뻐하였던 안회. 안회야말로 참스승 공자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았던 단 한 사람의 참제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안회가 공자에 앞서 30대 초반의 나이로 단명하자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天喪予 天喪予).’하며 통곡을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안회가 죽은 후에도 공자는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여러 번 안회에 대한 추억을 술회하는데, 훗날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왔을 때 애공이 ‘제자 중에서 누가 학문을 가장 좋아합니까.’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한 공자의 말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안회라는 사람이 학문을 제일 좋아해서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도 않고 과실을 거듭 범하지도 않았는데 불행히도 단명하여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죽고 이제 없으니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상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있던 안회.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안회의 가장 훌륭한 점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였던 학문적 태도였다. 안회는 머물러 있음을 경계하였다. 마치 고인 물은 썩듯이 자신의 세계에 안주하면 성장이 멈추어 버릴 것을 안 안회는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끊임없이 진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대해 공자는 안회를 다음과 같이 극찬한다. “애석하도다. 나는 그가 진보하는 것만 보았지 멈춰있는 것은 보지를 못하였다(惜乎 吾見其進也 未見其止也).”
  • 儒林(230)-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30)-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자로의 현실적 타협안은 얼핏 보면 현명한 것 같지만 실은 교묘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부정과 타락과 부패는 이런 타협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정치가는 자신의 통치술이 오직 국민을 위한 정도(正道)에 충실하면 그만인 것이다. 여론은 인기에 불과한 하나의 유행인 것. 이는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예술가는 그가 창조하는 작품이, 그림이, 음악이 좋은 씨앗의 역할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것이 좋은 열매를 맺고 못 맺음은 작가의 몫이 아닌 것이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씨앗의 수확까지 책임지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탐욕이며 여론을 조작하는 독재인 것이다. 그것이 누구이든 정치가든 기업이든 예술가이든 그들이 목표로 해야 할 일은 가라지가 아닌 좋은 씨앗을 뿌리는 일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말해 좋은 씨앗을 뿌리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으며, 마찬가지로 좋은 도를 행하면 반드시 그 결과는 좋게 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공자가 자공의 말처럼 도를 낮추어 현실과 타협하였더라면 공자는 천하를 제패하는 재상은 되었을지는 모르나 2500년 동안 내려오는 동양사상의 정수인 유가사상을 탄생시키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말하였던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것에 비할 수 있다.’라는 비유와 공자가 자로에게 말하였던 ‘훌륭한 농부는 씨를 잘 뿌릴 줄은 아나 반드시 수확을 잘 거둔다는 보장은 없다.’라는 비유는 결국 같은 하나의 진리인 것이다. 두 제자에게 실망한 공자는 마지막으로 안회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두 제자에게 했던 질문을 여전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던진다. “시경에 보면 ‘외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거늘 어째서 광야를 헤매고 있는가.’하고 읊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도가 그릇된 것일까. 우리가 어찌하여 그런 지경에 빠졌는가.” 이에 안회는 대답한다. “선생님의 도가 지극히 위대하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생님은 그 도를 계속 밀고 나가셔야 합니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받아들이지 않는 다음에야 참된 군자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도가 닦여지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의 결함이요, 도가 이미 크게 닦여졌는데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들의 치욕일 뿐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여기십시오. 받아들여지지 않은 다음에야 참된 군자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안회의 대답을 들은 공자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사기는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처음으로 공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공자는 어째서 처음으로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을까. 안회의 대답이 자신의 비위를 맞춘 위로의 말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것이 아니라 안회의 대답이 옳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안회의 말이 단지 옳았기 때문에 미소를 떠올린 것일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공자는 그토록 곤경에 있으면서도 올바른 분별력과 올바른 지혜를 갖춘 안회가 평소의 가르침과 일치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미소를 띠어 올렸을 것이다. 안회가 공자의 으뜸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안회가 스승을 ‘있는 모습 그대로의 공자’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석가가 자신의 수제자로 초라하고 어리석은 가섭(迦葉)을 지정하였듯이. 일찍이 석가가 영산(靈山)에서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였다. 그때 허공에서 연꽃이 떨어져 내리자 석가는 말없이 연꽃 한 송이를 집어 들어 제자들에게 이를 보였다. 제자들이 모두 그 뜻을 몰라 침묵하고 있었는데, 오직 가섭만이 얼굴을 환하게 펴서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염화미소(拈華微笑)란 말은 여기에서 나온 것. 석가의 마음을 가섭의 마음이 순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 [이경기의 스크린1인치]“샘~”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샘

    요즘 흥행가를 주도하고 있는 ‘여선생 VS 여제자’는 29살된 여선생이 꽃미남 미술 선생을 사이에 두고 초등학교 5학년 여제자와 사랑 싸움을 벌인다는 사연을 담고 있다. 여선생과 여제자는 모두 어려서 부친을 잃고 아빠와 같은 남자를 그리워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치 양보 없는 팽팽한 긴장관계는 성장 과정의 이같은 동병상련이 작용돼 결국 여제자의 양보(?)로 노처녀 선생이 공개적인 데이트를 하게 된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전남 여수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도회지에서 볼 수 없는 정겨운 학교 풍경을 담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성장한 386세대 관객들의 공감을 얻어내고 있다. 스승과 제자 사이를 다룬 할리우드 영화는 우리의 인간적 정서와는 달리 상당히 복잡한 내용을 담아 교육영화의 한 장르로 자리잡아왔다. 졸업 시즌만 되면 단골로 애청되는 루루의 주제곡 ‘To Sir with Love’로 명성을 얻고 있는 ‘언제나 마음은 태양’(67년)은 미국의 고질적인 병폐인 인종차별 문제를 교육 현장을 통해 꼬집은 대표적 작품. 흑인 엔지니어 마크(시드니 포이티어)는 투철한 사명감을 갖고 백인 빈민 자녀들이 통학하고 있는 이스트 엔드 학교로 부임한다. 첫날부터 ‘깜둥이’라는 조롱을 당한 마크는 온갖 구박과 야유 속에서 인간적인 접근법을 시도해 서서히 거친 백인 학생들의 마음을 열게 된다. 연필을 깎다가 칼에 베어 피를 흘리자 백인 학생들은 ‘어! 흑인 선생도 빨간 피를 흘리네!’라며 그가 배타적인 존재가 아닌, 함께 공존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가장 말썽을 피웠던 바바라(루루)가 졸업식 당일, 자신의 죄과를 반성하면서 ‘뜨거운 스승의 사랑에 감사 드린다.’는 노랫말을 담은 ‘To Sir with Love’를 불러주는 장면은 가슴 뭉클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일류 대학 진학을 위한 입시 교육에 몰두하고 있는 학교 당국의 교육 방침에 반발, 시와 음악이 흐르는 낭만적인 학급을 만들려다 학교와 학부모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고 교단에서 불명예 퇴진을 하게 되는 키팅 선생의 일화를 묘사한 작품 ‘죽은 시인의 사회’(89년). 키팅 선생의 가르침에 자극받아 출세지향적인 교육 정책에 반기를 드는 학생들의 모습은 서구 교단에 만연된 인간성 상실 교육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다. 이 영화는 어른들이 구축한 고루한 전통과 권위에 구속되지 말고 자신들의 품은 희망을 성사시키기 위해 ‘오늘을 즐겨라.’고 역설한 키팅 선생의 잠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유행시켰다. 영국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핑크 플로이드가 79년 발표한 2장짜리 앨범 ‘The Wall’을 토대로 해서 알란 파커 감독이 극영화로 각색한 것이 ‘핑크 플로이드의 벽’(82년). 안지오 전투에서 사망한 부친을 늘상그리워하는 청년 핑크가 성장하면서 겪는 여러 일화를 극복하기 벅찬 ‘벽’으로 설정해 놓았다. 수업 시간에 시를 썼다고 선생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체벌을 받은 핑크는 동료 학생들을 규합해 ‘우리는 더 이상 이런 교육은 필요 없다.’며 학교를 방화하고 집단 자살을 선택한다는 설정을 보여주어 한동안 국내에서는 상영 금지 영화로 낙인찍혔다. 부조리한 교단 문제를 고발하는 작품도 다수지만 대체적으로 교단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스승의 은혜의 한 구절처럼 ‘잘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다.’는 교훈을 일깨워주고 있다.
  • 25일 출범한 ‘최승희 춤연구회’ 김백봉 이사장

    “최승희 선생님은 항상 조국을 생각했어요. 또 무궁화가 있기에 춤을 출 수 있는 것이라며 조국 사랑을 늘 강조하셨지요.” 원로 무용가 김백봉(77)씨. 그는 전설적인 무용가로 알려진 최승희의 수제자이면서 동서지간이다.24일 저녁 김씨는 경희대에서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최승희 춤 연구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연구회 이사장직을 맡은 그는 “해외에서 활동 중인 최 선생의 제자들과 만나 한국무용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서겠다.”며 ‘최승희의 춤과 삶’을 연구할 것임을 피력했다. “최승희 선생님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무용가였으며 한국 무용계의 씨앗이 된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월북 이후 선생님의 삶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무용가로서 남긴 업적은 대단하지만 인간적인 조명은 잘 안 됐다고 생각합니다.” 스승의 춤에 대한 평가를 해달라고 하자 그는 “매우 아름답고 철저히 객석과 호흡하는 무용가였다.”면서 “오사카나 도쿄에서 공연할 때 대학생들이 환호를 지르며 기립박수를 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최 선생은 ‘평생 하루에 2시간씩만 연습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씀을 격언처럼 하셨다.”면서 “새벽 4,5시에 일어나 작품연습에 몰두할 정도로 춤을 사랑했다.”고 회고했다. “스승님은 항상 단발머리였죠. 머리핀 두 개만 꽂으면 머리 미용은 끝났습니다. 제가 머리핀을 자주 꽂아 드렸지요. 또 선생님은 제가 몸이 아프면 꼭 안아주셨습니다. 자신보다 항상 남을 배려하는 자세로 삶을 사셨지요.” 1911년 서울에서 태어난 최승희는 국내뿐만 아니라 파리와 뉴욕 등에서도 활발히 공연했다.1946년 월북한 최승희는 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를 개설해 활동하다가 1967년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씨는 13살 나이에 일본 도쿄에 있는 최승희를 찾아 무용에 입문,10여년 동안 제자로 활동했다. 최승희의 남편은 1920년대 유명한 문필가였던 안막(본명 안필승). 김씨는 17세때 안막의 동생인 안제승과 결혼했다. 해방후 김백봉 부부는 최승희 부부와 함께 월북했다가 6·25전쟁이 발발하자 아들을 데리고 월남했다. 김씨의 두 딸 안병헌·안병주씨와 세 손녀도 춤을 전공하고 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儒林(229)-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29)-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공자의 질문에 자공이 대답하였다. “선생님의 도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너무 큽니다. 그래서 천하가 선생님의 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어찌하여 도를 약간 정도 낮추어 절충하지 않으십니까.” 자공의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역시 실망하여 말을 이었다. “사(賜)야, 훌륭한 농부는 씨를 잘 뿌릴 줄은 아나 반드시 수확을 잘 거둔다는 보장은 없다. 또 훌륭한 공인은 물건을 기묘하게 만들 줄은 아나 반드시 사람들 맘에 드는 것만을 만든다고는 할 수가 없다. 군자는 그 도를 닦고 기강을 세우고 이것을 통제하고 정리할 수는 있어도 반드시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용납된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지금 그대는 자기의 도는 닦지도 않고 받아들여지기만을 바라고 있지 않은가. 사야, 너의 뜻이 원대하지 못하구나.” 똑같은 스승의 질문에 대해 자로와 자공의 대답은 근본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무인 기질이 뛰어나고 용감한 자로의 대답은 외뿔소도 호랑이도 아니면서 거친 광야를 헤매는 것은 아예 우리 자신이 어질지 못하고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철저한 자기부정의 발로였고, 외교술에 뛰어난 자공은 일단 스승의 도가 위대함은 인정을 하면서도 어찌하여 약간 낮춰서 절충하고 타협하지 않는가 하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부정은 자기반성과 전혀 다르다. 자신을 부정할 때 인간의 존엄성은 상실되고 존엄성이 상실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쓸데없이 자신을 학대하는 자학이 시작되며, 자신의 파괴가 시작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허무가 가치관을 앗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자기반성은 인간성을 회복시키나, 철저한 자기부정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로의 자기부정은 얼핏 보면 겸손해 보이지만 결국 전부 아니면 무라는 ‘올 오어 낫싱(ALL OR NOTHING)’의 위험에 빠질 우려가 있는 니힐리즘이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자공의 타협안은 일부부정이다. 도의 위대함은 인정하면서도 어찌하여 그것을 약간 낮추어 현실과 타협하지 않느냐의 외교적인 논리였던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 공자는 자신을 씨 뿌리는 사람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씨앗이 어떻게 수확되는가까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음을 분명하게 못 박고 있다. 예수도 자신을 똑같이 ‘씨 뿌리는 사람’으로 비유하고 있음이 성경 곳곳에 나오고 있는데, 이 씨앗이 좋은 땅에 떨어져 큰 수확을 맺고 못 맺음은 받아들이는 땅에 있지 씨를 뿌리는 사람에게 있지 않음을 다음과 같이 비유하고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다.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해가 뜨자 다 타버려 뿌리도 내리지 못한 채 말랐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맺은 열매가 백배가 된 것도 있었다.” 그러고 나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예수가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라고 강조했던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귀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자 역시 자로에게 ‘사야, 너의 뜻이 원대하지 못하구나.’하고 탄식하였던 것은 그토록 함께 있으면서도 공자의 말을 알아들을 귀가 없는 자로에게 실망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儒林(228)-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28)-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그러므로 공자가 시경의 ‘하초불황편(何草不黃篇)’에 나오는 ‘외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거늘 어째서 광야를 헤매고 있는가.’라는 구절을 인용함으로 스승과 제자간의 선문답을 시작한 것은 매우 적절한 비유였던 것이다. 외뿔소(). 모든 소는 두개의 뿔을 가지고 있는데, 유독 외뿔소만은 문자 그대로 뿔을 하나만 갖고 있는 변종이며, 호랑이는 잘 알려진 것처럼 모든 짐승 중에 가장 거칠고 사나운 동물인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자신이 이처럼 거친 들판인 광야를 헤매고 있는 것은 외뿔소처럼 균형 감각이 없는 독선적인 고집을 가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호랑이처럼 분수에 넘치는 욕망을 갖고 세상을 지배하려는 무서운 권력욕에 사로잡혔기 때문인가를 묻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자로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스승의 속마음을 깨닫지 못하였을 리가 없다. 이에 자로는 대답한다. “우리가 사람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아직도 우리가 어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들의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보니 우리가 아직도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로의 이 말을 들은 공자는 크게 실망한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도 예수가 살아있을 때는 그의 존재를 꿰뚫어 보지 못하였다. 이것이 눈먼 인간의 비극인 것이다. 마치 심봉사가 공양미 삼백석이 있어야만 눈을 떠 심청이를 볼 수 있다고 착각하였던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바로 심청이며, 부처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로는 그처럼 공자를 따라다녔으나 스승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편견 속에서 스스로 만든 우상, 즉 공자상(像)만 본 것이었다. 공자가 주장하던 어짐(仁)과 천도(天道)가 아직 행하여지지 못하였다고 대답함으로써 스승 공자를 미완성의 선생으로만 본 것이었다. 이에 공자는 대답한다. “그럴까. 유(由:자로의 이름)야, 만약 어진 사람이 반드시 남의 신임을 받는다면 어찌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고난을 당했겠느냐. 만일 지혜 있는 사람이 반드시 도를 행할 수가 있는 것이라면 어찌 왕자 비간(比干)이 죽음을 당하였겠느냐.” 백이와 숙제. 이 두 사람은 고대중국의 전설적인 성인형제. 사기에 의하면 이들은 원래 고죽국의 두 형제였는데 주나라의 무왕이 상나라를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하자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고 수양산에 들어가서 주나라의 곡식 먹기를 거부하고 고사리만 뜯어먹고 살다가 굶어죽은 절의의 인물이었다. 또한 비간은 상나라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폭군 주(紂)의 삼촌으로 주왕이 잔인무도한 폭정을 일삼자 ‘임금의 허물을 보고도 간하지 않으면 불충이요, 죽음이 두려워 말하지 않는 다는 것은 용기가 아닌 것이다. 간하여 따르지 않으면 차라리 죽어서 충성을 다하리라.’라며 계속 극간하였던 충신이었다. 이에 주왕은 화가 나서 ‘내가 듣건대 충신의 심장에는 구멍이 아홉 개가 있다 하였는데, 진짜 충신인지 확인해 보겠다.’고 비아냥거리며 실제로 가슴을 째고 심장을 꺼내 보았던 의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대답을 자로가 이해하였음일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자로는 여전히 공자상에 매달려 스승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허상만 확인한 후 마음속으로 투덜거리며 물러갔을 것이다. 자로 다음으로 불린 제자는 자공. 자공이 들어오자 공자는 토씨하나 틀리지 않은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시경에 보면 ‘외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거늘 어째서 광야를 헤매고 있는가.’하고 읊고 있다. 그렇다면 나의 도가 그릇된 것일까. 우리가 어찌하여 그런 지경에 빠졌을까.”
  • ‘금호음악인상’ 손열음양·김대진교수

    금호문화재단(이사장 박성용)은 제1회 금호음악인상 수상자로 손열음(사진 위·18·한국예술종합학교 3년)양을, 금호음악스승상 수상자로는 김대진(사진 아래·42·피아니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를 23일 선정했다. 손 양은 탁월한 음악성을 바탕으로 올해 세계정상의 뉴욕필하모닉과 협연하며 국제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는 심사위원단의 평가를 받았다. 김대진 교수는 손 양을 11세부터 가르쳐 음악적 가능성과 잠재력을 일깨웠다는 공로를 인정받았다.
  • 설대위 前예수병원장 별세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렸던 설대위(David John Seel) 전 예수병원장이 21일 오후 1시(한국시간) 고향인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몬트리트 자택에서 80세를 일기로 숨졌다.6·25전쟁 직후 전주에 호남 최대 규모의 ‘예수병원’을 짓고 36년간 인술을 펼쳤던 그는 지난 90년 귀향해 자녀들과 함께 살아왔었다. 미국 루이지애나에서 의대를 졸업한 그는 54년 미국 남장로교 의료선교사로 아내 설매리(Mary Batchelor Seel)와 함께 방한, 전주 다가동 언덕 위에 자그마한 진료소를 설치하고 환자 치료에 나서게 된다. 의술과 희생, 봉사정신으로 주민 치료에 온 힘을 기울였고 탁월한 사업경영 수완을 발휘한 끝에 예수병원을 60∼70년대 호남지역의 최대 병원으로 키워냈다. 특히 돈 없는 불쌍한 처지의 환자를 많이 보살피는 등 따스한 인술(仁術)로 ‘전북의 정신적 스승’이란 애칭도 얻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儒林(226)-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儒林(226)-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제2부 周遊列國 제5장 良禽擇木 이 모습을 본 애공은 감동하여서 친히 신포서의 머리를 받들어 급히 물을 먹이고 약을 써서 정신이 돌아오도록 한 후 다음과 같은 시를 읊는다. “내가 모극(矛戟)을 구비함은 그대와 함께 한 원수를 치기 위함이고 내가 갑병(甲兵)을 훈련함은 그대와 함께 거사하기 위함이네.” 함께 무기를 들고 공동의 적인 오나라와 싸우겠다는 애공의 뜻이 담긴 이 시를 들은 후 신포서는 아홉 번 절하여 최대의 사의를 표한다. 그 후 진나라에서는 4만 명의 병력인 전차 500승을 파견하여 단번에 오나라의 군사를 격파한다. 이로써 오나라에 빼앗길 뻔한 초나라는 부흥하고 다시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진나라의 궁중 뜨락에서 7일 낮밤을 통곡하면서 나라의 위기를 구한 신포서의 충심에서 ‘곡진정(哭秦庭)’, 즉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고 진나라의 궁궐 뜰에서 울면서 도움을 청하다.’라는 성어가 나온 것. 이처럼 소왕은 신하를 아끼고 하늘의 도를 알았던 그 무렵 최고의 군주였던 것이다. 공자가 채나라에 머물고 있을 무렵 오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하니, 오나라와 철천지원수인 초나라는 진나라를 도우려고 군사를 출동시켰던 것이다. 소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친정에 나서 오늘날 안휘성의 호현(毫縣)인 성보(城父)라는 진나라 땅에 머무르고 있었다. 진나라의 성보와 채나라는 지척지간의 거리. 그러지 않아도 파다한 소문으로 공자를 한번 친견하고 싶었던 소왕은 이 기회에 사람을 보내어 공자를 초빙한다. 공자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평소에 소왕을 ‘하늘의 도를 알았던 위대한 군주’라고 칭찬하였던 공자였으므로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즉시 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들어가려 한다. 그러나 이 소문을 전해들은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은 아연 긴장하였다. 왜냐하면 공자는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제후들의 약점과 대부들의 비행을 낱낱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공자를 초강대국인 초나라의 소공이 초빙하여 등용한다면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은 모두 위태로운 처지에 놓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이들은 서로 연락하여 군사들을 풀어 공자의 일행을 들판에서 포위한다. 이로써 공자일행은 또다시 포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때의 곤경을 논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나라에 있을 때 양식까지 떨어진데다가 (공자가어에는 ‘공자가 채나라와 진나라 사이에서 7일간이나 양식이 떨어졌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종자들 간에는 병이 나서 드러눕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이때도 공자는 강송(講誦)도 하고 악기를 타며 노래하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자로는 성이 나서 공자를 뵙고 말하였다. ‘군자도 곤경에 빠질 때가 있습니까.’ 이에 공자는 대답한다. ‘군자도 곤경에 빠지게 마련이다. 다만 소인이 곤경에 빠지면 함부로 굴게 되는 것과 다를 뿐이다.’” 지금까지 자로는 스승 공자에게 대놓고 ‘성을 낸()’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침묵으로, 두 번째와 세 번째에는 도가를 따르는 은둔자들의 얘기를 전하는 간접표현으로 공자에게 불만을 표출하였으나 마침내 자로는 스승의 면전에서 대놓고 직설적으로 ‘군자도 곤경에 빠질 때가 있습니까(君子亦有窮乎).’라고 노골적인 비난을 단행하는 것이다.
  • [기고] 주민 시름 덜어준 ‘백건우 연주회’/이기재 서울 노원구청장

    “노원구의 격이 달라진 느낌입니다.” “정말 백건우씨가 나올까 가슴 졸이며 기다렸답니다.” “정말 감동적인 한편의 드라마였습니다.” 얼마 전 노원문화예술회관서 열린 세계적 피아니스트 백건우씨의 피아노 연주회가 끝난 뒤 주민들이 쏟아낸 탄성이다. 사실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아 명성으로만 알고 있는 피아노의 거장 백건우씨를 한낱 ‘동네 공연장’에 불과한 노원문화예술회관 무대에 서게 하는 것이 결례가 아닐지, 그리고 관객들이 수용할 수 있을지 내심 염려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같은 생각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관객들은 완전히 몰입했다.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 고요한 지하 동굴 속 아스라이 들려오는 한 방울 청아한 낙수를 연상케 하는 거장의 손놀림에 관객들은 매료됐다. 변변한 공연장 하나 없어 노원구만의 공연장을 하나 만들겠다는 나와 노원구 직원들의 소박한 꿈이 실현된 순간이었다. 개관 4개월 남짓 만에 노원문화예술회관이 ‘또 하나의 예술의 전당’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내 공직생활 30여년 중 가장 소중한 추억이다. 이 모든 것이 변방에서의 공연을 흔쾌히 승낙해 준 백건우씨와 수준높은 관람태도를 보인 구민들 덕분이다. 백씨와 함께한 부인 윤정희씨도 “공연 요청 단계에서는 노원구가 어디 있는지 몰랐지만 오늘 관객들의 수준은 유럽 어느 지역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며 격찬했다. 어쩌면 그동안 공연관람을 위해 왕복 2∼3시간을 들여야했던 주민들에게 이날 공연은 한줄기 단비였으리라. 앙코르에는 응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백건우씨는 이날 특별히 노원구민을 위해 ‘애프터 독주’를 선사해 다시 한번 진한 감동을 자아냈다. 동네 공연장에서는 쉽사리 느낄 수 없는, 그래서 더 행복한 순간이었다. 개관 후 미흡한 부분도 많았지만 이를 높은 관람수준으로 너그럽게 메워준 구민들이 있어 노원문화예술회관은 서울 동북부 지역 문화예술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음을 느꼈다.“주민들의 시름을 덜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 행정을 펼치라.”는 옛 스승의 가르침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이기재 서울 노원구청장
  • 달라이 라마 내년 한국방문 이뤄질까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한국 방문이 이뤄질 수 있을까. 전남 여수 석천사 주지인 진옥 스님이 달라이 라마의 내년 방한을 추진하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 최근 인도를 방문해 달라이 라마와 40분 가량 면담한 진옥 스님은 “달라이 라마 성하께 내년 부처님오신날을 전후해 방한해 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한국정부가 방한을 허용한다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라도 방한하겠다. 그동안 못들어간 나라가 한국밖에 없다.’며 간곡한 방한의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 진옥 스님은 “불자 국회의원 모임인 정각회 등을 중심으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국회의원들과 접촉하고 있으며, 통도사·해인사 등 삼보종찰의 큰 스님들과도 달라이 라마 방한을 위한 협력을 구하고 있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달라이 라마의 방한은 2000년 달라이라마방한준비위원회가 발족하면서 여러 경로를 통해 본격적으로 추진돼 왔지만 한국과 중국간의 정치적 관계 등을 고려해 성사되지 못했다. 특히 김대중 정부 때에는 방한추진위원회가 구성돼 정부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 초청장까지 티베트 망명정부에 전달했으나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달라이라마방한준비위원회 사무국장인 정웅기 참여불교 재가연대 교단자정센터 정책실장은 “달라이 라마의 방한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부담이 되고 별다른 실익이 없을지 모르지만 평화와 자비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며 “정부에서도 이제 더이상 달라이 라마 문제를 단순한 대 중국 카드로 사용해선 안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달라이 라마 같은 ‘유명 승려’의 방한에 대해서는 사실 불교계 내부에서도 흔쾌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달라이 라마와 함께 세계 불교계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 중 한 명인 틱 낫한 스님이 올 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받은 ‘홀대’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한편 조계종 총무원장인 법장 스님은 최근 “모 스님이 달라이 라마의 방한을 추진하겠다고 말하기에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밝힌 바 있어 주목된다. 한국 방문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달라이 라마의 심정은 어떨까. 달라이 라마를 해마다 만나온 진옥 스님은 몇 차례나 초청이 무산된 데 대해 달라이 라마에게 사과하자 그는 “국제관계라는 게 다 그런 것 아니냐.(중국)공산당의 압박은 도덕적인 수준을 넘어 맹목적인 것이며 ‘공갈’에 가깝다.”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평화의 화신’ 달라이 라마는 자신의 자서전 ‘유배된 자의 자유’에서도 밝혔듯이 적대관계에 있는 중국마저도 사랑한다.“적은 인내심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가장 큰 스승”이라고 그는 말한다. 많은 불자들은 이번에는 달라이 라마의 방한이 꼭 성사돼 그의 비폭력·평화사상이 한반도에 꽃 필 것을 기대하고 있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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