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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5)조선 정조 北道 원수 주형채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5)조선 정조 北道 원수 주형채

    정조9년(1785) 봄이었다. 그 무렵 서울에서는 천주교인 수십 명이 오늘날의 명동천주교회를 결성했고, 그것이 문제가 돼 이른바 을사박해가 일어났다. 마침 전국적인 지하조직망을 가진 것으로 조사된 또 한 번의 ‘정감록’ 사건까지 발생해 세상인심이 뒤숭숭했다. 결국 정감록 사건의 주모자 몇은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주형채(朱炯采)라는 평민지식인이 끼어 있었다. 당시 심문 기록에는 주형채에 관한 단편적인 정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실로 구슬을 꿰듯 주워 모아보면 주형채의 일생은 역사상 이름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조선후기의 허다한 평민지식인 또는 술사들의 삶을 대변한다. 더욱이 그들은 체제에 저항한 일부 양반들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그런 점에서 주형채의 삶은 더욱 관심을 끈다. ●주형채의 ‘범죄행위’ 정감록 사건의 또 다른 주범인 문양해는 동지 주형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함경도 영흥이 고향인데 향악선생(香嶽 속명은 김정 또는 김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흉악한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편지에 쓰인 흉악한 구절을 문양해는 자기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며, 예를 든다.“하늘이 내리는 재앙과 시국의 변천이 이와 같으니 이제 진인(眞人)이 마땅히 나와야 할 것이고, 우리들은 사람들을 모아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을 반정(反正)을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향악선생은 이 편지를 상자 속에 깊이 감추어 두었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언젠가 향악선생이 외출한 틈을 타서 평소 호기심이 많았던 문양해는 몰래 편지를 꺼내 보았다고 했다. 문제의 편지가 지리산에 도착한 것은 아마 사건 발생 한 해 전인 정조8년 정월로 짐작되는데, 주형채가 하필 왜 그 시점에 이런 편지를 보내왔는지 문양해는 까닭을 모르겠다고 했다. 주형채가 향악선생과 교제를 시작한 것은 오래 전이었다. 적어도 사건 발생 15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했다. 주형채는 얼굴 생김이 괴상하고 못났지만 눈빛이 날카롭게 번쩍여 사람을 쏘아보듯 하였다. 주형채와 향악선생 사이에는 오랫동안 편지가 오갔다. 지리산에서 함경도 영흥까지는 근 2000리나 되는 먼 길인데도 서로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편지 심부름을 한 이는 혜준 스님이었다. 혜준은 오래 전 함경도의 어느 사찰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는 주형채와 친해졌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뒤로도 함경도를 자주 왕래하였다. 사건 당시 혜준은 경상도 하동에 있는 영원사에 몸을 담고 있었다. 향악과 ‘괴이한’ 편지를 주고받은 것 외에도 주형채는 여러 차례 불온 문서를 조작했다고 한다. 그는 “멀리 귀양가는 노래”를 지어 조정의 잘못을 비난하고 민심을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주형채는 아니라고 끝까지 부정했다. 그 노래는 충신이 멀리 귀양 갈 때 지은 시라고 누군가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그저 베껴두었을 뿐, 다른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발뺌이 용이하지 않았다. 주형채는 장차 자기가 왕이 되겠다는 주장을 동지들 앞에서 서슴없이 했던 것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함경도의 평민지식인 주형채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불순세력’과 연합해 조선왕조의 전복을 꾀했다.‘정감록’ 사건을 종결짓는 마지막 확정 판결의 일절은 이랬다.“이율, 양형, 문양해, 홍복영 등 여러 역적들이 반역을 음모해 여러 도에서 거사를 도모하면서 주형채를 북도의 원수로 정하였다. 그들이 서로 왕복하며 주도면밀하게 반역죄를 꾸민 사실은 여러 죄수들의 심문과정에서 샅샅이 드러났다.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죄인들을 군율에 의거하여 한강 모래밭에서 효시(梟示)하라.”(실록, 정조 9년 3월22일 신미) ●천문과 점술의 대가 주형채 정감록 사건에서 “북도 원수”로 거론된 주형채에게는 사실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그의 이웃사람들은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아리송한 일이 생기면 주형채를 찾아갔다. 주형채의 집은 함경도와 평안도 두 도가 만나는 접경지대에 있어 양도의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주형채는 이를 테면 ‘만물박사’였으며, 여러모로 평민들의 교사역할을 담당했다. 정감록 사건이 발생하기 일년 전인 정조8년 12월 초7일부터 사흘 동안 별자리에 이상이 있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주형채에게 물어왔다. 당시 주형채가 관찰한 바로는 위성(危星), 실성(室星), 벽성(壁星) 앞에 20여 개의 별이 벽을 쌓고 늘어섰었다. 그 가운데 붉은 기운이 있어 상서롭지 못했다. 특히 여러 별 가운데서도 장군성(將軍星)과 태백성(太白星)이 서로 사흘 동안 싸우다 1도(度) 거리로 멀어졌다. 그 때 태백성이 어깨로 장군성을 부딪쳐 여러 번 이겼다 졌다 했는데, 이 모든 것이 흉한 조짐이었다. 주형채는 이같은 현상이 조선이나 중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해로울 일이 조금도 없다고 주민들을 달랬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난리를 염려해 피란을 고려하고 있었지만 자기가 만류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조정의 심문관들은 주형채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관리들이 보기에 주형채는 민심을 선동해 피란행렬을 조장한 혐의가 짙었다. 실제로 그 무렵 함경도에는 남쪽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정감록’에 예언된 십승지가 모두 남쪽에 있는 관계로, 북도 사람들은 여차하면 남쪽으로 옮길 태세였다. 그들의 상당수는 이미 십승지를 찾아 이동을 시작했다. 주형채와 같은 평민지식인들은 이주운동에 음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주형채는 관리들의 문제제기를 부정했다.“저는 주민들을 타일렀습니다.‘현명한 임금이 다스리는 시대에 어찌 피란가는 일이 있겠는가´ 라고 말입니다.” 평민 주형채는 본래 고향 사람 장진익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의 스승은 사건 당시 이미 사망한 지 오래 되어 화를 면했다. 유교의 기본 경전은 물론이고 천문과 점술까지 통달한 주형채는 향악선생과 같은 도사는 물론이고 점술인들과도 친한 사이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형채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함구했다.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제게는 제자나 동문생도 전혀 없었으며, 도사나 점술인은 원래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주형채는 의리가 무척 강했던 사람이며, 의지가 대단했다. 그러나 사건을 수사한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주형채는 대단한 악질이었다.“주형채는 본래 흉악하고 요사스러운 놈으로 천문 역법과 점술, 둔갑술 등 갖은 술수를 써서 백성들을 속이고 인심을 선동하는 것을 일삼았다. 몰래 역적이 될 마음을 먹고 밤낮으로 기회를 엿보았으며, 스스로 ‘대장’이라 떠들기도 하고, 혹은 ‘도원수’라고 칭했다. 더러는 10만의 군사를 모을 수 있다고 했고, 혹은 영흥(永興)의 군사용 창고를 접수하겠다고 하였다. 심지어는 제가 세울 나라의 국호를 제(齊)나라라고까지 했다. 놈은 마음속으로 이것도 작다고 생각했던지 중국 황제를 만나 추천을 받아 자기가 임금이 될 거라고 했다. 또한 꿈의 해몽을 빙자해 신하로서는 감히 꺼낼 수도 없는 말을 멋대로 지껄인 편지가 남아 있다. 지극히 흉악한 죄상이 지금까지 압수된 문서 중에 이미 역력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자기 죄를 한마디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조정의 판단이었다. 평민지식인 주형채의 생각으로는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 때의 부정 불의한 세상이요, 조정이었다. 자기와 자기 동료들은 아무런 죄도 없었다. 따라서 썩어빠진 관리들이나 임금 앞에서 죄를 인정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살점이 떨어지는 혹독한 고문을 묵묵히 견디면서 주형채는 단 한마디도 잘못을 빌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사태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 ●주형채가 지하조직에 편입된 계기 ‘정감록’ 역모사건의 소용돌이에 주형채가 휩쓸리게 된 것은 물론 그가 지하조직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가 지하조직에 가입하게 된 데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째, 주형채는 이 사건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문양해 일가와 인연이 깊었다. 문양해의 삼촌 문광도는 함경도 문천에서 잠시 감목관(監牧官 목장업무를 담당하는 관리)을 지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곳을 여행하던 주형채가 천문에 관한 일로 문광도와 토론을 벌였고, 이를 계기로 여러 문씨들을 사귀게 되었다. 문씨 일가는 충청도 공주의 평민으로 학식이 뛰어났다. 그들은 홍국영의 가까운 친족 홍낙순이 충청감사가 되었을 때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홍 감사가 충청도 감영(監營)에 계실 때 많은 은혜를 입었고, 감사께서 저희 집에 찾아오셔서 만났습니다.” 문양해의 아버지의 진술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평민 문광도 역시 홍낙순의 후원으로 감목관 벼슬을 얻은 게 틀림없다. 주형채는 이런 문광도와 서로 기맥이 통하게 됨으로써 장차 문양해 및 홍복영(홍낙순의 아들)과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둘째, 정감록 사건의 또 다른 주역 양형과도 깊이 사귀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형채의 사촌 주형로는 이미 양형을 알고 지냈다. 주형로(일명 주형일)는 사건 당시 충청도 단양에 머물고 있었다. 양형은 주형로를 통해 주형채란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자기 친척 문광도에게서 주형채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전해 듣게 되자 호기심이 발동했다. 양형과 주형채는 서로 연락해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사이는 곧 절친한 관계로 발전했다. 양형은 서울 입동에 사는 중인이었다. 낮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글재주가 출중했던 그는 서울의 양반 홍복영 및 이율과도 매우 친한 사이였다. 정조 초년, 홍복영은 충청감사로 임명된 아버지 홍낙순을 따라 공주에 내려가 있었다. 그 때 의약에 관한 일로 홍낙순은 고민을 하던 중 양형이 의술에 밝다는 소문을 듣고 불러 상의한 적이 있었다. 양형의 처방이 적중했던지 의술을 매개로 그들은 서로 친해졌다. 홍낙순 일가가 서울로 돌아온 뒤 양형과 홍씨들은 더욱 가까워졌다. 홍복영은 양형의 살림이 어려울 때 도와주기도 했다. 그들은 때때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나중에 함께 공모해 하동에 지하조직의 거점을 마련했다. 양형과 가까워진 주형채 역시 이 조직에 포섭된 것은 물론이었다. 셋째, 주형채와 홍복영은 끝까지 그 점을 부인했지만, 주형채는 여러 해 전부터 홍복영 일가와 알고 지냈다고 봐야 한다. 홍복영의 삼촌 홍낙빈은 주형채와 친밀해 편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정조 5년(1781) 세도정치가 홍국영이 실각하자 가까운 친척 홍낙빈도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그 때부터 주형채는 홍씨 일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다들 왕조의 전복을 꾀하였다. 위에서 살핀 몇 가지 경로를 통해 주형채는 ‘정감록’ 사건의 주역들과 마음을 합친 것으로 생각된다. 주형채와 양형, 문양해, 홍복영 등이 지하조직을 형성해 나간 과정을 살펴보면 뜻밖에도 두 가지 사실이 부각된다. 하나는 18세기 조선사회에서 중인 또는 평민 지식인들이 끊임없이 지리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주형채처럼 고향을 지키고 사는 경우에도 자주 이웃 지방을 여행해 사교범위를 확장하고 있었다. 둘째, 평민 또는 중인 지식인들은 계층을 뛰어넘어 양반들을 사귀는 데 열심이었고, 양반들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하층지식인들과 접촉하였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양반들은 같은 신분층에 속하는 식자들만 사귀었을 것으로 짐작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완전히 달랐다. 양반과 평민지식인들은 그것이 비록 평교(平交 평등한 교제)는 아니었다 해도 인생의 다양한 국면에서 서로 만났던 것이다. ●주형채가 속한 전국규모의 지하조직 주형채는 조직의 상층부를 상당히 잘 알고 있었으나 하부구조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대다수의 조직원들은 지하조직의 일부를 알고 있었을 뿐이다. 이 조직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던 지도층 인사는 문양해 정도였다. 문양해는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지하조직의 얼개를 비교적 자세히 설명한 적이 있다. 북도의 원수는 주형채였지만 그 밑에 여러 명의 두목이 활동했다. 함경도 안변에는 조상호와 유덕휘가, 그리고 강원도 통천에는 유경일이 대도독(大都督)이라 불렸다. 고성의 칠송정에 사는 권생만 역시 대도독으로 통했다. 그들은 일단 유사시 지역사령관으로 능력을 발휘할 참이었다. 이들 가운데서도 특히 유경일과 권생만은 지리산의 향악선생과 가끔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문양해는 사건 발생 2년 전에 그들이 향악선생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밖에 황해도 봉산에 있는 이형윤과 황주에 사는 정몽로도 해서지방의 괴수로 손꼽혔다. 고위간부는 아니었지만 평안도 곽산에 살던 박필현도 이 조직의 일원이었다. 주형채 등의 명단은 지리산 거점에 보관 돼 있던 두루마리에 모두 적혀 있었다 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서울 사는 양반들도 이 지하조직에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앞에서도 이름이 언급된 이율과 홍복영이었다. 진사 이율은 한양 이현에 살았는데 홍씨 일문에 보낸 편지에서,“이 세상을 보지 아니 할 때는 언제입니까? 제 뜻을 온 세상에 널리 펴지 못하게 된다면, 한탄한들 무엇 하겠습니까?”라며 반역의 뜻을 비쳤다. 서소문 밖에 살던 진사 정래정과 정래익도 지리산의 향악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조정을 비방하였다.“우리가 비록 재주가 없고 불민하지만 거사하는 날에는 조영흥(趙永興 이름은 미상)이나 주공(朱公 주형채)의 부하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여기서 보듯 주형채는 조직 내에서 상당한 실력자로 인식되었다. 물론 지하조직을 총괄한 이는 향악선생이었고, 그를 측근에서 보좌한 이가 문양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향악선생이 끝내 체포되지 않은 가운데 이 사건은 종결된다. 어쩌면 향악선생이란 인물 자체가 허구였을 수가 있다. 문양해가 가공의 향악선생 노릇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문양해야말로 실은 지하조직의 괴수였던 셈이다. 문양해는 문장에 능한 미혼의 노총각으로 비승비속의 도사였다. 지하조직에서는 충청도출신 인사들의 참여도가 높은 편이었다. 특히 공주지방 사람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으며, 내포지방의 양반들도 여러 명이 관여했다. 조직의 실질적인 우두머리 문양해 일족이 공주 출신이었던 데다, 조직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한 홍복영의 아버지 홍낙순이 충청감사를 역임한 것과 관련이 있다. 예컨대 공주 효포 출신의 권우는 지하조직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향악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생님의 재간은 천고에 뛰어납니다. 제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마땅히 보내서 글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훗날 거사할 기일을 정확히 알려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밖에 공주의 상대장리에 사는 진규도 향악선생과 함께 흉악한 묘책과 비밀스러운 계책을 짰다고 한다. 공주 유구역의 홍정유, 한산의 정탁 3형제, 태안의 조수정과 조수인 형제, 역시 태안에 사는 가명정(賈命正) 등도 조직에 합류했다. 당진의 조두진, 서홍기, 한제만, 대흥의 이인치도 관련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전라 경상 양도의 참여도는 무척 낮았다. 전라도 광양의 오성겸과 이춘홍이 군비 조달에 기여하기로 내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특히 경상도 쪽은 조직원이 아예 전무했다. 그것은 이 지하조직이 노론 출신의 홍국영 잔당과 긴밀하게 연계돼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남인의 세력근거지인 경상도 인사들은 이 조직을 외면했던 것이다. 국가전복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가졌으면서도 이 조직은 다분히 종교적인 색채가 짙었다. 하필 그 거점을 지리산에 둔 것은 안전은 물론 신비스러운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이 조직의 실체는 문양해의 진술을 통해 어느 정도 밝혀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비밀스러운 조직이었던 만큼, 그리고 심문과정에서 마지못해 털어 놓은 이야기란 점에서 불충분한 점이 적지 않다. ●동학의 원조 지하조직에 가담한 사람은 다양했다. 이율과 홍복영 등 실세한 양반이 한 축을 이뤘다면, 지하조직의 운영을 직접 담당한 실질적인 주도층은 중인 이하의 평민지식인들이었다. 주형채, 양형 및 문양해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 사건은 이미 18세기 후반에 정치 종교적인 성격을 띤 전국규모의 민중운동이 준비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실례다. 이런 운동 경험은 지속적으로 축적되어갔다. 그 결과,19세기 말 동학이 대두하자 각지의 농민은 순식간에 동학의 기치 아래 모여들어 거대조직을 만들어냈다. 빗방울이 바로 바다에 이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인 빗물은 어디엔가 웅덩이를 이룬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儒林(476)-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52)

    儒林(476)-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52)

    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52) 맹자와 더불어 또 하나의 날개였던 순자. 그러나 이처럼 순자는 유가에 있어서 뛰어난 대사상가였으나 이단자로 불린 것은 두 가지의 오해 때문이었다. 그것은 순자의 제자로 일컬어지는 이사와 한비자가 법가를 부르짖음으로써 엄격한 형명주의(刑名主義)를 통치술로 제창한 장본인이라는 오해와, 맹자의 ‘성선지설’에 대항하여 ‘인간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는 ‘성악지설’을 주장함으로써 마치 악마의 화신으로까지 느껴지는 선입견 때문이었던 것이다. 순자는 BC238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순자가 죽은 지 불과 10여년 후인 BC221년. 마침내 진나라의 황제가 천하통일을 함으로써 춘추전국시대는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주왕실이 낙양으로 천거한 기원전 770년대부터 시작된 춘추전국시대는 시황제가 천하통일을 완수함으로써 550여년 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순자는 총 189종의 사상적 자유시장이 열렸던 ‘제자백가’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탄생된 사상가였으며, 통일전야(前夜)에 살았던 유자(遺子)였다. 공자와 노자로부터 시작된 백가쟁명의 치열한 경주는 마침내 순자라는 마지막 유복자에 의해서 천하통일의 골인지점에 도착하여 테이프를 끊게 되는 것이다. 순자는 550년에 걸친 대역전 경주의 마지막 릴레이 주자였던 것이다. 곽말약(郭沫若). 20세기 중국이 낳은 뛰어난 시인이자 사학자였던 그는 ‘순자적비판(荀子的批判)’에서 다음과 같이 순자를 평하고 있다. “순자는 제자백가 가운데 최후를 장식한 위대한 스승이다. 그는 유가를 집대성하였을 뿐 아니라 제자백가를 집대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공정하게 말하면 순자는 사실상 잡가(雜家)의 시조로서 제자백가의 학설을 총망라하였다. 선진의 제자백가 가운데 그의 비판을 받지 않은 이는 거의 없다.… 이러한 점은 진실로 순자가 제자백가에 대해서 초월적인 태도를 보였음을 드러내지만 우리는 그의 학설과 사상에서 제자백가의 영향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어떤 경우에는 정면에서의 수용과 발전이고, 어떤 경우에는 이면에서의 공격과 대립이며, 때로는 종합적인 통일과 변화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순자가 맹자의 성선지설에 ‘공격과 대립’ 양상을 보여 성악지설을 주장하였던 것은 곽말약의 말처럼 제자백가를 집대성하기 위해서였으며, 이로써 ‘인간의 본성은 악함으로 성인의 예의법도에 의해 변화시켜야 한다.’는 ‘화성기위(化性起僞)’의 신학설이 나온 것이다. 맹자가 ‘성선지설’을 주장하였다면 순자는 ‘성악지설’을 주장하였고, 맹자가 그 ‘성선지설’을 지켜내는 방법으로 ‘인간사회의 타락은 인간의 욕심과 두려움 때문이며 그러므로 참된 용기를 함양하여 이를 없앨 수 있다.’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주장하였다면 순자는 ‘성인은 본성을 변화시켜 인위를 일으킴으로써 나쁜 악을 교정할 수 있다.’는 ‘화성기위’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 불교독서모임 이끄는 번역가 이미령씨

    “사람들에게 불교를 가르쳐 주려고 책 읽기 모임을 시작한 게 아닙니다. 어떻게 불교를 제대로 알 수 있는가 그 방향을 제시해 주고 싶어서였습니다. 불교 서적을 번역하면서 늘 고민하는 것도 바로 그런 점이에요.” 독서 모임 ‘붓다와 떠나는 책 여행’을 이끌고 있는 이미령(41)씨는 “강의나 설법식의 접근보다는 불교가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를 스스로 찾아가도록 이정표를 마련해주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동국역경원 역경위원으로 10년 넘게 팔만대장경 번역작업을 해오고 있는 그는 경전 강의와 불교서적 번역, 방송활동 등으로 잘 알려진 프리랜서 작가. ‘대당서역기’‘일체경음의’‘본생경’‘대루탄경’‘밀린다왕문경’등 이름만 들어도 만만찮을 것 같은 불교책들을 우리말로 쉽게 옮겼다. “불교 독서모임을 시작한 지 지난달로 꼭 1년이 됐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30명 정도 모여 불교 서적을 읽는 모임이 입소문을 타 지금은 온라인 회원만 400명이 넘어요. 부산에는 지부도 생겼습니다.” 불교 서적에 대한 이씨의 애정은 BBS 불교방송 프로그램 ‘무명을 밝히고’의 ‘불서를 읽읍시다’ 코너를 맡아 진행하는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양서를 소개하기 위해 신간은 물론 이미 나온 책들까지 일주일에 수십권씩 통독한다. 가장 좋아하는 경전은 석가모니의 언행록인 아함경. 스승인 불교학자 고(故) 고익진 박사를 통해 아함경의 세계를 알게 됐다는 그는 “아함경이야말로 부처님 가르침의 원형을 접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경전”이라고 힘줘 말한다. “불교는 결코 어려운 종교가 아닙니다. 단지 불교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들이 생소해 어렵게 느껴질 뿐입니다.‘선어록(禪語錄) 같은 것을 읽지 말라.’는 말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요.” “한국 불교계가 학문불교와 선불교로만 치닫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하는 이씨는 일반 신도들에 대한 불교 교육의 문제점도 지적한다. “불교교양대학을 오래 다니고도 자기 입으로 불교를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육이 잘못됐기 때문이죠. 예컨대 아함경을 먼저 공부한 뒤에 읽어야 할 게 금강경인데, 금강경의 막연하고 추상적인 이론부터 먼저 접하게 되니….” 불교대중화의 최전선에서 서 있는 그는 부처님 가르침을 일상의 미덕으로 끌어내기 위한 저술작업도 보다 활발히 할 작정이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儒林(472)-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48)

    儒林(472)-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48)

    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48) 순자는 ‘사람의 본성이 태어날 때부터 악하여 본성이 선하다는 것은 거짓’이므로 반드시 ‘스승과 법도에 따른 교화와 예의의 교도’가 있어야 하는데, 그 교화와 교도의 수단이 바로 ‘법(法)’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순자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법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굽은 나무는 반드시 댈 나무를 대고 쪄서 바로잡은 뒤에라야 곧아지며, 무딘 쇠는 반드시 숫돌에 간 뒤에야만 날카로워지듯이 지금 사람의 본성이 악한 것은 반드시 스승과 법도의 가르침이 있은 뒤에야 다스려지는 것이다.” 이렇게 포문을 연 순자는 마침내 맹자를 향해 정조준하여 직격탄을 날린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맹자는 ‘사람이 배우는 것은 그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사람의 본성을 제대로 알지 못해 본성과 작위의 구분을 잘 살피지 못한 때문이다. 본성이란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이어서 배워서 행하게 될 수 없는 것이며,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예의란 성인이 만들어 낸 것이어서 배우면 행할 수 있는 것이며, 노력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배워서 행할 수 없고 노력해 이루어질 수 없는데도 사람에게 있는 것은 본성이라 하고, 배우면 행할 수 있고 노력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람에게 있는 것을 작위라 한다. 이것이 본성과 작위의 구분이다. 지금 사람의 본성으로 눈은 볼 수가 있고 귀는 들을 수가 있다. 모든 볼 수 있는 시력은 눈을 떠나지 않으며, 들을 수 있는 청력은 귀를 떠나지 않는다. 눈은 시력이 있고 귀는 청력이 있는데, 이것은 배워서 될 수가 없는 것들이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은 선한데, 모두 그 본성을 잃기 때문에 악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것은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본성대로 내버려두면 그의 절박함이 떠나고 그의 자질도 떠나 버려 선한 것을 반드시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다.” 우선 순자는 맹자의 사단설의 모순을 통렬히 비판한다. 맹자는 사람은 누구나 선천적 도덕적 능력을 갖고 있는데, 그 도덕적 능력이 바로 남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과 부끄러워하며 죄를 미워하는 수오지심과 남을 섬기고 사양하는 공경지심과 옳고그름을 가리는 시비지심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순자는 그러한 사단은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도덕능력이 아니라 반드시 스승과 법도의 가르침에 의해서 고쳐지는 후천적 작위라는 것이었다. 작위(作爲). 이는 순자가 주창한 ‘성악지설’의 골수이다. 사람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것이라는 맹자의 주장은 ‘양심(良心)’에서부터 기인된 것이지만 사람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것이라는 순자의 주장은 ‘본능(本能)’에서부터 기인된 것이었다. 이 본능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소리와 좋은 빛깔을 추구하는 욕망으로, 이를 절제하고 다스리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작위라는 것이 순자의 학설이었던 것이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4) 문인방의 ‘정감록’ 사건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4) 문인방의 ‘정감록’ 사건

    정조7년(1783) 1월15일, 인정전에 모인 신하들은 ‘정감록’을 되뇌이던 역적들을 일망타진하게 된 사실을 기뻐하며 국왕에게 축하인사를 올렸다. 난리가 토벌되면 되풀이되는 하나의 관습이었다. 이날 정조는 전국에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웬만한 죄인은 다 풀어주라는 것으로, 이 역시 뒤숭숭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상투적인 조치였다. 왕은 포고문에서 문제의 정감록 사건을 일으킨 문인방과 이경래 등 주범들의 죄상을 간단히 요약했다. 사면령을 내리는 동시에, 역모사건의 전모를 백성들에게 간단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실록, 정조 7년 1월15일 정미) 먼저 사건의 중심에 있던 문인방의 죄를 성토한다. 문인방은 삿된 술수를 써 백성들을 현혹하였다고 했다. 그가 역모를 꾸민 것은 고대 중국에서 일어난 황건적의 난과 비슷하다고 했다. 매우 심한 과장이었다. 그 옛날 장각이 이끈 황건적은 중국 한나라를 기우뚱거리게 만들었다. 문인방 사건이 미수에 그친 것과는 천양지차다. 정조는 문인방이 각지를 떠돌며 힘센 장사를 모으려 했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명종 때 유명한 도적 임꺽정 사건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역시 과장된 표현이다. 문인방은 백천식, 김훈 등과 짜고 상주의 백학산 아래 만든 소굴에 머물렀다. 이 사건이 발각된 것은 그들과 한통속이던 박서집이 밀고했기 때문이었다. 전라도에서 체포된 문인방은 전주 감영에서 취조를 받았고, 곧이어 서울로 붙들려가 본격적인 신문을 받았다. 그는 역모 사실을 모두 실토했다. 군량을 담당할 사람, 난리를 일으킬 때 선봉장을 맡을 사람 등 가담자들의 역할은 이미 정확히 정해져 있었다고 했다. 그 가운데는 도원수도 있었고, 대선생(大先生)으로 불리는 선비까지 존재했다. 문인방 사건 때 도원수로 내정된 이는 이경래였다. 이 사건이 뒷날의 여러 정감록 사건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은 송덕상(宋德相)이란 유학자를 ‘대선생’이라 떠받들며,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다는 점이다. 정조 즉위 초 산림(山林·재야에 묻혀 있던 큰선비)의 중심인물로 천거돼 조정에서 크게 활약한 송덕상이 정감록 사건에 연루됐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각별히 주목된다. ●산림 송덕상과 권신 홍국영 문인방 사건으로 조정이 한 차례 홍역을 겪기 5년 전이었다. 대대로 충청도 회덕에 살고 있던 성리학자 송덕상은 산림으로 천거되었다. 정조는 송덕상의 학덕(學德)에 크게 감복한 듯, 그의 건의라면 무엇이든 대체로 수용하는 편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른바 산림이란 명목으로 향리에 묻혀 지내던 큰선비들이 일시에 높은 벼슬에 등용되곤 했다. 그런데 영조 이후로는 산림이란 카드가 집권세력인 노론에 의해 정국수습용 임시방편으로 활용되는 듯한 분위기도 있었다. 마치 1970∼80년대 한국의 국무총리 자리가 그러했듯, 산림은 일종의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가끔 예외도 있었다. 효종 때 북벌론(北伐論)을 내세우며 정국을 홀로 이끌던 송시열(宋時烈)의 경우다. 그는 산림으로서 노론의 명실상부한 우두머리였다. 산림 송덕상은 바로 송시열의 자손이었으나 그 처지는 자기 조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송덕상은 정조 즉위에 공을 세운 홍국영 일파의 추천으로 조정에 등용된 만큼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대변했다. 정조 3년(1779), 이조참판 송덕상은 홍국영 등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김구주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한 적이 있다.(실록, 정조 3년 6월18일 경오) 알 사람은 이미 다 알지만 홍국영은 정조의 외척이었다. 그는 영조 말기 세손(世孫·정조)의 집권을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 홍인한, 김구주 등을 물리치고 정조를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 뒤 홍국영은 수년간 반대파를 모두 내쫓는 데 부심하였다. 그는 정조의 신변보호를 구실로 숙위소를 창설해 직접 그 책임을 도맡으면서 더욱더 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홍국영의 권력은 날로 비대해졌고, 과거에 그의 정적이었던 정후겸을 방불케 했다. 사람들은 홍국영을 ‘대후겸(大厚謙)’이라 부르며 비웃었다. 홍국영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자기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내 장차 외척으로 세력을 굳히려 했다. 하지만 일년 만에 누이 원빈이 병사하고 말았다. 홍국영은 꾀를 내어 왕제(王弟) 은언군 인의 아들 담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훗날 세자로 정할 생각을 가졌다. 이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담에게 역모죄를 씌워 죽였다. 정조4년(1780)에는 왕비 김씨를 살해하려고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그 일로 홍국영은 실각했고 그 여파는 송덕상에게도 미쳤다. 송덕상은 재빨리 상소를 올려 홍국영과 자기의 사이가 별것 아님을 애써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홍문관 교리 서유성 등 홍국영의 반대파들은 송덕상이 겉으론 산림으로 행세하면서 실제는 홍국영에게 아부를 일삼아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왕세자 책봉 건에 관여하는 등 수많은 죄를 저질렀다고 맹렬히 규탄했다.(실록, 정조 5년 4월28일 신미) 결국 송덕상 역시 조정에서 물러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로선 억울한 점이 있었을 테지만, 이런 식의 정계 개편은 집권세력이 바뀔 때마다 늘 되풀이되어 온 일이다. ●송덕상의 제자 문인방 뜻하지 않은 스승의 정치적 몰락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타격으로 다가왔다. 스승이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는 한 그들의 미래 역시 어두웠다. 보통 스승이 중벌을 받으면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미래를 기약하게 된다. 일단 죽림으로 들어간 젊은 선비들은 시서(詩書)를 연마하며 세상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그러다 운이 좋아 언젠가 관리로 등용되기만 하면 왕에게 스승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보통이다. 중종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개혁정치가 조광조의 복권과정이 바로 그랬다. 하지만 송덕상의 제자들 가운데는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문인방 등이 바로 그러하다. 그들은 ‘정감록’을 빙자해 난리를 꾸몄다. 과연 제자들이 스승 송덕상을 위해 역모를 꾀했는지, 아니면 우연히 송덕상과 역적들 사이에 사제관계가 형성돼 있었던 것인지, 쉽게 가늠하기는 어렵다. 여하튼 송덕상의 몇몇 제자들은 군사적 행동을 준비하다 발각돼 역적으로 처형되었고, 그 여파로 송덕상 역시 옥에 갇힌 것이 사실이다. 노론들 사이에서 박학다식한 큰선비로 통했던 송덕상은 여러 달 동안 영어(囹圄)의 몸으로 고통을 받다 드디어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실록, 정조 7년 1월7일 기해) 다른 역모사건들도 그렇지만 이 사건 역시 피의자들이 자기들의 처지를 변호하며 남긴 기록은 찾아볼 길이 없다. 있다면 취조문서가 전부다. 사건을 수사한 국가의 입장에서 사건을 완전히 왜곡하였을 가능성마저 적지 않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문인방 사건의 내막을 살펴보겠다. 송덕상의 제자 신형하는 황해도 평산 사람이다. 그는 송덕상의 억울함을 풀어야겠다며 스승을 변호하는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고 한다. 그것이 문제로 부각되어 신형하는 마침내 전라도의 한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송덕상을 추종하던 황해도 해주의 선비 박서집은 시를 지어 신형하의 절의를 기렸다. 그 시가 또 문제되어 박서집도 섬으로 귀양을 갔다. 박서집은 유배지에서 우연히 문인방이란 사람과 동거하게 되었다. 평안도 출신인 문인방은 놀랍게도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는 송덕상의 억울한 처지를 생각해서 장차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갈 계획이라고 하였다. 물론 박서집은 그에 찬동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박서집은 겁이 났다. 그는 섬에 파견돼 유배자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문인방의 역모사건을 밀고하였다. 그 섬은 전라도 관할이어서 깜짝 놀란 전라관찰사는 급히 영을 내려 관련자 전원을 체포하였다. 전주와 서울에서 혹독한 신문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문인방은 자기가 역모를 꾸민 사실을 시인하였다. 함께 붙들려온 백천식도 반란혐의를 인정하였다. 그들은 밀고자 박서집과 함께 일의 성사를 기원하며 하늘에 축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평민지식인으로 술사이기도 했던 문인방은 ‘정감록’의 한 구절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때 ‘여섯 글자’의 흉악한 예언이 문제로 부각되었으나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 구절은 문인방이 소지했던 ‘경험록’이란 예언서에도 나와 있다고 하였다. 현재 ‘경험록’이란 책자는 남아 있지 않다. 이 사건 당시 문인방은 모두 4종류나 되는 예언서를 소지하고 있었다. 평소 그가 이른바 비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같은 당류 이경래는 강원도 양양 임천리에 살며, 도창국은 평안도 영원 내락림에 있고, 김정언과 오성현은 함경도 안변에 거주하고, 곽종대는 평안도 순안에 살며, 이밖에 김훈과 백천식이 또 있습니다. 만일 난이 성공하게 되면 대선생으로 청계 선생을 모시려 하는데, 이는 송덕상이며 그 손자 송계유는 지금 나이 28세로 저와 마음을 합해 역모를 꾀했습니다.” 이 말에 따르면, 문인방처럼 고향이 평안도인 사람도 있지만 함경도 출신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이밖에 강원도 출신도 역모에 참여했다. 아울러 송덕상의 집안사람들도 일부 포섭돼 있던 것 같다. 그러나 과연 송덕상 일가가 역모사건에 참여하였을지는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회덕에 세거하던 송씨 집안은 조선사회에서 손꼽히는 명문 양반이었다. 설사 그들이 송덕상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일이었다. 조선사회에서 그들이 향유한 특권적인 지위는 이런 정도의 일로는 무너질 리가 없었다. 따라서 송덕상의 손자가 모의에 참여했다는 문인방의 진술은 신문과정에서 억지로 강요됐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송덕상의 제자는 주로 서울과 충청도에 거주했을 텐데, 하필 조선사회의 변경인 서북지방과 강원도 해안지방의 몇몇 제자들만 스승을 위해 난리를 꾸몄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양반과 평민지식인들의 역적모의 사건의 주모자로 분류된 문인방은 힘세고 날랜 평안도 출신의 장사 도창국과 함께 강원도 양양의 선비 이경래와 친했다. 이경래 역시 송덕상의 제자였는데 정조5년(1781) 9월 문인방 등이 이경래를 찾아갔을 때 이경래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스승님 송덕상이 조정에 죄를 얻어 뜻밖에 멀리 귀양을 가 계시므로 지금 사태가 급해졌다. 빨리 일을 도모하는 게 좋겠다. 문인방 그대가 인재를 잘만 모집하면 일이 성사된 다음 장수든 정승이든 여하튼 높이 등용하겠다.” 문인방 등은 그 말에 기뻐하며 이경래를 도원수로 삼고, 도창국을 선봉장으로 정했다. 이경래는 양양에 일가친척이 많은 데다가 노복도 숫자가 많으므로, 일단 유사시에 난을 일으켜 양양군수를 잡아 죽이고 무기와 병사를 확보하는 것쯤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이웃 고을인 간성을 공격하고 강릉으로 밀고 들어간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그 뒤 반란군은 원주를 함락시키고 곧이어 서울로 진격해 동대문을 거쳐 대궐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거사가 성공한 다음 그들은 송덕상을 ‘대선생’으로 책봉하기로 뜻을 모았다. 반란을 일으킬 시기는 갑진년(1784) 7월과 9월 사이로 정해졌다. 이경래의 집안은 강원도 양양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명문가였다. 이경래의 친척 공조참의 이택징은 우선적인 포섭대상으로 떠올랐다. 이택징은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에 반대해 규장각 운영을 강도 높게 비난한 적이 있다.“규장각은 전하의 사적인 관서에 지나지 않고, 규장각의 관리들은 전하의 사사로운 신하일 뿐입니다.” 이처럼 정조의 정책적 고려에 날카롭게 맞선 인물이었다. 문인방 등은 이런 이택징을 서둘러 합류시키고, 그들을 지렛대 삼아 서울의 여러 양반들을 역모에 끌어들이기로 했다. 당시 서울에는 몇 해 전에 거세된 홍국영 일파를 비롯해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에 반대하며 울분을 삭이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던 양반들이 많았다. 조선은 양반의 국가라, 양반들이 국가에 반기를 들 거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영조 초년 삼남지방에서 일어난 무신란(1728)을 비롯해 몰락한 양반들이 반란을 꾀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정적(政敵)들에 의해 완전히 조작된 역모사건도 없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17세기 초에 일어난 인조반정(1622)은 양반들이 반란을 통해 정권을 교체한 본보기였다. 그런 점에서 문인방과 이경래 등이 무력을 통해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소망을 품게 된 것도 전혀 터무니없는 일만은 아니었다. 문인방 사건의 경우 역모사건이 새롭게 달라진 측면도 있다. 권좌에서 밀려난 제일급의 양반들이 서북지방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평민지식인들 또는 술객(術客)들과 합세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모의과정에서 평민지식인들의 역할이 점차 강화되었다는 점을 놓쳐서도 안 될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볼 때 이경래나 이택징과 같은 일급 양반들보다 평민지식인 문인방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해 보인다. 또 한 가지 강조할 사항은 ‘정감록’을 포함한 각종 예언서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이다. 문인방은 양양과 서울은 일단 이경래에게 부탁해 놓고 자신은 삼남지방으로 내려갔다. 힘이 센 장사들을 다수 모집해 거사를 성공으로 이끌 생각이었다. 그가 관헌에 체포되기 직전 충청도 진천에 머물고 있던 것도 장사를 모으기 위해서였다.(실록, 정조 6년 11월20일 계축) ●평민지식인이 송덕상 같은 양반과 결탁하다니 억울하게 멸시받던 평민지식인들로서야 송덕상과 같은 명문가 출신의 양반과 사귀고 싶어도 도저히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짐작은 매우 합리적으로 들리지만,18세기 조선사회의 실상과는 더 이상 부합되지 않는다. 문인방 사건 때 연루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용케 법망을 빠져나간 평민지식인들 중에 이규운이란 사람이 있다. 전국 각지를 떠돌며 훈장노릇을 하던 평민지식인이었다. 그런 이규운이 산림 송덕상과 서로 가까워진 것은 실로 우연한 기회에 비롯되었다. 정조 초년 이규운은 강원도 통천에 있었다. 통천은 송시열이 함경도로 귀양갔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머물던 곳이라 송시열의 기념비가 있었다. 이 비석을 다시 세우는 일로 이규운은 송덕상을 몇 차례 만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강원도 김화 수령으로 재임하던 송덕상의 아들까지도 사귀게 된다. 어렵게 대갓집과 연줄을 대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규운에게 돌아올 몫은 아무 것도 없었다. 쥐꼬리만 한 벼슬 한 개도 차지할 운이 아니었다. 이규운은 본래 평안도 선천 사람이었고 진짜 이름은 오도하라고 했다. 이규운은 고향을 떠나 강원도를 떠돌았다. 그는 서울 양반 이찬이란 사람을 대신해 과거시험 답안지를 써주었는데 그 덕에 이찬은 진사가 되었다. 제 이름을 걸면 아예 과거시험장 출입이 불가능한 이규운이었으나 그가 대필해준 글로 다른 사람은 진사가 되었다.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 허탈과 공황 속에서 이규운은 ‘정감록’을 읽었고, 반란을 꿈꾸었다. 이규운은 송덕상 같은 양반을 위해 피를 흘릴 사람은 아니었다. 그와 같은 술객에게 송덕상의 명예회복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떡볶이 아줌마의 ‘꿈에 그린’ 전시회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아주머니가 틈틈이 그린 그림을 모아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 화제의 주인공은 전북 김제시 시립도서관 옆 골목에서 6년째 떡볶이와 순대, 김밥 등을 팔고 있는 박성연(52·김제시 요촌동)씨. 박씨는 손님이 뜸할 때나 장사를 끝내고 그린 500여점의 초상화를 모아 지난 1일부터 열흘 일정으로 김제 문화예술회관에서 전시회를 갖고 있다. 박씨가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1년부터. 처음에는 남편 송기수(56)씨의 권유로 달력의 정물화나 풍경화를 따라 그리다가 잡지나 신문에 실린 유명인사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지난 1993년 건강이 나빠 쓰러진 남편을 대신해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는 박씨는 값비싼 종이나 물감 등은 구입하지 못해 미술 도구라고 해야 연필과 지우개, 스케치북이 전부였다. 게다가 장사하는 틈을 이용해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손님이 올 경우 중간 중간 붓을 놓기 일쑤였다. 박씨는 “바쁠 땐 작은 초상화 한장 완성하는데 며칠씩 걸리는 등 작품완성이 어려워 중간에 몇 번씩 포기할 생각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박씨는 ‘이왕 시작한 거 포기하면 아들 볼 낯이 없다.’는 생각에 잠자는 시간도 쪼개 그림에 매달렸다. 이런 박씨의 ‘늦바람’에 동양화에 능한 남편도 구도나 신체 비율을 일일이 잡아주는 등 ‘스승’을 자처했다. 박씨는 “그동안 넉넉지 못한 살림에 흔한 미술학원도 못 다녔는데 이제 어엿한 화가가 됐다.”며 “평생 소원이던 개인전까지 열어 무척 기쁘다.”고 환하게 웃었다.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儒林(471)-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47)

    儒林(471)-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47)

    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 (47) 순자는 이처럼 ‘좋은 법이 있어도 어지러워지는 일은 있으나 군자가 있으면서도 어지러워진다는 말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일이 없다.(故有良法而亂者有之矣 有君子而亂者自古及今未嘗聞也)’라는 결론을 통해 ‘좋은 법(良法)’보다는 ‘좋은 사람(君子)’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유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순자는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법(法)’을 매우 중요시하였던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예의법정(禮儀法正)을 강조하는 순자는 세상은 군자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것이 최선이지만 어차피 군자가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불가하므로 인간이 만든 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차선이라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하였던 현실적 사상가였던 것이다. 순자는 ‘군도(君道)’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법은 다스림의 시작이고, 군자는 법의 근원이다.(法者治之端也 君子者法之原也)” 따라서 국가에는 다스림의 기준이 되는 법이 반드시 있어야 되며, 형벌을 엄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법의 중시가 그의 제자인 한비자에게서 극도로 발전해 법가를 이루었으며, 시황제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던 순자의 제자 이사는 시황제가 말더듬이 한비자를 총애하자 참언하여 독살시키는 한편 한비자의 법가를 한층 더 심화시켜 ‘형명법술(刑名法術)’을 주로 하는 철혈통치를 단행함으로써 중국역사상 최고의 악인으로 낙인찍혀 그 자신은 물론 스승인 순자까지도 이단자로 몰아버리는 우를 범하였던 것이다. 순자가 이렇듯 맹자와 더불어 유가의 정통을 이은 대사상가였으나 이단자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은 공자의 주관적이고 이상적인 형이상학을 계승한 맹자에 대해 준엄한 비판을 가하면서 특히 맹자가 부르짖었던 ‘성선지설’에 직격탄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순자는 맹자와 달리 ‘사람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는 ‘성악지설(性惡之說)’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순자는 ‘성악(性惡)편’의 첫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니 그것이 선하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다.(人之性惡 其善者僞也) 지금 사람들의 본성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는데, 이것을 따르기 때문에 쟁탈이 생기고, 사양함이 없어진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질투하고 미워하는데, 이것을 따르기 때문에 남을 해치고 상하게 하는 일이 생기며, 충성과 믿음이 없어진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귀와 눈이 욕망이 있어 아름다운 소리와 빛깔을 좋아하는데, 이것을 따르기 때문에 지나친 혼란이 생기고, 예의와 아름다운 형식이 없어진다. 그러니 사람의 본성을 따르고 사람의 감정을 좇는다면 반드시 다투고 뺏게 되어 분수를 어기고, 이치를 어지럽히게 되어 난폭함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스승과 법도에 따른 교화와 예의와 법도가 있어야 하며, 그런 뒤에야 서로 사양하게 되고 아름다운 형식을 갖게 되어 다스림으로 귀결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며, 그것이 선하다는 것은 거짓이다.
  • 儒林(469)-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45)

    儒林(469)-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45)

    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45) 이사(李斯). 그는 진나라의 재상으로 시황제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던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천하를 통일한 후에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였고, 시황제가 죽은 후 환관 조고(趙高)와 공모하여 막내아들 호해(胡亥)를 황제로 옹립하는 한편 태자 부소(扶蘇)를 자살케 한 간신이었다. 통일 국가 진나라의 15년의 짧은 수명은 전적으로 승상 이사에 대한 책임으로 중국의 역사는 이사를 절대적 악인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 자신이 순자로부터 유학을 배웠으면서도 유학자들을 구덩이에 산 채로 매장한 분서갱유 사건은 이사를 ‘용서받지 못할 사람(the Untouchable)’의 불가촉 악인으로 규정하고 그의 스승인 순자마저 이단아로 몰기에 충분한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사는 순자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나 그 자신은 유가보다는 법가(法家)에 가까웠다. 법가(法家:Legalism). 중국 고대철학의 한 학파로서 전국시대에 노예들의 끊임없는 폭동과 신흥봉건지주계급의 발흥으로 인하여 기존의 유가적 예치(禮治)가 점점 붕괴되어 효력을 상실하자 엄격한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자는 법치사상이 등장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법가였던 것이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법가를 부르짖은 한비자(韓非子)와 인간의 모든 활동은 통치자와 국가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오직 국가의 강력한 통제와 황제에 대한 절대복종을 통해서만 사회적 화합을 이룰 수 있으니, 엄격하게 상벌을 내리는 법률체계로서 통일제국 진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철혈(鐵血)정책을 쓴 이사 모두 순자의 제자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한비자나 가혹하게 이 정책을 실행함으로써 진나라를 15년 만에 멸망시켜 영원히 중국에서 법가 철학을 불신 받게 한 악역의 대명사, 이사라는 제자가 순자에게서 나온 것은 결코 돌연변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청출어람(靑出於藍)이었다. 우선 순자는 공자, 맹자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유가에서 하늘이 사람들의 도덕적인 권위의 기초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부정하였다.‘하늘은 사람 위에서 자연과 함께 이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섭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노자와 장자도 다르지 않아 이들 도가 역시 사람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국 사람들은 자연과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하늘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자는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분리시켰다. 자연에는 자연의 법칙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의 법칙이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순자는 하늘에는 자각과 뜻이 있어 착하고 악함에 따라 사람들에게 복을 내리기도 하고, 화를 내리기도 한다는 기존의 하늘에 대한 신앙을 전적으로 부정하였다. 순자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다. “하늘은 만물을 생성하게는 하지만 만물을 분별하지는 못하며, 땅은 사람들을 그 위에 살아가게는 하지만 사람들을 다스리지는 못한다.” 이는 스승 공자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사상이었다. 공자는 ‘중용(中庸)’에서 ‘정성이란 하늘의 도요, 정성되게 사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늘이야말로 이 우주만물의 지배자이며, 올바른 도의 근원으로서 사람들의 도덕적 행위의 원천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초정 김상옥시인 1주기 추모집

    지난해 10월31일 타계한 초정 김상옥(1920∼2004)시인의 1주기를 기리는 추모문집이 잇따라 출간됐다. 문화예술계 인사 36인의 회고담을 묶은 수필집 ‘그 뜨겁고 아픈 경치’(고요아침)와 미간행 유고를 비롯해 시인의 작품세계를 총망라한 ‘김상옥 시전집’(창비)이 나란히 나왔다. 교과서에 실린 ‘봉선화’‘백자부’ 등의 시조로 유명한 시인은 일제 시대 보통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지만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능해 문단에서 ‘시서화 삼절(三絶)’로 불렸다.1939년 ‘문장’과 ‘동아일보’로 등단했고,1947년 첫 시조집 ‘초적’을 내놓은 이래 60여년 동안 고결한 정신세계를 선명한 이미지로 드러낸 시편들을 선보였다. 수필집 ‘그 뜨겁고 아픈 경치’에는 세번씩 옥고를 치르며 일제에 맞섰던 민족주의자이자 20여년간 교편을 잡으며 어린 학생들에게 문학과 인생을 가르친 자상한 스승으로서의 면모 등 고인의 생애와 예술관이 지인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실려 있다. 소설가 박완서 이제하 서영은, 시인 김후란 이근배 허영자, 시사만화가 백인수, 전 서울시장 이해원, 원로 전각가 정문경, 장녀 김훈정씨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참여했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씨는 “선생의 글은 여름 소낙비가 지나고 난 뒤의 흙냄새 같다. 그것이 그림이 되면 골짜기의 난향으로 변하고, 붓글씨가 되면 은은한 연적의 묵향으로 바뀐다.”고 고인의 예술세계를 기렸다.1만 2000원. 시단의 원로, 민영 시인이 엮은 ‘김상옥 시선집’은 첫 시조집 ‘초척’에서 노년의 시집 ‘느티나무의 말’(1998)에 이르기까지 고인이 생전 발표한 시조집, 동시집, 시집 전부와 미간행 유고를 실었다. 문학평론가인 서울여대 이승원 교수의 해설, 작품 연보, 사진 등이 함께 실려 있다.2만 5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儒林(468)-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44)

    儒林(468)-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44)

    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44) 사마천은 사기에서 순자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순경(荀卿:순자)은 조나라(지금의 산시성) 사람이다.50세에 이르러 비로소 제나라에 유학하였다. 그때 제나라에는 추연(騶衍)이 있어 그 학술은 허하고 크면서도 넓었으며, 추석(騶奭)의 문장은 실용성이 없었으나 훌륭하였으며, 또 순우곤(淳于)은 오래 함께 있으면 명언을 쏟아놓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제나라 사람들은 이 세 사람을 칭찬하기를 ‘하늘의 일을 얘기하여 탕탕망망한 추연, 용을 새기는 것과 같이 실용에 맞지 않는 추석, 수레의 심대를 불에 그슬려서 기름이 다 함이 없이 흐르는 것과 같은 지혜가 많은 순우곤’이라 하였다. 이들 전병(田餠)의 무리는 이미 제양왕 때 모두 죽었다. 그 중에 순경이 가장 연장인 늙은 선생이었다. 제나라는 열대부에 결원을 보충하였는데, 순경은 세 번이나 좨주(祭酒:열대부의 최장로)가 되었다. 누군가 순경을 무고한 자가 있었으므로 순경은 초나라로 갔다. 초나라 춘신군(春申君)은 순경을 난릉(蘭陵)의 현령으로 앉혔는데, 춘신군이 죽자 면직되고 내쳐져 난릉에서 살았다. 이사(李斯)는 일찍이 순경의 제자였는데, 그 뒤에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순경은 혼탁한 세상의 정치와 나라를 망치는 문란한 임금이 계속해 나오고, 왕도가 행해지지 않고, 무당, 점쟁이에 미혹되어 길흉화복을 믿고, 되지 못한 선비들이 작은 일에 구애하며, 장자의 무리가 고담방론하며 풍속을 어지럽히는 것을 꺼려하였다. 그리하여 유가, 묵가의 도덕의 행실과 흥패를 연구하여 수만언을 저술하였다. 죽어서 난릉에 장사되었다.” 순자의 생애를 기록해 놓은 유일한 사기의 ‘맹자순경열전’을 통해 순자가 대략 기원전323년경에 태어났음이 추정된다. 왜냐하면 사기에 기록된 순우곤은 맹자와 동시대 사람으로 두 번이나 맹자와 설전을 벌였던 당대 최고의 세객이었으므로 순경이 ‘50세에 비로소 제나라에 유학하였고, 그 무렵에는 그들이 이미 다 죽어 순경이 세 번이나 좨주에 뽑혔다.’ 는 사기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대략 순자는 맹자보다 50년 뒤에 태어난 인물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순자의 원이름은 황(況)이며, 열다섯 살 때부터 수재라 일컬어졌다 한다. 제나라의 직하학궁에는 사기에 기록된 대로 추연, 전병, 순우곤 등 이름난 천하의 선비들이 몰려들어 학문을 연구하였으므로 맹자도 이곳에 빈객으로 추대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순자도 50세 때인 제나라 민왕(王) 말년에 그곳으로 가서 학문에 정진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마천의 기록을 통해 순자가 어째서 유가의 법통을 이은 대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유학으로부터 이단자 취급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그 이유가 명백하게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비롯된다. “이사는 일찍이 순경의 제자였는데, 그 뒤에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이사(李斯). 중국역사상 최고의 악역. 이 악역의 주인공이 순자의 제자라는 것은 스승인 순자에 대한 모독(冒瀆)이었던 것이다.
  • [여연 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15)한국의 다법

    [여연 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15)한국의 다법

    “스님네가 찾아와서 조주 문을 두드리니/차 이름(茶松)이 부끄러워하며 뒤뜰로 모시네/해남 초의선사 동다송을 진작 읽고/당나라 육우의 다경도 보았네/정성을 다하여 경뢰소를 우려내/손님께 따르니 피어나는 차의 향기/질화로 위 동병 속에 찻물이 익고 나면/한 잔의 금설은 제호보다 낫다네” 다송자 보정 스님의 차시다. 다송자 보정 스님은 전남 순천 송광사로 출가해 80여 수의 차시를 남긴, 근대를 대표하는 차인이다. 한 잔의 차를 마시며 평상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선이다. 차 역시 마찬가지다. 한 잔의 차에는 우주를 그대로 담은 평상심이 깃들어 있고 그 차는 곧 선일 수 있는 것이다. 초의 스님은 자신이 주석하던 큰절 대흥사를 떠나 두륜산 중턱에 작은 암자를 지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일지암이다. 그런 소중한 일지암이 쇠락해지자 초의 스님 상좌와 더불어 그 초암을 복원한후 시 한 수를 읊었다. “연하가 난몰하는 옛 인연의 터에/스님 살림할 만큼 몇 칸집 지었네/못을 파서 달이 비치게 하고/간짓대 이어 백운천을 얻었네/다시 좋은 향과 약을 캤고/때로 원기로 묘련을 펴며/눈앞을 가린 꽃가지를 잘라버리니/좋은 산이 석양 노을에 저리도 많은 것을” 다도는 차를 마시는 정신적, 문화적 행위로 규정된다.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여러 대중들 앞에서 무대예술로 육법공양 등 의식으로도 발전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다법이란 차를 행하는 모든 행위의 총체적인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초의 스님의 다법은 검박한 살림살이 속에서 풍요롭고 맑은 마음자리를 품어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초의 스님의 다법이 일상에 있어서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충만하게 하는 것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도(道)요, 선(禪)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차를 끓이는 사람은 삿됨이 없어야 하고 중정을 지켜야 한다. 중정이란 곧 삶의 철학이다. 차를 끓일 때 물의 온도, 차의 양, 시간 등 그 어느것 하나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전통적인 다법은 바로 중정의 묘리에 있다. 초의스님은 영혼을 일깨우는 도인의 찻자리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밝은 달 촛불이 되고 또 벗이 되니/흰 구름 자리되고 또 병풍이 되어주네/솔 솔 솔 찻물 끓는 소리 시원하고 고요하니/맑고 찬 기운 뼈에 스며 영혼을 일깨우네/오직 흰 구름 밝은 달 두벗을 삼으니/도인의 찻자리 이보다 빼어날 소냐” 참으로 아름답고 정겨운 풍경이다. 솔 솔 솔 찻물 끓는 소리를 밝은 달과 흰 구름을 벗 삼아 들으며 차를 마실 수 있는 삶의 여유가 바로 도인의 찻자리인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일깨우는 찻자리만큼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없다. 그렇다면 찻자리의 미덕은 어디에 있는가. 초의스님은 “손님이 많으면 소란스러우니 고상함을 찾을 수 없다. 홀로 마시면 그윽하고, 둘이 마시면 빼어난 것이요, 셋은 멋이라 하고, 대여섯은 덤덤할 뿐이요, 일곱여덟은 그저 나누어 마시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찻자리는 가능하면 사람이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조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차가 갖고 있는 근본성질이 맑고 조용한 성품과 잘 조화가 됨을 의미한다. 명나라 도륭은 고반여사(考槃餘事)에서 “차를 마실 때는 손님이 적은 것이 좋다. 손님이 많으면 시끄럽다. 또한 소란스러우면 아취가 모자란다. 홀로 마시면 그윽하고, 둘이 마시면 빼어난 것이요, 서넛을 멋이라 하고, 대여섯은 덤덤할 뿐이요, 일곱여덟은 그저 나누어 마시는 것이다.”며 차를 마실 때에는 가능한 한 담백한 자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고반여사에서는 또 차를 마시는 행위를 덕을 쌓는 것과 비교하고 있다.“차는 행실이 바르고 덕을 닦은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음료다. 백석의 맑은 샘물을 길어 끓이는 절차를 법도에 맞게 하여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없이 한결같이 계속하여 그 법식을 완전히 익히고 깊이 음미하여 정신이 융회하고 심취해서 제호나 감로에 비교할 만한 참다운 맛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다도를 훌륭하게 감상할 줄 아는 사람이라 하겠다. 모처럼 좋은 차를 마시면서 그 사람 됨됨이가 미흡하다면 마치 좋은 샘물을 퍼서 잡초에 주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니 이보다 큰 죄가 없을 것이다. 차의 멋을 모르고 꿀꺽 단숨에 마셔 맛의 분간도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상 속될 수가 없다.”고 했다. 차는 무척이나 신령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 위에서 노니는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신령이라 함은 인간의 영혼을 맑고 담백하게 일깨운다는 것이다. 차는 인간을 위한 것이고 우리 모두를 위한 현재적 존재인 것이다. 차는 또한 적요(寂寥)한 것이다. 적요라는 것은 고요하고 그윽한 경지에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시대의 문화는 자유분방한 가치를 선호하며 율동과 리듬, 그리고 비트로 이어지는 동적인 문화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현대인들은 참을 줄도, 기다릴 줄도 모른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이 우리의 일상사가 돼버린 지경이다. 그런 점에서 차는 우리들의 들뜬 문화를 가라앉힐 또 하나의 정적인 작용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도(茶道)의 정의는 명확한 것이 된다.‘다도’란 차나무를 재배하고 찻잎을 따고 차를 만들고 차를 마시고 찻자리를 정리하는 일체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다도를 좀더 압축적이고 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차를 통해 몸과 마음을 닦는 행위로 요약해 볼 수가 있다. 장원은 ‘다록’에서 다도에 대해 “차를 정성들여 만들고 건조하게 저장하며 깨끗하게 우리면 다도를 다한 것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다도를 더욱 더 명쾌하게 정의해놓은 것이 바로 불가(佛家)의 다선일미(茶禪一味)다. 풀이해보자면 차와 수행은 하나라는 것이다. 차는 곧 진리요, 진리는 곧 차라는 뜻이기도 하다. 차를 통해 오묘한 진리 길에 다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다도와 다법은 구별되어진다. 다도란 특별한 격식이 없이 차를 통해 심신을 수련, 진리의 길에 이르는 것이고 다법(茶法)은 특별한 격식을 지킴으로써 찻자리의 예절을 전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조주스님의 수행법인 “차나 한잔 마시게,”와 초의스님의 ‘중정의 묘’는 다도의 진수가 어디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다도는 있는가?´라는 물음을 여기저기에서 들을 수 있다. 대답은 ‘당연히 있다.’이다. 삼국의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도는 심신을 수양하는 한 방편으로 작용해온 것이다. 산과 들을 달리면서 활과 검을 쓰며 심신을 단련했던 화랑들도 차를 통해 그 정신세계를 고양시켰으며, 고려시대 스님들과 문인들은 “한잔의 차는 곧 참선의 시작”“차의 맛은 선의 맛”이라며 차를 진리를 고양시키는 도(道)의 동반자로 본 것이다.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다. 중정의 묘리를 강조했던 초의스님뿐만 아니라 추사 김정희도 “차를 끓여 마시는 것이 바로 도의 본체를 체득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차는 진리의 문을 여는 것과 같이 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전통의 다도는 ‘차와 진리는 하나’라고 정의해 볼 수 있다. 참으로 고아하고 높은 차의 품격과 일치하는 우리의 전통 다도인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차를 높은 품격의 길로 이끄는 고아한 정신세계를 지녔다. 그런 점에서 차인들의 마음가짐은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다. 차의 도가 진리의 길에 있다면 모든 사람을 융섭하는 화합과 자비의 마음이 깊어져야 한다. 차인들은 일상에서 차인으로서 도리를 지켜야 한다. 그래야 그 차인의 찻자리는 시간이 갈수록 높은 품격의 향기를 품어낼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시대에는 우아하고 품격있는 행다법만이 존재한다. 자신의 인격을 고양시키고 수행하지 않는 차인들의 찻자리는 이제 반성되어야 할 부분인 것이다. 차는 오감(五感)으로 마신다고 했다. 귀로는 찻물 끓는 소리를, 코로는 향기를, 눈으로는 다구와 차를, 입으로는 차맛을, 손으로는 찻잔의 감촉을 느끼라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차는 인간이 가진 모든 감각을 통해 그 맛과 향취를 즐겨야 한다. 그렇다면 행다법은 어디에 있는가. 행다법은 차를 잘 우려내고 차의 도리에 맞게 찻자리를 격식있고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과도한 기교나 격식을 차리는 경향이 오늘의 행다에 있는 것은 어쩌면 차의 근본과 배치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행다의 기본은 어디에 있는가. 첫째, 차의 품성에 맞춰 차의 맛을 내는 데 주력해야 한다. 둘째,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 되어야 하며 셋째, 차와 다구, 물과 불, 손님과 주인이 모두 하나가 되어 자연스럽게 공유하는 만남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차를 하는 모든 행위를 통칭하는 행다는 차를 끓이는 전다법과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공다법(供茶法)이 있다. 공다법은 곧 다례(茶禮)로 볼 수 있다. 다례는 말 그대로 예절을 갖추어 차를 손님에게 대접하는 것이다. 다례는 그 목적에 따라 생활다례(生活茶禮), 접빈다례(接賓茶禮), 의식다례(儀式茶禮)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생활다례는 여러사람이 함께 둘러앉아 마시는 두리차, 혼자 마시는 명상차가 있다. 접빈다례에는 차우들이 함께하는 예다법(禮茶法)인 가회다례(嘉會茶禮), 또 존경하는 사람이나 윗사람에게 차를 올리는 공경다례(恭敬茶禮)가 있다. 의식다례에는 차례(茶禮), 추모헌다례(追慕獻茶禮), 잔치다례, 개천다례, 궁중다례(宮中茶禮)가 있다. 그리고 차의 종류와 행다하는 사람에 따라 잎차행다(葉茶行茶), 말차행다(末茶行茶), 선비차 행다 등이 있다. 다도와 행다의 근원에 대해 초의스님은 우리에게 명쾌한 해답을 준다. “차를 딸 때는 그 현묘함을 다해야 하고, 만들 때는 그 정성을 다해야 하며, 물은 그 참물을 얻어야 하고, 달일 때는 그 중정(中正)을 얻어야 하며, 체(體)와 신(身)이 서로 어우러지면, 건(健)과 영(靈)을 함께 얻는 것이 다도(茶道)의 경지다.” 일지암 암주 ■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다도시연 모든 것은 근원으로 회귀한다. 생멸의 아름다운 공존은 우주만물의 삶을 각성하게 한다. 그래서 생멸은 우리에게 근원적인 물음을 던져주는 또 하나의 화두 같은 것이다. 가을이 되면, 그리고 겨울이 되면 우리는 정신적인 공허에 시달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공허한 영혼을 채우기 위해 이 세상 수많은 선지식들이 기록한 책을 찾는다. 책은 우리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선지식(善知識)이다. 그 선지식의 바다를 헤매는 것만큼 즐거운 일상은 없다. 지난 19일부터 23일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도서전에 초청을 받아 참여했다.57회째를 맞는 프랑크푸르트도서전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도서전이다. 세계 110개국 30여만명이 참가할 정도로 이번 도서전은 성황리에 열렸다. 우리나라는 그 도서전에서 주빈국이었다. 주빈국 오프닝 행사로 사단법인 초의차문화연구원의 선다도 시연이 열렸다. 주최측의 초청공연이었다. 세계 선종의 본산답게 주빈국 주요 책목록에는 ‘직지´, 서산선사의 ‘선가귀감´ 등 불교의 선에 관한 책들도 많이 소개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오프닝 행사 시연자로 선 다도를 선택한 주최측의 초청에 따라 초의스님의 선다(禪茶)를 시연하게 된 것이다. 주제는 ‘차 한잔에 담긴 느림의 미학’이었다. 선다의 기본은 정(靜)과 적(寂)을 통한 동(動)으로 나아감이다. 그뿐만 아니다. 동은 곧 정과 적으로 부드럽고 원만한 순환을 통한 자연스러운 가라앉힘이다. 선다의 시연은 그런 점에서 정을 근본으로 한다. 그러나 30여만명이 참가한 북새통 같은 곳에서 더구나 작은 공간에서 선다를 시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먼저 대금소리로 자리를 잡았다. 느리면서도 감미로운 선율을 뿜어내는 대금은 혼란스러운 장내를 순간 가라앉혔다. 선다는 원래 특별한 무대장치가 필요없다. 선다의 묘미를 살릴 수 있는 10폭 병풍을 두르고 하얀 백자 찻잔을 준비했다. 하얀 다포, 그리고 담백한 한복을 입은 시연자들의 모습은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순식간에 100명이 넘는 관객으로 불어났다. 티(tea)와 커피 그리고 포도주나 맥주를 선호하는 그들에게 조금은 번거로울 수 있는 다도 시연에 생경하기만 한 표정들이었다. 필자의 멘트가 이어졌다. 필자는 관람객들에게 “차 마시는 행위는 젠(禪)을 추구하는 것이다. 젠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 붓다가 깨달음을 추구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선다도는 자신의 내적 깨달음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이요 화두이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의 선 다도는 1300여년간 이어진 불교문화의 진수다. 차, 물 그리고 마음이 하나가 되어 삶의 근원을 찾는 찻자리는 그런 점에서 번뇌에 빠져 자신을 놓쳐버리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매우 정신적인 양식이다. 좋은 찻잔에 좋은 마음으로 차를 담아 손님을 접대하는 행위를 통해 한국의 정서와 문화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관람객들이 선다 시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초의스님의 정신이 깃든 차인 ‘설아’차의 향기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푸른 옥색 같기도 하고 연한 연두색 같기도 한 영롱한 찻물이 작고 하얀 찻잔에 담겨 돌아가자 관람객들은 탄성을 그치지 못했다. 그들의 문화적 수준은 매우 높았다. 생활다도를 무대예술로 끌어올린 선다의 독특한 시연을 금방 배우고 익힌 것이다. 총 3차례 열린 이번 선다 시연에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곳은 바로 독일 내 언론들이었다. 동양의 변방나라에 수천년에 걸친 문화의 향기가 깃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못한 그들의 눈에 선다 시연은 경이로울 수밖에 없었다. 방송과 신문의 인터뷰와 카메라 세례는 한국불교의 문화, 한발짝 나아가 우리민족의 문화가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 儒林(464)-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40)

    儒林(464)-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40)

    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40) 그렇다면 문공은 맹자에게 무슨 말을 들었던가. 어떤 인상 깊은 말을 들었기 때문에 마음에 끝내 잊히지 않는다고 말하고 평생 동안 맹자를 존경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맹자사상의 골수인 성선지설이었다. 그 무렵, 문공은 아직 세자로서 이웃 강대국인 초나라에 사신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말이 사신이지 약소국이 강대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떠나는 진사(陳謝)사절이었던 것이다. 초나라로 가는 길에 송나라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송나라에는 맹자가 머무르고 있었다. 송나라도 등나라처럼 규모가 작고 땅은 협소하여 인구가 적었지만 송나라의 임금은 술과 여자에만 빠져 있을 뿐 분발하지 않았으므로 맹자 역시 우울한 식객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세자는 강대국 초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진사로 나가는 자신의 입장을 한탄하자 맹자는 말끝마다 요순(堯舜)임금을 칭하면서 인간본성의 선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맹자’에는 맹자가 문공에게 말하였던 구체적인 내용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전후의 문맥으로 보면 맹자는 ‘인간은 누구나 선한 마음을 갖고 있다. 천하의 성군 요순도 성선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대도 그 성선을 확장시킬 수만 있다면 반드시 요순과 같은 성군이 될 수 있을 것이다.’는 내용으로 설법하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맹자의 말을 그대로 흘려들었던 세자는 초나라에 가서 굴욕적인 외교를 끝내고 돌아올 무렵에 다시 맹자를 만난다. 이때 세자는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요순과 같은 성군이 될 수 없는데 어째서 자신에게 그런 듣기 좋은 말을 하였는가 하고 따져 물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자 맹자는 대답하였다. 의심하는 세자에 대한 맹자의 명답이 ‘등문공 상편’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세자는 내 말을 의심하십니까. 도는 하나일 뿐입니다. 일찍이 성간(成 )이 제경공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대도 장부이고 나도 장부이니 내가 그대에게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하였으며, 안연(顔淵)이 말하기를 ‘순(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도를 이룬 자는 또한 이 순과 같다.’고 하였으며, 공명의(公明儀)가 말하기를 ‘문왕은 나의 스승이니 주공(周公)이라도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하였습니다. 지금 등나라는 비록 작다고 해도 국토의 긴 곳을 잘라 짧은 것을 보충하면 오십리가 되니, 그래도 그것을 가지면 좋은 나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만약 약이 몸을 어지럽게 하지 아니하면 그 병은 낫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맹자의 이 대답은 인간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성선지심’이 있는데, 그 마음을 닦아 도를 이루면 반드시 누구나 요순과 같은 성군이 될 수 있음을 분명하게 못 박고 있는 것이다. 이는 좋은 약을 먹었을 때 약 기운으로 말미암아 잠시 어지러운 증상이 있겠지만 참고 기다리면 곧 좋은 결과가 찾아와 쾌유되는 것처럼 비록 지금 등나라는 사방 50리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이지만 인의로써 다스린다면 반드시 요순과 같은 성군들의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음을 확신하는 맹자의 사자후였던 것이다.
  • [씨줄날줄] 유머와 독설 정치/진경호 논설위원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연단에 올라 한껏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곤 한마디 했다.“제게도 여러분 같은 빠순이들 많아요….” ‘?!…빠순이?’ 여고생들이 웅성거렸다.“그게 뭐야?”“술집아가씨 아냐?” 강당은 썰렁해졌고, 졸지에 ‘술집여자’가 돼버린 여고생들 앞에서 이 총재는 헛기침만 연발했다.2002년 스승의 날 서울 은평구의 한 여고에서 있었던 일이다. ‘오빠부대’를 잘못 일컬어-비서실장이던 C의원의 귀띔이었다-결국 설화(舌禍)가 되고 만 이 3년전 일화는 우리 정치의 단면을 보여준다. 대선을 앞두고 청중의 마음을 잡아끌기 위해 유머를 하기는 해야겠는데 제대로 된 유머를 해본 적이 없으니 이런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맞고 말았던 것이다. 아쉽고 부럽지만 서구 정치사에는 품격있는 유머가 차고 넘친다. 못생긴 링컨은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라는 야당의원의 비난에 “내가 두 얼굴을 가졌다면 왜 이런 얼굴로 나왔겠느냐.”고 되받아쳤고, 저격을 당해 병원으로 실려간 레이건은 “제발 여러분 모두 공화당원이라고 말해 주시오.”라는 말로 둘러싼 의사들을 안심시켰다. 우리에게도 유머가 넘치는 정치인들이 없지는 않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머는 하도 많아 옮겨적기가 벅차고, 김상현 조홍규 전 의원 등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재담으로 지난 국회를 부드럽게 했다. 17대 들어 국회가 독설가들의 무대로 변한 듯하다. 걸쭉한 입담으로 경색정국을 풀어내는 정치인들은 사라지고, 유시민 전여옥 의원 등 저격수로 불리는 독설가들의 활극이 넘친다. 지난해 ‘차떼기당’ 발언의 주역 이해찬 국무총리 역시 올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어김없는 ‘소신발언’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다.“총리는 훈계나 들으러 나온 사람이 아니다.”“…참 별꼴을 다 본다.”는 등의 발언은 독설을 넘어 싸움 수준이다. 여야의 정체성 공방 또한 청와대 비서관의 말을 빌리자면 ‘저주의 굿판’이나 다름없다. 영국의 역사학자 폴 존슨은 ‘지도자의 다섯가지 덕목’의 하나로 유머를 꼽았고,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유머의 원천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라고 했다. 국민들의 고통과 슬픔을 보듬는, 따뜻한 유머의 정치가 그립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차별철폐법 이끈 ‘여자 킹목사’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어머니’로 불리는 로자 리 파크스가 24일(현지시간) 노환으로 숨졌다.92세.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 살던 파크스는 1955년 12월 버스에서 백인용 좌석에 앉아 있다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그녀는 ‘흑백분리’를 규정한 시 조례를 위반한 혐의로 체포돼 14달러의 벌금을 선고받았다. 이에 분노한 흑인들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주도 아래 381일 동안에 걸친 버스승차거부에 들어갔다. 이후 흑인들의 민권운동이 줄을 이었고 결국 1964년 인종, 피부색, 종교, 국적에 따른 차별을 철폐하는 내용의 민권법 제정을 이끌어냈다. 1992년 파크스는 당시 상황에 대해 “나도 다른 승객과 똑같은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흑인들은 차별대우를 너무 오랫동안 견디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 사건 이후 파크스는 각종 협박에 못 이겨 디트로이트로 이사해 1965년부터 1988년까지 민주당 하원의원 존 코니어스의 보좌관으로 일했다.1996년에는 대통령이 수여하는 자유의 메달,1999년에는 의회가 수여하는 금메달을 각각 받았다.1999년에는 미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100대 인물’로 뽑히기도 했다.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길섶에서] 새치기/이목희 논설위원

    대학교수가 점심시간에 교내 학생식당을 갔다. 학생들이 길게 줄을 서서 배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교수가 등장하자 힐끗 쳐다볼 뿐 누구도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관절염으로 다리가 불편한 교수는 장시간 서서 기다릴 엄두가 안나 주뼛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마침 식당직원이 달려와 “먼저 식사하시죠.”라고 친절을 베푸는 바람에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며칠 후 교수 연구실에 한 학생의 편지가 배달되었다.“교수님이 차례를 안 지켜서야 되겠습니까.” 학생식당에서의 ‘새치기´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교수는 처음엔 화가 났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편지를 보낸 학생을 일방적으로 나무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교수는 줄을 안 서도 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이해시킬 엄두가 안 났고, 그들은 내가 다리가 아프다는 사실을 몰랐을 테니까….” 이 얘기를 듣고 토론이 벌어졌다. 공직에 있는 A씨는 “스승님이 앞서 배식받는 것은 ‘새치기´가 아니란 점을 가르쳐줘야 한다.”고 흥분했다. 언론인 B씨는 세태의 변화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식당에서 ‘내가 다리가 불편해 실례하네.´라며 학생들에게 손이라도 흔들어줬으면 어땠을까.”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주말엔 뭘 보러갈까]

    연극 ■ 왕세자 실종사건 조선 왕세자 실종사건을 둘러싼 기묘한 추리극.‘죽도록 달린다’에서 시·공간의 자유로운 활용과 시청각적 상상력의 확장을 보여준 신예 한아름 작가와 서재형 연출가 콤비의 신작. 홍성경 장우진 구혜령 출연.(02)580-1300. ■ 돼지사냥 30일까지 정동극장. 도망간 씨돼지를 잡으려는 마을주민과 탈옥수 ‘돼지’를 찾아나선 비밀수사관이 뒤엉켜 펼치는 블랙코미디. 이상우 작·문원섭 연출, 이성민 윤상화 출연.(02)751-1943. ■ 빨간 도깨비 13∼16일 아르코소극장. 해안가에 표류한 한 남자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빨간 도비’로 몰리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 현대 일본연극 대표주자인 극작가 겸 배우 노데 히데키의 한·일 합작공연. 최광일 오용 출연.(02)766-0228. ■ 은하궁전의 축제 16일까지 아룽구지극장. 은하궁전아파트 조성을 기념하는 축제기간중 성폭행 미수사건이 일어나면서 마을 주민들은 갈등을 빚는데…. 배봉기 작·박정희 연출, 이영석 박경근 출연.(02)744-0300.어린이 뮤지컬 ■ 불의검 23일까지 국립극장해오름극장. 선사시대를 배경으로 전사 아사와 그를 위해 불의 검을 만든 아라의 순애보가 아름다운 선율로 펼쳐진다. 만화가 김혜린의 동명 순정만화를 원작으로 한 창작뮤지컬. 박일규 연출, 김대성 최완희 작곡, 이소정 임태경 출연.1588-7890. ■ 넌센스 잼보리 무기한 충무아트홀소극장. 네명의 수녀님과 한명의 신부님이 펼치는 기상천외한 코믹극. 현경석 연출, 이태원 전수경 출연.(02)766-8551. ■ 죽은 시인의 사회 11월31일까지 알과핵 소극장 참스승의 모습을 일깨우준 감동의 영화를 뮤지컬로 각색. 톰 슐만 작·송형종 연출, 지석우 정인숙 출연.(02)762-0810. ■ 그녀만의 축복 11월6일까지 코엑스아트홀. 뮤지컬 배우 김선경의 1인7역 모노극. 김은미 작·이용균 연출.(02)545-7302. ■ 뮤직 인 마이 하트 23일까지 대학로 자유극장. 귀여운 노처녀 희곡작가의 꽃미남 애인 만들기 작전. 성재준 연출, 원미솔 작곡. 이민아 장재혁 출연.(02)745-8288. 미술 ■ 김영원 조각전 30일까지 성곡미술관. 삶과 존재에 대한 고뇌를 담은 홍대 미대 김영원 교수의 조각에서는 공간성과 시간성을 배제시킨 인체의 모습이 등장한다. 입체와 평면이 한 작품에서 교차하는 그의 작품은 40여년 작업끝에 찾아낸 결실.(02)737-7650. ■ 류경재전 류경재 화백의 작고 10주기를 기념하는 전시회. 자연을 가득 담은 그의 작품에서 꿈틀대는 ‘희망’을 느낄 수 있다.30일까지 금호미술관. (02)720-5114. ■ 송규태전 40여년 간 민화에 온 열정을 쏟아온 송 화백의 작품활동을 정리하는 전시회. 익살과 재치가 가득 담긴 소박하고 진솔한 민화에서부터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고분벽화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동궐도와 같은 궁중화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작품활동을 선보인다.18일까지 인사동 공화랑.(02)735-9938. ■ 정복수전 절단된 신체의 미학을 보여주는 회화, 드로잉, 입체작품 100여점 전시. 현대사회에서 몸이 주는 의미를 되새겨 보는 동시에 현대사회의 폭력성과 인간의 잔인함을 조망한다. 안국동 사비나미술관.(02)736-4371. 클래식 ■ 장영주 런던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 19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매혹적인 바이올린의 요정 장영주는 금세기 최고의 거장 쿠르트 마주어가 이끄는 세계 정상의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공연.(031)729-5615. ■ 김남윤 & 임종필의 프렌치 두오 콘서트. 14일 금호아트홀(02)6303-1915. ■ 길버트 카플란의 말러교향곡 2번 공연. 15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031)729-5615. ■ 러시아 볼쇼이합창단 공연. 17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02)2187-6222. ■ 히로시마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 19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02)2662-3806. 어린이 ■ 목각인형콘서트 23일까지 연우소극장. 은행나무로 깎은 목각인형과 함께 떠나는 시간여행.(02)744-5701. ■ 노누메기 12월31일까지 손가락놀이극장. 이솝우화로 배우는 어린이경제놀이 연극.(02)747-2777.
  • 儒林(452)-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8)

    儒林(452)-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8)

    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8) 이처럼 묵자와 양자는 양극의 극단주의적 사상가였다. 같은 상황이라도 엄격한 율법주의로 재단하는 묵자와 자연주의로 낙관적으로 보는 양자와의 가치관은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던 것이다. 같은 상황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어떻게 가르침을 펴고 있는가 하는가는 다음과 같은 고사를 통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양자에게는 양포(楊布)라는 동생이 있었다. 어느 날 양포는 아침에 집을 나설 때 흰옷을 입고 외출하였는데 집에 돌아올 때는 비가 오기 때문에 흰 옷이 더럽혀질까 검정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왔다. 그러자 집에서 기르고 있던 개가 양포를 낯선 사람으로 알고 마구 짖어대기 시작하였다. 양포가 화가 나서 지니고 있던 지팡이로 개를 때리려하자 형 양자가 그것을 보고 동생 양포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개를 탓하지 마라, 너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 만일 네 개가 조금 전에 희게 하고 있다가 까맣게 해가지고 돌아오면 너 역시 이상하게 생각지 않겠느냐.”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양자의 낙관주의적 무위주의를 엿보게 하는 장면인 것이다. 즉 겉모양이 달라졌다고 해서 속까지 달라진 것으로 아는 것은 다만 형상에만 집착하는 어리석음으로 이처럼 겉모양은 쉼 없이 변화하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심오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갈 때는 희었는데, 돌아올 때는 검다는 뜻’의 ‘백왕흑귀(白往黑歸)’란 성어가 태어나고 같은 동의어로 ‘겉이 달라졌다고 해서 속까지 달라진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 ‘양포지구(楊布之狗)’란 성어가 태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이라도 묵자에게 가면 그 뜻은 정반대로 달라진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묵자는 실에 물들이는 사람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 자신이 목공(木工) 출신이어서 ‘나무로 솔개를 만들어 날릴 수 있을 만큼의 손재주’가 있었고,‘잠깐 사이에 세치의 나무를 깎아 수레바퀴 빗장을 만들 만큼의 솜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던 묵자. 이처럼 스스로의 손재주와 솜씨로서 자급자족하던 묵자였으므로 자연 저잣거리에서 물감의 실을 염색하는 기술자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였던 일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염색하는 모습을 바라본 후 묵자는 탄식하며 슬퍼하였다. 스승의 그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 보던 제자 하나가 ‘어찌하여 실에 물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그처럼 슬퍼하십니까.’하고 물으니, 묵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탄식한 것은 처음에는 아무런 색도 없는 실이 파란물감에 물들이면 파란색이 되고, 노란물감에 물들이면 노란색이 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렇게 물감에 따라 실의 색깔도 변하여 매번 다른 색깔을 만드니, 물들이는 일이란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나 나라도 이와 같아 물들이는 방법에 따라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 노래하는 사제간의 사랑

    노래하는 사제간의 사랑

      한 달 만에 만난 사이라도 긴 인사를 오래 하지 않는다. 하나 둘 모이는 대로「피아노」둘레에 모여 선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멜로디」를 잡고 화음을 맞춘다. 25명의「코러스」가 4평 남짓한 김자경씨 댁 거실을 꽉 메운다. 25명 모두가 이화여대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한 김자경씨 제자들 -「오뚜기」회를 만들었다. 생김에서 성질까지가 오뚜기를 닮은 김자경씨에게 5, 6년 전부터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오뚜기」다. 스승의 별명을 그대로 모임의 이름으로. 김자경씨가 처음 내보낸 이대의 제자들은 59년부터 시작, 올해로 10년 졸업생을 냈다. 10년간의 성악과 졸업생이 전부 57명. 외국유학으로 멀리 있는 제자, 지방에 떨어져 살아 모이기 힘든 제자를 제하고 나니 25명이 손에 꼽힌다. 이들 만이라도 가까이 두고 자신의 10년간을 돌이켜 보면서 거슬러 올라가 보고 싶었다. 쉰이 넘은 일생의 보람 같은 것을 주워 모아보고 싶기도 했다. 이런 옛 스승의 회한을 달래주고 싶은 따뜻함이 제자들과의 모임이「오뚜기」회이기도 하다. 배움의 길이 뚝 끊기고 난 뒤 어느 날 갑자기 옛 스승이 그립고, 학우가 만나고 싶고,「캠퍼스」가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날이 있다.「배움을 연장시키고 싶어서」모이기도 했다. 회장에는 제자를 대표한 이영애씨(이대 음대 전임강사). 한 달에 한 번 첫째 금요일 2시, 김자경씨 댁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다. 회식은 호화롭지 않다. 차 한 잔, 아니면 라면 한 그릇이 고작이다. 반주는 김자경씨의 큰 며느리 공소자씨. 음대 기악과 졸업생이라「오뚜기」회 회원 자격 상실이란다. 회비는 한 달에 1천원씩. 절대로 쓰지 않고 모은다. 장학금 기금을 만들기 위해서다. 「오뚜기」회의 소문은 외국에 나가 있는 회원 자격이 있는 유학생들에게까지 퍼졌다. 이들은 참여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자주 전해온다. 장학금 기금에 보태달라고 얼마 안되지만 돈을 보내 오기도 한다. 서독에 있는 이주연씨, 미국에 있는 이규도씨 등. 「레퍼터리」는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찬송가에서 우리 가곡까지. 이 다양한「레퍼터리」는 1년에 한 번 정기공연을 갖고 발표된다. 이 공연기금 역시 개인의 이익으로 삼지 않는다. 그대로 장학기금에 쌓여지는 것. 연습이 별나게 따로 필요하지 않은 애초에 길들여진 제자들에 둘러싸여 병원, 고아원, 양로원… 위문을 해야 하는 곳으로 되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언제든지 위문을 하러 다녀야겠다는 것도 계획 안에 들어 있다. 만 50세의 연륜이 그 언제 한번 휴식을 가진 적이 없던 김자경씨는 아직도 할 일을 다하지 못해 안절부절하는 젊음으로 꽉 차있다. 『모두가 내 딸 같습니다』 아직 어리광을 벗지 못한 작년도 졸업생들이 엄마 치마폭을 감고 들 듯 어깨 언저리를 감싸고 돈다. 엄마가 된 지 몇 년이 지나버린 10년 전 졸업생들은 친정에 들른 맏딸처럼 스승을 보살피는 마음이 살뜰하다. 생활하면서 외면해 버렸던 잊혀간 노래들을 조갈이 풀릴 때까지 오랜만의 인사도 잊고 불러 젖힌다. 옆에 누가 새로 들어와「조인」했는지도 눈치 못 챈 듯 열중한다. 한 편에서는 김자경씨가 인자한 웃음을 얼굴 하나 가득 띠고「내 딸 같은」제자들을 하나 하나 따뜻한 손으로 손을 잡고 반갑게 맞아 들인다. 이제 25명이 다 모였다. 김자경씨가「피아노」앞에 앉았다. 발성 연습부터 시작,『아- 아- 』. 터질듯한 젊음으로 몇「옥타브」인가 더 튕겨 오를 것처럼 팽팽한 화음이 스승과 제자들을 세월을 무시한 채 묶어 버렸다. 늙음을 의식하던 스승은 잠시 10년이나 거슬러 올라간 삶을 즐기고 있는 듯이 착각하면서 흥분했다. [ 선데이서울 69년 3/2 제2권 9호 통권 제23호 ]
  • 儒林(450)-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6)

    儒林(450)-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6)

    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6) 그런 의미에서 맹자가 공자의 적자였다면 양자 역시 노자의 적자였다. 양자 역시 백가쟁명시대에 있어 노자의 ‘무위사상’을 통해 난세를 구원하려던 치열한 선각자였던 것이다. 열자의 ‘설부편(說符篇)’에는 이러한 양자의 사상가로서의 고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양자가 사는 이웃집의 양 한 마리가 달아났다. 그래서 그 이웃 사람은 자기 집 사람들을 다 동원하여 양을 찾으러 나서도록 한 후 양주에게도 찾아와 사람을 보내달라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양주는 이렇게 물었다. “허허, 양 한 마리를 찾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단 말이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웃 사람이 대답하였다. “양이 갈림길이 많은 길 쪽으로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양자는 갑자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하루종일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았다. 이때 제자 맹손양(孟孫陽)이 여쭈었다. “선생님, 양 한 마리는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 아닙니다. 또 선생님 소유의 양을 잃어버린 것도 아닌데 어찌 말도 않으시고 웃지도 않으십니까.” 하지만 양자는 여전히 가만히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맹손양은 자신의 선배인 심도자(心都子)를 찾아가 앞서 있었던 일을 말하자 역시 궁금해진 심도자는 맹손양과 함께 다시 양자를 찾아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며 자문을 하였다. “선생님, 옛날에 삼형제가 제나라와 노나라에 유학 가서 같은 스승을 모시고 유가의 도를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아들들이 돌아오자 그 아버지는 ‘너희들이 배운 것이 무엇이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삼형제는 ‘인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가 다시 물었습니다.‘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인의인가.’ 아버지의 질문에 큰아들은 ‘자기 몸을 아끼고 명예를 뒤로 돌리는 것’이라고 대답했고, 둘째아들은 ‘자기 몸을 죽여서 명예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으며, 셋째아들은 ‘자기의 몸과 명예를 다 보전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처럼 세 사람의 대답은 각각 다르지만 모두 한 유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입니까.” 제자 심도자의 질문을 받은 양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옛날 바닷가에 사는 어떤 어부가 자맥질을 잘해서 많은 이익을 얻었다. 즉 바다 속으로 들어가 자맥질을 하여서 온갖 고기와 보물을 얻어 큰부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에게 자맥질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떼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 사람 중 태반이 자맥질을 배우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그러면 내가 묻겠다.” 양자는 심도자에게 물었다. “그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 그 어부를 찾아간 것이냐.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배우기 위함이었더냐. 아니면 자맥질하는 법을 배워 바다 속에 들어 있는 온갖 보물을 꺼내기 위함이었더냐.” 스승의 질문에 심도자가 대답하였다. “그야 물론 자맥질을 배워 바다 속에 들어 있는 온갖 보물을 꺼내기 위함이었겠지요.”
  • [프로야구 2005] 김인식-김경문 ‘사제 충돌’

    [프로야구 2005] 김인식-김경문 ‘사제 충돌’

    ‘스승의 관록이냐, 제자의 패기냐.’ 느긋하게 플레이오프(PO) 진출팀을 기다려온 두산과 힘겹게 준PO를 통과한 한화가 8일부터 시작되는 플레이오프(5전3선승제)에서 한국시리즈(7전4선승제)행 티켓을 놓고 격돌한다. 이번 PO의 최대 관심사는 6년간 감독-코치로 한솥밥을 먹은 한화 김인식 감독과 두산 김경문 감독의 사제 대결. 김인식 감독은 1995년부터 2003년까지 두산의 사령탑이었다. 그는 특유의 ‘믿음 야구’로 무너졌던 두산을 추슬러 95년과 2001년 두 차례나 한국시리즈 패권을 잡았다. 김경문 감독은 98년부터 배터리 코치로 김인식 감독을 보좌하다 지난해부터 지휘봉을 물려받았다. 김인식 감독은 7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미디어데이’에서 “김경문 감독은 투수 운용이 뛰어나다. 함께 일할 때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이라고 띄웠고, 김경문 감독은 “김인식 감독은 선수들에게 맡기는 선 굵은 야구를 펼친다.”고 화답했다. 그러나 승리에 대한 자신감은 모두에게서 묻어났다. 양 팀은 올시즌 정규리그에서 9승9패의 절대 호각세. 상대 타율도 .268로 똑같은 데다 방어율도 두산이 3.44, 한화가 3.48로 차이가 없다. 다만 ‘대포군단’ 한화는 홈런 22개로 ‘소총부대’ 두산(10개)을 압도했고, 두산은 빠른 발로 도루 14개를 기록, 한화(8개) 내야를 흔들었다. 일단 일주일간 한껏 충전된 선발진을 보유한 두산이 객관적으로 우세하다. 그러나 한화는 준PO 통과의 상승세를 타 결국 양팀의 승부는 안개속인 셈이다. 두산은 다니엘 리오스, 한화는 김해님을 1차전 선발로 예고했다. 올시즌 기아에서 이적한 리오스는 15승12패, 방어율 3.51에다 탈삼진 공동 1위(147개)에 오른 에이스. 리오스는 두산 유니폼을 입고 한화전 1경기,6과3분의1이닝 무실점으로 승리를 챙겼다. 김해님은 준PO에서 선발진을 모두 소진한 한화의 고육책. 정규시즌 6승8패,4.28의 평범한 성적을 냈지만 두산전 6경기에서 1승1패,2.86으로 호투, 기대를 모은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두산 김경문 감독 마운드 운용에 초점을 두겠다. 확실한 1·2선발(리오스와 랜들)이 있는 만큼 이들을 중용하되 나머지 경기에서는 당일 컨디션에 따라 선발을 정하겠다. 잠실은 넓고 대전은 상대적으로 좁아 변수다. 될 수 있으면 빨리 끝내고 싶다. ●한화 김인식 감독 선발이 한정돼 있다보니 김해님이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김태균의 컨디션이 좋지 않지만,4번으로 계속 기용할 생각이다. 현재로서는 몇 차전까지 갈지 전혀 점칠 수 없다. 두산을 적이라는 생각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상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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