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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0대 美교포 ‘올해의 여성영웅’

    80대 재미동포 할머니가 미국 공영방송 ‘KCET’(대표 알 제레미)가 제정한 ‘올해의 여성 히어로’에 뽑혔다. 주인공은 미국 버스승객조합의 한인 커뮤니티 홍보담당자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김희복(84) 할머니. 그는 2000년 버스승객조합 회원으로 가입, 매일 동포들이 이용하는 버스를 타고 다니며 승객권리를 설명한 전단지를 돌리거나 대중교통국(MTA)을 상대로 버스 증편과 서비스개선을 요구하는 시위와 소송 등을 벌인 점이 인정돼 영웅으로 선정됐다. 김 할머니는 지난 23일 로스앤젤레스 KCET 본관에서 열린 시상식 직후 “오늘이 내 인생에서 최고로 기쁘고 행복한 날”이라며 “이 상을 모든 버스승객노조 회원들에게 바친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버스는 자동차가 없는 노인들에게 발이자 지팡이이지만 이들을 위한 서비스는 나아지지 않고 있다”며 “앞으로 한인들이 매 5분마다 버스를 탈 수 있도록 버스 증차를 위해 계속 뛰겠다.”고 덧붙였다.알 제레미 대표는 “고령에도 200명이 넘는 조합원을 가입시키고 버스승객의 권리를 위해 뛰어다닌 이 시대의 진짜 여성 활동가”라고 그를 평가했다. 미국에 먼저 이민한 두 아들의 초청으로 1988년 도미한 김 할머니가 운동가로 변신한 것은 버스 안에서 동포 청년으로부터 받은 영어 팸플릿 때문. 김 할머니는 팸플릿에 적힌 내용이 ‘승객권리’라는 것을 알고 모임에 참석하면서 회원으로 가입하게 됐다.결국 그가 가입한 후 영어와 스페인어로만 번역돼 있던 승객권리는 한국어로도 번역돼 팸플릿으로 제작됐다.연합뉴스
  • [26일 TV 하이라이트]

    ●스페이스 공감(EBS 오후 10시) 흙피리 연주자 한태주의 공연을 감상한다. 이번 공연에서는 그의 아버지이자 음악적 스승인 생태 가수 한치영과 함께 기타리스트 김광석 등이 아름다운 무대를 꾸밀 예정이다. 또 일본 시부야계의 실력파 혼성 트리오 ‘심벌즈’의 리드 보컬에서 솔로로 독립한 도키 아사코의 음악세계도 감상해본다. ●인사이드 월드(YTN 오전 10시25분) 의학의 발전과 정보를 보급시킬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더 오래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이들이 아주 간단한 의학 정보조차 모르고 있다. 건강한 삶을 제한하는 지식정보의 격차를 줄이는 중국, 네팔, 남아공, 벨리즈의 방법들을 살펴본다. ●결혼합시다(MBC 오후 7시55분) 임신 문제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나영과 은선은 드디어 화해한다. 지금까지 서운했던 서로의 감정을 속 시원하게 풀어내며 화해를 한다.1년의 시간이 흐른 후, 은선은 출산을 하고 재원의 집에는 아이 울음소리로 야단법석이다. 그 와중에 나영은 임신하기 위해 몸에 무리가 가는 약을 먹기 시작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SBS 오후 11시55분) 샤르코마리투스는 유전성 운동감각 신경병으로 운동 신경과 감각 신경의 이상으로 손 발의 근육들이 약해져 힘이 없어지는 질환. 일란성 쌍둥이 자매 성선이와 은선이가 이 질환을 앓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아픔이 되지만, 엄마와 아이들은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데…. ●TV쇼 진품명품(KBS1 오전 11시) 민족의 얼이 살아 숨쉬는 금강산을 묘사한 그림. 금강산의 수려한 절경과 인간의 모습이 조화를 이룬 소정 변관식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을 만나본다. 탐스럽게 피어난 여러 송이 꽃들의 그림이 의뢰되었다. 작가의 힘있는 손놀림이 고스란히 살아있는데, 온화한 느낌의 이 그림은 과연 누구의 작품일까? ●싱싱 일요일(KBS2 오전 8시) 친구 없이 온전히 자연을 벗 삼아 자란 소년은 산골의 적적함을 피해 도시로 떠났었다. 그리고 20년 후 중년이 된 소년은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경남 거제의 고향으로 귀농한 김옥곤씨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또 단백질과 지방은 물론, 철과 비타민 A가 풍부하게 들어 있는 장어의 효능을 알아본다.
  • [마니아] 몸매관리는 기본…호신은 덤 ‘무에타이’

    [마니아] 몸매관리는 기본…호신은 덤 ‘무에타이’

    “선수가 아니고, 그냥 취미로 무에타이를 배울 수 있나요?” “네.” “회원 중에 여성도 있어요?” “네.” 운동선수 출신답게 단답형으로 일관하던 오성일 관장과 태국 전통무술 ‘무에타이’를 배우는 여성을 만나러 20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 구심체육관을 찾았습니다.20평 남짓한 체육관에서 선수 2∼3명이 샌드백을 발로 차며 훈련중이었죠. 이미 벌겋게 달아오른 선수의 발목을 보자 덜컹 겁이 났습니다.‘체력이 뛰어난 여성들만 모여 운동하겠구나.’ 그러나 강의시간에 맞춰 하나둘씩 체육관을 찾은 여성들은 그저 평범해 보였습니다. 대부분 앳된 20대 초반 여성이었지요. 아들과 함께 무술을 배우는 40대 주부도 있었습니다. 5∼6명의 여성들이 자리하자 분위기가 확 달라졌습니다. 오 관장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고요.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회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관장의 동작을 따라하며 ‘춤’을 췄습니다. 순간 당황했습니다. 무에타이를 응용한 에어로빅 ‘무에타보’였습니다. 힘차면서도 유연한 게 묘한 매력을 발산하더군요. 20분쯤 흘렀을까요. 회원들은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다이어트는 기본, 호신은 덤”이라던 오 관장의 설명이 바로 이해되더군요. 허공을 가르는 발차기가 얼마나 상쾌해 보이던지. 긴장했던 기자도 발뒤꿈치가 들썩거렸습니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무에타이? 어려워하지 마세요 20일 오후 8시 서울 관악구 봉천6동 대한무에타이협회 구심체육관.20평 남짓한 체육관에 회원들이 하나둘 도착한다. 이마에 마주 잡은 손을 올려 인사를 건넸다. 오성일 관장이 들어오자 일순간 긴장감이 감돈다. 국기를 향해 경례를 한 뒤 수업을 시작했다. 모두 맨발이다. 신체 접촉이 많은 무술이다 보니 남성과 여성이 따로 자리했다 ●에어로빅 접목한 ‘무에타보´로 몸풀기 첫 순서는 무에타이에 에어로빅을 접목한 ‘무에타보’.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자 회원 10여명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가볍게 주먹을 쥐고 리듬에 맞춰 팔을 뻗는다. 발은 좌우로 움직이며 흥을 돋운다. 회원들은 거울에 비친 동작을 보며 어색한 부분을 바로잡는다. 힘을 빼고 가볍게 움직이지만, 어느새 팔이 뻐근해 진다. 다음은 다리올리기. 무릎을 접어 다리를 번갈아 올리며 앞으로 움직인다. 허벅지 근육이 당겨온다. 엉덩이를 탄력있게 만드는 동작이다. 이제 공중에서 무릎까지 편다. 기를 배로 모아 내뱉느라 입에선 ‘휙휙’바람소리가 나온다. 어느새 얼굴은 땀범벅으로 변했다. 공중으로 팔과 다리를 수차례 뻗었을 뿐인데 등줄기가 흥건히 젖었다. 음악이 바뀌었다. 이제 두 명이 한 조로 ‘춤’을 춘다. 글러브를 끼고 한 사람이 주먹을 날리면, 다른 사람이 막는다. 팔꿈치, 무릎, 다리로도 공격한다. 어느새 발차기에 힘이 실린다. 방어하는 사람이 겁먹은 표정으로 놀란다. 에어로빅을 가미했지만 무술이라 ‘승부욕’이 살아나는 탓이다. 체육관은 땀 냄새가 가득했다. 이제 서로 목을 움켜쥐었다. 무릎을 상대방 배쪽으로 올려치면 막아내는 동작. 타이밍이 어긋나면 다칠 수 있다. 조심하며 천천히 발을 옮긴다. 틀린 부분을 서로 지적해주는 모습이 다정하다. 무에타보는 20분 남짓 진행됐지만, 운동량이 상당했다. 대다수가 헐떡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복합운동” 아들과 함께 등록한 주부 서현숙(48)씨는 “무에타이는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운동”이라고 정의했다. “강한 동작도 음악과 어우러지면 부드럽게 변합니다. 재미있게 따라하다 보면 손·발놀림이 달라진 것을 느껴요.” 서씨는 태권도, 재즈, 에어로빅 등을 배웠지만 무에타이만큼 복합적인 운동은 처음이라고 했다. ●샌드백과 마주하기 다음은 샌드백과 한판 승부를 벌일 차례다. 샌드백 4개에 나눠 선 회원들은 오 관장의 시범을 따라한다. 우선 주먹으로 샌드백 치기부터. 한두번 치더니 연속해서 가격한다. 그리고 벽까지 천천히 달려갔다 온다. 유산소 운동과 무산소 운동을 함께 하는 것이다. 발차기로 이어진다. 운동 강도가 높아질수록 묘한 카타르시스가 번져온다. 흔들리는 샌드백을 힘껏 걷어차자 쌓였던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느낌이다. 잔소리하던 직장 상사나 술먹고 매일 늦는 남편을 떠올리는지 모른다. 샌드백에 손·발자국이 선명해질수록 가슴이 뚫리는 듯싶었다. 2분 운동하고 30초 휴식이 원칙이라 초보자도 쉽게 따라한다. 동작은 매번 바뀌어 지루하지 않다. 시간이 짧으니까 오히려 동작마다 최선을 다하게 된단다. 대학생 최효정(22)씨는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한달 만에 5㎏을 뺐고,1년 3개월간 운동하며 탄탄한 몸매를 가꾸고 있다. 자신감까지 덤으로 얻었다. “몸이 강해진 걸 느끼니까 생활도 변하더라고요. 밤 골목도 무섭지 않고, 옷을 입어도 맵씨가 나고. 기분 좋죠.” ●와이크루로 마무리 마무리는 와이크루. 원래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신과 스승, 부모에게 표하는 의식이다. 신나는 음악에 맞춰 부드러운 율동을 선보이는 터라 긴장감을 풀어주는 워밍업으로도 사용한다. 오 원장은 와이크루를 수업 후 근육을 풀어주는 스트레칭으로 사용했다. 무릎 꿇고 앉아서 손을 머리 부분에 올리고 원을 그리며 뻗어준다. 관절의 긴장을 촘촘히 짚어주는 느낌. 뻐근했던 어깨와 등이 이완되는 듯하다. 박수로 수업을 마치면 삼삼오오 모여 체육관을 청소한다. 바닥에 땀이 많이 떨어져 물걸레로 깨끗이 닦아낸다. 얘기를 나누며 걸레질하는 모습이 여고 교실과 닮았다. 영화 ‘옹박’을 보고 즉흥적으로 무술을 시작한 직장인 윤효진(26)씨는 “청소까지 끝내고 나면 정말 몸이 개운하다.”고 했다. “하루를 알차게 보내 내일을 힘차게 시작할 힘을 얻는 것 같은…. 그 맛에 푹 빠졌죠 뭐.”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무에타이란? 무에타이는 태국식 발음으로 ‘무워이 타이’다.‘무워이’는 복싱 또는 싸움을,‘타이’는 태국을 뜻한다. 태국 무술 전문가들은 무에타이가 2000년 전부터 존재했다고 설명한다. 주무기가 태권도 돌려차기와 비슷한 발 기술인데, 미얀마·필리핀·인도 등 동남아시아 지방에서 비슷한 발차기가 많아 역사가 깊다고 짐작한다. 무에타이는 이외에도 주먹, 팔꿈치, 무릎과 함께 ‘빰’(목잡기 기술)을 자유롭게 사용한다. 무에타이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17년 1차 세계대전부터다. 연합국으로 참여한 태국 군인들이 무에타이를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까지 무에타이는 가죽과 대마로 주먹을 감고 유리가루를 발라 신체 모든 부분을 이용해 상대방을 공격하는 고대 방식의 경기였다.1930년부터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글러브를 착용하고 있다. 태국에선 무에타이를 습득한 뒤에 국제식 복싱으로 전향하거나, 무에타이와 복싱을 겸하는 선수가 많다. 반면 킥복싱은 무에타이와 일본의 가라테 등을 합친 일본 특유의 경기로 1966년에 만들어졌다. ●오성일(31) 관장은 카리스마가 넘친다. 날카로운 눈빛과 탄탄한 근육 탓에 첫만남에 상대방을 압도한다. 그러나 경쾌한 리듬에 맞춰 ‘무에타보’(무에타이 에어로빅)를 선보일 때면 180도 달라진다. 날렵하고 정확한 동작 속에서 부드러움이 스며난다. “선수로 나설 계획이 없다면 무에타이는 과격한 무술이 아닙니다. 근육을 골고루 사용해 오히려 다이어트와 체형 교정에 효과적이죠.” 회원 50명 가운데 여성이 20여명인 것도 이런 이유란다. 오 관장이 무에타이를 시작한 것은 1994년, 우리나라에 소개될 무렵이다. 온몸을 사용하는 격투기의 역동성에 반한 그는 태국으로 떠났다. 본고장에서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99년까지 선수로 활동하며 실력을 쌓았다. 챔피언이 탄생할 때마다 새로운 기술이 만들어지는 무술이라 지금도 태국을 자주 방문해 기술을 익힌다.98년에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구심체육관을 열어 선수를 키우고 있다. 요즘엔 심판으로도 활동한다. 오 관장은 초·중·고급 과정을 3개월 단위로 가르친다. 초급 3개월이면 대부분 기본자세를 익힌단다. “처음에는 몸이 맘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특히 잘 쓰지 않던 왼쪽 팔과 다리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하면 몸의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오른발을 10번 뻗을 때, 왼발을 20번 뻗도록 가르친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몸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몸이 뜻대로 움직이면 자신감을 얻고 대인관계까지 향상된다고 오 관장은 설명했다.“링은 사회이고, 상대 선수는 피할 수 없는 과제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연습하다 보면 세상에 맞설 자신감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儒林(566)-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2)

    儒林(566)-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2)

    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2) 율곡이 이 별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던가 하는 것은 뜻밖에도 율곡이 스승 퇴계에게 자신이 과거시험에서 실패하였음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율곡이 9번이나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하였던 천재로만 알고 있을 뿐 그 역시 과거시험에 실패하였던 사실은 간과하고 있다. 그러나 천하에 영재였던 율곡도 한번 과거시험에서 낙과하였던 것은 엄연한 사실. 이에 대해 퇴계는 율곡의 상심한 마음을 위로하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고 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젊은 나이에 과거에 오르는 것은 하나의 불행이다.’라고 하셨으니, 자네가 이번 과거에 실패한 것은 아마도 하늘이 자네를 크게 성취하려는 까닭인 것 같으니, 자네는 아무쪼록 힘을 써 공부에 정진하시게나.” 퇴계의 이러한 위로는 맹자의 ‘고자장구하편(告子章句下篇)’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늘이 큰 임무를 그 사람에게 내리려 하실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 심지를 괴롭히며, 그 근골(筋骨)을 수고롭게 하며, 그 몸과 피부를 굶주리게 하며, 그 몸을 궁핍하게 하여 그의 하는 것을 어그러뜨리고 어지럽히는 것이니,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 능하지 못한 부분을 증익시키기 위한 것이다.(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 忍性 增益其所不能)” 퇴계의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율곡이 퇴계를 만난 후부터 그 해 겨울 별시해에 참석할 때까지 그 중간에 과거시험에 한 번 더 응시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험에서 율곡은 낙과하였던 것이다. 자존심이 유난히 강했던 율곡으로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절치부심. 그해 겨울에 열리는 별시해를 율곡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는 배수의 진으로 삼는 한편 자신의 학문을 총정리하는 청우계(晴雨計)로 삼았던 것이었다. 율곡은 검은 빛을 띤 짙은 남색의 모시청포를 입고, 검은 띠에 유건(儒巾)을 쓴 전형적인 유생의 차림새로 시험장인 성균관으로 들어섰다. 그때였다. 한 떼의 유생들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성균관을 들어서려는 율곡을 막아섰다. 그들의 면면은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낯이 익은 학우들이었는데 뜻밖에도 그들의 기세는 험악하였다. 이미 금강산에서 하산하여 치렀던 과장에서도 겪었던 경험이었으므로 율곡은 크게 놀라지 않았으나 기세는 전보다 훨씬 더 등등하였다. “네 이놈, 네가 감히 어딜 함부로 들어가려 하느냐.” 덩치 큰 유생 하나가 율곡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질러 호통 쳤다. 그러자 유생들을 따라온 선접군(先接軍)들이 막대기와 같은 무기들을 들고 삽시간에 율곡을 에워쌌다. 이 선접군들은 원래 각 유생들마다 고용한 힘깨나 쓰는 건달들이었다. 이들은 한양의 뒷골목을 휘어잡고 못된 일만을 골라 하는 건달패들이 대부분이었다.
  • 儒林(565)-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1)

    儒林(565)-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1)

    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1) 1558년 명종 13년 겨울. 성균관의 문묘 뒤쪽에 설치된 명륜당(明倫堂)에서는 별시해(別試解)가 거행되고 있었다. 별시란 정기적으로 3년에 한번씩 열리는 식년과(式年科)라 불리는 과거시험과는 달리 세자의 탄생, 책봉과 같은 나라의 경사가 있거나 10년에 한번 당하관(堂下官)을 대상으로 한 중시(重試)가 있을 때 시행하던 일종의 부정기적인 과거시험이었다. 식년시에는 33명의 인재가 선발되고,10년 만에 한번씩 치르는 중시 때는 조의(朝儀)를 행할 때 당상의 교의(交椅)에 앉을 수 없는 서얼(庶孼)과 같은 특수한 신분의 낮은 계층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었으나 이번의 별시는 주로 성균관 유생에 한정되어 치르는 별시문과(別試文科)였다. 율곡은 이 특별시험에 참석하기 위해서 강릉을 떠나 시험 이틀 전에야 한양의 수진방에 도착하였다. 그해 봄 퇴계를 만나 2박 3일의 짧은 상봉을 끝낸 후 율곡은 줄곧 강릉에 머물며 학문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율곡이 별시에 응시하기 위해서 한양으로 돌아온 것은 거의 10개월 만의 외출이었던 것이다. 율곡으로서는 세 번째의 과거시험이었다. 이미 율곡은 불과 13세의 어린나이로 진사과에 초시로 합격하였다. 두 번째 시험은 금강산으로 출가하였다 환속한 다음해였던 1556년 21세 때의 일이었다. 한성부에서 실시한 것으로 한성시(漢城試)라고 불렸던 초시였다. 이 시험에서 율곡은 장원으로 뽑혀 널리 문명을 떨쳤으나 최고 학부인 성균관에 유학할 수 있는 특권을 얻은 것에 지나지 않았을 뿐 여전히 백면서생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율곡에게 있어 세 번째 별시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이제 율곡은 더 이상 홀몸이 아니라 아내까지 거느린 가장이었고, 양반의 신분으로 태어난 율곡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과거에 급제한 뒤 입신양명함으로써 가족을 부양하고,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과거제도에 얽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율곡은 스승 퇴계를 만나고 강릉으로 돌아간 10개월 동안 스승으로부터 점지 받은 ‘거경궁리’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율곡이 평생 동안 공부하였던 학문의 양보다 이 짧은 10개월 동안에 더욱 깊이 침잠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율곡의 철학과 지적수준이 이 무렵에 거의 완성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학문에 투자하느냐 하는 사실보다 비록 짧은 기간이더라도 얼마나 집중하고 몰두하느냐 하는 것이 학문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사실을 율곡의 모습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장면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 번째의 과거시험이었던 별시해는 율곡의 학문을 객관적으로 시험해 볼 수 있는 바로미터였던 것이다.
  • [사진으로 본 전통의 숨결] 칠(漆)과 나전장(螺鈿匠)

    [사진으로 본 전통의 숨결] 칠(漆)과 나전장(螺鈿匠)

    우리나라에서 처음 옻칠을 사용했던 흔적은 낙랑지역에서 발견된 칠기(漆器)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칠 공예는 중국 당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졌고, 조선시대에 많은 생활용품들이 만들어지면서 오늘날까지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옻나무는 한자로 쓰면 칠목(漆木)이다 ‘옻’은 ‘漆(칠)’이다. 옻칠이란 말은 ‘역전앞’처럼 같은 말이 중복 사용된 경우이며 전통 칠의 대명사처럼 쓰여진다. 옻칠을 한 그릇에 음식물을 담아두면 쉬거나 변질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예로부터 목조식기에 옻칠을 사용하여 왔다. 옻칠은 순수한 칠뿐만이 아니라 깊이가 있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빛 때문에 색채옻칠로도 쓰여왔다. 일본의 옻칠공예가 정교함과 화려함으로 첫눈에 사람을 압도한다면, 우리 옻칠공예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은은한 깊이가 있다. 옻칠공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나전칠기(螺鈿漆器)이다. 나전칠기는 주로 옻칠바탕에 영롱한 무지갯빛 자개를 붙이거나 박아넣어 그림과 무늬를 놓는 공예 기법이다. 패각뿐만 아니라 대모(거북등껍질), 상아, 호박, 보석 따위를 새겨 넣어 장식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나전이라고 한다. 나전칠기에 그려지는 것은 자연이다. 언제나 자연을 가까이 두고자 했던 조상들의 신념이 그대로 드러난다. 때로는 오동나무 숲을, 때로는 계곡과 폭포를, 때로는 정자와 연못을 만들었다. 장수를 바라는 마음에서 십장생을 담았고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서 사군자의 모습을 그렸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전칠기는 우리 조상들의 생활공간에서 또다른 자연세계를 품을 수 있게 하였다. 나전의 아름다움과 칠기의 실용성이 접합되어 찬란한 빛을 발하는 빼어난 공예품으로 완성된 것이다. ■ “아교 혀로 핥아 세말 먹어야 숙련공” 나전칠기의 재료인 전복껍데기는 색이 고운 남해안산을 으뜸으로 친다. 일찍부터 통영은 나전의 고향으로 불려왔다. 뭍에는 충무공이 만든 12공방이, 물에는 오색영롱한 전복이 있었기 때문이다. 송방웅(65)씨(중요무형문화재 10호 나전장 기능보유자)는 17세 때 통영칠공예의 명장이던 부친(송주안·81년 작고)으로부터 자개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글과 기술은 원수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엄격한 스승 아래서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선친의 가르침이 있었단다. 자개를 칼로 끊어 붙여 무늬를 내는 끊음질과 실톱으로 그림대로 오려서 무늬를 만드는 줄음질은 자개를 붙이는 기술이다.“아교를 혀로 핥아 서말을 먹어야 숙련공이 된다고 배웠어요.” 끊음질 나전의 대가(大家)인 송씨는 무늬를 낼 때 따뜻한 수분을 주어 아교의 풀기를 살리기 위해 일일이 혀로 침을 바른다. 그는 나전칠기가 소목·나전·칠 등 복합적인 45가지의 기술 공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종합예술품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 “한때는 기능공만 1500명까지 있었지만 10명도 안 남았어요.”라며 찬란했던 민속공예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사진 글 도준석기자 pado@seoul.co.kr
  • 儒林(564)-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54)

    儒林(564)-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54)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54) 얼핏 보면 퇴계의 이런 답장은 ‘모범이 되어야 할 성인들의 실체’를 유지하려는 구차스러운 변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남을 비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라고 설법하였던 예수도 율법학자들을 향해 ‘이 뱀같은 위선자들아, 이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라고 질타한 것처럼 유비나 선왕의 신하들과 같은 위선자들에게 오만한 태도를 보인 듯한 두 성인 공자와 맹자의 모습 역시 퇴계의 설명처럼 짐짓 그런 행동을 보인 것이었을 뿐,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이 성인의 실체는 거경(居敬)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이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율곡이 유가사상을 오직 주자를 통해 배우고 익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퇴계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구하여 문을 닫고 한 여름에도 열독하자 주위 사람들이 더위로 몸을 상할까 경계하면 ‘이 글을 읽으면 가슴 속에서 문득 시원한 기운이 생겨나는 것을 깨닫게 되어 저절로 더위를 모르게 되는데, 무슨 병이 생기겠는가.’하고 대답하였던 것처럼 율곡도 퇴계의 영향을 받아 주로 주자라는 문(門)을 통해 공자와 맹자의 사상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율곡에 있어 성리학은 바로 주자학(朱子學)이었으며, 주자는 스승과 마찬가지로 율곡에 있어서 유가로 들어가는 염궁문(念弓門)이었던 것이다. 스승 퇴계가 결택해준 ‘거경궁리’의 문장을 확인한 순간 율곡의 가슴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감동의 물결이 용솟음치기 시작하였다. 율곡은 그 자리에서 떠나온 온계 쪽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눈밭 위에 무릎을 꿇은 주인의 모습을 보자 당황한 종자가 만류하여 말하였다. “나으리, 아니 되십니다. 눈이 차갑습니다.” 율곡은 대답도 하지 않고 의관을 정제한 후 갓을 벗었다. “정히 그러하시다면 쇤네가 자리를 깔겠나이다.” 그러나 율곡은 들은 체도 하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서 스승이 있는 곳을 향하여 삼배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스승과 제자로서 예의를 갖추기 위함이었으나 원래 삼배는 몸(身)과 말(口)과 뜻(意)의 삼업(三業)에 경의를 표하여 올리는 불교적 배례. “스승님” 삼배를 올리고 나서 율곡은 눈밭 위에 꿇어앉은 채 소리를 내어 중얼거려 말하였다. “스승님께서 내려주신 거경궁리의 요체를 몸을 다하고, 말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궁구하겠나이다. 반드시 궁극의 구경을 이루어 결초보은(結草報恩)하겠나이다.” 배를 올리고 나서 율곡은 일어서서 다시 말 위에 올랐다. “자, 가자.” 말머리에 내걸린 방울이 쩔렁이며 울었다. 종자를 앞세우고 율곡은 강릉을 향해 발길을 재촉하였다. 방울소리에 놀란 까치들이 눈 내린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다가 후드득―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 儒林(563)-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53)

    儒林(563)-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53)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53) 아무리 성인의 일이라곤 하지만 의심이 있으면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율곡의 태도는 물론 엘리트의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가지 사물을 대립된 두 가지 규정의 통일로 파악’하는 서양철학에서의 변증법(辨證法:dialectic)을 연상시킨다. 인식이나 사물은 정(正), 반(反), 합(合)의 삼 단계를 거쳐야만 발전될 수 있고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서양철학의 ‘철학적 진리이자 그 방법론’인 변증법처럼 율곡은 스승 퇴계가 점지해준 ‘거경궁리’의 화두를 일단 받아들이(正)지만 어느 순간 의심하고 부정한다(反). 이러한 모순구조를 극복해야만 마침내 ‘거경궁리’의 화두가 절대적 진리로서 마음속에 자리잡을 수(合) 있었기 때문에 집요하게 율곡은 스승에게 따져 물었을 것이다. 퇴계는 편지를 통해 이러한 율곡의 치열한 구도정신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하여 퇴계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율곡에게 써 보낸다. “호씨가 말한 ‘오타는 군자에 대한 말이 아니요, 중인들 가운데에는 본래 스스로 오타에 치우치는 자가 있다.’란 말은 사실이다. 주자가 또한 이를 해석해서 ‘사람은 중인(衆人)을 가리키는 것이다.’하였고,‘상인(常人:일반사람)의 감정은 오직 구하는 바에 치우칠 뿐 성찰(省察)에는 이르지 못한다.’하였으니, 그러한 공자와 맹자와 같은 성인들의 행동은 그런 가운데서 행해진 오만한 행동은 아닌 것이다.” 퇴계의 대답은 공자와 맹자가 얼핏 보면 오만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듯한 행동을 한 것은 공자를 대했던 유비나 맹자를 찾아왔던 선왕의 신하가 오만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오타의 행위에 치우친 상인들이었으므로 짐짓 그러한 행위를 취하였을 뿐인 것이다. 공자와 맹자와 같은 성인들은 ‘한 쪽으로 치우치는 생각에 빠지는 일이 없어 중정(中正)하고, 화평(和平)한 기상이 자재하기 때문’에 실제로 오타하였던 사람은 공자와 맹자와 같은 성인이 아니라 유비나 선왕의 신하들이라고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주자가 공자가 비파를 가지고 노래한 것과 맹자가 안석 위에 기대어 누웠던 일을 끌어다가 증명한 것은 공자와 맹자가 오타했다는 말이 아니라 오타하는 행위에 대해서 성인들이 취한 행동이 이와 같다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고나서 퇴계는 율곡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두 성인이 오타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서 어찌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있겠으며 또한 배우는 이가 사물을 오만하고 세상을 가볍게 업신여기는 것에 대해서도 어찌 근심할 수 있겠는가.” 퇴계의 결론은 ‘깨끗하여 한 점의 누(累)를 띠고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생각에 빠지는 일이 없이 혼후(渾厚)하고, 간측(懇惻)하고, 항상 화평한 기상이 자재한 공자와 맹자 두 성인’을 온전히 믿고 ‘거경궁리’의 화두를 통해 불가에 있어 성불(成佛)을 이루듯 유가에 있어서 성유(成儒)를 이루라는 스승으로서의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음인 것이다.
  • [WBC] 남은 건 울분… 무너진 이치로

    일본이 자랑하던 ‘천재타자’ 스즈키 이치로(33·시애틀)가 고개를 떨궜다. 이치로는 16일 한국전에서 패한 뒤 “오늘은 내 야구 인생에서 가장 굴욕적인 날”이라고 말했다. 일본 도쿄에서 열린 아시아라운드를 앞두고 “향후 30년동안 일본을 넘볼 생각을 못하게 해주겠다.”던 호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의 승리가 확정된 순간, 분을 못이겨 더그아웃에서 욕을 내뱉으며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물을 삼키며 한국선수들이 태극기를 마운드에 꽂는 광경을 그저 바라만봐야 했다.8회 수비에서도 관중석에 떨어진 파울플라이를 잡지 못한 뒤 “관중때문에 잡지 못했다.”면서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치로는 일본야구의 상징이다.2001년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통산 타율 .332를 기록했고 2004년에는 262안타로 한시즌 최다 안타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특히 대회를 앞두고 사망한 ‘영원한 스승’ 오기 아키라 전 오릭스 감독을 위해 대회 출전을 결정하는 등 열정을 보였다. 그러나 지나친 자신감은 그를 오만으로 빠트렸고, 결국 한국에 두번이나 연속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번 대회 6경기에서 .293의 타율로 3할을 넘기지 못했지만 팀 내에서는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16일 경기에서도 1회 첫 타석에서 박찬호로부터 안타를 뽑아냈지만 후속타자의 도움이 부족했다.박준석기자 pjs@seoul.co.kr
  • 儒林(562)-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52)

    儒林(562)-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52)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52) 찾아온 동기가 불순하다고 해도 일체의 말에 불응하고 비스듬히 안석 위에 기대어 눕는 ‘은궤이와(隱而臥)’의 태도를 취한 것은 법도에 지나친 것이었다. 그러자 찾아온 사람이 이렇게 불평하였다고 맹자는 기록하고 있다. “제가 제숙(齊宿)한 뒤에 감히 말씀드렸는데, 선생께서는 비스듬히 누우시고 들어주지 않으시니 다시는 감히 뵙지 않겠습니다.” ‘남을 겸손히 공경하고 섬겨야 한다.’는 경(敬)을 유가의 중요한 덕목으로 설법한 공자와 맹자가 그 이유야 어떻든 꾀병을 하고 일부러 들으라고 거문고를 연주한 것과 비스듬히 누워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는 두 행동은 어쨌든 ‘거경(居敬)’과는 위배된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놓칠 율곡이 아니었다. 엘리트의식이 남달랐던 율곡으로서는 이것을 간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거경의 반대말은 ‘오타(敖惰)’. 오타란 말은 ‘오만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뜻하는 것으로 두 성인이 취했던 오타행위를 율곡으로서는 그 원인을 해명하기 전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율곡은 첫 번째 편지 말미에서 그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따져 묻고 있다. “대학(大學) 제8장에서 주자는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오만한 데서 오만을 부리는 것은 상정(常情)으로서 이것은 마땅히 있을 수 있는 일이요, 사리에 합당한 일이다.’ 이 말에서 공자가 비파를 가지고 노래한 것과 맹자가 안석에 기대어 비스듬히 누웠던 일을 증명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호씨(胡氏:중국 원나라의 학자. 이름은 炳文, 호는 雲峯)는 말하기를 ‘오타는 군자에 대한 말이 아니요, 중인(衆人)에 대한 말이다. 중인들 가운데에는 본래 스스로 오타에 치우치는 자가 있다.’고 해설하였습니다. 이 두 구절을 어떻게 절충해야 하겠습니까. 만약 저 사람은 오만하게 대할 만하다 하여 마침내 오만하게 대하면 병통이 없겠습니까. 공자와 맹자가 한 것은 곧 가르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이니, 어찌 두 성인께 오만한 마음이 있겠습니까만 이 점에 있어서 의문이 없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주자는 율곡이 평가하였던 대로 이러한 공자의 태도를 ‘공자는 위선자를 싫어했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리에 당연한 일이다.’라고 변호하고 있다. 맹자 역시 ‘왕에게 돈을 얻으려면 자신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불순한 목적을 갖고 찾아온 신하가 출국을 만류하는 것은 맹자의 참된 뜻을 받들어 왕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드름을 피우고 있으니 현명한 사람을 받드는 도리가 아니므로 무시하고 비스듬히 누워버린 것이다.’라고 스스로 변명하고 있다. 그러나 율곡으로서는 그러한 수수께끼를 퇴계에게 묻고 스승의 대답을 듣기 전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고 ‘두 성인께서 오만한 마음이 어찌 있겠습니까만 이 점에 있어서는 의문이 없을 수 없습니다.’라고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음인 것이다. 그 의문이 풀리기 전에는 스승이 내리는 ‘거경궁리’의 화두라도 결코 결택할 수 없음을 드러내 보이는 무언의 시위이기도 한 것이었다.
  • 儒林(560)-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50)

    儒林(560)-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50)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50) 퇴계의 답장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와 같이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여 자꾸 쌓아 올리고 깊이 생각해서 자연히 심지(心知)가 차츰 밝아지고 의리의 실상도 차츰 눈앞에 나타날 때에 다시 그 전에 궁리하여 터득하지 못하였던 것을 가지고 상세히 궁구하여 이미 터득한 도리와 참험(參驗)하고 대조해 나가면 부지불식간에 앞에서 미처 궁리되지 못했던 것까지도 일시에 서로 깨닫게 된다. 이것이 바로 궁리의 활법(活法)이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율곡이 물었던 사마광의 지선(至善)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또 사물의 이치는 본질에서는 물론 지선이 아닌 것이 없지만 그러나 선(善)이 있으면 반드시 악(惡)이 있고 시(是)가 있으면 비(非)가 있는 것이 필연이니, 그러므로 무릇 격물궁리(格物窮理)하는 것은 그 시비와 선악을 밝혀 취사선택을 잘하고자 하는데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달리 엘리트의식이 강했던 율곡이 다만 스승으로부터 받은 유가적 화두인 ‘거경궁리’에 맹목적으로 집중할 리는 없었다. 율곡은 퇴계와 달리 사람들과의 인화관계는 썩 좋지 않았고, 벼슬길에 올랐던 젊은 시절에도 원로대신 이준경(李俊慶)에게 당돌하게 도전하였을 만큼 평생 동안 필요이상 많은 정적을 만들었던 트러블 메이커이기도 했었다. 이러한 사실은 율곡이 불의를 참지 못하고 바른 말을 잘 하는 선비기질 탓이기도 하지만 남다른 선량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율곡이 유가의 시조인 공자와 맹자가 평소에는 ‘경(敬)’을 덕목으로 주장하였으면서도 막상 자신들은 경에 위배되는 오만한 태도를 취한 불합리한 행동을 묵과하였을 리는 없을 것이다. 율곡이 ‘정자’와 ‘사마광’을 빌려서 거경궁리의 방법을 퇴계에게 묻는 한편 실제로는 ‘거경’에 위배된 행동을 하였던 공자와 맹자의 모순된 행동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율곡이 퇴계에게 보낸 첫 편지 말문에서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신랄한 질문을 던진 것은 몹시 흥미롭고 재미있는 사실이다. 실제로 경을 부르짖은 공자도 오만하고 무례한 태도를 보인 적이 있었다. 논어의 ‘양화편’에 나오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노나라 사람 유비(孺悲)가 공자에게 예를 배우러 온다. 공자를 만나기를 청원하였으나 공자는 신병을 이유로 거절한다. 그러고 심부름꾼을 보내어 이 사실을 통보한다. 그러고는 곧 바로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불러 제친다. 유비가 들으라고.” 공자의 이러한 오만한 태도는 ‘가르침에 있어서는 유별이 없다.(有敎無類)’ 또는 ‘속수의 예 이상을 갖춘 사람에게 나는 일찍이 가르치지 않은 일이 없다.(自行束修以上 吾未嘗無誨焉)’라고 말한 공자의 신념과 위배되는, 실로 미스테릭한 장면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 儒林(558)-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48)

    儒林(558)-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48)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48) 거경궁리. 스승 퇴계가 내려준 화두를 마음에 새기면서 율곡은 결심하였다. ―나는 이제 오로지 이 공안에 대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할 것이다. 마치 닭이 알을 품은 것처럼,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처럼 굶주린 사람이 밥을 생각하고, 목마른 사람이 물을 생각하듯이 어린애가 어머니를 생각하듯이 거경궁리에 대해서 큰 신심과 분심, 그리고 의심을 품고 고구(考究)할 것이다. 그리고 평생 동안 퇴계 선생을 나의 선지식으로 삼을 것이다. 선지식(善知識). 불법을 설하여 사람을 불도로 들게 하는 덕이 높은 스님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화두를 타파하였을 때 이를 인증하여 주는 살아있는 부처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스승 퇴계를 유가의 선지식으로 삼아 두고두고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율곡의 결심은 그대로 실행에 옮겨진다. 율곡은 의심이 들 때마다 퇴계가 세상을 뜰 때까지 줄곧 편지를 통해 자신의 의문점을 전하고 이에 대한 가르침을 청하고 있다.‘율곡전서’에 의하면 모두 5편.‘퇴계문집’을 보면 모두 7편의 서신이 교환되고 있는데, 총 네 차례 왕복한 서신의 내용을 비교해보면 35세에 보낸 마지막 편지에 이르기까지 율곡의 학문은 점점 더 원숙해지고, 학문적 성숙도는 점차 깊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 율곡은 평생 동안 실제로 퇴계를 유가에 있어 선지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첫 번째 서신은 ‘상퇴계선생별지(上退溪先生別紙)’라고 불리며 주로 거경궁리에 대해서 묻고 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문답은 율곡의 학문적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내용으로 손꼽히고 있다. 율곡은 퇴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어 자문을 구하고 있다. 율곡은 먼저 주자와 함께 거경궁리를 주창한 송대의 유학자 정자(程子:1037-1107)에 대해서 묻고 있다. 정자는 송나라의 유학을 완성한 주자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호는 이천(伊川)이다. 초기유학을 흔히 공자와 맹자의 이름을 합쳐서 공맹사상으로 부르듯 송대의 유학, 즉 성리학은 정자와 주자의 이름을 따 정주학(程朱學)으로도 불리는 것이다. 형이었던 정명도(程明道)와 함께 송학의 대가였는데, 불가에 있어 참선을 할 때 좌선법을 사용하듯 유가에 있어 거경궁리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성리학의 학문론과 수양론의 골수를 이룬 진보적인 유학자들이었다. 정이천은 평소에 불가에서처럼 정좌를 잘 하는 유학자들을 보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정이천은 ‘정(靜)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문득 석씨(釋氏:부처)의 말에 끌려들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자는 쓰지 않고 다만 경(敬)자를 썼으니, 정의 편법됨을 염려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동(動)이건, 정(靜)이건 한결같은 ‘거경’이야말로 유가의 요체임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송 대의 성리학이 불학(佛學)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신유학 운동이었으므로 정자가 불교의 선법에 대항하기 위해서 ‘거경’의 유교적 선법을 주장하였던 것은 실로 혁명적인 발상이었던 것이다.
  • 오빠는 풍각쟁이야/장유정 지음

    오빠는 풍각쟁이야/장유정 지음

    대중가요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대중의 가요, 즉 대중이 향유하는 가요다. 당대의 사회상과 대중심리의 핵심을 알뜰하게 반영하는 노래가 바로 대중가요임을 감안하면, 이에 대한 연구는 한 시대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음사 출판그룹의 새 브랜드인 민음in에서 펴낸 ‘오빠는 풍각쟁이야’는 그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본격적인 대중가요 연구서다. 저자는 2004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대중가요 연구(논문 ‘일제강점기 한국 대중가요 연구’)로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장유정(33)씨. 한때 가수를 꿈꿔 대학가요제에 나가기도 했던 젊은 국문학자다. 20세기 대중가요 탄생에 자궁 역할을 한 것은 단연 유성기였다. 캐나다 출신 매체비평가 마셜 매클루언은 유성기를 가리켜 “장벽이 제거된 음악당”이라고 했다. 그가 적절히 지적했듯, 유성기는 음악 대중화에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1930년대 일제강점기, 유성기 음반에 대한 인기는 절정을 이뤘다. 유성기 천하요 레코드 예술가의 황금시대라 할 만했다. 당시 ‘매일신보’ 기사는 이렇게 전한다.“1930년의 첫 여름에는 만중표 ‘담배’와 같이 13도 방방곡곡이 ‘에디슨’의 귀한 선물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 불행한 조선의 남녀노소는 없게 되었다.…” 저자는 이런 유성기 음반 가사지를 1차 자료로 삼고 당시 신문, 잡지 등의 글을 분석해 대중가요를 둘러싼 한국 근대의 풍경을 복원해냈다. 이 책을 통해 비로소 밝혀진 사실도 적지 않다. 그 중 하나가 한국 최초의 ‘얼굴 없는 가수’는 누구이며 또 최초의 기생 출신 가수는 누구냐 하는 것. 우리나라 대중가요 초기에도 신비주의 마케팅 차원의 ‘얼굴 없는 가수’가 있었다.‘복면 가수’로도 불린 이 얼굴 없는 가수는 음반에 본명 대신 ‘미스 리갈’‘미스터 콜럼비아’라는 식의 이름을 썼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 최초의 얼굴 없는 가수는 1934년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금강산 좋을시고’란 음반을 낸 ‘미스 코리아’다. 그러면 최초의 기생 출신 대중가수는 누구일까. 주인공은 ‘고도의 정한’을 부른 왕수복.‘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의 임종을 지킨 인물로 알려진 왕 여인이 바로 왕수복이라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1934년 ‘가신 님에게’를 만들어 부른 김정숙이고, 김소월의 스승 김억과 대중가요 작사가인 김포몽이 동일 인물이란 사실을 밝혀낸 것도 대중가요사 연구의 한 수확이다. 저자는 대중가요를 트로트, 신민요, 만요(漫謠), 재즈송 등 네 갈래로 나눠 살핀다. 트로트는 당시 일본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나타난 모든 곡을 통칭하는 용어. 일제강점기 트로트는 대중의 비참한 삶을 반영하는 한편 현실을 직시하고 시대 분위기를 일깨운 ‘엘리트 음악’이었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시대인식과 현실에 대한 초극의지가 담긴 노래가 다름아닌 트로트였다. 책에서는 이경설의 ‘세기말의 노래’, 채규엽의 ‘희망의 종이 운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박향림의 ‘지상의 어머니’ 등을 대표적인 트로트 곡으로 꼽아 분석한다.1932년 배우이자 가수로 활동한 이경설이 부른 ‘세기말의 노래’의 한 대목.“…가랑잎에 동남풍을 실어 슬렁슬렁 떠나면/달 떨어진 만경창파 위에 까마귀만 우짖어/외로워라 이 바다야 내 사랑 바다야/뒤숭숭한 이 바다가 언제나 밝아지려 하는가…” 온갖 비유와 상징이 동원된 노랫말에서 소극적이나마 당시의 암울한 현실에 대한 저항의지가 엿보인다. 신민요는 기존의 민요 형식을 빌려 새롭게 출현한 자생적인 대중가요를 말한다. 그것은 크게 국토예찬, 봄맞이, 풍년맞이의 세 형태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곡으로는 강홍식의 ‘조선타령’, 이난영의 ‘봄맞이’, 강홍식·조금자의 ‘풍년맞이’ 등을 들 수 있다. 신민요 중에는 애상적 분위기의 ‘꽃을 잡고´(노래 선우일선) 같은 곡도 있다. 만요는 희극적인 만담 등을 노래로 만든 일종의 코믹송이다. 박향림의 ‘오빠는 풍각쟁이’, 강홍식의 ‘유쾌한 시골영감’, 유종섭의 ‘뚱딴지 서울’, 김장미의 ‘엉터리 대학생’, 이애리수·전경희의 ‘붕까라’ 같은 곡들은 가사만 봐도 흥미롭다. 특히 ‘오빠는 풍각쟁이’는 해학적인 웃음을 선사하는 곡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 풍각쟁이가 ‘심술쟁이’나 ‘짜증쟁이’처럼 일종의 비어로 사용된 점이 특이하다. 재즈송은 오늘날 말하는 재즈뿐만 아니라 서양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팝송, 샹송, 라틴음악까지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이국 정취와 향락적인 정서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재즈송으로 삼우열의 ‘다이나’, 채규엽의 ‘정열의 산보’, 무용수로 이름 높던 최승희가 부른 ‘이태리의 정원’ 등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책에는 초판에 한해 지금은 구하기 힘든 유성기 음반을 복각한 CD레코드 한 장이 보너스로 붙어 있어 관심을 끈다.2만 2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깨미동과 떠나는 생각여행] (2) 화이트 데이의 진정한 의미

    [깨미동과 떠나는 생각여행] (2) 화이트 데이의 진정한 의미

    [생각열기] 화이트 데이의 ‘white’는 하얀색이다. 그럼 화이트 데이와 사탕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조금 있으면 화이트 데이다.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팬시점이나 마트에서는 화이트데이를 위한 상품들이 즐비하다. 기껏해야 사탕인데 하지만, 가격을 보면 10만원이 넘는 것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사탕값보다 포장비가 가격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화려한 사탕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색을 보면 하얀색과는 거리가 있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등 다양한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화이트데이라고 하는 것일까? 정답은 원래 화이트데이는 사탕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시맬로를 주는 마쉬맬로 데이가 바뀐 것이다. 일본의 한 제과업체에서 밸런타인데이에서 착안하여 남자도 여자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날을 만들고, 사랑을 고백할 때 마시맬로를 주도록 홍보하였다. 마시맬로는 초코파이 속에 들어있는 하얗고 부드러운 부분이다. 그래서 초기에는 마시맬로 데이라고 했었고, 마시맬로의 하얀색 때문에 화이트데이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마시맬로가 판매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대체하기 위한 상품으로 사탕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생각에 날개달기]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사랑을 표현할 때 돈의 가치가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얼마나 비싼 선물을 하느냐가 상대방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표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래서 초콜릿이나 빼빼로, 사탕의 값들이 점점 비싸져 가고 있으며, 값이 비싼 상품들이 잘 팔린다고 한다. 연인에게 뿐만 아니라 스승의 날이나 어버이날에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때도 어느 수준 이상의 적당한 가격의 선물을 찾기에 골몰한다. 그러나 청소년기부터 사랑의 마음이나 감사의 마음을 돈으로 표현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첫째 이유는 사람의 마음은 돈을 주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청소년기부터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돈으로 표현하는 습관을 기르게 되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습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셋째 이유는 이런 기념일의 대부분이 상업적인 목적에서 제과업체의 이윤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날 선물을 받았을 때 기쁜 것은 먹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받고 있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기쁜 것이다. 따라서 내가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값비싼 물질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예쁘게 종이를 만들어서 편지를 쓴다든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멋진 휴대전화 문자를 보낸다든지, 아름다운 시를 낭송해서 테이프에 녹음해서 주는 등 아주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시간과 노력은 조금 더 들겠지만 값비싼 선물의 인스턴트식 사랑고백보다 더 많은 감동과 함게 오래도록 기억에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사랑을 고백한다는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에 즈음해서 팔리는 제과 매출액이 각각 수백억원을 훨씬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해마다 이 금액은 엄청난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결핵환자들의 생명을 살리는 크리스마스 실의 판매량은 1997년 3811만장 팔리던 것이 2004년 2640만장으로 1200만장 가까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사랑을 고백하는 데에는 많은 돈을 쓰면서도 정작 우리 주위의 생명을 살리는 데 쓰여지는 돈은 줄어들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을 가지게 한다. [생각주머니 넓히기] 1. 아래는 우리 전통민속 기념일이다. 날짜에 해당하는 명절 이름을 적어 보자. 그리고 이런 민속명절과 제과업체에서 만든 기념일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의미있는지 생각해 보자 2.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찾아보자. 그리고 부모님이나 스승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이를 실천해 보자.
  • 儒林(557)-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47)

    儒林(557)-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47)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47) 주자의 해설은 ‘사물의 이치를 하나하나 철저히 궁구하여 그 극처(極處)에 다다르게 되면 궁극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이 천하의 이치와 활연관통(豁然貫通)하게 됨으로써 그렇게 되면 내가 본래 가지고 있는 심지(心知)를 밝힐 수 있고, 그 작용에 의해 정심(正心)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가 주장한 ‘격물치지’를 통한 ‘활연관통’은 마치 불교에 있어 화두를 타파하여 ‘활연대오(豁然大悟)를 이룬다.’는 뜻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거경궁리’는 ‘격물치지’를 이루는 유가의 선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퇴계 선생이 써준 ‘거경궁리’의 문장을 본 순간 율곡은 그러한 스승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지난밤 두 사람이 나눈 대화에서 율곡이 ‘사려가 깊은 뒤에 능히 얻을 수 있는 가장 나가기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퇴계 선생으로부터 ‘그것은 이(理)다.’란 대답을 들었고,‘어떻게 하면 그 이를 터득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다시 물었을 때 ‘주일무적’이란 답변을 들었던 것이다. 율곡이 ‘마음이 주일무적하기 위해서는 몸을 어떻게 가져야 합니까.’하고 다시 물었을 때 스승은 ‘오직 몸이 경(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율곡은 마침내 금강산에서부터 갖고 있었던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의 불교적 화두를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이 하나는 바로 이(理)며, 이 하나는 바로 경(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유교식으로 타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율곡은 스승이 써준 넉자의 활구(活句)를 쳐다보며 생각하였다. 이 글은 퇴계 선생이 내게 준 촌철(寸鐵)인 것이다. 평생 동안 지켜 나가야 할 나의 화두인 것이다. 실제로 율곡은 훗날 퇴계와 나눈 열통이 넘는 편지에서 상세하게 ‘경(敬)’에 대해서 묻고 있다. 이에 대해 퇴계는 ‘경이란 알기보다 행하기 어렵고, 일시적으로 행하는 것보다 오랫동안 지속하기가 더 어렵다.’고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자신도 경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율곡은 각별히 유념해서 실천해 옮겨야 한다고 당부하면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솔직히 드러내고 있다. 그러고나서 퇴계는 ‘거경궁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아무 일이 없이 고요히 있을 때는 존양성성하고 강습을 하거나 사물을 대할 때에는 마땅한 이치를 궁리하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경의 공부는 움직임과 조용히 있을 때를 두루 통관(洞貫)하여 거의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존양성성(存養惺惺). 마음을 모아 항상 깨어있음을 뜻하는 말. 항상 깨어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敬)에 머물러 있음을 강조하는 내용이었으니, 퇴계의 성리학은 오로지 경을 통해서만 사물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경학(敬學)’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 “과학도들 윤리의식 꼭 지켜줬으면…”

    국내 최초의 원자력 박사인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정창현(65) 교수가 35년 동안 잡았던 교편을 놓고 정년퇴임한다. 1941년생인 정 교수는 59년 정권의 근대화정책으로 신설된 원자력공학과 1회 입학생으로 서울대에 들어왔다. 스물아홉살이던 70년에는 미국 MIT(매사추세츠공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귀국했다. 정 교수는 이듬해 서른이라는 나이에 서울대 조교수가 돼 ‘최연소 교수’ 기록을 세웠다.2년 뒤에는 교무부처장직을 맡아 최연소 보직교수라는 기록도 남겼다. MIT 재학시 박사학위 시험에 합격한 뒤 논문을 5달만에 제출하자 학교측에서 ‘논문은 훌륭하지만 학위를 주기엔 너무 빠르다’며 1년 남짓 시간을 더 끌었고 1년 뒤 그 논문 그대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그의 ‘천재성’을 가늠하게 해주는 유명한 일화다. 이 논문은 미국 물리학회지에 실려 아직도 인용되고 있다.●초등학교때 부모 잃고 소년가장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정 교수에게도 당장 오늘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경남 진주에서 검사의 아들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정 교수는 초등학교 졸업을 한 달 앞둔 53년 1월 부산 다대포 앞 창경호 침몰사건으로 부모님을 잃고 세 동생을 거느린 소년가장 신세가 됐다. 스승들의 도움을 받아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뒤 경남고에 진학한 그는 공책 한 권을 사기 힘든 형편에도 100점 만점에 평균 99.8점을 받는 등 우수한 성적을 유지해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정 교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대학 갈 돈도 없는데 공부해서 뭐하느냐는 생각에 가출을 하기도 했다. 서울로 올라와 잘 사는 친구 집에 얹혀 지내던 그는 “서울대만 들어가면 한 학기 입학금을 대주겠다.”는 친구 어머니의 제안에 다시 책을 잡았다. 눈썹까지 밀면서 3달 동안 공부에만 집중한 결과 정 교수는 결국 서울대에 입학했고, 총학생회장까지 맡는 등 의미있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괴짜로 소문난 정 교수의 자유분방한 언행은 교수가 된 뒤에도 여러 해프닝을 만들어냈다.●자유분방한 `괴짜´… 숱한 해프닝교무부처장을 맡았던 당시 문교부 장관이 주재하는 식사 자리에서 “저 장관 별명이 짱구다. 머리만 크고 든 게 없다.”고 호탕하게 웃어 참석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일은 지금까지도 지인들 사이에서 종종 회자되고 있는 일화다. 고등학교 시절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가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에 반해 공학도가 되었다는 정 교수는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후학을 가르치기로 결심한 것은 어려운 시절 날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면서 “후배들이 과학도로서의 윤리의식을 꼭 지켜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 교수의 퇴임식은 오는 10일 오후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린다. 유지혜기자 wisepen@seoul.co.kr
  • [박성서의 7080 가요 X파일] 맨얼굴의 끼 ‘더블A’

    [박성서의 7080 가요 X파일] 맨얼굴의 끼 ‘더블A’

    # 윤복기-복희-성복희-보키 폰 보데-그리고 비로소 ‘윤복희’로 돌아오다 ‘어제’를 돌아보지 않고 ‘오늘’만 바라보며 산다. 윤복희씨의 오랜 습관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옛날로 돌이키는 ‘아주 편한 무대’에 선다. 바로 올 4월에 가질 ‘인생 60년, 무대 55주년’ 기념공연이다. 윤씨의 본명은 윤복기(尹福起).‘여러분’으로 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순간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을 연출했던 오누이. 바로 오빠 윤항기씨의 ‘기’자 돌림이다. 무대를 따라 옮겨 다니는 ‘떠돌이별’이었던 그는 정작 호적조차 없었다. 그냥 남들에 의해 발음상 ‘복희’가 되었다가 해외공연을 떠나기 직전인 열여섯 살 때 어머니 성을 따 ‘성복희’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처음 올렸다. 그 뒤 독일계 혼혈가수 유주용과 결혼하면서 ‘보키 폰 보데’가 됐다. 그러던 86년 비로소 부친의 성을 따 ‘윤복희(尹福姬)’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호적에 올렸다(이때 호적을 45년생으로 잘못 기재했다). 이름만큼이나 파란과 곡절의 삶을 살았던 그는 불과 열살 남짓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오로지 ‘무대’ 하나만을 의지해 살아왔다. 본인 스스로 거슬러 가본 최초의 기억에서조차 먹는 것, 잠잘 곳을 걱정해야 했던, 어쩔 수 없는 이미 어른 아닌 ‘어른’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고 나서부터는 굶거나 길에서 잔 적은 없었다. 스스로 터득한 재능으로 미8군 쇼 무대에 섰기 때문이다. 오산비행장 부근의 미8군 클럽의 ‘제트 스트립밴드’의 마스터에게 겨우 사정을 해서 ‘10분간의 무대’에 서기 시작한 열세살의 복희는 이어 당시 ‘더블 A급 단원’들만으로 구성된 미8군쇼단 ‘에이원쇼’에 스카우트된다. 당시 ‘에이원쇼’ 밴드마스터였던 작곡가 김희갑씨의 회고. “복희가 아주 어릴 때였죠, 영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우리말 발음을 적어 연습하곤 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히 떠오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복희는 발음이 매우 정확해 3개월마다 갖는 오디션에서 늘 더블 A를 받곤 했지요. 또한 내가 기타를 가르쳐주면 이내 무대에 올라 독주를 해낼 정도로 놀라운 음악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연기, 춤, 노래 그리고 ‘끼’를 타고난 윤복희는 이후 해외무대로 진출,‘코리안 키튼즈’를 결성해 맘껏 실력을 펼친다. 이때 만난 영국인 매니저 찰스 메이더는 그의 스승이자 수양아버지. 열여섯살인 그에게 언제나 무대란 ‘비상구 없는 공간’이라고 가르쳤다.‘용서가 허용되지 않는 땅’이라고도 했다. 사실 이런 가르침이 아니었더라도 그에게 있어 무대는 ‘세상보다 더 큰 세상’이었다. 대중가수였던 그가 처음 뮤지컬 배우로 선 것은 77년, 에디트 피아프의 삶을 그린 뮤지컬 ‘빠담 빠담 빠담’. 이 무대를 통해 그는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했고 이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는 넓은 음역을 넘나드는 놀라운 가창력으로 수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우는 듯 웃는, 얼굴 가득 찡그린 표정에서조차 어쩐지 행복감이 충만해 보이는 윤복희씨. 그는 지난 2001년에 ‘꾼’이라는 타이틀로 데뷔 50주년 기념공연을 가진 이래 5년 만인 올 4월에 감격의 무대에 선다. “50주년 공연이 그동안 내가 해왔던 모든 테크닉을 보여 주기 위해 꾸며진 무대였다면 이번에는 저나 관객들에게 매우 편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화장을 전혀 하지 않은 얼굴로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며 담담하게 각오를 밝힌다. “오히려 화장을 하지 않는 것이 내겐 말할 수 없는 자유로움을 줍니다. 그것으로 인해 허비했던 시간도 엄청 많이 남고…. 생활의 중심 하나를 바꿔버리니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더군요.” 지난 55년간 혼자 헤쳐 나온 ‘손때’가 잔뜩 묻은 무대가 그러하듯 말 한마디 한마디에 ‘땀내’가 짙게 배어 있는 듯했다. 글 박성서(가요평론가/저널리스트) sachilo@empal.com
  • 儒林(555)-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45)

    儒林(555)-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45)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45) 전라도의 특산물인 농선지를 보자 율곡은 생각하였다. 어째서 스승께서는 이처럼 네 겹으로 접힌 고급종이를 자신에게 내렸음일까. 이 종이에는 도대체 무엇이 담겨 있음일까. 율곡은 천천히 종이를 펼쳐보았다. 그러나 종이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다만 다음과 같은 넉자의 문장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居敬窮理” 그 문장을 쓴 사람은 퇴계 선생. 이미 스승의 필체에 낯이 익어 있던 율곡은 그 글씨가 다름 아닌 퇴계 선생이 직접 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순간 율곡은 그것이 퇴계 선생이 자신에게 내려준 유가의 화두임을 깨달았다. 불가에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화두를 결택하여 준다. 제자는 스승이 내려준 화두를 타파함으로써 마침내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는 성불(性佛)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퇴계 선생은 먼 길을 떠나 다시는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율곡을 위해 공안(公案) 하나를 점지해준 것이다. 거경궁리. 물론 율곡은 그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거경궁리’는 송학의 완성자라고 일컬어지는 주자가 학문의 방법으로 주장하였던 정신통일의 수단이었다. 성리학의 요체는 한마디로 ‘거경궁리’.‘거경(居敬)’이란 문자 그대로 ‘경에 머무른다.’는 뜻이요,‘궁리(窮理)’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경에 머무른다.’는 것은 유학자에게 있어 수양론이요,‘궁리’는 유학자에 있어 지식론에 해당하는 것이다. 경(敬). 원래 공자가 주장하였던 이 도는 공경(恭敬)을 의미한다. 이는 남을 대할 때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마음속으로는 상대방을 존경하는 태도’를 뜻하는 것인데, 공자는 일찍이 정나라의 대부였던 자산(子産)을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자께서 자산을 평해 말씀하셨다. ‘그에게는 군자의 도가 네 가지가 있으니, 그 자신의 행동이 공손하였고, 윗사람을 섬김에 공경스러웠고, 백성들을 다스림에 은혜로웠고, 백성을 부림에 있어 의로웠다.(有君子之道四焉 其行已也恭 其事上也敬 其養民也惠 其使民也義)’” 자산은 정나라의 재상으로 정나라를 잘 다스린 정치가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공자의 이러한 평가에 의해서 ‘행동이 공손하고, 섬김에 있어 공경스럽고, 은혜롭고, 의로운 행동’을 경이라고 부르고 반드시 군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강조하였던 것이다. 예수도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제일 높으냐.’는 문제로 옥신각신하며 다투자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 왕들은 강제로 백성을 다스린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백성들의 은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오히려 너희들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중략)…그러나 나는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여기에 와 있다.”
  • 儒林(554)-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44)

    儒林(554)-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44)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44) 그중 마지막으로 서신이 교환된 것은 퇴계가 70세의 나이로 별세하던 1570년이었다. 이때 율곡의 나이는 35세. 만약 퇴계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아마도 율곡은 더 많은 편지를 통해 스승으로부터 학문에 대한 편달(鞭撻)을 받았을 것이다. 율곡이 강릉에 머무르고 있을 무렵 퇴계가 사람을 시켜 서찰과 시를 보내오자 율곡은 계상에서 작별인사를 나누고 읍성을 빠져나올 때 마상에서 읊은 시를 스승에게 바쳐 올린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부에 그 누가 의심이 없으리오. 병의 뿌리는 바로 아집을 벗어나지 못함에 있네. 필경 한계(寒溪)의 물을 마시고 심간(心肝)을 밝히면 스스로 알리로다. 젊어서는 양식을 찧노라 사방을 달리시고 인마 주리고 여윈 뒤에야 빛을 돌이키셨네. 비낀 해는 본래 서산 위에 있나니 고향 길 먼 걸 어찌 근심하리까.” 시의 중간은 스승께서 찬물을 마시며 마음을 청량쇄락(淸灑落)하게 하였으므로 스스로 알게 된 경지에 이른 것을 찬양하였고, 스승도 초년에 방황하시다 그것을 깨달아 반조(返照)하심으로써 자아를 되찾았음을 칭송하고 있다. 끝에서는 ‘나이가 많고 적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석양은 본래 서산에 없는 것인데 나그네의 인생이 세상에 나온 지 오래되어 고향이 멀어진 것만을 어찌 근심하리까.’하는 스승에 대한 후학으로서의 존경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초반의 내용은 ‘공부에 그 누가 의심이 없겠는가. 다만 자신의 병근(病根)은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함에 있네.(學道何人到不疑 病根嗟我未全離)’를 크게 깨닫고 이러한 사실을 후회하며 가르쳐 준 스승에 대한 고마움을 노래하고 있음인 것이다. 말이 읍성을 벗어난 것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정오 무렵이었다. 퇴계가 살고 있는 예안은 안동이 거느리고 있는 8개의 현(縣) 중의 하나로서 안동은 예부터 ‘대도호부(大都護府)’라고 불릴 정도로 큰 읍성이었다. 세조 때에는 진을 두고 부사로서 병마절도사를 겸임하게 할 만큼 웅번(雄藩)이기도 하였다. 율곡은 읍성을 벗어나자마자 문득 퇴계로부터 받은 물건을 떠올렸다. 퇴계는 헤어질 무렵 율곡에게 물건을 내어주며 ‘반드시 동구 밖을 벗어난 후에야 이것을 펼쳐 보시게나.’하고 이르지 않았던가. 약속을 지켜 마침 도읍의 읍성을 벗어났으므로 율곡은 행랑에서 그 물건을 꺼내들고 말 위에서 내렸다. 스승이 주신 물건이었으므로 불경하게 말 위에서 그것을 펼쳐 볼 수 없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율곡은 조심스레 그 물건을 들여다보았다. 종이였다. 종이는 네 겹으로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농선지(籠扇紙)라고 불리는 고급종이였다. 이른바 사고지(四古紙)라고 불리던 옥판선지(玉板宣紙) 중의 하나였다.
  • 儒林(553)-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43)

    儒林(553)-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43)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43) 말 위에서 천천히 읍성을 빠져나가고 있는 동안 해는 더욱 더 떠올라 온통 옥양목처럼 흰눈이 깔린 설원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욱일(旭日)이었다. 사흘 동안 계속 내렸던 비와 눈이 마침내 그치고 아침 해의 승천(昇天)을 마상 위에서 보면서 율곡은 줄곧 가슴 속에 드리웠던 미망(迷妄)의 어두움이 한꺼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율곡은 하늘과 땅 사이에 충만한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 원기(元氣)를 느꼈다. 호연지기(浩然之氣)였다. ‘호연지기’는 일찍이 맹자가 제자였던 공손추와 대화를 나누다가 공손추가 ‘감히 묻겠습니다만 스승님께서는 어디에 장점이 있으십니까.’하고 물었을 때 ‘나는 말을 알며(知言), 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르노라.’라고 대답하였던 데서 나온, 맹자가 남긴 유명한 성어였던 것이다. 이에 공손추가 다시 ‘감히 묻겠습니다. 무엇을 호연지기라고 합니까.’하고 묻자 맹자는 대답한다. “그 호연지기라는 것은 지극히 크고 또한 강하니, 정직으로서 잘 기르고 해침이 없으면 온 천지사이에 꽉 차게 된다. 그 호연지기는 의(義)와 도(道)에 배합되니, 이것이 없으면 굶주리게 된다.(결핍하게 된다) 이 호연지기는 의리(義理)를 많이 축적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호연지기. 율곡은 욱일승천하는 아침 해를 바라보면서 하늘과 땅 사이에 정기(精氣)가 충만한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율곡은 크게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이 줄곧 방황하였던 것은 내 몸 속에 스스로 깃들어있는 호연(浩然)을 깨닫지 못하고 그릇된 방법으로 수양하였기 때문인 것을. 주자도 이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가. “기(氣)란 본래 몸에 충만되어 있어 스스로 호연한 것이지만 수양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족하게 되는 것이다. 맹자께서 ‘호연지기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것을 잘 길러 그 본래상태를 회복한 것이다. 말을 알게 되면(知言) 도의에 밝아서 천하의 일에 의심스러운 바가 없고, 기를 잘 기르면 도의에 잘 배합되어서 천하의 일에 두려운 바가 없게 되니, 이 때문에 큰일을 당하여도 부동심(不動心)하게 되는 것이다.” 부동심. 그 어떤 외계의 충동을 받아도 움직이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 그렇다. 율곡은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까지 사나운 말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천하의 일에 의심하고 천하의 일을 두려워하였던 것은 그릇된 학문의 길을 통해 도의에 밝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이때의 심정을 율곡은 말 위에서 시를 읊어 노래한다. 이 시는 퇴계와 율곡이 나눈 편지에 실려 있다. 2박3일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퇴계로부터 큰 깨달음을 얻었던 율곡은 평생을 통해 총 5통의 편지를 보내고 있다. 율곡이 편지를 보낼 때마다 퇴계 역시 꼬박꼬박 답장을 씀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서신은 모두 10통이 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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