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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영상] 최홍만, 굿리지 1회 ‘화끈 KO승’

    [동영상] 최홍만, 굿리지 1회 ‘화끈 KO승’

    ‘테크노 파이터’ 최홍만(27)이 화끈하게 부활했다. 최홍만은 5일 홍콩 아시아월드엑스포 아레나에서 열린 입식타격기 K-1 월드그랑프리 홍콩 대회의 슈퍼파이트(번외 경기)에 나와 팔씨름 세계 챔피언 출신 게리 굿리지(41·트리니다드토바고)를 1회 1분34초 만에 KO로 제압했다. 최홍만은 이로써 지난 4월29일 하와이 대회에서 마이크 말론(미국)을 2회 TKO로 꺾은 뒤 3개월여 만에 승리의 기쁨을 맛봤다. 특히 지난 6월 로스앤젤레스 다이너마이트 대회를 앞두고 메디컬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해 브록 레스너(미국)와의 대결이 무산된 아쉬움도 지워버렸다. 당시 머릿속 종양 발견으로 불거진 말단비대증 등 ‘건강 이상설’ 때문에 겪었던 스트레스도 날려버린 셈. 원래 왼손잡이였으나 그동안 오른손 자세로 경기를 치렀던 최홍만은 이날 왼손을 앞세우는 등 변신을 꾀했다. 최홍만은 “몸통을 노리겠다.”고 공언한 굿리지가 접근해오면 잽과 니킥으로 위협사격을 하며 거리를 내주지 않았다. 잽에 이은 훅과 니킥, 좌우 연타를 날리는 최홍만은 타격에서 확실하게 진화한 모습을 보여줬다. 상대보다 키가 27㎝나 큰 최홍만(218㎝)은 압도적인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니킥과 연타로 격투기 베테랑 굿리지를 로프로 몰아넣었고, 펀치 러시를 펼쳤다. 굿리지가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으며 눈이 풀리자 심판은 경기를 중지시키고 최홍만의 승리를 선언했다. 최홍만은 격투기 전적 12승(7KO·TKO)3패를 기록했다. 기분 좋게 부활을 선언한 최홍만은 다음달 29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리는 K-1 월드그랑프리 16강 파이널 개막전에 개최국 대표 자격으로 출전한다. 최홍만은 “한국 선수가 계속 져서 꼭 이기고 싶었고 꾸준히 운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느꼈다.”면서 “9월 서울대회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각오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최홍만의 격투기 스승인 재일교포 김태영(37)은 토너먼트 8강에서 1라운드 초반 센토류(미국)를 하이킥 한방으로 쓰러뜨렸고, 준결승에서도 후지모토 유스케(일본)를 2회 KO로 제압했으나 눈 주위 부상으로 결승전을 포기해 아쉬움을 남겼다. 일본 가라테 정도회관 소속인 그는 K-1 1세대 스타 출신.2000년 은퇴했으나 지난해 8월 역시 재일교포인 유도 스타 추성훈을 상대로 현역에 복귀했고 추성훈에게 졌으나 이후 이날까지 4연승을 달리며 재기에 성공했다. 태권도 출신 박용수(26), 투포환 출신 김재일(32), 씨름 출신 김동욱(30) 등 나머지 한국 선수들은 기량 부족을 드러내며 모두 KO로 무릎을 꿇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내 인생의 한 사람] 침묵속에서 스스로 길을 찾으라시던 법정 스님

    [내 인생의 한 사람] 침묵속에서 스스로 길을 찾으라시던 법정 스님

    조계산 자락이나 쳐다보다 가거라 오늘은 불가의 스승이신 법정 스님과의 인연을 꺼내려고 한다.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다. 나는 스님의 책을 만드는 일로 불일암에 가끔 내려가곤 했다. 그런데 불일암에 도착하면 스님께서는 일부러 사무적인 얘기를 짧게 끝내시고서는 내게 자연과 접할 휴식의 시간을 많이 주셨다. 내가 스님의 제자라고 하니, 스님 문하에 들어가 고된 수행이나 어떤 가르침의 단계를 거쳤다고 오해할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건 아니다. 스님께서는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고 말씀하시기보다 당신의 삶을 구름에 달 가듯이 언뜻언뜻 보여주셨을 뿐이다. 불가에 이런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한 젊은이가 고명한 선사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제자는 선사에게 많은 가르침을 기대하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선사는 그 젊은이에게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젊은이는 3년을 넘기면서 화가 나 “큰스님, 왜 저에게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까?” 하고 항의했다. 그러자 선사가 “너는 3년 동안 물 긷고 나무 하고 도량 청소를 하지 않았느냐. 그게 나의 가르침이다’고 깨우침을 주었다는 얘기다. 그렇다. 나는 그렇게 스님을 가끔 뵙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웠다. 불일암 뜰에는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고 세워둔 간판이 있는데, 나는 그 간판을 떠올리며 ‘인생길’을 선택하는 데 내가 가야 할 길인지, 아닌지를 늘 자문하고 답을 얻어왔던 것이다. 스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는 데 있어 가능한 뒤로 미루시는 법이 없었다. 급하신 스님의 성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을 잘 사는 것이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언젠가 여름에 내려갔을 때, 불일암 처마 끝에 달린 풍경이 하나 사라지고 없었다. 스님께 풍경이 어디로 갔냐고 여쭈었더니, 며칠 전 태풍이 지나갈 때 너무 시끄러워 비바람이 몰아치는 한밤중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떼어버렸다고 얘기하셨다. 나 같으면 귀를 막고 잤을 텐데 스님의 행동방식은 그랬다. 나는 서울로 올라와 인사동으로 나가 망치로 두들겨 만든 방짜유기 풍경을 주문했다. 청아한 불일암 풍경 소리를 다시 듣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훗날 불일암에 가보니 그 풍경은 미풍에 꿈쩍도 안 했고, 스님은 ‘태풍의 대변인’이라고 웃으셨다. 한편, 스님께서는 무엇을 장황하게 말하거나 아는 체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셨다. 이따금 젊은 스님들이 찾아와 스님께 설법을 들으려 하면 호두알만 한 사탕을 주어 입 안에 넣게 하고는 “조계산 자락이나 쳐다보다 가라”고 하셨다. 남의 말에서 지혜를 찾기보다는 침묵 속에서 스스로 체험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내가 직장 생활이 답답하여 스님을 뵙고 퇴직을 상의하자 스님께서 “다니고 싶은 마음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어떤가” 하고 물으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다니고 싶은 마음이 49퍼센트,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51퍼센트입니다”라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그만두라”시며 1퍼센트의 마음이 좌절했을 때 극복의지가 될 거라고 하시던 스님의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산중에 들어와 용케 7년을 잘 버티고 살고 있다. 스님께서 가정방문을 오겠다며 전화를 하고 다녀가시기도 했다. 다행히 스님께서는 스님의 책 <홀로 사는 즐거움>에서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는 촌평을 하셨다. 10여 년 전이었을 것이다. 나는 스님 정수리에 난 상처에 연고를 발라드린 적이 있다. 스님이 사시는 강원도 산중의 오두막은 문설주가 낮아 키가 큰 스님께서 방 안에 들어가시다 그 부분을 다치신 것이다. 그때 스님께서 ‘예전 같으면 당장 문을 뜯어 고쳤겠지만 지금은 내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다’고 하시던 말씀이 귓가에 선하다. 정찬주_ 법정 스님으로부터 ‘무염’이라는 법명을 받은 소설가로, 늘 마음속에 그리던 남도 산중에 집을 지어 초보 농사꾼으로 들어앉은 지 올해로 7년입니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산은 산 물은 물> <만행>, 산문집 <암자로 가는 길>, 어른을 위한 동화 <눈부처> 등이 있으며, 최근 자신의 참모습을 찾고 싶은 이들에게 전하는 소박한 삶의 이야기 <왜 산중에서 사냐고 묻거든>을 냈습니다.
  • 한나라 청주 합동연설회…충북 화두는 ‘어머니’

    한나라 청주 합동연설회…충북 화두는 ‘어머니’

    “제 스승은 어머니와 가난이었습니다.”(이명박 후보) “어머니의 고향, 충북은 곧 저의 고향입니다.”(박근혜 후보) 3일 충북 청주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한나라당 6차 합동연설회에서 이명박·박근혜 대선 경선 후보의 화두는 ‘어머니’였다. 이 후보는 자신의 출생의혹이 불거진 데 대해 “정직하게 살라고 가르친 어머니가 모독을 당한 꼴이 됐다.”며 씁쓸해했다. 박 후보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간호사는 기워입은 속치마를 보고 놀랐다.”며 박정희 시절의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30도를 웃도는 폭염 속에 진행된 유세에서 두 후보는 서로를 향해 뜨거운 공격을 퍼부었다. 먼저 연단에 오른 박 후보는 “제주에서 시작한 바람이 충청도까지 불어 닥쳤다. 박근혜의 바람이 느껴지냐.”고 웃으며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집앞에 대규모 공사가 벌어져도 돈은 개발정보를 미리 챙긴 사람들이 벌어갔다.”고 이 후보의 땅 투기 의혹을 연상시킨 뒤 “땅이 아니라 땀으로 돈 버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박 후보에 이어 연단에 선 이 후보는 “정치가 무엇이기에 어머니와 형제를 이렇게 음해하고 욕보이냐.”면서 “부동산 투기할 시간도 없이 살았다.”고 반박했다. 그는 “국정원이 제 사돈의 팔촌까지 100차례가 넘게 정보를 불법으로 유출했다.”면서 “배후가 밝혀져야 한다.”고 일갈했다. 이 후보는 “일생동안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12시까지 열심히 살아왔다.”면서 “이 정열과 힘과 경륜으로 대한민국을 살리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준표·원희룡 후보는 당 화합을 강조하며 두 후보와 지지자들을 설득했다. 한편 이날 행사장 앞에서 박 후보 동생인 지만씨 사진을 든 전국금속노조 광주전남 지부 소속 노조원들이 항의집회를 하다가 박 후보 지지자와 무력충돌을 빚기도 했다. 한 노조원은 박 후보 지지자에게 떠밀려 계단에서 떨어져 구급차에 실려가기도 했다. 떼민 지지자는 경찰에 연행됐다. 청주 박지연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30대男 훔친차로 추돌사고 도주

    고속도로에서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30대 남성의 피살과 여성의 실종, 차량강도 사건 등이 잇따라 발생했다. 24일 오전 2시40분쯤 충북 진천군 덕산면 중부고속도로 하행선에서 30대 후반의 남자가 쏘나타승용차를 몰고가다 카렌스승용차를 들이받은 뒤 실랑이를 벌이다 카렌스승용차 탑승자 두명을 야구방망이로 때리고 승용차를 빼앗아 달아났다. 이 남자가 몰다가 버린 쏘나타승용차의 주인 정모(32·경기도 평택시)씨는 이날 오전 7시20분쯤 안성시 원곡면 경부고속도로 안성휴게소 주차장에 주차된 EF쏘나타승용차 밑에서 야구방망이에 머리를 맞아 숨진 채로 발견됐다. 경찰은 정씨가 전날 밤 10시쯤 안성휴게소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태우러 가면서 “5분 후에 도착한다.”고 말한 점으로 미뤄 휴게소에 도착하기 직전에 30대 남자에게 변을 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정씨의 사체가 발견된 EF쏘나타승용차 주인 김모(39)씨의 부인도 행방이 묘연하다. 김씨의 EF쏘나타승용차 트렁크 겉에 핏자국이 발견됐고 운전석에는 키가 꽂혀 있었다. 남편의 EF쏘나타승용차를 몰고 나간 김씨의 부인은 23일 오후 8시40분쯤 평택시 이충동 여성회관에서 스포츠댄스 강습을 마치고 나온 뒤 연락이 끊겼다. 경찰은 175㎝의 키에 갸름한 얼굴형인 30대 남자를 수배했다. 진천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김미라 교수의 부모들을 위한 교육특강] (13) 기억력 향상시키는 방법 (하)

    [김미라 교수의 부모들을 위한 교육특강] (13) 기억력 향상시키는 방법 (하)

    이 절차는 사실 매우 단순하다. 먼저 물건들을 여러 종류로 구분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 종류만 있을 수도 있다. 기계가 없을 때는 다른 곳으로 가야 하지만 기계가 있다면 준비는 거의 다 된 것이다. 이제 지나치지 않게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한 번에 너무 많이 하는 것보다는 한 번에 좀 적다고 생각될 정도로 하는 것이 더 낫다. 단기적인 안목에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일이 복잡해지기 쉽다. 한 번 잘못하면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는 이런 절차가 복잡해 보일 수도 있지만 곧 생활의 일부가 될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이 일이 사라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쩌면 사라질 수도 있다. 이 절차가 끝나면 물건들을 여러 종류로 나누어서 정돈한다. 그 다음에는 물건들을 적절한 장소에 집어넣는다. 이 물건들은 결국 다시 한번 사용되고, 사용된 다음에는 이 절차가 다시 반복된다. 이런 일은 우리 생활의 일부이다. 앞부분 서너 문장을 읽으면서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꾹 참고 끝까지 다 읽고 나도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도 되지 않는 글을 순서를 기억하고 말까지 하라니 내심 도대체 ‘이게 뭐야.’라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그러나 윗글에 ‘세탁하기’라는 제목을 붙이고 다시 읽어보면 아하, 이제는 무슨 말인지 알겠고 순서도 기억할 수 있으며 말로 표현할 수도 있게 됩니다. 기억은 기억순서와 기억용량 그리고 기억시간에 따라 감각 기억, 단기 기억, 장기 기억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진이나 녹음기처럼 모든 것을 찰나적으로 다 기억할 수 있는 감각 기억과 감각 기억 가운데 주의집중한 것을 몇십 초 동안 ‘마법의 숫자 7’만큼 기억할 수 있는 단기 기억이 있습니다. 단기 기억 속 정보 중에는 몇십 초 동안만 단기 기억 속에 있다가 사라져 버리는 정보가 있는가 하면, 장기 기억으로 변환되어 평생을 망각되지 않고 남아 있는 정보도 있습니다. 장기 기억은 기억할 수 있는 용량과 기억할 수 있는 시간에 제한이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히말라야 산맥 위의 녹지 않은 눈을 만년설이라 표현하는 것처럼 인지심리학자들은 장기 기억을 ‘만년고’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가능한 한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 합니다. 즉, 좋은 장기 기억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단기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지 않고 장기 기억으로 변환되어 우수한 장기 기억을 가지게 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먼저, 위 글에서처럼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큰 틀을 알고 있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우수한 기억력을 가지게 합니다. 언어 시간이라면 그 시간이 어학 시간인지 문학 시간인지 알고 공부할 때와 모르고 공부할 때는 학습 효과, 다른 말로 기억력에서 차이가 나게 마련입니다. 즉, 사전 지식이 많을수록 새로운 정보를 기억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기억력은 ‘빈익빈 부익부’, 아는 것이 많은 분야일수록 더 기억이 잘되고 모르는 분야일수록 기억하기가 어려운 전문가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갓 입학한 어린 학생이 어학 시간과 문학 시간을 바로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여러 번 해당 수업 시간이 반복되어야 비로소 구분이 되겠지요. 전문가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연습을 많이 하는 것이 효과적인 것은 아닙니다. 연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무조건 별 생각 없이 되뇌기만을 하는 단순 반복 연습과 정보간의 관계를 생각해가며 되뇌는 정교 반복 연습이 있습니다. 이름 하나를 기억하기 위해서도 이름을 듣고, 소리 내 말해 보고, 써 보고, 이름의 의미를 떠올려 보는 일을 함께 했을 때가 더 잘 기억됩니다. 한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연습을 하루를 하지 않으면 자신만이 알고, 이틀을 하지 않으면 자신과 스승만이 알고, 사흘을 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전문가조차도 이러할진대 초보자는 어떠하겠습니까. 자신들이 배우는 대부분의 분야에서 초보자인 학생들이 기억을 잘 하기 위해서는 그 분야의 전문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연습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수한 기억력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연습의 결과입니다.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3) 월출산~나주 영산포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3) 월출산~나주 영산포

    전남 영암은 ‘소금강’인 월출산(해발 809m) 자락에 휘감겨 있다. 귀양길에 재를 넘던 윤선도가 “미운 게 안개로구나.”라고 탄식했듯, 기암괴석 봉우리는 늘상 구름 속에 노닌다. 월출산은 해남·강진·장흥쪽 길목이어서 나그네 쉼터로 그만이다. 또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국사, 일본에 천자문을 전한 왕인박사,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운 최지몽이 월출산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고 한다. 천년 고찰 도갑사, 왕인박사 유적지에는 산의 정기를 받으려는 관광객들이 끊이질 않는다. ●덕진 할머니의 돌다리 30여m 복원 한때 기선(汽船)이 드나든 포구였던 영암천은 1981년 영산강둑이 바닷물을 막으면서 작은 시냇가로 오그라들었다. 옛날 영암천은 덕진포로 불렸다. 포구 양쪽 언덕배기에 나그네들의 여정을 풀어주는 주막이 즐비했다.‘덕진’은 이곳 주막의 주모 이름이다. 그가 평생 모은 300냥으로 1000척(尺·303m) 되는 돌다리를 놨다고 전한다. 당시 돌다리 모습이 하천에 30여m 복원됐다. 앞에는 덕진 숭덕비가 세워졌다. 조만국(78·덕진면 장선리) 영암노인대학장은 “해마다 5월5일 단오날에 덕진면장 주관으로 면민들이 덕진 추모제를 지낸다.”고 말했다. 조씨와 함께 나온 노인들은 “왕건과 견훤이 사생결단을 벌인 곳이 덕진포 전투이고 이 싸움에서 이긴 왕건이 금성(나주)에 입성해 통일 발판을 마련한다.”고 말했다. 영암천 앞 벌판 한가운데쯤이 영보역이다. 이 역은 통일신라 멸망으로 경주로 가는 길이 쇠락하면서 조선 초에 덕진면 영보리에서 영암읍으로 옮겨왔다. 그래서 지명 그대로 영보역이다. 당시 영보역 자리에는 영암 공설운동장이 들어섰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모이게 하는 기능은 같지만 영보역을 기억하는 주민도, 푯말도 없다. 다만 영암산림조합 뒤편 마을인 역리 1∼4구가 역이 있었다는 명맥을 잇는다. 영보역에서 나주 영산강 앞까지는 28㎞(70리길)다. 오가는 데 가파른 고갯길이 없고 낮은 구릉이다. 옛길도 국도 13호선(나주∼강진)과 겹치는 등 엇비슷하다. 길 양쪽 들판 여기저기에 벼농사용 물을 가둬두는 인공 저수지가 보인다. 옛길을 짚어가는 주변 마을에는 ‘원등’이라고 불리는 곳이 적잖았다. 원님이 말을 타고 가다 발을 쉬게 하던 곳이다. 마을회관에서 수박을 먹던 문재현(73·신북면 이천리)씨는 “어렸을 때 원등에서 놀다가 땅을 파보면 깨진 기왓장과 주춧돌이 나왔다.”고 기억했다. 세월 속에 정자는 오간 데 없고 구부러진 소나무 대여섯 그루만 풍상을 견디며 자리를 지킨다. 영암군 문헌에는 이천리에 있던 부소원에서 나그네들이 쉬어갔다고 했다. 그래선지 마을 노인들은 옛길을 그런대로 잘 기억했다. 노인들은 “원등에서 100m쯤 아래로 가면 양반들이 타고 가던 말에게 물을 먹이던 방죽이 있고 그곳을 말 물통이라고 불렀다.”고 입을 모았다. 이곳에서 백제와 신라군이 맞붙어 싸웠다는 전설 같은 말도 곁들였다. 이곳은 수백년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연꽃과 억새 등으로 뒤덮인 손바닥만 한 방죽이었다. 영암휴게소 건너편 대방제(저수지)에서 조금 올라간 곳이다. 동네사람들은 나그네들이 행장을 추스른 뒤 방죽 둑길을 따라 한양길을 재촉했다고 덧붙였다. 이 언덕배기 옆으로 난 국도 13호선도 옛길처럼 오르막이다. 영보역에서 12㎞(30리)쯤 온 지점이니 주막거리가 있었을 법하다. ●100여년 전 새로 생긴 고을 ‘신북면´ 지금은 주유소를 겸한 영암휴게소가 주막집을 대신하고 있다. 비탈길이 평지로 바뀔 즈음엔 100여년 전에 새로 생긴 고을이라는 뜻의 신북면이 있다. 면 소재지인 월평리에서 ‘보해마트’를 하는 류진문(74)씨는 생생한 기억을 되살렸다. 류씨는 “13호선 바로 옆 연안주유소 뒤로 산비탈 길이 있었는데 달구지가 다닐 만큼 넓었다.”고 했다. 신북면 소재지에서 4㎞쯤 서쪽으로 가면 경주 왕릉에 버금가는 나주 반남 고분군이다. 반남면 자미산(해발 98m) 좌우 1.8㎞ 안에 무덤 35개가 흩어져 있다. 고대국가 형성 이전에 영산강을 지배하던 세력들의 무덤으로 추측된다. 일제가 4트럭 분량 유물을 마구 도굴하고 덮어버렸다고 한다. 이천∼호산∼월평을 지나 6∼7㎞를 더 가면 나주시 세지면 죽동리와 왕곡면 신원리로 접어든다. 국도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신가리가 있었다. 신가리1구 한재근(77)씨는 “말이 유일한 교통 수단이었을 때 여기에 신안역이라는 역촌이 자리했다.”고 말했다. 포장도로가 신원리1구 마을 한복판을 뚫고 지나면서 마을이 나눠졌다. 나주 신원리 보건진료소는 길 아래쪽에 있다. 지금부터 200년 전에 생긴 이 마을을 사람들은 ‘쌍다리’라고 부른다. 면장을 지낸 황치봉(74·신원1구)씨는 “원님이 말을 타고 한양 다니기 좋게 쌍다리를 놨다는 말을 들었다. 영산강 흘러드는 만봉천의 작은 고랑에 어른 키만한 돌 2개로 놓은 쌍다리를 본 적이 있다.”고 전했다. ●원님이 지났던 쌍다리 77년 사라져 이 마을 노인회관 앞 회관 건립 표지석에는 ‘1977년도에 원님이 지났던 쌍다리가 경지정리로 사라졌다.’고 적었다. 또 마을에서 해마다 겪는 홍수를 피하기 위해 농악놀이와 함께 꼭 거문고를 타서 액운을 막았다고 한다. 그래서 신원리는 ‘거문고 금’자를 써서 금동마을로도 불린다. 지금은 영산강 제방으로 물길이 틀어져 마을 앞은 논으로 변했다. 논둑에 서서 고개를 빼들면 양산리와 장산리 들판이 다가선다. 흐르는 땀을 닦고 선들바람을 쐬니 유유히 흐르는 영산강이 반긴다. 영암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장보고와 평생 동지 정년 선암마을 앞뒷집서 출생 “영보역은 통일신라 말까지 수도인 경주로 가는 가장 큰 길목으로 내동마을 뒷산인 옥녀봉 능선 야트막한 자락을 넘으면 영암 금정면으로 이어집니다.” 신희범(74·호남의병 연구가·덕진면 운암리 선암마을)씨는 이 길(영보리∼경주간)은 지금으로 치면 고속도로 나들목만큼이나 우마차와 사람들 왕래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당시 영보역 주변에는 동헌과 객사, 주막, 난전, 술집 등으로 번잡했다. 여기에다 길을 재촉하는 외지인들이 뒤엉켜 시끌벅적했다.6·25전쟁 때는 이 길 옆으로 작전 도로가 났다. 지금은 광주∼완도간 고속도로 건설 예정지다. 하지만 조선시대 초 영보역은 덕진면 영보리에서 지금의 영암읍내로 옮겨갔다. 지금은 ‘원조’ 영보역도, 그후 이전한 영보역도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덕진면 내동·강곡 등 12개 마을을 통틀어 영보리로 일컫는다. 대부분 거창 신씨, 전주 최씨 일문이 산다. 신씨는 “1967년에 마을 덕진포 앞에서 배수로 공사를 할 때 쏟아져 나온 배 뻘판 등이 마을 앞까지 바다였음을 입증한다.”고 말했다. 박인규(76·송석정 마을)씨는 “지금은 간척지로 논이지만 어릴 적에 마을 이름을 선창마을 또는 선창머리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고 전했다. 내동마을 앞에는 오늘날 학교인 영보정(永保亭·지방기념물 104호)이 400년 된 소나무(나무둘레 2.8m)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곳 학도들이 1931년 형제봉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630년 전주 최씨와 거창 신씨 두 집안이 화의를 다지며 같이 세웠다. 처마 밑 ‘영보정’이란 현판은 조선 명필 한석봉이 쓴 것이다. 이곳 출신인 신희남(1580년 강원 관찰사)이 그의 스승이다. 신씨는 이어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장보고(본명 궁복)와 그의 평생 동지인 정년이 이곳 선암마을 앞뒷집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지금껏 장보고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출신지가 ‘해도인(海島人)’으로만 기록돼 있을 뿐이다. 신씨는 “예부터 이들 두 사람 때문에 선암마을은 무장골로 불렸다. 당시 덕진포는 완도까지 관할했는데 장보고는 마을 앞 덕진포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주장했다. 그 증거로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한 뒤 이 마을은 동백나무가 많은 천민 집단인 ‘동백소’로 전락했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영암 동쪽 15리 지점에 동백소가 있다’라고만 적었다. 영암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 사람] 국내 첫 건물풍수백과사전 내는 이정암 전 경무관

    [김문기자가 만난 사람] 국내 첫 건물풍수백과사전 내는 이정암 전 경무관

    #상황1 지난 봄 어느날이었다. 한 풍수학자와 현직 경찰 고위간부가 서울시내 모처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풍수학자는 “5월을 조심하라. 큰 사건이 벌어질 것이다.”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화 김승연 회장 보복폭행 사건이 터지면서 경찰조직에 줄초상이 났다. #상황2 경찰총수의 퇴진압력이 거세게 일던 얼마 전, 풍수학자와 경찰 고위간부가 다시 만났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앞날을 물어보는 경찰 고위간부에게 풍수학자는 “지금은 (총수가)그럭저럭 넘어가겠지만 올해 안에 한번 더 고비가 올 것”이라고 조심스레 귀띔했다. 앞으로의 일이야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 이택순 경찰청장은 일단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넘겼지만 앞날이 불안한 상황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요즘 경찰 내부에서는 ‘푸닥거리’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니냐며 곤혹스러워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화 김승연 회장 보복폭행사건을 둘러싼 후유증으로 다들 맥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택순 청장이 최근 대국민 사과를 통해 “사건청탁 관행을 일소하고 조직 운영 시스템을 바로잡겠다.”고 역설했지만 일선의 체감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사실 경찰은 1991년 현재의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에 둥지를 튼 후 무슨 연유에선지 총수들의 ‘말년 팔자’가 대체로 사납다. 이인섭(2대) 전 청장은 슬롯머신 사업자와의 연루 의혹으로 구속됐으며, 김효은(3대) 전 청장은 부동산 투기의혹으로 밀려났다. 박일용(5대) 전 청장은 초원복집 사건으로 구속됐고, 김광식(8대) 전 청장은 인천 인현동 상가건물 화재참사로 자리를 내줘야 했다. 이무영(9대) 전 청장은 수지김 피살사건 내사중단 의혹으로 구속됐으며, 이팔호(10대) 전 청장은 최성규 전 특수수사과장 배후의혹 참고인으로 검찰에 소환되는 불운을 겪었다. 이 때문에 2003년 12월 경찰청장 임기제가 확정되자 안팎에서는 오랜 숙원인 ‘수사권 독립’과 달라질 경찰의 위상에 많은 기대를 했다. 하지만 임기제 시행 첫 총수인 최기문 전 청장은 지역구 출마와 관련, 정치권에 휘둘리다가 결국 2004년말 임기 3개월을 남겨놓고 도중 하차했다. 최 전 청장은 퇴임후 한화건설 고문을 맡았다가 이번 사건으로 기소된 상태. 그 뒤를 이은 허준영 전 청장 역시 임기 1년을 남긴 2005년말 농민시위 사망사건으로 그만 뒀으며 지금의 이택순 청장 역시 임기를 채울 것이라고 장담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그렇다면 경찰청 주변에는 풍문대로 ‘불운의 그림자’가 잔뜩 드리워져 있는 걸까. ●26년 경력의 베테랑 수사관 한국 도선풍수 명리학회 이정암(60·본명 이기만) 회장. 전직 경찰 간부 출신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2005년 8월 경기지방경찰청 청문감사관으로 명예퇴직해 최종 계급은 경무관이다. 경찰에 몸담은 26년 중에 17년이 넘게 수사분야에서만 근무한 베테랑이다. 경찰 입문 전부터 배운 풍수·명리학을 적용해 사건을 해결한 것도 한두번이 아니어서 경찰 내부에서는 오래 전부터 ‘용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퇴임 후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밀린 원고를 정리해 ‘풍수 그리고 운명’,‘범위명운수비결’ 등 10여권의 관련저술을 연이어 발간, 주위를 놀라게 했다. 특히 이달 중 발간 예정인 ‘건물풍수 핵심 비결’은 국내 최초의 건물풍수 백과사전이라는 점에서 벌써부터 관심을 끈다. “경찰청 건물은 마름모꼴의 대지 위에 동향(東向)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정문 출입문이 북동쪽으로 나 있어 풍수상 좋지 않아요. 북서쪽의 후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경찰청장 집무실이 9층인데 바로 여기가 절명궁(絶命宮)에 해당합니다. 즉 관재(官災), 구설(口舌)이나 교통사고로 요절하는 등 단명을 주관하는 흉살(凶煞)방위에 해당되지요.” 그러면서 청장실을 적절한 층(7층)으로 배치하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정문을 남쪽(정동향)으로 일부 개조해야 대길(大吉)하다는 것. 사실 이씨는 이택순 청장이 경기청장 재임때 차기 경찰총수로 승진할 것을 이미 예견한 바 있어 주위에서는 이씨의 권고를 그럴 듯하게 받아들인다. 하기야 한화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에 대한 예언도 그렇거니와 2003년 8월 인천지방경찰청 청문감사관 때 대통령 탄핵건을 비롯, 모 장관의 100일 낙마와 17대 총선 당락여부까지 미리 알아 맞혔으니 그럴 법도 하다. 흥미있는 일화도 많다.2004년 경기도 군포경찰서장 재임 때였다. 평소 군포서장은 단명하기로 소문난 자리였다. 그가 부임해서 서장자리를 풍수적으로 풀어 보니 육살궁(六煞宮)에 해당됐다. 그래서 대문의 방향을 현 교육청 쪽으로 약간 틀었다. 이후 해마다 전체 직원 중 10% 이상 승진자가 계속 생겼고, 지금도 감사의 전화를 받곤 한다고 전한다. 군포시의회 건물도 같은 ‘절명궁’ 자리여서 건강과 행운을 가져다주는 ‘생기궁’으로 바꾸는 법을 귀띔해 줬더니 단명하던 의장이 연임하는 경사가 겹치기도 했단다. ● 청와대 3층으로 지었어야 “청와대는 3층으로 지어야 합니다. 배산이 탐랑목성(貪狼木星)이고 정문이 정남향에 배치돼 있어 1층은 금(金),2층은 수(水)로 대문과 상극이 되지만 3층일 경우 생기궁이 되어 대길할 운입니다.” 국회의사당의 경우 떠다니는 배의 꼬리에 있어 정치인들의 생각이 이재(理財)에 치우친다고 지적했다. 여의도가 행주형(行舟形)이라면 63빌딩이 돛이요, 섬안에 늘어선 빌딩들은 마치 큰 상선에 짐을 싣고 계류하는 선박의 모습인데, 선미(船尾)가 되는 남동쪽에 국회의사당이 배치돼 있기 때문이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대검찰청 건물도 배산보다 높이 솟은 데다 정문이 남향으로 돼 있어 검찰총장실을 현재의 8층에서 5층으로 옮겨야 복덕궁(福德宮)의 생기가 회복된다고 했다. 반면 재벌가의 경우 비교적 길운의 자리에 위치했다고 설명했다. 삼성과 LG, 현대차 등 국내 10대 그룹 총수들이 사는 동네는 서울 강북의 한남동 등 남산 자락과 성북·평창·가회동 등 북한산 자락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비싼 주택들이 모여 있는 한남동의 경우 남산을 등지고 양 옆에 좌청룡·우백호 격의 언덕이 솟아 바람을 막아주며, 옆에 한강이 감싸듯 흘러 풍수적으로 재물운이 많다는 것. 재벌그룹의 사옥 중에서는 삼성그룹의 서울 태평로 본사가 층수별로 오행상생의 길운을 받도록 잘 배치돼 있다고 풀이했다.SK건설도 풍수경전인 ‘양택삼요’에 따라 집을 짓는 것을 중요시 여긴다고 귀띔했다. 생활풍수 상식에 대해 몇가지를 알려달라고 부탁하자 ▲임신 중에는 집수리를 하지 말 것 ▲아이들이 비뚤어지면 동쪽과 동남쪽을 먼저 살필 것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북서쪽을 살필 것 ▲여자에게 문제가 있으면 남서쪽을 살필 것을 권했다. 또한 주택의 서쪽에 큰 길이 있으면 길하고, 남쪽에는 빈터가 있어야 좋다고 말한다. 과거 각종 사건을 수사하면서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집에 가보면 대부분 ‘절명궁’터였음을 알 수 있었다는 그는 현장 경험이 풍수 연구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 풍수 학문적으로 집대성할 것 “풍수는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지혜입니다. 또 그 역사와 뿌리가 장구하고 경험적 과학의 산물이기에 백발백중, 천발천중 맞아 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북 의성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한테서 한학과 역경 등 경학을 배웠다. 검정고시에 합격한 후 해군에 지원해 36개월 군복무를 마친 뒤 검사가 되고자 고시 준비를 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한 스님을 만나 “자네는 검사는 안 될테고 경찰서장은 하겠구만.”이라는 얘기를 듣게 된 것이 계기가 돼 3년 동안 스님과 전국을 떠돌며 풍수·명리학을 공부했다.1979년 간부27기로 경찰에 입문한 후에도 틈틈이 스승(스님)한테 물려받은 풍수경전을 익히며 내공을 쌓았다. 퇴임 후에 본격적으로 관련 저술을 발간하는 등 오로지 풍수·명리연구에만 전념하고 있다. 요새는 고미술협회와 대학, 각 단체 등에 초청 강의도 나간다. 이래저래 제자가 130여명에 이를 만큼 따르는 사람도 많아졌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는 “제갈공명과 소강절 선생의 인간 길흉사 요결 ‘황극책수(皇極策數)’ 등 7,8권 정도의 저술을 더 발간해 풍수이론을 학문적으로 새롭게 집대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47년 의성 출생. ▲76년 경북대 졸업. ▲79년 경찰 간부후보 27기로 임관. ▲99∼2004년 강진경찰서장. 군위경찰서장, 군포경찰서장. ▲05년 경기지방경찰청 청문감사관으로 명예퇴직(경무관). ▲주요 저서 풍수 그리고 운명(풍수), 요해 도선비기(풍수), 소설 도선국사(풍수), 비전으로 전하는 한국 최고의 명당(풍수), 옥룡자답산가(풍수), 범위명운수비결(주역), 하락명운수(주역), 적천특수비전(명리), 천운(명리) 등.
  • 한국산업사회학회 조희연 회장 “비판 넘어 대안제시하는 학회로”

    한국산업사회학회 조희연 회장 “비판 넘어 대안제시하는 학회로”

    한국산업사회학회가 ‘비판사회학회’로 이름을 바꿨다. 최근 열린 임시총회에서였다.1984년 창립 후 23년만이다. ‘원조’ 학술운동 단체로 비판적·실천적 지식인집단의 모태 역할을 해온 산업사회학회가 간판을 바꿔단 것은 작지 않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독재에 맞서 싸운 전력이 더 이상 ‘비판지식인’이란 명패 유지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음을 함의하고 있는 까닭이다.‘포스트 민주화시대’에 조응하는 대안제출 없인 지식인의 비판정신도 ‘의기충천했던 옛날’을 회고하는 ‘후일담 집단의 자족적 뒷담화’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명칭 변경을 주도한 이는 현 회장인 조희연 성공회대(사회학) 교수다. 조 교수는 올초 벌어진 ‘진보논쟁´의 촉발자다. 참여정부 위기 원인을 진단한 최장집(정치학) 고려대 교수의 견해에 이견을 제시하면서 논쟁은 한국 지식계를 뜨겁게 달궜고, 노무현 대통령의 불편한 심기 표출로 정치논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자기변신하는 학회로 변신 16일 성공회대 교수연구실에서 조 교수를 만났다. 조 교수는 “산업사회학회란 명칭 때문에 범 비판지식인 단체가 분과학회의 하나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명칭 변경엔 비판적·진보적 시각으로 한국사회 전 영역을 탐구하고 대안을 내놓는 단체로 자기변신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내포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진일보한 민주주의로의 이행 단계에서 부닥치는 병목현상을 극복하려면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진보적 대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가 진보논쟁에서 제기하려 했던 핵심 주장인 동시에, 논쟁이 충분히 담보하지 못한 의제이기도 하다. 한국산업사회학회는 ‘민중의 스승’이라 불린 고 김진균(사회학) 서울대 교수가 싹을 틔웠다. 산업사회학회 창립은 역사문제연구소(1986년), 한국정치연구회(1987년), 한국역사연구회(1988년) 등 분과학문별 비판적 연구단체 창립을 가속화시켰고, 이는 88년 학술단체협의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학회는 당시 금기영역이던 계급, 국가, 빈곤, 마르크스주의 등을 연구주제로 적극 끌어들이는 한편,‘사회구성체논쟁’을 통해 80년대를 ‘사회과학의 백가쟁명 시대’로 이끌었다. 김 교수의 바통을 이어받아 학회를 이끈 이는 조 교수와 논쟁을 벌인 최장집 교수다. ●진보의 위기 조 교수는 “비판적 저항의식을 가진 연구자들은 민주화 상황에 걸맞은 문제의식에 따라 재조직화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불평등, 신빈곤, 소비자권리, 양극화, 욕망의 구조 등 ‘반독재 스펙트럼’으로 포착되지 않는 새로운 의제들을 적극 대면하고 끌어안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형준 의원이 이명박 캠프 대변인으로 있고, 이영훈(서울대 경제학) 교수와 김일영(성균관대 정치외교학) 교수가 뉴라이트로 변신하는 등 과거 우리와 함께했던 연구자들이 체제내화되는 것은 정치발전의 불가피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반면 비판지식인이나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자신들이 주장했던 의제가 실현되면서 나타나는 새로운 도전과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조 교수는 참여정부의 실패도 독재와 반독재, 보수와 진보의 양분법에 갇힌 채 경계를 뛰어넘는 진보적 전략을 구성해내지 못한 데서 하나의 원인을 찾았다.‘저항의 미덕’과 ‘통치의 미덕’을 조화시키지 못했고, 결국 ‘민주적이고 투명한 신계급사회’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자신이 대통령이면서도 거리의 투사처럼 행동해 반대편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참여정부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개방, 한·미 FTA 등을 과격하게 추진할 줄만 알았지 그 파괴적 결과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은 부족합니다. 결국 민주성과 투명성은 높아졌지만 훨씬 더 험악한 계급사회가 닥치고 말았습니다.” 조 교수는 자신을 포함한 진보진영 전반에 매서운 일침을 가했다. 자기변신하는 보수와 경쟁하려면 진보의 내용도 지금보다 한층 풍성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는 대안없이 비판만 하는 선입견 깰것 그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신개발주의로 무장하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장준하 선생 부인을 만나 화해를 모색하는 등 보수는 외연을 넓히고 있다.”면서 “대안부재의 책임을 정부에만 돌릴 것이 아니라 진보진영 전체가 책임을 통감하고 대안창출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범여권의 대통합작업에 대해서도 그는 “‘반한나라당 전선’이란 합종연횡만으로는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면서 “박정희와는 다른 방식으로 먹고 살 수 있는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면 인적결합만으로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중도자유주의 세력 및 진보의 위기는 곧 ‘대안의 위기’란 따가운 지적이다. 차이는 확인했으나 구체적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진보논쟁’이 아쉬운 것도,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안체제 논의를 그가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 교수 자신 또한 ‘생태평화 사회민주주의’란 미래상을 제시하는 등 ‘대안부재의 자괴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이 치열하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사설] 아이들에게 꿈 주는 금옥초교 김교사

    서울 금호동에 있는 금옥초등학교는 이름도 생소한 ‘미성취 영재반’이란 방과후 활동을 하고 있다. 수업이 끝나면 더운 교실을 피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있는 교무실로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은 공부할 것을 꺼내 자율학습을 한다. 모르는 게 있으면 6학년1반 담임 김성준 교사에게 이것저것 묻기도 한다. 이런 자율학습이 끝나면 김 교사는 학생들을 일일이 집까지 바래다 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돈도 안 되는 이런 일을 몇년째 해오는 김 교사다. 수업을 하다 모르는 단어에 쩔쩔 매는 아이들 때문에 진도가 나가지 않자 이들을 가르친 게 시작이었다. 학원에 갈 처지가 못 되거나 집에 가도 돌봐줄 사람이 없는 아이들, 성적이 낮은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 언젠가는 꿈을 이룬다는 뜻의 ‘미성취 영재반’을 만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 학교에 부임해 5년째인 김 교사 자신도 집안이 넉넉하지 않아 과외 한번 받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아이들의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 교사는 조그만 목표라도 성취해가는 자신감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노는 토요일에도 사비를 털어 갈 데 없는 아이들과 미술관이나 고궁을 다니는 그다. 그가 감동을 주는 까닭은 사라져가는 참스승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어느 교사나 할 수 있지만 많은 교사들이 놓치는 일이다. 교육 양극화의 그늘에서 쉽게 좌절할지 모르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 아이들의 손을 잡고 이끌며 더불어 살아가는 힘과 꿈을 불어넣는 김 교사 같은 이들이 교단에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전통무용음악 집대성하는 대금산조 명인 이생강 선생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전통무용음악 집대성하는 대금산조 명인 이생강 선생

    신적(神笛)이다.‘귀신을 일으키고 거친 바다를 잠재우는 신라의 소리’라고 했다. ‘만파식적’ 설화에 등장한다. 제31대 신라 신문왕(神文王)은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을 위해 동해안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추모했다. 그러자 죽어서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天神)이 된 김유신(金庾信)이 합심, 용을 시켜 동해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그런데 이 대나무는 낮이면 갈라져 둘이 되고, 밤이면 하나가 됐다. 왕은 이 기이한 소식을 듣고 하루는 현장에 나갔다. 이때 나타난 용에게 왕이 대나무의 이치를 물었다. 용은 “한 손으로는 어느 소리도 낼 수 없지만 두 손이 마주치면 능히 소리가 나는지라, 이 성음(聲音)의 이치로 천하의 보배가 될 것이다.”라고 대답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왕은 곧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불었더니, 나라의 모든 걱정과 근심이 해결되었다고 한다. 아울러 이 피리를 국보로 삼고는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이름지었다. 삼국통일 이후, 흩어져 있던 유민들의 민심을 통합해 나라의 안정을 꾀하려 했다는 전설이다. 이처럼 대나무는 3죽(竹)이라고 해서 대금·중금·소금 등 우리 고유의 전통악기의 재료로 사용돼 왔다.‘笛(적)’은 가로 부는 관악기를 가리킨다. 시인 복효근의 ‘어느 대나무의 고백’의 내용도 눈길을 끈다.‘∼내게서 대쪽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내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속에/터질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흰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거나∼/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소리에/어둠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올해로 음악인생 65년째 대금산조의 최고 명인 죽향(竹鄕) 이생강(70·중요무형문화재45호) 선생. 다섯살 때부터 소금(小)을 배웠으니 사실상 올해로 음악인생 65년째를 맞은 셈. 그 세월만큼이나 대나무 악기에 관한한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받는다. 지난 4월5일 북악산 개방행사때에는 노무현 대통령 등이 참석한 자리에서 감동적인 대금산조를 연주,39년 동안 잠자던 북악산의 정기를 새삼 일깨우기도 했다. 그는 얼마전 우리 음악사의 중요한 획을 하나 더 그었다. 한국 전통무용음악을 집대성한 ‘춤의 소리’(신나라뮤직) 전집음반 50장을 한꺼번에 내놨다. 본인의 평생 숙원사업이기도 하지만 이 전집에는 산조춤, 화관무, 부채춤, 살풀이, 승무, 농악 등이 총망라돼 있어 우리나라 전통 무용음악의 100년사를 담은 ‘대백과사전’이라는 점에서 실로 의미가 크다. 아울러 이번을 시작으로 나머지 350장(최종목표 400장)의 음반을 더 내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늦어도 2∼3년 안에 완결짓겠다며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지난주 서울 성북구 삼선동에 위치한 연구실(죽향대금산조 원형보존회)에서 그를 만났다. 괄괄한 목소리에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내뱉으면서 “우리나라의 난다긴다는 예인들은 대부분 전라도 사람들인데 그곳에 가서 대금을 배울 때 경상도 사투리를 함부로 쓸 수 있었겠느냐.”고 하면서 누가 말을 시키면 “그저 대금을 입에 대고 소리만 냈다.”며 웃는다. 얼굴이 50대로 젊어 보인다고 하자 “대금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복식호흡을 하게 된다.”며 나름대로의 비결을 귀띔했다. 20여평 남짓한 연구실 벽면에는 온갖 상장이며 지나온 발자취의 업적이 쭉 내걸려 있었다. 아들 이광훈이라는 이름도 눈에 들어왔다. 중앙대 국악과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자신의 뒤를 잇고 있다면서 “저기봐, 대통령상도 받았어, 아주 잘해.”라며 잠시 자랑끼를 발동한다. 친손자와 외손자들도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대금과 가야금 등에 소질이 많다고 부연했다. “11세 되던 1947년, 전주에 계신 스승(한주환)을 만나면서 대금을 본격적으로 배웠지요. 판소리든 민요든 한국의 전통공연은 음악과 무용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종합예술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일제시대 때 우리 문화말살 정책으로 우리 것이 중단되고, 또 6·25때 16개국이 참전하면서 서양음악이 거칠게 들어왔어요. 그래서 국악공부에 더욱 오기가 생겼습니다.” 6·25로 인해 부산으로 피란온 당대 국악의 대가들과 자주 접한 것은 그에게 큰 행운이었다. 어떨 때는 하루 동안 열심히 뛰어 일곱분의 스승에게 찾아가 ‘한수 한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일취월장, 자신감을 얻은 그는 서양의 7음계를 우리 5음계에 접목시켜가면서 ‘대니 보이’‘엘 콘도 파사’ 등의 팝송과 재즈를 넘나들며 대금의 음역을 계속 넓혀나갔다. 그랬더니 얼마후에는 악보도 없이 ‘눈물젖은 두만강’‘목포의 눈물’ 등 우리의 전통가요까지 자유자재로 불 수 있게 됐다. 결국 그는 다섯살 때 선친에게 단소와 피리를 배우는 것을 시작해 11세 때 한주환 선생을 비롯, 퉁소의 전추산, 피리의 오진석·임동석, 태평소시나위의 김문일 등 여러 스승에게 배우면서 스스로 ‘이생강류’라는 독특한 음악세계, 즉 전통과 현대를 크로스오버하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민속악예술대학 설립이 숙원사업 그의 명성이 세계 무대에 알려진 것은 1960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회 세계민속예술제. 이때 단원의 악사로 참가했으나 춘향역을 맡은 주연 무용수 안나영씨가 갑자기 맹장수술을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혼자 13분 동안 최초의 대금독주로 시간을 때운 것. 이때 객석에서는 동양적 음향에 반했다며 많은 찬사를 쏟아냈다. 그러던 1968년 멕시코올림픽 참가공연을 계기로 여기저기에서 초청을 받아 40여개국 순회공연까지 가졌다. “군대생활요? 27사단 정훈부 군예대에서 돌아가신 코미디언 이주일씨와 같이 근무했어요. 나중에는 피리명인 정재국씨와 함께 근무했는데 서로 ‘정악’(피리)과 ‘민속악’(대금산조)을 가르쳐주며 생활했습니다. 무형문화재는 정씨가 먼저 됐지요.” 나이 70을 넘기면서 그에겐 할 일이 더욱 많아졌다. 하루속히 자신을 뛰어넘는 제자를 길러내는 것(서울 국악예고와 중앙대 국악대 강의)이고 각종 공연활동과 음악강연을 틈틈이 하면서도 ‘춤의 소리’ 백과사전을 마무리짓는 일이다. 이 사업이야말로 먼저 가신 스승에게 보답하는 길이요, 후배들에게는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사명감이다. 오래전부터 단소와 단소교본을 만들어 왔는데 ‘국민1인 1국악기 갖기’운동에도 앞장설 생각이다. 또한 전통 가무악을 전수할 민속악예술대학을 설립하는 것도 숙원사업. 궁중음악은 국립국악원을 중심으로 교육되고 있으나 민속음악은 그러지 못한 형편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화합번영과 자긍심을 위해서라도 민속악의 대금소리는 계속 울려퍼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거듭 강조한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37년 일본 도쿄 출생. 해방후 부산 정착.▲42∼60년 이덕희·지영희·전추산·오진석·방태진·한주환 등에게 피리, 단소, 퉁소, 소금, 태평소, 대금 등을 익힘.▲59년 임춘앵 여성국극단에서 음악반주.▲6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회 세계민속예술제 참가공연.▲77년 첫 대금산조 개인 발표회. 이후 16차례 개인발표회.▲88년 서울 올림픽폐회식 때 대금독주.▲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보유자 지정. ▲2005년 음악인생 60주년 기념공연(세종문화회관). ▲07년 6월 ‘춤의 소리’ 전집음반 50장 제작. 현재 죽향대금산조원형보존회를 운영,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 # 수상경력 전주 대사습대회 장원(78년), 신라문화재 대통령상(84년),KBS국악대상(84년), 한국국악대상(02년), 서울시 자랑스런 시민상(94년), 대한민국 국민상(97년) # 주요 작품 한국 전통무용음악을 집대성한 ‘춤의 소리’(07년, 신나라뮤직) 전집음반 50장 외에 400여 종의 앨범제작.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8) 우리나라 서화를 집대성한 역관 오세창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8) 우리나라 서화를 집대성한 역관 오세창

    중국에서 한자가 전래된 이래, 우리나라의 서화는 중국의 영향을 받으며 우리 것을 만들어냈다. 한자라는 글자 자체가 중국의 것이기 때문에 초기에는 중국의 금석문과 명필들의 서첩을 구입해 본받았지만, 추사 김정희를 비롯한 여러 문인들은 자기의 서체를 발전시켰다. 고려시대에도 중국의 서첩이 수입되었지만,18∼19세기에 가장 많이 수입되었다. 서울의 고관들이 주요 고객이었고, 중국을 자주 드나들며 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확보한 역관들의 골동 서화 취미도 상당했다. 그 가운데 중심인물이 오경석이었으며, 그가 수집한 골동서화를 바탕으로 아들 오세창은 자신의 서체를 확립하고, 우리나라 서화사를 집필하였다. ●의원 유대치가 역과 시험을 준비시키다 오세창(吳世昌·1864∼1953)은 1864년 7월15일 서울 이동(梨洞·을지로 2가)에서 역관 오경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재산이 넉넉한 역관 집안에서는 아들이 10세쯤 되면 가정교사를 집안에 들여놓고 시험공부를 시켰는데, 오경석도 아들 세창이 8세가 되던 1871년 1월에 가숙(家塾)을 설치하고 친구인 의원 유대치(본명 유홍기·1831∼?)를 스승으로 모셨다.15세 되던 1878년 10월23일에 청계천가 수표교 남쪽 마을로 이사갔으니, 장교 언저리에 살던 유대치의 집과 더 가까워졌다.16세 되던 1879년 윤3월28일 역과에 응시했으며,5월29일에 합격자 발표를 하자 바로 그 달에 가숙을 철거하였다.8년 동안 시험공부를 하여 급제했으니, 늦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곧바로 벼슬에 나아가지는 못했다.8월7일에 어머니 김씨가 콜레라로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마저 22일에 세상을 떠나 잇달아 과천에서 장례를 지냈다. 그래서 이듬해인 1880년 4월20일에야 사역원에 등제(登第)했지만, 청나라에 갈 기회는 없었다.1882년 6월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파주 문산포로 피란갔다가 8월에야 집으로 돌아왔다.9월에 처음으로 후원주위청영차비관(後苑駐衛淸營差備官)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그때 19세였는데, 창덕궁 후원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군사들의 통역을 맡은 것이다. 22세되던 1885년 12월에 사역원 직장(直長·종7품)에 임명되었으니, 빠른 승진이었다.1893년에 장남 일찬이 11세가 되자 역시 가숙을 설치하고, 역과 시험공부를 시작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갑오경장이 실시되며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자, 이듬해에 가숙을 철거하고 장남을 소학교에 입학시켰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빠른 결단이자 적응이었는데, 기득권을 누리던 양반이 아니라 역관이었기에 가능했다. ●조선어 교사로 초빙되어 일본 체험 김홍집 내각에서 1895년 11월에 단발령(斷髮令)을 내려 성인 남자들의 상투를 자르도록 하자 최익현이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며 반대한 것을 비롯해 대다수의 사대부 양반들이 반발했지만, 단발의 이로움을 인식한 그는 자발적으로 상투를 잘랐다. 그의 연보에는 1896년 1월이라고 했는데, 이때부터 양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오경석은 일본공사의 초청으로 일본 동경외국어학교 조선어과 교사로 부임하였다. 대대로 외국어를 배웠던 집안 출신이므로 일본어를 배우는 속도도 빨랐다.34세 되던 1897년 9월2일 동경에 도착하여 이듬해 9월3일에 일본 문부성에 휴가를 신청했으니,1년 동안 가르친 셈이다. 이 동안 일본이 서양문물을 수용하여 발전한 모습을 확인하고 개화의 필요성을 체감하였다. 교사파견 해약신청은 12월 1일에 접수되었다. 한어(漢語) 역관이었으므로 당연히 중국통이었던 그는 일본 파견 이후로 일본통이 되었다. 아버지 오경석이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와 어울렸던 영향이기도 하다. 그러나 귀국후 개화파 역모에 연루된 그는 1902년에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 육사 출신의 청년장교들이 결성한 혁명 일심회가 일본에 망명 중이던 유길준과 연계하여 쿠데타를 도모한 사건에 그가 연루된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천도교 제3대 교주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에 입교했으며,4년 뒤에 함께 귀국하여 ‘만세보’를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때부터는 한어 역관의 생활이 아니라 언론인으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애국계몽 진영의 지도자로 나서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역관의 운신의 폭이 좁았지만, 사회변혁기에는 시야가 넓었던 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10년 8월 ‘황성신문’에 ‘위창(오세창)이 안중식과 이도영 및 당시 대한협회 회장으로 글씨를 잘 썼던 전 농상공부대신 동농 김가진과 더불어 종로의 청년회관(YMCA)에 서화포(書畵鋪)를 개설하기로 협의중’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화랑을 개설하여 골동 서화를 유통시킬 생각을 했다는 것인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상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문인화는 물론 돈을 받고 그리지 않았으며, 화원들도 개인적으로 주문을 받아 그려주었을 뿐이지 체계적인 유통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기획했던 서화포가 실제로 어떤 형태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가 전문적으로 골동서화를 구입한 이야기는 1915년 1월13일자 ‘매일신보’에 ‘별견서화총(瞥見書畵叢)’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근래에 조선에는 전래의 진적서화(珍籍書畵)를 헐값으로 방매하며 조금도 아까워할 줄 모르니 딱한 일이로다. 이런 때 오세창씨 같은 고미술 애호가가 있음은 경하할 일이로다.10수년 이래로 고래의 유명한 서화가 유출되어 남는 것이 없을 것을 개탄하여 자력을 아끼지 않고 동구서매(東購西買)하여 현재까지 수집한 것이 1175점에 달하였는데, 그중 150점은 그림이다.” 그가 동서로 뛰어다니며 골동 서화를 구매한 까닭은 조선왕조가 망하면서 전통문화의 가치가 땅에 떨어져 헐값으로 일본에 팔려나가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다. 그는 몇 년 뒤 3·1독립선언 때에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명하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는데, 그보다 앞서 민족문화의 지킴이로 자임하였다. 10만석 거부의 상속자인 전형필이 1929년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 골동서화를 수집하며 지금의 간송미술관을 설립하게 된 것이나, 역시 일본 대학에 유학했던 오봉빈이 1929년에 광화문 당주동에서 신구(新舊) 서화 전시와 판매를 목적으로 한 조선미술관을 개설한 것이 모두 오세창의 권고와 지도 덕분이었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고서화 명품 가운데 상당수가 오세창의 감정과 평가를 거쳐 수집되었다고 한다. 아버지 오경석에게 이어받은 골동서화 감식안으로 발굴해낸 문화재들이 그의 집뿐만 아니라 간송미술관이나 조선미술관 등에 구입되며 민족문화의 유산을 지키게 되었다. ●학문적으로 서화 분류 ‘어두운 바다의 북극성´ 그는 방대한 양의 골동서화를 수집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서가별로, 화가별로 분류하여 학문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고서화의 인명사전이자 자료집인 ‘근역서화징’을 1928년에 출판했는데, 최남선은 ‘동아일보’에 서평을 쓰며 ‘암해(闇海)의 두광(斗光)’, 즉 어두운 바다의 북극성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근역(槿域)’은 무궁화꽃이 피는 지역이고,‘징(徵)’은 모은다는 뜻이다. 그는 ‘범례’에서 “흩어지고 없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이를 모아 차례대로 엮어 다섯 편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가 이 책을 만든 구체적인 이유는 “우리나라 서화가들의 이름과 자취를 찾아보는 보록(譜錄)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인쇄한다는 소문이 해외까지 퍼져, 수백 부의 예약이 들어왔다고 한다. 이 책에는 신라시대 솔거부터 출판 직전에 세상을 떠난 정대유까지 화가 392명, 서가 576명, 서화가 149명의 작품과 생애에 관한 원문을 초록하고, 출전을 표시하였다. 예술을 천하게 여겼던 조선시대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작업이다. 홍선표 교수는 오세창이 조선시대를 태조·명종·숙종조를 기점으로 나눈 3분법은 한국 최초의 회화사 개설서인 이동주의 ‘한국회화소사’(서문당 1972)까지 그대로 이어졌다고 평가하였다. 오세창이 우리나라 명필 1100명의 작품을 모은 ‘근역서휘’와 명화 251점을 모은 ‘근역화휘’는 대부분 1936년에 골동서화 수집가 박영철에게 넘겼는데, 그가 2년 뒤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후손이 1940년에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하였다. 오세창은 일흔이 넘은 뒤에도 골동서화를 정리하려는 열정이 식지 않아,74세 되던 1937년에 우리나라 문인 화가 830여명의 성명·자호(字號)·별호 등을 새긴 인장의 인영(印影) 3930여방을 집대성하여 ‘근역인수(槿域印藪)’ 6권을 편집하였다. 직접 날인한 것도 있고 고서나 서화에 찍힌 것을 오려내어 붙인 것도 있다. 도장 파는 작업을 전각(篆刻)이라는 예술로까지 승화시켰기에, 고서화를 감정할 때에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다음 호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간신문인 한성주보 기자(1886)부터 서울신문 초대 사장(1945)에 이르기까지, 오세창의 언론생활을 소개한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누드 브리핑] 중구청장은 ‘…아가씨’ ‘…처녀’만 부른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부인과 최근 서울시에 합류한 권영걸 전 서울대 미대 학장의 35년 묵은 인연이 공개됐고, 정동일 중구청장이 최근 구민들 앞에서 노래 솜씨를 뽐냈는데, 노래 제목이 ‘…아가씨’‘…처녀’ 등 여자 일색이어서 웃음을 자아냈습니다.●35년전에 본 바로 그 얼굴 오세훈 서울시장의 부인 송현옥(46·세종대 연극영화과) 교수가 서울시 부시장급 디자인서울총괄본부장으로 지난 4월 임용된 권영걸 전 서울대 미술대 학장과 오랜 인연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는데요. 권 본부장은 최근 오 시장 내외 등과 함께 한 저녁모임에서 35년 전쯤의 만남을 털어 놓았고, 송 교수는 어릴 적 아픈 기억을 되살렸습니다. 두 사람은 송 교수가 초등학교 4학년, 권 본부장이 서울대 미대 1학년생 때 송 교수 부친의 장례식 자리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송 교수의 부친은 우리나라 추상 조각의 거장이던 송영수 전 서울대 교수인데요. 권 본부장은 “고인은 천재 조각가였다.”면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눈물을 흘리던 딸의 모습을 보면서 존경하는 스승을 잃은 슬픔이 더 북받쳤다.”고 말했습니다. 고인은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을 앞두고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추풍령에 세울 기념 조각품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고 심혈을 기울여 완성했지만 과로가 겹쳐 그만 고혈압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권 본부장도 얼마 전에야 한 지인으로부터 “스승님의 딸이 오 시장의 부인”이라는 말을 듣고 알았다고 하는군요.●구청장님이 ‘…처녀’를 찾는 까닭은 정동일 중구청장의 노래 실력이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지난 2일 중구청 광장에서 ‘춤추는 분수대’ 개관식과 정 구청장의 취임 1주년 기념식이 함께 열렸는데요. 정 구청장은 주민 200여명이 보는 자리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상당한 노래 실력을 뽐내 ‘앙코르’까지 받았는데요. 그런데 노래 제목이 모두 처녀, 아가씨여서 ‘소싯적에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노래방을 꽤 다닌 것 같다.’는 촌평이 있었습니다. 정 구청장은 이에 대해 “구청장 취임 이후 한번도 노래방을 간 적이 없다.”고 주장했답니다. 또 ‘노래 사연’과 관련,“아직도 영산강에 처녀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다.”고 의미있는 웃음을 날렸다고 하네요. 정 구청장이 부른 노래의 제목은 ‘영산강 처녀’와 ‘동백아가씨’였다고 합니다.시청팀
  • 담임들이 울고간다

    ‘담싫모, 담저모, 담죽모….’ 경기 성남시의 한 초등학교 6학년 담임교사 A씨는 얼마 전 한 학생으로부터 자신의 비공개 안티카페가 존재한다는 말을 듣고 눈앞이 캄캄했다. 학생의 아이디를 빌려 들어간 카페에는 ‘A는 왜 사는지 모르겠다.’,‘A를 왕따시키자.’ 등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정도의 욕설로 가득했다. 그가 더욱 놀란 것은 카페 개설자가 자신을 가장 잘 따른다고 믿었던 반장이었다는 것.A씨는 “아이들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더 이상 교사를 계속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초·중·고등학생 사이에서 선생님에 대한 적대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담임교사 안티카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특정 교사에 대한 비난은 물론, 폭력 사용이나 촌지 수수 등 치부를 폭로하며 조롱하기도 한다.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형태의 ‘학교폭력’에 시급히 대처해야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치부 폭로·원색적 욕설… 반장 등 주도 충격 안티카페는 대부분 학교의 처벌을 우려해 비공개로 운영되고 있지만 인터넷 포털사이트만 검색해도 수십여개의 공개된 카페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회원수는 1∼2명에서부터 120명이 넘는 것까지 다양하다. ‘역겨운 담탱이 안티(‘담탱이’는 담임 선생님의 속어)’,‘담죽모(담임을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모임)’,‘담싫모(담임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담저모(담임을 저주하는 이들의 모임)’ 등 이름부터 섬뜩한 카페도 상당수다. 특정 선생님에 대한 혐오뿐 아니라 한 학년 혹은 학교 선생님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연합카페’도 존재한다. 카페에 등록된 게시글 또한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은 찾아볼 수 없다. “△△가 요즘 너무 깝치는 것 같아.”“□□는 요즘 화장이 진한 게 미친 거 아냐?”등 원색적인 욕설만이 가득하다. 한 학생은 “어차피 ◇◇이는 실력도 없는데 차라리 수업시간에 ‘불량배한테 돈을 덜 뺏기는 방법’이나 ‘지나가다 실랑이하지 않는 법’ 같은 거나 가르치라.”며 교사를 비꼬기도 했다.●“공교육 붕괴 안티카페 근본 원인” 인터넷을 통해 특정 학생·교사를 공격하는 것은 전세계의 공통적 현상.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특유의 집단성과 결합해 따돌림 대상에 대해 더욱 큰 충격을 주게 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때문에 한 학생이 담임 교사에 대한 비난의 강도를 높일수록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지며 이와 비례해 해당 교사는 “반 전체 학생들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배신감과 자괴감으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나범정 뉴라이트학부모연합 사무처장은 “공교육이 완전히 붕괴되면서 스승에 대한 권위나 존경이 사라져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학생들의 불평을 감수하고라도 진정한 ‘사도’를 보이려는 책임감 없이 그저 자리 보전에만 연연하는 일부 교사들의 소극적 태도 또한 지금의 상황을 자초한 측면이 크다.”고 지적했다.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세상의 모든 지식/김흥식 지음

    백과사전도 아니고 대용량의 하드 디스크도 아닌데 세상의 모든 지식을 어떻게 한 권의 책에 담을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지식(김흥식 지음, 서해문집 펴냄)’은 모든 지식이라기보다 ‘특별한’ 지식을 담고 있는 책이다. 야심찬 제목으로 책을 펴낸 저자는 류성룡의 ‘징비록’을 번역 출간한 경력이 있는 현직 출판인. 책에 소개된 150가지 특별한 지식은 역사, 정치, 지리, 음악, 종교, 과학 등 동서고금의 지성의 역사다. 고양이 한 마리를 산 딕 휘딩턴이 어떻게 600년에 걸친 자선사업의 실마리를 마련했는지, 베토벤은 왜 죽기 25년이나 전에 유서를 써 두었는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제자들은 왜 스승이 죽자마자 그 목을 자르고 시신을 솥에 넣고 삶아 버렸는지 등 자못 흥미로운 내용이다. 그림, 사진, 도표, 지도 등과 함께 정리돼 있어 이해를 돕는다. 첫번째 지식으로 소개된 고양이 상인 딕 휘딩턴은 1350년 영국에서 태어난 운좋은 고아소년. 무역상 휴 피츠워런이 그를 거뒀고, 다락방에서 생활하던 휘딩턴은 쥐를 쫓기 위해 어느날 고양이를 한마리 산다. 피츠워런은 동방에 무역선 한 척을 띄우고, 휘딩턴은 고양이를 배에 실어보낸다. 일행을 실은 배는 낯선 항구에서 그곳 지배자가 연 연회에 참석하는데, 산해진미를 망친 쥐새끼들을 없애는데 휘딩턴의 고양이가 큰 활약을 한다. 덕분에 휘딩턴은 일확천금, 이후 런던 시장을 4차례나 지내며 전 재산을 사회에 남긴다.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의 대표작 ‘야경(夜警)’이 사실은 낮 장면을 묘사한 그림임을 밝힌 대목도 눈길을 끈다. 이런 터무니없는 제목이 붙게 된 것은 그림을 의뢰한 국민병 본부 건물에 엄청난 그을음을 내는 이탄 난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추구한 렘브란트의 그림은 갈수록 어두워졌고,100년이 지나자 결국 사람들은 그것을 야밤을 틈타 이뤄지는 기습 장면으로 여기게 됐다. 이 그림의 원래 제목은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의 민방위대’였다. 베토벤은 32살의 나이에 두 아우 앞으로 유서를 남긴다. 그는 귓병뿐 아니라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부터 간경화, 신장질환, 폐질환 등 온갖 질병을 겪었다. 수많은 합병증을 동반한 베토벤의 육체적 고통의 원인은 2000년 그의 모발 분석 결과가 발표되면서 납 중독으로 밝혀진다. 베토벤 유서의 첫 머리는 “너희들은 나를 적의에 차고 사람들을 혐오하는 고집쟁이로 여기고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그른 일인지 모르고 있다.”로 시작된다. 육체적 고통 때문에 정신 질환을 겪은 그의 괴로움을 잘 보여준다. 저자는 각종 도서와 위키디피아를 비롯한 수많은 인터넷 사이트가 ‘세상의 모든 지식’의 참고 자료가 됐음을 밝힌다.1만 95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너는 꼭 필요한 사람이다

    너는 꼭 필요한 사람이다

    글 정희재 모든 것은 완벽한 시간에 완벽한 방식으로 온다. 그 만남이 내 생애 몇 번째 면접이었을까? 학교를 졸업한 뒤 처음 가지는 자리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직장 생활을 하다 또래들보다 2년 늦게 대학에 들어가, 1년의 휴학을 거쳐 졸업했으니 그해 봄 나는 나이가 어정쩡한 중고 사회 초년생이었다. 때때로 가슴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열기가 솟구쳤으나, 해질녘이면 막 진흙 반죽에 손을 담근 도예가처럼 난감하고 외로웠다. 내 손에 와 닿는 진흙의 감촉이 너무나 부드러워서 오히려 내가 빚어야 할 삶을 망쳐버릴 것 같아 불안했다. 그해 봄 어느 날, <샘이 깊은 물>이란 잡지에 인터뷰 기사를 써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졸업하고 처음 들어온 일이었다. 인터뷰를 진행할 유명인사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단체의 수장이었다. 사진을 찍기로 한 최광호 선생님과 그날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눈 뒤 약속 장소로 향했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사무실로 들어설 때 긴장한 나머지 손바닥에 찐득한 땀이 배어나던 기억이 난다. 단체의 수장이었던 분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 이른바 ‘얼음깨기’라고 부르는 대화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나는 가방에서 녹음기를 꺼내고 수첩을 무릎 위에 펼쳐 놓은 채 질문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 분은 자신이 수학한 학교와 그 동안 사회에서 이룬 성취, 그리고 그 단체가 이룬 성과들을 들려주었다. 과연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단체를 성공적으로 이끌 만한 화려한 경력을 지닌 분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인터뷰 내용의 일부인지,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 말들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해 수첩을 바투 끌어당기며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그 분의 질문이 나를 향했다. “그런데 ○○씨는 어떤 글들을 썼죠?”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이의 천진함을 담아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럼 이게 ○○씨의 첫 인터뷰인가요?” 내가 그렇다고 답하자 실내에 정적이 흘렀다. 그 분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책장에서 지금까지 자신의 기사가 실렸던 잡지를 몇 권 꺼내 해당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모두 이 나라를 대표할 만한 매체들이었다. 잡지를 뒤적이는 그 분의 손길이 친절함을 담고 있지 않다는 건 아무리 눈치 없는 나라고 해도 알 수 있었다. 그 분은 잡지를 탁, 소리나게 덮더니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 인터뷰는 할 수 없어요.” 나보다 더 당황한 사람은 최광호 선생님이었다. “경험은 없지만 잘하는 친구입니다. 한 번 기회를 줘보시죠.”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이기에 나는 마음이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분의 마음은 끝내 돌아서지 않았고, 이렇게 해서 나의 첫 사회 진입은 문턱을 넘기도 전에 좌절됐다. “선생님,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나이보다 앳된 얼굴에 경험도 미미한 나야 그렇다 쳐도 최광호 선생님은 그런 홀대를 받을 분이 아니었다. 이미 일본과 미국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돌아와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가진 사진가로 자리잡은 분이었으니까. 선생님은 자신도 몹시 언짢을 텐데 내 어깨를 툭툭 두들기더니 광화문의 한 찻집으로 데려가서 커피를 사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문학을 공부했다고 했죠?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어요?” 선생님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 몸을 약간 기울여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고통이나 구원 같은 당시 몰두하던 문제들에 대해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따뜻하고 진지하게 한 젊은이의 말을 듣고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꼭 쓸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믿어요.” 그날 나는 두 사람에게 질문을 받았다. “그동안 어떤 글을 써왔죠?”와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어요?” 라는 질문을. 비슷한 단어들의 조합인데도 그처럼 다른 에너지를 지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쪽이 과거와 성취 중심이라면 다른 한쪽은 미래와 기대가 담겨 있었다. 사무실에서 퇴짜를 맞고 나와 바로 헤어지지 않고 커피숍으로 함께 가서 진심을 담아 물어주었던 일은, 과연 인간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작업으로 유명한 최광호 선생님다운 배려였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이의 얼굴은 환하다. 그날 나는 최 선생님을 통해 인생에서 중요한 갈림길이 될 만한 ‘결정적 순간’이 존재한다는 오해를 풀었다. 인생이란 어느 한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다림이며, 가장 나다운 나와 만나는 먼 여정임을 이해한 것이다. 면접만 해도 그렇다. 면접장에 앉기까지 서류를 접수시킨 뒤 연락을 기다리고, 면접 날짜를 기다리고, 긴장한 대기자들과 함께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설사 탈락하더라도 ‘완벽한 순간에 완벽한 방식’으로 다가올 기회를 기다릴 것. 새로운 것이 오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 최 선생님과의 만남이 준 선물 덕분에 그날의 일은 내 마음에 오래 그늘을 드리우지 않았다. 면접장. 그 장소만큼 우리가 간절히 뭔가를 얻기 위해 집중하는 곳이 있을까. 그곳처럼 내가 살아온 인생을 요약하기 쉬운 순간이 또 있을까. 선택과 배제의 권력을 가진 면접관 앞에서 나는 어느 하늘 밑에서나 있을 수 있으며, 내일은 내일 몫의 햇살이 비출 것이라고 믿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허점투성이 같은 내 자신을 사랑하기란 더더욱. 나의 스승은 말씀하셨다. 나에게서 받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크고 깊은 사랑이라고. 누군가에게 당신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아야 ‘쓸모’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꼭 필요한 존재라는 확신이 있어야 ‘잘 쓰이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그 확신은 내 자신을 믿고, 재능이 꽃필 시간을 기꺼이 기다려주는 일부터 시작된다고. 이제는 면접장에 들어설 기회가 점점 드물어지겠지만, 꽃 피는 나무와 마주서거나, 몸을 부풀렸다 사라지는 구름장을 보거나, 누군가를 만나서 한 끼의 식사를 나누거나, 버스나 지하철에서 서로 발을 좁혀 설 때 나는 좀 더 확장된 면접장에 들어선 것임을 안다. 일상의 면접관들이 무엇보다 보고 싶은 것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이의 환한 얼굴이 아닐까. 자신에게 불친절한 순간과 마주칠 때마다 나는 면접관이 되어 묻는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어떤 삶을 살고 싶었는가.” 정희재 _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티베트인들과의 감동적인 만남을 경험한 후에 <티베트의 아이들> <나는 그곳에서 사랑을 배웠다> <당신의 행운을 빕니다> 등을 펴냈습니다. 월간샘터 2007년 6월호
  • [나를 움직인 한 마디] 외로이, 어리석게, 가난하게

    이 코너의 제목은 ‘나를 움직인 한마디’이지만 나는 원고 청탁을 받는 순간 ‘나를 움직이지 않게 하는’ 몇 마디를 퍼뜩 떠올렸다. ‘움직인다’는 말의 의미가 단순히 동작이나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향을 받아 변화를 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불혹의 나이가 가까워짐에도 여전히 세상의 미혹에 시달리는 내게는 나를 흔들리지 않게 지켜줄 그 무엇이 더 갈급하다. 작가라는 버거운 이름으로 살아온 지 어느덧 십오 년이다. 현대의 작가는 물신의 지배력이 인간의 감성과 상상까지도 장악하는 세상에서 지독히 고루하고 부가가치가 낮은 사양 산업에 종사하는 일꾼이다. 노동은 고되고, 아무리 해도 좀처럼 숙련되지 않으며, 일을 마치고 받아드는 품삯은 박하기만 하다. 짐짓 몸만큼 마음이 빈한해지려 할 때, <화수분>의 소설가 전영택의 금언 한 구절을 떠올린다. 외로이, 어리석게, 가난하게! 외롭지 않으면, 어리석지 않으면, 스스로 가난해지지 않으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다. 세상의 부와 명예와 화려한 가치에 홀린 채로는 나만의 세계를 축조할 수 없다. 그래도 가끔은 뒤통수를 치고 옆구리를 스쳐 앞질러가는 세상을 멀거니 바라보며 언제까지 견뎌 버틸 수 있을까 쓸쓸히 의심할 때가 있다. 그때 김소월의 스승으로 유명한 시인 김억의 한마디를 기억한다. “자기의 본분인 줄 알거든 그 길을 꾸준히 걸어나갈 것이요, 결코 여러 곳에 곁눈질할 것이 아닙니다. 눈을 딱 감고 귀는 꽉 틀어막고 바보처럼 그대로 나아갈 것입니다.” 이 고집스런 지침이 꼭 작가들만을 위한 금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신없이 변하는 세상, 가치가 혼돈된 사회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법은 거듭된 반성과 성찰과 다짐뿐이다. 나는 외롭다. 하지만 또다시 해야 할 일이 있어 외롭지만은 않다. 나는 어리석다. 그렇지만 내가 추구하는 가치 속에서 어리석지만은 않다. 그리고 나는 끝끝내 지키고픈 나만의 세계 속에서 누구보다 큰 부자다. 그렇게 나는 행복한 바보인 채로 살고 싶다. 김별아_ 소설가. 소설 <미실>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 <개인적 체험> <축구 전쟁> 등을 썼습니다. <미실>로 제1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월간샘터 2007년 6월호
  • [이 달에 만난 사람]음악 전령사로 변신한 첼리스트 장한나

    [이 달에 만난 사람]음악 전령사로 변신한 첼리스트 장한나

    취재, 글. 박혜란 기자 털털하기 그지없는 ‘껄껄껄’ 소리로 시작해 장난기와 애교가 듬뿍 담긴 ‘히히히’ 소리로 마무리되는, 인상적인 웃음소리가 연신 귓가를 두드린다. 그 얼굴과도 잘 어울리는 웃음이었다. “제가 어떤 아이였느냐고요? 선생님이 어머니께 이런 하소연을 하셨다지요. ‘우리 반 아이들은 쉴 틈이 없어요. 한나가 쉬는 시간에도 아이들 거느리고 학교 놀이를 하는 통에.’ ‘한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수업을 할 수가 없어요.’ 저 굉장한 개구쟁이였어요.” 이처럼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장한나는 이제 더 이상 음악 신동도, 대견한 국민 여동생도 아니다. 올해 스물여섯의 어엿한 성인인 그는, 지난해 영국의 클래식음악전문지 <그라모폰>이 꼽은 ‘내일의 클래식 슈퍼스타 2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열한 살에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국제 콩쿠르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최연소 우승을 거머쥔 것이 벌써 1994년의 일이니, 그가 어른이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올해 3월에 나온 새 앨범 <로맨스>의 재킷 사진을 보고 팬들은 너무나 커버린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다. 장한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또 한 가지 신선한 소식을 전한다. 5월 성남에서 열리는 국제청소년관현악축제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관객들에게 곡에 관한 해설도 들려줄 계획이다. “우선 음악가로서 개인적인 욕심이 있었지요. 완벽한 음악가란 자신의 감정을 자기 손으로 완벽하게 연주해낼 수 있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서도 완벽하게 구현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4년 전부터 줄리어드 음대 지휘과 교수님께 수업을 받아왔습니다. 또 한편으론 음악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했습니다. 식사시간마다 아버지께서 꼭 하시는 말씀이 있었어요. ‘너도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니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지 생각해야 한다.’곰곰이 궁리해보니, 결국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음악을 나누는 일이었어요.” 놀고 숨쉬듯이 그는 특히 어린이들에게 음악을 소개하는 일에 각별한 의욕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지난해 ‘장한나와 함께 가는 상상의 음악여행’이란 방송을 통해 아이들과 만나는 자리를 가진 후 관심은 더욱 깊어졌다. “제 생각에,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기쁨과 슬픔을 품고 태어나는 것 같아요. 다만 어떤 계기로 그 감정을 일깨우느냐가 중요하지요. 저는 음악이 그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다고 생각해요. 특히 한국의 어린이들은 공부하랴 학원 다니랴 무척이나 바쁘잖아요. 그럴수록 감성과 지성의 밸런스를 잡아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어른들은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만 제공하면 돼요. 음악의 아름다움은 아이들 스스로 찾아낼 거니까요. 이렇게 음악을 친구로 소개하는 일을 이왕이면 빨리, 아이들이 저를 언니나 누나로 부를 수 있을 때 시작하고 싶었어요. 기대고 싶을 때 편하게 기댈 수 있고, 굳이 존경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장한나는 유독 스승 복이 많은 음악가다. 얼마 전 타계한 첼로의 거장 로스트로포비치와 미샤 마이스키, 지휘자 주세페 시노폴리 등 거장과의 만남 속에서 성장해왔지만, 그 세기의 수업에는 수업료 한 푼 들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제 순수하고 총명한 눈빛을 가진 아이들에게 음악의 문을 열어주고 친절한 안내자가 되려고 나선 것은 하나의 자연스런 흐름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은 누구일까. 돌아온 답은 예상을 약간 빗나간다. “아시다시피 저는 정말 훌륭한 분을 많이 만났어요. 모두 말할 수 없이 고마운 분들이죠. 그런데 굳이 가장 존경하는 인생의 스승을 꼽으라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라고 말씀드릴래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말할 수 없이 힘든 시절을 보내셨지만, 자신의 고통을 큰 소리로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견디며 삶을 받아들이신 분들이지요. 그분들이 평생에 걸쳐 익힌 삶의 지혜를 배우고 싶어요.” 한 사람을 사귀듯이 첼리스트임에도 하버드대에서 음악이 아닌 철학을 전공한다는 사실로도 그는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또 지독한 책벌레다. “철학이요? 어렵지만 즐거워요. 철학책은 한 단락을 다섯 번은 읽어야 겨우 이해할 수 있을 정도지요. 칸트 같은 것은 아무리 읽어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나 혼자서는 생각조차 못 했을 문제들을 생각해볼 계기를 만들어준다는 게 철학의 매력인 것 같아요. 그런 점은 음악과도 닮았어요. 사실 웬만큼 산전수전을 겪지 않고서야 일상생활에서 직접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감정이란 한계가 있잖아요. 하지만 음악은 일상생활에서 느낄 수 없는, 초월적인 감동을 느끼게 해주지요. 일종의 휴가나 여행 같은 거랄까요. 물론 음악을 듣는 데 여유와 인내심이 필요하기도 하지요. 그건 한 사람을 만나 사귀는 것과 같아요. 처음엔 잘 몰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조금씩 다가서면 언젠가 상대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거예요. 음악이, 작곡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세요. 음악 속에도 결국 인생이 깃들어 있으니까요.” 월간샘터 2007년 6월호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6) 개화파의 비조(鼻祖) 오경석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6) 개화파의 비조(鼻祖) 오경석

    우리나라 개화파의 비조(鼻祖)로 흔히 오경석·유대치·박규수 세 사람을 꼽는다. 역관 오경석(吳慶錫·1831∼1879)은 북경을 열세 차례나 드나들며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시달리는 청나라의 모습을 보고 자주적으로 개화해야 한다고 깨달았던 첫 번째 개화파이다. 역관의 아들 유대치(유홍기)는 의학 공부를 해서 의원이 되었지만, 오경석과 교유하며 개화의 필요성을 공감해 20세 되던 김옥균을 개화파로 끌어들였던 인물이다. 좌의정까지 오른 박규수는 대동강을 거슬러 침입해온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켜 대원군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중앙 정부로 돌아온 뒤에 북촌의 청년 지식인들에게 개화를 역설했던 정치적 후원자였다. 오경석은 중인이 주도하는 개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에, 북학파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를 통해 북촌의 양반 자제들을 개화파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8대 역관 집안에 태어나 5형제가 역과에 합격 오경석은 1831년 1월21일(음력)에 중인들이 많이 살던 청계천가 장교동에서 한어(漢語) 역관 오응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해주 오씨의 중시조인 오인유를 거쳐 11세 오인수까지는 문과 합격자를 낸 양반이었지만,12세 오동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참봉(종9품)을 지냈다가,13세 오구가와 14세 오대종이 무과에 합격하여 무반(武班)이 되었으며, 오대종의 맏아들인 15세 오인량이 역과에 합격하여 역관 가문이 되었다. 오제량의 아들인 16세 오정화까지 의과에 합격하여 의관(활인서 별제)이 되면서, 해주 오씨는 중인으로 신분이 굳어졌다.17세 오지항부터 23세 오경석까지 대대로 역과에 합격하여 역관이 되었으며, 혼인도 물론 역관 중심의 중인 집안과 하였다. 22세 오응현(1810∼1877)이 16세 나이로 1825년 역과에 2등으로 합격할 때에 1등은 이상적인데, 오응현은 친구 이상적에게 맏아들 오경석의 교육을 맡겼다. 오경석은 16세에 역과에 합격했으며, 아우들까지 모두 합격해 5형제 역관 집안이 되었다. 사위 이창현도 역관인데, 대표적인 중인 집안들의 족보를 종합하여 ‘성원록(姓源錄)’을 편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 무렵에는 중인들이 커다란 세력을 이뤘으며, 그 한가운데에 오경석이 자리했음을 알 수 있다. 오응현의 손자 가운데도 역관이 4명이나 나왔는데, 이들이 마지막 역관 세대였다. 갑오경장 이후에는 과거가 모두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한학습독관(漢學習讀官)으로 역관 생활을 시작한 오경석은 18세에 사역원 당상역관 이시렴의 중매로 그의 조카딸과 혼인했다. 처가인 금산 이씨는, 김양수 교수의 통계에 의하면 교회역관(敎誨譯官)을 가장 많이 배출한 중인 집안이다. 이씨 부인이 26세에 유행병으로 요절하자,3년 뒤에 역시 중인인 김승원의 딸과 혼인하였다. 아들 오세창도 역관이고, 딸도 역관 이석주의 아들인 이용백에게 시집보냈는데, 사위 이용백은 산학(算學)을 전공한 중인이다. ●무역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골동 서화 구입 오응현은 북경을 드나들며 재산을 많이 늘렸다. 신용하 교수가 오경석의 손자인 오일룡씨와 오일륙씨에게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맏아들 오경석에게 2000석 분의 재산과 집 두 채를 상속해 주었다고 한다. 장교동의 천죽재(天竹齋)와 이화동의 낙산재가 바로 그 집이다. 그는 ‘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이라는 글에서 골동 서화를 모은 과정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계축년(1853)부터 갑인년(1854)에 걸쳐 비로소 북경에 노닐게 되어, 박식하고 단아한 동남의 문사들과 사귀면서 견문이 더욱 넓어졌다. 원(元)·명(明) 이래의 서화 백여 점을 차츰 사들이게 되었고, 삼대(三代)·진(秦)·한(漢)의 금석(金石)과 진(晉)·당(唐)의 비판(碑版)도 수백 종을 넘었다.(줄임) 내가 이들을 구입하는 데 수십년의 오랜 시간이 걸렸고, 천만리 밖의 것이라 심신을 크게 쓰지 않고는 쉽게 얻을 수 없었다.> 넓은 중국 천지 곳곳에 흩어진 골동 서화가 북경으로 모여들어, 유리창에 가면 구입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새로 발견되는 금석 탑본들은 역시 학자를 통해야 구입하기 쉬웠다. 오경석이 1861년 2월에 북경을 떠나기 직전에 청나라 학자 하추도(何秋濤)가 편지를 보내왔다.“보내드리는 석각(石刻) 한 장은 복건성 태녕현에 있는 주자(朱子)의 수서각석(手書刻石) 탑본입니다. 지금까지 금석가들이 모두 몰랐던 것이므로, 기실(記室)께 드려서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오경석이 이 편지와 탑본을 받고 얼마를 사례했는지 알 수 없지만, 청나라 학자 정조경(程祖慶)이 책과 인삼에 관해 보낸 편지를 보면 오경석이 인삼을 가지고 가서 팔아 골동 서화를 구입했음이 확인된다. <역매인형대인각하(亦梅仁兄大人閣下) 며칠 전에 나에게 인삼 값을 묻는 친구도 있고, 지화(紙貨)를 묻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귀국의 서적과 비판(碑版)을 서로 교환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혹 그런 일이 있게 되면 너무 번거로우시겠습니까? 전에 보내온 서목(書目)을 돌려드린 뒤에, 또 어떤 친구가 청구하고 싶어합니다. 아직 구입하지 않은 것도 있으니, 서목 한 벌을 다시 부쳐주시면 시기에 따라 모두 구입할 수 있고, 또 포장비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잠연당전서’는 종경이라는 친구가 가져 왔는데, 어제 또 찾아와 “서점에서 파는 값보다 헐하다.”고 하면서 이 서목을 읽어보아야 한다기에 하는 수 없이 빌려 주었습니다. 옛날 비판(碑版)은 장황(표구)되지 않은 것을 사야 값이 헐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범유경(范維卿) 같은 골동품상과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보를 교류했는데, 오경석이 북경을 왕래하며 기록한 ‘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에 골동 서화 구입에 관련된 기록이 많았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아들 오세창이 지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일부 인용되어 남았을 뿐이다. 그는 골동서화를 구입해 감상만 한 것이 아니라, 훌륭한 글씨나 그림을 보고 연습하여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아들 오세창이 ‘근역서화징’이라는 불후의 저술을 남기게 된 것도 오경석이 수집한 골동 서화 덕분이었다. ●청나라가 망해가는 모습 보며 개화에 눈떠 오경석은 23세 때인 1853년에 처음 북경에 가서 같은 20대의 청나라 지식인들과 사귀기 시작했다. 스승 이상적의 소개로 빠른 시일에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북경에 갈 때마다 선물을 주고받았으며, 그들로부터 골동 서화만이 아니라 서양 문물을 소개하는 책들도 소개받아 구입해 왔다. 청나라 문사 61명과 주고받은 편지 292통이 현재 7첩으로 장황되어 후손 오천득씨가 소장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공자의 73대손 공헌이(孔憲彛)는 뒷날 내각 중서를 지내고, 만청려(萬靑藜)는 예부상서를 지냈으며, 반조음(潘祖蔭)과 서수명(徐樹銘), 장상하(張祥河) 등은 공부상서를 역임했다. 오대징은 갑신정변 때에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조선에 왔으며, 장지동(張之洞)은 호광총독(湖廣總督)과 군기대신(軍機大臣)을 역임했다. 조선과 중국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오경석이 이들의 도움으로 풀어나갔다. 오경석이 북경의 청년들 가운데 동방과 남방 출신의 양무파(洋務派) 개혁사상가들을 주로 사귄 것은 박제가의 영향 때문이다. 오경석이 역과 시험에 합격하도록 지도해준 스승은 역관 이상적이지만, 아버지 오응현은 박제가의 학문을 매우 높이 평가하여 후손들에게 박제가의 저술을 읽도록 했다. 오경석 또한 국내 학자 가운데 박제가를 가장 존경하여, 서재에는 그의 글씨와 그림을 한 폭씩 걸어놓고 그의 책을 읽었다. 추사에서 이상적으로 내려오는 중인 문화를 거슬러 올라가면 추사의 스승이 바로 박제가였으니, 이 집안에서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를 교과서로 받드는 것도 일리가 있다. 오경석은 다른 역관들같이 청나라에 드나들며 통역이나 하고 무역으로 재미만 본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청나라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신용하 교수는 오경석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853∼1859년 사이에 개화사상을 형성한 선각자”라고 평가했는데, 오경석은 1840년부터 시작된 아편전쟁과 1851년에 수립된 태평천국 때문에 청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북경 현장에서 보고 자기만 개화사상을 지닐 것이 아니라 국내 지도층이 함께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청나라에서 간행된 ‘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박물신편(博物新編)’‘양수기제조법(揚水機製造法)’‘중서견문록(中西見聞錄)’ 등의 서적을 구입해 왔다. 아들 오세창의 증언에 의하면, 유대치가 오경석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의 개혁을 성취할 수 있을까?” 묻자, 오경석이 “북촌의 양반 자제 가운데 동지를 구하여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오경석이 북경에서 구입해 온 세계 각국의 지리와 역사, 과학과 정치 서적들이 유대치와 박규수를 통해 김옥균과 박영효를 비롯한 북촌 청년들에게 전해지며 개화파라는 정치 세력이 생기게 되었다. 다음 호에는 오경석의 외교활동을 소개하기로 한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5) 열두차례나 중국 오간 역관 이상적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25) 열두차례나 중국 오간 역관 이상적

    양반 관료들은 고유 업무가 있었으므로 일생에 한번 사신으로 가기 어려웠다. 두 차례 이상 나갔던 문인은 별로 없다. 그러나 역관들은 외국에 나가 통역하는 게 업무였으므로, 능력만 인정되면 몇 번이라도 나갔다. 외국에 많이 나갈수록 회화 솜씨가 느는 것이 당연했다. 가장 많이 나갔던 역관은 이상적(李尙迪·1803∼1865)과 그의 제자 오경석인데, 이상적은 27세 되던 1829년부터 환갑이 지난 1864년까지 열두 차례나 나갔다. 한번 왕복하는데 반년 넘게 걸리고 준비기간까지 필요한 것을 감안하면, 젊은 시절의 절반은 외국에서 머문 셈이다. 박지원이나 박제가 같은 실학자들이 중국 여행을 통해 중국 문인들과 교유한 예가 있지만, 모두 일회성에 그쳤다. 이상적 같이 지속적으로 교유한 예는 없었다. ●9대에 걸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우봉(牛峰) 이씨는 9대에 걸쳐 30여 명의 역과 합격자를 배출한 세습 역관 집안이다. 증조부 이희인과 조부 이방화가 역관들의 교육기관인 교회청(敎誨廳) 훈상(訓上·정3품)을 지냈으며, 생부(生父) 이정직과 양부(養父) 이명유는 사역원 첨정(僉正·종4품)을 지냈다. 아우 상건, 사촌 상익, 조카 용준도 연행(燕行)의 수역관(首譯官)과 교회청 훈상을 지냈다. 손자 대에 이르러 태정, 태영, 태준이 모두 역관으로 중국에 드나들었다. 생부 이정직(1781∼1816)과 당숙 이정주(1778∼1853)는 송석원시사에 드나든 위항시인인데, 이상적은 이정주의 시집 ‘몽관시고(夢觀詩稿)’를 북경에 가지고 가서 청나라 문인들에게 보여 주었으며,“만당(晩唐)의 여러 시인을 닮았다.”는 칭찬을 들었다. 역관들을 가르쳤던 교회역관(敎誨譯官)은 출세의 지름길이었는데, 김양수 교수는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교회역관 442명의 집안을 분석해본 결과 97씨족 가운데 우봉 김씨가 2위, 우봉(강음) 이씨가 8위라고 하였다. 이상적의 외가인 설성(雪城) 김씨도 역시 역관 집안이어서, 외조부 김상순, 외삼촌 김경수가 모두 중국에 여러 차례 다녀왔다. ●문집을 북경에서 출판하다 이상적은 제8차 연행이었던 1847년, 북경 유리창에서 문집 ‘은송당집’을 간행하였다. 국내외에서 문인들과 주고받은 시문을 12권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표지의 제목과 서문, 찬(贊)을 모두 청나라 문인들이 짓고 써주어, 그의 교유 범위를 짐작케 한다. 이상적은 청나라 문인들에게 받은 편지를 모아 ‘해린척독(海隣尺牘)’이라는 10권 분량의 서한집을 편집했는데, 이 책은 출판되지 않고 호사가들에 의해 여러 형태로 필사되어 전해졌다. 해린(海隣)이라는 두 글자는 당나라 시인 왕발(王勃)의 시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하늘 저 끝도 이웃과 같으리(海內存知己,天涯若比隣)”라는 구절에서 나왔다.“세상 모두가 이웃(海隣)”이라는 생각은 ‘논어’의 “천하가 다 형제(四海之內,皆兄弟也)”라는 구절에서 나왔는데, 이상적은 자신의 서재 이름을 ‘해린서옥’이라고 하여, 조선에서는 중인이라 차별대우를 받지만 하늘 저 끝에서는 이웃으로 인정받았다는 자부심을 나타냈다. 청나라 문인들에게서 받은 이 편지집은 규장각, 장서각, 고려대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과 일본 덴리대학 이마니시류(今西龍)문고, 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에 다른 제목으로 소장되었는데, 필자가 옌칭도서관에서 발견하여 ‘출판저널’에 소개한 ‘화동창수집(華東倡酬集)’의 분량이 가장 많다.56명 148통의 편지가 실렸는데,‘은송당집’의 출판을 주선해준 오정진(吳廷)의 편지가 실려 있다. 이상적이 북경에 머무는 동안 오정진은 원문 교정에서 종이 구입, 인쇄비 계산과 계약금 전달, 인쇄 및 배포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편지를 통해 업무를 추진했다. 서문은 이상적의 친필을 그대로 새겨서 찍자고 권하기도 했다. 목판은 북경 광성화포(廣成貨鋪)에 보관해 두었는데, 오정진도 20부를 추가로 인쇄해 친구들과 나눠 보았으며. 성리학자 주돈이(周敦)의 후손인 주달(周達)도 자기 돈을 들여 200부를 더 찍어 강남 일대에 전파시켰다. 이상적은 1859년에도 북경에서 속집(續集)을 간행하였다. 본집과 속집까지 합하여 24권 체제의 ‘은송당집’은 그 이후에도 조금씩 달라진 체제로 여러 차례 간행되어 국내외에 독자를 늘려갔다. 임금이 자신의 시를 읊어준 은혜에 감격하여 문집 이름을 ‘은송당집(恩誦堂集)’이라 하였다. ●‘태평천국의 난´을 정확히 보고하다 해마다 여러 차례 사신들이 중국에 다녀왔지만, 개인적인 교류는 별로 없었다.18세기 후반이 되면서 청나라 문화에 관심이 깊었던 연암 박지원이라든가 담헌 홍대용 같은 실학자들이 사신의 개인 수행원인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따라가면서 청나라 문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자에 익숙했지만 중국어 회화는 못했기 때문에 붓으로 글씨를 써서 의사를 통하였다. 이들이 필담(筆談)을 통해 청나라 문인들과 학문을 논하고 신간 서적을 구입해 오자, 조정에서 통제하기 시작했다. 정조 10년(1786) 1월 22일에 대사간 심풍지가 “연경에 가는 사신은 사행(使行)에 관한 일 이외에, 그쪽 인사들을 방문하여 필담을 나누거나 서찰을 주고받는 것을 금지하소서.”라고 아뢰자, 정조가 그대로 따랐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역관 문인들이 능숙한 중국어 회화를 통해 본격적으로 청나라 문인들과 교유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역관이 바로 이상적이다. 한 차례 연경에 다녀오면서 수완이 뛰어난 역관은 이듬해에도 선발되어 다녀왔는데, 이상적은 열두 차례나 선발되었다. 임무가 없었던 자제군관과는 달리, 수역(首譯)에게는 “청나라 정세를 자세히 탐지하라.”는 왕명이 주어졌다. 이상적이 1859년 제10차 연행에서 돌아와 올린 견문사건(見聞事件)을 한 구절만 읽어 보자.“경술년(1850) 선황(先皇)이 붕어하자 광동 서쪽지역에서 도적의 무리가 창궐하고, 바닷물이 평지에 솟구치며, 벌레와 모래가 먼지 속에 묻힐 정도였다고 합니다. 비록 황하 이북으로 감히 쳐들어오지 못했지만 장강 남쪽에서는 아직도 횡행하여 고을의 성곽을 빼앗았다 잃었다 변화가 무쌍하니, 나라와 개인의 축적이 탕진되어 남은 것이 없습니다.(줄임) 도적이 요사한 천주교의 터무니없는 말로 속이니, 나라가 망하기에 충분합니다.” 사신 일행은 북경을 나설 수 없었기 때문에 양자강 남쪽의 사태를 짐작할 수 없었지만, 이상적은 청나라 인사들과 교유를 통해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을 정확하게 보고하였다. 조정의 장수들이 군자금을 빼돌리고, 영국 오랑캐가 이 틈을 타서 약탈을 감행하며 천진(天津)을 개방하라는 압력까지도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를 천자의 나라라고 의지했지만, 이상적은 청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진단한 것이다. ●오경석과 오세창으로 이어진 역관 제자들 역과 응시자가 많아지고 경쟁이 치열해지자, 재력이 있는 집안에서는 가정교사를 모셔놓고 과거공부를 시켰다. 일단 역과에 합격해야만 대를 이어 역관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역관이 되더라도 통역 실력이 뛰어나야만 자주 북경에 가서 무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이름난 역관 가문 가운데 하나가 해주(海州) 오씨인데, 이상적과 함께 역과에 응시해 2등으로 합격한 오응현은 동기 가운데 실력이 가장 뛰어난 이상적을 자기 아들 오경석의 스승으로 모셨다. 이상적은 오경석을 비롯한 역관 자제들에게 역과 시험문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린서옥(海隣書屋)에 소장한 골동 서화를 보여주며 서화(書畵)에 관한 지식도 가르쳤다. 뒷날 오경석이 귀중한 골동서화를 많이 수집한 것도 이상적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거니와, 북경에 13차례나 다녀오면서 서구세력의 침략과 청나라의 몰락을 목격하고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나서게 된 것도 이상적의 국제적인 안목에서 시작된 것이다. 오경석은 자신의 아들 오세창이 8세가 되자 집안에 가숙(家塾)을 설치하고 역관 수업을 시켰으며,16세가 되던 1879년 5월 역과에 합격하자 가숙을 철거하였다. 역관이자 서예가로 활동하던 오세창은 뒷날 삼일독립선언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으로 나서서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해방 이후 서울신문사 초대 사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1840년에 제주도 대정으로 유배되어 9년 동안 외롭게 살았는데, 추사에게 시(詩)·서(書)·화(畵)를 배운 이상적은 중국에 다녀올 때마다 새로운 책과 중국 문인들의 편지를 가지고 스승을 찾아가 전달하였다. 지극한 정성에 감동한 추사가 그려준 그림이 바로 ‘세한도(歲寒圖)’인데, 세한(歲寒)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나중에 시드는 것을 안다.”고 한 공자의 말에서 따왔다. 그림에 “우선은 감상하라(藕船是賞)”고 썼는데, 우선은 이상적의 호이다. 제7차 사행을 마친 1845년 1월 13일에 오정진이 북경 우원(寓園)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상적은 이 자리에서 청나라 문인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 18명으로부터 시와 발문을 받았다. 추사로부터 이상적을 거쳐 오경석과 오세창으로 이어진 중인 문화를 다음 호에 소개하기로 한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18일 TV 하이라이트]

    ●김동건의 한국, 한국인(KBS2 밤 12시45분) ‘첼로의 젊은 거장’으로 불리는 장한나.20세기에 이어 21세기에도 세계 음악계를 주름잡은 천재소녀 장한나가 지휘봉을 잡은 사연을 들어본다. 얼마 전 타계한 첼로 스승 로스트로포비치에 얽힌 추억을 비롯해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는 첼리스트 장한나의 삶과 음악 인생을 만나본다. ●세계 세계인(YTN 오전 10시40분)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농촌에서는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어린 소녀들이 다른 집에 팔려가고 있다.13세 소녀 시사이는 가족의 압력에 결혼했지만 당당히 자신의 운명을 거부했다. 법정 소송까지 가서 아버지는 벌금을 내야만 했다. 시사이의 간절한 소망은 학교에 다니며 친구들과 놀아보는 것이다. ●60분-부모<부모 공감, 생각하며 키우며>(EBS 오전 10시) 체험학습을 선택하는 대부분의 엄마들은 가격대비 교육 효과가 얼마나 높은지를 먼저 따져 보고 고른다. 이번 시간에는 아이들의 지각발달에 효과적인 요리체험과 감성발달에 도움이 되는 미술관체험을 통해 현장체험학습은 어떻게 선택하고 즐길 수 있는지 방법을 함께 알아본다. ●솔로몬의 선택(SBS 오후 8시50분) 내연남과 밀회를 즐기다 교통사고를 당한 여자. 그녀는 후유장애를 핑계로 가해자쪽의 보험회사와 합의를 미루며 내연남과 3주일이 넘도록 병원에서 은밀한 데이트를 즐겼다. 그렇게 몸이 완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릴있는 데이트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여자는 계속해서 보험사와의 합의를 거절하는데…. ●신현모양처(MBC 오후 9시55분) 국희와 석두의 다정한 모습을 본 명필은 태란에게 밖으로 나갈 핑계를 대고 둘이 있는 곳으로 간다. 명필은 지금 데이트하는 것이냐며 묻지만, 날려버린 집을 찾을 생각에 사로잡힌 국희는 집 계약서를 가지고 온다며 명필의 말은 들은 척도 않는다. 석두는 명필에게 국희를 싱글로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KBS1 오전 10시) 클로렐라는 탄산가스를 산소로 바꿔주며, 아미노산이 풍부한 고단백 식품이다. 또 항산화 성분인 카로틴이 풍부해 성인병 예방은 물론 치매를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클로렐라를 섭취할 때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클로렐라의 올바른 섭취법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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