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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고]

    ●임제선원 조실 종성스님 입적 서울 봉천동 임제선원 조실인 종성(宗成) 스님이 21일 오후 11시 입적했다. 세수 74세, 법랍 36세. 스님은 1930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1968년 백양사에서 서옹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종성 스님은 임제선원을 개원해 주석하면서 스님과 재가불자들에게 참선을 지도해왔다. 영결식은 24일 오전 7시 서울대병원 영안실에서 열리며, 다비식은 같은 날 오후 1시 전남 장성 백양사에서 봉행된다. ●김영수(광혜병원장)씨 모친상 최청자(세종대 예체능대학장)씨 시모상 21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3일 오전 8시 (02)3410-6916 ●서영갑(고려대 명예교수)씨 상배 량(재미 의사)재하(청우ENG 상무)씨 모친상 김영준(서울시립대 교수)김원찬(서울대 〃)씨 빙모상 2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3일 오전 8시 (02)3410-6919 ●김용정(전 부산상공회의소 부회장)씨 별세 21일 부산 동아대병원, 발인 23일 오전 8시 (051)256-7012 ●최재규(전 한진 과장)재식(알리안츠생명 감사)구식(제17대 국회의원)씨 모친상 22일 경상대학병원, 발인 24일 오전 9시 (055)750-8657
  • [아듀 2004 벽을 깬 마이너리티] 천성산터널 반대 단식 지율스님

    [아듀 2004 벽을 깬 마이너리티] 천성산터널 반대 단식 지율스님

    마이너리티는 대개 당대의 지배적 가치나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지점에서 생겨난다. 그런 까닭에 그들의 지향(志向)과 목소리는 상식과 대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회의 거대한 방어벽에 가로막히곤 한다.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식에 의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저항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그래서 무모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일쑤다. 경남 양산 천성산의 한 선방사찰 비구니였던 지율 스님의 단식투쟁도 경제개발론이 판치는 우리 사회의 눈에는 그렇게 비쳐진다. 그가 산중(山中)이 아닌 세속(世俗)의 거리를 수행의 거처로 삼은 지도 3년째로 접어든다. 지난해 2월부터 천성산을 관통하는 경부고속철도 공사 중지를 주장하며 부산시청 앞에서, 청와대 앞길 모퉁이에서 ‘도롱뇽 살리기’ 운동에 매달려 왔다. 특히 올 여름 58일 동안 계속됐던 단식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난달 법원의 공사 재개 결정으로 사태는 일단락됐다. 하지만 지율 스님은 경제개발 우선주의에 매몰돼 갈수록 각박해지는 우리 사회에 ‘생명존중’의 가치를 새롭게 부각시켰다. 존중되고 보호받아야 할 생명의 대상을 천성산의 습지와 들풀, 도롱뇽을 비롯한 모든 생태계로 확장시킴으로써 “환경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도 나온다. 그의 도롱뇽 살리기 서명 운동에 어느덧 4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동참한 상태다. 도롱뇽의 여린 숨결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초록의 공명(共鳴)’이 널리 울려퍼진 셈이다. 지율 스님은 “단식을 그만두라.”는 주변의 만류와 관련,21일 새벽 자신의 홈페이지에 심경을 띄웠다.“제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길은 제가 의지로 걷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중략) 제 영혼의 자유로움에 손대지 않기를…. 그것이 제가 가진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은호기자 unopark@seoul.co.kr
  • 7년째 철새 촬영 도연스님

    “새들은 어떤 아름다운 이의 영혼일지도 모릅니다.” 강원도 철원군 중부전선 최전방 비무장지대(DMZ)와 철원평야를 겨울철마다 ‘평화의 땅’으로 만들고 있는 새들을 카메라에 담는 스님이 있어 화제다. 지장산 도연암에서 수행 중인 도연(52) 스님은 겨울철마다 두루미(천연기념물 202호) 등 희귀 철새들이 모여드는 민통선내 철원평야를 찾아 7∼8년째 아름다운 비행 장면을 찍고 있다. 암자라고 하지만 실상은 산속에 있는 컨테이너 한 동이 전부여서 ‘컨테이너 스님’으로 불리며, 겨울에는 추워 철원으로 하산해 생활해야 한다. 도연 스님이 새들의 세상에 빠진 것은 사람이 죽으면 새가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어, 새들은 바로 자유와 해탈의 세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원렌즈와 모노포드, 디지털카메라 등 장비를 챙겨 일주일의 절반 가량은 철원평야에서 새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 컷씩 담고 있다. 그가 사진에 취미를 갖게 된 것은 초등학교 시절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형이 일제 카메라를 가지고 온 것이 계기가 돼 야생화 등을 찍어 보기 시작했으며, 최근에는 새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주로 담고 있다. 특히 지난달 19일에는 철원평야에 등장한 황새(천연기념물 199호)를 찍어 세상에 알리는 등 렌즈를 통해 새들의 세상을 헤아려보는 안목도 수준급이다. 또 한국조류보호협회 철원지회 회원들과 함께 가끔씩 순찰활동에 나서 탈진하거나 독극물 중독으로 쓰러진 새들을 보듬기도 한다. 철원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토요일 아침에] 성전을 단장하며/박기호 천주교 서울서교동 성당 주임신부

    9월에 시작한 성전 보수 작업을 이제야 마쳤다. 새로 짓기보다 더 힘들다더니 정말 그런 거 같다. 처음에는 발주를 하려고 업체와 상의하고 준비를 했었는데, 구석구석 손질해야 할 일이 자꾸 생길 게 뻔하고 행여 비용 마찰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걱정되어 직영을 하기로 했다. 신심있고 성실한 교우를 불러서 고쳐가면서 상의하고 결정하기로 하고 무작정 시작했다. 불교에서는 수행자들이 살림에 신경을 쓰지 않기 위해서 건축, 재정 같은 일은 사판승이 전담한다고 친구 스님께 들은 적이 있다. 팔자에 없는 공사 감독을 하고 있으려니 신부가 성당 짓고 돈 걱정하는 것은 할 일이 못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판사판을 분리한 불교의 운영방식이 대단히 현명한 구조인 것 같다. 이제까지 선배 사제가 고생해서 지어놓은 성당에서 손도 안 대고 거저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도 들고 누군가의 노고에 감사했다. 개보수 작업을 마무리해놓고 보니 20년 동안 낡고 너저분한 건물이 깔끔해지고 새로운 분위기를 갖게 되어 청소년에서 노인들까지 모두 좋아한다. 역시 건물도 사람도 가끔은 깔끔하게 단장도 하고 미장원에도 가고 거울도 보고 새 옷도 한 벌 장만하는 일은 삶에 활력소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철거, 토목, 조적, 목공, 석재, 페인트, 집기, 장비와 잡부 구하기…. 참 일도 많았다. 디자인 시대라던가? 설계도 없이 시작한 일이라서 구조건 컬러건 선택하는 일이 같은 비용이라도 기품있는 모양새를 내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공사라곤 해본 적이 없는 터라 전문가에게 조언을 들어야 하는데, 돈도 안 생기는 일에 매번 아무 때고 그렇게 응해줄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전문가보다는 목공이건 페인트건 각 분야마다 현장 일을 오래 해온 인부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건축 현장의 인부들은 침묵 속에서 일한다. 어디를 어떻게 고치건 흰색이건 붉은 색이건 감독이 요구하는 대로 칠해주고 돈만 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놀라운 비밀이 있었다. 내가 진지하게 조언을 구하자 침묵 속에 일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말해 주었고 나는 그들의 말을 따랐다. 전문가가 제시했던 것보다도 훨씬 좋은 모양새가 나왔다. 담장을 헐고 낮은 정원석을 놓았는데 돌 쌓는 기술자가 이틀째 날에 말도 없이 나오지 않았다. 조경을 맡은 분이 어쩔 수 없이 보조하는 일꾼과 포클레인 기사와 상의해 가면서 돌을 놓았다. 결과는 기술자가 쌓았던 곳보다 더 아름답게 되었다. 불경스럽게 들릴지 모르나 기술자란 이름으로 일당은 많이 받고 손가락으로 지시만 하던 그가 사이비처럼 느껴졌다. 현장 일꾼들은 항상 설계자와 감독이 시킨 대로 일하고 돈만 받으면 그만이었지만, 그래도 자기 노동이 낳은 모양새에 대한 나름대로의 눈과 평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제까지 자신들의 생각이 반영될 일도 없고 결정권의 기회도 없었을 뿐이었다. 우리 성당 공사는 노동자의 침묵 속에 닫혀있던 비밀을 풀어 이루었다는 의미를 부여하며 감사한다. 사제로 살아가면서 종교의 전문가로 행세하는 나도 침묵의 눈으로 지켜보고 평가하는 교우들이 있음을 새삼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정치가, 지도층, 전문가 집단들도 정말 전문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에 노력해야 하고, 말없이 지켜보는 국민들에게 비밀의 눈이 있음을 각성하고 존중했으면 좋겠다. 박기호 천주교 서울서교동 성당 주임신부
  • [부고]

    ■ 박헌영 부인 정순년씨 대표적인 공산주의자로 꼽히는 박헌영의 두번째 부인이자 원경(63) 스님의 생모인 정순년(82)씨가 15일 새벽 경기도 오산 한국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충북 영동군 출신인 정씨는 박헌영을 만나 1941년 아들 원경스님을 낳았으며 박헌영이 지하로 잠적한 뒤 원경 스님을 친할머니에게 맡기고 귀향했다가 1944년 재가했다.1995년부터는 원경 스님이 주지로 있는 평택시 진위면 동천리 만기사(萬奇寺)에서 지냈다. 박헌영의 유족은 첫째부인인 여성 혁명가 주세죽 사이에서 태어난 러시아 무용가 박비비안나(75)와 둘째부인 정순년 사이에서 태어난 원경 스님, 김일성의 소개로 결혼한 윤례나 사이에 1남 1녀가 있다. 빈소는 만기사에 있으며 17일 오전 8시 발인, 경기 수원시 연화장에서 화장한 뒤 유해는 만기사에 봉안된다. ●이충우(초대 서초구청장)씨 별세 이인자(건국대 명예교수)씨 상부 이상훈(스팍스 인터내셔날 대표)상민(성지병원 원장)혜전(숙명여대 음대 교수)씨 부친상 강충모(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씨 빙부상 15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7일 오전 8시 (02)3010-2294 ●최중현(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씨 부친상 김영학(필립비뇨기과원장)정호천(자영업)씨 빙부상 15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7일 오전 8시 (02)3010-2293 ●이기종(전 헌법재판소 서기관)씨 별세 철(인포비테크놀로지 부사장)씨 부친상 15일 여의도성모병원, 발인 17일 오전 9시20분 (02)3779-2194 ●최광호(전 동아건설 업무담당 이사)씨 별세 은재(한국공간정보통신 대리)씨 부친상 조선경(영진자동차 전무)임재석(썬스타 주임)씨 빙부상 13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7일 오전 8시 (02)3010-2253 ●김강웅(단국대 총무처장)씨 모친상 15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7일 오전 9시30분 (02)3410-6920 ●황영중(예스성형외과 원장)영신(엔케이씨 대표)씨 부친상 15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7일 오전 9시 (02)3010-2291 ●박수일(한국투자신탁 서초지점 대리)수항(현대모비스 직원)씨 부친상 이선영(한국투자신탁 개포지점 과장)씨 시부상 15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7일 오전 7시30분 (02)3010-2237 ●이태영(김기영정형외과 원무과장)돈영(미국 거주)이세정(김기영정형외과 부원장)씨 부친상 김기영(〃 원장)씨 빙부상 15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7일 오전 9시30분 (02)3010-2000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본업으로 돌아온 소설가 김홍신 ‘21세기 장총찬’ 쓴다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본업으로 돌아온 소설가 김홍신 ‘21세기 장총찬’ 쓴다

    그 이름은 ‘권총찬’이었다. 그러나 군부의 사전 보도검열 때문에 ‘장총찬’으로 바뀌었다. 장총찬의 아버지는 서부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장총을 든 주인공들이 악의 무리를 죄다 쓰러뜨리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그래서 아들 이름을 장총찬으로 지었단다. 어쨌든, 그는 1980년대의 ‘인간시장’을 종횡무진 누비며 당대를 풍미했다. 소설가 김홍신(57).1년전 이맘 때 국회의원직을 돌연 사퇴했다.4개월 뒤, 정치 1번지 종로에서 재도전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박진 의원에게 500여표 차이로 고배를 마셨다. 이젠, 정치무대와 완전 고별하고 본업인 작가로 돌아왔다. 최근에는 시집을 하나 내놓아 ‘시인’으로서 명함을 추가했다. 그는 서슬이 퍼렇던 80년 군사정권 시절에 ‘인간시장’의 장총찬을 배짱으로 등장시켰다. 이는 신군부를 겨냥하는 모습처럼 비쳐졌다. 원고는 살얼음 걷듯이 아슬아슬하게 검열대를 통과했다. 숱한 화제를 뿌리며 결국 우리나라의 출판시장에서도 100만부 이상 팔릴 수 있다는 신기원을 이룩했다. 정치판에서 새로운 무공을 쌓은 그가 이제 ‘21세기 장총찬’을 준비 중이다. 이에 앞서 내년 2월 수필집을 낼 예정이다. 소설, 시, 수필 등 장르를 자유자재로 뛰어넘으며 작품세계가 더 깊어지는 듯하다. 지난 3월에는 부인과 사별하는 등 인생의 전환점도 맞고 있다. 서울 서초동의 자택에서 2시간 동안 만났다. ●내년 봄 달라이 라마 만날 것 서울고 뒤편에 위치한 그의 집은 2층 단독주택이었다.20년째 살고 있다. 그의 서재에는 1만여권의 각종 서적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지하창고에도 골동품 같은 서적들이 1만여권 있단다. 그러나 몇해전 동파이프가 터져 물벼락을 맞는 바람에 소중한 자료들이 못쓰게 됐다며 아쉬워했다. 근황을 묻는 질문에 창밖을 넌지시 바라본다. “빚쟁이로 살고 있습니다. 어느날 인생의 뒤안길을 돌아보니 빚이 많다는 걸 느꼈습니다. 종로구민한테도 그렇고, 부모님, 국가, 민족에게도 빚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에게 빚을 갚을 수가 없어요. 대신 힘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고 용서하고…. 그렇게 살아갈 생각입니다.” 정치인 8년이면 작가로서는 아주 소중한 경험이자 소재가 아니냐고 했다. 그는 “이어령씨도 정치판에서 얻은 경험을 잘 살려보라고 권유했지만 실명을 써야 하는 부담감이 뒤따른다.”고 했다. 이어 “작가는 등장인물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전지적 능력은 있지만 옳다는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면서 “선과 악에 대한 공정성과 공평성, 또 작가가 옳다고 하는 확증이 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여기, 산이 하나 있습니다. 동쪽에서 보면 서쪽산이요, 서쪽에서 보면 동쪽산입니다. 동과 서, 방향에 따라 주관이 각각 다릅니다. 객관적일 필요가 있지요. 사실, 태양이 뜨고 진 적이 한번이라도 있나요. 지구 자체가 돌고 있을 따름이죠. 인생이라는 것이 갈등이고 목마름입니다. 물이 흐르는 이유는 산과 땅이 꾸불꾸불 삐뚫어져 있기 때문이죠. 우리 인생은 물 흐르듯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떤 도의 경지에 이른 수사(修辭)처럼 느껴졌다. 김씨는 가톨릭 신자이면서 불교철학에도 조회가 깊다. 지난해 3월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과 일주일 동안 같이 지내며 침묵의 걷기 명상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는 또 내년 봄, 티베트로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달라이 라마와 직접 만나 초청의사를 전달하고 수행과 정진의 깊이를 몸소 체험할 예정이란다. 그는 이어 책상에 올려진 의정활동을 담은 500쪽짜리 두툼한 책자를 꺼내들며 “이런 책이 여덟권이나 된다.”고 웃었다. “글쓰던 사람이 정치 하니까 처음에는 주위에서 우려와 걱정을 많이 하더군요. 저는 정말 열심히 (의정활동)했습니다. 옳은 일에 앞장서고 쓴소리도 많이 했지요. 나중에는 ‘저런 사람이 정치를 왜 진작 안했나.’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였습니다. 요즘 문학계 인사들을 만나면 ‘자존심을 세워줘서 고맙다.’는 칭찬을 듣고 있습니다.” 매년 국정감사 때마다 그의 언행은 거의 날마다 매스컴에 보도될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칼날같은 매서움으로 공무원들을 몰아붙이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이 때문에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가장 미워하는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가장 믿음직한 정치인으로 바뀌었다. 이에 대해 “국익을 위해서는 절대 발설하지 않는 신뢰와 관용이 통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노트북’ 같은 예쁜소설도 구성중 ‘21세기 장총찬’은 언제 탄생하느냐고 물었다. 즉 ‘신(新)인간시장’이다. 그는 정치판의 이런저런 경험을 살려 책을 쓴다면 적어도 10여권짜리는 되지 않겠느냐고 자신했다. 구상 단계는 이미 끝났음을 암시했다. “(80년대 장총찬보다)정신적으로 업그레이드된 인물을 그리고 싶습니다. 가령 아주 매끄러운 정원석이 있지 않습니까. 돌을 깨서 서로 막 돌리면 나중에 예쁜 정원석이 됩니다. 젊어서는 강한 기질로 사회를 비판하고 기존의 윤리와 도덕을 거부하려는 몸짓, 그런 과정을 통해서 숙성됩니다. 이제는 거친 응징이 아닌, 포근하면서도 따뜻한 응징을 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담담한 인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림이 약간 그려진다. 거침보다는 부드러움, 튀는 것보다는 담담한 인물이 생각났다. 이같은 ‘신인간시장’도 쓰겠지만 영화 ‘노트북’같은 예쁜 소설도 써 볼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의욕이 새록새록 생긴다는 것. 이미 자료수집이 다 끝난 작가적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다. ●최전방 소대장 때 北장교와 총격전 그는 충남 공주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릴 적부터 걸레질, 변소청소 등 집안의 온갖 굳은 일은 도맡아 했다. 얼마나 혹독했던지 처음에는 계모로 여길 정도였다. 하루는 친척뻘 되는 아이를 두들겨팬 일이 있었다. 그쪽 집안의 5형제가 와서 보복을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을 길가 나무에 새끼줄로 꽁꽁 묶어놓고 그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하루종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동네사람들이 수십번 만류해서야 겨우 일어섰을 정도였다. 또 한번은 동네의 곱추를 놀렸다가 호되게 맞았다. 그런 다음 장애인들을 집으로 초대해 보란듯이 음식을 마련해주었다. 거짓말하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용서 없이 회초리를 들었다. 이는 오늘날의 ‘김홍신’을 있게 한 토대가 됐다. 건국대학 3학년때 대학신문 문화상에 소설이 당선됐고 4학년 때는 전국 문화예술축전에 당선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졸업 후 광주보병학교에서 장교훈련을 받고 6사단 최전방 철책근무 때였다.71년 7월 1일 새벽. 그는 북한군 장교 3명을 발견 총격전 끝에 전원 사살하는 무공을 세웠다. 마침 이날은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날. 언론 등에 의해 무공이 부풀려지면서 일약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불행이 곧 닥쳤다. 거적을 아무렇게나 덮어 가매장된 북한 장교의 시신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나무를 깎아 십자가를 만들었다. 이어 소대원들과 기도를 했다. 그러자 빨갱이로 몰려 조사를 받았다. 그는 이때 “죽은 자는 흙이다. 영화에도 보면 적장이 죽었을 때 경례를 붙이지 않느냐.”라고 대들었다. 80년대 중반에는 실천문학운동에 뛰어들었다. 고은, 이호철, 신경림, 송기숙, 백낙청, 이문구 등과 인권운동에 매달렸다. 그러던중 하루는 조계종 총무원장이 불러 “머리 깎은 내가 하랴,(정치판에)참신한 젊은이가 있어야 해.”라고 권유했다. “인생은 일회용 휴지와 같습니다. 한번 쓰고 버리는 것이기에 살아있는 동안 행복해야 합니다.” 부인과 사별한 아픔을 지우지 못해서인지 가급적 외출은 삼가고 있다. 청탁받은 칼럼, 또 소설쓰는 일 등 할 일도 많단다. 집안 일은, 챙겨주는 아주머니가 있어 크게 불편하지 않단다. 주위에서 그를 가리켜 “체형은 왜소하지만 사회를 관통하는 깊이와 날카로움은 무궁무진한 사람”이라고 주저없이 표현한다. 최인호씨 역시 “첫 모습은 작지만 금방 6척장신을 능가하는 풍모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21세기 장총찬은 어떤 모습일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km@seoul.co.kr
  • 법정스님, 길상사 7주년 기념법회

    “‘맑은 가난’, 즉 청빈(淸貧)이란 많이 갖고자 하는 욕망을 스스로 억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갖고자 할 때 갖지 못한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가난의 정신입니다.” 법정(72) 스님이 12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 극락전에서 열린 길상사 창건 7주년 기념법회에서 법문을 했다. 법정 스님은 길상사 회주로 주석하다 지난해 12월 회주직을 내놓았다. “최근 감기에 걸려 몸이 온전하지 않다.”고 밝힌 스님은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불황이라고들 얘기한다.”며 “어려운 때일수록 진정한 가난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사람들은 부자가 되려고 합니다. 하지만 많이 가질수록 행복할까요? 20∼30년 전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봅시다. 우리는 연탄 몇 장과 쌀 몇 되밖에 가진 것이 없었지만 행복했습니다. 삶의 질은 물질적인 부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님은 이어 “하루에만 전세계에서 매일 3만 5000명 정도가 굶어 죽어가고, 세계인구의 6분의1인 10억명 정도가 하루 1달러로 연명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웃을 먼저 돌아보자.”고 역설했다. 환경문제에 대해서도 한 자락 펼쳤다.“기상학자들은 금세기 중 지구 평균기온이 섭씨 5∼8도 올라갈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갠지스강과 양쯔강은 모두 말라 버리고 이 지역 벼농사는 망치게 될 겁니다. 그러면 세계적인 기아사태가 벌어질 것입니다.” 스님은 “그렇다고 너무 기죽을 필요는 없다.”며 “미래는 현재의 연장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사느냐에 따라 미래가 좋아질 수도 나빠질 수도 있다.”면서 청빈의 삶을 재차 강조했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직지사 주지에 성웅스님

    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경북 김천 직지사는 10일 산중총회를 열어 상주 남장사 주지 성웅 스님을 차기 주지로 선출했다. 성웅 스님은 현재 조계종 초심호계위원과 행자교육갈마위원을 맡고 있다.
  • [뒷골목 맛세상] 인사동의 작은 맛집들

    [뒷골목 맛세상] 인사동의 작은 맛집들

    인사동은 흔히 ‘거리의 박물관’이라고 불린다. 화랑에서부터 공예품이며 골동품을 파는 가게에 이르기까지 고급스러운 문화의 향취가 풍겨난다. 더군다나 얼마 전부터 관광특구로 지정돼 거리 미화작업이 진행되고, 기다렸다는 듯이 문화자본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인사동은 더욱 세련되고, 멋들어졌다. ●음식점 상호엔 멋들어진 우리말 화가나 도예가, 공예인, 문인 같은 예술인들이 터전을 삼아 노니는 곳에 어찌 멋이 뒤따르지 않겠는가. 그들의 발자취가 두루 머무는 곳에 멋이 빠진다면 그야말로 속빈 강정에 다름 아닐 터이다. 멋스러운 거리에 자리를 잡은 먹고 마시는 맛집들 또한 어찌 멋들어지지 않겠는가. 인사동의 맛집들은 우선 상호에서부터 맛이 다르다. ‘오늘같이 좋은 날,千강에 비친 달, 바람 부는 섬, 소금인형, 황금비늘, 두레멍석, 오 자네 왔는가, 툇마루, 놀부가 기가 막혀, 흥부가 기가 막혀, 북치구 장구치구, 사람과 나무, 우리 그리운 날은, 평화만들기, 달고둥, 보릿고개추억, 조각하늘, 좋은 씨앗, 달새는 달만을 생각한다, 뜰 앞에 잣나무, 아빠가 어렸을 적에, 낮에 나온 반달, 완자무늬, 머시 꺽정인가, 모깃불에 달 끄슬릴라, 풍경소리….’ 얼핏 둘러봐도 가히 그 멋들어짐은 시인의 상상력을 넘어선다. 멋들어진 것이 어디 상호뿐이랴. 다양한 먹을거리 또한 멋들어져서, 은정이나 선천, 사천, 이모집 같은 전통 한정식에서부터 재첩 요리만을 전문으로 하는 섬진강, 다슬기 요리만을 전문으로 하는 풍류사랑, 홍어만을 전문으로 하는 홍어가 막걸리를 만났을 때, 홍어천하, 사찰음식 전문의 산촌, 녹차대나무쌈밥이며 녹차너비아니 등 밥이며 요리에 녹차를 이용한 차이야기, 야채 커리나 마살라 같은 인도 요리의 작은 인디아, 된장비빔밥의 툇마루에 이르기까지 불쑥 어느 집에 들어가도 멋들어지지 않은 요리가 없다. 어쩌면, 인사동에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바로 그 멋들어짐이 너무 지나치다는 데에 있는지도 모른다. 멋이 멋으로만 머물지 않고 멋 자체가 상품화되어 거리에 넘쳐난다면 그런 멋은 이미 멋이 아니다. 멋들어짐이 지나치면 곧바로 건들거리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건들건들, 건들거리면 자칫 사람 냄새를 잃고 만다. 만약 인사동 거리가 죄다 사람 냄새를 잃고 건들거리고 있다면? 인사동에 언제부터인가 40대 언저리의 중년여인이 있는 듯 없는 듯 모습을 드러냈다. 그이는 인사동 네거리에서 안국동 방향으로 10미터쯤 오르는 왼편 골목에 역시 있는 듯 없는 듯 조그만 맛집을 냈다. 작은 뜨락(02-739-2218)이라는 상호인데, 원래 건물 옆에 버려진 골목이었던 것을 위는 차양으로 가리고, 건물 벽에 의지해 폭 1미터에 길이 5미터 남짓한 공간을 마련했다. 폭이 너무 좁아 일반 탁자를 놓을 수가 없어서 벽에 긴 나무판대기를 붙이고, 바닥에는 겨우 엉덩이를 걸칠 만한 간이의자를 놓았다. 이 집에서 먹고 마시기 위해서는 한껏 몸을 웅숭그린 채 본의 아니게 면벽을 해야 한다. ●인사동 풍류객들의 ‘참새 방앗간’ 한 마디로 멋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맛집에다가 주인 되는 노인자씨도 멋하고는 아예 담을 쌓은 이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한 주먹 움켜잡아 뒤통수에 질끈 동여맨 꽁지머리, 아무렇게나 차려입은 차림새. 한 술 더 떠, 먹고 마시는 소위 물장사가 난생 처음이어서 음식을 마련하고 상을 차리고 셈을 헤아리는 일도 서툴다.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손님이 “여기 얼마요.”하면 “몰라요. 먹은 만큼 알아서 주세요.”가 대답이고, 대구와 동태라는 생선을 구별하지 못해 대구를 동태로 파는가 하면 손님이 계산을 않고 나가도 숫제 알아내지를 못했다. 멋대가리라고는 없는 작은 뜨락의 진가를 인사동의 눈 밝은 이들이 못 알아볼리 없었다. 툇마루의 바깥주인이자 ‘집도 절도 주민등록증도 없이’ 떠도는 시인 박중식, 동숭동에서 작가폐업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는 예사롭지 않은 작가 배평모, 누구나 알아주는 시대의 낭만주의자인 시인 김사인, 한국판 비용으로 통하는 시인 김신용, 인사동 화단의 마당발 화가 장경호,588여인들의 사진전으로 이름을 날린 사진작가 조문호, 십수 년에 걸쳐 인도를 헤맨 끝에 ‘우리는 지금 인도로 간다’는 인도 안내서를 내고 아울러 ‘인도로 가는 길’이라는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는 인도전문가 정무진 등 소위 인사동의 풍류객으로 통하는 이들이 마치 고양이가 생선냄새를 맡고 찾아오듯 차례로 작은 뜨락에 모여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노인자씨는 물장사만 난생 처음인 것이 아니라 돈을 버는 일 또한 처음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돈이라고는 벌어본 적이 없는 노인자씨는 돈을 쓰는 일에는 누구보다도 화려한 이력이 붙은 이였다. 일찍이 불교계의 내로라하는 큰스님 아래서 포교사 비슷하게 아시아 각국이며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까지 돌아다녔는데, 세 번이나 말라리아에 걸려가며 아프리카를 종단하여 굶주린 현지인들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썼다. 이를테면 몸과 마음 전체를 바쳐 30년 가까이 중생구제라는 보살행을 해온 셈이었다. 그런 그이가 어느 날 획하고 머리가 돌아 그만 맛집을 차려 돈을 버는 일을 하고 말았다. 인사동의 눈 밝은 풍류객들이 맨 먼저 알아본 것은 다름 아닌 주인 되는 이의 사람냄새였을 터이다. 그런 그이들로서는 적어도 작은 뜨락이 그대로 망하는 꼴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이들은 주인을 대신하여 나름대로 작은 뜨락을 살리는 일에 나섰다. 이를테면 셈이 어두운 주인을 대신해 모자를 돌려 자신들이 먹고 마신 만큼 돈을 거두어 스스로 셈을 헤아리고, 한 접시에 5000원을 넘지 않는 한도에서 입맛에 맞는 안주를 개발해내고, 무엇보다도 작은 뜨락을 연락처 삼아 주인이 있든 없든 하루에 한 두 번은 꼭꼭 들렀다. 그리고 그이들은 마침내 작은 뜨락만의 규칙을 만들었다. 술과 안주는 한 사람이 1만원을 넘지 않는 선에서 1차를 마감한다. 만일 차수를 변경하여 2차로 넘어가면 다시 모자를 돌려 1만원을 추가하는데, 절대로 외상은 없다. ●사찰음식 전수받은 된장찌개·들깨탕 작은 뜨락은 4000원짜리 우거지 해장국이 있어서 식사도 할 수 있다. 술안주는 서산에서 이틀에 한번 꼴로 택배로 부쳐오는 어리굴젓과 자연산 생굴이 있는데, 배춧속에다가 생굴을 쌈 싸먹는 맛이 신선하다. 그밖에 조기며 자반고등어 같은 생선구이며 생선찌개도 있다. 작은 뜨락에 처음 가는 이라면 마땅히 조심해야 할 것은 자칫 요술 같은 시간의 흐름에 휘말리는 일이다. 우연히 합석하게 된 풍류객들과 잠시잠깐 웃었는데, 낮술 한 잔이 어느 새 2차,3차를 넘어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진다. 인사동 네거리에서 종로 2가 쪽으로 몇 걸음 걷지 않으면 덕원 갤러리 옆 골목 깊숙이 고샅길(02-734-3371)이라는 한식 전문집이 역시 있는 듯 없는 듯 멋 부리지 않고 있다. 한옥의 사랑채를 개량한 듯 주방까지 합쳐 10평 남짓한 실내에 대여섯 개의 식탁이 있는 작은 집이다. 출입문 쪽의 벽을 터서 통유리창을 달고 거기에 진열해놓은 종발 같이 앙증맞은 도기들이 무슨 꽃들이라도 재잘거리며 피어나듯이 아름답다. 뿐만 아니라 좁은 공간에 매달아놓은 화분들이며 실내장식들은 어디에서나 주인의 깔끔하고도 섬세한 손길이 그대로 묻어나와 은은한 향기를 풍긴다. 고샅길 주인 되는 이는 박진숙·경숙 두 자매인데, 이중에서 언니 되는 박진숙씨가 도예가여서 이들 종발이며 요리에 쓰이는 접시와 그릇들을 모두 포천에 있는 작업실에서 직접 구워낸 것이다. 동생인 경숙씨는 식품영양학과 출신으로 원래부터 음식 솜씨가 뛰어났는데, 솜씨를 아낀 언니의 권유로 인사동까지 나서게 되었다. 고샅길의 특징은 요리에서 밑반찬에 이르기까지 어느것 하나 정갈하면서도 깊은 맛이 우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고샅길된장찌개(5000원)와 산사들깨탕(1만원)이 일품이다. 메주를 쓰지 않고 알콩 자체를 띄워 만드는 절에서만 전해오는 비법으로 담근 된장을 원료로 한 된장찌개는 한 입 넣는 순간, 어떻게 이런 맛이 날 수 있을까 싶게 그 정갈하면서도 깊은 맛에 대뜸 매료된다. 스님들의 보양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산사들깨탕 또한 예사로운 맛이 아니다. 곱게 간 들깨에 배추, 호박, 버섯, 두부, 거두절미한 콩나물을 넣고 약간 되직하게 끓인 산사들깨탕은 육식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특히 별미일 터이다. 얼핏 보면 지극히 평범하지만 먹을수록 감탄사가 나오는 이 두 가지 요리는 실제로 쌍계사에 있던 무산스님으로부터 전수받았다는데 무산스님은 출가하기 전에는 한의사 출신으로 평소에도 사찰음식에는 깊은 조예가 있는 이였다. 이밖에도 5000원짜리 동태찌개와 야채비빔밥이 있고, 술안주로는 버섯전골(2만원)이며 닭매운탕(2만원)이 있는데, 서너 명이서 너끈히 즐길 수 있는 양이다. ■ 인정으로 우려내는 전통찻집 인사동 네거리에서 안국동 방향으로 한참을 올라와 쌈지박 어름에서 왼편 길로 접어들면 산타페 입구 옆에 초당(02-738-4154)이라는 전통찻집이 또한 있는 듯 없는 듯 멋 부리지 않고 있다. 탁자 세 개가 전부인 작은 공간의 한 쪽에 주인 되는 최정해씨가 평생을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듯 그림 같은 자세로 신비한 미소 지으며 앉아 있다. 결코 적지 않은 나이와는 상관없이 곱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자태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향기와 빛깔이 은근하게 배어나오는 듯한 자태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마치 오랜 세월을 잊혀졌다가 어느 날 불쑥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고려청자나 이조백자처럼 정지된 시간 속에서 깊어진 향기며 빛깔이다. 삶의 무엇이 한 여인을 저렇듯 깊게 만들었을까. 참으로 막막한 무슨 기다림 같은 것은 아닐까. 손님이야 하루에 한 명이 들든 두 명이 들든 별로 개의치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바로 최정해씨가 지키고 있는 자리이다. 벌써 20년 가까이 그 자리에서 어쩌다 든 손님들에게 깊은 손길로 차를 만들고 차를 따른다. 아주 잊혀진 듯 참으로 오랜만에 오는 손님이면 연꽃 모양의 작은 촛불을 물이 담긴 자기 잔에 켜서 차와 함께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촛불에 어둑한 실내가 일순 은은하게 밝아지면서, 그것을 지켜보는 손님의 어둑한 마음 또한 어쩔 수 없이 밝아지기 마련이다. 그렇듯 밝아진 마음으로 차를 들어 한 모금 입안에 넣으면 저 안으로 깊이 흘러들어가는 것은 비단 차만은 아니다. 홍삼말차라는 초당만의 특이한 차가 있다. 녹차 가루에 홍삼가루를 섞어서 약간 되직하게 물을 넣은 흡사 맑은 죽 같은 느낌의 차인데, 이것을 사발에 넉넉하게 마시고, 다음에 바위에서 나는 대나무의 어린 순으로 만든 연둣빛 석죽차와 석류빛 오미자차를 마시고, 이어 솔바람차며 매실차까지 마신다. 차를 바꾸는 틈틈이 편강, 쥐눈이콩강정, 오미자 양갱으로 입가심을 해가며 대여섯 가지의 차를 마시고 나면, 삶의 무엇이 우리를 그다지 애면글면 안타까워하게 하랴. 이런 식으로 차를 순례하고 초당을 나설 때 잠자코 1만원짜리 한 장을 식탁에 놓아두는 것을 잊지 말 일이다.
  • ‘한달간 스님되기’ 지원자 몰려

    ‘한달간 스님되기’ 지원자 몰려

    한 달 동안 행자 과정을 체험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월정사(주지 정념 스님)의 단기출가학교가 일반인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월정사는 17일까지 접수할 예정이던 단기출가학교 3기생을 8일로 조기 마감한다고 7일 밝혔다. 접수에 들어간 지 10여일 만에 모집인원(일반 60명, 중·고등학생 20명)의 네 배 가까운 300여명의 지원자가 몰렸기 때문이다. 일반인들도 한 달 동안 삭발, 발우공양, 새벽과 저녁 예불, 운력(대중과 함께 하는 노동) 등 스님들과 똑같은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단기출가학교는 한국불교사에 새로운 출가문화를 정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단기출가학교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최근 들어 이 학교 1기생들의 사연과 수행모습을 영상에 담은 MBC 다큐멘터리 ‘출가’ 2부작이 방영되면서 한층 커졌다. 월정사는 제4기(내년 4월18일∼5월17일ㆍ일반), 제5기(8월 중순ㆍ대학생과 교사), 제6기(9월12일∼10월11일ㆍ일반), 제7기(2006년 1월5일∼2월4일ㆍ일반인과 중고등학생)생을 잇따라 모집한다. 월정사 홈페이지 참조(www.woljeongsa.org).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가톨릭·불교미술의 만남전

    불교계 미술인들과 가톨릭계 미술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종교간 이해와 화합을 다지는 뜻깊은 전시가 마련된다. 사단법인 불교문화산업기획단(이사장 도후 스님)은 8일부터 15일까지 서울 사간동 법련사 불일미술관에서 ‘가톨릭과 불교 미술인의 만남전’을 연다. 이종상 상명대 석좌교수, 김형구 전 세종대 교수, 문학진 전 서울대 교수 등 가톨릭 작가 12명과 송영방 동국대 명예교수, 강경구 경원대 교수, 이만익 화백 등 불교 작가 11명 등 모두 23명의 작가가 참여한다.8일 오후 5시 열리는 개막식에는 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과 가톨릭 주교회의 총무 장익 주교가 참석해 종교간 화합의 메시지를 전할 예정이어서 관심을 모은다.(02)733-5322.
  • 입적 숭산스님 제자 현각 “큰스님 빈자리 제자들이 메울 것”

    “이 세상 믿을 수 없습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저의 손을 꼭 잡고 차를 마시며 ‘공부 챙겨라.’하시던 스님이었는데 금세 다른 쪽으로 가셨습니다.” 4일 숭산 스님의 영결식이 봉행된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만난 현각(사진 앞에서 두번째·서울 화계사 국제선원장) 스님은 “숭산 스님은 무엇보다 제자들이 진정한 수행자가 되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신 분이었다.”고 말했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 출신인 현각 스님이 한국 선불교에 빠져들게 된 것은 90년 하버드대학원에서 열린 숭산 스님의 특별강연에 매료되면서부터.“처음 만났을 때 스님은 ‘당신은 누구세요.’라고 물으셨습니다.‘제 이름은 폴’이라고 대답하자 스님께서는 ‘그건 당신 몸의 이름입니다. 당신의 진짜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라고 하셨지요. 그때 정말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스님이 주신 ‘오직 모를 뿐’이란 가르침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현각 스님은 그후 숭산 스님의 인격과 법문에 점점 더 빨려들어갔다.“스님은 다른 종교 지도자들처럼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나를 통해 너희들 자신의 본모습을 제대로 보라.’고 하셨죠. 곧 스님은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진정으로 제자들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을 원하셨던 겁니다.” 숭산 스님의 빈 자리가 너무 커 일부에서는 스님이 세운 세계 120여 곳의 선원이 제대로 운영될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현각 스님은 숭산 스님이 워낙 일찍부터 후계자 양성에 힘썼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고 자신한다.“스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직전 ‘걱정하지 마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나도 너희들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 수덕사서 영결·다비식 봉행

    지난달 30일 입적한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숭산 스님의 영결식이 4일 오전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조계종 원로회의장으로 봉행됐다. 행사는 고인의 행장 소개,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종산 스님의 영결사, 종정 법전 스님의 법어, 총무원장 법장 스님의 추도사, 중앙종회 의장 법등 스님 조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법전 스님은 법문을 통해 “깊고 고요하여 형상은 없지만 우주만물과 더불어 벗을 하고 비록 텅 비었으나 스님의 생사자재(生死自在)한 묘용(妙用)은 만상을 통해 나투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라고 추도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진행된 이날 영결식에는 사부대중 1만여 명이 참석해 스님의 열반을 추도했다.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 태고사 주지 무량, 화계사 국제선원장 현각, 계룡산 무상사 조실 대봉 등 숭산 스님의 외국인 제자와 신도 500여 명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영결식이 끝난 뒤 스님의 법구(法軀)는 영결식장에서 600여m 떨어진 연화대 다비장으로 옮겨져 다비식이 거행됐다. 낮 12시30분부터 시작된 이날 다비식에서 불가의 전통 의식인 사리 수습은 덕숭총림 수덕사 전통에 따라 이뤄지지 않았다. 예산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낙지네 개흙 잔치/윤봉선 그림

    동시집 ‘박하사탕 한봉지’를 냈던 안학수(50) 시인이 이번엔 개펄에서 시를 캤다. 개펄에서 하나 둘 건져올린 그 작은 노랫말들은 동시집 ‘낙지네 개흙 잔치’(윤봉선 그림, 창비 펴냄)에 묶였다. 조개, 고둥, 게, 갯지렁이, 낙지…. 펄에 묻힌 갯것들을 보듬어 시인은 목청껏 노래로 꿰었다.“작은 벌레나 풀꽃 하나라도 소중히 할 줄 아는 마음이 곧 인류를 사랑할 줄도 안다.”는 철학을 어린 독자들에게 귀띔해주고 싶어서다. “뾰룩뵤룩 뾰루지/따개비는 부스럼//찌덕지덕 생딱지/눌어붙은 굴딱지//새까맣고 얼룩진/울퉁불퉁 못난이//그래도 그 품에/아기 달랑게를 품었다.//그래도 그 등에/꼬마 갯강구를 업었다.”(‘갯돌’) “개펄 마당 가득 채우며/밀려드는 밀물 깊은 곳/김발 매었던 말짱머리에/뙤똥하게 앉아 무엇으르 하나?//(…)//스님처럼 좌선한 폼이 염주 없이도 깨우치겠다./차려입은 잿빛 장삼이/목탁 없이도 성불하겠다.”(‘두루미중’) 금방이라도 개펄 내음이 코끝에 끼쳐올 것 같은 서정시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환경파괴 등 현실문제를 고민해보게 하는 시들도 자주 끼어든다.“터진 과자봉지/뒹구는 소주병/널브러진 담배꽁초/우그러진 깡통/씹다뱉은 오징어발//(…)//놀란 괭이갈매기들/메스껍다 되돌아 날며/끼야 끼야 꺄꺄/꾸루 꾸루 꾸꾸.”(‘해수욕장의 아침’) 꼼방울(솔방울), 말짱(말뚝), 트레못(나사못), 황발이(농게) 등 재미난 우리말들이 많다. 초등생용.65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케리, 숭산스님 추도 편지

    최근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섰다 낙선한 존 케리 상원의원이 숭산 스님의 입적을 추도하는 서신을 스님의 빈소가 마련된 충남 예산 수덕사로 보내온 것으로 알려졌다. 2일 불교신문에 따르면 케리 의원은 1일자로 숭산 스님의 미국인 제자 현각 스님을 통해 보내온 편지 형식의 글에서 “숭산 대선사는 젊은 시절부터 전세계에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새로운 혁신을 일으켰고, 각 나라에 100개가 넘는 선원을 건립해 무수한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와 고요를 심어 줬다.”고 추도했다. 케리 의원은 이어 “그 중에서도 특히 내 가족 중에 가장 사랑하는 아들 존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며 “그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 준 모든 것에 대해 우리 가족들은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종교플러스] 송년법회 10일 서울조계사서

    한국공무원불자연합회(약칭 공불련)는 10일 오후 7시 서울 조계사에서 ‘2004 송년법회’를 봉행한다. 이날 법회는 최근 공불련 3대 회장으로 선출된 김세호 건설교통부 차관의 취임축하를 겸하는 자리다. 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이 법물할 예정이다.
  • [산박사 홍순섭 산산산] 경기 양평 예봉산·운길산

    [산박사 홍순섭 산산산] 경기 양평 예봉산·운길산

    경기도에서 6시간 정도의 종주산행을 맛볼수 있는 유일한 곳이 예봉산과 운길산이다. 서울에서 동쪽으로 40㎞,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되는 양수리에서 서북쪽으로 4㎞거리에 솟아 있는 산들이다. 산 아래까지 시내버스가 연결돼 교통이 편리하며 산세가 부드럽고 등산로가 순탄해 가족산행이나 가벼운 주말산행에도 좋다. 특히 수종사에는 지방문화재 제 22호인 팔각 5층석탑과 500년이 넘는 수령을 자랑하는 은행나무가 눈길을 끈다. 남한강과 북한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권할 만하다. 또 수종사에 가면 무료로 그윽한 차를 마실 수 있어 초겨울 산행의 맛을 더한다. 송촌 쪽에서 예봉산, 적갑산을 거쳐 운길산으로 하산하는 ㄷ자모양의 종주코스를 소개한다. 팔당댐을 지나 천주교 묘역에 내려서 산행을 시작한다. 천주교 묘역앞의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은 초입부터 만만치 않다. 경사난 길이기 때문이다. 철탑 밑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점점 더 가팔라지는 산길, 거친 숨을 토해내며 ‘담배를 끊으리라’고 다짐을 했다. 일망대라는 바위가 나온다. 아래로 팔당과 양수리의 풍경이 그만이다. 눈 앞을 가로막는 조그마한 암릉벽. 우회해서 오르니 승원봉. 쌀쌀한 날씨임에도 땀이 비오듯 흐른다. 내내 오르막길을 만났기 때문이다. 잠시 앉아서 꿀맛 같은 휴식을 맛본다. 신선한 공기와 서늘한 바람이 지쳐있던 몸에 신선한 자극을 준다.‘역시 이맛이야.’산행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견우와 직녀의 애틋한 사랑을 간직한 견우봉과 직녀봉이 손에 잡힐 듯하다. 힘들게 올라선 견우봉 좌측으로 팔당댐 하류와 검단산이 만들어내는 멋진 풍경을 뒤로하고 직녀봉(예빈산)으로 향한다. 예빈산 정상에는 정약용 선생과 그의 형제들이 학문을 닦던 곳이라는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율리봉을 지나니 가장 힘들다는 예봉산 깔딱고개. 정말 숨이 넘어갈듯하다. 가장 높은 예봉산에 오르니 이제부터 내리막이다.‘룰루 랄라’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이제부터 능선의 고저가 완만하다. 철문봉을 지나 적갑산에서 도시락으로 허기를 채운다. 출발한 지 3시간이 넘었다. 전망 좋은 바위에 앉아 먹는 도시락은 정말 어떤 진수성찬 부럽지 않다. 송전탑을 거쳐 새우젓고개를 지나 오르막을 오르니 첫번째 봉우리가 나온다. 무려 6개의 봉우리를 넘으니 이제 다리가 풀려간다. 마지막 남은 운길산 정상을 향해 올랐다. 정상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견우, 직녀, 예봉 등 지나온 많은 봉우리들이 앙상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의 쓸쓸한 모습에 가슴이 저며온다. 우리의 인생도 이러하지 않은가. 파랗던 젊음이 빠져나가면 우리도 저런 모습으로 서 있지 않은가. 쓸쓸함을 뒤로하고 수종사에 들렀다. 조그마한 절, 물맛이 좋아 정약용선생이 벗들과 차를 즐겼다는 그곳. 다구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테이블이 있는 수종사 다원으로 갔다. 문 앞에서 보살님이 안내하는 자리에 앉아 따뜻하고 향기로운 차로 욕심과 번뇌를 다스렸다. 돈은 받지 않는다. 주지스님의 마음을 담은 차를 마시며, 속인의 마음 전할 길이 없어 불전함에 지폐 몇 닢을 넣는 손이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이 방법밖에는 길이 없으니. 내려오니 오후 3시30분. 오전 9시에 산행을 시작했으니 꼬박 6시간30분이 걸렸다. 볕이 따뜻한 내년 봄날 다시 한번 찾으리라 마음 속으로 약속했다. 찾아가는 길:서울 청량리 시장 앞에서 양수리로 향하는 2228번(구 166번)이나 8번 버스를 타고 팔당댐을 지나 천주교묘원에서 내리면 된다. 차가 안 막히면 1시간정도 걸린다. 6번 국도는 주말에는 상습 차량정체구간이므로 기차를 이용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기차는 하루에 3번 다닌다. 하지만 청량리에서 아침 6시50분기차를 타야 하고 서울행은 팔당역에서 오후 6시35분에 출발하는 기차이외에는 일정이 맞지 않는 불편함이 있다. 팔당역(031-576-2888).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는 팔당대교를 지나 양평쪽으로 5∼6㎞가다가 팔당댐이란 표지를 보고 오른쪽으로 빠져 구길을 이용해야 한다. 실전명산 순례 700코스 중에서 hss1708@korea.com
  • 전세계에 한국불교 전파한 숭산스님 입적

    전세계에 한국불교 전파한 숭산스님 입적

    불교 조계종 원로의원이자 화계사 조실인 숭산 스님이 30일 오후 5시15분 서울 수유리 화계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77세. 법랍 57세.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난 숭산 스님은 47년 마곡사에서 출가 득도,49년 수덕사에서 고봉 선사를 법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화계사 주지, 불교신문사 초대 사장, 조계종 비상종회의장 등을 역임한 숭산 스님은 특히 전세계에 한국 불교를 전파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스님은 한창 때는 1년에 지구를 두 바퀴나 돌기도 했으며, 열반에 들기 전까지도 1년에 서너 차례씩 미국, 홍콩, 말레이시아, 유럽 등지의 해외선원을 순방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했다. 저서로는 ‘큰 스님과의 대화’‘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온 세상은 한 송이 꽃’‘천강에 비친 달’등이 있다. 영결식은 4일 오전 10시30분 충남 예산 덕숭산 수덕사에서 조계종 원로회의장으로 봉행될 예정이다.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숭산 스님 발자취 ‘세계일화’… 해외포교 한평생

    “언제나 이 순간 밖에 없다.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마라. 우리는 오직 모를 뿐이다! 공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생과 같이 있는 것이다. 우리 생활과 떨어진,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 생활의 영향을 그대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숭산 스님의 가르침은 명명백백하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니, 본래 있는 그대로에서 깨달음을 구하라는 것이다. 스님의 삶은 그 자체가 그대로 커다란 가르침이자 귀감이었다. “다 걱정하지 마라! 만고광명(萬古光明)이 청산유수(靑山流水)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열반에 든 숭산 대종사. 스님은 철저한 묵언수행을 원칙으로 했지만 일주일에 한번씩 법회를 열고 제자들과 선에 관해 편지글도 주고 받았다. 숭산 스님과 제자들 사이에 오간 질문과 대답이 ‘공안 인터뷰’다. 수행의 정도가 제각각인 제자들의 질문에 상황에 맞게 답을 들려주는 숭산 스님의 가르침은 부처님의 대기설법과도 통했다. 숭산 스님은 무엇보다 한국 선을 세계에 알린 해외포교의 선구자로 이름을 남겼다. 열반 직전까지 스님이 조실로 주석한 화계사는 한국불교 세계화의 전초기지였다. 스님의 열성적인 포교 덕에 홍콩, 미국, 캐나다, 폴란드, 영국, 스페인 , 브라질, 프랑스 등 세계 곳곳에는 어김없이 한국식 선원이 들어섰다.1989년에는 한국 선지식으로는 처음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포교 활동을 시작했고,1994년에는 베트남을 방문해 지도자급 승려들과 법거량(法擧揚, 불가의 스승이 제자의 수행 정도를 문답으로 점검하는 것)을 나누기도 했다. 숭산 스님은 1964년에는 한국 불교 최초로 승려대학교육과 종단이 학비를 제공하는 종비생 제도를 실시하는 업적을 남겼다. 한국불교 전파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던 숭산 스님의 마음 속에는 한국 근대불교 중흥의 선지식인 만공 스님의 가르침이 자리잡고 있었다. 만공은 수덕사에서 주석할 때 ‘세계일화(世界一花, 세계는 한 꽃)’라는 말을 남겼고, 숭산 스님은 이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숭산 스님의 독특한 수행지도를 통해 배출된 서양인 제자는 5만여명. 외국인 승려 가운데 직계 제자만 해도 50명이 넘는다.‘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화계사 국제선원장 현각 스님, 미국 캘리포니아 모하비 사막에서 한국식 절 ‘태고사’를 짓고 있는 무량 스님 등도 숭산의 제자다. 현각 스님은 2001년 경북 영주 현정사 주지로 취임하면서 세인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숭산 스님으로부터 “오직 할 뿐(Only Do)”이라는 가르침을 받은 무량 스님은 “숭산 스님은 대단히 융통성있는 스승이다. 미국과 미국인의 현실에 맞게 다양한 가르침의 방편을 쓰시는 분이었다.”고 회고한다. 숭산 스님은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친구들과 함께 부모님으로부터 500원을 훔쳐내 만주 국경을 넘어 독립군과 합세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의 정치적 운동이나 학문으로는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없음을 깨달은 스님은 결국 출가의 길을 걷게 된다. 수행승으로서의 숭산의 구도행각은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스님은 계를 받고 10일이 지나 원각산 부용암에서 백일기도에 들었다. 식사로는 솔잎을 말려 빻은 가루로 벽곡( 穀)을 하면서 매일 20시간 동안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를 했다. 그런가 하면 하루에도 몇번씩 얼음을 깨서 목욕을 하기도 했다. 마침내 100일이 되는 날, 스님은 갑자기 자신의 몸이 떠나 무한한 공간에 있음을 느꼈다.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 스님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었으며, 모든 것이 참다운 자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숭산 스님은 “선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스님의 가르침으로부터 큰 의심 덩어리 하나 챙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족하다. ●숭산 스님 행장 ▲1927년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읍 출생 ▲1947년 공주 마곡사 출가 득도 ▲1949년 수덕사에서 고봉 선사를 법사로 비구계 수지 ▲1958년 화계사 주지로 취임 ▲1960년 대한불교 신문사 설립, 초대사장 취임 ▲1966년 일본 홍법원 개설, 초대원장 취임 1992년 홍콩 국제선원 개설 ▲1997년 대한불교 조계종 원로스님 ▲2000년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개원 ▲2001년 대한불교 조계종 법계스님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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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0여명의 스님이 50억∼60억원에 이르는 1년 예산을 쓰는 해인사 스님은 평균 연봉 4000만원을 받는 수행자인 셈이다.-28일 해인사에서 열린 ‘해인사 수행풍토 어떻게 진작할 것인가’라는 주제의 토론회에서 혜능 스님이 “아침·저녁 예불 때도 빈 자리가 많고, 그런 대중적인 의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개인 용무만 보거나 아예 무관심하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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