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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12)차의 보관과 선별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12)차의 보관과 선별

    찬 서리가 새벽 산봉우리 구름에 걸리더니 어느새 빨간 화염(火焰)들이 두륜산을 하나 둘씩 점령해나가고 있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단풍이 설악대청을 넘어 이곳 두륜산에 도착한 것이다. 그 하얀 무서리 위로 하얀 차꽃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그 차꽃사이로 노란 꽃술을 잔뜩 묻힌 벌들이 윙윙거리며 바쁘게 꿀을 모으고 있다. 온갖 만물이 풍성하고 바쁜 계절들을 뒤로하고 서서히 생을 마감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지금쯤 차인들은 자신의 차 곳간이 비어가고 있음에 벌써 초조해진다. 이때부터 차인들의 ‘차 인심’은 각박해진다. 봄은 아직 멀리있기 때문이다. 보관하고 있는 차 역시 마찬가지다. 장마가 지나고 가을이 오면 햇차맛은 사라지고 묵은 차 밭이 시작될 시점이기 때문이다. 정말 좋은 차와 아닌 차가 감별이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차는 그 성질이 매우 까다롭다. 그래서 차를 고르고 보관하는 법 역시 매우 신중해야 한다. 만든 지 한 두 달이 된 햇차는 대부분 어떤 것을 고르더라도 색과 향 그리고 맛이 좋다. 찻잎이 가지고 있는 맛 향 색이 신선함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초의스님은 (다신전)에서 “차에는 스스로 진향(眞香), 진색(眞色), 진미(眞味)가 있으니 한번 한점이라도 물들게 되면 곧 참다움을 잃게 된다. 예컨대 물에 소금기가 있는 것과 차에 다른 물질이 있는 것과 다완에 생강이 있으면 모두 참됨을 잃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차의 보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차를 만들 때는 정성을 다하고, 보관할 때에는 건조한 곳에 두어야 하며, 탕을 끓일 때는 청결하게 하여야 한다. 정성을 다하고 건조하게 보관하고 청결하게 끓이게 되면 다도를 극진히 했다고 할 수 있다.”며 차의 보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초의스님의 차 보관법은 그런 점에서 매우 특이했다고 보여진다. 초의스님은 먼저 차를 청결한 병에 담아 대나무로 만든 피편(皮編)으로 눌렀다. 그리고 몇 차례 종이와 죽순 껍질로 빈틈없이 차통을 봉해버렸다. 그리고 예쁜 기와를 얹어 다실에 두었다. 명나라때 다서인 (다소)에서도 비슷한 예가 있다.(다소)에서는 “차를 자기 항아리에 넣고 죽순껍질로 누르고 죽피를 채워 봉한 후 상끈으로 매어 새로 구운 곱돌을 그위에 얹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초의스님이 다성인 이유를 우리는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한봉지의 차를 보관하기 위해 손수 만든 차통을 밀봉한 후 그 차의 올곧은 맛을 유지하기 위해 따로 다실까지 만드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차를 직접 제다했던 다인으로 차 한잎에도 늘 그 가치를 부여했다. 송나라 채양의 (다록)에도 차의 성질에 대해 논하고 있다.(다록)에는 “차는 대껍질과 상화하고 향이나 약 냄새를 싫어한다. 또 건조한 곳을 좋아하며, 축축한 곳을 꺼린다.”고 되어 있다. 옛날 우리 다인들은 차를 대나무로 만든 상자나 죽통에 보관하기도 했다. 또한 오동나무통에 넣어 끈으로 묶어서 처마 밑에 걸어두었다. 그것은 땅의 단열성과 흡수성으로 온 습도가 자연적으로 조절되었기 때문이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자연식 김치냉장고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바로 먹을 차의 용기는 한지같은 종이재료를 사용했고, 오래 두고먹을 차는 옹기같은 흙을 재료로한 것을 많이 이용했다. 과거 우리 차인들은 이렇게 차를 저장하는 집을 따로 마련,‘찻집’이라고 불렀고 차를 보관하는 방을 ‘다실’ 또는 ‘차실’이라고 불렀다. 자연을 이용해 그 사물을 보호하고 활용하는 우리선조들의 지혜가 경이로울 뿐이다. 먼저 법제된 차가 변질되지 않으려면 습도 온도 광선 산소 냄새 등에 주의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차가 지닌 본래의 맛과 향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차는 먼저 햇볕을 피해야 한다. 차가 햇빛에 직접 닿으면 폴리페놀 성분이 쉽게 산화될 뿐만 아니라 온도가 높으면 차의 엽록소가 쉽게 분해되어 찻잎이 누렇게 변질되기 때문이다. 차는 또한 섭씨 5도 가량 저온에 저장하는 것이 매우 좋다. 그래서 요즘 어떤 차인중엔 김치냉장고 같은 냉장고를 차 전용 냉장고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만약 여러 음식과 함께있는 냉장고에 보관해야 한다면 흡착성이 매우 강한 차의 성질을 막아내기 위해 철저하게 밀봉하여 넣어두는 것이 좋다. 차는 가능한 한 차통에 보관해야 한다. 요즘 차를 보관하는 차통은 상품에 따라 다양한 재료들이 선보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전통적으로 쓰이고 있는 차통은 자기나 토기 금속 유리 종이 등이다. 그중 가장 무난한 것은 바로 자기나 토기로 된 차통이다. 금속 중에서는 주석통이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기도 하다. 차중에서도 녹차나 말차는 그 보관에 특히 신경을 써야 한다. 황차나 홍차등 발효차에 비해 공기중에 노출되면 쉽게 변하기 때문이다. 차가 공기중에 노출되면 습기를 흡수해 수분 함량이 높아진다. 차가 수분에 의해 용해되면 재빨리 변질되어 버리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마시는 녹차는 자체 변질이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 오룡차나 반야병차처럼 발효시켜 만든 차는 오래 저장할수록 그 깊은 맛이 우러나오지만 생잎을 가지고 만든 덖음차나 녹차는 아무리 잘 보관하더라도 일년이 지나면 변질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보관에 신경을 써야 한다. 차를 개봉해서 마시며 보관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개봉한 차는 늘 사람의 손보다는 찻숟가락 같은 도구를 이용해 마실 양을 꺼내야 한다. 사람의 손이나 다른 용도로 사용했던 도구들을 사용하면 그 냄새를 차가 흡수해 좋은 차맛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차 보관에 못지 않게 좋은 차를 고르는 법 또한 매우 중요하다. 차는 먼저 어떤 곳에서 사용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사무실이나 가정에서 등 사용하는 곳에 따라 차를 고르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사무실에서 여러사람들이 차를 마셔야 한다면 값싸고 가볍게 마실수 있는 중작 정도의 차나 발효차가 무난하다. 특별히 격식을 갖추지 않고 여러사람이 두루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가정이나 귀한 손님을 접대할 차를 원한다면 가장 최고의 차로 꼽히는 첫물차 즉 우전 같은 차를 선택해야 한다. 가장 품질이 뛰어난 첫물차는 귀한 손님을 대접할 수 있는 최상의 상품이기 때문이다. 첫물차 두물차 세물차 등 시기별로 고르는 차의 종류는 보통 차를 처음 대하는 일반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차를 감별하는 방법은 색·향·미다. 차는 초의스님이 말했듯이 진미, 진향, 진색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차는 그 발효정도에 따라 고유한 맛과 향이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녹차는 신선한 자연의 풋냄새와 열처리에 의한 깊은 향이 제맛이다. 차를 끓였을때 찻물은 맑고 신선한 것이 매우 좋으며 색이 어둡고 잡티가 섞인 것 같은 것은 좋지 않은 차에 속한다. 찻잎은 가늘고 말려진 상태가 균일한 것이 좋은 차다. 찻잎이 고유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표면에 윤기가 흐르는 것이 좋다. 차의 빛깔을 보는 것을 완상(玩賞)이라고 한다. 완상은 오른손으로 찻잔을 쥐고 왼손으로 가볍게 받쳐서 가슴까지 가져간 후 눈으로 차의 빛깔을 보는 것이다. 이때 차의 빛깔은 봄날 갓 돋아난 여린 잎에서만 볼 수 있는 맑은 취색(翠色)을 으뜸으로 친다. 다음은 차의 향이다. 차의 향에서는 사향 즉 네가지의 향이 있다. 진향 난향 청향 순향을 말하는데 겉과 속이 똑같이 순수한 것을 순향, 설익지도 타지도 않은 것을 난향, 싱그러운 냄새를 갖춘 것을 진향이라고 한다. 차맛을 감미할때는 먼저 차 한모금을 입에물고 입안에서 한바퀴 굴려 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차가 가진 색·향·미의 감미로움과 상태를 직접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차에 대해 먼저 인식하는 것이다. 차 한잎은 마치 참새의 혓바닥처럼 작고 가늘다. 그 참새의 혀같은 차를 한통 채취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공력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다. 그 차를 법제하기 위해서 또 얼마나 많은 진기가 소모되는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차는 탄생에서 소비까지 모든 인간의 순수한 모든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는 정심한 것이다. 과거 우리 차인들이 차방을 만들고 다실을 만드는 행위가 자칫 지배계층의 유희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한가지 음식이라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연과 합일된 생명사상으로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차를 마시기 위해 투여된 중생들의 뜨거운 눈물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차는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우리의 발아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역설의 미학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일지암 암주 ■ 정약용의 걸명소 차는 사람의 마음속에 차분한 기운으로 깃들어 있을 때 비로소 차가 된다. 차는 그 어떤 것보다 신묘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묘함이란 것은 우리가 말하는 형이상학적인 신비스러움이 아니다. 그 어떤 것에도 물들지 않는 청정한 그 자리에 차는 있다는 것이다. 삶의 형식과 내용도 마찬가지다. 맑고 순수한 마음으로 삶을 영위하지 않고 오염이 된다면 세상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뿐만 아니라 평생을 치욕속에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사회지도층의 추문은 그같은 삶의 또다른 반영이다. 한잎의 차에 우주가 깃들어 있다는 것은 바로 그속에 생멸의 윤회를 그대로 반영하고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가 일상에서 하나의 삶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그것이 일상과 현실속에서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삶의 비밀을 자연스럽게 투영하는 또하나의 반영체로 자리잡을때 비로소 살아 숨쉬는 것이 된다. 차가 우리시대에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실의 삶에서 거칠게 부대끼는 중생들의 삶속에 여유와 평안함을 줄수 있는 간절한 힘이 바로 차속에 충만하게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같은 예는 조선시대 최대의 실학자요, 당시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정약용의 (걸명소)에서 확인된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고 소외된 자의 마음을 달래며 새로운 삶의 의미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차의 마음을 정약용이 읽어냈기 때문이다. 그 차의 마음속에 깃든 힘을 통해 그는 새롭게 시대를 관통해내는 살아있는 지식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다산이 초의스님에게 보낸 차를 구하는 마음은 그같은 철학적 현재적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요새 차에 걸신이 들려 차를 약으로 하고 있다오, 다서 중에 중요한 것은 육우의 (다경)3편에 능통해야 하고 병든 주제에 꿀떡꿀떡 노동의 일곱잔을 다 마시고 있소, 비록 정력이 가라앉고 기력이 없어진다는 기 모경의 말을 잊지 않고 소화를 돕고 기미가 없어진다고 해서 이찬황의 버릇만 생겼소.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맑은 하늘에 구름이 둥실 떴을 때,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밝은 달이 시냇가에 떠있을 때, 한잔의 차가 목마르다오. 바람 부는 산, 등잔 밑 따끈한 차 한잔은 자순의 향이요, 물을 긷고 불을 지펴 마당에서 달인 차는 백토의 맛이지요. 화자 홍옥잔의 사치는 부호 노공에 미칠 수 없고, 돌솥에 푸른연기 지피는 검소는 한비자를 따를 수 없소, 게 눈이니 고기 눈이니 하는 옛 사람들의 완호는 부질없고, 궁궐의 용단봉단은 너무 심한 사치라오. 땔감나무조차 하지 못할 깊은 병이 들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차를 얻고자 할 뿐이오. 살짝 훔쳐듣건대, 고해의 다리를 건너는 데는 스님들의 보시가 제일이고, 명산의 고액인 서초의 우두머리인 차를 살짝 베풀어 주시는 것이라 했소, 목마르게 바라노니, 부디 그 은혜를 아끼지 마옵소서” 한사람의 생활인으로 차인으로서 간절한 마음은 시공을 초월해 있다. 난마같이 얽힌 실타래를 풀어내듯 다산은 차의 모든 것을 일거에 관통해내고 있다. 그리고 또한 차를 법제하고 보내는 그마음이 바다보다 넓은 은혜임을 일깨우고 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차인의 마음자리인 것이다. 차 한잎에 깃든 우주의 생멸을 깨닫는 것이…
  • [토요일 아침에] 금강산 유감/원철 스님 조계종포교원 신도국장

    이른 아침 조계사 마당에 ‘금강산 신계사’라는 글씨가 선명한 승합차가 주차되어 있다. 해질 무렵 안국동 사거리에 ‘개성공단’이라는 노선표를 크게 써붙인 대형버스가 지나간다. 신계사 복원이라는 역사적 큰 짐을 지고 있는 조계종의 소임자들은 금강산을 ‘마실 가듯’ 오가고 있다. 개성공단 버스 역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현대아산 직원들의 출퇴근용 정기편이라고 한다. 냉전시대 금강산은 ‘이상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그것을 현실 속에서 찾아낸 것은 비무장지대(DMZ)의 금강산 끝자락에 간신히 얹혀 있는 건봉사였다. 거기도 마음놓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출입허가절차가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사미시절에 DMZ 밖 간성읍내에 있는 건봉사 포교당에서 하루를 묵은 적이 있다. 그곳 현판은 ‘금강산 건봉사 포교당’이었다. 이것이 현실에서 내가 처음 만난 금강산이었다. 그 뒤 건봉사 부도탑의 ‘부처님 치아사리’의 도굴범이 검거되면서 매스컴을 탔고, 이후 이 절이 유명해지면서 출입이 좀 쉬워져 가 본 그곳의 금강산은 ‘다이아몬드 산’이 아니라 여느 평범한 산과 다를 바 없었다. 절집에서는 ‘금강산에서 발심(發心)하고 묘향산에서 수행하며 지리산에서 보임(保任)한다.’라는 말이 있다. 금강산에 가면 누구든지 출가할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묘향산에 가서 열심히 정진한 후 지리산으로 가서 그 공부를 마지막으로 푹 익히는 것이 일반적인 수순이었던 것이다. 엿장수 차림으로 전국으로 떠돌던 이 찬형 거사(뒷날 종정과 송광사 방장을 지낸 효봉선사;1888∼1966)가 석두선사라는 도인을 만난 곳이 금강산이다. 대뜸 처음 만나 “어떻게 왔느냐.”고 하니 “이렇게 왔다.”고 하면서 엿판을 안은 채 방안을 한바퀴 빙 돌아보이는 선문답 끝에 ‘10년 공부한 수행자보다 낫다.’는 칭찬과 함께 출가를 허락받게 된다. 물론 두 분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이차돈의 순교지인 경주 천경림의 흥륜사를 복원한 혜해(慧海) 스님이 금강산으로 출가한, 생존하고 있는 유일의 노비구니이시다. 연세가 팔순을 훨씬 넘겼으니 또다른 살아 있는 현대사인 셈이다. ‘돌아다니는 것(만행)이 직업’인 승려이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금강산을 가보지 못했다. 그런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올여름에 지인이 시월초 사흘간의 연휴에 금강산 여행을 신청하려고 하니 여권을 보내달라는 것이다. 지금 신청해야 그 때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관광’으로 가게 된 것이다. 날짜가 가까워짐에 따라 만산홍엽의 풍악산을 생각하면서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구월 어느 날이었다.“죄송합니다. 금강산 입산인원을 반으로 줄이는 바람에 공식업무가 아닌 순수한 관광객은 일정이 취소되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요. 할 수 없죠. 다음에 흰눈이나 보러 갑시다.” 덤덤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해야만 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알고 보니 그 회사의 오너와 경영자 간의 불협화음이 급기야 정치적으로 비화되어 북쪽에서 관광인원을 반으로 축소하라는 통보로 이어져, 그 화가 나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그 두 양반은 뉴스화면과 공식행사장의 먼발치에서 몇 번 본 게 전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에 계획해 놓은 일이 가을에 무산되는 걸 보니 새삼 세상의 모든 일이 서로 서로 연관성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연기(緣起·관계성)의 법칙’을 다시금 실감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북쪽의 국제적 정치적 협상력의 탁월함이야 이미 정평이 나있지만 비경제적인 논리를 앞세운 경제 협상술은 그렇게 세련되어 보이지 않는다. 경제적인 문제를 정치적 시각 내지는 인기주의로 풀어가려는 방식은 남과 북이 21세기에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 울산공단은 꼭 가봐야 하는 ‘근대화의 현장’이었다. 그 때 받은 그 기업의 ‘통 큰 이미지’는 3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나에게 호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바라건대 이번 갈등이 모두가 윈윈하는 방향으로 잘 해결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이 아침이다. 원철 스님 조계종포교원 신도국장
  • 삶의 지혜-실천편 / 발타자르 그라시안 원작 난샨 지음

    중국 쓰촨성의 외진 곳에 사는 두 스님. 한 스님은 가난했고, 한 스님은 부자였다. 어느날 가난한 스님이 부자 스님에게 “내가 남해에 가려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라고 묻자 부자 스님이 “무슨 수로 갈 거요?”라고 되물었다. 가난한 스님이 대답했다.“나는 물통 하나와 밥 사발 하나면 충분하오.” 부자스님이 말했다.“나는 요 몇 년 동안 배를 한 척 빌려서 장강을 건너 가려고 생각하는데, 아직 실행을 하지 못했소.”다음 해 가난한 스님은 남해에서 돌아와 부자스님에게 남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이야기는 “백마디 말보다 단 한번의 행동이 낫다.”는 단순한 진리를 보여준다. 나폴레옹도 “나는 언제나 먼저 전투를 시작해 놓고, 그 뒤에 전략을 세웠다.”며 ‘행동’을 강조했다. ‘삶의 지혜-실천편’(발타자르 그라시안 원작·난샨 지음, 김수영 옮김, 예솜 펴냄)은 인생 난관을 헤쳐 나갈 지혜를 알려준다.17세기 스페인의 철학자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남긴 무수한 명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이미 나온 ‘삶의 지혜-자아편’후속작이다. ●두번의 선택이란 있을 수 없어 기회는 악마와 같아서 막상 다가오면 당황해서 어찌해야 될지 모른다. 또 기회는 천사 같아서 가버리고 나면 후회 막급. 평범한 사람은 가만히 기회를 기다리고 있지만, 똑똑한 사람은 기회를 잡는데 능하고, 현명한 사람은 과감하게 기회를 만든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두번의 선택이란 없단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설파했다. 그럼 좋은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할 일은? 먼저 기회가 없다고 투덜댈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기회가 오면 고민하지 말고,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야 한다. 모험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 특히 친구가 많으면 기회도 많아진다. 인적 네트워크가 넓으면 좋은 기회를 찾아낼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 ●목표 있는 사람이 역사를 만들어 목표가 없으면 우리의 열정은 과녁없는 화살처럼 다다를 곳이 없게 된다.“정처 없이 항해하는 배에는 어디서 불어오는 바람이건 모두 다 역풍”이라고 그라시안이 말한 것처럼 목표는 인생의 나침판이다. 꿈은 얼마나 커야 하는가? 언제나 희망 목표보다 더 큰 성과를 거두려면 목표도 커야 한다. 원대하고 장기적인 목표를 가진 사람은 전력투구하게 되니까 최상의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당장 5년내에 달성할 목표를 만들고, 정리해서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지침은 바로 ‘운을 믿지 말아라.’수많은 행운은 근면과 정확한 판단을 통해 만들어진다. 운이 좋지 않다는 것은 대개 노력이 부족했거나 관찰력이 부족한 결과일 뿐이다.9800원.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엄마 유전자/심재억 문화부 차장

    부끄럽게도 불혹에 들어서도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남들 앞에서야 ‘어머니’라고도 했지만 집에서는 어김없이 ‘엄마’라고 불렀고, 어머니는 “다 큰 놈이 엄마, 엄마 하는 것 좀 봐라.”시면서도 그다지 싫어하시지는 않았습니다.“지 놈이 별 수 없지. 뱃속에서부터 입에 익은 말인데….” 노후에 오래 병상에 계셨던 어머니, 나중에는 산소호흡기로 연명을 하셨는데, 서울 산다는 핑계로 구완마저 소홀했던 자식이 뒤늦게 병원을 찾았을 때 어머니는 이미 말을 잃으신 뒤였습니다. 억장이 무너져 찬 손을 잡고 ‘엄마’라고 불렀더니 놀랍게도 어머니는 혼수상태에서도 제가 잡은 손아귀에 꼬옥 힘을 주셨고, 그 때 ‘엄마’라고 불렀던 게 마지막 인사였습니다. 지금도 ‘엄마’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에 바람이 입니다.“원래 중놈은 그리움이란 헛된 망상을 버려야만 함에도 앓는 어머님을 두고 밤마다 이렇듯 가슴이 미어져 오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나 봅니다. 마지막 남은 어머니에 대한 죄를 사하는 길이오니 부디 저를….” 이렇게 고백하고 세속의 어머니 병구완에 나섰다는 벽안스님의 편지글이 새삼 가슴을 훑는 날. 심재억 문화부 차장 jeshim@seoul.co.kr
  • ‘예의·도덕 실천운동’ 덕운스님

    ‘예의·도덕 실천운동’ 덕운스님

    한 스님이 ‘예의’와 ‘도덕’이 실종된 현실을 두고 볼 수 없다며 사찰을 박차고 나와 거리 캠페인에 나섰다. 주인공은 서울 서초구 방배동 활인정사 주지 덕운 스님. 그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예의·도덕 실천운동’을 하고 있다. 사찰 신도들도 자발적으로 나서 ‘예의·도덕 실천은 가정에서부터’라는 제목의 전단지를 시민들에게 나눠주며 ‘예의와 도덕’을 지켜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부터 50여 차례에 걸쳐 캠페인을 벌였다. 민족 분단의 현장인 임진각에서부터 서울역과 조계사 앞, 대구 팔공산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다. 지난 4일 수원역 앞에서 만난 덕운 스님은 “예의와 도덕을 지키면 가정이 평안해지고, 모든 이가 평안해지면 사회 안녕과 국가의 화합이 이뤄져 결국 세계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승려는 산중에 있어야 하는데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그 자식 또한 부모를 버리는 부도덕한 현상들을 바라만 볼 수 없었다.”며 거리로 나온 이유를 설명했다. 한국도덕운동협의회장직을 맡고 있는 덕운 스님은 “한국의 대표 브랜드는 ‘동방예의지국’인데 요즘 이 브랜드가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며 “범국가 차원의 윤리·도덕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에 동참할 수 있도록 ‘예’와 ‘덕’을 전하는 내용의 신문을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덕운 스님은 침술에도 일가견이 있어 사찰 주변의 독거노인 등 소외계층을 상대로 무료 시술도 하고 있다. 덕운 스님은 “예의와 도덕을 제대로 실천한다면 건강한 삶도 함께 따라오게 될 것”이라며 “체력이 닿는 데까지 이 운동을 벌일 생각”이라고 말했다. 글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백승종 정감록 산책] (39)민족적, 유교적 천문예언과 오윤부

    [백승종 정감록 산책] (39)민족적, 유교적 천문예언과 오윤부

    구한말 대표적인 애국계몽 운동가요, 항일운동가인 단재 신채호는 우리역사를 깊이 연구했다.‘조선 상고사’처럼 널리 알려진 연구서가 있는가 하면,‘꿈하늘(夢天)’ 같이 소설 형식을 취한 것도 있다.‘꿈하늘’은 일종의 팬터지 문학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작가 신채호는 천상에 올라 ‘임’을 좌우에 모신 여러 영웅호걸을 만난다.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있고 철학자 화담 서경덕도 보인다. 도술의 달인 전우치도 함께 자리한다. 예상 밖인 것은 오윤부(伍允孚)라는 생소한 인물이다. 그는 성력(星曆)의 대가라 했다. 우선 성씨부터 낯선 오윤부. 좀 더 알고 보면 그는 ‘고려사’ 열전에 소개될 정도로 완전히 무명은 아니었다. 천문예언 전문가라고 했다. 섣부른 짐작과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천문예언이 무척 중시됐다. 이름난 유학자 박상충의 전기에도 “성명(星命)에 밝아 사람들의 길흉을 점치면 많이 맞혔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다. 중국에서는 13세기 이후 사주명리학이 예언이나 점의 핵심이었다. 고려는 경우가 달랐다. 풍수지리와 더불어 천문예언이 늘 예언의 중심축이었다. 인간 만사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 그리고 산줄기를 타고 흐르는 땅의 기운과 직결된다는 믿음이 고려인들의 정서에 부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천문은 조선후기에 출현한 ‘정감록’에서도 큰 역할을 한다. 정조9년(1785)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그랬다.“이른바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것은, 그 성씨가 김가이고, 이름은 자세히 모릅니다만, 금년에 군사를 일으킨다고 들었습니다. 유가는 정미년에 군사를 일으키고, 정가는 무신년에 군사를 일으켜, 세 집안사람들이 장차 백 년 동안 서로 싸웁니다. 그 증거로, 객성(客星)이 남방에서 이미 서울로 들어왔습니다.”(실록, 정조 9년3월1일 경술) 조선은 장차 3국으로 분할돼 오랜 세월 다투게 된다는 예언이다. 객성이 남쪽에서 출현해 서울 쪽으로 들어왔다는 천문현상이 증거로 제시됐다. 나라의 운명은 별이 결정한다는 민중의 믿음이 읽힌다. ●대대로 별점을 본 오윤부 고려 충렬왕 때 일관(日官)으로 활동한 오윤부야말로 별점의 대명사였다. 그의 본관은 황해도 배천(白川), 한 때 부흥(復興)으로 불리기도 한 곳이다. 일제시대의 성씨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엔 배천 오(伍)씨가 없다. 오윤부는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는 이야기만 전해 내려온다. 그 조상은 대물림을 해가며 고려의 수도 개성에 살았다. 배천오씨들은 자자손손 별점을 보며 태사국(太史局)을 지켰다.(오윤부의 전기는 ‘고려사’, 권 122를 참조) 고려는 귀족사회였고, 모든 신분이 세습되었다. 심지어 군졸 노릇만 하는 집안, 아전과 서리를 배출하는 집안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일관 오윤부 일가는 귀족은 아니었으나, 일반 농민이나 상인보다는 훨씬 지위가 높았다. 오윤부는 용모가 초라했고 말수가 적었다. 여간해서는 좀체 웃지도 않았다. 그는 첫눈에 호감을 살 만큼 붙임성 있고 구변 좋은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문을 익혔다. 장성해서는 일관에 임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친 뒤 판관후서사(判觀候署事)라는 고위직에 올랐다. 말년에는 천문도(天文圖)를 그려 왕에게 바쳤다. 후배 일관들이 그 천문도를 모범으로 삼았다니 그의 실력을 짐작할 만하다. 오윤부의 특기는 뭐니 뭐니 해도 별점이었다. 타고난 재주도 재주였지만 그는 무척 부지런했다. 밤을 새워가며 하늘을 수놓은 수 백 개의 별들을 샅샅이 살폈다. 날씨가 제아무리 춥거나 덥더라도 그는 늘 성실했다. 오윤부의 먼 후배 격인 조선시대 일관들은 5개 팀으로 나뉘어 하루 24시간 내내 하늘을 관측했다. 그들은 관측 대상을 23종으로 나눠 정상적인 현상과 비정상적인 것으로 구별했다. 해, 달, 흰무리, 지진, 혜성, 새별(新星) 그리고 28수로 요약되는 주요 별자리를 모두 점검했다. 일관들은 특히 새별과 흰무리 등의 모양, 정도, 자리, 바뀌는 모습을 낱낱이 기록해 ‘성변측후단자’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서운관지’) 이 보고서에 천체 약도가 첨부돼 날마다 임금님에게 제출됐다. 조선시대 일관들이 남긴 일지는 당시로선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천문 보고서였다. 그 일부가 아직도 남아 천문 강국의 역사를 입증한다. 고려시대의 일관들은 그와 비슷한 활동을 했고 그것이 ‘고려사’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특히 오윤부는 이상한 천문 현상을 해석하는 데 뛰어났다. 어떤 별이 천준(天樽)을 범하자 “이번에 올 중국사신은 술꾼이다.” 고 예언했다. 천(天)은 중국, 준(樽)은 술통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또 어떤 별이 여림(女林)을 범하자, 중국 사신이 와서 소녀들(童女)을 데려갈 것이라며 걱정했다. 모두 사실로 드러났다. 이런 식의 해석이 현대인의 눈엔 너무 단순해 보일 수 있다. 하늘이 꼭 중국이어야 될 이유가 없다.‘여림’을 두고 공녀(貢女)하라는 것으로 해석할 까닭도 없다. 그러나 그 때는 원나라의 횡포가 가장 큰 문제였다. 오윤부는 그런 현실을 감안해 모든 천문현상을 풀이했다. 그의 별점은 잘 들어맞았고 소문이 원나라 황제의 귀에까지 들렸다. ●원형 민족주의자 오윤부 고려 후기에는 원의 수시력과 같은 중국역법이 수입되기도 했다. 오윤부는 그 방면에도 상당한 전문가였다. 그는 달력을 고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고려의 제일(祭日)을 중국과 비교했다. 고려에서는 봄가을의 가운데 달인 음력 2월과 8월의 마지막 무일(遠戊日)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으나, 중국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첫째 무일(近戊日)을 제삿날로 삼았음이 확인됐다. 오윤부는 조정에 건의해 중국의 예를 따르게 했다. 그러나 그가 항상 중국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긴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의미로 그는 고려인이었다. 충렬왕은 즉위 직후 선왕인 원종의 신위를 종묘에 모셨다. 새 위패를 선대왕들의 신위와 합설하기 위해 원종의 시책(諡冊 시호를 아뢸 때 쓴 글)을 올릴 차례가 되었다. 충렬왕후는 원나라 공주였는데, 왕비로서 그 행사에 참여하기로 돼 있었다. 마침 오윤부가 이 행사를 주관했다. 그는 난색을 표하며 공주의 참여를 가로막았다. 선대왕들의 신령이 계신 곳에 원나라 공주가 술잔을 올리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 원나라는 과거 수십 년간 고려를 침략했기 때문에, 고려인들은 원을 미워했다. 오윤부는 이런 반원의식이 강했다. 원나라 공주는 종묘 제사에서 제외됐다. 많은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통쾌해 했다. 알려진 대로 원종 이후로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이 더욱 노골화됐다. 고려국왕은 대대로 원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었다. 왕은 죽어서도 원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시호에 표기해 “충○왕”이 되었다. 고려왕실에 시집온 원나라 공주의 위세는 때로 왕권을 능가하는 경우가 있었고, 오윤부는 이 점을 못마땅해 했다. 그는 천문 현상을 빙자해 공주를 압박했다.“천문을 살펴 보니 괴이한 현상이 자주 나타납니다. 요즘은 심한 가뭄까지 닥쳤습니다. 청컨대 궁궐을 짓거나 고치는 공사를 중지하고 덕을 닦으십시오. 그래야 재변이 멈춥니다.” 원나라 공주는 오윤부의 제지를 받자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원나라 공주에 대한 오윤부의 공격은 계속됐다. 공주는 고려에 시집온 뒤에도 여러 차례 본국을 오갔다. 그 때마다 막대한 비용이 국고에서 지출되었음은 물론이다. 그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판인데 공주는 원나라로 여행을 떠날 때마다 자기가 없는 동안 궁궐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라고 지시했다. 언젠가 한 번은 재상들을 불러 모아 놓고 좋은 날을 택해 아예 새 궁궐을 지어 놓으라고 졸랐다. 다들 불평은 있었지만 드러내놓고 반대는 못했다. 이 때도 오윤부가 발 벗고 나섰다.“금년에 토목공사를 일으키면 임금님께 불리하므로, 신하인 저는 절대 택일을 못하겠습니다.” 원나라 공주는 분노에 치를 떨며 오윤부의 벼슬을 빼앗았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려 매로 때리려 했으나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한 어느 재상이 애써 말리는 바람에 매 맞는 것만은 간신히 피했다. 그 일로 분이 안 풀린 공주는 오윤부를 왕에게 고자질했다. 왕은 공주의 청을 어기지 못해 오윤부를 매질하게 했다. 그는 매를 맞으며 이렇게 변명하였다.“날을 가리는 것은 흉(凶)을 피하고 길(吉)을 맞으려는 것입니다. 신하를 협박하여 억지로 가리게 한다면 차라리 가리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신은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임금님의 뜻에 아첨할 수가 없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궁궐을 짓는 공사가 겨우 시작됐는데, 화성이 달을 삼키는 변이가 일어났다. 왕은 반승(飯僧 스님들에게 밥을 공양함)을 실시해 이 문제를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다. 반승은 사소한 재앙이 예측될 때마다 되풀이된 고식적인 해결책이었다. 오윤부는 동료인 문창유와 함께 왕에게 간언을 바쳤다. 화성이 달을 삼키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다. 스님들에게 밥을 주고 부처님을 공양한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런 값싼 보시를 그만 둬야 한다. 진정한 길은 불필요한 토목공사를 중지하는 것이다. 사실 그 말이 맞는 말이었다. 왕은 반대여론을 의식해 궁궐 짓는 일을 그만뒀다. ‘고려사’에 실린 전기 기록을 검토해 보면 오윤부의 간언은 전문분야인 천문에 구애되지 않았다. 시사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한 번은 오윤부가 전법총랑(典法摠郞 법률의 집행을 담당) 박인주에게 전법사의 사무가 자꾸 지연되는 까닭을 물었다. 원나라 공주의 명령과 임금님의 명령이 한없이 쏟아져,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왕과 공주는 각기 소송 사건에 비공식적으로 개입해 일처리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오윤부는 이런 일이 자기 소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따졌다. 이런 식으로 일관 오윤부는 가끔씩 왕과 의견충돌을 보였다. 그러나 원나라 공주에 대해 대들거나 비판하는 경우는 더욱 많았다. 그는 공주 보기를 마치 원나라 침략군을 대하듯 했던 것 같다. 오윤부는 일종의 원형(proto) 민족주의자였다. ●백성을 대변한 오윤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전혀 안 그럴 것 같지만 천문에는 변이가 많다. 그럴 때마다 오윤부는 이를 정밀하게 살펴 고려왕실의 미래 운명과 관련지었다. 그는 특히 고려백성의 편에서 국왕 내외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천문현상을 활용했다는 혐의가 있다. 천문에 이상이 있을 경우 과거의 일관들은 기도를 권하거나 굿을 하라는 권고를 주로 했다. 다분히 미신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오윤부는 달랐다. 그가 제시한 해결방법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정치적이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백성의 원망이 없다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 두 곳에 파견한 왕지별감(王旨別監 왕의 특사)을 소환하고, 여러 곳에 설치된 공주식읍(公主食邑 원나라 공주에게 준 토지와 백성)을 폐지하면 되겠습니다.” 이런 권고를 듣자 왕은 한동안 망설였지만 마침내는 공주에게 줬던 식읍을 폐지하였다. 거기서 거둔 세금을 나라의 창고에 배속시켜 백관의 봉록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사실 원나라 공주는 왕을 졸라 각처에 농장을 마련해 호사가 극에 이르렀다. 그 뒷바라지를 하느라 수만 명의 백성들은 한숨을 짓고 있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오윤부는 백성들의 의사를 대변해 식읍의 혁파를 주장했다. 하늘뿐만 아니라 자연계의 변동도 오윤부는 마찬가지로 이용했다. 언젠가 한번은 궁궐 연못에 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산소부족이었든지 아니면 약물에 의한 중독이었을 것이다. 허옇게 배를 드러낸 채 물위로 떠오른 고기떼를 두고 오윤부는 충렬왕을 몰아쳤다.“갑술년(충렬왕 즉위년 1274)에 대궐 동편 못에서 이런 괴변이 일어났고 선왕이신 원종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청컨대 임금님께서는 덕을 닦으시고 스스로를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궁궐의 물고기가 죽든 살든 그것이 왕의 목숨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일관 오윤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칫하면 국왕이나 원나라 공주의 진노를 사게 될 거였지만 개의하지 않았다. 예언가 오윤부의 성공비결은 고려사회에 만연했던 반원적인 정서를 잘 이용했다는 점이다. 조정 대신들 가운데도 원나라의 정치노선에 반대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어찌 보면 충렬왕 역시 친원과 반원의 두 노선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했다. 그 틈을 비집고 오윤부는 한결 같이 자주노선을 지켰다. 그런 점에서 그는 묘청과 백수한의 후예였다. 그러나 오윤부는 묘청 등을 뛰어넘었다. 그는 일관으로서 하늘의 뜻을 왕에게 정확히 인식시켜야 될 임무가 있다고 확신했다. 만일에 왕이 자기의 ‘충언’을 듣지 않으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끝까지 졸라댈 정도였다. 오윤부의 해석은 유교의 재이론(災異論)에 가까웠다. 묘청 등이 불교적이고 무속적인 세계에 기울어 있었다면, 오윤부는 다가올 성리학 시대의 천문해석에 근접해 있었다는 말이다. 유교적인 천문예언가 오윤부의 고집불통에 충렬왕은 때로 두통을 일으켰다. ●충렬왕이 졌다! 왕은 오윤부를 골탕 먹일 생각까지도 했다. 원 나라 세조가 요동을 정벌하게 되었을 때다. 왕은 상국의 명령으로 마지못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까지 나가게 됐다. 우선 유청신을 황제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그 때 오윤부가 별점을 쳤다.“아무 날 유청신이 반드시 돌아옵니다. 임금님께서는 요동까지 가실 필요 없이 말머리를 서울로 돌리게 되십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됐는데도 유청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오윤부를 체포했다. 점괘가 틀렸으니 벌을 받으라 했다. 하지만 오윤부는 해가 아직 저물지 않았다며, 좀더 기다리자고 했다. 과연 얼마 안 있어 먼데서 먼지를 휘날리면서 달려오는 말 한 필이 있었다. 유청신이 타고 있었다. 예언이며 점이 설마 그렇게까지 용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천문현상은 그저 자연계의 변화를 알릴 뿐이다. 그것이 인간 세상에 복을 불러들일 리 만무하고 화를 초래할 수도 없다. 오윤부의 사고방식은 이런 현대적 인식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시대적 한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윤부는 늘 나라와 백성을 위해 천문을 살폈고, 그 때문에 민중은 그를 사랑했다. 신채호가 그를 가장 뛰어난 천문예언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그 때문이다. 다시 조선 정조 때 일어난 ‘정감록’ 사건으로 돌아간다. 이 사건의 공범인 평민 지식인 주형채도 오윤부처럼 별점을 보았다. 주형채는 말했다.“작년 섣달 초7일, 초8일, 초9일에 위성(危星), 실성(室星), 벽성(壁星) 앞에 20여 개의 별이 벽을 쌓고 늘어섰습니다. 그 속에 붉은 기운이 있었습니다. 장군성과 태백성이 서로 싸운 지 3일 만에 서로 1도(度) 거리로 떨어졌으며, 태백성이 어깨로 장군성을 떠밀어 여러 번 물러가고 나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정조,9년3월22일 신미) 주형채는 국가의 녹을 먹는 일관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윤부처럼 밤하늘의 별자리를 많이 알고 있었고 밤새워 별을 보았다. 별자리의 이동을 1도 2도로 따질 만큼 전문적인 지식을 갖췄다. 고려시대에는 오윤부 같은 특수 계층만 그런 지식을 독점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평민지식인들도 서적을 통해 공유하게 됐고, 그래서 주형채와 같은 평민도 직접 별을 바라보며 민중의 희망을 찾아 나섰다. 자유로운 지식은 곧 우리들의 희망이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11)일본 차의 유래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11)일본 차의 유래

    우리나라 가을이 마치 새빨간 화로에서 불꽃이 일 듯 아름다운 단풍의 계절이라면, 일본의 4월은 폭죽처럼 화려하게 터져버리는 벚꽃의 계절이다. 매년 4월이 되면 필자는 일지암 초의차문화연구원들과 함께 일본의 사스마야키를 방문해 차회를 연다. 사스마야키에는 14대 심수관가가 있는 곳이다. 우리는 그곳에 매년 초대되어 매화꽃이 휘날리는 아름다운 남중국해를 보며 차회를 연다. 일본과의 차회는 단순한 차회가 아니다.7년 왜란 속에서 치욕의 한을 안고 일본에 건너온 조선인 도공들의 혼과 넋을 달래는 것이다. 벚꽃이 휘날리는 화려한 생의 찬미와 그 이면에 깃든 우리 조선 도공들의 400년 아픈 넋을 눈물로 받아 차 한잔을 올리고 아득한 회한을 풀어내는 것이다. 겨우내 눈밭 속에 속눈을 감추고 누워 있던 초록 보리싹이 파릇파릇하게 피어날 때 떠나도 떠나도 머문 그 자리! 머물러 머물러 주저앉아도 시방을 떠도는 그 자리에 향긋한 차향에 실려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전해오는 도공의 혼들에 대한 귀향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일본은 참으로 가깝고 먼 나라이기도 하다. 일본은 세계적으로 차의 나라로 불린다. 중국이 미국을 상대로 ‘핑퐁외교’를 했듯,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차외교를 했기 때문이다. 일본을 방문한 미국의 지도자들을 상대로 한 일본 지도자들의 차외교는 세계적으로 일본의 정신문화가 매우 높은 경지에 있음을 선전하는 장이 되기도 했다. 일본차와 한국차의 관계는 매우 긴밀하다. 먼저 일본에 차를 전래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동대사요록에 따르면 백제의 행기 스님이 차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일본의 문화는 매우 후진적이었다. 일본과 가까웠던 백제의 스님들이 그 문화를 전파한 흔적들이 기록들로 남아 있는 것은 그같은 사실을 잘 말해준다. 차와 그 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차의 원류는 ‘초암차’다. 초암차에 일본다도의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일본다인들은 ‘와비’로 부른다.‘와비’는 우리말로 자득(自得), 한적한 정취, 소박하고 차분한 멋, 혹은 한거(閑居)로 설명할 수 있다.‘와비’는 부유한 귀족층이 많은 돈을 들여 호사를 자랑하며 물질적인 향락을 추구했던 것과는 반대로 가난함, 진지함, 청순함 속에서 화려함을 멀리한 정신세계를 추구했다. 당시 차인들은 한적한 곳에 소박하고 검소한 다실을 세우고 검박하고 자연스러운 조화를 추구했다. 이것이 바로 일본다도의 핵심인 ‘와비’의 정신이다. 일본차의 또다른 이야기는 바로 ‘말차’다. 일본 말차의 뿌리는 중국 송나라 때 황룡파에서 선을 배운 에이사이 선사다. 중국에서 선을 배운 에이사이는 당시 중국선가의 일반적인 차수행법이었던 말차법을 배웠다. 일본으로 귀국한 에이사이는 규수평호도 고춘원에 차의 모종을 심었을 뿐만 아니라 말차법도 함께 보급하게 되었던 것이다. 에이사이는 그가 모시던 가마쿠라 막부의 3대장군 미나모토 사네토모가 병에 걸리자 ‘끽다양생기’에서 말차를 “양생의 선약”이라고 하고 그 약용효과와 각성작용을 설명했다. 사네토모는 에이사이의 말차로 인해 그 병이 치료되자 일본의 ‘육우’로 받들여졌다. 에이사이 말차는 그후 그가 주석하던 가마쿠라 수복사, 교토 건인사 등 일본 선종사찰의 다례로 정착됐다. 말차의 보급은 에이사이에서뿐만 아니다. 당시 일본의 많은 승려들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차를 접한 그들은 일본으로 돌아와 차 문화를 조금씩 뿌린 것이다. 일본 최초의 차밭인 ‘히요시다원’의 기록은 805년 일본 승려 사이초에 의해 전해진다. 당나라에 유학을 간 사이초는 중국 천태산에서 차의 묘목을 가져와 일본의 히에이산에 재배했다고 한다. 헤이안시대 에이추 선사의 활약도 눈여겨볼 만하다. 에이추는 사가천왕에게 전차를 바쳤고 천왕은 그에게 긴끼지역에 황실전용 다원을 만들도록 했다. 가마쿠라시대에는 송대에서 유행했던 투다, 즉, 차 겨루기가 있었다.1332년 서로 대립되는 사원측의 사람과 귀중한 소유물을 걸고 하는 차겨루기가 일상화됐다. 찻물을 마셔보고 결과를 적던 채점표가 있을 정도였다.‘태평기’에는 “대숙소에 일곱 군데를 꾸미고, 일곱 가지의 차를 갖추어, 칠백 가지의 내기를 거는 물건을 쌓고 일흔 모금의 본비차를 마신다.”는 기록이 있다. 투다가 얼마나 일상화되어 있는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큰 차담기’(大茶盛) 풍습도 당시에 전해진다. 율종의 노장이었던 에이손 선사는 1239년 정월 보살도 정진을 마치고 차를 올린 뒤 그 차를 여러 스님들에게 마시게 했다. 이같은 다법은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서대사의 큰 차담기 시초가 됐다. 큰 차담기는 지름 30㎝가 넘는 큰 찻잔에 차를 담아 참가자들에게 마시도록 하는 차 잔치의 풍습 중 하나다. 차문화가 왕성하게 일본사회 전반에 스며들면서 무가정치는 새로운 전기의 일대 변혁을 맞이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하는 모모야마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때 일본의 차 산업은 꽃을 피운다. 우치를 중심으로 시즈오카 시미즈 일대에 차 산업이 본격화 됐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다방인 살롱문화가 정착되었다. 그것은 오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차 산업에 대한 관심과 보호 때문에 가능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직접 우치에 가서 다기와 차 만드는 것을 봤을 뿐만 아니라 차의 명가였던 모리집안에서 융숭한 차 대접을 받기도 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모리가에게 봉토를 부여하고 우치향에서 어차를 봉공하는 역할을 맡겼다. 당시 우치가에는 차를 섞는 가마가 48개, 그리고 차를 만드는 일꾼이 5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모모야마 시대는 차문화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시대였다고 보여진다. 일본의 대표적인 차인은 바로 센리큐 선사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 스승이었던 센리큐 선사는 불안정한 서민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거칠대로 거칠어진 무사들의 정서를 부드럽게해 안정적인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차를 보급했다. 센리큐는 다도를 권력 속에서 일상의 중생들에게 회향해냈다. 그래서 세상의 고통으로 마음이 황폐해진 중생들에게 마음의 평정·적정 경지를 안겨주는 아름다운 세상이 차의 예(禮)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노력했다.“끝없는 마음의 헤아림 다도와 함께 족하구나.”라고 노래했던 센리큐는 다도에 있어서 형식이나 규범보다는 ‘정성어린 깊은 마음’ 속에서 탄생하는 고요한 가라앉힘의 세계를 더욱 사랑했던 것이다. 센리큐는 차가 직접 사람들의 감각에 다다를 수 있는 창조적인 길을 꽃피워내고, 나아가 사람의 마음에 깊은 환희와 감동을 줄 수 있는 다구를 창안했다. 그리고 그곳에 꽃을 꽂아 차실의 우주를 새로 꾸리고 그것으로 점다(點茶)하는 이상향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센리큐는 저 우아하고 섬세한 아름다운 보석의 눈물 같은 고려다완, 가을날 청정한 호수 속에 어리는 안개 같은 청자를 즐겨 썼을 뿐만 아니라 다다미 두 장의 넓이에 소우주 같은 차실을 만들었던 것이다. 에도시대에 피어난 다도는 센리큐의 할복자살로 쇠퇴기를 맞이한다. 정치이념에 의해 좌지우지됐던 다도관이 불교에서 유교로 바뀌어지는 가운데 많은 유파들이 생긴다. 에도 말기부터 다인들은 직제화되었다. 다인들의 직제화는 일본다도의 계보화를 촉진시켰다. 오늘날 우라센케, 오모데센케이 등 일본 내 대표적인 유파들이 이때 탄생한 것이다. 메이지초기 일본의 다도는 사회변혁기를 맞아 단절상태에 빠진다. 개화와 개방이라는 사회적 혼란기를 맞아 차에 종사하던 관리들의 일터인 다이묘나 장군 등 후원자가 없어짐에 따라 실업자가 생겨 다도계가 불황의 늪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다도는 메이지 중기 대두된 내셔널리즘에 따르는 전통문화에 대한 자각과 다례의 재발견 때문에 살아났다. 다도의 후원자였던 대명 대신에 메이지유신으로 성장한 재계의 거물들이 다도에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다. 일본 다도 중흥의 기초는 1898년 다나카 센쇼유다. 일본다도학회를 창설, 스승에서 제자에게만 전수되던 밀밀의 다도를 대중화시키는 헌다행사를 창안, 성공시킨 인물이다. 일본의 다도는 아직도 ‘중생들의 정성어린 깊은 마음’을 사랑하는 센리큐 그 차체다. 그는 “다도를 행함에 있어 마음이 맑고 깨끗하도록 수행의 덕목을 쌓는 일이 중요하다. 고목이 눈에 의해 쓰러진 것처럼 서투른 솜씨 속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불완전한 미의 극치를 찬양했다. 센리큐는 차 한잔 속에 담겨진 정성과 인정의 향기, 그 속에 어린 손님과 주인의 마음이 화합으로 만나 이루어진 오묘한 소우주의 평정심이 진정한 차의 미학임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일깨우고 있다. 일지암 암주 ■ 일본차의 근원 초암차는 ‘김시습 茶’ 일본다도의 근원은 초암차(草庵茶)다. 차를 연구하는 많은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일본 다도를 대표하는 초암차의 연원을 매월당 김시습에서 찾고 있다. 김시습은 조선을 대표하는 차인 중 한 사람이다.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 머물며 ‘금오신화’를 집필하며 자신이 살던 초막 인근에 차나무를 직접 재배해 차를 우려 마셨다. 일본은 당시 경남지역, 특히 웅천 등지에 많은 일본인들이 무역을 하며 한국문화를 접하고 있을 때였다. 일본은 당시 조선과 외교할 수 있는 외교가로 일본승려들을 이용했다. 그들은 당시 중앙의 관료들뿐만 아니라 지방의 토호, 문인 그리고 유명한 스님들을 찾아 직접 교류하기도 했다. 그같은 일본승려 외교관 중 한 사람인 준초라는 스님이 1460년대 중후반경 경주 용장사에서 은거하고 있는 김시습을 방문했던 것이다. 당시 김시습은 하늘이 훤히 내다보이는 작은 암자에서 살고 있었다. 폭악무도한 세상에 대해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었던 김시습은 스스로 머리를 깎고 설잠이란 법명을 가진 승려가 되었다. 승려가 된 김시습은 이곳 저곳을 떠돌며 작은 초당을 짓고 차와 참선 그리고 집필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그런 김시습이 머물고 있는 암자는 그야말로 한평 남짓한, 그러나 온 우주를 담고 있는 담백함이 깃든 곳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암자를 감싸고 있는 또 다른 우주는 바로 화경청적한 자연이었다. 풀벌레 소리 들리고 나비가 훨훨 날아다니며 춤을 추는 그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마음을 내려놓고 마시는 차는 바로 자연의 완벽한 고요함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방바닥보다 낮게 설치한 땅화로, 찻사발 등은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일본차에 물들어 있던 준초라는 스님에게는 충격적인 것들이었다. 사료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승려는 그후 한 두차례 더 매월당 김시습을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시습은 그같은 사실을 ‘유금오록’이란 시집에 담고 있다.‘일동승 준 장로와 이야기하며’라는 시에서 김시습은 “고향을 멀리 떠나니 뜻이 쓸쓸도 하여/옛 부처 산 꽃속에서 고적함을 보내누나/최 차관에 차를 달여 손님앞에 내놓고/질화로에 불을 더해 향을 사르네/봄 깊으니 해월이 쑥대 문에 비치고/비 멎은 산 사슴이 약초 싹을 밟는구나/선의 경지나 나그네정 모두 아담하나니/밤새 오순도순 이야기할 만하여라.” 그같은 김시습의 차법을 준초등 일본승려들은 ‘선차’(禪茶)라 불렀다. 김시습의 선차는 작고 소박한 차실, 차마시는 법의 고요함과 자연스러움을 강조한 차선일미의 정신과 내용이 일치하는 일본 초암차의 근원이 되었다. 초암차는 간소하고 서민풍의 차법을 선보인 무라다 주코에서 시작돼 다케노 조 그리고 센노리큐에 의해 완성된다.
  • [종교플러스] 새달 28일 개성영통사 낙성법회

    불교천태종은 조선불교도연맹과 함께 다음달 28일 개성 영통사에서 낙성법회 및 남북불교학술회의를 개최한다.천태종 사회부장 김무원 스님은 최근 금강산에서 조선불교도연맹 정서정 서기장을 만나 이같이 합의했다.무원 스님은 “우리측에서 일단 200명이 방북하기로 했으나 방북인원을 350명까지 늘려달라고 북측에 제안한 만큼 인원조정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 빛고을 광주 佛心확산 나선다

    광주에 ‘젊은 불교’가 확산될까? 기독교세가 절대 우위를 차지하는 광주에서 젊은 불자들이 뭉쳐 불교 전파에 나섰다. 광주동구불교협의회와 현대불교신문이 주최하고 광주광역시 사찰 및 불교신행단체, 직장인불자회, 공무원불자연합 등이 연합한 ‘빛고을 불교아카데미’운영위원회가 주관하는 ‘빛고을 불교아카데미’가 다음달 10일부터 12월7일까지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광주 동구 KT센터 대강당에서 일반 불자들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열린다. 불자가 많지 않은 광주에서 불교 강연회가 매주 열리는 것은 처음이다. 그만큼 불자들을 모으기 힘들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최근 1∼2년간 직장 등을 중심으로 젊은 불교가 힘을 얻으면서 연합체를 구성, 대중강좌를 마련하게 된 것. 주제는 일반인도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부처님의 10대 제자와 행복한 삶에 대한 이야기’다. 아카데미 운영위 관계자는 “부처님의 10대 제자를 만남으로써 현대인들이 삶의 지혜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는 취지”라면서 “지속적인 대중강좌 추진을 통해 일반인에게 불교사상을 널리 알려 지역불교 발전에 초석을 닦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강사로는 10대 제자의 수행을 실천해온 미산·정무·현봉·혜거·자광·지운·호진·재연·도법·혜능 스님이 나선다. 참가신청은 불교아카데미 사무국(062)234-27342∼3).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사극속에 숨은 즐거운 물음표들

    사극속에 숨은 즐거운 물음표들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전하∼, 망극하옵니다.’식의 독특한 발성과 왕조실록 등을 바탕으로 구중궁궐의 암투를 담은 사극은 이제는 떠났다. 사극의 옷을 입돼, 현대식 테마를 슬며시 차용하기도 한다. 국악이 아니라, 가요나 오케스트라가 배경 음악으로 쓰이기도 한다. 애절한 러브 스토리에 중국 무협 액션을 보는 듯한 장면도 필수. 명칭도 퓨전 사극으로 바뀌고 있다. 과거를 배경으로 했지만, 진부한 설정의 현대극보다 상상력이 넘쳐난다. 그래서 요즘 사극은 재미있다. 최근에도 막대한 물량을 투입하고 있는 MBC ‘신돈’과 SBS ‘서동요’가 야심차게 출발했다. 이 드라마들이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는 독특한 재미는 무엇이 있을까.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신돈, 단걸음에 천리를 달렸다? 매섭게 노려보자 바닥이 갈라지고 상대방은 목을 감싸쥐며 숨을 헐떡인다. 마치 영화 ‘스타워즈’에서 다스 베이더가 보여주는 ‘포스’같다. 저자거리에서 장정 여럿이 덤벼도 무협 고수도 서러워할 정도의 360도 회전 발차기로 쓰러트리고, 지붕 위로 훌쩍 뛰어오르는 경공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극 맞아? 신돈 맞아?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다간 인물을 재해석한다는 이유로 정통 사극을 떠올렸다면 다소 황당하겠지만, 여기에 드라마적 재미가 있다.KBS ‘태조 왕건’에서 종전과는 달리 그렸던 궁예처럼,23일 시작한 MBC 대하사극 ‘신돈’의 포인트는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신돈, 또는 우리가 알아야 할 신돈, 바로 신돈이라는 인물 그 자체다. 그동안 신돈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나라를 망친 요사스러운 승려. 박종화의 소설 ‘다정불심’에서도 요술을 부리는 요승으로 묘사됐을 정도다. 하지만 최근 역사 교과서에서는 공민왕이 개혁을 위해 등용했으나, 기득권 세력 때문에 꿈을 접은 인물로 기술되고 있다. 이번 드라마에도 마찬가지.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스님이 되지만 답답한 계급사회를 뒤집어 새 세상을 만드려는 개혁가로서 성장하는 모습이 그려질 계획이다. 때문에 극의 흐름이 최근 퓨전 사극에 비하면 정통 사극에 가까울 정도로 무겁다. 무거움을 상쇄시키고, 신돈에 대한 친근함을 심어주기 위해 도술이나 무예 등 판타지적인 요소가 보태진다. 상대적으로 범상치 않은 신돈의 능력과 계급사회라는 굴레를 대비시키려는 계산된 설정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평생 신돈을 보필했던 원현은 1부에서 신돈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려 하자,“안광으로 바위를 가르고 단걸음에 천리를 달리는 그 도력은 다 어디에 쓰실 겁니까.”하고 외친다. 이제 젊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중국으로 고행을 떠나게 될 신돈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서동요, 백제시대에 찜질방이 있었다? SBS ‘서동요’는 너무나 친숙한 설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고 있다.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백제 왕자와 신라 공주 사이의 로맨스가 기본 골격이다. 때문에 말랑말랑하다.‘허준’ ‘대장금’ 등 대박을 터뜨려왔던 이병훈 PD도 이번 드라마에서는 사랑 이야기를 강조해보겠다고 했다. 이 PD와 김영현 작가가 덧붙여 새로 시도하고 있는 것은 사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은 백제의 기술과 문화에 대한 신선한 묘사다. 27일 방송된 7부에서 눈에 띄는 장면이 있었다. 한국인이 즐겨 먹는 두부의 기원에 대한 독특한 해석이다. 두부의 유래는 불분명하지만 중국설이 유력하다. 기원전 2세기 한무제 당시 문헌에서 처음 등장한다고 하고, 이후 존재를 감췄다가 당나라 말기와 송나라 초기 사이에 다시 언급된다. 국내에서 두부가 기록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려말. 제작진은 백제인이 우연히 두부를 만들어 먹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백제 태학사의 기와제조 기술자 맥도수가 우연히 두부로 추정되는 것을 만들어 먹고는 “맛이 좋다.”며 술안주로 삼는 장면을 내보냈다. 지난주 방송된 6부에서는 역시 맥도수가 “가마의 불을 끄고 이틀 뒤 사람이 들어가면 땀이 난다.”면서 “일주일에 두 번 정도하면 만병이 낫는다.”고 말한다. 또 “거기에 달걀을 구워 먹으면 맛이 좋다.”고 덧붙인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불가마 찜질방의 유래를 역사 속에서 재현해본 것이다. 앞으로도 ‘서동요’는 합금 방패, 갑옷, 강철단련법 등 무기가 진화하는 과정과 온돌 등 다양한 과학기술의 기원을 만들어가며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끌 예정이다.
  • [여의도in] 朴대표 ‘울다가 웃다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불교계 지도자로부터 ‘쓴소리’와 ‘단소리’를 함께 들었다.28일 국회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권한대행 현고 스님과 수덕사 수좌 설정 스님, 수경 스님 등 불교계 지도자들과 만나 최근 입적해 장기 기증을 한 법장 스님을 애도한 자리에서다. 수경 스님은 “불교는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 기대할 것이 없다.”면서 “그런데 밖에서 보기에는 한나라당도 마찬가지다.”라고 쓴소리를 했다. 수경 스님은 이어 “여야가 민생을 위한 정치를 안하고 정쟁만 한다.”고 지적한 뒤 “그런데 박 대표는 좀 낫더라.”라고 평가했다. 현고 스님은 “나는 정치를 잘 모른다.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훌륭한 지도자가 나와서 사회를 변화시켰고, 국민들을 변화시켰고, 굶주림에서 해방시켰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그 새마을운동이 빛을 바래고 있다. 안타깝다.”면서 “손해보는 일이 있더라도 큰 틀에서 정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데스크시각] 법장 스님이 사리 대신 남긴 것은/임창용 문화부 차장

    다비식 없는 스님 입적은 왠지 쓸쓸하다. 절집 너른 마당에서 ‘스님 불 들어갑니다….’란 불제자의 소리와 함께 육신을 태우며 열반에 들어야 제격이 아닌가? 다비식후 수습된 영롱한 사리들. 중생들은 이를 보며 스님의 강철같은 수행력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데 최근 입적한 법장 스님이 다비식도 없이 법구를 의대에 기증했다. 스님, 그것도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대종사 스님의 시신이 다비식도 없이 의대생들의 해부용 칼에 맡겨진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할까? 다비(茶毘)가 무엇인가. 사전적으론 단순히 ‘시신을 불태운다’ 즉 화장이다. 하지만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고 ‘초탈’을 강조하는 불교에선 미혹의 근저에 남아 있는 티끌까지 태우고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뿐인가. 속되게 생각한다면 수만 사부대중의 극락왕생 축원 속에 치러지는 다비식은 승려로서의 마지막 ‘호사’가 아닌가? 이 모든 것을 마다한 법장 스님이 영롱한 사리 대신 남긴 것은 무엇일까? 입적 전 말씀과 행적을 살펴 미루어보건대 스님은 여러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 종교계에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남긴 것 같다. 바로 ‘실천과 포용’의 정신이다. 불교든 기독교든 한국 종교계의 가장 고질적 병폐중 하나는 지나친 자기중심적 종교생활이라고 한다. 남을 이롭게 하는 대신 자신의 이득과 복을 구하기 위해 교회에 다니고, 절을 찾는다. 속된 말로 ‘기도발’ 잘 받는다는 절과 암자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리고,‘예수 안 믿으면 지옥간다.’고 협박하는 목사 앞에 겁먹은 사람들이 꼬인다. 법장 스님이 평소 강조한 것이 바로 실천적 불교 보급이다. 지난 7월 법장 스님 일행을 따라 타이완의 생활불교 현장을 둘러본 적이 있다. 그때 타이완 최대 종단인 포구앙산스를 창건한 싱윈 스님이 ‘수행력은 다름 아닌 자비의 실천력’이라고 한 말에 법장 스님이 공감을 표했던 생각이 난다. 승려가 먼저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맞고, 즐겁고 편안하게 해주고, 봉사에 앞장설 때 신도들도 자신만을 위한 종교에서 벗어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 같다. 자비와 사랑의 실천보다는 타인과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행위가 판치는 우리 종교계의 현실은 실로 아타까울 정도다. 얼마전 집에서 TV를 보다가 한 종교채널에서 어이없는 장면에 부닥쳤다. 종교가 없는 내게 종교방송은 영 눈길을 끌지 못하는데,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포복절도하듯 웃는 방청객들 모습이 궁금증을 자극했나 보다. 강사 얼굴이 눈에 익었다. 요즘 한 공중파 TV가 인기리에 방송중인 프로에 출연하는 목사님 아닌가. 그는 시종일관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재담으로 타종교, 타종파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었다. ‘108번뇌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게 바로 109번뇌란 말요’‘드넓은 대웅전을 부처님 혼자 차지하고 있다니, 욕심도 많으시지’ 등등. 사랑을 전파해야 할 성직자가 어떻게 이런 억지 코미디로 타종교를 욕보일 수 있을까. 더구나 방송이라는 공기(公器)를 통해서 말이다.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긴 한국 불교도 여기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절에 한 번 가보자. 탑이 신기하고 대웅전 내부가 어떻게 생겼나 궁금해 아무리 기웃거려도 어떤 스님 한 분 다가와 들어와보라고 하는 곳이 없다. 이런저런 설명과 함께 따뜻한 미소로 방문객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는 것 또한 자비의 실천일 것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한국 불교는 내향적, 나아가 배타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법구를 중생을 위한 ‘실험재료’로 던진 법장 스님의 메시지는 따끔한 죽비다. 사랑과 자비에 인색한 우리 종교계, 나아가 물질만능주의를 숭배하는 현대인들이 ‘화들짝’ 놀라 깨어나게 하려는 죽비 말이다. 법장 스님 입적후 장기 기증을 서약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꼬리를 물고 있다 한다. 스님이 영롱한 사리 대신 남긴 ‘보이지 않는 죽비’가 효험을 발휘하고 있나 보다. 임창용 문화부 차장 sdragon@seoul.co.kr
  • 조해녕 시장등 지도층 31명 대구투명사회협약 체결

    대구지역 공공·지방의회·경제·시민사회 등 4개 부문의 대표 31명은 27일 대구엑스코에서 ‘대구투명사회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에는 공공부문에서 조해녕 대구시장과 신상철 대구시교육감, 홍 철 대구경북연구원장 등 5명이, 지방의회 부문에서 박성태 대구시의회 부의장 등 2명이 각각 서명했다. 또 경제부문에 노희찬 대구상공회의소 회장과 김문기 대구경영자총협회장, 이인중 화성산업㈜ 회장 등 12명이, 시민사회부문에 동화사 주지 지성스님과 원유술 천주교 범어성당 주임신부, 이창기 대구흥사단 회장, 윤귀분 대구YWCA 사무총장 등 12명이 각각 서명했다. 이들은 관주도형 반부패대책에서 민·관이 함께 하는 반부패시스템을 구축하고, 지방의회내 윤리위원회 설치 등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키로 했다. 이와 함께 기업과 시민단체, 종교계 등은 윤리강령을 제정하고, 사회 전반의 부패문화를 없애는 데 동참키로 했다.대구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족상보는 미모의 전직여교사

    족상보는 미모의 전직여교사

      확대경을 손에 쥔 손이 창백하리만큼 새하얗다. 곱상한 얼굴, 미인형이다. 서울 서대문구 한구석의 담뱃갑만한 골상소(骨相所) 내실. 젊은 여류역학자는 골상도 수상도 아닌, 바로 족상(足相)에 심취해 있다.『구정 원단(元旦)엔 족상을 봅시다』신종 족상소의 열띤 개점사(開店辭) - . 대학나온 젊고 예쁜 미망인이 냄새나는 발도 주무르며 『발은 나무에 있어 뿌리와 같은 것입니다. 몸을 받치고 또 걸어다닐 수 있도록 버팀으로써 막중한 소임을 맡고 있죠. 골상(骨相)과 수상(手相)에 못지 않게 발의 형태는 그 삶의 운명을 점치는 하나의 예시적, 영감적 존재로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임경산(林景山)(여·35) 족상가는 열을 올린다. 미모 - 서른 다섯의 젊은 미망인. 대학 출신에다 전직이 여학교 교사라는 좀 별난 이력서가 이 여자「관상장이」를 감싸고 있다. 전문이 골상과 수상인데 이번에 업종을 하나 더 추가, 족상업을 차렸다. 서대문에서 아현동으로 이르는 큰 길목, 옛「코리어·호텔」옆 후미진 자리에 자리잡은 임경산 골상소. 손님이 많다. 양말을 벗고 알몸뚱이(?)가 된 발을 내맡긴다. 확대경이 발의 구석구석을 답사하고 나면 미녀 족상가는 이윽고 발을 주무르기 시작한다. 발의 경도(硬度), 두께, 전체 모양 등을 샅샅이 검열하는 것이다. 『수상이나 족상은 허망한 미신이 아닙니다. 확고한 통계적 학문이에요. 파란만장한 인생항로에 있어 시기의 성쇠라든지, 직업의 적부, 또는 선천적 능력의 대소 같은 게 없을 수 없잖아요? 여기에 태국,「프랑스」, 독일, 일본 같은 데서 오히려 성행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족상을「통계적 학문」에다 얽어 맨다. 수상이 초·중·말의 유년법(流年法)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반해 족상은 영구불멸의「대활(大活)」이 제1의. 수상이「가변(可變)」이라면 족상은「불변(不變)」인데 그 기저(基底)가 있다고 했다. 임경산씨가 역학을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나서부터였다. 향리인 충북의 D시에 사숙하던 스님이 한 분 있었는데 자신의 운명이 스님의 예언과 너무나 일치되어 버린데 감명, 재혼 대신 역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년. 이제는 사주·골상·수상에다 족상까지 섭렵하여 명실공히 역학계의「명인좌(名人座)」에 올랐다고 자부할 정도. 발바닥에 털 있으면 귀인상이요 사마귀 있으면 큰 무사감 사람의 발엔 방향(芳香)이 있다. 특히 도시 남성의 그것은 말할 수없이 썩은 향내를 종횡무진 풍기고 있다. 그 냄새나는 발에 내밀히 감춰져 있는 운명과 신비의 의미를 발굴해내는 작업이 족상이란 이름의 역술(易術). 옛날 중국의 안녹산(安祿山)은 두 발바닥에 사마귀가 있었다. 얼마 전에 작고한 국군 창설의 유공자인 K장군 발바닥에도 큰 사마귀가 있었다. 족상에서 사마귀는 무장(武將)운. 발바닥에 털이 나면 대귀(大貴)상인데 중국 한문제(漢文帝)가 그랬다. 족상에서 옛 중국의 실존인물들이 예거되는 것을 보니 그것의 역사는 수상과 함께 꽤 오래된 모양. 임경산씨는 69년을「족상보는 해」로 스스로 설정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골상과 수상만이 일반에 광범히 뿌리박고 있었는데 골상은 기실 족상이 뒤따라야 진면목이라는 것. 『발금은 거짓이 없어요. 있는 그대로의 운명과 성질을 무언중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족상이야 말로 진실의 학문이지요』 족상은 보통 족형(足形)과 족문(足紋)으로 이루어진다. 수상이 생명, 두뇌, 감정, 운명, 태양, 재운, 건강, 방종, 인기, 수경(手頸), 총애, 피로, 장해, 화성(火星), 영향, 희망, 원조, 금성(金星), 자녀, 직감 등 21선의 수장(手掌)선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비하면 족상은 그「폼」이 간단한 셈. 발은 방정하게 생기고 두터우며 길고 보드라운 것이 길상(吉相)이다. 무늬가 글자 모양으로 된 것, 사마귀가 있는 것, 빛깔이 윤택한 것 등은 모두 좋은 상이며 반대로 짧고 작은 것, 얇거나 거친 것, 단단한 것, 무늬가 없는 것 등이 천상(賤相)으로 평가되고 있다. 『옛날 이태백은 발바닥에 거북무늬가 있었다고 합니다. 거북무늬나 비단무늬 같은 것은 다 길상이지요. 탐스러운 꽃무늬도 좋은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골상소 개업 10년 만에 족상소를 개설한 이「여류」의「족상관」은 자신과 신념으로 싸여 있다. 자신의 족상은 백발백중이라고 기염. 입시「시즌」과 구정을 맞아 임경산 골상소는 그야말로 초만원, 족상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금년은 천대만 받던 발이 햇빛을 보게 되는「족권신장의 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발의 두께 4치 넘으면 거부(巨富)상이요 발가락이 길면 어진 사람 ◇ 족형의 판단 ① 발의 두께가 네 치(4寸)를 넘으면 거부의 격이다. ② 발가락이 가늘고 길면 충량하고 어질다. ③ 발가락이 고르고 단정한 것은 호걸이며 현인의 상. ④ 남자가 오리다리 같으면 평생 어리석고 천하며 여자가 오리다리이면 남의 첩이나 종노릇을 한다. ⑤ 발이 커도 얇거나 발바닥이 평평한 것은 비천하다. ⑥ 귀인의 발은 작아도 두텁고 비천한 사람의 발은 커도 얇다. ⑦ 발바닥 아래로 거북이 들어갈만하면 부귀를 얻는다. ◇ 족문의 판단 ① 발바닥에 꽃무늬가 있으면 재산을 많이 모은다. ② 발바닥에 거북무늬나 비단에 수놓은 무늬 같은 것이 있으면 다 좋은 상이다. ③ 열 발가락이 모두 둥근 무늬면 성격이 야비하다. ④ 발바닥에 무늬가 많으면 크게 자손이 번창한다. 무늬가 전혀 없으면 가난하다. ⑤ 발바닥의 십자(十字)문, 금(禽)문, 인형(人形)문, 도형(刀形)문은 모두 고관대부의 격이다. ⑥ 열 발가락에 모두 무늬가 없으면 파재(破財)가 많다. ⑦ 발가락 여덟 개에 소라무늬가 있는 것은 부귀할 격이다. 그러나 열 발가락이 모두 소라무늬면 오히려 성품이 야비할 상이다. [ 선데이서울 69년 2/16 제2권 7호 통권 제21호 ]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10)명차(名茶)와 설화(說話)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10)명차(名茶)와 설화(說話)

    “진정으로 묘한 작용 알고 싶다면 일상생활에서 천연을 섬겨라. 물 길어 차 달여 마시고 자리에 올라 다리 뻗고 잠잔다. 솔개는 날아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고 물고기는 뛰어올랐다가 깊은 못속으로 들어간다. 만물은 그지없이 활발하여 잠시도 중단되는 일 없으니 푸른 구름 먼 산마루에 일어나도다.” 우리나라 다승중 한 분인 보우선사는 ‘차’의 정신을 선가의 정신인 ‘평상심시도’에 비유한 선시를 남겼다. 차의 진정한 묘용은 바로 차의 일상성에 있다. 학교에서든 직장에서든 차를 마시는 법식은 따로 없다. 그저 차를 마실 수 있는 잔에 찻잎을 띄워 그냥 필요할 때 마시면 된다. 그러나 차를 마실 때는 차에 깃든 일상의 도를 생각해야 한다. 수단선사의 ‘다당청규’는 ‘화경청적’의 묘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중국의 대선사로 불리는 양기선사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던 수단선사는 10년이 넘도록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낙심한 수단선사는 양기선사의 문하를 떠나기 위해 하직인사를 했다. 수단선사의 모습을 본 양기선사는 그의 수행이 충분히 익을대로 익었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스님 차나 한잔 하고 가십시오 양기선사는 수단선사에게 “스님 떠나시더라도 차나 한잔 하고 가십시오.”라고 말했다. 마음이 바빴던 수단선사는 차를 내오는 시자스님에게 “나는 갈길이 바쁘니 빨리 차를 가져오라.”고 청했다. 수단선사는 시자스님이 가져온 차를 급하게 마시다 그만 목에 걸렸다. 목에 걸린 차 때문에 고통을 받던 수단선사는 차의 향기가 코로 스며들어오는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을 얻은 수단선사는 ‘명선’(茗禪)이란 공안과 ‘다당청규’를 제시했다. 수단선사는 ‘다당청규’에서 “처음에 정좌하여 호흡을 조용히 한 다음 세 번 깊게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쉰다. 몸의 탁한 기운을 다 빼는 것이다. 그리고 입을 다물고 코로만 호흡한다. 마음을 가라앉혀야 호흡도 가라앉는다. 희로애락에 마음이 쏠려 기분이 들떠 있거나 가라앉아 있으면 호흡을 제대로 할 수 없다. 호흡을 들여다 내 뿜어야 한다. 그러면 일상에 들떠 있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다.”고 말하고 있다.‘화경청적’의 묘용은 일상속에서 차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가라앉은 내면은 온화한 얼굴이 되며 평온한 마음을 통해 활력있는 일상과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약 5000여종의 차가 있는 중국의 차 이야기는 무궁무진할 정도로 많다. 그중 옛날부터 전해오는 명차와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개해 보겠다. 우리는 그 수많은 명차들 속에 당시대를 살다간 민중의 피와 땀이 배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명차엔 중생들의 피와 땀이 황제의 나라 중국에서는 ‘공다원’같은 공적인 기관을 두어 차를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차가 귀한 공물이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공다원’ 같은 기관에서는 공차를 5등급으로 분류했다고 한다. 그중 가장 어려웠고 민중을 수탈했던 것은 첫물차를 공납하는 것이었다.‘급정차’(急程茶)이야기는 그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잘 상기시킨다. 공다원에서는 첫 번째 청명 10일전에 차를 황제가 살고 있는 장안으로 운송해야 했다. 차를 운송해야 하는 장흥에서 장안까지는 4000리 정도. 당나라때 교통조건을 따진다면 10일 안에 도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절강북쪽 지구에 속하는 장흥은 기온이 다른 곳보다 낮아 봄이 늦게 오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에서는 종묘제사에 쓸 공차를 청명 이전에 장안에 보내라고 했던 것이다.‘급히 운송한 차’라는 점에서 ‘급정차’라고 불렸던 그 차에 대해 호주자사 원고는 “걸핏하면 천금을 내라고 하니 백성들은 날로 빈곤해진다. 내가 고저에 온 후로 찻일을 알게 되었는데 바삐 농사 짓고 차 채집하는 일은 너무나 힘들다. 사람들은 노동을 위해 온 방 가득 모여든다. 하루종일 채집해도 다 채우지 못하고 손에는 온통 주름이 잡힌다. 비탄의 소리는 산을 울리고 초목은 봄을 맞지 않는다. 어두운 언덕에 싹 아직 안 돋았어도 관리들은 조급히 재촉한다. 망망한 푸른 바다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디에 토로할까”라고 차공납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망망한 차의 대해로 불리는 중국에서 명차가 탄생한 이면에는 이같은 중생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죽은사람도 살린다는 ‘선약´ 중국차의 전설은 몽정산의 몽정차로 시작된다.‘동다송´ 19절에 “육안차는 맛이요 몽산차는 약이다.”라는 구절이 있듯 몽정차는 그 어느 차보다 약성이 두드러진 차다. 몽정산 상청봉에서 나는 몽정차는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선약’이라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로 뛰어난 약성을 보유하고 있어서 ‘길상예’‘성양화’라고도 부른다. 감로보혜선사가 몽산 상청봉아래 일곱 그루를 심어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는 몽정차는 맛이 달고 맑으며, 그 빛은 황금빛을 띤 푸른색으로 향기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당나라대 문헌인 ‘국사보´에서는 몽정차를 황차 가운데 가장 뛰어난 차라고 적고 있으며 뇌명, 무종, 석화, 감로, 자설, 백호, 미아, 황아, 능백 등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중국의 대표적인 녹차는 동정 벽라춘이다. 춘분에서 곡우 때까지 따는 벽라춘은 아주 어린 잎으로 만든다.1등급에서 7등급으로 나뉘는 벽라춘은 1등급 한 근에 어린 찻잎과 싹이 약 6만 5000개 가량 들어있고,2급의 벽라춘에는 5만 5440개 정도의 찻잎과 차싹이 들어있다. 참으로 놀랍고 어마어마한 차인 벽라춘은 짙은 향기와 신선한 맛을 지니고 있다. 우려낸 차의 빛깔도 선명한 벽록색이며 어린 차싹과 잎은 여린 녹색 비취 빛이고 그잎의 모양은 소라고동처럼 구부러져 있어서 ‘일눈삼선’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기도 하다. 오늘날 마치 중국차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오룡차’는 중국 푸젠성에서 생산되는 무이산 암차가 그 원류이다. 푸젠성 숭안현 남쪽에 있는 무이산은 그 자연환경이 차의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진 곳으로 유명하다. 무이암차에는 육계, 수선, 오룡, 철라한, 대홍포, 기란, 매점 등의 차가 있다. 그중 가장 뛰어난 것이 바로 육계와 수선, 그리고 오룡차이다. 무이암차는 봄과 여름 두철에 걸쳐서 찻잎을 채취한다. 무이암차의 찻잎을 따는 기준은 녹차와는 다르다. 녹차는 어린 차싹과 찻잎을 따지만 무이암차는 다 펼쳐진 찻잎을 딴다. 찻잎을 너무 일찍 따면 무이암차의 독특한 향기와 맛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운남 보이차도 명차 중 하나다. 운남의 대엽종 찻잎으로 만드는 차인 보이차는 보이현에서 모아 출하하기 때문에 보이차라는 이름을 붙였다. 보이차는 발효성분과 타닌성분이 많아 그 차맛은 아주 진하며 자극성이 있고 여러차례 우려낼 수가 있다. 보이차는 잎을 채취하여 차를 만드는 시기로 구분하는데 그 시기에 따라 어린 잎의 부드러운 정도가 차이가 난다. 차를 따서 만드는 시기에 따라 춘첨, 춘중, 추미, 이수, 곡화 등의 이름이 붙는 것이다. 보이차는 크게 산차와 고형차로 나눈다. 그 형태와, 어린잎 센잎을 섞는 비율의 기호도는 판매되는 곳의 습관에 따라 다르다. 만두와 같이 생긴 타차, 아주 단단하게 만든 긴차, 떡차인 병차, 칠자병차, 그리고 둥글거나 네모진 형태의 벽돌처럼 만든 박차…. ●안계철관음 과일향처럼 은은 안계철관음 역시 중국에서 오랫동안 내려온 명차로 인식되고 있다. 안계철관음은 푸젠성 안계현에서 생산되는 차로 높은 향기가 오랫동안 유지될 뿐만 아니라 차맛이 달고 입안을 시원하게 해준다. 또한 마신 뒤에는 입안에 과일의 향기와 같은 향이 감돌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찻잎은 4계절에 걸쳐서 따는데 시기에 따라 봄에 따는 춘차, 여름에 따는 하차, 더울 때 따는 서차, 그리고 가을의 추차로 나눈다. 철관음을 우려낸 차의 탕색은 금빛이 감도는 선명한 등황색이고 잎은 두텁다. 두터운 찻잎이 원래 차나무 잎보다 무겁기 때문에 철관음의 ‘철’자가 붙었다고 한다. 부드러운 은빛털이 빛나는 ‘황산모봉차’도 명차다. 황산모봉차를 처음 보는 사람은 놀란다. 작고 흰 은빛털이 온몸에 감고 있어 마치 여우털이나 밍크를 온몸에 감고 있는 귀부인을 연상시키기 대문이다. 특급에서 3급까지 나뉘어지는 황산모봉차는 또 높은 향기와 부드러운 맛을 자랑한다. 찻잎의 색깔은 황록색이고 우려낸 탕색은 맑고 투명하다. 어린 황산모봉차의 찻잎을 차호에 넣고 더운 물을 부으면 차호 안에서 찻잎이 물위에 둥둥 뜨다가 계속해서 물을 부으면 천천히 차호에서 가라앉는다. 이밖에도 청대에 이르러서 황실에 바치던 귀한 차인 군산은침차는 첨차와 용차로 구분되었으며 차싹이 검과 같고 흰털 난 것이 녹용과 같은 모습인데 조공되는 차는 첨공이라고 했다. 안후이성 남단에서 나오는 기문홍차도 중국 10대 명차의 반열에 속한다. 기문홍차는 흔히 ‘기홍’이라고도 부르며 꽃다운 향기가 넘치고 단맛이 돌 뿐만 아니라 신선한 차맛을 자랑한다. 이밖에도 가슴속을 향기로 가득 채우는 동정오룡차, 다성 육우가 극찬했던 대로 자줏빛 차움이 아름다운 고저자순차, 중국최고의 다완으로 불렸던 천목다완과 너무도 잘 어울렸던 여향경산차, 높고 깊은 푸른 하늘을 담고 있다는 천목산의 청정차 등은 중국을 대표하는 명차들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중국의 시인들은 명차중 하나인 ‘경정차’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그 모습은 작설과 같은데 백호를 보이니/비취빛 어린 잎 향기도 짙어라/부드럽고 순한 맛이 가슴을 적시고/넘치는 샘물 담은 잔에 눈꽃이 핀다.” 일지암 암주 ■ 장쑤성 동정산 벽라춘 중국을 대표하는 명차들에는 아름다운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얽혀 있다. 몽정산의 몽정차, 용정산 용정차 등에는 각기 그럴듯한 전설들이 전해진다. 중국의 명차중 장쑤성의 벽라춘이라는 차가 있다. 벽라춘은 장쑤성과 동정의 동·서쪽산 일대에서 생산되는 아주 어린 잎으로 만든 차로, 탕색은 푸른 녹색에 천연 꽃향기와 과일향의 맑고 그윽한 품위 있는 차향이 나고 신선하고 상쾌한 맛이 있고 마신 후에는 단맛이 난다. 그런 벽라춘에는 한폭의 수채화 같은 아름다운 차이야기가 숨어 있다. 먼 옛날 태호 동정산에 아름답고 착한 처녀인 벽라가 살고 있었다. 벽라는 동정산을 대표하는 노래꾼이었다. 노래를 부르기 좋아한 벽라는 고기를 잡거나 농사를 짓는 중생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벽라의 노래에는 중생에게 노동의 피로를 잊게 하는 신기한 힘이 있었다. 동정산에는 무예가 뛰어나고 의협심이 강하나 고기잡이로 생계를 꾸려가는 착한 청년 아상이 살고 있었다. 아상은 벽라의 노래를 좋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큰 재앙이 닥쳤다. 태호에 살던 나쁜 용이 아름다운 벽라가 탐이나 아내가 되어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그 요구를 거절하자 용은 바람과 불을 일으켜 마을과 배를 폐허로 만들었다. 벽라를 구하기로 마음먹은 아상은 용을 잡는 작살을 들고 밤낮없이 7일 동안 싸워 이겼다. 그러나 용에게 깊은 상처를 받은 아상의 목숨은 경각에 달렸다. 벽라는 자신을 위해 싸운 아상을 깊은 정성으로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상의 병은 깊어만 갔다. 깊은 시름에 빠진 벽라는 아상을 생각하며 용과 싸운 곳을 서성이다 작은 찻나무를 발견했다. 벽라는 그 찻나무를 아상을 위해 매일 가꾸기 시작했다. 벽라의 정성을 들었음인지 경칩이 지나자 그 차나무에서는 어린 찻잎이 움트기 시작했다. 어린 찻잎이 얼어붙을까봐 벽라는 매일 아침 그곳에 가서 한번씩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어 주었다. 청명이 지나자 그 차나무는 차잎을 풍성하게 갖추기 시작했다. 벽라는 그 차나무를 바라보며 “이 차나무는 아상의 선혈과 내 입의 온기로 자란 것이다. 이 찻잎을 따다가 아상에게 마시게 하면 그 병이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벽라는 아상을 위해 여린 잎을 한잎 따서 차를 만들어 아상에게 권했다. 그 찻물을 마신 아상은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벽라는 매일 여린싹을 한 줌 뜯어 품에 넣고 자기체온으로 잎을 말려 차를 만든 후 아상에게 끓여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상의 간호에 너무 정성을 기울인 나머지 벽라는 아상의 품에서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슬픔에 젖은 아상은 벽라의 시신을 동정산 차나무 옆에 묻어 주었다. 사람들은 벽라와 아상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그곳에서 나는 차 이름을 ‘벽라춘’이라고 불렀다.
  • 산사에서 부친 편지/경봉·성철스님 외 지음

    산사에서 부친 편지/경봉·성철스님 외 지음

    ‘돌아보면 저에게 남는 것은 방안에 걸어둔 붓 한 자루와 낡은 서책 몇권, 그리고 내 몸을 근질근질하게 하는 쥐벼룩 몇 마리가 전부일 뿐, 한평생 살아온 삶의 무게가 오직 그것뿐입니다. …. 종주의 청장(請狀)을 제가 받는다면 이는 망령된 짓입니다. 차라리 뒷방이나 비워두시면 살아생전 함께 모여 정담이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종주를 맡아달라는 경봉 스님의 청에 한암 스님이 ‘무소유의 꿈’을 담아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이다. 통도사 주지를 지낸 경봉(1892∼1982) 스님은 입적 전 당대의 고승들과 수많은 한자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편지 하나하나가 주옥같은 문장들로, 삶을 깨우쳐주는 화두들로 채워져 있다. ●경봉스님이 당대 고승들과 주고 받은 편지 묶어 43년간 경봉 스님을 스승으로 모셨던 통도사 극락선원장 명정 스님이 이 편지들을 현대어로 옮기고, 정성욱 시인이 말을 다듬어 엮은 책 ‘산사에서 부친 편지’(노마드북스 펴냄)가 나왔다. 한암 스님을 비롯해 경허, 성철, 만해, 효봉, 청담 스님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 큰스님들과 주고받은 편지 130여통을 담았다. 경봉 스님은 118명이 쓴 총 260여통의 편지를 남겼는데 그중 판독이 가능한 것들을 추렸다. 색이 바래고 때론 쥐똥이 묻은 편지, 찢은 도포자락이나 죽순잎, 나무껍질 등에 쓰여진 글도 있었다. 편지들은 한마디로 우리 한국불교의 귀중한 역사이며 산 증거들이다. 신새벽 감로수에 먹을 갈아 한 소식 한 소식 툭툭 던지듯이 오가는 문답이며, 절집 살림살이, 대웅전 뒤 대숲을 스치는 바람소리, 긴 밤 시름을 쏟아내는 풍경소리를 버무려 닦은 큰스님들의 글들은 마치 잡사에 찌든 뇌를 씻어내듯 시원하다. ●삶의 의미 깨우쳐주는 주옥같은 문장들 경봉 스님이 ‘깨달음은 어디 있는가? 저 돌에게 물어보라!’고 화두를 던지자 제자인 고봉 스님은 고민 끝에 편지를 보낸다.“그 돌을 수세미로 깨끗이 씻어 방 머리맡에 두고서 뚫어지게 바라보았으나 미천한 탓인지 그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라고. 경봉 스님은 이후 편지를 통해 끝없이 고행을 하는 자만이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였음을 넌지시 비춘다. 경봉 스님이 한 거사에게 보낸 다음의 편지는 비단 그 거사뿐만 아니라 이땅의 모든 사람에게 일갈하는 화두가 아닐까.‘인생이란 밤늦은 시간, 촛불을 앞에 두고 한 잔 차를 끓여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사람이란 티끌이며 허공입니다. 이 이치를 깨달으면 욕망과 악이 사라집니다.∼무심이란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자신과의 단절을 뜻하는 것입니다….’ 편지들은 시를 읊고 즐겨 쓰는 스님들의 풍류가 묻어 있어 잘 된 한시를 감상하는 묘미를 더해준다.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달은 하늘에 오르고 꽃은 골짜기에 피었네/밤은 삼경이요 향은 백천이라도.(경봉 스님이 월곡 스님에게) 또 비록 속세의 잡다한 욕망에 등을 돌리고 수행을 하고 있으면서도 세속적 인연을 저버리지 못해 고뇌하는 인간적인 모습들을 드러내는 편지들도 있다. 홀로 계신 어머님을 간병하러 산을 내려가며 고뇌하는 벽안 스님에게 경봉 스님은 “본래 도는 선과 악이 따로 없으며 인과도 없으나 모두가 속세의 업을 받고 세상에 태어났으니 이것을 어찌할 수 있겠나.∼부처님이 그대를 나무라지 않을 걸세.”라며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편지들의 연대 불분명해 아쉬워 아쉬운 것은 편지들의 연대가 거의 불분명하고 편지를 주고받은 장소가 나타나지 않은 점. 그래도 명정 스님은 서문에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것 같았던 편지들이 빛을 보게 됐다. 근세 우리나라 큰스님들이 이루어놓은 영롱한 문자사리(文字舍利)로 부족함이 없다.”고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1만 35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새달 31일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도공 스님)는 21일 회의를 열고 최근 입적한 총무원장 법장 스님의 뒤를 이을 제32대 후임 총무원장 선거를 오는 10월31일 오후 1∼4시 서울 종로구 견지동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후보자 등록기간은 선거일 10일 전부터 사흘간인 다음달 21∼23일이며, 공식 선거운동 기간은 다음달 21∼30일까지 열흘이다. 선거인단은 중앙종회 의원 81명과 24개 교구에서 10명씩 선출된 대의원 240명 등 모두 321명이며, 이중 과반 득표를 해야 총무원장에 선출된다. 과반 득표자가 없을 경우 1차 투표의 1·2위 득표자를 놓고 2차 투표를 해 다수 득표자가 총무원장이 된다. 어느 경우든 원로회의 추인을 받아야 4년간 조계종을 이끌게 된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전남 산사체험객 3배 껑충

    산사 체험이 날로 인기를 더하고 있다. 전남도가 체험 관광상품으로 내놓은 산사 체험에 올 들어 외국인 340여명을 포함해 모두 5700여명이 찾은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체험자 1900여명에 비해 3배 이상 늘어난 숫자다. 산사 체험을 운영하는 사찰은 승보사찰인 순천 송광사를 비롯해 해남 미황사와 대흥사, 보성 대원사, 나주 불회사, 장성 백양사, 구례 화엄사, 강진 백련사 등 8곳이다. 체험은 1박2일이나 2박3일로 새벽예불과 발우공양, 다도, 법어청취, 스님과의 대화 등으로 운영된다. 이들 사찰은 수백년 역사와 문화, 불교전통이 어우러져 있고 주변경관이 수려해 도심속 잡념을 털어내기에 제격이다.체험 희망자는 사찰별로 올려진 홈페이지나 전화 등을 통해 예약하면 되고 참가자는 세면도구와 운동화 등을 가져오면 된다. 도 관계자는 “관련 사찰에 세면장과 화장실 개조비를 지원해 사찰 체험을 전남도의 대표 관광상품으로 키워가겠다.”고 말했다.광주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오감 만족’ 가을축제

    ‘가을 축제에 흠뻑 빠져 보세요.’ 풍성한 계절을 맞아 전국 각지에선 축제 준비가 한창이다.●임방울 국악제 광주에서는 ‘쑥대머리∼귀신형용∼’으로 시작되는 판소리 춘향가 가운데 쑥대머리로 일제말 조선과 일본·만주에 까지 이름을 떨쳤던 ‘국창’ 임방울(1905∼1961) 선생을 기리는 ‘임방울 국악제’가 오는 26∼28일까지 광주 문예회관에서 열린다. 임방울국악진흥재단(이사장 염홍섭)이 임방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여는 것으로 중요 무형문화제 송순섭 선생, 명창 안숙선, 이생강씨 등 90여명이 출연, 공연을 펼친다. 장사익씨도 참여한다. 학생부와 일반부로 나뉘어 열리는 경연에서는 판소리 명창부 ‘임방울 대상’(대통령상)에 1500만원의 상금과 순금 트로피 60돈이 주어진다.●갓바위 축제 신비로운 영험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갓바위 축제가 오는 23일 경북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갓바위(관봉석조여래좌상 보물 제431호) 일원에서 열린다. 올해로 6회째. 갓바위에서 있을 다례봉행을 비롯해 각설이·댄스 공연, 과일 게임 등 다양한 볼거리 행사가 준비돼 있다. 특히 갓바위 주차장 특설무대에선 은해사 주지인 법타 스님의 소원 기도 법회가 열린다.설운도, 현숙, 조항조, 오은주 등 인기 연예인과 서연·도연스님 등이 출연하는 산사음악회도 흥을 돋울 전망이다.●오미자 축제 24∼25일 경북 문경시 동로면 일대에서 ‘2005 문경 오미자축제’가 개최된다. 문경의 새로운 특산물로 떠오른 오미자를 소재로 한 이번 축제는 ‘빨간 웰빙의 맛과 체험’이란 주제로 오미자 수확체험, 오미자 음식품평회 등을 비롯해 학생미술대회, 사진전, 초청공연, 황장산 등반대회, 가요제 등이 다채롭게 마련돼 있다.●송이·인삼·탈춤 축제 오는 24일부터 4일 동안 경북 봉화군 봉화읍 포저리 내성천 체육공원과 송이산 등지에서는 ‘봉화 춘양목 송이축제’가 열린다.청량문화제와 송이요리 경진대회, 송이산 체험, 송이요리 맛보기, 춘양목을 활용한 한옥 짓기, 목공예 체험, 춘양목 명상 수련회 등이 준비됐다. 30일∼다음달 9일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이 안동 하회마을과 낙동강변 축제장에서 막을 올린다. 우리나라 탈춤관련 중요무형문화재 18개 단체와 일본, 러시아 등 세계 16개 나라에서 18개 공연단이 참가한다. 영주에서는 ‘풍기인삼축제’가 오는 10월1일부터 닷새 동안 풍기읍 남원천둔치와 인삼시장에서 벌어지는데, 인삼캐기, 인삼깎기, 인삼인절미 만들기, 우량인삼선발대회 등 여러가지 체험ㆍ경연 행사를 준비 중이다.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어제 조계사서 법장스님 영결식

    어제 조계사서 법장스님 영결식

    “어느 것 하나 남김 없이 대중에게 회향(回向)하고 떠나신 법장 대종사를 추모합니다.” 지난 11일 새벽 입적한 불교조계종 총무원장 법장 스님의 영결식이 15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에서 스님과 일반신도, 각계인사 등 2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조계종단장으로 엄수됐다. 행사는 타종으로 시작해 삼귀의, 영결법요(능허 스님), 행장 소개(적명 스님), 영결사(장의위원장 현고 스님), 법어, 추도사(중앙종회의장 법등 스님), 각계 대표의 조사(弔辭)와 헌화, 문도 대표 인사 등 약 2시간 동안 진행됐다. 교구본사 주지 대표 정락 스님, 수좌 대표 혜국 스님, 비구니 대표 명성 스님, 노무현 대통령(김병준 정책실장 대독), 중앙신도회 대표 김의정 권한대행, 태고종 총무원장 운산 스님, 정동채 문화관광부 장관, 이명박 서울시장, 가톨릭 김희중 주교, 달라이라마(초펠라 동북아대사 대독) 등 국내외 각계 인사의 조사가 낭독됐다. 종정 법전 스님은 영결법어에서 “생전에 법장 대종사는 생명에 대한 외경과 애종심(愛宗心)이 깊었고 이사(理事)에 집착하지 않는 기략(機略)이 있었다.”고 추모했다. 이어 법장 스님이 후원해준 최예슬(13·서울 효제초 6년)양이 ‘큰스님에게 올리는 편지’를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주위를 숙연케 했다. 행사에는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장,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민주노동당 김혜경 대표 등 정계 인사들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영결식 직후 법장 스님의 위패와 영정, 훈장 등은 충남 예산 수덕사로 이운됐다. 수덕사에서는 법장 스님의 유품과 스님이 수행했던 토굴이 공개됐으며, 수덕사 설정스님 등이 법장 스님의 유고를 기리며 단체로 장기기증에 서약했다. 초재는 수덕사에서,49재는 조계사에서 각각 열린다. 한편 법장 스님의 법구가 지난 13일 동국대 일산병원에 기증됨에 따라 종단장 사상 처음으로 다비식은 열리지 않았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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