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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儒林(529)-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9)

    儒林(529)-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9)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9) 따라서 율곡의 시에는 노승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내 말에 노승은 긍정하지 않은 채 한참을 말이 없었다.” 침묵을 지키던 노승이 다시 화제를 바꾸어 율곡에게 묻는다.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다.’란 말이 있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노승의 질문은 ‘반야바라밀다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色卽是空)’에서 인용하였던 말. 부처가 제자인 사리불에게 ‘사리불이여, 물질(色)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니,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다.’라고 설법한 내용에서 유래된 유명한 구절이었다. 즉 불가에서는 ‘유형의 만물을 색이라 칭하고, 만물은 모두 인연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고, 본래 실재하는 것이 아니어서 공과 다름이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이었던 것이다. 이에 율곡은 대답한다. “이것 역시 앞의 경계일 뿐입니다.” 율곡의 대답은 색이니, 공이니 따지는 것도 앞에서 말하였던 실리(實利)가 아니라 공허한 말장난, 즉 경계를 따지는 일이라는 공격이었다. 율곡의 이 말을 들은 노승은 다만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 웃음을 본 순간 젊은 율곡은 다시 투지를 불러일으켜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 스님께 내가 묻겠습니다.‘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닿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란 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색입니까, 공입니까.” 율곡의 말은 시경에 나오는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닿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鳶飛戾天 魚躍于淵)’란 말에서 인용한 것. 이 시를 두고 공자의 제자인 자사(子思)는 중용에서 ‘솔개는 하늘을 날고 있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놀고 있지만 하늘과 연못의 상하는 결국 하나로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다만 말에 지나지 않는다.(言其上下察也)’고 설명하였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노승은 다시 묻는다.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닌 것이 진여(眞如)의 본체라오. 이 오묘한 진리를 어찌 유교의 시경에 비교할 수 있겠소이까.” 노승이 말하였던 진여(眞如). 불교의 진실여상(眞實如常)에서 나온 말로 곧 우주만유(宇宙萬有)의 실체로서 평등하고 무차별한 절대 불교진리를 감히 유가의 시경으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노승의 준엄한 질책이었던 것이다. 즉 색은 형상과 색채를 가진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현상계를 가리키고, 공은 일반적으로 현상계에서 서로 관계하며 변화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불변의 어떤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현상계란 모두 색과 공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참된 진리인 진여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상계를 초월해 있다. 그것은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어서 말이나 글로 경계 지어 표현할 수 없는 진여(眞如), 그 자체인 것이다. 그 진여를 어찌 유교로서 감히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노승이 갈긴 한 방망이였던 것이다.
  • 불교계 ‘가사 홍역’

    스님이 설법이나 의식을 할 때 입는 가사(袈裟)를 놓고 불교계가 홍역을 앓고 있다. 특히 한국불교 장자종단인 조계종과 태고종간 해묵은 가사 논란이 재연될 조짐이어서 눈길을 끈다. 최근 불교계의 가사 논란은 조계종이 종단 차원에서 통일된 가사를 제작해 전국의 스님들에게 보급하려는 방침에 전국 승복업자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 ●조계종 통일 추진에 제조업체도 반발 25일 불교계와 불교신문에 따르면 조계종 총무원은 지난 2002년 다양한 형태로 통행되던 승복을 통일하기 위한 실무연구회를 발족해 작업을 벌여왔으며 이같은 종단 방침이 알려지면서 승복제작업체들이 집단 반발하고 있다. 연합회를 구성한 이들은 최근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만나 “업체별로 이미 많은 원단을 확보해 놓았는데 종단의 갑작스러운 원단 독점공급 결정으로 타격이 크다.”며 승복 제작·보급을 위한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에 대해 조계종측은 “승복의 색깔과 문양이 들쭉날쭉해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으며 심지어 가사를 걸치고 조계종 스님을 사칭하는 경우도 있다.”며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조계종 총무원의 이같은 입장은 2004년 전국의 스님 131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종단에서 제작후 일괄 지급해야 한다.’(79.2%)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아 종단 차원의 통일된 가사 제작·보급의 필요성을 의식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태고종 “올 상반기 의장등록” 그러나 불교계에서는 최근 조계종의 이같은 조치가 가사를 둘러싼 태고종과의 해묵은 갈등 탓이라는 견해가 적지 않다. 조계종이 밤색 가사를 종단의 정통 가사로 인정하고 있는 반면 한국불교 제2의 종단인 태고종은 선명한 주홍색인 홍가사를 정통으로 인정하고 있다. 조계종은 지난해 밤색 가사를 조계종단의 가사로 의장등록해 놓았으며 이에 맞서 태고종도 올해 상반기중 홍가사의 의장등록을 마칠 예정이다. 불교계에서 가사 논쟁은 종단의 정체성과 맞물려 오래도록 지속돼 왔던 사안. 이승만 정권시절 왜색불교 퇴치를 내걸고 시작된 불교 정화작업은 조계종과 태고종의 분리를 낳았으며 이 과정에서 가사도 지금의 홍가사와 밤색 가사로 확연하게 나뉘었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실제로 스님들은 당시 흔히 비구·대처 싸움으로 알려진 조계종·태고종의 분쟁에서 가사는 양측을 구별하는 일종의 전투복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조계종은 종조인 보조국사의 장삼 색깔에서 밤색 가사가 시작돼 지금의 조계종단 가사로 자리잡았다는 주장을 하는 반면 태고종은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부터 홍가사 전통이 이어진데다 보조국사·원효 스님 등 고승들이 모두 홍가사를 입었고 지금 중국이나 남방불교국가에서도 홍가사가 일반적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들어 홍가사가 한국불교의 정통 가사임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불교계 인사들은 “이른바 법난으로 불리는 조·태분쟁의 와중에서 양분된 한국불교의 가사는 각 종단의 특색을 살려 인정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그러나 발우나 가사 등을 대물림하는 전통이 있는 한국불교에서 지나치게 종단의 정체성만을 강조해 획일적인 승복을 보급할 경우 전통불교의 정신을 훼손할 수 있으므로 신중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동숙의 노래’로 가수 데뷔 40년 문주란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동숙의 노래’로 가수 데뷔 40년 문주란

    ‘너무나도 그님을 사랑했기에’ 노래가 없는 인생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세상의 온갖 시름을 어찌 달래고 오는 백발과 가는 세월을 무엇으로 잠시 잡아본단 말인가. 에구, 속절없음이리라. 그러기에 무수한 세월이 흘러도 노래는 늘 우리 곁에서 추억과 인생을 이야기하겠지…. 지난 14일 저녁 8시.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북한강가에 위치한 한 라이브 카페.100여평 넓이의 홀 안에는 남녀노소들로 꽉 차 있었다. 잠시후 살갗색깔 바탕에 작은 구슬방울 반짝이가 박혀 있는 드레스를 곱게 차려 입은 여인이 무대 위로 등장한다. 어깨선이 확연히 드러난데다 조명빛을 받아서인지 얼핏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가냘픈 모습이었다.‘쁘바빠∼앙’ 하는 색소폰 반주가 나오자 요란한 박수소리와 함께 여인이 노래한다. 익숙한 목소리,‘동숙의 노래’였다. 특유의 저음인 알토인가 싶더니 어느새 소프라노까지 사뿐사뿐 넘나든다. 이어 추억의 ‘카사비앙카’를 부른다. 얼마전 인기 드라마 ‘황금사과’의 주제곡으로 젊은이들에게도 잘 알려진 곡. 박수가 끊이질 않는다. 여인은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로 대신한다. 노래 몇 자락을 쫙 깔아 흥을 돋운 여인은 “날씨도 추운데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 많이 했지예. 대신 마 신청곡을 많이 주시면 열심히 불러드리겠심니더.”라고 인사한다.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에서 쪽지가 쇄도한다. 여인은 이를 받아들더니 “어디보자,‘낙조’‘백치아다다’‘공항의 이별’‘돌지 않는 풍차’‘과거를 묻지 마세요’‘가슴아프게’…. 우와 이렇게 많이라요? 오늘 죽었심니더.”라며 무대에 털썩 주저앉는 모습을 연출한다. 한바탕 웃음이 쏟아진다. “반갑습니다.6년 전 이곳에 왔어예. 호미로 풀 베고, 반은 속세를 떠나 있지예. 하지만 매주 토요일은 팬들과 이렇게 만나는 날로 정했지예.” 이때 손님 중 한 사람이 불쑥 나이를 묻는다.“아따 보소, 연예인 나이는 거꾸로 먹는기라예. 오십하나믄 오십, 마흔아홉, 마흔여덟으로 말이지예. 노래나 듣지 나이는 왜 묻는교.”라고 받아넘긴다. 이렇게 1시간30분동안 시간가는 줄 모르게 노래와 웃음이 가득가득 이어진다. 가수 문주란씨. 데뷔곡 ‘동숙의 노래’로 공전의 히트를 쳤다. 올해로 발표된 지 꼭 40년째를 맞는다.40대 이상의 팬들에겐 여전히 애창되는 곡들이 많다. 뿐만 아니라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로 젊은이들 사이에도 많이 불려져 폭넓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문씨는 6년 전 지금의 청평 집(2층)을 마련하고 아래층에 라이브 카페 ‘문주란 뮤즈클럽’을 만들었다. 전국에서 찾아오는 팬들의 성화에 못이겨 매주 토요일 ‘만남의 무대’를 결심했던 것. 문씨는 또 워낙 불심이 깊어 2층에 부처를 모시고 살면서 되도록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아 팬들의 궁금증을 더해왔다. 이런 문씨가 오는 5월 신곡을 낼 예정이다. 신곡의 주제는 인생을 관조하면서 음미해보는 내용으로 1997년 ‘굿바이 홍콩’ 이후 10년만에 신곡을 발표하는 셈이다. 청평에서 문씨를 만났다. 자연스럽게 ‘동숙의 노래’에 대한 감회 얘기가 먼저 나왔다.“중학생 때 안 불렀습니껴. 나이가 너무 어려 방송을 내보내느니 마느니 하는 논란도 많았지예.”라고 회고한다. 노래 속의 동숙은? “원래 영화 ‘최후전선 180리’의 주제가였지예. 여자 주인공인 바로 동숙이라예.”라고 대답한다. 중1 때부터 ‘데니보이’ 같은 노래를 곧잘 불렀단다. 부산 MBC노래자랑에서 연속해서 몇주 동안 우승하자 ‘덕수궁 돌담길’과 ‘바보처럼 울었다’로 잘 알려진 진송남씨가 “12살 아이가 목소리 굵고 노래를 썩 잘 부른다.”고 호평을 했다. 이에 한 흥행업자가 부산으로 내려와 문주란을 무작정 서울로 데리고 온다. 어린 나이에 낯선 서울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이 무렵 특유의 저음 목소리에 탄복한 작곡가 백영호씨가 맞춤형 노래를 작곡, 선물한 것이 바로 ‘동숙의 노래’였다. 당시를 잠시 회상하던 문씨에게 어느덧 40년 세월이 흘렀다고 했다.“어린 나이에 데뷔해 지금은 이렇게 변하지 않았는교. 돌아보건데 가수라는 명찰을 달고, 가슴깊이 삶을 얘기하듯이 노래해 왔지예. 신세대 노래와 비교해보면 유치할지 몰라도 말입니더.”라고 했다. 이어 “요즘에는 다 비주얼 위주가 아닝교. 화려한 치장에 춤 위주로 노래를 부르고…,(이런 노래들이)세월이 흘러도 과연 우리 가슴에 남을 수 있을까요.”라고 반문해본다. 또한 “솔로보다는 그룹으로 많이 나오지예. 그러다 보면 개성을 잘 몰라예. 가수 이름인지, 노래 제목인지도 헷갈리고. 세대가 변해도 인간이 가는 인생길은 똑같은 거 아닝교.”라고 했다. 적어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배가수로서 후배에 대한 충고와 아쉬움이 동시에 담겨져 있으리라. 청평에서의 삶이 궁금했다. 스님처럼 산다는 즉답이 나온다. 조용한 곳이라 고독에 몸부림칠 때도 있지만 부처 앞에서 반야심경과 천수경을 외우며 마음을 다스린다고 했다. 가끔 친언니가 드나들면서 말벗을 해주지만 애견 네마리(꼬돌이 뽀순이 루비 등)가 자식처럼 항상 곁에 있어 위안을 삼는다.“비가 부슬부슬 올 때 허전하고 고독에 빠지죠. 그럴 때 가끔 서울로 나가 쇼핑도 하지예.”라고 했다. 혹 술친구는? “박일남씨가 ‘주란아 한잔 하자.’고 전화를 주지예. 남진씨도 그렇고요.”라고 귀띔했다. 왜 결혼을 안 했느냐는 질문에 “첫단추를 잘못 끼웠지예. 성격이 쾌활한 편이지만 만가지 복을 주지는 않았어예. 남자들한테 환멸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인간 문주란이 아닌 가수 문주란으로 다들 접근했심니더. 진실이 없는기라예. 오히려 혼자 있는게 편하다는 생각을 했지예.”라고 거침없이 나온다. 아울러 “기쁨과 슬픔은 마음 먹기에 달렸지예. 사랑과 미움이 종이 한장 차이 아닝교. 상대방을 이해하고 노력하면 만사 그만이라예.”라고 나름대로 불심의 경지를 피력한다. 밤무대 출연 여부를 묻자 “절대 안 나가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시간이 짧아요. 어떻게 하면 깨끗하게, 멋있게 가느냐가 중요하지예.”라고 목소리를 약간 높인다. 자존심인지 모르겠지만 늙어가는 모습을 팬들에게 보이기가 싫어 방송출연도 안 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젊었을 적 이미지로 남고 싶은 욕망도 자신을 붙들어멨단다. 하지만 잠시 생각하더니 올해는 꼭 신곡을 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가수 데뷔 40년을 맞기에 팬들을 위해 최소한의 보답을 해야 한다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고 했다. 현재 작곡가 김희갑씨 등 여러 곡을 받아 검토 중이며 기왕지사 문주란이 살아 있다는, 존재의 이유를 다시 한번 드러내보이겠다는 각오다. 몸매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 않으냐고 했더니 “소식(小食)이라예. 집에서 스트레칭을 자주하지예. 요즘에는 담배를 줄이려고 애를 쓰고 있어예.”라며 웃는다. 문씨는 부산 서면에서 비교적 부유한 집안의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삼촌이 한일합섬 창설멤버였다. 아버지는 한량소리를 들을 정도로 노래와 춤솜씨가 좋았다. 자식들 중 문씨가 끼를 유일하게 이어받았다. 어릴 적 서울에 올라와 고생하면서 22살에 해선 안될 사랑에 빠졌다가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기도 했다. 자신이 부른 곡 중 가장 아끼는 노래는 ‘백치 아다다’‘초우’‘동숙의 노래’‘파란 이별의 글씨’ 등 대부분 쓸쓸한 노래를 꼽는다. 한때 배호씨와도 절친해 노래를 자주 바꿔부르기도 했다며 잠시 회상에 젖어본다. 지난해 병마와 싸우는 작곡가 박춘석씨가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 문주란 뮤즈클럽을 찾았다. 둘은 벽에 걸린 왕년의 사진을 보면서 한없이 울었다. 문씨는 이때 “선생님, 사람은 가지만 명곡은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남아예.”라고 위로했다. 문씨는 요즘 한 템포 느리게 사는 여유가 생겼다. 시간이 허락되면 네팔 참선여행을 꼭 다녀올 생각이다. “기대하세요. 올해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좋아하는 팬들과 함께 춤과 노래의 향연을 멋있게 펼칠 생각입니더.” We팀장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부산 서면 출생 ▲중학 1학년 때 부산 MBC 노래자랑 우승 ▲1966년 2월 ‘동숙의 노래’로 가수데뷔 ■ 대표곡 ▲타인들(66년) ▲돌지 않는 풍차(67년) ▲낙조(67년) ▲카사비앙카(68년) ▲별빛속의 연가(69년) ▲주란꽃(69년) ▲백치아다다(70년대) ▲초우(70년대) ▲별이 빛나는 밤에 부르스(71년) ▲공항의 이별(72년)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92년) ▲굿바이 홍콩(97년) ▲이밖에 공항대합실, 공항에 부는 바람, 나하나의 사랑, 과거를 묻지 마세요, 꼭 필요합니다 등 수십곡
  • 儒林(525)-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5)

    儒林(525)-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5)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5) 원래 화두는 본인 스스로 결택(決擇)하지 않고 스승이 제자에게 정해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율곡이 금강산에 들어갈 때 명종실록의 기록처럼 ‘어떤 중이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복을 빈다는 이야기로 그를 유혹하였고’ 또 그 중이 율곡을 데리고 함께 입산하였으므로 율곡에게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를 점지해준 사람은 아마도 율곡을 불교에 귀의케 하였던 이름모를 사승(師僧)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율곡은 금강산에서 계정(戒定)에 정진할 무렵 바로 이 난해한 화두를 붙들고 깊은 선정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 저 나무도, 저 구름도, 저 산도, 저 물도 하나로 돌아간다. 태어남도, 죽음도, 애욕도, 번뇌도 하나로 돌아간다. 그러하면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 저 꽃도, 저 계곡도, 저 바람도, 저 나비도, 저 새도, 짐승도, 하찮은 미물인 벌레도 모두 하나로 돌아간다. 추위도, 더위도, 향기로운 냄새도, 악취도, 시고 매운맛도, 눈에 보이는 형상도, 귀에 들려오는 그 모든 소리도 하나로 돌아간다. 하나로 돌아간다. 명예도, 인간의 사치도, 칭찬도, 권세도, 임금도, 신하도 하나로 돌아간다. 사랑도, 미움도, 증오도, 원한도,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도 모두 하나로 돌아간다. 그러하면 이 하나는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금강산을 이곳저곳 탐승(探勝)하면서도 율곡은 자나 깨나 밥을 먹으나 산길을 가나 항상 이 화두에 매어 달리고 있었다. 단발령에 올라 1만 2000봉우리의 기기묘묘한 절경에 심취하면서도 율곡은 이 화두에 집중하고 있었고 마침내 금강산 최고봉인 비로봉에 오르면서도 율곡은 이 화두를 놓지 않았다. 율곡을 인도해 함께 올라가던 스님이 비로봉이 위험할 것이라고 등정을 만류하였지만 율곡은 하루 낮과 밤을 꼬박 새워 이른 새벽 동틀 무렵에 비로봉 정상에 다다라 그 풍경에 넋을 잃고 취해서 시를 읊기도 하였다. 동쪽에서는 붉은 아침 해가 솟아오르고 있는데, 서쪽바위 위에는 아직 달이 걸려 있는 그 장관을 바라보면서도 율곡은 ‘만법귀일’의 화두를 놓지 않았던 듯 비로봉에서 지은 시 중에 ‘마음을 비우면 만사가 하나이고 기가 웅대하면 우주도 좁도다(心虛萬事一 氣大六合窄).’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여러 스님들로부터 살아있는 부처로 불릴 만큼 선정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던 율곡의 모습을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율곡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 것(萬法歸一)은 바로 ‘마음을 비우면 만사가 하나로 돌아가는 것(心虛萬事一)’과 같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즉 마음을 비우면 만법이 돌아가는 구경처(究竟處)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율곡의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율곡은 ‘만법귀일’의 화두를 타파하였음일까. 화두를 타파하여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가 돌아가는 궁극처(窮極處)를 마침내 견성(見性)하였음일까. 일찍이 달마가 말하였다. “모든 지식을 버려야만 자성(自性:인간의 본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율곡은 달마가 말하였던 대로 지식을 버리기에는 지나치게 머리가 좋은 천재. 따라서 율곡의 깨달음은 대오(大悟)가 아닌 해오(解悟)일 가능성이 높다.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27)茶室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27)茶室

    붉디붉은 동백꽃이 벙그러져 하늘을 향해 얼굴을 내민다. 퍼득이는 새의 날갯짓에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붉은 동백의 무리들은 마치 절망 속에서 자신의 삶을 내던져 버리는 중생들의 아픈 추락비행 같다.‘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속에 깃든 의미는 아마 희망이었던 것 같다. 추락과 날개는 상반된 감각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추락이 절망이요 포기라면 날개는 곧 다시 비상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로지 한 곳을 향해 집중하고 인내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넉넉한 삶의 여유다. 신년 들어 일지암에서 중생의 평안과 차인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다회를 열었다. 멀리 서울과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초의차문화연구원들이 참석했다. 신년다회는 일지암 초당에서 열렸다. 까실까실하고 상큼해 보이는 새 볏짚으로 엮어올린 지붕을 가진 일지암 초당에는 3평 남짓한 차실이 있다.3방향으로 문을 해닫고 한쪽에는 차를 덖을 수 있는 부엌으로 만들어 놓은 일지암 초당 옆으로는 그 유명한 유천이 흐른다. 초당의 문을 열면 두륜산의 광활한 산맥이 울퉁불퉁 튀어오르는 것이 보이고, 늦은 오후 맑은 석양에는 서해바다의 잔잔한 물소리가 바람과 풍경소리를 타고 월담을 한다. 아름다운 풍광을 다탁으로 한 일지암 초당의 다실은 그야말로 담백하다고 말할 뿐이다. 갈아 붙인 회벽에 몇겹으로 이어 붙인 회백색 벽지와 3명 정도가 마실 수 있는 작은 차 도구가 전부다.2∼3명의 찻자리는 늘 고요하다. 오직 바람소리와 유천의 물소리를 벗삼아 자신의 마음을 흘려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지암의 차실을 두고 ‘무애의 차’ 자리라고 하는 것이다. 차인들에게 차실은 차, 차도구와 함께 매우 중요한 것중 하나다. 차를 하면 할수록 자신만의 차실을 하나쯤 가꾸는 염원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부쩍 자신의 차실을 소유하는 차인들이 늘고 있다. 작게는 3∼4평, 크게는 10여평의 차실을 근사하게 가꾼 후 가까운 차인들을 초대해 차회를 여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도심의 아파트에서도, 먼 산골의 초막에서도 차실을 꾸며 차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차실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일본의 차실이다. 일본의 차실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고도의 문명을 향유한 일본문명의 상징처럼 일본의 차실은 세계적인 눈길을 끌었다.100여년이 넘는 대숲속의 차실들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의 눈에도 동양문명의 핵심으로 인식되고 있을 정도다. 이른바 초암으로 불리는 일본의 다실들은 실로 담백하기 짝이 없다. 허리를 굽혀야 하고 몇 사람이 옹기종기 몰려 앉아 무릎을 맞대고 먹어야 하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차실이 바로 이 시대의 차인들과 서양인들의 마음과 눈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초암의 백미는 텅 비어 있고 작다는 데 있다. 초암에 대해 조선시대 이형상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내 집은 초려삼간/세상일이라곤 전혀 없네/차 달이는 돌 탕관과 고기 잡는 낚싯대 하나/뒷산에 절로 난 고사리 그것이 분수인가 하노라.”라며 소유하지 않는 자의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초암의 핵심은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적이라는 점에 있다. 그리고 작지만 위대한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한적한 대숲이나 정원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초암은 흙과 볏짚을 혼합해 바른 벽이나, 대나무와 흙으로 엮어 만든 벽이 대부분이다. 방바닥 역시 마찬가지다. 대나무 자리를 깔거나, 갈대를 엮어 만든 것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초암 차실은 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의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가집 같은 것이다. 이른바 건축의 기본을 도외시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쉽게도 일본 초암차의 원류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우리의 옛 초가집의 소박한 멋이 원형인 것 같다. 최근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일본 초암다실의 원형은 우리나라라는 것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센리휴에 의해 완성된 초암차실은 당시 강대했던 무사계급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꺾으려는 정치적 목적도 가미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비록 자결은 했지만 도요토미의 왕사역할을 했던 센리휴는 차의 근본정신 회복을 통해 일본 지배계급의 야만성을 희석시키려 했던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굽어보게 하는 소박한 다실인 초암은 우리나라의 초가집들과 매우 닮았다. 초암다실이 세계적인 다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역사성과 함께한 정신성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갖는 근원적 투쟁심을 탈각시켜 버린 무소유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물신주의의 총아인 자본주의는 불가사리처럼 무엇이든 거대화시키고 조작해낼 수 있는 무소불위의 힘을 가졌다. 그러나 초암은 그런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역설의 미학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곧게 수직으로 뻗어내린 직선의 미학에 휘어지고 굽어진 곡선의 미학으로 맞서고 있다. 화학화시키고 인위적으로 조작한 재료 대신 흙과 집 그리고 대나무 등 천연재료를 사용,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한다는 데 그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작고 어두운 초암은 폐쇄적인 공간이 결코 아니다. 사방을 개방해 누구라도 들고 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 열린공간은 신분의 차별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초암은 우리나라에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 깊은 산중에서 수행을 하기 위해 손가는 대로 지어낸 띠집인 초암, 가난한 선비들이 호연지기를 기르고 청빈함과 검소함을 자랑하기 위해 만들었던 모사(茅舍), 초려(草廬), 초정(草亭), 또한 왕이나 왕세자 등이 제를 지내기 위해, 잠시 머물며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지은 모옥(茅屋), 초옥(草屋) 등이 존재했다. 먼저 초암은 원래 스님들이 살던 암자의 명칭이기도 하다. 대중수행을 피해 홀로 수행을 하기 위해 깊은 산중에 아무렇게나 지은 작은 암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초암은 천연재료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검소하고 청빈한 삶의 원형을 그대로 담아내게 된 것이다. 설잠 스님의 ‘모암’이란 시는 이같은 상징성들을 그대로 드러낸다. “푸른 산 깊은 곳에 귀틀집 한 채 얽었는데/집 아래로는 맑고 맑은 만길 깊은 못이로세/가는 곳 되는대로 구름따라 함께 가고/머물 때엔 한가로이 달 아래 절방에 함께 있네.” 선비들이 독서나 차를 마시는 데 이용했던 초정이나 누실도 마찬가지다.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며 호연지기와 청빈함을 자랑했던 초정이나 누실 역시 작고 소박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암의 원형들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런 점에서 초암은 자연주의의 원형이랄 수 있다. 그같은 것은 차가 지닌 자연성과 우주성을 일체화한 독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초암은 또 차의 정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물론 역사성과 현실성에서 시작된 것이겠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현대에 와서 초암은 문명의 역설성을 상징하고 차의 본연성을 담아낸 천연의 기제로 자리매김될 만하다. 차의 정신은 궁극적으로 하심(下心)에 있다. 넓고 큰 집, 넓고 화려한 광채가 나는 차실은 바로 현대인들의 욕망을 상징하는 또 다른 기제다. 그러나 초암으로 대별되는 차의 정신은 내 욕망을 내려놓은 하심을 구조적으로 추구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좁고 작아서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작은 문들, 도대체 막힘이 없는 사방으로 열린 공간들, 울퉁불퉁 튀어나온 소나무의 서까래 등 순수한 자연의 미학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경계를 풀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초암에서 소박한 미의식을 본다. 소박한 미의식이란 작고 볼품없는 공간속에서 채워낼 수 있는 정신적 충만감을 의미한다. 일지암 초당의 신년차회는 바로 이같은 것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바싹 마른 장작을 구들에 넣고 사방으로 환히 열어젖힌 초당의 문들, 바로 앞의 작은 연못과 붉게 핀 매화 향, 그리고 손에 잡힐 듯 툭툭 꽃봉오리를 벙그러올리는 동백꽃이 바로 또 다른 차의 세계를 구현한 것이다. 그들은 그 찻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스님 참으로 부끄럽고 초라합니다. 이렇게 위대한 자연의 경이 앞에서, 꾸미지 않은 자연의 소박함 앞에서 내가 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한 잔의 차를 마시며 그들은 자연을 품에 안았고, 현대사회 속에서 일그러져 있는 자신의 작고 초라한 모습을 관조할 수 있었다. 찻자리가 소중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차를 통해 마음을 나누고 자연을 나누고 결국은 우주를 나눌 수 있다. 한발짝 더 나아가 차를 통해 자신을 개벽시킬 수 있는 단초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술은 사람을 들뜨게 하고 육신을 망치지만 차는 사람을 가라앉히고 육신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신묘로운 작용을 한다는 말이있다. 차 한잔은 이렇게 인간의 삶의 양식을 바꿀 수 있기도 하다. 일지암 암주 ■ 현대인의 차실은… 차실은 차인의 품격과 인격을 나타내는 척도다. 요즘 찻자리에 초대되어 가보면 이른바 명품으로 치장되어 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것은 누구의 작품이며 이것은 얼마나 값어치가 나간다고 자랑을 한다. 그럴 때 그 찻자리에는 은근히 질시와 불편함이 싹튼다. 이른바 차회가 아니라 과시회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차가 자신의 신분과 인격을 상승시켜주는 인격체의 들러리로 전락하는 경우를 보며 씁쓸해한다. 흔히들 차를 격식의 문화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갖추어진 다실에서 갖추어진 다구와 차를 준비한후 예법에 따라 마시는 것이 바로 차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른바 그것은 바로 차가 격식화되어 있는 것이다. 차는 격식의 문화가 아니다. 물론 의식을 통해 격식을 갖추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차는 당연히 격식의 차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차는 자연스러움과 소박함 그리고 편안함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 우선 차는 특정인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차를 마실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을 갖추고 자연스럽게 마음을 공유하는 나눔의 마당이 되어야 한다. 거실이나 방에서 행다를 해도 된다. 차실은 가급적 비린내가 나지 않고 소란스럽지 않은 곳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깨끗하고 아담한 분위기 연출을 위한 곳이면 더욱 좋다. 먼저 다실을 꾸밀 공간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이다. 다실의 크기는 3∼4평 정도가 제격이다. 다실의 크기가 너무 넓으면 주위가 산만하고 어지럽기 때문에 오히려 차실로서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다실은 손님을 접대할 몇 가지 가구와 다구, 요란하지 않은 화분이나 서화로 간단하게 장식되어 있으면 더욱 좋다. 다실에 놓여진 난과 꽃은 차실의 분위기를 한층 품격있게 만들기도 하다. 다만 너무 요란스럽게 꾸며진 장식물들은 오히려 차실의 분위기를 해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실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 없다면 차선책으로 응접실이나 서재를 이용해도 된다. 우선 차를 마실 수 있는 차도구를 위한 상시적인 공간을 마련한다. 그곳의 넓이는 0.5평 정도면 된다. 가능하다면 창문을 통해 밖을 볼 수 있는 공간이 좋으며 조촐하게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소나무 화분이나 꽃 등을 준비해 놓아두면 더욱 좋다. 마지막으로 응접실이나 서재도 없는 단칸방에서도 차는 가능하다. 평상시에 차를 마실 수 있는 도구를 사람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놓아둔 다음 차를 마실 때 자리를 마련해 마시는 것이다. 참으로 훌륭한 행다란 다실의 유무에 있지 않고 그것을 소박하고 검소하게 즐길 수 있는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몸펴기 한번 쭈욱~ 명절 증후군 쏴악~

    몸펴기 한번 쭈욱~ 명절 증후군 쏴악~

    민족 명절 설이 가깝다. 귀성도 즐겁고, 가족끼리의 단란도 가슴 설레게 한다. 그런 즐거움이 건강과 함께 하면 더할 나위가 없다. 각각의 상황에 맞는 스트레칭을 익혀 건강한 설나기를 준비하자. ●귀성길 운전 중에 장시간 운전은 온몸의 근육을 경직시켜 근육통을 일으키기 쉽다. 특히 오래 앉아 운전을 하다보면 누워 있을 때보다 2∼3배나 무거운 하중이 가해져 허리 부담을 피하기 어렵다. 운전 중에 등받이를 너무 뒤로 젖히면 허리를 받쳐주지 못해 요통이 생길 수 있다. 엉덩이와 허리는 좌석 깊숙이 밀착시켜 앉는 것이 좋다. 등을 젖히고 싶다면 등 쪽에 쿠션을 대는 게 낫다. 발 지압기구를 차 안에 비치해 수시로 발을 자극해 주는 것도 혈액순환에 좋다. 차 안에서는 발꿈치를 서서히 들어올린 상태에서 2∼3초간 정지하거나 허벅지 힘주기, 엉덩이 씰룩거리기, 양손을 맞잡고 앞으로 밀었다 당기기, 양 어깨 들어올리기 등 간단한 체조로 긴장된 근육을 풀 수 있다. ●주부는 부엌에서 손님맞이와 상차리기 등으로 주부들은 명절이면 녹초가 된다. 스트레스로 인한 명절증후군은 물론 요통·관절통으로 온 몸이 편한 곳이 없다. 오랫동안 쪼그려 앉거나 바닥에 앉아 있으면 허리를 지탱하지 못해 척추에 무리를 줄 수 있으며, 혈행장애로 팔다리가 저리고 요통을 겪기 쉽다. 특히 서서히 퇴행이 시작되는 40대 이후라면 허리를 보호하는 자세가 필수적이다. 주방에 서서 오랫동안 일할 때는 바닥에 목침을 놓고 양쪽 다리를 번갈아 올렸다 내리는 자세를 취하면 허리의 무리를 덜 수 있다. 또 높은 선반 위의 그릇을 내릴 때도 평소 발바닥 마사지를 위해 준비한 발판 위에 타월을 서너장 깔고 디디면 한결 허리 부담이 준다. 상이나 무거운 물건을 들 때는 최대한 몸에 붙여 들고, 음식 준비를 위해 앉을 때도 맨바닥보다 식탁 위에 불판을 놓고 의자에 앉아 하면 피로감이 덜하다. 앉아 있건 서 있건 한 자세로 오래 있으면 허리에 부담이 되므로 아무리 바쁘더라도 1시간에 한번씩은 허리를 쭈욱 펴 스트레칭을 해주는 것이 요통을 예방하는 길이다. ●놀이도 자세가 문제 오랜 시간 같은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화투나 바둑은 허리통증을 일으키기 쉽다. 특히 술을 마시고 놀이를 하면 위험부담은 2배로 늘어난다. 술에 취하면 허리를 받쳐주는 방어기전이 약화돼 허리의 인대와 근육, 디스크 등이 쉽게 손상을 입게 되며, 허리 손상을 느끼지 못해 계속 무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맛’은 안 나지만 의자에 앉는 자세를 취하는 게 좋다. 화투나 바둑을 즐길 때는 스님처럼 허리를 곧추 세운 자세가 좋다. 아니면 벽을 기대고 앉거나 등받이가 있는 방석을 이용하면 좋다. ●노약자는 느리게, 느리게 60대 이상 노인의 70% 정도가 요통 및 관절질환을 앓는 등 퇴행성 질환이 특히 많으므로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항상, 무리없이 생활하는 게 좋다. 특히 고령자들이 갑자기 야외에서 힘겹게 움직일 경우 근육이 풀어지지 않아 급성염좌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성묘 전에는 앉았다 일어서기 등 충분한 준비운동을 권해야 한다. 골절도 조심해야 한다. 통상 노화는 20년에 10%씩 진행된다.60대는 20대에 비해 20% 이상 노화됐다고 보면 된다. 그만큼 작은 충격으로도 쉽게 골절을 당한다. ■ 도움말 김성용 자생한방병원 원장. 양주민 길흉부외과 원장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상황별 스트레칭법 ●운전자 스트레칭 -한쪽 손바닥으로 반대편 뒤통수를 감싸 쥐고 45도 오른쪽과 앞쪽으로 당겨 5초 정도 유지한다. -한쪽 팔꿈치를 가볍게 90도 정도 굽히고 반대쪽 손으로 굽힌 팔꿈치를 감싸 쥔 뒤 천천히, 힘껏 반대편으로 당겨 5초 정도 유지한다. -배와 허리를 앞으로 내밀고 척추를 곧게 세운 뒤 허리에 5초간 힘껏 힘을 준다. -운전석에 앉아 다리를 쭉 뻗은 상태에서 발목을 발등 쪽으로 최대한 꺾어 5초간 유지한다. -발목관절로 크게 원을 그리며 천천히 돌리고, 발가락도 오므렸다 펴준다. ●고스톱 스트레칭 -어깨와 목의 힘을 빼고 고개를 앞뒤, 좌우로 충분히 돌려 준다. -양쪽 팔을 교대로 반대편 귀가 닿도록 머리위로 넘겨 올린 팔 방향으로 고개를 가볍게 눌러준다. -척추를 따라 위, 아래로 등을 가볍게 두드린다. -양 손을 등 뒤에서 마주잡고 가슴을 젖히듯 쭉 펴준다. ●성묘 전 스트레칭 -다리를 붙이고 무릎에 두 손을 얹은 뒤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몸통을 앞으로 굽혔다가 뒤로 젖히는 동작을 반복한다. -다리를 벌리고 서서 팔을 좌우로 휘두른다. 처음에는 범위를 작게 하다가 점차 크게 흔들며 허리를 비튼다. -다리를 어깨보다 넓게 벌리고 서서 두 팔을 위로 들었다가 오른쪽에서 아래로 왼쪽으로 한 바퀴를 돌리듯 허리와 함께 움직인다. ●주부 스트레칭 -어깨를 모아 위로 올렸다가 힘을 빼고 단숨에 아래로 내리기를 10∼20회 반복한다. -양팔꿈치를 구부리고 어깨를 축으로 팔과 어깨를 회전시킨다. -양손을 위로 올리고 가슴을 내밀며 기지개를 켠다. -식탁이나 싱크대를 붙잡고 엉덩이를 뒤로 빼고 상체를 90도 숙이면서 등을 쭉 펴준다. -한쪽 다리로 서서 반대쪽 다리를 뒤로 굽힌 뒤 엉덩이 쪽으로 당겨 근육을 늘려준다. -차렷 자세로 서서 무릎을 몸과 90도가 될 정도로 들어올리며 제자리에서 걷는다. ●잠자리 스트레칭 -차렷 자세로 누운 상태에서 무릎으로 상체를 들어 올린 뒤 엉덩이 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한다. -차렷 자세로 누운 상태에서 무릎을 구부려 어깨를 드는 느낌으로 가볍게 윗몸일으키기를 한다. -엎드린 자세에서 다리 들어올리기를 반복한다. -앉은 상태에서 두 다리를 쭉 벌린 뒤 몸통과 등을 쭉 펴서 뻗은 다리 쪽으로 굽혀준다.
  • 지율스님 의식잃어 응급치료

    동국대 병원에 입원한 뒤 15일째 치료를 거부하던 지율(知律·48) 스님이 끝내 의식을 잃어 병원측이 응급치료를 시작했다.동국대 일산병원은 22일 지율 스님은 지난 20일 오후 4시30분쯤부터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등 이상 증세를 보이다 오후 6시쯤부터는 거의 무반응 상태에 빠졌다고 밝혔다. 치료를 맡고 있는 병원 중환자실 김영권 실장은 “스님의 의식이 갑자기 혼탁한 상태에 빠져 치료를 시작, 정맥주사를 통해 수액과 전해질, 비타민을 공급하고 있다.”면서 “의학적으로 혼수상태의 전 단계쯤 된다.”고 설명했다.그는 “일단 치료를 시작해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긴 했지만 아직 의식이 없는 등 안심할 단계는 아니고 회복여부도 불투명한 상태”라며 “전해질 불균형이 심각, 치료 중에도 상황이 악화될 수 있다.”고 밝혔다.고양 한만교기자 mghann@seoul.co.kr
  • [길섶에서] 장흥에서/최종찬 편집부 차장

    추억의 오솔길이 반죽하는 사연의 꽃 커졌다 작아지는 보리햇살로 피워보다 때까치 손님 반기는 벤치에 잠시 앉는다 저희끼리 속삭이며 익명으로 살아가다 절정의 순간에 모든 걸 다 내놓은 나무들 목탁소리 한아름 자비를 구하는데 차량행렬 공허한 메아리로 시주한다 해맑은 스님 눈동자 속으로 지는 연꽃 실개천 봄의 전령 버들강아지 알까 들풀의 생채기서 알리바이 피는 것을 풀벌레 울음그치면 이름만 남는 것을 다람쥐가 나무에 이야기 새겨놓듯 정들 것 없는 세상사 안쪽주머니에 넣고 돌탑에 쌓은 돌 하나로 번뇌를 날린다 아내와 함께 놀러간 장흥에서 우연히 마주친 때까치와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는 나무를 보면서, 영등포백화점 앞에서 시주를 구하는 젊은 스님을 떠올리며, 봄을 기다리는 마음과 세상의 시름 하나 덜고자 하는 바람을 담아봤습니다. 최종찬 편집부 차장 siinjc@seoul.co.kr
  • [씨줄날줄] 지율스님/오풍연 논설위원

    “만일, 당신이 저와 함께 천성을 어둠 속에 묻는다면 그때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합법적인 위헌과 위법으로 어우러진 이 세상에서 법을 알고 법을 바로 세워야 할 분이 당신이기 때문이며, 수많은 생명을 묻은 뒤 찾아오는 이 땅의 피비린내를 역사에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성의 아픔을 기억해 주세요. 지난날 당신이 ‘공약’했던 원칙과 약속의 이름으로….”(내 생애 하루가 남아 있다면 1-노무현 대통령께,‘초록의 공명’ 41쪽) ‘천성산 지킴이’‘도롱뇽 엄마’로 불리는 지율스님. 그가 던지는 화두가 바로 ‘초록의 공명’이다. 지난해 11월 같은 이름의 책을 펴낸 것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 책에는 지난 2003년부터 38일,45일,58일,100일 등 모두 241일에 걸친 단식 일지가 담겨 있다. 노 대통령에 대한 섭섭한 마음과 천성산 자락에 서 있는 자신의 심경도 담담히 적고 있다. 그는 지난해 2월 긴 단식을 중단했었다. 그러나 불과 7개월 만에 외부와의 연락을 모두 끊은 채 단식을 다시 시작한 이유는 뭘까. “내가 죽어야 천성산이 산다.”“이미 마음을 비웠고,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지율스님은 평소 지인들에게 유언(遺言)처럼 말해왔다는 귀띔이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 눈 앞에 다가온 느낌이 든다. 이달 초 동국대 일산병원에 입원조치된 뒤 보름가량 치료를 거부하던 그가 지난 20일 의식을 잃어 응급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의학적으로는 혼수상태(coma)의 전단계쯤 된다는 설명이다. 체중도 27㎏에 불과하단다. 또 스님 스스로가 영양분을 섭취해야 치료가 가능하다고 하니 더욱 더 안타깝다. 이제 스님을 살리는 데 모두가 나서야 한다. 생명보다 고귀한 것은 없다. 스님이 던진 ‘도롱뇽’이나 ‘초록의 공명’은 그동안 중생에게 모두 스며들었다. 사랑·평화·생명이 그것이다. 스님의 묵언이 지니는 의미는 심심상인, 염화미소다. 이심전심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숨을 담보로 한 소영웅주의의 발로’로까지 폄하하고 있다. 그를 잃게 된다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개발과 환경 논쟁의 악순환이 계속될지도 모른다. 생명의 역사·문화가 공존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오풍연 논설위원 poongynn@seoul.co.kr
  • 儒林(524)-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4)

    儒林(524)-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4)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4) 금강산으로 입산하는 도중에 지은 율곡의 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늙은이 하는 말이, 지나온 세상 햇수조차 기억 못해,/편하고 괴로움과 슬프고 기쁨을 다 맛보았다오. 인정은 얄팍한 매미 날개 무상도 하여라,/ 말하고 웃는 그 속에도 칼날이 감춰 있더군. 나는 이제 옹졸한 생활로 여생을 보전하노니,/본래 칭찬이 없는데 누가 헐뜯을 것인가. 그대 만난 김에 세상 일들 묻고 싶노니,/시국 운수가 몇 번이나 통했다 막혔다 했는고. 부디 이름 갖고 속세에 퍼뜨리지 말기를,/나는 지금 숨어 사는 사람이라오. 그리고는, 닭 잡고 기장밥하여 나를 배불리고,/함께 빈 집에 누워 자면서 성리(性理)를 이야기하였네. 기이한 말과 험한 이야기 가끔 상도에 벗어나,/장자(莊子), 열자(列子)쯤은 개미처럼 내려다 보기도, 이른 아침 잠깨어 보니 사람은 간 데 없고,/단지 빈 뜰에 벗어둔 신만 보이네.” 피의자(被衣子),‘세상을 피해 숨어사는 사람’.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지은 이 시를 통해 율곡은 자신의 입장을 세상과 인연을 끊은 피의자로 노래하고 있음인 것이다. 금강산에서 율곡은 자신을 ‘의암(義菴)’이라고 불렀다. 그런 의미에서 의암은 율곡의 불교적 법명이었다. 또한 율곡의 화두는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였다.‘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것이 율곡의 화두였던 것이다. 원래 이 화두는 불가에서 최고의 선승이었던 조주(趙洲)의 유명한 선화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날 학승 하나가 고불(古佛) 조주를 찾아와 다음과 같이 물었다.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그러자 조주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한 벌의 마의(麻衣)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옷의 무게가 자그마치 7근이나 되었어.” 제자의 질문에 조주가 대답한 청주는 오늘날 산동성에 있는 조주의 고향이었다.7근은 4.2㎏쯤 되는 무게로 옷 한 벌의 무게가 4㎏이 넘는다면 이는 보통 무거운 옷이 아닌 것이다. 이 화두는 1700개가 넘는 화두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고 난해한 공안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화두는 또 다른 조주의 선화와 유사하다. 어떤 중이 조주에게 물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그 유명한 남천(南泉)스님을 여러 해 동안 시봉하였다 하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그러자 조주가 대답하였다. “진주에서는 큰 무(蘿富)를 캘 수가 있다.” 조주가 말하였던 진주는 하북성의 정정(正定)의 땅을 가리키는 말로 예로부터 큰 무가 나오는 명산지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조주가 대답하였던 청주에서 만든 7근이 넘는 베옷이나 진주에서 나는 큰 무와 같은 말은 정답이 아니고 그 어떤 언구에도 얽매이지 말고 오직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러하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의단(疑團)에 집중하라는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 儒林(522)-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2)

    儒林(522)-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2)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2) 그리하여 율곡은 마침내 금강산에 입산하기를 결심하게 된다. 이때 율곡은 자신의 심정을 여러 친구들에게 보낸 작별의 편지에서 대충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학문은 배운다고 능할 수는 없어도 기(氣)는 길러 이룰 수 있네. 이와 기(理氣)는 사람마다 함께 가진 것으로 기를 잘 기르면 마음의 부림을 받지만 제대로 기르지 못한다면 마음이 기의 부림을 받게 되네. 기가 마음의 부림을 받게 되면 몸에 주재하는 바가 있어 성현도 가히 기약할 수 있으나 마음이 기의 부림을 받게 되면 희·로·애·락·애·오·욕의 7정에 통제가 없어 우매하고 황망하게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니와 옛날 사람으로 기를 잘 기른 이는 맹자일세. 공자께서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산과 물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 흘러가는 것이나 그 우뚝함 만을 취할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조용한 가운데에 본체를 배워야 할 것이네. 어진사람과 슬기로운 사람이 이른바 기를 기르는데 산수를 버리고 도대체 어디서 이를 구하겠는가.” 이 편지에서 율곡이 지적한 ‘기(氣)’란 바로 맹자가 ‘그 기됨이 지극히 크고도 굳세어 길러 해로움이 없다면 하늘과 땅에 가득하게 된다.(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則 塞于天地之間)’고 말하였던 ‘호연지기(浩然之氣)’인 것이다. 그러나 율곡이 금강산에 입산하였던 직접적인 동기는 맹자가 말하였던 호연지기, 즉 ‘떳떳한 기상’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친구들에게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서 금강산으로 들어간다고 편지를 썼던 것은 명목상의 이유였을 뿐 실제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서모와 큰형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집안에 불화가 끊이지 않자 ‘끝내 화합하지 못하면 차라리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는 것이 낫다.’는 편지를 쓰고 강릉의 외갓집으로 현실을 도피하였던 율곡의 고민에서 엿볼 수 있듯, 그것이 직접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이때 율곡은 한 스님을 만나게 된다. 그 스님의 이름은 알려진 바 없으나 그 스님은 율곡에게 다음과 같이 유혹하였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복을 비는 데에는 불교를 당할 도가 없습니다.” 천도(遷度). 죽은 사람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길은 오직 불교밖에 없다는 스님의 말을 들은 순간 율곡의 마음은 크게 움직인다. ‘명종실록’에는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이는 어려서부터 이미 문장으로 나 있었고, 일찍 모친상을 만나 장례를 치르는데 정성이 지극하였다. 그 부친의 첩이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또 부친은 일찍부터 경전을 좋아하였다. 이이의 나이 16,17세 되던 때 어떤 사람이 찾아와 죽은사람의 영혼을 위해서는 복을 빈다는 이야기로 그를 유혹하였다. 그는 이 말을 듣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의복을 정돈하여 그대로 금강산으로 숨어들어갔다.”
  • 한국 천주교·불교 ‘울타리’ 넓힌다

    새해들어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아시아 사제양성의 요람으로 거듭나는가 하면 불교 조계종이 해외 교구 신설을 적극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움직임은 “한국종교가 국내 역할을 넘어 세계속에서의 사명과 소임을 적극 맡아야 한다.”는 교계 안팎의 여론에 본격 대응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서울대교구 베트남人등 4명 사제교육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올해 베트남과 방글라데시 신학생 각 두 명씩 네명을 국내 대신학교에서 사제로 양성키로 했다. 지난해 중국교회 신학생 두명을 받아들인 데서 더욱 확대한 것으로, 올해 서울대교구에서 공부하는 아시아 유학생은 모두 6명으로 늘어난다. 이들 베트남ㆍ방글라데시 신학생들은 서울 혜화동 대신학교에 머물며 1년간 서강대에서 한국어 교육을 받아 수학능력에 적합한 학년으로 편입하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앞서 서울대교구는 아시아 신학생으로는 처음으로 중국교회 신학생 두 명이 국내에서 3년간 수학한뒤 2002년 중국 현지에서 사제서품을 받도록 했었다. 서울대교구가 아시아 신학생을 받아들여 교육하게 된 것은 “한국교회가 아시아 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해야 한다.”는 교구장 정진석 대주교의 의지에 따른 것으로 천주교계는 보고 있다. 정 대주교는 “한국교회가 아시아 선교의 큰 축이 되어줄 것을 교황청이 요청한다.”고 강조해왔다. 정 대주교는 특히 올해 교구 신년하례식에서 앞으로 몽골 신학생까지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밝혀 아시아 신학생 교육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교구측은 “한국 천주교의 아시아 신학생 교육은 중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의 도움으로 성장한 한국교회가 은혜를 갚는다는 데 의미가 있다.”면서 “나아가 한국 신자들이 아시아교회에 대해 좀더 많은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계종, 해외교구 신설 적극 검토 한편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은 지난 13일 미국 뉴욕사암연합회 휘광 스님(뉴욕 불광사 주지)의 예방 자리에서 해외교구 신설 건의를 받고 “(해외교구 신설을)적극 생각하고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불교계에 따르면 휘광 스님은 현지 불자들의 의견을 총무원장 스님에게 전달하기 위해 방한,“이민 1ㆍ2세대 가운데 출가를 희망하는 교민들이 많다.”면서 해외교구 설립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총무원 관계자는 “해외교구가 만들어지면 총무원에 담당 국제부서를 신설하는 것과 함께 행자교육도 현지에서 실시해야 한다.”는 휘광 스님의 주장에 지관 스님이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儒林(520)-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0)

    儒林(520)-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0)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0) 전해오는 야사에 의하면 이원수는 꼬박 사흘 낮 사흘 밤을 쉬지 않고 오백그루의 밤나무와 오백 개의 밤톨을 혼자서 심었다고 한다. 이원수는 기진맥진하여 쓰러졌으나 노추산은 이로부터 원효가 태어난 밤나무계곡, 즉 ‘율곡(栗谷)’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년 후. 다시 강릉의 오죽헌 집에 탁발승 하나가 찾아들었다. 외할머니는 정성껏 담은 쌀 한 되를 가져다 바랑에 넣어다 주는 순간 그 스님이 1년 전에 찾아왔던 바로 그 스님이란 사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 스님께서는 작년에 오셨던 그 스님이 아니신가요.” “그래, 밤나무는 모두 심으셨는가요.” “스님의 말씀대로 더도 덜도 아닌 꼭 천 그루의 밤나무를 심었습니다. 지금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럼 이 아이의 아버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밤나무를 심은 파주의 노추산에 있을 것입니다.” 스님은 그 즉시 파주의 노추산을 찾아간다. 노추산에서는 이원수가 땀을 흘리며 밤나무를 가꾸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이원수가 스님을 쳐다본 순간 스님은 다짜고짜로 밤나무의 숫자를 세어보기 시작하였다. “한 그루, 두 그루,….” 스님은 지팡이로 밤나무를 일일이 확인해 나가면서 숫자를 헤아리고 있었다. “998,999,….” 하나하나 밤나무의 숫자를 헤아리던 스님의 지팡이는 마침내 땅위에서 멎어섰다. “한 그루가 모자라는군요.” 한 그루가 모자란다는 말에 이원수는 깜짝 놀라며 다시 세어보았다. 그러나 과연 스님의 말대로 꼭 한 그루가 모자랐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분명히 오백그루의 밤나무 묘목과 오백 개의 밤톨을 심었는데, 한 그루가 부족하다니. 그러자 스님이 웃음을 지으면서 말하였다. “이제 당신의 아이는 하늘의 것이요. 곧 하늘이 당신의 아이를 데리고 갈 것이요.” 그때였다. 낙심하던 이원수는 땅에 떨어진 낙엽을 헤치다 이제 막 땅을 뚫고 솟아나오는 새싹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여기도 있습니다.” 이원수는 소리쳐 말하였다. “분명히 밤나무 새싹입니다.” 스님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말하였다. “내가 졌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순간 스님은 호랑이로 변하여 울부짖으며 하늘을 박차고 사라졌다고 하는데, 어쨌든 이로부터 파주의 노추산은 밤나무가 많은 율곡리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한갓 야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율곡의 호는 이러한 야담의 본거지인 ‘율곡리’에서 따온 것이었으며, 실제로 원효가 태어난 곳이 율곡의 ‘사라수’ 아래였다고 삼국유사가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율곡이란 이름도 이처럼 원효와 깊은 인연을 가진 불교적 숙연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한 것이다.
  • 국립공원 입장료 7월부터 단계적 폐지

    국립공원 입장료 7월부터 단계적 폐지

    때묻지 않은 자연과 빼어난 경관, 운이 좋으면 희귀 야생동·식물까지 볼 수 있는 곳은? 바로 국립공원이다. 한해 탐방객이 2000만명에 육박하는, 온 국민의 쉼터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이런 국립공원이 앞으론 더욱 각광받을 것 같다. 정부가 오는 7월부터 단계적으로 국립공원 입장료를 폐지(서울신문 1월12일자 1면 참조)키로 하고, 구체적인 추진 절차를 밟고 있어서다. 불교계도 이런 방침에 적극 호응하고 있어 그 동안 국립공원 입장료와 공원내 사찰 문화재관람료를 함께 걷어 온 부당한 관행도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외국도 대부분 무료 입장 국립공원 입장료는 1970년 5월 속리산 국립공원부터 걷기 시작해 현재 전국 18개 국립공원,188개 매표소에서 받고 있다. 정부 재정형편이 어려워 공원관리 비용을 충당할 목적으로 도입돼, 최근 들어선 해마다 250여억원 안팎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국립공원 입장료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 전부터 제기돼 왔다.‘국립공원은 사유재산이 아닌 국민 모두의 소유’라는 당위에 터잡고 있다.‘수혜자 부담원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해 등산객의 호주머니를 털 것이 아니라 국가예산으로 관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다. 유럽의 모든 나라와 일본, 뉴질랜드 등 미주 대륙을 뺀 대부분의 국가들도 입장료를 받지 않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입장료 징수의 형평성 문제도 거론된다. 공원내 사유지가 많은 데다 출입구도 여러 군데 흩어져 있어 맘만 먹으면 입장료를 내지 않고도 들어갈 수 있는 형편이다. 특히 공원 주변지역 주민들의 경우 “동네 앞산에도 돈내고 들어가야 하느냐.”거나 “이웃집이나 친척집을 방문할 때도 입장료를 내야 하느냐.”는 불만과 민원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국립공원관리공단측도 “성수기엔 순찰이나 공원관리 인력보다 단순 매표업무에 매달리는 직원들이 더 많아 전문적인 공원관리가 어렵다.”는 입장이다. 입장료 폐지문제는 지난해 하반기 정부부처간 진지한 논의가 이뤄졌는데, 예산엔 반영되지 못했다. 하지만 올해 사정은 다르다. 이재용 환경부장관은 “입장료 폐지가 옳으며, 이에 대해선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정부 내 분위기를 전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역시 “자체 예산을 활용해서라도 4개 해상·해안국립공원의 입장료 폐지를 우선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불교계도 적극 호응 입장료와 함께 사실상 강제적으로 걷어 온 사찰 등의 ‘문화재관람료 징수 시비’도 해소될 전망이다. 현재 전국 14개 국립공원(22개 사찰)에서 입장료·문화재관람료를 등산객의 의사에 상관없이 통합징수하고 있다. 지난해 국립공원 입장객 1799만명 가운데 47%에 이르는 848만명이 입장료와 문화재관람료를 통합징수하는 매표지역으로 입장했다. 하지만 문화재보호법 등 관련 법엔 이같은 통합징수에 대한 어떠한 규정도 없어 “정부와 불교계가 공공연히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비판이 거셌다.“문화재를 보지 않는 등산객에게도 관람료를 징수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여론도 시시때때로 들끓었다. 이 때문에 1997년엔 ‘별도 징수’가 추진되기도 했지만 “산문(山門)을 닫겠다.”는 불교계의 강력한 반발에 밀리는 등 번번이 무산됐었다. 그러나 최근 불교계의 행보는 종전과는 딴판이다. 여론악화를 의식한 듯 오히려 정부보다 더 적극적이다.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은 지난달 25일 사학법 개정과 관련한 노무현 대통령과의 종단지도자 간담회에서 “공원 입장료 폐지가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전달, 노 대통령의 긍정적 반응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16일과 30일엔 김재규 공단이사장 및 이재용 환경부장관을 잇따라 만나 이런 방침을 거듭 확인하기도 했다. 불교계에선 입장료 폐지에 대비해 매표소를 사찰 근처로 옮겨 문화재관람료를 징수키로 하거나, 수입 축소에 따른 대책 등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은호기자 unopark@seoul.co.kr
  • 儒林(519)-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9)

    儒林(519)-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9)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9) 마을 동구 밖에서 간신히 스님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외할머니는 스님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스님, 저희 집으로 가셔서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스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선선히 대답하였다. “알겠습니다, 가시지요.” 두 사람은 오죽헌으로 돌아왔으나 스님은 한참 동안을 마당에서 놀고 있는 현룡을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말씀하여 주십시오, 스님. 저 아이를 하늘이 가만히 놓아둘까 그것이 걱정되다니요.” 외할머니가 채근하자 스님이 무거운 입을 떼었다. “저 아이가 지나치게 똑똑하여 하늘의 천기를 해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액을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마침 소문을 전해들은 현룡의 아버지 이원수도 이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저 아이를 위해 밤나무 천 그루를 심어야 합니다.” 밤나무 천 그루라는 말에 기가 막힌 외할머니가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밤나무 천 그루를 한꺼번에 어떻게 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저 아이의 아버지가 혼자서 심어야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아버지 혼자서 밤나무를 심어야한다는 스님의 말에 이원수가 따지듯 물어 말하였다. “아니, 무슨 이유로 밤나무 천 그루를 심어야 한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저 아이의 재능을 탐낸 하늘이 호랑이를 보내어 잡아갈 것입니다.” “하필이면 밤나무여야 하는 연유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스님은 목탁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옛날 원효(元曉)대사께오서는 압량(押梁:지금의 경산군)의 남부 불지촌(佛地村)의 북쪽에 있는 율곡(栗谷)의 사라수(娑羅樹)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대사의 어머니께서 원효를 잉태, 만삭이 되어 마침내 그 율곡 골짜기의 밤나무 아래를 지내다가 홀로 해산을 하셨습니다. 창황 중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고 해서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두고 그 아래서 해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밤나무를 사라수라고 불렀습니다. 사라수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을 때 부처님을 편안하게 모셨던 상서로운 나무로 이 아이를 보호해주기 위해서는 원효대사의 가피(加被)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침내 할 말을 마친 스님이 합장을 하고 사라지자 외할머니는 사위에게 말하였다.“여보게, 어서 저 스님이 시키는 대로 하게나. 저 스님은 보통 분이 아닌 것 같으네.” 장모의 말을 듣고 이원수는 하인을 불러 모아 밤나무 묘목 천 그루를 구해오도록 하였다. 하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나 밤나무 천 그루를 일시에 구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었다. 간신히 구한 것은 밤나무 오백그루. 나머지는 할 수 없이 밤톨로 심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원수는 오백그루의 묘목과 오백 개의 밤톨을 가지고 하인들과 함께 파주의 노추산으로 갔다. 스님의 말은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아버지 혼자서 이 모든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므로 이원수는 혼자서 땅을 파고, 혼자서 밤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다.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26)세계의 음다풍습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26)세계의 음다풍습

    새해다. 아직도 앞산인 달마산은 눈을 모자삼아 구름을 목도리 삼아 유유자적 하늘과 세월을 떠받치고 있다. 새해들어 눈 덮인 골짜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인사를 하러 온 차인들도 많지만 일반 등산객들의 발길도 늘어가고 있다. 하얀 입김을 푸우 푸우 내뿜으며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다. 해남의 명산인 두륜산에는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두륜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큰절인 대흥사를 지나 일지암을 지나는 코스와 진불암을 지나는 코스가 있다.2000년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일지암을 찾는 등산객들은 매우 드물었다. 마치 사시사철 선방처럼 한적한 곳이 바로 일지암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큰 절의 수련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등산객까지 일지암을 찾는 발걸음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른바 웰빙음료로 각광받고 있는 차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인 것 같다.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 중 가끔씩 차를 청하는 분들이 있다. 일지암에는 좀 독특한 차 풍습이 있다. 그곳에 머무는 사람이 아닌, 청하는 손님이 차를 직접 우려내서 마시는 것이다. 그러면 대부분 당황해 한다. 차를 어떻게 내야 합니까.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매우 까다로운 절차와 형식을 거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쉽게 생각하세요. 직장생활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커피를 마시듯 편안하게 차를 끓여 드시면 됩니다. 우선 유천에서 물을 떠와 차를 끓이는 주전자에 넣고 사람 수에 맞게 잔과 차를 준비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물이 끓으면 차 주전자에 물을 붓고 마시면 되는 것이지요.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편안하게 따르고 마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손사래를 치며 차를 마시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안타까워 다시 권해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차는 형식과 관념 속에서 머무는 뜬 구름이 아니라 존재와 현실의 내적 욕망을 갈무리하는 청적(淸寂)이 머무는 마음의 공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차는 그 자체로 이미 편안함이며 실용적이며 삶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장자의 이야기다. 제나라 환공이 당상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당대최고의 목수인 윤편이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물었다.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책은 무슨 말을 쓴 책입니까.” “성인의 말씀이다.” “그 성인은 지금 살아계십니까.” “벌써 돌아가신 분이다.” “그렇다면 전하께서 읽고 계신 책은 옛 사람의 찌꺼기군요.”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목수 따위가 감히 시비를 건단 말이냐. 합당한 설명을 한다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많이 깎으면 축인 굴대가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굴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정확한 깎음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뿐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깎아야 할 수레바퀴의 정확한 치수는 있기는 있습니다만 소신은 제 자식에게 그것을 말로 깨우쳐 줄 수가 없고 제 자식 역시 신으로부터 그것을 전수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흔 살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손수 수레를 깎고 있습니다. 옛 사람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하께서 읽고 계시는 것은 옛 사람들의 찌꺼기 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환공과 윤편의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형식인 말은 결코 그속에 담긴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눈으로 봐서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형(形)과 색(色)이요 귀로 들어 알 수 있는 것은 명(名)과 성(聲)일 뿐이다. 차도 마찬가지다. 차는 거창한 삶의 형식이 결코 아니다는 것이다. 차의 본뜻은 삶의 실용속에서 자신을 발견해가는 작은 기쁨에서 시작되는 일상화를 뜻하기 때문이다. 다만 다구를 갖출 수 있고 차를 마시는 최소한의 지혜를 갖춘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차는 내 일상의 삶속에서 천연스럽게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차는 곧 자신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는 삶의 존재로서 우리에게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지구촌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형태든 차를 마신다. 그리고 차를 마시는 것은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차를 많이 마시는 민족은 어디일까. 아이로니컬하게도 바로 티베트다. 그것은 높은 고원지대의 기후 탓이다. 티베트인들은 인체에 필요한 비타민과 미네랄 같은 영양성분을 차로 보충한다. 그들이 마시는 수유차와 수유차를 만들 수 있는 통모, 그리고 차담은 티베트인들을 세계에서 가장 차를 많이 마시는 민족으로 만들고 있다. 티베트인들의 음다풍속은 매우 자연스럽다. 형식과 격식이 없이 앉는 곳이 바로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티베트인들의 찻자리는 그런 점에서 매우 자유롭고 평안하다. 아마도 형식과 격식을 갖추지 않고 자연과 인간 그리고 차가 하나가 되는 찻자리를 펼치는 유일한 민족이 바로 티베트일 거라는 생각이다. 그들은 노동을 통해 생산하는 생산현장에서, 그리고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는 회의장에서도, 높은 산에서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차를 마신다. 자세히 들여다면 그들의 일상은 이미 차 공동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는 그들의 모든 삶을 씨줄과 날줄로 이어준다. 척박한 문화속에는 아주 조용한 삶의 평화가 깃들어 있다. 그들의 종교적 성지인 라사의 포탈라궁을 가기 위해 온 가족이 7개월 동안 삼보일배를 한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의 차문화 공동체는 우리가 향후 지향해야 할 차의 살림살이가 어디에 있는가를 연구해줄 귀중한 것들이라고 보여진다. 중국 신강 위구르족의 밀크티와 향차(香茶)도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들이다. 위구르족의 밀크티와 향차는 한가한 여가시간보다는 식사와 함께 먹는다는 게 특징이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식사를 한 뒤나 편안한 시간을 따로내어 차를 마시는 반면 위구르족은 식사와 함께 차를 마시는 것이다. 위구르족은 북쪽의 민족들은 밀크티를 마시고 남쪽에 사는 민족들은 향차를 마신다. 위구르족의 밀크티는 매우 독특하다. 벽돌차로 불리는 전차를 쪼개 덩어리를 철제주전자나 알루미늄 주전자에 넣고 물을 부어 팔팔 끓인다. 차가 적당하게 푹 우러나면 신선한 우유 혹은 양젖을 넣고 다시 소량의 소금을 넣은 뒤 더 끓인다. 그리고 몇분이 지난 뒤 찻잔에 따른후 식사와 함께 차를 마신다. 향차 역시 마찬가지다. 주전자를 사용해 차와 함께 후추나 계피 정향 등 향로가루를 넣고 서서히 물을 부은 뒤 불위에 얹어 4∼5분가량 끓인다. 차 찌꺼기나 향료가루를 찻잔에 함께 나오지 않도록 걸러 마시며 보통 아침 점심 저녁식사와 더불어 차를 마신다. 몽골인들에게도 밀크티가 있다. 유목민인 몽골인들에게는 삼차일반(三茶一飯)의 음다풍습이 있다. 하루에 3번정도 차를 마시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뒤 가족들과 함께 한번의 식사를 하는 것이다. 중국의 운남지방에서도 독특한 음다풍습이 있다.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음다풍습은 염파차(炎波茶)와 용호투차(龍虎鬪茶)다. 염파차는 차 덩어리를 부숴 작은 토기그릇에 넣은 뒤 토관을 불위에 얹어 찻잎이 “퍽 퍽”하는 소리가 날 때까지 구운 다음 천천히 뜨거운 물을 붓고 다시 5분정도 끓인다. 그런 후 다시 소금덩어리를 다탕에 넣고 끓여서 짠맛이 나면 화로에서 꺼내어 따른 뒤 각자의 기호에 따라 뜨거운 물을 더 부어 마신다. 운남에서는 염파차를 마실 때 옥수수떡을 함께 먹는 습관도 있다. 용호투차는 밀림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감기치료에 이용하는 비방으로 전해지고 있다. 먼저 진하게 우려낸 뜨거운 차를 알코올 도수 높은 술이 담긴 술잔에 부으면 마치 용과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것과 같은 형상을 나타낸다. 감기에 걸렸을 때 마시면 땀이 나고 잠을 잘 자게 되고 몸이 가벼워져 큰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인들은 티베트인 다음으로 차를 가장 많이 마시는 민족이다. 연간 1인당 차소비량이 약 4.5㎏이 될 정도로 차를 마시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영국인들이 차를 마시는 습관은 매우 독특하다.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우선 차를 한 잔 마신다. 그리고 아침 식사때 한 잔을 마시며,11시쯤 일을 하거나 대화를 하며 또 차를 한 잔 마신다. 점심식사때 한 잔, 오후 1시부터 4시사이에 한 잔, 잠을 자기 직전에 한 잔을 마시는 것이 영국인들의 다시(茶時)다. 영국인들이 세계적으로 차 소비량이 많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영국에서는 또 ‘5시 차’라는 음다풍습이 있다. 18세기 중엽 베드포드 공작부인인 안나가 고안해낸 방법으로 오후 5시에 많은 사람을 초청해 차와 과자 등을 제공하는 통상적인 차회를 말한다.5시 차회에서는 크래커 과일 등을 바구니에 담아 차와 함께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에 비해 미국인들은 차가운 차인 ‘아이스티’를 즐겨 먹는다. 차는 통상적으로 뜨거운 물에 우려내어 마신다는 통념을 미국인들은 깨고 있는 것이다. 아이스티는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국제박람회에서 영국인 차업자인 리처드에 의해서 보급됐다. 차를 선전하기 위해 박람회에 온 리처드는 7월이라는 뜨거운 날씨 탓에 아무도 차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자 홍차에 얼음을 넣어 차게 한 다음 차가운 홍차라고 권유했다. 차가운 홍차인 아이스티는 뜻밖에도 참가자들의 환호를 받았고 전세계적으로 보급될 수 있었다. 사막의 나라 모로코에서는 박하차를 마신다. 박하차는 차를 넣고 먼저 끓이다 설탕과 함께 박하잎을 넣어 마신다. 차와 설탕 박하가 어우러져 상쾌한 기분을 전해주는 것이 바로 모로코의 박하차이다. 이밖에도 차는 유럽 러시아에서도 그 지역의 기후와 문화적 풍습에 알맞게 음용되고 있다. 차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우유 설탕, 심지어 박하와 소금까지도 함께 섞어서 음용되고 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차는 형식과 관념의 문제가 아닌 현실 삶의 존재조건이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 차가 함께 하는 매개고리로써 중요한 매체이기도 한 것이다. 일지암 암주 ■ 티베트의 수유차 ‘하루 양식은 없어도 되지만 차 없이는 못산다.’는 민족이 바로 티베트다. 그들은 하루 일과를 차로 시작해 차로 끝낸다. 최소 20∼30잔에서 100잔을 넘게 마시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티베트에 가면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명물이 바로 ‘통모’라고 부르는 차통이다. 보통 지름이 15∼18㎝이고 길이는 150㎝가량이며 왕대나무를 잘라 차통으로 만든 후 겉에는 아름다운 문양을 새긴다. 차통에는 피스톤 같이 생긴 막대가 끼여 있다. 통모에 야크의 젖으로 만든 버터를 빚어넣고 그위에 끓는 차를 붓는다. 소금과 입맛에 맞는 향로를 또 넣고 피스톤처럼 생긴 자루를 두손으로 잡고 절구질하듯 아래 위로 밀어 넣었다 뺐다 하며 골고루 섞는다. 절구질을 많이 할수록 차는 부드럽고 맛깔이 난다. 수유차라 불리는 이 차는 단백질과 지방질 풍부한 비타민과 카페인이 함유된 버터차가 된다. 쌀뜨물처럼 진한 게 탁한 우유맛이 난다. 수유차를 만들 수 있는 통모는 티베트 사람들의 빈부차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신분적 가치를 지닌다. 통모의 겉이나 절구질을 할 수 있는 막대기의 손잡이인 ‘자나’에 부자들은 아주 귀한 보석으로 치장한다. 수천만원이 넘는 귀한 통모가 티베트에는 존재한다. 수유차를 담을 수 있는 보온통인 ‘차담’도 매우 중요한 차 도구 중 하나다. 티베트 사람들은 집집마다 최소한 2∼3개의 통모와 4∼5개 정도의 차담을 가지고 있다. 티베트 사람들은 찻자리가 따로없다. 찻상을 차리거나 차를 마시는 격식 없이 시장바닥이건 회의장에서건 앉는 곳이 바로 찻자리다. 어떤 자리든 앉으면 바로 차가 나오기 때문이다. 티베트 풍습상 손님으로 차를 접대받을 때 찻잔의 차를 모두 마셔서는 안 된다. 차를 모두 마셔버리면 차를 더 이상 마실 의향이 없다는 것으로 알고 더 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를 더 마시기 위해서는 찻잔에 차를 약간 남겨두어야 한다. 차가 일상화되어 있는 티베트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차 소비량을 자랑하고 있다.1인당 연간 소비량이 15㎏가량 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 儒林(518)-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8)

    儒林(518)-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8)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8) 물론 율곡은 이 상소문에서 한때 자신이 심취하였던 불교의 교리에 대한 비난은 자제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이 상소는 요승 보우의 악행에 대한 논척(論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교를 ‘이단’이라고 분명히 못 박음으로써 한때 자신이 ‘이단’에 빠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맹비난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율곡의 이러한 태도는 율곡이 가진 남다른 엘리트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퇴계와 율곡 두 거인의 차이점이기도 하였다. 만약 퇴계가 율곡처럼 한때 궁향(窮鄕)에 들었더라면 설혹 불교의 폐단을 알고 있다 해도 퇴계는 불교를 이단이라고 못 박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퇴계가 율곡에게 ‘권하노니 그대는 제때에 바른 길을 추구하고 궁향에 들었던 일 슬퍼하지 말아 주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을 미뤄 보면 율곡은 그 무렵 자신이 불교에 심취했던 것을 슬퍼하고 그러한 고민을 사흘 동안 퇴계에게 모두 털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율곡이 이처럼 한때 불교에 심취하였던 것은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였다.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는 불경을 좋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율곡의 아버지가 벼슬에 관심이 없고 유유자적한 청빈생활을 즐겨하였던 것은 이처럼 불교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율곡은 불교와 많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데, 그의 호가 율곡, 즉 ‘밤나무계곡’이라고 불린 것도 본가가 있는 파주의 노추산에 밤나무가 많다고 해서 ‘율곡리’에서 불리는 데서 따온 것이지만 노추산에 밤나무가 많게 된 것은 율곡과 한 스님과 맺은 불교적 인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일화는 다음과 같다. 율곡이 다섯 살 무렵, 외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강릉에서 성장하고 있던 율곡에게 어느 날 스님 한사람이 찾아온다.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탁발을 하고 있던 스님에게 외할머니 이씨는 얼른 광으로 가서 쌀 한 되를 퍼서 스님에게 시주하였다고 한다. “복 받으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스님이 합장하고 인사를 할 때 현룡이 할머니를 부르며 뛰어왔다. 현룡은 율곡의 아명. 뒤로 돌아서려던 스님은 그 소리를 듣고 현룡을 쳐다 보았다. 한참을 쳐다 보던 스님은 할머니에게 말하였다. “참 총명해 보이는 아이로군요.” 스님의 말에 외할머니는 기분이 좋아서 웃으며 대답하였다. “네 아주 똑똑한 아이랍니다.” 그러나 스님은 잠시 머뭇거리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위해서는 꼭 살아있어야 하는데, 쯧쯧.” 혀를 차는 스님의 말에 외할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러자 스님은 다시 합장을 하며 말하였다. “저 아이는 분명 영특한 아이지만 하늘이 가만히 놓아두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스님은 말을 마치고 벼랑을 꾸며 훌쩍 길을 나섰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이 너무 궁금하였던 외할머니는 스님을 차마 보낼 수가 없었다. 외할머니는 곧 스님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스님의 행방은 묘연하였다.
  • 양성자가속기 부지선정위원장 된 성타 스님

    “방폐장 유치의 ‘숨은 진주’로 평가되는 양성자가속기 부지가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선정되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10일 경북 경주시청에서 열린 양성자가속기 부지선정위원회 첫 회의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된 성타(性陀) 스님(불국사 회주)은 “위원으로 선출된 15명 모두가 전문가들로 역사적 사명감을 갖고 열린 마음으로 부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위원들의 고견을 과감히 수렴하고, 지역정서를 충분히 감안하면 이의 없는 결정이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면서 “이를 위해 우선 오는 20일 열리는 부지선정위 두번째 회의에서 합리적인 부지선정 기준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성타 스님은 “부지가 어디로 결정되든 경주에 있지 다른 데 가는 것이 아니다. 유치에 나선 지역민들도 최선을 다해 경쟁하고 결과를 겸허히 수용해 달라.”고 당부했다. 성타 스님은 조계종 포교원장과 불국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지난해 국책사업 경주유치 추진단 공동대표를 맡아 중·저준위 방폐장 유치에 나서는 등 지역사회 현안에 적극 참여해 왔다. 한편 이날 위촉된 위원은 ▲과학기술부 이인길 원자력정책과장·최도영 사무관▲양성자가속기사업단 김준연 책임연구관·황덕구 행정부장▲경북도 김학홍 과학기술진흥과장▲경주시 이정구 건설도시국장·강두언 도시과장▲경주시의회 이삼용·간봉종 의원▲동국대 이태경 공대학장▲위덕대 정창원 건축공학과 교수▲경주대 정현 부총장▲허용 신부(경실련 대표)▲이장희 목사▲이성타 스님 등 15명이다. 경주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儒林(516)-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6)

    儒林(516)-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6)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6) 그러나 1년 반 동안의 불교입문 전력은 율곡 일생에 있어 두고두고 무거운 짐이 되었다. 조선조의 국시(國是)는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배불숭유(排佛崇儒)정책. 특히 율곡이 입신양명 중이었던 명종조에는 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와 보우와의 유착으로 불교에 대한 비난여론이 비등하던 무렵이었다. 보우(普雨)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한학을 공부하다가 15세를 전후하여 금강산 장안사(長安寺)로 출가한 당대 최고의 명승이었다. 그가 처음 금강산에서 수륙대전을 올릴 때에는 여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릴 정도로 법명이 널리 알려진 승려였다. 그는 문정왕후의 비호에 의해서 승과(僧科)를 다시 세워 승려들에게 도첩(度牒)을 주고 자신이 주지로 있는 봉은사를 선교양종의 종찰(宗刹)로 삼았다. 이 승과를 통해 서산대사와 사명당과 같은 고승들이 스님이 되는 등 수많은 업적을 거두었으나 보우는 ‘요망한 이물(異物)’로 지탄받는 대상이 되었으며, 실제로 보우는 ‘요승(妖僧)’으로까지 불리며 배척되었다. 훗날 문정왕후가 죽자 곧 잡혀서 제주도로 유배되어 그곳의 목사 변협(邊協)에 의해서 피살되는 비극을 맞았으나 보우는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이 영원히 끊겨질 것이다.’라는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불법을 보호하고 종단을 소생시키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조선 제일의 순교승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무렵 선비들은 지존(至尊)인 문정왕후 대신 보우에게 반감을 갖게 되어 역적 보우를 죽이라는 상소문이 75계(啓)에 이를 만큼 탄핵의 집중대상이었다. 이러할 때 율곡이 한때 불교에 입문하였던 것은 최고의 약점이 아닐 수 없던 것이다. 명종실록에 의하면 율곡이 생원시에 합격하고 알성과에 응시하고자 하였을 때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작당하여 율곡을 묘정(廟廷)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 유생들은 율곡에게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 “너는 한때 이단에 빠졌던 자이다. 그런 네가 어찌 공자를 위시해 여러 성인들을 모셔 놓은 이곳에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겠느냐.” 과거로 입신하려는 율곡에게 유생들의 이러한 배척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으나 율곡은 시종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의연하게 행동하였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을 정도이다. 율곡이 금강산에 입산하였던 1년 반 동안 삭발을 하고 정식 비구승이 되었다는 소문과 다만 유발거사로 불교에 심취하였을 뿐이라는 소문도 평생 동안 율곡을 따라다닌 무거운 짐이었다. 이에 대해 율곡 자신은 단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았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금강산에 있을 때 율곡이 삭발을 하였는가, 아니면 유발거사로 지냈을 뿐인가 하고 물었을 때 율곡은 다만 이렇게 대답하였을 뿐이었다. “이미 입산하였으니 비록 외향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이 그에 빠졌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러니 너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율곡은 1년 반에 걸친 금강산의 운수행각 중 실제로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지는 않았다는 몇 가지의 증거는 있다.
  • 지율스님 ‘위중’

    병원 입원 4일째 치료를 거부하고 있는 지율(知律·48) 스님의 건강이 위중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율 스님이 입원 중인 동국대 일산병원은 9일 기자회견을 갖고 “스님이 계속해서 치료를 거부할 경우 생명이 위험할 수 있으며 심각한 후유증을 초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주치의를 맡고 있는 동국대 병원 중환자실 김영권 실장은 “의식은 또렷한 상태이나 입원시보다 혈압이 낮아졌고 체중이 1㎏ 이상 빠졌으며 가끔 맥박수가 분당 100회를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면서 “심각한 비타민 부족과 전해질 이상이 있는 등 의학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태”라고 말했다. 김 실장은 “성인의 경우 비타민과 전해질 섭취가 안될 경우 60일 이내에 사망에 이르고 체중이 40% 이상 감소할 경우에도 사망할 수 있다.”면서 “스님의 경우 평상시 체중에서 40% 정도 빠진 상태”라고 밝혔다. 김 실장은 스님의 상태를 촛불에 비유,“켜져 있기는 하지만 어느 순간 불면 훅 꺼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 실장은 “스님이 계속해서 치료를 거부하고 있어 의학적인 치료는 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스님은 현재 손짓과 낮은 목소리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며 소량의 물과 녹차 정도만 섭취하고 있다.”고 말했다.고양 한만교기자 mghan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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