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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천 스님의 아헹가 정통요가] 숩타 비라아사나

    [현천 스님의 아헹가 정통요가] 숩타 비라아사나

    숩타(Supta)는 ‘누운’, 비라(Vira)는 ‘영웅’이라는 뜻이다. 이 아사나에서는 등을 마루에 대고,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음으로써 다리를 쉬게 하며 소화에 좋다. 1. 비라아사나로 앉는다(사진1). 2. 숨을 내쉬며, 몸통을 뒤로 기울이며, 팔꿈치를 하나씩 마루에 놓고 몸통을 바닥으로 내린다(사진2). 3. 두 팔을 머리 위로 쭉 뻗고 몸통을 길게 늘인다. 넓적다리와 무릎을 아래로 누르고 두 무릎을 서로 모은다. 이때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주의한다. 호흡을 깊게 하면서 오래 이 자세를 유지한다(사진3). *고급단계로 나아가기:허리를 쭉 뻗으며 치골에서부터 위로 몸 앞부분을 뻗는다. 넓적다리를 바깥쪽으로 돌리고 정강이와 발을 넓적다리 쪽으로 더 당긴다. 어깨뼈가 마루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 4. 초보자일 경우: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무릎 뒤에 얇은 받침대를 대거나 무릎 아래에 쿠션을 둔다. 큰 베개 위에 등을 대고 눕는다. 양 팔은 아래로 편안하게 내려서 양 엉덩이 옆에 놓는다. 초보자는 무릎을 붙이지 않아도 좋다. 또 머리 뒤에 담요를 받쳐 편안하게 할 수 있다(사진4). 5.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일으킨다. 효과:이 아사나는 복부 기관과 골반부를 잡아당겨 준다. 다리가 아픈 사람은 이 자세를 10∼15분간 유지하면 편안해지고, 운동 선수나 장시간 걷거나 서 있어야 하는 모든 사람에게 권장된다. 식후에도 할 수 있으며, 자기 전에 하면 다음날 아침 다리의 피로가 풀릴 것이다. 요가교실:한 가지 아사나를 완전하게 할 수 있을 때는 그 아사나를 힘들이지 않고 쉽게 할 수 있으며 불편하지 않게 되고, 몸의 동작은 우아하게 된다. 아사나를 수행하는 동안, 우리의 육체는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물들의 모습(하등곤충에서 가장 완벽한 현인까지)을 취하며, 이들이 대자연, 즉 ‘대우주의 기’를 똑같이 호흡하고 있음을 안다. 아사나를 수행하면서 진정한 자아를 보게 되고 신에게 자신을 맡기는 감정으로 행하는 다양한 아사나에서 대우주의 기를 느낀다. *요가 보조 기구(큰 베개, 벨트 등)는 아헹가 요가 선원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 자료제공:대구 아헹가 요가 선원 053)753-1737 www.iyengar.co.kr 아사나:김교영
  • 儒林(618)-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

    儒林(618)-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

    제6부 理氣互發說 제1장 相思別曲(1) 1568년 선조원년 춘3월. 도산서당 정문 앞에 행색이 남루한 노인 하나가 이제 막 도착하여 문 안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서 있었다. 아직 초봄이라곤 하지만 한기가 가시지 않은 쌀쌀한 날씨임에도 노인의 이마에 땀이 배어 있었고,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허리에 메고 있는 걸망에는 해질 때 갈아 신을 짚신이 대롱대롱 매어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먼 길을 내쳐 걸어온 모양이었다. 정오가 지나고 어느덧 짧은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고 있었다. 이 무렵 도산서당은 이퇴계가 완전히 퇴거계상(退居溪上)하여 살고 있었던 은둔처였다. 단양과 풍기군수를 끝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퇴계는 고향에 ‘계상서당’을 지어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계당시대는 10여 년간 계속되었는데, 청년 이율곡이 스승 퇴계를 만나러 와서 2박3일의 운명적인 상봉을 하였던 바로 그 곳이었다. 그러나 계당은 좁고 허술하였으므로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적당치 않았으므로 퇴계는 그의 나이 57세 되던 1557년 도산 남쪽 기슭에 서당을 새로 짓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여기는 작은 골짜기가 있어 앞으로 산과 물을 굽어보고 있고 골짜기 속은 깊숙하고 넓으며 바위기슭이 선명하고 돌우물의 물이 감미로워서 머물러 살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다.” 퇴계 스스로가 쓴 ‘도산기’에 나와 있는 묘사 그대로 머물러 살기에 아주 적당한 땅을 발견한 퇴계는 ‘그 안에서 밭농사를 짓고 사는 농부가 있어 대금을 치르고 사서 토지를 확보한 후’ 1558년 3월 도산서당을 짓기 시작하는 착공식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서당을 짓는 일은 퇴계 집안의 종택으로부터 서쪽으로 4㎞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용수사라는 절의 법연스님이 도맡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사이 퇴계는 잠시 명종에게 불려 한양에서 공조판서라는 중책을 제수하고 있었는데, 퇴계는 그동안에도 법연에게 서당의 설계도를 그려 보이는 등 서당의 건립에 온갖 정성을 쏟아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당을 맡아 짓던 법연은 1년 만에 입적하고, 뒤를 이어 역시 용수사에 있던 정일스님이 뒤를 이어 공사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유년(1561년)에 이르는 5년 동안 서당인 도산과 살림집인 농운정사 두 집이 대강 이루어져 퇴계는 마침내 평생소원이었던 자신의 서원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퇴계는 온 식구들을 이끌고 정사로 이주하였으며, 그의 가문을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이 머물면서 공부하는 대학사(大學舍)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즐거움은 퇴계가 지은 ‘도산서당’이란 시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순임금은 그릇을 구우면서 즐겁고 편안했고, 도연명은 농사를 지으면서 즐거운 얼굴이었네. 성현의 마음을 내 어찌 알겠냐만 백발의 나이에 돌아와서 숨어 사는 즐거움을 맛보노라.” 스스로 노래하였던 대로 퇴계가 꿈에 그리던 도산서당으로 돌아와 숨어사는 즐거움을 맛보게 된 것은 그의 나이 61세 때의 일이었다.
  • 대법 “천성산 터널공사 계속”

    대법 “천성산 터널공사 계속”

    ‘도롱뇽 소송’으로 알려진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원효터널 공사착공금지 가처분 사건과 관련, 대법원이 공사를 계속해도 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대법원3부(주심 김영란 대법관)는 2일 천성산에 서식하는 도롱뇽을 원고로 환경단체 도롱뇽의 친구들, 천성산 내 사찰 내원사와 미타암 등이 한국철도시설공단을 상대로 낸 공사착공금지 가처분 신청 재항고를 기각했다. 이에 따라 천성산 13.2㎞ 구간을 포함한 경부고속철도 2단계 사업의 2010년 완공이 가능해졌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자연변화 정밀조사와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의 검토 등에 따르면 터널공사가 천성산의 환경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터널 공사로 신청인들의 환경이익이 침해될 개연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고 헌법상 기본권인 환경권을 근거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직접 공사의 중지를 청구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법원은“공사는 진행할 수 있지만 피신청인은 자연환경을 보호하고 후손에게 이를 물려줄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할 책무가 있다.”면서 한국철도시설공단측에도 환경보호 의무를 요구했다. 한편 천성산 터널공사에 반대해 온 지율 스님은 이날 부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천성산 단층대와 지하수 유출 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은 2003년 대한지질학회 보고서로 대법원이 (터널 공사가) 환경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스님은 “이번 판결은 하루에 지하수가 144t 빠지고 있는 천성산의 현실과 반대되는 보고서로 재판이 이뤄진 것”이라면서 “도롱뇽의 친구들이 매일 천성산에 올라가 유량조사를 계속하고 있는데 환경파괴 징후들이 나온다면 법적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대응책을 밝혔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토요일 아침에] 소유권과 관리권 사이에서/원철 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북관대첩비는 일제시대 때 반출되어 그 유명한 야스쿠니 신사에 있다가 일본과 한국의 두 노스님의 관심과 열정에 힘입어 100여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남한을 거쳐 북한의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이를 지켜보면서 유물은 제자리에 있을 때 가장 의미가 있다는 원론에 동의하면서도 새삼 관리와 소유의 경계선이 어딘가를 되묻게 한다. 지난 5월 한달동안 국립박물관의 기획전인 ‘사리함(舍利函)’전시회를 접한 느낌도 마찬가지이다. 절집의 소유물임이 분명한데 어떤 경로를 밟아 박물관의 관리를 받으면서 국가의 소유 아닌 소유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 소유자와 관리자의 한계마저 모호해졌다. 경천사지 10층석탑을 용산의 신축 박물관에 복원하면서 탑이 가지는 예배대상으로서의 종교적 의미는 무시한 채 사리공(舍利孔)에 사리도 없이 ‘이건기(移建記)’만 넣겠다는 안목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리함을 맡기기에는 원소유자로서 별로 내키는 일은 아니다. 마치 남의 무덤 앞에 있는 무인석을 뽑아다가 정원장식물로 쓰는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는 의미는 무시한 채 눈에 보이는 미적 조형물로만 인식하는 의식구조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것이다. 문화재 관리자가 원소유자에게 돌려주지 않고 계속 관리하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소유자의 관리능력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다. 그건 유물보존을 최우선으로 하는 지극히 프로다운 생각이니 탓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또 그동안 유물 관리비용을 적지 않게 투자하다 보니 내 소유물이 된 양 착각하는 부분도 있기 마련이다. 마지막으로 오랜 세월 관리하다 보니 거기에 묻은 손때와 정성 그리고 유물과의 교감으로 인한 집착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 원소유자가 그동안의 복원관리비용을 모두 지불하겠다고 해도 돌려받기 어려운 요인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최근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의 반환소식을 접하면서 또 소유와 관리의 경계선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역으로 불교계가 관리자의 입장에 속하는 문화재이다. 월정사 경내의 영감사는 오대산 사고(史庫)를 지키기 위하여 지어진 암자이다. 임진란 이후 1913년 일본으로 반출될 때가지 몇백년을 사찰에서 관리해 왔다. 보존을 위해 시설관리는 말할 것도 없고 승군까지 조직해 외곽을 지켰다. 물론 소유자는 조선왕조였다. 왕조가 망한 후 대리 관리를 자처하며 가져갔으나 결국 일본에서 대지진을 만나 거의 소실되었다. 마침 그 무렵 대출된(빌려간 연구자가 누구인지 그 후손에게라도 감사패를 드려야 할 것 같다.) 74책만이 무사하여 27권은 일제말기 경성제국대학으로 이미 돌아온 상태였고, 나머지 43권은 도쿄대학에 현재까지 보관되어 있던 것이 저간의 사정이다. 이를 알고서 오대산 월정사 스님네들이 반환을 위하여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런데 그 결과는 기존 관리자인 사찰이 아니라 서울대 규장각으로 반환된다고 한다. 도쿄대학이 관리자와 소유자 사이에서 반환주체를 누구로 할 것인가를 줄타기하다가 나름대로 고심하여 내린 결론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규장각에는 같은 종류의 완질본이 남아있다. 물론 이본(異本)이니 똑같을 수는 없다. 그래도 대동소이할 것이다. 따라서 산질(散帙)인 오대산본을 부분적으로 중첩하여 가지고 있는 것은 ‘소유’라는 욕심 충족 외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따라서 기존 27권과 이번에 돌아오는 43권을 포함한 오대산본 74권 모두를 원소재지에 두는 것도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살릴 수 있는 길이 아닌가 한다. 왜 북관대첩비가 휴전선을 넘어 자기 자리로 가야 했는지 우리는 그 도리를 알아야 한다. 현재 오대산에는 두 채의 텅빈 사고(史庫)가 복원되어 있다. 건물은 있는데 내용물이 전혀 없는 것은 사리없는 탑을 보는 것만큼이나 허전하다. 그리고 이끼 낀 석물들이 도굴로 실려 나가버린 오래된 큰무덤을 바라보는 것처럼 안쓰럽기까지 하다. 원철 조계종 포교원 신도국장
  • [현천 스님의 아헹가 정통요가] 부인과 질환에 효과 ‘우파비스타 코나아사나’

    [현천 스님의 아헹가 정통요가] 부인과 질환에 효과 ‘우파비스타 코나아사나’

    우파비스타(Upavistha)는 ‘앉아 있는´, 코나(Kona)는 ‘각도´를 뜻한다. 이 자세에서 똑바로 앉는 동작은 부인과 질환에 도움이 되며 무리하지 않는 한 생리 중이나 임신 중에도 수련할 수 있다. 1. 단다아사나로 앉는다. 두 다리를 동시에 옆으로 같은 거리로 넓게 벌린다. 두 다리를 쭉 뻗고, 다리의 뒷면 전체가 마루에 닿았는지를 살핀다. 손가락을 두 엉덩이 옆 바닥에 누르고 몸통을 위로 당긴다. 이때, 무릎과 발가락을 위로 향하게 하고 무릎은 곧게 편다(사진1). 2.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두 팔을 뻗어 양손의 엄지손가락과 둘째와 가운뎃손가락으로 엄지발가락을 각각 잡는다. 두 팔을 쭉 뻗고 엉덩이 앞쪽과 몸통을 앞으로 내밀면서 위로 당긴다. 척추를 곧게 세운 상태에서 갈비뼈를 완전히 신장시킨다. 정상적인 호흡을 하면서 몇 초간 이 자세를 유지한다(사진2). *주의사항:오금의 힘줄이 당길 경우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다. 3. 숨을 내쉬며 몸통을 바닥 쪽으로 굽혀 허리와 가슴을 앞으로 내민 다음 어깨와 가슴 윗부분을 아래로 내린다. 그리고 목을 쭉 뻗어 턱을 마루에 놓는다. 고르게 호흡하면서 20초∼30초 동안 이 자세로 머문다(사진3). *고급단계로 나아가기: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과 턱을 앞으로 보내 몸통을 아래로 더 내린다. 등을 오목하게 하며 꼬리뼈를 들어 올린다. 천골, 요추, 신장, 흉추 부분을 안으로 넣고 몸 뒤쪽뿐만 아니라 앞쪽도 위로 뻗는다. 경추를 신장시키면서 머리를 뒤로 보낸다. 4. 숨을 들이마시며 몸통을 마루에서 들어 올리고 다리를 모으며 위의 1번 자세로 돌아간다. 5. 초보자일 경우:위의 2번 자세에서 두 다리를 옆으로 뻗을 때 다리가 바깥쪽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고 벨트를 각각의 발에 건다. 무릎은 아래로 누르며 몸통은 바로 세운다(사진4). 효과:오금의 근을 쭉 뻗게 하고, 골반 부분에서의 혈행을 적당하게 도와 주어 건강하게 유지시킨다. 탈장의 진행을 억제하며 경미한 증상은 치료도 가능하고, 좌골신경통을 완화시킨다. 월경의 양을 조절하고 규칙적으로 해주면 난소를 자극하므로 여성에게 특히 유익하다. 요가교실:잘못된 아사나의 수행은 며칠 안에 불편하고 몸이 거북하게 된다. 이것은 잘못 되어가고 있는 증거이며 스스로 그 잘못을 찾을 수 없다면, 숙련자의 지도아래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사나의 올바른 수행은 가벼움을 가져다 주고 마음뿐만 아니라 육체에도 활력을 주며 몸, 마음, 정신이 하나가 된 느낌을 준다. 지속적인 수행은 수행자의 외모를 변화시킨다. ■ 자료제공:대구 아헹가 요가선원 053)753-1737www.iyengar.co.kr 아사나:김교영
  • 천태종 ‘새터민 정착’ 지원 나서

    새터민, 즉 탈북자들을 위한 템플 스테이가 국내 처음으로 천태종 사찰에서 실시된다. 조계종을 중심으로 주한 외교사절이나 국내의 신자·일반인들을 위한 템플스테이가 점차 확산되고 있지만 탈북자만을 위한 사찰문화 체험 행사가 열리기는 처음이다. 대한불교 천태종(총무원장 정산 스님) ‘나누며하나되기운동본부’는 탈북한 뒤 남한 사회에서 정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새터민들을 지원하는 차원에서 1,2일 충북 단양 구인사와 단양 일대에서 전통사찰문화 체험과 봉사활동으로 꾸며진 템플스테이 행사를 개최한다. 불교 종단 차원에서 처음 마련한 이번 템플스테이에는 정부가 운영하는 새터민 정착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교육받고 있는 탈북 1∼2개월의 남성 30명이 참가한다.천태종은 이에 앞서 지난달 12일 탈북자 80여명을 구인사와 인근 마을에 초청해 노인들과 함께 어울리도록 하는 효도 큰잔치를 열었다. 탈북자들은 템플스테이 기간 중 북녘에 두고 온 가족들의 무사평안을 기원하는 기도와 탑돌이를 비롯한 불교문화체험을 한 뒤 구인사 인근 온달동굴 관광과 적성농공단지를 견학하며 봉사활동도 벌이게 된다. 천태종 사회부장 무원 스님은 “무엇보다 정신적인 안정을 필요로 하는 탈북자들이 이 사회에서 빨리 적응하고 정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템플스테이를 준비했다.”며 “이번 행사를 시작으로 생활필수품을 지원하는 등 지속적인 새터민 정착지원사업을 벌여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약탈 국보’ 민간교류로 환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史庫本)의 반환은 지난해 10월 돌아온 북관대첩비와 더불어 한·일 민간차원의 협상을 통해 이끌어낸 문화재 반환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안휘준(명지대 석좌교수) 문화재위원장은 “이번 실록 반환을 계기로 민간 교류를 통한 문화재 환수가 더욱 활기를 띨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도쿄대 서고에 오대산 사고본 47책이 보관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올해 초. 그때부터 오대산 월정사를 비롯한 불교계와 시민단체, 정치권 등은 이를 돌려받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왔다. 지난 3월 불교계를 중심으로 출범한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는 실록 환수를 위해 도쿄대와 수차례 협상을 했으며 정치권에서는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 김원웅 열린우리당 의원 등이 참여했다. 환수위측은 불법으로 유출된 문화재 반환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환수가 이뤄지지 않으면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었다. 환수위의 적극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도쿄대는 최근까지도 “문부과학성, 문화재청, 외무성 등 관계당국과의 협의에 상당한 시일이 요구된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밝혔다. 도쿄대가 신중한 태도를 취했던 것은 한국측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인상을 줄 경우 일본 내 우익세력이 반발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도쿄대의 이같은 고민은 서울대가 개교 60주년을 맞아 양국의 대표적 국립대간 학술교류협력 차원에서 고문서를 기증받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해결됐다.‘약탈문화재 반환’의 의미보다 학술교류를 강조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대와 도쿄대 총장이 최근 적극적인 학술 교류를 약속하면서 반환 분위기를 조성했으며,2004년 도쿄대가 법인화되면서 학교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된 점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김기배 문화팀장은 “그동안 서울대보다 환수위가 협상에 적극적이었지만 향후 실록 보관 및 활용 등을 고려할 때 일본측이 서울대 규장각을 선택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동안 실록 반환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온 환수위측은 조선왕조 시절 오대산 월정사가 실록 사고 관리를 맡아 왔다는 점을 근거로 ”반환되는 실록은 서울대 규장각이 아니라 월정사가 소장해야 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특히 환수위 실무자들이 30일 3차 협상을 위해 일본으로 떠난 상태에서 일본측이 일방적인 결정을 내렸다며 크게 실망하는 분위기다. 환수위 공동의장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은 “도쿄대의 결정은 협상주체인 우리 환수위를 무시하는 처사”라면서 “일본측이 아량을 베푸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김미경 김기용기자 chaplin7@seoul.co.kr ●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에 왕위를 물려받은 왕이 선대 왕대에 일어난 일들을 편년체로 정리한 것들을 실록이라 하며 이런 실록을 총칭해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한다. 조선 왕은 27명이 재위했으므로 27가지 실록이 존재해야 하지만 우리가 조선왕조실록이라고 하면 26대 고종과 27대 순종실록은 제외한다. 마지막 두 왕에 대한 실록이 엄연히 있는데도 고의로 누락시키는 까닭은 이 두 실록이 일본 제국주의시대에 편찬되었기 때문이다. 목활자로 인쇄된 실록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전주 사고(史庫)만이 살아남은 교훈을 거름삼아 깊숙한 산중으로 옮겨져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 강화도 사고에 보관된다. 현재는 남한에 강화 정족산본 실록 1707권 1187책과 오대산본 27책 등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돼 있고, 국가기록원 부산기록정보센터에 태백산본 1707권 848책이 보관돼 있으며 모두 국보 151호로 일괄 지정돼 있다.1997년에는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북한 사회과학원에서도 적상산본 실록을 보관하고 있다. 이번에 반환되는 것은 조선총독부 시대에 일본에 반출된 오대산본 47책이다.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국의 헬렌 켈러’ 저시력인연합회장 미영순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한국의 헬렌 켈러’ 저시력인연합회장 미영순씨

    ‘빛의 천사’라고 했다. 한평생 세상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러나 전 세계 맹·농아를 위해 온몸으로 살았다. 헬렌 켈러(1968년 사망),3중 장애를 극복하고 하버드대학까지 졸업한 위대한 사상가로 존경받는다.50대 나이에 “만약 기적이 일어나서 사흘 동안만 눈을 뜰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라는 화두를 던진다. 답은 이러했다. 첫째날-‘나에게 삶의 보람을 찾아준 친절함과 따뜻함, 동료애로 가득한 사람들을 만나보리라. 그 동정어린 친절과 인내의 산 증거를 발견해내리라. 소중한 친구들을 모두 불러내어 그들 안에 있는 아름다움의 외적 증거를 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리라.’ 둘째날-‘동트기 전에 일어나서 밤이 아침으로 바뀌는 가슴 설레는 기적을 바라보리라. 그리고 잠든 대지를 깨우는 태양의 장엄한 광경을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리라.’ 셋째날-‘아침 일찍 큰 길로 나가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리라. 이윽고 밤이 이르러 일시 유예가 끝나고 영원한 암흑이 나에게 다시 닥칠지라도, 미처 보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할 틈도 없이 나의 마음은 광휘로 가득찰 것이다.’ ●여고 2학년 때 실명… ‘고통·희망의 삶´ 한국의 헬렌 켈러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미영순(米榮順·58·정치학박사)씨. 쌀 미(米)자의 성을 쓰는 특별한 가족사를 안고 있다. 경기여고 2학년 때 갑자기 시력을 잃은 후 맹인-반맹인의 경계를 넘나드는 고통 속에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방송통신대와 국민대를 졸업한 뒤 타이완 유학까지 했다. 한·중 수교 이전에 중국 전문가로 활약도 했다. 지난 99년에는 ‘전국 저시력인연합회’를 창설한 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저시력 장애인(약 50만명)들이나 맹인들을 위해 ‘빛의 천사’ 역할을 해오고 있다. 흐린 세상으로 살아온 40년 인생, 경외스러움으로 문득 다가온다. 지난주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에 위치한 연합회 사무실에서 미씨를 만났다. 올 1월 건양대 부속 ‘김안과병원’의 지원으로 이 병원 3층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주로 저시력 아이들과 부모들을 만나 상담을 해준다. 인사를 건넸더니 “미안해요, 잘 생긴 사람 같은데 알아보지 못해서.”라며 환하게 웃는다. 목소리가 무척 맑았다. 둥근 모자를 쓴 모습이 얼핏 헬렌 켈러를 연상케 했다. 더듬더듬 안경을 찾는다. 더 잘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 내용에 대해 물었더니 “하얀 쌀밥은 색깔 있는 그릇에 담아주어야 해요. 안 보일수록 밥과 반찬 그릇은 내용물과 다른 색깔이어야 좋거든요.”라고 대답했다. 시력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물었다.“남자 여자 구분이 안됩니다. 그저 어떤 형체만 어렴풋하게 아른거릴 뿐이지요.” 5월의 라일락이나 아카시아도 그저 마음에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전국 저시력인연합회 만들어 상담·봉사활동 미씨는 최근 장애인들을 위해 중요한 일을 주관했다. 전국의 시각 장애인들과 함께 ‘마음으로 보는 세상’이란 주제로 글짓기 대회를 열고 나무 심는 행사도 가졌다. 시각장애인들은 남의 도움을 많이 받기 때문에 ‘세상과 주위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는 취지에서였다. 가족이 있느냐고 하자 “독야청청이죠.”라는 즉답이 나온다. 자연스럽게 시곗바늘을 과거로 돌렸다. 오색찬란하던 세상이 어느날 흐린 세상으로 다가온 것은 고2 겨울방학 때. 까닭없이 시력이 뚝 떨어졌다. 안경을 맞춰 써봤지만 일주일도 안돼 무용지물. 그렇게 반복하기를 4,5차례 거듭했다. 결국 공부밖에 몰랐던 17살 소녀에게 캄캄한 암흑이 찾아왔다. 실명상태였다. 나중에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중2 때 야맹증이 있었는데 비타민A를 복용하면 된다는 말만 믿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게 화근이었다. 우선 다니던 학교에 휴학원을 냈다. 당시 미씨네 집은 서울 성북구 수유리. 삼양동 소재 여맹원을 찾아 점자를 배우기 시작했다. 또 수유리에 있는 절 화계사를 자주 찾았다.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희망의 끈´ 놓지 않는 여자 이때 숭산 큰스님과 인연을 맺는다. 하루는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범종 옆에 쭈그려 앉아 있는 단발머리의 여학생 모습이 숭산 스님의 눈에 띈 것. 스님은 미씨를 방으로 불러 안타까운 사연을 들었고 즉석에서 법문을 들려준다.“자 이 종이에 선을 그어 둘로 나눈 뒤 한쪽에 X, 다른쪽에 Y라고 해보자. 눈에 보이는 X인자는 X1,X2… 등으로 이어지고, 안 보이는 Y인자도 Y1,Y2…등으로 쭉 이어지겠지. 여기에 공통인자가 있다. 그 인자를 찾는 것이 바로 불교이니라.” 잠자코 듣던 미씨는 “스님, 그 공통인자는 Z겠지요. 제가 찾아보겠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로부터 세월이 지나 미씨가 반백이 된 뒤 스님을 다시 찾아갔다. 이때 스님은 “티끌처럼 작아도 세상을 품는 넉넉한 쉼터에 연꽃이 피어났구나.”라는 말로 격려했다. 또 미씨가 2004년 수필집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여자’를 펴낼 때 스님은 다음과 같은 추천사로 각별한 마음을 전했다. 장중유리애지도(掌中有理碍之道) 장이칙구인지비(臟裏則救人之悲) -손 안에는 장애를 다스리는 길이 있고, 마음에는 남을 구하려는 사랑이 있네. “아직도 Z는 못찾았지요. 아무튼 눈이 아니라 정신을 통해 사물을 보는 법을 터득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휴학한 지 6개월 후였다. 기적이 일어났다. 어렴풋이나마 세상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 미씨는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구나.”하며 돌멩이 하나도, 바람에 쓸려가는 휴지 조각도 아름답게 보였다. 1년만에 다시 복학했다. 교실을 못찾아 헤맬 때도 있었고 배구공을 축구공으로 착각하는 시력에도 불구하고 67년 우수한 성적으로 고교과정을 무사히 마쳤다. 이어 서울대 법대시험에 응시했다. 첫날 수학과목은 만점을 받았으나 이튿날 독일어 시험지를 받아든 순간, 갑자기 캄캄해져 시험장을 빠져나와 한없이 울기만 했다. 법대를 나와 10년동안 무료변론한 뒤 국회활동을 거쳐 대통령이 되는 꿈이 무너졌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배웠다. 가야금, 장고, 단소, 시조, 한국무용, 요리, 꽃꽂이, 영어회화 등등….73년 방송통신대 가정학과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5개학과에 2년제. 아버지가 새벽에 일어나 강의방송을 녹음하고 낮시간에 딸에게 들려줬다. 교재를 읽어주는 아르바이트 학생의 도움으로 방통대를 당당히 수석졸업했다. 국민대 정외과에 장학생으로 편입하면서 배움의 열정은 더했다. 집과 학교 통학은 친구들의 도움에 의지했다. 혼자 등하교할 때에는 ‘8’자를 크게 쓴 카드를 이용해 버스를 세우곤했다. 이는 당시 8번 버스종점 기사들 사이에 오랫동안 화제가 되기도 했다.80년 국민대를 졸업한 이듬해 타이완 유학시험에 장학생으로 뽑혔다. ●정치학 박사로 한·중관계 전문가 활동 유학시절에도 노트정리를 해주고 빈 종이에 큰 글씨로 써주는 룸메이트와 짝궁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강의는 망원경을 가지고 들었다. 곧 터질 듯한 높아진 안압으로 책 읽기가 너무 힘들어 한번 읽을 때마다 죄다 암기를 해야 했다.84년 중국정치대학 석사과정을 마친 뒤 내친김에 중국문화대학에서 박사과정까지 밟았다.89년 귀국한 후 ‘세종연구소’와 ‘북방연구소’에서 연구위원으로 일했다.94년에는 흑룡강대학 객원교수를 겸했다. “마음이 흐리면 흐리게 보이고 밝으면 밝게 보입니다. 주위에서 ‘헬렌 켈러가 미국에만 있느냐.’‘지체장애인 루스벨트도 대통령을 했다.’는 말로 자신감을 많이 심어주었지요.” 미씨의 부모는 둘 다 세상을 떠나 영등포에서 외롭게 혼자 지낸다. 아버지의 고향은 함북 경성.6·10만세운동에 연루돼 열일곱살에 중국 하얼빈으로 피신했다. 어머니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생한 구소련 한국교포 2세. 옥사코프스키 여학교를 나와 하얼빈 대학에서 노어과 교수로 재직할 때 아버지를 만났다. 해방되면서 부모는 고향에 들어갔다가 6·25 직전에 월남했으며 48년 서울에서 무남독녀의 미씨를 낳았다. ●성씨를 米자로 쓰는 독특한 가족사 성을 쌀 ‘미’자로 쓰게 된 연유에 대해 “재령 이씨였던 19대 할아버지가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관직에 있을 때 함경도 지방에 쌀 보급을 워낙 잘해서 성을 ‘미’로 바꿨다.”고 설명했다. 지금 국내에는 50명 정도가 이 성을 쓰고 있다고 귀띔했다. “동그라미는 처음 떠난 제자리로 와야 완성이 되지요. 느리지만 한걸음 한걸음 또박또박 처음의 자리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저는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로 살아왔어요. 비록 빈 손일망정 그 빚을 갚고 가야지요.” 주말매거진 We팀장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48년 서울 출생 ▲67년 경기여고 졸업 ▲76년 방통대 수석 졸업 ▲80년 국민대 정외과 졸업 ▲84년 타이완 중국정치대학 석사 ▲89년 타이완 중국문화대학 박사 ▲89년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92년 북방연구소 연구위원 ▲94년 흑룡강대학 객원교수 ▲99년∼현재 사단법인 전국저시력인연합회 회장 ●상훈 2004년 이웃돕기 유공자포상 국민포장 수상. ●주요 저서 눈물 고인 가슴에 눈물 대신 품은 뜻(96년 고려원), 새벽 산사에 가보세요(97년 시공사),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여자(04년 북포스).
  • 길 위의 삼국유사/고운기지음

    올해는 삼국유사를 쓴 일연(1206∼1289) 선사가 태어난 지 800주년 되는 해. 일생의 대부분을 무인정권의 혼란과 몽골과의 전쟁 속에 보낸 일연이 민족의 고난을 극복하는 요체로 정리한 책 삼국유사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만큼 그의 탄생을 기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일연이 현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삼국유사를 썼던 만큼, 책의 의미를 생생하게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그 현장을 더듬지 않을 수 없다. 연세대 국학연구원 고운기(46) 연구교수가 쓴 ‘길 위의 삼국유사’(미래M&B)는 삼국유사의 현장을 몸소 찾아 역사의 흔적을 살핀 생동감 넘치는 답사기다. 고전의 깊이를 전하되 살아 있는 오늘의 이야기로 체험하게 한다는 데 이 책의 미덕이 있다. 13세기에 씌어진 삼국유사를 21세기의 눈으로 새롭게 재발견해 가는 여정은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한 마라난타의 도래지 법성포를 출발점으로 삼는다.‘신라유사’라 해도 좋을 만큼 신라에 대한 경도(傾倒)가 심한 삼국유사이지만 이 책에서는 백제 불교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전라도 지역을 가장 먼저 둘러본다. 저자는 이처럼 삼국유사에서 변방 취급을 당한 전라도 땅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백제 땅에서 시작한 여정은 경주 일대를 거쳐 일연이 이웃집처럼 왕래한 낙산사, 상원사, 월정사를 지나 진전사 터에서 완성된다. 경상도 경산에서 태어난 일연은 여덟 살 되던 해, 전라도 광주의 조그만 절로 공부를 하러 떠난다. 그로부터 여섯 해가 지나 일연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출가를 결심하고 머나먼 길을 걸어 설악산 아래 진전사(陳田寺)까지 와 머리를 깎는다. 이 열네 살 소년이 바로 일연이다. 저자는 일연이 출가한 그 자리에서 삼국유사 탄생의 계기를 돌아보고 이 책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으로 긴 여정을 끝맺는다. 책은 세월의 강을 건너 1000년전 옛 사람들과의 만남을 주선한다. 미륵사 터에서 서동과 선화공주를, 분황사에서 희명과 원효를, 낙산사에서 조신을 이야기하는 동안 삼국유사 속의 백제와 신라인들은 생생한 표정으로 살아 돌아온다.‘나는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등 세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기도 한 저자는 이렇게 서정시 같은 글을 남긴다.“…쓰러진 전각을 세우고 탑을 일으키고 담을 둘러쳐 보자. 우리 마음의 스카이라인을 그려 끝내 거기에 어떤 형상이 떠오르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저자는 삼국유사의 옛 이야기를 오늘의 현실과 중첩해 읽는다. 자신의 옷을 걸인에게 벗어주고 알몸으로 돌아간 정수 스님의 설화를 말하며 요즘의 시민운동을 반성하는가 하면,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를 들려주며 2005년 인도네시아 지진으로 수중고혼이 된 이들을 추모한다. 신라 신문왕의 두 아들 보천과 효명 태자가 수행한 오대산 자락을 지날 때는 전쟁으로 얼룩진 현대사의 비극을 떠올린다. 삼국유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저자의 발길은 때로 새로운 장소를 찾아내기도 한다. 삼국유사에 백제 출신 승려로는 유일하게 실려 있는 진표 스님이 절벽 위에서 몸을 날려 미륵신앙 수행법을 행했다는 불사의암. 그 위치를 찾아 헤매던 저자는 마침내 변산반도에 자리잡은 의상봉이 바로 그곳임을 확인한다. 태종(김춘추)이 삼한을 통일한 뒤 무기를 감춰뒀다는 경주 무장사 터와 ‘무기를 감춘 들’이라는 뜻을 지닌 일본 도쿄 서남쪽의 분지 무사시노(武藏野)를 연관지어 다룬 대목도 눈길을 끈다. 책에는 사진작가 양진이 찍은 90여컷의 사진이 실려 있어 글로 못다한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부여 궁남지에 피어오르는 신비로운 노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굴산사 터 당간지주, 국보로 지정된 진전사 터 3층석탑의 한적한 정취 등을 감상할 수 있다.1만 5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가야산 호랑이’와의 아름다운 인연

    성철 스님은 입적한 지 1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불교계의 큰 별로 살아있다. 생전 수행을 게을리하는 도반이나 후배들에겐 예외없이 엄하게 대해 지금도 선방 수좌들에겐 ‘가야산 호랑이’로 널리 회자된다. 일반 신도들도 108배 혹은 3000배의 참회기도를 하고서야 만날 수 있었을 만큼 사람 대하는 데 있어서 여간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성철 스님은 스님이나 일반인 모두에게 ‘대쪽같은 스님’‘만나기 어려운 스님’‘무서운 스님’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도서출판 아름다운 인연이 ‘아름다운인연만들기’시리즈 세 번째로 펴낸 ‘가야산 호랑이를 만나다’는 그저 엄하기만 한 것으로 비쳐진 성철 스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는, 색다른 책이다.스님의 법문을 듣고서, 혹은 개인적인 만남을 가진 뒤 불가에 귀의했거나 감화를 받은 11명이 스님과의 훈훈한 인연 이야기를 풀어낸다.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을 비롯해 전 조계종 전계대화상 일타 스님, 동화사 선원장 지환 스님, 박경훈 전 동국대 역경위원, 김천진성 백련암 신도회장, 직지성보박물관장 흥선 스님, 삼정사 주지 원소 스님, 현승훈 화승그룹 회장, 남자비심 전 대구 정혜사 신도회장, 장성욱 동의대 불문과 교수, 김선근 동국대 인도철학과 교수가 그들이다. 스님과의 특별한 인연을 회고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야단을 치는 ‘가야산 호랑이’선사의 면모부터 철저하게 규칙적이고 자신에게 사정없이 엄했던 극기, 마치 독심술을 하는 듯 사람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보는 안목, 엄하지만 크게 포용하는 도량이 어렵지 않게 읽혀진다. 법전 스님은 1949년 전국의 수좌들이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며 봉암사에서 뜻을 모은 이른바 ‘봉암사결사’에 성철 스님과 함께 참여한 조계종의 대표적인 선승. 봉암사 시절 모셨던 성철 스님의 인상을 이렇게 소개한다.“성철 스님은 왕왕 대중들을 밖으로 끌어냈다. 언제나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수좌의 멱살을 잡아끌어서 봉암사 계곡의 시린 물 속에 가차없이 집어넣곤 했다. 그 숨막히는 분위기가 나에게는 오히려 살아 숨쉰다는 안도감으로 작용했다.” 성철 스님은 법문에 자주 현대물리학이며 기하학, 심리학을 녹여 전문가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성철 스님의 법문을 들은 동화사 선원장 지환 스님이 “산중에 계시는 스님께서 어떻게 현대 학문을 그렇게 많이 알고 계시느냐.”고 묻자 “예끼 이놈 네깐 놈이 뭘 안다고….”라고 대답하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삼정사 주지 원소 스님은 백련암에서 행자생활을 마치고 사미계를 받기 며칠전 평생 승려생활을 할 자신이 없어 망설이던 무렵 성철 스님의 일갈에 마음을 굳혔다고 회고한다.“하산할까 하는 고민을 붙들고 부엌에서 군불을 지피고 있는데 성철 스님이 지나가시면서 한 말씀을 하셨다.‘인생의 일대사를 해결하는 승려생활처럼 보람있는 일은 없다. 우리들 인생이란 너무 짧은 것이다. 쓸데없는 망상 말아라.’도망가려고 기회만 엿보고 있는 놈의 마음을 훤히 꿰뚫어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가. 바로 마음을 고쳐먹고 지금까지 승려생활을 계속하고 있다.”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25일 동국대 이사장 취임식

    동국대는 25일 오전 11시 정각원에서 제35대 이사장으로 선임된 영배 스님의 취임식을 갖는다. 영배 스님은 조계종 총무원 호법부장, 불교방송 상무, 동국대 이사장 직무대행 등을 역임했다.
  •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밀양길

    [부산에서 서울까지 다시 걷는 옛길] 밀양길

    경남 양산시 원동면 가야진사 앞을 지나온 옛길은 밀양 땅으로 들어선다. 지금은 흔적만 남은 작원관 터부터 밀양 땅이다. 이곳을 지나 낙동강을 끼고 가다 삼랑진과 무흘역을 통과해 밀양시내에 들어선다. 그러나 밀양 땅은 쉽게 기자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밀양 땅의 유일한 옛길 출입로인 작원관터는 폭이 불과 70여㎝. 겨우 사람 한명이 다닐 수 있을 정도다. 더구나 왼쪽은 절벽이고 오른쪽은 경부선 철도이다. 이곳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고심 끝에 접근해 보기로 했다. 사람 진입을 막기 위해 처놓은 철조망을 뚫고 작원관터를 향해 갔다.5분 간격으로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열차 때문에 등에서는 식은 땀이 흘렀다.50m 전방까지는 다가갔으나 더 이상은 어려웠다. 작원관터에서 500m쯤 올라가면 작원마을이 있다. 과거에는 꽤 큰 부락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30여가구만이 살고 있다. 작원관에서 삼랑진으로 가는 길은 시멘트길로 포장돼 있다. ●작원관터 옛길 폭 70㎝로 좁아져 이 길 중간에는 밀양시 안태리에서 흘러 내리는 안태천을 건너는 3개의 다리가 놓여 있었으나 현재는 돌다리 흔적만 있다. 동행한 밀양시립박물관 김재학(47)씨가 이 다리에 담긴 슬픈 사연을 들려줬다. 첫눈에 한 여인에게 반한 스님이 이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당황한 여인은 스님에게 돌로 다리 놓기 시합을 벌일 것을 제안했다. 먼저 다리 놓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시합이었다. 시합 결과 스님이 져 물에 빠져 죽자 처녀도 뒤따라 물에 뛰어들었다는 전설이다. 이때 놓인 다리가 작원대교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다리는 작원석교라고도 불린다. 삼랑진은 낙동강과 밀양강, 밀물과 썰물이 합쳐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김해 방면으로 나가는 나룻목으로도 번창했으며 지금은 경부선과 경전선의 분기점이다. 토박이라는 김길수(67)씨는 “과거 삼랑진은 경남 일대에서는 가장 큰 장이 섰다. 현재도 4일과 9일 5일장이 서지만 규모는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삼랑진읍 네거리에서 옛길은 두갈래로 갈라진다. 우회전해 무흘역을 가는 것이 길손들이 많이 이용했던 길이다. 그러나 평민들이나 홍수가 나서 길이 침수되었을 때에는 삼랑진네거리에서 좌회전해 뒤기미 마을로 거쳐 무흘역에 도착한다. 김재학씨는 “양반들은 가장 빠른 직선 길을 이용했지만 평민들은 길에서 양반들에게 머리 숙이기 싫어 우회길을 선호했다.”며 “옛길에는 평민들의 고통과 눈물이 담겨져 있었다.”고 설명했다. 미전리의 미전고개가 무흘역이 있었던 자리다. 옛날에 역은 역마(驛馬)를 갈아타는 곳이었다. 사람과 말이 머무르는 여관과 차고의 구실도 하였으며, 통신을 전달하는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현재의 역은 철도라는 특정한 교통수단 용어로 축소되었다. ●“양반에 머리 숙이기 싫어” 평민들 우회길로 무흘역 터에는 말을 매두곤 했던 500여년 된 포구나무가 마을에 있었으나 40여년전 어느 목사에 의해 베어져 없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무흘역에서 밀양으로 가는 옛길은 1022번 지방도를 가로질러 무월터널 위쪽 산등성이를 타고 무월터널 맞은 편에 다다른 뒤 다시 경부선 철도좌측 낙동강의 지류인 밀양강변을 따라 곧 바로 밀양시내로 거슬러 올라간다. 밀양시내로 들어서는 길손은 먼저 밀양강을 건너야 했다. 밀양강은 상시범람해 현재 번화가인 삼문동 일대는 조선시대 늪지대나 다름 없었다. 나룻배가 밀양강을 건너는 유일한 수단인 시절에는 영남루 밑에 큰 포구나무에 배를 묶었다. 주변 바위들은 선착장 역할을 했다. 일제시대인 1910년에야 여러 척의 배를 놓아 만든 배다리를 띄워 왕래했다.1935년 콘크리트 다리가 가설됐으며 현재의 밀양교는 1995년 이 다리를 개수한 것이다. 밀양시청 이인수 공보계장은 “현재 두란노기독서점과 내일동사무소 자리가 밀양관아였다.”고 설명했다. 1479년 조선 성종 10년에 축조된 밀양읍성은 현재 일부가 복원돼 있다. 또 아동산 망루 아래에서 무봉사까지 300m, 아동산과 밀양여고 뒷산 아북산 정상까지 2.2㎞ 등에서 옛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기생 운심이 묘 벌초하면 소원 이루어진다” 밀양읍성을 벗어난 옛길은 밀양향교를 지나 제사고개를 넘어간다. 제사고개는 ‘만주에서 죽은 아버지의 혼이 이 지점에서 닭울음 소리를 듣고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들이 제사장소를 이 곳으로 옮긴 데서 유래됐다. 제사고개에서 기회송림과 금곡마을을 지나면 신안마을이 나온다. 신안마을 500m 위에는 바위절벽이 두갈래로 움푹 팬 자리에 조그마한 무덤이 하나 있다. 사모하던 한 관리를 한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이곳에 묻힌 기생 운심이의 묘다.8월초 이 묘를 벌초하면 한가지의 소원은 성취된다는 이야기가 퍼져 이맘 때면 벌초꾼들로 붐빈다. 옛길은 현재의 상동교인 상동나루와 구역마을 관마을, 유천을 지나 청도로 넘어간다. 글 밀양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왜적 침공 방어하던 요새지 작원관은 경북 문경의 조령관과 함께 옛길의 2대 관문 가운데 하나다. 동래에서 한양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한다. 작원나루로 출입하는 사람과 화물도 이곳에서 검문을 받아야 통과할 수 있었다. 숙박시설인 역원의 기능도 했다. 고려시대부터 왜적의 침공을 방어하던 요새지로 고려 고종때 창건됐다. 임진왜란 당시 밀양부사 박진이 이곳을 통해 침범해 오던 소서행장(小西行長·괘시유키나가)의 군대를 막기 위해 제일방어선을 구축하고 결사 항전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박진은 700여명의 군사로 1만 8700여명의 소서행장 정예부대와 맞서 하루 이상 전투를 벌였다. 박진 군사의 활약으로 조선 군대는 전열정비에 상당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곳 일대 옛길은 황산잔도만큼 험하다는 것이 동국여지승람 작원조의 기록이다. 물금취수장 부근에 있는 황산잔도는 황산장 주막에서 거나하게 한잔 걸치고 과거보러 가던 옛 선비들이 무수히 빠져 죽을 만큼 험하기 그지 없었다. 일제시대 때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면서 작원관은 인근 50m 옆으로 옮겼고 1923년 낙동강 대홍수 때 유실되었다. 그동안 비만 설치돼 있었으나 밀양시가 당시 있었던 곳에서 1㎞쯤 떨어진 삼랑진읍 검세리 산101번지에 지난해 12월 복원했다. 모두 25억원을 들여 작원관 이외 비각과 충혼탑 등이 들어섰다. 작원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 두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때 어느 임금이 행차를 위해 이곳 나루를 건넜을 때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수많은 까치들이 지저귀며 일행을 맞아 유래됐다는 설과 부왕과 함께 종군한 백제 공주가 신라 진영을 교란하기 위해 이곳에 날아와 앉았다는 유래가 있다. 밀양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밀양가면 웅어회·돼지국밥 꼭 드이소 밀양에 가면 2가지 음식은 꼭 먹어야 한다. 웅어회와 돼지국밥이다. 이곳에서 ‘보리누루미´라고도 불리는 웅어는 갈치와 비슷한 은빛을 띤 바다 생선이다. 전어와 맛이 비슷한 웅어는 산란철인 5월말에 낙동강으로 올라온다.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막걸리로 씻는 것이 밀양 웅어회의 특징이다. 전어는 조금 무르지만 웅어는 부드럽고 고소하다. 묵은 김치에 웅어회를 곁들여 먹으면 맛을 더해 준다. 약간의 군내가 기름진 맛을 없애줘 개운하기 때문이다. 돼지국밥은 여행자의 음식이다. 열을 식히고 피로회복에도 좋다. 또 먹기 쉽고 값이 싸 주머니 걱정을 덜어준다. 막걸리 한잔이 생각 나도 별도로 안주를 시키지 않아도 된다. 국밥에 있는 고기가 훌륭한 안주다. 옛길을 걸은 나그네는 밀양에서 꼭 돼지국밥을 먹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밀양의 돼지국밥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밀양 터미널 앞 단골집은 3대에 걸쳐 40여년 동안 돼지국밥을 팔고 있다. 이 식당의 특징은 돼지국밥에 김치를 넣는다는 것이다. 식당 이름과 같이 단골들이 많다. 이들 중에는 의사, 변호사 등 돼지국밥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화이트칼라 계층이 다수이다. 밀양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CEO칼럼] 경제를 세우는 ‘상생의 팀워크’/노영인 동양메이저·동양시멘트 부회장

    [CEO칼럼] 경제를 세우는 ‘상생의 팀워크’/노영인 동양메이저·동양시멘트 부회장

    월드컵이 다가왔다. 지난 대회 4강까지 오르며 ‘골 맛’을 톡톡히 본 우리 국민들이 이번 대회에 거는 기대는 자못 크다. 최근 최종 엔트리가 발표되면서 대표팀의 윤곽도 드러났다. 박지성과 이영표, 안정환, 박주영, 이운재, 최진철 선수 등 나무랄 데가 없는 면면들이다.16강은 물론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두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불과 한달 전만 해도, 국민들은 불안해 했었다. 대표팀의 스트라이커 이동국 선수가 무릎 십자인대 부상으로 월드컵 출전이 좌절됐기 때문이다. 이동국 선수의 좌절이 곧 우리 대표팀의 최대 악재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언론과 전문가들은 대안 찾기에 부심했다. 그 과정에서 나머지 선수들이 소외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 만큼 대표팀에서 이동국 선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스트라이커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축구는 11명이 함께 뛰는 스포츠다. 스타플레이어 한명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개인 스포츠와는 달리 팀워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딕 아드보카트 감독도 최종 엔트리를 발표하면서 “가장 균형 있는 팀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아무리 중요하다고 스트라이커로만 엔트리를 짤 수는 없다. 공격과 허리, 수비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 속에서 팀워크를 이뤄야만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다. 이동국 선수로 인해 조바심내던 국민들은 물론이고 전문가들도 막상 최종 엔트리가 발표되니 만족스러워했다. 그 엔트리에는 이동국 선수를 발견할 수 없었는 데도 말이다. 스트라이커 하나만 놓고 봤을 때는 불안했겠지만, 전체를 두고 보니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1,2명의 스트라이커에 의해 사회가 운영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다양한 이해와 요구를 지닌 구성원들이 대화와 타협을 통해 팀워크를 이루면서 발전을 거듭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의 실정은 그렇지 않게 보인다. 편 가르기가 기승을 부리며 팀워크를 해치고 있다. 사회를 이분법적인 흑백논리로 나눴던 80년대로 되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세계는 이념과 사상을 뛰어넘어 협력과 경쟁을 통해 공존하는 다변화된 사회로 변한 지 오래다. 하물며 자국 내에서는 말할 나위가 없다. 국제 사회와의 경쟁에 앞서 다양한 계층간에 대화와 타협으로 공통분모를 찾는 국민적인 합의가 선행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구성원간에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공존하는 문화를 정착시켜야겠다. 상대의 허물을 감싸안고, 기쁨을 함께 나눌 때 비로소 사회의 팀워크가 공고해질 것이다. 요즘 우리 기업들이 사회의 질타를 많이 받고 있다. 특히 일부 기업은 사법 심판대까지 갔다. 비록 수십년간 관행적으로 이뤄져온 일이라고 하지만 잘못된 점은 마땅히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일각에서 일어난 이런 일들이 전체의 일인 양 침소봉대되면서 기업들이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는 편 가르기의 대상이 되고 있다. 기업 역시 사회의 일원으로 경제 분야에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70,80년대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됐고, 국제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세계경제와 경쟁하는 첨병으로 나서고 있다. 더불어 어느 사회, 어느 주체보다 사회공헌에 앞장서고 있다. 기업에 질타할 것은 질타해야겠지만 사회구성원으로서 맡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보듬어 주는 지혜도 필요하다. 그 속에서 진정한 우리 사회의 팀워크가 살아날 것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에 쓰여 있는 한 구절을 되새겨 본다.“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이다.” 노영인 동양메이저·동양시멘트 부회장
  • 달라이라마 한국비자 신청

    인도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종교 지도자 달라이라마가 지난 16일 인도 주재 한국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다고 세계종교지도자대회 준비위원회(위원장 연기영)가 18일 밝혔다. 준비위에 따르면 달라이라마의 방한은 만해사상실천선양회(총재 지관 스님)와 김대중도서관(관장 류상영)의 초청으로 추진돼왔으며, 달라이라마가 한국행 비자를 신청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낙산사서 부처님 진신사리 발견

    강원도 양양군 낙산사(주지 정념 스님) 해수관음공중사리탑 내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봉안한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낙산사는 지난해 화재로 훼손된 해수관음공중사리탑을 해체 보수하던 중 탑신석 윗부분 중앙의 원형 사리공(舍利孔)안에서 사리장엄(舍利莊嚴, 직경 23㎝, 깊이 17㎝)을 확인,18일 공개했다. 낙산사에 따르면 사리장엄은 발견됐을 당시 노란색 비단 보자기에 싸인 원형 청동합안에 원형의 은제합(높이 9㎝, 직경 8㎝)이 놓여져 있었다. 청동합 안에는 ‘강희(康熙) 31년’으로 적힌 연기(緣記)가 들어 있어 사리장엄이 조선 제19대 숙종 18년(1692년)에 봉안됐음을 알 수 있다.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불교미술 거장’ 손에 붓 쥔 채 열반

    한국 불교미술의 거장 만봉(萬奉·속명 이치호·신촌 봉원사) 스님이 17일 오전 0시10분 봉원사 운수각에서 노환으로 열반했다. 세수 96세, 법랍 80세. 최근까지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 고인은 작업에 전념하던 중 붓을 손에 쥔 채로 입적했다.1910년 10월 서울에서 태어나 1917년 단청장 김예운 스님에게 사사한 고인은 1926년 봉원사로 출가해 금어(金漁·불교에서 불화의 최고 경지에 이른 스님에게 주는 칭호) 자격을 취득했다.1971년엔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고인의 작품은 금강산 표훈사, 유점사, 장안사, 마연사, 서울 봉원사, 도봉산 도선사, 백련사 등 전국 주요 사찰과 문화재에 고루 남아있다. 고인은 1978년 세계불교도 우의회 동경총회 기념 전시회를 시작으로 2005년 6월 모란갤러리에서의 마지막 개인전을 열기까지 수많은 전시회를 열어 한국전통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불교 태고종 서울교구 종무원장, 봉원사 주지 등을 역임했으며,1988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저서로는 ‘만봉 이치호 단청전 작품집’이 있다. 빈소는 봉원사에 마련되어 있으며, 영결식은 21일 오전 10시 봉원사에서 태고종 종단장으로 엄수된다. 다비식은 이날 오후 전남 순천 태고총림 선암사 연화대에서 열린다.(02)-392-3007.
  • 儒林 (606)-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42)

    儒林 (606)-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42)

    제5부 格物致知 제3장 天道策(42) 물론 퇴계의 위로는 맹자가 ‘고자장 하편’에서 ‘하늘이 장차 큰 인물을 이 사람에게 내리려 할 때에는 반드시 그 마음을 괴롭게 하며, 그 신세를 수고롭게 하며, 그 몸을 굶주리게 하며, 그 몸을 궁핍하게 하여 행하는 바를 어그러지게 함이요, 이것은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 능하지 못한 바를 보태주고자 함이다.’라고 한 말을 상기시킴으로써 율곡을 오히려 분발하게 하려는 뜻이었으나 이 무렵 율곡은 실로 사면초가에 봉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폐병을 앓는 아내와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과거에 급제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절박한 심정은 이 무렵 율곡이 지은 시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강릉에 머물고 있을 때 율곡은 지정(智正)이란 산인(山人)을 만난다. 아마도 율곡이 금강산에 입산수도하고 있을 때 만났던 사람으로 스님은 아니었고, 산중에 살고 있던 거사처럼 보여진다. 두 사람은 함께 술을 마시다가 서로 불교와 유교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데, 이 토론의 내용이 ‘산인 지정에게 주다(贈山人智正)’라는 시 속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우리 유가에는 본래 참된 낙지(樂地)가 있어 외부의 물질을 꺾지 않고도 능히 본성을 기른다네. 고원(高遠)하거나 기이한 길, 다 중도(中道)가 아니라 자신에 돌이켜 성실하면 성인에 이를 수 있다오.…” 이 구절을 통해 이율곡은 이미 불교와 완전히 단절하고 스승 퇴계가 내려준 유가적 화두인 ‘거경궁리’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삼계와 지옥(地獄), 아귀(餓鬼), 아수라(阿修羅), 축생(畜生), 인간(人間), 천상(天上)의 육도를 벗어나기 위해서 굳이 불교적 중도(中道)를 취하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돌이켜 성실하면 성인에 이를 수 있다.(反身而誠可醒聖)’는 유교적 진리를 주장하고 있음인 것이다. 토론 중에 율곡은 지정과 함께 술을 마시며 담소한다. 국화꽃 꺾어 꽃잎을 띄우며 술을 마셨는데, 이러한 풍습은 일찍이 도연명이 읊은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딴다(採菊東籬下)’란 시구절을 인용하여 그대로 풍류를 즐긴 것이었다. 또한 전국시대 초나라의 비극적인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굴원(屈原)이 남긴 ‘저녁에는 국화의 낙화를 먹는다(夕餐秋菊之落英)’는 사(詞)를 그대로 인용한 행동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국화꽃잎을 술잔에 넣어 마시던 청년 율곡은 문득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서리 속의 국화를 사랑하기에(爲愛霜中菊) 노란 잎 따서 술잔에 가득 띄웠네.(金英摘滿觴) 맑은 향내는 술맛을 돋우고,(淸香添酒味) 수려한 빛은 시의 창자를 적셔 주기도 하네.(秀色潤詩腸) 도잠(陶潛)이 무심히 잎을 따고,(元亮尋常採) 굴원(屈原)이 잠시 꽃을 맛보았으나,(靈均造次嘗) 어찌 정담만 나누는 일이(何如情話處) 시와 술로 서로 즐기는 것만 하겠는가.(詩酒兩逢場)”
  • [현천 스님의 아헹가 정통요가] 하체에 탄력성을 주는 비라바드라아사나 2

    [현천 스님의 아헹가 정통요가] 하체에 탄력성을 주는 비라바드라아사나 2

    비라바드라는 인도 신화에 나오는 전사이다. 지난 주에 이어 이번 주의 자세는 몸을 두 다리 위에 똑바로 세우고 두 팔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뻗는다. 심장 질환이 있거나 생리 중에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1. 타다아사나로 선다. 2. 숨을 들이마시며 껑충 뛰어 두 다리를 120∼135㎝ 정도 옆으로 벌린다. 양팔을 일직선으로 올리고, 손바닥은 아래로 향하게 한다. 오른발을 오른쪽으로 90도, 왼발은 오른쪽으로 약간 돌린다. 이때, 왼쪽 다리는 밖으로 쭉 뻗고 무릎에 힘을 준다. 몸통을 위로 뻗는다(사진1). 3. 숨을 내쉬며, 오른쪽 넓적다리가 마루와 수평을 이룰 때까지 오른쪽 무릎을 구부린다. 이때 오른쪽 정강이는 마루와 수직을 이루고 오른쪽 넓적다리와 종아리는 직각을 만든다. 굽혀진 무릎은 직각을 넘지 않아야 하며 발뒤꿈치와 일직선을 유지해야 한다. 손을 옆으로 쭉 뻗고, 얼굴을 오른쪽으로 돌리며 오른손을 응시한다. 정상 호흡을 하면서 20∼30초간 이 자세를 유지한다(사진2). *고급단계로 나아가기:왼쪽 발목 안쪽을 들어 올리고 왼쪽 엉덩이를 밖을 향해 열고 왼쪽다리 안쪽을 왼쪽으로 당긴다. 흉골과 뒤쪽 갈비뼈를 들어 올린다. 몸통 오른쪽은 오른쪽으로, 왼쪽은 왼쪽으로 활짝 편다. 척추와 몸의 양면을 위로 뻗는다. 4. 숨을 들이마시며 위의 2번으로 돌아간다. 5. 왼발은 왼쪽으로 90도, 오른발은 왼쪽으로 약간 돌린다. 왼쪽 무릎을 굽히고 위의 3번 동작을 되풀이 한다. 6. 숨을 들이쉬며, 다시 2번으로 돌아간다. 숨을 내쉬며 껑충 뛰어 타다아사나로 돌아간다. 7. 초보자일 경우(1):위의 2번 자세에서 양손을 허리에 둔다. 숨을 내쉬며 오른쪽 무릎을 굽힌다. 몸통을 수직으로 유지하며 왼쪽 다리는 쭉 뻗는다(사진3). 8. 초보자일 경우(2):벽을 이용하여 위의 1∼3번 자세를 취한다(사진4). 효과:이 자세에서 종아리와 넓적다리근육의 경련을 풀어 주고, 다리와 등 근육에 탄력성을 준다. 이로 인해 다리 근육은 보기 좋고 강하게 된다. 복부 기관을 강하게 해 준다. 요가교실: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여러 시간 밖에 있은 직후에는 아사나를 하지 않는다. 요가 아사나를 하기에 적당한 장소는 해충과 소음이 없는 깨끗하고 공기가 잘 통하는 곳이어야 한다. 맨 마루나 바닥이 고르지 않은 곳에서는 하지 말고, 담요를 접어서 평평한 마루에 깔고 한다. ■ 자료제공 대구 아헹가 요가선원 053)753-1737 www.iyengar.co.kr ● 알립니다 대구 아헹가 요가선원에서는 제4기 지도자과정을 모집합니다. 아사나와 호흡법은 세계 주류 하타요가인 아헹가 요가방식으로 원장스님이 직접 지도합니다. 교육기간은 오는 27일부터 11월11일까지(매월 둘째, 넷째 토요일) 12주 과정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왼쪽 연락처로 문의바랍니다.
  • 5월 솔잎 내시야를 덮다

    5월 솔잎 내시야를 덮다

    솔 향기 솔∼솔 나는 솔잎. 독특한 향기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지켜온 것이 아니다. 풍부한 영양까지 갖췄다. 자연 솔잎은 동의보감에서 효능을 인정 받으며 명약 중의 하나로 대접 받는 영광을 누렸다. 머리를 나게 하고,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게 해 수명을 연장시켰다는 솔잎. 지혜로운 우리 조상들은 이 솔잎을 곁에 두고 건강을 지켜왔다. 지금은 웰빙 바람 타고 솔잎차 등 다양한 솔잎 먹거리를 비롯, 솔잎 반신욕, 솔잎 다이어트, 솔잎 화장품 등으로 쓰임새가 무한대로 진화하고 있다. 신록의 계절 5월, 푸른빛 광채가 더욱 선명한 솔잎을 건강 지킴이로 활용해보자. 글 최광숙 최여경기자 bori@seoul.co.kr 사진 김문기자 km@seoul.co.kr ■ 풍부한 영양의 보고 ‘솔잎’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가수 양희은씨의 소나무를 주제로 한 노래 ‘상록수’를 부르다보면 누구나 목이 메게 마련.‘어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꼿꼿하게 서 있는 소나무의 솔잎은 이렇듯 우리들 가슴 속에 절개의 상징, 민주화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예로부터 소나무는 부귀영화와 자손 번창을 약속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마을을 수호하는 나무 중 소나무가 가장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고,‘용비어천가’에 나오는 ‘뿌리 깊은 나무’도 바로 소나무다. 또 지혜로운 우리 조상들은 일찌감치 소나무로 건강을 지켜왔다. 솔잎을 비롯해 솔방울, 송진, 소나무 뿌리에 생기는 복령, 솔 아래 나는 송이버섯 등 소나무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좋은 약으로 쓰였다. 특히 솔잎은 단순히 특유의 향으로만 승부를 걸지 않고 몸에 좋은 다양한 성분으로 자신의 진가를 높여 왔다. 깊은 산 속에서 맑은 공기를 마신 소나무는 그 덕분인지 사시사철 변함없이 푸른빛 광채를 낸다. 특히 신록의 계절 5월의 솔잎은 푸른빛이 더욱 진해 만수무강이 숨어 있다는 얘기도 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삐쭉삐쭉한 가시처럼 뻗어 있는 솔잎이 무수한 영양체의 보고임을 알 수 있다. # 무한한 쓰임새로 사랑받는 솔잎 한낱 나뭇잎에 불과한 솔잎의 쓰임새는 놀랍도록 다양하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갓난아기가 태어나면 솔잎이 무성한 솔가지를 매단 금줄을 쳤고, 솔잎을 말려 아궁이에 불을 때 밥을 해먹었다. 추석에는 시루에 깔아 솔향기 가득한 송편을 쪄냈다. 산중 스님들은 토굴에서 이 솔잎을 씹어 먹고 도(道)를 깨우쳤다. 다른 음식을 일체 먹지 않고 그늘에 말린 솔잎가루만으로도 추위와 배고픔을 이겨냈던 것이다. 한방에서는 또 솔잎을 약술 형태로 복용하기도 했고, 노화를 방지하는 항산화성분이 있어 솔잎 물로 목욕하는 지혜로움도 보였다. 동의보감에도 솔잎의 효능이 잘 나와 있다. 솔잎이 머리를 나게 하고, 오장을 안정시키며 허기가 지지 않게 하여 수명을 연장시킨다고 했다. 몸의 염증을 가라앉히고 지혈작용, 저린 증상, 신경쇠약, 탈모에도 좋다고 써놓았다. 김기준 자연담은한의원 원장은 “솔잎을 갈아서 상복할 경우 대변이 좋아지고, 과로하여 몸이 개운치 않을 때 원기가 회복되는 효과가 있다.”면서 “솔잎을 썰어서 소주에 숙성시킨 술은 혈액순환을 촉진시켜 고혈압, 심장병, 신경통에 좋다.”고 밝혔다. # 솔잎이 몸에 좋은 이유는. 솔잎의 주요 구성 성분은 향을 내는 휘발 성분인 ‘테레빈유’와 떫은 맛을 내는 ‘타닌’. 테레빈유는 불포화지방산을 많이 함유,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 동맥경화를 방지한다. 또 말초 혈관을 확장시켜 혈액순환을 촉진시키고 호르몬 분비를 높이는 등 고혈압, 심근경색 등 성인병 증상에 효과가 있다. 신경을 안정시키고 감기예방과 치료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타닌은 위 운동을 활발히 도와 식욕을 촉진시키고, 위 점막을 보호한다. 장의 긴장을 풀어 신경성 변비가 있는 사람에게 좋은 성분이기도 하다. 노화와 암을 예방하는 베타카로틴을 비롯, 몸에 좋은 영양소인 각종 미네랄과 비타민 성분이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는 것도 바로 솔잎이다. 혈당 수치를 낮춰 당뇨병에 도움을 주는 글리코키닌, 빈혈에 좋은 철분,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해주는 루틴 등 몸에 이로운 성분들이 다 들어 있다. # 좋은 솔잎을 고르려면 솔잎 요법에는 적송(홍송)과 흑송(해송)등 재래종 조선솔을 쓴다. 이 가운데 비옥한 땅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광채가 있는 것이 좋으며 먼지나 공해가 없는 깊은 산 속에서 자란 것이 가장 좋다. 특히 해충 방지를 목적으로 약물주사를 놓은 소나무는 피해야 한다. ■ 웰빙의 주역 천연 솔잎 제품 최근 웰빙 바람 타고 뜨고 있는 솔잎. 솔잎을 잘 이용하면 ‘건강 미인’이 될 수 있다. 피로할 때 솔잎 반신욕으로 피로를 풀고, 잇몸 질환으로 고생한다 싶으면 솔잎 물로 가글을 하면 통증이 가라앉는다. 완벽한 S자 라인의 몸매를 가진 탤런트 겸 영화배우 김아중씨가 밝힌 자신의 환한 미소의 일등 공신도 바로 솔잎 가글. 솔잎에서 나오는 솔잎오일(적송유)을 에센스, 팩 등으로 활용, 고운 피부를 가꿀 수 있다. 평소 사용하는 비누나 샴푸도 솔잎 관련 제품이 시중에 나와 있다. 머리를 나게 하는 성분이 있는 만큼 탈모로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한번 써볼 만하다. 천연 제품이라 피부에 좋은 것은 물론. 아직 대중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한번 써 본 사람들의 재구매율이 높을 정도로 만족도가 높다. 솔잎 제품을 생산·판매하는 ‘솔나라’김기현 실장은 “부작용이 전혀 없는 천연제품이라는 매력 때문에 가격이 다소 비싸더라도 솔잎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말했다. # 피로할 때는 솔잎 반신욕 건강을 위해 반신욕을 즐기는 가정이 늘고 있다. 반신욕을 할 때 솔잎을 넣은 물에 반신욕을 하면 스트레스와 피로회복은 물론 허리와 배가 아픈 증상을 없애 주고, 심장을 튼튼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커다란 들통에 솔잎을 넣고 끓여 우린 물을 섞어서 반신욕을 한다. 솔잎을 건져내지 않고 사용해도 된다. 솔잎 목욕은 관절염, 신경통 요통 고혈압에 좋다. 동상에 걸렸을 때도 솔잎 삶은 물에 손발을 담그면 풀어진다. # 잇몸질환에는 솔잎 가글 바쁘고 피곤할 때 오는 신호가 바로 잇몸질환. 잇몸이 붓거나 피곤할 때 입안에 솔잎 달인 물이나 즙에 소금을 약간 넣어 잠깐 머금고 있으면 통증이 가라앉는다. # 솔잎오일로 화장품 만들어요 해발 300m이상 북한 청정지역인 금강산, 백두산 등에 자생하는 소나무의 솔잎에서 채취, 특수 가공한 적송유는 식용으로도 쓰이지만 스킨, 로션 등에 혼합해서 사용하면 탱탱한 피부를 가꿀 수 있다. 편리하게 캡슐로 된 솔잎오일이 있어 사용하기 간편하다. 솔잎을 이용한 피부관리를 할 경우 피부 트러블의 원인이 되는 세균과 곰팡이를 제거해줌으로써 피부의 자생력을 키워준다. ●스킨에 넣어요:스킨병에 솔잎오일 캡슐 1개 정도를 터뜨려 넣고 흔들어 혼합해 사용한다. 피부의 탄력을 위해 혼합된 스킨을 화장솜에 묻혀 냉동실에 잠시 넣었다가 얼굴에 올리면 된다. ●로션, 에센스, 크림에 넣어요:평소 사용하는 로션, 에센스, 크림을 바를 때 손등에 덜어 낸 뒤 솔잎오일을 반캡슐만 짜서 같이 섞어 바른다. Tip:솔잎오일을 얼굴에 바를 때 원액을 그대로 바르면 안된다. 피부 트러블이 있는 경우 캡슐의 솔잎오일을 면봉이나 거즈로 찍어서 트러블이 있는 부위만 바른다. ●천연팩으로도 좋아요:곡물팩이나 과일팩 등 천연팩에다 솔잎오일 캡슐 1개를 넣으면 매끈하고 보습력 있는 피부가 된다. Tip:팩을 한 후에 모공에 팩 찌거기가 남지 않도록 충분히 세안해야 한다. # 피부에 직접 바르세요 ●두피에 바를 때:비듬, 지루성 두피, 탈모로 고생할 경우 캡슐 1∼2개를 두피에 뿌려 손끝으로 지압하듯이 발라준 후 샴푸와 린스로 머리를 감는다. 다만 두피 부분을 제외한 모발에만 샴푸와 린스를 사용하고 잔여물이 남지 않도록 충분히 헹군다. ●몸에 바를 때:샤워나 목욕후 보디로션이나 보디오일 등을 솔잎오일 캡슐 1∼2개를 섞어서 사용하면 좋다. 습진이나 무좀 등에 사용할 때 캡슐을 터트려 원액 그대로 바른다. ■ 도움말 솔나라 ■ 가지 가지 솔잎 먹을 거리 (1) 솔잎식초 재료:솔잎과 황설탕을 같은 분량으로 준비. 만드는법:(1)항아리(또는 입구가 넓은 병)에 황설탕과 깨끗이 씻어 말린 솔잎을 켜켜이 담는다.(2)3일 동안 재워둔다.(3)끓인 뒤 식힌 물을 자박하게 붓는다.(4)한지로 덮어 100일 정도 숙성시킨다. Tip:발효하는 과정에서 가스가 발생하므로 뚜껑에 숨이 통할 구멍을 만들어놓는다. (2) 솔잎주 재료:솔잎과 꿀(또는 설탕)은 같은 분량으로, 술은 솔잎의 6배 분량으로 준비. 만드는법:(1)솔잎을 깨끗이 씻고 잘 말린 뒤 1∼1.5㎝ 길이로 자른다.(2)솔잎과 꿀, 소주를 병에 담아 밀봉한다. 발효되면서 가스가 생기므로 병의 80% 정도만 채운다.(3)한두 달 발효시킨다.(4)솔잎을 걸러내 작은 병에 담아 먹는다. (3) 솔잎보쌈 재료:돼지고기 삼겹살 1인분, 솔잎500g, 소금 약간, 깻잎·상추·풋고추·쌈장·마늘 등 만드는법:(1)솥에 솔잎을 깔고 삼겹살을 얹어 소금을 뿌린 뒤 솔잎으로 덮어 뚜껑을 닫는다.(2)센 불에서 찌다가 김이 오르면 불을 줄여 약한 불에서 1시간 정도 더 쪄낸다.(3)핏물이 보이지 않으면 꺼내 먹기 좋게 썬다.(4)야채와 쌈장, 마늘 등을 곁들여 먹는다. (4) 솔잎차 재료:솔잎과 설탕의 분량을 1:1로 준비 만드는법:(1)솔잎을 물에 씻어 완전히 말린다.(2)솔잎과 설탕을 병에 켜켜이 넣는다. (3)한 두 달 정도 지나 설탕이 걸쭉해지면 솔잎과 시럽을 꺼내 물을 부어 마신다.
  • 지방선거 이색후보들

    지방선거 이색후보들

    5·31 지방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후보 가운데는 다양한 경력을 지닌 이색 후보가 많았다. 이혼한 부부가 한 선거구에 출마했고,‘10전11기’ 단골 출마자도 나왔다. 첫날 접수 결과 최연장자는 충남 청양군 가선거구에 기초의원으로 출마한 정락기씨로,1925년에 태어나 올해 81세다. 최연소 출마자는 경기 용인 마선거구에서 민주노동당 배지를 달고 기초의원에 도전장을 낸 박해웅씨. 한국외국어대 경영정보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다. 광주 남구청장 선거에서는 무소속 강도석씨가 10전11기 도전에 나섰다. 강씨는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것을 시작해 지금까지 30년 가까운 기간에 국회의원 4차례, 구청장 5차례, 광역의원 1차례 등 10차례 각종 선거에 도전한 바 있다. 경기 고양에는 이혼한 부부가 한 선거구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고양시 파선거구에 기초의원 후보등록을 한 심규현(38)씨와 김영선(38·여)씨는 한때 부부 사이였다가 이혼했다.2,3대 고양시의원인 심씨는 무소속으로 3선에 도전하며, 김씨는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처음 입후보했다. 의사·약사 대결도 벌어진다. 충북 증평군수 선거에는 약사 출신 유명호(64) 현 군수가 무소속으로 출사표를 낸 가운데 의사 출신 김영호(53)씨가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도전장을 던졌다. 광역의원을 뽑는 고양시 제7선거구에는 열린우리당 경기도당 위원장인 김현미 의원의 보좌관을 지낸 김영환(38)씨와 한나라당 김영선 최고위원의 비서 출신인 김학진(31)씨가 후보로 등록했다. 여야 여성 국회의원의 대리전이라는 얘기도 지역 정가에서 나오고 있다. 이밖에도 대전 동구청장에 무소속으로 등록한 박병호 현 구청장은 열린우리당 박병석 의원의 친형이며, 열린우리당 전북 정읍시장 후보로 등록한 김생기(61)씨는 김원기 국회의장의 사촌동생이다. 또 서울 서초2선거구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시의원 선거에 나선 이지현씨는 같은 당 이방호 정책위의장의 딸이다. 대구 달서구 나선거구에서 기초의원으로 출마한 김병규 후보는 ‘개구리소년’ 사건의 유족으로 실종된 5명의 소년 중 김종식군의 큰아버지이다. 제주에서는 태고종 용문사 주지인 원정상 스님이 제주도의회 제24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눈길을 끌었다. 한편 한자 이름마저 같은 동명이인이 한 선거구에 출마할 것으로 알려져 눈길을 끌었으나,8촌형이 출마를 ‘양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북 포항 제2선거구 광역의원 선거에는 백씨 종친회가 ‘개입’해 죽도시장 상가번영회장을 지낸 8촌형 백남도(55)씨가 출마를 포기하고 포항시 자원봉사센터 이사장을 지난 백남도(47)씨만 출마했다.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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