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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수 없게 군다”며 빚쟁이를 동생과 몽둥이질한 장미스님

    F=지난해 봄 경부고속도로가에 장미 1만 그루를 심고, 올봄에는「파고다」공원에서 장미전시회를 열어 장미스님으로 유명해진 김대심(金大心)스님(36·가명)이 지난 11일 폭력혐의로 성동경찰서에 구속됐어. C=그 절 사람이 아닌 것 같았는데-. F=혼자 구속된 것만도 아니야. 그가 운영하는 불교보육원 죽심원(성동구 삼선동)의 총무인 동생(27)과 섭외인 조(趙)모씨(28)와 함께 구속됐어. 혐의사실은 김스님에게 지난해 7월 12만원을 빌려 줬다는 박(朴)모씨(37)와 張모여인(40)이 6일 아침 8시 30분쯤 빚받으러 고아원에 찾아가자『아침부터 재수없이 군다』며 욕설을 퍼붓고 고아원직원들과 합세하여 몽둥이와 우산대로 때리고 발길질을 했다는 건데 장여인은 큰 상처를 입지 않았지만 박씨는 전치 3주의 진단서를 고소장에 첨부했더군. B=이상한데, 지난해 취재갔을 때만 하더라도 50~60명의 고아들을 돌보느라고 아주 애를 쓰던 모습을 보았는데. F=글쎄 말이야.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도 그래서 직접 고아원에 나가 보았다는 거야. 그랬더니 고아원에 원아라곤 불과 5~6명 밖에 없고 김스님의 가족 8명을 비롯 직원들만 득실거리더라지 않아. 김스님과 장여인은 몇 해 전부터 꽤 가까이 사귀었던 모양인데 경찰에서 서로 사기꾼이라고 욕을 하더군. <서울신문 사회부> [선데이서울 72년 8월 27일호 제5권 35호 통권 제 203호]
  •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23) 도봉산 원도봉 계곡~망월사

    [진우석의 걷기좋은 산길](23) 도봉산 원도봉 계곡~망월사

    서울 도봉구, 경기도 의정부시와 양주시에 걸쳐 있는 도봉산(739.5m)은 운명적으로 북한산과 얽혀 있는 산이다. 한북정맥이라는 뿌리가 같고, 우이령을 통해 서로 이웃해 있다. 북한산이 좀 더 크고 높아 도봉산이 손해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북한산과 도봉산 일대를 묶어 북한산국립공원이라 부르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다고 도봉산은 성내거나 섭섭해하지 않는다. ‘푸른 하늘에 깎아 세운 만 길 봉우리’라는 선인의 시구처럼 도봉산은 예부터 소금강으로 불려왔다. 도봉산 최고 절경인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이 빚어내는 조화는 가히 금강산이 부럽지 않다. ●자운봉·만장봉·선인봉의 조화 도봉산의 여러 등산로 중에서 험하지 않아 가족 나들이로 좋은 곳이 원도봉계곡을 따라 망월사까지 이어진 길이다. 이곳은 행정구역상 의정부시에 속하고 도봉산 주등산로와 떨어져 있어 비교적 호젓하다. 또한 빼어난 계곡에서는 신갈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등이 조화를 이룬 건강한 숲을 만날 수 있고, 도봉산 최고의 명당자리를 꿰찬 망월사가 버티고 있어 느릿한 산행으로 제격이다. 전철 1호선 망월사역을 나오면 엄홍길 기념관을 만난다.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4좌를 국내 최초로 완등한 엄홍길 대장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산악인이다. 그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 바로 원도봉계곡이다. 그의 부모님이 원도봉유원지에서 식당을 했기에 엄홍길 대장은 자연스럽게 산과 산꾼들의 품에서 자랐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신흥대학 입구를 지나 도로를 따르다 보면 어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앞쪽 멀리 거대한 도봉산의 모습이 아스라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왼쪽으로 세 개의 암봉이 악마의 뿔처럼 치솟는데, 그것이 선인봉, 자운봉, 만장봉이다. 원도봉 탐방안내소를 지나 계곡을 만나면서 길이 갈린다. 망월사는 왼쪽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다리를 건너면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커다란 폭포가 나타난다. 폭포 아래쪽으로 청둥오리 한 쌍이 다정하게 물놀이를 하고 있다. 올해 6월에 북한산 정릉계곡에서 청둥오리 가족이 북한산에서 처음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는데, 이곳에도 용케 살고 있었다. 계곡을 따르는 길섶에서 운 좋게 꽃 핀 함박꽃나무를 발견했다. 까치발을 하고 꽃에 코를 가까이하니 은은한 향기가 밀려온다. 이 꽃은 목련 향기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 향기를 맡으면 식물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좀 더 올라가니 ‘참나무의 종류’를 알리는 숲해설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줄기를 갈아치우는 갈참나무, 짚신 바닥에 깔았던 신갈나무, 떡을 싸기도 하였던 떡갈나무, 도토리 열매가 가장 많이 열려 도토리묵을 쑤어 임금님 수라상의 맨 위쪽에 올렸다 하여 상수리나무’ 등 재미있는 설명과 함께 그 나무들의 잎과 열매 그림이 잘 나와 있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안내판을 보면서 참나무들을 구별해보면 재미있고 유익하겠다. 수도권에서 원도봉계곡만큼 숲이 건강하고 풍성한 곳도 드물다. ●한국 선불교 전통이 배어 있는 망월사 ‘망월사 0.9㎞’ 이정표 앞에서 가파른 돌계단이 이어진다. 이곳을 올라서면 나뭇가지 사이로 원도봉계곡의 명물인 두꺼비바위가 나타난다. 이어 덕제샘에서 목을 축이고 그윽한 숲길을 지나면 망월사 입구다. 망월사 구경은 오른쪽 담장을 따라 이어진 돌계단을 올라 금강문을 통해 절로 들어가, 영산전까지 구경하고 나오는 것이 좋다. 오른쪽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금강문 앞인데, 이곳이 망월사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다. 망월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영산전 뒤로 자운봉·만장봉·선인봉이 병풍처럼 두른 모습이 장관인데, 구름이 살짝 끼면 더욱 신비스럽게 보인다. 대웅전 역할을 하는 낙가보전을 지나 영산전으로 가는 길은 산동네 골목길을 돌아가는 기분이다. 종무소 앞의 거대한 바위에는 고사리가 군락으로 자라고 있다. 이어 천봉선사 탑비에서 작은 문을 통과하면 천중선원(天中禪院)이다. 선원은 망월사에서 가장 풍광이 빼어나고 너른 터에 자리 잡았다. 그만큼 망월사의 핵심 지역이라는 뜻이다. 일제시대 용성 스님은 당시 몰락한 우리나라 선불교 전통을 이곳에서 일으켜 세웠고, 만공·한암·전강·성월·춘성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거물급 선승들이 모두 천중선원을 거쳐 갔다. 그래서 선원에는 지금까지 엄격한 선 전통이 내려오고 많은 스님이 그 가르침을 따라 용맹정진하고 있다. 천중선원 앞에서 철계단을 오르면 영산전인데, 그 앞에서 조망이 시원하게 뚫린다. 영산전 안의 부처님은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으며 속세를 지그시 내려보고 있다. 하산은 올라온 길을 천천히 되짚어 내려온다. 망월사역에서 망월사까지는 약 2㎞, 1시간20분쯤 걸린다. 엄홍길 기념관에서 우회전해 신흥대학 입구를 지나 15분쯤 올라가면 원도봉 탐방안내소를 만난다. 원도봉계곡의 진고개(031-873-4100)는 깔끔한 한정식집으로 자연 조미료를 고집하는 맛집이다. 한정식 1인분에 1만원. <여행전문작가>
  • [6·10 민주항쟁 22주년] 변호사·법학교수 877명 “국정 바꿔라” 시국선언

    6·10항쟁 22주년인 10일에도 민주주의 후퇴를 비판하고 정부의 국정기조 전환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이 잇따랐다. 박재승 전 대한변호사협회장과 최병모 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 등 변호사 682명과 김승환 전북대 교수 등 법학 교수 195명 등 877명은 이날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에서 ‘인권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모든 문제의 원인과 책임은 인권· 민주주의를 경시해온 정부의 독선적 국정운영 기조에 있다.”면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국민 기본권을 침해하는 정책과 행동을 중지하라.”고 촉구했다. 연세대, 한국외대, 인하대, 인제대, 제주대 교수들도 이날 각각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경희대, 한양대 등 서울지역 12개 법과대학 학생회장단과 ‘공익,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대학생 모임’도 이날 정오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민주주의 수호와 정의로운 법집행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경희대와 성공회대, 중앙대, 한국외대, 서울대 총학생회는 이날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거나 교수들의 선언에 동조하는 성명을 냈다. 이에 따라 이날 현재 각계에서 시국선언에 동참한 인사는 4000명을 넘어섰다. 특히 대학교수의 경우 전국 40여개 대학에서 3000여명가량 된다. 부산지역 종교계 인사 51명도 이날 오전 성명을 발표하고 국민 대화합과 남북관계 개선을 촉구했다. 범어사 주지 정여 스님과 정영문 부산기독교교회협의회 증경회장, 윤종모 성공회 주교, 김일상 원불교 교구장 등이 참여했다. 이재연 유대근기자 oscal@seoul.co.kr
  • 올 여름 온가족 템플스테이 떠나볼까

    올 여름 온가족 템플스테이 떠나볼까

    부처는 이것저것 나누려 하는 분별심을 경계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면서 ‘승(僧)과 속(俗)도 하나요,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도 하나’라는 ‘불이(不二)’의 진리를 전했다. 불이의 가르침을 받들 듯 삼수갑산 속 사찰들도 이제는 문을 활짝 열고 세속의 사람들을 맞이 하고 있고, 일반인들도 ‘관광 이상의 목적’으로 사찰을 찾고 있다. 예불을 올리고 참선을 하며 마음 속 부처를 찾아보는 단기 사찰체험 ‘템플스테이(Temple Stay)’가 대표적인 경우. 요즘 불교신자는 물론, 종교를 떠나 누구나 즐기는 일종의 레저가 됐다. 1인당 3만~5만원 선이면 경치 좋은 산사에서 머리도 식히고 선(禪)수행도 체험하며 하룻밤을 머무를 수 있다. ●전국 100개 사찰서 일정 준비 올여름 방학 및 휴가철을 맞아 조계종 불교문화사업단이 지정한 전국 100개 사찰들은 벌써 여름 템플스테이 일정을 준비하고 참가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불교문화사업단에 따르면 2004년부터 작년까지 템플스테이를 체험하고 간 인원은 30만명. 특히 작년 한해만 외국인 2만명을 포함 11만명이 체험해 무서운 속도로 참가자가 늘고 있다. 템플스테이 프로그램도 다양해져 이제는 단순한 사찰 체험을 넘어 취미생활이나 교육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사찰과 잘 어울리는 ‘차(茶)’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 올해도 차를 많이 재배하는 남도 사찰을 중심으로 김제 금산사 ‘전통차만들기’, 해남 대흥사 ‘제다실습’, 장성 백양사 ‘발효차 만들기’, 고창 선운사 ‘햇차만들기’, 구례 화엄사 ‘야생차 만들기’ 등 다도 교육 및 차만들기, 사찰 체험을 결합한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여름방학을 맞는 어린이들을 위한 수련회를 겸해 전통문화 교육을 강화한 사찰들도 있다. 서산 부석사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경전을 통한 한문교육을 비롯, 단청 그리기, 도자기 만들기 등 체험행사를 준비했다. 또 청소년의 학습효과 증진을 위한 집중력 향상 선 프로그램도 있다. 해남 미황사 ‘한문학당’, 경주 골굴사 ‘화랑수련회’, 밀양 표충사 ‘어린이 사명당’ 등 32개 사찰도 모두 어린이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송광사·수덕사·통도사선 수련회 집중 순천 송광사, 예산 수덕사, 양산 통도사 등 총림 사찰들은 스님들 하안거에 맞춰 선 수련회에 집중했다. 그외 무주 안국사의 태권도 함께하는 템플스테이같은 이색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특히 올해부터는 템플스테이 방식의 대규모 연수도 가능하게 됐다. 조계종은 11일 충남 마곡사 인근에 한국불교 세계화와 템플스테이 대중화를 목적으로 ‘전통불교문화원’을 개원한다. 공사기간 5년, 244억원을 들여 지은 이 건물은 300명이 한꺼번에 사찰체험식 교육 및 연수를 받을 수 있어 기업 등 단체 연수에 활용할 계획이다. 전통불교문화원 원장 종훈 스님은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이룬 시설은 물론 대규모 연수에 적용가능한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적극 개발했다.”면서 “이로써 종단 내 수행·교육은 물론 한국 불교 문화의 세계화·대중화에 힘쓰겠다.”고 했다. 템플스테이에 대한 정보와 일정은 각 사찰 홈페이지 외에도 ‘템플스테이 홈페이지(www.templestay.com)’에서 확인가능하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중국의 세계적 청소년문학작가 차오원쉬안 성장소설 ‘17세 밍쯔’ 한국어판 출간

    한국 소설 시장의 상당 부분은 일본 문학이 점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에쿠니 가오리 등 숱한 소설가들로 대표되는 ‘일류(日流)’는 출판업계를 기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국내 문단을 긴장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여기에 중국의 현대문학까지 가세하는 형국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소설의 초판 1쇄를 무려 5만~50만부나 찍는 곳이 중국이다. 그 힘의 한 쪽 끄트머리가 중국 대륙을 휩쓴 뒤 서해 바다를 건너 반도 남쪽으로 넘어오고 있다. 베이징대학 교수이자 세계적인 청소년문학 작가인 차오원쉬안(曹文軒·55)이 쓴 ‘17세 밍쯔’(은행나무 펴냄)는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세상의 밑바닥에 내던져진 열 일곱 살 소년 ‘밍쯔(明子)’가 겪어야 했던 힘겹지만 아름다운 성장의 기록이다. 밍쯔는 돈벌이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온 뒤 목공 사부 ‘싼 스님’의 일거리를 가져오는 일로 생게를 잇는 농공민(農工民)으로, 하루하루를 비참하게 살아간다. 싼 스님 역시 젊은 남자에게 아내를 빼앗긴 상처를 가슴에 품고 사는 상처받은 인물이다. 싼 스님은 밍쯔에게 도둑질을 강요하고, 그의 노동을 착취한다. 또한 도시와의 불화, 세상과의 불화로 상징되는 야뇨증은 끊임없이 밍쯔를 따라다닌다. 믿고 의지할 이가 부재한 세상은 밍쯔가 알고 있는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다. 밍쯔 역시 여자친구에게 받은 배신을 또다른 낯선 소녀에게 되갚음하는 방식으로 일찍 배워버린 세상의 법칙을 풀어낸다. 현대 중국의 격변을 이끌고 있는 물질주의의 폐해는 17세 소년의 세밀한 심리 묘사와 유려한 문장을 앞세워 핍진성있게 담겨진다. 이는 단순히 우울한 사회를 반영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희망과 꿈을 찾아 나가는 ‘신 중국식 리얼리즘’의 전형을 보여 주는 듯하다. 중국 문학에 대한 기대를 높여주는 작품으로, 문학의 특수성을 아우르는 문학의 보편성이 엄연히 존재함을 확인시켜 준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新 귀거래사] ‘울고 싶어라’의 가수 이남이씨

    [新 귀거래사] ‘울고 싶어라’의 가수 이남이씨

    “자연 속에서 봉사하며 사는 삶이 무척 행복합니다.” 대중 가요 ‘울고 싶어라’로 1980년대 후반 절정의 인기를 끌던 가수 이남이(62)씨가 강원 춘천에 둥지를 틀었다. 햇수로 9년째다. 서울 토박이로 그룹 ‘사랑과 평화’, ‘신중현과 엽전들’의 맴버로 가수 생활을 해 오다 쉰을 훌쩍 넘겨 춘천에 정착했다. 서울 생활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의형제를 맺은 중광 스님, 작가 이외수씨와의 인연이 춘천을 그의 제2 고향으로 만들었다. 자유인으로 괴짜인생을 사는 사람들끼리 모여 살게 된 셈이다. ●‘철가방 프로젝트’그룹 만들어 음악도 계속해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 막 끝났을 때 ‘울고 싶어라’를 냈고, 히트를 쳤다. 올림픽은 성공적으로 치렀지만, 우리사회가 민주화 등 변화의 몸부림속에 있었기에 반향이 더욱 컸을 것이라는 게 나름대로의 분석이다. 절규하는 듯, 울부짖는 듯한 가창과 무대 제스처가 더욱 호소력있게 다가왔다. 이씨는 그때를 회상하며 “올림픽 이전이나 군사정권 초기에 울고싶어라가 나왔으면 틀림없이 금지곡으로 묶였을 텐데, 절묘하게 세월을 잘 만나 히트곡이 됐다.”고 말했다. 일명 떳다떳다 비행기로 알려진 노래 ‘내집이 그립네’도 그런대로 대중들에게 알려져 가수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이후 걸레 스님으로 잘 알려진 중광 스님을 따라 백담사와 곤지암을 찾아 떠돌이 생활을 하다 중광 스님이 입적한 뒤 이외수씨와 가까이 살고 싶어 아예 춘천에 보따리를 풀었다. 부인, 두딸과 함께 춘천 후평동 도심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정한 뒤 그동안 딸들 교육도 춘천에서 모두 시켰다. ‘철가방 프로젝트’라는 언더그라운드 그룹을 만들어 음악인 생활도 계속했다. 작가 이외수씨가 작사를 하면 이씨가 곡을 붙이는 식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 ‘춘천에 걸린 달’, ‘짬뽕과 자장면’ 등을 엮어 CD 2집까지 냈다. 괴짜들끼리 모여 괴짜들의 노래를 만들었다. 춘천 마임축제와 화천 산천어축제의 주제가도 만들어 불렀다. 큰 딸 이단비(27·가수)씨와 함께 철가방 프로젝트를 이끌다 최근 딸은 솔로로 독립했고, 이씨도 지역방송에서 리포터와 패널 활동과 봉사활동으로 소일하고 있다. 특히 시인과 함께 춘천과 안양교도소,춘천 인근의 군부대를 정기적으로 찾아 시와 음악에 대한 강의와 공연을 겸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씨는 “재소자들과 병영생활을 하는 군인들이 무척 좋아해 보람이 크다.”며 “최근에는 재소자 가운데 시인까지 나왔다.”며 좋아했다. ●가수 데뷔 큰딸과는 무료 위문공연도 펼쳐 자원봉사 활동도 펼친다. 춘천 김유정문학관에서 해마다 펼치는 김유정문학제 때는 첫 회부터 자원봉사팀장을 맡아 지금까지 봉사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노인복지회관과 독거노인을 찾아 무료 위문공연도 펼친다. 가끔 딸 단비씨도 동행한다. 봉사와 방송활동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지만 춘천의 자연을 만끽하는 나름대로의 방법도 터득했다. 이씨는 “시간이 날 때마다 돗자리 하나 챙겨 동면 시냇가 다리밑 그늘에 누우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고 너스레를 떤다. 공지천을 산책하고, 차량으로 춘천 호숫가를 드라이브하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제2의 고향인 춘천 자랑이 늘어졌다. 여전히 이씨는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이 희끗희끗하게 세었지만 여전히 동그란 안경, 밀집모자에 콧수염이 잘 어울리는 자유인이다. 이씨는 “인생 후반기에 좋아하는 자연속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보내는 삶이 좋다.”고 활짝 웃어 보였다. 글 사진 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다른기사 보러가기] ☞北 미사일은 럭비공… 어디 떨어질지 몰라 ☞서러운 10급 공무원 ☞에어프랑스, 탑승객 가족에 “희망 버려라” ☞‘수도권·30대·女’ 불법사채 피해 가장 많아 ☞‘뜨거운 감자’ 정수근 복귀논란 ☞이문영 교수 “수십만 조문객 목소리 정부 반응없어 놀라워”
  • 통일신라시대 미륵불의좌상 발견

    통일신라시대 미륵불의좌상 발견

    포항 고석사에서 통일신라 ‘미륵불의좌상(彌勒佛倚坐像)’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문명대(불교미술사) 전 동국대 교수는 4일 고석사 보광전에 봉안된 불상이 ‘미륵불의좌상’임을 최근 확인했다고 밝혔다.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이 의자에 앉은 모습을 형상화한 미륵불의좌상은 중국에서는 많이 나왔으나 국내에서는 지금껏 삼국시대 신라 1구(경주 삼화령 미륵세존), 고려시대 1구(법주사 마애미륵불) 나온 게 전부다. 고석사 주지 종범스님에 따르면 이 불상은 본래 일제시대 때 바른 석고에 싸여 있었다. 그것이 보기에도 좋지 않고 안에 있는 본래 불상의 모습을 가린다 하여 지난 2007년 가을에 이를 제거했는데, 그 안에서 석고상과는 다른 모습의 불상이 나온 것이다. 새로 나온 불상은 거대한 석감(石龕·돌에 만든 감실) 속 의자에 돋을새김한 미륵불이 앉아 있는 형식. 감실을 제외한 불상 크기만 해도 높이 222㎝에 무릎 폭 95㎝이다. 종범스님은 “처음 나온 통일신라 미륵불의좌상이고 불상 상태도 좋은 편이라 가치가 높다.”면서 “관련 세미나가 끝난 뒤 정식으로 문화재청에 감정을 의뢰해 국가문화재 지정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서울 봉원사 6일 영산대재

    서울 봉원사 6일 영산대재

    서울 신촌에 위치한 안산 초입에는 시인 조지훈(1920~1968)의 ‘승무’ 시비가 서 있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불교 무용인 승무를 추는 승려의 모습을 그려낸 작품이다. 그 안산 앞자락으로 태고종 사찰인 봉원사가 위치해 있다. 봉원사는 오는 현충일(6일)에 ‘전 세계인의 평화와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영산대재’를 시연한다. 봉원사는 영산재 보존회를 두고 1988년부터 승무를 비롯해 불교종합예술의 정수인 ‘영산재(靈山齋·중요무형문화재50호)’를 지금껏 20여년째 이어오고 있다. 본래 단옷날 열렸으나 2007년부터 국가적 행사로서의 의미를 살려 현충일에 시연을 하고 있다. ●세계평화기원·호국영령추모 의식 영산재는 일종의 불교식 천도의식.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 후 영취산에서 중생들을 모아놓고 ‘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할 때 모습을 재현했다. 단순히 죽은 자를 위로해 보내는 의식이 아니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함께 불도를 깨닫게 하는 데 의의가 있다. 장엄한 제례의식이지만 사실 예술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영산재에는 바라춤, 나비춤 등 무용 요소는 물론이고 불교노래인 범음범패(梵音梵唄)에 취타, 3현6각 연주 같은 음악적 요소도 있다. 또 괘불(掛佛·야외에서 법석을 차릴 때 뒤에 거는 불화)이나 의상 등은 미술적 요소도 갖추고 있다. ●불교종합예술 정수로 정평 올해 행사는 ‘세계평화기원·호국영령추모’ 목적 외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천도재를 겸한다. 영산재 보존회 사무장 전지암 스님에 따르면 올해는 노 전 대통령의 영정을 모시는 순서도 따로 둘 예정이다. 또 평소 진행의 어려움으로 시연하지 않던 ‘괘불이운(掛佛移運)’ 의식도 올해 행한다. 괘불이운은 6×10m의 대형괘불을 평소 모셔져 있던 만월전에서 야외로 옮겨와 거는 과정이다. 또 올해 영산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신청을 앞두고 있어 의미가 크다. 9월 중 이와 관련한 대략의 윤곽이 나올 예정이라 보존회측도 영산재를 세계적으로 알리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프랑스 파리 세계문화유산의 집을 비롯해 벨기에, 일본, 캐나다 등에서 영산재를 시연했고 중국에서는 종교국 초청으로 ‘쓰촨성 대지진 희생자를 위한 영산대재’를 열었다. ●바라춤·범음범패 등 선봬 전지암 스님은 “한국불교의 전통의식을 전수한다는 것 외에도 전 세계의 평화는 물론 남북평화통일을 염원하고 전몰장병, 호국영령을 추모한다는 의미에서 이번 행사를 연다.”면서 “올해 행사는 노 전 대통령 서거 등을 맞아 어느 시연회보다 더욱 경건하고 장엄한 스케일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또 “9월에는 영산재를 주제로 국제학술세미나도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6일 행사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8시간 동안 계속된다. 20명이 넘는 시연자들이 불교예술의 정수를 펼친다. 관람무료. (02)392-3007.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우리 마음 그대로가 법문”

    “우리들 마음 그대로가 법문입니다. 우주 자체가 법문을 들려주고 있으니 주위를 잘 살피십시오.”(본문 중) 법정(法頂·77) 스님의 법문집이 처음으로 나왔다. ‘일기일회(一期一會)(문학의숲 펴냄)’는 스님이 2003년 5월부터 2009년 4월까지 자신이 회주로 있는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펼쳤던 정기 법회, 하안거, 동안거 결제·해제 법회 법문 43편을 모은 것이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 ‘함께 있고 싶어서’ 같은 수필작품으로 종교를 뛰어넘는 대중적 사랑을 받고 있으며 불교계에서도 존경받는 큰스님 중 하나다. 이번 나온 법문들은 스님이 수행 대중을 대상으로 마음을 바로 하고 정진할 것을 당부한 내용들이다. 하지만 종교적 법문에서도 수필에서 보여준 문학적 기량이나 삶에 대한 통찰은 여전하다. 예를 들면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입니다. 자연은 우리가 필요한 만큼 공급하지만 분수에 넘치는 탐욕 앞에서는 궁핍해집니다.”(본문 116쪽) 같은 부분이다. 책 제목 ‘일기일회’는 다도(茶道)에서 기원한 말. ‘주인과 손님의 만남은 일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니 차를 대접하는 주인과 받는 손님은 모두 정성을 다해 그 자리에 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인연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스님의 생각이 담겨 있다. 책은 스님의 제자인 덕인, 덕현, 덕진 스님과 전에 함께 책을 내며 인연이 된 류시화 시인이 스님의 법문을 녹음한 자료를 글로 옮긴 것이다. 거기에 법문 시작마다 약간의 메모를 붙여 넣었다. 법정 스님은 아직 병중인데도 직접 문장을 다듬고 보완한 것으로 알려졌다. 1만 5000원.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태고종 종정 혜초스님 재추대

    한국불교 태고종의 제18세 종정으로 현 종정인 혜초(慧草·77) 스님이 재추대됐다. 임기는 5년. 태고종은 지난 1일 원로회의에서 현 종정인 혜초 대종사를 만장일치로 재추대했다고 2일 밝혔다. 경남 태생인 혜초 대종사는 1945년 진주 청곡사에서 청봉(靑峰) 화상을 은사로 득도했다. 이듬해 해인사 강원에서 사교과를 수료하고 1956년 해인대학(현 경남대학) 종교학과, 1960년 일본 임제대학 선학과를 졸업했다. 태고종 총무원 사회부장, 부원장, 총무원장을 지낸 혜초 대종사는 2004년 6월 제17세 종정으로 추대돼 현재 태고총림인 순천 선암사 무우전에 머무르고 있다.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노 前대통령 국민장 이후] 영결식 끝났지만 봉하마을 추모객 몰려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애도와 슬픔을 달래기에 국민장 7일은 짧았다. 노 전 대통령의 유골이 임시 안치된 경남 김해시 봉화산 정토원과 봉하마을 분향소에는 서거 이후 첫 주말인 31일 전국에서 모인 추모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사저 앞에서 정토원으로 이어지는 노 전 대통령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걸었던 길은 이날 하루종일 추모객의 줄이 이어졌다. 봉하마을측은 이날 하루 10만명 안팎의 추모객이 찾은 것으로 추산했다. 대형 초상화가 세워진 봉하마을 분향소는 이날 이른 새벽부터 가족 단위의 추모객이 몰리기 시작했다. 낮에는 발디딜 틈이 없었다. 장의위원회는 당초 이날 철거하려던 마을회관 앞 분향소를 영결식이 끝난 뒤에도 추모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음에 따라 당분간 그대로 운영할 계획이다. 유골이 안치된 정토원 수광전에서도 분향하려는 추모객 행렬이 하루종일 100m 넘게 이어졌다. 수광전 앞을 비롯해 정토원 주변 곳곳에는 경비를 위해 경찰이 배치됐다. 정토원 정봉 스님은 “노 전 대통령의 유골이 안치됐다고 해서 정토원의 평상시 일정이 달라지는 것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평소처럼 오전 4시30분과 오전 10시30분, 오후 6시30분에 예불을 올린다. 정봉 스님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해 49재 전까지 예불을 할 때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광주 노공 무현 영가’라는 축원을 추가한다.”고 말했다. 정토원 선진규 원장은 “노 전 대통령의 유골함이 어디에 어떻게 안치돼 있는 지는 공개하기 곤란하다.”고 말했다.정토원측은 경비와 질서유지 등을 감안해 추모객의 법당안 분향은 오전 4시~밤 12시로 제한했다. 정토원을 오르내리는 추모객들은 노 전대통령이 이승과 작별한 부엉이바위옆을 지나며 비통함을 나타냈다. 부엉이바위에는 경찰이 배치돼 있고, 바위가 있는 쪽으로 건너가는 나무다리에서부터 경찰통제선이 설치돼 일반인 출입이 금지됐다. 노 전 대통령의 김경수 비서관은 “유족측이 깊은 슬픔에 빠져있고 안장 등 장례절차도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족 근황에 대한 취재와 보도는 자제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 비서관은 “추도기념사업은 아직 논의할 상황이 아니며, 일부에서 나오고 있는 비석이나 추모사업을 위한 모금운동도 유족측에서 정중하게 사양했다.”고 밝혔다. 유가족과 참여정부 인사 등은 이날 홈페이지 ‘사람사는 세상’에서 “경건하고 엄숙하게 국민장을 치를 수 있게 마음을 모아주신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밝혔다. 한편 경찰은 2일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당일 산행현장 등에 대한 현장검증을 실시한다. 김해 강원식 박정훈기자 kws@seoul.co.kr
  • [1일 TV 하이라이트]

    ●인간극장(KBS1 오전 7시50분) 길도 닿지 않는 지리산 중턱의 대성골. 덩치 큰 살림살이에서부터 자잘한 부식에 이르기까지 등지게 짐을 지고 한 시간 남짓 걸어 올라야 하는 그곳에 두 형제 김기석씨와 김남성씨 가족이 산다. 세상 밖의 눈으로 보면 고생스럽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산속 생활. 그 산속에 그들이 사는 이유를 들어본다. ●한국 한국인(KBS2 밤 12시45분) 여류시인이자 당대 최고의 비구니 스님이었던 일엽스님을 어머니로, 일본 최고의 명문가 오다가문의 오다 세이조를 아버지로 두었던 일당 스님. 일당스님에게 듣는 한국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의 운명적 만남과 헤어짐, 어머니 말고 스님이라 부르라 했던 어머니 일엽에 대한 애틋함을 들어본다. ●닥터스(MBC 오후 6시50분) 누구보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미점씨. 하지만 40여년의 세월 동안 일그러진 얼굴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종양으로 인해 끊임없이 변해버린 오른쪽 얼굴. 다섯 번의 수술로 많은 종양을 제거할 수 있었지만 반쪽 얼굴을 되찾을 순 없었다. 안면기형 김미점씨의 이야기를 담는다. ●TV로펌 솔로몬(SBS 오후 8시50분) 가난한 결혼생활을 이유로 딸 예지의 양육권까지 넘긴 채 남편 준성과 매몰차게 이혼한 민주. 준성은 가족을 버린 민주를 원망하며 힘들게 예지를 키운다. 그러나 이혼 후 예지가 눈에 밟히는 민주. 딸 예지를 찾아가지만 준성은 민주에 대한 배신감에 갖은 방법을 동원해 예지와의 만남을 막는다. ●스페이스 공감(EBS 밤 12시5분) 소리꾼 장사익과 재즈 기타리스트 정재열의 ‘실험 Experiment’. 장사익의 대표곡 ‘찔레꽃’과 ‘바보천사’, ‘님은 먼 곳에’ 등을 선보이는 특별한 무대가 펼쳐진다. 영혼을 노래하는 우리 시대의 소리꾼 장사익과 수준 높은 포스트 밥 재즈 기타리스트, 정재열이 함께하는 새로운 실험은 무엇일까? ●YTN 스페셜(YTN 오전 10시30분) 지식재산은 각 산업의 동력원이며 그린 산업의 숨은 주역이다. 특허를 비롯한 지식재산이 경제 성장의 핵심으로 떠오른 지금, 지식 재산을 둘러싼 기업들의 치열한 공방전은 이미 시작됐다. 세계와 싸우는 우리 기업을 위해 정부가 지식 재산을 국가의 성장 동력으로 이끌어 내기 위한 정책을 알아본다.
  • [노 前대통령 국민장] “해처럼 지셨지만 고결한 정신은 달처럼 빛날 것”

    [노 前대통령 국민장] “해처럼 지셨지만 고결한 정신은 달처럼 빛날 것”

    29일 오전 10시48분쯤. 서울 경복궁 동문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쪽에 도열한 의장대가 ‘받들어 총’ 자세로 운구 행렬을 맞았다. 뒤이어 영구차와 유족들이 나타나자 장내는 일순 숙연해졌다. 군악대의 조악 연주에 맞춰 창백한 얼굴의 권양숙 여사가 아들 건호씨와 함께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건호씨의 아내 배정민씨와 딸 정연씨도 뒤를 따랐다. 역대 대통령 중 5번째 영결식이었다. 공동 장의위원장인 한승수 총리와 한명숙 전 총리의 조사가 낭독됐다. 4개 종단의 추모의식도 이어졌다. 이날 오전 5시쯤 김해 봉하마을에서 차를 타고 상경한 유족들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한다는 생각에서였을까. 권 여사를 비롯한 가족들은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모르는 어린 두 손녀만 천진하게 놀고 있었다. ●화면속 “바보 정신으로 정치…” 오전 11시50분쯤. 제단 옆 대형 스크린에서 노 전 대통령의 생전 모습을 담은 영상이 나왔다. 화면 속 노 전 대통령은 “별명 중에서 (바보가)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바보 정신으로 정치하면 나라가 잘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냥 바보하는 게, 그게 그냥 좋아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울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던 유족과 참여정부 시절 인사들의 흐느낌이 터져나왔다. 일주일 동안 표정 한번 변하지 않았던 이해찬 전 총리도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이미 눈시울이 붉어 있던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은 격하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백원우 의원 “MB는 사죄하라” 이어서 유가족과 주요 인사들의 헌화가 시작됐다. 권 여사를 비롯, 유족들이 줄지어 흰 국화를 제단에 바쳤다. 이명박 대통령 내외가 헌화하려는 순간, 앞줄에 앉아 있던 민주당의 백원우 의원이 “사죄하라. 어디서 분향해.”라며 소리를 질렀다. 경호원이 입을 틀어막으며 제지했지만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백 의원이 경호원들에게 끌려나간 뒤에야 이 대통령 내외는 헌화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분향소 앞까지 휠체어를 타고 이동한 뒤 고인의 영정에 국화꽃을 놓기 위해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헌화한 뒤 뒤돌아서 권 여사가 앉아있는 쪽으로 다가간 김 전 대통령은 권 여사의 손을 잡고 위로하다 슬픔이 북받치는지 큰 소리로 통곡했다. 영결식은 국립합창단의 ‘상록수’ 합창, 삼군(육·해·공군) 조총대원들의 조총 발사 의식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이날 영결식에는 2500여명의 조문객이 참석했다. 추모사를 낭독한 대한불교 조계종 봉은사의 주지 명진 스님은 “일락서산월출동(日落西山月出東), 즉 해가 서산에서 지면 달은 동녘에서 뜬다. 지는 해처럼 당신은 떠나가지만 당신의 고결한 정신은 떠오르는 달처럼 빛날 것”이라며 노 전 대통령과의 마지막 이별을 애도했다. 김민희 허백윤기자 haru@seoul.co.kr
  • [노 前대통령 국민장] 유골함 정토원 부모위패 곁 임시안치

    [노 前대통령 국민장] 유골함 정토원 부모위패 곁 임시안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해가 29일 새벽 봉하마을을 떠나 발인식과 영결식, 노제, 화장 등 서울을 다녀오는 긴 여정을 마치고 30일 새벽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봉화산 정토원에 임시 안치됐다. 향나무 유골함에 담긴 유해는 이날 새벽 봉하마을에 도착한 뒤 노 전 대통령이 서거 당일 올랐던 등산로가 아닌 산 뒤쪽의 자동차길을 이용해 정토원에 올랐다. ●49재후 봉하마을 사저 옆 묘소로 유족들은 정토원 앞뜰에 제단을 차려 영정과 유골을 모시고 반혼제(返魂祭)를 지낸 뒤 유골을 법당인 수광전 안 부처님 앞으로 옮겼다. 반혼제는 세상을 뜬 사람을 화장한 뒤 다시 혼을 불러 집으로 모시는 의식이다. 개문계(開門戒·불법에서 문을 여는 의식)와 삼보계(三寶戒) 독송에 이어 유족들은 부처에 예를 올리고 유골함을 수광전 오른쪽 벽에 마련된 영혼의 위패를 두는 영단(靈檀)에 임시로 안치했다. 영단에 안치한 뒤 유족과 스님, 장의위원 등이 49재 초제를 지내는 것을 끝으로 유골 안치 의식은 마무리됐다. 정토원은 노 전 대통령이 삶을 마감한 부엉이바위와 사자바위 사이 봉화산 중턱에 있는 조계종 소속의 조그마한 사찰이다. 부엉이바위와 사자바위에서 각각 250m쯤 떨어져 있다. 1920년 김해시 한림면 지역 한 지방 유지가 세운 신앙도량 ‘자암사’가 정토원의 모태다. 1968년 당시 동국대 총학생회장이던 선진규(75) 현 원장이 농촌계몽운동을 하기 위해 사찰 규모를 확장하고 봉화사로 개명한 뒤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운동을 해왔다. 봉화사는 이후 화재로 전소돼 선 원장이 1984년 다시 사찰을 건립해 정토원으로 개명했다. 정토원은 식당 및 방문객 숙소로 쓰는 2층 벽돌건물, 선 원장 등이 거주하는 요사채, 일반 사찰의 대웅전에 해당하는 수광전 등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생전에 선 원장은 정신적 지주 선 원장은 노 전 대통령의 진영 대창초등학교, 진영중학교 선배로 노 전 대통령과 친밀한 사이다. 어릴 적부터 정토원에 자주 들렀던 노 전 대통령은 생전에 선 원장을 정신적 지주로 부르며 존경심을 나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귀향 뒤에도 종종 정토원에 들러 선 원장과 대화를 나눴다. 노 전 대통령의 모친도 생전에 정토원에서 노 전 대통령을 비롯한 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자주 올렸던 곳으로 전해진다. 노 전 대통령 유골이 안치된 수광전에는 고인의 부모와 장인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국민장 기간에는 노 전 대통령의 영정이 자리했다. 정토원 신도들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생전에 정토원에서 가끔 신도들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곤 했다. 선 원장은 “노 전 대통령의 유골이 돌아올 곳에 돌아온다고 생각한다. 애통한 영혼을 잘 보듬어 좋은 곳으로 가실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유골 일반인에게 노출 안해 선 원장은 “법당에 안치한 노 전 대통령의 유골은 일반인에게는 노출하지 않는다.”면서 “법당 주변 경비가 크게 강화될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전직 대통령이 서거한 뒤 화장해 유골을 임시 안치했던 전례가 없어 경찰은 유골 경비대책에 대해 고심하고 있다. 경남지방경찰청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의 유골이 임시로 안치된 봉화산 정토원에 추모객 및 관광객이 많이 몰릴 것에 대비해 적절한 경비대책을 세워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장지가 선정돼 정식 안장될 때까지 정토원에 임시 안치된 노 전 대통령의 유골에 대해 엄격한 경비가 이루어질 전망이다. 김해 강원식 박성국기자 kws@seoul.co.kr
  • 유골함 정토원 부모위패 곁 임시안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해가 29일 새벽 봉하마을을 떠나 발인식과 영결식, 노제, 화장 등 서울을 다녀오는 긴 여정을 마치고 30일 새벽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봉화산 정토원에 임시 안치됐다. 향나무 유골함에 담긴 유해는 이날 새벽 봉하마을에 도착한 뒤 노 전 대통령이 서거 당일 올랐던 등산로가 아닌 산 뒤쪽의 자동차길을 이용해 정토원에 올랐다. ●49재후 봉하마을 사저 옆 묘소로 유족들은 정토원 앞뜰에 제단을 차려 영정과 유골을 모시고 반혼제(返魂祭)를 지낸 뒤 유골을 법당인 수광전 안 부처님 앞으로 옮겼다. 반혼제는 세상을 뜬 사람을 화장한 뒤 다시 혼을 불러 집으로 모시는 의식이다. 개문계(開門戒·불법에서 문을 여는 의식)와 삼보계(三寶戒) 독송에 이어 유족들은 부처에 예를 올리고 유골함을 수광전 오른쪽 벽에 마련된 영혼의 위패를 두는 영단(靈檀)에 임시로 안치했다. 영단에 안치한 뒤 유족과 스님, 장의위원 등이 49재 초제를 지내는 것을 끝으로 유골 안치 의식은 마무리됐다. 정토원은 노 전 대통령이 삶을 마감한 부엉이바위와 사자바위 사이 봉화산 중턱에 있는 조계종 소속의 조그마한 사찰이다. 부엉이바위와 사자바위에서 각각 250m쯤 떨어져 있다. 1920년 김해시 한림면 지역 한 지방 유지가 세운 신앙도량 ‘자암사’가 정토원의 모태다. 1968년 당시 동국대 총학생회장이던 선진규(75) 현 원장이 농촌계몽운동을 하기 위해 사찰 규모를 확장하고 봉화사로 개명한 뒤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운동을 해왔다. 봉화사는 이후 화재로 전소돼 선 원장이 1984년 다시 사찰을 건립해 정토원으로 개명했다. 정토원은 식당 및 방문객 숙소로 쓰는 2층 벽돌건물, 선 원장 등이 거주하는 요사채, 일반 사찰의 대웅전에 해당하는 수광전 등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생전에 선 원장은 정신적 지주 선 원장은 노 전 대통령의 진영 대창초등학교, 진영중학교 선배로 노 전 대통령과 친밀한 사이다. 어릴 적부터 정토원에 자주 들렀던 노 전 대통령은 생전에 선 원장을 정신적 지주로 부르며 존경심을 나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귀향 뒤에도 종종 정토원에 들러 선 원장과 대화를 나눴다. 노 전 대통령의 모친도 생전에 정토원에서 노 전 대통령을 비롯한 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자주 올렸던 곳으로 전해진다. 노 전 대통령 유골이 안치된 수광전에는 고인의 부모와 장인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국민장 기간에는 노 전 대통령의 영정이 자리했다. 정토원 신도들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생전에 정토원에서 가끔 신도들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하곤 했다. 선 원장은 “노 전 대통령의 유골이 돌아올 곳에 돌아온다고 생각한다. 애통한 영혼을 잘 보듬어 좋은 곳으로 가실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유골 일반인에게 노출 안해 선 원장은 “법당에 안치한 노 전 대통령의 유골은 일반인에게는 노출하지 않는다.”면서 “법당 주변 경비가 크게 강화될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전직 대통령이 서거한 뒤 화장해 유골을 임시 안치했던 전례가 없어 경찰은 유골 경비대책에 대해 고심하고 있다. 경남지방경찰청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의 유골이 임시로 안치된 봉화산 정토원에 추모객 및 관광객이 많이 몰릴 것에 대비해 적절한 경비대책을 세워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장지가 선정돼 정식 안장될 때까지 정토원에 임시 안치된 노 전 대통령의 유골에 대해 엄격한 경비가 이루어질 전망이다. 김해 강원식 박성국기자 kws@seoul.co.kr 영상 / 멀티미디어기자협회 공동취재단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총책임자 대안 스님 “내 음식 먹고 그저 편안했으면”

    총책임자 대안 스님 “내 음식 먹고 그저 편안했으면”

    코앞에 닥친 ‘바루’의 개점을 준비하느라 “눈이 감길 정도로 피곤하다.”고 했지만 대안 스님(49)의 얼굴은 티없이 맑았다. “그 사람이 먹는 것이 그 사람을 말해 준다.”는 얘기가 스님을 보니 실감이 났다. 경남 산청 금수암에서 조용히 참선에 열중하던 스님을 속세로 끌어낸 것은 사찰음식이다. 어머니에게서 물려 받은 손맛과 음식에 대한 열정이 타고 난 스님은 20년 전 찾아온 병(갑상선 기능항진증)을 음식으로 고친 뒤 올바른 식습관과 섭생의 중요성을 널리 알려 왔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찰음식 다이어트’, ‘식탁 위의 명상’ 등 두 권의 책을 펴냈으며 본격 사찰음식 요리비법을 담은 ‘열 두달 절집 밥상(가제)’이 새달 나온다.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현재 동국대에서 한·일 사찰음식 비교를 주제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스님이니 종단에서 어찌 ‘총대’를 맡기지 않으랴. “세상에서 두 가지 꼴을 못 보는데 더러운 꼴과 맛 없는 꼴”이라는 스님. 그가 개발한 음식들의 진가는 한달 동안 모신 2000명 고객들의 반응에서 확인됐다. 특히 ‘하얀모자들의 모임(LTB)’ 소속으로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 셰프들은 기존 한식과 차원이 다른 사찰음식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다. 스님은 ‘바루’를 찾는 이들에게 평온을 누리기를 바랄 뿐이다. “그저 내 음식을 먹고 편안했으면 좋겠다.” 는 스님은 4합 발우 세트 메뉴가 제공되는 점심시간에 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경우 죽비를 치며 식전·후 기도를 올리는 발우공양 의식을 치러 줄 요량이다. “진실된 것은 내안의 영체이고 육신은 도를 닦는 그릇일 뿐”이라며 “깨지지 않게만 하면 되는데 요즘 사람들은 그릇 치장에 너무 열중해 몸도 상하고 정신도 피폐해지고 있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 했다. “향 싼 종이에서 향내 나고 생선 싼 종이에서 비린내 난다고 하잖아요. (제대로 먹어)내 속을 어떻게 가꾸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지친 도심 속 ‘무념의 밥상’

    지친 도심 속 ‘무념의 밥상’

    ‘절밥’이 저잣거리로 내려온 지는 오래다. 먹을거리에 대한 불신과 건강에 대한 높은 관심으로 스님들의 소박한 ‘무념(無念)의 밥상’을 엿보는 중생이 많아진 까닭이다. 철저하게 채식 위주로 짜여지는 식단은 그저 배만 불리기보다 건강도 함께 챙기려는 웰빙(well-being) 트렌드에 부합한다. 소식(小食)으로 채우지만 동시에 비우는 식사법은 가리지 않고 넘치게 먹어 오히려 병을 부르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처방이 아닐 수 없다. 때문에 요즘 시중에서도 사찰음식 전문점을 표방한 식당들을 만나기 어렵지 않다. 호텔 뷔페 레스토랑들도 특별 건강식으로 사찰음식을 메뉴에 올리기도 한다. 멀리 있는 산사를 찾아가지 않아도 절밥을 손쉽게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반갑다. 하지만 불교에서 식사도 수행의 하나일진대 영리를 추구하는 일반 음식점에서 ‘발우공양’에 담긴 뜻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서울 종로구 조계사 맞은 편 템플스테이통합정보센터 건물 5층에 자리한 사찰음식 전문점 ‘바루(BARU)’. 새달 1일 문을 여는 이곳을 그저 또 한군데 사찰음식 식당이 생기나 보다 하고 쉽게 볼 일이 아니다. 승려의 밥그릇을 뜻하는 ‘발우’에서 비롯한 ‘바루’는 조계종에서 운영하는 첫 사찰음식 전문점. 템플스테이와 더불어 사찰음식을 포교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종단에서 제대로 된 사찰 음식을 선보이고자 만들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한 일부 음식점에서 오신채(파, 마늘, 부추, 달래, 흥거 등 자극이 강하고 냄새가 많이 나는 다섯가지 식물)를 슬쩍 넣는 등 사찰음식 문화가 변질되고 있다는 염려가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바루’의 총책임을 맡아 중생의 식습관을 바로 잡고 사찰음식의 정통을 바로 세우는 중책을 띤 이는 이미 사찰음식연구가로 이름 높은 대안 스님이다. 경남 산청의 금수암 주지승으로 ‘금당 사찰음식 연구원’을 운영해 온 스님은 출가 이후 쌓아온 음식에 대한 철학과 솜씨를 부려 ‘바루’의 식단을 짰다. 불가(佛家)의 전통을 철저히 따르면서 일반인들의 마음까지 채울 만한 음식들이다. 식재료에 쏟은 정성은 말로 다 못한다. 금수암 주변의 자연과 텃밭에서 자란 신선한 무공해 채소들을 직접 공수해 왔다. 젓갈, 파, 마늘을 넣지 않아 담백하고 시원한 김치와 ‘장아찌 달력’에 따라 절기마다 담근 각종 장아찌, 제철에 거둔 계절 나물들이 기본으로 상을 채운다. 코스 요리로 가을에 채취한 능이버섯을 말려 은행가루와 두릅을 넣고 끓인 담백한 능이죽, 닭고기살보다 쫀득하고 상큼한 더덕 샐러드, 새콤한 산야초 초밥, 그윽한 향기가 입맛을 자극하는 연잎밥, 자연송이의 향이 뜨거운 김과 함께 솔솔 피어 오르는 송이 누룽지탕 등 쉽게 접해 보지 못했던 음식이 선보여진다. 코스 메뉴는 저녁에만 해당되며 8합, 12합, 15합 발우 등 세가지로 제공된다. 바쁜 직장인들을 위해서 점심에는 4합 발우 세트를 선보이는데 주 요리는 날마다 달라진다. 점심은 1만원선, 저녁은 2만~5만원으로 정해 놓고 있다. 바루의 식기 또한 남다르다. 불가에서 신성하게 여겨지는 느티나무를 재료로 7차례 옻칠 끝에 탄생한 발우는 인간문화재 김을생 선생이 직접 제작한 것이다. ‘ 바루’의 실내는 건물을 지은 유명 건축가 승효상씨가 디자인했다. 작은 산사에 온 듯 아늑하다. 총 좌석이 68석으로 그리 크지 않다. 건물 외부와 내부가 연결된 직선 계단을 통해 1층에서 5층 ‘바루’까지 108 걸음을 걸어야만 도달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습관적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하겠지만 몸은 물론 마음을 채우는 ‘영혼의 음식’을 먹기 위한 의식을 치른다는 의미로 한 계단씩 밟아 올라가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02)2031-2081. 글 사진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봉하마을 빈소 표정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나흘째인 26일에도 경남 김해 봉하마을 빈소에는 추모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추모 열기가 더 달아오르는 모양새다. 봉하마을 분향소에는 조문객 행렬이 수백m에 이르렀다. 임시주차장인 진영공설운동장~봉하마을 셔틀버스는 조문객을 실어 나르느라 밤늦게까지 계속 운행됐다. 봉하마을로 들어가는 2㎞ 진입로는 국화꽃들이 2m 간격으로 줄지어 서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지난 25일 새벽부터 자원봉사자와 조문객들이 하나둘씩 봉하마을 진입로 가드레일에 국화꽃을 1~3송이씩 꽂기 시작해 현재 수백송이로 늘어났다. 조문객들은 연령층과 신분 등이 각계각층이었다. 마을 관광안내센터 관계자는 “평일이어서 주말보다 조문객 수가 줄어들 줄 알았는데, 오후가 되면서 퇴근한 회사원과 수업을 마친 중·고생들이 조문객 행렬에 동참해 오히려 더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봉하마을 입구에서 빈소에서 조문하는 데 4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교통이 불편하고 평일임에도 봉하마을을 찾는 조문객 수가 26일 자정까지 연인원 60만명을 넘었다. 장의위원회 관계자는 “현재의 조문 열기로 볼 때 봉하마을과 전국의 분향소를 찾는 추모객은 200만명을 넘어서 역대 최대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올해 초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당시 서울 명동성당을 찾은 40여만명과 1993년 열반한 성철 스님의 영결식과 3주간의 사리친견법회 추모객 40만명을 이미 웃돈 셈이다. 추모 인파는 1949년 6월 서거한 김구 임시정부 주석의 국민장 때 100만여명, 1979년 첫 국장으로 치러진 박정희 대통령 서거 때 200만명에 이르렀다. 노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는 노 전 대통령 서거 직전 서로 자신을 강하게 자책했으며, 이같은 심경을 가족회의나 주변 인사에게 공개적으로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측근은 “노 전 대통령이 자신 때문에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고, 자신이 죽으면 모두 다 편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 것 같다.”며 “가족회의 때 ‘노 전 대통령이 나만 죽으면 편해 지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권 여사는 ‘그 사람은 돈을 받은 사실을 전혀 몰랐는데 나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심하게 자책하며, “그 충격으로 걸음조차 걷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날 오전 경북 문경에서 온 학생 남매가 편지를 읽었다. 문경여고 3학년 박수경(19)양이 노 전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자 조문행렬 여기저기서 흐느꼈다. 박양은 “부모님 다음으로 존경하던 분이었는데 비보를 듣고 멍해졌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울먹였다. 박양은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했다.”며 “진심으로 편히 쉬시라.”라고 편지를 맺었다. 박양의 남동생 박민용(11·모전초 3)군도 편지를 낭독했다. 박양은 2003년 ‘대통령이 된 바보’란 책을 읽고 감동했다고 했다. 봉하마을에 머물며 폭력으로 정·관계 주요 인사들의 조문을 막는 등 장례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일부 과격 노사모 때문에 유족들의 근심이 가중되고 있다. 유족들은 “모든 인사들이 조문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 하지만 조문을 방해하는 일부 노사모 회원들을 통제할 수 없어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 / 김해 김정한 박성국기자 jhkim@seoul.co.kr 영상 / 서울신문 나우뉴스TV 손진호기자 nasturu@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노무현 前대통령 서거] 마을입구 2㎞ 국화 꽃길… 나흘새 60만명 조문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나흘째인 26일에도 경남 김해 봉하마을 빈소에는 추모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추모 열기가 더 달아오르는 모양새다. 봉하마을 분향소에는 조문객 행렬이 수백m에 이르렀다. 임시주차장인 진영공설운동장~봉하마을 셔틀버스는 조문객을 실어 나르느라 밤늦게까지 계속 운행됐다. 봉하마을로 들어가는 2㎞ 진입로는 국화꽃들이 2m 간격으로 줄지어 서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지난 25일 새벽부터 자원봉사자와 조문객들이 하나둘씩 봉하마을 진입로 가드레일에 국화꽃을 1~3송이씩 꽂기 시작해 현재 수백송이로 늘어났다. 조문객들은 연령층과 신분 등이 각계각층이었다. 마을 관광안내센터 관계자는 “평일이어서 주말보다 조문객 수가 줄어들 줄 알았는데, 오후가 되면서 퇴근한 회사원과 수업을 마친 중·고생들이 조문객 행렬에 동참해 오히려 더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봉하마을 입구에서 빈소에서 조문하는 데 4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교통이 불편하고 평일임에도 봉하마을을 찾는 조문객 수가 26일 자정까지 연인원 60만명을 넘었다. 장의위원회 관계자는 “현재의 조문 열기로 볼 때 봉하마을과 전국의 분향소를 찾는 추모객은 200만명을 넘어서 역대 최대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올해 초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당시 서울 명동성당을 찾은 40여만명과 1993년 열반한 성철 스님의 영결식과 3주간의 사리친견법회 추모객 40만명을 이미 웃돈 셈이다. 추모 인파는 1949년 6월 서거한 김구 임시정부 주석의 국민장 때 100만여명, 1979년 첫 국장으로 치러진 박정희 대통령 서거 때 200만명에 이르렀다. 노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는 노 전 대통령 서거 직전 서로 자신을 강하게 자책했으며, 이같은 심경을 가족회의나 주변 인사에게 공개적으로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측근은 “노 전 대통령이 자신 때문에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고, 자신이 죽으면 모두 다 편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 것 같다.”며 “가족회의 때 ‘노 전 대통령이 나만 죽으면 편해 지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권 여사는 ‘그 사람은 돈을 받은 사실을 전혀 몰랐는데 나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심하게 자책하며, “그 충격으로 걸음조차 걷지 못했다.”고 전했다. 이날 오전 경북 문경에서 온 학생 남매가 편지를 읽었다. 문경여고 3학년 박수경(19)양이 노 전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자 조문행렬 여기저기서 흐느꼈다. 박양은 “부모님 다음으로 존경하던 분이었는데 비보를 듣고 멍해졌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울먹였다. 박양은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했다.”며 “진심으로 편히 쉬시라.”라고 편지를 맺었다. 박양의 남동생 박민용(11·모전초 3)군도 편지를 낭독했다. 박양은 2003년 ‘대통령이 된 바보’란 책을 읽고 감동했다고 했다. 봉하마을에 머물며 폭력으로 정·관계 주요 인사들의 조문을 막는 등 장례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일부 과격 노사모 때문에 유족들의 근심이 가중되고 있다. 유족들은 “모든 인사들이 조문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 하지만 조문을 방해하는 일부 노사모 회원들을 통제할 수 없어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해 김정한 박성국기자 jhkim@seoul.co.kr
  • [노무현 前대통령 서거] 권 여사 “모두 다 비워놓고 떠나라… 미워말자”

    [노무현 前대통령 서거] 권 여사 “모두 다 비워놓고 떠나라… 미워말자”

    “고인은 편안하고 인자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이 슬퍼 더 서럽게 울었습니다.” 25일 새벽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입관식을 지켜 본 민주당 서갑원 의원의 소회다. 이날 입관식은 권양숙 여사와 친지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고인의 시신이 안치된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회관에서 1시간30여분 간 진행됐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염은 이날 새벽 1시29분쯤 시작돼 2시5분쯤 마무리됐다. 사저에서 머물던 권 여사는 염이 끝나자 승용차를 타고 마을회관에 도착,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 봤다. 권 여사와 가족, 친지들은 ‘잠든 듯 편안한 얼굴’을 보고 통곡했다. 검은색 뉴그랜저 차량에서 경호관의 부축을 받아 내린 권 여사는 수척한 모습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15m가량 떨어진 마을회관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권 여사는 감색 상의에 회색바지, 흰색 운동화 차림이었다. 휠체어에 의지해 애써 침착한 표정을 보였지만 설움에 북받친 듯 가끔 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입관식도 휠체어에 기댄 채 참관했다. 노 전 대통령의 염을 지켜본 측근들은 “베옷 수의를 입은 (노 전 대통령의) 표정이 잠든 듯 평온했다.”고 전했다. 천호선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권 여사를 비롯해 친지분들이 차례로 고인을 뵈었다.”며 “전통제례에 따라 권 여사도 입관 이후 첫 제사를 지내며 상복으로 갈아 입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대통령의 다른 가족과 친지들도 이같은 절차에 따라 입관을 마친 뒤 상복 차림으로 첫 제사를 올렸다. 입관식은 비공개로 진행됐다. 권 여사와 노 전 대통령의 형 건평씨 등 가족과 친지들이 참석했다. 또 박봉흠·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 박남춘 전 인사수석, 이호철 전 민정수석, 이정호 전 시민사회수석, 윤태영 전 대변인, 민주당 서갑원 의원, 안희정 최고위원, 변재진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참석했다. 입관식에 참석한 조계종 통도사 주지 정우 스님은 “(입관식은)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권 여사는 좋은 길 가시라며 향을 하나 피웠다.”고 말했다. 권 여사는 입관식에서 “모두 다 비워 놓고 떠나라. 용서하고 미워하지 말자.”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 측근은 “(권 여사의) 시름이 생각 이상으로 깊다. 아무 말씀도 없고 묻지도 않는다. 억지로 권유해 하루 한끼, 겨우 몇 숟갈만 들고 있다.”며 “몸에 힘이 빠져 신발도 못 신으시더라.”고 전했다. 오전 3시15분쯤 권 여사가 휠체어를 타고 입관식장에서 나와 승용차로 이동하자 일부 조문객은 “여사님 죄송해요.”라고 외쳤다. 일부 지지자들이 “힘내세요.”라고 말하자 가볍게 목례를 하기도 했다. 전날 내려와 대기하던 노사모 회원들은 미리 준비한 촛불을 밝혔고, 일부 조문객은 촛불을 도로가에 일렬로 세워 놓기도 했다. 김해 박정훈 박성국기자 jhp@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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