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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론] 바보들로부터 얻는 위안/조일영 한국교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시론] 바보들로부터 얻는 위안/조일영 한국교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옛날 내가 살던 동네에 바보로 불리는 사람이 살았다. 집도, 가족도 없이 동네 중국 음식점에 매일 몇 차례씩 물을 길어주고 남은 음식을 얻어먹으며 살았다. 밤에는 그 음식점과 옆 건물 사이에 있는 주방 굴뚝 옆의 좁은 틈에서 새우잠을 잤다. 말하자면 노숙자다. 옷도 변변한 것이 없어서 누더기 옷 한 벌로 돌아다녔다. 앞니는 다 빠져서 말할 때는 잇몸만 드러났다. 전쟁이 끝난 지 채 십년이 안 되어서 모든 게 궁핍하고 거지가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는 동네 개구쟁이들의 놀림감이었다. 그가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물통에 퍼 담아 물지게에 지고 뒤뚱거리며 갈 때면 악동들은 몰래 따라가서 물통에 흙을 뿌렸다. 그러면 그 바보는 물지게를 내려놓고 돌아서서 자신의 뺨을 때리며 ‘얘들아! 얘들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이 둘러서서 바보라고 놀리면 ‘바보야! 바보야!’하며 자신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어른들이 불쌍한 사람을 괴롭힌다고 나무랐지만 우리들은 그 자학하는 모양이 재미있어서 철딱서니 없는 짓을 반복하곤 했다. 그래서 그의 뺨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기 일쑤였다. 나도 그 악동들 중의 하나로서 그 기억은 내게 큰 죄책감으로 남아 있다. 어느 해인가 동네 사람들이 나서서 그 바보에게 집을 지어주었다. 동네 뒤에 흐르는 제법 큰 개천 둑에 나무기둥을 비스듬히 받쳐 세우고 물 위에 한 칸 남짓한 작은 판잣집을 지어 주었던 것이다. 기억이 아물아물하지만 나도 그 집 안을 들여다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밤새 비가 많이 내린 어느 여름날, 그 집과 함께 그 개울에 있던 것들이 모두 떠내려간 것이다. 그 당시는 해마다 큰물이 나서 개천에 있던 것들을 모두 휩쓸어 가곤 했다. 금세 넘어올 것처럼 둑 가장자리에서 넘실거리며 흘러가는 무서운 흙탕물을 우산을 쓰고 사람들과 함께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동네에서 그 바보의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갈수록 팍팍해지는 삶을 이어가는 우리에게 가깝고 큰 힘이 되어주던 분들의 떠남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분들의 삶이 하나같이 바보스럽다. 스스로 바보라고 하기도 하고 남들이 바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무소유라니, 법정 스님의 삶 또한 바보스러운 삶이 아닐 수 없다. 바보들은 자기 것을 챙길 줄 모른다. 그러니 남에게 해를 끼칠 일이 없다. 추기경이나 노스님 혹은 전직 대통령들의 떠남이 우리들에게 큰 아쉬움이나 안타까움 혹은 죄책감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들의 삶이 바보처럼 자신의 것을 챙길 줄 모르고 오히려 가지고 있는 것을 아낌없이 내놓았기 때문이다. 또는 바보처럼 온몸을 던져 자신의 믿었던 바를 지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바보스럽기는 내가 어렸을 적 만났던 바보나, 앞서 떠났던 추기경이나 전직 대통령이나, 또 엊그제 입적한 노스님이나 모두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내가 어렸을 때 만났던 바보는 측은함과 죄책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추기경이나 전직 대통령이나 노스님의 떠남은 각각 조금씩 다른 감정을 일으킨다. 한 사람은 한없이 밝고 따뜻함을, 다른 한 사람은 안쓰럽고 아쉬움의 아픔을, 또 다른 한 사람은 속세를 훨훨 떨치고 떠나는 자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추기경의 선종은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하고 법정 스님의 입적은 자유로움을 주었다. 한편 전직 대통령의 죽음은 우리에게 아픔을 주었다. 안쓰러움이 바탕이 되는 아픔이다. 나이가 드니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는 일이 늘면서 어렸을 적의 불쌍한 그 바보를 괴롭혔다는 죄책감이 점점 더 커진다. 그나마 옳은 것을 남기고 다른 것은 모두 포기하거나 제거하여 건실한 과실을 맺게 하는 것이 올바른 회개라는 어느 신부님의 말씀에 위안을 얻을 뿐이다.
  • [학술·종교플러스]

    ●길상사 17일 법정스님 초재 서울 성북동 길상사는 17일 법정 스님의 초재를 연다. 길상사 측은 “21일로 예정됐던 추모법회는 취소했지만 49재는 일정대로 진행한다.”고 밝혔다. 막재는 새달 28일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열린다. (02)3672-5945~6. ●24~30일 장애우 그림 전시전 서울 신사동 광림교회는 24~30일 서울 관훈동 경인미술관에서 ‘스토리 북: 우리들 이야기’전을 연다. 장애우 22명이 신앙, 자연, 희망, 가족 등을 주제로 그린 작품 40여점이 전시된다. (02)2056-5680.
  • 법정스님 병상구술 글 2편 공개

    지난 11일 입적한 법정 스님이 마지막 병상에서 구술한 글 2편이 15일 공개됐다. 출판사 문학의숲 고세규 대표는 “법정 스님이 이달 말 ‘불타 석가모니’와 ‘수심결’을 재출간할 계획이었다.”며 “두 책의 서문을 와병 중에 간병인에게 구술해 썼으며 직접 교정까지 봤다.”고 밝혔다. 불타 석가모니는 일본 불교학자가 쓴 부처 전기로 1년 전 절판됐다. 수심결은 법정스님이 젊은 시절 번역한 경전으로 25년 전 절판됐다. ●길상사 “절판 곧 발표…유서 공개안해” 고 대표는 그러나 “법정 스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라고 했다는 얘기가 있어 유지가 확인되는 대로 두 책의 출간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법정 스님의 상좌이자 길상사 주지스님인 덕현 스님은 “법정 스님의 유언에 따라 스님 저서들을 곧 절판할 것”이라며 “조만간 공식발표가 있을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서울신문 3월15일자 14면> 이어 “당신의 사후에 저작권과 관련해 이해관계에 얽힐 것을 우려한 때문으로 짐작된다.”고 덧붙였다. ●21일 추모법회 취소 법정스님이 남긴 법적 유서와 관련해서는 “길상사를 잘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문도들은 서로 화합하고 도우라는 취지의 짧은 당부였다.”면서 “유산이나 저작권 등의 내용은 일절 포함돼 있지 않아 유서를 따로 공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길상사는 오는 21일 열기로 한 추모법회도 스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취소했다. ‘불타’ 등의 출간 여부와 관계 없이 두 편의 서문은 출가 수행자로서 부처의 가르침을 지키려 애썼던 법정 스님의 평소 마음가짐이 잘 담겨 있다. 서문 끝에는 모두 ‘2010년 봄 법정’이라고 썼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불타 석가모니-나 자신 부처님 제자로서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제1계로서 살생금지를 받들며 살아왔다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계율을 몰랐다면 얼마나 많은 허물을 지었겠는가. 뿔뿔이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거듭 형성되고 재결속될 수 있다. 출가해서 반세기 넘게 지금까지 부처님의 제자로서 살아온 것이 고마울 뿐이다. 불타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지닌 감화력으로 불타 사후 25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삶의 기준이 없다면 아무렇게나 살아갈 것이다. 불타 석가모니는 우리 삶이 나아가야 할 기준이며 지향점이다. 여기 불타 전기로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와타나베 쇼코의 <불타 석가모니>를 새삼 재출간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다. 2010년 봄 법정 수심결-인간의 업이란 한꺼번에 녹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한번 깨달았다고 해서 수백 생의 습이 사라지지 않는다. 깨달음은 수행으로 완성된다. 설령 이치로는 알았다 해도 실제 현상에서는 실천하지 못한다. 수행이란 ‘행行’이 그 근간이 되어야 한다. 역대 조사와 선지식들은 한결같이 깨달음과 함께 끝없는 수행으로 그 모범을 보인 까닭이 거기에 있다. 어느 누구도 한소식했다고 해서 막행막식莫行莫食을 한 예가 없다. 인과가 역연因果亦然한데, 한소식했다고 해서 놀아나서는 안 된다. 바르게 알아야 바르게 행할 수 있으며, 바른 행을 통해서 사람은 거듭 형성되어 나간다. 그 가르침에 있어서 깊은 호소력과 진실성을 담고 있는 보조 스님의 <수심결>은 불교 수행자들만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지침서가 될 뿐 아니라 우리 불교가 탄생시킨 뛰어난 경전이다. 2010년 봄 법정
  • [길섶에서] 법정 스님 찻잔/함혜리 논설위원

    차를 즐기시던 법정 스님은 다기에 대한 안목도 뛰어났다. 차는 좋은 그릇을 만나야 비로소 그 차가 지닌 빛과 향기가 맛을 제대로 낼 수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법정 스님은 지헌(知軒) 김기철 선생의 연잎 다완을 특히 아끼셨다. 때깔이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정성스럽게 손으로 빚은 까닭에 만든 이의 인품이 배어 있다고 칭찬하셨다. 이 찻잔에 ‘법정 스님 찻잔’이라고 이름이 붙은 내력이다. 지헌 선생과 법정 스님의 인연은 30년 전 시작됐다. 스님께서 서울 인사동에서 마음에 드는 다기가 너무 비싸 그냥 나오고 말았다는 글을 읽고 스님께 다기 한 벌 선물하고 싶다고 지인에게 지나가는 말을 했는데 어느날 지인이 스님을 작업실에 모시고 왔더란다. 차 문화에 맹문이었던 자신이 어엿한 다기를 만들게 된 것도 법정 스님의 가르침 덕분이었다고 지헌 선생은 말씀하신다. 오랜만에 선생께 안부전화를 드렸다. “법정 스님께서 보잘것없는 찻잔을 늘 곁에 두고 아끼셨다.”며 고마워하신다. 찻잔이 맺어준 인연이 참 아름답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법정스님읽기 열풍 헌책방까지 초토화

    서울 이문동 한국외국어대 앞 헌책방 신고서점은 지난 12일 오후 수십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10여종 50여권 몽땅 동나” 이들은 다짜고짜 “법정 스님이 쓴 책 있느냐.”며 책을 찾았다. ‘무소유’처럼 대표적인 저서는 물론, 책 종류와 관계 없이 법정스님이 남긴 책은 모조리 찾아갔다. 이어진 주말에도 직접 방문 외에 전화문의, 홈페이지 문의, 주문 등이 내내 이어졌다. 10여종 50여권의 법정 저서는 몽땅 동이 났다. 법정 스님의 유지(遺志)에 따라 절판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교보문고를 비롯해 대부분 온·오프라인 서점에서는 관련 책이 품절 상태다. 특히 ‘무소유’는 아예 구할 수 없다. 그러자 몸이 단 독자들이 헌책방까지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문의 폭주… 업무마비 지경 광화문, 강남, 신촌, 경기 파주 네 곳에서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아름다운가게’ 역시 법정 저서를 찾는 문의전화로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다. 이현지 신촌헌책방 매니저는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법정 스님 책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헌책방에 문의전화가 폭주하는 것 같다.”면서 “현재 강남점과 파주점에 ‘무소유’가 1권씩 있는 것으로 확인되지만 지금 이 순간 나갔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신고서점을 운영하는 김종명(41)씨는 “헌책방 열기는 김수환 추기경 선종,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도 없었던 현상”이라면서 “무한 경쟁, 빈부격차, 상대적 박탈감 등 각박하게 굴러가는 세상에서 ‘무소유’ 가르침을 통해 위안을 얻으려는 마음과 절판되기 전에 책을 구하려는 욕심이 복합작용한 때문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봉은사 조계종 직영 반발… 불교계 내홍

    봉은사 조계종 직영 반발… 불교계 내홍

    법정 스님 추모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불교계가 내분에 휩싸였다. 서울 삼성동 봉은사를 직영사찰로 전환하겠다는 조계종 총무원의 결정에 봉은사와 신자들이 공개 반발하고 나섰다. 봉은사 측은 1000만 서명운동까지 벌이겠다며 강경하다. 15일 불교계에 따르면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은 전날 열린 일요법회에서 “신도들과 소통되지 않은 (총무원 직영사찰 전환) 결정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 의사를 밝혔다. 스님은 “직영 전환 이유를 사찰의 주인인 신도들이 납득할 수 있게 총무원에서 설명해야 할 것”이라며 “다음 주까지 답변이 없으면 전국 사찰과 신도들을 대상으로 ‘봉은사 직영 폐지를 위한 1000만인 불자 서명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못박았다. 발단은 지난 4일 총무원이 임시중앙종회에 ‘봉은사 직영사찰 전환’ 안건을 상정하면서 불거졌다. 직영사찰은 총무원장이 당연직 주지를 맡는 사찰을 말한다. 재정·인사권이 총무원에 귀속되며, 기존 주지는 ‘재산관리인’ 역할만 맡는다. 총무원이 내세운 직영 전환 명분은 ‘수도권 포교 강화’. 하지만 봉은사 측은 “명진 스님이 주지로 취임한 이래 재정공개와 1000일 기도를 통해 포교가 강화되고 투명한 경영 풍토가 확립됐다.”며 “자율성 침해”라고 반발했다. 그럼에도 이 안건은 11일 법정 스님 입적으로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통과됐다. 봉은사는 ‘결사 항전’ 분위기다. 명진 스님은 “봉은사를 나간다면 뼈가 돼 나갈 것”이라며 결기에 찬 각오를 밝혔다. 신도들은 홈페이지(www.bongeunsa.org) 등에 총무원의 일방적 결정을 규탄하고 명진 스님 지지 글을 잇따라 올리고 있다. 신도 박기원씨는 “법정 스님 열반으로 심적으로 힘든 와중에 이렇게 눈뜨고 도적질 당하는 현실이 너무 답답하고 기가 찬다.”고 썼다. 총무원은 공식 대응을 피하고 있다. 총무원 관계자는 “봉은사 측에서 공개 질의서를 보내오면 그때 공식적인 입장을 전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강남의 중심 사찰인 봉은사를 두고 때마다 벌어지는 다툼에 불교계 안에서는 자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참여불교재가연대 교단자정센터 측은 “직영사찰 지정이 불가피하다면 총무원이 이에 대한 공론의 장을 먼저 만들었어야 옳다.”면서 “그것이 소통을 종책 기조로 삼은 현 총무원 기조에도 부합한다.”고 꼬집었다. 김종서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는 “이런 논란이 생긴다는 것은 조계종에서 주지를 중심으로 한 개별 사찰 포교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뜻한다.”면서 “전체 조직 사업과 지역 포교 간의 긴장을 유지하고 적절한 합의점을 찾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법정스님 다비식] 추모객 3만 ‘마지막 길 배웅’

    ‘무소유’ 가르침으로 세상을 가득 채웠던 법정 스님이 끝내 한 줌 재로 화했다. 정부는 법정 스님에게 국민훈장을 추서하려 했으나 문도들은 “주변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스님의 유언에 맞지 않는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24시간 다비된 스님의 법구는 불길이 사그라든 14일 오전 10시쯤 1차로 큰 유골이 수습됐다. 이어 불이 완전히 꺼진 뒤 습골 의식이 치러졌다. “사리를 찾지 말라.”는 스님의 유지(遺志)대로 재를 뒤적이는 과정 없이 재빨리 뼈만 수습했다. 유골은 바로 분쇄돼 송광사 지장전에서 하루를 머문 뒤 15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로 다시 옮겨진다. 새달 28일 49재 전까지 이곳에 안치된다. 이후 유골은 상좌들에게 전해져 스님이 머물던 강원도 오두막, 길상사 뒤뜰 풀밭 등에 비공개로 뿌려진다. 6재까지는 길상사에서 치르고, 막재인 49재는 송광사에서 지낸다. 오는 21일 길상사 일요법회 때는 추모 법회도 함께 열린다. 108타의 범종 소리와 함께 13일 시작된 다비식에는 이른 새벽부터 전국 각지의 추모객들과 스님 3만여명이 몰려들었다.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던 학봉(전남 화순 달마사) 스님은 “철저히 계율을 지켰던 스님의 모습은 수행자들에게 귀감이 됐다.”고 했다. 스님의 병상을 끝까지 지켰던 가수 노영심은 “마음이 너무 복잡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효봉 스님 밑에서 법정과 함께 동문수학했던 법흥(法興·동당 수좌) 스님은 “평소 ‘중이 법명 하나면 되지 무슨 호가 필요하냐’고 질색하더니 성정 그대로 ‘비구 법정’ 딱 4글자로 돌아왔더라.”고 말했다. 그래도 그건 아니다 싶어 ‘비구 법정 대선사 강녕’이라고 몇 자 더 붙여 분향소에 올렸다고 한다. 한편 ‘주님 발언’으로 불교계의 반발을 샀던 SBS 스피드 스케이팅 해설위원 제갈성렬씨는 지난 12일 길상사 분향소를 찾았다. 순천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법정스님 다비식] 법정 서적 절판될 듯

    법정 스님의 책이 그의 유지대로 절판될 것으로 보인다. 변택주 사단법인 ‘맑고향기롭게’ 이사는 14일 “스님의 말씀은 널리 퍼져야 하지만 스님이 절판을 원하셨기에 그 뜻을 따를 수밖에 없다.”며 절판 의지를 분명히 했다. 출판계는 “설사 유지가 그렇더라도 스님의 말씀을 좀 더 널리 알리기 위해 계속 책을 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여왔다. ‘일기일회’ 등을 출간한 고세규 문학의숲 대표는 “스님의 유지를 대변하는 ‘맑고향기롭게’ 측이 절판을 강행한다면 따를 수밖에 없다.”면서 “다만, (절판까지는) 시간이 다소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소유’를 내고 있는 범우사 측도 “맑고향기롭게의 결정에 따를 것”이라면서도 “절판되면 오히려 무단 복제판이 판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법정스님 다비식] “한 조각 구름이 없어지듯 가셨다”

    [법정스님 다비식] “한 조각 구름이 없어지듯 가셨다”

    “한 조각 구름이 없어지듯 가셨다.” 법정 스님과 30년 넘는 인연의 끈을 이어온 윤형두(75) 범우사 대표는 14일 관악산에 올랐다. 스님에게 “잘 가시라.”란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울컥하는 마음이 가슴 밑바닥을 치며 올라왔지만 애써 눈물을 꾹꾹 눌렀다. 스님의 성품을 워낙 잘 알기 때문이다. ●“책 내기 어렵던 깐깐한 저자” 윤 대표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평소 스님은 ‘사람이 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생기는 것이요, 사람이 죽는 것은 그 구름이 없어지는 것이다.’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 말처럼 그렇게 가셨다.”며 말끝을 흐렸다. 윤 대표와 법정 스님의 인연은 잘 알려진 대로 산문집 ‘무소유’가 맺어줬다. ‘범우 에세이 문고’ 시리즈를 내고 있던 윤 대표는 1976년, 당시 서서히 문명(文名)을 알려가던 스님을 처음 만났다. ‘무소유’ 출판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첫 인상은 상당히 깐깐한 모습이셨습니다. 선천적인 것으로 보일 정도로 솔직하셨고, 쉽게 타협하지도 않았고, 실없는 우스개를 하지도 않으셨죠.” 윤 대표는 “책을 만드는 게 쉽지 않았던 저자”라고 스님과의 첫 대면을 회고했다. “책 제목을 정하기 위해 출판회의를 처음 가졌는데 당신이 미리 생각해 온 ‘무소유’라는 제목을 꺼내놓으시더라고요. 편집자가 (조금 어렵다며) 다른 제목도 생각해 보자고 했지만 스님은 끝까지 ‘무소유’를 굽히지 않으셨지요.” ●인세로 어려운 학생 장학금 지원 인세(印稅) 문제만 해도 그랬다. 원고료를 한꺼번에 주기로 하고 책을 만들었던 터라, 출판사로서는 따로 스님에게 인세를 줄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스님은 느닷없이 “좋은 데 쓰려 한다.”며 인세를 요구했다. “무슨 스님이 돈을 밝히나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고민 끝에 결국 10% 인세를 드리기로 했지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인세로 가정형편이 어려운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셨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자신의 선행을 단 한번도 입 밖으로 꺼내 생색낸 적이 없다는 윤 대표는 스님의 이런 ‘숨은 나눔’이 불교계뿐 아니라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끌어낸 원동력이라고 했다. 그는 “경허 스님 등 위대한 인물들이 많았지만 민중을 위해 불심을 심고 대중적 사랑을 받은 스님은 만해 한용운, 성철 큰스님, 법정 스님 정도였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비식에 모여든 것만 봐도 법정 스님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돌이켜 보면 스님은 ‘무소유’라는 수필 한 편에 자신의 평생 삶을 건 게 아닌가 싶어요. 무소유에서 말씀하신 삶을 살아오셨고, 돌아갈 때까지 그 끈을 놓지 않으셨으니까요.”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씨줄날줄] 법정스님과의 인연/함혜리 논설위원

    파리 교외 토르시라는 곳에 길상사 파리 분원이 있다. 특파원으로 있을 때 마침 길상사 파리 분원 10주년 행사가 있었다. 기념법회에 법정 스님께서 직접 참석하셨다. 아직 바깥 바람은 싸늘했지만 화창했던 날 법회와 함께 열린 수계식에서 스님으로부터 수월화(水月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수월관음의 ‘수월’이다. 스님께서는 “달빛이 물에 골고루 비치듯이 좋은 글로 세상을 맑게 비추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가슴에 고이 간직했다. 2007년 여름 법정 스님을 다시 만나 뵐 기회가 왔다. 길상사 신도인 친구가 스님께서 순천 송광사 불일암(佛日庵)에 내려 오신다는 기별을 받았다면서 함께 친견하러 갈 것을 권했다. 주저없이 따라나섰다. 8월16일.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코스피지수가 사상 최대의 낙폭을 기록했던 날이다. 불일암은 송광사 뒷산으로 20분쯤 걸어 올라가면 나온다. 스님께서 직접 지으셨다는데 스님 성품처럼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세련됐다. 마당의 매화와 산후박나무, 웬만한 집 거실보다도 깨끗한 해우소가 일품이다. 스님이 1992년 강원도 산골로 거처를 옮기신 이후에도 일년에 서너 차례 불일암에 오셔서 휴식을 취하곤 하셨다. 처소에 외부인을 들이지 않으시는 스님은 마당 한편에 지어진 공양간의 다실에서 우리 일행을 맞으셨다. 하얀 모시 바지저고리의 편안한 차림이셨다. 그날 스님께서는 “마음이 재물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재물이란 많든 적든 우리가 이생에서 잠시 맡았다가 가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지 말라. 비교하면 불행해진다. 이만큼이 내 몫이고, 저 사람 몫은 저만큼이라고 생각하면 그뿐”이라고 하셨다. 내 몫도 아닌 것에 괜한 욕심을 부리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다. 은은한 향이 좋다며 황차를 내주시면서 스님은 말씀하셨다.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야.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해.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서는 향기가 나지.” 그날 스님은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떠나셨다. 차로 7시간 걸리는 거리를 손수 운전을 해서 가신단다. 오두막에서 일을 하다가 가슴뼈를 삐끗했는데 영 개운하게 낫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스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던 자연의 품에 안기셨다. 다정하게 차를 권하시던 모습, 밀짚모자를 쓰고 대나무 사잇길을 훠이훠이 걸으시던 모습, 커다란 부채를 부치며 산후박나무를 지그시 바라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친북·반국가 행위자 100명 발표

    보수 계열 민간단체인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위원장 고영주)는 12일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 같은 당의 권영길 의원, 민주당 최규식 의원 등 현역의원 3명을 포함한 친북·반국가 행위자 100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명단에는 각계의 진보 성향 인사들이 대거 포함돼 있어 사회적 논란과 함께 ‘보·혁’ 대립구도가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추진위는 이날 서울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현재 활동 중이고 사회적 영향력이 큰 인사를 대상으로 친북·반국가 행위 대상자 1차 수록 예정자 100명을 공개했다. 추진위는 북한 당국의 노선인 ‘주체사상’ ‘선군노선’ ‘연방제 통일’ 등을 지지·선전한 행위(친북행위)와 헌법질서를 부정하고 국가변란을 선동한 경우(반국가행위)를 선정기준이라고 설명했다. 명단에는 김근태·노회찬 전 의원, 이재정·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등 정·관계 인사 14명이 포함됐다. 또 박원순 변호사 등 법조계 인사 3명, 백낙청 평론가 겸 서울대 명예교수, 소설가 조정래·황석영 등 문화예술·언론계 13명 등도 명단에 등재됐다. 학계에서는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조국 서울대 교수, 강정구 동국대 교수 등 17명이, 종교계에서는 문규현·문정현·함세웅 신부, 진관·수경 스님 등 10명이 이름을 올렸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최열 환경재단 대표, 한상렬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등 노동계·재야운동권 인사도 36명이고, 송두율 독일 뮌스터대 교수 등 해외활동 인사 5명도 들어갔다. 1차 명단 등재를 놓고 보수진영 내에서 논쟁이 벌어졌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빠졌다. 추진위는 당사자의 이의 신청을 받아 올해 8월15일 친북반국가행위 인명사전 1권을 발간키로 했다.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 [법정스님 운구] 이대통령 분향소 조문

    [법정스님 운구] 이대통령 분향소 조문

    이명박 대통령은 12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 설법전(說法殿)에 마련된 법정(法頂) 스님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이 대통령은 오전 9시30분쯤 길상사 입구에 도착해 기다리던 스님들에게 합장 후 일일이 악수한 뒤 분향소에 들어섰다. 이 대통령은 분향을 마친 뒤 법정 스님의 영정을 향해 합장하고 머리를 숙여 삼배했다. 이 대통령은 “평소에 제가 존경하던 분이셨고, 저서도 많이 읽었는데 마음이 아프다.”라고 말했다. 또 “진짜 나는 오래전부터 스님 책을 많이 읽었고 여행 중에도 꼭 들고 다녔다. 스님이 쓰신 글이나 사상이 이번 기회에 많이 알려질 것”이라며 “(법정 스님처럼) 그렇게까지 실천은 못 해도 있는 사람들이 나누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사진] 법정 스님 마지막 가시는 길 ☞[사진]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법정 스님 생전 활동 모습
  • [법정스님 운구] 오열·염불 속 작은 평상에 모셔

    [법정스님 운구] 오열·염불 속 작은 평상에 모셔

    화려한 상여도, 거창한 의식도 없었다. 길상사를 떠나는 스님을 보내 주는 것은 수만 신자들이 만들어 내는 울음소리와 부처님을 부르는 염불 소리뿐이었다. 스님은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도 소박했다. 세간(世間·속세)과 출세간(出世間·수행 세계)을 떠나 존경받았던 스님에게 주어진 건 단지 법구(法軀)를 가린 한 벌 가사와 대나무 평상뿐이었다. 12일 법정 스님의 법구가 다비를 위해 전남 순천 송광사로 옮겨졌다. 정오쯤 서울 성북동 길상사를 떠난 법구는 오후 5시쯤 송광사에 도착해 문수전(文殊殿)에 모셔졌다. 운구 절차는 스님의 생전 모습처럼 담백했다. 형형한 눈빛이 그대로 남아 있는 흑백 영정 뒤로는 어떤 수식도 붙이지 않고 ‘비구(比丘) 법정’이라고만 쓴 유패가 따랐다. 스님의 법구는 한 몸을 겨우 눕힐 정도의 작은 평상에 모셔졌고, 이를 10명의 제자들이 받쳐 들었다. 이 평상은 평소 스님이 강원도 오두막에서 사용하던 것을 본떠 만들었다. 운구행렬은 행지실 앞 비탈길을 곧장 내려와 길상사 본당인 극락전(極殿)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아미타불을 향해 삼배만을 드린 행렬은 곧장 설법전 앞 마당에 준비돼 있던 운구차로 이동했고, 스님의 법구를 실은 행렬은 참배객들의 오열을 뒤로하고 그대로 일주문을 빠져나갔다. 30~4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나마도 행렬이 지체된 것은 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려는 참배객들 때문이었다. 수많은 참배객들은 행지실에서부터 행렬을 따라 산길을 내려왔고, 운구행렬이 길상사를 떠난 뒤에는 버스를 타고 이를 따랐다. 신자 박옥희(68·여·서울 돈암동)씨는 “‘무소유’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아 길상사를 찾았으나 와병으로 스님의 법회가 중단된 상태였다.”면서 “결국 한 번도 스님을 뵙지 못하고 보냈다.”고 눈가를 적셨다. 황토색 가사를 입은 이국적 차림의 스님들도 눈에 띄었다. 법정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달려온 타이완 불광협회 소속 비구니들이었다. 다비식이 치러지는 송광사는 다비식 당일에 외지 신도와 추모객이 대거 몰릴 것으로 보고 순천경찰서와 진입로 일대 교통 소통 대책을 협의했다. 송광사 3거리에 주차를 하면 사찰 측이 마련한 셔틀버스를 타고 다비장 입구로 진입할 수 있다. 전국 각지에는 스님을 추모하기 위한 분향소가 자발적으로 설치됐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길상사 분원, 미국 뉴욕 사암연합회 등 해외에도 분향소가 마련됐다. 순천 최치봉·서울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사진] 법정 스님 마지막 가시는 길 ☞[사진]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법정 스님 생전 활동 모습
  • [법정스님 운구] ‘요정에서 사찰로’ 길상사는

    법정스님 입적 이후 새삼 길상사의 태동과 관련된 이야기가 관심을 끌고 있다. 스님이 입적한 길상사는 원래 ‘요정정치의 현장’이라 불렸던 대원각이었다. 그러다 스님의 대표 산문집 ‘무소유’를 읽고 감명 받은 대원각 소유주 고(故) 김영한(1916~1999)이 스님에게 시주, 절을 세워 주기를 청하면서 길상사가 탄생했다. 법정스님 입적으로 길상사 성장의 가장 큰 요인이었던 일요법회는 회주를 잃게 됐다. 하지만 스님의 가르침을 잇는 법회는 계속된다. 변택주 법정스님다비준비위원회 부대변인은 “법정 스님의 법회는 1년에 2차례 정도 있던 것이라 큰 문제는 없다.”며 “존경 받는 고승들을 차례로 모셔 스님의 빈자리를 채울 것”이라고 전했다.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사진] 법정 스님 마지막 가시는 길 ☞[사진]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법정 스님 생전 활동 모습
  • 법정스님의 ‘마지막 소유’를 만나다

    법정스님의 ‘마지막 소유’를 만나다

    11일 세상과 인연을 다하고 열반에 든 법정 스님은 수필집 ‘무소유’에 수록돼 있는 ‘미리 쓰는 유서’라는 글에서 이런 유언을 남긴 적이 있다. “내 머리맡에 놓여 있는 책들을 매일 아침 신문을 배달하러 오는 사람에게 주어라.”라고. 그말은 달리 생각해보면 “내가 죽는 순간까지 이 책들만은 내 머리맡에 두어라.”는 의미와 같다. 불교계 최고의 문필가이자 ‘무소유’의 가르침을 설파한 시대의 스승 법정 스님도 마지막 순간까지 소유하고 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책이었다. 법회에서 빠지지 않은 주제 중 하나가 책이었고, ‘맑고 향기롭게’ 회보를 통해서 매달 읽을 책을 선정해 주기도 했다. 스님은 깊은 사유를 가진 문필가이자 폭넓은 독서가였고, 무엇보다 지독한 애서가였다. ●현대문명 사고방식 비판 책 많아 그런 그가 강원도 오두막에서 밤을 새우며 읽었던 책들은 무엇이고,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었던 책은 어떤 것일까. 또 그토록 맑고 향기로웠던 스님의 사유를 키워낸 책들은 뭘까. 스님의 입적 직전에 나온 책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문학의숲 펴냄)은 그런 의문에서 출발한 책이다. 스님이 평소 법문이나 수필집을 통해서 언급했던 책 중 50권을 가려 뽑아 책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다 스님이 언급 또는 인용한 대목들도 자세하게 전하며, 이를 통해 법정 스님의 독서편력를 전하고, 그것이 그의 지성과 가치관을 어떻게 구성해 놓았는가에 대한 지도를 그려준다. ‘무소유’를 통해 물질문명에 치우친 사람들의 가슴에 큰 파문을 일으켰던 스님은 배타적·공격적이며 경쟁적인 현대 문명의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책을 많이 읽어왔다. 특히 격월간지인 ‘녹색평론’은 스님이 창간호부터 빠짐 없이 읽은 책이라고 한다. 소비적인 현대 사회를 비판적 시각으로 보고 사람과 자연의 공생적 문화 재건을 목표로 간행되는 이 책을 두고 스님은 “이런 잡지가 널리 읽힌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이외에도 스님은 ‘성장을 멈춰라’, ‘슬로 라이프’,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나무를 심은 사람’, ‘육식의 종말’ 등 문명 비판적인 책을 자주 언급했다. 이런 비판 정신은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세상, 새로운 삶의 방식을 다룬 책들로 스님의 손이 가게 했다. 대표적으로 자연주의 운동가 스콧 니어링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가 그렇고,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위기’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 ‘펀드혼 농장 이야기’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등도 모두 새로운 삶과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해 다룬 것이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꼼꼼히 문장 수정 스님은 또 ‘월든’ ‘여기에 사는 즐거움’ ‘걷기 예찬’ ‘그리스인 조르바’ ‘죽음의 수용소에서’ 등을 읽으며 본질적인 삶에 대해 고민했고, ‘꾸뻬 씨의 행복 여행’ ‘행복의 정복’ ‘풍요로운 가난’ 등에서는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가를 타진했다. 소유에 대한 개념은 ‘톨스토이 민화집’에서 배우고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읽고는 직접 현장까지 찾기도 했다고 한다. 책은 부록으로 스님이 언급한 책 300여권을 가나다 순으로 정리했다. 여기에는 스님이 한 법문에서 “늘 곁에 두고 읽으며 의지하는 스승”이라고 한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도 눈에 띄고, 스님이 직접 번역까지 했던 서산대사의 ‘선가귀감(禪家鑑)’이나 초기불교의 경전인 ‘숫타니파타’, 수행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장로게’ ‘정법안장’ 등도 자리하고 있다. 이들 경전 외에도 ‘어린 왕자’ ‘꽃씨와 태양’ ‘구멍가겟집 세 남매’ 같은 동화들도 목록에 포함돼 있다. 스님은 ‘나의 과외 독서’라는 글에서 ‘어린 왕자’를 두고 “누워서 부담 없이 읽히는 동화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앞뒤가 툭 트이는 그런 책”이라면서 “내 나날의 생활에서 시들지 않은 싱싱한 초원”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책은 문장가로서의 스님의 손길이 묻어 있는 마지막 책이기도 하다. 출판사 측은 처음에 스님이 언급한 책 300권 목록을 뽑았고, 이를 다시 2년여에 걸친 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50권으로 추렸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법정 스님은 병마와 싸우면서도 원고를 꼼꼼히 읽고 문장을 바로 잡아 주었다고 한다. 1만 8500원.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법정스님 운구] 다비식 어떻게…조사·만장도 없이 입던 승복 그대로

    “일절 형식적인 장례를 준비하지 말라.” 법정 스님의 유지는 준엄했다. 스님의 장례 절차는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생략된 채 진행됐다. 길상사에는 불교식 장례에 흔히 보이는 흰색 연꽃 한 송이조차 볼 수가 없었다. 조화는 물론이요, 심지어 공식적인 부고(訃告)조차 띄우지 않았다. 다비식도 조촐하게 치러진다. 다비준비위원회에 따르면 13일 오전 11시 치러지는 다비식에는 조사(弔辭)가 일절 읊어지지 않으며, 만장(輓章) 하나 나부끼지 않는다. 스님은 따로 수의도 갖춰 입지 않은 채 평소 입었던 승복 그대로 화장된다. ☞[사진] 법정 스님 마지막 가시는 길 ☞[사진]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법정 스님 생전 활동 모습 화장은 송광사 구석진 곳에 마련돼 있는 다비장에 장작더미를 쌓고, 그 위 평상에 가사를 덮고 누운 모습 그대로 올려 놓는 식으로 진행된다. 스님은 관도 없이 작은 대나무 평상에 누워 하루가량 불길에 휩싸인 뒤, 마침내 한 줌 재로 남게 된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女談餘談] 아이콘/홍희경 사회부 기자

    [女談餘談] 아이콘/홍희경 사회부 기자

    “글쎄요, 저는 사실은 여성 문제나 이런 쪽에 관심이 없었거든요. 저를 위해 애써 주신다니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고맙네요.” 2004년 최진실은 광고 모델을 했던 아파트 회사로부터 이혼으로 인한 명예 실추에 따른 3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한 뒤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면식도 없는 톱스타와 전화가 연결된 것은 당시 사용하던 휴대전화 번호가 그쪽 매니저의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전화를 받지 않던 최진실이 한참 뒤에 스스로 전화를 걸어와 통화 상대를 확인하더니 “아, 기자셨어요.”라고 씁쓸하게 말한 것에서 미루어 봐도 그렇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연결된 통화에서 최진실은 여느 사람과 다름없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여성단체가 자신을 옹호하는 이유를 적잖이 궁금해했고, 거액의 소송이 걸린 데 대해 황망해했다. 최진실의 대답은 “여성이 이혼하는 게 명예실추에 해당하느냐.”라는 사회적 담론이 아니라 “갑자기 거액의 소송을 당하니 주변에 물어볼 곳도 없고 막막하다.”라는 개인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사정에 관계없이 한참 동안 최진실은 ‘억척 이혼녀’의 아이콘으로 살았다. 90년대 신세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던 그는 생애 마지막 작품에서는 ‘줌마렐라’라는 새로운 아이콘이 됐다. 그의 죽음의 도화선으로 무분별한 정보 유통의 폐해가 지목되자 관련 법안을 ‘최진실법’이라고 부르자는 논의가 있었는가 하면, 최근 대법원이 아파트 회사의 편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놓으면서 ‘이혼녀’ 아이콘이 다시 부각됐다. 아이콘 최진실은 인간 최진실보다 생명력이 강한 셈이다. 지극히 사적인 입장만 내세우던 최진실과의 단 한 번의 통화는 그가 새롭게 아이콘으로 부각될 때마다 미묘한 간극을 느끼게 했다. 아이콘이 된다는 것은 개인이, 어쩌면 본인조차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무력감과 경외감이다. 우리 시대 아이콘을 수없이 떠나보낸 지난해를 거쳐 엊그제 법정 스님까지 입적하시니 경외하는 마음은 더 커진다. 다음에 올 아이콘은 떠나보낸 아이콘보다 비록 덜 화려하고 덜 급진적이어도,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saloo@seoul.co.kr
  • [법정스님 입적] “장례의식 일절 말라”… 분향소 조촐히

    [법정스님 입적] “장례의식 일절 말라”… 분향소 조촐히

    스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불필요한 것들의 소유’를 거부했다. 형식적인 장례 절차를 일절 마련하지 말라는 스님의 유지에 따라 스님이 숨을 거둔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는 11일 조촐한 분향소만 마련됐다. ●길상사 추모·조의 발길 이어져 스님의 투병 소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지긴 했으나, 최근 안정을 찾았다는 소식이 나왔던 터라 스님의 입적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입적 소식이 전해진 직후 길상사에는 각지에서 불자들이 모여들었다. 불자들은 길상사 주지 덕현 스님의 안내에 따라 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설법전(說法殿)에서 삼배를 올리며 조의를 표했다. 스님의 법구가 모셔져 있는 행지실(行持室)에는 일부 스님들을 제외하고 접근이 제한됐다. 길상사에는 산문 밖으로까지 이어진 조문객들의 줄이 밤늦도록 줄어들지 않았다. 신도들은 더러 통곡을 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묵언’ 안내에 따라 침묵 속에 조의를 표했다. 분향소에는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 전 총무원장 지관 스님을 비롯,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손학규 민주당 전 대표,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 도올 김용옥씨 등 각계 인사들과 불자들이 찾아왔다. 생전에 길상사에서 스님의 법문을 직접 들었다는 진여정(50·여·서울 도곡동)씨는 “좀 더 우리 곁에 머무르시면서 좋은 말씀을 들려주셔야 하는데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분향소는 길상사 외에도 스님의 출가본사인 전남 순천 송광사, 스님이 머물던 불일암에도 마련됐다. ☞ [포토]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법정 스님 생전 활동 모습 한편 법정 스님은 종교 간의 담을 허물었을 뿐 아니라 문학, 미술 등 문화 예술계의 많은 인사와 교류했다. 2000년 법정 스님의 부탁으로 길상사에 성모 마리아를 닮은 관음보살상을 조각해 큰 화제를 낳았던 원로 조각가 최종태 전 서울대 교수는 “스님은 글재주가 특별나 말보다는 글로 선교를 하시고 신선한 스님의 향기를 만천하에 전파했다.”면서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만날 때는 ‘세상을 향한 원이 있는데 몸이 이렇다 보니 한계가 있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법정 스님의 수필집 ‘아름다운 마무리’에 등장하는 소녀 ‘봉순이’ 그림을 그린 박항률 화백은 ‘봉순이’ 그림에 얽힌 일화를 전했다. 그는 “스님께 작은 소년을 그려 드렸더니 스님이 껄껄 웃으시면서 ‘나는 소녀가 더 좋아.’라고 하셔서 소녀 그림을 다시 그려 드렸다.”고 회상했다. ●MB 조전… “비우는 삶 소중함 보여주셔” 이명박 대통령은 11일 법정 스님 입적과 관련, 조전을 보내 애도의 뜻을 표했다. 이 대통령은 조전에서 “법정 큰스님은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무소유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해 오셨다.”면서 “많이 갖고 높이 올라가기를 욕심내는 현대인들에게 비우는 삶, 베푸는 삶의 소중함을 보여 주셨다.”고 추모했다. 이 대통령은 “큰스님께서는 원적에 드셨지만, 수많은 저서와 설법을 통해 남겨진 맑고 향기로운 지혜와 마음은 우리 가슴속에 오래 남을 것”이라면서 “부디 서방정토에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김성수 윤창수 강병철기자 geo@seoul.co.kr
  • [법정스님 입적] 얼음알보다 청아한 법정스님 영전에-시인 유안진

    지금 저는 성당에서 묵주기도 중에 큰스님의 열반소식을 듣습니다. 갑자기 마른 풀 향기 전해지며, 큰스님은 깡마른 모습으로 눈앞 환히 마주 서 계십니다. 먹물장삼 딱 한번만 스친 듯이, 無所有의 향기는 백설의 겨울山寺 한 채이십니다 같은 시대, 같은 하늘을 이고, 같은 땅에 살면서도, 큰스님과 저는 하늘과 땅바닥의 차이였지만, 마주치지 않아도 너무 자주 만나 뵈었습니다 공중해우소도 가리지 않고 무소유의 행복을 일러주시었습니다 쉽고 간결한 몇 말씀에 정신차린 그 날은, 진창 같은 어디에 있어도, 머리카락 날리도록 휘파람을 불고 싶었습니다큰스님의 글에서는 늘 산촌을 울리는 일곱 박자의 목탁소리가 낭랑하게 울리었습니다 한 점 콤마조차도 소리 없이 울림 하여, 깊고도 높은 설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얼음알처럼 청아하게 닦으신 정신의 향기는 한국불교의 더 없는 고아함을 보여주시었습니다 저의 묵주기도는 저절로 큰스님의 열반을, 카톨릭 말로는 소천(召天)을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종교의 경계를 넘으신 큰스님과 속인 저는 오늘 열반소식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어느 생애 덕업을 쌓아, 한번 더 동시대에 같은 이 땅에 태어나 같은 우리나라 하늘을 이고, 큰스님과 저 유안진 글라라로 다시 만나진다면 거기가 바로 법정 큰스님의 극락이고, 저의 천국인 하늘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가슴속에 영롱한 구슬로 남은 설법은, 오는 시대도 한결 밝게 맑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목탁을 잃었으나, 일곱 박자의 목탁소리는 오래오래 메아리 칠 것입니다 번뇌세상 너머의 영원하고 완전한 평안에 드시옵소서. <시인 유안진 글라라 올림> ☞ [포토]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법정 스님 생전 활동 모습
  • 암투병 이해인수녀 감동의 ‘추모 편지’ 화제

    암투병 이해인수녀 감동의 ‘추모 편지’ 화제

    ■이해인 수녀님의 법정스님 추모글 전문 법정 스님께 언제 한번 스님을 꼭 뵈어야겠다고 벼르는 사이 저도 많이 아프게 되었고 스님도 많이 편찮으시다더니 기어이 이렇게 먼저 먼 길을 떠나셨네요. 2월 중순, 스님의 조카스님으로부터 스님께서 많이 야위셨다는 말씀을 듣고 제 슬픔은 한층 더 깊고 무거워졌더랬습니다. 평소에 스님을 직접 뵙진 못해도 스님의 청정한 글들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큰 기쁨을 누렸는지요! 우리나라 온 국민이 다 스님의 글로 위로 받고 평화를 누리며 행복해했습니다. 웬만한 집에는 다 스님의 책이 꽂혀 있고 개인적 친분이 있는 분들은 스님의 글씨를 표구하여 걸어놓곤 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스님의 그 모습을 뵐 수 없음을, 새로운 글을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합니다. ‘야단맞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에게 오라’고 하시던 스님.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대조’한 지 꽤나 오래되었다고 하시던 스님. 때로는 다정한 삼촌처럼, 때로는 엄격한 오라버님처럼 늘 제 곁에 가까이 계셨던 스님. 감정을 절제해야 하는 수행자라지만 이별의 인간적인 슬픔은 감당이 잘 안 되네요. 어떤 말로도 마음의 빛깔을 표현하기 힘드네요. 사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워 편지도 안 하고 뵐 수 있는 기회도 일부러 피하면서 살았던 저입니다. 아주 오래전 고 정채봉 님과의 TV 대담에서 스님은 ‘어느 산길에서 만난 한 수녀님’이 잠시 마음을 흔들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고백을 하신 일이 있었지요. 전 그 시절 스님을 알지도 못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수녀님 아니냐며 항의 아닌 항의를 하는 불자들도 있었고 암튼 저로서는 억울한 오해를 더러 받았답니다. 1977년 여름 스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구름모음 그림책도 다시 들여다봅니다. 오래전 스님과 함께 광안리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줍던 기억도, 단감 20개를 사 들고 저의 언니 수녀님이 계신 가르멜수녀원을 방문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어린왕자의 촌수로 따지면 우리는 친구입니다. ‘민들레의 영토’를 읽으신 스님의 편지를 받은 그 이후 우리는 나이 차를 뛰어넘어 그저 물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담백하고도 아름답고 정겨운 도반이었습니다. 주로 자연과 음악과 좋은 책에 대한 의견을 많이 나누는 벗이었습니다. ‘…구름 수녀님 올해는 스님들이 많이 떠나는데 언젠가 내 차례도 올 것입니다.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이기 때문에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그날 헛되이 살지 않으면 좋은 삶이 될 것입니다…한밤중에 일어나(기침이 아니면 누가 이런 시각에 나를 깨워주겠어요) 벽에 기대어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이 자리가 곧 정토요 별천지임을 그때마다 고맙게 누립니다’ 2003년에 제게 주신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어쩌다 산으로 새 우표를 보내 드리면 마음이 푸른 하늘처럼 부풀어 오른다며 즐거워하셨지요. 바다가 그립다고 하셨지요. 수녀의 조촐한 정성을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도 하셨습니다. 누군가 중간 역할을 잘못한 일로 제게 편지로 크게 역정을 내시어 저도 항의편지를 보냈더니 미안하다 하시며 그런 일을 통해 우리의 우정이 더 튼튼해지길 바란다고, 가까이 있으면 가볍게 안아주며 상처 받은 맘을 토닥이고 싶다고, 언제 같이 달맞이꽃 피는 모습을 보게 불일암에서 꼭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이젠 어디로 갈까요, 스님. 스님을 못 잊고 그리워하는 이들의 가슴속에 자비의 하얀 연꽃으로 피어나십시오. 부처님의 미소를 닮은 둥근달로 떠오르십시오.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 공개> ☞ [포토] “큰 욕심 부리지 말고” 법정 스님 생전 활동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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