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숭례문
    2025-10-05
    검색기록 지우기
  • 파워맨 지속시간-파워맨 사기-【pom5.kr】-파워맨 가격 Visit our website:(xn--fast-uz7qx23dgtt.com)
    2025-10-05
    검색기록 지우기
  • 비닉스 파는곳-비닉스50mg 가격-【pom5.kr】-비닉스 복용법 Visit our website:(vinix55.com)
    2025-10-05
    검색기록 지우기
  • 아동
    2025-10-05
    검색기록 지우기
  • 비­아그라 25mg 후기-비­아그라맥주-【pom5.kr】-비­아그라 성분 Visit our website:(viagrabuy365.com)
    2025-10-0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040
  • 中ㆍ日네티즌 “숭례문 사라져 안타깝다”

    中ㆍ日네티즌 “숭례문 사라져 안타깝다”

    국보1호 숭례문 화재사고 소식이 이웃 중국과 일본 주요언론의 머릿기사로 실시간으로 타전되고 있다. 숭례문이 중국과 일본인 사이에서도 잘 알려진 관광명소이기 때문. 중ㆍ일언론은 진화에 힘쓰는 소방대원들의 사진과 함께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며 숭례문 화재사고 과정· 붕괴 장면 등을 상세히 보도했다. 일본 교도통신·지지통신은 “한국의 국보1호로서 일본인 관광객에게도 친숙한 숭례문이 붕괴했다.”고 전했으며 요미우리신문 등 유력매체도 “작은 불이 (한국의) 큰 재산을 빼앗은 꼴이 되었다.”며 화재 현장을 자세히 전했다. 또 야후재팬을 비롯한 포털사이트에서도 숭례문 전소 소식이 ‘가장 많이 읽힌 해외 뉴스’ 부분 1위, 2위, 3위에, 전체 뉴스에서도 2위에 올라 일본인들의 관심을 반영했다. 아울러 런민르바오(人民日報)·신화통신을 비롯한 중국언론들도 큰 관심을 기울이며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해 30여대의 소방차가 출동했지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중국과 일본 네티즌의 반응도 뜨거웠다. 일본 네티즌들은 “평소에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문화재였다면 관리를 잘 했어야 하는데…”(아이디 1pyT+fZ3) “아직 불명확하지만 방화가 분명할 것”(QmfgtBWe) 이라고 말하는 등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중국네티즌들도 “한 나라의 국보가 타버렸다니 정말 안타깝다.”(124.114.*.*) “세계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문화재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매우 가슴이 아프다.”고 소감을 남겼다. (125.149.*.*) 반면 “한국의 대문이 불에 탔으니 한국인의 자존심이 불에 탄 것이나 마찬가지”(218.76.*.*) “한국인은 문화재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을 가지고 관리에 신경썼어야 했다.”(123.154.*.*)고 지적한 중국인 네티즌들과 “한국은 문화재 방화 사건에 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편인 것 같다.”(TexlMB20)고 지적하는 일본인 네티즌들도 있었다. 사진=사진 위는 NHK와 야후재팬 인터넷판 캡처·아래는 야후차이나·궈지짜이셴 메인 페이지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주미옥 기자 toyobi@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국보 1호 人災로 ‘폭삭’

    국보 1호 人災로 ‘폭삭’

    남대문의 화재 역시 인재였다. 전문가들은 화재진압이 비전문적이었으며 유관단체들의 체계적 협조 시스템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남대문이 국보 1호라는 이름에 걸맞은 방재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우왕좌왕 화재진압 진압은 됐지만 비전문적인 화재진압과 체계 없는 유관부서 협조 시스템은 또 다른 불씨를 남겼다. 오후 9시 현장에 도착한 소방관들은 곧바로 불이 붙은 기와 사이로 물을 쏘았다. 사다리차까지 동원해 직사·고압 방식으로 물을 분사했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물 분사는 기와를 깨고 단청을 지울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한 문화재 전문가는 “일본의 경우 공중으로 물을 뿜어 위에서 아래로 흘리는 스프링클러 방식으로 진압을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12일과 13일에는 강추위가 올 예정이어서 건물 동파 위험까지 우려된다. 이에 대해 화재 현장의 소방관계자는 “일부 훼손위험을 알고 있지만 진압이 먼저여서 어쩔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판 뒤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숭례문 현판을 떼내는 과정에서 실수로 현판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등 비전문적인 면도 드러냈다. 또한 남대문경찰서 관계자는 야간에는 사설 보안 시스템에만 의존하는 문제를 지적했다. 실제 화재가 나자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한 보안업체 직원은 “우리는 오후 8시 이후 외곽 경비만 관리한다. 화재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밝혔다. ●왜 화재 커졌나 소방방재본부 관계자는 지붕에 붙은 불을 끄려고 했으나 불이 난 ‘적심’까지 물이 미치지 못했다고 밝혔다. 지붕은 기와, 보토, 강회다짐, 적심, 서까래의 5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강회다짐이 방수효과를 가지고 있어 물을 차단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적심에 방수처리를 한 것도 화재를 키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방 관계자는 “매 시각마다 기와와 보토 그리고 강회다짐을 들어내고 불을 진화하려 했지만 진화를 위해 뿌린 물이 얼어 진입이 쉽지 않았다.”고 밝혔다. 유관기관의 미비한 협조 시스템도 화재를 키웠다. 현장에서 소방관들은 문화재청과의 협의가 필요해 함부로 기와를 들고 불을 진화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문화재청 담당자가 대전에서 출발해 현장에 도착한 것은 2시간 후였다. 결국 미흡한 초동진화로 불은 2층 지붕으로 옮겨 붙었고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방재 시스템 애초에 없었다 숭례문 화재는 국내 문화재 방재 시스템의 대응 원칙이 부재함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제일 큰 문제는 누전이다. 성곽과 석탑 등을 제외하고 목조건축물이 대부분인 국내 건축물 문화재의 화재원인 50% 이상이 누전이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은 “문화재청 화재관리 매뉴얼에는 누전 부분이 완전히 빠져 있다.”고 말했다. 조명도 문제다. 석조건축이 대부분인 외국의 직접 조명 방식은 가열이 돼도 화재에 안전하지만 목조건축은 화재나 변색 가능성이 커져 국내 문화재 사정에 맞는 간접 조명방식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숭례문이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상황에서 관리인 부재 문제도 제기된다. 한 문화재 관계자는 “숭례문은 불이 나 인근 지하도에 근무하는 관리인이 쫓아온다 해도 10분은 걸린다.”며 “문화재를 일반인에게 공개할 경우 안전과 보호에 대한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경주 정서린 신혜원기자 kdlrudwn@seoul.co.kr
  • 日언론, 숭례문 붕괴 머릿기사로 대서특필

    日언론, 숭례문 붕괴 머릿기사로 대서특필

    국보1호 숭례문 화재사고 소식이 일본 각 언론매체의 머릿기사로 실시간으로 타전되고 있다. 일본 교도통신·지지통신은 “한국의 국보1호로서 일본인 관광객에게도 친숙한 숭례문이 붕괴했다.”고 한국 언론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어 요미우리신문·TBS 뉴스 등 유력매체들도 “숭례문이 화재로 무너졌으며 작은 불이 (한국의) 큰 재산을 빼앗은 꼴이 되었다.”며 화재 현장을 상세히 전했다. 아울러 야후재팬을 비롯한 포털사이트에서도 숭례문 전소 소식이 ‘가장 많이 읽힌 해외 뉴스’ 부분 1위에 오르는 등 일본 네티즌들도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일본 언론은 숭례문 화재사고 과정· 붕괴 장면 등을 실시간으로 보도하며 초기 진화작업에 실패한 이유와 원인으로 꼽히고 있는 방화 가능성도 피력했다. 또 숭례문의 역사적 가치와 전소 후 서울시민들의 심정을 비중있게 다뤘다. 숭례문 화재사고를 접한 일본 네티즌들은 “평소에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문화재였다면 관리를 잘 했어야 하는데…”(아이디 1pyT+fZ3) “아직 불명확하지만 방화가 분명할 것”(QmfgtBWe) 이라고 말하는 등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또 “숭례문이 완전히 복원될 수 있을지 의문”(LrVRfQEK ) “한국은 문화재 방화 사건에 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편인 것 같다.”(TexlMB20)고 지적하는 네티즌들도 있었다. 사진=NHK·야후 일본어판 캡처 서울신문 나우뉴스 주미옥 기자 toyobi@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中네티즌 “한국인의 자존심이 불탔다”

    中네티즌 “한국인의 자존심이 불탔다”

    국보 1호 숭례문의 화재 소식에 중국 언론들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런민르바오(人民日報)·신화통신을 비롯한 주요언론들은 숭례문 붕괴 소식을 주요뉴스로 비중있게 보도했다. 런민르바오는 “숭례문에 갑작스런 화재가 발생해 30여대의 소방차가 출동했지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신화통신도 진화에 애쓰는 소방대원들의 사진을 전하며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다. 각 매체들은 숭례문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라는 점 등을 자세히 소개했으며 화재 발생 시작과 진화 과정 등을 발빠르게 전하고 있다. 중국의 많은 네티즌들도 숭례문 화재 소식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한 네티즌(124.114.*.*)은 “한 나라의 국보가 타버렸다니 정말 안타깝다.”고 전했고 또 다른 네티즌(125.149.*.*)은 “세계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문화재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매우 가슴이 아프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에 반해 “한국의 대문이 불에 탔으니 한국인의 자존심이 불에 탄 것이나 마찬가지”(218.76.*.*) “한국인은 문화재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을 가지고 관리에 신경썼어야 했다.”(123.154.*.*)고 지적하기도 했다. 사진=위는 중국판 야후, 아래는 궈지짜이셴 메인 페이지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영어 숭상에 조상들 진노했나”

    “영어 숭상에 조상들 진노했나”

     “영어 숭상에 조상들 진노했나”  화마에 쓰러진 국보 1호인 숭례문이 11일 아침 참담한 모습을 드러내자 출근길 시민들은 당혹감을 넘어 좌절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허탈한 표정의 일부 시민들은 발길을 멈추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인근 공무원들로 보이는 이들에게 원망에 찬 욕설을 내뱉거나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던 시민들의 눈길은 모두 검게 무너져내린 누각에 쏠렸으며 ‘되풀이되면 안 될 아픈 장면’이라며 휴대전화기를 꺼내 ‘흉물’이 돼버린 숭례문을 사진기에 담았다.  한성렬(45·회사원)씨는 “마음이 아프다.복원이 되더라도 의의가 있을지 모르겠다.우리가 국보를 관리하는 게 이것밖에 되지 않는지 화가 치민다.”라고 눈에 핏발을 세웠다.  최승혁(30·회사원)씨는 “참담하고 허탈하다.”며 “방화라는 얘기도 있던데 정말 그렇다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모두가 사랑하는 문화재에 불을 지르는 건 ‘사회적 테러’라고 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김병일(46·회사원)씨는 “전날 불이 났다는 말을 듣고 당혹스러웠다가 불기둥이 치솟아 전소했다는 얘길 듣고는 허탈했다.”며 “잔해를 보니 ‘자존심 1호’가 무너졌다는 생각에 화가 나서 눈물이 나려고 한다.”고 말했다.  참담한 숭례문의 모습에 시민들의 분노가 터져나오고 일부 출근길 차량들은 도로에서 서행하거나 정차해 창 밖으로 삿대질 하는 모습이 목격되는 가운데 당국은 서둘러 숭례문에 가림막을 치기 시작했다.일부 익명성이 보장돼 의사표현이 자유로운 온라인에서는 더 노골적인 감정이 쏟아졌고 사고의 원인을 분석하거나 당국의 반성을 촉구하는 차분한 글도 눈길을 끌었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아이디 ‘hikim63’씨는 “완벽한 대책 없이 일반에 개방한 데 문제가 있다.”며 “부작용까지 예측해 일반인의 접근이 쉬워지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비책을 세웠어야 했다.문화재는 가까이 두고 즐기는 것보다 보존이 우선인데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심정이다.”라고 말했다.  김영훈씨는 문화관광부 홈페이지 게시판에 “운현궁은 차 돌진으로 문이 부서지고 숭례문은 불타고,화성의 장안문도 그슬리고,수어장대도 불타 없어지고,경복궁 문은 탈 뻔하고,양양 낙산사는 다 타버리고….관리 좀 똑 바로 하자.”며 허탈함을 내비쳤다.  심은주씨는 싸이월드에서 “설에,또 대통령 취임 직전에 국보 1호가 불에 탄 것은 조상의 암시”라며 “한글을 제쳐두고 영어를 숭상하고 금수강산을 토막내려고 하니 조상이 진노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 숭례문 불… 누각 전소

    숭례문 불… 누각 전소

    대한민국 문화재의 자존심인 국보 1호 숭례문이 10일 밤 화재로 사실상 전소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 이 발생했다. 소방방재청 관계자는 “8시50분쯤 남대문 경찰서 교통초소 근무자가 교통 폐쇄회로 카메라를 통해 화재를 포착해 보고했으며,9시쯤 소방차 60대와 소방관 190여명이 출동해 진화작업을 벌였다.”고 밝혔다. 하지만 초기 진압 실패로 숭례문 2층 누각과 지붕이 전소되고 1층 지붕의 중간부분이 붕괴되는 등 구조물이 심각하게 훼손됐다. 특히 ‘숭례문’ 현판이 불에 타는 것을 막기 위해 톱으로 잘라내는 과정에서 소방관의 실수로 현판이 바닥으로 떨어져 일부가 훼손됐다. 소방 관계자는 “문화재 훼손의 위험 때문에 화재 초기에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서지 못해 불이 커졌다.”면셔 초기진압 실패를 시인했다. 화재 원인과 관련, 이 관계자는 “2층 누각 아래에 설치된 조명등 과열이나 누전에 의한 발화 가능성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장에 출동한 남대문 경찰서 관계자는 “노숙자 1명이 숭례문에 들어갔다는 택시기사의 제보가 있어 방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경찰서측은 이날 밤 10시쯤 서울역 인근에서 방화 용의자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이모(53)씨를 붙잡아 조사를 벌였으나 이씨가 만취 상태여서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보 1호 숭례문은 1962년 국보 1호로 지정됐으며 서울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완성됐다. 현재의 건물은 세종 29년(1447년) 고쳐 지은 것이다. 1961~63년에 해체복원된 뒤 불이 나기는 처음이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창덕궁 새 영문이름 ‘비밀정원의 궁전’

    앞으로 국보 몇호니, 보물 몇호니 하는 일련번호가 없어진다. 또 건축물이나 동산뿐 아니라 사적과 천연기념물도 국보로 지정된다. 이렇게 되면 창덕궁, 제주자연유산, 무령왕릉 등도 국보가 될 수 있다. 문화재청은 이런 내용을 담은 ‘문화재 등급·분류체계 개선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10일 밝혔다. 국가유산은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으로 나누고, 국보를 상위점으로 하위 분류는 보물, 무형문화재, 천연기념물, 명승 등 4가지로 단순화한다.또 국보와 보물은 일련번호를 없애고 대신 사적 제○호, 건축문화재 제○호, 미술문화재 제○호 등 하위분류 번호를 매기게 된다. 국보 제1호인 숭례문은 `국보 숭례문(건축문화재 제1호)´, 보물 제1호인 흥인지문은 `보물 흥인지문(건축문화재 제2호)´과 같이 표기되는 것이다.이와 함께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고 있는 경복궁(Gyeongbokgung), 불국사(Bulguksa) 등 외국인이 이해하기 어렵고 흥미를 유발하지 않는 이름도 고치기로 했다. 경복궁은 `The Grand Palace of Joseon Dynasty´, 창덕궁은 `The Palace of Secret Garden´ 등으로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조선 왕릉의 국문 표기도 왕릉의 주인공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조선 태조 건원릉’,‘조선 세조 광릉’,‘세종대왕 영릉’ 등으로 묘호를 함께 표기하기로 했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3·끝) 수원~과천 남태령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3·끝) 수원~과천 남태령

    경기 수원으로 들어온 옛길은 이내 정조대왕의 능행로와 만난다. 능행로는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신 화산(화성) 현륭원에 행차하기 위해 다녔던 길로, 수원과 화성 경계에 있는 대황교에서 그동안 걸어온 옛길과 합쳐진다. 여기에서부터 과천 남태령까지 정조의 능행로와 거의 일치한다. ●팔달문~장안문 사이 유적 즐비 군 비행장 옆을 지난 옛길은 구획 정리된 주택가를 통과하면서 생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수원천 매교다리까지 이어진다. 다리를 건너 옛 1번 국도를 따라 조금만 가면 정조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화성의 품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수원 화성은 정조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만든 신도시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성곽은 정약용이 설계했다. 화성의 4대문 중 남쪽에 위치한 보물 제402호 팔달문이 첫눈에 들어온다. 충청·전라·경상도 사람들이 이 문을 통과해 들어오기에 사통팔달로 통한다는 의미로 지었다. 서울의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문루의 네귀에 높은 기둥이 없는 것이 다르다. 또 성문 바깥쪽에 벽돌로 옹성을 쌓았다. 팔달문에서 장안문으로 이어지는 옛길 주변에는 화성의 유적이 즐비하다. 길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화성행궁이 있고 반대편에는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화성에 행차할 때 머물던 처소로, 무려 576칸에 달해 조선시대 최대 행궁으로 꼽힌다. 수원시는 당시 제작된 ‘화성성역의궤’란 보고서를 토대로 화성행궁 등 화성의 대부분을 복원했다. 장안문은 화성 북쪽 대문으로 사실상 정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으로 국보 1호인 서울 숭례문보다도 크다. 옛길은 화성을 뒤로한 채 옛 국도를 따라 가다 수원종합운동장 앞에서 왼쪽으로 꺾이며 이목동 노송지대에 다다른다. ●인덕원 소공원엔 ‘옛길터’ 표석이… 노송지대 길 오른편에는 ‘만석거’라고 불리던 일왕저수지가 있다. 정조의 지시에 따라 1795년에 만들어졌다. 주변의 곡식들이 가뭄 피해를 입지 않도록 평상시에 물을 저장해 두었다. 약 5㎞에 이르는 노송지대도 정조가 현릉원 관리에게 내탕금 1000냥을 하사, 소나무 500그루와 능수버들 40그루를 심게 해 조성됐다. 경기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그러나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하고 대부분 죽고 일부만 남아 있다. 게다가 주변에는 갈비집 등 음식점과 상가 등이 들어서 노송지대의 경관을 해치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옛길은 1번국도와 다시 만나면서 ‘지지대고개’에 오른다. 정조는 현륭원 행차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갈때 지지대 고개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먼발치에서나마 현륭원이 있는 화산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전한다. ●남태령 원래 이름은 ‘여우고개’ 수원을 벗어난 옛길은 10차로로 뚫린 1번 국도를 타고 의왕으로 진입한다. 고천사거리를 통과한 뒤 고촌초등학교 앞길로 들어선다. 학교옆 고천동 사무소에는 정조가 쉬어 가던 사근행궁이 있었다. 옛길은 상가들이 촘촘히 들어선 거리를 지나 1번 국도와 합쳐졌다 오전초등학교 지점에서 아파트와 가구점들이 뒤섞여 있는 의왕가구단지로 진입한다. 전남 나주에서부터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며 의왕까지 온 1번 국도는 여기서부터 이별을 고한다. 정조대왕의 능행로도 이곳에서부터 시흥(1번국도)쪽길과 남태령(47번)쪽 길로 나뉜다. 그동안 걸어온 옛길(호남대로 또는 삼남대로)은 다시 남태령으로 이어진다. 가구거리 끝자락에 위치한 효성중학교 앞길을 지나면 안양교도소 뒷길이 나타난다. 승용차 1대가 통과할 수 있는 한적한 옛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길은 바로 47번 국도로 진입한다. 국도 왼쪽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바로 평촌신도시이다. 2㎞쯤 달리면 옛길은 서울외곽순환도로 고가차도 밑을 통과한 뒤 신도시가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약간 비껴서 인덕원에 당도한다. 궁중의 내시들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 왕이 덕을 베풀어 인덕(仁德)이라 했고 또 이곳에 여행자들의 숙식을 제공하는 원(院)이 있어 인덕원이라 불렸다. 주택들이 들어서 길은 사라졌지만 인덕원 소공원에는 ‘인덕원 옛길터’라는 표석이 설치돼 있고 서쪽으로 60m 떨어진 곳에 100m도 채 안 되는 옛길 소로가 남아 있다. 또 표석에는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 현륭원으로 옮긴 뒤 12번 능행차를 했는데 이중 6번을 인덕원 옛길을 이용했다.”고 적혀 있다. 길은 인덕원 사거리에서 47번 국도를 따라 정부청사가 있는 과천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도 아파트와 관공서, 크고 작은 상가 건물들이 들어차 있어 옛길은 흔적조차 없다. 과천현 관아가 과천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고 문헌에 기록돼 있다. 또 학교 바로 옆에는 ‘온온사’라는 사찰이 있는데, 정조가 현륭원에 내려갈 때 쉬었던 객사였다고 전한다. ●서울 진입 옛길 일부 과천시서 복원 옛길은 다시 47번 국도를 만나 서울에 들어가는 관문인 ‘남태령로’와 합쳐진다. 원래 남태령의 이름은 여우고개였다. 정조가 행차할 때 이 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이름을 묻자 과천현 이방 변씨가 왕에게 상스러운 말을 할 수 없어 남태령(남쪽으로 내려갈 때 첫번째로 맞이하는 고개)으로 답했다고 전한다. 옛길은 과천 관문사거리에서 남태령 고개로 향한다. 일제 강점기 때 길을 넓히면서 모두 사라졌지만 과천쪽 길은 일부 남아 있다. 남태령 지하차도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도로와 나란히 이어지는 옛길은 정상 부근까지 900여m쯤 이어진다. 과천시가 복원했다. 땅끝마을 해남에서 출발해 1000리를 달려온 옛길은 전라도·충청도·경기도 등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채 남태령을 넘어 한양에 당도한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김준혁 수원시 학예연구사 “옛길이 지나가는 수원은 정조대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정조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수원에 계획도시를 만들었습니다.” 수원시 학예연구사 김준혁(41)씨는 “정조는 위민(爲民)정치 실현 및 왕권 강화를 위해 서울을 벗어난 곳에 도시를 조성해 새로운 정치를 펼치고 싶어 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수도 한성부는 정조의 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노론세력들이 정치·경제 등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있었다. 정조는 이에 따라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명당 자리인 수원 관아로 이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수원에 신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수원의 읍치(邑治·고을)를 화산(화성)에서 수원 팔달산 기슭으로 옮긴 뒤 4년 후인 1793년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켰다. 유수부는 지금의 광역자치단체에 해당된다. 도시와 백성을 보호해 줄 성곽도 쌓았다.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를 이용해 10년 예상했던 공사를 단 2년9개월 만에 끝냈다. 정조는 수원으로 이주하는 백성들에게 이주 비용과 함께 10년간 세금을, 남자들에게는 군대 면제 혜택을 주었다. 성 안팎에 시장을 개설해 서울·개성·평양의 상인들을 유치하고 성곽 밖에는 저수지와 둔전을 설치했다. 화성에서 매년 1차례씩 특별과거시험을 실시하는 등 교육 활성화 정책도 폈다. 자연스럽게 백성들이 몰려들어 수원은 서울 다음으로 큰 도시로 성장했다. 김씨는 “도시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메트로시티를 넘어 인구 1000만명의 ‘메가시티’가 돼야 한다는 게 요즘의 세계적인 추세”라며 “정조는 18세기 상황에서도 인구가 많은 도시에서 다양한 정치·문화·경제·교육이 발전하는 메트로시티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당시 전국 인구가 760만명에 불과했는데, 정조는 수원을 인구 50만의 신도시로 만들고, 이같은 도시를 전국으로 확대하는 구상을 그리고 있었다. 김씨는 “정조는 그 당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혜안을 갖고 있었다.”며 “따라서 수원은 우리 역사뿐 아니라 아시아 일대에서 계획적으로 조성된 최초의 신도시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대통령 선거운동 첫날… 그들의 레이스가 시작됐다

    ‘더 빨리, 더 넓게, 더 많이.’ 17대 대선에서 후보들이 보여주고 있는 무한경쟁 양상을 압축한 말이다.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27일부터 후보들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도전하며 전례없이 살인적인 일정을 강행했다. 한나라당 이명박, 무소속 이회창,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 등은 이날 새벽 0시를 기해 유세에 돌입했다. 이른 아침 구두끈을 조이던 역대 대선의 부지런함은 명함도 못 내밀 판이다. 이날 하루 후보들의 동선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이명박 후보는 서울→대전→대구→부산을 관통했고, 정동영 후보는 여수→도라산→대전→서울을 종횡무진했다. 하루 단위로 권역을 옮겨다니던 역대 대선을 아득한 옛날 얘기처럼 만들어 버렸다. 서울에서 움직인 이회창 후보도 무려 7곳의 시장을 찾는 등 10여개의 일정을 소화하는 강행군을 펼쳤다. 이명박 후보는 서울역 앞 유세에서 “경제를 살려 대한민국이 행복하게 하겠다.”면서 “서울부터 시작해 정권교체 불길이 전국에 솟아오르도록 하자.”고 했다. 이회창 후보는 숭례문 앞에서 가진 출정식에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자기 배만 채우면 된다는 사고에 빠진 후보로는 정권을 교체할 수 없다.”면서 “노무현 후보에 속아서 지난 5년 피눈물을 흘렸는데 한나라당 후보에게 속아 다시 후회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정동영 후보는 대전역 앞 유세에서 “이명박·이회창 후보가 가져오는 변화는 미래를 망치는 나쁜 변화”라며 “(나는)나쁜 경제 대통령이 안 될 것”이라고 했다. 각 후보 진영은 동시간 대에 최대 다수의 관심을 끌기 위한 전략도 동원하고 있다. 한나라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은 각각 이명박 후보와 정동영 후보의 유세 장면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멀티비전을 270여대의 차량에 실어 전국을 누비고 있다. ‘한번에 15분씩 하루 20번 유세를 한다.’는 원칙을 세운 민주당 이인제 후보는 선거유세단 이름을 아예 ‘무한도전’이라고 정했다. 공교롭게도 이명박 후보의 대학생 선거유세팀 명칭도 ‘무한도전’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이런 무한경쟁이 유권자에 대한 일방적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점에서 후진적인 행태라는 지적도 있다. 과열·혼탁 선거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선거운동 범위를 지나치게 제한하다 보니 유권자가 아닌 당과 조직, 후보 중심으로 유세가 진행되는 소모적 경쟁이 빚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명지대 김형준 교수는 “미국의 경우 선거운동원이 유권자를 가가호호 방문하거나, 유권자들 스스로 집단적인 선거운동을 할 수 있어 후보가 한밤중에 돌아다니는 후진적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서 “우리나라는 IT기술이 발달했고 선관위의 권한도 강한 만큼, 선거운동 허용 범위를 넓힐 때가 됐다.”고 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범국민대회 서울 도심 충돌

    민주노총과 한국진보연대 등으로 구성된 ‘한·미 FTA 저지, 비정규직 철폐, 반전평화를 위한 범국민행동의 날 조직위원회’는 11일 노동자와 농민, 학생, 시민사회단체 회원 등 6만여명(경찰추산 2만여명)이 모인 가운데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시청 일대에서 민중총궐기대회를 열었다. 본 집회를 마친 뒤 미국대사관 등으로 접근하려던 시위대와 저지에 나선 경찰이 광화문 일대에서 충돌, 농민 김모(51)씨 등 60여명이 부상당하고 125명(전국 141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또 경찰 12명이 다치고 경찰차량 7대도 파손됐다. 시위대는 ▲한·미 FTA 폐기 ▲비정규직 철폐 ▲자이툰부대 철수 ▲노점탄압 중단 ▲국가보안법 폐지 ▲청년실업 해소 등을 주장했다. 이 때문에 이날 오후 늦게까지 시청∼남대문, 종로2가∼세종로, 세종로∼정동 등 도심 도로가 통제돼 운전자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태평로 16차선 도로를 점거한 채 촛불집회를 벌이던 1만여명의 시위대는 오후 8시30분쯤 자진해산했다. 조직위는 이날 대국민호소문에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박탈당했고 평화시위의 의지는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 앞에 무참히 짓밟혔다.”고 비난했다. 시위대는 당초 을지로와 동대문운동장 등에서 단체별로 사전집회를 가진 뒤 시청 앞 서울광장에 집결할 예정이었지만, 경찰의 원천봉쇄로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숭례문로터리까지 차로를 점거한 채 집회를 가졌다. 앞서 이날 아침 일찍부터 전국의 고속도로와 국도 등에서는 민중총궐기대회에 합류하기 위해 상경하려는 농민·노동자들과 경찰이 격렬하게 맞섰다. 경찰은 전국적으로 421개 중대 6만 4000여명을 동원해 상경하려던 1만 5000여명의 집회 참가를 저지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Seoul In] 경복궁서 한글날 기념행사

    종로구(구청장 김충용) 6일 오후 2시 경복궁 근정전에서 ‘제561주년 한글날 기념 훈민정음 반포 재현’ 행사를 갖는다. 반포 행사는 초엄→이엄→삼엄→국궁사배→훈민정음 반포→국궁사배→삼고두→산호→국궁사배→예필 순서로 진행된다. 행사 후에는 어가행렬이 광화문, 시청앞, 숭례문을 지나며 펼쳐진다. 문화체육과 731-1160.
  • [김미라 교수의 부모들을 위한 교육특강] (21) 단답형 시대는 지나갔다

    [김미라 교수의 부모들을 위한 교육특강] (21) 단답형 시대는 지나갔다

    대한민국의 국보 1호는? 지체 없이 바로 남대문이나 숭례문이 떠오르는 부모님은 학창 시절 꽤 공부 잘 하는 학생이었을 겁니다. 성적이 매우 우수했던 분들은 국보 2호,3호도 떠오르고 더 나아가서는 보물 1호도 생각이 나실 겁니다. 예전에는 이런 단답형의 문제에 빠르고 정확하게 정답을 찾아내야만 우수한 성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이런 문제의 정답을 알려면 학교에서 선생님께 배우거나 책을 찾아봐야만 했습니다. ●인터넷 검색만해도 큰 도움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인터넷에서 검색만 해도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인터넷이 1982년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등장한 뒤 본격적으로 인터넷을 사용하기 시작한 해는 1994년입니다. 이후로 국내에서도 세상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학교에 가거나 책을 읽는 방법 이외에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정보를 얻는 시대가 되었습니다.‘정보의 바다’라고 불리는 인터넷은 검색만 잘 하면 나이와 인종, 성(性)에 관계 없이 다양한 정보를 거의 무한정 얻을 수 있는 매체입니다. 정보가 이렇게 널려있다시피 하니 단순 정보를 묻고 답하는 방식은 이제 평가의 도구로 적절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널려 있는 정보를 마음만 먹으면 얻을 수 있는 시대에는 정보를 설득력 있게 잘 조합해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한 평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질문의 형태와 원하는 답의 형태가 바뀌었습니다.‘대한민국의 국보 1호는?’이라는 문제는 ‘왜 남대문이 대한민국의 국보 1호인가?’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문제의 답은 단 하나만의 정답이 존재할 수가 없지요. 따라서 하나만의 정답에서 여러 개의 다양한 답을 도출하는 것으로 답변이 바뀌게 되었고, 다양한 답변 가운데 가장 설득력이 높은 답변이 최우수 답변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그래서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우선적으로 배양해야 할 능력은 무엇일까요? 널려 있는 수많은 정보를 설득력 있게 조직화할 수 있는 능력, 바로 창의적 사고력입니다. 그렇다면 창의적 사고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턱대고 창의적 사고력을 기르자고 하면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그러나 창의적 사고력을 구성하는 요소를 하나하나 잘게 나누어 익혀 나간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민감·유창·융통·독창·정교성 다져야 표는 창의적 사고력의 대표적인 요소 5가지를 적어 놓은 것입니다. 민감성을 높이기 위해 쉽게 할 수 있는 활동 가운데 하나는 ‘숨은 그림 찾기’입니다. 숨은 그림을 찾아내려면 선이나 곡선 등의 작은 변화와 그 선들이 만들어 내는 형태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이 활동이 잘 되면 이제는 주변 환경 내에서 숨은 그림 찾기를 응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학습 도구들도 형태만, 그림자만, 색채만 고정시켜 놓고 보아도 새로운 것이 찾아집니다. 브레인스토밍이나 생각 이어가기는 유창성의 예입니다. 아무런 제약 없이 떠오른 대로 얘기하거나 한 단어로 시작해서 연상되는 단어를 가능한 많이 이야기해보는 방법입니다. 융통성은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물건을 이어서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물과 휴지를 함께 놓으면 젖어서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물휴지가 될 수도 있지요. 독창성 영역은 기존의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는 겁니다. 냉장고를 새로운 방식으로 보면 에어컨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정교성은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인 생각을 구조화되고 세밀하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떠오르는 생각을 말로 해 보거나 글로 적어보면 좋습니다. 특히 글로 적은 것을 하루나 이틀의 간격을 두고 다시 보면서 첨가를 해 나가는 방법은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남대문이 왜 대한민국의 국보 1호인가?’라는 문제를 다섯 가지 창의적 사고 영역으로 나누어 아이들과 함께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물어 봤을 때는 볼 수 없었던 깜짝 놀랄 만한 답변들이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 ‘논현동 의화빌딩’ 서울 건축 대상

    ‘논현동 의화빌딩’ 서울 건축 대상

    서울시는 6일 ‘제25회 서울시 건축상’ 대상에 강남구 논현동 ‘의화빌딩(7th Heaven Building)’을 선정했다고 밝혔다.‘의화빌딩’은 성냥갑 모양처럼 획일적인 형태가 아니라 각 층을 불규칙한 형태로 만든 독특한 외관으로 색다른 도시 풍경을 보여 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면적 4971㎡의 이 빌딩은 지하 3층 지상 6층 규모다. 부문별 본상 수상작 중 비주거부문에는 주차장 공간을 재개발해 학생 중심의 공간을 새로 마련한 ‘고려대학교 하나스퀘어’가 뽑혔고, 주거부문에는 ‘방배동주택’이 선정됐다. 리모델링부문에서는 ‘동덕여대 학생회관’, 야간경관부문은 국보 제1호인 ‘숭례문’이 각각 본상을 수상했다. 이밖에 장려상 19작품과 특별상 등도 발표하고,10일 오후 2시에 옛 서울역사에서 시상한다. ‘서울시 건축상’은 디자인 등이 우수해 예술적 가치가 높고 기술적 수준이 탁월한 건축물에 주는 상이다. 수상작 사진은 옛 서울역사에서 8일부터 전시된다.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29)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다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29)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다Ⅲ

    1624년 2월10일 이괄이 서울로 입성한 직후, 도원수 장만은 관군을 이끌고 서울을 향해 달렸다. 장만은 초조했다. 반란군에게 도성을 내주고 국왕으로 하여금 파천 길에 오르게 만든 일차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장만은 파주 혜음령(惠陰嶺)에 이르러 부원수 이수일(李守一)과 남이흥, 정충신 등 장수들을 불러모아 작전 회의를 열었다. 장만은 두 가지 계책을 제시했다. 서울로 달려가 결전을 벌이든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남쪽에서 원군이 오기를 기다려 세력을 키운 뒤 공격하자는 안이었다. 그는 사실 지구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관군 승기 잡자 관망하던 민심 돌아서 정충신은 지구전에 반대했다. 그는 즉시 서울로 달려가 안현(鞍峴)을 장악하자고 주장했다. 높은 고개를 차지하여 진을 친다면 도성을 내리누르게 될 것이고, 관망하고 있는 도성 백성들도 관군 편으로 붙을 것이라고 했다. 또 반란군이 공격해와도 지형의 이점 때문에 승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장만은 정충신의 계책을 받아들였다. 관군은 안현을 향해 내달렸다. 정충신이 제일 먼저 연서역(延曙驛, 지금의 은평구 역촌동)을 통과하여 안현에 도착했다. 그는 정상으로 달려 올라가 봉수대를 지키는 병사를 생포했다. 정충신은 평상시의 봉화(烽火)를 올리도록 하여 이괄의 진영에서 안현이 탈취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이윽고 관군의 병력이 속속 안현으로 집결했다. 때마침 동풍이 크게 불어 이괄 진영은 관군이 안현으로 모여드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에야 이괄은 관군이 안현을 접수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는 느긋했다. 이미 승승장구해온 터라 관군을 가볍게 보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이괄은 항왜들을 이끌고 연서역으로 나아가 장만을 생포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한명련(韓明璉)은 도성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안현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민심을 얻어내자고 건의했다. 이괄의 반란군은 부대를 둘로 나눠 안현을 향해 진격했다. 한명련이 항왜 수십 명과 정예 포수를 이끌고 선봉에 서고, 이괄은 중군이 되어 싸움을 독려했다. 아침 6시쯤부터 격전이 벌어졌다. 도성의 백성들은 성이나 높은 곳에 올라가 두 진영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전황은 밑에서 위쪽으로 공격하는 반란군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화살과 총탄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더욱이 장만 등은 도성을 내준 것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도 분전했다. 오전 11시쯤까지 이어지던 싸움의 중간에 바람의 방향마저 바뀌었다. 반란군 쪽으로 서북풍이 불었다. 관군은 승기를 잡았다. 반란군 진영에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많은 수가 안현을 향해 기어오르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 한명련도 화살에 맞은 뒤 퇴각했다. 전투 장면을 구경하던 도성 백성들은 반란군이 수세에 몰리자 돈의문(敦義門)과 서소문(西小門)을 닫아 버렸다. 관망하던 민심의 향배가 정해진 것이다. 퇴로가 막힌 반란군은 숭례문 쪽으로 향하거나 마포 서강(西江) 방면으로 도주했다. 여염으로 숨어 들어간 자들도 있었다. ●기익헌 등이 반란군 지휘부 9명 죽여 2월11일 밤 아홉시 무렵, 이괄과 한명련은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서울을 탈출했다. 다음날 새벽 삼전포(三田浦)를 경유하여 광주(廣州)까지 달아났다. 이괄은 광주목사 임회(林檜)를 살해하고 경안교(慶安橋)라는 곳에서 병력을 수습하려 했다. 12일 아침, 정충신 등이 병력을 이끌고 추격해 왔다. 안현에서 패한 이후 반란군은 이미 기세가 꺾였다. 얼마 되지 않는 관군의 공격에 변변하게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괄은 고작 60여명 정도의 기병만 거느리고 다시 이천(利川) 쪽으로 달아났다. 이괄을 따라가던 흥안군은 광주 소천(昭川) 쪽으로 도주했다. 관군 또한 지쳐서 추격을 멈추고 있을 때, 이괄의 진영에서 포수 한 사람이 도망쳐 왔다. 그는 반란군 내부에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려고 시도하는 자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자중지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튿날 새벽 정충신이 관군을 이끌고 이천 묵방리(墨坊里)에 당도했을 때 상황은 이미 종료되었다. 반란군 가운데 기익헌(奇益獻) 등이 이미 이괄과 한명련 등 지휘부 아홉 명을 살해한 상태였다. 한명련의 아들과 조카만 간신히 달아나고 반란군은 궤멸되었다. 흥안군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여염으로 숨어들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돈화문 앞에서 살해되었다. 한남원수(漢南元帥) 심기원(沈器遠)과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이 ‘흥안군이 선조의 아들이고 인조의 숙부지만 참역(僭逆)에 가담했으니 아무나 죽일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죽였던 것이다. 흥안군은 이괄에 의해 추대된 지 불과 4일 만에 몰락하고 말았다. 인조 일행은 안현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천안에서 들었다. 하지만 13일 새벽, 도주하던 적이 달려들 것을 우려하여 공주로 들어갔다.2월15일, 참수된 이괄의 머리가 공주에 도착했다. 인조와 신료들은 군용(軍容)을 벌여놓고 이괄의 수급(首級)을 받는 의식을 거행했다. 반정을 일으켜 어렵사리 잡은 권력을 1년이 채 못 되어 내놓을 뻔하다가 다시 잡는 순간이었다. ●난의 후유증 인조는 2월18일 공주를 출발하여 22일에 서울로 귀환했다. 난민들이 불을 질러 창경궁이 불탔기 때문에 인조는 경덕궁(慶德宮)으로 들어갔다. 도성은 엉망이었다.“모든 재물이 바닥나서 열흘 먹을 저축도 없는 상황”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민심이 흉흉한 것이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였다. 며칠 사이에 궁궐의 주인이 바뀌었다가, 다시 바뀌면서 처참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이미 파천하기 직전인 2월7일, 인조 정권은 옥에 갇혀 있던 정치범들을 즉결 처분했다. 광해군때 정승을 지냈던 기자헌(奇自獻)을 비롯하여 역모 가담 혐의를 받았던 37명의 목을 베었다. 이들은 의심은 받았지만, 혐의를 부인하고 있었던 데다 심문도 채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이원익이 “기자헌은 반역에 가담한 죄상이 없는 데다 폐모론에도 반대했다.”고 애써 변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반정공신들의 여유를 빼앗아 갔다. 격변의 와중에서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백성들도 적지 않았다. 안현 싸움에서 패한 이괄군이 도주하기 전에 80여 명을 학살했고, 관군이 서울을 접수하면서 다시 처참한 학살이 빚어졌다. 좌의정 윤방(尹昉)은 인조에게 ‘적에게 붙었던 백성 가운데 자신이 처단한 사람만 200명’이라고 보고했다. 백성들 가운데는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여 ‘반란군의 머리’라면서 수급을 가져다 바치는 자들이 있었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이괄이 도성을 점령했던 동안 서울의 민심은 인조정권에 몹시 적대적이었다. 백성들은 이괄군을 맞이하고, 창경궁에 불을 지르고, 내탕(內帑)을 훔치고, 반정공신들의 저택을 점거했다. 인조반정 성공 직후 자살한 박승종(朴承宗) 집안의 노비들은, 대가가 서울을 나가자마자 반정공신 김류의 집을 접수했다. 박승종의 며느리는, 역시 공신 가운데 실세였던 이귀의 집에 들이닥쳐 문을 봉해버렸다. 반정 직후 김류가 박승종의 저택을, 이귀가 박승종의 아들 박자흥(朴自興)의 저택을 차지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인조가 환도한 뒤 또 다른 보복이 자행되었다. 서울을 비운 사이에 피해를 당한 관인이나 사대부들은 환도하자마자 의심나는 대상자들을 포도청에 고발했다. 그 때문에 ‘포도청의 감옥이 가득 찼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아예 직접 대상자들의 집으로 쳐들어가 재물을 약탈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괄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인조정권은 여러 면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논공행상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괄로 하여금 거병하게 만든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였다. 후금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와중에 내란을 치르면서 조선의 군사적 역량은 심하게 훼손되고 말았다. 인조정권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민심을 수습하고 국방력을 재건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남대문주차장 관광객 중심으로

    남대문주차장 관광객 중심으로

    주차난이 심각한 남대문시장 주변이 이르면 8월부터 관광객 중심의 주차공간으로 바뀐다. 서울시는 22일 서울의 대표적 재래시장인 남대문시장을 찾는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주차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현재의 주차시설을 대폭 손질하는 종합개선대책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시는 숭례문 동쪽에 있는 관광버스 전용 무료 주차공간(3면)을 유료로 전환하고, 대한화재 본사 앞에 만든 관광버스 전용 주차공간을 화물 전용 주차장으로 바꾸면서 규모도 5면에서 10면으로 확장하기로 했다. 외국인 관광객 탑승 차량은 숭례문 동쪽 주차공간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대한화재 앞에 주차하면 요금을 할인받는다. 또 남대문시장 앞 버스 정류장에 외국인 관광객 탑승버스를 위한 정차공간 2면을 새로 만든다. 퇴계로쪽 인근 지역에는 외국인 관광버스에 한해 주간시간(오전 9시∼오후 8시)에 정차할 수 있도록 서울지방경찰청과 협의를 할 계획이다. 시는 매일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단속공무원, 주차단속 카메라 등으로 특별 단속할 방침이다. 단속 대상은 이중 주차, 버스전용차로변 화물 조업, 불법주정차, 택배차량 장기 주차, 번호판 가림 등이다. 시는 또 지방상인, 쇼핑객 등을 수송하는 대형 버스를 위한 전용주차장 개설을 검토 중이다. 이 전용주차장은 대형버스 50대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인근 적정 부지를 매입해 조성할 계획이다. 시는 남대문시장 현대화 사업 기본계획을 수립할 때 이를 고려하기로 했다. 숭례문 동쪽의 무료 관광버스 주차장은 현재 승용차와 화물 차량이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어 관광버스들이 남산순환로와 서울역 고가차도 밑에 불법 주차하는 등 교통혼잡을 야기하고 있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28)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다 Ⅱ

    [병자호란 다시 읽기] (28)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다 Ⅱ

    인조반정을 일으키던 당일, 대장 김류는 미적거렸다. 성공 여부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2경에 모이기로 했던 약속을 어겼고, 그가 나타나지 않자 반정군 진영은 동요했다. 바로 그 때 군사들을 다잡아 대오를 안정시킨 사람이 이괄이었다. 반정 성공 직후 ‘이괄이야말로 병조판서 감’이라는 칭송이 있었지만 병조판서는커녕 궁벽진 변방으로 발령이 났다. 이등공신으로 녹훈하여 불만을 돋우더니 ‘역모를 꾀하고 있으니 잡아들여야 한다.’는 소식까지 날아들었다. 이괄은 막다른 골목에 몰렸던 것이다. ●이괄군의 승승장구 자신을 잡아가려고 금부도사가 영변(寧邊)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이괄은 구성(龜城)에 있던 순변사(巡邊使) 한명련(韓明璉)을 시켜 자산(慈山)으로 출격하게 했다. 이윽고 금부도사와 선전관이 당도하자 그들을 난자한 뒤 불 속에 집어 던졌다. 이어 자신도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괄은 안주를 우회했는데, 그곳에는 상관인 도원수 장만(張晩)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산에서 한명련의 부대와 합세했다. 당시 삼남에서 선발된 병력과 평안도 군병의 대부분이 이괄의 휘하에 있었다.1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안주의 장만은 허를 찔린 셈이 되었다. 반란군을 정면에서 막지 못하고 뒤에서 추격해야 하는 형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반란군은 1월28일 상원(祥原)을 지나 2월1일에는 수안(遂安)으로 접어들었다. 황주(黃州)의 신교(新橋)에 이르렀을 때 정충신(鄭忠信)과 남이흥(南以興)이 이끄는 진압군이 막아섰다. 두 장수가 역순(逆順)의 도리를 내세워 반란군을 선무하자 이괄 진영에서는 동요가 일어났다. 하지만 선봉을 맡은 항왜(降倭)들이 칼을 휘두르며 돌격하자 진압군은 싸우지도 못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항왜란 임진왜란 시기 조선에 귀순했던 일본군과 그 후예들을 말한다. 검술이 뛰어나고 조총을 잘 다루는 데다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하는 용맹한 자들이었다. 이괄 휘하에는 수백명의 항왜가 있었는데 그들이 선봉을 맡음으로써 반란군은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인조와 조정은 당황했다. 내응을 우려하여 서울에 남아 있던 이괄의 인척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다.2월6일에는 이괄의 장인 이방좌(李邦佐)를 참수했다. 이방좌는 이괄이 군대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 주변 사람들에게 ‘사위의 올해 운이 한 번 외치면 만인이 응답하는 형상이라 자신도 부원군(府院君)이 될 것’이라 자랑했다고 한다. 관군은 평산(平山)의 마탄(馬灘)이란 곳에서 다시 막아섰지만 또 패하고 말았다. 방어사 이중로(李重老)가 전사하고 병사들은 대부분 항복하거나 도주했다. 이괄군은 이제 임진강까지 거칠 것이 없었다. ●仁祖, 파천길에 오르다 마탄의 패전 소식이 날아들었던 2월7일, 인조는 밤중에 신료들을 불러모았다. 대사간 정엽(鄭曄)이 서울을 버리고 파천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좌우의 신료들은 서로 돌아만 볼 뿐 다른 말이 없었다. 대신들은 세자에게 분조(分朝)를 이끌게 하자고 건의했다. 이윽고 장유(張維)는 공주(公州)로 가자고 주장했다. 공산성(公山城)이 있는 데다 금강이 흐르고 있어 방어하기에 편리하다는 것이었다. 반정 성공 이후 맞이한 최대의 위기였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에게 훈련도감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적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신경진은 미적거리면서 명을 따르지 않았다. 당연히 군율로 다스려야 할 사안이었지만 인조는 그러지 못했다. 그가 인척인 데다 반정공신이었기 때문이다. 2월 8일 반란군이 임진강을 건넜다는 보고가 날아들었다. 이괄은 관군이 개성에서 저지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항왜 수십명을 앞세워 개성을 우회하여 파주로 진격하게 했다. 파주에서 임진강의 방어를 맡고 있던 목사 박효립(朴孝立)은 이괄의 회유에 넘어갔고 병사들은 달아나버렸다. 밤에 인조는 궁궐을 나섰다. 숭례문에 이르렀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승지 홍서봉(洪瑞鳳)이 하인을 시켜 자물쇠를 부수고 문을 열었다. 한강변 나루에 도착했지만 배가 없었다. 강 건너편에 몇 척의 배가 있었지만 사공을 불러도 오지 않았다.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무사 우상중(禹尙中)이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는 헤엄쳐 건너가서 사공 한 사람을 베고 배를 저어 건너왔다. 곧 이어 전라병사 이경직(李景稷)도 배 한 척을 구해왔다. 배가 도착하자 수행원들이 서로 먼저 타려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위기의 순간에는 임금의 존재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법이다. 이경직이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자 비로소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인조가 배에 올랐지만 배는 한참 동안 강물 가운데 떠 있어야 했다. 인조를 경호할 군사들이 강 건너에 상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겨울 밤의 습기가 몹시 차가웠지만 황망한 와중에 장막도 준비하지 못했다. 인조가 탄 배가 강 가운데 이르렀을 때 도성 쪽에서는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난민들이 궁궐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이괄, 서울에 입성하다 인조의 피난길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반란군이 어가를 쫓아올까봐 전전긍긍하는 상황이었다.2월9일 아침, 인조 일행은 양재역(良才驛)에 도착했다. 유생 김이(金怡) 등이 콩죽을 쑤어 갖고 나와 인조를 마중했다. 김이는 이 때의 공으로 뒷날 의금부 도사(都使)에 임명되었다. 당시 인조의 위기의식이 그만큼 컸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2월9일 한밤중에야 인조 일행은 수원에 도착했다. 위기 상황에 몰리자 대신들은 응급책을 내놓았다. 이정구(李廷龜)와 오윤겸(吳允謙)은 항왜들의 공격을 도무지 막아낼 수 없으니 동래의 왜관(倭館)에서 왜인 1000명을 빌려다가 적을 치자고 했다. 평소 품고 있던 일본에 대한 원한이고 뭐고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인조도 동의했다. 즉석에서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경험이 있는 이경직을 청왜사(請倭使)로 임명했다. 이경직은 문제를 제기했다. 일본군을 요청하려면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알려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보나마나 시간이 지체될 것이고, 또 일본군이 대거 몰려올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인조는 일본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없었던 일로 하라고 지시했다. 위기 상황에서 불거져 나온 해프닝이었다. 2월11일 피난 행렬은 직산(稷山)을 거쳐 천안에 도착했다. 천안까지 밀려왔음에도 도원수 장만으로부터는 이렇다 할 진압 소식이나 승전보가 전해지지 않았다. 더욱이 경기도 일원에서는 명령도 통하지 않았다. 호남에서 강화도로 이어지는 조운로(漕運路)를 탈취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터져나왔다. 인조는 급히 지방의 관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이괄이 지방관을 임명하여 파견할지도 모르니 그들을 베어버리고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2월10일 이괄의 반란군은 마침내 서울에 입성했다. 반란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은 조선시대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괄은 경복궁의 옛 터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이윽고 인조의 숙부인 흥안군(興安君)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흥안군은 일찍이 이괄로부터 언질을 받았기 때문에 인조를 수행하다가 중간에 도주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이귀가 반정 성공 직후부터 ‘흥안군이 수상하니 감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이괄이 승승장구 끝에 도성으로 들어오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휘하로 몰려들었다. 수원부사 이흥립(李興立)도 그 안에 끼어 있었다. 한번 배신하면 계속 배신한다고 했던가?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당일, 반정군이 창덕궁으로 진입하는 것을 방관하여 광해군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던 그였다. 그런 그가 이제 다시 이괄에게 붙은 것이다. 이괄은 지인들을 끌어모아 조정을 꾸리기 시작했다. 반정 이후 세력을 잃거나 소외되었던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이 대목까지는 일단 이괄의 거사가 성공한 셈이었다. 인조 일행은 이미 서울을 버리고 떠났고, 진압군의 존재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1624년 2월, 조선에서는 또 다른 정권교체가 임박한 것처럼 보였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서울성곽 7.66㎞ 복원 추진

    서울성곽 7.66㎞ 복원 추진

    서울시는 9일 올해 안에 사적 제10호인 서울성곽에 대한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고, 본격적인 복원 사업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서울시 관계자는 “서울성곽의 미복원 구간 7.66㎞에 대한 종합적 복원 계획과 북악산 일원의 자연생태에 대한 연구용역을 하반기에 발주할 계획”이라면서 “현재 복원 중인 구간을 포함한 곳과 아직 복원하지 하지 않은 구간까지 포함한 탐방로 조성까지 종합적으로 추진한다.”고 설명했다. 시는 1975년부터 서울성곽 복원사업을 벌여 전체 18.12여㎞ 중 10.46㎞를 복원하고 이를 사적으로 지정했다. 나머지 구간 중 5.14㎞는 흔적을 찾을 수 없고,2.52㎞는 유구(건축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흔적)만 남아 있다. 시는 현재 훼손된 구간 중 복원이 가능한 인왕산 지역 1.5㎞ 중 청와대 뒤편 340m를 복원하고 있고, 올해말까지 350m를 더 복원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청운동∼서대문(강북 삼성병원 인근)∼숭례문∼남산 구간과 광희문(신당동)∼동대문 구간 등은 성곽의 흔적이 사라졌거나, 도로와 건물이 밀집해 있어 복원 가능성 및 방안에 대한 세밀한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에 따라 시는 올 하반기 중 5억원을 들여 민간 연구기관에 용역을 발주한 뒤 결과가 나오는 대로 문화재청에 보고해 승인을 받고 복원사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계획이다. 하지만 아직 복원되지 않은 구간은 사유지 수용이 필요한 곳도 있는데다 큰 석재를 평지에서 산속으로 옮기는 데도 적지 않은 돈이 들 것으로 보인다. 인왕산 구간의 경우 1m 복원 비용으로 600만원 정도가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 관계자는 “서울시 자체 예산 외에도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면서 “이번 성곽 복원사업은 문화재청이 추진하는 ‘서울 역사도시 조성 계획’과도 관련이 있다.”고 정부 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문화재청은 서울 역사도시 조성 계획을 세워 광화문 복원과 광화문 광장(세종로 거리에 조성되는 광장), 서울성곽 복원, 북악산 개방 등을 통해 서울 4대문안 일대를 유네스코의 ‘세계역사도시’로 등재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서울성곽 서울의 내사산(內四山=북악산·인왕산·남산·낙산)을 타원형으로 잇는 성곽으로,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전략적 가림막이자, 조선 시대 수도와 외곽의 경계선으로 활용됐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산업화 등을 거치며 상당 부분이 훼손돼 돈의문(敦義門·서대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숭례문과 동대문 역시 성벽 없는 성문(城門)으로만 남아 있는 상태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서울 4色 탐험-야경 스케치] 시내버스로 즐기기

    [서울 4色 탐험-야경 스케치] 시내버스로 즐기기

    6년 전 외국인 친구가 서울을 찾았다. 나는 친구를 경주와 제주도로 안내했다. 우리는 서울에 살지만, 서울의 매력을 잘 알지 못한다. 잠시 여행한 유럽이나 미국, 일본보다는 더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서울신문이 서울의 매력을 파헤치는 ‘4색(色) 테마여행’으로 독자 여러분을 안내한다. 여행의 주제는 ▲밤 스케치▲역사의 숨결 ▲예술의 향기 ▲박물관 천국 등 서울의 숨은 명소들이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서울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현란한 불빛이 도시를 휘감고 거리마다 젊음이 넘쳐난다. 이런 야경을 저렴하고 편하게 즐기는 방법이 없을까. 정답은 파란색 402번 버스이다. 단돈 1000원(교통카드는 900원)으로 즐기는 1시간짜리 여행이다.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본관 건너편 스타벅스 앞 버스 정류장(시청역)에서 버스를 타면 강북과 강남, 남산의 야경을 ‘한방’에 체험할 수 있다.‘찰칵´하고 추억을 남기고 싶다면 버스에서 과감히 내려도 무방하다. 배차간격이 15분이라 사진을 찍다보면 어느새 다음 버스가 도착해 있으니까. 밤 1시10분까지 버스는 운행된다. 21:00 서울시청 서울시청을 출발한 버스는 서울광장, 청계광장을 거쳐 경복궁에서 유턴한다. 청계천 상징조형물 ‘스프링’(Spring, 세계적 작가 클래스 올덴버그·쿠제 반 브르겐의 공동작업)이 우뚝 솟아 있다. 밝은 조명을 받아 모양, 색깔이 선명하게 보인다. 청계천은 경쾌한 물소리로 도심 속 자연을 한껏 자랑한다. 세종문화회관은 낮에 보던 그 멋 없는 건물이 아니다. 바닥에서 쏘아올린 조명이 건물을 감싸안아 우아한 멋을 뽐낸다. 숭례문도 색동옷으로 갈아입었다. 은은한 자태가 600년 역사를 다정하게 속삭이는 듯하다. 21:20 남산도서관 버스는 어느새 숨을 몰아쉬며 고갯길로 들어선다. 남산 순환도로이다. 자동차가 꽉찬 큰 길을 벗어나자 가슴이 탁 트인다.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N서울타워가 보인다. 색색깔로 변신하는 모습이 매혹적이다. 아파트 건물에 서울타워가 가려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서울타워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남산도서관 정류장에서 내려보자. 남산순환버스 2번으로 갈아타면 남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승용차 통행은 금지하고 있다. 21:30 하얏트호텔 야경의 백미는 후암약수터.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서울시내가 눈 아래로 펼쳐진다. 멀리 꼬리에 꼬리를 문 차량 행렬이 힘겨운 일상을 대변하는 것처럼 애처롭다. 이들은 초초한 듯, 다급한 듯 어딘가로 달려간다. 대형 건물에는 불빛이 요란하지만, 다닥다닥 붙은 주택 단지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다. 고된 하루를 보낸 맞벌이 부부의 한숨이 들리는 듯하다. 일상에서 벗어나 서울야경을 즐기는 내가 ‘선택 받은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얏트호텔이 지나자 내리막길이 나온다. 창문을 열었다. 상쾌한 밤 공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버스는 서울의 과거를 뒤로한 채 미래로 달리고 있다. 21:34 단국대학교 남산을 내려와 한남동으로 향했다. 도로가 확 늘어나면서 대형 간판이 와락 다가온다.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등 피곤할 정도로 요란하다. 저마다 크게, 밝게 자신을 뽐내다 보니 오히려 눈에 띄는 것이 없다. 혼란스럽기만 하다. 한남대교가 강북과 강남을, 옛도시와 신도시를 잇고 있다. 강남의 밤은 화려하다. 강북에서는 어둠 속에서 빛이 도드라지만, 강남에서는 밝음 속에서 어둠이 발견된다. 거리도, 사람도, 불빛도 넘쳐나는 까닭이다. 진정한 밤 여행은 이제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 통신사길 따라 표지석 12개 설치

    통신사길 따라 표지석 12개 설치

    조선통신사 파견 400주년을 맞아 통신사들이 지나갔던 전국 주요 길목 12곳에 표지석이 설치된다. 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는 1일 통신사들이 한양(서울)을 출발해 일본으로 가면서 거쳤던 연고도시 12곳에 이날부터 오는 5일까지 표지석을 세운다고 밝혔다. 표지석은 높이 120cm, 가로·세로 각 50cm 크기의 검은 돌로 ‘조선통신사의 길’이라는 표제아래 ‘이곳은 1607년 조선통신사가 국서를 받들고 지났던 길입니다. 조선통신사 일본 왕래 400주년을 기리고 선린우호정신을 다짐하며 이정표를 세웁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먼저 출발지였던 서울 숭례문앞 표지석을 이날 제막한다. 이어 서울시 양재동, 경기도 용인시, 충북 충주시, 경북 문경시·안동시·의성군·영천시·경주시, 울산광역시, 경남 양산시 웅상읍, 부산시 동래구의 도로변이나 시청 공공건물 앞에 표지석을 5일까지 세운다. 한국체육진흥회와 일본워킹협회가 공동 주최하는 ‘조선통신사 우정의 걷기대회’에 참가하는 두 나라 42명의 참가자들은 이날 숭례문 표지석 앞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행진에 나선다. 이들은 연고도시들을 거쳐 오는 19일 부산에 도착한 뒤 쓰시마로 떠나 일본 주요 연고도시들을 거쳐 도쿄까지 행진할 예정이다.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 남대문시장 50년만에 재개발

    국내 재래시장의 대명사인 남대문시장의 재개발이 추진된다. 현대와 전통의 장점을 살리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서울시는 12일 중구 숭례문 옆 남대문시장을 재개발해 세운상가, 동대문운동장 등과 함께 강북 도심의 활성화를 이끌어 나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연내 `타당성 검토´등 용역 발주시는 이를 위해 올해 안에 3억 20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시정개발연구원이나 민간 전문기관에 재개발사업 타당성 검토와 계획 수립을 위한 연구용역을 발주한다. 일본, 중국 등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진 남대문시장은 오세훈 시장도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대문시장은 1414년(태종 14년) 조정에서 상인들에게 점포를 임대하면서 시장이 형성됐다. 주로 곡물 등 지방 특산물을 거래했다 해방 후인 1958년에는 대지 1만 2000여평, 연건평 3만평 규모의 상가 건물이 세워졌다. 요즘은 1만 172개 점포에 5만여명이 종사하며 의류, 식품, 수입상품 등을 판매한다. 하루 40만명 이상이 찾지만 시설노후화 등으로 경기는 예전만 못하다. 남대문시장을 개발하는 방안은 ▲도심재개발(도시환경정비사업) ▲리모델링(시장현대화사업) ▲재개발 리모델링의 절충형 등 3가지 방식이 거론된다. 서울시는 남대문시장의 특징인 재래시장의 정취를 살릴 수 있게 현대식 건물로 재건축하기보다는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방식을 찾고 있다.●공사 중에도 시장기능은 유지 시는 가급적 재개발이나 현대화를 하더라도 상인들이 영업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 문제는 리모델링 방식은 공사 중에도 상인들이 영업을 할 수 있지만 전면 재개발 방식을 택하면 영업이 불가능하다. 시는 이에 따라 재개발 방안을 선택하더라도 블록을 나눠 시차를 두고 개발하는 순환 재개발 방식을 선택, 시장기능을 존속시키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어떤 방식을 선택하든 공사 중에도 시장기능은 유지될 전망이다.●상인 이견 조율이 관건 남대문시장 현대화의 관건은 이해당사자들의 이견을 조율하는 것이다. 점포수가 1만여개에 달하는 만큼 의견조율이 쉽지 않다. 여기에 세입자 등을 감안하면 더욱 어려워진다.1977년 도심재개발지구로 지정됐다가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해 1988년 재개발지구에서 해제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현재 남대문시장 재개발과 관련, 상인들의 의견을 모을 수 있는 대표기구가 설립이 안된 상태다. 시 관계자는 “남대문시장 재개발은 방식보다는 점포주나 세입자 등의 다양한 의견을 어떻게 수렴하느냐에 성공 여부가 달려 있다.”고 말했다.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