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숭례문
    2025-10-0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040
  • 축소판 세상 만드는 모형 제작의 대가

    축소판 세상 만드는 모형 제작의 대가

    세상을 축소해 과거를 기록하고 미래에 남기는 작은 거인 ‘기흥성’. 올해로 어느덧 모형 제작 인생 46년을 맞는 그는 이 분야에서는 대가로 손꼽힌다. 현재는 아버지와 후학들을 위해 자신의 작품 인생을 총망라하는 박물관을 세우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직접 현장 시찰을 가고 도면을 그려 직원들과 회의를 하는 등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위풍당당하게 현역 생활을 계속해 오는 미니어처 제작의 선구자 기흥성씨를 1일 밤 10시 40분에 방영되는 EBS ‘직업의 세계-일인자’에서 만나본다. 모형 제작 인생 46년. 그는 어릴 때부터 손으로 만드는 것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우리나라에선 모형에 대한 기본 개념조차 서 있지 않았던 1960년대에 모형 제작 일에 뛰어들었다. 건축디자이너는 아니지만 회사 건축부에서 일하던 그는 자신의 스승인 고(故) 김수근 선생의 뜻에 따라 회사 내부에 모형팀을 만들어 전문적으로 모형 제작 일을 시작했고 이후 꾸준히 작업 활동을 이어와 그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자리매김하며 미니어처 제작이라는 외길을 걸어오고 있다. 그래서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모형 제작의 일인자’다. 기흥성씨가 제작한 모형을 보면 우리나라의 발전사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여의도 개발 ▲경부고속도로 ▲독립기념관 ▲88올림픽 주 경기장 ▲상암 월드컵 경기장 ▲영종도 신공항 등 1960~70년대 개발 연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또 허물어지거나 다시 지어진 건물들의 원형 또한 그가 만든 모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건물로 김영삼 정부 시절에 폭파됐던 중앙청의 모형은 건축물로서는 뛰어났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또 2008년 2월 화재로 소실되기 전의 숭례문과 서울역, 서울대학병원 등 많은 건축물이 그의 손에 의해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기흥성씨는 요즘 박물관을 짓는 문제로 바쁜 날을 보내고 있다. 평생 자식들을 위해 사셨던 아버지와 자신의 길을 따라오는 후배들을 위해 박물관을 지어 자신의 46년 작품 세계를 총망라할 계획이다. 4번의 심장 수술을 버텨내며 걸어온 길. 그는 자신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을 계속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당당하게 현역 생활을 이어 나가는 그. 오늘도 그의 손끝에서 또 다른 대한민국의 미래가 만들어진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형의 세계! 미니어처 제작의 선구자 기흥성씨를 만나본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저신용자에 은행문턱 높아… 획기적 대책 필요”

    한국금융연구원은 24일 정부의 불법 사금융 척결방안과 관련, “이번 대책으로 불법 사금융이 얼마나 뿌리 뽑힐지는 미지수”라면서 “저소득층이나 신용불량자 등에 대한 제도권 금융기관의 문턱이 너무 높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연구원은 핫이슈 보고서에서 “따라서 획기적인 서민 금융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 시장의 지적”이라고 밝혔다. 불법 사금융 피해신고가 폭주하자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은 이날 현장방문에 나서 “불법 사금융을 제도권 은행에서 흡수했으면 한다. 저소득, 저신용자의 대출도 취급해달라.”고 강조했다. 서울 역삼동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를 찾은 권 원장은 39%의 고금리에 시달리고 있던 박모(33)씨에게 8.5~12.5%로 대출 금리를 낮출 수 있는 ‘바꿔드림론’을 직접 안내했다. 박씨는 “다니던 회사가 경영난으로 6개월 동안 월급을 주지 않아 고금리 대출을 받게 됐다.”며 “발등의 불만 끌 게 아니라 체계적으로 신용 관리에 신경 써야겠다.”며 상담을 받은 소감을 밝혔다. 이어 KB국민은행 숭례문지점을 방문한 권 원장은 “사금융을 단속하면 새희망홀씨와 같은 서민금융 대출 상품에 수요가 몰리게 된다.”며 “은행들이 저신용자들을 제도 금융권으로 유도하고 실질적 금융지원을 하는 데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병덕 KB국민은행장은 “KB국민은행은 새희망홀씨 대출자가 3개월 동안 연체가 없으면 이율을 0.2% 깎아준다.”며 “12~15%의 새희망홀씨 대출 이율이 최저 5.4%까지 낮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새희망홀씨는 지난해 1조 2000억원에서 올해 1조 5000억원으로 재원이 늘어난다. 불법 사금융 규모는 30조원 대로 추정되지만 새희망홀씨, 햇살론, 미소금융 등 서민금융 상품을 모두 합한 재원이 올해 5조원 대로 확대될 예정이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삼척 ‘목재문화 체험장’ 조성…목공학교 등 2015년 개장

    강원 삼척시 도계읍 심포리 일대에 오는 2015년까지 ‘목재 문화 체험장’이 조성된다. 삼척시는 산림청에서 주관한 ‘2013년 목재 문화 체험장 조성 사업’에 응모해 부지 확보, 사업 타당성, 시설 계획, 사후 운영 관리 등의 부문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사업 시행 기관으로 선정됐다고 29일 밝혔다. 시가 추진하는 크리에이티브 목재 문화 체험장은 내년부터 3년간 연차 사업으로 52억원(국비 80%)의 예산을 들여 목공 체험 학교, 목재 테마 복합전시관, 목(木) 문화촌, 탄광 목광차 등 다양한 체험 시설 및 프로그램을 갖추고 2015년부터 개장에 들어갈 예정이다. 시 관계자는 “목재 문화 체험장이 조성되면 연간 20만명의 체험 방문객 유입이 기대되고 폐광 자립형 개발사업의 하나로 도계읍 일원에 추진 중인 유리 조형 문화관광 테마파크 및 하이원스위치백리조트 사업과 연계해 복합 테마 관광·체험단지 발전이 기대된다.”고 분석했다. 삼척 지역은 2008년 화재로 소실된 국보 1호 숭례문(서울 도성 정문)과 광화문(경복궁 정문) 복원의 중요 목재로 미로면 활기리 준경묘역 일원에서 금강소나무 20그루가 제공되고 삼척국유림관리소에서 최근 한옥 건축용 목재 수요가 증가하는 데 부응하기 위해 도계읍 심포리 일원 국유림 14.5㏊를 ‘한옥 건축용 국산 목재 시범 생산지’로 지정해 관리하는 등 우수한 소나무 목재 생산·공급지로 위상을 다져왔다. 삼척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숭례문 복원공사 석장 이재순

    [김문이 만난사람] 숭례문 복원공사 석장 이재순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석공의 흔적은 역사의 물결처럼 도도하게 흐른다. 백제의 석공 아사달은 신라로 건너와 석가탑을 만들었다. 아내 아사녀는 천리길을 달려와 탑의 그림자를 기다리다 지쳐 연못에 빠져 죽었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아사달은 연못에 다가가 웃는 듯하다가 사라지는 아내의 모습을 앞산 바위에 새기며 뼈 아픈 한을 달랬다. 그러다가 ‘아사녀! 아사녀!’를 외치며 연못에 빠졌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못을 ‘영지’라고 했고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석가탑을 ‘무영탑’이라고 했다. 석공의 슬픈 전설은 지금도 그렇게 전해진다. 이렇듯 신라시대의 석공은 많은 전설과 함께 오늘날의 ‘국보’와 ‘보물’이란 이름으로 우리들과 만나고 있다. 문화재청은 2007년 처음으로 국가중요무형문화재(120호) 석장(石匠) 부문을 신설했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그나마 석공예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이때 석조각 공예가 이재순(57)씨가 국내 최초로 무형문화재 석장이 됐다. 이씨는 김진영 선생의 제자로 경복궁의 석조물을 조각한 이세욱·김맹주 선생의 맥을 잇는 석조각계의 대가였기에 이 계통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씨는 요즘 이에 부응이라도 하듯 숭례문 복원작업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성곽 복원 전체 공정 중 85%가 진행됐고 오는 7월이면 거의 끝날 예정이다. 그는 12살 때부터 돌과 인연을 맺어 올해로 석조각 인생 45년째이다. 지난 26일 오후 경기 구리시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입구에는 10여m 높이의 미륵상을 비롯해 사자상, 부처상 등 수많은 석상들이 놓여 있었다. 모두가 돌이지만 다들 저마다 메시지를 품고 있었다. 완성품도 있었고 아직 덜된 작품도 있었지만 다들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모습들이었다. 꽃샘추위를 담은 바람이 잠시 밀려왔다. 작은 부처상한테 물었다. “춥지 않으세요.”라고 했더니 “바람은 극복하는 것이여.”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에궁…. # 성곽 85% 복원… 옛 석공의 번뇌 읽다 그러는 참에 웃으면서 나타난 이씨와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눴다. 먼저 요새 무슨 일로 바쁘냐고 했더니 숭례문 복원공사 얘기가 나온다. “숭례문 성곽 복원이 85% 정도 완료됐습니다. 숭례문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53m, 서쪽으로 16m의 길이를 대부분 복원했지요. 기나긴 세월의 풍화를 읽으면서 하는 작업이 정말로 간단하지는 않았습니다. 먼 옛날 석공들의 고뇌와 번민 등 그런 부분을 알고 그대로 재현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씨는 석공 선현들의 지혜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숭례문에 쌓아 올려진 돌, 그러니까 오랜 세월을 간직한 유물들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비오는 날이었다. 돌에 구멍이 있었는데 빗방울에 의해 구멍이 뚫렸다. 이 순간 이집트의 신전이 생각났다. 커다란 돌을 옮겼던 기억이었다. 정사각형의 돌 중앙에 구멍을 뚫어 정교하게 자리 이동을 해 벽을 쌓은 것이다. 그 다음에는 숭례문 돌 모양들이 아주 자연 친화적으로 쌓여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 돌 가운데 구멍 뚫어 옮긴 흔적 발견 “숭례문에 있는 돌들은 아무렇게 쌓아 올려진 것이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생각하면서 그에 맞게끔 친자연적으로 어우러져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도석수(都石手)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도편수는 그동안 많이 나왔지만 도석수라는 말은 이번 복원공사에서 처음 알게 됐습니다. 아마 당시 도석수는 지금으로 말하면 5급 관리 정도로 여겨집니다. 또한 돌마다 가진 물과의 관계, 즉 비가 오면 물이 밖으로 새도록 하는 등 아주 과학적이고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특히 돌의 크기가 다 다르다는 점에 눈길이 쏠렸다. 얼핏 보면 부자연스럽고 서로 맞추기도 힘들 법한데 퇴물림 형식으로 쌓아놓은 돌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이씨는 그런 돌을 보면서 한마디, 한마디 묻고 또 물었다. “선조들이 어떻게 돌을 다뤘으며, 또 어떻게 생각했을 것이란 상상을 하는 순간 전율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특히 중간중간에 놓인 장돌들을 볼 때에는 더욱 그랬지요. 위아래에서 누르는 압력을 장돌을 통해 견디도록 하는 지혜에 참으로 경탄했습니다.” 숭례문 복원 공사에 참여하면서 힘든 것은 무엇일까. 잠시 고민하던 이씨는 “(방화사건 직후) 처음에 아직도 가시지 않은 화재의 기운과 접하면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 몇몇이 피부병에 걸렸을 정도였다.”면서 하지만 다들(20여명) 숭례문 복원공사가 새로운 역사를 쓴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작업했다고 술회했다. “따지고 보면 그동안 우리는 문화재를 복원한답시고 기계적으로 손을 대는 바람에 오히려 화재나 사고 등에 대해서는 무심했습니다. 정작 보존과 관리에 대해서는 진정성 없이 다가갔던 것입니다. 아마 숭례문 복원은 이런 것들을 전부 고민한, 새로운 역사를 쓰는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 都石手가 있었음을 처음 알게 돼 이씨는 숭례문 복원 공사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첫째 앞에 언급한 도석수라는 단어였다. 원래 도편수라는 말은 있었지만 도석수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면서 선조의 존엄성을 몸소 느꼈던 것. 또한 부석소(浮石所), 즉 지금의 채석장을 두고 돌 문화 창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새삼 발견했다. 특히 돌을 다듬으면서 비가 올 것을 대비해 정교하게 빗물을 흘려보내는 것까지 생각한 선조 석공들의 지혜의 흔적을 보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을 깨는 방법이나 돌을 다듬는 방법이 정말 과학적이며 친자연적으로 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특히 돌 중앙에 구멍을 뚫어 정교하게 이동시켰다는 걸 알고 놀랐지요. 대체로 돌을 다른 곳으로 옮길 때에는 사방에 밧줄을 연결하게 되는데 이럴 경우 밧줄을 빼는 과정에서 약간의 오차가 생깁니다. 그런데 숭례문의 돌을 보면서 이런 과정까지 염려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흔들림 방지, 비 올 때 물의 흐름까지 생각한 선조 석공들의 지혜를 숭례문 복원 공사를 통해 깨달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이씨는 이런 점을 소중히 메모하면서 후배들에게 전수할 책을 준비하고 있다. “옛날에는 돌을 다루는 것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석공들 또한 자부심이 강했지요.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은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재 가운데 돌이 안 들어간 것이 어디 있습니까. 소중한 것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돌의 미학, 석공의 예술을 책으로 남기려고 합니다.” 이씨가 그동안 제작한 작품은 2000여점에 이른다. 전국의 사찰과 문화재가 있는 곳에는 그의 손때가 대부분 묻어 있다. 뿐만 아니다. 네덜란드 유트리트 박물관, 이탈리아 카라라시청, 일본 덕정사, 타이완 기륭 자항기념당, 프랑스 파리 7대학 등에도 이씨의 작품이 보관돼 있을 정도로 국내외적으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일화 한토막. 2005년 일제가 가져간 북관대첩비(임진왜란 때 정문부를 대장으로 한 함경도 의병의 전승비)의 환수 운동이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문화재청에서 북관대첩비가 환수될 때를 대비해 좌대와 옥개석을 복원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며칠 후 북관대첩비는 무사히 반환돼 남한을 거쳐 북으로 돌아갔다. 이때 북관대첩비는 이씨가 복원한 옥개석을 머리에 인 채 북한 국보 193호로 지정돼 북한으로 갔다. 이씨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돌을 만지는 장인으로서 더없는 영광이 아니냐.”고 말한다. # 선조의 지혜 책으로 펴낼 계획도 이씨는 전남 담양 출신으로 12살 때부터 외삼촌에게 돌을 다루는 기술을 배웠다. 평소 무엇이든 만들기를 좋아했던 그는 팽이, 썰매 등 전통 놀이기구 제작에 솜씨를 발휘했다. 그러던중 1970년 스승 김진영 선생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석공예의 길로 들어섰다. 스승 김씨는 40년간 석조계에 몸담은 베테랑으로 조선 철종, 헌종 시대 경복궁의 해태상 등을 조각한 이세욱 선생과 김맹주 선생의 맥을 잇고 있었다. 이씨는 스승 김씨한테 10년 동안 가르침을 받고 두 번째 스승인 김부관 선생을 따라 불국사 청운교, 백운교 보수작업을 하면서 숙석(熟石) 기법을 배웠으며 그 덕분에 불교미술 대전에서 특선을 수상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돌 분야는 할 일이 많습니다. 현대와 전통을 접목시키는 것도 중요하고요. 사실 이제야 돌을 만지는 사람들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돌은 정직합니다. 화난 사람이 돌을 마주하면 돌도 화가 나 있고, 예쁘게 돌을 보면 돌 또한 예쁜 대답을 합니다. 돌에는 정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도 정이 많잖아요. ” 선임기자 km@seoul.co.kr 열두 살 때부터 돌 잡아 국가주요무형문화재 석장 부문 1호 지정 1956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한학자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다. 12살 때 석공이었던 외삼촌에게 돌을 고르는 일을 배웠다. 문화재 공사현장을 다닌 것도 이때부터. 이후 스승 김진영 선생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석공예의 길로 들어섰다. 두 번째 스승인 김부관 선생한테 돌을 다듬는 숙석(熟石) 기법을 배웠다. 전국 기능인경기대회에서 연속 2회 금메달과 함께 한국문화재기능협회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대한민국 석공예 명장으로 지정됐다. 1995년 타이완의 자항기념당에서 석굴암보다 더 큰 석상을 만들어 화제가 됐다. 현재 부도를 비롯한 석조물의 복원과 정비, 각종 석조물의 해체 및 보수 공사에 참여하고 있다. 특히 성곽의 해체 및 복원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일본 오사카 보암사 석가노미불(1999), 경북 영주 석륜선원 부처 진사리석탑(2000), 네덜란드 유트리트 박물관 기하형체(1977), 이탈리아 카라라시청 소상(1983), 북관대첩비 갑석(2005) 등 2000여점이 있다.
  • 숭례문 복원 나선 번와장·제와장·단청장 이야기[동영상]

    숭례문 복원 나선 번와장·제와장·단청장 이야기[동영상]

    숭례문 복원 작업에서 목공사를 하는 신응수 대목장이 주로 주목받았다면 앞으로는 이들 무형문화재를 눈여겨봐야 한다. 10일 숭례문 복원 현장에서 이근복 번와장과 한형준 제와장, 홍창원 단청장을 만나봤다. ●이근복 번와장 번와란 ‘기와를 덮는 일’로 이근복(62) 번와장은 2008년 10월에 무형문화재로 선정됐다. 경복궁 경회루와 근정전, 홍례문, 창덕궁,덕수궁 등 국보급 1000여동의 건물에 기와를 입혔다. 한옥의 미려한 곡선은 흔히 목공에서 나오는 줄 알지만 사실은 기와를 덮는 일에서 진행된다. 목조 건물의 수명을 결정하는 것도 기와를 덮는 일에서 비롯된다. 잘 마른 목재라도 기와를 잘못 덮어 비가 새면 몇십년 못 가기 때문이다. 아울러 기와를 덮을 때는 적심을 넣어 기와의 곡선을 잡고 흙을 채워 기와를 서로 잇는데 이 과정이 건물의 하중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적심과 흙을 잘못 채우면 건물의 머리인 지붕이 너무 무거워져 건물이 처지기 때문이다. 고건축의 미를 결정하는 주요한 것이 지붕이고, 지붕이 건물의 하중과 수명을 결정한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숭례문 기와 덮기는 빠르면 5월 중순 작업에 들어간다. ●한형준 제와장 1929년생으로 83세인 한형준 제와장은 ‘조선 기와의 맥’으로 통한다. 다소 불편한 몸에도 ‘생애 마지막 작품’이라는 일념으로 일한다. 지난여름부터 지하 100m에서 길어 올린 고운 진흙을 경기 안양시에서 가져와 밟고 다진 후 흙 판으로 기와를 만들어 가마에 굽는 방식으로 전통 기와를 만들어내고 있다. 전통 기와는 가볍다. 또 가마에서 구워내기 때문에 기와의 색깔도 다양한 색조의 잿빛을 선보인다. 기포도 많아 이른바 숨 쉬는 기와, 숨 쉬는 한옥의 원천이 된다. 두달씩 우기가 발생하는 여름이 문제인데 공장에서 찍어내는 기와의 흡습률이 1%에 불과하다면 전통 기와는 흡습률이 12~15%로 높다. 한 제와장과 그의 전수조교 김창대(41)씨는 가마에서 기와를 구울 때 불완전 연소시켜 기와에 탄소 코팅을 씌우는 방식으로 흡습률을 줄였다. 이렇게 만든 기와는 혹한의 날씨에도 깨지지 않고 잘 버티기 때문에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한국형 한옥에 안성맞춤이다. ●홍창원 단청장 숭례문은 1392년 창건돼 1447년에 개축됐고 1479년에 대대적으로 수리됐다. 홍창원(57) 단청장은 숭례문이 조선 초기의 건물인 만큼 단청 또한 조선 초기의 양식으로 가려고 한다. 강진 무위사 극락전의 내부(1440년 전후), 창경궁 명정전(1616년), 수덕사 대웅전(1500년대) 등 단청의 문양과 색깔을 연구해 숭례문 복원 단청에 활용할 예정이다. 조선 초기 단청의 특징은 고려처럼 화려하지 않고, 유학의 영향을 받아 녹색과 청색 위주로 청아하다. 문양은 주로 연꽃잎과 물결무늬 등이다. 값비싼 단청을 입히는 이유는 목조 건물이 병충해나 비바람에 잘 견딜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일종의 페인트인 셈이다. 둘째는 건물에 권위를 입혀 웅장하고 장엄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다. 미학적 욕구는 최하위다. 화학안료가 아닌 천연안료만으로 단청을 하는 첫 사례가 된다. 5월부터 단청 작업에 들어간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숭례문 화재 4년… 12월 제 모습 찾을 듯

    숭례문 화재 4년… 12월 제 모습 찾을 듯

    국보 1호 숭례문이 방화로 문루(門樓)의 상당 부분이 소실된 지 벌써 4년째에 접어들었다. 연초에 품셈(노임)을 둘러싼 건설사와 목수들 간의 갈등으로 숭례문 복구 목공사가 한동안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오는 12월 13일 완공을 향해 목수들과 석수들의 손길이 더 바빠지고 있다. 목공사는 올 4월 중에 끝나야 하는데 최근 변수가 생겼다. 영하 17도까지 떨어진 강추위가 복병이다. 재료들을 조립해야 하는데 이런 추위에는 사고 위험 등으로 엄두를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응수 대목장은 6일 “날씨가 너무 추워져서 숭례문 현장에 못 나가고 최근 2주 동안 목재 다듬기밖에 못했다.”면서 “목공사는 5월이나 되어야 끝날 듯하다.”고 말했다. 신 대목장은 “기와 올리기는 목공사가 끝난 뒤에 하겠지만, 단청은 목공사와 병행해도 큰 무리가 없으니 12월 완공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기와가 올라가야 숭례문은 형태상으로 화재 이전의 모습을 되찾게 된다. 앞으로 남은 작업 중에 관심을 끄는 것은 손으로 빚은 전통 기와와 숯불로 뽑아내는 전통 철물, 손으로 가공한 석재, 천연 안료를 이용한 전통 단청 등이다. 숭례문 복원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통재료와 전통방식으로 하기로 한 데 따른 것이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박원순시장 한양도성 도보 점검

    박원순시장 한양도성 도보 점검

    박원순 서울시장이 31일 한양도성(서울성곽) 전 구간을 둘러봤다. 지난 28일 헬기를 타고 서울 하늘에서 도심을 살펴본 데 이어 이날 직접 서울성곽을 도보로 돌아본 것이다. 순성에는 이상해(성균관대 건축과 교수) 문화재청 세계유산분과위원장과 송인호(서울시립대 건축학과 교수)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한국위원회 사무총장 등 도성 전문가 6명과 서울시 행정 1·2부시장, 도시계획국장 등이 동행했다. 성 살펴보기는 이날 오전 6시 50분 숭례문에서 시작했다. 그는 숭례문과 동대문플라자(DDP) 공사 현장, 성북동 한옥마을과 수성동 계곡 복원 현장도 들렀으며, 서울 전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도시개발 현장도 함께 살폈다. 특히 관심을 보인 것은 성곽 복원. 박 시장은 2014년을 목표로 복원 중인 서울성곽에 대해 함께 동행한 전문가들에게 세계문화유산 등재 방안과 도성의 지속 가능한 보존 방법 등을 물었다. 그는 “서울성곽을 걸으면서 전문가와 시민 대표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산하에 사업단을 만들기로 결심했다.”면서 “단순히 성곽을 복원하고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민이 즐기고 사랑할 수 있고 주변 활성화까지 이룰 수 있도록 차근차근 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서울성곽 바로 옆에 위치한 시장 관사에 대해서도 “오늘 답사를 해 보니 관사 위치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면서 “미리 알았더라면 애초에 관사에 입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관사 이전을 고민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일제강점기에 파괴된 서울성곽을 복원 중인 서울시는 현재까지 12.3㎞ 구간을 원형 복원했다. 도로나 주택이 들어서 원형 복원이 어려운 5.1㎞ 구간은 상하부 형상화로 성곽을 단절 없이 잇는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서울성곽을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성곽에서 도심을 내려다보며 도시 계획도 세웠다. 그는 도로를 내면서 길이 완전히 끊어져 버린 혜화문 옆에서는 “도시계획이 주변 환경을 잘 반영하지 않는 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앞으로는 도시계획 단계부터 현장을 여러 각도에서 직접 둘러보는 정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조현석·강국진기자 hyun68@seoul.co.kr
  •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절도범 15년 구형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훔쳐 은닉, 훼손해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배모(49·경북 상주·고미술수집상)씨에 대해 검찰이 이례적으로 징역 15년의 중형을 구형했다.<서울신문 2011년 11월 26일자 8면,12월 5일자 10면> 대구지검 상주지청 박순영 검사는 26일 대구지법 상주지원에서 열린 결심공판에서 “배씨가 범행을 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해례본의 소재에 대해서 밝히지 않고 오히려 범행을 부인하는 등 죄질이 나쁘다.”며 중형이유를 밝혔다. 지난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의 범인 채모(70)씨는 징역 12년 구형에,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박 검사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가치는 숭례문만큼이나 가격을 따질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라는 문화재청의 의견을 구형에 참고했으며, 모든 우리 문화재는 소중하지만 특히 훈민정음이 지니는 가치는 어떠한 문화재보다 월등한 것이라는 점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배씨는 2008년 경북 상주 시내에서 골동품상을 운영하는 조모(66)씨 가게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훔친 혐의를 받고 있다. 조씨는 배씨를 상대로 반환 민사소송을 제기, 지난해 6월 “원소유주인 조씨에게 돌려주라.”는 대법원 판결을 받았다. 검찰은 배씨가 판결에도 불구, 상주본을 반환하지 않자 구속 기소했다. 박 검사는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문화재보호법을 위반한 대형 범죄가 별로 없어 참고할 사건이 드물었으나 유사 사례로 4년 전의 숭례문이 있다는 점을 참고했다.”면서 “숭례문 방화범의 경우 70세라는 고령인 데다 범행 후 반성하고 뉘우치는 점이 있었으나 이번 훈민정음 상주본 사건의 경우 피고인이 범행을 부인한 점 등을 구형에 참작했다.”고 말했다. 문화재청 강신태 사범단속계장은 “검찰의 중형 구형은 훼손되고 있을지도 모를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하루빨리 국민 품으로 되돌리려는 의지를 보여 준 것”이라고 말했다. 선고공판은 다음 달 9일 오전 10시 상주지원에서 열린다. 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용어 클릭] ●훈민정음 해례본 세종 28년(1446년) 훈민정음 반포와 동시에 출간된 한문 해설서다. 세종의 명을 받아 창제 동기·의미·사용법을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엮었다. 33장 1책의 목판본인 해례본은 문화재 전문가들 사이에서 값을 따질 수 없는 ‘무가지보’로 평가된다.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백운화상초록불조 직지심체요절’이 1조원 이상으로 평가된 전례에 비춰 그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는 감정도 나오고 있다.
  • “중요 문화재복구, 전통방식으로 작업”

    중요 국가 문화재의 복구·복원은 전통적인 자재와 도구를 이용해 전통 방식 그대로 작업하게 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문화재 복구·복원은 전동 공구를 사용한 비전통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에 따라 앞으로 복구·복원은 ‘전통 품셈’(노임)과 ‘기계 품셈’으로 엄격히 나누어 발주된다. 최종덕 문화재청 문화재보존국장은 13일 서울신문기자와 만나 “문화재 복원·복구와 관련해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방식은 전통적인 자재, 도구, 방식을 이용하는 것”이라며 “1974년 전통방식에 의한 목수 품셈을 마련해 놓고도 그대로 적용하지 못한 것이 숭례문 복구공사 중단과 같은 사태의 단초가 됐다.”고 말했다. 전통 방식으로 품셈을 잡아놓았지만, 문화재 복원 및 복구공사에서 전동공구가 도입돼 공공연하게 사용된 것은 1960년대 말부터라는 것이 최 국장의 설명. 전동공구가 문화재 복구에 쓰였는데도 수십 년 동안 문화재청이 묵인한 것이 문제였다고 최국장은 덧붙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결국 2010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광화문 복원 공사에서 왜 기계 대패 등을 사용하느냐.”라는 질의를 통해 공론화됐다. 최 국장은 “결국 2010년 전통방식에 의한 목공사와 전동공구를 활용한 목공사의 품셈을 나누어 적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새 품셈표를 복구 작업에 적용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재 복구 현장에서 30~40년 동안 관행처럼 전동공구를 활용해 왔는데, 관행을 단번에 뒤집고 전통 도구에 의한 전통 방식을 적용하면 목수 등 현장의 반발과 혼란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숭례문 복구 목공사의 경우는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됐고, 문화재청이나 시공을 맡은 명헌건설, 신응수 대목장 등이 모두 전통도구를 활용한 전통방식을 고집했기 때문에 실제 전통방식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최 국장은 “올해부터 발주 단계에서 전통방식의 품셈을 적용할지, 기계품셈을 적용할지를 분리해 결정하고, 전통방식의 품셈을 단계적으로 확대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문화재청은 ‘손으로 만든 기왓장’이나 ‘숯불로 만든 못’과 같은 전통기법의 전승자들이 거의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 기법과 재료의 복원도 추진할 계획이다. 그는 “숭례문 복구 목공사와 관련해 대목장, 목수들과 갈등을 겪었지만 어차피 한번은 겪고 넘어가야 할 진통이었다.”면서 “숭례문 복구가 향후 문화재 복원·복구의 원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박세리 골프클럽·88올림픽 굴렁쇠 등 문화재로”

    “박세리 골프클럽·88올림픽 굴렁쇠 등 문화재로”

    1998년 7월 US여자오픈 골프 대회에서 맨발 투혼을 보여준 박세리의 골프 클럽이 ‘문화재’로 등록된다. 김찬 문화재청장은 12일 신년기자간담회에서 “올해부터 ‘예비문화재’(가칭) 인증제도를 도입해 만든 지 50년이 지나지 않았다 해도 첨단 산업기술 분야나 각종 국제경기대회 우승 관련 스포츠 유물 중 미래에 가치가 있을 문화재를 확보해 나가겠다.”며 “박세리의 골프 클럽을 비롯해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사용한 굴렁쇠,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붉은악마가 사용한 대형 태극기 등 국민적 주목을 받은 스포츠 유물을 ‘문화재’로 등록하겠다.”고 밝혔다. ●2002년 붉은악마 대형 태극기도 등록 이에 따라 휴대전화나 자동차, 화장품, 의약품 등 근·현대 산업기술 분야 최초의 국산품이나 현대 건축가의 건축물, 주요 국제행사 관련 유물, 우리의 문화 전파력이 우수한 분야의 작품이나 유물 중에서 상징성이 큰 것을 우선 예비문화재로 인증키로 했다. 이를 위해 문화재청은 올해 안에 예비문화재 인증 대상과 기준을 마련하고 그중에서도 산업기술과 체육, 한글 분야 예비문화재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기로 했다. 나아가 문화재청은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보호협약 제정(2003.10.17)과 중국의 무형유산법 제정(2011.2.25) 등에 대비하는 한편 무형문화재 진흥활성화를 위해 무형유산 보존 육성을 골자로 하는 법률을 별도로 제정키로 했다. 기술이나 예능 위주의 무형유산 범위를 한의학, 농경과 어로에 대한 전통지식 등으로 확대해 포괄한다. 또한 무형문화재 보유자의 인정 연령제를 도입해 만 80세가 넘으면 명예보유자로 전환한다. 아울러 문화재청은 ‘국민편의 증진을 위한 발굴제도 개선’ 차원에서 보존조치한 유적에 대한 재평가와 더불어 이에 따른 유적 정비·활용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문화재 현장관리 인력 1000명 투입 문화재청은 또한 국가지정문화재의 재난예방 관리인력으로 1000명을 투입한다고 밝혔다. 관리인력을 배치하는 곳은 지방의 서원 등 597곳이다. 문화재청은 화재를 비롯한 각종 재난으로부터 국보나 보물 등 중요 목조문화재를 지키고자 121곳에 안전경비 인력 362명을 24시간 배치하고, 산간 오지나 폐사지(廢寺址) 등의 관리가 취약한 문화재 476곳에는 관람환경 개선 등을 위한 특별관리인력 638명을 배치한다고 덧붙였다. 이 중에서도 안전 경비인력 배치사업은 2008년 숭례문 화재 이후 방화관리자격증 소지자나 문화재 안전경비 경력자, 문화재 관련 교육 이수자를 우선 채용하며 이들은 지역 여건에 따라 24시간 2교대 또는 3교대로 근무한다. 이들에게 지급하는 급여는 월 140여만원(2교대 기준)이고, 특별관리 인력은 하루 8시간 근무하고 월 114만원을 받는다. 문화재청은 이번 사업이 지역사회의 중·장년층과 취약계층의 일자리 창출 효과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채용 문의는 기초자치단체 문화재 담당 부서로 하면 된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서울신문 보도 그후] 숭례문복원 목공사 한 달여 만에 재개

    문화재청은 9일 목수들 노임 문제로 한 달째 중단된 숭례문 복원 목공사를 10일부터 재개한다고 밝혔다. 시공사인 명헌건설㈜과 실제 복원을 맡은 신응수 대목장이 기존 계약대로 공사를 재개하기로한데 따른 것이다. 신 대목장은 이날 전화통화에서 “목공사 노임이 명헌건설과 애초 계약했던 3억 8500만원보다 이미 지난해 12월 초에 1억원 이상 늘어난 것을 감안하면 4월까지 공사할 경우 더 늘어날 텐데 추가되는 노임을 받지 않더라도 일을 진행하겠다.”면서 “숭례문 목공사 전체를 기부하겠다고 서울신문에 밝힌 마당에 더 이상 목수들의 노임을 가지고 계속 갈등한다면 서로 상처만 입게 돼 이 같은 결정을 했다.”고 말했다. 신 대목장은 “다만 이후에 들어오는 나무들은 통나무가 아니라 제재목으로 들어오는 방향으로 명헌건설과 협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 대목장은 8일 오후 3~6시 3시간 동안 최종덕 문화재청 문화재보존국장과 면담하고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최 국장도 “공정이 한 달여간 중단된 상태였지만 문화재청과 공사 관계자들은 국민의 관심사인 숭례문 복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현 시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이같이 결정했다.”고 말했다. 최 국장은 숭례문 복구 목공사가 당초 예정한 대로 4월 말 완료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숭례문 복구는 크게 성곽 복원과 문루 복구공사로 구성되며 이 중 문루 복구는 목공사, 기와공사, 단청공사로 진행된다. 현재 목공사는 1층 조립과 2층 목재 가공을 70%가량 완료한 상황에서 지난달 8일 이후 중단된 상태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불탄 숭례문 복구에 나와 목수들 ‘품’ 기부”

    “불탄 숭례문 복구에 나와 목수들 ‘품’ 기부”

    신응수(70·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은 6일 자신이 목공사를 맡고 있는 숭례문 복구 공사 중단과 관련해 “불탄 숭례문을 복구하는 데 내 품은 물론 내 목수들의 품까지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신 대목장은 이날 서울 종로구 창성동 자신의 ㈜한국전통건축 사무실에서 서울신문 기자와 단독 인터뷰를 갖고 “나와 내 목수들이 돈 몇 푼 더 받으려고 문화재청과 싸우고 있는 것처럼 국민에게 비치는 것이 안타깝다.”면서 “평생 목수 일로 먹고살았는데 내 목수들의 품값은 내가 떠맡을 수 있다.”고 밝혔다. 신 대목장은 “숭례문 복구 공사비가 약 170억원인데 목수의 품값은 2~4%에 불과하다.”면서 “명헌건설이 설계 변경을 이유로 품값을 줄이겠다면 아예 내가 품값을 다 떠맡고 목공사를 국가에 기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신 대목장은 2009년 말 복구 공사에 참여할 당시 자신의 품값은 받지 않겠다고 문화재청에 낸 제안서에서 밝힌 바 있다. 신 대목장은 목수들의 노임 산정 논란과 관련해 “문화재청에서 내 목수들이 전통도구와 방식에 낯설고 숙련되지 않아서 노임이 늘어났다고 지적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면서 “통나무를 도끼로 다듬어서 목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품이 더 든 것”이라고 반박했다. 신 대목장은 “1962년 정부가 작성한 목수들의 품셈으로는 150년 전 경복궁 중건 방식과 같은 지금의 숭례문 복구 공사 품값을 도저히 맞출 수 없다.”고 지적했다. 문화재청은 명헌건설과 167억 8500만원(목재비 포함 목공사 부문 15억 7800만원)에 시공사로 계약했고, 명헌건설은 신 대목장을 직원으로 영입한 뒤 신 대목장에게 목공사 부문을 13억 2300만원에 맡겼다. 명헌건설은 설계 변경을 이유로 목공사 비용을 10억원으로 낮췄으며, 5억 4000만원이던 목수들의 품값도 3억 8500만원으로 축소한다고 지난해 12월 초 통보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계약엔 손질된 각재 쓰기로 돼 있어…원목 손으로 다듬으면 노임 더 들어”

    “계약엔 손질된 각재 쓰기로 돼 있어…원목 손으로 다듬으면 노임 더 들어”

    “170억원에 달하는 숭례문을 복구하는 국보 일을 하면서 나와 목수들이 돈 몇 푼 더 받으려고 문화재청하고 싸우는 것처럼 비치면 국민들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차라리 이미 받은 노임 3억 8000만원을 돌려주고, 목공사를 국가에 기증하겠습니다.” 신응수(70·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은 숭례문 복구 공사 중단 보도가 나간 6일 오후 기자와 단독으로 만나 그동안 답답했던 속을 털어놨다. 신 대목장과의 인터뷰는 서울 종로구 창성동 신 대목장의 ㈜한국전통건축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일문일답. →숭례문 목공사가 중단된 이유는. -지난달 1일 목수 노임 1억 6000만원이 연체됐다는 공문을 보냈다. 4월까지 목공사를 다 마치면 2억 3000만원의 노임이 더 들게 되는데 이에 대한 대책도 요구했다. 목수 노임에 대한 명헌건설과의 계약이 당초 5억 4000만원이었다. 답신은 그달 19일에 왔는데, 설계가 변경됐기 때문에 전체 노임은 3억 8000만원이라고 했다. 만약 시공사 측 주장대로 하면 노임은 벌써 1억원이 초과된 상태다. 연체된 노임을 지급할 수 없는 상황이라 일을 더 못 하게 됐다. →문화재청 보도 자료를 보면 명헌건설과 신응수 대목장의 계약이 13억 2300만원이라고 돼 있던데. -그것은 목재를 포함한 가격이다. 문화재청에서 명헌건설에 공사를 맡길 때 목공사의 당초 계약은 약 13억원이었지만 설계가 변경돼 10억원으로 줄어들었다. 10억원 중 목재 가격이 6억 8000만원이고, 노임은 3억 8500만원에 불과했다. 167억 8500만원짜리 복구 공사에서 목수들 노임 3억 8500만원 때문에 공사가 중단됐다는 것은 기가 막힌 일이다. →그렇다면 노임은 예정보다 왜 더 늘어났나. -1962년 숭례문 증수 공사가 있었는데 나도 20살 언저리에 그 공사에 참여했다. 그때 적용한 품셈표가 지금도 적용되고 있다. 50년 전에는 각재를 켜 가지고 온 1차 가공 목재를 목수들이 손으로 파고 깎고 했다. 서까래 대자귀질도 했다. 이번 숭례문 목공사는 가공이 안 된 통나무에 도끼질을 해서 나무를 다듬는 방식이다. 지금 숭례문 복구 방식은 150년 전 경복궁 복원(1865~1868) 때의 방식과 같다. 통나무 다듬기부터 시작하니 하루에 해야 할 일이 3일이나 더 걸리는 것이다. →명헌건설과의 계약은 어떻게 돼 있나. -명헌건설과의 계약에서도 나무가 손질된 각재로 들어온다고 돼 있다. 그러데 원목이 들어왔다. 폐쇄회로(CC)TV로 진짜 도끼질을 하는지 다 감시당했다. 나무 다듬을 때 전동기계 안 쓰고 일일이 손으로 다듬으면 앞으로 목수 노임이 2억 3000만원이 더 들어간다. 즉 목수 노임이 모두 7억원으로 불어나는 것이다. 물론 손으로 하면 정성이 들어가고 좋다. 그러나 통나무 다듬기까지 원시적으로 할 필요가 있나. 도끼질하고 나무 다듬는 것을 숭례문 현장에서 하면서 시민들에게 보여 준 것도 아니라서 안타깝다. →문화재청에서는 목수들이 자귀질도 못하고, 숙련이 안 됐다고 하더라. -숙달된 목수는 자귀질도 금방 배운다. 3일이면 배운다. 통나무 깎는 것부터 시작해서 해야 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해결책이 뭔가. -문화재청이나 명헌건설이 목수의 노임을 지불할 수 없다고 계속 주장한다면 내가 3억 8500만원을 내놓겠다. 나는 처음부터 도편수는 무료 봉사하겠다고 했고 실제로 무료 봉사 중이다. 또한 문화재청에서 명헌건설 직원이 되라고 해서 직원이 됐지만 단 한 푼의 월급도 받은 적이 없다. 나도 돈 쌓아 두고 살지는 않지만 목수로 평생을 먹고살고 자식들 교육까지 다 시켰으니 우리 목수들하고 목공사 부문을 기부하고 싶다. 나중에 불탄 숭례문 목공사를 신응수와 목수들이 기증했다고 한다면 나도 보람이 있지 않겠나.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신응수 대목장은 1942년 충북 청원 출신으로 1991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로 지정됐다. 경복궁, 숭례문, 불국사, 수원성 등을 복원했다. 대목장 혹은 도편수는 고건축의 으뜸이 되는 궁궐, 사찰, 성곽 건축의 목공사 책임자를 뜻한다. 신 대목장은 이번 숭례문 복원에 목수 20여명을 이끌고 있다.
  • 숭례문 복구 한달째 중단…시공사·목수간 임금 마찰

    숭례문 복구 한달째 중단…시공사·목수간 임금 마찰

    숭례문 복구공사가 지난해 12월 초부터 중단된 것으로 5일 확인됐다. 이에 따라 오는 12월 준공 일정에 차질이 우려된다. 공사 중단은 목공사 비용 인상을 요구하는 목수와 더 올려 줄 수 없다는 시공사 간 다툼에서 비롯됐으나 관리·감독을 해야 할 문화재청이 이를 한 달 가까이 방치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문화재청은 지금까지 시공사 측에 공문을 두 차례 보내는 데 그치는 등 형식적인 조치만 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화재청은 이날 “지난달 8일부터 목수들의 임금 단가 문제로 숭례문 복구공사 가운데 목공사가 중단됐다.”면서 “그러나 협의를 통해 이달 중에 목공사가 재개되면 당초 계획대로 4월까지 목공사를 끝낼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한 달 가까이 늦춰진 공사가 이달 안으로 재개되더라도 4월 목공사 완료, 12월 준공이라는 복구 일정을 맞출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문화재청과 숭례문 복구공사 시공사인 명헌건설㈜ 간에 계약된 총 복구비용은 167억 8500만원이다. 목공사 비용은 15억 7800만원이 책정됐으며 명헌건설은 신응수 대목장 측과 13억 2300만원에 목공사를 계약해 공사를 진행해 왔다. 신 대목장 측은 애초 명헌건설과 계약한 공사비용에서 25~33% 정도를 추가로 더 책정해 달라는 입장이라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최종덕 문화재보존국장은 “이번에 제기된 목공사 임금 단가 문제는 최근 20여 년 동안 장인들이 공공연하게 써온 전동 공구를 못 쓰게 하고, 대패 등 낯선 전통도구를 사용한 전통기법으로 숭례문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인건비 등이 많이 늘어나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숭례문 복구공사는 성곽 복원과 문루 복구공사로 나뉜다. 문루 복구는 목공사가 끝난 뒤 기와공사를 하고 마지막으로 단청을 입히게 된다. 문화재청이 밝힌 복구 공사의 공정률은 70%다. 최 국장은 “목수들이 전통기법을 쓰겠다고 각서까지 작성했지만, 막상 복구공사에 들어가자 자귀질(자귀로 나무를 깎는 일)과 같은 전통 기법을 사용할 수 있는 목수가 한 사람밖에 없어 서로 배워 가며 공사를 진행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리고, 품도 많이 들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화재청은 “명헌건설과 목공사를 총괄하는 신응수 대목장 사이에 원만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율을 시도하고 있으나 돈 문제가 개입돼 있어 어려움이 있다.”고 덧붙였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숭례문 복원 중요무형 문화재 홍창원 단청장

    [김문이 만난사람] 숭례문 복원 중요무형 문화재 홍창원 단청장

    단청(丹靑)이 없는 목조건물을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궁이나 고즈넉한 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건축물 안팎에 그려진 단청 문양이다. 건물의 벽면이나 천장 등에도 어김없이 곱고 화려한 단청 문양으로 장식돼 있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단청은 삼국시대 벽화고분에서 나타나듯 우리나라 회화 미술사의 2000여년 궤적을 오롯이 그려오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만봉(1910~2006) 스님이 1972년에 처음으로 중요무형문화재 48호로 지정되면서 그 연구와 명맥을 이었다. 스님은 생전 “단청이라 함은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의 오방색을 기본으로 여러 가지 색상을 만들어 궁전, 불전 등에 다양한 문양과 인물, 산수, 화조, 산수 등으로 장엄하는 것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올해 연말이면 숭례문 복원 공사가 완료된다. 현재 성곽복원이 마무리됐으며 봄부터는 문루 복원과 기와 잇기가 시작된다. 그 다음에는 건축물의 화룡점정이자 마지막 화장단계인 단청작업이 진행될 예정이다. 단청작업에는 내로라하는 단청 기술자 30여명이 참여한다. 이들을 진두지휘하는 사람을 가리켜 단청화사(丹靑?師)라고 한다. 중요무형문화재 48호인 홍창원(57) 단청장은 바로 숭례문 단청복원의 화사(?師)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조선시대 명 화승인 예운스님의 맥을 이은 만봉스님의 수제자로 그동안 창경궁, 창덕궁, 경복궁, 덕수궁 등 4대 궁궐은 물론이고 봉정사 극락전·대웅전 등 전국 각 지역의 고찰과 문화재 건축물의 단청작업을 해오고 있다. ●고려 단청은 화려… 조선은 검소한 문양 지난 3일 오후 경기도 퇴촌에 위치한 한국단청연구소를 찾았다. 때마침 함박눈이 내려 주위가 온통 하얗게 변해 있어서 그런지 그가 평소 그렸던 각종 단청 작품들이 아름답고 화려하게 빛났다. 연구소 벽에 걸린 대형 ‘경복궁 근정전 천장 용그림’이 금빛 찬란하게 눈부시도록 다가온다. 용그림에 대해 궁금해하자 “1998년에 모사했으며 이런 모사 작품들을 모아 벽연회라는 이름으로 제자들과 함께 2년에 한 번씩 전시회를 갖고 있다.”고 대답했다. 근래에 들어서는 2009년 12월 ‘숭례문 단청문양 모사전’을 서울메트로미술관에서 가졌다고 한다. 특히 이 전시 때는 숭례문 화재 직후이기도 했지만 1800년대 후반의 숭례문 단청을 비롯해 1954년, 1963년, 1973년, 1988년 등 변화된 단청 모습을 연도별로 상세히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숭례문은 원래 중층의 다포(多包)건물로 아래·위층이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공포조작(拱包造作)에 있어서 조선 초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진기록으로 볼 때 1890년대 이후 광복 이전까지 재단청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며 한국 전쟁 이후 피해 상태를 조사하고 수리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1961~1963년 숭례문 문루 전체의 해체복원 공사가 이루어졌으며 1973년과 1988년에 재단청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듯 숭례문 단청은 19세기 말 이후 여섯 차례 단청공사가 진행되면서 각기 다른 양식의 단청으로 시공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번 단청을 다르게 시공할 수밖에 없었던 세부적인 상황과 내용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숭례문 단청에 대한 설명이 계속 이어진다. 문양 형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고 했다. 19세기의 단청과 1954년의 단청은 조선 후기 단청의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1963년의 단청은 조선 초기 단청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또 1973년부터 1988년까지의 단청의 경우 문양 형식은 조선 초기 양식이지만 수법이나 색상은 조선 중·후기의 단청 양식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숭례문 복원 조선초기 양식으로 재현해낼 것” 그는 이번 숭례문 복원공사 때 1963년의 단청, 그러니까 숭례문이 세워진 조선초기의 양식을 복원하겠다고 역설했다. 하여 조선 초기 단청이 남아 있는 강진 무위사 극락전과 예산 수덕사 내부단청, 안동 봉정사 대웅전, 창경궁 명정전, 그리고 1937년 임천 선생이 조사한 수덕사 단청조사 보고서에 수록된 여러 자료 등을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토대로 조선 초기 당시의 단청자료에 대한 샘플링 작업을 모두 마무리했으며 오는 5월부터 제자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복원작업에 들어간다. 작업기간은 5~6개월 정도 소요될 것으로 내다봤다. 화학안료를 쓰면 기간이 짧아지지만 숭례문의 경우 화학안료 대신 천연안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천연안료는 돌가루를 정제해 색깔을 낸 것으로 고운 심성으로 정성껏 입혀야 색깔이 아름답고 오래도록 남는다고 말했다. “고려시대의 단청은 화려한 반면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청색과 녹색 위주의 검소한 문양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1966년의 ‘남대문 수리보고서’에 수록된 복원 모사도의 컬러도판은 옛 안료색상인 삼복, 이청, 대청 등의 색상을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자료를 모두 참고해 되도록 조선 초기 원래의 단청을 재현해 낼 생각입니다.” ●건물 장식뿐 아니라 목재수명 연장 기능 지녀 국보 1호 복구작업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쏠려 있는 데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는 숭례문 단청을 멋지게 입히기 위해 틈틈이 숭례문 복원현장을 찾아 나름대로 단청의 그림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또 숭례문 복구작업과 관련해 장인들 회의가 있을 때에도 매번 참석하고 있다. 이런 그에게 어떻게 해야 단청을 배울 수 있는지 물었다. “우선 소질이 있어야 하며 그 다음 불굴의 인내력이 뒤따라야 하고 뭐니뭐니 해도 심성이 고와야 한다.”고 웃는다. 그러면서 최소 1년에서 3년 정도는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단청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음양오행설이다. 단청에 사용된 반복 문양은 화재와 잡귀를 막아주는 의미를 담고 있다.”면서 “건물을 장식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풍화나 뒤틀림을 방지하는 등 목재의 수명을 연장해 주는 역할도 한다.”고 덧붙였다. 서울 신촌에서 태어난 그는 불심이 깊었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15살 때 중학진학을 포기하고 단청에 입문했다. 당시 집과 가까운 봉원사에서 만봉스님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됐다. 처음에는 만봉스님이 그리는 단청을 지켜보면서 어깨너머로 배웠다. 그러다가 취미가 붙었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단청을 공부하면서 점점 실력을 쌓았다. 이런 모습을 본 만봉스님은 그를 기특하게 여겨 기꺼이 제자로 삼았다. 이후 서울 보문사 일주문 단청을 시작으로 만봉스님과 함께 전국을 돌며 일했다. 1981년 만봉스님의 전수장학생으로 선정된 데 이어 일취월장해 1986년에는 이수자가 됐다. 이때부터 창경궁 문정전, 경복궁 경회루·강녕전·교태전, 덕수궁 중화전, 경복궁 근정전 등을 도맡아 일을 하면서 명성을 얻었으며 2009년 2월 만봉스님의 뒤를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48호 단청장이 됐다. 그는 30여명의 제자를 두었는데 부인과 딸도 여기에 속해 있다. 특히 딸 홍보라씨는 아버지의 전수장학생으로 숭례문 복원 단청에도 함께 참여하고 있다. ●“수천년 이어온 겨레의 얼과 예술 명맥 이어야지” 1990년부터 한국단청연구소를 운영 중인 그는 숭례문 복구작업이 끝나면 전통 단청 보전과 후진양성에 더욱 매진할 계획이다. 42년 동안 단청인생을 살아오면서 우리의 단청이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또 이 같은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란다. 그는 일본에서 가끔 초청을 받기도 하는데 이때마다 우리의 단청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열정을 보인다. 연구소 안에는 경복궁 근정문 적심(1850년 이전), 창덕궁 희정당 연목(1906년), 봉정사 대웅전 보머리(1604년) 등 각종 단청문양이 그려진 400여점의 고목들이 진열돼 있어 그가 평소에 얼마만큼 자료수집에 열중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런 자료들을 모아 나중에 ‘단청 박물관’을 지어 전시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아울러 올해 말에는 ‘경회루 단청 문양 모사전’을 가질 계획이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우리 겨레의 삶과 예술의 혼이 담겨 있는 단청은 수천년 이전부터 사물에 아름다운 색상과 무늬를 붓끝에 담아 이어 왔다. 대한민국 최고의 단청장이었던 만봉스님의 화맥을 끊임없이 전수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홍창원 단청장은… 1955년 서울 신촌에서 태어났다. 15살 때인 1970년 중요무형문화재 48호(단청) 만봉스님 문하생으로 입문했다. 1970년 동대문 탑골승방 일주문과 세검정 창의문 단청에 참여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부여 무량사(1971), 신촌 봉원사 대웅전(1972), 영화사 삼성각(1973), 부산 동래산성(1974년), 강릉 경포대(1978) 등의 단청에 참여했다. 1981년에는 만봉스님 전수장학생에 선정됐고 문화재수리 단청기술자로 등록한 데 이어 1986년 만봉스님 이수자로 선정됐다. 이후 광희문(1990), 창덕궁 구선원전(1992), 경복궁 강녕전·교태전·경성전·연생전(1994) 단청을 비롯해 덕수궁(2001), 창덕궁(2002), 경복궁 근정전(2003) 등의 단청 작업을 했다. 일본 나카지마 육각당과 일본 쇼고 무량수사 등의 단청 작업에도 참여했다. 2009년 만봉스님의 뒤를 이어 무형문화재 48호 단청장이 됐다. 이 밖에 동방불교대학 불교미술과 교수(1991~2005), 전통건축미술학교 단청강사(1991~1999), 불교방송국 단청강사(1997~2001) 등을 맡기도 했다. 현대미술대전 현대미술상(1993) 등 다수의 수상경력과 제1회 벽연회 단청소품전(1998) 등 10여 차례 초대전과 단체전을 가졌다.
  • 단청 입는 佛와인

    단청 입는 佛와인

    정통 프랑스 와인이 한국 전통 색상인 단청(丹靑)을 입는다. 19일 국순당에 따르면 자사가 수입, 판매하는 프랑스 보르도 와인 ‘그랑드 포르테 뒤 쉬드’가 단청의 오방색을 적용한 새로운 라벨을 입는다. 이 와인은 2008년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이 라벨에 들어가 있어 일명 ‘숭례문(또는 남대문) 와인’으로 불리며 지난해 국내에서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프랑스 보르도에 있는 와이너리 샤토 갸호의 프랑스와 게즈 사장은 수년 전 한국 방문 중 인상 깊게 봤던 숭례문이 전소됐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이를 회상하기 위해 ‘숭례문 와인’을 생산했다. 파리의 유명 한국 식당에서 판매되며 현지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던 이 와인은 국순당 직원의 눈에 띄어 국내에 들어오게 됐다. 게즈 사장은 국순당과 연을 맺은 후 와인 1병이 팔릴 때마다 500원을 문화재 복원 및 보호기금에 기부하기로 결정해 또 한번 감동을 줬다. 새로운 숭례문 와인은 캡실과 라벨 하단에 각 빈티지별로 오방색의 붉은색, 감색, 검은색, 노란색, 흰색을 적용했으며 라벨의 숭례문 그림과 어우러져 한국적인 분위기를 더욱 높였다. 2007년산은 붉은색, 2008년산 감색, 2009년산은 검은색, 2010년산은 노란색, 2011년산은 흰색을 입었다. 국순당 측은 “라벨에 한국 고유의 색깔을 입히고 싶다.”는 게즈 사장의 바람에 따라 오방색을 권했으며 디자인은 물론 라벨 제작은 전부 프랑스 현지에서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숭례문이 소실된 2008년 빈티지의 경우 의미가 남다른 해인 만큼 최고 품질의 포도가 사용됐고 2008년을 기억하기 위해 2008병만 한정 생산했다. 한국에서는 1번에서 1008까지의 와인이 판매되며 1009번부터 2008번은 런던, 파리, 도쿄에서 판매될 예정이다. ‘그랑드 포르테 뒤 쉬드’는 갈비, 불고기 등 간장 양념을 기본으로 해 숙성시키는 한국 요리에 맞게 설계된 와인으로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레드 와인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브랜딩해 만들었다. 국내에서는 지금까지 8000병 정도가 팔려 나갔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길섶에서] 남대문시장/최용규 논설위원

    봄에 갔을 때만 해도 달랐다. 재래시장이 죽었다고 하지만 남문안장은 그래도 인파로 바글바글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했는데 600년 역사를 지닌 시장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지. 상자로 가린 숭례문을 곁눈질하며 장터로 들어선다. 왼쪽 첫 집에 눈길이 간다. 크리스마스 용품 천지다. 아! 연말이구나. 책상 앞에서 코 박고 있을 때, 달력에 ‘11월-NOVEMBER’ 아무 생각없이 스칠 때와 전혀 다른 감흥이다. 그런데 쓸쓸하다. 징글벨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한데 찾는 사람이 없다. 무슨 절간도 아니고…. 남대문, 아니 ‘숭례문시장’ 갈치조림 골목. 여기도 마찬가지, 손님이 없다. 밥(손님)보다 고추장(상인)이 많다. 좁은 식당에 손이 없다 보니 더 휑하다. 필사적으로 손님을 끄는 아줌마의 호객행위가 안쓰럽다. 마치 1990년대 초 순화동 골목을 연상시킨다. 불황의 골이 깊다. 4000, 5000원이 무서워 도시락을 싸오는 상인들이 늘었다 한다. 훈풍은 언제 불까. 중국 사람, 일본 사람이 몰려 와야 풀릴까. 시장 가야겠다. 자칫하다간 그들이 얼어 죽겠다. 최용규 논설위원 ykchoi@seoul.co.kr
  • 신한은행, 숭례문 지킴이 등 문화재 보호활동 확대

    신한은행, 숭례문 지킴이 등 문화재 보호활동 확대

    신한은행은 국보 1호 숭례문 지킴이로 활약하고 있다.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있는 신한은행 본점은 2008년 2월 방화로 소실돼 복원 중인 숭례문과 마주 보고 있다. 이런 인연으로 신한은행은 지난 8월 문화재청과 ‘숭례문 복구 지원 후원약정’을 맺었다. 지난달에는 충남 부여의 한국전통문화학교에서 ‘숭례문 전통기와가마 화입식’을 열었다. 숭례문 복원을 위한 전통기와 제작을 위한 전통기와가마 3기, 제와막, 백와관 등의 시설을 구축한 것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화입식이란 가마에 처음 불을 넣는 일을 축하하는 의식이다. 신한은행은 가마제작에 들어간 비용 전액(4억원)을 후원하고 문화재청은 전통기와가마 원형복원 연구 등을 맡았다. 이번에 복원된 가마는 숭례문의 성공적인 복원과 전통문화를 공부하는 한국전통문화학교 학생들, 국내외 연수생들의 교육에 활용될 것이라고 신한은행 측은 설명했다. 신한은행은 그동안 숭례문 지킴이로서 매주 토·일요일에 숭례문 복구현장에서 공개관람 안내 등 자원봉사를 계속해 왔다. 숭례문 조명설치 비용 8억원도 후원하는 등 문화재를 아끼고 보호하는 사회적 기업을 추구하고 있다. 기부활동 외에도 전국 문화재 보호활동 등 임직원들의 봉사활동을 확대할 계획이다. 서진원 신한은행장은 “순수 전통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국보 1호 숭례문의 성공적인 복구를 기원하며 우리 문화재의 가치를 널리 퍼뜨려 국민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일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오달란기자 dallan@seoul.co.kr
  • ‘묵호항’ 뱃사람들 애환 오롯이 내 마음속 등대가 되어…

    ‘묵호항’ 뱃사람들 애환 오롯이 내 마음속 등대가 되어…

    잎을 모두 떨군 나무가 시나브로 야위어 갈 쯤, 바다는 짙푸른 감청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푸르다 못해 검게 일렁이는 바다와 마주한 포구는 추운 계절에 찾아야 제격입니다. 찬바람 부는 선창가와 잔뜩 움츠린 채 종종걸음으로 오가는 어민들의 뒷모습이 어딘가 포구의 쓸쓸한 이미지와 닮았기 때문이지요. 강원 동해시 묵호항을 다녀왔습니다. 한때 동해안 제일의 어업전진기지였다가 이제는 이름으로만 남은 포구지요. 세상에서 묵호는 가뭇없이 사라졌지만, ‘묵호 빌딩 언덕’이라 불렸던 판자촌엔 아직도 옛 향기 오롯합니다. 어여쁜 어달리와 묵호등대 등 둘러볼 곳도 제법 많고요. ●조붓한 고샅길 수놓은 담장 벽화 묵호항 뒤편 가파른 언덕. 작가 심상대가 소설 ‘묵호를 아는가’에서 “불이 켜지면 빌딩숲 같다.”고 표현했던 묵호동 언덕이다. 예전 외항선원들이 묵호항에 입항할 때면 두 번 놀랐단다. 항구 맞은편 묵호 언덕의 휘황찬란한 불빛에 놀랐고, 이튿날 아침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빌딩 숲 자리에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들어찬 판잣집들의 몰골을 보며 또 놀랐다. 이 모두 묵호가 ‘잘나가던’ 시절의 이야기다. 묵호동은 인근 어달리와 대진리를 합친 행정 구역명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지금도 ‘묵호진동’이라 부른다. 영화를 누렸던 옛 묵호진(津)의 기억이 아련한 때문일 터다. 이제 옛 묵호는 없다. 1980년, 옛 명주군 묵호읍은 삼척군 북평읍과 합쳐져 동해시가 됐다. 그 이후 동해안 제1의 무역항이자 어업전진기지였던, 그리고 한때 금강산 관광선의 출항지였던 묵호는 이제 동해시의 한 동(洞)으로만 남아 있다. 갯바람에 밀려 묵호 언덕에 정착한 사람들이 그 위로 조붓한 길을 냈다. 논골마을이다. 밤이면 오징어배의 불빛으로 유월의 꽃밭처럼 현란하다고 했던 묵호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달동네다. 여느 바닷가 마을이 그렇듯, 붉고 푸른 지붕들이 낮은 담장 위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비좁은 골목길은 집을 에둘러 아슬아슬하게 언덕을 타고 오른다. 그 사이로 묵호등대가 들어섰다. 요즘에야 많은 사람들이 재미삼아 그 길을 오르지만, 고샅길에 박힌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건 묵호 사람들뿐이지 싶다. 후줄근했던 논골마을은 몇 해 전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논골담길’ 프로젝트에 따라 고샅길 담벼락마다 다양한 내용의 벽화가 그려졌다. 스케치는 미대생 출신들로 구성된 ‘공공미술 공동체 마주보기’ 회원들이, 채색은 60~70대의 마을 노인들이 맡았다. 담벼락 벽화가 그려진 시골마을을 찾는 게 뭐 그리 대수일까 싶지만, 논골마을 벽화는 확실히 남다르다. 단순히 낡은 집을 그림으로 가린 게 아니라, 한평생 바다와 함께한 마을 사람들의 신산한 삶의 이야기를 연작시처럼 그림 속에 듬뿍 녹여 냈다. 논골마을 둘러보기는 묵호항 어판장 맞은편 논골3길에서 시작된다. 묵호등대까지 차로 오른 뒤, 되짚어 걸어 내려오는 편한 방법도 있지만, 그보다는 고샅길 초입부터 차곡차곡 밟아 올라야 제격이다. 골목길은 뭉툭하다. 닳고 닳았다. 오랫동안 수많은 주민들이 한숨 쉬며 짚고 오른 흔적이다. 맨 먼저 이방인을 맞는 건 ‘논골갤러리’다. 빈집에 크고 작은 그림들을 그려 넣었다. 밤바다에 촘촘히 불을 밝히고 있는 오징어잡이 배와 불덩이처럼 솟아오르는 태양,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나는 ‘묵호벅스’까지. 하지만 어쩌랴. 그림의 뒤편에서 풍겨오는 날카로운 쇠락의 흔적마저 가리진 못하는 것을.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 산다” 논골갤러리를 지나면 담벼락에 널린 오징어 그림이 눈길을 끈다. 1980년대만 해도 묵호의 열 가구 중 세 가구는 오징어를 말리는 일을 주업으로 삼았다. 남자들은 오징어잡이 배를 탔고, 아낙들은 밤새 오징어 배를 갈랐다. 아이들은 오징어를 입에 문 채 골목길을 뛰어다녔다. 마을엔 늘 오징어 냄새가 가득했고, 항구는 밤낮없이 흥청거렸다. 그림은 바로 그 시절에 대한 회상이다. 장화가 잔뜩 그려진 벽화도 그 기억의 연장이다. 제목이 재밌다.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 산다’라나. 묵호가 잘나가던 시절엔 물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고샅길 바닥에 물이 마를 날이 없었단다. 그래서 장화는 묵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생필품이었던 것. 수많은 사람들이 신고 다녔던 장화가 담벼락 가득 그려졌다. 이처럼 벽화 하나하나에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기지 않은 것이 없다. 오래된 골목길을 걷다 문득문득 가슴 뭉클해지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묵호동은 사실 그리 높은 언덕이 아니다. 해발 67m에 불과하다. 하지만 가슴이 느끼는 마을의 높이는 결코 낮지 않다. 골목 구석구석 숨어 있는 벽화들을 감상하며 언덕을 오르다 보면 어느새 마을 꼭대기다. ‘묵호동 종점’이란 띠 두른 전봇대가 박혀 있고, 그 위로 묵호등대가 우뚝 솟아 있다. 바다의 수호천사를 상징하는 ‘천사날개 포토존’과 불꽃을 형상화한 조각 작품,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시구가 새겨진 소공원 등 볼거리가 제법 많다. 등대 안의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전망대다. 눈앞에 검푸른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묵호(墨湖)에 담긴 뜻이 예서 보면 확연해진다. 너른 바다는 가슴 속 앙금을 말끔히 씻어낸다. 상처받은 이에겐 한 잔 소주 같은, 바닷가가 고향인 이들에겐 어머니 젖가슴 같은, 그런 바다다. ●작고 예쁜 어달리 해변… 조각 작품같은 기암괴석 볼만 언덕을 에두른 고샅길은 버스 종점 앞 매점에서 다시 게구석길, 덕장길 등으로 구불구불 흩어진다. 어달리 쪽으로 내려가는 길도 있다. 방법은 두 가지. 등대 오른쪽은 묵호 수변공원에서 시작된 ‘등대오름길’을 되짚어 내려가는 길이다. 바다 쪽으로 트인 이 길에도 아름다운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등대 왼쪽은 출렁다리 방향이다. 예전 TV드라마 ‘찬란한 유산’에서 이승기와 한효주가 입맞추는 장면을 찍었다 해서 유명해진 곳이다. 큰길로 내려 서서 왼편으로 돌면 왜구를 물리쳤다는 호국 문어상과 만난다. 그 옆의 거무튀튀한 바위는 까막바위다. 서울 숭례문에서 정확히 동쪽 방향에 있다는 바위다. 현지 어민들은 이 바위에 경외감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다. 까막바위 굴에 문어의 영혼이 산다고 해서 해녀들도 다가가지 않는다고. 까막바위에서 모퉁이를 돌면 느닷없이 예쁜 마을이 튀어나온다. 어달리다. 모래해변의 길이가 300m, 폭이 20~30m에 불과한 조그만 바닷가 마을이다. 여느 동해안 해수욕장과 달리 경사가 완만한 데다, 모래가 곱고, 수심 1m를 넘지 않는 해변이 바닷가 쪽으로 이어져 있어 가족단위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다. 특히 낚시 포인트로 명성이 자자해 평일에도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넘친다. 기왕 예까지 온 터에 동해 제1경 추암해변을 찾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 재상 한명회가 추암해변의 절경에 탄복해 ‘미인의 걸음걸이’를 뜻하는 능파대라 이름지었다고 전해진다. 촛대바위와 능파대 주위로 파도와 비바람에 깎인 기암괴석이 조각 작품처럼 늘어서 있어 ‘작은 해금강’이라 불린다. 묵호등대에서 삼척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20여분 달리면 나온다. ■여행수첩(지역번호 033)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영동고속도로→강릉분기점→동해고속도로→망상 나들목→묵호 방향→묵호항 순으로 간다. 논골담길은 선어판매센터에서 북쪽으로 300여m 가면 나온다. 묵호등대로 곧장 가려면 일출로에서 논골3길 방면으로 좌회전한 뒤 묵호동주민센터를 끼고 우회전해 곧장 가면 된다. ▲맛집 묵호항은 오징어와 가자미 등의 물회가 유명하다. 가자미 물회의 경우 묵호항 선어판매센터 앞 횟집들에서 1만 5000원이면 맛볼 수 있다. 까막바위 인근 ‘오부자횟집’(533-2676)은 냄비 물회 전문점. 횟집으로는 부흥횟집(531-5209)이 유명하다. ▲잘 곳 묵호항 인근 동해관광호텔(533-6035)과 꿈의궁전모텔(532-9996)은 바닷가에 붙어 있다. 침대에 누워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묵호등대 바로 아래에도 펜션이 있다. 글 사진 동해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천장에 작은 구멍 내면 화재확산 방지 복원 중인 숭례문에도 고려할만 하다”

    “천장에 작은 구멍 내면 화재확산 방지 복원 중인 숭례문에도 고려할만 하다”

    “우리나라 목조건축에 대한 소방시설을 대부분 해놨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관리자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낙산사 전소(2005년), 창경궁 문정전 화재에 이어 수원 화성 서장대 전소(2006년), 숭례문 화재 사건(2008년) 등등. 요즘 산과 들에는 낙엽이 많이 쌓이고 있다. 행락객들도 많아지고 있다. 날씨는 점점 건조해진다. 깊은 산사 주변의 문화재는 목조건축이 대부분이라 어느 때보다 화재위험에 노출돼 있다. 동절기 화재예방, 그리고 화재방지시스템 등을 ‘똑 부러지게’ 점검해야 할 시기다. 목조건축 전문가로 잘 알려진 현고스님(전 송광사 주지)을 지난달 27일 송광사에서 만났다. 스님은 송광사 건물 64개동 가운데 3개동만 빼놓고 모두 개·신축을 맡아했다. 또 김천 현암사, 울진 불영사, 제주 번화사, 광주 신관사, 화순 운주사의 대웅전·요사채 등 지금까지 스님의 손을 거쳐간 목조건축물이 180여채나 된다. ‘불사(佛事)의 귀재’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다. 먼저 목조건축에 대한 화재 대비는 어떻게 해야 하는게 가장 좋은지를 물었다. “우선 불의 성질을 잘 알아야 합니다. 목조건물인 경우 마루에서 붙은 불은 순식간에 천장 쪽으로 올라갑니다. 마치 기다란 헝겊에 불이 붙었을 때처럼 말입니다. 숭례문 화재만 하더라도 불이 붙어 천장으로 곧바로 올라갔는데 천장이 꽉 막혀 있었지요. 그러자 불은 압력에 의해 옆으로 확 퍼졌습니다. 그런데 이때 밖에서 물을 마구 뿌려대 오히려 산소만 공급해 주는 역할을 했지요. 부채질을 한 셈이지요. 진압을 할 수 없는 상황이 금방 벌어진 것입니다. 만약 이때 천장에 구멍이 있다면 불은 구멍 속으로 자동적으로 확 빨려 올라갑니다. 구멍이 바로 굴뚝 역할을 해주는 셈이지요. 목조건축을 지을 때 기둥이 있는 천장에 작은 구멍을 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바로 화재가 발생해도 더 이상 확산이 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복원 중인 숭례문에도 화재방지를 위해 한번쯤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물론 원형성 유지와 불가피한 변형 등을 놓고 논란이 있겠지만 미관상 처리만 잘되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나라 목조건축과 관련, 화재발생에 대한 여러 가지 단계적 실험을 거쳐 적립된 매뉴얼이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스프링클러 같은 시스템으로 100%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은 오산이지요. 화재는 0.1%의 오차도 허용해서도 안 됩니다. 또한 수막설비같은 것은 동절기에 작동이 안될 수도 있거든요. 소화탄과 소화기의 사정거리는 어떠한지 등의 단계적 대응시스템을 꼼꼼히 살필 때가 됐습니다.” 이어 그는 “전통 사찰의 경우 대부분 문화재가 있기 마련인데 전문적인 관리 시스템과 매뉴얼이 전혀 없다.”고 재차 강조한다. 시설이나 장비 등을 작동하는지 몰라 시간을 보내다가 노후화된 뒤 교체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때문에 “영국의 의사들처럼 종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유급자를 두어 지역 할당제를 도입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제안한다. 사찰인 경우 각 교구본사별로 두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부연한다. “제 손을 거쳐간 목조건축물들은 대부분 칸과 칸 사이에 격벽을 쳐서 불이 붙어도 옆 칸으로 못 건너가도록 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목조건물들은 10분 안에 진화하지 못하면 실패로 돌아갈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전소되고 만다는 뜻이지요.” 스님은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1971년 송광사에서 구산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1994년부터 4년동안 송광사 주지를 했고 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불교문화사업단장, 총무원장 권한대행 등을 거쳤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불교대중화를 위해 ‘템플스테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와 관련, 그는 “유럽과 미국의 석학과 지성들이 병풍 쳐놓고 자기 명상을 할 정도로 한국불교가 세계화됐다.”고 말했다. 현재 광주광역시에 있는 원각사 회주로 있으면서 불교 요양원 시설 확충에도 앞장서고 있다. 불사계획을 묻자 “우리의 전통 고건축 기법으로 한 400평 규모의 최대 목조건물을 구상중에 있다.”고 말했다. 글 사진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