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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숭례문 복원 기념우표 발행

    숭례문 복원 기념우표 발행

    우정사업본부는 8일 숭례문이 5년간 원형복구 작업을 통해 복원된 것을 기념하는 기념우표 1종 120만장을 10일 발행한다고 밝혔다. 숭례문은 2008년 2월 화재로 일부가 소실된 이후 장인들이 전통기법에 따라 원형대로 복원, 지난 4일 다시 태어났다.
  • “한글의 과학성·아름다움을 남기고 싶어”

    “한글의 과학성·아름다움을 남기고 싶어”

    “스승의 날이 왜 5월 15일인 줄 아세요? 세종대왕의 생일이에요. 한국인의 가장 큰 스승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이라는 이야기죠.” 강병인(51) 캘리그래퍼는 한글 붓글씨에 ‘꽂힌’ 사람답게 서슴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붓글씨로 한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훈민정음해례본도 닳도록 읽었다. 그는 “한글은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소리도 상형했다”면서 생동 기운을 끌어온다. 칼의 날카로움, 봄의 따뜻함, 꽃의 아름다움, 나는 자유로움, 숲의 듬직함 등등. 상업적인 한글 캘리그래퍼로 본격 활동한 지 13년. 그의 글씨는 이제 어디서든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참이슬’과 ‘산사춘’, ‘풀무원’, ‘아침햇살’ 등을 시작으로 ‘독도’, 숭례문 가림막 ‘늠름한 모습 그대로’, ‘함께 만드는 서울, 함께 누리는 서울’ 등 셀 수가 없다. “TV드라마 타이틀인 ‘엄마가 뿔났다’에서 ‘뿔’자를 황소의 우뚝 솟은 뿔처럼 그려서 기억에 오래 남기도 했고요, ‘화요’라는 술은 마시면 불같이 일어나는 술이라는 이미지를 담아서 쓴 글씨라서 술꾼들이 좋아합니다”고 했다. 그가 붓글씨를 만난 것은 경남 합천군 용주면 용호초등학교 6학년 때다. “담임선생님이 ‘서예반으로 들어오느라. 그럼 꿀을 실컷 먹게 해주마’라고 했어요. 그때 제가 군 미술대회에 나갈 만큼 그림도 곧잘 그렸는데, 꿀 때문에 서예반으로 갔죠. 중학교 때는 교과서에서 추사 김정희를 만났는데, 그때 ‘나도 추사가 되자’는 꿈을 꾸었어요. 그래서 ‘영원히 먹물과 지내자’라는 ‘영묵’으로 호도 지었죠. 붓글씨가 그렇게 삶의 일부가 됐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고교 졸업장은 1981년 검정고시로 또래보다 1년 먼저 땄다. 그리고 출판사 편집디자이너로 일했다. 군대를 다녀온 기간을 제외하면 늘 붓글씨와 디자인과 함께 살았다. 대학은 방통대와 사이버대학을 거쳤고, 2010년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 광고디자인과에서 석사도 마쳤다.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형태적으로 상형문자로서 아름다움이 있는지 글로 남기고 싶었어요. 석사논문 제목이 ‘한글 글꼴의 의미적 상형성’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는 한글의 아름다움과 붓글씨의 자유로움을 소재로 오는 24일 고향인 경남 합천 용주초등학교에서 4~5학년과 ‘한글, 글씨로 놀다’라는 주제로 논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는 ‘2013 세계문화예술교육주간’의 일환이다. 그는 “시골 촌동네에서 붓글씨를 만나고 제가 이렇게 성장했듯이,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다. 글 사진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중구 ‘서울중심’ 새 CI 공개

    중구 ‘서울중심’ 새 CI 공개

    중구는 ‘서울의 중심’을 상징하는 새로운 CI(휘장)를 7일 공개했다. 새 CI는 서울의 중심이라는 것을 단순한 원의 형태로 힘있게 표현하고 ‘Junggu’의 이니셜인 J자를 위로 뻗게 해 글로벌 도시로 도약하고자 하는 구의 비전을 담았다. 빨간색과 주황색은 핵심과 중심을 나타낸다. 기존 CI는 1998년에 만들어 디자인이 세련되지 못하고 숭례문을 상징화했으나 식별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받아 지난해 3월부터 주민 의견 수렴을 거쳐 새로 만들었다. 구는 지난해와 올해 직원과 주민들을 대상으로 선호도 조사를 실시해 CI를 선정했다. 지난 3월 주민 25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새로운 CI가 구의 미래상과 발전방향을 담고 있다는 의견이 70%에 달했다. 새 CI는 공문서는 물론 모든 행정 서식과 시설물, 명함, 공용차량 등에 활용된다. 구는 앞으로 애플리케이션 시스템을 개발하고, CI 활용 매뉴얼을 제작한 후 특허등록을 할 예정이다. 조현석 기자 hyun68@seoul.co.kr
  • 국순당 ‘숭례문 와인’ 한정판매

    국순당 ‘숭례문 와인’ 한정판매

    국순당은 국보 1호 숭례문 복원을 기념해 일명 ‘숭례문 와인’으로 불리는 프랑스 와인 ‘그랑 폭트 뒤 수드’의 2007년과 2008년도 빈티지 제품을 100세트 한정 판매한다. 이 와인은 와이너리 ‘샤토 갸호’ 사장이 뉴스를 통해 숭례문이 불에 타는 모습을 보고 흐느껴 울던 한국인들에게 연민을 느껴 만든 것으로, 숭례문을 뜻하는 ‘남쪽의 큰 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와인 라벨에 숭례문 그림을 넣어 화제가 된 바 있다.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레드 와인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브랜딩해 만들었으며, 갈비·불고기 등 간장 양념을 기본으로 숙성한 한식에 맞게 설계된 최초의 보르도 와인으로 파리 한식당에서 판매 1위를 달리고 있다. 세트 가격은 9만~10만원이다. 박상숙 기자 alex@seoul.co.kr
  • [서울광장] 숭례문 준공식이 축제로 그치면 안 되는 이유/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숭례문 준공식이 축제로 그치면 안 되는 이유/서동철 논설위원

    숭례문이 5년 3개월의 복구공사 끝에 오늘 준공식을 갖는다.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를 비롯한 대표적 장인들이 참여한 복구 결과를 두고서는 칭찬하는 목소리가 많다. 손으로 빚은 기와는 전통가마를 만들어 구웠고, 단청은 천연안료를 써서 우아한 색감을 되살렸다. 한국전쟁 때 상처 입은 현판은 조선시대 탁본을 반영해 당초 필치를 되찾았다. 일제가 철거한 문루 좌우의 성곽을 복원한 것은 가장 큰 외형적 변화이다. 경축행사는 숭례문과 세종로,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국민참여형으로 열린다고 한다. 하나의 국민축제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숭례문이 복구됐다고 온 국민이 나서 기뻐해야 하는지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오히려 복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무겁게 마음을 다잡는 날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엊그제 종묘에서는 그동안의 경과를 알리는 고유제를 가졌다고 한다. 숭례문 화재에 가슴 아파하고, 성공적인 복구에 다행스러워하는 사람이 어찌 조선의 역대 왕들뿐일까. 그러니 준공식에서는 문화재 보호에 책임이 있는 누군가는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막말로 국보 제1호를 태워 먹고 간신히 되살려 놓은 게 무슨 큰 공로는 아니지 않은가. 숭례문 화재는 그 자체가 불행이지만, 훨씬 더 큰 불행을 낳았다. 한국 땅에 문화재라고는 숭례문밖에 없다는 듯 다른 문화재 보존에 대한 관심이 사실상 ‘올 스톱’됐다는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서울 종로구 청진동 일대가 초대형 건물 숲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줄지어 발굴된 지하의 시전행랑 유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상점 건물인 시전행랑은 조선시대 광화문네거리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종로 양쪽을 메웠고, 그 집터의 기초는 지금도 대부분 남아 있다. 벌써 한 블록이 완전히 파괴된 것이다. 그럼에도 유적 보존은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엊그제 경기 동탄2지구 현장에서도 고려시대 관공서로 추정되는 대형 건물터가 확인됐다. 동탄을 전통이 살아 있는 신도시로 가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겠지만, 역시 굴착기 삽날에 사라질지 지켜볼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정부 문화재 정책의 진전을 가로막은 ‘숭례문 신드롬’이 반구대를 빌려 다시 찾아들고 있는 것은 매우 걱정스러운 일이다.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는 한국의 문화유산을 뛰어넘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보존 방법을 놓고 갈등이 첨예화할수록 관심도 높아진다. 국무조정실이 ‘조기에 해결해야 할 갈등과제’로 삼고, 정치권이 나서는 것도 국민적 관심을 반영한다. 문화재 보존은 정치적으로 타협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보존이면 보존이고, 아니면 아니지 정치인들이 즐기는 어중간한 타협이란 곧 문화재의 훼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이 반구대만큼은 새누리당에 맡겨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3대 국정과제의 하나로 문화 융성을 내세운 대통령이다. 국민이 문화적 자존심을 드높일 수 있는 세계적 유적의 보존만큼 확실한 문화 융성 방안이 어디에 있을까. 그런데 문화 융성에는 돈이 들기 마련이다. 박 대통령이 문화예산 2%를 공약한 뜻도 여기에 있다고 보고 싶다. 예산을 쓰지 않는 문화유산 보존 의지는 그저 정치적 수사일 뿐이다. 숭례문 준공식이 그저 축제로 그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준공식에서는 먼저 반구대 암각화 보존 문제의 해결을 위한 박 대통령의 ‘결단’이 공표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새 정부의 문화재 정책이 반구대의 질곡에서 벗어나 본궤도에 오를 수 있다. 나아가 준공식은 새 정부의 문화재 정책 구상을 국민에게 소상히 밝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문화융성시대를 실감할 수 있도록 대통령의 전통문화 발전 의지를 확인시켜 주는 자리가 되면 좋을 것이다. 미래를 위한 청사진 없이 그저 봄날 하루를 즐기는 축제에 그친다면 숭례문 화재와 복구의 의미는 남는 것이 없다. dcsuh@seoul.co.kr
  • [주말 하이라이트]

    ■SBS 스페셜(SBS 일요일 밤 11시 15분) 2008년의 설 연휴 마지막 날이었던 2월 10일. 국보 1호 숭례문이 화염에 휩싸였다. 그렇게 600년 역사가 잿더미로 변하는 데는 여섯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5년이 지난 지금, 숭례문은 완벽히 복구됐다. 하지만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과연 5년간 숭례문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왕의 꿈(KBS1 토요일 밤 9시 40분) 황산벌을 돌파한 신라군은 파죽지세의 기세로 백제군을 섬멸한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김유신의 기백을 보고 신라군을 경계하기 시작하고, 당나라 군대와 신라군 간에는 누가 먼저 사비성을 공략할지 눈치작전이 시작된다. ■인간의 조건(KBS2 토요일 밤 11시 15분) 대한민국 대표 개그맨 6인이 체험을 위해 모였다. 여섯 멤버에게 주어진 새로운 체험 과제, 이번에는 ‘산지 음식만 먹고 살기’다. 바쁜 스케줄에 라면과 인스턴트 음식이 주식인 멤버들은 원산지에서 직접 음식을 구해 먹으라는 말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거부하고 싶어도 이미 시작된 새로운 체험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SBS 토요일 밤 11시 15분) 늦은 밤, 불빛 하나 없는 경기도의 한 야산. 30㎏이 조금 넘는 왜소한 13살 소년은 얼굴만 드러낸 채 온몸이 구덩이에 파묻혀 움직일 수 없었다. 공포 속에서 30분을 보낸 소년은 다시 끌려가 몽둥이 세례를 받아야 했다. 놀랍게도 가해자는 소년이 머물던 보육원의 교사 3명이었다. ■문화 책갈피(KBS1 일요일 밤 11시 30분) 끊임없는 히트곡 행진으로 한국 대중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대중가요의 황제’ 조용필이 19집을 들고 성공적으로 컴백했다. 오페라의 황제로 불리는 베르디. 베르디 탄생 200주년을 맞아 그를 기리는 공연이 시작된다. ■어린이날 기획 출발 드림팀 시즌 2(KBS2 일요일 오전 10시 25분) 5일 어린이날을 맞아 스페셜 MC 씨스타 보라와 초등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초특급 스타들이 총출동한다. 또 40년 전통을 지닌 국내 최고의 어린이 태권도 시범단인 미동초등학교 태권도 시범단이 함께한다. 재밌고 기발한 장애물 5종 경기가 펼쳐진다. ■주말특별기획 백년의 유산(MBC 일요일 밤 9시 55분) 팽달은 자식들에게 안성 밀밭은 명의만 자신의 이름으로 돼 있는 종중 땅이라고 밝힌다. 채원은 철규에게 세윤과 정식으로 교제 중이라고 말한다. 기춘과 기문 가족은 모두 팽달의 집을 나간다. 한편 설주는 도희와 얘기하던 중 방 회장이 세윤과 채원을 불륜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김일수 樂山樂水] 창조를 자극하는 시련

    [김일수 樂山樂水] 창조를 자극하는 시련

    잔인한 달, 사월이 지나고 오월이 왔다. 며칠 후면 국보 1호, 숭례문이 복구를 끝내고 다시 우리 곁으로 다가온단다. 숭례문이 불길에 휩싸여 무참히 무너져 내리던 5년 전의 그 광경은 우리 모두에게 큰 상실의 고통처럼 느껴졌었다. 그 고통을 넘어 다시 부활하는 숭례문을 되새기며, 문득 ‘고독해방 심리학’의 저자인 스위스 정신의학자 폴 투니에의 말이 떠오른다. ‘창조적 고난’이라고. 모종의 상실이 인간의 창조성을 자극하여 건설적인 변화를 낳게 하고, 고난과 고통이 바로 성숙과 발전의 기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고난을 통해 성숙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쇠락하는가? 그 원인은 개인의 운명이나 유전적 성향에 있다기보다 이들이 외부의 제도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영향에 크게 좌우된다. 건설적인 영향은 기왕의 고난을 성숙의 열매로 변화시킬 수 있지만, 파괴적인 영향은 그 고난의 상처 자리에 그대로 머무르게 한다. 비교적 단순하게 보이는 이 논리를 우리는 국가나 사회제도에 적용해 볼 수 있다. 왜 형벌제도를 통해 어떤 사람은 변화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재범·누범의 굴레 속에 갇혀 살게 되는가. 어떤 사람은 형벌이라는 고통의 과정 속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사회와 화해하는 자리로 나아가는데, 다른 사람은 동일한 과정 속에서 미움과 분노, 절망의 반응을 보이는가. 더 나아가 우리는 이 논리를 학문의 세계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진리를 탐구하는 치열한 학문의 세계에도 실패와 좌절의 위험은 항상 따르게 마련이다. 어떤 이들은 성공의 열매를 맛보지만, 다른 이들은 실패의 고배를 마시기도 한다. 과학의 세계에서 연구자들은 거듭된 실패를 거쳐 새로운 가설이 진리라는 최종 단계에 이르러 간다. 거듭된 실험에서 쓰라린 실패를 반복하는 연구자들의 고통이 얼마나 가슴 저리는 아픔이 될지 우리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원천기술과 같은 세계 초일류를 다투는 연구 분야에서 막대한 연구비 투여와 세간의 집중된 시선을 감안하면, 고독한 실험실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실패가 얼마나 힘든 고통이 될까.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잊어버린 채, 우리는 어느새 세상사에서 불패 신화, 성공 신화에 길들여져 왔다. 창조적 실패를 자극하는 선한 영향력을 지닌 인적·제도적 장치를 우리는 아직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학문적 속임수나 표절 같은 일탈 행위가 잦아들지 않는 결과를 낳는다. 대학도, 정부도 이제는 연구자들에게 실패의 정직한 보고자가 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 오늘 한 사람의 실패가 밑거름이 되어 내일 다른 성공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학문적 연구시장에 축적된 정직하고 양심적인 실패보고서는 성공한 연구성과 못지않게 내일의 값진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긴 안목을 키워야 한다. 그래서 외롭고, 치열한 정신적 씨름을 하는 이 땅의 연구자들이 당장의 연구 결실에 연연하기보다 연구 과정에 충실하면서, 실패와 성공을 아우르는 풍요로운 지적 시장을 형성해 나갈 수 있도록 분위기를 진작시킬 필요가 있다. 마침 새 정부 들어 창조경제 논의가 한창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창조경제의 지평에 안착하려면 먼저 한 번의 실패를 값진 창조의 밑거름으로 삼고 도약할 수 있는 관심과 배려의 장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미당(未堂 )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울고, 시인은 잠 못 이루는 고뇌의 시간들을 보탰다고 한다. 국화꽃 같은 한 송이의 연구 결실을 거두기 위해 지금 우리는 고독한 연구자들의 곁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연구자들에게 희망의 나라를 열어 주어야 하겠고, 경계를 뛰어넘어 그들의 상상력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부처 이기주의의 칸막이도 거둬들여야 한다.
  • “숭례문 복구 선대왕께 고합니다”

    “숭례문 복구 선대왕께 고합니다”

    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종묘에서 열린 ‘숭례문 복구 고유제’에서 변영섭(오른쪽에서 두 번째) 문화재청장이 첫 번째 술잔을 올리는 ‘초헌관’으로 나서 ‘작헌례’를 치르고 있다. 이번 ‘고유제’는 국보 1호인 숭례문의 복구를 무사히 마친 것을 선대왕께 고하기 위해 마련됐다. 행사에는 숭례문 복구단과 자문단, 참여 장인, 시공사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2008년 2월 방화로 훼손된 숭례문은 5년 3개월의 복구 작업을 마치고 오는 4일 일반 공개된다. 안주영 기자 jya@seoul.co.kr
  • [씨줄날줄] 숭례문 현판/함혜리 논설위원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은 1394년 한양 천도 후 새 도읍지의 면모를 갖추는 역할을 맡았다. 종묘와 사직, 궁궐이 들어설 자리를 정했을 뿐 아니라 각종 궁궐 및 전각, 거리의 이름을 손수 지었다. 그는 1395년 도성축조도감 책임자가 되어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잇는 약 17㎞의 성벽도 쌓았다. 성곽의 4대문을 건설하면서 이름에는 유교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나타나도록 했다.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북쪽의 관문은 홍지문(弘智門)이라 이름지었다. 풍수지리적으로 부족한 부분은 현판 글씨를 통해 보완했다. 숭례문의 경우 남쪽에 있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불로 다스리기 위해 다른 문과 다르게 세로로 쓰도록 했다. 숭(崇)자는 불꽃이 위로 타오르는 듯한 모양이고, 례(禮)자는 오행으로 화(火)이며 방위로는 남쪽을 가리킨다. 가로로 하면 불이 잘 타지 않기에 세로로 세워 불이 잘 타도록 비보(裨補)를 쓴 것이다. 숭례문 현판 글씨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오랜 논쟁거리다. 태종의 큰아들로 한때 세자였던 양녕대군이 썼다는 설이 유력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양녕은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으나 글을 알지 못하는 척했다. 지금 남대문의 숭례문 석자는 그가 쓴 글씨”라고 했다. 한편 조선후기 실학자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숭례문 편액은 정난종이 쓴 것”이라고 했다. 정난종(1433~1489)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서예에 뛰어나 비석이나 종에 글을 새겼다. 추사 김정희는 ‘완당 전집’에서 “지금 숭례문 편액은 신장의 글씨”라고 적었다. 신장(1382~1433)은 대제학을 지냈으며 초서와 예서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장중하면서도 단아한 서체로 이름을 날린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썼다는 설도 있으나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 1929년 9월호는 “안평대군의 글씨는 오해요, 중종 때 명필 유진동의 글씨”라고 기록했다. 옛 기록의 서술이 엇갈리는 것은 태조 7년(1398년) 준공된 숭례문이 크고 작은 화재로 손상되면서 세종 30년(1448년) 개축과 성종 10년(1479년) 중수를 거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장대함과 우아함을 갖춘 숭례문 서체의 수려함에 대해선 이견이 없다.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화재 와중에도 현판을 구해낸 것은 천만다행이다. 현판은 2009년 7월 완전 복원됐다. 한국전쟁 이후 수리과정에서 일부 글자 획이 변형된 것은 19세기 탁본을 바탕으로 원형에 가깝게 살려냈다.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숭례문 현판이 공개될 그날이 기다려진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숭례문 5월 4일 공개] 615년 전 숭례문에 가깝게, 옛 방식대로 지었습니다

    [숭례문 5월 4일 공개] 615년 전 숭례문에 가깝게, 옛 방식대로 지었습니다

    “숭례문을 뜯어는 놓았는데 기술자가 없어 다시 세우지를 못 한다네.” 어둑어둑해지는 해거름 무렵 서울 마포구 아현동 골목 어귀에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런거렸다. 1961년 7월 해체를 시작한 숭례문은 1962년 3월쯤 완전히 해체됐다. 현 남대문시장 쪽에 아름드리나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1962년 4월 ‘급래’(急來) 딱 두 글자의 전보를 받고 서울로 뛰듯이 올라와 숭례문 중수 현장에서 일하던 당시 20살의 어린 목수 신응수는 걸어서 아현동 거주지로 퇴근하던 길에 이런 걱정을 들었다. 신 목수는 마음속으로 “내가 바로 그 숭례문을 다시 세우는 사람입니다”라고 외치며 어깨에 한껏 힘을 주고 뿌듯하게 지나갔다. 해체된 목공사가 완료되던 1962년 12월 20일 숭례문은 국보 1호로 지정됐다. “지금이라면 가던 길을 멈추고 ‘어르신 걱정하지 마세요. 대목장 조원재(1903∼1976) 지휘 아래 잘 만들고 있습니다’라고 할 텐데…”라고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신응수(71) 대목장은 회상했다. 그는 1963년 3월까지 만 11개월 동안 조원재 대목장 밑에서 대패질과 톱질을 하면서 숭례문이 조선 전기 건축물 양식으로 군더더기 없이 완전해지는 데 힘을 보탰다. 1963년 5월 14일 숭례문에서 완공식을 했다. 그 뒤 50년이 지난 2013년 5월 4일, 2008년 2월 방화로 2층 문루가 크게 소실됐던 숭례문이 5년 3개월 만에 복구공사를 마치고 국민들에게 완전히 돌아온다. ‘숭례문, 문화의 새 문이 열린다’는 슬로건 아래 연극 연출가 이윤택(61)씨가 경축 행사를 총감독한다. 중수에 참여했던 20살의 신응수는 66세에 대목장으로 숭례문 복구공사에 참여해 칠순을 넘겼다.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신응수 대목장과 28일 숭례문 현장을 찾았다. 숭례문은 1395년(태조 4년)에 짓기 시작해 1398년 완성한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조선의 수도인 한성을 보호하는 성곽의 남문으로 남대문으로 더 잘 알려졌다. 이후 1447년(세종 29년)에 개축했으나 1961~1963년의 중수 과정에서 1479년(성종 10년)에도 대규모 보수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번 복구의 기준은 1960년대 중수였다. 그래서 복구된 숭례문의 외관은 조선 전기에 사용했던 녹색과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단청을 입었다. 울긋불긋한 절집의 단청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위엄 있고 묵직한 느낌이다. 당시 중수의 책임자였던 조원규 대목장은 숭례문의 1층이 조선 후기 양식으로 변형돼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전기 양식으로 바로잡았다. 조선 후기 건물 양식인 광화문 등에 달렸던 완초공 등을 제거했고, 덩굴무늬 등도 당연히 없앴다. 그 과정에서 문화재 담당 공무원과 갈등도 빚고 그만두기도 했다. 당시 문화부 차관이 조 대목장 집을 찾아가 모셔 오지 않았더라면, 숭례문 중수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번 복구공사가 1960년대 중수와 다른 점은 더 철저하게 전통 방식으로 복구하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공장에서 찍어 낸 기와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제작한 가벼운 기와를 썼고, 대장간을 숭례문 복구 현장에 설치해 직접 못과 철물을 만들어 썼다. 중수보다 용마루 길이가 0.9m 늘어나 16.6m가 됐고, 1층 잡상(지붕 장식물)도 8개에서 7개로 줄었다. 1층 마루도 우물마루에서 장마루로 바뀌었다. 성곽을 좌로 16m, 우로 53m 복원해 군사시설이란 목적을 확실히 했다. 목재도 전동기기 대신 도끼와 자귀로 다듬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런 시간을 계산하지 않은 탓에 늘어난 목수들 품삯을 놓고 문화재청과 갈등이 생겨 지난해 1월 목공사가 한 달 정도 중단되기도 했다. “옛날만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완공된 모습을 보니 뿌듯합니다. 도편수(대목장)가 돼서 공사가 잘못됐으면 당시 도편수였던 조원재 선생님이 나한테 잘못 전수한 것이 됐을 테니 그런 무례가 없잖아요. 정말 잘 배웠구나 싶습니다.” 복구 기간 내내 전통 방식으로 목공사를하지 않았다느니, 한옥에는 못을 사용하지 않는데 못을 썼다느니, 단청을 한 용무늬가 잘못됐다느니, 적심 탓에 화재에 취약하다느니 등등 말도 많았다. 신 대목장은 “눈으로 보이는 부분에 못을 안 쓰니까 한옥은 끼워 맞추기만 하는 줄 아는데, 오해다. 근정전을 해체해 보니 2m 가까운 대못이 나오기도 했다. 우물마루는 목재를 끼워서 쓰지만, 장마루에는 못을 써야 한다. 또 홍예의 용무늬 단청이 잘못됐다는 오해는 풀리지 않았나. 적심 탓에 화재에 취약하다는 것은 문제지만 차차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조목조목 반박했다. “마지막으로 문화재 보호를 기계에만 맡기지 말고, 국민 모두가 감시자가 돼 국보 1호를 보호했으면 좋겠다”며 복구된 숭례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숭례문 5월 4일 공개] 양녕 친필 현판 지킨 장성삼씨

    [숭례문 5월 4일 공개] 양녕 친필 현판 지킨 장성삼씨

    “숭례문을 다시 볼 수 있게 돼 감회가 새롭습니다. 소중한 문화재가 소실되는 불행한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합니다.” 2008년 숭례문 화재 당시 위험을 무릅쓰고 화재 현장에서 양녕대군이 쓴 숭례문 현판을 구했던 장성삼(60) 전 서울 중구 관광공보과장은 “한양도성 해설사 과정을 수강하면서 숭례문을 탐방할 때마다 5년 전 화재가 다시 떠오른다”며 숭례문을 다시 보는 소감을 밝혔다. 정년을 1년 앞두고 지난해 말 명예퇴직한 뒤 6개월 과정의 한양도성 해설사 과정을 수강 중인 그는 2008년 2월 10일 밤 숭례문 화재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당시 구청 공보팀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TV를 통해 화재 소식을 접하고 도봉구 쌍문동 집에서 곧바로 숭례문으로 달려갔다”면서 “도착해 보니 큰 불은 진압된 듯했지만 지붕 위로 연기가 심상치 않게 나더니 불길로 번졌다”고 전했다. 그는 숭례문 간판을 구할 당시 상황에 대해 “불길이 문루까지 번지자 한 소방관이 현판의 대못을 뽑아내면서 현판이 10여m 아래 바닥으로 떨어졌다”면서 “양녕대군의 친필인 현판만이라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출입을 막던 경찰을 뿌리치고 현판이 떨어진 곳으로 달려갔다”고 말했다. 당시 불붙은 서까래가 하나씩 떨어지고, 소방 호스의 물줄기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누구도 불속에 들어가 현판을 꺼내 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더욱이 길이 3.5m, 폭 1.5m에 무게가 150㎏이나 되는 현판을 혼자 옮기기는 무리였다. 그는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불속의 현판을 겨우 꺼낼 수 있었다. 이어 주변에 있던 전경들에게 현판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도록 건네주었다. 그는 “현판의 테두리가 심하게 파손됐지만 다행히 형태를 보존한 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됐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앞으로 한양도성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면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들을 널리 알리고 지키는 데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조현석 기자 hyun68@seoul.co.kr
  • [숭례문 5월 4일 공개] 숫자로 본 5년 3개월의 복구

    숭례문은 2008년 2월 어처구니없는 방화로 2층으로 된 문루가 불타 내렸다. 이후 5년 2개월 20일간의 복구가 진행됐다. 당시 국민은 숭례문이 모두 소실됐다고 절망했지만 1층은 멀쩡했다. 2층 문루도 일부는 건질 수 있었다. 그래서 복원이 아니라 복구공사가 된다. 불에 그슬린 통나무를 적심으로 사용하는 등 숭례문 부자재로 활용했다. 투입된 총비용은 245억원으로 문화재청 숭례문 자체복구 비용 147억원과 기탁금 7억 5000만원, 신한은행 12억원, 포스코 3억원, 서울시의 관리동 건립비 9억 2000만원 등이 포함됐다. 신응수 대목장과 이재순·이의상 석장, 홍창원 단청장, 한형준 제와장, 이근복 번와장, 신인영 대장장 등 중요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가 참여했다. 복구에 동원된 인원은 총 3만 5000명이다. 신응수 대목장이 주도한 목공사에는 3968명이 참여했다. 목재는 국내산 육송 15만 1369재가 사용됐다. 25t 트럭 28대분이다. 화마를 피한 목재 6만 47재는 재활용했다. 국민들이 1만 855재를 기증했다. 복원에 사용된 목재는 문루 아래층(1층)의 경우 90% 이상이 기존 부재다. 2층 문루는 4개 고주(중심기둥)를 최대한 살렸고, 그 위에 새 나무를 덧대 화재의 흔적이 보인다. 단청 작업에는 1541명이 동원됐다. 안료는 12종 1332㎏이 사용됐다. 석간주(82㎏)와 호분(80㎏)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수입했다. 기와는 이근복 번와장 감독 아래 284명이 참여해 전통기와 2만 3369장을 지붕에 이었다. 암키와 1만 4991장, 수키와 7284장, 암막새 488장, 수막새 519장, 특수기와 96장 등을 사용했다. 대장장 신인영의 주도하에 251명이 철물을 생산했다. 못 등 31종 3만 7563개가 사용됐으며, 총무게는 6.3t이다. 방재 장치도 강화했다. 건물 안에는 스프링클러 장치, 건물 밖에는 소화전과 방수총을 북동, 북서, 남동, 남서 귀퉁이에 각 1개씩 총 4개 설치했다. 지붕 적심과 개판 사이에 방염천을 설치해 섭씨 1000도 이상 고온에서도 10분 이상 견딜 수 있게 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20살 ‘풋내기 중수’, 51년만에 숭례문 복구하다

    20살 ‘풋내기 중수’, 51년만에 숭례문 복구하다

    “숭례문을 뜯어는 놓았는데 기술자가 없어 다시 세우지를 못 한다네.” 어둑어둑해지는 해거름 무렵 서울 마포구 아현동 골목 어귀에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런거렸다. 1961년 7월 해체를 시작한 숭례문은 1962년 3월쯤 완전히 해체됐다. 현재 남대문시장 쪽에 아름드리 나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1962년 4월 ‘급래’(急來) 딱 두 글자의 전보를 받고 서울로 뛰듯이 올라와 숭례문 중수 현장에서 일하던 당시 20살의 어린 목수 신응수는 걸어서 아현동 거주지로 퇴근하던 길에 이런 걱정을 들었다. 신 목수는 마음속으로 “내가 바로 그 숭례문을 다시 세우는 사람입니다”라고 외치며 어깨에 한껏 힘을 주고 뿌듯하게 지나갔다. 해체된 목공사가 완료되던 1962년 12월 20일 숭례문은 국보 1호로 지정됐다. “지금이라면 가던 길을 멈추고 ‘어르신 걱정하지 마세요. 대목장 조원재(1903∼1976) 지휘 아래 잘 만들고 있습니다’라고 할 텐데?”라고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신응수(71) 대목장은 회상했다. 그는 1963년 3월까지 만 11개월 동안 조원재 대목장 밑에서 대패질과 톱질을 하면서 숭례문이 조선 전기 건축물 양식으로 군더더기 없이 완전해지는 데 힘을 보탰다. 1963년 5월 14일 숭례문에서 완공식을 했다. 그 뒤 50년이 지난 2013년 5월 4일, 2008년 2월 방화로 2층 문루가 크게 소실됐던 숭례문이 5년 3개월 만에 복구공사를 마치고 국민들에게 완전히 돌아온다. ‘숭례문, 문화의 새 문이 열린다’는 슬로건 아래 연극 연출가 이윤택(61)씨가 경축 행사를 총감독한다. 중수에 참여했던 20살의 신응수는 66세에 대목장으로 숭례문 복구공사에 참여해 칠순을 넘겼다.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신응수 대목장과 28일 숭례문 현장을 찾았다. 숭례문은 1395년(태조 4)에 짓기 시작해 1398년 완성한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조선의 수도인 한성을 보호하는 성곽의 남문으로 남대문으로 더 잘 알려졌다. 이후 1447년(세종 29)에 개축했으나 1961~1963년의 중수 과정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대규모 보수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번 복구의 기준은 1960년대 중수였다. 그래서 복구된 숭례문의 외관은 조선 전기에 사용했던 녹색과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단청을 입었다. 울긋불긋한 절집의 단청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위엄 있고 묵직한 느낌이다. 당시 중수의 책임자였던 조원규 대목장은 숭례문의 1층이 조선 후기 양식으로 변형돼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전기 양식으로 바로잡았다. 조선 후기 건물 양식인 광화문 등에 달렸던 완초공 등을 제거했고, 덩굴무늬 등도 당연히 없앴다. 그 과정에서 문화재 담당 공무원과 갈등도 빚고 그만두기도 했다. 당시 문화부 차관이 조 대목장 집을 찾아가 모셔 오지 않았더라면, 숭례문 중수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번 복구공사가 1960년대 중수와 다른 점은 더 철저하게 전통 방식으로 복구하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공장에서 찍어 낸 기와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제작한 가벼운 기와를 썼고, 대장간을 숭례문 복구 현장에 설치해 직접 못과 철물을 만들어 썼다. 중수보다 용마루 길이가 0.9m 늘어나 16.6m가 됐고, 1층 잡상(지붕 장식물)도 8개에서 7개로 줄었다. 1층 마루도 우물마루에서 장마루로 바뀌었다. 성곽을 좌로 16m, 우로 53m 복원해 군사시설이란 목적을 확실히 했다. 목재도 도끼와 자귀로 다듬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런 시간을 계산하지 않은 탓에 늘어난 목수들 품삯을 놓고 문화재청과 갈등이 생겨 지난해 1월 목공사가 한 달 정도 중단되기도 했다. “옛날만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완공된 모습을 보니 뿌듯합니다. 도편수(대목장)가 돼서 공사가 잘못됐으면 당시 도편수였던 조원재 선생님이 나한테 잘못 전수한 것이 됐을 테니 그런 무례가 없잖아요.” 복구 기간 내내 전통 방식으로 목공사를 않았다느니, 한옥에는 못을 사용하지 않는데 못을 썼다느니, 단청을 한 용무늬가 잘못됐다느니, 적심 탓에 화재에 취약하다느니 등등 말도 많았다. 신 대목장은 “눈으로 보이는 부분에 못을 안 쓰니까 한옥은 끼워 맞추기만 하는 줄 아는데, 오해다. 근정전을 해체해 보니 2m 가까운 대못이 나오기도 했다. 우물마루는 목재를 끼워서 쓰지만, 장마루에는 못을 써야 한다. 또 용무늬 단청이 잘못됐다는 오해는 풀리지 않았나. 적심 탓에 화재에 취약하다는 것은 문제지만 차차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조목조목 반박했다. “마지막으로 문화재 보호를 기계에만 맡기지 말고, 국민 모두가 감시자가 돼 국보 1호를 보호했으면 좋겠다”며 복구된 숭례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숭례문 복구 기념… ‘희망’을 보내는 동심

    숭례문 복구 기념… ‘희망’을 보내는 동심

    문화재청이 숭례문 복구 기념식(5월 4일)을 앞두고 22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개최한 ‘문화융성 희망우체통’행사에 어린이와 시민들이 희망엽서를 넣고 있다. 이 행사는 다음 달 2일까지 100여곳에서 열린다. 이 엽서들은 ‘희망보감’으로 제작되고, 기념식 날 숭례문에서 채여(왕실에서 귀중품을 운반하던 가마)에 실어 광화문으로 옮긴 뒤 숭례문에 보관했다가 1년 뒤 작성자에게 발송된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새달 4일, 숭례문 다시 열린다

    국보 1호 숭례문이 5월 4일 다시 문을 연다. 문화재청은 숭례문 복구 기념식 및 축하 행사를 5월 4일 오후 2시 숭례문, 세종로,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연다고 21일 밝혔다. 2008년 2월 10일 방화 이후 5년 3개월간 전통 방식으로 진행된 숭례문 복구 공사는 4월 31일 최종 마무리된다. 이에 앞서 22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광화문광장과 신한은행 전국 각 지점 100여곳에 ‘문화 융성 희망 우체통’이 설치된다. 복구 기념식 전에 진행되는 사전 행사로, 숭례문과 문화유산을 가꾸며 지켜 나가자는 뜻을 담은 엽서를 적어내면 이를 담아뒀다가 1년 뒤 엽서를 쓴 사람에게 발송한다. 누구나 희망엽서를 작성해 참여할 수 있다. 엽서들은 ‘희망보감’으로 제작돼 숭례문 복구 기념식날 숭례문에서 채여(彩轝·왕실의 귀중품 운반 가마)에 실려 광화문까지 행렬과 함께 운반된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5년 만에 모습 드러낸 숭례문

    5년 만에 모습 드러낸 숭례문

    2008년 2월 화재를 당한 지 5년여 만인 15일 복구공사 가림막을 완전히 벗은 숭례문. 화재 당시 누각을 받친 석축만 남기고 전소됐던 숭례문은 좌우측 성곽이 복원돼 군사 방위시설로서 뽐낸 웅장한 본래 자태를 되찾았다. 문화재청은 숭례문 주변 정비를 거쳐 오는 5월 중 의미 있는 날을 정해 현판 제막식을 겸한 준공식을 할 계획이다. 정연호 기자 tpgod@seoul.co.kr
  • [어린이 책꽂이]

    엄마 꿈속에서(유준재 지음, 문학동네 펴냄) “엄마, 잠이 안 와. 한 개도 안 와.” 아이는 오늘밤도 보챈다. 이럴 때 머리맡에 두고 함께 보기 좋은 그림책. 불 꺼진 방 안, 엄마는 딴짓 하는 지수를 애써 재우려 하지만 딸의 눈은 여전히 말똥말똥하다. 엄마가 먼저 잠들자 지수는 ‘꿈속에서 엄마가 무얼 하고 있을까’ 궁금하기만 하다. ‘분홍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을까’, ‘큰 물고기를 찾아 바다로 떠났나’. 1만 2000원. 팬티가 날아다녀요(카라 르비한 글, 데보라 올라잇 그림, 신혜규 옮김, 종이책 펴냄) 패티 아줌마가 빨랫줄에 널어놓은 분홍색 팬티. 산들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날아간다. 광장을 지나 신호등에 걸려 소동이 일어나고, 연에 걸려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펼쳐진다. 동물원에도, 놀이공원에도, 바다에도 간다. 아이의 상상력을 키워주는 특별한 여행. 좌충우돌 모험과 유쾌하고 엉뚱한 그림이 가득하다. 1만원. 아빠가 들려주는 숭례문 이야기(이용재 글, 이승원 그림, 한솔수북 펴냄) 600년간 자리를 지켜온 국보 1호 숭례문. 초등학생들이 쉽게 다가가도록 그림책 형식으로 풀어놨다. 건축평론가 이용재가 어린 딸과 함께 숭례문 구석구석을 돌며 그 안에 담긴 역사와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숭례문 편액은 왜 가로가 아닌 세로인지, 육축에 쓰이는 화강암에는 어떤 비밀이 담겼는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1만 2000원.
  • 숭례문 복구 기념주화 발행

    숭례문 복구 기념주화 발행

    한국은행과 조폐공사·문화재청은 11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에서 숭례문 복구 기념주화를 처음 공개했다. 최대 3만개가 발행되는 이 기념주화는 액면가 5만원의 은화로 판매가격은 5만 7000원이다. 오는 25일까지 농협은행과 우리은행의 전국 지점과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한 사람당 3개까지 예약할 수 있다. 이종원 선임기자 jongwon@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경복궁 야간 지킴이로 새 삶 사는 ‘시라소니 이후 최고 주먹’ 방동규 씨

    [김문이 만난사람] 경복궁 야간 지킴이로 새 삶 사는 ‘시라소니 이후 최고 주먹’ 방동규 씨

    “나를 주먹, 건달, 협객, 뭐라고 해도 상관없지만, 그냥 뜨거운 내 인생을 찾아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을 뿐이오.” 이 시대의 낭만 협객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시라소니 이후에 최고의 주먹, 한번에 17명과 맞서 싸운 전설, 백기완, 황석영과 함께 조선의 3대 구라”라고. 본명 방동규, 아니 ‘방 배추’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1935년 개성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각종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중·고교 시절, 뜻하지 않게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1954년 체육특기생으로 홍익대 법학과에 입학했고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 구중서(문학평론가) 등과 함께 나무를 심고 계몽운동을 펼쳤다. 30살에 독일에서의 광부생활, 4년 동안 파리에서의 유랑생활, 양장학교 수업, 중동 파견, 긴급조치와 ‘말지’사건으로 구속수감 등 실로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겪었다. 2006년 경복궁 관람안내 지도위원으로 있다가 잠시 그만둔 뒤 2011년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야간지킴이 일을 하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낭만 협객이 80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경복궁의 파수꾼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지난달 22일 저녁 경복궁에서 방씨를 만나 사진 촬영을 한 다음 인근 막걸리 집으로 장소를 옮겼다. 등산복 점퍼에다 청바지 차림이었다. 백발이긴 한데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걸음걸이가 경쾌하다. 말할 때는 “이봐, 이 사람” 등을 섞어가면서 자신감을 나타냈다. 자리에 앉으면서 “내가 2003년 서울시장배 보디빌딩 대회(장년부)에서 6등을 했거든, 나이 80 되는 내년에는 꼭 우승하려고 그래. 그런 각오로 하루 1시간씩 꼭 운동을 하고 있지. 허허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단단한 팔뚝 근육을 잠깐 보여준다. 요즘 근무하고 있는 경복궁 야간지킴이 활동에 대해 먼저 물었다. “말 그대로 야간에 경복궁을 지키고 경비하는 일이여. 물어볼 것도 없어. 경복궁에는 오랫동안 내려오는 정기 같은 것이 있잖아. 그런 정기를 받고자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무작정 담을 넘어오는 사람도 더러 있어. 참 내원. 거 머시기야. 남대문에 불을 지른 사람도 창경궁에 불을 지르려다가 붙잡혔잖아. 당시 초범이고 노인이어서 풀어줬는데 결국 남대문에서 사고 쳤거든. 야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해.” 경복궁 주변에서 막무가내로 버티는 사람도 많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친절하게 대해 주다가 정 안 되면 강제로라도 끌고 나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올까. 방씨는 아직은 괜찮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방씨는 오후 5시 30분에 출근해서 그 다음 날 아침 8시 30분에 퇴근한다. 15시간을 근무하는 셈이다. 어떤 인연으로 경복궁에서 일하게 됐을까. “유홍준씨와 각별히 친하지. 긴급조치법 2호 때 독방에 있었어. 유홍준씨가 학생들과 데모하다가 감옥 옆방에 들어왔어. 통방이라고 하거든. 벽을 똑똑 두드리면 옆방에서 반응을 해. 귀에다 대고 말을 하면 서로 통화가 잘돼. 그때부터 형·동생으로 지내게 됐고 감옥에서 나와 같이 술 마시면서 아주 친해졌어. 또 이때 같이 수감된 이호철, 임헌영, 장준하, 백기완 등과 인연을 맺었어. 아주 각별하지.” 이후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고 유홍준씨가 문화재청장으로 재직 시 방씨에게 경북궁에서 일하도록 배려를 해 줬다. 이에 대해 방씨는 “아마 왕년의 주먹이자 몸짱 할아버지라는 이미지와 ‘경복궁 지킴이’의 역할이 썩 잘 어울렸는지 이곳저곳에서 인터뷰를 해 화제의 인물로 부각됐다”고 했다. 그는 지인들에게 사발통문을 날려 인사동에서 송년회를 겸해 ‘배추 취직 축하연’ 자리를 가졌다. 이때 임재경 전 한겨레신문 부사장, 시인 신경림, 정치인 김태홍과 이부영, 춤꾼 이애주, 불문학자 최권행 등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이 또한 언론에 보도돼 또 한번 화제가 됐다. 그렇다면,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과 인연이 된 긴급조치법 2호와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큰딸 이름은 방그레, 둘째는 방시레이다. 웃는 행렬로 지었단다. 방씨가 강원 철원 노느메기밭에서 일할 때였다. 둘째 딸 출산을 위해 서울 어머니네 집에 들러 병원을 가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점퍼 차림의 두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나 권총을 들이대면서 철원에서 대구 경찰서 대공분실로 연행했다. 이유는 서울에 아는 사람이 많고 정치와 문화계통에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취조를 해야 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심문 내용은 이런 것이었어. 뭐, 다짜고짜 김일성과 무전 친 암호를 대라고 했어. 나는 무전기도 만질 줄 모르고 집에 그런 것도 없다고 했지. 그때 산에서 농사를 지을 때 아는 사람이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하나 줬어. 그걸로 트집을 잡는데 참 황당하더라고. 그렇게 6개월 동안 고문받으며 지내다가 나왔어.” 1986년 ‘말지’ 사건 때도 수감됐다. 김태홍 전 국회의원과 형·동생하면서 지냈다. 제5공화국 시절 언론 보도지침이 나왔을 때 김 전 의원이 수배 대상이 돼 고향인 광주로 피신해야 했다. 방씨는 그런 사정을 알고 김 전 의원과 함께 광주로 동행했다. 이런 이유가 나중에 밝혀져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 가서 고문을 받았던 것. “그때 고문기술자 이근안씨를 만났어. 고문실에 들어가면 옆방이나 옆옆방 정도에서 비명 같은 것이 들려. 진짜 고문해서 나는 비명인지 하여간 그런 소리 들리면 맥이 쫙 풀려. 그런데 이근안씨는 때리지는 않고 아주 상당한 기술이 있더구먼(웃음).” 화제를 돌렸다. 왜 ‘배추’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6·25전쟁 혼란기 때였다. 방씨는 당시 경신·대광고와 정신여고 등 기독교 계열의 학교들이 합쳐진 전시 연합학교에 다녔다. 전쟁 혼란기라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평소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군복 등 입을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거나 걸쳐 입고 다녔다. 특히 방씨는 6·25 때 부산과 호남에서 장사하던 옷차림 그대로였다. 여학생들은 이런 방씨의 모습을 보고 ‘쟤가 싸움 잘하는 배추장수’라고 했고, 결국 ‘배추’로 굳어졌다. ‘시라소니 이후의 최고의 주먹’이라는 별명은 어떻게 얻었을까. 방씨는 1950년대 학생 주먹으로 유명했다. 고등학생 때 대학가의 주먹들과 붙는 일이 자주 있었다. 1953년과 1954년에는 대학생 건달로 악명을 떨치던 ‘춘하’의 패거리들과 싸웠고 전국 씨름왕의 도전을 받아들여 이기기도 했다. 창경원에서 특수부대 군인 출신인 깡패들과 맞짱을 뜨면서 ‘양배추’의 이름이 장안에 알려졌다. 당시 신문기사 제목이 ‘군인 깡패, 학생에게 혼쭐나다’였다.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이라는 근원지는 소설가 황석영이었다. 그럴 것이 1960년대를 거쳐 1990년대까지 잊을 만하면 한두 번씩 ‘맞짱의 전설’을 만들어냈다. 국내뿐만 아니라 파리와 스페인 등 해외에서도 그랬다. 문단의 화제였고 술자리의 단골 주인공이었다. 특히 방씨는 재야 세력의 주먹으로 반독재 민주화를 기치로 내건 문화운동패의 문인, 화가, 그리고 지식인들과 두루 친했다. “내가 말야. 한창 주먹으로 이름을 날릴 무렵 이정재가 제3자를 보내 은근히 영입의사를 밝힌 적이 있어. 당시 이정재는 유지광을 전면에 내세워 동대문시장과 평화시장 일대를 주무대로 하는 ‘화랑동지회’라는 단체를 조직했거든. 이 조직의 후신인 반공청년단 등을 만들어 사회적 이권과 정치세계에까지 개입하고 있었지.” 그러나 방씨는 이정재의 제안을 단호하게 뿌리쳤다. 이유는 간단했다. ‘중국무협사’에 주가(朱家)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그는 첫째, 가난하고 빈천한 사람부터 도왔다. 둘째, 의협을 행하면서도 남이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해 굳이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셋째, 가난하고 청빈하여 집에 재물이 없었다. 적어도 사나이라면 이러한 의기는 지녀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정치깡패들과 한통속이 된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방씨는 운동가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육상 등 각종 운동을 했고 막내 삼촌은 승마, 고모는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였다. 방씨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육상과 높이뛰기, 넓이뛰기, 수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수로 발탁됐다. 고등학교 때에는 역도와 합기도를 했다. 그는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 중국, 중동 국가 등에서 생활했던 경험이 있어 지금도 6개 국어를 구사한다. ‘조선의 3대 구라’라는 말 또한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지나온 세월을 반추한다. “돌이켜보면 가난하더라도 ‘마음 부자’에 ‘친구 부자’로 지냈어. 비록 별 볼 일 없이 살았지만, 친구들은 하나같이 모두 멋진 사람들이야. 정말 복 받은 사람이지. 그 복을 보디빌딩 장년부 우승으로 갚아 주려고 해. 세상이 뭐라 하든 나의 길을 가는 것이 원칙이야.” 너털웃음과 함께 ‘배추의 호방함’이 향기롭다. 헤어지면서 “앞으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좋은 친구가 되면 어떠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세상은 좋은 친구들이 많아야 해”라며 다시 웃는다. 선임기자 km@seoul.co.kr ■방동규씨는 누구 1935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1948년 월남 후 경신고와 대광고, 정신여고 등이 합쳐진 기독교 계통의 연합학교를 나왔다. 중학교 시절부터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으로 유명했다. 1954년 체육특기생으로 홍익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이때 백기완, 구중서, 김태선 등과 함께 나무를 심고 계몽운동을 펼쳤다. 30세에 독일에서 광부생활을 했고 4년여 동안 파리에서 유랑생활을 했다. 고국으로 돌아와서 양장점 ‘살롱드방’을 운영했고 1973년에는 강원도 철원의 ‘노느메기밭’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다. 이때 간첩 혐의로 수감되기도 했다. 1979년부터 2년 동안 중동 아랍에미리트연합에서 건설노동자로 근무했고 1986년 ‘말지’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1991년 서해화성 경영자(CEO)로 취임했고 3년 뒤에는 중국 공장 대표이사를 지냈다. 2001년에는 헬스클럽 강사로 깜짝 변신했다. 2006년부터 경복궁 관람 안내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다 2008년 그만둔 뒤 2011년부터 경복궁 야간 지킴이로 근무하고 있다.
  • 숭례문 복구 기념주화 나온다

    숭례문 복구 기념주화 나온다

    ‘국보 1호’ 숭례문 복구 기념주화가 4월 30일 발행된다. 우리은행과 농협에서 오는 11일부터 25일까지 예약을 받는다. 한국은행은 28일 방화로 소실됐던 국보 1호인 숭례문이 원형 복구작업을 거쳐 준공을 앞두고 있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기념주화를 발행한다고 밝혔다. 액면가 5만원짜리 은화로 지름 3.3㎝, 무게 19g이다. 테두리는 톱니 모양이며 앞면은 복구된 숭례문의 정면을 새로 복원되는 성곽과 함께 표현했다. 뒷면은 기왓등 끝 부분에 쓰이는 수막새기와의 봉황 무늬를 담았다. 판매분은 국내용 2만 7000개, 국외용 3000개 등 총 3만개다. 판매금액은 액면가에 부대비용 7000원을 더한 5만 7000원이다. 1인당 최대 3개까지 신청할 수 있다. 전경하 기자 lark3@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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