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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 시복식]교황 광화문 미사 준비로 15일 교통통제…세월호 유족(유가족) 시복식 참석 예정

    [광화문 시복식]교황 광화문 미사 준비로 15일 교통통제…세월호 유족(유가족) 시복식 참석 예정

    ‘광화문 시복식’ ‘교황 광화문 미사’ ‘15일 교통통제’ ‘교황 세월호 유족’ 광화문 시복식 및 교황 광화문 미사 준비로 15일 교통통제가 이뤄질 전망이다. 교황 세월호 유족 위로에 이어 세월호 유족들이 광화문 시복식에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교황 프란치스코 방한 이틀째인 15일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식을 하루 앞두고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교통통제가 본격화되고 있다. 15일 경찰에 따르면 광화문광장 북쪽에 시복식 제단과 시설물이 설치됨에 따라 이날 정오부터 정부중앙청사 사거리→경복궁사거리 전 차로가 통제된다. 경찰은 이 방향으로 차량이 갈 수 있도록 가변차로를 운용하고 유턴도 가급적 허용할 방침이지만 시설물 설치 상황에 따라 상황은 유동적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날 오전부터 시복 미사 행사장을 감싸는 높이 90㎝의 방호벽 설치 작업이 시작됨에 따라 광화문 삼거리↔세종대로 사거리 상위 2개 차로, 시청→세종대로 사거리 상위 2개 차로가 통제된다. 이날 오후 7시부터는 광장 주변 도로도 단계적으로 통제될 전망이다. 오후 7시에 광화문 삼거리↔세종대로 사거리, 중앙청사 사거리↔경복궁 사거리 차로가 막히고 오후 8시에는 중앙지하차도가 봉쇄된다. 오후 9시에는 세종대로 사거리↔시청 앞, 시청 삼거리→대한문 구간이 통제되고 오후 11시에는 오피시아빌딩 앞↔종로구청 입구 구간이 막힌다. 시복식 당일인 16일 오전 2시부터는 경복궁역에서 안국동, 종로1가, 광교, 을지로1가, 한국은행, 숭례문, 염천교, 경찰청앞, 서대문역, 구세군회관을 돌아 다시 경복궁역을 잇는 구간의 교통이 통제된다. 시복 미사에 참석하려면 대중교통을 이용해 이 통제 구간 바깥까지 와서 입구까지 걸어가야 한다. 한편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족 600여 명이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 교황방한위원회 허영엽 대변인은 14일 소공동 롯데호텔 프레스센터에서 연 브리핑에서 “전날 세월호 유족 측에서 600명이 시복식에 참석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허 대변인은 이어 “이미 (시복식의) 자리 배치가 끝났지만 신도들이 불편을 감수하고 조금씩 좁혀서 앉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날 공항에 내린 프란치스코 교황은 환영단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다 세월호 가족을 소개받자 왼손을 가슴에 얹고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다. 가슴이 아프다.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있다”고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넸다. 세월호 유가족 시복식 참석에 네티즌들은 “세월호 유가족 시복식 참석,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될 것”, “세월호 유가족 시복식 참석, 상당히 기대된다”, “세월호 유가족 시복식 참석, 뭔가 가슴이 뭉클하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0) 지명(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0) 지명(중)

    ●창지개명은 단군 이래 최악의 민족정기 말살 사건 서울의 지명은 다중(多重)적이다. 대부분 지명은 여러 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 모든 지명에는 그렇게 부르게 된 명명(命名) 동기가 있는 데 이를 지명의 유래라고 한다면 서울의 지명은 2000년 동안 성쇠와 풍상을 겪으면서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엄청난 생성과 소멸 과정을 거친 적자생존의 산물이다. 서울의 지명은 산이나 물, 고개, 풍수, 바위, 들, 땅 모양, 인물, 식물, 역사적 사실을 나타내는 정겨운 토박이 이름이 주를 이뤘다. 훈민정음 창제(1446년) 이전까지 비록 우리 글이 없었지만 한자(漢字)를 빌려 이두(吏)로 적었기에 소리 체계는 살아 있었다. 더욱이 수도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역사가 깊숙이 배어 있다. 예컨대 사간동, 내수동 같은 관아 지명이나 동소문동 같은 성문 지명을 비롯하여 왕십리나 답십리 같은 전설 지명, 압구정동 같은 누정 지명과 정릉동, 효창동 같은 능원 지명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지명의 역사에는 두 가지 경천동지할 사건이 있다. 신라 경덕왕(757년) 때 모든 지명을 일률적으로 한자로 바꾸면서 가해진 변형이 첫 번째다. 그러나 두 번째 사건인 일제의 창지개명(創地改名) 앞에서는 조족지혈이다. 일제는 조선 사람 이름을 일본 이름으로 바꾸고(창씨개명), 땅이름도 제멋대로 바꿨다. 단군 이래 최악의 사건이라 할만하다. 서울의 지명에는 이 모든 영욕이 담겨 있다. 서울은 조선 개국 이후 한성부(한성)가 공식 명칭이었지만 한양 또는 서울이라는 지명이 더 널리 쓰였다. 뿐만 아니라 도성, 수선(首善), 도읍, 경조(京兆), 경도(京都), 사대문 안 등 다양한 별칭으로 불렸다. 오늘의 서울을 있게 했고, 서울에서 가장 중요한 산인 삼각산과 백악산은 북한산, 북악산이라는 이명(異名)을 갖고 있다. 남산과 청계천의 본명도 목멱산과 개천이지만 잊혀진 이름이다. 남산은 목멱산이라는 옛 이름보다 오히려 정겨운 것이 사실이다. 인위적인 지명의 전이(轉移)가 아니어서 그렇다. 역사학자 안재홍은 목멱(木覓)은 남산의 우리말인 ‘마뫼’의 이두 표기라고 풀었다. 우리말 마뫼의 ‘마’는 앞이고 ‘뫼’는 산이므로 남산의 남(南)자는 ‘남녘 남’ 자가 아니라 ‘앞 남’자이며 결국 남산은 앞산이라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남산은 주산(主山)인 백악산의 앞산이요, 왕이 사는 경복궁의 앞 산이었다. 지금은 서울이 확장되면서 강북과 강남의 가운데에 자리잡은 중앙산(中央山)이 됐지만…. 그러나 청계천 개명은 사정이 다르다. 옛 이름인 개천(開川)보다 청계천이 더 청결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역사성이 훼손됐기 때문이다. 청계천은 백악산과 인왕산 사이의 골짜기였다. 개천의 발원지로 ‘청풍계천’(?風溪川)이 본명인데 청계천이라고 줄여 불렀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개천의 상류가 청계천인 셈이다. 1916년 6월 24일자 매일신보에 청계천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했다. ‘청계천변 시찰’이라는 기사에서 “개천, 일명 청계천…”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10년이 흐른 1927년 조선총독부가 ‘조선하천령’을 제정하면서 청계천이라고 바꿔 버렸다. 조선 500년 동안 한양도성의 명당수이자 하수구였던 개천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숭례문, 흥인지문, 숙정문, 돈의문처럼 조선 개국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이 명명한 사대문의 정식 명칭을 두고 남대문, 동대문, 북대문, 서대문이라고 즐겨 불렀다. 광희문, 혜화문, 창의문, 소덕문 등 사소문 또한 수구문(시구문), 동소문, 자하문(북소문), 서소문이라는 별칭을 주로 썼다. 인위적인 엄숙한 지명보다 방향이나 쓰임새 위주로 호칭하기를 즐겼다. 한강도 지금은 하나의 이름으로 통칭되지만 조선시대에는 동호, 경강, 노들강, 용산강, 서강, 조강 등 지역별로 세분해서 불렀다. 그중에서 3개의 강이 주를 이뤘다. 경강은 지금의 한남대교~노량진 구간, 용산강은 노량진~마포, 서강은 마포~양화진 구간을 각각 지칭했다. 학자에 따라서는 5강, 8강, 12강까지 세분했으니 우리 지명의 다중성은 일일이 예로 다 들 수 없을 정도다. ●역사는 지명에 의해 기록되지만 지명은 역사를 창조하기도 지명의 다중성은 어디에서 연유됐을까. 역사의 곡절 때문이다. 역사는 지명에 의해 기록되지만, 지명이 역사를 창조하기도 한다. 지명학(Toponymy)의 어원이 그리스어 토포스(Topos·장소)에서 비롯된 것처럼 지명은 땅의 기원과 의미, 변천사를 단순화해 보여주는 척도다. 지명이 곧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자료가 남아 있지 않을수록 역사 연구에서 지명 의존도는 높다. 지명이 복잡하다면 그만큼 역사가 고단했다고 볼 수 있다. 지명이 여럿이라고 해서 반드시 역사의 고단함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성명학(姓名學)에 빗대 보면 사물에는 하나의 이름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명(名)이 있다. 성년이 되면 자(字)를 가지며 사람에 따라 호(號)를 가진다. 죽은 뒤 시호(諡號)를 받는 사람도 있다. 왕은 사후 묘호(廟號)와 능호(號)를 가진다. 성명학에서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자나 호를 부르도록 한 것은 이름을 귀히 여기는 존명 사상 때문이다. 왕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국휘(國諱)라고 하고, 존속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을 피휘(避諱)라고 했다. 자와 호가 없는 일반인들도 이름이 함부로 불리는 것을 꺼렸기에 ‘안동댁’ 같은 택호(宅號)를 두어 누구나 부를 수 있도록 했다. 사람의 이름이 여럿이듯 땅의 이름인 지명도 여럿일 수 있다는 것이 우리네 사고방식이었다. 사람이나 사물에 별칭이 따로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지명 왜곡은 차원이 다르다. 민족의 역사와 정기를 말살하고자 획책했다. 1914년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군을 317개에서 220개로, 면은 4322개에서 2518개로 축소하는 어마어마한 행정개편을 단행했다. ‘전국 방방곡곡(坊坊曲曲)’을 이루던 우리의 마을 방(坊)을 폐지했다. 서울은 186개의 동(洞)-정(町)-통(通)-정목(丁目)으로 정리했다. 조선인들이 많이 살던 북촌은 동으로, 일본인이 모여 살던 남촌은 정으로 이름 붙였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번화가 본정통(충무로), 황금정(을지로), 명치정(명동)이 이때 생겼다. 뿐만 아니라 일본 황태자가 서울에 와서 머문 것을 기념한다면서 ‘황공하게도 다녀가셨다’는 의미의 어성정(御成町·남대문)이라는 지명을 붙였고, 술집과 찻집이 많던 다동을 일본식 다옥정(茶屋町·다동)이라고 개악했다. 일본군 육군대장의 이름을 따서 장곡천정(長谷川町·소공동)이라고 명명하거나, 일본 정신을 상징하는 ‘대화’를 넣어 대화정(大和町·남산)이라고 하는 등 얼토당토않은 이름을 부지기수로 붙였다. 22년간 지속된 동-정-통-정목 제도는 1936년 경기도 고양군, 시흥군, 김포군 지역이 서울(경성)로 편입되면서 모조리 정-통으로 통일됐다. 서울의 면적은 4배가 늘었고 186개의 동-정-통이 259개의 정-통이 됐다. 종로구, 중구, 용산구, 동대문구, 성동구, 서대문구, 영등포구, 마포구 등 8개 행정구가 생겼다. 원동이 원서정, 동세교리가 동교정, 아현북리가 북아현정, 홍제내리와 홍제외리가 홍제정, 한지면 신촌리가 응봉정, 수철리가 금호정, 두모리가 옥수정, 동막상리가 용강정, 동막하리가 대흥정, 여율리가 여의도정으로 각각 변경됐다. 역사와 문화가 깃든 우리 지명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의 절정이다. 무악재에서 발원해 남대문을 거쳐 원효로를 따라 한강으로 흐르는 만초천을 그들이 내세우는 ‘욱일승천기’에서 ‘해돋을 욱’(旭) 자를 따 욱천이라고 마음대로 바꿨고, 흑석동 일대에 고급 주택을 지어 분양한 일본인 업자가 붙인 주택단지 명수대를 지명화했으며, 노들섬을 중지도라고 명명했다. 조선시대 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이름이 표기된 단 두 개의 길 이름도 퇴출당했다. 육조대로(광화문광장)와 운종가(종로)라는 양대 지명의 소멸이다. 육조가는 의정부와 육조가 자리한 관청거리였고, 운종가는 사람이 구름처럼 모이던 시장거리였었다. 일제는 유서 깊은 지명을 역사와 지도에서 지워 버렸다. 개천을 청계천으로 개명하거나, 인왕산(仁王山)의 한자를 엉뚱하게 인왕산(仁旺山)이라고 고친 것도 역사 말살의 속셈이었다. 해방 후 육조대로와 운종가를 왕조의 유물로 생각해 원상 회복시키지 않은 것은 후회막급이다. 삼각산이나 백악산이라는 정기가 깃든 아름다운 이름도 되돌리지 않았다. 태평로를 닦느라 고갯마루가 사라진 세종로 네거리 황토마루(황토현)의 이름도 청사에 남겼어야 했다. 우리의 조급함이 문제였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국보급 문화재 10점 중 4점 보존상태 최하 등급

    석굴암(국보 제24호), 첨성대(국보 제31호), 해인사 대장경판(국보 제52호) 등 주요 문화재들이 구조적 안전성과 보존환경 등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 중점 관리된다. 문화재청은 7일 국보와 보물 등의 국가 및 지방지정문화재, 등록문화재를 포함한 7393건의 문화재를 특별점검한 결과 이 가운데 22.8%인 1683건이 구조적 결함이나 즉각적인 보수정비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특히 야외에 노출된 석탑 등 석조문화재는 1601건 중 642건(40.1%)이 풍화와 생물오염 등에 따른 훼손 위험도가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점검대상 국보급 문화재 85건 가운데는 무려 31건(36.5%)이 최하인 D~E등급으로 분류됐다. 석굴암과 첨성대 등은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구조모니터링이 진행 중이지만, 붕괴 우려가 높은 예산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 등은 해체 보수 등의 구체적인 대안이 마련되지 않고 있다. 문화재청은 전체 점검 대상 중 구조적 결함 등으로 정기 점검이 필요한 문화재 183건, 보수정비가 필요한 문화재 1413건, 즉시 수리조치가 요구되는 문화재를 87건으로 꼽았다. 이번 특별점검은 지난해 12월부터 올 5월까지 야외에 노출돼 훼손 위험성이 큰 국가지정문화재, 시·도지정문화재, 등록문화재와 유물 다량 소장처 47곳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한편 문화재청은 이날 ‘숭례문 복구 계획’의 발표를 취소한 채 별도의 자료 없이 간단히 언급해 빈축을 샀다. 문화재청은 감사원으로부터 지적받은 숭례문 단청 박락에 따른 재시공과 기와 교체 여부, 조선 중후기 바닥면으로의 지반 복구 등을 문화재위원회 등의 향후 논의를 거쳐 진행할 것이라며 단계별로 필요에 따라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강경환 문화재청 보존국장은 “복구 과정이 5년 이상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연구소장은 “숭례문 복구 계획 발표는 이달 말 시작되는 국정감사를 의식해 갑작스럽게 취소된 것으로 안다”고 지적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가마에 앉아 잠시 쉬어가마” 황제 기분 나는 남대문시장

    “가마에 앉아 잠시 쉬어가마” 황제 기분 나는 남대문시장

    서울 대표 전통시장인 남대문시장에 이색 의자 5개가 늘어섰다. 정통 사극에서 본 것 같기도 한데 문양이 독특해 설치 미술작품인가 싶을 정도다. 지나던 사람들이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앉아본다. 중구가 남대문시장 이용객을 위해 마련한 것이다. 쉼터나 편의시설이 부족한 이곳에서 한 번쯤 찾을 법한 명소로 자리할 전망이다. 중구는 남대문시장 C동과 D동 사이에 ‘황제의자’ 5개를 설치했다고 23일 밝혔다. 옛날 임금이 행차할 때 타고 다니던 가마를 형상화한 데다 임금처럼 앉아 쉬라는 의미를 담았다. 인근에 있는 숭례문 단청문양 색채와 여백이 어우러진 디자인에, 거리 바닥 양탄자는 모자이크 기법으로 표현했다. 외부노출 때도 변형되지 않도록 도자파편, 타일, 대리석 등 재료를 한 조각 한 조각 붙이는 방식으로 만든 게 특징이다. 강우현 남이섬 대표가 디자인하고 한국도자재단이 참여해 완성했다. 구는 지난 3월에도 전문가들의 재능기부를 통해 남대문시장 내 유동인구가 많은 대도아케이드 내부에 도자파편을 이용한 도자공예와 소주병을 재활용한 쉼터를 조성했다. 구 관계자는 “친환경소재로 만들어 이용객이나 상인들에게도 호응이 좋았는데 매출 증대에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는 남대문시장을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조성하기 위해 빈 점포나 유휴공간을 활용한 휴식 공간, 예술 감상이나 포토존이 가능한 쉼터를 만들 예정이다. 최창식 구청장은 “남대문시장에 문화와 예술을 아우르는 공간을 늘려 시장을 활성화할뿐더러 관광쇼핑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홍혜정 기자 jukebox@seoul.co.kr
  • 쉿, 여긴 너만 알고 있어…

    쉿, 여긴 너만 알고 있어…

    휴가 시즌 ‘7말 8초’가 코앞이다. 누구나 차량 적고 인적 드문 휴가처를 찾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절정의 피서철만은 피하려 해도 그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달콤한 휴가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여름휴가 때 가 볼 만한 10곳을 소개한다. 여기에 누락시키기 아쉬운 곳 하나를 더했다. 여기라고 붐비지 않을까만, 그나마 한적하다고 귀띔할 만한 곳들이다. 글 사진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대한민국 특급 피서지-제주 우도 하고수동 제주 우도를 대표하는 명소는 서빈백사(西濱白沙)다. 바다풀의 일종인 홍조류가 돌처럼 굳어져 형성된 홍조단괴(천연기념물 제438호)와 함께 새하얀 모래 해변으로 유명하다. 한데 서빈백사 맞은편의 하고수동 해변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단언컨대 대한민국에서 이만한 해수욕장 찾기 쉽지 않다. 모래 곱고, 비췻빛 물빛도 곱다. 더 좋은 건 수심이 얕다는 것. 썰물 때는 100m 넘게 상앗빛 백사장이 드러난다. 누구와 가도 좋지만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이라면 만족도는 훨씬 더 높아진다. 검멀레 해변, 우도 등대 등 인근에 볼거리도 풍성한 편. 다만 햇빛을 피할 그늘이 부족한 게 다소 흠이다. ●여우를 닮은 섬-충남 보령 호도 충남 보령엔 외연도 등 명자깨나 날리는 섬이 수두룩하다. 그 틈바구니에서 힘겹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섬이 호도(狐島)다. 여우를 닮았다는 작은 섬. 호도의 자랑은 규사로 이뤄진 해수욕장이다. 유리의 원료가 되는 모래로, 바람이 불면 날릴 만큼 곱고 부드럽다. 섬은 여우처럼 작고 앙증맞지만 해변은 1㎞를 훌쩍 넘길 만큼 넓고 길다. 해수욕장 오른쪽은 갯바위 지역이다. 바위에 붙은 굴 등 해산물이 풍성하다. 물고기 개체 수도 많은 편. 초보자라도 매운탕을 끓일 우럭 서너 마리쯤은 잡아 올릴 수 있다. 갯바위 너머 몽돌해안에선 스노클링을 즐기기 좋다. 대천항에서 배로 50분 정도 걸린다. ●궁극의 적요함-경북 울진 왕피천 ‘등허리 긁어 손 안 닿는 곳’이 경북 울진이랬다. 그만큼 두메산골이란 뜻이다. 그 울진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곳이 왕피천 계곡이다. 왕피천은 고려 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피신했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은 국내 최대 규모의 생태경관보전지역이다. 면적이 북한산 국립공원의 1.3배에 이른다고 한다. 왕피천에 들면 참 웅숭깊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굴구지마을에서 속사마을까지 다녀오는 동안 내 발자국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만큼 적요하다. 모래톱이 하얗게 빛나는 수곡(水曲)과 뱀처럼 굽이치는 용소 등 볼거리도 많다. ●탐험형 동굴의 시초-강원 평창 백룡동굴 관광보다는 교육과 탐사에 주안점을 둔 탐험형 동굴이다. 여느 동굴과 다르게 내부에 조명시설이 없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사람으로 인한 오염을 최소화하겠다는 뜻도 담겼다. 백룡동굴은 영월과 평창을 가르는 동강의 가파른 절벽에 자리 잡고 있다. 전체적으로 수평굴이라 하나 다소 품은 든다. 하지만 장식되지 않은 동굴의 원형을 엿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백룡동굴 안내소에서 전용 탐사 복장을 빌려 준다. 장화와 장갑도 필수. 지급된 헤드랜턴은 필요한 경우에만 켤 수 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50분까지 총 9회 입장. 1회 관람 인원도 20명 정도로 제한된다. (033)334-7200. ●숨어 있던 1인치-충북 제천 억수계곡 괴산과 단양, 제천 등 충북 북쪽엔 계곡이 많다. 월악산과 속리산에서 뻗어 내린 1000m급 준봉들이 만든 터라 어느 하나 서열을 매기기 어려울 만큼 깊고 아름답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제천시 덕산면 억수리의 억수(億水)계곡이다. 흔히 용하(用夏)계곡, 또는 아홉 개의 풍경을 지니고 있다는 뜻에서 ‘용하구곡’이라고도 불린다. 사실 이름만큼 수량이 ‘억수로’ 많지는 않다. 다만 물은 정말 ‘억수로’ 맑다. 계곡 위쪽은 출입통제구역이다. 계곡미가 빼어나고 곳곳에 텐트 칠 자리가 넉넉해 진작부터 캠핑족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월악산 송계계곡에서 제천 방향으로 가다 보면 나온다. 계곡 지류에선 천렵도 즐길 수 있다. ●수도권 주민들의 휴식처-경기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 경기 파주는 흥미로운 도시다. 최전방 도시로 인식되지만 늘 전쟁의 기억만 맴도는 건 아니다. 임진각 평화누리가 대표적이다. 사방을 짓누르던 무거운 분위기는 사라지고 지금은 밝고 평화롭다. 여름이면 분수가 가동되는데 제법 규모가 넓어 수영장에 견줄 만하다. 아이들이 뛰어놀기 딱 좋다. 공원은 야외공연장 ‘음악의 언덕’과 수상카페 ‘카페안녕’, 3000여개의 바람개비가 있는 ‘바람의 언덕’ 등으로 구성돼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바람개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대나무 조형물 ‘통일부르기’도 이채롭다. 자유의 다리 초입엔 경의선 증기기관차가 전시돼 있다. (031)953-4854. ●토종 ‘천연 워터 테라피’-전남 구례 수락폭포 국내 대표적인 물맞이 폭포다. 현지 안내판에는 “수락폭포(15m)가 ‘천연 워터 테라피’ 효과를 갖고 있다”고 적혀 있다. 기암괴석 사이로 은가루가 쏟아지는 듯 풍경이 빼어나고 물맞이가 근육통 등에 효험이 있다고 소문나면서 여름철 수많은 사람이 몰린다고도 했다. ‘공기 속 비타민’이라 불리는 산소음이온의 발생량도 많다고 한다. 전남 보건환경연구원이 2012년 도내 유명 계곡의 산소음이온 분포도를 조사했는데 수락계곡의 산소음이온 발생량이 월등히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는 것이다. 폭포 오른쪽의 할미암은 부녀자가 치마에 돌을 담아 올려놓으면 아이를 갖는다는 이야기가 구전돼 온다. ●에메랄드빛 호랑이 꼬리-경북 포항 구룡포 해수욕장 우리나라 지도에서 호랑이 꼬리처럼 삐죽 솟아오른 곳이 경북 포항의 호미곶이다. 호미처럼 돌출된 곶부리 옆에 구룡포 해수욕장이 있다. 아름다운 물 빛깔에도 불구하고 세간엔 덜 알려진 곳이다. 해변으로 내려가는 언덕길에 서면 에메랄드빛 바다가 눈을 의심케 한다. 파도가 일 때면 꼭 연둣빛 커튼이 출렁이는 듯하다. 해수욕장 주변에 볼거리도 많다. 구룡포 읍내 우체국 골목에 ‘일본인 가옥거리’가 남아 있다. 호미곶 등대 옆 ‘까꾸리개’는 풍랑이 심한 날 밀려와 갇힌 청어 떼를 ‘까꾸리’(갈고리)로 쓸어 담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모리국수’는 꼭 맛보고 오자. 잡어 넣고 끓인 칼국수로 비릿하고 걸쭉한 국물이 일품이다. ●물과 안개의 나라-강원 화천 파로호 강원 화천은 흔히 겨울 도시로 인식된다. 산천어축제 때문이다. 하지만 화천의 아름다움을 꼽자면 절반은 물의 몫이다. 북한강과 화천천이 들녘을 적시고,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계곡물은 파로호에서 ‘내륙의 바다’를 이룬다. 피서 시즌엔 파로호 일대에서 물축제도 열린다. 수상자전거 등 온갖 수상 레포츠를 한곳에서 즐길 수 있다. 굽이도는 북한강변을 따라 42㎞짜리 ‘산소길’도 조성됐다. 호수와 주변 산자락이 뿜어내는 맑은 공기를 흠뻑 마시며 걸을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돌 수도 있다. 물축제가 열리는 붕어섬에서 자전거와 헬멧을 대여해 준다. 오지 중의 오지로 꼽히는 비수구미 마을도 둘러볼 만하다. ●모래와 공룡의 섬-전남 여수 사도 사도(沙島)는 ‘바다 한가운데 모래로 쌓은 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수에서 약 25㎞, 배로는 1시간 30분쯤 걸린다. 본섬인 사도를 중심으로 추도와 중도, 증도(시루섬) 등 7개의 섬이 빙 둘러 마주하고 있다. 추도를 제외하면 사실상 6개 섬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 사도 안에는 다양한 지질 현상이 남아 있다. 공룡 화석은 사도와 중도 사이를 잇는 다리 아래에 무수하다. 해안가엔 공룡의 알을 닮은 바위들이 놓여 있다. 중도 너머는 양면 해수욕장이다. 맑은 바닷물이 해변 양쪽에서 들이친다. ●그리고 빠지기 아쉬운 이곳-강원 동해 어달리 강원 동해시 묵호항에서 북쪽으로 내달리다 보면 모퉁이 너머에서 느닷없이 예쁜 마을이 튀어나온다. 어달리다. 비단처럼 미끈한 바다, 손대면 묻어날 것 같은 잉크빛이 일품이다. 어달리는 모래 해변의 길이가 300m, 폭이 20~30m에 불과한 조그만 바닷가 마을이다. 이 작은 마을에 60여개에 달하는 횟집 등 식당이 몰려 있다. 여느 동해안 해수욕장과 달리 경사가 완만한 데다 모래가 곱고 수심 1m를 넘지 않는 해변이 바닷가 쪽으로 이어져 있어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다. 특히 낚시 포인트로 명성이 자자하다. 어달리 초입의 까막바위는 서울 숭례문에서 정확히 동쪽 방향에 있다는 바위다.
  • [노주석의 서울 택리지 테마기행] 지명(상)

    [노주석의 서울 택리지 테마기행] 지명(상)

    ●북악인가 백악인가… 조선 초기부터 명실공히 백악산 경복궁 뒤에 피지 않은 한 떨기 모란 꽃송이처럼 솟구친 수려한 산의 이름은 둘이다. 백악(白岳)이기도 하고 북악(北岳)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이 산을 놓고 면악, 공극산 등 다양한 지명이 등장하지만 결국 두 개의 이름만 살아남았다. 이 산의 이름이 중요한 것은 조선의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도록 결정지은 산이기 때문이다. 이 산이 있었기에 새로운 나라의 수도를 송악(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우리는 이런 중요한 산 이름을 별 생각 없이 극과 극을 달리는 두 개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또 어떤 이는 백악인지 북악인지 헷갈린다면서 뭉뚱그려 북한산이라고도 부른다. 곡할 노릇이다. 청화산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태조가 중 무학(무학 대사)을 시켜 도읍 터를 정하도록 하였다. 무학이 (삼각산)백운대에서 맥을 따라 만경대에 이르고, 다시 서남쪽으로 비봉에 갔다가 한 개의 돌비석을 보니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무학이 길을 잘못 찾아 여기에 온다)라는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도선(신라 도선국사)이 세운 것이었다. 무학은 길을 바꿔 만경대에서 정남쪽 맥을 따라 바로 백악산 밑에 도착하였다. 세 곳 맥이 합쳐져서 한 들로 된 것을 보고 드디어 (경복궁)궁성 터를 정하였는데, 곧 고려 때 오얏(자두나무)을 심던 곳이었다”고 한양천도 당시 주산 백악과 명당 경복궁 택지에 얽힌 일화를 전한다. ‘오얏을 심던 곳’이라는 표현은 고려 중엽 때 비롯된 것이었다. 도선의 ‘도선비기’에 전해지는 ‘목자득국’(木字得國·이씨 성을 가진 자가 나라를 얻어 한양에 도읍 하게 된다)의 도참설을 깨고자 삼각산 면악(백악) 남쪽에 오얏(李木)나무가 무성하자 윤관 장군 등 벌리사(伐李使)를 보내 싹둑 잘라 기를 누른 사례를 말한다. 이 마을을 ‘벌리’라고 불렀는데 ‘번리’(?里)를 거쳐 지금의 강북구 번동으로 변했다. 오패산 혹은 벽오산이라고 불리다가 지금은 ‘북서울 꿈의 숲’ 공원이 조성됐다. 이렇듯 한양천도는 풍수지리의 원리에 따라 백악을 주산(主山)으로 정하고서 산 아래 명당 혈 자리에 남쪽을 향해 왕궁을 짓기로 하면서 현실화됐고,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 초기 이 산의 이름은 명실공히 백악이었다. 산꼭대기에 진국백(鎭國伯)이라는 여신(女神)을 모신 백악신사(白岳神社)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고산자 김정호가 남긴 ‘수선전도’나 ‘경조오부도’ 등 대표적 지도에도 백악이라고 기록돼 있다. 백두산이나 태백산이 그렇듯 산 이름에 ‘흰 백’(白)자를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우리는 흰 백자를 ‘밝다’ 또는 ‘으뜸’이라는 의미로 썼다. ‘흰 머리를 인 으뜸가는 산’이라고 풀 수 있다. ‘북녘 북’(北)자는 꺼렸다. 북쪽을 향해 머리를 두지도, 눕지도 않았다. 북망산(北邙山)처럼 죽음을 나타낼 뿐 아니라 패하다, 등지다, 분리하다, 도망하다는 뜻이 들어 있어 금기시했을 법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북악산 또는 북악이 지배 지명이 됐다. 근대 이후 만들어진 대부분의 지도와 책에 이 지명이 자리 잡았다. 단서를 찾아보니 중종 때(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북악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앞에는 남산이 솟았고, 뒤에는 북악산이 높다”라고 적었다. 이 산의 수호신이 한양의 풍수를 관장하는 북 현무(北 玄武)이고, 사람들에게 친숙한 남산이나 한강의 북쪽에 자리 잡은 산이어서 그렇게 불렀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후 나온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백악부아암도’ 등 그림이나 지도에서는 어김없이 백악이라고 썼다. ●삼각산이냐 북한산이냐… 일제에 의해 잊혀져간 삼각산 1940년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통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시도한 일제가 사전 정지작업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내세워 대대적인 창지개명(創地改名)을 꾀하면서 성스러운 산 이름에 분탕질했을 것으로 의심된다. 무엇보다 서울의 조상 산인 ‘세 개의 뿔’ 삼각산(백운대·인수봉·만경대)을 북한산이라고 의도적으로 바꿔 버린 명확한 증거가 있다. 경성제국대학 교수 이마니시 류가 1916년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북한산 유적조사 보고서’가 그것이다. 그는 삼각산이라는 멀쩡한 이름을 두고 북한산이라는 지명을 보고서에 사용했다. 한양과 한강의 북쪽에 있는 산이라는 게 이유였다. 고구려 때 북한산군(北漢山郡)이라고 불렸으며, 백제 개루왕 때 북한산성을 쌓았고, 조선 숙종 때 북한지(北漢誌)를 발간하는 등 북한산이라는 지명이 생경한 것은 아니지만, 삼각산이라는 민족정기를 상징하는 신령스러운 지명이 사라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83년까지 두 이름이 혼용됐지만, 정부가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하면서 삼각산은 힘을 잃었다. 일본인 학자만 책망할 일이 아니다. 역사의식 없는 행정 당국의 잘못이 더 크다. 조선총독부와 총독관저가 경복궁 뒤 고려 이궁 터에 틈입했고, 경무대와 청와대가 이어받으면서 백악이라는 이름은 잊혀 갔다. 1968년 김신조 사건 이후 출입이 통제되면서 갈 수 없는 산이 돼 버렸다. 북악스카이웨이와 북악터널이 상류층의 드라이브 코스나 요정 가는 길로 인기를 끌면서 북악이라는 지명의 사용 빈도가 높아졌다. 2006년 폐쇄됐던 숙정문을 38년 만에 열고 난 뒤 문화재청은 백악신사가 있던 산마루에 ‘백악산 342m’라고 새긴 돌비석을 세웠다. 또 2009년 백악산을 국가지정 명승 제67호에 올렸다. 이 산의 명칭을 백악산이라고 공식 인정한 것이다. 더불어 삼각산도 명승 제10호로 제 이름을 찾았다. 그러나 아직 대한민국 국민 열 명 중 아홉 명이 백악은 북악, 삼각산은 북한산이라고 부른다. 안내 표지판과 안내책자, 역사책에도 여전히 그렇게 적혀 있다. 이름을 찾은 건 다행이지만 제 이름으로 불러야 산의 영험함이 살아난다. ●백악산·삼각산 공식 인정… 국가 지정 명승지로 지명(地名)이란 땅 이름이다. 사람에게 인명이 있듯이 땅에도 지명이 있다. 인명이 사람의 뿌리라면 지명은 인명을 낳은 땅의 뿌리인 것이다. 서울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서울 지명사전’에 따르면 “땅 이름도 사람 이름과 마찬가지로 그 장소가 다른 장소와 구별되는 개성을 지닌 존재라는 의식과, 그 장소가 쓸모가 있어서 이름을 붙일 가치가 있다는 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지명의 존재성과 유용성을 설명하고 있다. 지명학(地名學)에서 지명은 ‘사람을 제외한 모든 자연과 삼라만상의 이름’이라고 정의했다. 우리를 둘러싼 향토 역사문화가 집대성된 기록인 셈이다. 사람을 둘러싼 지리적, 역사적, 민속학적, 유전자적 특성과 흔적이 지명 속에 살아 숨쉬는 것이다. 우리말의 어휘 중 가장 숫자가 많고 사용 빈도가 높은 것도 지명이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기 이전까지 말과 글이 달라 그 전까지 존재했던 우리말 자료가 거의 없다. 우리말 소리에 맞는 한자를 빌려 표기한 향가 25수를 제외하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기록된 옛 지명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명은 인명을 낳은 땅의 뿌리… 역사의 수수께끼 푸는 열쇠 지명은 한 번 붙여지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역사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이다. 서울은 고대 부여의 도읍 소부리와 신라의 도읍 서라벌에서 음운 변화된 유일한 우리 고유어 지명이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이천 년 이상을 버틴 하나밖에 없는 우리말 지명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한성’(漢城)이라고 적고 ‘한청’이라고 읽는 불편을 없애겠다면서 ‘수이’(首爾)라는 억지춘향식 한자 이름을 붙이고 ‘셔우얼’이라고 읽도록 했다. 얼빠진 발상이다. 우리는 이미 백두산정계비에 쓰인 ‘토문강’(土門江)이라는 두 개의 지명 탓에 드넓은 동간도를 중국에 빼앗긴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현재도 독도 대 다케시마(죽도), 동해 대 니혼카이(일본해)라는 지명을 놓고 일본과 피 터지게 다투고 있다. 불명확한 지명 표기 탓에 겪은 숱한 불이익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조선 건국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은 경복궁과 종묘·사직 그리고 한양도성 성곽을 축성했다. 궁 이름은 물론 근정전과 광화문 등 전각의 이름을 명명했다. 숭례문·흥인지문·돈의문·숙정문 등 사대문과 보신각, 광희문·혜화문·창의문·소덕문 등 사소문의 이름이 그때 붙여졌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남북 간 축선상에 육조거리(광화문광장)를, 동서 간 축선에 운종가(종로)를 두고 시전행랑을 들였다. 도읍건설을 완성한 뒤 “앞은 한강수여 뒤는 삼각산이여”라고 도성의 위용을 읊었다. 삼봉은 한양(한성부)을 5부 52개 방으로 행정구역을 나눴고 이름도 직접 지었다. 이때 지은 52개 지명 중 현존하는 지명은 적선, 서린, 가회, 안국 등 4개밖에 없다. 몇몇 지명은 길 이름이나 학교 이름 등에 남았지만 나머지 지명은 다른 지명과 합쳐지거나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거나 멸실됐다. 산업화 과정에서 혁명적 변화가 수반됐지만 40년에 불과한 식민시대에 벌어진 지명 훼손과 왜곡은 뼈저렸다. 일제는 단군 이래 5000년 내려온 지명의 역사를 갈아엎었다. 지명에 담긴 사람과 자연의 역사를 짓밟았다. 한국땅이름학회 조사에 따르면 서울 중심 8개 구의 법정동 명칭 중 3분의1이 그때 일그러졌다. 종로구 지명의 3분의2가 난도질당했다. 광복 후 빼앗겼던 사람 이름은 되찾으면서 비틀린 땅이름은 바로잡지 못했다. 남은 지명은 유래를 잃고 방황하고 있다. 선임 기자 joo@seoul.co.kr
  • [서울광장] 관음보살도 미륵이라 믿는 게 민심이다/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관음보살도 미륵이라 믿는 게 민심이다/서동철 논설위원

    불상을 공부하는 미술사학자들의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불상의 성격을 밝혀내는 일이다. 이름을 알아내면 곧 불상의 성격이 밝혀지는 것일 텐데,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불상의 이름을 학계에서는 높임말로 존호(尊號)나 존명(尊名)이라 부른다. 흔히 보고 듣는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약사불 같은 부처의 이름이 바로 존호다. 뜻밖에 경주 토함산의 석굴암 본존불도 석가모니불로 그 존호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한때 학계에서는 본존불이 석가모니불이라는 주장과 아미타불이라는 반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석가파(派)는 본존불이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석가불이라 했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은 결가부좌하고 두 손을 모아 좌선하는 자세에서 오른손을 풀어 무릎에 얹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모습이다. 수행을 방해하는 마구니의 항복을 받고 정각(正覺)을 이루는 석가를 묘사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아미타불파(派)는 본존불이 앉아 있는 방향을 근거로 들었다. 본존불은 잘 알려진 것처럼 멀리 동해바다를 바라본다. 동쪽을 쳐다보며 좌정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 서쪽에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이 법당 왼쪽에 모셔져 있는 것도 서방정토를 주재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그러니 석굴암 본존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학자들이 이럴진대 일반인의 오해는 말할 것도 없다.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는 충남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이 대표하는 몇 개의 고려 초기 대형 석불에 대한 오해가 대표적이다. 이름처럼 이 불상은 오래전부터 미륵으로 굳게 믿어졌다. 석불을 배례하는 전각에도 ‘미륵전’이라는 현판이 내걸려 있으니 장차 세상을 구원할 미륵이라는 확신은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문화유산에 대한 적지 않은 착각이 존재한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유산이란 오늘날 시각에서는 글자 그대로 문화적 유산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창건되거나 조성된 시기에도 문화적인 이유로 이뤄졌는지는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경복궁과 숭례문을 비롯한 한양 도성은 문화적 이유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물론 부석사와 은진미륵 또한 종교적 이유로만 조성된 것은 아니다. 특히 신라와 고려 같은 불교국가에서 대형 불사(佛事)는 너무나도 당연히 정치 행위였다. 은진미륵 또한 석굴암 본존불에 버금가게 존호를 둘러싼 논란은 적지 않았다. ‘미륵이냐 관음이냐’ 하는 논쟁이었다. 그런데 은진미륵은 관음보살의 도상(圖像)적 특징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학계 일부가 미륵이라는 전칭(傳稱)에 미련을 두었던 것은 정치적 역학관계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이유가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은진미륵은 고려 광종 19년(968) 조성을 시작해 목종 9년(1006) 완성했다. 광종은 과거제도를 도입해 지방호족의 자제가 칼 대신 붓을 잡게 만든 인물이다. 그렇게 중앙집권국가의 체제를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후백제와의 결전지였던 논산에 높이 18.2m의 거대 불상을 조성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과거 적국 및 변방의 주민들에게 조정의 위세를 보여주면서 관음보살의 권능처럼 현세의 고통을 덜어주겠다는 일종의 약속을 담은 것이다. 그럼에도 미륵이라고 불린 것은 그 회유가 전혀 먹혀들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조정은 고통을 견디며 권력에 순응하라는 상징성을 담아 관음을 만들었지만, 역설적으로 민초는 그 관음조차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 줄 혁명가로 믿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은진미륵이라는 존호는 민초의 무지에 따른 오류가 아니라 관음도 미륵으로 믿으며 의지하고 싶은 민초의 적극적 의지에 따른 의도적 오류라 할 수 있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을 바꿀 것 같았던 정치인이 권력자로 탈바꿈하면 또다시 새로운 미륵을 기다리는 것이 민심이다. 지금도 민초는 누구나 마음속에 은진미륵 하나씩을 품고 있다. 이 땅의 정치인들이 은진미륵의 존호 논쟁에서 깨달아야 할 교훈이다. dcsuh@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하)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하)

    ●한양도성은 어떻게 훼철(毁撤)됐나 한양도성은 일제 히로히토 황태자의 1907년 10월 서울 방문을 계기로 파괴되기 시작했다는 게 통설이다. 천황이 될 지엄한 몸이 보호국의 성문(숭례문) 아래를 지날 수 없다며 헐어냈다는 설이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콜레라가 기승을 부리자 히로히토를 보호한다고 호들갑을 피웠는데 숭례문 밖 남지(南池)를 전염병의 온상으로 몰아 메워 버렸다. 고니가 유유히 노닐던 연못은 이때 사라졌다. 일제는 사대문 중 산중에 있는 숙정문을 빼고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서대문)을 다 헐고자 했다.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대포를 쏴서 파괴하겠다고 하자 조선거류민단 단장 나카이 기타로가 임진왜란 당시 한양을 점령한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각각 입성한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전승 기념물이므로 후세에 남겨야 한다고 주장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식민 통치가 무르익었던 1925년에는 히로히토 결혼 기념 행사를 치를 장소를 만든다면서 흥인지문 양쪽 성곽과 청계천 수계 오간수문과 이간수문, 훈련도감과 하도감을 허물어 땅에 파묻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동대문디자인플라자)으로 옷을 갈아입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이다. 이간수문과 성곽은 복원됐다.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들춰 보면 진위가 의심스러운 대목이 등장한다. 1907년 3월 30일 참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권중현이 “동대문과 남대문, 두 대문은…사람들이 붐비고 거마가 몰려듭니다. 게다가 전차가 문 가운데로 관통하는데 피하기가 어려워 매양 전차와 부딪히는 경우가 많으니…문루의 좌우 성첩(성가퀴·城堞)을 각각 8칸 허물어 전차가 출입하는 선로를 만들게 하고 원래 정해진 문은 백성이 왕래하는 곳으로만 쓴다면 매우 번잡한 폐단은 없을 듯합니다”라고 고종에게 아뢰었다는 내용이다. 한양도성 성곽의 훼철은 일제의 강압이 아니라 우리 정책인 것처럼 적혀 있다. 사실이라면 성곽 철거는 백성의 통행 불편과 사고 예방 차원에서 각부 대신이 연명으로 건의해 고종의 재가를 얻어 시행됐다고 볼 수 있지만 여느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식민 시기에 집필, 편찬된 고종실록을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히로히토의 방한과 도성 훼손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이완용이 총리대신에 취임한 이후인 ‘1907년 6월 24일 내부대신과 탁지부대신에게 동대문과 남대문의 성가퀴와 성벽 일부를 철거토록 통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를 맡을 ‘성벽처리위원회’가 7월 30일 내려진 ‘내각령 제1호’에 의해 구성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황태자’를 쓴 송우혜 작가는 언론에 기고한 칼럼에서 “성벽이 실제 철거된 것은 1908년 3월 중순으로 황태자가 서울을 다녀간 지 5개월이 지난 뒤였다”고 주장했다. 실제 성곽 철거 기사는 황성신문 1908년 3월 10일자와 대한매일신보 1908년 3월 12일자에 각각 실렸다. 일제에 대한 증오심 유발용으로 일본 황태자 원인설을 조작, 유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① 한양도성 낙산 구간 흥인지문~혜화문 가는 길의 서울디자인지원센터에 자리 잡은 한양도성박물관의 전경. ②~④는 내부 전시공간. 서울시는 2015년까지 한양도성 성곽을 복원해 끊어진 전 구간을 연결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등 한양도성 복원 종합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일제가 급조한 성벽처리위, 한양도성 훼철의 주범 비록 히로히토 방한 시기에 성곽이 손상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제가 급조한 성벽처리위원회가 한양도성 훼철의 주범이라는 사실은 부인 못 한다. 성벽처리위원회는 민간 전문가 조직이 아니라 정부의 차관급 인사로 구성됐는데 당시 각 부 차관 전원이 일본인 관리였다. 이들은 간선도로변의 성벽을 철거키로 하면서 교통 방해를 표면적인 이유로 내세웠다. 저의는 딴 데 있었다. 그들이 자랑하는 도쿄나 교토와 비교할 수 없는 한양도성의 위용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성벽처리’라는 사무적인 기구 명칭에서도 그들의 불순한 의도가 느껴진다. 쭉정이가 머리 드는 법이고, 어사는 가어사(假御使)가 더 무섭다고 했다. 백성을 위한다면서 전찻길을 따로 내자고 건의한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과 성벽처리위원회 설치를 명하는 내각령 1호를 발동한 이완용은 이근택과 함께 우리에게 ‘을사오적’으로 더 익숙한 매국노들이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이완용은 학부대신, 박제순은 외부대신, 이지용은 내부대신, 권중현은 농상공부 대신이었다. 백성을 팔아 일제의 환심을 사려는 사리사욕의 발로가 아닌가 한다. 이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성벽처리였다면 우연치곤 너무 고약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일제는 거칠 것이 없었다. 1910년 병탄에 앞서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도성의 해체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들은 태조가 행했던 나라 세우기의 역순으로 와해를 꾀했다. 도성 성곽 해체가 식민지 건설의 첫 단추라고 본 것이다. 일제가 성곽을 거느린 위풍당당한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문루만 덩그러니 남은 도심의 외딴섬으로 만든 까닭이다. ●도성 성곽의 해체는 국권 상실의 다른 말 도성 성곽의 해체는 왕조의 멸망과 외세의 지배를 백성에게 피부로 느끼게 했다. 무장해제된 도성문의 초라한 행색이 우편엽서로 만들어져 전국에 뿌려졌고 전국 각 읍성의 성곽도 뒤이어 철거됐다. 오백년 동안 익숙했던 도성 출입 시스템이 바뀌면서 생활상도 급변했다. 매일 새벽 4시와 밤 10시를 기해 도성문을 여닫으면서 통행금지 해제(인정·人定)와 통행금지(파루·罷漏)를 알리던 보신각 종소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도성 출입과 하루의 시작 및 끝을 알리던 전통적인 통제 장치가 사라지면서 일상이 무너졌다. 성곽이 없는 문은 의미를 상실했고 지엄한 권위도 힘을 잃었다. 도성 해체는 국권 상실을 뜻했다. 한양도성 성곽의 전체 둘레는 모두 18.627㎞이지만 남아 있는 산악 지역 성벽을 제외한 도심 구간 5.471㎞는 멸실됐다. 12.4㎞만 사적 제10호 ‘서울 한양도성’으로 지정돼 있다. 훼손이 가장 심한 구간은 돈의문~숭례문~흥인지문 구간이다. 일제와 친일파는 처음 숭례문 양쪽 성곽 8칸을 허물어 전찻길을 낸다고 했다가 야금야금 다 허물었다. 남산~숭례문 구간도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지형을 변형시켰다. 최근 회현지구 정비가 마무리돼 남산 자락 성곽이 위용을 드러냈고 옛 조선신궁터 복원이 진행 중인 것을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창의문(자하문)~백악(북악)~숙정문~혜화문 구간은 대부분 복원됐지만 서울과학고와 경신고 사이 일부 구간은 성벽이 담장이나 축대로 쓰이는 형편이다. 숭례문은 화재 소실을 계기로 성첩 일부를 복원했지만 흉내에 그쳤다. 소덕문(서소문)~돈의문 구간에는 잔존 유구가 지하에 묻혀 있다. 정동구간 중 주한 러시아 대사관과 창덕여중 등에 성곽이 포함돼 복원 가능성이 희박하다. 강북삼성병원에서 사직터널에 이르는 돈의문~창의문 구간에는 손길이 아직 미치지 않았다. 흥인지문~광희문 구간은 운동장을 헐고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다행히 복원이 이뤄졌다. 광희문~남소문 구간 중 장충동과 신당동 경계 지역 성곽은 대부분이 주택가에 포함돼 복원까지 시간이 걸릴 듯하다. 이 구간은 박정희 정권 시절 타워호텔(반얀트리)과 자유센터를 짓도록 허가를 내 주면서 망가졌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알려진 김수근은 두 건물을 설계하면서 한양도성 성곽을 완전히 해체했으며 그 돌로 도로변 석축을 쌓는 만용을 부렸다. 일제에 못지않은 훼철을 저질렀다. 문루가 희생된 돈의문, 소덕문, 남소문은 큰 도로가 자리 잡아 원상회복이 어렵다. 청계천의 수문인 오간수문터는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소외돼 발굴 상태로 방치돼 있다. 혜화문과 광희문도 도로에 자리를 빼앗겨 한옆으로 밀려나 있다. 도시화에 밀려 엉거주춤한 상태인 한양도성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보수와 복원 그리고 재건의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무너진 성곽을 원재료로 다시 쌓는다면 보수이며 발굴 등을 통해 드러난 기저부에 새 돌을 다시 쌓아 본래 모습으로 되돌린다면 복원이 될 것이다. 자연재해나 전쟁 등으로 말미암아 파괴되거나 없어진 부분이 기록과 고증에 의해 문화재적 가치를 되찾으면 재건이다. 홀랑 타 버려 다시 세운 숭례문을 재건했듯 돈의문, 소덕문, 남소문의 재건 방안을 찾아야 한다. 자리를 옮김으로써 역사 가치를 상실한 광희문과 혜화문은 원위치 이축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임기 내 청계천 복원 사업을 끝내고자 한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게서 버림받은 수표교는 장충단공원에서 본디 자리로 돌아오고 오간수문도 제 모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보스턴 프리덤 트레일처럼 순성길 이어져야 미국 보스턴의 역사문화적 정체성은 ‘프리덤 트레일’에 담겨 있다. 건국과 독립전쟁 유적지로 가는 4㎞의 길 위에 붉은색 선이 그어져 있다. 그 줄만 따라가면 사적지를 만날 수 있는데 트레일은 보스턴 국립역사공원의 일부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한양도성 순성(巡城)길은 이어지지 않는다. 토막 나 있고, 흔적도 없다. 도성 길라잡이의 안내가 없다면 미아가 되기 십상이다. 한양도성 복원과 재건은 서울의 정체성 회복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한 해 1000만명이 넘는 서울 방문 외국 관광객들은 빌딩숲과 아파트단지, 불야성을 이루는 유흥가에서 서울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한강이나 남산을 서울의 랜드마크로 지목하는 사람도 많다. 서글픈 일이다. 우리는 2000년 고도 서울의 정체성 확립에 실패한 것이 아닐까. 역사문화도시 서울의 정체성은 내사산(백악~낙산~남산~인왕산)에서 흘러내려 사대문을 울타리처럼 감싼 한양도성 성곽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가파른 고갯길과 좁은 골목길을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한옥 처마와 담장 너머로 펼쳐지는 내사산과 그에 겹쳐진 고색창연한 성곽이 곧 서울이다. 내사산과 도성 성곽의 어울림이 서울을 상징하는 도시 경관의 결정체다. 한양도성 순성이 서울 관광의 알갱이라는 사실을 웬만한 외국인은 다 알고 있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서부역앞 관광버스 주차장 운영

    서울 중구는 서부역 앞에 관광버스 주차장을 설치하고 이달 말 운영에 들어간다고 26일 밝혔다. 구는 서부역 서부교차로 안전지대 931㎡에 방호 울타리와 충격흡수시설, 주차안내 표지판, 시설유도봉 등을 설치할 예정이다. 주차장은 관광버스 6대를 수용할 수 있다. 시비 2500여만원을 들인다. 구는 관광 비수기인 10월 1일부터 다음해 3월 31일까지는 이곳을 겨울철 도심 제설작업을 위한 제설차량 주차장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구 관계자는 “숭례문이나 남대문시장 인근에 관광버스를 주차할 공간이 부족해 불법 주정차로 몸살을 앓았다”며 “이 때문에 일대가 교통체증을 겪어야 했는데 이젠 불법 주정차 걱정도 덜고 관광객들도 편히 여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혜정 기자 jukebox@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중)

    ●왕권의 존엄성을 성곽에 세우다 조선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최고의 풍수지리서인 ‘택리지’를 지은 청화산인 이중환은 한양도성을 보고 “온 나라 산수의 정기가 모인 곳”(一國山水聚會精神之處)이라고 평가했다. 한양도성은 한양을 둘러싼 백악~낙타산~목멱산~인왕산 등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흐른다. 성곽은 암벽을 만나면 멈춘다. 자연이 인공을 대리하는 절묘한 경관이 펼쳐진다. 성곽을 따라 걷노라면 내가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잊게 된다. 평지에 세워진 성곽이 안팎을 차단하는 데 반해 한양도성 성곽은 안과 밖을 분리하고 있지만, 시각적으로는 열려 있다. 성곽이 산수(山水)와 한 몸을 이루는 세계 유일의 역사도시경관이다. 평지에 네모 반듯하게 구획된 중국식 성과는 뚜렷하게 다른 조선만의 것이다. 조선 개국의 기획자이자 서울의 설계자였던 정도전은 ‘한양팔경’에서 “성은 높아 철옹인데 천 길이요/구름은 봉래산 둘렀는데 오색일세/해마다 상원(上苑)에는 꾀꼬리와 꽃인데/해마다 서울사람들 놀며 즐기네”라고 도성의 풍광을 맘껏 읊었다. 성종 때 온 명나라 사신 동월은 ‘조선부’에서 “높고 높은 삼각산으로 자리를 정했고/푸르고 푸른 수많은 소나무로 덮였다/산들이 성벽을 둘러싸며 훨훨 나는 봉황이 환히 빛나고/모래가 소나무 뿌리에 쌓여 있어 흰 눈이 갓 갠 듯하다”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한양도성 성곽은 도성 출입자를 통제하거나, 침입자를 막는 단순 용도에 머물지 않았다. 성 밖을 파서 연못으로 만든 해자(垓子)가 없다는 것은 방어개념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도성 밖에서 도성 안으로 드나드는 8개의 크고 작은 문 중 숭례문 밖 남지(南池), 흥인지문 밖 동지(연지), 돈의문 밖 서지(반송지) 같은 연못을 조성한 것은 물의 부족과 화기를 막으려는 풍수기법이었다. 성문은 도성 중심에 있는 보신각 종루에서 울리는 인경(밤 10시)과 파루(새벽 4시)의 종소리에 맞춰 열고 닫았다. 성문의 개폐가 곧 통행금지와 해제를 뜻했다. 한양도성 내 일상생활의 시작과 끝이 한양도성 성곽에서 비롯되고 맺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으로 무너진 도성 성곽을 숙종이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을 지어 허술한 방어체계를 보완한 숙종의 속마음이 ‘비변사등록’에 드러나 있다. 숙종은 “처음부터 도성은 넓고 커서 지키기 어렵다고 여겼다. 도성의 축조가 당초에 성을 지킬 계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원래 견고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왜 조선 왕들은 도성 축조에 매달렸을까 그렇다면 조선의 역대 왕들이 그토록 한양도성 성곽의 축조와 개·보수에 매달린 까닭은 무엇일까.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 사이의 통치질서를 확인하고, 외적 방어와 내부 적대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는 국력을 표현하면서, 왕권의 존엄성을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이다. 무릇 성(城)이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이데올로기의 경관적 표출이기 때문이다. 서울에 남아 있는 한양도성 성곽은 조선 태조가 18㎞의 울타리를 처음 정한 이후 역대 왕이 개·보수를 거듭한 육백 년의 역사 층위가 오롯이 살아 있는 희귀한 문화유산이다. 이렇듯 큰 수도성곽이 유지돼 남은 것은 세계적으로 드물다. 고고학적 조사와 문헌기록, 성벽에 새겨진 축조 당시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태조, 세종, 숙종, 순조 등 네 임금이 주로 쌓았는데 시대에 따라 각각 다른 석축기법이 성곽에 남아 있다. 개국조 이성계는 내사산을 따라 도읍의 윤곽을 정한 자리에 성을 쌓았다. 고구려 때부터 전해 오던 산성 축조기법을 주로 썼고 성곽의 3분의2는 흙으로 쌓았다. 이성계는 석재를 구하려고 문무 양반 관료들에게 의무적으로 돌을 바치도록 독려했으나 쉽지 않았다. 왕권을 강화한 세종은 흙 성을 메주 크기의 돌로 바꿨다. 현재의 한양도성 성곽을 사실상 재축조했다고 볼 수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성은 무용지물이었다. 선조는 싸울 의지도, 겨를도 없이 몽진 길에 올랐다. 파죽지세로 올라온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카가 흥인지문 옹성의 위세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평양성 전투가 60일을 끈 것을 참작하면 조선관군이 한양도성에서 버텼다면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40여년 후 병자호란에 휘말렸다. 청은 항복 조건에 ‘성벽을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넣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가 45일간 결사항전하자 함락에 실패한 분풀이였다. 이후 축성 행위가 공식적으로 금지됐지만, 조선 국왕들은 청의 감시를 틈타 도성과 산성의 개·보수를 암암리에 진행했다. 숙종과 순조 때는 무너진 곳을 보수하면서 장정 4명이 들 정도의 크고 반듯반듯한 돌을 사용하는 등 성석(城石)의 대형화와 규격화를 꾀했다. 조선왕들은 태조에게서 성곽 쌓기라는 유전인자를 물려받은 것처럼 보인다. 성곽 돌에 새겨진 이름과 지명 등을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고 하는데 서울시 한양도성도감에 따르면 2013년12월 현재 한양도성에는 모두 252개의 각자성석이 존재한다. 각자성석에 나타난 시대를 분석한 결과 14명의 임금 이름이 등장하는데 확인이 불가능한 44개(17%)는 제외됐다. 이 중 세종 때 것이 113개로 44%를 차지했고 순조 40개(15%), 태조 23개(9%). 숙종이 19개(7%)의 순서였다. 그래서 어느 임금 때, 어느 지역에서 동원된 인력이 성곽을 쌓았는지 확인이 가능하다. 태조 대의 토성은 남산 일대에 일부 남아 있고 세종대에 쌓은 돌 성이 현재 남아 있는 성곽 12km 중 메주돌 부분이다. 이성계는 1, 2차에 걸쳐 98일 만에 공사를 마무리했다. 4대문(숭례문·흥인지문·숙정문·돈의문)과 4소문(소의문·광희문·혜화문·창의문)의 이름을 지었다. 토성이 칠할, 석성이 삼할을 차지했다. 토성이 장마에 무너지자 세종은 43만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견고한 돌 성으로 개축한다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웠다. 당시 호구자료에 따르면 조선의 인구는 672만명이었고 도성 인구는 10만명이었다. 일부 신하들을 중심으로 인력동원의 문제와 석재난 등을 들어 중국사신이 드나드는 무악재~남산 부분만 돌로 쌓자고 건의했으나 상왕인 태종의 의지가 워낙 강했다. 세종은 반대 의견이 빗발치자 10만명을 줄여 32만 2400명의 동원을 결정했다. 석공 등 장인 2211명은 별도였다. 태조 때 봄·가을 2차례에 걸쳐 19만 7000명을, 고려 현종 때 개경 나성 축조에 23만명을 동원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역사였다. 도성 인구의 3배를 넘는 인력이 전국 팔도에서 몰려들었다. 세종은 엄격했다. 병력을 늦게 보낸 경상도 관찰사에게 죄를 묻고, 수령은 봉고파직시켰다. 태종과 세종은 수시로 술을 내려 격려했다. 공사는 38일 만에 끝났지만 872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다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도성에 쌀이 동나고 전염병이 돌아 희생자가 더 늘어났다. ●조선 최대 역사(役事)가 최고 역사(歷史)로 남다 한양도성 축조는 막무가내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지역사정과 인구에 따라 인력과 담당구역을 균등하게 분배했다. 부역은 고달프지만 불평하지 않도록 과학적으로 안배됐다. 태조 1차 축조 때 동원된 인력은 평안도의 안주 이남과 함길도의 함주(함흥)이남,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등에서 11만 8049여 명이 동원됐다. 청천강 이북과 함경도 국경지역은 국방상의 이유로 제외했다. 황해도, 경기, 충청도 등 도성 가까운 지역 인력은 차후 보완 및 보수를 위한 예비인력으로 남겼다. 농번기를 피했고 도성에서 먼 곳과 가까운 곳이 서로 겹치지 않게 했다. 성터 전체가 영조척(營造尺·약 30㎝)으로 5만 9500자이므로 백악에서 시계방향으로 600자(약 180m)씩 97개 구간이다. 97개 구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하늘 천(天)~조상 조(吊)까지 차례로 순서를 정하고 담당 구간을 균등 배분했다. 예를 들면 동북면 함주 이남에서 동원된 1만 953명은 백악마루에서 숙정문까지 구간을 맡았는데 천(天), 지(地), 현(玄), 황(黃), 우(宇), 주(宙), 홍(洪), 황(荒), 일(日)까지 9개 구간이며 맡은 길이는 5400자였다. 4만 9897명으로 팔도에서 가장 많은 인력이 동원된 경상도는 혜화문에서 숭례문까지 41개 구간을 맡았다. 어느 구간을 맡든 1인당 평균은 0.493자로 같았다. ●조선의 국혼 깃든 도성 축조… 항일의병 촉발 원동력 공사의 감독체계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치밀했다. 총감독으로부터 아래로 점차 구역별 책임자가 늘어나는 피라미드식 그림이 나온다. 하나의 자호(字號) 구간은 600자 구간을 다시 6개의 작은 구역으로 나눠 100자(약 30m)를 가장 작은 구역 단위로 삼았다. 판사, 부판사, 사, 부사, 판관이라는 감독관을 두었다. 성곽을 담당한 지역의 이름과 감독자, 석공의 이름을 돌에 새겨 무너지거나 부실이 발생했을 때 책임을 물었다. 요즘 서울시내 보도블록에 시공자의 이름을 새기는 ‘공사 실명제’가 이때 이미 실행된 셈이다. 도성 축조의 대역사는 신생국 조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팔도에서 몰려든 장정들은 한양에 모여 공동작업을 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타지방의 정보를 얻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도성을 오가는 과정에서 생전 처음 이웃 고을과 먼 고을을 보고 물산을 터득했다. 도성 축조는 단순한 부역동원이라기보다 당시 백성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넓힌 일대 사건이었을 것이다. 태조와 정도전, 무학대사의 이야기와 세종과 한양의 풍광에 대한 얘깃거리가 방방곡곡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조선 초 한양도성 성곽 축조로 말미암아 조선이라는 나라의 건국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그때 처음 본 한양에 대한 인상이 내 자식은 한양으로 벼슬살이를 보내겠다는 서울중심주의를 형성했을 것이다. 한양도성과 성곽의 축조는 ‘역사’(役事)가 아니라 ‘역사’(歷史)가 되었다. 조선이 오백 년이라는 긴 수명을 유지한 원천이 됐다. 내 손으로 지은 도성의 위용을 경험한 백성의 마음속에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혼이 깃들었다. 이것이 의병과 위정척사, 항일의병을 촉발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선임 기자 joo@seoul.co.kr
  • 역동의 근대사 속 왜곡된 궁궐의 실체

    우리 궁궐의 비밀/혜문 지음/작은숲/290쪽/1만 5000원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의 역사는 수난과 극복의 기록이다. 1392년 조선왕조의 탄생과 함께 만들어진 광화문은 약 200년 뒤인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 사라졌고 그 뒤 270년 동안 폐허로 존재했다. 광화문을 중건한 것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었다. 왕조의 중흥을 꿈꾸며 추진한 경복궁 중건(1868년)으로 광화문은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광화문은 1910년 왕조의 몰락과 함께 다시 수난기에 접어든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2년부터 일제는 경복궁을 허물고 그 터에 조선총독부 청사 계획을 수립했고 1921년부터 광화문 해체공사를 시작해 광화문을 동문인 건춘문 옆으로 이전시켜 버렸다. 그 후 광화문은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화강암 기단만 남고 완전히 사라지는 비운을 맞는다. 광화문을 다시 역사의 무대에 불러올린 것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신간 ‘우리 궁궐의 비밀’은 궁궐에 대한 일반적인 교양이나 상식을 제공하기 위한 다른 저술들과 달리 근·현대사의 역동 속에서 왜곡된 궁궐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비판한다. 경복궁과 광화문에 숨겨진 사연, 인정전에 새겨진 이화 문양, 창덕궁 진선문과 금천교에 얽힌 이야기 등은 일제강점기 궁궐의 훼손 사실에 대한 비통한 기록으로 읽힌다. 특히 국보 1호 숭례문을 조선총독부가 지정했으며 지정 이유가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한양으로 입성한 문이었기 때문이라는 일부 지적도 거론하면서 풀어야 할 과거사의 한 문제임을 강조한다. 아울러 지금까지 계속되는 부실 복원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예를 들어 고 이승만 대통령이 경복궁에 하향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낚시를 즐겼다는 사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향원정의 연꽃을 없애 버린 사실, 경복궁에 지어진 금산사 미륵전에 대한 이야기 등은 궁궐 복원의 문제가 복잡한 정치권력에 의해 좌우된 현대사의 굴곡을 감지하게 한다. 궁궐의 운명이 정치권력의 변동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롭다.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상)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한양도성(상)

    ●조선시대 도성 축조에 얽힌 두 가지 설화 1392년 조선 건국과 함께 도읍을 송악(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긴 태조 이성계는 “종묘는 조종(祖宗)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요, 궁궐은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政令)을 내는 것이며, 성곽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는 것으로,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다”라면서 종묘와 경복궁, 도성(都城)의 축조를 독려했다. 종묘·사직과 경복궁이 완성되자 한양의 얼개인 도성을 짓는 축조도감을 1395년 설치했다. 삼봉 정도전이 성 쌓을 자리를 정했는데 태조가 직접 둘러보았다. 여기에서 두 가지 흥미로운 스토리가 등장한다. 첫 번째는 서울이라는 지명의 유래이고, 두 번째는 성리학과 풍수학의 정면 대결이다. 서울이라는 지명의 탄생과 관련된 속설을 조선 후기 방랑 실학자 청화산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소개하고 있다. “성을 쌓으려고 했으나 둘레의 원근을 결정하지 못하던 중 어느 날 밤 큰 눈이 내렸다. 그런데 바깥쪽은 눈이 쌓이는데 안쪽은 곧 눈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태조가 이상하게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성 모양이다”라는 기록이다. 나중에 눈이 녹은 지역이 도성 안이 됐다. 눈(雪)이 쌓여 생긴 울(울타리)이라고 하여 도성 안쪽을 ‘설울’이라고 불렀으며 그것이 ‘서울’로 전이됐다는 얘기다. 수도(首都)를 나타내는 유일한 순우리말 지명인 서울의 유래는 처용가의 첫 구절 ‘새벌’이 서라벌을 거쳐 서울로 변했다는 양주동의 풀이가 정설로 돼 있다. 새벌이 서울의 옛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우용은 삼한시대의 성스러운 곳 소도(蘇塗)의 ‘소’가 새벌의 ‘새’와 같으므로 서울은 ‘솟벌’이나 ‘솟울’에서 온 것으로 보았다. ‘솟은 벌’이나 ‘솟은 울’이 ‘신의 땅’이나 ‘신의 울’이며 한자로 번역하면 신시(神市)라는 주장이다. 김정호가 그린 서울 지도 ‘수선전도’에서 보듯 서울을 ‘으뜸가는 선’인 수선(首善)으로 표기한 것과 같은 이치라는 풀이다. 입으로만 전해진 서울이란 지명은 1896년 4월 7일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 창간호에서 처음 공식 표기됐다. 독립신문 한글판의 제호 아래 ‘조선 서울’이라고 표기하고 있고, 영문판에서는 ‘SEOUL KOREA’라고 발행지를 인쇄했다. 서울이 ‘서울특별시’가 된 유래는 희극적이다. 해방 후에도 서울은 여전히 경기도 경성부였다. 미 군정청은 1946년 ‘서울은 경기도 관할에서 독립, 자유독립시가 된다’라고 발표했다. 영어 원문에는 ‘Seoul established Independent City’(서울독립시의 설치)라고 기록됐다. 하지만 법령 번역을 맡은 군정청 한국인 직원이 서울독립시는 한국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고민 끝에 ‘서울특별시’라고 고쳐 표기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또 한 가지는 정도전과 무학대사로 대표되는 유교와 불교의 한판 대결이다. 두 사람은 경복궁 명당이 앉을 자리를 정해 줄 주산(主山)을 백악(북악)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인왕산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차천로는 ‘오산설림’에서 “무학은 ‘인왕산을 진산(주산)으로 삼고, 백악과 목멱산(남산)을 청룡과 백호로 삼으시오’라고 하였으나 정도전이 수용하지 않자 ‘내 말을 듣지 않으면 200년이 지나서 내 말을 생각할 것’이라 하였다”는 설화를 전했다. 무학의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200년 후라는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뜻한다. 태조가 정도전의 손을 들어 주면서 주산은 백악으로 결정됐다. 무학은 굴하지 않고 도성을 쌓을 때 인왕산 선바위를 도성 안에 포함할 것을 제안했다. 선바위를 왕성 안에 집어넣어 불교의 중흥을 꾀하려는 몸부림이었으나 또다시 삼봉에 의해 바깥으로 밀려났다. 2전 2패를 당한 무학은 “불교가 망할 것”이라고 개탄했다. 얄궂은 운명인지 스님의 형상을 닮은 선바위 옆에는 일제강점기 남산에 조선 신궁을 짓느라 쫓겨난 국사당이 자리했다. 불교와 무속신앙이 500년이 지나고 나서 한자리에서 해후한 셈이다. 조선 개국의 설계자 정도전이 한양도성 건설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궐은 물론 관아와 시장의 터를 잡았고 도성 성곽의 윤곽도 결정했다. 서울을 5부(동·서·남·북·중부), 52개 방으로 나누고 경복궁을 비롯해 궁궐 전각의 명칭을 정하는 일도 모두 그의 생각대로 였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서울을 건설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유교 국가의 출범을 알리는 북소리였다. 신라 천 년과 고려 오백 년을 풍미한 불교와 풍수도참설은 시대의 도도한 흐름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양도성’ 명명 4년… 안내판에 ‘서울성곽’ 한양도성이란 무엇인가. 한양도성은 조선시대 한성부, 한성, 한양, 서울을 나타내는 표상이었다. 한양도성이 곧 조선이었다. 더불어 수도, 수선, 도읍, 도성, 왕성, 황성, 궁성, 경조(京兆), 경도, 장안, 사대문 안의 통칭이기도 하다. 서울을 나타내는 모든 용어 중 가장 대표적이고 권위 있는 명칭이었다. 한양은 세계에서 가장 큰 수도 중 하나였다. 17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가 10만명, 영국 런던이 15만명이었을 때 한양 인구는 20만명에 육박했다. 규모로 보아도 현존하는 세계 수도의 성곽 중 서울을 둘러싼 성곽이 가장 크다. 그런데 현실은 딴판이다. 우리는 ‘한양도성=서울을 에워싼 18.672㎞의 성곽’이라고 범위를 좁혀 해석하고 있다. 내용물은 다 빼고 도성을 둘러싼 성곽만 내세우는 축소지향의 우를 범하고 있다. 한양도성은 조선 500년 내내 성곽으로 둘러싸인 한성부 전체를 지칭하는 당당한 국가권력의 표상이었다. 도성 밖 10리를 나타내는 성저십리(城底十里)와 구별하려는 의도에서 쓰인 사대문 안과 같은 권역을 나타내지만, 의미는 훨씬 공식적이고 권위적이었다. 성곽은 유일무이의 대도시인 한양도성 안을 관리, 운영할 목적에서 세워진 상징 벽이었다. 8개의 크고 작은 문인 흥인지문~광희문~숭례문~소의문(서소문)~돈의문~창의문(자하문)~숙정문~혜화문은 한양도성의 관문이었다. 상경(上京)과 낙향(落鄕)이 구분되는 시대의 경계선이었다. 궁궐을 에워싼 백악~낙타산(낙산)~목멱산~인왕산 등 내사산(內四山)을 잇는 도성은 외적 방어용이 아니라 왕권과 통치의 상징이었다. 외적의 침입과 방비, 농성을 위해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탕춘대성 등 산성을 따로 외곽에 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양도성과 서울성곽은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 서울성곽이라는 용어를 쓰려면 ‘서울성곽=조선시대의 옛 서울인 한양도성을 둘러싼 성곽’이라고 분명하게 정의해야 한다. 개발연대 몰지각한 권력자와 도시행정가들이 한양도성에서 성곽만 따로 떼 ‘서울성곽’이라고 멋대로 이름 붙인 것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 도성 안 문화재와 유물은 마구잡이로 깔아뭉개면서 일제가 조선 정체성 지우기의 하나로 헐어버린 성곽은 잇는다는 앞뒤 맞지 않은 복원계획이 화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구자춘 서울시장이 1975년 ‘서울성곽 중장기 종합정비계획’을 세웠고, ‘서울성곽복원위원회’가 구성되면서 한양도성이라는 당당한 이름이 복권되지 못하고 서울성곽이라는 중성적 이름으로 둔갑한 것이다. 천박한 역사인식과 자가당착이 빚은 비극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문화재위원회가 2011년 사적 제10호 서울성곽의 명칭을 ‘서울 한양도성’으로 바꿨지만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뿐만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눈이 어두워 서울성곽을 ‘서울 한양도성 성곽’이라고 분명히 밝히지 않고 서울 한양도성이라고 어정쩡하게 명명하는 과욕을 부려 또 다른 오해와 시비를 불러들였다. 차라리 서울성곽이라고 놔두는 편이 나았다. 우리는 도성을 둘러싼 성곽과 8개의 대·소문이 한 몸이란 사실을 가끔 잊곤 한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국보 1호, 보물 1호인 줄은 알고 있지만, 이들 문이 한양도성의 출입문이라는 점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성곽을 상실한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너무 오랫동안 보아 왔고, 출입이 통제된 숙정문과 차량통행에 방해된다며 철거해 버린 돈의문을 아예 보지 못한 탓이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한양도성은 201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됐고 정식 등재는 시간문제라고 한다. 송인호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장은 ‘한양도성의 유산가치와 진정성’이라는 논문에서 “서울성곽의 영어표기가 ‘Seoul Fortress’인데 반해 한양도성은 문화유산 등재 때 ‘Seoul City Wall’이라고 표기됐다”면서 “Fortress가 방어 요새로서의 역할만을 제한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City Wall은 역사도시의 도시성곽으로서 의미를 포괄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용어의 정의부터 정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한양도성을 둘러싼 전반적인 용어와 개념 정리를 주장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보다 더 시급한 일일 수도 있다. 서울성곽을 한양도성이라고 명칭을 바꾼 지 4년째를 맞지만 성곽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여전히 서울성곽이라고 표기돼 있다. 한 번 머릿속에 박힌 용어나 명칭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식민시기 서울의 조상 산인 삼각산을 북한산이라고 엉뚱하게 이름 붙임으로써 정체성이 훼손된 것처럼 용어의 변질은 의미의 변질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한양도성과 서울성곽을 헛갈리고 있다. 묵은 역사인식을 바꾸려면 안내판부터 제때 바꿨어야 했다. 정책을 수립하는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한양도성이라고 하는데 이를 운영하는 자치구는 서울성곽이라고 우기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씨줄날줄] 방화광(狂)과 분노사회/서동철 논설위원

    “불을 확 싸질러 버리고 싶다”는 표현에서는 극도의 복수심이 읽힌다. 분노의 원인을 제공한 상대가 가진 것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뜻일 것이다. 나아가 상대가 가진 것이 활활 타오르다 폭삭 주저앉는 장면을 보면서 느끼는 일종의 카타르시스에 더욱 방점이 찍힌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병적 심리가 현대 사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조선왕조실록’만 펼쳐도 수많은 방화(放火)의 사례가 등장한다. 인명 피해가 수반된 방화는 참형이나 교형에 처해진 사례가 적지 않았고, 특히 궁궐의 화재는 실화라 하더라도 극형이 논의되곤 했다. 중국 명나라 기본 법전으로 조선왕조가 준용한 ‘대명률’(大明律)에 그렇게 명시돼 있는 까닭이다. 조선시대에도 조정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방화를 저지른 모습이 보인다. 단종 2년(1452)에는 의금부 문서고에 불이 난 사건에 현상(懸賞)하여 범인을 수배했고, 광해군 9년(1617)에는 공조의 담장 3곳에 불을 지른 자에 치죄를 청하기도 했다. 인조 23년(1645)에는 순천부의 별시 무과 초시에 낙방한 사람들이 시험장에 난입해 불을 지르자 죄를 묻겠다며 보고서를 올린 기록도 남아 있다. 특정인에게 원한을 갖거나, 재물을 노린 방화로 사람이 죽거나 다친 사례도 보인다. 그런데 누가 죽어도 좋다는 식의 ‘묻지마 방화’는 적어도 실록에서는 찾기 어렵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이른바 다중 시설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가뜩이나 부정적인 방화의 이미지는 1930년 작가 김동인의 ‘광염 소나타’에서부터 극도의 비정상적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밝게 빛나는 불꽃이라는 광염(光焰)을 미쳐 날뛰는 불꽃이라는 광염(狂炎)으로 비틀었으니 작품의 분위기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작품은 병리 현상을 자극하는 원인 물질로 불의 존재를 처음으로 우리 사회에 직설적으로 소개했다. 정신분석학자들은 방화를 저지르는 행위를 충동조절장애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어느 사회에도 충동조절장애를 앓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멀게는 대구지하철역과 숭례문 방화, 가까이는 도곡역 방화와 장성 노인요양병원의 방화 의심 사건에서 보듯 최근 우리나라의 상황은 유독 심각하다.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절차를 거쳐서는 풀 길이 없는 한국 사회의 특성을 보여준다는 진단이 그럴듯하다. 지금이 왕조 시대보다 더한 분노 사회라는 전제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분노 게이지’ 눈금이 치솟아 있는 것은 현실이다. 처방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또한 정치적으로 접근한다면 치유는 어려울 것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첨성대 기울기’ 5년 방치한 경주시

    ‘첨성대 기울기’ 5년 방치한 경주시

    국보 1호 숭례문이 단청과 지반의 재시공이 필요한 상태로 엉터리 복원된 것으로 확인됐다. 또 해외반환 중요 문화재들은 미등록 상태로 방치된 채 국가문화재 보수 예산의 77%가 다른 용도로 전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원은 지난해 12월부터 문화재청과 서울시 등 9개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문화재 보수 및 관리실태’를 감사해 이 같은 내용의 결과를 15일 공개했다. 감사원은 문화재청이 2009년 민간업체 두 곳과 숭례문 복구공사 계약을 맺고 공사를 진행하면서 기간 내 완공에 급급한 나머지 부실시공을 방치했다고 지적했다. 단청을 시공한 단청장은 아교가 흘러내리고 색이 흐려지자 금지된 화학접착제와 화학안료를 몰래 사용해 단청에 균열이 생기게 했으며, 값싼 화학접착제 사용으로 3억원의 부당이익까지 챙겼다고 감사원은 밝혔다. 숭례문 지반도 문화재청이 제대로 된 고증 없이 공사를 진행해 숭례문과 주변 계단부분이 조선 중·후기 지반보다 145㎝까지 높아졌다. 감사원은 복구단장 등 5명에 대해 징계를 요구하고 화학접착제 사용으로 부당이득을 얻은 단청장에 대해 지난 3월 경찰에 수사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첨성대는 지반 침하로 해마다 1㎜ 정도씩 기우는 것이 2009년 확인됐지만 경주시는 지난해 말 안전진단을 하면서 추가 침하 가능성과 침하 원인 등에 필요한 지반상태 조사를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첨성대 꼭대기 부분의 석재가 떨어져 나와 낙하 위험이 있는데도 문화재청은 사업비를 받지 못했다며 안전조치 없이 방치해 왔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서울의 건축 공존 무너지고 경쟁만 우뚝 서다

    서울의 건축 공존 무너지고 경쟁만 우뚝 서다

    못된 건축/이경훈 지음/푸른숲/ 376쪽/1만 5000원 서울역에서 KTX를 타고 내릴 때마다 여행의 설렘보다는 왠지 힘들다는 느낌이 강했다. 에스컬레이터가 있기는 하지만 비행기를 타는 것도 아닌데 짐을 이고, 지고, 끌고서 올라갔다가 내려가서 기차를 타야 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갔다. 왜 그런 건지 ‘못된 건축’을 보면 납득이 간다. 새 천년과 함께 시작된 고속철도 시대에 기술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는 이른바 하이테크 경향으로 새로 지은 서울역사를 저자는 못된 건축의 하나로 지목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기차여행의 역사가 긴 유럽 대도시의 시발역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기차가 머무는 플랫폼은 도시의 가로와 같은 높이에 있다. 하지만 새 서울역은 기단을 통해 모두를 한층 들어올린 후 다시 3층 출발 대합실로 안내하고 다시 기다란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두개 층 아래로 내려가서 기다리는 기차에 도달하게 한다. 실제로 5개 층을 이동하는 셈이다. 새 서울역이 복합역사로 개발됐기에 생긴 결과다. 기차역이라는 단일 기능만으로도 벅찬데 버스, 지하철에 쇼핑센터 고객을 위한 주차공간까지 갖춰야 하다 보니 역사는 기단 위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고 주 출입구를 옆구리에 둬야 했다. 저자는 이 기묘한 조합의 결과 “역사가 비대해지면 여행자나 쇼핑하는 사람 모두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이곳에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도시는 건축이 모여서 이뤄진다. 저자는 “도시의 건축은 도시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제시한 ‘도시적’의 중심 개념은 ‘공화’(共和)다.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이 일정한 양보를 하면 공공의 선이 생겨나고, 그 혜택으로 개인은 훨씬 더 큰 행복을 누린다는 개념이다. 도시의 건축은 주변의 맥락과 도시공간, 즉 도시적인 공공 공간을 배려하고 살피는 것으로 시작된다. 책에서 언급된 서울의 건축들은 대부분 도시를 무시하거나 오해한 것이다. 자신만 내세울 뿐 도시를 위해 양보하지 않는다. 숭례문 주변의 고층빌딩들은 못됐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크기, 형태, 색상, 재료, 어느 것 하나 국보 1호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역사적인 건축물을 의식하지 않고 있다. 미스코리아처럼 포즈를 잡고 뽐내지만 과거의 역사를 존중하며 공존하는 도시적인 건축물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밤이 되면 숭례문 기와는 주변 건물의 현란한 전광판 불빛 때문에 견딜 수 없이 현란하다. 저자는 “마치 우리 할아버지를 홍등가에 버려두고 온 듯 께름칙한 기분이 든다”면서 “주변 건축이 스스로를 낮추며 도시적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역사와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가 된다”고 지적한다. 새롭고 잘된 건축으로 평가받던 이화여대의 ECC 건물은 거리에 있어야 할 모든 공간을 무미건조한 지하로 구겨 넣어 캠퍼스의 낭만을 삼키고, 지역 커뮤니티와의 소통을 단절시켜 버린 사례다. 도시를 등지고 남쪽으로 돌아앉아 있는 데다 갓과 부채를 빌려와 선비 정신을 표현했다는 예술의전당과 전형적 사찰 배치 형식을 따르고 있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은 ‘세상과 섞일 수 없는 존재’로 예술을 대하는 1980년대식 정서를 보여 주는 못된 건축으로 꼽혔다. 책에는 못된 건축만 있는 건 아니다. 저자는 옛 한국일보 자리에 들어선 트윈트리타워가 북에서 바라보면 동십자각을 병풍처럼 둘러싸도록 설계됐으며, 남쪽에서 바라보면 쌍둥이 건물이 만드는 시각통로가 동십자각을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착한 건축이라고 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우리나라 건축사상 최대의 논란거리인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경우 칭찬이 지나친 측면이 있다. 국민대 교수로 DDP의 자문역으로 설계공모기획부터 완공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함께했던 저자는 “DDP는 대지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통해 그 장소에 최적화된 조형으로 탄생한 것이며, 불규칙한 대지의 경계를 중요한 모티브로 삼고 과감한 구조적 모험까지 시도하면서 도시와 주변 환경에 적극적으로 조응하고 있다. 디지털 건축 방식으로 모든 것을 형태화한 21세기 건축테크놀로지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서울시민의 스트레스 지수를 높이는 서울시 신청사가 못된 건축에서 빠진 것은 독자로서 의문을 가질 법하다. 그는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의 일원이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지역색 (상)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지역색 (상)

    ●조선시대 한양은 ‘경조 5부’ 행정구역으로 구분 오늘의 서울에도 강·남북이라는 지역 차가 실재하지만, 전통적으로 서울은 지독한 지역색이 작용하던 도시였다. 대개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양태를 보였다. 조선 500년 내내 개천(청계천)을 경계로 북쪽과 남쪽 두 개 구역으로 양분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종로를 중심으로 한 조선인 거주지역과 남산아래 본정통(충무로) 중심의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진화했다. 광복 이후 갈라진 좌우 이데올로기는 결국 국토의 허리를 남과 북으로 끊어놓았고,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반 전개된 남·북한의 체제 안보경쟁이 강남개발을 촉발했다. 이때 서울은 한강을 경계로 강북과 강남 두 개의 도시로 양분됐다고 할 수 있다. 서울은 두 개의 도시로 이뤄졌다. 서구개념으로 치면 강북은 구도심(Old Town)이요, 강남은 신도심(New Town)이다. 한강은 나루터와 나룻배가 사라진 대신 다리로 촘촘하게 이어졌지만 두 도시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격차도 심화된 느낌이다. ‘한강의 기적’이란 엄밀히 말하자면 한강 이남의 초고속 성장사였다. 양극화는 한강을 사이에 둔 남과 북 양극에서 빚어진 현상일 수도 있다.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할 만큼 문화적 이질성도 고착화하고 있다. 몇 년 전 조사에서 강남과 강북 아파트의 평균매매가 차이가 3.3㎡당 무려 1337만원이었다. 강남이란 ‘나’와 ‘남’이 다름을 보여주는 주거의 ‘차별 짓기’를 통해 몸값을 부풀린 아파트 왕국이다. 서울 강남·북을 뺨치는 지역색이 조선시대 한양에 존재했다. 도시학자들은 서울을 전통도시와 근대도시가 공존하는 ‘이중 도시’(Dual City)로 분석한다. 도시사학적 시각에서 서울의 공간적 특성을 근대 이전과 이후로 나눠 본다면 근대 이전 서울은 남촌과 북촌으로, 근대 이후는 강남과 강북으로 양립하고 있다. 조선시대 한성부(서울시청)는 ‘경조 5부’(京兆 5部)라고 하여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 등 5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눠 다스렸다. 오늘날 서울의 25개 자치구 중 경기도 시흥·과천·용인·광주였다가 서울로 편입된 한강 이남 10개 구를 제외한 한강 이북 15개 구 가운데 사대문 안에 해당하는 종로·중구·서대문·동대문 등 4개 구가 옛 경조 5부의 대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경복궁과 사대문을 축으로 나눠보면 북부는 경복궁~창덕궁 사이, 동부는 창덕궁~흥인지문 사이, 서부는 돈의문~숭례문 사이, 남부는 숭례문~흥인지문 사이쯤이다. 5부(部)가 곧 5촌(村)이다. ●사색당파, 제사·옷고름·갓끈 등으로 차별화 경조 5부 가운데 북부(가회동·계동·안국동·재동·경운동)와 동부(이화동·동숭동·혜화동·충신동)를 북촌체제로, 서부(정동·새문안)와 남부(필동, 묵동, 남산동·주자동, 인현동)를 남촌 체제로 구분할 수 있다. 개천을 경계선으로 긋는다면 북쪽은 권문세가와 현역 벼슬아치 그리고 그들을 돕는 아전(衙前) 및 겸인(?人)들의 주거지구였다. 개천부터 목멱산(남산)까지 남쪽에는 지체 낮은 관리나, 퇴락한 양반, 별 볼 일 없는 무반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 서울연구가 전우용은 ‘서울은 깊다’에서 “남촌 사람들은 술을 빚어 마시는 것을 즐겼고, 북촌 사람들은 떡을 자주 만들어 먹었다는 ‘남주북병’(南酒北餠)이란 속담은 두 구역 사람들의 기질이나 처지가 그만큼 달랐음을 일러준다”고 분석했다. 동·서·남·북촌이 양반이나 관료 그리고 그들을 떠받치는 아전들의 거주구역이라면 중촌(中村)은 중인(中人)들의 터전이었다. 의관, 역관, 율사, 화원, 도사 등 중인에다 상인, 군속들이 중부(다동·무교동·수표동, 입정동, 주교동, 관수동) 일대에 둥지를 틀었다. 오늘의 을지로와 청계천변이라고 보면 된다. 중인이란 용어도 중부 혹은 중촌에 사는 사람에서 생겼다. 케케묵은 조선의 행정구역인 경조 5부를 들먹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중인이 사는 중촌을 제외한 4개의 양반 촌을 중심으로 조선 중기 사색당파(四色黨派)가 발원했기 때문이다. 동인의 거두 김효원(1532~1590)이 낙산 아래 동촌에 산다고 하여 그 일파가 동인(東人)이 되었으며, 이에 맞선 심의겸(1535~1587)이 인왕산 아래 서촌에 살았다고 하여 서인(西人)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동인 중 남산 아래 진고개에 사는 일파가 남인(南人)이 되었고,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거주하는 몇몇이 북인(北人)을 형성했다.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리됐다가 노론이 영조와 정조를 거쳐 고종에 이르기까지 150년 이상 득세했다. 노론의 거주지가 이른바 북촌이었다. 풍수에서 한양의 최고 명당은 백악 아래 경복궁이었다. 다음이 응봉 아래 창덕궁과 종묘, 성균관 자리다. 백악과 인왕산 사이 장동·청류계·백운동·옥류동·인왕산동도 빠지지 않았고, 백악과 응봉 사이 지금의 율곡로 일대도 최고 길지의 하나였다. 남산을 바라보는 풍광이 좋고 터가 넓어 권문세가들이 큰 집을 짓고 교류했다. 이에 비해 남산골은 음지였으나 배수가 잘되고 지하수가 풍부해 하급관리들이 살 만한 곳으로 쳤다. 고종 대인 1864년부터 1887년까지의 기록인 ‘매천야록’에서 황현은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고 부르며 노론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 이하 삼색이 섞여서 살았다”라고 썼다. 조선 말기 북촌에는 노론이 살았고, 소론과 남인, 북인은 주로 남촌에 어울려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붕당(朋黨)은 제사 모시는 법, 옷고름이나 갓끈 매는 법을 서로 달리 하면서 차별 짓기를 했다. 사화(士禍)가 이 같은 지역색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금의 강·남북 구별 짓기가 무색할 지경이다. ●서촌은 새문안·정동, 상촌이나 윗대로 불러야 서울의 지역색과 구역분화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1924년 발행된 개벽 6월호 ‘경성중심세력의 유동’에서 소춘은 “경성은 오촌(五村), 양대, 자내(字內), 오강(五江)으로 나뉜다”라고 주장했다. 조선후기 들어 신분과 계층이 세분화되고 신분에 따라 거주지역이 정해진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오촌은 경조 5부의 지역공간과 겹친다. 양대는 윗대(웃대)와 아랫대로 나뉜다. 윗대는 상촌(上村)이라고도 했는데 경복궁 주변의 육조 관아가 있던 사직동·내자동·당주동·도렴동·체부동·순화동·통의동에 살던 아전이나 겸인, 내시의 거주지를 일렀다. 아전이란 ‘관아 앞에 사는 사람’이라는 조어였고, 겸인은 권문세가의 경호원 또는 비서격이었다. 이들은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을 통해 궁을 드나들었다. 인사동을 중심으로 중촌에 살던 중인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였다. 정교는 ‘대한계년사’에서 “상촌인은 평민 중에서 각 부의 서리 및 공경가의 겸인이 되는 자인데, 그들은 평민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자라고 칭한다”라고 했고, 정래교는 ‘임준원전’에서 “경성의 민속은 남과 북이 다르다. 백련봉 서쪽에서 필운대까지가 북부인데 주로 가난한 집들로 얻어먹는 사람들이 산다. 그러나 때때로 의협 있는 무리가 의기로 서로 사귀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며, 약속을 중히 여긴다. 또 시인 문사들이 시를 다투었다. 풍속이 그러했던 것이다”라고 윗대의 풍속을 평했다. 또 이가환은 ‘옥계청유첩서’에서 “경복궁의 남쪽은 육조이다. 그 서쪽은 좁은 땅이다. 때문에 서리들이 많이 살며 일에 익숙하고 질박한 이 적다”라고 윗대의 지역을 구분했다. 요즘 서촌이라고 부르는 경복궁 서쪽지역이 바로 윗대이다. 일제강점기 옛 옥류동과 인왕산동을 강제로 합쳐 만든 새로운 동 이름인 옥인동 쪽으로 흐르는 옥계천의 상류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북촌에 빗대 서촌이라고 불렀지만 애당초 잘못된 지명이다. 서촌이란 조선시대 경조 5부 중 돈의문 부근을 지칭하던 지명임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경복궁의 서쪽이라 하여 서촌이라고 한다는 논리대로라면 북촌은 동촌이 돼야 할 판이다. 구태여 새로운 지명이 필요하다면 지금이라도 윗대 혹은 상촌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아랫대(下村)는 중촌과 남촌 중간지대를 지칭하는데 지금의 오간수문~광희문 사이쯤이다. 이 일대에 자리 잡았던 어영청이나 훈련원 소속 군병들이 주민을 이뤘다. ‘개벽’(1924년 6월)에서 “우대(웃대)는 육조 이하 각사에 소속된 이배, 고직 족속이 살되 특히 다방, 상사동 등지에 상고 통칭 시정배가 살았고…아래대(아랫대)는 각종 군속이 살았으며 특히 궁가를 중심으로 하여 경복궁 서편 누하동 근처는 대전별간파들이 살고…”라고 구역특징을 설명했다. 황성신문(1900년 10월 9일자)은 “사대부의 말투는 극히 화미절이하며, 북촌 사람들의 말투는 매우 부드럽고 조심스러우며, 남촌 사람들의 말투는 빠르며, 상촌사람들의 말투는 공경스러우며, 중촌사람들의 말투는 기민하며, 하촌사람들의 말투는 상스러우며…”라면서 조선말 오촌, 양대사람의 인적특성을 총정리했다. 자내란 한양도성을 쌓거나 보수, 경비하고자 한성부가 담당구역을 정한 구역을 말한다. 천자문의 ‘천(天)자’이면 이 글자가 적힌 구간에 거주하는 사람을 뜻했다. 성안을 돌아다니며 계란이나 채소, 장작을 팔았고 분뇨를 퍼다가 가축을 키웠다. 오강은 한강과 용산, 서강 등 3강에 마포삼개와 망원을 합해 오강이라고 이름 붙였다. 오강주민들은 나루에서 먹고사는 사람들이었다. 나루터에서 잔뼈가 굵은 사공, 짐꾼이거나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떼다 파는 기가 센 사람들이었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문화재 관리 현주소] (하)전·현 문화재청장이 본 문제점·제언

    [문화재 관리 현주소] (하)전·현 문화재청장이 본 문제점·제언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아랫사람은 다시 업체에 미루더군요.” 지난달까지 숭례문·광화문·경복궁의 복원 실태를 광범위하게 수사한 경찰청 관계자는 “문화재청 직원들이 과연 공복(公僕)인지 의심스러웠다”고 일갈했다. “서너 명의 문화재청 직원이 상주해 업체나 감리사의 주관이 작용할 여지가 없었다”는 숭례문 복원 현장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수뢰 혐의가 드러난 공무원 가운데 일부는 소송을 준비 중이다. 문화재 복원수리업체인 J사의 현장소장이 수기로 작성한 장부가 혐의를 입증할 거의 유일한 증거물인 탓이다. 대법원 판결까지 3년 넘게 걸리는 공무원 ‘떡값’ 관련 공판에선 대다수 공무원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아 왔다. 2008년 2월 10일 숭례문 누각에서 치솟아 오른 불길은 화재 발생 5시간 만에 굉음을 내며 숭례문을 집어삼켰다. 상징적이나마 국보 1호인 숭례문이 화마에 무너지자 국민 여론은 들끓었다. “유사 이래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높았던 적이 없었다”는 어느 대학교수의 고백처럼 불씨는 순식간에 사회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문화재청 공무원과 문화재위원의 수뢰, 입찰 담합, 문화재 수리 기술자 자격증 대여 등 문제가 불거져 조용한 날이 없었다. 문화재청은 우리 문화 유산을 보존·관리·연구하는 막중한 소임을 지닌 국가 기관이다. 청장 산하에 1관·3국·19개과와 문화재위원회가 있다. 본부기관 외에 서울과 지방에 대학교, 관리소, 연구소, 박물관 등 8곳의 산하기관을 두고 있다. 몸담은 직원만 정규직 890여명을 포함해 1600명에 이른다. 국민들은 이들에게 일관성 있는 정책 수행과 책임을 기대했으나 허사였다. 서울신문은 숭례문이 불탄 2008년을 기점으로 당시 문화재청장이던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부터 이건무, 최광식, 김찬, 변영섭, 나선화 등 6명의 전·현직 청장과의 인터뷰를 추진했다. 3명은 대학교수, 2명은 학예직, 1명은 행정직 출신이다. 이들은 “무얼 말할 게 있겠냐”며 참담한 심정부터 드러냈다. “3년간의 청장 재임 기간이 너무 힘들어 나중에 회고록이라도 한 줄 써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취임하면 보통 2~3년은 일하는데, 앞선 청장이 잡아 놓은 예산과 사업을 추스르다 보면 어느새 퇴임할 때가 됩니다. 내가 의욕적으로 벌이려던 사업은 다음 청장의 몫이 되는 셈이죠. 개혁을 하려 해도 기존 공무원들의 반발이 만만찮아요. 신상필벌이라지만 징계를 하려면 사무관급 이상은 중앙징계위원회를 거쳐야 하고, 청장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인사도 과장급 이하에 불과합니다.” 이건무(67) 전 문화재청장은 문화재 행정 개혁과 관련한 조언을 부탁하자 답답함부터 토로했다. “청장 한두 명을 바꾼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더라”면서 “미래를 보고 정책을 끌어가야 하는데 물리적 한계 탓에 장기적 안목에서 정책의 좌표 설정을 하지 못하고 돌려막기에 급급한 현실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전 청장은 또 “문화재청 업무는 굉장히 잡다하고 정치권 민원도 적지 않다”면서 “지역 문화재 보존을 위한 국고 지원 못지않게 지역 개발을 위한 지정해제와 관련,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 대부분 규제와 연관돼 늘 정치권과 부딪친다”고 하소연했다. 중요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 지정 때마다 지역 정치권에서 서로 지역민을 뽑아 달라고 아우성치거나, 반구대 암각화 보존을 놓고 갈등이 불거진 것 등은 지역 이기주의의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의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언젠가 해코지를 당해 결국 (심의기구인) 문화재위원회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문화재청장의 위상은 이처럼 생각만큼 견고하지 못했다. 기존 공무원 조직의 경직성과 청와대의 인사권, 정치권의 외풍에 흔들려 인적쇄신과 조직개편에 대한 동력을 스스로 찾기 어렵다는 게 관계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지난 9일 ‘문화재 수리체계 혁신 대책’을 내놓기까지 나선화 현 청장도 좁은 입지 때문에 고충이 적지 않았다. 문화재 수리체계에 한정된 이번 혁신 대책은 수리시험 체계 개선, 수리실명제 도입, 업체의 기술·기능자 의무보유 축소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았다. 나 청장은 수리체계 혁신안 발표 이후 타 부처와의 직원 교류와 문화재위원회 개편에 방점을 찍은 조직 혁신안을 후속 방안으로 준비하고 있다. 나 청장은 극심한 반발을 의식해 세부 개편안을 단계적으로 발표할 복안도 갖고 있다. 숭례문 단청 박락에서 비롯된 부실복원 논란과 직원 비리 등이 겹치면서 사면초가에 빠진 문화재청과 문화재 행정은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 전임 청장들은 어느 정도 책임을 통감한다는 뜻에서 대부분 말을 아꼈다. 유홍준(65·명지대 석좌교수) 전 청장은 “좋은 말을 해야 하는데, 할 말이 없다”고 뭉뚱그렸고, 나 청장의 전임자인 변영섭(63·고려대 교수) 전 청장은 “새 청장이 임명된 지 얼마나 됐다고 내가 누를 끼치면 되느냐”고 했다. 숭례문 화재 당시 청장이었던 유 교수는 그간 “최근 불거진 문제들은 시스템의 문제”라고 짚어 왔다. 변 전 청장은 “문화재만큼은 경제·정치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가치 중심으로 가는 철학이 (현장에) 자리 잡았으면 한다”고 바람을 털어놨다. 이 전 청장은 “문화재청은 조직이 작아 기관 내에서도 인사 교류가 상당히 어렵다”면서 “다른 기관과의 인적 교류는 기피 인물을 서로 떠넘기는 경향이 강해 우려되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주무관부터 사무관, 과장까지 특정 분야에서 잔뼈가 굵는 문화재청의 조직 특성도 장애물이다. 이 전 청장은 “싱가포르처럼 조그마한 부정이라도 엄하게 처벌하려는 기강 확립과 윗사람 지시에도 신념을 꺾지 않는 환경 조성이 우선”이라며 “그러려면 정치권이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최광식(61·고려대 교수) 전 청장은 “산하 문화재위원회도 전문성 못지않게 세대 교체가 필요하다”며 “문화재청의 위상과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국토교통부처럼 지청을 설립해 최소한 경주와 서울의 문화재라도 직접 관리하도록 해야 체계가 잡힐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숭례문 복원의 ‘속도전’ 논란과 관련해선 “이명박 정부가 아닌 참여정부 때 이미 2012년 말 늦어도 2013년 2월까지 숭례문 복원을 완료하도록 계획이 잡혀 있던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부 콘텐츠산업실장과 문화재청 차장 등을 거친 김찬 전 청장은 최근 기독교 봉사활동에 매진하며 문화재계와의 접촉을 완전히 끊은 상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전·현직 청장 모임에도 나오지 않고 연락도 닿지 않는다”고 전했다. 한편 문화재 행정의 개혁과 관련, 문화재위원장 출신의 원로학자인 정양모(80) 전 국립중앙박물관장과 김정배(74) 전 고려대 총장은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 전 관장은 “일본 문화청은 지방 문화재까지 직접 관리한다. 우리 문화재가 소중하고 국가 장래를 결정하는 자산이란 인식을 갖고 문화를 근간으로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전 총장은 “문화재위원회의 경우 합동분과로 운용의 묘를 살리고, 행정가가 할 수 없는 독특한 성격의 심의기구 성격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현행 문화재 관련 제도는 그 자체로만 봐선 여느 선진국과 비교해 크게 뒤지지 않는다”면서 “이 같은 제도를 지키는 사람들의 인식과 수준이 향상돼야 문화재 행정의 후진성을 탈피해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200년 전으로 떠나는 행궁 한 바퀴

    200년 전으로 떠나는 행궁 한 바퀴

    완연한 봄 날씨를 보인 11일 오후 3시 경기 수원시 팔달구 신풍동 화성행궁 신풍루 앞. 갑옷 등으로 무장한 조선의 무사 17명이 나타났다. 무사는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장창과 칼날이 달처럼 생긴 월도를 자유자재로 휘두른다. 큰 기압 소리와 함께 세워진 볏짚단과 대나무가 한번에 잘려 나갈 때면 관객들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온다. 궁수들은 전쟁터를 연상시키듯 활을 들고 뛰어가면서, 때론 옆으로 돌면서 민첩하게 움직이는 자세로 과녁을 향해 화살을 날린다. 신라시대 화랑들이 익힌 권법인 본국검과 창검무예를 익히기 전에 배웠던 권법도 보여준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이들의 기합 소리, 허공을 가르는 검과 창 동작 속에서 웅장한 조선 무사의 기백이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행궁 초입서 본 ‘무예24기’와 장용영 수위의식 화성행궁에 가면 볼 수 있는 ‘무예 24기’ 공연이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1시와 오후 3시 두 차례 공연을 한다. 무예 24기는 조선 정조시대 때 지상무예 18가지와 마상무예 6가지를 합해 만든 24가지 무예로, 무예 교과서인 ‘무예도보통지’에 실려 훈련도감, 장용영 등 중앙 군영을 비롯해 전국 군영에서 사용됐다. 조선 무예는 화려하고 현란한 액션의 중국 무술이나 날카로운 검으로 정제된 동작을 구사하는 일본 무예와는 전혀 다르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크고 활달한 동작으로 단호하고 강인한 힘을 발산하는 것이 무예 24기의 특징이다. 신풍루 앞에서는 매주 일요일 2시 장용영의 수위 의식이 열린다. 정조대왕의 친위 부대였던 장용영 군사들의 화성행궁 수위 및 훈련을 보여주는 의식이다. 토요일에는 궁중무용, 무등돌이, 전통 줄타기 등의 상설 공연도 펼쳐진다. 장용영 수위 의식과 연계해 진행되는 정조대왕 거둥은 정조의 능행차를 축소한 것으로 매월 둘째, 넷째 주 일요일에 시연된다. ●화성열차 등 행궁 안 체험 천국 화성행궁 안으로 들어가면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체험할 수 있다. 왕과 왕비의 의상 체험, 한지 탁본 뜨기, 구슬공예, 뒤주 체험, 한자스티커 붙이기, 전통 다도 체험, 도자기 만들기, 한자 부채 만들기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홍보관 지하 영상실에서는 ‘화성이와 함께하는 수원화성 여행’이란 3차원(3D) 애니메이션이 무료로 상영된다. 화성행궁과 화성 주요 지점을 오가는 화성열차도 타볼 만하다. 이곳에서 만난 일본인 관광객 가즈 다카는 “일본에서 화성행궁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보고 찾아왔는데 역사는 물론 무예 등 역동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무척 좋았다”고 말했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융릉을 참배할 때 머물던 임시 처소로, 우리나라 행궁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워 행궁 가운데 백미로 꼽힌다.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열리기도 했다. 수원문화재단 라수홍 대표는 “일제에 의해 훼손된 것을 화성 축성 당시 행궁을 비롯한 건축물 모습과 특징까지 모두 기록해 놓은 화성성역의궤를 토대로 주요 건물 482칸을 복원했다. 전문가들의 철저한 고증도 거쳤다”고 설명했다. TV 드라마 ‘대장금’ ‘이산’과 영화 ‘왕의 남자’ 등이 이곳에서 촬영되는 등 영화 촬영 장소로도 인기다.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주요 관광지를 자전거로 탐방할 수 있도록 자전거 대여소도 운영하고 있다. 대여소는 화성행궁광장, 연무대 국궁체험장, 화서문 입구, 장안문 종합안내소 등 화성 주변 4곳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된다. 자전거는 화성행궁광장에 60대 등 모두 135대가 비치돼 있으며 하루 이용 요금은 1000원이다. 초등학생 이하 어린이는 보호자가 있어야 빌릴 수 있다. ●행궁 뒤 성곽둘레길 5.4㎞ 나들이 코스로 딱! 화성행궁 뒤편 팔달산에 오르면 화성 성곽둘레길을 만날 수 있다. 제주에 ‘올레길’이 있다면 수원에는 ‘화성 성곽둘레길’이 있다. 성곽 둘레길은 걷는 재미와 함께 200년 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성곽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녀를 동반한 가족 봄나들이 코스로도 제격이다. 성곽둘레길은 서남암문(화양루)~서장대~화서문(서문)~장안문(북문)~화홍문~방화수류정~동장대(연무대)~창룡문(동문)~봉돈~동남각루를 잇는 5.4㎞ 코스다. 성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2~3시간 정도이며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길이 험하지 않아 노약자들도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둘레길은 큰 원형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 출발해도 좋다. 성곽 가운데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는 군사 지휘소로, 동서남북 모든 방향에서 벌어지는 전투나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곳이다. 서장대에서 성곽을 따라 내려가면 다산 정약용이 설계한 화서문을 만난다. 문 옆에는 공격하는 적들을 삼면에서 저격할 수 있도록 지은 서북공심돈이 자리한다. 성곽 옆에 조성된 장안공원을 지나면 화성의 북쪽 문인 장안문을 만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으로 문루의 높이가 13.5m, 너비가 9m에 달한다. 국보 1호인 서울 숭례문보다도 크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크게 훼손됐으나 1975년부터 5년간 복원했다. 이어 7개의 아치형 수문을 거느린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이 나타난다. 화홍문은 7칸의 홍예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 문루를 세운 것이다. 연못을 끼고 있는 방화수류정 주변은 경치가 아름다워 수원 8경 중 하나로 꼽힌다. 화홍문을 지나면 연무대가 나타난다. 동장대로로 불리는 이곳은 당시 군사들이 활을 쏘며 무예를 연습하던 군사 훈련장이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국궁 체험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어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과 봉돈을 지나 계속 걷다 보면 동남각루에 이른다. 여기서 팔달문 사이는 성곽이 한국전쟁 때 파괴된 데다 시장과 상가 건물들이 밀집해 있어 복원되지 못했다. 보물 402호인 팔달문은 사통팔달로 통한다는 의미로 지었다. 서울의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문루의 네 귀에 높은 기둥이 없는 점이 다르다. 이렇듯 화성의 시설물들은 지형 조건을 최대한 활용해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배치됐다는 점에서 여타의 성과는 다르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종석(55·교수·수원시 망포동)씨는 “도심 속에 이렇게 아름다운 성곽이 보존돼 있다는 게 놀랍다. 구불구불한 성곽길을 따라 걸으면 조선시대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제주 올레길 못지않은 매력도 있어 건강 삼아 지인들과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외국 같은 생태교통마을 행궁동 지난 한 해 동안 외국인을 포함해 모두 144만 6000여명의 관광객이 화성행궁을 비롯한 화성을 찾았다. 화성행궁이 있는 행궁동은 생태교통마을로 유명하다. 지난해 9월 주민들이 차 없는 불편을 체험하는 ‘생태교통 수원 2013’ 행사가 치러졌기 때문이다. 2200가구 주민 4300명이 한달간 석유 연료가 고갈된 상황을 전제로 자동차를 포기하는 ‘불편 체험’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주목받았다. 거리 상가 간판과 벽면을 깔끔하게 단장하고 도로는 아스팔트 대신 대리석을 깔고 자동차보다 보행자가 우선되는 특화거리로 리모델링해 마치 외국에 온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공방거리로… 행궁길은 변신 중 화성행궁 앞을 통과하는 행궁길은 공방거리로 변신 중이다. 규방공예와 한지, 서각, 칠보, 가죽 등의 공예공방과 갤러리 30여개가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는 나눔갤러리가 문을 열었다. 행궁길 초입에 설치된 솟대도 공방거리의 명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다양한 높이와 알록달록한 색채를 자랑하며 조화롭게 서 있는 솟대는 지역 주민과 공방작가들이 만들었다. 주말 행궁길에는 거리 판매대가 설치되고 공예 체험 행사와 벼룩시장, 다양한 먹거리 판매 행사 등이 마련돼 화성행궁을 찾는 관광객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코스로 자리매김했다. 김민서(49·여·용인시 서천동)씨는 “화성행궁의 역사와 공방, 갤러리, 카페 등이 오밀조밀하게 이어지는 풍경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 같다. 서울 인사동 부럽지 않은 매력이 있어 행궁에 올 때면 반드시 들른다”고 말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문화재 개·보수 참여 수리기술자 공개키로

    앞으로 중요문화재 개·보수 작업에 참여한 기술자는 물론 일반 기능공까지 명단이 공개되는 ‘수리 실명제’가 도입된다. 또 문화재 수리업체 등록 시 수리기술자 4명을 의무 보유해야 했던 현행 기준을 2명으로 낮춘다. 문화재청은 9일 문화재 수리 체계의 부정과 비정상적 관행을 바로잡기 위한 ‘문화재 수리 체계 혁신대책’을 발표했다. 대책안에 따르면 문화재 수리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중요문화재 개·보수 현장에 누가 참여했는지와 설계도면, 공사 내역 등을 공개하는 ‘수리 실명제’가 실시된다. 또 숭례문 부실 복구 논란에서 불거진 수리기술자 자격증 불법 대여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문화재 수리업체 등록 자격을 완화한다. 업체 등록 시 수리기술자 4명을 의무 보유하기로 돼 있는 현행 규정이 과도해 오히려 자격증 불법 대여를 유도한다는 판단에 따라 2명으로 낮췄다. 의무 보유해야 하는 기능자 수도 현행 6명에서 3명으로 줄였다. 대신 자격증 대여 사실이 두 차례 적발되면 자격이 취소된다. 아울러 기술(기능)자와 수리보수업체를 경력과 능력에 따라 1~3등급(군)으로 분류해 관리하는 평가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인터넷 기반의 ‘문화재 수리 종합정보관리시스템’을 구축, 문화재 수리기술(기능)자를 근무처·경력·학력 등에 따라 등급별로 관리한다. 현장 수석에 해당하는 경력 15년 이상의 1등급 기술자는 5억원 이상의 국가지정 문화재 수리를 맡는다. 또 기술력을 갖춘 우수 업체를 선별해 평가점수 90점 이상인 1군 업체에 한해 5억원 이상의 국가지정 문화재 수리를 맡길 방침이다. 일반 건설공사 입찰에 쓰이는 낙찰 하한가 중심의 현행 적격심사제가 업체 간 담합 등을 불러왔다고 판단, 일괄 낙찰율제의 예외 적용도 추진한다. 또 업체를 대상으로 부실 설계, 감리, 시공에 대한 영업 정지 등 기존 행정처분 외에 부실 벌점제를 적용한다. 현행 수리공사가 대부분 3억원 이하의 소액사업으로 감리에서 제외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감리 대상을 크게 확대하고, 문화재 수리 현장을 일반에 공개하는 ‘문화재 공개의 날’도 정할 계획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공무원과 업체 간 유착을 방지할 대책이 부족하고, 시민 옴부즈맨 장치 등이 배제됐다며 솜방망이 대책이란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일부 업체의 독점적 문화재 공사 수주 등 업계 내부의 불합리한 관행을 바꿀 근본 대책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문화재 관리 현주소](중) 문화재위 권력화 실상과 해법

    [문화재 관리 현주소](중) 문화재위 권력화 실상과 해법

    지난달 26일 경찰청의 전·현직 문화재위원들에 대한 ‘떡값 수수’ 발표는 후폭풍을 몰고 왔다. 문화재위원으로 구성됐던 광화문·경복궁 복원 자문위원 5명이 회의비·명절 선물 등의 명목으로 수년간 시공업체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혐의가 드러났고, 현직에 있던 문화재위원회 K건축분과위원장과 L위원, 전통문화대 K총장이 잇따라 사직서를 제출했다. “업계 관행으로 알았다”는 어이없는 해명도 이어졌다. 경찰청 지능수사대 관계자는 “모두 수수혐의를 시인했으나 금액이 적어 입건하지 않았다”면서 “알음알음 현금이나 상품권이 오가는 ‘떡값’의 특성상 ‘금품을 제공했다’고 명확히 드러난 시공업체 장부 기록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 장부는 시공사인 J업체의 것으로, 이 같은 관행이 업계 전반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시공업체는 왜 문화재위원들을 ‘관리’하려 했을까. 여기에는 출범 52주년을 맞은 문화재위원회의 위상이 한몫했다. 자문기구로 출범했으나 지금은 주요 문화재 정책의 실질적인 의결권을 행사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문화재위원이란 타이틀은 명예이자 ‘보이지 않는 권력’이 된 것이다. 최근 문화재위원회 안팎에서는 조직 개편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부침을 거듭해온 문화재위원회가 정치색 논란을 벗어나 제대로 탈바꿈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문화재위원회의 위상과 역할을 이번 기회에 다시 정립할 겁니다. 심의·자문기구가 실질적인 의사결정기구 역할까지 떠맡으며 여러 문제가 제기됐어요. 감사원 감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기능적인 대안을 찾아야죠. 규모를 키울 수도 줄일 수도 있지요.” 지난달 초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만난 나선화(65) 문화재청장의 어투는 단호했다. 숭례문·광화문·경복궁 복원사업과 관련된 경찰의 수사 결과가 나오지 않은 시점이었으나 어느 정도 결과를 예측하고 있는 듯했다. 수사 결과가 발표된 이후 현직 문화재위원은 “이번 사건은 ‘마당발’로 불리는 일부 위원에 국한된 이야기”라면서도 “업체 입장에선 문화재위원들을 꾸준히 ‘인맥관리’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리보수업체를 비롯해 개인과 대기업, 정치권까지 문화재위원회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위원회가 지닌 막강한 권한 때문이다. 현재 위원회에는 건축·동산·무형·매장·근대 문화재 등 9개 전문 분과가 있고, 각 분과는 임기 2년의 9명 안팎 위원과 20명 정도의 전문위원으로 구성된다. 전체 77명의 위원은 분과별로 전국 단위 국가 유적·사적·천연기념물·무형문화재의 지정과 해제, 관리 등을 심의한다. 여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대민사업이 관련되고 민원과 분규, 청탁과 압력이 끊이지 않는다. 예컨대 어느 지역 임야, 전답, 택지가 사적으로 지정되면 땅값이 크게 떨어진다. 예전에 지정된 땅값은 제자리걸음인데 바로 옆 미지정 지역의 땅값이 마구 오르기도 한다. 개인이나 기업은 사적으로 지정하지 않거나 지정에서 해제되면 큰 이득을 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를 관철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지역구 국회의원들은 지역구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여러 청탁을 넣기도 한다. 또 대규모 개발사업에서 유물이 발굴될 경우 매장문화재의 가치를 판단하는 문화재위원들의 손끝에 따라 개발은 지속되거나 중단된다. 모든 중장비가 쉬어야 하고 막대한 공사비가 낭비된다. 이 밖에 건축문화재 주변 현상변경 심의에 따라 애초 3층만 올려야 할 신축 건물의 높이가 올라가거나 그대로 머물기도 한다. 인간문화재 등 무형문화재 지정 과정에서 끊이지 않는 잡음은 이미 익숙한 이야기다. 형식적으로 최종 결정권은 청장이 갖지만, 위원회 출범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청장이 위원회 결정을 번복한 사례는 거의 없다. 일각에선 금전적 유혹에 쉽게 노출되는 것보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생리가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전직 문화재위원장 출신 인사는 “위원회의 생명은 위원 인선으로, 최고의 실력과 다양한 경험을 녹여내야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이전 정부에선 문화재청과 권력기관의 친소관계에 따라 인재 추천과 임명이 이뤄져 제대로 된 정책을 기대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 인사에 따르면 문화부 문화재관리국 시절엔 문화재위원 인선에 장차관, 담당 국장과 실장의 입김이 작용했다. 반면 1999년 문화재청 승격 이후에는 청장 주도로 인선이 이뤄졌으나, 청와대와 국회 등 정치권의 입김을 여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문화재청은 위원과 전문위원 인선에 학회 등 수백 곳이 넘는 단체에서 추천서를 받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종 선임 이후에는 늘 “정치권과 밀접한 교수들이 권력의 지시에 따라 선임됐다”거나 “학맥과 주관적 판단만으로, 반대 논리를 전개한 전문가를 빼버렸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현직 문화재 전문위원은 “전 문화재청 공무원이나 재단·연구소 직원, 청장의 성향에 따라 재선임된 교수들, 특정학교 출신 인사들이 눈치를 보지 않고 위원회에서 제대로 일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정작 경륜과 연구실적을 갖춘 학자가 배제되고 ‘돌려막기’식의 재선임도 이뤄진다는 지적이다. 문화재위원 간 호선으로 선임되는 분과위원장과 전체위원장의 경우에도 청장의 절묘한 개입에 따라 형식적으로 선출되는 사례가 많았다고 덧붙였다. 위원회는 정권이 바뀌면서 잦은 부침도 겪었다. 위원회 규모가 커지고, 활동범위도 확장된 참여정부 때가 대표적이다. 당시 위원회에 몸담았던 인사는 “분과와 위원수가 많아지면서 문화재와 관련 없는 젊은 운동권 출신 위원이 속출했다. 또 문화재청과 코드가 맞지 않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해온 위원들은 연령이 많다는 이유로 배제됐다”고 전했다. 정치성향이 비슷한 사람끼리 같은 분과의 위원이 되거나 심지어 한 위원이 여러 분과를 겸직해 임명되는 경우까지 나왔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 때도 사정은 비슷했는데, 4대강 살리기 사업과 같은 국책사업을 밀어붙이기 위해서였다는 해석이 나온다. 지자체 산하에서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지역단위 문화재위원회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지자체가 지정하는 문화재를 관리하는 일부 지역 위원들은 권력가처럼 군림한다”고 주장했다. 지역위원의 위촉 과정이 불투명하고 명단이 공개되지 않거나 심의가 1년간 단 4차례만 이뤄지는 등의 사례도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전직 문화재청 고위 관계자는 “미국의 경우 지구단위계획에 따라 문화재위원회를 두고 중요 안건을 공개된 장소에서 위원회가 의결한다”면서 “회의가 열릴 때마다 수십 건의 안건을 비공개로 처리하는 현행 문화재위원회는 축소되거나 새롭게 재편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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