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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물러나라” 3차 촛불집회 수십만 운집…광화문~숭례문까지 100만명

    “박근혜 물러나라” 3차 촛불집회 수십만 운집…광화문~숭례문까지 100만명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대규모 집회가 12일 오후 서울 도심과 전국에서 열렸다. 서울에서만 오후 7시 30분 기준 100만명(주최측 추산)이 모여 이번주가 박 대통령의 퇴진 등을 가늠할 정국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경찰은 같은 시각을 기준으로 26만명으로 추산했다. 경찰 추산 기준만으로도 2000년대 들어 최대 규모다. 2008년 6월10일 광우병 촛불집회(8만명, 주최 측 추산 70만명), 2004년 3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규탄 촛불시위(13만명, 주최 측 추산 20만명) 참가 인원을 이미 넘어섰다. 민주노총 등 진보진영 시민사회단체의 연대체인 ‘민중총궐기 투쟁본부’는 이날 오후 4시 서울광장에서 ‘백남기·한상균과 함께 민중의 대반격을! 박근혜 정권 퇴진! 2016 민중총궐기’ 집회를 열었다. 집회에서는 비선 실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사건을 중심으로 세월호 참사, 백남기 농민 사망, 국정교과서 강행,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AD) 배치 등을 두고 현 정부를 향한 날선 비판이 계속됐다. 도심 행진과 이후 이어지는 행사 과정에서 인원은 더 늘어나 100만명을 넘길 전망이다. 서울시민은 물론 지방에서 전세버스나 열차로 상경한 인원도 상당수이고, 대학생, 청소년, 가족 단위 참가자 등 면면도 다양하다. 참가자들은 총궐기 집회 이후 종로, 을지로, 의주로 등 서울 도심 곳곳을 거쳐 청와대 진입로인 내자동네거리까지 5개 경로로 행진을 시작했다. 경찰은 앞서 최소한의 교통 소통 확보를 이유로 내자동로터리를 낀 율곡로 남쪽까지만 행진을 허용했다. 그러나 주최 측이 경찰을 상대로 낸 집행정지 신청을 이날 법원이 받아들여 내자동네거리까지 행진이 가능해졌다. 행진이후 오후 7시쯤부터 150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한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주최로 광화문 광장에서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3차 범국민행동’ 문화제가 열린다. 문화제는 방송인 김제동·김미화, 가수 이승환·정태춘 등 문화예술인들과 시민들이 함께하는 발언, 공연 등으로 진행된다. 이후에는 광장 일대에서 텐트 농성과 시민 자유발언 등으로 다음날까지 ‘난장’ 행사가 이어진다. 한편 경찰은 이날 272개 중대 2만 5000여명을 집회현장 주변에 배치해, 안전사고에 대비하고 있다. 행진 종착지인 내자동네거리 등 청와대 방면 진입로에는 차벽이 설치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in SEOUL’… 이국 풍경 닮고 다문화 담은 서울 속 작은 지구촌

    ‘in SEOUL’… 이국 풍경 닮고 다문화 담은 서울 속 작은 지구촌

    거주 외국인 46만명, 해외 관광객 1100만명. 아시아 대표 글로벌 도시 서울을 설명하는 숫자다. 거주 외국인과 유동 외국인이 늘면서 서울의 모습도 알록달록 변하고 있다. 이주민들은 특유의 문화적 색채를 서울 골목골목에 입혔다. 외국인이 모여 사는 다문화 마을은 서울에만 30여곳이다. 또 이국적 문화를 쉽게 포용하는 젊은 세대를 겨냥한 음식점과 술집, 커피숍 등이 가득하다. 외국 여행을 못 간다면 이국적 이곳을 방문하면 된다. 필리핀 마닐라와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 베트남, 중동, 아프리카 등의 분위기를 꼭 빼닮은 서울의 명소를 살펴봤다. ●이슬람사원·나이지리아 거리… 이태원 프리덤 이태원은 서울 외국인 동네의 원조 격이다. 1945년 해방 뒤 미군이 이곳에 기지를 지어 넓은 터(242만 6748㎡)를 깔고 앉았고 이후 부대 담장 안 문화가 흘러나오면서 특유의 이국적 동네 분위기가 조성됐다. 용산구 향토사학자인 김천수(39)씨는 “1970년대 주한미군이 재편되면서 경기 동두천의 미군부대가 용산으로 이전했는데 이때 미군을 상대하던 상인들까지 이태원으로 대거 옮겨와 이태원 문화가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1990년대까지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빅 사이즈’ 의류 등을 팔며 미국 대도시의 슬럼가 느낌을 주던 이태원은 2000년대 들어 한층 젊고 다채로워졌다. 이태원에서 이국적 풍경을 사진에 담기 좋은 장소 중 한 곳은 이슬람 거리(용산구 우사단로 10번길)와 나이지리아 거리(보광로 60길) 일대다. 이슬람 거리의 맨 끝에는 첨탑과 돔형 지붕이 인상적인 이슬람서울사원이 있다. ‘중동 붐’이 한창 불던 1976년 중동 사업가들이 한국에 체류하는 일이 늘면서 국내 첫 이슬람사원이 이곳에 생겼다. 이후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에서 온 노동자 등이 주변에 살며 이슬람 생활권을 조성했다. 이슬람 거리로 불리는 우사단길에는 할랄(이슬람 계율에 맞춰 도축·가공한 식품) 인증 식품을 파는 마트와 화장품 가게, 케밥·라마준(터키식 피자)·시리아식 양꼬치 등 이슬람 음식점, 히잡 파는 옷집, 이슬람 서적이 있는 서점 등이 아랍 문자로 쓰인 간판을 달고 성업 중이다. 터번·히잡을 쓴 남녀 무슬림을 쉽게 만날 수 있어 중동 여행객이 된 듯한 느낌마저 든다. 용산문화원은 ‘해설이 있는 용산문화탐방’을 통해 해설가가 시민들과 함께 이슬람 사원 등 지역 명소를 돌며 역사와 특징 등에 대해 배우는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오는 22일 올해 마지막 탐방이 열릴 예정이다. 우사단길 옆으로 가지처럼 뻗은 보광로60길(옛 이화시장 골목) 등 일대는 ‘나이지리아 골목’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다. 레게파마 등 흑인들이 즐겨하는 헤어스타일을 연출해 보고 싶다면 이곳의 전문 미용실을 찾으면 된다. 거리에서는 자유분방함이 느껴지는 형형색색의 벽화를 볼 수 있고 인젤라(에티오피아식 전병 요리) 등 아프리카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도 있다. ●유럽 앤티크 가구거리 걷고… 퀴논길서 베트남 여행을 유럽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이슬람 거리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앤티크가구거리’로 가보자. 이태원 보광로·녹사평대로의 이 공간에는 유럽풍 고(古)가구 매장이 즐비하다. 1970년대부터 차차 형성됐는데 모두 80여개의 매장이 들어선 국내 최대 고가구 거리다. 대부분 유럽에서 직수입한 것인데 70~80년 된 제품이 주를 이룬다. 1000만원이 넘는 고급 장식장 등은 쉽게 살 수 없지만 5만~6만원 선인 원목의자 등을 사는 소소한 사치는 누려볼 만 하다. 이태원에는 최근 공개된 베트남 테마거리 ‘퀴논길’(보광로59길)도 있다. 용산구가 베트남 꾸이년(퀴논)시와의 우호협력 20주년을 기념해 조성한 코스로 도로 바닥에 베트남 국화인 연꽃을 그려 넣고 거리 중앙에는 베트남 전통모자인 ‘논’을 본뜬 조형물을 설치했다. 인근 골목에는 해안 도시 꾸이년을 연상케 하는 벽화도 그렸다. ●일요일마다 혜화동성당 앞은 ‘리틀 마닐라’ 다채로운 색감의 동남아시아 분위기를 느끼려면 주말에 종로구 혜화동으로 가면 된다. 일요일 오전 9시~오후 6시 혜화동성당 인근에 필리핀 상인들이 몰려들어 ‘리틀 마닐라’ 마켓을 연다. 이 성당은 ‘타갈로그어’(필리핀어)로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가 있어 국내 필리핀 노동자 등이 많이 찾았는데 미사가 끝난 뒤 자연스레 장이 섰다고 한다. 동성고 정문부터 혜화동 성당까지 약 100m 남짓한 거리에 15개가량의 가판이 들어서 음식과 잡화 등을 판다. ‘바나나큐’(설탕 바른 바나나를 구운 음식)나 ‘키키암’(필리핀 어묵) 등 동남아 거리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자양동 ‘신차이나타운’에선 양맥(양꼬치와 맥주) 서울 최대 규모인 영등포 차이나타운이 지겹다면 광진구 자양동의 ‘신차이나타운’을 방문해 보는 것도 괜찮다. 지하철 2·7호선 건대입구역 5번 출구로 나와 한강뚝섬유원지 방면으로 200m쯤 걷다 보면 오른편으로 중국 옌볜에 온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羊肉’(양꼬치집), ‘△△電話房’(국제전화방), ‘XX面’(중국냉면집) 등의 간판이 즐비한 이곳이 중국음식문화 거리다. 골목길 600m를 따라 양꼬치 등 중국음식점 100여개가 늘어서 있다. 광진구 관계자는 “1980~90년대 성수동 일대 공장에서 일하던 조선족 노동자들이 가양동 다세대 주택의 월세방에 많이 살았다”면서 “이후 가리봉동의 중국 동포들과 건국대 등 인근 대학으로 유학 온 중국 학생이 몰려들면서 차이나타운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두타서 보는 DDP·낙산공원 야경, 뉴욕 안 부럽네 다문화 인구가 모여 사는 곳은 아니지만 우편엽서에서 본 듯한 해외 명소의 밤풍경을 꼭 닮은 공간도 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일대가 대표적이다. 세계적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DDP는 유선형 외관에 알루미늄 패널 5만 5000장을 붙여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건축물이다. LED를 활용해 만든 흰색 모형 장미 2만 5500송이가 불을 밝히는 DDP의 ‘장미정원’이 풍경의 격을 높인다. 특히, 인근 두타 면세점 8층(D2층) 테라스는 동대문 야경을 100% 즐길 수 있는 명소로 온라인 블로그 등에서 주목받고 있다. 은빛 DDP는 물론 숭례문과 인근 도심까지 내다보이는 밤 풍경은 미국 뉴욕의 야경 명소인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과 겨룰 만하다. 두타몰은 새벽 5시까지 밤샘 영업을 해 동대문에서 심야 쇼핑을 즐길 뒤 시내를 내려다보며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다. 동대문 인근 서울 종로구의 낙산공원도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을 닮은 야경 명소다. 한양도성 성곽길의 일부인 이 공원에 밤에 오르면 조명등에 비춰 곡선미를 자랑하는 옛 성곽과 서울 시내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낙산공원의 제2전망소에서 성곽을 따라 완만한 언덕을 걷다 보면 골목으로 빠질 수 있는데 이곳에는 공방과 작은 박물관, 아기자기한 카페가 많아 예술 거리라는 이미지를 준다. 글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사진 이언탁 기자 utl@seoul.co.kr·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서울신문 DB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맑은 가을햇살 느끼며 옛 ‘경성 월스트리트’를 걷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맑은 가을햇살 느끼며 옛 ‘경성 월스트리트’를 걷다

    서울신문은 서울미래유산을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서울시·문화지평과 함께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을 매주 토요일 진행한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co.kr)에서 답사 코스 확인과 참가신청을 할 수 있다. 오는 5일 답사는 ‘인권을 생각하며 걷는 남산둘레길’을 주제로 이필용·손안나 서울미래유산해설사가 진행한다. 서울미래유산 중에서 긴급한 보호조치가 필요한 것들은 ‘위기의 미래유산’으로 지정할 수 있다. 관리주체가 없어서 보전이 어렵거나 적극적인 수리·보수가 필요할 경우 미래유산 보존위원회 심의를 거쳐 선정한다. 이 경우 소유자는 적극적인 개방을 통해 시민들과 유산의 가치를 공유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최근 문화지평이 답사하는 과정에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성우이용원의 이남열 대표이발사는 건물이 노후해 수리가 시급한 실정이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건물은 실제로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고 비가 많이 오면 빗물이 줄줄 샌다고 한다. 또 다른 서울미래유산인 공씨책방의 경우 건물주가 퇴거를 요청하면서 미래유산으로서의 공유가치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이들 모두 위기의 미래유산인 셈이지만 먼저 미래유산 보존위원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서울 남대문부터 광교까지 뻗은 남대문로는 일제강점기 조선은행(한국은행)을 비롯해 수많은 은행이 밀집했던 금융 1번지였다. 13회차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은 ‘경성 월스트리트를 가다’를 주제로 지난달 15일 오전 10시부터 세 시간 가까이 진행했다. 이 해설사는 이런 역사적 배경을 바탕에 두고 해설하는 한편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서울미래유산들을 꼼꼼하게 챙겼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로 하늘이 맑은 데다 도심 한복판 평지를 걷는 편안한 코스라서 다른 때보다 많은 40명 가까운 인원이 답사에 참여했다. 이날 참석한 선현호 아시아나국제특허법률사무소 관리부장이 어린아이 주먹만 한 약식 30여개를 싸와 답사팀 간식으로 나눠주었다. 약식은 선씨의 부인이자 이바지 음식 전문가인 강기숙씨가 아침에 손수 만들어 보낸 것이라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 옆 작은 공원에서 답사팀은 모였다. 2008년 2월 10일 설날 연휴에 방화로 완전히 불타 버린 숭례문은 2013년 5월 지금의 모습으로 복구돼 일반에 공개됐다. 화재 전에는 도로 위에 섬처럼 서 있어서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공원화되면서 출입이 자유롭다. 문화재 관리의 소중함을 교훈으로 간직한 숭례문에서 이번 답사 여정이 시작됐다. 이 해설사는 “오늘 답사길은 시내 한복판이라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친밀하게 느껴지는 곳”이라며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 가로세로 동서남북형 도로와는 다르게 소공로처럼 대각선 도로와 연결되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남대문에서 소월로를 따라 남산 쪽으로 조금 오르면 남산육교 고가차도가 나온다. 1961년 말 만들어진 일반교량으로 오래된 구조물이라는 점에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남대문시장 안에는 은호식당이란 노포가 있다. 1932년 ‘은성옥’이란 상호로 문을 연 꼬리곰탕집이다. 한국전쟁 때는 부산 피란처에서도 임시로 문을 열었다가 휴전 후 지금 자리에 건물을 짓고 재개업했다. 현재 4대째인 정용식씨가 운영하고 있고 서소문, 여의도에 직영점이 있다. 같은 지역에서 84년 동안 운영되면서 남창동 일대의 시대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장소라는 이유로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남대문시장 전체도 서울미래유산이다. 1414년 정부 임대시전으로 남대문 근처에 가게를 지어 상인들에게 빌려준 게 시장의 시초다. 종로 시전과 동대문 이현과 함께 남대문 칠패는 조선 내내 주요한 시장의 기능을 했다. 1608년(선조 41년) 선혜청이 지금의 남창동에 설치되면서 지방의 특산물 등을 매매하는 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1911년 3월 을사오적 중 한 명인 내부대신 송병준이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남대문시장은 정식 근대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해설사가 남대문시장 초입의 선혜청 표지석 앞에서 답사팀을 멈춰 세웠다. 17세기 초 조선시대 대동법 실시에 따라 대동미(米)·대동포(布)·대동전(錢) 출납을 관장한 관청이 있던 자리다. 쬐끔 과장해서 월스트리트는 이미 17세기 조선조부터 시작된 셈이다. 대동법은 조선시대에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해서 바치게 한 납세제도다. 벼농사가 어려운 산간지방이나 쌀 납부가 어려운 경우에는 베·무명(대동포), 돈(대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었다. 선혜청의 의미는 대동법 실시 이후 등장한 공납 대납업자들이 산업자본가로 성장해 수공업과 상업발달을 촉진시켰다는 데 있다. 이렇듯 돈이 흘러가는 곳이다 보니 자연스레 운송활동도 증대하면서 교환경제가 발달하게 됐다. 서울역이 남대문시장 인근에 위치한 이면에는 아마도 이런 이유가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남대문 2층 한옥 상가벽돌 쌓아 올린 한·양 절충식 건물 남대문 지하보도 역시 서울미래유산이다. 정확한 준공 시기는 알 수 없고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남대문 4가 대로변에는 생소하게 한옥 기와를 이고 선 2층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바로 남대문로 2층 한옥상가다. 올해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662호로 등록됐다. 1910년대 만들어진 벽돌조 한양(韓洋) 절충식 건물로 전통적인 단층 목조 건축 양식에서 벗어난 벽돌조란 특징을 갖는다. 업무상 중국 출장이 잦은 김유림(40·넥스나인 대표)씨는 “중국 VIP 및 비즈니스 고객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남대문 일대 관광을 매우 좋아하는데 그동안 흔하게 알려진 것만 설명하는 데 그쳤다”며 “이번 답사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역사적 사실을 중국인들에게 보다 풍성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이 해설사는 답사팀을 북창동 먹자골목을 통과해 플라자호텔 쪽으로 이끌었다. 길 건너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는 때마침 수문장 교대식이 한창이다. 수문장 교대식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국립극장장을 지낸 허규씨가 병상에서 아이디어를 내 관광 콘텐츠로 발전시킨 ‘작품’이다. 즉 역사에 이런 수문장 교대식은 없었다. 명동 나석주 열사 동상 나 열사가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던진 곳 이 해설사는 “대한문 앞 도로는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가 근대적 도시 발전을 도모하기 시작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며 “환구단을 거쳐 소공로를 뚫어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개설했고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도로 역시 구체화시켰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도로의 확장과 직선화가 사회 구성원 간 소통의 부재라는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이 해설사는 “도로가 넓어지면 교통은 편리해지지만 사람이나 차가 빠르게 이동하면서 교류가 어려워지게 된다”며 “이는 도로의 발달이 사람보다 자동차에 우선권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도로는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고 편리하게 걸어가면서 정보를 얻고 교류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야 사람 간 교류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환구단 일대 호텔가일제강점기 경성 대표적 상업지역 눈을 조선호텔 쪽으로 돌리자 사적 157호 환구단이 나타났다. 2007년 수유리 그린파크호텔 재개발 과정에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던 문이 환구단 정문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이전 복원된 사연을 갖고 있다. 환구단 일대는 지금도 각종 호텔이 빼곡하지만 일제 강점기에도 경성을 찾는 외국인이 묵는 호텔이 많았다. 교통이 편리하고 물산이 풍부한 경성의 대표적인 상업지역이었던 셈이다. 백화점과 양판점이 들어서면서 막대한 시장 자금이 돌자 자연스레 금융시설도 들어섰다.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자리에는 조선은행, 신세계백화점 옆 건물인 SC제일은행에는 조선저축은행, 한국은행 소공별관 자리는 조선상업은행, 롯데 애비뉴엘에는 조선신탁주식회사가 있었다. 그 바로 옆 롯데백화점은 식산은행, 길 건너편에는 제일은행, 외환은행 자리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었다. 이 밖에도 시청 을지로별관에는 제국생명, 신한은행 광교빌딩은 한성은행, 광교약국 자리에는 동일은행 등이 있었다. 우리은행 종로지점은 조선상업은행 종로지점으로, ‘1924년 8월에 문을 열었다’는 동판이 벽에 부착돼 있다. 이렇게 금융회사가 밀집해 있었던 역사로 인해 ‘경성의 월스트리트’였다는 표현이 자연스러운 거리다. 한국은행 앞 사거리부터 을지로입구역까지 남대문로 일대를 아우른다. 한편 소공로는 조선총독부와 경성부청을 대각선으로 잇는 짧은 도로였지만 모던보이들이 즐겨 찾던 신식 양복점이 즐비했다. 소공로 중간쯤 있는 서울미래유산 해창양복점은 1945년 문을 열었다. 부산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던 창업주 이용수씨가 소공동으로 이전 운영하다가 1958년 아들 이순신씨에게 가업을 넘겼다. 1995년 재단사로 일하던 한창남씨가 경영에 참여한 이후 2004년 완전히 인수했다. 지금은 일대가 부영그룹에 의해 개발되면서 조선호텔 건너편으로 이전했다. 소공로 해창양복점 거리모던보이들 즐겨 찾던 신식 양복점 을지로입구역에서 명동으로 들어가는 하나은행 옆 골목 초입에는 나석주 열사의 동상이 있다. 이곳은 1926년 12월 나 열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 중 자결한 곳이다. 답사단은 광교 위에서 이번 답사를 정리했다. 고등학생인 두 딸과 함께 참석한 이은순씨는 “오늘 답사를 하면서 그동안 익숙하게 들어 왔지만 자세히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새로이 알게 됐다”며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서 앞으로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따뜻한 사람들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졌다”고 후기를 전했다. 이 해설사는 “이번 답사 지역은 조선후기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150여년간의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우리들 기억 속에 내재해 있는 대표적인 곳”이라며 “일제 치하 경성 금융가, 도로 확장이 주는 사람들 사이 소통의 문제를 엮어서 진행해 봤다”고 끝맺음을 했다. 을지로입구에서 답사를 마무리한 팀 일부는 청계천을 따라 을지로4가까지 걸었다. 그곳에 있는 서울미래유산인 춘천막국수집에 들러 막국수와 돼지고기 보쌈을 나눠 먹으며 훈훈하게 답사를 정리했다.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남대문 옆, ‘시장의 역사’ 품은 떠들썩함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남대문 옆, ‘시장의 역사’ 품은 떠들썩함

    “떡 장수, 메밀묵 장수, 국수 장수, 활기에 넘치고 가지가지 소리가 있는 시장, <페르시아 시장>이 아니고 전쟁이 밟고 지나간 장터에도 음악은 있다. 장난감 파는 가게에 인민군들이 서 있고 그들이 돌아갈 때 누이와 동생, 아들과 딸들에게 선물할 장난감을 고르고 있지 않은가” 박경리의 작품, ‘시장과 전장’(1964)에 묘사된 남대문 시장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한국전쟁 절망의 한 가운데에서도 삶의 생명력을 잃지 않는 유일한 공간으로 그리고 있다. 흡사 붉은 양탄자 층층이 올린 아라비아 페르시아 시장 뒷골목에서 양탄자가 날아오르는 요술처럼, 남대문시장에서도 피난민들의 남루한 삶을 날려 줄 마법의 램프 속 도깨비가 남대문시장에는 있었을 듯하다. 주소로는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시장4길 21. 흔히 없어서 못 파는 물건이 없다는 말같이 도깨비처럼 뚝딱 소리 한 번에 모든 물건을 다 구할 수 있어 ‘박격포’까지 판다는 허명(虛名)마저 되새김질하는 시장이 바로 ‘남대문시장’이었다. 남대문시장은 지금도 명실상부 의류를 비롯해 각종 섬유 제품, 액세서리, 안경 같은 잡화, 주방용품, 공산품, 토산품, 수입 상품, 농수산물 등 1700여 종의 물품들이 거래되는 한국 제일, 최고(最古), 최대 전통시장임은 분명하다. 대지면적으로만 2만 467㎡, 건물연면적으로는 6만 4613㎡에 달하며, 점포 수는 이미 만 여곳 이상이 성업 중인, 하루 4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발도장을 찍는 서울의 대표적인 핫 플레이스이기도 하다. 또한 이 곳에는 도소매를 겸하는 전문 상가가 있어 일반 손님들도 원하는 물품이 소량이라도 편리하고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어 서울 시민의 넉넉한 안살림을 채워주는 곳간과도 같은 곳이다. 최근에는 남대문 시장이 한류(韓流)의 중심지로 다시금 각광받고 있다, 일본 도쿄 우에노 공원의 아메요코(アメ)시장이나 대만 최대 재래시장 디화지에(迪化街)처럼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는 단연 1순위 관람코스로 새롭게 등장하여 과거의 전성기를 누릴 심사를 남대문 시장은 품고 있다. ●옛 모습은 숭례문 밖 생선 팔던 칠패(七牌)시장 남대문시장의 역사는 이러하다. 원래 17세기 초부터 한양 도성에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 하여 조정으로부터 물품 독점권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시전(市廛)상인들이 종루(鐘樓) 행랑을 중심으로 모여 조선팔도 모든 물목들을 어깨 힘 잔뜩 넣은 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도성 외부에 인구가 몰리는 17세기 후반 남대문과 서소문 밖을 중심으로 상가가 조성되기 시작한다. 바로 남대문시장의 전신인 칠패(七牌)시장이 등장한 것이다. 이와 아울러 18세기 중엽, 서울 동부의 어의동(於義洞) 근처에도 또 다른 상가가 등장하게 되는 데 이는‘동대문시장’ 전신인 ‘이현(梨峴)상가’였다. 이로 인하여 서울 도성 안팎의 상가는 종루 시전상가와 이현, 칠패 상가를 합하여 삼대시(三大市)로 나뉜다. 제각각 취급하는 물품도 다양해서 종루 시전상가는 궁궐이나 관아, 그리고 양반 사대부가에 필요한 사치품이나 중국 수입물품, 생활용품을 판매하였다. 반면 남대문시장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칠패시장은 마포나루터와 인접해 있어 새벽녘 마포(麻浦) 서강(西江)을 거쳐 들어오는 곡식이나 생선같은 상품들을 도성 안 서민들에게 대주었다. 특히, 칠패의 어물전(魚物廛) 명성은 지금의 노량진 유명세보다 훨씬 윗길이었다. 따라서, 지금도 남대문 시장의 대표 음식인 '갈치조림'의 명맥이 뜬금포처럼 등장하지 않은 연유가 바로 이러하다. 18세기 후반 한양 도성을 기록한 당시의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 회현동, 죽전동, 주자동, 어청동, 어의동, 이현, 명문 등지에 칠패시장에서 미리 매점매석한 어물이 산처럼 쌓였다고 전해질 정도로 이 지역은 번성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1914년, 우리나라 제1호 시장으로 등록 구한말에 이르러 칠패시장의 규모가 종로와 남대문로를 뒤덮을 정도로 성장하자 대동미와 대동포 출납을 관장하던 선혜청(宣惠廳)으로 시장의 중심 터전이 옮겨가게 되고 이로부터 오늘날의 남대문시장의 자리가 옛 선혜청 자리로 잡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상인들에 의해 시장 경영권이 당연히 넘어가게 된다. 1922년 일본인이 운영하는 중앙물산주식회사로 시장의 경영권이 넘어가고 조선의 유통을 장악하려던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남대문 시장은 1936년경 등록된 상인의 수만 무려 230여 명이 될 정도로 급성장한다. 또한 1930년대 시장의 하루 거래액이 8만원에 이를 정도로 시장은 활성화되어 현재 남대문 시장의 규모가 만들어진다. 당시 주요 거래 품목은 미곡(米穀)과 과일, 채소, 생선 등 농수산물과 식료품이었으며, 이 외에도 고기류나 생활 잡화도 취급하여 명실상부한 거래액 규모에서는 조선 최대 전통시장의 면모를 차지하게 된다. 이후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남대문 시장은 동대문시장과 아울러 서울의 중심시장 자리를 지켜온다. 1947년에 215개의 점포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1952년에 252개로 늘어났고, 종전 후 폐허 속에서도 여전히 150개의 점포와 500여 개의 노점들이 생업을 이끌어가는 공간으로 살아 남아 있었다. 특히 휴전 이후 남대문시장은 주목할 만한 양적 성장을 이룬다. 전후복구를 위한 미군의 구호물자와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군용품,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내려오던 적산(敵産) 사치품과 밀수품 들이 거래되면서 소위 ‘도깨비’처럼 단속을 피해 물건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일이 남대문 시장 안에서는 빈번하였다. 특히 50,60년대 정부에서 유통 금지 물품으로 단속을 하던 밀수품들인 카메라, 양주, 담배, 시계, 양산 등이 남대문 시장 곳곳에 등장했다가 없어지곤 해서 당시 서울 시민들의 호기심을 가득 받기도 하였다. 또한 미군들의 군복, 담요, 시레이션(C-ration) 박스 등 접하기도 힘든 고급 군수물자들을 쉽게 구입할 수 있게 되어 항간에는 ‘박격포’도 살 수 있다는 소문도 그럴듯하게 퍼지기도 하였다. 1960, 70년대에는 빈번한 불난리를 피해 시장 건물 현대화사업에도 박차를 가한 기간이었다. 1969년 1월에는 지하1층 지상 3층짜리 건물이 완공되었고, 이후 1975년까지 667개의 점포가 추가되어 그 때의 건물들이 현재까지 이르러 지금의 시장의 틀을 만들었다. 1980년대는 바야흐로 남대문 시장 전성시대였다. 흔히 ‘남문’패션이라고 해서, 베이비붐 세대들인 1970년대 생 아동들이 학교에 입학할 즈음 전국적으로 아동복에 대한 수요가 넘쳐흘렀고 이를 남대문시장이 감당하였다. 40대 이상이라면 지금도 귀에 익숙한 ‘부르뎅’, ‘원 아동복’ 등의 아동복 브랜드가 당시 ‘국민학교’ 학생들의 ‘워너비’ 메이커가 되었다. 또한, 신발류로는 ‘프로스펙스’, ‘르까프’, ‘까발로’, ‘타이거’, ‘슈퍼카미트’, ‘프로월드컵’ 등의 브랜드가 등장하여, 남대문 시장을 중심으로 서울, 경기를 넘어 전국 각지로 어린이들의 동심을 흔들어 놓았다. 특히 어린이날 전후로는 물건을 떼러온 ‘봉고’들이 남대문 시장 입구 10Km부터 줄지어 서있는 진풍경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런 남대문시장의 호황은 1997년 IMF와 더불어 막을 내린다. 더구나 백화점과 할인마트가 등장하고 인근의 동대문 시장이 의류 특화 상권으로 성장하면서 남대문시장은 의류 중심의 상권이 대거 액세서리, 안경점, 여성 전문 패션, 그릇, 내복류 등으로 이동하여 2000년대를 맞이한다. 오늘날 남대문시장은 비록 예전의 ‘박격포’까지 팔 기세의 위세는 점점 사그라졌을지라도, 여전히 서울의 대표 전통시장으로 발을 굳건히 붙이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중국, 일본 관광객들의 급증으로 인하여 한류상품, 인삼, 김, 가죽 제품 등과 같은 관광상품을 취급하는 상점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17세기 후반에 출현한 어물 유통의 중심지, 남대문 밖 칠패(七牌)시장으로서의 오랜 역사를 지닌 남대문 시장. 현재 인터넷, 모바일 쇼핑 등의 변화된 유통 환경에서도 그 옛날 나랏님도 어쩌지 못하던 난전(亂廛)시장 특유의 질긴 생명력을 한류(韓流)의 물살을 타고 단단히 이어가길 바란다. <남대문시장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너무나 당연하다. 남대문시장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전통시장이다. 서울을 방문하는 초심자에게 남대문 시장은 경복궁, 남산 타워와 아울러 기본 탐방 코스다. 2. 누구와 함께? -나이 드신 부모님과 함께 가 보면 좋다. 추억과 더불어 시장 골목골목 볼거리,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3. 가는 방법은? -무조건 대중교통을 이용하길 권유한다. 지하철4호선 회현역 5번 출구로 나오는 것이 제일 낫다. 4. 감탄하는 점은? -규모다.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게 넓고 크다. 점포수가 만 개가 넘으니 넉넉한 시간을 두고 둘러보는 것이 낫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80년, 90년대의 부르뎅 아동복이나 원 아동복을 그리워하는 세대들에게는 그 당시만 못하더라도 여전히 전통시장 특유의 진한 삶의 내음은 찾을 수 있다. 지금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많다. 6. 꼭 봐야할 상점이나 거리는? -수입상품거리나 그릇 도매점, 액세서리 상가도 볼만한 것이 많다. 특히 수입상품상가 강추! 7. 먹거리 추천? -원래 남대문시장 최고의 인기 음식은 단연 갈치조림이다. 갈치조림골목은 남창동 본동상가에 위치해있다. 그리고 회현역 5번 출구 인근의 칼국수 골목도 유명하다. 또한 안경점 골목 주변의 노천 생갈비도 먹을 만하다. 이외에도 곰탕, 닭곰탕 등등의 먹거리 투어 장소로도 손색이 없는 시장. 8. 홈페이지 주소는? -www.namdaemunmarket.co.kr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남대문 시장 만으로 한나절 넉넉하다. 주변이 바로 명동이어서 남산이나 경복궁, 광화문 등지로 쉽게 이동이 가능하다. 10. 총평 및 당부사항 -우선 남대문 시장을 방문하기 전에는 반드시 홈페이지에서 전체 지도를 꼭 보고 가야한다. 또한 전문적인 상가들이 밀집해 있기 때문에 자신의 구매 목적에 맞는 상가 위치를 미리 알고 가면 좋다. 그리고 주차 문제는 심각해서 반드시 주차장에 세워 두어야 견인, 과태료 부과를 피할 수 있다. 에누리 없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씨줄날줄] 또 하나의 ‘훈민정음’ 판본/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또 하나의 ‘훈민정음’ 판본/서동철 논설위원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1443년 창제한 새로운 문자다. ‘훈민정음’은 또한 1446년 펴낸 목판본을 일컫기도 한다. ‘훈민정음 해례본’이라 하는데 몇몇 시민단체는 ‘국보 제1호’를 기존 숭례문에서 이것으로 바꾸자는 청원을 얼마 전 국회에 내기도 했다. ‘해례본’은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취지를 직접 밝힌 어제서문(御製序文)과 음가(音價)와 용법을 설명한 예의편(例義篇), 집현전 학사들이 제자원리와 자모체계를 해설한 해례편(解例篇), 한글의 창제 이유와 창제자, 책의 편찬자를 담은 정인지 서문을 합쳐서 찍어 낸 것이다. 어제서문과 예의편은 ‘세종실록’이나 ‘월인석보’에도 같은 내용이 실렸지만 해례편과 정인지 서문이 포함된 ‘해례본’은 1940년이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간송 전형필이 경북 안동에서 나온 목판본을 입수해 공개한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됐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해례본’은 2008년 경북 상주에서 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간송미술관 소장 ‘안동본’과 같은 목판으로 찍어 낸 것이다. ‘상주본’은 ‘안동본’보다 훼손이 심하다고 한다. 그럴수록 아직도 소장자를 둘러싼 잡음 속에 서지학적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 ‘해례본’ 이야기를 장황하게 나열한 것은 그만큼 희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글날을 앞두고 의성 김씨 집안이 물려받은 책 한 권을 탐문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세종어제 훈민정음’이라고 했다. 집안을 대표해 소재 파악에 나선 사람은 김도현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다. 김 전 차관의 설명은 이렇다. 집안 고서(古書)를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다가 1994년 전문가들에게 작업을 맡겼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오래 일한 고서 전문가도 포함됐다. 대략 300권 1300책의 목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저자가 ‘신숙주’로 되어 있고, ‘목판후쇄’라 부기된 ‘세종어제…’는 당연히 눈길을 끌었다. 이 책들을 보관하고 있던 집안 형님은 1996년 한 대학에 소액의 사례금을 받고 모두 넘겼다. 두어 봐야 훼손만 될 뿐이니 대학이 갖고 있으면 연구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시간이 흐른 뒤 김 전 차관이 이 사실을 알고 해당 대학에 물어보니 그런 책은 오지 않았다고 답변을 하더라는 것이다. 김 전 차관은 이 책이 해례본이거나 버금가게 가치 있는 책인지 확인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가치가 높은데도 음지에 묻혀 있다면 불행한 일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무엇보다 목록에 적힌 책들은 일정한 대가를 받고 양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숨겨 놓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김 전 차관은 이 책이 어디에서건 나타나 서지학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책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다고 했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gh@seoul.co.kr
  • 2016 여의도 불꽃축제 등으로 서울 도심 정체 극심 예상…버스 노선 조정도

    2016 여의도 불꽃축제 등으로 서울 도심 정체 극심 예상…버스 노선 조정도

    토요일인 8일 서울 도심에서 세계불꽃축제 등 문화행사가 개최되는 가운데 도로 곳곳이 통제돼 극심한 정체가 예상된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이날 오전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 행사와 오후 세계불꽃축제를 위한 교통통제로 교통혼잡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정조대왕 능행차로 양방향 전차로가 통제되는 구간은 율곡로(오전 1∼9시), 은행나무로(하루 종일)다. 오전 8시30분부터 낮 12시30분까지 창덕궁→돈화문로→종로→남대문로→숭례문→한강대로→한강대교→강변북로(구리방향)→한강시민공원→노들섬까지 10.2㎞ 구간은 진행방향 하위 2개 차로가 차례로 통제된다. 이어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노들나루공원→노량진로→동작구청→장승배기역→상도로→보라매역→여의대방로→시흥대로→시흥행궁까지 10.8㎞ 구간도 진행방향 하위 1개 차로에서 순차적으로 통행을 할 수 없다. 불꽃축제 통제 구간은 마포대교 남단에서 63빌딩 사이 약 1.6㎞ 구간으로, 오후 2시부터 9시30분까지 양방향 전차로에 차량이 다닐 수 없다. 경찰은 통제 구간 주변에 교통통제ㆍ우회안내 입간판과 플래카드를 설치하고 교통경찰ㆍ모범운전자 등을 배치하여 교통관리를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울시도 통제 구간 내 버스 노선을 임시로 조정한다고 밝혔다. 자세한 교통상황은 서울지방경찰청 교통정보 안내전화(☎ 02-700-5000), 교통정보센터 홈페이지(www.spatic.go.kr),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서울교통상황)으로 확인하면 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220년 만의 ‘정조대왕 능행차’ 서울~수원 45㎞ 전 구간 재현

    서울시와 경기 수원시가 창덕궁을 출발해 수원 화성행궁까지 가는 ‘정조대왕 능행차’를 8~9일 재현한다. 6일 수원시에 따르면 정조대왕 능행차는 수원시 대표축제인 수원화성문화제의 하이라이트로 조선 제22대 정조가 1795년 행했던 ‘을묘년화성원행’을 원형 그대로 재현하는 행사다. 수원종합운동장에서 화성행궁까지 이르는 2~3㎞ 구간에서만 재현됐던 예년과 달리 올해는 서울 창덕궁을 출발해 배다리를 건너고 안양시와 의왕시를 지나 수원 지지대 고개를 통해 화성행궁까지 이르렀던 45㎞ 전 구간을 재현한다. 1997년 나란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각별한 인연이 있는 창덕궁과 수원화성이 이번 능행차로 연결되는 셈이다. 첫날인 8일 오전 9시 창덕궁을 출발해 숭례문과 서울광장, 노들섬, 노량행궁을 거쳐 오후 6시 서울 금천구청 옆 시흥행궁지에 도착한다. 서울광장에서는 정조대왕이 시민들과 인사하고 혜경궁 홍씨에게 배례하는 의식을 치르고, 노들섬에서는 정조가 혜경궁 홍씨에게 미음 다반을 올린 것을 재현한다. 둘째 날인 9일 오전 9시에 금천구청을 출발해 만안교, 안양역(안양행궁지), 의왕시(사근행궁지), 지지대고개, 화성행궁을 거쳐 오후 6시 30분 연무대에 도착한다. 전체 행렬 구간 47.6㎞, 총참여인원 3069명, 말 408필이 동원되는 역대 최대 규모다. 수원시는 처음 공동으로 재현하는 만큼 창덕궁 출궁의식과 배다리 등을 고증해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는 데 중점을 뒀다.이상훈 수원시 문화체육국장은 “서울과 안양·의왕시 등 관련 지자체의 협조를 받아 정조대왕 능행차의 전 구간을 최초로 재현하게 돼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주말 서울 도심 집회·행사… 여의도·광화문 일대 통제

    주말 서울 도심 집회·행사… 여의도·광화문 일대 통제

    주말인 24일과 25일 서울 도심 곳곳에서 대규모 집회와 행사가 개최돼 주요 도로 곳곳이 통제된다. 24일에는 화물연대 조합원 1만 4000여명이 여의도공원에서 집회를 연 뒤 오후 6시부터 1시간 30분간 여의공원로와 여의대로, 국회의사당로를 거쳐 KDB산업은행 본점까지 2개 차로로 1.4㎞를 행진한다. 경찰은 행진 구간을 차례로 통제했다가 해제한다. 도심에서는 사직대제 어가행렬로 덕수궁부터 종로구 사직단까지 오전 11시부터 50분간 태평로 일부 구간과 세종로의 차량 운행이 통제된다. 오후 3시부터는 2시간 동안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반대하는 시민단체가 전쟁기념관에서 국방부, 녹사평역, 한신아파트 등을 지나 녹사평역 3번 출구까지 1개 차로로 2.6㎞를 행진한다. 또 다른 사드 배치 반대 시민단체는 오후 5시 30분 서울역을 출발해 숭례문, 한국은행, 을지로1가를 지나 오후 7시 청계광장에 도착한다. 이들은 1개 차로를 이용해 2.4㎞를 행진한다. 25일에는 ‘서울아 운동하자 2016 아디다스 MBC+마이런 서울’ 행사와 관련해 여의도공원 일대(여의대로, 여의서로, 여의공원로), 여의하류IC, 노들로, 양화대교, 월드컵로(합정역~상암 월드컵경기장 주변) 일대, 증산로 일부 구간이 오전 8시부터 정오까지 통제된다. 또 ‘서울 차 없는 날 2016’ 행사로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광화문삼거리~세종대로사거리(세종문화회관 쪽 한 방향), 세종대로사거리~시청 앞 양방향도 통제된다. 행사시간대 자세한 교통상황은 서울지방경찰청 교통정보 안내전화(02-700-5000), 카카오톡(아이디 ‘서울경찰교통정보’), 교통정보센터 홈페이지(www.spatic.go.kr),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서울교통상황) 등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은행·금강송·주목… 대통령들이 심은 나무

    은행·금강송·주목… 대통령들이 심은 나무

    산림청은 세계기록총회(5~10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기간인 6~9일 진행되는 산업전 공공부스에 우리나라 산림녹화 역사 기록물 100여점을 전시한다. 6·25전쟁의 폐허 속 화전민, 송충이 잡기에 동원된 고사리손과 주민들의 모습 등 아픔이 담긴 사진도 만날 수 있다. 식목 행사에 참가했던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 모습도 정리했다. 식목일은 1949년 제정돼 서울시에서 행사를 주관하다 1970년 산림청이 정부 차원에서 기념식을 진행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0년 식목일 당시 광릉시험림에 ‘공손수’(公孫樹)로도 불리는 14년생 은행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심은 뒤 80∼150년 뒤에야 열매를 맺고 풍성해져 손자와 그 후대를 위한 나무라는 의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크게 키우는 게 더 중요하다”며 1980년 11월 첫째 토요일로 지정된 육림의 날에 30년생 독일가문비(소나무과)를 심었다. 검푸른 색깔에 우뚝 솟은 모습이 군인의 위용을 닮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89년 식목일에 20년생 분비나무(소나무과)를 심었다. 분비나무는 한라산과 지리산 등 높은 산 정상 부근에서 자라 청초하면서 단정한 느낌을 주지만 대기오염에 약한 게 단점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2년 식목일에 경기 포천군 소흘읍 국립수목원에서 ‘산림헌장’ 비석을 제막하며 17년생 금강송을 심었다. 숭례문과 광화문 복원에 쓰일 정도로 우량 품종인 금강송은 강원 금강산에서 경북 조령을 잇는 산맥, 특히 계곡 부위의 토양 수분이 좋고 비옥한 지역에서 잘 자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를 9개월 앞둔 2007년 5월 국립수목원에서 28년생 주목을 심었다. 이 나무는 1년가량 더딘 성장으로 수목원을 당황하게 하다가 회복돼 검푸른 잎과 원추형의 독특한 모양으로 자랐다. ‘경제 대통령’을 모토로 내걸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2년 식목일 국립산림품종관리센터에 ‘금빛노을’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신품종 황금색 주목을 식수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13년 식목일을 맞아 30년생 구상나무(소나무과)를 심었다. 국내에만 자생하는 특산수종이지만 최근 심각한 고사 상태를 보였다. 대전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 [오늘의 눈] 국보 2호를 아시나요?/김승훈 문화부 기자

    [오늘의 눈] 국보 2호를 아시나요?/김승훈 문화부 기자

    이달 초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을 찾았다. 내리쬐는 뙤약볕에 숨이 막혔다. 공원 안쪽, 하늘로 곧게 솟아오른 탑 하나가 유리관에 갇혀 있었다. 비좁은 유리관 속에서 열기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수많은 부처, 보살상, 구름, 용, 사자, 모란, 연꽃 등 층층이 새겨진 유려하고 정교한 조각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듯했고, 독특하고 이국적인 정취는 퇴색하고 있었다. 높이 12m에 달하는 위용이 오히려 안타까움을 더했다. 조선시대 석탑으론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련된 석탑인 ‘원각사지 10층 석탑’의 현주소다. 유리관은 서울시에서 1999년 말 비둘기 배설물로부터 탑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국보 1호는?”하고 물으면 즉각 숭례문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렇다면 국보 2호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국보 2호는 앞서 말한 원각사지 10층 석탑이다. 한 문화재 관계자는 “국보 2호의 보존·관리 상태를 보면 깜짝 놀란다”며 “유리관 속 열기로 탑 표면 상태는 말도 아니고 관리도 엉망”이라고 탄식했다. 국보 1호 교체 논란이 뜨겁다. 국보 1호를 숭례문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으로 바꿔야 한다는 측과 그래서는 안 된다는 측의 설전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 때인 1996년 이래 20년째 거듭돼 왔다. 급기야 문화재제자리찾기 등 시민단체들은 지난달 31일 훈민정음 해례본을 국보 1호로 지정하자는 청원까지 국회에 제출했다. 이 같은 논쟁은 ‘문화재 지정 번호’로 인해 촉발된 면이 크다. 문화재청은 문화재 지정 번호는 관리와 행정 편의를 위해 부여된 것일 뿐 우열을 가리는 게 아니라고 강변하지만 1호, 2호, 3호 같은 숫자는 곧 문화재 서열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사람들도 중요 순위로 받아들여 1호만 기억한다. 예전 ‘1등은 기억하지만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광고 문구처럼 1호는 알지만 2호는 관심조차 없다. 한 문화재 관계자는 “국보 1호 논란만 뜨겁지 국보 2호가 뭔지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고 하소연했다. 다른 관계자는 “국보 1호를 훈민정음 해례본으로 바꾸면 1위에 집착하는 우리나라 정서상 숭례문은 현재의 국보 2호와 같은 처지가 되고 말 것”이라고 지적했다. 모두 문화재 지정 번호가 초래한 폐단을 꼬집은 것이다. 현재 문화재 지정 번호를 사용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북한뿐이다. 국보 1호 교체 논란을 종식하기 위해선 지정 번호를 폐지해야 한다. 국보 숭례문, 국보 경천사지 10층 석탑 같은 식으로 표기해야 한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서 번호가 필요하다면 문화재청 데이터베이스에만 기록해 두면 된다. 국보는 국보다. 모든 국보는 소중히 보존하고 관리해 후세에 물려줘야 한다는 뜻이다. 일각에선 지정번호를 폐지하면 간판 교체 등 경제적 비용이 초래될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 문화재 관계자는 “반구대 암각화 보존방안으로 추진됐던 가변형 임시 물막이의 투명 물막이판 실험에 사용된 28억원을 고려하면 비용적인 측면은 크게 걱정할 부분이 안 된다”고 했다. hunnam@seoul.co.kr
  • [씨줄날줄] 수원 화성 방문의 해/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수원 화성 방문의 해/서동철 논설위원

    ‘수원 화성’이 어색한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수원에 있는 화성’이라는 뜻이라면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수원과 화성의 역사를 살펴보면 ‘역전앞’처럼 동어반복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조 17년 ‘수원부(水原府)의 호칭을 화성(華城)으로 바꾸고 어필(御筆)로 현판을 써서 장남헌(壯南軒)에 걸었다’고 적었다. 장남헌은 화성행궁의 정궁(正宮)이다. 그런데 정조실록은 이후에도 ‘수원부’와 ‘화성부’를 거리낌 없이 뒤섞어 쓰고 있다. 하기는 ‘숭례문’이라는 표현이 보편화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남대문’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적지는 않다. 서울 관악구의 봉천동도 사라진 이름이지만, 지하철 2호선 봉천역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도 다르지 않다. 정조도, 사관(史官)들도 굳이 ‘수원’과 ‘화성’을 구분해 언급하고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수원 화성이라는 이름은 어색하게 들릴 수도, 어색하지 않게 들릴 수도 있지만 진짜 어색한 것은 하나의 역사문화권을 두 개로 갈라놓은 행정구역이다. ‘화성에는 화성이 없고, 동대문에는 동대문이 없다’는 말이 있다. 화성은 행정구역상 화성시가 아닌 수원시에 있고, 서울 사대문의 하나인 동대문은 동대문구가 아닌 종로구에 있기 때문에 생긴 우스개다. 정조가 화성 신도시를 만든 이유는 군사, 행정, 경제에 걸치는 만큼 단순할 수 없다. 그럼에도 아버지 사도세자,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진한 가족 관계도 축조의 상당한 이유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화성은 수원시에, 짝을 이루는 정조와 그 부모의 무덤은 화성시에 있는 것은 역사는 역사, 현실은 현실이라는 것을 고려해도 부자연스럽다. 수원시와 화성시를 통합하자는 논의는 그동안에도 몇 차례 있었다. 최근에도 수원시와 화성시는 물론 오산시까지 합친 통합 논의가 있었지만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정치인들의 소(小)지역 할거주의 때문이겠지만 아쉬운 일이다. 한편으로는 통합을 이룬다 해도 통합자치단체의 이름을 무엇으로 해야 할지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수원이나 화성 모두 역사성으로 우열을 가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2016 수원 화성 방문의 해’를 맞아 엊그제 이곳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화성은 단계적으로 정비가 이루어져 깔끔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관광객은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아 보였다. 서울에서 가깝지는 않은 만큼 외국인 관광객은 하루를 꼬박 투자해야 화성을 둘러볼 수 있다. 그런데 수원 화성의 역사 자산은 물론 전통시장을 비롯한 문화 자산은 그 시간과 비용을 아까워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다양했다. 그럴수록 단순히 ‘즐거움을 주는 관광 도시’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는 ‘품격 있는 역사문화 도시’로 목표를 수정하기를 권하고 싶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8년 만에 재개된 숭례문 파수의식 재현

    8년 만에 재개된 숭례문 파수의식 재현

    2008년 화재로 중단된 숭례문 파수의식 재현 행사가 8년 만에 재개된 가운데 덕수궁 대한문에서 근무하는 수문군과 교대하는 의식이 23일 서울 숭례문광장에서 열리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서울포토] 숭례문 파수의식 재현행사 중 교대의식

    [서울포토] 숭례문 파수의식 재현행사 중 교대의식

    2008년 화재로 중단된 숭례문 파수의식 재현행사가 8년 만에 재개된 23일 서울 숭례문 광장 앞에서 개막을 알리는 교대의식이 열리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서울포토] 8년 만에 재개된 숭례문 파수의식 재현행사

    [서울포토] 8년 만에 재개된 숭례문 파수의식 재현행사

    2008년 화재로 중단된 숭례문 파수의식 재현행사가 8년 만에 재개된 23일 서울 숭례문 광장 앞에서 개막을 알리는 교대의식이 열리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서울포토] 숭례문 파수의식 재현행사 중 무술시범

    [서울포토] 숭례문 파수의식 재현행사 중 무술시범

    2008년 화재로 중단된 숭례문 파수의식 재현행사가 8년 만에 재개된 23일 서울 숭례문 광장 앞에서 개막을 알리는 무술시범이 열리고 있다. 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 [명인·명물을 찾아서] 움집에서 아파트로… 한반도 주거문화 변천사 한눈에

    [명인·명물을 찾아서] 움집에서 아파트로… 한반도 주거문화 변천사 한눈에

    집은 사람들의 삶이 이어지는 물리적 공간이고 정신적인 안식처다. 1만년 전, 긴 빙하기 추위가 끝나고 따듯한 기후로 급변하면서 그전까지 떠돌이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집을 짓고 정착 생활을 하게 됐다. 선사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거주하는 집은 어떻게 바뀌어 왔을까. 19일 경남 진주시에 따르면 경남혁신도시인 남가람신도시에 있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토지주택박물관’은 우리나라 주거문화와 건축기술 변천 과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토지·주택 전문 박물관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박물관이다. 한국토지공사와 한국주택공사는 LH로 통합되기 전 경기 성남시에 본사를 두고 있을 때부터 각각 토지박물관(1997년 7월 설립)과 주택도시박물관(2005년 12월 설립)을 운영했다. 두 기관이 2009년 통합되면서 자연스럽게 두 곳 박물관도 토지주택박물관으로 통합됐다. LH는 정부의 공공기관 지방 이전 정책에 따라 진주혁신도시 충의로19 일대에 새 사옥을 지으면서 사옥 안에 독립된 박물관 공간을 함께 설계해 건립했다. 박물관을 완공한 뒤 성남 토지주택박물관에 전시됐던 5만여점에 이르는 토지·주택 관련 각종 자료와 유물을 특수 운반 차량 30여대를 이용해 옮겨 왔다. 전시 전문 기관에 의뢰해 자료, 유물을 다양한 기법으로 새로 설치, 전시하고 전시물을 보완한 뒤 지난해 7월 1일 박물관을 개관했다. 성남시에 있었던 두 개의 박물관보다 규모가 크고 전시 내용도 다양해졌다. LH 사옥은 20층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 본관동을 가운데에 두고 동쪽에 ‘늘벗동’(의료·금융 시설)과 서북쪽 ‘나래동’(보육시설), 서남쪽 ‘공감동’(토지주택박물관동) 등 모두 4개 동의 건물이 부드러운 곡선 모양으로 이어져 하나의 건물을 이루고 있다. 부지 9만 7165㎡에 연면적 13만 5686㎡로 경남의 랜드마크 건물이다. LH 본사 정문에 들어서면 웅장하면서도 날렵하게 우뚝 솟아 있는 LH 사옥 건물 작품을 먼저 감상하게 된다. 박물관이 있는 공감동은 3층 규모다. 현관으로 들어가면 1층에 홍보관과 다목적 전시실 등이 있다. 토지주택박물관은 2층에 있다. 3층은 박물관 사무실로 쓴다. 2층 박물관 시설은 전체 면적이 2390㎡로 제1전시실(1106㎡)과 제2전시실(603㎡), 기획전시실(327㎡) 등 모두 3개 전시 공간으로 나뉜다. 1, 2전시실은 상설 전시실이다. 1층에 있는 다목적 전시실도 토지 및 주택 관련 기획전시를 하는 전시 공간이다. 제1전시실은 ‘삶의 공간’을 주제로 우리나라 주거시설과 주거 생활 문화를 살펴보고 이해할 수 있는 각종 희귀 자료와 시설이 설치, 전시돼 있다. 특히 청동기시대 움집과 고구려시대 부엌, 조선시대 양반집의 사랑채, 근대 신당동 문화주택, 우리나라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인 12평 크기의 마포아파트 등 시대를 대표하는 5채의 집을 실물 크기에 가깝게 당시 모습으로 재현해 놨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 주거 형태가 시대에 따라 어떤 모습이었고 어떻게 변해 왔는지 살펴볼 수 있다. 마포아파트 전시 공간에는 방 2개와 거실, 부엌, 베란다, 수세식 화장실 등 아파트 실내를 당시 구조 그대로 설치해 놨다. 아파트 안에 전시돼 있는 상자 모양의 흑백 TV를 비롯해 당시 전자제품과 생활용품 등의 소품도 눈길을 끈다. 마포아파트는 1962년 대한주택공사가 우리나라 주택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마포형무소 농장 부지를 구입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다. 오래된 건축 자재와 다양한 도구를 비롯해 삼국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의 갖가지 기와 종류, 조선시대 각종 토지대장, 토지 매매 기록, 토지등기문서 등도 1전시실에서 구경할 수 있다. 조선시대 울산에 살았던 심원권이 84살로 사망할 때까지 64년 동안 쓴 생활일기는 토지주택박물관에서만 구경할 수 있는 희귀 자료다. 제2전시실은 우리나라 토목·건축 기술의 흐름과 발전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터전의 기술’을 전시 주제로 삼았다. 흙, 돌, 나무, 철을 비롯한 건축 재료와 다양한 건축 공구를 비롯해 우리나라 전통 난방시설인 온돌의 구조와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온돌 시설 모형 등 흥미 있는 전시물이 많다. 귀로 듣고 직접 만져 볼 수 있는 체험시설도 있다. 소나무로 만든 공포(?包)도 눈에 띈다. 공포는 한국, 중국, 일본 등의 전통 목조건축에서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 데 짜 맞춰 댄 나무 부재다. 이 공포는 숭례문을 복원할 때 사용된 것과 같은 것으로 숭례문 복원에는 이 같은 공포 84개가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제3전시실은 토지주택박물관이 소장한 희귀한 유물과 자료 등을 기획전시를 통해 소개하는 공간이다. 현재 제3전시실에서는 ‘토지주택박물관의 진주(眞珠)’를 주제로, 구석기시대 돌 도구, 죽음 뒤의 집인 석관 등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주먹도끼인 연천 구미리 주먹도끼를 비롯해 구석기시대 돌 도구와 고려시대 사신도문의 석관 등을 전시해 놨다. 1층 다목적 전시실에서는 ‘터전의 여정 70년’이라는 주제로 광복 이후부터 최근까지 추진됐던 우리나라 민간주택 및 공공주택 건설 사업과 도시 개발 사업 등을 사진과 영상 등을 통해 소개하는 기획전시를 하고 있다. 주차 공간은 LH 사옥 앞 광장에 넉넉하게 조성돼 있다. 박물관은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연다. 관람은 무료다. 단체 관람 예약을 하면 해설사가 안내와 설명을 해 준다. 박물관 전시 안내 업무를 맡은 천윤진(25)씨는 “진주시민뿐 아니라 외지에서도 관람객들이 평일에는 100여명, 토요일에는 200명 넘게 꾸준히 찾아온다”고 말했다. 토지주택박물관은 지역 주민들을 위해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세계의 역사와 문화, 인문학 등을 배우는 박물관 대학을 상·하반기 두 차례 운영한다. 방학 기간에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체험 학습 프로그램인 어린이문화교실을 연다. 지역민들을 초대해 명사 초청 특강을 진행하고 지역 초등학교를 찾아가 전시하는 ‘찾아가는 박물관’도 운영한다. 글 사진 진주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서울역 길모퉁이서 바라본 ‘도시의 살풍경’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서울역 길모퉁이서 바라본 ‘도시의 살풍경’

    전쟁의 상처…서울의 관문…재건의 망치소리…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건축으로 평가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끝났다. 이미 그 전부터 폐허가 된 수도 서울로 사람들이 모여 들고 있었다. 개전 초기에 한 번 그리고 1·4 후퇴 때 한 번 수도를 빼앗긴 뒤 다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특히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막아 낸 1951년 이후 전선은 주로 최전방에서의 국지전 양상으로 형성되었고 후방은 비교적 빨리 일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원래 서울에 살았던 사람들, 이북에서 부산, 거제 등으로 피란왔다가 대한민국에서 정착할 곳을 구하던 사람들, 그리고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찾던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기차가 그들을 서울역에 토해 놓고 나면 아직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도시의 살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던 1950년대 후반, 드넓은 역전 광장의 북쪽 길모퉁이에 재건의 망치 소리와 함께 4층 건물 하나가 올라가고 있었다. 훗날 관문빌딩으로 불리게 될 그리고 어떤 자료에 의하면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건축으로도 평가될 건물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숭례문 앞 남지(南池)가 메꿔지지 않았다면 그 한구석에 모습이 살짝 비쳐졌을지도 모른다. ‘서울역 앞 상가주택’은 이렇게 전쟁의 폐허 속에서 태어났다. 개발시대의 기록문화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을 정도다. 도면을 구하는 것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다. 결국 직접 가서 부딪혀 봐야 한다. 건물 안에 식당이 있으면 뭐라도 시켜 먹으면서 슬슬 말을 붙여 본다. 부동산 사무소에 가서 양해를 구하고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 것도 도움이 많이 된다. 이 건물의 답사도 그런 과정을 거쳤다. 건물명이 관문빌딩이라는 것도 이렇게 알게 되었다. 다만 현지의 증언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은 금물이다. 객관적 사실과 대조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건물은 당혹스러운 경우였다. 왜냐하면 증언 중에 이 건물이 상가주택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 이 건물에서 사업을 한 지 30년이 넘었는데 주거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 만약 그랬으면 상층부에 화장실 같은 것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 이 건물은 일본인들이 지었다고 알고 있다. - 작년에 서울시에서 지주들을 모아 재건축을 결정해 조만간 새로 지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만 들으면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것 같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보면 그 내용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게다가 30년 전에 입주했다고 해도, 그 당시 이 건물은 이미 서른 살 가까운 나이였다. 그러니 지금의 입주자들이 이 건물의 옛날 모습을 정확히 알기란 어렵다. 결론적으로 이 건물이 상가주택으로 지어졌다는 객관적 증거는 많다. 게다가 그것은 아주 큰 계획의 일부였다. 대강의 경과는 이렇다. 전후 복구 과정에서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지시로 남대문 일대를 우선적으로 재건하게 되었다. 수도 서울의 관문이라는 이유였다.(관문빌딩이라는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지금이야 이 일대를 수도의 관문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없지만 철도 의존도가 높았던 시대였으니 이해가 된다.(한반도의 통일이나 이에 준하는 상황이 되면 다시 한 번 서울역과 함께 이 일대의 위상도 달라질 것이다.) 당시 각료들이 이에 대한 방안으로 제시한 것이 남대문 일대를 포함한 서울시내 13곳의 간선도로변에 소위 ‘상가주택’을 짓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그 현장을 돌아보는 사진이 전해지기도 한다. 총력을 다해 사업을 진행한 결과 1964년 서울에 93동의 신축 상가주택이 들어섰다. 아직도 남아 있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이 서울역 앞 상가주택, 일명 ‘남대문로 5가 역전 시범상가주택’인 것이다. #시대를 앞선 개념 특이하게도 ‘상가주택 건설요강’을 지킨다는 전제하에 이 방대한 프로젝트의 건축비에 대한 융자를 제공했다. 그 요강은 지금도 참고할 만하다. 기술적인 내용이 많으나 그중 특기할 것은 다음과 같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4층 건물. -1, 2층은 점포, 3, 4층은 주택. -벽체는 벽돌이나 콘크리트, 혹은 블록. -바닥과 지붕은 콘크리트, 혹은 PSC(pre-stressed concrete) 들보. -도로변은 타일 이상의 외장재, 다른 방향은 모르타르 뿜기. -3, 4층은 양면 캔틸레버, 즉 외팔보(한쪽에 기둥 없이 벽에서 튀어나온 보). -변소는 수세식. -옥상에 난간 설치. 주거와 일반 도시 기능을 한 건물에 수직적으로 갖춘다는 무지개떡 건축의 기본적인 조건 대부분이 이 안에 들어가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3, 4층의 양면 캔틸레버 규정이다. 1, 2층의 점포 위로 주택을 튀어나오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비나 눈이 올 때도 별다른 불편 없이 점포 앞을 걸어 다닐 수 있다. 저층부의 후퇴된 부분에 간판이 달릴 것이므로 간판으로 인해 건물 전면이 혼잡스럽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또한 점포의 소음이 주택으로 전달되는 것을 어느 정도 방지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기대할 만하다. 간단한 규정인 것 같지만 도시 건축의 여러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매우 좋은 방식이다. 싱가포르 구도심의 아케이드 지역이 바로 이런 원칙을 지키고 있다. 안타깝지만 건물 저층부의 이런 문제를 자발적으로 해결하는 경우는 요즘도 별로 없다. 심의에서 강제로 지적해야 마지못해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건물 입구에 차양 등이 덕지덕지 붙으면서 건물의 외관은 물론 전체 도시 경관을 망치는 일이 흔하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무려 50년도 넘은 이전에, 게다가 전쟁 복구 기간 중에, 이런 참신한 내용이 정부에 의해 공표되고 이에 따라 사업이 진행되었다니. 희열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무지개떡 건축의 기본 개념이 이렇게 구체적인 문자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희열이라면, 그 영향력이 도시 전체로 충분히 확산되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움이다. 기록 이야기는 이쯤 하고 현재의 모습을 좀더 충실히 들여다보기로 한다. 건물의 위치야 당시 그대로일 수밖에 없지만, 외관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건립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아니었으면 같은 건물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건물 양 끝부분에 원래의 외벽이 노출되어 있는데 자세히 보면 당초의 외벽 재료가 벽돌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가운데 부분이 알루미늄 복합 패널로 덮여 있을 뿐 아니라 대형 입간판이 들어서 완전히 원래 모습을 잃어버렸다. 계단실은 모두 여섯 개가 있다. 그중 지하로만 내려가는 것이 네 개, 2층으로 올라만 가는 것이 하나, 지하와 상층부를 모두 연결하는 것이 두 개다. 결국 3, 4층까지 연결되는 계단은 단 두 개다. 후면에 편복도가 있지 않고서는 주거가 한 층당 겨우 4채만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렇다면 전체 건물 규모로 보아 주거의 규모가 상당했을 것인데 그 사실 여부는 안타깝지만 원도면을 구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당시 사진을 자세히 보면 2, 3, 4층의 대형 유리창 뒤에 가벽 같은 것이 서 있는 게 보이는데 그 일부가 현재 상태에서도 발견된다. 남쪽에서 쏟아지는 햇살 혹은 거리의 소음을 막기 위한 조치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열이 되지 않는 창호 프레임에 복층이 아닌 단판 유리가 끼워져 있었을 것이므로 소음이나 냉난방 등에 있어서 당시의 거주 환경이 그리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햇살이 밝게 들어오는 커다란 창문 안의 실내 풍경은 상당히 근대적이지 않았을까. 현재 저층부에는 식당, 카페, 직업소개소, 마사지 업소 등이 있고 지하에는 맥줏집, 식당, 노래방 등이 있다. 특이한 것은 상층부인데 부동산, 문서감정원 등과 함께 고시원과 원룸텔 등이 있다. 사람이 잠을 자는 곳이라는 점에서 준주거시설이라고나 할 이 시설들이 원래 주거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건물 안에 들어가 보면 일단 계단실이 아주 좁다. 게다가 계단이 돌아가는 방향이 제각각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건물의 가운데 부분이 곡선이고 양쪽 부분은 직선인데 그 연결 부위에 계단실이 있기 때문에 묘하게 각을 이루는 공간들이 만들어진다. 건물은 4층인데 입구의 안내판을 보면 5층이 있다. 숨어 있는 층이 하나 더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건물에 4층이 없는 것과 같은 이유다. 즉 불길하다는 이유로 4층을 생략하고 5층으로 건너뛴 것이다. # 참신한 디자인 건립 당시의 사진은 지금 보아도 상당히 참신하다. 특히 2, 3, 4층의 창문을 서로 엇갈리게 배치한 것은 파격적인 디자인이다. 교통량이 많은 대로변 모서리의 건물이므로 역동적인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게 한다. 보다 전문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처럼 창이 엇갈리는 디자인은 이 외벽이 건물의 하중을 받는 내력벽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근대건축의 선구자인 르코르뷔지에가 말한 소위 ‘자유로운 입면’의 개념을 보여 주는 예다. 옥상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계단실과 연결된 옥탑이 있고 주변에 난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위에서 언급한 건설 요강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외관상 상가가 1층에만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은 요강과 다른 부분이다. 요강을 지키지 않은 또 다른 부분은 바로 주거 부분을 돌출시키라는, 즉 캔틸레버에 대한 규정이다. 1층과 나머지 층이 거의 같은 면으로 연속되어 있다 보니 햇살을 막고 비를 긋기 위해 1층 부분은 거의 예외 없이 차양이 설치되어 있다. 작은 디테일 하나가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오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1950년대 말이면 서울역 앞에 고층빌딩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탁 트인 풍경 너머로 저 멀리 관악산까지 시원하게 보였을 것이다. 남쪽을 향해 시원하게 뚫린 저 커다란 창문 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으며, 또 어떤 삶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을까. 주거로서의 만족도는 어떠했을 것이며 사람들은 이 건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당시의 실내 사진이나 기록을 언젠가 접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조만간 재건축된다는 것이 주민들의 증언이지만 이 귀중한 도시건축의 한 선례를 잘 복원하여 상가주택으로 다시 활용하면 어떨까 상상해 본다. (서울시립대 박철수 교수의 블로그인 ‘살구나무 아랫집’을 참조했습니다.)
  • 공급 과잉?… 비즈니스호텔 ‘명동 혈투’

    공급 과잉?… 비즈니스호텔 ‘명동 혈투’

    서울 시내 최대 관광지인 명동을 둘러싼 비즈니스 호텔들의 치열한 경쟁이 다시 시작됐다. 미국 메리어트 인터내셔널의 비즈니스 호텔 브랜드인 ‘코트야드 메리어트 서울 남대문’이 23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에서 개관했다. 코트야드 메리어트 서울 남대문은 KT&G가 소유하고 메리어트 인터내셔널이 위탁 운영을 맡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 호텔은 지하 4층, 지상 22층 규모로 모두 409개 객실을 갖췄다. 코트야드 메리어트 서울 남대문의 가장 큰 강점은 위치다. 숭례문 오거리에 위치해 다양한 대중교통의 접근이 쉽다. 또 호텔이 남대문시장, 명동, 덕수궁, 시청 등 주요 관광지에 있다. 코트야드 메리어트 서울 남대문의 개관으로 최근 1년 사이 명동 인근에 문을 연 비즈니스 호텔들의 셈법도 복잡해졌다. 지난해 3월 이비스 스타일 앰배서더 명동과 같은 해 5월 포포인츠 바이 쉐라톤 서울 남산이 문을 열었다. 이어 올해 1월 롯데시티호텔 명동, L7 호텔 명동, 골든튤립 엠 서울 호텔이 잇따라 개관했다. 또 다음달에는 하나투어가 운영하는 비즈니스 호텔인 티마크 그랜드 호텔이 충무로에서 영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과거 늘어나는 외국인 관광객에 비해 호텔이 부족하다는 분석도 있었지만 최근 명동을 중심으로 비즈니스 호텔 공급 과잉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라지브 메논 메리어트 인터내셔널 아시아태평양지역 최고운영책임자(COO)는 “한국 특히 서울이 여행지로서의 위상이 올라가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인 관광객이 연간 10~15%는 늘어날 것으로 보여 객실 점유율은 충분히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강력한 왕권의 상징 관음보살? 민초엔 혁명 지도자 미륵보살!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강력한 왕권의 상징 관음보살? 민초엔 혁명 지도자 미륵보살!

    논산(山)이라는 땅이름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논란도 없지 않다. 백제시대에도 충남 논산 일대는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라 불렀다. ‘삼국사기’에는 황산지원(黃山之原),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황산지야(黃山之野)라는 표현이 보인다. 곧 ‘황산벌’이다. 삼국통일전쟁의 마지막 격전지이자, 후삼국통일전쟁의 마지막 격전지다. 황산(黃山)이 노랗다는 뜻이 아니라 넓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해석이 가장 그럴듯하게 들린다. 놀뫼라는 순수한 우리말 땅이름을 한자식 표현으로 고치는 과정에서 ‘누를 황(黃)’을 훈차(訓借)한 결과 황산이 됐다는 것이다. 훈차란 한자의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이다. 같은 원리로 논산은 놀뫼를 음차(音借)해서 만들어진 지명이라는 주장이다. 음차는 한자의 음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이다. ●38년 걸쳐 만든 높이 18.2m 고려 석불 실제로 현지에서는 논산의 우리말 이름이 놀뫼라는 것을 거의 정설로 받아들인다. 놀뫼유치원에 놀뫼아파트, 놀뫼새마을금고, 놀뫼신문까지 폭넓게 쓰이고 있다. 놀뫼가 넓은 벌판을 뜻한다는 것은 논산에 가보면 깨닫게 된다. 그 넓은 벌판 여기저기에 백제장수 계백의 무덤과 백제군사박물관, 후백제왕 견훤의 무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기념으로 세운 개태사가 흩어져 있다. 관촉사는 이 황산벌이 내려다보이는 충남 논산시 은진면 반야산 중턱에 있다. 관촉사라면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는 돌부처로 더욱 유명한 절이다. 높이 18.2m의 고려시대 거대불상은 실제로는 관음보살이지만 오래전부터 미륵불로 굳게 믿어졌다. 지금도 석불을 배례하는 전각에는 ‘미륵전’이라는 현판이 내걸려 있으니 이 돌부처가 장차 세상을 구원할 미륵이라는 확신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륵·관음 논쟁… 도상적으론 관음 특징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유산이라면 글자 그대로 문화적 유산이다. 하지만 그것이 꼭 문화적인 이유로 이뤄졌는지는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대표적인 조선시대 문화유산인 경복궁과 숭례문 같은 궁궐과 한양성곽의 각종 구조물은 문화적 이유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은진미륵 또한 종교적 이유에서만 조성된 것은 아니다. 고려 같은 불교국가에서 대형 불사(佛事)는 너무나도 당연히 뚜렷한 목적이 있는 정치 행위였다. 은진미륵은 그동안 불상의 존명(尊名)을 둘러싼 논란이 적지 않았다. 미륵보살이냐, 관음보살이냐 하는 논쟁이었다. 그런데 은진미륵은 미술사학자들이 잘 쓰는 표현대로 관음보살의 도상적 특징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갖추고 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이마에 아미타불의 모습인 화불(化佛)이 새겨졌고, 손에는 연꽃가지를 들고 있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둘 다 관음보살을 나타내는 대표적 특징이다. 그럼에도 미륵이라는 전칭(傳稱)에도 적지 않게 미련을 두었다. 하기는 기도하는 민초들에게 미륵부처와 관음보살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원을 이루어 주는 존재라면 어떤 부처님이든 무슨 상관인가. ●후백제민 회유·경고… 민초는 변혁 기원 은진미륵은 고려 광종 19년(968) 조성을 시작해 목종 9년(1006) 완성했다. 광종은 잘 알려진 대로 과거제를 도입해 지방호족의 자제가 칼 대신 붓을 잡게 만든 인물이다. 중앙집권국가의 체제를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후백제와의 마지막 결전지에 거대 석불을 조성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과거 적국 및 변방의 주민들에게 위세를 보여 주면서 관음보살의 권능처럼 현세의 고통을 덜어 주겠다는 일종의 정치적 약속을 담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듯 강력한 왕조에 ‘딴마음’을 먹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도 담겨 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당대는 물론 이후에도 줄곧 미륵으로 믿어진 것은 고려왕조의 정치적 회유가 먹혀들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권력은 지역민에게 고통을 견디며 순응하라는 상징성을 담아 관음을 조성했지만, 역설적으로 민초는 그 관음조차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 줄 혁명의 지도자로 믿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은진미륵이라고 부른 것은 무지에 따른 오류가 아니라 관음도 미륵으로 믿으며 의지하고 싶은 민초의 적극적 해석에 따른 의도적 오류로 보고 싶다. 글 사진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돈 없어도 차 없어도 OK 서울 명소를 소개합니다

    돈 없어도 차 없어도 OK 서울 명소를 소개합니다

    맞벌이 박모씨 부부는 어린이날 아이와 놀아 주느라 체력도 지갑도 ‘탈탈’ 털렸다. 하지만 날도 따뜻한 5월에 아이들은 “오늘은 어디가?”라며 박씨를 조른다. 박씨 부부는 “교외로 차를 몰고 나가기는 너무 힘들고 그렇다고 가족의 달인 5월에 텔레비전만 보기엔 아이들에게 미안하다”고 고민을 털어놨다. 돈 없어도, 차 없어도 갈 수 있는 서울의 동네 명소를 찾아봤다. ■전철옆 생태숲 도시락 들고 안산 자락길… 아차산 나무·꽃향기 절정 자녀와 자연의 기운을 느끼고 싶은데, 정색하고 텐트를 들고 캠핑을 가기 어렵다면 동네 주변 공원을 가 보자. 준비물은 돗자리 하나면 충분하다. 서울 서북권에 사는 주민이라면 서대문구 안산 자락길로 가 보자. 무장애 길이 설치돼 유아와 임신부 등 보행 약자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자락길을 한 바퀴 도는 데는 대략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길을 걷다 보면 메타세쿼이아, 아까시나무, 잣나무, 가문비나무 등도 만날 수 있다. 또 인왕산과 북한산 등 서울의 명산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중간중간 돗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먹을 수 있는 곳도 있어 더 좋다. 가는 길은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로 나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바로 위 골목으로 올라가면 된다. 금천구 ‘베짱이 유아숲 체험장’도 좋은 선택이다. 독산동 산 199-1에 1만 2000㎡ 규모의 유아 숲 체험장에는 숲속놀이터와 나무 오르기, 모험놀이대, 세족장, 모래놀이터, 숲속야외교실, 생태연못 등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놀 수 있는 시설이 완비돼 있다. 특히 원두막은 도시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 체험장 바로 옆엔 감로천생태공원이 있어 다양한 나무와 꽃, 풀, 곤충 등을 관찰할 수 있다. 1호선 독산역 1번 출구에서 8번 마을버스를 타고 독산도서관에서 내리면 된다. 광진구 아차산 생태공원은 역사와 자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동상 앞에서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면 ‘엄지 척’을 받을 수도 있다. 생태공원에는 산초나무 등 나무 40여 종 4000여 그루와 70여종 5만여 포기의 꽃과 풀이 심어져 향기를 내뿜는다. 내친김에 아차산 중턱까지 오르면 ‘고구려정’을 만날 수 있다. 금강송을 사용해 전통방식으로 지은 고구려정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구려와 신라, 백제가 이곳을 두고 벌인 전쟁 이야기를 해주면 아이들이 부모를 존경하는 시선으로 다시 볼 것이다. 5호선 아차산역 2번 출구로 나와 영화사 길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 양천구 서서울호수공원도 재밌는 장소다. 특히 이곳을 걷다 보면 항공기 소리에 따라 분수가 뿜어져 나오는 색다른 장면도 만날 수 있다. 아이들은 하늘로 비행기가 지나가는지 유심히 살핀다. 공원 안의 몬드리안 정원으로 발길을 돌리면 추상화가 몬드리안의 기법을 바탕으로 만든 계단과 난간, 정수시설 등을 만날 수 있다. 5호선 화곡역 7번 출구로 나와 652번, 6627번 버스를 타면 공원 앞에 내려준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표없이 명공연 어린이 모터쇼 상상력 자극… 어르신 위한 산사 음악회도 ‘가족의 달’ 덕분에 각종 문화공연과 전시·행사가 매달 줄을 잇는다. 하지만 막상 가려면 비싼 돈만 들이고, 아이도 어른도 모두 만족하지 못하면 어쩌나 고민된다. 이럴 때 챙기면 좋은 곳이 서울시청이나 각 구청에서 운영하는 공연장이다. 강동구 상일동 강동아트센터에선 체험형 전래동화 뮤지컬 ‘뚝딱하니 어흥!’이 무대에 오른다. 전래동화 ‘호랑이와 곶감’, ‘해와 달이 된 오누이’ 등을 마당극 형식으로 엮었다. 오는 27일까지 소극장 ‘드림’에서 한다. 어린이들은 직접 도깨비 방망이를 만들어 도깨비 대장 ‘뚝딱하니’와 주문을 외우며 신나는 모험을 떠나게 된다. 입장 순서대로 착석하니 일찍 가야 앞자리에 앉을 수 있다. 어린이를 위한 모터쇼도 눈길을 끈다. 이달 내내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서울 중구 을지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4층 디자인놀이터에선 무료로 ‘키즈 모터쇼’를 연다. ‘꽃향기가 나는 차’, ‘눈이 내리는 차’ 등 공모를 통해 아이들의 상상력이 듬뿍 묻어 있는 자동차를 만들어 체험할 수 있게 만들었다. 월요일은 휴관. 부모님을 모시고 갈 고즈넉한 공간을 찾는다면 서울 종로구 부암동 ‘무계원’도 생각해 보자. 전통문화공간 무계원에서는 오는 22일까지 ‘한국의 미(美), 한국의 탈’을 주제로 기획전시를 개최한다. 가산오광대, 하회별신굿 탈놀이 등 전국의 탈춤에 쓰인 전통탈들을 한자리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여기서 ‘팁’ 하나. 무계원은 종로구 익선동에 있던 서울시 등록음식점 1호인 오진암의 건물 자재를 사용해 지어졌다. 오진암은 1970~80년대 한국 요정 정치의 중심이었다. 1972년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박성철 제2부수상이 만나 7·4 남북공동성명을 논의해서 더 유명하지만 ‘기생관광’의 메카라는 오명도 가지고 있던 곳이다. 서울 구로구 궁동 원각사에서는 오는 10일 오후 6시 30분부터 ‘산사 음악회’가 열린다. 음악회는 아름다운 자연과 어울리는 국악과 성악, 대중가요 등으로 구성됐다. 국악인 김영임과 성악가 하만택, 가수 남진·김혜연, 걸그룹 바바 등을 초대해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 계획이다. 강남권이라면 ‘찾아가는 거리음악회’에서 신나게 놀아 보자. ‘제2회 서리풀 페스티벌’의 사전 행사인 거리음악회는 강남역을 비롯한 야외광장 등에서 다음달 말까지 팝페라, 어쿠스틱 밴드 등 다양한 팀의 공연으로 진행된다.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城따라 역사길 한양·몽촌토성 무료 해설… 29일까지 방정환 특별전 서울은 세련된 고층 빌딩이 가득한 ‘메가시티’지만 1392년 조선 건국 이후 600년 넘게 우리의 수도 역할을 해 온 역사 도시이기도 하다. 덕분에 지역마다 역사적 볼거리가 가득하다. 지갑이 홀쭉해도 별 걱정 없이 아이들과 한나절 역사여행 하며 웃고 떠들 수 있는 코스가 널려 있다. 날이 화창하다면 야외를 걷는 역사 탐방을 떠나 보자. 북악산부터 낙산, 남산, 인왕산 등 서울 도심부를 감싼 한양도성(18.6㎞)을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옛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도심 속 녹음과 역사를 한번에 즐길 수 있다. 도성길 주변으로는 숭례문, 흥인지문, 경교장 등 주요 문화재가 많다. 특히 매주 일요일 오후 열리는 ‘스탬프 투어’에 참여하면 전문 해설사에게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데 이 프로그램에 4주간 ‘개근’하면 한양도성 18.6㎞를 완주하고 ‘완주 배지’도 받게 된다. 한강 남쪽에 산다면 가까운 토성산성어울길을 권할 만하다. 이 길은 몽촌토성역부터 올림픽공원, 성내천, 마천전통시장을 거쳐 남한산을 오르는 19.6㎞ 코스다. 2000여년 전 한성(서울)을 도읍 삼았던 백제가 흙으로 쌓은 몽촌토성은 돌로 지은 한양도성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토성산성어울길에 있는 한성백제박물관과 몽촌역사관은 아이들이 삼국시대 역사를 배워 볼 수 있는 여러 유적을 보유했다. 역사적 상흔이 있는 시설을 둘러보는 도심 속 ‘다크투어’도 아이들에게 생각거리를 던져 준다. 김구, 유관순 등 많은 독립운동가가 옥고를 치른 서대문형무소는 역사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또,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들에게 악명 높은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은 경찰인권센터로 바뀌었다. 고 김근태 전 국회의원과 서울대생이었던 고 박종철군 등이 고문을 당한 곳이다. 인권센터에는 경찰이 박군을 물고문했던 욕조 등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궂은 날씨에는 실내 박물관을 찾아보는 것도 좋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오는 29일까지 ‘방정환과 어린이날을 만나는 특별전시회’가 열린다. 전시회에서는 방정환 선생이 쓴 창작동화는 물론 시대별 어린이날 행사 사진, 포스터 등이 선보이고 있다. 아이들이 방 선생이 즐겨 썼던 중절모를 쓰고 다양한 배경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코너도 마련됐다.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과 한글박물관 등도 모두 무료로 전시를 관람할 수 있어 부담 없이 둘러볼 수 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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