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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리 소나무에서 자연의 생명력 느껴보세요”

    “구리 소나무에서 자연의 생명력 느껴보세요”

    동 파이프를 조각조각 잘라 일일이 나무망치로 두드려 소나무 껍질의 느낌을 낸 다음 용접해서 이어 붙인다. 일부러 비를 맞혀 부식시킨 구리로 만든 구불구불한 소나무는 갈색이나 녹색의 녹이 자연스럽게 슨다. 시멘트로 덮인 도시의 삭막한 광장에 등장한 기이한 소나무 형상의 거대한 조각은 자연의 숨소리를 들려준다. ●동 파이프 조각 이어붙여 나무 형상화 구리로 만든 소나무를 통해 자연의 무한한 생명력을 표현하는 조각가 이길래(49)씨를 1일 ‘나무, 형상을 구축하다’ 전시가 열리는 서울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서 만났다. 이씨는 20여년간 절단한 동 파이프 조각 수천, 수만개로 나무의 생명력을 표현해 온 중견 조각가다. 다음달 10일까지 열리는 조각전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야외광장에서 동시에 열린다. 그는 “요즘 작품 재료인 원자재 값이 많이 올라 고민이다. 세계 원자재 가격 동향을 주시하고 있다.”며 껄껄 웃었다. 특히 이번에는 토양과 햇빛 등 자연환경에 따라 구불구불하게 몸을 휘며 자란 한국의 늙은 소나무를 형상화한 조각에 처음으로 초록색 잎사귀를 붙였다. 물론 구리선을 잘라 약품 처리를 통해 초록색으로 부식시킨 것이다.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아닌 오랜 시간 노동력의 집약인 그의 나무 조각의 출발은 섬세하고 꼼꼼한 드로잉에 있다. 못을 갈아 잉크에 찍어 그리는 드로잉은 사비나미술관에 21점이 설치되어 있다. 설계도 수준의 치밀함과 신중함을 보여준다. 경춘가도를 달리다 보면 경기 가평군에 10m 높이의 구리 나무 5점을 만날 수 있는데 이씨의 조각 작품이다. 서울 갈월동 한진중공업 건물 앞에도 그의 작품이 있어 도심 속에서 자연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작은 부분의 반복에서 생명은 시작” 이씨는 “금속 가운데 구리는 보존성이 높고 회화적 느낌이 많이 날 뿐 아니라 색을 내기도 좋아 소나무 껍질을 표현하기에 수월하다.”며 “수만개의 구리 파이프 조각을 일일이 용접해 소나무를 만드는 것은 모든 생명의 시작이 세포나 나뭇잎 등 작은 부분의 반복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침묵의 발레·알몸 공연…놓치지 마세요”

    “침묵의 발레·알몸 공연…놓치지 마세요”

    1982년 시작됐으니 벌써 29년째다.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 무용제로 자리매김했다. 바로 국제현대무용제 (MODAFE)다. 올해 축제가 25일부터 새달 8일까지 보름간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과 대학로예술극장에서 펼쳐진다. 한국의 현대무용은 물론 세계 무용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다. 해외 7개 팀과 국내 14개 팀이 참여해 실력을 겨룬다. MODAFE 2010에서 ‘놓치면 후회할’ 세 작품을 추려 봤다. ●시선1 : 에마뉘엘 가트 댄스 ‘침묵’ 무대도 없다. 배경음악도 없다. 무용수들이 움직이면 발과 바닥이 부딪치는 소리가 그대로 음악이 된다. 박동, 열정, 에너지, 숨소리로 표현되는 무용수들의 몸짓은 정적 속에서 음표를 하나씩 창조해 간다.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안무가 에마뉘엘 가트의 작품 ‘사일런트 발레’다. ‘MODAFE 2010’ 개막작이기도 하다. 가트는 독특한 감각으로 끊임 없이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가 창단한 무용팀 ‘에마뉘엘 가트 댄스’는 세계 유명 무용 축제의 ‘단골 손님’이다. 또 다른 개막작 ‘윈터 베리에이션스’에서는 가트가 직접 출연해 기량을 뽐낼 예정이다. ●시선2 : 리퀴드 로포트 ‘혁신’ 오스트리아 안무가 크리스 하링은 미리 규정된 이미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즉흥적이다. 그의 무용단 ‘리퀴드 로포트’가 선보이는 ‘러닝(running) 스시’ 역시 마찬가지다. 규정된 순서대로 진행하지 않는다. 관객들에게 12가지 순서를 직접 선택하게 해 공연을 할 때마다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마치 초밥(스시) 식당에서 손님들이 접시를 고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러닝 스시’다. 배우들이 알몸으로 스시 이미지를 표현한다. 이같은 안무 스타일은 현대 무용보다 미래 무용에 가까워 보인다. 이미 2003년 MODAFE에서 국내 공연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하링은 지난해 무용제 때는 움직임이 아닌 멈춤의 미학으로 무용계의 주목을 다시 한번 받았다. ●시선3 : 스파크 플레이스 ‘패기’ ‘스파크 플레이스’는 MODAFE 주최 측인 한국현대무용협회가 차세대 안무가를 육성하기 위해 해마다 펼치는 프로젝트다. 공개 오디션을 통해 최종 선발된 6개팀이 무용제 기간 동안 공연을 하면 심사를 통해 최우수 작품을 선발한다. 최우수 작품 안무가에게는 무용협회가 주는 신인상과 이듬해 MODAFE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올해는 새달 5일 곽영은의 ‘달팽이 뿔’, 하영미의 ‘기발한 인연’, 이주형의 ‘소년의 거짓말’이, 7일에는 이지희의 ‘다크 퓨리티’, 최진주·이현범의 ‘포즈필로’, 차종현의 ‘이프 아이 쿠드’가 무대에 오른다. 패기 넘치는 신인들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자리다. 세부 일정은 홈페이지(www.modafe.org)에서 확인 가능하다. 2만~3만원. (02)744-1367.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펜 터치로 등반 의미 그려

    요즘은 등산도 생중계하는 시대다. 얼마전 오은선 대장이 안나푸르나에 오르던 때가 그랬다. 세계 여성 산악인 가운데 처음으로 히말라야 14좌 완등 과정이 머나먼 한국까지 실시간으로 전달됐다. 오 대장과, 정상까지 그를 따라갔던 정하영 KBS 촬영감독이 흘린 땀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호들갑스러운 중계가 마음에 걸렸다. 하늘에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경외심을 갖고 엄숙해야 한다고 하면 고리타분한 생각일까. 그래서인지 분명히 생중계였지만, 안나푸르나는 그저 TV 속에 머무르는 것 같았다. 왜 산에 오르는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영국의 산악인 조지 맬러리가 말한 것처럼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산에 오르는 의미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산악 만화 ‘신들의 봉우리’(홍구희 옮김, 애니북스 펴냄)가 전5권으로 완간됐다. ‘음양사’ 시리즈로 유명한 일본 소설가 유메마쿠라 바쿠가 1997년 원작을 썼고,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가 2000~2003년 그림으로 옮겨 연재했다. 2001년 일본 문화청 미디어예술제 만화부문 최우수상과 2005년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 최우수작화상을 받았다. ‘신들의 봉우리’는 1924년 에베레스트 정상 근처에서 실종된 뒤 1999년 정상 아래 200m 지점에서 시신이 발견된 맬러리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그가 뉴질랜드의 에드문드 힐러리보다 29년 먼저 사상 처음으로 정상을 밟았는지 여부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비밀을 풀어줄 열쇠는 맬러리가 갖고 갔던 코닥 카메라. 오랜 세월이 흘러 네팔 카트만두에 나타난 이 카메라를 통해 산사나이 두 명의 운명이 뜨겁게 얽힌다. 산을 오르는 ‘한 마리의 짐승’ 하부 조지와 그를 쫓는 사진작가 후카마치 마코토다. 만화는 미스터리를 다루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두 사내의 에베레스트 남서벽 무산소 등정 도전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거친 숨소리와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책에서 튀어나온다. 8000m급 명산들의 웅장함과 고도감이 세밀한 펜터치로 되살아난다. 전문 산악인들도 감탄할 정도로 등반 과정의 긴박감과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에서의 인간 심리, 자연의 위대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정상에 선 후카마치가 독백을 쏟아낸다. ‘무엇인가 몸속에서 기어 올라온다./중략/굵직한 무언가가 등을 빠져나가 머리 끝으로 내달렸다. 나는 지구를 밟았다…왜 산에 오르는가? 그런 물음도, 그에 대한 답도 티끌처럼 사라지고 창공으로 몸과 의식이 치닫는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열린세상]허트 로커, 미국의 우울한 자화상 /이종수 한양대 신문방송학 교수

    [열린세상]허트 로커, 미국의 우울한 자화상 /이종수 한양대 신문방송학 교수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최고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아바타’를 누르고 압승한 것은 저예산 독립영화 ‘허트 로커’(Hurt Locker)였다. 특히 이 영화를 만든 58세 미모의 캐서린 비글로 감독이 ‘아바타’의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전 부인이어서 더 큰 관심이 쏠렸다. 최근 ‘허트 로커’가 한국에서 개봉됐다. 관심에 비해 흥행성적은 그리 좋지 않다. 최고의 영화라는 의견과 무겁고 재미없는 영화라는 평이 팽팽히 엇갈리고 있다. “전쟁은 마약이다.”라는 전 뉴욕타임스 종군기자 크리스 헤지의 책에서 따온 문구로 영화는 시작된다. 이라크 바그다드의 미군 폭발물 처리반(EOD) 소속 제임스 중사, 샌본 하사, 엘드리지 상병이 주인공이다. 극도의 긴장감을 즐기듯 폭탄을 해체하는 제레미 레너(제임스 중사 역)의 연기는 단연 압권이다. 시종일관 흔들리는 화면은 관객들을 이라크 전쟁의 공포스러운 현장에 깊숙이 몰아넣는다. 제임스가 폭발물로 다가가는 순간, 그 거친 숨소리는 마치 관객이 깊은 물 속에서 자신의 숨소리를 듣는 것처럼 생생하다. 영화는 온몸을 파고드는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감탄스러울 만큼 영상과 음향 모두 치밀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플래툰’ 같은 대형 전투신도, 멋진 전쟁영웅도, 시원스러운 카타르시스도 없다. 특히 관객의 기대를 결정적으로 배반하는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지옥같이 고통스러웠던 전쟁터(‘허트 로커’는 이런 장소 혹은 ‘심각한 부상’을 의미하는 미군들의 은어라고 한다)에서 미국의 일상으로 돌아온 제임스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 이라크의 공포스럽고 거친 전쟁터보다, 수십 가지 시리얼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는 대형 슈퍼마켓이 그에게는 더 무섭다. 장난감을 보면서 좋아하는 어린 아들에게 제임스는 말한다. “세상에 좋은 것이 많은 시절도 있단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가면서 점점 좋은 것이 하나 둘 줄어들지. 그리고 마지막에 좋은 것은 딱 하나 남게 되지.” 제임스가 좋아하는 그 단 하나는 폭발물을 해체하는 순간의 전율이다. 이라크 전쟁터로 다시 돌아가는 제임스의 얼굴에 옅은 안도감이 비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상하고 애매한 엔딩이다. 전쟁의 심각한 상처는 한 인간을 더 이상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명분도 이유도 뚜렷하지 않은 전쟁이 인간을 광기로 몰고 간다는 반전 메시지인가. 전쟁의 고통도, 두려움조차도 한 번 중독되면 빠져나올 수 없는 강렬한 마약과 같다는 말인가. 아무튼 우울한 결말이다. 왜 아카데미는 이라크전이라는 인기 없는 소재에 다소 음울한 분위기의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일까. 해답은 바로 영화가 끝나고도 영 뇌리를 떠나지 않는 주인공들의 생생한 고통과 두려움이다. ‘허트 로커’는 단순한 전쟁 액션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예리하고 깊은 ‘인간’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앞에서,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조차 바로 그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가야 하는 인간의 내면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밀도 있는 영화적 기제를 통해 관객들에게 강렬하게 전달한다. 이 영화는 전쟁액션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상처 받은 인간들의 초정밀 초상화에는 이라크전에 대한 미국인의 불안감이 짙게 녹아 있다. 전쟁이 어느 누구의 명백한 잘못이라고 소리 높여 이야기하지 않는다. 피 튀기는 전쟁터를 하나의 비디오 게임처럼 바라보는 우리는 일상 자체가 전쟁만큼이나 끔찍한 것이라고 나직이 말해줄 뿐이다. 2008년 아카데미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작품상을 수여했다. 미국의 우울하고 불안한 자의식을 드러낸 영화였다. 2010년에는 화려한 블록버스터 대신 전쟁의 어두운 현실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잘 그려낸 ‘허트 로커’를 선택했다. 아카데미의 균형 감각과 안목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 타블로 “세상에서 아기 숨소리가 제일 예뻐”

    타블로 “세상에서 아기 숨소리가 제일 예뻐”

    아빠가 된 에픽하이의 타블로가 아이에 대한 사랑을 드러냈다. 타블로는 3일 오전 자신의 트위터에 “아기 숨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부모가 된 행복한 마음을 표현했다. 앞서 타블로는 지난 2일 배우 강혜정과의 사이에서 건강한 딸을 낳았다. 타블로는 당시에도 자신의 트위터에 “신비로운 기적의 날. 오늘 오전 11시 5분 예쁜 딸아이가 태어났다. 혜정이와 우리 아기 모두 건강하다.”고 행복한 소식을 알렸다. 이어 타블로는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난다.”며 “그동안 고생이 너무 컸던 내 여자 세상 최고다.”고 들뜬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사진 = YG엔터테인먼트 서울신문NTN 정병근 기자 oodless@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길섶에서] 생채기/김성호 논설위원

    후유증이 크다. 몸 곳곳에 난 생채기들. 넘어져 쓸린 자국이 분명한데. 어디서 어떻게 받은 훈장(?)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고. 아무튼 술자리의 여파가 크다. 식구들의 눈총과 지청구야 받아 싼 것이지. 제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한 과보이니. 그래도 원인 모를 훈장은 야속하다. 오랜만에 걸어보는 석촌호수길. 호수를 휘돌아 흐르는 꽃바람이 좋다. 샛노란 개나리며 순백의 목련은 흐드러지고, 연분홍 진달래는 아직 수줍은 듯 조심스럽다. 꽃들도 서열이 있을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얼굴을 내미는, 섭리에 순응하는 모습이 오묘하다. 생채기의 통증도 농염한 화신(花信)엔 감쪽같이 묻히니 신기하다. 일렁이는 꽃 물결의 한편에 초라하게 선 작은 나무. 꽃조차 피우질 못한 채 배리배리 고사 직전이다. 여기저기 난 생채기며 부러진 가지들. 얼핏 봐도 심한 훼손이 역력하다. 흐드러지는 봄꽃들의 경연에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소외된 모습이 안쓰럽다. 잠시 잊었던 생채기의 통증이 살아난다. 생채기 난 숱한 마음들이야 오죽할까.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천안함 침몰 이후]“곳곳서 한숨·탄식소리” “이제 대화마저 끊겼다”

    4일 이른 아침부터 경기 평택 해군 2함대 예비군 훈련장 실종자 가족 숙소에는 침울함과 비통한 분위기가 무겁게 감돌았다. 실종자 수색 및 구조작업 중단을 공식적으로 요청한 뒤라 희망을 얘기하는 가족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웠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가족들에게 이번 결정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무엇에 기대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을 힘조차 없었다.”고 토로했다. 숙소 복도에서는 울다 지쳐 힘이 빠진 실종자 어머니들이 다른 가족들의 부축에 의지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숙소 한쪽에 마련된 이동진료소에는 몸과 마음이 지친 가족들이 진료를 받고 있었다. 일부는 몸을 옮기기조차 힘들어 의료진이 직접 가족들의 방을 찾았다. 숙소 곳곳에서는 실종자 가족들이 링거 바늘을 팔뚝에 꽂은 채 허망한 표정으로 천장만 응시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이날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남기훈 상사가 백령도에 정박 중인 독도함에서 헬기로 2함대 임시 안치소로 운구되는 과정을 TV로 지켜봤다. 상당수 가족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인의 영면을 빌었다. 곳곳에서 한숨소리와 탄식이 끊이지 않았다. 울음과 위로의 말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혹시 다른 실종자가 발견될까 하는 기대에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가족들도 많았다. 심영빈 하사의 동생 영수(25)씨는 “모두들 (남 상사의 사망 소식을) 자기 일처럼 힘들어한다.”며 “어머니가 식사도 제대로 못 하셔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고 슬퍼했다. 주말을 맞아 많은 친지들이 실종자 가족을 찾았지만 무거운 공기가 흘러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박경수 중사의 사촌형 경식(36)씨는 “구조작업이 한창일 때는 가족들이 TV를 보며 가끔 대화라도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 끊겼다.”면서 “인양작업에 시간이 걸린다니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며 숙소 분위기를 전했다. 가족 숙소를 찾은 친지들은 부대 내 성당과 교회, 절을 찾아 실종자 추가 발견과 극적 생환을 기대했다. 한편 남 상사가 살았던 평택 해군 아파트는 하루 종일 슬픔에 잠겼다. 이 아파트에는 실종 승조원 6명이 살고 있다. 이곳에 사는 이모(30·여)씨는 “이런 비극이 생기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는데 안타깝다. 너무나 슬프다.”고 안타까워했다. 백민경 김양진기자 ky0295@seoul.co.kr
  • ‘야구장의 꽃’ 치어리더들 “몸매 관리 따로 안해요”

    ‘야구장의 꽃’ 치어리더들 “몸매 관리 따로 안해요”

    야구의 계절이 돌아왔다. 27일 오후 열린 개막전으로 7개월간의 대장정이 시작됐다. 이 계절에 맞춰 ‘꽃’들도 만개할 준비를 마쳤다. 프로야구 정규리그 개막 직전에 찾은 LG트윈스 치어리더들의 연습실에는 음악이 끊이지 않았다. 지하 연습실에서 울리는 음악과 구령 소리는 방음시설을 뚫고 밖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 ‘야구장의 꽃’, 몸매 관리는 저절로 ‘야구장의 꽃’으로 불리는 치어리더지만 경쾌한 음악 사이로 가뿐 숨소리가 삐져나오는 연습실에선 화려함보다 뜨거움이 먼저 느껴진다. 화려한 단상 위 모습은 쉼 없는 연습의 결과다. 출정식과 시즌 응원 준비 때문에 치어리더들은 3월 내내 하루도 쉬지 못했다. 매일 이어지는 격렬한 연습에 지칠 법도 하지만 이들은 그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다. “따로 운동을 하지 않아도 몸매가 자연스레 만들어진다.”며 웃기까지 한다. 연습실을 찾은 날엔 소녀시대의 ‘쇼쇼쇼’ 안무 연습이 한창이었다. 소녀시대의 안무와 동작은 거의 같지만 경기장에서 잘 보이도록 동작을 더 크고 격렬하게 표현했다. 같은 곡이 계속해서 나오는 동안 한 박자 한 박자 동작을 확인하며 수정과 반복이 이어졌다. 연습을 이끄는 노희숙(27) 치어리더는 “7년 동안 했지만 편한 마음으로 단상에 올라간 적은 없어요. 당연히 떨리죠.”라고 말했다. 경기에 나서기까지 고된 연습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 “팀 성적 안 좋으면 더 활기차게” 노희숙 치어리더는 그들의 역할을 “팬들을 신나게 만들고, 그로써 더 큰 응원소리를 이끌어 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선수들에게 상대팀보다 더 큰 응원 소리를 들려주려는 ‘응원전’의 선봉 격이다. 팬들과 선수들의 기(氣)를 살리는 치어리더들은 분위기에 민감하다. 팀 성적이 안 좋을 때나 늦은 시간까지 경기가 계속되는 날은 오히려 더 활기찬 모습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LG트윈스 성적이 좋지 못했기에 올해 치어리더들의 각오도 남다르다. “올해 감독님도 새로 오셨고 선수 구성도 달라졌잖아요. 기대가 큰 만큼 더 잘해야죠.”라고 입을 모은 ‘꽃’들은 짧은 휴식을 마치자마자 다시 거울 앞에서 뛰며 땀을 흘렸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박성조기자 voicechord@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어린이 도서관서 어른도 놀 수 있네

    무서운 높이로 꽂혀 있는 책들, 딱딱한 책상과 의자, 숨소리도 조심스러운 엄숙한 분위기…. ‘도서관’하면 떠오르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공식에서 벗어난 도서관이 있다. 온돌방에 뒹굴면서 책을 보고 배고프면 간식을 먹기도 하며 심지어 큰 웃음소리도 들리고 격렬한 토론까지 벌어진다. 바로 어린이도서관이다. 전국에는 이런 도서관이 500개 넘게 있다. 신간 ‘우리동네 어린이도서관 101% 활용법’(김명하 지음, 봄날 펴냄)은 우리 가까이 있는 어린이도서관을 제대로 즐기는 법을 전수하는 ‘도서관 사용설명서’다. 전국에 있는 어린이도서관을 직접 찾아 어린이, 부모, 도서관장, 사서 등의 반응까지 담았다. 책은 어린이도서관이 ‘규칙이 없는 도서관’이라고 소개한다. 이곳은 “떠들지 마라.”, “자리에 앉아라.”처럼 ‘~해라 ~마라’는 잔소리가 없는 곳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열려있으며, 심지어 걸음마를 떼지 못한 아기들도 엉금엉금 책 위를 기어다니는 자유로운 공간이다. 이곳의 차별성은 자유로운 분위기가 전부는 아니다. 이곳은 어린이와 부모 등 사용자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공간이다. 자원봉사로 어린이들도 사서가 될 수 있고, 부모들도 직접 문화행사를 꾸려 나갈 수 있다.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또래 관계나 육아 커뮤니티 등은 덤이다. 이런 분위기와 함께 책은 ‘도서 대여’ 이상의 도서관 활용법들도 전한다. 도서관은 영화 상영, 연극 공연으로 지역민의 문화 감수성도 채워주며, 각종 강연으로 부모들에게 교육 기회도 준다. 어린이들은 독서 외에도 체험교실, 역사 기행 등 각종 견학 프로그램에 참가할 수도 있다. 서울대 영재교육연구원 등 교육 관련 분야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글쓴이는 “수많은 사교육 속에서 오늘의 어린이들은 어린 시절 추억과 함께 자기주도성을 잃고 있다.”면서 “도서관은 자기주도성을 만드는 자발적 배움, 관계의 배움, 지속 가능한 배움이 이루어지게 하는 공간”이라고 했다. 책은 여성포털 ‘마이클럽’(www.miclub.com)이 부모교육서 두 번째 시리즈로 기획한 것이다. 부록으로 지역별 도서관 목록도 실려 있다. 1만 2000원.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도지원-안내상이 뽑은 ‘수삼’ 최고의 1분은?

    도지원-안내상이 뽑은 ‘수삼’ 최고의 1분은?

    “남대문이죠!” 도지원과 안내상이 한 목소리를 냈다. KBS 주말극 ‘수상한 삼형제(이하 수삼)’의 ‘왈가닥 부부’ 도지원과 안내상은 18일 오후 여의도 KBS 별관 근처 음식점에서 기자들과 만나 “지금까지 촬영된 내용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서로 입을 맞춘 듯 “남대문 시장에서 건강과 청난이 만나는 장면”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꼽은 촬영 신은 시어머니(이효춘)의 구박에 못 이겨 집을 나간 청난(도지원)이 남대문시장에서 음식을 나르던 도중 그녀를 찾아 불철주야 돌아다닌 건강(안내상)과 남대문시장 한 복판에서 마주치는 장면이다. 도지원은 “당시 남대문시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촬영장을 에워쌌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면서 “내 앞에 있는 김건강 외에는 아무도 안 보였고 실제 내 남편과 다시 만난 듯한 묘한 느낌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도지원은 또 “그 순간 ‘난 청난이다’라고 스스로 주문을 외웠을 정도로 가슴에서 벅차오르는 감동은 직접 연기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설명했다. 남편인 김건강 역의 안내상도 “나 역시 남대문 신이 가장 기억에 남는 명장면”이라며 “청난이의 눈을 보자 마자 나도 모르게 울컥했고 그 순간 청난이 밖에는 아무도 안보였다. 뭔가에 홀린 듯했다.”고 전했다. 특히 안내상은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뤘음에도 바람소리조차 안 들렸다. 이는 우리 뿐만 아니라 우리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같이 집중해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그 순간은 마치 우리가 연극을 하고 있는 듯했다.”고 묘사했다. 주말드라마 ‘왕좌’를 지키고 있는 ‘수삼’은 지난 14일 방송에서도 39.9%의 시청률을 기록하며(TNmS미디어) ‘막장드라마’ 논란에도 불구, 시청자들로부터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사진=KBS 서울신문NTN 김진욱 기자 action@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살아있는 음악무대의 600번째 초대

    살아있는 음악무대의 600번째 초대

    ‘그곳에 가면 진짜 음악이 있다.’ 고품격 라이브 공연 및 음악 방송 문화를 이끌어온 EBS 스페이스 공감이 방송 600회 및 개관 6주년을 맞는다. 스페이스 공감은 서울 도곡동 EBS 사옥 안에 마련된 공연장. 2004년 4월1일 문을 열었다.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조촐하지만 뜨거운 공연이 꾸준히 열려왔다. 팝, 록, 포크, 재즈, 힙합, 펑크, 클래식, 월드뮤직, 국악, 민중가요 등 장르에 관계없이 오로지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뮤지션이 엄선돼 초대됐다. 공연 횟수가 무려 1500회에 육박한다. 또 그동안 세션을 포함해 약 3800명이 무대에 올랐다. 스페이스 공감은 약 300㎡, 151석의 작은 공연장으로 무대와 객석 사이 거리가 3m 정도에 불과하다. 비좁아 보이는 공연장이지만, 관객들은 뮤지션의 숨소리까지 느끼고, 뮤지션이 흘린 땀은 관객들에게 튈 정도다. 음악에 대한 공감대는 그만큼 증폭될 수밖에 없다. 좋은 뮤지션이 나오고 라이브 연주를 피부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보니 당연히 인기가 높다. 각 공연 5일 전까지 홈페이지 신청에 이은 추첨으로 스페이스 공감 공연을 다녀간 관객들은 지금까지 22만명. 평균 10대1의 경쟁률이다. 역대 최고 경쟁률은 2005년 12월 뮤지컬 콘서트 ‘크리스마스 인 러브’로 무려 146대1이었다. 스페이스 공감은 좋은 공연 실황을 엄선해 일주일에 두 차례 방송하는 등 안방에도 감동을 전달해 왔다. 개관 기념으로 열렸던 소프라노 신영옥과 재즈뮤지션 이정식 등의 합동 공연 실황을 2004년 4월3일 방송한 것이 시작. 새달 4~5일엔 600회 특집 방송을 내보낸다. 지난해 12월 중순 열린 콘서트 ‘한상원 블루스스테이션’의 실황이다. 기타리스트 한상원을 주축으로 전설의 기타리스트 이중산, 시나위의 신대철, 카리스마 보컬리스트 한영애 등이 함께 블루스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본 공연이다. 이중산이 TV에 나오는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스페이스 공감은 개관 6주년 기념 특별 공연도 준비하고 있다. 시청자들에게 다시 보고 싶은 뮤지션과 초대하고 싶은 뮤지션을 놓고 28일까지 인터넷 투표를 받고 있다. 최근 매주 목~금요일 밤 12시10분으로 편성이 변경됐다. 원년부터 스페이스 공감과 함께해 온 백경석 PD는 “솔직히 말하자면 감회에 젖을 여유가 없다. 그동안 내부적으로 환경 변화도 있었고, 외부적으로도 유사한 경쟁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생겨났기 때문이다.”면서 “팬들과 뮤지션들의 응원 덕택에 힘을 내고 있다. 뉴미디어 시대에 유연하게 적응하면서도 좋은 음악을 널리 알리자는 취지를 더욱 제대로 살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고전 톡톡 다시읽기] 노래의 책 ‘시경(詩經)’

    [고전 톡톡 다시읽기] 노래의 책 ‘시경(詩經)’

    ‘시경(詩經)’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 그러니까 중국 주나라 때부터 춘추시대 때까지 황하강 유역의 사람들 사이에 구전되던 노래를 공자가 모아서 엮은 책이다. 원래 311편인데 이 중 6편은 제목만 전하고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이렇게 시경의 시가 300편가량 되기 때문에 시경을 ‘시(詩)’ 혹은 ‘시삼백(詩三百)’이라고도 부른다. 시경은 쉽게 말해서 노래책이다. 여기에는 여자들이 불렀던 노래도 있고, 남자들이 불렀던 노래도 있고, 농부가 불렀던 노래도 있고, 전쟁터에 나간 병사가 불렀던 노래도 있다. 각양각층의 사람들이 불렀던 오래된 노래의 책이 바로 시경이다. 공자의 시경의 해설서 격으로 주희가 쓴 ‘시경집전(詩經集傳)’에 들어간 삽화들이다. 시경의 시편에 등장한 복식, 수레, 동식물 등은 당대 사람들에게도 생소했기에 용어 해설이 필요했다. ●시경이 건전가요라고? 공자는 “시경의 시 삼백편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게 하는 것이다.(子曰 詩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논어, 위정)라고 하였다. 사무사(思無邪), 생각과 행동에 사악함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시경은 사무사다.”라고 하니까, 흔히 ‘시경의 노래들은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이다.’라고 생각한다. 즉, 요즘으로 치면 ‘건전가요’ 쯤으로 여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雅)’나 ‘송(頌)’은 임금의 덕을 칭송하고 후대의 자손들에게 올바른 덕을 권장하는 계몽적인 내용이므로 건전가요라고 할 수 있지만, 국풍(國風)의 시들은 내용이 별로 건전하지가 않다. 오히려 점잖지 못한 연애시들이 많다. 將仲子兮 無踰我里(장중자혜 무유아리) 청컨대 그대여 우리 마을로 넘어오지 마세요. 無折我樹杞(무절아수기) 내가 심은 버드나무 꺾지 마세요. 豈敢愛之 畏我父母(기감애지 외아부모) 어찌 그것이 아깝겠어요. 부모님이 두렵답니다. 仲可懷也 父母之言(중가회야 부모지언) 그대가 보고 싶지만 부모님의 말씀도 亦可畏也(역가외야) 두렵답니다. 정풍(鄭風)에 나오는 ‘장중자(將仲子)’라는 시다. 이 시에서 아가씨는 연인을 기다린다. 그러나 아가씨를 좋아하는 도령은 아가씨의 마을에 살지 않는다. 도령이 아가씨를 만나려면 담장을 넘어야 한다. 이것은 설레면서도 두려운 일이다. 도령과 만나고 싶다. 하지만 부모님이 혼내실까 두렵다. 이 두 가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가씨는 그래서 이렇게 노래한다. ‘도령님, 도령님, 보고 싶은 도령님, 우리 집 담장을 넘어오면 안 돼요, 돼요, 돼요….’ 아니, 이건 도대체, 도령보고 담장을 넘어오라는 것인가. 넘어오지 말라는 것인가. ●노골적 추파 담긴 연애詩도 관관저구 재하지주(關關雎鳩, 在河之洲)…. ‘요조숙녀(窈窕淑女)’와 ‘전전반측(輾轉反側)’이라는 말이 나와서 유명한 ‘관저(關雎)’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반쪽은?”이라면서 짝을 구하는 노래이다. 강가 모래섬에 저구새가 광광 소리내어 짝을 부르는 것과 같이 군자가 자기에게 어울릴 요조숙녀를 찾는 노래이다. 뿐인가. ‘표유매(?有梅)’에서는 혼기를 맞은 여자가 배우자에게 빨리 와서 자기를 데려가라고 아예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진다. ‘매실이 떨어집니다. 열매 일곱 개 남았네요./ 날 데려 갈 그대는 좋은 날에 오기를!/ 매실이 떨어지네요. 열매 세 개 남았네요./ 날 데려 갈 그대는 지금 오기를!/ 매실이 다 떨어졌네요. 광주리에 주워 담습니다./ 날 데려갈 그대는 말이라도 건넵시다!’ ‘도요(桃夭)는 복숭아꽃이 만발한 날, 시집가는 아가씨를 축복하는 시다. 인생에서 가장 환할 때는 언제일까. 아마 여자에게는 시집가는 날일 것이다. 이제 비로소 어른이 되고, 새로운 공동체의 당당한 주인이 되는 때. 나무로 치자면 봄에 꽃이 활짝 피는 때이다. 이런 봄날의 풍경을 시집가는 아가씨의 모습과 함께 표현했다. 연인들 사이 선물을 주고받는 시로 ‘모과(木瓜)’가 있다. ‘그녀가 나에게 모과를 주었네./ 나는 그녀에게 옥돌을 주었네./ 보답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녀랑 친해지고 싶어서.’ 옛날 사람들은 좋아하는 이에게 모과를 주었나 보다. 이런 정표를 받은 남자가 가만 있을 수 있나. 옥돌을 준다. 모과를 받았는데 옥돌을 주다니. 손해 보는 거 아니냐고? 그러나 선물은 장사와 다르지.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순수한 마음,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치자면 모과나 옥돌이나 소중하기는 똑같다. 시경에는 연애시와 함께 근심이 가득한 노래가 많다. 시경에서 휘파람은 즐거운 때 부는 흥겨운 가락이 아니라 근심을 푸는 한숨소리이다. 전쟁 때문에 남편과 헤어진 여인의 슬픔을 노래한 시 ‘중곡유퇴(中谷有?)’, 행역 나갔다 돌아와 보니 나라가 망해서 기장과 피만 수북이 자라는 황폐한 옛터를 맥없이 비틀거리며 걷는 시 ‘서리(黍離)’, 가난 때문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유랑민의 비애를 노래한 시 ‘갈류(葛?)’, 정복전쟁에 끌려간 병사가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고향의 집으로 ‘나 돌아갈래’ 외치는 시 ‘동산(東山)’도 있다. ●왜 思無邪인가:즐겁되 지나치지 않고 슬프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노래가 사람의 마음을 순화하고 풍속을 교화한다는 유가의 본래 취지에 따르자면 시경의 연애시들, 근심이 가득한 노래들은 별로 권장할 만한 노래들이 못 된다. 그건 사무사(思無邪)가 아니라, 오히려 사(邪)에 해당하는 것 같다. 그런데 공자는 왜 이런 노래들을 사무사라고 했을까. 공자는 ‘관저’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즐겁되 지나치지 않고 슬프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而不淫 哀而不傷) 시경의 시들은 즐거움이나 슬픔 같은 인간의 솔직한 감정이 표현되었지만 그것이 거짓되거나 과장되지 않아 억눌린 마음을 풀어주고 다른 이에게 감동을 준다는 뜻이다. 즉 시경의 시들은 지극히 사사로운 감정을 노래한 것이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고 다른 이들과 감응하고 소통한다는 점에서 사(邪)가 아니라 사무사인 것이다. 시경은 건전가요가 아니다. 뜻은 너무 좋지만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가 아닌 시경은 오히려 발칙한 불량가요에 가깝다. 그러나 삼천년 전의 노래가 아직도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는 것! 공자가 말한 사무사는 시경의 바로 이러한 감응(感應)과 소통(疏通)의 능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시경의 진솔한 노래들은 지치고 왜소해진 우리들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어준다. 기쁜 마음은 정말 기쁘게, 슬픈 마음은 정말 슬프게, 화가 나는 마음은 정말 분통이 터지게…. 어떤 마음이든 깊이 헤아리고 편안하게 풀어주는 노래의 힘! 이것이 바로 불량가요 시경의 힘이다. 수유+너머 구로 연구원 정경미
  • [주말 데이트] 한국 헤비메탈 1세대 심상욱 뮤즈에로스 리더

    [주말 데이트] 한국 헤비메탈 1세대 심상욱 뮤즈에로스 리더

    “그동안 금단 현상처럼, 온몸이 간지러웠습니다. 다시 제 운명에 대해 실험하고 싶어졌죠.” 음악의 신과 사랑의 신에서 이름을 따온 뮤즈에로스라는 국내 헤비메탈 밴드가 있다. 한국 메탈의 르네상스였던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 사이에 10대 시절을 지낸 음악 팬들이라면 들어봤을 이름이다. 미국 하드록 밴드 키스를 떠올리게 하는 분장과 무대 의상, 그리고 격렬하면서도 연극적인 무대 퍼포먼스로 이름을 날렸다. 대표곡 ‘한민족의 숨소리’가 웅변하듯 노래는 상당히 진한 한국적인 냄새를 풍겼다. ●시나위·백두산과 함께 국내 1세대 메탈밴드 뮤즈에로스가 시나위나 백두산 등에 견줘 대중적인 인지도는 떨어졌지만 국내 대중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한 몫을 담당했던 밴드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뮤즈에로스가, 특히 밴드의 리더인 심상욱(46)이 ‘메탈 프로젝트’라는 모임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심상욱의 표현을 빌리자면 음악을 하는 호걸들이 모인 양산박 같았던 이 모임은 1990년대 국내 대중음악계를 이끈 손무현, 오태호, 김종서, 이근형, 이근상, 신성우, 홍성민, 이승환 등 쟁쟁한 뮤지션들을 배출했다. 뮤즈에로스가 지난달 말 2집 ‘어머니의 땅’을 정식으로 꺼내놨다. 1988년 1집 발표 뒤 무려 21년 만이다. 최근 서울 논현동에서 만난 심상욱은 “한이 맺힌 작품”이라고 2집을 소개했다. 1992년 즈음 발매하려 했으나 계약 관계가 꼬이는 과정에서 마스터 테이프가 훼손되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묻혔다는 것. 결국 해체됐던 밴드가 2008년 말 심상욱(보컬·기타), 이우정(베이스), 오경환(드럼), 김용훈(기타) 등 오리지널 멤버로 다시 뭉치며 한풀이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모니터링용으로 남은 테이프를 복원하는 한편, 절절한 발라드 ‘레인 송’ 등 신곡 두 곡을 보태며 새롭게 다듬었다. 영화 팬들이라면 심상욱을 영화인으로 알고 있을 수도 있다. 밴드가 깊은 겨울잠을 자는 동안 심상욱은 대학 전공을 살려 영화 미술감독으로 활동해 왔다. 1998년 영화 ‘퇴마록’으로 청룡영화제 미술상을 받기도 했다. 앞서 류승완 감독의 단편 데뷔작 ‘변질헤드’에 출연하기도 했던 그는 현재 자신이 직접 메가폰을 잡을 작품을 준비 중이다. “영화인들로 이뤄진 직장인 밴드 ‘삐뚤스’에서 활동하며 음악에 대한 불씨를 되살리게 됐어요. 국내 메탈 1세대로서 영화일을 하면서도 (음악에 대한) 기대는 갖고 있었죠. 주변의 격려로 부담 없이 다시 시작했는데 완전히 불이 붙었네요.” ●“음악계 편식이 가장 심각한 문제” 다시 돌아온 음악계 상황은 녹록지 않다. 땀 흘려 곡을 쓰고 연주하는 라이브 문화가 외면받는 느낌이라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솔직히 1980년대보다 더 못한 상황인 것 같아요. 음악적 편식이 가장 큰 문제죠. 즐기는 문화가 향락적인 것으로만 몰려간 것 같아요. 라이브 공연 문화를 선도해야 할 록도 숨을 죽이고 있어 너무 아쉬워요. 누구의 잘잘못인지를 따지기 전에 저부터 나태했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후배들에 대한 사명감도 생기죠.” 그래서일까. 올해 뮤즈에로스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 연말 성대하게 공연을 치렀던 뮤즈에로스는 오는 29일 서울 홍대 앞 클럽스팟에서 2010년 마수걸이 라이브 무대를 선보인다. 본격적인 3집 준비에도 착수한다. 메탈 밴드들이 힘을 모을 양산박을 다시 한번 구축해 보고 싶다는 심상욱은 최근 백두산의 김도균, 시나위의 신대철, H2O의 김준원, 블랙신드롬의 박영철 등을 초대해 토크쇼를 찍기도 했다. 1980년대 국내 헤비메탈의 역사가 없어져 가는 게 안타까워서다. 인터넷 방송 등 적절한 플랫폼을 찾아 방송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음악을 갈망하는 제 자신을 찾아 정말 행복해요. 밴드가 놓여진 상황이 그리 고무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이제 열심히 해야 한다는 숙제만 남았죠.”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고학 면하게 해준다기에 혹시나 했더니…”

    “고학 면하게 해준다기에 혹시나 했더니…”

    새 학기 등록을 앞둔 대학가에 한숨소리가 커지고 있다. 올 1학기부터 도입될 것으로 기대되던 취업 후 학자금 상환제(ICL) 법안 처리가 불발됐기 때문이다. 정부는 올 상반기에 관련법을 통과시켜 2학기부터 시행한다는 방침이지만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학생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6일 대학가에 따르면 당장 올해부터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하는 재학생과 신입생들 가운데 상당수는 ICL 법안 처리 불발로 직격탄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2만명가량으로 추산되는 금융채무 불이행 대학생은 기존 대출제도 혜택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ICL제도만 기다리다가 뒤통수를 맞은 셈이 됐다. 거치기간 이자부담이 큰 현행 학자금 대출제도와 달리 ICL은 거치기간 동안 무이자인 데다가 졸업한 뒤 일정한 소득이 생긴 시점부터 원금과 이자를 상환하면 되기 때문에 학생들의 부담이 적다. 신용불량자 양산을 막는 효과도 기대됐다. 정부는 107만명의 대학생이 혜택을 볼 것으로 예상했다. 한국외대에 재학 중인 박비나(23·여)씨는 “새학기부터 ICL이 도입되면 적어도 등록금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은 없어져 나름대로 기대가 컸다.”면서 “취업 후 돈을 갚으면 돼 부모님 부담도 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무산돼 안타깝다.”고 말했다. 연세대 재학생 최한규(24)씨는 “정치권에서 (학생들의) 등록금 문제를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는데 역시나 였다.”고 꼬집었다. 대학들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등록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거나 혹시 등록을 포기할지도 모르는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혜택, 등록금 동결 등 지원책 마련을 고민 중이다. 조영금 중앙대 학생지원처장은 “학교 내에서 별도로 취업 후 학자금 상환제와 유사한 ‘릴레이장학제도’를 2년간 운영하다가 이번에 ICL 법안이 통과될 줄 알고 제도를 폐지했다.”면서 “지금 와서 제도를 부활시키기도 어렵고 법안이 통과될지도 미지수여서 어찌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구영 서울대 학생부처장도 “등록금이 비싼 일부 사립대 학생이나 재정 부족으로 학자금 지원율이 상대적으로 떨어져 당장 장학금 보충이 어려운 대학 재학생의 경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숙명여대 등 서울 사립대와 국립대 가운데 경북대가 지난해 말 2년 연속 등록금 동결을 선언하는 등 학생들의 학비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대학들의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정현용 이민영기자 junghy77@seoul.co.kr
  • [서울신문 2010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붉은 코끼리/이은선

    [서울신문 2010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붉은 코끼리/이은선

    할머니가 사라졌다. 노인정과 공판장을 지나 경찰서로 뛰어가던 엄마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뭐라고? 할머니가, 어디? 엄마, 잘 안 들려요! 모퉁이를 돌아서자 팀장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얼결에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 재빨리 칸막이를 닫았다. 어느새 전화가 끊어져 있었다. 아침 식사 시간 전부터 기숙사에 와 잔소리를 해대는 팀장과 이러저러한 일들이 겹쳐 오후 두 시가 다 되도록 한 번도 자리에 앉지 못했다. 내친김에 변기 위에 걸터앉아 엄마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옆구리에 차고 있던 무전기가 울렸다. 곧 리허설을 시작하겠다는 팀장의 목소리였다. 그건 안 됩니다. 코끼리들 상태가 좋질 않아요. 오늘은 무조건 쉬게 해야 합니다. 내가 대답했다. 팀장은 무전기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당장 달려오라고 했지만 당장은 가기 싫었다. 무전기의 전원을 끄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할머니가 어디 가셨다는 거지? 몸도 안 좋으시면서.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두 시간이 지나서야 삼촌의 이름이 전광판에 떴다. 울고 있던 가족들이 황망히 수골실로 내달렸다. 나는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삼촌의 유골은 대리석 탁자 위에 새카맣게 탄 못들과 뒤엉켜 있었다. ‘냉각’을 거쳤다고는 하나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유골이었다. 할머니가 탁자 모서리에 가슴을 짓찧었다. 망연히 서 있던 아버지가 서둘러 할머니를 일으켜 세우려 했을 때, 나는 할머니가 작은 뼛조각 하나를 움켜쥐는 것을 보았다. 탁자 옆에 서 있던 나도 얼른 새카맣게 탄 못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무도 못 본 건가. 주위를 둘러보니 고모들은 아예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내내 울음을 참던 아버지도 할머니를 부둥켜안고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못을 내 몸에 박아두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쥐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나는 공항에서 곧바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나를 데리러 온 사촌 동생의 차를 탈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는데도 어쩐지 집으로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장례식장 앞에서 선뜻 안으로 들어서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는 나에게 둘째 고모가 내 몫의 상복을 내밀었다. 장례식장 안팎에 삼삼오오 모인 가족들은 삼촌이 왜 죽었을까 답답해했고 삼촌의 동료와 친구들은 경찰서를 오가고 있는 중이었다. 무당이라도 불러 알아볼 수 없을까? 사촌 동생이 불쑥 꺼낸 말이었다. 삼촌의 방에 널브러진 술병들, 불에 탄 이부자리, 종류가 다른 담배꽁초들. 어떤 추측은 가능할 테지만 진실은 아무도 몰랐다. 그날 밤 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 것일까.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삼촌은 각기 다른 이유들로 죽고 또 죽었다. 효원 장례식장 국화실에 놓인 영정사진 속 삼촌은 너무나 밝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무릎에 올려놓은 상복이 자꾸 무겁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삼촌의 죽음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서 삼촌의 시신을 보았다는데도. 거의 녹아내린 새카만 못과 유골을 분리하는 일은 아버지의 몫이었다. 뼈가 상하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 내게 다가와 그만 잠에서 좀 깨어나라고 흔들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런데 나는 어쩌려고 못을 집어든 것일까. 할머니가 두 주먹을 옹골차게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덩달아 나도 주먹에 힘을 주었다. 내 손이 못과 함께 타들어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하설 조장님, 본부 운영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원내 방송이 들려왔다. 잠깐 눈만 감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재빨리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숫자를 거꾸로 보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득달같이 일어나 문을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이하설 조장님, 본부 운영실로 와’달라는 방송은 계속 되었다. 운영실이 가까워질수록 방송이 더 자주 들려왔고, 느려터진 두 발은 점점 더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내가 도착하기만 하면 저 공손한 팀장의 말투는 야수로 변해 나에게 돌진할 것이었다. 그때 가로수 사이로 한 여자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남색 기지바지와 연두색 스웨터, 복고풍의 파마머리까지. 혹시 할머니인가 싶어 가던 방향을 바꿔 전속력으로 달려갔다가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뒤돌아섰다. 팀장이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두루마리 휴지가 창문 쪽으로 날아갔고, 내 가슴팍에 내리꽂힌 전화기는 바닥에 떨어지면서 박살이 났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고 속으로 되뇌었다. 원내 방송 담당 아나운서가 시디 데크를 만지작거리는 게 보였다. 팀장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사무실 안을 둘러보니 악단장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악단장의 발치에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노란색 나비넥타이가 떨어져 있었다. 기어이 팀장과 한바탕 한 것 같았다. 오전에 병원으로 실려 간 러시아 무용수는 응급 수술을 해야 할 상황이라고 했다. 하혈이 심해 개복 수술을 해야 한다고. 악단장과 팀장의 관계를 가장 잘 알고, 더듬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러시아 말을 할 줄 알았던 내가 그 ‘중요한’ 시기에 사라졌다는 것이 팀장이 화를 내는 이유였다. 앞으로 바짝 다가온 팀장의 손이 내 뺨을 향해 날아왔다. 그때 태국인 조련사 푸앙이 운영실 안으로 들어왔다. 푸앙은 코끼리들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퍼레이드를 취소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코끼리의 설사 따위는 팀장에게 먹혀들 만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나는 푸앙의 손을 잡아끌고 코끼리 우리로 갔다. 쏘냐는 계속 설사를 했고, 아프리카 산 일 년 생 코끼리 튀라는 쏘냐의 엉덩이 쪽에 대가리를 박고 누워 있었다. 제때 검사를 하며 건강을 돌보아 주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야생과는 달리 동물원 우리 안에 갇혀 있는 동물들은 잔병치레가 잦았다. 그래서 예방 접종, 먹이, 변의 상태 등을 확인하여 제때 사료 혹은 건초 더미를 바꾸어 주는 것들은 무척이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일들이었다.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팀장은 번번이 동물원의 재정 상태를 운운하며 우리가 올리는 건의사항들을 묵살했다. 이하설, 오늘 제대로 하지 않으면 너부터 자를 줄 알아! 나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팀장님, 직접 오셔서 코끼리들을 살펴보시란 말이에요! 무조건 데리고 나가는 일이 능사가 아니란 말입니다. 뭐야? 푸앙이 눈물을 흘리며 내게 말했다. 코끼리 나가지 마, 나 죽어. 푸앙, 그러기 전에 내가 먼저 어떻게 되겠어. 그러니 나한테 제발 좀 이러지 마! 그러나 푸앙은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삼촌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내가 아는 한 삼촌은 아픈 동물은 절대로 퍼레이드에 내보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외국인 조련사들의 고충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 주었고, 윗사람들에게도 최선을 다했다. 그 사람이 원하는 선에 맞추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못을 만졌다. 잠깐이지만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울고 있는 푸앙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오늘은 이틀 앞으로 다가온 퍼레이드의 리허설이 열리는 날이었다. ‘우리를 나온 동물들의 퍼포먼스’라는 이름으로 한 달 전부터 신문 및 지역 방송에 광고를 내보내고 있었다. 나날이 쇠락해가는 테마랜드의 혁신을 위해 팀장이 삼 개월 넘게 심혈을 기울인 행사였다. 만약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삼촌은 일급 코끼리 조련사이자 동물 쇼의 사회자였다. 공휴일이나 특별한 행사가 있기 한 달 전이면 삼촌의 얼굴이 실린 포스터가 동네 곳곳에 나붙었다. 지역 방송국에서는 매일 테마 랜드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고 또 어떤 쇼가 진행 중인지 보도해 주었다. 삼촌은 방송에도 자주 나왔다. 나도 삼촌에게 꽃을 건네는 어린이 중 한 명으로 텔레비전에 나온 적이 있었다. 십 년이 지나 스무 살이 된 나도 테마 랜드에 조련사 보조로 들어왔다. 그러다 조련사가 되었지만 그 삼촌에 그 조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내내 업무에 허덕이다 시간이 되면 퇴근하기에만 급급한 나날이었다. 삼촌처럼 되기를 원했지만 그를 뛰어넘을 재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동물 구입 차 태국과 러시아에 출장을 간 사이 삼촌은 직원 기숙사 방문 손잡이에 목을 맸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할머니는 삼촌의 시신이 병원으로 옮겨지고 하루가 지난 뒤 실신한 채 삼촌이 있는 병원으로 실려 왔다. 어린이 날 행사를 며칠 앞두고 일어난 일이었다. 바쁘게 행사를 준비하면서 이래저래 악단장과 팀장 사이에 생긴 일들을 조율하고 동물원 곳곳의 문제들을 해결하며 별 탈 없이 생활을 했다는 진술들이 이어졌다. 내가 아는 바와 다를 것이 없었다. 장례식 도중, 나는 삼촌이 행사를 진행할 때 입던 붉은색 조련복을 챙겨두었다. 팀장은 동물원에 사람들이 오지 않는 이유가 사육사들이 동물 관리를 잘하지 못한 탓이라고 말했다. 그는 동물 구입의 명목으로 예산을 타갔지만, 그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단란주점에서 여자애들과 놀아났다는 소리가 들려왔고 어느 날에는 실내 경마장에서 누군가와 게임을 했다는 말도 들렸다. 건의서를 제출하면 가지고 있는 동물 관리나 잘하라며 번번이 우리의 의견을 무시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동물이 죽었다는 보고서를 제출한 후 사체처리비로 외유를 떠났다. 이사장이 바뀌고 줄을 잘 섰다는 소문이 돌았다. 얼마 후 악단의 인원이 대폭 감소되었다. 게다가 이러저러한 꼬투리를 잡아 악단장의 연봉도 삼십 퍼센트나 감봉시켰다. 대부분이 계약직인 연주자들은 불만을 표시할 수가 없었다. 곧 재계약 기간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하나 둘, 동물원을 떠나는 연주자들이 늘자 참다못한 악단장이 팀장에게 항의했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악단장은 내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나는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소주를 마시고, 매일 두 갑의 담배를 피웠다. 테마랜드는 죽을 날만 기다리는 병든 짐승들과 관리되지 않은 채 잡풀이 번다한 식물원, 날만 흐리면 전기가 오르는 범퍼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놀이기구만 모아 놓은 부상 랜드였다. 사육조장에게선 늘 술 냄새가 났다. 비가 오면 비가 온다는 이유로, 날이 더우면 덥다는 이유로, 동물들이 발정이 나면 수컷이 없다는 이유로 그는 늘 술을 마셨다. 나도 간간이 그와 함께 술을 마시곤 했지만 어쩐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그는 술만 취하면 내게 삼촌의 이야기를 하려고 들었다. 삼촌의 성격과 그와의 관계, 동물들을 아끼던 마음, 은밀하게 나누곤 했던 농담들. 하지만 나도 다 아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사육조장과 함께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반쯤 마신 매실 주스에 소주를 타먹곤 하는 버릇이 있었다. 오늘도 그는 코끼리 우리를 나오면서 빈 매실 주스 병 두 개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엄마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많이 진정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서 없어진 할머니를 이곳에 있는 내가 어찌해 볼 도리는 없었다. 엄마,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요, 지금 좀 바빠! 통화를 끝내자마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조장님, 홍학 우리에 고양이가 들어와 새끼들을 물어뜯고 난동을 부렸어요. 뭐라고? 홍학 한 마리가 다리를 크게 다쳤어요. 알았어, 곧 갈게. 안 그래도 행사 준비 때문에 신경이 무척 곤두서 있는 홍학무리였다. 허겁지겁 바쁘게 뛰어가다 보니 남색 기지바지가 또 눈에 띄었다. 오늘은 동물원에 남색 기지바지가 유난히 많았다. 그 바지들은 여기서도 나타났고 저기로도 지나갔다. 동물원에 온 할머니들은 대부분 남색 기지바지 혹은 검정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모두들 엇비슷한 파마머리를 한 채 손차양으로 햇빛을 가리고 느릿느릿 걷거나 그늘에 앉아 김밥을 먹었다. 납골당은 노인들이 게이트볼을 치고 있는 공원을 지나 한참 더 올라가는 산 중턱의 후미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적한 공터인 줄 알았던 공원도 지나가며 살펴보니 있어야 할 것들은 다 있었다. 그물이 벗겨진 하나밖에 없는 축구 골대, 녹슨 시소, 줄 끊어진 그네. 곳곳에 놓인 페인트칠이 벗겨진 벤치와 그곳에 누워 있는 사람들. 공원을 지나 한참을 걸었는데도 납골당이 나오질 않아 잘못 찾았나 하고 두리번거리는 나와는 달리 할머니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따름이었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산길을 따라 삼십여 분쯤 더 걸어가다 보니 자그마한 분지 위에 지어 놓은 건물이 하나 보였다. 우리는 곧장 유골 안치실로 들어갔다. 삼촌의 위패에 쓰여 있는 이름이 낯설었다. 이선빈이 아닌 고(故) 이선빈은 내게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알 수 없는 수학공식 같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저쪽 세계의 풀 수 없는 문제 같은 것인가. 돌아갔으나, 되돌아 올 수는 없다는 낙인? 오늘만큼은 할머니가 글자를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퍽이나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할머니는 귀신같이 아들 있는 곳을 찾아냈다. 가져간 술과 포를 놓고 준비되어 있는 향을 피웠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훌쩍이는 소리에 혹시나 싶어 뒤돌아보니 할머니는 대꾼한 두 눈을 슴벅이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계시라 해도 한사코 일어서서 창문 쪽으로 얼굴을 돌린 채. 술이 넘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잔을 쥐고 향 위에 세 번을 돌린 후 상에 올렸다. 두 뺨이 경련이 이는 것처럼 제멋대로 움직였다. 옆 칸에서 제를 지내던 사람들이 담배에 불을 붙여 제상 위에 올려놓는 것이 보였다. 분향실의 향내에 짓눌려 있던 나는 생담배 타는 매캐한 냄새가 차라리 반가웠다. 우리도 한 대 필까, 삼촌? 부검 결과 별다른 타살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악단장과 몇몇의 연주자들, 팀장에 대한 조사가 차례대로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은 알지 못하던 우울증이 새로 생겨났으며, 사육조장과 함께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알코올 중독이란 말이 덧붙여졌다. 추측성 발언들이었지만 조서에 쓰인 것들은 그대로 사인(死因)이 되었다. 분개한 가족들이 사건 수사를 계속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곧바로 장례 일정이 잡혔다.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발인 날짜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발인 전날 신발도 신지 못하고 영안실로 달려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할머니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납골당 쪽을 다시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쉽게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가 저쪽의 삼촌을 아직 내려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까. 할머니의 어깨가 잔뜩 내려앉아 있었다. 듬성듬성하던 머리칼은 그 사이 더 빠졌는지 머릿속이 훤히 다 보일 지경이었다. 올라오는 길을 잘 찾았던 할머니가 돌아가는 길을 헷갈렸다. 납골당에 들어서는 길은 우리가 걸어온 길 하나밖에 없는데도 할머니는 분향실에서부터 출구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헤맸다. 내가 앞장서 걸을 수도 있었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그렇게 이끌고 있는 것만 같아 가만히 뒤를 따랐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지난 주말에 할머니와 내가 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납골당에 가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다. 내가 만약 그곳에 할머니를 모시고 간 것을 알면 크게 혼이 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지의 기억에는 할머니가 한 번도 삼촌에게 다녀온 적이 없다는데, 처음이라는 할머니는 삼촌의 자리를 잘도 찾았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홍학 우리 안의 소동이 잠잠해진 뒤였다. 고양이에게 물려 다리를 다친 홍학은 다행히 퍼레이드에 나갈 녀석이 아니라 두 달 전에 알에서 깬 새끼였다. 놀란 홍학들을 진정시키느라 껍질 깐 호두와 아몬드를 두 자루나 뿌려주었다. 어느샌가 팀장도 홍학 우리 앞에 와 있었다. 그는 퍼레이드에 나갈 녀석들을 좀 더 밝은 빨간색 형광 안료로 칠하라며 조련사들을 다그쳤다. 나는 홍학들에게 빨간 안료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해 보았지만 팀장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것 같았다. 나는 물끄러미 팀장과 조련사들을 바라보다 문득 이제 여기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삼촌을 보내고도 꿋꿋하게 나오던 곳이고, 그가 하던 일만은 내 손으로 이어받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도저도 아니었다. 조련사들이 빨간 형광 안료 통을 들고 사육실 안으로 들어갔다. 퍼레이드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나는 옷장에서 삼촌의 조련복을 꺼내 입었다. 오랫동안 묵혀둔 것이라 혹시 곰팡이라도 슬었으면 어쩌나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의자 위에 놓아둔 전기 총을 집어 들자 푸앙이 비명을 지르며 울어댔다. 미안해, 푸앙.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우리 얼른 끝내버리자. 나는 입을 앙다문 채 쏘냐의 뒷다리에 총을 쏘았다. 쏘냐가 움찔하며 왼쪽 다리를 들었다. 재빨리 엉덩이에도 총을 갖다 댔다. 한참 만에 쏘냐가 일어섰다. 푸앙이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다 울부짖으며 내 왼팔에 매달렸다. 쏘냐의 몸에 멋을 내느라 발라놓았던 노란색 형광안료가 설사에 섞여 줄줄 흘러내렸다. 바닥에 형광 선을 긋는 것 같았다. 무전기에서는 팀장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무전기 소리를 무시하니 그 뜻 없는 말들은 점차 행진곡 풍으로 변해갔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괜찮다고, 얼른 끝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진흙탕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호두를 쪼아 먹고 있던 홍학들이 코끼리 우리 앞에 나와 있었다. 온몸에 빨간색 형광 안료를 잔뜩 바른 홍학 무리였다. 등에 홍학을 둘씩 태운 코끼리들이 정문으로 출발했다. 붉고 노란 머리들이 공중에다 점을 찍었다. 휴대전화와 무전기에서 팀장과 사육조장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어차피 코끼리들이 도착하지 않으면 행렬을 완성할 수 없고 또 사회자인 내가 가지 않으면 시작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동물들의 건강을 살피는 것 역시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무전기를 뺐다. 팀장님, 지금이라도 리허설을 취소해 주세요. 뭐, 뭐야? 이대로 가단 코끼리들이 죽습니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얼른 데리고 나와! 시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지켜보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지금, 니가 나한테, 대든 거냐? 쏘냐와 튀라는 절뚝이고 비틀거리면서도 앞만 보고 걸었다. 푸앙이 코끼리 배에 손을 얹고 함께 걸었다. 저렇게라도 가주기만 한다면 크게 문제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쏘냐는 설사를 하고 있었다. 코끼리, 죽어. 나도 죽어. 푸앙이 울며 말했다. 푸앙, 나도 어쩔 수가 없잖아, 미안해! 니가 살려! 푸앙, 죽어가는 것들을 일으키고 이미 죽은 것도 살려낼 수만 있다면야 오죽이나 좋겠니. 푸앙이 이를 악물고 우는 소리와 코끼리들의 거친 숨소리가 마치 한 덩이처럼 느껴졌다. 정문 쪽에 노란 나비넥타이를 한 악단장의 모습이 보였다. 전보다는 풀이 죽은 모습이었지만 잘 다려진 연미복을 입은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심벌즈 연주자가 그만두는 바람에 탬버린을 담당했던 사람이 심벌즈를 잡고 있었다. 다섯 명이던 작은 북 담당 연주자들은 둘밖에 없었고 심지어 트럼펫 연주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행렬이라도 완성해야 한다는 팀장의 고집 때문에 음악은 녹음해둔 것으로 대체되었다. 연주자들이 항의했지만 오늘은 ‘리허설’ 날이니 그렇게 해도 된다는 악단장의 말에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하지만 연주자들의 얼굴 표정은 괜찮아진 것 같지 않았다. 안 그래도 불안한 처지인데 악단장마저 번번이 자신들 앞에서 팀장에게 무시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손에 익지도 않은 악기를 든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갔다. 악단장은 연신 나비넥타이만 고쳐 맸다. 동물원 곳곳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정문으로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카메라를 꺼내들고 환호성을 지르거나 직접 코끼리를 만지려고 다가갔다. 놀란 사육사들이 그들을 말리는 사이, 나는 희뿌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이었다. 눅눅한 공기와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 동물들의 우는 소리들이 마구잡이로 내 가슴속에 맺혔다. 그 사이 ‘시’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이 정문 쪽으로 다가왔다. 행사를 하는 날도 아닌데 무슨 일로 온 거지? 팀장은 ‘시’ 사람들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시’ 사람들은 악단장에게도 다가갔다. 팀장이 활짝 웃으며 악단장의 오른팔을 잡아끌었다. 팀장에게 이끌린 악단장이 지휘봉을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엉거주춤하게 그들과 악수를 했다. 허리를 제대로 굽히지 않은 채 인사를 하는 악단장을 바라보는 팀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팀장은 악단장에게 당장 연주를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악단장은 시디를 틀기로 되어 있지 않느냐며 반문했다. 빨리 하라니까! 팀장 자신도 모르게 나온 큰 소리에 본인이 더 놀라고 있는 사이, 악단장이 뒤돌아섰다. 그러나 내내 굽실거리거나 팀장에게 할 말을 다 못하고 돌아서던 악단장의 얼굴이 아니었다. 악단장은 맨 앞줄의 연주자가 들고 있던 바이올린을 넘겨받았다. 지휘봉을 연미복 허리춤에 찔러 넣은 악단장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축배의 노래였다. 멍한 얼굴의 팀장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악단장의 바이올린 선율에 맞춰 다른 연주자들의 악기도 조금씩 리듬을 탔다. 때마침 비가 내렸다. 당황한 팀장이 재빨리 ‘시’에서 나온 사람들을 이끌고 자리를 벗어나는 와중에 악단이 연주하는 축배의 노래는 점점 절정으로 향해 갔다. 어느새 굵어진 빗방울들이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원숭이와 코알라, 나뭇가지에 걸쳐 놓은 채 들고 나온 나무늘보들을 적셨다. 문제는 코끼리 등 위에 빨간 형광 안료를 덕지덕지 바르고 올라 앉아 있는 홍학들이었다. 진회색의 코끼리 등에 붉은 물이 들어갔고, 악단이 연주하는 축배의 노래는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나는 열심히 연주를 하는 악단장과 ‘시’ 사람들을 서둘러 본관으로 끌고 가는 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바람이 거세지자 동물들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작은 소란이 일었다. 그때 푸앙이 코끼리 등에 앉아 있던 홍학의 다리를 잡아챘다. 푸덕, 푸흐드덕! 홍학이 거센 날갯짓을 했지만 푸앙의 손아귀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푸앙이 정문과 반대쪽을 향해 뛰었다. 마치 홍학 연을 타기라도 한 것처럼 재빠른 속도였다. 홍학 한 마리가 사라지자 코끼리 등에 앉아 있던 다른 홍학 네 마리도 푸앙이 사라진 쪽을 향해 날아갔다. 푸앙은 홍학의 습성도 잘 알았다. 아마도 어미를 데려갔을 거였다. 홍학이 날아가면 코끼리들은 그 자리에 앉아 무릎을 굽혀 반쯤 앉거나 선 채 왼발을 들어 쇼의 시작을 알리게끔 훈련되어 있었다. 내가 말려볼 틈도 없이 정문에서가 아니라 정문으로 가는 도중에 코끼리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붉은 꽃 한 송이를 등에 얹은 코끼리들이 추는 군무가 악단이 연주하는 축배의 노래와 함께 어우러졌다. 그때까지도 정문 앞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박수를 치거나 사진을 찍어댔다. 쏘냐와 튀라는 설사를 좍좍 갈기면서도 춤을 추었다. 코를 양 옆으로 흔들면서 왼발과 오른발을 차례대로 접고 자리에 앉았다 일어나며 엉덩이춤을 추었다. 코를 하늘 위로 높게 치켜세웠다가 쿵쿵 땅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다시 왼쪽 오른쪽으로 두 차례씩 긴 코를 하늘로 들어올렸다. 빗줄기를 쏟아붓는 하늘을 향해 코를 쏘아 올리기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한 번 쇼를 시작하면 끝이 날 때까지 절대로 멈추지 않게 훈련된 코끼리들이었다. 홍학과 함께 한 군무가 오 분, 코끼리만 하는 쇼가 십오 분이었다. 나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코끼리들 옆에 전기 총을 든 채 무력하게 서 있었다. 코끼리의 군무가 점점 더 활기를 띠기 시작할 때쯤 다시 축배의 노래가 들려왔다. 악단장은 마치 무한 반복이라도 할 것 같은 완강한 표정이었다. 코끼리들은 덜렁덜렁 코를 흔들며 리듬에 맞춰 춤을 추었다. 차례대로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한 후 푸앙이 쏘냐의 어깨 위에 올라가 커다란 횃불을 치켜세우는 것으로 끝이 날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푸앙이 없다.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홍학들은 왜 하나도 돌아오지 않는 거지? 본관으로 갔던 팀장이 호루라기를 불며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정문을 가로지르는 팀장의 뒤쪽으로 익숙한 남색 기지바지가 지나갔다. ……할머니? 축배의 노래에 맞춰 자박자박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할머니였다. 나는 재빨리 할머니를 향해 뛰었다. 할머니, 할머니이! 그러나 할머니는 멈춰 서지 않았다. 내 등 뒤에서 악단장이 연주하고 있던 바이올린이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뒤따라 전기 총을 쏘는 소리도 들려왔다. 코끼리들이 거세게 날뛰며 질러대는 울음과 구경하던 사람들의 비명이 뒤섞였다. 돌아서서 잠시 주춤하던 나는 다시 있는 힘껏 할머니 쪽을 향해 뛰어갔다. 빗물이 자꾸 눈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삼촌의 뼛조각을 손에 쥔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어서인가. 내 손은 자꾸만 할머니의 몸을 움켜쥐려고 했다. 아버지가 못을 골라내자 화장장 직원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바로 삼촌의 뼈를 유골함에 넣어주었다. 고모들은 자신의 혈육이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막힌 듯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촉망받던 조련사였으며, 사람 좋던 막내 삼촌은 그렇게 몇 줌의 유골이 되었다. 옥색 유골함 위에는 삼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제 삼촌은 옥함 겉면의 금박 이름으로만 남게 될 모양이었다. 할머니가 움켜쥐고 있던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크게 우시려는가 싶어 나는 고개를 돌려 유골함 쪽을 쳐다보았다. 할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단단히 쥐고 있던 두 주먹이 텅 비어 있었다. 나는 할머니의 두 손을 자세히 살폈다. 그러는 사이 할머니는 천천히 입을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수골실의 모든 것이 잠깐 멈춘 것 같았다. 할머니는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하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할머니가 갑자기 상체를 숙였다. 입 속의 것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는가. 나는 의자에 걸터앉아 오랫동안 할머니 뒤쪽의 흰 벽을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잘 움직이지 않았고 무엇을 먹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셔가려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지 말고, 동물원에 가보자. 집으로 돌아온 후 할머니가 우리들에게 처음으로 한 부탁이었다.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했지만 그것은 분명 동물원이라는 말이었다. 아버지가 동물원에 데려다주지 않자 할머니는 살아 있는 사람이 해야 하는 모든 행위들을 다시 거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기세와 할머니의 고집 사이에서 가족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나는 밤마다 할머니 방으로 가서 할머니의 몸을 쓰다듬었다. 여기 어디쯤 삼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할머니의 몸이 무척 단단하게 느껴졌다. 삼촌은 할머니의 쇄골 위에 올라 있었다. 할머니가 들이쉬고 내쉬는 숨 속에서도 삼촌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어느 날엔가 삼촌은 할머니의 팔목을 그러쥔 채 죽이 담긴 숟가락을 할머니의 입 속으로 밀어 넣어주기도 했다. 먹은 음식이 어쩌다 얹히기라도 하면 조용히 할머니의 등을 쓸어주었다. 나는 삼촌이 그렇게라도 여기서 할머니와 함께 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삼촌, 좋아? 나는 탄 못과 할머니의 무릎을 번갈아가며 만졌다. 할머니는 오래 울었다. 가족들 모두 마음을 진정시키고 일상으로 돌아간 다음에도 할머니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새벽에 홀로 깨어 화장실에 다녀올 때도, 물에 만 밥 한 그릇을 다 먹고 난 뒤에도 삼촌의 베개를 쓰다듬으며 울었다. 어쩌다 밥상에 삼촌이 좋아하던 창란젓이라도 올라오면 그걸 바라보며 오래 울었다. 눕거나 앉거나 간신히 일어서거나 벽에 등을 기대거나. 언제 어디에서건 어떤 자세로든 할머니는 울고 있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속으로 울고 있었지만 나는 할머니가 울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어쩌면 울다 지쳐 손으로 몸을 짚기라도 하면 어디에서건 삼촌이 만져져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그러는 것인지도 몰랐다. 살아 있는 유골함이 되는 일은 무척 힘겨워 보였다. 그래도 할머니는 식구들 앞에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고,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난 오늘 할머니는 혼자서 동물원에 온 거였다. 우리가 걸음을 멈춘 곳은 식물원 입구였다. 할머니를 막 따라잡으려다가 도대체 왜 동물원에 왔고 또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 궁금해 뒤를 따랐던 참이었다. 할머니의 남색 기지바지 속에서 끊임없이 휴대전화 벨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원내 방송이 나왔다. 이하설 조장님, 운영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식물원 뒤쪽에는 고사한 나무들이 즐비했다. 희귀한 꽃이나 과실수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팔려가거나 누군가가 빼돌린 뒤였다. 테마 랜드를 재정비한다면 가장 먼저 손을 대야 할 곳도 여기였다. 할머니는 왜 하필 이곳으로 온 것일까. 마침내 할머니가 걸음을 멈추고 단풍나무 둥치에 기대앉았다. 집에서 동물원까지 걸어왔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을 텐데……. 나는 천천히 할머니에게로 다가갔다. 집으로 모셔 갈 작정이었다. 그때 할머니가 손을 뻗어 땅바닥에 흩어져 있는 나뭇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내 새끼손가락만 한 나뭇조각이었다. 주저할 새도 없이 할머니는 그것을 입에 넣은 후 가슴을 쳤다. 그러다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크으헉, 으흑. 그것은 그동안 가슴에 쌓였던 울음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듯한 소리였다. 나는 다가가 말리지 않았다. 할머니도 얼마간은 큰 소리로 울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주먹으로 툭툭 땅을 쳤고, 나무 둥치에 등을 짓찧었다. 돌로 만든 조형물에 얼굴을 갖다 박았고 두 손으로 머리채를 쥐어뜯었다. 할머니는 그동안 속으로만 쌓였던 울음들을 모조리 뱉어내려는 것 같았다. 그때 식물원 어디선가 커다란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푸앙? 그는 나에게 다른 한국인들과 구별되는 나만의 향기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내가 자기를 찾는 거라 여기고 또 달아나버리면 어떡하지? 푸드덕거리는 새소리와 할머니의 울음이 식물원 안을 가득 채웠다. 죽은 나무들도 잔잔한 바람을 타며 울음소리와 박자를 맞췄다. 나는 할머니가 울고, 푸앙이 새들과 함께 마음을 삭이고 있는 여기가 아주 잠깐 동안만이라도 누군가에게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눈물을 그친 할머니가 다시 걸었다. 나는 할머니를 뒤따라갔다. 할머니는 여전히 뒤에 있는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참 동안 동물원 곳곳을 걷던 할머니는 코닥 필름 사진관 앞에서 멈춰 섰다. 우두커니 서서 문 닫힌 사진관의 창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코끼리 등에 올라 탄 삼촌이 붉은 조련복을 입고 활짝 웃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테마랜드 30년의 모습을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전시된 사진들이었다. 오래되어 빛이 바랬을 뿐, 사진 속의 모든 것들은 충분히 식별이 가능했다. 할머니는 손을 뻗은 채로 창가에 바짝 다가섰다. 삼촌의 사진이 언제부터 저곳에 걸려 있었던 걸까. 테마랜드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저 사진을 그곳에 걸어 놓지는 못했을 것이다. 할머니! 그제야 내가 큰소리로 할머니를 불렀지만 할머니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코끼리 등 위에 앉아 밝게 웃고 있는 삼촌과 그것을 향해 말 없이 손을 뻗는 여인을 찍은 한 장의 사진을 쓸쓸히 바라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 이 사진 속으로도 빗방울들이 쏟아져 내렸다. 정적을 깬 것은 다름 아닌 푸앙이 우는 소리였다. 푸앙은 팀장에게 멱살을 잡힌 채 이쪽으로 끌려오는 중이었다. 여전히 홍학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야, 이하설! 나는 갑작스러운 그들의 등장에 놀라 나도 모르게 할머니!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내내 그렇게 멈춰 있을 것만 같던 사진 속 초로의 여인이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여인의 핏발 선 두 눈이 멈춘 곳은 내가 입고 있는 삼촌의 조련복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단추를 달고 솔기를 여며준 이 옷을 할머니는 단번에 알아차린 것 같았다. 어느새 창틀에서 떼어 낸 삼촌의 사진을 안고 있는 할머니가 다른 한 손으로 내 옷을 가리키며 다가왔다. 팀장과 푸앙도 이쪽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코끼리 울음소리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쏘냐와 튀라는 우리로 돌아갔을까.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나는 주머니 속에 있던 못을 꺼내 쥐었다. 나는 어느 쪽으로도 가지 못했다. 누군가 먼저 잡아당기지 않는다면 나는 언제까지라도 그렇게 서 있을 것만 같았다. <끝> ■ 당선소감 - “기꺼이, 조금 더 말랑해지겠습니다” 타슈켄트 동물원에는 코끼리 두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초원을 훑어야 할 우묵한 눈들이 녹슨 푸슈킨 동상을 바라보고 있지요. 어느 날 저도 모르게 코끼리 우리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야 말았습니다. 늙고 병든 코끼리의 두툼하고 너덜너덜한 귓불을 한참 동안 쓰다듬어 주었어요. 그 코끼리들이 저와 함께 아랄 해를 지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 할머니는 요즘 노인정에서 한글을 배우고 계십니다. 손녀가 쓴 글을 읽겠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저는 아주 오랫동안 천천히 글을 써나갈 작정이므로 할머니는 기필코 200세 장수하셔야 합니다. 기꺼이, 조금 더 말랑해지겠습니다. 이 소식을 누구보다도 기뻐해주신 ‘동인, 그 섬’의 대장 임철우 선생님(‘그 섬에 가고 싶다’를 필사하던 그 순간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잘 견디고 천천히 나아가겠습니다.), 치열하고 엄중한 소설쓰기가 일상의 진부함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제시해주신 최수철 선생님(선생님의 조언과 응원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 마음에 누가 되지 않도록 살고, 쓰겠습니다.), 검룡소에서 풀솜대를 뜯어주신 최두석 선생님(돌아가지 못하는 시의 자리가 아직도 제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글 쓰는 손가락은 절대적으로 겸손해야 함을 일깨워주신 서영채 선생님(밤새 꺼지지 않던 선생님 연구실의 불빛을 바라보며 술 취한 저는 도서관에서 잠들곤 했지요.), 사물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신 주인석 선생님(아, 이제 오디오 튜닝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10년 전 홍성여고 문예반 수업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 겁니다, 이정록 선생님. 좋은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행운입니다. 그 운명을 결정지어주신 어머니, 아버지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 제가 무너지려 할 때마다 옆에서 바로잡아주고 격려해준 권오영 시인께는 미처 다 갚을 수도 없는 마음들을 받았습니다. 함께 공부하는 동안 내내 소설 쓰기의 치열함을 온몸으로 가르쳐주던 김도연 선배께 맥주 한 잔 사드리고 싶습니다. 철없는 저를 뒤치다꺼리해 주느라 고생한, 제일 먼저 축하해준 이진희 시인. 정말 고맙습니다. 부족한 작품을 끝까지 손에 들고 계셨던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같이 힘들어도 조금 더 기운을 낼 수 있는 뚝심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얼른 ‘리보통(Ly-botong)’으로 달려가 그곳에 계신 분들과 커피 한 잔 내려 마시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약력 -본명:이미선. 1983년 충남 보령 출생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한신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 소설전공 수료 -한국국제협력단(KOICA) 단원으로 우즈베키스탄 세계언어대학 한국어 강사 역임 ■ 심사평 - ‘현대인 삶의 축도’ 동물원… 상징적 압축미 탁월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은 모두 열 편. 이 가운데 다시 세 편의 작품을 어렵게 추려 놓고 생각했다. 신춘문예가 필요로 하는 소설은 어떤 소설인가? 우리 소설은 어디로 가야 하나? 단편소설은 산문 양식임에도 언어의 경제성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는 영역이다. 우리는 이 짧은 언어로는 ‘모든 것’을 쓸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양식은 이 ‘모든 것’을 내놓으라고 한다. 어떻게? 수사학, 즉 기교가 우리를 지상적인 삶에서 초월적 의미의 세계로 순간이동시켜 준다. 그러니 기교가 모든 것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할 수도 있다. 상징적 깊이나 환유적 지시 체계를 갖추지 못한 훌륭한 단편소설이란 일종의 형용모순과도 같다. 하이준씨의 ‘은행나무가 있는 풍경’은 현대적 일상을 사건으로 만들어 가는 문체가 돋보였다. 강남의 한 미장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조그만 사건은, 일상의 소소함이 그 한계 내에만 머무르지 않도록 만든 장점도 갖추었다. 김명진씨의 ‘뷰티플 원데이’는 베트남에서 온 아버지와 아버지의 젊은 여인과 ‘나’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나’의 내면의 섬세함이 다문화라는 문제를 사회성 이상의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 그러나 ‘은행나무가 있는 풍경’은 의미를 구성하는 사건이 너무 희박하고, ‘뷰티플 원데이’는 사건을 보편적인 의미로 상승시키는 힘이 부족하다. 이은선씨의 ‘붉은 코끼리’는 상징적 압축미가 뛰어나다. 동물원 코끼리 조련사의 이야기 안에 많은 것을 담았다. 동물원이라는 배경 자체가 어떤 상징성을 띤, 현대인의 삶의 축도로 이해하게 한다. 여기서 동물원을 지배하는 어떤 메커니즘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세계의 어떤 축도와도 같다. 이 작품은 쓴 것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면서 독자에게 시적인 울림을 선사한다. 재능과 생각을 겸비한 이은선씨에게 축하의 말씀과 함께 정진을 당부 드린다.
  • 국회에 가로막힌 이슬람머니 유치

    국회에 가로막힌 이슬람머니 유치

    우리나라의 몫이 된 400억달러(47조원)짜리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원전 공사 발주는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거침없이 뻗고 있는 이슬람의 경제력을 뚜렷이 보여준 사건이었다. UAE의 국부펀드인 아부다비투자청이 운용하는 자산만도 우리나라 한 해 국내총생산(GDP) 규모에 근접하는 8750억달러에 이른다. 각국이 너도나도 이슬람 자본 유치에 발벗고 나선 이유다. 하지만 국내 금융계에는 한숨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슬람자본 조달을 위한 채권(수쿠크) 발행의 길이 사실상 막혀 있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는 이슬람자본의 국내 유입을 활성화하기 위해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이번 정기국회에 제출했다. 독특한 형태로 운용되는 이슬람채권의 수익을 일반 외화표시채권처럼 이자소득으로 간주해 법인세를 면제하는 게 핵심이다. 그러나 지난 2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개정 법률안의 처리를 내년 2월 임시국회로 미뤘다. 금융이자가 아닌 실물자산 형태인 수쿠크 소득에 대해 세제상 혜택을 주는 것은 조세 형평성에 어긋날 뿐 아니라 그 수익이 이슬람 과격세력의 테러 자금에 유입될 수 있다는 것 등을 이유로 들었다. 재정위 소속의 한 의원은 “이슬람채권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이 테러 자금으로 유입될 수 있다는 주장을 여러 경로로 들었다.”고 말했다.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는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이자를 받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슬람 자본은 율법 규제를 피하기 위해 실물투자 형식을 빌려 대출이나 투자를 한다. 이를테면 주택자금을 빌려줄 때 통상적으로는 직접 자금을 대출해주고 거기에서 이자를 받지만 이슬람권에선 해당 주택을 직접 산 뒤 채무자에게 빌려 주고 원리금 대신 사용료를 받는다. 이렇게 금융자산이 아닌 실물자산 형태로 운용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특례를 인정, 세제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당초 정부의 입법취지였다. 국회의 결정에 대해 금융권은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한 금융사 관계자는 “이슬람권과의 사이가 우리나라보다 더 나쁜 미국과 영국에서조차 이슬람 투자수익과 테러자금은 관계가 없다고 결론냈다.”면서 “우리나라가 그쪽에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투자를 받는 것인데 이를 테러자금과 연계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했다. 정부가 이슬람 채권에 대해 세제상 혜택을 주겠다고 발표한 이후 한국 투자에 대한 이슬람권의 관심이 부쩍 높아진 상태여서 자칫 대외 신인도에도 나쁜 영향이 우려되고 있다. 특히 말레이시아, 쿠웨이트, UAE 등 일부 국가의 국부펀드들은 투자 타당성 검토를 위해 한국을 직접 다녀가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각국에서는 이슬람자본 유치전이 치열하다. 프랑스는 적극적인 이슬람자본 유치를 위해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있으며 일본도 이슬람 금융상품 도입을 위해 은행법을 개정했다. 이미 일본은 5억달러 규모의 이슬람채권을 발행했다. 싱가포르도 이슬람채권 발행을 위한 제도 정비를 완료했다. 유영규 김민희기자 whoami@seoul.co.kr
  • 연말 공연계 ‘섹시코드’ 시끌시끌

    연말 공연계 ‘섹시코드’ 시끌시끌

    세밑 공연계가 선전성 논란에 다시 휩싸였다. 일부 공연의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장면을 놓고 찬반 양론이 뜨겁다. ‘섹시 코드’ 역시 문화계의 중요한 트렌드 가운데 하나인 만큼 윤리적 잣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과, 작품성이 받쳐주지 않는 ‘섹시 코드’는 흥행을 노린 수단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엇갈린다. ●관객이 여배우 껴안는 해프닝도 9일 공연계에 따르면 논란의 발단은 가수 지드래곤(21·본명 권지용) 콘서트와 연극 ‘교수와 여제자’다. 인기그룹 ‘빅뱅’의 멤버인 지드래곤은 지난 5~6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가졌다. 세로로 세워진 침대에 여성댄서가 쇠사슬에 묶여 있고, 지드래곤은 이 댄서와 성 행위를 연상시키는 모습을 연출했다. 거친 숨소리도 간간이 섞여 나왔다. 여배우의 전라 연기가 10분가량 펼쳐지는 ‘교수와 여제자’는 지난해부터 ‘외설’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급기야 지난 6일 서울 명륜동 한성아트홀 공연에서 40대 후반 남성 관객이 여배우를 껴안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주최 측은 선정성 논란에 다소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지드래곤 측은 “아이돌 스타에서 성인이 된 지드래곤의 모습을 퍼포먼스로 연출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교수’ 제작사인 ‘예술집단 참’도 “중·장년 부부의 성적 트러블을 다룬 작품인 만큼 어느 정도의 노출은 불가피하다.”면서 “선정적이라는 평은 지극히 주관적”이라고 반박했다. 실제 지드래곤 콘서트를 본 20대 여성관객 김모씨는 “다소 민망한 장면이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그렇게 야하다는 느낌은 없었다.”고 말했다. ●근본적 접근법 고민해야 따라서 ‘선정적이냐, 선정적이지 않으냐.’라는 단편적인 접근보다는 ‘섹시 코드’에 대한 근본적 접근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학과 교수는 “갈수록 거세지는 대중의 섹시 코드 요구가 공연계의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과 결합하면서 거스를 수 없는 문화적 조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게 현실”이라면서 “문제가 되고 있는 지드래곤 공연만 하더라도 주요 관객층이 20~30대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적 섹시함을 핵심코드로 잡은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다시 말하면 ‘꽃미남 아이돌’을 바랐던 대중의 요구가 ‘거칠고 남성적인 아이돌’로 바뀌면서 공연계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인 만큼 외설적이라고 매도하기는 어렵다.”고 진단했다. 문화적 현상을 윤리적 잣대로만 획일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이영미 대중문화예술 평론가도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이분법적 접근법은 난센스”라고 전제한 뒤 “노출 수위가 어떻든 이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녹여내 높은 작품성으로 승화시키느냐가 관건”이라고 역설했다. 예컨대 배우들이 알몸으로 출연했던 연극 ‘논쟁’은 알몸이 상징하는 태고의 순수성과 자유로움을 제대로 표현, 작품성을 인정받으면서 초기의 선정성 논란을 잠재웠다. 하지만 공연계가 ‘트렌드’라는 명분 아래 섹시 코드를 남발한다는 따가운 시선도 적지 않다. 이동연 교수는 “작품성이나 주제와의 연관성이 결여된 채 다분히 흥행을 의식한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장면 연출은 예술계 전반의 퇴보를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영미 평론가는 “이를 걸러내는 것은 평론가와 관객의 냉정한 평가”라고 뼈있는 말을 했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비 주연 ‘닌자어쌔신’ 뚜껑 열어보니…

    비 주연 ‘닌자어쌔신’ 뚜껑 열어보니…

    세계적인 감독인 워쇼스키 형제와 한국의 정지훈(비)이 손잡은 영화 ‘닌자 어쌔신’이 드디어 베일을 벗었다. 이 영화에서 비는 전설로만 알려진 비밀집단 ‘오즈누’파에게 거둬져 훈련을 받고 세계 최고의 암살자로 키워진 고아 출신 역을 맡아 열연했다. ‘라이조’(비)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실력으로 최고의 암살자 자리에 오르지만, 친구를 죽인 ‘오즈누’파에게 복수를 결심하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인다. ‘닌자 어쌔신’은 개봉하기 전부터 화제를 모은 비의 액션신에서도 알 수 있듯 선혈이 낭자하는 하드고어액션 영화다. 잘린 팔다리가 나뒹구는 것은 기본이요, 빠진 눈알과 잘려나간 머리에서 샘솟는 ‘피분수’는 보너스다. 그러나 잔인하다고 눈을 가리기에는 비의 액션이 매우 눈부시다. 체인, 단날검, 양날검, 표창 등의 무기로 완벽에 가까운 무술을 선보인 비는 ‘새로운 가능성을 엿봤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파워풀하다. 특히 이 영화의 관전포인트라 할 수 비의 탄탄한 몸매는 일찍이 할리우드 액션영화에 진출한 성룡과 이연걸의 그것과 비할 수 없을 정도다. 상처, 핏자국으로 가득한 역삼각형의 몸에서 나오는 움직임은 ‘멋지다’보다 ‘아름답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고난도 액션을 무사히 소화한 비에게 남은 과제는 세심한 감정표현과 자연스러운 영어대사의 처리능력이다. 친구를 잃고 복수를 결심하는 장면에서는 감정을 듬뿍 담은 눈빛 대신 치켜든 눈만 있었고, 무게잡고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는 장면에서는 마치 책을 읽는 듯 한 어색한 말투가 귀를 거슬린다. ‘닌자 어쌔신’은 인간 병기로 키워진 암살자 ‘라이조’가 조직을 상대로 복수하는 간단한 내러티브를 가진 영화다. 스토리의 치밀함 보다는 화려한 화면과 액션에 초점을 맞춘 까닭에 러닝타임 내내 지루함을 느끼진 않는다. ‘라이조’의 어두운 내면을 암시하는 검은빛과 목숨을 건 전투에서 베어 나오는 핏빛이 대조되는 구성도 꽤 볼만하다. 이밖에도 그림자를 이용한 액션신과 기예에 가까운 몸놀림을 자랑하는 닌자들의 전투신은 동양적인 색채를 물씬 담고 있어 특히 빛난다. 잔인한 고어액션이 두려운 관객이라면 다소 재고할만한 영화지만, 화려한 액션 뿐 아니라 비 특유의 거친 숨소리를 마음껏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을 고려한다면 여성 관객도 큰 무리 없이 즐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닌자 어쌔신‘은 26일 전 세계에서 동시 개봉된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때이른 겨울에 한숨짓는 쪽방촌… 구룡마을·동자동 가다

    때이른 겨울에 한숨짓는 쪽방촌… 구룡마을·동자동 가다

    쪽방촌에 때이른 겨울이 찾아왔다. 쪽방촌 주민들은 다음해 3월까지 150일간 추위와 사투를 벌여야 한다. 올 겨울에는 유난히 기습 한파가 잦을 것이라는 기상 예보에 주민들의 한숨소리가 깊다. 100원 가까이 오른 연탄값 때문에 보일러를 켜지 못하고 집 주인 눈치가 보여 달랑 한 장 있는 전기장판의 온도도 맘껏 높이지 못한다는 그들. 쪽방촌의 초겨울 한낮은 햇빛마저도 비껴간 듯했다. ●하루2시간 전기장판으로 버텨 체감온도가 영하로 떨어진 지난 3일, 1300가구의 쪽방촌이 모여있는 서울 개포동 구룡마을을 찾았다. 한정수(67·여)씨는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단층 판잣집에 살고 있었다. 4㎡ 크기의 방은 스프링이 주저앉은 낡은 침대 한 대로 꽉 찼다. 찬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방바닥 탓에 한씨는 늘 양말 두 켤레를 신어야 한다. 그는 “중고 연탄보일러라도 들여놓으려 했더니, 못해도 30만원은 줘야 한다기에 관뒀다.”며 고개를 숙였다. 7년 전 중풍으로 쓰러진 남편을 요양원에 보내고 홀로 살고 있는 한씨는 형제들이 달마다 쥐여주는 10만원으로 겨우 버텨나가고 있다. 그는 “몸이라도 아프지 않으면 식당일이라도 할텐데 삭신이 쑤셔 밖에 나가기조차 힘들다.”며 눈물을 훔쳤다. 한씨의 딱한 사정을 아는 이웃 주민들이 온풍기를 주워다 주거나 밑반찬을 만들어다 주곤 한다. 연탄보일러가 있는 집이라고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연탄값이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연탄 한 장에 450원, 배달비를 합치면 한 장당 600원이다. ●“올해는 도움의 발길 뜸해” 구룡마을 주민자치회 부회장인 김원심(61·여)씨는 “지난 2~3년 동안 기름값이 너무 올라 목돈을 들여 연탄보일러로 바꾼 집이 절반가량 되는데 연탄값마저 오르니 주민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주민 이모(50)씨는 “여느 때 같으면 대기업에서 연탄이며 쌀을 나눠줄텐데 올해는 일찍 추워졌는데도 발길이 뜸하다.”고 말했다. 보일러 놓을 형편조차 안 되는 600여가구는 전기장판 한 장으로 겨울을 난다. 이 마을에서 15년째 사는 김분홍(83) 할머니는 한 달에 1만원 나오는 전기세가 아까워 전기장판을 하루 2~3시간만 켠다. 고장난 전기장판 2장을 주워다가 앞뒤로 겹쳐 온기를 유지하는 게 김 할머니의 유일한 월동준비다. 그는 “한 달에 40만씩 나오던 수급비가 석 달 전부터 17만원으로 떨어졌다.”며 한탄했다. 같은 날 오후 7시30분 1000여가구가 모여 사는 서울역 인근 동자동 쪽방촌. 서윤수(58·가명)씨가 사는 다세대주택 3층, 나무 쪽문을 열자 성인 한 명이 겨우 다리를 펴고 누울 만한 공간이 보였다. 방은 냉기로 가득찼다. 서씨는 들어오자마자 전기장판을 켰다. 그는 “6단까지 온도를 올릴 수 있지만 늘 3단으로 켜놓는다. 집 주인이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고 타박해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30년 넘게 막노동을 한 탓에 온몸에 골병이 들었다는 서씨는 지난해 꼬리뼈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그는 “절절 끓는 방에서 몸을 뜨끈하게 지져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쪽방촌 사람들을 지원하는 시민단체 ‘동자동 사랑방’의 엄병천 대표는 “겨울이면 ‘차라리 교도소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는 하소연이 나올 정도”라면서 “최빈곤 계층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정부와 사회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지난해 11월 쪽방촌 개선 종합대책을 발표한 서울시는 1년이 지난 현재, 시내 1391개 쪽방에 단열문을 설치하고 502개의 보일러 단열공사를 진행했다. 또 화재 예방을 위해 3500여개의 모든 쪽방에 소화기를 비치했다. 서울시 자활지원과 관계자는 “쪽방촌의 겨울나기를 돕기 위해 난방대책을 보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글 사진 오달란기자 dallan@seoul.co.kr
  • 거점병원 ‘추석인력’ 확보 못해 한숨

    다음달 2~4일 추석연휴에 상당수 거점병원이 신종플루 비상 진료체계를 유지하게 됨에 따라 대체인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지역병원들의 한숨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1일 의료계에 따르면 신종플루 환자가 집중되는 중대형 거점병원을 중심으로 의료진의 피로도가 크게 높아지고 있다. 하루 12~16시간씩 일하는 것은 기본. 신종플루 의심환자만 하루 수십명씩 늘어나면서 5~6명의 의료진이 신종플루에만 매달리는 실정이다.사태가 장기화하면서 호흡기내과 등 내과계열 의료진은 마땅한 대체인력이 없어 많게는 100~200명의 환자를 혼자서 진료하기도 한다. 환자를 거부할 경우 의료법 위반이 되기 때문에 병원에는 일손이 달린다고 환자를 거부할 권리도 없다. 의료계에선 계속된 진료로 의료진의 체력 고갈로 인한 면역력 약화와 이로 인한 원내 감염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서울의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가을철 감기환자와 독감환자까지 겹치면서 대다수 내과 의료진이 한계점을 향해 다가가는 분위기”라고 한숨지었다. 수도권 이외 지역의 거점병원들은 상황이 더욱 나쁘다. 추가 간호인력을 구할 수 없어 2~3명의 간호사가 하루 100명 이상의 환자 진료 보조는 물론 심평원, 질병관리본부 등 관계기관에 보고서를 작성하는 행정업무까지 도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경남지역의 한 거점병원장은 “거점병원으로 지정만 할 것이 아니라 피로도를 감안해 공공의료기관의 대체인력을 지원해주어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보건소 등 공공의료기관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보건소는추석 연휴기간 매일 정상 근무해야 하고, 보건지소는 3분의1씩 돌아가며 업무를 보아야 한다.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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