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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삼웅 칼럼] 대한민국 임시정부 80돌

    오늘(13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上海)에서 출범하면서 독립전쟁을 선포한지 80주년이다. “백산(白山)에 이는 바람 천지도 시름짓고 푸른파도 구비치는 곳 구룡(龜龍)이 일어나 춤을 추는구나. 어두운 이밤은 언제나 새이려나.모진 비바람만 휘몰아치는 것을….”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내고 임정에 내분이 생기자 25일간 단식끝에 목숨을 끊은 申圭植선생이 망명지에서 쓴 ‘한국혼’의 서두다. ‘모진 비바람만 휘몰아친’절망의 시대에 애국지사들이 이국땅 상하이에모여 임정을 세우고 나라찾기 전쟁을 벌인지 80성상이 흘렀다. 상하이에 임정이 세워졌다는 소식에 고국의 동포들은 노래불렀다. 자유민아 소리쳐서 만세불러라 임시정부 만세불러라 대통령 국무총리 각부처 장관 국제연맹 여러 특사 만세불러라 우리 이미 이민족의 노예 아니오 또한 전제정치하의 백성 아니라 독립국 민주정치 자유민이니 동포여 소리쳐서 만세불러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만세. 망국 9년만에 3·1항쟁의 뜻을 담아 임정을 세우니 ‘일제 36년’은 국권상실의 측면에서 임정이전의 9년일 뿐이다. 임정은 물론 국제법상 통치권이 미치는 국토와 국민이 있어야 하는 일반 정부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렇다고 대한제국과는 시간적 연속성이 없고 주체세력과 이념이 달라 ‘망명정부’일수는 없다. 임정은 한민족의 정신적 구심체가 되면서 향후 27년 동안 줄기차게 독립전쟁을 벌였다. 무장·의열·외교등 모든 방법을 동원한 전쟁이었다. 식민지역사상 우리 임정처럼 일체의 타협을 배격하면서 완전독립을 추구한 사례는없다. 자치론이나 위임통치론 따위를 철저히 배격하면서 ‘완전독립’만을추구했다. 임정의 지도자들이 왕조시대 인물들인데도 복벽(復 )을 거부하고 민주공화체제를 지향한 것은 대단히 선각적이다. 임시헌장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제1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빈부 및 계급없이 일체평등으로 함”(제3조) 등 ‘헌법’정신과 조항이 민주공화제를 지향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국내외 독립운동단체 460개 중 민주공화제 국가의 건설을추구하는 민주지향형이 244개(53%)인데 비해 계급투쟁형은156개(34%), 왕정복고형은 37개(8%), 군정추구형은 23개(5%)로 나타났다. 한민족의 민주지향성을 살피게 한다. 임정은 욱일승천하는 일제로부터 탄압과 회유, 국제열강의 외면과 냉대, 극심한 생활고와 재정난, 그치지 않는 노선 시비와 사상갈등 속에서도 민주공화제의 정통성을 지키면서 항일투쟁의 구심체 역할을 맡았다. 국민의 정신적 지주 역할도 했다. 예컨대 李東輝중심의 좌파계열과 金元鳳중심의 의열단세력까지 포용, 거국적 항일투쟁 전선을 형성한 것은 임정의 정통성과 대표성을 뒷받침한다. ‘한국독립’의 계기가 된 카이로선언이 가능한 것은 임정의 존재때문이다. 尹奉吉·李奉昌의사의 의열투쟁과 항일전선에 몸을 사른 지사들의 희생이중국을 움직이고 중국정부가 미·영 수뇌를 움직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한 것이다. 임정의 최대 성과라 할 것이다. 해방후 국민사이에 이런 노래가 불려졌다. “따따따 따따따 나팔소리 들린다/쿵 쿵 쿵 북소리 들린다/남대문을 열어라 동대문을 열어라/임시정부 들어온다 광복군이 들어온다.” 그러나 임정은 귀환하지 못했다. 임정의 귀국이 거부되면서 한국현대사는이념대결과 친일파가 득세하는 분단과 왜곡의 시대가 되었다. 임정수립 80주년, 해방 54년이 되는 20세기 마지막 임정 기념일에 독립지사들의 순결한 애국정신이 그립다. 남북이 갈리고 지역을 토막쳐서 이념과 이해로 대립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애국지사들의 영령앞에 부끄러워하면서, 임정정신이 국민통합과 환난극복, 남북화해의 바탕이 되었으면 한다.
  • [대한광장] 부활절에 부침-광주는 과거인가

    4일은 부활절이다.부활절은 2000년 전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던 팔레스타인의 어떤 종교 창시자의 생애를 기억하는 축일만은 아니다.부활절은 기독교교리를 넘어 인류가 자신의 삶에 대해 숙고할 만한 그 무엇인가를 제공해 준다.그것은 죄 없이 순결하게 죽어간 한 영혼의 고통과 승리를 기억하는 축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순결한 영혼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살아남은 자들의 역사적 책무에 대해 다시 질문하는 축제이기도 하다.나,죄 없는 죽음 뒤에 살아남은 나,죄 없이 죽은 자와 함께 못박히지 못했던 나,방관했던 나,순결한 자를 변호하지 못했던 나,세번씩이나 그를 모른다고 발뺌했던 나는 아무런 내적인 제의 없이 무상으로 부활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을까. 부활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수난’과 ‘참회’라는 자기정화의 긴 터널을 통과하지 않는 자는 존재의 소생이라는 열매를 입에 댈 수없다.그 열매는 사람의 입에 닿기도 전에 썩어버린다.그의 손에 피가 묻어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팔레스타인에서만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다.그는 도처에서 십자가에 달린다.우리는 죄 없는 자들을 여전히 죽음으로 몰아넣는다.예수는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4·3의 동굴 속에서,광주의 광장 앞에서 십자가에 달린다.그가 십자가에 달릴 때 우리는 어디 있었던가.술집에? 도서관에? 안방에?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 걸까? 김대중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이후 광주문제는 슬그머니 물 밑으로 가라앉은 것처럼 보인다.발포명령자도 밝혀진 바 없고,당시 상황의 책임자들도 다시햇빛 속으로 나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그들은 전혀 아무런 공식적 참회도 한 바 없다.검은 돈을 끌어모아 한 재산 불려서 어딘가에 숨겨놓은뒤 나라를 거지꼴로 만들어 놓고도 추징금 징수에 ‘나 돈 없어’‘배째’하고 버틴다. 어디 그뿐인가.마치 자신들이 희생양인 양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무도 미워하지 말자’고 도사 같은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다.도대체 누가 누구를 미워하지 말자는 말인가.더 가관인 것은 과거에 어떤 짓을했건 아무 상관도 하지 않는 패거리주의자들과 함께 광주의 책임자들이 정치판으로 다시 슬금슬금 복귀할 생각마저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건 한 판의 거창한 코미디다.규모에다 플롯까지 세계 최고 수준이다.한국은 역사적 코미디의 대국이다.‘망각’을 신경안정제처럼 복용하는 이 나라의 국민이 코미디의 단골 관객이다.광주는 이제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깡그리 지워진 것처럼 보인다.아이고,이제는 다 잊었소,덮어둡시다.좋은 게 좋은 거니까.말이야 바른 말이지 내 손엔 피 안 묻혔소,어쨌든 호남 출신 대통령이 당선 됐으니까 그 걸로 됐소. 정말 그런가.망월동이 화려하게 단장되고,호남 출신 대통령이 죽은자들 앞에 헌화하며 눈물을 흘리고,호남 차별이 완화돼 호남 출신 인물들이 정계 요직에 포진하고,그런 걸로 광주는 망각 속으로 사라져도 좋은가.광주의 신음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걸까.그러므로 이제,랄랄라,부활의 계절인가. 다시 광주에 대해 말해야 한다.꼼꼼하고 철저하게 말해야 한다.대통령 자신부터 정치적 문제에 발목 잡혀 유야무야하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다.자신과 소신을 가지고 다시 광주를 거론하기 바란다.얼토당토않은 비극의 책임자들을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그리고 국민 각자는 그 비극의 역사적 의미를 마음 깊은 곳에서 내면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광주의 신음은 사라지지 않았다.그것은 팔레스타인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의 죄 없는 죽음의 의미를 내면화하지 못할 때 그의 신음이 우리 영혼을 떠나지 않는 것이나 똑 같은 이치다.그 신음을 잠재우지 못할 때 우리손은 여전히 검은 피로 물들어 있다.그 손으로 ‘부활’의 희디흰 열매를 만질 수 없다.역사라는 우리의 살이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金正蘭 시인
  • 종교 단신

    ◇원불교 교정원(원장 조정근)은 남자교무 제복을 제정하고 4월28일 대각개교절부터 일제히 착용하기로 했다.제복은 양복과 한복 두 가지로 순결을 나타내는 흰색과 조화를 뜻하는 회색을 기본 색상으로 했다. 양복을 입을 때는 검정과 회색의 기존 양복 안에 둥근 깃을 단 와이셔츠를받쳐입도록 했으며 한복은 전통한복의 동정을 살리되 옷고름을 단추로 대체한 생활한복으로 만들었다.의식을 집례할 때는 제복위에 법복을 입는다. 지금까지 여자교무는 검정치마에 흰색이나 검정색 저고리를 입어왔으나 남자교무는 통일된 제복이 없었다. ◇제3시대 그리스도연구소(대표 김진호목사)는 30일부터 오는 5월4일까지매주 화요일 오후7시 서울 서대문구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강당에서 신학아카데미를 연다.‘여성신학과 교회’를 주제로 한 아카데미 강좌내용은 기독교여성운동,여성신학과 교회개혁,여성교회론,대안공동체 등이다.강사 양미강정신대대책협의회 총무.(02)3141-9190.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최근 가톨릭 인터넷 굿뉴스(http//www.catholic.or.kr)에 인권상담소 사이트를 개설,인권상담에 들어갔다.이 사이트에는 인권상담소 소개 및 자료실,상담실,자유게시판 등 코너가 마련돼있다. ◇다음달 1일 소천(召天) 1주기를 맞는 김동익목사(전 새문안교회 담임) 의설교집이 출간됐다(쿰란출판사펴냄).김목사의 설교집은 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총 9권이 나왔으며 이번에 52편의 설교문을 10·11권으로 나누어 수록했다.
  • 石吾 李東寧선생 오늘 59주기 일대기

    “선생은 재덕(才德)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최후의 한순간까지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사람이었다.”김구선생이 ‘백범일지’에서 石吾 李東寧선생을 기리며 쓴 내용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석오만큼 폭넓고 헌신적이며 종시일관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친 분도 흔치 않다. 그에 비해 평가와 관심이 크게 뒤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는 석오의 애국심과 포용력으로 유지된 바 크다고 하겠다. 8·15해방까지 임정이 유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은 석오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후계자’백범은 석오에 의해 발탁되고 지도되었다. 두사람은 7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혈맹의 義’관계에서 항상 석오가 백범을 발탁하고 지도하는 입장이었다. 석오가 아니었다면 백범의 존재는 나타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04년 석오는 항일청년단을 만들면서 무명청년 백범을 상동교회 청년회에 가입시켰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혈맹의 동지가 되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지 며칠후 백범은 임정의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석오를 찾았고 그의 노력으로 당시 내무총장이던 안창호 밑에서 경무국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이(利)를 보면 겸양을 생각하고 의(義)를 보면 위험을 무릅쓰는” 석오의 인품을흠모해온 백범은 항상 그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해방후 백범은 아들 信을 시켜 중국땅에 외롭게 묻힌 석오의 유해를 고국으로봉환하여 서울 효창공원에 안치하였다. 석오의 생애는 국내에서 선각적 개화운동의 전기와 임정을 이끌면서 망명생활로 생애를 마친 후기로 나눌 수 있다.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나서 잘못된정치를 탄핵하다가 이준·이승만과 함께 옥고를 치루고, ‘제국신문’논설위원, YMCA운동, 을사조약 반대 결사대로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 안창호·양기탁등과 신민회조직, 안창호·이회영과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발행 지원, 상동학교 설립 등 37세때까지 국내에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한일합병 뒤 만주로 망명,서간도에서 이회영·이시영 등과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와 신흥학교를 설립한데 이어 한국군관학교를 세우다가투옥되는 등 만주지역의 항일투쟁을 주도하다가 3·1항쟁후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석오는 망명길에 나서면서 자식들에게“우리가 이제 합병의 참변을 당하였으니 왜놈들은 우리를 금수와 같이 다룰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도 아버지를따라 중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자. 나라없는 백성은 어디를 가나 서럽고 비참한 것이다. 만리타향 객지에서 고생할 각오를 한 몸, 그러나 내가 죽기 전에 조국이 광복되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이상의 더 큰 소망이 없겠다.”고 당부하면서 다시 못올 고국을 떠났다. 석오는 임정의 내무총장, 대통령직무대행, 국무령, 주석 등 요직을 지내고 백범과 함께 임정을 이끌었다.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로 추대되어 항일 구국투쟁을 지도하였다. 1940년 3월 13일 중국 사천성 기강현 임시정부 청사의 초라한 이층방에서한 많은 생애를 접을 때그의 나이 72세였다. 임정은 간소한 국장으로 그의장례를 치렀다. 해방은 그러고도 5년 뒤에야 찾아왔고 석오의 유해는 3년 뒤에야 그리던 고국에 안장되었다. 뒤늦게나마 석오선생의 독립정신과 애국혼이 선양되어 정직한 역사가 쓰였으면 한다. 김삼웅주필kimsu@- 李東寧선생 연표 ●1869년 충남 천안서 출생●1892년 국가고시 응제진사에 합격●1897년 독립협회 활동으로 7개월간 옥고 치름●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항의,연좌데모로 2개월 옥고치름●1907년 신민회 조직에 참여●1910년 만주서 신흥학교 설립,초대소장 취임●1919년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국무총리,내무총장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1929년 한국독립당 이사장·의정원 의장●1935년 임시정부 세번째 주석 취임●1939년 임시정부 네번째 주석 취임,전시내각 구성●1940년 급성폐렴으로 치장서 타계,임시정부 첫 국장(國葬)지냄●1948년 유해봉환,사회장으로 효창원에 안장 - 손자 李奭熙씨 및 후손 근황 “어릴 때부터 조부님께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셨다는 얘기를듣고 자랐습니다만 그동안 기업경영에 전념하느라고 손자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해죄스럽습니다.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으니 조부님의 기념·현창사업에 여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석오 이동녕 선생의 손자인 李奭熙(67)(주)대우 상담역은 석오 선생 기념사업에 관한 포부로 말문을 열었다.경기고·서울대 법대를 졸업(55년)후 중소기업체에 근무하다가 68년 대우실업에 입사한 그는 대우개발 사장·대우자동차 회장·대우 부회장·경총 부회장·대우증권 회장·대우통신 회장·대우일본법인 회장 등 대우그룹 주요계열사의 최고경영자를 두루 거친 ‘대우맨’이다. 그의 부친,즉 석오 선생의 아들 李義植씨(1900년생)는 유명한 내과전문의였다.일제때 보성전문학교의 교의(校醫)를 지낸 그의 부친은 미군정 당시 민주의원·한독당 조직부장 등 정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또 반민특위의 특별검찰관으로도 활동했으며 이듬해 6·25 와중에 납북됐다. 2남3녀의 형제 가운데 그는 차남이다.그의 형 喆熙씨(75년 작고)는 경기고·보성전문 출신으로 보사부장관비서관,문교부 편수국장·기획관리실장,서울교대 학장 등을 지냈다. 그동안 그는 석오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널리 알리기위해 소리없이 많은일을 해왔다.우선 그는 ‘이동녕연구’의 일어판(94년)·중국어판(98년)을사재로 출간했다.89년에는 ‘백범일지’의 필사본을 책으로 출간,앞서 출간된 ‘백범일지’가 원본의 상당부분을 누락시킨 사실도 밝혀냈다.또 작년에는 석오 선생이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현 국회의장격)을 지낸 사실을 토대로 국회의사당 내에 석오선생의 흉상을 건립하였는데 그는 이를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정운현- '臨政 의 거인' 李東寧 석오(石吾) 李東寧(1869∼1940) 선생은 임시정부 탄생의 주역이자 임정의‘기둥’이었다.임시정부가 공식출범하기 직전인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출된 선생은 국호(國號)와 임시헌법·관제(官制)를 제정,3일후인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선생은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비롯해 의정원 의장 3회,주석(主席) 4회 등 무려 일곱 차례나 임정의요직을 역임하였는데 이는 임시정부사를 통털어 선생만이 유일한 기록이다. 석오 선생이 임정내 이념·계파간의 갈등 속에서도 별다른 ‘잡음’없이 요직을 중임한 것은 선생이 공명정대한 업무처리와 온후한 인품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은 때문이다.이 때문에 선생은 임정이 내부갈등이나 일제의 탄압으로 난국을 맞을 때마다 중책을 맡아 임정을 위기에서 구하곤 했다.일제는 이러한 선생을 회유,이용하기 위해 조선인 관리 洪承均을 시켜 선생에게 추파를 던졌으나 이를 즉석에서 일축,이 일로 선생의 부친이 원산에서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뤘다. 합리주의자였던 선생은 출신지역·계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기호(畿湖)지방의 양반출신들이 주축을 이루던 신민회(新民會)에 황해도 출신의‘무명인사’ 백범 金九를 추천하여 가입시킨 것이 대표적 사례다.이 일로두 사람은 남다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백범은 ‘백범일지’ 곳곳에 선생의 행적과 개인적인 친분에 대해 언급해놓고 있는데 이는 평소 백범이 선생을 독립운동계의 선배 이상으로 예우한 것으로 보인다.48년 ‘남북협상’차북한을 다녀온 백범이 아들 信을 시켜 모친(곽낙원)과 처자(최준례·김인)의 유해를 봉환해오면서 이 때 같이 봉환해온 분이 바로 석오 선생과 임정 국무위원겸 비서장 출신 車利錫 선생이었다.62년 선생은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는데 이를 두고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이 많다.임정 정부수반급은 대개 1등급을 받았으며 심지어 李承晩의 비서 출신 임병직씨도 1등급을 받았다. 임정요인 출신 趙擎韓 선생은 생전에 “선생은 지위나 돈 따위를 탐내지 않는 순결무구한 분으로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으뜸이었다”고 회고했다. 정운현- 李東寧 선생 효창공원 묘소서 오늘 추모식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 주석과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을 지낸 石吾 李東寧 선생의 ‘제59주기 추모식’이 13일 오전 11시 서울용산구 효창공원 석오선생 묘소에서 열린다. 석오선생 기념사업회(회장 姜英勳)가 주최하는 이 추모식은 추모기도와 석오선생 약사보고,추모사·추념사,추모가 제창,헌화분향의 순으로 진행된다. 행사 진행을 맡은 석오기념사업회 金錫營 부회장(69)은 “3·1독립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80주년을 맞아 거행하는 올해의 추모식은 감회가남다르다”고 말했다.60주기인 내년에는 추모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재정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장학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추모식에는 崔圭鶴 국가보훈처장, 高建 서울시장,尹慶彬 광복회장,朴維徹독립기념관장,국민회의 張在植·李錫玄·鄭漢溶의원,자민련 李東馥의원,한나라당 李漢東·吳世應·徐廷和·朴明煥의원,李奭熙 석오선생 유족회장,李元範 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李榮載 대종교 총전교,金信 백범선생기념사업회고문을 비롯한 각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상록
  • 굄돌-성의 평등한 관계를 향한 ‘다카선언’

    최근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막을 내린 세계여성대회에서 ‘매춘은 직업,오락,경제의 한 분야로 규정할 수 없다.(매춘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며 인권침해다’라는 ‘다카선언’을 채택했다.섹스관광이나 성상품화 금지 등을 권고한 이 선언은 21세기를 향한 여성들의 메시지다.그러나 인류사회의 이상이 되어야할 ‘성의 평등한 관계’는 결코 쉬운 과제는 아니다. 오래전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던 시절,매춘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면 남자들은 매춘이 ‘필요악’이라는 논리를 폈다.그러나 다카에 모인 여성들은 매춘은 직업이 될 수 없으며 여성폭력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했다.매춘은필요악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이자 나쁜 것,근절되어야 하는 사회악이라는 것이다.다카선언이 당장 매춘이나 성상품화를 근절할 수는 없다해도 그선언의 의미는 크다. 최근 ‘남녀차별금지 및 규제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모든분야의 성차별이나 성희롱에 규제가 가해지게 됐다.그러나 이를 받아들이는대다수 남성들의 이해수준은 매우 낮고 더욱이 문제의 핵심을 벗어나는 것같아 아쉽기 그지없다. 성희롱으로 신고되면 처벌받을까 두려워진 남성들이 ‘이런 것도 성희롱에포함되느냐’ 여직원을 목석으로 보는 훈련이라도 해야하는 거야’는 문의가 쇄도한다는 현실은 성희롱 규제가 지닌 참뜻을 이해하지 못해 벌어지는 해프닝이다.또 어느 대학에서는 올해부터 ‘순결학과’를 신설한다고 하고,‘생식을 위한 성’이 성교육의 전부인 것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순결학과는 무너진 성도덕을 바로 세워보겠다는 뜻일 것이다.하지만 성도덕은 여성만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이중적 잣대로 보아서는 안된다.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한 가부장적 사회가 가해 온 통제의 역사는 길다.남녀간에 널리 적용되는 이중적 성규범과 ‘왜곡된’ 성관계·성문화는 종교·도덕·이념적 포장을 하더라도 불평등한 남녀관계의 거울일 뿐이다.최근 통관된 법으로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에 성희롱을 포함한 각종 성차별 조사,시정 권고권이 부여된 것은 ‘성의 평등한 관계’를 위한 필요한 조치다.
  • ‘민중의 시인’ 김남주 추모 작업 다채

    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섰던 시인 김남주.오는 13일은 그가 48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 지 5년째 되는 날이다.김남주 시인의 사망 5주기를맞아 다채로운 추모작업이 펼쳐지고 있다. 김씨의 서간집 ‘편지’(이룸)와 미망인 박광숙씨의 수상집 ‘빈 들에 나무를 심다’(푸른숲)가 나온 데 이어 문학동네에서는 김씨의 서정시집 ‘낮달’을 12일에 펴낸다.또 시비(詩碑) 건립이 추진중이며 그를 기리는 문학기행도 예정돼 있다. ‘시인’이라기 보다는 ‘전사’를 자처한 광야의 선지자,비인간적인 이데올로기에 혁명의 순결성으로 맞선 민족주의자,분단시대의 철조망을 걷어차던 선봉대장…. 그에게 시는 단순한 문자놀음이 아니다.그것은 민족현실을 타개하는 변혁의 무기요,시대정신의 광맥을 더듬는 유용한 연장이다.그런 만큼 그에게는 과격한 투사의 이미지가 따라다녔다.그러나 그의 서정 시편들을읽다보면 그가 왜 ‘한국의 하이네’로 불리는가를 대번에 알 수 있다.그는때로 사랑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으로 민중 앞에 선다. “내가 손을 내밀면/내손에와서 고와지는 햇살/내가 볼을 내밀면/내볼에와서 다스워지는 햇살/깊어가는 가을과 함께/자꾸자꾸 자라나/다람쥐 꼬리만큼은 자라나/내 볼에 와서 감기면/누이가 짜준 목도리가 되고/내 입술에와서 닿으면/그녀와 주고 받고는 했던/옛 추억의 사랑이 되기도 한다”(‘창살에 햇살이’ 전문) 시의 행간에는 소월이 어른거리고 영랑이 얼비친다. 시집 ‘낮달’에는 ‘창살에 햇살이’‘물 따라 나도 가면서’‘고뇌의 무덤’‘황소 뒷다리에 붙은 진드기 같은 세상’‘솔연(率然)’등 60여편의 작품이 실렸다. ‘편지’는 79년 남민전 사건으로 15년을 선고받은 김씨가 투옥생활중 아내에게 보낸 100여통의 편지를 묶은 것.시시각각 옥죄 오는 삶의 벼랑에서도희망을 갈무리하는 시인의 마음이 담겼다. ‘빈 들에 나무를 심다’는 암으로 남편을 저 세상에 보낸 미망인 박씨가사부곡(思夫曲)삼아 쓴 산문집이다.강화도에서 외아들 토일군과 함께 살아온 5년간의 삶을 들려준다. 한편 민족문학작가회의(02-313-1486)는 오는 20,21일 김남주 문학기행을 떠난다.문학기행은 서울을 출발해 전남 해남의 김남주 생가를 방문한 뒤 광주망월동 묘역에 안장된 김씨 묘지를 참배하는 순서로 진행된다.5월엔 그의 묘지 곁에 시비를 세울 예정이다.金鍾冕 jmkim@
  • ‘역사’ 두렵거든 바른 길을/金三雄 주필(특별시론)

    수명의 사형수중에는 16세 소년도 떨며 옆에 서 있었다.“아플까요?”라고 소년이 묻자 “아니야,전혀 아프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부드럽게 소년을 감싸주며 ‘프랑스만세’를 외친 마르크 블로흐는 맨 먼저 쓰러졌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역사가이며 소르본대학 교수를 지낸 58세의 블로흐는 나치병사들에 의해 이렇게 처형되었다.“아빠, 도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느 것인가요?”란 첫마디로 시작되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 ‘역사를 위한 변명’의 저자는 독일패망을 목전에 두고 리옹 근처의 벌판에서 행동하는 지식인의 삶을 접었다. 역사란 무엇에 쓰는가,역사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에게 역사의 효용가치란 자장면 한그릇보다 못할지 모른다.블로흐는 그 명제를 완성하지 못한채 비명에 갔지만 역사에 대한 질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문을 남긴다. 이와 관련,‘시간은 세계사의 심판관’(헤겔)이란 말은 명언이다.시간이 축적되면 역사가 되고 역사를 쪼개면 시간이 된다.신을 믿지않고 종교를 부정하더라도 시간과 역사만은 믿지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간과 역사만큼 진실과 거짓,정의와 불의를 공정하게 판별해주는 심판관은 다시없기 때문이다. 사마천의 통곡도, 백이숙제의 원망도 시간이라는 역사가 모두 해결해주었다.단종의 절규와 사육신의 분노도 시간이 모두 들어주었다.천도(天道)마저 침묵한 사마천의 아픔,백이숙제의 억울함, 단종과 사육신의 피맺힌 한을 천도를 대신하여 시간이 풀어주고 역사가 옳게 평가했다. ○당대사를 보라 당장 우리시대의 당대사를 살펴보자.나라를 판 대가로 부귀영화를 누리던 매국노와 변절자들이 ‘친일파’로 지탄받아 후손들이 조상을 원망하면서 살고 쿠데타와 양민학살을 일삼던 살인자들은 떳떳하게 사회활동을 하기 어려운 반면 그들에 저항하여 몸을 던졌던 분들은 ‘민주열사’로 대접받는다. 어찌 천도가 무심하며 역사가 눈멀었다고 하겠는가.아직 친일파와 양민학살 세력이 활개치고 있지만,그들은 명분과 국민의 눈총에서 점차 설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시간은 한국사의 심판관이기도 하다. ○대한매일의 역사관 ‘生의 권력의지’를 필생의 중심개념으로설정한 니체가 시간의 가치를 탐구한 것은 당연하다.그는 인간의 삶의 시간성을 동물의 무시간성과 구별하여 “그대곁을 지나가는 가축을 보라.저들은 내일이 무엇이고 오늘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다만 고락에만 매달려 있으니 곧 그들의 순간의 일편(一片)에만 매달려 있기때문에 우수도 권태도 알지 못한다”고 개탄했다.그러면서 니체는 인간의 숙명적 기능을 ‘어제를 기억하고 내일을 아는 것’이란 명쾌한 해답을 제시했다. 시간과 역사의 가치를 잊고 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권력을 탐하거나 물욕에 빠지는 사람,퇴폐행각을 즐기는 부류,곡필아세를 명예로 착각하는 지식인이 너무 많다.이런 현상은 시간 역사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고 순간의 쾌락과 동물적 포만을 즐기려는 반시간 반역사적인 ‘인간모독’이다. 1세기전 국운이 바람앞의 촛불과 같았을 때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 등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맡았던 선각자들은 국권수호에 온몸을 던졌다.이들은 지사적 순결주의, 도덕주의, 순교주의까지 지닌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거룩한 언론인들이었다.이들의 한결같음은 항일구국운동가,정론언론인,바른 역사학자라는 일체성이다.아마 이들이 믿었던 신이 있었다면 ‘역사’또는 ‘역사법칙’이 아니었을까. 당시 많은 권력자,지식인들이 시류를 좇아 매국의 대열에 설때 이들 선각들은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역사의 대열에 섰던 것이다.白凡의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정도(正道)냐 사도(邪道)냐가 생명이라는 것”도 바로 이런 역사법칙의 준거라 할 것이다. 역사를 흔히 대하장강(大河長江)에 비유하지만,역사는 모든 오물을 받아들여 스스로 썩는 강물과는 다르다.역사란 받아들일 것은 받고 배척할 것은 배척하면서 종국에는 반드시 바르고 옳게 회귀하는 것이 역사,그 대하장강의 법칙이고 엄숙성이다. ‘역사’가,그 평가가 두렵거든 진실과 정도를 걸으라.이는 바로 ‘대한매일’이 추구하는 역사관이며 마르크 블로흐가 꿈꾸었던 ‘역사의 쓰임새’이기도 하다.
  • 윤대녕씨 장편 ‘달의 지평선’/감옥간 친구의 애인과 결혼­이혼…

    ◎세기말적 사랑과 시대의 상처 그려 90년대 감수성의 상징적 작가로 꼽히는 윤대녕씨(36)가 ‘추억의 아주 먼 곳’에 이어 2년 6개월만에 새 장편소설 ‘달의 지평선’(전2권,해냄)을 내놓았다. 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살아온 불특정 다수에 해당하는 한 개인의 세기말적인 사랑과 시대의 상처를 그린 작품. 10년의 기간을 시간배경으로 한 이소설은 한편의 긴 여행기록으로,시대의 경계에 선 인간들의 불안한 존재의식을 더듬는다. 이를 위해 작가는 80년대 상처에 대한 90년대식 문답풀이라는 소설적 장치를 동원한다. 주인공은 80년대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남창우. 그는 87년 6·29선언뒤 감옥에 간 친구의 애인과 결혼하나 이내 이혼한다. 새로운 여자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 역시 곁을 떠난다. 이같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그는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파탄에 이른 원인을 자기 안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 뿐 아니라 타인의 삶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9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차라리 상처 투성이의 80년대로 돌아가 순결한 사랑과 참된 인간성을 회복할 것을 당부한다. 기울고 차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달의 영휴(盈虧) 이미지는 시대에 따라 바뀌는 사랑의 양상에 관한 은유. 소설 제목 ‘달의 지평선’은 바로 이를 시사하는 것이다.
  • 白堊館 포르노(林春雄 칼럼)

    70년대 후반,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이다.카터 대통령의 결혼한 아들과 며느리가 백악관에서 얼마동안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문제가 됐다. 대통령과 부인,미혼 자녀들의 백악관 생활비는 정부가 지불할 수 있으나 결혼한 자녀의 생활비까지 국민의 세금으로 낼 수는 없지 않느냐는 의문의 제기였다.이 문제가 언론의 시빗거리가 되자 대통령이 기자들 앞에 나와 아들 가족의 생활비는 개인적으로 지불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한 식탁에서 밥을 먹은 대통령과 아들의 식비를 어떻게 나누어 냈는지 후문은 전해듣지 못했으나 백악관은 그러고야 무사했다.석유파동때는 겨울을 앞두고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에너지 절약을 호소한 바 있었다.공교롭게도 그해 겨울 백악관 난방비가 전년에 비해 더 많이 지출됐다는 사실이 다음해 봄에 밝혀졌다.대통령은 이 문제에도 공개적으로 사과를 해야했다. ○사생활과 대통령직 수행 백악관이란 그런 곳이다.수백명의 기자들이 24시간 초롱초롱 눈망울을 굴리고 있고 세계의 촉각이 모아져 있는 매우 특별한 곳이다.이런 백악관에서 대통령이 백주,그것도 근무시간에 젊은 여직원과 일을 벌였다.대통령의 도덕성이 문제인 것은 무론(無論)이거니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판단력이다.그런 일을 하고도 무사하리라고 생각했다면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수 미국민들은 아직도 대통령의 사생활은 사생활이고 대통령직 수행은 별개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이런 점은 항상 점잖은 한국 사람들로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면이다.미국사람들이 얼마나 실용적인가를 보여주는 실례라 할 것이다.미국의 이같은 실용주의가 과연 언제까지 유효할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이번 사건을 보고 어떤 칼럼니스트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종말”이라고 우려했다.미국의 상업주의가 사태를 이토록 키워놓았다는 것이다.백악관의 그 순결한 이미지는 어떻게 할 것이며 미국의 지도력은 또 얼마나 손상됐는가. 프랑스의 르몽드지는 ‘미국식 지옥’이란 사설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위증을 입증하기 위해 그토록 수치스럽고 혐오스런 성행위 내용을 세밀하게 묘사해야 하느냐고 반문하고 있다.케네스 스타 검사는 이같은 ‘백악관 포르노’를 제작해 내기 위해 물경 400만달러의 국민세금을 추가해 소진(消盡)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악역을 한 것은 역시 언론이다.음란한 용어가 무려 5,000자나 포함된 보고서 내용을 그대로 보도한 것이다.공개하지 않기로 했던 클린턴의 대배심증언마저 끝내는 방송되고 말았다.이런 저런 변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언론의 추악한 상업성이다. ○위험 천만한 언론 상업성 평소 어느 신문이 이런 유의 내용을 활자화했다면 “비열한 선정주의”라고 필시 펄펄 뛰었을 미국의 권위지들도 대통령의 일이란 이름으로 아무런 죄의식 없이 모든 것을 활자화했다.음란성 표현을 삼가야 한다는 것은 공익 언론의 기초적인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일반의 것은 안되고 백악관의 것은 괜찮을 성질의 일이 아니다. 한국언론도 마찬가지다.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신문윤리 규정을 갖고 있는 한국의 신문들은 한국의 문화적 현실을 고려해 적절치 못한 용어는 다소 완화해 소개한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결국 쓸 것은 다 썼다. 이번 사건이 세계에 전하는 메시지가 적지 않다.특히 상업언론에 주는 경고를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 사간동 갤러리현대서 ‘우연의 만남’展

    ◎3인의 젊은 작가 3색깔의 작품세계 3개층서 전시회/노상균­밤무대 의상 스팡클로 순결함을 표현/도윤희­새벽녘 안개의 숲 연상시키는 추상화/서정국­대나무와 철의 조화와 反조화 눈길 국내 화단에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노상균 도윤희 서정국 등 3명의 젊은 작가가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 현대(734­8215)에서 ‘우연의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동시에 전시회를 갖는다(9월2일까지). 이들은 남이 관심을 갖지 않는 특이한 대상과 재료에 주목,독특한 조형세계를 구축하는데 비교적 성공한 작가들로 각각 한 층의 별도의 공간에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노씨는 재료의 특이함과 끈질긴 장인정신으로 주목을 받아온 작가.그는 밤무대 의상에서 볼수 있는 스팡클을 재료로 환상적인 입체와 평면작품을 선보인다. 푸르른 바다를 연상시키는 미니멀 회화,하얀 스타킹을 신은 듯한 하반신, ‘시퀸’이라 불리는 반짝이는 재료 자체로는 유치한 느낌이 들지만 노씨의 손에서 예술품으로 완성되는 순간 재료적인 속성과는 정반대의 순결함과 그윽함을뿜어낸다. 빛의 반사각에 따라 동심원을 그려내기도 하고 오목,볼록 등 입체감과 함께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도 이 작업의 매력이다.실로 연결된 수천개의 시퀸을 한개씩 풀로 붙여나가는 수공과정에서 장인정신이 느껴진다.노씨는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했으며 미국 뉴욕의 플랫 인스티튜트에서 수학했다. 한국미술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작고작가 도상봉씨의 손녀인 화가 도윤희씨는 올해초 처음 참가한 마이애미 아트페어에서 예상외의 돌풍을 일으켜 화제를 모았던 주인공. 이번 전시에는 현미경을 통해 본 세포분열과정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추상화가 선보인다.연필과 유채로 그린 작품은 그러나 세포 분열과정과는 아무 연관성이 느껴지지 않는다.그보다는 새벽녘 뽀얀 안개에 뒤덮인 숲을 연상시킨다. 도씨는 성신여대 미대 서양화과를 나와 92년부터 2년동안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일했다.오는 9월 뉴욕 아트페어 참가 예정.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활동해온 서정국씨는 나무 철 산업폐기물 사진 비디오 등을 소재로 창작열을 과시해온 작가.이번 전시에는 철을 소재로 대나무 형상의 작품이 선보인다.대나무는 그에게 고향과 유년시절을 상징한다. 철을 토막내 용접과정을 거친 뒤 연결한 이 작품에서 휘어는지지만 꺾이지는 않는 대나무의 강인함이 철의 속성과 조화를 이룬다.홍익대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독일 쿤스트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현재 계원예술대학 조형과교수로 재직중이다.
  • 베르디 오페라 ‘팔스타프’(명반과 함께하는 음악여행:8)

    ◎주세페 베르디/희극,일상과 노년의 과정/호색한 팔스타프卿 계교에 빠져 망신살/세익스피어 원전으로 비극 극복의 오페라화/더 우월한 삶의 亂場 일상스민 죽음의 미소/83세 토스카니니 지휘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1.여인숙 술집. 응축한 음악이 웃음을 폭발시킨다. 그리고 ‘응축과 폭발’이 시작부터 의인화(擬人化),따아,따아,딴,단 세 음(音)으로 딴전을 핀 후 씩씩하게 돌아다닌다. 뚱보에다 배불뚝이,모주꾼에 호색한인 팔스타프가 그렇게 소개된다. 소개는 반복되고 장면이 진행된다. 정작 팔스타프는 술에 쩐 상태. 게으르게 퍼져있다. “팔스타프!” 박사가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그렇게 눈을 부라리지만 그는 대꾸가 없다. “팔스타프경!” 박사가 그렇게 고함을 질러도 소용이 없다. “왜 내 하인들을 두들겨 패고 그러나.” 그렇게 다그치는 박사를 그는 아예 무시해버린다. “주인장! 세리주 한 병 더!” 음악은 팔스타프 대신 돌아다니고…. 희극 오페라(오페라 부파) ‘팔스타프’는 그렇게 시작된다.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적절한 웃음 의 축제를 위한 무대가 그렇게 마련된다. 팔스타프는 유부녀를 꼬셔 재미도 보고 재정문제도 풀어보려 한다. 그러나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는 오히려 그 여자와 자기 주변사람들이 꾸민 계교에 빠져 지독하게 골탕먹고 호되게 망신당한다. 그것도 두 번 씩이나. 팔스타프는 실의에 빠지지만 끝내는 술과 웃음으로 낙천적이다. 해피엔딩도 있다. 젊은 딸이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젊은 연인과 결합에 성공한다. 2.오페라 ‘팔스타프’의 이야기장(場)은 이렇듯 매우 평범하다. 대본 자체가 셰익스피어 희극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과 사극 ‘헨리 4세’를 원전으로 하고 있다. 음악의 장은? 다르다. 의인화한 음악=웃음이 오페라가 진행되는 동안 내내 응축,폭발과정을 심화­확대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두 장의 관계 속에서 ‘과정’이 결론을 극복하는 광경. 일상을 매개로 웃음이 성(性)의 온습(溫濕)과 음탕을 포괄한다. 그리고 바로 그 과정속에 다시 젊고 청아한 사랑이 탄생한다. “내 황홀의 노래가 내 입을 떠나 깊은 밤멀리 여행한 후 다른 사람의 입술을 만나고 그 입술이 단 한마디 대답해준다면 음악은 더 이상 홀로 있지 않고 은밀한 조화의 기쁨에 떨고 동틀 무렵 사랑으로 온 공기를 채우며 원래 입술로,다른 목소리와 함께 돌아오리니 돌아와 다시 소리를 얻고 그러나 노래의 목적은 자신을 가르는 것을 통합시키는 것 뿐 그렇게 나는 연인의 입술에 입맞추었네…” 그(가사와 선율의 겹침이 자아내는) 청아함은,낭만주의와 달리,문명의 나이를 아는 청아함이다. 그것은 비비꼬이지만 비비꼬임 자체를 순정성(純正性)의 자양분으로 전화한다. 그리고 육체의 순정­순결성보다 우월한 역사적 순정성을 일상 속에 창조한다. 이것은 상부구조의 반영인 비극을 하부구조의 반영인 희극이 극복하는 ‘과정’ 그 자체의 음악­오페라화에 다름아니다. 3.고대 그리스비극에서 일상인은 전령,보초 등 미미한 역할 뿐이었다. 그들의 우스갯소리가 하부구조의 유일한 반영이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서 웃음은 ‘음탕을 동원한’ 정치 풍자였다. 그렇게 시작된 연극에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극복하는데는 2천년 이상이 걸렸다. 오페라 부파는 연극의 극복과 더불어,특히 이탈리아 희극과 춤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다시 200년 이상의 발전 과정을 거쳐 베르디의 ‘팔스타프’에 달한다. 그토록 허랑방탕했던 웃음이 음악을 매개로 총체보다 더 우월한 삶의 난장(亂場)을 펼친다. 아니,난장으로 펼쳐진다.동시에 난장을 포괄하는 새로운 총체가 예감된다. 매우 강력하게. 이때,무엇이 보이는가. 아,음악이 죽음을 매개한다. 일상에 스며든 죽음. 그 죽음이 음악의 모습을 띠면서 모종의 미소를 흘린다. 마침내 검은 가면도 없이. 삶과 죽음이 살을 섞는 성(性)과 성(聖). 세속의 종교화. 그 속에 바리톤과 테너가,남자와 여자가,선율과 가사가,아리아와 레시타티브가 각각 완벽하면서도 더 큰 총체를 구성한다. 페르골레시­로시니를 계승한 오페라부파 테너 청아성(淸雅聲)의 경지가 절정에 달하면서 그 모태(母胎)인 바리톤 영역과 완벽하게 한 몸으로 겹쳐진다. 아니 그것은 이미,새로운 총체의 음악화이다. ‘팔스타프’에는 여느 오페라작품을 능가하는 아리아와 중창이 수두룩하지만 따로 분리되어 불리는 경우는 드믈다. 비극은 일상을 끝내지만 희극은 죽음을 일상속으로 ‘연장’시킨다. 희극이 낭만적일 수는 있어도 낭만주의적일 수는 없는 까닭이다. 이탈리아 부파 음악은 독일­프랑스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그날그날의 이름없는 일상으로 존재하면서 모차르트­바그너를 비롯한 오페라 대가들에게 ‘열등감의 교과서’로 작용했다. ‘팔스타프’는 그 과정을 역전시킨다.베르디로 하여 이탈리아는 대망하던 일상의 이름을 갖게 된다. 4.베르디는 1893년,즉 80세 때 ‘팔스타프’를 무대에 올렸다. 출세작 ‘나부코’(1841),대 히트작 ‘리골레토’ ‘라트라비아타’등을 거쳐 ‘아이다’(1870)를 끝으로 무대 은퇴를 선언한지 장장 23년 만의 일이었다. 아 그랬던가. 체념과 노년의 과정조차 이 작품은 요했던 것인가. 대본작가 보이토는 베르디와 예술적으로 대립했던 사람. 그렇다. 이 작품은 화해의 과정조차 요했다. 그 모든 과정들이 ‘팔스타프’의 과정으로 응축­폭발,수천년 문명의 나이를 먹은 웃음을 노년화하면서 동시에 일상 속에 낯익은 죽음의 모습을,웃음으로 형상화 한다. 그렇게 과정이 과정화하고 그 총체를 능가하고 죽음은,허망한 채로,위안에 가깝다. 이 위대한 ‘과정의 미학’을 전설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가 83세의 나이로 연주한다. 그는 27세 때,즉 ‘팔스타프’ 초연 1년 후 이 작품을 직접 지휘했다. 그후 둘 사이에 깊은 예술적 교감이 오간다. 그렇다. ‘팔스타프’는 토스카니니의 과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팔스타프’를 통해 토스카니니의 뿌리 깊은 바그너 취향이 극복된다. 그런 그의 83세 노년 연주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1950.4&8 녹음. 1990. BMG60251­2­RG 바리톤 주세페 발뎅고 외(外) 로버트 쇼 합창단(지휘:로버트 쇼)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아르투로 토스카니니
  • IMF시대 여성象/李春鎬 여성유권자연맹 회장(서울광장)

    한국인을 고개숙이게 한 IMF 한파의 위력은 밉지만 우리 사회의 남녀 역할관을 변화시키는데는 큰 공헌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게도 단단히 닫혔던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아침 햇살에 서리 걷히듯 아스라이 녹아 내리면서 여성상에 대한 변화의 문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 몇 달전까지만 해도 가냘프고 늘씬한 서구적 외모와,귀엽고 사랑스러우면서도 순결함을 지닌 다소곳한 현모양처형이 여성을 평가하는 가치기준이 되어 왔다. 그로 인해,여성들은 아름다워지려는 욕망에 거의 모든 것을 투자하고 낭비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IMF시대의 경제적 고통이 이제 겨우 7개월을 넘기고 있는 시점에서 남성들이 원하는 여성상이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 요사이 영화나 만화,그리고 광고 속에서까지 푼수스럽더라도 돈 잘 벌고 억척스러운 여성이 각광을 받고 있다. 영화 ‘GI제인’의 데미 무어같은 독립적이며 강한 투사형의 여성,가정경제를 잘 꾸리고 남편 기살리는 사랑스런 여성,이 두 역할을 완벽하게 해 낼 수 있는 여성을 이 사회와 남성들은 당장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돈 잘버는 억척여성 각광 하지만 IMF시대가 끝나고 우리 사회의 힘든 상황이 모두 끝난 뒤에도 남성들은 진정으로 당당하고 능력있는 전문직 여성과 투사적인 여성 해방군과 같은 억순이를 이상형의 여성으로 생각할 것인지에는 의문이 간다. 남성들의 편의와 요구에 여성이 맞춰지는 한시적인 사회현상보다는 여성 스스로 변화돼야 한다.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변화하느냐는 것이다. 이에 해답을 주 듯,바버라 마코프가 쓴 ‘딸,이렇게 키워라’와,저넷 게이트버그의 ‘강한 딸 만들기’등에서 여성이 강하고 행복한 존재로 새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책들은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시몬 드 보봐르의 실존주의 철학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로 하는 여성상의 방향타를 설정하는데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남성 역시 변화해야 한다.근육질의 표정없는 포커 페이스에 가족의 짐을 혼자 짊어지고 끙끙대는 미련한 남성이 아니라 부드러움과 융통성을 갖고 가정적 역할을 공유하는 그런 남성을 이 시대는 원하고 있다. 지금은 남녀 모두가 열린 사회를 위해 새롭게 변해야 한다. ○열린사회 남녀 모두 변해야 이제는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남성과 그 사회문화의 잣대에 의해서 재단되지 말고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전 생애에 걸쳐 노력할 때 자율적인 민주시민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다.즉 자율적인 인간으로서 살아가겠다는 깊은 깨달음이 내면으로부터 솟구칠 때 자신의 가치를 공평하게 배분받을 수 있는 과정에 참여하게 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 행복을 느끼게 된다. IMF시대를 통해서 한국 여성상의 변화 뿐만 아니라 정치판까지 깨끗하게 개혁되길 희망한다. 개혁은 언제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때가 있는 법이다. 정부가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가 확고하더라도 국민의 기대가 고조된 시기를 놓치고 나면 다시 기회를 얻기는 어렵다. 남녀평등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진 金大中 대통령과 여성운동 1세대인 李姬鎬 여사의 깊은 배려가 정부의 개혁 뿐 아니라 평등사회를 만드는데 반드시모아지기를 바란다. 이 모아짐을 갖고 남녀가 역사발전의 추진력이 되어 IMF 한파의 긴 터널을 지나 들꽃 만발한 평야를 모두 함께 달리고 싶다.
  • 발레리나 金純晶(이세기의 인물탐구:170)

    ◎‘동양적 발레’ 자신만의 이미지/타고난 연습벌레… 고난도 테크닉 모두 소화/안무하고 춤춘 ‘신화의 끝’ 발레팬 사로잡아 지난 해는 발레리나 金純晶에게 여러가지로 의미있는 해였다. 87년 국립발레단 창단 25주년 기념으로 무대에 올렸던 ‘노틀담의 꼽추’를 10년만에 다시 춤춘 것과 그가 몸담고 있는 동덕여대에 무용과가 정식 출범한 것.거기다 제자들과 ‘공기의 정(精)’을 공연했고 그가 안무하고 춤춘 창작발레 ‘머물며’가 민속춤제전에서 안무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그중에서도 ‘노틀담의 꼽추’는 표현영역의 확장과 무용수로서의 도약(跳躍)을 보여준 결정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이 무대에서 그는 에스메랄다의 야성과 순결한 여심을 생기발랄과 스며드는 슬픔으로 표현하여 관객을 감동시켰다. 그의 요염함은 이미 86년 ‘튜닉 팬터지’에서 발휘되기 시작하여 그가 춤추었던 우아한 ‘백조의 호수’와는 달리 클래식의 베일을 활짝 벗고 ‘깨끗하고 담백한 느낌과 탄탄한 춤집’을 각인시켰다. ○‘머물며’로 안무상 수상 또한 쌍꺼풀이없는 고전적인 눈매와 긴 팔다리는 ‘동양적 발레’라는 ‘자신만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무리가 없었다.이후 ‘돈키호테’를 마지막으로 프리마의 지위와 호칭,주어진 공간에서는 자신의 내부에 숨겨진 철학과 사색을 쏟아놓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87년 발레단을 떠나 그는 자신만의 창작발레에 몰두하게 되었다.만약 그가 지금까지 대극장무대에 머물러 있었다면 오늘의 변화된 김순정의 창작발레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타를 만들지 않는 국립발레단에서 명실공히 5년간의 프리마시대를 마감하고 이번엔 부군인 朴丙煥씨(외교통상부 근무)를 따라 발레의 본고장인 영국에 유학,런던 라반센터와 로열발레 아카데미에서 마치 춤추지못해 한이라도 된 듯이 밤낮없이 연습에 매달렸고 몸을 회전시키는 필루에트와 푸에테,아티튀드와 바느질 스텝인 부레에 이르기까지 난이도가 높은 갖가지 테크닉들을 몸의 일부처럼 익혀나갔다. ○발레 본고장 런던 유학 그리고 2년만에 영국에서 돌아와서 선보인첫작품 ‘빛깔’은 ‘그의 모든 것이 그속에 다 들어있다’는평을 받을 수있었다.그때도 여전히 무용수로서 특출했던 프리마의 매력을 상실하지 않았고 격조와 힘과 꿈틀대는 생의 갈망이 춤속에 건재하고 있었다.백색 의상에 꽃을 들고 유년기의 환상을 다스리는 그의 빛깔은 거의 발레작품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이었으며 국립발레단의 클래식발레를 사랑하던 팬들은 더이상 김순정만의 순백의 감수성과 정결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안무하고 춤춘 작품중에서 ‘신화(神話)의 끝’도 빼놓을 수 없는 수작이다.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간주곡과 비제의 ‘카르멘’ 전주곡에 의존한 이 작품은 ‘강렬한 음악으로 극적인 상황을 연출한 드라마틱한 분위기’로 젊은 발레팬들의 눈길을 일시에 사로잡았다. 맨발과 토슈의 대비,발끝에서 튕기는 힘의 배분은 ‘감정처리의 성숙함’과 ‘신성(神性)에서 벗어나려는 인간다운 갈망’을 보여주었고 결국은 신과의 대결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으로 겸허하게 마무리짓는 것이 특징이다.평론가 김경애는 ‘몸선의 지시언어(指示言語)’는 시종 아름다움을 동반하면서도 필요이상으로 덧칠하지 않고 사유와 성찰,자신의 기질탐구를 세세히 제시하기를 잊지않았다’고 평한다. ○신선한 현대적 무대 창출 과연 정열적이고도 순발력있는 싱그러움으로 그는 젊은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끊기듯 이어지는 감정의 전이는 불협화음적인 파괴미(破壞美)마저 창조하는 가하면 억압속에서 자유롭고 싶은 의지를 스타의 카리스마로 온몸에 담아낸다.이 역시 뛰어난 기교없이는 불가능한 표현이며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의 일상적인 모습은 어느때보다 신선한 현대적 무대를 창출해낸다.이른바 성격을 연출하는 춤에서 고난도의 기교를 무기로 하는 고전발레에 이르기까지 전천후로 춤추는 김순정의 기량은 나이에 비해 이미 모든 것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한 차원이라고 할수 있다. 그가 무용을 하게된 것은 어머니 김남숙씨가 딸의 남다른 재능을 발견하여 10살되던 해 남산어린이회관에 있던 부설 무용반에 데려가면서 부터다. 그곳에서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를 배울수 있었고 고3때 이화여대가 주최하는 전국무용콩쿠르에서 최우수상,서울대 사대 체육과에 진학하면서 이대와 경희대로 이어지는 무용계의 인맥에서 다소 소외되는 감이었으나 피나는 연습으로 외로움을 달래면서 ‘하루에도 수십번씩 최고의 발레리나가 될 것을 굳게 다짐했다’고 말한다.대학 3학년때 무용협회가 주최하는 신인무용콩쿠르에서 글라즈노프 작곡의 ‘사계’로 문공부장관상,다음해 동아무용콩쿠르 대상을 수상하면서 교사자격증을 반납한채 지체하지않고 그는 국립발레단에 입단했다. 별로 커보이지 않는 체구에 작고 야무진 얼굴,억척스럽다고나 할만큼 노력에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그는 화려한 세트나 기괴한 몇개의 동작만으로 창작성을 부르짖는 주변을 비웃기라도 하듯 ‘전신에서 땀이 배어나는 춤’으로 삶의 절규를 간절하게 춤추어 낸다.‘일상의 지루함으로부터,정의가 죽어버린 부당함으로부터,위선과 가증스러움이 포장된 이중인격이 판을 치는 속에서’ 오로지 탈출하기 위해 그의 온몸은 솟구쳐 오르는 열기로 무대에서 언제나 활활 타오르고 있다. ○자신의 단점 보완 극복 그런 중에도 끊임없이 자기를 지키고 남의 장점을 존중하며 자신의 단점을 보완,극복하기를 잊지 않는다.가족은 그의 예술을 이해하여 역사와 철학 등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는 부군과의 사이에 아들(재영·10) 하나.부친은 서울대 경영대 김원수 교수다. 긴 명상속에서 작품을 분석하고 기획하는 그는 디베르시티망과 트릭까지도 철저히 연구하는 학구파로서 내면에 깔린 심성을 건드려 김순정의 춤을 이룩하려는 야심에 차있다.그의 꿈은 러시아의 마야 풀리체스카야나 스승이던 이시다 다네오,불멸의 폰테인 마곳처럼 70세가 넘어서도,아니면 그 이상 무대에서 춤추는 영원한 현역으로 남고 싶은 것이다. □연보 ▲1960년 서울출생 ▲1978년 이대주최 전국학생무용콩쿠르 최우수특기상 ▲1979년 서울예고졸업 ▲1982년 신인무용콩쿠르 발레부문 특상 및 문공부장관상 ▲1983년 서울대사대 체육과졸업(임성남 박혜련 진수인 사사),동아무용콩쿠르 대상,국립발레단초청 ‘백조의 호수’및 ‘세헤라자데’출연 ▲1983­87년 국립발레단에서 ‘처용’‘배비장’‘춘향의사랑’‘고려 애가’외 ‘호두까기인형’‘카르멘 조곡’‘노틀담의 꼽추’등 주역 ▲1985­92년 충남대 한성대 숭의여전등 출강 ▲1987년 이대 교육대학원졸업 ▲1987­89년 영국 라반센터 및 R·A·D(로열 무용아카데미)연수 ▲1990­91년 국립발레단 주역 ▲1991­95년 청주대 동덕여대강사 1993­현재 한국발레연구회이사, 바탕 춤전 ‘빛깔’안무 출연 ▲1994년 개인발표회, 한일댄스 페스티벌 ‘일상의 꿈’안무·출연 ▲1995­현재 동덕여대무용과 교수 ▲1997년 국립발레단 ‘노틀담의 꼽추’,민족춤제전 ‘머물며’안무출연 올해의 안무가상(97년) ‘몽유(夢遊)’‘공주무덤’‘길위에서’‘풀피리의 춤’외 다수
  • 음악평론가 韓相宇(이세기의 인물탐구:169)

    ◎‘올곧은 비평’ 음악계 정의의 사제/방송·강연 통해 고전음악 정신 전하는데 전력/음악만 생각하고 음악속에 살아가는 ‘노신사’ 누군가 음악평론가 韓相宇를 향해 ‘신비로운 음악의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라고 했다.그의 해박한 음악지식은 단순히 평론가의 차원이 아니라 몸속에서 음악이 넘쳐서 흘러나오는 식이다.그가 음악을 감상하는 태도는 한음한음을 주의깊게 들으면서 악보의 쉼표와 점하나까지도 놓치지 않는 실력이다. ○논리정연한 이론가 음악을 통해 정신적 위로와 감동을 맛보기 위해서는 옷깃을 여미고 기도하듯이 콘체르토와 심포니에 접근해 나간다.거짓이 없는 순결한 마음을 지키면서도 예술가의 고뇌나 센티멘탈리즘대신 이론가답게 논리정연하고 글귀마다에 번뜩이는 경구가 도사린다. 악곡뿐만 아니라 그 곡에 관련된 예술가 자신의 삶과 죽음,연주에 얽힌 작은 에피소드 하나까지도 철저하게 궁구(窮究)하여 절중(節中)을 기하는 주의다. 그러나 미소망상(微小妄想)이 없고 자신을 포장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원로 박용구씨의 말대로 ‘어떤 경우에도 결백하고 청담(淸淡)한 인품을 지닌 신사가 한상우’인 것이다. 이른바 ‘작곡가나 작품명을 줄줄이 외우고 디스크 진열을 자랑삼는 것’은 천열(賤劣)하다고 지적하고 전통을 중시하지만 완강하게 자기고집만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자연스럽게 자유하는 마음가짐이 그의 인간됨이며 옳지 못한 일을 지적할 때도 날카로운 송곳을 드러내기보다 상대방의 실수를 부드러운 유머와 재치로 감싼다. 그의 생활방식도 음악을 대하는 진지함과 상통한다.집안은 조선왕조 후기에 총융사(總戎使) 어영대장 공조판서를 지내고 갑신정변때 나이 사십에 순절한 충숙공(忠肅公) 韓圭稷이 그의 증조부이고 포대장 장위사(壯衛使) 찬정(贊政)을 지낸 韓圭卨이 작은 증조부,부친은 충북 제천중을 설립하고 제2대국회의원을 지낸 韓弼洙씨다.그러나 부친은 ‘계파’를 따지는 것을 지극히 자제하여 ‘앞으로의 삶이 더 중요한만큼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고 자녀들에게 일러왔다.‘과거집착에서 벗어난 해방감’과 ‘자유로움 속에서 떳떳한 자세’는 바로 부친이물려준 가르침 덕분이다. ○세계적 명반 대량 소장 부친은 37년 서울을 등지고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땅이 있는 제천으로 낙향했고 그는 다음해 그곳에서 태어났다.형제는 4남2녀중 막내,다섯살을 전후해서 유성기옆에서 붙어살다시피 하면서 교회나 동네모임에서 하모니카 독주,한때는 부친이 광산에 손대는 바람에 모진 파란을 겪기도 했으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언제나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강한 생활력’을 터득할 수 있었다.노래부르기를 좋아하고 세계명곡집을 비롯한 갖가지 음악책과 음악사전문학작품집에 몰두하여 음악이론을 향한 탄탄한 지식을 쌓아왔다. 그가 방송에서 음악해설을 시작한 것은 문화방송제작위원으로 있던 72년부터다.그때도 방송 첫머리에서 ‘안녕하세요’라든가 ‘오늘 날씨가 좋다’는 식의 형식적인 멘트를 하지않았다.‘물론 안녕하니까 나의 방송을 듣고있다’는 생각에서 청취자를 음악의 숲으로 인도해주었고 이런 결곡한 매너가 ‘나의 음악실’을 14년이상 장기프로로 성공시킨 비결일 것이다.음악평에 손댄지도 30년이가깝다.서대문구 대신동 그의 집 음악실에는 낡은 유성기에서 레이저 디스크등 최신 오디오시스템을 고루 설치하여 그는 새벽에 일어나서 음악을 들으면서 글을 쓰고 저녁에는 음악회에 간다. 그의 음악평중에서 지난 75년,한 일간지에 시리즈로 실었던 ‘해방 30주년을 맞아 살펴본 현실과 그 반성’은 음악계의 병폐를 신랄하게 비판한 일대사건으로 기록된다. ‘음악계 이대로 좋은가’제하로 ‘연주회는 돈많은 자랑이거나 교수진급을 위한 것,교향악단은 연주회보다 개인레슨같은 부업에만 치중하고 교수는 특기자 입학을 미끼로 한 밑천 잡자는 식,오페라는 나눠먹기 배역에다 해외유학생들은 귀국하자마자 대학전강부터 따고나서 자리를 고수하기에만 급급하다’고 꼬집었다.이어서 ‘작곡도 탈낭만(脫浪漫) 탈정서(脫情緖)운동으로 지나치게 난해하고 애매모호할뿐 아니라 음악성이 결여되어있고 평론가 자신도 색종이를 오려붙이듯이 미사여구나 동원해서 주문식 잡문이나 쓴다’고 몰아붙였다. 이로 인해 음악계는 발칵 뒤집혔으나 평론계의 원로 유한철씨는 ‘한국음악계의 발전을 위해 긍정적인 관점에서 시정해야 할 점을 끌어내어 격려한 사항은 바람직하다’고 공감해 주었다.최근에도 그는 ‘신인발굴의 허구성’이란 글에서 ‘교향악단들이 예술적 양심으로 되돌아가 청소년연주회에 최선을 다하는 모범을 보이라’고 전제하고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청소년협연자를 내세우는 연주를 하지말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음악 조기영재교육 장려 그는 대학강단과 서울예고에 몸담고 있는 동안 비평활동과 음악의 조기영재교육을 장려하고 방송과 강연을 통해 차원높은 고전음악 정신을 전하는데 전력해온 공로자다.가족은 핵물리학을 전공한 辛承愛 교수(이화여대)와의 사이에 남매,그들 부부는 ‘인간으로서 또는 전문직을 가진 사회인으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민주적인 가정’으로 소문나 있다.좋아하는 음악가는 브람스와 슈베르트,카루소가 1910년대 취입한 SP를 LP화시킨 RCA 50주년기념판과 빈필하모닉 150주년 기념음반등 세계적 명반들을 소장하고 있다. 지난 70년대부터 살고있는 그의 집마당에는요즘 살구나무 감나무등 유실수와 회양목 향나무등 수목이 우거지고 집안은 봄꽃들이 만개하여 꽃향기가 범람한다.‘부자는 부(富)로 괴롭고 빈자는 빈(貧)으로 괴롭다지만 나는 부하지도 빈하지도 않으니 괴로울 이유가 없다’는 그는 때마침 취미와 전공과 직업이 모두 ‘음악’이기 때문에 ‘음악만 생각하고 음악속에서 살고있는,참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에 틀림없다.물질의 허욕에서 벗어나 오로지 음악계의 ‘정의의 사제’ 로서 그는 오늘도 자신을 위한 보보행진(步步行進)을 멈추지 않는다. □연보 ▲1938년 충북 제천출생 ▲1958년 제천고 졸업 ▲1962년 서울대 음대 작곡과졸업 ▲1962­69년 무학·경기중교사 ▲1969­84년 문화방송제작위원 ▲1980­86년 문화공보부 자문위원 1980­93년 국립극장 자문위원 ▲1987년 대한민국음악제 집행위원 ▲1984년 단국대대학원 졸업 ▲1982­85년 公倫 영화심의위원, 아세아청소년음악연맹 한국지부회장 ▲1985­88년 公倫 음악심의위원 ▲1984­96년 서울예고 음악과장▲1987­89년 서울올림픽 문화예술 자문위원, 국제음악제 운영위원 ▲1989­93년 한국음악협회부이사장 ▲1990년 문화부 기획위원 ▲1991년 남북문화예술교류정책자문 ▲1996년 KBS교향악단 자문위원 ▲1996­97년 월간음악춘추편집인 ▲1997­현재 KBSFM음악회 실황중계진행자,성균관대 출강 한국음악협회이사,세계청소년음악연맹 한국위원회이사, 예술의 전당이사, 한국페스티벌앙상블이사 ‘선율,온 영혼의 불꽃’ ‘삶과 죽음의 음악’(청한출판사) ‘북한음악의 실상과 허상’(신원문화사) ‘한국오페라 50년사’등 출간 예술평론가상(80년) 국음악상(94년)
  • 개방의 물결 흑룡강省(黑龍江 7천리:30)

    ◎88년부터 개방… 국경엔 러 장사꾼 북적/하얼빈·흑하·무원 등 통상구 25곳/92년부터 96년까지 5년간/러시아 관광객 130만명 다녀가 지난해 12월 6일 무원에 도착한 때는 저녁 아홉시였다.무원현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예약한 호텔 부근의 사우나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와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내렸다.도시의 거리와 지붕이 새하얀 면사포를 쓴 것처럼 하얀 빛인데 낙엽진 가로수 가지에도 눈꽃이 하얗게 폈다. 출근시간이 되자 거리에는 삽과 빗자루를 든 사람들이 눈을 쓸었다.‘눈이 오면 문앞의 눈을 치는 것’은 흑룡강성 시민들의 의무사항이다.눈이 멎으면 사람들은 어떤 명령을 받은 군인들처럼 자발적으로 나와서 길을 쓰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청나라 선통원년(宣統元年·1909년)에 수원주(綏遠州)가 설치,1913년 수원현이 되었다가 1929년에 무원현으로 되어 줄곧 가목사시에 예속되어온 현의 면적은 6천200㎢,인구는 겨우 4만여명이고 현성인구가 1만여명이라고 한다.러시아와의 통로가 열린 후로 외지 유동인구가 급증해서 사람도많아지고 거리도 많이 번성해졌다고 하지만 산간도시로 한산한 기분이 없지 않았다. ○전국 통상구의 10%나 차지 강변으로 갔다.‘1993’이라고 분명히 새겨진 국경비가 강둑에 세워져 있었는데 국장(國章) 아래 ‘중노국경’이라 쓰고 ‘258(1)’이라고 새겨져 있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 한 점 없는 두나라 대지에는 햇빛이 가득했다.백설을 덮고 누운 무연한 강의 수면과 평야는 한빛으로 눈이 부시게 시야로 달려왔다.그물을 어깨에 멘 어민이 강판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인적이 없는 해관뒤의 강면에서 어린아이들이 썰매를 타기도 하고 팽이를 치기도 했다. 5월에 강이 풀리면 10월까지 해관은 매일 2천여명의 러시아 장사꾼들로 북적댄다.중로무역성(中俄貿易城)에는 양국의 장사꾼들로 꽉 찬다.흑룡강성에는 국가의 비준을 거쳐 대외개방을 실시한 통상구가 25개나 있다.그것은 전국 동류의 통상구 총수의 10%,광동성 다음으로 전국 제2위이다.1988년말 흑하시가 처음으로 관광업무를 시작한 뒤부터 수분하,가목사,동녕,동강,무원,손극,나북,부금,요하,호림,밀산,하얼빈,목단강 등 17개 통상구에서 러시아와의 관광업무를 취급하는데 지난 92년부터 96년까지의 통계만 하더라도 1백30만명이나 된다.햇수로는 만 5년이지만 관광계절이 겨우 반년밖에 안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2년반만의 기록인 셈이다. 11월이 되어 일단 강이 얼기 시작하면 강을 오가던 중국의 화물선과 유람선들은 가목사부두로 가고 러시아 배들은 하바로브스크로 떠나간다.그때부터 흑룡강과 우수리강 통상구들은 수로왕래가 끊어진다.무원은 완전히 동면에 들어간다.말하자면 일년에 반년은 동면하는 곳이라 하겠다. 용강의 문화는 겨울에 있다.매혹적인 겨울의 눈과 얼음속에 있다.흑룡강성 소재지 하얼빈을 ‘빙성(氷城)’이라고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누군가는 ‘빙성’에 시의(詩意)를 부여하여 ‘은도(銀都)’라고 했다.은은 눈의 별칭이고 순결을 뜻하기도 하면서 고대 화폐를 연상시켜서 부유한 도시라는 뜻도 내포한다. 역사기록에는 벌써 상주(商周)시기에 눈에서 스키를 타면서 수렵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12세기에는 겨울에 스케이트와 같은 오라활자(烏羅滑子·신밑에 쇠칼을 댄 것)를 타고 전쟁을 하고 17세기 누르하치때에도 스케이트와 중국식 스키가 군사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매년 1월 빙등유원회 열려 해마다 1월 중순이면 하얼빈 조린(兆麟)공원에서는 빙등유원회(氷燈游園會)가 열린다.옛멋이 다분한 당나라 성곽이며 진나라 병마용이며 웅위로운 장성(長城)이며 번화한 시중심에 우뚝 솟은 소피아 천주교회당이며 12띠 짐승과 꽃,식물,명인들을 복제한 것 같은 얼음조각들은 절묘하기 이를데 없다.마치 일본 야마가타현 자오국정공원 지역에 해마다 스키시즌 때면 나타난다는 기기묘묘한 스노 몬스터를 통째로 옮겨온 듯했다.그리고 태양도공원에는 눈으로 조각한 예술품들이 전시되었는데 마치 안데르센이나 입센의 동화세계에 이른듯한 황홀한 감을 주었다. 지난해 말 나는 가족을 데리고 하얼빈으로 빙등구경을 갔다.22일 저녁 조린공원에서 빙등을 구경하고 차량통행이 금지된,러시아식 건물들이 길 양켠에 늘어서 이국의 풍치가 흐르는 중앙대가의 돌을 깐 옛거리를 걸어서 호텔로 돌아오면서 얼음음식에 대해 직감으로 공부했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고 길옆 식당에는 손님들이 붐볐다.그리고 중앙대가를 벗어나 경위로(經緯路)에 접어드니 언 배,언 감,언 두부,언 남새,언 만두,언 물고기 등 언 음식과 과일을 파는 난전들이 즐비했다.뼈를 에는 추운 겨울에 이곳 사람들이 더운 음식을 즐길 것이라고 넘겨짚는다면 착각이다.추운 곳이면서 찬음식을 즐기는 이곳 사람들의 식성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북방의 빙설은 집집의 베란다를 천연 냉장고로 만들었다.아파트에서는 베란다에 매달린 물고기며 채소를 볼 수 있었다.청나라때부터 북방사람들은 황어 등 귀한 물고기에 물을 부어 얼음덩이로 만든 다음 그것을 황궁에 보냈는데 얼음을 깨내면 여전히 신선했다고 한다.긴긴 겨울 밤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언 배나 언 감을 녹여 먹고 밤이 되어 시장하면 얼려둔 만두를 펄펄 끓는 솥에 넣어 끓여서 먹는다.얼음음식은 그 종류에 따라 맛이 다르지만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용강문화는 ‘얼음을 먹고 얼음에서 놀며 얼음을 감상’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결혼 승낙 받았어도 미성년 혼숙은 불법/서울고법 판결

    서울고법 특별 12부(재판장 洪日杓 부장판사)는 29일 결혼할 사이라고 주장하는 17와 18세 미성년자를 투숙시켰다는 이유로 영업정지를 당한 여관주인 鄭모씨가 안산시장을 상대로 낸 숙박업 영업정지처분 취소청구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鄭씨는 미성년자라하더라도 양가의 결혼승낙을 받아 혼인할 사이라면 풍기문란의 우려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공중위생법에 규정된 미성년 혼숙금지의 취지는 혼전순결 의무까지 감안해 엄격히 적용해야 하는 만큼 행정제재 조치는 정당하다”고 밝혔다.
  • 문신 그 육체훼손의 미학/월간 ‘지오’ 3월호 특집기사

    “너희 몸에 먹물로 어떤 무늬도 새기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모세가 유태인들에게 문신을 금지한 후로 유럽에서 문신은 한때 퇴조의 길을 걸었다.그러나 문신은 여전히 결속의 징표로,또 남태평양의 여러 섬나라에서는 아름다움과 힘을 과시하는 최고의 상징으로 널리 애용되고 있다. 본격 다큐멘터리 잡지 월간 ‘지오’(두비) 3월호는 문신­그 육체훼손의 미학을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어 눈길을 끈다. 1769년 당시 폴리네시아 여러 나라들을 여행한 영국인 선장 제임스 쿡은 유럽으로 돌아가 원주민들의 몸에 그려진 화려한 그림에 대해 설명했다.그가 전한 ‘예술적’이라는 의미의 타이티 언어 ‘타타우(tatau)’는 문신이란 뜻의 영어 단어 ‘태투(tattoo)’의 어원이 됐다. 문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인도다.인도에서는 문신술 자체가 규수가 익혀야할 교양과 기예 중 하나로 정해져 있다.특히 여자들의 정수리에 그려진 작은 점,곧 백호상은 순결을 지켜주고 정숙함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통한다.또 남인도 케랄라 주의 족장은 신격화 의식을 위해 ‘테이얌’이라는 복장을 해야 한다.죽은 뒤 부족의 정령으로 모셔질 그는 몸 전체를 화려하게 장식해 최고의 지도자라는 표시를 남긴다. 몸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일심동체임을 확인하는 서약 의식으로서의 문신은 우리나라에서도 그 역사가 깊다.대표적인 것이 바로 연인간의 연비다.삼국시대 이후 여염이나 기방에서 행하던 연비는 같은 부위에 같은 문양이나 글귀를 쪼아 먹을 먹여 서로의 몸에 베품으로써 연인끼리 사랑을 맹세하는 일종의 서약식이다.조선 초 성도덕 관념을 흔들었던 어우동 사건이 알려진 것도 연비 문신 때문이었다.성종 당시 뭇 양반들을 거느렸던 어우동의 팔뚝에는 각기 다른 남자와 사랑을 약속한 연비 문신이 여섯 개나 있었다.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의 손자 며느리였던 어우동은 결국 시어머니의 구박과 양반가의 부당한 처사에 “이제부터 당신네들의 노리개가 아닌 한 인간으로 살겠다”고 선언하며 소박을 자청해 집을 나온다.아름다운 사랑의 약속인 연비 풍속도 후에는 ‘곰배팔이 할개눈에 째보년도 팔을쪼을 줄 안다’는 속담이 나올 정도로 천시됐다.우리나라에서는 또 신분을 구별하고 범죄자임을 표시하기 위해 문신을 사용했다.흔히 ‘경칠놈’이라는 욕을 하는데,여기서 경친다의 경은 살갗을 쪼아 입묵을 하는 문신을 뜻한다.혹형을 폐지한 영조 이전까지만 해도 나랏돈이나 세금을 횡령한 관리에게는 오른쪽 팔뚝에 경을 쳐 죽을 때까지 지울 수 없게 했다. 이번 호에서는 또 효과적인 캐릭터 상품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할리우드 스타들의 문신에 대해서도 소개한다.인기 여배우 미라 소르비노는 퀼트 문양의 문신을 양손과 등에 새겼고,영화 ‘제리 맥과이어’의 아역배우 조나단 리프니키는 오른 팔뚝에 용맹스런 독수리 문신을 지니고 있다.한편 문신은 낯선 이국땅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 사이에서는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로스앤젤레스 빈민가의 멕시칸들 대부분이 왼쪽손등 부위에 3방사형 문신을 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 우리시대 젊은작가 7인 소설로 푼 자전적 이야기

    ◎단편소설집 ‘서정시대’/글쓰기의 고통·희열 명쾌한 언어로 표현 채영주(‘미끄럼을 타고 온 절망’) 김인숙(‘바다에서’) 윤대녕(‘은항아리 안에서’) 은희경(‘서정시대’) 최인석(소설가 최보의 어제,또 어제) 함정임(‘동행’) 구효서(‘오남리 이야기3’).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젊은 작가 일곱 명의 자전적 소설집 ‘서정시대’가 도서출판문학동네에서 나왔다.저마다 독특한 문학의 성을 구축하고 있는 7인의 작가가 자전소설이라는 타이틀로 쓴 단편들을 한데 묶은 것.이들에게 있어 세상은 하나의 가면무도회장.이들은 한편으로는 자신을 은폐하고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노출시키면서 글쓰기의 고통과 희열,그리고소설적 진실을 명쾌하게 담아낸다. “그때 열아홉 살때 첫키스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내 첫사랑은 완성되었을까”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작가인 은희경의 ‘서정시대’는 작가만의 문학적 장점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특유의 날카롭고 속도감 있는 해학적 어조의 문장이 그대로 살아 있다.소설 제목인 ‘서정시대’는 화자가 여섯 살에서부터 대학졸업 때까지의 인생 시기를 일컫는 말.소설은 지금의 ‘나’와 지나치게 ‘진지했던’ 서정시대의 나 사이를 넘나들며 전개된다.지나친 진지함이 자신의 삶에 오해와 고지식함을 덧씌웠다는 게 ‘나’의 진단.인생에 대한 서정적 태도를 지녔던 ‘서정적 나이’의 그 시기와 당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지금의 ‘자의식’ 사이에 작가 특유의 해학이 넘쳐난다. 우리 시대의 탁월한 이야기꾼 구효서는 최근의 자신의 일상과 소설쓰기의 고민을 술술 읽히는 간결한 문장으로 풀어냈다.그 작품이 ‘오남리 이야기3’이다.작가는 “내가 소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소설이 나를 선택했다”고 말한다.그의 말 속에는 소설가의 운명이란 무당이 되기 싫어 필사적으로 버티다가 종당엔 신내림굿을 받아들이고 마는 신딸의 운명과도 같은 어떤 숙명적인 인식이 스며 있다.구효서에게 있어 작가의 운명이란 “날마다 글 감옥에 갇혀 허우적대고 빌빌거리는 생활의 연속” 바로 그것이다. ‘동행’은 지난해 35세의 나이로 요절한 작가 김소진의 문학과 생활의반려였던 함정임씨가 고인의 마지막 투병과정을 진솔하게 적은 작품.악마의 놀림으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몹쓸 병에 걸린 남편이 죽음의 문턱에서 고통당하던 한달여 동안 함씨가 겪은 애통한 상황들이 소상하게 그려져있다.“새벽이 되자 그의 혼은 한마리 새가 되어 어둔 허공 속으로 날아갔다” 소설 ‘동행’은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구상의 끈을 놓지 않았던 고인의 순결한 영혼에 바치는 진혼가다. “글 쓴다는 것은 바퀴 빠진 수레를 밀고 언덕을 혼자서 올라가는 짓”이라는 최인석.그는 ‘소설가 최보…’란 작품을 통해 환상적 기법을 동원한 글쓰기의 고민을 토로한다.이 작품은 ‘소설과 망상의 경계’에서 시작된다.자신을 소설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에 견주는 화자는 가공의 인물과 이미 사라진 역사적 인물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눈다.먼저 이 소설은 정신분열증환자 쉬레버 박사를 등장시켜 프로이트를 비판하며,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법이 실로 다양함을 보여준다.작가는 스스로 ‘부끄러움’이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반성과 문제의식을 나름의 이야기 틀속에 정치하게 담아낸다. 감성적 언어와 몽환적 분위기로 특유의 소설적 성과를 일궈내고 있는 윤대녕의 ‘은항아리 안에서’는 자전소설이라는 이름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다.그는 이 소설에서 또 다시 한편의 서정시같은 아름다운 풍경과 닿을듯 말듯한 애절한 사랑의 아픔을 황홀한 이미지로 그려낸다.채영주의 ‘미끄럼을 타고 온 절망’은 무어라 이름붙일 수 없는 젊음의 열병에 사로잡혀 방황하던 작가의 20대의 삶을 애잔하게 그린 작품.작가의 길에 들어서기 위한 통과의례로서의 정신적 내출혈 과정이 생생하게 전달된다.김인숙의 ‘바다에서’ 역시 80년대의 시대고를 다루는 데 관심을 보여온 작가 자신의 20대 이야기다.“이루어야 할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속이 투명한 아이 J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80년대의 ‘운동권체험’을 힘겹게 토해낸다. 아울러 글쓰기의 진정성에 대한 물음도 던진다.
  • 죽이는 이야기/영화감독의 ‘일그러진 꿈’(시네마 줌)

    이 시대 ‘영화 만들기’란 무엇일까.또 영화감독의 역할은? 쉽지 않은 화두를 던지며 영화 ‘죽이는 이야기’(여균동 감독,한맥엔터테인먼트 제작)가 1일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죽이는 이야기’는 어떻게든 영화 한편 만들어 보려는 감독과 그 주변 인물들인 배우·제작자·배우 지망생,그리고 영화가 주는 꿈에 빠져 있는 보통사람들을 그린 블랙코미디이다. 구이도(문성근 분)는 ‘작품성은 높되 흥행에 실패한’영화를 만든 감독.그는 한차례 더 실패하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죽이는(관객을 죽여주는)이야기를 구상한다.그 내용은 ‘여관 종업원이 손님들의 성행위를 몰래카메라로 찍어팔다가 단골인 창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그는 이같은 아이디어를 ‘음란을 상품화한 사회에서 피어나는 순결한 사랑이야기’라며 스스로 대견해 한다. 그러나 제작자와 배우를 만나면서 그의 의도는 자꾸 엇나간다.3류 에로배우 말희(황신혜)를 정부로 둔 제작자는 그녀를 출연시켜야 돈을 댄다고 하고,말희는 이제야말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안리처럼 될 기회라며 턱없이 욕심을 낸다.그런가 하면 공동제작자이자 남자 주연배우인 하비(이경영)는 액션을 가미한 느와르가 돼야 한다고 우긴다. 구이도는 자기를 따르는 동네 여관종업원(고구마)이 실제로 찍은 말희와 하비의 장사장면을 영화에 활용하려다 음란물 제작 및 배포죄로 구속된다.관객을 죽이는 영화를 만들려던 꿈이 스스로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 것. 이 작품으로 세번째 연출을 맡은 여균동 감독의 재치가 곳곳에서 번득여극적 재미를 주는 한편으로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인다.특히 무식하고 천박한 에로배우 역을 맡아 과감한 노출 신을 보인 황신혜의 변신이 놀랍다.영화에 첫 출연한 전이다와 록밴드 ‘삐삐롱스타킹’출신의 고구마 등 조연급들도 각각 독특한 매력을 뽐낸다. 영화는 그러나 뜻대로 작품을 만들 수 없는 감독의 비극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경지까지 다다르지는 못한다.지나친 정사·노출 신,과장된 대사가 재미를 주는 반면 관객의 주의를 흐트리는 장애로 작용한다.
  • 대선주자들 온라인 성폭력 토론회/“여성문제 적임자” 한목소리

    ◎‘노출과 성폭력의 관계’엔 모두 비판적 대선주자들이 성폭력 토론회에 ‘접속’했다.한국성폭력상담소와 컴퓨터통신 유니텔이 97 세계성폭력추방주간(11월25일∼12월10일)동안 사이버공간에 마련한 ‘온라인 성폭력 토론회’에 뛰어든 것.이들은 성폭력문제가 여성에게 민감한 관심사임을 감안,자신이 여성문제해결에 적임자라는 점을 앞다퉈 강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오랜 판사경력을 보고 제가 모든 사물에 굉장히 보수적일 거라고 믿는 분들이 많다.하지만 각계각층 다양한 인생을 간접 경험하다 보니 오히려 사회적으로 힘없는 약자,피해자입장에 서게 된다”면서 “성폭력문제도 여성 정조침해가 아니라 인간존엄성 말살차원으로 보고 피해여성들의 권익회복,성폭력없는 세상만들기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주장했다.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세상의 반인 여성여러분을 누구보다 사랑해 여성들을 위해 열심히 뛰었는데 여성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낮아 섭섭하다”면서 “평소 ‘아내의 권리가 남편과 같고,어머니의 권리가 아버지와 같고,딸의권리가 아들과 같은 세상’을 강조해왔다”고 홍보.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자신이 “할머님과 어머님,누님의 사랑속에 자란데다 슬하에 딸만 둘”이라며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을수 밖에 없는 가족사를 공개. ‘노출은 성폭력의 주범이고,끝까지 저항하면 강간은 불가능한가’라는 첫주제(11월25∼31일)에 이들은 입을 모아 반박했다. 한나라당 이후보는 “대법원 판례는 피해자가 강하게 저항했으나 극복할수 없는 폭행·협박이 가해졌어야 강간죄로 본다”며 판사출신답게 법지식을 과시한뒤 “하지만 강도높은 반항은 ‘강간치사’를 부를 수도 있어 강간기준으로 적합치 않다”고 역설. 국민회의 김후보는 “성폭행 가해자 70%가 면식범 소행이며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 가운데 34.3%가 어린이 성추행”이라는 자료를 인용하며 “성폭행원인을 여성노출에 돌리는 것은 본질호도”라고 지적. 국민신당 이후보는 성폭력 요인으로 “여성을 성적 쾌락의 대상으로 보는 남성중심사고,대중매체의 역할방기,여성순결에만 치중한채 남성의 성충동 자제에는 무관심한성교육” 등을 꼽았다. 유니텔에서 go DISCUSE하거나 초기화면에서 통신광장을 거쳐 토론마당으로 들어가면 토론회에 참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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