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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삼웅 칼럼] ‘비판언론’이란 허위의식과 역설

    천문학적 조세포탈 혐의가 드러나 사주와 언론사가 고발된 족벌신문이 ‘비판언론’으로 자처하며 ‘언론자유수호투쟁’을 벌이는 저 장렬한 모습은 시대의 희극인가 소극인가. 자신들이 마치 독재정권을 비판하다가 탄압받는 투사이고순교자인 것처럼 지면을 사유화하는 저 혼탁한 풍경은 언론사(史)의 만담일까 엽기일까. 경비 허위계상을 통한 비자금 조성, 회계장부와 증빙서 조작, 세금장부 파기, 부실 증빙서류 첨부, 건물양도세 탈루, 수백개의 차명계좌금 운용, 편법 증여, 가짜 영수증, 주식 우회증여에 의한 증여세 탈루, 명의신탁 허위작성, 차명계좌를 통한 소득세 탈루, 주식 매매위장, 세금 포탈, 외화도피 혐의 등 악덕기업 뺨치는 족벌언론의 타락상은 ‘만화경’이다.그런데 자성은커녕 ‘비판언론 죽이기’라 분장하고 한나라당이 이를 비호하면서 본말이 전도되고 있으니 족벌언론과 야당의 도덕지수는 얼마쯤일까. 족벌신문은 스스로 ‘비판언론’이란 간판을 거두어야 한다.‘비판’이란 용어를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술집여자에게 순결이란말이 어울리지 않듯이 말이다. 비판(批判)의 뜻을 풀어보자.고어에 비(批)자의 ‘수’변은 바를 시(是), ‘비(比)’변은 아닐비(非)와 같은 뜻으로쓰이고, 판(判)자는 ‘반(半)으로 쪼갠다’는 의미다.바른것과 그른것을 반으로 쪼개어 보여준다는 뜻이다. 맹자는 ‘비시지심(非是之心) 지지단야(智之端也)’라 했다.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 슬기라는 인간본성의 단서가 된다는 것이다.여기서 ‘비시지심’이 곧 시시비비를 가리는 비판정신의 근본이다. 영어의 ‘critic’은 물론 희랍어나 라틴어에서도 비판은‘분별하거나 판별하는 힘’의 의미를 갖는다.어떤 사실이나 사상 또는 행동의 진위·우열·가부·시비·선악·미추등을 분별하고 판별하여 그 가치를 밝히고 평가하는 인간교육의 고등정신이 비판행위다. 따라서 비판은 분별력과 판별심, 고도의 도덕성이 전제된다.탈세언론은 과오를 자성하는 분별력을 보여야 한다.자신들의 과오에는 눈을 감고 ‘비판언론 죽이기’란 억지로는국민과 역사를 설득하기 어렵다. 2년전 홍석현 중앙일보사장(당시)의탈세문제가 대두됐을때 동아·조선은 뭐라고 했나.“언론인 또는 언론사라고 해서 특혜 특권을 기대해선 안되며 어떤 언론이라도 결코 성역이 될 수 없다”(동아일보)라고 썼다.내가 하면 관행이고 라이벌이 하면 범죄인가. ‘언론자유수호투쟁’이란 구호도 그렇다.막상 ‘투쟁’해야 할 때는 굴종하거나 침묵했던 신문이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가 진척되자 언론자유를 만끽하면서 비리 호도용으로‘언론탄압’을 주장한다면 밭가는 소가 웃을 노릇이다.‘술판의 주정’까지 대서특필하고 외신이나 국제언론기구의성명도 거침없이 왜곡하는 ‘언론자유’를 누리면서 탄압이라면 누가 믿겠는가. “적어도 양심적인 젊은 기자들이라면 자신들이 몸담은 언론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부분을 비판하고 시정하라고 요구하면서 정부를 비판해야 하나 결의문 어디에도 이에대한 비판은 찾아볼 수 없다”(조선일보 기자성명에 대한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성명) “젊은 기자들이 맞서 싸워야 할 더 중요한 적은 언론자유를 개인의 자유로 악용하려는 족벌언론 사주들의 만행이다. 우리는 조선일보내 젊은 기자들의 마음속에 내재한 진정한언론자유에 대한 열망이 언젠가는 국민들의 언론개혁 목소리와 합쳐질 날이 올것을 확신한다”(〃 민언련 성명) “언론의 자유는 언론사가 불법·부정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전제로 보장되는 것인데 이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군사독재와 30년 유착했던 언론사가 민주시대에도 옛날처럼자신들의 비리를 언론자유라는 미명으로 감출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다”(강만길 상지대총장) 독일 바이마르 정부를 가장 혹독하게 공격(비판이 아닌)한 언론인과 한국 장면정부를 가장 극렬하게 공격한 언론인들이 히틀러정권과 박정희정권에 기생한 것은 역사의 역설이다.지금 이른바 ‘비판언론’은 이런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김삼웅 주필
  • [기고] 솔직한 性이야기는 ‘무죄’

    최근 가수 박진영의 노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청소년유해’ 논쟁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진다.아직도 우리사회가 이런 정도의 문제로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건지,개인의 표현의 자유와 솔직한 성 이야기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왜 이리 어려운지,성을 다룬 문화상품과 성을 상품화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상상력이 마비되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측은 성과 성 표현물에 뭔가 이상한 강박관념,도덕적 순결주의,대상공포성 히스테리에 시달리고 있어 보인다. 성에 대한 솔직한 자기고백과 섹스의 쾌락을 이야기하면,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변태적 섹스증후군에 감염되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심을 드러낸다.여기에 종교적 사명감과 근거없는 상업적 음모론이 가세되면 공포심은 성적 표현물과 섹스의 자유를 곧바로 음란물,음란한 행위로 규정해 버린다. 박진영의 노래는 이러한 공포심으로부터의 자유를 표현하고 싶어한다.또한 그러한 공포심이 결코 성차별과 범죄를예방하는 만병통치약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기윤실’이중요하게 생각하는 청소년보호론이 청소년들에게 일종의 부패방지용 진통제라면,박진영이 드러내고 싶은 성적 자유론은 성과 섹스의 쾌락을 위한 면역성 소화제가 아닐까? 박진영의 솔직한 성이야기는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고 본다.물론 지금의 사태를 역산한다면 그의 섹스론이 상업적의도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는 있다. 논쟁이 있고 난 후 사후적인 상품효과를 완전 부정할 수없는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적어도 음악적 선택과 성에 대한 박진영의 자기 주관은 솔직하다고 보고 싶다. ‘기윤실’은 이 솔직함을 두가지로 왜곡하고 있다. 하나는 성을 노래하는 문화상품을 성을 악용한 저질상품으로 왜곡했고,다른 하나는 그의 성 이야기를 청소년 탈선의주범으로 왜곡했다.오히려 박진영의 노래를 접하면서,불륜·낙태·탈선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더 음란하다고 생각한다.정작 청소년이 보호받아야 할 것은 문화적 볼 권리이다. 나는 박진영의 상업적 이해관계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없다.다만 표현의 자유에 대한 기본 원칙과 권리는옹호되어야 한다고 믿을 뿐이다.표현의 자유는 국민이 누려야 할기본권이다.어떤 문화적 표현물이 인종차별이나,아동학대와같은 인간의 차별을 말하는 것이라면 규제해야겠지만, 개인의 삶의 의미와 가치의 차이를 말하는 것은 지켜지고 옹호되어야 한다. 청소년보호론은 명백하게 차별이 행사되었을 때에만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박진영의 노래는 단지 성적 차이만을 당당하게 말했을 뿐이다.나는 차이가 존중되면서 차별을 없애는 사회가 바로 문화사회이며,표현의 자유는 문화사회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지금은 특정한 도덕률을 모두에게 강요하기보다는 문화적 다양성과 차이를 더 많이 인정해야 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싶다. 이동연 문화개혁시민연대 사무차장
  • 밀링고 가톨릭 대주교, 통일교도 한국여성과 결혼

    지난 5월 미국에서 열린 통일교 합동 결혼식에서 천주교대주교 신분으로 한국 출신의 여성 침구사인 성 마리아(43)와 결혼해 화제가 된 엠마누엘 밀링고(71) 대주교가 방한,3일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밀링고 대주교는회견에서 “천주교 사제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천주교신앙을 유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다음은 일문일답이다. △가톨릭 사제로서 통일교의 합동결혼식에 참여한 배경은. 하느님의 모든 아들 딸은 가정을 이룰 자유를 갖고있다고생각한다.평생동안 주님을 모시고 열심히 살아왔다.지금부터는 가정을 이뤄 주님을 모시고 살고싶다. △결혼을 앞두고 고민을 많이 했다는데. 결혼과 관련해 걱정이나 고민을 한 적은 없다. 어떤 인터뷰기사가 잘못된 번역 탓에 와전된 것으로 안다. △결혼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가톨릭의 공식 입장을 전달받은 게 있나.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말만 전해들었다. △자녀는 몇 명이나 두고싶나. 제한 없이 생기는 대로 낳겠다. △천주교 사제들이 모두 결혼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나. 교회도 인간들이 만든 조직이다.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을것이다.그러나 2∼3년간 독신생활을 한뒤 결혼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결혼하지 않은채 온갖 죄를 짓고 사는 성직자보다 차라리 결혼해 떳떳이 사는게 나을 것이다. △성직자에게 독신과 결혼생활은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나. 하느님은 남자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셨다.나의 결혼은 개인적인 사안이 아니라 어찌보면 공적인 결정이다.나의 경우 한 단계 높은 순결 차원에서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에 동석한 부인 성 마리아는 결혼배경에대해 “95년부터 이탈리아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밀링고대주교의 명성을 알고 존경하게 됐지만 개인적인 만남은 전혀 없었다”면서 “통일교의 결정에 따라 결혼했고 지금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다. 김성호기자 kimus@
  • [대한광장] 백두산 천지에 올라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날은 거세게 비가 뿌렸다.일곱명이동승한 지프 안에서 나는 천지를 볼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이 들었다.만약 천지를 보지 못한다면 이 먼 곳까지의 여행은 의미를 상실할 것만 같았다. 차가 산을 오르는 동안 나는 중국인 인부 몇명이 천막을함께 머리에 쓰고 내려오는 장면을 목격했다.그 풍경은 나의 어린 시절을 상기시킬 만큼 인상적이었다.산 정상으로오를수록 빗발은 점점 약해져가고,꽃들은 낮게 피어 고산에서의 생존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었다.고산에서 만나는 야생화.기상의 악조건 속에서도 생명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꽃에서는 서럽도록 짙은 생명의 힘을 느낀다. 백두산으로 떠나기 전날 나는 백두산에 어떤 꽃들이 피는지 궁금해져 김태정의 ‘우리꽃 백가지’를 들춰 보았다.그 책 맨마지막 부분에 내가 알고자 했던 백두산의 야생화들이 수록되어 있었다.나는 사진을 통해서 꽃들의 모양과 이름을 하나 하나 외어 두었다.백두산에서 꽃들을 만나면 꽃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호명해 줄 작정이었다.비로용담,골짝발톱,분홍바늘꽃,담자리꽃,가솔등,노란만경초 등등.나는꽃들의 이름을 하나씩 떠올리며 차창 밖의 꽃들을 유심히살펴 보았지만 쉽게 낯익은 꽃들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나의 기억과 책에 대한 과신이었는지도 모른다.살아있는 꽃들을 책 속에 그림으로 파악하고자 했던내 어리석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꽃들은 내 눈길에서 멀어져갔다. 차가 천지 바로 아래 도착했을 때 나는 거의 뛰다시피 하여 천지에 올랐다.어쩌면 또 금새 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내려 천지의 모습을 감출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천지는 내 가쁜 숨 끝에서 웅혼한 모습으로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처음 만나는 천지의 모습은 웅혼하고 광활한 생명의 힘이었다.나는 그 앞에서 그만 압도당하고 마는자신을 발견했다.연전에 미국에서 보았던 산 위의 드넓은호수보다도 천지는 신령스러운 힘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천지를 이제서야 비로소 만난 것이다.사진으로만 보았던 천지의 숨결을 이제서야 느낀 것이고,사진 속에서는발견하지 못했던 그 생명의 힘을 지금에서야 발견한 것이다.그리고 백두를 왜 민족의 영산이라고 했는지 천지를 보는순간 비로소 알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 천지는 하나의 사진이었고,꿈이었다.천지를 만난다는 것이 내게는 꿈만 같던 시절이 있었다.그러나 꿈은언제나 꿈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꿈은 현실이 될때 비로소 아름다운 것이다.꿈이 꿈으로 남는 것은 슬픈 그리움이고,꿈의 완성은 결국 실현에 있는 것이다. 백두산 정상에서 천지가 현실이 되어 내게 왔듯이 우리 민족의 꿈인 통일 또한 그렇게 오라고 나는 기도했다.설혹 그날이 먼 훗날일지라도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지혜롭게 걸어가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통일은 이성적 거래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통일은오히려 감성적 동질성을 회복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겠다는 것은 가진자의 오만이고,줄 것이 없는 자에 대한 압박이기도 하다.체제의 범주가 아니라 민족의 범주 안에서 사고하고 이해하는 넓은 안목이지금 우리에게는 절대 필요한 것은 아닌가. 천지의 저편은 북녘이다.나는 저편을 통해 천지에 올랐어야만 했다.그러나 지금은 남의 땅에서 우리의 땅을 바라보고 있다.저편도 곧 현실이 되리라.사진 속의 천지를 향해내가 걸어 왔듯이 저편,북녘의 백두도 언젠가 반드시 통일의 길을 밟고 가 서리라 다짐해본다. 천지는 하나의 생명으로 웅혼하다.나는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의 생명의 원형을 본다.거센 바람이 불어 거짓과 폭력을모두 날리는 천지.오직 생명의 처녀성으로 남아있는 천지는끝없이 순결하다. 성 전 옥천암 주지
  • ‘역사’를 갖지 못한 여성들의 삶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원망하라.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니라.”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이 자식들에게 남긴 유언 아닌 유언이다.출구 없는 미로와 같은 막막한 상황에서 그는 사회와 어울리지 못 한 채 행려병자로 삶을마감했다. “집을 떠난 ‘노라’에게 가능한 미래는 창녀 아니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 양자택일 뿐”이라고 중국 작가 루쉰은 말했지만 나혜석은 창녀가 될 수도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주류(主流)의 역사 밖에 놓인는 여성들의 삶.그것은 아직도 ‘역사’라는 이름을 갖지 못하고 ‘사건’속에 파편으로 존재한다. 최근 출간된 ‘20세기 여성 사건사’는 이러한 여성들의역사를 어떻게 다시 쓸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총체적인 여성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사건사’라는 접근법을 택했다. 지은이는 권김현영 소현숙 박정애 등 여성사 연구모임 ‘길밖세상’의 멤버들.27개의 사건들을 사회적·역사적맥락에서 재구성 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단발을 감행한 여성인 한남권번 기생강향난,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한밤중에 평양 을밀대위에 올라가 농성한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작가 김유정이 사랑한 여자였던 당대의 명창 박녹주 등 20세기 초 잊혀져가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생생한 역사로 되살아난다. 책의 초점은 한국사회에서 ‘성별 정치학’이 어떻게 여성의 삶을 왜곡해 왔는가를 살피는 데 맞춰져 있다.전쟁미망인의 정조가 우려돼 미망인의 재혼을 권장했던 50년대우리 사회 이야기는 쓴웃음을 자아낸다.또 일탈한 여성의응징을 외치게 만든 자유부인 논쟁이나 “법은 순결한 여성의 정조만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명언(?)을 남긴 박인수사건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시금 짚어보게한다. 하지만 저자들은 근대는 남성의 것이라는 ‘선험적인’ 믿음이 그대로 굳어지는 것을 경계한다.그것은 결과적으로여성비관주의를 낳고 여성이 쌓아온 경험을 역사화하려는여성사의 이론적 전망을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근대 여성교육의 시작에서 사이버 페미니즘까지’라는부제대로이 책은 20세기 여성 사건사를 폭넓게 다룬다.그러나 저자들 스스로 인정하듯 역사의 장에 제대로 자리매김돼야 할 의미있는 사건들이 빠졌다.‘김활란’을 둘러싼 여성주의와 민족주의의 관계,여성들의 정치적 주류화를향한 노력,90년대 이후에 등장한 레즈비언 조직 등이 그것이다.여성신문사 펴냄. 김종면기자 jmkim@
  • 이정연·정현숙·차대영교수 합동전시회

    이정연(SADI 교수) 정현숙(대진대 미술학부 교수) 차대영(수원대 조형예술학부 교수).화단의 중추를 이루는 3명의교수작가가 한 자리에 모인다.5월2일부터 13일까지 서울신문로 성곡미술관에서 열리는 ‘3인 3색전’이 그 현장이다.이들의 작품은 과연 얼마나 3인 3색일까. 이정연은 ‘옷칠회화’를 통해 만물을 키워내는 대지 혹은 자연의 생명력을 예찬한다.그는 삼베를 화면으로 사용하며 안료로는 옻을 즐겨 쓴다.조야한 삼베의 갈색과 옻나무 진의 독기에서 자연의 생생한 숨결을 읽어 낸다.옻을비롯해 흙이나 목탄,골분 등 천연재료를 사용하는 그의 그림이 전통적인 미감을 안겨주는 것은 당연하다.그는 동양화와 서양화의 이론과 실제를 아울러 공부한 균형있는 작가다. 서양화가 정현숙은 금분과 은분을 재료로 한 시리즈 ‘전과 후’를 보여준다.최소한의 조형수단이 동원된 미니멀리즘의 세계다.프랑스 평론가 제라르 슈리게라는 그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알베르 카뮈가 ‘단순한 모든 것은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고 말했던 것처럼 정현숙의 작품에는 호기심을 유발하고 때론 낯선 느낌을 갖게 하는 단순함이 있다”.‘단순함의 미학’을 구체화하는 그의 그림은 안개처럼 포근하게 다가온다. 차대영은 동양화가로서는 드물게 양화재료를 많이 사용하는 작가다.그는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물상을 그린다.극사실주의의 경향을 보이면서도 배경을 정제된 추상으로 꾸며 화면에서 색감이 배어나는 듯한 독특한 기법을 구사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나리’‘붓꽃’‘피튜니아’등 군더더기 없이 깨끗한 꽃그림을 선보인다.어느 화가보다도 순결한 꽃을 그리는 작가가 바로 차대영이다.(02)737-7650. 김종면기자
  • [공직자 에세이] 열린 마음으로/ ‘윤락’-그 이중적 성윤리관

    최근 신문 사회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사의 하나가 10대 청소년들의 성매매 문제이다. 서울지방경찰청이 지난 2월1일부터 2개월동안 벌인 청소년 성매매범죄 단속결과에 따르면 적발된 청소년 121명의절반이 넘는 65명이 만15세 이하라고 한다.더욱 충격적인것은 이들이 가출 청소년 등 소위 문제학생이 아니라 교실과 학원에서 친구의 소개로,집에서 부모 몰래 채팅을 통해 매춘행위에 빠져든 보통학생들이 많다는 점이다. 도덕,윤리적인 면에서 그지없이 ‘근엄한’ 우리사회에서 이같이 왜곡된 성문화가 횡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사회는 성을 파는 여성들의 성적 타락이나 일탈을 비난하는 반면 성을 사는 남자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한태도를 보여왔다. 매매춘은 분명 성을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함께 있는것임에도,사는 사람은 자취를 감춰버리고 파는 행위와 파는 사람만이 가시화되고 있는 것이다.매매춘행위를 단속하는 현행법인 ‘윤락행위등 방지법’도 성을 파는 자의 행위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가치판단에 근거함으로써 성을파는행위를 방지하고 이를 처벌하는 법으로 인식돼 오랫동안 여성계의 반발을 사왔다. 이렇게 성을 사는 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대함은 성에대한 이중적 잣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즉 남성은 여성보다 성적 욕구가 강하다는 신화,성욕의 자유로운 표출을 남성다움의 과시로 보는 남성문화,그리고 성을 사는 행위를 남성의 특권으로 인정해온 관습 등이 복합돼 매매춘은 ‘필요악’으로써 정당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매매춘에서 남성들은 면죄부가 주어지고 여성들은 늘 비난의 대상이 된다.최근에는 매춘여성에 대한 비난이 더 거세지고 있다.과거처럼 가난이나 순결의 상실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향락과 사치를 위해자발적으로 선택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자발적’이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의미하지만 사회구조가 그런 선택을 강요할 경우 진정한뜻에서 자발적인 것으로 볼수 없다.노동시장에서 여성들의 위치는 생계보조자로 여겨져 늘 불안정하며,여성의 성적대상화와 성 상품화는 일상화돼 있다.주택가와 학교 주변을 가리지 않고 유흥가가 즐비하며,정보기술의 발달로 사이버 세계를 통한 국경없는 성산업이 번창한 사회구조 속에서 여성의 몸은 경제적 자원인 양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 매매춘은 단순한 ‘사회적 일탈’이 아니라 여성을 주변화하는 가부장적 가치를 집약하고실행하는 ‘사회적 행위’로 구조적인 문제이다.이에 대한 책임 또한 매춘여성 개인과 이들을 이용하는 업주만이 아닌 ‘수요자’인 남성에게도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공공의 합의를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매매춘의 ‘필요악’ 논의는 사회적 공론화에 부쳐져야 하며,이로부터 우리사회의 성매매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한명숙 여성부장관
  • [굄돌] 나무에서 배운다

    며칠 벼르다가 집 근처 야산에 올랐다.아직 눈꼽만한 잎들을 가지 끝에 오종종 달고 있어서 산 속은 훤히 들여다보였다.그러나 풋풋한 봄기운이 온 산을 감싸고 있었다.전날 내린 비로 땅바닥은 축축히 젖어 먼지도 나지 않았고 발걸음은 부드러운 쿠션을 밟는 것처럼 경쾌하기만 했다.이따금옆을 스치는 사람들의 표정도 한결 넉넉해 보였다.풋풋한흙내음에 나도 모르게 힘이 솟았다.멀리서 볼 때는 드문드문 보이던 진달래가 여기 저기서 가지 끝에 진분홍 꽃을 잔뜩 피워 올리고 있었다.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꽃잎마다함초롬히 이슬방울을 머금고 있었다.수십 개의 이슬을 달고서도 가볍게 흔들리는 모습이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목련이나 개나리꽃보다 산 속에 숨어서 남몰래 핀 진달래가유난히도 순결해 보임은 웬일인지…. 눈여겨보니 소나무가 많았다.발 밑은 작년에 떨어진 솔잎으로 가득했다.새로 돋아난 소나무 새순은 만지면 바스라질까 염려될 정도로 여리디 여렸다.그런데 뜻밖에 잎들이 서로 한 몸으로 붙어있는 게 아닌가.침엽수라 당연히 새순부터 서로 갈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원예전문가가 아닌 나로서는 새로운 발견이자 놀라움이었다.그러면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이 자연이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을 준비하고 있음을.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지금 나무들이 한창 가지 끝으로 물을 길어 올리고 연초록의 오종종한새순을 준비하고 있음을 본 것이다.저 작고 여린 잎들이 자라서 크고 탐스런 잎으로 변모하고 다시 큰 숲을 이루고,가을이면 풍성한 열매를 맺으리라.그 과정에서 나무들은 비바람과 천둥 번개와 모진 가뭄과 온갖 벌레들의 시달림을받아야 하리라.이 모든 것을 견디어 낸 자에게 오는 넉넉함과 평화로움.아주 평범한 진리를 새삼 산에서 깨닫게 된 것이었다. 나무들은 특별히 누구의 보살핌도 없다.폭풍우에 가지가찢겨지면 찢겨진 채로,허리가 꺾이면 또 꺾인 채로 자신의삶을 꿋꿋이 지켜나간다.무성한 가지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도 다투지도 성내지도 않는다.오히려 서로 얽혀 등 기대고 의지하며 사는 것이다.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자신만의영역을 지키기 위해 눈을홉뜨고 있지 않은가.아직은 여린잎으로 숲을 이루지 못하는 나무들을 보면서 문득 내 속이뭔가로 꽉 차 오르는 것을 느끼는 산행이었다. ▲박지현 시조 시인
  • 한나라 “與 아예 막가기로 했나 사실상 국정 포기 선언”

    한나라당은 10일 민주당 장재식(張在植)의원의 자민련 이적이 향후정국에 미칠 파장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허탈감과 분노를 나타냈다. 당직자들도 격한 말로 민주당과 자민련을 싸잡아 성토했다.“여권이완전히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아예 막 가기로 했다”라고 쏘아댔다. 한나라당 국정위기비상대책위(위원장 河舜鳳부총재)는 10일 여의도당사에서 회의를 열고 정부·여당이 민의를 거부한 채 자민련 교섭단체 만들기를 통한 ‘야당 죽이기’에 혈안이 돼 있다고 보고 자민련을 교섭단체로 상대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당직자들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직접 겨냥하는 등 거센 비난을쏟아냈다.권철현(權哲賢)대변인은 성명을 내고 “2차 임대극은 체면이고 국민들의 비난이고 일절 개의치 않겠다는 국정 포기 선언”이라고 주장했다.“국정쇄신책을 발표하는 연두기자회견을 하루 앞두고이런 일을 하는 대통령의 정신상태를 의심치 않을 수 없으며,이런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인정해야 할지 국민들이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할지경에 이르렀다”고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정창화(鄭昌和) 총무는 “한 번 순결을 잃으면 부끄러운 게 없다고하더니,다시 정부가 의원을 임대함으로써 윤리적으로 완전히 추락했다”며 자민련을 당분간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장광근(張光根)수석부대변인도 “자민련이 법적으로는 원내 교섭단체일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그림자 정당’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다. 이회창(李會昌)총재는 장 의원의 이적 소식을 듣고는 “허,그것 참…”이라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고 주진우(朱鎭旴)총재비서실장이 전했다.김기배(金杞培)사무총장은 “국민이 결정한 정당 지지도를무시하는 민주당은 차라리 해산하라”면서 “국민들이 정강·정책을살펴 뽑은 의원을 멋대로 임대차하면서 어떻게 ‘국민의 정부’라고할 수 있는가”고 반문했다. 자민련 교섭단체 등록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아 제명된 강창희(姜昌熙)의원은 “계속해서 ‘죽는 수’를 쓰고 있다”면서 “그렇게 무리를 해가며 교섭단체가 되면 뭘 하나.국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텐데”라고 말했다. 김상연기자 carlos@
  • 대한매일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작-최하림론(1)

    *역사와 개인이 만나는 시의 자리-최하림론. 1.거친 육성(肉聲)과 혼돈을 넘어서 고야의 한 그림에는 황폐하고 공포스러운 표정의 크로노스가 자식을잡아먹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그림 속의 주인공 크로노스는 ‘시간’을 상징하는 신으로서 자식을 낳는 족족 잡아 삼키는데,자식 중에하나인 제우스를 삼켰다가 제우스의 아내 메티스〔‘숙려(熟慮)’라는 뜻의 여신〕가 준 약을 마시게 되어 그를 토해놓는다.아버지의 뱃속에서 놓여난 제우스는 아버지 크로노스를 무한지옥인 타르타로스에가두어 버리고 은(銀)의 시대를 펼친다. 인간 상상력의 한 중요한 테마가 실현되어 있는 크로노스의 신화에서, 우리는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류의 뿌리 깊은 욕망을확인할 수 있다. 크로노스의 자식들인 우리 인간은 그의 뱃속에서 삶을 영위하지만,그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을 열망한다.종교를 비롯한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 신화적 상상력을 실현하려는 욕망의 발현이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 밖에 존재할 수 없으며,인간의 삶이란 결국 시간과 벌이는 고투의 흔적이다.시간은 모든 고통의 원천이자 자기동일성의 근원적 조건인 것이다.우리는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서 생의 좌표와 의미를 가늠하고 수정한다. 시간이 거쳐가고 남은 자리에 부려져있는 소모와 쇠약, 또 한켠에서 벌어지는 생성의 현장은 인간의 근원을 돌아보게 하는 냉엄한 지표이다. 인간의 경험과 욕망을 담아내는 문학은 궁극적으로 시간과 투쟁하는존재의 모습을 형상화한다.시의 경우,이 대결의 양상은 정서적 직접성과 대상의 중층성이라는 성격을 띠게 되는데,여기서 대상의 중층성이란,현실과의 역동적 상호 작용 속에서 구축되는 한 시인의 작품 세계에는 현실의 시간적 궤적과 생리적 연치가 더해가면서 변모하는 한자연인의 모습이 함께 담겨있음을 말한다. 시에는 시대와 개인을 통과한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시는 시대와 개인,역사와 인간이 삼투하며 길항하는 생생한 내면의 현장이다.한 시인의 시세계를 조감함으로써 우리 자신 속에도 깃들어 살고 있는 시간의 신이 한 인간의 몸을 빌어 건네는 전언을 들을 수 있으며,아울러 몸 속에 지핀 시간과의 길고도 험한 싸움을 수행하는 한 정신의 고언(苦言)도 듣게 되는것이다. 이미 다섯 권의 시집 ―『우리들을 위하여』(1976),『작은 마을에서』(1982),『겨울 깊은 물소리』(1987),『속이 깊은 심연으로』(1991),『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1998) ― 을 상재한 바 있는 최하림은 역사와 현실에 대한 진지한 사색과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압축된 풍경과 서정적 형식을 통해 형상화해 왔다.그의 시에서 우리는 지나온 역사의 의미와 그 현실을 통과한 한 개인의 정신의 풍경을,더불어 몸을 받은 존재로서 시간을 경험하는 한 인간의 고단한 삶의역정을 보게 된다. 최하림의 시가 현실참여적 성격을 보이는 1970,80년대는 전사회적으로 정치적 열기가 강렬한 시기였다. 소위〈시의 시대〉로 불렸던 이 연대(年代)에 시가 발휘한 힘은 분화(噴火)를 꿈꾸던 당대인의 욕망과 상상력에서 발원한 것이었다.극렬한 용출을 욕망하게 만든 억압적 상황은 역설적으로 시에 힘을 실어주었던 배후(背後)였으며,현실의 후광 속에서 시는 단일하면서도강렬한 상징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그러나 한편으로는 역사와 현실의거대한 깃발 아래,개인의 실존에 대한 시적 사유의 깊이나 언어적 성취가 상대적으로 소외되기도 하였다. 시 장르의 폭발력이 외부에 있었던 만큼,현실적 열기가 지나간 현장에는 작부들의 사이비 신세타령만이 웅성댈 뿐,역사와 현실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들은 이제 실종되고 없다.80년대가 부려놓고 간 피폐하고 앙상한 언어의 잔해들 위로,묵시록적 상상력과 정신분열증적 언어들이 쇄말리즘의 안개 속에 밀려와 있고,‘시의 죽음’이 풍문처럼떠도는 상황에서 한 세기가 막을 내렸다. 그리고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미만하던 세기말의 암울한 전망과 우려가 새로운 세기의 도래와함께 말끔하게 제거되면서,그 자리에는 기술자본주의의 지칠 줄 모르는 광란의 질주에 도취되어,그것에 저항하고 개입할 의지를 포기한상혼(商魂)들이 혼몽 속을 헤매고 있다. 최하림 시의 독자적 가능성은,‘역사적 연대’의 흔적들이 썰물처럼빠져나간 이 흉흉한 시점에서도 여전히 역사와 현실에 대한 진지한천착을 서정적긴장 속에서 일관되게 수행해 오고 있다는 점,아울러그러한 작업이 자기 존재,나아가 존재 일반에 대한 깊은 성찰에까지닿아있어 시적 사유의 폭과 깊이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 놓여 있다. 우리는 그의 시에서 7,80년대의 날선 육성(肉聲)과 90년대의 세기말적 언어들을 넘어서는 치열한 시적 사유를 만나게 된다.깊은 고통과오랜 침잠의 시간들이 동행하는 그 세계에서,우리는 ‘역사의 시대’에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개인의 실존적 고뇌들이 진지한 역사적 상상력과 조우하는 장면을 목도할 수 있다.역사와 개인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최하림의 시적 태도는 우리 시대 문학의 자리를 새삼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강인한 정신 속에 길이 있다.길을 만들고,그 길을 가는 것은 문학의 태생적인 운명이다.그것은 포기하지 않는 꿈이,문학의 배태(胚胎)된 자리이기 때문이다. 2.역사의 공범의식,그 도덕적 순결성〈아우슈비쯔〉는 시간의 진행을 진보의 역사로 인식했던 인류에게근본적인 반성의 계기였다.근대의 쌍생아인 자본주의와 역사주의 모두에 가능태로 잠복해 있던 폭력적 욕망이 그 포악성을 드러낸 자리에서 역사는 시간의 근본적인 의미와 방향을 인간으로 하여금 되묻도록 요구하였다.20세기의 인류에게 〈아우슈비쯔〉가 있었던 것처럼우리 현대사의 한 극점에는 〈광주〉가 놓여있다.역사적 상상력의 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주〉는 결과적으로 역사적 현실로부터 선회하는 최초의 기점이 되었다.그것은 고통의 진원지를 응시하는 힘의부족에서 연유한 것이었는데,〈광주〉를 문제삼던 많은 사람들은,아예 〈광주〉가 서있던 ‘역사의 자리’를 떠나버리고 말았다.바로 이지점이, 최하림을 여타의 시인들과 갈라놓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한국사의 비극적 상징인 [광주]를 통과하면서, 그리고 ‘현실사회주의권의 해체’라는 세계사적 변혁을 지나면서 최하림은 역사와 존재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사유 속으로 침잠한다.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의 붕괴를 그는 외부적 현실을 통해서 해소하지 않고, 역사를 내면속에 소환하는 방식으로 끌어안는다.역사의 내면화는 필연적으로 역사를 윤리학의 차원으로 환원한다.역사는 익명의 타자의 것이 아닌,주체의 윤리적 실천의 장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따라서 외부에 대한공격적인 정서보다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반성적 사유가 시의 주를 이루게 된다.낭만적 격정과 들끓는 고뇌로부터 한걸음 비켜선 자리에서 최하림은 지나온 역사와 시간을,그리고 시와 인간을 응시한다. 어둠과 함께 온 기억들에 싸여 나는/나를 밝혀주지 못하는 불빛을본다/빛이 멀면 편안하다 죄가 많은/우리는 죄들이 두렵고 어둠이 내려서/아름다우니 어둠에 몸 섞는다/이런 밤 새들은 얼마나 조심스레/그들의 하늘을 날았던지/내 영혼은 어디를 방황했던지/검은 유리 같은 공기 속에서 길들은/보이지 않게 밤으로 이동하고/새로운 추억이짐짝처럼 마른 나무 밑에 쌓인다/시간이 별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흘러 간다/시간을 따라서 광목도로 어디쯤 걸음을 멈추고 쉴 곳이 있을것이다/잠시 유숙할 집이 있을 것이다/우리에게 범한 죄를 우리가 사할 때가 있을 것이다/한 사람에게만은 사랑이었고 배반이었던 여자도어디쯤 있을 것이다/그러나 세상은 결국너를 버리고 달려간다/세상은 고통스럽고 일어서는 자는 숨을 수 없어서 불행하다/내 가슴은 사직처럼 허물어져간다/예감을 노래해선 안 된다/나는 밤으로 간다 잘있거라/한번도 힘껏 꽃잎 피지 못하고/한번도 힘껏 울어보지 못한/정다운 말들아 내 딸들아 ―「光木道路」 전문 한바탕의 회오리 같은 역사가 훑고 지나간 내면 세계에,짙은 허무와체념이 배음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쓸쓸한 어조 사이로 배어나오는고통과 절망 속에,내면으로 귀환한 역사의 흔적이 음각되어 있다. 이흔적이 구체화된 기억의 형상은 최하림의 역사 인식을 반영하는 중요한 단초로서,그의 시 곳곳에는 역사가 남기고 간 상처가 고통의 기억으로 잔존해 있다.그 기억의 공간은,‘절망의 부레 찢어지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악마구리같이 아우성치며’(「말하기 전에,나는」) ‘피투성이 된 붉고붉은 입술들’(「우리들은 오늘도」) ‘갈가리찢긴 육신의 목소리’(「무등산」)들이 ‘합창을 이루는’, 아비규환의 절규가 가득한 곳이다.이러한 고통스러운 공포의 기억을 조성한과거는‘몇 대의 트럭이 난폭하게 거리를 질러가고’(「부식 동판화」) ‘탐욕스러운 개들이 안개 속으로 달려가’ (「고통의 문지방」)며 ‘사나이가 시간을 죄스레 칼질하고 생채기에서 뚝,뚝, 피가 흐르는’(「상처」),폭력과 살육으로 얼룩진 광란의 시간이다.주목할 점은 이러한 과거의 기억이 역사 자체의 이미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시적 화자를 끊임없이 고통스럽게 만드는 ‘죄와 벌’의 이미지로 출현한다는 사실이다.이는 “기억의 아이들이 붉은 얼굴로 지나가고/어디서인지 흰 이를 드러내며 킬킬킬킬/웃는 아이”(「섬진강」)와 같이 과거의 기억에 대응하는 심리적 이미지가 대체로 자조적이고 자학적인 형상으로 각인되어 시인의 내면에 환기된다는 점에서 보다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역사적 현장을 투과하면서 굴절,각인된 이러한이미지들은 시인이 과거의 역사를 자기반성의 방식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최하림에게서 과거는 부정적 실체라기보다,폭압적 상황을 결과적으로 방기했던 고통스런 부채의 시간인 것이다. 역사를 내면화하는 이러한 방식은 최하림의 많은 시편들을 의식의풍경으로 읽게 만든다.인용된 시의 배경인 ‘어둠’의 상황은 죄의식속에 고통스러워하는 화자의 내면을 상징한다.‘빛’과 대조되는 ‘어둠’은,공포와 방황의 시간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윤리적 자의식의내면 상태를 보여준다.이 어둠 속에는 한국 근대사의 비극적 경험과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이 각인시켜놓은 고통스러운 상흔,시간을 역사의 진보로 인식한 20세기적 사유의 참담한 좌절이 가로놓여져 있다. ‘빛’으로 생각했던 역사와 시간의 배반을 절망적인 체념으로 추억하면서도,자신을 ‘어둠과 함께 온’ 역사의 주체로 사유하는 시인에게 과거의 기억은 ‘짐짝’ 같이 둔중한 고통의 추억이 될 수밖에 없다.광포한 역사의 기억이 형벌과 같은 공포의 대상이라면,그 기억의공간 속에서 시인은 자신을 유형수(流刑囚)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적인 역사,패배의 역사를 주체가 되어 감내하려는 태도는 최하림시의 역사 의식과 도덕적 순결성의 원천이다. 역사의 폭력에 희생된영혼들이 ‘보이지 않는 내 맘속의맘까지도 감시한다’(「죽은 자들이여,너희는 어디 있는가」)는 토로나,‘말’에 대한 자학적인 공격,그리고 시의 언어를 형벌로 인식하는 태도 등은 최하림이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의식의 내면으로 소환하여 현재의 윤리적 검열의 내적장치로 삼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베드로] 연작시들과 [소록도] 시편들은,자신을 불행한 역사의 공범자로 인식하는 시인의 이러한 의식을 반영한다.가롯유다뿐만 아니라베드로 역시,예수를 로마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팔아넘긴 공범자라는죄의식이 죽음과 패배의 시대를 통과한 최하림의 내면 속에 자리잡고있는 것이다. 포악한 현실의 암묵적 공범이라는 이러한 윤리적 자의식은 “우리에게 범한 죄를 우리가 사할 때가 있을 것이”라는 대용서의 전제를 마련한다.이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예수의 정신과 상통하는 것으로서,우리는 최하림의 시에서 개인의 윤리성의 문제로 화육(化肉)한 역사의 실체를 만나게 된다.그에게 있어서 역사는자신의 [시와 삶]을 향해 끊임없이 윤리적 질문을 투척하는 고통의실체인것이며,시는 역사에 바치는 고해성사인 셈이다.따라서 시 초반부의 ‘빛이 멀면 편안하다’는 진술은,회한과 고통이 배어있는 역설적 고백으로서,이러한 도덕적 순결성은 윤리적인 차원을 넘어 종교적인 성격에까지 닿아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최하림의 시는 시간을 보는 시각에서 지상으로 복귀한다. ‘사랑’이자 ‘배반’이었던 역사와, 역사의 연인들은 시간의 무심한흐름 속 ‘어디쯤 걸음을 멈추고 쉴’ 것이기 때문이다.시인은 영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명멸하는 역사와 인간 존재의 의미를 되묻는다. ‘세상은 결국 너를 버리고 달려갈’ 것이고 역사의 전망을 모색하는 자는 ‘숨을 수 없어서 불행할’ 것이지만, 그래도 시인은 다시그 역사의 암담한 ‘밤으로 갈’ 것임을 밝히고 있다. ‘예감을 노래해선 안 된다’는 당위적 진술과 ‘나는 밤으로 간다’는 고백 사이에는, ‘역사의 진보’라는 믿음의 종말이 몰고온 뼈아픈 각성과 현재의 암담함을 감내하겠다는 고뇌의 의지가 가로놓여 있다.시간의 냉혹함을 응시하는 유한한 역사적 존재의 허무와 절망을 그대로 끌어안으면서도 결코, 역사적 삶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에서 우리는 어둠 속을 걸어가는 한 정신의 비장한 모습을 보게 된다. 역사를 자신에 대한 윤리적 성찰의 계기로 수용하면서도,다시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최하림의 엄격한 현실주의에서 우리는 고결한 지상의 세계와 만난다.미래를 밝혀줄 어떠한 것도 남아있지 않은 현실을자기 성찰의 자리로 삼는 그 강인한 정신의 고도(孤島)는 우리에게시의 자리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3.인간의 실존,그 처연한 고요 현재는 과거의 기억 위에서 진행되며 모든 삶은 시간 속에 묻힌다는명제는,최하림 시의 기본 전제이다. 최근 시집『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에는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역사와 실존의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이 시집에 수록된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동일 제목의 두 편의 시는 최하림의 시적 작업이 그동안 집요하게 천착해온 두 테마를 압축해서 보여준다.두 편의 작품에서 추구하는 [집]이란,하나는 우리 모두가 다시 꿈꾸며 세워야 할 역사적 미래를 의미하고,나머지 하나는 실존적개인이 최종적으로 도달할 적막의 세계를 상징한다. 이 두 개의 테마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작품 속에 나타나는데, 인간실존의 주제가 보다 근원적이라는 점에서 후자의 것이 최하림 시의보다 깊은 심층을 이룬다고 하겠다.이는 역사의 문제를 개인의 윤리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개인적 실존의 문제를놓지 않고 역사적 현실을 응시하는 그의 자세는, 한 평론가의 지적대로 그를 ‘고전적 정신의 표상’으로 이해하게 하는 요인이다.개인의존재성에서 출발하여 현실의 문제에 육박해가는 이러한 특징은 최하림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그의 시의 미덕이다.[집으로 가는 길] 두 번째 작품에서 우리는 그가 도달한 개인적 실존의 한 극점을 보게 된다. 많은 길을 걸어 고향집 마루에 오른다/귀에 익은 어머님 말씀은 들리지 않고/공기는 썰렁하고 뒤꼍에서는 치운 바람이 돈다/나는 마루에 벌렁 드러눕는다 이내 그런/내가 눈물겨워진다 종내는 이렇게 홀로/누울 수밖에 없다는 말 때문이/아니라 마룻바닥에 감도는 처연한고요/때문이다 마침내 나는 고요에 이르렀구나/한 달도 나무들도 오늘내 고요를/결코 풀어주지는 못하리라 ―「집으로 가는 길」(88쪽)전문 이 작품은 소리가 멎고 시간이 정지된 듯한 깊은 고적(孤寂)의 세계를 보여준다.원초적 고요에 휩싸인 흑백필름 같은 이 침묵의 세계에서 우리는 인간의 근원적인 실존의 풍경을 본다.모성의 자궁에서 나와 영원의 집으로 돌아가는 인간은,그가 출발한 고요의 세계와 도착할 침묵의 집 사이에 존재한다.그 집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길을 가야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 ‘많은 길을 걸어’ 귀환하는 ‘고향집’은 실존의 근원지로서,길의 출발이었던 ‘어머니’조차 존재하지않는 무(無)의 세계이다.‘공기는 썰렁하고’ ‘치운 바람이 도’는그 적막의 세계에서 ‘벌렁 드러눕는’,이 시의 가장 처연한 대목은존재의 고단한 무게와 허무함을,행위를 통해 서늘하게 표현하고 있다.존재의 무게를 부려놓는 행위는 주검이 되어 땅에 몸을 누이는 행위를 환기시킨다.여기에서 시인이 도달한 ‘처연한 고요’가 감도는 ‘마룻바닥’은 내가 떠나온 어머니,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도달했을 인간 보편의 공간이자 삶 속에 내재한 근원적인 침묵의 세계이다.죽음이란,결국 존재를 끌고 다니던 침묵이 보편적인 고요의 세계로 돌아가 합류하는 영역인 것이다.그 거대한 절대 침묵의 세계 속으로의 편입,그것이 바로 [집으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이 ‘처연한 고요’의 세계에 도달했다는 진술은, 시인이 이미 이 상태를 경험했음을 의미한다.그것은 사물로부터의 소외를 처절하게 체험했던 투병기간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시인이 도달한 이‘처연한 고요’의 세계는 그의 시에 등장하는 ‘무색계’(「구천동시론」)의 심연을 이루는 정서이다.색신(色身)과 물질의 속박을 벗어나 순정신적 세계를 의미하는 무색계는,최근 시집(『굴참나무 숲에서아이들이 온다』)에 다수를 차지하는 만물과 교감을 누리는 시들의정신적 바탕이라 할 수 있다.사물로 스며들고 사물에 개방되어 만물과 동화(同和)를 경험하는 투명하고 정결한 세계는,이미 무색계에 들어와 있는 상태로서,사물과의 자유로운 정신적교감을 보여주는 이시들 속에 처연한 정서가 내재되어 있는 것은 이 ‘무색계’가 육체적 실존의 끝을 기저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최하림의 시세계에 한 축을 이루는 개인적 실존의 문제는 그의 시에배어있는 허무와 쓸쓸함의 원천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존재의 막막함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그의 태도에서 우리는 실존의 처연함,그 서늘한 고요를 감지하게 된다.어떠한 과장이나 포오즈도 용납하지 않고 존재의 현실을 고스란히 감내하는 그의 준엄한 태도는,현학적 사변과 요설,감상적 자기 연민과 소영웅주의가 만연한 오늘의 문학적 현실을 반성케 하는 시정신의 본질을 보여 준다.언어의 사원에서 울려나오는 서늘한 사유는,삶이 부과한 시의 자리이자 시가 돌아가야 할 시원(始原)이다. 김문주
  • [대한광장] 언제나 새로운 시작

    눈이 내렸다. 청청한 소나무 위에 흰 눈은 내려 꽃을 피웠다.아름답다.하얀 순결함으로 숨죽인 산사는 시작의 의미를 일깨워 주고 있다.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듯이 모든것은 변화의 물결을 따라 사라져 간다.어제는 흘러갔고 오늘은 이렇게 고요한 신새벽으로 다가오고 있다. 흘러가지 못하는 것은 어제에집착하는 우리의 마음뿐이다. 집착은 마음의 그림자이고 환(幻)이다.거짓된 마음의 그림자에 구속된 사람은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하지 못한다. 신새벽,눈내린 산사의 아름다움은 마음이 자유로운 자의 것이다.마음이 구속된 자는 눈 내린 새벽 산사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없다.마음에 집착의 응어리가 있는 사람은 언제나 과거를 기웃거릴 뿐이다. 우리네 인생은 파도치는 바다와 같다.어느 한순간도 고요한 안위를약속하지 않는다.인생은,거칠게 파도 치는 바다를 당당하게 헤쳐 나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러운 것이다.이 고해(苦海)의 세계에서 누군들 어렵고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누군들한때 좌절의 길목을 서성이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그것을 능히 참고견디어 나간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용기와 지혜의 행위인가.세상이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 당당히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높은 지위나 많은 부에 있지 않다.그것은 순간순간을 언제나 시작의 의미로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와 용기에 있다.언제나 새로운 시작으로 시간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좌절이란 덧없다.과거는 이미 흘러가 버렸고,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시간의 의미에 충실한 사람은 진정 시간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이다.우리는얼마나 부질없이 시간을 학대하는가.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에 매달려새로운 가능성으로 다가선 현재를 상실한 적은 그 얼마였던가. 살아가면서 어려움이 없기를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다.아무 것도 약속된 것이 없는 우리의 시간 속에는 언제나 어려움이 도사려 있다.노력하지 않으면 그 어려움은 언제나 높은 파도가 되어 나타난다.마음을 잘 지키지 못하면 우리는 그 파고에 넋을 잃고 표류하게 될 것이다.그러나 마음을 잘 지키어 낼 수 있다면 그 파고 위에서도 새로운시작을 꿈꿀 수 있다. 살아가면서 가장 슬픈 것은 마음을 잃는 것이다. 비록 소유한 모든것을 다 잃는다 해도 희망을 향한 마음을 지닐 수 있다면 그는 아무것도 잃지 않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그것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사람에게 상실과소유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상실이 소유가 되고 소유가 상실이 되는자유로움을 그는 이미 지녔기 때문이다.그것은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재산이다. 어떠한 두려움 앞에서도,어떠한 시련 앞에서도 그것은 새로운 길을 약속한다. 절은 길이 끝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출가사문은 길이 끝난 곳에서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들이다.새로운 길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끝 없는 발원과 희망의 다짐 없이는 결코 새로운 길을 만날 수 없다.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고자 하는 용기가 없다면 길을 찾겠다는 염원은 그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새벽에 일어나 파르라니 깎은 머리를 만지며 언제나 시작처럼길을찾겠다고 다짐한다.길 없는 길 위에서 되뇌이는 그 다짐이 행복한 것은 마음 속에 언제나 희망과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우리 모두는 어둠과 같은 한해를 보냈다.그러나 새롭게 떠오르는 신사년의 태양은 그빛으로 찬란하다.그것은 언제나 시작의 의미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눈을 감자.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 보자.아직 과거의 상처와 좌절이 마음에 남아 있다면 모두 버리도록 하자.마음에 좌절과 회의가 남아 있을 때 시간은 언제나 과거로 머무르지만,마음에 희망과 확신이 있을 때 시간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된다는것을 온 마음으로 깨달으며 새해의 태양을 향해 힘차게 길을 떠나자. 성전스님 조계종 옥천암 주지
  • [대한광장] 달빛을 밟으며

    계절을 따라 달빛은 변한다.봄날의 달빛이 포근하다면 여름의 달은태양의 잔영을 안은 채 뜨겁다.그리고 가을 달빛은 가슴에 한 줌 바람을 남기는 시림을 지니고 있다.가을 날,사람은 달빛 아래서 외롭다.그 외로움이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눈을 들어 달을 향해 잃어버린것들을 하나하나 호명하게 한다. 늦은 가을 밤에 달을 바라보고 있으면 잃은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나이를 먹을수록,세상에 깊이 발목을 묻을수록 가슴은 더욱 더 헛헛해질 뿐이다.모두들 스쳐 지나가고 혼자라는 생각이가슴을 저미게 한다. 달이 밝은 밤이면 산길에는 끊이지 않고 발자국 소리가 이어진다.창호지에 어리는 밝은 달빛이 끝내 수행자들을 유혹해 산길을 걷게 하기 때문이다.삼삼오오 혹은 혼자 산길을 나선 그들은 달빛에 안긴 산길의 어여쁨에 새벽이 올 때까지 길을 걷고 또 걷는다.무슨 생각들을하는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걷는 그들의 발 끝에는 달빛만이 차여 물보라처럼 부서진다. 달빛 밝은 밤,산길을 걸으면 내 주변을 스쳐간 많은 얼굴들이 떠오른다.그 순간 그들의 모습은 정답다.어디서 무엇들을 하는지 새삼 그들의 안부가 긍금해지기도 한다.수행자의 그 차갑던 마음도 이 밝은달빛 아래서는 회상의 한 때를 기꺼이 허용한다. 불교에서는 옷깃을 스치며 지나는 인연을 만나기 위해 오백년이 걸린다고 한다.그리고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앉는 인연을 만나기까지는 삼천년이 지나야 한다고 한다.오백년만의 스침과 삼천년만의 만남이라면 그것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내 기억 속의 얼굴들은 모두 삼천년을 지나온 사람들이다.만남에 삼천년의 시간이 필요했다면 잊기에도 삼천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단지 몇 년을 보지 않았다고 잊었다고 말하는 것은 인연에 대한 오만이다.만나는 사람 누구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나는 삼천년의 긴 시간을 후회해야 할는지 모른다.누군가에게 손해를 입히고 누군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면 그 빚은 삼천년을 쫓아올 것이다. 돌아보면 산다는 것의 의미는 너무나 지중하다.삼천년만의 인연들이모여 우리는 지금 이 시간 속에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얼굴과 이름을 잊었다는 이유로 이 소중한 인연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다.삼천년 전에는 부모나 형제나 연인이었을 우리가 그때의인연을 망각하고 분노하고 미워한다면 그것은 지울 수 없는 어리석음으로 남을 것이다. 달빛 아래서는 참회로 순결해지는 마음을 만날 수가 있다.내가 지어왔던 모든 죄업과 비정과 불성실을 모두 드러내 용서를 구하고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못한 말들을 달빛에게는 다 고백하고만 싶다.달빛이일체를 숨김없이 내게 왔듯이 나 또한 달빛을 향해 그렇게 투명하게다가서고 싶은 마음이다. 흔히들 시간이 지나면 지난날의 잘못은 잊혀진다고 말한다. 그러나정작 잊혀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하늘이 잊고 땅이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잘못을 쉽게 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고,잘못에대해 깊이 참회하는 사람은 두번 다시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잘못을 잊기 위해 양심을 가리기보다는 양심을 드러내기 위해잘못을 참회하는 것이 훨씬맑은 삶이다.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사람의 마음은 투명하여 조그마한티가 앉아도 그 자리에는 표가 난다. 그러나 언제나 자기를 합리화하는 사람의 마음은 혼탁하여,바위같은 어둠이 내려앉아도 그 마음에는표가 없다. 우리 모두는 양심을 가린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소중한 인연의 모임이라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싸우고 속이고 미워하는 우리들의 세상살이가 큰 빚이 되어 쫓아온다는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달 밝은 밤 산길을 걷는 스님들처럼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가던 길을 멈추고 달을 바라볼 일이다. 그리고 달을 바라보며 진정 우리가 잃은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야만한다. 성전 조계종 옥천암 주지
  • 중년층 뮤지컬 한국판 ‘로마의 휴일’

    “유럽 순방중 어느 도시가 가장 인상적이었나요?”“로마입니다.평생 로마를 기억할 것입니다”트레비 분수옆 미장원에서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잘라내고 단 하루의 꿈같은 휴일을 보낸 앤 공주는 로마를 떠나기 전 기자회견장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애틋함을 이 한마디에 담아낸다.태연한 척짧은 악수를 나누는 앤 공주와 신문기자 조의 이별장면은 숱한 연인들의 가슴을 울렸다.무명의 오드리 헵번을 단박에 만인의 요정으로‘신분 상승’시킨 추억의 영화를 스크린밖에서 만난다.28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막올리는 뮤지컬 ‘로마의 휴일’은 햅번의 청순함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에게 아련한 향수와 색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킬 만한 공연이다. 신시 뮤지컬컴퍼니와 극단 유가 공동제작한 ‘로마의 휴일’은 몇가지 점에서 눈길을 끈다.먼저 30대이상 중장년층을 주 관객대상으로삼았다는 점.20대 젊은이들의 입맛에 맞춘 대다수 뮤지컬작품과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악극사이에서 이렇다할 볼거리를 찾지 못했던 관객층을 과감히 끌어들였다.신시의 박명성대표는 “본격적인 중년용 뮤지컬이란 점에서 기대와 우려가 교차된다”면서 “관객 반응이 좋을경우 ‘7인의 신부’등 비슷한 류의 작품을 계속 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로마의 휴일’은 브로드웨이나 유럽 뮤지컬에 비해 국내에 덜 알려진 일본 뮤지컬이란 점에서도 독특하다.일본 토호뮤직코포레이션이 98년 초연한 창작품을 저작료내고 들여온 것.앤 공주를 연기한 여배우 다이치 마오의 뛰어난 미모와 로마의 아름다운 명승지를 담아낸 화려한 무대 등으로 호평을 받아 올초 도쿄에서 재공연됐었다.한국판‘로마의 휴일’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아무래도 극중 남녀주인공.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 누구라도 연기하기가 만만치않을 터이기 때문이다.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앤 공주는 뮤지컬배우 김선경.‘드라큘라’에서 순결하고 아름다운 아드리아나로 열연했던 그녀는 배역이 정해지자마자 비디오를 구해 스무번이 넘게 헵번의 연기를 봤다고 한다.상대역인 신문기자 조는 노련한 중견연기자 유인촌이 맡았다. ‘로마 관광용영화’라는 우스갯 소리가 나올 정도로 시내 곳곳을등장시킨 원작의 볼거리를 무대위에 어떻게 재현해 낼지도 관심사항. 신시측은 ‘스페인 광장’‘진실의 입’‘기도의 벽’등 영화속 추억의 명장면들을 고스란히 살릴 뿐 아니라 스쿠터 질주장면까지 더해한층 입체적인 무대를 선사하겠다고 밝혔다.11월5일까지 매일 오후 4시·7시30분 두차례 공연.1588-7890이순녀기자 coral@
  • [네티즌 이슈] 낙태문제

    *합법화 다시 생각을. 지난 9월 유엔 인구기금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매년 8,000만명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이중 5,000만명이 낙태수술을 받고 있으며,그 중 2,000만명이 전문의료인의 도움없이 안전하지 못한 낙태수술을 받으며,이로 인해 7만8,000명이 목숨을 잃고 있다고 한다.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이 간단한 보고 내용만으로도 우리는 단순한 살인행위로 치부되어 외면하고 있었던 낙태의 합법화 문제에 대해숙고할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현대사회는 점점 다원화되고 있고 성의 해방은 의식의 해방이라는이름을 붙여 공공연히 대두되는 세상이다.이런 현상은 모두 삶의 주체로서 개인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한다.그런데 낙태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미혼여성의 경우,낙태의 주된 이유가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첫째가 아이를 낳음으로써 쏟아질 사회적비난이고,둘째가 자신의 장래계획에 지장이 있어서라고 한다.이들의입장에서 본다면 낙태의 문제는 생존의 문제,즉 세상과 공존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그렇기에 많은 여성운동가가 주장하는 낙태의 합법화란 낙태를 인류사회적 차원을 떠나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켜달라는호소인 것이다. 낙태에 관한 논의는 항상 여성들의 인권에 결부되어있다.왜냐하면모든 임신의 또다른 원인인 남자들은 적절하지 않은 시기,적절하지않은 대상과의 섹스는 그 순간 잉태될지도 모르는 태아의 살인행위라는 관념이 없다.그러니 늘 여자들만 섹스의 결과에 따른 책임,즉 임신에 대한 두려움에 싸여 사는 것이다.피임에 성공한 것이 대학입시에 붙은 것보다 더 기쁘다는 한 여대생의 고백을 들으며 우리사회가이 대책없이 무거운 굴레를 벗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피임이다.이것은 보다근본적인 교육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미국에서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남자아이들에게 콘돔사용법을 가르치고 그 사용을 권한다.이 광경을 목도하고 너무 지나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현재 미국은통계적으로 해마다 낙태율이 낮아지고 있다.교육의 힘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정말 낙태가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죄악이라는 인식이 우선된다면 섹스는 다름 아닌 새 생명에 대한 책임의 시작이라는 철저한 계몽이 되어야 한다.부수적으로 피임교육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철저해야 한다.뻔히 눈에 보이는 비극을 막기 위한 방지책은 아무리 지나쳐 보여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그러고도 방지를 못해 발생한 임신의경우 출산과 육아의 직접책임이 있는 여성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원치 않는 아기를 낳은 산모와 아기를 환영할 사회분위기가 수반되지않는데, 무조건 생명윤리를 앞세워서 아기를 낳으라고 강요하는 것은지극히 무책임한 폭력일 뿐이기 때문이다. ■안 윤 미 소설가 ym1209@orgio.net. *여성 자유의지에 맡겨라. 살다보면 똑떨어지는 정답이 없을 때가 많다.O,X의 문제로 다루기엔인간이 너무 복잡한 탓이다.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낙태’의 문제도 마찬가지다.이미 세계곳곳에서 찬반논쟁이 뜨겁지만 선뜻 어느한쪽을 택하기가 쉽지 않다.그러나 낙태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문제이기에 선택을 해야 한다면,나는 눈물을 머금고 ‘찬성’의 손을들어줄 것이다. 기존의 낙태 찬반논쟁의 핵심에서 ‘윤리’와 ‘생명’,두 단어가걸린다.전자는 낙태를 허용함으로써 생길 무질서한 성윤리를 견제하는 말이고,후자는 태아가 가진 생명의 권리를 누가 뺏을 수 있느냐는추궁이다.그러나 여기에서 나는 구조적인 모순을 본다. 먼저 윤리적 문제의 제기는 마치 낙태여부로 여성의 ‘도덕성’을가늠하는 듯 해 적절하지 못하다.성(性)은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면이고 꼭 필요한 부분이다.순결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면자유로운 성개념이 크게 문제시될 필요는 없다.만일 실수든 고의든임신을 할 경우에 결과로 남은 아이에 대한 책임은 여성 혼자 감당하는 수밖에 없다.그런데 이를 죄인처럼 제재한다는 건 남성위주의 사고로 여성의 정조를 강요하는 것과 같다.오히려 성이 개방되고 공식화될수록 그에 따른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대처될 수 있다.확실한 피임법이라든지 미혼모 수용시설 등이 떳떳하게 마련될 수 있다는 말이다.이렇게 볼 때 낙태허용이 윤리를 혼란시킬 것이라는 의견은 허점이 있다. 다음으로 태아의 ‘생명존중’의 문제이다.꼭 낙태시술의 장면을 보지 않더라도 태아의 생명은 분명히 존중받아야 한다.그러나 출산은여성의 생명도 담보로 하는 행위이다.감히 어느 쪽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더구나 가부장제의 사회에서 ‘남아’를 낳아야만 되는여성에게 줄기차게 아이를 낳으라고 할 수도 없다. 여성은 출산을 선택하든 낙태를 선택하든 엄청난 고통을 겪게 마련이다.아무도 그 고통을 감수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선택은 여성자신의 ‘자유의지’여야 한다.특히 낙태는 모두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선택했다면 그녀의 결정은 존중되어야 한다.사회나 종교단체의 일방적인 구속이나 제재는 여성에 대한억압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낙태는 찬반의 논쟁으로 끝내기보다 둘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환경을 바꾸는 쪽으로 대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만일 낙태가 허용된다면 낙태의 직접적인 결정은 여성이 하겠지만 그 결정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법이 아닌 그사회의 환경과 분위기라고 생각한다.임신한 여성을 수용하는 분위기,이렇게 출생한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는 시설기관들이 제대로 마련될 때 여성은낙태가 아닌 출산의 선택으로 본인의 의지를 움직일 것이다.정말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분위기가 마련될 때까지 우리의 관심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우리 모두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기쁘게 받아들일 때까지. ■임 지 연 나드리화장품 홍보팀 lovely0@nadricosmetic.co.kr.
  • 리뷰/ 14일 막내리는 SBS ‘아름다운 性’

    ‘성(性)담론을 한 차원 위로 끌어올린 혁신적 프로그램이다’,‘교육적 효과를 가장한 성인 토크쇼에 불과하다’….많은 화제와 논란을불러일으킨 SBS ‘아름다운 성’이 14일 21회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이 프로는 ‘성문제를 수면위로 공개해 올바른 성문화가 만드는 사회의 건강성을 찾자’는 기획의도 아래 지난 4월29일 30대 유부남의성생활을 다룬 ‘횟수의 진실’로 첫걸음을 내딛었다. 이후 여자의 성욕,권태기,미혼 남녀의 성,40대 남자의 성생활,포르노문제,노인의 성 등 민감한 문제를 과감하게 주제로 올렸다. 14일 마지막 회에서는 그동안 다룬 내용을 총정리하는 ‘성문화 최종보고서’가 방송된다. 기본적인 형식은 두 진행자(표인봉,박철)와 고정 카운셀러(정신과의사 표진인)를 중심으로 성교육 강사 구성애,개그우먼 조혜련 등이 패널로 등장했다.이와는 별도로 일반인 5∼6명이 출연해 주제와 관련한대화를 나눴고 설문조사 결과도 인용됐다. 인터넷 홈페이지(www.sbs.co.kr)에 올라온 글을 보면 이 프로에 대한 시청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엿볼 수 있다.‘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성에 대한 생각을 간접적으로나마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ID toltol42),‘우리의 성 의식을 다룬,첫번째 총대를 맨 프로라는사실에 박수를 보낸다’(ID 642579)등 칭찬을 보내는 시청자가 많았지만 ▲순결문제에 지나치게 개방적이었다 ▲MC의 진행이 너무 가벼웠다 ▲여성중심 시각에서 프로가 진행됐다는 등 비판적 내용도 적지않았다. 방송진흥원 주창윤 책임연구원은 “선정성 문제와는 다른,성문화에대한 담론을 열어준 의미있는 프로였다”면서 “특히 일반시청자들이직접 출연해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준 점이 좋았다”고 평가했다. 반면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조정하 사무국장은 “정성을많이 들인 흔적은 보이지만 지금과 같은 성문화가 존재하게 된 사회문화적 배경까지 깊이 들어가지 못한 점이 아쉬었다”고 지적했다. 장택동기자
  • “정조란 비밀을 간직한 채 지켜가는 약속”

    한때 부부였던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과 소피 마르소가 네번째 함께 작업한 ‘피델리티’(Fidelity)는 사랑과 순결의 의미를 집요하게따져묻는 영화다.줄랍스키 스타일의 이야기 전개방식이 이번 역시나과격하고 거칠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하지만 애초 감독이 던지고자 의도했던 메시지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일상적이고도 본질적인 것이다. 지난 22일 방한한 감독과 배우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정조는 복잡한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다.남들에게는 진부한 이야기지만 당사자들에겐 전부일 수도 있다.그것은 개인적 삶의 문제다”(줄랍스키)“‘피델리티’(정조)란 타인과의 비밀을 간직한 채 지켜나가는 약속이고 계약이며 선택이다”(소피 마르소)개방적 성의식을 가진 사진작가 클레리아(소피 마르소)가 길모퉁이꽃집에서 클레베(파스칼 그레고리)를 만나 사랑을 나눈 것도 처음엔스쳐지나는 열정에 지나지 않았다.그러나 출판사의 경영위기로 정략결혼을 앞두고 있던 클레베에게 클레리아는 아주 특별한 사랑.클레베의 자상함에 이끌린 클레리아는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사진작가 네모(기욤 카네)가 등장하면서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엇갈린 사랑을 그린 영화는 사랑과 정절의 무게를 열심히 저울질하기 시작한다.네모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느낌을 알아챈 클레리아는 뒤늦게 걷잡을 수 없는 격정에 휩쓸리지만,남편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지 못해갈등한다. 끝내 육체의 정조는 지켰지만 마음의 정절은 네모에게 줘버린 클레리아.그러고 보면 영화제목은 다분히 중의적이다.순수한 열정에 희생당하는 정절을 부각시키려 했을 수도 있고,뒤집어 정절의 굴레에 묶여억압받는 순수한 사랑에 대한 헌사일 수도 있다. 줄랍스키의 영화를 특징짓는 충격적인 장면들이 어김없이 끼어있다. 살아있는 사람의 눈을 매매하는 대목에서는 ‘샤만카’에서 애인의생골을 파먹던 장면이 오버랩된다.“실제 길거리에서는 그보다 더한일들도 벌어진다.그들을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지만 금지돼 있으니영화속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다”는 게 감독의 ‘변’이다. 황수정기자
  • KBS2‘태양은 가득히’강민기役 유준상

    “주말드라마 주인공을 맡았는데 부담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제 연기 인생에 전환점이 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 하겠습니다” KBS2 새 주말드라마 ‘태양은 가득히’(극본 배유미,연출 고영탁·신창석)의 남자 주인공 ‘강민기’로 발탁된 유준상(30)은 수수하고소탈한 인상이다.하지만 순간적으로 번득이는 눈빛은 깊고 날카로웠다. 유준상은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뒤 95년 SBS 공채 5기 탤런트로 TV에 데뷔했다.그 뒤 드라마 ‘백야’,‘첼로’,‘연어가 돌아올때’,뮤지컬 ‘그리스’,영화 ‘가위’ 등 여러 작품에 출연했다. 그가 그동안 맡은 역도 다양했다.“소박하고 순결한 청년부터 공사판 일꾼,부잣집 아들 등 이것저것 많이 했습니다.특히 검사 배역을자주 맡았죠”라고 밝혔다.이번 드라마에서도 강민기는 훗날 사법고시를 합격한 뒤 검사가 될 예정이다.유준상에게는 익숙한 배역이다. 그렇지만 강민기는 유준상으로서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악역’이라는 점에서 종전과 다르다. 민기는 출세를 위해 그의 유일한 친구 호태와 애인 지숙을 배신하고호태의 애인이자 대기업 상속녀인 가흔과 결혼하지만 결국 기업도 잃고 암에 걸려 쓸쓸한 죽음을 맞게 된다.“민기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잊지 못하고 이를 분노,미련 등의 감정으로 표출합니다.다행히 마지막에는 본래의 선한 모습을 되찾게 되죠”라고 강민기에 대해 설명했다. 본인의 성격이 강민기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지 묻자 “자신의 삶에나름대로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점은 같아요.그렇지만 저는 훨씬 소박한 편이죠”라고 대답했다.자신의 외모에 대해서는 “남들은 선해 보인다고 하던데…”라며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연기에서도 서서히 주가를 높이고 있는 유준상이지만 음악,미술 등못하는 것이 없다.색소폰,피아노,기타 등 악기 연주가 수준급이고 미술은 최근 개인 전시회를 열었을 정도다.“샤갈은 인생의 스승입니다.그림도 샤갈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상상과 동화의 세계를 함께 표현하려고 노력합니다”라고 자신의 미술세계를 설명했다. 음악과 미술 뿐 아니라 여행도 즐긴다.짬이 나는 대로 혼자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비어 있는 공간에 발자취를 남길 수 있다는 점이매력”이라고 유준상은 밝혔다. 장택동기자 taecks@
  • [여성 선언] 열사람의 義人 있으면

    “사회 지도층 인사가 그런 짓을 해서야…”.우리 시대에 유난히 많이 나도는 말이다.성직자,교육자,공직자,국회의원,법관 등등 어느 한곳 순결하게 남아있는 곳이 없다. “지도층이 타락했으니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라는 한탄을 많이 듣는다.그러나 지도층의 타락과부조리가 우리 시대만의 두드러진 현상은 아니다. 사회 지도층일수록,특권이 많을수록 그 특권을 바탕으로 이익을 챙기거나 불의를 행해 왔다는 것은 역사를 살펴보면 항상 되풀이되고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런 지도층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사회는 아직 붕괴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그 까닭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열 사람의 의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열 명의 의인이 없어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했다는 성경의 이야기는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올해,나는 두 사람의 여성에게서 의인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5월 광주에서 임수경씨는 정치개혁을 이끌어 나가리라 기대되는 젊은 국회의원들을 인터넷에서 고발했다.그리고 8월초 한 젊은 판사의부인은자신의 남편을 언론에 고발했다.고발내용은 유사했다. 개혁을 표방한 젊은 국회의원들이 혹은 법을 엄정하게 집행해야할법관이 단란주점에서 여성들을 동반하고 접대술을 마셨다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사회에서 이 정도의 사건은 비난하고 고발할 내용이라기보다는 으례 벌어지는 당연한 일로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오히려 이런 정도의 일을 가지고 자신의 동지를,혹은 자신의 남편을고발한 당사자를 비난하는 시각이 더 크다.특히 임수경씨의 경우, 그렇지 않아도 개혁세력의 발목잡을 꼬투리만 노리고 있는 보수 기득권층에 빌미를 제공했다해서 동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고,실제로 국민의 기대를 안고 출발했던 국회의원들은 여론과 보수층의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임수경씨는 “처음에는 화가 나서 기자회견을 열어 폭로할까 생각했지만 자제하고 글을 ‘제3의 힘’에 올린 것도 386세대 내부에서 한번 반성해보자는 의도”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는 선배들의 능력과 가능성을 믿습니다.지금은 비록 이미지가 훼손되었다 하더라도….오늘 쏟아지는 이 모진 매를 매로 생각하지 마시고,오늘의 이 (국민들의) 기대와 희망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고 당부한다. 판사부인은 “저의 행동으로 다른 판사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바라지 않습니다.남편이 스스로 그 자리를 물러나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것으로 만족합니다”고 밝혔다.그리고 남편인 판사는 “아내와대화를 나눴지만 아내의 순수한 마음에 상처를 주었고 법관으로서 저의 행동을 더이상 용서받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사법부를 떠나겠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새롭게 충격을 주었다. 광주의 젊은 국회의원들의 심정은 다양했을 것이다. 그러나 판사의 경우처럼 임수경씨의 행동을 충정이 깃든 뼈아픈 공론화 작업으로 받아들였던 사람이라면,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현실의타락한 면에 조금이나마 물들어가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지않았을까 싶다. 그런 사람이라면 언제라도 타락으로 흐르기 쉬운 권력의 속성을 제어할 수 있는 고삐 하나를 선물로 받은 것이다. 국회의원들이나 법관들 중에는 권력지향적인 사람도 있겠지만순수하게 개혁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고 믿는다. 권력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에게 두 여성의 고발은 코웃음거리도 안될 것이다.그러나 그 당시 광주에는 없었던 국회의원,그리고 그날 판사들의 술자리에는 없었던 법관이지만 진정한 개혁을 소명의식으로가졌던 사람들이라면,그들 가슴속에는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 하나가심어질 것이다. 한 사람의 의인은 그 사회의 10%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열 사람의 의인’이 의미하는 바가 아닐까. 김성옥 장안대 교수·철학
  • [대한광장]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결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과 개신교의 윤리’라는 책에서 서구 산업문명을 일으킨 정신적 동력을 탐구한 바 있다.이는 칼 마르크스가 역사발전의 동력을 유물론적으로 해석해 역사가 권력과 생산구조를 장악한 세력에 의해 만들어져 왔다는 테제에 쐐기를 박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베버는 산업문명을 일으킨 정신적인 동력을 칼빈주의 개혁신앙이 뿌리내린 지역의 개신교인들의 윤리의식에서 보았다.새롭게 발견된 복음의 능력으로 거듭난 개신교인들의 생활태도는 근면,절제,기도,노동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들의 자각중에는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새로운 ‘선민’으로 선택받았다는 사명감이 불타고 있었다.베버는 이러한 개신교인들의 생활신앙을 ‘세계내적 금욕’이라 이름지었다.세계내적 금욕이란 세속안에 살면서 선민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윤리로서 후에는 영국성공회 개혁운동 가운데서 생겨난청교도들의 윤리로 발전되어갔다.베버가 세계내적 금욕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세속을 떠나 수도원으로 들어간 가톨릭 사제와수도사들의 윤리와 구별짓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복음의 능력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세계 안에 살면서 선택받은 창조적 소수로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는 곤궁에 처한 것이다.세계내적 금욕이라는 윤리는 낡을대로 낡은 윤리의 옛 패러다임이 더이상 지탱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발전된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이었던 것이다.새 패러다임이 낡은 패러다임을 대치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하루아침에 낡은 질서가 새로운 질서에 의해서 극복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은 낡은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삼켜버리는 형국이다.새패러다임이 낡은 패러다임을 극복하기 위해선 많은 투쟁과정과 피나는 노력과 희생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낡은 가치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의 질곡에서 새로운 가치는 삼킴을 당해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유대땅에서 하나님나라를 선도했던 상황도 이와같은 경우에 해당된다.유대교의 낡은 패러다임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 가운데서 “때가 찾고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복음을 믿으라”는 외침은 낡은 패러다임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많은 무리가 그에게 몰려왔다.예수께서는 갈릴리호수를 중심으로 제자공동체를 형성하고 하나님나라 운동을 펴간다.그는 하나님나라라는 새 패러다임으로 세계를 개혁해나갔다.그는 하나님나라의 기쁜 소식으로 무장된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파송한다.그가 제자를 파송하는 세계에는 낡은 패러다임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그러므로 그가 제자를 보내면서 당부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보라,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이 말씀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져 있다.제자들은 아직도 낡은 질서가 지배하는 사회속에 나아가 낡은 체제의 바퀴에 차이지 않기 위해서 ‘뱀의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뱀의 지혜로써 슬기롭게 대처하지 않으면 옛 체제의 희생물이 돼버릴 것이 명약관화했기 때문이다.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악의 실체를 꿰뚫어볼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무모한희생물이 되지 않는다는것이다. 또,예수의 제자들은 세상의 악한 질서에 사로잡혀서도,타협해도 안된다.어떠한 경우에라도 비둘기의 순결을 상실해서는 안된다.비둘기의 순결을 잃어버리게 될 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제자로서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순결이본질적으로 위협받게 될 때 순교의 각오로 이에 맞서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현실도 같은 모순들이 지배하고 있다.새로운 이상과 꿈을 가지고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낡은 질서에 희생되지 않는 뱀의 지혜와 새 질서를 실현하고자 하는 순결로 무장해야 한다.한국사회의 현실이야말로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결이 필요한 사회다.꿈과 비전을 가진 사람은 낡은 질서와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속에서 옛 질서의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뱀의 지혜를 훈련해야 하며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비둘기의 순결을 연마해야 한다.새로운 꿈과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 지녀야 할 새시대의 윤리강령이다. 김원배 목사·기독교 목회자협회 상임총무
  • 문화스냅 2000-여름/ 스타킹 벗어던진 신세대

    2000년 여름,신세대와 구세대를 가름짓는 바로미터 하나.꼼지락거리는 맨발가락을 내놓고 당당하게 활보할 수 있으면 신세대,그게 아니면 우겨봤자 구세대다. 한국IBM에 다니는 주부 직장인 황해경씨(32).올 여름,핸드백안에 꼭꼭 챙겨다니는 소지품이 하나 더 늘었다.스타킹이다.유행이라면 누구보다 민감한 미시족이라 자신해왔지만,‘전천후 맨발’은 아무래도 신경쓰일 때가 많다.격식을 따져야 할 VIP고객이나 직장 상사와의 회식자리에 들어가기 직전.눈치껏 스타킹을 꺼내 신고나서야 마음이 놓인다.“갓 입사한 젊은 친구들은 원피스 아래로 맨다리를 통째 내놓고도 아무렇지 않은 모양인데…” 맨발에 관한,미시 아줌마의 유감섞인 한마디다. 한평생에 지구 세바퀴 반을 도는 노고에도 불구하고 인류사를 통틀어 찬밥대접을 면치 못해온 신체기관.그러고 보면 ‘발’이 올 여름만큼이나 주목받은적이 없었다. 시선을 끌어내려보자.도심 거리를 장악하고 있는 건 여성들의 맨발이다(신세대 남성들도 맨발을 즐기긴 마찬가지).색색의 화려한 니퍼(뒤꿈치가 트인샌들)속에서 나일론스타킹을 훌렁 벗어던진 뽀얀 발가락들이 여유만만.‘생으로’ 세상에 맞서보기로 한듯 ‘날발’들의 발언이 어딜가나 시끌벅적하다. 날발 유행에는 해설들이 분분하다.무엇보다 경제논리.문화평론가 김지룡씨같은 이는 “사회적 부가 축적되면 신체의 주목대상이 몸통으로부터 머리카락,손발톱,발쪽으로 분산되는 경향을 보이게 마련”이라면서 최근 발로 쏠리는 대중의 관심을 경제적 여유의 징표로 파악한다. 그러나 재미난 것은 ‘강요된 여성성’에서 벗어나려는 반동문화의 한 코드로 이를 이해하려는 페미니즘적 시각이다.여성신문 ‘아줌마’섹션 편집위원장인 이숙경씨는 “발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신발이 어떻게 모양을 바꾸고 있는지에 주목해보라”고 주문한다.하긴 적어도 올 여름 대한민국의 여자들은하이힐에 의지해 위태롭게 뒤뚱거릴 마음이 없는 것 같다.낮아진 굽에 얼기설기 발을 조이던 가죽끈마저 떼어 버린 신발들이 거리를 누빈다. 실제로,발이 대접받는 현장을 직접 들여다보면 ‘날발’의 가치 전복이 실감된다.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맞은편 골목의 나비뷰티라인.대낮부터 발관리를 받으러 오는 이들은 남녀노소가 따로없다.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맨발을 내밀고 앉은 채 사람들은 지압,물방울 아로마 마사지,보습팩 서비스에 주저없이 지갑을 연다.1시간 풀서비스에 5만원,30분 단축코스에 3만원.“지난해까지만 해도 40∼50대 주부들이 주고객층이던 것이 최근엔 20대 초반 손님이 부쩍 늘었다.더러 남녀커플이 함께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고 윤미숙 사장은 귀띔한다. 동서고금을 통해 맨발은 억압된 에로티시즘의 상징이기도 했다.10여년간 발사진만 찍어온 한정식 중앙대 예술대학원장은 “조선시대 여성의 발은 순결의 상징으로 버선속에 꼭꼭 숨겨졌고,치마자락 밑에서 드러나는 버선코가 관능미로 묘사되기까지 했다”고 말한다. 발이 해석의 여지가 많은 신체 지점인 것만은 분명하다.프로이트는 여성의신발이 성을 암시한다고 주장했는가 하면,신화연구가 이윤기씨는 발에서 신화적 모티프를 짚어내기도 한다. 올 여름,맨발의 샌들이 ‘딸딸딸’ 유난히 큰 굽소리를내며 계단을 타고다닌다.스쳐지나는 유행일 뿐일까.아니면 억압된 여성성이 풀려나는 작은 메시지일까.어느쪽이든,삶의 메타포 하나를 새로 발견한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황수정기자 sjh@. *날발의 '신상발언'. ■‘날발’의 씩씩한 발언…“더이상 생긴 걸로 시비걸지 말기!”‘나’는 발이다.사람 몸 전체에는 206개의 뼈가 있는데,그중 4분의 1인 52개가 내게 쏠려있다.30㎝도 안되는 크기로 70∼80㎏의 거구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각각 41개의 인대와 20여개의 근육을 가진 덕분.알고보면 우리는 대단히 민감한 ‘조각품’들인 셈이다. 최근의 맨발유행을 일과성 세태쯤으로 일축해버린다면,모처럼 해방된 우리로서는 억울하다.습하고 구리다는 편견으로,울퉁불퉁 못 생긴 생김새 때문에,시비걸리며 살아온 지난 세월이 얼만데….말이 난 김에 해보자.누가 언제 이중삼중으로 우릴 봉해놓으라 했나? 숨도 못쉬게 옥죄는 소가죽,양가죽으로 호사를 떨어달라고 주문했었나? 우리역사가 어땠는지는 소설책 한질로 써도 모자란다.가장 굴욕적인 역사는뭐니뭐니해도 전족(纏足)이다. 10세기 중국 송왕조 이후 귀족사회 미인의 필수조건에 맞춰주기 위해선 기형적으로 작고 뾰족해져야 했다. 그 지독한 악명의 역사덕분에 우리는 문학작품이나 영화속에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펄벅의 ‘대지’에서 왕룽의 아내 오란은 자신은 큰발때문에 남자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며,딸에게는 어떻게든 전족을 시켜 귀족의 조건을 갖춰주려 했다. 또 영화 ‘홍등’에서도 우리 얘기를 짭짤한 소재로 써먹었다. 세도가의 첩으로 팔려온 가난한 여주인공 공리는 남편을 기다리며 ‘발마사지’를 받는 게 일이었다.우리가 가진 에로티시즘적 속성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루 한두번쯤 세수대야에 담기는 게 고작이던 우리가 요즘 온갖 대접을 다받는다. 발찌,발가락지,영양크림,붓기빼는 아이싱크림까지….가려지고 억압될 뿐,인간의 욕망은 소멸되지 않는 모양이다. 차제에,알아줬으면 하는 사항이 또 하나 있다.원래 우리에게도 지문 못잖게독특한 족문(足紋)이 있지만,신발에 치여 무의미해지고 있을 뿐이란 사실이다. 황수정기자.*발미용산업도 호황. 발 미용에 대한 관심과 함께 발 관리 전문점이 서울 강남거리를 중심으로 속속 생겨나고 있다.최근 3∼4년새 전국에 500여곳이 개업한 것으로 추산된다. ●발관리 전문점 성업 발 관리전문점은 각질제거와 발톱손질을 해주는 네일케어숍과 전문교육을 마친 발관리사가 발마사지를 해주는 곳 등 두종류다. 발 마사지는 경혈을 자극해 발바닥 노폐물을 제거해 줌으로써 몸을 가뿐하게 만든다.오랫동안 서있는 직장인들의 붓기를 없애는 데도 효과가 있다.비용은 5만∼10만원으로 비싼 편.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2층에서 ‘네일 갤러리’를 운영하는 윤정옥 원장은“요즘엔 남자 손님도 간혹 눈에 띈다”며 전문직 여성 회사원 외에도 대학생,주부손님이 많이 찾는다고 귀띔한다.보통 30∼40분이 소요되는데 비용은 2만∼5만원선. ●발 가락지까지 등장 발 전용화장품은 이제 더이상 호사스런 사치품이 아니다.각질제거제,보습제에서부터 피로를 풀어주고 냄새를 없애주는 스프레이까지 종류도 다양하다.다른 피부보다 두꺼운 발의 표면에 잘 흡수되도록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최근엔 발목에 차는 발찌에 이어 발 가락지라는 신종액세서리까지 등장했다.은도금,큐빅 장식 등 화려한 디자인의 발가락지 가격은 1만원∼1만5,000원으로 젊은 여성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 ●집에서 하는 발관리 발 관리를 위해 꼭 전문점에 갈 필요는 없다.집에서세수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은 뒤 아로마 몇방울을 섞어 발을 담그면 소독도되고 각질을 불리는 효과가 있다.굳은살을 말끔히 제거한 뒤에는 로션을 발라 가볍게 마사지한다.손이나 지압봉으로 지압점을 찾아 꾹꾹 눌러주면 피로 회복과 혈액순환을 돕는다.로션의 흡수가 잘 되도록 석고팩을 하거나 랩으로 감싸주는 것도 좋다. 허윤주기자 r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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