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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OS 10대들의 性] (하) 전문가 좌담

    [SOS 10대들의 性] (하) 전문가 좌담

    요즘 청소년들의 성문화에 대해 전문가들은 “성행동 수위는 높아졌지만 성문화는 왜곡돼 있는데, 원인은 사회와 어른들에게 있다.”고 한결같이 지적했다. 지나친 경쟁과 입시 중심의 교육, 어른들의 성 상업화가 청소년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청소년들의 성문화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개선하려면 더디지만, 학교와 가정, 사회가 달라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전문가들은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별개의 인간일 뿐 아니라 성적 욕구를 지닌 존재라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난달 26일 서울 영등포동 아하!서울시립성문화센터(아하센터)에서 여섯 명의 관련 전문가들이 모여 ‘청소년 성(性)문화’를 주제로 좌담을 가졌다. 모임에는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 이명화 아하센터장, 이윤상 한국성폭력상담소장, 정유성 서강대 학생처장(교육학 교수), 우옥영 보건교육포럼 대표, 이명선 인디여성연구소 소장이 참석했다. ●“청소년 성행동 수위 높아졌지만….” 김찬호(이하 김) 최근 10년, 한국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지만 변화가 지체된 영역이 존재하며,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성(性) 영역이 아닐까 싶다. 이명화(이하 화) 과거에는 성이라는 주제가 감춰야 할 것이었지만 요즘은 중학교 2학년이 성관계를 할 정도로 성 행동 수위가 높아졌다. 우리나라 성교육이 그동안 성폭행 예방, 10대 임신문제 등 이슈 중심의 캠페인에다 순결교육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성적 의사결정능력을 키우는 쪽이어야 한다. 이윤상(이하 상) 지난 10년, 성을 둘러싼 변화 중 가장 큰 것이 법제화다. 성폭력, 성매매 등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는 공감대가 생겼고, 그 결과 성폭력특별법, 성매매특별법 등 많은 법과 정책이 마련됐다. 하지만 인식이 제도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헤픈 여자가 강간당한다.’는 인식 등의 이중적인 성적 잣대는 여전하다. 청소년 문제도 마찬가지다. 청소년은 보호의 대상이기도 하고, 성적 자율성과 주체성을 가진 주체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사회가 방향을 못 잡고 있다. 정유성(이하 정) 현재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받는 교육은 실제 아이들의 삶과 관련이 없다. 학교는 청소년들의 삶과 욕구를 인정하지 않는데, 성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지 않겠나. 화 청소년 성문화, 나아가 한국 성문화는 여전히 폭력적이고 상업적이다. 청소년들끼리 몸을 찍어서 휴대전화로 보내거나, 음란물을 모방하는 성폭력이 늘어나는 현상 등을 보면 과거와는 또 다른 폭력적이고 노골적인 면을 볼 수 있다. 우옥영(이하 우) 10년 전 당시 교과부에서 일선 학교에 성교육 지침을 내렸지만, 성교육 교과서도 제작되지 않은 데다 관련 교사 교육도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그냥 각자 알아서 하고 결과를 보고하라고 했다. 그때보다야 낫지만 지금도 부족하긴 하다. 지난해 조사결과를 보면 중·고등학교에서 보건과목을 선택한 학교가 10%밖에 안 된다. 선택하지 않은 90% 학교에서 성교육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명선(이하 선) 사회 전체적으로 섹슈얼리티는 개방됐지만 청소년들은 성적 욕망을 인정받지 못한다. 성적 욕망이 없는 존재, 혹은 있어도 통제 돼야 하는 존재로 파악되고 있다. 청소년이 성을 주장하거나 실천하면, 위기청소년으로 묶여버린다. 과거라면 이들이 성 행동을 하고, 결혼해 아이를 낳을 나이인데…. ●“부모·자녀 사이 성 인식 간극 줄여야 화 현장에서 보면, 학부모와 자녀들 사이의 성 인식에 대한 간극이 너무 크다. 외출한 부모들이 집에 갔더니 아이들이 성관계를 하고 있더라는 상담 사례가 없지 않다. 아이는 학교도 계속 잘 다니고, 이런 상황이 특별히 문제 될 게 없는데 부모한테는 이게 심각한 문제다. 그 간극을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 우리 성교육은 청소년들에게 “너희들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진 주체야. 그러니까 너희는 ‘No.’ 할수 있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정작 ‘Yes.’라고 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는 못한다. 성행동을 두고 “책임질 수 있는 데까지”라고 유예를 시키지만, 그럼 책임은 언제부터 질 수 있나, 애매하다. 그래서 저는 딸에게 “법적으로 19세”라고 말해주고 만다. 정 많은 부모들이 자식들을 사유화한다. 자식을 독립된 주체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내 새끼만 괜찮으면 좋다는 완강한 가족주의를 보인다. 부모만이 아니라 사회도 학교도 청소년들의 존재를 대상화하고 수단화하고 있다. 그러니 청소년들의 욕구, 특히 성적인 욕구는 당연히 무시된다. 우 또 다른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들의 경제활동이 제한돼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애들이 “나 성적으로 자유롭고 싶어.”라고 했을 때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가 없다. 타이완에서는 학생이 임신해도 학습권이 보장되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지원책이 없다. 김 아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스스로 삶의 주인임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성교육의 기본 방향이 되어야 한다. ‘Yes’라고 말할 수 없는 건 어른들이 청소년기를 그렇게 보내지 못한 데 대한 질투가 아닐까(다같이 웃음). ●“청소년 성문화, 어른들이 먼저 변해야 선 성에도 남녀 청소년의 권력관계가 있다. 남학생들의 경우는 성경험을 해도 별 문제시하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여학생들은 성관계에서 ‘No.’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을 겪는다. 왜냐하면 남자친구가 심리적으로 불편해 하고, 상처를 받을까 봐, 또 가출한 여학생은 의지할 곳이 없어질까 봐…. 정 남자 아이들도 몸이나 욕망, 관계에 대해서는 굉장히 무지하다. 매체에서 말하는 겉으로 드러나는 욕망이라던가 하는 것밖에 모른다. 걱정이다. 우 스웨덴은 청소년들이 실제 필요로 하는 부분을 지원해 주는 나라다. 청소년들이 언제든 성 상담은 물론 진료까지 무료로 할 수 있는 병원이 있다. 의료인, 보건교사, 상담사, 심리사 등이 팀을 이뤄 아이들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놀라웠다. 화 청소년의 성행동 수위는 높아지고, 우리 사회의 성폭력 등 성에 관한 문제는 심각하지만 지원 시스템은 부족하다. 아하센터와 같이 청소년성교육을 전문적으로 하고 있는 곳은 전국 38곳, 서울 6곳에 불과하다.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정부가 현장의 성교육 전문가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정 앞으로는 새로운 성문화를 위한 물적 토대뿐 아니라 인간관계의 평등성이나 젠더 감수성까지 포함한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 여기에 어른들의 반성과 각성이 더해져야 한다. 상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다. 하지만 성교육 의무화 등 여러 가지 얘기가 많이 나왔지만, 결국 공교육 현장은 진지하지 않았다. 매번 초등학생 성폭력사건이 일어나면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히고 서로를 탓하지만 10년, 20년 전에 정말 진지했다면 오늘의 모습은 확실히 달랐을 것이다. 김양진·김진아기자 ky0295@seoul.co.kr
  • “보건 필수과목 지정하고 토론수업해야”

    “보건 필수과목 지정하고 토론수업해야”

    이달 초, 경기도의 한 전문계 고등학교 학생부장이 이웃 학교 보건교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지난달 말 학교에서 임신 6개월인 여학생이 2명이나 확인돼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면서 성교육을 요청했다. 보건교사는 “그러면 반별로 성교육을 하겠다.”고 했지만 학생부장은 “그냥 5월 말쯤 방과 후 한 차례만 방송 교육을 해 달라.”고 선을 그었다. “순결 교육을 해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보건교사는 어이가 없었다. 지난 7일 오후 4시쯤, 서울 내수동의 사무실에서 만난 보건교육포럼 우옥영(46) 이사장은 “임신은 했는데 말할 곳이 없어 끙끙대는 학생들에게 순결 교육을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학교 성교육의 현주소”라며 이 사례를 소개했다. 우 이사장은 “한 주당 한 시간도 가르치기 힘든 현실에서 제대로 된 성교육이 이뤄진다는 건 무리”라면서 “필요성으로 보자면 보건과목은 ‘선택’이 아닌 ‘필수’ 과목으로 지정돼야 하며, 의무교육 10~17시간도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건 교사들은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싶어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게다가 일선 중·고교에서 보건 과목을 선택하는 비율은 10%에도 미치지 않는다. 충북·전남 지역 학교에서는 보건교사가 없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그는 “성교육이 ‘안내 교육’에서 ‘의식 교육’으로 탈바꿈하려면 10여 시간의 단시간 교육보다 주기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우 이사장은 “학부모들은 ‘공부 잘해 좋은 대학 들어간 뒤에 (이성 친구를) 사귀라’고 하는데, 이는 현실을 너무 모르는 소리”라면서 “이런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이 임신을 하게 되면 낙태하거나 아이를 버리는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여전히 학교에서는 피임 방법만 가르치는데, 중요한 것은 콘돔을 사용하도록 요구하는 사회 의식”이라면서 “성이 성장 과정에서 일상적으로 다뤄지게 하려면 교사가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것보다 역할극이나 토론을 하게 하는 등 보다 긴 시간을 할애한 실질적 교육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진아기자 jin@seoul.co.kr
  • 독일 20년전 성교육 의무화… 콘돔 무료 제공

    독일 20년전 성교육 의무화… 콘돔 무료 제공

    유럽, 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성교육에서 가장 큰 특징은 ‘열린 성교육’을 한다는 점이다. 청소년의 성적 욕구를 인정하면서도 임신과 출산 등 성관계에 따른 책임을 스스로 고민하도록 유도한다. 피임약과 콘돔을 무료로 제공할 만큼 정부·사회적 지원도 탄탄하다. 반면 우리나라의 청소년 성교육은 여전히 전근대적이고 형식적이다. 교육 내용이 기초적인 생물학적 지식 전달이나 모든 성행위를 선악으로 구분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고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아하! 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 등에 따르면 미국은 공립학교에서 성교육을 의무화하고 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성교육에서 ‘혼전 순결’을 강조해 왔으나,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안전한 성생활과 피임, 출산’ 등의 실질적 프로그램이 보강됐다. 오바마 정부는 ‘10대 임신 예방 발의’를 통해 지난해부터 개인책임교육프로그램(PREP, Personal Responsibility Education Program)에 대해 연방 재정을 지원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성적 관심을 자연스럽고 건강한 삶의 한 부분으로 보면서, ‘혼전 순결’보다는 ‘피임’을 강조한다. 네덜란드는 ‘긴 생애 사랑(Long Life Love) 프로그램’을 1980년대 후반 정부 보조로 개발했다. 10대들이 건강과 성관계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고 결정하도록 돕는 데 목표를 둔다. 거의 모든 중등 교육 과정에서 성교육이 이루어진다. 생물학적인 부분뿐 아니라 가치, 태도, 이성을 만날 때 대화의 기술 등도 포함된다. 그 결과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10대 임신율이 가장 낮은 나라로 꼽힌다. 독일은 1970년부터 성교육을 정규과정에 편입시켰다. 1992년부터 성교육을 의무교육으로 강화했다. 성관계 시 체위를 포함한 거의 모든 주제를 가르친다. 그러다 보니 정확한 피임법 교육도 가능하다. 프랑스는 1973년부터 성교육을 정규 교과과정에 편입, 8~9학년 학생들에게 연간 30~40시간을 할애해 교육한다. 콘돔도 학교에서 무료로 나눠 준다. 노르웨이·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반도 국가들에서는 학생들이 자연과학 시간을 통해 기초지식을 익히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본격적인 성교육을 받는다. 반면 우리나라의 학교 성교육은 2008년부터 본격 시작됐다. 초등학교 5~6학년생의 경우 1년에 보건교육 17시간, 중·고생은 1년에 10시간의 성교육을 받는다. 하지만 학교장의 재량에 따라 방식은 달리할 수 있어 생물수업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2009년부터 고교 교육과정에 ‘보건’이라는 선택과목이 신설됐지만, 전국 5395개 중·고교 가운데 360개교만 선택해 채택률은 6.7%수준에 그친다. 그나마도 인문계열 고교는 보건과목 채택률이 5%에 불과하다. 전문 지식으로 성교육을 실시하는 보건교사 배치 현황도 60%로 부족한 편이다. 지역별 편차도 심하다. 서울·부산·인천·광주 등 대도시는 80~90%인 데 반해 제주·강원·충남·충북 등은 40~60% 수준이다. 김양진·김진아기자 ky0295@seoul.co.kr
  • [SOS 10대들의 性] 현실따로 교육따로

    [SOS 10대들의 性] 현실따로 교육따로

    10대들의 섹스·임신·자위·낙태…. 어른들에게는 피하고 싶은 이야기지만 청소년들에겐 현실이자 일상적 대화의 주제다. 한 고등학교 보건교사는 “5년 전부터 한 학기에 임신 테스트기를 5개씩 사서 교실에 비치했는데 남았던 적이 한번도 없다.”고 털어놨다. 청소년들의 성 고민이 깊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의 성을 더 이상 가둬 두거나 짓눌러서는 안 되는 상황이라고 진단한다. 팬덤(연예인 열성팬) 활동가 방연지(19)양은 “서로 사랑하면 (성관계도) 할 수 있는데, 10대라는 이유만으로 막는 건 말이 안 돼요.”라고 담담하게 말했다.이처럼 성에 대해 개방적인 청소년들이었지만 성 지식은 부족했다. 여전히 이성교제를 숨기려고 하는가 하면 원치 않는 임신으로 괴로워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교실 비치 임신테스트기 남지 않아” 지난달 중2 여학생이 한 사이버 상담센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고민글을 올렸다. “남자 친구하고 성관계를 했어요. 처음이라서 콘돔을 하자고 하면 ‘까진 애’처럼 보일까 봐…. 콘돔 없이 바깥에 사정했는데, 쿠퍼액(남성이 성적으로 흥분하면 분비되는 체액. 쿠퍼액으로 임신할 확률은 5~10%로 알려짐)으로도 임신이 될 수 있다고 하던데, 저 임신인 건가요?” ●“성지식 얻는 통로는 인터넷” 34.6% 학교가 이들의 궁금증과 고민을 수렴·해결하지 못하자 청소년들은 인터넷 등 부정확한 정보에 의존하고 있다. 2007년 아하! 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가 서울시내 고교 2학년 학생 1052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성 지식을 얻는 통로’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34.6%인 364명이 ‘인터넷’이라고 답했다. 성교육이라고 응답한 학생은 308명(29.3%)이었다. 친구(205명, 19.5%) , TV(119명, 11.3%)라고 응답한 학생들도 상당수였다. 최진솔(17·고2)양은 “야동(음란영상물)만 본 남자애들은 성관계 시 삽입만 하면 여성이 오르가슴을 느끼는 줄 안다.”며 “그런 게 아니라고 알려주면 ‘너 어떻게 그런 걸 아느냐’며 이상한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최양은 “여자 청소년들의 성 문제는 친한 친구끼리도 잘 이야기하지 못해 오해가 커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학교 교육은 청소년들의 이런 성의식과 다른 방향으로 이뤄지고 있다. 청소년들은 지금도 ‘야한 생각이 날 땐 냉수 마찰이 최고’라고 가르친다고 증언했다. 현실과 학교 교육의 괴리로 청소년들의 성 관련 불만은 커져만 가고 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활동하는 민다영(18)양은 “학생은 임신해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환경이므로 원치 않는 임신을 하지 않도록 피임교육을 강화하면 좋겠는데 그런 교육은 하지 않으면서 순결만 강조하고 있다.”며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고3 푸르른(18·가명)양도 “만날 정자·난자 이야기만 하지 말고 차라리 학교에 콘돔을 비치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의 성 고민을 수용하지 못하는 학교 교육에 대해 청소년들이 내놓은 솔직한 해결책이었다. 김양진·김진아기자 ky0295@seoul.co.kr
  • [10대들이 말하는 性 -청소년 성 좌담회] “청소년 성욕 억압만 하지말고 피임 등 다양한 성교육을”

    [10대들이 말하는 性 -청소년 성 좌담회] “청소년 성욕 억압만 하지말고 피임 등 다양한 성교육을”

    요즘의 10대들은 확실히 성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처럼 성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세대는 일찍이 없었다. 가치 기준이 바로 서지 않은 성 지식은 폭력의 도구가 되기 쉬운 탓이다. 이런 10대의 성 문제를 흔히 ‘주머니를 비집고 나오는 송곳’에 비유한다. 사회적 억압에 일탈로 맞서려는 기형적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이런 문제를 짚기 위해 서울신문이 설립 10주년을 맞은 ‘아하! 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와 함께 ‘청소년 성(性) 좌담회’를 마련했다. 좌담회 내내 10대 청소년들은 학교 성교육을 조롱하고, 기성세대의 성 의식을 질타했다. 좌담회는 지난 8일 오후 2시 서울 상수동에 있는 식당 ‘델마’에서 가졌다. 모임에는 ‘청소년 또래 지도자 동아리’의 최진솔(17)양, ‘여성가족부 청소년참여위원’인 김진수(18)군,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운동 활동가’인 매미울적에(가명·17)군,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활동하는 민다영(18)양, ‘팬덤(팬문화) 활동가’인 방연지(19)양, ‘소녀들의 여성주의 연극모임 피쒸어터’에서 활동하는 푸르른(가명·18)양 등 6명의 10대들이 참석했다. ●“순결사탕을 아세요?” 민다영(이하 민) ‘순결사탕’을 아세요? (다들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순결사탕을 먹으면 순결해야 한다는 건데, (일동 ‘어우.’) 그게 여자한테만 강요돼서 난리 난 적이 있었어요. 여성, 그것도 청소년에게만 강요하는 게 기분 나빴어요. 그래, 키스는 되고 섹스는 안 된다는 그런 기준이 불쾌하죠. 어른들 보기에 예뻐 보이는 연애만 강요하는 거죠. 청소년들도 성욕이 있는데 말이에요. 매미울적에(이하 매) 어른들도 청소년에게 왕성한 성욕이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건전한 방법으로 풀어야 한다고만 말하죠. 푸르른(이하 푸) (성욕쯤이야) 운동하면 풀린다고만 하고요. (일동 웃음) 방연지(이하 방) 10대나 20대나 다를 건 없잖아요. 사랑하면 (성관계를) 가질 수 있는데 10대라는 이유만으로 막는 건 말이 안 돼요. 해만 바뀌면 10대에서 바로 20대가 되는데, 그러면 다 된다는 건지…. 최진솔(이하 최) 저는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라 친구들이 자주 제게 묻곤 해요. 그럴 때마다 제가 ‘대놓고 물어보지 그랬어.’라고 하면 친구는 ‘좀(그러지 좀 마라.)….’이라며 쑥스러워하고 그래요. 푸 야동이라는 것도 제대로 된 성 지식을 갖고 보면 괜찮은데, 10대들이 이것만 보고 (성을) 배우는 게 문제죠. 김진수(이하 김) 야동이란 말 자체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것 같아요. 야한 게 나쁜 거라는…. 민 저는 멜로영화의 섹스신이 예뻐 보여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주위에서는 이상하다고들 해요. 여자가 성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상하고, 남자가 그러면 영웅시하는 건 심각한 차별 의식 아닐까요. 푸 그렇잖아요? 여자가 섹스 많이 하면 ‘걸레’라고 하고, 남자가 많이 하면 ‘와.’ 하는 풍토 같은 거요. 최 자위도 그런 것 같아요. 여자가 자위를 하면 남자들은 ‘(여자가) 자위를 어떻게 해?’ 막 이러잖아요. 여자 자위에 대해 다들 좀 무지해요. 여자들끼리도 그런 말 하기를 꺼리기도 하고…. 민 10대들은 연애에 제약이 있고, 그 때문에 (성욕 문제를) 풀 수 없으니 아이돌에 빠지는 것 아닐까요. 방 그래서 팬픽(‘팬 픽션’의 줄임말. 연예인을 등장인물로 가공한 소설)이 등장한 거죠. 자기가 원하는 연애를 팬픽을 통해 구현하는 거지요. 최 저도 팬픽 몇 편 읽어 봤어요. 동방신기 팬픽이었는데 무조건 다 섹스로 직결되는 게 좀 그랬어요. 추천작을 보면 다 야한 얘기들뿐이고 해서 거부감이 들더군요. 민 팬픽을 보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성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될 것도 같더군요. 방 주변에 ‘나도 팬픽의 주인공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하고 말하는 애들도 없지 않아요. ●“짧은 옷이 성폭행 유발?” 방 ‘2004년 밀양 성폭행 사건’ 생각나요. 그때 가해 남학생들은 학교 졸업해서 잘 사는데 피해 여학생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며 전학도 안 되고 해서 대인기피증까지 생겼죠. 마을 사람들도 ‘남자애가 무슨 잘못이야? 여자애가 꼬셨겠지.’ 이러는데, 충격이었어요. 민 지하철 성폭력 예방법을 보면 치마를 입을 경우엔 가방으로 가리라고 해요. 왜 그 책임을 여자에게 떠넘기죠? 성욕을 풀 대상은 여자여야 한다고 말하는 성매매자들 얘기도 이해가 안 되고, 짧은 옷 입지 말라는 성폭력 문구도 그렇고…. 방 맞아요. 일상 속의 성희롱이 심각해요. 고등학교 때 친구가 계단 올라가는데 남자애들이 친구 다리를 보고 “마스터베이션 하고 싶다.” 이래서 여자애 완전 충격받은 적도 있어요. 민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어떤 선생님이 “너네 공부 안 해도 돼. 다 내 첩 하면 되니까.” 이러는데, 농담이라도 할 소리가 아니지요. 일상적으로 그런 일들이 많아요. ●“어른들은 숨기는 게 너무 많아요.” 푸 학교에서는 교육이랍시고 맨날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이야기만 하고…. 차라리 콘돔 사용법을 가르치거나 학교에서 콘돔 나눠 주는 게 나을 거예요. (모두 웃음) 애들은 (성관계를) 하고 있는데…. 전 개인적으로 콘돔 가지고 다니는 애들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준비성 있잖아요. 민 학교 다니면서 임신을 하면, 아이 낳고 학교를 다닐 수 없는 환경이니까 원치 않는 임신을 하지 않도록 피임 교육을 강화하면 좋겠는데, 그런 실질적인 교육은 안 하면서 순결 교육만 하고…. 사실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방 가정에서부터 잘 가르쳐야 하는데 엄마 아빠는 부끄러워하잖아요. 우리 부모님은 잘 이야기해 주시는데 내가 친구들한테 부모님이 이런 얘기 했다고 하면 다들 놀라요. 이게 왜 놀랄 일인지…. 학교에서 안 가르쳐 주면 가정에서라도 가르쳐 줘야 하잖아요. 방 특히 실생활에 유용하고 활용 가능한 것을 많이 알려 줬으면 해요. (다들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림.) 푸 그런 점에서는 기성세대가 숨기는 게 많은 것 같아요. ●“상담센터 안 찾게 학교 성교육 강화” 민 저는 성 상담이 필요한 상황을 웃긴다고 생각했어요. 일상에서 풀 수 있어야 하고, 다니는 학교에서 당연히 이뤄져야 하는데 따로 상담센터를 찾아야 하는 게 웃기잖아요. 김 싸이클럽처럼 청소년들이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곳에 성 상담 클럽 같은 것이 있어서 전문가들이 성의 있는 상담을 해줬으면 해요. 푸 정말 우리가 평소에 다루지 못하는 주제를 수업시간에 배웠으면 해요. 다양한 주제, 꼭 필요한 내용을 가르쳐 주시기를 바라요. 매 어떤 약국에서는 청소년들에게 콘돔을 안 판대요. 그렇다면 콘돔을 학교에 비치해 놓으면 어떨까요. 김양진·김진아기자 jin@seoul.co.kr
  • 새 장편 ‘꺼져라 비둘기’ 낸 작가 김도언

    새 장편 ‘꺼져라 비둘기’ 낸 작가 김도언

    소년은 늘상 불안과 고독, 욕망과 공포를 붙들고 소설을 썼다. 그의 집착 대상은 찰나의 감정이면서도 인간의 삶에서 결코 털어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소년은 질투, 폭력, 파괴, 치정, 섹스, 살인 등 자극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를 앞세워 읽는 이를 불편하게 했다. 소년은 형식이건, 내용이건 기존의 것들을 해체하고 파괴하는 것을 통해 소설가로서 자신만의 미학을 쌓아 올리고자 했다. 1998년 등단한 이후 세 권의 소설집과 두 권의 장편소설을 내놓는 동안 늘 그렇게 자신만의 소설 세계를 구축해왔다. 그러다가 소년은 문득 파괴와 불안으로 순정하게 뭉쳐진 옷을 벗고, 고전적인 소설 문법, 그리고 거기에서 구사하는 전통적인 문체, 문장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고래(古來)의 것을 갖고 또 다른 파괴와 뒤틀림을 실험해보리라 마음먹는다. 소년은 나이를 먹어가며 ‘더욱 순정한 소년’이 되어간다. ●‘순정한 소년’ 티 벗고 도발적 문제 제기 ‘순정한 소년’ 김도언(39)이 새롭게 내놓은 장편소설 ‘꺼져라 비둘기’(문학과지성 펴냄)는 그렇게 쓰여졌다. 소설은 ‘선악의 기원과 구조에 대한 사적 견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부제를 달고 있다. 그런데 소설이 묘하다. 마치 희곡인듯 ‘주요 등장인물 소개’로 소설은 시작한다. 또한 소설의 중간과 마지막에 ‘소설 밖에서 모인 사람들’이라는 부분을 집어넣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소설가 자신과 함께 한 자리에서 대담을 나누며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각자의 모습과 소설 작품 자체에 대해 발화할 수 있게 한다. 소설의 서사는 지극히 단순하고 평면적이다. 촉망받던 씨름 선수 ‘이산’과 젊은 시인 ‘영만’, 영만과 순결한 사랑을 나누는 젊고 예쁜 유실래, 그리고 한의사 고붕, 이산의 어머니와 아버지 등은 토담리라는 마을에 사는 한없이 착한 사람들이다. 반면 타이어 공장이 들어선 뒤 토담리로 들어온 이산의 새어머니, 세탁소 박씨, 오토바이 상회 계씨 형제, 목욕탕 주씨 등은 탐욕스럽고 무례한 악인들이다. 식탐을 부리며 매일 사람들 머리 위에 똥만 갈겨대는 비둘기처럼, 악인들은 착한 사람들을 쉴 새 없이 괴롭힌다. ●어설픔과 낯선 느낌의 권선징악 전반부와 후반부의 화자는 이산과 영만으로 크게 나뉜다. 이산과 영만 등 늘 당하고만 살던 힘없고 착한 사람들은 의지를 꺾지 않고 힘을 하나로 모아 결국 악인들을 마을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기승전결이 딱딱 들어맞고, 권선징악이 분명하다. 김도언은 이를 계속 반복해서 강조한다. 의도적인 어설픔이 느껴진다. 김도언의 의도가 비로소 짐작된다. 읽는 이들이 선악의 기본적 대립에 대해 낯설게 느끼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등장인물 소개’나 ‘소설 밖에서 모인 사람들’과 같은 비소설적 장치를 내세움으로써 일종의 메타소설적 기능을 하게 함은 물론, 선과 악, 또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전형화-마치 고전소설의 권선징악적 구성처럼-시킨 것에 대한 또다른 전복을 꾀하는 역설인 것이다. ●근대적 가치에 대한 관대함·조롱 일반적으로 ‘평화의 상징’이라 일컬어지는 비둘기가 실제로는 탐욕과 게으름, 지저분함을 품고 있는 인간의 기생자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김도언은 마지막까지 이를 감추며 의뭉을 떤다. 그는 ‘작가의 말’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쉽고 친절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이 시대가 선과 악, 도덕과 부도덕, 정의와 불의, 왼쪽과 오른쪽이 마구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게 이 소설 구상의 출발점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혐의는 더욱 짙어진다. 소설 텍스트 자체뿐 아니라 등장인물 소개, 등장인물의 소설 밖 발언, 심지어 ‘작가의 말’까지 모두 소설의 한 부분임이 점점 명확해진다. 소설은 이처럼 불필요할 정도로 관대하고, 친절함이 이어진다. 너무도 ‘반(反) 김도언스러운’ 단순명쾌함이기에 오히려 무람없이 선악을 구분지으려는 근대적 가치에 대한 김도언의 조롱으로 읽혀진다. 다음 작품에서 그의 의도는 더욱 명확해질 것으로 보인다. 더 분명한 사실 하나. 문학을 마주하며 사는 김도언의 실험과 파격, 해체는 계속된다는 것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실천문학·문학과지성사 신임대표 문학계 희망을 말하다

    실천문학·문학과지성사 신임대표 문학계 희망을 말하다

    봄은 왔건만 문학의 봄은 여전히 아득하다. 몇 년 전부터 제기된 ‘근대 문학의 종언’이라는 담론에서 허우적대다가 그마저도 흐지부지된 채 위기와 침체를 일상으로 여기며 지내는 형국이다. 한국 문학계를 대표하는 출판사들이 최근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대표들을 바꿨다. 드러나는 모양새는 조금씩 다르다. 실천문학이 과감한 세대교체로 젊은 얼굴을 골랐다면 문학과지성사는 묵직한 중량감의 인물을 택했다. 새 얼굴을 각각 만나 한국 문학의 미래와 최고경영자(CEO)로서의 포부를 묻고 들었다. 지향점은 같았다. 문학이 우리네 삶의 희망을 복원해 낼 수 있다는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글 사진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유쾌한 진보 위해 세대교체 필요” 손택수 실천문학 대표 서울 망원동 사무실에서 만난 손택수(왼쪽·41) 실천문학 신임대표는 그저 평온했다. ‘초짜 사장’으로서 과도한 자신감도, 애써 속내를 감추려는 지나친 겸손함도 없었다. 이미 기획위원, 기획실장, 편집주간으로 6년 동안 실천문학의 복판에서 일해왔기에 달라질 바가 없는 탓이다. 대신 그는 다른 이유로 분주했다. 문학계에서 실종되다시피 한 담론을 복원해내야 하고, 진보의 가치가 결코 진부하지 않음을 입증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이 일을 함께 떠맡을 젊은 작가들을 찾느라 삼고초려 중이다. “실천문학은 어느 개인의 출판사가 아닙니다. 1980년대 치열했던 사회 인식에서 출발해 공공의 꿈으로 만든 한국 진보문학의 공동체입니다. 문학으로 실천하고, 실천을 문학화할 수 있는 공동체를 다시 복원해야죠.” 실천문학은 민주주의에 대한 기존의 열망을 이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대와 손을 잡아야 한다. 지극히 이율배반적이다. 손 대표가 분명히 선을 긋는 곳은 ‘지루하고 진부한 리얼리즘’이다. 그는 “신나고 유쾌하고 늘 꿈틀거리는 새로운 상상력과 리얼리즘을 만나게 하고 싶다.”고 잘라 말했다. 덧붙였다. “진보의 가치와 진보의 문학을 얘기하면서 진부한 틀과 내용을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그는 “이를 위해 세대교체는 불가피하다.”고 했다. 전 한국문학번역원장인 윤지관(57) 덕성여대 교수, 이은봉(57)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과 함께할 나머지 이사 2명을 젊은 작가들로 채울 예정이다. 또한 편집위원과 기획위원의 면면도 확 바뀐다. 공석이 된 편집주간도 필요하다. 목표는 하나다. 확 젊어진 실천문학을 위해서다. 손 대표는 “좌우 경계를 뛰어넘어 젊고 패기만만한 작가와 평론가들이 전면에 나서게 될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사뭇 비장하다. ‘유쾌한 리얼리즘’을 얘기하면서도 비장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위기의식은 충분하다. 1980년 만들어진 실천문학은 그동안 문학을 통한 사회 운동의 최전선에 있었다.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폐간 위기에 몰리기도 했고, 필화사건으로 대표가 구속되기도 하는 등 시련도 컸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주요 논의 지점마다 실천문학이 있었다는 자부심은 꼬박 30년의 시간을 한결같이 그 자리에 서 있게 했다. 그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문단 주변부로 비켜나 있는 작가들을 실천문학이 기꺼이 껴안을 것”이라면서 “다양한 진보의 프리즘과 연대하여 문학의 담론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공유하는 한편, 정치사회적 담론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뭘 하더라도 문제는 돈이다. 그동안 실천문학이 버틸 수 있는 힘은 시집 ‘접시꽃 당신’, ‘체 게바라 평전’, 장편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 ‘지상에 숟가락 하나’ 등이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뜸했다. 실천문학은 이달 중 사무실을 옮긴다. 같은 서울 망원동이긴 하지만 조금이나마 긴축할 수 있게 공간을 좁혀 인근으로 이사한다. 대표이사 월급도 대폭 낮췄다. 1억 5000만원 증자 계획도 진행한다. 손 대표는 “본질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실천문학이 새롭게 출발해야 할 지점이 바로 청빈과 내핍이기 때문”이라면서 “도덕적 순결성을 무기 삼아 빚에 허덕이는 실천문학의 경영을 정상화하고 문학 전체의 적극적인 변화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갓 40대에 접어든 젊은 시인을 대표이사로 선임한, 소액주주 111명 소설가, 시인, 평론가들 전체의 뜻이기도 하다.
  • [신달자 시인 신작 출간] 종이에 담은 인간의 본성과 문학적 始原

    [신달자 시인 신작 출간] 종이에 담은 인간의 본성과 문학적 始原

    1964년 등단했으니 반백년 가까이 시(詩)를 업(業)으로 삼아 왔다. 하지만 희고 흰 여백의 종이를 앞두면 여전히 귓가에 울려퍼지는 그 소리, 종소리…. 시가 마음껏 뛰놀 그 공간을 마주하는 순결함은 스무살 그 시절의 설렘과 하나다. 신달자(68) 시인이 종이를 주제로 쓴 시 76편을 모아 시집을 펴냈다. 제목 역시 ‘종이’(민음사 펴냄)다. 그의 시편에 이르러 종이는 단순한 글감 이상의 의미를 띤다. 생명과 우주의 사유로 가 닿게 하는 매개가 되기도 하며, 시와 더불어 위기에 처한 비운의 처지를 애달프게 노래하는 호출자가 되기도 한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자신의 문학적 시원(始原)을 내밀히 고백한다. 그가 종이와 맺은 ‘첫 경험’은 원초적이고 육감적이며 순정적이다. 아주 오래전 시인의 숙명으로서 종이와 자신 사이의 관계 사이에 놓인 비의(秘意)에 천착할 수밖에 없음을 퍼뜩 드러낸다. 신달자는 ‘나 어린 처녀 때/ 가랑이에서 물컹 살점 떨어지는 기미 있었는데/…/ 문 걸어 잠그고 나 그걸 종이에 묻혀 보았는데/…/ 종이에게 첫 여자를 바친/ 종이와 관계한’(‘꽃 비친다 하였으나’ 중) 자신으로 표현한다. 또한 ‘…/ 저 유리종이에 베이고 싶어 붉은 피 흘리고 싶어 서럽게 금 긋고 싶어/ 나 스무 살 가슴에 한 장 종이와 맞서기로/ 입술 베며 맹서했었네’라고 50년 전 어느날로 시선을 돌린다. 사라져 가는 종이에 대한 묵시록적 예언도 곁들인다. ‘인피가 있다는 거 알아?/…/ 문명의 기술보다 종이가 더 귀해지면/ 요즘 흔하다는 성폭행보다/ 사람들 피부를 겁탈?’(‘인피’ 중)이라고 적는다. 털 뽑고 피 씻어낸 생닭 한 마리를 보고서도 ‘아뿔싸!/ 나는 한 순간 필기도구를 찾고 있었네’(‘백지2’ 중)라고 고백한다. 시인은 ‘시인의 말’을 통해 “종이가 사라진다는 목소리가 커져 갔고 죽어 간다는 말도 나왔다.”면서 “7년 전부터 준비한 이 시집 속에 따뜻함, 영원함, 모성, 순수, 고향 등을 종합해서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의 따뜻한 본성을 그리워하고 그 본성을 되찾아 보려는 한톨의 씨앗이자 한 시인의 종이에 대한 사랑”이라고 갈무리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北주민 4명 “돌아가지 않겠다”

    지난달 5일 연평도 인근 북방한계선(NLL)을 통해 넘어온 북한 주민 31명 가운데 4명이 귀순 의사를 밝혔다. 북한은 31명을 모두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며 남측을 비난했다. 통일부는 3일 “북한 주민 31명(남성 11명, 여성 20명) 가운데 4명이 남측에 남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발표했다. 통일부는 이에 따라 이들 4명을 제외한 27명을 4일 판문점을 통해 송환하고 이들이 타고 온 선박은 서해 NLL 해상에서 북측에 인계할 예정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송환 및 귀순은 북한 주민의 자유 의사에 따른 것”이라면서 4명의 성별과 인적사항, 귀순결정 배경 등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북한 주민 31명은 설 연휴 기간인 지난달 5일 서해 NLL을 넘어왔다. 이들은 그동안 합동신문조로부터 남하 경위와 귀순 여부 등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대한적십자사는 이 같은 내용을 오후 판문점 적십자 채널을 통해 북한 조선적십자회로 보내 송환계획을 통보했다. 북한 조선적십자회는 이날 밤 대변인 담화를 통해 “부당하게 억류된 주민 31명 전원을 배와 함께 무조건 즉시 돌려보내야 한다.”면서 “남조선 당국은 국제 관례에도 어긋나고 인도주의 견지에서도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반인륜적 행위를 당장 걷어치워야 한다.”고 밝혔다.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 [혼돈의 리비아] 카다피 엽기 언행… ‘아마조네스 미녀 경호대’ 거느려

    ‘중동의 미친 개’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의 돌출 발언과 기행을 압축하는 별명이다. 그는 최근에도 재스민 혁명으로 지네 엘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을 축출시킨 튀니지 국민들에게 “당신들은 커다란 손실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튀니지를 통치하는 데 벤 알리만 한 인물은 없다.”고 말해 독특한 가치관을 드러냈다. 여성 편력도 남다르다. 지난해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 국무부 외교 전문은 카다피가 우크라이나 출신의 금발 간호사인 갈리나 콜로트니츠카와 늘 함께 다닌다고 전했다. 그의 개인 경호팀인 ‘아마조네스 경호대’는 카다피가 직접 뽑은 미모의 미혼여성 40여명으로 구성된 것으로 유명하다. 카다피가 이들에게 평생 순결할 것을 요구했다는 설도 있다. 2009년 미국 뉴욕 유엔총회장에서 그의 엽기적인 진가는 유감없이 발휘됐다. 카다피는 15분으로 할당된 연설을 96분으로 늘리며 장광설을 쏟아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유엔헌장을 찢어 던지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테러위원회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또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영구 집권해야 한다.”, “유엔 본부를 리비아로 옮기자.”는 등의 황당한 주장을 계속해 참석자 대부분이 졸거나 자리를 뜨게 했다. 동시통역사가 중간에 지쳐서 교체될 정도였다. 연설을 제지하려는 유엔 관계자의 쪽지는 공중에 날려 버렸다. 2009년 카타르에서 열린 아랍 정상회의에서는 “나는 아프리카 왕 중의 왕이다. 내 국제적 위상이 나를 하위권으로 내려오게 두질 않는다.”며 낯뜨거운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지난해 가톨릭의 본산인 이탈리아 방문 중에는 돈을 주고 동원한 여성 500여명에게 코란을 나눠 주며 이슬람교로 개종하라고 설득해 이탈리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소말리아 해적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서방국가에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그는 “해적 행위는 소말리아의 해양자원을 불법 침탈한 탐욕스러운 서방국에 대한 응답”이라면서 “자기를 방어하고 소말리아 아이들의 먹거리를 보호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전기 고문’으로 살해된 17세 소녀 논란

    파키스탄의 한 10대 소녀가 가족의 허락을 받지 못한 남성과 사랑에 빠졌다가 ‘전기 고문’이라는 끔찍한 형벌을 받고 사망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인도통신사 PTI는 “파키스탄 바하왈푸르에서 가족들이 인정하지 않은 남자와 사랑에 빠진 소녀(17)가 전기 고문을 당해 살해됐다.”고 최근 보도했다. 현지 경찰 관계자는 “살해된 사이마 비비의 가족과 마을 장로들은 회의를 통해 그녀를 사형하기로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면서 “시신에서 고문의 흔적 뿐만 아니라 목과 등, 양손에 화상이 발견됐다. 대부분 감전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사이마 비비의 죽음은 ‘명예 살인’으로 알려졌다. ‘명예 살인’은 이슬람권 국가 등의 일부 지역에서 순결이나 정조를 잃은 여성을 상대로 가족구성원이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죽이는 악습이다. 파키스탄에서는 매년 ‘명예’라는 이름으로 대부분 여성인 수백 명의 사람이 살해되는데 대다수 피해자는 가난한 농촌 가정에 속해 있다. 여성이 혼외정사 혐의를 받게 되면 ‘카리’ 또는 ‘나쁜 여성’으로 낙인 찍히며 그녀의 처벌은 부족의 관습에 따라 결정된다. 현지 독립 인권위원회는 “약 650명의 여성이 지난 2009년에만 명예 살인이란 이유로 처형됐다.”고 밝혔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강원 태백 함백산 눈꽃 트레킹

    강원 태백 함백산 눈꽃 트레킹

    함백산(咸白山)에 갑니다. 백두대간의 일부이면서 눈꽃 트레킹 명산으로 제법 이름 높지요. 주변 풍광도 빼어나 베테랑 산꾼뿐 아니라, 초보 산꾼들도 즐겨 찾습니다. 도시인에게 겨울산행이 쉬운 도전은 아닙니다. 엘리베이터에 적응했던 두 다리는 쥐가 날 정도로 뻐근하겠지요. 맛있는 커피를 탐하던 입술은 밭은 숨결 내뱉느라 닳을 지경일 겁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풍경은 고생한 자의 몫이란 겁니다. 발품 팔아 오른 그 산엔 당신만의 풍경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순결한 눈이 쌓여 은빛 세계로 변해 있을 함백산. 신기루처럼 눈앞에 아련하게 오버랩되더니, 조급증 걸린 두 발은 어느새 강원도 태백시로 향합니다. ●첩첩첩 산산산… 높은 산 깊은 풍경 설악산과 오대산, 대관령에서 뻗어온 백두대간이 남하하다 태백 인근에서 불끈 솟구친 산이 함백산(1573m)이다. 만항재와 화방재를 경계로 태백산과 이웃하고 있다. 함백산은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높다. ‘태백의 지붕’이라 불리는 태백산(1567m)보다 높다. 예로부터 묘고산이라고도 불렸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과 같은 의미로, 신성한 산이란 뜻이다. 두문동재(1268m)와 은대봉(1422m), 피재(935m)로 이어지며 백두대간 코스를 이룬다. 산행에 앞서 온도계를 본다. 영하 17도다. 두터운 외투를 헤집고 살을 에는 칼바람이 밀려 온다. 태백시내가 이 정도면 산 정상은 얼마나 추울까. 산행 들머리는 두문동재다. 대체로 만항재에서 출발해 정암사나 두문동재로 내려 오는 게 일반적이다. 만항재가 1330m이니 함백산 정상까지는 243m만 오르면 된다. 하지만 길이가 짧은 대신 정상까지 된비알이 심하다. 넉넉한 마음으로 주변 풍경과 마주할 여유를 갖지 못할 바엔 쉬엄쉬엄 오르는 편이 낫다. 두문동재에서 만항재까지는 약 8㎞. 4시간가량 걸린다. 태백시에서 38번 국도를 타고 가다 보면 두문동재터널이 나온다. 터널 바로 위가 백두대간 선상의 두문동재다. 고개 이름이 독특하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의 ‘두문’과 같은 한자를 쓴다. 풀자면 ‘문을 닫아 둔다.’는 뜻일 터. ‘태백시지’나 태백문화원에서 발간한 ‘우리 고향 태백’ 등 문헌을 보면 이름에 특별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이성계의 조선 개국 이후, 고려 신하 가운데 72명이 조선의 녹을 먹지 않겠다며 벼슬을 버리고 현 황해도 개풍군 광덕산 기슭에 은거했다. 조정에서 이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려고 산에 불을 질렀지만, 이들은 뜻을 굽히지 않고 불타 죽고 만다. 그때부터 광덕산 일대를 두문동이라 불렀다. 그런데 72명의 충신 가운데 7명이 태백으로 내려와 인적 드문 함백산 아래 산간 마을에 몸을 숨겼고, 이를 계기로 마을 이름은 두문동, 고개 이름은 두문동재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은빛 설원과 파란 하늘 하나 된 풍경 은대봉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도로에서 한 발짝만 떼면 곧 백두대간 능선이다. 내심 기대했던 상고대(나뭇가지 등에 서리가 얼어붙어 눈꽃처럼 핀 것)는 없다. 하지만 숲은 여전히 눈밭이다. 다져진 등산로를 살짝 벗어나면 금세 무릎 언저리까지 푹푹 파묻힌다. 봄철 연분홍 꽃잎을 곱게 밀어올렸을 철쭉 가지에도, 길가에 낮게 몸을 움츠린 산죽의 푸른 잎에도 순백의 솜털 옷이 달렸다. 여기에 코발트빛 하늘이 멋진 조합을 이루며 잠시 산행의 피로를 잊게 한다. 신갈나무와 사스래나무 숲을 지나 능선에 올라 붙자니 뒤편으로 광활한 산경이 펼쳐진다. ‘첩첩첩 산산산’이다. 대간 능선 트레킹은 이런 매력이 있어 좋다. 멀리 산자락 위편엔 새하얀 풍력발전기 여러 대가 서있다. 삼수령(각각 동·서·남해로 흘러드는 오십천·한강·낙동강의 발원지) 인근의 매봉산 자락에 세워진 현대판 풍차다. 한때 백두대간의 정기를 훼손한다며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것이, 어느새 풍경의 보고가 됐다. 등산로 초입은 제법 가파르다. 대간 마루의 이름값을 하는 것일 게다. 코가 땅에 닿을 듯, 허리 굽혀 40분 남짓 오르면 은대봉 정상이다. 너른 공터에서 잠시 다리쉼 하기에 맞춤하다. 사방이 나무에 가려 조망은 그리 좋지 않은 편. 이후 1~3 쉼터까지는 내리막과 오르막이 번갈아 펼쳐진다. 3쉼터를 지나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함백산의 명물인 주목 군락지와 만난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장생의 나무다. 말라 비틀어져 고사목처럼 보이지만, 이 추위에도 끄떡없이 살아 있다. 주목의 푸른 바늘잎이 싱싱한 생명력을 새삼 일깨운다. 눈을 딛고 선 주목들의 장한 자태를 담느라 산꾼들의 카메라도 덩달아 바빠진다. 예서 정상까지는 줄곧 급경사다. 입에서 단내가 풀풀 나고, 허벅지에 경련이 일어날쯤에야 함백산은 비로소 제 몸을 허락했다. 사방이 탁 트인 정상, 바람이 땀을 씻는다. 차긴 하되 더없이 맑고 상쾌한 바람이다. 온갖 잡념들도 한줌 남김 없이 바람에 실어 보낸다. 그리고 그 빈 공간에 백두대간의 힘찬 줄기를 품는다. 천천히 정상 이곳저곳을 돌아본다. 대간의 고산준봉들이 거칠 것 없이 줄달음치고 있다. 머릿속에 관념으로만 머물던 ‘일망무제’가 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북쪽 대간 길을 따라 은대봉, 싸리재, 금대봉이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고, 서쪽으로는 두위봉과 백운산, 장산이 산너울을 이룬다. 멀리 도심속에서나 보았던 검은 띠가 산과 하늘을 가르고 있다. 속세의 홍진이 모인 것인지, 대기오염 탓인지 알 길은 없으나, 승속을 구분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청명한 날이면 동해 앞바다까지 한눈에 찬다던데, 그런 행운은 없었다. 하지만 하늘과 맞닿은 곳에 서서 일망무제(한눈에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하게 멀고 넓어서 끝이 없음)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은 충분히 벅차다. ●태백산 눈조각전만 열려 구제역 여파로 ‘2011 태백산 눈축제’가 12일 전격 취소됐다. 하지만 핵심 행사인 눈 조각 전시회는 오는 21~30일 예정대로 진행된다. 태백산도립공원 당골광장과 함백산 아래 오투리조트, 그리고 시내 황지연못 등이 주 무대다. 올해 특징은 눈 조각의 대형화다. 지구촌 곳곳의 문명을 섬세하게 재현했다. 특히 주 행사장인 당골광장 사랑동산에는 ‘세계의 불가사의’라는 주제로 ‘진시황릉 병마용’과 ‘스핑크스’ 등 높이 4.5~11m, 길이 12~30m에 이르는 초대형 눈조각 11점이 전시된다. 글 사진 태백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33)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중앙고속도로 제천 나들목으로 나와 38번 국도를 타고 내처 달리면 태백이다. 우리테마투어(www.wrtour.com)가 태백산 눈꽃열차 상품을 내놨다. 전세 기차를 타고 축제장과 주변 관광지를 돌아보는 당일 상품이다. 21~25일, 29~30일 서울 영등포역에서 출발한다. 4만 3000원. 버스는 2만 4900원. ▲맛집 닭갈비가 별미다. 볶음식의 춘천 닭갈비와 달리 고구마, 냉이 등을 육수와 함께 끓여 낸다. 대명닭갈비(552-6515)가 입소문 난 집. 태백닭갈비(553-8119)는 복매운탕으로도 많이 알려졌다. 한우마을(552-5349)은 ‘가격 대비 성능’이 탁월한 쇠고기집. 강산막국수(552-6680)는 막국수와 감자 부침 등 토속 음식을 잘한다. ▲주변 볼거리 태백의 명소를 전부 둘러보자면 하루해가 짧다. 구역별로 묶어서 계획을 짜는 게 좋겠다. 귀네미마을과 매봉산 풍력발전단지는 대단위 고랭지 배추밭으로 유명한 곳. 설경도 이에 못지 않게 빼어나다. 인근에 삼수령, 자작나무 군락지도 있다. 구문소(求門沼)는 약 5억만년 전의 고생대 지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수능천석(水能穿石)의 격언을 실감할 수 있는 기이한 세계다.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과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철암역두 등을 한 코스로 묶을 수 있다. 태백체험공원은 폐광지를 체험관광지로 조성한 곳이다. 석탄박물관과 함께 돌아보면 훌륭한 테마여행이 된다. 한강 발원지 검룡소는 별도 코스로 계획하는 게 좋겠다. 예수원은 구제역으로 출입금지 상태다. 태백시청 관광문화과 550-2081~5. ▲잘 곳 시내에 깨끗한 모텔이 많다. 5만원선. 가족과 함께라면 함백산 정상 아래 오투리조트(580-7000)를 고려하는 게 좋겠다.
  • [연극리뷰] ‘에어로빅 보이즈’

    [연극리뷰] ‘에어로빅 보이즈’

    말 그대로 ‘흔드는 데’ 목표가 있었다면 출발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서울연극협회가 주관하는 차세대 연극연출가 육성 프로그램 ‘요람을 흔들다’에 선정돼 지난 5일 서울 대학로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첫선을 보인 작품 ‘에어로빅 보이즈’(최원종 연출, 극단 명작옥수수밭 제작) 얘기다. 작품은 입만 열면 ‘퍽’(fuck)을 외쳐대던 데스 메탈(Death metal·거칠고 과격한 연주가 특징인 헤비 메탈의 한 장르) 밴드 ‘지옥의 사생아들’ 멤버들이 에어로빅 센터 직원으로 변신하는 내용이다. 미국의 헤비 메탈 밴드 메탈리카가 1996년 ‘로드’(Load) 앨범을 내고 받았던 비난을 떠올리면 극의 분위기가 쉽게 짐작갈 듯. 흰색 바탕에 시뻘건 핏물과 망치를 그려 넣었던 충격적 데뷔앨범 ‘킬 뎀 올’(Kill’em all)을 기억하는 골수 팬들은 치렁치렁하던 머리를 짧게 자르고 댄디 보이로 변신한 메탈리카를 두고 혹평을 서슴지 않았다. 물론 차이는 있다. 세계적 밴드였던 메탈리카는 험한 욕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건재하지만, 극 중 ‘지옥의 사생아들’은 한국적 음악 풍토에서 고별무대마저 빈 의자를 놓고 치러야 했다. 극은 이런 상황이 일으키는 웃음의 연속이다. 헤드 뱅잉(머리 흔들기)에 미쳐 있던 밴드 주자들이 먹고살기 위해 에어로빅의 발랄한 춤과 작위적 웃음을 흉내내는 과정을 상상해 보라. 로커의 자존심이라는 긴 머리를 미용실에서 잘라내는 장면은 웃음의 절정이다. 송재룡, 염혜란 등 코미디에 능한 배우들은 코믹 연기의 핵심이 호흡이라는 점을 확연하게 보여 줄 정도로 주거니 받거니 탄탄하게 극을 떠받친다. 관객들은 이들의 호들갑에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웃는다. 밴드 멤버들 역시 평범한 대한민국 청년들이라는 점도 포인트. 겉으로는 마이크의 순결함을 얘기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장과 복장을 한 채 온 세상에 저주를 퍼부어대지만, 속으로는 ‘소녀시대’를 좋아한다. 더 큰 반전은 이 작품을 쓰고 연출한 이가 작가 시절엔 줄곧 심각한 작품을 던져 온 최원종이라는 점이다. 극 전체는 젊은 시절의 무모한 열정이 차츰 무뎌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주제의식만 놓고 보면 그가 쓴 전작 ‘두더지의 태양’, ‘안녕, 피투성이 벌레들아’ 등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이전 작품들이 상황을 다소 극단적으로 밀어붙였다면, 이번 작품은 코믹한 방식을 택했다는 게 이채롭다. 소재나 극을 풀어 나가는 방식이 아주 새롭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데스 메탈에서 에어로빅으로 180도 변신한 것은 ‘지옥의 사생아들’이 아니라 최원종 본인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놀랍다. 다른 무대에서는 비극적 인물을 맡아 열연했던 박완규가 ‘지옥의 사생아들’ 리드 보컬을 맡아 약간 어설픈 리더 역을 소화해 내는 점도 눈길을 끈다. 짧게 끊어치던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가 늘어지는 감은 있으나, 이어지는 작품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기에 충분하다. 7일까지. ‘에어로빅’에 이어 같은 무대에 오르는 작품은 ‘고리끼의 어머니’(임세륜 연출, 극단 다 제작)와 ‘사라-O’(이성구 연출, 극단 가변 제작)다. ‘고리끼’는 9~12일, ‘사라-O’는 14~16일이다. 12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요람’ 지원작으로 뽑힌 뒤 김석만 전 서울시립극단장, 박재완 극단 루트21 대표, 양정웅 극단 여행자 대표가 각각 멘토를 맡아 만들었다. 이들 작품 가운데 최우수작은 올해 서울연극제에 공식 출품된다. 1만 5000~2만원. (02)765-7500.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씨줄날줄] 빗나간 성전(聖戰) /김성호 논설위원

    알카에다는 적어도 서방세계에선 ‘공공의 적’이다. 9·11사태 이후 자살폭탄 테러가 날 때마다 첫 번째 용의자로 지목되는 단체. 이 알카에다는 이슬람권에선 큰 지지를 받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영 딴판이다. 올해 초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조사만 보더라도 그 경향은 극명하다. 2005년에 비해 알카에다 지지율이 요르단의 경우 57%에서 12%로 낮아졌고, 파키스탄도 반대가 43%에서 90%로 급증했다. 지지가 아닌 배척의 대상이 된 셈이다. 많은 이슬람 국가와 무슬림(이슬람신도)들이 알카에다에 등을 돌려 가는 결정적인 이유는 이 조직이 표방하는 성전(지하드)의 모순이다. 지하드라면 무슬림들이 목숨같이 여기는 근본교리인 6신(알라·천사·코란·예언자·내세·천명)과 5행(고백·예배·단식·희사·순례)의 지킴. 아랍어로 ‘고투’ ‘분투’란 뜻 그대로 원 개념은 신앙을 이루기 위한 근신과 개선의 고단한 노력일 터이다. 박해로 점철된 종교에서 종교와 교리를 지켜 내겠다는 평화와 기본적 방위의 개념인 것이다. 무슬림들의 알카에다 배척의 중심엔 가치의 괘씸한 전도에 대한 배신감이 있다. 평화와 순결의 순수한 종교적 가치를 전쟁과 정치의 이데올로기로 바꿔 놓은 데 대한 증오 수준의 이탈. ‘침략자에 대해 너희에게 침략한 범위까지 응징하라.’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생명과 무고한 민간인을 죽이지 말라.’ 법 위에 있는 절대적 신앙지침인 코란을 무참히 짓밟은 무고한 살상과 폭력에 눈감고 있을 무슬림은 지구상에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북한 인민무력부장이 엊그제 성전을 입에 올렸다. ‘핵 억지력에 기초한 우리 식의 성전을 개시할 만단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지난 7월 국방위원회 대변인, 8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성전 발언에 이어진 살상과 폭력의 다짐이 섬뜩하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만행에 희생된 무고한 생명은 오간 데가 없다. 야만적 테러의 다짐을 이슬람식 지하드로 교묘하게 포장하는 전도망상이 한심하다. 지하드의 본뜻이나 알고 있는지. “증오의 감정을 부추겨 이익을 보는 그룹에 의해 증오의 공급이 이뤄진다.” 얼마 전 에드워드 글래서 하버드대 교수가 지하드 테러를 꼬집은 말이다. 증오의 확산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 경제적 입지를 얻는다는 일갈. 지금 지하드를 외쳐대는 북한의 입장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테러 지하드에 맞선 무슬림들의 반발은 이미 북한 동포들에게도 비슷한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는데….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연극’에 대한 연극-다르면서 같은 두 무대… 공통분모는 재미!

    ‘연극’에 대한 연극-다르면서 같은 두 무대… 공통분모는 재미!

    28일까지 서울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에 오르는 ‘경성스타’(이윤택 연출, 연희단거리패 제작)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 오르는 ‘우리 말고 또 누가 우리와 같은 말을 했을까?’(김동현 연출, 극단 코끼리만보 제작)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금기로 통용되는 자기 얘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두 작품 모두 ‘연극에 대한 연극’이다. ‘경성스타’가 일제시대 연극사를 소재로 삼았다면, ‘우리 말고’는 연극의 이야기성 그 자체에 집중한다. 과거와 현대에 대한 얘기인 셈이다. 스타일상으로도 대조된다. ‘경성스타’가 서사극으로 연대기적 서술을 선보인다면, ‘우리 말고’는 시공간이 파괴된 곳에서 뚜렷한 서사 없이 극을 전개한다. 유일한 공통점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말들이 별처럼 반짝이는 세상 - ‘우리 말고 또 누가 우리와 같은’ ‘우리 말고’는 딱 어떻다고 설명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서사구조를 갖추지 않아서다. 한 배우가 뚜벅뚜벅 걸어나와 당신은 도대체 어떤 얘기를 기대했기에 지하의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 들어와 있냐고 되물으면서 시작된다. 그 뒤 차례로 등장하는 20여명의 배우들이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는다. 개명해서 이름이 두 개인 덕분에 두 명의 인생을 살고 있다는 남자, 뛰어난 스턴트맨이지만 “괜찮습니다.”만 연발할 뿐 이름은 가질 수 없는 남자, 13년 연기하는 동안 박수받은 순간을 합쳐 보니 단 24시간에 불과하지만 그 맛에 한다는 무대중독 여자, 엄마에게 서운한 게 있었는데 매운 낙지를 같이 먹으며 눈물 흘리다 보니 어느 순간 다 풀려버렸다는 여자 등 온갖 사연들이 다 나온다. 작품 자체가 크로키 화집 같다. 극의 리듬도 소설적이라기보다 시적이다. 공연이 끝난 뒤 극장 밖을 나설 때 잠시 발길을 멈춰 밤하늘을 올려다 보길. 그 밤하늘에 단지 20여명의 배우가 아니라 지구상 수십억명이 뱉어낸 말, 차마 뱉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 삭인 말, 입이 아니라 표정이나 행동으로 건넸던 말들이 떠돌아 다닐는지 모른다. 그 말들이 그렇게 허공을 맴도는 것은 그 말들에게 쉴 곳을 만들어주지 않았던 우리 자신 때문 아닐까. 연극 마지막, 무대를 텅 비운 채 침묵 속에서 무용수의 낯선 몸짓만 번득이는 것은, 가슴을 연 우리들에게 마침내 반짝이며 다가온 별무리였을지도. ‘세상 밖, 극장 안’을 넘어 ‘극장 밖, 세상 안’으로 달려가는 미래 연극의 풍경이 아른거린다. ●우리는 집 나간 ‘노라’요, 순결 잃은 ‘카추샤’가 아니었을까-‘경성스타’ ‘경성스타’는 일제강점기 극작가 임선규(김용래)의 삶을 통해 한국 연극사를 재구성한다. 임선규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나중에 ‘홍도야 우지마라’로 널리 알려졌다)라는 신파극으로 최고 극작가로 떠오른 인물. 서양식 연극쟁이들은 임선규의 눈물 찔찔 짜대는 극을 두고 비웃지만, 그는 조선 민중의 정서에 가장 잘 들어맞는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역사에 대한 얘기라 많은 세월과 인물이 거쳐가지만 무대 뒤편에 떡하니 자리잡은 회전무대 덕에 무리 없이 넘어간다. 수많은 사건을 다루는 속도감을 올려주는 데다, 서사극적 연출 덕분에 감정과잉이 자제된다. 회전무대는 연극 막판 또 다른 명풍경을 만들어낸다. 회전무대가 쉬지 않고 돌아가면서 선배 연출과 배우가 남긴 말이 임선규 팀의 막내이자 신출내기 배우 혜숙(배보람)에게 내리꽂히는 것이다. 이 장면은 그야말로 백미다. 그런 의미에서 연극의 진정한 주인공은 임선규가 아니라 퇴물 여배우 이월화(김소희), 새내기 배우 혜숙 두 인물이다. ‘인형의 집’에서 뛰쳐나간 노라의 운명은 결국 ‘부활’의 카추샤가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 그런 현실 앞에서 조선 남자들은 모른 척 퉁소나 불 수밖에 없었던, 이상의 ‘날개’에 나오던 풍경. 그게 조선의 모습이었고, 신극과 친일작품의 물결에 떠밀린 당대 연극인의 모습이었으리라. 이월화는 이 세월을 온몸으로 받아낸 인물이었고, 혜숙은 그 잿더미 속에서 월화를 이어가는 새싹이다. 나무꾼이 포대기에 싸인 아기를 들고 가는 장면을 남긴 영화 ‘라쇼몽’처럼, 아무리 치욕의 역사라 한들 그 시대는 이미 혜숙이란 배우를 낳아버린 것이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장은주 교수의 ‘인권의 철학’

    ‘대한민국’과 ‘속물주의’(snobocracy)를 진보 진영이 끌어 안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참여사회연구소가 발간하는 반년간지 ‘시민과 세계’ 편집주간인 장은주 경남 영산대 법대 교수가 쓴 ‘인권의 철학’(새물결 펴냄)이 담고 있는 내용이다. 대한민국과 속물주의는 보수의 트레이드 마크다. 상대를 윽박지를 때 “그렇다면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냐.”고 목에 핏대를 세우거나, 상대를 회유할 때 “잘 먹고 잘 살고 싶지 않아.”라고 은근히 속삭이곤 한다. 때문에 진보 진영이 이들 단어에 취하는 태도는 “즐길 수 없다면 피하라.”는 쪽이다. 그런데 이들 단어에는 묘한 점이 하나 있다. 논리적으로는 궁상맞고 유치할는지 몰라도 현실적 힘은 강력하다. 일종의 마법의 주문이다. 직장인 가운데 “그렇다면 너는 회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냐.”, “그렇다면 네 가족을 먹여 살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냐.”라는 질문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저자는 거꾸로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겨라.”라고 말한다. 책에 언급된 저자의 주장은 이 같은 시각을 선명히 드러낸다. “뉴라이트의 대한민국주의는 제대로 된 애국주의가 아니다. 아무런 품위도 없이 몰염치를 무슨 훈장처럼 내세우며 기득권의 수호만을 노리는 속물적 우파들의 대한민국이다. 그런데도 왜 진보적 민주주의자들은 이 대한민국을 그들에게만 맡겨두고 있는 것일까.” “진짜 문제는 속물주의에 대한 단순한 냉소나 경멸 같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 병리화를 막을 수 있는 사회정치적 조건에 관한 것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프레임의 진지전’을 제안하는 셈이다. 국가를 부정만 할 게 아니라 국가의 다른 가능성도 찾아보자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국가를 긍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책 곳곳에서 저자는 진보의 입장에서 이명박 정권 이후 우경화되고 있는 한국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치적 존재인 인간이 기댈 수밖에 없는 곳은 국가 아니냐고 말한다. 국가의 다른 가능성을 찾는 기준은 ‘민주공화국 헌법이 지향하는 보편적 인권의 보장’이다. 추상적 보편주의와 다문화주의 문제, 자유권을 넘어선 사회권의 문제, 민주적 애국주의의 가능성, 북한 인권 문제 등까지 저자는 두루 언급한다. ‘속물주의’도 마찬가지다. 자녀 해외유학을 두고 보수는 자랑스럽게 보내고 진보는 부끄러워하면서 보낸다는 말처럼, 그 어느 누구도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때문에 저자는 “문제는 속물주의 그 자체가 아니다. 그 속물주의가 왜 하필이면 부동산 투기, 사교육 광풍, 성형 열기로 나타나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오늘날 우리가 부러워하는 서구 선진국의 매너는 따지고 보면 대개 중세 귀족놀음을 흉내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중산층도 조선 선비의 고졸함을 흉내낼 수 있을 법도 한데 횡행하는 것은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배기량 비교뿐이다. 저자는 이를 두고 ‘상처 입은 삶의 빗나간 인정 투쟁’이라고 표현한다. 상처 입은 삶을 냉소하기보다 따듯하게 보듬어줘야 한다는 얘기다. 진보 진영은 제각각 100% 순결한 세상을 그린다. “그건 진짜 진보가 아니다.”라는 논쟁이 진보 진영에 유독 많은 이유다. 순결한 세상을 꿈꾸는 논의에 지쳤다면 환영할 만하고, 그런 논의가 아직도 가치있다고 믿는다면 반박을 준비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윤동주 학창시절 생생히 재현

    최근 오랜만에 TV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윤형주, 조영남, 송창식은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감상실 ‘쎄시봉’에서 노래 불렀던 이들이다. TV에 출연한 조영남은 직접 작곡한 윤동주의 ‘서시’를 노래 부르며 윤형주가 고(故) 윤동주 시인의 6촌 동생이라고 소개했다. 윤형주는 “해방을 6개월 앞두고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난 윤동주 시인의 유해를 가지고 돌아오신 분이 우리 아버지”라며 “1400곡이 넘는 광고음악을 작곡했지만 아버지는 시도 노래라며, 나의 잘난 작곡으로 시를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형님인 윤동주 시인의 시로 노래를 만들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만류로 하지 못했던 윤씨는 조영남이 작곡한 ‘서시’가 “결국 히트하지 못했다.”고 면박을 줘 사람들을 웃겼다. 서정 시인 윤동주(1917~1945)는 대한민국 국민의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시로 여전히 우리에게 친근하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최동호 엮음, 서정시학 펴냄)는 그동안 여러 차례 출간된 윤동주 전집이지만 고려대 국문과 교수가 고인의 육필 원고 노트 두권을 치밀하게 대조하고 그간 간행된 자료들을 총정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저자인 최동호 교수는 ‘황사 바람’ ‘불꽃 비단벌레’ 등의 시집을 펴낸 시인이기도 하다. 저자는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발간 60주년인 2008년부터 작업을 시작해 3년 만에 완간했다.”며 “연세대 윤동주 기념관의 사진자료를 대폭 보완하여 학창시절의 생생한 윤동주 모습을 재현해 볼 수 있게 했다.”고 설명했다. 책에 정리된 윤동주의 작품은 모두 127편이며 산문 4편이 포함되어 있다. 원전의 한자를 버리지 않았고 다른 어떤 윤동주 전집보다 육필원고에 가깝게 접근하되 오늘의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꾸며졌다. 순결한 삶을 지향하고 순정한 모국어를 갈고닦은 윤동주 시인의 시는 언제 읽어도 가슴을 울리는 고전이다. 저자는 “참인간으로서 자기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주체적 젊은 세대라면 윤동주의 시를 읽고 그가 전하는 진실한 삶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고 조언한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드라마] 가슴까지 따뜻해지는 가족이야기

    [드라마] 가슴까지 따뜻해지는 가족이야기

    평소에는 불륜, 복수가 넘쳐나는 드라마가 명절만 다가오면 정색하고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 바쁘게 사는 도시인들에게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수준 높은 작품들이 이번 추석 연휴에도 어김없이 안방극장을 찾아간다. 가슴 훈훈하게 만드는 이야기에, 신뢰도 높은 연기파 배우들이 총출동하니 명품 드라마가 따로 없다. 추석마다 ‘하노이신부’(2005년), ‘내사랑 달자씨’(2006년), ‘깜근이엄마’(2006년), ‘아버지, 당신의 자리’(2009년) 등을 방송해온 SBS는 올해 ‘당신의 천국’을 내놓는다. 23일 오전 9시10분부터 오전 11시40분까지 1, 2부로 나눠 방영한다. 드라마는 평생 자식을 위해 헌신한 부모, 이런 부모에게 늘 손을 벌리기만 하는 자식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철도기관사로 정년 퇴임한 기수는 자식들의 떨떠름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옥분과 황혼 재혼에 성공한다. 둘의 행복도 잠시, 옥분의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기수와 자식들의 갈등은 깊어간다. 기수와 옥분 역에 연기파 배우 최불암과 정영숙이 출연해 기대감을 한껏 높인다. 정애리, 김진근, 이아현, 지현수, 연운경, 서승현, 정근, 조형기, 강남길, 김민한, 이종남 등 내로라하는 중견 연기자들 또한 드라마의 감칠맛을 더한다. 2010년 SBS 극본 공모에 당선된 정선영 작가의 첫 작품으로 ‘연개소문’과 ‘순결한 당신’의 주동민 PD가 연출했다. 지상파 TV가 가족애에 호소한다면 케이블TV는 인기 높은 ‘미드’(미국드라마)의 무더기 연속 방송을 내세워 젊은층을 공략한다. 먼저 채널 CGV는 미 해군 범죄 수사대의 활약을 그린 ‘NCIS’ 최신편(시즌7)의 전편인 24편을 한꺼번에 방송한다. 20일과 21일(낮 12시) 이틀간 12편씩 나눠 방영한다. NCIS는 진지하고 심각한 범죄 수사물이지만 유머와 위트가 적당히 결합돼 색다른 재미를 선사해 왔다. 특히 엄격하지만 가슴 따뜻한 리더, 강력계 형사 출신의 바람둥이 요원, 아름다운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고문에 능한 여자 요원, 고지식하고 순진한 컴퓨터 천재 요원 등 개성 넘치는 캐릭터가 드라마의 인기에 한몫한다. OCN은 20~26일 매일 오전 2시에 화려한 액션과 영상미로 미드팬들을 사로잡아온 ‘스파르타쿠스’를 다시 내보내며, 20~23일에는 매일 오전 4시 ‘CSI 라스베이거스’ ‘CSI 마이애미’ ‘CSI 뉴욕’의 새 시즌 가운데 가장 인기 높았던 에피소드만을 골라 5편씩 연속 방송한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최희진, 태진아 공식입장 반박 “기사 몇 줄이 강경대응?”

    최희진, 태진아 공식입장 반박 “기사 몇 줄이 강경대응?”

    가수 태진아 이루 측이 작사가 최희진의 폭로와 공식사과 요청에 대해 28일, 보도자료를 통해 공식입장을 배포한 가운데, 같은날 최희진 역시 미니 홈피를 통해 반박글을 게재해 시선을 모으고 있다. 최희진이 미니홈피에 올린 글은 다음과 같다. “뭐야? 강경대응한다고 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침 모 방송에서 공식입장 발표라고 해서 얼마나 떳떳한지 기다렸었는데, 홀랑~ 기사 몇 줄이 ‘강경대응’이었어? 태진아 선생님! 저한테 가만히 있으라고 하신 경고 같은데 저는 가만히 있었어요, 사과를 기다리며. 그런데 고소를 하니, 협박을 했니, 거액을 요구했니 하면서 화들짝 당황 플레이 한 건 선생님 쪽이죠.그리고 1억 하하. 10억 100억을 요구해도 할 말 없으시잖아요? 사람 인연과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돈으로 계산할 수 있겠어요? 제가 1억을 요구 했다고 주장 하시려면, 왜 돈을 요구했는지도 밝히셔야 앞뒤가 맞아 떨어지겠죠? 아, 그리고 무슨 얼어 죽을 책 홍보? 저 그 책 안내도 되요. 누가 자기 자신의 치부를 이렇게까지 공개하면서 책 홍보를 합니까? 책 안 팔아도 저, 먹고 살거든요? 힘 있다고 힘없는 자를 함부로 짓밟는 건, 쓰레기 정치인들 전공인 줄 알았는데 이 바닥도 만만치 않구나,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왜요? 제대로 터트리자니, 자폭하는 심정이시죠? 아차! 그리고 제가 정신적 곤란 겪는 사람이라구요? 아니, 그럼 한 여자가 그런 아픔 겪고도 아무렇지 않게 방글방글 웃고 다녀야 하는 겁니까?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요? 내가 누구 때문에 그리고 왜, 정신적으로 힘들어 했는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나세요? 또한 저한테 비슷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연락을 해왔다죠? 전번 다 까세요. 선생님 아들 이루는 이슬처럼 맑고 순결해서 그런 말을 함부로 하십니까? 이루가 어떻게 노는지 뭐하고 노는지 죄 까발리고 싶어도, 이루 지인들이 깊이 관여되어 있기에 그들에게 까지 피해주긴 싫기에 참고 닥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겁쟁이 이루야, 너는 입 없니? 어떻게 너는 네 주관적인 말 단 한 마디를 못하고, 남의 집 불 구경하 듯 아버지 뒤에 꼭꼭 숨어 있니? 아직도 애기놀이 하니? 난 네가 참 부럽다. 해결사 아버지가 옆에 계시니, 네 똥 오물 다 받아주시는구나. 이젠 다 큰 네가 오히려 아버지를 지켜드리고 보호해드려야 하지 않니? 연예계가 깡패들의 손에 놀아나고 주먹구구식으로 불리함을 입막음하려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 나는 적어도 좋은 물로 바뀌고 있는 가요계를 믿고, 또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뮤지션들 매니저들 가수들이 많다는 걸 믿는다. 다시한번 정중히 요청드립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 가슴에 한으로 맺힌 말 아직 10%도 다 안한 거 잘 아시죠? 너무 아들말만 믿고 한 사람 매도하는 거 멈춰주십시요. 지저분하게 무슨 진실공방이니 법정싸움이니 이런 단어조차 싫으니까, 단정하고 아름답게 마무리되기만을 바랍니다. 저도 이젠 혼자가 아닙니다. 지켜보는 분들이 너무 많아져서 저는 악플조차 감사하더라구요. 한때나마 존경했던 태진아 선생님 나이와 위상과 권력과 잔머리와 배후를 다 떠나서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사과하시기 바랍니다.” 사진=서울신문NTN DB, 최희진 미니홈피 서울신문NTN 뉴스팀 ntn@seoulntn.com ▶ 홍은희, 과거사진 노출…성형의심 "눈이 너무 심심해"▶ ’태도논란’ 김그림 아버지, 딸 대신 공개사과 "용서와 자비를"▶ ’이기적 S라인’ 유인영, 뱃살굴욕 "과욕 vs 오해"▶ ’절대 섹시’ 이효리 눈웃음 화보공개…"같은 사람 맞아?"▶ ’당신의 PC를 꿰뚫고 있다’ 좀비PC 극성…확인법은?
  • [고전톡톡 다시읽기] 이광수 ‘무정’

    [고전톡톡 다시읽기] 이광수 ‘무정’

    ●1917년 최초의 신문 1면 소설 한국에서 근대 백년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단연 ‘무정’이다. 26살의 청년 이광수는 생애 두 번째 일본 유학을 하던 1917년, 조국의 ‘매일신보’에 자신의 원고를 보냈다. 바야흐로 을사조약 후 12년이 지났고, 삼일운동을 2년 앞두고 있던 때였다. 새해 벽두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이 작품은 당대 독서대중을 쥐락펴락하며 그해 6월14일까지 총 126회에 걸쳐 연재된다. 최초의 신문 1면 소설이었던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일일연속극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배신과 사랑의 드라마였다. 이 작품으로 이광수는 일약 조선의 문사이자 조선의 스승으로 등극하게 된다. ‘무정’은 해방 이후에도 줄기차게 간행되어 그 판본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2005년에는 일어로, 2006년에는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과연 이 작품의 생명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작품의 주인공인 일본 유학생 출신 이형식의 속물근성, 그를 중심으로 기생 박영채와 여학생 김선형이 만드는 애정의 삼각관계, 폐쇄적 공간 안에서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동성애 코드, 공원 데이트와 고백에 이르는 신식 자유연애의 문법, 청나라를 신봉하던 박진사와 그 딸의 퇴행적 삶, 오로지 미국만 외쳐대는 얼개화꾼 목사의 허영까지, ‘무정’은 그 자체로 전통과 근대를 넘나드는 일상의 박물지였다. 독자들은 당장이라도 경성과 평양 시내 한복판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주인공들의 행동과 말솜씨에 열광했다. 그러나 ‘무정’은 무엇보다 청년들의 이야기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게 된 식민지의 현실 안에서 지사와 학생들은 우왕좌왕했다. ‘난세(世)의 시대, 청년은 어디로 가야 하나?’ 와세다 대학을 다니고 있던 이광수는 이야기의 힘을 빌려 이 질문에 답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질문이 반복될 때마다 ‘무정’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구시대와 신시대의 대립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선명하다. 청년들이여 무정하라! 과연 무엇에 대해? 또 어떻게? ‘무정’을 관통하는 것은 구시대와 신시대의 대립이다. 옥에 갇힌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되어버린 첫사랑 영채. 그리고 이제 막 ABC 받아쓰기를 시작했지만 반드시 미국 대학 졸업생과 결혼하겠다고 생각하는 속물 선형. 영채는 낡았고, 선형은 타락했다. 그러나 형식에게는 두 여인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형식은 선형의 집안이 밀어줄 학력과 금력을 원했지만, 보잘 것 없는 고아였던 자신을 돌봐준 영채 가족에 대한 의리를 저버릴 수도 없었다. 봉건적 인습으로 얽힌 아내를 버릴 수도 없고, 자유연애로 사랑을 키운 엘리트 애인을 어찌하지도 못하는 조선의 ‘찌질남’! 그들의 역사는 여기서 시작한다. 형식은 이 난관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무정’에는 사랑과 출세의 화신인 형식이 무정한 인간으로 변신하는 대목이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자살하러 평양에 간 영채를 형식이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고 돌아오면서다. 형식에게는 순결을 잃고 평양으로 도망친 영채의 죽음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불결한 과거와는 굳이 손잡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돌아온 형식은 간절히 사랑을 갈구하며 선형에게 프러포즈를 한다. 1917년의 독자들은 영채를 자살시키지 말아달라고 떼를 쓰는 투서를 연일 신문사로 보냈다고 한다. 그 시절의 독자들은 무정한 형식과 무정한 사회를 비난했다. 두 번째 변신이 이루어지는 건 삼랑진 수해의 국면에서다. 살아 돌아온 영채는 자신을 구해준 병욱과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형식과 선형도 미국 유학을 떠나기 위해 부산으로 가고 있었다. 기차 안에서 형식, 선형, 영채, 세 사람은 운명처럼(!) 조우한다. 허나, 이 돌발적 조우 때문에 세 사람은 서로에 대한 신의를 완전히 잃게 된다. 무정했던 세상을 핑계로 영채에게 등을 돌렸던 형식이 다시 딜레마에 빠지기 때문이다. 선형은 난데없는 영채의 등장으로 비로소 질투라는 감정을 알게 되었고, 형식의 무정함이 야속했던 영채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런데 바로 그때, 삼랑진에 엄청난 수해가 닥친다. 강물 위로 돼지가 떠내려가고 , 곧 아이를 낳을지도 모르는 산모는 물 위에서 정신을 잃을 찰나였다. 이를 본 형식은 갑자기 영채와 선형에 대한 사랑이 사소하게 생각되고, 정신없이 수해에 허덕이는 민족을 구하는 사명감에 몸서리치면서 자신의 미래를 재정립하게 된다. 영채와 선형의 연인(lover)이 아니라 민족의 스승, 민족의 지사이기를 원하게 된 것이다. 수해의 폭력은 순식간에 형식의 사적 열정을 쓸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날 형식은 결국 기차 안 젊은 예술가들과 정치인들을 독려해 수해 복구를 위한 자선음악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에게 감화된 영채와 선형은 서로 화해하고 각자의 길을 축복한다. 작품을 관통하던 세 남녀의 각종 정념이 수해와 함께 모두 증발해 버린 것이다. 세 사람은 사랑도 미움도 없는 동지애를 느끼며 ‘조선인으로’ 하나가 되었다. 민족을 향해서는 달콤하게, 자신의 연인에게는 살벌하게! 근대적 문명인이라면 무엇보다도 조국과 민족의 운명부터 생각할지어다! 이것이 ‘무정’의 무정하고도 숭고한 결말이다. ●민족지사여 무정한 세상을 살라! 삼랑진 수해 앞에서 보이는 이형식의 돌연한 결단과 확신에 찬 행동은 지금 읽어도 강렬하다. 근대적 개인, 개성과 자율을 자랑하는 독아적(獨我的) 주체들이 사회를 장악한 시대에 이처럼 민족을 생각하는 헌신적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청년이라면 마땅히 대의를 위해, 역사를 위해 자신을 던질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대 백년을 관통한 ‘무정’의 메시지였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는다. 형식을 향한 사랑 대신에 민족애를 거머쥐게 된 선형은 행복할까? 자신을 배신한 형식이 조선을 위해 공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영채는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 정말로 형식은 여인에 대한 육체적 욕망을 다 버리고 계속 계몽운동만 할 수 있을까? 과연 이런 민족 지사들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을까? ‘무정’의 주인공들은 끝내 가난한 고향으로 귀환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자신들처럼 방황하게 될 자식도 낳지 않았다. ‘무정’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춘의 에너지, 그 모든 의욕을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흡수했다. 전통과 질서에 대한 줄기찬 의심, 미래를 향한 당돌함, 자신의 맨몸에만 기대는 패기! 이 모든 방황이 조선을 위할 때에만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뜨겁던 청춘은 실종되었다. 각양각색의 청년들은 사라지고, 민족지사만 남게 되었다. 무정한 세상을 무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끼리만 살게 된 것이다. 오선민 수유+너머 구로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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