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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선 지낸 김덕규 전 국회부의장 별세

    5선 지낸 김덕규 전 국회부의장 별세

    김덕규 전 국회부의장이 9일 오후 2시 44분쯤 숙환으로 별세했다. 79세. 전북 무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81년 11대 총선에서 민한당 전국구 의원(비례대표)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13대, 14대, 16대, 17대는 서울 중랑을에서 5선을 지냈다. 민주당 사무총장, 제15대 대통령직 인수위원, 민주당 대통령 후보 국민경선 집행위원장, 열린우리당 중앙당 선거관리위원장을 역임했다. 제17대 국회 전반기 국회부의장을 지냈고 행정경제위원장과 한·멕시코의원친선협회 회장 등도 맡았다. 유족은 부인 이정이씨와 2남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6호실에 마련됐다. 발인 일시는 11일 오전 9시다.
  • LIG그룹 계열분리 이끈 구자원 명예회장 별세

    LIG그룹 계열분리 이끈 구자원 명예회장 별세

    구자원 LIG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28일 오전 11시 15분쯤 숙환으로 별세했다. 86세. 고인은 고 구인회 LG 창업주의 동생이자 창업 동지인 고 구철회 전 LIG그룹 회장의 장남이다. 지난해 12월 별세한 고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사촌동생이기도 하다. 1935년 경남 진양군에서 태어났으며 고려대 법대와 독일 퀼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4년 락희화학에 입사해 첫발을 내디딘 뒤 럭키증권 사장, 럭키개발 사장, LG금속 부회장, LG정보통신 부회장을 거쳤다. 럭키개발 사장 시절에는 88올림픽 훼밀리타운 아파트와 LG트윈타워 건설을 이끌었다. LG그룹에서 계열분리한 이후에는 LIG손해보험(현 KB손해보험) 등 LIG그룹의 경영을 이끌어 왔다. 2012년에는 경영권 유지를 위해 분식회계와 함께 2000억원대의 사기성 기업어음(CP)을 발행한 혐의로 기소돼 결국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LIG손해보험 매각 후에는 방산 회사인 LIG넥스원의 명예회장직을 맡았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돼 가족장으로 조용하게 치러졌다. 발인은 31일 오전 7시, 장지는 경남 진주 선영이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구자원 LIG그룹 명예회장 숙환으로 별세

    구자원 LIG그룹 명예회장 숙환으로 별세

    구자원 LIG그룹 명예회장이 28일 오전 11시 15분쯤 숙환으로 별세했다. 86세. 고인은 고 구인회 LG 창업주의 첫째 동생이자 창업 동지인 고 구철회 전 LIG그룹 회장의 장남으로 지난해 12월 숨진 고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사촌동생이다. 1935년 경남 진양에서 태어났으며, 고려대 법대와 독일 쾰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4년 락희화학에 입사한 뒤 럭키증권 사장, 럭키개발 사장, LG정보통신 부회장을 거쳤다. 이후 계열 분리와 함께 금융업계에 뛰어들어 LIG그룹의 모태가 됐던 LIG손해보험(현 KB손해보험)을 이끄는 등 LIG그룹 경영을 이끌었다. LIG손해보험 매각 후에는 방산 회사인 LIG넥스원의 명예회장직을 맡았다. 고인은 언론 등에 많이 노출되지 않고 비교적 조용한 행보를 이어왔지만, 그룹 경영권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일기도 했다. 2012년 경영권 유지를 위해 분식회계와 함께 2000억원대의 사기성 기업어음(CP)을 발행한 혐의로 기소됐고 약 2년의 재판 과정을 거쳐 2014년 7월 24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확정 판결받았다. 유족으로는 구본상 LIG넥스원 회장과 구본엽 전 LIG건설 부사장, 구지연씨, 구지정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됐다. 발인 일시는 31일 오전이고 장지는 경남 진주 선영이다. LIG넥스원 관계자는 “장례는 가족장으로 조용하게 치른다”고 말했다. LIG 측은 또 “고인의 유지에 따라 조화와 부의금은 정중히 사양한다”며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문상을 위해 방문하는 경우에는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 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흙과 돌 틈, 자연 그대로의 삶이 오롯이… ‘토지’ 생명력처럼 강인하고 든든한 품

    흙과 돌 틈, 자연 그대로의 삶이 오롯이… ‘토지’ 생명력처럼 강인하고 든든한 품

    ‘작가의 땅’(작.땅)은 온 생을 다해 글을 쓴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주소다. ‘작.땅’은 치열한 창작의 공간이자 문장으로 대들보를 세운 장소들을 따라간다. 작가들이 글을 쓰는 뒷모습과 곡진한 삶의 희비를 엿보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책 바깥의 여행이다. 그곳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강원 원주 매지리에 있는 토지문화관은 내게 멧돼지 떼가 창궐하던 한여름 밤의 옥수수밭으로 남아 있다. 재작년 여름, 두 번째 소설집의 교정지와 가을호 계간지 마감이 겹쳐서 얼마간은 저돌적인 상태로 토지문화관 문인 창작실에 입소했다. 만두 찜기의 뚜껑을 연 것 같던 하오가 지나도 청쾌한 바람은 쉽게 산골에 스미지 않았다. 창작실에서 식당으로 가는 길목에 나 있던 산짐승 발자국이 멧돼지의 것이라는 사실은 먼저 입소해 소설을 연재하고 있던 전성태 소설가가 알려주었다. 그날 밤부터 나는 창작실의 베란다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벌레 소리들을 배경음악 삼아 원고 작업에만 매달렸다. 일상에서 오는 잡념들을 접어둔 채 오로지 창작에만 매달릴 수 있는 환경이 더할 나위 없었지만 작업은 진척이 없었다. 자정을 넘기고서야 겨우 숨이 좀 가라앉을 만한 바람이 내려왔다. 그리고 바람을 따라 산골의 멧돼지도 왔다.창밖의 기척이 심상찮아서 밖을 내다보던 중이었다. 하늘보다 더 어두운 옥수수밭 한가운데에 분명 어떤 움직임이 있었다. 만일 나에게 귀신을 보는 눈이 트였다면, 헛것에게라도 어떻게든 빌어 보고 싶던 시기였기에 내 눈은 어둠 속의 움직임에 집중돼 있었다. 그 밤 내내 일사불란하게 옥수숫대 사이를 누비는 소리를 들으며 간신히 새벽을 맞았다. 다음날 남들이 점심 먹을 때쯤 일어나 식당으로 가다 보니 옥수수밭 한가운데가 우주선이 앉았다 간 모양으로 둥그렇게 파헤쳐져 있었다. 식당에서는 어젯밤에 내려온 멧돼지들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옥수수와 고구마밭이 점점 더 크게 헤쳐진다는 사실도 덧붙여 들려왔다.덕분에 아침마다 밭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도 내 또 다른 일과가 됐다. 엄밀히 따지자면 산짐승의 공간을 우리가 침범한 셈이기도 했으니 잘못은 이쪽에 있었지만 말이다. 그곳에서 나는 원고가 풀리지 않을 때마다 박경리 선생이 손수 일구시던 밭과 장독대에 다녀왔다. 선생의 거처를 지키고 있는 거위 떼들이 꽉꽉 우는 곳이었다. 그 소리를 따라 창작실과 선생의 울 안까지 오가는 길이 내가 부릴 수 있는 최대치의 여유였다. 정갈한 장독대와 두둑하게 북이 오른 밭이랑을 볼 때마다 직접 농사를 지어 수확한 작물들로 하루에 한 끼는 꼭 직접 반찬을 만들어 후배 작가들의 식사를 챙겼다는 선생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그곳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산짐승의 울음도, 더위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우리가 후대에게 잠시 빌려 쓰는 것일 뿐”이라는 선생의 말씀에 따라 자연 친화적으로 지어진 문화관의 모습과 인위적인 것을 최대한 배제하며 살아가고자 했던 그분의 뜻이 곳곳에 배어 있는 자리였다. 생의 마지막까지 밭둑의 흙을 돋우며 생활하셨던 선생답게 남겨진 것들은 매우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선생이 손수 지은 옷들과 밀짚모자, 호미와 낫 같은 농기구들이 생전 그대로 놓여 있었다. 허울 좋은 건물의 이름 크게 쓴 문학관보다는 문인 창작실을 지어 후배 작가들의 작업을 응원했던 그 정신 그대로 오로지 작가들의 복지만을 추구하고 당신께서는 직접 흙과 돌 틈에서 최대한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사셨다. 그러는 동안에도 창작에 대한 열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를 때마다 이렇게 앉아 게으름을 피우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소리가 들리지는 않지만 게으른 후배에 대한 정갈한 꾸짖음, 그렇지만 응원과 격려를 한꺼번에 전해 받는 듯한 그 감각은 오로지 선생의 울타리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좋은 기회에 선생이 사용하던 모든 물건이 고스란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처에도 들어가 보았다. 방 한쪽에 은은한 분위기를 풍기던 장은 예전에 선생이 어느 글에서 썼던 그 나비장이었다. 6·25전쟁 당시에 피란을 가기 위해 이불에 싼 나비장을 마른 우물에 던져 넣고 떠났다가 천신만고 끝에 다시 돌아온 뒤에 건져냈다고 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애지중지하며 아꼈던 장과 필기구, 오래된 살림살이들, 태우시던 담배 보루까지도 여전한 그곳은 선생이 곧 문을 열고 들어올 것처럼 무척 현실적인 공간이기도 했다.작가 중에서 토지문화관을 모르거나 거쳐 가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로 이곳은 창작하는 사람들에게는 고요한 꿈의 공간, 선생의 창작열을 느낄 수 있는 산실이다. 누구도 선뜻 문인들의 복지를 이야기하지 않았던 시절에 사재를 기꺼이 헌사해 지은 이 공간을 선생은 무척 아끼고 사랑하셨다고 전해진다. 매지리 안쪽 산기슭에 자리했지만 제주도와 경상도, 전라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작가들이 몰려들었고 급기야 해외 작가들도 한 번쯤 다녀가고 싶은 공간으로 손꼽히는 장소가 됐다. 중견과 신진을 가리지 않고 고루 지원하는 문화관의 정책도 여전했다. 국내 지원을 넘어서 해외 레지던스까지도 교류를 넓힌 상태였다. 매년 봄이면 새로운 작가들이 입주해 60일 동안 혹은 길게는 90일 정도 이곳에 머물다 간다. 올해도 봄이 시작됐으니 창작실도 새 주인을 맞이했겠다.올해 토지문화관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박경리 선생의 딸 김영주 이사장이 숙환으로 별세한 후 그의 둘째 아들 김세희 관장이 취임했다. 선생의 유지를 이어 작가들의 창작을 지원하고 소설 ‘토지’의 삶과 생명 그리고 환경보호의 정신을 잇는 일이 손자 대로 넘어온 셈이었다. 토지의 생명력처럼이나 강인하고도 든든한 바통 터치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박경리 선생과 관련된 공간은 하동 악양면 평사리의 최 참판 댁 한옥문화관, 통영 박경리기념관 그리고 원주의 박경리 문학공원과 ‘토지’를 완성하고 선생이 말년을 보낸 공간인 이곳 흥업면 매지리 토지문화관까지 모두 네 군데다. 선생이 17년 동안 사신 원주시 단구동 자택이 택지지구가 되면서 그 자리가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많은 문인이 마음을 모았다. 여기에 택지지구 보상금과 토지개발공사 기부금을 합쳐 토지문화재단과 토지문화관이 들어섰다. 토지문화관 개관식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참석해 선생의 소설과 후배들을 지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기렸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흘렀지만 창작실에는 여전히 문인들의 입주 신청이 쇄도하고 매일 관람객들이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룬다. 김세희 관장은 위에 언급한 네 군데의 장소들을 보다 유기적이고도 조직적으로 연계해 ‘토지’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더불어 소설 ‘토지’의 콘텐츠들을 보다 현대적이고도 접근성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제반 사업들을 검토 중이라는 사실도 덧붙였다. 선생의 유훈과 창작 업적을 기리기 위해 숙고 끝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세계문학상인 ‘박경리 문학상’을 국내외 독자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작업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박경리 문학상 수상자들이 토지문화관에서 진행하는 강연 또한 국내에서 다시 듣기 어려운 기회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터였다. 최인훈, 베른하르트 슐링크, 응구기 와 티옹오, 이스마일 카다레 등이 이 상의 역대 수상자였으며 이들의 강연은 창작실에 입주한 작가들을 비롯해 전국에서 찾아든 독자들로 인해 매년 성황리에 개최됐다. 아울러 여러 문화 행사들과 관련된 장소 대관과 숙박을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을 대여하는 일도 동시에 이루어지는 바쁜 문화관이라는 관장의 말을 듣고 있자니 소설 ‘토지’의 북적이는 평사리 장터의 여러 장면들이 떠올랐다. 선생이 일구었던 환경과 삶 그리고 창작의 힘을 후대에도 변함없이 이어 가겠다는 새 관장의 목소리에 자못 힘이 실려 있었다. 끊임없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중에도 문화관 한켠에 위치한 창작실에서 여러 명의 작가가 각자의 작업에 몰두하는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문화의 산실이 아닌가.코로나19 탓에 여러 나라의 국경이 닫혔다. 새싹과 꽃이 피는 길을 따라 걷던 발걸음도 사라졌다. 그러나 곧 감염병은 잠잠해질 것이며(그러리라 믿고!) 우리는 다시 길 위에 두 발을 얹어둘 것이다. 봄꽃은 남도에서부터 피어 온다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봄꽃을 따라 통영에서 하동을 거쳐 원주에서 그 여정의 정점을 찍는 일명 ‘박경리 토지 로드’를 돌아보시기를 추천해 드린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시간에 문학과 대문호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 시간이 길 위의 사람들에게 보다 의미 있는 여정이 돼 주리라 확신한다. 토지문화관을 돌아보고, 선생의 자취를 밟으며 하룻밤 토지문화관에서 묵어가는 일정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꿈꿨던 작가의 삶을 조금은 엿볼 기회가 되지 않을까. 올봄의 여정은 ‘토지’의 길을 따라 문학적인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시기를, 그곳에 다녀가면 분명 이 ‘다음’을 살아갈 새로운 용기가 생겨 있을 것이니. 참, 나는 그해 여름에 멧돼지 옥수수 갉아먹는 소리를 들으며 작업했던 두 번째 소설집 ‘유빙의 숲’을 출간했고, 단편소설 마감 역시도 무사히 마쳤다. 선생의 응원이 분명 그곳에 실려 있다고 아직도 믿고 있다. 그 시간을 지켜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어디에 해야 할지 몰라 이곳에 적는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소설가 이은선
  • 아동문학가 신지식 작가 별세

    아동문학가 신지식 작가 별세

    고전 ‘빨강머리 앤’을 국내에 처음 소개했으며 소설집 ‘하얀 길’로 유명한 신지식 작가가 지난 12일 별세했다. 90세. 17일 문학계에 따르면 소설가 겸 아동문학가인 고인은 지난 12일 밤 숙환으로 소천, 14일 오후 경기 용인시 용인공원에 안장됐다. 유족들은 코로나19 확산 우려로 가족장으로 조용히 장례를 치른 뒤 뒤늦게 부고를 알렸다. 가족장은 고인 유지인 것으로 전해졌다. 1930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8년 이화여고 재학 시절 ‘전국여학생 문예콩쿠르’에서 단편 ‘하얀 길’이 당선돼 등단했다. 1956년에 나온 첫 소설집 ‘하얀 길’은 고인의 대표작이다. 꿈 많은 소녀 감성을 아름답고 섬세하게 표현해 당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소녀들이 사랑하는 고전 ‘빨강머리 앤’(루시 몽고메리)을 1963년 처음으로 번역해 국내에 소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유네스코문학상, 소천문학상, 대한민국아동문학상 대통령상, 화관문화훈장, 한국어린이도서상 등을 받았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권근술 前 한겨레신문사 사장 별세…언론 자유 위해 싸운 ‘동아투위’ 출신

    권근술 前 한겨레신문사 사장 별세…언론 자유 위해 싸운 ‘동아투위’ 출신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사 사장이 1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79세. 고인은 1941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남고,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67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1974년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반대하거나 비방하는 행위를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자 그해 10월 동아일보 기자들이 사옥에서 언론 자유를 위한 농성을 벌였다. 동아일보는 사람들을 동원해 이들을 무력으로 쫓아냈고, 1975년 3월 고인을 포함한 기자 100여명을 해직시켰다. 이들은 이후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해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고인은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해 편집위원장, 편집인, 논설주간 등을 거쳐 1995~1999년 두 차례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이후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석좌교수, ㈔남북어린이어깨동무 이사장을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보인(전 연세대 의대 교수)씨, 아들 유석(사람의마음 대표)씨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장지는 천안공원묘원. (02)3410-3151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유통거인’ 신격호(1921~2020)

    ‘유통거인’ 신격호(1921~2020)

    롯데그룹 창업주인 ‘유통 거인’ 신격호 명예회장이 19일 오후 4시 29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신 회장이 떠나면서 이병철 삼성 회장, 정주영 현대 회장, 구인회 LG 회장, 최종현 SK 회장 등이 국내 산업계를 이끌던 ‘창업 1세대 경영인’ 시대도 완전히 마감됐다. 주민등록상으로는 1922년생이지만 실제로는 1921년생으로 지난해 11월 3일 백수(白壽·99)를 맞은 신 회장은 전날 밤 병세가 급격히 나빠져 서울 아산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가 끝내 눈을 감았다. 1948년 일본 도쿄에서 맨손으로 껌 사업을 시작한 고인은 한국과 일본 양국에 걸쳐 식품·유통·관광·석유화학 분야 대기업을 일구며 롯데를 국내 재계 5위 그룹으로 키워 냈다. 말년은 수난의 연속이었다. 2015년 벌어진 장남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간의 경영권 분쟁으로 그룹 전체가 위기에 휩싸였다. 이 과정에서 정신건강 문제도 알려졌다. 제조업 중심이던 국내 산업계에 유통·서비스업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는 평가와 독단적인 경영방식, 불투명한 지배구조에 대한 비판이 엇갈린다. 장례는 그룹장으로 진행되며 이홍구 전 국무총리,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명예장례위원장으로 선임됐다. 장례위원장은 황각규 롯데지주 대표이사, 송용덕 롯데지주 대표이사가 맡는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유통거인’ 신격호 (1921~2020)

    ‘유통거인’ 신격호 (1921~2020)

    롯데그룹 창업주인 ‘유통 거인’ 신격호 명예회장이 19일 오후 4시 30분쯤 숙환으로 별세했다. 신 회장이 떠나면서 이병철 삼성 회장, 정주영 현대 회장, 구인회 LG 회장, 최종현 SK 회장 등이 이끌던 ‘창업 1세대 경영인’ 시대도 완전히 마감됐다. 주민등록상으로 1922년생이지만 실제로는 1921년생으로 지난해 11월 3일 백수(白壽·99)를 맞은 신 회장은 전날 밤 병세가 급격히 악화하며 아산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가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1948년 일본 도쿄에서 맨손으로 껌 사업을 시작한 고인은 한국과 일본 양국에 걸쳐 식품·유통·관광·석유화학 분야 대기업을 일구며 롯데를 국내 재계 5위로 키워 냈다. 1967년 국내에 롯데제과를 설립하면서는 회사의 역할이 수익을 내 국가에 도움이 된다는 ‘기업보국’(企業報國)을 기치로 내걸었다. 말년은 수난의 연속이었다. 2015년 벌어진 장남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간의 경영권 분쟁으로 그룹 전체가 위기에 휘말렸다. 이 과정에서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두 아들과 함께 경영비리 혐의로 2017년 12월 징역 4년 및 벌금 35억원을 선고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법정 구속을 면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시게미쓰 하쓰코씨와 장녀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신동주 전 부회장, 신동빈 회장, 사실혼 관계인 서미경씨와 딸 신유미씨 등이 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이름처럼…무대에서 공주 인생

    이름처럼…무대에서 공주 인생

    전체적인 어울림이나 통일을 의미하는 프랑스 단어 앙상블(ensemble)은 뮤지컬에선 주·조연 배우 주변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이름 없는’ 단역 배우들을 의미한다. 한두 명의 주연 배우가 무대 조명을 차지하고 관객들의 박수를 받을 때 수십 명의 앙상블도 언제나 저마다의 역할에 온 열정을 쏟아낸다. 지금은 대한민국 뮤지컬을 이끄는 한 축인 배우 윤공주(38)의 시작도 그랬다. 2001년 뮤지컬 ‘가스펠’ 오디션에 합격했지만, 그에게 주어진 극 중 이름은 없었다. 자신만을 위한 조명도 없었고 지켜보고 기억하는 관객도 없었다. 그럼에도 윤공주는 ‘이 무대의 주인공은 나’라는 자기 최면을 걸며 생애 첫 뮤지컬 무대를 즐겼다. ‘지킬 앤 하이드’로 올해를 시작해 연말을 ‘아이다’로 장식하고 있다. “어린 시절 이름과 달리 어렵게 살았고 돈도 없었지만 저는 돈 없음에서 오는 두려움은 없었어요. 부모님은 100만원을 버시면 50만원으로 저를 키우고 50만원은 저축하셨죠.”‘아이다’ 공연이 한창인 서울 블루스퀘어에서 만난 그는 이름 얘기를 꺼내더니 화제를 자연스럽게 부모님으로 옮겼다. 어릴 때는 이름 때문에 으레 놀림이 따라왔고, 그 자신도 인생을 이름처럼 소개한다. ‘이름 같지만은 않은 삶이었지만 이름처럼 키워 주신 부모님’이라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파트 경비 일과 건물 청소를 하며 고된 삶을 살면서도 저를 공주처럼 키우려 애쓰셨어요. 재래식 공동 화장실을 쓰는 단칸방에서 아등바등 살았지만 마음만은 부족하지 않았거든요.” 윤공주는 당당한 목소리로 유년기를 떠올렸다. 작품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난 자리였지만, 뮤지컬 주연 배우의 입에서는 ‘아버지’, ‘감사’, ‘행복’이라는 말이 반복됐다. 장성한 딸에게도 “내겐 공주 너 하나뿐”이라던 사랑 넘치던 아버지는, 지난 10월 27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뮤지컬 ‘아이다’ 개막을 앞두고 막바지 연습으로 연습실을 땀으로 적시고 있을 때였다. “올해 초부터 건강 악화로 통원치료를 받으셨던 터라 예상은 했지만 몇 년은 더 사셨으면 했다”는 윤공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가난 속에서도 ‘공주’로 키워 준 부모님의 헌신과 사랑은 윤공주의 지금을 만든 자양분이 됐다. 그는 “물론 어릴 땐 가난과 평범하지 않은 환경이 싫었지만 배우로 성장하는 데 다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한다”며 “나는 무대에 서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였다”고 말했다. 그의 절박함은 뮤지컬 제작자와 관객들의 눈과 마음에 닿았다. 앙상블과 각종 단역을 거쳐 2006년 뮤지컬 ‘드라큘라’에서 드라큘라를 사랑한 여인 로레인 역을 맡아 그해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신인상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하루’, ‘맨 오브 라만차’, ‘그리스’ 등에 출연, 같은 시상식 인기스타상을 받으며 스타 배우 반열에 올랐다. “배우로 성공해서 부모님께 좋은 집 사드리고 싶다”던 스무 살 때 꿈은 서른이 넘어 이뤘다. “서른한 살 되던 해 엄청 싼 아파트를 샀어요. 서울과 비교해선 말도 안 되게 싼 곳이었지만 세 식구 살기엔 풍족한, 따뜻한 집이죠.” 현재 세계 각지에서 마지막 시즌 공연이 열리고 있는 디즈니 뮤지컬 ‘아이다’와 만나기까지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2005년 한국 초연, 2010년 재연 때 앙상블 오디션을 봤으나 떨어졌다. 2012년 공연에는 암네리스 역으로 도전했으나 선택받지 못했다. 결국 2016년 네 번째 시즌 공연에 주역 ‘아이다’로 오디션을 보고 무대를 꿰찼다. “이번에도 연락이 없어 마음을 접고 있었는데 조금 늦게 연락이 왔죠. 너무나 기쁘고 고마웠어요. 관객분들도 이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작품이죠. 공연장을 찾으신다면 정말 소중한 선물 같은 시간이 될 거라고 자신합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리릭 테너의 최고봉 페터 슈라이어 ‘드레스덴 사랑꾼’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리릭 테너의 최고봉 페터 슈라이어 ‘드레스덴 사랑꾼’

    독일 리트(예술가곡)계의 맥을 잇는 테너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성악가 겸 지휘자 페터 슈라이어가 성탄절(이하 현지시간)에 세상을 떠난 사실이 하루 뒤 세상에 알려졌다. 향년 84. 20세기 최고의 리릭 테너로 손꼽히며 옛 동독 출신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몇 안되는 이 가운데 한 명인 고인은 늘 사랑했던 도시 드레스덴에서 당뇨병, 등과 엉덩이의 오랜 통증 등 오랜 숙환과 싸우다 눈을 감았다고 AFP 통신 등이 26일 전했다. 1935년 7월 29일 드레스덴 근처 가우나니츠라는 크지 않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교회 성가대를 지휘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적부터 재능을 드러내 여덟 살에 드레스덴의 명문 성 십자가 합창단에 들어가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공습으로 많이 파괴된 성당으로 수업을 받으러 다녔다. 지휘자 루돌프 마우어스베르거가 대번에 그의 목소리를 알아보고 독창을 맡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959년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단의 오디션을 통과했고 1967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무대에 서면서 세계적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는 무대에서 슈베르트와 슈만의 가곡을 부르며 최정상급 테너로 부상했다. 또, 바흐와 모차르트의 음악에 대해 높은 이해력을 보이면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베를린 국립 오페라단 단원이 되면 무조건 공산당에 가입해야 했는데 그는 그러지 않고도 당당히 활동했다. 1972년 뉴욕 필하모닉과 빈 필하모닉을 지휘했다. 바리톤 음역이 익숙한 가곡들을 테너 음역으로 선보이며 색다른 분위기와 개성을 선보였다. 특히 1990년대에는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와 함께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겨울 나그네’, ‘백조의 노래‘ 등 슈베르트 3대 가곡집으로 그라모폰상과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슈라이어는 65세이던 2000년 ‘마술피리’를 끝으로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했으나 70세까지 지휘자와 교육자로서 활동했다. 그는 “음악이 없는 하루는 그저 낭비된 하루일 뿐”이라고 DPA 통신에 털어놓았고 자주 “만약 드레스덴에서 살지 못한다면 늘 뭔가를 그리워하며 살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드레스덴을 사랑했다. 무대에서 60개 이상의 다양한 역할을 소화한 것으로도 이름 높다. 같은 해 한국에서 독창회를 갖기도 했던 그는 체코 프라하에서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트리오’를 지휘하며 직접 천사 역할을 맡아 노래도 들려준 뒤 공연 활동도 완전히 접었다. 그는 드레스덴 외곽의 별장에서 휴식을 즐기며 아내 레나테를 위해 요리를 하겠다고 독일 매체들에 털어놓았다. “충분히 노래 불렀고 이제는 몇년 더 평안한 세월을 즐기고만 싶다”고 말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색채 마술사’ 佛 패션 디자이너 웅가로 별세

    ‘색채 마술사’ 佛 패션 디자이너 웅가로 별세

    ‘색채의 마술사’로 불렸던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에마뉘엘 웅가로가 22일(현지시간)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86세. 남프랑스 엑상프로방스의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웅가로는 신사복 재봉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9살 때부터 의상 제작술을 배웠다. 그는 23살이던 1956년 파리로 상경해 거장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조수로 들어가면서 오트쿠튀르(고급맞춤복)의 세계에 본격 입성했다. 이후 그는 이브 생로랑과 함께 오트쿠튀르의 대안을 확립한 인물로 평가받게 됐다. 웅가로의 디자인은 기하학적이고 과감한 무늬의 활용과 여성의 신체 특성을 살린 관능적인 스타일로 국내에서도 유명하다. 그가 1965년 세운 웅가로 패션하우스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관능과 색감, 화려함의 거장으로서 그는 우리 기억 속에 남을 것”이라고 추모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패션 디자이너 에마뉘엘 웅가로 “옷 안에서 살게 해야”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패션 디자이너 에마뉘엘 웅가로 “옷 안에서 살게 해야”

    옛적 로마에서는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 행진을 할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게 했다.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 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메리카 인디언 나바호족에게도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넌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 전해진다. 죽음이 곧 삶이다. 의미있는 삶을 마치고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들의 자취를 좇는다.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디자이너 에마뉘엘 웅가로가 지난 21일(현지시간) 파리에서 숙환으로 여든여섯 삶을 마쳤다. 이탈리아 이민자 재단사의 아들로 남프랑스 엑상프로방스 태생인 웅가로는 부친의 영향으로 아홉 살부터 의상 제작을 익히기 시작해 스무살이 되기도 전에 맞춤복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터득했다. 가문의 영향으로 패션에 대한 꿈을 키워온 그는 20대 초반이던 1956년 파리로 상경, 스페인 출신의 유명 디자이너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조수로 들어가면서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복)의 세계에 입성했다. 발렌시아가는 그에게 “엄격함과 완벽함”을 가르쳤다고 홈페이지 ‘하우스 오브 에마뉘엘 웅가로’는 전하며서 “시즌을 거듭할수록 에마뉘엘 웅가로는 과감히 변신을 시도하며 뜻밖의 감각적인 충돌을 즐겼다”고 하우스했다. 웅가로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패션 스타일을 접목해 화려한 색채, 기하학적인 프린트, 과감한 무늬의 활용과 더불어 여성의 신체 특성을 살린 로맨틱하면서도 관능미 넘치는 선의 스타일로 독특한 패션세계를 구축했다. 웅가로는 1980년대에 특히 큰 성공을 거둬 재클린 케네디, 카트린 드뇌브, 마리엘렌 드 로스칠드 등의 명사들이 그의 옷을 즐겨 입었다. 2005년 은퇴하면서 자신의 브랜드를 미국 실리콘밸리의 기업인 아심 압둘라에게 처분한 그는 미국 여배우 린제이 로한이 이 브랜드의 예술감독으로 잠깐 고용되자 “재앙”이라고 표현하며 자신의 패션 하우스가 “혼을 잃는 과정”에 있다고 신랄하게 꼬집은 일로 눈길을 끌었다. AFP 통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누구도 옷을 입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살게 해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향수와 명품 등 여성의 패션을 창출하는 일을 말년에도 계속해왔다. 그는 결혼했으며 딸 하나를 뒀는데 그녀는 최근에 거의 대중의 눈 밖에 있었다. 한 가족 구성원은 AFP에 고인이 최근 2년 동안 건강 상태가 많이 약해져 있었다고 말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포토] 고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까까머리 청년’ 시절

    [포토] 고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까까머리 청년’ 시절

    LG그룹 2대 회장으로 1970년부터 1995년까지 25년간 그룹을 이끌었던 구자경 LG 명예회장이 14일 오전 10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1925년생인 구 명예회장은 LG 창업주인 고(故) 구인회 회장의 장남으로 45세 때인 1970년부터 LG그룹 2대 회장을 지냈다. 진주사범을 졸업한 고인은 부산 사범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50년 부친의 부름을 받아 그룹의 모회사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 이사로 취임하면서 그룹 경영에 참여했다. 1969년 구인회 창업회장의 별세에 따라 구 명예회장은 1970년 LG그룹 회장을 맡아 25년간 그룹 총수를 지냈다. 1987∼1989년 사이에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도 역임했다. 검정 뿔테안경에 경상도 사투리가 트레이드 마크인 구 명예회장은 안정과 내실을 중시하는 경영스타일로 유명했다. 고인이 이끌던 LG는 ‘보수적인 기업’의 대명사로 불렸고, 대기업의 부침이 심했던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도 특혜나 이권과 관련해 잡음을 일으킨 사례가 거의 없는 편으로 전해진다.1970년 회장으로 취임할 당시 그룹은 럭키와 금성사, 호남정유 등 8개사에 연간 매출이 270억원이었다. 취임 이후 한국경제의 고도성장기 때 범한해상화재보험과 국제증권, 부산투자금융, 한국중공업 군포공장, 한국광업제련 등을 인수했고 럭키석유화학(1978년), 금성반도체(1979년), 금성일렉트론(1989년) 등을 설립하는 등 외형을 불렸다. 구 명예회장은 70세이던 1995년 ‘21세기를 위해서는 젊고 도전적인 인재들이 그룹을 이끌어나가야 한다’며 장남 고(故) 구본무 회장에게 그룹을 넘겨줬다. 고인이 경영에서 물러날 당시 LG는 30여개 계열사에 매출액 38조원의 재계 3위 그룹으로 성장했다. 구 명예회장은 그룹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고자 연구개발을 통한 신기술 확보에 주력해 회장 재임 기간에 설립한 국내외 연구소만 70여개에 이른다. 해외 진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중국과 동남아시아, 동유럽, 미주 지역에 LG전자와 LG화학의 해외공장 건설을 추진해 그룹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구 명예회장은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의 권한을 이양하고 이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게 하는 ‘자율경영체제’를 그룹에 확립했다. 고인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교육 활동과 공익재단을 통한 사회공헌활동에 관여해 왔다.또한, 충남 천안에 있는 천안연암대학 인근 농장에 머물면서 된장과 청국장, 만두 등 전통음식의 맛을 재현하는 데 힘을 쏟았다. 구 명예회장은 슬하에 지난해 타계한 구본무 LG 회장과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구본준 LG 부회장, 구본식 희성그룹 부회장 등 6남매를 뒀다. 부인 하정임 여사는 2008년 1월 별세했다. LG 2대 경영인 구자경 명예회장의 빈소는 작년 구본무 회장 별세 때와 마찬가지로 간소하게 치러졌고 장례식 이틀째인 15일 정·재계 주요 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연합뉴스
  • 이낙연, 구자경 LG 명예회장 추모…“혼자 비빔밥 드시던 소박한 모습”

    이낙연, 구자경 LG 명예회장 추모…“혼자 비빔밥 드시던 소박한 모습”

    이낙연 국무총리가 14일 94세를 일기로 타계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을 추모했다. 이낙연 총리는 이날 자신의 트위터에 “LG 구자경 명예회장님의 명복을 빈다”면서 “회장님께서 1980년대 정부서울청사 뒤편 허름한 ‘진주집’에서 일행도, 수행원도 없이 혼자서 비빔밥을 드시던 소박한 모습을 몇 차례나 뵈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회장님의 그런 풍모가 국민의 사랑을 받는 기업을 키웠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덧붙였다. LG그룹은 “구자경 명예회장이 이날 오전 10시 숙환으로 별세했다”면서 “장례는 고인과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최대한 조용하고 차분하게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1925년생인 구 명예회장은 창업주 고 구인회 회장의 장남으로 LG그룹 2대 회장을 지냈다. 고인은 부산 사범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1950년부터 그룹의 모회사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 이사로 취임하면서 경영에 참여했다.1969년 구인회 창업회장이 별세한 후로는 1970년부터 1995년까지 25년간 LG그룹 총수를 지냈다. 구자경 회장 재직 당시 LG그룹이 본격적으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했다. 특히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의 권한을 이양하고 이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게 하는 ‘자율경영체제’를 도입했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교육 활동과 공익재단을 통한 사회공헌활동에 관여해왔다. 슬하에는 지난해 작고한 장남 구본무 LG 회장을 비롯해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구본준 LG 부회장, 구본식 희성그룹 부회장 등 6남매를 뒀다. 부인 하정임 여사는 2008년 1월 별세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25년간 LG그룹 이끈 구자경 명예회장 타계

    25년간 LG그룹 이끈 구자경 명예회장 타계

    25년간 LG그룹을 이끌었던 구자경 명예회장이 14일 94세 일기로 별세했다. LG그룹은 “구자경 명예회장이 이날 오전 10시 숙환으로 별세했다”면서 “장례는 고인과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최대한 조용하고 차분하게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어서 “유족들이 온전히 고인을 추모할 수 있도록 별도의 조문과 조화를 정중히 사양한다”면서 “빈소와 발인 등 구체적인 장례 일정도 외부에 알리지 않기로 했음을 양해 바란다”고 전했다. 1925년생인 구 명예회장은 창업주 고 구인회 회장의 장남으로 LG그룹 2대 회장을 지냈다. 고인은 부산 사범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1950년부터 그룹의 모회사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 이사로 취임하면서 경영에 참여했다. 1969년 구인회 창업회장이 별세한 후로는 1970년부터 1995년까지 25년간 LG그룹 총수를 지냈다. 구 명예회장은 LG그룹을 글로벌기업으로 도약시키기 위해 연구개발을 통한 신기술 확보에 주력해왔다. 재임 동안 국내외 설립한 연구소가 70여 개에 이른다. 또 중국과 동남아시아, 동유럽, 미주 지역에 LG전자와 LG화학 해외공장 건설을 추진하는 등 해외 진출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그는 특히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의 권한을 이양하고 이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게 하는 ‘자율경영체제’를 도입했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교육 활동과 공익재단을 통한 사회공헌활동에 관여해왔다. 슬하에는 지난해 타계한 장남 구본무 LG 회장을 비롯해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구본준 LG 부회장, 구본식 희성그룹 부회장 등 6남매를 뒀다. 부인 하정임 여사는 2008년 1월 별세했다. 곽혜진 기자 demian@seoul.co.kr
  • [포토] 김우중 전 회장 빈소 조문…잇따른 정·재계 행렬

    [포토] 김우중 전 회장 빈소 조문…잇따른 정·재계 행렬

    지난 9일 숙환으로 별세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빈소에 각계 인사들의 조문이 이틀째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10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빈소를 찾아 조문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뉴스1
  • [사설] ‘대우 신화’ 김우중 전 회장 별세, 기업들 공과 되새겨야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추앙받다 외환위기로 부도덕한 경영인으로 전락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그제 숙환으로 별세했다. ‘샐러리맨 신화’를 쓴 김 전 회장은 만 30세인 1967년 자본금 500만원, 직원 5명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해 1999년 자산 규모에서 현대에 이어 국내 2위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계열사 41개, 해외법인 396개에서 일하는 임직원만도 32만 4000여명에 달했다. 해체 직전인 1998년 대우의 수출액은 186억 달러로 당시 한국 총수출액(1323억 달러)의 14%를 차지했다. 저서의 제목인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유행어가 될 정도로 그의 활약은 젊은이들에게 큰 영감을 줬다. 하지만 차입경영에 의한 외형성장에 치중했던 ‘대우신화’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라는 외환위기를 맞아 허망하게 무너졌다. 김 전 회장은 1999년 10월 중국으로 출국했다가 한동안 종적을 감춘 뒤 2005년 6월 베트남에서 입국하자마자 구속됐다.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항소심에서 징역 8년 6개월, 추징금 17조 9253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이듬해 연말 특별사면을 받았다. 검찰은 지금까지 추징금 892억원을 거둬들였다. 김 전 회장과 대우그룹의 몰락은 무리하게 빚을 내 과잉투자를 하는 방만경영이 경제에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럼에도 김 전 회장의 세계경영 의지와 불굴의 도전정신을 어느 시대든 본받아야 한다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마지막 순간까지 청년들의 해외 진출을 독려하는 ‘GYBM’(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사업)에 강한 애착을 보인 것도 세계 진출에 대한 그의 신념을 잘 보여 준다. 대우그룹과 김 전 회장의 흥망은 저성장 속에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전범이다. 아울러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로서 ‘대마불사’는 존재할 수 없다고 웅변하고 있다.
  • “김우중, 존경받을 자격 있는 분”… 세계경영 기억하는 경제인들

    “김우중, 존경받을 자격 있는 분”… 세계경영 기억하는 경제인들

    동료·정재계·아주대 등 조문 행렬 줄이어 대우 로얄즈 데뷔했던 하석주 감독 문상 “해외 청년 사업가 양성 계속 이어갈 것” 대우家와 인연 이병헌도 2시간 머물러“대우그룹은 비록 해체됐지만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국민에게 존경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탱크주의’로 유명한 배순훈 전 대우전자 회장은 10일 고인의 별세를 애도하며 이렇게 말했다. 배 전 회장은 “김 전 회장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 많은 젊은이들이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은 것을 안타까워했다”면서 “당시 정부와 잘 타협했다면 대우그룹은 해체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드러냈다.이날 경기 수원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 전 회장의 빈소는 조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장례 첫날 조문객 수는 3000여명으로 집계됐다. 유가족들은 침통해하기보다 담담한 표정으로 조문객을 맞았다. 김 전 회장은 숙환으로 아주대병원에 11개월 입원하다 지난 9일 오후 11시 50분 8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지난 7일부터 김 전 회장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자 가족들은 마지막 준비를 했고, 김 전 회장은 부인과 자녀, 손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영면에 들었다. 고인은 본인의 뜻에 따라 연명치료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별다른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장례식은 고인이 평소에 밝혔던 대로 가족장으로 소박하게 치러졌다. 유족들은 조위금도 정중히 거절했다. 빈소 왼편 맨 안쪽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조화가 자리했다. 그 옆으로 문희상 국회의장, 이낙연 국무총리의 조화가 놓였다. 오른편에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박찬구 금호석유화학그룹 회장이 보낸 조화가 나란히 서서 김 전 회장을 추모했다. 전두환·이명박 전 대통령이 보낸 조화는 복도에 나란히 놓였다. LA 다저스 류현진 선수가 보낸 조화도 눈길을 끌었다. ‘1호 조문객’은 박형주 아주대 총장이었다. 이어 ‘대우맨’들이 속속 빈소를 찾았다. 김태구 전 대우자동차 회장, 장병주 전 ㈜대우 사장, 장영수·홍길부 전 대우건설 회장, 강병호·김석환 전 대우차 사장, 유기범 전 대우통신 사장, 추호석 전 대우중공업 사장, 신영균 전 대우조선공업 사장 등이었다. 김태구 전 회장은 “고인은 저희와 함께한 가족이자 큰 스승”이라면서 “엄격했지만 동시에 자상했고, 부하 직원들을 아주 끔찍이 사랑하셨다”고 전했다. 이어 “다음 세대가 잘살 수 있도록 우리가 희생하자는 것이 고인의 생각이었다”면서 “그 뜻을 이어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해외에서 활발하게 청년 사업가들을 양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신세계 이명희 회장과 정용진 부회장, 윤부근 삼성전자 부회장, 황각규 롯데지주 부회장, 김동관 한화큐셀 부사장,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 등이 직접 빈소를 찾았다. 조원태 회장은 “김 전 회장의 아들과 친구였고, 고인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정계에서는 주호영·조훈현 자유한국당 의원, 조원진 우리공화당 의원 등이 가장 먼저 빈소를 다녀갔다. 배우 이병헌은 빈소에 2시간가량 머무르며 유가족에게 위로를 건넸다. 이병헌은 24세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단명한 김 전 회장의 아들과 닮았다는 이유로 대우가(家)와 인연을 맺은 뒤 대우통신 컴퓨터, 대우차 티코 등의 광고 모델로 활약했다. 하석주 아주대 축구팀 감독은 선수단을 이끌고 단체로 조문했다. 하 감독은 대한축구협회장을 지낸 김 전 회장이 창단한 대우 로얄즈 축구단을 통해 프로리그에 데뷔하며 인연을 쌓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한국경영자총협회도 이날 논평 등을 통해 김 전 회장을 ‘한국 경제발전의 주역’이라 높게 평가하며 깊은 애도를 표했다. 이영준 기자 the@seoul.co.kr
  • ‘세계경영’ 대우 신화 일군 김우중 전 회장 별세... “한국 청년들, 넓은 세계 누비길”

    ‘세계경영’ 대우 신화 일군 김우중 전 회장 별세... “한국 청년들, 넓은 세계 누비길”

    1980~90년대 고도 성장의 상징이었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타계한 가운데 10일 경기 수원 아주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김 전 회장의 영정사진이 마련됐다. 이날 경기 수원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 전 회장의 빈소에는 재계·정치권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찾아와 김 전 회장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유가족들은 침통해하기보다 담담한 표정으로 조문객을 맞았다. 김 전 회장은 숙환으로 아주대병원에 11개월 입원하다 지난 9일 오후 11시 50분 8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지난 7일부터 김 전 회장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자 가족들은 마지막 준비를 했고, 김 전 회장은 부인과 자녀, 손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영면에 들었다. 고인은 본인의 뜻에 따라 연명치료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별다른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장례식은 고인이 평소에 밝혔던 대로 가족장으로 소박하게 치러졌다. 유족들은 조의금도 정중하게 거절했다.재계에서는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신세계 이명희 회장과 정용진 부회장, 윤부근 삼성전자 부회장, 황각규 롯데지주 부회장, 김동관 한화큐셀 부사장 등이 직접 빈소를 찾았다. 조원태 회장은 “김 전 회장의 아들과 친구였고, 고인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정계에서는 주호영·조훈현 자유한국당 의원, 조원진 우리공화당 의원 등이 가장 먼저 빈소를 찾았다. 강용석 전 의원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밖에 이문열 작가,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원희룡 제주지사 등이 빈소를 다녀갔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국내 기업의 글로벌 경영의 효시이자 한국 경제발전 성공의 주역이신 김 전 회장께서 별세하신 데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한다”며 고인을 기렸고 한국경영자총협회도 “김 전 회장은 우리나라가 자동차·조선·중공업 분야에서 내실을 다지고 세계적인 수출국 대열에 합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글 영상 박홍규, 문성호 기자 gophk@seoul.co.kr
  • 김우중 회장은 갔지만...아직도 살아있는 대우정신

    김우중 회장은 갔지만...아직도 살아있는 대우정신

    대우그룹 계열사 타그룹에서 명맥 유지해서정진 셀트리온 회장 등 현직에서 활약홍영표 의원 등 정치권 진출도 활발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추앙받다 외환위기 직후 부도덕한 경영인으로 내몰리기까지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9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세계를 호령했던 대우그룹의 신화는 이제 잊혀져 가는 건가. 해체 직전인 1998년 대우그룹은 32만 4000여명의 국내외 임직원, 396개의 해외 법인, 41개의 계열사를 거느렸다.창립 30여년 동안 78조원의 자산을 쌓아 올린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는 영원한 추억으로 회자될 운명에 처했다. 하지만 그룹의 간판을 내렸지만 대우와 대우정신은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뿔뿔이 흩어진 옛 대우 계열사 가운데는 매각 이후에도 여전히 대우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기업들이 적지 않다. 글로벌 시장에서 대우라는 브랜드가 가진 막강한 경쟁력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당시 대우그룹이 경쟁력이 있었다는 평가와 함께 그룹 해체가 성급했던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1998년 41개에 달하던 대우 계열사는 자체 구조조정을 통해 10개의 주력계열사로 재편을 시도하지만 실패, 같은 해 8월 워크아웃 과정을 밟았다. 이때는 대우자동차와 ㈜대우, 대우중공업, 대우전자 등 사실상 대우의 주력계열사라고 할 수 있는 12개 회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됐다. 현재 사명에 ‘대우’가 들어간 회사는 대우건설, 위니아대우(옛 대우전자), 대우조선해양(옛 대우중공업 조선해양부문), 미래에셋대우(옛 대우증권) 등이 있다. 이중 대우조선해양은 현대중공업이 인수를 추진하고 있어 인수 후 ‘대우’라는 이름이 빠질 가능성이 크다.대우전자는 2006년 파산 후 워크아웃과 매각을 거쳐 대우일렉트로닉스, 동부대우전자로 이름을 바꾸면서도 ‘대우’는 유지했다. 그러다 지난해 대유위니아그룹이 대우전자를 인수하면서 현 사명인 ‘위니아대우’를 쓰고 있다. 한때 산업은행 계열로 넘어간 KDB대우증권도 2016년 미래에셋에 인수돼 미래에셋대우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우그룹 해체 20년을 맞은 올해 4월 대우실업이 모태인 포스코대우가 포스코인터내셔널로 사명을 변경했다. 포스코그룹이 2010년 대우인터내셔널을 인수하며 수년간 ‘대우’라는 이름을 썼으나 포스코그룹사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지웠다. 대우엔지니어링도 2002년 포스코엔지니어링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대우자동차는 2002년 미국 GM이 인수한 뒤 ‘GM대우’로 새 출발했다. 그러나 GM이 2011년 대우를 빼고 ‘한국GM’으로 사명을 바꿨다. 대우자동차 쌍용차 부문은 인도계 타타, 쌍용차는 상하이차를 거쳐 2010년 인도 마힌드라로 넘어갔다. 대우종합기계는 2005년 두산그룹으로 들어가면서 두산인프라코어로 다시 태어났다. 대우캐피탈은 2005년 아주캐피탈로, 대우시네마네트워크는 온미디어를 거쳐 2011년 CJ ENM에 매각됐다. 대우중공업의 항공사업 부문은 삼성항공산업과 현대우주항공 등 3사가 모여 만든 한국항공우주산업(KAI)으로 통합됐다. 그룹이 해체된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재계 현직에서 활약중인 대우맨들이 많다. 셀트리온 서정진 회장, 한화그룹 김현중 부회장, 바이오리더스 박영철 회장, 아주그룹 이태용 부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서정진 회장은 대우그룹 컨설팅으로 김 전 회장을 만났다가 당시 34세에 대우그룹 임원으로 영입됐다.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하면서 실직한 이후 대우 동료들과 셀트리온 전신인 넥솔바이오텍을 설립해 시가총액 20조원이 넘는 ‘바이오 신화’를 일궈 김 전 회장의 경영 스타일을 닮았다는 평가를 받았다.대우세계경영연구회를 중심으로 김 전 회장 주변인들은 고인의 뜻을 받들어 해외 청년 사업가 양성에 주력할 계획이다. 대우세계경영회는 현재 회원 4700여명, 해외 지회 37개소 규모다. 대우세계경영연구회와는 별도로 대우 출신 임직원들의 정치권 진출도 활발하다. 대우그룹 노동조합협의회 사무처장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의원을 비롯해 대우경제연구소장을 지낸 이한구 전 의원, 대우경제연구소 패널·금융팀장을 지낸 강석훈 전 의원, 정희수 전 의원,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대우맨이다.  이종락 논설위원 jr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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