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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3)대원위대감의 생각 (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3)대원위대감의 생각 (下)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옥양봉 절골에 있던 가야사 터에다 아버지의 무덤을 옮겨쓴 지 12년 만에 둘째아들 명복을 낳은 것이 풍수설의 힘이라는 증거는 없다.또한 명복이 태어난 지 12년 뒤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것도 풍수설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라는 증거도 없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대원위대감의 그 해괴한 행동이 명복을 왕이 되게 했다고 여겼다.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민중들은 오래된 전통과 관습을 따르게 마련인가보다.풍수지리설은 조선 민중들에게 부정할 수 없는, 이상향을 향한 꿈이었다. ●백성들, 부친묘 옮겨서 덕본 것이라 믿어 이하응이란 파락호(破落戶),궁도령(宮道令)의 둘째 자식이 왕위에 오르고,아비는 대원위대감이 되는 좀체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을 두고 민중들은 마치 자신들의 옹색한 신세가 훤히 펴지기라도 한 듯이 좋아했다.대리만족의 한 극치였다. 대원위대감은 세상의 그런 민심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집권 초기부터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민중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당색과 문벌을 초월한 인재 등용,탐관오리의 숙청,양반 토호의 면세토지 조사와 세금의 징수,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것,복식의 간소화 등 후기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폐단들을 혁명적으로 개혁해 나갔다. 집권 초반의 개혁 정치가 성과를 거두자 이를 발판으로 삼아 쇠미해진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정책을 폈다.경복궁 중건을 강행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경복궁 짓는 일로 대원위대감은 그동안 쌓아온 정치적 성과와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고,사회 모든 부문에서 지탄받기에 이르렀지만 한 번 권력의 맛을 본 그는 난세의 정략가답게 저돌적으로 일을 밀어붙였다. 그의 저돌성에 희생된 대표적인 경우가 속리산 법주사에 모셔져 있던 청동 미륵장륙상을 헐어다 녹여서 건축자재로 사용하게 한 것이었다. 그의 정치 역정에는 대외적 위협과 난관도 만만치 않았다.천주교와 관련된 외세들과의 갈등이었다. ●정권유지 위해 천주교 탄압으로 급선회 집권 초기 그는 천주교에 대해 나름의 이해를 보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그랬던 그가 장기간에 걸쳐 천주교 박해를 감행한 것은 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국가적 위기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의 비난에서 벗어나 정권을 계속 장악하기 위한 목적이 감춰져 있었다. 대외적인 첫 위협은 러시아였다.두만강이 러시아와의 국경으로 바뀌게 되자 러시아의 통상요구는 대원위대감을 비롯,정부고관들에게 위기의식으로 다가왔다. 이때 천주교인이자 정부 관리인 김면호(金勉浩),홍봉주(洪鳳周) 등이 오랑캐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물리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고 대원군은 이를 정치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분위기는 승지를 지낸 남종삼(南鍾三)이 대원군으로 하여금 한불조약(韓佛條約)을 체결하여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는 정책을 펴도록 건의하기까지 이르렀다.숨막히는 긴장의 나날이었다. 이같은 정책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조선에 체류중이던 베르뇌(Berneux) 주교와의 만남을 주선하게 되었고,그때 대원군은 만약 러시아를 물리칠 수만 있다면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어 천주교인들은 자못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1866년 1월에 북경사신이 보내온 편지가 도착했다.청나라는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이 분위기에 편승한 국내의 반 대원군 세력들은 대원군이 천주교와 불순한 정치적 흥정을 한다며 공세를 취했고 대원군은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껴 천주교 탄압 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된 것이다. 1866년 2월 베르뇌를 비롯해 홍봉주,남종삼,김면호를 포함한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이 서울과 그밖의 여러 지역에서 체포되어 순교했는데,이때 베르뇌,다블뤼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들은 서울 새남터와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로 불리는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 프랑스 군대와 대원위대감의 지휘를 받은 조선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대원위대감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천주교인들을 외국의 적들을 불러들이는 무리로 규정하여 거듭되는 박해로 맞섰다. 서양오랑캐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내통하는 천주교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처형지는 주로 서울과 해안지방으로 정해졌다.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이 계속되자 프랑스는 대원위대감을 기필코 굴복시켜 그들이 겪은 수모를 되갚아주겠다며 방법을 모색했다. 그때 프랑스 신부 페롱(Feron)이 묘안을 내놓았다.그는 1866년 8월 프랑스 제독 로즈가 조선을 공격할 때 뱃길을 안내했던 인물이다.또한 그는 조선의 사정에도 밝아서 대원위대감을 꺾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그는 독일의 무역상인인 오페르트(Oppert,E.J)라는 인물을 끌어들일 궁리를 했다.오페르트는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서 모두 실패한 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페롱은 오페르트를 책임자로 하여 대원군과 정치적 교섭을 벌이면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묘책을 마련했다. 이 묘책을 강구하는 데는 조선인 천주교인도 가담했다.묘책이란 다름 아닌 대원위대감의 아버지 남연군이 묻혀 있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사 옛터의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이었다. 묘를 파헤쳐 시체와 부장품을 미끼로 내걸고 대원군과 통상문제,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흥정하자는 것이었다.조선은 조상의 무덤에 대하여 특별한 관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역이용하자는 극단적인 방법을 내세웠다. 오페르트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그는 자금을 담당할 인물로 미국인 젠킨스를 끌어들였다.통상교섭이 성공하면 이익을 배당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도굴단이 결정되었다.오페르트,젠킨스,페롱,선장 묄레,조선인 안내자 2명,유럽·필리핀·중국인 선원 등 모두 140명으로 이루어졌다.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에 실패 1868년 5월 차이나(China)호,그레타(Greta)호 등 1000t급 기선 두 척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무기와 도굴용 장비를 구입한 다음,5월10일 충남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했다. 도굴단은 자신들을 러시아인이라고 말하면서 조선인의 안내를 받아 남연군 묘소로 직행했다.덕산 군청을 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는가 하면 민가들을 습격하면서 고의적인 난동을 부렸다. 절골의 남연군묘까지 온 그들은 도굴을 시작했으나 묘광이 워낙 견고하여 그들이 준비해온 도구로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대원위대감은 마치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측이나 했던 듯 성능이 매우 좋은 폭약을 사용하지 않는 한 묘를 파헤치기 어렵도록 만들어 둔 것이었다. 결국 남연군묘 도굴은 실패했다.오페르트는 돌아가는 길에 인천 앞 영종도에서 프랑스 제독 알리망 명의로 된 협박장을 대원위대감에게 보냈다.남연군의 시체와 부장품이 그들 손아귀에 있으니 교섭에 응하라는 내용이었다.그러나 이 협박문을 접수한 영종첨사는 도굴행위가 인간의 짓이 아니므로 대응할 가치가 없다며 협박문을 되돌려주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젠킨스는 같은 미국인에 의하여 파렴치범으로 고발당하였고,페롱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소환당하였다. ●대원군의 박해로 8000명 이상 순교 대원위대감의 분노는 컸다.조선은 조상숭배 사상이 유별하여 묘를 신성시하는 데다,국왕의 할아버지며 자신의 아버지 묘를 파헤쳤으니 그의 생각은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대원위대감은 덕산군 내포지방 천주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했다. 내포지방은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가 전파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부근의 지방까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렇듯 대원군에 의하여 감행된,이른바 병인박해는 6년에 걸쳐 8000명 이상이 순교하는 불행을 낳았다. 한 정치가의 무모한 권력욕구가 불러온 결과는 조선의 세계사 합류를 지연시켜 근대화의 길을 막음으로써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극을 초래했고,나쁜 지도자로서의 선례가 되었다. 그같은 대원위대감은 1871년 무슨 생각에선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서원산 남쪽 기슭에 자신이 불태웠던 가야사의 3층석탑을 옮기면서 보덕사(報德寺)라는 절을 지었다.아들이 보위에 올랐으므로 보은(報恩)의 뜻으로 절을 지은 대원위대감의 생각은 오늘날 한국 정치지도자들처럼 혼란스럽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3)대원위대감의 생각 (下)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옥양봉 절골에 있던 가야사 터에다 아버지의 무덤을 옮겨쓴 지 12년 만에 둘째아들 명복을 낳은 것이 풍수설의 힘이라는 증거는 없다.또한 명복이 태어난 지 12년 뒤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것도 풍수설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라는 증거도 없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대원위대감의 그 해괴한 행동이 명복을 왕이 되게 했다고 여겼다.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민중들은 오래된 전통과 관습을 따르게 마련인가보다.풍수지리설은 조선 민중들에게 부정할 수 없는, 이상향을 향한 꿈이었다. ●백성들, 부친묘 옮겨서 덕본 것이라 믿어 이하응이란 파락호(破落戶),궁도령(宮道令)의 둘째 자식이 왕위에 오르고,아비는 대원위대감이 되는 좀체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을 두고 민중들은 마치 자신들의 옹색한 신세가 훤히 펴지기라도 한 듯이 좋아했다.대리만족의 한 극치였다. 대원위대감은 세상의 그런 민심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집권 초기부터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민중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당색과 문벌을 초월한 인재 등용,탐관오리의 숙청,양반 토호의 면세토지 조사와 세금의 징수,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것,복식의 간소화 등 후기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여러 폐단들을 혁명적으로 개혁해 나갔다. 집권 초반의 개혁 정치가 성과를 거두자 이를 발판으로 삼아 쇠미해진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정책을 폈다.경복궁 중건을 강행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경복궁 짓는 일로 대원위대감은 그동안 쌓아온 정치적 성과와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고,사회 모든 부문에서 지탄받기에 이르렀지만 한 번 권력의 맛을 본 그는 난세의 정략가답게 저돌적으로 일을 밀어붙였다. 그의 저돌성에 희생된 대표적인 경우가 속리산 법주사에 모셔져 있던 청동 미륵장륙상을 헐어다 녹여서 건축자재로 사용하게 한 것이었다. 그의 정치 역정에는 대외적 위협과 난관도 만만치 않았다.천주교와 관련된 외세들과의 갈등이었다. ●정권유지 위해 천주교 탄압으로 급선회 집권 초기 그는 천주교에 대해 나름의 이해를 보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그랬던 그가 장기간에 걸쳐 천주교 박해를 감행한 것은 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국가적 위기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의 비난에서 벗어나 정권을 계속 장악하기 위한 목적이 감춰져 있었다. 대외적인 첫 위협은 러시아였다.두만강이 러시아와의 국경으로 바뀌게 되자 러시아의 통상요구는 대원위대감을 비롯,정부고관들에게 위기의식으로 다가왔다. 이때 천주교인이자 정부 관리인 김면호(金勉浩),홍봉주(洪鳳周) 등이 오랑캐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물리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어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고 대원군은 이를 정치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분위기는 승지를 지낸 남종삼(南鍾三)이 대원군으로 하여금 한불조약(韓佛條約)을 체결하여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는 정책을 펴도록 건의하기까지 이르렀다.숨막히는 긴장의 나날이었다. 이같은 정책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조선에 체류중이던 베르뇌(Berneux) 주교와의 만남을 주선하게 되었고,그때 대원군은 만약 러시아를 물리칠 수만 있다면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어 천주교인들은 자못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1866년 1월에 북경사신이 보내온 편지가 도착했다.청나라는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이 분위기에 편승한 국내의 반 대원군 세력들은 대원군이 천주교와 불순한 정치적 흥정을 한다며 공세를 취했고 대원군은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껴 천주교 탄압 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된 것이다. 1866년 2월 베르뇌를 비롯해 홍봉주,남종삼,김면호를 포함한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이 서울과 그밖의 여러 지역에서 체포되어 순교했는데,이때 베르뇌,다블뤼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들은 서울 새남터와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로 불리는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 프랑스 군대와 대원위대감의 지휘를 받은 조선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대원위대감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천주교인들을 외국의 적들을 불러들이는 무리로 규정하여 거듭되는 박해로 맞섰다. 서양오랑캐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내통하는 천주교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처형지는 주로 서울과 해안지방으로 정해졌다.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이 계속되자 프랑스는 대원위대감을 기필코 굴복시켜 그들이 겪은 수모를 되갚아주겠다며 방법을 모색했다. 그때 프랑스 신부 페롱(Feron)이 묘안을 내놓았다.그는 1866년 8월 프랑스 제독 로즈가 조선을 공격할 때 뱃길을 안내했던 인물이다.또한 그는 조선의 사정에도 밝아서 대원위대감을 꺾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그는 독일의 무역상인인 오페르트(Oppert,E.J)라는 인물을 끌어들일 궁리를 했다.오페르트는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서 모두 실패한 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페롱은 오페르트를 책임자로 하여 대원군과 정치적 교섭을 벌이면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묘책을 마련했다. 이 묘책을 강구하는 데는 조선인 천주교인도 가담했다.묘책이란 다름 아닌 대원위대감의 아버지 남연군이 묻혀 있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사 옛터의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이었다. 묘를 파헤쳐 시체와 부장품을 미끼로 내걸고 대원군과 통상문제,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흥정하자는 것이었다.조선은 조상의 무덤에 대하여 특별한 관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역이용하자는 극단적인 방법을 내세웠다. 오페르트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그는 자금을 담당할 인물로 미국인 젠킨스를 끌어들였다.통상교섭이 성공하면 이익을 배당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도굴단이 결정되었다.오페르트,젠킨스,페롱,선장 묄레,조선인 안내자 2명,유럽·필리핀·중국인 선원 등 모두 140명으로 이루어졌다.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에 실패 1868년 5월 차이나(China)호,그레타(Greta)호 등 1000t급 기선 두 척을 이끌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무기와 도굴용 장비를 구입한 다음,5월10일 충남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했다. 도굴단은 자신들을 러시아인이라고 말하면서 조선인의 안내를 받아 남연군 묘소로 직행했다.덕산 군청을 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는가 하면 민가들을 습격하면서 고의적인 난동을 부렸다. 절골의 남연군묘까지 온 그들은 도굴을 시작했으나 묘광이 워낙 견고하여 그들이 준비해온 도구로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대원위대감은 마치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측이나 했던 듯 성능이 매우 좋은 폭약을 사용하지 않는 한 묘를 파헤치기 어렵도록 만들어 둔 것이었다. 결국 남연군묘 도굴은 실패했다.오페르트는 돌아가는 길에 인천 앞 영종도에서 프랑스 제독 알리망 명의로 된 협박장을 대원위대감에게 보냈다.남연군의 시체와 부장품이 그들 손아귀에 있으니 교섭에 응하라는 내용이었다.그러나 이 협박문을 접수한 영종첨사는 도굴행위가 인간의 짓이 아니므로 대응할 가치가 없다며 협박문을 되돌려주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젠킨스는 같은 미국인에 의하여 파렴치범으로 고발당하였고,페롱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소환당하였다. ●대원군의 박해로 8000명 이상 순교 대원위대감의 분노는 컸다.조선은 조상숭배 사상이 유별하여 묘를 신성시하는 데다,국왕의 할아버지며 자신의 아버지 묘를 파헤쳤으니 그의 생각은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대원위대감은 덕산군 내포지방 천주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했다. 내포지방은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가 전파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부근의 지방까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렇듯 대원군에 의하여 감행된,이른바 병인박해는 6년에 걸쳐 8000명 이상이 순교하는 불행을 낳았다. 한 정치가의 무모한 권력욕구가 불러온 결과는 조선의 세계사 합류를 지연시켜 근대화의 길을 막음으로써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비극을 초래했고,나쁜 지도자로서의 선례가 되었다. 그같은 대원위대감은 1871년 무슨 생각에선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서원산 남쪽 기슭에 자신이 불태웠던 가야사의 3층석탑을 옮기면서 보덕사(報德寺)라는 절을 지었다.아들이 보위에 올랐으므로 보은(報恩)의 뜻으로 절을 지은 대원위대감의 생각은 오늘날 한국 정치지도자들처럼 혼란스럽다.˝
  • 儒林(50)-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1519년 11월 16일. 조선 역사상 가장 길고 길었던 한밤의 숙청극은 중종이 조광조에게 참형의 교지를 확정하여 내림으로써 마침내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이 비극적인 숙청이 일어났던 해는 기묘년.따라서 후세 사람들은 이 사건을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부르고 있다.결과적으로 정치적인 개혁의 희생양으로 죽음을 당하게 되는 조광조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공초를 올려 자신의 죄상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 공초란 죄인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사실에 대해 진술하고 이에 서명하는 일인데,술에서 깨어난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최후진술을 하고 있다. “신의 나이가 38세에 이르기까지 선비로서 이 세상에 살면서 믿은 것은 오직 군심(君心)뿐입니다.국가의 병폐가 모두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이원(利源)에 있다고 망령되이 생각하여 국맥을 영구히 새롭게 하고자 했을 뿐 전혀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자신의 입장을 담담하게 진술한 조광조뿐 아니라 8명의 죄인들도 공동으로 작성하여 중종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리고 있다. “신들은 모두 뜻만 높고 어리석은 자들로서 어진 상감을 만나 경연에 드나들면서 성덕을 가까이하고 상감의 밝은 경광(耿光)만을 믿으며 미충(微衷)을 다하였습니다.간혹 많은 사람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켰으나 오직 상감만을 믿고 다른 것을 헤아리지 않은 채 우리 임금님이 요순과 같이 되시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그러니 어찌 사심(邪心)이 있었겠습니까.하늘이 내려다보는데 정말로 다른 사사로운 마음은 없었습니다.신들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하더라도 선비들의 참화가 한번 발생하면 장차 나라의 명맥이 염려되지 않겠습니까.천문(天門:대궐문을 가리킴)은 멀어 한번 직접 뵈옵고 말씀드릴 수 있다면 백번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뜻은 넘치고 마음은 간절하지만 말이 차올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비장한 상소문은 중종에 의해 무시된다.‘한번 직접 뵈옵고 말씀드릴 수만 있으면 백번 죽어도 한이 없을 것이다.’라고 진술함으로써 마지막으로 왕과의 면담을 간청하고 있는 8인의 진술은 그러나 중종에 의해서 철저하게 기각되는 것이다. 다만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하여 김정 김식 김구에게는 참형,나머지 4인에게는 귀양보내게 했던 처음의 형량을 변경하여 조광조 등 4인에게는 장 100대에 벽지에 안치시킬 것과 나머지 4인은 벽지에 부처(付處)시킬 것을 명령하였던 것이었다.그나마 조광조가 참형에서 장형으로 감형되었던 것은 정광필을 비롯하여 안당과 같은 의정부 대신들이 눈물로 읍소하였기 때문이었다.특히 정광필은 조광조가 병약한 몸이라 장 100대도 과중하여 장형을 감하여줄 것을 탄원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날 아침 8인의 죄수들은 의금부 앞뜰에 모여서 중종이 내린 최후의 전지를 듣게 된다.중종의 전지를 대신 읽은 사람은 판중추부사였던 김정이었다.조광조를 비롯한 8인의 죄인들은 부복하고 군신으로서의 예의를 갖춰 왕이 있는 곳을 향해 큰절을 올린 후 모두 무릎을 꿇고 중종의 교지를 듣는다.기록에 의하면 중종의 전지는 다음과 같다. “…너희들은 모두 나를 시종하던 신하들로서 경연에 출입하면서 상하가 한마음으로 옳은 정치를 하려 하였으므로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은 아니었다.…”˝
  • 儒林(50)-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儒林(50)-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1519년 11월 16일. 조선 역사상 가장 길고 길었던 한밤의 숙청극은 중종이 조광조에게 참형의 교지를 확정하여 내림으로써 마침내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이 비극적인 숙청이 일어났던 해는 기묘년.따라서 후세 사람들은 이 사건을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부르고 있다.결과적으로 정치적인 개혁의 희생양으로 죽음을 당하게 되는 조광조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공초를 올려 자신의 죄상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 공초란 죄인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사실에 대해 진술하고 이에 서명하는 일인데,술에서 깨어난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최후진술을 하고 있다. “신의 나이가 38세에 이르기까지 선비로서 이 세상에 살면서 믿은 것은 오직 군심(君心)뿐입니다.국가의 병폐가 모두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이원(利源)에 있다고 망령되이 생각하여 국맥을 영구히 새롭게 하고자 했을 뿐 전혀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자신의 입장을 담담하게 진술한 조광조뿐 아니라 8명의 죄인들도 공동으로 작성하여 중종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문을 올리고 있다. “신들은 모두 뜻만 높고 어리석은 자들로서 어진 상감을 만나 경연에 드나들면서 성덕을 가까이하고 상감의 밝은 경광(耿光)만을 믿으며 미충(微衷)을 다하였습니다.간혹 많은 사람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켰으나 오직 상감만을 믿고 다른 것을 헤아리지 않은 채 우리 임금님이 요순과 같이 되시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그러니 어찌 사심(邪心)이 있었겠습니까.하늘이 내려다보는데 정말로 다른 사사로운 마음은 없었습니다.신들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하더라도 선비들의 참화가 한번 발생하면 장차 나라의 명맥이 염려되지 않겠습니까.천문(天門:대궐문을 가리킴)은 멀어 한번 직접 뵈옵고 말씀드릴 수 있다면 백번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뜻은 넘치고 마음은 간절하지만 말이 차올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비장한 상소문은 중종에 의해 무시된다.‘한번 직접 뵈옵고 말씀드릴 수만 있으면 백번 죽어도 한이 없을 것이다.’라고 진술함으로써 마지막으로 왕과의 면담을 간청하고 있는 8인의 진술은 그러나 중종에 의해서 철저하게 기각되는 것이다. 다만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하여 김정 김식 김구에게는 참형,나머지 4인에게는 귀양보내게 했던 처음의 형량을 변경하여 조광조 등 4인에게는 장 100대에 벽지에 안치시킬 것과 나머지 4인은 벽지에 부처(付處)시킬 것을 명령하였던 것이었다.그나마 조광조가 참형에서 장형으로 감형되었던 것은 정광필을 비롯하여 안당과 같은 의정부 대신들이 눈물로 읍소하였기 때문이었다.특히 정광필은 조광조가 병약한 몸이라 장 100대도 과중하여 장형을 감하여줄 것을 탄원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날 아침 8인의 죄수들은 의금부 앞뜰에 모여서 중종이 내린 최후의 전지를 듣게 된다.중종의 전지를 대신 읽은 사람은 판중추부사였던 김정이었다.조광조를 비롯한 8인의 죄인들은 부복하고 군신으로서의 예의를 갖춰 왕이 있는 곳을 향해 큰절을 올린 후 모두 무릎을 꿇고 중종의 교지를 듣는다.기록에 의하면 중종의 전지는 다음과 같다. “…너희들은 모두 나를 시종하던 신하들로서 경연에 출입하면서 상하가 한마음으로 옳은 정치를 하려 하였으므로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은 아니었다.…”
  • 儒林(49)-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儒林(49)-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도일 뿐입니다.소위 도라는 것은 천성(天性)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대개 천성이 없는 것은 없기 때문에 도 또한 없는 것이 없습니다.크게는 예악형정(禮樂刑政)과 작게는 제도문물(制度文物)이 모두 사람의 힘을 빌려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각자가 지니고 있기 마련인 당연한 도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옛날에 어진 임금들이 바로 그러한 이치를 가지고 다스렸기 때문에 그 업적이 천지를 가득 채울 수 있었으며,그 찬란한 빛이 고금을 꿰뚫고 빛을 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실은 나의 마음 안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이러한 이치를 따르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나라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이러한 진리로부터 잠시라도 떠나서는 안 됩니다.그러므로 이러한 도리가 항상 나의 마음속에서 환히 비추어야만 하며 잠깐이라도 내마음속에서 그 진리의 빛이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나서 조광조는 ‘혼자 있을 때라도 늘 삼가야 한다’는 공자사상의 핵심인 ‘근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대개 사람들은 밝게 드러난 곳에서는 삼가지만 어두운 곳에서는 마음가짐이 소홀하기 마련입니다.그윽하게 감추어져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개 신하들은 보지 못하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만은 그 사소하고 미묘한 일까지 다볼 수 있습니다.여러 신하들이 듣지 못하는 것도 그곳에 있는 사람만은 다 아는 것입니다.때문에 사람들은 마음가짐이 소홀하게 되어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혼자 있을 때는 꼭 삼가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압니다.이러한 나쁜 생각을 오래 지니고 있으면 그런 나쁜 생각이 얼굴에 나타나게 되며 나라를 다스릴 때도 드러나게 되어 더 이상 감추어둘 수가 없으며 마침내 정치와 교화를 그르치게 됩니다.그러므로 옛날에 어진 임금들은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항상 마음을 진리의 빛으로 밝혀 혼미(昏迷)해지지 않도록 노력하였기 때문에 깊고 어두운 곳에 홀로 있을 때는 오히려 더욱 근신하였던 것입니다.그리하여 은밀한 곳에 홀로 있을 때에도 추호라도 거짓된 생각이 싹트지 못하게 하여 순수하고 의로운 진리가 드러나게 되었으므로 옛날에 어진 임금들의 나라 다스리는 도리는 지극히 선하고,지극히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나라의 기강이 서고 법도가 정하여지는 것입니다.”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조광조의 답안은 다음과 같은 끝맺음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엎드려 비오니 전하께오서는 성실하게 도를 밝히시고 홀로 계실 때에도 항상 삼가는 태도로 나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要諦)로 삼으십시오.그러면 도가 조정에 서게 될 것인즉 나라의 기강이 어렵지 않게 서게 될 것이며,법도 또한 어렵지 않게 정해질 것입니다. ‘3개월이면 충분하며 3년이면 다 이룰 수 있다’고 하신 공자의 말씀 본 뜻도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제가 감히 지엄하신 임금님 앞에서 감격하고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이 글을 올리나이다.” 나라의 기강과 법도를 바로 잡으려는 중종에게 그 방법은 오직 두 가지뿐,즉 하늘의 천성인 명도(明度)를 따라 나라를 다스리며,또 하나는 중종 스스로 깊고 어두운 곳에 홀로 있을 때라도 근신하여 스스로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근독(謹獨)의 두 사상은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34세의 나이에 정치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으며,그리고 4년 동안 화려한 정치적 역량을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종은 4년 만에 이러한 조광조에 대한 신임을 거두게 되었으며,마침내 조광조를 숙청 끝에 사사케 하였으니,이는 권력자가 가진 변덕 때문인가,아니면 자신이 곧 정의라는 권력의 환상성 때문인가. 어쨌든 조선 제11대 왕으로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그 세력을 지지기반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던 중종은 조광조를 숙청함으로 40년 가까운 재위기간 동안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무능하고 일관성 없는 통치력으로 유례없는 나라의 대혼란을 초래하였으니,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을 조심해야할 사람은 신하가 아니라 용,즉 최고의 권력자 바로 그 자신인 것이다.
  • 儒林(49)-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도일 뿐입니다.소위 도라는 것은 천성(天性)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대개 천성이 없는 것은 없기 때문에 도 또한 없는 것이 없습니다.크게는 예악형정(禮樂刑政)과 작게는 제도문물(制度文物)이 모두 사람의 힘을 빌려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각자가 지니고 있기 마련인 당연한 도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옛날에 어진 임금들이 바로 그러한 이치를 가지고 다스렸기 때문에 그 업적이 천지를 가득 채울 수 있었으며,그 찬란한 빛이 고금을 꿰뚫고 빛을 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실은 나의 마음 안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이러한 이치를 따르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나라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이러한 진리로부터 잠시라도 떠나서는 안 됩니다.그러므로 이러한 도리가 항상 나의 마음속에서 환히 비추어야만 하며 잠깐이라도 내마음속에서 그 진리의 빛이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나서 조광조는 ‘혼자 있을 때라도 늘 삼가야 한다’는 공자사상의 핵심인 ‘근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대개 사람들은 밝게 드러난 곳에서는 삼가지만 어두운 곳에서는 마음가짐이 소홀하기 마련입니다.그윽하게 감추어져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개 신하들은 보지 못하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만은 그 사소하고 미묘한 일까지 다볼 수 있습니다.여러 신하들이 듣지 못하는 것도 그곳에 있는 사람만은 다 아는 것입니다.때문에 사람들은 마음가짐이 소홀하게 되어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혼자 있을 때는 꼭 삼가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압니다.이러한 나쁜 생각을 오래 지니고 있으면 그런 나쁜 생각이 얼굴에 나타나게 되며 나라를 다스릴 때도 드러나게 되어 더 이상 감추어둘 수가 없으며 마침내 정치와 교화를 그르치게 됩니다.그러므로 옛날에 어진 임금들은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항상 마음을 진리의 빛으로 밝혀 혼미(昏迷)해지지 않도록 노력하였기 때문에 깊고 어두운 곳에 홀로 있을 때는 오히려 더욱 근신하였던 것입니다.그리하여 은밀한 곳에 홀로 있을 때에도 추호라도 거짓된 생각이 싹트지 못하게 하여 순수하고 의로운 진리가 드러나게 되었으므로 옛날에 어진 임금들의 나라 다스리는 도리는 지극히 선하고,지극히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나라의 기강이 서고 법도가 정하여지는 것입니다.”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조광조의 답안은 다음과 같은 끝맺음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엎드려 비오니 전하께오서는 성실하게 도를 밝히시고 홀로 계실 때에도 항상 삼가는 태도로 나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要諦)로 삼으십시오.그러면 도가 조정에 서게 될 것인즉 나라의 기강이 어렵지 않게 서게 될 것이며,법도 또한 어렵지 않게 정해질 것입니다. ‘3개월이면 충분하며 3년이면 다 이룰 수 있다’고 하신 공자의 말씀 본 뜻도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제가 감히 지엄하신 임금님 앞에서 감격하고 간절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이 글을 올리나이다.” 나라의 기강과 법도를 바로 잡으려는 중종에게 그 방법은 오직 두 가지뿐,즉 하늘의 천성인 명도(明度)를 따라 나라를 다스리며,또 하나는 중종 스스로 깊고 어두운 곳에 홀로 있을 때라도 근신하여 스스로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근독(謹獨)의 두 사상은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광조는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34세의 나이에 정치무대에 등장하게 되었으며,그리고 4년 동안 화려한 정치적 역량을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종은 4년 만에 이러한 조광조에 대한 신임을 거두게 되었으며,마침내 조광조를 숙청 끝에 사사케 하였으니,이는 권력자가 가진 변덕 때문인가,아니면 자신이 곧 정의라는 권력의 환상성 때문인가. 어쨌든 조선 제11대 왕으로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그 세력을 지지기반으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던 중종은 조광조를 숙청함으로 40년 가까운 재위기간 동안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무능하고 일관성 없는 통치력으로 유례없는 나라의 대혼란을 초래하였으니,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을 조심해야할 사람은 신하가 아니라 용,즉 최고의 권력자 바로 그 자신인 것이다.˝
  • 儒林(47)-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儒林(47)-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권력이 가진 속성 중에서 변덕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중독과 환상이다.권력은 강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어 인간의 욕망 중에서 가장 무서운 집착을 보인다.권력이 바로 자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된 권력자는 어떻게 해서든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으려 하며,이로 인해 권력자는 독재자로 변화되어 간다.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권력자가 자신의 행동이 곧 정의라는 환상에 사로잡힌다는 점이다.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은 자신이 행하는 권력의 통치술이 가장 올바른 정도라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그리하여 권력자들은 정의라는 이름 하에 권력을 휘두르게 되며,이것이 바로 권력의 횡포이다. 조광조를 숙청하기 위해서 기묘사화를 일으킨 중종도 이러한 권력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산군을 쫓아내는 반정에 의해서 왕위에 오른 중종.그도 처음에는 연산군을 폐위시키는 데 앞장선 훈구파들에 의해 옹립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그후 10년 동안 중종은 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강력한 친위세력을 조직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이러한 중종의 의지는 중종 10년 8월(1515년)에 있었던 알성시(謁聖試)에서 중종이 직접 성균관에 거동하여 문과시험을 주재한 데서 잘 드러난다.시험문제는 다음과 같다. “공자께서 ‘만약 내가 등용이 된다면 단 몇 개월 만에도 가능하지만,적어도 3년이면 (정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이룰 수 있다.’고 하셨다.성인이 어찌 헛된 말을 하셨으리오.그 뜻의 규모와 정치를 베푸는 방안에 관하여 공자께서는 시행하기 전에 먼저 작정한 바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이를 낱낱이 헤아려 말할 수 있겠는가.주나라 말기는 나라의 기강(紀綱)과 법도(法度)가 이미 땅에 떨어졌을 때임에도 불구하고 공자께서 3년 이내에 (바른 정치를 펴)이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셨다.그렇다면 (공자께서 등용되었다면)그로부터 3년 후의 결과는 어떠하겠는가.우리는 정말 공자의 다스림에 이상적인 결과를 구체적으로 볼 수가 있었겠는가.성인이 스쳐 지나가거나 머무르는 곳에는 반드시 교화(敎化)가 이루어진다는 묘한 이치를 쉽게 논할 수는 없다.” 중종은 자신의 속마음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고 있다. “내가 왕이 될 만한 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종(祖宗)의 기업을 잇고 정치에 임하여 좋은 성과를 소망하여 온 지도 벌써 10년이 되었으나 아직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지 못하였으며,나라의 법도도 정해지지 못하였다.그러니 어찌 정치의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었으리오.(이 자리에 모인)여러 성균관 학생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들이므로 모두가 요순시대의 이상적인 정치를 이루려는 포부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개인의 입신출세만을 여기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은 어려운 시대를 당하여 이 난국을 극복하고 옛 성인의 이상적인 정치를 다시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이에 대한 대책을 논하라.” 중종이 직접 출제한 알성시의 문제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중종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나라의 법도를 바로잡아 이상적인 정치를 펴고 싶은 군왕의 충정을 갖고 있었다. 이에 조광조는 그가 남긴 문장 중에서 가장 체계적이며 논리적인,다음과 같은 답안을 통해 알성시에서 차석으로 급제한다.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그러므로 하늘이 사람에 대하여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임금과 백성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그러므로 예전에 이상적인 임금들이 백성들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옛날에 성인들은 하늘과 땅의 큰 것과 수많은 백성들의 무리를 하나로 여기셨으며,그런 이치에 따라 도를 행하였습니다.”
  • 儒林(47)-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권력이 가진 속성 중에서 변덕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중독과 환상이다.권력은 강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어 인간의 욕망 중에서 가장 무서운 집착을 보인다.권력이 바로 자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된 권력자는 어떻게 해서든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으려 하며,이로 인해 권력자는 독재자로 변화되어 간다.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권력자가 자신의 행동이 곧 정의라는 환상에 사로잡힌다는 점이다.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은 자신이 행하는 권력의 통치술이 가장 올바른 정도라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그리하여 권력자들은 정의라는 이름 하에 권력을 휘두르게 되며,이것이 바로 권력의 횡포이다. 조광조를 숙청하기 위해서 기묘사화를 일으킨 중종도 이러한 권력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산군을 쫓아내는 반정에 의해서 왕위에 오른 중종.그도 처음에는 연산군을 폐위시키는 데 앞장선 훈구파들에 의해 옹립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그후 10년 동안 중종은 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강력한 친위세력을 조직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이러한 중종의 의지는 중종 10년 8월(1515년)에 있었던 알성시(謁聖試)에서 중종이 직접 성균관에 거동하여 문과시험을 주재한 데서 잘 드러난다.시험문제는 다음과 같다. “공자께서 ‘만약 내가 등용이 된다면 단 몇 개월 만에도 가능하지만,적어도 3년이면 (정치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이룰 수 있다.’고 하셨다.성인이 어찌 헛된 말을 하셨으리오.그 뜻의 규모와 정치를 베푸는 방안에 관하여 공자께서는 시행하기 전에 먼저 작정한 바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이를 낱낱이 헤아려 말할 수 있겠는가.주나라 말기는 나라의 기강(紀綱)과 법도(法度)가 이미 땅에 떨어졌을 때임에도 불구하고 공자께서 3년 이내에 (바른 정치를 펴)이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하셨다.그렇다면 (공자께서 등용되었다면)그로부터 3년 후의 결과는 어떠하겠는가.우리는 정말 공자의 다스림에 이상적인 결과를 구체적으로 볼 수가 있었겠는가.성인이 스쳐 지나가거나 머무르는 곳에는 반드시 교화(敎化)가 이루어진다는 묘한 이치를 쉽게 논할 수는 없다.” 중종은 자신의 속마음을 다음과 같이 털어놓고 있다. “내가 왕이 될 만한 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종(祖宗)의 기업을 잇고 정치에 임하여 좋은 성과를 소망하여 온 지도 벌써 10년이 되었으나 아직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지 못하였으며,나라의 법도도 정해지지 못하였다.그러니 어찌 정치의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었으리오.(이 자리에 모인)여러 성균관 학생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들이므로 모두가 요순시대의 이상적인 정치를 이루려는 포부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개인의 입신출세만을 여기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은 어려운 시대를 당하여 이 난국을 극복하고 옛 성인의 이상적인 정치를 다시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이에 대한 대책을 논하라.” 중종이 직접 출제한 알성시의 문제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중종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나라의 법도를 바로잡아 이상적인 정치를 펴고 싶은 군왕의 충정을 갖고 있었다. 이에 조광조는 그가 남긴 문장 중에서 가장 체계적이며 논리적인,다음과 같은 답안을 통해 알성시에서 차석으로 급제한다. “하늘과 사람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그러므로 하늘이 사람에 대하여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임금과 백성은 그 근본됨이 하나입니다.그러므로 예전에 이상적인 임금들이 백성들에게 도리에 맞지 않은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옛날에 성인들은 하늘과 땅의 큰 것과 수많은 백성들의 무리를 하나로 여기셨으며,그런 이치에 따라 도를 행하였습니다.”˝
  • 儒林(44)-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자신들을 ‘엎질러진 물’이요,‘떨어진 꽃잎’으로 비유한 김식의 생각은 정확한 것이었다.바로 그 순간 중종은 승정원,홍문관,대간,한림을 다 교체하고 새로 승지가 된 성운에게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린 것이다.이 교지의 내용이 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정의 큰일이 이미 다 결정되었으니 시간을 지체하여 아이들의 장난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빨리 조광조를 처형하라는 전지를 내리라.조광조의 처형을 서둘러 확정하라고 두세번 독촉하였는데도 밤이 새도록 결정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옳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광조는 여전히 자신을 신임하였던 중종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조광조가 자신이 마침내 ‘엎질러진 물’이 되었음을 실감한 것은 능주로 유배를 떠난 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능성에서 유배 중에 지은 시(綾城謫中詩)’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으므로. “누가 활 맞은 새와 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내 마음은 말 잃은 마부 같다고 쓴 웃음을 짓네.벗이 된 원숭이와 학이 돌아가라 재잘거려도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엎어진 독 안에 들어 있어 빠져 나오기가 어려운 줄을 어찌 누가 알리오.” 유배 중에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이 시에서 조광조는 유가에서 군자를 비유하는 ‘원숭이와 학’이 되어 돌아가고 싶어도 ‘엎어진 독(覆盆)’,즉 자신에게 씌어진 누명과 형벌 때문에 돌아갈 수 없음을 한탄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는 달 밝은 의금부 뜨락에서 술을 나눠마셨던 김식이 비유하였던 강태공의 고사성어의 의미를 뒤늦게 깨달은 때문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모든 상황이 끝나 날이 밝았을 때부터 이들에 대한 신문이 시작되었다. 죄인을 신문하기 위해서 임시로 설치한 국청에는 이들 8인을 국문하기 위해서 병조판서 이장곤과 홍숙(洪叔)이 자리잡고 있었다.그리고 국문의 책임자로 판중추부사인 김정이 있었다.그러나 이 국문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왜냐하면 지난밤 의금부에 갇혔던 8인들은 모두 같이 술을 마셔서 만취해 있었으며,특히 조광조는 인사불성에 가깝도록 대취해 있었기 때문이다.특히 문초담당관인 이장곤과 홍숙은 어제까지만 해도 조광조와 절친한 사이였다.이장곤은 조광조에 대해 호의를 가진 중도파였는데 거사에 참여한 것은 자의가 아니라,병조판서로 군사를 통솔하는 수장이었으므로 심정과 남곤의 필요에 의해서 강제로 참석하게 된 것이었다.그러므로 조광조의 신문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장곤이 문초하면 조광조는 ‘희강아 희강아 그대가 어찌하여 나를 죄인으로 취급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불평하고 있었고,기록에 의하면 이장곤을 향해 ‘이 못난아,용가(龍哥)야.어리석은 용가야.’하고 놀리기까지 하였다는 것이다.특히 홍숙이 심문할 때에는 한층 더 엉망이었다. 홍숙은 어제까지만 해도 한성부판윤이었는데,전고(典故)에 밝아 정치를 함에 균형을 잃지 않고 스스로 몸가짐에 임해서도 엄정하고 관후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한 선비였는데 비록 조광조를 숙청하는 데 앞장서기는 하였으나 내심으로는 조광조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홍대감은 한성부판윤이었는데 어찌하여 나를 신문할 수 있단 말이오.” 홍숙이 하루아침에 형조판서가 되었음을 비웃는 말로 어젯밤까지만 해도 형조판서는 이정이었으나 이정이 조광조와 함께 체포되었으므로 파직되고 홍숙이 대신 형조판서에 올라 자신을 문초하고 있음을 빈정거리고 있는 말이었던 것이다.˝
  • 儒林(44)-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儒林(44)-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자신들을 ‘엎질러진 물’이요,‘떨어진 꽃잎’으로 비유한 김식의 생각은 정확한 것이었다.바로 그 순간 중종은 승정원,홍문관,대간,한림을 다 교체하고 새로 승지가 된 성운에게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린 것이다.이 교지의 내용이 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정의 큰일이 이미 다 결정되었으니 시간을 지체하여 아이들의 장난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빨리 조광조를 처형하라는 전지를 내리라.조광조의 처형을 서둘러 확정하라고 두세번 독촉하였는데도 밤이 새도록 결정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옳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광조는 여전히 자신을 신임하였던 중종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조광조가 자신이 마침내 ‘엎질러진 물’이 되었음을 실감한 것은 능주로 유배를 떠난 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능성에서 유배 중에 지은 시(綾城謫中詩)’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으므로. “누가 활 맞은 새와 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내 마음은 말 잃은 마부 같다고 쓴 웃음을 짓네.벗이 된 원숭이와 학이 돌아가라 재잘거려도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엎어진 독 안에 들어 있어 빠져 나오기가 어려운 줄을 어찌 누가 알리오.” 유배 중에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이 시에서 조광조는 유가에서 군자를 비유하는 ‘원숭이와 학’이 되어 돌아가고 싶어도 ‘엎어진 독(覆盆)’,즉 자신에게 씌어진 누명과 형벌 때문에 돌아갈 수 없음을 한탄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는 달 밝은 의금부 뜨락에서 술을 나눠마셨던 김식이 비유하였던 강태공의 고사성어의 의미를 뒤늦게 깨달은 때문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모든 상황이 끝나 날이 밝았을 때부터 이들에 대한 신문이 시작되었다. 죄인을 신문하기 위해서 임시로 설치한 국청에는 이들 8인을 국문하기 위해서 병조판서 이장곤과 홍숙(洪叔)이 자리잡고 있었다.그리고 국문의 책임자로 판중추부사인 김정이 있었다.그러나 이 국문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왜냐하면 지난밤 의금부에 갇혔던 8인들은 모두 같이 술을 마셔서 만취해 있었으며,특히 조광조는 인사불성에 가깝도록 대취해 있었기 때문이다.특히 문초담당관인 이장곤과 홍숙은 어제까지만 해도 조광조와 절친한 사이였다.이장곤은 조광조에 대해 호의를 가진 중도파였는데 거사에 참여한 것은 자의가 아니라,병조판서로 군사를 통솔하는 수장이었으므로 심정과 남곤의 필요에 의해서 강제로 참석하게 된 것이었다.그러므로 조광조의 신문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장곤이 문초하면 조광조는 ‘희강아 희강아 그대가 어찌하여 나를 죄인으로 취급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불평하고 있었고,기록에 의하면 이장곤을 향해 ‘이 못난아,용가(龍哥)야.어리석은 용가야.’하고 놀리기까지 하였다는 것이다.특히 홍숙이 심문할 때에는 한층 더 엉망이었다. 홍숙은 어제까지만 해도 한성부판윤이었는데,전고(典故)에 밝아 정치를 함에 균형을 잃지 않고 스스로 몸가짐에 임해서도 엄정하고 관후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한 선비였는데 비록 조광조를 숙청하는 데 앞장서기는 하였으나 내심으로는 조광조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홍대감은 한성부판윤이었는데 어찌하여 나를 신문할 수 있단 말이오.” 홍숙이 하루아침에 형조판서가 되었음을 비웃는 말로 어젯밤까지만 해도 형조판서는 이정이었으나 이정이 조광조와 함께 체포되었으므로 파직되고 홍숙이 대신 형조판서에 올라 자신을 문초하고 있음을 빈정거리고 있는 말이었던 것이다.
  • [기고] ‘친일 규명법’ 왜 머뭇거리나/박유철 전 독립기념관 관장

    3·1절 85돌을 맞은 지금 우리가 가장 부끄러워할 일은,과거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라기보다 광복 반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까지 잘못된 과거사에 책임을 물은 일도,물을 수도 없다는 점이다.당시 일제에 빌붙었던 당사자들에 대한 처벌은 고사하고,그들 스스로가 반성도 사죄도 없고,부끄러워할 줄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오만과 뻔뻔스러움을 대물림까지 하는 현실에 분노를 느끼게 된다.우리나라 꼴이 이 모양이니 잘못된 한·일 관계의 과거사야 들춰내 무엇하겠는가.친일파가 득세하는 세태에서 과거사가 청산될 리 없다.이 과거사를 정리하지 않고 어찌 이 나라에 건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할 수 있겠는가.과거사를 반드시 정리하고 청산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과거의 채권·채무 관계를 정리하지 않고 어찌 새로운 거래가 이루어지겠는가. 일본이 툭하면 제기하는 식민지 시혜론과 신사참배,교과서 왜곡 등의 행위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한·일 관계와 비슷한 독·불 관계를 보면 독일의 적극적인 사죄와 반성으로 과거사를 깨끗하게 청산해 어느때보다 원만한 관계가 정립되었다.프랑스는 종전 60년이 가까운 지금도 나치 부역행위를 가차없이 처벌한다.부역행위를 숨기고 경찰국장과 장관까지 지낸 자가 9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법정에 끌려나와 10년 징역형을 받은 기사를 보았다.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프랑스 사회가 그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역사에 대해 경외심을 요구하는 프랑스의 사회적 환경이다.역사에 대해 경외심이 없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한다.나치 부역자에 대한 철저한 숙청이 오늘날 프랑스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프랑스에서는 진정한 과거 청산이 있었기에 그 바탕 위에 국가의 진로를 바르게 설정하고,건전하고 정의가 살아 있는 국가로 국제사회에서 떳떳하게 행세하고 있지 않는가. 16대 국회에서 과거청산 관련 4대 법안의 발의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역사의 진보를 확인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비록 불법 정치자금 수사에 묻혀 일반은 물론 언론에서조차 큰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이 법안이야말로 엄청난 역사의 변화요,사회환경의 변화였다.그런데 이 4대 법안 중 친일관련법과 6·25 전쟁 휴전 이전 민간인 희생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안),이른바 6·25 통합 특별법은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기가 어렵다고 한다.이로써 제16대 국회는 불법 정치자금 수수란 수치보다 더 부끄러운 모습을 민족과 역사 앞에 노출한 것이다. 더구나 친일규명 관련법은 국회 법사위에서 당초 법안에 수정을 거듭하여 친일행위의 죄상을 규명하고 단죄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있으나마나 한 법으로 변질되고 말았다.그것조차 본회의 상정이 보류된다니 민족정기와 사회정의가 통째로 사라지는 느낌이다.그런다고 친일행위를 한 그들의 과거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결국 이를 계속 감춰 국민을 기만하고 역사를 경시하는 행위는 그 자신들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친일행위자들은 과거의 잘못된 역사에 대한 심판을 면했을는지 모르나 용서받을 기회까지 잃은 셈이다.우리는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또 한번 꺾이게 되었다.진정한 의미에서의 국민화합은 철저한 과거 청산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항일했던 사람,친일했던 사람,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던 사람들 사이에 맺혀 있는 갈등,…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안목으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지혜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밝힌 것은 전적으로 옳다.국회의원들은 역사적 안목을 가져야 한다.그래야 16대 국회도 살고 우리 민족도 자존심을 찾게 될 것이다. 박유철 전 독립기념관 관장˝
  • 儒林(35)-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儒林(35)-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그 정적은 폭풍이 오기 전의 고요와 같은 것이었다.중종이 과연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줄까 판가름이 나는 것을 기다리는 무시무시한 순간이었다. 중종이 심정을 비롯한 훈구파의 손을 들어준다면 그 순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은 역적 죄인으로 처벌을 받아 숙청될 것이고,윤자임과 공서린의 승지들은 그 자리에서 체포될 것이다.그러나 만약 중종이 조광조의 손을 들어준다면 한밤중에 승지의 허락 없이 불법으로 대궐 안으로 들어서 시위를 하고 있는 훈구파 대신들은 대역죄로 참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절체절명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던 것이다.그러나 심정은 초조해하는 다른 대신들과는 달리 중종이 이미 왼쪽 어깨를 벗어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윤자임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몇 년간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에 대한 중종의 총애는 남다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각별한 총애가 없었다면 조광조의 정치개혁은 애당초 불가능했을 것이 아닌가. 마침내 새로이 가승지로 임명된 성운이 합문 밖으로 나와 근정전 위에 올라섰다.성운은 소매 속에서 종이쪽지를 꺼내어 읽기 시작하였다. “상감마마께오서 전지를 내리셨소.형조판서는 나와서 상감의 전지를 받으시오.” 이장곤이 나서서 두 손으로 교지를 받아 읽기 시작하였다.내용을 읽던 이장곤의 얼굴이 순간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하였다.교지 속에는 어명으로 의금부에 갇힐 죄인의 명단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우참찬 이자(李),형조판서 이정(李淨),도승지 유인숙(柳仁淑),우부승지 홍언필(洪彦弼),좌부승지 박세희(朴世熹),동부승지 박훈(朴薰),부제학 김구(金絿),대사성 김식(金湜)….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대사헌 조광조. 중종은 마침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을 의금부에 가둘 것을 명함으로써 훈구파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내용을 확인한 이장곤은 납덩어리와 같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대신들 앞에서 소리쳐 말하였다. “군사들은 우선 이곳에 있는 승지들을 체포하여 하옥시키도록 하라.” 순간 촛불을 밝히고 경연청에 앉아 있던 훈구파 대신들의 입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흐르고 희색이 만면하였다.동시에 한 가닥 기대를 갖고 기다리던 윤자임 일행은 그 자리에 맥없이 쓰러졌다.군사들이 즉시 윤자임을 비롯하여 공서린,이구,기준,심달원(沈達源)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는 한편 교지에 쓰인 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군사가 총출동하였다. 특히 조광조를 체포하기 위해 동원된 사람은 선전관(宣傳官)이었던 금오랑(金吾郞)이었다. 금오랑에게 군사를 주어 즉시 체포토록 명을 내리면서 이장곤이 말하였다. “시간을 지체해서는 절대 아니 된다.즉시 출발하여 조광조를 포박하여 의금부에 가두도록 하여라.알겠느냐.” “알겠습니다.나으리.” 금오랑은 대답하였다.사안의 중요성을 간파한 이장곤이 다시 다짐하여 말하였다. “절대로 이 밤이 새기 전에 조광조를 체포하지 않으면 안 된다.날이 새거나 조광조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즉시 체포하지 못하면 반드시 문책하여 그대를 군명으로 엄히 다스릴 터이니 명심토록 하여라.” “알겠습니다.나으리.” 금오랑은 즉시 군사를 끌고 사라졌다. 이 때가 자시(子時)의 한가운데 정확히 자정 무렵이었다.이제 막 새날이 시작되려는 밤 12시에 친위 쿠데타는 이처럼 끝이 나 버린 것이다.
  • 儒林(35)-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그 정적은 폭풍이 오기 전의 고요와 같은 것이었다.중종이 과연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줄까 판가름이 나는 것을 기다리는 무시무시한 순간이었다. 중종이 심정을 비롯한 훈구파의 손을 들어준다면 그 순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은 역적 죄인으로 처벌을 받아 숙청될 것이고,윤자임과 공서린의 승지들은 그 자리에서 체포될 것이다.그러나 만약 중종이 조광조의 손을 들어준다면 한밤중에 승지의 허락 없이 불법으로 대궐 안으로 들어서 시위를 하고 있는 훈구파 대신들은 대역죄로 참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절체절명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던 것이다.그러나 심정은 초조해하는 다른 대신들과는 달리 중종이 이미 왼쪽 어깨를 벗어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윤자임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몇 년간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에 대한 중종의 총애는 남다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각별한 총애가 없었다면 조광조의 정치개혁은 애당초 불가능했을 것이 아닌가. 마침내 새로이 가승지로 임명된 성운이 합문 밖으로 나와 근정전 위에 올라섰다.성운은 소매 속에서 종이쪽지를 꺼내어 읽기 시작하였다. “상감마마께오서 전지를 내리셨소.형조판서는 나와서 상감의 전지를 받으시오.” 이장곤이 나서서 두 손으로 교지를 받아 읽기 시작하였다.내용을 읽던 이장곤의 얼굴이 순간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하였다.교지 속에는 어명으로 의금부에 갇힐 죄인의 명단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았다. ―우참찬 이자(李),형조판서 이정(李淨),도승지 유인숙(柳仁淑),우부승지 홍언필(洪彦弼),좌부승지 박세희(朴世熹),동부승지 박훈(朴薰),부제학 김구(金絿),대사성 김식(金湜)….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대사헌 조광조. 중종은 마침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을 의금부에 가둘 것을 명함으로써 훈구파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내용을 확인한 이장곤은 납덩어리와 같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대신들 앞에서 소리쳐 말하였다. “군사들은 우선 이곳에 있는 승지들을 체포하여 하옥시키도록 하라.” 순간 촛불을 밝히고 경연청에 앉아 있던 훈구파 대신들의 입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흐르고 희색이 만면하였다.동시에 한 가닥 기대를 갖고 기다리던 윤자임 일행은 그 자리에 맥없이 쓰러졌다.군사들이 즉시 윤자임을 비롯하여 공서린,이구,기준,심달원(沈達源)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는 한편 교지에 쓰인 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군사가 총출동하였다. 특히 조광조를 체포하기 위해 동원된 사람은 선전관(宣傳官)이었던 금오랑(金吾郞)이었다. 금오랑에게 군사를 주어 즉시 체포토록 명을 내리면서 이장곤이 말하였다. “시간을 지체해서는 절대 아니 된다.즉시 출발하여 조광조를 포박하여 의금부에 가두도록 하여라.알겠느냐.” “알겠습니다.나으리.” 금오랑은 대답하였다.사안의 중요성을 간파한 이장곤이 다시 다짐하여 말하였다. “절대로 이 밤이 새기 전에 조광조를 체포하지 않으면 안 된다.날이 새거나 조광조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즉시 체포하지 못하면 반드시 문책하여 그대를 군명으로 엄히 다스릴 터이니 명심토록 하여라.” “알겠습니다.나으리.” 금오랑은 즉시 군사를 끌고 사라졌다. 이 때가 자시(子時)의 한가운데 정확히 자정 무렵이었다.이제 막 새날이 시작되려는 밤 12시에 친위 쿠데타는 이처럼 끝이 나 버린 것이다.˝
  • 儒林(28)-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儒林(28)-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남곤의 질문에 정광필이 대답하였다. “어찌 내가 감히 남 대감을 향원과 같은 소인이라고 비웃을 수 있겠소이까.하오나 일찍이 맹자께오서도 ‘내가 향원을 미워하는 것은 그가 덕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다.’라고 말하지 않으셨나이까.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조광조를 숙청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 아니라 어쩌면 벽을 뚫고 담을 넘는 도적의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나이다.” 정광필의 대답 속에는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일찍이 맹자에게 제자 만장(萬章)이 다음과 같이 물은 적이 있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한다면 그런 사람은 어디를 가도 훌륭한 사람이 아닐까요.그런데 공자께서는 왜 향원을 가리켜 ‘향원은 덕을 해치는 도둑(鄕愿德之賊)’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맹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들을 비난하려 해도 딱 들어서 비난할 길이 없고 공격하려 해도 공격할 구실이 없으니 세속에 아첨하고 더러운 세상에 합류한다.집에 있으면 충심과 신의가 있는 척하고 나아가 행하면 청렴결백한 척한다.그래서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스스로도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들과 더불어 ‘요순의 도(유교에서 이상으로 그리는 정치)’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그래서 공자께서는 ‘나는 사이비를 미워한다.말 잘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정의를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말 많은 것을 미워하는 것은 신의를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향원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덕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남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말하였다. “대감께오서는 그러하면 신을 사이비라 칭하고 있는 것이오이까.” 벌떡 일어선 남곤은 걸쳐 입고 있던 천복을 벗기 시작하였다.초립과 베옷을 벗자 안에 받쳐 입고 있던 복장이 드러났다. “어쨌든 신은 주상의 밀지를 전하고 이제 물러가오니 나으리께오서는 주상의 뜻을 받들어 조정을 안정되게 하시오.” 남곤은 소매를 떨치고 황망히 사라졌다.살기마저 느껴지는 남곤의 태도에 차마 만류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정광필은 마음이 착잡하여 그가 벗어 버리고 간 변복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생각하였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온 조정은 또다시 피의 숙청으로 얼룩질 것이다.홍경주와 남곤,심정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와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 사림파간 죽느냐 사느냐의 혈전이 시작될 것이다.문제는 밀서의 내용대로라면 주상의 마음이 이미 조광조에게서 떠나 있다는 점이다. 주상은 밀지에서 분명하게 단언하고 있지 않은가. “…요즘은 무엇을 먹어도 맛을 모르고 잠을 자도 편안치 않으니,경들이 그들을 처치하고 나에게 알려라.” 정광필은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게 누구 있느냐.” 그러자 문밖에서 노인이 대답하였다. “쇤네 대령하고 있사옵니다.” 정광필은 남곤이 벗어두고 간 옷들을 집어 들어 문밖으로 나아가 뜨락에 내던지며 말하였다. “이것들을 모두 태우거라.댓돌 위에 있는 짚신도 함께 태우거라.다시 한번 말해 두거니와 새벽에 남 대감이 집으로 찾아왔었다는 것이 절대로 밖에 알려져서는 안 되느니라.알겠느냐.” 눈치 빠른 하인은 재빠르게 옷가지를 들고 사라졌다.정광필의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된다. 바로 그날 밤. 왕,중종을 중심으로 하는 친위 쿠데타가 궁궐 안에서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 儒林(28)-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남곤의 질문에 정광필이 대답하였다. “어찌 내가 감히 남 대감을 향원과 같은 소인이라고 비웃을 수 있겠소이까.하오나 일찍이 맹자께오서도 ‘내가 향원을 미워하는 것은 그가 덕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다.’라고 말하지 않으셨나이까.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조광조를 숙청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 아니라 어쩌면 벽을 뚫고 담을 넘는 도적의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나이다.” 정광필의 대답 속에는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일찍이 맹자에게 제자 만장(萬章)이 다음과 같이 물은 적이 있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한다면 그런 사람은 어디를 가도 훌륭한 사람이 아닐까요.그런데 공자께서는 왜 향원을 가리켜 ‘향원은 덕을 해치는 도둑(鄕愿德之賊)’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맹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들을 비난하려 해도 딱 들어서 비난할 길이 없고 공격하려 해도 공격할 구실이 없으니 세속에 아첨하고 더러운 세상에 합류한다.집에 있으면 충심과 신의가 있는 척하고 나아가 행하면 청렴결백한 척한다.그래서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스스로도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들과 더불어 ‘요순의 도(유교에서 이상으로 그리는 정치)’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그래서 공자께서는 ‘나는 사이비를 미워한다.말 잘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정의를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말 많은 것을 미워하는 것은 신의를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향원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덕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남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말하였다. “대감께오서는 그러하면 신을 사이비라 칭하고 있는 것이오이까.” 벌떡 일어선 남곤은 걸쳐 입고 있던 천복을 벗기 시작하였다.초립과 베옷을 벗자 안에 받쳐 입고 있던 복장이 드러났다. “어쨌든 신은 주상의 밀지를 전하고 이제 물러가오니 나으리께오서는 주상의 뜻을 받들어 조정을 안정되게 하시오.” 남곤은 소매를 떨치고 황망히 사라졌다.살기마저 느껴지는 남곤의 태도에 차마 만류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정광필은 마음이 착잡하여 그가 벗어 버리고 간 변복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생각하였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온 조정은 또다시 피의 숙청으로 얼룩질 것이다.홍경주와 남곤,심정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와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 사림파간 죽느냐 사느냐의 혈전이 시작될 것이다.문제는 밀서의 내용대로라면 주상의 마음이 이미 조광조에게서 떠나 있다는 점이다. 주상은 밀지에서 분명하게 단언하고 있지 않은가. “…요즘은 무엇을 먹어도 맛을 모르고 잠을 자도 편안치 않으니,경들이 그들을 처치하고 나에게 알려라.” 정광필은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게 누구 있느냐.” 그러자 문밖에서 노인이 대답하였다. “쇤네 대령하고 있사옵니다.” 정광필은 남곤이 벗어두고 간 옷들을 집어 들어 문밖으로 나아가 뜨락에 내던지며 말하였다. “이것들을 모두 태우거라.댓돌 위에 있는 짚신도 함께 태우거라.다시 한번 말해 두거니와 새벽에 남 대감이 집으로 찾아왔었다는 것이 절대로 밖에 알려져서는 안 되느니라.알겠느냐.” 눈치 빠른 하인은 재빠르게 옷가지를 들고 사라졌다.정광필의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된다. 바로 그날 밤. 왕,중종을 중심으로 하는 친위 쿠데타가 궁궐 안에서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 儒林(27)-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준엄한 남곤의 질문에 정광필이 대답하였다. “신하된 도리로서 어찌 감히 주상의 뜻을 거역할 수 있단 말이오.하오나” 정광필은 물끄러미 남곤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공께오서는 일찍이 조광조를 천거하여 부교리에서 응교로 승진시키지 않았나이까.” 정광필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조광조를 2품이나 건너뛰어 정4품의 관직인 응교(應敎)로 승진시킨 것은 바로 남곤이 주상께 ‘조광조는 과거 유생으로 천거를 받을 만큼 뛰어난 학행이 있고,많은 신진들의 추종을 받고 있으니 자격을 따질 것 없이 마땅한 자리에 앉히는 것이 좋겠나이다.’하고 추천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그뿐인가.조광조를 경연의 시강관(侍講官)과 춘추관의 편수관(編修官),그리고 승문원의 교감(校勘)도 겸직하게 만들어 당대 최고의 실력자로 만든 것도 바로 남곤이 아니었던가.그것이 2년 전의 일.불과 2년 사이에 조광조를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권력의 중심에 서도록 강력하게 천거하였던 남곤이 이번에는 이처럼 조광조를 숙청하려고 모의를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닌가.무릇 정치란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이해가 걸렸을 때에는 이처럼 손바닥을 뒤집듯이 쉽게 변하는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일까. “하오나 지금의 조광조는 변했나이다.주상의 밀지처럼 조광조는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여 조정을 장악하고 심지어는 주상마저 허수아비로 만들려 하지 않소이까.” 남곤의 말에 정광필이 대답하였다. “나는 다만 자주색이 붉은 색을 빼앗을까 그것을 두려워할 따름이오.” 정광필은 수수께끼와 같은 말을 던진 후 방 한 구석에 있는 종이를 꺼내 붓에 먹을 듬뿍 묻혀 다음과 같이 써내렸다. “色而內荏 譬諸小人 其猶穿踰之盜也與” 남곤은 정광필이 쓴 문장을 읽어보았다.그 문장의 뜻은 다음과 같았다. “얼굴빛이 위엄이 있으면서 마음이 유약한 것을 소인에 비유하면 벽을 뚫고 담을 넘는 도적과 같은 것이다.” 최후의 통첩과 같은 남곤의 질문에 정광필은 두 줄의 문장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 보인 것이었다. 잠시 붓을 멈췄던 정광필은 다시 문장을 써내려갔다. “惡紫之奪朱也 惡利口之覆邦家者” 마지막 문장을 읽어본 남곤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하였다.그 말의 뜻은 다음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주색이 붉은색을 빼앗는 것을 미워하며,말 잘하는 입이 나라를 전복시키는 것을 미워한다.” 당대의 문장가였던 남곤이 정광필이 쓴 그 문장의 내용을 모를 리 없었다.그 말은 논어의 양화(陽貨)편에 나오는 문장으로 ‘작은 지방의 토호였던 향원(鄕愿)을 덕을 해치는 도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공자는 ‘진짜 같은 가짜’,즉 사이비(似而非)에 대해서 경계하는 가르침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자주색은 붉은색에 가깝기는 하지만 붉은색은 아니다.따라서 자주색은 진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가짜인 것이다.마찬가지로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마음속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벽을 뚫고,담을 넘는 도적의 행위이며,말 잘하는 입으로 나라를 전복시키는 행위 역시 도적의 행위인 것이다. 사이비. ‘비슷하지만 실은 아님’이란 뜻을 가진 사이비. 공자가 가장 미워하였던 것은 정치가들이 갖고 있던,이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이었던 것이다. “하오면” 남곤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따져 물었다. “대감께오서는 신을 향원이라고 비웃고 계시나이까.”˝
  • 儒林(27)-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儒林(27)-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준엄한 남곤의 질문에 정광필이 대답하였다. “신하된 도리로서 어찌 감히 주상의 뜻을 거역할 수 있단 말이오.하오나” 정광필은 물끄러미 남곤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공께오서는 일찍이 조광조를 천거하여 부교리에서 응교로 승진시키지 않았나이까.” 정광필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조광조를 2품이나 건너뛰어 정4품의 관직인 응교(應敎)로 승진시킨 것은 바로 남곤이 주상께 ‘조광조는 과거 유생으로 천거를 받을 만큼 뛰어난 학행이 있고,많은 신진들의 추종을 받고 있으니 자격을 따질 것 없이 마땅한 자리에 앉히는 것이 좋겠나이다.’하고 추천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그뿐인가.조광조를 경연의 시강관(侍講官)과 춘추관의 편수관(編修官),그리고 승문원의 교감(校勘)도 겸직하게 만들어 당대 최고의 실력자로 만든 것도 바로 남곤이 아니었던가.그것이 2년 전의 일.불과 2년 사이에 조광조를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권력의 중심에 서도록 강력하게 천거하였던 남곤이 이번에는 이처럼 조광조를 숙청하려고 모의를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닌가.무릇 정치란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이해가 걸렸을 때에는 이처럼 손바닥을 뒤집듯이 쉽게 변하는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일까. “하오나 지금의 조광조는 변했나이다.주상의 밀지처럼 조광조는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여 조정을 장악하고 심지어는 주상마저 허수아비로 만들려 하지 않소이까.” 남곤의 말에 정광필이 대답하였다. “나는 다만 자주색이 붉은 색을 빼앗을까 그것을 두려워할 따름이오.” 정광필은 수수께끼와 같은 말을 던진 후 방 한 구석에 있는 종이를 꺼내 붓에 먹을 듬뿍 묻혀 다음과 같이 써내렸다. “色而內荏 譬諸小人 其猶穿踰之盜也與” 남곤은 정광필이 쓴 문장을 읽어보았다.그 문장의 뜻은 다음과 같았다. “얼굴빛이 위엄이 있으면서 마음이 유약한 것을 소인에 비유하면 벽을 뚫고 담을 넘는 도적과 같은 것이다.” 최후의 통첩과 같은 남곤의 질문에 정광필은 두 줄의 문장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 보인 것이었다. 잠시 붓을 멈췄던 정광필은 다시 문장을 써내려갔다. “惡紫之奪朱也 惡利口之覆邦家者” 마지막 문장을 읽어본 남곤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하였다.그 말의 뜻은 다음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주색이 붉은색을 빼앗는 것을 미워하며,말 잘하는 입이 나라를 전복시키는 것을 미워한다.” 당대의 문장가였던 남곤이 정광필이 쓴 그 문장의 내용을 모를 리 없었다.그 말은 논어의 양화(陽貨)편에 나오는 문장으로 ‘작은 지방의 토호였던 향원(鄕愿)을 덕을 해치는 도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공자는 ‘진짜 같은 가짜’,즉 사이비(似而非)에 대해서 경계하는 가르침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자주색은 붉은색에 가깝기는 하지만 붉은색은 아니다.따라서 자주색은 진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가짜인 것이다.마찬가지로 얼굴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마음속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벽을 뚫고,담을 넘는 도적의 행위이며,말 잘하는 입으로 나라를 전복시키는 행위 역시 도적의 행위인 것이다. 사이비. ‘비슷하지만 실은 아님’이란 뜻을 가진 사이비. 공자가 가장 미워하였던 것은 정치가들이 갖고 있던,이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이었던 것이다. “하오면” 남곤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따져 물었다. “대감께오서는 신을 향원이라고 비웃고 계시나이까.”
  • 외교장관 반기문씨 임명/외국언론 반응

    |워싱턴 백문일특파원·서울 김균미기자|주요 외신들은 16일 노무현 대통령이 윤영관 외교부장관의 경질 하루 만에 후임에 반기문 청와대 외교보좌관을 임명한 사실을 긴급 뉴스로 일제히 타전하며 관심을 보였다. AP통신과 AFP통신,BBC방송 등은 정찬용 청와대 인사수석의 성명 내용을 자세히 전하면서 특히 반 신임 장관이 30년 경력의 전문 외교관으로 미국통이라는 점과,노무현 정부 출범 때부터 청와대 외교보좌관으로 노 대통령을 측근에서 보좌해 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비영리단체인 아시아재단의 스콧 스나이더 서울 대표는 “반 신임 장관은 미국 관료들 사이에 잘 알려진 전문 외교관이고 1993∼94년 제1차 북한 핵위기 때 주미 대사관 정무공사로 일한 경험이 있고 노 대통령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한·미 동맹관계의 균열 가속화에 대한 미국 내 우려를 어느 정도는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그는 앞으로 노 대통령의 반 신임 장관에 대한 신뢰 정도와 반 신임 장관이 대미 관계,이라크 파병 등 산적한 현안들을 어떻게 처리해 나가느냐가최대 관건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미국은 윤 장관의 사임 이후 한국의 대미정책과 관련,“노무현 대통령이 연두회견에서 한·미 협력을 칭찬하고 한·미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주목한다.”고 강조했다. 리처드 바우처 국무부 대변인은 15일 정례 브리핑에서 윤 장관의 사임에도 “(협력적인) 한·미관계가 유지되고 강화하기를 고대한다.”며 “과거에도 그랬듯이 한국은 아주 가까운 동맹국으로 계속 남아 여러 현안에서 함께 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윤 장관의 사임은 한·미 관계나 한국의 외교정책을 변화시킬 만한 이슈가 결코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미 국무부의 원론적 언급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의 일부 언론은 한·미 관계의 장래에 대해 상당한 우려를 표시했다. LA타임스는 윤 장관은 내부 정치적 갈등으로 사임했으며 한·미 관계를 더 어렵게 하는 ‘전조’가 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뉴욕타임스는 윤 장관의 사임은 역내 외교정책에서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노 대통령의 승리로 평가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수 성향의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에서의 숙청’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노 대통령이 윤 장관 경질 기조를 이어 나간다면 미국 정부의 인내심이 머잖아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보도했다. mip@
  • 한나라 공천토론회 ‘혹붙인 격’

    ‘밀실에서 광장으로’ 한나라당이 9일 오후 시민·사회단체 인사들과 함께 마련한 ‘개혁공천 국민 대토론회’의 표어이자,화두였다.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김상희 여성민우회 대표,김영래 한국 NGO학회장,박인제 변호사,서경석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공동대표,소설가 이문열씨 등 참석자들은 토론회 개최 취지에는 저마다 높은 점수를 줬다. 하지만 “한나라당 같은 당이 이런 공개 토론회를 개최한 것 자체가 진일보”라는 냉소적 시각에서 비롯된 평이어서,당 관계자들을 떨떠름하게 했다.이들은 작심한 듯,정치개혁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한 책임을 한나라당에 돌리며 비판을 쏟아냈다. 서경석 대표는 “정치개혁은 미뤄놓고 개혁공천을 하겠다는 건 순서가 뒤바뀐 것으로 국민앞에 설득력이 없다.”고 지적했다.김상희 대표는 “한나라당이 개혁공천을 말할 자격이 있나 의구심이 든다.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정치개혁 의지 없이 국민의 시선을 다른 데 돌리고 개혁하는 체하는 모습 보이려는 게 아닌가.”라며 강한 불신감을 내비쳤다.박인제 변호사는 한나라당이 시민단체의 당선운동에 반발한 것과 관련,“한나라당은 ‘당선운동 대상이 될 만한 사람을 내놓겠다.’고 하면 될 일이지 도리어 피해망상적 반응을 보였다.”면서 “상품 불매운동이 펼쳐지면 상품자체를 불신하지 운동하는 사람을 불신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다만 김기식 처장은 지난 2000년 낙선운동 당시를 반성하기도 하면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그는 “당시 부패·인권·선거법 위반 등 의정활동외 부분만 갖고 낙선의원을 선정했던 한계가 있었다.”면서 “사고치지 않고 4년간 지역만 돌아다닌 의원을 배제하려면 반드시 의정활동을 평가내용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또한 “텃밭인 영남에서 물갈이를 하지 않을 경우 이번 공천은 개혁공천이 아닌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한 공천으로 비쳐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당 공천심사위원인 이문열씨는 “한나라당은 우리 현대사에 오래된 큰 배와 같다.많은 짐을 실어날랐지만,시대의 모순과 부조리도 함께 실려있어 침몰하지 않을까 위기의식도 든다.”면서 “모순과부조리를 들어내고,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건전한 보수,건전한 대안이 되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공천에 임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지운기자 jj@
  • 후세인 생포/사담 후세인 영욕의 일생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은 서방국가에는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사탄 후세인’이었지만 아랍권에서만큼은 미국을 위시한 서방 제국주의에 유일하게 ‘맞서는 자’(아랍어로 사담의 의미)로 영웅 대접을 받았다. 군 장교이던 외삼촌의 영향으로 10대 때부터 반외세·반제국주의 사상에 깊이 빠져 있던 후세인은 대학생이던 1957년 범아랍민족주의를 표방한 바트당에 가입한 뒤 이듬해 영국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압델 카림 카셈 총리 암살을 꾀하면서 파란만장한 정치 역정을 시작했다.1968년 바트당의 쿠데타 성공으로 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79년 대통령에 취임한 후세인은 근대화 정책과 정치적 소수파인 시아파와 쿠르드족 탄압 등을 통해 입지를 굳힌 뒤 외부로 눈을 돌렸다.아랍의 맹주가 되려는 야욕으로 80년 이란을 침공,8년간 전쟁을 벌였고 90년 쿠웨이트를 공격,‘전쟁광’이란 딱지를 달았다.두 번의 전쟁과 국제사회의 봉쇄조치는 이라크 경제를 파탄나게 하고 민초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후세인이 24년간독재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데는 지속적인 정적 제거와 대국민 기만전술이 주효했다.후세인은 공포에 기초한 스탈린식 통치술을 숭배했고 이를 실행,‘바그다드의 도살자’로 불렸다.그의 집권 3년간 3000명에 달하는 정적이 목숨을 잃었다.자신의 비리를 폭로한 사위들도 처형,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면 친·소 관계도 따지지 않았다. 그의 지속적인 숙청 작업은 끊임없는 암살 위협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그는 거처를 수시로 옮겨 다니며,외부 노출을 극도로 꺼려 공개 행사에 자신과 꼭 닮은 ‘가짜 후세인’을 내보낸다는 소문도 있었다. 후세인이 독재자이긴 했으나 처음부터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깡패국가’의 지도자는 아니었다.미국은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란의 호메이니 정권을 견제할 요량으로 후세인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미국이 이라크 침공의 구실로 삼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도 미국의 지원 아래 제조·보유된 것이다.화학·세균무기 제조 비법도 미국으로부터 전수받았다.그러나 1986년 이란-콘트라 게이트가 터지면서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이라크는 석유 과잉 생산으로 국제유가를 떨어뜨리는 쿠웨이트에 앙심을 품고 90년 쿠웨이트를 침공,91년의 걸프전 발발을 불렀다.한 달 뒤 미군 특수부대가 쿠웨이트에 진입,걸프전은 막을 내렸지만 후세인은 건재했다. 걸프전 이후 인권 탄압 자행과 더불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한다는 비난을 받아온 후세인은 유엔 사찰을 거부,방해했다.2001년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이라크를 이란·북한과 더불어 ‘악의 축’으로 규정했고 후세인은 세계평화를 위해 제거되어야 할 제1 목표로 낙인찍혔다.그는 2003년 3월 이라크전쟁이 발발하면서 무소불위의 독재자에서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다. 박상숙기자 al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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