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숙청 정치
    2026-02-21
    검색기록 지우기
  • 죄책감
    2026-02-21
    검색기록 지우기
  • TV 공연
    2026-02-21
    검색기록 지우기
  • 문화재청
    2026-02-21
    검색기록 지우기
  • 평가전
    2026-02-2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900
  •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손학규의 무(모)한 도전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손학규의 무(모)한 도전

    2000년 5월 손학규는 한나라당 총재 경선에 나섰다.16대 국회의원 당선자 신분이었다. 당시는 이회창 총재가 막강한 권한을 가진 ‘제왕적 총재’로 군림할 때였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윤환 전 의원과 이기택·신상우 등 쟁쟁한 중진그룹을 공천에서 탈락시킨 ‘2·18 피의 숙청’을 단행한 이 총재다. 누구도 이 총재의 재선출을 의심하지 않는 그런 상황에서 손학규는 겁없이 총재 경선에 나선 것이다. 주변에서 그를 극구 말린 것은 당연한 일. 그럼에도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손학규에게는 그런 무모함이 있다. 결과는 고작 3.6%의 득표율로 꼴찌. 일각에선 탈당을 권유하기도 했으나 손학규는 “내가 한나라당의 주인”이라며 당을 나가지 않았다. 손학규는 그 때도 이 총재의 대세론에 온 몸으로 저항했다. 대세론이 안고 있는 위험성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다녔다. 그러나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7년 후 손학규는 주역이 이회창에서 이명박으로 바뀐 대세론의 맹점과 허구를 또 다시 주장했다. 줄세우기 폐해를 강조하면서 이 전 시장측의 의원 실명까지 거론했다. 하지만 이 역시 먹혀들지 않았다. 어찌보면 그에겐 대세론은 뼈에 사무치는 일이다. 손학규는 1997년 신한국당 대권후보 경선 때 이수성 후보측에 가담하면서 비주류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국회의원 2년과 경기도지사를 지내면서 비주류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으나 입지 구축에는 실패했다. 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의 선택은 무모한 도전인가, 아니면 무한 도전인가. 전자는 실패로 귀결되지만, 후자는 온갖 고통 속에서도 결국에는 성공을 거둘 가능성을 내포한다. 손학규는 지금 황량한 벌판에 서 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다. 더욱이 경선 캠프의 핵심 인사들도 하나둘 떠나고 있다.23일에는 박종희 비서실장이 한나라당 잔류를 선언했다. 동행을 거부할 인사가 더 나올 분위기다. 그들에게는 금배지를 다는 것이 더 큰 가치이고 급선무다. 그게 현실이다. 범여권에서도 점차 그를 견제하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탈당과 관련한 말바꾸기와, 낮은 지지율 때문에 탈당한 것 아니냐는 비판적 시각도 그에겐 커다란 부담이다. 대권병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비아냥도 나온다. 자칫 손학규의 트레이드마크였던 도덕성 훼손마저 우려된다. 그가 언급한 ‘드림팀’ 역시 단순히 기능적 결합에 그친 느낌을 준다. 그래서는 국민들에게 감흥을 줄 수 없다. 현실적으로도 대상자들이 한결같이 손사래를 치는 마당에 더 이상의 진전은 어려운 상황이다. 손학규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는 것도 절박한 문제다. 이명박·박근혜와 너무 비교된다. 그는 싫든 좋든 정치결사체 정도는 이끌어야 할 것이다. 핵심은 조직과 자금인데,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한데 자금에 관한 한 ‘무능력자’에 가까운 게 손학규다. 손학규가 주몽이 될지, 아니면 부여의 영포왕자에 그칠지는 그에게 달렸다. 당장 다음주부터는 그에 대한 주목의 강도가 떨어질지 모른다. 그의 동선이나 진행 과정이 ‘그렇고 그렇네’라는 평가를 받는 순간 존재감은 희미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에워싼 환경은 좋은 편이 아니다. 마의 10% 지지율 돌파도 쉽지 않다. 그가 보여줄 정치력에 따라 산적해 있는 먹구름이 걷히느냐, 더 시커멓게 되느냐가 결정된다. 그는 지금 평균대 위에 서 있다. jthan@seoul.co.kr
  • 美 연방검사 무더기 해임 파문

    미국 법무부가 지난 연말 93명의 연방검사 중 8명을 해임한 배경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4일(현지시간)보도했다. 해임된 연방 검사 중 5명을 불러 지난달 28일 청문을 한 민주당은 연방검사의 대량 해임이 부정부패 사건 수사를 막거나 덜 독립적인 성향의 후임자를 앉히기 위한 의도로 이뤄진 정치적 숙청이라고 비난하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이를 테면 애리조나주의 폴 찰턴 검사는 연방수사국(FBI)관계자들에게 음성기록 진술을 하도록 요구해 난감하게 만들었고, 시애틀의 존 매케이 검사는 법무부 관계자들이 난색을 표하는 범죄 자료의 수집과 분석 등에 관한 정보의 컴퓨터 공유시스템을 추진했었다는 점을 사례로 들었다. 법무부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브라이언 로카스 법무부 대변인은 “연방검사에 대한 해임은 개인적인 업무성과에 대한 문제점을 기준으로 결정됐다.”고 말했다. 피트 도메니치 상원의원(뉴멕시코·공화)은 4일 해임된 검사 가운데 한명인 데이비드 이글레이시아스 검사에게 자신이 지난해 전화를 걸어 당시 진행 중이던 민주당 의원 수뢰사건 수사상황을 물어본 적이 있다고 밝혔다.도메니치 의원은 이날 성명을 통해 자신이 당시 이글레이시아스 검사와 통화를 했으며 수사상황과 시한등을 ‘짧게’ 문의한 바 있다고 밝혔다. 그는 그러나 수사방향등과 관련해 어떠한 압력도 가한 바 없다고 주장했다. 수사가 진행 중인 범죄사건과 관련해 의원이 검사와 대화하는 것은 의원 윤리에 저촉된다. 앞서 이글레이시아스는 자신이 해임된 것은 민주당 의원 수뢰사건 수사와 관련해 2명의 의원들로부터 가해진 압력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밝혀 파문을 일으켰다. 미국 연방검사의 임기는 4년이지만 이유를 막론하고 언제라도 해임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해임 이후 전국적으로 법조계나 행정 관료들 사이에서 해임의 정당성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카터 행정부에서 서부 미시간 지역 연방검사를 했던 제임스 브래디는 이 지역의 마거릿 키아라 검사의 해임과 관련해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정치가 법 문제에까지 개입하려 한다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푸틴식 재벌 길들이기

    푸틴식 재벌 길들이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올리가르흐(oligarchs·과두재벌)’들이 생존을 약속받았다. 조건은 ‘변함없이 충성을 다하라.’는 것이다. 올리가르흐는 러시아에서 로비 등 정경유착을 통해 재벌이 된 부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6일(현지시간)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열린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재계 지도자들간의 회합은 푸틴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자리였다고 8일 보도했다. 이번 회합은 한국의 전경련과 같은 러시아 산업연맹(RSPP) 창립 15주년을 기념해 크렘린 카테리나홀에서 열렸다.FT는 푸틴 대통령이 그동안 재계와 회합을 가졌지만 카테리나홀에서 만난 것은 2002년 이후 5년만이라고 전했다. 푸틴 대통령은 2002년 당시 재계와의 만남에서 최대 석유재벌인 유코스그룹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회장과 날 선 설전을 벌였고 이후 호도르코프스키 회장은 사기 및 탈세 혐의로 구속됐다.‘올리가르흐’ 숙청의 서막이었다. 현재 그는 9년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지만 지난 5일 돈세탁 혐의까지 추가돼 가중 처벌될 전망이다. 푸틴 대통령은 집권 첫 해인 2000년 7월 재계 지도자 21명을 크렘린으로 불러 “(당신들이)법과 조세 의무를 지키고 정치와 거리만 둔다면 당신들의 제국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이후 푸틴에게 반기를 든 재벌들은 모두 몰락했다. 대부분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과 유착됐던 재벌들이었다. 옐친의 측근이자 당시 최대 재벌이었던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모스트 그룹 회장인 블라디미르 구신스키는 이스라엘로 망명했으며, 러시아 최대 상업은행을 소유했던 알렉산더 스몰렌스키도 몰락했다. 또 세계 최대 천연가스 회사인 가즈프롬의 최고경영자(CEO) 렘 비야키레브는 2001년 가즈프롬에서 축출됐다. 미하일 프리드만 알파그룹 회장, 블라디미르 포타닌 오넥심방크 회장 등 푸틴에 충성을 바친 기존 재벌들은 옐친 때보다 오히려 재산을 더 불렸다. 옐친 시절 제1부총리였던 보리스 넴초프는 “푸틴은 중앙집권적인 통제 정책으로 재계를 통제하고 위협하고 있다.”면서 “푸틴에게 충성심을 보인 인사들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재계를 향해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올바르게 인식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의 집권 7년 동안 러시아는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호황기를 누리고 있다. 알파은행 수석 전략가인 크리스 위퍼는 “오늘날 러시아 재벌들은 2000년 푸틴 대통령이 내린 지시를 지키는 것뿐 아니라 자산 일부를 국가를 돕는 데 쓰고, 에너지 등 전략 산업에 사용해야 안전하게 존재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피와 눈물로 쓴 역사’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옛 소련 고려인 출신 인사 81명과 주변 가족들의 육필 수기가 인터넷을 통해 곧 공개된다. 이 수기는 북한 정권 초기 내부 권력투쟁과, 북한과 소련·중국 외교관계를 알 수 있는 생생한 내용이다. 이는 미 의회 도서관측이 장학봉 전 북한 정치사관학교장이 수집한 ‘피와 눈물로써 씨여진 우리들의 력사’란 제목의 수기집을 마이크로필름에 담아 보관하고, 인터넷 열람이 가능하도록 디지털화 작업을 마친 것이다. A4 복사지 950쪽으로, 장씨를 포함해 허가이 전 부수상, 유성철 전 북한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겸 부총참모장, 허가이의 장인 최표덕 전 북한군 땅크(탱크)장갑차 사령관 등 81명의 본인 수기나 유족들이 쓴 일대기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대부분 소련 출신의 고학력자들로, 광복 직후 북한 정권이나 노동당·학교·언론사 등에 다양하게 참여했다가 1950년대 중반 김일성의 권력 공고화 과정에서 숙청당하거나 소련으로 돌아간 사람들이다.워싱턴 연합뉴스
  • [긴급조치 판사 명단 공개 파문] 과거청산 해외 사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30일 긴급조치 위반 사건에 관여한 판사들의 실명 공개를 강행키로 했지만, 각국의 과거사 청산 과정에서 판사가 처벌받거나 공격 대상이 된 경우는 흔치 않다. 2차대전 직후인 1945년 전범 처벌을 위해 연합국이 주도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치 시절 고위 법관 12명이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이 있지만, 자신들이 내린 판결 때문은 아니었다. 이들은 반인권적 전쟁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됐다. 이후 독일 국내 과거사 청산 과정에서 법관들이 사법처리된 적은 없다. 하지만 60∼70년대 언론과 학계에서 나치 정권하 법관들에 대한 책임 논쟁이 불거졌다. 독일이 점령한 동유럽 지역에서 유대 상인이 계란을 매점매석한 혐의로 기소됐을 때 히틀러의 지시에 의해 이 상인에 대해 법정형보다 더한 중형을 선고한 사례 등이 적발됐다. 독일 언론은 “청산 과정에서 법의 잣대가 공평하지 못하고 굴절됐다.”고 혹평했다. 전후 나치 부역자들에 대해 ‘초법적 숙청’으로 대변되는 약식처형을 통해 8000여명의 사망자를 낸 프랑스는 이후 ‘사법적 숙청’을 단행했다. 부역자 재판소에 5만 5000여명이 회부됐고, 이 가운데 6700여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정치·경제·군사·문화계 모두 이 과정에서 검증 대상이 됐지만 법관은 보호됐다. 우리나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모델이 된 남아프리카공화국 진실과 화해위원회는 60년부터 94년까지의 인권침해 상황의 원인과 실태를 조사해 보고서를 만들었다. 정부와 관료들의 행위가 폭로됐지만, 법관과 관련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 진실을 털어놓은 가해자를 사면키로 하는 등 애초부터 위원회가 처벌보다 진실규명에 주력한 탓에 사건의 실체에서 한 발 물러서 있는 법관들에 대한 조사는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동굴’지도자는 나타날까

    [한종태 정치전문기자의 정가 IN&OUT] ‘동굴’지도자는 나타날까

    영국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훌륭한 지도자의 유형을 이렇게 꼽았다. 국정에서 한발짝 비켜선 뒤 온갖 시련과 고초를 겪으며 심신을 단련한 끝에 다시 한번 전면에 부상하는 지도자가 나라를 발전시킨다고 설파했다. 그러면서 토인비는 핍박받는 이스라엘인들의 출애굽을 이끈 모세를 예로 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동굴(洞窟) 비유도 이와 비슷하다. 즉,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동굴에서 살다가 동굴 밖 세상에 대한 궁금증으로 동굴을 떠나, 밝은 세상을 보게 된 지도자가 다시 동굴 속으로 돌아와 동굴만이 유일한 생활터전이라고 믿는 무리들에게 화려한 바깥 세상의 존재를 알리고 그들을 각성시키는 일을 차곡차곡 진행시키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라는 것이다. 중국의 오늘이 있게 한 덩샤오핑이 그랬고 대영제국의 기초를 공고히 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그랬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혁명으로 숙청을 당해 10년 이상 야인으로 지내며 개혁 개방에 대한 신념을 더욱 굳게 한 끝에 중국이 나아갈 방향의 틀을 체계화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딸을 낳았다는 단 한가지 이유로 아버지 헨리 8세가 그녀의 어머니인 앤 블린 왕비와의 결혼을 무효로 하고 사형까지 시키면서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졸지에 서출이 된 것도 그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일. 그러나 그는 이복 오누이인 메리 공주와 에드워드 왕자에 이어 왕위에 오른 뒤 영국을 가장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기초를 닦았다. 우여곡절의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끊임없는 자기 성찰로 나라를 잘 이끈 엘리자베스 1세는 이후에도 훌륭한 지도자의 전범으로 추앙받고 있다. 여의도 정가에서는 ‘너무 쉽게 당선되면 끝이 안 좋다.’는 통설이 있다. 처음 치른 국회의원 선거에서 너무도 쉽게 금배지를 단 의원 치고 의정활동 성적이 뛰어난 사람 별로 없고, 이후 연속 당선에 성공한 이도 그다지 많지 않다는 현실을 빗댄 것이다. 내가 왜 국회의원이 되어야 하고, 의원이 된 후 지역구민과 국민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법안을 만들 것인지 정도는 머릿속에 그리고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어떤 경험과 심신 단련을 했는지, 그리고 성과별 자기관리는 확실하게 하고 있는지도 점검해야 함은 물론이다. 단순히 정파적 이해에 따라 출마하고 특정인 줄서기나 해서는 국민들 뇌리에 오랫동안 기억되는 국회의원이 될 수 없다. 이는 곧 ‘정치인’과 ‘정치꾼’의 차이다.17대에서 탄핵 열풍으로 금배지를 단 탓에 ‘로또 의원’이란 비아냥을 듣는 국회의원의 상당수가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갈라서기 직전에 놓인 여당의 심각한 분열상도 이런 현실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차기 대선후보군 가운데 ‘동굴’ 지도자는 과연 있을까. 후보군마다 이런 시련과 저런 고초를 겪으며 나라를 제대로 이끌 안목을 키웠다고 주장할 것이다. 문제는 국가를 운영할 정도의 위치에서 그런 일을 했느냐가 문제다. 변호사나 언론인, 기업인으로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다. 물론 여기에서 남녀의 차이를 두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모세나 덩샤오핑처럼 훌륭한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은 순전히 국민들의 몫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삶의 질과 직결되는 것이다. jthan@seoul.co.kr
  • [이창구기자의 호찌민 르포] 젊은 노동·시장주의 무서운 ‘베트남의 힘’

    [이창구기자의 호찌민 르포] 젊은 노동·시장주의 무서운 ‘베트남의 힘’

    지난 3일 밤 베트남 호찌민 국제공항. 현지 공항 직원들과 한국 관광객들이 TV 앞에 모였다. 한국과 베트남의 아시안게임 축구 경기가 한창이었다. 한국 관광객들은 “어떻게 베트남에 쩔쩔 맬 수 있냐.”며 분통을 떠뜨렸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이길 수 있는 경기인데 아쉽게 졌다.”는 반응이었다. 베트남의 프로축구 구단이 30여개에 이르고, 다양한 국적의 선수들이 베트남 리그에서 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더 이상 베트남 축구를 ‘동네 축구’로 평가절하하기는 어렵다. ●젊은 베트남의 힘 괄목상대할 변화는 축구뿐이 아니다. 이른 새벽부터 쉴 새 없이 어디론가 달려가는 호찌민 시내의 오토바이 행렬은 베트남의 역동성을 웅변한다. 지난 2일 아침 호찌민의 레전드호텔 지배인에게 “젊은이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도대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일터로 가거나, 공부하러 간다.”는 것이었다. 베트남은 1인당 국민소득(2003년 기준)이 620달러에 불과한 빈국이다. 그러나 경제 중심지인 호찌민시의 1인당 소득은 2500달러에 이르고, 국민 8000만명의 평균 연령이 24.5세로 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라다. 우리나라보다 11살이나 젊다. 앞선 세대의 젊은이들이 독립과 통일을 위해 싸웠다면, 지금은 ‘잘 살기 위해’ 싸우고 있다. 베트남 현지인 1만 3500명을 고용해 나이키 운동화를 생산하는 한국기업의 현지법인인 태광비나의 공장에서 만난 생산직 노동자들은 60∼70년대 서울 구로공단의 노동자들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희망이 가득찼다. 태광비나 유재성 사장은 “직원 가운데는 대학생이 많다.”면서 “학비 마련과 대학원 진학을 위해 월 80달러를 받고 기꺼이 땀을 흘릴 줄 아는 이들을 보면 베트남이 무서워진다.”고 말했다.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를 지원 KOTRA 호찌민무역관에 따르면 베트남은 1986년 대외개방 정책인 도이머이(쇄신) 정책 이후 연 평균 7% 이상의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세계무역기구(WTO)의 150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무역관의 이성훈 관장은 “사회주의국가인 베트남에서 어설픈 자유민주주의 국가보다 시장원리가 더 확실하게 작동한다.”면서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를 제대로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은행 호찌민지점 한용성 지점장도 “공직부패는 찾아볼 수 없다.”면서 “‘인민이 동의하지 않으면 하지 말라.’는 호찌민의 유언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혔다. 베트남은 2000년 국영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부패에 연루된 정치인과 기업인을 대거 숙청해 자본주의의 적은 ‘부패’라는 사실을 국민과 관료들에게 각인시켰다. 외세의 침입과 분단을 겪은 베트남에는 경제 개발이 늦기는 했지만 한국이 부러워할 만한 점이 많다. 남북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로 갈렸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은 겪지 않았다.15인의 정치국원 중에서 당서기장과 대통령, 총리 등 권력의 ‘빅 3’가 나오기 때문에 예측가능한 정치를 한다. 한용성 지점장은 “수많은 전쟁을 치른 베트남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다.”면서 “하지만 이 무관심은 혐오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신뢰에서 나온다.”고 분석했다. window2@seoul.co.kr
  • 상하이 고위직 숙청 가속도

    |베이징 이지운특파원|상하이(上海) 고위직들이 여권이 압수되고 이들의 출국을 막기 위해 공항과 항만에 특수경찰이 배치됐다고 홍콩 언론들이 26일 전했다. 상하이에 대한 보안 강화는 사회보장기금 4억달러를 유용한 혐의를 받고 있는 천량위(陳良宇) 상하이 공산당 서기의 해임 발표 하루 만에 이뤄진 전격적인 조치이다. 홍콩의 대공보는 유럽·호주를 방문할 예정이던 시 정부 대표단 3명의 출국이 취소됐으며 모든 고위직들의 해외 여행도 특별 허가를 받도록 통보됐다고 보도했다. 당 중앙 기율검사위원회 간이성(干以勝) 상무위원회 비서장은 이날 베이징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전국에 8개팀을 파견, 정부 고위관리와 금융기관장들의 부패실태를 조사하고 있으며, 관련자들이 더 나올 수 있다.”고 밝혀 사건의 파장이 더욱 확대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는 “관련자가 누구이든 엄중히 처벌받을 것”이라면서 “규정과 법을 위반한 사안에 대해서는 추호의 관용도 베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천량위는 24명의 정치국원 가운데 1명으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2002년 이래 진행하고 있는 부패 청산과정에서 현직 축출된 최고위직이다. 이와 관련, 조지프 쳉(鄭宇碩) 홍콩 시티대 교수는 “천 서기의 실각은 장쩌민이 자신의 정치적 특권을 유지하거나 막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있지 않다는 점을 의미한다.”며 “이는 장쩌민 시대의 종언을 뜻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로써 후 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중국 정권을 완전 장악에 성공했음을 뜻한다.”고 덧붙였다. 이를 증명하듯, 상하이시 공산당위원회와 시정부의 간부들은 천 서기 해임 결정을 절대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고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이들은 한정(韓正) 상하이 시장을 공산당 서기 대행으로 임명한 결정을 지지하며 상하이의 안정적인 발전과 함께 반부패투쟁을 계속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고 통신은 전했다. 타이완의 한 언론은 정치국의 “또 다른 위원과 가족들이 이번 부패사건과 관련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jj@seoul.co.kr
  • 北 개혁파·군부 주도세력

    북한 내각에서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박봉주와 장성택이다. 내각에 실질적 권한이 부여된 것은 2003년 9월 홍성남의 후임에 박봉주가 임명되면서부터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박봉주 총리로부터 당과 권력기관이 국가경제를 침해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내각에 권한을 주었으면 써먹을 줄 알아야 한다.”면서 강력한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알려진다. 박봉주 총리는 경제관료 출신 가운데 처음으로 김정일 위원장이 측근에 앉혔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현성일 국가안보통일정책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측근 대열에 당과 군뿐 아니라 내각의 인물들이 합세하고 있다는 것은 김정일의 권력구조가 단순한 역할분담의 차원을 넘어 권력분산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분석했다. 장성택 당 중앙위 조직지도부 부부장은 ‘숙청 후 복권’된 파워엘리트로 꼽힌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매제로 ‘2인자’로 불렸던 장성택 부부장은 2003년 공식석상에서 사라졌다가 지난해 다시 모습을 드러내 올해 초 경제시찰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 8명으로 구성된 국방위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비롯해 조명록 1부위원장, 이용무 부위원장, 김영춘 총참모장,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등 4명이 현역 장성이다. 나머지 3명은 당 군수담당 비서인 전병호, 김양건 책임참사, 그리고 백세봉이다. 백세봉은 김정일 위원장의 둘째 아들 정철의 가명이라는 관측도 있다. 국방위원 외에 이명수 총참모부 작전국장, 이용철 조직지도부 1부부장, 황병서 조직지도부 부부장, 원용해 보위사령부 국장이 군부의 실세 4인방으로 꼽힌다. 김정일 위원장은 지난해 131차례의 공개활동을 했으며, 이 가운데 군관련 활동이 70회로 가장 많았다. 박재경 인민군 총정치국 선전부국장(대장)은 김 위원장을 44차례나 수행하면서 김 위원장의 곁을 가장 많이 지켜 관심을 모은다. 박 대장은 2000년 9월 김용순 당시 노동당 대남비서를 수행해 송이버섯을 들고 서울을 방문했으며,68년 1ㆍ21청와대 습격사태 당시 김신조와 함께 남파됐다 살아 돌아간 유일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여의도in] ‘정형근의 인사’ 구설수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이번엔 대규모 ‘정치보복성 인사´로 논란을 빚고 있다. 정 의장은 지난해 말 경선 때 경쟁후보인 공성진 의원을 지지했던 중앙위 임원진 거의 모두를 배제한 인사안을 마련, 최고위원회의에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제된 인사는 공성진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고목훈 부의장과 선거대책본부장이었던 정병국 불교분과위원장, 이정기 건설분과위원장, 김동운 이북5도위원장, 유상열 평화통일분과위원장, 배경호 자문위원, 이호붕·서정숙·이남형 총간사 등 무려 20여명이다. 이 때문에 5·31지방선거를 앞두고 ‘경선 무용론’내지 ‘경선 해악론’까지 나오는 등 파문으로 번질 조짐이다. 한 관계자는 “정 의장이 친정체제 구축을 위해 반대파에 대한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며 “지방선거를 앞두고 일치단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당내 분열을 조장하는 행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지도부에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할 것”이라고 반발했다. 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9)지배층의 편에 선 정치적 예언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9)지배층의 편에 선 정치적 예언

    역사를 보면 기성세력이 예언의 힘을 빌린 경우도 적지 않았다. 민심이 흉흉할 때, 국가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예언서를 끄집어내 “이렇게 하면 아무 문제도 없다.”는 식으로 나왔다.‘정감록’이 주로 권력에 도전하는 사람들 편에서 이용돼 온 것과는 사뭇 다르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기성세력은 주로 국도(國都)에 관한 풍수설을 자주 꺼냈다. 이런 논의를 주도한 이들은 술관(術官)이었는데, 고려 인종 때 백수한과 묘청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자고 주장한 일은 너무도 유명하다. 이른바 묘청의 서경 천도설이다. 이것은 이미 다각도로 다룬 적이 있어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밖에 어느 곳에 별궁(別宮)을 지으면 나라의 수명이 연장된다거나, 양경제(兩京制 수도를 둘로 함) 또는 삼경제(三京制)를 실시해야 나라가 무사태평하다는 견해도 있었다. 일단 이런 주장이 제기되면 술관들 사이에선 격렬한 갑론을박(甲論乙駁)이 되풀이되었고, 그 여파로 한동안 조정이 양분되기도 했다. 민심을 달래려는 정략적인 의도에서 임시방편적인 조치가 강구되기도 했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특히 조선 후기엔 예언서에 관한 논의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이 민심을 가라앉히는데 더욱 효과적이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이것은 기성세력이 예언서를 대하는 근본 태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징후로 봐야 한다. ●강화도 연기설과 술관 백승현 13세기, 고려사회는 몽골의 침입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고종(1213∼1259) 때는 사태가 심각했다. 몽골군의 침략을 피해 조정은 수도 개경을 버리고 강화로 피란을 가게 됐다. 국운이 다했다는 소문이 온 나라에 퍼졌고 신하들의 사기도 저하되었다. 왕은 무엇이 됐든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이 때 풍수를 업으로 삼은 백승현이란 술관이 고종의 뜻을 알아차리고 왕업을 연장시킬 방도를 제시했다.“혈구사(穴口寺)에 들러 ‘법화경’을 강론하시면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삼랑성 등에 궁궐을 짓는다면 영통한 효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백승현은 국교인 불법과 풍수설의 위력을 빌려 사태를 호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고종은 내심 백승현의 주장에 찬동했다. 당시엔 심리적인 방법 외에 따로 마땅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왕은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재상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다음 최고급 술관들에게 백승현의 건의사항 특히, 임시궁궐을 짓는 문제에 대해 찬반토론을 하게 했다. 일대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백승현은 이 자리에서 ‘마타도록’, 불경, 음양서 및 각종 예언을 자유자재로 인용하여 왕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의 견해를 반대하던 경유 등은 말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결국 백승현의 건의대로 삼랑성과 신니동에 궁궐을 건설하게 되었다.(‘고려사’, 권 123) 그러나 궁궐공사는 시작만 하였을 뿐 제대로 추진되기 어려웠다. 많은 인력과 재물이 투입되는 큰 공사인 만큼 도리어 국력이 소진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뒤 고종은 승하했고 원종이 왕위에 올랐다. 몽골과의 전쟁은 아직 지속되고 있었다. 원종5년(1264년) 몽골은 고려의 왕더러 몸소 입조(入朝)하라고 요구하였다. 백승현은 당시의 실권자 김준(金俊)을 통하여 다시 왕에게 아뢰었다.“만약 마리산(摩利山·마니산이라고도 함)의 산성 주변에 못을 판 다음 왕께서 친히 제사 지내시고, 또 삼랑성과 신니동에 임시 궁궐을 만들고, 친히 대불정에서 오성도량(五星道場·해와 달을 비롯한 다섯 별들을 위한 기도)을 마련하신다면 금년 8월이 되기 전에 징험이 나타날 것입니다. 몸소 입조하라는 말은 아예 사라질 것입니다. 또한 삼한이란 이름을 바꿔 진단(震旦)이라 부르면 큰 나라가 조공을 바치러 올 것입니다.” 원종은 백승현의 그 말을 믿고 싶었다. 그래서 내시대장군(內侍大將軍) 조문주를 비롯한 여러 신하들에게 명령해 임시 궁궐을 짓게 했다. 가뜩이나 조정의 세입이 부족한데 궁궐공사를 벌이고 대규모 불사(佛事)를 벌이고 한다는 것은 도리어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하는 관리가 있었다. 예부시랑 김궤였다. 그는 어느 재상에게 자신의 의견을 솔직히 털어놓았다.“혈구산은 사실 흉산입니다. 그러나 요망한 백승현은 그곳에 대일왕(大日王 태양신)이 항상 머무른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는 일찍이 고종께 아뢰기를, 혈구사를 지어 고종의 옷과 혁대를 가져다 두면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한 지 얼마 안 되어 왕께서 승하하셨습니다. 지금 또 감히 요망한 말을 지어내서 임시 궁궐을 짓자 하고, 혈구사에 임금님이 몸소 대일왕을 위해 도량을 차려야 한다고 하니 말도 안 됩니다.” 김궤는 그 재상더러 국정의 실권자인 김준에게 고해, 백승현의 말을 물리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려사’, 권 123) 이 말을 전해 들은 김준은 김궤를 죽이려 했다. 까짓 돈이 얼마 드느냐가 큰 문제는 아니었다. 과연 백승현의 제안이 옳은가, 하는 문제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런 행사를 벌임으로써 고려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백승현의 예언이 들어맞았다고 볼 수 있을까. 그의 주장과는 달리 원종은 몽골에 항복했고, 몽골인 왕비를 맞아들이는 처지가 되었다. 김준도 비명에 횡사했고, 조정은 강화도를 떠나 개경으로 다시 돌아갔다. 고려라는 나라가 완전히 망하지는 않았지만 망한 거나 별반 차이는 없었다. 그렇다면 백승현 효과는 그야말로 일시적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은 아직 살아 있다. 강화도 혈구산에 대일왕, 즉 태양신이 머문다는 백승현의 견해는 현재까지 영향력을 행사한다. 혈구산은 강화도의 주산(主山)인데, 그 남쪽에 마니산이 있다. 그 산 꼭대기에 유명한 참성단이 있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인데, 이를 통해 우리는 강화도가 하늘 또는 태양신과 밀접한 관계로 인식됨을 알 수 있다. 지금도 해마다 참성단에서 채화된 불을 가져다 전국체전에 봉화로 사용할 정도다. 또한 혈구산 등이 최고의 명산이란 백승현의 주장이 후대에 널리 전승되어 ‘정감록’에도 강화도는 전국의 길지(吉地) 가운데 하나로 이름이 올라 있다. ●조선 광해군 때의 교하 천도설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잿더미로 변했다. 그러자 그간 수백 년 동안 잠잠했던 천도설이 다시 조정에 등장했다. 광해 4년(1612) 술관 이의신이 상소를 올려 한양을 버리고 천하제일의 길지인 경기도 교하(交河)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얼마 전 왜란에 이어 몇 차례 반역사건이 발생한 이유, 조정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까닭, 그리고 한양 주변의 산이 황폐해진 것도 한양의 지기(地氣)가 쇠약해진 때문이라고 했다. 광해군은 이 말에 솔깃했다. 허균을 비롯한 일부 관리들도 수도 이전에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힘을 얻은 왕은 예조에 명령해 수도이전 문제를 본격적으로 검토해 보라 했다. 그러나 예조 판서 이정구(李廷龜)는 반론을 전개했다. 우선 풍수설이란 것이 유교경전과 무관해 믿을 만한 근거가 도무지 전혀 없다는 지적이었다. 이의신이 문제로 삼은 한양은 지세가 평탄해 편리하고, 전국각지와 교통망이 발달해 있으며 주변에 비옥한 토지가 많아 물산이 풍부하고 성곽도 잘 갖춰져 있어 흠잡을 데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수도로서의 조건이 완비돼 있어 조선을 다녀간 중국의 많은 사신들도 한양의 수려함을 칭찬했다고 주장한다. “왜란은 국제질서에 관계된 것이며, 역적이 일어난 것은 수도와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도끼를 들고 산에 들어가지 않으면 수풀은 절로 무성해집니다. 국운을 생각한다면 백성을 사랑하고 풍속을 두터이 하며, 내정을 잘 닦고 외적을 물리치는 것뿐입니다. 이 도리에 어긋나면 해마다 도읍을 옮기더라도 위기와 난리만 불러들일 것입니다.” 이런 식의 반론이 고려 공민왕 때는 불가능했다. 고려 고종이나 원종 때도 물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예언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술관들이 검토해야 할 일종의 전문분야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엔 달랐다. 모든 중요한 문제는 성리학자들이 담당했다. 더 이상 풍수설과 도참설이 판단의 기준은 아니었다.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이 절대적인 척도였다. ●발상의 전환 이정구는 바로 그런 입장에서 일체의 예언을 근거 없는 미신으로 간주해 몽땅 부정해 버렸다. 그가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은 공리성과 합리성이다. 이것은 역사상 일대 전환을 뜻한다. 고대의 왕과 대신들은 기꺼이 예언가 노릇을 차지했다. 고려 말까지도 왕과 대신들은 예언의 위력을 빌려 정권의 안정을 꾀했다. 남의 나라 일이라곤 하지만,20세기 후반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국가의 중요한 일을 점성술사와 상의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어쨌거나 17세기 조선의 성리학자 이정구는 예언을 정치의 장에서 몰아냈다. 본심이야 어쨌든 광해군도 이정구의 견해에 반대의사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예언이 주렁주렁 매달린 뽕나무 밭이 변해, 이제 합리성의 푸른 바다가 된 셈인가. 세월이 가면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신돈·공민왕 ‘도선비기’ 이용 망국론 잠재워 요즘 MBC가 고려말 승려였던 신돈을 재조명하는 드라마 ‘신돈’을 방영하고 있다. 그는 과연 ‘희대의 요승’인가 아니면 ‘실패한 혁신가’인가. 고려 말, 공민왕은 몽골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왕은 승려 출신 신돈을 내세워 내정을 혁신하고, 정권을 농단해온 무장(武將) 세력을 숙청하는 등 여러 면에서 새로운 정치를 꾀했다. 그러나 귀족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고, 여러 차례 홍건적과 왜구의 침공이 잇따르는 등 애로가 많았다. 공민왕과 그를 최측근에서 보좌한 신돈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 여러모로 예언을 이용하고자 했다. 신돈과 공민왕이 예언설에 집착하게 된 데는 사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외우내환이 겹쳤고 혁신정치를 추진하느라 불만세력이 발생한데다, 항간에 고려가 곧 망한다는 끔찍한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수를 써서 든 국면전환이 이뤄져야만 했다. 이에 신돈은 ‘도선비기’(道詵記)를 살폈다. 여기서 그는 송도의 운수가 쇠진된다는 설(松都氣衰之說)을 거꾸로 이용했다. 신돈은 왕에게 천도를 권하였다. 왕은 그에게 명령하여 평양으로 가서 지맥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돈은 진심으로 도읍을 옮길 생각을 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시늉을 하며 잠시 민중의 마음을 떠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과연 신돈은 심리전술의 대가였다. 자신이 승려출신이라 유교를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학자들을 널리 포용하기 위해 약간의 잔재주를 피우기도 했다. 공민왕이 성균관을 지으라고 명령하자 그는 여러 유신(儒臣)들과 함께 성균관의 옛 터를 둘러보았다. 신돈은 모자를 벗고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리며 공자에게 맹세했다.“온 마음을 다하여 성균관을 다시 짓겠습니다.” 공민왕 18년(1369), 신돈은 그동안 자신이 추진해온 개혁정치가 한계에 도달하자 또 다시 천도론을 펼쳤다. 이번에는 평양이 아니라 충주였다. 공민왕은 그에 반대했다. 신돈에 대한 의심을 노골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궁지에 몰린 신돈은 핑계를 찾아냈다. 개성은 바닷가에 가까운 관계로 왜구가 쳐들어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내륙지방이자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한 충주가 수도로 적격이란 것이었다. 공민왕은 여러 생각 끝에 교서(敎書)를 내려 수도 문제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정리했다.“옛날에 우리 태조는 매번 소해, 용해, 양해 그리고 개해마다 삼소(三蘇)를 돌아가며 머물렀다. 나도 장차 평양에 갔다 금강산을 거쳐 충주에 머물려고 한다.”서울은 개성으로 묶어 두되 평양, 금강산 및 충주를 이른바 세 군데 명당으로 삼아 돌아가며 머물겠다고 한 것이다. 왕의 원거리 순행은 막대한 비용이 지출되는 큰일이었다. 여행경비가 만만치 않은 것은 물론이고, 일행이 머물 시설을 새로 짓는 문제, 도로를 닦는 작업이 뒤따랐다. 더욱이 왕은 자신이 머물 이궁(離宮)은 물론 죽은 왕비를 위해 공주혼전(公主魂殿)까지 짓게 하였다. 그 바람에 평양과 충주의 백성들은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국운을 연장해 보겠다고 벌인 공사 때문에 자칫하면 민심이 이반되어 도리어 국운이 위태해질 가능성마저 커졌다. 얼마 후 공민왕은 자신의 결정이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책동한 신돈을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이때를 기다린 술관 진영서가 왕에게 아뢰었다.“요즘은 한낮에도 태백성이 보입니다. 게다가 흉년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길하고 움직이면 흉합니다.” 이 말을 듣고 왕은 어째서 이렇게 늦게 그런 사실을 아뢰느냐며 평양과 충주 순행계획을 모두 파기해 버렸다. 모든 공사가 중지된 것은 물론이다. 공민왕은 남달리 영리했지만 본래 의심이 많고 잔인한 성격이었다 한다. 제아무리 심복 대신이라도 권력이 커지기만 하면 꺼려해서 반드시 제거했다. 신돈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역모를 꾸몄다는 죄명으로 왕은 신돈을 없애 버린다. 그러던 왕 역시 어느 신하의 칼끝에 쓰러진다. 공민왕과 신돈은 한 때 개혁정치의 동반자로, 갖은 예언설까지 끌어다 국운을 연장하려 애썼지만, 실은 제 한 목숨도 온전히 지켜내지 못했다.
  • 儒林(496)-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18)

    儒林(496)-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18)

    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18) 평생 지기였던 성혼에게 보낸 율곡의 편지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과거를 보는 한가지 길로 노친을 봉양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뜻을 굽힌 것이지 감히 가난으로 인해 녹봉을 구하는 것을 공맹의 바른 맥으로 삼은 것은 아니라네.” 편지의 내용으로 미뤄보면 성혼이 율곡이 과거를 보아 급제하여 ‘녹봉을 구하는 짓’에 전념한다고 비판하자 이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율곡은 성혼에게 자신이 과거를 보는 것은 노친, 즉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한 방편일 뿐 ‘공맹(孔孟)을 버리고 녹봉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율곡의 이러한 변명은 그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퇴계의 처신과 매우 흡사하다. 퇴계 역시 자신의 평생 과업이 벼슬의 길이 아니라 학문의 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다만 늙은 어머니가 가난으로 고생하고, 가세가 궁핍하자 어쩔 수 없이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나섰던 것이다. 이러한 퇴계의 심정은 그의 행장기에도 자세히 실려 있고,53세 때 남명(南冥) 조식(曺植)에게 보낸 편지에 절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나는 집이 가난하고 모친이 늙으셔서 억지로 과거를 보아 녹봉을 받게 되었습니다.…그 뒤 병은 더욱 깊어가고 또 세상에 나가 일할 만한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안 뒤에야 비로소 뉘우치고 물러나 옛 성현의 글을 더욱더 힘써 읽어보니 이전의 나의 학문방향과 처신한 것이 모두 옛날사람에 비해 크게 어긋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두려운 마음으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닫고 그들을 따르고자 길을 바꾸어 노년기의 삶을 수습코자 하였습니다.…” 퇴계가 집이 가난하고 모친이 늙으셔서 억지로 녹봉을 마련하기 위해 벼슬길에 올랐다면 율곡 역시 집이 가난하고 노친을 봉양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올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율곡의 도의지우(道義之友)였던 성혼은 왜 그토록 율곡이 과거를 보아 입신출세하는 것을 만류하였던 것일까. 율곡의 생애를 논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단 한사람의 벗 성혼. 성혼이 없었더라면 천재 율곡은 대정치가로만 성장하였을 뿐 편지의 내용처럼 공맹의 바른 맥은 끊겼을지도 모른다. 성혼은 율곡을 평생 동안 학문의 길을 병행케 채찍질하였던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퇴계가 율곡의 정신적 스승이었다면 성혼은 율곡의 정신적 도반(道伴)이었다. 그렇다면 성혼은 어째서 율곡이 녹봉을 받는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그토록 반대하였던 것일까. 그것은 그 당시의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음이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정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사림파들이 정치의 개혁을 부르짖다 구세력들에 의해 숙청당하였던 비극적인 사건인 기묘사화가 일어난 것이 중종14년(1519년). 율곡이 태어나기 17년 전의 일이었으나 율곡의 청년기에도 여전히 어두운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8)정치적 야심가들과 ‘정감록-허균과 유효립’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8)정치적 야심가들과 ‘정감록-허균과 유효립’

    한국의 정치적 예언서는 권력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정감록’은 그 대표적인 경우인데, 그 기원은 실로 오래됐다. 신라 말 풍수예언의 대가 도선국사가 고려태조의 아버지에게 바쳤다는 ‘봉서’(封書)가 그것이다. 도선은 하늘의 명을 받아 송악에서 왕이 배출될 줄을 미리 알았다. 그는 한 편의 예언서를 밀봉한 다음, 왕건의 아버지에게 바쳤다. 훗날 고려 태조는 예언서를 펼쳐 보고 자신에게 천명이 있는 줄 알게 되었다 한다. 이것은 고려 초기 최유청이 지은 글에 자세히 나와 있다. 도선이 전해준 ‘봉서’에 힘입어 왕건이 고려의 성립을 쉽게 정당화할 수 있었다. 역사상 왕건만큼 운이 좋은 경우는 드물었다. 후세에 많은 사람들이 예언을 내세워 대권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허균(許筠·1569~1618)과 유효립(柳孝立·1579~1628)의 경우도 그랬다. 그들 두 사람은 거사에 앞서 각기 자신들에게 유리한 예언을 조작해 널리 유포했다. 역사상의 야심가들이 예언을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게다가 그들이 퍼뜨린 예언은 직접 간접으로 ‘정감록’에 스며들어 있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끈다. ●허균과 유효립 허균은 우참찬(정2품)이란 고위직에 오르기까지 했으나 세평은 별로 좋지 않았다.“허균은 천지 사이의 한 괴물입니다.” 광해 10년(1618) 대간(臺諫)들이 허균을 탄핵할 때 나온 말이다. 상소문에는 허균이 평소에 저지른 온갖 악행이 고발되었다. 그는 상중(喪中)에도 창기를 끼고 놀았으며, 예언을 조작하고, 난리를 꾸미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는 비난이다. 과장된 점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통용되던 도덕 기준을 가지고 보면 그에게 문제가 있긴 했다. 그는 본래 조정의 실권자 이이첨과 사이가 멀었다. 소문에 따르면, 이이첨의 집엔 머리가 큰 뱀이 하나 있다 했다. 허균은 그 뱀이 이이첨에게 죽임을 당한 최영경과 김직재의 귀신이라고 풀이했다. 허균은 이이첨을 저주했던 것인데 광해군 5년(1613) 이른바 ‘칠서(七庶·7명의 서자)사건’이 일어나 자기의 처신이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이이첨에게 매달렸다. 허균이 높은 벼슬을 하게 된 것은 변절의 대가였다. ‘칠서사건’에는 평소 허균이 가까이 하던 서울 양반의 서자들이 모두 관련되었다. 그들은 광해군에게 서얼 차별을 없애 달라고 호소했으나 뜻이 이뤄지지 않자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도적질을 하였다. 그러다 경상도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의 은을 약탈한 사실이 적발돼 모두 사형을 당했다. 대북파는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정권을 독점하려 했다. 서인과 남인이 서자들을 앞세워 광해군의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며 사건을 조작해 정적들을 처단했다.‘칠서’와 가까웠던 허균은 신변의 위기를 느낀 나머지 이이첨에게 붙었다. 허균의 벼슬길은 트였다. 그러나 선비들은 허균의 처사를 비루하게 여겨 틈만 나면 공격해댔다. 약점을 잡힌 허균은 늘 우울하게 지냈다(실록 광해 6년(1614) 10월10일 기축). 그러나 그만한 처지도 유효립과 같은 사람이 보기엔 부럽기 그지없었을 테다. 허균이 처단되고 한참 지나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광해군이 축출되고 그 아래서 최고 실권자로 행세하던 이이첨, 박승종 및 유희분이 일거에 숙청되었다. 유효립은 바로 그 유희분의 친조카였기 때문에 연좌되어 충청도 제천으로 유배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로 남부러울 것이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울분을 참지 못한 유효립은 인조반정 자체를 부당한 역적행위로 규정하고, 유배지에서 역 쿠데타를 준비하였다. 그는 이미 폐위된 광해군을 상왕으로 모시고 인조의 숙부인 인성군공(仁城君珙)을 새 왕으로 추대할 계획이었다. 대북파의 복권을 위해서였다. ●유효립이 조작한 예언과 ‘정감록’ 예로부터 야심가들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예언을 조작하곤 했다. 인조 초년에 발생한 유효립 역모사건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유포된 예언 중에는 ‘정감록’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유효립은 강원도 원주 치악산에 담화(曇華)라는 승려와 무척 친했다. 유효립의 사주를 받은 담화는 옛날 도선국사가 창건한 전남 광양의 옥룡사(玉龍寺)로 가서 “개해(戌年)와 돼지해(亥年)에 사람이 상하는 화가 발생한다. 그러면 범해(寅年)와 토끼해(卯年)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구절을 비석에 남몰래 새겨 넣었다. 인심을 선동하기 위해서였다. 그밖에도 담화는 예언서를 조작해 “쥐해(子年)와 소해(丑年)에는 안정되지 않다가 범해(寅年)와 토끼해(卯年)에 패한다.”라든가 “용해(辰年)와 뱀해(巳年)에 인성(仁城)을 얻는다.”는 대목을 삽입했다. 담화가 즐겨 이용한 편년체 예언방식은 18세기 이후 예언서의 기본형이 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정감록’에도 자주 발견된다. 그런데 담화가 ‘인성´을 인성군 이공으로 해석하였던 관계로, 강원도 원주 지방 사람들은 머지않아 인성군이 즉위할 것으로 믿고 큰 기대를 걸었다 한다. 유효립과 담화 등이 퍼뜨린 예언 중에는 새 임금이 등극할 시기를 “계룡산의 돌들이 흰색으로 변하고 거친 개펄에 배가 다닐” 때라고 했다. 신기하게도 이 구절은 현재 ‘정감록´의 ‘감결’에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계룡산의 돌들이 흰색으로 변하고 청포 죽이 흰색으로 변한다. 거친 개펄에 조수가 일어 배가 다니며 누런 안개와 검은 구름이 일고 붉은 기운이 삼일 동안 감싼다.”는 구절이다. 역시 ‘정감록’의 일부인 ‘징비록’에도 “진인이 남해에서 계룡으로 오면 창업을 알 수 있다. 말세가 되면 계룡산의 돌들이 흰색으로 변하고, 거친 개펄에 배가 다니며, 목멱산의 소나무가 붉게 변하고 삼각산의 모양이 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미 여러 차례 강조했듯,‘정감록’은 역사상 등장한 한국의 수많은 예언들이 모여서 이뤄진 호수다. 그 일부는 결과적으로 유효립 등이 목숨과 맞바꿔 조작한 예언들이다. 사실 계룡산의 돌이니, 개펄의 배 또는 용의 해 따위는 ‘정감록’ 가운데서 핵심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앞의 두 가지는 앞으로 세상이 바뀔 조짐을 보여주며, 마지막 것은 진인이 나오는 시기를 점치는 것이라서 중요하다. ●허균이 조작한 예언과 ‘정감록’ 그의 반대파들이 보기에도 허균의 문재(文才)는 뛰어났다. 그는 붓만 손에 들면 수천 마디의 글을 막힘없이 써 내려갔다 한다. 특히 위서(僞書·가짜 책) 짓는데 취미가 있어 산수참설(山水讖說)과 선불이적(仙佛異迹·신선과 부처의 기이한 행적) 등을 멋대로 꾸몄다 한다. 허균의 위작은 그가 평상시 지은 글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허균은 ‘산수비기’(山水秘記)라는 예언서를 읽다가 거기에 본래 없던 내용을 보태 썼다. 조선의 첫째 수도는 한(漢), 둘째는 하(河), 셋째는 강(江), 넷째는 해(海)라고 조작해 넣었다 한다.‘한’은 두말 할 나위 없이 한양이었다. 그리고 ‘하’는 경기도 교하(交河)를 가리켰다.‘강’과 ‘해’는 어디에도 밝혀져 있지 않으나 ‘강’은 아마도 계룡산이 있는 금강을 뜻하지 않았을까.‘정감록’의 ‘감결’을 보더라도 한국의 수도는 한양, 계룡산, 가야산, 전주, 개성 등으로 몇 차례 더 바뀐다고 되어 있다. 허균은 예언서를 조작해 우선 인심을 뒤흔든 다음, 영창대군의 외척인 김제남과 공모해 서울을 교하로 옮기려 했다. 이것은 ‘칠서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그러나 허균은 그에게 씌워진 이런 혐의를 강력히 부정한다.‘산수비기’를 읽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법률상 엄격히 금지돼 있어 집안에 들여놓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 뒤에도 허균은 도성의 인심을 동요시키기 위하여 매일 밤 부하를 시켜 남산에 올라가 고함을 지르게 했다.“서쪽의 도적이 이미 압록강을 건넜다.” “유구(琉球) 사람들이 바다 가운데 섬에 숨어 있다.”는 식이었다. 남북 양면에서 외적이 쳐들어올 기세란 거짓 소문이었다. 특히 유구는 조선에 쌓인 원한이 있어 군대를 보내 섬 속에 숨겨둔 채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주장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허균은 조선을 멸망시킬 군대가 섬에 있다는 예언을 조작해 널리 퍼뜨렸던 것인데,‘정감록’에도 비슷한 내용이 발견된다. 오랑캐인지 왜적인지 구분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바다에서 쳐들어 온다고도 했고, 새 나라를 일으킬 진인이 섬에서 군사를 이끌고 나온다고도 했다. 그밖에도 그는 다른 예언을 지어 전파시켰다.“성은 들만 같지 못하고 들은 멀리 도망가는 것만 못하다.”는 식이었다. 이 역시 ‘정감록’ 에 약간 변형된 형태로 남아 있다. 활활(活活 또는 闊闊), 궁궁(弓弓), 밭(田) 또는 소나무(松)가 난세에 가장 유리하다는 구절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허균은 부하들을 시켜 남산의 소나무 사이에 등불을 걸어 놓고 “살고 싶은 자는 피난을 가라.”고 소리쳤다 한다. 이런 소동으로 인해 도성 인심은 몹시 어지러워졌고 실제 도성을 떠나 피난을 가려는 인파가 길을 메웠다고 한다. 당시 한양 주민은 이미 임진왜란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허균이 조작한 외침 예언에 심리적으로 크게 동요를 일으켰다. 아닌 게 아니라 광해 8년(1616)부터 북방이 어수선했다. 만주의 여진족들이 청나라를 일으켜 중국 대륙의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여진족들은 건주까지 밀려들어 국내 인심이 흉흉하였다. 바로 그때 허균은 변방이 위급하다며 거짓 예언을 조작했고, 익명으로 된 글을 지어 어느 해 어느 곳에서 역적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등 실로 터무니없는 예언을 퍼뜨렸다. 반란에 관한 허균의 예언은 18세기 이후 ‘정감록’에 여러 차례 기록된 ‘삼국분국설’ 즉 특정한 시기에 나라가 세 토막이 나고 만다는 예언과 유사하다.‘분국설’의 기원이 허균에게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끼친 영향이 결코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역자의 동지들 허균이든 유효립이든 그들이 일으킨 반역사건에는 다종다양한 여러 인사들이 관련되었다. 유효립 사건의 경우는 처형된 공범 수가 무려 50명을 헤아렸다. 그 가운데는 전 현직 관리는 물론 궁중의 내시와 화원(畵員)까지도 끼여 있었다. 이런 사건엔 늘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승려들도 상당수 포함되었다. 그 점에서는 허균의 역모사건도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위에 말한 부류 외에도 무사와 하인들도 다수 가담했다. 허균의 경우엔 한두 가지 이색적인 취향이 도드라져 보인다. 그는 평소 정도전(鄭道傳)을 흠모하여 “현인(賢人)”이라 칭찬했다 한다. 정도전은 왕자의 난 때 태종 이방원에게 희생된 고관이었다. 그는 명실 공히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공신이었으나 권력투쟁에서 실패해 역사에 오명을 남긴 불우한 인물이다. 허균은 바로 그 정도전을 사모해 ‘동인시문(東人詩文)’을 정리할 때 그의 시를 가장 먼저 실었다. 혹시 허균은 정도전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또 하나, 허균은 재주가 비상한 서자들과 가까웠다. 특히 처조카인 서자 심우영(沈友英)을 몹시 아꼈다. 심우영과 함께 ‘칠서사건’의 주범이던 서양갑과도 무척 친했다. 허균은 서양갑에게 석선(石仙)이란 자를 지어 주기도 했는데, 전설에 등장하는 신선 황초평(黃初平)이 돌을 양으로 둔갑시켰다는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평소 허균은 주장하기를,“오늘날 영웅은 서석선(徐石仙)뿐이다.”라고 했다. 물론 허균이 친하게 지냈던 서자들은 글재주가 탁월해 장안의 명망가로 통하던 인물들이었고, 서울의 양반들 중에는 그들 서자와 사귀는 사람들이 많았다. 허균만 그들과 친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 해도, 현실세계에서 버림을 받은 재주 있는 서자들, 그리고 비명에 죽은 정도전 같은 인물을 허균은 유달리 좋아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는 반대파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허균은 자신의 신변안전을 위해 ‘칠서사건’ 이후 서자들을 비롯한 비제도권 인사들을 별로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광해군 때 승려들이 난리를 일으키려고 모의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많은 사람들은 입을 모아, 허균이 꾸민 일이라고 비난했다. ●허균이 정말 반역을 꾀했을지는 의문 앞에서 예로 든 허균과 유효립은 서로 정치적 노선이 달랐다. 허균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자신이 직접 왕이 될 생각이었다 한다. 그에 비해 유효립은 대북파의 재집권을 노렸다. 인조를 쫓아내고 광해군을 상왕으로 복권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주모자인 유효립은 자신의 ‘역모’가 정당하다고 굳게 믿었으므로, 체포된 뒤에도 떳떳했다. 그 태도에 놀란 조정 대신들은 “효립의 진술은 언사가 매우 흉악하고 버릇이 없어 차마 읽을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먼저 목을 베게 하소서.”라고 우선 처형부터 하자고 인조를 졸라댔다. 왕은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고, 유효립이 펼친 주장이 후세에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 두려워 “그가 진술한 내용을 불살라 버려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허균의 역모사건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실록’에 나오는 여러 기록을 정리해 보면 그가 은밀히 무사를 모은 것과 승군(僧軍)을 동원한 일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은 뚜렷하지 않다. 당시 허균은 군사를 이끌고 인목대비의 처소로 쳐들어가 먼저 대비를 제거한 다음 광해군에게 아뢸 계획이었다 한다. 왕도 이미 그 계획을 허락하였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때 갑자기 조정의 실권자인 삼창(三昌·이이첨, 박승종 및 유희분)이 왕에게 허균이 반역을 꾀한다고 밀고했다. 대비를 없앤다는 구실 아래 허균이 역모를 일으킬 거라는 주장이었다. 그 말에 놀란 인조는 사건을 엄히 조사하게 했다. 아무리 보아도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는 증거는 명백하지 않다. 그는 대북파의 우두머리 이이첨을 상대로 인목대비의 폐모를 누가 먼저 할 것인가를 둘러싼 경쟁을 벌였다. 이이첨은 공을 빼앗길까봐 두려움을 느꼈고, 허균에게 반역죄를 씌워 반전을 도모한 것으로 짐작되기도 한다(실록 광해10년 8월21일 정축). 그때 허균을 궁지로 몰아넣는데 크게 조력한 이는 허균의 제자였던 기준격이었다. 기준격의 아버지 기자헌은 애초 허균의 친구였다. 그런데 인목대비에 관한 문제로 그들의 우정은 금이 갔다. 허균은 기자헌을 죽이려 들었고, 분노한 기준격은 허균의 과거 언행 가운데 문제 삼을 만한 부분을 꼬투리 삼아 공격했다(광해 9년 12월26일 정사). ●예언을 통한 집권의 정당화는 오랜 전통 어쨌거나 허균과 유효립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예언을 통해 기성의 정치세력에 반항하다 실패했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성사되었더라면 어찌 되었을지는 빤하다. 때로 예언은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이 예언을 바꾸는 경우는 더욱 많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儒林(481)-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3)

    儒林(481)-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3)

    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3) ‘질풍노도’의 계절은 비단 율곡의 한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 나라도 미친 바람과 성난 파도의 질풍노도였다. 12세의 어린나이로 왕위에 오른 명종은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윤원형일파의 소윤이 권력을 장악하여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되었다. 이것이 바로 을사사화. 이 사화로 인하여 윤임, 유관 등은 사사되고, 이언적, 노수신을 유배시켜 불과 5,6년 사이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는 참극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명종은 20세 되던 해에 어머니로부터 수렴청정을 거두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명종은 자신의 세력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채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전횡 속에서 간신히 왕위를 지켜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외척에 의한 권력독점은 양반관료층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나라는 안팎으로 소용돌이에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1555년 세견선(歲遣船)의 감소로 곤란을 겪은 왜인들이 전라도 지방을 침입하는 을묘왜변까지 일어나게 되자 민심은 흉흉하게 되었으며, 여진족의 빈번한 침범으로 북쪽지방도 불안에 빠져 나라 전체는 표류하는 배처럼 극도의 혼란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실록에 의하면 이러한 난세를 반영하듯 명종13년에는 한낮에 태백성이 수시로 나타났다고 전하고 있다. 태백성은 저녁 무렵 서쪽하늘에서 유난히 빛나는 금성(金星)을 이르는 말로 이 별이 한낮에 수시로 나타났다는 말은 국가의 변란을 예고하는 천재지변의 표징이었던 것이다. 또한 실록은 4월30일 밤에도 ‘유성이 남방의 하늘가로 들어가는데, 형상은 배(梨)와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1,2척쯤 되었으며, 붉은 적색을 띠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7월20일에는 평안도 평양부에 혜성이 서북방 하늘가에 나타났는데, 꼬리길이는 3,4척쯤 되었고, 모양은 흩어놓은 실과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이러한 자연현상의 괴변뿐 아니라 생명현상으로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돌연변이가 발생하였다.8월15일에는 전라도 무장(茂長)의 민가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여 날개를 치며 새벽에 울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금산(錦山)의 민가에서는 한 여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왼쪽 겨드랑이로 출산하였다는 괴현상도 출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 부패한 사회에 대한 불만과 백성들의 민심은 마침내 큰 난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이익(李瀷)이 ‘성호사설’에서 홍길동, 장길산과 더불어 3대 의적으로 평가하였던 임거정(林巨正)의 난이었던 것이다. 임거정은 임거질정(林巨叱正)으로도 불리는 경기도 양주출신의 백정으로 흔히 소리나는 대로 임꺽정으로 불리던 도둑으로 처음에는 민가를 횡행하여 도적질을 일삼다가 차츰 세력이 커지자 황해도 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의적으로까지 성장하였던 것이다.
  • 약산 김원봉/이원규 지음

    약산 김원봉(1898∼1958). 약관의 나이에 의열단을 창단하고,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치열한 한일투쟁을 벌였던 인물이다.1920년대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은 임시정부의 존재는 몰라도 김약산과 의열단은 알고 있을 정도로 그는 항일투쟁의 ‘스타’였다. 그러나 이같은 화려한 이력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약산은 해방 후 남과 북 양쪽 모두에서 거의 잊혀진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북이 분단되면서 북쪽을 선택했던 그는 북한 정권에서 국가 검열상, 노동상 등을 지냈으나, 결국 숙청되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선택을 떠나 일제 강점기에서 치열했던 항일 투쟁 업적과 삶의 모습은 제대로 조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소설가 이원규가 쓴 ‘약산 김원봉’(실천문학사 펴냄)은 약산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선택을 넘어 일제 강점기에서 치열했던 그의 항일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삶을 재조명한 책이다. 김원봉과 의열단원들이 국내외에서 벌였던 수많은 거사를 소설적 상상력을 덧붙여 재구성했다. 책엔 약산뿐만 아니라 의열단선언문을 작성해준 단재 신채호, 약산을 라이벌로 인식하면서 임정을 이끌어간 백범 김구, 남경 금릉대학 선배로서 그를 격려해 주었던 몽양 여운형 등 한국근대사와 독립운동사에 등장하는 무수한 실존인물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1만 5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코드로읽는책]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이덕일 지음

    참여정부 출범후 최대의 화두는 뭐니뭐니 해도 ‘개혁’. 개혁의 필요성이야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 주체와 대상, 방식과 내용에 있어서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갈등과 불신도 적지 않다.‘개혁피로증’이 만연돼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는 개혁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역사 속 당대 엘리트들이 경험한 개혁의 성공과 좌절 속에 현재 우리의 자화상이 담겨 있지는 않을까? ‘한국사로 읽는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이덕일 지음, 마리서사 펴냄)은 이같은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시도됐던 개혁의 실상을 살핀 책이다. 신라 김춘추에서 백제 의자왕, 조광조, 태종, 광해군, 정조와 대원군, 갑신정변으로 이어지는 당대의 개혁정책들이 현 정부의 개혁정책과 대비되면서 개혁이란 거대한 역사적 스펙트럼을 그리고 있다. 필자는 이른바 ‘개혁피로증’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개혁이 아무리 오래 계속되어도, 진정한 개혁에 피로를 느끼는 국민은 없다는 것. 피로한 것은, 개혁이 특정 세력의 사익 추구를 위한 것일 때, 본질적 부분은 간과한 채 현상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고정된 과거에 묶여 미래의 발목을 잡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책은 가장 성공한 개혁으로 조선 정조의 개혁을 꼽는다. 이는 정조가 뒤주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수에 매달리지 않고 정적 포용과 미래지향적 정책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 개혁대상인 노론은 일부 강경파만 신속히 숙청하고, 나머지는 현실적 정치 세력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극단적 반발을 막았다. 이를 바탕으로 탕평책을 실시, 이가환, 정약용 등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남인을 중용하였으며, 규장각을 설치해 사실상 젊은 관료들에 의한 개혁 추진기구로 삼았다. 박제가, 유득공 등 서얼 출신들을 파격적으로 등용하고, 재위 말년 공노비를 해방한 것은, 폐쇄된 사회에서 개방된 사회로 나아가는 조선의 시대적 과제와 사회의 변화욕구를 정확히 읽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삼국을 통일한 김춘추와 김유신도 대표적 개혁 성공세력으로 꼽는다. 김춘추는 삼국이 통일되기 불과 20여년 전 백제 의자왕으로부터 대야성(합천)을 함락당하며 성주였던 사위와 딸을 잃는 치욕을 당한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김유신과 힘을 합쳐 ‘삼국통일’이란 원대한 ‘어젠다’를 수립하게 되며, 이를 위해 20여년간 고군분투한 끝에 결국 목표를 이루게 된다.‘어젠다’가 개혁 성공을 위해 필수적인 핵심 키워드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민중이 등을 돌리면 어젠다든, 포용정책이든 개혁이 성공하기 어렵다.120년 전 갑신정변 세력들이 ‘근대적 국민국가’란 훌륭한 어젠다를 세웠음에도 외세 일본의 힘을 빌리는 바람에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해 3일천하로 만족해야 했다. 반면 조선 중기,‘대동법’이 막강한 수구기득권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민중생활과 밀접한 조세평등이 그 본질이었기 때문이다. 책에서 소개되는 개혁의 사례는 그것이 성공한 것이든 실패한 것이든 어디까지나 지나간 과거의 사례에 불과하다. 그래도 개혁을 놓고 갈등과 반목으로 혼란을 겪은 우리에게 어렴풋이나마 방향을 제시해 주지는 않을까?1만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논술이 술술] 시사키워드/과거사 청산

    [논술이 술술] 시사키워드/과거사 청산

    이른바 ‘과거사법’으로 불리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안’이 지난 3일 국회에서 통과됐다. 과거사법은 일제 강점기 이후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주요 과거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법안이다.4대 개혁법안의 하나로 지난해말 타결 직전까기 갔다가 조사범위와 조사위원회 구성, 조사위원 자격조건 등을 놓고 여야가 대립하는 바람에 국회 통과가 미루어져 오다 극적인 타결을 보게 된 것이다. 이 법이 암울했던 과거의 의혹들을 풀어줄 수 있는 점에서 기대를 모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권위주의 정권 때 국민들을 탄압했던 인권침해 사건들의 진상이 규명될 수 있을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 법이 여야의 타협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반쪽자리 법안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일부 강경파 의원들은 인혁당 사건 등 중요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수 없는 법이라며 발효도 되기전에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사법의 내용 과거사법이 규정하고 있는 진실규명의 범위는 다음과 같다.▲일제 강점기 또는 그 직전의 항일독립운동 ▲일제 강점기 이후 우리나라의 주권을 지키고 국력을 신장시키는 등의 해외동포사 ▲광복 이후 한국전쟁 전후의 불법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 ▲광복 이후의 헌정질서 파괴행위나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발생한 사망·상해·실종사건, 그 밖의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과 조작의혹 사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는 세력에 의한 테러·인권유린·폭력·학살·의문사 ▲위원회가 진실규명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사건 ▲진실규명 범위에 해당하는 사건이라도 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은 제외하되, 위원회가 의결한 재심의 사유가 있는 사건 등이다. 이와는 별도로 지난해 말 통과된 ‘반민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에 따른 친일진상조사위 활동과 국가정보원 등이 자체적으로 진행중인 진실규명위원회 활동도 본격화할 전망이다. 이번에 국회에서 과거사법이 통과됨으로써 ‘올바른 과거사 되찾기’가 궤도에 오르는 셈이다. 하지만, 얼핏 조사 대상이 광범위해 보여도 여야의 생각이 달라 대상 선정을 놓고 대립하고 다투는 일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조사 과정에서 좌우 대립 또는 색깔 논쟁이 불거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여당은 좌익의 독립운동에 대한 재조명과 발굴, 김구 선생 암살사건, 장준하 선생 의문사, 유서대필 등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주장하고 있는 반면 한나라당은 김신조 간첩 사건이나 이승복 어린이 사건, 이한영 피살사건 등을 조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편, 국가정보원과 경찰, 검찰 등 국가기관의 과거사건 조사활동과 중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한다. ●뒷탈 많은 과거사법 특히 여당과 민주노동당의 일부 의원들은 이 법안이 지도부의 막판 타협으로 ‘누더기 법안’이 되었다고 비판하고 제정 철회, 또는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국가공권력에 의한 부당한 인권 침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한다는 입법 취지에 어긋난다는 주장이다. 이들이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는 부분은 법원의 확정 판결이 난 경우는 조사대상에서 제외하되, 조사위원회가 재심사유에 해당한다고 인정할 때에만 재조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한 규정이다. 민·형사소송법의 재심 조건이 매우 엄격해 사실상 확정판결이 난 사건은 재조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혁당 사건이나 5·18 민주항쟁 등은 재조사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또 조사 범위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거나 적대시하는 세력에 의한 테러 등’을 포함한 조항은 국가보안법이 애매한 규정으로 민주화운동가를 탄압했던 것과 같은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위증을 검증하고 처벌할 제도적 장치인 청문회와 진상규명을 위해 필수적인 압수·수색 규정이 빠진 점, 위원 자격을 변호사·공무원·교수·성직자로 못을 박은 점, 교수의 경우 ‘전임 10년 이상’이라고 제한해 특별법을 마련하는 데 기여한 교수 대부분이 배제된 점 등도 문제점으로 꼽고 있다. 강경파 의원들은 이에 따라 이번 법이 ‘당리당략의 산물’‘밀실 논의로 만든 법’‘민주인사를 부관참시하려는 입법’이라고 강력히 비난하고 있다. 실제로 표결에서도 여당 의원 122명 중 59명만이 찬성한 반면, 한나라당은 109명 참석에 92명이 찬성 표를 던지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여당 지도부들 사이에서도 찬반표가 엇갈리는 등 여당의 당론이 분열됐다. ●과거사 청산 어떻게 볼 것인가 원점으로 돌아가서 과거사 청산은 왜 필요한가. 과거사를 정리하지 않고서는 공공질서를 올바르게 작동시킬 수 없다. 역사는 한번 묻어버리면 시간이 흐를수록 진실을 밝히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과거를 밝히는 것은 미래를 위한 역사 바로세우기인 것이다. 일본의 과거사 망언과 교과서 왜곡을 볼 때 과거를 올바로 정립하지 않으면 현재와 미래가 큰 제약을 받는다. 잘못된 과거를 덮어두는 사회는 정의가 없는 사회로서 구성원 통합이 어려워진다. 또 역사적 책임을 물음으로써 사회적 규범을 확립하고 재발을 방지한다. 가해자의 책임을 밝혀 침해받은 인권을 회복하고 피해자와의 진정한 화해를 유도하는 것도 목적이다. 그러나 조사활동을 하는 동안 우리 사회가 과거사를 놓고 갈등을 겪고 대립할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에 연연함으로써 정치적 공방을 확대시키는 것의 폐해 또한 분명하다. 실제 과거청산이 독재세력에 의한 반대파의 숙청 수단으로 쓰였던 예도 적지 않았다. 과거에 대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시각을 국민들이 갖게 된다는 점, 초법적인 여론재판을 부른다는 점도 과거청산 작업이 초래할 수 있는 폐단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이같은 폐단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과거의 진실을 밝히려는 신념 아래 과거사법을 제대로 운용해야 한다. 당리당략의 도구로 정쟁의 소용돌이로 몰아서는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에 국민을 통합하기보다는 분열을 조장하고, 과거를 청산하기보다는 현재와 미래의 발전을 저해할 뿐이다. 손성진 기자 sonsj@seoul.co.kr
  • 가족과 함께 가볼만한 서울의 성곽

    가족과 함께 가볼만한 서울의 성곽

    압축성장의 표본인 서울의 국적은 한국이 아닌 ‘세계’다. 도심은 일부 고궁을 제외하고는 미국 뉴욕, 일본 도쿄와 마찬가지로 빌딩군과 아스팔트로 덮여 있다. 아파트숲으로 덮인 시 외곽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서울이 2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라는 거의 유일한 증거는 성곽들이다. 서울성곽, 남한·북한산성 등 서울의 도심과 외곽을 아우르는 인공 유산인 성곽은 오랜 역사의 질곡을 온 몸으로 견딘 채 오늘도 서울 시민들을 넉넉한 가슴으로 안고 있다. 꽃봉오리가 제 몸을 틔우는 완연한 봄날, 역사의 숨결이 초목들과 한데 어울려 넘실대는 ‘자연 역사 박물관’ 성곽으로 연인과 가족들과 함께 찾아가자. ●도심을 품고 있는 서울성곽 서울의 성곽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유적은 서울성곽이다. 조선 개국 뒤 한양을 방어하기 위해 축성한 석조성곽이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낙산·남산·인왕산을 이으면서 경복궁을 에워싸고 있다. 둘레는 18.127㎞에 이른다. 하지만 일제 침략과 도시계획,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까지 거치며 거의 모두 파괴됐다. 지금은 서울 토박이도 서울성곽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나 지난 1976년부터 꾸준한 복원 결과 10㎞ 정도 제 모습을 찾았다. 원래 서울성곽의 관문이었지만 이젠 차량의 ‘섬’이 된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동대문) 등에서도 성곽의 흔적을 따라 올라가면 조선시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원래의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낙산을 중심으로 한 길.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에서 나와 흥인지문에서 낙산공원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창신성곽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어 30분쯤 타락산을 따라 오르면 ‘서울의 몽마르트 언덕’이라는 낙산공원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는 서울의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공원 주차장 쪽으로 내려와 이화장을 지나면 대학로 뒤쪽 혜화문(동소문)과 만나게 되고, 이어 성북지구까지 성곽이 연결돼 있다. 또 혜화동 서울과학고등학교 뒷길을 따라 응봉과 숙정문(숙청문)까지 이어지는 길에서도 서울성곽을 만날 수 있다. 인왕산 성곽길에서도 서울성곽의 운치를 접할 수 있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이나 사직공원에서 경사가 급한 인왕산길을 30분 정도 오르는 길에 기암괴석과 함께 성곽의 장중한 모습이 펼쳐진다. 자하문터널 위 창의문(자하문·북문)에서 올라갈 수도 있다. 이외에도 숭례문에서 남산의 백범광장과 팔각정·서울타워를 거쳐 타워호텔로 이어지는 길이나 장충체육관 뒤에서 신라호텔 뒤로 이어지는 길에도 서울성곽의 예스러운 풍치와 모습이 잘 보존돼 있다. ●서울의 요충지 남한·북한산성 서울의 외곽에서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성곽을 만날 수 있다. 남한산성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일대에 해당한다. 송파구와 경기도 성남시·하남시·광주시 등에 걸쳐 있다. 본성 둘레는 8㎞, 외성은 12㎞에 달한다. 성 안에서나 바깥에서 죽 돌면 남한산성 전체를 볼 수 있다. 한양을 지키던 대표적인 군사적 요충지답게 많은 문화재도 품고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1호로 지정돼 있는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해 지어진 누각이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 조선 시대 임금이 거둥할 때 머물던 별궁인 행궁 등도 눈길을 잡아 끈다. 관광객들이 애용하는 길은 송파구 마천동에서 올라오는 등산길이다. 지하철 5호선 마천역에서 출발, 공수부대를 지나 3㎞ 남짓한 등산로를 따라 1시간30분 정도 올라가면 서문에 도착한다. 혹은 지하철 8호선 산성역에서 버스를 타거나 승용차로 성남 복정·태평사거리를 거쳐 남문으로, 광지원 등을 지나 동문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자리잡고 있는 북한산성은 서울 은평구와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등에 퍼져 있다. 백제 계루왕 때인 132년에 처음 축성된 뒤, 조선 숙종 때 수도 방위를 위해 돌로 쌓여졌다. 전체 둘레는 12.7㎞, 성벽을 둘린 체성(體城)의 길이는 8.4㎞에 이른다. 현재 대서문, 대남문, 대성문, 대동문 등의 문루가 복원돼 있다. 성곽을 따라 등산로가 이어져 있어 북한산을 산행하면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밖에도 행궁, 창고, 장대 등 많은 유적지와 사찰문화재가 산재돼 있다. 교통도 편리한 편. 지하철 1호선 망월사역·도봉산역,3호선 구파발역,4호선 길음역·수유역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면 된다. ●백제의 숨결 여전한 토성들 화려했던 백제 문화의 발상지답게 당시 성들도 송파구 지역을 중심으로 넓게 퍼져 있다. 대표적인 유적은 풍납리토성과 몽촌토성. 평지성 토성인 풍납리토성은 서북쪽으로 한강, 남쪽으로 성내천과 접해 있다. 성벽 둘레는 3470m로 풍납동을 감싸안고 있다. 광복 이후부터 꾸준히 발굴 작업이 계속돼왔고, 지금도 정비작업이 한창이다. 지하철 5·8호선 천호역이나 8호선 강동구청역에서 내려 도보로 5분 남짓 걸린다. 또 다른 백제 초기의 토성인 몽촌토성은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내에 있다. 크기는 남북 730m, 동서 540m이다. 성벽의 높이는 대부분 30m 정도로 지금은 넓은 잔디밭과 산책로로 조성돼 있어 운동이나 소풍을 즐기는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밖에 광진구 광장동의 아차산성, 경기도 고양시 행주산성, 종로구 홍지동 탕춘대성도 서울 경기에서 찾아갈 만한 성곽들이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서울의 성곽엔 무슨 사연이… 한강을 끼고 있는 서울의 성곽은 역사 이래 한민족의 숨결을 오롯이 담고 있다. 서울을 수도로 삼은 백제와 조선은 물론, 고려 시대의 문화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일제와 한국전쟁, 무분별한 근대화라는 ‘괴물’은 전통 유산인 성곽을 제멋대로 파괴했다. 성곽이 역사교과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백제의 도읍지로 출발 백제 왕성인 풍납리토성, 몽촌토성은 서울 문명의 첫 흔적이다. 이들 토성은 백제의 초기 도읍지인 위례성 가운데 하나인 하남위례성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지금까지 풍납리토성에서는 다양한 토기 조각과 가락바퀴, 우물터, 해자 등 백제 초기 철기시대 유물 등이 발굴됐다. 몽촌토성에서도 삼족토기, 벼루, 화살촉 등이 출토됐다. 이곳은 비록 백제가 475년 수도를 부여로 옮긴 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현재 진행중인 풍납리토성 발굴 조사 등을 통해 번성했던 백제 문명이 더욱 자세하게 드러날 전망이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도 아차산성, 이성산성, 대모산성, 행주산성 등 많은 성곽들이 서울에 쌓였다. 중국과의 교류가 가능하고 넓은 평야가 자리잡은 전략요충지로서의 서울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증거가 되고 있다. 개경을 도읍으로 삼았던 고려도 지리도참설의 영향을 받아 서울을 중시,3경 가운데 하나인 남경으로 삼았다. 창경궁 부근에 가궐이, 북한산에는 중흥산성이 지어졌다. ●일제 침략의 고통 떠안은 성곽 서울성곽과 북한산성, 남한산성은 모두 조선시대 때 수도 한양의 방위를 위해 축조됐다. 서울성곽은 태조와 세종 때인 14세기 말 15세기 초에 처음 만들어졌다.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숙종 때 다시 축조됐다. 삼국시대 때 처음 토성으로 쌓여졌던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은 각각 광해군과 숙종 때 석성으로 개축됐다. 그러나 조선시대 성곽은 구한말부터 시작된 일제의 침탈로 크게 훼손됐다. 전차와 경부선 철도, 조선신궁 등의 공사로 대부분의 성벽은 물론 동대문과 남대문을 제외한 문들도 거의 다 헐렸다.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서울성곽은 광복 후 정치적 혼란과 한국전쟁 등 행정 공백기를 틈타 성곽 주변에 무허가 건물이 마구 들어섬에 따라 더욱 파괴됐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일본은 북한산성에 헌병대를 주둔시켰고, 산성 안의 시설물을 대부분 불태웠다. 그나마 남아있던 유적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됐다. 구한말 의병운동의 거점이 됐던 남한산성도 일제 치하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거의 무너졌다가 복원됐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코드로 읽는책] 지식인의 죄와 벌/피에르 아술린 지음

    과거사, 특히 친일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우리 사회는 갈등의 악순환을 겪어왔다. 해방후 친일 부역자 청산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친일 지식인들은 그 추종자들이 여전히 대중적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점 때문에 갈등의 골이 더 깊다. 이런 측면에서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 사례는 우리에게 거울과 같다. 프랑스는 1944년 8월 나치에서 해방된 후 즉시 과거 청산에 들어가 약 2년에 걸쳐 나치에 협력한 1만여명을 처형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가혹하게 처벌한 것은 부끄러운 과거를 바로잡지 않으면 국가 정체성을 확립할 수 없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울 수 없으며, 올바른 미래를 건설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죄와 벌’(피에르 아술린 지음, 이기언 옮김, 두레 펴냄)은 2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에서 이뤄진 지식인 숙청을 다룬 책이다. 신문이나 일기, 회고록, 재판 기록 등 관련 자료들을 토대로 객관적·중립적인 관점에서 지식인 숙청의 실상을 정리했다. 눈에 띄는 점은 일방적으로 숙청의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 프랑스에서도 과거청산문제를 놓고, 특히 나치에 부역한 지식인들의 숙청 문제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 2월까지 약 반년에 걸쳐 작가 프랑수아 모리악과 카뮈가 벌인 논쟁이다. 가톨릭 신자이며 부르주아 작가이자 언론인이었던 모리악은 저항운동을 펼친 지하신문 ‘프랑스 문예’에 카뮈, 사르트르 등과 함께 참여했음에도 우익 대변지 ‘르 피가로’를 통해 숙청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국민화합을 위해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카뮈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끌어온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하신문‘투쟁’지를 통해 모리악의 자비론을 다음과 같이 강력 비판했다. “나는 증오에 대해 조금의 애착도 없다. 인간으로서의 나는 반역자를 사랑할 줄 아는 모리악을 존경하지만, 시민으로서의 나는 모리악을 불쌍하게 여긴다. 이러한 사람은 우리에게 반역자와 졸개들의 나라를,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사회를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보수 지식인들이 숙청에 반대한 데는 자비론이나 국민들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 말고도 지식인들이 특히 가혹하게 처벌받고 있는 데 대한 동정과 저항도 작용했다. 문인이나 언론인, 출판인 등 지식인들이 다른 분야 부역자보다 더 엄중하게 처벌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역사적 범죄에 대한 가혹한 처벌은 지식인들에게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며, 글쓰기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었다. 하지만 저자는 프랑스의 지식인 숙청 과정의 문제점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한다. 고의든 아니든 숙청을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런 점에서 보면 숙청은 목표라기보다는 수단인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다. 친일 청산에 대한 입장이 어떻게 갈리든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책이다.1만 28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자오쯔양 사망] 실용노선 외길… 中개혁 ‘야전사령관’

    |베이징 오일만특파원|톈안먼(天安門) 사태의 책임을 지고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중국 공산당 전 총서기가 17일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자오 전 총서기는 이날 오전 7시1분 베이징(北京) 시내의 한 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병인 호흡기와 심혈관 질환으로 숨졌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실각 이후 가택 연금돼온 자오 전 총서기는 결국 16년 만에 역사적 재평가는 물론 복권도 이루지 못한 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자오쯔양의 사망으로 홍콩과 서방을 중심으로 톈안먼 사태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요구가 제기되고 있지만 ‘반혁명 폭란(暴亂)’으로 규정한 중국 당국의 평가는 당분간 바뀌지 않을 전망이다. 그의 85년 삶에는 중국 현대사의 비극과 권력투쟁이 그대로 투영돼 있다. 허난(河南)성 화(滑)현 출신으로 중학 중퇴의 학력을 딛고 최고 권좌인 당 총서기에 올랐지만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비운을 맞았다. 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무력진압을 지시한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과 리펑(李鵬) 총리 등 강경파에 맞서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다가 ‘당을 분열시켰다.’는 죄목을 뒤집어 쓴 것이다. 그해 5월19일 새벽 비가 뿌리는 톈안먼 광장을 찾아가 눈물로 학생들의 시위 해산을 호소한 것이 TV에 비친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학생 제군들은 아직 젊다. 살아서 중국의 4대 근대화를 실현하는 날을 직접 보아야 한다.…”는 간곡한 설득 장면은 아직까지 중국인들의 가슴 속에 각인돼 있다. 자오의 생애는 실각→복권→출세가도→실각이 반복되는 극적인 인생으로 점철된다.1967년 문화대혁명 당시 숙청됐다 4년만인 1971년 네이멍구 자치구 당서기로 복권, 폭넓은 실용주의를 익힌다.75년 쓰촨(四川)성 당서기 시절 ‘식량을 원하면 자오쯔양을 찾아라.’는 유행어가 나돌 정도로 농업개혁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가 도입한 자유시장의 일종인,‘가정생산청부제도(家庭生産請負制度)’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그는 중앙정치국 후보위원, 정치국위원, 상무위원, 부총리, 총리로 거침없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물론 덩샤오핑의 전폭적인 지원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80년 총리,87년 당총서기에 올라 총설계사 덩샤오핑의 오른팔로서 개혁·개방의 ‘야전 사령관’으로 맹활약했다. 천윈(陳雲)과 리셴녠(李先念) 등 당 보수파들의 치열한 견제 속에서 폭넓은 정치·경제개혁을 도입하는 등 고도성장의 레일을 깐 인물로 통한다. 덩샤오핑은 평소 ‘하늘이 무너져도 자오쯔양과 후야오방(胡耀邦)이 있기에 안심할 수 있다.’는 말로 각별한 신임을 표현했지만, 결국 ‘톈안먼 사태’의 희생양으로 내몰았다. 실각 이후 베이징의 번화가 왕푸징(王府井) 부근 자택에서 연금생활에 들어간 그의 ‘자유’를 위해 각계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홍콩과 서방을 중심으로 연금해제를 촉구하는 서한은 100만통을 넘었고,1998년에는 홍콩 인권단체에 의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추천되기도 했다. 90년대 중반 이후 국내 여행이 허가된 그는 베이징 인근의 순이(順義) 골프장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말년에는 홍콩과 서방언론 사이에서 사망설이 제기되는 등 온갖 풍설을 겪었고 결국 “6·4운동은 재평가될 것”이라는 희망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oilman@seoul.co.kr ■ 자오쯔양 연보 ▲1919년 11월 허난(河南)성 화(滑)현 출생 ▲1932년 중학 중퇴후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가입 ▲1938년 중국공산당 입당 ▲1948년 위어(予鄂)지구 당위원회 서기 ▲1951년 광둥(廣東)성 인민정부 토지개혁위원회 부주임으로 토지개혁 주도 ▲1956년 중국공산당 광둥성위원회 서기 겸 광둥성 군구(軍區) 제1정치위원 ▲1963년 광둥성 제1서기 겸 당 중앙 중남국 서기 ▲1967년 문화대혁명으로 비판·숙청 ▲1971년 복권 ▲1975년 쓰촨(四川)성 당위원회 제1서기, 혁명위원회 주임, 청두(成都)부대 제1정치위원으로 농업진흥과 기업자 주권확대에 현저한 성과 거둠 ▲1980년 당 중앙정치국 상임위원 및 국무원 총리 ▲1987년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선임 ▲1988년 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선임 ▲1989년 5월19일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 농성중인 학생들 방문, 너무 늦게 온 것 사과. 마지막 공식행사 ▲1989년 6월24일 6·4 톈안먼 사태 때 시위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숙청, 공직 박탈당한 채 연금조치 ▲2005년 1월17일 지병으로 베이징에서 사망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