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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성민의 게임체인저] 정치권 표 계산에 볼모 잡힌 신산업 생태계

    2대 중국 국가주석 류사오치를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류사오치는 원래 초대 주석인 마오쩌둥과 같은 고향 사람으로 중국 공산당 서열 2인자였다.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 결과 공산당이 승리해 중국을 장악하고, 국민당은 대만으로 패주한 1949년 무렵이었다. 이미 농촌에선 토지 무상몰수 뒤 공동농장을 설치하는 ‘공동노동과 분배’ 원칙이 정해졌지만, 상업과 공업의 경우 공장을 몰수해 운영할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류사오치는 먹고사는 문제 해결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오쩌둥은 자본가를 배척하는 노선을 채택했다. 1958년 대약진운동에도 불구하고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되지 못해 3년간 기근이 닥쳤다. 체면에 금이 간 마오쩌둥은 국가주석 자리를 류사오치에게 넘겼지만 곧, 경제건설을 최우선하며 자산계급을 옹호하는 류사오치가 거슬려 계급투쟁이론을 진일보시킨 문화대혁명을 통해 류사오치를 숙청했다. 한국인에게 류사오치가 낯선 이유는 숙청당해 그의 임기가 짧았던 탓이 크다. 숙청당한 류사오치의 경제 정책은 중단됐다. 하지만 이 류사오치의 오른팔이던 덩샤오핑이 1978년 정권을 장악하면서 오늘날 중국 발전의 원동력이 됐던 중국 특색 사회주의 인식인 ‘선부론’과 ‘흑묘백묘론’을 설파했다. 먼저 부자가 되자는 것이 ‘선부론’이고, 쥐를 잡는 데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중요치 않다는 것이 ‘흑묘백묘론’이다. 류사오치 숙청이 1968년 이뤄졌으니 52년이 지났다. 류사오치가 숙청되던 그때 ‘한강의 기적’을 썼던 한국 기업은 올바른 경제정책 속에서 성장을 이어 가고 있는가. 선뜻 긍정적 대답을 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피크 시대’(정점의 시대)가 도래해 기업의 성장절벽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 현실엔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지난해 한국의 대표적 승차 공유 서비스인 ‘타다’는 검찰에서 불법 사업 판정을 받았다. 구글과 같은 기업들이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 빠르게 신산업 생태계를 장악하는 추세가 무색하게 한국 대기업이 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인 비상장 스타트업 기업인 유니콘 기업에 투자하는 것은 불법이다. 이런 규제와 정책은 정치권의 이념이 투영된 결과물이다. 이른바 좌파건 우파건 먹고사는 문제, 즉 국민들의 경제적 가치보다 정치권의 표 계산이 우선이고 권력투쟁이 우선인 것이다. 과거 부정적 인식에서 벗어나 대기업을 활용해 가치 창출을 극대화해야 한다. 정책금융 의존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한국 모험자본이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그나마 선제적·모험적 투자를 하던 국내 대기업에 ‘성장 한계’가 닥친 지금 규제를 푸는 일은 시급하다. 류샤오치는 당대의 좌우 투쟁과 관련해 좌우 모두 방향성과 노선상의 과오를 저질렀다면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틀렸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실사구시 타이밍을 놓친 채 조금의 인기를 더 얻는다고 한들 국민들이 손에 쥐는 것은 없을 거라는 경고였는데 지금의 위정자들이 이 메시지를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배화여대 교수
  • “핵 배치 美공군기지 빼고 싶나” 에르도안 앞 작아지는 트럼프

    “핵 배치 美공군기지 빼고 싶나” 에르도안 앞 작아지는 트럼프

    미국의 군사동맹 가운데 가장 ‘눈엣가시’ 같은 나라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65) 대통령이 이끄는 터키일 것이다. 터키의 최근 외교·안보 행보는 서방의 동맹이라 하기엔 너무 적대적이다. 그렇다고 적으로 돌리기엔 부담스러운 국가다. 터키와 서방, 특히 미국과의 관계는 애증이 교차하는 ‘프레너미’(Frenemy·적인 동시에 아군인 상대)로 압축된다. 존스홉킨스대 터키 전문가 리즐 힌츠는 “터키에 전략적 파트너 관계라고 부를 만한 것은 이제 남아 있지 않다”며 “동맹은 터키가 하는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에르도안이 초강대국 미국에 큰소리치는 배경은 뭘까.흑해와 지중해 사이에 자리한 터키는 지정학적 강국이다. 나토나 미국의 세계 전략에 꼭 필요한 입지 조건이 에르도안의 자신감으로 꼽힌다. 게다가 지난해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7번 만났고, 18번 통화했다. 그리고 지난 7월에 첨단 기술 기밀 유출 우려로 나토와 미국이 반대하는 ‘러시아판 사드’인 S400 미사일 방어망을 배치했다. 이에 미국 의회는 지난 18일(현지시간) 터키에 당초 계획했던 최신예 스텔스 전투기 F35 판매를 금지하는 국방수권법안을 통과시켰다. 발끈한 터키는 이날 “F35 국제 개발 프로그램의 참여국으로서 의무를 이행했음에도 우리를 부당하게 차단하고 있다”며 “이는 터키의 주권적 결정을 무시하고 적대적 태도를 보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터키는 F35 대신 러시아 수호이(SU)35 전투기 구매 등의 대안을 모색하겠다고 맞불을 피웠다. 나아가 에르도안은 자국에 있는 미 공군기지 사용을 막겠다고 위협했다. 그는 지난 15일 “제재 위협이 실제로 이행되면 인지를리크 공군기지와 퀴레지크 기지를 폐쇄하겠다”고 협박했다. 터키 남부에 위치한 인지를리크는 미군의 중동작전 전진기지이다. 특히 이곳에 미군 전술핵 50여기가 배치된 사실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인정한 바 있다. 미군은 기지 접근이 차단되면 핵무기가 에르도안의 손에 넘어갈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불안해한다. 에르도안의 이런 협박에 뉴욕타임스(NYT)는 “전략 핵무기를 인질로 잡고 있다”고 표현했다. 앞서 2016년 7월 터키 쿠데타 발생 당시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핵무기 이전을 검토했으나, 핵무기 철수가 동맹의 가치를 훼손하고 에르도안이 핵무기를 보유하겠다는 구실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NYT가 보도했다. 에르도안이 인지를리크 기지 사용을 볼모로 미국을 협박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미군은 실제로 인지를리크와 퀴레지크 기지를 사용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루마니아와 카타르에 대안 기지를 마련한 상태다. 터키에 더이상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의도다. 루마니아와 카타르는 터키의 완전한 대체지는 아니지만 아쉬운 대로 러시아를 경계하고, 중동에 신속히 접근할 대안을 마련해 둔 셈이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대외정책연구소의 터키 전문가 애런 슈타인은 “터키가 자국 기지의 가치를 떨어뜨린 것”이라며 “현재 미국과 터키의 관계는 천천히 다가오는 차량 충돌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미국의 움직임을 간파한 에르도안은 미군이 터키에서 철수하면 핵무장을 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그는 “일부 국가는 핵탄두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데, 우리는 가지지 말라고 한다. 나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듯 러시아는 터키에 우라늄 농축과 연구용 원자로 4기 건설을 돕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가 민감한 지정학적 위치 탓에 결정적인 기술을 터키에 넘겨줄지는 의문이다. 실제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이 인지를리크 기지에 배치한 핵탄두 미사일 철수를 소련이 조건으로 내걸었던 적이 있다. 과거 몇 차례 전쟁을 벌였던 두 나라는 서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힌츠 교수는 “터키가 나토와 미국을 신뢰하지 않듯 러시아도 신뢰하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에르도안의 핵무기 무장 발언은 반미 정서를 정치에 이용하는 수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비확산 연구를 위한 제임스 마틴 센터’의 터키 전문가 제시카 바넘은 “터키가 핵무장을 할 경우 제재로 인한 엄청난 경제적 손실이 따를 것이고, 이는 유권자의 표가 달아나는 것”이라고 NYT에 말했다. 미국과 터키는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터키는 독일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며 연합군과 보조를 같이했다. 한국전쟁 참전에서 볼 수 있듯 공산주의 확산과 소련의 중동 진출을 막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 하지만 소련 붕괴와 냉전 종식으로 공동의 적이 사라졌다.특히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쿠르드족 처리에 대해 서방과 터키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미국과 나토는 수년 동안 쿠르드족이 시리아 내전 이후 발생한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를 격퇴하는 전쟁을 함께 치렀다. 반면 터키는 쿠르드족을 자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테러 단체로 보고 있다. 실제로 1977년 터키 산악지대에 사는 쿠르드족이 ‘쿠르디스탄’이라는 나라를 세우며 독립을 추구하다 터키군에 의해 유혈 진압됐다. 터키와 쿠르드족 간에는 크고 작은 유혈 충돌이 잇따랐다. 미중앙정보국(CIA) 월드팩트북에 따르면 8125만여명의 터키 인구 가운데 쿠르드족은 약 20%로 추정된다. 세인트로렌스대 아인스타트 교수는 “터키 입장에서 무장 쿠르드 세력은 실존적 문제”라고 말했다. IS와 전쟁을 벌이던 미국은 전쟁이 끝나자 쿠르드 민병대(YPG)가 시리아 북부에 정착하는 것을 도와줬다. 터키는 이 YPG가 자국 테러 단체인 쿠르드노동자당(PKK)과 이념적으로 밀접하다며 연대 가능성을 두려워했다. 에르도안은 올 1월 “테러 무장세력이 태어나기 전에 싹을 자르겠다”고 말했다. 특히 지난 10월 트럼프가 시리아에 주둔하는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밝히자마자 에르도안이 시리아 북부를 ‘침공’했다. 터키는 시리아와 맞닿은 국경선 440㎞를 따라 폭 30㎞의 ‘안전지대’를 확보했다. 안전지대란 쿠르드족을 모두 쫓아냈다는 의미이다. 이곳에 내전을 피해 터키에 몰려든 난민을 거주시킬 계획으로 알려졌다. 에르도안은 지난 4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나토 창설 70주년 행사에서 YPG 테러단체 인정 요구와 함께 난민 정착촌 건설비용을 내라고 요구했다. 터키는 시리아 난민 350만명 이상을 수용하고 있다. 에르도안은 돈을 내지 않으면 “난민들이 유럽으로 향하는 수문을 열 수도 있다”고 협박했다. 시리아 일부를 점령한 에르도안이 리비아 등 중동에 적극 개입하는 것은 ‘오스만제국’의 계승자가 되겠다는 야욕과 관련이 깊다. 총리와 대통령으로서 16년째 권좌를 지키는 에르도안은 이슬람 국가를 묶은 공동체인 ‘움마’를 만든 뒤 자신이 주권자가 되겠다는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런 종류의 발언도 많았고, 학교 교육에서 종교 교육도 늘어났다. 에르도안이 재미 이슬람 학자 펫훌라흐 귈렌(78)을 2016년 쿠데타 배후 세력으로 지목하며 송환을 요구하는 것도 그런 배경으로 보인다. 미국 네이벌워대학 터키 전문가 버럭 카더르칸은 “에르도안이 터키 건국의 아버지 케말 아타튀르크가 세운 세속주의를 버리고 종교적으로 기울고 있다”고 진단했다. 쿠데타 이후 군부와 관료에 남았던 친서방적 인사들을 모조리 숙청해 절대권력 기반을 다졌다. 에르도안의 터키와 미국 및 서방의 관계는 나빠질까. 스웨덴 스톡홀름대 터키 전문가 제니 화이트는 “사이는 나쁘지만 협력하고 지내는 나라가 많다”며 “미국과 터키는 서로 적이 아니기 때문에 긴밀히 협력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석교교회~영천시장 옛 골목에서… 외솔선생 한글 사랑을 되새기다

    석교교회~영천시장 옛 골목에서… 외솔선생 한글 사랑을 되새기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0차 서울의 문학 4(외솔 최현배의 사주오 두부장수)’ 편이 지난 16일 수필의 주무대인 서대문구 행촌동과 외솔선생이 반평생을 보낸 신촌 연세대 캠퍼스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이날 오전 10시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4번 출구를 출발했다. 먼저 3·1독립선언 기념탑과 독립관, 서재필 동상, 독립문을 차례로 돌아봤다. 탐방 다음날인 11월 17일이 마침 순국선열 추모제 80주년이어서 뜻깊은 방문이 됐다. 천주교 무악동 성당은 서울에 5개 있는 빈민사목 성당이다. 단아한 ‘ㄷ자’형 한옥 성당은 안방과 마루를 튼 공간에 제대 역할을 하는 교자상이 놓였고, 건넌방에 십자가상이 설치된 소박한 초기교회의 모습이다. 석교교회~영천시장 길은 작품 속 두부장수가 외치고 다니던 길처럼 정겨운 옛 골목이다. 일행은 독립문공원 극동아파트 버스정류장에서 7737번 버스를 타고 세브란스병원 앞에서 하차했다. 외솔선생을 기념하는 외솔관과 선생의 흉상을 보고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날의 서울미래유산은 무형유산인 수필 ‘사주오 두부장수’와 유형유산인 석교교회, 영천시장 등 3개였다. 해설은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에 첫 데뷔한 김윤정 서울도시문화지도사가 맡았다.해마다 한글날이면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이 지은 ‘한글날 노래’가 방방곡곡 울려 퍼진다.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새 세상 밝혀주는 해가 돋았네/한글은 우리 자랑 문화의 터전/이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이 노래를 지은 외솔은 평생 우리말과 우리글을 연구하고 지킨 ‘수호신’이다. 외솔은 외로운 한 그루 소나무라는 뜻이다.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김삼웅은 ‘외솔 최현배 평전’에서 “외솔이라는 자호가 선생의 생애를 한마디로 압축한다. 외솔은 조선의 사육신 성삼문의 단심가에서 취한 호”라고 풀이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단심가 중 일편단심에서 ‘붉을 단(丹)’자를 얻었듯 외솔은 단심가 중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됐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의 낙락장송에서 ‘소나무 송(松)’을 취했다. 선생의 임은 조국이었으며, 한글이 곧 목숨이라는 각오로 외로운 소나무 한 그루가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실제 선생은 숱한 지식인들이 친일 변절했을 때 한글을 지킨 최고의 국어학자인 동시에 독립지사였으며, 해방 후 독재정치를 비판한 사회사상가로서 일생을 보냈다. 선생은 “말은 그 겨레의 정신이요 생명이라. 정신이 없는 몸뚱이가 살아갈 수 없으며…”라면서 나라흥성의 법칙이 말과 글을 지키는 데 있다고 갈파했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에 저항해 우리말과 한글을 유지하는 말과 글을 통한 독립투쟁운동을 벌였다. 해방 후에는 한자 전용과 영어공용어 채택 주장에 맞서 한글전용, 한글 가로쓰기, 한글 자판 개발에 온 힘을 쏟았다. 외솔은 반봉건, 반제국주의 견지에서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각자 한흰샘 주시경(1876~1914)의 수제자였다. 외솔은 “나는 주 스승에게서 한글을 배웠을 뿐 아니라 우리말, 우리글에 대한 사랑과 그 연구의 취미를 길렀으며 겨레정신에 깊은 자각을 얻었으니, 나의 그 뒤 일생의 근본 방향은 여기서 결정된 것이었다. 나는 주 스승에게 배우고 또 배워, 가위 그 당에 들어갔다고 할 만큼 되었다. …나는 스승의 부탁에 따라 우리말, 우리글을 오늘날까지 갈고닦고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있는 것이니, 이 사명을 다한 뒤에는 스승에게로 돌아가서 복명을 할 작정이다”고 술회했다. 실제 숨진 뒤 평소의 바람대로 스승이 잠든 경기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 묘소 옆에 안장됐다. 그러나 후학들이 무심함 탓에 스승은 2013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제자는 2009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돼 떨어졌다. 살아서 함께했고, 죽어서도 함께했던 사제를 떼논 것이다. 주시경 선생의 묘비는 홍릉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겼다.‘세종대왕 다음으로 한글 연구에 공헌한’ 주시경 선생은 언어가 민족의 얼이라고 생각한 언어민족주의자였다. 문하에는 최현배·김두봉·김윤경·이윤재·이병기·신명균·권덕규·이상훈·이극로·김선기 등 기라성 같은 애제자가 있었다. ‘외솔 최현배 평전’에 따르면 체제는 달랐지만 남한의 최현배, 북한의 김두봉이 중심이 돼 분단 상황에서 남북한의 언어정책을 이끌었다. 부산 동래출신 김두봉(1889~1961?)은 울산 염포 출신 최현배보다 5살 연상이었으나 절친한 친구사이로 지냈다. 이 둘은 스승을 쫓아 단군을 숭배하는 민족종교 대종교에 입교했다. 북조선노동당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일성종합대학 초대총장을 지낸 김두봉은 1958년 김일성일파에 의해 반당종파분자로 몰려 숙청당할 때까지 북한의 한글전용에 큰 업적을 남겼다. 두 분이 없었더라면 미국과 소련 두 절대강국 치하에서 우리말과 글을 지켜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외솔의 3대 저술은 ‘조선민족 갱생의 도’, ‘우리말본’, ‘한글갈‘이다. 일본 교토대학에서 유학하던 32살 때 ‘조선민족 갱생의 도’를 집필, 일약 유명인사가 된 외솔은 귀국하자마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해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국어국문학과 ‘페스탈로치의 교육사상’을 강의했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된 대다수가 친일로 전향했을 때도 외솔은 끝까지 신념을 지켜 학교에서 쫓겨났다. 복직하기 전까지 3년 동안 ‘우리말본’과 ‘한글갈’을 저술했다. 우리말본은 우리말 문법 연구의 분수령을 이루는 역저이며 한글갈은 훈민정음에 관한 역사적 문제와 한글의 이론적 문제를 체계적으로 논구한 노작이다. 외솔 선생은 1970년 3월 23일 입원 중이던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77살로 세상을 떠났다. 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서 평생 동지 노산 이은상(1903~1982)은 ‘마지막 드리는 노래- 외솔 최현배 님 영 앞에’를 낭송했다. “고난도 파란도 많은/이 땅에 오셔 칠십 칠년/얼, 말, 글 겨레의 성벽/한 몸으로 지키시더니/붓 놓고 입 다무시고/어디로 멀리 가시옵니까./바람찬 거친 들에/뚜벅뚜벅 걸어간 자취/바람은 가고 없어도/발자욱만은 뚜렷하구려/이 길로 가야 한다고/일러주신 노정표외다./나라 잃은 그 시절에도/조국의 말과 글이 같이 살았고…금 글자로 새기오리다/해마다 솔씨 떨어져/자라난 다복솔 보소/생전에 외솔일러니/인제는 외롭지 않소/새 솔밭 돌아다보며/웃고 가시옵소서.” 외솔과 함께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투옥됐던 시조시인 노산은 옥중에서 “미처 다 못 배워/인제사 여기 와서/ㄹ(리을)자를 배웁니다/ㄹ(리을)자 받침 든 세 글자/ 자꾸 읽어 봅니다./제 ‘말’ 지켜라/제 ‘글’ 지켜라/제 ‘얼’ 붙잡고…”라는 ‘평생을 배우고도’라는 글을 남겼다. 외솔은 늘 검은 두루마기, 흰 고무신에 머리는 중 마냥 빡빡 깎은 시골 생원 같은 모습이었다. 미끈한 양복에, 학자나 예술가 풍채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실망했으나 이 실망은 갈수록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경모의 정이 솟구쳐 올랐다고 한다. ‘사주오 두부장수’에 나타나 있는 소박한 정겨움의 실체이다. 외솔의 숨결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늘 쓰는 도시락, 반올림, 마름모꼴, 꽃잎, 짝수와 홀수, 지름 같은 숱한 고운 말을 만드신 분이다. 가로쓰기와 띄어쓰기, 한글자판에도 선생의 고혈이 스며 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제31회 서울역 뒷동네-서계동 ■집결장소: 11월 23일(토) 오전 10시 서울역 1번 출구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새로운 사회, 새로운 예술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새로운 사회, 새로운 예술

    대각선으로 화면을 채운 붉은 말, 중세 종교화의 인물처럼 가늘고 긴 소년의 몸, 초록색 호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러시아 초원지대의 소년들은 말을 끌고 강가에 나가 목욕을 시키면서 물놀이를 했다. 쿠지마 페트로프봇킨이 자란 볼가 강변의 작은 마을도 그랬을 것이다. 풍속화에 어울릴 만한 일상생활이 페트로프봇킨의 손에서 타는 듯이 붉은 말과 차가운 누드가 어우러진 상징주의 그림으로 탄생했다. 그는 가난한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 정교회의 성상 화가에게 미술을 처음 배웠다. 고향의 한 상인이 학비를 대주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성화를 그렸는데, 그의 그림은 교회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상징적이고 에로틱한 분위기를 띠고 있어서 마찰을 빚었다. 이 그림의 붉은 말은 전쟁과 피를 상징하는 요한 묵시록의 붉은 말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냉담한 표정의 누드는 묵시록의 기사보다 고대 그리스와 맞닿아 있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이 그림에서 보색 대비, 면의 대담한 분할, 운동감 같은 추상적 요소에 주목했다. 소비에트 비평가들은 정치적 의미를 부여했다. 붉은 말을 러시아의 미래, 다시 말해 볼셰비키 혁명을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물에서 솟아올라 앞발을 치켜든 붉은 말과 방금 태어난 듯한 알몸뚱이 소년은 혁명의 아이콘이 됐다.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러시아 제국이 두 번의 혁명 사이에 있던 때였다. 페트로프봇킨은 반동적인 사람은 아니었으나 특별히 혁명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1905년 혁명이 실패하고 사회가 암울한 분위기에 젖어 있을 때 화가가 다섯 해 뒤에 일어날 볼셰비키 혁명을 예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그림의 진정한 혁명성은 정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러시아 전통을 아방가르드 형식과 결합한 데서 찾아야 한다. 국제적인 인물이었던 칸딘스키와 달리 페트로프봇킨은 러시아의 정신적 유산을 간직한 채 추상으로 나아갔다. 스탈린 치하에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숙청당할 때 페트로프봇킨은 살아남았고 소비에트예술가협회의 초대 의장까지 지냈다. 하지만 그를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1910년대의 그림이다. 미술평론가
  • ‘비운의 왕자’ 김평일 駐체코대사 곧 北귀국… 세대교체냐 숙청이냐 촉각

    ‘비운의 왕자’ 김평일 駐체코대사 곧 北귀국… 세대교체냐 숙청이냐 촉각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이복동생으로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나 30여년간 외국을 떠돈 ‘비운의 왕자’ 김평일(65) 주체코 북한대사가 곧 북한으로 귀국할 것이라고 국가정보원이 4일 밝혔다. 국정원은 이날 내곡동 국정원에서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김평일 대사가 조만간 귀국할 것으로 보인다”며 “김평일 대사의 누나 김경진의 남편인 김광섭 주오스트리아 북한 대사도 교체돼 귀국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다고 자유한국당 정보위 간사인 이은재 의원이 밝혔다. 이어 이 의원은 “현재 자리는 유지하고 있으나 내정이 된 것 아니겠나”고 덧붙였다. 김평일 대사는 김일성 전 북한 주석의 두번째 부인인 김성애의 아들로 김정일 전 위원장과는 이복 형제간이다. 남산고등중학교와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고 김일성 주석의 외모를 빼닮아 한때 김일성 주석을 계승할 유력 후보로 여겨졌다. 특히 김일성 주석이 노동당은 김정일 위원장에 맡기고 군은 김평일 대사에 맡기겠다고 했을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군 경험이 없는 김정일 위원장과 달리 김평일 대사는 인민무력부 작전국 부국장 등을 지내 군부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970년대 김정일 전 위원장과 후계자 경쟁을 벌이다 밀려난 뒤로 김평일 대사는 1988년 헝가리에서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불가리아, 핀란드, 폴란드, 체코 등지를 거치며 30년 넘게 해외를 전전하며 사실상 유배생활을 해왔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북한 방송은 김평일 대사와 그의 어머니인 김성애의 모습을 삭제한 화면을 내보냈다. 2011년 김정일 전 위원장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배제됐다. 김성애는 사망한 것으로 지난해 알려졌다. 30여년 만에 귀환하는 김평일 대사에 대해 숙청 대상이 될 가능성과 함께 세대교체의 일환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집권 이후 ‘실세’들이었던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을 처형하고 이복형인 김정남을 숙청하는 등 공포 정치를 펴왔는데, 김평일 대사도 가능성 있는 대상 중 하나로 꼽혔다. 유럽 탈북자 단체가 망명정부 수립을 추진하면서 김평일 대사를 옹립하려고 접촉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김평일 대사의 나이와 오랜 해외 생활을 근거로 세대교체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지난 4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의 동생인 김영주도 오랫동안 맡고 있던 최고위원회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직에서 소환되고 최고위원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직들이 상대적으로 젊은 인물로 바뀌었는데 이번 인사 역시 외교분야의 세대교체를 완성하려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김평일 대사는 김정일 위원장의 견제로 대사관에서도 주변에 사람이 없는 굉장히 고독한 생활을 해왔다”며 “이번 소환으로 사실상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정 체제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도 “김정은 위원장이 외교라인의 세대 교체와 함께 자기 사람을 심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손학규 “한국당에 붙어서 공천 받을 사람, 갈 테면 빨리 가라”

    손학규 “한국당에 붙어서 공천 받을 사람, 갈 테면 빨리 가라”

    “황교안과 만나겠다니 ‘꼴통보수’” “‘변혁’에는 분열과 파멸밖에 없다”“한국당서 공천 받겠단 사람 꺼지고 나면최고위 재정비해 선거기획단 꾸리겠다”징계 당한 하태경·이준석 “孫, 추하다”하 “합리적 중도·개혁보수 도전 못막아”비당권파 2시간 비공개 회동…진로 논의분당설에 “탈당은 분위기 무르익어야”孫 결별선언엔 “항상 하던 이야기” 무시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가 19일 유승민계 비당권파 모임인 ‘변화와 혁신을 위한 비상행동’(변혁)을 겨냥해 “자유한국당 가겠다는 사람 말리지 않겠다. 갈 테면 빨리 가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손 대표는 “한국당과 통합해 국회의원 공천 하나 받겠다는 사람이 꺼지고 나면 최고위 정비해 선거기획단을 꾸리겠다”고 밝혔다. 손 대표는 이날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 엄정 수사 및 검찰개혁 촉구 결의대회’에서 “(변혁은) 문재인 정권 실정에 한국당 지지율이 좀 오르는 것 같으니 거기 붙어서 공천받아 국회의원 공짜로 해볼까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손 대표는 “다음 총선에서 한국당이 일어서기는커녕 망할 것”이라면서 “개혁보수를 하겠다고 했는데 황교안과 만나겠다니 그게 개혁보수인가. ‘꼴통보수’를 다시 추구한다는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바른미래당을 분열 시켜 훼방하고 오직 한국당과 통합해 국회의원 공천 하나 받겠다는 사람들이 꺼지고 나면 바른미래당은 새로운 길로 힘차게 출발한다”면서 “최고위를 재정비 하고 선거기획단을 꾸리겠다”고 강조했다.비당권파의 핵심인 유승민 의원이 최근 보수통합을 위해 황교안 한국당 대표와 만날 의향이 있다고 밝힌 점을 겨냥한 것이다. 앞서 유 의원은 지난 16일 변혁 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황 대표가) 제가 밝힌 원칙에 대해 생각이 정리되면 언제든지 만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유 의원은 이어 “중요한 것은 만나는 게 아니라 탄핵의 강을 건너자, 개혁보수로 나와라, 낡은 집을 다 허물고 새집을 짓자는 제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만나자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면서 “양쪽에서 중간에 매개 역할을 하는 분들이 계신다”고 말했다. 손 대표는 이런 유 의원을 비롯한 변혁 구성원들의 행동이 한국당으로 가기 위해 일종의 해당 행위를 하고 있다고 봤다. 손 대표는 “바른미래당이 현재 내홍으로 엉망이 된 것은 머릿속에 한국당 공천받을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 당을 분열시키고 망가뜨리려고 하기 때문”이라면서 “‘변혁’에는 변화와 혁신이 아니라 분열과 파멸밖에 없다”고 거칠게 비판했다. 또한 “그 사람들이 처음에는 ‘절대로 한국당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다음 선거에서 기호 3번 달고 나가겠다’고 하면서 김관영 전 원내대표를 내쫓았다”면서 “그러면서 한국당과 만나겠다고 하고 한국당과 보수통합 하겠다고 한다”고 말했다.손 대표는 한국당을 향해서도 공세를 이어갔다. 손 대표는 “조국이 사퇴했는데 ‘대통령 사과하라’, ‘국정 대전환 촉구’라니 뭐 하자는 것인가”라면서 “그저 어떻게 하면 정권을 무너뜨려 권력을 잡을까 생각밖에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박근혜 정권 때 잘못한 구(舊)적폐에 대해 반성할 생각 없이 ‘정권 내려놔라’ 주장밖에 없는 한국당을 우리 국민들이 찍겠는가”라면서 “바른미래당이 제3정당으로 다음 총선에서 이기기 위해 제가 온갖 수모와 모멸을 견디고 참으며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손 대표는 이날 오후 서울 모처에서 비당권파가 모임을 갖고 신당 창당을 포함한 향후 진로를 모색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통합의 길로 가야 하는데 분열의 정치를 획책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비판했다. 손 대표의 발언은 바른미래당 창업주인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를 비하한 비당권파 이준석 최고위원에게 바른미래당 윤리위원회가 ‘당직 직위 해제’라는 중징계를 내린 데 대해 지난 18일 하태경 의원과 이 최고위원이 “추하다” “부끄러운 줄 알라”며 거세게 반발한 데 이어 나왔다. 하 의원은 전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최고위원 징계에 대해 “손학규 한 사람의 권력에 당이 풍비박산 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그동안 바른미래를 지탱해 온 후배 정치인을 다 죽이겠다는 것”이라면서 “당은 망가져도 대표직 권력만 유지하면 된다는 손 대표, 참 추하다”고 말했다.하 의원은 “이 최고위원에 대한 징계는 유승민, 안철수계 주축인 ‘변혁‘을 파괴하고 서둘러 내쫓으려는 꼼수”라면서 “바른미래당을 민주당의 2중대 만들기 위한 노림수”라고 비판했다. 그는 “합리적 중도와 개혁보수를 향한 변혁의 도전을 막을 순 없다”면서 “바른미래당 당원 및 지지자들과 함께 개혁 야당의 기치를 더욱 높이 들겠다. 그 길에 손 대표에게 숙청당한 하태경과 이준석 최고가 가장 앞장서겠다”고 강조했다. 지난 18일 바른미래당 윤리위원회는 안 전 대표를 비하했다는 이유로 이 최고위원에게 ‘당직 직위해제’ 징계를 내렸다. 이번 결정으로 이 최고위원은 최고위원 자격과 서울 노원병 지역위원장직을 모두 박탈당하게 됐다. 윤리위 측은 이 최고위원이 올해 청년정치학교 뒤풀이 행사에 참석한 30여명 앞에서 당 지도자인 안 전 대표를 두고 ‘X신’ 등 비하 발언과 욕설을 쏟아내며 심각한 해당 행위를 했다고 판단해 이러한 징계를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 최고위원은 징계 직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손 대표가 임명한 윤리위원장이 이끄는 윤리위원회에서 바른정당 출신의 인사들에게 꾸준히 징계를 하고 있는데 사당화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니겠나”라면서 “10% 지지율 약속을 국민에게 하고 식언을 해서 당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만큼의 윤리적 지탄을 받을 행위가 또 있겠나.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고 비판했다.한편 비당권파 의원 모임은 ‘변혁’은 이날 2시간가량 비공개 회동을 갖고 향후 진로를 논의했다. 당권파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변혁 의원들의 탈당이 초읽기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관측 속에 이뤄진 이날 회동은 장소와 시간조차 외부에 함구한 채 극비리에 진행됐다. 회동에는 유승민·안철수계 의원들 가운데 이동섭·이태규 의원 등을 제외한 대다수가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12월 창당 및 단계적 탈당’ 등은 구체적인 향후 행동 로드맵은 거론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손 대표가 이날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변혁 모임을 겨냥해 “갈 테면 빨리 가라”고 발언한 데 대해 변혁 소속 의원들은 “탈당은 분위기가 무르익어야 한다”면서 “항상 하던 이야기로 새로운 것이 없다. 상대할 필요가 없다”고 무시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하태경, ‘이준석 징계’에 “손학규 권력욕에 당 풍비박산…참 추해”

    하태경, ‘이준석 징계’에 “손학규 권력욕에 당 풍비박산…참 추해”

    바른미래 윤리위 “이준석, 안철수 비하”이준석 “바른정당 출신만 징계…사당화”이 “지지율 식언, 손학규 부끄러운 줄 알라”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이 당 윤리위원회가 안철수 전 대표를 비하한 이준석 최고위원에게 ‘당직 직위 해제’라는 중징계를 내린 것과 관련해 “손학규 한 사람의 권력에 당이 풍비박산 나고 있다”면서 “참 추하다”고 비판했다. 19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따르면 하 의원은 지난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그동안 바른미래를 지탱해 온 후배 정치인을 다 죽이겠다는 것”이라면서 “당은 망가져도 대표직 권력만 유지하면 된다는 손 대표, 참 추하다”고 했다. 그는 “징계를 받아야 할 사람은 하태경이나 이준석이 아니다”라면서 “징계는 추석 지지율 10%가 안 되면 사퇴하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한 손 대표가 받아야지 당 지지율 뒷받침하고 개혁과 혁신 추구하는 후배 정치인들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하 의원도 앞서 손 대표에 대해 막말을 했다는 이유로 최고위원직을 박탈 당하는 징계를 받았다. 하 의원은 “이 최고위원에 대한 징계는 유승민, 안철수계 주축인 ‘변화와 혁신을 위한 비상행동‘을 파괴하고 서둘러 내쫓으려는 꼼수”라면서 “바른미래당을 민주당의 2중대 만들기 위한 노림수”라고 비판했다. 그는 “합리적 중도와 개혁보수를 향한 변혁의 도전을 막을 순 없다”면서 “바른미래당 당원 및 지지자들과 함께 개혁 야당의 기치를 더욱 높이 들겠다. 그 길에 손 대표에게 숙청당한 하태경과 이준석 최고가 가장 앞장서겠다”고 강조했다.지난 18일 바른미래당 윤리위원회는 바른미래당 창업주인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를 비하했다는 이유로 이 최고위원에게 ‘당직 직위해제’ 징계를 내렸다. 이번 결정으로 이 최고위원은 최고위원 자격과 서울 노원병 지역위원장직을 모두 박탈당하게 됐다. 윤리위 측은 이 최고위원이 올해 청년정치학교 뒤풀이 행사에 참석한 30여명 앞에서 당 지도자인 안 전 대표를 두고 ‘X신’ 등 비하 발언과 욕설을 쏟아내며 심각한 해당 행위를 했다고 판단해 이러한 징계를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바른미래당 당헌규정에 따르면 윤리위 징계 수위는 경고, 직무정지, 직위해제, 당원권 정지, 제명 등이다. 이 최고위원은 징계 직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손 대표가 임명한 윤리위원장이 이끄는 윤리위원회에서 바른정당 출신의 인사들에게 꾸준히 징계를 하고 있는데 사당화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니겠나”라면서 “10% 지지율 약속을 국민에게 하고 식언을 해서 당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만큼의 윤리적 지탄을 받을 행위가 또 있겠나.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고 비판했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중국의 미래를 결정한 시안사변(西安事變)

    중국의 미래를 결정한 시안사변(西安事變)

    70년 전인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 (이하 중공) 중앙위원회 위원장인 모택동(毛澤東)이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성립을 선포함으로써 중국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 후 중국은 복잡한 역사를 거쳤으며 중국공산당의 지도 밑에 경제적으로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초강대국이 되어가고 있다. 중공의 당사(黨史) 연구자들도, 중국근현대사 연구자들도 중국혁명 승리의 뿌리는 중국의 역사를 완전히 바꾼 1936년 12월에 발생한 ‘시안사변’에 있다고 간주한다. 이번에는 중공에 의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기념하면서 이 사건의 배경과 경과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중국공산당은 당시 공산주의운동을 지도했던 국제조직인 코민테른의 대표 2명이 참여한 1921년 7월 1일 제1차전국대표대회에서 창건되었다. 유럽혁명의 실패 후 소련과 코민테른은 민족 및 식민지문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면서 중국, 조선 등 제국주의 열강의 압박에 대항하는 동양민족 공산당들에게 사회주의혁명 대신 민족해방운동에 전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내전을 겪어 큰 피해를 입은 소비에트 러시아는 열강에 의한 국제적 봉쇄를 돌파하기 위해 중국의 국민혁명을 통해서 통일을 목적으로 했던 국민당의 당총리인 손문(孫文)과 관계를 맺었다. 만일 공산당원들의 국민당 가입을 허가하면 군사·정치적 지원을 제공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손문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바로 제1차 국공합작이다.소련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은 국민혁명군을 창설하고 중국의 무장통일을 위해 북벌(北伐)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손문은 1925년에 죽었다. 그 후계자인 장개석(蔣介石)은 극우파로 공산당원들을 숙청해야 할 내부의 적으로 보았다. 때문에 1927년 4월 상해를 점령한 장개석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국민혁명군과 함께 중국통일을 위해 싸웠던 노동자들로 구성된 소부대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잔인한 숙청을 단행했다.결국 국민당의 배신을 당한 중공은 국민당에 대해 혁명적 공세를 결정하고 남창폭동(南昌暴動) 등을 일으키면서 공산당 무력조직인 홍군(紅軍)을 창설하였다. 그 후 중공은 혁명근거지를 중심으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설립하고 국민당과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을 통한 일본의 중국침략에도 불구하고 안내양외(安內攘外)정책을 선포한 장개석은 대일저항을 사실상 포기하고 중공에 대한 토벌을 고수했다. 1933~34년 독일 군사고문의 지도를 받은 장개석의 군대는 코민테른 군사고문의 잘못된 전략을 이용하여 대부분의 혁명근거지를 없애는 데에 성공했으며, 중공은 모택동을 따라 장정(長征)을 실시하고 심각한 병력피해를 입으면서 중국 북부에 있는 연안(延安)이라는 지역으로 도피했다. 연안에 도달한 중공은 항일전쟁을 계속 호소하면서 1936년에 그 정권의 명칭을 중화소비에트인민공화국으로 변경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란 국명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이때 국민당 내부에 일제의 위협을 무시하고 중공 소멸에만 집중하던 장개석의 정책을 반대하고 중공을 동정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었다. 결국 연안 지역에서 중공 토벌이 맡긴 장학량(張學良)과 양호성(楊虎城)이 일제 침략이라는 상황에서 내전의 무의미함을 깨달아 공산당과 연락을 취하면서 정전했으며 장개석의 정책을 바꾸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중공과 손잡고 대일전쟁의 준비에 나선 장학량은 대화를 통해서 내전보다 항일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장개석에게 몇 개월 동안 설명하고자 했으나 장개석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공격을 계속하라고 지시하였다. 1936년말, 장개석은 공격을 강행하기 위해 시안에 도착했다. 장학량과 양호성이 장개석을 다시한번 설득해봤으나 장개석은 즉시 공격하지 않으면 그들의 군대를 남부로 보내고 대신 중앙군대를 파견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장과 양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되어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12월 12일 오전 5시, 장학량 친위대가 장개석을 체포하려고 그가 머물렀던 별장을 급습했다. 장개석은 잠옷을 입고 맨발인 채 별장에서 나가 도망치려고 했으나 오전 9시에 잡혔다. 반란군 사령부에 호송 후 장학량은 8개의 조건을 내세우고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에 나설 것을 요구했으나 장개석은 압박 하에서 아무 타협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것은 힘으로라도 장개석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장학량과 양호성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같은 날 저녁, 장학량은 중공 중앙위원회에게 전보를 보내 상황을 설명했다. 중공은 긴급회의를 열어 장개석 문제의 해결 방법을 논의했다. 이 회의의 기록이 공개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그 회의에 참석했던 장국도(張國燾) 중공중앙위원의 회의록에 따르면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 중공중앙 책임자들 중에 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우리는 장개석을 살려주면 향후 큰 화를 초래할 수 있다(養癰遺患)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공개 재판을 통해 그 반공분자를 죽일 것을 주장했고, 어떤 사람은 그를 비밀리에 구금하고 인질로 삼아 남경으로 하여금 항일을 강요할 것을 주장했다.”하지만 중공 중앙위원회는 행동하기 전에 우선 교섭을 위해 주은래(周恩來)를 시안에 파견하고 코민테른의 의견을 확인하고 결정하기로 했고 모스크바에 전보를 보냈다. 소련과 코민테른에게 이 소식은 몹시 충격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잘 인식했던 소련의 지도부는 장개석을 죽이고 통일전선을 결성하지 못하면 아시아 전체가 일제의 지배에 들어가고 식민지 민족 해방은커녕 소련 자체가 독일과 일본의 양면침략을 당해 패망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장개석이 죽으면 국민당이 분열되고 대도시에서의 지지기반이 비교적으로 약한 중국공산당이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스탈린은 그 소식을 받은 후 즉시 소련 정부 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에 시안사변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장학량의 봉기’라는 기사를 발표할 것을 지시했고 12월 16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장 디미트로프가 중공에 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라는 전보를 보냈다. 재미있게도, 중공 당사(黨史) 교재에는 12월16일자 디미트로프의 전보는 암호에 문제가 있어 해독하지 못해서 재전송을 요구했다고 실려있다. 하지만 그 후 모스크바로부터 연락이 없어서 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운명적인 19일자의 결정을 모스크바의 지시에 의거해서 내려진 것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독립적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양규송(楊奎松) 등 중국 연구자들에 의해 중국문서보관소에서 시안사변을 비난하는 소련 신문기사의 내용이 17일에 중공에 알려졌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문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19일자의 결정은 소련의 영향을 받고 내려진 것으로 확인된다.이와 동시에, 중국에서의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장개석 구금의 소식을 받은 국민혁명군 장군 하응흠(何應欽)은 12월 16일 자신을 토벌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시안 부근에 대해 폭격을 실시했다. 이 폭격의 인명피해는 수백명에 달했다. 하지만 직접 시안에 가서 장학량과 만난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宋美齡)은 토벌 작전을 중지하도록 장개석을 설득했다. 긴장이 고조되어가는 상황에서 양측은 회담을 계속해 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공 중앙위원회는 12월 19일 확대회의에서 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결정했고 장개석과의 대화를 본격적으로 지지했다. 흥미롭게도, 장학량과 양호성과의 대화를 거부하던 장개석은 소련이 창설한 황포(??)군관학교 총수 시절에 그 부하이었던 주은래와 대화를 시작했다. 결국 장개석은 중공이 그 정부와 홍군을 해산하고 국민혁명군에 들어가면 내전을 중지하고 통일전선을 결성하겠다고 약속했고 12월 26일에 석방된 후 비행기를 타고 남경(南京)으로 향했다. 약 반년 후인 1937년 7월 7일, 일본이 루거우차오 사건을 통해 중국에 대한 침략을 전면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하지만 이때 내전이 이미 중지되었고 제2차 국공합작이 형성되어 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유격대 전술에 능숙한 중공과 정규군을 가진 국민당은 통일전선을 결성하고 일본 침략에 맞설 수 있었다. 중국은 1945년 9월 2일에 승전국이 되었다. 하지만 전쟁과정에서 국민당과 중공 간의 모순이 완전히 해결되지 못해 내전이 재발하였고, 그 결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었다.글 사진: 바실리 블라디미로비치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 정의가 넘쳐나는 시대… 조선의 풍문정치 ‘기축옥사’ 닮았다

    정의가 넘쳐나는 시대… 조선의 풍문정치 ‘기축옥사’ 닮았다

    거리에 정의가 넘쳐난다. ‘사회정의’를 앞세운 정치인, 대학교수, 대학생, 족벌언론, 법조인들이 거리마다 물결친다. 정의와는 담쌓은 자들이 그러하니 이 나라에 정의가 실현되는 걸까? 하지만 먼저 떠오르는 건 전두환이 방방곡곡 경로당에까지 걸었던 ‘정의사회구현’ 구호다. 각종 ‘사회정의를 바라는…’ 집단이나 모임은 ‘초록이 동색’ 같다. 조선 중기 사림은 3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를 장악하고 지금의 국회의원, 교수, 대학생, 법조인 따위의 역할을 했다. 네 차례 사화로 철퇴를 맞기도 했지만, 중기에 이르러 정치와 사회를 주도했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하자 사림은 오로지 고담준론으로 혹세무민했다. 연암 박지원이 ‘양반전’과 ‘호질’에서 비판했던 바로 그 위선 덩어리였다. 선조 즉위년(1567년) 민생은 파탄 나고 국고는 거덜 났다. 중종 대만 해도 삼창(사창·의창·상평창)의 200만 석이 넘던 비축미는 전임 명종을 거치면서 바닥이 났다. 군자곡(군량미)은 연산군 초기만 해도 100만 섬에 이르렀지만, 중종 25년 50만 섬, 명종 6년엔 10만 섬으로 줄었다. 사섬시의 면포는 연산군 초기 20만여 동이었지만, 명종 6년엔 6만 동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세원이 줄고 세수가 줄었기 때문이었다. 세원 감소는 납세자인 양민이 공납 등을 이기지 못해 자경을 포기하고 제 발로 권세가의 머슴이 되었기(투탁) 때문이었다. 세금 내지 않은 권세가의 토지는 크게 늘었고 양민의 경작지는 급감했다. 양민이 권세가에게 투탁하거나 향리에서 도망가면 그 부담은 이웃에게 전가됐으니, 자경 포기자와 함께 세원과 세수는 기하급수로 줄었다. 영의정 이준경은 선조 2년 1월 구폐책을 제안했다. 세원인 공전을 확대하고 납세자인 양민을 늘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폐책은 사장됐다. 이른바 ‘개혁’을 입에 달고 다니던 ‘신진 사림’의 반대가 주효했다. 당시 신진 사림을 이끌던 기대승은 선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변혁하는 것 역시 아름다운 일이나 상의 학문이 높아지고 경력이 오래 쌓인 연후 해야 하는 일들이 견고해질 것”이며 “누적된 폐단이 너무나 많아 지금은 인심을 복종시킬 수 없는데 갑자기 그 폐단을 구제하려고 한다면 다른 병통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준경은 선조 3년 공납의 폐단이라도 줄이려 했다. 조선은 양민들에게 경지 면적에 따라 지방의 토산물과 특산물을 현물로 경지 면적에 따라 내도록 했다. 공납의 수량은 갈수록 늘었다. 게다가 심사관들은 농민들의 공물에 일쑤 퇴짜를 놓았다(방납). 퇴짜 맞은 농민들은 업자들에게 고가로 사서 바쳐야 했고, 이를 위해 양반 대지주들의 고리채를 써야 했다. 철면피라도 방납 혁파의 명분마저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준경의 제안대로 정공도감을 설치했다. 그러나 문서로만 존재하는 기구로 만들어버렸다. “임금은 전례를 따르기만 하도록 하고, 대신들은 혁신을 싫어해 단지 문서로만 감정하고 늘리고 줄여, 결국 아무 이익도 없었다”(선조수정실록 3년 11월 1일치). 좌의정 권철은 이렇게 딴지를 걸었다. “그와 같은 큰 정책은 명세지재(命世之才)가 아니고는 해낼 수가 없다.”당시 신진 사림은 기대승과 이이가 이끌고 정철, 윤두수 등이 그 뒤를 따랐다. 모두 향촌 출신이었다. 이들은 사화로 철퇴를 맞기도 했지만, 훈신과 척신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 때문에 왕실은 이들의 성장을 꾸준히 후원했다. 조광조의 개혁으로 훈척의 향촌에 대한 침탈이 억제되고, 향약의 보급과 사마소의 확대로 지방의 자율성이 높아지면서 이들은 향촌의 기득권세력이 되었다. 이준경의 개혁은 이들의 이해와 충돌했다. 말로는 조광조의 도학과 대의를 내세우며, 뒤로는 잇속만 차리는 이들에 대해 일찍이 남명 조식은 이렇게 비판했다. “당나귀 가죽에 기린 형상을 뒤집어쓴 것 같은 고질이 있다.” 선조에게 이런 상소도 올렸다. “나라의 폐단이 극에 달해 불에 타고 물에 빠진 것 같지만 조정에선 한갓 허명만 일삼고 논란만 하고 있다.” 이준경은 명종 말까지 사림 정치의 기틀을 놓았다.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영의정에 올라, 백성의 등골을 파먹던 왕실 재산 관리기구 내수사를 개혁하고, 당시 최고의 권력자였던 외척 윤원형을 숙청했으며, 선조 즉위년엔 인순왕후의 외척 심통원을 2선으로 물러나게 했다. 공신 책봉을 저지했으며, 소격서를 혁파하고 궁내 불당을 없애는 등 사림의 주도권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주도권을 잡은 기대승·이이·정철 등 신진 사림은 이준경·노수신·백인걸·김난상·유희춘·김개 등 원로들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윤원형 시절 고위직에 있던 자들은 모두 윤원형의 앞잡이’라고도 매도했다. 이들은 인순왕후의 외척 청송 심문과도 손을 잡았다. 외척 심의겸은 신진 사림을 적극 후원했고, 아예 사림으로 신분을 세탁했다. 정철은 선조 2년 이이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먼저 (원로 대신들을) 쳐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이이의 ‘석담일기’) 다음은 선조수정실록 선조 2년 6월 1일치 기사. “신진 선비들이 떼 지어 서로 교유하며, 학문을 강론하면서 그들 스스로 한 무리가 되었고,… 이때부터 당파의 경색이 뚜렷이 갈라졌으므로 여염에서는 노(老)당, 소(少)당으로 지목하여 부르게 되었다.” 결국 청백리로 존경을 받던 김개가 쫓겨나고, 을사사화로 20여 년간 유배를 당했던 대사헌 백인걸, 대사간 김난상도 물러났다. 김난상은 심의겸이 사간원 정원에 앉히려던 박점에 대해 비리를 문제 삼아 거부했다가 오히려 탄핵을 당했다. 조정은 신진 사림의 천하가 되었다. 선조 5년 이준경은 마지막 상소를 올렸다. 네 가지 당부 가운데 마지막이 ‘붕당의 사론을 없애라’는 것이었다. “지금 사람들은 잘못한 바가 없고 법에 어긋난 일이 없더라도 자기와 한마디만 맞지 않으면 서로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거나 힘써 공부하지도 않으면서 고담대언으로 당파를 짓는 자를 훌륭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런 폐단을 제거하지 못하면 나라의 근심이 될 것입니다.” 신진 사림의 영수 이이가 발끈했다. “사림의 분열을 언급하여 훈구의 공격에 빌미를 줬다.” “원래 사람은 죽음에 이르면 그 말이 선해지는 법인데 이준경은 그 말이 악하다.” 그를 이렇게 평가하기도 했다. “거만하여 혼자 똑똑하다 하고, 선비들에게 굽히지 않으니, 끝내는 나라를 그르칠 말로 임금을 망쳐놓아 명예를 잃었다.” 서애 유성룡은 ‘운암잡록’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선조 초에 등용된 사람들은 대개 말과 행동이 서로 맞지 않은 이가 많으며, 공도를 버리고 당파를 위해서 죽는 폐습이 이루어졌다. 상공 이준경이 고치고자 하였는데, 사류라고 이름하는 자들이 떼를 지어 일어나 공격했다. 이때부터 조정은 둘로 나뉘어 당의 화가 비로소 일어나더니 이이, 정철 등이 일어남에 이르러 더욱 분열하게 되었다,” 말년의 이이는 후회했다. “동고(이준경의 호)가 옳았다.” 이렇게 한탄하기도 했다. “들뜬 논의의 위력은 태산보다 무겁고 칼날보다 예리해 그 칼날에 저촉되면 공명도 잃게 되고, 뛰어난 인재들도 그 명성을 잃게 된다. 그런데도 끝내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이상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이는 이준경의 뒤를 따라 공납의 폐단 등을 없애기 위해 대공수미법 실시를 주장했다. 그의 개혁안은 후배 사림에 의해 좌절됐다. 이런 일도 있었다. 사간원 관리들의 탄핵으로 용궁 현감이 처벌당했다. 따져보니 의혹은 거짓이었다. 선조는 무고한 자를 처벌하라고 했다. 좌승지 기대승이 막았다. “풍문을 포악한 방법으로 쓰면 허위가 되고 공정하게 쓰면 정당한 것이 됩니다. … 만약 부실했다 하여 말한 자를 죄 주면 누가 감히 탄핵하겠습니까. 들은 것이 있으면 다 말을 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후 툭하면 온갖 풍문, 억측을 동원해 무고하고 모함하고, 숙청하는 일이 벌어졌다. 신채호가 ‘조선 5백년 제1사건’이라고 개탄했던 기축옥사(1589년)는 그 절정이었다. 정철 등이 기획하고 조작한 이 옥사는 임진왜란 전야 조선 조정과 지식인 사회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요즘 위선자들의 ‘풍문 정치’가 그와 다르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논설고문 kbc@seoul.co.kr
  • 바른미래 전면전… 孫 퇴진파 “징계 철회” vs 당권파 “보따리 싸라”

    유승민 “孫 추하다”… 고소·고발 예정 ‘직무정지’ 하태경 “당 팔려는 정치공작” 손학규 대표의 퇴진을 두고 수개월째 이어진 바른미래당의 갈등이 하태경 최고위원 징계로 전면전에 돌입했다. 손 대표 퇴진파는 19일 긴급 의원총회를 열어 윤리위원회 징계 철회와 손 대표의 퇴진을 요구했다. 전날 손 대표 측이 윤리위를 통해 하 최고위원에게 6개월 직무정지 징계를 내린 데 대한 맞대응이다. 하 최고위원의 직무가 정지되면 최고위 구성이 손학규파 4명, 손학규 퇴진파 4명으로 동수가 돼 의결권을 손 대표가 갖게 된다. 의총에는 24명 중 11명이 참석했고, 일정상 의총에 불참한 정병국·유의동 의원도 뜻을 함께했다. 오신환 원내대표는 의총 후 “손 대표가 징계를 철회하지 않으면 이후 여러 경우의 수를 놓고 대응하겠다”며 “비상대책위원회 전환도 경우의 수 중 하나”라고 했다. 이어 “손 대표와 내년 총선을 치를 수 없다는 게 대다수의 생각”이라고 했다. 다만 탈당과 분당설에 대해선 “시기상조”라고 했다. 유승민 의원은 “손 대표가 정치를 이렇게 추하게 할지 몰랐다”고 비판했다. 하 최고위원은 “손 대표가 반대세력을 숙청해 권력을 독차지한 다음 당을 팔아먹으려는 정치공작”이라며 손 대표와 민주평화당·대안정치연대의 움직임을 겨냥했다. 퇴진파 의원들은 손 대표에 대한 고소·고발도 이어 갈 예정이다. 반면 손 대표 측은 “우리도 윤리위 결정에 놀랐고 윤리위원들의 독립적 결정”이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손 대표 측 관계자는 “이제 보따리만 싸면 된다”며 탈당을 압박했다. 손지은 기자 sson@seoul.co.kr
  • 영접 나온 김영철, 회담선 빠져…최룡해 투입

    영접 나온 김영철, 회담선 빠져…최룡해 투입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실패로 숙청설이 불거졌던 김영철(왼쪽)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20일 평양을 찾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영접 인사로 등장했다. 그렇지만 정상회담에는 배석하지 않았다. 의전적 위상은 건재하지만 실질적 역할은 축소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김 부위원장은 시 주석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난 네 차례 북중 정상회담에 모두 배석했다. 그런 점에서 이날 김 부위원장의 정상회담 불참은 예사롭지 않다.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여파로 김 부위원장이 비핵화 협상 라인에서 2선으로 물러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실제 김 부위원장은 지난 4월 노동당 제7기 4차 전원회의에서 장금철에게 통일전선부장직을 넘기고 당 부위원장직만 유지한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이날 회담에는 최룡해(가운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겸 국무위 제1부위원장이 김 위원장의 바로 왼쪽에 배석해 김 부위원장의 역할을 대신 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최 상임위원장은 앞서 두 차례 북미, 네 차례 북중 정상회담에는 한 번도 배석하지 않았다. 김 위원장의 동생인 김여정(오른쪽) 노동당 제1부부장도 이날 평양 순안공항에서 열린 시 주석 환영행사에서 당 부위원장급으로 구성된 북측 간부 중 7번째 순서에 서서 시 주석과 인사를 나눴다. 그동안 김 제1부부장은 김 위원장의 정상회담에서 김창선 국무위 부장과 의전을 총괄했지만, 이번에는 의전을 담당하는 대신 행사 참석에 머무른 것으로 보인다. 대신 이번 회담에서 김 제1부부장의 의전 역할은 현송월 삼지현관현악단장 겸 당 부부장이 맡았다. 결국 비핵화 협상의 두 주역이었던 김 부위원장과 김 제1부부장이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역할에 변화가 생긴 것이 이번에 확인된 셈이다. 김 제1부부장은 최근 이희호 여사 별세 때 김 위원장의 조화를 직접 전달했다는 점에서 김 위원장과의 사적 거리는 여전히 공고하지만, 회담 등 공적인 업무에서는 손을 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회담에는 리수용 노동당 부위원장 겸 국제부장과 리용호 외무상 등도 참석했다. 또 김재룡 내각총리와 김수길 인민군 총정치국장도 배석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숙청설’ 김영철, 영접 행사 참석…건재 확인

    ‘숙청설’ 김영철, 영접 행사 참석…건재 확인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실패로 숙청설이 불거졌던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20일 평양을 찾은 시진핑 주석의 영접 인사로 등장해 건재를 과시했다.인민일보는 이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시 주석을 직접 영접했다고 보도하면서 김 부위원장을 포함한 북측 영접자 명단을 공개했다.김 부위원장은 지난 4월 열린 노동당 제7기 4차 전원회의에서 장금철에게 통일전선부장직을 넘기고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노이 회담 실패로 강제노역형에 처해졌다는 관측도 나왔다. 하지만 이달 초 집단체조 ‘인민의 나라’ 개막 공연에 이틀 연속 김 위원장과 함께 나타났고 이날 영접 행사에도 참여한 것이다. 그가 이번 북중 정상회담에도 배석했다면 여전히 북미 비핵화 협상을 총괄하거나 적어도 관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정상회담의 배석자 명단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중국의 방북수행단과 북한의 영접 인사를 감안할 때 그간 네 차례 회담과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그간 북측에서는 김 부위원장과 리수용 노동당 부위원장 겸 국제부장, 리용호 외무상이 참석했고 중국은 왕후닝 공산당 중앙서기처 서기, 딩쉐샹 주임, 양제츠 정치국원, 왕이 부장, 쑹타오 대외연락부장 등이 나왔다.이번에는 중국에서 경제 관료인 허리펑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주임도 왔기 때문에 그가 정상회담에 배석했다면 북측 카운터파트로 경제 담당인 오수용 부위원장이나 경제 정책 관련 장관이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허리펑 주임이 회담에 배석하지 않았더라도 북한 경제 사령탑인 박봉주 국무위 부위원장이나 김재룡 내각총리와 별도로 면담하며 경제협력을 논의할 수 있다.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김영철, 시진핑 공항 영접에 김정은·김여정과 함께 등장…숙청설 힘 잃어

    김영철, 시진핑 공항 영접에 김정은·김여정과 함께 등장…숙청설 힘 잃어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한동안 공개석상에 등장하지 않아 숙청설이 나왔다가 최근 다시 모습을 보인 김영철 북한 노동당 대남 담당 부위원장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영접하는 자리에 등장해 관심이 모아진다. 중국 인민일보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일 평양 순안공항(평양국제비행장)에서 시진핑 주석을 직접 영접했다고 보도했다. 인민일보가 공개한 북측의 공항 영접자 명단에 따르면 박봉주 국무위원회 부위원장, 리만건·최휘 노동당 부위원장, 김여정 당 제1부부장 등을 호명하면서 김영철 부위원장도 포함했다. 김영철 부위원장은 지난 4월 열린 노동당 제7기 4차 전원회의에서 장금철에게 통일전선부장직을 넘긴 뒤 한동안 국가적인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국내 일부 언론은 북한 정권이 하노이 회담 실패의 책임을 물어 김영철 부위원장을 강제노역형에 처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김영철 부위원장은 지난 2일 제2기 제7차 군인가족예술소조경연과 3일 집단체조 ‘인민의 나라’ 개막 공연에 이틀 연속 김정은 위원장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 강제노역설 주장이 힘을 잃게 됐다. 그 이후 17일 만에 다시 김정은 위원장과 함께 시진핑 주석 영접 행사에 자리하면서 여전히 신임을 받는 위치에 있음을 보여줬다. 특히 공항에서 리수용 노동당 외교담당 부위원장과 리용호 외무상 등도 함께해 ‘외교담당 3인방’으로서 위치가 여전한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낳는다. 공항 영접에는 김수길 군 총정치국장, 리영길 군 총참모장, 노광철 인민무력상 등 국방담당 3인방도 모두 참석했다. 북한 주요 고위 인사가 총출동한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김영철 부위원장은 김정은 위원장 집권 이후 지금까지 총 네 차례의 방중을 수행해 정상회담에 모두 배석한 인물이다. 그동안 북한의 대중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온 셈이다.이에 따라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북한이 하노이 회담 실패 이후 원인을 분석하고 향후 전략을 고민하는 등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겠냐는 해석이 나온다. 김영철 부위원장이 통일전선부장 직책을 내놓은 것도 이 과정에서 이뤄진 내부 역할조정으로 해석된다. 김영철 부위원장이 담당했던 대미외교 업무를 외무성으로 넘기는 등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다소 비대해진 권한을 분담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도 지난 4일 서울외신기자클럽 간담회에서 “김영철이 정치국 위원이면서 당 부위원장은 직위를 유지하고 있고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은 최근에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며 “정확하게 역할 분담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황교안이 구세주라는 유림 양반, 그 보수의 뿌리는 제대로 아시오?

    황교안이 구세주라는 유림 양반, 그 보수의 뿌리는 제대로 아시오?

    지난달 13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경북 안동을 방문했다. 그를 맞은 건 영남지역 종손 모임인 영종회 회원, 경북향교재단 관계자 등, 영남 종가와 유림의 간판이라 할 면면이었다. 종가의 권위가 ‘봉제사 접빈객’에서 나온다 했으니, 나름 법도에 충실했다. 문제는 ‘접빈객’의 내용이었다. “1세기마다 사람이 하나 난다고 하는데 건국 100년, 3·1운동 100년을 맞아 (정치 혼란 상황에서) 나타난 사람이 바로 황교안 대표다.”(박원갑 향교재단 이사장) “보수가 궤멸해 가는 이 어려운 처지를 건져 줄 우리 희망의 등불이요 국난 극복을 해줄 구세주.”(김종길 선비문화수련원장) 요즘 막말로 상종가를 치는 한기총 전광훈 회장이 지난 3월 예방한 황 대표에게 했다는 ‘칭송’을 연상시켰다. “위기 상황에서 우리 하나님께서 일찍이 준비하셨던 황교안 대표님을 자유한국당의 대표님으로 세워주시고….” 지난해 12월 “마음만 연합하면 문재인 저놈을 끌고 나올 수 있다”고 했던 인물이다. 시민의 반발이 없을 수 없다. 고성 이씨 문중인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고성 이씨) 선생의 증손자 이항증씨는 이렇게 개탄했다. “말 같지도 않은 행동을 하니까 시민들로부터 유림이 욕을 얻어먹는다.” 서애 유성룡의 14세손 유돈하씨는 18일 1인 피켓 시위를 했다. “어찌 선비가 되어 속유나 부유가 되어 소인배를 따르는가.” 24일 이런 펼침막이 안동 곳곳에 걸렸다. “안동 선비 어데 가고 아첨쟁이 넘쳐나노.” 오늘 펼침막은 더 걸린다. 이 꼴을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 경당 장흥효, 대산 이상정, 정재 유치명, 서산 김흥락, 석주 이상룡 등이 보고 있다면 무어라 할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허언을 하지 않던 이들이었고, 직언에 목숨 거는 걸 영광으로 알던 이들이었다. 사실 더 부끄러운 건 만천하에 드러난 ‘무지’였다. 지금의 이른바 ‘보수’는 제헌헌법부터 지금까지 헌법 전문에 명기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려 했다. 일부 족벌신문과 함께 8월 15일을 ‘건국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게 그들이다. ‘임시정부의 법통’도, 이 나라 건국의 초석이 된 항일독립운동의 의미도 지우려 했다. 선비의 기개와 항일독립운동의 기백은 안동 자존심의 두 축이다. 안동은 지자체 차원에서 처음으로 독립운동기념관을 세웠다. 안동의 독립운동가들은 의성 김씨, 고성 이씨, 진성 이씨, 전주 유씨 등 안동 명문가 출신이 대부분이다. 민족학교의 효시였던 협동학교도 이들의 지원 속에서 설립됐고, 협동학교는 혁신유림의 산실이었다. 밀양에 약산 김원봉이 있다면 안동엔 하구 김시현(안동 김씨)이 있었다. 김시현은 영화 ‘밀정’ 주인공의 모티프가 된 인물로, 황옥 경부를 의열단으로 끌어들였다. 이승만을 처단하려다 체포돼 9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런 김시현을 두 번씩이나 국회의원으로 뽑아준 것이 바로 안동 시민이었다. 물론 서인-노론의 경화세족, 세도가가 돼 조선을 망국으로 이끌고, 병탄 뒤엔 일제에 빌붙어 작위와 은사금을 챙긴 가문도 있지만, 그들은 소수다. 근대사의 이런 기백은 목숨 걸고 조선을 개혁하려 했던 사림의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성리학의 도통은 정몽주(경북 영천)에서 길재(경북 선산)-김숙자(경북 선산)-김종직(경남 밀양)-김굉필(대구 달성), 정여창(경남 함양)으로 이어졌다. 조광조(경기 용인) 이후 영남의 이언적(경북 경주), 이황(경북 안동), 기호의 이이(경기 파주), 성혼(서울), 호남의 기대승으로 분화되지만 영남과 안동은 사림의 원류를 이뤘다. 김종직에서 조광조에 이르기까지 사림은 훈신과 척신의 전횡을 극복하고 조선의 정치를 혁신하려 했다. 훈척이 일으킨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로 지도자들이 극형에 처해졌지만, 이들의 결기는 결국 선조에 이르러 공론정치에 기초한 사림의 시대를 열었다. 특히 조광조의 기개는 사림의 귀감이었다. 훗날 훈척의 길을 택한 기호와 달리 영남은 조광조의 길을 따랐다. 조광조가 위훈삭제를 놓고 중종, 훈척과 맞섰던 상황은 사림의 기개를 보여 준 조선 역사 최고의 명장면 가운데 하나였다. 조광조는 중종의 절대적 신임 속에 초고속 승진해 출사 후 불과 3년 만인 1518년 사헌부 대사헌에 올랐다. 그사이 향약을 보급해 지방의 자율성을 높이고, 균전제와 한전제를 관철했다. 당시 ‘송곳 하나 꽂을 땅조차 없었다’던 농민에게 땅을 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공론정치의 기틀을 마련해 훈척의 농단을 막으려 했다. 현량과를 관철해 과거제를 혁신했다. 조광조 개혁의 마지막 승부처는 왕권마저 위협하던 훈척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중종 14년(1519년) 10월 25일(음력) 조광조는 칼을 빼 들었다. “정국공신에 폐주(연산군)의 총신이 많으며, 반정에 공이 없는 자도 많습니다. 공신을 중히 여기면 공과 이익을 탐내어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게 됩니다.” 그는 편전까지 따라가 박원종, 유자광, 성희안, 유순정, 강혼, 유순, 구수영, 권균 등을 일일이 거론하면서 공신 명부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종은 “이익의 근원을 어찌 한꺼번에 막을 수 있는가”라며 거부했다. 중종도 완강했지만, 조광조는 더 완강했다. 중종실록은 그로부터 30일까지 위훈삭제를 둘러싼 논란만 기록하고 있다. 왕은 두려웠다. 왕의 면전에서도 눈을 부라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던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 반정공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들은 이미 죽었거나 늙고 병들었지만, 그 자식, 친척들이 눈에 불을 켜고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은 나라의 병권을 쥐고 있었고, 심지어 사병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11월 8일 밤이 돼서야 중종은 한발 물러섰다. 3사의 수장을 사정전으로 호출했다. “70여 인을 어찌 삭제할 수 있겠는가. 공의가 시끄러운 자라면 개정해도 되겠다.” 9일 검토가 시작됐다. 왕과 조광조, 대간 사이에 105명 가운데 지목된 76명 전원의 삭제를 놓고 입씨름이 벌어졌다. “전에는 뚜렷이 드러난 자를 개정하자고 청하고서 이제는 모두 개정하자고 하니, 어찌 전후가 다른가.” 왕은 역정을 냈다. 10일 다시 회의가 열렸다. 왕은 76명 삭제를 거부했다. 조광조가 나섰다. “어찌하여 다들 옳다고 여기는데 뜻을 고집하십니까. 임금의 뜻이 어딘가 매인 곳이 있는 것 아닙니까.” 대사간 이성동이 나섰다.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있다면 크게 두려운 일입니다.” 대제학 정광필이 따졌다. “어찌하여 우리의 말이 전후가 다르다고 하십니까.” 왕은 궁지에 몰렸다. “전후가 다른 것을 그르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12일 결국 중종은 전지를 내렸다. “이효성, 유순 등 76인의 외람된 것을 추가로 바로잡아서 공권을 맑게 하라.” 위훈삭제 후 불과 사흘 뒤 훈척의 친위쿠데타가 일어났다. 왕은 호랑이 같은 훈척이 싫었다. 하지만 물러설 줄 모르고 채근하는 사림파보다 이들이 차라리 편했다. 조광조와 사림은 역도로 몰려 숙청되고 처형됐다. 기묘사화였다. 사후 초기 그에 대한 평가는 인색했다. 마음으로부터 조광조를 섬겼던 퇴계조차 “타고난 기질은 아름다웠으나 학력이 충실치 못하여 하는 일이 지나침을 면치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 실패했다.” 그러나 이 평가는 오래지 않아 바뀐다. “그로 말미암아 선비들이 학문의 지향할 바를 알게 되었으며, 나라의 근본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 한때 사림의 화는 애석하지만, 선생이 도를 높이고 진정한 학문의 뜻을 높인 공로는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광조의 학문과 자세는 이황을 통해 영남 사림으로, 이이를 통해 기호 서인으로, 그리고 훗날 이황을 사숙한 성호 이익을 통해 채제공, 정약용, 이가환 등 기호 남인으로 이어졌다. 성호 이후 남인은 보수적인 영남 성리학파와 진보적인 남인 실학파로 분화됐지만, 구한말 노론 훈척들이 일제에 몸을 던질 때 이들은 한결같이 구국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다. 민주국가에서 주군은 국민이고, 대의는 국민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 아무리 염량세태라지만, 최순실과 그가 조종하던 로봇 대통령에게 신명을 바쳐 출세 가도를 달렸던 사람을 두고 이 나라 보수의 구세주라고? 지금 그가 대표한다는 ‘보수’의 뿌리가 가까이로는 친일매판, 멀리로는 영남 남인을 봉쇄했던 ‘훈척 사림’이었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 걸까. 퇴계와 학봉과 서애가 사당 문을 박차고 나올 일이다. 논설고문 kbc@seoul.co.kr
  • 김원봉 앞세운 文, 이념·정파 극복 취지… 보수야당 강력 반발

    김원봉 앞세운 文, 이념·정파 극복 취지… 보수야당 강력 반발

    야당 대표 때도 “치열하게 무장투쟁한 분” 김삼웅 “일제, 홍범도 다음으로 두려워 해” 金, 北서 고위직 지내 유공자 대상서 제외 보수 야당 “귀 의심케 하는 추념사” 비판 보훈처 “의견 수렴중”… 서훈 논란 재점화올 들어 독립운동가 서훈 논란이 불거졌던 약산 김원봉(1898∼1958) 선생과 관련, 문재인 대통령은 6일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으로)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고 “(좌우가) 통합된 광복군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됐다”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는 이념과 정파를 뛰어넘는 사회통합에 방점이 찍혀 있지만 보수 야당들은 ‘귀를 의심케 하는 추념사’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따라 서훈 논란 또한 재점화될 것으로 보인다. 김원봉 선생은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해 요인 암살 등 무정부주의 투쟁을 전개했다.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했으며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도 지냈다.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의 저자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은 첫째가 홍범도, 둘째가 김원봉, 셋째가 김구”라고 했다. 1948년 월북 이후 국가검열상과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지만 1958년 연안파 숙청으로 제거됐다. 문 대통령은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였던 2015년 7월 영화 ‘암살’을 관람한 뒤 “정말 치열하게 무장투쟁한 분인데, 해방 후에 북으로 갔다 얼마 있어 숙청됐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설 곳이 없었다”고 말했다. 같은 해 광복절에는 페이스북에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취지를 밝히고 김원봉 선생을 직접 거론했다. 북한에서 6·25전쟁 공훈을 인정받아 노력훈장을 받고 고위직을 지낸 탓에 그동안 국가보훈처의 국가유공자 선정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하지만 올 초 보훈처 자문기구가 3·1절을 맞아 독립유공자로 포상할 것을 권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쟁이 불거졌다. 지난 3월 피우진 보훈처장은 국회에 출석해 ‘김원봉을 국가보훈 대상자로 서훈할 것이냐’는 야당 의원의 질문에 대해 “지금 현재 기준으로는 되지 않는다”면서도 “의견을 수렴 중이며 (서훈 수여) 가능성은 있다”고 답했다. 자유한국당 전희경 대변인은 “6·25전쟁에서 세운 공훈으로 북한의 훈장까지 받고 북의 노동상까지 지낸 김원봉이 졸지에 국군 창설의 뿌리, 한미 동맹 토대의 위치에 함께 오르게 됐다. 기가 막힐 노릇”이라고 했다. 바른미래당 이종철 대변인도 “문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에서 난데없이 북한의 6·25전쟁 공훈자를 소환했다”며 “말로는 보수와 진보가 없다고 하면서 사실은 보수·진보의 편을 갈라 놓을 일방적 주장을 그때그때 무늬를 바꿔 가며 이어 가고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이념·정파 갈등을 뛰어넘자는 취지”라면서 “김원봉 선생이 언급된 맥락도 좌우가 통합된 광복군이 국군의 뿌리라는 의미이지 조선의용대가 곧 국군의 뿌리라고 대통령이 말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고 말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이근홍 기자 lkh2011@seoul.co.kr
  • 한국당 “문 대통령의 김원봉 헌사, 귀를 의심”…김원봉 누구길래

    한국당 “문 대통령의 김원봉 헌사, 귀를 의심”…김원봉 누구길래

    자유한국당이 6일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원 추념사에 발끈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4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현충월원을 ‘살아있는 애국의 현장’이라고 지칭하며 “여기 묻힌 한 분 한 분은 그 자체로 역사이며 애국이란 계급이나 직업, 이념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이어 “우리에게는 사람이나 생각을 보수와 진보로 나누며 대립하던 이념의 시대가 있었다”며 “스스로를 보수라고 생각하든 진보라고 생각하든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상식의 선 안에서 애국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통합된 사회로 발전해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위해 임시정부가 좌우합작으로 창설한 광복군을 소개하고,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끈 조선의용대가 편입되면서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하게 됐다고 언급했다. ●“귀를 의심” “반국가적 망언” 현·전 의원들 비판 한국당은 문 대통령이 이런 광복군의 독립운동 활약상을 설명한 뒤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창설의 뿌리가 됐다’고 덧붙인 것을 문제삼았다. 한국당 전희경 대변인은 논평에서 “귀를 의심하게 하는 추념사”라면서 “6·25 전쟁에서 세운 공훈으로 북한의 훈장까지 받고 북의 노동상까지 지낸 김원봉이 졸지에 국군 창설의 뿌리, 한미동맹 토대의 위치에 함께 오르게 됐다”고 밝혔다. 전 대변인은 “이 정부에서 김원봉에게 서훈을 안기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은 보훈처를 넘어 방송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펼쳐지고 있다”면서 “여기에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가 종지부를 찍었다”고 말했다. 그는 “6·25 전사자들을 뒤에 모셔두고, 눈물로 세월을 견딘 가족들을 앞에 두고, 북의 전쟁 공로자에 헌사를 보낸 대통령이 최소한의 상식의 선 안에 있는지 묻고 싶다”며 “청와대와 집권세력이야말로 가장 극단에 치우친 세력이라 평가할 만하다”고도 했다.이만희 원내대변인 역시 논평을 통해 “북한에서 훈장까지 받았다는 김원봉을 콕 집어 언급한 데 대해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대통령의 언급이 김원봉 등 대한민국에 맞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까지 서훈하기 위한 이 정권의 분위기 조성용 발언은 아니어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차명진 전 의원도 페이스북에 “김원봉이 누구인가. 김일성 정권 권력 서열 3위,6·25 남침 최선봉에 선 그 놈”이라며 “이보다 반(反)국가적, 반(反)헌법적 망언이 어디 있는가. 그것도 현충일 추모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라고 썼다. “내가 더이상 이 나라에서 살아야 하나”라며 “한국당은 뭐하나. 이게 탄핵 대상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말했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투사…이념 떠난 평가 필요 김원봉 선생에 대한 정치적·역사적 판단이 엇갈리는 부분은 있다. 영화 ‘암살’, ‘밀정’ 등에서 항일단체 단장으로 그려졌던 그는 1919년 의열단을 꾸려 조선총독·일본군·친일파 등을 암살하고,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주요 기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등 무장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일제는 김원봉 선생을 두고 “재외 반일 조선인의 거두”라고 표현하며 두려워했다.하지만 이런 업적에도 아직 그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한 데는 해방 뒤 월북한 행적 탓이 크다. 1947년 김원봉은 극우주의자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자 남조선노동당 지도자 박헌영(1900~1955)과 함께 북한으로 갔다.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해 국가검열상(검찰총장)에 임명됐고 노동상(노동부 장관)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북한에서 최고위직으로 활동하다가 1958년 숙청됐다. 한국당은 김원봉 선생이 “6·25 남침의 공으로 북한에서 훈장까지 받았다”면서 그를 기리는 데 극렬히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은 김원봉 선생이 월북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당시 친일파들이 기득권을 잡으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테러를 당하고 목숨을 잃었던 상황이 있었다고 전한다. 역사학계에서는 남북을 가른 이념이 아닌, 1945년 해방 전 행적을 기준으로 역사적 인물을 평가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한편 청와대 관계자는 문 대통령의 이날 발언과 관련해 “좌우합작을 이룬 임시정부의 모습을 보면서, 좌우 이념의 갈등을 극복하고 애국에 뜻을 모으자는 취지”라면서 “애국을 위해 낡은 이념에 갇혀서는 안된다는 의미인데 거꾸로 이를 문제삼아 다시 이념 공세에 나서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해식 더불어민주당 대변인도 논평에서 “문 대통령의 말은 역사적 사실이며 광복군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며 “약산 김원봉의 월북 이후 행적을 끌어들여 광복군 운동 자체를 색깔론으로 덧칠하는 일이야말로 역사 왜곡”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최고의 독립투사조차 포용하지 못했던 뼈아픈 배척의 역사를 이제 뛰어넘을 때가 됐다”고 덧붙였다. 최석 정의당 대변인 역시 논평을 내고 문 대통령이 ‘통합’을 강조한 데에 공감한다면서 “배는 좌현과 우현의 노가 서로 힘의 균형을 이룰 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우현이 손을 놓고 있어 대한민국호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을 뿐”이라며 “경제가 어렵다며 전국을 돌며 정부를 흔들고 있는 한국당은 본인들이 그 주범임을 깨우치고 이제라도 통합 대한민국으로 함께 전진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학계 “독립운동 서훈, 이념 아닌 1945년 광복 기준으로 평가해야”
  • 김연철 “김영철, 당 부위원장직 유지…신중한 보도 필요”

    김연철 “김영철, 당 부위원장직 유지…신중한 보도 필요”

    통일부가 최근 숙청설에 휩싸였다가 공개석상에 등장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대남 담당 부위원장에 대해 당 부위원장직을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4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서울외신기자클럽 초청 간담회에서 “김영철이 정치국 위원이면서 당 부위원장은 직위를 유지하고 있고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은 최근에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김 장관은 “정확하게 역할분담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계속해서 주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앞서 이날 통일부 당국자도 기자들에게 ‘김영철이 당 부위원장직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김영철 부위원장은 지난 4월 초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통일전선부장직을 장금철에 넘겨준 바 있다. 김 부위원장은 51일간 공개석상에 나오지 않다가 2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군인가족예술소조 공연 관람, 3일 대집단체조 ‘인민의 나라’ 개막공연 관람에 연이어 동석했다. 두 공연 소식을 전한 북한 매체들도 김영철을 다른 당 부위원장들과 함께 참석자로 호명했다.다만 통일부 당국자는 최고인민회의 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던 김여정 노동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이 ‘인민의 나라’ 개막공연에서 김정은·리설주 부부 바로 옆 자리에 앉은 것과 관련해서는 “앉은 순서와 호명 순서, 실제 당사자가 어떤 상태인지 등을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편 김연철 장관은 이날 간담회에서 김혁철의 거취에 대한 질문에 즉답을 피했다. 그러면서 “북한 정보와 관련해서는 저희가 추가로 확인할 만한 것은 없고, 다만 좀 신중한 보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라고 전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CNN “‘처형설’ 北김혁철 살아있어…현재 조사받는 중”

    CNN “‘처형설’ 北김혁철 살아있어…현재 조사받는 중”

    언론을 통해 처형설이 제기된 김혁철 북한 국무위원회 대미 특별대표가 현재 살아있으며 구금 상태로 조사를 받고 있다고 미국 CNN 방송이 4일 보도했다. CNN은 이번 사안을 잘 아는 익명 소식통을 인용해 김 특별대표가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결렬된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해 조사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 매체는 또 하노이 회담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통역도 역시 구금 상태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앞서 일부 국내 언론은 북한이 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의 책임을 물어 김혁철 대표 등을 처형했고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은 혁명화 조치를 당했다고 보도했다. 또 김혁철과 함께 실무 협상을 담당한 김성혜 통일전선부 통일책략실장도 정치범수용소에 보내졌고 통역도 정치범 수용소에 갇힌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숙청됐다던 김 부위원장이 지난 2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군인가족예술소조 공연 관람, 3일 대집단체조 ‘인민의 나라’ 개막공연 관람 장소에 잇따라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다만 CNN은 김 부위원장이 최근 김 위원장의 공개 활동에 동석한 모습이 포착되긴 했지만 하노이 정상회담 이후 권력 대부분을 빼앗긴 것으로 보인다고 소식통들을 통해 전했다. 소식통들은 또 CNN에 “김 부위원장이 강제노역형에 처해지지 않은 대신 자신의 사무실에서 조용히 ‘자아비판문’을 쓰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4월 최고인민회의 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아 ‘근신처분설’이 나돌던 김여정 북한 노동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도 전날 김 위원장과 함께 대집단체조 공연을 관람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김 제1부부장은 김 위원장과 부인인 리설주 여사 바로 오른편에 앉고 그 뒤에 리수용 당 부위원장이 앉아 오히려 정치적 서열이 더 높아진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씨줄날줄] 北 관련 가짜뉴스/박록삼 논설위원

    [씨줄날줄] 北 관련 가짜뉴스/박록삼 논설위원

    2013년 8월 29일자 조선일보는 ‘김정은 옛 애인 등 10여명 음란물 찍어 총살돼’라는 기사를 6면 톱으로 실었다. 당일 새벽 포털사이트에 단독 기사임을 표시해 게재했음은 물론이다. 또 조선일보는 그해 12월 10일 문화일보 보도를 재인용하며 ‘김정은 포르노 추문 옛 애인 현송월 기관총으로 공개처형…국정원 확인’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현송월 단장은 2015년 12월 모란봉악단 단장으로서 버젓이 베이징에 등장했고, 2018년 1월에는 평창올림픽 예술공연 사전 점검을 위해 공개적으로 한국 땅까지 밟았다.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은 어떤 해명도, 사과도 없이 그저 ‘오보 해프닝’처럼 지나갔다. 명백한 ‘북한 관련 가짜뉴스’다. 한국 사회 일부 세력들은 남북 관계 경색을 호시탐탐 노린다. 이를 목적으로 삼거나 아니면 배경으로 삼는다. 꽉 막혀 있는 남북 관계 속에서 이른바 ‘중국 내 대북 소식통’ 등 어설픈 전언이 쏟아지며 진실의 자리를 가로채곤 한다. 과거 ‘김일성 암살’, ‘성혜림 망명’, ‘금강산 폭파’ 등 어이없는 가짜뉴스는 한반도 긴장 완화를 바라지 않는 보수언론과 정보기관의 합작품이었다. 이는 먼 과거가 아니다. 지난해 5월 19일에도 TV조선은 ‘북, 미 언론에 풍계리 폭파 취재비 1만 달러 요구’라는 ‘가짜뉴스’로 남·북·미 대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으려 했다. 남북 교류협력이 활발하던 때는 달랐다. 시민사회단체, 중소기업인, 농민, 종교인, 청년·학생 등 남북을 오가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많아진 덕분이었다. 이른바 휴민트(human+intelligence)가 풍성해졌다. 과거의 조작된 북한 정보의 통용은 제한됐고, 휴민트를 통한 현실에 기반한 정보들이 남쪽으로 넘나들며 이해의 폭이 넓어지게 됐다. 북한에 대한 가짜뉴스는 상대적으로 설 땅이 적었다. 조선일보가 지난달 31일자 1면 기사로 ‘숙청’됐다고 보도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이 지난 2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군부대 공연을 관람하는 사진이 나왔다. 이 보도는 정용기 자유한국당 정책위원장의 어처구니없는 막말의 배경이 됐다는 점에서 그 사회적·정치적 폐해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줬다. 문재인 정부 들어 어렵사리 이뤄 낸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꽉 막힌 틈을 타 보수언론 등의 ‘고약한 버릇’이 다시 고개를 치켜든 것이다. 단순한 정쟁이나 오보가 아니라 여론을 호도하기 위한 발버둥처럼 여겨진다. 오랜 세월 동안 보수언론이 이념 대립을 부추기며 내놓는 ‘아니면 말고식’ 북한 관련 가짜뉴스의 무책임함은 매우 심각하다. 남북 화해협력의 창달자 역할은 못 돼도 최소한 걸림돌은 되지 않아야 한다. youngtan@seoul.co.kr
  • 숙청됐다던 김영철 건재… 또 반복된 ‘北 악마’ 프레임 씌우기

    숙청됐다던 김영철 건재… 또 반복된 ‘北 악마’ 프레임 씌우기

    보수세력 이념 잣대로 오보 생산 되풀이 박지원 “김여정 근신설도 근거 없을 것”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책임을 지고 노역형에 처해졌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가 나온 지 사흘 만인 지난 2일 김 부위원장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공개 행보를 수행하며 건재를 드러낸 모습이 3일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과거에도 일부 언론이 북한 주요 인사의 처형설을 보도했다가 오보로 판명된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북한 정권의 잔혹한 이미지를 전파하기 위해 일부 보수세력이 ‘북한=악마’ 프레임을 의도적으로 구사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이날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김 위원장이 전날 “조선인민군 제2기 제7차 군인가족예술소조경연에서 당선된 군부대들의 군인가족예술소조공연을 관람했다”며 관람에는 부인 리설주 여사가 함께했고, 김 부위원장 등 당과 군 간부들이 동행했다고 보도했다. 김 부위원장은 당 부위원장 중에서는 관람에 불참한 박봉주·태종수·오수용 부위원장을 제외하고 9번째로 호명됐다. 김 부위원장은 지난달 13일 보도된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2일 회의 기사에 마지막으로 등장했는데, 당시 당 부위원장 중에서는 12번째로 호명된 바 있다. 김 부위원장은 지난 4월 당 부위원장과 국무위 위원으로 선출된 이후 직책과 직위의 변동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앞서 지난달 31일 일부 언론은 김 부위원장이 해임된 후 자강도에서 강제 노역 중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김 부위원장의 노역설 보도가 나온 당시에도 대다수 전문가들은 신중론을 제기했다. 홍현익 세종연구소 외교전략실장은 보도 당일 “김영철은 당 부위원장과 장관급인 국무위원이 임명됐고 김정은하고 사진도 같이 찍었는데 혁명화까지 보냈을지 근거가 희박하다”고 했다. AP 등 외신은 김 부위원장 숙청 보도에 대해 과거 오보 사례를 들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김 부위원장의 노역설과 함께 보도된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의 근신설에 대해서도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이날 라디오 인터뷰에서 “(김 부부장이) 김 위원장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자 백두혈통인 만큼 아무 문제가 없다고 알고 있다”고 했다. 김혁철 국무위 대미특별대표 처형 보도에 대해서도 “한국과 미국의 정보당국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라고 했기 때문에 저는 한미 정부의 발표를 믿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과거 현송월 당 부부장 겸 삼지연관현악단장도 2013년 음란물 영상을 봤다는 혐의로 처형됐다고 일부 언론이 보도했지만, 이듬해 조선중앙TV를 통해 현 부부장의 건재가 확인된 바 있다. 박근혜 정부는 2016년 2월 리영길 총참모장이 처형됐다고 일부 언론에 흘렸으나 그가 석 달 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되면서 대규모 오보를 야기하기도 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북한 관련 오보의 경우 북한 정보는 확인하기 어렵다는 속성을 오히려 역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며 “공포정치를 일삼는 김정은과는 대화와 협력해서는 안 되고 굴복시키고 붕괴시켜야 한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라고 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특정 북한 인사들이 한동안 공개석상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신뢰하기 어려운 ‘대북 소식통’에 의존해 그들이 숙청 또는 처형되었다고 성급하게 단정 보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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