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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의 북향동향/강인덕/김영주 재기용은 「노간부」 무마책(기고)

    ◎후계체제 구축과정서 소외된 불만 해소 93년도 북한의 대내정치에서 가장 의외(?)라 할 수 있는 사건은 지난 8일 이후 드러난 인사개편이었다. 제6기21차노동당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과거 18년간 종적이 희미했던 김영주(김일성의 실제)가 「정치국원」으로 임명되었고 양형섭(김일성의 4촌매부)이 「정치국후보위원」으로 부활하였다. 그런가 하면 제9기6차 최고인민회의에서는 김영주와 김병식(현 사회민주당당수·20년전 조총련 부의장)이 「국가부주석」으로 지명되었다. 그 대신 출세가도를 달리는듯이 보였던 김용순(당비서)과 김달현(부총리겸 국가계획위원장)이 정치후보위원에서 탈락되었다.김용순의 경우 당비서와 종전의 직책(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 같으나 김달현의 경우는 2·8비날론공장 책임비서로 임명되었다고 하니 좌천인 것만은 확실하다.이외 당중앙위원과 동 후보위원 16명이 새로 임명되었는데 그 중 9명이 군장성이고 나머지 7명이 기술관료출신이라는 점에서 군부의 부상이 점쳐지고 있다. 우리의 관심사는 과연 이번 인사가 어떤 정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김영주가 담당할 역할이 무엇인가하는 점이 궁금하다. 일반적인 관측은 김정일세습체제가 마무리단계에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때 그의 역할은 김정일체제를 보다 강화시키는데 이바지 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보고 있다. 필자 역시 이런 견해에 찬동한다.그런데 막상 구체적으로 그가 담당할 역할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보면 석연치 않다.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김영주의 과거 경력을 캐 볼 필요가 있다. 그는 19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전반까지 당조직을 전담했던 사람이다. 지난 56년 김일성에게 일대 위기를 가져왔던 연안파·소련파와의 권력투쟁(8월종파사건)에서 김일성일파가 승리한 이후 당내에 남아 있는 반금세력을 일소하는 작업을 바로 김영주가 수행했다.다시 당조직지도부장이었던 그는 젊은 열성당원을 동원하여 「집중지도사업」을 조직하고 김일성1인체제구축을 주도하였다.60년대 기간에 전개된 군부숙청(1969년2월 김광협·허봉학숙청)도 주도했다. 이렇게 보면 현재 생존해있는 60·70대의 노간부(필자는 이들을 1·5세대라고 부른다)중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 노간부들이 김정일후계체제구축과정에서 소외당해왔다. 김정일은 지난 74년 후계자로 지명되자마자 「3대혁명소조」를 조직하여 당기관은 물론 군부대,행정기관,기업 집단농장,교육기관,사회단체 등 모든 기관에 이들을 파견하여 기성간부들에 대한 사상지도사업을 전개했다.안하무인격의 3대혁명소조원들의 행동은 이들 간부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다.이들 기성세대들이야 말로 북한정권을 세웠고 6·25를 이겨냈으며,폐허화된 땅에 오늘의 북한경제를 「일떠세운」장본인인데 「무슨 이유에서 투쟁경력을 무시하며 애숭이들이 책임을 추궁하고 사상검토를 하려 하는가」하는 심한 불평 불만을 갖게 되었다.더욱이 김정일등장이후 북한경제는 그의 「통이 큰 정치」(광벽정치)로 인해 엉망진창이 되어 강냉이밥 조차 배불리 먹을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으니 내심 불만일수 밖에 없다. 이들 1.5세대를 누가 위무할 것인가.역시 같이 싸워 온 김영주 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김영주가 담당할 정치적 역할이 어느정도 떠오른다.김정일후계체제확립과정에서 소외된 60대,70대 노간부들로 하여금 소외감을 떨쳐 버리고 김정일후계체제 강화에 참여케 하는 것이다. 지난 7월 휴전협정조인 40주년기념을 계기로 「전국로병대회」가 개최되고 이때부터 김영주의 이름이 공식거론되었다는것이 그의 정치적역할을 밝혀 주는 것이 었다°그렇다고 그의 등장이 남북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전망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 할것이다.
  • 창의문 개방(외언내언)

    서울 청운동 막바지,세검정으로 넘어가는 고개마루에 한양도성 4소문중 하나인 창의문이 있다.자하문으로 더 잘알려진 창의문은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1396년 도성과 궁궐을 짓는 대토목공사를 일으키면서 만들어진 성문이다.그러나 4대문중 북한산에 위치한 북문인 숙정문(처음에는 숙청문)이 창건된지 18년만인 태종때 폐쇄되면서 창의문 역시「산중에 있고 지대가 높다」해서 폐쇄당하는 불운을 겪는다.숙정문을 열어두면 도성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진다는 것이 폐문의 이유였다고 한다. 숙정문과는 달리 창의문은 양주나 고양으로 통하는 길이 연결돼 곧잘 이용되어왔다. 1623년 인조반정때는 지방에서 진군한 군사들이 홍제원에 집결했다가 창의문을 통과해 궁궐에 들이닥쳐 광해군을 왕좌에서 몰아냈다.그 당시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이 지금도 걸려있다.근래에 와서 창의문이 다시 폐쇄돼 「금단의 문」이 된 것은 68년 북한의 무장간첩 김신조일당이 청와대 기습을 노려 이곳까지 침투한 1·21사태이후.안보상 이유로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인왕산·북악산과 함께 창의문도 폐쇄조치가 내려졌다.그바람에 사적인 창의문 경내에는 군인막사와 경비초소등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어제 굳게 닫혔던 창의문이 개방되었다.일대 9백여평의 소공원까지 아담하게 조성돼 시민들에게 공개된 것이다.새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후 청와대앞길,인왕산길,대통령비서실장 공관(효자동 사랑방)개방등 일련의 청와대주변공개조치에 따른 것이다. 때마침 내년은 서울 정도6백년.갖가지 기념행사가 준비되고 있는중에 유서깊은 사적인 창의문을 시민들에게 돌려주어 한결 더 뜻깊다.도성의 4소문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서문인 창의문과 동남문인 광희문(일명시구문)뿐이다.그중에서도 문루와 함께 완벽하게 원형을 갖추고 있는 곳은 창의문이다.
  • 북 「김정일승계」 구도 마무리/「김영주복귀」 무얼 뜻하나

    ◎권력다툼 “끝”… 체제난국 타개 역점/“경제실패” 대대적 문책 인사 예상 김일성의 친동생으로 전노동당조직지도부장 등 핵심요직을 거친 김영주(71)의 권력일선복귀는 김정일후계구도를 마무리지으면서 경제난 등 북한이 당면한 대내외적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총동원체제구축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8년만에 복권 8일 북한 노동당 정치국위원으로 기용되면서 사실상 숙청된 지 18년만에 복권된 김영주는 한때 김일성의 후계자로까지 지목되던 인물.그는 지난 70년대 초반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등을 맡으면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나 김정일이 공식후계자반열에 오른 이듬해인 지난 75년이후 사실상 은둔생활을 해왔다.그래서 김영주가 지난 7월17일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준공식에 김부자 등 당고위인사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자 그의 정계복귀가 임박했다는 관측을 불러일으켰었다.당시 그의 호명서열은 당정치국서열 10위인 당비서 전병호 다음이었다.그러나 당정치국위원으로 선임된 이후 9일 열린 「전국공산주의미풍선구자대회」에서는 박성철부주석과 김영남정무원부총리겸 외교부장 사이인 7위로 부상했다. ○후계자 거론도 그는 62년부터 10년간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이라는 요직을 맡아 북한 당·정·군에 걸쳐 자파세력을 확충해나가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김일성 다음가는 실세였다.그는 김정일과의 후계경쟁에서 밀려날 때까지 노동당 정치국위원·중앙위원·정무원부총리 등 핵심요직을 두루 거친 바 있다. 그런 그가 김정일에 대한 우상화작업이 절정에 달한 시점에 재등장한 점을 북한문제전문가들은 의미심장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핵심요직 거처 서재진민족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김영주의 복귀는 김정일의 권력승계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김창순북한연구소이사장도 『김영주가 더 이상 김정일후계구도에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란 점에서 그의 복귀는 김정일족벌체제의 강화로 볼 수 있다』며 같은 견해를 표시했다. 이처럼 그의 정계복귀는 김정일후계체제가 마무리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반증한다는 분석에 정대규통일원정보분석실장 등 정부관계자들도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즉 그의 재등장이 김정일의 계모인 김성애가 김정일과의 불화로 지난 80년대이후 거의 공식석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지난달 15일 「여맹」회의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사실과 함께 김일성일가의 가족간 갈등관계가 일단락됐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북한식 표현대로 「기본가」인 김정일과 「곁가지」인 그의 배다른 동생 김평일의 후견인격인 김성애와 김영주간 삼각암투가 김정일의 완승으로 끝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김성애가 참석한 「여맹」전원회의가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결의를 했다는 것과 불가리아대사로 「좌천」되어 있던 김평일이 북한으로 되돌아온 사실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마이너스 성장 심각한 상황에 이른 북한경제는 올해도 마이너스 10%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는등 연4년째 뒷걸음질치고 있다.이 때문에 북한당국도 올해말로 끝나는 제3차 7개년계획의 실패를 이례적으로 자인,앞으로 2∼3년간 조정기를 갖겠다고선언했다. 이처럼 북한경제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시점에서 김영주의 복귀가 이뤄졌다는 점도 음미해볼 만한 대목이다.즉 김달현국가계획위원장을 경질한 데 이어 김영주와 가까운 사이로 알려진 홍석형을 그 자리에 앉힌 사실은 『대권에 미련을 두지 않고 조카를 돕겠다』는 것을 전제로 김영주에게 경제분야에서 상당한 재량권을 부여하거나 김을 남북관계개선을 위한 특사로 활용할지도 모른다는 관측을 낳게 하고 있다. 이와 함께 경제실패의 책임을 묻는 대대적인 후속인사도 뒤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 김정일 최고사령관 취임후 북,장성 6백64명 숙청/미 재단보고

    【도쿄 연합】 미국의 영향력있는 두뇌집단인 「안전보장회의재단」은 최근 북한 김정일 노동당 비서와 군과의 관계,군내부의 동향,주체사상의 재평가 등을 분석한 「평양에 있어서의 권력이행」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일본의 산케이(산경)신문이 22일 워싱턴발로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안전보장회의재단은 보고서에서 『김정일비서는 지난 91년 12월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한 후 총6백64명의 장성급 인사를 갈아 치움으로써 군주도권의 강화를 시도했다』고 전하고 『그러나 김정일은 김일성의 열렬한 충신이면서 매우 강력한 위치에 있는 인민무력부장(국방장관)과 총참모장은 유임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또 『북한 지도부내에서는 김일성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김정일이 세계전쟁 등의 위기에 견디며 현실적으로 국가를 지도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고 『평양정권이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있는 주된 이유는 군고관들이 앞으로 예상되는 군사적 모험에 말려들어 가는 것을 싫어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 초보적 사회주의 시장경제 목표/막내린 3중전회 평가와 전망

    ◎신속한 개혁·고성장 격론끝 합의/“당지도력 강화” 대규모 숙청설도 14일 폐막된 중공당 14기3중전회는 오는 2000년까지 초보적인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확립한다는 목표설정과 함께 그 실천을 위해 10개 부문 50개 조항의 구체적인 추진방안을 마련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이날 발표된 3중전회 공보에서도 이번 회의에서 채택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건립에 따르는 약간의 문제에 대한 결정」은 지난해 14차 당대회에서 확정한 경제체제계획을 계통화하고 구체화시킨 것으로 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총체적 청사진이며 90년대 진행할 경제체제개혁의 행동강령이라고 그 의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 결정의 10개 부문은 ▲경제체제 개혁의 당면임무 ▲국유기업 경영체제 전환 ▲시장경제 육성발전 ▲건전한 거시경제통제장치 마련 ▲합리적 개인소득 분배와 사회보장제도 확립 ▲농촌경제체제 개혁의 심화 ▲대외경제체제와 대외개방의 심화발전 ▲과학기술과 교육체제 개혁 ▲법률제도건설의 강화 ▲금세기말까지 초보적인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건립을 위해 당의 지도활동 개선강화 등으로 되어 있다.그러나 50개 항목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중국신문들이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궁금증을 더해주고 있다. 3중전회 공보와 이곳 소식통들에 따르면 이번 회의를 통해 전반적으로 등소평이 제창한 「신속한 개혁과 성장」에는 모두가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나 구체적인 실천방안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격심한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특히 지금까지 지방정부가 세금을 거둬 그중 일부를 국가에 바치던 세제를 서방 선진국들처럼 국세와 지방세로 나누는 개혁에서 지방당국자들의 저항이 극심했다고 한다.회의이전 국무원이 국세와 지방세의 비율을 60대40으로 설정하려 했으나 결국 50대50으로 조정된 것은 지방인사들의 저항이 어느 정도였나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여기에다 중앙정부는 재정수입의 일부를 내륙 빈곤지역에 지원토록 하는 부담까지 떠맡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당초 예상이 어긋난 또다른 분야로는 공유제의 완화문제를 들 수 있다.당초엔만성적인 적자에 허덕이는 국유기업의 상당부분을 주식회사화하거나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기는등 소유제 문제에 약간의 변화를 시도한다는 얘기가 계속 흘러 나왔었다.하지만 이번에 「공유제를 주체로 삼는다」는 결정이 내려짐에 따라 역시 이 문제는 사회주의 원칙고수라는 측면에서 민감한 문제임이 재확인된 셈이다. 이같은 점들을 들어 이번 3중전회에서 개혁파가 전승을 거두지는 못했다는 평가가 나오는가 하면 당중앙에서는 지도력 강화를 위해 군과 당정지도자들에 대한 일련의 숙청작업을 곧 시작할 것이라는 관측마저 나돌고 있다. 이밖에도 3중전회 공보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는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체제이다』고 선언한 것이나 『경제발전에서 인민의 이니셔티브가 존중돼야 한다』,『모든 개혁은 사회주의 생산력 향상에 도움이 되느냐의 여부에 따라 진행돼야 한다』는 등의 주장을 펴고 있는데 대해서도 주의깊게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강택민, “국유제 대개혁” 천명/중국 14기3중전회 개막

    ◎사유제 경제주도 가능케/반개혁파 인사 대거숙청 예상 【홍콩 연합】 중국공산당 강택민총서기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아직도 신성불가침한 부문으로 남아있는 국유제에 대한 대대적 개혁방침을 천명했다고 홍콩의 중국계신문 문회보가 11일 크게 보도했다. 강택민 총서기는 중국공산당 제14기중앙위원회 제3차전체회의(14기3중전회)개막을 앞두고 개혁심화에 대해 언급하면서 『비국유제가 일부지역과 일부업종에서 국유제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있다』는 「새로운 관념」을 제시했다고 문회보는 말했다. 강택민은 중국이 지금까지 강조해온 국유제의 「주도적인 역할」과 「주체적인 위치」는 전국적 또는 경제 전체를 두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밝히고 따라서 일부지역과 일부업종은 비국유제가 주도해도 된다고 말했다고 문회보는 전했다.강의 이같은 「새로운 관념」은 사유제의 보조적 역할을 주로 강조해온 종전의 고루한 관념을 크게 뛰어넘는 신선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홍콩 연합】 중국공산당 제14기중앙위원회 제3차전체회의(14기3중전회)는 최고 지도자 등소평의 개혁에 반대해온 주요 보수파 인사들도 숙청할 것이라고 홍콩의 성도일보가 11일 크게 보도했다.이 신문은 3중전회가 중국공산당 정치국(22명)과 국무원(중앙정부)의 인사도 개편하며 이 과정에서 개혁에 걸림돌이 돼온 보수파 인사 여러명이 숙청될 것이라고 전했다. 성도일보는 급격한 경제개혁 추진에 반대해온 이들 보수파 인사는 3중전회 직전까지도 당의 부패척결운동을 공격하고 개혁에 저항해왔다면서 이들이 3중전회를 통해 숙청되면 강택민 당총서기와 주용기제1부총리의 권력기반은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 김정일 우상화작업 본격화

    ◎주민과 혈연적 유대강화 「경애하는 어버이」로 호칭 격상/찬양문예물 대량 제작… 올들어 125편 보급/완벽한 세습체제 구축위해 친위세력 보강 올들어 북한내부에 김정일의 후계구도 구축을 위한 우상화작업이 더욱 본격화되고 있다. 김일성세습체제의 완벽한 정착을 위한 정지작업은 김정일에 대한 대내적 선전차원의 우상화작업과 북한정권내부에서 김정일 친위세력 보강작업이라는 이원적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선 김정일에 대한 호칭이 올들어 「경애하는 어버이」로까지 격상되는 등 김일성과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까지 올라 주목을 끌고 있다.최근 평양방송과 노동신문 등 매체들이 김정일과 주민들의 관계를 「어버이와 자식과의 관계」로 선전하면서 「혈연적 유대의 강화」를 역설하고 있다. 북한에서 김정일에 대한 호칭은 후계자옹립작업이 물밑에서 이뤄지던 70년대초에는 주로 「당중앙」으로 불렸었다.그후 김이 지난 80년 6차 당대회에서 당정치국원겸 비서,당군사위원 등에 기용되어 명실공히 후계자 반열에 오르면서 호칭도 「친애하는지도자」「위대한 영도자」「최고 사령관」「원수」등으로 차츰 격상됐었다. 물론 이전에도 김정일에 아부하는 연형묵전총리 등 일부 인사들에 의해 「어버이」라는 호칭이 간헐적으로 사용된 적은 있다.그러나 북한정권의 공식매체에 의해 이번처럼 집중적으로 사용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에 발맞춰 북한의 각종 예술단체들도 김정일 찬양작품을 대량으로 쏟아내고 있다.북한의 문예창작단체인 조선문학창작사는 올들어서만도 1백25편의 시를 비롯해 김정일을 찬양하는 다양한 장르의 문예물을 대량 창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요란한 권력승계 선전작업과는 대조적으로 김정일 친위세력 부식작업은 눈에 띄지 않게 은밀하게 진행되는 양상이다.북한 권력구조의 변화를 판독할 수 있는 공식행사 석상의 당서열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정권창립 45주년 기념중앙보고대회에 참석한 주석단의 서열을 보면 김부자에게 양다리를 걸친 인사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즉 김일성·김정일·오진우를 제외하고 4위 강성산정무원총리에서부터 박성철부주석,김영남부총리겸 외교부장,최태복당비서,김용순당비서,최영림부총리,홍성남·강희원·김달현(이상 부총리),김중린당비서,윤기복·서관희·황장엽·박남기(이상 당비서)김복신·김윤혁·김환·장철(이상 부총리),양형섭최고인민회의의장,전문섭국가검열위원장 등의 순이었다. 이들의 면면을 볼 경우 지난 당 제6차대회에서 김정일이 공식적인 후계자 지위에 오르면서 심어 놓은 측근 세력들은 대부분 건재하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김용순,최영림,박남기,김환,전문섭 등 핵심측근 인사들이 상위서열을 고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김용순의 경우 올들어 당의 대남사업을 관장하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특히 김일성의 친동생으로 김정일과 한때 치열한 후계경쟁을 벌였던 김영주전노동당조직지도부장이 지난 7월 숙청된지 18년만에 공식석상에 나타난 사실도 부자 세습체제가 완성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외견상 김정일체제가 강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북한문제 전문가들은한결같이 김정일시대가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는 것은 재미있는 현상이다.밤이 깊을수록 새벽 또한 멀지않다는 얘기다.
  • 천안문시위 진압/등소평 책임 시인/출간예정 어록집서

    【북경 AFP 로이터 연합】 중국의 최고 실권자 등소평은 자신이 지난 89년의 천안문 민주화 시위의 유혈진압에 책임이 있으며 이후 반정부 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주도했었다고 밝혔다. 중국의 인민출판사가 82년부터 작년2월까지 나온 등소평의 연설문들을 엮어 곧 출간할 예정인 어록집 3권에 따르면 그는 당시 천안문사태에 부분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었음을 시인했다.
  • 신창악 오페라 「소녀심청」/원로작곡가 김동진씨(인터뷰)

    ◎“판소리에 서양발성법 접목시켜 창안”/29일부터 김자경오페라단이 무대에 올려 『만족스런 연주가 됐으면 좋겠어요.아직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그렇지만 이렇게 자꾸 공연하다보면 신창악도 자리가 잡히겠지요』 오페라「소녀심청」을 무대에 올리게 된 원로작곡가 김동진씨(81)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몇년이나 미루어졌던 공연이 이루어져 기쁘다』면서 대뜸 「신창락」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김자경오페라단이 29일부터 11월1일까지 서울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할 「소녀심청」은 바로 김씨가 창안한 신창악으로 불리는 오페라이다. 『신창악은 판소리의 정신과 창법의 멋을 발전시켜 서양음악의 기법과 발성법으로 노래할수 있도록 한 거예요.전통음악을 깊이 연구한 바탕에서 다양한 서구의 기법을 응용해야만 만인이 공감할수있는 세계성 있는 작품이 될것이라는 생각에서 50년째 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소녀심청」의 원제는 「심청전」이다.지난 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으로 초연된뒤 이번이 두번째 공연.김씨는 그러나 이번 공연을 사실상의초연으로 생각하고 있다. 『당시 연주는 제음악이 아니었어요.행사를 준비하던 관쪽의 요구에 쫓겨 제대로 공연되지 못했습니다.그러니 제대로 된 신창악 오페라를 선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할수 있어요』 김씨는 당초 이 공연에 지휘자로 직접 나설 계획이었다.그러나 연습이 시작된 지난 7월부터 거의 매일 연습장에 나가 출연진에게 신창악을 가르치느라 지금은 무척 피로한 상태. 때문에 주위에서는 그가 무대에 서는 것을 적극적으로 말리고 있다. 『소리꾼은 목이 망가지면 북을 잡지않습니까.신창악의 지휘자는 판소리의 고수같은 역할이라고나 할까요.지휘자가 아닌 북잽이라는 생각으로 몸 상태를 봐서 다섯차례 공연중에 한번 쯤은 지휘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김씨는 잘 알려진대로 국민적 애창곡인 「가고파」의 작곡자.이밖에 「봄이오면」「창문을 열면」「님의 노래」등 1백여곡의 가곡과 여러개의 교성곡등을 남겼다.평남 안주 출신인 그는 해방뒤 현재 북한 「국립교향악단」의 모체인 평양 중앙교향악단을 창설해 지휘하다 숙청되어 6·25때 월남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지난 봄 두번째 신창악 오페라 「춘향전」을 완성했어요.이제 새로운 작품을 쓰기보다는 「심청전」과 「춘향전」을 통해 신창악을 제대로 보급하는데 힘쓸 작정입니다.그리고 나면 평생 쓴 제 작품을 정리해 펴내려고 합니다.제 작곡인생을 마무리하는 작업이라고나 할까요』 김씨에게 『만약 「심청전」과 자신의 표현대로 「서양음악을 모방」한 「가고파」가운데 후세에 한곡만 남겨야 한다면 어떤 곡을 고르겠느냐』고 다소 허황한 질문을 던졌다.그러자 그는 『세상사람들이 좋아한다면 「가고파」도 좋은 노래가 아니냐』면서도 『그래도 한곡만 골라야 한다면 당연히 「심청전」』이라고 다짐하듯 말했다.노작곡가의 우리음악에 대한 애정을 다시 한번 확인한 순간이기도 했다.
  • 중국,부패장성 30명 숙청/새달 대폭인사

    ◎“양백빙계열 권력기반 약화 【홍콩 연합】 중국은 인민해방군내 소장급 이상 장성 약30명을 다음달말 숙청한다고 홍콩의 권위있는 영자 주간지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최신호가 21일 중국군부의 정통한 소식통들을 인용,크게 보도했다. 이날부터 발매되기 시작한 리뷰지 최신호는 이같은 군부의 숙청겸 대인사는 최근까지 군부내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을 형성했던 양상곤 전국가주석과 그의 이복동생인 대장출신 양백빙의 권력기반을 약화시키는데 주목표가 있으며 부패장군의 숙청과도 관련이 있다고 전했다. 숙청대상에는 난주군구 사령원(사령관) 유정송(대장)을 비롯,성도군구 정치위원장공(중장),제남군구 부사령원 동학림(중장) 등 양백빙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진 장군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
  • 보­혁 갈등속 약진(러시아는 어디로:3)

    ◎보수파 유혈진압 이후의 정국 /지방정부,「제3의 권부」로 부상/권력 60% 보유… 이미 준국가지위 확보/옐친의회 해산령 반대… 향후 통제 부담 적어도 러시아 중앙국가권력은 이제 옐친대통령 1인의 수중에 모이고 있다.그러나 시각을 러시아연방 전체로 확대하면 사정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그동안 중앙권력이 의회·대통령간 권력다툼으로 약화된 사이 지방정부들의 권한이 거의 되돌리기 힘든 수준으로 신장됐기 때문이다. 최근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산하 「세계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의회해산 직전까지 전 국가권력의 60%가 지방정부에 넘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나머지 40%를 갖고 있는 의회와 대통령이 서로 싸우고 있다는 분석이었다.이런 상황에서 옐친대통령이 의회견제를 위해 지방지도자들로 구성한 연방평의회는 단순한 협의체가 아니라 의회·행정부에 이은 사실상 「제3의 권부」라는게 이 조사의 결론이었다. 옐친대통령은 이점을 감안,의회 유혈해산 직후 곧바로 지방정부에 대한 견제에 들어갔다.6일 모스크바 시의회를해산한데 이어 각 지방의회에 대해 자진해산을 명했다.오는 12월 11,12일 총선때 지방의회선거를 동시실시할 방침을 이미 확정지었다.일부 지방행정 지도자들에 대한 숙청작업에도 착수했다. 그러나 지방정부들이 이에 순순히 따를리 만무하다.자체 대통령까지 선출한 칼미크공화국은 7일 총선·대선 동시실시를 요구하고 나섰고 체첸 및 사하­야쿠츠공화국,바슈코르토스탄은 지방의회해산에 곧바로 반대하고 나섰다.이보다 작은 행정단위인 하바로프스크·요시카르­올라·레닌그라드 오블라스치(자치지역)의회도 자진해산에 반대하고 나섰다. 지난해 3월 옐친대통령이 제안한 연방조약의 결과 상당수의 지방정부는 이미 준국가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새 헌법안에 첨부된 연방조약안은 자치공화국을 「주권국가」로 규정하고 연방탈퇴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권한을 인정했다.독자적 헌법과 국기,국가를 인정한다는 내용까지 담고 있다. 21개 민족공화국중 체첸­잉구세치야,타타르스탄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이 연방조약에 서명했고 7개 공화국은 자기들의 헌법이 연방헌법에 우선한다고 선언했다.체첸·타타르스탄·투바·사하­야쿠츠·바슈코르토스탄공화국은 연방정부에 조세납부를 이미 중단했다. 각 공화국들도 행정부와 의회 사이에 옐친지지 여부로 이견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의회와 달리 지방주지사들은 상당수 옐친의 심복들로 임명돼 있다.하지만 탈중앙화라는 큰 조류에 있어서는 많은 주지사들이 지방의회와 입장을 같이 한다.6개 공화국을 제외한 전 민족공화국의 경우 고유민족 비율이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 결속력에 있어 중앙정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민족공화국뿐 아니라 그보다 소규모 행정단위인 크라이(영토자치주),오블라스치(지역자치주)중엔 민족공화국으로의 지위격상을 요구하는 곳도 있다.스타브로폴·연해주·아르항겔스·투멘·사마라 등이 대표적이다.볼고그다·우랄·남우랄·칼리닌그라드 등은 독자적으로 자치공화국을 선포했다. 특히 시베리아에 위치한 크라스노야르스크·톰스크·노보시비르스크·옴스크·바르나울 등은 중앙정부와 연방관계(컨페더레이션)를 맺자고 요구중이다.이들은 이미 스스로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가동,모스크바가 내리는 지시는 무시한다는 입장들이다. 과거 소련시절에는 공산당조직이 지방정부를 확실하게 통제해 주었다.지방의 간부들은 중앙정부 간부들과 일일이 「꼬붕­오야붕」관계로 연결돼 있었다.그러나 당조직이 붕괴되고 자치 기운이 확산돼 이러한 관계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방정부와 협조관계가 빠른 시일내 복원되지 않을 경우 옐친대통령은 힘들게 의회를 해산시킨 「보람」도 없이 「하나도 되는 일 없는」출발점으로 되돌아갈 가능성도 있다.
  • 신권위주의 통치(러시아는 어디로:2)

    ◎보수파 유혈진압이후의 정국전개/“옐친 독주” 민주주의 후퇴 우려/보수정당 해산령… 개혁성향 언론도 검열/“눈엣가시” 지방지도자 대규모 숙청 임박 의사당을 감싼 포연이 걷히면서 비상통치를 위한 옐친대통령의 권력장악이 본격화되고 있다. 예상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일정기간 옐친대통령 1인의 「신권위주의」통치는 불가피할 것같다.5일 당장 언론검열제 실시와 함께 보수색깔의 정당·사회단체 해산조치가 이루어졌다.그리고 지방정부지도자 및 정부관리들에 대한 대규모 숙청작업이 시작될 것이라는 말들이 크렘린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3일 모스크바 일원에 선포됐던 비상사태와 하오11시부터 상오 5시 사이의 통행금지조치는 기약없이 연장됐고 시경계쪽에는 군병력들이 통행차량들에 대한 철저한 검문검색을 실시하고 있다.남은 「폭도」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이기는 하지만 통금시간 내 특별허가증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선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져있다.산발적이지만 시내쪽에는 야간에 총격소리가 끊이지 않고있다. 숙청 1호로 발렌틴 스테판코프 검찰총장이 해임됐다. 그는 지난 2년여 옐친이 의회와 권력대결을 벌이던 시기에 수시로 의회편을 들었던 사람이다.그의 후임으로 시베리아 옴스크시에 사는 무명의 변호사로 옐친의 심복인 알렉세이 카자니크가 임명됐다. 6일에는 발레리 조르킨 헌법재판소장이 크렘린의 압력으로 물러났다.그는 지난달 21일 옐친대통령의 의회해산조치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었다. 권위주의의 도래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역시 언론의 통제.정간조치로 프라우다,덴,소베츠카야 로시아등 보수신문들이 5일 아침부터 가판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반옐친논조의 TV시사프로 「600초」도 방영이 중지됐다.그리고 부패혐의로 정직당했다가 의회해산 직전에 복직된 옐친의 심복 블라디미르 슈메이코 제1부총리가 새공보장관으로 임명됐다.그는 취임일성으로『민주주의와 애국심에 기초한 언론의 대오각성』을 촉구했다. 옐친은 6일 언론검열을 중단하겠다고 밝혔지만 언론통제는 이미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더이상의 검열도 필요없는실정이다. 언론통제의 화살은 보수신문들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네자비시마야 가제타,세보드냐등 개혁성향의 신문들도 5∼6일 검열로 군데군데 기사가 삭제된 흉한 몰골로 독자들을 만났다. 「구국전선」「노동자 러시아」「공산노동자당」「장교연맹」등 반정부단체들이 불법화됐고 그 대표들은 국가전복기도 혐의로 모두 체포됐다. 지난달 21일 의회해산 포고령때 지방의회는 존속시키겠다는 약속과 달리 옐친대통령은 지방의회도 자진해산해줄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이번 사태기간중 시종일관 의회편을 든 모스크바시의회는 이미 해산됐다. 옐친대통령은 의회와 권력투쟁중 원군으로 쓰기 위해 소집했던 89개 지방지도자회의에 대해서도 안면을 바꾸었다.의회가 없어진 마당에 추가 자치권한을 요구하는 그들과의 정치거래는 더이상 필요없다는 판단에서이다. 의회해산조치에 반대했던 아무르주지사와 시베리아의 노보시비르스크주지사가 해임됐다.이 두사람만 시범케이스로 처벌된 것인지 앞으로 전대상지역을 모두 처벌할지 여부가 향후 정국운영의 중요한지렛대로 부상됐다. 만약 옐친대통령이 유혈진압에 비판적인 지방정부에 대해 모두 메스를 가할 경우 러시아의 권력투쟁은 중앙정부 대 지방정부라는 보다 깊숙한 수렁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불과 이틀 사이에 취해진 이런 숨가쁜 조치들에 대해 일부에서는 「불가피하고 필요하다」는가 하면 힘들게 시작된 러시아민주주의의 퇴보를 들어 우려를 나타내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이제 러시아의 모든 국가권력은 옐친 1인의 수중에 모아졌다.그리고 이제 그에게는 이 「권위」를 잘못썼을 때 비난을 나누어 받을 상대도 없다.모든 책임은 그가 져야한다.
  • 보수파 대대적 숙청 “초읽기”/패자의 운명 어떻게 될까

    ◎무력점거 주동자 중형 불가피/옐친측,「부담」고려… 오래 끌지도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최고회의(의회)해산조치에 맞서 싸우다 체포된 루슬란 하스불라토프 최고회의 의장,알렉산드르 루츠코이 전부통령 등 러시아 보수파 지도부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이와관련,옐친대통령의 보좌관인 드미트리 루리코프는 4일 『보수파의 두 지도자들은 구금상태에서 신문을 받은 후 사법처리될 것』이라고 밝혔다.이들과 함께 체포된 알베르트 마카쇼프 장군,블라디슬라프 아찰로프(최고회의 지명 국방장관),안드레이 두나예프(〃 내무장관),빅토르 바라니코프(〃 보안장관)등도 사법처리 대상에 올라있다. 특히 지난 3일 모스크바 시청사와 방송국의 무력점거를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마카쇼프는 중형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따라서 새로운 극적인 사태의 반전이 없는 한 이들의 정치생명은 끝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사법처리를 한다고 해서 조속한 결말,예컨대 극형을 언도한다든가 신변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왜냐하면 이번 유혈사태를 촉발시킨 옐친의 최고회의 해산 역시 「쿠데타적」 초법적인 조치여서 이들에 대한 강경 징벌은 옐친에게도 정치적인 부담이 될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측통들은 지난 91년 쿠데타 주모자들의 사법처리가 시간만 끌고 있음에 비춰 이들의 경우도 유사한 절차를 밟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세르게이 필라토프 대통령 행정실장의 반정부 무장봉기 관련 최고회의 의원들의 검거선언과 이어 나온 옐친대통령의 공산주의 단체들의 활동금지령은 이번 사태와 어떤 형태로든 줄을 댔던 세력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과 정치적 보복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반발→진압… 시간별 상황(현지시각)/모스크바일대 비상사태 선포/하오 6시30분/정부군,의사당 진입 1∼2층 장악/상오 9시40분/의원·지지자들 백기들고 투항/하오 4시50분 ▲10월3일 하오 6시30분=옐친,모스크바 일원에 비상사태 선포. ▲하오 8시=TV센터,시위대의 로켓추진 수류탄의 공격받고 3개 TV채널송출 중단.이후 정부군,TV센터 일단 탈환 성공. ▲4일 0시30분=약 40대의 정부군 탱크,모스크바 시내로 진입. ▲상오 5시=옐친,의사당 건물에 대한 군작전 명령에 서명. ▲상오 9시40분=탱크와 기관포 엄호 아래 정부군 의사당에 진입,1층과 2층 장악. ▲상오 10시=정부군 탱크,의사당건물 정면벽에 포격.그후 의사당 한 창문에 백기가 내걸림 ▲하오 2시=장갑차 50대·경탱크 6대·트럭 10여대의 군차량행렬,의사당 탈환작전이 절정에 달한 가운데 시내 중심부로 진입. ▲하오 3시=구소련공화국 지도자 거의 전원이 옐친 지지의사 표명.파벨 그라초프 국방장관,백기들고 의사당 나온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 의사당에 도착했다고 러시아TV 보도. ▲하오 3시30분=옐친이 모스크바시에 야간통금령을 선포했다고 이타르타스 통신 보도. ▲하오 3시45분=한 프랑스 TV기자,루츠코이와 하스불라토프가 안전보장시 항복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고 모스크바발 생방송으로 보도. ▲하오 4시30분=옐친,프라우다를 포함한 공산주의및 민족주의 신문들의 정간을 선포했다고 이타르타스 통신 보도. ▲하오 4시50분=보수파의원 및 지지자들,의사당에서 항복표시로 손을 머리 뒤에 대고 나옴. ▲하오 7시=루츠코이와 하스블라토프 항복,「안전장소」로 이송됐다고 옐친의 한 측근 공개. ▲하오 7시50분=TV센터 전투를 지휘한 강경 민족주의자 알베르트 마카쇼프 전장군 체포됐다고 이타르타스 통신 보도.
  • 유난히 뜻깊은 올 광복절/「8·15」48주년을 맞으며

    ◎구총독부 철거 순국선열들도 반길것 오랫동안 새삼스럽지 않던 일이 어느 날 새삼스러워질 때가 있다.내일 맞이하는 8·15가 바로 우리들에게 새삼스러워지는 날이다.1945년이후 근 5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간 오늘에 이르기까지 올해만치 이날의 의미와 뜻이 새삼스럽게 되새겨지는 날도 별반 없었다는 느낌이 강하다.우리민족에게는 그때마다 새삼스러워야 할 오늘의 의미와 뜻이 국민들의 가슴에 뜨겁게 와닿지 못했던 것은 여러갈래의 해석이 있을 수 있다. 8·15의 의미가 우리들 국민정서를 송두리째 사로잡지 못한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해방당시 들어선 정부가 일제의 잔재를 청산시킬 아무런 의지도 갖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후 48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청산의 의지는 별달리 피부에 와닿았던 적이 없었다는 데 있다. 그 청산이란 반드시 피비린내나는 숙청과 보복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일제의 관청에서 관리로 녹을 먹던 사람이 해방된 조국 정부의 요직에 그대로 들어가 앉아 나라의 살림을 도맡아 처리하였고 일제가 쓰던 건물에 그대로 들어앉아 공무를 보았으니 의자나 책상 역시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독립투사의 후손들은 달동네의 사글세방에서 끼니를 굶으며 병고의 시달림을 받고 있는데 일제에 부역하거나 거기에 빌붙어 호사를 누린 사람들의 후손은 각계각층의 요직에 앉아 권세를 누려왔다.누구도 그런 사람들의 구차스러움과 야비함을 꾸짖지 않았다.심지어는 그런 사람들이 순국선열들의 영령들을 애도하는 행렬의 앞줄에 서서 분향까지 하는 웃지 못할 사태까지도 우리는 여러번 목도해왔다. 아픔도 역사라는 어눌한 궤변과 건축사적 사료가 된다는 이유 때문에 일제의 총독부건물에 나라의 중앙관청이 들어서고 총독의 살림집에 대통령이 또한 살림집을 차려왔다. 이러한 모든 청산의욕의 뜨뜻미지근함은 해마다 맞이하는 8·15의 의미와 뜻을 퇴색시켜온 것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이웃나라 땅에서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던 선열들의 뼈가 얼마전 환국하여 그분들이 몽매에도 그리던 고국의 땅에 다시 묻히게 되었다. 해방당시 지체없이 결행되어야 할 일이 해방 48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흘러간 지금에서야 그 뜻을 받들게 되었다는 것은 부끄럽고 가슴아픈 일이다.그 분향소에만은 일제에 녹을 먹었던 사람들이 출입하지 말았으면 했는데 처음부터 지켜보지 못했으니 그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때늦은 감은 없지 않으나 중국땅에 묻혀 있던 선열들의 영령을 모셔오는 일도 일제의 청산이며 총독부건물과 그 총독의 집이었던 청와대의 구본관을 철거하는 것도 일제청산의 길이다.대청기둥뿌리밑에 숨어 있는 개미집을 발견하여 헐어낸 속시원한 오늘의 8·15로 기억되기 충분하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는 매우 착잡하다.조선시대부터 우리의 선조들에게 총칼을 들이대고 위협과 약탈을 일삼다가 결국은 일제치하 36년이란 치욕스러운 역사를 우리에게 안겨준 일제.그들의 만행이 아직도 우리들의 뇌리에 역력하건만 그들은 망한 적이 없다. 지지리도 못난 꼴을 보이고 망조가 들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이다.사람이 짓는 선악의 업보에 따라 과보가 주어진다는 인과응보란 말 어디를 뒤져보아도 일본이란 나라에 망조가 든 징조는 보이지 않는다.일본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점이 이 시점에서 우리를 당혹스럽게,그리고 착잡하게 만든다. 해방된 지 48년.이젠 경제만이 나라가 살아나갈 일이란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일이 되었다.경제논리만이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고,이런 논리는 장차도 좀처럼 뒤바꿔질 것 같지가 않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일제의 잔재를 철저하게 청산하되 오늘날 일본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모습을 주의깊게 바라보면서 우리가 섭취해야할 것이 무엇인가를 새삼스럽게 살펴보아야 할 처지에 우리는 놓여 있다.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심정적 갈등을 하루 빨리 해소시키기 위해서도 우리들 주변에 버젓이 산재한 일제의 잔재부터 청산하는 일이 시급하다.
  • “벌목장 노역3년 TV한대 못사”(오늘의 북한)

    ◎시베리아 작업장 탈출 노동자가 폭로한 북한의 인권/정치범수용소 12곳… 「반당」 찍히면 직행/숙청인사들은 「특별구역」 설정 격리도/“인권문제는 자국의 실정맞게 보장”… 북대표 억지 시베리아에서 강제노역중인 북한의 벌목노동자들의 참상이 최근 외신을 통해 전해지면서 북한의 인권문제가 또 다시 국제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러시아 하바로프스키주에 있는 북한 벌목사업장에서 모진 생활을 견디다 못해 탈출한 김호씨(34)가 최근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에게 정치적 망명을 요청해 국제적 이목을 집중시킨 것도 그 하나의 사례다. 김씨의 증언에 따르면 벌목장 노동자들은 3년을 벌어도 TV 한대 사기 힘든 저임금과 중노동에 시달리며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한다.김씨는 탄원서에서 『북조선에서 정치탄압이 없고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제가 사랑하는 조국과 부모형제를 버리고 러시아로 정치적 망명을 요구하겠습니까』라고 호소하고 있다. 지난 3월 제네바에서 개최된 유엔인권회의에서 러시아대표가 북한의 인권상황이 계속 악화되고 있다고 지적하는등 올들어 국제인권기구와 주요국 언론들은 한결같이 북한의 인권에 대한 범세계적인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 6월 빈에서 열린 세계인권회의에 참석한 북한대표 백인준은 『인권문제가 다른 나라의 사회·정치제도를 전복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어선 안된다』며 북한사회의 인권문제에 관한 서방국들의 간섭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그는 『인권문제는 해당국가가 자기실정에 맞게 책임지고 보장해야 할 문제』라면서 『북한은 정치적 권리와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 사회』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은 국제사면위원회도 지적했듯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는 물론 거주이전·직업선택·종교등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기본적인 자유조차 제한받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이같은 상황에서 북한주민들이 노동당의 1당독재,더 정확히 말해 김일성부자체제에 대해 공개적인 비판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북한에는 김부자체제를 보다 확고히 다지기 위해 북한당국이 가장 우려하는 정치사상범을 수용하는 12개소 이상의 특별독재대상구역까지 설치되어 있다고 귀순자들은 증언하고 있다.북한 전역의 산간오지에 설치된 이 수용소들은 러시아의 벌목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인권의 완전한 사각지대로 알려져 있다. 이 특별독재대상구역에는 과거에는 지주·친일파·반혁명적인 종교인들과 그 가족들이 주류를 이뤘으나 근래에는 노동당의 간부나 당원으로 있다 밀려난 자들과 그 가족들이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70년대 이후 김일성부자 세습체제구축과정에서 밀려난 정치범들이 급증해 수용인원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는 소식이다.즉 김정일이 장악하고 있는 3대혁명소조에 의해서 반당·관료주의자로 낙인찍힌 뒤 국가보위부나 법무생활지도위원회의 판정으로 숙청된 당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 수용소에 일단 들어가면 외부와의 접촉이 일체금지된 채 매일 12시간이상씩의 강제노동과 2시간이상 자아비판을 위주로 한 사상개조학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이들이 하는작업은 주로 석탄과 광물을 캐는 갱도작업과 벌목및 개간작업등의 중노동이다.
  • 야서도 「큰 흐름」엔 수긍/개혁을 보는 민주당 시각

    ◎제도화 등 각론·절차에 사안별 이견 민주당이 내리는 김영삼정부 1백일 평가는 한마디로 개혁의 큰흐름은 인정하나 방법상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압축된다. 따라서 총론적 접근보다는 각론에서의 문제점 제기에 치중하는 인상이 짙다.예컨대 과거처럼 「잘못됐다」라는 대전제 아래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국민적 기대와 일치하고 있는가,또는 절차와 순위가 올바른가 등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대여견제와 비판이라는 정치적 시각에서 예전같은 강도나 무게를 찾아보기가 힘들다.이는 민주당이 처해있는 한계와 고민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임채정의원이 『당이 개혁을 분석·비판은 하지만 대안이 없다』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방법상의 문제점을 철저히 부각시킴으로써 「개혁정국」에서의 입지확보및 강화를 노린 흔적이 역력하다.김병오정책위의장은 총평을 통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제도개혁을 사정과 의식개혁 뒤로 미루고 있어 일과성으로 그칠 위험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기택대표가 조만간 기자회견을 통해 공식 입장을 표명할 예정이지만 평가는 전반적으로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먼저 새정부가 설정한 개혁목표,즉 군사문화청산은 국민적 기대와 시대적 요청이라는 점을 들어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민주당의원들이 『김영삼정부 출범후 1백일동안 정부가 올바른 개혁을 추진할수 있도록 수구세력의 저항에 맞서 적극 협력해 왔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가 소외되고 대통령중심의 개혁이 이뤄지고 있는데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국민과 국회를 관객으로 전락시키는 「극장식당」식 개혁은 지속적 추진을 담보할수 없다는 논리이다.최근의 「사정개혁」과 관련,노무현최고위원은 『사정의 방향이 숙청 또는 정치보복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규정했다.달리 해석하면 민주당이 그동안 개혁돌풍속에서 느꼈던 무기력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정치분야에 있어서는 형평성을 상실한 부정비리수사,불완전한 과거 청산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박상천의원은 『표적수사,성역있는 수사가 진행중』이라며 『신질서를 위한 제도개혁에 소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예를들면 12·12사태,5·18광주민주화운동등의 진상규명이 크게 미흡하다는 것이다.이러한 불완전한 청산은 결국 문민정부의 「족쇄」로 작용,창조를 위한 개혁을 어렵게 만들것이라는 지적이다. 한광옥최고위원도 『제도개혁없이 개혁은 있을수 없다』고 단언했다. 경제부문을 보는 시각은 특히 비판적이다.경제활성화에 역점을 둔 신경제개혁은 우리 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고려할 때 실패할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무리한 경제활성화대책은 물가안정 기반을 무너뜨리고 고통분담에 나선 서민생활에 주름살만 지을 것이라는 설명이다.박지원대변인이 『현 경제팀은 전혀 개혁의지가 없는 낡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며 전면교체까지 촉구하고 나선 것도 이같은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회 부문의 평가는 주로 교육분야에 쏠려있다.입시부정,해직교사 복직등에 있어 정부의 개혁의지가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처럼 민주당의 진단은 전체가 아닌 사안별로 내려지고 있으며,그것도 개혁추진에 따른 부산물에 집중되어 있다고 볼수 있다.
  • 김덕용 정무1장관,강연서 방향제시

    ◎“개혁은 국제경쟁사회의 생존수단” 응징 아닌 포용… 5년간 지속/「위로부터」함께해야 성공/광복때 못한 모순청산 이제야 시작 김덕용정무제1장관이 새정부의 개혁과 관련,3단계 개혁론을 제시해 주목을 끌고 있다.즉 정치적 결단에 의한 개혁→잘못된 관행과 의식개혁→법적 제도적 개혁의 단계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새 정부의 실세인 김장관의 이같은 발언은 김영삼대통령의 개혁정책에 대한 일부의 비판을 일면 반박하는 한편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겠다는 새 정부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으로 볼수 있다.김장관이 18일 고려대 정책과학대학원 총교우회 모임에서 새정부의 개혁 방향에 대해 이같은 논지로 강연한 내용을 간추린다. 새 정부의 개혁을 놓고 프로그램이 없다느니 「인치냐 법치냐」는 등의 비판이 있는 것 같다.그러나 김영삼대통령의 개혁방법과 방향은 3단계로 진행되는 것으로 이해하는게 바람직하다. 1단계 개혁은 정치적 결단으로 개혁의 큰 줄거리를 잡는 일이다.구시대의 상처를 치유하고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으로 제자리에놓이게 해야 한다.예컨대 국가안보를 담당하고 있는 군이 정치군인을 배출하지 못하도록 인사를 통해 바로 잡자는 것이다.군사정부시대에는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이지 못했다.기업은 기업활동만을,학생은 공부만을,군인은 국토방위만을 하지 않았다. 2단계는 잘못된 관행과 의식을 바꾸는 작업이다.기업에 대한 규제와 간섭이 심하다보니 웃돈이 오가고 부정부패의 근원이 됐다.이러한 관행을 바로잡는 것과 함께 공직자들의 의식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국민들의 의식개혁은 더욱 중요하며 근본적으로는 교육이 뒷받침돼야 한다. 3단계는 정의의 방향으로 법과 제도를 바꾸는 일이다.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잘 살고 정의로운 사람이 보장받는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정치적으로 선거법과 공직자윤리법등을 고치고 경제적으로 세제개혁,토지공개념,금융실명제등을 반드시 실현하는 것 등이다. 법과 제도의 개혁이 가장 중요하다는 인식은 개혁의 본질을 이해못한 것이다.법과 제도를 고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요된다.그러나 대통령의 지도력,통치력,해결력으로는 할 수 있다.이같은 개혁방향은 순서의 문제가 아니라 단계와 방법의 차이라고 봐야 한다. 김대통령의 개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있다.새 정권이 들어서면 으레 그랬듯이 정적들을 숙청하기 위한 작업이 아닌가.나중에 꼬리를 내리는게 아닌가.어디까지 할 것인가.과거를 들추고 누구를 몰아내는 것이 아닌가 등의 회의와 불안이다.그러나 개혁은 누구를 응징하거나 처벌하는게 아니라 포용하고 끌어안는 작업이다.개혁은 일시적이 아니라 5년동안 지속될 것이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개혁은 「위로부터의 혁명」이지만 「아래로부터의 혁명」과 함께 만나야 성공할 수 있다.근로자는 어려운 시기에 임금동결에 협조하고 있다.더 많이 가진 자는 더 양보해야 한다.세제개혁을 통해 덜 가진자의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시켜야 한다.분배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도 금융실명제를 반드시 실시할 것이다. 한국병은 광복으로부터 출발했다. 독립투사들이 유랑생활 때문에 국내 기반을 갖추지 못해 친일파의 수족이 1공화국을 움직였다.일제의 청산은 커녕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와 부정부패를 낳았다. 그러나 지난해 선거는 온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해 새 정부에 개혁과 변화의 기치를 내걸게 했다.시대적 상황은 변화와 개혁,개방의 방향으로 가도록 하고 있다.개혁은 치열한 국제 경쟁사회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다.
  • 옐친,“개혁반대 공무원 숙청”/전국TV연설/의회선거 가을이전 실시

    【모스크바 로이터 연합】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6일 개혁반대 공무원들을 숙청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새 의회선거도 올 가을이전에 실시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옐친 대통령은 이날 국민들의 지지를 확인하기 위해 지난달 실시한 국민투표 결과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 TV연설 녹화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투표결과 자신의 최대의 정적인 최고회의(의회) 의장인 루슬란 하슬불라토프에 의해 방해받고 있는 개혁을 계속 추진하도록 국민들이 지지해 주었다고 평가하고 개혁동참에 거부하거나 주저하는 공무원들을 단호히 축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새 의회 선거시기를 금년 가을이후로 미룰 필요는 없다고 본다』면서 조기선거 실시안을 곧 최고회의에 상정할 것이라고 말했으나 최고회의측은 이같은 조기선거 실시가 불법임을 들어 반대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54)

    ◎길림시절:13/「공청」날조 제3기/거당적 「유일사상체계」 확립 맞춰/68년부터는 가입 아닌 결성 주장/78년엔 조직성립 날짜까지 “창작” 김일성은 1950년대 후반부터 약 10년간 「공산청년동맹」이란 조직 이름을 조작하여 자기가 「가입」한 공청이 조선공산당 계통인 점을 암시하려고 애썼다.이 시기는 그가 항일빨치산의 항일투쟁만을 「조선노동당의 혁명전통」으로 삼고 다른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을 「종파행동」으로 격하시켜 북한에서 타도대상으로 만들어버린 시기였다.그는 중공계 빨치산을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빨치산」으로,또 자기를 조선공산당계통이었던 것 같이 만들어 내었다. ○「조공」계통 암시 그러나 북한에서의 반종파투쟁은 극단을 치달려 멈출 줄을 몰랐다.67년5월 상순에 있었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회의부터는 드디어 1937년에 있었던 보천보전투를 국내에서 도와 준 박금철 등까지 숙청하였다.그후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책동이 전 당적으로 벌어지게 되었는데 김일성은 과거의 중공계 빨치산들을 사실상 자기의 꼭두각시로 전락시키고 몇해 안가서 김정일 후계체제까지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67년 후 그는 이러한 혹독한 정치를 강행하는 한편 과거의 그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대규모적인 자신의 전기를 만들어 내게 된다.68년에 발간된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부터가 공청날조 제3기로 되는데 그후 그의 「경력」은 그 이전에 선전하고 있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68년… 「1927년 여름에 장군께서는 길림에서 처음으로 공청(공산주의청년동맹)을 조직하셨던 것이다」59쪽 69년… 「김일성동지께서는… 1927년 여름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을 결성하시었다」12쪽 78년…「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27년8월28일 반제청년동맹의 핵심들을 골간으로 조선공산주의 청년동맹을 조직하시었다」234쪽 이러한 「공청 날조」과정에서 보이는 문제점은 아래와 같다. 1.1968년에 나온 김일성 전기는 이 책이 나오기 직전까지의 전기들이 20년이상 한결같이 「공청 가입」이라 하고 있었던 것을 「공청 결성」으로 바꾸었다.공청을 김일성이 아예 만든 것으로 한 것이다. 2.그는 과거 10년간 자기는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했다고 하였다.그런데 이번에는 이 말을 다시 바꾸어 자기가 만든 것은 공산주의청년동맹이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사실은 그는 해방직후부터 약 10년간 자신은 중공계통의 「공산주의 청년동맹」에 들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중국공산주의청년단 같으면 김일성이 「결성」하지 않았다는 것은 만인이 다 아는 일이다. 3.이 모순을 깨달은 것은 아니겠지만 69년 전기는 공산주의청년동맹이란 조직이름의 머리에 「조선」이란 국적으로 갖다 붙였다.이리하여 이 가공조직은 형식적으로는 조선이란 민족의 「주체」를 찾게 되었다. ○유령들이 맹활약 4.김일성은 이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의 동맹원을 「반제청년동맹」의 핵심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반제동맹이란 30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생겨난 공산당의 산하 대중단체였다.이러한 조직은 27년에는 있을 수가 없는데도 전기에서만 「반제청년동맹원」이란 유령들을 활약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5.가공조직에 결성날짜를 메긴다는 것은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후 김일성은 오랜 기간의 허무한 「노력」끝에 78년 드디어 이 「공청」의 결성일을 확정하였다.27년8월28일이 그 날짜란 것이다. 요컨대 김일성은 68년 이후 「공청」을 날조하기에 이르렀다.「주체」확립의 내막이란 대개가 이런 것들이지만 여기서는 다른 문제는 차치하고 다 같이 그가 조작한 반제청년동맹과 공청의 결성날짜 문제만을 정리하여 놓는다. 68년 전기는 「반제청년동맹 결성」이후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장군께서는 먼저 각지에서 찾아온 선진 청년들을 일정한 기간 동맹조직에서 훈련을 주신 다음 시내의 각 학교에 들여보내거나 농촌에 보내어 사업을 하게 하였다.그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벌써 수많은 곳에 하부조직들이 생겨나서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독자들은 이 기술을 보면 반제청년동맹이란 조직은 공청 성립이전에 상당한 기간,적어도 1∼2개월은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이러한 필치는 75년에 나오는 「은혜로운 태양」까지 지속되고 있다. ○창립일 변조 고민 그런데 막상 날짜를 메기는 단계에 이르던 78년에는 반제청년동맹 결성은 27년8월27일로,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결성은 8월28일로 정해졌다.동맹 결성후 단 하루만에 공청이 결성된 것으로 된 것이다. 역사상 조선공산당은 25년4월17일에 결성되고 고려공산청년회는 그 하루 후인 4월18일에 결성되었다.그런데 공교롭게도 가공조직인 반제청년동맹과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의 결성날짜는 그 「월」과 「일의 두자릿수」가 공산당과 청년회의 패수인데다 날의 한자릿수가 각각 동일하다. 따라서 이 날짜들은 김일성이 그가 종파라고 매도하는 조공과 고려공청의 결성날짜를 「참작」한 것이 아닌가하는 혐의를 낳게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①59쪽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53)

    ◎길림시절:12/가공조직 「공산청년동맹」/56년 연안파 숙청뒤 중공게경력 은폐/“조선공산당 산하서 청년활동” 꾸며내/중국공산당원생활 7∼8년 과거 지우기 공청날조 제2기가 되는 19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김일성은 「공청가입」에 관한 표현을 아래와 같이 하고 있다. 58년…「김일성원수는 1926년에 벌써 공산청년동맹에 가맹하였다」이나영의 「조선민족해방투쟁사」337면 61년…「김일성동지는 길림육문중학교에 입학한 후 1926년 8월에 공산청년동맹에 가맹하였다」「조선근대혁명운동사」287면 이밖에 64년에 나온 박상혁의 「조선민족의 위대한 영도자」도 비슷한 표현을 쓰고 있다. 해방후 중국공산주의청년단이란 조직이름을 이리저리 변형해 가면서 자신이 마치 26년에 중공계통이었던 것 같이 비치고 있었던 김일성은 5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이러한 허위를 새로운 허위로 전환하였다.그는 우선 52년에 사용한 「공산주의청년회」란 조직명칭에서 「회」를 「동맹」으로 다시 돌리고 중공계통이란 냄새를 없앴다.그 다음 「공산주의」에서 「주의」를 빼고 「공산청년동맹」이란 새로운 가공조직을 만들었던 것이다. ○허위사실 또 변조 그런데 이러한 변조작업의 정치적 배경에는 1956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8월 전원회의 이후의 연안파,소련파 숙청이 있었다.중국공산당 계통이었던 연안파를 몰살하면서 김일성은 「주체」적인 방법으로 자기 경력에서 중공계통이란 냄새를 지워버린 것이다.원래 북한에서 사용하는 「주체」란 말에는 김일성만은 무슨 일이든지 제멋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런데 「공산주의 청년동맹」을 「공산청년동맹」으로 명칭변경한 김일성의 행동에는 중공계통이었던 자기를 조선공산당 계통으로 왜곡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1925년에 서울에서 창건된 조선공산당은 그 산하 청년단체를 고려공산청년회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이외에도 「공산청년회」라고 생략할 수 있는 조직명칭으로 조선공산청년회가 있는데 이 문제는 다음에 말하겠다. 한국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공산주의자를 자처하고 있는 김일성이 통치하고 있는 북한에서는 25년에 창건된 조선공산당에 대한 평가는 문자 그대로 최악이다.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처음으로 나온 역사서적 「조선민족해방투쟁사」에서 저자 이나영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창건되었다.그러나 이는 파벌투쟁을 극복,청산한 토대위에서가 아니라 주로 화요·서울 양파간의 격렬한 대립투쟁의 와중에서 화요파가 중심이 되고 이에 북풍회파·상해파의 일부가 참가하여 결성되었다.같은 시기에 공청도 화요파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나영의 이러한 기술은 한마디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는 「종파분자」들의 소굴이고 종파의 연합이면서 그 종파들이 대립하고 투쟁하는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혹평이다. ○“종파투쟁 집합체” 이것이 과연 조선공산당 창건에 관한 정당한 평가인가 어떤가는 별문제이다.다만 여기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이나영이 퍼붓는 욕설은 그것이 단순한 욕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이 나올 때까지 북한에서 진행된 국내파,남노당파,연안파,소련파가 숙청되는 가장 중요한 구실이었다.그리고 이러한 딱지를 제공한 자는 김일성 자신이었다.그는 화요파였던 박헌영,서울파 출신인 최창익 등을 과거의 행적까지 「종파」로 규정하여 숙청한 인물이다. 김일성은 그들을 일망타진한 후 조선노동당의 역사적 정통성을 조선공산당에 두지 않고 「과감하게」중공 항일빨치산파로 옮겨버렸다.그는 1958년 2월8일 조선인민군 열병식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게 되는 것이다. 「항일빨치산투쟁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했지 나쁜 것은 없습니다.반당 종파분자들은 무엇때문에 이것을 반대합니까? 그들의 목적은 지난날 우리나라 역사에는 아무런 투쟁업적도 없었다고 하며 또 만일 있다고 하면 고루 한몫씩 나눠먹자는 것입니다.그들의 비방은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우리가 계승해야 할 유일한 전통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깃발 밑에 근로인민의 이익을 옹호하여 투쟁한 항일유격대의 혁명전통입니다」「우리가 전통을 계승한다고 해서 오가잡탕을 다 계승할 수는 없습니다」 ○동만주서 유격대 김일성은 해방전인 1930년대,동만에서 성장한 중공유격대에 몸을 담아 7∼8년간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따라서 이 기간의 대부분 그는 중국공산당 당원이었다.그는 그후 45년 8월까지도 명명백백한 중공당원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까지 약 10년의 세월을 소비하여 한 것은 중공에 조속한 자기의 과거를 지워버리는 작업이었다. 그 전형적인 작업이 30년대의 어떤 시기에 중공공청에 소속하고 있었던 경력을 26년으로 앞당겨,마치 자기가 조선공산당 산하의 청년조직에 있었던 것처럼 공청 경력을 바꾸는 일이었다. 그는 이런 작업을 20년대에 조선공산당의 정수분자였던 인물들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거의 완성한 후에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①「조선민족해방투쟁사」58년 간 2백78면 ②「김일성 저작선집2」7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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