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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북자/이용가치 없을땐 “헌신짝”

    ◎저학력·전과자·곧장 산간오지 탄광으로/체제환멸 못이겨 탈출… 자실기도 “방랑” 국제사면위의 폭로로 납북자들이 북한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음이 밝혀진 이후 자기발로 걸어들어간 월북자들은 과연 어떤 생활을 하고있을까에 대해서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월북자들은 표면적으로는 어느 정도 대우를 받고있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론 체제선전에 이용 당할대로 이용 당하면서 북한당국의 철저한 감시,통제와 북한체제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경우는 이용가치가 있고 북한체제에 협조적인 경우이고 그렇지않고 월북자가 저학력자 및 전과자이거나 이용가치가 없을 땐 산간오지의 탄광촌등에 배치되기 일쑤이며 심한 경우 숙청되기도 한다. 또 사소한 불평,불만이라도 털어놓다가 적발되면 그냥 놓아두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은 이용가치가 있는 사람이 월북하게 되면 평양 등지에서 환영집회를 열어주고 직장 및 결혼을 알선하거나 대학 또는 대학원 입학을 주선하는등 처음엔 상당한 대우를 해주고 있다.또그들이 한국에서 가지고 있던 학력,경력,사회적 지위에 따라 이에 상응한 대우를 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지난 92년에 발행한 화보 「조선」에서 80년대 사병으로 근무하다 월북했다는 6명이 모두 결혼해 잘 살고 있으며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이라고 선전한 바 있다.또 지난 91년2월 월북한 호텔종업원 지영준도 「장철구대학」에 입학했다고 전하고 있다. 군장교출신의 월북자들은 일단 1계급 승진시켜 인민군에 편입시키고 있다.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북한사회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심한 심리적 갈등을 느껴 군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이에 따라 일부 월북자들은 북한에서 다시 탈출을 기도하거나 자살하는 경우도 발생하는데 고상문씨와 함께 승호리 수용소에 수감된 이준광(전육군소령) 등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월북자들에 대해서는 북한 관계당국이 철저하게 「일일동향」을 파악,감시하고 있다.이 작업은 국가안전보위부와 사회안전부 등 정권보위기관을 통해 2중3중으로 수행된다. 80년 월북한 염규환 등 4명이 「남한간첩」으로 몰려 자취를 감춘 것도 불평·불만 등을 늘어놓다 이같은 감시망에 걸린 대표적 사례이다. 한편 북한당국은 저학력자나 전과자 등 이용가치가 별로 없는 인물이 북으로 넘어올 경우 일체의 환영행사없이 곧바로 산간오지의 탄광으로 보내버리는 것이 상례다.89년과 90년 월북한 전과 5범 전권수와 국민학교 중퇴학력의 표병호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
  • 광복 49돌/해묵은 이념갈등 종식을 모색한다/정담

    ◎“「자유민주」 건국이념 통일로 승화돼야”/미군정·독재정권 친일파 수용이 갈등의 불씨/자유민주=보수·민족주의=진보 「기형적 틀」 형성/남북 이념적인 통합기회 없이 분단/6·25 겪으며 반공·반미로 첨예 대립/탈냉전시대 사상논쟁 재연은 역사의 아이러니 올해로 광복 49주년을 맞았다.그러나 반세기가 지나도록 자유민주주의라는 건국이념을 다시 논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우리 현실이다.김일성사후 주사파문제가 예년에 없이 심각하게 부각되고 사회 일각에서는 우리 정부의 정통성마저 부인하며 해묵은 사상논쟁이 재연되고 있다.새로운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수립을 앞두고 진덕규(이화여대),이택휘(서울교대·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이현희교수(성신여대)가 우리의 건국이념을 재조명해보고 현재에 갖는 의미,구현방법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택휘교수=광복 당시 남북한은 모두 통합된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고 국민적 합의도 얻고 있었습니다.그러나 광복과 함께 남한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북한은 구소련의 사회주의를 수용해 이념적으로 통합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분단이 고착됐습니다.광복전부터 내재해 있던 이념갈등은 그후 심화됐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현희교수=건국이념의 배경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내부적으로는 민족광복세력의 왕조체제청산과 미국과 소련등 외세에 의한 영향등을 우선 꼽을 수 있습니다.임시정부가 중심이 됐던 군주제청산은 민주체제로의 자주적인 노력으로 임시헌장에 절대 자주독립과 자유민주주의,나아가 전통사상인 홍익인간과 이화세계,삼균주의정신을 담고 있습니다.그러나 광복후 남북의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건국이념은 올바로 설정되지 못했습니다. ▲진덕규교수=국민적 열망이었던 자주독립정신을 문서에 담은 것이 건국 초기의 헌법입니다.여기에는 의회정치와 개혁적인 경제정책,근대적인 시민사회와 선진문화 도입등을 분야별로 담고 있습니다.그러나 이같은 헌법정신,즉 건국이념은 이데올로기와 남북갈등으로 인해 반공으로 치우치게 됐고 결국 이데올로기의 경화는 삼균주의와 같은 임시정부의 이념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택=그렇습니다.항일운동은 여러 갈래로 나눠 진행됐지만 군주정치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이념적인 틀에는 모두 합의하고 있었죠.그러나 45년이후 남북간에 타율적으로 생겨난 이념갈등은 6·25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전쟁을 겪으면서 남한은 자유민주주의의 제1 요소로 반공을 부각시켰고 북한은 반미를 들고 나와 첨예하게 대립합니다.이같은 갈등은 60년대 국제적인 해빙무드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다 80년대 들면서 서서히 해소됐습니다.45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역학변화가 이번에도 남북에 영향을 줘 급기야 남한에 사상논쟁을 재연시켰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현=광복직후 서구의 특정 이념을 초월해 통합된 민족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데 국민적 합의가 모아졌다는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하나의 민족국가를 세우겠다는 국민들의 열망은 그러나 좌우대립으로 멀어져갔고 그 과정에서 남한이 48년 먼저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사회 일각에는 이같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분단고착과 연결지어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북한의 주장처럼 단정의 책임이 전적으로 남한에 있는지,또 단정수립이 정말 불가피했는지 등을 짚어봤으면 합니다. ▲진=단독정부수립을 남한의 이승만정권이 혼자서 주도했다고 보는 것은 정확한 역사인식이 아니라고 봅니다.왜냐하면 북한에는 이미 46년 실질적으로 정부가 세워진 것과 다름없을만큼 조직이 정비돼 있었고 남쪽마저 공산정권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진행중이었습니다.그래서 남쪽에서는 북쪽에 대응해 단독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위기감과 절박감이 팽배했습니다. 게다가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끝나 미국은 결국 유엔에 남북한 정부수립문제를 위임했고 총선이 가능했던 남한에서만 선거가 치러진 겁니다.다시말해 처음부터 단독정부를 수립해 분단을 획책한 것이 아니라 당시 주변상황이 남한 단독정부수립으로 이어지게 한 거지요.때문에 이승만정권이 단정수립으로 분단을 노렸다는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며 역사에 대한 몰이해·반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봅니다. ○무정부상태 계속 ▲이현=저 역시 단정수립에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시킬 의도가 있었다고 보지 않습니다.45년부터 48년까지 남로당은 대구폭동,여순반란사건,4·3제주사건등 전국적인 교란작전으로 정국을 무정부상태로 만들었습니다.당시 이승만박사는 「선 정부수립 후 통일」이 불가피 하다고 봤고 김구선생이 이끄는 한독당과 접촉을 합니다.한독당은 그러나 남한단독정부수립은 한반도의 영구분단을 가져온다며 반대하며 좌우연립정권 수립을 주장합니다.이박사는 공산세력을 절대로 끌여들여서는 안된다는 단호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한독당이 불참한 가운데 불가피하게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단정수립 불가피 ▲이택=단정수립이 과연 불가피했느냐 하는 문제는 현대 정치사의 주요 논쟁의 대상입니다.앞에서도 언급됐지만 북한은 46년에 이미 정부조직을 거의 완료해 놓고 남쪽에도 공산정권수립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 사실입니다.사료들을 종합해보면 단정수립의 책임은 상당 부분 북한 특히 소련에 있다고 봐야합니다.그러나 남한도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이박사와 민족세력등이 보다 적극적으로 미군정을 설득하고 단정수립을 지연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점이 아쉽습니다. ▲이현=좌우합작을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치안상태와 내외의 역작용을 고려할 때 단정수립은 불가피했다고 정리를 해도 무리는 없겠군요.그렇다면 화제를 최근의 사상논쟁으로 돌려 그 원인과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운 건국이념이 현재에 갖는 의미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진=건국이념의 현재의 의미를 논하기전에 먼저 현실인식과 당위성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단정이 수립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까에 대한 가정은 얼마든지 해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실인식이 선행돼야 한다는 겁니다.대한민국은 선거를 통해 수립된 합법적인 정부였지만 상해 임정세력들이 제헌의회에 불참하는 등 불완전한 부분도 있습니다.그러나 그후 5·30선거에는 임정세력들도 참여했고 특히 조소앙선생이 최다득표를 얻어 국민적합의가 생겨납니다.강조하고 싶은 것은 6·25전쟁은 자유민주주의의 건국이념을 변하게 했던 사건이 되었습니다.즉 공산주의와의 대결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건국이념으로 서의 자유민주주의를 반공으로 몰아가는 냉전적 대결성을 가열시키고 말았습니다. ▲이택=그렇습니다.이쯤에서 왜 이념적 갈등 또는 논쟁이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고 있는지 그 이유를 정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가장 큰 이유는 미군정이 군정의 편의를 위해 친일인사를 수용한 겁니다.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막상 항일민족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철저하게 배제됐습니다.이런 모순된 상황은 결국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싹틔웠고 「자유민주주의=보수,민족주의=진보」라는 기형적인 이념적 틀을 만들었습니다. 이념적 왜곡은 70년대를 거치면서 더욱 커졌고 지금에 이릅니다.최근의 사상논쟁의 중요배경 역시 미군정과 그후 독재정권이 친일파를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했다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진=친일파처리문제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정통성시비를 일으키는 면이 있습니다.대한민국에는 48년부터 50년대 초까지 정부·경찰·학교·법조계등 국가의 중간관료급에 친일파가 다소 남아있었지만 각료의 차관급이상에는 친일파가 비교적 적지않았습니다.그러나 50년대 중반기 이후 중요정책의 결정에 참여했던 고위직에도 친일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이는 당시 이승만정권이 국가의 1차적인 대결세력를 공산주의자들로,이들과 대립하면서 승리하기 위해 힘의 응집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현상으로 여겨집니다. ○김일성 집권수단 ▲이현=최근 주사파 학생들은 남북한의 친일파숙청과정을 비교하면서 남한 정권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북한이 광복이후 인민위원회의 주요간부급에 친일파 또는 친일한 혐의가 있는 사람을 모두 배제한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북한은 친일파의 숙청을 그 자체보다는 김일성 반대세력을 제거,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행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택=친일세력들은 6·25전쟁과 5·16혁명을 거쳐 80년대까지 모든 분야에서 충원됐고 이는 이념의 혼란을 가져온 주요 원인입니다.과거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30∼40년씩 방치해둬 어렵게 사는 반면 친일세력은 득세하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겁니다.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은 이를 비판했습니다.소위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친일세력이 대부분 일치하자 「이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자연히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됐다고 봅니다.대안마련이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북쪽의 이념은 그래도 어느정도 정리된 것처럼 비친 것이 우리사회의 이념적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진=한국전쟁이후 3·15부정선거까지만 돌이켜 보아도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와 속성이 얼마나 유린되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4·19혁명은 자유민주주의로 되돌아가서 이를 확립해 보려는 열망의 표출입니다.그러나 곧 박정희정권의 조국근대화 기치에 눌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도 빗나갔지만 6월 항쟁을 계기로 다시 국민과 정부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으로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정의실현 ▲진=먼저 건국이념인 자유민주주의의 본질과 민족국가의 개념을 짚어봐야 합니다.민족국가수립의 적시성과 국민적 욕구와 합의가 확보되어 있었는지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체제에서 말하는 민족주의의 개념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원래 민족주의는 계급을 초월한 개념입니다.그러나 사회주이는 이를 전략적·수단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택=민주주의는 통합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민주주의의 운영원리는 구성원들 사이에 도덕성과 사회적 정의를 과감하게 실현하기 위해 개혁을 지향하는 겁니다.정부가 먼저 주사파등을 수용,보다 과감하게 개혁을 추진해야 합니다. ▲이현=반대세력은 용인하되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불순한 사상 제거를 전제로 한 건국이념을 정립해야 합니다.광복이전의 공산활동은 항일운동의 방편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8·15이후와는 구분돼야 합니다.따라서 대단합 차원에서 8·15이전에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공산활동을 한 사람도 독립운동자로포상하는 방안은 검토해볼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단군의 후손으로 「하나였다」는 주체적인 입장에서 45년 또는 48년이 아닌 임정의 임시헌법이 만들어진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경험을 토대로 한 건국이념으로 통일을 지향해야 합니다.
  • 이승만과 김일성 비교론/김학준교수,남북한단정 두주역을 말한다

    ◎끝까지 항일깃발… 사상적 뿌리 민주주의에/이승만/기독교신자서 마지막 스탈린주의자로 종말/김일성 대한민국 건국 46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새삼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들 가운데 한 분으로 대한민국의 초대 국회의장과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박사를 생각하게 된다.동시에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우는데 앞장서 북한 공산정권의 초대 내각수상으로 북한 권력구조의 정상에 오른 뒤 무려 46년동안 1인장기집권을 유지하다가 최근에 죽은 김일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이승만과 김일성은 똑같은 이북 사람으로 이승만은 황해도에서,김일성은 평안남도에서 각각 태어났다.두 사람은 37년의 시차를 두고 태어났는데 그러나 차이는 연령 하나에 국한되지 않고 많은 부분들에 걸쳐 있다. 이승만은 조선왕조의 황혼기에 태어나 고전적인 한문교육을 받다가 서울에서 배재학당을 다니며 미국 교육을 받았다.이렇게 볼때 그는 미국 교육 또는 서양 교육을 일찍받은 당대의 선진적 소수 지식인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그가 받은 교육의 내용은 서양 민주주의와 기독교에 관한 것이었다.그는 상당히 자극됐으며 그리하여 독립협회 운동과 만민공동회 운동에 참여해 싸우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석방된 뒤 그는 기독교 청년운동에 종사하다가 도미하여 조지워싱턴대에서 정치학 학사를,하버드대에서 정치학및 역사학 분야의 석사를,그리고 프린스턴대에서 정치학및 국제법 분야에서의 박사를 각각 받았다.그의 학문적 배경만을 놓고 볼때 당시의 조선사람으로는 단연 정상급의 학자였다고 할 것이다. 이승만은 곧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에서 벌어진 심각한 노선투쟁은,특히 무장투쟁노선을 옹호하는 세력은 외교선전노선을 앞세우는 이승만으로 하여금 미국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수도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만들고 이 기구를 중심으로 미국 정부와 국제연맹을 상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운동에 매달리게 했다. 그의 독립운동 방식이 무장투쟁 방식의 시각에서 보면 의미가 줄어들 것이다.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단 한차례도 일제와 타협한 일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항일독립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일성은 조선왕조가 무너진 뒤 망국민의 신분으로 태어났다.이승만이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듯 김일성 역시 기독교 집안에서 기독교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그러나 이승만이 평생 기독교 신앙을 지켰음에 반해 김일성은 곧 기독교를 버리고 반기독교적 입장에 섰다는 점이 대조된다. 이승만의 교육적 배경과 활동의 무대가 미국이었음에 비해 김일성의 그것들은 만주였다.이승만이 영어를 모국어나 다름없이 썼음에 비해 김일성이 중국어를 모국어처럼 썼다는 대조도 흥미롭다. 김일성의 교육은 그러나 중학교 퇴학으로 끝났다.그는 곧 중국공산당 당원이 됐으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무장투쟁의 길을 걸었고 그 종착역은 소련극동군의 정보특무 대위였다.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면서 이승만은 만70세의 노인으로 미국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왔다.한편 김일성은 만33세의 청년으로 소련으로부터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승만의 사상적 뿌리는 미국식 민주주의였다.그래서 그는 북한을 점령한 소련의 국가 이데올로기,곧 공산주의를 증오하고 소련의 영토적 팽창주의를 경계하면서 소련이 북한을 발판으로 남한까지 공산화시켜 한반도 전체를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경각심을 가졌다. 여기서 그는 일찍부터 단정론을 들고 나왔다.되지도 않을 남북통일에 연연하다가는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될 위험성이 크므로.게다가 북한에서는 「소련 점령군의 앞잡이」김일성을 중심으로 소비에트 정권이 창출되고 있으므로 남한에서도 서둘러 정부를 수립해 맞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김일성은 소련점령군의 북한 소비에트화 전략을 떠받들고 북한에 공산주의 단독정권을 세워나갔다.그는 이 단독적 공산정권이 서고나면 그것을 발판삼아 남한까지 공산화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48년8월15일에는 남한에서 대한민국이 세워졌고,같은해 9월9일에는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두 국가는 각각 상대방의 존재를 부인했다.부인할 뿐만아니라 상대방을자신에게 흡수통합시키기위해 무력의 사용도 주저하려고 하지 않았다. 전면적인 선제공격을 가해 온 쪽은 김일성이었다.그는 소련및 중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50년6월25일 남침을 개시함으로써 동족상잔을 촉발시킨 것이다. 이승만은 다행히 미국의,그리고 국제연합의 지원을 받아 대한민국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압록강까지 진격해 북진통일을 기대할 수 있었다.이 시점에서 김일성은 중국의 지원을 받아 북한 공산정권의 궤멸을 막을 수 있었다.여기서 전전 원상의 회복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휴전이 성립됐고 이 휴전체제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을 치르면서 이승만은 권위주의 체제의 길을 걸었다.부산 정치파동과 3선개헌을 거치면서 민심의 이반을 낳았던 그의 통치는 결국 60년의 3·15부정선거로 귀결됐으며 4·19학생의거에 따른 4월혁명을 만나게 됐다. 대한민국의 조지워싱턴이 될 수 있었던 그는 하야하지 않을 수 없었고,하와이로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5년 뒤 그는 유명을 달리한 채 귀국했다. 김일성은자신의 정신적 스승인 스탈린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걷고자 했다.그것은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 그리고 피치자에 대한 억압과 세뇌였다. 이승만이 하야한 뒤 대한민국에서는 정권이 여러차례 바뀌었다.헌정사에는 굴곡이 적지 않았으며 어두웠던 시절들이 때때로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쌓아올린 건국의 울타리 안에서 대한민국은 결국 민주주의와 번영의 길에 들어섰다.다행스러운 일이다. 김일성의 북한은 한때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을 앞선 때가 있었다.그러나 1인 장기집권의 억압체제가 반세기 가깝게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활력을 잃게 됐으며 자연히 경제적 침체라는 늪속에 깊숙하게 빠져버렸다. 그리하여 북한 공산체제의 붕괴론마저 나오는 시점에서 김일성은 마침내 죽었다.이승만의 별세 이후 29년만의 일이다. 48년 이후 남쪽에서는 공화정이 여섯차례나 바뀌었고 최고권력자도 일곱사람이나 나왔다.그래서 대한민국은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교체를 통한 국민적 활력이 살아도 나고 지탱도 되어 선진국을 바라볼 수 있는 민주적 신흥공업국가로 커졌다. 그러나 북쪽에서는 최고집권자가 전혀 바뀌지 않은채 지내오다보니 세포가 죽어버려 결과적으로 빈곤의 땅이 됐다.이것은 김일성이 역사적으로 너무 오래 살았음을 의미한다.역사와 민족을 위해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났거나 권력에서 떠났어야 했다. 이제 미래가 대한민국의 편임이 확실해졌다.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라는 시대적 흐름을 탄 대한민국으로서 자신감을 갖되 신중하게 남북의 평화통일을 향해 착실하게 전진할 때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서두를 필요는 없다.김정일체제의 성격과 방향을 날카롭게 주시하면서 우선은 기본적인 교류와 협력의 부문에 돌파구가 열리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년의 8·15는 해방 50주년이면서 분단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역사적 시점이다.남과 북을 통틀어 우리 겨레의 형편이 훨씬 더 개선되기를 바란다.
  • 국내외학자연구로 본 남북단정수립 과정

    ◎“평양 45년말 실질적 공산정권 수립”/「5도인민위」 조직 등 남측보다 3년 더 빨라/“「서울단정」 출발로 분단고착 ” 주장 허구 입증 대한민국 정부는 민족과 국토가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난지 만 3년째 되는 날인 1948년 8월15일 출범했다.비록 해방된 민족의 염원인 「통일 조국」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대한민국의 수립은 민주사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자못 심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 일각에는 「대한민국이 38선 이남에 세워진 단독정부」라는 이유로 그 의의를 평가절하하는 시각이 남아 있는데다 급진세력은 『남한에서 단정이 출범함으로써 분단이 고착됐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분단의 책임을 대한민국의 출범에 떠넘기는 이같은 주장이 어느정도 타당성을 갖는지 학계의 연구성과를 통해 알아본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관한 역사적 평가를 위해서는 당시 남한지역을 통치하던 미 군정과 정치주도 세력이 통일정부를 이룩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단정을 강행했는지 여부를 따져봐야 한다. 신용하·김학준·진덕규교수등 국내 학자와 미국의 스칼라피노(캘리포니아대 명예교수)·이정식씨(펜실베이니아대 교수)등 국내외 학자 대부분이 한반도 남쪽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들 학자의 입장은 ▲광복이후의 정국이 남쪽과 북쪽간에 크게 달랐고 ▲남쪽에서는 새로 탄생할 국가의 주도권을 놓고 좌·우의 정파가 극한대립하고 있었던 반면 ▲이북에서는 소련주둔군의 지원아래 공산세력이 「실질적인」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특히 북한지역에서의 공산통치는 현실적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남한지역은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면서 나름대로의 일정표에 따라 민의를 수렴한 정치단체가 등장하기를 기다리는 실정이었다.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으로 남북을 통괄할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논의하는 회의에 참가신청한 정당·단체가 4백25개에 이른 예에서 보듯 당시의 남한 정국은 지리멸렬한 상태였다.이에는 46년 9월의 「9월총파업」,10월의 「대구폭동」등 광복이후 잇따라 발생한 좌익의 준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반해 이북에서는 45년 8월16일 「함경남도 인민위원회」결성을 시작으로 연내에 황해도·평안남북도·함경남북도등 5개 도의 인민위원회 조직을 완료했다.또 46년 2월에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는등 급속히 통치조직을 확립해 나갔다.이 과정에서 소련식 소비에트정권 수립에 반대하는 기독교·지주·지식계층등의 반대파를 일사불란하게 숙청했음은 물론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이란 저서로 유명한 미국학자 브루스 커밍스마저도 자신의 책에서 『북한에서는 45년 말에 이미 실질적인 정권이 들어섰다』고 인정하는 정도이다.그는 「단정 수립은 한반도 남부를 장악하려는 미국의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는 학파의 대표격 학자이다. 따라서 당시 남북 제 정당·사회단체의 논의에 따른 통일정부 수립은 불가능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은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유엔에 넘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유엔총회는 「남북한 전지역에서 자유총선거를 실시해 정부를 구성」할 것을 결의했지만 당초 한반도문제의 유엔상정 자체를 거부했던 소련은 유엔감시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결국 남한의 단독선거를 가져왔다. 대한민국은 48년 5월10일의 총선거,7월17일의 헌법 공포를 거쳐 8월15일 출범했다. 이에 북한은 기다렸다는듯 8월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치르고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성립시켰다. 이로써 45년 미·소 양군의 진주로 시작된 영토분단은 48년 체제분단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앞서 ▲47년 2월의 「조선인민군 창설」 ▲48년 4월의 「헌법 채택」등 발빠르게 정부수립을 위한 준비를 다져왔다.막상 정부수립 일자만 한달여 늦었을 뿐 단독정부를 준비하고 이룩한 과정은 남쪽보다 북쪽이 훨씬 빨랐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단정의 분단책임론」이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하는 대목이다.
  • 수령목소리 흉봤다 이튿날 사형/“인권동토”북한의 실상/통일원보고서

    ◎재판절차 없이 구금·고문 예사로/당·보위부·안전부등서 3중감시 북한주민들의 참담한 인권 실태가 통일원이 귀순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국제기구들의 조사결과 등을 종합해 펴낸 「북한의 인권실태」보고서에 의해 백일하에 드러났다. 통일원이 9일 국회 외무통일위에 제출한 이 보고자료는 최근 국제사면위가 폭로한 북한내 정치범수용소 수용자들의 비참한 인권유린 상황도 재확인하고 있다. ▷자유권적 인권 침해◁ 공정한 재판절차없이 피의자를 구금하거나 고문 등 비인간적 처벌을 자행하고 있다.특히 김일성부자의 지시나 당정책을 어겼을 때 처벌의 가혹함을 주민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인민재판식 공개재판을 실시하기도 한다. 정치범 및 그 가족들에 대한 처벌은 더욱 가혹해 「특별독재대상구역」이라는 수용소에 감금해 매일 12시간 이상 강제노동을 해야 한다. ▲사례=83년 김일성신년사 발표를 집단 시청하던 중 한사람이 김이 쉰 목소리를 내자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꽥꽥 거린다」고 무심코 내뱉었다.그는 다음날 소리없이 불려가 특수처리대에 의해 사형당했고 그의 가족까지 추방당했다(90년 귀순자 이덕남증언). ▷사생활비밀과 자유침해◁ 당·국가안전보위부·사회안전부 등 3중 감시체제로 주민들의 일상생활과 사상동향을 철저히 감시하고 무단침입해 점검하는 등 사생활 침해가 비일비재하다.5호담당제를 통해 5호담당 지도원이 각 세대의 동태를 감시한다. ▲사례=평양시의 한 젊은 부부의 집이 유일사상 검열원의 김일성부자 초상화와 도서에 대한 불시검열을 받게 됐다.이 때 3살짜리 아기가 싼 오줌때문에 김일성노작 맨 앞장의 초상화가 젖어 있는 것이 발견되는 바람에 불경죄에 걸려 산간벽지로 추방됐다(89년 귀순자 고운기 증언). ▷평등권 침해◁ 해방이후 여러차례에 걸친 주민성분 조사를 통해 주민들을 3계층 51개 부류로 세분했다.이에 따라 특권,식량배급,교육뿐만 아니라 일반범죄에 대한 처벌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차별대우가 적용된다. ▲사례=당정간부들은 직위에 따라 국가로부터 주택·가전제품·식료품 등의 일용품을 전용상점 등을 통해 보장받고 가족수와 관계없이아파트도 우선 배정된다.이들에게는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어도 제대로 법적 규제가 적용되지 않는다.하지만 일반 노동자는 방 한칸에 한 세대가 살림을 하는 것은 보통이며 남의 집에 임시로 방을 만들어 살림을 하는 사람도 많다(88년 귀순자 소영식 증언). ▷직업선택의 자유 침해◁ 취업희망자의 의사보다는 당정기관의 조정·통제에 의해 이뤄진다. ▲사례=형제간이라도 직업때문에 어쩔수 없이 헤어지는 경우가 많다. 동생이 나이가 들어 군대에 나가게 됐을 때 형은 제대해 탄광으로 강제배치되는 등 형제간에도 군대갈 때쯤 헤어지면 다시 못만나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90년 귀순자 신광호 증언). ◎북 「정치범수용소」 실태/탈출 기도자등 연15명 공개총살/하루 15시간 강제노역… 거의가 영양실조/「요덕」선 치료못받아 매년 40∼50여명 병사 북한이 정치범을 특별수용한 것은 지난 58년 연안파 숙청사건 연계자 및 그 가족을 교화소가 아닌 특정지역에 집단수용함으로써 시작됐다.북한식 수용소군도인 정치범수용시설을 북한당국은 「○○호 관리소」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나 주민들간에는 「특별독재대상구역」「종파굴」「정치범집단수용소」「유배소」 등으로 불려지고 있다. 현재 수용소는 함남·함북·평남·평북·자강도 등 5개도에 12개소가 설치돼 있으며 수용인원은 20여만명으로 추정된다.도별로는 ▲함남에 요덕,단천,덕성 ▲함북에 온성(2개소),회령,화성,부령 ▲평남에 개천,북창 ▲평북에 천마 ▲자강도에 동신수용소가 있다.수용소의 면적은 각각 51∼2백50㎦로 5천명에서 5만명까지 수용되고 있다. 수용소는 통상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구역으로 구분돼 수용자의 죄질에 따라 격리된다.완전통제구역은 반당·반혁명분자,종파분자,해외도주 기도자 등을 종신수용하며 혁명화구역엔 불순 북송교포,당정책위반자,자유주의 성향자 등이 수용돼 일정기간(1∼5년)이 지나면 심사결과에 따라 출소가 가능하다. 수용소의 경비는 삼엄해 각 수용소엔 3∼4m 높이로 2,3중의 외곽철책선과 탈주가 용이한 곳에는 고압전기철조망과 지뢰밭이 설치돼있다.감시망루에는 AK자동소총과 수류탄 및 기관총으로 무장한 감시원이 군견과 함께 외곽순찰을 하고 있다. 수용소에 들어가면 공민증을 압류당하고 친지면회및 서신연락금지 등 외부와접촉이 차단된다.이와함께 선거권등 기본권이 박탈되고 배급및 의료혜택은 물론 결혼및 출산도 금지된다.수용자들은 상오5시반까지 아침식사를 하고 작업준비를 완료한후 5인조로 짜여져 하오9시까지 작업을 한후 10시부터 학습교육을 받는다.하오6시에 담당 보위원이나 감독,인민반장 등이 할당된 작업결과를 중간점검하고 미달시는 연장작업을 시킨다.작업과 학습시간을 제외하고는 2명이상 모여다니지 못하며 수용자로 위장한 정보원을 잠입시켜 행동을 감시하고 있다. 수용소안에서의 식량배급은 형편없어 대부분 영양실조에 걸려있다.게다가 중노동에 시달려 폐렴,결핵,간염,페라그라병을 앓는 사람이 많다.그러나 의사가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해 요덕수용소의 경우 해마다 40∼50명이 병으로 사망한다. 밤 10시부터는 통행이 금지되는데 적발되면 1개월간 중노동에 처해진다.도주기도자나 보위원구타자등 매년 15명가량이공개총살된다. 정치범수용소외에 모든 시·군에 설치된 각종 노동교화소에서 문제가 있다고 보는 주민들을 강제구금해 중노동을 시키고 있다.
  • 60년 북송 재일동포 오페라가수 김영길씨도 북수용소에

    ◎조총련문제전문가 장명수씨 「명단」 보고 확인/부인·세 딸과 함께 북송선 타/2∼3년뒤 숙청 소식 전해져/사위는 부모가 헌금보내자 수용소 풀려나 【도쿄=이창순특파원】 1960년1월29일 하오 일본 니가타(신석)항.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부두에서 재일동포 오페라가수인 김영길씨가 『조국에 바친다』며 「오 솔레미오」를 열창하고 있었다.그러나 눈발에 휩쓸려 바다위로 흘러가버린 그의 「조국에 바친 노래」는 훗날 자신과 북송교포및 일본인가족들의 슬픔과 비극의 서곡이 돼버렸다. 당시 나가타 겐지로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유명한 오페라가수이던 김영길씨는 그날 제6차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갔다.그리고 그는 평양에서 화려한 영접을 받았다. 그러나 북한땅에선 비극적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화려한 영접을 받은 지 불과 2∼3년 뒤 숙청당했고 영영 소식도 끊겼다. 30여년전 이렇게 사라진 김씨가 아직 생존해 있음이 30일 국제사면위원회가 공개한 북한 정치범수용소 수감자명단을 통해 확인됐다.「승호정치범수용소」 수감자명단속의김영길(Kim Yong Kil)이란 이름이 북송됐다 행방불명된 오페라가수 김영길씨일 것이라고 일본의 조총련문제전문가 장명수씨는 말한다. 장씨는 34년전 김영길씨가 눈내리는 니가타항에서 북한으로 떠나기 직전 이탈리아 가곡을 부르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며 『살아 있어 다행이지만 지옥같은 수용소에 갇혀 있다니…』하고 안타까워했다. 북송당시 40대초반이던 김영길씨는 해방전 일본에서 유명한 「후지하라가극단」의 테너가수로 데뷔했다.해방후 그는 북한출신 재일동포들로 구성된 「중앙문선대」의 일원이 됐다.55년 조총련이 결성된 후 「제1조선중앙예술단」이 창단되며 단장을 맡았다.그후 그는 북한에 오페라극장이 만들어졌으니 와서 북한오페라를 이끌어달라는 초청을 받고 이를 수락했다.북한으로 가기 직전인 60년1월21일 도쿄에서는 그를 위한 환송리사이틀까지 열렸다. 운명의 날인 1월29일.그는 일본인 처,3명의 딸과 함께 북송선을 탔다.1월31일 청진에 도착,안기옥·최승희 등 인민배우들의 화려한 영접을 받았다. 김영길은 북한에도착한 후 「조국」으로부터 문화주택과 훌륭한 피아노를 받고는 부인과 함께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으며 당시 북송사업책임자인 김주영은 선전용으로 그의 편지내용을 공개했다. 그는 3월25일엔 공훈배우칭호까지 받았다.그는 수여식 답사에서 『조국의 품에 안겨 당과 혁명의 노래를 마음껏 부르고 당과 조국의 번영을 위해 나의 예술을 더욱 높이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그러나 그의 답사는 순수예술가로서의 마지막을 알리는 조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북송 2∼3년후 숙청당해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김일성에게 일본인인 처를 일본으로 돌려보내달라고 요구한 일,그리고 자살한 북송동포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하는 당국에 강력히 항의한 사건등으로 숙청됐다는 소문이 있다고 장명수씨는 말한다. 그후 그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고 그의 딸이 도쿄에 살다 북송선을 타고 귀국한 청년과 북한에서 결혼했으나 강제이혼당했다는 소식이 있었다.또 김영길의 일본인 처는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일본의 부모들이 헌금한 후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그러나 김영길씨는 아직도 수용소에 갇혀 있는 것이다.화려하던 동포 오페라가수의 비극은 생명과 인권을 유린당한 북송교포 모두의 비극을 증언하고 있다.
  • 귀순 강명도·조명철씨 기자회견 일문일답

    ◎북군부 오진우·오극렬파 암투 치열/김정일,85년부터 외교 제외 모든 권한 행사/전쟁 대비,마카오·스위스·일등에 외자 예치 27일 귀순 기자회견을 가진 강명도씨와 조명철씨는 『북한 김정일의 정치 체제에 회의를 느껴 귀순을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내용. ­귀순동기와 강성산총리에게 알렸는지에 대해 말해 달라. ▲(강씨)89년 인민무력부 실장으로 있을때 군부고위계층의 권력다툼과정에서 18호 관리소에 2년간 수용된 적이 있었다.이때 죄없는 3만여명의 죄수들이 구타당하며 비참하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 김정일의 정치체제에 불만을 품게 됐다. 부모친척중에 김정일의 측근이 많다.그래서 이들이 석방을 제의해 김의 지시로 석방된뒤 강성산의 도움으로 릉영윤전합영회사 부사장으로 발령받고 작년 12월 강재수출관계로 중국으로 가게됐다. 그러나 강재를 못 팔아 자금회수가 어려워 1주일로 예정했던 체류기간이 한달로 길어졌다.북한에서는 내가 행방불명된 것으로 김정일에게 보고돼 체포명령이 떨어졌고 이 사실을 친구를 통해 알게돼 탈출을 결심했다.강성산이나 가족들은 탈출사실을 모른다. ­한달간 머문 행적은. ▲(강씨)중국에서는 겨울이 지나야 강재값이 오르므로 팔지 않고 있었다.돈을 돌리기 위해 심양과 북경등지를 왕래했다.김일성 사후에 대해서도 신중히 생각했다.오늘의 귀순기자회견 내용이 보도되면 강성산에 대한 대우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것이다. ­군부내 권력다툼이 심각하다는데. ▲(강씨)북한 군부내의 권력다툼은 오진우·오극렬·이봉원파등 3개파로 갈라진다.그 밑으로 1군단과 2군단 출신파로 갈려 있다. 오진우파와 오극렬파가 갈려진 배경은 이렇다.87년에 오진우가 김정일과 함께 만찬에 참석했다가 대형 벤츠 승용차를 직접 몰고 돌아오다 가로수를 받아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오진우는 거의 죽을 상태가 돼 후임을 오극렬이 대행하게 됐다.오는 이후 총참모부에 공군사령부 출신을 측근으로 기용하는등 파벌을 형성하고 자기가 무력부장이 다 된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오진우가 러시아에서 치료를 받고 1년만에 회복돼 복귀해 이봉원한테서 이런얘기를 듣고 분개했다.이봉원은 오극렬과 사이가 안좋았다. 원래 오진우는 혁명1세대이고 오극렬은 만경대학원 출신의 2세대인데 오진우는 오극렬을 키우다시피 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김일성에게 교체를 요구해 결국 오극렬은 물러났고 그의 사람도 다 나가게 됐다. ­김정일의 후배로서 김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정무원 간부들이 성향은.(강씨에게)김달현의 근황은.강성산이 88년 좌천이후 재발탁된 배경은.강성산과 김정일의 관계는. ▲(조씨)나는 북한에서 풍파를 격은 사람이 아니다.고스란히 자라서 순탄한 길을 걸었다.남산고등중학교를 다녔는데 이 학교는 고등반 인민반 유치원반으로 나눠져 있고 장차관급이상 자녀들만 따로 교육하는 곳이다.이 곳에서나는 김정일의 동생 김평일,영일과 함께 공부했다. 대학졸업후 김일성대학 교원이 돼 상류생활을 하면서 행복에 빠져 자기만을 위한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그러면서 김정일체제와 북한 사회를 다시 생각할 기회가 있었다.김정일은 정치적 경제적인 업적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남쪽의 소식도 들을 기회가 많았다.나의 행동이 북조선 통치자들에게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 김평일과 영일은 공부도 잘했다.김평일은 사람을 많이 끌었다.학교에서는 김정일을 치켜 세우는데 장애가 되는 요인을 결단코 제거하자는 운동이 미사여구로 미화됐고 정당성으로도 연결됐다.이런일도 있었다.학생들은 김평일과 영일과는 대면하지 못하게 돼 있으나 어느날 축구를 하고 선생들이 평일 영일과 식당에 가 식사를 같이 했다.서로 불문에 부치기로 했으나 어느 선생이 노트를 두고 나와 탄로가 나 많은 선생들이 물러났다. 정무원 각료들은 파벌은 없다.그러나 이들은 개방을 원하고 있다.정무원의 모든 부장들은 개방을 지향하고 있다. ▲(강씨)김달현은 나의 친척이다.할아버지는 강선욱인데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의 아버지와 6촌형제이며 전부주석 강양욱과 친형제이다.김달현은 강반석의 오빠 강진석의 손녀 사위이다. 김달현은 대외분야를 많이 맡아 92년 12월 강성산이 총리가 되면서 대외경제위원회 위원장에서 같이 승진했다.그런데 김은 강성산이 심장쇼크로 입원하면서 처음으로 총리를 대행하면서 경제를 책임지게 됐다.그때 군수공장의 전기를 30% 삭감해 탄광등지로 보냈는데 그 때문에 군수생산계획에 지장을 받고 있다는 보고를 김일성이 받게됐다.김일성은 대노해 『정신 있는 사람인가』 하면서 질책을 했고 김달현은 사상검토를 받고 도청도 당했다.김달현은 강성산과 때로 맞서기도 했다.강성산이 내놓는 방안을 놓고 옥신각신 다툼을 벌이기도 했던 것이다.결국 김은 작년 12월 함남에 지도원으로 내려갔다. 강성산은 경제문제등이 꼬여 집에 들어가지도 못해 당뇨병이 심해졌다. 그래서 김일성이 쉬도록 권고해 88년에 함북으로 휴양을 갔다.91년에 다시 총리가 되었는데 재기는 상상도 못했다.강성산은 어려서부터 김일성이 키운 사람이다.강은 중국 출신이고 아버지 강위련은 빨치산출신으로 김일성의 무릎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강의 삼촌 강위룡은 아직 살아 있다.강위련은 기관총 분대장을 했는데 강이 죽자 김일성이 몹시 울었다고 한다.강은 혁명학원에서 공부하고 이근모 연형묵등과 함께 체코에서 유학도 해 체계적으로 키워져 김일성이 등용했다.강은 김정일과도 가깝다.김정일과 사이가 나쁜 김성애의 동생 김성갑의 비리를 들춰 낸 것이 계기가 됐다. ­북한의 핵 상황은. ▲(강씨)김정일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핵이라 생각하고 있다.인민생활과 경제가 파탄상태인데도 그것을 해결하는 길은 핵이라고 여기고 있다.북한에는 군수공장이 민간공장보다 더 많다.핵이 개발됨으로써 군수공장의 투자를 민간으로 돌릴 수 있다는 논리이다.동구권국가가 허물어지면서 공격받지 않으려면 핵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지금 북한은 5개 정도의 핵폭탄생산을 완료했다.핵을 실어나를 로켓 생산은 실험단계이고 94년까지 완전 생산할 것이다.최소한 10개정도 확보한 다음에는 보유사실을 공개해 남북 대미 관계에 이용하려 하고 있다. 핵폭탄은 이미 개발이 완료됐고 다만 갯수에 관한 문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이 이야기는 영변 핵단지에 있는 고위 간부가 아들 결혼식 때문에 나와 술과 담배 식료품등을 취급하던 나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들은 것이다. ­북한내 지식인이나 고위층주변의 김정일에 대한 평판은 어떠한가. ▲(강씨)북한의 지식인들과 일부 고위층 사이에는 김정일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해 있다. 이때문에 식량난과 경제난을 타개하지 못할 경우 김정일 체제는 붕괴될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이 이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평소 김정일은 지나치게 즉흥적인 정치행위를 일삼고 심지어 일부 원로들에 대해서까지 너무 편견적인 태도를 보여 왔고 이러한 내막을 알고 있는 지식인이나 고위층들은 그에 대한 신뢰감이 전혀 없는 실정이다. ▲(조씨)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한 북한 이반현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북한사회를 빠져 나올 경우 가족들이 피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해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을 뿐 80년대 중반부터 노골화된 김정일체제를 인정하거나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김정일 체제는 얼마나 갈 것 같은가. ▲(강씨)20년전부터 정치를 해와 권력기반은 튼튼해 수명이 길 것으로 본다.75년부터는 정권기반을 닦았으며 85년부터는 김정일이 외교권 행사를 제외하고는 총지휘했다. 당정의 지시를 받아 모든 일을 처리한다는 유일적 지도체제에서 당정은 사실상 김정일을 말하는 것이다. 또 기본권력수뇌부인 당정 조직 지도부가 모두 김일성대학 출신의 2세대인만큼 권력기반은 확고하다.총비서,주석을 다 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청진시의 화학석유공장이 91년부터 지금까지 3년동안 가동이 중단됐고 작년 9월 한달동안 김책제철소가 가동되지 못하는등 경제의 70%정도가 파탄지경이어서 김정일 체제 수명은 주민 불만고조로 짧아질 수도 있다. ­인민무력부장 오진우가 총정치국장을 겸하고 있는가. ▲정치국과 참모부간의 갈등이 많아 오진우가 겸임하고 있다. ­94년을 잘 넘긴다는 뜻은 무엇이고 핵수출 가능성은. ▲지난해 김정일은 북미회담과 IAEA핵사찰문제와 관련된 미국의 진의,핵사찰에 대한 중국의 입장등을 파악하느라 집에도 가지못하고 청사에서 자면서 북미회담을 지휘했다. 이때문에 김정일은 당시 내년(94)만 잘 넘기면 북미회담및 남북회담에서 유리하다고했다.핵수출여부는 잘 모르겠다. ­외화보유고는 얼마나 되나. ▲대성은행이 전쟁에 대비해 마카오,스위스,일본은행등에 외화유치를 하고 있다. ­북한의 사로청과 한총련과의 관계는. ▲사로청 산하 조선학생위원회는 사로청의 외곽지도를 받고있으나 사실상 대남사업부인 통일전선사업부 6과에서 지도하고 있다.주체사상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그럴싸한 이론으로 보일 수도 있다.그러나 왜 남조선으로 오는 귀순자들이 있는지 학생들은 심각히 생각해봐야한다. 또 서강대 박홍총장의 얘기는 약과다.대남정보부에서는 공장의 노동자들보다는 흥분하기 쉽고 혈기가 있는 젊은 대학생들을 상대로 주체사상을 전파하려고 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김정일의 성격,지식,지도력,건강,가족관계는. ▲성격이 대단히 급하고 저돌적이다.특히 측근들을 질책할 때는 그 정도가 매우 심하다.성질의 기복이 매우 심하다는 뜻의 「패났다」는 소릴 들을 정도다. 피아노를 전문가이상으로 치는등 예술에 매우 조예가 깊다.매우 건강한편이다. 또 초대소(별장)에서 동생 경희가 어머니를 회고하며 눈물을 흘리면 동생을 나무라다가도 따라서 우는등 눈물도 많다. 김정일이 김평일등 곁가지등과의 식사및 사진촬영등을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피해야한다는등 자신의 입지확보에 장애가 되는 이복형제들의 제거에 신경을 쓰는등 졸렬하다. 김정일은 또 평소 잘 웃지 않는다.83년 할아버지(강양욱 부주석)가 죽었을 때 김정일은 김일성과 함께 왔으나 거의 말을 하지 않았으며 92년 11월 식품을 담당하는 경리부 시찰을 왔을 때는 신제품 음식을 보고는 『잘 됐다』는 의사표시로 미소를 지은 것이 고작일 정도로 거의 웃지않는 편이다. 김정일의 방탕한 사생활은 대남정탐본부인 통일전선사업부 이동호 제1부부장이 김정일이 초대소의 여자에게 관심이 많은 것을 알고 78년 문수초대소로 초대,이때부터 기쁨조에 관심을 보였다. 또 외교부 산하에도 기쁨조를 두고 있으나 정·군을 장악하기 시작한 85년부터는 업무때문에 기쁨조를 축소시켜 현재는 각 도별로 3개씩 모두 72명의 기쁨조가 있다. 김정일은 유일한 동생인 김경희와 남편 장성택을 제일 신임하며 인민무력부장 오진우·호위총국장 이을설등 항일 빨치산 세대인 이른바 「혁명1세대」는 대부분 존경한다. 가족관계는 본처 김영숙과의 사이에 딸 2명과 아들 1명이 있으며 이들은 55호 관저에 있다. 두번째 처는 무용수출신의 고영희씨(40)이며 고씨와의 사이에 아들과 딸 1명씩을 각각 두고 있다. 자식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김정남(23·미혼)은 조선예술영화촬영소배우인 송혜림과의 사이에서 났으며 70년대 당시 결혼한 송씨를 차지하기위해 송씨의 남편을 프랑스의 유네스코 대표로 보냈다. 김군은 그러나 김정일 뒤를 이를 후계계승자도 아니고 김정일을 아버지로 부르지도 못하며 식모등과 함께 문수구역에 거주하고 있다. 김군을 93년 9월 고려호텔에서 만났을 때 김군이 여자랑 노는등 타락한 생활을 해 호텔출입을 금지당하기도 했다. ­남한에 대한 정보는 어떤 방법으로 입수했는가. ▲(조씨)남산고등중학교 시절에는 남한 신문을 볼 수 있었고 아버지가 건설부부장으로 일할 때 장관급 이상 고위직에게 보급되는 국제정세,남조선정세,과학기술정세등에 관한 참고통신을 아버지를 통해 볼 수 있었다.이 통신은 논평없이 있는 그대로 사실만 기록돼 있다.또 지식인들 사이에는 이같은 정보가 비밀히 나돌고 있다.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사망으로 집단 통곡하는 현상은 어떻게 생각하나. ▲(조씨)북한의 주체사상은 공산주의 이론을 창조적으로 현실에 맞게 적용했다고 주민들은 세뇌당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다.주민들은 주체사상이 대중과 민중을 위한 이론으로 알고 있어 이를 만든 김일성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또 주민들이 그토록 슬퍼했던 것은 앞으로 김정일 체제에 대한 불안감도 작용했다. ◎“장인 강총리 숙청될것” 괴로운 표정/“북뉴스 접촉기회” 내외신기자 2백명 몰려/귀순자 기자회견장 이모저모 27일 귀순한 강명도씨와 조명철씨의 기자회견이 열린 프레스센터 20층 회견장에는 두 사람이 북한고위인사의 친인척이어서 폐쇄적인 북한 내부의 고급 뉴스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내외신기자 2백여명이 한꺼번에 몰려 어느 때보다 치열한 취재경쟁을 벌였다. 특히 일본의 교토통신과 유럽의 로이터통신등 외신기자가 보도진의 절반을 넘었으며 국내 기자들보다 앞서 질문공세를 펼침으로써 최근 북한 내부 정세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반영하기도 했다. ○…강씨등은 시종 진지하고 또렷한 말투로 취재진의 질문에 성의있게 답변했으며 종래 귀순자들과는 달리 고위층 내부의 비밀스런 활동등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 이날 회견에서 강씨는 여유있는 태도와 달변에 가까운 말솜씨로 북한 내부사정을 조리있게 설명.반면에 조씨는 구체적인 답변보다는 학자풍의 원칙론적인 대답으로 일관해 대조적. ○…특히 강씨의 경우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이 지난 87년 음주교통사고를 낸 상황을 설명하면서 오의 대형벤츠 승용차 번호인 216­5555를 정확하게 기억해 내기도 해 기자들을 놀라게 하기도. ○…이날 강씨는 3시간여동안의 기자회견을 마치면서 『나의 귀순과 기자회견으로 단기간내에는 강성산총리의 신변에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조만간 숙청등 그 대가를 치르고 상당히 곤경에 빠질 것』이라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기자회견도중 땀을 훔치는 등 다소 힘든 모습을 보인 조씨는 『북한에 있는 가족·동료들은 북한의 모순된 체제를 내부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달아났다고 비난할 것』이라면서 『다만 우리들의 귀순동기가 북한사회에 알려져 북한사회를 바로 잡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끝을 맺었다. □인적사항 ▷강명도◁ ▲나이·생년월일:36세,58.12.4생 ▲출생지:평양시 만경대구역 칠골동 ▲주소:평양시 만경대구역 광복거리 1동7반 ▲직책:금수산의사당(주석궁)경리부 릉영윤전합영회사 부사장 ▲학·경력 ­70.8∼76.9 평양외국어학원 불어과 졸업 ­76.10∼79.9 평양외국어대학 불어과졸업 ­79.9∼82.7 중앙사로청 과외교양지도국 외사과 지도원 ­82.7∼85.10 조선인민경비대원,평양시당 39호실 지도원 ­85.10∼86.7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 국제부 지도원 ­85.10∼86.7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 국제부 지도원 ­87.6∼92.2 인민무력부 보위대학 보위전문연구실장 *외국인 무단접촉으로 90.3∼92.2 평남 북창군 「18호관리소」수용 ­92.3∼ 금수산의사당(주석궁)경리부(대외명칭 「릉라888무역회사)산하 「릉영윤전합영회사」부사장 ▷조명철◁ ▲나이·생년월일:35세,59.4.2생 ▲출생지:평양시 만경대구역 봉수동 ▲주소:평양시 만경대구역 당상1동 8반 아파트 20층1호 ▲직책:김일성 종합대학 경제학부 상급교원(전임강사) *92.8부터 중국 북경언어학원·천진시 「남개」대학 유학 ▲학·경력 ­71.9∼77.8 남산고등중학교 졸 ­77.9∼83.8 김일성종합대학 자동화 학부자동조정학과 졸업 ­83.9∼87.10 김일성종합대학 박사원졸업 *기업관리 현대화 전공,준박사학위 취득 ­87.10∼92.7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상급교원(전임강사) *경제수학·기업관리 현대화 강의 ­92.8∼93.7 중국 유학,북경 언어학원 중국어 연수 ­93.9∼ 중국 천진시 남개대학관리학부 연수 *경영합분야의 정책결정론 과정
  • 미정부서도 김정일평가 엇갈려/뉴욕타임스 보도 분석

    ◎국무부 관리들/“국정 장악… 책임있는 지도자 부상”/국방부·CIA/“방탕한 인물… 쿠데타로 실각할것” 미국 신문 뉴욕타임스는 17일 김정일에 대한 정보가 워낙 부족하기 때문에 클린턴행정부내에서도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고보도하면서 김정일을 만난 사람들의 사례를 전했다. 타임스는 김정일의 사생활을 지극히 문란하게 그리고 있는 신상옥·최은희부부의 얘기와 함께 이와는 반대로 김정일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탈리아기업인의 목격담을 소개했다. 김정일과 만난 이탈리아기업인은 현재 로마에 사는 카를로 바엘리씨(61)로 스캄비 콘 엘에스테로라는 무역회사를 경영하고 있다.북한에 1억2천만달러상당의 어로장비를 판매하고 그 대금을 대리석과 금으로 받는 계약을 체결한 그는 92년9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의 요트에서 그와 5시간동안 만났다는 것이다. 바엘리씨는 지난주 뉴욕타임스와 가진 전화인터뷰에서 『내가 만나본 김정일의 특징적인 인상은 꾸밈이 없는 순박함이었다』면서 『그는 다재다능하고 유머가 있었으며 누구라도 그를 만나보면 알려진 것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요트선상의 식사메뉴는 생선과 구운 새우,그리고 김정일이 즐긴다는 헤네시 코냑과 프랑스산 포도주였으며 두 사람은 보좌관들이 배석한 가운데 우정의 축배를 들고 세계문제를 화제로 삼았다. 김정일은 북한사람들이 미국과 협조할 용의를 갖고 있으며 이미 미군 유해송환과 관련해 협조하고 있다고 밝힌 뒤 『멀지않아 서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우리가 미국의 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고 바엘리씨는 전했다. 한편 뉴욕타임스는 김정일에 대한 정보부족으로 그가 누구이며 그가 의도하는 바는 무엇이고 과연 김일성의 뒤를 이을 수 있을 것인지등에 대해 국무부와 국방부및 중앙정보국(CIA)간에는 물론 심지어 CIA내부에서 조차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국무부와 CIA 일부 분석가들은 김정일이 괴짜일지는 모르지만 일정기간 매일매일 국정을 운영해왔고 지금은 분명히 국정을 관장하고 있으며 결국은 책임있는 지도자로 떠오를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김정일은 오랜 기간 몸을 숨긴채 기다려왔으며 이제 정면에 나선 이상 새로운 시각으로 그를 봐야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에 반해 국방부와 대부분의 CIA관계자들은 김정일이 김일성과 같이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하는 스탈린주의자이면서도 아버지와는 달리 국가적 영웅도 아니고 나이먹은 세대나 대부분의 군부세력으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핵문제에 있어서도 양보를 할 수 없을 것이며 정치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카리스마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CIA와 국방부가 작년 12월 작성한 보고서는 김정일을 「정신이상자이며 방탕하고 의심스런 인물」로 묘사하면서 『일단 그가 권력을 잡겠지만 개인적 능력부족과 광범위한 반대세력,지속적인 경제·사회적 빈곤으로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 북한의 인권(김일성 사후:9)

    ◎권력암투로 숙청늘땐 「심각한 상황」/정치범 15만… 수용소 이미 “포화상태”/구타·굶주림 심해 한해 수백명 사망 북한의 요덕정치범수용소에 있다가 탈출한 안혁씨(26)와 강철환씨(26)는 지난 92년 8월 귀순 직후 인터뷰에서 요덕 한곳에만도 5만여명의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다고 전했다.이들 가운데 해마다 3백여명이 수용소를 지키는 보위요원들의 구타나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20여명이 공개 처형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열악한 인권상황은 이미 잘알려져 있다.아마도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인권 사각지대일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특히 「특별 독재대상구역」으로 불리는 정치범수용소는 북한의 인권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국제 인권단체의 보고서와 귀순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북한엔 14개의 독재대상구역에 15만2천여명의 정치범들과 그 가족들이 집단수용되어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모두 북쪽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 산간오지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곳의 인권과 생활이 가히 어떤 상태일지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북한이 정치범수용소를 설치하기 시작한 것은 죽은 김일성이 1인독재체제를 강화하던 지난 60년대 초로 알려지고 있다.1인독재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저항세력을 숙청했고 이들을 한데 수용하려고 6개의 수용소를 지었다는 것이다.70년대 중반들어 김부자의 세습에 반대한 세력을 수용하기 위해 4개를,70년대 후반 김정일의 후계구도 확립에 반대한 김평일 지지세력등 정적숙청 과정에서 또 4개를 지었다. 이처럼 북한의 인권은 내부 권력체제와 밀접한 관계속에서 생겨난 특수한 문제이다.북한의 새 권력자로 부상하고 있는 김정일은 아직까지 숙청식의 탄압을 자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때문에 김일성이 죽고 김정일이 새 권력자로 들어선다고 해서 북한의 인권상황에 조금도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이 북한문제전문가들의 지적이다.외교안보연구원의 유석렬교수는 『내부의 권력승계 작업이 어려움을 겪게되면 대규모 숙청등에 따라 인권상황은 더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북한의 인권탄압 대명사로 불리는 국가안전보위부와 사회안전부 두 기관은 이제껏 김정일의 수하에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반체제 세력의 색출과 정보파악,주민감시가 주임무인 국가안전보위부는 주석의 직속기관으로 있다가 지난해부터 김정일이 위원장인 국방위원회 산하로 옮겼다.부장은 아직 공석이라는 얘기와 함께 김정일이 맡고있다는 추측이 함께 나돌고 있으나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아무래도 국방위원회 산하이기 때문에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고 봐야 한다. 벌목공의 감시등 일반치안을 맡고 있는 사회안전부는 비록 정무원 산하기관이긴 하지만 부장이 김정일의 심복으로 알려진 백학림이다.그는 이번 장의위원 명단에 서열 53위로 올라있다. 이처럼 북한의 인권문제는 김정일이 직·간접으로 관여해왔고 앞으로도 더욱 통제를 강화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세습에 대한 불만세력과 내부의 동요,족벌 사이의 암투가 갈수록 치열해질 것이고 이를 막으려면 통제를 보다 강화해 나갈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에 식량부족과 에너지 사정 악화등 경제난의 가중으로 주민들의 동향도 나날이 심각해질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여러모로 볼때 북한의 인권상황은 새 권력체제가 들어선다 해도 지금보다 나빠졌으면 나빠졌지,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이런 점에서 핵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 북한 인권문제에 조심스러웠던 우리정부가 민족 전체의 복지차원에서 북한의 인권개선 문제를 우선 순위에 올리는 것을 검토하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 오진우­최광/「김정일체제」 군부의 양대 버팀목

    ◎혁명1세대… 김일성 권력투쟁 1등공신/김 생전 한번씩 「딴마음」… 계속 충성 주목 오진우와 최광.김정일이 북한의 새로운 지도자로 위치를 굳혀가는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할 두 사람이다. 오진우와 최광은 모두 김일성과 함께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혁명 1세대」이다.이들은 해방후 국내기반이 취약했던 김일성이 박헌영의 국내파나 김두봉의 연안파,허가이의 소련파를 꺾고 권력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던 버팀목이었다. 둘 가운데서도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는 김일성이 생전에 김정일 후계체제를 위탁한 핵심인물로 알려져 있다.함경남도 북청출신으로 올해 77세인 오는 김정일과 함께 둘밖에 없는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이며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는 군부의 제1인자이다. 오보다 한살 아래인 군부의 2인자 최광 군총참모장은 함경북도 출신으로 권력서열 8위이다.6·25때 제13사단장을 맡을 만큼 김일성의 신임이 두터웠다.최광의 처인 전여맹위원장 김옥순은 김일성의 전처 김정숙이 죽은뒤 김정일·경희 남매의 유모 역할을 맡아 두 사람과 각별한 관계인 것으로 전해진다. 김일성 생전에 김씨 부자에 대한 두사람의 충성심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그러나 김일성이 사망한뒤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이 그대로 이어질지는 단언할 수 없다.일부에서는 군의 두 원로가 군복무경험도 없는 김정일을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분석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오진우와 최광 사이에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오가 김일성의 결정적 신임을 받게 된 것은 69년 1월 6일부터 14일까지 열린 인민군당 제4기 4회 총회에서 부터다.당시 인민군 총정치국장이었던 오는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에 불만을 품은 민족보위상(국방상) 김창봉과 7군단사령관 정병갑,해군사령관 유창권,함흥주둔군사령관 김양춘등 「항일연군」 출신의 군수뇌부를 반혁명 음모로 몰아 숙청하는 작업을 지휘했다.그리고 이때 숙청된 인물들 가운데 최광이 포함됐던 것이다.최는 그러나 탄광노동자로 좌천된 뒤에도 변함없는 충성심으로 김일성부자를 감격시켜 김정일후계를 공식지명한 80년 6차 당대회에서 복권됐다.오는 80년대초까지는 김정일을 후계자로 지목하는데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그러던 오는 84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매는 상태에 빠졌다.그때 김정일은 특별기로 오를 소련으로 수송,치료를 받도록 조치했다고 한다.오는 그뒤 김정일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 반김정일세력/군부소장파·유학생 주축

    ◎북,김일성 사망직후 「불온분자」 색출령 북한은 「정적」이라든지 「반체제」라는 개념이 없는 이른바 「유일사상·유일체제」의 사회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전문가들은 「김정일체제」가 얼마나 오래 가느냐 하는 것은 반금정일세력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북한정권 스스로도 「불온분자」가 있음을 인정한다.북한은 지난 9일 정오 김일성의 사망을 보도하기 직전 북한 전역에 반금정일세력을 색출하도록 긴급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한국과 미국·일본 3개국 정보기관이 파악한데 따르면 북한의 국가사회안전국은 각 지방지부에 「불온분자에 대해 즉각 대응하고 색출하라」는 지시를 시달했다는 것이다. 김정일에 반대하거나 그를 비판하는 세력으로서 우선 주목되는 대상은 북한군부이다.군은 당장 무력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군부의 핵심세력은 3부류로 나누어진다.첫째는 오진우 인민무력부장과 최광 총참모장등 이른바 빨치산세대이다.이어 오극렬 전총참모장,김광진 인민무력부부부장,이봉원 인민무력부총정치국부국장등 60대의 장성그룹이 있다.마지막으로는 수천명에 이르는 해외유학 경험이 있는 영관급 장교들이다. 이들 가운데 김정일체제를 위협하는 계층은 유학파 장교들이다.그들 다수는 러시아및 동구의 변화를 보면서 북한도 변해야 한다는 합리적 사고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다.그에 비해 빨치산세대가 김정일에게 등을 돌릴 가능성은 낮다.60대의 장성들도 김에게 충성하며 군원로들의 자리를 차지하려 할 것으로 전망된다. 당과 내각에서는 김일성의 총애를 받던 친·인척이 잠재적으로 김정일의 적대세력이다.김일성의 동생과 부인인 김영주와 김성애,그리고 김성애의 아들 김평일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김정일체제를 위협하는 것은 일반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지식분자」들의 반금정일세력화이다.이들이 본 외국의 「신세계」가 입과 입으로 전해지면서 김정일에 대한 불만층의 폭이 넓어져 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 정부는 누가 반금정일세력인가에 대해 신중한 편이다.최근 들어서는 유일하게 국방부측이 이와 연관된 자료를 내놓았다. 이병대국방부장관은 지난 11일 국회국방위에 제출한 비공개자료를 통해 김정일에 대한 「비판세력」이 5백77만여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수용소에 갇혀 있는 정치범,당원이 못된 감시대상자,유학생출신,지주등 출신성분이 나쁜 사람등을 뽑아 보니 그정도 수치가 나왔다는 것이다.모스크바 타임스지도 14일자 사설에서 북한주민가운데 5백만명은 김일성조문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썼다.우리 국방부와 비슷한 추정을 하는듯 싶다. 그렇다고 북한의 나머지 1천7백만명이 김정일을 지지한다는 얘기는 아니다.그들은 김에 반대할 엄두를 못내고 있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김이 경제정책에 실패,북한주민들을 지금보다 더 못먹인다면 잠재적 반대세력은 더 늘어나고 표면으로 나올 수도 있다.북한사회가 개방되면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커져가리라 예상된다. 김정일은 20년전부터 김일성의 비호아래 후계작업을 진행시켜 왔다.자기에게 충성하는 인사들을 이미 당·정·군에 많이 박아놓았다.따라서 스탈린,모택동사후의 소련이나 중국처럼 「대숙청」은 없으리라고 북한전문가는 전망한다.
  • 일부 친척의 「잠재적 저항」이 변수/김정일 체제의 앞날

    ◎오진우등 혁명 1세대,실정 누적땐 등돌릴듯 북한의 평양방송은 11일 밤 김정일이 노동당 고위간부들과 함께 수정관에 안치된 김일성의 시신 앞에서 조문하는 모습을 방영했다.북한의 새 권력자로 지목되어온 김정일이 김일성의 사망후 처음으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내부 권력체제의 정비가 이뤄진 뒤에야 죽은 권력자의 시신을 일반에 공개하는 게 관례처럼 되어있다.이런 시각에서 보면 북한의 권력은 국가주석과 당총비서직을 김정일이 다 맡을 것인지,아니면 주석직은 당의 원로급에 줄 것인지라는 형식적인 절차문제 말고는 김정일로 완전히 후계구도가 굳어졌다고 봐야한다. 전문가들이나 정부 관계자들도 여기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김일성이 지난 73년부터 공들여온 김정일 후계체제의 공식 출범이 시간의 문제로 다가왔다는 설명이다.그렇다고 김정일체제가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될 것이라는 예측은 찾아보기 어렵다.전문가들도 무척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이들은 김정일체제가 앞으로 2∼3년 이상 계속될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일성의 죽음에 따른 국내외적인 공백을 메울 인물이 마땅치 않은데다,이미 권력의 핵심부에 그의 측근들이 대부분 포진해 있기 때문에 일단은 김정일을 중심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분석이다.또 김정일에게 통치권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주기위해서라도 이 정도의 기간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많은 잠복변수가 산재해 있으며,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김정일체제의 유지를 가늠하는 관건이 될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지적이다.현 시점에서 그 변수는 크게 세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제도상의 이유이다.북한은 지난 92년 개헌을 통해 군부엘리트들이 적법한 절차를 거쳐 권력을 장악할수 있도록 하고있다.북한의 모든 무력을 장악하고 있는,당과 더불어 또 하나의 권력기관인 「국방위원장」을 위원들이 투표절차를 거쳐 언제라도 바꿀수 있도록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지금 이 위원장 자리는 군경력이라곤 조금도 없는 김정일이 맡고있다. 그러나 만일 그의 실정이 누적된다면 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으나 지금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소장파 장성들이 언제라도 이 위원회를 소집,그를 합법적으로 갈아치울 수 있다.북한에서 군의 축출은 곧 실각을 뜻한다. 두번째는 김정일로부터 그동안 숱하게 견제를 받아온 그의 친·인척들의 공격이다.지금 당장 김정일에게 반기를 들 인물을 찾긴 어렵다.그러나 이들이 언제까지나 이대로 김정일에게 눌려지내기에는 당한 갈등의 골이 너무 깊다는 지적이다.특히 김정일과 그의 계모인 김성애,이복동생 김평일과의 갈등은 유명하다.이번 장의위원회 명단에도 김성애는 1백4위에,그녀의 아들 김평일은 그래도 김일성의 아들인데도 불구,아예 2백73명의 명단에서 빠져있다.게다가 김평일은 조문행렬등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반면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는 47위에,그녀의 남편 장성택은 1백10위에 들어있다. 이는 족벌사이에 갈등의 불씨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단서이다.그리고 북한에는 그동안 숱한 숙청에도 아직 군부 소장파와 젊은층사이에 김평일 지지세력이 숨어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세번째는 오진우 최광등 이른바 혁명 1세대의 향배다.이미 고령인데다 모두 은퇴를 남겨놓고 있어 이들은 단기적인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그러나 김정일의 실정이 드러나면 맨먼저 등을 돌릴 세력으로 점쳐지고 있다.김정일때문에 평생의 노력이 무너지는 것을 방치하지는 않을 사람들인 것이다.
  • 개방파·「혁명소조」출신 친위그룹 주도/김정일의 적과 동지들

    ◎당 김용순·황장엽­적 「프라하 3인방」 포진/평일모자·빨치산출신 「잠재적」 반발세력 김정일이 일단 북한권력의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이 확실시됨에 따라 그의 친위세력들이 대거 부상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김일성이라는 절대권력자의 사망으로 인한 권력의 진공사태를 메우기 위한 필연적인 수순이다. 따라서 앞으로 김정일체제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긴 하나 당분간 북한정국은 친김정일 세력과 잠재적인 반대세력간의 물밑 암투가 한동안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친김세력과 반김세력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북한이라는 특수체제의 성격상 쉽지 않다. 우선 김일성 생전에 김부자간 권력세습에 대한 공개적인 반발은 곧 파멸을 의미했기 때문에 김정일에 대한 불만이 있더라도 내연할 수 밖에 없었던 탓이다.그리고 김정일 친위세력은 대부분 김일성 추종세력과 겹치고 있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김정일은 지난 72년 당중앙위 비밀 전원회의에서 공식 후계자로 낙점된 뒤 꾸준히 자신의 시대에 대비해온 것은 사실이다.당·정·군에 걸친 주요 포스트에 은밀히 자신의 세력을 심어온 것이다. 이같은 그의 측근세력은 크게 ▲3대혁명소조를 중심으로 한 소장 저변 친위세력 ▲당·정·군의 이른바 혁명2세대 간부 ▲혁명1세대 중 김정일과 잦은 사적인 교유를 갖는 인물군 ▲친족세력 등으로 대별된다.이들은 상당부분 중첩되는 것도 특징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노동당쪽에선 김용순·김기남·김국태·황장엽 등이 눈에 띈다.이중 대남담당 비서와 최고인민회의통일정책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는 김용순은 외교 및 대남관계 핵심브레인으로 등장할 전망이다.「주체사상」의 최대 이론가인 황장엽과 김정일의 각종 연설문 등을 대필해온 김기남 등은 김정일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우상화작업을 선도할 이론과 실무책임자로 부상할 공산이 크다. 김정일의 권력안정에 핵심적 열쇠를 쥐고 있는 군쪽에선 오극렬대장과 김강환·김두남 두 전현 당군사부장이 대표적 측근이다.이들 중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였던 오증흡의 아들인 오극렬이야말로 군부내 「혁명2세대」 중 김정일의 최측근 인사로 차기 인민무력부장이 유력시된다는 관측이다.그는 김정일의 비호하에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다 88년 오진우인민무력부장과의 마찰로 군총참모장직을 재임 10년만에 최광에게 넘겨준 바 있다. 행정 및 경제분야에선 프라하공대 출신의 3인방인 강성산·연형묵·박남기 등과 전현직 국가계획위원장인 김달현·홍석형 및 최영림 등이 측근인사로 거명된다.이들은 대부분 조심스럽지만 개방노선의 불가피성을 인식하고 있는 대표적 테크노크라트들이다. 이밖에 김정일을 위해 중국 문화혁명기의 홍위병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해온 3대혁명소조를 이끌고 있는 장성택도 빼놓을 수 없는 측근이다.그는 김정일의 친여동생인 김경희의 남편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김으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얻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고 있는 측근세력과는 달리 반김세력들은 수면하에 잠재해 있다.더욱이 어차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북한권력의 속성상 측근세력중에서도 김정일세가 약화될 경우 언제라도 등을 돌릴 인사가 상당하다는 관측이다.이같은 관점에서 주목되는 잠재적 반김 세력들로는 군부와 당에 걸친 이른바 「혁명1세대」그룹 일부와 군부내 소장 및 중견 장교층,그리고 김성애·김평일 등 족벌세력들이다. 김정일의 권력장악에는 오진우를 정점으로 최광인민군총참모장과 이을설호위총국장·백학림사회안전부장·김철만 국방위원을 비롯해 「혁명1세대」의 막내격인 김광진차수 등 빨치산 원로급들의 협조가 절대적이다.그러나 이들중 상당수는 그동안 김일성이 카리스마에 눌려 침묵을 지켰으나 내심 김정일의 노선과 지도력에 회의를 품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때문에 이들 중 일부가 동구유학을 다녀온 중견장교들과 연계해 김정일체제가 대외적 고립과 경제난을 극복하지 못할 경우 반기를 들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표면적으로는 후원세력이나 언제든지 등을 돌릴 가능성도 있는 인물들로는 친삼촌인 김영주와 계모 김성애,이복동생 김평일 등 족벌세력들이다.특히 김정일과 후계경쟁에서 밀려나 18년의 은둔 끝에 지난해 일약 부주석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김영주는 일단 김의 후견인역을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당정에 걸친 추종세력이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요주의 인물이라는 관측이다. ◎매부 장성택 가장 신임… 요직 앉혀/작년 재기한 숙부 영주의 향배에 관심/김정일과 족벌내 역학관계 김일성은 생전에 자신의 아들 정일을 둘러싸고 빚어지고 있는 가족간 갈등에 대해 심히 우려했었다고 전해진다.그만큼 김정일과 다른 가족간 대립이 심각했고 이는 자신의 사후 정권존립 자체에 위험요소가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가장 큰 근심거리는 김정일과 자신의 후처 김성애,자신의 친동생 김영주,김성애와 사이에 난 아들 즉 김정일의 이복동생 평일과의 관계였다. 지난 72년 이후 20여년간 후계자로서의 정권 정지작업을 다져온 김정일에 있어서 가족관계는 철저히 적과 아의 개념이 분명했다.권력장악의 걸림돌이냐 추종세력이냐가 그 기본선으로 특히 김일성과 자신의 생모 김정숙(49년 사망)사이 관계인 「기본가지」와 계모 김성애(김일성과 56년 결혼)와의 관계인 「곁가지」를 철저히 구분했다. 따라서 김정일이 가장 신임하고 있는 것은 친 여동생으로 북한 여성계의 참모역할을 하는 당 경공업위원장인 경희와 그의 남편 장성택이다.그는 실세로 불리며 중앙당 27개 부서 가운데 3대혁명소조부·근로단체부·청년사업부 등 핵심 3개부서를 맡고 있다.이밖에 신임하는 사람으로는 자신의 브레인으로 사상적 부족함을 메워주는 가정교사 황장엽(전 김일성대총장으로 사상담당 당서기·김일성의 조카사위),양형섭(최고인민회의 의장·김의 4촌동생 김신숙의 남편),김정숙 민주조선 책임주필(김의 4촌동생)등이 있다. 김정일이 배척,김일성의 우환거리를 제공했던 이들과의 「가족화해」를 시사한 일련의 사건들이 이어져 세계의 이목을 끈 것은 지난해.70년대 초반 남북조절위 공동위원장,10년간의 당조직위원장을 지내며 막강한 실력을 행사하다 75년 김정일에 의해 사실상 숙청된 김영주가 재등장한 것.당내 막강한 지원세력까지 김정일에 의해 「여독청산」란 이름으로 거의 제거돼 은둔생활에 들어간 그는 지난해 7월17일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관」 준공식에김부자등과 모습을 나타내고 이어 며칠뒤 당정치국서열 7위로 부상했다. 또 지난 71년 여맹위원장이 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다 김정일에 의해 73년 여사칭호를 박탈당하고 친동생 김성갑마저 평양시 인민위원장 자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었던 김성애도 마찬가지.80년 이후 줄곧 공식행사에 얼굴을 못내민채 평양근교 별장에서 두문불출해 오다 지난해 11월 노동신문에 쿠바여성대표단을 맞는 사진이 나오고 이어 여맹전원회의에서 「김정일지도자를 받들자」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지난달 김일성과 함께 카터 전미국대통령을 맞으며 내외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세계의 뉴스거리로 받아들여질 정도였다. 한편 김평일은 김정일로부터 가장 박대를 받아온 인물.김일성을 닮은 건장한 체구와 카리스마적 얼굴,원만한 성격이 김정일로 하여금 그를 권력의 언저리에서 감시의 대상으로 올려 놓았던것. 불가리아 대사로,핀란드 대사로 겉돌며 북한주민들로부터 동정을 받았던 그가 최근 북한으로 돌아가 군요직을 맡았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도 그 하나다. 이같은 김정일의 관용이 김일성의 심기를 편하게 해주는 단순한 배려로 그치고 김일성이 사망한 지금 다시 이들을 숙청하거나 「안거」토록 할는지는 분명치않다. 일단은 복권된 이들 친족들이 「조카의,의붓아들의,형의,처남의 대권에 도전하지 않고 적극 밀어주겠다」고 약조한 끝에 나온 족벌정치강화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김정일족벌의 정확한 향배는 11일 이후 김정일이 정식 권력승계절차를 마치고 통치를 행사함에 따라 조만간 드러날 전망이다. ◎올들어 공식행사 6차례만 참석/「친필서한」은 부쩍 늘어… “충성경쟁 유도”/김정일 최근 어디서 뭘했나 김정일은 공식석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아버지 김일성을 예우하는 차원이라는 분석도 있으나 몇가지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1백58∼1백62㎝로 추정되는 단신에다 그의 연설문이 육성으로 단 한 차례도 방송되지 않을 정도로 말을 더듬는 콤플렉스가 있어 대인 기피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김정일의 최근 행적 가운데 특별히 눈에 두드러지는것은 없다.평소보다 활동이 눈에 띄게 뜸했다거나 아니면 왕성했다거나 하는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김정일의 최근 행적에서 그의 권력승계 여부를 확인하는 단서를 찾기란 힘들다는 얘기이기도 하다.공식적인 자리에 자주 얼굴을 내미는 대신 뒤에서 조용히 기반을 다져 권력승계에 대비해온 것이다. 김정일이 올들어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여섯차례에 불과하다. 새해 벽두에 근로자들과 신년모임을 가진데 이어 2월 28일에는 조총련 책임부의장인 허종만과 면담했다.뒤이어 3월 5일에는 북한군 협주단 공연을 관람했고,4월 6일에는 최고인민회의 9기 7차회의에 참석했다. 4월 25일에는 군창건절을 맞아 아버지 김일성과 함께 564군부대를 시찰했고,5월 6일에는 조총련 제1부의장 이진규와 「친선담화」를 나눴다.지난달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방북했을 때 김정일은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처럼 의례적인 공식활동을 하면서도 실질적인 통치자로서의 정책지도 활동이라 할 수 있는 「현지지도」 및 외빈접견 활동은 김일성이 사망할때까지 단 한차례도 갖지 않았다. 올들어 김정일의 보이지 않는 행적 중 눈에 띄는 것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친필서한」을 보내는 숫자가 예년에 비해 부쩍 늘었다는 점이다.친필서한이란 김정일이 주민들에 대한 「사랑」을 과시하고,이들을 고무·격려하기 위해 직접 쓰는 편지이다.지난 90년 11월 1일 「조선중앙통신사」 당원들에게 보낸 것이 효시이다. 올들어 지난 5월초까지 7차례의 친필서한을 보냈다.예년의 1년치와 맞먹는다. 전문가들은 친필서한이 잦아지고 있는 것을 김정일의 「인덕정치」를 부각시키고 그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속셈으로 보고있다.사상적으로 취약한 새 세대들에게는 김정일에 대한 「대을 이은 충성」을 확고히 하고,핵문제로 국제적 압력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청년 군인들에게는 김정일 체제 수호를 위한 긴장감을 불어 넣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이후 김정일의 외형적인 행적에서 변화를 찾는다면 생산현장에 대한 「현지지도」가 줄어든 대신 군관련 행사 참여가 늘고 있는 점이다.군후방일꾼대회·전승기념탑 제막식·공병대회 등에 참석하고,전승기념 퍼레이드를 관람하는 등 군관련 행사에는 매우 활발하게 참여했다.지난해 4월 국방위원장으로 선임된 이후 당연한 결과로 지적되고 있으나,권력승계에 대비해 군부를 미리 장악하려는 의도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 비정한 권력투쟁가… 유례없는 반세기 독재/김일성 82년의 인생역정

    ◎유년 평양·만주 전전… 20세에 빨치산 활동/해방후 구소점령군 배경업고 권력장악/도전세력 가치없이 제거… 1인체제 구축/민족통일 빙자 6·25남침… 「전범」 낙인/67년 주체사상 만들어 사회주의 통치도구로 활용하기도 김일성.현대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집권을 누린 독재자이다.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난 45년 소련군을 등에 업고 한반도의 절반인 북한땅의 통치자가 된 뒤 거의 반세기동안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둘러왔다.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주석과 당총비서라는 사회주의 체제 특유의 어마어마한 권력집중적 직책도 모자라 북한주민들에게 「위대한 수령」,「민족의 태양」으로 부르기를 강요한 전제군주적 독재자였다. 김은 어찌보면 사이비 종교집단의 교주처럼 전지전능하고 무오류의 존재로 인식되도록 주민들을 세뇌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먹을 것이 모자라 하루 두끼 먹기운동을 벌이면서도 철저한 사상무장과 외부 정보통제로 주민들로 하여금 지상낙원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믿도록 만드는능력을 갖춘 인물이 바로 김일성이기 때문이다. 김은 1912년 4월15일 평양의 한 농가에서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을 부모로 하여 철주와 영주를 동생으로 둔 삼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본명은 성주였으나 만주에서 빨치산활동을 할 때 일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우상화과정에서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엄청나게 날조되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그의 출생지가 평남 대동군 룡산면 하리 칠골에 있는 외가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을 거쳐 다시 일성으로 바뀌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김일성의 「공식」생가는 평양 대동강변 언덕에 자리잡은 지금의 만경대이며 이른바 「혁명의 요람」으로 북한의 모든 주민들에게는 참배의 대상이 되어왔다. 김은 어린 시절 한때 외할아버지가 개신교 장로를 지내는 등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외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강반석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그는 만경대에서 짧은 유년시절을 보낸 뒤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그후 김은 만주의 중국계 소학교인 모예산소학교,팔도구소학교와 평양근교 외가인 칠골에 있는 외조부 강돈욱이 교감으로 있던 창덕학교 등을 전전하며 파란많은 소년기를 보내다 26년 역시 중국계인 무송소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32년 유격대활동에 적극 가담하기까지의 기간은 뚜렷한 활동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다만 북한에서 나온 그의 전기들은 이 기간중 장춘과 길림 사이에 있는 가륜에서 한인농민들에게 사상교화작업을 했다고 쓰고 있다. 그는 31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32년 중순부터 중국 공산당 산하의 항일 빨치산집단에 참여한다.이때 이름도 성주에서 일성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김의 항일투쟁경력은 그가 북한정권을 장악한뒤 유일체제를 강화하면서 그에 대한 우상화를 합리화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과장·미화되었다.북한의 선전용 김일성 전기들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32년 그가 조선공산당을 창설했다고 하지만 당시 불과 19세였던 그는 당시 그럴만한 힘이 없었다. 그는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양세봉이라는 한인이 이끄는 유격조직에 들어감으로써 항일빨치산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후 그는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에 사병으로 들어가 활동하다 우수한 중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나중에 대대장급으로 승진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만주 일대에서 소규모 유격활동을 벌이던 김은 37년 유격대원 2백명을 이끌고 국경 마을인 함남 보천보를 습격했다.일본경찰지서와 우체국 등을 방화하고 추격해오는 경찰서장을 비롯한 일경 7명을 살해한 이른바 「보천보전투」를 벌여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김은 이 전투가 자신이 참여한 빨치산 전투중 가장 성공적인 전투였다고 자랑하며 보천보에 자신의 동상과 혁명박물관까지 세우고 북한 주민들에개 참관을 강요했다.하지만 보천보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김일성이 아니라는 소수 의견을 내는 학자들도 있다.즉 보천보사건의 김일성은 그해 11월 죽었으며 그의 부하였던 사람이 소련으로 도피한 뒤 그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보천보사건 이후 일본이 중국 본토 침략의 전초전으로 만주의 빨친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전에나서는 바람에 동북항일연군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때문에 김도 41년 8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으로 피신해야 했다. 소련은 이 무렵 만주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중국인과 한인유격대원들을 모아 블라디보스토크 근교 등지에 「88독립저격여단」이라는 부대를 창설했다.김도 김책,최용건,이동화 등 빨치산 동료들과 함께 이 부대에 들어가 43년에는 대위급으로 진급한다. 김은 여기서 만주에서 함께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김정숙과 결혼했다.그녀는 16세 때인 35년에 김일성의 빨치산부대에 가담해 주방일 등 잡일을 보았던 여자였다. 김은 42년 그녀와의 사이에 첫아들인 정일(소련명 유라)을 낳았다.하지만 그녀는 49년 평양에서 사산아를 낳다가 사망했다. 해방과 함께 무명의 소련군 장교로 평양에 입성한 그는 이후 소련의 절대적 후원과 타고난 권모술수로 재빨리 권력을 장악한다.소련 점령군은 친소세력에 의한 공산정권 수립의 필요성에 따라 자신들의 협조자들 가운데 하나를 북한지도자로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고 김이 바로 그같은소련의 의도를 기민하게 포착한 것이다. 소련점령군이 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지명하면서 정치지도자로서의 그의 기반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49년 3월에서 4월까지 한달동안 자신을 도와준 소련에 감사를 표시하기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인 6월 24일 북로당과 남로당 중앙위원회연석회의를 열어 당 위원장자리를 차지했다.이 회의에서 당의 명칭도 북조선노동당에서 조선노동당으로 바꾸었다. 당과 정부기관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김일성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세력을 가차없이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그는 자신에게 협력했던 인사도 자신에 도전할 정도로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숙청 또는 암살이라는 수단을 동원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는데 심지어 자신과 유격대활동을 함께했던 빨치산대원들까지 가차없이 제거하기도 했다. 그는 조만식과 같은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박헌영,김두봉등과 같이 자신에게 협력했던 수많은 인물들을 한국전쟁에 대한패전책임을 덮어씌우거나 종파주의를 부추키고 있다는등의 갖가지 죄목을 걸어 제거함으로써 결국 북한정권을 족벌체제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소련의 힘을 빌려 48년 북한정권의 초대수상에,49년 조선노동당 초대위원장에 오른뒤 도전세력들을 가차없이 제거하기 시작했다.그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는 물론 현준혁 등 국내파,박헌영 등 남로당계,김두봉을 위시한 연안파,허가이 등 소련파를 차례로 숙청해 결국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김은 자신의 권좌가 어느 정도 다져진 50년 6월25일 한반도의 적화통일이라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마침내 무력 남침을 감행한다. 그 자신이 식은죽먹기라고 여겼던 적화통일이 유엔의 개입으로 실패로 끝났음에도 그는 전혀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김일성이 무력 적화통일이라는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47년부터였다.그는 신년사를 통해 『단합된 민주조선의 건설은 남한에 있는 반동적인 매국노들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군과 보안대를 강화시켜야한다』고 역설했다. 김일성은 모든 상황이 유리하다고 판단,밤도둑처럼 새벽야음을 틈타 남침을 했으나 유엔군이 참전하고 중국의용군이 자신을 도와주러 왔을때는 이미 전쟁이 자신의 관리능력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되었다.국제정세를 너무 단순하게 보았던 판단착오의 결과였다. 김일성은 자신의 실수로 엄청난 결과가 빚어지자 동료들을 숙청했다.그는 1950년 12월 21일 강계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그의 빨치산 동료들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을 공격했으며 그 가운데서 김일,최광,임춘추,김열,무정등은 당에서 축출해버렸다. 김일성은 뒤이어 당의 재조직문제를 놓고 자신과 이견을 보인 소련파의 거두 허가이를 숙청했으며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들도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미국을 위해 스파이활동을 했다는등의 죄목으로 체포해 사형에 처하는등 자신에게 도전하거나 더이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세력은 여지없이 제거하는 비정함을 보였다. 김일성은 50년대 중반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도전하는 세력들을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래 67년에 「주체사상」을 만들어 냈으며 72년에 와서 북한의 사회주의헌법에 통치이념으로 명문화시켜 통치의 도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같은 주체사상과 김일성에 대한 극단적인 우상화가 맞물리면서 북한정권이 안에서부터 서서히 허물어지는 요인이 됐다. 북한의 선전매체들이 김일성에 대해 『가랑잎을 띄우고 대하를 건너가는 만고의 영웅이며 그가 한번 노려보기만 하면 원쑤도 가을 풀같이 쓰러진다』고 보도할 정도로 북한은 이후 유사종교집단적 사회구조를 띠면서 경직적인 김일성 1인체제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70년대 이후 김일성은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밀리면서 철저한 폐쇄체제로 주민들을 통제하면서 다른 한편 아들인 김정일에게로 후계세습작업을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나름대로의 준비과정을 거쳐 지난 72년 12월 비공개리에 당중앙위 전원회의를 거쳐 김정일을 자신의 후계자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그도 소련의 스탈린 등의 전례를 보고 자신의 사후에 대해 대비를 시작한 것이다.다시 말해 스탈린 사망후 대대적인 격하운동에 충격을 받은 김이 사후 안전판으로 세계사에 유례없는 부자간 권력승계라는 희화적 구도를 상정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 이상으로 김정일에 대한 상징조작을 단계적으로 확대해나가면서 권력을 하나씩 아들에게 이양하기 시작했다.김정일에 대한 호칭을 「당중앙」에서부터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향도의 별」 등으로 격상시켜나가면서 노동당 조직비서(73년),노동당 정치 상무위원회 위원(80년),인민군 최고사령관(91년),국방위원장(93년) 등 핵심요직을 하나하나 물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에게 「살아있는 신」으로 우상화작업을 펴온 김일성도 끝내 죽음을 거부할 수 없는,한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그 자신도 70년대 이후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 건강유지에 발버둥쳐온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김일성의 질환은 지난 73년께부터 확인된 뒷머리의 혹에서부터 고혈압·당뇨·난청·신경통·뇌일혈을 비롯해 그를 8일 새벽 마침내 죽음으로 몰고간 심근경색 등 10여가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그는 분단 반세기만에 초유의 역사적 사건인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급사했다.그를 갑작스런 죽음으로 몰고간 원인이 그의 일생일대의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상회담에 대한 준비과정에서의 과로 때문인지,아니면 경제난과 대외적 고립에 따른 누적된 스트레스 탓인지는 아무도 모른다.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북한주민들에게 영생불사의 존재로 신격화된 그도 죽음 앞에 아무도 예외일 수가 없다는 철리를 그의 맹목적인 추종세력들에게 마침내 일께워 준것이다. 그의 공과는 후세의 사가가 엄정하게 평가해줄 것이다.그가 역사의 장에 어떻게 기록되든 과대망상에 빠진 권력의 화신이었다는 사실은 동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이미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 연표◁ △1912.4.15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출생(본명은 김성주) △1923 만주 장백현 팔도구 소학교 졸업 △1926 만주 길림 육문중학 중퇴,재학중 공청 가입 △1930 김성주를 김일성으로 개명 △1931 중국공산당 입당 △1932 중국공산당 조선인부대 지대장 △1935 김일성으로 재개명 △1936 조국광복회 조직 △1937.6 함남 보천보 습격 △1937.9 함남 증평리 습격 △1940말 소련으로 망명 △1945.8 소련군 소좌 △1945.9 소련점령군 비호하 입북 △1945.10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참석 △1945.10 「김일성장군」환영 평양시군중대회에 등장 △1945.12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 △1946.2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7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장단 의장 △1946.8 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 △1947.2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 △1948.8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48.9 수상(제1차 내각) △1949.3 경제문화 협정체결차 소련방문 △1949.6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0.6 군사위원회 위원장 △1950.7 인민군 최고사령관 △1953.2 원솔칭호 △1953.7 영웅칭호 △1956.4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1957.9 수상(제2차 내각) △1957.11 당 및 정부 대표단장으로 소련 10월혁명 40주년 기념식 참석 △1959.1 소련 제21차 공산당대회 참석 △1959.9 중국 정권창건 10주년 기념식 참석 △1961.7 우호협조 및 상호 원조조약 체결차 소련 중국 방문 △1961.9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및 정치위원회 위원장 △1961.10 소련공산당 제22차대회 참석 △1962.10 수상(제3차 내각) △1966.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67.1 소련방문 △1967.12 수상(제4차 내각) △1970.11 노동당 총비서 겸 정치위원 △1972.12국가주석 △1972.12중앙인민위원회 위원겸 국방위원회 위원장 △1975.4중국방문 △1975.5루마니아·알제리·모리타니·불가리아·유고 순방 △1977.11국방위원회 위원장 △1977.11인민군 최고사령관(원수) △1977.12 국가주석 △1980.5 유고 티토대통령 장례식 참석 및 루마니아 방문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1980.10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총비서·군사위원장 △1982.4 국가주석 △1982.9 중국 방문 △1984.5 소련등 동구권 8개국(소련·폴란드·동독·체코·헝가리·유고·불가리아·루마니아)순방 △1986.10 소련 방문 △1986.12 국가주석 △1988.6 몽골 방문(중국·소련 경유) △1989.11 중국 방문 △1990.5 국가주석 △1991.10 중국 방문 △1992.4 대원솔 칭호 △1993.4 「전민족 대단결 10대강령」발표 △1994.4.8 사망
  • 김일성사후의 한반도정세/김석준(특별기고)

    ◎대남노선 온건화­평화통일 “청신호”/김정일체제 개혁·개방 가속화 전망/정상회담 정례화·북핵 타결 가능성 북한 김일성주석의 사망소식이 온나라에 여러가지로 큰 충격을 주었다.남과 북의 7천만 민족에게 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에도 긴급뉴스로 전파되어 김일성사후의 한반도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하였다.특히 북한핵문제,북미회담,남북한 정상회담 등이 구체적인 관심의 초점으로 되고 있는 이때 김일성주석의 사망은 사인을 둘러싼 의혹만이 아니라 이들 문제와 한반도정세의 향후 전개에 미칠 영향에 대해 많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한국정부도 돌발사태에 대비한 전군비상체계 돌입,국가안보회의와 국무회의 개최 등의 조치를 취하는 한편 새로운 대응전략을 마련중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남북정상회담준비에 골몰했던 정부였기에 일부 관계자가 충격과 허탈감에 빠진것도 이해할 수 있으나 신속하게 대응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니 다행으로 생각된다. 자연사의 경우에는 이미 오랜기간 권력승계를 준비해온대로 김정일후계체제가 다소의부작용을 무마하면서 큰 무리없이 등장할 것이다.김정일이 주석직을 승계하고 반대파를 숙청,무마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면 정치안정을 이룬뒤에 북한핵문제해소와 경제안정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이 경우에는 남북관계도 진전되고 남북통일도 전향적으로 전개될 것이다.김일성 개인의 카리스마와 전체주의적 통치방식도 김정일체제의 경우에는 새로운 권력집단으로 부상할 개혁지향의 관료집단과 합리적 통치방식으로 변화할 가능성이 크다.물론 이러한 전환과정에 많은 시행착오나 부분적인 저항으로 인한 혼란이 발생하여 더욱 전체주의적인 방향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없지 않으나 그럴 경우에도 체제의 폐쇄성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전반적으로 볼 때 북한의 새로운 체제는 기존 체제보다 개방화와 개혁의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고 개인의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에 의존하던 지도체제에서 집단적인 방식이 많이 추가된 탈전체주의체제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세계적인 사회주의체제의 몰락과 개방화라는 역사적인 추세뿐만이 아니라 북한사회내의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군부,당및 정부내에서의 개혁적·합리적 기술관료집단의 부상,북한사회내 엘리트집단의 폐쇄적 체제에 대한 회의 및 개방에 대한 선호,북한 경제상황의 악화,주체사상에 대한 확신 약화,해외 유학파의 증가에 따른 개방화의 욕구파급,외국 방송과 해외정보의 확산 등이 기존체제를 위협하는 요인들이다.이들이 김일성체제의 후계체제구축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이 때문에 북한체제의 개혁과 개방에 반발하는 수구세력,특히 일부 군부세력이 중심이 되어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매우 낮다.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북한체제는 소련이나 동구체제보다는 중국의 개방화와 가까운 길을 걷게될 가능성이 크다.김일성의 사망은 장기적으로 북한체제의 개혁과 개방을 더욱 가속화시킬 것으로 보인다.북한체제가 개방과 개혁의 길로 나아가는 한 한반도주변정세는 안정된 길로 나아갈 것이다.북미회담의 계속 추진,남북정상회담의 정례화,북환핵문제의 평화적 해결등이 가능하게 된다. 혹시라도 김일성이 피살된 경우에는 상황전개가 더욱 복잡하다.누구가 주도했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개혁과 개방에 반대하는 수구세력이나 김정일에 의한 경우에도 북한체제의 안정은 단기간에는 어려운 반면 장기적으로는 북한체제의 급속한 붕괴를 제촉할 수도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남북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북한뿐만이 아니라 우리정부가 남북관계의 또다른 독립변수가 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상황이 유동적이고 불확실할수록 정부의 대응전략내용에 따라 전개방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국내 보수·진보세력간의 의견대립이 지나치게 표출되었던 점을 교훈으로 삼아 정부가 보다 개혁적인 정책방향을 조속히 정립할 필요가 있다.국가안보를 속으로는 중시하더라도 유동적인 북한을 자극하기보다는 더욱 통일을 향한 평화적 대화통로를 유지해야한다.가능하면 남북정상회담도 차질없이 추진하겠다는 정부 의지를 공표하여 북한의 새로운 체제의 안정에 도움을 줄 필요가 있다.정치적·경제적 수단을 동원하여 우리정부의 일관된 통일정책을 추진해야 하겠다.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북한체제의 붕괴로 인한 흡수통일보다는 단계적인 통일방안의 독자적·주체적 실현이 필요하다.남북정상회담과 북미회담의 지속적인 추진을 촉구한다.
  • YS의 통일경쟁력/최평길(시론)

    북한지도부는 한국과 러시아 및 중국의 수교로 3백60도 외교포위를 당한데다 바닥이 드러난 경제,서독식 흡수 통일에 대한 위기의식,정권승계의 부담 속에서 가장 경제적이며 가장 파괴력이 있는 방편으로 「핵」을 선택하게 되었다.최근 평양주재 러시아대사관 공사로 근무하다 귀국한 제니소프 러시아 외무부국장은 한달전 필자에게 『북한 정부의 과장급 이상은 남한 주도의 현실성있는 통일에 일종의 공포감을 느끼고있다』고 북한의 내부사정을 말한 바 있다. 이에반해 한국은 북한핵 개발에 미국이 무력대응을 할 때 발생가능한 전쟁공포감에 시달리고 있다.6·25에 대한 연상과 최신의 무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은 더욱 공포감을 느끼는 듯 하다.그러나 체제붕괴,흡수통합,전쟁 공포의 삼중 공포감에 시달리는 북한이 보다 어려운 위치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시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북한의 제의로 추진되고 있다.북측의 경우 안병수·백남준 회담꾼 말고 이번 예비회담에 나오는 김용순은 실세 중의 하나이다.김일성대학 출신으로 해외유학이나 재외공관근무경험이 없는 국내파이긴 해도 노동당 국제부장이였으며 해외감각이 있고 불어에도 능통한 김용순 최고인민회의통일정책위원장이 예비대표로 온다니 무게는 다소 실리는 것 같다.1990년말 루마니아 차우세스쿠가 무너지고 체코의 무명 지하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이를 감지하지 못한 구 소련 KGB나 외무부,당 외교 계통에서는 대경실색하여 다음의 민주화 대상국은 북한으로 보아 고르바초프의 직접 명령으로 소련 공산당 국제부 극동본부의 트카첸코 본부장은 김일성 이후 차세대 지도자 후보 1백인 리스트를 만들었는데 10위권 이내에 김용순이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민족주의자 조만식·국내 공산파 현준혁·소련파 허가이·연안파 김두봉·자기식구 박금철·심지어 신세대 이용무 장군까지 서로 이간시켜가며 숙청의 무대에서 방어자로 자란,그리고 중국과 러시아의 비위와 수모와 권력이동을 교묘히 이용해 오며 북한의 예수로 자처하는 80고령의 김일성은 중학교육을 받았으며 일제하의 민족 게릴라출신의 노쇠한 우회 돌파형의 정치술수가이다. 해방세대의 대학교육을 받고 야당의 정적을 처리하고 정보정치속에서 줄기찬 도전자로 성장한 투사형 김영삼대통령은 정면돌파의 정치전략가이다. 체제붕괴와 세습체제 종말,남한에 의한 흡수통합,핵무기제조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공포의 3중고에 시달리는 김일성에게 김영삼대통령이 주저하거나 일말의 불안감을 가질 하등의 이유가 없다.따라서 가능하면 판문점이나 개성 정도에서 7월중에 북미회담과 맞물린 정상회담을 하되 시간과 장소에 너무 구애받을 것이 없다.오히려 느긋한 쪽은 남한이며 김영삼대통령 쪽이다. 그러나 반드시 관철해야 될 일은 회담의제이고 처음 만남에 간결하고 정확한 메시지가 담겨야 하는데 여기서는 다음의 다섯가지 의제를 제시하고 분명히 설명해야 될 것이다. 첫째는 북한이 핵무기제조를 중단하고 그간의 경위를 소상히 IAEA는 물론 남한에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이 불이행될때 남한도 단시일내에 북한보다도 더 빨리 핵무기제조를 할 수 밖에 없음을 통고해야 할 것이다.특히 제조능력은 갖추고 있더라도 만들지는 않는다는 메시지를 주어야 한다.둘째 정권승계나 경제난·대중봉기 등 북한의 혼란이 있다해도 경제원조 등은 있어도 남한이 먼저 의도적으로 흡수통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현재의 남한경제여건과 남한 국민이 통일비용부담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밝혀야 한다.셋째 무슨일이 있어도 남북한 관계는 전쟁이 아닌 평화적 해결이며 그 실질적·상징적 표상으로 남북한 정상 핫라인을 개설하여 항시 두 정상이 전화로 통화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넷째는 이렇게 될때 북미간의 외교수립이나 국제관계에서 남한이 협조해야 할 것이며,다섯째는 군축·남북경제·사회·문화교류,특히 북한이 원하는 식량·원유원조·남북교역·두만강 특구 등 모든 경제교류 협조의 일대 물꼬를 트는 대담한 큰 정치 회담을 이끌어야 될 것이다. 통일시대의 YS와 IS의 대좌가 임박한 이때 YS의 국제경쟁력 향상,국내 정치 주도권 장악에 이어 자유민주체제를 위한 통일정국의 장악력을 기대해 본다.
  • 스탈린,인구발표 조작/조사문서 발견… 3백여만명 누락

    ◎공포정치로 인한 희생자로 추정 구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지난 39년 실시한 인구조사 자료가 최근 단행본으로 출판됐다고 러시아 일간지인 로시스키예 베스티가 25일 보도했다. 이 자료는 엄청난 인명피해 등을 감춘 소련 초기역사의 공백을 밝혀주고 스탈린이 행한 숱한 거짓말을 폭로해줄 것으로 보여 관심을 모으고 있다. 소련은 지난 26년 총인구가 1천4백70만명이라는 통계를 발표한 것을 마지막으로 59년까지 완전한 인구통계를 발표치 않아 학자들은 스탈린의 공포정치와 제2차 세계대전이 인구에 끼친 영향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20여권에 이르는 39년도의 인구 조사 통계 보고서는 정부 문서 보관소에 있었으며 겉표지에는 「극비,공개불허」라는 스탬프가 찍혀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로시스키에 베스티는 러시아의 나우카 프레스가 문제의 보고서에서 통계수치를 발췌,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산하 역사연구소 전문가들의 주석을 붙여 책으로 펴냈다고 밝혔다. 26년도 인구조사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39년 사이에 많은주민들이 피의 숙청과 폭압적인 집단화·산업화 정책으로 희생됐다.희생자 추정치는 최저 6백만명에서 최대는 6천만명으로 들쭉날쭉하다.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했던 37년에 인구조사가 있었지만 발표를 금지시키다 39년도에 2차 인구조사를 실시했다.그러나 그는 이것도 마음에 안들었는지 극히 단편적인 자료만을 발표토록 했다. 스탈린은 39년 총인구가 1억7천50만명이라고 공언했으나 이번 자료에는 당시의 실제 총인구가 1억6천7백60만명인 것으로 돼 있다. 기사를 쓴 알렉산드르 구바노프는 『3백만명 가까운 사망자가 살아있는 것으로 발표된 셈』이라고 말했다. 또한가지 밝혀진 사실은 스탈린이 30년대 소련국민들의 문자해독률을 과장했다는 것.당시 관리들마저 교육수준이 형편없었음이 드러났다.판검사들 41%가 중학교 수준의 학력에도 마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 암보다 무서운 것들/서지문(일요일 아침에)

    암을 정복하는 것이 멀지 않았다는 기쁜 소식이 들린다.캐나다 어느 대학의 연구소에서는 정상세포에는 없고 암세포에만 있는 효소를 발견했는데,이 효소의 작용을 억제하는 방법을 발견하기만 하면 암세포분열을 막을 가능성이 기대된다고 한다.또 미국 유타주의 어느 유전공학연구소에서는 암세포에는 세포의 비정상성장을 차단하는 유전인자의 사본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고,그래서 이 결여를 시정할수 있게되면 암의 진행을 막을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이외에도 AIDS예방약 개발가능성 발견등 최근에 의학계의 낭보가 적지 않았다.이런 소식은 암이나 AIDS에 걸릴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기쁘고 감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끈기가 드디어 수많은 사람을 죽음과 고통에서 구하게 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켜주고 인류의 내일에 대해 희망을 갖게 한다. 바로 얼마전에는 암의 정복보다도 더 오래되고 중요한 인류의 숙제를 푼 사건이 있었다.3백50년의 백인통치를 종식시킨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총선이그것이다.우리의 일제강점기의 열배나 되는 세월을 침략자의 지배를 받으며 인간이하의 생존을 강요받아왔던 남아공의 흑인들이 오랜 필사적인 투쟁 끝에 드디어 시민권을 얻고 민주적인 투표로 자신들의 대통령을 선출했다. 이 기적은 단순한 정의와 민중의 힘의 승리이상의 인간개가이다.흑인들의 목숨을 건 긴 투쟁이 세계의 안목을 남아공에 집중시키고 백인들의 안전을 위협해서 백인통치종식의 토대를 마련했다.그러나 총선의 성공은 흑인들이 백인들에 대한 처절한 원한에도 불구하고 수백년간 그곳에서 삶을 이룩한 백인들도 남아공의 국민이라고 인정을 했고,또 백인을 중오하는 이상으로 서로를 증오하는 흑인종족들이 그들사이의 적대감을 접어두고 민주국가수립에 함께 참여하기로 양보와 수용을 했기에 가능했다. 인류의 역사를 보고 우리의 주위를 보면 인간에 대해서 절망하고 정의의 실현가능성을 불신하게 될때가 많다.금세기에 들어서만도 양차대전과 수차례의 인종말살,대 숙청과 탄압,탈 식민지 투쟁과 영토분쟁등 수많은 인류사적 범죄와 살상이 있었다.그런가하면 평화시의 민주사회에도 갖가지 범죄와 비리는 그치지 않는다.그래서 현대에서는 더 나은 미래를 믿는 사람은 감수성이나 통찰력이 부족한 사람같이 보이게 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건설적인 노력이나 성실한 삶의 자세 같은 것도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팽배하게 되었다.물론 이런 정신적 풍토를 틈타 정치적 냉소주의와 허무적 실존주의를 표방하며 이기적,반사회적 행위를 서슴지 않는 2중인격자들도 무더기로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전쟁과 인종말살,독재,그리고 질병과 재해때문에 거듭 퇴행을 했으면서도 수천년간 인류는 꾸준히 발전을 해서 20세기 말에는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누리고 사는 사람의 비율이 부족국가시대 보다 몇십배 증가했다.그러니까 역사적 비관주의는 오히려 근시안적 사고라고 할수 있다. 우리민족도 끊임없는 내우외환에 시달리면서도 생존을 했고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했다.환난이 많았던 만큼 탁월한 지도자,뛰어난 인물도 많았었고 이름없는 영웅도 많이 있었다.그런데 이제 UR협상으로 상품시장 뿐아니라 서비스시장까지 개방되면 우리나라는 또한번 존립자체에 위협을 받을수 밖에 없다. 흔히들 우리나라는 하드웨어는 제대로 되어있지만 소프트웨어는 가망이 없다는 말들을 한다.즉 기계나 제도나 장치가 갖추어져 있어도 그것을 제대로 효율적으로 운용할 두뇌와 정성과 치밀함이 없다는 말이다. 역사·문화사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설명이 될수 있겠지만 우리 민족은 세심하지 못하고 어떤 문제에 대해서 면밀하게 다각적으로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앞날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하는 것이 사실이다.독재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항거를 할수 있는 사람들이 자신과 이웃,공동사회의 안전을 위해 간단한 안전점검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독한 역설인데 그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이제 반독재투쟁을 벌일때 보다도 더 큰 용기와 각오로 우리 국민성의 혁신을 이룩해야 한다.타성과 적당주의와 부주의와 요행심리는 암보다도 더 치명적인 적이다.정체도 모르는 암을 잡아내어 굴복을 시키는 사람도 있는데,우리의 각오가 철저하다면 정체를 잘 아는 우리 속의 장애를 제거하지 못하겠는가. 한 세대의 과오가 열세대의 불행을 몰아 온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으로 배웠다.우리는 열세대의 감사와 존경을 받는 세대가 되어야겠다.
  • 김정산씨 정치소설 「한국지」 출간

    ◎광주항쟁·배경 군부·정객 움직임 다뤄 지난해 경향신문과 전주일보 신춘문예에서 모두 단편에 당선돼 문단에 데뷔한 신예작가 김정산씨(34)가 집념의 역작 「한국지」를 민예당에서 펴냈다. 해방후 흥망을 거듭한 공화국과 그 관련인물들의 이야기를 경신군란·득세·동국·서국·동서국 교류등 5편으로 나눠 집필중인 한국지 시리즈중 첫작품 경신군란편을 선보인 것. 경신년의 광주사태를 배경으로 80년대 한국을 좌지우지했던 군부와 주요 정객들의 안팎을 집요하게 추적해 다루고 있는 본격 정치소설이다. 난세의 영웅격으로 등장한 박태환소장이 군 사조직인 일심회를 기반으로 쿠데타에 성공한후 언론장악과 정치인 숙청 단행에 이은 군사정권 출범까지를 그리면서 권력이동에 따른 인간심리를 놓치지않고 있다. 『훗날의 작가가 대작을 쓰는데 한 톨 밀알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겸손한 출간소감을 밝힌 이씨는 그러나 『뒷날 누군가가 지난 시대의 인물들을 다룬 소설을 읽을때 사료나 신문기사에서 느끼는 것과는 또다른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이 작품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기도.
  • 아이티군부 숙청위해/미,중무장군 파견계획/“제재 굴복해도 투입”

    【로스앤젤레스·워싱턴 AP 로이터 연합】 미국은 아이티의 군사정권 지도자들이 국제 제재에 굴복,권력을 포기하더라도 아이티에 병력을 파견할 것이라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지가 11일 보도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여) 유엔주재 미국대사도 제재가 실효를 거두게 된 뒤라도 군사고문단을 보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LA타임스지는 워싱턴과 이이티의 미관리들 말을 인용,최소한 6백명의 미군이 아이티 군부를 「숙청」하기 위해 파견될 것이라면서 미국은 군사지도자들이 그 이전에 권력을 내놓길 바라지만 이와 관계없이 병력파견은 이뤄질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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