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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광장] 박정희기념관 논쟁에 마침표를

    최근 박정희기념관에 관한 논란이 뜨겁다.그러나 정작 이에 대한 공개토론은 잘 열리지 않고 있다.반대측 토론자로 참여할 분은 아주 많지만 찬성측 토론자를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란다.이것만 보더라도 기념관 건립에 대한 시시비비는 이미 가려진 셈이다. 무릇 특정 사람에 대한 기념관은 그가 남긴 업적이 후대에 귀감이되고 역사교훈으로 기릴 만할 때 건립된다.그러나 박정희는 청산의대상이지 귀감의 보기는 아니다.그의 일생을 일본군 장교로서,해방후 한국군 장교로서,대통령으로서,또 인간으로서 각기 나누어 평가해보자. 먼저 일본군 장교로서 박정희 평가는 의문사를 당한 장준하 선생께서 그의 반민족적 친일행위 때문에 “대한민국 누구도 대통령이 될수 있지만 박정희만은 안된다”고 이미 내려주었다.그런데도 굳이 기념관을 건립한다면 우리는 천안의 독립기념관을 허물어야 한다.민족해방과 독립을 위해 투쟁하거나 돌아가신 선열들,곧 독립군과 의병을기리고 그 정신을 이어받자고 지어놓은 기념관인데, 이들을 죽이는데앞장선 일본군 장교의 기념관을 세운다면 논리적으로 천안기념관은마땅히 허물어야 한다. 다음 한국군 장교로서 박정희는 여순사건때 숙청 제1호였으나 그가가진 한국군내 좌익계의 비밀명단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질수 있었다.또 막 출범한 4·19 이후의 장면 민주정권을 총과 칼로써무너뜨리는 반역의 쿠데타를 감행했고 이 땅에 군사독재라는 악의 씨앗을 뿌렸다.그 스스로도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우리 역사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대통령으로서의 평가는 일반적으로 정통성을 기반으로 한다.정통성은 역사적 정당성,권력창출의 정당성,권력행사의 정당성을 두루 갖추어야 한다.그러나 역사적 정당성은 그가 일제의 황군장교였던 사실만으로도 이미 상실됐다.또 그가 초기에는 총과 칼로,유신시대에는 체육관 선거라는 요식 행위로 종신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기에 권력창출의 정당성도 없다.마지막 권력행사에서는 인권,통일,민주화,경제성장,법치주의,부정부패 일소,도덕성 등 다양한 요소에 걸쳐 평가를 해야하는데 어느 한 분야에서도 정당성을 찾을 수없다. 민주주의에서 박정희는 유신독재·군부독재의 원조였고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임명하는 반의회주의자였다.인권에는 인혁당사건등 수많은 간첩단 사건을 조작해 귀중한 생명을 앗아간 반인권의 세계적 명사였다.법치주의에서는 내각이나 국회가 아니라 중앙정보부와경호실이 통치 핵심이 되고,대통령의 긴급명령이 헌법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등 반법치주의의 연속이었다. 부정부패에서는 그가 죽자 청와대 특수 비밀금고에서 발견된 현금 9억원,가족 중 최측근이 관리한 스위스은행 비밀계좌가 말한다.더 나아가 심복이던 김성곤·김형욱 등에 이르기까지 최소한 1억달러 이상부정축재를 취했다고 미국 프레이즈 청문회는 밝힌 바 있다. 인간으로서 박정희는 채홍사인 중정요원 박선호 대령이 매일 연예인·가수 등을 대령하는 일이 가장 괴로웠다고 실토할 정도로 난봉꾼에다 변절·배신·기회주의·음모·타락으로 뒤범벅된 일생을 살았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한 가지 업적이나 사실만에 의존한 단편적평가가 아니라 여러 요소를 함께 포괄하는총체적 평가를 해야 한다. 박정희의 경우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단지 하나 경제성장을 이루어냈기 때문에 기념관을 지어야 한다고들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마저도박정희 때문이 아니라 누가 집권을 하더라도 냉전의 대결 속에서 남한은 그 정도의 경제성장을 하게 돼 있던 점을 고려하면 그에게 기릴것은 하나도 남지 않는다. 만약 10·26 직후 민주정권이 들어섰더라면 박정희의 전모는 샅샅이밝혀지고 그 평가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을 것이다. 기념관 건립이란말조차 꺼낼 수 없게 됐을 것이다. 늦었지만 이제 우리는 박정희기념관 논란에 마침표를 찍어야겠다. 강정구 동국대 교수·사회학과
  • [외언내언] 왕따 경호

    서울의 한 초등학교.올해 6학년인 A양(12)은 지난달 30일부터 건장한 청년 2명과 함께 승용차로 등하교한다.청년들은 점심시간과 쉬는시간에도 복도에서 A양 주변을 감시하는 바람에 교실 분위기가 어색하다.지난해 말 수도권에서 전학 온 A양이 줄곧 급우들로부터 집단괴롭힘을 당하자 그 부모가 궁리 끝에 채용한 사설 경호원들이다.A양 부모는 전학 후 급우들을 집으로 초대해 좋은 친구가 돼 줄것을 부탁했지만 허사였다.학교와 담임선생님에게 여러차례 호소도 했다고한다.백방으로 노력해도 개선되기는커녕 급기야 전치 2주의 집단폭행까지 당하자 생각다 못한 A양 부모는 사설 경호원을 붙여 딸을 보호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는 물론 중·고등학교의 집단 괴롭힘은 어제 오늘 얘기가아니다.말을 더듬는다는 이유로,뚱뚱하거나 못 생겼다고,옷이 남루하다고,심지어 키가 보통보다 크거나 혹은 작다는 이유로 왕따 대상이된다.공부를 잘하는 ‘범생이’(모범생),얼굴이 잘 생겼거나 옷을 잘 입어도 위험하다.괴롭힘의 종류는 상상을 초월한다.집단 폭행은 보통이고 설사제를 탄 우유를 강제로 먹인 후 화장실을 못가게 감시하는가 하면 코에 지푸라기 쑤셔넣기 등 온갖 행패가 동원된다.그런 왕따에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학생도 있고 며칠 전에는 여중생이 장파열로 죽는 사고까지 발생했다.서울지법 민사합의부가 8일 “집단 괴롭힘을 가한 학생의 부모도 배상책임이 있다”고 판결한 것은 이제이 문제가 학교나 피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회적 공감대를 반영한 듯하다. 심리학자들은 왕따의 집단심리에 대해 ▲이질적 요소를 동질화시키려는 본능 ▲증오를 제삼자에게 발산해 집단의 평화를 유지하는 수단 ▲강자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전가하는 방편 등으로 해석한다.중국 서남부 지방에서 야생원숭이 사육장에 돼지를 한마리 넣어 준다든가,집안이 불편하면 강아지가 괴로운 이치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왕따’가 동물이나 어린이 세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지배집단과 의견을 달리한다는 이유로 숙청을 당한 역사 속의 사례가 있다.옛날 얘기만도 아니다.얼마 전까지도 ‘왕따’를 정략으로 이용한 집단이 있었고 지금도 그 정략에 미련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우리 사회의심각한 문제인 지역주의는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집단을 유지하고결속시키는 수단으로 주어진 생태적 본능이 어린이 세계에 나타나는것은 그렇다 치고 어른들 사회의 ‘왕따’는 어떻게 봐야 하고 해결해야 하는가.나와 다른 것에 대한 포용 등 대책이야 많지만 그 실천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화두(話頭)다. 김재성 논설위원 jskim@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1)西安-延安

    *광복군-조선 의용군 마지막 활동지 西安-延安. 서안은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1천여년 동안 중국 역사에서 서주(西周) 서한(西漢) 당(唐)등 12개 나라의 왕도로 영광을 누렸던 도시다.따라서 도시 전체가 유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유적이 많다.우리의 항일유적지도 상당히 많다.조선청년전지공작대 주둔지,한청반 훈련장,광복군 전선사령부,그리고 미국 OSS(전략첩보국)과 합작해 국내진공을 준비했던 광복군의 흔적도 있다. 취재팀이 아시아나항공 직항편을 이용해 바로 서울에서 서안으로 날아간 것은 서안 교외에 있는 광복군 OSS훈련장을 먼저 찾아보기 위해서 였다.공항에서 차를 대절해 서안시 남쪽 25㎞ 지점에 위치한 광복군 제2지대 기지와 OSS 훈련장이 있던 두곡진(杜曲鎭)으로 향하는 길은 끝이 없어 보이는 짙푸른 옥수수밭이 이어진다.산이라곤 거의없는 황토고원지대인 이 지역의 주 생산물이다.안내인은 몇년전 한국에서 상영된 중국영화 ‘붉은 수수밭’도 이 지역에서 촬영됐다고 한다. 그동안 기자는 실크로드 답사를 위해 몇차례 서안을 지나간 적이 있다.그때마다 서안의 변화모습에 놀랐는데 이번에는 정말 몰라볼만큼달라져 있었다.새로 뚫린 서안시내 우회도로를 따라 달리는 차창옆으로 무궁화꽃이 활짝 피어있다.이따금 거대한 왕릉이 보였다.서안 외곽의 작은 시가지를 스쳐가고,참외·수박을 파는 저자거리를 지나고다시 평원이 나타난다.그렇게 한 시간여를 달리자 멀리 제법 높아 보이는 산이 나타났다.광복군 대원들이 OSS훈련을 받은 종남산(宗南山)이었다. 1945년 3월 15일 한국 광복군과 미군은 한미 군사합작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상호 협력하여공동작전을 전개한다는 것.광복군은 미군으로부터 필요한 전술을 훈련받고 적진과 한반도에 잠입해 연합군작전에 필요한 군사정보를 제공한다는 것 등이었다.그리하여 서안 근교에 주둔한,‘청산리 전투’의 영웅 이범석이 이끄는 제2지대가,안휘성 부양(阜陽)에서는 조선혁명군 참모장 출신 김학규가 이끄는 제3지대가 낙하산 강하 폭파,암호 무전통신 등 특수전훈련을 받았다.그리고 8월 11일을 국내진공일로잡고 작전계획을 세웠다.그러나 8월 9일,원자폭탄 세례를 받은 일본은 연합국측에 무조건 항복을 통고함으로써 광복군의 국내 잠입작전은 무산되고 말았다. 취재진은 당시 제2지대 본부 겸 훈련소가 있던 곳을 찾았다.그곳은지금은 두곡 양참(糧站)이라 불리는 곳으로 서안시 양식국의 창고로변해 있었다.당시의 자취는 없고 창고건물에 둘러싸인 1,000여평의마당이 옛 모습을 암시할 뿐이었다.사무실로 들어가서 책임자인 진강정(陳康正) 참장(43세)을 만났다. “한국손님들이 더러 찾아옵니다.지난해에는 원로 몇 분을 모시고온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구보도 했지요” 문화혁명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노예묘’라는 상당히 큰 규모의도교사원이 있었는데 문화혁명때 완전히 없어지고 양참이 들어섰다고 한다.그는 측백나무 소나무 등 나무들이 우거져 거주지로 삼았던 것같다며 멀리 건너다보이는 종남산 아래에도 절이 있었다고 말한다.광복군 OSS 훈련대원들은 이곳에 본부를 두고 종남산 아래 종남사라는불교 사찰에서 훈련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두곡 양참을 둘러본 취재팀은 그곳에서 2㎞ 떨어진 인근의 흥교사(興敎寺)를 찾아갔다.서역으로 불경을 구하러 떠났던 고승 현장법사(玄裝法師)의 사리를 모신곳인데 신라유학승 원측(圓側)탑이 현장법사의 탑 옆에 천년의 세월은 안은 채 서있다. 그곳에서 차를 돌려 시내로 들어가는데 진 참장이 두곡에 있던 옛날 사람들로부터 들은 얘기라며 들려준 가슴아픈 얘기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예전에 한 한국인이 아이를 데리고 와 훈련받다가 그곳을 떠날 때 남겨두고 갔는데 아이는 그후에도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는 것이다.광복군 아버지가 남겨둔 그 어린 아이는 그 후 어찌 됐을까.지금 살았으면 아마 50살도 넘었을 텐데….내내 그런 생각을 하며 취재진은 서안 시내로 들어갔다.전지공작대와 광복군 전선사령부가 있었던 자리를 찾기 위해서 였다. 전지공작대는 1939년 11월 중경에서 나월한·김동수·김인 등 청년투사들이 조직한 아나키스트성격이 강한 단체였다.그들은 일본군 점령지 교란작전을 위해 전선에서 가까운 서안으로 이동,중국군 전시간부훈련단 안에 한국청년특별반(약칭 한청반)을 만들었다.수료생들은소위로 임관되고 뒷날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에서 큰 역할을 했다. 서안 성내 이부가(二府街)29호,전지공작대가 주둔했던 자리는 중급인민법원이 자리하고 있었다.같은 골목의 4호,옛 광복군 전선사령부가 있던 장소는 유명한 당대(唐代)의 유물인 종루(鐘樓)로 향하는 길을 넓히면서 지금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전지공작대원들이 장교교육을 받은 ‘한청반’ 자리는 지금의 서북대학 안에 있었다.백양나무 그늘이 시원한 현장을 찾으니 연병장은 잔디가 깔려 있고 일부는 도서관 건물이 들어서 있고 당시의 사열대는 국기게양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서안시내의 유적을 찾아본 뒤 취재팀은 한밤중에 침대열차를 타고중국 공산당 혁명성지인 연안으로 떠났다.연안은 서안 정북 방향,깊숙한 분지에 있다.중국 공산당의 장정(長征)과 관련깊은 곳이다.1934년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 홍군 30만명은 국민당의 공격을 피해 화남(華南)의 비옥한 근거지를 버리고 행군을 거듭,최후의 근거지인 연안에 도착했다.남은 병력은 3만.그러나 모택동은 이를 기반으로 국민당 군대에 저항하고 항일전을 전개하면서 재기하는데 성공한다. 1930년대 후반 김원봉과 의열단원들은 발전적으로 해체,조선의용대를 만들었다.우리동포들이 많이 이주한 화북에 진출해서 투쟁한 대원들을 화북지대라 불렀다.그들은 김원봉이 이끄는 대본부가 광복군으로 통합되자 화북독립동맹 산하의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중국 공산군인 팔로군의 지원을 받으며 인근의 태항산에서 싸우다가 연안으로 들어가서 해방을 맞았다.독립동맹의 대표는 유명한 국학자인김두봉,조선의용군 사령관은 김무정이었다. 침대열차는 에어컨이 잘 들어왔고 시설도 좋은 편이었다.이따금 터널을 달리는 듯 소리가 커져 잠을 깨곤 했는데 둔중한 느낌을 주며용을 쓰듯 달리는 것으로 보아 끊임없이 경사진 고원을 오르는 듯 했다.차창으로 새벽빛이 스며들어 창문을 여니 보이는 것이라곤 황토뿐이었다.벼랑에 뚫린 구멍이 있어 눈여겨 보니 그게 유명한 토굴집인 요동(寮洞)이었다.연안역 앞에서 만두로 아침을 때운우리는 조선의용대와 독립동맹이 있던 라가평(羅家坪)마을을 찾아갔다. 라가평 마을은 연하(延河) 위에 놓인 다리 건너에 있었다.마을어구비탈에 기념표시판이 있어 다가가 보니 조선혁명군정학교 자리 표지석이었다.먼지가 일어나는 비탈길을 올라 노인을 찾아 물었다.83세의 고영유(高零有)노인은 벼랑에서 가장 높은 곳을 가리켰다.모두 8개의 요동이 보였다.그곳에는 8개의 요동을 포함 모두 20여개의 요동이 있었는데 군정학교와 독립동맹,조선의용군사령부가 있던 자리로 알려져 있다.요동은 아무 보존조치를 취하지 않아 무너질듯 위태해 보였다. 다시 연하를 건너 동북쪽으로 달려가면 교얼구로 갔다.길가 버스정거장 장려한 천주교회당이 보였다.그것이 유명한 노신기념관으로 옛날에 노신예술학원으로 사용한 건물이었다.최근 다시 예술학원이 개교해 교사로 사용되고 있는데 ‘아리랑’의 저자 님 웨일즈가 김산(金山)을 처음 만난 도서관은 여학생들의 기숙사가 돼 있었다. 취재팀은 밤 기차를 탈 때까지 시간이 넉넉해 연안 서북쪽에 위치한 중국공산당의 여러 근거지중 모택동이 교시한 ‘문예강화(文藝講話)’ 현장이 그대로 보존돼있는 양가령(楊家嶺)을 돌아봤다.이밖에 연안시내 중심가에는 항일군정대학의 옛터가 보존돼있는데 이곳은 김산이 일본의 첩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숙청될 때까지 ‘일본경제사’를 강의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서안(중국) 박찬기자 parkchan@
  • 언론사 사장단 방북7박8일/ 김위원장 대화록-2

    ◆김 위원장 우리는 평화적 이용을 위해서 로켓을 개발 중에 있는데미국은 자꾸 자기들과 전쟁한다고 우리를 의심하고 있습니다.우리는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로켓을 연구하고 있습니다.로켓 한 발에 2∼3억달러가 들어가는데 미국이 우리 위성을 대신 쏴 주면 푸틴 대통령에게 우리가 개발을 안 하겠다고 얘기 했습니다.클린턴 정부가 얼마있으면 끝나는데 미국 새 정부가 들어서면 어떻게 할 지…. 과학기술과 첨단기술을 위해서 이런 얘기를 서로 웃으면서 그냥 웃는 얘기로 푸틴 대통령한테 한 것인데 푸틴 대통령이 아무 소리도 안하더니 내 얘기를 꽉 잡아 쥐고 그랬습니다. 농사 지어야 쌀을 먹는 것 아닙니까?로켓 연구해서 몇 억 달러씩 나오는데 그거 안 할 수 있습니까?위성 발사는 과학 목적으로 하는데 1년에 두세번 하면 한 9억 달러 들어갑니다.우리처럼 작은 나라에서 1년에 2발씩 쏘면 이건 비경제적입니다.수리남과 이란에 로켓을 판매하고 있습니다.로켓을 개발해서 대륙간 탄도탄을 만들어 2,3 발로 미국을 공격하면 우리가 미국을 이깁니까?그런데도 미국은 이것으로 트집을 잡고 있습니다.미국이 골머리 아프겠지.우리한테 돈 주기는 싫고,과학자 연구는 막아야 하겠고,골치 되게 아플 겁니다. ◆방북단 푸틴 대통령에 친서를 줘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달해 달라고 한 것으로 워싱턴 포스트인가에서 보도를 했는데…. ◆김 위원장 왜곡 과장된 것입니다.나는 푸틴 대통령에게 친서 전달한 바 없습니다. ◆김 위원장 로켓 개발 조상은 소련입니다.러시아가 로켓 원조 국가인데 미국이 NMD다 뭐다 해서 소련을 제쳐놓고 우리만 미사일을 개발한다고 합니다.이게 말이 됩니까?푸틴 대통령은 당연히 반대지요.푸틴이 서울 가게 돼 있는데,서울 가면 잘 물어보세요. 남측 언론이 나를 정신분열증 환자라고까지 했지요.미사일 문제는내가 만든 것입니다.나라가 작을수록 자존심을 굳게 세우고 열강 대국에 맞서야 합니다.북남 합쳐봤자 인구가 1억도 안 되는데 그럴수록명예를 중히 해야지요.대국에 비굴하거나 아첨하면 절대 안됩니다.남쪽의 경제 기술과 북쪽의 정신을 합작하면 강대국이 됩니다. 일본을이기고 36년간의 못 받은 보상도 받을 것은 받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큰 나라들을 찾아 다니나요.내가 평양에 앉아 있어도 여러 열강에서 나를 찾아 오지요. ◆김 위원장 노동당 규약도 고정 불변의 것은 아닙니다.언제든 바꿀수 있습니다.김 대통령이 북조선에 와서 ‘당 대회를 언제 하느냐’고 물어 ‘가을쯤 할 생각’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김 대통령이 ‘당 대회를 열면 할 일이 많겠습니다’라고 얘기해서 그렇다고 답변했습니다.그런데 준비했던 당 대회가 남북정세가 급히 바뀌어 모든 걸다시 준비하게 됐습니다. ◆방북단 규약을 개정한다면 남쪽의 보안법 개정과 연계시켜 정상회담 때 말씀하셨습니까?◆김 위원장 아닙니다.보안법은 남조선 문제입니다.과거에도 규약은고쳤으나 45년도에 만들어진 강령은 안 바꿨습니다.그런데 이 강령은해방 직후 40년대 것이어서 과격적·전투적 표현이 많이 있습니다. 당 간부들 가운데는 주석님과 함께 일하신 분들도 많고 연로한 분들도 많습니다.그래서 쉽게 바꿀 수 없습니다.강령을 바꾸면 이 자리에있는 많은 사람들도 숱하게 물러나게 됩니다.그래서 강령을 바꾸면내가 숙청한다고 그럴 것입니다.남조선 국가보안법은 그건 남조선 법이고,우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김 위원장 저마다 다들 간다고 야단입니다.남쪽에도 숨어있는 사람까지 치면 이산가족 숫자가 굉장할 것입니다.이곳에도 숨어있는 사람이 많았는데 위원장(본인)이 남쪽에 간다고 하니 이젠 너도나도 가겠다고 나타납니다.여러분들은 사장단으로 60명 정도 와서 오늘 이 자리에 우리는 30명을 참석시켰습니다.이것은 인구 비례로 한 것이오. 전금진 동지,와서 사장들한테 술을 권하시오.언론사가 잘 써 줘야지,상급회담 아무리 잘 해도 소용없어요. ◆전금진 잘 부탁합니다. ◆김 위원장 청탁하지 마시오.언론이 알아서 써야….이산가족 문제는준비없이 갑자기 하면,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비극적 역사로끝나거나 다른 방향으로 가 버릴 수 있습니다.우리는 50년 간 서로가지워 버릴 일이 있는 처지입니다.50년도에 6·25가 일어났고, 지워버릴 역사가 있습니다.너무 인간적이고 동포애만 가지고 강조하면 안됩니다. 올해는 9월,10월 매달 한 번씩 하고,내년에 종합 검토해서 사업을 해나갑시다. 내년에는 이산가족들이 집에까지 갈 수 있게 해 보겠습니다.
  • 남북 화해시대/ 金新朝목사의 벅찬 감회

    “이제야 통일의 새 아침을 맞게 됐습니다.” 지난 32년 동안 남모를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충남 예산 성락교회 김신조(金新朝·58)목사가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느끼는 감회는 남다르다.그는 지난 13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두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터질 듯한 감격에 부인 최정화(崔正化·55)씨를 얼싸안고 목놓아 울었다. “박정희 목아지 따러 왔쉐다.” 삭풍이 살을 에이던 지난 68년 1월21일 북한의 특수부대 124군단 소속으로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를 습격했던 ‘냉전시대의 전사(戰士)’.그는 이제 고향인 함북 청진에서 복음을 전하는 ‘통일시대의 목자’를꿈꾸고 있다. 68년 당시 김씨의 투항으로 청진에서 직업동맹위원장을 지낼 정도로 ‘독실한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처형당했다.인민군 소좌였던 매형을 비롯,6남매 가족과 공군 장성을 지낸 작은아버지 등 친척도 모두 숙청당해소식이 끊겼다. 70년 4월 삼부토건에 취직한 뒤 반공강연 등으로 살았지만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했다는 죄책감이 엄습할 때면 자녀들이 학교에서 ‘공비 자식’이라고 놀림받을 때면 술에 빠져들었다.그러다가 81년 아내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97년 1월에는 서울영등포구 신길동 성락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김씨는 “나는 전쟁의 불씨를 지고 남쪽에 왔던 사람”이라면서 “김정일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한다면 전쟁의 불씨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단언했다.또 김위원장이 서울에 온다면 북한의 변화도 훨씬 빨라질 것으로 내다봤다. 오랜만에 고향 말투를 들으니 반가웠다는 김씨는 “북한 사람들은 배가 고파도 내색을 하지 않을 만큼 자존심이 몹시 강하다”면서 “김위원장이 김대통령을 공항에서 직접 영접하는 것을 보고 진심으로 환영하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와서 과거를 따지는 것은 상처를 덧나게 할 뿐”이라면서 “서로를 이해하려면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충고했다. 친구들이 금강산 관광을 같이 가자고 했지만 행여 북측을 자극할까봐 사양했다는 김씨는 “이제 때가 된 것 같다”면서 “고향에 가서 나 때문에 고통받은 형제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부모님 묘소라도 찾아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전영우기자 ywchun@
  • 이도학교수 신간 ‘궁예 견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서 강조

    궁예는 패륜아가 아니다.그는 도탄에 빠진 백성에게 미륵불의 도래를 예고하며 현세에 이상향을 이루려고 한 급진 개혁주의자이다. 진훤(견훤)은 역사의 패자(敗者)다.그렇다고 해서 용렬하거나 무능하지는 않았다.그도 왕건처럼 연호를 사용했고 대왕을 칭했다.다만 승부에서 졌을 뿐이다. 왕건은 물론 한반도 재통일을 이룰만큼 걸출한 위인이다.그렇지만 그를 성인(聖人)처럼 미화한 것은 역사가 이긴 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백제 고대국가 연구’‘새로 쓰는 백제사’등 백제사 관련 역저들을 잇따라 발표해온 이도학교수(국립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재관리학과)가 이번에는 후삼국사를 정리했다.최근 발간한 역사교양서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시대’(김영사)가 그것. 후삼국시대는 우리 역사연구에서 가장 소외된 시기였다.그동안에는 통일신라의 종말 또는 고려의 탄생과 얽혀 부수적으로 언급될 뿐이었다.따라서 이교수의 이번 저서는,논문의 정밀한 틀을 벗어났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총체적으로 조망한 첫 역사서란 점에서 가치가 높다.게다가 TV드라마와 각종 소설류 발간으로 ‘왕건 붐’이 일어난 가운데 대중에게 그 시대의 진면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주목받을 만하다. 이교수는 후삼국 시기를 “우리나라 역사상 단연 박진감 넘치고 생기 가득찼던 시대”라고 꼽는다.그 까닭은 “천년왕국 신라를 지탱하던 골품제의 사슬이 끊겨 신분이나 혈통이 아닌 능력이 중시됐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따라서 “민족의 에너지와 개인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산한,그래서 궁예 진훤 왕건이라는 걸출한 영웅 3명이 역사의 전면에 선 시대”라고 강조한다. 이교수는 세 영웅의 삶의 궤적을 섞어짜가며 후삼국사를 재구성한다. 신라 왕자로 태어난 궁예는 승려로 떠돌며 민초들의 곤궁한 삶을 체험한다. 그는 지방호족들의 수탈로부터 농민해방을 선포했고 기존 불교의 폐해를 통렬하게 비판했다.그는 하층 농민들에게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궁예와자웅을 겨룬 진훤은 경북 문경의 농민 출신.군인의 길을 택한 그는 전남 순천만(灣)에서 근무하며 해적소탕에 발군의 공을 세워 기반을 닦았다.이 시기 그는 순천만을 통해 오가는 당나라 무역선,유학생·유학승에게서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운다. 한때 통일신라 영토의 3분지2를 차지한 궁예가 결국 왕건에게 쫓겨난 원인은 무엇일까?궁예는 처음 ‘고구려 부흥’을 내세웠으나 세력이 확대되자 백제와 신라계까지 포용하려고 했다.또 저항세력에게는 피의 숙청을 단행했는데 이같은 일들이 황해도와 경기도 북부의 옛 고구려 출신 호족들을 불안케 했다.이들이왕건을 중심으로 뭉쳐 반기를 들었다는 게 이교수의 해석이다. 이밖에 ▲왕건과 진훤이 황제(또는 대왕)를 칭했다▲통일신라는 알려진 것보다 통합이 덜 된 상태였다▲왕건은 신라에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등 새 주장이 많이 담겨 있다.아울러 이 시기와 관련한 갖가지 편견에 대해서도 예리한 칼날을 들이댔다. 딱딱한 논문 형식을 벗어나 때로는 소설처럼,역사기행처럼 자유롭게 풀어쓴이 글은 그러나 문헌과 고고학의 탄탄한 토대 위에서 서술됐다.지은이가 직접 찍어 수록한 현장사진들은 세련되지는 않되 그의 부지런함을 보여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이용원기자 ywyi@
  • 서대숙교수 특별인터뷰/ 내가 본 김정일 총비서

    남북분단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상호 관계개선을 통해 분단 현실을극복하고 민족 화합을 이뤄내는 일이다.현재 미국 하와이에 머물고 있는 서대숙(徐大肅) 미 하와이대 정치학 석좌교수는 17일 대한매일과 국제전화를통해 가진 인터뷰에서 “남북이 서로 정부를 인정하고 국교를 수립,경제 교류와 긴장 완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과거 냉전논리에 젖은 무조건적 비판이나 검증되지 않은 일방적 찬양은 모두 남북관계의 진정한 개선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성격과 인품은. 한국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개인적 성격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한두차례 만났다고 인품이나 성격을 제대로 알 수는 없다.여러가지 정황을 종합할 때 ‘괴팍하다’는 말도 있지만 ‘효자’로 평가받기도 한다.양쪽이 다 맞을 것이다. 지난 82년 제가 덩샤오핑(鄧小平)과 후야오방(胡耀邦) 등의 초대로 중국에갔을 때 통역자들이 그의 성격에 대해 ‘덩샤오핑이나 후야오방에 비해 굉장히 괴팍하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아버지 김일성 주석에 대한 효심은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한 이기적차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한국에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깊다. ■김정일 위원장의 성장배경과 지도자로서의 교육은. 아버지에 비해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한국전쟁이 일어난 8살때 만주로 피난가서 조선 혁명가 유자녀들이나 다른 빨치산의 아이들과 함께 혁명학원을 다녔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평양에 돌아온 그는 초등학교와 초급중학교에 이어 60년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는 등 정상적인 학교교육을 받았다. 또 64년 대학을 졸업한 뒤 곧바로 당에 들어가 10여년 동안 지도자 준비 과정을 철저하게 거쳤다. ■그동안 국내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대인관계를 기피하고 내성적 성격이라는말이 많았는데. 김정일 위원장이 우쭐한 자세로 별 달린 군복을 입은 사진은 찾아볼 수 없다.외국 손님이 북한을 방문할 때 화려하게 환대하거나 접대하는 일도 드물다.이를 두고 내성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나라를 이끌어 가는 처지에서자기가 해야 할 일에 주력하기때문이다.한국에서는 객관적인 입장으로 김정일 위원장이 무엇을 하려는지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아버지 김일성 주석과 다른 점을 꼽는다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은 지도자로서 완전히 구별된다.김일성 주석은항일 빨치산이었다. 어릴때부터 목숨을 걸고 항일 운동을 했다.중국사람들과도 같이 학교에 다니면서 가까이 지냈다.또 국내파,연안파 등 정적(政敵)을자기 손으로 한사람,한사람 숙청하고 나라를 세웠다. 김정일 위원장은 정반대다.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바로 당에 들어갔다. 군복무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군에 입대하지도 않았고,정규군의 훈련을 받은일도 없다. 아버지가 만든 국가를 인계 받았을 뿐,누구를 숙청한 경험도 없다.대신 연극 연출이나 영화 제작 등 예술계통에 관심이 높다. ■김정일 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공인받기까지 정치적 카리스마를스스로 획득했는가. 그렇다고 본다.왜냐하면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 74년부터다.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기까지 20년 동안 후계자 학습을 받은것이다. 김일성 주석에게 지도를 받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겪었다.예를 들면 70년대 후계준비 사업인 3대혁명소조운동은 초창기 실패를 거쳤다.그러나 후계준비 작업이 끝날 무렵인 79년12월에는 ‘김일성 훈장’ 제1호를 받는 등 어느정도 인정을 받았다. 김정일 위원장은 또 당내 2인자로 등장한 80년 이후 91년 12월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될 때까지 11년 남짓 지도자로서 자질을 닦았다.이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직후 자기의 확고한 카리스마를정립할 수 있었다. 정치지도자로서 아버지보다 더 배짱이 있다는 평가도 있다. 국가 주석직을차지하지 않고도 북한을 다스리고 있다.중국 공산당 당수였던 마오쩌둥(毛澤東)이 국가 주석을 맡지 않고도 대륙의 최고 지도자 역할을 한 것과 비슷하다. ■지난 98년 8월 김정일 위원장이 미사일 발사를 강행한 이유는. 김정일 위원장으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본다.어느 나라든 자기 나라의처지에서 생각해야 한다. 소련이 붕괴되고 중국이 개방으로 나서고 미국·일본과 관계개선도 제대로 안되니 생존방법으로서는 핵무기와 핵무기를 운반하기 위한 미사일을 만드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은 리더십을 어떻게 발휘하는지. 실례를 들면 70,80년대부터 줄곧 현장시찰을 많이 해왔다. 군 시찰이 특히잦다.선군(先軍)정치를 해야 강성대국으로 번성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기때문이다.군수공장을 자주 둘러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그는 무엇을 해야할지 알고 있고,지도력도 제대로 발휘하고 있다고 본다. ■김정일 위원장의 예술적 식견은 어떤가. 높은 편이다.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에서 일하면서 여러가지 영화제작을 지도했다.특히 69년에 발표된 ‘피바다’,70년의 ‘어느 자위단원의 운명’,72년의 ‘꽃파는 처녀’ 등은 굉장한 인기를 얻었다.아버지의 빨치산 운동때 얘기를 토대로 극본을 만들었는데,김일성 주석도 감동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정일 위원장이 서양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자기 작품과 비교·연구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평양의개선문이나 주체탑도 그가 만들었다. ■서방세계의 문물에 대한 이해나 수용 정도는. 평양에서 당 간부들을 만나 얘기를 해보면 한국은 물론 서방세계에서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김정일 위원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평양에서는 1주일에 한차례씩 당 간부를 대상으로 ‘평양순보’가 발행되는데 국제뉴스가 빠짐없이 실려 있다. 북한을 ‘봉쇄된 나라’,‘아무 것도 모르는 나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북한주민의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인식은. ‘좋다’는 생각과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절반 정도씩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천재(天災)가 오면 임금이 천운을 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여겼다.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로 나서자 홍수,가뭄등 자연재해가 닥쳤다.때문에 주민들이 잘못 인식하는 점도 있다. 그러나 금년부터 이탈리아와 국교를 맺고 중국,소련,필리핀,캐나다 등과 관계 개선에 나서는 등 김정일 위원장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오는 6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간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를전망하면. 낙관적으로 본다.회담이 좋게 발전할 것이다. 두 정상의 만남 자체도 남북 화해라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지만,악수만 하고헤어지진 않을 것이다. 북한에서 볼 때 김대중 대통령은 이승만(李承晩) 이후 자기들에게 가장 가까이 생각되는 대통령이다.북한으로서도 민족화합을 생각한다면 지금이 가장좋은 기회인 것이다. 한국이 북한에 혜택을 주는 것이 있다면 북한도 한국 대표단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것이다.예를 들면 휴전선 일대 지뢰를 제거한다든지,동·서해안의 해상경계선을 합의하기 위한 위원회를 만든다든지,긴장완화를 위한 대표부를 세운다든지,여러가지 가시적인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국은 ‘북한이 돈이 없어 일방적으로 손을 내밀려 할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북한은 차라리 굶더라도 자존심은 지키려 한다. ■김정일 위원장의 경제관은. 과거 김일성 주석은 ‘200일 전투’,‘생산고지 점령’ 등의 구호로 국가계획경제를 추진했다.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은 완전히 다르다. 아버지 세대처럼 성장과정에서 큰고생을 하지 않았다.또 노동력 동원 등 국가계획경제 개념과 달리 첨단기술을 확보하고 컴퓨터를 활용하는 등 새로운 경제개발 방식에 눈을 돌리고 있다.앞으로 많은 변화가 올 것이다. 기동취재소팀 박찬구기자 ckpark@. ◆ 서대숙교수 프로필. 서대숙(徐大肅·69) 미 하와이대 정치학 석좌교수는 30년 남짓 북한을 연구한 세계적인 북한문제 전문가이다. 올 들어 북한연구 전문기관인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소장과 북한대학원 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70년대 이후 여러차례 방북,핵심권력층과 정책토론을 벌이는 등 북한연구에 독보적 영역을 구축해 왔다. 지난 4월 발간한 ‘현대북한의 지도자-김일성과 김정일’이란 저서는 김정일국방위원장의 권력승계 과정과 ‘김정일 체제’의 특징, 향후 과제 등을 잘분석해 요즘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주요 독서파일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 [시베리아 대탐방](7)블라디보스토크 국립 극동대 한국학대학

    [블라디보스토크 특별취재반] 외국에 한국관련 학과들만 모은 단과대학이있을까.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한국학 단과대학이 바로 냉전시대 우리의 오랜 적대국이었던 러시아,그것도 군항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립 극동대에 있다는 점은 아주 흥미롭다. 지난해 11월 23일 취재팀은 극동대 한국학 대학을 방문했다.한국학대학은극동대의 서쪽 끝에 자리잡고 있었다.빅토르 코제미아코 부학장이 유창한 우리말로 취재팀을 반겼다.그는 자신이 이 대학 출신이며 춘천 한림대에 교환교수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고 소개했다.95년에는 북한을 방문,평양과 원산,남포,나진,금강산도 다녀왔다고 밝혔다. 러시아 극동대와 한국학의 인연은 1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899년 극동대 동양대 한국어학과로 출발했으나 30년대 스탈린의 소수민족 억압정책으로 동양대학은 폐쇄되고 직원 일부는 숙청됐다.75년 한국어학과가 다시 생겨나 5명의 학생을 모집했다.부학장도 이 때 입학했다.이후 94년 한국어문학과와 한국역사학과,한국경제학과 등 3개학과로 지금의 틀을 갖춘한국학부가발족했고 95년에는 한국학대로 이름을 바꿨다. 한국학대학에는 현재 250명이 수학하고 있으며 매년 50∼60명의 신입생을뽑는다.어학실습실에는 한국 위성TV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고 단과대 부설 도서관에는 7,000여권의 한국어 교재가 잘 정리돼 있었다.하바로브스크나 사할린의 사범대학에서 채택하고 있는 한국어 교재도 바로 이곳 극동대 한국학대학에서 만든 것이다. 한국학대학에는 태권도 전용 연습장도 설치돼 있다.경희대 출신의 한국인사범이 대학원생으로 공부하면서 태권도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또 한국 전통춤 동아리에도 50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인터넷실은 특히 눈에 들어왔다.러시아에서 이처럼 인터넷을 자유롭게 쓸수 있는 곳이 몇군데 되지 않기때문이다.학생들은 삼성전자에서 기증한 PC로한국의 주요 웹사이트를 넘나들며 한국어 실력과 한국에 대한 지식을 쌓고있었다.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친 로만 메신그씨도 2년전에 이 대학 한국경제학과를졸업,학교를 떠났지만 바로 이 인터넷 때문에 학교에드나들고 있었다.그는98년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장학금을 받고 고려대 어학당에서 6개월 공부한 뒤다시 6개월 동안 서울의 러시아전문 바이칼 여행사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우리말을 스승인 부학장보다 잘하는 듯 보였다. 한국학대학의 또 다른 특징은 학생들에게 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도 밀도있게 가르친다는 것이다.이 때문에 학생들은 졸업후 영어통역으로도 활동할수 있을 정도다. 부학장은 “학생들이 졸업한 뒤 봉급수준이 낮은 교수가 되기보다는 한국등 외국의 회사나 외교공관에 취직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그러나 “한국기업들이 IMF사태를 겪으면서 러시아내 지사를 속속 철수하고 있어 학생들의진로가 다소 걱정이 된다”고 덧붙였다. 한국학대학의 교수진은 모두 20명.이 가운데 경기대 김정오 교수 등 3명은한국에서 온 교환교수다.부학장은 그러나 “한국교수들이 이쪽으로 더 많이파견왔으면 한다”며 “회화를 가르칠 수 있는 3명 정도의 한국인 교수가 더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라고 말했다. 현재 극동대 한국학대학은 두가지 장기 과제를추진하고 있다.한국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한국어 관련 자료를 수집,보관,열람할 수 있는조직인 ‘한국어 은행’의 설치를 추진중이다. 영국 옥스포드대학의 ‘뱅크오브 잉글리쉬(Bank of English)’를 모델로 삼고 있다.이와함께 ‘한국 현대사 연구소’의 설립도 검토중이다.아울러 이 대학 교수들은 이미 한국어-한자-영어-러시아어 등 4개국어를 동시에 찾아볼 수 있는 ‘전자 사전’편찬작업에 들어가 이미 상당부분 완성했다. 부학장은 “블라디보스토크는 한국학을 연구하기 가장 좋은 지리적 이점을갖고 있다”며 한국인들이 이 대학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져줄 것을 부탁했다. ◆국제팀 김규환기자 ◆정치팀 이도운기자 ◆사진팀 유재림 오정식차장,김명국기자 oosing@. * 우수리스크 극동 최대 고려인촌. [우수리스크 특별취재반] 우수리스크는 극동지역에서도 고려인(까레이스키·한국출신 러시아인)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이다.약 1만3,000명의 고려인이거주하고 있다. 우수리스크에 고려인이 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생활고를 겪던 한반도 북부의 주민들이 1862년부터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리 춥지 않아 농사 짓기도 괜찮은데다 중국과 가까워 장사하기도 좋았기때문이다. 지금도 한국의 주택협회와 새마을운동중앙본부,고합그룹이 인근에 농장을 갖고 있다. 현재 우수리스크의 고려인은 중앙아시아 출신이 95%,사할린 출신이 5%다.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마을도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사라졌다가 7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복구됐다. 우수리스크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의 이 로베르트 아나톨리비예치 회장은 “스탈린 시대의 잔재가 남아 있어서 인지 예전에는 고려인임을 나타내기를 싫어했다”며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야 고려인 단체가 생겨났다”고 말했다. 모국을 잊어버릴만한 세월이 흘렀지만 이들은 아직도 모국의 끈을 놓지 않고있다. 한글학교를 세워 고려인 3,4세들에게 한글과 한국말을 가르치고 있다. 추석과 설날 같은 명절도 꼭 지킨다. 한글학교 김문자 부회장은 “명절 전날 가족들이 모여 유쾌하게 어울리지만젊은이들은 잘 모이지 않는다”며 “이들은 조국을 다 잊어버렸다”고 안타까워했다. 우수리스크에는 또 연해주재생기금이란 고려인단체도 있다.고합그룹이 후원하는 이 단체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이주를 돕고 있다.요즘도 중앙아시아고려인 3,000여명이 여름내 이곳 농장에서 농사를 짓다가 겨울에 돌아가곤한다.북한인들도 연해주재생기금의 초청을 받아 외화벌이에 나서고 있다. 취재팀은 평양출신 북한 외화벌이꾼 신상현(40)씨와 려국현(36)씨를 만났다. 신씨는 “지난 5월 10명이 입국해 두명은 여기서,나머지는 이곳 산하 농장서일하고 있다”며 “1만달러를 벌러 왔는데 잘 안된다”고 걱정했다. 그들은 취재진과의 대화나 사진촬영에도 자연스레 응했다.하지만 “아무뜻없이 점심식사나 대접하겠다”는 취재팀의 제의에는 “할 일이 많다”며 황망히 자리를 떴다.
  • [사설] ‘신당 창당 논의’

    한나라당의 공천 후유증이 당 고문급 중진들의 공천 반납, 탈당 등 내분을넘어 신당 창당 움직임으로 확대되고 있다.‘기습 낙천’에 반발하고 있는김윤환(金潤煥)·이기택(李基澤)고문과 신상우(辛相佑)국회부의장은 역시 이회창(李會昌)총재의 공천 전횡(專橫)에 반발해서 공천을 반납한 조순(趙淳)명예총재와 20일 긴급 회동을 갖고 이번주 안에 탈당을 해서 신당을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다.이 총재가 차기 대권에 집착해서 ‘공천’이 아닌 ‘사천(私薦)’의 칼을 휘둘러 당을 ‘이회창당’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국민들이 보기에도 이번 한나라당의 공천내용은 헷갈리게 하는 측면이있다. 정치개혁을 열망하는 국민들의 뜻에 따라 구 시대 정치인들을 대거 탈락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이 총재가 시민단체들의 ‘거부감’을 정략적으로 이용해서 당내 반대자들을 숙청한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한나라당이 낙천자들의 반발을 줄이기 위해 일부 후속 조처를 고려하고 있고 민주당과 자민련도한나라당 낙천자들에게 손짓을 하고 있는지라 선거일이 불과 50일밖에 남지않은 시점에서 이들이 새 정당을 꾸릴 수 있을지는 두고볼 일이다. 신당 창당의 실현 가능성 여부를 떠난 또다른 차원에서 국민들은 새 정당창당 논의를 우려의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또 하나의 ‘영남당’이 나오는게 아니냐는 것이다. 창당 인사들이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과의 제휴를 거론하는 자세를 보면 신당 창당이 영남의 지역 정서에 기대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권을 영남으로 되찾아오기 위해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한 나라의 정권이 특정 지역의 전유물이란 말인가.국민들로서는 심한 모욕감을 떨치기 어렵다. 신당 추진 인사들도 그러한 국민들의 시선을 의식했음인지 ‘전국 정당’을표방하고 있다. 그리고 김용환(金龍煥)·이수성(李壽成)·장기표(張基杓)·김상현(金相賢)·박찬종(朴燦鍾)씨 등이 신당 창당에 호응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새 정당의 정체성에 관련해서 국민들의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새로운정당을 창당하려면 정치이념이나 정강·정책에서 기존 정당들과 차별성이 있어야 한다.각 정당의 낙천자들과 정치권 소외 인사들을 끌어모아 ‘반(反)DJ’ ‘반(反)이회창’을 주장해봐야 국민의 호응을 받기 어렵다.여야 공천 전반에 반발해서 시민단체들이 공천 철회 또는 낙선운동을 선언하고 있는 마당에 불거져나온 신당 창당 논의는 총선 국면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그러나 신당 논의는 어차피 국민들과는 상관이 없다.그러므로 국민들로서는 결국 당락을 결정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된다.
  • [이란 오늘 총선] 개혁 드라이브냐 후퇴냐 기로에

    18일 실시되는 이란 총선은 가파르게 고조돼온 이나라 내부의 개혁 열망이본격적 분출구를 얻느냐,그대로 주저앉느냐의 분수령이 된다는 점에서 지구촌 이목을 끌고 있다. 지난 97년 선거혁명을 일으키며 당선된 모하메드 하타미 대통령의 개혁 드라이브는 권력 정점에 도사린 수구파들의 저항이란 벽에 부딛쳐 삐걱거려왔다.때문에 총선 결과에 따라 이란 개혁은 결정적 날개를 달 수도,어렵사리쌓아온 지분조차 잠식당하는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는 형편이다. 정부에 대한 보수파 입김이 이토록 거센데는 이란의 독특한 권력구조에서요인을 찾아볼 수 있다.79년 2,500년 왕정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호메이니는종교가 현대적 통치원리에 앞서는 일종의 신권정치 시스템을 도입했다.이에따라 대통령이 아닌 이슬람교 지도자가 이란 최고지도자로 군부,사법부,입법부 등을 장악하게 돼 있다.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 단순히 경제·치안을 관장할 뿐이다. 하지만 반미,독자노선의 이슬람혁명 정신은 89년 호메이니 사후 갈수록 부패와 관성,권력 유지를 위한 무리수등으로 얼룩져갔다.호메이니를 계승한아야툴라 하메네이는 언론탄압,무자비한 정적 숙청,여성 등 소외계층에 대한차별정책 등으로 호메이니가 물려준 정당성을 갉아먹었다. 무엇보다 대서방폐쇄정책이 지속되면서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 언저리를 헤매는 경제피폐상이 지속됐다. 97년 대선에서 하타미에게 쏟아진 70% 이상의 몰표는 독점적 세습권력에 물린 국민들의 변화 욕구가 어느 정도인지를 읽게 했다.하타미는 국민지지를등에 업고 과감한 개혁정책을 펴나갔다.이탈리아,프랑스 순방,미국과의 스포츠 외교 등으로 서방세계로의 빗장을 풀어헤쳤고 대내적으로는 언론자유,여권 및 시민권의 신장 등을 추진,봄바람을 몰아왔다. ‘문명간의 화해’,‘이슬람 시민공화국’으로 요약되는 하타미의 이같은개혁 지향은 최종적으로 기득권층 내부를 겨냥하지 않을 수 없는 셈이었다. 결국 이는 종교권력 정점으로부터의 반발을 불렀다.지난 3년간 이란 정정은하메네이와 하타미의 대립구도 아래 개혁을 지지하는 학생 시위와 이를 상쇄하려는 관제시위의 맞불양상이 되풀이됐다. 의회에서 야당에 머물러온 개혁파에게 이번 총선은 따라서 결코 놓쳐서는안될 교두보인 셈이다.국민의 지지가 유일한 권력기반인 이들에게 총선은 그정당성에 대한 심판대나 다름없다. 전문가들은 대체적으로 개혁파의 우세를 점치고 있다.인구구성으로만 봐도6,000만 이란 인구의 절반 이상이 25세 미만 젊은층인데다 여성 및 지식인들까지 포함하면 지지기반이 97년 대선 당시의 70%를 넘어선다는 게 하타미 진영의 주장이다. 문제는 이것이 국회내 지분으로 그대로 연결되느냐는 점.전문가들은 하타미노선을 추종하는 정파들의 결집체인 ‘개혁파 참여전선’이 절대과반수를 얻어야만 개혁추진을 위한 최소한의 추진력을 얻을 것이라고 분석한다.단순 제1당에 그쳐 중도파 등과 연립해야 할 상황이라면 오히려 정국 불안을 가속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하메네이 진영에서 의회 위에 버티고 선 초법적 ‘혁명수호위원회’ 등을 동원,내부분열을 획책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손정숙기자 jssohn@. * 개혁·보수 양대세력 총력전. 18일의 이란 총선은 79년 이란공화국 수립 이래 여섯번째.293명의 마즐리스(의회) 의석을 놓고 6,000여명의 후보자가 난립했다.향후 개혁 정국의 강도와 향방을 좌우할 점화력을 의식,개혁·보수 양대세력은 일제히 진용을 재정비,총력전에 나서고 있다. 하타미 대통령을 주축으로 한 개혁파들은 ‘개혁파 참여전선’ 아래 집결했다.18개 정당 및 사회단체가 참여,절대 과반수를 향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지도자인 모하마드 레자 이슬람참여당 당수는 하타미의 친동생. 현재 의회내 다수파인 보수세력은 제1당인 무장성직자협회를 중심으로 ‘호메이니 추종자들’이라는 보수연합을 결성했다.개혁파의 약진에 위기를 느낀이들은 기득권을 총동원,치열한 수성 전략을 펴고 있다. 후보로 나서기 위해서는 ‘혁명수호위원회’의 자격심사를 통과해야 하는데이 기구는 사실상 하메네이의 ‘친위부대’격. 이번에도 보수파는 위원회를바람막이삼아 669여명의 개혁성향 후보들을 사전에 걸러냈다.또한 신문들을폐간하고 압둘라 누리 전 내무장관 등 친하타미 성향의 인기정치인을 구속하는 등 공권력을 휘두르고 있다.중도파인 라프산자니 전대통령을 차기 국회의장감으로 영입,개혁바람에 물타기를 시도하는 카드도 꺼내놓았다. 개혁파의 우세가 점쳐지고 있긴 하지만 압승이냐 신승이냐 여부,무소속의점유비율,종교세력의 승복 여부에 따라 향후 정국은 다양한 합종연횡이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손정숙기자
  • [의열 독립투쟁](18)김상옥 의사

    1923년 1월 12일 저녁 8시.서울시내 한복판인 종로 네거리에 있던 종로경찰서(현 제일은행 본점자리)에 폭탄이 날아들어 일경과 신문기자 등 수 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당시 종로경찰서는 조선인 탄압의 대표적 기관으로 이곳에 폭탄을 던진다는 것은 엄두도 낼수 없는 일이었다.사건직후 일경은 총동원령을 내려 범인검거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사건 발생 10일만에 일경은 겨우 단서를 잡고 범인검거에 나섰는데 검거과정에서 일경측은 간부 등 수 명이 목숨을 잃었고 범인은 자결로 최후를 장식하였다.일제통치의 심장부에 폭탄을 던진 범인은 당시 33세의 조선인 청년김상옥이었다. 김상옥(金相玉) 의사는 1890년 1월 5일 서울 어의동(현 효제동)에서 태어났다.본관은 김해,구한말 군관을 지낸 김귀현(金貴鉉)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태어난 김 의사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14세때부터 낮에는 대장간에서 말 발굽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가사를 도왔다.러일전쟁후 동대문교회에 나가 기독교에 입교한 김 의사는 1906년 동대문 교회안의 신군(信軍)야학교를 다니며뒤늦게 주경야독하며 시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후 어의동 보통학교를 다니면서도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며 배움의 의지를 불태운 김 의사는 20세 되던 해인 1909년 직접 동흥야학교를 세워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고,이곳에서 손정도,이종소,임용호 등을 만나 시국을 토로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갔다.1912년 김 의사는 동대문밖 창신동에 영덕철물상회를 설립,경영하였다.철물상회는 날로 번창하였으나 김 의사는 망국민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특히 삼남지방의 장터를 다니면서 약을 팔고 기독교를 전도하면서 일제의 조선침략상을 더욱 뼈저리게 체험하게 되었다. 1919년 3·1의거가 발발하자 4월 1일 동대문교회내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서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혁신공보’를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전파했다.김 의사는 이 해 12월 암살단을 조직하여 일본고관 및 친일파에 대한응징과 숙청을 기도했고 이듬해 4월에는 광복단 결사대의 한훈,유장렬 등과함께 전라도 지방에서 친일파수 명을 총살하고 오성 헌병대분소를 습격,장총 3정과 군도 1개를 탈취하였다.김의사는 이 해 8월 미국의원단 일행이 동양 각 국을 시찰하는 길에 내한한다는 소식에 접하고 5월부터 미국의원단 환영행사에 참석하는 사이토 총독을 암살키로 하였다.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일경에 탐지되어 함께 거사를 모의했던 동지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한편 상하이로 건너간 김 의사는 의열단에 입단,1921년 7월 국내로 들어와충청도·전라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한 후 다시 상하이로 돌아갔다.김 의사는 1923년 1월 조선총독이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로 가는 기회를 이용하여 또다시 총독을 처단키로 하였다.권총 4정과 실탄 수 백발,대형폭탄을 가지고 농부차림으로 변장한 김 의사는 야음을 틈타 압록강철교를 건너 국내 잠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상하이주재 일본영사관의 통보로 조선총독부에서 엄중한 경계를 편 데다 상하이로부터 들여온 무기를 보관하고 있던 한우석 동지가 일경에 체포되면서 거사는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그러던 중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 투탄사건이 발생했다.이 사건으로 종로경찰서 건물 일부가 파괴되고,행인 7명이 크게 다쳤다. 거사후 김 의사는 삼판동(현 후암동)에 있는 매형(고봉근)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집요한 추적을 벌이던 일경은 폭탄 투척 후 5일만인 1월 17일 새벽김 의사의 은신처를 급습하였다.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 경부(警部)의 지휘 아래 20여명의 무장 일경들이 집을 포위한 가운데 총격전이 벌어졌는데이 과정에서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다무라가 사살되고 이마세,우메다 경부 등 수명이 중상을 입었다.일경의 포위망을 뚫고 나와 남산을 가로질러 장충동쪽으로 은신한 김 의사는 왕십리의 안장사(安藏寺)에 이르러 승복으로 변장한 후 일경을 기만하기 위해 짚신을 거꾸로 신고 산을 내려왔다.무내미(현수유리) 이모집을 거쳐 19일 새벽 일경의 경계망을 피해 혁신단 동지인 효제동 73번지 이혜수(李惠受·여)의 집에 은신,동상을 치료하는 한편 앞으로의거사를 구상하였다.그러나 거사 10일만인 1월 22일 새벽 이곳 은신처도 일경에발각되고 말았다.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의 지휘 아래 시내 4개 경찰서의 기마대와 무장경찰 수 백명이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한채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집안으로들이닥쳤다.이후 3시간 반에 걸친 총격전 끝에 일경 10여 명을 살상한 김 의사는 오른쪽 넓적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인근집 화장실로 피신하였다가 단한 발 남은 탄환으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는 33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였다.가족들이 김 의사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확인한 총상은 무려 열 한 군데였다고 한다.김 의사는 1남 1녀를 두었으나 장남은 해방전에 요절하였고 조카 태운(泰運·72·경기도 수원 거주)씨가 양자로 입적돼있다. 이명화 독립기념관 연구원 * '의열 독립투쟁' 연재를 마치며지난 8월부터 시작된 본 연재는 이번 회로 막을 내린다.8월 13일자 ‘매국노의 상징’ 이완용을 응징한 이재명 의사를 시작으로 그간 의·열사 열여덟 분의 위국헌신(爲國獻身)의 삶을 되새겨 보았다.일황을 처단하려 했던 이봉창·박열·김지섭 의사,조선총독 사이토를 처단하려 했던 강우규·송학선 의사,일제 침략자를 처단(모의 포함)한 안중근·윤봉길·백정기·전명운·장인환·조명하 의사,일제 침략기관에 폭탄을 던진 김익상·장진홍·김상옥·곽재기·박재혁·나석주 의사,친일파를 처단한 이재명 의사,그리고 의열단원으로 일곱 차례나 일경에 붙잡혀 16년동안 감옥생활을 한 김시현 의사 등등.우리 항일투쟁사에서 찬란한 공적을 남긴 의·열사는 이 분들 외에도 무수히많다.그 분들에 대해서는 후일을 기약키로 한다. 연재를 마치면서 한 가지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은 이 분들의 후손들의 삶이다.연재 중 확인결과 대부분의 후손들은 그동안의 소문대로 생활형편이 여유롭지 못했다.대개의 경우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특히 몇몇 후손들의 경우 현행 관계법의 문제로 인해 연금수혜조차 받지 못하고 있어안타까움을 더했다.최근 이들 가운데 일부는 선대가 받은 건국훈장을 당국에 반납,사회적 논란을 야기시킨 바 있다.관계당국은 그들을 외면만 할 것이아니라 관계법령을 개정해서라도 대책마련에 나서야 할 것이다. 조국광복을 위해 일신을 초개와 같이 국가에 바친 의·열사들의 애국적 삶은 한민족과 더불어 유방백세(遺芳百世)할 것이다. 정운현기자 jwh59@
  • 20세기 한국 대표 춤꾼과 춤은?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춤꾼과 춤은?최근 나온 춤전문지 ‘몸’12월호가 평론가 9명의 의견을 모아 해답을 내놓았다.무용가는 한성준 최승희 임성남 육완순 김매자 홍신자 등 6명,작품은‘승무’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제례’ ‘살풀이’연작,‘춤본’,창작발레 ‘심청’등 6편이 선정됐다. 6표를 얻은 한성준(1874∼1942)최승희(1911∼?)는 우리 무용의 개척자들.한성준은 전통춤을 집대성하고 무대화해 중요무형문화재만도 27호 ‘승무’,40호 ‘학무’,92호 ‘태평무’,97호 ‘살풀이’등을 남겼다.국내에 신무용을소개한 최승희는 미국 유럽 남미 아시아를 누비며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수.6·25직후 월북해 훗날 숙청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나머지 4명은 생존인물들로 나란히 5표를 얻었다.임성남(전 국립발레단장)은 ‘한국발레의 살아 있는 역사’로 불리는 발레리노.마사 그레이엄의 제자인육완순(한국현대무용진흥회 이사장)은 이땅에 미국 현대무용을 도입했다. 김매자(창무예술원 이사장)는 한국 창작무용계를 이끈 공로로,‘전위무용가’홍신자는 전위무용 시대를 연 공을 각각 인정받았다. 이매방(무형문화재 ‘승무’와 ‘살풀이춤’보유자)강수진(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 수석무용수)은 4표에 그쳐 ‘베스트6’에는 들지 못했다.특히 강수진은 “역사적 평가를 하기엔 아직 어리다”는 일부 평론가들때문에 득표에손해를 보았다. 최고작품 6편은 모두 5표씩 얻었다.‘승무’(한성준 정리)는 전통춤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히며,‘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육완순 안무)는 록뮤지컬을 무용화한 것으로 지난 73년 초연이래 200회가 넘는 공연기록을 자랑한다.‘제례’는 홍신자의 서울무대 데뷔작으로 73년 그때 뜨거운 ‘전위 논쟁’을 불러일으켰다.‘살풀이’연작(이정희 안무)은 ‘80년 광주’를 모티브로 해 그해 첫 작품이 나왔으며 이후 정치·사회상을 반영한 시리즈가 9회까지 계속됐다.‘춤본’은 김매자의 대표작.유니버설발레단의 고정 레퍼토리 ‘심청’(에드리언 델라스 안무)은 우리 정서를 세계화한 대표사례로 평가됐다. 선정에 참여한 평론가는 김영태 채희완 김태원 김채현 김말복이종호 문애령성기숙 박성혜로, 이들은 후보자(작)없이 각자 자유로이 10명(편)안팎을 추천했다. 이용원기자 ywyi@
  • [의열 독립투쟁](12)나석주 의사

    1926년 12월28일 오후 2시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한 조선 청년이 조선식산은행(남대문로 2가)과 동양척식회사(을지로 2가)에 폭탄을 던지고 일경과 동양척식회사 직원 등 7명을 살상시킨 사건이 일어났다.공격 대상이 토지를 장악하여 농민들의 원성이 집중되던 일제의 기관이었으니 조선인들로선 그야말로 응어리진 민족의 한을 씻어주는 쾌거였다.이 거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격정의 장을 펼쳐낸 장면이었는데 그 주인공은 바로 나석주(羅錫疇·1892∼1926) 의사였다. 황해도 재령 태생인 나 의사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11세에 이문성(李文成)과 결혼하였다.15세에 고향 마을의 보명학교(普明學校)에 입학해신학문을 배우고,안악으로 가서 백범 김구 선생이 설립한 양산학교(養山學校)를 다녔다.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나 의사를‘제자이자 동지’라고 표현하였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이 강탈당하자 나 의사는 국권회복에 신명을 바치고자맹세하고 1913년 21세때 1차 망명길에 올랐다.만주로 건너간 그는 북간도를거쳐 이동휘(李東輝)가 개설한 나자구(羅子溝)의 무관학교에 입학,군 간부로 성장하였다.1915년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서는 국내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면서 아이들을 교육하였다.1917년에는 동양척식회사 사리원지점에 농토를 전부 몰수당한 그는 결국 소작농으로 몰락하고 말았다.훗날 동양척식회사를 응징하게 된 것은 이 일이 한 계기가 됐다.3·1의거가 일어나자 그는 겸이포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고 미곡상점도 문을 닫게 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황해도 사리원으로 옮겨 표면적으로는 정미소를 경영하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동지를 모으고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1920년 김덕영(金德永) 최호준(崔皓俊) 최세욱(崔世郁) 박정손(朴正孫) 이시태(李時泰)등과 의열투쟁 조직을 결성하고 군자금 모금과 친일파 숙청을 계획하였다.사리원의 부호 최병항(崔秉恒),안악의 부호 원형로(元炯潞)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받아 상해의 임시정부로 송금하기도 했다.일경 1명과 악질 친일파인 은율군수를 처단한 후 일경에 쫓기던 그는 마침내 독립운동의 새 돌파구마련을 위해 중국으로 제2차 망명길에 올랐다.상해로 간 나 의사는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국장으로 활약하고 있던 백범 김구 밑에서 경무국 소속 경호원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와 동포사회에 파고 드는 밀정을 찾아내 박멸하고 정부요인들을 경호하는 임무를 맡았다.특히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의 경찰과 첩보전을 펼치고 있던 상황이기에 나 의사가 소속된 경무국 경호원들은 정보수집과경찰의 임무를 함께 수행하고 있었다. 한편 1920년대 후반 들어 김구·여운형(呂運亨) 등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였다.이는 ‘독립은 전쟁을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군사 양성과 전쟁비용 마련을 위해 1922년 10월 조직한 것이 한국노병회다.정부가 군대를 유지할 능력을 갖지 못하니 한 사람이라도 군사훈련을받아 군사요원이 되고 또 노동자가 돼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으로서 출전하는 계획이었다.즉 한 사람이‘노동자’요‘병사’가 되는 것이다. 한국노병회는 군간부 양성을 위해 요원을 중국의 각 군사학교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나 의사는 첫 요원으로 파견된 1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1923년 초 한단(邯鄲)군사강습소에 입교,사관훈련을 받고 이듬해 중국군 초급장교로 임관되어 중대장으로 복무하다가 1925년 상해로 돌아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25년부터 그는 국내 침투를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세가지구도 위에 전개되고 있었다.임시정부와 한국노병회를 대표해 김구,제2차 유림단의거를 진행하고 있던 김창숙(金昌淑),그리고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金元鳳)이라는 세 세력의 협조에 의해 나 의사를 비롯한 요원들이 국내로 잠입해 의열투쟁을 벌이는 투쟁이었다.즉 김구가 키운 군사 간부로서,김창숙이 국내 유림에게서 모금한 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여 의열단원으로서 국내로침투하는 것이다.목표는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1925년 중국인으로부터 배 한 척을 구입하여 국내로 잠입하고자 하였다.그 과정을 보여주는 나 의사의 서신(금년 6월 대한매일신보사에서 발간한 ‘백범 김구전집’ 4권에 실림)을 보면 그가 천진에서 이승춘(李承春) 한봉근(韓鳳根)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국내 침투용 선박 구입자금을 준비하는 내용을 알 수 있다.그러나 계획이 연기되다가 끝내 자금 부족으로 계획을변경할 수밖에 없던 사정도 이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초의 계획은 수정되고,실행은 1926년으로 연기되었다.마침 1926년(병인년) 1월1일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가 조직됐다.병인의용대는 한국노병회가 정체현상을 보이자 의열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나 의사는 여기에 가입한 후 국내 침투계획을 재추진,1926년 12월26일 단독으로여객선 이통환(利通丸)을 타고 인천에 도착하였다.마중덕(馬中德)이란 중국인 노동자로 위장한 나 의사는 권총과 폭탄을 갖고 들어왔다. 이틀 뒤인 12월28일 오후 2시쯤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행하게도 불발이었다.곧바로 인근 동양척식회사로 이동한 나 의사는 일본 경찰과동양척식회사 직원 등 3명을 사살하고 4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과정에서 다시 폭탄을 던졌으나 이것마저 불발이었다.거사 준비과정이 너무길다보니 폭탄의 성능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나 의사는 곧장 거리로 나가 일경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중과부적으로 당해내지 못하자 마침내 권총으로 자결하였다.나의사는 숨지기 전 본인의 이름과 의열단 소속이란 것만 밝혔을 뿐 더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순국하였다./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나석주 의사 후손과 추모사업 나석주 의사가 일경과 대치 끝에 권총으로 자결,순국한 후 장남 응섭(應燮)은 부친의 시신을 찾으러 갔다가 오히려 8일 동안 구금돼 고문을 받았다.순국 직후 일제에 의해 미아리 공동묘지에 강제 매장된 나 의사의 유해는 아들에 의해 수습돼 고향 황해도 재령 땅에 묻혔다.당시 일제의 감시 때문에 아무런 표식이나 봉분도 만들 수 없었는데 분단 이후 그 소식을 알 수 없다.이 때문에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묘소 대신 무후선열제단에 나 의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나 의사는 1남1녀를 두었다.장남은 일찍 사망하고 장녀 응서(應瑞·1918년생)는 92년 지병으로 사망했다.현재 나 의사는 직계 후손이 절손된 상태다. 지난 17일 제60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나 의사의 의거 현장인 당시동양척식회사 본점 자리(현 외환은행 본점 터)에서 나 의사의 동상이 제막됐다.추모 단체로는 김상옥·나석주의사기념사업회(회장 서영훈)가 구성돼 활동하고 있으며 동상 건립도 기념사업회에서 추진한 결과다. 나 의사는 지난 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다. 정운현기자 jwh59@
  • 金대통령“공산주의 인간본능 어긋나 실패”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5일 “공산주의의 계획경제는 정부가 국민의 의·식·주를 책임진다는 것이나 이제 그 책임을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 뒤 “북한은 수만에서 수십만명이 굶어죽고 있어 정부가 국민을 통제할 힘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한국자유총연맹 전국 회장단 371명을 청와대로 초청,다과를 함께 한 자리에서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간 승패는 이미 끝났다”면서 이같이 강조했다. 또 “북한은 개방할 경우 남한에 흡수당하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으나 사실우리도 어려운 상태인데 당장 북한을 흡수해서 어떻게 하겠느냐”고 반문,북한의 개방을 거듭 촉구했다. 특히 김대통령은 “우리가 당장 바라는 것은 독일식 흡수통일이 아니라 북한을 도와 북한의 경제를 재건함으로써 자기 돈으로 식량과 기름을 사고,시장경제를 알게 해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밝히고 “그런 과정에서 통일이 온다”고 말했다. 이어 “공산주의가 전세계적으로 후퇴·좌절한 것은 공산주의의 잘못된 이론 때문”이라면서 “마르크스의 이론은 대단히 정교한 이론이어서 한때 자본주의 경제학자들도 경의를 표시했지만 결과는 모든 경제이론 가운데 가장맞지 않는 이론이 됐다”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공산주의는 노동자 독재의 이름으로 소수의 당간부가 권력을장악,억압하고 수없는 피의 숙청을 하는 등 자유에 대한 인간의 본능에 반하는 것이어서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양승현기자 yangbak@
  • [기고] 언론인인가 정상배인가

    역사는 지난 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32년간이라는 정치군인의 장기집권을 ‘언론의 탓’이라고 말할 것 같다.권력화한 언론이 정치권력과 유착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이다.언론이 군사정권의 나팔수를 자임하고 나서 장기집권을 위한 도구 노릇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독재정권의하수인이 되어버린 언론은 시민사회에서 분출하는 민주화 요구를 묵살했고,때로는 매도함으로써 군사정권의 영속화에 기여했던 것이다. 87년 6월의 민주항쟁은 시민사회의 발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시민사회가 전제적 통치체제에 대항하여 민주체제를 회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국민적 합의에 근거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도출함으로써 시민사회를 억압하던 권력체제를 해체하는 분기점을 맞았던 것이다. 그런데 87년 민주항쟁 이후 세차례에 걸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언론의보도행태는 시민사회의 발달과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사실을 왜곡하거나 변질시키는 편파보도로 특정후보를 지지했다.심지어 여론조사를 왜곡함으로써 가공의 여론을 조성하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정치권력이 야당으로 이동하는 사태를 막으려는 의도에서 그같은 편파보도를 일삼았을 것이다.그것은 언론이 기존의 정치권력과의 밀착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그동안 누려온 부당이득과 특권의식을 계속 향유함은 물론,권력창출에 기여한 대가를 노린 정치적 계략에서 나왔을 것이다. 지난 92년 대선에서 어느 연합통신 기자는 ‘기자사회의 성향보고서’를 작성하여 김영삼 후보에게 넘겨줬다.또 97년 대선에서는 중앙일보 기자가 이회창 후보에게 ‘전략보고서’라는 것을 만들어 줬지만 작성자는 신분을 온전히 유지하면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탈세사건과 관련한 최근 중앙일보 사태는 언론탄압이라는 성격으로 변질되더니 언론대책 문건이라는 것이 돌출됐다.발설자는 작성자가 여권실세라고지목했는데 엉뚱하게도 일선 기자가 그짓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그 문건의 내용은 음모적이고 공작적이어서 언론장악을 기도하라는 권고를 담고 있다.그런데 그 뜻을 모를 리 없는 그 기자는 다른 기자들을 모아 놓고 언론개혁을 위해서 그랬다고 말했다. 전달자로 밝혀진 평화방송 기자도 언론상황과 정치현실이 안타까워 그랬다고 말했다.그는 여야의 실력자 사이를 줄타기 하듯이 오가며 한쪽에서는 훔치고 다른쪽에서는 거금 1,000만원을 받고 장물 팔듯이 넘겼다고 한다.여기서 돈을 일찍 받고 늦게 받은 것이 중요한 사안이 될 수 있을까.발설자도 접수자도 우연인지 안기부 고위간부 출신이다.그래서 그런지 낮말과 밤말만 다른 것이 아니라 시간마다 말이 다르다. 이쯤 되면 언론사가 기자를 고용해서 정치권에 출입시키는 것인지,아니면정치권이 기자를 언론사에 파견하는지 알 길이 없다.그래서인지 기자들이 영화에서나 봄직한 2중첩자 노릇을 하는 듯하다.정치기사는 거의 인물중심이고가십성 기사들로 꽉차며 그것도 친소(親疎)에 따라 크기도 달라진다. 언론인인지,정상배인지 알 길이 없다. 그들은 목도했다.70년대 초반의 자유언론실천운동,80년의 대량숙청사태,90년대 초반의 언론노조운동을.언론의 정도를 말하면 고난과 형극의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는 것이다.또 그들은 목도했다.정치권력과 결탁하면장·차관도 되고 청와대에도 진출하고 의사당에서도 사자후를 터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디 기자뿐인가.사주들의 각종 불법·탈법행위도 잇따라 터지고 있다.탈세사건,해외도박사건,폭력적 노동탄압,경영권 전횡 등 말이다.특권의식에 젖은탓인지 이들은 정당한 법집행에마저 저항한다. 그래서 기자들도 물들어 도덕의식이 마비된 듯 부끄러움을 잊은 것 같다. 도둑이 던져준 고깃덩어리에 눈이 멀었는지 파수견들은 짖을 줄 모른다.이제 파수견을 지키는 파수견이 나와야 한다.그것은 시민사회의 몫이다.이제시민사회가 감시자로 나서야 한다.늦었지만 언론도 신뢰의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시민사회는 올바른 기자들의 공정보도,진실보도를갈구하고 있다. [김영호 언론개혁시민연대 신문개혁특별위원장]
  • [대한광장] 민주 기지론

    ‘민주기지론(民主基地論)’이라는 것은 원래 북한에서 전개된 이론으로 북한이 통일을 위한 ‘민주주의 근거지’로서 우선 튼튼한 기반을 구축해야 된다는 것이었다.이것은 1946년 봄­여름 사이에 개념이 잡히기 시작했다.그때부터 50여년이 지난 지금,이제는 남쪽에서 이 개념을 생각할 때가 된 것이아닌가 한다. 북쪽에서는 소군정의 지도하에 토지개혁을 하고 친일파들을 내몰고 이기분자(異己分子)들을 숙청하고 ‘인민정권’을 창출하여 통일에 대비한 ‘민주기지’를 만들려고 노력했으나 현 시점에서의 남쪽에서는 우선 산적한 문제가운데에서 억울한 사람들을 신원하고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것이‘민주기지’로서의 선행조건이 되지 않을까 한다. 필자는 일본을 자주 다니면서 부러웠던 것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국민들 사이에 상호 증오감이 적다는 점이었다.국민 사이에 서로 증오감이 적으면 적을수록,억울한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그 나라는 강국이다.가난한 나라가 원자탄을 가지는 것보다도 월등히 효과적이다. ‘억울한 사람들’이라는 범주는 상당히 넓지만 그중에서도 6·25 이전에공권력에 의해 억울함을 당한 사람들을 생각해본다.제주도의 4·3사태가 그렇고 문경 석봉리의 한 마을 학살사건이 그렇다.대만에서는 1947년의 2·28사건을 슬기롭게 극복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중국의 처참했던 문화대혁명 뒤처리에 있어서도 대국답게 보상할 것은 보상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떠하였는가?지금에야 해결책을 모색중에 있는 느낌이 있다.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근자에 있어 문화방송의 4·3사건 특집들이 진지한 노력이라 생각된다.물론,필자는 ‘억울하게 된 원인’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제공자는 소련과 그 주위라고 지목한다.북한에서의 소련군정은 알다시피 자신들의 노선에 반대되는 세력은 인정하지 않고 당초부터 남한 미군정의 교란을 적극적으로 획책했었다.이것은 ‘쉬티코프 비망록’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에 반하여,모두가 아는 사실이 되어 다시 꺼내는 것도 쑥스럽지만 남쪽에서는 사회상의 여러 기존 모순에,북쪽에서의 공세적 교란공작,미 당국의 ‘계산’과 ‘실책’ 등으로 혼란이 가중하여 갔다고 보여진다.의젓한 시골 선비가 좌경운동에 몰두하게도 되고 대지주의 자제가 월북하는 현상을 보게 된다.월남자,우익 민족주의자와 남쪽 기득권층(친일 부역자집단을 포함하여)으로서는 남한내에서조차 몰리면 갈 곳이 없다는 위기감에 붙잡혀 필사 반격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이에는 이로,피에는 피로’의 악순환이 생기는 것으로 생각된다.얼마전 ‘대한매일’에 실린 ‘문경사건’을 생각해 보자.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은 평화스러운 산간벽지의 마을일 뿐이다.두 개의 상반되는 외세의 분단 점령이 없었던들 여태껏 평화스럽게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일대는 북쪽에서 지리산쪽으로 게릴라가 이동하는 길목에 위치했다.1949년 가을의 북쪽 신문을 보면 경북 산간지대에서는 피아의 교전뿐만아니라 생포한 경관들을 처단했다는 보도 등을 볼 수 있다.동료들이 생포당한 후 처형되는 것을 보고 발작적인 분노가 발생하기 쉬운 것이다.이러한 환경하에서 문경경찰서에서도 우호적이라고 분류된 석달마을 남녀노소가 전멸적 학살을 당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6·25축소판의 비극을 6·25 이전의남한 사회에서 본다. 이제는 대한민국도 어른이 됐으니 나이에 걸맞게 서슴없이 명예회복과 응분의 보상을 하여야 통일을 위한 ‘민주기지’로서의 역량이 더욱 튼튼해질 것이다.필자는 지난 8월 27일 새벽 일찍 떠나 800㎞를 주파하여 어느 시골에다녀왔다.1950년도 4월 빨치산과 좌익군인을 처형하는 천연색 동영상물(動映像物)을 보기 위해 갔던 것이다.당연하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너무도 슬픈 광경이었다. 통일,통일,부르기 전에 우선 주위부터 다지자.슬기로운 국민화합운동은 바로 통일의 첩경인 것이다. [方善柱 한림대 객원교수]
  • [義烈 독립투쟁](1-2) 李在明 의사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중국 하얼빈역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지 채 두 달이 못돼 국내에서는 한 애국청년이 ‘을사오적’의 하나인 이완용(李完用)을 노상에서 습격,치명상을 입힌 의거가 일어났다.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은 일제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한국 땅에는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사실상 한국정부를 대신하였다.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 폐위당한 데 이어 한국군의 해산 등 일제의 한국침략은 갈수록 강도를 더해 갔다.이에 전국에서 의병이 궐기해 일제에 대해무력항쟁을 시도했으나 병력과 물자에서 역부족이었다.여기서 돌파구로 모색된 것이 바로 개별단위의 의열투쟁이었다.이는 일제의 침략 주동자와 친일적신들을 처단함으로써 그들의 침략의지를 분쇄시키고 동시에 동포들에게 구국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함이었다.이완용처단의거도 그 연장선상에서 시도된 것이었다. 1909년 12월22일 오전 이완용은 5일 전인 12월17일 사망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식이 열리고 있는 서울종현(鐘峴) 천주교회당(현 명동성당)내 추도식에 참석하고 있었다.11시 30분경 식이 끝나자 이완용은 저동(苧洞) 자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인력거에 올라 교회 오른쪽 언덕길을 막 오르려던 참이었다.이때 갑자기 한 청년이 인력거 뒤에서 달려오더니 품 속에서 단도(短刀)를 꺼내 순식간에 이완용의 왼쪽 어깨(左肩)를 내리 찔렀다. 졸지에 습격당한 이완용이 인력거 아래로 고꾸라지자 청년은 따라내려가 그를 타고 앉아 이번에는 오른쪽 허리(右便腰部)를 찔렀다.이완용은 이내 의식을 잃고 길바닥에 쓰러졌다.이를 지켜보던 인력거 차부(車夫) 박원문(朴元文)이 달려들어 제지하려 하자 청년은 그의 어깨를 찔러 쓰러뜨리고는(박원문은 왼쪽 폐를 찔린 후 나중에 사망함) 다시 이완용에게 달려들어 오른쪽 신장(腎臟)부분을 난자하였다(이완용의 생질로 그의 비서관을 지낸 김명수(金明秀)가 1927년 간행한 이완용의 전기 ‘일당기사(一堂紀事)’에서 인용).길바닥은 유혈이 낭자하고 순식간에 일대는 아수라장이 돼버렸다.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고 판단한 청년은 그때서야 ‘대한독립 만세!’를외쳤다.때마침 인근에서 호위하던 순사들이 달려들어 체포하려 하자 청년은칼을 휘두르며 대항하였다.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일경의 칼에 하체에 상처를입고 붙잡히고 말았다.이 의거로 결국 이듬해 처형된 청년이 바로 이재명(李在明)의사로 검거 당시 23세였다. 이 의사는 평양 출신으로 13세때 예수교에 입교하였으며 평양 일신(日新)학교를 졸업하였다.1904년 미국 노동이민회사의 이민모집에 응모,하와이에서농부로 일하다가 1906년 3월 재미한인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활동하기도 했다.1907년 공립협회에서 매국적(賣國賊) 숙청을 결의하자 자원,그 해 10월 배로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귀국 후 중국과 노령(露領,러시아령) 등 각지를 돌며 동지를 규합하고 일제의 침략 원흉들과 매국노의처단을 결심한 이 의사는 1909년 1월 순종황제의 서도(西道,평안도) 순시때이토(伊藤博文)가 동행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평양역에서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동지 몇 사람과 정거장에서 대기했다.그러나 이토가 자신의 신변의 위협을 우려해 순종황제에게 붙어다니므로 이토를 향해 발포하다가 자칫 순종황제의 안전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도산 안창호의 만류로 이 계획은 미수에그치고 말았다.그러나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원산을 거쳐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기회를 엿보던 중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그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일제와의 무력항쟁이 어려운 상황에서 일제 침략괴수보다는 매국노들을 먼저 처단하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고 생각한 이 의사는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처단 대상으로 지목하였다.그들 가운데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은 첫번째 대상인물이었다.거사 1개월 전인 11월 하순경 이 의사는 동지들과 숙의끝에 자신은 이동수(李東秀)·김병록(金丙祿)과 함께 이완용을,김정익(金貞益)·조창호(趙昌鎬)는 일진회 회장 이용구(李容九)를 처단하기로 결의하였다.12월7일 최종모임에서 일행은 역할분담을 확정하였다.거사 결행자 이외에 오복원(吳復元)·박태은(朴泰殷)·이응삼(李應三) 등 3인은 거사자금 조달을,조창호·전태선(全泰善)은 거사에 필요한 권총·단도를 준비하여 서울로운반하는 책임을,그리고 김용문(金龍文)은 먼저 서울로 올라가서 이완용과이용구의 동정을 탐지하기로 했다. 12월12일 상경한 이 의사는 당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기사를 통해이완용이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거사 당일 아침 군밤장수로 변장,성당 정문 앞에서 군밤을 팔며 동태를 살폈다.오전 11시30분경 추도식을 마친 이완용이 인력거에 오르자 이 의사는 그를 응징하고는 현장에서 체포돼 이완용 저택 보호순사실로 끌려갔다. 의거현장에서는 이 의사 이외에 여인 2명도 같이 체포되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이 의사의 부인 오인성(吳仁星)여사였다.권총을 휴대한 채 성당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동수와 조창호는 이 의사가 체포된 후 현장에서 도주하였다.이 사건으로 이 의사 등 13명이 이듬해 3월13일 정식 기소되었다. 첫 공판이 열린 5월13일 오전 9시30분경 이 의사 등 일행을 태운 3대의 호송차가 신축한 지방재판소에 도착하였다.중키에 짧게 깎은 머리,흰색 죄수복을 입은 이 의사가 동지 일행과 함께 출정하자 10시5분 개정에 이어 검사의기소장 낭독이 끝나고 재판장의 심문이 시작됐다. 문:공모자는 모두 몇 명이나 되는가?답:한 사람도 없다. 문:찬성자도 없었는가?답:2천만 동포가 모두 찬성자다. 문:거사는 언제부터 준비했나?답:을사조약 체결 후 미국에 있을 때부터 준비했다. 문:왜 이완용을 죽이려고 했나?답:죄목은 8개조(條)다.그 첫번째가 을사조약 체결이다. 거사현장에서 압수된 권총·단도 등 거사용품을 가리키며 재판장이 물었다. 문:행흉(行凶)에 사용된 무기는 이것들인가?답:행흉이라니,나는 행의(行義)를 했다.(‘일당기사’에서 인용) 18일 선고판결에서 이 의사에게는 ‘교(絞)’,즉 교살형이 선고되었고 김정익·김병록은 징역 15년,자금조달책인 이응삼에게는 최저형인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6월30일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 열린 2심 공판에서 검사는 “1심판결은 ‘완전무결’한 것”이라며 1심대로 판결을 내려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하였다.8월 최종선고에서 사형이 확정되자 이의사는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만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해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라며 엄숙히 경고하였다. 9월13일 사형집행에 앞서 기독교 신자인 이 의사는 “내가 보던 찬미(讚美,찬송가)책이나 갖다 달라”고 하여 207장 ‘예수가 나를 기다리심’을 1절부터 끝까지 읽고는 조용히 순국하였다. 한편 이 의사의 습격을 받은 후 다량 출혈로 사경을 헤매던 이완용은 일제당국의 각별한 치료 덕분에 이듬해 2월14일 퇴원하였다.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그의 병실이 있던 대한의원(현 서울대병원 구관)에는 통감부 소속 일본인 고관을 비롯해 고종·순종황제가 보낸 칙사,한국정부 고관,심지어 한국거류 일본인들의 병문안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퇴원 후 내각 총리대신으로 복귀한 이완용은 이 의사 순국 20여일 전인 8월22일 한국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와 마침내 ‘한일병합조약’을 체결,강토와 국권을 일제에 내주고 말았다.금산(錦山)군수 홍범식(洪範植)은 이 소식을 듣고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매 자결하였고 매천 황현(黃玹)은 ‘절명시’를 남기고 음독,순국하였다.1910년대 의열투쟁은 이로써 또하나의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정운현기자 jwh59@
  • 北수석대표 박영수 나올듯

    ■베이징 구본영특파원■베이징 남북차관급회담 북측 수석대표로는 박영수(朴英洙·58)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부국장이 유력시된다.수석대표 이외두명의 대표로는 김성림(金成林) 전 광명성경제연합회 부회장과 이성덕(李成德) 전 대외경제위원회 국장 등이 거론되고 있다.그러나 21일 회담장에 누가나올지는 좀더 두고봐야한다는게 우리 정부측 설명이다. 박영수는 지난 94년 3월19일 남북 특사교환을 위한 판문점 실무회담에서 “서울이 불바다가 될 것”이라는 사뭇 위협적 언사를 했던 인물. 이후 남북관계는 경색국면으로 치달았음은 물론이다.박은 불바다 발언 이후 한 때 종적을 감춰 숙청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지난해 공식 석상에 재출현,건재를 알렸다. 그는 말싸움에 강한 전형적 북한의 대남 ‘대화 일꾼’.김일성종합대를 수석졸업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두뇌회전이 빠르다는 평.논리가 정연하다는긍정적 평가와 함께 말꼬리를 잡고 물고 늘어지는 ‘싸움닭’형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교차.때문에 그가 수석대표로 나오면 베이징회담이 험난한 전도를겪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박은 지난 85년 고향방문단 교환시 북측 대변인을 맡아 서울에 온 적이 있다. kby7@
  • [외언내언] 프랑스의 대숙청

    “과거는 어디까지나 과거일 뿐이다. 과거는 역사 속에 묻어버려야 한다.” ‘인간도살자’ 별명을 가진 나치 게슈타포(비밀경찰) 바르비가 1985년 프랑스 정보기관에 체포되었을 때 남긴 말이다. 바르비의 이 말은 한국에서 가장 잘 먹혀든다.과거가 ‘어두운’ 사람일수록 ‘과거청산’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한다.그러면서 현재가 중요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도 할 일이 많은데 언제까지 과거타령이냐며 여론을 왜곡한다. 이들은 한술 더 떠서 ‘미래지향’을 내세우고 마치 선각자연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처럼 ‘청산’해야 할 과거가 많은 국가도 흔치 않을 것이다.나라를 판 매국노와 친일파들로부터 군사독재 원흉,그들에 빌붙어 인권을 짓밟고 언론을 유린한 지식인·언론인,IMF환란을 불러온 책임자들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제대로 청산을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오늘날 사회정의가 바로 서지 못하고 새정부의 개혁작업이 그들의발목잡기에 시달리게 되었다.만년 양지족(陽地族),기회주의자들의 농간 또한 만만치 않다. 프랑스는 달랐다.4년여의 짧은 기간나치의 지배를 받았지만 드골 정부의과거청산 작업은 준엄했다.1940년 6월 프랑스는 패전과 함께 남북으로 분할되어 북부는 나치 독일군, 남부는 페텡의 비시 괴뢰정권이 다스렸다.비시 정권은 온갖 방법으로 나치에 협력하면서 조국을 배반했다. 해방과 함께 망명정부 자유프랑스를 이끈 드골은 나치 협력자 숙청에서부터 새나라 건설을 시작했다.나치 협력자 779명이 처형되고 2,777명이 종신징역,26,529명이 유기징역,3,678명이 공민권박탈형을 선고받았다.드골은 “국가가 애국자에게는 상을 주고 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는 신념으로 나치 부역자들을 단호하게 처벌했다. 비시 정권의 페텡은 개인적으로는 드골의 스승이었지만 무기징역이 선고되고 옥중에서 자살했다.드골 정부는 나치 부역자 중 언론인·출판인·작가·지식인 그룹을 가장 가혹하게 다스렸다.드골은 “지식인은 도덕의 상징이기때문에 제일 먼저 죄를 물었다”고 밝혔다.친일파와 군사독재,환란 책임자청산에 손대지 못한 우리 처지에서 프랑스의 나치청산은 훌륭한 교훈이 된다.우리는 그동안 ‘프랑스의 교훈’을 떠올리면서도 막상 프랑스의 나치 숙청에 관련한 저서 한권,번역서 한권도 나오지 못한 황무지 상태였다.이 한가지 사실로도 우리 지성풍토가 얼마나 과거청산에 소극적이었는가를 보여준다. 언론인 주섭일(朱燮日)씨가 ‘프랑스의 대숙청-드골의 나치 협력 반역자 처단 진상’을 펴낸 것은 이런 의미에서 뜻깊은 일이다.남들은 반세기 전에 끝낸 일을 우리는 이제야 ‘교훈’으로 읽어야 하는가. 김삼웅주필
  • [제2공화국과 張勉](19)-요동치는 軍(上)

    1960년 8월27일 민의원에서 총리 취임후 첫 시정연설에 나선 장면(張勉)은긴급과제 6가지에 관한 정부 방침을 역설했다.마지막 항목에서 장총리는 “경제건설과의 균형상 과중한 국방비를 줄이고자 감군(減軍)을 하겠으며 이에 대비해 중장비를 도입하는 계획을 이미 수립했다”고 밝혔다.이어 “국군의 군기를 확립하고 일부에서 있었던 부패를 숙청하는 동시에 군의 정치적 중립을 확보하고 군내 파벌 조성을 방지하기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다짐했다. 장총리가 제시한 군 관련 정책의 큰 줄기는 ‘감군’과 ‘개혁’이었다.또그가 지적한 군의 문제점들은 국민도 충분히 공감하는 것들이었다.이승만(李承晩)정권 아래서 군은 정치에 심하게 오염된 상태였다[별도기사 참조].4월혁명이 일어난 뒤 군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다른 어느 분야에 관한 것 못잖게 높았다. 4월혁명 공간에서 국민과 군의 만남은 충돌 없이 이루어졌다.4월19일 이승만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해 군이 서울 등 대도시에 진주했지만,경찰과는 달리국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지는 않았다. 송요찬(宋堯讚)계엄사령관은 계엄군에게 “민가에 들어가지 말고 절대 음식을 얻어먹지 말 것,어떤 일이 있어도 총을 쏘지 말며 발포한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명령을 내렸다.계엄군인 15사단의 조재미(趙在美)사단장은 19일 고려대를 찾아가 강당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에게 “절대 연행하지 않겠다”는약속을 해 해산시키기도 했다. 60년 4월 중립을 지킨 군의 엄정한 자세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다행스러운일이었다.가령 군이 유혈진압에 나섰다면 그 비극적 결말은 상상하기에도 두려울 정도였을 테고,계엄사태를 빙자해 직접 권력 장악에 나섰더라도 민주화를 이루는 데 큰 타격이 됐을 것이다. 4월혁명 과정에서 군은 정치·사회적인 문제에 초연한 듯이 보였다.다만 장총리의 연설에서 지적받은 자체 문제점들을 처리하려는 움직임이 내부에서일어났다.그것이 바로 정군(整軍)운동이다. 허정(許政)과도정부 시절인 5월2일 군수기지사령관인 박정희(朴正熙)소장은송요찬 육군참모총장에게 편지를 보낸다.“군의 최고 명령자로서 ‘3·15부정선거’에책임을 지고 용퇴하라”고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5월8일에는 김종필(金鍾泌)중령 등 육사 8기생인 중령 8명이 김중령 집에서모였다.이들은 정군운동을 벌이기로 뜻을 모으고 ▲3·15 부정선거를 방조한 군 장성들의 책임 추궁 ▲부정축재한 장성 처단 ▲무능·파렴치한 지휘관제거 ▲파벌 요인 제거와 군의 정치적 중립 보장 ▲군 처우개선 등을 목표로 정했다. 이들은 연판장을 돌려 군내 여론을 불러일으키려고 했지만 즉시 발각돼 김종필 최준명(崔俊明) 김형욱(金炯旭) 옥창호(玉昌鎬) 석창희(石昌熙)등 5명이구속됐다.그러나 여론 악화를 우려한 송요찬은 이들을 바로 석방하고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났다.송요찬의 후임으로는 역시 정군대상으로 꼽히는 최영희(崔榮喜)중장이 임명됐다. 장면내각이 구성되면서 국방장관은 현석호(玄錫虎),정무차관은 박병배(朴炳培)의원(무소속)이 각각 맡았다.장·차관 모두 군이나 국방에 관해서는 백지나 다름없었다.다만 현석호에게 육사 2기생인 현석주(玄錫朱)라는 동생이 있어 그를 통해 군 내부사정을 알아보는 정도였다.장면은 국방부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듯하다.공보비서관인 고 송원영(宋元英,5선의원 역임)은 회고록에서 “장총리는 나이가 지긋한 민간인을 국방장관에 앉힌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다.그러나 국방부의 모든 일은 한계가 있다고 본 것 같다.미군에서 작전권을 가진 이상 국방장관 자리는 한계가있다고 보았던 것이다”라고 밝혔다. 육군 참모총장 자리에는 최경록(崔慶祿)중장을 앉혔다.최중장은 이승만정권에서 정치에 물들지 않은,몇 안되는 고위장성 가운데 하나였다.최영희는 합참의장으로 승진했다. 장면정부 출범후 영관급 장교들의 정군운동이 다시 떠올랐다.9월10일 김종필 김형욱 등 중령 11명이 현석호 국방장관을 방문해 전군을 상대로 정군을 단행할 것을 청원했다.현장관도 필요한 정화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이틀뒤 국방장관이 현석호에서 민주당 구파인 권중돈(權仲敦)으로 바뀐 뒤 권장관은 정화조치의 첫 단계로 3·15부정선거 관련자와 부정축재자를 조사하는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한다. 9월20일 엉뚱한 곳에서 정군운동에 불똥이 튀었다.최영희 합참의장 초청으로 방한한 미국 국방부 군원국장인 윌리스턴 파머 대장이 한국을 떠나면서 정군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한국군 고위장성들이 최근의 사태에큰 불안과 초조를 느끼니 더 이상 조직을 흔들어 군사력을 약화시키지 말라”는 요지였다. 파머의 성명은 큰 반발을 불러왔다.최경록 육참총장이 즉각 “명백한 주권침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9월24일에는 육사 7·9·10기 대표 16명이 최영희 합참의장을 찾아가 “파머를 불러들여 자리를 보존하려고 했다”면서 사임을 요구했다.‘하극상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태의 결과로 김종필·석정선(石正善) 두 중령이 61년 2월 예편당한다.배후로 지목된 박정희는 육군본부작전국장에서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된다. 이후 정군운동은 사라지지만 주동자들은 결국 쿠데타 음모로 돌아선다. 이용원기자ywyi@李承晩정권하의 軍실태 이승만(李承晩)정권 12년동안 군은 외형상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대한민국 출범 당시 국군은 육군·해군을 합해 5만 병력 규모였다.‘6·25’발발직전에 10만명을 넘어섰고 1954년에는 65만명에 이른다.이후 다소 줄어 50년대 중반부터는 통칭 ‘60만 대군’으로 자리잡는다. 반면 이 시대는 군이 정치적인 사건에 자주 동원되고 그 영향으로 분파(分派)가 극심해지는 등 정치에 오염된 기간이기도 했다. 창군(創軍)이후 60년대 초까지 한국군 상층부를 이룬 장성과 고급장교들은출신에 따라 네 부류로 나뉜다.광복군 또는 중국 정규군 출신을 비롯해 ▲일본군 장교·하사관 ▲일본이 창설한 만주군 ▲공산통치를 피해 내려온 이북피난민 출신 들이다. 육군의 전신으로 46년 창설된 조선경비대에서는 광복군의 유동열(柳東悅)송호성(宋虎聲)장군이 초대,2대 사령관을 맡는다.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김구(金九)를 지지하는 광복군·중국군 출신들을 뒷전으로 밀어낸다. 이승만은 초대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참모총장(49년 폐지됨)에 일본군 출신 이응준(李應俊) 채병덕(蔡秉德)을 각각 임명한다.일군 출신들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고 실전 경험도 풍부해 초기 국군이 기틀을 잡는 데 나름대로기여한다. 그러나 일군 출신들도 52년이면 ‘실권’에서 멀어진다.‘발췌 개헌’때 이승만이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에게 2개 전투사단을 부산으로 보내라고 명령하지만 거부당한 일이 계기가 됐다.일본 육사를 나온 이종찬은 “군의 정치적 개입은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한다. ‘만만치 않은’일군 출신들을 배제한 이승만은 후임에 ‘젊고 경험이 부족한’만주군 출신들을 선택한다.대표적인 인물이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정일권(丁一權)과 백선엽(白善燁)이다. 일제가 중국대륙을 침공하려고 관동군 보조병력으로 창설한 만군은 그 위상이 독특했다.정규전 훈련보다는 독립군이나 마적들을 소탕하는 데 필요한 반란진압 전술을 주로 배웠다.독립운동가·공산주의자를 상대하는 바람에 그업무도 상당히 정치적이었다.그래서 흔히 “만군 출신의 많은 장교들은 군내(軍內) 분파주의와 음모의 원천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이승만은 정일권과 백선엽을 교대로 중용하며 충성경쟁을 부추긴다.정일권이 51년 34살에 국군 최초로 중장에 오르지만 대장 계급장은 그보다 3살 아래인 백선엽이 53년 먼저 단다.육군참모총장도 정일권(50년)-백선엽(52년)-정일권(54년)-백선엽(57년)으로 왔다갔다한다.두 사람의 선두다툼은 군부 내에 함경도파(정일권)와 평안도파(백선엽)라는 두 파벌이 형성되는 원인이 된다. 군부내 파벌을 조장해 충성경쟁을 시킨 것 말고도 이승만은 여러 면에서 군을 정치에 악용한다.대통령·국회의원 선거 때 부정투표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되었다.헌병총사령부(사령관 元容德)와 특무대(대장 金昌龍)를 시켜 군 내부를 감시하는 한편 이들을 정적 제거에도 동원했다.‘서민호(徐珉濠)의원 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 정치자금도 군비에서 조달했다.군은 당시 국가예산의 40%이상을 썼고 매년미국으로부터 4억달러 상당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원조받고 있었다.군에서 정치자금을 끌어쓰는 행태는 필연적으로 군 내부에 부패를 불러왔다.군수물자를 빼돌려 사복(私腹)을 채우고 위로는 상납하는 구조가 심해졌다.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군은 자유당·관료층에 버금가는개혁의 대상으로 떠올라 정군(整軍)운동을 불러왔다. 이용원기자yw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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