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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윌슨센터 “北 정권교체 바라지 않는 中…비핵화 협력 가능성 낮아”

    美 윌슨센터 “北 정권교체 바라지 않는 中…비핵화 협력 가능성 낮아”

    北, 中핵우산은 주체사상과 충돌 ‘민생단 사건’ 등 근본적 불신도 북한이 중국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믿지 못하고, 중국 역시 북한의 정권교체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북한의 비핵화가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미국 워싱턴 싱크탱크에서 나왔다.17일 미 의회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윌슨센터의 의회관계실에서 발표한 메모 형식의 보고서 ‘중국과 북한의 독특한 관계’에는 북한이 대외무역의 80%를 차지하는 중국에 상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신뢰하지 못하는 관계로 보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는 자력갱생을 강조하는 북한의 ‘주체사상’ 때문일 수도 있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1930년대 민생단 사건, 6·25 전쟁 중 250만명 조선인 학살, 일제강점기 등과도 연결되는 것으로 봤다. 민생단 사건은 조선인 공산당원들이 일본의 밀정이라는 의심을 받고 중국공산당에 의해 숙청된 사건이다. 또 중국의 핵우산에 대해 북한이 편안하게 느끼기 보다는 오히려 주체사상과 충돌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핵화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봤다. 중국 역시 북한의 정권 교체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북한의 비핵화보다는 한반도가 미국화되지 않는 것을 원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이는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놓고 미중이 협력할 가능성이 낮음을 의미한다. 보고서는 북한의 정권 교체가 중국과의 국경에서 난민과 인도적 위기 등의 문제를 초래하고,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은 북한을 미국과 동맹을 맺은 한국 사이에서 완충 역할로 더 평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중 경쟁 구도 속에서 중국은 북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것이며, 미국이 정책을 만드는 데 있어 북중 관계에 대한 이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더 많은 정보에 기반한 정책을 만들어야 하다고 제언했다.
  • [금요칼럼] 가짜뉴스의 오래된 족보/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금요칼럼] 가짜뉴스의 오래된 족보/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겸임교수

    영조 1년 4월 19일의 실록을 읽다가 흠칫 놀랐다. 사간원은 이태화가 전라도 옥구현감 시절에 저지른 비행을 고발했다. 그는 관청의 여종이 된 이술지의 아내를 점고하면서 “입은 옷을 벗기고 강제로 뜰 아래에 무릎을 꿇린 다음 갖가지 곤욕을” 주었다고 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끔찍했던지 고을의 아전들조차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하게 된 것은 페이스북 친구 덕분이었다. 그는 ‘승정원일기’에 이 사건이 좀더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고 했다. 과연 그러했다. 사간원은 이태화를 비난하면서 그 여성은 “아마 목매어 죽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동정했다. “만약 그가 사대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졌더라면 차마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간원은 이 몹쓸 사람을 변방으로 귀양 보내라고 요구했다. 영조는 그 말을 따랐다(승정원일기, 영조 1년 4월 19일). 그 후 이태화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됐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러고는 30년 넘게 고향인 인천에 숨어 지냈다. 채제공의 ‘번암선생집’(제42권)과 정범조의 ‘해좌선생문집’(제36권)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런데 영조는 이태화를 잘 알고 있었다. “이태화는 젊은 나이에 급제하여 유명했다.”(승정원일기, 영조 6년 11월 24일) 그를 파렴치범으로 몰아 귀양까지 보냈으나 그것이 왕의 본심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태화가 당쟁에 워낙 깊숙이 개입돼 있어서 마지못해 처벌했을 것이다. 놀랍게도, 채제공과 정범조는 이태화의 비행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사실무근”, 여성의 옷을 벗기고 모욕한 일은 결코 없었다고 했다. 왕은 고향에서 근신하고 있던 이태화를 다시 조정으로 불렀다. “그대는 나와 동갑이 아니던가. 그대가 18세에 급제하자 선왕께서 기이한 인재라며 승정원 주서를 시키셨지.” 영조의 이런 말을 채제공이 기록했다. 동갑내기 이태화를 영조는 승지로 삼았다(실록, 영조 35년 8월 23일). 이태화가 사망하자 영조는 매우 슬퍼했고, 높은 벼슬도 추증하고 영민(榮敏)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태화는 특히 행실이 고왔다. 형제간에도 우애가 깊어, 한 잔의 술이라도 형제가 나누어 마셨다. 어머니가 작고한 뒤로는 형수를 어머니처럼 섬겨, 작은 일도 반드시 형수에게 여쭈어 결정했다. 게다가 그는 누구보다 검소하고 청렴했다. 채제공과 정범조는 이태화가 극히 모범적인 선비였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맨 앞에서 읽은 ‘실록’과 ‘승정원일기’는 어찌 된 것인가. 사실관계를 정확히 알고 싶어서 나는 여러 문헌을 검토했다. 알고 보니, 이태화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여성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추사 김정희의 고조부요, 영의정을 지낸 김흥경의 딸이었다. 그 남편 이술지는 좌의정 이건명의 아들이었다. 영조를 경종의 ‘세제’로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운 ‘노론 4대신’의 하나가 이건명이었다. 이건명의 며느리가 한때 관청의 여종이 된 것은 ‘신임사화’(경종 1년)의 여파였다. 그때는 이건명의 가족이 모두 벌을 받았다. 그러나 영조가 즉위하자 그들은 모두 복권됐다. 이제는 노론의 반대파인 소론과 남인이 숙청됐다. 이태화는 남인의 소장파로 처벌된 것이었다. 그가 김흥경의 딸을 정말 모욕했는지는 따질 일도 아니었다. 당쟁이 격심할 때면 가짜뉴스가 횡행했다. ‘실록’도 ‘승정원일기’도 오염된 기록으로 가득하다. 21세기 한국 사회는 유감스럽게도 당쟁이 극심하던 그 시절과 닮은 듯하다. 날마다 혼란스러운 뉴스를 읽고 들으면서 나는 때로 슬픔을 느낀다. 모두가 그토록 바랐던 민주화가 기껏해야 이런 가짜뉴스나 마음껏 만들자는 준비운동이었던가.
  • 숙청설 돌던 北 리영길, 국방상에 임명된 듯

    북한이 지난달 말 노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단행한 인사조치 결과가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남측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국방상에는 한때 숙청설까지 돈 리영길 사회안전상이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는 15일 북한 국방상에 리영길 사회안전상이 임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8일 김일성 사망 27주기의 금수산태양궁전 참배 당시 찍힌 사진에서 도열 위치나 군복 등을 토대로 한 분석 결과다. 당시 리영길은 기존 김정관 국방상이 섰던 둘째 줄 권영진 군 총정치국장과 정경택 국가보위상 사이에 자리했으며, 군복의 옷깃 역시 녹색이 아닌 육군의 적색 테두리에 대장 견장(별 4개)을 착용했다. 다만 통일부 당국자는 “공식 보도가 나온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리영길은 김정은 체제 첫해인 2012년 12월 상장(별 3개)에 진급한 뒤 다음해 대장을 달고 합참의장에 해당하는 군 총참모장에 취임했지만, 2016년 2월 갑자기 물러나면서 처형설이 돌기도 했다. 2018년 다시 총참모장으로 복귀했으나 다시 해임됐고 공식 석상에도 1년 넘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1월 당 정치위원과 사회안전상에 다시 이름을 올렸다. 리영길이 국방상으로 가면서 사회안전상에는 지난해 같은 직책에 있다 해임됐던 김정호가 재임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고속 승진과 해임, 복귀를 반복하는 ‘회전문 인사’가 되풀이되는 배경에는 다른 세력이 자라는 것을 견제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자리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김 위원장은 자신이 군 서열 1위로 끌어올렸던 리병철을 돌연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내치는 등 군에 대한 대대적 인사를 단행했다.
  • 조광한 남양주시장 ‘이재명 겨냥’ 대선 관련 출간

    조광한 남양주시장 ‘이재명 겨냥’ 대선 관련 출간

    조광한 경기 남양주시장이 13일 자신의 SNS에 연재한 글 20편을 모아 책을 냈다. 조 시장은 올해 초부터 ‘포퓰리즘 비판’ 시리즈를 자신의 SNS에 연재해왔다. 내년 대선에 출마하는 인물군에 대한 ‘위험성’을 경계하는 내용의 글을 비유와 풍자로 풀어낸 내용이다. 원론적인 내용이지만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1위를 달리는 이재명 경기지사를 겨냥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조 시장은 이재명 경기지사와 ‘특별감사’ 문제 등으로 지속적인 갈등을 빚고 있다. 조 시장이 그동안 경기도 감사의 적법성, 정책 표절 시비 등으로 갈등을 겪은 이 지사를 비판한 내용, 이 지사가 당 안팎에서 공격받은 내용 등과 유사한 동서양의 역사적 사건들을 책에 담았기 때문이다. ‘선거실패,국가실패-나의 꿈,강국부민(强國富民)’이란 제목의 이 책은 역사적 사건들을 쉽게 설명하면서 지도자의 덕목, 포퓰리즘의 위험성 등을 역설하고 있다. 조 시장은 이 책에서 ‘국가의 성공과 실패는 인종이나 지리적 환경이 아닌 정치·경제 제도에 달렸다’는 글을 인용,“포용적 지도자를 선출한 경우와 편협하고 난폭한 지도자를 선출했을 때,국가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진다”고 강조했다. 또 아르헨티나,베네수엘라,그리스 등 세 나라의 사례를 들어 “포퓰리즘은 정책의 현실성이나 옳고 그름은 외면한 채 대중의 인기에만 부합하려는 인기 영합 정책”이라며 위험성을 설명했다. 특히 그는 “공짜로 퍼준다고 무턱대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라며 “당장은 달콤할지 모르지만 결과는 몹시 쓰고 비참하다”고 경고했다. 히틀러의 집권과 독재화 과정을 다루면서 “광기와 집착으로 전 세계가 끔찍한 재앙을 겪었다”며 그 역시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한 점을 부각했다. 특히 조선 초기의 이방원과 수양대군 등 ‘패륜사건’으로 정권을 잡아 ‘혈육간 숙청’을 감행한 사례를 설명하면서 “패륜은 국가의 운명에 결정적 폐해를 낳는다.세종과 정조처럼 훌륭한 자질이 있는 어진 성품의 리더를 골라야 한다”고 ‘인성과 인품 우선 인물론’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외에도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 등을 소개하고 있다. 조 시장은 29일 서울 여의도에서 출판기념회를 연다.
  • 마오쩌둥, 분열된 대륙 통일 ‘국부’ 추앙… 덩샤오핑, 개혁·개방으로 경제 도약

    마오쩌둥, 분열된 대륙 통일 ‘국부’ 추앙… 덩샤오핑, 개혁·개방으로 경제 도약

    중국 공산당은 100년 동안 다섯 명의 최고 지도자를 배출했는데 마오쩌둥을 1세대, 덩샤오핑을 2세대, 장쩌민 전 국가주석을 3세대, 후진타오 전 주석을 4세대, 시진핑 주석을 5세대 지도자로 부른다. 1세대 마오쩌둥(1893∼1976)은 중국 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지도자로 이견이 없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논쟁이 분분하다. 그가 매우 불리한 환경에서 국민당 장제스를 격파하고 1949년 중국 대륙에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는 점에서 ‘국부’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1950년 후반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 문화혁명으로 이어진 그의 계속된 급진적 정책이 중국에 입힌 인적·물적 피해는 수치로 계산이 힘들다. 1957년 반우파 투쟁을 통해 지식인 55만명이 숙청됐고 대약진 운동과 인민공사의 실패로 굶어 죽은 사람이 3000만~4000만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1966~1976년 문화혁명 때에는 360만명이 박해를 받고 75만~150만명이 사망했다는 연구도 있다. 이런데도 마오가 신으로 추앙받는 것은 분열된 대륙을 하나로 통일해 거대 중국을 탄생시켜 상처받은 중국인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준 덕분이라는 게 중국인의 대체적인 평가다. 2세대 덩샤오핑(1904~1997)은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사회주의 이념을 교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닌, 자본주의의 장점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했다. 그가 내세운 기치가 실용주의 노선의 ‘흑묘백묘론’이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중국인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으면 가장 좋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과감한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해 피폐해진 중국 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교두보를 구축했다. 이후 중국은 40년간 연평균 9.2%에 이르는 고도성장을 통해 미국과 맞서는 ‘주요 2개국’(G2)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19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짓밟는 역사적 오점을 남겼다. 3세대 장쩌민(1926~)은 1989년 톈안먼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최고 지도자에 올라 덩샤오핑이 닦아 놓은 길로 역동적인 중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은 중국의 시장경제 발전을 되돌릴 수 없는 경로로 들어서도록 했을 뿐 아니라 중국 경제에 날개를 달아 줬다. 중국은 ‘원바오’(생존을 위한 의식주 해결)를 넘어 ‘샤오캉’(여가생활 가능) 사회도 가시권에 뒀다. 4세대 후진타오(1942~)는 집권 10년 동안 주창해 온 ‘과학적 발전관’과 ‘조화사회 건설론’이라는 슬로건을 통해 앞선 장쩌민 시대까지 성장에만 방점을 뒀던 정책에 대한 보완 성격이 강한 정책을 펼쳤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로지 경제성장만을 추구했던 정책에서 벗어나 분배는 물론 사회, 환경 등 모든 분야를 함께 챙겨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끌었다. 덩샤오핑과 장쩌민과는 달리 핵심 권력인 당중앙군사위 주석직까지 동시 이양해 완벽한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원로 정치’를 사실상 종식시켰다. 5세대 시진핑(1953~)은 중국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중화민족의 부흥을 위한 ‘중국몽’을 장기 비전으로 제시했다. 지난해 창당 100주년을 1년 앞두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 1만 달러를 돌파해 샤오캉 사회를 이룩한 시 주석은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에 경제와 문화를 세계 최고로 만드는 부강사회를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기원을 둘러싼 논란과 홍콩 및 신장위구르족 인권 탄압 등 여러 악재가 겹치는 바람에 세계 무대에서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 리더십이 시험대에 올랐다는 지적이 나온다.
  • [정승민의 막론하고] ‘대한’과 ‘조선’의 차이/북유튜버

    [정승민의 막론하고] ‘대한’과 ‘조선’의 차이/북유튜버

    6ㆍ25가 일어난 지 이제 71년이다. 몇 달 전 전쟁의 장본인인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발간됐다고 들었다. 온라인 서점몰을 검색해 보니 판매하는 곳이 전무했다. 시중에 나온 책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이 모두 압수했단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침해했기에 판매와 배포를 금지해야 한다는 가처분 신청도 연달아 제기된 상태다. 다른 편에서는 학문과 출판의 자유를 가로막는 시대착오적 행위라며 반발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절대선(絶對善)은 아니다. 보편타당한 사실을 왜곡해 역사적 정통성을 훼손하는 내용은 곤란하다. 헌정질서를 지키려는 정당한 행위로 평가된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허위사실을 퍼뜨리는 짓을 처벌하는 까닭이다. 현재 ‘세기와 더불어’는 법원의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이념성 서적은 유해 간행물 여부를 확정할 수 없어서다. 김일성의 이력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6ㆍ25다. 북한 인민군은 나라가 세워지기 7개월 전 창설됐다. 한반도 전역을 사회주의로 통일하기 위해 북한을 민주기지로 만들고 국토를 완정하겠다는 방침에서 비롯됐다. 김일성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리지만 젊은 시절 만주에서 무장활동을 한 행적은 인정된다. 그가 가장 잘 알고 잘하는 일이 무력을 쓰는 것이니 통일의 명분이 걸린 전쟁을 마다할 이유는 없는 셈이다. 전쟁의 발발을 놓고 북침론부터 내전연장론까지 다양한 관점이 나오지만 당사자인 김일성의 입으로도 남침은 확인된다. 세계적 작가인 루이제 린저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진행되던 시기에 만난 김일성에게 왜 개입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과거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피로 물들인 손을 더이상 쓸 수 없다고 답했단다. 6ㆍ25의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그가 선택한 것은 내부 권력투쟁이었다. 경쟁하는 정치세력들을 차례로 숙청했다. 연안파의 무정, 소련파의 허가이에 이어 최대 정적인 박헌영 그룹을 날려 버렸다. 상층부는 제거했지만 출당한 당원 수십만을 복당시키면서 당내 기반은 확충했다. 이 시기에 김일성의 직함이 수상에서 수령으로 승격한 배경이다. 전쟁에 따른 숱한 비극과 상처를 야기한 인물이 정작 자신은 물론 후손까지 권력세습을 가능하게 했으니 역사는 난감하기만 하다. 그러나 김일성에서 시작된 북한 정치는 주체사상의 이념과 유일 권력구조에만 고착됐기에 남북한 체제경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승패가 뚜렷해졌다. 1961년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은 남한의 갑절이었지만 강산이 두 번 바뀌기 전에 정반대가 됐다. 서구 경제학자가 ‘코리아의 기적’으로 극찬했던 북조선은 ‘한강의 기적’에 완패했다. 어떻게 대역전극이 가능했을까. 정치학자 박명림은 경쟁과 갈등을 허용하는 서울의 민주주의적 요소가 체제의 실패를 방지하고 실수를 교정하는 발전적 역할을 하는 반면 평양은 최고지도자에게 의심조차 용납하지 않는 개인숭배로 리더십의 오류를 수정할 기회를 원천 박탈했다고 본다. 이견과 이론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혁신과 발전은 존재할 수 없다. ‘국부’ 이승만과 ‘근대화의 기수’ 박정희도 사정없이 끌어내리는 대한민국의 역동성에 비춰 보면 ‘위대한 수령’ 김일성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기 힘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봉건성이 두드러진다. 진행 중인 ‘세기와 더불어’ 논란도 모순과 갈등을 허용하는 우리 사회의 자정 능력으로 풀어나가면 어떨까. 사상의 자유와 헌법적 가치도 고려하면서 피해자와 유족의 상심을 배려하는 독일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아돌프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은 전후 70년 만에 다시 출간됐다. 서점에 깔리기도 전에 선주문으로 동이 날 만큼 관심이 후끈했다. 히틀러와 나치즘에 대한 부활을 걱정할 법도 하지만 안전판을 놨다. 국수주의와 인종차별로 점철된 본문에 관해 비판적 주석을 첨부한 판본만 출간을 허용한 것이다.
  • 이스라엘 “이란 대통령 당선인은 ‘테헤란의 도살자‘” 강경 보수로 회귀

    이스라엘 “이란 대통령 당선인은 ‘테헤란의 도살자‘” 강경 보수로 회귀

    이스라엘은 지난 18일(이하 현지시간) 실시된 이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강경 보수 성향의 세예드 에브라힘 라이시(61)가 핵무기 개발에 전념할 것이라며 경계했다. 야이르 라피드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19일 트위터에 “‘테헤란의 도살자’로 알려진 이란의 새 대통령은 이란인 수천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며 “그는 이란 정권의 핵 야욕과 글로벌 테러에 전념할 것”이라고 논평했다. 오는 8월 초 취임하는 라이시 당선인이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당시 최고지도자였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지명을 받아 반체제 인사 숙청을 이끌었던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에 따르면 그는 테헤란 근처 감옥들에 수감돼 있던 5000명 가량의 죄수들에 극비 사형 판결을 언도한 “죽음 위원회” 4명의 판사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들이 묻힌 공동묘지는 당국이 철저히 체계적으로 은폐했다. 그는 또 2009년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의 부정선거 의혹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인 ‘녹색 운동’을 유혈 진압하는 데도 앞장섰다. 당시 체포된 시위 가담자 가운데 일부는 국가 전복·간첩 혐의로 처형됐다. 1960년 이슬람 시아파 성지이며 이맘 레자의 영묘가 있는 마슈하드 인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10대 시절 그는 정규 교육을 그만두고 중부 도시 콤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했다. 콤은 이란의 유서 깊은 종교도시다. 라이시는 현재 이란의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밑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70년대 팔레비 왕정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검찰 총장 등 요직을 거치며 2019년 삼부 요인 중 하나인 사법부 수장이 돼 대선 출마 직전까지 역임했다. 최고지도자가 사망하거나 유고 시 후임을 결정하는 권한이 있는 국가지도자운영회의 부의장이기도 하다. 이란 정가에서는 그를 유력한 차기 최고지도자 후보로 꼽는다. 서방은 이란의 사형 제도를 지지하며 반체제 인사 숙청에 앞장선 라이시를 잔혹한 인물로 묘사한다. 뉴욕에 본부를 둔 이란인권센터는 그에 대해 “국가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감금하고 고문하고 제거하는 체제의 주축”이라고 비판했다. 중동 전문매체 알모니터는 그가 1980년대 후반 수천명의 반체제 인사 숙청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행정부는 2019년 “청소년 시절 저지른 범죄에 대한 사형 집행, 죄수 상대 고문 등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조치“를 했다는 이유로 라이시를 제재 대상에 올렸고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AP 통신은 라이시에 대해 인권 활동가와 그들의 가족을 구금하고 이를 서방 국가와 협상 카드로 이용한 것을 감독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2017년 대선에 출마한 라이시는 현직 하산 로하니 대통령과 대결해 38% 득표에 그쳐 패한 바 있다. 라이시는 이번 선거 운동 과정에서 “빈곤과 부패, 굴욕과 차별”을 뿌리 뽑겠다고 천명했다. 리오 하이앗 이스라엘 외무부 대변인도 성명을 통해 18일 이란 대선 투표율 48.8%와 관련,“절반도 못 미치는 이란 유권자들이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대통령을 선출했다”며 “라이시 선출을 통해 진실로 사악한 이란의 의도가 명확해졌다”고 주장했다. 성명은 이어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즉시 그리고 영원히 중단돼야 한다.또 이란의 탄도 미사일 프로그램도 해체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앞서 대선을 관리한 이란 내무부는 라이시가 1792만 6345표(약 61.9%)를 얻어, 경쟁 상대인 개혁파 압돌나세르 헴마티(242만 7201표·약 8.4%) 후보를 크게 앞섰다고 밝혔다. 혁명수비대 출신 모센 레자에이 후보는 341만 2712표(약 11.8%)로 3위를 차지했다. 전체 유권자 5931만 307명 중 2893만 3004명이 선거에 참여해 최종 투표율은 48.8%로 집계됐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치러진 대선 투표율 중 가장 낮다. 2017년 대선 투표율은 70%에 이르렀다. 투표율이 저조한 것은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의 영향에다 일부 보이콧 열풍이 겹쳐서다. 당선 확정 후 라이시는 취재진에게 “현 정부의 경험을 활용해 국가의 문제들을 푸는 데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며 특히 민생 문제를 챙기겠다”고 말했다. 로하니 대통령은 내무부 발표 직후 라이시를 찾아 회담하고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개혁파 후보 헴마티는 이날 인스타그램에 “제13대 대선에서 라이시 후보가 당선된 것을 축하한다. 당신(라이시)의 정부가 명예로운 이란인의 생계와 행복을 증진하기를 바란다”다고 썼다. 레자에이 후보도 이날 성명을 내고 라이시의 당선을 축하한다고 밝혔다.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는 “어제 승리의 위대한 승자는 이란 국민이다. 이란 국민은 적의 용병 역할을 하는 미디어의 프로파간다에 직면해 봉기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셰이크 무함마드 빈 라시드 알막툼 아랍에미리트(UAE) 총리 겸 두바이 군주 등도 라이시의 당선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임병선의 시시콜콜] 북 노동당에 신설된 제1비서 비상용? 위임정치용?

    [임병선의 시시콜콜] 북 노동당에 신설된 제1비서 비상용? 위임정치용?

    북한이 지난 1월 노동당 8차 대회에서 발표한 당 규약 개정과 관련해 지난 2일 조선 노동당에 정통한 국내 두 전문가 사이에 해석이 뚜렷이 갈려 눈길을 끌었다. 공교롭게도 세종연구소에서 나란히 근무하는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과 정성장 북한연구센터장이다. 정 센터장은 이날 오전 “김여정 부부장이 (신설된 당중앙위원회) 제1비서에 임명되려면 당 중앙위 비서직과 정치국 상무위원 또는 위원직에 먼저 선출됐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얼마 전 정치국 후보위원에서도 탈락했는데 논리적으로 모순이란 지적이다. 그는 또 “이 직책은 총비서를 제외하고 비서들 중 가장 서열이 높은 직책”이라며 “현재 북한의 비서들 중 이 직책에 임명됐거나 임명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은 조용원 당중앙위원회 조직비서 겸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이라고 분석했다. 그런데 이 전 장관은 이날 오후 통일부 출입기자들과 화상 간담회을 가지면서 “최고지도자의 신상과 관련한 비상상황 등을 염두에 둔 수령체제 안정성 확보 조처”라며 “대리인은 후계자와 후계자를 이어주는 인물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보인다. 대리인은 기본적으로 백두혈통만이 가능해 김여정 부부장이 유사시 제1비서로 등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제1비서 직이 공석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대부분의 인사 내용을 공개하는 북한 당국의 경향으로 볼 때 지정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또 조용원 조직비서가 제1비서직에 오를 가능성을 여러 언론이 제기한 데 대해선 “정치국 상무위원의 총비서 위임에 따른 정치국 회의 주재 조항이 별도로 있는 것으로 보아, 백두혈통이 아닌 조용원에게 대리인 권한을 부여할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정 센터장과 4일 오후 전화 인터뷰를 갖고 궁금한 점을 물었다. Q. 이 전 장관과 대립하는 것처럼 보여 부담스럽겠다. A. 내가 먼저 입장을 밝히고 이 전 장관이 나중에 말씀하셨는데 반대로 이 전 장관의 논지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내가 반박한 것처럼 소개돼 곤혹스럽다. 다만 논점의 차이는 뚜렷하다. 이 전 장관은 비상상황을 염두에 두고 조치한 것이라고 봤고, 난 통상적인 위임정치의 일환으로 봤다. 김 총비서는 모든 것을 틀어쥐고 인민과의 접촉보다 책상에서 문건으로 보고받고 결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 아버지 김정일과 많이 다르다. 아버지에게 충성하던 원로 군 간부들을 정리하고 현장에서 군을 이끌 수 있는 젊은 간부들로 물갈이한 것은 최룡해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책임을 부여했기에 가능했고 성공할 수 있었다. 경제에서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이 경쟁하게 하고 생산단위끼리 경쟁하게 만든 것도 관료 중에서 가장 혁신적이라 할 수 있는 박주봉에게 권한을 위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이 두 사안을 직접 챙겼더라면 각각 숙청이니 뭐니, 자본주의를 도입하려 한다는 비난과 의심을 자신이 뒤집어 썼을 것이다. 김정은은 아직 30대 후반이라 비상 상황을 염두에 둘 조치를 취할 필요도 없다. 백두혈통인 김여정을 제1비서에 앉힐 생각이었으면 연초에 후보위원에서 탈락시키지 않았어야 한다. 그보다는 과도한 업무 부담을 줄이고 자신은 핵심적인 정책 결정에만 집중하고 책임과 권한을 분산시키기 위한 조치라고 보는 것이 옳다. Q. 이 전 장관이 정리한 당 규약의 핵심 요소에는 공감하는지? A. 이 박사님은 “‘김정은 당’의 완성을 뜻하는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면서 ▲대남혁명노선 및 통일담론 쇠락 ▲선군정치의 소멸과 새 정치방식으로 인민대중제일주의 천명 ▲수령체제 안정성을 위한 제도적 조처로 제1 비서직 신설 ▲김정은 당의 완성과 노동당의 정통 마르크시즘 당으로의 부분 회귀 등을 중요한 변화로 손꼽았다. 김일성·김정일주의에 의존하던 것을 털어내고 선군정치에서 인민대중제일주의로 전환, 남조선혁명론에서 일국(북한)혁명론으로의 전환, 우리(조선)민족제일주의에서 우리국가제일주의로의 전환, 대안의 사업체계를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2019년 4월 개정 헌법 반영)로 전환 등을 꼽았다. 거의 동의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Q. 규약 개정된 내용 가운데 꼭 눈여겨봤으면 하는 것은? A. 서문의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 삭제는 단순한 문헌 상의 변화를 넘어 대남전략 변화 여부를 둘러싼 국내에서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어주는 의미가 있다는 이 전 장관의 평가에 동의한다. 그동안 공산주의란 말조차 쓰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노동당의 최종목적을 ‘온 사회의 김일성·김정일주의화’에서 ‘공산주의 사회 건설’로 명확히 못박은 것도 ‘우리국가제일주의’와 일맥상통하며 잘사는 남한과 별도의 길을 걷겠다는 일국주의 경향이 심화됐음을 보여준다. 김일성·김정일주의의 구속력을 약화시켜 현존의 유일한 수령으로서 자신이 정치를 주도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도 돋보인다. 그동안 주민들 사이에 헷갈린다는 얘기가 적지 않았는데 그런 요소들을 정리했다. 통일전선과 관련해 ‘남조선에서 미제의 침략무력을 몰아내고 온갖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끝장내며 일본 군국주의와 재침책동을 짓부시며 사회의 민주화와 생존의 권리를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적극 지지 성원하며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 평화, 통일,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조국을 통일하고 나라와 민족의 통일적 발전을 이룩하기 위하여 투쟁한다’는 표현이 ‘남조선에서 미제의 침략무력을 철거시키고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배를 종국적으로 청산하며 온갖 외세의 간섭을 철저히 배격하고 강력한 국방력으로 근원적인 군사적 위협들을 제압하여 조선반도의 안전과 평화적 환경을 수호하며 민족자주의 기치, 민족대단결의 기치를 높이 들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앞당기고 민족의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하여 투쟁한다’로 바뀌었다. 여전히 남한을 미국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보는 시각이 또렷하다. 조선 노동당 규약 개정 주요 내용과 비교 표 보러가기(모바일에서 안 되면 https://peacemaker.seoul.co.kr/etc/DPRK_reg_revision.pdf 조선 노동당 규약 전문 보러가기(모바일에서 안 되면 https://peacemaker.seoul.co.kr/etc/WPK_reg_full.pdf) 임병선 논설위원 겸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갑자기 물러난 ‘틱톡’ 38세 창업주… 마윈처럼 될까봐?

    갑자기 물러난 ‘틱톡’ 38세 창업주… 마윈처럼 될까봐?

    지난달 20일 중국에서 ‘빅뉴스’가 날아들었다. 짧은 동영상 공유 소셜미디어 틱톡(TikTok·글로벌 버전)과 더우인(音·중국 버전)으로 유명한 쯔제탸오둥(字節跳動)을 창업한 장이밍(張一鳴·38)이 올 연말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사내 공지를 통해 “수개월간 고민 끝에 CEO에서 물러나 회사의 장기적 계획에 좀더 집중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나는 혼자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면서 깊이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매일 사람들을 만나고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CEO의 직무와 잘 맞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마윈·핀둬둬 황정까지 부자 CEO 줄사퇴 중국에서 젊은 나이에 사업이 한창 잘나갈 때 손을 떼는 기업인들이 잇따르고 있다. 장 CEO에 앞서 중국 전자상거래업계 3위 핀둬둬(多多) 황정(黃·41) 창업자는 지난해 7월 CEO직을 내던진 데 이어 올 들어 회장직마저 내놨고, 2018년 9월에는 알리바바(阿里巴巴)그룹 마윈(馬雲·57) 창업자가 회장직에서 물러나는 등 연부역강한 CEO들이 줄줄이 퇴진하면서 주목받고 있다. 중국 경제매체 차이신(財新) 등에 따르면 장 CEO의 후임은 회사를 공동 창업한 량루보(梁汝波)에게 맡기기로 했다. 량루보는 회사의 인사(HR)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두 사람은 원활한 임무 교대를 위해 6개월간 함께 일할 예정이다. 비상장 기업인 만큼 주주 구성을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장 CEO가 쯔제탸오둥 지분을 20% 이상, 의결권을 50% 이상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향후 거취 등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1983년 푸젠(福建)성 출생인 장 CEO는 톈진(天津)시 난카이(南開)대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을 전공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스타트업 여러 곳을 거쳐 2012년 베이징에서 쯔제탸오둥을 창업했다. 쯔제탸오둥은 뉴스 앱 터우탸오(頭條)에 이어 더우인(틱톡)까지 연달아 성공시켰다. 틱톡은 미국 Z세대(10~20대)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국가안보를 이유로 들며 사용 금지까지 내렸다. 쯔제탸오둥은 동영상 소셜미디어 외에 뉴스 서비스 진르터우탸오(今日頭條), 온라인 교육 등이 주요 사업이며 전 세계에서 10만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다. 기업 가치는 2500억 달러(약 283조원)로 세계 최대 유니콘(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 스타트업)으로 꼽힌다. 특히 30대 후반의 장 CEO가 쯔제탸오둥이 기업공개(IPO·상장)를 앞둔 중차대한 시점에 갑작스럽게 사퇴를 결정한 것에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차이신에 따르면 쯔제탸오둥은 올해 2분기에 홍콩 증권거래소에 상장을 신청할 계획이다. 상장에 성공하면 쯔제탸오둥의 시가총액은 3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단숨에 텅쉰(騰訊·Tencent)과 알리바바에 이어 중국에서 세 번째로 시총이 많은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이런 만큼 그의 퇴진은 미스터리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중국 산업계에서는 중국 정부의 빅테크 기업에 대한 견제 강화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장 CEO의 퇴진이 불확실한 정치 환경과 관련됐다는 얘기다. 마윈 전 회장이 지난해 10월 상하이 금융포럼에서 금융 감독 당국을 비판한 뒤 공산당과 정부가 본격적인 ‘인터넷 공룡 길들이기’에 나서면서 중국 빅테크 기업들을 둘러싼 규제는 날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중국 당국은 지난달 알리바바그룹에 대해 3조원대 반독점 벌금을 부과했고, 디디추싱(滴滴出行)·메이퇀(美團) 등 정보기술(IT) 기업을 불러 ‘군기 잡기’에 나서고 있다. 인민은행 등 금융감독 기관은 지난달 ‘웨탄’(約談·예약 면담) 형식으로 중국의 인터넷 각 분야를 대표하는 테크 기업 관계자들을 소환해 금융 사업 자제를 요구했는데 쯔제탸오둥도 여기에 포함됐다. 이에 반발해 알리바바그룹의 최고 경쟁자로 떠오른 핀둬둬 황정 전 회장이 지난 3월 사임했다는 설이 유력하게 나돈다. 이런 탓인지는 몰라도 중국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에서는 ‘마윈: 이 녀석 어릴 때부터 똑똑하네’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마윈 전 회장이 실제로 한 말은 아니지만 현재 중국에서 빅테크 기업들의 경영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는 점을 애둘러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황 전 회장은 지난해 7월 기준으로 직접 보유 지분과 우호 지분을 합쳐 29.4%의 지분을 통제하고 있는 데다 차등의결권(보유 지분 이상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을 보유하고 있다. 덕분에 그의 보유 의결권은 80.7%로 거의 절대적인 수준이었다. 회장 사퇴로 주당 10배의 의결권을 갖는 차등의결권을 모두 잃게 됐다. ●“규제=분서갱유” 비판한 왕싱도 어려움 중국 내 배달대행업계 1위 메이퇀 왕싱(王興) 창업자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당국의 규제를 분서갱유(焚書坑儒)에 빗댄 한시를 올렸다가 곤욕을 치렀다. 왕 CEO는 지난 6일 트위터와 비슷한 중국 SNS인 판퍼우(飯否)에 당나라 시인 장갈(章碣)이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를 비판하려고 쓴 한시 ‘분서갱’(焚書坑)을 올렸다. 28자로 된 이 한시는 “책 태운 연기가 사라지기도 전에 동쪽 산에서 반란이 일어나니 유방과 항우는 원래부터 책을 읽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는 중국에서 체제 비판적인 시로 읽힌다. 왕 CEO가 이 시를 통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중국 공산당에 불만을 드러낸 것이라는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다. 장 CEO의 퇴진도 같은 맥락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회사 경영에 누구보다 열정적인 젊은 CEO들의 잇단 퇴진에 마윈 전 회장 퇴진 당시에 제기된 음모론을 떠올린다. 미 뉴욕타임스는 2018년 9월 마윈 전 회장의 퇴진 당시 “마 회장이 회장직에서 물러날 것이란 징조가 전혀 없었다”며 “은퇴를 결심하기까지 말 못 할 속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대만 자유시보(自由時報)는 ‘비명횡사(非命橫死)’라는 표현까지 써 가며 마 전 회장이 신변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퇴의 길을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자유시보의 당시 논리는 이랬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 계열’로 분류되는 마윈 전 회장이 시진핑 정권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2014년 9월 뉴욕증시에 상장한 알리바바에 장 전 주석 계열 인사들이 대거 포함되면서 마 전 회장도 장 전 주석 계열로 비쳐졌다. 중국 당국은 2015년 5월 중국 증시 폭락 사태를 두고 마 전 회장이 태자당(太子黨·혁명 원로 자제 그룹)을 도와 공매도(주식을 빌려 판 뒤 가격이 하락하면 그 주식을 사서 갚는 과정에서 시세 차익을 챙김)를 통해 대규모 시세 차익을 얻었다고 암묵적으로 비판했다. 마 전 회장은 장 전 주석의 손자 장즈청(江志成), 류윈산(劉雲山) 전 정치국 상무위원의 아들 류러페이(劉樂飛) 등 장쩌민 계열 인사들과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인사는 시진핑 정권 들어 ‘부패 척결’의 미명 아래 제거됐다. 류러페이는 2015년 10월 외화유출 및 불법 자금 수수 등의 혐의로 체포됐고, 장즈청은 권력 남용을 통해 1000억 위안대 재산을 모았다는 정황이 드러나 공안 당국에 붙잡혔다. 이들 외에도 시진핑 정권이 반부패 사정의 칼날을 겨눈 장쩌민 계열 기업인에는 우샤오후이(吳小暉) 전 안방보험 회장, 샤오젠화(肖建華) 밍톈(明天)그룹 회장, 천이(陳毅) 전 부총리의 아들 천샤오루(陳小魯), 프랑스에서 의문의 실족사한 왕젠(王健) 전 하이항(海航)그룹 회장 등이 꼽히고 있다. 자유시보는 시진핑 주석은 성장 둔화와 채무 압력, 자금 유출에 미중 무역 전쟁까지 겹치면서 이들을 부패 척결의 이름으로 숙청했다고 주장했다. khkim@seoul.co.kr ■이 기사는 서울신문 홈페이지에 연재 중인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goo.gl/sdFgOq)의 전문을 만날 수 있습니다.
  • 잘 나가는 중국 기업 젊은 총수들 돌연 퇴진 왜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잘 나가는 중국 기업 젊은 총수들 돌연 퇴진 왜 <김규환 기자의 차이나 스코프>

    지난 20일 중국에서 ‘빅 뉴스’가 날아들었다. 짧은 동영상 공유 소셜미디어 틱톡(TikTok·글로벌 버전)과 더우인(?音·중국 버전)으로 유명한 쯔제탸오둥(字節跳動·ByteDance)를 창업한 장이밍(張一鳴·38)이 올 연말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사내 공지를 통해 “수개월 간 고민 끝에 CEO에서 물러나 회사의 장기적 계획에 좀 더 집중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나는 혼자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면서 깊이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매일 사람들을 만나고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CEO의 직무와 잘 맞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중국에서 젊은 나이에, 사업이 한창 잘 나갈 때 손을 떼는 기업인들이 잇따르고 있다. 장 CEO에 앞서 중국 전자상거래업계 3위 핀둬둬(拼多多) 황정(黃崢·41) 창업자는 지난해 7월에 CEO직을 내던진데 이어 올들어 회장직마저 내놨고, 2018년 9월에는 알리바바(阿里巴巴)그룹 마윈(馬雲·54) 창업자가 회장직에서 물러나는 등 연부역강한 CEO들이 줄줄이 퇴진하면서 주목받고 있다. 중국 경제매체 차이신(財新) 등에 따르면 장 CEO의 후임은 회사를 공동 창업한 량루보(梁汝波)에게 맡기기로 했다. 량루보는 회사의 인사(HR)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두 사람은 원활한 임무 교대를 위해 6개월 간 함께 일할 예정이다. 비상장 기업인 만큼 주주 구성을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장 CEO가 쯔제탸오둥 지분을 20% 이상, 의결권은 50% 이상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향후 거취 등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1983년 푸젠(福建)성 출생인 장 CEO는 톈진(天津)시 난카이(南開)대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을 전공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스타트업 여러 곳을 거쳐 2012년 베이징에서 쯔제탸오둥을 창업했다. 쯔제탸오둥은 뉴스 앱 터우탸오(頭條)에 이어 더우인(틱톡)까지 연달아 성공시켰다. 틱톡은 미국 Z세대(10~20대)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국가안보를 이유로 들며 사용 금지까지 내렸다. 쯔제탸오둥은 동영상 소셜미디어 외에 뉴스 서비스 진르터우타오(今日頭條), 온라인 교육 등이 주요 사업이며 전 세계에서 10만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다. 기업가치는 2500억 달러(약 283조원)로 세계 최대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으로 꼽힌다. 특히 장 CEO가 30대 후반의 나이에 쯔제탸오둥이 기업공개(IPO·상장)를 앞둔 중차대한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사퇴를 결정한 것에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차이신에 따르면 쯔제탸오둥은 올해 2분기에 홍콩 증권거래소에 상장을 신청할 계획이다. 상장에 성공하면 쯔제탸오둥의 시가총액은 3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단숨에 텅쉰(騰訊·Tencent)과 알리바바에 이어 중국에서 세 번째로 시총이 많은 빅테크(대형 정보기술)기업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이런 만큼 그의 퇴진은 미스터리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중국 산업계에서는 중국 정부의 빅테크기업에 대한 견제 강화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장 CEO의 퇴진이 불확실한 정치 환경과 관련됐다는 얘기다. 마윈 전 화장이 지난해 10월 상하이 금융포럼에서 금융감독 당국을 비판한 뒤 공산당과 정부가 본격적인 ‘인터넷 공룡 길들이기’에 나서면서 중국 빅테크 기업들을 둘러싼 규제는 날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중국 당국은 지난달 알리바바그룹에 대해 3조원대 반독점 벌금을 부과했고, 디디추싱(滴滴出行)·메이퇀(美團) 등 정보기술(IT) 기업을 불러 ‘군기 잡기’에 나서고 있다. 인민은행 등 금융감독 기관은 지난달 ‘웨탄’(約談·예약 면담) 형식으로 중국의 인터넷 각 분야를 대표하는 테크기업 관계자들을 소환해 금융 사업 자제를 요구했는데 쯔제탸오둥도 여기에 포함됐다. 이에 반발해 알리바바그룹의 최고 경쟁자로 떠오른 핀둬둬 황정 전 회장이 지난 3월 사임했다는 설이 유력하게 나돈다.상황이 이런 탓인지는 몰라도 중국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에서는 ‘마윈:이 녀석 어릴 때부터 똑똑하네’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마윈 전 회장이 실제로 한 말은 아니지만 현재 중국에서 빅테크기업들의 경영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는 점을 애둘러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황 전 회장은 지난해 7월 기준으로 직접 보유 지분과 우호 지분을 합쳐 29.4%의 지분을 통제하고 있는 데다 차등의결권(보유 지분 이상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을 보유하고 있다. 덕분에 그가 보유 의결권은 80.7%로 거의 절대적인 수준이었다. 회장 사퇴로 한 주당 10배의 의결권을 갖는 차등의결권을 모두 잃게 됐다. 중국 내 배달대행업계 1위 메이퇀 왕싱(王興) 창업자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당국의 규제를 ‘분서갱유’(焚書坑儒)에 빗댄 한시를 올렸다가 곤욕을 치렀다. 왕 CEO는 지난 6일 트위터와 비슷한 중국 SNS인 판퍼우(飯否)에 당나라 시인 장갈(章碣)이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를 비판하려고 쓴 한시 ‘분서갱’(焚書坑)을 올렸다. 28자로 된 이 한시는 “책 태운 연기가 사라지기도 전에 동쪽 산에서 반란이 일어나니 유방과 항우는 원래부터 책을 읽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는 중국에서 체제 비판적인 시로 읽힌다. 왕 CEO가 이 시를 통해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중국 공산당에 불만을 드러낸 것이라는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다. 장 CEO의 퇴진도 같은 맥락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젊은 CEO들이 회사 경영에 누구보다 열정적이다 보니 이들의 잇단 퇴진에 일각에서는 음모론을 제기한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2018년 9월 당시 마윈 알리바바 전 회장의 퇴진에 대해 “마 회장이 회장직에서 물러날 것이란 징조가 전혀 없었다”며 “은퇴를 결심하기까지 말 못 할 속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대만 자유시보(自由時報)는 ‘비명횡사(非命橫死)’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마 회장이 신변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사퇴의 길을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자유시보의 논리는 이렇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 계열’로 분류되는 마윈 전 회장이 시진핑 정권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2014년 9월 뉴욕증시에 상장한 알리바바그룹에 장 전 총서기의 계열 인사들이 대거 포함되면서 마 회장도 장 전 총서기 계열로 비쳐졌다. 중국 당국은 2015년 5월 중국 증시 폭락사태를 두고 마 회장이 태자당(太子黨·혁명 원로 자제 그룹)을 도와 공매도(주식을 빌려 판 뒤 가격이 하락하면 그 주식을 사서 갚는 과정에서 시세사익을 챙김)를 통해 대규모 시세 차익을 얻었다고 암묵적으로 비판했다. 마 회장은 장 전 주석의 손자 장즈청(江志成), 류윈산(劉雲山) 전 정치국 상무위원의 아들 류러페이(劉樂飛) 등 장쩌민 계열 인사들과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인사들은 시진핑 정권 들어 ‘부패 척결’의 미명 아래 제거됐다. 류러페이는 2015년 10월 외화유출 및 불법 자금 수수 등 혐의로 체포됐고, 장즈청은 권력 남용을 통해 1000억 위안대 재산을 모았다는 정황이 드러나 공안 당국에 붙잡혔다. 이들 외에도 시진핑 정권이 반부패 사정 칼날을 겨눈 장쩌민 계열 기업인에는 우샤오후이(吳小暉) 전 안방보험 회장, 왕젠린 (王健林) 완다(萬達)그룹 회장, 샤오젠화(肖建華) 밍톈(明天)그룹 회장 등이 꼽히고 있다. 자유시보는 시진핑 주석은 성장 둔화와 채무 압력, 자금 유출에 미중 무역 전쟁까지 겹치면서 샤오 회장과 우 회장, 왕 회장과 함께 천이(陳毅) 전 부총리의 아들 천샤오루(陳小魯), 왕젠(王健) 전 하이항(海航) 그룹 회장 등을 부패 척결의 이름으로 숙청했다고 주장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글로벌 In&Out] 북한 정권 두려움의 대상, 평양시민/피터 워드 북한 전문 칼럼니스트

    [글로벌 In&Out] 북한 정권 두려움의 대상, 평양시민/피터 워드 북한 전문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국방부 국방백서에 따르면 100만명이 넘는 북한군은 전 세계적으로 인구 대비 가장 큰 군대라는 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왜 묘할까? 일단 군대가 크면 클수록 좋다는 낙후된 인식이 몇십 년간 이어져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인력의 양보다 질이 중요하며 기술 또한 갈수록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북한군은 수도권에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지만 현재 남한에 주는 위협보다도 북한 지도부에 줄 수 있는 위험이 더 클지도 모른다. 한국 군대에 42년 전까지만 해도 쿠데타가 있었듯이 북한군 역사에서도 군란과 쿠데타의 전통이 있다. 물론 과장과 숙청을 구실로 가득한 가짜 전통일지도 모른다. 기록으로 보면 1958년 연안파 장성들의 군란 모의, 1968년 군부 강경파 사건, 1992년 프룬제 유학파 쿠데타 모의, 1996년 6군단 사건이 있었으며 2013년에는 인민군 총참모장 리영호가 “경애하는 최고 사령관 동지의 믿음을 헌신짝처럼 저버린 의리 없는 인간”이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숙청당했다. 북한에서 군대라는 존재는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강력하면서도 유일한 존재이다. ‘수령 옹위’를 담당하는 호위사령부가 군대와 개별적으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총정치국에 소속된 정치 장교마저 각 군부대에 파견돼 일반 장성들의 ‘정치 동향’을 감시한다. 그렇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현재 북한 당국은 북한 청년들(14~29세)을 더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지난주 노동신문에 투고된 사회주의 청년동맹에 보낸 김정은의 서한을 보면 북한 청년들에 대한 걱정이 많이 나타난다. 공산주의 같은 밝은 미래를 다시 강조하는 김정은은 다음 5년 동안 경제발전을 촉구하는 것과 더불어 “15년 안팎에 전체 인민이 행복을 누리는 륭성번영하는 사회주의 강국을 일떠세우자”라며 뒤늦게라도 북한 경제를 되살리겠다고 밝혔다.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동시에 현재 소위 비사회주의 ‘문제’들을 지적하면서 “언어례절, 인사례절”과 “이색적인 생활풍조” 등 여러 문제점을 거론하기도 했다. 특히 언어와 인사의 예절은 한국식 표현의 사용을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보였다. 북한 당국은 조직 강화와 고강도 투쟁을 통해 이러한 ‘문제’들을 없애겠다는 방안을 마련했다. 연초에 데일리엔케이(DailyNK)에서 단독 입수한 설명자료에 따르면 작년 말에 채택된 반동문화배격법에서 남한 문화 콘텐츠를 보거나 공유하는 경우 사형까지 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북한 내부가 전혀 통제되지 않고 있다는 현실을 보여 준다. 또한 사형까지 내세워 협박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매우 절박한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뿐만 아니다. 20~30대를 포함, 평양시민은 가장 무서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특히나 현재 김정은의 지도행태를 보면 평양에 대한 걱정이 매우 크다. 주택난이라든가 의료시설 문제 등 코로나 위기 동안 중요한 국책 사업을 평양에 집중해 왔다. 경제위기가 타개되지 않는다면 평양 시민의 이탈이 나타날 수 있으니, 이를 방지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다른 곳에서 청년이 이탈돼 민란을 일으키면 군사를 동원해 막아낼 수 있으나 민란의 주체가 평양 시민이 되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뜻이다. 평양시민이 곧 한국의 ‘1987년 넥타이 부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재 북한은 평양 국책 사업에서 볼 수 있듯 코로나 위기 속에서 권력기반을 튼튼히 꾸리고자 한다. 수도인 평양시민에 대해서도 중장기적으로 걱정하고 있다. 현재 아파트 건설 및 종합병원과 관련된 김정은의 민생 행보를 볼 때 단기적으로 정권 위협까지 걱정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평양시민의 점진적 이탈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하는 조치로 봐야 한다.
  • [글로벌 In&Out] 사료, 마오쩌둥선집 그리고 북한사 연구/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글로벌 In&Out] 사료, 마오쩌둥선집 그리고 북한사 연구/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역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료(史料)이다. 사료를 고찰하고 실증해 사실(史實)을 밝히는 것이 가장 전통적인 연구방법이다. 타임머신이 발명되지 않은 이상 자연과학과 달리 실험이 불가능한 역사학은 사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학의 이러한 한계는 정치적으로 많이 이용돼 왔다. 사료가 특정 사람이나 집단을 보호하거나 사상적 투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무기로서 사용되면서 크게 수정하거나 아예 위조됐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라는 교리를 직설적으로 서술하고 치열한 내부 논쟁을 멈추기 위해 성경에 삽입된 ‘요한의 콤마’가 대표적 사례이다. 필자가 하는 한중일 사회주의운동 역사 연구에서도 이러한 문제가 자주 나타난다. 중국의 마오쩌둥의 경우를 살펴보자.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에 의해 수립됐다. 12월 16일, 마오는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과 회담을 가졌다. 중국의 정치, 경제, 군사 등에 대해서 합의한 후 스탈린은 마오쩌둥 저작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것에 대해 물었다. 이 질문에 당황한 마오는 그 저작은 오류가 많아 수정할 필요가 있다면서 중국어 원문 편집까지 도와줄 것을 소련에 요청했고 스탈린은 동의했다. 1950년 5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마오쩌둥선집편집위원회’를 설립했다. 1951년 10월, 마오쩌둥선집 제1권을 시작으로 총5권까지 출판됐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의 저작을 수록한 선집은 중국 국내외에 인기가 많았으며 중국혁명사연구의 기본 사료로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중국이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진짜 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하기 위해 반항의 자유를 맛본 홍위병 조직들은 반동분자라는 죄목으로 숙청당한 사람들의 이름을 제외하고 마오쩌둥 저작들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수록한 ‘마오쩌둥 사상 만세’라는 시리즈의 책들을 비밀리에 출판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중공은 이 책들의 인쇄를 금지했으나 ‘마오쩌둥 사상 만세’는 해외로 유출돼 버렸다. 이 자료를 접하게 된 일본 학자들은 마오쩌둥 저작의 연구에 들어갔으며 1970년대 총 10권으로 구성된 ‘마오쩌둥집(集)’을 출판했고 1980년대에는 연구를 한층 더 심화해 제2판까지 발표했다. 중국의 마오쩌둥선집에 수록된 글과 비교한 결과 1950년대 편집 과정에서 중공이 원문 내용의 50% 이상을 삭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선집은 사료적 가치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일본 학자의 노력은 마오쩌둥 사상을 규명하는 역사학적 연구가 비로소 가능하게 했고 전 세계의 중국혁명 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면 북한사 연구는 어떠한가? 북한이 발행한 ‘김일성전집’은 원문 왜곡에서 ‘마오쩌둥선집’의 수준을 크게 초월했다. 김일성은 마오쩌둥과 달리 항일투쟁 초기에 논문을 쓰는 것보다 유격활동에 더 집중했기 때문에 1945년 해방 이전에는 저작이 거의 없다. 해방 직후에도 소련군정의 영향과 간섭을 많이 받아서 완전히 독립한 활동을 하는 것이 어려웠다. 때문에 한국전쟁 직후 주체사상을 내세운 북한은 김일성이 해방과 새로운 조선의 건설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국가와 정권의 정통성을 세계공산주의 운동이 아니라 김일성의 혁명활동에서 찾기 시작한 북한의 학자들은 김일성전집을 발행하면서 김일성의 연설문 등 저작들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거나 아예 조작했다. 김일성의 저작에서 소련군과 스탈린에 대한 칭찬이 사라진 것뿐만 아니라 당시 역사적 배경을 감안하면 전혀 있을 수 없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김일성전집에 대한 사료 비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일부 북한사 연구자들도 이에 수록된 자료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 “조선의 건국영웅분들”…‘조선구마사’ 박계옥 작가, 사과문도 논란

    “조선의 건국영웅분들”…‘조선구마사’ 박계옥 작가, 사과문도 논란

    역사 왜곡 논란으로 퇴출당한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의 박계옥 작가가 공식 사과했지만, 그의 사과문 역시 개운치 않게 뒷말을 낳고 있다. ‘조선구마사’를 집필한 박계옥 작가는 지난 27일 공식입장문에서 “저의 사려 깊지 못한 글쓰기로 지난 며칠 동안 시청자 여러분께 깊은 심려를 끼친 점 진심으로 사죄드린다”고 밝혔다. 그는 “많은 시청자분들께서 염려하시고 우려하셨던 의도적인 역사 왜곡은 추호도 의도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박계옥 작가가 친중국 성향을 숨긴 채 역사를 왜곡해 결과적으로 동북공정을 거든 것 아니냐는 시선을 부인한 것이다. 그러나 소셜미디어와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박계옥 작가의 사과문 역시 어색하고 위화감이 든다는 의견이 적잖게 나오고 있다. 특히 사과문 중 “역사 속 큰 족적을 남기셨던 조선의 건국 영웅 분들에 대해 충분한 존경심을 드러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라는 구절이 어색하다는 지적이 많았다.‘조선구마사’에서 인물 묘사와 관련해 가장 크게 논란이 됐던 부분은 태종 이방원과 훗날 세종이 될 충녕대군을 그린 방식이다. ‘조선구마사’ 속 태종(감우성 분)은 승하한 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모습을 환각으로 본 뒤 검을 휘두르는데 그 바람에 죄없는 양민들이 도륙당한다. 비록 실제 역사 속 태종이 건국과 즉위, 후계 과정에서 고려 유신과 정적, 권신과 외척을 과감히 숙청한 사실은 있지만, 백성을 상대로 잔악한 통치를 한 왕은 절대 아니었다. 또 드라마에서 충녕대군(장동윤 분)이 6대조 목조를 “기생 때문에 삼척으로 야반도주를 하셨던 분인데 그 피가 어디 가겠냐”고 말한 부분 역시 훈민정음 창제 뒤 용비어천가를 지어 왕실 선조들을 찬양했던 세종대왕의 행적과 어긋난 대목이었다.이처럼 역사 왜곡을 지적하고 비판했던 것인데 작가는 태종·세종을 ‘조선의 건국 영웅분’이라 칭하며 “충분한 존경심”을 드러내지 않아 잘못했다고 사과한 것이다. 오늘날 일반 상식을 가진 국민들은 태종과 세종대왕의 업적을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것이지 그들을 ‘조선 건국 영웅’으로서 존경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세종대왕은 조선 건국에 관여하지도 않았다. 이에 네티즌들은 “한국인 중 누가 ‘조선의 건국 영웅’이라는 말을 쓰느냐”고 지적했다. 이질감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한 네티즌은 “‘조선구마사’가 비판을 받은 것은 역사를 왜곡했기 때문이지 존경심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라며 “언제 존경심을 보이라고 했나. 인물들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조선의 건국 영웅’을 굳이 ‘조선의 건국 영웅분들’이라고 표현한 데에서 비아냥거림이 느껴진다는 의견도 있었다. 전날 박계옥 작가 외에도 드라마를 연출한 신경수 PD와 배우 감우성, 장동윤, 이유비, 박성훈 등이 잇따라 사과문을 올렸다. ‘조선구마사’는 역사 왜곡 문제로 2회 만에 종영하는 사상 초유의 불명예를 남기며 폐지됐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박계옥 작가 입장문 전문 ‘조선구마사’ 작가 박계옥입니다. 저의 사려 깊지 못한 글쓰기로 지난 며칠 동안 시청자 여러분께 깊은 심려를 끼친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드라마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데 있어서 가장 맨 앞에 서 있는 작가로서 지난 잘못들을 거울삼아 더 좋은 이야기를 보여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안일하고 미숙한 판단으로 오히려 시청자 여러분들께 분노와 피로감을 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역사 속 큰 족적을 남기셨던 조선의 건국 영웅 분들에 대해 충분한 존경심을 드러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판타지물이라는 장르에 기대어 안이한 판단을 한 점에 대해서도 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많은 시청자 분들께서 염려하시고 우려하셨던 의도적인 역사 왜곡은 추호도 의도한 적이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여러분께 깊은 상처를 남긴 점 역시 뼈에 새기는 심정으로 기억하고 잊지 않겠습니다. 현장에서 좋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해왔던 감독님, 배우님, 스탭 여러분. 그리고 제작사와 방송사에도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다시 한번 시청자 여러분께 온 마음을 다해 사죄드립니다.
  • [글로벌 In&Out] 3·8국제부녀절과 북한/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글로벌 In&Out] 3·8국제부녀절과 북한/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북한은 기념일이 많은 나라이다.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에서 ‘명절’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첫 번째 뜻으로 ‘나라와 민족에 의의 깊고 경사스러운 날로서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경축, 기념하는 날’이라는 말이 나온다. 공휴일은 아니지만 3·1운동을 기념하는 ‘반일인민봉기일’이나 1947년 8월 20일 김일성이 북한 역사상 최초의 비행대를 창설한 것을 기념하는 ‘공군절’ 같은 기념일들이 가장 대표적이다. 하지만 북한은 이러한 민족적 기념일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도입된 국제기념일도 있다. 보통 사회주의 명절이라 하면 제일 먼저 꼽히는 것이 5·1 노동절이지만 한 가지 더 대표적인 것이 있다. 바로 여성의 날, 일명 ‘3·8국제부녀절’이다. ‘여성의 날’의 역사는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요일이었던 1909년 2월 28일, 미국 사회당이 여성의 날을 처음 선포하고 전국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 후 여성의 날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도 퍼졌으며 국제적인 기념일로 승격됐다.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들은 당시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린 1917년 3월 8일(구력 2월 23일) 러시아 2월 혁명의 배경까지 됐다. 하지만 2월 혁명이 러시아 국민의 염원에 응답하지 못하자 10월 혁명이 일어나 레닌을 수반으로 하는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됐다. 사상 최초 노농정권인 레닌 정부는 1919년 이를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고 ‘국제 근로여성의 날’이라 명명했다. 여성의 날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20년대이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러시아 혁명을 비롯한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모체였던 염군사가 1924년 3월 8일 종로 청년회관에서 ‘국제 부인 데이 기념강연’의 개최를 시도했으나 일제경찰에 의해 해산됐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이 국제부인절을 계속 기념해 나갔다. 해방이 되자 상황은 급변했다. 국제 여성의 날을 공식화하려던 지식인들의 노력이 남한에서 미군정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북한에서는 반대로 소련군의 지지와 지원을 얻었다. 1946년 3월 8일,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기관지인 ‘정로’에서 국제부녀절을 기념하는 일련의 기사가 발표되고 일부 지역에서 각종 행사도 진행됐다. 공산당 기관지이지만, 김일성이나 당을 찬양하는 내용이 극히 적었다. 재미있게도 북한에서 명절의 국제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기념일이 유럽에서 등장한 1911년을 원년으로 해서 해마다 ‘3·8국제부녀절 ○○돐’이라고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북한에서 국제부녀절의 의미도 변화했다. 1920년대 한반도에 들어온 국제부녀절은 근대화의 상징으로 봉건적 전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1945~1948년 건국 시기의 북한은 민족의 통일과 ‘민주국가 건설에 민족영웅’이 돼야 한다는 뜻이 강조되고 있었다. 한국전쟁 직후 북한 국제부녀절 행사에서는 북한 여성들도 사회주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선전이 비교적 강했다. 북한이 기념하는 국제부녀절의 특징이 한국전쟁 이후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0~1960년대 초 국내·소련·연안파가 숙청되고 김일성의 우상화가 진행된다. 1960년대 유일사상체계가 확립되면서 여성의 날은 여성 해방뿐만 아니라 김일성의 혁명활동과 관련된다. 이 과정이 본격화되면서 1970년대 이후 여성 해방이 김일성의 송가로 바뀐다. 이러한 추세는 나날이 강화되면서 오늘날까지 지속돼 왔다. 2020년 3월 8일 노동신문이 북한의 여성을 ‘영도자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심을 지니고 일편단심 충직하게 받들어 나가는 참된 혁명가’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변화가 얼마나 컸는지 느낄 수 있다.
  • 비판이 잠든 순간 독재가 깨어난다

    비판이 잠든 순간 독재가 깨어난다

    체제 유지 성공 독재자 8명 분석언론 장악·진실 왜곡·미화 작업반대파마저 거짓 숭배 동참하며불신·감시·충성 경쟁만 남게 돼 비판·바른 조언만이 독재자 위협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자 그의 거대한 동상이 서 있는 만수대에 모인 북한 주민들은 마치 경쟁하듯 슬퍼했다. 가슴을 손으로 마구 내리치며 비통해하는 이들도 있었고, 심지어 졸도해 쓰러지기도 했다. 이들의 눈물은 진짜였을까. 프랑크 디쾨터 홍콩대 인문학 석좌교수의 ‘독재자가 되는 법’은 효과적으로 체제를 유지한 8명의 독재자를 분석한다. 이들은 무솔리니,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뒤발리에, 차우셰스쿠, 멩기스투다. 권력을 얻은 자들 대부분이 피비린내 나는 숙청, 교묘한 속임수, 혹은 각개 격파로 정적을 제거했다. 저자는 이런 방법에 관해 “일시적이나마 권좌를 유지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이 독재자들에게서 보통의 권력자들과 결정적인 차이를 찾는다. 바로 강력한 개인숭배다. 저자는 독재자들이 개인숭배를 받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우선 언론 장악이 필수다. 무솔리니는 로마 진격 직후 반대 목소리를 내는 신문사의 인쇄기부터 파괴하고, 자신에게 호의적인 언론에 막대한 자금을 줬다. 나팔수 언론은 무솔리니를 영웅으로 추켜세웠다.진실을 왜곡하고 독재자를 미화하는 작업이 이어진다. 예컨대 히틀러에게는 전속사진가인 하인리히 호프만이 있었다. 히틀러의 신봉자인 요제프 괴벨스 나치스 선전장관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때론 외국인을 끌어들여 대외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마오쩌둥은 기자 에드거 스노를 초대해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혁명가로서 각색한 이력을 들려줬다. 스노가 1937년 출간한 ‘중국의 붉은 별’에는 마오쩌둥이 독서광이자 천재인 데다가 탁월한 군사·정치적 전략가라는 내용이 담겼다. 독재자를 미화하고 찬양한다고 국민들이 이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다. 개인숭배를 거부하거나 비판하는 이들에게 가혹한 폭력을 가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저자는 특히 “개인숭배를 시키는 목적은 설득이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측근이건 반대파건 독재자를 칭송하도록 해 모두를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게 핵심이었다. 개인숭배를 거부하면 숙청당하기 때문에 거짓으로라도 따라야 한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되면, 반대파는 독재자에게 반대하는 공모자를 찾아내기 어렵다. 결국 서로를 불신하고 감시할 수밖에 없고, 독재자를 향한 충성 경쟁에 매달리게 된다. 독재자의 말로는 한결같이 비참하다. 자신을 반신이라 믿었던 히틀러는 자살했고, 차우셰스쿠는 생방송 도중 야유와 함께 순식간에 몰락했다. 나라 곳곳에 세운 스탈린 동상은 성난 시민들에 의해 내동댕이당했다.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북한 주민들이 슬퍼한 까닭은 슬퍼서가 아니라 비밀경찰들이 이들을 감시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권력자를 무조건 옹호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그의 눈은 멀게 마련이다. 이른바 ‘문빠’나 ‘대깨문’ 같은 단어가 섬뜩하게 들리고, ‘대통령의 괴벨스’를 자처하는 이들의 득세가 우려스런 이유다. 독재자가 생겨나는 것을 막는 장치는 결국 비판이다. 권력자 주변에 바른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사라지면 아첨꾼만 남는다. 성난 국민이 혁명을 일으키고 권력자를 끌어내리는 일, 우린 이미 몇 차례 겪었다. “결국 독재자에게 가장 큰 위협은 국민과 독재자 자신”이라는 저자의 마지막 말이 특히 와닿는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한인애국단 핵심 3인방 중 ‘여전사’… 윤봉길·이봉창 의거 숨은 조력

    한인애국단 핵심 3인방 중 ‘여전사’… 윤봉길·이봉창 의거 숨은 조력

    1919년 14살 나이에 평양 3·1운동 참여상하이 김구 찾아가 ‘밀정’ 처단 등 앞장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와 이념 갈등 심화‘백범일지’에도 독립운동 전혀 언급 없어 김원봉 창건 조선의용군 ‘부녀대장’ 맡아6·25땐 인민군으로 참전해 남한서 외면이화림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독립운동가가 있다. 이화림은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함께 백범 김구 선생이 만든 한인애국단의 핵심 3인방 중 한 사람이었다. 두 의사를 도와 의거를 성공으로 이끈 이화림은 공식적으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화림의 역할이 조역(助役)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이화림은 님 웨일스의 ‘아리랑’ 주인공이자 동갑내기인 김산과 자주 비교된다. 1932년 4월 29일 아침 중국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기념행사 겸 일본의 상하이 침공 승리 기념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봄 코트를 입은 남자와 양장 차림을 한 젊은 여인이 식장 입구에 나타났다. 도시락과 물통을 든 남자가 행사장 안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을 100m 떨어진 곳에서 확인한 여인은 골목으로 사라졌다. 남자는 윤봉길 의사였고 윤봉길이 삼엄한 검문검색을 통과하도록 도운 27세의 여성이 바로 이화림이었다. 기념식이 시작되자마자 요인들이 늘어선 단상으로 윤 의사가 던진 물병 폭탄으로 식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상하이 일본인 거류민단장과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가 즉사했다. 중장 노무라는 눈을 잃었다. 일본 패전 후 미주리함에서 일본 외무대신 자격으로 항복문서에 조인했던 시미게쓰 당시 주중 공사 등 수십명은 중상을 입었다.●윤봉길 의사 훙커우공원 검문검색 통과 도와 거사 직전 이화림은 세 살 적은 윤봉길과 김구 앞에서 애국단 단원으로서 선서를 했다. 원래 윤봉길과 이화림은 부부로 변장해 식장에 들어가기로 했었다. 두 사람은 사전답사를 하며 거사 지점까지 잡아 놓았다. 그러나 둘이 함께 움직이면 발각될 염려가 있다는 김구의 의견에 따라 윤 의사 혼자 거사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이화림은 훗날 회고록에서 “추풍낙엽이 지듯이 일본놈들이 우수수 떨어졌다”고 썼다. 석 달 전 이화림은 이봉창 의사의 의거도 도왔다. 이봉창은 일왕을 폭탄으로 죽일 계획을 세웠는데 문제는 폭탄을 일본으로 몰래 갖고 갈 방법이었다. 김구와 이봉창, 이화림이 밤새 고민한 끝에 생각해 낸 방법이 이봉창의 속옷(훈도시)에 숨겨 가는 것이었다. 이봉창의 속옷에 비밀 주머니를 달아 준 이가 이화림이었다. 그 덕에 이봉창은 삼엄한 감시를 뚫고 대한해협을 건널 수 있었다. 이봉창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화림은 오열했다.이화림은 1905년 1월 6일 평양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춘실이며 두 오빠도 일찍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화림도 14세의 나이에 3·1운동에 참여하며 항일운동에 뜻을 두었다. 중학교를 거쳐 평양 유치원교원학교를 나와 유치원 교사로 잠시 일하며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하던 이화림이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것은 1930년이었다. 망명을 앞둔 막내딸 이화림에게 어머니는 눈물을 감추고 정몽주를 떠올리는 시를 선물로 주며 격려했다. “나는 죽을지언정 굴복하지 않고 영원히 앞으로 나아가리라. 비록 내가 죽을지라도 나의 영혼은 영원히 인간 세상에 존재할 것이다.” 상하이로 간 이화림은 김구가 만든 한인애국단에 가입해 김구와 함께 조선인 밀정을 죽이기도 했다. 그러고는 거사를 벌일 기회를 엿보았다. 두 의사의 의거 후 이화림은 김구를 떠났다. 테러가 아닌 조직적인 무장 투쟁만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우파인 김구도 코뮤니스트인 이화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화림은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의 추천으로 광저우 중산대학에 입학했다. 법대에 들어갔다가 몇 년 후 신분을 감추기 용이한 의대로 바꾸었다. 1935년 의열단을 포함한 좌익 계열의 조선민족혁명당이 결성됐고 윤세주의 연설에 감동한 이화림은 1937년 1월 민혁당에 가입했다. 1938년 10월 김원봉이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를 창건하자 이화림은 부녀대(부녀복무단) 부대장을 맡았다. 대장은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이었다. 조선의용군은 좌파 연합인 조선민족전선 산하의 한인 군사조직이었다. 조선의용군은 적을 상대로 한 선전 활동, 포로 신문 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전투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에 배속된 선전대여서 대원들은 국민당의 소극적인 항일 투쟁에 불만이 많았다. 그런 이유 등으로 조선의용군은 1939년 10월 화베이행을 결정한다. 의용군은 모택동의 팔로군 지휘 아래 타이항산맥에서 일본군과 싸웠다.●“이화림은 혁명에 충직했던 여류혁명가” 이화림은 일본군 바로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었고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 선전과 삐라 살포에 앞장섰다. 체구는 작았지만 남자보다 용감했다. 중산대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진광화의 소개로 간부훈련반을 마친 이화림은 부녀대장이 됐다. 진광화는 타이항산맥 전투에서 윤세주와 함께 전사했다. 당돌한 이화림이 남자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조선의용군 출신 최후의 분대장이자 옌볜 작가였던 김학철의 책에 쓰여 있다. 이화림을 곁에서 지켜봤던 김학철은 이화림을 혁명에 충직했던 여전사이며 여류혁명가라고 평가했다. 중산대학 법대생 김창국과 결혼했다 이혼한 이화림은 이집중(본명 이종희)과 재혼했다. 이집중은 조선총독부의 밀정이며 김활란의 형부인 김달하를 중국에서 처단한 인물이다. 공산주의자라기보다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던 이집중은 화북행을 거부하고 김원봉과 함께 한국 광복군으로 편입됐다. 이런 이념적 차이 등이 원인이 돼 이화림은 또 이혼했다. 이후 이화림은 조선의용군 병원에서도 일했고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1월에는 혁명사업의 일환으로 의학 공부를 해야 한다는 명을 받아 중국의과대학에 들어갔다. 의대 재학 중에 종전이 됐고 이화림은 학업을 계속해 의대를 마쳤다. 중국에 있던 한인 항일운동가들이 광복 후 남북으로 갈라진 조국의 한 곳을 택해 귀국했지만 이화림은 중국에 남았다. 이화림은 옌볜의학원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하얼빈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그럴 즈음 6·25가 터지자 조선인민군 제6군단 위생소 소장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폭격으로 부상을 당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선양의사학교 부교장, 중국 교통부 위생기술과 간부, 옌볜 조선족 자치주 위생국 부국장 등 주로 만주의 공공 의료 분야에서 조선족을 위해 일했다. 중국의 극좌 사회주의 운동인 문화혁명을 이화림도 피해 가지 못했다. 이화림은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혀 고초를 겪었다. 마오쩌둥 사후 이화림은 명예를 회복했지만 건강이 악화됐다. 말년을 다롄에서 요양하던 이화림은 1999년 2월 10일 세상을 떠났다.●中 문화혁명 때 ‘반혁명분자’ 낙인찍혀 고초 이화림의 조선족 사랑은 지극했다. 검소하게 살며 모은 돈으로 조선족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 거금을 기부했고 조선족 아동문학작가들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기도 했다. 임종 직전에도 자신의 전 재산 5만 위안을 다롄시 조선족학교에 기부했다. 김구는 이화림의 투쟁 정신은 높이 샀지만 그의 사상은 싫어했다. 이화림은 백범일지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념적 차이로 김구가 고의로 언급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화림에게는 인민군 간호장교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주홍글씨 같은 전력이 있어 남한에서는 철저히 외면받았다. 이화림 외에도 일본군과 싸우던 수많은 조선의용군 출신들이 인민군의 일원이 돼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인민군 보병부대원의 47%가 조선의용군 출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김일성은 권력투쟁을 일으켜 옌안파를 숙청했듯이 조선의용군을 내팽개쳤다. 조선의용군은 남북에서 모두 버림받은 것이다. 중국에서만 중국 옌볜작가협회가 ‘화림문학상’을 제정해 시상하는 등 이화림을 기리고 있다.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무솔리니에 탕탕탕, 코에 반창고 붙이게 만든 아일랜드 여성 깁슨

    무솔리니에 탕탕탕, 코에 반창고 붙이게 만든 아일랜드 여성 깁슨

    20세기 최악의 독재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이탈리아 총통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총을 쏴 코에 반창고를 붙이게 만든 아일랜드 여성이 있었다. 바이올렛 깁슨의 존재는 역사에서 거의 잊혀졌는데 영화로 만들어져 연내 아일랜드 텔레비전이 방영할 예정이고 더블린 거리에 동상 건립이 추진되는 등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고 영국 BBC가 21일(현지시간) 전했다. 1926년 4월 7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총통 재임 3년차 축하 연설을 할 즈음, 깁슨은 군중 속에서 튀어나와 세 발을 쐈다. 그는 무솔리니 지지자들에게 총을 빼앗기고 공격을 당했지만 경찰이 뜯어 말려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무솔리니는 평생 네 차례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는데 볼로냐에서 15세 소년이 쏜 총에 맞기도 했고, 이탈리아와 미국인 아나키스트가 저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넷 중 가장 무솔리니와 가까운 거리에서 총을 쏜 것이 깁슨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감옥에서 얼마간 지내다 잉글랜드로 추방됐는데 당시 이탈리아 재판은 인민재판 식이라 어떤 자비도 구하기 어려웠는데 외교적 노력이 있었지 않았나 추정될 따름이다. 그는 노샘프턴의 세인트 앤드루스 정신병원에 수용돼 여생을 보내다 1956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무솔리니를 저격하고 정신병원에 여생을 갇혀 지낸 얘기는 그의 가문 때문에 더욱 극적이 된다. 그는 당시 아일랜드에서 법적으로 가장 높은 공직인 로드 챈슬러였던 애시번 남작의 딸로 태어났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사교계에 발을 들였다. 이런 가문이었으니 무솔리니 저격을 정치적 의거로 받아들이지 않고 “정신 나간” 짓이라고 여겼다. 그가 존재했다는 사실마저 감추려 했다.그런데 이제는 깁슨 가문도 동상 추진에 동의하고 있어 몇주 안에 다가올 최종 승인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무소속 더블린 시의원 매닉스 플린은 설명했다. 아울러 더블린의 메리온 광장에 있는 그의 생가 건물주도 동상 건립에 찬동할 것으로 믿는다고 덧붙였다. 2014년 프랜시스 스토너사운더스가 쓴 ‘무솔리니에 총을 쏜 여인’에 기반해 시오본 리남이 쓴 라디오 다큐멘터리가 방영돼 많은 청취자들에게 그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다. 리남의 남편 배리 다우달이 연출해 영화 ‘ 바이올렛 깁슨-무솔리니를 쏜 아일랜드 여인’이 만들어져 국제영화제 등에서 선보이고 있다. 리남은 동상이 세워지면 “사람들이 무솔리니를 죽이려 했던 성지를 찾을 것이다. 여성이, 그것도 50세 여성이 사각지대에서 그에게 총을 쐈다”고 말했다. 다우달은 정신병원에서 지금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공주, 어쩌면 어린 시절 아일랜드에서 어울렸을지 모르는 윈스턴 처칠 등 영향력 있는 이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던 것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열심히 썼지만 병원 측은 발송조차 하지 않아 두 사람은 노샘프턴에서 편지들을 볼 수 있었다. 부부는 이탈리아의 문서 보관소들을 뒤져 깁슨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풀어갈 수 있었다.다우달은 “남자가 이런 일을 했다면 아마도 진즉 동상이나 비슷한 것들이 세워졌을 것이다. 여성이었고 평생 감금돼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얘기를 밖에 끄집어내 얘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어 “깁슨과 무솔리니 둘 중 누가 더 진짜 미친 것 같으냐”고 되물었다. 무솔리니는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힘들어하던 이탈리아 민중의 마음을 파고들어 1920년대 초반 정권을 잡은 민족주의 파시스트 당의 총수였다. 민주 헌법을 짓밟고 1925년 총통에 올랐다.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검정셔츠단이란 무장조직을 수하처럼 부렸다. 프랑코 총통의 스페인 내전을 지원했고 2차 세계대전 때는 아돌프 히틀러의 편에 섰다. 무솔리는 히틀러의 정책들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는데 예를 들어 1938년 반유대 법을 가져와 이탈리아 거주 유대인들의 시민권을 빼앗았다. 홀로코스트로 이탈리아 유대인 75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무솔리니는 1945년 연합군의 진격 때 달아나려다 파르티잔(빨치산)에게 붙잡혀 즉결 처형됐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북한 차세대 괴벨스’ 리재일 전 제1부부장 사망

    ‘북한 차세대 괴벨스’ 리재일 전 제1부부장 사망

    북한의 선전선동 분야 실세로 활약해 온 리재인 전 노동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이 사망했다. 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6일 2면에 부고를 싣고 “당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 전 고문 리재일 동지는 폐암에 의한 급성호흡부전으로 2021년 2월 4일 22시 30분께 86살을 일기로 애석하게도 서거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의 충직한 혁명 전사, 김정은 동지의 견실한 혁명동지이며 우리 당의 강화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한 노혁명가”라며 “리재일 동지를 잃은 것은 우리 당과 인민에게 있어서 큰 손실”이라고 유감을 표했다. 조선중앙통신도 리 전 제1부부장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깊은 애도의 뜻과 함께 화환을 보냈다고 전했다. 리 전 제1부부장은 평양신문사 기자 출신으로 출판지도국장을 거쳐 2004년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을 역임했다. 2014년 기존 선전선동부 간부들이 대거 숙청됐지만 리 전 제1부부장은 김정은을 수행했고, ‘북한의 괴벨스’로 불리던 김기남 전 비서를 대신하는 ‘차세대 괴벨스’로 주목받기도 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히틀러의 측근으로 나치 독일에서 국가대중계몽선전장관의 자리에 앉아 나치 선전 및 미화를 책임졌던 인물이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 등 보수쪽에서는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괴벨스에 자주 비유했다. 고 리 전 부부장은 김정일 체제에 이어 김정은 체제에서도 선전선동 부문의 실세로 활약하면서 김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의 선전선동부 업무를 지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리 전 제1부부장은 80대의 고령에도 김 위원장을 수행했지만, 2018년 금수산태양궁전 참배 참석 이후로는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윤창수 기자 geo@seoul.co.kr
  • [글로벌 In&Out] 새로운 5개년 계획과 북한의 미래/피터 워드 북한 전문 칼럼니스트

    [글로벌 In&Out] 새로운 5개년 계획과 북한의 미래/피터 워드 북한 전문 칼럼니스트

    북한은 예측 불가능한 나라로 불린다. 핵실험을 한 직후 갑자기 협상을 하자고 하고, 대외 경제 사업을 대폭 늘리겠다면서 대중 라인을 숙청하는 등 앞뒤가 잘 맞지 않아 보일 때가 많다. 폐쇄적이고 정책 결정 과정이 투명하지 않은 만큼 타당한 논리를 파악하지 못했거나 국가 내 갈등과 조정력 저하 등 여러 문제로 생긴 현상일 수도 있다. 이달 초에 개최된 조선노동당 제8차 당대회에서 지난 5개년 경제전략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5개년 경제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북한 경제 정책과 발전 가능성 등 앞으로 북한의 미래를 내다보는 데 눈여겨볼 만하다. 북한 경제는 북한 정치를 반영해서 매우 불투명하다. 생산, 성장, 투자, 자산, 통화량 등 기본적 지표들은 물론 목표를 세울 때도 목표치를 공개하지 않는다. 구조상 크게 보면 당중앙 직속 군수경제 및 궁경제(김씨 가문의 소비 자금 조달과 고위인사의 소비 등 자금 조달 담당)와 내각 산하의 일반민수와 민간경제로 나뉘어 있다. 많은 사람의 주요 관심사인 장마당 경제는 후자에 포함되고, 암경제적 부분은 여전히 커서 공식적 경제구조에 포함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우리는 경제 계획을 말할 때 내각경제를 이야기한다. 당대회에서 지난 5년 동안 경제 실적은 매우 미흡했다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판단했다. “거의 모든 부문”에서 계획이 미달됐는데, 2019년 일본 마이니치신문의 단독 보도인 5개년 경제전략의 목표 내용을 보면 연간 8% 성장, 대러 무역 10억 달러 등 매우 비현실적인 내용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 제시된 계획은 ‘자립적 경제 모델’, 즉 국방 부문에서 필요한 중공업 생산을 기초로 해 그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철강, 석탄, 시멘트, 건재, 화학 등 중공업을 주요 산업으로 삼으며 농업도 알곡생산에 집중했다. 이는 비교적 우위에 있는 경공업 무역에 반대된 전략으로 한국의 1960년대, 북한의 1980년대와 유사하다. 더불어 개혁적 성격인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와 포전담당책임제가 유지된다고 확인됐지만 내각의 중심적 역할인 중앙정부의 능력과 힘이 강조돼 아래로부터의 혁신, 즉 시장적 요소들을 대거 제거하려고 하는 조짐이 드러났다. 코로나 파장으로 일시적 사회 통제가 아닌 경제 관리를 위해 국가의 능력과 경제보다 정치적 논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앞으로도 비핵화를 거부하고 안보제일주의적 군사·외교 정책을 유지할 전제조건하에서 당연한 정책 선택으로 판단된다. 무역 확대와 외자 도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사회 통제를 강화하고 불안 요소를 ‘척결’하는 논리가 김 위원장에게 끌렸을 것이다. 문제는 지난 20년 넘게 시장으로 대부분 북한 주민들이 먹고살아 왔는데 앞으로 국가 능력은 무역 파탄과 경제 침체에서 회복될 가능성이 희박할 것으로 예측된다. 시장을 간헐적으로 탄압하고 투쟁 대상으로 삼을 수는 있지만 없애거나 그 영역을 크게 축소시키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대중 무역은 마비 상태이지만 코로나 사태는 올해 이내 해소돼 대중 무역이 원상 복귀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극심한 경제적 난제는 해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급성 결핍 현상이 풀려도 근본적인 만성적 외자투자 결핍과 무역의 대중집중 등 여러 구조적 문제들이 풀려야 경제성장이 가능하다. 경제계획 관련 보도에서 관광과 대외경제 관계 개선 등 여러 차원에서의 문제를 인정했다지만 새로운 무기 개발이라는 협박으로 유리한 대외 환경을 조성하려는 의도는 우려된다. 다만 경제계획의 주요 축인 중공업에서 볼 수 있듯 북한 당국이 그럴 가능성은 적으며, 제재의 장기화로 인해 경제 침체의 장기화를 예상하는 것으로 보인다.
  • 印尼의 공수처 KPK “코로나 지원품 업체서 뇌물” 장관 구금

    印尼의 공수처 KPK “코로나 지원품 업체서 뇌물” 장관 구금

    대통령 직속 印尼 반부패위원회… 고위직·유력자 수사조코 위도도 2기 행정부 부패 혐의 장관 두 번째 적발인도네시아 반부패위원회(KPK)가 코로나19 지원 프로그램 업체 선정 과정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줄리아리 바투바라 사회부 장관을 구금해 조사 중이라고 인도네시아 언론이 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부패와의 전쟁’을 내세워 집권한 조코 위도도 2기 행정부에서 두 번째로 장관이 연루돼 벌어진 부패 사건이다. 바투바라 장관은 정부의 코로나19 지원품 배급 업체 2곳으로부터 170억루피아(약 13억원) 이상을 불법 수수한 혐의로 반부패위에 자진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반부패위 측은 브리핑에서 “줄리아리 장관을 구금하며, 공금 횡령 관련 유죄가 입증되면 무기징역형에까지 처해질 수 있다”고 했다. 집권당인 민주투쟁당(PDI-P) 의원으로 지난해 10월 조코 위도도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출범과 동시에 장관이 된 바투바라 장관은 조코 위도도 대통령의 2기 행정부에서 부패 사건에 연루된 두 번째 장관이란 불명예를 안게 됐다. 앞서 지난달 25일 여당 연합인 그린드라당 사무총장 출신인 에디 프라보워 해양수산부 장관이 랍스터 유충 수출 금지 철폐 결정 과정에서의 부패 혐의에 연루돼 체포됐다. KBK는 또 지난 3일 공공주택부 프로젝트와 관련해 뇌물을 받은 혐의로 전직 감사원 고위 관료를 조사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유력자 수사를 담당하는 KPK는 2003년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설립된 기구다. 인도네시아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인 셈이다. KPK 위원장은 의회 동의를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고, 정원 5명인 부패척결위원은 대통령이 추천한 후보 10명을 대상으로 의회 의결을 통해 선출한다. 그 간 집권당 총재와 헌재소장, 하원의장 등 고위층·거물급 인사의 부정부패를 적발해 국민 지지를 받아 왔지만 대통령이 당내 인사 숙청, 연립정부 세력구도 재편 수단으로 KPK를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 역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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