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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색부서 이색공무원] 국과수 법의관

    산자보다 죽은자를 더 많이 만나는 의사.사건의 미로를 칼과 함께 헤쳐 나가는 의사들이 있다.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법의관(속칭 부검의)들이다. 이들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87년) 등 시국사건이나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95년),김훈 중위 사망사건(98년) 등 각종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사건해결의 일역을 맡는다. 이 직업의 매력은 미궁으로 빠지고 있는 사건해결의 결정적 단서를 찾아내는 것.경기도 A호텔에서 90년 여름 한 여성이 목을 맨 채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모두 자살이라고 보았지만 끈질긴 부검 끝에 목 부분에서 작은 손톱자국을 발견,내연의 남자에게 살해당한 사건의 전말을 밝혀냈다. 이처럼 죽은자의 한을 풀어준 사례는 적지않지만 법의관의 생활은 여간 고되지 않다.보통 이들의 하루를 ‘오전에는 칼을 들고,오후에는 펜을 든다’고 표현한다.오전에는 부검하고 오후에는 부검감정서를 쓰기 때문이다.언뜻보기엔 간단해 보이지만 ‘노동 강도’가 엄청나다. 현재 국과수 서울본소와 서부분소(전남 장성군)에 19명이 활동중이다.우리나라에서 한해에 부검하는 시신은 대략 2,500여구.법의관 한 명이 한해 동안 부검하는 시신은 평균 200여구에 이른다.10여년 경력의 이원태(李垣兌·46)법의학부장은 지금까지 6,000여구의 시신을 접하기도 했다.게다가 3∼4개월동안 방치돼 부패가 심한 시신을 만날 때는 모습과 냄새 때문에 경험 많은베테랑들도 얼굴이 일그러진다. 급여 수준은 개업의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법의관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5급공무원 수준의 급여를 받는다.다만 실무경험에 대한 높은 평가가 전직시도움이 되거나 외부 강의가 꽤 많아 보탬이 된다는 귀띔이다. 하지만 법의관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범죄 초동수사 개입이 제한돼 있는 점.미국 검시관제도의 경우 변사사건의 최초 담당자가 법의관이지만 우리나라는 그 역할을 검사가 담당하고 있다.한 법의관은 “인력 부족과 제도 미비로 초동수사 단계에서 변사체를 감식할 수 없어 정확한 사인을 밝혀내기가쉽지 않다”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때문에 ‘마지막 인권수호자’라는 사명감이 없다면 2∼3년 버티기가 힘들다. 국과수법의관 11명 가운데 유일한 여성법의관인 김유희(金有熙·37)박사가부검의란 직업을 택한 것도 바로 이러한 사명감 때문이다.대학병원 마취과에서 근무했던 김 박사는 “미약하나마 마지막 인권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최여경기자 kid@
  • [기고] 東亞평화와 인권을 향하여

    한반도 전역이 한파에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을 때 따뜻한 남국의 섬 오키나와에서는 평화와 인권의 ‘난장판’이 질펀하게 벌어졌다.참가자의 암구호는 ‘미·일의 냉전정책과 동아시아의 평화·인권’.한국,타이완,일본 등 각지에서 320명 이상이 모여 11월26일부터 29일까지 열기가 이어졌다. 휴양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키나와는 또 하나의 얼굴을 갖고 있다.바로 미군 기지의 존재이다.섬 전체 면적은 일본 국토의 0.4%에 지나지 않으나,기지를 포함한 미군 전용시설의 75%가 집중돼 있다.미군 기지의 철폐를 둘러싸고 줄기찬 운동이 전개된 것은 물론이다.이번 제3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국제 학술대회가 오키나와에서 열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참고로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학술회의’는 지난 1997년 2월 제1회타이완 대회를 기점으로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을 위한 국제연대로 돛을 올렸다. 참가자는 물론 발표자까지 자비부담을 원칙으로 하며,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지 않는 것에서 기본적인 문제의식이 조금은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제2회대회는 작년 8월 제주도에서 열렸다.‘4·3사건’이 국제 무대에 올려진 것은 그 때가 아마 처음일 것이다. 한국 일행 64명(단장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이 오키나와에 도착한 것은 25일.다음날 오전 옛 류큐 왕궁이 있던 슈리성과 박물관을 둘러보고,곧바로대회장소인 사시키로 향했다.27일은 오키나와 전적지를 둘러보는 일정이 준비되어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 9만4,000여명의 전사자에 비해 민간인이 15만명이나 죽어갔다는 사실이 오키나와 전투의 본질을 얘기해 준다.급기야 일본군은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집단자결을 강요했다.부모가 자식을 죽여야 했던 처절한 비극이 섬 곳곳에서 벌어졌다. 섬에서 아비규환은 섬 남단의 마부니에 있는 ‘평화의 주춧돌’이 겨우 이름만으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참극은 식민지 조선 백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군의 스파이로 몰려 학살당한 한 조선인 가족명단의 마지막은 ‘제5자(第五子)’였다.젖먹이까지 죽인 것이다.한편 그 옆 한국인 희생자 기념비에는일본군 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박정희의 이름이 버젓이 박혀 있었다.착잡하기 이를 데 없는 순간이었다. 오후는 오키나와의 현재의 비극,미군 기지 문제.최근에 외신에 가끔 거론되는 후텐마 기지의 이전 후보지인 헤노코에서 현지 주민들과의 연대 집회가있었다.‘인어’로 오인되기도 하는 세계적인 희귀 동물 듀우공의 서식지를매립하고 동아시아 평화의 ‘수호자’ 미군은 비행장을 건설하려고 한다는것이다.기지로 인해 황폐화되는 것은 듀우공과 자연만이 아니다.그 속에 살아가야 할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 28,29일 이틀은 본격적인 심포지엄이 4개 세션으로 나눠 열렸다.주제는 ‘동아시아의 냉전을 넘어서’와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구조와 일본’,‘냉전하 동아시아 민중의 수난과 투쟁’이 1,2부로 나뉘어 진행되었고,3국에서 20편의 발표가 이루어졌다.국가폭력과 관련한 여성문제도 대회의 중요한 이슈중의 하나다.여담이지만 그 점에서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는 가장 ‘짭짤한’ 성과를 올렸다.오키나와의 관련 단체와 굳건한 동맹을 맺었으며,모금도 성공적이었으니까. 심포지엄의 총괄이 끝나고 각국의 성명서와 공동성명서가 채택되었다.참가자들의 마음은 푸근하게 이미 하나가 되어 있었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을 향한 발걸음이 착착 그 무게를 더해간다는 것을느낀 것은 물론이다.4회 대회는 내년 5월에 광주에서 열린다.광주민주화항쟁20주년과 한국전쟁 50주년의 의미를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의 실현에 비추어서. [하종문 한신대교수·일본학]
  • [정형근의원 발언] 野“특검제 당장 실시하라”

    한나라당은 5일 여권이 정형근(鄭亨根)의원의 부산 발언을 놓고 공세를 펴자 국정조사와 특검제 실시를 거듭 요구하며 강경하게 맞섰다. 문제가 된 정의원을 ‘언론자유의 수호자’로 한껏 치켜세우기도 했다. 이날 주요당직자회의 및 확대당직자회의에서는 여권의 공세를 ‘언론말살공작의 본질을 흐리기 위한 곁가지 키우기 수법’이라고 일축했다.국정조사에 응할 것을 거듭 촉구하며 공세의 수위를 높였다. 오는 9일 수원에서 장외집회를 갖는 등 전국 순회집회로 여권을 계속 ‘압박’해 나가기로 했다. 이회창(李會昌)총재는 “언론탄압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가 이뤄지면 국회일정을 시작할 것”이라며 “장외집회를 갖는 것은 결코 국회를 거부하는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국민회의 이만섭(李萬燮)총재권한대행까지 나서서 정의원을 공격하자 여권이 본질을 외면한 채 ‘색깔논쟁’운운하는 것은 치졸한 짓이라고 비난했다. 김용수(金龍洙)부대변인은 논평에서 “서경원(徐敬元) 간첩사건의 역사적 사실을 밝힌 것이 왜 색깔론 제기냐”며“본질을 흐리려는 공작”이라고 여권 주장을 반박했다. 한나라당은 특히 정의원의 부산발언을 뒷받침할 자료를 추가로 공개,색깔론의 시시비비를 밝히겠다는 입장이다. 이사철(李思哲)대변인은 “당시 검찰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서 전의원으로부터 공작금 1만달러를 수령한 죄로 공소 제기한 내용과 그후 여야합의로공소 취소가 이뤄진 과정에 대한 자료를 모으겠다” 고 밝혔다. 한편 연일 강도높은 대여(對與)포문을 열었던 정의원은 회의에도 참석하지않고 하루종일 행방이 묘연했다. 최광숙기자 bori@
  • [21세기 여성시대] (3)사회운동

    ‘세계 NGO(비정부기구)와 사회운동은 이제 여성의 몫’ 15일 폐막되는 ‘99 서울 NGO 세계대회’가 전 세계에 띄운 메시지중 하나다.루이스 프레쳇 유엔 사무부총장,메리 로빈슨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사라롱위 아프리카 여성개발협회(FEMNET)의장,클라렌스 디아스 국제법개발센터의장 같은 ‘거물’이 참석해서만이 아니다. 공동대회장 3인중 아파브 마푸즈 유엔경제사회 이사회 NGO협의회의장,일레인 발도프 유엔공보처 NGO집행위원회 의장이 여성이고 대회에 참가했던 크고작은 NGO의 일꾼들 상당수도 여성이었다. 새 밀레니엄에 인권, 여성,제3세계의 빈곤과 기아,환경 등 산적한 지구촌의 과제를 풀어나갈 주역으로 여성이전면에 등장했음을 실감케 한 대회였다. 여성의 몫과 역할이 커진 것은 유엔 인권위원회 의장을 지낸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 대통령의 부인 엘리노어 루즈벨트(1884∼1962)처럼 징검다리 역할을 한 여성 운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미국 산아제한운동의 주창자 마거릿생어(1879∼1966), 여성 참정권 운동의 선구자 에멀린 팬크허스트(1858∼1928·영국)도 손꼽을 만한 전세대 사회운동가였다. 여성의 진출이 크게 늘면서 활동분야도 활짝 열렸다. 여성과 환경운동을 접목시킨 에코-페미니즘의 저명한 이론가인 마리아 미즈(68·독일).그녀는 80년대 미국 독일 등 선진국 여성들의 미사일 설치 반대시위,인도·아프리카 여성들의 자연파괴 저지운동의 이념적 토대를 제공했다. 인도 출신의 반다나 쉬바도 미즈 여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적 학자이자 환경운동가다. 90년대 중반 세계 YMCA 의장을 지낸 라지아 슬탄 이즈마일(56·인도)은“세계인류의 보편적인 문제가 바로 여성의 문제”라는 시각으로 여성과 사회운동을 접목시켰다. 필리핀에서 도시빈민운동을 주도하며 ‘아시아 여성주거연대’를 구성한 피데스 바가사오(46·필리핀),여성환경개발기구(WEDO) 의장인 벨라 압죽(79·미국)도 여성이 주도하는 사회운동의 지평을 넓혔다. 유엔을 무대로 활약하는 여성도 크게 늘었다. 9년째 유엔난민고등판무관을 지내고 있는 오카타 사다코(72·일본)는 코소보 사태 때 ‘50만 코소보 난민의어머니’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그녀는서울 NGO대회때 내한한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인 메리 로빈슨과 유엔에서 ‘여성 파워’를 과시하고 있다. 유력 정치가 부인들도 사회운동을 주도하거나 남편의 영향력을 업고 현장운동가들을 측면지원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 여사,캐나다 총리 부인 알랭 크레티앵 여사 등 아메리카 대륙 퍼스트 레이디의 모임인 ‘아메리카 영부인 회의’는 지난 9월 회의를 갖고 아동조기교육과 보건강화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앨 고어 미 부통령의부인 메리 엘리자베스 에이친슨 고어(48)도 무주택 및 의료개혁 분야의 사회운동가다.이밖에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의 부인 제한 사다트(66),미국의 지미 카터 전대통령의 부인 로잘린(72),부시 전대통령의 부인 바바라 부시(74)도 퍼스트 레이디 이전부터 착실히 사회운동을 펴왔다. 여성의 부단한 사회운동은 97년 ‘지뢰없는 세상만들기 운동’을 펴온 미국의 조디 윌리엄스(49)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결실을 봤다. ‘인간이 존중되고 인간이 중심에 서는 인간적인 인간사회,문화적인 복지사회,보편적인 민주사회를 구현해내는’ 서울 NGO 대회의 이념대로 여성의 활동영역은 새 밀레니엄에 보다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황성기기자 marry01@ * '피임 합법화 투쟁' 美운동가 '마거릿 생어' ‘피임,즉 성생활과 산아제한의 자유야 말로 여성해방과 인류발전에 필수조건이다’ 마거릿 생어(1879∼1966).반세기 이상을 여성의 신체해방을 위한 길고 긴투쟁에 나섰던 미국의 운동가. 산아제한을 최초로 주창한 그녀는 나아가 인구폭발이라는 재앙의 문턱에서세계를 일치감치 구해낸 구원자라해도 과언이 아니다.인구 60억 시대를 돌파한 지금.그녀의 공로가 단순히 여성해방운동차원을 벗어나 인류 공동 발전에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임법이나 성이란 말을 언급하는 자체가 음란죄에 해당했던 1900년대 초반. 간호사였던 그녀는 뉴욕 빈민굴의 한 병원에서 계속된 임신으로 지치고 허약해진 젊은 산모들을 지켜보면서 피임의 자유가 여성운동의 가장 핵심이라고판단,적극적인 피임 정보보급및 합법화운동에 나선다. 당시는 의사조차도 산아제한에 관한 언급이 불가능했던 시절.그녀는 ‘여성의 반란’이란 월간지를 출판했다. 이 잡지를 비롯한 그녀의 팸플릿과 잡지는 우송 불가물로 판정돼 강제폐간됐으며 수차례의 구속과 기소,재판을 되풀이했다.1916년 뉴욕 브루클린에 미국 최초의 산아제한 클리닉을 열어 여성들에게 피임상담을 함으로써 미국과유럽대륙까지 시끄럽게 만들었다. 후에 미연방 가족계획국의 토대가 된 ‘미국 산아제한 연맹’을 21년 설립했다.23년 최초로 의사가 진료하는 ‘산아제한 연구 클리닉’을 뉴욕에 열었고 이후 300여개의 클리닉이 전국에 세워졌다.미 의학협회가 의과대학에서피임에 관한 강의를 하도록 허락한 것은 1937년이었다. 그녀는 계속 인구증가율을 낮추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종교단체 등에 의해 묵살됐다.결국 2차대전후 인구폭발의 위험성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뒤늦게 그녀의 주장과 공로가 인정받기 시작했다. 52년 세계가족계획연맹의 초대회장이 된 그녀는 여성이 스스로 조절할 수있는 안전한 피임법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주도했으며 마침내 60년 처음으로피임약이 개발됐다.그녀가 죽기 1년전인 65년 미 정부는 1개주에 남아있던피임약사용금지법을 폐지했다.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는 여성의 성생활과 임신에 대한 자유.그 역사는 이처럼 1세기도 되지 않은 짧은 것이다. 김수정기자 crystal@ [인터뷰] 메리 로빈슨 유엔 인권고등판무관 서울 NGO세계대회 참석차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한 메리 로빈슨(54) 유엔인권고등 판무관은 13일 탈북자 문제와 관련,“강제 송환이 이뤄지고 있다면심각한 인권침해”라며 “회의 참석자들의 의견을 들은뒤 유엔에 돌아가 대책을 상의하겠다”고 밝혔다.90년부터 7년동안 아일랜드 최초의 여성대통령,인권대통령으로서 명망을 얻은 그는 “여성의 정치참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다음은 롯데호텔에서 가진 기자들과의 일문일답. ■방문 소감은 NGO 대회에 참석하게 돼 기쁘다.세계적인 인권 수호자로 알려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법무장관 등을 만나 한국 인권문제와 보안법 등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겠다. ■동티모르의 학살극과 관련,위란토 인도네시아 국방장관이 전범으로 기소될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있는데 우선 한국의 동티모르 파병에 감사한다. 동티모르 학살극에 인도네시아 정부가 연루됐는지에 관해서는 동티모르 사태조사담당 위원회의 결론을 기다리겠다.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어떤 편견도,판단도 내리지 않겠다. ■여성이 남성보다 더욱 평화적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여성이 남성보다 어떤부분에서 우수하다는 견해보다는 ‘균형’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여성은 문제에 대해 실용적인 접근을 하고 보호받아야 될 집단을 보살필 능력이있다.여성이 책임감을 갖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중요하다. ■중국 등지의 탈북자에 대한 지원방안은 없는가 이번 한국 방문중에 탈북자상황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기를 바란다. 강제송환이 이뤄지고 있다면 중대한 인권침해다.정치적 보복이나 박해 등의 가능성이 있는데도 강제송환이이뤄질 경우 기본적 난민협약 규정에 위반되는 것이다.오가타 유엔난민 고등판무관과이 문제를 논의하겠다. ■미군의 노근리양민 학살사건에 대한 견해는 미국 언론들이 인권침해와 유린에 대한 시정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하지만 노근리사건은 기본적으로 한국과 미국 간에 긴밀한 협조로 해결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유엔활동에 관심을 두게된 개인적인 계기는 어렸을때부터 인권문제,사회정의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변호사로서 아일랜드는 물론 유럽과 국제사회의 인권문제에 주목해왔다.그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의 활동을 하고 있다. ■여성의 정치참여에 대한 생각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유엔은 베이징(北京)세계여성대회의 행동강령 이행상황에 관한 결과 보고서를 내년에 발표한다.세계 여성의 현실을 검토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오일만기자 oilman@ *아일랜드 대통령 지낸 인권파수꾼 '로빈슨 판무관' 아일랜드 명문 트리니티대학을 수석입학,졸업하고 25세에 최연소 상원의원이 됐고 20여년 동안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보수적인 가톨릭사회,내각책임제하에서도 대통령 당선 직후 북아일랜드를 방문,내전치유에 나서고 이혼합법화,동성애자 차별금지 등의 조치를 이끌어내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로빈슨은 97년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유엔의 인권관련 활동을 총괄하는 인권고등판무관으로 자리를 옮겨 ‘세계인권의 파수꾼’으로 활약하고 있다.
  • [대한광장] 스님살이

    옛 스님의 말씀이 “한 번 산 속으로 들어온 후 잎이 푸르고 잎이 노랗게 변한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출가하여 도(道)를 이루기 위해 산에 들어온 이후 산을 내려가 본적이 없다는 말씀이 아닐까 합니다. 스님이 되려고 해인사 백련암으로 입산, 출가한 후 10여년 동안은 거의 산문출입 없이 보냈습니다.생활이 단촐하고 말 상대가 없어 하루종일 말 몇마디하지않고 살게 되니 자연히 말이 어눌해지고 표현이 잘 되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루는 큰스님의 심부름으로 큰절로 가려고 바삐 계단을 내려가는데 젊은 남녀가 올라오면서 ”스님,말씀 좀 물어봅시다”고 걸음을 멈추게 하였습니다.그러면서 ”스님,백련암 경치가 참 아름다운데 동양철학 하는 스님이 계실 것 같습니다.스님 우리 둘 행복하게 살겠는지 한번 봐주십시오”하는 것이었습니다.나는 대뜸 ”동양철학이 뭐요?”하고 물으니 ”아이고 스님,동양철학이 뭐라니요.사주 관상 아닙니까? 우리 둘 사주 한번 봐주이소.행복하게 살겠는지요?”. 어이없어 ”여기는 부처님 도를 배우는 곳이지 사주관상 보는 공부하는 곳이 아닙니다”고 대답하니 두 사람 얼굴색이 변하며 처녀가 하는 말이 ”동양철학 공부하는 스님같은데 우리 사주관상이 안 좋으니 스님이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시는가 보다”며 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하였습니다. 저는 화도 나고 또 큰스님의 심부름이 급한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큰절로내달렸습니다. 일을 다 마치고 백련암으로 올라오는데 아까 일이 떠올랐습니다.”그렇다.동양철학 봐 달라는 말에 화가 나 쏴붙였는데 내가 잘못했구나. 보아하니 두 사람이 행복하게 오순도순 평생 잘 살겠다고 한마디만 해줬더라면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을까!”하고 후회를 했습니다. 산에 살면서 흔히 받는 질문이 ”스님 왜 스님됐어요? 실연했습니까? 아니면 실패를 했습니까?…”입니다.처음에는 정직하게 ”큰스님을 만난 인연으로 출가하게 되었습니다”하면 다들 시큰둥하게 생각하며 ”스님,출가의 비밀은 따로 있지?!”하는 눈치입니다.그래서 대답 하나 개발해 ”내 사주팔자가 스님팔자라 스님 됐습니다”라고 하면 다들 머리를 끄덕거리며 ”그래,스님팔자가 있으니 스님됐겠지…”하며 수긍하고 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성철스님께 출가한 후로 스님께선 항상 ”중은 행각(行脚)하기가 논두렁베고 죽을 각오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때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스님은 도만 닦다가 가진것없이 훌훌히 떠날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안지도 얼마 되지않은 세월인 것 같습니다. 그런 각오로 평생을 수행만하는 스님들이 있기 때문에 불교는 적막하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불교계에 바라는 국민들의 기대감은 의외로 높은 것 같습니다.신부나 목사가 운전을 하면 당연시하는데,스님이 운전을 하면 뭔가 아닌 것 같고,신부나 목사가 스키를 타면 근사해 보이는데 스님이 스키를 타면뭔가 영 이상해 보이고, 신부나 목사가 골프를 치면 당연한데 스님이 골프치면 난리나는 세상입니다.그만큼 우리 국민들이 ”세상일은 모두 잊고 수행에만 전념하는 것이 스님이다”는 생각을 자기들도 모르게 마음에 갖고 있기때문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성철스님이 떠나신 후 중국이나 일본의 사찰들을 둘러보면서 ”아! 스님이란 산사에서 수행하는 것만 아니라 전통문화의 수호자이자 계승자”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습니다.절안에 있는 모든 것,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가 없구나하는 생각입니다.유홍준교수는 문화재를 잘 가꾸지 못한다고 스님들을질타합니다.그러나 산사에 스님이 없었던들 이만한 문화재인들 누가 가꾸고지켜왔겠습니까? 가야산에 불이 나면 삽이나 갈고리를 들고 제일 먼저 달려가는 것이 스님들입니다.불을 끄고 꺼멓게 그을린 얼굴과 먼지투성이 된 몰골을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릴 때는 몇시간이나 불끄느라 고생한 이후입니다. 이렇게 수행하며 산과 산사를 지켜가는 스님들의 노력을 일반인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흔히 세상사가 각박해지면 ”나도 산에 가서 중이나 될까”하는 넋두리를 곧잘 합니다.그런 사람치고 한달이,아니 일주일도 못돼 하산하고 맙니다.정말로 스님팔자가 있어야만 산사에서 살 수 있나 봅니다. [圓澤 조계종 총무
  • [대한광장] 자유민주주의의 허상과 실상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거 일자가 1년도 남지 않았다.총선이란 온국민의 소망을 대변해 정치·경제·사회의 관리운영을 감독하고 새로운 법규 제정을 맡아 할 덕망과 능력있는 봉사자들을 가리는 거창한 국가행사이다.우리사회가민주공화국 호칭의 독립국으로 정치를 시작한 지도 꼭 51년을 넘기고 있다. 그동안 정치운영을 맡은 사람들은 ‘외세의 조종을 받는 1인 독재정권’이니,‘장기집권 야욕’,‘쿠데타 군사독재’라는 등의 부정적 칭호를 들어가면서도 집권세력 자신들은 한결같이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임을 굽히지 않고주장하여 왔다. 그리하여 집권세력이나 지배계층의 주장이나 집행행태에 의해 피해를 당하는 서민근로계층 사람들이 그 나름의 권익주장이나 하소연을할 경우 엄연한 객관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체제를 부정·파괴한다며 협박하고,참된 자유민주주의는 공동참여에 있다고 애걸하면,기존의 실정법대로 하자면서 불합리하게 만들어져 있는 법제도를 들먹이며 맹종을 강요하거나 아예 묵살하여 왔다. 돌이켜보면 자유민주주의의 주창의 역사는 아메리카가 식민지 모국인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던 1776년경부터로 추정된다.유럽대륙뿐 아니라 전세계 모든국가들의 왕이 ‘짐이 곧 국가’라고 했을 정도의 절대군주 지배체제하에서대다수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을 당시 인류 최초로 자유로운 민의의 수렴과자발적 참여에 의한 의회구성으로 군주를 배제한 국민 자치공화국을 선포하고 이를 무력투쟁으로 실현했다.그것도 독재를 막고 사회 구성원 일반의 권익과 주장을 골고루 보장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삼권분립의 제도적 견제장치까지 마련하여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찬란하게 비춰졌던 만민평등의 민주정부 탄생에는 외부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많은 어두운 허상의 그림자가 있었음을 간과하여 왔다.식민지 이주민들은 250만 전체인구 가운데 아프리카에서 강제 납치되어온 50만명(전체 인구중 20%)의 흑인 노예들을 생산노동의 고통속에 짐승처럼 속박시켜 놓고 있었으며,농사와 목축을 생업으로 하여 평화롭게 살고 있던 4만년전통의 원주민들을 대서양 연안으로부터 차례차례 집단 학살하는 방법으로몰아쳐 가고 있었다. 그후 100여 년에 걸쳐 백인 침탈자들이 개척의 이름으로 태평양 연안까지차지해가며 영토를 확장하고 광산과 철도를 건설하며 산업을 일으켜 가는 과정에서 유색인종은 물론 모든 근로계층 사람들이 당한 억압과 착취의 역사는세계 노동운동의 기념일인 ‘메이데이’가 미국의 파업 노동자를 무자비하게총격,살해한데서 유래된 사실에서도 잘 증명되고 있다. 20세기에 접어들면 중남미를 석권하고 하와이와 필리핀을 병탄하면서 조선과 중국 대륙을 최종 목적지로 설정하고 영국·프랑스·러시아·독일·일본등 제국주의 열강들과 온갖 음모와 무력침공에 의한 살상을 거듭하여 식민지및 반식민지로 점령하고 천연자원 탈취와 강요된 불평등 상거래로 이 지역민들의 피와 땀을 갈취하여 갔다. 더욱이 최근 100년의 역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군사·경제적 침탈과 함께선진 지식과 종교와 도덕률을 언어와 책과 설교와 물리적 강요에 의해 그들의 죄악상은 가리고 유리한 측면만을 전달함으로써 피탈지역민들로 하여금밝은 측면만보고 어두운 측면은 전혀 보지 못하는 의식 장애인이 되게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약육강식에 의한 이기·배타적 경쟁논리는,억강부약의 정의감과 동포애와 같은 도덕적 인간성을 파괴시켰고 생산·건설과 사회발전에누구보다 많은 노력과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생산 근로대중의 정치·경제 관리에 대한 공동참여를 불가능하게 하는 상황을 당연시하고, 정치판을 가진자들만의 출세경연대회장으로 만들어 관람시키는 정도로 변모시켜 놓았다. 물론 정치·경제 공동참여의식의 결여와 억압상황을 제거·극복하지 못해온책임은 우리 사회 스스로에게 있다고 본다.선진사회의 밝은 측면의 가르침을모방하면서 이를테면 ‘산업별 근로전문가 비례대표제’와 같은,법과 제도와의식의 개발에 창의력을 발휘한다면 남을 탓하기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우방을 대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朴 智 東 광주대 교수·언론학]
  • [사설] 특검제 도입의 참뜻

    여권이 특별검사제를 수용하는 쪽으로 선회했다.특검제 도입을 요구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뜻을 따르고,서해에서 남북간에 교전사태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여야 대치정국을 더이상 지속해서는 안된다는 게 그 이유다.여권이 내놓은 특검제는 제한적이고 단계적이다.파업유도 의혹에 대해서만 특검제를 도입,운영해 보고 일반 제도로서의 특검제는 국회 정치개혁특위에서 논의해 나가자는 것이다.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제한적이고 변형적인 특검제가 아니라전면적인 특검제 도입을 주장하고,파업유도 의혹뿐 아니라 고급 옷 의혹에대해서도 국정조사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국정조사와 특검제 문제가 서로 뒤엉켜 있기 때문에 앞으로 여야 협상과정에서 어떻게 결말이 날지 알 수 없으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대치정국 해소에 물꼬가 트였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특검제 도입과 관련,여·야와 검찰에 대해 국민의 소리를 전하려 한다.여권이 특검제 수용으로 방향을 선회한 데에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결단’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대통령은 특검제가지닌 폐해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국민의 뜻을 따랐다.결코 야당의 공세에 밀려서가 아니다.한나라당은 이 점을 착각해서는 안된다.야당이 대통령의 ‘결단’을 수용하지 않고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려고 파행정국을 계속 조장한다면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제한적이나마 특검제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여권내부에 반대가 만만치 않았음을 알고 있다.특검제를 반대하는 논리는 “특검제를 도입하면 검찰조직이 와해돼 국정운영의 ‘칼’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그러나 본원적 의미에서 검찰은 법치주의의 수호자이지 정권의 ‘칼’이아니다.검찰에 기대어 정권이 유지되던 시대는 지났다. 검찰은 기소독점주의와 수사권 일원화 원칙의 훼손을 내세워 특검제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그러나 기소독점주의와 수사권 일원화 원칙은 헌법사항이 아니다.그리고 국민의 70% 이상이 왜 특검제 도입을 이토록 요구하고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그것은 그동안 검찰이 국가의 형벌권 행사에 있어 정치적 공정성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그 결과 검찰의 수사결과를 국민이 믿지 않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독점화되고 집중된 검찰의 권력에 대한외부의 견제를 자청하지 않고는 검찰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해소되지 않는다. 특검제 문제는 이처럼 복잡한 정치·사회적 요인들을 내포하고 있다.정치권과 검찰은 특검제를 도입하는 근본 취지에 비춰 각자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할 것이다.
  • [각료 에세이 열린 마음으로]-金成勳 농림부장관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밤 늦게 집에 도착하면 어김없이 농민들의 반가운목소리가 나를 기다린다.전자우편과 팩스,편지 등 형식이 다양한 만큼 내용도 참으로 다종다기하여 웃음이 날 때도 있고 눈물이 날 때도 있다.농민들의 가감없는 소중한 의견이기에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어 날이 밝는줄 모르고 고민에 빠져들 때도 있다. 77회에 걸친 농촌현장 이동장관실 운영,17대(代)의 일일명예 장관제를 실시하면서 접하게 된 농업정책 건의나 민원사항들도 소중한 자산이다.하지만 추곡수매나 농가부채 등 문제 외에 교육,의료,복지,도로 등 우리부와 직접 관련이 없는 문제가 제기될 때는 좀 곤혹스러운 게 사실이다.대부분 농민들은‘농’(農)자만 붙으면 무조건 농림부에 하소연한다.때문에 농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방송 프로그램 등에서 ‘농촌지역 초등학교 급식개선’‘농촌보건진료소 직원 감원 반대’‘농촌 주택개량 지원’등의 건의를 받기도 한다. 이럴 때면 “농림부와 무관하진 않지만 교육부 건교부 복지부 등 해당부처에 협조를 구하겠다”고 대답하곤 한다. 농촌의 문제라고 해서 모든 것을 농림부 단독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뒤늦게나마 94년에 ‘농어촌 특별세’가 신설돼 농특세의 40% 수준은농림부가 집행하고 나머지는 9개 부처가 나누어 집행하고 있다.교육부,보건복지부,환경부,건교부 등 관계부처에서 그동안 도외시해온 농어촌 주택 및하수도,농어민 연금,의료지원,농어촌 도로정비 등 농어촌지역의 생활환경개선에 관심을 갖고 투자를 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 수준은 도시에 비해 크게낮다.농업과 농민문제는 관계부처가 함께 협력해 다룰 때에만 제대로 풀려나갈 수 있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쿠즈네츠교수는 “농업의 발전 없이 선진국이 되는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시대를 막론하고 농업이 얼마나 중요한 기반산업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이처럼 ‘지속가능한 사회’(Sustainable Society)의 역군인 우리 농민들이 불리한 여건하에서도 국민생명 지킴이,전통문화의 수호자,지역발전의 파수꾼으로서 충실히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이 절대적이다.골고루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 가야할 때다.
  • [외언내언]미 防産업체

    발칸전쟁으로 미국 방위산업체들의 주식시세가 전반적인 큰폭의 오름세를보이는 것으로 외신은 전한다.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계속된 유고공습으로 각종 미국산 최첨단 무기들의 판매가 호조를 보이기 때문이다.토마호크미사일을 생산하는 레이시언사(社),공격용 헬기의 유나이티드 테크놀로지,F-15전투기 생산의 보잉사,초음속 B-1랜서 폭격기의 록웰 등 미국내 방위산업체들은 때아닌 호황을 즐기고 있다.물론 스텔스전투기 추락으로 노스롭그루먼사 같은 곳은 주가가 떨어 졌지만…. 여하튼 이번 발칸사태발생 및 주가상승과 관련,미국의 전통깊은 산·군(産·軍)연합구조가 또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지난 1929년 발생한 대공황이결국 2차대전 참전에 따른 군수산업부흥과 그 파급효과에 의해 완전히 막을내렸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로 미국 군사행동과 산업생산의 함수관계는 깊은 것으로 전해진다.물론 미국은 자유민주주의의 맹주로서 공산권에 맞서고 우방을지키기 위해 끊임없는 무기개발이 불가피했다.이를 위한 국방예산의 지출은보다 첨단화한 무기생산을 위한 민간기업들의 기술혁신과 산업발전의 자금원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또 미국내 대기업들의 갖가지 무기개발관련 첨단과학기술은 곧바로 미국 산업의 국제경쟁력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이러한산·군합동의 연결고리는 미국의 위상을 세계유일의 초강대국으로 고착화하는 슈퍼파워로 작용한다. 냉전의 종식으로 미국 군대의 자국산 무기수요가 종전에 비해 절반가량 줄어듦에 따라 방위산업의 재고증가와 가동률저하,경기침체 등 경제적 마이너스파장을 우려하는 미정부는 해외에서의 무기판매를 강화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 때문에 미국산 무기의 세계시장점유율은 계속 높아지는 추세에 있다는 것이다. 평화의 수호자로 세계경찰의 역할을 자임하는 미국이 전쟁도구인 무기판매에 열성적인 아이러니는 팍스아메리카나(미국지배에 의한 지구평화)의 색다른단면이기도 하다.미국 전대통령 아이젠하워는 퇴임직전의 한 연설에서 “산·군연합의 부당한 영향력을 당연한 일로 방임해서는 안된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오늘의 상황이 부당하기까지야 하겠나마는 그는 보다 막강한 화력의 신병기(兵器)가 새로운 분쟁을 창출하는 악순환을 일찌감치 예견하고 경고한 것인지 모른다.냉전체제붕괴 이후 그동안 잠자던 새로운 인종·종교적 갈등이 노골화돼 국지적으로는 오히려 더욱 늘어난 지구촌의 분쟁이그러한 우려를 짙게 해준다. 우홍제 논설실장
  • 미국의 이라크 공격(사설)

    미국이 무기사찰을 거부하고있는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단행했다. 91년 ‘사막의 작전’이후 7년만의 걸프전 재발이다. 국제 평화와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이라크사태가 단시일안에 해결되기를 바란다. 비록 불가피한 공격이라하더라도 무고한 인명의 희생은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공격은 이미 예견됐었다.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유엔의 사찰을 번번이 거부했고 그때마다 미국의 군사공격 경고는 계속됐었다. 지난달에는 미국의 공격 일보직전에 이라크가 무기사찰을 무조건 받아들임에 따라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이번 공격은 유엔무기사찰단이 철수하자마자 전격적으로 시작됐다. 더이상 이라크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미국의 강경 대응이라 하겠다. 무기사찰 거부로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와 위험한 게임을 지나치게 되풀이해왔던 이라크가 공격을 자초한 셈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사태가 조기에 수습되기위해서는 이라크가 무기사찰을 수용하고 승산없는 도박을 끝내는 것이라 하겠다. 결사항전을선언하고 있는 이라크로서도 이유는 있을 것이다. 8년여에 걸친 유엔의 경제제재조치로 경제는 바닥나고 50여만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미국의 목표는 대량무기 해체가 아니라 사담 후세인의 축출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후세인이 치명적인 무기로 세계를 위협하도록 더이상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미국의 입장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미국의 전격적인 공격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없지않다. 바로 다음 날로 예정돼있던 클린턴대통령에 대한 하원의 탄핵표결을 피하려는 국내 정치적 요인이 작용했다는 의혹이다. 탄핵안은 하원에서 가결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라크 공격이 단행되자 탄핵안 표결은 당연히 연기됐다. 유엔안보리마저 심각한 이견을 보일 정도다. 국제평화의 수호자로서 미국의 역할에 오점이 아닐 수 없다. 이라크사태는 우리에게도 강건너 불이 아니다. 당장 경제에 미칠 영향이 걱정된다. 국제유가와 달러화 가치가 일제히 급등세를 보였다. 사태가 장기화되지 않는한 큰 영향은 없을 것이란 전망이지만 모처럼 청신호가 보이고 있는 우리 경제에 부담을 줄 것이 우려된다. 진출업체와 교민들의 안전도 염려스럽다.사태추이를 면밀히 지켜보며 만전의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 韓·美 정상회담­이모저모

    ◎DJ 색소폰 연주 권유에 클린턴 “마우스피스 안가져와…”/영어로 가벼운 인사말 나눠/예정시간 무려 50분 넘긴 대좌/高 인권차관보 기념촬영 사양 金大中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21일 오전·오후 청와대에서 정상회담과 공동기자회견을 가진 데 이어 저녁에는 청와대 만찬에 참석,우의를 다졌다.클린턴 대통령의 이번 방한은 실무적 성격이 강한 ‘공식방문(Official visit)’으로 국빈방문이 아니어서 부인 힐러리 여사는 동행하지 않았다 . ▷청와대 도착◁ 클린턴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40분 숙소인 하얏트호텔을 출발,10여분만에 청와대에 도착해 현관에서 金대통령으로부터 영접을 받았다.양국 정상은 영어로 가볍게 인사말을 나눴다.클린턴 대통령은 金대통령과 나란히 서서 기념촬영을 한 뒤 2층 회담장으로 이동하다가 사진기자들의 요청으로 본관 1층 계단 앞에서 다시 포즈를 취해주기도 했다.클린턴 대통령은 방명록에 영어로 ‘민주주의의 진정한 수호자인 한·미 양국의 우의를 다지기 위해 이곳을 다시 방문하게 돼 영광으로 생각합니다’라고 썼다.클린턴 대통령이 서명하는 동안 金대통령이 방명록 상단에 미리 쓰여있던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 미합중국 대통령 방한 1998.11.21’이라는 한글 문구를 읽어주자 클린턴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상회담◁ 두 나라 정상은 오전 11시5분부터 12시27분까지 단독정상회담을 가졌다.단독회담은 예정된 30분을 넘겨 1시간20여분 동안 계속돼 무려 50분을 넘겼다.단독회담이 길어진 이유는 양국 정상들이 북한 지하핵시설 건설 의혹과 북한 간첩선 남파,통상현안 등 다양한 현안에 대해 폭넓게 논의한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비공개 회담에 앞서 金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오지 못한다고 해 몹시 실망했다가 다시 온다는 연락을 받고 믿음을 확인했다”고 인사했다.이에 클린턴 대통령은 “매우 고맙다”고 화답했다.클린턴 대통령은 이날 金대통령이 인사를 건넬 때마다 몸을 반 이상 金대통령 쪽으로 기울이는 등 각별히 신경을 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회담 후 두 정상은 승강기 앞에서 헤어져 金대통령은 백악실에서 비빔밥을,클린턴 대통령은 국빈대기실에서 양식 뷔페로 점심을 해결하면서 오후 공동 기자회견 준비를 했다. 회담장에서 눈길을 끈 인물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 행정부 최고위직까지 오른 해럴드 고(한국명 高홍주) 국무부 인권담당차관보.고씨는 확대정상회담에만 배석하는 관계로 단독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회담장 옆 집현실과 부속방에서 미국측 관계자들과 환담하는 모습이었다.고씨는 한국측 관계자들이 여러 차례 기념촬영을 요청했으나 한사코 거부했다. ▷공식만찬◁ 金대통령이 영빈관에서 베푼 공식만찬은 클린턴 대통령의 도착이 늦어져 예정보다 20분 늦게 시작됐다. 金대통령은 만찬도중 클린턴 대통령이 팔레스타인과 북아일랜드 등 세계 각 지역의 평화회복에 기여한 사실을 평가한 뒤 “중동 평화협상시 어떤 분이 설득하기 어려웠냐”고 묻자 클린턴 대통령은 “네타냐후가 설득하기 훨씬 어려웠다”고 답변했다. 金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이 세계 평화에 공헌한 업적은 길이 빛날 것이라고 평가한 뒤 “임기후에는 무엇을 할 계획인가”고 질문했다.이에 대해 클린턴 대통령은 “도서관을 설립해서 공직에 뜻이 있는 젊은이들의 공직 진출을 돕고 싶고,세계 분쟁 해결,지구 온난화 등의 분야에서 활발히 기여할 수 있는 상황이 됐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金대통령은 공연 관람 도중 “색소폰을 잘 하신다는 데 한번 해보시죠”라고 권유하자 클린턴 대통령은 “좋아하지만 오늘은 마우스피스를 가져오지 않아 연주할 수 없다”고 사양하기도 했다.
  • 勞使 한발씩 양보… 접점 찾았다/현대自 분규 해결 실마리까지

    ◎“파국땐 공멸” 인식이 탈출구로/해고 축소로 가닥… 노노갈등 불씨 정리해고 강행여부로 40여일 동안 조업이 중단되는 등 파국을 향해 치닫던 현대자동차 노사분규가 李起浩 노동부장관에 이어 여당 합동중재단의 중재로 마침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전망이다. 현대자동차 노사는 20일 盧武鉉 국민회의 부총재 등 중재단이 제시한 정리해고 비율 등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로 함에 따라 국가신인도 하락으로 이어 질뻔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돌파구를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사 양측이 이처럼 벼랑 끝에서 한발짝씩 물러선 이유는 극단적인 대립은 결국 공멸만 가져올 뿐이라는 현실인식에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 올들어 현대자동차 고용조정 문제가 불거진 이후 6,769명의 근로자가 희망퇴직이라는 형식으로 직장을 떠났지만 회사측이 정한 정리해고 커트라인인 나머지 1,569명의 정리해고 문제를 두고 노사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평행선을 달려 왔다. 그 결과 수출과 생산 차질에서 1조5,000여억원의 손실을 초래한 것을 비롯,전체 협력업체의 10%가 넘는300여개 부품협력업체가 부도로 쓰러지는 상처를 남겼다. 현대자동차 분규는 노사 양측의 양보로 경찰력 투입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지만 앞으로 넘어야 할 고비도 만만치 않다. 사용자측은 ‘정리해고 강행’이라는 명분을 얻기는 했으나 생산과 수출 차질 등 엄청난 물질적 피해와 근로자들의 불신 등 도저히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는 대가를 치렀다. 부품협력업체의 붕괴와 대외신용도 하락 등도 회사가 떠맡아야 할 부담으로 남게 됐다. 노조 역시 “단 한명도 정리해고 할 수 없다”는 당초의 약속을 번복함에 따라 지도력에 치명상을 입었다. 특히 분규과정에서 농성 근로자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등 극심한 노­노 갈등을 불러일으킨 것도 쉽게 치유될 수 없는 상처로 남을 전망이다. 정부도 폭력 등 불법이 난무하고 있음에도 법집행을 계속 미룸으로써 법과 질서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결국 현대자동차 노사분규의 종착역은 승자는 없고 패자만 남은 ‘또 하나의 불행’으로 평가돼야 할 것 같다.
  • ‘한지붕 두가족’ 불협화음/홍콩 반환 1년

    ‘동방의 진주’ 홍콩이 7월1일로 중국에 반환된 지 꼭 한돌이다.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홍콩 차이나의 1년’은 세계인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비록 법적으로는 ‘1국가 2체제’로 자유분방한 영국식 정치환경이 보장됐지만,역사적 주권 귀속이 주민들에겐 무겁게 다가왔을 것이다. 아직 ‘생부모’(중국)보다는 150년을 함께 생활해온 ‘양부모’(영국)쪽에 더 마음이 쏠린 그들이었다. 더욱이 때마침 밀어닥친 아시아권 경제위기에서 홍콩도 예외가 아니다.변혁의 물결로 소용돌이치는 홍콩의 오늘을 진단해 본다. ◎급속 中國化 부작용… 국제 비즈니스센터 위상 흔들/개혁세력 선거 승리… 시민 상당수 “英領시절 그립다” 홍콩이 50년 시한부인 특별행정구라는 지위로 중국에 귀속된 지 어언 1년. 사회주의 체제하의 12억 본토인과 시장경제하의 650여만 홍콩인들이 ‘한지붕 두가족’처럼 딴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 ‘1국 2체제’구도는 겉보기엔 순조롭게 뿌리를 내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질적인 체제의 접목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큰 몸살을 앓고 있다. 변화의 방향은‘탈(脫)영국 중국화’로 요약된다. 홍콩은 더 이상 동서양가치가 조화롭게 공존하던,과거의 ‘동양의 진주’가 아니다. 올들어 홍콩거주 영국인들의 ‘엑소더스’도 가속되고 있다. 반환 이전 3만1,400여명을 헤아리던 영국인들이 현재 2만7,000여명으로 줄었다. 중국 정부의 음양의 간섭으로 서구식 자유주의도 눈에 띄게 위축되고 있다. 문제는 급속한 ‘중국화’과정에서 장점보다는 부작용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영국 통치의 강점이었던 ‘법의 지배’가 약화되는 대신 인치와 연고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영국령일 때보다 한층 무질서해진 교통질서가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중국어 전용이나 서구적 질서의 실종은 그렇찮아도 위기국면인 홍콩경제의 주름을 깊게 하고 있다. 금융·무역 등 국제 비즈니스센터로서의 홍콩의 위상을 약화시키고 있는 까닭이다. 다수 홍콩인들의 불안감도 증폭되고 있다.최근 홍콩대 사회과학원의 여론조사가 이를 입증한다. 주민 대다수가 영국 통치를 그리워하는 역설적인결과가 나온 탓이다. 이는 지난해 9월 주권반환 100일에 즈음한 홍콩정부의 여론조사 결과와는 극히 대조적이다. 당시엔 주민의 80%가 “‘홍콩 차이나‘가 더 안정되면서 번영할 것”으로 내다봤다. 요컨대 홍콩과 중국이 협연하고 하고 있는 ‘1국 2체제’교향악은 아직 미완성 상태로 불협화음을 빚어내고 있는 셈이다. 중국 귀속후 처음 실시됐던 지난달 입법회(의회)선거에서도 이 여론이 반영됐다. ‘홍콩발전민주연맹’ 등 친중국계는 불공정 시비 속에 간선제로 뽑는 의석을 독식,억지로 다수파가 됐다. 하지만 민주당 등 개혁세력이 직선제인 지역구 20석중 15석을 석권,사실상 승리를 거뒀다. 이 결과는 중국 귀속 이후 상황에 대한 홍콩인들의 강력한 불만표출로 받아 들여진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기묘한 동거체제가 벌써 삐걱거리고 있는 징후인 것이다. ◎홍콩은… 홍콩은 홍콩섬과 대륙의 구룡반도,그리고 부근의 240개의 조그마한 섬들로 되어 있다. 모두 합해 면적은 1,067㎢. 제주도가 1,845㎢이니 제주도의절반보다 조금 큰 편이다.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동서양간 경제교류의 징검다리로 보물과 같은 존재라 해서 흔히 ‘동방의 진주’로 불린다. 그러나 157년전만 하더라도 홍콩섬은 불모의 땅이었다. 고작 해적의 소굴에서 ‘동방의 진주’로 변신한 것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부터. 1841년 아편전쟁의 와중에 홍콩섬에 영국군이 처음 진주했고 이듬해에 아편전쟁이 끝나면서 영국에 할양된다. 18년후 2차 아편전쟁이 4년만에 매듭지어지며 구룡반도와 스톤 캐터스섬이 영국 영토가 된다. 그리고 1898년의 의화단 사건을 수습하면서 영국은 란타나오섬을 비롯한 200여개의 섬들을 또 넘겨받는 대신 할양기간을 99년으로 조정하는 조약을 맺었다. 60년대에서 80년대를 거치며 홍콩은 아시아는 물론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면서 영국이나 중국에 ‘효자’노릇을 톡톡히 한다. 실제로 중국정부는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게 했던 조약들이 평등하지 않다면서도 공식적으로 반환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79년 반환협상을 시작했고 84년 협상에서 역사적인 ‘97년 홍콩반환에 관한 공동성명’에 조인하면서 97년 7월1일 157년만에 본래의 중국 땅이 되었다. 그리고 1년이 흘렀다. ◎누가 이끄나/董建華·陳方安生 1국2체제 실험 주도/李柱銘 민주당수 “개혁세력의 희망봉”/통화전문가 任志剛 경제 조타수 역할 ▲둥젠화(董建華·61) 행정장관=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때부터 가장 많은 스폿라이트를 받았던 인물. 지난 1년동안 톈안먼(天安門) 사태 추도행사를 보장하고 입법회의 선거를 실시하는 등 유화 정책을 많이 썼다. 홍콩의 초대 행정장관으로서 앞으로 4년간 ‘1국 2체제’실험을 주도해나갈 인물이다. ▲천팡안성(陳方安生·58) 행정총리=둥젠화 행정장관 아래 홍콩의 관료들을 이끄는 제2인자. ‘홍콩의 대처’로 불린다. 영국 통치시절 홍콩 번영의 반석이라 할 깨끗한 행정관료 조직을 중국 귀속 이후에도 별 흔들림없이 잘 지켜내고 있다는 평이다. ▲스투화(司徒華) 지련회 주석=홍콩 민주 운동 단체의 대부격인 ‘애국민주운동을 지원하는 홍콩시민들의 연합회’(약칭 지련회)주석. 톈안먼 사태 기념 촛불시위 등을 주도. 중국의 인권탄압상을 국내외에 알리며 홍콩시민의 민주화 교사역을 하고 있다. ▲리주밍(李柱銘·60) 민주당 당수=5월24일 홍콩이 중국이 반환된 후 처음 치러진 입법회 선거에서 화려하게 재기했다. 귀속 전 최대 정당인 민주당의 수장. 이번 입법회 선거에서 민주당 등 개혁세력이 지역구를 휩쓰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 수호자’인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하는 길에 당연히 자신을 만나야 한다고 주장해 미국측을 난감하게 만들기도 했다. ▲조셉 얌(任志剛·50) 홍콩 재정사 금융관리국 총재=아시아 경제위기를 통해 급부상한 통화정책 전문가. 지난해 10월 미국 달러에 대한 홍콩달러 가치 하락 압력이 거세자 하룻밤 사이에 홍콩 이자율 280% 인상을 단행,환율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주역이다. 홍콩 경제 순항의 열쇠를 쥔 인물이다. ◎달라진 것들/北京語 배우기 열풍… 모르면 2류시민/“아편전쟁은 침략전쟁” 中 역사관 주입/영국紋章 사라지고 紫荊化도안 사용 홍콩 특별행정구의 거리에선 이제 그 흔하던 대영제국(大英帝國)의 왕관 로고를 찾아볼 수 없다. 엘리자베스 여왕 동상은 물론 우표에 찍힌 여왕 흉상도 사라져 버렸다. 대신 특별행정구를 상징하는 박태기나무꽃(紫荊花 자형화)도안이 행정특구 깃발에서부터 경찰제복에 이르기까지 뒤덮고 있다. 지난해만해도 어색하던 지하철과 공공장소에서의 보통화(普通話 베이징 표준어)의 사용도 자연스런 일이 됐다. 영국 통치 시대 홍콩에선 영어와 광둥어(廣東語)만을 사용해 보통어는 소통이 불가능한 외국어에 불과했다. 초등학교 등 각급 학교에선 보통화 교육이 필수가 됐다. 아직 완벽하지 못한 보통화를 배우려는 공무원과 직장인들로 학원은 계속 호황이다. 영국 치하에서 영어에 능숙하지 못하면 2류 시민이 됐던 것처럼 이제 매끄러운 보통화 실력없이는 설땅이 좁아지고 있다. 각급 학교의 교과서가 개정된 것은 물론이다. 중화민국은 타이완(臺灣)으로 격하됐고,역사는 영국의 식민지배적 관점에서 중국의 역사관으로 대체됐다. 예전 영국령 홍콩 시절 교과서에서는 아편전쟁이 자유무역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일어났다고 기록했지만 이제는 본래 모습대로 침략전쟁으로 제자리를 찾았다. 공휴일도 달라졌다. 6월 두번째 토요일부터 시작되던 ‘여왕 탄신 기념일’연휴는 지난해로 홍콩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대신 10월1일부터 3∼4일간 이어지는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수립일이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뒤덮는 불꽃놀이 속에 가장 성대한 축제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7월1일 이전까지 법원의 최종 판결은 영국의 추밀원에서 결정했으나 이제는 홍콩에도 최종심 법원이 설치돼 자체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거리의 외환 환전창구에선 인민폐(중국돈)를 바꿔주고 있고 인민폐를 홍콩돈처럼 받는 상점도 늘고 있다. 물론 ‘베이징 바람’이 점점 거세질 수록 ‘홍콩 차이니즈’들의 정치적 참여와 비판의식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홍콩의 중국화는 어쩔수 없는 대세로 굳어지고 있다. ◎경제/불황 주름살/1분기 마이너스성장 실업률 15년래 최악 중국 반환 1주년을 맞는 홍콩이 요즘 우울하다. 홍콩의 버팀목은 단연 경제. 꼭 영국과 결별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마침 닥친 아시아 경제위기에 휩쓸리며 어려움을 격고 있다. 90년대 들어 5%대의 경제 성장율을 유지해 왔으나 올들어 1·4분기에는 -2%를 기록했다. 경제가 침체되다 보니 실업률도 최악의 상황이다. 1.4분기 실업률은 4.1%. 최근 15년이래 가장 높은 것이다. 96년의 실업률은 2.8%,지난해 2.5%였다. 지난해 중국 귀속을 앞두고 불안심리가 팽배하면서 오르기만 했던 부동산 가격과 주식의 폭락은 사뭇 심각하다. 주가는 1년 전보다 절반 아래로 떨어졌고 부동산도 40∼50% 수준에 머물고 있다. 홍콩 경제가 자랑하는 고정 환율제마저 흔들리고 있다. 홍콩 달러가 실제가치보다 높게 평가되면서 수출 경쟁력이 탄력을 잃고 1년 내내 붐비던 관광객마저 발길이 뜸해졌다.중국에 편입되면서 11%나 줄었던 관광객이 올들어 24%나 더 감소했다. 재무장관격인 도널드 창(曾蔭權) 재정사(財政司)는 지난 17일 올 경제성장률 3.5%의 달성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몇년간경제 전망도 어둡다고 털어 놨다. 버팀목인 경제가 허약해지자 홍콩 사회가 흔들린다. 실제로 최근 홍콩대학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홍콩장래에 대한 불신도(不信度)도 지난해 9%에서 25%로 늘어났고 신뢰지수는 최저수준을 기록했다. 동북아와 동남아의 요충지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세계최고의 컨테이너 수송능력과 첵납콕 신공항 등으로 요약되는 아시아 금융·무역의 중심지 홍콩. 그러나 싱가포르와 상하이(上海)가 홍콩의 자리를 맹렬히 추격하는 상황에서 ‘동방의 진주’가 얼마나 더 ‘제 색깔’을 유지할지, 의구심이 커가고 있다.
  • 존 F.케네디(美國의 대통령 문화:19)

    ◎뉴 프런티어정책 편 美 상징적 지도자/평화봉사단 창설… 후진국 교육·영농지도/蘇의 쿠바 미사일 배치 기도 ‘힘’으로 봉쇄 【보스톤(美 메사추세츠주)=羅潤道 특파원】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수 있는가를 묻지 마십시요.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수 있는가를 물으십시요.” 1961년 1월20일,43세의 나이로 미역사상 최연소의 기록을 세우며35대 대통령에 취임한 존 F.케네디 대통령(1917­1963)의 취임사는 냉전체제에 대한 염증 때문에 강한 개인주의적 성향을 보이던 미국민들에게 신선한충격으로 다가왔다. 63년 11월21일 댈러스에서의 총성으로 최고의 전성기에 역사의 뒤안으로 물러서게 된 케네디는 불과 2년10개월(1천37일)의 짧은 집권기간에도 불구하고 미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그래서 그는 죽어서도 포토맥강 건너 알링턴 국립묘지 한복판,워싱턴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중앙 언덕에 ‘불멸의 불꽃’(eternal flame)으로 살아 미국민들의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다. 첫 20세기 출생 대통령인 그는 많은 업적을남겼다.‘뉴 프런티어’라고 불린 그의 정책은 루즈벨트의 ‘뉴 딜’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평화봉사단’을 창설,미국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세계 구석구석 후진국을 찾아가 교육과 영농을 지도케하는 인류애적 차원의 일에 적극 나섰다.흑인인권 보호를 위해 흑백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안도 만들었다.소련보다 한발늦기는 했지만 선구자적인 의지로 우주개발계획을 추진,미국이 최초의 달정복 국가가 되도록 했다. ○흑백차별금지법 제정 대외적으로도 소련의 베를린 봉쇄에 대한 강력한 대처,쿠바내 소련의 미사일 배치를 저지키 위한 쿠바 봉쇄 등 ‘힘’으로 소련을 굴복시킨 그의 강력한 대외정책은 미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물론 국제적인 관심또한 불러 일으켰다.비록 쿠바침공 실패로 국제적 망신을 하기도 했지만 60년대 들어 대중문화의 급속한 확산과 함께 미국적 이상을 실현할 젊고 용기있는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하고 있던 미국민들에게 케네디는 ‘미국의 상징’으로까지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는 탁월한 두뇌의 소유자도 아니고 강력한 의지력을 갖춘 인물도 아니었다.더우기 정계 입문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정치적 성장과정이 백만장자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의 금권을 앞세운 적극적 개입에 의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그러나 그가 강력하고 진보적인 정책을 펼수 있었던 것은 겸손하고 노력하는 자세 때문이다.그는 사려깊고 여러 사회문제들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민주주의 원칙의 수호자로 이미지를 심었다. 1917년 보스턴 교외의 브루클린에서 아일랜드 이민의 후손으로 백만장자가 된 조지프와 로즈 케네디 사이의 9남매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케네디는 병약하고 그다지 학교성적은 좋지 않았으나 사람을 사귀기 좋아했고 스포츠를 좋아했다.부친이 루즈벨트 행정부때 영국대사를 지내 런던대학에도 잠깐 재학한 일이 있는 그는 하버드에 입학,광범위한 여행을 즐겼다. 그러나 상급 학년으로 올라가면서 그는 점차 학업에 흥미를 보였다.영국의 나치 독일에 대한 대응 실패를 다룬 그의 졸업논문은 ‘왜 영국은 잠을 잤는가’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이어 1942년 진주만 폭격 직전 미해군에 입대해 PT(어뢰정)지휘관으로 활약,일본군과 싸운 공로로 은성훈장을 받기도 했다.45년 디스크 수술로 전역한 그는 부친의 권고로 46년 민주당 소속으로 연방하원에 출마,당선됐다. ○57년 퓰리처상 수상 52년 3선의원인 케네디는 35세의 젊은 나이로 상원의원에 당선됐다.이듬해 그는 조지워싱턴대를 나오고 워싱턴타임스­헤럴드의 런던특파원 이던 24세의 재클린 부비어와 결혼했다.지성과 미모를 갖춘 재클린과 미남 총각 상원의원과의 결혼은 커다란 화제를 불러 일으켰지만 겉보기와는 달리 두사람의 결혼생활은 케네디의 바람기로 원만치 못했다. 57년 미의회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의원들의 이야기를 엮은 ‘용기있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저술,퓰리쳐상을 받은 케네디는 바른 이상을 가진 정치인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TV토론이 처음 실시된 60년 대통령선거에서 닉슨을 근소한 차이로 따돌릴수 있었다. 백악관에 들어간후 재클린은 훌륭한 참모이자 동반자 역할을 했으며 특히 63년 8월 2살바기 아들 패트릭이 죽은 후에는 두사람의 금슬이 상당히 좋아진 것으로 전해졌다.그러나 이 좋은 금슬도 케네디의 피격으로 3달밖에 지속되지 못했다.케네디 가문은 대통령과 3형제 상원의원을 내는 등 미역사상 가장 번성한 집안의 대명사가 됐지만 두아들이 총에 맞아죽고 아들과 딸들이 사고로 죽는 비운의 가문으로도 남아 있다. 서거 35주년이 되는 오늘날까지도 그는 미국민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대통령으로 남아있으며 보스턴항 남부의 컬럼비아 포인트에는 케네디도서관이 우뚝 서 케네디 대통령 당시 각종 자료 및 유물을 집대성하고 있다.또 브루클린에는 그의 생가,히아니스항 인근에는 하계별장 등이 잘 보존돼 있다.
  • 중견 방송작가 최홍준씨 ‘무한을 향해 자신을 던지고’ 펴내

    ◎국내외 가톨릭 성인들의 삶 중견 방송작가인 최홍준씨(K­TV전문위원)가 국내외 가톨릭 성인들의 삶을 다룬 성인전 ‘무한을 향해 자신을 던지고’(가톨릭신문사)를 냈다.기존의 평면적인 성인전 구성방식에서 벗어나 성인들의 여러 일화와 약전을 입체적으로 구성해 놓은 것이 특징.또한 스스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세계에 유례가 없는 한국 순교성인들의 박애정신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미 30여년 전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은 공의회를 마치면서 발표한 메시지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파멸과 고루의 현상인 무신론 앞에서 생명의 신앙과 생명에 뜻을 주는 모든 것을 주장할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이 책은 ‘미래를 비추는 불빛’인 다음 세대에게 이러한 생명의 정신을 일깨워주는 데에도 적잖은 비중을 뒀다.이 책의 1부 ‘이 땅의 순교자들’편에서는 초대교회 공동체를 연상시키는 현경련 베네딕다 성녀,이소사·아가다 등 기해년 5월의 순교자들, 한국성직자들의 수호자 김대건 사제순교자 등을 다룬다. 또 2부 ‘교회의 누룩이 된 해외 성인들’편에서는 로레또의 성가정, 사도요한,동정녀 아녜스,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 사도 마티아, 필립보 네리 신부,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동정녀 젤뚜르다,십자가의 요한,초대교황 베드로,파비아노 교황 순교자 등이 소개된다.지은이는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특히 필요한 것은 성인들의 끝간데 없는 사랑의 정신과 사그라들줄 모르는 견인불발의 정신이라고 강조한다.
  • 檢察 바로 서야 한다(社說)

    金大中 대통령이 9일 법무부 업무를 보고 받는 자리에서 과거 검찰이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검찰이 정말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한 당부는 가슴에 와닿는다.金대통령은 자신이 오랜기간 동안 야당 지도자로 살아오면서 검찰로부터 받았던 피해사례를 열거하며 새로운 검찰상 수립을 촉구했던 것이다.대통령의 날카로운 질문과 지적,그리고 체험에 바탕한 훈계에 검찰 간부들은 진땀을 흘리며 새 출발을 다짐했다고 한다. 검찰에 대해 공식적인 견해를 전혀 밝히지 않던 대통령이 취임후 처음으로 가슴 속 깊숙이 간직해 두었던 검찰관(檢察觀)을 피력한 사실 자체가 무척 인상적이다.아울러 검찰이 법 질서의 수호자요,인권의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로 한 약속에 대해서도 우리는 기대를 갖게 된다. 검찰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없이 어느 시대에나 막중하다.“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대통령의 지적은 이 시대 검찰의 사명(使命)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일깨워 주고 있다.그만큼 지난 날 우리의 검찰은 정치권력의 논리에 좌지우지(左之右之)되었고 스스로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던 경우가 많았다.金대통령도 한보사건과 지난 89년 용공(容共)조작 사건 수사를 예로 들며 거듭 공정수사를 강조해 검찰 수뇌부를 쩔쩔매게 했다. 이날 보고자리에서는 “나도 감옥에 있어 봤는데…”라며 시작되는 대통령의 교정(矯正)시설에 대한 지적도 간곡하다.‘4평정도 방에 재소자 10명이 들어간다’는 보고를 받고 “이건 교정이 아니다”는 말로 질타하고 개선을 명령했다.이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부정부패를 막았더라면 우리 경제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탄식(歎息)으로 검찰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해 검찰을 한층 곤혹스럽게 했다.검찰은 인사를 공정하게 하고 권력을 위해 검찰권 행사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뜻을 바로 받아들여 정말 신뢰받는 검찰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다.
  • 인권옹호자 선언 행사때 金 대통령 메시지 받겠다/세계인권위

    金大中 대통령이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버마의 아웅산 수지 여사,체코의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에 필적하는 세계적인 인권운동 수호자로 ‘공인’받게 됐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는 유엔산하 세계인권위원회의 미국대표인 낸시 루빈 대사는 27일 보스워스 주한미대사를 통해 다음달 2일 ‘인권옹호자 선언’ 을 기념하는 행사에 金대통령의 화상 메시지를 받고 싶다는 뜻을 요청해왔다고 朴智元 청와대대변인이 이날 밝혔다. ‘인권옹호자 선언’은 미국의 주도적인 노력으로 13년간의 협상끝에 세계인권선언 50주년과 때를 맞춰 오는 4월2일 세계인권위원회에서 정식으로 채택되며,인권운동의 헌장에 해당하는 역사적인 문서이다.
  • 우드로 윌슨(미국의 대통령 문화:13)

    ◎‘민족자결주의’ 제창 국제평화 기본틀 다져/독점기업·세제 등 개혁… 노동자보호 앞장/‘이상주의자’ 평가속 20년 노벨평화상 수상 【스톤튼(미버지니아주)=나윤도 특파원】 민족자결주의로 한국민에게도 익히 알려져 있는 28대 미국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이른바 ‘버지니아왕조’,즉 버지니아주 출신 대통령 8명중 마지막 대통령 이다. 프린스톤대 총장을 지낸 학자 출신의 이상주의자로 알려진 윌슨 대통령은 1차대전의 와중에서 미국익의 성실한 수호자역을 맡아 국제정치의 무게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 놓은 훌륭한 대통령으로 평가되고 있다.대통령은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명실공히 국가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던 그는 온화한 외적 분위기와는 달리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했다. 그의 생가가 있는 스톤튼은 애팔래치아산맥 동부의 빼어난 절경인 셰난도계곡 복판에 위치해 있으며 윌슨의 도시로 유명하다.이 작은 도시에서는 도시 설립 250주년을 기념,지난해 9월부터 올 1월말까지 5개월 동안 생가에서 ‘스톤튼의 이야기들’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가졌다. ‘윌슨시대의 도시(1855­1912)’라는 부제가 붙은 이 전시회에는 윌슨이 이곳 장로교회의 목사관에서 태어나 자라고 대통령이 되어 이 도시를 떠났던 때까지,사진과 각종 유품 등 당시의 생활상을 상세히 진열해 윌슨을 키워낸 이 도시의 어제와 오늘을 잘 살펴볼수 있게 했다. ○한국독립 운동에 침묵 이곳의 윌슨 사적지에는 그의 생가가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새로 지은 박물관과 부친 조셉이 시무하던 교회,설립한 대학 등이 시가지 곳곳에 그대로서 있다.우드로 윌슨 재단에 의해 사적지 내에 세워진 박물관에는 윌슨의 존스 합킨스대 박사학위논문을 책으로 펴낸 ‘의회 정부론’를 비롯,‘민주주의 국가론’‘분열과 통합론’‘조지 워싱턴’‘미국 민중사’ 등 그의 명저들을 비롯,1차대전과 관련된 많은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프린스톤 총장에 이어 뉴저지 주지사를 역임했던 윌슨 대통령은 총장 당시 리승만 대통령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함으로써 한국과의 인연을 시작했다.그러나 3·1운동 이후 임시정부수반으로조선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리승만의 거듭된 주장에 그는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한국민에게는 섭섭한 감정을 남기고 있다. 20세기 초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미국내 일기 시작한 혁신주의운동은 정당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윌슨에 의해서도 계승됐다.남북전쟁 이후 경제적 사회적 침체와 함께 사회 도처에 만연된 부정부패를 일소하여 미국을 진정한 민주사회로 개혁하자는 이 운동의 가장 큰 목표는 당시 모든 폐해의 근원이 되고 있던 국내의 독점기업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윌슨이 내세운 정강은 바로 이같은 사회적 욕구를 반영한 것으로 기업의 독점을 와해시켜 시장원리에 따른 자유경쟁을 부활시키자는 이른바 ‘신자유(New freedom)’였다.‘신자유’는 대대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재선을 꾀하던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은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는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대중을 독점기업의 강력한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고 개개인을 모든 형태의 압제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한 정책을 내세웠고 이를 위해 개혁주의자들을 전면에 포진시켰다.대표적인 정책으로는 관세인하,연방소득세 신설 등 세제개혁과 연방지불준비법 등 은행제도의 개혁이 있었다.루즈벨트 시대의 셔먼법보다 훨씬 강화된 독접 규제법인 ‘클레이턴 트러스트 금지법’도 제정했다. ○전쟁중 경제활황 재선 윌슨 대통령이 이같이 국내문제에 심혈을 쏟고 있는 동안 1914년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인해 발발한 1차대전은 미국에 국제정치의 중심역할을 맡게하는 계기를 가져왔다.초기에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고 급증하는 군수수요는 미국의 경제활황을 가져다 주었다.이같은 상황에서 16년 그의 재선은 순조롭게 이뤄졌다. 그러나 독일군 잠수함의 집요한 미국 상선 공격은 1917년 4월 마침내 미군의 참전을 불러오게 했다.미해군과 육군의 참전은 전세를 급속히 반전시켰으며 이듬해 1월 윌슨은 1차대전 이후 국제평화의 기본틀이 된 유명한 ‘14개항 원칙’을 발표했다. 자유주의와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전후의 세계질서를 재편하려는 의도가 담긴 이 선언의 주요 내용은 ▲공개외교 ▲평화시나 전쟁시 항해의 자유 ▲군비축소 ▲자유무역의 원칙 ▲식민지 요구에 대한 공정한 판결 ▲영토본전을 위한 국제연맹 창설 등으로 돼있다. 이 선언은 파리평화회의를 가져왔고 이 회의에서는 국제연맹규약이 포함된 베르사이유조약을 도출해 냈다.그러나 집단안전보장을 골자로 하는 국제연맹의 설립은 윌슨에게 뜻하지 않은 정치적 부담을 안겨주었다.공화당이 가맹국의 내전에 간섭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상호 불간섭의 원칙을 표방했던 먼로주의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반대입장을 밝혔다. 윌슨은 국민들에의 직접 설득을 통해 이를 돌파하려 애썼지만 국제연맹 가입안은 미상원에서 부결됨으로써 막상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가입을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이같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여러차례 윌슨은 겪어야 했고 이때문에 그는 시대를 앞서가는 지나친 이상주의자라는 평을듣고 있다.그러나 그의 이상주의는 1920년 노벨문화상수상으로 보상 받은 셈이 됐다. ◎룰라 브룩스 윌슨박물관 큐레이터/“도덕정치·개혁 실천한 지도자”/“이상주의 추진” 용기와 노력 본받을만/첫부인 앨런과 사별… 재임중 재혼 기록 【스톤튼(미버지니아주)=나윤도 특파원】 ‘스톤튼의 이야기들’전시회를 주관했던 우드로 윌슨 박물관의 엘렌 시아 큐레이터는 “5개월간의 전시기간중 많은 관람객들로 붐벼 윌슨 대통령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데 놀랐다”며 말문을 열었다. ­.윌슨 대통령의 성품에 대해 설명해달라. ▲윌슨을 흔히 미국의 마지막 지성인 대통령이라고 한다.그는 높은 도덕정치와 과감한 개혁을 동시에 행한 지도자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이때문에 그는 라이딩스의 대통령 랭킹에서 42명중 6위라는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지나친 이상주의자라고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오늘날 생각하면 그의 생각들은 모두 옳은 것이었다.한 예로 그의 세계정부론은 선견지명이 있던 것이다.그러나 당시의 수준에서는 너무 앞선 것이어서 인정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이상을 실현하려는 그의 용기와 노력은 우리가 본받을만 하다. ­.어린 시절은 어떠했는가. ▲아버지가 장로교회 목사 였기 때문에신앙이 좋고 매우 검소한 분위기에서 성장했다.특히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임지에 따라 남부의 여러곳을 다니며 성장했다.그러나 출생지인 스톤튼에 대한 애정은 남달라 성장후에도 틈틈이 찾아왔던 기록이 있다. ­.가족관계는 어떠했는가. ▲첫부인인 앨런과 사이에 세 딸을 두었다.대통령 취임 2년만에 그녀가 죽고 불과 9개월만에 에디트 갈트와 재혼,재선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하는 측근들의 우려를 사기도 했다.타일러,클리브랜드와 함께 대통령 재임중 결혼의 기록을 남겼다.
  • 야당세력의 형성(대한민국 50년:8)

    ◎48년 8월 한민당 “이승만정권에 투쟁” 선포/조각 배분 푸대접 받자 초대총리 지명 인준 부결/보수세력에 지나치게 기대 ‘보수야당’ 성격 고착 이승만정권에 대응한 야당세력의 출현은 바로 한국민주당에서 비롯된다. 한민당은 미군정기인 45년 9월16일 좌우대립속에서 지주세력 등 우익측 인사들로 결성된 보수반공연합체 정당으로 출발했다. 중경의 임시정부를 정통정부로 추대하고,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의 인민공화국 타도를 모토로 내걸었다. 한민당은 창당 당시에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의 임정요인들을 지지하고 이들과 함께 반탁운동을 전개했으나 김구 등 임정세력들과의 노선차이로 결별했다. ○건국까지는 손발 맞춰 그러나 단독정부수립을 주장한 이승만과 한민당은 손발을 맞춰 건국까지 이끈다.이승만과 한민당의 관계는 ‘정약결혼’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이승만은 그들의 국내 지지기반이 필요했고 대신 한민당은 이정권에서 권력을 주도하려는 야심이 있었던 것이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한 이승만은정약결혼속에서도 내심 ‘친일정당’으로 비판받던 한민당과 계속 제휴하는 것은 자신의 노선까지도 손상받을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48년 7월20일 제헌국회에서 내각제를 대통령제로 바꿔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바로 조각작업에 착수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하나씩 드러냈다. 먼저 한민당이 국무총리로 내세운 당위원장 김성수안을 거부하고 조선민주당 부당수였던 이윤영을 총리로 지명,국회인준을 요구했다. 이에 한민당도 기다렸다는듯 즉각 인준을 부결시켰으며,결국 이범석을 총리로 지명해 인준받은 이승만은 김도연에게 재무장관 자리 하나를 주는 것으로 한민당의 조각참여를 제한했다. 한민당은 이 사건을 ‘이승만의 배신’으로 간주하고 자연스럽게 야당의 길로 전향했다.한민당의 이승만에 대한 불만은 48년 8월8일 발표한 성명에 잘 나타나있다. 이 성명은 ‘…본당원으로서 정부에 국무위원으로 입각한 사람은 김도연 1인뿐이어서 극히 빈약하다.본당은 신정부에 대해 시시비비주의로써 임할 것은 물론이거니와…”라고 주장해 이승만정권에 대한 투쟁을 선포한 것이다. 한민당은 본격 야당으로 강화하기 위해 대한국민당의 신익희 세력 등을 규합,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한민당은 창당 3년4개월만인 49년 1월26일 자연해체하게 되고 49년 2월10일에는 민국당으로 자리잡게 된다. 민국당은 이어 정부12개부처의 각료중 7명이나 차지해 세를 불려나갔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기 위해서는 내각책임제 개헌밖에 없다고 여겨 이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민국당은 50년 1월 79명의 서명으로 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50년 3월14일 국회 본회의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표결에 부쳐졌으나 부결로 끝났다. ○49년 2월 민국당 창당 하지만 민국당은 동조자를 확보해 계속 이정권에 도전하는 공세를 펴나갔다.민국당 신익희의 국회의장직 진출로 민국당이 반 이승만세력을 한창 규합해 갈 즈음 6·25전쟁이 일어났다. 이로써 국회활동도 중단되고 정쟁은 사그러지는 듯 했으나 이승만측의 정권에 대한 욕심은 굳건했다.전쟁중에도 민국당이 차지한 의회를 거치지 않고 바로 선거를 치르기 위한 직선제 개헌에 불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어 청·장년들을 강제징집·수용해놓고 간부들은 돈을 횡령한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을 겪으며 정부불신임이 팽배해지면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는 마침내 이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야당 국회의원들을 마구 잡아들인 ‘부산정치파동’으로 연결돼 반정부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당시 문헌들에서 한민당은 흔히 기본적인 자유와 인권의 수호자로,또한 이승만의 독재적인 행정부 권력에 맞서는 의회 특권의 수호자로 묘사돼있다. 그러나 한민당은 사실상 토지와 지방권력등을 대변하는 기관으로 군림했으며 재원의 분배와 부의 통제를 둘러싸고 중앙 행정권력과 투쟁을 벌일 뿐이었다. ○6·25중에도 개헌 추진 미 중앙정보국(CIA)은 당시 한국 국회를 대한민국 내의 ‘민주주의 정신의 터전’이고 흔히 입법부에서의 논의가 정부관리들과 가열된 공방을 야기시켰다고 파악했다. 그런데 이 국회가 ‘서구의회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며’ 집행부에 대해서는 전혀 효과적인 억제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승만의)‘보나파르티즘’(Bonapartism)에 어떤 장애도 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한민당은 민주국민당으로 변신해서도 국가관료의 고위지도부에 계속 참여했다.49년초 도지사,시장,군수등의 명단은 45∼46년 지방관리들의 명단과 놀라울 정도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한민당이 야당으로 자리매김했으면서도 이승만정권의 정책에는 동조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즉 한민당은 이승만의 보수주의적 반공노선에 동조함으로써 혁신 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러면서도 자기 지분을 늘리기 위해 6·25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도 의원내각제 개헌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많은 한계를 드러냈다. 이는 CIA가 50년 당시 대한민국에서 ‘정치적 경쟁’은 ‘보수지도자들 사이에서만 존재했다’고 평가한데서도 알 수 있다. 한민당은 수많은 당명의 교체속에서도 현재까지 한국 야당의 명맥을 이어준 ‘뿌리’로 치부되고 있다.그러나 첫 야당이 보수세력에 지나치게 기댐으로써 지금까지 한국정치에서 야당의 성격을 보수로 규정하게 만드는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야 한민당 관료기구 주도”/49년 미 관리 작성 ‘남한정세 조사’ 보고서 확인 이승만정권시기 관료기구에서 한민당의 주도성과 한계는 1949년 3월 미국관리 맥도널과 로지엘이 직접 대한민국 전역을 여행하며 작성한 ‘남한 정세의 조사’라는 보고서와 미국무부 문서 등 당시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남한 정세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각 지역의 도지사·시장·군수 등은 1945∼46년 미군정기 지방관리와 거의 일치함을 보여준다.한민당이 이승만정권에 대한 투쟁을 선언했으면서도 관료기구를 주도했던 것이다. 한민당 후신인 민주국민당도 역시 ‘산업가 및 지주들’의 후원을 받는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정당이었다.따라서 이승만정권과 이들 야당세력 사이에는 ‘권력을 향한 경쟁 이외에는 모든 것이 부차적’이었으며 ‘내부 파벌투쟁 또한 강력해 하찮은 자극에도 당을 뛰쳐나가게’ 만들었다.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의 야당은권위주의적 통치권을 획득하려는 노력에 의해 움직여졌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체질적 요소가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미 공문서 기록관리청(NARA) 국무부 일반문서중 50년총선관련자료(Developments concerning the 1950 general election)에 따르면 당시 한국 정당의 정강은 유교체제탓인지 정부에 대해 온정적 시각을 담고 있다고 표현돼있다.게다가 당시 이는 정강자체는 의미없는 것으로 여겨져 부실한 정당정치를 알 수 있다.이들간에 이데올로기의 차이도 권력투쟁에 있어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민국당과 대한국민당 양대정당 사이의 주요한 이슈는 민국당이 행정부에 반대하고 국민당은 지지한다는 차이,그것으로 족했던 것이다.국민당 당수 윤치영도 주한미대사관 관리에게 개인적으로 “우리 당과 민국당의 위치에 큰 차이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또 민국당은 자유주의를 공언했으나 산업가,지주 등의 지지를 등에 업어 보수정당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세계 문화유산 순례:57)

    ◎서양문명의 상징 파르테논신전 우뚝/BC5세기 페리클레스가 아테나연신 위해 건립/인근엔 제우스신전·디오니수스 원형극장 함께 아테네는 로마와 함께 서양에서 대표적인 고대도시 유적일 것이다.도시의 중심에 높다랗게 솟아 있는 파르테논 신전과 그 아래 아크로폴리스는 그리스문명 뿐 아니라 서양문명을 오랫동안 상징하여 온 대표적인 문화재기도 하다. 아테네는 파르네산과 히메투산,펜텔산 아래에 말굽형으로 펼쳐져 있다. 회백색조의 건물들이 짙은 올리브 숲에 박힌 아테네 언덕은 눈이 부셨다. 그 중에 빛나는 기념구역이 아크로폴리스다.이속에서는 가장 그리스적인 완벽하고 아름다운 건축과 조각품을 볼 수 있다. 아크로폴리스(Acropolis)는 기원전 6세기경에 건설되었다. 아테네 시민들의 거주지역과 구분한 신성한 지역으로 현재의 파르테논 신전이 들어선 바위언덕 일대가 아크로폴리스다. 폴리스(Polis)라는 말은 도시이고 아크라(Akra)라는 말은 상부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덩그랗게 높은 도시라는 말이 된다. 언덕의 윗쪽은 기다란 삼각형의 모양을 했다. 그 크기는 너비 270m,길이 156m로 되어 있다. 서쪽은 프로필라이아라고 부르는 건물군의 입구이다.그리고 언덕의 동남편으로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 ○페르시아전쟁때 폐허로 아크로폴리스는 원래 그리스의 다른 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성채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케네의 왕이 이 높은 곳에 왕궁을 지었다. 아주 옛날부터 이아크로폴리스는 풍요와 번영,그리고 승리의 여신 아테나가 그 수호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아크로폴리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 전쟁이 일어난지 50년 후에 페리클레스가 여신 아테나를 위하여 건축가인 페이디아스의 도움으로 새로운 신전을 짓게 되었다. 그것이 파르테논 신전인 것이다. 신전은 기원전 447년에서 기원후 432년 사이에 지었다. 그리고 나서 서편에 있는 건물군 프로필라이아는 432년에서 437년 사이에 지은 것이다. 그이후에 연속하여 아테나 나이키(Athena Nike)가 들어서고 최종적으로 여인상 조각의 기둥이 인상적인 에레흐테온이 들어섰다. 파르테논 신전은 현재 우아한 도리와 지붕 일부,기둥들만이 서 있다. 동서편의 긴쪽으로는 17개의 도리아식 기둥과 남과 북의 짧은 쪽으로는 8개의 기둥이 건물의 외곽에 배치되었다. 이 건물은 아테나여신의 거주처였기 때문에 여신의 위엄과 영광을 재현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건물의 외모에 완벽한 균형미를 나타내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건물이 놓여있는 지면이 불균형한 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배흘림기둥을 사용했다. 신전의 일부 벽에는 고부조로 된 장식들이 남아 있는데 트로이 전쟁 따위의 전쟁에 관련한 것과 범아테네 행진같은 것이 표현되었다. 지붕아래 도리에 해당하는 벽에는 아테나여신의 탄생과 아테나를 차지하려는 포세이돈을 조각해 놓았다. 아크폴리스의 주위에는 언덕 꼭대기의 신전건물 말고도 북쪽에 디오니수스라는 원형극장이 자리잡았다. 이 원형극장에서는 페리클레스같은 세력가의 후원으로 소포클레스와 에이쉬루스,유리피데스 등의 비극이 상연되었다고 한다. 비극은 극작가 자신들이 직접 연출한 것이 대부분이였다. 기원전 4세기에 지은 디오니수스극장은 그 이후에 약간의 변형과 증축을 거쳤다. 기원전 5세기까지는 목조구조였으나 기원전 4세기에 들어 돌로 다시 개조했다. 이 극장 말고도 헤롯 아티쿠스극장이 있다. 현대음악가인 야니의 음악회를 포함하여 많은 공연들이 지금도 이루어지는 이 극장의 석조건축은 그 표현이 인상적이다. ○그리스 최대의 석조건물 제우스 신전은 아크로폴리스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평지에 지은 제우스 신전은 그 규모가 엄청나 길이가 110m가 넘고 폭도 44m에 달했다.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석조건물이었다는 것이다. 기원전 515년에 착공한 이 신적공사는 한때 중단되었다. 그러다 기원전 174년 시리아의 막강한 권력자 엔티오크스 4세가 자금을 대어 로마의 건축가 코스티우스로 하여금 다시 짓게 했다. 엔티오쿠스 4세가 죽자 공사는 다시 중단되었다. 신전은 기원후 131년경 하드리안황제 시절에 가서야 원래의 설계대로 완성할 수 있었다. 지금 제우스 신전에는 104개의 코린트양식의 기둥 가운데 겨우 15개의 기둥이 서 있고 하나는 누워 있다. 하드리안 아치라고 불리는문은 아마도 이신전의 완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었을 것이다. 그 아치는 오늘날 구 아테네와 신 아테네를 구분하는 경계 구실을 한다. 제우스 신전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오면 판아테니안 스타디움이 있던 자리에 같은 방식으로 지은 스타디움이 근대 올림픽의 기념비적 건조물인 것이다. ◎여행 가이드/편의시설 완비… 렌터카로 단독관광 해볼만 아테네로 가는 항공편은 다양하다. 서울에서 암스테르담이나 츄리히 또는 프랑크푸르트 등의 대도시는 물론 이스탄불에서도 연결된다.국제적인 관광도시여서 호텔 등 편의시설은 잘 구비되었다. 현지의 고 투어스(92­33­166)나 키 투어즈(322­5951)같은 그리스관광회사들도 패키지 버스관광상품을 제공한다. 한국인계 관광회사로 킴스 투어(968­0942),아시아나 트래블(72­22­700)을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 아테네 시내는 가이드북을 가지고 렌트카로 단독관광을 해도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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