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수탈
    2026-08-05
    검색기록 지우기
  • 국방
    2026-08-05
    검색기록 지우기
  • 공천
    2026-08-05
    검색기록 지우기
  • 피란
    2026-08-05
    검색기록 지우기
  • 3호선
    2026-08-05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993
  • “아편전쟁ㆍ천안문 사건은 구국 운동”(특파원수첩)

    ◎중국정부,“동질성”홍보 안간힘/“두 사건 모두 「서방침투」막는데 크게 기여”/「무력진압」이후 정치위기 벗으려 몸부림 1백50년전의 아편전쟁과 지난해 6ㆍ4천안문사건. 중국당국은 겉보기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듯한 이 두가지 사실에 구국차원의 공통점을 부여,현실적인 정치위기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즉 아편전쟁이나 6ㆍ4사건 모두가 중국을 수탈하고 반식민지화하려는 서방세계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역사적 사명감과 애국심에서 비롯됐다는 식으로 이색적인 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6ㆍ4사건의 경우 개방ㆍ개혁에 편승해서 유입된 자산계급 자유화등 사회주의 중국을 좀먹는 부르주아사상이 정신적 아편으로 작용,대학생을 비롯한 일부 젊은이들을 현혹시켰기 때문에 당국으로선 이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국가와 전체 민족을 구하기 위해 무력진압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중국당국은 아편전쟁발발 1백50주년(6월)을 맞아 요즘 북경 등 주요도시에서 이와 관련된 자료전시와 함께 영화 연극등을 공연하는 등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벌이고 있으며 강연회 등을 통해 아편전쟁과 6ㆍ4사건의 동질성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지난 6월4일 6ㆍ4사건 1주년을 전후해서도 대학생등 청소년들을 이러한 행사에 의무적으로 참석케 해 애국심을 되새기게 함으로써 사건의 부정적인 영향을 희석시키려 했다. 중국당국은 앞으로 연말까지 아편전쟁의 애국적 성격을 강조하는 캠페인을 계속 벌이고 6ㆍ4사건도 같은 시각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식의 정치사상교육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아편전쟁은 누구나 잘 알고 있듯 팽창적 제국주의에의 야심에 가득찼던 영국이 19세기 들어 중국대륙에 아편을 대량으로 팔아 넘기던 과정에서 발생한 것. 영국은 대륙에서 수입하는 중국차와 비단의 결제대금으로 당시 국제통화역할을 했던 은을 주는게 아까워 그들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하던 아편을 대신 주기 시작했고 중국측은 몇차례 수입금지령을 내렸지만 영국상인들의 밀무역으로 아편수입량이 급증했다. 이처럼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아편값을 치르느라 거꾸로 중국의 은이 해외로 대량유출,대륙경제는 큰 타격을 입게 됐다. 당시 중국의 본위화폐이던 은보유량의 격감과 가격급등은 은으로 세금을 납부하던 상인과 농민들의 담세능력을 극도로 저하시켰고 결국 중국대륙은 아편중독의 만연과 함께 정부재정이 파탄에 이르게 된 것. 그당시 청국의 전권대신 임측서가 1839년 6월3일 영국은 물론 미국 포르투갈상인들로부터 압수한 2천t의 아편을 광주에서 불태워 버리자 영국은 이를 기화로 다음해 6월 군대를 파견,2년간에 걸친 아편전쟁이 벌어졌고 청국의 참패로 맺게 된 남경조약에 따라 홍콩이 영국에 할양됐다. 또 중국측은 이 전쟁으로 허약한 실체가 드러나 서구 열강에게 이리저리 뜯기는 식민지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현재의 북경정권은 그당시 중국이 싸움에는 졌지만 아편전쟁은 빈사상태에 빠져가는 조국을 지키기 위한 국민들의 애국심이 반영된 것이며 아편으로 중국을 병들게 한 제국주의에 분연히 대항했던 임측서야말로 사상 보기 드문 구국의 민족영웅이라고 치켜 세우고 있다. 또 과거에는 너무 오래 쇄국정책을 썼기 때문에 국가가 쇠퇴해지고 서구열강에 의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당하는 치욕을 겪었지만 현정권은 10년전에 스스로 개방ㆍ개혁을 단행,국가발전을 이루고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강력한 힘을 과시하게 됐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다만 개방의 틈을 타서 서방국가들이 정신적 아편인 자본주의의 독소들을 계속 대륙에 침투시켜 국민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하려 하기 때문에 아편전쟁 당시의 애국심을 되살려 이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중국당국의 논리가 그들 국민들에게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발휘할지는 정확히 헤아리기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그러나 관측통들은 중국당국이 지난해 천안문광장의 민주개혁요구시위를 무력진압한데 대한 국민들의 분노와 실망이 엄청나게 큰데다 진정한 애국심이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므로 별다른 실효를 거둘 것으로는 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대학생을 비롯한 중국의 지식층은 민주개혁과 인권보장노력이 참된 애국이라고 생각할 것이므로 아편전쟁과 6ㆍ4사건을 같은 역사적 유형으로 묶는 견해에 큰 저항을 느낄 것이란 지적을 하고 있다.
  • 기는 정책 나는 투기꾼/황산성 변호사(서울시론)

    ◎서민의 내집 마련길 막아놓고… 사람은 적어도 의식주문제가 생존권에 걸맞게 충족되어야 된다. 이것이 사람이 사람되는 최소한의 요건이며 이 요건이 충족되는 사회가 의로운 사회일 것이다. 쌀은 비록 공급상 잘못된 구조로 값이 오르기는 하나 생산량이 남아 돌아 굶을 염려는 없다고 한다. 걸치는 옷도 값나름이고 싼값으로 제법 모양내며 살아갈 수 있는 정도로 선택의 여지가 많다. 다만 우리는 4계절이 너무 뚜렷하여 계절마다 체온조절이 어려워 거할 집이 필요하다. 천막이나 판자촌으로 여름철 나기도 힘들다. 강우량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환경이다. 그래서 모두가 자나깨나 내집마련이 소원이다. 이 소원을 약점으로 최대한 이용하여 약을 올리고 값을 치솟게 할 수 있으므로 집이 엄청난 이득을 챙기는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업자에 두손드는 당국 건설부는 작년 11월 아파트 분양가 연동제를 실시해도 1991년 이후에나 다시 조정하겠다고 한 당초의 약속을 깨고 6개월만에 아파트 분양가를 일부 조정,현실화 하기로 결정했다 한다. 주택업자 대표들이 물가상승에 따라 분양가를 현실화 하지 않으면 신도시 아파트 분양을 포기하겠다는 집단행동의 움직임에 두손을 든 것이다. 33평형의 분양가격이 평당 18만원이 상승되어 총 5백94만원을 더 부담하게 되어 내집마련의 꿈에 부풀었던 2백만 주택청약저축 가입자들의 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부가 무주택자를 위한 주택의 공급확대와 주택투기 억제를 위하여 2백만호를 짓기로 결정하였다면 차라리 정부가 재원을 확보하여 소형아파트 건설을 늘려야 할 것이고 만약에 민간 주택공급업자들에게 소형아파트 건설을 주문하려면 이에 따른 세재상의 혜택과 의무화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많은 주택을 공급하기로 한 정책을 펴면서 왜 미리 건자재 수급에 관한 대책을 세워 공급물량을 확보해 두지 못하였을까. ○실패뿐인 「아파트 정책」 1987년과 1988년 2차에 걸쳐 분양된 목동 신시가지 장기 임대아파트가 80% 내지 90%가 불법전매 또는 전대되었다고 하여 정부가 아파트를 환수하고 불법전매ㆍ전재자들에게 벌금을 물게 하는 강하고도 충격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어떻게 5년기간이 장기라는 이름이 붙여질 수 있으며 당초 완전 분양이 어려웠던 당시의 상황에서 임대분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데 그 분양이 문자와 법 그대로 효용을 발휘하리라고 누가 믿었겠는가. 원계약자의 경제능력은 고려하지 않고 35평형 등 무리하게 건설하였고 5년후 분양 전환시 분양가 산정에 관한 언급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탈법과 편법에 능란한 수완을 발휘했던 것이다. 모처럼 저소득 무주택자들에게 내집마련의 기회를 주기 위한 장기 임대 공급정책이 실패로 돌아갔다. 기는 정책에 나는 국민이 있는 셈이다. 세든 사람이 약정기간이 경과하면 집주인이 직접 사용하든 제3자에게 다시 세를 주든지 상관없고 재개발ㆍ재건축이 목적이든간에 비워주는 것이 도리요 법적의무이다. 그런데 오늘의 세태는 그렇게 순순히 물러나려고 하지 않는다. 전세값 폭등으로 그 돈으로는 갈 곳이 없다. 그들을 내쫓은 후 주택업자와 집주인은 엄청난 개발이익을 수탈한다고 여긴다. 계층간의 갈등이 더욱 골이 깊어지며 자살소동,몸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한사람이 여러채의 주택을 소유하는 일이나 부동산이 투기나 재산증식이 수단이 되지 않도록 분별력과 자제력을 가져야 한다. 땅을 소유한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눈덩이 처럼 불어나는 보화덩어리가 되는 땅을 국가가 강제수용한다면 참을 수 없는 권리침해로 보아 토지에 대한 보상기준을 정부의 기준지가로 하도록 한 토지 수용법 46조2항을 위헌 제청하였다. 헌법재판소는 공익사업의 시행을 예상지가 상승부분에 해당하는 개발이익을 보상액에서 배제하기 위한 것으로 개발이익은 피수용자의 노력이나 자본에 의하여 발생한 것이 아니므로 피수용자에게 당연히 귀속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준지가 보상이 정당보상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볼 수 없다. ○의로운 사회풍토 조성을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라고 한다. 16만5천여명의 국가유공자와 1백여만명의 그 가족들은 거의 다 가난에 찌들고 집도 없이 고생하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모세가 애급으로 부터 이스라엘 민족 해방운동을 전개 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3∼4대까지 이르게 하리라』는 훈계를 몇차례 내리시며 그 민족의 정기를 바로 잡도록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축재한 친일파는 지금까지 부유하게 살고 독립투사의 자손은 가산은 없어지고 배우지 못하여 결국 가난에 찌든 삶을 살고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닌가. 의를 세우고 의롭게 살아 가며 의로운 풍토가 조성되었으면….
  • 한국전 40돌 맞아 재조명 미 유에스 뉴스지

    ◎“잊혀진 전쟁”6ㆍ25… 「공산화 도미노」막았다/동ㆍ서 이념대립서 군사충돌로 급선회/「값비싼 희생」은 동구민주화와 연계성/“전쟁의 물적ㆍ심리적 유산은 한국인 모든 세대에 깊이 자리” 미국의 시사주간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는 6ㆍ25 40주년을 맞아 「잊혀진 전쟁」을 재조명하고 이 전쟁이 남긴 유산과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남북대결의 현실을 분석하는 특집기사를 6월25일자 카버스토리로 다뤘다. 장장 14쪽에 이르는 유에스 뉴스지의 특집기사를 요약한다. 지금부터 꼭 40년전 장마비가 내리는 아침에 시작돼 그후 37개월동안 이미 수탈당한 아시아 변방의 반도를 뒤흔든 야만적인 투쟁은 마지막 전쟁(제2차 세계대전)의 후기인 동시에 다음에 일어날 전쟁의 서문이었다. 이것은 갑자기 열전으로 변한 냉전이었고 공산주의 사상 가장 담대한 「국제해방전쟁」이었으며 유엔으로서는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경찰업무」였다. 판문점이라는 무인지대의 황량한 「휴전마을」에서 교착상태로 끝날 때까지 이 전쟁에는 22개국이 참전했고5백만명의 인명이 이로 인해 희생됐으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정치적ㆍ경제적 소요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발발 40년이 지난 지금 한국전쟁은 미국인들의 기억속에 미국의 킬링필드였던 안개낀 산들만큼이나 아물거리는 존재로 남아있다. 폭찹힐이나 하트브레이크 리지에서,또는 장진호에서 퇴각하는 길에 쓰러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값하는 기념비는 어디에 있는가? 베를린 장벽이 유럽 분단의 상징이라면 남북한을 가르는 경계선은 아시아의 베를린 장벽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 한국의 노태우대통령이 2주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을때 이들은 냉전의 가장 뚜렷한 흔적인 한국의 분단상태를 언젠가는 끝낼 수도 있을 해빙작업을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아시아에서 화해의 봄이 무르익고 있는 지금 공산주의 양대 종주국인 중국과 소련은 자신들이 지난 1950년 파괴하려 했고 그후 40년간 무시하고 비난하고 전복시키려 애써 왔던 한국과의 외교재개를 위한 새로운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냉전의 모델◁ 한국전은 유럽일변도였던 미국의 관심을 태평양쪽으로 되돌렸다. 2차 대전후 극동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약화되기 시작했었다. 트루먼행정부는 「중공」과의 타협에 접근하게 된다. 당시 칼럼니스트 월터 리프먼은 『아시아는 서방의 군사적 영향력,경제력 통제 및 사상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다』고 기술했다. 한국전이 중국과 소련간 불화의 서막이었다는 증거가 현재 나타나고는 있지만 당시 한국전은 획일적 공산주의의 이미지를 강화했으며 미정책입안자로 하여금 이때문에 오랜기간 골머리를 앓게 해왔다. 한국전은 무엇보다도 냉전을 정치ㆍ이념적 성격에서 군사충돌로 변모시켰다. 이는 전후 봉쇄정책의 촉매일뿐 아니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표현한대로 「군사산업 복합체」를 형성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51회계연도 미군사예산은 1백40억달러(책정기준)에서 53회계연도에는 5백40억달러로 상승된다. 보다 놀라운 점은 미국의 대외 원조계획의 군사화이다. 1950회계연도의 경우 군사원조가 대외원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2%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는 60회계연도에 41%로높아졌다. 한국전은 또한 냉전기간을 통해 미국의 외교정책을 괴롭혀온 기본적인 모순을 가져다 주었다. 미국은 한편으로 국내에서 악의에 찬 반공주의에 반대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한편에서는 공산주의 침략이 이루어지는 세계 어디서고 이를 퇴치한다는 결의를 다짐하도록 만들었다. 50년 9월30일 북한이 남침을 시작한지 3달째가 되는 날 트루먼은 국가안보회의문서 68호에 서명한다. 이 문서는 『소련의 강대국 부상을 막기위해 미국은 희생이 어떠하더라도 국내외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할 결의를 갖추어야 한다』고 언급한다. ▷미 극우세력의 득세◁ 다른 수준에서 한국전은 핵시대(소련은 전쟁발발 3개월전 첫 핵실험에 성공했음을 발표한다)에서 전쟁이 가열돼서는 안된다는 점을 상기시켜준 전쟁이었다. 이같은 새로운 「제한전」의 개념은 그러나 중국을 핵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온 더글러스 맥아더장군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51년 3월 맥아더는 중국 로비스트였던 조셉 마틴하원의원에게 보낸 서한에서 트루먼의 제한전 개념을 공개적으로통박한다. 그는 『공산주의가 세계무대 장악을 위해 준동하는 지역이 아시아』임을 상기시키면서 『아시아가 떨어지면 유럽도 공산화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명령에 순종하는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트르먼은 마침내 맥아더를 해임하나 공산주의 「격퇴」에 관한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맥아더가 밀려난데 자극받아 존 맥가시상원의원은 공산주의 동조세력이 트루먼 행정부안에 도사리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그로부터 13년후 피그만사건이 있고난후 미국이 아시아에서 또다른 제한전으로 치달을 무렵 배리 골드워터상원의원은 64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자유방위를 위한 극단주의는 악이 아니다』라고 선언함으로써 맥아더를 상기시켰다. 이같은 우익노선은 마침내 로널드 레이건에 의해 미국의 정책으로 채택된다. ▷잊혀진 전쟁◁ 한국전의 여파가 오래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에 관한 한 가장 놀라운 것은 거의 잊혀졌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수는 5만4천여명으로 한 세대후의 베트남전의 미군희생자 5만8천명에 거의 육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미국인들의 한국전에 대한 기억은 뚜렷한 것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사람들에게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싸운 전쟁에서 비겼다는 사실은 결코 달갑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트루먼대통령은 ▲징집연장 ▲세금인상 ▲임금ㆍ물가 통제부과 등을 취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상황에 비교하면 국내의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고 하겠다. 또 베트남전이 TV를 통해 대대적으로 소개된 것에 비하면 한국전은 신문에나 조금 보도되는 등 일반인들의 관심밖의 일이다. 한국전이 끝난지 40년이 지난 지금 냉전이 종식되고 있는 현실을 되돌아 보건대 한국의 산하에서 치른 희생과 최근 프라하,바르샤바,부다페스트에서의 민주주의 태동은 분명한 연계성을 갖고 있다. 미국의 봉쇄정책은 성공했으며 미국과 우방국들은 한국에서 공산주의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값비싼 희생을 치른 것이 분명하다. 최종적인 결과를 볼때 그 희생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고 역사는 결론을 내릴 것이 분명하다. ▷계속되는 남북대결◁ 한국전쟁은 총성이 멈춘지 1세대가 지났지만 아직도 남북한 국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이 경제기적을 거두고 한소 정상회담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물적ㆍ심리적 유산은 모든 세대와 사회계급에 걸쳐 깊이 자리잡고 있다. 도쿄에서 발행되는 친북한신문의 편집인 손진형씨는 『전쟁은 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다고 말한다. 휴전된지 37년이 되도록 남북한은 아직도 기술적으로 전쟁상태이며 1백51마일 휴전선에는 1백만의 병력이 마주 대하고 있다. 한국의 영화관에서는 영화상영전에 간첩과 공산주의자를 113으로 신고하라는 자막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북에서는 김일성이 또다른 전쟁 가능성을 내세워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모든 북한주민은 매년 열리는 한미 합동군사훈련 기간동안 전투비상체제하에 놓인다. 김일성은 『미제국주의자와의 전쟁경험은 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남쪽에서는 전쟁이 재벌이라는 신흥기업군이 자랄 수 있는 혼란스럽고 독점적인 시장을 마련해 주었다. 전쟁은 남북을 합쳐 1백50만명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낳았으며 수백만명의 인구가 고향을 떠나게 만들었다. 인구의 대량이동은 도시화를 촉진시켰다. 전쟁이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남북 모두 군인들이 정치권력을 쥐도록 만든 점이다. 남에는 장성출신의 대통령이 3명이나 되고 그중 2명은 쿠데타로 집권했다. 북에서는 전현직 고위 장교들이 김일성의 강력한 지지그룹을 형성하고 있으며 당의 고위직에 앉아 있다. 경희대 나종일대학원장은 『전쟁은 우리가 정치적으로 성숙되지 못했음을 보여줬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을 군사적인 수단과 독재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지적한다. 아직도 남북 모두에게 분단상황은 마음속에 굳게 자리잡고 있으며 남한은 독일통일방식의 단계적 통일을,북한은 1국2체제 방식을 내놓고 있다. 한국전쟁의 사회적 영향을 연구한 서울대 김경동교수는 『전쟁이 왜,어떻게 발발했는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우리는 당시 전쟁을 막을 통제능력이 거의 없었다』라고 진단한다. 전쟁이 한국민들에게 가치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남한은 자신들이 1950년에는 갖지 못했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힘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지일이 극일/송복 연세대교수(세평)

    우리에게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도대체 우리와 일본은 어떤 관계인가. 서로 주고 받는 호혜관계인가,주기만 하고 받기만 하는 일방적 봉사관계인가. 역사를 돌아 보면 마치 우리는 일본을 위해서 존재하는 나라처럼 되어있다. 그들이 미개한 때는 우리의 문화를 그들에게 전파해서 깨우쳐주는 구실이나 하는 나라로,그것도 모자라면 대륙의 문물을 그들에게 전해주는 다리구실까지 해주는 나라로,또 그것도 모자라면 우리 연안을 무인지경으로 노략질하던 왜구들의 약탈장소나 돼주는 나라로­. 그러나 이 정도는 고려때까지이고,조선조에 들어서면 아예 그 구실과 역할의 양태로 달라지고 내용도 달라진다. ○미래 장담할 수 있는가 자기들끼리 분열해 싸움을 일삼다 통일이 되니 이젠 그 통일된 힘의 시험장소로,혹은 통일된 제 세력들의 내부압력을 바깥으로 분출시키는 외부발산장소로 우리를 초토화시킨 것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어떤 이들은 네덜란드 중간상인들과 무역하던 사카이지방 조총상인들의 안팔린 조총소화장소로 우리를 이용한 것이 임진왜란이라는 주장도 펴고 있다. 17세기이후 평화로웠던 얼마간의 시기도 있었지만 일본은 내내 위협의 적이 됐고,마침내 19세기 중엽을 넘어서면 후발 일본 자본주의를 보다 빨리 발전시키고 완성시키는 구실을 하는 장소로 바뀐다. 그들의 야욕을 충족키 위해 청일전쟁을 벌일 때는 그 전쟁의 싸움터로 그들 나라가 아닌 우리가 돼 주었고,잇따라 일어난 노일전쟁에서 우리는 그들 승전의 주배후지가 됐다. 드디어는 식민지까지 돼서,뿐만 아니라 대륙침탈의 병참기지까지 돼서,무소불위로 그들이 하고 싶은대로 해도 되는 가장 악랄한 수탈의 대상자가 돼 주었다. 45년 원자탄을 맞고 참담한 패배자로 무조건 손을 들었을 때는 이제야말로 그 잔인 무극의 나라가 최후의 비명을 지르고 물러가나 했더니,난데없이 6ㆍ25가 터져서 그들 부흥의 기틀을 만들어 주었다. 물러간 지 5년도 채 못돼,우리가 우리를 죽이는 상잔을 벌이면서까지 전쟁의 폐허에서 몸부림치는 그들을 구해주는 것이 됐다. 가장 잔인했던 적을,그것도 치가 떨리도록 증오했던 적을 1백만명이상의 사상자를내면서까지 구해준 것이 우리의 6ㆍ25였다고 한다면 6ㆍ25야말로 일본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를 죽인 전쟁이다. 일본에 대해선 우리야말로 살신성인의 나라다. 역사상 그 어느 나라가 자기를 죽이면서까지 원수를 구해준 나라가 있던가. 오늘날은 어떤가. 우리는 매년 40억달러이상의 적자를 내면서까지 일본의 물건을 사주는 나라가 돼있다. 세계에서 가장 부한 나라가 된 그 일본의 부를 증가시키기 위해,우리 기업가가 밤낮없이 뛰고 있고,우리 노동자가 살을 에이면서까지 불철주야 일하고 있는 격이 돼있다. ○우리 힘으로 청산해야 도대체 우리는 일본에 어떤 나라인가. 우리 역사는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일본을 살찌우기 위해서,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져 있는 나라인가. 우리는 단호히 아니라고 대다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고 우리의 역사를 다시 고쳐 쓸 수 있는가. 그러나 그 일본은 언제나 기껏해야 「통석의 염」에 불과하다. 그들의 사고를 속에는 호혜의 염이란 있을 수 없고,호혜의 염이 있을 수 없는한 「통석」아닌 「통한의 염」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 마음이 일어날 수 없는 그들을 보고 우리의 한을 달래는 말을 받아 낸다고 해서 그 내실이 바뀔 리 없고,그 내실이 바뀔 리 없는 한 그 일본을 위해 존재해온 것이나 다름없는 우리의 과거역사가 미래에도 그 구실로 지속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아니 더할나위 없이 요구되는 것은 그 과거의 역사를 우리가 우리 힘으로 청산하는 것이다. 통석의 염이든 통한의 염이든 뼛속에 깊이 간직하면서 과거는 과거로 보내는 것이다. 이제 그것을 다시 거론해서 이렇게 반성해라 저렇게 사죄하라 한다고 해서 우리의 미래에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일본을 볼 때마다,그리고 일본을 생각할 때마다 이제 더이상 이제 더이상 일본을 위해 존재하는 역사를 만들지 않겠다는 극일의 앙다짐이 있어야 한다. 일본은 명명백백 자진해서 우리에게 도움을 줄 나라가 아니다. 일본은 명명백백 과거역사의 패턴을 패턴 그대로 지속시키려는 나라다. 지속시키려 하는 그만큼 그 일본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 교포들의 지위를 바로 잡아 줄 리 없고,우리를 위해서 그 과거 역사와는 다른 패턴을 가지라고 기술을 순순히 이전해줄 리도 없을 뿐아니라,더더구나 우리 부에 한 푼이라도 도움이 되는 무역역조를 스스로 나서 시정해줄 리 없는 것이다. 오로지 우리가 해야 할 따름이다. 우리가 주체가 되고 우리가 주도를 해서 우리가 다시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일본을 알고 일본을 배워야 한다. 오래전 그 일본이 우리를 배워서 우리를 좌지우지 했듯이 거꾸로 우리가 일본을 배워야 그 일본을 극복할 수 있다. 그 다른 무엇보다 일본인들의 「나라사랑 마음」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역사시대이후 대소 전쟁을 수도 없이 치르면서도 이상하게도 나라사랑 마음을 내면화 시키지 못했다. 뼈에도 안 박히고 살에도 안 박히는,입발림만의 나라사랑만 무성해 있다. 더구나 중상층의 경우 자기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 나라사랑이라는 것은 너무나 「완벽히」 잊고 있다. 대일 무역역조를 시키는 사람들이 우리 국민 가운데 도대체 누구인가.수입개방이야 피할 수 없어 한다해도 그 물건을 안 사쓰는 양식과 양심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나라사랑 마음이 있다면 그 양식 그 양심이 어디로 갈 것인가. 자기 상품이 질이 낮다해도 남의 것을 안 사쓰는 정신,그래서 내수용 수입을 한푼이라도 줄이는 생활자세 그것이 일본인들의 나라사랑 마음이며 그것이 오늘의 대국 일본을 만든 장본이다. ○「나라사랑」 본받을만 일본은 미국처럼 통이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 통이 큰 미국도 불리하니 우리에게 개방하라고 수없이 압력하지 않던가.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그리고 심적으로 일본은 대국이 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작은 기술로 오직 나라사랑하는 일념으로 오늘의 대국이 됐다. 자기를 돕지 않는 자는 하늘도 돌아보지 않는다. 자기가 자기를 일으키지 않는데 어느 하느님이 자기를 일으켜 줄 것인가.
  • 84년 「유감」보다 진전… 대승적 차원서 수용

    ◎일왕 「사과문안」 최종절충 안팎/가ㆍ피해자 명시됐지만 「책임」은 약해/일왕ㆍ총리 사과 합치면 우리측 요구수준 될듯 노태우대통령 방일시 아키히토(명인) 일왕이 궁정만찬석장에서 밝히게 될 대한사과문안에 대한 한일 양국간 협상은 방일 하루전인 23일 일단 마감됐다. 야나기 겐이치(유건일) 주한일본대사가 이날 하오 최호중외무장관을 예방,일본측이 과거사에 대해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시하고 사과의 주체를 밝히는 내용의 최종적인 일왕사과문안을 전달했기 때문이다. 최장관도 이날 야나기 주한일본대사를 만난 뒤 기자들에게 『일본측이 노대통령을 정중하게 맞이하는 자세를 견지,신중하고도 많은 고심을 한 결과라고 일단 평가한다』며 일본측이 제시한 최종사과문안에 대한 소감을 피력한 데 이어 『이번 방일에서 아키히토 일왕이 밝힐 사과수준은 84년 전두환 전대통령 방일당시 히로히토(유인) 일왕이 말한 「유감표명」보다는 진전된 것』이라고 강조,우리측 요구가 상당부분 수용됐음을 시사했다. 일본측이 제시한 최종문안은 ▲한일 양국간 과거사에 있어 가해자및 피해자 명시 ▲사과주체의 표시 ▲84년 당시의 「유감」보다는 더 강도가 높은 사과표현이 담겨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초 우리정부가 요구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적시,식민지배에 대한 「책임」과 「반성」을 분명히해야 한다는 수준에는 못미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같은 수준을 토대로 일왕사과문안을 정리해본다면 『본인(일왕)은 금세기 한 시기에 있어서 우리나라(일본)가 한국에 끼친 불행했던 과거가 있었던 데 대해 고통과 슬픔을 통절히 느끼며 다시는 이같은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로 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양국간의 이번 협상은 우리측의 강력한 입장개진과 일본측의 양보가 어우러져 마무리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완전한 과거청산을 희망했던 국민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날지는 미지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일본측은 84년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정식외교경로 전달방식을 선택,이날 하오 야나기 대사가 최장관을 예방하는 자리에서 일왕의 최종사과문안을 한국측에 전달. 일본측은 이에앞서 22일 밤 고위특사인 세지마 류조(뇌도용삼)씨의 보고를 토대로 가이후(해부) 총리 주재로 나카야마 외상,사카모토 관방장관등이 참석한 가운데 대책회의를 열고 최종문안을 23일 제시키로 결정했다는 후문. 일본측은 이 자리서 일왕발언의 헌법상 허용문제를 감안,일왕의 사과표명을 한국측의 요구수준보다는 낮추되 대신 가이후 총리가 한국측의 요구를 대폭 수용,깊은 반성과 책임을 밝힌다는 기존의 방침을 재확인했다고. ○…야나기 대사는 당초 예정시간보다 35분가량 늦은 이날 하오 2시35분쯤 외무장관접견실로 최장관을 예방,최종문안 전달과 함께 일본측의 전반적인 상황을 설명했다고 한 배석자가 전언. 40여분간 계속된 이 면담에서 최장관은 『양국관계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도 일왕의 사과문안이 우리국민의 기대를 상당한 정도 담기를 희망한다』면서 일본측의 성의있는 자세를 재차 강조했으며 야나기 대사는 이에대해 어려운 일본 국내사정을 설명하며 양해를 구했다고. 일본대사관측은 야나기 대사가늦게 도착한 이유에 대해 『본국정부로부터 텔렉스 도착이 늦었기 때문』이라고 밝혀 일본측이 우리측에 공식통보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진통을 겪었음을 시사. 최장관은 특히 야나기 대사가 『늦어서 미안하다』며 인사말을 건네자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일왕의 최종사과문안 제시가 온 국민의 관심사항이 되고 있다』고 답변,일본측이 우리국민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사과문안을 갖고 왔음을 의식한 듯한 발언을 하기도. 최장관은 또 야나기 대사와 악수하는 포즈를 잡아달라는 사진기자들의 요청에 『그냥 앉아서 얘기하는 표정을 찍는 것이 낫지 않느냐』며 신중한 자세를 견지. 최장관은 면담을 끝낸 뒤 청와대로 직행,노대통령에게 최종사과문안및 일본측 정황등을 상세히 보고. ○…최외무장관은 이날 노대통령에게 일측 사과문안을 보고한 뒤 노재봉대통령비서실장과 만나 한동안 문안내용을 놓고 숙의. 노실장은 이어 삼청동에서 외무부관계자들과 대책을 논의,청와대로 돌아와 이수정공보수석비서관을 급히 찾았는데 주변에서는 『일측의 사과문안과관련한 우리측 대응입장을 다시 수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들. 노실장은 기자들이 『일왕사과문안은 절충이 모두 끝났느냐』는 물음에 직접적인 답변은 회피하면서 『비행기 타는 일만 남은 것 아니냐』고 말해 양국간의 절충이 사실상 마무리됐음을 시사. 노실장은 일왕의 사과수준을 캐묻자 『일왕과 총리의 사과내용을 합치면 우리가 요구하는 수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다소 미흡함이 있음을 우회적으로 답변. 노실장은 이날 전달된 일본의 사과내용을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는 『당장 문안을 펼쳐보일 수는 없으나 긍정적일 것으로 본다』고 조심스레 피력.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일측 사과문안과 관련,『노대통령의 일왕주최 만찬답사ㆍ국회연설ㆍ일총리주최 만찬답사 등을 일부러 다시 손댈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일본측의 사과수준과 외교적으로는 정상적인 것 같다』고 피력해 다소 우리의 당초 기대에는 못 미치지만 「84년 사과수준」보다는 강도가 있는 것임을 시사. 이 관계자는 『일측의 사과문안이 일본내에서는 많은 반대견해가 있을 수도 있는 것으로 일본정부로서는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고 볼 수 있다』고 언급. ◎노대통령 맞는 동경의 기류/「침략국」인상 씻고 “평화지향 일본” 부각 겨냥/“한ㆍ일 신협력시대”들어 실리 치중 말은 안해도,노태우대통령의 일본방문에 대해 일본측이 전례없이 중점을 두고 배려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정」에 기인한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미래지향적 우호ㆍ협력관계의 구축을 노대통령 방일실현의 첫번째 목적으로 꼽는다. 앞으로 다가올 아시아ㆍ태평양시대의 이니셔티브를 잡기 위한 두나라 공동전선을 구축하며,세계경제 블록화에 대처하기 위해 보조를 맞춘다는 명분론을 들고 있으나 그 「필요성」은 더욱 현실적인 데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우선 국내의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가이후(해부)정권의 장기안정화를 꾀하기 위해 외교에 치중할 필요가 있다. 오는 8월이면 발족 1년을 맞는 가이후내각으로서는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 방일실현,한국과의 유대강화,동구제국과의 관계개선등 외교실적을 통해 국제적 지위를 부상시킴과 동시에 「본격정권」으로서의 이미지를 내외에 인식시켜줄 필요가 절실하다. 두번째는 일왕의 방한실현 타진이다. 침략군국주의의 대명사 쇼와(소화) 일본의 인상을 씻고 평화지향의 헤세(평성) 일본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아키히토(명인) 일왕의 한국방문이 필요하다. 일왕의 한국방문이 갖는 상징성은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경쟁상대로 떠오르고 있는 한국과의 경제협력을 원활히 함으로써 세계적 경제마찰의 초점을 분산시키자는 등의 계산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신칸센(신간선)같은 대형 프로젝트의 판매등을 통해 기존시장을 확대하려는 의도도 없지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일본의 이같은 외교목표 설정은 한국의 그것과는 일치하지 않음으로써 지금까지도 불협화음을 빚고 있다. 지난 3월 일본의 학자ㆍ변호사ㆍ종교인등 58명은 『의회는 36년간의 식민지지배를 통해 일본이 한민족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준 데 대해 반성하고 국민의 이름으로 사과한다』는 결의를 채택하도록 일본 중ㆍ참의원및 각 당에 요구했다. 와다 하루키(화전춘수) 동경대교수,다카키 겐이치(고목건일),변호사 다케우치 겐타로(죽내겸태랑) 일본기독교협의회장 등을 대표로 하는 이들은 「한국병합조약 80주년을 맞아 조선식민지 지배 반성의 국회결의를 요구하는 성명」을 통해 이같이 촉구했다. 이것은 진정한 인식전환만이 우호의 바탕이라는 사실을 일본인 스스로가 자각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평화ㆍ안전보장연구소 회장인 이노키 마사미치(저목정도)씨는 최근 산케이(산경)신문에의 기고를 통해 일왕은 일본의 책임소재를 명쾌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국의 상징으로서,일본을 대표하고 있는 것은 천황이다. 노일전쟁으로부터 종전까지 일본은 가해자였으며 한국은 피해자였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기 때문에 천황의 사죄내용에 「일본의 책임에 의해」라는 의미가 명시되어야 한다. 총리가 제아무리 노력하더라도 한국민은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간파했다. 그러나 이같은 식자들의 우려와는 달리 평소 일본의 대한관에서는 불과 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일제의 침략과 수탈에 대한 뉘우침과 반성의 뚜렷한 기미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오히려 최근의 오사카(대판) 나고야(명고옥)등지에서의 극우국수주의자들에 의한 폭발테러사건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같이 일제당시의 의식과 시각을 그대로 갖고 있는 언행들을 많이 접할 수 있다. 과거 일본교과서의 역사왜곡도 그 좋은 예의 하나이다. 일본법원은 일본군의 「침략」과 「대학살」표현을 완화토록 지시한 문부성의 수정지시가 합법적이라는 판결까지 내렸었다. 역사적 사실을 수정하도록 강요하는 정부,또 이를 마땅한 것으로 판단하는 법조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일부 지배층의 기본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한ㆍ일우호관계는 수립될 수 없다. 일본의 잘못된 대한인식과 태도는 지난번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보장ㆍ처우개선 협의에서도 잘 드러났다. 우여곡절끝에 「3세문제」에 대해서는 최소한도의 합의를 보았으나 1ㆍ2세문제는 거론되지도 않았다. 70여만명에 달하는 재일동포들의 법적 지위문제는 바로 인간의 기본권인인권과 생존권의 문제이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교육울 받으며 일본사회에서 살고 있는 재일동포와 그 자손들의 법적 안정성 보장및 차별철폐,원폭피해자문제,사할린거주 한국인문제등 일본이 역사적 책임을 져야만 하는 문제는 많다.
  • 노태우대통령의 일본 방문(사설)

    과거가 지나간 현재이고 미래가 앞으로의 현재라면 우리에게 있어 과거 현재 미래는 언제나 소중한 것이다. 특히 미래가 소중하다면 과거는 그만큼 의미가 더 크고 더욱 교훈적일 것이다. 밝은 미래를 위해서는 따라서 과거도 깨끗해야 하지만 현재도 맑아야 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일본과 한국이 지금 그런 계제에 있다. 노태우대통령의 방일은 그런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한일국교정상화이후 국가원수로는 두번째이지만 그 이후 일왕 아키히토(명인)의 방한도 예정돼 있는 만큼 이번 대통령의 방일은 한일간 관계를 새롭게 전개,정립시킨다는 측면에서 그 의미가 더욱 부각된다고 할 것이다. 새로운 한일협력 시대의 정립을 두고 요즈음 두나라가 겪고 있는 혼선과 갈등은 그런 점에서 보면 「비온 뒤」와 「땅 굳기」에 비유해도 그르지 않다고 본다. 일본쪽으로 보면 지금 한국문제및 재일동포 법적지위와 관련하여 이른바 4대악이란게 있다. 지문날인ㆍ강제퇴거ㆍ재입국허가ㆍ외국인등록증 상시휴대가 그것이다. 여기에 요즘엔 동포3세에 대한 영주권부여문제가 걸려 있다. 물론 일본으로서는 이런 문제들이 악의 요소가 아니다. 일본측으로는 자국거주 외국인에 대한 통상적인 정책에 속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에 있어 또 그들 과거와 관련하여 재일한국인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역사와 범죄적 과거의 소산인가를 조금만 인식한다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어렵지 않은 것이다. 재일동포3세문제만 하더라도 한일간 실무협상에서는 물론 그들 국회에서까지 논의가 됐지만 그들 당국자들은 이상한 명분과 논리를 내세워 앞뒤가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점진적인 영주권부여니 또는 특수호적제니 등록증 상시휴대 완화니 해서 겉으로는 그럴 듯한 안들을 얘기하지만 근본문제의 개선보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노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한일간 불편한 관계의 깊이를 구태여 지적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강조하건대 오늘날 한일문제의 출발은 일본이 일제가 저지른 식민수탈과 전쟁의 역사적 죄과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치 않고 있는데서 시작됐다. 그들은 일본이 저지른 전쟁의 희생물이다. 또 3세는 그들의 후손이다. 그런 일본은 한일관계사에 관한 한 지금까지 그들의 과거에 대한 것으로는 「불행했던 과거」에 대한 「유감표명」이란 표현으로만 호도해왔다. 사과는 커녕 뒷전에서나마 시인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무책승차라는 말이 있다. 안보에 관한 한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을 빌려 쓰고 미국의 안보호에 동승하고 있다. 부와 힘을 구사하는 풍요로운 그 사회에 「대동아전쟁긍정론」이 대두된지는 벌써 오래 됐다. 재일동포문제ㆍ무역 역조시정ㆍ첨단기술 이전 등 현안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일본은 역사를 인식하고 과거를 청산하는 겸허함을 지녀야 한다. 전쟁에서 희생된 수많은 군인ㆍ군속과 그 유족들에 대한 피해보상은 물론 생존해 있는 수만명의 원폭피해자들에 대해 최소한 일본인 보상수준과 같은 보상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일왕의 방한문제는 별도로 언급코자 한다. 그러나 역시 과거청산없는 한일관계의 진정한 개선은 어렵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 “한인 최초 소 이주 1863년 9월21일”/재소 한인작가 밝혀

    【내외】 한인들이 소련땅에 처음으로 이주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백27년전인 1863년 9월21일이라고 모스크바방송이 한 재소 한인작가의 글을 인용,보도했다. 현재 소련에서 기자겸 작가로 활동중인 한인3세 김부르트는 최근 정부기관지 이즈베스티야 부록으로 발행되는 「소유즈」에 기고한 「소련에 사는 조선사람들의 역사와 현황」이란 글에서 1863년 9월21일에 첫 한인이주민들이 소련국경을 통과했다는 기록문서가 있으며 이후 8년만인 1871년에는 술탄강가에 인구 1천6백16명을 헤아리는 한인농촌 7개가 형성되었다고 밝히고 이주원인에 대해 『조선에서의 지나친 봉건적 압박과 농민들의 토지수탈,그리고 빈곤』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모스크바방송은 전했다.
  • 요시다ㆍ구보타ㆍ후지오…/이재근 논설위원(서울칼럼)

    사명대사에게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가 여쭈되 『조선에 보물이 있습니까』하니 스님이 『보물은 일본에 있을 뿐 조선에는 없다』고 대답했다. 다시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고 묻자 『지금 조선에서는 당신의 목을 베기만 하면 천금의 상을 받게 되므로 당신의 머리가 곧 보물인 것이다』라는 호통이 나왔다. 가토는 간담이 서늘했다. 조선 선조 27년(1594년)4월에 사명스님이 울산 서생포에서 왜장가토를 만났을 때 얘기다. 허균이 지은 자통홍제존자사명송운대사 석장비명으로 전해 온다. 이승만은 생래적으로 반일주의자였다. 1952년말 한일회담이 교착상태에 들자 도쿄의 미군당국은 중재를 해줄양으로 이승만을 도쿄에 초대했다. 당시 일본총리는 노회하기로 소문난 요시다 시게루(길전무)였다. 먼저 미국대사 머피가 마련한 오찬에 요시다가 불참하는 결례를 저질렀다. 이어 다음날 미군사령관 클라크가 초대한 만찬에서 두 노인은 냉랭한 표정으로 만난다. 요시다가 묻고 노대통령은 대답했다. 『듣건대 산자수명한 한국엔 아직도 호랑이가 많다던데요』,『한국엔 이제 호랑이가 없소』『그럴리가…. 예로부터 백두산 호랑이가 유명하지 않습니까』『당신들 일본사람이 마구 잡아 가죽까지 벗겨간 터에 이제 호랑이는 씨가 말랐소』 한일간에 가로놓인 넓은 강과 깊게 드리운 그늘의 연원이 역사적으로 대개 이러하다. 요시다가 이어 한일간 지난날에 언급,『우리의 군국주의자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고 하자 드디어 이승만의 참았던 분노가 폭발했다. 『귀하는 군국주의자들에 책임을 돌리지만 그런말은 아직도 한국을 지배하려는 일본의 야망과 그 시도를 의심하는 한국인들에게 확신을 줄지 모른다』고 쏘아붙인 것이다. 요시다는 대답대신 묘한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한일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모순과 갈등으로 가득차 있다. 증오와 불신감 또한 뿌리깊다. 양쪽의 여론조사는 언제나 서로를 「가장 싫어하는 국가군」속의 첫째로 꼽고 있다. 최근에도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첫 인상은 「간사하다」로 나타났고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대표적인 느낌은 「감정적」이라고 지적됐다. 40년의 강점과 식민수탈을 단 한마디 「불행했던 과거」라는 표현으로 호도하고 「유감」을 표할지언정 결코 시인 사과는 하지 않는 그들이다. 그런 일본은 요즘 안팎으로 눈부신 변신을 거듭하는 소련을 배울 필요가 있다. 소련은 얼마전 지난 1940년의 카틴숲 학살사건이 당시 그들 내무인민위원국(NKVD)의 주도아래 저질러진 범죄라고 시인하고 폴란드 정부에 사과하는 곰의 재주를 부렸다. 43년 소련을 침공한 나치독일이 스몰렌스크 동쪽 카틴 숲속에서 4천3백구의 유해를 찾아냈을 때 소련은 시침을 뗐었고 지금까지 그랬다. 소련이 과거의 전쟁적 범죄를 시인하고 사과하는데 50년이 걸린 것이다. 그것은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며 사실은 영원히 사실이라는 진리를 일깨워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지난 37년 중국군이 완강하게 버티던 남경시를 함락시킨 일본군은 부녀자 겁탈과 약탈은 물론 닥치는 대로 학살한 양민이 30만을 넘는다. 한국에서의 경우도 그러하다. 태평양전쟁기간중 39년부터 45년까지 6년동안 일본 등지에 노무자로 끌려간 한국인은 1백37만명,국내에서의 강제노역4백50만,군인 군속 소위 여자정신대 등으로 연행된 37만 등 모두 6백만명이 일제에 의해 동원되거나 학살됐다. 「불행했던 과거」에 대한 「유감」표명만으로는 절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일본당국은 연전에 교육용으로 일본역사상 10명의 「위인」을 선정한 바 있다. 그중 근대편에는 길전송음ㆍ서향륭성ㆍ이등박문 등 조선침략의 원흉들이 망라됐다. 군국주의 잔재에 젖어 있는 일본 지도층의 의식의 단면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오래전에 「일본의 한국병합」이라는 책을 쓴 야마베 겐타로(산변건태랑)는 이들 소위 근대화주역들의 행적을 분석한 뒤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시대에 따라 그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언제나 정한론이었다』고 갈파했다. 바로 그것이다. 53년 한일회담 당시 일본대표였던 구보타(구보전관일랑)는 『한일평화조약이 체결되기전에 한국이 독립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라고 흥분하더니 끝내는 한술 더 떠 조선통치를 「시혜」라고까지 망발을 해 한일관계사에 이른바 「구보타 망언」을 남긴다. 『이등박문의 길을 따라 우리는 한국에 뿌리를 심어야 한다』고 말한 자는 요시다였고 마지막 수석대표였던 다카스기(고삼진일)는 『일본이 한국을 20년은 더 지배했더라면…』하고 아쉬워했다. 30년후인 86년 당시 문부상이던 후지오(등미정행)는 『식민지지배니 하고 떠들어 대지만 일본은 좋은 일을 하지 않았는가』고 근성을 드러냈다. 섬나라 지도층의 한국에 대한 착시와 오만이 이와 같다. 지금도 일본 도처에는 그때보다 더 많은 요시다,구보타,다카스기,후지오들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이 일본에 임한 기본자세는 정신적이며 도덕적이었다. 「정신적 화해」였기도 하다. 반면 일본은 법적ㆍ실무적이었고 경제동물적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지금 막강한 부와 힘을 갖고 있다. NTT(일본전신전화) 한 회사의 주를 팔면 서독의 전 회사주식을 살 수 있고 도쿄를 처분한다면 그 돈으로는 미국 하나반을 살 수 있다. 미국의 핵우산을 빌려 쓰고 풍요를 구가하는 그 사회에 「대동아전쟁긍정론」이 대두된 지는 오래다. 급기야는 군국일본과 일왕찬미의 상징이었던 일장기와기미가요의 사용이 공식화되기에 이르렀다. 패전후엔 그토록 믿었던 힘을 버리고 조심조심 부지런하기 30년만에 졸부가 된 그들이 이제 다시금 축적된 힘에 대한 자신과 오만을 갖고 그것을 활용하고 싶어한다. 그러한 그들이 과거에 저지른 전쟁범죄와 관련된 피해보상문제와 재일동포문제에 있어서는 그렇게 간교하고 이중적이고 인색할 수가 없다. 그래가지고는 한일에 가로놓인 강과 그늘은 영원히 걷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일은 그들의 앞날을 위해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일,“군징용 한인명단 보관”/후생성

    ◎군속포함/배상 꺼려 45년간 숨겨오다 첫시인/한일 민간단체들 확인 【도쿄 연합】 일본정부는 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해 일제때 군인·군속으로 징집해간 한국인명부를 현재 보관하고 있으면서도 보상기피등을 위해 해방이후 45년이 지난 지금까지 「관련문서 유실」을 이유로 명단공개 거부와 이의 대한인도를 외면하는등 비인도적인 처사로 일관해온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인에 대한 보상을 촉구하는 일본내 민간단체인 「일본국에 대해 공식진사와 보상을 청구하는 재판촉구모임」 대표4명과 한국내 희생자 유가족들의 모임인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양순임상임이사등 5명이 21일 하오 사회당 이토(이동수자)의원의 주선으로 일본 후생성을 방문,강제징용·징병자명단,희생자명부 등을 요구한 데 대한 후생성관리들의 답변과정에서 확인됐다. 후생성측은 이날 한국인 징용자들에 대한 끈질긴 명단공개요구에 대해 처음에는 『관련자료가 없다. 조사가 안됐다』며 발뺌하다 『일본군인·군속의 명단등은 있으면서 유독 한국인 명단만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고 반박하자 『징용자·정신대 등에 관한 명단은 없으나 군인·군속의 명단은 있다』고 실토했다. 이들 관리들은 그러나 군인·군속중 사망한 사람의 명단공개요구에 대해서는 사망자와 생존자의 분류가 돼 있지 않다는 이유로 끝까지 공개를 거부했으며 군인·군속으로 동원된 구체적인 숫자에 대해서도 언급을 피했다. 후생성이 강제징용·징병자명단과 관련,보관유무를 확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정부는 그동안 패전과 함께 대한인력수탈에 관한 자료가 유실됐다는 이유로 한국내 유가족들의 간곡한 호소에도 불구,명단공개를 거부해 왔다. 일본이 지금까지 공개한 명단은 2만1천9백19명의 군인·군속사망자명부(65년 한일회담시 제공)뿐으로 그이외에는 징용자·징병자 총수조차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군인·군속으로 끌려간 한국인은 37만여명으로 이중 15만명이 행방불명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후생성에는 4만명의 희생자명단이 보관돼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일본서 훔쳐온 국보급 골동품

    ◎“반환이냐”“귀속이냐”… 각계,처리싸고 논란/“사법공조협정 없어 돌려줄 의무없다”/“장물문화재 국가소장은 부당”주장도 부산시경은 지난 6일 일본 원정 강도범들로부터 압수한 국보급 골동품 9점(청자 6점ㆍ백자 3점)의 처리문제를 놓고 수사당국과 학계ㆍ문화관계기관 등 사이에 상반된 입장을 표명하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또 일본측 피해자 히가사 겐이치씨(82)가 「장물반환」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서 한ㆍ일간 법정다툼으로까지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우선 형법상 수사기관이 압수한 장물은 피해자에게 돌려줘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번 일본 원정 골동품절도사건에서의 장물(골동품)은 한·일간에 사법공조협정이 맺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범인 인도와 마찬가지로 일본에 넘겨줄 의무는 없다는 것이 수사 당국의 기본입장이다. 더욱이 이 사건의 범인으로 검거된 김수홍씨(62)도 『이러한 방법이 아니라면 수탈당한 우리문화재를 찾아올 방법이 없었다』며 민족감정을 범죄 목적으로 강변,골동품업자와 많은 시민들이 이에 동조하고 있다. 또한 일단 반입된 골동품의 일본 반환은 문화재보호법과 외국환관리법에 따라 반출이 불가능하다는게 「반환불가론자」들의 주장이다. 만약 이 물건을 팔아서 돈으로 가져가려 해도 외환관리법에 저촉된다는 것이다. 또 유네스코 국제문화재협약에 따르면 장물로 타국에 반입된 문화재는 원소유국에 되돌려주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으나 일본은 한국ㆍ중국에서 문화재를 수없이 강탈,이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 협약에 가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정부에서도 이를 우리 정부에 공식적으로 인도요청을 할 수 없을 것으로 문화재 관리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아무리 우리것이었다 해도 절도범이 훔친 물건을 문화재로 국가에서 소장할 수 있겠느냐』고 이의를 제기,『훔쳐온 물건을 붙잡아 두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으며 일단 돌려준 뒤 정정당당히 되찾아 오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문화재위원인 김원용교수(한림대)는 『국가가 지정한 문화재와 골동품은 엄연히 구분해야하며 일본에서 밀반입해온 골동품이 일제때 반출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것이라는 주장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부산시경 관계자는 이번에 밀반입된 골동품이 문화재 전문가들의 감정결과 국보급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보물급은 충분히 된다는 판정에 따라 비록 장물로 반입됐지만 일본인 피해자 겐이치씨에게 한국에 기증할 것을 권유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편 겐이치씨는 『다른 골동품은 몰라도 호랑이 무늬가 있는 이조염부창회호문호만은 40년 동안을 가보로 지녀온 것』이라며 되돌려줄 것을 강력히 요구,우리 정부가 이를 거절할 경우 자칫 이 문제가 한ㆍ일간 법정다툼으로 번질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는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 재일3세의 신분과 권리보장(사설)

    최근 한일 양국간에 최대 현안이 되고 있는 재일교포 법적 지위문제와 관련해 우리는 다시금 일본이 한국에 과연 어떤 존재인가 하는 강력한 물음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양국의 실무자회담에서도 일본측의 성의와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가이후 도시키(해부준수) 일총리도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으나 그 말 속에도 구체적인 성의와 각오는 담겨 있지 않은 것같다. 재일 한국인의 법적지위,특히 교포 3세의 문제는 이미 당사자와 그 가족의 이해에 직결되는 문제로서만이 아니라 68만 전교포,모든 국민의 감정,그리고 한일 양국의 장래문제와도 연결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본 당국은 우리측의 각별한 관심과 함께 지난번 노태우대통령이 『한일간 재일교포 3세 문제는 과거의 불행한 역사의 가장 뚜렷한 흔적이므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방일을 재검토하겠다』고 언명한 사실에 거듭 유의해야 할 것이다. 68만 재일동포는 일본 사회에서 아직도 철저한 차별과 질시속에 살고 있다. 게다가 지난 65년 체결된 「재일 한국인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에서는 교포 3세의 지위보장 문제가 제외되고 있다. 협정 발효일로부터 5년 후인 71년 1월17일 이후 태어난 동포(2세)의 자녀 즉 3세부터는 그나마 법적 지위에 대한 어떠한 보장도 없는 상태이다. 일반 외국인처럼 3년 이내의 특별체류허가를 받아야 하는등 신분상 극히 불안정한 상태에 놓일 우려가 있는 것이다. 재일교포 1세는 징용 징병이나 일제의 식민수탈의 결과로 일본에 살게 된 사람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일본내의 어떤 외국인과도 다른 시대적 특수성과 역사적 인과를 지니고 있다. 그들과 그 후손들은 잔학했던 일제식민통치의 산물이며 피해자들이다. 결코 자의가 아닌 그들의 현 위치와 신분에 대해 책임질 쪽은 일본 이외에 달리 없다. 일본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수행하면서 그들을 전장으로 내몰고 전쟁에 지자 국적과 자격을 박탈하고 단순한 「외국인」으로 처리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본은 아직도 전시의 징병 징용자,여자 정신대,전사자와 그 가족 등에 대한 어떠한 정신적 물질적 보상도 하지 않고 있다. 『재일동포들은아직 해방되지 않고 있다』는 말은 68만 재일동포들의 처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지만 일본은 아직껏 한국에 대한 전쟁책임과 전후 처리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물론 정부가 65년 협정체결 당시 오늘과 같은 사태가 생겨나지 않도록 재일교포 문제를 확실히 해두지 못한 데 대해 안타까움을 갖고 있다. 그렇더라도 이 문제에 대한 인과와 해결 책임은 모두 일본측에 있다. 일본은 지난해 소화시대를 벗어남으로써 과거를 청산했다고 했다. 그러나 일본은 실질적으로 지나간 시대 불행한 역사의 유물과 과오와 상처를 말끔히 씻어내야 한다. 그것이 한일관계의 진정한 우의와 협력을 다지는 길이다. 일본 정부당국은 아직 남은 기간 동안 재일한국인 문제 전반에 대해 도덕적 책임과 법적권익 보호의 측면에서 새로운 시각을 갖고 성의를 보여야 할 것이다.
  • 임수경양 징역 10년 선고/서울지법

    ◎「군사상 이익 공여」등 공소사실 모두 인정/함께 방북했던 문 신부엔 8년형 서울 형사지법 합의21부(재판장 황상현부장판사)는 5일 「평양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몰래 다녀온 임수경피고인(22ㆍ외국어대 용인캠퍼스 불어과 4년)에게 국가보안법의 특수탈출 및 잠입 등 모두6개죄목을 적용,징역10년에 자격정지 10년을 선고했다. 임피고인과 함께 구속기소된 「정의구현사제단」소속신부 문규현피고인(42)에게는 징역8년에 자격정지8년이 선고됐다. 임피고인은 징역15년,문피고인은 징역10년을 구형 받았었다. 재판부는 이날 판결문에서 두피고인에 대한 검찰의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피고인들의 밀입북은 우리나라의 법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한편 사회적인 혼란을 야기해 국가의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했으므로 엄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평양축전」에 참가해 북한이 대남적화통일전략을 정당한 것처럼 대외적으로 선전하는데 이용됐을 뿐아니라 남한의 통일논의를 혼란에 빠뜨렸다』고비난했다. 재판부는 또 『임피고인이 북한당국자에게 「전대헙」의 구성과 조직,운동권의 활동 상황 등을 보고한 것은 현대전이 군사력뿐만 아니라 정치ㆍ경제ㆍ사회 등에 걸친 총력ㆍ정보전이란 점에 비추어볼때 군사상의 이익을 북한에 제공한 것으로 봐야한다』고 지적,군사상이익공여죄도 인정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말하는 「순수한 통일의지」는 대한민국의 기본질서를 전복해 북한의 통일정책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이같은 시각은 어떤 명목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고 밝혔다. 두 피고인은 이날 비교적 밝은 표정으로 법정에 들어서 가족 등 70여명의 방청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고를 받았다. 한편 피고인 가족들과 변호인단은 이날 공판이 끝난뒤 『재판부가 특수탈출ㆍ잠입과 지령수수부분에 대해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북한에 동조했다고 판시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곧바로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사제단,비난성명 이날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임수경양과 문규현신부의 1심공판은 자유변론의 권리를 침해하고 공개재판의 원칙과 법의 형평을 잃은 부당한 재판』이라는 성명을 냈다.
  • 임종석군 기소

    서울지검 공안2부 이종왕검사는 3일 임수경양을 「평양축전」에 보낸 일 등으로 구속된 「전대협」의장 임종석군(23ㆍ한양대 무기재료과4년)을 국가보안법의 특수탈출잠입죄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화염병사용 등의 처벌에 관한 법률 등 8개 죄목으로 서울형사지법에 기소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