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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해리스 美대사에게 전하는 ‘주한명군’의 빗나간 동맹 스토리

    [곽병찬의 역사 앞에서 묻다] 해리스 美대사에게 전하는 ‘주한명군’의 빗나간 동맹 스토리

    중동 파병 압박·분담금 5배 인상 요구 한국의 자율적 주권 부정하는 언사 잦아 “근래 드문 총독형 외교관” 지적 많아 외세 방어 외쳤던 명나라 모문룡의 군대 주둔비·상납 요구에 병자호란의 빌미 예속 스스로 끊는 민중의 복수 기억해야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요즘 보기 드문 ‘총독형’ 외교관이다. 부임 이래 방위비 분담금, 한국군의 파병, 남북 관계, 한일 관계 등 한미 현안과 관련해 보인 그의 언행은 해방 후 미 군정장관을 빼닮았다. 불과 1년 1개월 전 방위비 분담금을 10억 달러 이상으로 증액하지 않으면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고 했던 그는 채 1년도 안 돼 한국은 분담금을 다섯 배는 증액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뚜렷한 근거도 없다. 오로지 한미 동맹 강화가 이유였다. 그가 말하는 동맹의 강화란 한국의 미국에 대한 예속의 강화를 의미하는 듯했다. 지난 7일 해리스 대사는 말했다. “나는 한국이 중동에 파병하기를 희망한다.” 황제가 속국의 왕에게 지시할 때 쓰는 ‘점잖은’ 명령이다. 한국군을 미군 예하 부대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하기 힘든 말이었다. 8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언급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답방이나 비무장지대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동 등재 추진에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미국과 협의할 문제다.” 한국 정부의 자율성, 한국의 주권을 부정하는 언사였다.배경이 궁금하다. 그는 주한미군을 통할하던 태평양사령부 통합사령관이었다. 한국군의 전시작전권은 주한미군에 있으니 그의 눈에 한국은 주권국가가 아닐 수 있다. 그는 툭 하면 주한미군 철수를 앞세워 한국 정부를 압박하곤 했다. 아버지는 미국인, 어머니는 일본인이라는 혈통도 개운치 않다. 미국과 일본은 한국을 점령하거나 지배했다. 막무가내의 해리스를 보면 400년 전 조선을 쥐락펴락했던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이 떠오른다. 조선 땅에 주둔하면서 조선으로부터 군량과 은을 뜯어내고 명청전쟁에 조선군을 동원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모문룡의 군대는 호란의 빌미가 됐고, 조선은 두 차례나 쑥대밭이 됐다. 역사학자 한명기 교수는 2013년 펴낸 ‘역사평설-병자호란’에서 ‘주한명군’(駐韓明軍)이라는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표현을 선보였다. 1621년부터 평안북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주둔하던 모문룡의 군대(‘모병’)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른바 ‘주한명군’은 1637년 청군이 정벌하기까지 청(후금)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해 준다며 주둔비와 작전 비용은 물론 각종 상납까지 요구했다. 중원을 노리던 후금(청)에 가도의 ‘주한명군’은 목젖을 노리는 송곳이었다. 중원으로 나아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 요동이었다. 대체할 수 없는 이 병참선을 위협하는 해상 요충지가 가도였다. 또 ‘주한명군’의 존재는 후금에 정복된 지역에서 한족의 동요를 부추겨 후방을 불안케 했다. 한족들은 이들을 믿고 조선이나 가도로 도망쳐 후금에 저항했다. 모문룡이 군사작전보다는 조선을 등치며 ‘해상 천자’ 놀음에 빠진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놀고 있다 해도 칼날은 칼날. 그것을 유지하고 강화한 게 조선이었다. 1627년 중원 정벌에 앞서 조선을 침략(정묘호란)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조선을 정벌한 후 후금은 ‘주한명군’에 대한 조선의 지원 중단을 조약으로 명기했다. 가도의 명군은 애초 패잔병 무리였다. 1619년 사르후 전투 이후 연패하던 명이 1621년 요동마저 잃게 되자 영관급 장교 모문룡이 떠도는 패잔병을 모아 편성한 부대였다. ‘모병’은 평안북도 용천, 의주 등지를 떠돌며 노략질로 연명했다. ‘부모의 나라’ 군대라는 이유로 행패를 징치할 수 없었던 광해군은 모문룡을 설득도 하고 어르기도 해 가도를 내줬다. 명과 후금을 모두 자극하지 않는 선택이었다. 후금으로서도 모병이 조선의 청북(청천강 북쪽)에서 활개를 치는 것보다는 나았다. 광해군 시절 ‘찬밥’이었던 ‘모병’은 인조가 즉위하자 반정세력의 구세주가 됐다.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명나라의 책봉이었다. 책봉이 늦어지면 ‘이괄의 난’ 같은 또 다른 반란의 빌미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명은 책봉을 차일피일 미뤘다. 조카가 삼촌을 내쫓은 것이었으니 책봉할 명분도 약했고, 반정세력 내부에서 반란까지 일어날 만큼 불안정한 정권이었으니 섣불리 책봉했다가는 망신만 살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은 명에 책봉 사절을 보내려 해도 요동이 막혀 험난한 해로를 이용해야 했다. 길목에 있는 것이 가도였다. 인조는 명의 실세를 자처하는 모문룡에게 매달려 로비를 했다. 20세기 한국의 쿠데타 정권이 미국의 인정을 받고자 주한 미국대사에게 매달렸던 것처럼. 모문룡은 이런 사정을 이용해 조선으로부터 군량은 물론 온갖 뇌물을 챙겼다. 그것으로 당시 명 조정의 최고 실세였던 환관 위충현을 구워삶아 놓았다. 모병의 위세가 커질수록 조선은 등골이 빠졌다. 인조 즉위 원년(1623년) 조선은 모병에 쌀 6만 석을 지원했다. 매년 그 규모가 늘어나, 인조가 명의 책봉을 받은 이듬해(1626년)엔 16만 석을 제공했다. 조선은 이 ‘모문룡 군량(모량)’을 채우기 위해 특별세(토지 1결당 쌀 1말 5되)를 신설해야 했다. 모문룡은 이 밖에도 수시로 평안도 일대의 수령들에게 은과 군량을 요구했다. 수령들이 거부하면 병사를 동원해 창고를 약탈했다. 당시 평안감사 윤훤은 ‘온 나라 식량의 절반이 모문룡 휘하에게 넘어가고 있다’고 개탄했다. 여기에 한족 유민 10만여 명이 ‘주한명군’을 믿고, 평안도를 쓸고 다니며 곡식은 물론 개, 돼지, 닭까지 노략질했다. 이정구는 이들을 ‘조선의 홍건적’이라고 한탄했다. 오죽하면 ‘청북’(청천강 이북 지역)을 포기하자는 논의까지 나왔다. 모문룡은 가끔 후금을 정벌하겠다며 원정군을 상륙시켰다. 물론 후금과 전투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군량과 물자를 약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병은 함경도까지 돌아다니며 각 고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의주 부윤 이완(이순신 장군의 조카)은 약탈하던 모병을 체포해 곤장을 쳐 내쫓았지만, 모문룡의 항의를 받은 인조는 이완을 강등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김류로 하여금 평안도 안주에 모문룡 공덕비를 세우도록 했다. 정묘호란 때 모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량이나 인삼 따위를 뜯어내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정묘호란 이듬해(1628년) 11월엔 명나라로 가는 조선의 동지사 일행에게서 은과 인삼 등 조공물을 빼앗기도 했다. 1629년 명의 병부상서 원숭환은 모문룡을 제거한다. 후금을 배후에서 견제할 조선이 모문룡의 등쌀에 망해버릴까 걱정해서였다. 이후 ‘벗겨먹기’는 주춤했지만, 원숭환이 부패한 관리들에 의해 처형당하자 즉각 부활했다. 후임 손원화는 1630년 11월 조선 조정에 ‘군량과 전마 2000필을 공급하라’고 재촉했다. 가도의 도독 유흥치는 툭 하면 평안도로 나와 접대를 요구했고, 명군은 노략질과 부녀자 겁탈을 일삼았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1633년 1월 ‘가도 정벌에 필요한 전함 300척과 배를 조종할 수군을 의주 포구로 가져와라. 듣지 않으면 사신 왕래를 끊겠다’고 통보했다. 인조는 쿠데타의 기치였던 ‘숭명’의 이념을 버릴 수 없었다. 호란으로 말미암은 국토의 유린은 망각한 지 오래였다. 인조는 허황된 결단을 했다. “단교는 물론 전쟁도 불사하겠다”, “오랑캐가 침략해 오면 자신이 전방으로 나아가 장사들을 독려하리라”고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그해 가도의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인조는 진압군을 파견해 반란군을 추격하기도 했다. 1633년 6월 여순을 함락한 후금이 ‘가도를 돕지 말라’고 다시 경고했다. 그러나 인조는 10월 가도의 부총병 정룡의 요구에 따라 군량을 제공했다. 1636년 11월 25일 결국 청 태종 홍타이지는 조선 정벌을 선언했다. 병자호란이었다. 그가 환구단에서 고한 전쟁의 이유 6가지 가운데 4개는 ‘주한명군’과 관련된 것이었다. 조선은 다시 한 번 쑥대밭이 됐다. 인조는 청 태종의 ‘신하’가 됐다. 4개월 뒤 인조는 황해도의 병선 100척과 수군 3000여명을 징발했다. 가도의 명군을 정벌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조청연합군의 지휘관은 1633년 조선군이 토벌하려던 공유덕이었다. 가도에 상륙한 조선군은 청군보다 더 심하게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고 한다(‘병자록’). ‘주한명군’이 저지른 패악질에 대한 민중의 복수였다. 상대를 예속시키고 수탈하는, ‘빗나간’ 동맹의 결과이기도 했다. 논설고문 kbc@seoul.co.kr
  • 하이커가 발견한 유해 주인공 1945년 스러진 ‘만자나르의 귀신’

    하이커가 발견한 유해 주인공 1945년 스러진 ‘만자나르의 귀신’

    지난해 10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발견된 유해의 주인공이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로 가뒀던 만자나르 수용소에서 머무르다 죽은 마쓰무라 기이치로 확인됐다고 영국 BBC가 4일(이하 현지시간) 전했다. AP 통신에 따르면 타일러 호퍼와 브랜던 폴린이 마운트 윌리엄슨을 하이킹하다 돌들로 가려진 유해를 발견했다. 허리에 벨트를 차고 있었으며 가죽 신발을 신고, 팔짱을 낀 채였다. 인요 카운티 보안관실은 수십년 동안 실종 신고됐던 이들의 정보와 대조했으나 유해 상태와 일치하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 2012년 일본계 미국인 영화감독 코리 시오자키가 만자나르 수용소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사실이 눈길을 끌었다. 편집 과정에 마쓰무라의 얘기는 빠졌지만 시오자키는 영화 시사회 도중 그의 사연을 전해줬다. 마쓰무라는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 1942년 행정명령 9066에 의거해 산타 모니카 집에서 강제로 퇴거당해 만자나르로 옮겨와 3년을 철조망 안에 갇혀 지냈다. 보안관실은 마쓰무라의 손녀 로리로부터 DNA 샘플을 제공받아 유해와 비교했다. 로리는 할아버지의 유해가 산 어딘가에 있을 것이란 점을 알고 있었으며 할머니가 돌들로 덮인 할아버지 유해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모 가주에는 할아버지가 “만자나르의 귀신”으로 불렸다는 얘기도 들려줬다.만자나르는 진주만 기습에 대한 보복 조치로 세워진 일본계 미국인 수용소 10곳 가운데 가장 큰 수용소였다. 사실상 포로였던 이들은 몰래 수용소를 빠져나와 낚시나 다른 취미를 즐겼으나 마쓰무라가 하이킹을 떠났을 때는 미국 정부가 이미 수용자들이 자유롭게 떠나도 좋다고 허용한 시점이었다. 앞서 가둔 지 1년 뒤인 1943년에는 미군에 자원 입대하면 수용소를 떠날 수 있게 허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쓰무라 가족은 떠나지 않았다. 살던 산타 모니카로 돌아가봐야 일자리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고산 호수들을 화폭에 담으려 돌아다녔다. 그는 일행과 떨어져 그림을 그렸거나 스케치를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 만자나르 수용소는 바람이 아주 심한 오웬스 계곡에 세워졌는데 그날도 갑자기 돌개바람이 불었다. 나중에 잦아든 뒤 일행이 찾아보니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유해는 1945년 9월 3일 하이킹을 하던 미국인 커플에 의해 발견됐다. 수용소 관리들은 소규모 인력을 동원해 그의 유해를 묻으러 나섰으나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그냥 그 자리에 묻어버렸다. 그리고 수용소는 1945년 11월 21일 영원히 폐쇄됐다. 이들 10군데 수용소에 수용됐던 일본계 미국인은 모두 11만명이었다. 마쓰무라네는 결국 산타 모니카로 돌아갔다.만자나르 수용소는 현재 국가사적지로 등록돼 전쟁 중 애꿎게 집단 수용된 이들을 기억하는 장소로 쓰이고 있다. 버나데트 존스 감독관은 이제 신원이 확인된 만큼 가족들이 평안한 안식을 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년 전에는 행정명령 9066 75주년을 맞아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이들의 사진전이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 침략과 수탈, 숱한 인권 유린을 경험한 우리로선 일본계 미국인들을 마냥 동정할 수만은 없는 복잡하고 착잡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쥐꼬리만 하다’ 무시 마라…지혜와 풍요의 ‘팔색쥐’

    ‘쥐꼬리만 하다’ 무시 마라…지혜와 풍요의 ‘팔색쥐’

    경자년(庚子年) 흰쥐의 해가 밝았다. 12년마다 돌아오는 쥐의 해 중에서도 올해가 특별히 흰쥐의 해로 불리는 까닭은 육십갑자를 이루는 10간(干) 중 경(庚)과 신(辛)이 백색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흰쥐는 다른 쥐들보다 지혜롭고, 생존 적응력이 뛰어나 뭇 쥐의 우두머리로 꼽힌다. 쥐는 12지(支)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쥐가 열두 동물 가운데 맨 앞자리에 놓인 연유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중 발가락 개수를 기준으로 삼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음양 사상에 따라 홀수 발가락과 짝수 발가락을 가진 동물이 번갈아 나오도록 배치했는데 쥐는 앞발가락이 4개, 뒷발가락이 5개로 음양을 겸비한 유일한 동물이어서 가장 앞에 서게 됐다는 얘기다. 하지만 어릴 적 들었던 다음과 같은 민간 설화가 기실 더 친숙하다. ‘옛날옛적 옥황상제가 하늘의 문에 빨리 도착하는 동물 순으로 지위를 주고자 경주를 벌였다. 소는 경주에서 우승하기 위해 열심히 훈련했다. 그러나 몸집이 작은 쥐는 정정당당한 경쟁으로는 소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해 꾀를 냈다. 경기 당일 소의 등에 몰래 올라탄 쥐는 소가 결승선에 다다르기 직전 재빨리 뛰어내려 1등을 차지했다.’ 영민하고 민첩한 쥐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보여 주는 설화와 기록은 이외에도 여럿이다. ‘삼국사기’에는 쥐 8000마리가 평양을 향해서 갔다는 기록과 눈이 내리지 않았다는 점을 적시해 다음해의 흉년을 미리 암시하는 쥐의 예지력을 칭송했다. ‘쥐가 배에 없으면 침몰한다’, ‘쥐가 천장에서 소란을 피우면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있다’는 속설 등은 위험을 감지하는 쥐의 남다른 능력을 잘 보여 준다. 함경도에서 전승되는 서사 무가 ‘창세가’에는 쥐가 사람보다도 뛰어난 지혜를 갖춘 동물로 등장한다.먹이를 찾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쥐의 습성은 부와 번영을 상징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부지런하고 준비성이 철저하기 때문에 ‘쥐띠는 굶어 죽지는 않는다’는 말도 있다. 번식력과 생존력이 탁월한 쥐는 다산과 풍요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임신기간이 21일 정도로 짧아 1년에 6~7번 출산하고, 한 번에 6~9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지혜롭고, 근면하고, 예지력까지 갖춘 덕에 열두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서생원’이라는 관직까지 받았지만 실제로 쥐는 대대로 우리 실생활에서 환대보다는 홀대받는 존재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병을 옮기고, 곡식을 축내고, 책이나 가구를 갉아먹는 등 인류에 끼친 피해가 너무 큰 탓이다. 쥐의 몸에 기생하는 벼룩이 옮기는 흑사병은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1을 죽음으로 내몰 정도로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쥐를 간신이나 수탈자, 혹은 도둑으로 묘사하는 속담이나 설화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옹고집전’은 사람의 손톱과 발톱을 먹은 쥐가 사람으로 둔갑해 주변인을 괴롭히는 오싹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다산 정약용은 ‘들쥐는 구멍 파서 어린 낟알 숨겨 두고/ 집쥐는 온갖 물건 안 훔치는 것이 없어/ 백성들은 쥐등쌀에 나날이 초췌해 가고/ 기름 말라 피 말라 피골까지 말랐다네’라고 한탄했다. 왜소하고, 소란스러운 쥐의 특징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속담은 차고 넘친다. ‘쥐꼬리만 하다’, ‘쥐뿔도 없다’, ‘태산명동 서일필’(큰 산이 떠나갈 듯하더니 쥐 한마리) 등이 대표적이다.쥐를 박멸하기 위한 인류의 전쟁은 역사가 깊다. 1809년 빙허각 이씨가 가정살림을 기록한 ‘규합총서’에도 ‘정월 첫 진일과 매달 경인, 임진일과 북단일에 쥐구멍을 막으면 다시는 안 뚫는다’처럼 쥐를 없애는 여러 가지 속신이 담겨 있다. 1970년대에는 쥐꼬리 하나당 연필 한 자루를 나눠주며 대대적인 쥐잡기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 세계 역사에서 쥐가 박멸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쓰레기가 늘어나고, 기후온난화 등 도시 환경이 변화하면서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 일본 도쿄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오히려 쥐의 개체수가 급증하는 추세다. 그렇다고 쥐가 인간에게 피해만 끼치는 건 아니다. 인간의 노화나 질병 치료, 신약 개발에 쥐 실험은 필수적이다. 스스로를 희생해 인간의 삶에 기여하는 이타적인 존재가 바로 쥐다. 생쥐가 실험 대상으로 처음 등장한 건 1650년이다. 이후 1800년대 중반부터 과학자들이 실험동물로 쥐를 본격 사육하기 시작했다. 최근 고령화가 급속히 진전되면서 고령실험쥐에 대한 요구도 커지고 있다.실생활에선 쥐가 혐오와 척결의 대상이지만 문화예술 분야에선 꾀 많고, 귀여운 캐릭터로 자주 등장한다. 고양이 톰을 골탕 먹이는 생쥐 제리처럼 말이다. 월트 디즈니를 대표하는 만화주인공 미키마우스도 1928년 탄생 이후 여전히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뿐인가. 영어로 쥐를 뜻하는 ‘마우스’(mouse)는 컴퓨터 보급이 대중화되면서 현대인의 필수품이 된 지 오래다. 쥐는 최초의 포유류로, 약 3600만년 전 지구상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인간과 쥐의 인연은 농업이 시작된 2만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인류에게 쥐는 애증의 대상이자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다. 쥐가 인류에게 미치는 해악을 최소화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할 방법은 없는 걸까. 이순녀 선임기자 coral@seoul.co.kr <참고 자료> -김종대 중앙대 교수, ‘쥐, 근면함과 예지력을 갖춘 동물’ -김재호 과학칼럼니스트, ‘최초의 포유류 쥐: 먹이 대신 탐험을 즐기다’
  • 군산에 홀로그램 체험존 개관

    전북 군산시에 일제 강점기 수탈사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홀로그램 체험존이 문을 열었다. 전북도는 군산시, 전북문화콘텐츠산업진흥원 등과 함께 ‘군산 홀로그램 콘텐츠 체험존’을 준공하고 개관했다고 30일 밝혔다. 군산 근대문화유산거리에 들어선 체험존 조성에는 70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됐다. 체험존은 옛 조선식량영단 군산출장소 건물을 개보수했다. 5세대 이동통신(5G)과 가상현실(VR) 등 다양한 첨단기술이 활용됐다. 체험존은 홀로그램 상영관을 비롯해 역사전시실, 복원전시실, VR체험실 등을 갖췄다. 이날 준공식과 함게 첫 시연된 홀로그램 콘텐츠는 호남권 최초의 3.1만세운동인 군산만세운동으로 관람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만화 속 주인공 되어볼까, 구석기시대로 떠나볼까

    만화 속 주인공 되어볼까, 구석기시대로 떠나볼까

    겨울방학 시즌이다. 아이와 함께 추위 걱정 없는 실내에서 재미와 학습,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여행지는 없을까. 한국관광공사가 1월에 가볼 만한 곳을 추천했다.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가득한 ‘어린이를 위한 박물관’이 테마다.1. 어린이의 보물섬 - 강원 춘천 애니메이션박물관 상상력을 키우고 애니메이션에 대한 흥미도 불러일으키는 곳으로, 다양한 체험 시설이 있다. 초창기 애니메이션 작품과 영사기 등 애니메이션 관련 자료를 관람하고, 특별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사운드를 만들어 보는 폴리 아티스트 체험, 애니메이션 기법을 몸으로 경험하는 핀 스크린 체험, 애니메이션에 내 목소리를 입히는 더빙 체험이 인기다. 바로 옆의 토이로봇관에선 다양한 로봇을 조작해 볼 수 있다. 하루 7회 공연하는 로봇 댄스도 놓치면 안 된다. 관람료는 애니메이션박물관과 토이로봇관 각 6000원, 통합권 1만원이다. 인근의 효자마을 낭만골목엔 아기자기한 벽화가 가득하다. 춘천낭만시장에서 시장표 주전부리를 맛보고, 이상원미술관에서 고즈넉한 춘천의 멋을 느끼는 것도 좋겠다.2. 우주선 타고 시간여행 - 경기 연천 전곡선사박물관 전곡선사박물관은 동북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된 경기 연천 전곡리 유적에 있다. 국제 설계 공모를 거쳐 완공된 건물은 원시 생명체와 우주선을 결합한 모양새다. 박물관은 상설전시실, 고고학체험실(인터스코프), 3D영상실 등을 갖췄고, 아이부터 어른까지 즐길 만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전곡 구석기나라 여권’을 이용해 본인의 얼굴과 선사시대 인류의 얼굴을 합성해 보는 체험이 인기다. 고고학체험실에서 고인류 가상현실(VR), 아이스맨 외찌 체험도 즐겨 보자. 관람료는 없다. 아울러 다양한 휴양 시설을 갖춘 한탄강관광지, 하수종말처리장을 공원으로 꾸민 임진물새롬랜드, 고구려의 독특한 축성 방식을 보여 주는 연천 당포성, 고려조 네 왕의 제사를 지내던 연천 숭의전지 등 주변 볼거리도 풍성하다.3. 풍성한 의학 체험 기회 - 충북 음성 한독의약박물관 동서양 의약 관련 유물을 관람하고 소화제를 직접 만들어 보며 의약 관련 지식을 넓힐 수 있는 곳이다. 국내 최초 전문 박물관이자 기업 박물관으로 1964년 개관했다. 무료로 개방하고, 연령대별 맞춤 프로그램이 충실해 가족 여행 코스로 제격이다. 19세기 독일의 약국을 재현한 특별전시실과 페니실린을 처음 발견한 플레밍 박사 연구실은 아이들의 인기 코스다. 독일 약국 안에 있는 약장과 약병은 모두 독일에서 가져온 진품이다. 가족 단위 체험 프로그램은 매달 홈페이지에 공지하며, 네이버에서 예약한 뒤 이용할 수 있다.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코리아크래프트브류어리는 토요일 오후 1시와 3시에 맥주 시음 투어를 진행한다. 화덕 피자, 소시지도 함께 즐길 수 있다. 역사가 100년이 넘은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 운곡서원, 반기문기념관도 함께 돌아볼 만하다. 4. 꼭 기억해야할 역사 - 전북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일제강점기 참혹한 수탈이 할퀴고 간 전북 군산은 상처투성이다. 무수한 약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거리는 생생한 고통의 기록이자, 잊지 말아야 할 역사가 됐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일제 수탈의 근거지로 왜곡된 성장을 겪은 도시의 상처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군산 최고 번화가였다는 영동상가 맞은편에는 도시 빈민이 거주하던 토막집이 있어 대비된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미두장’으로 등장한 군산미곡취인소도 눈에 띈다. 박물관 오른쪽으로 구 군산세관 본관이, 왼쪽으로 구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등록문화재 372호)과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등록문화재 374호)이 이어진다. 진포해양테마공원에는 군산내항 뜬다리부두(등록문화재 719-1호)가 자리를 지킨다. 테디베어뮤지엄군산, 경암동철길마을도 가깝다.5. 가야로 가는 시간의 문- 경남 김해 국립김해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은 사라진 왕국, 가야를 만나는 공간이다. 부산·경남 지역의 선사시대, 변한의 문화와 유물까지 아우른다. 무료로 진행되는 해설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가야 왕국의 건국부터 소멸에 이르는 변천사를 자세히 알 수 있다. 본관과 이웃한 어린이박물관 ‘가야누리’는 놀이와 배움을 결합한 공간이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체험 코너가 많아 가족 여행객에게 적합하다. 관람료는 없다. 이웃한 수로왕릉은 가야 왕국의 시조 수로왕 무덤이다. 수로왕 위패를 모신 숭선전과 신어 문양이 새겨진 납릉정문 등 여러 전각이 있다. 김해가야테마파크는 김해의 랜드마크다. 전시와 공연, 체험 시설을 통해 누구나 쉽고 재밌게 가야의 역사를 배울 수 있도록 꾸몄다. 김해분청도자박물관도 가볼 만하다. 분청사기 변천사와 제작 과정, 여러 가지 기법을 알차게 소개한다. 6. 고려청자의 고향 - 전남 강진 고려청자박물관 고려청자박물관은 고려청자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낸 공간이다. 2층 상설전시실에는 9세기 청자완, 12세기 청자상감여지문대접, 13세기 청자퇴화연국문과형주자 등이 시대별로 전시돼 있다. 청자범종과 청자인장 등 강진 고려청자 요지에서 출토된 유물 800여 점을 전시한 공간도 볼만하다. 연꽃 등 청자가 품은 아름다운 꽃문양과 명문(銘文) 등을 소개한 1층 특별전시실과 기획전시실도 흥미롭다. 나만의 고려청자를 만들어 보는 도자 체험은 아이들이 좋아한다. 관람료는 어른 20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이다. 조선 민화 200여점을 전시한 한국민화뮤지엄과 정약용 유적(사적 107호)도 놓칠 수 없다. 정약용 유적에서 2㎞ 남짓 떨어진 다산박물관은 2012년 유네스코가 세계기념인물로 꼽은 다산 정약용의 강진 유배 생활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했다. 손원천 선임기자 angler@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동백꽃 필 무렵 - 포항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동백꽃 필 무렵 - 포항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동백이 #용식이 #옹산게장거리 최근 인기리에 막을 내린 KBS2 수목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극본 임상춘, 연출 차영훈)의 주인공 동백(공효진)은 지극히 인간적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옹산 게장 단지 골목에 들어와 아들 필구를 키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미혼모 동백과 촌스럽지만 사람냄새 팍팍 나는 순경 황용식(강하늘)의 소박한 사랑이야기는 시청률 20%를 웃돌 정도로 올해 지상파 최고의 드라마로 등극하였다. 등장인물들의 말투를 보아하니 충청도 서산이나 태안 근처 어디쯤에서 촬영하지 않았을까 짐작되는 ‘옹산 게장 거리’는 사실 경상북도 포항에 위치한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의 모습을 담은 곳이다. 동백의 인기와 더불어 갑자기 관람객들이 몰려 들고 있다는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로 가 보자.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주인공 동백(공효진)의 캐릭터는 분명 이문구의 소설 ‘관촌수필’에 나오는 주인공 ‘옹점이’와 흡사하다. 소설에도 나오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와 걸쭉한 입담이 주는 재미 역시 드라마에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특히 ‘옹산’이라는 지명은 소설 주인공 ‘옹점이’와 소설 첫 소제목인 ‘일락서산’에서 가져온 듯한 느낌마저도 든다. 그러나 소설 속 ‘옹점이’는 한국 전쟁 중 남편을 잃고 시댁 식구들에게도 쫓겨나는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그려졌지만 드라마 속 ‘동백이'는 스스로 당당한 인생의 주인공으로 거듭난다. #구룡포일본인거리 #어업권수탈 #여명의눈동자 여하튼 모처럼 지상파 드라마의 인기를 절절하게 체험하고 있는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에는 연일 ‘동백이’와 ‘용식이’를 찾는 소리가 사방에서 끊이질 않는다. 최근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외교 관계가 싸늘했기에 구룡포 일본인거리에 다시금 들이닥치는 손님들의 발걸음은 주변 식당가와 상점들의 매출을 수직 상승시키는 중이다. 특히 구룡포에서 유명한 과메기나 물회, 모리국수, 해풍국수의 매출도 늘어났지만 뜬금없이 게장을 찾는 손님도 많아졌다. 그런데 포항에 위치한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의 유명세는 진즉에 난 적이 있었다. 바로 ‘여명의 눈동자’라는 1991년에 방영된 MBC드라마 역시 이곳에서 촬영을 하였다. 따라서 최근까지도 ‘여명의 눈동자’ 촬영 명소라는 철이 한참이나 지난(?) 드라마를 홍보하던 구룡포 거리가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요사이 가장 뜨끈뜨끈한 입소문에 올라타기 시작한 것이다.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는 1883년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조일통산장정' 이후부터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들어와 살았던 곳이다. 이후 구룡포 앞바다에 어족자원이 풍부한 황금 어장이 발견되자 1935년부터는 일본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어업 항구로 개발하면서 번성하게 된 곳이다. 포항시는 2010년부터 지역 관광 산업 활성화를 위해 해방 이후 몇 채 남아있던 교토식 일본 가옥과 더불어 원형이 보존되던 하시모토 젠기치의 집을 근대역사관으로 바꾸고 당시의 요리집, 찻집, 소학교와 우체통 등도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이후 꾸준히 일본 강점기의 역사적 배경이 필요한 드라마, 영화, 사진 촬영장소로 사용되다 최근에는 현대적 감성을 더한 거리 조성을 통해 새로운 문화 관광 자원으로 성공적으로 변모하였다.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에 대한 방문 10문답> 1. 방문 추천 정도는? - ★★★(★ 5개 만점) - 동백이의 까멜리아를 만날 수 있다. 2. 누구와 함께? -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 동백이와 황용식을 보고픈 사람들 3. 가는 방법은?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길 153-1(구룡포읍) - 포항시내 어디든 200번 좌석버스 탑승,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하차 4.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방문의 특징은? - 동백꽃 필 무렵 드라마가 지닌 여운을 좀 더 길게. - 일제강점기 일본의 어업권 수탈의 현장 그대로 5. 방문 전 유의 사항은? - 이곳은 원래부터 항구로 이름난 곳이다. 일본인 거리와 더불어 볼거리, 먹거리들이 많아서 넉넉한 시간을 두고 방문하면 좋다. 6.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에서 꼭 볼 곳은? - 까멜리아세트장, 계단, 근대역사관, 일본식 찻집 7. 토박이들로부터 확인한 추천 구룡포 먹거리는? - 구룡포의 명물은 물회, 모리국수, 해풍국수 등이 있다. 모리국수 ‘할매국수’, ‘까꾸네 모리국수’, ‘초원식당’, 해풍국수 ‘해풍명가’, 고래고기 ‘삼오식당’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phtour.pohang.go.kr/phtour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대보항, 포항 호미곶, 죽도시장, 보경사, 영일대 해수욕장 10. 총평 및 당부사항 -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는 관광을 위해 급조된 인위적 거리가 아니라 실제 100여 년 전 일본인 900여 명 이상 살았던 대표적 일본인들의 조선 거류지였다. 특히 건물 형태가 일본에서도 요사이는 보기 힘든 교토식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 일본 강점기 시대의 역사와 건축 문화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 방문지기도 하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꼼수탈세’ 찾아내 사상 최대 추징액 거둬

    ‘꼼수탈세’ 찾아내 사상 최대 추징액 거둬

    인천 계양구는 대규모 기업집단들이 조세회피 수단으로 활용하는 ‘총수익스와프’(TRS)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와 끈질긴 노력으로 지방세 사상 최초로 과세 논리를 개발하고 적용해 수백억원의 세금을 추징할 수 있었다. 계양구는 국내 5대 대기업 중 한 곳인 A그룹 계열사들이 최첨단 금융상품을 악용한 꼼수 탈세를 일삼았으나, 과점 주주를 직접 기획조사해 전국 기초자치단체 세무조사 사상 최대 금액인 319억원을 추징했다. 전국 65개 다른 자치단체에도 과세 자료를 통보, 총 446억원의 세원을 발굴하고 유사 사례에 대한 추가적인 세수를 늘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특히 국내 최상위 조세 로펌이 A그룹 계열사들을 대리해 조세심판청구를 했으나 청구된 45개 자치단체를 대표해 체계적이고 논리 정연한 대응으로 승소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계양구의 성과는 창의적 발상으로 기업 인수합병(M&A) 사례를 조사하고 신종 파생금융상품을 연구, 국내 대기업들이 총수익 스와프 거래를 악용해 조세를 탈루하는 구조를 찾아낸 것이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일제 수탈로 해조류 씨말라… ‘몸국’ 대신 돼지고기 육수로 부활

    일제 수탈로 해조류 씨말라… ‘몸국’ 대신 돼지고기 육수로 부활

    제주에는 100년 전까지만 해도 밀국수가 없었다. 제주의 부엌살림 유물을 아무리 뒤져 봐도 국수틀이나 홍두깨는 없으며 밀국수 얘기가 구전으로도 전해진 바 없다. ●일제강점기에 제주에 ‘건면’ 들어와 1900년대 일제강점기에 ‘건면’이 제주에 들어온다. 고기국수는 이 건면의 도입과 제주의 전통혼례 풍습이 결합한 새로운 음식으로 100년도 채 안 된 것이다. 제주의 전통혼례는 돼지를 잡으면서 시작해 최소 3일 이상 진행된다. 마을 사람들이 잔치 음식을 그 기간 나눠 먹는다. 이때 끼니마다 접시에 수육 세 점과 두부와 순대도 한 점씩 담아 주는데, 이를 ‘괴기반’이라 한다. ‘반’(槃)은 한 사람분의 음식이라는 의미다. 또한 밥과 괴기반과 함께 돼지고기 육수에 해조류인 모자반을 넣어 ‘몸국’이라는 국을 끓여 먹는다. 과거에는 구경하기 힘든 육수로 만든 국으로 제주만의 잔치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돼지를 잡는 풍습은 이어졌다.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일본인들은 고기를 그다지 탐내지 않아 돼지를 공출하지 않았다. 하지만 톳이나 천초, 모자반 등 해조류를 탐해 해녀들을 앞세워 제주 해조류를 채취해 전량 본국으로 가져가 버렸다. ●1990년대 ‘향수 상품’으로 인기 몰이 결국 모자반이 없어 몸국을 끓일 수 없던 제주 사람들은 육지의 음식인 잔치국수를 돼기고기 육수에 말아 먹었다. 이때 괴기반에 담을 고기를 고명으로 얹으면서 자연스럽게 제주식 잔치국수인 고기국수가 완성됐다. 그렇게 고기국수는 90여년 전 제주시의 무근성(현 삼도이동 일부) 일대와 애월읍 등지를 거쳐 섬 전체에 확산됐다. 1970년대 군사정권에는 가정의례 간소화 정책을 빌미로 집안 대소사에 돼지 도축을 금지했다. 그로 인해 전통적인 ‘반’이 사라지고, 혼식과 분식 장려 정책으로 국수가 일반화돼 멸치 육수가 제주에도 확산됐다. 이에 고기국수는 그 명맥이 끊어지는 듯했지만 1990년대 중반 이른바 향수 상품으로 고기국수가 재등장했다. 이때부터 돼지 사골 육수를 사용했다. 양용진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장
  • 北매체 “美 분담금 요구는 날강도 심보”

    북한 대외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가 12일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과 관련, 미국의 요구를 ‘날강도적 심보’라고 비난하는 한편 판문점선언 등에 따라 주한미군 주둔의 명분이 없다고 주장했다. 현재 진행 중인 제11차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 협상에서 미국은 올해의 5배가 넘는 50억 달러(약 5조 8000억원)에 육박하는 금액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민족끼리는 ‘빛 좋은 개살구-동맹의 실체’라는 논평에서 “미국이 주한미군 유지비 외 가족들에 대한 지원비, 해외에 배치된 전략자산들의 유지 및 전개 비용 등 47억~50억 달러 규모의 방위비를 요구했다고 한다”면서 “실로 날강도적 심보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어 “지난해 채택된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 공동선언, 군사분야합의서는 북남 사이에 무력에 의한 동족 상쟁을 종식시킬 것을 확약한 사실상 불가침 선언”이라며 “미국이 남조선에 침략 군대를 주둔시킬 명분은 이미 사라졌다”고 했다. 또한 “남조선 집권 세력은 방위비 분담금 인상 문제와 관련해 미국의 강도적 요구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고, 보수패당은 미국 상전과 엇서나가지 말아야 한다고 고아대고 있다”며 “민족적 수치를 자아내는 사대 매국 행위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또 다른 선전매체 ‘조선의 오늘’도 미국이 한미 동맹의 연합위기관리 범위를 ‘한반도 유사시’에서 ‘미국의 유사시’까지 넓히자고 제안한 것을 비난하며 “장장 70년 해마다 천문학적 액수의 혈세를 수탈하는 것도 성에 차지 않아 남조선 청장년들을 해외 침략전쟁의 돌격대로 내몰려는 이런 파렴치한 강도배”라고 했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조국 사태’ 뒤 소모적 정쟁… 그 뒤엔 바뀌지 않은 친일파 세상

    ‘조국 사태’ 뒤 소모적 정쟁… 그 뒤엔 바뀌지 않은 친일파 세상

    조국으로 시작해서 조국으로 끝난 한 달여 시간을 보냈다. 전 국민이 조국 사태에 매달렸다. 그 상황의 중심에 정부 여당과 자유한국당의 적대적 대결이 존재했고 그 가운데 조국 사태가 있었다. 특이하고 낯선 광경이지만 비슷한 상황을 2년 내내 겪었다. 그러나 그 전인들 달랐으랴. 정치권의 후진적인 광경을 언제까지 봐주어야 할지 의문이다. 인류사회의 가장 오래된 질문은 싸움에 관한 것인데 한반도는 지난 200년 동안 원치 않는 싸움을 겪었다. 조선 후기의 농민반란과 동학혁명, 망국에 저항한 의병운동, 식민통치하에서의 독립운동과 전시동원 등 형극의 길을 걸었다. 동학혁명 후 자행된 대량 살육과 식민지 말기에 군국주의가 강요한 징병과 징용, 정신대와 위안부 등 전방위적인 수탈은 가혹한 고통이었다. 이 모든 상황이 독립으로 보상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해방된 조선은 역사로부터 배신당하고 강대국에게서 배신당했다. 조선이 좌파도 우파도 아닌 친일파에게 점거되면서 해방의 꿈은 사라졌다. 해방된 조선에서 친일파의 부활은 모든 환란의 원인이었고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구약 말씀을 빌리면 ‘태초에 친일파가 있었다’. 해방으로 일본군은 물러갔지만 친일파로 인해 일본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았다. 제1공화국에서 지금의 제6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은 거듭 바뀌었지만 친일파의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4월혁명으로 들어선 제2공화국이 군사쿠데타로 무너졌을 때 그 자리는 일본 육사를 나온 박정희가 차지했다. 일본군 장교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음지의 친일 권력은 양지로 확장됐다. 이 상황은 1960~70년대의 박정희 시대를 관통했고 박정희가 사라진 1980년대로 연장됐다. 1990년대에도 무늬만 바뀌었다. 그러므로 친일파 문제는 1945년 이전의 과거사가 아니라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며 반일종족주의로 드러난 식민지근대화론은 그 하나의 병증에 불과하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역사는 되풀이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것도 비극적으로 되풀이된다. 그래서 역사청산에 거듭 실패했다. 1940년대에는 해방에도 불구하고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다. 반민특위는 해산됐고 애국자가 학살되고 배제된 자리를 친일파가 채웠다. 1960년대에는 4월혁명에도 불구하고 제1공화국을 청산하지 못했다. 1980년대에는 전두환의 광주학살로 박정희를 청산하지 못했다. 1990년대에는 6월항쟁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시대를 청산하지 못했다. 그래도 역사는 발전했고 그 정점에 6월항쟁이 있다. 해방 후 정치는 6월항쟁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특히 정치변동의 경우 1987년 이전의 정변이 6월항쟁 후에는 대통령선거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승만 정권은 4월혁명으로, 장면 정권은 군사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은 부마항쟁 직후 암살로, 전두환 정권은 6월항쟁으로 무너졌다. 모두가 정변이었다. 그러다가 6월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가 부활하면서 선거가 정치변동의 제도적 계기로 작동했다. 한 단계 질적 도약을 이룬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은 1980년 광주항쟁의 좌절을 7년 만에 성공으로 복원해 낸 희망의 횃불이었고 한국 현대사의 거듭된 실패를 바로잡을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였다. 그러나 6월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직선제의 첫 번째 결과는 노태우 집권이었고, 두 번째 결과는 3당 합당이었다. 기대에 반하는 두 번의 실패로 전두환 독재는 사실상 살아남았다. 전두환뿐만 아니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굴절된 현대사가 살아남았고, 부패 기득권 세력은 반성도 처벌도 없이 민주사회에 정착해 민주화의 혜택을 누렸다. 오늘날의 모순적인 정당체제, 언론체제, 재벌체제, 신앙체제, 교육체제가 그 미완성의 산물이며 소모적인 정치적 대결도 여기서 시작됐다. 돌이켜보면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과 역사청산의 실패, 이 두 가지 언어의 모순적인 조합이 6월항쟁 이후 한국 정치의 갈등 구조를 만들었다. 민주주의 제도는 작동하지만 청산되지 못한 역사가 민주주의를 껍데기로 만드는 상황,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한 열망은 간절하지만 친일파와 부패 기득권 세력이 압도하는 상황, 정의와 도덕을 향한 의지는 강하지만 불의와 부도덕이 판치는 세상, 이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끝없이 소모적인 대결, 이것이 민주화된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한국 정치는 이렇게 구조화된 역사사회적 대결 구조를 여의도 방식으로 지루하게 반복적으로 표출한다. 이것이 여의도 현실 정치의 민낯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다시 이명박·박근혜 시대를 청산하는 과제와 맞닥뜨려 있다. 이 과제는 지난 9년간의 국정 파탄을 정리하는 일이지만 그 속에 청산되지 못한 현대사가 오롯이 녹아 있다. 두 전직 대통령과 몇몇 측근이 구속됐지만, 중요한 것은 인신 구속이 아니라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정부와 정치권의 한계도 있지만, 역사청산에 반대하는 기득권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 탄핵 이전의 헌정 질서 문란과 탄핵 이후의 정치적 갈등 역시 그 저항의 일환이다. 대통령 탄핵 이후의 국회는 소란한 동물국회와 무능한 식물국회를 합친 동식물 합동국회로 전락해 버렸다. 삼권의 한 축인 국회에서는 모든 안건이 논란으로 비화하고, 논란은 저급하기 짝이 없고, 어떤 형태의 시시비비조차 가리지 못하고,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상태가 돼 버렸다. 국회는 가장 나쁜 사람들의 집합소인 양 타락해 버렸다. 국회가 실종되고 삼권분립체제가 무너진 상황이다. 그 근저에 친일파가 있고 친일파에서 변신을 거듭해 오늘에 이른 부패 기득권 세력이 있다. 친일파는 해방 정국에서는 반공주의자로, 군사쿠데타 후에는 경제역군으로, 6월항쟁 후에는 자칭 산업화 주역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 뿌리가 친일파이고 근본 속성이 부패 기득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민주화 과정에서 친일 전력과 부패 문제가 불거지자 이들은 반공안보 논리에 기대어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민주화가 부패 기득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추상적 이념 대결이나 단순한 정책 대결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래상을 만들어 가는 본질적인 과정이다. 결국 현대사의 누적된 이 갈등 구조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 방식이 역사적 대결일지 역사적 타협일지를 결정해야 할 양자택일의 임계점에 도달했다. 지금까지는 묵인과 지연이 용납됐지만, 더이상은 어려운 상황이다. 지금과 같이 소모적인 정파적 대결이 계속되면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도 없고 장차 나라의 미래가 위협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들도 저급한 정파적 대결을 더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 국면에서 역사적 대결론은 확실한 역사청산을 통해서 현대사를 바로잡고 그것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역사적 타협론은 부패 기득권 세력이 역사적 과오를 시인하고 우리 사회가 그 반성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공존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어느 경로를 선택하든 내년 국회의원 총선거와 그 후의 대통령선거가 역사청산의 마지막 계기가 될 것이다. 바로 이 역사의 전환기 국면에서 촛불이 혁명으로 발전했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촛불은 과거를 태워 미래를 밝힌다. 촛불혁명은 30년 전 거세게 타올랐던 6월항쟁의 횃불을 계승해 6월항쟁의 미완성 의지를 복원하기 위한 혁명으로 자리잡았다. 촛불혁명은 부패 권력의 국정농단에 대한 저항이라는 1단계 현재시제를 표상하지만 아울러 6월항쟁이 이루지 못한 역사청산의 최종적인 종결을 지향하는 과거완료형인 동시에 조만간 다가올 통일된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미래완료형으로서 과거와 미래까지 함축한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그 2단계와 3단계를 기대한다. 상지대 총장
  • 김구라, 日 시민 망언에 인터뷰 중단

    김구라, 日 시민 망언에 인터뷰 중단

    방송인 김구라가 일본 시민들을 만나던 중 분노로 인터뷰를 중단했다. 김구라는 15일 방송된 JTBC ‘구독TV, 막 나가는 뉴스쇼’(이하 ‘막나가쇼’)에서 혐한 망언을 일삼았던 DHC 사내 방송의 3인방, 사쿠라이 요시코, 하쿠나 나오키 작가, 다케다 쓰네야스를 찾아나섰다. 이날 김구라는 “화장품 사내방송 망언 3인방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며 ”직접 일본으로 찾아갔지만 문전박대 당했다“고 전했다. 이에 이들은 거리의 일본 시민들에게 ‘혐한’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아베 총리 관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한 시민은 ”한국인의 사고방식은 잘못됐다. 일본이 가해자, 한국이 피해자라는 것은 틀렸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 지배 했다는 것은 거짓이다. 통일국가로 만들려고 했던 거다“라며 ”수탈하러 간 게 아니다. 한국에 철도, 댐, 발전소, 병원, 학교 공장 등을 지어줬다“고 망언을 쏟아냈다. 김구라는 ”저런 잘못된 생각을 가진 분이 참 많다“며 급기야 인터뷰를 중단했다. 반면 일본의 젊은 세대는 한일관계에 관심이 없었다. 인터뷰에 응한 20대 일본 청년들은 ”뉴스를 잘 안 봐서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솔직히 왜 싸우는지 잘 모른다“ ”휘말리고 싶지 않다. 특별히 상관없다“라는 답변을 내놨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일제 수탈 상흔 안은 ‘노송’ 산림문화자산 보존

    일제 수탈 상흔 안은 ‘노송’ 산림문화자산 보존

    1933~1943년 9539t 송진 채취 피해전국 조사… 최대 1.2m 길이 상처도일제가 송탄유(松炭油)를 만들기 위해 송진을 채취하면서 생긴 상흔(V자)을 간직한 소나무 피해목을 산림문화자산으로 등록, 보존한다. 9일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에 따르면 일제는 1933∼1943년까지 10년간 우리나라에서 9539t의 송진을 수탈했다. 1943년 한 해에만 4074t을 채취했는데 이는 50년생 소나무 92만 그루에서 채취할 수 있는 양이다. 피해목은 전국적으로 분포하나 현황 및 송진 채취로 인한 피해 조사는 이뤄지지 못했다. 일본은 송탄유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송진을 채취했는데 소나무에 ‘V’자형 상처를 내 나온 송진을 받아 끓여 만들었다. 송진 채취와 소나무 피해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상처다. 송진은 우리나라의 전통지식으로 약재와 등불의 원료로 사용했다. 일제는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 보급을 위해 송진을 채취했는데 항공유에 썼다는 기록은 없고 패전 후 어선 연료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산림과학원은 2017년부터 문헌 조사와 시민 제보, 현장 조사 등을 거쳐 확인된 43곳의 ‘전국 송진 채취 피해 소나무 분포지도’를 작성했다. 이 중 21곳의 피해목을 조사한 결과 피해목의 V자 상흔이 최대 1.2m 높이까지 남아 있었다. 지역별로는 전북 남원, 충북 제천, 강원 평창의 소나무에서 넓고 긴 채취 흔적이 확인됐다. 피해목의 건강 상태는 양호한 것으로 평가됐다. 또 충북대 서정욱 교수팀과 공동으로 정밀 연륜분석기법을 활용해 남원 길곡리, 울산 석남사, 평창 평창읍 등의 피해 발생 연도를 분석한 결과 1940년대 초반 생성된 나이테에 상처가 확인됐다. 경남 합천, 강화 석모도 일대 피해목에서 추가 정밀 연륜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산림과학원은 일제강점기 송진 채취 피해목 생육지를 산림문화자산으로 등록해 역사적 가치를 기록으로 남길 예정이다. 대전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 북한 매체, 이영훈 ‘반일종족주의’ 비난… “친일 역적 단호히 징벌해야”

    북한 매체, 이영훈 ‘반일종족주의’ 비난… “친일 역적 단호히 징벌해야”

    북한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가 6일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등이 집필한 ‘반일종족주의’를 비난하며 “매국도서를 출판한 친일역적들을 민족의 이름으로 단호히 징벌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민족끼리는 이날 ‘단호히 징벌해야 할 추악한 친일역적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최근 남조선(남한)에서 친일분자들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 역사를 날조한 도서 ‘반일종족주의’를 출판한 것이 커다란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며 “지난 7월에 발간된 도서 ‘반일종족주의’는 일제가 강제징용, 성노예, 쇠말뚝 등 우리 민족에게 들씌운 죄악을 전면부정하고 일제의 ‘식민지근대화론’을 정당화한 매국도서”라고 소개했다. 이어 “매국도서출판에 가담한 자들이야말로 섬나라 오랑캐들의 피가 뼈속까지 들어찬 매국노들이 틀림없으며 온 민족의 이름으로 하루빨리 능지처참해버려야 할 추악한 친일역적들”이라며 “과거 일제 식민지 통치 시기 창씨개명하고 친일매문으로 더러운 목숨을 부지한 추악한 민족반역자들의 후예들이 아직까지도 활개치고 있는 것은 남조선 사회의 비극이며 민족의 수치”라고 원색 비난했다. 매체는 “바로 이런 역적 무리들이 길잡이 역할을 놀고 있기에 일본 반동들이 더욱 기고만장하여 남조선에 대한 경제침략을 단행하고 저들의 과거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망발을 함부로 내뱉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매체는 “문제는 이러한 친일매국의 독버섯들이 민족의 존엄과 이익을 섬나라 족속들과 같은 외세에 팔아먹으며 재집권 야망을 추구하는 보수세력이라는 썩은 서식지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라며 “친일매국노들이 활보하고 있는 남조선의 현실은 친일매국과 보수는 쌍둥이이며 일본의 만고 죄악에 대한 철저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보수패당을 완전히 매장해버려야 한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일종족주의’는 지난 7월 10일 출간됐으며,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지난달 페이스북에 “구역질 나는 책”이라고 비난하면서 화제에 올랐다. 이후 ‘반일종족주의’는 교보문고 지난달 2~4주차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3주 연속 1위에 올랐으며, 5주차에는 5위로 하락했다. ‘반일종족주의’ 집필자들은 책 소개에서 “아무런 사실적 근거 없이 거짓말로 쌓아올린 샤머니즘적 세계관의, 친일은 악(惡)이고 반일은 선(善)이며 이웃 나라 중 일본만 악의 종족으로 감각하는 종족주의. 이 반일 종족주의의 기원, 형성, 확산, 맹위의 전 과정을 국민에게 고발하고 그 위험성을 경계하기 위한 바른 역사서”라고 표방했다. 하지만 일제의 강제징용과 식량수탈, 일본군 위안부를 부정하고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서도 학술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주장을 담아 논란이 됐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조선의 식민지 수혜론 모순 폭로한 일본학자

    조선의 식민지 수혜론 모순 폭로한 일본학자

    일본학자가 본 식민지 근대화론/도리우미 유타카 지음/지식산업사/298쪽/1만 8000원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경제를 바라보는 일본의 인식은 철저하게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요약된다. 일제가 한국의 발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수혜론이다. 최근 국내에서 논란을 빚는 ‘반일종족주의’도 크게 보면 같은 맥락이다. 조선이 혜택을 받아 발전했다면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은 왜 그토록 가난에 허덕였을까. ‘일본학자가 본 식민지근대화론’은 발전과 가난의 모순을 파고들어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를 입증한다. 식민지근대화에 의문을 품어 연구에 천착해온 도리우미 유타카 한국역사연구소 상임연구원이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을 보강해 단행본으로 내놓았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가난이 일제의 철저한 군사력과 계산된 정책에 의한 것임을 폭로한다. 그중에서도 저자가 주목한 점은 조선총독부의 비호를 받은 토목 청부업자들이다. 일본 청부업자들은 독점적 지위를 누리며 부를 독식했고 그 밑에서 일한 조선 노동자들은 일본인에 비해 값싼 임금에 허덕였으며 그마저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실상의 수탈이 만연했다고 주장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은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충분히 공업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제는 잠재적 경쟁국으로서의 조선을 저지했고 단일 농업(모노 컬처)과 수리조합사업에 국한한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 정책의 산물이 바로 철도 부설과 산미 증식이다. 실제로 저자가 제시한 조선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한일병합 이후 해방까지 영선비·토목비·철도 건설 및 개량비·토지개량비·사방사업비 등 토목관련비 합계가 조선총독부 재정 지출의 20%를 차지했다. 그 막대한 지출에 혜택받은 한국인 청부업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일제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대한제국과의 계약을 완전히 무시했고 일본인 청부업자들이 공사를 독점했다.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은 하루 30~50전으로 일본인 노동자의 4분의1 정도에 그쳤다. 그 차이만큼 일본인 청부업자가 합법적으로 착취한 셈이다. 책은 식민지근대화론의 상대적 개념인 수탈론의 섣부른 강조도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이런 말로 책을 마무리한다. “이제 수탈의 정의에만 얽매일 게 아니라 정치 권력에 의한 경제 영역에의 부당 관여·개입,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부당한 방치, 부작위 등을 포괄하는 폭넓은 개념으로 일제강점기 경제 연구가 진전되어야 한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죽산 선생,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야 완전히 명예회복”

    “죽산 선생,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야 완전히 명예회복”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돼야만 완전한 명예회복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어요.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셨어요. 아직 그동안 해 오신 것의 반도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죽산 조봉암(1898~1959) 선생은 해방 후 국회의원을 지내며 진보당을 창당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죽산 선생은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돼 간첩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5개월이 지난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됐다. ‘사법 살인’으로 기록된 사건이 발생한 지 52년이 지난 2011년에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죽산 선생의 장녀 조호정(91) 여사의 노력 덕택이었다. 지난 9일 조 여사의 외동딸 이성란(59)씨를 만났다. 조 여사는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이씨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났을 때 어머니께서 ‘이제야 죽어서 아버지를 뵐 낯이 있다´고 하시면서 크게 기뻐하셨다”며 “어머니의 마지막 소망은 할아버지의 완전한 명예회복”이라고 말했다. ●광복 후 조선공산당 탈당… 건국 참여 -완전한 명예회복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난 건 간첩죄에 대한 명예회복이에요. 정치인으로서 명예회복은 이뤄진 겁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원래 독립운동가였어요.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옥고를 치렀고 1932년부터 신의주 감옥에서 7년을 보냈으며 1945년 광복하던 날을 서대문형무소에서 맞으셨어요. 그런데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반려했어요. 독립운동을 인정받아야 ‘죽산’이라는 이름이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는 2011년 1월 20일 조봉암 재심 사건에서 대법관 13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피고인은 일제강점기하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고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지 개혁의 기틀을 마련해 우리나라 경제 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이었다. 이 사건 재심에서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이제 뒤늦게나마 재심 판결로써 그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내용을 판결문에 명시했다. ●빨갱이로 헐뜯는 것 볼까 봐 기사 댓글 못 읽어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은 왜 반려된 건가요. “무죄 판결을 받은 2011년 그리고 2015년 두 차례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는데 모두 거절당했어요. 이번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지난해 7월 보훈처에서 연락이 왔어요. 자기들이 서류를 검토했는데 안 되겠다는 거죠. 기분이 안 좋았어요. 저희가 신청도 안 했는데 보훈처에서 검토하고, 또 안 된다니요. ‘이제는 그만 신청하라’는 의미로 이해했어요. 그래서 더이상 서훈을 신청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할아버지에게 누를 끼치는 일 같아서요.” “저희 가족은 아직도 할아버지 기사에 달린 댓글을 못 봐요. 여전히 무섭거든요. 나중에 언젠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는다면 ‘빨갱이가 무슨 독립유공자냐’고 헐뜯는 사람들이 나타날까 봐 두렵습니다. 공산주의적인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죠. 이런 이야기를 더이상 하고 싶지가 않아요. 아직도 간첩이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한스럽지요.” ●‘진보당 사건’ 압수수색으로 자료 사라져 보훈처는 ‘친일 흔적’이 있다며 죽산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반려했다. 1941년 신문 기사에 죽산이 휼병금(장병 위로금)을 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는 이유에서다. “진보당 사건으로 구속되기 전 가택 압수수색으로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많은 자료가 다 사라졌어요. 보훈처에서는 입증할 자료를 더 찾아서 가져오라고 하는데, 일반인이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있잖아요.” 이씨를 만난 지난 9일 국회 의원회관 세미나실에서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후원으로 ‘청년 조봉암’ 발대식이 열렸다. 이씨는 광복회,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등이 주관한 이 행사에 참석했다. ‘청년 조봉암’은 죽산의 고향인 인천 지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를 기념하고 발자취를 좇기 위해 만들어졌다. -진보당 사건은 대표적인 ‘사법 살인’으로 불리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1심에서 간첩죄는 무죄, 국가보안법만 유죄로 징역 5년이 나왔는데 2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돼 사형이 선고됐어요.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되고 재심을 청구했는데, 기각되자마자 바로 다음날 사형을 집행했죠. 이게 사법 살인이 아니면 뭘까요. 다른 말로 대체할 수가 없죠. 할아버지 싹수를 자른 거예요. 여운형, 김구 선생을 살해하듯 정적을 제거한 거죠.” -기념사업회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요. “기념사업회에서는 죽산 선생의 정신과 사상을 계승하고 선양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어요. 학술 활동과 토론,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요. ‘청년 조봉암’도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청년들이 죽산 선생의 생각과 이념을 공유하고 생각해 보는 거죠. 내년에는 생가터 복원과 기념관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해요.” 재심 무죄 판결을 받던 날 조 여사는 “아버지 비석에 비문을 새길 수 있게 돼 기쁘다”고 언론에 소감을 말했다. 그러나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에 있는 죽산 묘지의 비석 뒷면은 아직도 비어 있다. ●60주기에 죽산정신 계승 청년들 참석 뜻깊어 “백비는 보존해야 될 역사적 가치가 있어 보존하려고 해요.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아 완전한 명예회복이 되면 비를 새로 세우려고 합니다. 지난달 31일 60주기 추모식이 열렸는데 호우 경보가 떴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어요. 그 빗속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신 분들은 물론 죽산의 정신을 이으려는 청년들까지 참석해 정말 고맙고 뜻깊었어요.”-어머니 조 여사의 건강은 어떤가요. “지병은 없지만 거동이 불편하셔서 몇 년째 추모식에도 참석을 못 하세요. 어머니는 너무 고초를 겪으셔서 이제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태연자약하시지요. 재심 무죄 판결이 나던 날도 저는 얼굴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 생각에 법정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울었는데, 어머니는 편안하게 웃으시더라고요. 그런데 사실은 그날 아침에 어머니가 눈을 떴는데 할아버지가 사형 선고받던 날이 생각나서 너무 힘드셨다고 해요. 50년이 지나도 잊히지가 않는 거죠. 아직도 서대문형무소 인근을 가면 어머니가 몸서리를 치세요. 텔레비전에서 감옥, 수의가 나오면 숨을 못 쉬고요. 옥바라지하던 시절이 생각나서요.” 고 노회찬 의원은 죽산 선생을 ‘한국 정치사 최초의 좌파 정치인’이라고 명명했다. 추모식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궁금합니다. “사회활동을 하실 때는 냉철하고 빈틈을 보이지 않으셨다고 해요. 반면 집에서는 너그러우시고 유머가 넘치셨다고 합니다. 식구들이 식사하고 있으면 와서 보시고는 ‘왜 내 상에 있던 반찬이 없냐. 내 상에만 특별한 반찬을 놓지 말고 다른 식구들도 똑같이 놓고 먹어라’고 하셨다네요.” -죽산 선생께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십니까. “할아버지의 마지막 옥중 유언으로 대신할게요.” “우리의 정치적 이상은 책임 정치, 수탈 없는 경제 민주화, 그리고 평화 통일이었지. 우리는 벽에 막혀 하지 못했지만 먼 훗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후배들이 해 나갈 것이네. 그러면 결국 어느 땐가 평화 통일의 날이 올 것이고 국민이 고루 잘사는 날이 올 것이네. 씨를 뿌린 자가 거둔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나는 씨만 뿌리고 가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죽산 선생,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야 완전히 명예회복”

    “죽산 선생,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야 완전히 명예회복”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돼야만 완전한 명예회복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어요.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셨어요. 아직 그동안 해 오신 것의 반도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죽산 조봉암(1898~1959) 선생은 해방 후 국회의원을 지내며 진보당을 창당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죽산 선생은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돼 간첩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5개월이 지난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됐다. ‘사법 살인’으로 기록된 사건이 발생한 지 52년이 지난 2011년에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죽산 선생의 장녀 조호정(91) 여사의 노력 덕택이었다. 지난 9일 조 여사의 외동딸 이성란(59)씨를 만났다. 조 여사는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이씨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났을 때 어머니께서 ‘이제야 죽어서 아버지를 뵐 낯이 있다‘고 하시면서 크게 기뻐하셨다”며 “어머니의 마지막 소망은 할아버지의 완전한 명예회복”이라고 말했다.-완전한 명예회복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난 건 간첩죄에 대한 명예회복이에요. 정치인으로서 명예회복은 이뤄진 겁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원래 독립운동가였어요.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옥고를 치렀고 1932년부터 신의주 감옥에서 7년을 보냈으며 1945년 광복하던 날을 서대문형무소에서 맞으셨어요. 그런데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반려했어요. 독립운동을 인정받아야 ‘죽산’이라는 이름이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는 2011년 1월 20일 조봉암 재심 사건에서 대법관 13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피고인은 일제강점기하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고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지 개혁의 기틀을 마련해 우리나라 경제 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이었다. 이 사건 재심에서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이제 뒤늦게나마 재심 판결로써 그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내용을 판결문에 명시했다.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은 왜 반려된 건가요.  “무죄 판결을 받은 2011년 그리고 2015년 두 차례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는데 모두 거절당했어요. 이번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지난해 7월 보훈처에서 연락이 왔어요. 자기들이 서류를 검토했는데 안 되겠다는 거죠. 기분이 안 좋았어요. 저희가 신청도 안 했는데 보훈처에서 검토하고, 또 안 된다니요. ‘이제는 그만 신청하라’는 의미로 이해했어요. 그래서 더이상 서훈을 신청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할아버지에게 누를 끼치는 일 같아서요.”  “저희 가족은 아직도 할아버지 기사에 달린 댓글을 못 봐요. 여전히 무섭거든요. 나중에 언젠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는다면 ‘빨갱이가 무슨 독립유공자냐’고 헐뜯는 사람들이 나타날까 봐 두렵습니다. 공산주의적인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죠. 이런 이야기를 더이상 하고 싶지가 않아요. 아직도 간첩이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한스럽지요.”  보훈처는 ‘친일 흔적’이 있다며 죽산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반려했다. 1941년 신문 기사에 죽산이 휼병금(장병 위로금)을 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는 이유에서다.  “진보당 사건으로 구속되기 전 가택 압수수색으로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많은 자료가 다 사라졌어요. 보훈처에서는 입증할 자료를 더 찾아서 가져오라고 하는데, 일반인이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있잖아요.”  이씨를 만난 지난 9일 국회 의원회관 세미나실에서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후원으로 ‘청년 조봉암’ 발대식이 열렸다. 이씨는 광복회,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등이 주관한 이 행사에 참석했다. ‘청년 조봉암’은 죽산의 고향인 인천 지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를 기념하고 발자취를 좇기 위해 만들어졌다. -진보당 사건은 대표적인 ‘사법 살인’으로 불리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1심에서 간첩죄는 무죄, 국가보안법만 유죄로 징역 5년이 나왔는데 2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돼 사형이 선고됐어요.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되고 재심을 청구했는데, 기각되자마자 바로 다음날 사형을 집행했죠. 이게 사법 살인이 아니면 뭘까요. 다른 말로 대체할 수가 없죠. 할아버지 싹수를 자른 거예요. 여운형, 김구 선생을 살해하듯 정적을 제거한 거죠.” -기념사업회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요.  “기념사업회에서는 죽산 선생의 정신과 사상을 계승하고 선양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어요. 학술 활동과 토론,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요. ‘청년 조봉암’도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청년들이 죽산 선생의 생각과 이념을 공유하고 생각해 보는 거죠. 내년에는 생가터 복원과 기념관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해요.”  재심 무죄 판결을 받던 날 조 여사는 “아버지 비석에 비문을 새길 수 있게 돼 기쁘다”고 언론에 소감을 말했다. 그러나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에 있는 죽산 묘지의 비석 뒷면은 아직도 비어 있다.  “백비는 보존해야 될 역사적 가치가 있어 보존하려고 해요.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아 완전한 명예회복이 되면 비를 새로 세우려고 합니다. 지난달 31일 60주기 추모식이 열렸는데 호우 경보가 떴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어요. 그 빗속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신 분들은 물론 죽산의 정신을 이으려는 청년들까지 참석해 정말 고맙고 뜻깊었어요.” -어머니 조 여사의 건강은 어떤가요.  “지병은 없지만 거동이 불편하셔서 몇 년째 추모식에도 참석을 못 하세요. 어머니는 너무 고초를 겪으셔서 이제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태연자약하시지요. 재심 무죄 판결이 나던 날도 저는 얼굴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 생각에 법정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울었는데, 어머니는 편안하게 웃으시더라고요. 그런데 사실은 그날 아침에 어머니가 눈을 떴는데 할아버지가 사형 선고받던 날이 생각나서 너무 힘드셨다고 해요. 50년이 지나도 잊히지가 않는 거죠. 아직도 서대문형무소 인근을 가면 어머니가 몸서리를 치세요. 텔레비전에서 감옥, 수의가 나오면 숨을 못 쉬고요. 옥바라지하던 시절이 생각나서요.”  고 노회찬 의원은 죽산 선생을 ‘한국 정치사 최초의 좌파 정치인’이라고 명명했다. 추모식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궁금합니다.  “사회활동을 하실 때는 냉철하고 빈틈을 보이지 않으셨다고 해요. 반면 집에서는 너그러우시고 유머가 넘치셨다고 합니다. 식구들이 식사하고 있으면 와서 보시고는 ‘왜 내 상에 있던 반찬이 없냐. 내 상에만 특별한 반찬을 놓지 말고 다른 식구들도 똑같이 놓고 먹어라’고 하셨다네요.” -죽산 선생께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십니까.  “할아버지의 마지막 옥중 유언으로 대신할게요.”  “우리의 정치적 이상은 책임 정치, 수탈 없는 경제 민주화, 그리고 평화 통일이었지. 우리는 벽에 막혀 하지 못했지만 먼 훗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후배들이 해 나갈 것이네. 그러면 결국 어느 땐가 평화 통일의 날이 올 것이고 국민이 고루 잘사는 날이 올 것이네. 씨를 뿌린 자가 거둔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나는 씨만 뿌리고 가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제국 끌려간 ‘장물 문화재’ 총 없는 전쟁

    제국 끌려간 ‘장물 문화재’ 총 없는 전쟁

    열강, 로제타석 등 식민지 유산 약탈 시장국·원산국 셈법 복잡 반환 난관 한국 소장한 실크로드 벽화도 거론그들은 왜 문화재를 돌려주지 않는가/김경민 지음/을유문화사/372쪽/1만 6000원 문화재에 대한 정의는 국내법, 국제법에 따라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불변의 공통점도 있다. ‘국가 혹은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중요한 물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문화재를 약탈당한 이들 입장에선 자신의 혼이 담긴 역사와 문화를 통째 도둑맞았다는 생각을 갖는 게 당연하다. 2011년, 무려 145년 만에 프랑스에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를 대하던 우리의 심정을 떠올리면 알기 쉽겠다.외규장각 의궤가 우리나라로 반환되긴 했지만 소유권까지 이전된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5년 단위로 연장이 가능한 일괄 대여 형식’으로 돌아왔다. 우리 입장에서는 수탈했으니 돌려주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한데 그런 단순 논리로는 문화재 반환 문제를 풀 수 없다. 각국의 이해와 셈법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새 책 ‘그들은 왜 문화재를 돌려주지 않는가’는 이 같은 문화재 수탈과 반환에 얽힌 역사를 짚고, 해결 방안을 모색한 책이다. 과거 문화재 약탈을 주도했던 서구 열강과 오늘날 수많은 문화재를 구매할 힘을 갖고 있는 나라들은 대개 일치한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러시아, 이탈리아, 벨기에 등이 이른바 ‘문화재 시장국’이다. 일본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 반대편에 있는 이집트, 인도, 그리스 등은 ‘문화재 원산국’이다. 여기엔 우리나라도 포함된다. 저자는 그 가운데 ‘시장국’을 영국으로, ‘원산국’을 인도,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등으로 한정해 논지를 펼친다. 이 사례들이 문화재 약탈사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판단에서다. 영국을 꼽은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은 예나 지금이나 다른 어떤 열강보다 넓은 식민지를 가진 ‘제국적인’ 국가다. 주목받는 유물도 그 어느 나라보다 많다.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의 열쇠가 된 ‘로제타석’, 영국 왕실 왕관에 장식된 인도와 파키스탄의 코이누르 다이아몬드, 범아프리카 차원의 반환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베닌 왕국의 베닌 브론즈 등이 대표적이다.제국주의 시대가 막을 내린 지금 원산국과 시장국 사이의 첨예한 입장 차이는 ‘소리 없는 전쟁’이라 불릴 정도로 정치·외교적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영국과 그리스 사이의 ‘파르테논 마블’ 논쟁이다. 영국의 귀족 토머스 브루스가 1800년대 초 파르테논 신전을 해체한 뒤 200t에 달하는 대리석 조각을 당시 세계 최강이던 해군 함정에 실어 영국으로 옮긴 사건으로, 문화재 약탈에 개인뿐 아니라 영국 정부의 영향력이 방대하게 작용했던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 각국의 반환 요구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여전히 약탈의 합법성과 취득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여러 근거 중 핵심은 “19세기 약탈을 20세기 법으로 단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국만 시장국이 아니라는 것도 중요한 근거다. 쉽게 말해 여러 시장국이 있는데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다. 책 말미에 시장국으로서 한국의 문제를 지적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은 실크로드 문화재를 1500점가량 소장하고 있다. 그중 50여점이 세계 최고 수준의 벽화다. 반면 중국 신장 투루판 등 현지의 벽화들은 안료가 지워지는 등 훼손 상태가 심각한 수준이다. 일각에서 반환 논의가 이어지는 이유다. 저자는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았던 이탈리아의 성공 사례를 본보기 삼아 반환 문제에 나서자고 주장한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이영훈 등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 모욕죄로 조국 고소

    이영훈 등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 모욕죄로 조국 고소

    조국 “구역질 나는 책” 비난에 저자들 “책 읽지도 않고 친일파로 매도”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등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이 책에 대해 “구역질 난다”고 평한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모욕죄로 고소했다. 이영훈 전 교수를 비롯한 저자 6명(김낙년·김용삼·주익종·정안기·이우연)은 20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조국 후보자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했다. 조국 후보자는 지난 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책 ‘반일 종족주의’를 두고 “이들이 이런 구역질 나는 내용의 책을 낼 자유가 있다면, 시민은 이들을 ‘친일파’라고 부를 자유가 있다”고 썼다. 또 “(‘반일 종족주의’에서 제기한 것과 같은) 주장을 공개적으로 제기하는 학자, 이에 동조하는 일부 정치인과 기자를 ‘부역·매국 친일파’라는 호칭 외에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고도 했다. 이영훈 전 교수 등은 “조국씨는 책은 읽지도 않고 한국일보의 한 칼럼을 인용해 필자들이 일제 식민지배 기간에 강제동원과 식량 수탈, 위안부 성 노예화 등 반인권적·반인륜적 만행은 없었으며, 많은 젊은이가 돈을 좇아 조선보다 앞서 일본에 대한 로망을 자발적으로 실행했을 뿐이라 썼다고 비난했다”면서 “그러나 ‘반일 종족주의’ 어디에도 일제 식민 지배 기간에 반인권적·반인륜적 만행이 없었다는 변호는 없다”고 밝혔다. 이들은 “‘반일 종족주의’는 기존 한국인의 일반적 통념과 다른 새로운 주장을 담았지만, 이는 수십년에 걸친 필자들의 연구 인생의 결과를 담은 것으로 진지한 학술적 논의와 비평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조국씨는 아무런 근거 없이 이 책을 ‘구역질 난다’고 비방하고 필자들을 ‘부역 매국 친일파’로 매도하여 학자로서의 명예를 크게 훼손하고 인격을 심히 모독했다”고 했다. 저자들을 대리하는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은 “‘매국, 친일파’ 등의 표현으로 모욕죄로 처벌된 사례는 매우 많다”면서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형법 교수로서 이러한 법리를 모를 리 없는 조국 후보자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명백히 형법상의 범죄에 해당하는 망언을 쏟아내는 것은 법률을 무시하는 태도로, 법무부 장관으로서의 자질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北 “방위비 청구서 콱 찢어버려라” 한미동맹 이간질

    北 “방위비 청구서 콱 찢어버려라” 한미동맹 이간질

    노동신문 “남한을 종으로 보고 수탈”“남조선 집권자들, 굴욕적 추종행위”방위비 협상 시점에 노골적 이간질북한이 남북협력을 강조한 문재인 대통령을 막말에 가까운 언사로 비난하더니 이번엔 “미국이 요구하는 방위비청구서를 찢어버려야 한다”며 한미동맹을 이간하고 나섰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0일 ‘또다시 가해지는 상전의 방위비분담금 증액압박’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남조선당국이 미국의 계속되는 ‘방위비분담금’ 증액요구에 시달리고 있다”며 “미국의 증액 요구는 남조선을 한갖 저들의 탐욕을 채워주는 수탈의 대상으로 제 마음대로 빼앗아내고 부려먹을수 있는 노복(종살이하는 남자)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상전의 심보가 얼마나 오만무도하고 날강도적인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또한 한일 갈등을 거론하며 “바로 이런 때에 미국은 남조선에 동정과 위로를 보내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경제의 숨통을 조이는 청구서를 연방 들이대고있다”며 “남조선을 얼마나 하찮은 존재로 여겼으면 그런 무리한 행위를 서슴지 않고 강행하고 있겠는가”라고 미국을 비판했다. 심지어 “분담금 증액요구가 날로 거세지고 있는 것은 역대 남조선 집권자들의 굴욕적인 대미추종행위가 초래한 것”이라며 남한 정부의 굴종적 자세를 문제 삼기도 했다. 신문은 “돌이켜보면 역대로 남조선 집권자들은 미국과의 ‘전략적 동맹관계’를 떠들어대고 미제 침략군의 남조선 강점을 그 무슨 ‘억제력’으로, ‘평화와 안정에 대한 기여’로 묘사하면서 상전에게 별의별 아양을 다 떨었다”며 “미제 침략군의 남조선 영구강점을 애걸하며 상전의 끊임없는 ‘방위비분담금’ 증액 요구를 고스란히 받아물었다”고 비판 수위를 높였다. 이날 대남선전매체 메아리가 낸 ‘불 난 집에서 도적질하는 격-한미동맹의 진모습’이라는 제목의 글도 한미동맹을 헐뜯는 내용을 담았다. 이 매체는 “남조선 당국이 미국의 거듭되는 방위비분담금 증액요구로 진땀을 뽑고 있다”며 “상황을 보면 마치도 미국이 빚을 빨리 갚으라고 남조선에 독촉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또 “(미국은) 남조선을 그 어떤 동맹이나 외교상대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한갖 수탈의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는것”이라면서 “대체 티끌만한 존엄이라도 있는 것인가. 어째서 세상이 보란듯이 치욕의 ‘청구서’를 콱 찢어버리지 못하는가”라고 했다. 한편 한미 양국은 이날부터 내년도 방위비 분담금 협상을 위한 본격적인 만남을 갖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방위비 분담금 대폭 인상을 압박하는 발언을 이어가고 있어 협상 결과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역대 대통령의 명절선물 보니...

    역대 대통령의 명절선물 보니...

    우리나라에는 명절이면 고마운 분에게 감사의 의미로 선물을 전달하는 아름다움 풍습이 있다.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청와대에서는 대통령 명절 선물을 전직 대통령과 5부요인, 정계원로, 정부 고위공직자,종교문화계 인사는 물론 각종 재난에서 의로운 일을 한 분이나 국가에 헌신한 분들에게 보내고 있다. 역대 대통령이 명절에 어떤 선물을 보냈는지 정리해본다. 대부분 우리 농수산물을 애용한 것으로 파악됐다. 예년보다 열흘정도 앞당겨진 올해 추석선물의 경우, 청와대에서 어떤 선물을 보낼 것인지 드러난 건 없지만 올해도 추석명절 선물을 보낼 것으로 예상된다. 대통령 명절선물 인삼, 멸치, 김 등 다양해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은 인삼을 주로 선물했다. 인삼을 담은 나무 상자에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 문양을 새겨 넣어 선물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격려금을 주로 전달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선물은 멸치세트였다. 거제도에서 멸치잡이 사업을 하던 부친이 보내준 멸치였다.외환위기 직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주로 김과 한과를 선물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전통주 애용노무현 전 대통령은 전통주를 사랑한 대통령으로 평가할 만하다. 취임 첫해인 2003년 추석에 지리산 복분자 선물을 시작으로 2004년 충남 한산 소곡주, 2005년 추석에는 평안도 지방소주인 문배주, 임기 마지막해인 2007년 추석 선물로 전주산 이강주 등 전국의 전통주를 선물했다. 재임 기간 10번의 명절선물 중 9번이나 전통주를 선물할 정도였다. 2006년 추석 때는 전통주 대신, 전국 9개 지역을 대표하는 우리의 전통차와 다기세트를 보냈다.이명박 대통령은 전국 각 지역의 농특산물을 애용했다. 2008년 추석에는 강원도 인제의 황태, 충남 논사나 대추, 전북 부안 김, 경남 통영 멸치를 보냈다.임기 마지막해인 2013년 추석 선물로는 횡성 들기름에 경기 여주 햅쌀, 충남 부여 표고버섯, 경북예천의 참기름 전남 진도 흑미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13년 추석 명절 때 찹쌀, 잣, 육포세트를 선물했다.다음해인 2014년 추석 때는 대추, 잣, 육포를 돌렸다. 육포와 잣은 박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부터 애요한 선물품목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올 설 선물주는 함양 솔송주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설 명절을 맞이해 함양 솔송주를 선물한 바 있다. 함양의 솔송주는 솔잎과 송순 찹쌀 지리산 암반수로 빚은 술로 진한 솔향을 지니며 목넘김이 깔끔한 함양의 토속주다. 지난해엔 설날 선물로 평창 감자술을, 추석 선물로는 제주 오매기술을 보냈다. 문배주는 남북화합의 상징한편 남북화합의 상징으로는 문배주를 들 수 있다. 2000년 6월 14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과 지난해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때 건배주로 사용된 술이 문배주다.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양으로 가져간 문배술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마시면서 “원래 문배술은 평양 대동강 일대 주암산물로 만들어야 진짜배기”라고 말하면서 남북화합을 상징하는 술로 자리잡았다. 우리나라의 전통주는 현재 100여종에 이르고 있다. 원래는 그 종류가 1000개가 넘을 정도로 많았으나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수탈로 고사위기에 처했다가 2000년대 들어 조금씩 활성화된데 이어 2017년 7월 전통주에 한해 인터넷 판매가 허용되고 젊은이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 전통주 산업의 활성화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전략사업부 seoulmarket5@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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