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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대 입시문제 유출/회화과 양화전공

    【부산=이기철기자】 동아대 예술대 기악과 합격자를 번복발표해 말썽을 빚었던 동아대가 이번에는 예술대 회화과 양화전공 실기문제가 사전에 유출된 것으로 밝혀져 입시부정의혹을 사고있다. 동아대는 29일 지난 5일 실시된 예술대 양화전공 정물수채화 실기시험장에서 심모양(19·S여고)이 시험문제의 구도가 잡힌 메모지를 갖고 들어와 시험을 치르다가 적발,불합격 처리됐다고 밝혔다. 심양은 이날 낮 12시 45분쯤 입시진행위원 박모씨(27·동아대 회화과3년)로부터 시험문제를 건네받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학원강사 노모씨(27)에게 전달,노씨가 이를 토대로 잡아준 구도 메모지를 들고 입실해 시험도중 발각됐다는 것이다.
  • 17세 요절… 일 아마화가 가마치/유작전에 관객들 줄이어

    ◎“삶의 용기준다”… 하루 6백명넘게 찾아 예술작품에 대한 평가가 반드시 작가의 지명도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오히려 아마추어의 작품이 그 순수성으로 인해 관객을 더욱 매료시키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 군마현의 다카사키에서는 요즘 20세도 못채우고 비운에 간 아마추어 화가 가마치 야마다의 유작들을 전시한 한 기념관이 연일 사람들로 붐비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한번도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못한 가마치는 오늘날 일본인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작가로 부상해 있다.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가마치의 그림들이 거칠지만 힘이 들어가 있으며 그 힘을 보는 이의 마음에 불어 넣어준다고 평한다. 가마치가 꽃다운 나이에 요절했다는 점이 사람들의 연민을 자아낸 면도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끄는 더 큰 이유는 그가 비록 짧은 인생이나마 뜨겁게 살았다는데 있다. 가마치는 1977년 8월 어느날 17번째 생일선물로 받은 전자기타를 치다가 뜻밖의 감전사를 당한다.사람들은 그가 죽고 난뒤에야 그의 침대밑에 숨겨져 있던 1천여점의 수채화및 스케치,일기와 시가 적힌 18권의 일기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마치는 17년간 1천여점의 작품을 만들어낼 만큼 꿈에 가득찬 소년이었다.그림들은 선과 채색이 거칠고 불완전했지만 그림속엔 소년의 격정이 살아 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의 작품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9년 미술품 수집가이자 화랑 운영자인 다케오 히로시씨의 눈에 띄면서부터. 그의 작품을 처음 본 순간 충격에 사로잡혔다는 다케오는 즉시 군마현의 마에바(전교)시에 있는 자신의 화랑에서 저명화가들의 작품들을 떼어내고 가마치의 작품을 내걸었다. 프로들이 그림을 그릴때부터 마음속에 고객과 관객,비평가들을 의식하는 것과 달리 가마치는 젊은 힘을 순수하게 그림에 담았을 뿐이라는 것이 다케오의 설명이다. 다케오는 마침내 지난해 도쿄에서 신간선으로 1시간 거리인 다카사키에 70평 넓이의 2층건물인 가마치 기념관을 세워 가마치의 그림들을 상설전시하게 됐다.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찾는 이가 늘기 시작해 초창기엔 하루평균 50∼60명에 불과하던 내방객이 요즘은 6백명을 넘고 있다.최근 도쿄의 긴자에서 가마치 작품전이 열렸을땐 하루 평균 관객이 6천명을 넘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기년관을 찾는 사람들중엔 군마현 이외의 외지인이 더 많다는 점이다.삶에 의욕을 잃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찾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관객들이 자유롭게 소감을 적는 기념관내 공책은 이미 91권이 채워져 있다.공책에 적힌 글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삶의 용기를 얻었다』『용기를 잃었을땐 이곳을 다시 찾겠다』
  • 페쟈의 통나무집/아나톨리 김 지음(화제의 책)

    ◎재러 교포작가의 단편동화 모음 러시아교포작가의 단편 동화 모음. 우리가 처음 보는 낯선 생활과 낯선 풍경들을 마치 한폭의 수채화처럼 펼치고 있다.캄차카지방으로 이사온 소년의 이야기인 「편도꽃 필 무렵」,아이들과의 싸움을 통해 동심을 그려낸 「아이들처럼,부드러운 아이들처럼」,증조할머니의 가슴 아픈 사연과 새끼고슴도치에 대한 추억을 하나로 묶는 「애정의 고리」 그리고 「페쟈의 통나무 집」과 「수채화」등 5편의 동화는 모두 한국인의 혼과 러시아의 문학전통이 잘 어울린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작가는 이 글 전편을 통해 『아이들의 눈도 어른들과 똑 같아서 모든 것을 아름답게만 포장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아나톨리 김 지음 김현택 옮김 동쪽나라 3천5백원.
  • 강연균/김경인/“민중화단 두 중진의 새화풍”

    ◎재탄생 평가속 대규모 개인전 눈길/강연균/활력있는 수채화 대중성 얻어/김경인/인간대신 자연으로 시선 돌려 민중화단을 선도해온 두 중진의 대규모 개인전이 열려 눈길을 끌고있다. 특히 이들의 전시는 문민시대에 들어 지향점을 잃고 변화를 모색하는 민중화단의 새로운 분위기속에 개최돼 더욱 주목되고있다. 30여년간 수채화에 전념해온 남도의 작가 강연균씨(53)와 80년대 민중미술을 선도해온 김경인씨(52). 화력30년의 회고전을 갖는 강씨와 10년이 넘어 개인전을 연 김씨는 모두 예술가로서의 신념과 투지, 불굴의 창의력면에서 손색없는 작가들로 화단의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들이다. 지난달27일 서울 동아갤러리에서 「수채화30년전」을 연 강연균씨는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를 지켜온 무등산 토박이 작가이다. 30여년간 남도의 빛과 사람들을 고집스레 수채화에 담아온 강씨는 지역이라는 제한성을 극복해내고 민족회화의 새로운 경지를 이룩해왔다. 젊은 시절,고운 화면의 향토적 소재주의 작가로 이름을 낸후 80년 광주사태를 맞으며 현실인식에 기반을 둔 사실주의 그림에 진입했다. 향토적 서정에서 사회의식이 깃든 사실주의로 거듭나면서 그는 자칫 힘없어 보이기 쉬운 수채화에 생동감을 안겨주는데 외길을 걸어왔다. 탁월한 데생력을 바탕으로한 그의 기량은 민중화가들이 놓치기 쉬운 대중성과 회화성을 겸비하게 됐으며 『강연균의 붓끝이 닿으면 그 소재가 무엇이든간에 예술적으로 재탄생된다』는 말을 듣게 됐다. 수채화의 명예회복을 위해 30년간 갈고 닦아온 맛깔나는 그의 수채화들은 오는 27일까지 동아갤러리 벽면을 장식한다. 80년대 민중미술의 선두에 섰던 김경인씨는 서울 갤러리이콘에서 3일까지 열리는 개인전에 과거와 다른 엄청난 변신의 작업을 발표, 화단의 이목을 끌고있다. 70∼80년대 사회의 암울함을 표현해온 그는 과격하면서도 때론 섬뜩하기까지 했던 화면들을 푸르름이 밴 서정적 화면으로 바꿨다. 91년부터 시작한 그의 이 「소나무」연작들은 『지천명의 나이에 걸맞는 자신과 자연을 향한 전향적 시도』라는 작가의 해석이 따르고 있다. 비판적 가치관과 안목으로시대상과 삶의 표정을 담는 그림에 몰두하기 20년. 김씨는 20년을 넘기면서 이제 인간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맑고 시원한 공기를 마시고 싶다고 했으며 이번에 발표된 「소나무」들이 바로 그 맑은 공기를 찾아다니며 일궈낸 그의 첫번째 결실들이다.
  • KOEX/선물박람회/장신구박람회/문구 전시회

    ◎온가족 함께 볼만한 국제전 3가지/국내외 2백70여업체 참가 새달 2일까지 열러/장신구 선물/유행소품에서 아토산품까지 다양/문구/재활용 학용품·전문가용구 등 눈길/우리 상품수준 자녀에 알리고 알뜰쇼핑 기회로 깊어가는 가을,국내외 최신상품의 수준과 경향등을 자녀들에게 학습거리로 제공하면서 가족 나들이를 겸해 가볼만한 행사가 서울 강남구 한국종합전시장(KOEX)에서 열리고 있다. 종합전시장 본관 3층 대서양관에서 30일부터 11월2일까지 4일간 마련되는 93 서울국제선물용품박람회와 서울국제장신구박람회,서울국제문구전시회가 바로 그것. 한국공예협동조합연합회와 한국문구공업협동조합,대한무역진흥공사가 공동으로 수출시장 확보를 위한 국내외 바이어상담및 내수를 위한 홍보전의 일환으로 개최하고 있는 이들 3개 행사에서는 일부품목의 경우 홍보 선전용으로 염가에 판매도 되고 있어 전시장을 찾는 이들에게 알뜰 쇼핑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국내 1백16개 업체와 홍콩 대만 이집트등 12개국가 17개 업체가 참가하는 장신구·선물전람회에는 목걸이,팔찌 등의 모조 장신구에서 옥·수정등진품에 이르기까지 각종 신변장신구와 인형등 완구류,실내장식품,공예품등이 풍성하게 선보이고 있다. 버클 벨트 사진틀 탈액자 나전칠기등의 선물코너와 양념통,요리기구등이 전시된 곳은 특히 주부들의 발길을 끄는 코너. 지갑 핸드백등 각종 가방류와 머리빗등 화장용품,스카프 모자등의 최신 유행소품코너에는 젊은 여성들의 발길이 몰리고 있다.자동차 액세서리,건강레저용품,오락용품등의 코너도 인기. 특히 올해는 홍콩 대만등 주로 아시아국가들이 참가 했던 지난해에 비해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이집트 탄자니아 케냐 등 아프리카국가들도 대거 참가,목각공예등 진귀한 토산품을 선보이고 있다. 또 단일「국가관」을 설치하고 수주전을 벌이고 있는 중국의 사천성 참가단이 선보이는 실크스카프등의 상품전시회와 문화행사도 규모가 크고 이색적이어서 관람객들이 많이 찾는다. 국내 1백1개 업체와 일본 독일 네덜란드등 11개국 37개 업체가 최신상품을 놓고 전시를 하는 서울 국제 문구전시회에는 학용품류와 미술및 디자인용품 제도용품 팬시문구등이 선보여 학생및 전문가들의 눈길을 모으고 있다. 국내업체중 코데코산업이 세계최초로 개발했다는 입체타원제도기 「타원가이드」와 냄새와 독성이 없는 매직펜,색연필로 그림을 그린후 붓이나 손가락에 물을 묻혀 그리면 수채화 물감의 효과를 낼 수있는 「수성색연필」등이 전시되고 있다.또 다양한 재활용 문구류와 직접 그려서 장식용 스티커를 만들 수있는 신개발품 「매직아트」물감세트도 어린이 교육용이나 가정취미용품으로 인기이다. 일반인들을 위한 개장시간은 하오1시부터 하오 5시까지이나 31일,일요일은 상오 10시부터 5시까지이다.
  • 조각가 유영교씨(이세기의 인물탐구:39)

    ◎돌로 빚어내는 생명력… 인간미 “물씬”/풍만한 인체·단순화된 형태의 구상 즐겨 표출/연속 국전특선… 완벽한 조형술로 정상의 명성/요즘은 고난·번뇌 초월한 「평화의 표정」 형상화에 집착 「인생은 석재다.그것으로 신의 모습을 조각하든가 악마의 모습을 새기든가 모든것은 자유다.그러나 다만 생명이 깃든 조각인가?」이는 영국철학자 허버트 스펜서의 말이다. 유영교는 강한 석재로 생명이 깃든,살아있는 사람의 표정을 만드는 작가다. 알찬 마스(양괴)와 신선한 정감표출의 단아한 나부상,예술가가 품은 그 어떤 상념도 돌이라는 재료에 의해서 표현되지 않는것은 없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그는 작품화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끊임없이 데생하고 데생한다.또는 수채화로 그리거나 유화나 파스텔로 그린다.그리고 하나의 회화로서 만족할만한 결과를 보였을때 이번엔 점토로 이를 빚는다. ○실패확률 거의 없어 형태의 완성과 완벽성을 석고 모형으로 경험한다음 비로소 돌작업에 들어가기 때문에 실패의 확률은 거의 없다.표정조차도 이미 모형에서 이미지를 또렷하게 살려내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린 그림이 조각에 닮아있으면 그것은 대부분 성공적인 것이지만 만일 조각이 그림에 닮아있을땐 이건 낭패일수밖에 없을 것이다.작품에 관한한 완벽추구자이며 영원히 만족을 모를수도 있다. 작품에서 그가 중점적으로 파고드는 테마는 언제나 인간의 이야기다.인간의 고뇌하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여러형태의 모습을 어디서 찾느냐는 것과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조각으로 표현하느냐는 것이 과제다. 같은 고뇌라도 성자의 고뇌인가 범상한 인간의 가족애적인 것인가.사랑도 신의 사랑과 남녀의 사랑,자비는 베풀때와 베풀음을 받은 은총일때가 다르듯이. 한때는 구도자나 수도자의 얼굴을 만들기도 했다.또는 어둡고 그늘진 어부나 농부의 삶에 찌든 표정이 그의 작품의 한 구릉을 이루기도 한다.그러나 「삶의 이야기」시리즈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아들을 보고 기절한 어머니의 모습,가톨릭의 고통과 고난과 수난은 끝이 없음을 그는 새삼 느낄수밖에 없었나보다. 이에비해 경주 불상에서 온화한 평정의 모습을 발견했다.미술이론을 모르는 이름모를 석공이 원만함과 무심과 풍요를 그려낸 것이다. 이때부터 헤르만 헤세의 「싯달타」를 다시 읽고 노자·장자에 심취하면서 초탈·초월의 경지를 갈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풍만감이 넘치는 인체에다 반가사유상의 양식을 적용한 극기와 무상,번뇌를 떨쳐버린 초월적 명상,마음의 갈등씻긴 평화로운 표정을 작품마다에 햇살처럼 아로새겨 나갔다. 유영교는 데뷔때부터 지금까지 비교적 순탄하게 일류작가의 대열에서 한치도 뒤처진 적없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예술가의 한 사람이다. ○첫 개인전 찬사 일색 아직 대학2학년때인 66년 국전 3회 연속 입선,이어서 목우회 공모전서 문공부장관상 국전 국무총리상 국회의장상 국전 연속특선으로 삼십을 갓넘긴 나이에 국전추천작가·초대작가등 남보다 배나 빠른 정상가도를 똑바로만 달려왔다. 추천작가가 되던해인 77년 첫개인전과 함께 수많은 찬사·호평에 둘러싸여 다음해 이탈리아로 유학,국립로마미술아카데미와 르네상스 조각의 본고장으로 일컬어지는 카라라에서도 거장 에밀리오 그레코와 페레클레 파시니를 사사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때 「지중해」 「일드 프랑스」의 작가인 마욜과 아르프,오슬로의 후로그넬 공원에 있는 비게란드의 화강암으로 된 「조각군」을 보고 그는 자신의 구상조각에 대한 집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부조에서 환조에 다다른 아르프의 아르 콩쿨레(구체예술)를 수용하면서 구상·추상 사이를 넘나들다가 차츰 추상의 경지를 뛰어넘어 그만의 구상인체에 망설이지 않고 정착할수 있었다.진위를 가릴수없는 모호한 추상의 세계보다 손으로 만져지는 구상세계가 그의 투명한 성격에도 거부감이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가 아끼는 재질인 대리석도 인체의 아름다움과 당당함,사유와 풍요를 표현하는데 어떤 부족감도 없었다. 2년전 선보인 성숙·풍요·동반 시리즈에 이어 최근에는 점점 더 불교적으로 된 작품의 표정들이 무심을 지나 열반의 경지를 보이는 것이 그 좋은 예다. 더구나 밑그림이 철저하게 뒷받침된 표정들은 하나하나가 서로 다르고 하나하나마다에 생동감이 담긴다.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텅빈 무심이 아니라 청순이라든가 순백·환희가 눈부신 것도 특징이다. 고흐의 해바라기 같은 이미 다른 작가가 그려온 소재를 그는 그 나름대로의 천진무구를 강조하여 행복의 꽃다발로 재창조한 경우도 있다. 미술평론가 김복영은 이를 「회고」와 「번안」의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유홍준은 『살아숨쉬는 듯한 생명체의 덩어리』라든가 자신의 작품을 되물으며 의식을 심화시켜 나가는 자세는 『예술의 성실성』내지 『예술의 진지함』이라 평하고 있다. 그의 작업장은 금강 남쪽,충남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에 자리잡고 있다.그가 살고 있는 대전시내에서 버스로 20분거리.많은 조각가들이 교외별장과도 같은 아기자기한 건물을 지닌 것과는 달리 야산을 깎아 만든 2천평 대지에 세운 이 간이작업장은 거대한 석물공장을 방불케한다. 10t의 무게를 들어올릴수 있는 빔설치,돌을 썰거나 마광할수 있는 전기모터와 체인 블록,바이트와 드릴과 리머와 탭 등 수백가지의 절삭공구들과 마당구석구석에 사람의 키만한 대리석 화강암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는 이리나 문경,여수를 돌며 자연석을 직접 사오기도 하고 이탈리아 대리석을 현지에서 주문해다 쓰기도 한다. 남들이 직장에 출근하는 것처럼 아침8시에 도시락을 싸들고 출근,데생에서 흙반죽,석고 뜨고 돌자르고 드릴로 뚫고 다듬고 깎고 하루종일 돌가루와 흙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채 중노동에 시달리다 밤9시가 넘어서야 귀가한다. 사방이 청명한 가을인 요즘,드넓은 벌판엔 외딴 작업실에서 내는 그의 기계소리 돌을 다듬는 소리외엔 주변은 온통 적막강산이다. 간간이 브론즈나 나무를 다루기도 하지만 돌만이 갖는 차갑고 강한 느낌,정발 하나하나로 확실하게 작가의 손에서 작업이 끝나는 확인은 돌이 아니고서는 맛볼수 없는 희열의 하나다. 유영교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그 어떤 경우에도 세속에 물들거나 부당함에 타협하지 않는 결벽증이다. 일찍이 그가 국전추천작가가 됐을때 화단에서 까다롭기로 유명한 평론가 원동석씨는 「평론가 10인이 추천하는 신예작가」의 한 사람으로 유영교를 추천하면서 「아집이나 고집때문이 아니라 그의 천성적인 순결과 자신감은 세파에 쉽사리 물들거나 외세에 섣불리 휩쓸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대로다. 스승·선배들에게 예의 바르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끝까지 관철하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엉뚱한 말을 들으면 그의 의도를 명료히 제시하여 시정을 요구한다. 또 대학의 전임강사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가르치는데 시간을 뺏기다보면 그의 예술을 할수 없기 때문이다. ○세속의 욕망을 거부 돈이 될수 있는 모뉴망이나 설치미술등의 주문에도 응하지 않는다.건물주의 몰취미에 억지로 맞추기도 싫고 번거로운 계약과정이나 브로커들이 중간에 끼는 것도 마땅치 않다. 그는 언제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작품,온 몸과 마음으로 몰두할수 있는 대상에만 철저하게 파고든다. 그는 충북 제천군 청풍면장이던 유상종씨와 정효옥여사의 5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면소재지이긴 하지만 국민학교 3학년때 마을에 들어온 버스를 처음 볼만큼 산골동네에서 투박하게 자라났다. 국민학교때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하고 충주고 2학년때 홍대가주최한 전국고교미술실기대회에서 1등상 수상.그날 조각실에서 작업복을 입고 흙을 만지는 선배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 계기가 되어 후에 조각과를 지망하게 됐다. 이탈리아 유학중 그곳의 조각가들이 야외작업장을 가진 것을 부러워한 나머지 고향청풍에다 작업장을 짓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충주댐 건설로 고향이 수몰되어 목원대교수인 부인 이은기씨(서양미술사)를 따라 86년 대전에 정착했다.슬하엔 3남매. 유영교조각은 양감의 풍요에서는 마욜,극도의 단순한 형태추구면에서는 때때로 아르프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그가 다다르고 싶은 것은 순연한 조각이다. 그러나 연전에 그의 작품전을 보고 이탈리아 카라라 아카데미 교수이자 평론가인 피에르 카를로 산티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형태면에서는 영혼의 영원과 가치에 대한 신념』,『작업의 전과정에서 보여주는 것은 투명한 영감의 세계』라고. 남보다 빨리 화단에 입문해서 일사천리로 예술의 정상에 이른 것처럼 그는 남보다 빠르게 그가 원하는 순정한 순연의 경지에 이미 이르고 있음을 산티니는 예고하고 있는것 같다. □연보 ▲1946년 충북 제천 출생 ▲1964년 충주 고교졸업 ▲1965년 홍대 미대조각과 입학 ▲1966∼68년 국전연속3회 입선(대학재학중) ▲1969년 홍대 미대졸업 ▲1975년 국전 특선 ▲1976년 국전 특선,홍대대학원 졸업 ▲1977년 국전 추천작가및 초대작가,전국조각가초대전 목우회초대전출품 ▲1977년 제1회 개인전(미술회관) ▲1978년 제2회 개인전(진화랑),이탈리아 로마 미술아카데미 유학 ▲1980년 제3회 개인전(로마) ▲1980년 제4회 개인전(진화랑) ▲1982년 제5회 개인전(미라노),국제청년작가 야외전(미라노) ▲1983년 제6회 개인전(현대화랑) ▲1984년 이탈리아 로마 미술아카데미 조소과졸업(거장 에밀리오 그레코 펠리클레 화시니 사사),한국조각가 13인전 한·이조각가교류전,재이한국조각가전출품 ▲1985년 재이한국조각가15인전,토스카넬로의조각전,국제청년조각가전 ▲1986년2월 귀국개인전(제7회·강남현대화랑) ▲1986년10월 제8회 개인전(현대화랑) ▲1987년 이탈리아 문화원개원기념 초대전,재이 한국조각가초대전(갤러리 현대및 이탈리아 뤼기 루소) ▲1988년 제9회 개인전(현대화랑),현대조각 초대전 ▲1991년 제10회 개인전(현대화랑) ▲1992년 제11회 개인전(갤러리 신현대)홍대및 목원대 서울교대강사 현재 충남대 예술대 출강 미술회관 개관기념초대전·한국 현대조각초대대전·목우회초대전·평론가10인이 추천한 신예작가초대전·한국구상조각회 로마전 주관·국제청년작가 야외전·한이조각가교류전·한국조각가협회전및 해마다 홍익조각회전·한국구상조각회전·국전초대작가전·현대미술초대전·원로중진조각초대전·MBC구상조각대전·대한민국 미술대전초대작가 국내외 그룹초대전에 수십차례 참가 목우회공모전 동아일보사장상·목우회공모전 문교부장관상·국전국무총리상·목우회공모전 최고상·국전 국회의장상 수상 국립현대미술관 호암미술관 어린이대공원 워커힐미술관 럭키·금성사옥 제천시청 한일은행본점 한흥증권본점 남해화학 대전교구장 아라리오미술관 신라호텔 야외조각 전시장
  • 배꽃/이선의 첫 창작집… 중·단편 9편 수록(화제의 소설)

    「행촌아파트」를 통해 만만찮은 역량을 과시했던 여류작가 이선의 첫번째 창작집.등단 5년만에 2권의 소설집을 상재한데 이어 소망하던 창작집을 엮어냈다. 창작집에 실린 표제작 「배꽃」을 비롯,「승자를 위하여」「잃어버린 목소리」등 9편의 중단편은 자신의 이름에 갈음하는 수작들이다.특히 표제작 「배꽃」은 탁월하다.이토록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나본 적이 있느냐고 당당하게 권할 만하다.촌스런 50대 파출부아줌마와 「배꽃같이 생긴 예쁜 딸」에 얽힌 이야기가 파스텔톤의 수채화로 펼쳐진다. 작가는 53년 전주생으로 숙명여대 국문과를 나왔다.90년 장편「기억의 장례」로 오늘의 작가상을 탔다. 이선지음 민음사 5천5백원.
  • 한국화가 송수남씨(이세기의 인물탐구:34)

    ◎화폭에 시정 가득… “시인같은 화가”/수묵현대판화 개척… 「남천산수」는 독보적 경지/유연하면서도 예리한 운필로 화력 30년 빛내/가장 한국적인 소재에 집착… “동서양 넘나드는 화격” 꿈꿔 남천은 시인같은 화가다.그는 그림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다.그의 그림만 봐도 알 수 있다.먼산 먼강 안개 서린 먼동,잔잔한 금강이며 섬진강 얼어붙은 겨울산하까지도 그의 그림속에는 교교한 시정이 담겨있다.공간에 뜬 몇개의 산이 담묵 농묵으로 꿈결같은 원근을 이루거나 또는 보석처럼 빛나는 수묵채색일 때도 아름다운 여백을 살려 화면전체에 서정시가 흐르는 듯한 향수를 품고 있다. 그가 쓰는 먹은 모든 색의 출발이자 모든 색깔을 포함한 색채다.어둠이 흩뿌리는 혼묵,비내리는 잿빛하늘의 회묵일지라도 단순한 검은색인가 하면 전혀 검은 색깔이 아닌 현묘 심묘의 먹색일색이다.그는 눈부시게 하얀 백지위에서 먹으로 백색을 백답게 살리고 먹색을 가장 먹답게 표현할 줄 아는 화가다. 색깔과 색깔을 배합해서 얻어지는 효과와는 달리 물과 먹의 비율은그 농도를 계산할 수는 없으나 모필이 한지에 닿는 순간의 유연성과 날카롭고 경쾌한 선조,그 번짐이 내는 의외의 조형에 흠뻑 빠져든듯 그는 지난 수년간 수묵을 매재로 하는 긴 실험과 모색의 시기를 거쳐왔다. 그리고 수묵추상 발색산수 동양화판화에서 다시 발묵산수로 이어지는 그의 수묵작업은 이제 포만과 방출의 단계를 통과하여 그만의 독자적인 「남천산수」를 이루고 있음을 인정받고 있다. ○충격던진 첫 개인전 그의 이런 실험정신은 그가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할 때도 일관되게 지켜지던 그만의 방법이다. 이대입구 신촌 하숙집 골방에 틀어앉아 낙엽이란 낙엽은 모조리 주워다가 수북하게 쌓아놓고는 이를 화면에 이리저리 꼬아 붙이는 나뭇잎 콜라주,켄트지에 유화 한지에 수채화등 그가 무엇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를 스스로 모색하고 타진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때의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고향의 뒷동산」과 「강언덕 버들개지 꽃샘바람에 한바탕 춤추고 나면 온산은 진달래가 물들어」샤갈과 드가를 변주한 듯한 영롱한 색채는 그가 범상치않은 화가로 탄생될 것을 그의 주변에 일찍이 예감시켰다. 화력 30년의 화가로서나 대학교수로서나 그는 이제 중진의 위치다. 그러나 스승의 문하에서 스승의 화풍을 이어받은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혼자서 자신의 세계를 암중모색으로 성취한 편에 속한다.이에대해 그 자신도 「누구에게 배운 적도 영향을 받은 바도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초기 「한국화」전이란 타이틀로 그가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는 한지와 먹,탑이나 기와지붕등 동양화재료와 한국적 테마를 택하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의 동양화에서의 설채와 운필을 벗어나 서양추상화를 보는듯한 충격을 던졌다. 원로미술평론가 이경성씨는 『시류에 영합하지 않은 송수남 한국화는 새로운 공간예술을 실천한 예로서 70년대 화단에서 독보적인 위치로 우뚝 설것임』을 다짐했었다. 70년대후반 실경산수가 한창 붐 일때도 그의 산은 진채표현의 중량감을 과시하여 적묵산수의 특징을 강조했고 담백한 여운을 느끼게 하는 수묵과는 달리 강렬한 발색산수에서 중성적 느낌을 안겨주는 다채로운 채색과분방한 화풍을 구사해 보였다. 야트막한 구릉과 하천을 부드러운 선과 극도로 절제된 간결한 구성으로 암시하는가 하면 상상을 초월하리만큼 거대한 산봉은 휘염의 범람인듯 화면을 압도하기도 한다. 그곳에는 시의 빛과도 같은 섬세한 장식이 둥우리를 틀고 우뚝한 삼각형,묵취와 묵광,산정에서 갑자기 솟아오른 빨갛고 동그랗고 자그마한 해만으로 먹구름같은 화면에 눈시린 청량감을 뿌렸다. ○동양화서 추상 시도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동양화가로서는 드물게 「산」을 주제로한 판화를 제작,목판·석판·실크스크린·모노타입등 4종류를 찍어 수묵화의 수묵현대판화로서의 새로운 화경을 열었고 88년 「자연과 도시」전도 빼놓을수 없는 탁발한 전시로 손꼽힌다. 굵거나 묽은 선으로써 시작과 끝을 흐려뜨리면서 드로잉적인 필선과 발묵의 번짐으로 독특한 도시의 서정을 구현,울창한 잡목숲과도 같은 어지러운 도시의 여러 풍경을 특징적으로 묘사해 냈다. 도시나 산하외에 그가 즐겨 그리는 미루나무는 먹으로 화면을 가득채운 동양화의 현대추상을 시도한 선시리즈와 고향으로 가는듯한 휴식을 살린 첨단과 향수의 두면을 대비적으로 선보여주고 있다. 붓끝에 힘을 주어 사군자를 치는듯한 한계를 자유하여 그는 이제 모필만이 갖는 유연성으로 동서양을 넘나드는 그만의 화격을 이루는것이 꿈이다. 남천으로서는 어느구석에도 그 겉모습에선 화가의 티는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그런 「티」는 그에게는 지난 시절의 치기일지도 모른다.문학과 철학에 빠져 세상을 온통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니힐리스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이른바 가난이면 가난, 슬픔이면 슬픔, 외로움이면 외로움이었던 회오리가 한바탕 지난후 거추장스러운 껍질을 훨훨 벗고 「평범」과 「무심」을 과장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굵은테 안경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 그런거지 세상이란 그런거지」털털 웃으면서 술잔을 기울이는 그를 바라보노라면 지난 날이 흔적없이 허무하게 느껴진다는 수류운공이 떠오른다. ○단체활동 개입 안해 그러나 그는 여전히 어눌하고 치밀하지 못하여 지난 90년 한 신문사가 주는 예술대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상을 제정해주신 신문사에 감사한다」는 인사말을 여러차례 연습까지 해놓고는 막상 단상에 올라 다른 신문사 이름을 들먹이며 중언부언하는 바람에 관계자와 좌중을 난처하게 했었다. 또 두주불사로 학생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 사심없이 놀다가도 갑자기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한국적이란 무엇일까.중국하면 도가 떠오르고 인도하면 명상이 떠오르듯이 「한국」하면 뭐가 먼저 생각나지?』심각하게 추궁하여 주위를 당혹케하기 일쑤다.이런 한국적인데 대한 집착은 75년 스웨덴 스톡홀름국립박물관 초대전이후 수십차례의 세계미술전에 참가하면서 생긴 징후다. 그는 전북 전주에서 농가 송대석씨의 3남매중 외아들.조부가 쓰던 먹과 벼루가 있는 환경에서 자라나 일찍이 그림에 재능을 보였고 그의 소원은 언제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을 성취하는 일이었다.소원대로 지금은 서교동 그의 집에 마련된 80여평의 드넓은 화실에서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고 바로 이를 이루기 위해 그는 끝없이 노력해왔다고 할 수 있다.가족은 부인 백명희교수(이대사대학장·54)와 1남2녀.그림을 그리는 자녀는 없다. 화가친구보다는 옛날 신촌하숙방에서 함께 뒹굴던 소설가 이제하 시인 강위석 등과 즐겨 어울리고 80년대 수묵화운동을 함께 했던 후배 제자들이 있지만 화단에서의 단체활동등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 화가로 유명하다. 사람들은 남천을 소탈하고 소박하다고 말한다.대체로 자신의 일에만 충실할뿐 그는 만사에 서툴고 머뭇거리는 형이다. 그러나 가까이 화단일부에서 그의 후배들이 말하는 남천은 뚝심과 정열,실험정신이 투철하여 기왕에 있어온 타성을 묵살하고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도전적 욕망이 꿈틀대는 야심파다.또는 감정이 격하고 제스처가 명확하며 일을 벌이면 끝장을 내고 한번 눈밖에 난 사람은 끝끝내 돌아보지않는 독선적인 면이 지나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림의 완성을 설계 어느것이나 화가로서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일면일 것이다.사람이 나이들면 환경과 시대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듯이 아마도 남천 역시 그런 여러 측면을 복합적으로 지닐 수도 있다.그래선지 그는 다른 예술과는 달리 미술은 음악처럼 세계도전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서슴없이 긍정한다.그리고 한때 지나치게 탐닉했던 화려한 색채를 단순하게 저버린것이 아니라 이를 오채의 먹으로 종합한다는 의지다. 그는 결국 시와 철학으로 살찌운 마음속에다 그의 수많은 붓들을 담가두었다가 어느날 하얀 한지위에 먹만의 조형으로 세계화단에 발돋움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그는 그림의 완성,그의 그림의 끝을 알고있는 이시대 소중한 화가의 한사람임에 틀림없다. □연보 ▲1938년 전북 전주출생 ▲전주중앙국교 서중­공고졸업 ▲1956년 홍대 서양화과 입학 ▲군복무후 1961년 동양화과로 전과 ▲1963년 홍대 졸업 ▲1962년 국전입선후 신광여고­이대부고교사 ▲1967년 제9회 동경국제비엔날레 출품(동경) ▲1969년 송수남 「한국화」전(신문회관화랑) ▲1970년 인도 트리엔날레 출품(뉴델리) ▲1972년 한국현대작가7인전(샌프란시스코 아시아재단화랑) ▲1973년 송수남 개인전(신세계화랑) ▲1973년 상파울루 국제비엔날레(상파울루)한국 동양화10인전(동경) ▲1974년 양지화랑 초대개인전 ▲1974년 현대 화랑 기획전(현대화랑)현대한국동양화전(나고야) ▲1975년 스웨덴 스톡홀름국립박물관 초대개인전 ▲1976년 한국현대 동양화대전(국립현대미술관) ▲1977년 한국 미술대상 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 ▲1978년 맥향화랑 초대전 ▲1978년 뉴욕 한국화랑 초대개인전 ▲1978년 한국미술20연 동향전(국립현대미술관) ▲1979년 한국미술­오늘의 방법전(문예진흥원 미술회관) ▲1980년 하와이대 한국학센터 개관기념 초대전 ▲1981년 백상미술대전 한국현대작가 드로잉전(뉴욕 브루클린미술관) ▲1983년 송수남전(현대화랑) ▲1983년 초대 송수남 개인전(뉴런던 코네티컷대,뉴욕브루클린대 시카고 스코키시립미술관) ▲1984년 송수남 개인전(뉴욕 한국문화원) ▲1985년 송수남 판화전(조선화랑) ▲1986년 한국화,오늘과 내일 전망(워커힐미술관) ▲1986년 한국화 100연전(호암갤러리) ▲1986년 동양화 초대전(강남현대화랑) ▲1986년 송수남 초대전(부산진화랑) ▲1988년 자연과 도시전(동산방화랑) ▲1989년 남천 판화전(청작미술관)해마다 국립현대미술관 주관 현대미술초대전,한국의자연전,서울미술대전,현대작가초대전 등 단체전 수회출품 동아미술제심사위원,문예진흥원 미술대전심사위원,운영위원 역임〔현재〕서울 미술대전 운영위원,서울시 예술위원,홍대교수(홍대박물관장) 중앙예술대상수상 「수묵화」「동양화」「자연과 도시」「남천사군자(상·하)」
  • 샤갈의 “환상적 명작” 국내 전시

    ◎21일∼10월17일,호암갤러리서 1백4점 선봬/외동딸이 소장한 미공개작이 대부분/「생애·예술세계」 주제로 강연회도 마련 금세기 세계화단의 거장으로 독창적 예술세계를 구축한 마르크 샤갈 (1887∼1985년)의 환상적 명작들이 국내에 대규모로 전시된다. 호암갤러리(771­2381)가 오는 21일부터 10월17일까지 「사랑과 향수의 세계」라는 주제로 「마르크 샤갈전」을 열어 그의 대표작 104점을 선보이는것. 샤갈의 작품은 지난83년 현대미술관 전시등에서 몇차례 국내에 소개된 예가 있지만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은 그의 외동딸 이다 샤갈의 개인소장품으로 귀한 미공개작품이 대부분이다. 장르별로는 ▲유화 37점 ▲과슈 18점 ▲수채화 5점 ▲조각 1점 ▲타피스트리 4점 ▲판화 39점 등으로 샤갈이 40대이후 완성한 작품들. 고향마을을 배경으로 한 「썰매」, 연인들의 모습과 젊은 여인의 이미지가 들어간 「결혼식」, 성서적 내용을 담은 「야곱의 꿈」등은 고향과 여인·성서 세가지를 원천으로 삼았던 샤갈의 작품세계를 잘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호암갤러리가 프랑스의 화상 엔니코 나바라와 교섭을 통해 2억여원을 들여 유치했으며 일본 한국 대만 홍콩등을 찾는 순회전의 하나다. 1887년 러시아의 작은 촌락에서 태어난 샤갈은 20대이후 러시아와 프랑스등 각국을 방랑하며 1·2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나치의 인종박해등 20세기의 역사적 격동을 경험하면서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환상적 색채로 화폭에 표현,피카소이후 최고의 대가로자리를 잡았다. 그는 특히 지난85년 98세를 일기로 타계할때까지 대가로는 드물게 일관된 작품톤을 유지하고 계파와 이즘을 초월해 독창적 작품세계를 구축한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호암갤러리측은 9월2일과 15일 두차례(하오 2∼4시) 동방플라자 국제회의실에서 오광수씨와 미술사가 송미숙씨를 강사로 초청,「샤갈의 생애와 예술세계」란 주제로 대학생및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특별강연회도 갖는다.
  • 「패션박물관」 건립됐으면…/신혜순(여성칼럼)

    멀리 보이는 산의 빛깔이 어느새 연두색의 은은한 봄빛으로 바뀌고 있다.군데군데 색색으로 물든 봄꽃들과 어울려 한폭의 수채화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다. 한평생을 패션산업에 종사해오신 어머니.이때만 되면 봄이 주는 색감을 놓칠세라,여든셋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감흥을 스타일북에 찬찬히 옮겨 놓곤 하신다.또 외할머니와 엄마의 뒤를 이어 뉴욕에서 패션경영학을 공부하고 있는 나의 딸.그애 역시 계절이 주는 아름다움에 매혹돼 캠퍼스에서 자신의 넘쳐나는 벅찬 정서를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다는 서신을 보내온다.그리고 나. 우리 모계 3대가 한집에서 살면서 어떤 일에 대해 거의 같은 느낌을 가졌던 일을 떠올려보면 패션의 대를 잇는 일이 어쩐지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주변 사람들이『너무 부럽다』고 하는 말이 어색하게 여겨질 정도로. 아직도 학원일과 자신의 손길을 거쳐간 패션계 후배들을 챙기느라 늘 바쁘신 어머니와 햇병아리 후배로 힘든 유학생활을 택한 나의 딸,그 사이에서 나는 실무를 맡고 있는 탓에 가장 힘들어 해야겠지만오히려 넉넉함과 평온함이 느껴진다.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는 안도감과 뿌듯함 때문일까. 흔히 패션인을 가리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디자이너의 시선이나 감각이 남보다 앞서야하고 남과 다른 각도에서 미를 포착할 수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새것」이란 결코 무에서 탄생된 전혀 생소한 그 무엇은 아니다.오히려 많은 옛것과 경험들이 쌓여 있는 그 가운데서 새로운 것이 하나 어우러져 생겨나는 것이다.그런점에서 나는 이「새로움」의 근원을 물려준 나의 어머니에게 그지없이 고마워하고 내가 살아온 경험을 물려줄수있는 딸의 존재에도 감사한다. 손때묻고 정이 든 오래된 물건들이 유난히도 좋은 것이 그때문인가 보다.우리나라의 패션의 역사를 정립하는 「의상박물관」건립이 어느새 떨치지 못하는 소원이 돼버린것도.
  • 서울음대 45% 반영/미대는 「소묘」대상 인물·정물 포함

    ◎94학년도에 예체능계 입시요강 확정 서울대는 2일 표현력과 창의력평가를 대폭 강화한 94년도 예·체능계 실기고사 과목의 출제방침을 확정,발표했다. 서울대는 기존 예·체능계 실기고사의 과목과 출제범위로는 고교교육 정상화를 이룰 수 없고 예술의 본질인 창의력과 표현력을 갖춘 학생을 선발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출제대상을 확대해 다양한 표현기법을 평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미술대학◁ 실기고사 비율이 35%로 출제의 조건과 대상,주제를 사전발표없이 실기 고사장에서 발표하고 고사에 필요한 재료와 준비물도 수험표 교부시에 알린다. 동양학과등 5개학과 공통으로 실시하던 「소묘」의 대상을 종전의 석고상에서 석고·인물·정물등으로 다양화하고 연필뿐만아니라 목판·콩테·파스텔등도 표현재료로 쓸수 있도록 했다. 전공별 실기과목에서도 서양학과의 경우,종전의 「수채화」과목을 「채색화」로 확대,유화아크릴화·파스텔화도 포함시키기로 했다. ▷음악대학◁ 실기비율은 45%이며 작곡과와 기악과에서만 실시하던,음악을 듣고 악보에 받아 적는 이른바 「청음」과목을 국악과 성악과등 10개 모집단위에서 모두 실시키로 했으며 일부 실기과목은 전공별 특성에 맞게 추가 또는 삭제했다. ▷사범대◁ 실기가 20%반영되며 종전과 달리 교육부에서 인정한 체육 특기자에 한하여 스키·빙상·골프·볼링·배드민턴·탁구·태권도등 7개 선택운동종목을 응시할수 있도록 했으며 기초운동 능력검사 종목중 「윗몸 앞으로 굽히기」는 없애 1백m달리기등 5개종목으로 줄였다.
  • 크레파스(알고 삽시다)

    ◎어린이 색상훈련엔 24색제품 적당/크레용·파스 장점살린 제품 인기… 품질표시 확인을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고궁이나 경치좋은 교외에는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둘러멘 어린 학생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중고등학생은 물론 국민학교 5·6학년만 되도 그림물감을 사용해 수채화를 주로 그린다.그러나 유치원생부터 국민학교 저학년들 사이에서 애용되는 미술용 도구라면 단연코 크레파스·크레용이 꼽힌다. 흔히 크레파스로 총칭해서 부르는 크레용(Crayons)과 파스(Oilpastels)는 원래 서로 다른 회화용 도구이다.크레용의 기원은 고대이집트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파라핀이라는 밀납성분에 색깔을 내는 안료성분을 섞어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후 르네상스와 중세를 거치며 회화용구의 발달이 계속되면서 크레용의 질 또한 많이 나아졌다.그러나 원료인 파라핀의 특성상 촉감이 미끄럽고 딱딱하며 지질이 좋지 않으면 색칠할때 종이가 찢어지는 등의 문제점이 남아있었다.또 색이 균일하게 칠해지지 않아 얼룩이 생기며 두가지 이상의 색을 겹쳐 칠하면 색깔이 서로 섞이지 않고 위에 덮이지도 않는 점도 당시 크레용 사용의 애로점이었다. 이런 단점을 극복한 상품이 바로 크레파스.크레파스는 파라핀 대신 경화유와 광물유를 원료로 사용해 크레용의 단점을 보완했다.따라서 색이 섞이지 않는 결함은 없어진 반면 색이 마찰에 의해 잘 번지고 다른 종이에 묻어나는등 파스에도 단점은 있다.최근에는 크레용과 파스의 장점만을 이용해 사용자의 취향에 맞도록 크레용과 파스를 구분한 제품들이 인기를 끌고있다.색상도 다양해져 30∼36개들이 상품들도 시중에 많이 나와있다. 전문가들은 그림그리기에 갓 취미를 붙일 나이 또래의 어린이들에게는 24가지 색상이면 충분하다고 얘기한다.지나치게 많은 색상은 오히려 색상훈련에 혼란을 주기 쉽다는 것이다.현재 시판되는 크레파스의 가격은 24개들이 상품이 1천2백∼2천4백원,36개들이가 2천5백∼4천원가량 한다. 크레파스를 구입할때는 우선 품질표시가 되어있는지 여부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공산품품질관리법에 의하면 크레용및 파스의 포장용기에는 종류,개당용량,제조년월,사용시 주의사항등을 표시하도록 규정돼있으므로 잘 살펴본다.또 색상수가 너무 많거나 포장용기 등에 어린이들의 정서를 해치는 도안·그림이 그려진 제품은 피하도록 한다. 크레용은 대개 닳아서 없어지기보다 사용중 부주의로 부러뜨기거나 잃어버려 못쓰는 경우가 많다.
  • 오출신 요절화가 에곤 쉴레 유작전

    ◎28세에 독감사망… 에로틱한 여인상 눈길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지만 에곤 쉴레(1890∼1918)의 28년 생애는 짧아도 너무 짧았다고 할수 있다.오는 27일까지 일정으로 프랑스 파리의 세타미술관에서 인기리에 전시되고 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이 화가의 작품들을 보면 그의 짧은 생애가 너무 아까울만큼 매우 천분이 있는 작가라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시된 소묘와 수채화등 1백여점 거의가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어서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관람객들은 『이런 작품들이 어디에 숨어있다 이제 나왔을까』의아해 하며 조금은 복잡한 그의 내면 세계와 만난다. 에곤 쉴레는 스페인 독감에 걸려 숨을 거두었다.그의 임신 6개월된 아내가 독감의 희생자가 된지 사흘만이었다.이런 죽음을 생각하면 그의 그림에 어린 분노와 우울함이 더 짙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는 가난과 병고에만 시달린 불운한 화가는 아니었다.이미 19살애 화가로서 명성을 얻어 그의 작품은 계속 잘 팔렸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빈 미술학교에서 구스타프 클립트라는선생의 지도를 받았다.클립트의 지도로 17살때 첫 전시회를 열어 작품을 팔았다.19살에 「아르 누보」(신미술)그룹을 만들고 학교에서 쫓겨났다.그는 조숙하고 반역아적인 예술가였다. 그는 여인들을 에로틱하게 그리곤 했다.그러나 마냥 널브러지거나 쾌락에 들떠 있는 여인들에게서 풍겨지는 것은 고통과 절망이다.쉴레는 소묘 솜씨가 매우 빠르고 인물의 심리를 그려내는데 탁월했다고 한다.그러나 이상한 점은 색깔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었다. 그의 과격한 그림들을 두고 어떤이들은 심리학적인 해석을 시도하기도 한다.쉴레가 15살때 아버지가 매독으로 죽었기 때문에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같은시대 사람들과 쉽게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1918년 그가 죽기 얼마전에 가진 전시회는 대성공이어서 거의 모든 작품이 팔렸다.그는 자신의 재능을 결코 의심하는 법이 없었다.『내 작품은 현대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월의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그의 그림들이 그리 충격적인 것은 되지 못한다.그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세기초 한 젊은이의 정서이며 사랑과 죽음과 욕망이라는 문제에 대한 고통어린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 재야화가 고 이철이 예술혼 재조명

    ◎갤러리 21,19∼28일 화업 40년 발자취모아 「유작전」 마련/이중섭과 함께 수학한 양서1세대/국전외면… 「그림통한 자유」로 일관/하정웅대표,“한국미술 발전위해 숨겨진 작가발굴 지속” 잊혀지고 숨겨진 작가들을 발굴,재조명작업에 정성을 기울이고있는 한 화랑이 지난해 연말 김욱규유작전을 개최한데 이어 새해들어 「이철이유작전」(19∼28일)으로 또다른 뜻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사업가로 성공한 재일교포 하정웅씨가 고국에 각별한 마음으로 지난해 가을 동숭동에서 개관한 갤러리21이 바로 그 화랑이다.상업성보다는 미술인과 관객의 교감의 공간이 되도록 하겠다는 뜻을 담고있다. 이철이란 작가는 지난69년 60세로 타계한 서양화가. 일제시대에 이중섭 유영국등과 함께 동경문화학원에서 수학했던 양화1세대 작가이다. 일찍부터 국전을 외면하고 재야작가로 일관하여 화단의 그늘에 가려졌던 인물이기도 하다.그 저력과 열망을 다 채우지 못한채 예술생애에 대한 엄밀한 평가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불우한 작가라 할수있다. 19 42년 상처한 뒤로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과묵한 가운데 술을 좋아했고 세속적 욕심이 없었다는 그의 예술세계는 19 60년을 전후한 시기에 선명하게 성취됐다. 지난88년 미술전문잡지의 발굴기사에 의해 작고후 처음으로 미술사적 조명의 대상으로 떠올랐다.그래서 유작을 보관해온 유족(장남 이상국)은 비로소 용기를 얻어 90년 조그마한 회고전을 연바도 있다. 이 전람회를 계기로 이 작가에 대한 미술계 인식은 새로워지기 시작했으며 91년에는 이철이의 삶과 예술을 정리한 대형화집이 유족에 의해 발간되기도 했다. 이번 유작전에는 일본 유학시절에 제작했던 누드,풍경등 구상경향의 유화에서부터 해방이후 오랫동안 미술교사로 지내면서 몰입했던 꽃그림 중심의 수채화가 나온다.그리고 예술의 본격적 경지에 접어들어 작고 직전까지 천착했던 추상작품이 한꺼번에 선보여 예술40년의 궤적을 뚜렷이 보여줄수있게 되었다. 그의 아들과 동명이인인 중견서양화가 이상국씨는 스승이었던 그를 『선생님은 작품으로 인생의 승부를 거셨고 그림을 통해 자유를 얻으려 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예술가의 인생이 어떠해야 하는지 눈뜨게 한 훌륭한 스승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미술평론가 이구열씨는 『그의 예술적 자취를 재조명하는 것은 우리 근·현대화단사에 매우 요긴한 일』이라고 강조하고있다. 지난해 가을 작고작가 김욱규(19 16∼19 90년)의 유작 4백여점을 최초로 공개,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던 갤러리21은 앞으로도 이 사업을 계속할 계획이다. 한국현대미술사에 빠져있으나 우리 미술사를 바꿔야 할만큼 소중한 작가들을 발굴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에서다. 지난20년간 미술을 수집해온 화랑대표 하정웅씨는 그때마다 한국미술의 발전과 우수한 작가들의 양성을 위해 큰 몫을 하리라는 각오로 고국을 다녀가곤한다.
  • 움직이는 미술관/전시·이론 교육병행… 기능확대 주력

    ◎국립현대미술관서 3년째 시행… 올 추진사업을 보면/문화소외지역 중심,강원 등 11곳 순회/광주·전주 등서 소장품전시회도 함께/임영방관장,“국민 모두의 마음속에 파고들도록 심혈” 지난해 연말로 시행 3년을 맞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움직이는 미술관」이 전국민의 미술문화 향수권 신장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이에따라 국립미술관은 올해는 「움직이는 미술관」운영의 폭을 문화소외지역으로 집중시키는 한편 단순 미술전시뿐 아니라 이론교육과 시청각교육을 병행해 미술관기능 확대에 더욱 주력할 방침이다. 올해 「움직이는 미술관」이 찾아나설 지역들은 수도권의 중소도시 4곳을 비롯하여 강원도 2곳 충청도 1곳 경상도 3곳 전라도 1곳등 모두 11개 지역.「움직이는 미술관」과는 별도로 전국 대도시에서 미술관 소장품 순회전시를 병행,미술관을 방문하기 힘든 전국의 미술애호가들에게 수준높은 소장품을 접할 기회를 대폭 늘릴 계획이다.소장품전시회는 부산과 광주 전주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펼치게 된다. 지난90년도 문화부 발족과 더불어 출범한 「움직이는 미술관」은 미술문화의 활성화를 위해 국내 유명작가들의 작품을 갖고 전국의 문화소외계층을 찾아가는 형식으로 운영됐다.92년도의 경우 한햇동안 이 미술관은 74일간 전국 25개지역을 찾아 25회 전시회를 가졌으며 관람인원은 16만3천9백명을 동원했다.한국화 서양화 조각등 각 장르를 망라하여 1백30여점의 작품을 갖고 학교등 학생대상지역과 산업현장 의료기관과 기업체및 은행,공공기관등을 찾았다. 미술관측의 이같은 이동전시에 대한 관람객의 반응은 대단히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현장을 찾은 7백4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4%가 재미있고 유익하다고 대답했으며,82%가 생활과 미술에 움직이는 미술관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반응을 보였다.또 이들은 작품기호조사에서 1위로 한국화를 꼽은데 이어 수채화 사진 조각 양화 영상비디오등을 차례로 선호하고 있었다. 응답자들은 또 이 미술관의 문제점도 지적했는데,군단위지역까지의 운영확대,초보자를 위한 작품설명,국내외작품 동시전시,한국추상작품과 지방작가의 참여확대등을 희망했다.이같은 문제점외에도 미술관 관계자들은 전시기간이 2∼4일밖에 안돼 자주 움직이는데 대한 고충과 작품의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개선할 부분들로 스스로 지적하고있다. 한편 「움직이는 미술관」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복제품을 보급해온 국립현대미술관은 지난 한해만도 유명작가의 복제품을 국내에 9백65점,국외에 2백65점을 보급한 바있다.국내의 경우 미술품생활화에 기여한 한편 외국 교포들에게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는 조그마한 선물의 역할을 해낸 것으로 평가됐다. 임영방국립현대미술관장은 『움직이는 미술관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게 아니라 국민 모두의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미술관이 되기위해 심혈을 기울이고있다』고 말했다.관장은 『그리고 많은 국민이 일상생활속에서 그림을 감상할수있는 여유를 주기위해 효율적인 미술관 운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앞으로의 운영계획을 털어놓았다.
  • 한국무용가 최현씨(이세기의 인물탐구:14)

    ◎절제된 몸짓… “여백의 미” 표현 일품/고고한 기품 넘치는 타고난 재능의 예인/김해랑문하서 승무·태평무 등 두루 이수/완벽주의적 성격… 대선배와의 불화 “천추의 한”으로 갓쓰고 도포입고 부채들고 최현이 무대에 나타나면 이도령이 광한루에 나선듯 화사하고 눈부시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헌칠하고 단정한 매무새,운신의 폭이 조용하면서도 민첩하다.삭풍이 이는 한겨울에도 그의 분위기에는 오월 단오같은 싱그러운 신록이 묻어있다. 부채끝으로 오작교(오작교)를 가리키고 부채를 펴서 얼굴을 가리면 그때마다 한양의 풍류와 선비의 기품이 동시에 엇갈린다. 무용계에서 「푸르름을 몰고다니는 예인」으로 불리는 것처럼 그는 20대 미장부의 멋과 미를 변치않는다.나이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젊고 기개에 넘쳐있다.언제 어디서나 누구앞에서나 당당하다. 우선 그의 춤솜씨부터가 그렇다.타고난 재능과 기량으로 그는 빠르고 느린 어떤 곡조에도 절묘한 춤의 경지를 보여준다. 정중동이 절제된 그의 「승무」나 「살풀이」등 그의 춤의 매력은 그 움직임마다에 여백의 미를 살리는데 있다.뿌리치고 내뻗는 손짓하나에도 선과 배경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마치 한폭의 수채화를 그리고 있는듯 하다.힘이 들어가지 않은,몸속으로부터의 흥취가 절로 살아나 어느땐 멈추고 어느땐 다시 흐른다.그리고 조각처럼 푸르고 흰 얼굴에는 한과 슬픔을 자제한 인고가 담겨있다. 그는 춤뿐아니라 춤과 관련된 영화와 연극,창극과 뮤지컬을 두루 섭력한 예술가다. ○춤관련 영화·연극 출연 완벽주의자인만큼 한가지를 알아도 끝까지 파고들어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쌓고있다.대강대강 그럭저럭은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사람을 사귀어도 한번 사귄 사람은 절대로 놓지않는다. 이렇게 흑백이 분명하기때문에 무용계에서의 그의 위치는 자칫 외롭기 십상일수가 있다.그러나 서로서로 인맥·학맥,제자 스승으로 얽히고 설킨 속에서 그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할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타고난 재능,탁월한 춤솜씨 하나뿐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춤추는 사람이 춤잘추는데야 누가 뭐라하겠는가.위로는 막강한 선배들이 기라성처럼 좌정하고 이리저리 끈이 닿는 무용풍토에서 최현자신은 그런 자부심과 오기 하나만으로 고고하게 버티어왔다 할수 있다. 그가 춤으로 무용계에 어필하기 시작한 것은 65년 그가 안무·출연한 무용극 「초라니」에서다.조택원이후 송범 김진걸 이매방으로 이어지는 남자무용수중 수려한 춤과 미모마저 갖춘 그의 출현은 무대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51년이후 한때 영화에 심취하여 조미령 김승호 허장강 등 당대 스타들과 영화 「춘향전」「시집가는날」등에서 주연,이후 그가 안무·출연한 무용극 「춘향전」「마의태자」「황진이」등은 노련미 넘치는 춤기교와 함께 영화에서 닦은 연기솜씨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작품들이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비상」은 그 자신이 끊임없이 추어왔고 지금도 무용인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의 하나다. 소매가 긴 백삼에 상투관 차림,부채 하나만으로 무대를 누비는 이 「비상」은 희로애락의 일상사를 살고있으나 저 하늘을 향한 끝없는 의지,꿈을 잃지않으려는 인간의 끈질긴 열망이 춤속에 담겨져 「마음을 비운 춤」「생의 환희와 승리를 득도의 경지로 이끈 춤」「아무도 비상을 최현만큼 출수 없다는 경계선을 확실하게 그을수 있다」고 시인이며 무용평론가인 김영태가 쓴적이 있다. 영화·연극 못지않게 그의 음악취미또한 광적이다. 76년 호암 이병철회장의 도움으로 독립문쪽에 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최현무용단을 창단했을때 그의 연구소는 무용연구소라기보다는 마치 음악연구소처럼 사방벽이 온통 오리지널 디스크로 둘러싸여 있었다.그의 오디오 취미는 「마니아」급으로 오디오전문지들은 걸핏하면 드보르자크에서 수재천에 이르는 그의 음악취미·오디오기기들을 탐방취재하고 있다.이 방면에서는 특히 김영태와 의기투합하여 두사람은 충무로에서 용산전자상가를 곧잘 기웃거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음악취미도 “광적” 최현은 마산에서 성장했지만 본래 부산사람이다.본명은 최윤찬,후에 영화계에 데뷔하면서 최현이란 예명을 가졌다. 16세때 전국가요경연대회에서 특상한 것을 계기로 「천재소년가수」가 되어 지평선 가극단을 쫓아 마산에 정착,마산의부호이자 한량으로 소문난 김해낭문하에 입문하여 그곳에서 궁중무에서 승무·살풀이·태평무·탈춤·기방무를 고루 이수했다. 그러나 스승이 초기엔 장작이나 패게하고 집안청소를 하게 할뿐 도무지 춤을 가르쳐주지 않아 그때도 당돌했던 그는 『왜 춤을 가르쳐주지 않느냐』고 스승에게 항의하곤 했다. 『예술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네가 보고 느끼고 깨달아라』그는 머리속에 꽉 찼던 안개가 걷힌 듯 스승의 이 말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그때부터 춤이 몸속에서 피돌기처럼 돌고 흥이 기운처럼 솟구치기를 기다렸다.스승은 그제서야 그에게 춤 한자락씩을 지도해나갔다. 예술의 겸손을 엄숙하게 익히고도 인격수양이 덜 됐거나 춤을 잘 춘다는 주변의 칭찬에 우쭐한 나머지 지금까지도 가슴에 남아 잊히지 않을 큰 「잘못」을 하나 저지른 적이 있다. 58년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스승 김해랑 안무로 「독무」를 출때였다. 당시 명고수인 지영희씨가 장단,그의 부인인 성금련씨가 가야금을 연주,진양조에서 중머리 중중머리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지영희씨가 그만 잦은몰이 장단을 잘못친 것이다. 박자와 호흡,시간조절에 의해 손의 움직임을 감을 수도 펼수도 있는 그로서는 리듬이 맞지않아 크게 당황했고 무대는 막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물불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지영희씨에게 덤벼들었다. 『무대는 생명입니다.단 한번의 실수도 있어선 안돼요.관객에게 손가락질 받으면 나는 이것으로 끝납니다』 지영희씨는 『최선생 내가 정말 잘못했네.큰 실수였다』고 백배사죄했으나 그로서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망발.당대의 명인이자 대선배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자신의 방만함을 후회했다고 탄식한다. 이제 그는 참다운 예술가가 되고 싶다.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고 진지하게 나를 점검하여 「몸짓」하나 「소리」하나에도 자연의 질서가 깃든 지혜와 노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그리고 내 춤속에 관객을 끌어들여 나의 한과 정취와 풍류의 빛,내가 살아온 춤의 굽이굽이를 함께 향유하고 싶다고 말한다. 최현의 많은 이야기중에서 그가 54세때 27세 연하의 신부를 맞아들인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화제중 하나다. ○54세때 27세 신부 맞아 84년 12월,일밖에 모르던 까다로운 성품의 최현이 갑자기 결혼을 발표,더구나 신부는 서울예고를 졸업,그가 지도위원으로 있던 국립무용단 단원이라고 해서 주변의 놀라움은 한층 컸다. 신부인 원필녀씨는 나이보다 깊고 의젓한 성품으로 춤추는 스승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혼자서 그를 사모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두사람의 결혼은 올해로 만 9년.제자로서 스승으로서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결혼초기때의 사랑과 정성과 존경을 변함없이 나누고 있다. 최현씨는 그동안 부인을 한성대와 이대대학원에 다니게 했고 지금은 한성대에 출강.『내가 아프면 밤새 내 머리맡에 앉아 나를 지켜준다』고 자랑한다. 지난해 6월엔 제1회 원필녀개인무용발표회를 주선해 주었다.그리고 그가 사랑해마지않던 그의 춤 「비상」을 부인에게 추게 했다. 그는 88올림픽 폐막식때는 10만군중과 수천명의 출연자들에게 청사초롱 「안녕!」을 추게 하여 방대한 스케일로 각계의 시선을 모았었다.지난해엔 청소년예술제에 「파란풍선」에 이은 「비단안개」를 안무,서울예고 무용단을 이끌고 일본 도쿄 무장야시민문화회관에서 「시집가는날」을 공연,올해는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기금을 받아 그의 개인발표회를 준비중이다.작품은 정철의 「사미인곡」. 차범석극본·최종원음악의 이 작품은 그의 춤 60평생을 정리한 집대성의 일환으로 그의 특기인 「춤에서의 여백의 미」를 유장하게 전승시킨다는 집념을 담고 있다. 그는 아무리 춤을 잘추어도 훈련된 춤,숙련된 춤은 단호하게 부정한다.긴 세월 스스로 깨달아 마음속에서 몸속에서 자연스러운 율동으로 우러나오는 극미(극미)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리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기를 축적시키면서 이를 어느 한순간 우주의 무한한 공간속에 힘차게 내뿜는다.장삼자락을 낙화로 흩날리며 탄식의 숨결을 하공에 흩뜨려놓듯,그래서 그의 춤의 한끝은 결국 끝없는 비상임을 그는 알고 있다. □연보 ▲1929년12월 부산 영도 출생.최재용씨와 이말념씨의 2남5녀중 장남 ▲1946년 마산으로 이사 ▲1953년 마산상고졸업 ▲1959년 서울대 사대 체육과 졸업 ▲1988∼1990년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예술학과 수학 ▲1946∼1953년 마산 김해랑 무용연구소 입문 전통무용 유형과 기법사사 ▲1953년∼ 오광대일인자 장재봉,민속춤의 김숙자씨등에게 승무·살풀이·태평무·탈춤·기방무 등 이수 ▲1955년 최윤찬무용연구소 개설 ▲1961∼1962년 서울대 음대 무용강사 ▲1965∼1985년 서울예고 강사 ▲1967∼1974년 서울대 사대 체육과강사 ▲1976년 최현 무용단 창단 ▲1980∼1981년 중앙대 예대 무용과 강사 ▲1981∼1985년 서울예전 무용과 주임교수 ▲1982년 최현 무용연구실 개설,한국무용협회이사,한국문화예술단체 총연합회(예총)이사,문공부 문화재 전문위원,국립무용단지도위원,한국무용협 부이사장,대한민국 무용제 심사위원 문예진흥원 지원기금 심사위원역임 (영화)「삼천리의 꽃다발」 「시집가는날」 「춘향전」 「불멸의 성좌」 (무용·안무출연)무용극 「초라니」 「춘향전」 「시집가는날」 「마의태자」 「황진이」국립창극 「심청가」 「강릉매화전」 「광대가」 「변강쇠타령」 「시집가는날」 「대춘향전」 「허생전」 「심청」 「서동가」 「이춘풍전」 「놀부전」 「소태산」 「아리랑」 ▲1970년 일본 EXPO70 한국의날 안무·출연 ▲1971년 국립무용단 유럽지역 10개국 순회공연 안무·출연 ▲1975년 국립무용단 일본 10개도시 순회공연 안무·출연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예술제 「녹」 「비상」안무·출연 ▲1980년 국립무용단 동남아 9개국 순회공연 안무·출연 ▲1982년 시립무용단 「한국 명무전」에 「비상」출연 ▲1985년 호암아트홀 개관 초청공연 「헌화가」안무·출연 ▲1987년 88서울예술단 창단공연 「새불」구성·안무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안무총괄 「안녕」 ▲1990년 국제문화협 주최 일본 지역 공연 창극 「심청전」안무 ▲〃 동아일보창간70주년기념 모스크바지역등 5개국 순회공연 창극 「아리랑」안무·출연 ▲1991년 국립극장주최 청소년예술제 「파란풍선」안무 ▲1992년 국립극장주최 「비단 안개」안무 ▲〃 서울시립무용단 무용극 「춘향전」객원안무 ▲현재 문화부 문화재 보호협회 「한국의집」예술총감독,서울예고 무용과장 서울올림픽 안무총괄 공로 대통령 표창
  • 육중하지만 비정상 나체청동조각 눈길/보테로작 파리 샹젤리제가 전시

    프랑스 파리의 번화가 샹젤리제거리에는 요즘 등치가 큼직한 청동 조각품들이 등장,행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자세히 보면 꽤나 기이한 이 조형물들은 파리지앵은 물론 외국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한편 무언가 야릇한 충격을 주고있다. 이 조각품들은 올해 60세된 콜롬비아출신 조각가 페르난도 보테로가 내년 1월말까지 개최하는 노상전시회에 내놓은 그의 토르소(나체조상)들이다.보테로는 지난 반세기동안 예술계를 풍미해온 전통적 흐름을 완강히 거부하는 작가로 이들 작품에서는 그의 관능적이면서도 육중한 예술세계를 넉넉히 엿볼수 있게 한다. 잘 발달된 근육질에 균형잡힌 몸매이긴 하나 남성의 「상징」은 왜소하며,부드럽고 풍만해보이는 여성이지만 몸집은 무거워보이는 작품들.가슴은 불룩하지만 너무 비대해보이는 여자,크고 힘이 센 것같지만 지방질이 많은 거인,포동포동해보이지만 욕심꾸러기처럼 느껴지고 올챙이배에다 둔해보이는 사람,그리고 술을 좋아하고 기지가 있는 몸집이 큰 쾌남. 용감무쌍한 로마병정이 허리에 찬 칼과 함께불룩한 배를 흔들고있고 중산모자를 눌러쓴 기사가 체구의 절반밖에 안되는 말 잔등에 걸터앉아 있기도 한다. 하여간 뚱뚱보·땅딸보·배불뚝이등 인체의 비정상적인 발달현상을 「토르소」라는 기법을 빌려 제작한 31개의 누드 조각품들은 다소 충격적이긴 하나 한편으로는 부드러운 웃음도 자아낸다.예술작품은 재미있고 아름다움을 느낄수있어야 한다는 그의 예술관이 마음껏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우스꽝스런 작품들이 전시된 이후 샹젤리제의 동서를 분리하는 환상교차로에선 이들 조각품을 보느라 한눈을 파는 운전자들 때문에 이따금 교통체증이 빚어지기도 한다. 보테로는 원래 화가였으나 지난 73년 조각가로 변신했다.그뒤 예술에 관한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한두 점 그의 작품을 보기만하면 누구의 것이라는 것을 알수있을 정도로 자신만의 독특한 경지를 창조해냈다. 작품의 소재는 군부독재자·탱고댄서·육감적인 매춘부등 그가 태어난 남미쪽것이 주류다.소재가 사람이건 동물이건 한결같이 실제보다 뚱뚱하게 묘사,입술은 부풀리고 눈은 개구리눈망울처럼 표현했다. 『나는 언제나 작품구성에 관한한 양감에 사로잡혀왔다』 이 말은 보테로의 작품세계의 출발점이 되고있다.때문에 그가 빚어내는 작중인물들은 주변공간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이번 야외 전람회와 때맞춰 파리의 그랑 팔레 미술관에선 보테로가 그린 투우와 관련된 회화작품들이 전시되고 있고 이웃 프티 팔레에는 그의 대표적인 소상들과 그림들이 선을 보여 미술애호가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유럽 화랑가에선 그의 중간 크기 수채화 한편에 30만달러를 받고있다. 현대작가들 가운데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인 보테로의 조각품들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샹젤리제거리에 전시하게 된 것은 물론 자크 시라크 파리시장의 아이디어다. 보테로의 작품에 대해 신랄히 비판하는 비평가들도 적지않다.즉 그의 작품들은 비만형의 무솔리니가 백치 시골 아낙네를 통해 임신시킨 태아같다는게 그것이다.
  • 작곡가 강석희씨(이세기의 인물탐구)

    ◎고정된 틀 거부하는 “현대음악의 대명사”/끝없는 혁신·실험정신으로 첨단음악 개발/“지나치게 난해·비약” 평가받고 한때 좌절·실의/한국·서구리듬 조화시켜 음악세계 대변환 하얀 턱시도를 입은 연주가가 피아노 앞에 자리잡는다.곧 연주가 시작되려는 순간이다.청중은 숨죽이고 연주자는 침묵,장내는 물뿌린듯 피아노연주를 기대하지만 연주자는 여전히 미동도 없다.그리곤 얼마후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뒤로 퇴장해버린다.객석은 어리둥절한채 술렁거리는 분위기다. 그다음 장면에선 장막뒤에서 두 사람의 벌거벗은 다리가 걸어나오고 무대중앙에 놓인 그랜드피아노쪽으로 접근하는가 했더니 네개의 다리가 건반위에 뒤엉켜 춤을 추기 시작한다.청중은 경악을 금치못해 당황하고 아연한다. 69년9월7일 작곡가 강석희씨가 주관한 제1회 국제음악제 풍경이다. 피아노 앞에서의 침묵연주는 미국의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의 창작곡이고 네 다리의 피아노 연주는 당시 비디오 뮤직으로 뉴욕에서 센세이셔널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던 백남준의 「컴포지션(Composition)」이다. 「컴포지션」은 「섹스뮤직」이란 논란과 함께 공연윤위에 고발되는 사태를 빚기도 했으나 젊은 작곡가의 새로움에 대한 콤플렉스라는 차원에서 쉽사리 무마될수 있었다. 다음해 강석희씨는 독일 하노버대로 유학,71년 제2회 음악제를 열기위해 현지에서 위촉 작곡된 새로운 레퍼토리를 들고 일시 귀국한다. 그러나 2년전의 사건때문에 국립극장을 빌리지 못하자 피치못하게 이대 대강당을 연주회장으로 택하게 되었다. ○파격적 새 음악 시도 「컨템포러리」란 단어조차 생소하기만 했던 그 시절,1백여명이나 모일까 말까하는 마당에 4천석이 넘는 강당이란 여간한 무리가 아니었다. 그런 강석희의 무모함과 파격적 시도는 음악계 일원에서 비웃음과 빈정거림이 되기도 했으나 그는 개의치않고 신문사·방송사를 찾아다니고 길거리에다 전단을 뿌려댔다. 「끈질김」이란,정말 강석희씨에게서 끈기와 인내를 빼고는 그를 말할수는 없을 것이다.그의 음악도 이 끈질긴 노력과 실험정신끝에 이루어진 결과임을 지금까지도 일관되게 보이는 행동으로알수 있다. 상대방을 설득하는데도 지치지않아 매스컴의 음악담당자들에게 「현대음악이란 무엇인가」,「세계 현대음악의 오늘」,「왜 현대음악이 이 시점에서 한국에 필요한가」를 시간 가는줄 모르고 설명해주었다. 「현대음악은 해프닝이나 쇼가 아니며 백남준의 「컴포지션」은 퍼포먼스의 한 형태일뿐 모차르트도 그 시대에선 이런 의혹과 냉대,시련을 거쳐 오늘의 고전이 되었음」을 강변했다. 그럼에도 두번째 시도되는 이번 음악제만은 그로서도 도무지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만이 알고있는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예술세계를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보여주고 싶은 열망이 왜 한낱 객기로 외면당해야 하는가.음악회 한시간전쯤 연주회장으로 향하면서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음악회라도 청중이 없다면 무의미 할뿐」이라고 그는 의기소침해질수 밖에 없었다. 그날따라 이대입구에는 사람들이 넘쳐 있었고 「이 근처 교회에서 부흥회라도 열리나 보다」고 그는 구름같은 인파를 부러운듯 바라봤다. 한데 바로 이들이 그가 주관하는 현대음악제에 모여드는 청중이 아닌가. 4천여 좌석은 삽시에 매진되었고 그날의 연주자인 독일 피아니스트 클라우스 빌링도 「내 생애를 통해 이렇게 많은 청중앞에서의 연주는 처음」이라고 했고 신문들도 전례없이 「우리에게 낯설기만했던 새로운 음악의 경이」,「세계적 거장들의 음향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예리한 통찰력」,「유감없이 새 기량이 표현된 명연주」등의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카겔이나 쇤베르크 리게티와 베리오 스톡하우젠과 존 케이지는 더이상 우리생활에서 생소한 이름은 아니었다. 스트라빈스키음악을 전위적으로 연주하기 위해선 악기를 때려부수거나 분해하는 정도로만 알았던 우리에게 세계음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를 이땅에 정착시킨 강석희를 「현대음악의 대명사」「선두주자」로 부르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그후 베를린대에 유학하는 동안을 빼고는 해마다 거르지않고 이 음악제를 강행하여 지난 10월 제20회를 기록했다. 그는 서울대음대에 입학하기 전까지 음악에 관한한 전혀 문외한이었음을 주저없이 고백한다.단지 누구나 그런것처럼 한때는 세계문학전집에 심취하여 비바람만 쳐도 가슴을 설래고 다음단계에선 수학과 과학에 몰두하여 공학도를 꿈꾸다가 교회에서 익힌 피아노연주가 작곡과를 지망하게 된 동기라고 했다. ○국내 첫 전자음악 연주 그러나 대학졸업후 간경화증에 시달리는 4년동안 그는 어둡고 외롭고 참담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한다. 『그때 병석에서 읽은 외지(외지)에서의 전자음악기사에 흥미를 느껴 이 시대에 걸맞는 첨단음악을 만들고 싶었다』고. 뒤늦게 66년 한국 최초의 전자음악 「원음의 향연」연주로 음악계에 데뷔했으나 누구에게나 공감을 얻기엔 지나치게 난해하고 비약된 분위기란 평을 받고 다시 한번 긴 좌절,실의의 늪에 빠져있을 때 윤이상씨와의 극적 조우(조우)가 그를 변환시키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주었다. 소위 동백림사건과 관련되어 병보석으로 서울대병원에 머물고 있던 윤이상씨에게 그는 1주일에 두번 개인 레슨을 허락받게 되었다. 만일 그때 윤이상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뉴욕에서 그를 끊임없이 유혹하던 백남준을 따라 지금쯤 백남준과 함께 멀티미디어에서 쌍벽을 이루는 존재가 됐을지도 모른다. 이후 「한국적 리듬과 서구적 리듬을 조화시켜 세계언어로 발전시켜 나간다」는 목표아래 일본 오사카 엑스포70의 「예불」과 「생성」을 창작했고 독일에서의 6년을 총정리하여 응결시킨 대편성 관현악을 위한 「카테나(사슬)」는 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 사고속에 구성한 작품이라는 평가와 함께 그가 국제적 명성을 얻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는 순서울토박이로 종로구 충신동에서 7남매중 장남으로 출생,깔끔하고 고집이 센 편이지만 마음을 정하기에 따라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하는 사교적인 일면도 있다. 그의 음악제에 단골로 초청되는 존 케이지 스톡하우젠외에 독일작곡가 볼프강 바더등 국내외의 각 분야 인물들과 화려한 교분을 트고있으나 가정적으로는 같은 작곡가이자 생활의 반려였던 오랜 친구와 헤어졌고 76년 실험영화 감독인 한옥희씨를 만나 다음해 4월 공간극장 개관 기념으로 두 사람이 음악과 영화로 공연한 믹스미디어 「무제」는 인상적인 퍼포먼스로 예술계에서 손꼽힌다. ○문제성 제시 주목받아 그는 다작은 아니지만 정부 위촉 작품외에도 크고 작은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있고 그때마다 「문제성 제시」로 음악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지난 8월 예술의 전당서 열린 광복절 경축음악제에서 KBS와 펜데레스키 지휘로 연주된 「햇빛 쏟아지는 푸른 지구의 평화」는 그날밤의 청중을 환호와 열기로 몰아넣은 대작으로,음악평론가 이상만씨는 이는 「작가의 절대음악의 완성」이라고 호평했다. 음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절약하면서 청중을 숨막히게 긴장시키는 절묘한 피아니시모,단음에서 점차 세분화되고 또다시 반음계 시스템으로 이동하면서 미분음으로 표현할 수 있는 최후의 한계점,유성이 충돌하는듯한 장렬한 환희를 표현하는등 음표와 음표의 음군(음군)들은 새떼가 날듯 바람결에 비구름이 몰리듯 악보 한장한장마다가 마치 추상수채화를 연상케하는 복잡다단한 구성이었다. 그는 타고난 재능의 예술가라기보다 피나게 추구하고 치열하게 노력하여 자신을 이룩한 작곡가라는 편이 옳다. 그러나그의 작품중 「한국적 이미지를 담아달라」는 부탁으로 위촉된 「□□」는 그런 의도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해서 끝까지 애정을 갖지못한다. 요는 모든 예술가들의 공통점인 그도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다.그래서 외로운 편이기도 하다. 그의 겉모습에선 예술가적 광기나 번뜩이는 기지,연연한 낭만이나 감성적 섬약성은 찾아볼 수 없다.오히려 너무나 세련된 나머지 세련이 탈색된데서 온 메마름이 도포되어있다.또는 부당함에 대하여 단호하게 「NO!」라는 벽을 쌓고 있기때문에 더한층 이기심으로 비치는지도 모른다. 제자교육도 마찬가지다.스스로 깨우치도록 철저하게 방치해두었다가 당사자가 어떤 변화나 각오를 보일때만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고 작곡기법과 작품구축,악곡의 논리성을 쏟아붓는다. 시대는 천재가 만들고 천재는 시대를 이끌어 간다.그런 천재중에는 타고난 천재도 있겠지만 스스로 연마하여 천재를 이룬 천재도 있을 것이다. 남들이 상상치도 못하는 기상천외한 초현실성을 계획하고 이를 실천해가는 강석희씨는 스스로를 연마해가는 천재일 수도 있다. 지금 그는 현대음악이라는 긴 암중모색을 끝내고 우리 음악사에서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뚜렷하고 진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그리고 그의 노력의 결정과 결실과 함께 새시대의 지평을 여는 영원한 선두주자로 앞장서고 있다. □연보 ▲1934년 10월22일 서울출생 ▲60년 서울대 음대 작곡과 졸업 ▲69년이후 범음악제 음악감독(92년 10월 제20회 연주) ▲70∼71년 서독 하노버 음대 수학 ▲71∼75년 서독 베를린 음대 및 공대 수학 ▲80∼82년 DAAD(독일국제학술교류처)예술가프로그램초청 독 일 체류 ▲80∼82년 베를린 실험음악제 「인벤치오넨(Invention en)」공동주관 ▲85∼90년 ISCM(국제현대음악협회)부회장 ▲88년 서울올림픽 폐회식 음악감독 ▲82∼현재 서울대 음대 교수 66년 한국 최초의 전자음악 「원색의 향연」발표 오사카 EXPO70 위촉 「예불」 「원음」 「생성」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농」 「변용」 「반사」 대편성 관현악을 위한 「카테나」 「대화」 칸타타 「용비」 「청동시대」 대관현악을 위한「□□」「청동시대」영화음악 「화려한 외출」 컴퓨터음악 「불사조」 88서울올림픽 성화음악 「프로메테우스 오다」 칸타타 「햇빛 쏟아지는 푸른지구의 성화」 「세계음악의 현장을 찾아서」(고려원간) 대한민국 작곡상·올해의 음악가상·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통령상
  • 정당이미지 개선에 이벤트 도입/민주당 「출발­20·30대물결」행사

    ◎팝스 오케스트라·영상 쇼 등 다채/서울 이어 대선전 12개도시 개최 민주당이 청년층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이미지개선등을 위해 기획한 청년문화제「출발­20·30대물결」행사가 23일 하오7시30분부터 2시간동안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화려하게 펼쳐졌다. 이날 행사에는 김대중·이기택대표등 당원·학생·시민등 2만여명이 모여 행사를 지켜보았 김대표는 공연시작을 알리는 서울팝스오케스트라 연주가 울려퍼지자 지지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입장했고 수행의원,20·30대 젊은 지구당위원장들이 일반 관중석에 군데군데 섞여 앉아 출연진·관중들과 호흡을 같이했다.이 행사는 젊은이들에게 문화적 흥미거리를 제공,정치적 무관심을 허물면서 자연스레 민주당에 대한 선호도를 높이고 부정적 이미지를 씻어주기 위해 대선전략의 하나로 기획된 것이다. 테너 신영조씨의 가곡독창으로 시작된 1부순서에서는「변화예감」을 주제로 60인조 서울오케스트라의 웅장한 반주속에 귀에 익은 가곡이 이어졌고 가수 이동원이 히트가요를 친근감있게 불러 행사를무르익게 했다. 제2부에서는 무대에 설치된 초대형화면을 통해 영상으로 구성된「역사의 현장」이 내레이터의 설명을 곁들여 중계됐으며 전문사회자인 박일규씨가 「신세대」를 주제로 이야기쇼를 엮어 나갔다. 메인행사는 노래와 극으로 펼쳐진 제3부 「젊음의 축제」. 「비오는 날의 수채화」권인하를 시작으로 변진섭·신형완이 히트곡을 선사,앙코르송을 부르기도 했으며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코미디언 오재미가 신디사이저 반주속에 대학가에서 유행하는 노래가사 바꿔부르기로 관중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어어 국악인 신영희씨등이 판소리와 랩뮤직을 접합시켰고 전인권등 인기가수들과 김덕수사물놀이패가 어우러져 재즈·사물놀이를 섞자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날 행사는 민주당의 대형심벌에 불을 켜둔채 출연자와 관중들이 함께 「솔아 솔아 푸른 솔아」등을 부르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김대표는 이날 공연내내 웃음띤 표정으로 곁에 있는 한 청중의 어린이를 무릎에 앉힌채 관람했는데 사물놀이도중 출연자의 노래요청에 『목이 잠겼지만 흥이 나니 한곡 부르겠다』며 청중들과 함께 「고향의 봄」을 합창하기도. 김대중대표는 부인 이희호여사 김민석위원장(영등포을)등과,이기택대표는 한광옥총장 이해찬당무기획실장등과 함께 각각 관중석에 앉아 멀티비젼쇼 개그풍자극 판소리와 랩,그리고 사물놀이패의 조인트 콘서트등으로 이어지는 공연마다 박수를 치며 관람하는등 젊은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이들을 대상으로 득표 활동. 민주당은 이 행사를 대선전략 차원에서 서울공연을 시작으로 대선전까지 수원·청주·대전·춘천·대구·울산·제주·광주등 12개시·도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 「…싱아…」「문학액범」/박완서 문학인생 담은 책 출간

    ◎「…싱아…」/본인 체험담 다룬 자전적 성장소설/「문학앨범」/맏딸이 본 작가의 삶과 문학 등 실려/형식 특이… 평론계에 큰 반향일으킬 전망 중견작가 박완서(61)씨의 작품론·문학론을 다룬 책 두권이 잇따라 출간돼 눈길을 끈다.작가 박완서가 3년만에 완성한 자전적 성장소설 「그 많던 싱아를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출판사 펴냄)와 「박완서 문학앨범」이 바로 화제의 책들. 신작 장편소설「…싱아…」는 70년 발표된 처녀작 「나목」이후 22년만의 두번째 전작소설로 박완서 소설의 원형과 그가 소설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들을 보여주고 있다.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에서 보낸 유년시절에서부터 작가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체험을 겪게되는 6·25와 1951년 1·4후퇴시기까지를 다루고 있는 이소설은 작가가 당시 체험했던 시대에 대한 증언으로서 글을 쓰게 될 것이란 예감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끝난다. 「나」라는 일인칭 화자의 정신적·육체적 성장과정을 다루고 있는 이소설은 그러나 기존의 성장소설과는 구별해 「자전적 성장소설」로 봐야한다는 의견이 높다.이는 출생지를 비롯해 가족관계,화자가 살던 서울 동네이름,학교이름등이 작가 자신의 그것을 그대로 원용하고 있기 때문.또 책 여기저기에 이 책이 자전적인 생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예를들어 「경제정의」지에 기고했던 글의 일부를 인용하거나 『내 소설중 가장 긴 장편 「미망」을 쓰는데 중요한 모티브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어 이 소설의 자서전적 형식을 뒷받침하고 있다.이와같은 형식상의 특이점은 「소설=허구」라는 일반 공식에 배치되는 것으로 문단은 물론 평론계에 큰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작가 자신도 『이런 글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고 밝히고 있듯이 소설「…싱아…」는 기억이나 경험에 소설적인 윤색을 최대한으로 억제한 글짓기로 윤동주및 서정주의 시 「자화상」이나 화가들의 자화상처럼 「소설에서의 자화상」에 해당한다. 문학평론가 홍정선씨도 이를 「자전적 소설이거나 소설의 형태를 빌린 자서전」으로 분류하고 작가의 6·25에 대한 남다른 관심,강인하고 자존심 강한 어머니상,가족사 소설에 대한 집착등 이소설에서 이미 발표된 소설들의 원형이 발견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소설「…싱아…」는 형식적인 면이외에 화자의 어머니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특히 눈길을 끈다.개성사람 특유의 강한 생활력과 자존심의 화신인 어머니,이에 못지않는 화자의 독특한 기질이 그대로 드러나있다. 또 들풀냄새 풍기는 정감어린 30∼40년대 시골생활과 때묻지 않은 풍부한 정서는 근래 다른 소설들에서는 접하기 힘든 이소설의 특징.한마디로 한편의 서정시나 수채화를 대하는 듯한 편안함과 포근함을 안겨준다. 이밖에 이미 발표된 작가의 여러 소설들처럼 40∼50년대 개성지방의 사회상과 풍속,인심등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고 토속어와 고유어도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제목에 쓰인 「싱아」 역시 개성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마디풀과에 속하는 다년초로 작가의 고향들판에 지천으로 널려있어 작가와 고향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한편 함께 출간된 「박완서 문학앨범」은 박완서씨의 맏딸인 호원숙씨가 가까이서 본어머니 박완서의 삶과 문학을 적은 「행복한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글이 실려 「…싱아…」와 함께 박완서의 인생궤적을 상호보완적으로 고찰할수 있게한다. 웅진출판사는 「…싱아…」와 「문학앨럼」출간을 계기로 오는8일 하오5시30분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그의 문학세계를 총체적으로 살펴보고 90년대 한국문학의 방향을 모색하는 문학심포지엄을 연다.이날 심포지엄에서는 문학평론가 김철교수(교원대)가 「분단시대의 삶과 소설」를,권영민교수(서울대)가 「중산층의 삶과 소설」을,박혜란씨(상명여대 강사)가 「여성의 삶과 소설」을 각각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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