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개발계획(대한민국 50년:20)
◎“빈곤의 역사 씻자”… 62년 첫 울산공단 기공/“자립경제 구축” 62년부터 5개년 계획 실시/간접자본 확충·기간산업 육성 효율적 통제/81년까지 연평균 8.3% 성장… 경제규모 4배로
1962년 1월2일 황량한 울산 들판 위로 육군경비행기 ‘비바’가 날았다.그 안에는 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과 金鍾泌·金龍泰 등 5·16 주체세력,李秉喆·李庭林·鄭載頀·南宮鍊·金周仁 등 실업인들이 타고 있었다.李秉喆(삼성) 李庭林(개풍) 鄭載頀(삼호)는 당시 3대 그룹의 총수였고,南宮鍊·金周仁은 한국경제인협회(전경련 전신)의 부회장들이어서 가히 한국 경제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라 할 만했다.
울산 벌판을 둘러본 일행은 인근 여관방에서 떡국을 안주로 소주잔을 기울였다.朴의장이 입을 열었다.“거창한 계획을 추진하려면 자본과 기술이 있어야 하는데 걱정이군요.그러나 여러분이 이처럼 의욕을 보여주시니 기필코 성공하리라 믿습니다.”
○공업화 원년으로 기록
그로부터 두달 보름만인 62년 3월16일 울산공업단지 기공식이 열렸다.朴의장은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민족의 숙원인,4천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자 이곳 울산에 신생 공업도시를 건설하기로 했다”고 공표했다.훗날 대한민국 경제개발의 시발(始發)이자 ‘공업화의 원년’으로 기록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무렵의 풍경화는 경제개발 논리의 당위와 한계를 이미 보여주었다.李秉喆을 비롯한 재력가들은 5·16쿠데타 직후 부정축재자로 지목받은 상태였다.이들은 朴正熙와 만나고자 울산을 향하다가 천안경찰서 관내에서 붙잡혀 한때 구금될 정도였다.하지만 ‘강탈한’권력과 ‘부정한’재력이 만나는 순간 양쪽은 경제개발이라는 명목으로 공생의 길을 찾았다.이후 정경유착은 우리 사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된다.
朴正熙 군사정권은 통치의 당위성으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62∼66년)을 곧바로 발표했다.그 기본목표는 원조의존적인 소비경제를 청산하고 자립경제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었다.이에 따라 시책의 중점을 △농업생산력 증대에 의한 농업소득 상승과 국민경제의 구조적 불균형 시정 △전력·석탄 등 에너지원의 확보 △기간산업과 사회간접자본 확충 △유휴자본 활용,특히 고용증대와 국토 보존 및 개발 △수출증대를 주축으로 하는 국제수지 개선 △기술 진흥에 두었다.
이 기간에는 전력·비료·시멘트·정유·PVC 등을 전략산업으로 지정,자금 동원과 배분에서 각종 특혜를 주면서 집중 육성했다.이와 함께 투자재원을 외자에 전적으로 의존하다 보니,그 원리금을 상환하고자 수출을 적극 장려하게 됐다.이후 ‘수출’과 ‘공업화’는 경제개발을 이끄는 두바퀴로 자리잡았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71년)은 산업구조 근대화와 자립경제 확산에 중점을 두었다.외형적인 성장은 괄목할 수준이었지만 석유화학 등 일부 분야에서는 이미 과잉투자가 발생해 기업 부실화가 상당한 정도로 진척됐다.
그 후유증은,제3차 계획의 첫해인 1972년 대통령긴급명령권으로 발동된 ‘8·3조치’를 비롯한 일련의 특별조치로 나타났다.그리고 그 당연한 귀결로 국민 희생 위에서 정부가 경제개발에 일방적인 주도권을 행사하는 개발체제는 더욱 심화했다.
○과잉투자 기업 부실화
제4차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7∼81년)은 기업의 시장경쟁원리에 입각,공업화를 간접적으로 유도하고 사회개발은 정부가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 진행됐다.그에 따라 △투자재원을 스스로 조달하고 △국제수지에서 균형을 이루며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고 △과학기술 투자를 확대한다는 시책이 강조됐다.정부는 이 시기에 의료보험·공정거래·환경보전 등의 개념과 제도를 도입해 시행했다.
1962년부터 81년까지 네차례로 나눠 추진한 개발계획의 결과 한국경제는 연평균 8.3%라는 경이로운 성장을 이루었다.이 기간에 경제규모는 4.8배로 커졌고,1인당 국민소득도 82달러에서 1천636달러로 엄청나게 늘어났다.
○정부 주도 성장 ‘한계’
반면 외자에 기댄 경제성장은 필연적으로 무역의존도를 높여 62년에는 22.6%에 불과하던 것이 81년에는 95%나 됐다.무역적자도 62년에 3억5천5백만달러였으나 20년후 29억8천5백만달러라는 거대한 양으로 늘어났다.만성적인 국제수지 악화를 초래한 것이다.
1980년 한국경제는 -5.2%라는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면서 경제개발과정 아래 쌓여온 문제점들을 노정했다.경제규모가 대형화하면서,정부주도형 경제개발이 오히려 낭비와 비능률을 유발한다는 지적이 첫손가락에 꼽혔다.양적(量的) 성장에 치중하다 보니 대기업과 중소기업,조립업체와 부품생산업체,도시와 농촌간의 간극(間隙)이 크게 벌어진 것도 사회에 짐이 되었다.
적정한 성장을 이루지 못하면 물가를 비롯한 경제안정을 얻을 수 없고 신규고용,외채 원리금 상환도 불가능해지는 구조가 고착됐다든지,각종 규제와정책·제도적 요인의 비용부담이 기업의 대외경쟁력을 약화시킨다든지 하는 문제점도 정부주도의 성장논리를 약화시켰다.
이후 91년까지 두차례 더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했지만 1∼4차 개발계획 때와는 기본방향이나 영향력이 본질적으로 달랐다.
자본을 축적하지 못한 신생 독립국가가 공업화를 이룩하는 데는 경제통제의 일종인 개발계획 도입이 필수적이었다.그나마 형성된 자본을 누수없이 사회간접시설과 기간산업 육성에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인허가 업무를 활용,중복투자·자원낭비를 막은 것이나공공요금·생필품값을 규제해 물가안정을 이룬 것,수입규제를 통해 취약한 국내 산업기반을 보호한 것도 초창기 경제개발계획의 긍정적인 측면이었다.
그러나 개발경제 체제에서 굳어진 정부의 경제규제는,경제규모가 커지고 기업경영의 세계화가 진전된 지금 오히려 국민경제의 효율을 저해하는 역기능으로 작용한다.공룡처럼 비대해진 재벌의 갖가지 부정적인 행태,정경유착의 부산물인 정치인·관료의 부패,경제환경 변화에 신속히 대체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는 행정절차가 그것들이다.
IMF체제로 국가 산업구조를 기본적으로 재조정해야 하는 이 때,우리는 경제개발 계획의 묵은 틀에서 벗어나 진정한 시장경쟁 원리로 재도약해야 하는 시대적 소명을 떠안고 있다.
◎그전의 ‘계획’들/네이산 보고52년 유엔한국부흥委 작성… 李 대통령 거부/타스카 계획아이젠하워 특사 3년 對韓 원조 계획 권고/부흥부 계획산업개발委 입안… 5·16뒤 군사정권 승계
국가가 경제목표를 정하고 그 실현에 필요한 조건들을 조성해 나가는 경제개발계획은,후진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필연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다.대한민국 출범후 경제개발계획이 등장한 것이 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6·25가 교착상태에 빠진 1952년 12월 ‘네이산 보고서’가 나왔다.UN한국부흥위원회의 위촉으로 네이산자문단이 작성한 ‘한국경제재건 5개년계획’(1953∼57년)은 李承晩 대통령에게 제출됐으나 채택되지 않았다.이어 6개월후에는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경제특사인 헨리 타스카가 방한해 ‘타스카 3개년 대한원조계획’을 내놓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네이산 보고서’건 ‘타스카 계획’이건,한국전쟁이후 미국의 대한원조를 어떻게 운용하라는 지침 성격이 강했을 뿐 한국 자체의 경제개발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정부 스스로 마련한 경제개발계획은 58년 부흥부의 산하기관인 산업개발위원회가 입안,발표한 ‘경제개발 3개년 계획’(1962∼64년)이 최초였다.이 계획은 실현이전에 5·16을 맞는 바람에 빛을 잃었지만 그 핵심내용은 군사정권에 의해 대부분 계승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