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수용소
    2025-12-29
    검색기록 지우기
  • 권고
    2025-12-29
    검색기록 지우기
  • 재활용
    2025-12-29
    검색기록 지우기
  • 금값
    2025-12-29
    검색기록 지우기
  • 이석기
    2025-12-2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859
  • 우즈베크 국경 탈출행렬에도 발포

    우즈베키스탄 사태의 희생자가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군대와 시위대 사이의 대규모 충돌이 빚어졌던 안디잔의 사망자가 600명이 넘는다는 보도가 나오는가 하면 다른 도시에서 200여명이 추가로 희생됐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수천명이 우즈베크를 탈출하기 위해 국경으로 몰려든 가운데 반정부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16일 현지 인권단체 책임자인 사이드자혼 자이내비트디노프는 “지난 14일 파흐타바드에서 군인들이 200여명의 시위대를 사살했다.”고 AP통신에 밝혔다. 파흐타바드는 안디잔에서 북동쪽으로 30㎞ 떨어진 도시다. 그는 “군대에 의한 학살이 자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안디잔에는 제15학교에 500여구의 시신이 있고, 근처 대학교에도 100여구가 놓여 있어 사망자는 600명이 넘는다고 다른 비정부기구 관계자가 AFP통신에 알려왔다. 전면적인 보도통제로 이들 주장은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사실로 밝혀질 경우 지난 13일 이후 우즈베크 사태의 희생자는 800명을 넘어서게 된다. 우즈베크 내무부는 지금까지 70여명이 사망하고 2000명이 부상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지금까지 나온 공식발표 가운데 사상자 규모가 가장 큰 것이다. 안디잔에는 여전히 팽팽한 긴장이 이어지고 있다. 주말에 이어 16일에도 총성이 들려왔고,15일 무장세력과 군대가 교전을 벌였다고 한 목격자가 전했다. 키르기스스탄과의 국경지역은 혼란상태다. 러시아 인테르팍스 통신은 시민의 말을 인용, 군인들이 탈출행렬을 향해 몇 차례 발포했다고 보도했다. 테셰크토시에서는 15일 군인과 시민 11명이 숨진 것으로 전해졌다. 카라수에서는 1500명이 모여 반정부 집회를 여는가 하면 밤새 총성이 들리는 등 “극도로 긴장된 상황”이라고 키르기스 수도 비슈케크의 한 외교관이 전했다. 코라수프는 시위대가 시청과 경찰서 등을 장악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경지역으로 몰려든 우즈베크 시민 가운데 900여명이 키르기스로 넘어가 임시수용소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에서는 그동안 가려져 있던 우즈베키스탄의 참상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안디잔 시위 현장에 있던 10대 후반의 소년은 “아이들과 여성을 포함한 시민들은 군대가 들이닥치자 총을 쏘지 말라고 애원했다.”면서 “하지만 군인들은 토끼사냥을 하듯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했다.”고 로이터통신에 밝혔다. 하루가 지난 뒤 군인들은 거리에 흩어져 있는 시신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 한 사업가는 “아직 목숨이 붙어 있던 몇몇 부상자들은 도망치려 했지만 부상자 확인사살을 전담하던 3,4명의 군인들이 이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고 전했다. 러시아 방송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무장한 채 시신들을 트럭에 싣고 있는 안디잔의 모습을 방영했다. 잭 스트로 영국 외무장관은 15일 우즈베크에서 명백한 인권남용 사태가 일어났다고 비난한 뒤 국제적십자와 국제감시단 파견을 허용하라고 우즈베크 정부에 촉구했다. 장택동기자 외신 taecks@seoul.co.kr
  • 아프간 전국적 ‘반미 시위’

    미군이 이슬람 경전 코란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리는 등 모독했다는 기사로 촉발된 아프가니스탄의 반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13일(현지시간) 아프간 34개주 가운데 10개주에서 코란 모독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고, 일부 지역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막는 과정에서 발포해 시위대 3명을 포함해 7명이 숨지고 20명 이상이 다쳤다. 지난 10일부터 나흘째 계속된 시위로 지금까지 14명이 숨지고 100여명이 부상했다. 수도 카불에서도 13일 대학생을 중심으로 이틀째 반미시위가 계속됐다.12일 동부 지역 잘랄라바드에서는 경찰이 시위대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발포,2명이 숨졌으며 와르닥주에서는 시위에 참가한 고등학생 1명이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로가르주에서는 국제구호단체 케어(CARE) 사무실과 관공서들이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은 코란 모독에 대한 시위는 정당하며 폭력만은 피하라고 말해 시위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파키스탄의 아프간 전문가 라히물라 유수프자이는 “2001년 탈레반 정권 축출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고 평했다. 또 아프간 접경지역인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와 퀘타에서도 12일 코란 모독에 항의하는 집회가 열리는 등 시위가 아랍권으로 퍼질 조짐이 보이고 있다. 다급해진 미국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나서 “코란에 대한 모독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면서 조사 결과 보도 내용이 사실이면 당사자 처벌을 약속하는 등 진화에 나섰다. 이 사건은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지난 9일 아프간·파키스탄 출신 테러용의자 500여명이 수감돼 있는 쿠바 관타나모수용소에서 미군들이 용의자들을 자극하기 위해 코란을 변기에 넣고 물을 내리는 등 모독 행위를 했다고 보도하면서 비롯됐다. 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책꽂이]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지성(김윤식 지음, 문학사상 펴냄) 평생 문학비평에 매진해온 저자가 자신의 인생을 제자 혹은 후배에게 들려주는 수필 형식에 해방 전후부터 20세기말까지 한국 근대문학사를 촘촘히 담아낸 비평 에세이.2년7개월간 ‘문학사상’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고희 기념 문집으로 출간했다.2만 5000원.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정호승 지음, 박항률 그림, 랜덤하우스 펴냄) 아름다운 시와 사랑스러운 그림이 만났다. 시인은 30년간 세상에 내놓은 작품중에서 70편을 가려뽑았고, 화백은 여기에 31점의 그림을 보탰다.10년을 한결같이 시와 그림으로 우정을 나눠 온 동갑내기 두 작가의 따뜻한 사랑이 책 갈피마다 배어난다.8500원. ●소외(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열린책들 펴냄) 유럽에서 활동하는 라틴아메리카 작가중 가르시아 마르케스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저자의 단편집. 소시민의 일상, 유대인 수용소, 아마존의 환경파괴 등을 다룬 35편의 이야기를 묶었다. 현대인의 비뚤어진 성문화를 파헤친 2002년작 ‘핫라인’도 함께 출간됐다. 작가는 24일 개막하는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가한다.8500원. ●너무 많은 입(천양희 지음, 창비 펴냄) 삶의 고통을 시로 승화시키는 작가 천양희가 7년 만에 신작 시집을 냈다. 이전 시집들에서 보여줬던 생의 상처에 맞서는 강렬한 힘은,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서 얻는 깨달음에 녹아들어 한층 유연하고 폭넓은 세계를 획득했다. 광속의 시대, 세상의 속도를 거슬러 시인으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파고드는 작가정신이 매섭다.6000원. ●몽당연필 모으는 남자(앙리 퀴에코 지음, 남수인 옮김, 샘터 펴냄)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이자 예술이론가, 에세이스트로 활동하는 저자의 수필집. 몽당연필, 체리꼭지, 초콜릿 껍질, 복숭아씨, 스펀지 등 주변의 사소한 물건들을 모으는 취미를 가진 저자가 그것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8500원.
  • [종전60년…731부대 현장을 가다] 발굴 유해 급증…1만 5000명 사망설도

    [종전60년…731부대 현장을 가다] 발굴 유해 급증…1만 5000명 사망설도

    중국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60주년을 맞는 올해 일본 관동군 산하 731부대가 만주지역에서 자행한 생체실험 현장을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정식 신청할 예정이다.2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과는 달리 일본군의 만행은 그 실상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데다 잘못된 역사의 반복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유네스코는 유대인 120만명이 희생된 폴란드 아우슈비츠의 나치 수용소와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평화기념관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바 있다. 역사교과서 왜곡 등으로 중·일관계가 최악을 맞고 있는 상황에서 ‘731부대’ 현장을 찾았다. |하얼빈 오일만특파원|중국 북부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 시내에서 남쪽으로 20㎞쯤 떨어진 핑팡지구 신장(新疆)대로 21호. 상가와 아파트가 섞여 있는 지역에 ‘731부대 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정식 이름은 ‘침화일군(侵華日軍) 731부대 죄증(罪證)전시관’으로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의 붉은색 벽돌 건물이다. 이 전시관에는 2차 대전 당시 일본 군국주의가 만주에서 비밀리에 자행한 ‘생체 실험’의 전모가 생생하게 보존돼 있다. ‘731 전시관’은 2차 대전 당시 부대의 본청으로 사용된 건물이다. 현재 14개 전시실로 개조해 수천점의 관련 자료와 일본군이 자행했던 주요 생체실험 과정을 모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다소 어두운 전시관 내부를 안내원과 함께 돌아보면서 억울하게 죽어간 마루타들의 비명과 신음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듯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사진과 실험에 쓰였던 도구, 모형을 이용한 생체실험 장면, 비디오 영상물 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일본 군국주의의 잔학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얼빈 사회과학원 731부대 연구소 진청민(金成民) 소장은 “731부대 유적지는 일제 군국주의가 세균전으로 인류를 말살시켜려 했던 역사의 현장”이라고 강조했다. ●인류 말살을 기도한 역사 현장 31종의 세균 실험과 영하 60도에서의 동상 실험, 사람과 말의 ‘피교환 주사’, 공기없이 얼마나 생존 가능한지를 실험한 ‘진공 실험’ 등등. 일본군은 인간의 몸을 나무토막(마루타·丸太)으로 여겨 온갖 생체실험에 사용했다. 엄청난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죽으면 태워버리거나 구덩이에 파묻었다. 그야말로 ‘인간이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일본 병사들의 동상 치료법 개발을 위해 영하 60도까지 내려가는 실험실에서 맨발·맨손의 인간을 기둥에 묶고 강제로 동상을 입혔다. 그 상처에 끓는 물을 부어 보기도 했고, 찬 물과 미지근한 물을 번갈아 붓기도 했다. 강제로 얼린 손발을 도끼로 때려 뼈를 부러뜨리는 실험도 했다. 마취 없이 실험에 동원된 마루타들은 자신의 배가 갈라지고 뼈에 붙은 살가죽이 벗겨지는 모습을 보면서 서서히 죽어갔다. 큰 유리 상자 속에 사람을 가두고 밖에서 공기를 빼내 완전 진공 상태를 만든 뒤, 인간의 생존 시간을 체크했다. 또 페스트 등 각종 세균을 강제로 몸 속에 주입, 인간의 장기가 어떻게 변하고 투입량에 따라 어느 정도 빨리 죽는지 실험했다. 중국인·러시아인·몽골인·한국인을 동원한 인종별 실험도 자행됐다. ●한국인들도 마루타로 희생돼 왕강(王剛)이라고 소개한 중년의 관람객은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이렇게 몹쓸 짓을 할 수 있을까.”라며 치를 떨었다. 헤이룽장 대학에 재학 중이라는 한 학생은 “말로만 듣던 일본 제국주의의 실상을 오늘에서야 명확하게 알게 됐다.”며 “침략 역사를 부인하는 일본인들이 직접 이러한 만행을 목격해야 한다.”며 분개했다. 전시관 관계자는 “실험이 끝나고 더 이상 필요가 없는 마루타들은 실험실 내부에서 소각됐거나 한꺼번에 구덩이에 파묻었다.”고 밝혔다. 이렇게 죽어간 마루타들의 숫자는 대략 3000여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부대의 책임자는 ‘인간 백정’으로 불렸던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중장이다. 그는 전후 도쿄 국제군사법정에 기소돼 재판을 받을 당시 마루타(생체실험 대상)가 총 3850명이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러시아인이 562명, 한국인이 254명, 나머지는 모두 중국인이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최근 전시관 인근 지역 개발과 함께 발굴된 유해 숫자가 급증하면서 ‘1만 5000명 사망설’이 떠오르고 있는 형국이다. 당시 조선인들도 다수가 마루타로 희생됐지만 신원이 확인된 것은 심득룡(沈得龍)과 이청천(李淸泉) 두 명뿐이다. 심득룡은 당시 소련 극동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공산당원으로 확인됐다. ●중국 마을에서 세균전 실험 45년 8월15일 일본 항복 직후 731부대는 인체 실험실과 각종 건물을 철거하고 증거가 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소각한 뒤 퇴각했다. 하지만 46년 페스트 실험용으로 사용됐던 쥐들이 튀어나와 당시 마을 주민 100여명을 몰살시킨 비극적 사건도 있었다고 전시관 관계자들이 전했다. 중국 대륙에 존재했던 인체실험실은 731부대 이외에 창춘(長春) 100부대, 베이징 1855부대, 난징(南京) 1644부대, 광저우(廣州) 8604부대 등 5개이며, 이들을 주축으로 중국 전역에서 인체 실험이 광범위하게 운영됐다는 게 전시관측 설명이다. 일본군이 실제로 전쟁 당시 세균전을 감행했다는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1940년 닝보(寧波)에서 페스트균을 대량 살포하여 100명 이상을 사망케 했고,1941년 봄 후난성(湖南省)에 페스트 벼룩을 공중 살포하여 중국인 400여명을 희생시켰다는 것이 중국측의 주장이다. 최근 731부대 장교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문서가 일본의 한 대학에서 발견돼 일본군의 세균전 및 생체실험이 사실로 입증됐다. 페스트균을 배양해 지린성(吉林省) 눙안(農安)과 창춘에 고의로 퍼뜨린 뒤 주민들의 감염 경로와 증세에 대해 관찰했다는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oilman@seoul.co.kr ■ 731전시관 청리화 부관장 |하얼빈 오일만특파원|“일본 군국주의의 잔학상을 세계에 알리고 인류의 평화 애호사상을 함양하기 위해 731부대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게 됐습니다.” ‘731 전시관’ 청리화(程立華·여) 부관장은 “지난해 20만명이 731부대를 관람한 것을 비롯해 지금까지 모두 300만명이 이곳을 다녀갔다.”며 앞으로 전시관 주변에 ‘731 공원’을 건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731 전시관’을 통해 전세계에 일본과의 반파시스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지불한 중국인들의 희생과 고난을 알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지난 82년 설립된 ‘731 전시관’은 85년 8월15일 처음으로 외부에 개방됐다.95년 중국의 반파시스트(중·일전쟁) 전승 50주년을 맞아 신관을 설립하고 새로운 자료를 보강했다. 세계문화유산 신청 준비 작업은. -2000년부터 하얼빈시는 731부대 인근 120 가구와 11개 기업을 이주시키고 유적 발굴작업을 진행하고 있다.2002년 5월부터 현 전시관 면적의 3배에 달하는 ‘731 공원’ 설립을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예산은 모두 5억위안(약 650억원)이다. 일본이 이 부대를 설립한 이유는.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죽이는 방법을 찾기 위해 세균 부대를 창설한 것이다. 세균·화학 무기는 총과 대포와 비교해 원가가 5분의1에 불과하다. 731부대는 수천, 수만의 인민들이 참혹하게 죽어간 도살장이며 일본 군국주의가 인류를 말살하기 위해 시도했던 ‘세균전’의 현장이다. 생체 실험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됐나. -페스트, 장티푸스, 이질, 콜레라, 탄저, 결핵, 매독 등 31개 종류의 세균을 이곳에서 배양시켜 마루타들에게 실험을 했다. 생체 실험 대상이었던 마루타들은 대부분 항일운동을 한 경험이 있으며 특수 감옥에 수감된 채 세균 전문가들의 치밀한 실험계획에 따라 고통 속에서 살해됐다. oilman@seoul.co.kr ■ 731 부대란 ‘731부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관동군이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에 주둔시켰던 세균전 부대이다.1932년 창설돼 1936∼1945년 여름까지 전쟁포로 및 민간인 3000여명을 대상으로 각종 세균 실험과 약물 실험 등을 자행했다. 바이러스·곤충·동상·페스트·콜레라 등 생물학 무기를 연구하는 17개 연구반이 있었고, 각각의 연구반마다 마루타라 불리는 인간을 생체 실험 대상으로 사용했다. 1940년 이후 최소한 3000여명의 한국인·중국인·러시아인·몽골인 등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7년 미 육군 조사에 따르면 36년부터 43년까지 부대에서 만든 인체 표본만 해도 페스트 246개, 콜레라 135개, 유행성 출혈열 101개 등 수백개에 이른다. 생체실험의 내용은 세균실험 및 생체해부실험, 동상 연구를 위한 생체 냉동실험, 생체 원심분리실험 및 진공실험, 신경실험, 생체 총기관통 실험, 가스실험 등이다.
  • [본사 주최 ‘세계 거장 판화대전’ 지상갤러리] (16) ‘SIMPLE’ TRIPTYCH

    ‘프란시스 베이컨’作. 에칭 38.5×29.4㎝.1981. 영국 더블린 출신의 베이컨(1909∼1992)은 자코메티와 더불어 실존주의적 성격이 강한 신구상주의의 지도자로 불리는 작가다. 그는 미술시장과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영국화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가로 평가될 정도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한 그는 피카소의 작품을 비롯해, 고흐와 뭉크의 표현주의 작품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후 그는 입체파의 영향을 벗고 이미 퇴물로 취급받던 리얼리즘 회화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확립했다. 동시대의 전쟁, 기아, 강제수용소에서의 대량학살 등 2차대전을 통해 사람들이 체험한 공포감을 반영하는 작품들로 주목을 받았다. ‘단순함’이라는 이 작품도 벗은 남자의 몸을 통해 어두운 분위기를 연출하며 오히려 ‘복잡한 세계’를 보여준다. 바다 모래사장인 듯한 장소에서 우산을 받쳐든 이 남자는 온몸으로 고통과 절망을 말하는 듯하다. 이 작품은 3개의 소품이 하나의 작품으로 구성돼 있다. 그는 이처럼 아름다운 인체가 아니라 뒤틀리고 그로테스크한 인체로 자신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다. 철학자 베이컨의 방계후손이어서 그런지 그의 작품도 ‘철학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기 간 2005년 5월7일(토)까지 (전시기간 중 무휴, 전시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9시까지) ●장 소 서울신문사 서울갤러리 전관(한국프레스센터 1층) ●입장료 성인 5000원, 초중고생 3000원 ●단체접수 및 작품판매 문의 서울신문사 문화사업부(02-2000-9752)
  • 맨 얼굴의 중국사/김영수 옮김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의 자기변명’이란 말이 있다. 사회 구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중적 시각은 찾아보기 어렵고, 권력을 쥔 자들에 의한 억압적·권위적·위선적인 국가·민족주의 논리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타이완 작가 보양(栢楊)이 저술한 중국 역사서 ‘맨얼굴의 중국사’(김영수 옮김, 창해)는 시각 자체가 매우 파격적이다. 수천년 동안 인민을 고통속으로 몰아넣었던 전제왕조 체제와 그에 기생한 관료사회의 온갖 비리와 모순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나아가 그 역사를 통찰하고 반성할 것을 강조한다. 저자는 장제스 정권의 부패를 신랄하게 비판한 죄로 1968년 3월 체포돼 이른바 ‘집행되지 않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나이는 49세. 투옥 후 장제스가 사망하면서 8년으로 감형돼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인 훠샤오다오에 수감됐다. 그로부터 9년여 만인 1977년 4월 풀려났다. 저자가 투옥기간에 쓴 이 책은 ‘25사’‘자치통감’ 같은 정통 역사서를 참고해 썼지만, 가장 비정통적이고 이단적 역사서로 재탄생했다. 과거 역사 속의 반인권적이고 반인간적인 요소와 봉건적 요소를 철저하게 해부하고 청산하려는 지은이의 처절한 의도가 엿보인다. 이 책은 다른 역사서와 몇 가지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역사의 주인공이자, 거의 신(神)적 반열에서 다루어졌던 제왕들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 끌어내려졌다. 따라서 제왕이 그의 왕조을 위해 사람들을 탄압하고 죽이는 일은 정치적·왕조적 논리에선 합리화되었을지라도 이 책에서 반인간적으로 철저히 비판받는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관점은 ‘반성’이다.‘반성은 진보를 위한 출발점’이란 시각에서 봉건 전제주의의 ‘피의 역사’를 현재의 역사법정에 세우고 있다. 보양은 역사의 진보를 확신하고 있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그는 역대 개혁가들과 개혁정치에 무한한 애정을 보낸다. ‘변법개혁’을 비롯해 왕안석의 개혁정치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개혁의 실패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분석한다. 반면 명 왕조에 대한 평가는 무서우리만큼 비판적이다. 특히 최고 통치자에 대한 비판은 위험수위를 넘나든다. 대도살, 인권유린, 단두정치 같은 극단적 용어를 동원하며 강력하게 비판을 가한다. 제왕들도 한 사람의 인간이란 관점에서 수양제니 당태종과같은 시호 대신 양광, 이세민 등 본명을 직접 썼다. 제왕들이 재위중 사용했던 연호도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시대구분은 왕조별로 하지 않고 1세기 단위로 서술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같은 시도는 학자들 사이에선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로선 오히려 매우 쉽고 간명하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다. 역사학자가 아닌 작가의 저술답게 문장이 생생하고 문체가 박진감이 넘쳐 물 흐르듯 속도감이 느껴진다. 그래선지 5권이란 방대한 분량도 부담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각권 1만8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부시, 북핵 안보리회부 시사

    |워싱턴 이도운특파원|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28일(현지시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독재자로 비난하며 북핵 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로 회부할 가능성을 언급해 북한의 반발 등 파장이 예상된다.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가진 특별 기자회견에서 김 위원장에게 초점을 맞춰 ‘위험한 사람’,‘폭군’으로 지칭하며 ‘주민을 굶긴다.’,‘위협하고 허풍떤다.’ ‘거대한 강제 수용소’ 등의 표현으로 강하게 비판했다. 부시 대통령은 또 “미국은 북핵 문제를 6자회담의 틀 안에서, 특히 중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과의 협의를 통해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최선책”이라면서 “유엔 안보리로 가져가려면 나머지 6자회담 참가국들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재선 이후 한국과 중국 등의 요청으로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자제해왔으며, 북핵 문제의 안보리 회부를 직접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부시 대통령은 그러나 “일부 참가국(중국, 러시아)들은 안보리 결의안에 대한 비토권도 갖고 있다.”고 말해 안보리 회부를 일방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입장은 아님을 시사했다. 부시 대통령은 특히 이라크에 대규모 미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지만, 이 때문에 북한 등 다른 문제를 처리하는 데 조금도 제한을 받고 있지 않다고 말해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능력’을 과시했다. dawn@seoul.co.kr
  • 유대인 이미지의 역사/볼프강 벤츠 지음

    유대인에 대한 이미지는 누구나 한 마디씩 초들 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그만큼 고정관념화돼 있다는 반증이다. 탈무드의 지혜로운 민족이니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뛰어난 민족이니 하는 찬사로부터 ‘미국 네오콘의 배후세력’ 등과 같은 비난성 지적에 이르기까지 그 이미지는 실로 다양하다. 그러나 유대인에 대한 이미지는 단연 부정적인 것이 주류를 이룬다. 반유대주의의 뿌리는 기독교에서 찾을 수 있다. 유대교도들이 기독교로의 개종을 거부하며 예수 이전의 신앙을 고집하자 기독교도들의 포교적 사명감은 증오로 돌변했다. 유대인에 대한 저주와 사회적 격리는 ‘개종의 열정’이 좌절된 데 따른 반작용인 셈이다. 나아가 19세기에 등장한 ‘근대적 반유대주의’는 인종주의에 기초해 인간의 우열을 규정하는 등 서구 사회의 근거없는 편견을 그대로 보여줬다. 독일 본 대학 반유대주의연구소 소장인 볼프강 벤츠의 ‘유대인 이미지의 역사’(윤용선 옮김, 푸른역사 펴냄)는 유럽사회의 유대인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을 낱낱이 폭로한다. 책은 인종학살이라는 끔찍한 폭력으로 발전한 유대인 혐오가 사실은 별 생각없이 받아들인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준다. 종교적인 이유에서 출발한 유대인에 대한 편견은 교회, 민간에 유포된 이야기, 각종 조형물 등을 통해 전해지고 확산됐다. 이런 편견은 지배집단 사이에서도 별다른 비판없이 수용됐다. 이 책은 안네 프랑크의 ‘상품화된’ 신화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 눈길을 끈다. 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10대 소녀의 순수한 일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부드럽게’ 이지화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한편 이 책은 역자(한국외대 외국학종합연구센터 교수)도 지적하고 있듯이, 반유대주의 범주에 포함시키기엔 어울리지 않는 사례까지 반유대주의 유형으로 다뤄 의문을 남긴다. 국가 이데올로기로까지 발전한 반유대주의를 별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유대인을 혐오한 독일의 유대인 작가 쿠르트 투홀스키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1만 3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교황 베네딕토 16세 시대] ‘하느님의 충복’ 별명 보수주의자

    새 교황 베네딕토 16세(78)는 일생 동안 보수주의적 입장을 견지해왔다.‘요한 바오로 3세’,‘하느님의 충복’이라는 별명이 그의 노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콘클라베가 시작된 뒤 그는 보수적 추기경들의 지지를 모으면서 일찌감치 강력한 교황 후보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여든에 가까운 고령인데다 지역적 지지기반이 약한 것이 약점으로 꼽힌다.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그는 “교황이 된다면 단기간만 재위하고 물러나겠다.”며 스스로 ‘과도기적 관리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평범한 유년기, 나치 전력으로 얼룩 베네딕토 16세는 1927년 4월16일 독일 바이에른주의 마르크트 암 인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전통적인 독일 농가의 분위기를 이어받았으며 아버지는 경찰관이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열심히 배웠던 명민한 소년이었던 그는 청소년기에 접어들며 나치와 2차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된다.14살이었던 1941년 히틀러 소년단(유겐트)에 가입했던 것이 두고두고 논란이 되고 있다. 소년단 가입을 거부할 수도 있었는데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이어 1944년 입대, 방공포 부대 소속으로 복무하던 중 탈영했다가 붙잡혔다. 전범수용소에 갇혀있다 2차대전 종전과 함께 석방됐다. ●왕성한 연구활동으로 명성얻어 이후 베네딕토 16세는 형 게오르그 라칭거와 함께 가톨릭 신학교에 입학, 본격적으로 신학 수업을 받기 시작한다.1951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2년 뒤 뮌헨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프라이징과 본, 튀빙겐, 레겐스부르크 등지의 여러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며 가톨릭 교리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했다.1962년 그는 35세의 나이로 쾰른대주교의 고문에 임명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1977년 2월 베네딕토 16세는 뮌헨대주교가 됐으며 석달 뒤 추기경에 봉임됐다.1981년 요한 바오로 2세는 베네딕토 16세를 교황청 신앙교리성성(聖省) 수장으로 임명, 이후 24년 동안 두 사람은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1998년에는 추기경단 부단장,2002년에는 단장이 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베네딕토 16세가 실질적으로 교황청을 이끌어왔다는 데에 이견이 없다. ●평생 보수주의 유지 베네딕토 16세가 보수주의적 입장으로 돌아선 데에는 1968년 독일 대학가를 휩쓴 ‘68운동’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그는 동성애, 낙태, 피임, 여성 사제 서품 등에 대해 일관되게 보수적 입장을 유지해왔다. 베네딕토 16세는 종교적 자유·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 ‘2차 바티칸공의회(1962∼65년)’에 대해 “교회의 타락 과정이며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불길하고 파멸적인 것”이라며 분명하게 반대했다.2001년 6월 발표된 동성애와 자위행위 금지를 포함한 엄격한 교황청의 성윤리 지침과 지난해 7월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교회와 세계에서 남성과 여성의 협력에 관하여’라는 교황청의 문건을 작성한 사람도 바로 베네딕토 16세였다. 또 미국 주교들에게 낙태를 옹호하는 정치인에게 영성체를 베풀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고, 이슬람국가인 터키의 유럽연합(EU) 가입에 반대했다. 지난 13일에는 이혼, 동성결혼, 인간복제 등에 반대하는 교리를 담은 저서 ‘격변의 시대의 가치’를 출간했다. ●엇갈리는 평가 베네딕토 16세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나오고 있다. 지지자들은 대표적인 지적 성직자인 베네딕토 16세가 뚜렷하고 명쾌한 교리를 제시, 가톨릭 내부의 단합을 이끌 것이라며 환영한다. 베네딕토 16세는 10개 언어를 구사하며 7개 분야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베토벤 음악을 좋아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그를 ‘강요자’로 부른다. 이들은 ‘해방 신학’의 주창자인 브라질의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를 징계했던 것처럼 새 교황이 진보적 성직자들을 처벌하고 가톨릭을 중세시대로 돌려놓을 것으로 우려한다. 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中 “日帝 생체실험현장 세계유산 신청”

    |베이징 오일만특파원|중국이 2차대전 당시 일본 731부대가 만주지역에서 자행한 생체실험 현장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할 예정이라고 중국일보가 19일 보도했다. 하얼빈(哈爾濱) 사회과학원 731부대 연구소 진청민(金成民) 소장은 “731부대 유적지는 일제 군국주의가 세균전으로 인류를 멸살하려고 기도한 곳으로 일본군이 중국에서 행한 잔학행위의 실상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 관동군 731부대는 지난 1939년부터 일제 패망 때인 1945년까지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의 비밀부대에서 중국, 한국, 러시아 등 수천명의 ‘마루타’를 대상으로 생체해부, 페스트 병원균 배양 등 세균전 실험을 실시했다. 당시 3000여명이 이 부대에서 살해됐고 부대 주변 주민 20만명이 실험에 따른 직간접적 피해를 입은 것으로 하얼빈 사회과학원 보고서는 주장했다. 보고서는 2차대전 당시 유대인 120만명이 희생된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이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상태여서 이같은 전쟁 유적지의 세계유산 등재가 전례없는 일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oilman@seoul.co.kr
  • ‘나치전력’ 교황선출 새변수로

    유력한 차기 교황 후보로 떠오르고 있는 독일의 요제프 라칭거(78) 추기경이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소년단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영국 더 타임스가 17일 보도했다. 라칭거 추기경은 14세였던 1941년 히틀러 소년단에 가입했으며, 전투기 엔진을 만들던 BMW 공장에서 군 복무를 했다. 이 공장은 다카우 강제수용소에서 끌려온 유대인과 반나치인사들이 노예처럼 일하던 곳이었다. 이어 그는 헝가리로 이동, 대전차 장애물을 만드는 공장에서 복무하다 1944년 4월 탈영, 몇 달 동안 투옥되기도 했다. 라칭거 추기경의 형인 게오르그 라칭거는 “히틀러소년단 가입은 강제적으로 진행됐으며 저항할 수 없었다.”고 동생을 옹호했다. 하지만 나치에 대항하다 다카우 수용소에 끌려갔다 살아나온 사람들은 “저항은 가능했고 실제 그렇게 한 사람도 많다. 라칭거는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신문은 라칭거 추기경이 유대인 학살에 관여했던 정황은 전혀 없지만 나치에 대한 태도가 요한 바오로 2세와 상반된다고 지적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청년시절 폴란드에서 반나치 영화에 출연했으며 1986년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로마에 있는 유대인교회(시나고그)를 방문하기도 했다. 라칭거 추기경은 가톨릭 교리를 엄격하게 수호하려는 보수파의 대표로 꼽히고 있으며, 콘클라베에 참석하는 추기경 115명 가운데 40명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인터넷에는 라칭거 추기경의 팬사이트가 속속 생겨나고 있어 그의 인기를 보여주고 있다. 독일 언론에 따르면 대표적인 사이트(www.ratzingerfanclub.com)는 지난 2000년 만들어졌으나 차기 교황 선출 절차가 시작된 이후 주목받고 있다. 이들 사이트에는 라칭거 추기경의 생애에 관한 자료와 그의 저서, 언론 보도 내용 등이 게시돼 있는 것은 물론 그의 이름이나 얼굴을 인쇄한 티셔츠, 스티커, 커피잔, 야구모자까지 팔리고 있다. 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7)거제도의 숭어잡이 ‘육소장망’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67)거제도의 숭어잡이 ‘육소장망’

    암벽 위 진달래가 꽃그림자를 드리울 즈음이면, 숭어떼가 몰려온다. 봄이왔다는 증거. 숭어만이 그러한가. 강과 바다를 오고가는 모든 고기들이 입춘만 지나면 봄을 알아차리고 운동량이 부쩍 증가한다. 거제도 최남단의 그림 같은 해금강이 건너다 보이는 남부면 다포리로 숭어잡이를 찾아나섰다. 숭어는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을 가리지 않는다. 한반도에서도 제주로부터 동서남해를 막론하고 없는 곳이 없으나 거제도 숭어잡이는 남다르다. 일명 숭어둘이, 혹은 육소장망(六張網)이라 불리는 전통어법은 부산 가덕도로부터 거제 남동해 곳곳에서 펼쳐진다. 가덕도는 TV 등을 통해 간간이 소개된 반면 거제도는 일반에 알려져 있질 않다. 신항 건설로 급속히 가덕도 어장이 사라졌지만 거제도의 지세포, 양화, 학동, 다포, 도장포에서는 현행 어법으로 이어지는 중이다. ●산길 30분 올라가자 얼기설기 엮은 망통이… 어민 임성덕(59세)씨가 천장산 기슭의 망통으로 안내했다. 족히 30분 이상 산길을 걸었다. 바닷가 가파른 벼랑의, 사람 하나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소로가 동네사람들이 오랜 세월 오고가던 숭어잡이 길이다. 동백 팔손이를 비롯한 상록수들이 남도임을 실감시켜준다. 망통은 깎아지른 벼랑 끝에 서 있다. 바다 사나이 하나가 묵묵히 망을 응시하고 있다. 얼기설기 엮은 헛간이 벼랑에 의지하여 간신히 바위에 매달려 있고 그 안에 사내들 몇몇이 둘러앉아 바다를 응시한다. 하늘에서 움직임을 굽어보면서 숭어떼가 들이닥치기를 기다렸다가 그물로 둘러싸서 잡는 글자 그대로 ‘둘이(두르다)’이다. 숭어는 2월1일부터 5월30일까지 날을 정해놓고 잡는다. 소머리 받치고 고사부터 지내는데 예전에는 무당까지 모셔다가 날 받는 날, 즉 낙망일을 정하였다. 그물은 포구를 향하여 ‘ㄷ’자 형으로 놓는다. 아가리가 포구를 향해 있어 외해로 나가는 길목을 차단하게끔 입을 벌려놓았다. 강철안 어촌계장은 “갯가를 문전문전 타고 다니지요.”라고 한다. 가덕도 쪽에서 내려온 숭어가 건너편 해금강에서 다포리 내만으로 접어들면서 육지로 바짝붙어서 골골이 만을 들른다는 설명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민물을 받아먹으려고 골에서 머물다가 어느날 갑자기 커다란 숭어 대군이 몰려오면 떼거리에 합세하여 포구의 모든 숭어들이 일제히 이동한다. 광장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출구에서 몰려드는 일련의 군중을 만나게되면 갑자기 합세하는 심리와 같다고나 할까. 수만마리 숭어들이 바다로 내려가는 통로는 어느 해나 일관되게 산 아래 육지쪽이다. 숭어 길목에 정확하게 그물을 놓는다. 어느 시각에 대군이 지나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망쟁이는 바다 빛깔의 변화를 보고서 민감하게 알아차린다. 입춘 직후에는 숭어가 ‘바닥을 기기 때문’에 여간한 전문가가 아니면 알기 어렵다. 그러나 봄빛이 짙어지면 숭어가 물 위로 뜨기 때문에 웬만한 어민들도 알아차린다. 망쟁이(어로장)는 고도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금년에도 건너편 해금강에서 어민 최봉조(33)씨를 돈까지 주고 모셔왔다. ●숭어 몰려오면 물색 짙어져 ‘나이 젊어도 고기를 잘 보기 때문’이라나. 노련한 어부들도 숱하겠건만 고기도 아무 눈에나 띄는 것은 아닌가보다. 고기가 몰려오면 물색이 짙어진다. 고기 눈이 밝은 어로장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어민 17명이 한 팀을 이루어 전형적인 어촌 공동체의 협업정신을 발휘한다. 예전에는 그물을 돈 있는 선주가 담당하였으나 어촌계 몫으로 바뀌었다. 육소장망은 여섯 척의 배에서 비롯되었다. 좌우로 세 척씩 여섯 척이 진을 짜듯 벌려 있다가 숭어가 들어온다는 신호가 망통에서 내려오면 바짝 조여서 빈틈없이 에워싼다.‘독 안에 든 쥐’가 이것이다. 가덕도에서는 근래까지도 배를 이용하는 반면에 거제도에서는 10여년 전부터 고정적으로 그물을 쳐두는 것으로 개량화되었단다. “얼마나 잡힙니까.” “많게는 2만마리고요, 엊녁에도 5000마리 잡았어요.”그물질 한번에 2만마리라니. 마침 찾아간 날은 고기가 들지않았다고 울상이었는데 그래도 족히 500여마리는 잡혔다. 어촌계에서 10%를 제하고 나머지는 참가자들이 공평하게 분배한다. 객주가 전량 수거하여 부산권역으로 팔려나간다. 양이 많으면 노량진수산시장까지도 나가는데, 문제는 숭어값. 예전에 마리당 7000∼8000원 하던 것이 금년에는 마리당 1600원이다. 그래도 숭어잡이철은 비수기인지라 어민들로서는 제발로 찾아들어 잡혀주는 숭어가 고맙기만 하다. 숭어가 제 대접을 받지 못함은 흔하기 때문이다.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남의 영산강, 평북의 청천강, 경기의 한강 등에도 많이 회유한다. 어릴적과 성어 이름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 재미있다.1000여개의 토속이름이 분포하고 있으니 그만큼 흔하다는 증거다. 모치, 모쟁이 같은 어린 숭어 이름이 그것이다. 식성이 까다로워 양식이 어려우며 95% 이상이 자연산인데다가 기름진 숭어는 피로회복에도 그만이니 하대할 수산물이 아니리라. 지역명산으로 출시되는 영산강 몽탄의 숭어알로 만든 영암어란은 임금님 진상품이었으니 지금도 웬만한 가격을 치르지 않고는 서민들은 접할 수 없는 진미이다. 망을 보아 고기를 잡는 어법은 멸치도 예외가 아니었다. 산에 오른 망쟁이가 회유하는 멸치떼를 발견하면 신호를 보내어 일제히 후리로 끌어당겨 많은 양의 멸치를 잡곤 하였다. 고래잡이에서도 고래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했으니, 잡은 고래몫에서 일정 부분을 발견한 이에게 먼저 떼줄 정도였다. 고기들이 몰려들어옴을 눈으로 발견할 수 있음은 그만큼 자원이 풍부했다는 증거. 사람들은 사람의 눈 대신에 첨단 어군탐지기로 ‘싹쓸이어법’을 감행하고 있으니, 육소장망 같은 어법은 하루에 1만마리씩 많은 양이 잡히기도 하지만 그래도 ‘기다림의 어법’이란 점에서 쫓아가서 잡는 ‘싹쓸이어법’에 비할 바가 아니다. 어쩌면 갯가로 몰려드는 숭어떼마저 사라지고 육소장망마저 멈춘다면 거제 바닷가의 봄은 꽃은 피웠으되 봄은 오지 않은 셈이 되어 레이첼 카슨의 표현대로 ‘침묵의 봄’으로 변하리라. ●멸치·대구·감성돔… 경남 최대의 어장 거제는 경남 최대 어장 중의 하나다. 멸치, 대구는 물론이고 감성돔, 볼락, 도다리 같은 고급어종이 많이 잡힌다. 우리나라 두 번째로 큰 섬답게 해안이 제주도보다도 크며 61개섬이 퍼져 있어 넓은 어장을 자랑한다. 관광객에게는 해금강이 관광명소로만 여겨지겠지만 고기들에게는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정거장 같은 곳들이다. 봄철에는 갓 잡은 도다리와 쑥을 끓인 쑥국을 식당에서 마주칠 수 있는 행운이 뒤따라 진한 봄내음을 식탁에서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이 거제바다다. 이곳은 전통시대부터 어업규모가 만만치 않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오죽하면 ‘아배가 멸치를 잡기 때문에 멸치값이 올랐다.’는 소문까지 났을까. 거제도뿐 아니라 전라도까지 진출하여 잡아들이고 있다. 동지를 전후하여 찾아가면 대구 전진기지로 분주하다. 거제도를 중심으로 진해만과 거제 외포리 근해 통영해안에서 잡아들여 대구국과 내장탕을 끓이고, 대구포도 말린다. 예로부터 고급음식이었으니 돈 없는 사람은 명태를 사먹고 돈 있는 이나 대구를 먹었다고한다. 식당에서 볼락젓을 내오는 경우가 있다. 어린 볼락으로 담근 젓갈인데, 일찍이 김정은 우해이어보에서 이렇게 말하였다.‘보라어’를 ‘보락’이나 ‘볼락어’라 부른다. 방언에 엷은 자주색을 보라(甫羅)라고 하는데 ‘보’는 아름답다는 뜻이니, 보라는 아름다운 비단이다. 보라라는 이름은 여기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해마다 거제도 사람들이 보라어를 잡아 젓갈을 담아 배로 수백 항아리씩 싣고 와서 포구에서 팔아 생마(生麻)와 바꾸어갔다고 전해진다. ●日침탈·포로수용소… 모진 역사도 견뎌내 어업이 활발한 반면에, 생필품이 늘 부족하였다는 뜻이다. 실제로 산이 많고 거칠며 농토는 적은 반면에 고기는 흔했다. 그래서 일찍부터 어업이 성했으니, 장승포나 지세포 같은 포구는 동서해안의 작은 포구에 비할 바가 아니다.1995년에 장승포시와 거제군을 합쳐서 거제시로 재탄생하였다. 김광수 거제수협전무는,“고현으로 기관이 다 옮겨갔어도 어업의 본부격인 거제수협만큼은 장승포에 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옥포대첩이 이루어진 옥포성, 임진왜란 당시에 우수영이던 개배량성, 왜구들이 쌓은 견내량 같은 왜성 흔적은 일찍부터 일본의 침탈이 집중화된 해변임을 말해준다. 옥포조선소가 들어선 옥포에서 보자면 대한해협과 대마도가 빤히 보이니 임란 전에도 왜선들이 시도때도없이 출몰하였다. 본격적 어업침탈은 합방 19년 전인 1891년에 시작된다. 에히메켄(愛媛縣) 우오시마무라(魚島村)에서 어민 수백명이 구조라로 집단이주하여 멸치잡이에 종사한다. 합방도 되기 전에 일본인회, 학교조합이 들어선다. 일제의 폭압적인 지원에 힘입어 조선어민들은 어장을 내주어야 했다.‘일제36년’이라 하는데 틀린 계산법이다. 이후에 구조라 북쪽의 지세포, 장승포가 일본인에 의해 건설된다. 조선시대의 지세포성이나 구조라성이 모두 왜적을 방비하기 위함이었는 바, 하필 그곳에서부터 일제의 어업침탈이 시작되었으니 아이러니컬하다. 게다가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조용했던 섬에 미군들이 몰려들고, 한때 17만명에 이르는 전쟁포로들이 360여만평에 수용되었다. 좌우 대립 속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갔으니 전국의 유명 관광지로 연간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찾아드는 이 아름다운 섬에도 외세의 개입은 한시도 끊이지 않았던 셈이다. 수용소는 유적지로 변신하여 역사교육 현장으로 뭍에서 온 이들을 맞아들인다. 조만간 거제 장목과 부산간의 거가대교까지 개통된다고 하니, 거제의 변신은 어디까지일까.
  • [영화속 수능잡기] 제이콥의 거짓말

    [영화속 수능잡기] 제이콥의 거짓말

    ‘사실이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사실 대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환상을 좇아도 좋은가.’ 프랑스 대입시험인 바칼로레아의 논술 문제다.3개월밖에 살 수 없는 시한부 인생이 있다고 하자. 이제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시간이 3개월뿐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그를 불편하게 한다. 문제는 이같은 상황에서 위안을 주는 환상을 좇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묻고 있다. 영화 ‘제이콥의 거짓말’에서 팬케이크를 만들어 파는 장사꾼 제이콥은 동료에게 우연히 라디오를 통해 들은 소련군의 진군 소식을 말하게 된다. 그런데 이 일은 나치들이 소유를 금지한 라디오를 그가 가지고 있다고 와전되어 퍼진다. 라디오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형에 이르는 중죄다. 그러나 라디오가 없다고 밝혀지면 오히려 절망하여 죽을 사람이 더 많아지게 될 상황에 이르자 제이콥은 모두를 위해 희망적인 뉴스를 만들어낸다. 그는 수용소 안의 유태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만들어 낸다. 희망적인 뉴스는 현실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거짓된 뉴스’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은 언제 처형될지 모른다는 불안과 절망뿐이다. 그 불안과 절망을 이기지 못해 수용소 안의 유태인들은 목을 매어 자살하기도 한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이었다.‘사실’은 그들을 절망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만약 인간이 사실만을 말해야 하고, 사실만을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라면 세상에는 절망과 불안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하는 사람의 숫자가 부지기수일 것이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운명과의 싸울 힘을 잃지 않는 것은 희망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실현 가능성이 있을 때 인간은 희망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싸움의 의지를 철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는 현실에서라면 어떨까. 과연 인간은 묵묵히 패배의 운명을 수락하게 될까. 천만에. 인간은 거짓된 환상을 만들어서라도 삶에 매달린다. 바로 그것이 인간의 가열찬 삶에의 의지다. 살아보겠다는 삶에의 의지가 거짓된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환상은 절망에 빠진 인간에게 희망을 준다. 그러나 실현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환상이 마술의 한 장면처럼 현실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삶의 불가해함이다. 제이콥의 거짓말이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믿은 사람, 우리 앞에는 오직 죽음의 현실만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은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 목을 매어 자살을 했다. 그러나 희망에 매달린 사람들에 희망은 현실이 되었다. 영화 감독, 피터 카소비츠는 말했다.‘희망에 대한 굶주림은 배고픔보다 나쁘다.’ 우리는 빵 없이는 살 수 있어도 희망 없이는 살 수 없다. 희망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랑이다. 거짓의 희망을 만들어서라도 내 동료를 살려야겠다는 제이콥의 사랑, 바로 그 사랑이 있는 곳에서 환상은 마법처럼 현실로 뒤바뀌기도 한다. 피터 카소비츠 감독, 로빈 윌리엄스, 테일러 고든 주연,1999년작. 김보일 서울 배문고 교사 uri444@empal.com
  • 물거품된 이라크판 ‘쇼생크 탈출’

    지하동굴을 뚫어 수용소를 탈출하려던 이라크 수감자들의 시도가 성공 직전 발각돼 수포로 돌아갔다고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가 27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라크 내 최대 규모 수용소인 캠프 부카에서 수감자들이 뚫어 놓은 땅굴이 지난 25일 미군에 발견됐다. 캠프 내 8개 막사들 중 한 곳의 지하에서 시작돼 수용소 철책 직전까지 뚫린 이 땅굴은 깊이 3.7∼4.6m에 길이가 183m인 초대형이었다. 근처에선 91m 길이의 작은 땅굴도 발견됐다. 수감자들은 금속 물통을 잘라 만든 바가지와 막사의 각종 물건으로 만든 삽으로 굴을 팠고 파낸 흙을 화장실 변기에 버려 증거를 없앤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변기 하수관이 흙 때문에 막히고 미군 경비병이 화장실에서 흙더미를 발견하면서 계획은 좌절됐다. 미군은 사건 직후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갇힌 연합군의 땅굴 탈출을 영화로 만든 스티브 매퀸 주연의 ‘대탈주’를 병사들에게 관람케 했다고 인디펜던트는 보도했다. 남부 항구도시 움카스르 근처에 있는 캠프 부카는 전체 이라크 내 수감자의 3분의 2인 6000여명이 수용돼있는 최대 수용시설이다. 한편 미국의 시민단체가 법원 판결로 국방부로부터 입수해 26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이라크 내 수감자에 대한 미군의 인권 유린 실상은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 성(性)학대 이상이었으나 그 때문에 군사법정에서 처벌받은 경우는 없었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황장석기자 surono@seoul.co.kr
  • 얽히고 설킨 동북아 역사 재조명

    얽히고 설킨 동북아 역사 재조명

    최근 일본의 ‘독도 만행’과 역사교과서 왜곡 등 식민지침탈 정당화 움직임 등으로 한반도 전역에서 반일 감정이 들끓고 있다. 중국도 센카쿠열도 영유권 분쟁 등으로 일본에 대한 반감이 최고조에 올라 있는 상태. 역사 전문 히스토리채널은 이같은 분위기 속에 소중한 우리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특집물을 편성했다.26∼27일 방송되는 한국·중국·일본의 역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6편이 선보이는 특집 ‘우리 역사 지키기’가 그것. 26일 오전 10시에는 일본 만주군 731부대의 비밀 연구소를 다룬 ‘731부대의 망령’편을 방송한다.1930년대 동양의 파리라고 불리던 하얼빈 외곽에 위치한 이 연구소에서는 생화학무기 개발을 위한 잔혹한 생체실험이 이뤄졌고, 일본 패망 이후 실험 결과는 모두 미국에 넘어갔다. 같은 날 오전 11시부터는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미국인 포로들이 겪은 기아와 고문 등에 관한 다큐멘터리 ‘일본군의 전쟁범죄’와 1937년 중국의 난징에서 벌어진 일본군의 무차별적인 학살을 다룬 ‘난징 대학살을 고발한다’ 등 2편이 연속 방영된다. 오후 4시에는 중국의 한국고대사 왜곡작업인 동북공정의 중심에 있는 간도의 역사와 역할을 짚어본 ‘잊혀진 역사, 간도’를, 오후 6시에는 한·일협정을 살핀 ‘피해보상인가, 독립축하인가-65 한·일협정’이 전파를 탄다. 또 27일 오후 3시에는 우리 문화재가 프랑스·일본·미국 등 해외로 유출된 과정, 역사적 의미 등을 짚는 4부작 다큐멘터리 ‘잃어버린 문화재를 찾아서’가 시청자를 찾아간다.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나치 전술核 가졌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을 몇개월 앞둔 기간동안 독일 나치가 소형 핵무기 폭파실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수백명이 희생됐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독일의 역사학자 라이너 칼시는 14일 발간된 저서 ‘히틀러의 폭탄’에서 “베를린 근처에서 수일 혹은 수주 동안 원자로가 가동됐으며 독일 남부 투린지아와 발트해에서 핵무기 실험이 실시됐다.”고 주장했다. 나치가 핵무기 개발에 열중했지만 원자폭탄 개발 단계에 훨씬 못 미친 상태에서 종전을 맞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논란이 되고 있다. 칼시는 옛 소련이나 서구 국가들의 문서보관서, 옛 동독 기록들을 검토한 이 책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미 원자폭탄의 파괴력에 훨씬 못 미치는 전술 핵무기였지만 실험은 몇 차례 성공을 거뒀다.”고 밝혔다. 그는 또 45년 3월3일 투린지아주 오르드루프에서 실시된 마지막 핵무기 실험에서 반경 500㎡ 지역이 파괴됐고 전쟁 포로와 수용소 수감자 수백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폭탄은 농축 우라늄을 포함하는 2t급 실린더로 추정되며 우라늄양이 너무 적어 연쇄적인 핵분열 반응을 일으킬 만한 위력을 지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칼시는 덧붙였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美인권보고서“中·러·사우디 인권상황 열악”

    미 국무부가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발표한 연례 인권보고서는 ‘폭정의 전초기지’로 분류된 북한, 쿠바, 미얀마, 이란, 벨로루시, 짐바브웨 외에 중국,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의 인권 상황이 매우 열악한 것으로 지적했다. 북한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가장 잔인한 정권의 하나’로 지목됐다.15만∼20만명이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 중이며, 주민들은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채 언론자유나 공식 재판을 받을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특히 여성 수감자들은 강제로 낙태를 당하거나, 출산 직후 신생아들이 살해되는 아픔을 겪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얀마는 보안군이 수감자를 상대로 강간을 저지르거나 고문, 구타를 일삼는 등 “인권이 극도로 악화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은 지난 2002년 미·중간 인권협상에서 합의된 내용들이 이행되지 않은 점이 지적됐다. 반체제 인사에 대한 체포 남발, 사법부의 독립성 결여 등 지난해 중국의 인권 신장은 “실망스러웠다.”는 평가다. 한국은 대체로 인권 상황이 개선됐지만 경찰 및 교도소의 수감자 학대, 국가보안법 등이 지적됐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지구촌 ‘양심수의 벗’ 피터 베넨슨 타계

    앰네스티 인터내셔널(국제사면위원회·AI)의 창설자인 인권운동가 피터 베넨슨이 25일 사망했다.83세. 브렌던 패디 AI 대변인은 26일 베넨슨이 런던 서부 옥스퍼드의 존 래드클리프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AI측은 “평생 불의를 비전과 용기로 맞서온 베넨슨의 행동은 전세계 감옥과 고문실, 죽음의 수용소에 빛과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고 애도했다. 영국의 변호사였던 베넨슨은 40세이던 1961년 포르투갈 리스본의 한 카페에서 자유를 위해 건배를 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투옥된 2명의 포르투갈 학생의 석방운동을 계기로 AI를 창설했다. 당초 1년간의 한시적인 조직으로 발족됐던 AI는 지지자들의 후원에 힘입어 전세계 180만여명의 회원과 160여국에 지부를 둔 세계 최대 인권단체로 성장했다. 이튼 스쿨을 거쳐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그는 1950년대초 노동당과 노동변호사협회에 가입, 스페인 노동운동가들의 재판 감시인으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그 뒤 10여년 동안 남아프리카, 헝가리 등에서 법률 구조활동을 폈다. 또 남아공 보안기관의 인권유린행위를 폭로했으며, 서방국가들의 공평하고도 독립적인 인권유린행위 방지 정책 확립에도 기여했다. AI는 이데올로기와 정치·종교상의 신념이나 견해 때문에 체포, 투옥되거나 부당행위를 받고 있는 양심범들의 석방과 공정한 재판, 옥중 처우개선 등을 위해 전세계적인 감시활동을 벌이고 있다.AI는 그동안 2만여명의 양심수를 석방시켰으며 이 공로로 1977년에 노벨평화상,1978년에 유엔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석우기자 swlee@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9)근대 문화유산의 보고 군산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9)근대 문화유산의 보고 군산

    군산은 식민 수탈의 가장 전형적인 공간이었다. 식민공간답게 전통과 근대가 공생하고, 강요된 근대의 기형적 뒤틀림이 강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제시대 군산은 오쿠라, 이와사키 등 수많은 일본 토지재벌들이 지배했다. 그들은 고리대금업도 겸했으니,‘허리에 권총 차고, 손에 망원경 든’ 무장상인, 바로 약탈자였다.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시가지) 하나가 올라 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한국문학사의 금자탑인 채만식의 탁류는 이렇게 시작된다. 채만식 문학관은 소설 대목처럼 금강이 끝나면서 황해와 만나는 그 곳에 서있다. 문학관에서 조금만 서쪽으로 내려가면 ‘째보선창’이 나온다. 소설 속의 정주사는 서천땅을 처분한 뒤 똑딱선을 타고 째보선창으로 건너온다. 하지만 쌀 현물을 가지고 투기하는 미두장에서 돈을 다 날리고는 선창에서 자살을 기도한다. ●‘탁류’ 속 정주사 자살시도했던 ‘째보선창’ ‘째보선창’은 지정학적으로 ‘옆으로 째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 실제로 백마강과 금강이 합수하면서 바다로 흘러드는 길목에 자리잡아 Y자로 째진 곳이다. 구한말까지도 삼남의 농수산물이 이곳에 집산했다가 서울로 보내지던 중요한 선창이었다. 채만식 시절까지만 해도 제 몫을 다하던 선창이 금강하구언이 축조되면서 쌓일 대로 쌓인 퇴적물 때문에 항구 기능을 거의 상실해 문화원이 세운 입간판만이 그 역사를 말해줄 뿐이다. “탁류는 당연히 픽션이지만 역사적 전형성을 고스란히 획득하고 있지요. 두벰이산 정상에 있는 정주사 집터, 한창봉 쌀집, 콩나물고개 같은 소설 속의 역사현장을 짚어가면 식민지시대 군산의 풍경이 오롯이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군산 지킴이’ 이복웅 군산문화원장의 증언이다. 세종실록지리지 만경현조에 ‘군산은 병선을 정박시킨 곳으로, 섬이 둘 있는데 군산도와 망입도가 있다.’고 했다. 군산진은 본디 군산도(현재의 선유도)에 있었다. 그 후 군산진을 오늘의 군산시 영화동 해변의 진포로 옮기면서 이름도 따라와 군산으로 확정됐으며, 과거의 군산진은 고군산이 되었다. 그러니 고군산열도는 본디 군산의 원적지인 셈이다. 1899년 개항과 더불어 전혀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기 시작한다. 당시의 군산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갈대밭이 무성한 비좁은 곳이었다. 일제는 이 갈대밭을 매립하고, 시가지를 일본식 마치(町)체계로 바꾸었다. 본정통, 명치정, 강호정 따위가 그것이다. 메이지(明治), 에도(江湖) 같은 이름에서 식민지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일제는 군산을 강제로 개항시킨 뒤 대규모 항만시설을 서둘러 건설한다. 당시의 항만 흔적은 ‘뜬다리’같은 유적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수탈의 신작로’ 전주~군산가도 일제는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만경평야의 곡식을 군산항에 모았다가 일본으로 실어냈다. 전주~군산을 잇는 ‘전군가도’가 벚꽃으로 유명한 이유는 이런 역사적 연원을 지닌다. 일직선으로 뻗은 신작로는 수탈을 위한 토목공사의 증거였다. 오죽하면 당대 민중들이 ‘아깨나 낳는 년 갈보짓하고, 힘깨나 쓰는 놈은 목도질한다.’며 식민의 애환을 읊조렸을까. 일본 영사관이 설치되고 일본 거류민단이 세력을 확장해 갔다. 수탈은 금강을 거슬러서 상류인 부여 위쪽의 부강까지 미쳤다. 추수철이면 충청도와 전라도의 이 황금 곡창지대에서 개땅쇠처럼 일만 했던 소작인들은 피땀흘려 거둔 알곡을 바리바리 싣고 지주집으로 향했다. 소작 떼일 것을 걱정한 작인들은 굶주리면서도 정성껏 엿을 고와 받쳐야 했으니, 참으로 ‘엿 같은 세상’ 아니었을 것인가. 조선인 지주는 일본인 지주에 비하면 수나 양 모두 ‘별것’ 아니었다. 전국에서 전북처럼 일본인 농장이 많은 곳은 없었다. 전북은 일본의 기업형 농장이 가장 많이 진출한 일본 식량조달의 거점이었다. 금강, 동진강, 만경강 3대 강 유역에 펼쳐진 30만 정보의 대평원, 그 곡창의 문호인 군산 일대를 오쿠라, 이와사키 등 수많은 토지재벌들이 지배했다. 그들은 땅만 소유한 것이 아니라 고리대금업도 겸했으니,‘허리에 권총 차고, 손에 망원경 든’ 무장상인, 바로 약탈자였다. 폭력적 토지겸병 과정을 보노라면 사무라이 낭인집단의 건들거리는 풍경이 되살아난다. 가령,1904년에 이곳에 들어온 가와사키는 옥구군 서수면 일대를 자신의 향리인 일본 니가타현 모형으로 일본화할 계획을 가지고 온 골수 국수주의자였다. 일본 고향의 지주들을 서수면에 불러들여 농장설치를 권유했는가 하면 서수에는 신사까지 세웠다. 그리하여 가와사키농장이 모체가 된 이엽사농장이 탄생하는데, 이엽사는 전주의 삼례, 익산의 황등, 옥구의 서수면 일대에 논 1000정보, 밭 200정보, 소작인 1700여명을 거느린 대농장주로 군림하게 된다. 이들이 농장을 순찰할 때는 말을 타고, 승마복에 권총까지 찬 채 말채찍을 휘두르며 다녔다고 한다. 봉건시대의 영주와 다를 바 없었다. 그리하여 군산과 옥구·김제 등의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인으로 전락했으며, 일본인 농장에 가족들까지 예속되어 노예 같은 삶을 이어나갔다. 보릿고개 때는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으며, 그 고통을 이겨내지 못해 북간도 허허벌판으로 야반도주하는 사례도 속출했다. 아니면 소작쟁의를 벌여 죽기살기로 저항하는 수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34년 통계를 기준으로 무려 200만섬 이상의 쌀이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됐다.1930년대 일본 농업공황을 계기로 조선은 완전한 일본의 식량 공급기지로 전락했다. 황금쌀은 일본으로 나가고 조선사람들은 만주에서 들여온 콩 같은 잡곡, 일제 말기에는 그것도 모자라 기름 짜고 버린 깻묵으로 연명했다. 일본인들이 끊임없이 수탈을 감행하는 동안 ‘멍청한’ 조선인 지주들은 미두장에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 공인 도박장 격인 미두장에서 실의에 빠진 조선인 지주들과 자본가들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유산과 토지를 탕진했다. 탁류의 정주사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한 쪽에서는 거대한 기선에 수천 섬의 쌀이 실려나가는 동안 다른 한 쪽에서는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이 빈 밥그릇에 멍한 눈길을 주던 곳, 바로 군산이다. ●일본인은 평지 살고 조선인은 산동네 살고 일본인들이 평지에 살고 조선인은 산동네에 얹혀 살았다.‘언덕 비탈에 의지해 오막살이가 생선비늘 같이 들어박힌 개복동 그 중에서도 산꼭대기에 올라앉은 납작한 토담집, 방이라야 안방 하나 건넌방 하나 단 두 개뿐인 것을 명임이네가 도통 5원에 집주인한테서 세를 얻어가지고 건넌방은 먹곰보네한테 2원씩 받고 세를 내주었다.’고 채만식은 묘사했다. 군산은 식민 수탈의 가장 전형적인 공간이었다. 식민공간답게 전통과 근대가 공생하고, 강요된 근대의 기형적 뒤틀림이 강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으로 개항장은 제국주의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관철되는 시험장이었다. 네덜란드가 건설한 바타이유 같은 해양 식민도시처럼 일본이 건설한 목포·군산·마산·원산 등이 그랬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이 곳은 숫자조차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숱하게 징용 나간 이들의 눈물이 넘치던 항구였다는 점이다. 쌀만 수탈당한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수탈당한 곳이다. 해방 직후 군산항에서 노무자들의 퇴직금 요구와 귀화 노무자의 착취에 대한 격렬한 보상요구 투쟁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근자에 다시금 문제가 되고 있는 한·일협정 과정에서의 반민족적인 협상으로 그만 영구 미제사건으로 덮이고 말았다. 재미있는 점은 조선에서 살다가 8·15 후 일본으로 되돌아간 일본인들은 ‘인양자(引揚者)’라며 일본에서도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점이다. 실로 아이로니컬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식민지를 체계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경찰, 군대, 식민 경영기관, 거류민단, 금융기관 등이 필요하다 보니 으레 항구에는 이런 흔적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군산도 예외는 아니어서 당시로서는 거대했을 조선은행 건물, 번듯한 세관건물이 지금도 남아있으니 가히 근대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뒷골목에는 이른바 왜정시대의 적산가옥도 즐비하다. ●방치된 수탈의 흔적들… 박물관 재활용해야 그러나 어쩌랴. 극장식 카바레로 쓰이던 조선은행 건물은 방치돼 있다. 안될 일이다. 식민지 시대를 비판하는 것과 별개로 그 시절의 흔적을 이런 식으로 방치해서야 되겠는가. 식민지의 역사적 교훈을 위해서라도 말끔히 복원하여 박물관이나 자료관 등으로 재활용할 일이다. 군산항의 역할은 일제시대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군산 수용소에는 진남포에서 LST를 타고 내려온 무려 5만여명의 피란민이 수용되었다. 이곳 미군기지와 공군비행장은 전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증명해 준다. 항구는 이처럼 사회변동의 축소판이다. 군산은 더 이상 화려한 곳이 아니다. 서해안시대를 부르짖지만 침체한 경기는 살아날 기미가 없다. 영화롭던 영화동에는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항구는 먼 외곽의 신항으로 밀려났고 토사가 쌓이는 본래의 군산항은 그저 자그마한 배들만 오갈 뿐이다. 예로부터 백제의 도읍지인 부여 길목에 자리잡아 대중국 전진기지였던 천년 역사의 군산은 그렇게 정중동의 움직임만 보이고 있다. 건너편 장항에 오래된 제철소만 남아 옛날의 영화를 증명할 뿐. 개항 100년을 기념하는 백년광장에서 우리는 과연 개항 백년의 기념비적 의미를 제대로 챙기고 있는가 자문하게 된다. 또 좋든 싫든 근대 100년의 음지와 양지를 모두 지닌 군산항의 21세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말로만 서해안시대를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군산 같은 항구에서부터 그 해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 [씨줄날줄] 2月의 명절/김경홍 논설위원

    평양 모란봉 기슭에 있는 금수산기념궁전은 지난 1977년 4월15일 김일성의 65회 생일을 맞아 준공됐다.1989년 시민혁명으로 처형된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이를 보고 대통령궁을 지었다고 한다. 준공 당시는 금수산의사당, 주석궁으로 불리다가 김일성 사망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후 ‘궁전’으로 승격된 것이다. 유럽식 궁전을 본떠 만든 5층 복합 석조건물 앞에는 콘크리트 광장이 조성돼 있는데 그 너비가 415m, 길이가 216m다.‘415’는 김일성의 생일을,‘216’은 김정일의 생일을 상징한다. 기발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은 김정일의 생일인 2월16일부터 김일성의 생일인 4월15일(태양절)까지 두달동안을 축제기간으로 정해놓고 일반인의 혼인식도 자제할 정도다. 북한이 지난주 설날 연휴기간 핵무기 보유 선언으로 세계를 들썩이게 만들더니, 내부적으로는 ‘2월의 명절’로 불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3회 생일준비로 분주하다고 한다. 평양방송은 “장군님은 역사가 일찍 알지 못하는 희세의 위인, 절세의 애국자, 불세출의 영웅”이라면서 “선군정치를 따르는 것은 세계의 흐름”이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중앙TV는 김 위원장이 태어났다는 ‘백두산 밀영’의 기슭에 버들개지가 피었다고 소개하며 2월 평균기온이 영하 25도를 오르내리는 백두산에서 버들개지가 핀 것은 자연의 현상을 초월한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북한이 이렇게 김 위원장을 세계적 지도자로 부각시키고 있는 와중에 미국의 한 잡지는 김 위원장을 세계 최악의 10대 독재자 중 2위로 선정했다. 북한을 압박하고 있는 미국의 한 언론이 김 위원장을 독재자 상위에 랭크했다고 해서 공정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한 숭배 강요, 적대계급으로 분류된 북한주민 3분의1에 대한 차별,25만명의 수용소 감금, 공개처형 등 독재라는 굴레를 씌운 선정 이유는 일리가 있어 보인다. 남의 명절이나 생일, 축제에 재를 뿌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북한의 핵무기 협박이나, 봉건왕조 시대에도 없던 개인숭배 현상을 보면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북한이 특수한 국가라는 것만으로는 체증이 가시지 않는다. 김경홍 논설위원 honk@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