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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년 4700명 납치 강제수용소…‘선감학원’ 특별법 제정되나

    소년 4700명 납치 강제수용소…‘선감학원’ 특별법 제정되나

    19일 국회 의원회관서 토론회“아홉 살 때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시장 구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경찰관이 우리를 부르더니 강제로 버스에 태워 선착장에 갔습니다. 그날부터 선감도에서 9년간 아우슈비츠 같은 강제 수용소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소년 수용소’ 선감학원 피해생존자 이대준씨의 증언이다. 이씨는 1967년 납치돼 선감학원에 수용된 뒤 1975년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10살 안팎의 아이들이 하루 종일 밭이나 염전에서 쉬지 않고 일했다”면서 “매질을 당해 죽은 아이, 탈출하다 죽은 아이들도 허다했다”고 밝혔다. 18일 경기도선감학원아동피해대책협의회 등에 따르면 오는 19일 오후 2시 국회 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4600여명의 소년들이 강제 수용돼 고통 받았던 선감학원의 인권피해 진상규명 및 피해자 지원 대책 마련 토론회가 열린다. 권미혁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경기도선감학원아동피해대책협의회 등이 공동주최하는 이번 토론회는 선감학원 피해생존자가 증언하는 1부와 대책을 논의하는 2부로 구성된다. 하금철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과정,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 소장, 안경호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 등이 토론자로 나서 정부와 국회에 선감학원 사건 해결을 촉구할 예정이다. 하금철 연구원은 사전 공개한 토론문에서 “정부 기관은 적극적으로 관련 자료를 확보해 책임자 조사가 가능하도록 촉진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시민사회에도 강제수용 피해자와 함께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할 정치적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이 경기도 안산 선감도에 세운 소년 감화 시설이다. 해방 이후 경기도가 인수해 1955년부터 1982년까지 국가 부랑아 정책에 따라 강제 수용소로 직접 운영했다. 경기도는 당초 선감학원 운영에 대해 “부랑아 수용 및 교육이 목적”이라고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정확한 신원 확인 없이 아동을 데려와 강제노역과 학대를 자행한 것으로 드러났다.경기도에 따르면 관련법이 부재한 탓에 선감학원이 폐쇄된지 37년이 지났지만 보상은커녕 정확한 피해 규모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경기도의회 진상조사위원회와 국가인권위원회 차원에서 개략적인 조사만 이뤄졌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발간한 ‘선감학원 아동인권침해사건 보고서’에 따르면 4691명의 아동이 복장이 남루하거나 행동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선감학원에 강제 수용됐다. 이들은 염전, 농사, 축산, 양잠, 석화 양식 등 노역에 동원됐다. 수용아동의 41%가 8~13세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에게는 식사가 제대로 제공되지 않아 야생 열매와 곤충, 쥐 등을 잡아먹고 지낸 것으로 파악됐다. 한편 경기도의회는 2017년 ‘선감학원 특별법’ 제정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켰지만 국회에서는 논의되지 못했다. 과거사 문제를 다루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진화위법)도 현재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한 채 계류된 상태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돈 되는 혐한…日 출판업계 도 넘는 혐한

    돈 되는 혐한…日 출판업계 도 넘는 혐한

    ‘한반도 지옥’ ‘새빨간 한국’ ‘망상대국’ 대국민 선전구호 같은 원색적 제목들 日대표 출판사까지도 혐한 대열 합류 업계 ‘뭐든지 팔리면 만든다’ 인식 확산 최소한의 책임의식 버리고 판매 혈안 잘 팔리는 책에 혐한서적 끼워팔기도 50대 이상 안정적 독자층이 ‘황금어장’ 한국인 필자 내세워 신빙성 높이기도 뿌리 깊은 한국 차별·우월의식도 작용‘한반도는 왜 항상 지옥이 반복되는 것일까’, ‘새빨간 한국: 김정은에 조종되는 친북정권의 절망적 내막’, ‘숨 쉬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는 한국’, ‘망상대국 한국을 비웃다’. 일본의 대다수 서점에서는 보편적 상식에 비춰 볼 때 “이런 제목으로, 이런 내용의 책을 만들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혐한서적’들이 자극적인 색깔로 치장한 채 주요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서점이나 편의점 입구 진열대에 꽂혀 있는 주간지, 월간지의 한국과 한국 대통령에 대한 원색적 비난은 마치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의 대국민 선전 구호를 방불케 한다. 일본 출판계의 고질적인 혐한 선동이 한일 갈등 국면에 편승해 더욱 볼썽사납게 확대, 심화되고 있다. “출판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심도, 책임의식도 던져 버리고 오직 판매량에만 혈안이 돼 벌거벗고 달려드는 형국입니다. 일본의 출판 수준이 이렇게까지 저열하게 떨어진 적은 없었는데, 정말 수치스러울 정도입니다.” 서울 특파원 경력이 있는 40대 일본 신문기자는 9일 이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가 특히 우려하는 것은 최근 들어 기존의 우익 성향 출판사뿐 아니라 일본을 대표하는 곳까지 혐한 대열에 뛰어들며 전체 독자 저변을 넓히고 있다는 점이다.켄트 길버트라는 일본 거주 미국인 변호사가 2017년 출간해 50만부가량 판매된 ‘유교에 지배된 중국인과 한국인의 비극’은 일본 최대 출판사인 고단샤에서 나왔다. 매출만 아니라 독자 선호도에서도 최상위인 고단샤 같은 곳에서 이런 책들이 나오면 혐한을 몰랐던 사람에게는 ‘믿음’을, 혐한에 경도돼 있는 사람에게는 ‘확신’을 심어 주기 마련이다. 길버트 본인이 쓴 것인지에 대해서조차 의문이 많은 이 치졸한 내용의 책이 대히트를 기록한 데는 “고단샤에서 나왔으니까 산다”는 독자들의 심리가 크게 작용했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주간지, 월간지들도 혐한 선동가들을 끌어모아 왜곡되고 날조된 글들을 ‘기사’나 ‘기고’ 형태로 내보내는 데 더욱 열을 올리고 있다. 여기에도 주류 출판사들의 합류가 두드러진다. 최근 ‘한국 따위 필요 없다’라는 특집기사를 실어 물의를 빚자 마지못해 사과했던 ‘주간 포스트’도 일본 내 ‘톱5’에 드는 쇼가쿠칸에서 나온 것이었다. 기존 혐한 사업자들의 전략도 한층 교묘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수법이 한국인 필자들을 내세우는 것이다. ‘한국 사람조차 저렇게 말할 정도’라는 이미지를 통해 주장의 신빙성을 높이려는 속셈이다. 유명한 혐한잡지 ‘하나다’는 최신 10월호에서 ‘한국이라는 병’ 기획특집 아래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고문의 ‘한국 옥중수기: 문재인의 정치범 수용소’와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의 ‘문재인의 반일로 한국은 멸망해 버린다’를 실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반일’, ‘친북’을 집중 부각시키는 행위다. 이를테면 ‘하나다’ 10월호에 실린 ‘특종: 문재인에 조선노동당 비밀당원 의혹’ 같은 따위의 글들이다.일본에서 ‘혐한’이라는 개념이 미디어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92년이었다. 이후 관련 서적들이 하나둘 출간되고 언론들이 이에 대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관심 있게 보도를 이어 가면서 하나의 카테고리로 굳어졌다. 2005년 출간돼 순식간에 30만부가 팔린 ‘만화 혐한류’는 혐한서적 붐을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이 만화책은 ‘객관성을 유지할 것’(가장할 것), ‘알기 쉽게 쓸 것’이라는 혐한서적의 2대 원칙을 수립했다는 평까지 받았다. 혐한 경쟁 속에 ‘매한’(韓·어리석음), ‘증한’(憎韓·증오), ‘정한’(征韓·정복), ‘치한’(恥韓·수치), ‘붕한’(崩韓·붕괴) 등 파생어들이 속속 등장했다. 2012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혐한 열기가 달아오른 가운데 2014년 등장한 ‘한국인에 의한 치한론’은 혐한서적 붐을 재점화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신시아 리’라는 자칭 한국인이 쓴 이 책은 예약 주문이 쇄도해 발매도 되기 전에 이미 증판이 결정됐고 나온 지 3주 만에 10만부 이상이 팔렸다.출판사들이 혐한 소재에 눈을 돌리는 것은 한번 찍어 내기만 하면 몇 배의 수익을 올려 주는 ‘황금어장’으로 보기 때문이다. 주된 독자층은 어느 정도의 안정적 기반을 갖고 있는 50대 이상으로 추정된다. 30여년간 한국과 관계를 맺어 온 사와다 가쓰미 마이니치신문 외신부장은 최근 칼럼에서 “1980년대까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인상은 ‘군사정권’이라는 부정적인 것이었는데, 이러한 ‘옛날 한국’의 이미지가 영향을 주는 듯하다”며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작고 약했던 한국이 우리가 주춤하는 사이 따라와 주제넘은 말을 한다는 등의 인식이 혐한으로 이어진 것 아닌가 한다”고 밝혔다. 혐한서적 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90년대 이후 지속되고 있는 일본 출판업계의 불황이다. 생존이 어렵다 보니 ‘뭐든지 팔리기만 하면 만든다’는 풍조가 업계에 확산돼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됐던 ‘주간 포스트’도 한때 동종 1위 잡지였다. 그러나 발행 부수가 급격히 줄면서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게 됐다는 평을 받고 있다. 많은 출판사가 서적 제작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편집 대행업자라는 영세 사업자들에게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에 맞춰 납품할 것을 요구하는 하청 관행도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 대행업자들은 계속 일감을 확보하기 위해 비판의식, 책임의식은 뒷전으로 한 채 출판사의 무리한 주문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 ‘유능한 혐한 이야기꾼’을 찾게 된다. 혐한단체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모임’(재특회)의 창설자로 2015년 ‘대혐한시대’를 쓴 사쿠라이 마코토 같은 인물도 이런 식으로 발굴된 경우다.이러한 ‘혐한 하청공장’ 제작 관행은 지난 4월 마이니치신문에 실렸던 전직 혐한서적 편집 대행업체 직원(30)의 고백을 보면 잘 나타난다. 주요 부분을 요약하면 이렇다. “2015년 중견 출판사로부터 ‘일본을 비판하는 세계 각국의 주장’에 대해 책을 써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극심한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던 사장과 나는 당시 ‘무슨 일이 됐든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나는 한국·중국의 반일 정서, 미국의 일본 때리기뿐 아니라 일본의 고래잡이를 비판하는 국제환경단체까지 아우르는 집필 기획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출판사 측은 대번에 ‘다른 나라는 빼고 한국으로만 가자’고 했다. 그 출판사는 당시 혐한서적들로 상당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나는 혐한서적 제작의 기계가 됐다. 많게는 한 달에 2건씩도 썼다. 일감이 너무 밀려 일주일에 4일을 회사에서 잘 때도 있었지만, 그때는 너무나 신바람이 나서 일했다. 출판사 납기일이 빠듯해 취재는 불가능했고 연합뉴스, 조선일보 등의 일본어판 중에서 일본을 비판한 부분만 뽑아내 집필에 이용했다.” 잘 팔리는 책에 혐한서적을 끼워팔기식으로 억지로 밀어 넣어 서점에 납품하는 일부 출판사의 횡포도 서점들이 혐한서적을 주요 공간에 진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이유다. 일본 출판계의 혐한 붐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의식과 우월의식 및 한국에 대한 견제심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아시아 최강대국이 중국으로 바뀐 상황에서 한국에 대한 공격을 통해 일본인들의 상실감을 달래고 쾌감을 주려는 목적도 크다. ‘만화 혐한류’로 대박을 낸 다카라지마샤는 ‘보수층과 한국에 비판적인 사람들의 울분을 달랜다는 것’을 제작의 철칙으로 삼고 있다. 일본 언론에 대한 불만도 이유로 든다. ‘만화 혐한류’의 저자 야마노 샤린은 “혐한류는 한국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한국에 대한 비판을 터부시하는 일본의 보도 풍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라며 일본 미디어의 한국에 ‘과도하게 우호적인 시각’이 동기가 됐다고 말하고 있다. 1923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논픽션 작가 가토 나오키는 “일본에는 혐한도 있고 혐중 정서도 있지만 과거 식민 지배 등 경험이 있는 한국에 대한 시선이 중국보다 훨씬 더 차별적”이라며 “현재의 혐한 분위기는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량 학살을 낳았던 유언비어의 현대판”이라고 말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 9·11 테러 ‘관타나모 5인‘ 2021년 1월에 재판 시작 왜 이제야?

    9·11 테러 ‘관타나모 5인‘ 2021년 1월에 재판 시작 왜 이제야?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일이다. 2001년 9·11 테러를 주도했던 ‘관타나모 5인’이 오는 2021년 1월 11일 정식 군사재판에 들어간다고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가 30일(현지시간) 보도했기 때문이다. 21세기 들어서자마자 벌어진 참사에 대한 첫 정식 재판이 20년 가까이 지나서야 시작된다. 테러 주범으로 알려진 알카에다의 전 작전사령관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를 비롯해 용의자 5명은 미군 해군기지인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돼 있는데 이제야 군사법원은 이들에 대한 정식 공판 일정을 처음으로 확정했다. 재판 일정이 확정됨에 따라 군사법원은 12명으로 구성되는 배심원단 선정에 들어갈 예정인데 아홉 달 가량 걸릴 것으로 보인다. 재판은 관타나모 특별군사법정에서 진행되며, 최고 사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이들 5명의 용의자는 2002~2003년 파키스탄에서 체포됐다. 특히 칼리드 셰이크모하메드는 2008년 관타나모 군사법정에 설 예정이었다. 그를 비롯해 5명을 기소하는 방안이 추진됐다.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는 기꺼이 순교할 자세가 돼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2009년 관타나모 수용소의 폐쇄를 약속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뉴욕 연방법원에서 재판을 진행하는 방안이 추진됐지만, 정치적 논란 속에 차일피일 미뤄졌다고 뉴욕타임스는 설명했다. 그리고 2011년 다시 관타나모 특별군사법정에 세우는 쪽으로 결론이 났고, 지난 2012년 6월에야 정식 기소됐는데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시절 기소를 추진했을 때의 혐의와 거의 달라진 게 없었다. 그 뒤 30차례 이상의 재판 전 심리(Pretrial Hearing)를 진행한 바 있다.미국 국방부는 이전에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가 9·11 테러의 “A부터 Z까지” 책임이 있음을 실토했다고 밝혔다. 또 미국 검찰은 그가 2002년 인도네시아 발리 나이트클럽 폭탄 공격,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 미국 언론이 다니엘 펄 살해, 2001년 신발 폭탄을 이용해 항공기를 날려버릴 시도가 미수에 그친 것 등 다수의 공격을 기획했다고 인정했다고 밝혔다. 피고인들의 변호인단은 2006년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피고들이 했던 자백을 증거로 제출하는 일을 막는 데 매달려왔다. 구금 기간 거친 심문을 통해 얻어낸 자백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는 관타나모에서 반복적으로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문서에 따르면 그는 물고문을 183차례나 당한 것으로 나와 있다. 다른 네 명, 왈리드 빈 아타시, 람지 빈 알시브, 아마르 알발루치, 무스타파 알하우사위 등도 미군에 인도되기 전에 CIA가 해외에서 운영하는 감옥, 일명 ‘블랙 사이트’들에서 심문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땅굴 속에서 숨어 생활… 지뢰 폭발로 전사한 친구 잊지 못해”

    “땅굴 속에서 숨어 생활… 지뢰 폭발로 전사한 친구 잊지 못해”

    노영남 인터뷰 일시 1998년 2월 16일 장소 인천학생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규원 치과 3층) 대담 이경종(인천학생 6·25 참전관 설립자) 이규원(치과원장 / 이경종 큰아들)6·25 사변과 우리 가족의 수난 내가 인천송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인천공업중학교 5학년 재학 중일 때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 당시 내가 살던 동네는 동구 화수동이었으며 그때 우리 형님이 인천경찰서 사찰계 형사로 있었는데 6·25사변이 일어나고 인천이 북한 공산 괴뢰군에 점령당했을 때 우리 집은 경찰 가족으로 감시 대상이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 나하고 아래 윗집에 붙어서 살았던 그림 잘 그리는 인천중학교 5학년인 이흥주와 같이 강화도로 피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화도도 지방 빨갱이들의 득세로 그곳에서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인천 집으로 돌아와 그때 친구들이 파 놓은 땅굴 속에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땅굴 속에서 9·15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복될 때까지 무사히 넘기고 햇빛을 보게 되었다.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으로부터 해방된 나와 친구들(임경선, 이희중, 노영남, 이광용, 이덕준, 이기한 등)은 인천 동구 지역에서 인천학도치안대(후에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지대장 : 류문길)를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가 인천축현국민학교에서 남쪽으로 출발할 때 같이 따라서 남하(南下)하였다. 인천학도의용대를 따라서 남하 이때 안양을 거쳐서 수원까지 걸어갔다. 수원에서부터는 각자 개인행동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였으며 그때 나는 친구들(임경선, 이희중, 이광용, 이덕준, 이기한 등)과 기차 곳간 차 지붕 위로 올라앉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몇 날 며칠을 고생하며 내려가다 들으니까 우리들의 마지막 행선지가 경상남도 아래 끝 통영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여러 날을 곳간차 위에서만 추위를 견디려니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와 친구들은 경상북도 청도역까지 와서는 일단 곳간차에서 내려 남쪽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걸으면서 통영 가는 길을 물으니까 통영으로 직접 가는 길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청도에서 부산으로 내려간 대원들도 있었다. 내려가는 도중에는 남기라는 곳도 경유하게 되었는데 남기는 땅콩이 많이 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남기를 거쳐서 통영에 도착한 나와 우리 친구들(임경선, 이희중, 노영남, 이광용, 이덕준, 이기한 등)은 통영충렬국민학교에 수용하게 되었다.통영의 국민방위군 수용소에서 국민방위군 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경계가 심해 바깥출입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수용소에서 주는 식사는 날 김에 뭉친 주먹만한 밥 한 덩어리에 소금을 얹어주면 그것이 한 끼 식사였다. 그 당시 수용소 울타리는 철조망이 처져 있었으며 그 철조망 바깥에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우리들을 상대로 김밥을 팔려는 장사꾼들이 많았으며 그 김밥을 사 먹으려는 수용소 안의 우리들과 수용소 경비 간에는 실랑이도 많았다. 마산에서 해병 6기 신병 모집에 지원하여 합격 이렇게 수용소 생활을 하는 중에도 인천에서 같이 떠난 학도의용대원들은 계속 수용소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수용소에 들어오는 한 대원이 하는 말이 “지금 마산에서 해병대모집을 하고 있다.”라는 것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친구가 하는 말이 “해병대는 세라복도 입는 아주 멋진 군인인데 우리 해병대로 가자.”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 친구와 같이 4명이 방위군수용소를 탈출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단 수용소를 탈출한 우리들은 통영 부두까지 나와 마산 가는 배를 타려고 동정을 살피니까 배는 아침 9시에 출발한다는데 부두 근방에는 이미 방위군들이 수용소에서 탈출해 온 우리들을 잡으려고 순찰을 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는 다른 탈출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몸을 숨기고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9시가 되어 배가 막 고동을 울리며 떠나려고 할 때 숨고 있던 장소에서 막 뛰어 배에 올라타 통영을 무사히 빠져나왔다.해병대 5기 입대 통영을 빠져나와서 마산항에 도착한 우리들은 해병대 모집 장소인 어느 국민학교에 들어갔는데, 인천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들은 그곳에서 신체검사 받고 진해로 가서 해병대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교육이 끝나고 나는 다시 포병학교에 입교해 6개월 교육받고 해병대 포병이 되었다. 이후 나는 해병 1연대 3포대 소속으로 서부전선 장단전투 등 각종 전투에 참전한 후 1955년 11월에 만기 명예제대했다.전사한 친구 임경선(군번 : 9210577) 임경선은 나하고 친하게 지냈으며 같은 부대에서 복무했다. 하루는 부대 전방에서 ‘펑’ 하고 무슨 폭발물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나는 바깥에 얼른 나가 알아보았더니 지뢰가 터졌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전방 OP(관측소)에 있었다. 조금 있으려니까 누군가가 죽었다 하더니 좀 있으려니까 미공군 헬리콥터가 와서 실어 나르는 것이었다. 그때 임경선이 그 지뢰 폭발로 전사했는데 임경선은 그 지뢰로 몸체가 흩어지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던 것이었다. 그때 내가 있던 관측소와 사고지점과의 거리는 불과 100m 거리였다. 임경선은 키가 크고 얼굴이 잘생겼으며 나하고 친하게 지낸 사이이며 사고가 난 이후 지금까지 임경선 생각이 떠난 날이 없었다. 꽃다운 나이에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간 내 친구 임경선! 부디 편안히 지내기를 빌 뿐이다. 1933년 중구 전동 336번지에서 태어난 임 경선(林景善)은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소속으로 호국활동을 하다가, 인천영화중학교 4학년생으로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해병 6기에 자원입대하여 해병 제1 포병대대 3중대 소속으로 1952년 3월 31일 포병대 근무 중 지뢰 폭발로 전사하였다. (묘지 : 동작동 국립묘지 서16-971) 글 사진 제공 :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관 노영남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 소속 ▲해병 5기 입대 (군번 : 9210583) 1933년 12월 4일 인천 중구 전동 출생 1950년 9월 18일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천학도의용대 북구지대를 창립하고 호국활동 1950년 12월 18일 인천축현국민학교를 출발 1951년 1월 24일 마산에서 인천공업중학교 5학년 재학중에 해병 5기로 지원입대하여 해병대 포병으로 참전 1955년 11월 17일 입대 4년 10개월만에 만기 제대
  • 의사들이 아직도 나치 해부학 도해 들여다보며 수술한다고?

    의사들이 아직도 나치 해부학 도해 들여다보며 수술한다고?

    미국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워싱턴 대학의 신경외과 전문의 수전 매킨넌은 수술할 때면 20세기 중반에 나온 해부학 도해서를 펼쳐든다. 인간의 몸을 낱낱이 묘사한 그림들이 너무 상세하고 컬러풀하게 표현돼 있어 수술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받고 있다. 책의 제목은 단조롭게만 들리는 페른코프의 인간 해부학 도해다. 보통 페른코프 해부학 도해로 불린다. 이제는 더 이상 인쇄되지 않아 중고 세트 여러 권이 온라인에서 몇천 파운드에 팔린다. 워낙 희귀하긴 하지만 일부 클리닉이나 도서관, 자택 서재에 꽂아 놓고 자랑하는 책이기도 하다.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도 몇 권이 꽂혀 있다. 이 책은 독일 나치 정권이 살해한 시신 수백 구를 검시해 얻어낸 결과들을 모아낸 책이라고 영국 BBC가 19일 전했다. 어두운 과거로 얼룩진 책이기도 하고, 일부 과학자들은 이 책을 들춰보면서 도덕적 딜레마와 씨름하기도 한다. 매킨넌 박사는 이 책의 기원에 대해 불편하지 않다면서도 이 책을 이용하는 것은 “윤리적인 수술의 결정적인 역할을 차지한다. 이 책이 없으면 내 직업을 제대로 해낼 수도 없다”고 털어놓았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며 건강법을 전공한 랍비 조지프 폴락은 “생생한 악을 담고 있지만 좋은 일에 많이 쓰이는 ‘도덕적 수수께끼’로 믿는다”고 밝혔다.책의 저자 에두아르드 페른코프는 유명한 나치 당원이었으며 20년 동안 연구한 결과를 책에 담았다. 나치를 앞장서 찬양해 오스트리아 의학계에서도 상당한 지위를 누렸다. 동료들은 그를 “바지런한” 민족사회주의자로 1938년부터는 매일 나치 유니폼을 입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빈 대학 의대 학장이 된 다음 처음 한 일은 유대인 멤버들을 가려내 해고하는 일이었다. 1939년 제3제국 헌법이 통과돼 모든 처형된 죄수들의 몸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게 되자 연구와 강의에 쓰도록 시신들을 옮겼다. 페른코프가 하루 18시간 주검들을 해체하면 화가 팀이 이미지를 그렸다. 이곳 해부학 시설이 가득 차면 처형이 미뤄질 정도로 나치와의 협력은 긴밀했다. 하버드 의대의 사비네 힐데브란트 박사는 이 책에 나오는 800점의 그림 가운데 절반은 정치범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면서 게이나 레즈비언, 집시, 정치적 반대자와 유대인들이었다고 말했다. 1937년 출간된 초판에는 일러스트레이터 에리히 르피에르와 카를 엔트레서의 서명이 스바스티카(나치 卍字)와 나치 친위대(SS)의 쌍둥이 번개 치는 그림과 함께 들어가 있다. 1964년 두 권 분량의 영어판이 출간됐는데 그마저 나치 문양들이 들어가 있었다가 나중에 쇄를 거듭하면서 나치 표식을 지웠다. 세계적으로 몇천 권이 팔렸으며 다섯 언어로 옮겨졌다. 1990년대에야 학생들과 학계에서 이 도해서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의문이 제기됐고 잔인한 역사가 알려진 1994년 이후 절판됐다. 왕립 외과학회는 영국에서는 사용되지 않지만 도서관 등에서는 역사적 목적 때문에 수집해 보관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뉴로서저리(Nurosurgery) 설문 결과 신경외과 의사의 59%는 이 책을 알고 있으며 13%는 이 책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고 답했다. 또 69%는 이 책의 역사를 알고서도 편안하게 쓰고 있다고 답했다. 15%는 거북했다고 설명한 반면 17%는 어느 한 쪽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지난해 랍비 폴락과 의학사 연구자인 마이클 그로딘 교수는 매킨넌이 도해서를 이용하는 행위가 윤리적으로 온당한지를 판단했는데 유대 기관들도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림들을 활용하는 행위에 대해 도해서의 역사를 알고 쓰는 것이라면 괜찮다고 손을 들어줬다. 페른코프는 어떻게 됐을까? 전후 체포돼 학교에서 해고됐다.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3년 감금됐는데 어떤 범죄로도 기소되지 않았다. 석방된 뒤 대학에 복직해 도해서 제작을 계속해 1952년 3판을 내놓았다. 1955년 세상을 떠났는데 4판 출판을 앞둔 시점이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나치수용소 경비였던 92세 노인도 단죄, ‘액세서리 이론’이란?

    나치수용소 경비였던 92세 노인도 단죄, ‘액세서리 이론’이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만행을 단죄하겠다는 독일 사법부의 노력은 70여 성상(星霜)이 지나도 변치 않는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경비를 섰던 92세 남성이 가을에 전범으로 재판을 받는다고 함부르크 법원 대변인이 8일(현지시간) 밝혔다. AP통신에 따르면 나치 친위대원이었던 브루노 데이는 열일곱 살이던 1944년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폴란드의 그단스크(당시는 단치히) 근처에 세워진 슈투트호프 강제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복무했다. 이곳에서 6만 5000여 명의 유대인을 비롯해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진압 때 검거된 레지스탕스 대원 등이 목숨을 잃었다. 데이는 특정인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5230명의 살해에 ‘액세서리처럼’ 있었고, 탈출을 막아 결과적으로 학살을 막지 못한 혐의로 기소됐다. 카이 반트첸 대변인은 “경비란 강제수용소가 기능하는 데 필요한 존재였다. 그리고 수용소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지어졌다”고 강조했다. 지난 4월 그가 기소됐을 때 검찰은 피고인을 “살인 기계의 자그마한 바퀴였다”고 표현했다. 데이의 변호인은 AP의 답변 요구에 응하지 않았지만 반트첸 대변인은 그가 수용소에 근무한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고 했다. 당시 나이를 감안해 소년법정에서 재판을 받으며 유죄가 인정되면 6개월~10년형이 선고될 수 있다. 이처럼 독일 사법부는 유대인 학살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강제수용소 경비 등에 대해서도 학살 방조 혐의를 폭넓게 적용해 기소해왔다. 이 때문에 데이는 그나마 최근 기소된 전범 가운데 가장 나이 어린 축에 속한다. 지난해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일했던 요한 레보겐이 묀스터 법정에 지팡이를 짚고 출두했는데 94세였다. 심리 몇 주 만에 졸도해 심장과 신장 문제로 입원하는 바람에 재판이 중단됐다. 그 뒤에도 프랑크푸르트 법원이 마즈다네크 수용소 경비를 고령을 이유로 재판에 세우면 안된다고 판결했는데 당시 97세였다. 2017년 12월에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회계원으로 일한 전 나치 친위대원이 징역 4년형을 선고받은 일이 있다. 데이는 레보겐 재판에도 증인으로 소환되는데 일주일에 두 차례, 하루 2시간만 법정에 있도록 배려를 받는다. 레보겐 재판은 아유슈비츠나 마즈다넥, 소비보르처럼 학살을 직접 자행한 수용소가 아니고 단지 임시로 가두는 곳이었던 스튜트호프 수용소에 처음 액세서리 이론을 적용한다는 의미가 있다. 액세서리 이론은 2011년 미국 오하이오주의 자동차 직공인 존 데먄죽을 단죄했을 때 처음 적용해 유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데먄죽은 항소했으나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사망했다. 2015년에도 아우슈비츠 경비였던 오스카르 그로에닝을 기소했을 때 같은 이론을 폈고, 연방 법원은 전례를 좇아 그로에닝의 유죄를 인정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獨, 74년 추적 끝에 92세 나치수용소 경비원 법정에 세워

    獨, 74년 추적 끝에 92세 나치수용소 경비원 법정에 세워

    역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영토 도발을 일삼는 일본 아베 정부와 달리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경비를 섰던 92세 남성이 독일 사법당국의 오랜 추적 끝에 74년 만에 ‘전범’ 재판을 받게 됐다. 8일(현지시간) dpa 통신에 따르면 전 나치 친위대원인 이 남성은 1944년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현재 폴란드의 그단스크 인근에 세워진 슈투트호프 강제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복무했다. 이 강제수용소에서는 6만 5000여명의 유대인 등이 나치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전해졌다. 전 나치 친위대원은 당시 5000명 이상의 유대인 학살을 도운 혐의로 함부르크 법정에 설 예정이라고 법원 대변인이 밝혔다. 독일 사법당국은 유대인 학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강제수용소 경비원 등에 대해서도 학살 방조 혐의 등으로 법정에 세워왔다. 지난해에도 전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복무한 90대 중반의 남성이 법정에 섰다. 2017년 12월에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회계원으로 복무한 전 나치 친위대원이 징역 4년형을 최종 선고받았다.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일제가 남긴 ‘알뜨르’ 軍시설·상처 입은 오름… 기억하겠습니다

    일제가 남긴 ‘알뜨르’ 軍시설·상처 입은 오름… 기억하겠습니다

    조선을 강제 합병한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다. 뒤이어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한반도를 군수기지화해 무자비한 수탈을 감행한다. 조선 청년 40만명이 징병으로, 72만명은 징용으로 끌려가 이역만리에서 죽거나 죽을 고생을 했다. 특히 제주도는 육지가 당한 수탈에 더해 중국 침략의 전초기지로, 일본 본토 방어의 최전선으로 이중 삼중의 피해를 입게 됐다.●육중한 콘크리트 구조물에 띠 입혀 위장한 비행기 격납고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넓은 감자밭에 수십 개의 풀무덤들이 작은 오름과 같이 펼쳐져 있다. 자세히 보면 육중한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띠를 입혀 위장한 비행기 격납고들이다. 그 옆에 마련된 넓은 벌판은 과거 활주로의 흔적이다. ‘아래 펼쳐진 벌판’이라는 뜻의 ‘알뜨르’ 비행장은 1937년 당시 중국의 수도 난징을 폭격하기 위한 징검다리였다. 난징 폭격은 일본 나가사키현에 기지를 둔 오무라항공대가 담당했다. 나가사키에서 이륙한 항공대는 난징을 폭격하고 알뜨르에 착륙, 연료와 폭탄을 보충해 이튿날 다시 난징을 폭격한 후 나가사키로 귀환했다. 총 36회 출격, 300여t의 폭탄을 투하해 난징의 도시 시설 89%를 파괴했다. 폭격에 뒤이어 진주한 일본 육군은 30만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8만명의 여성들을 강간했다. 아직도 중일 간에 해결이 안 된 ‘난징대학살’이다. 1941년 일제는 하와이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을 도발했다. 초기에는 우세했지만 곧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반격에 밀리게 된다. 1944년 4월, 80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미군은 오키나와를 함락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 1만 5000명, 일본군 6만 5000명이 전사하고 섬 주민 20만여명 중 12만명이 사망했다. 그해 11월부터 대대적인 일본 본토 공습이 시작됐다. 미군의 이른바 ‘몰락작전’의 시작이었다. 이 작전은 공습으로 일제를 무력화한 후 일본 규슈와 혼슈를 차례로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이에 대응해 일제는 전원 죽음으로 본토를 수호한다는 ‘결○호작전’을 펼친다. 일본 본토를 1호부터 6호까지 나누어 방어하고 7호는 제주도가 맡는다는 내용이다. 일제는 미군이 곧 제주도에 상륙하리라 예상했고, 제주도를 본토 방어의 최전선으로 삼았다. 제주도는 이른바 ‘결7호작전’의 작전지가 돼 군사시설을 건설하는 대대적인 노역에 시달린다. 알뜨르 외에도 여러 곳에 군사비행장을 만들고 훈련장과 포대, 대피소, 특공대 기지 등을 섬 전체에 건설했다. 대부분의 군사시설은 지하로 파들어 간 진지동굴이었는데, 제주도 내 총 360여개의 오름 중 160여개에 지하 진지를 구축했다. 58군 사령부 예하에 5개 사단, 보병 5만 8000명, 포병과 기갑부대 1만 6000명이 주둔했다. 이는 한반도 전체에 주둔한 군대보다 많은 숫자이며 10만명이 주둔했던 오키나와에 육박하는 규모였다.●모슬포 마을 주민 5000여명 강제 동원해 격납고 38개 지어 알뜨르비행장이 있는 모슬포 일대는 결7호작전의 핵심지역이었다. 비행장은 1944년부터 활주로를 늘리는 등 대대적으로 확장했고 이때 지은 격납고 38개 중 20개가 잔존하고 있다. 매일 주민 5000여명을 강제 노역에 동원한 결과였다. 격납고는 폭 10m, 길이 20m, 높이 4m의 반원통형 구조로, 전투기에 꽉 끼는 옷과 같은 최소한의 크기이다. 30~80㎝ 두께의 매우 견고한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서, 공중 관측을 피하기 위해 지붕에 풀을 덮어 위장했다. 여기에 숨긴 전투기는 일본의 주력인 제로센이었다. 제로센은 기체의 무게를 과감하게 줄여서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었고 개전 초기에 우수한 전과를 거두었다.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은 무게를 줄이기 위해 저출력 경량엔진을 장착하고 보호용 장갑판을 제거했다. 그래서 민첩함은 얻었으나 속도가 느려 쉽게 노출되고 적기의 공격에 취약한 문제가 있었다. 전쟁 말기에는 급기야 자살특공대인 가미카제의 운송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알뜨르의 격납고들은 모두 가미카제 특공대를 위한 위장 보호시설이었다.격납고 인근에 지하 벙커가 남아 있다. 터널같이 긴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고 그 위에 3~5m 두께의 잡석들을 쌓아 인공 둔덕을 만들었다. 풀을 심은 둔덕은 얼핏 동산같이 보이지만 벙커 내부는 수십 명이 너끈히 들어가 작전을 펼 수 있다. 환기용 굴뚝과 배수로, 별도의 설비관로까지 설치한 모습으로 보아 아마도 중요한 통신시설로 쓰인 듯하다. 활주로 반대 송악산 쪽으로 3개의 작은 오름이 연달아 있는데 이를 통틀어 셋알오름이라 부른다. 이 오름 정상부에는 고사포진지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땅을 파고 지름 6m의 원통형 콘크리트 진지를 구축했다. 원통의 중심부에 고사포를 설치해 360도 회전하며 적기를 공격할 수 있었다. 현재 포좌는 없어지고 원통부만 남아 하늘에서 보면 마치 숲속에 뚫린 원형탈모 상흔과 같다. 모두 5기를 배치했는데 하나는 미완성이며 2기는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인근 송악산의 원래 이름은 ‘절울이오름’으로 ‘물결이 우는 소리를 듣는 오름’이란 뜻이었다. 바다 위에 솟은 대단한 절경이지만 60여기의 일제 동굴진지가 여기저기 뚫린 상처 입은 오름이다. 화순포구 쪽에서 보면 인공적으로 뚫은 해안동굴들이 절경을 훼손하고 있다. 총 15기의 해안동굴에는 1인용 모터보트들을 주둔시켰는데, 선두에 250㎏의 폭약을 싣고 적함에 돌진해 자폭하는 특공함이었다. 합판으로 선체를 만들고 자동차 엔진을 달았다니 애초부터 돌아오지 못하는 1회용 자살함정이었다. 하늘에 가미카제가 있었다면, 바다에는 인간어뢰라고 불린 가이텐 특공대가 있었다. 모두 나 죽고 너 죽자 식의 무모한 전술이며 최후 발악의 광기였다.●“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다시 반복된다”… 다시 봐야 할 이유 전쟁은 건축을 파괴하지만, 그래도 군사용 시설은 건설된다. 1940년대 제주에 남겨진 알뜨르비행장의 격납고나 지하 벙커, 고사포진지, 해안동굴 진지들은 여러 감상을 불러온다. ‘이 땅과 민족을 희생시켜 일본의 영토를 지킨다?’ 일제에 분노가 치밀지만 이 지경까지 당하게 된 역사적 수치심이 앞선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다시 반복된다.” 이 수치 유산들을 둘러보고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왜 이 땅에 이런 것들이 세워졌으며 어쩌다 그러한 역사에 처하게 됐는가. 어두운 체험과 불쾌한 사유의 여정을 일컬어 다크 투어리즘이라 한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그 대표적인 성공(?) 사례이다. 제주의 일제군사시설은 거의 다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인장력(당기는 힘)에 강한 철근과 압축력(누르는 힘)에 강한 콘크리트를 합쳐 천하무적이 된 건축 재료다. 20세기 초 발명한 이 재료는 강하기는 강철 같지만 밀가루 반죽과 같이 어떤 형태든지 만들 수 있다. 알뜨르의 격납고는 공중폭격에 가장 강한 반원통 구조로 지어졌다. 지하 벙커는 수m 두께의 토압을 견디고 내부 통행이 가능하도록 아치형 터널로 만들었다. 철저하게 기능적이며, 단순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건축은 죄가 없다. 하지만 이를 만들고 사용한 인간들의 탐욕과 광기는 용서 못 할 죄악이다. 식민지근대화론도 그렇다. 일제는 이 땅에 항만, 철도, 공장 등 근대적 시설을 지었다. 해방 후 근대화는 그 혜택의 연장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목적은 무엇이고, 이익은 누가 차지했는지 손익 계산을 해야 한다. 그러면 식민지근대화는 허구이며 식민지수탈이 있을 뿐이다. 2차대전 직전에 프랑스 국방장관 앙드레 마지노는 350㎞ 길이의 초대형 철근콘크리트 지하 진지를 완성했다. 참호전으로 점철했던 1차대전의 교훈에서 얻은 방어선이었다. 그러나 개전과 동시에 독일군은 탱크를 앞세운 기동력으로 마지노선을 돌파, 이를 무력화했다. 마지노선 건설은 지상 최대의 삽질로 비웃음거리가 됐다. 일제의 전략은 무모하고 시설은 어리석다. 전원 옥쇄란 사무라이 싸움에서나 있을 법한 전략이다. 총길이 15㎞에 달하는 제주 내 동굴 진지들도 자학적이다. 내부에 아무 지원시설 없어 단 며칠도 버티기 어려운 동굴에서 미군의 첨단 전투력을 어찌 대항하나. 가미카제나 가이텐 특공대의 성공 확률은 얼마나 높을까. 통계에 따르면 특공대 1명의 자폭으로 미군 1명을 사살했을 정도라 한다. 전쟁의 실체를 모르는 시대착오적 전술은 얼마나 허망한가. 해방 74년, 일제가 남긴 알뜨르의 군사건축이 던지는 역설적 교훈이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일제가 남긴 ‘알뜨르’ 軍시설·상처 입은 오름… 기억하겠습니다

    일제가 남긴 ‘알뜨르’ 軍시설·상처 입은 오름… 기억하겠습니다

    조선을 강제 합병한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다. 뒤이어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한반도를 군수기지화해 무자비한 수탈을 감행한다. 조선 청년 40만명이 징병으로, 72만명은 징용으로 끌려가 이역만리에서 죽거나 죽을 고생을 했다. 특히 제주도는 육지가 당한 수탈에 더해 중국 침략의 전초기지로, 일본 본토 방어의 최전선으로 이중 삼중의 피해를 입게 됐다.●육중한 콘크리트 구조물에 띠 입혀 위장한 비행기 격납고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넓은 감자밭에 수십 개의 풀무덤들이 작은 오름과 같이 펼쳐져 있다. 자세히 보면 육중한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띠를 입혀 위장한 비행기 격납고들이다. 그 옆에 마련된 넓은 벌판은 과거 활주로의 흔적이다. ‘아래 펼쳐진 벌판’이라는 뜻의 ‘알뜨르’ 비행장은 1937년 당시 중국의 수도 난징을 폭격하기 위한 징검다리였다. 난징 폭격은 일본 나가사키현에 기지를 둔 오무라항공대가 담당했다. 나가사키에서 이륙한 항공대는 난징을 폭격하고 알뜨르에 착륙, 연료와 폭탄을 보충해 이튿날 다시 난징을 폭격한 후 나가사키로 귀환했다. 총 36회 출격, 300여t의 폭탄을 투하해 난징의 도시 시설 89%를 파괴했다. 폭격에 뒤이어 진주한 일본 육군은 30만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8만명의 여성들을 강간했다. 아직도 중일 간에 해결이 안 된 ‘난징대학살’이다. 1941년 일제는 하와이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을 도발했다. 초기에는 우세했지만 곧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반격에 밀리게 된다. 1944년 4월, 80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미군은 오키나와를 함락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 1만 5000명, 일본군 6만 5000명이 전사하고 섬 주민 20만여명 중 12만명이 사망했다. 그해 11월부터 대대적인 일본 본토 공습이 시작됐다. 미군의 이른바 ‘몰락작전’의 시작이었다. 이 작전은 공습으로 일제를 무력화한 후 일본 규슈와 혼슈를 차례로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에 대응해 일제는 전원 죽음으로 본토를 수호한다는 ‘결○호작전’을 펼친다. 일본 본토를 1호부터 6호까지 나누어 방어하고 7호는 제주도가 맡는다는 내용이다. 일제는 미군이 곧 제주도에 상륙하리라 예상했고, 제주도를 본토 방어의 최전선으로 삼았다. 제주도는 이른바 ‘결7호작전’의 작전지가 돼 군사시설을 건설하는 대대적인 노역에 시달린다. 알뜨르 외에도 여러 곳에 군사비행장을 만들고 훈련장과 포대, 대피소, 특공대 기지 등을 섬 전체에 건설했다. 대부분의 군사시설은 지하로 파들어 간 진지동굴이었는데, 제주도 내 총 360여개의 오름 중 160여개에 지하 진지를 구축했다. 58군 사령부 예하에 5개 사단, 보병 5만 8000명, 포병과 기갑부대 1만 6000명이 주둔했다. 이는 한반도 전체에 주둔한 군대보다 많은 숫자이며 10만명이 주둔했던 오키나와에 육박하는 규모였다.●모슬포 마을 주민 5000여명 강제 동원해 격납고 38개 지어 알뜨르비행장이 있는 모슬포 일대는 결7호작전의 핵심지역이었다. 비행장은 1944년부터 활주로를 늘리는 등 대대적으로 확장했고 이때 지은 격납고 38개 중 20개가 잔존하고 있다. 매일 주민 5000여명을 강제 노역에 동원한 결과였다. 격납고는 폭 10m, 길이 20m, 높이 4m의 반원통형 구조로, 전투기에 꽉 끼는 옷과 같은 최소한의 크기이다. 30~80㎝ 두께의 매우 견고한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서, 공중 관측을 피하기 위해 지붕에 풀을 덮어 위장했다. 여기에 숨긴 전투기는 일본의 주력인 제로센이었다. 제로센은 기체의 무게를 과감하게 줄여서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었고 개전 초기에 우수한 전과를 거두었다.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은 무게를 줄이기 위해 저출력 경량엔진을 장착하고 보호용 장갑판을 제거했다. 그래서 민첩함은 얻었으나 속도가 느려 쉽게 노출되고 적기의 공격에 취약한 문제가 있었다. 전쟁 말기에는 급기야 자살특공대인 가미카제의 운송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알뜨르의 격납고들은 모두 가미카제 특공대를 위한 위장 보호시설이었다.격납고 인근에 지하 벙커가 남아 있다. 터널같이 긴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고 그 위에 3~5m 두께의 잡석들을 쌓아 인공 둔덕을 만들었다. 풀을 심은 둔덕은 얼핏 동산같이 보이지만 벙커 내부는 수십 명이 너끈히 들어가 작전을 펼 수 있다. 환기용 굴뚝과 배수로, 별도의 설비관로까지 설치한 모습으로 보아 아마도 중요한 통신시설로 쓰인 듯하다. 활주로 반대 송악산 쪽으로 3개의 작은 오름이 연달아 있는데 이를 통틀어 셋알오름이라 부른다. 이 오름 정상부에는 고사포진지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땅을 파고 지름 6m의 원통형 콘크리트 진지를 구축했다. 원통의 중심부에 고사포를 설치해 360도 회전하며 적기를 공격할 수 있었다. 현재 포좌는 없어지고 원통부만 남아 하늘에서 보면 마치 숲속에 뚫린 원형탈모 상흔과 같다. 모두 5기를 배치했는데 하나는 미완성이며 2기는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인근 송악산의 원래 이름은 ‘절울이오름’으로 ‘물결이 우는 소리를 듣는 오름’이란 뜻이었다. 바다 위에 솟은 대단한 절경이지만 60여기의 일제 동굴진지가 여기저기 뚫린 상처 입은 오름이다. 화순포구 쪽에서 보면 인공적으로 뚫은 해안동굴들이 절경을 훼손하고 있다. 총 15기의 해안동굴에는 1인용 모터보트들을 주둔시켰는데, 선두에 250㎏의 폭약을 싣고 적함에 돌진해 자폭하는 특공함이었다. 합판으로 선체를 만들고 자동차 엔진을 달았다니 애초부터 돌아오지 못하는 1회용 자살함정이었다. 하늘에 가미카제가 있었다면, 바다에는 인간어뢰라고 불린 가이텐 특공대가 있었다. 모두 나 죽고 너 죽자 식의 무모한 전술이며 최후 발악의 광기였다.●“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다시 반복된다”… 다시 봐야 할 이유 전쟁은 건축을 파괴하지만, 그래도 군사용 시설은 건설된다. 1940년대 제주에 남겨진 알뜨르비행장의 격납고나 지하 벙커, 고사포진지, 해안동굴 진지들은 여러 감상을 불러온다. ‘이 땅과 민족을 희생시켜 일본의 영토를 지킨다?’ 일제에 분노가 치밀지만 이 지경까지 당하게 된 역사적 수치심이 앞선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다시 반복된다.” 이 수치 유산들을 둘러보고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다. 왜 이 땅에 이런 것들이 세워졌으며 어쩌다 그러한 역사에 처하게 됐는가. 어두운 체험과 불쾌한 사유의 여정을 일컬어 다크 투어리즘이라 한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그 대표적인 성공(?) 사례이다.제주의 일제군사시설은 거의 다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이다. 인장력(당기는 힘)에 강한 철근과 압축력(누르는 힘)에 강한 콘크리트를 합쳐 천하무적이 된 건축 재료다. 20세기 초 발명한 이 재료는 강하기는 강철 같지만 밀가루 반죽과 같이 어떤 형태든지 만들 수 있다. 알뜨르의 격납고는 공중폭격에 가장 강한 반원통 구조로 지어졌다. 지하 벙커는 수m 두께의 토압을 견디고 내부 통행이 가능하도록 아치형 터널로 만들었다. 철저하게 기능적이며, 단순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건축은 죄가 없다. 하지만 이를 만들고 사용한 인간들의 탐욕과 광기는 용서 못 할 죄악이다. 식민지근대화론도 그렇다. 일제는 이 땅에 항만, 철도, 공장 등 근대적 시설을 지었다. 해방 후 근대화는 그 혜택의 연장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목적은 무엇이고, 이익은 누가 차지했는지 손익 계산을 해야 한다. 그러면 식민지근대화는 허구이며 식민지수탈이 있을 뿐이다. 2차대전 직전에 프랑스 국방장관 앙드레 마지노는 350㎞ 길이의 초대형 철근콘크리트 지하 진지를 완성했다. 참호전으로 점철했던 1차대전의 교훈에서 얻은 방어선이었다. 그러나 개전과 동시에 독일군은 탱크를 앞세운 기동력으로 마지노선을 돌파, 이를 무력화했다. 마지노선 건설은 지상 최대의 삽질로 비웃음거리가 됐다. 일제의 전략은 무모하고 시설은 어리석다. 전원 옥쇄란 사무라이 싸움에서나 있을 법한 전략이다. 총길이 15㎞에 달하는 제주 내 동굴 진지들도 자학적이다. 내부에 아무 지원시설 없어 단 며칠도 버티기 어려운 동굴에서 미군의 첨단 전투력을 어찌 대항하나. 가미카제나 가이텐 특공대의 성공 확률은 얼마나 높을까. 통계에 따르면 특공대 1명의 자폭으로 미군 1명을 사살했을 정도라 한다. 전쟁의 실체를 모르는 시대착오적 전술은 얼마나 허망한가. 해방 74년, 일제가 남긴 알뜨르의 군사건축이 던지는 역설적 교훈이다.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사설] 평화소녀상 해외 철거에 전시마저 중단시킨 일본

    일본 국제예술제 ‘아이치 트리엔날레’ 조직위원장을 맡은 아이치현 지사는 정부와 우익단체의 항의와 테러 예고 등으로 그제 ‘표현의 부자유, 그후’ 전시에 참여한 ‘평화의 소녀상’(이하 소녀상)을 철거하고 전시를 중단한다고 통보했다. 정치·사회적 이유로 일본 각지의 미술관에서 철거됐던 작품 20여점을 전시해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려던 이번 기획전에서 또다시 정치적 이유로 소녀상 전시가 중단됐다는 점은 일본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또 2017년부터 독일 브란덴부르크주 나치수용소 여성 피해 기념관에 상설 전시된 소녀상이 지난해 1월 일본의 압박으로 철거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한국인들은 분노하고 있다. 여기에 독일 베를린 여성예술가 전시관에서 지난 2일부터 전시 중인 소녀상도 주독 일본총영사관이 집요하게 철거 요구를 한다니 우리 외교부도 강력히 대응하길 바란다. 일본의 소녀상 전시 중단 및 철거행위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 권리인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억압이자 검열이다. 백번 양보해 일본 안에서 일본인의 작품에 대해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 것은 내치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쟁범죄의 반인류성, 반인권성을 상기하려 해외에서 열린 다른 나라 작가의 작품 전시에 일본의 입장을 들이대며 강요·압박해 전시를 중단하려는 행위는 부당하고 파렴치한 만행이다. 일본은 정치·외교의 문제를 경제보복의 이유로 삼으면서 국제무역 질서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다. 이것도 모자라 자유를 보장해야 할 문화예술 분야까지 보복 대상으로 삼아 억압하고 있다. 이는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파시즘 국가에서나 나타났던 퇴행적인 행태다. 오죽하면 아사히신문과 도쿄신문 등 자국 언론을 비롯해 일본펜클럽 등 문화예술인조차 일본 정부의 문화예술 탄압에 대해 날 선 비판을 던지겠는가.
  • 日정부 압력·우익 협박에… ‘평화의 소녀상’ 전시 강제 중단

    日정부 압력·우익 협박에… ‘평화의 소녀상’ 전시 강제 중단

    작가들 “전후 일본 최대 검열 사건” 일부 언론 “정치인 압력 행사” 비판 獨 전시 ‘10㎝ 소녀상’도 철거 압력한국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 와중에 위안부 피해자들을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일본에서 강제로 중단됐다. 일본 우익세력의 협박과 함께 일본 정부의 압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독일에서도 대사관을 통해 압력을 가해 고작 10㎝도 안 되는 소녀상을 전시 품목에서 끌어내렸다. 지난 1일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에서 개막된 국제예술제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 주최 측은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돼 있는 ‘표현의 부자유, 그 후’ 기획전 전시장을 4일 오전부터 폐쇄했다. 위안부 소녀상이 일본 공공미술관에서 원래 모습대로 전시된 것은 처음이었으나 결국 3일밖에 유지되지 못했다. 지난 3일 오후 아이치 트리엔날레 실행위원회 회장인 오무라 히데아키 아이치현 지사는 기자회견을 갖고 “안전한 운영이 우려된다”면서 “3일을 끝으로 ‘표현의 부자유전, 그 후’ 기획전을 중단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소녀상 철거 요구가 1일과 2일 각각 전화 200건, 이메일 500건씩 왔다고 했다. 실제로 우익인사들은 소녀상 앞에서 “최악”이라며 고함을 치거나 이상한 포즈를 취하며 조롱을 하거나 소녀상의 머리에 종이봉투를 씌우는 등 방해행위를 해 많은 관람객의 항의를 받았다.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압력도 전시 중단에 강하게 작용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지난 2일 “아이치 트리엔날레에 대한 정부 보조금 교부 결정 과정을 정밀 조사한 뒤 적절히 대응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전시 중단에 참여 작가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와사키 사다아키 등 전시 실행위원들은 “전후 일본 최대의 검열 사건이 될 것”이라며 분노했다. 도쿄신문과 아사히신문 등 일부 일본 언론은 4일 전시 중단을 1면에 보도하며 일부 정치인의 압력 행사와 우익들의 협박을 강력히 비판했다. 한편 4일 독일 소재 한국 관련 시민단체 코리아페어반트 한정화 대표에 따르면 2017년 4월부터 베를린 북부 소도시 라벤스브뤼크의 옛 나치 강제수용소 기념관에 상설 전시하던 ‘작은 소녀상’이 최근 전시에서 제외됐다. 주독 일본대사관 측이 지난해 1월부터 브란덴부르크주 당국과 기념관 등에 전방위적으로 항의하며 전시물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베를린 여성예술가 전시관인 ‘게독’이 지난 2일 시작한 ‘토이스 아 어스’ 전시회에 출품된 소녀상에 관해서도 주독 일본대사관은 주최 측에 철거 공문을 보냈다. 도쿄 김태균 특파원 windsea@seoul.co.kr 서울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10㎝도 안 되는 소녀상까지…일본 항의로 독일서 철거

    10㎝도 안 되는 소녀상까지…일본 항의로 독일서 철거

    독일 나치 강제수용소 기념관서 철거일본, 독일 곳곳서 소녀상 전시 훼방유럽 최초 소녀상도 설명 비문 철거일본, 위안부합의 근거로 들며 항의 일본이 독일의 한 나치 강제수용소 기념관에 전시된 10㎝도 채 안 되는 초소형 ‘평화의 소녀상’마저 기념관 측을 압박해 철거하도록 한 것으로 뒤늦게 드러났다. 4일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 관련 시민단체인 코리아페어반트(Korea Verband)에 따르면, 이 단체의 한정화 대표는 지난 2017년 초 베를린 북부 브란덴부르크 주의 소도시 라벤스브뤼크의 옛 나치 강제수용소 기념관(Ravensbruck Memorial)에 ‘작은 소녀상’을 선물했다. 기념관 측은 의미가 깊은 선물이라면서 같은 해 4월부터 여러 작품과 기념품을 모아 놓은 기념관 입구에 작은 소녀상을 전시했다. 이 소녀상은 곳곳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과 동일한 외형이지만, 높이가 10㎝가 안 되는 초소형 크기다. 소녀상 왼쪽에는 ‘평화비’라는 제목으로 한국어, 영어, 일본어로 설명이 적혀 있다. 소녀상이 설치된 입구는 방문객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위치다.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는 나치 시절 체제에 반항하는 여성을 가둬놓는 여성 전용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의 일부 수감자는 다른 강제수용소에 성노예로 보내지기도 했던 만큼, 한국에서 온 작은 소녀상이 특별한 의미였기에 소중히 여긴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 할머니는 소녀상 전시 당시 기념관을 찾아 기념 촬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지 일본 대사관 측이 이를 알게 되면서 지난해 1월쯤 브란덴부르크 주 당국과 기념관을 상대로 항의하며, 전시물에서 이 소녀상을 제외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한 대표는 “당시 기념관 측과의 통화와 이메일을 통해 주 당국과 기념관이 일본 측의 압력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달받았다”고 말했다. 일본 측의 강한 반발에 당황한 기념관 측은 일본 대사관 관계자를 불러 이유를 묻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일본 측의 전방위적이고 집요한 압박 속에서 기념관 측은 작은 소녀상을 전시 작품에서 제외했다. 소녀상 전시 등과 관련한 일본의 방해는 독일 곳곳에서 현재진행형이다.베를린의 여성 예술가 전시관인 ‘게독’(GEDOK)이 지난 2일 시작한 ‘토이스 아 어스’(TOYS ARE US) 전시회에 소녀상이 출품되자, 주독 일본대사관은 게독 측에 공문을 보냈다. 전시된 소녀상은 일본 최대 국제 예술제인 ‘아이치 트리엔날레’에 출품된 소녀상과 같이 김운성-김서경 작가의 작품이다. 최근 아이치 트리엔날레에서 선 보인 소녀상은 결국 전시장에서 철거됐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일본 대사관 측은 2015년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맺은 합의를 근거로 들며 “일본과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를 했다”면서 “이후 문재인 정부가 화해·치유 재단을 해산한 것은 2015년 양국 합의의 관점에서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게독에 전시된 소녀상은 지난 6월 도르트문트에서 열린 ‘독일 교회의 날’ 기념 전시회에서도 전시됐는데. 당시 일본 뒤셀도르프 총영사관이 전시관 측에 연락해 철거 요청을 했다고 전시 관계자들이 전했다. 2일 전시관을 찾은 일본인 여성 미술가인 아이 코바야시는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단체들이 소녀상을 걸고넘어지고 있는 게 문제”라며 “일본에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가짜뉴스가 너무 많고, 미디어는 제대로 다루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고 연합뉴스는 전했다. 앞서 2017년 3월에 남부도시 비젠트의 네팔-히말라야 파빌리온 공원에 유럽에서는 최초로 세워진 소녀상에 대해서도 일본 측이 공원 측에 철거해달라고 요구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결국 같은 해 공원 측은 소녀상은 철거하지 않되, 소녀상을 설명한 비문을 철거했다. 재독동포 단체인 풍경세계문화협의회가 본에 있는 여성박물관에도 소녀상을 세우려고 추진해왔지만, 일본 측의 방해로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2016년에는 수원시가 자매결연을 한 독일 프라이부르크에 소녀상을 설치하려고 했지만, 일본 측의 항의로 무산됐다. 일본 측 인사들이 프라이부르크 시 당국을 찾아 강력히 항의한 것이다. 프라이부르크와 자매결연을 해온 일본의 도시 마쓰야마는 소녀상을 세울 경우 단교하겠다는 뜻까지 전하며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극단 플레이위드 ‘천국으로 가는 길’ 2일 개막… 유대인수용소 둘러싼 3가지 시선

    극단 플레이위드 ‘천국으로 가는 길’ 2일 개막… 유대인수용소 둘러싼 3가지 시선

    극단 플레이위드의 신작 ‘천국으로 가는 길’이 개막한다. 플레이위드는 오는 2일부터 10일까지 서울 종로구 혜화동 한양레퍼토리 씨어터에서 신작 ‘천국으로 가는 길’을 상연한다고 밝혔다. 지난달 14일부터 이곳에서 열리고 있는 낭독극 페스티벌 ‘한양리딩레퍼토리’의 15개 상연작 중 하나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스페인 작가 후안 마요르가의 원작을 각색해 재구성한 작품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수용소를 방문한 적십자대표, 수용소를 관리하는 독일군 장교, 수용소 안에 살고 있는 유대인 대표 등이 등장한다. 학살의 참상을 직접 전하기보다 연극적 상상력을 더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연출가 박선희는 “‘천국으로 가는 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가스실로 이동한 길을 말한다”며 “이번 연극을 통해 당시 독일이 만든 선전용 유대인수용소를 세 가지 시각에서 바라 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극단 플레이위드는 여행 연극 프로젝트 ‘인디아블로그’, ‘터키블루스’, ‘인사이드 히말라야’, ‘라틴아메리카 콰르텟’을 연출한 연출가 박선희의 사단이다. 소속 배우로는 드라마 ‘미스터 기간제’, ‘킹덤’, ‘미생‘ 등에서 활약한 전석호를 비롯해 박동욱, 임승범, 김영욱, 이현지가 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의 예매문의는 한양레퍼토리 씨어터를 통해 할 수 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뿔난 터키…중국 위구르족 탄압 반발 자치구에 대표단 파견

    뿔난 터키…중국 위구르족 탄압 반발 자치구에 대표단 파견

    중국의 투르크계 위구르족 탄압을 비판해온 터키가 중국 신장위구르(新疆維吾爾)자치구에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메블뤼트 차우쇼을루 터키 외교장관은 30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52회 아세안 외교장관회의 참석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위구르 형제들이 중국의 한 지붕 아래 평화롭게 살기 바란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그러면서 중국의 초청으로 10명의 대표단을 신장위구르자치구에 파견할 것”이라며 “대표단은 현지에서 신장자치구의 상황을 살피고 올 것”이라고 말했다. 차우쇼을루 장관은 “이달 초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만났을 때 시 주석이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대표단 파견을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지난 24일 터키 앙카라 주재 중국대사관이 터키 외교부에 공식 초청장을 전달했으며, 에르도안 대통령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차우쇼을루 장관은 덧붙였다. 중국의 신장위구르자치구에는 터키 투르크족의 한 분파로 알려진 투르크계 위구르족 1000만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중국에서 독립해 ‘동(東)투르크스탄’이라는 나라를 세울 것을 주장하고 있으며, 중국 정부는 이들을 테러리스트로 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유엔 인권 패널은 지난해 11월 100만명에 이르는 위구르족과 다른 소수 민족이 신장위구르자치구 지역에서 초법적 구금 상태에 있다는 보고서를 내놔 중국의 강한 반발을 샀다. 유엔 인권이사회(UNHRC)에서 서방 국가들은 신장위구르자치구 ‘직업 훈련 캠프’가 사실상 초법적인 ‘정치범 수용소’라며 중국에 관련 시설을 폐쇄하라고 촉구했다. 터키 역시 중국의 위구르 수용소에 대해 “인간성의 관점에서 크나큰 수� 굡箚� 비난하고 수용소 폐쇄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신장위구르자치구 지도부는 30일 ‘재교육 수용소’와 관련한 인권침해 비판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라며 반박했다. 쉐커라이디 짜커얼 자치구 주석과 에르킨 투니야즈 자치구 부주석 등은 국무원 신문판공실이 베이징에서 연 ‘아름다운 신장 건설, 조국의 꿈을 함께 이루다’ 기자회견에 참석해 이같이 밝혔다. 짜커얼 자치구 주석은 “신장은 8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이 중 일부 국가는 최근 몇 년간 테러로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면서 “접경 국가들의 영향으로 극단적인 사상에 감염된 일부 국내 사람들이 테러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법과 규정에 따라 세계의 반테러 투쟁의 효과적인 방법을 배워 테러 활동에 휩쓸렸거나 극단적인 사상의 영향을 심하게 받은 사람들을 최대한 구제했다“고 강조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北 억류됐던 미국인 김동철 목사 “한미 위해 간첩 활동”

    北 억류됐던 미국인 김동철 목사 “한미 위해 간첩 활동”

    2년간 북한에 억류됐다 지난해 풀려난 한국계 미국인 김동철(66) 목사가 한국과 미국을 위해 간첩 활동을 했다고 털어놨다. 29일(현지시간) 북한 전문 매체 NK뉴스에 따르면 김씨는 석방된 뒤 처음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2009년 라선경제무역지대에서 일하는 사업가라는 특수한 직업 때문에 스파이로 영입됐다고 밝혔다. 그는 2016년 검거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한국 국정원을 위해 민감한 정보를 입수하는 일을 한 적이 있다”는 취지로 자백을 했는데, 자유를 얻은 뒤에 당시 진술이 대체로 진실이었다는 걸 털어놓은 셈이다. 김씨는 이날 “미 중앙정보국(CIA)과 함께 매우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앞서 이달 초에는 서울에서 “카메라가 달린 시계로 영상을 촬영했고, 전자기파 감청장비도 사용했다”면서 “국내에서 ‘안테나’로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도 했다. 당시 북한 매체들은 김씨가 “북한에 대한 국가 전복 음모와 스파이 행위로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그는 2016년 4월 10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고 농사를 하는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는 지난해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전격 방북에 이어 북미 관계가 훈훈해진 가운데 다른 두 명의 미 시민권자들과 함께 석방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최근까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로 이들의 석방을 거론해 왔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JSA 귀순’ 북한 병사 오청성 “아픈 어머니 못 만나 괴롭다”

    ‘JSA 귀순’ 북한 병사 오청성 “아픈 어머니 못 만나 괴롭다”

    2017년 11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귀순한 북한 병사 오청성씨가 일본에서 열린 강연회에 참석해 남북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28일 일본 공영방송 NHK 보도에 따르면 오씨는 전날 밤 오사카에서 한일 시민단체가 함께 개최한 강연회에 참석해 “북한에 있는 병에 걸린 어머니가 차로 불과 15분 거리에 있는데도 만나지 못하는 것이 괴롭다”면서 남북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밝혔다. 오씨는 판문점에서 약 12㎞ 떨어져 있는 개성에서 태어나 가족들과 함께 거주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강연회에서 오씨는 북한에서는 아버지가 군인이어서 비교적 풍요로운 생활을 했지만 인터넷 환경이 나빠 국제정세를 몰랐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이 된 후 판문점에 배치돼 판문점에서 많은 외국인 관광객을 보면서 언젠가 해외 문화를 접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이것이 탈북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오씨는 2017년 11월 13일 JSA를 통해 귀순하는 과정에서 북한 추격조로부터 총상을 입고 중태에 빠졌다. 그러나 그의 집도의였던 이국종 아주대병원 중증외상센터장의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했다. 오씨는 지난해 11월 보도된 극우 성향의 일본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실상을 전한 적이 있다. 그는 “북한 내부에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정치와 지도자에 대한 무관심이 퍼지고 있으며 충성심도 없다”면서 “체제가 인민들을 먹여 살린다면 손뼉을 치겠지만, 무엇 하나 (혜택을)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귀순 경위를 묻는 질문에는 “근무지 밖에서 친구와 문제가 생겨 술을 마신 뒤 검문소를 돌파해버렸다”면서 “돌아가면 처형당할 우려가 있어서 국경을 넘었다”고 답했다. 오씨는 미국 NBC 방송과도 인터뷰를 했다. 지난 4월 보도된 NBC와의 인터뷰에서 오씨는 자신이 귀순할 때 다섯 차례의 총격을 가한 동료를 탓하지 않는다면서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나도 총을 쐈을 것이고, 이건 우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약 내가 잡혔다면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총살당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美연방 16년만에 사형 재개…‘아동·노인’ 살해한 5명 면면은

    美연방 16년만에 사형 재개…‘아동·노인’ 살해한 5명 면면은

    미국 법무부가 지난 25일(현지시간)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범죄자들에 대한 연방 정부의 사형 집행을 16년 만에 재개하기로 함에 따라 2020년 미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로 나선 주자들이 앞다퉈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AP통신 등 외신은 이날 윌리엄 바 미 법무장관이 연방 정부가 사형 집행을 재개하기고 결정했으며, 오는 12월부터 2달에 걸쳐 사형이 선고된 5명의 살인범에 대해 형 집행일을 확정할 것을 법무부에 지시했다고 전했다. 바 장관은 이날 성명을 통해 “의회는 양원 모두에서 국민의 대표가 채택하고 대통령이 서명한 법안을 통해 사형을 명시적으로 승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법무부는 법에 의한 지배를 옹호하며 희생자들과 유족에게 우리의 사법 체계에 의해 부과된 형을 이행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바 장관은 법무부 산하 교정국이 사형을 집행하는 데 1개의 독극물(펜토바르비탈)만 사용하는 방안을 도입하도록 했다. 과거 티오펜탈을 이용해 3개 약제 혼합물을 투여했지만 적정 용량을 지키지 않으면 사망 직전에 극심한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돼서다. ●사형 집행 지지해 온 트럼프 대통령 미국에서는 14개 주에서 사형을 집행하고 있지만 연방 정부 차원의 사형집행은 지난 2003년 이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미 형사법 체계상 연방대법원은 사형제도가 합헌이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연방 법무부의 교정국 산하 교도소에 62명의 사형수가 수용돼 있으며, 각 주에도 사형수가 존재한다. 1988년 미 연방 사형제도가 부활한 이후 15년간 연방 정부 차원에서 사형이 이뤄진 사례는 3건에 불과하다. 2001년 오클라호마시티 정부 청사 앞에서 폭탄을 실은 트럭으로 테러를 주도한 티모시 맥베이에 사형을 집행했으며 가장 최근에는 2003년 19살의 젊은 여성 군인을 납치해 강간, 살인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걸프전 참전군 루이스 존스 주니어(53)를 사형했다. 2014년 버락 오마바 전 대통령이 법무부에 사형과 독극물 주사제를 둘러싼 문제에 대한 검토를 지시하면서 사실상 사형 집행을 동결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오클라호마주에서 독극물을 주사해 사형을 집행하던 중 사형수가 발작을 일으켜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사형제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를 지시한 것이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중범죄자에 대한 사형을 공개적으로 지지해왔다. 2017년 10월 뉴욕에서 트럭으로 보행자를 들이받아 8명을 숨지게 한 용의자에 대해서는 트위터에 “뉴욕 테러리스트를 관타나모 수용소로 보내고 싶지만 그 절차는 통계적으로 연방 시스템을 거치는 것보다 훨씬 더 걸린다. 빨리 움직여야 한다. 사형!”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지난해 10월 11명을 사망케 한 피츠버그 유대교 회당(시너고그) 총격 참사 때도 사형제에 대한 지지 의견을 밝혔다. 아직 두 사건에 대한 사법부의 판결은 진행중이다.●“사형 집행 재개는 역사의 반대편에 서는 것” 연방정부의 이번 결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민주당 대선 주자로 나선 카말라 해리스 상원의원은 “국가의 사형 집행은 부도덕이자 깊은 흠결”이라고 규정했으며,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사형에 대해 반대하는 자신의 뜻을 다시금 환기했다. 유력한 민주당 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미국에서 1973년 이후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 중 160명이 추후에 무죄가 입증됐다”며 사형 집행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다. 사형제에 대한 미국 시민들의 입장도 변화했다.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1996년 당시 사형제에 대해 지지를 표명한 응답자는 80%에 육박했지만, 지난해에는 54%로 22년 사이 26%포인트 감소했다. 미국시민자유연맹의 카산드라 스텁스는 이번 연방정부의 사형제 집행 재개 결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스텁스는 “연방 정부의 사형제도는 인종에 대한 편견과 지리적 불균형, 검사의 위법행위, 말도 안 되는 과학 등으로 규정된다”면서 “이는 전국적으로 사형제에 대한 지지율을 떨어뜨린 원인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법무부는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서 있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사형 집행 대상자들 면면은 한편 연방정부가 사형 집행 일시를 지정하라고 요청한 5명의 사형수는 모두 아동이나 노인을 대상으로 살인죄를 저질렀으며 인디애나주 테러호트에 있는 연방 수용소에 수감돼 있다. 이 가운데 37살 레즈몬드 미첼은 자신의 친구와 함께 2003년 애리조나주에서 할머니와 9살 난 손녀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히치하이킹을 하던 미첼과 그의 친구는 자신들을 태워준 피해자 앨리스 슬림(63)과 함께 있던 손녀 티파니 리를 살해하고 차량을 절도했다. 미첼의 사형집행일은 오는 12월 11일로 예정됐다. 16살 소녀를 납치해 강간하고 토막 살해한 웨슬리 퍼키(67)의 사형 집행일은 같은 달 13일로 정해졌다. 그는 소아마비에 걸린 80세 노인을 망치로 살해하기도 했다. 퍼키의 변호사는 그가 “끔찍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백인만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한 백인 우월주의자 대니얼 루이스 리(46)의 사형집행일은 12월 9일로 계획됐다. 리는 1996년 공범인 체비 케호와 아칸소주 틸리에서 총기상 윌리엄 뮬러를 비롯해 그의 아내 낸시 뮬러, 두 사람의 8살 난 의붓딸 사라 파웰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리의 변호사 모리스 문은 이날 “아이의 죽음은 케호의 책임”이라면서 “리에 대한 사형집행은 ‘정의의 무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2살 난 자신의 딸을 고문하고 살해해 2004년 사형을 선고받은 알프레드 부르주아(55)의 사형 집행 예정일은 2020년 1월 13일이다. 뉴욕타임스는 이번에 집행이 예정된 사형수 가운데 부르주아가 유일한 흑인이라고 설명했다. 마약상이던 더스틴 혼켄(51)은 1993년 여자친구의 도움을 받아 5명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동료 마약상인 테리 드제우스와 그레고리 니콜슨 두 명을 비롯해 니콜슨의 여자친구와 6살, 10살이던 두 딸의 목숨을 빼앗았다. 혼켄의 사형집행 예정일은 2020년 1월 15일이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1930년대 역사 속 전쟁·부패·정경 유착… 현재 진행형이다

    1930년대 역사 속 전쟁·부패·정경 유착… 현재 진행형이다

    그날의 비밀/에리크 뷔야르 지음/이재룡 옮김/열린책들/176쪽/1만 2800원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 공쿠르상 수상작.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1930년대 유럽을 배경으로 역사서에나 등장할 법한 권력자들의 짤막한 이야기 16편을 담았다. 그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보여주는 한편, 작가는 불쑥불쑥 난입해 그들의 작태를 논평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소설인 듯 소설이 아닌 것 같은 이야기, 에리크 뷔야르의 ‘그날의 비밀’이다. 소설은 1933년 2월 20일, 독일 대기업의 총수 24명이 모인 비밀 회동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돌프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을 만나는 자리인 이곳에는 오펠, 지멘스, 바이엘, 알리안츠 등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한다. 이어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를 시종장으로 착각한 영국 추밀원 의장 로드 핼리팩스, 히틀러 앞에서 비굴하기 짝이 없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독재자 쿠르트 폰 슈슈니크 등 역사의 한 장면을 장식했지만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인물들의 면면이 이어진다. 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히틀러나 괴링 같은 정치인들의 뻔뻔스러움에 더해 구스타프 크루프 같은 기업가들의 무덤덤함이다. 정치인, 군인들이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해도 기업가들은 놀라지 않는다. ‘그들은 뇌물과 뒷거래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며 ‘부패는 대기업의 회계 장부에서 긴축 불가 항목’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사람과 달라 죽지도 않으며, 결코 늙지 않는 신비한 육체’(15쪽)이다. 전쟁이 끝나고 히틀러가 죽고 다른 전범들이 처형당한 후에도 그들은 살아남았다. 나치당원의 금배지가 있던 자리에 독일 연방 공로 훈장을 달고서 말이다. 일상화된 부패, 정경 유착, 거대한 경제 권력의 위험성을 생각하게 되는 지점이다. 책의 마지막장은 크루프가 별장에서 자신의 아내, 아들과 식사하는 것으로 끝난다. 2차 대전 당시 강제 수용소에서 노동력을 빌려썼던 독일 철강 군수업체 프리드리히 크루프사를 이끌었던 크루프는 치매에 걸렸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재판을 받지 않았다. 냉전 속에서 아들 알프레트는 경영을 재개했다. 뷔야르는 말했다. ‘한순간이라도 이 모든 것이 먼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라’고. 포인트는 달라도, 일본 기업 제품 불매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현시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은 책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펜타곤과 재계약 안했다고… 구글이 반역죄?

    NSC 전 대테러조정관 “美에 등돌려” 미중 무역협상은 화웨이 문제로 교착 “구글은 중국에서 인공지능(AI)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리처드 클라크 전 미국 국가안보회의(NSC) 대테러조정관은 17일(현지시간) CNBC에 출연해 이같이 밝히고 “(AI와 관련해) 구글은 펜타곤과 일하기를 거부했다. 이것이 진실”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구글이 올 초 끝난 미 국방부와의 계약을 언급한 것이라고 CNBC는 설명했다. 클라크 전 조정관은 이어 “당신이 등돌려 중국에서 AI에 대한 일을 하고, 그들이 그것(AI)으로 무엇을 할지 모른다면 거기엔 문제가 있다”며 “중국 기업과 중국 정부 사이에 차이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의 언급은 구글이 중국군과 함께 일하고 있으며 미 정보기관이 이를 수사해야 한다고 요구한 실리콘밸리 투자자 피터 틸의 주장에 동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도 16일 윌리엄 바 법무장관에게 틸이 제기한 구글의 반역죄 혐의를 살펴보라고 주문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달 정상회담에서 협상 재개에 합의한 후 미중이 전화접촉에 나섰지만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 문제에 발목이 잡혀 교착상태에 빠졌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안보와 관련 없는 분야의 제재 완화를 약속했지만 상무부와 재무부가 이견을 보이며 결론을 내리지 못한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화웨이 제재 완화 움직임은 오히려 강경파의 반발을 불러 미 의회에서는 정부가 의회 승인 없이 화웨이 제재를 해제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이 초당적으로 발의됐다. 이에 중국은 미국의 화웨이 제재 위협이 협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환구시보는 18일 논평에서 “미국의 중국에 대한 새로운 위협은 미국 내 정치적 요구 때문”이라며 “미국의 화웨이 제재 역시 백악관에서는 철회하고 싶지만 반대파의 맹렬한 공격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시 주석은 재외 공관장들을 만나 격려했다. 시 주석은 17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해외 주재 외교공관장 회의에 참석한 사절들을 만나 격려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미중 무역전쟁과 홍콩 범죄인인도법안(송환법) 반대 시위, 신장위구르자치구 내 재교육 수용소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재외 공관의 외교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인의 미국 주택 구입이 대폭 감소했다. CNBC는 17일 지난해 4월부터 올해 3월까지 외국인의 미국 주택 구매가 금액 기준으로 전년 동기보다 36% 줄었으며 이 가운데 중국인이 가장 큰 폭으로 줄었다고 전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홀로코스트 조형물 사이를 뛰어다니면 불경스러운 일일까?

    홀로코스트 조형물 사이를 뛰어다니면 불경스러운 일일까?

    미국의 팝스타 핑크(40)가 독일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찾았다가 아들과 딸이 조형물 사이를 뛰어다니는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유대인이 학살당한 일을 추억하는 곳인데 자녀들을 그렇게 뛰어 놀게 방치한 것은 불경스럽다며 아이들에게 존중심을 갖도록 가르쳤어야 했다고 지적하는 누리꾼들이 있었다. 핑크는 이에 대해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려 자신과 아이들도 유대인이며 아이들은 나름대로 역사를 배울 것이라고 답한 뒤 기념관을 설계한 페터 아이센만의 발언을 인용해 유대인 학살이 자행된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과 “다른 분위기”의 장소란 점을 강조했다고 영국 BBC가 15일(현지시간) 전했다. 하지만 핑크를 감싸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이란 것이었다. 뎁 존스는 “나도 유대인이며 친척들이 수용소에서 죽었다. 친구들은 시나고그(유대교 회당)에서 습격을 당해 죽었다. 이 사진에는 공격적인 내용이 전혀 없다. 이 아이들은 유대인의 역사를 배우고 있다. 계속 삶을 영위하고 눈물이나 닦고 있지 않는 유대인 핏줄과 영혼을 보여준다. 아이들이 삶을 즐기는 것을 보며 난 즐거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때에도 그랬던 일”이라고 말했다.많은 이들이 지적했듯 아이센만은 이곳은 다른 추모 장소와 다른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 BBC 인터뷰를 통해 “내 아이디어는 다른 세대의 수많은 이들이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이 장소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싶어도 괜찮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기념관은 일상적인 일이 벌어지는 곳이지 신성한 묘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실 2년 전에도 이곳 조형물 위에 사람들이 걸터 앉거나 그 위를 걸어다니는 사진이 소셜미디어에 올라 입길에 오른 적이 있다. 이스라엘계 독일인 작가가 이곳에서 촬영한 셀피 사진들을 모아 배경을 수용소 사진으로 포토샵 처리하는 바람에 상당한 논란을 야기한 일이 있다. 이 사진들을 실은 홈페이지는 지금은 폐쇄됐으며 한 인플루엔서가 쓴 사과의 글만을 찾아볼 수 있다고 방송은 전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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