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수용소
    2025-12-3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859
  • 국가보훈처, 美 첩보전략국 ‘냅코작전’자료집 출간

    일제말 미 첩보전략국(OSS)의 한반도 침투계획인 ‘냅코작전(Napko Project)’ 관련자료가 집대성돼 출간됐다. 국가보훈처는 최근 미국에서 새로 입수된 자료 등을 모아‘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시리즈 제24권으로 발행했다. 대모험을 꾀한다는 ‘nap’과 ‘Korea’를 합쳐 만든 용어로 보이는 ‘냅코작전’은 1944∼45년 당시 미국의 특수공작기관인 OSS가 잠수함과 낙하산으로 한반도에 특수요원을 침투시켜 정보수집,거점확보,태업 등의 활동을 벌이려했던 작전이다. 이는 중국에서 광복군과 협동해서 추진했던 ‘독수리작전’과 함께 OSS의 가장 대표적인 대일 특수작전으로 불리고 있다.이 작전은 미국이 태평양전쟁을 조속히 끝내기 위하여 추진한 것으로,재미한인들이 출기차게 요구한 한인 게릴라부대 창설요구와 그에 따른 특수부대 운용경험과 항일운동에 몸바치려는 미주지역의 애국동포들이 존재했기에가능한 것이었다. 재미한인들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직후 중국 중경의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과 결합하거나 아니면 재미한인만으로 독립적인 한인부대 또는 게릴라부대를 창설,대일특수전·정규전에 자신들을 투입시켜 달라고 미군당국에 끊임없이 요청했다.당시 미국은 CIA의 전신인 COI(정보조정국,1941년7월 창설)를 통해 중국에서 대일정보를 수집하는 계획을 추진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승만(李承晩)을 통해한인들과 연결고리가 만들어졌다. 한편 냅코작전은 1944년 중반 이후 장석윤(張錫潤·97·전 내무장관·경기 일산)이 위스콘신주 맥코이 포로수용소에 들어가 한인공작원의 명단을 확보하고 대강의 계획을수립하면서 본격화됐다.이 작전에는 장석윤·유일한(柳一韓·유한양행 설립자) 등 재미한인 10명,김현일 등 한인포로 6명,박순동(朴順東) 등 학도병 출신 3명 등 총19명의한인요원들이 참가하였다.이번 자료집에는 학도병 출신 3인이 버마에서 일본군을 탈출,이 작전에 참가하는 과정을보여주는 자료들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냅코작전에 참가한 한인들을 연령별로 보면 20대 3명,30대 8명,40대 6명,50대 2명 등이며,이들은 안정된 삶을 추구할 수 있음에도 위험한 임무에 자원했다.특히 재미한인출신 변일서(邊日曙)의 경우 대일전 참전을 위해 합의이혼을 했으며,이근성(李根成)은 공작원으로 침투하기 위해 미간의 사마귀 제거 성형수술을 받기도 했다.이들은 샌프란시스코 연안의 한 섬에서 3∼4개월간 유격훈련·무선훈련·폭파훈련 등은 물론 침투용 잠수정을 제작,가상훈련까지 마친 상태였다.그러나 아깝게도 일제의 패망으로 이들의한반도침투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자료집의 해제를 쓴 정병준(鄭秉峻)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이들이 실제 전쟁에서 미친 영향은 미미했으나,태평양전쟁 말기 재미한인들의 독립운동사에 찬란히 빛날 공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이들의 항일투쟁활동은 재미사학자 방선주(方善柱) 박사의 자료발굴로 90년대 들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이들 가운데 독립유공 포상을 받은 사람은 유일한 등 5명에 불과하다. 정운현기자 jwh59@. * 냅코작전 참여 장석윤은. ‘냅코작전’의 핵심인물로 현재 유일한 생존자인 장석윤(張錫潤·97·경기도 고양시 거주)전내무장관은 “원폭투하로 일본이 항복하면서 한반도침투계획이 수포로돌아갔다”고 아직도 아쉬워했다. 1904년 강원도 횡성 출생인 장씨는 1923년 도미,밴더빌트대에서 수학·지질학을 전공한 뒤 LA한인사회 등에서 활동했다. 1942년 5월 미 육군에 입대하여 미군 첩보전략국(OSS) 1기생으로 졸업한 장씨는 1944년 7월까지 중국,버마,인도전구(戰區)에서 이승만 박사와 중경 임시정부,미군 사이의 연락관을 지냈다. 이후 OSS가 추진한 ‘냅코작전’에 참가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각종 특수훈련을 받았으며,나중엔 교관으로 근무했다. 해방후 귀국,미24군단 G2(정보처)에서 3년간 근무한 그는 이승만 정권 하에서 내무부 치안국장,내무부장관을 거쳐3·4대 민의원을 역임했다.그와 함께 ‘냅코작전’에 참가했던 인사 가운데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작고)은 지난 95년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받았으나 그는 아직 미포상 상태다. 그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9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허리가 조금 불편한 것 이외에는 건강도 좋은 편이다. 슬하에 딸만 넷을두었는데 심상필 홍익대 총장이 둘째,박태규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가 세째사위다. 정운현기자
  • [김삼웅 칼럼] ‘치매의 역사’ 바로잡지 못하면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단 한가지뿐이다.그것은 인류가 그 사실을 잊는 것이다.”-유대인 학살의 현장인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기념비에 새겨진 글이다.맹자는 ‘전사불망(前史不忘) 후사지사(後事之師)’라했다.지난 일을 잊지 않으므로 후일의 교사로 삼는다는 뜻이다. 리하르트 폰 바이츠체커 전 독일 대통령은 “과거에 눈을감은 자는 현재에도 맹목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일제시대 우리 독립군사관학교는 ‘오수불망’(吾讐不忘)이란 교재로 독립군을 양성했다.‘우리의 원수를 잊지 말자’는가르침이었다.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빨리 쉽게 잊는다.그래서 가치관이 전도되고 진실과 허위가 뒤죽박죽이다.E H카는 “역사가 정확을 기한다는 것은 미덕이기 전에 하나의 신성한 의무”라고 역설했다.‘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니 ‘현실’은 자꾸 뒤틀린다. 뒤틀리는 현상을 살펴보자.그동안 어렵사리 유지돼온 남북 화해협력의 분위기가 사대주의에 기생해온 냉전세력과미국 부시 정부에 의해 크게 도전받고 있다.정치개혁은 기득세력의 저항으로 표류하고 언론개혁은 수구언론의 공세로 비틀거린다. 군사독재 시대의 희생자인 의문사 진상규명도 사건 관련자들의 기피로 제자리걸음이다.82건이 의문사로 선정됐지만 단 한건도 진상을 밝히지 못한 상태다.1,000억원이 넘는 안기부 자금 횡령사건도 꼬리를 감추고 각종 ‘괴문서’ 사건도 유야무야되고 있다. 역사에 대한 무책임 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역사 드라마의 인기에서 나타나듯이 사극에는 관심이 많으면서도 역사의식은 박약한 것이 우리 국민이다.역사의식만투철하다면 지금과 같은 ‘악화’(惡貨)가 설치지는 못할것이다.역사의식의 빈약과 치매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사회적 ‘그레셤 법칙’이 나타나게 됐다. 잘못은 1948년 건국한 대한민국이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면서 임정이 탄핵한 인물을 건국 대통령으로 선출한 ‘정치치매증’에서 비롯한다.이렇게 시작된 정치치매 현상은 친일파를 척결하지 못하고,친일파의 온상에서 수구세력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장준하 선생이 생전에 말한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될자격이없는 사람이 셋 있는데,오카모토 미노루와 다카기마사오와 박정희”라는 바로 그 동일인이 집권하고 이후그의 아류들이 현대사의 ‘주류세력’(main stream)이 됐다. 이 주류에는 정치군인,부패 정치인,족벌언론과 어용 지식인,타락한 기업인이 중심을 이루고 이들은 분단과 냉전구조와 지역갈등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거대한 수구계급 사회를 형성했다.요즘 언론개혁에 어깃장을 놓는 식자들을 살펴보면 수구언론과 연계되거나 군사정권에서 핵심역할을했던 자들 또는 그 2세들이다.독재시대에 ‘용비어천가’를 불렀던 자들이 마치 자유언론의 파수꾼이 된 것처럼 설친다.청산하지 못한 치매역사의 부끄러운 업보다.일제시대일경이 독립운동가 중 가장 많은 현상금을 내걸고 눈이뒤집혀서 잡고자 했던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 선생은 해방후 국립경찰 간부로 변신한 고등계 형사 출신의 노덕술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그리고 월북했고 최근까지 그의이름을 부르는 것도 거부됐다.약산의 여동생이 밀양에서북에 있는 오빠의 두 아들을 찾고자 이산상봉 신청을 했다고 들었다. 너무 먼 얘기인가.군사정권에서 민주인사들을 고문하던자가 어느 도시에서는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이 되고,수구언론 거부운동이 들불처럼 일고 있는 지역의 국회의원은족벌언론의 대변자인 양 정론지를 매도한다. 나서서는 안될 사람들이 킹 메이커가 되겠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부시 정부가 북한에 강경책을 써주기를,밸도 없고자존심도 없는 사대주의 언론·지식인들이 날뛴다.청산하지 못한 치매정치의 낯뜨거운 현상이다. 연암 박지원은 ‘양반전’에서 “선비는 천작(天爵)이다”고 썼다.‘천작’이란 하늘에서 받은 벼슬이란 뜻으로,남에게 존경받을 만한 덕행과 시비곡직을 가리는 지식인을말한다. 지금의 지식인과 언론인을 옛 선비에 비할 바 아니지만최소한의 ‘선비정신’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걸핏하면 남북 화해협력을 헐뜯고 외신과 외국기관의 보고서를 왜곡하고 우리 국익보다는 타국의 이익에 충실하려는 쓸개 빠진지식인·언론인들은 역사와 하늘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역사의 필주(筆誅)가, ‘천작’을 내는 하늘의 ‘천벌’(天罰)이 두렵지 않은가. 김삼웅
  • 日우익 96년부터 ‘역사왜곡’ 공작

    오는 15일을 전후해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시선이 일본 열도에 쏠린다.일본 문부과학성이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왜곡 교과서에 대한 검정결과를 발표할예정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진행 상황을 보면 이 교과서의 검정 통과는 거의확실시 된다.‘새 역사…모임’은 일제 당시 피해 주변국의반발을 의식한 일본 정부가 수차례 수정을 지시한 내용을 받아들여 일단 ‘통과의식’을 치렀다. 이들이 만든 교과서가 채택될 경우 우익진영의 국민의식통합 운동을 위한 합법적인 ‘교두보’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반세기동안 집요하고 치밀한 교과서 왜곡운동을 펼쳐온우익세력이 역사교육 현장에 거점을 확보,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위한 파상공세에 본격 돌입할 것이란 점에서 주변국들의 우려를 더하고 있다. ■왜 교과서 왜곡인가 일본 우익세력에게 교과서는 일본 재무장을 위한 ‘사상운동의 첨병’이다.“지금의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잔학한 민족의 자손이라는 열등감을 심어주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시각이다.이른바 ‘자학사관’과‘반일사관’,‘도쿄재판사관’(일본의 전쟁책임을 인정하는 역사관)등을 타파해야만 일본이 군사적으로 재무장할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다.이들은 특히 ‘자유주의 사관’ 또는 대표적인 보수 논객인 고(故)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이름을 딴 ‘시바사관’으로 포장,일본 국민의식의 통합에 앞장서고 있다. ■교과서 파동 전말 ‘새 역사…모임’을 선봉으로 진행된이번 ‘역사왜곡공작’이 감지된 것은 지난 96년 6월.자민당내 우파의원 모임인 ‘밝은 일본 국회의원연맹’ 초대 회장오쿠노 세이스케(奧野誠亮) 전 법무상이 “종군위안부는 상(商)행위였다”는 의도된 망언과 함께 현 역사교육을 비판하면서 본격화됐다.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도 ‘역사 검토위원회’ 출신이다.이 단체는 ‘자학사관’ 타파 지침서인 ‘대동아 전쟁의 총괄’을 편찬했다. ‘새 역사…모임’은 이 책을 바탕으로 역사서를 새로 집필, 지난해 4월 검정신청을 냈다.같은해 8월 일부 내용이 공개되면서 국내외에 파문이 일었다. ■우익의 입체적 공작 이번 교과서 파동으로 우익진영의 조직력과 치밀성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다.회원수가 1만여명으로 알려진 ‘새 역사…모임’은 그 전위대나 다름없다.일부 자민당 의원 등 우익 정치세력이 분위기를 조성하고 ‘새역사…모임’의 회장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도쿄대 교수,후지오카 노부카쓰 도쿄대 교수 등이 이론적 뒷받침을 했다.산케이(産經)신문 등은 지면을 통해 선전수 역할을 했다.이 교과서의 출판을 맡은 후즈사(扶桑社)는 산케이신문 계열사다. ■1·2차 수정내용과 전망 일본 정부는 한·일,중·일 외교관계 악화를 우려,1차에서 137곳에 대한 수정을 지시했다.수정 지시는 통상 두 차례인데 네 차례나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한일합방과 관련,‘식민지’ 등 단어를 추가토록 했고,공민(사회과목)교과서의 군국주의 부활을 고무하는 내용도상당 부분 완화시켰다고 일본 언론은 보도했다.그러나 곁가지를 기술적으로 고쳤을 뿐 역사인식의 근본틀은 그대로다. 분명한 것은 자신들의 교과서를 일단 통과시키는데 성공한우익진영이 교과서 점유율 제고를 위한 2차전에 착수하고,일본 재무장을 금지한 일본 헌법 수정 등 총체적인 우경화 작업을 더욱 노골화 할 것이라는 점이다. 김수정기자 crystal@. *‘과거 청산’獨은 역사교과서 반영. 독일도 일본처럼 세계 2차 대전의 전범 국가지만 그들의 역사 접근방식은 일본과 크게 다르다.독일은 자신들의 과거가‘집단 범죄’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역사관에서 출발한다.즉전후 독일의 국가적 정체성은 나치를 부정하는 기반 위에 있는 것이다. 명확한 역사관과 과거 청산의 의지를 갖고 있는 독일은 교육법에서 교과서의 기본요건으로 ‘교조적인 사상을 주입하거나 국가의 중립성,사회의 관용성의 원칙을 침해하는 내용을 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학교교육의 목적으로는 ‘나치주의와 폭력적 지배를 추구하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해 불굴의 의지로 저항하는 인간을육성한다’고 명시하고 있다.여기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것은세계시민을 육성하는 것이다. 1970년 당시 독일 총리였던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기도 했던 독일은 전후 역사 교과서를 편찬할때 폴란드·프랑스 등 이웃 나라들과 협의과정을 거친다. 서로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오해의 소지를 최소화하기위해서다. 독일·프랑스·폴란드의 역사·지리학자, 교사들은 장기간동안 위원회 활동과 공동 연구를 통해 ‘권고안’ 형태의 합의문서를 만들어 이를 자국의 교과서 편찬에 적극 반영한다. 이 방법은 과거 불행한 역사를 공유한 해당국 사이에 발생할수 있는 ‘교과서 왜곡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독일의 학교와 시민단체도 유대인 학살 현장인 강제수용소견학을 수시로 실시,잘못된 역사에 대한 성찰을 통해 편협하지 않은 국민,세계 시민으로서의 정신을 고취시키고 있다. 이진아기자
  • [데스크 시각] 대결과 양보

    냉전은 진정 끝났는가.동·서독이 하나가 되고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대응 기구였던 바르샤바조약기구는 무너졌다. 그런 의미에서 냉전은 끝났다.그러나 냉전의 관행과 냉전식편가르기는 미국과 러시아 사이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 여전히 남아 있다. 최근 화제가 된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의 이중 스파이사건은 미국과 러시아 두 나라의 첩보전이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그는 옛 소련 시절부터 시작해 지난달체포되기까지 15년간 이중첩자 노릇을 해왔다.그가 넘겨준정보들로 인해 러시아 내 미국 스파이망이 회복 불능의 수준으로 타격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도 미국 영국을 비롯한 나토 주축국들과 러시아 중국북한 등은 각종 국제적 이슈들에 어김없이 서로 반대편에 선다.이라크 길들이기,코소보 공습이 그 대표적인 예다.국가미사일방어망(NMD)을 둘러싼 편가르기도 마찬가지다.영국과 일본 호주가 미국의 입장에 적극 찬동하고,서유럽국들이 묵시적 찬성을 하고 있다.러시아 중국 북한은 그 반대편이다.옛모습 그대로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암묵적 동의를 표했지만 NMD에 대한우리 정부의 공식 입장은 ‘중립’이다.그러나 이 입장을 정리하기까지의 과정은 외교 미숙을 드러낸 실패작이다.1972년미·소간 체결된 탄도탄요격미사일(ABM)제한협정은 서로 상대의 공격력을 무력화하는 방어망은 안 만들겠다는 일종의신사협정이다.NMD 추진에 ABM 개정은 필수다.따라서 ‘ABM개정을 반대했지 NMD를 반대한 건 아니다’는 식의 우리 정부 해명은 삼단논법에도 맞지 않는 난센스였다. 그것이 만의 하나 동맹관계인 미국에서 러시아로 ‘말을 갈아 타기 위한’ 신호였다면 그 타이밍과 정책 결정 과정 역시 문제다.정책의 당위성에 대해 좀더 충분한 토의와 국민적합의가 선행됐어야 했다. 수면 아래서는 냉전식 편가르기가계속되는데 앞서서 어느 한쪽의 손을 표나게 들어줄 필요는없다. 냉전의 잔영은 우리 마음 속에도 있다.중동평화가 이루어지기 힘든 요인 중 하나는 이스라엘 지도층 다수가 반세기 전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당시 10대 전후의 어린이였던 이들은 지금도 생존에대해 일종의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고 한다.이들에게 타협은곧 생존권의 포기다. 6·25는 ‘우리 민족의 아우슈비츠’다.6·25에 가족을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도 같은 강박관념을 안고산다.세월이 약이 돼 잊고 살 만큼은 됐지만 조그마한 자극이라도 있으면 이 상처는 금방 도진다.그런 점에서 ‘김정일(金正日)위원장은 6·25전쟁에 책임이 없다’는 황태연(黃台淵)교수의 말은 그의 속뜻이 어디에 있었던 간에 사려깊지못했다. 올 봄 우리의 최대 이슈는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이 될 것이다.김 위원장의 답방에 사과가 전제돼야 한다는 요구는 정당한 것이다.하지만 사과하면서까지 그가 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도 우리는 안다.어느 한쪽이 양보를 해야 하는데 양보는 조금이라도 더 가진 쪽에서 하는 게 순리다.그건 남쪽이다. 답방의 전제조건을 따지는 건 중요하다.하지만 그의 답방이우리 주위는 물론 세계 무대에 남아 있는 유·무형의 냉전잔재들을 걷어낼 큰 전기가 되도록 지혜를 모으는 게 더욱더현명하다는 생각이다. 영원히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이 기 동 국제팀장yeekd@
  • [굄돌] 마음의 경치

    무던히도 무더웠던 작년 여름,처음으로 어머니의 나라인 한국을 방문한 고교 졸업생인 딸과 함께 전라도와 경상도의 명승지 단체 버스관광을 떠났다.두달동안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 딸아이는 친구와 함께 벨기에에 있는 피난민수용소에서자원봉사로 그림을 가르치고 왔고,나는 27년만에 남편과 어머니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와 다시 한국 땅에서의 삶에 적응하느라 남모를 땀을 흘리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같은 아파트에서 온 60살 내지 70살 정도 나이의 두 그룹이 타고 있었다.그들은 서로 노래를 부르고 술도나누어 마시며 농담을 하고 버스 스피커에서는 계속 옛날 유행가가 흘러나와 흥을 돋우었다.하지만 나는 그것을 즐길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식당에서 한 테이블에 앉은 할아버지와도 별 말도 안하고 거북스럽게 밥을 먹고 버스에 오르자 딸아이가 나보고 “엄마 왜 그 분에게 친절하게 이야기를안해요? 할머니는 항상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며 친하게 지내는데….엄마는 너무 긴장해 지내요”라고했다.그 말을 듣는 순간,아! 내가 바쁜생활 속에서 인간에대한 사랑을 잊어버릴 뻔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이내 일행에게 미소를 짓고 딸과의 대화의 길로 나섰다. “리사,한국에 오니 사람들이 50인데도 많이 늙었다고 하고 큐레이터들도 전람회를 기획할 때 거의 30대,40대의 화가들만 뽑는다고 하는구나.나도 거울을 보면 얼굴에 주름살이 많이 있는 것 같아.”그 말을 들은 딸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엄마,주름살 안 보여요.마음이 젊고 이상이 높고 최선을다하는 사람이 젊은 사람이지.얼굴에 주름 하나 없어도 아무것도 안하고 늙었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늙은 사람이에요.엄마가 나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했지않았어요?” 이 여행후 나는 긍정적으로 살기로 딸과 약속했고 딸은 대학생활을 시작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 하면서 더 큰 마음의 경치를 보기 위해 먼 미국으로 떠났다. 곽 수 서양화가
  • 국군포로와 반공포로가 고려호텔에서 동시에 혈육과 상봉

    분단의 아픔을 온몸으로 체험한 ‘국군포로’와 ‘반공포로’가 고려호텔에서 동시에 혈육과 상봉,50년 동안 참았던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국군포로 손원호(75)씨를 만난 남의 동생 준호(67·경북 경주)씨는 40년간 제사를 지냈다며 수절한형수의 안부를 전했다.원호씨는 영웅훈장 바로 아래인 ‘국기훈장 1급’ 등 8개의 훈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재덕(69)씨의 남측 동생인 재조(65·경남 남해군)씨는 가슴에 훈장을 4개나 달고 나타난 형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삐죽히 솟은 어금니를 확인한 뒤 “맞구나,맞아 형이구나”라며 감격어린 포옹을 나눴다.한편 53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인민군 출신 반공포로 김한전(70)·장형섭(78)·최인식(71)·최창환(70)씨 등은 북측 혈육들을 만나 모진 ‘한풀이’를 했다. 오일만기자 oilman@
  • “다른 탈북자처럼 남한에 정착했으면”

    “중국사람이라면 한국에 오지 않았을 겁니다.다른 탈북자들처럼 남한에서 인간답게 살고 싶습니다” 북한을 탈출해 13년동안 중국과 베트남,일본 등지를 떠돌며‘국제 미아’생활을 해온 김용화(金龍華·47)씨가 지난 5일일본에서 입국해 경기도 시흥시의 한 연수원에 임시 거처를마련했다. 김씨는 비록 한국정부로부터 1년간의 체류허가를 받아 입국했지만 이번에는 기필코 난민이 아닌 북한주민으로 인정받아남한에 정착해 보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갖고 있다. 함흥철도국 승무지도원으로 일하던 지난 88년 철도사고의문책을 피해 북한을 탈출한 김씨의 ‘탈북생활 13년’의 인생역정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당시 중국으로 탈출한 김씨는 베트남을 거쳐 95년 6월 충남 태안반도로 숨어 들어왔으나 탈북자가 아닌 밀입국 조선족으로 분류됐다. 중국 도피생활중 돈을 주고 만든 위조 공민증이 화근이 돼탈북자임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무려 22차례에 걸쳐재판을 했으나 불법 입국자로 판정돼 강제퇴거 명령을 받게되자 98년 4월 전남 진도에서 또 다시 쪽배를 타고 일본으로밀항했다. 김씨는 “그동안 겪은 고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자살할 마음까지 먹었으나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눈을 감을 수없어서 이를 악물고 참았지요. 분단이라는 비극의 장벽이 너무 높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고 말했다. 김씨는 일본 오오무라시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병 보석으로가석방 조치를 받은 후 일본 인권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한국을 다시 찾게됐다. “결국 일본사람들이 저를 살려준거나 다름없지요” 김씨는 “요즘 남북 화해무드가 조성되고 있으나 탈북자들에 대한 관심은 그리 높지 않은 것 같다”며 “이들이 남한도 같은 조국이라고 느낄수 있도록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흥 김병철기자 kbchul@
  • 87년 납북 재환씨 사망소식들은 이영욱前의원 ‘비통’

    “아들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는데….” 15일 남북적십자사의 이산가족 생사 확인 결과 87년 납북된 것으로 알려졌던 장남 재환(宰煥·당시 25세·)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영욱(李榮旭·68·전 민정당 의원) 변호사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이 변호사는 오는 26일부터 2박3일동안 제3차 이산가족 방문단으로 평양을방문,재환씨를 상봉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지난달 말 상봉 후보자 200명의 명단이 북한으로 보내진뒤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렸다”는 이 변호사는 “영리하면서도 사려가 깊었던 아들이 꼭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었는데이렇게 가슴아픈 소식을 들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이 변호사는 “26일 평양에 가면 아들이 초라한 몰골을 하고 나타나 99년 정부가 발표한 것처럼 정치범수용소에 있는데도 차마 사실을 말하지 못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상봉의 날만 기다렸다”고 안타까워했다. 미국 MIT 경영대학원 박사 과정에 다녔던 재환씨는 87년 7월20일 유럽 여행을 하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북한 요원에게납치된 것으로 알려졌다.북한은 “제3국을 통해 의거 입북했다”고 발표했었다.이씨는 중·고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서울대 영문학과에 입학,2학년을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었다. 송한수기자 onekor@
  • 독자의 소리/ 한국전쟁 고아 제주도 수송 희생정신 기려야

    1956년 제작된 영화 ‘전송가’는 당시 우리 국민에게 크나큰 감동을주고 심금을 울린 영원불멸의 명작이다. 전쟁중 1,000여명에 달하는고아들을 제주도로 수송하는 마지막 장면은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인간의 숭고한 희생정신이다.빗발치는 폭격 속에 헐벗고 굶주린 고아들을 모아 임시수용소인 한 초등학교로 데려가는 장면,헤스소령이 난관을 무릅쓰고 고뇌 끝에 용단을 내려 비행기를 조종하는 그 순간은 한편의 드라마틱한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게 한다. 정부는 이 기회에 브레이즈텔군목과 딘·헤스소령이 남긴 고귀한 인류애 정신과 한국을 사랑한 숭고한 업적을 길이 보존하고,당시 참여한 미5공군 장병들의 희생정신을 잊지 않기 위하여 기념관 건립을 추진해야 한다. 한승혁[서울 종로구청 교통지도과 팀장]
  • 전사처리 국군포로 손윤모씨 가족 “”어머니가 얼머나…””

    6·25전쟁 중 포로로 잡혀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손윤모(孫閏模·70)씨의 동생 상모(相模·65·경남 사천시 축동면 배춘리)씨는 “죽은 줄 알고 제사까지 지낸 형님이 살아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달 31일 발표된 북측 이산가족 명단에서 손씨의 이름을 확인한상모씨는 “어머니(李德秀)는 형을 애타게 그리워하다 지난 63년에돌아가셨다”며 이제야 소식을 전해온 형을 원망했다. 손씨가 국군에 입대한 것은 19살이던 지난 50년.당시 무진회사(현상호신용금고) 영업사원이던 손씨는 6·25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입대,가족들과 영영 헤어졌다. 휴전 후 전쟁에 나갔던 다른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손씨는소식이 없었다.그러다 포로 교환으로 돌아온 이웃으로부터 손씨가 북한의 포로수용소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이후 가족들은 손씨가 전사한 것으로 알고 매년 음력 9월9일 제사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소식없는 아들을 부르며 숨을 거뒀다. 사천 이정규기자 jeong@
  • 국민·주택銀 노조 파업 이모저모

    국민·주택은행의 파업이 장기화 조짐을 보임에 따라 은행 경영진과 금융당국은 휴일인 24일에도 대책마련에 부심했으나 뾰족한 해답을찾지 못했다. ◆당국,대책없어 고심 공권력 투입시기를 저울질 하고 있으나 후유증을 우려해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금융감독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의 주요 간부와 은행관련 실·국장 등은 휴일인 24일 대부분 출근,은행파업 대책마련에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이들은 26일에는 국민·주택은행의 영업을 무조건 정상화시킨다는 각오로 대체인력 확보 등 다양한 영업정상화 방안을 강구 중이다. 금감위의 강권석(姜權錫) 대변인은 “성탄절은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도록 해야하지 않겠느냐”며 공권력 투입을 통해 두 은행의 영업정상화를 도모하는 수밖에 없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금감원의 한 고위관계자도 “원장은 공권력 조기투입을 통해 은행정상화를 도모하려는 생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그러나공권력 투입에 따른 불상사가 생길 경우,책임은 경찰이 지게되는 만큼 경찰의 결정을 지켜보고만 있는상황이다. 한편 경찰은 24일 오후 들어 20개 중대 2,000여명의 경찰력을 농성장 주변에 재배치했으나 눈이 많이 내리자 밤 10시쯤 10개 중대 1,000여명의 병력을 철수시켰다.경찰 관계자는 “눈으로 인한 기상악화로 병력을 철수했다”며 이날 밤에는 공권력을 투입하지 않을 것임을시사했다. ◆노조,결사항전 태세 국민·주택은행 노조원 1만5,000여명이 나흘째 농성중인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국민은행 연수원은 ‘피난민 수용소’를 방불케 했다. 노조원들은 목도리,마스크,장갑 등으로 중무장한 채 운동장에 설치한 70여개의 천막은 물론,연수원 복도에까지 비닐장판과 담요를 깔고 앉아 “합병선언이 철회될 때까지 싸우겠다”고 전의를 불태웠다. 민성욱(閔盛郁·28·국민은행 교대역지점 )씨는 “합병은 실업자만양산할 뿐”이라며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이날 새벽에는 ‘깡통’ 연탄불을 피워놓고 자던 노조원 7명이 가스에 중독돼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오후 8시쯤에는 20대 여자 노조원 1명이 탈진해 인근 병원으로 후송됐다. 농성장에는 온종일 옷가지와 담요,먹거리와 음료수를 들고 찾아온노조원 가족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오후 6시30분쯤 기독교 신자 노조원 1,000여명은 운동장에서 약식으로 성탄예배를 드렸다.특히 배치됐던 일부 경찰병력이 밤 늦게 철수하자 노조원들은 문화마당을 즉석에서 열어 성탄 축하노래 등을 부르며 추위를 녹였다. 국민은행 팀·차장협의회는 팀·차장 1,020명 전원이 노조원들의 파업에 동참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팀·차장협의회측은 “이번 합병은 전형적인 관치금융의 결과인 만큼 합병이 철회될 때까지 노조원들과 행동을 같이하며 투쟁하겠다“고 덧붙였다. 전영우기자 ywchun@
  • 납북자문제 北과 인내심 갖고 대화

    납북자와 국군포로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나.2차 이산가족 상봉에서 납북자의 가족상봉이 처음으로 성사되면서 이들의 본격적인가족상봉과 해결 가능성이 기대되고 있다.냉전시대의 산물로 남북관계 진전 속에서도 여전히 한반도의 상처를 상징하고 있는 이들 납북자와 국군포로의 해법을 살펴본다. 2차 이산가족 방문(11월30일∼12월2일) 때 납북어부 강희근씨 모자의 상봉이 이뤄짐으로써 남북의 납북자 문제 해법에 관심이 쏠리고있다. 납북어부 상봉은 북한을 꾸준히 설득,납북자를 이산가족의 틀에 넣어 상봉부터 시키자는 우리 정부의 신중한 접근법이 주효했기 때문에가능했다. 그러나 ‘납북’을 인정하지 않는 북한과 ‘비전향장기수북송’과 맞먹는 피랍자 송환을 요구하는 납북자 가족의 틈바구니에서 정부의 고민도 크다. 정부는 납북자 문제는 다른 남북 현안들처럼 한걸음씩 천천히 풀어나가지 않으면 해결이 어렵다는 인식 아래 인내심을 갖고 북한과 대화를 해나간다는 전략이다.특히 이 문제가 향후 남북관계 진전을 가늠하는 중요한 과제라는 점에서 해결의 우선순위도 높게 잡고 있다. 납북자란 넓은 의미에서 분단 이후 한국국민으로써 북한에 억류돼사망했거나 살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입북 당시의 신분,납북지역,시기,상황 등에 따라 세분되며 이를 유형별로 보면 ▲국군포로 ▲한국전쟁 중 납북된 민간인 ▲납북어부 ▲외국에서 강제납치된 민간인 ▲항공기 피랍자 ▲북송 재일교포 ▲북파공작원 등으로 나뉜다. 납북자에 대한 정의는 관계기관마다 다르다.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국군포로의 경우 별개의 사안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국방부가 공식확인한 국군포로는 351명에 불과하다.북파공작원은 아예 인정하지 않고 있다.관련 정보수집의 어려움과 납북자에 대한 정부의 입장차이때문에 전체규모에 대한 파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최근 통일부는 국회에 제출한 납북억류자 현황자료에서 정전협정 이후 납북자는 모두 3,790명이며 이 중 13%인 487명이 북한에 억류돼있다고 밝히고 있다.여기에는 어부(3,692명),69년 KAL기 피랍에 따른승무원과 승객(51명),함정 피랍군인 및 경찰관(22명)등이 포함돼있다. 북한은 납북자의 북한거주사실은 인정하고 있다.하지만 ‘납북자가아니라 공화국을 동경해 자진 월북한 사람들’로 규정하고 있다.북한체제에 순응하는 사람에겐 공식적으로 ‘의거입북자’‘의용군’‘통일의 역군’‘통일용사’ 등으로 호칭한다.납북자들은 대부분 대남선전에 활용된다.납북자를 회유,협박해 자진월북했다는 기자회견을 시키고 월북자들의 생활상을 TV를 통해 내보내기도 했다.그러나 체제에저항하면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납·월북자 22명 수용확인)하거나 처형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북한의 국군포로에 대한 입장은 단호하다.정전협정체결 이후 포로교환을 통해 남으로 갈 사람은 다 갔으므로 법적으로 국군포로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노주석기자 joo@. *“납북자 가족도 상봉신청하면 만남 기회”.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주관하고 있는 대한적십자사 박기륜(朴基崙)사무총장은 6일 “납북자 가족들도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하면 규정된절차에 따라 상봉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서 북측과 납북자의 상봉확대를 협의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납북자도 ‘넓은 의미’의 이산가족으로 풀어나간다는 게 한적과정부의 기본 원칙입니다.별도 생사확인과 면회소를 통한 상봉기회가있을 때에도 포함시키는 등 납북자 가족 상봉을 활성화시켜 나갈 계획입니다” ‘납북자 상봉을 이산가족 해법과 별도 의제로 풀어나가자’는 일부주장에 대해 박총장은 명분론적인 접근보다 실질적인 성과를 가져올수 있는 방안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납북자들이 ‘왜 북한땅에 있느냐’는 시시비비를 가리기에 앞서 가족과 인도적 차원에서 우선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자세다. 2차 상봉에서 납북자 가족상봉은 북측의 태도 변화를 의미하느냐는질문에 박총장은 ‘북에 납북자는 없다’는 북측 입장에는 변함이 없지만 전반적인 남북관계의 진전에 따라 북측도 인도적인 문제에 유연성을 보인 것이라며 앞으로 보다 전향적인 조치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적이 북측과 이 문제를 다뤄온 것은 지난 6월 말 1차 적십자회담때.비공식적인 입장 전달 수준에 그쳤지만 북측은이 문제를 제기하자 자리를 박차고 나갈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는 후문이다.그뒤 9월 2차 적십자회담에서 다시 정식으로 제기했을 때는 북측 반응이 많이 누그러지는 등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국군포로의 상봉문제에 대해선 “국군포로의 가족상봉 문제도일단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적십사회담을 통해 풀어나가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군포로 문제는 국방장관급 회담 등 다른 정부채널에서 해결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라고 덧붙였다. 이석우기자 swlee@. * “정전협정후 끌려간 사람들 이산과 별개”. “납북자 문제를 이산가족 문제와 같이 취급해선 안됩니다” 87년 백령도 해상에서 납북된 동진호 어로장 최종석씨(55)의 딸이자납북자가족협의회 회장인 최우영(崔祐英·30·여)씨는 “납북자 문제해결의 첫 걸음은 납북자를 정확히 인식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최근 정부가 ‘납북자도 포괄적인 이산가족 범위에 포함된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최씨는 “이산가족들 중에는 6·25 때 자진 월북한경우도 있지만 납북자는 모두 정전 이후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북에끌려간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따라서 “납북자가 이산가족과 같이다뤄지면 남북 이산가족 교환방문처럼 가족간에 일회성 만남은 가능하겠지만 남쪽으로의 송환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납북자 문제 해결에 있어서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았다.최씨는 “지금까지 남북간에 있었던 300회 이상의 협상에서 북한은 끊임없이 비전향장기수의 송환을 주장해왔다”면서 “하지만 우리 정부는 92년에는 이인모씨,올해는 비전향 장기수 모두를 북으로 보내 주면서도 남측의 납북자 생환에 대해선 아무런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며 정부 정책을 못마땅해 했다. 최씨는 또 납북자 문제를 전담하는 정책기구나 전담부서의 필요성을강조했다. “우리 정부에는 납북자 문제 담당직원이 통일부 인도지원국 사무관 한명이 고작”이라면서 “지원정책도 제대로 정비하지 못한 정부는 지난 9월 납북자로서는 최초로 생환한 이재근씨에게 탈북자에 준한 대우를 하고 있다”며 답답해 했다. 최씨는 “통일이란 두 체제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인데 여기에는 먼저 사람의 통합이 필요하다”면서 “근래 남북간에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있기 때문에 납북자 문제도 더 잘 해결될 것이라 믿는다”며 빠른 시일 내에 납북자들이 고향에 있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희망했다. 홍원상기자 wshong@.
  • [해외 항일전적지를 찾아서] (16)블라디보스토크·빨치산스크

    1910년 국권상실 직후 의병들의 거점이었던 포시에트와 크라스키노를 돌아본 취재팀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항일투쟁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러시아어로 ‘보스토크(동방)’와 ‘블라디’(정복)를 합성한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연해주의 중심도시.금각만(金角灣)을 껴안은이 곳은 극동에 있는 러시아의 유일한 부동항(不凍港)으로 1860년대이래 러시아 극동진출의 발판이 돼왔다.특히 1903년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개통되면서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우리 항일투쟁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항일투쟁이 응집된 중요한곳이다.일제를 피해 포시에트를 떠난 한인들이 새로 자리를 잡은 곳이기 때문이다. 해삼위(海蔘威)라고도 불렸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먼저 찾아 나선곳은 뽀그라니치나야 스라보카 거리였다.구한말 항일운동의 중심역할을 한 개척리가 세워진 곳이다.남향에다 바다로 향한 전망이 좋아 마을이 없던 당시 이주자들이 정을 붙이고 살기에는 최적지로 보였다. 그러나 개척리는 1911년 러시아 당국이 콜레라 근절을 핑계로 수천여명에 이르던 우리 동포들을몰아낸 뒤 병영을 지었고,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원형극장이 들어섰다.지금은 중국음식점으로 바뀌었다. 한인들은 쫓겨나기 1년전인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이 전해지자이상설 이범윤 홍범도 등을 주축으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했다. 그러나 9월 11일 러시아 극동공화국 당국이 일본의 요구에 따라 성명회와 십삼도의군 간부 200여명을 체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대동공보’도 이 곳에서 발행됐다.국내 의병장,계몽운동가들이 모여들면서 이 주변은 한인수가 한때 16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90여년의 긴 세월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을 남김없이지워냈다.기왓장 하나 남아 있지 않은 현실에 취재팀은 안타까움을감출 수 없었다. 개척리를 떠난 동포들은 십여㎞쯤 떨어진 언덕에 새둥지를 틀었다.바로 신한촌(新韓村)이다.그러나 신한촌은 북향의 경사진 언덕이다.따뜻한 남향의 옥토에서 칼바람 부는 황무지로 옮겨온 우리 동포들의심정은 어땠을까. 우리 동포들은 신한촌에서 1911년 8월29일 한일합방 1주년을 맞아반대시위를 벌였다.그리고 조국독립과 계몽활동,민족주의교육 등을주창하는 권업회(勸業會)를 창설했다.이 때 홍범도는 20명의 동지와함께 ‘21의형제 동맹’을 결성했다. 1914년에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앞서 1912년 신채호 이상설장도빈 등은 ‘권업신문’을 발간했다.1919년 3월17일에는 고국에서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규모 시위를 가졌다.이듬해 3·1절에는독립문을 세웠다.이렇게 줄기차게 전개된 투쟁 때문에 독립운동사 연구가들은 독립운동사에서 신한촌을 북간도의 용정과 명동보다 앞선것으로 평가한다. 일본군은 1918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군인 적위군과 차르의 백군간에 벌어진 내전에 국제간섭군이라는 명분으로 파병해 있었다.1920년4월,일군이 러시아군과 한인부대 연합군과 충돌하자 이를 기화로 신한촌을 기습하였다.주요 지도자들은 탈출하였으나 불운하게도 최재형이 동포 60명과 함께 체포되었다.그는 우수리스크로 끌려가서 처형되었다. 취재팀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를 피해 새로 정착한 빨치산스크로 향했다.우리식으로 수청(水淸)이라고 이름지어진 이 곳은블라디보스토크에서 200㎞쯤 떨어진 산세 험한 소 도시이다.백마 탄 김일성장군으로 불렸던 김경천(金擎天) 장군이 이끄는 항일유격대가 치열하게 일본군과 싸웠던 곳이다. 김경천은 창해(滄海)청년단과 수청고려의병대를 이 곳에서 이끌었다. 광복군사령관을 지낸 이청천(李靑天)보다 일본육사 3년 선배로서 조국 독립에 한몸을 던졌던 김경천.그는 1909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육사에 재학 중 조국이 강점당하는 비운을 겪었다.요코하마에서 그는이청천 홍사익 등과 함께 뒷날 탈출하자고 결의했다.1919년 6월 그는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했다. 이청천이 중국 땅에 남은 것과 달리 김경천은 1919년 말 러시아로와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1920년 4월 일본군의 신한촌 기습에서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면한 그는 수청으로 가서 한인들을 괴롭히는마적들을 제압하고 일본군과 싸웠다.그는 이 때부터 ’백마 탄 김일성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김경천은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하면서도 때때로 러시아 백군과 싸워 볼셰비키혁명에도 공로를 쌓았지만홍범도가 그랬던 것처럼 강제 이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그리고 1942년 수용소에서 불우하게 사망했다. 광산촌인 빨치산스크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자동차는 첩첩산중으로 들어가고 또 들어갔다.간신히 3시간만에 도착한 빨치산스크의중심가는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갑자기 내리는 보슬비를 맞으며 한참수소문한 끝에 빨치산스크 시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나탈리아라는여성 관리원의 도움을 얻어 빨치산 사진과 문헌을 샅샅이 뒤졌지만김경천 등 한국식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한인 빨치산에 관한 어떤 기록도 없었다.기록에 따르면 이 곳에 있던 빨치산 중 절반이 한인이었다고 하는데 아마 1936년 강제이주 뒤 자료들이 대부분 멸실된 듯 싶었다.나탈리아는 취재팀의 허탈해 하는 표정을 보고 “수장고에 다른자료들이 있는데 관장이 갖고 외출했고 그는 며칠뒤에야 돌아온다”며 자기가 더 미안해 했다.취재팀은 어쩔 수 없이 벽에 걸린 사진들을 꼼꼼히 살펴보다 한인으로 보이는 몇사람을 발견한 것을 위안으로삼으며빨치산스크를 떠났다. 블라디보스토크 박재범기자 jaebum@. * 빨치산스크의 고려인들. 빨치산스크에는 고려인(카레이스키)이 간혹 눈에 띄었다.1936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전원 강제이주된 한인들의 후손들이다.그들은 최근 몇년새 한둘씩 다시 연해주로 돌아오고 있다.대개 중앙아시아에 가까운 하바로브스크 등 대도시에 자리잡고 있으나 멀리 빨치산스크까지 오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그러나 그들은 이미 선조들의역사를 잊었다.아니 아예 모르고 있었다. 빨치산스크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러 들어온 한 사람을 만났다. 생김새가 한국사람과 똑같아 “혹시 카레이스키가 아니냐”고 러시아말로 묻자 “그렇다.박이다”라고 대답했다.“4∼5년전에 중앙아시아에서 이 곳으로 왔다”는 그는 “예전에 이 곳이 독립운동의 거점이었음을 아느냐”는 질문에 ‘처음 듣는 얘기’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바로브스크에는 고려인이 빨치산스크보다 훨씬 많다.고려인들은하바로브스크 시내 시장에서 채소와 과일 등을 팔거나 구두를 고치는일 등을주로 하고 있다.그들 역시 중앙아시아가 고향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바로브스크 등 연해주가 그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뿌리내렸던 곳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역시 극히 드물었다. 박재범기자
  • 새영화/ 글루미 썬데이

    ■2차대전 당시 헝가리에서 단 8주만에 187명을 자살로 내몰았다는죽음의 송가 ‘글루미 썬데이’(Gloomy Sunday).부다페스트의 무명작곡가 레조 세레스의 전설같은 노래와 이미지가 그대로 스크린으로 옮겨졌다. 독일 출신의 감독 롤프 슈벨이 연출한 영화에는 도드라진 미덕이 한둘이 아니다.실화를 바탕으로 다큐멘터리적 리얼리티를 견지하면서도드라마의 감성을 잃지 않은 균형미는 무엇보다 압권. 거기에 또하나. ‘블루’,‘화이트’,‘레드’ 시리즈를 찍었던 촬영감독 에드워드클로진스키는 카메라가 닿는 부다페스트 구석구석을 낭만과 우울이교차하는 미학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연인사이인 자보와 일로나가 함께 운영하는 레스토랑에 피아니스트안드라스가 합류하면서 세사람은 삼각관계를 이룬다.하지만 질투같은감정은 이들에겐 없다. 사랑을 공유하며 평화롭던 ‘동거’에 돌을 던진 건 나치 장교 한스다.지난날 일로나에게 구애를 거절당한 그는 유태인 수용소 징집권한을 휘두르며 안드라스와 자보를 죽음으로 내몬다. 음울하고 나른한 피아노 선율은 멜로와 미스터리 사이를 오가는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50년뒤 일로나가 혼자 지키는 레스토랑을 다시 찾은 한스가 비극적 최후를 맞는 끝대목에서는 반전의 쾌감까지 건질 수 있다.안드라스역의 스테파노 디오니시는 ‘파리넬리’에서 주연했던 그 얼굴.장담컨대,모처럼 만나는 수작(秀作)이다. 황수정기자
  • 14일 개봉‘러브 오브 시베리아’

    올 봄 칸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돼 일찍부터 입소문을 타온 니키타 미할코프 감독의 ‘러브 오브 시베리아’(The Barber of Siberia)가 오는 14일 개봉된다.유럽 4개국이 580억원을 밀어넣어 합작한 영화는 소문대로 스케일이 크다.이국정취가 물씬 풍기는 대서사 로맨스를 찾고 있는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같다.잔꾀와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가득한 ‘할리우드 상품’들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를 전해준다. 영화의 시점은 1905년.등을 돌려앉은 초로의 여인이 사관생도인 아들에게 길고긴 편지를 써내려간다.20년전으로 시계바늘을 돌려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사랑이야기를 속절없이 끄집어낼라치면,어느새 화면은 술렁이는 열차속에서 예기치 않게 얽혀드는 젊은 남녀의 인연을 포착한다. 거액을 들인 대작인 만큼 다소 위압적으로 가라앉았을 것이란 선입견은 시작부터 깨진다.러시아 황실사관학교의 생도인 안드레이 톨스토이(올렉 멘쉬코프)와 미국에서 온 여인 제인 칼라한(줄리아 오몬드)이 샴페인을 나눠마시며 호감을 나누는 과정은 경쾌하고발랄해서 영화가 시대물이라는 사실을 깜빡깜빡 잊게 만든다. 제인은 발명가 맥클라한의 딸 행세를 하지만 실은 발명가의 고용인일 뿐이다.황제의 최측근이자 사관학교장인 레들로프 장군을 유혹해,새로 발명된 벌목기계 ‘시베리아의 이발사’를 러시아 정부에 납품하게 만드는 것이 그녀의 임무다.자칫 칙칙하게 가라앉아버릴 수 있는 서사극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영화는 중반지점쯤까지 여기저기 꾸준히 코믹요소를 흩어놨다.제인이 장군을 유혹해내는 건 일사천리로 진행될 일.풍채좋은 레들로프 장군이 외국인 여자의 사랑을 얻으려 애면글면 발버둥치는 익살맞은 장면 등은 2시간40분짜리 영화의 체감길이를 줄여주는 주효장치로 쓰였다. 의도적으로 장군에게 접근해가는 제인에게 순수한 열망 하나로 안드레이가 열렬히 구애해온다.자신을 사랑하면서도 ‘현실’을 포기하지 못하는 제인을 지켜보다못한 안드레이는 연적이 돼버린 장군에 맞서고,결국 시베리아 수용소로 돌아올 기약없는 유배를 떠난다. 다 자란 아들에게 보내는 회상편지를 통해 복원된사랑이야기는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화려하고 풍성하게 채운다.침엽수림으로 끝없이 뒤덮인 시베리아 평원만으로도 모처럼 탁 트인 풍경화 한폭을 감상하는 느낌이다. 그러나 감독은 이왕이면 압축의 묘미를 좀더 살렸더라면 좋았겠다.잔재미를 위해 자잘하게 쪼개진 코믹한 에피소드들이 비극적 사랑을 그린 주제의 본류까지 망가뜨렸다는 아쉬움이 남는다.러시아 감독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거장 미할코프는 실제 크렘린궁을 촬영장소로끌어들이는 저력을 과시했다. 황수정기자 sjh@
  • 23일 개봉 ‘제이콥의 거짓말’

    사랑을 레드,블루,화이트로 표현한 영화가 있었다.그렇다면 희망은무슨 색이어야 할까.‘제이콥의 거짓말’(Jacob The Liar)은 눈물나게 페이소스 짙은 ‘슬픈 코미디’지만,내내 그런 발랄한 고민을 해보라고 부추긴다. 의도하지 않은 선의의 거짓말.더도 덜도 아닌 여기에서부터 영화는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무대는 2차대전중 나치에 점령당한 폴란드내 유태인 거주촌‘게토’다.희망의 불씨가 자취를 감춰버려 자살이 전염병처럼 번져나던 어느날,카페를 운영하는 홀아비 제이콥이 얼떨결에 흘린 몇마디에 마을은아연 생기를 되찾아간다.야간통행금지를 어겨 붙잡혀간 독일군 본부에서 라디오를 통해 소련군이 나치에 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제이콥은 다음날 목을 메려는 친구 미샤에게 삶의 희망을 심어주기위해 주워들은 라디오 뉴스를 ‘뻥튀기’해서 말해준다. 그렇게 시작된 제이콥의 거짓말은 삽시간에 몸집을 불려나가 게토를발칵 뒤집어놓는다.모처럼 되찾은 마을사람들의 희망을 꺾을 수가 없어 거짓말을 멈추지 못하는 제이콥은 어느새 나치가 개인소지를 금지한 라디오를 갖고 있다는 새빨간 거짓말까지 한다.평범한 소시민이던그가 진지한 얼굴로 “배고픔은 참아도 희망없인 못산다”는 독백을하게 될 즈음 영화는 비극의 결말을 암시한다.제이콥은 나치에 저항하며 게토를 선동하는 반군조직의 주모자로 내몰린다. 무색무미한 한마디의 거짓말이 삶의 용기를 일깨워주는 ‘아름다운거짓말’로 나아가는 과정이 풍부한 드라마에 담겼다.있지도 않은 라디오의 존재를 놓고 우왕좌왕 이야기를 엮어내는 대목들은 그대로 유쾌한 코미디다.수용소행 기차에서 탈출한 소녀 리나와 나누는 제이콥의 우정은 또 순진한 동화를 떠올리게 한다. 제이콥 역에 마춤한 배우는 누구였을까.현실감 잃지 않는 코믹연기를 보장하는 로빈 윌리암스가 맡았다. 독일판 영화는 74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피터카소비츠 감독.23일 개봉황수정기자 sjh@
  • 명지대 신율교수 “납북자 송환은 인권문제…미뤄선 안돼”

    “납북자 문제는 인권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며,더 이상 정부가 쉬쉬해서는 안됩니다” 학계의 관심 밖에 있던 납북자 문제를 꾸준히 연구하며 납북자 가족들을 접촉해온 명지대 신율(申律·정치외교학) 교수는 24일 “납북자 송환 문제가 2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의제로채택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납북자 송환 요구가 남북대화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장기수 송환이든 납북자 송환이든 모두 인권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우리 정부가 먼저 ‘통 크게’ 조건없이 장기수를 보내면 북에서도 성의를 표시할 것으로 믿는다.장기수를 보내니 납북자를 달라는식의 접근은 곤란하다.납북자 문제를 거론조차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납북자수는 정확히 얼마나 되나.정부는 454명이라고 발표했지만 가족들을 만나 확인한 결과 490여명이었다.어부가 409명으로 가장 많다.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는 것으로 확인된 사람도 22명이다. ■모두가 송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납북과 월북의 차이는 미묘하고 어려운 문제다.개개인의 동기를다 알 수는 없다.다만 정치범수용소에 있는 22명이 우선적으로 거론되어야 하며,당장 송환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사 확인 등의 절차를 밟는 것이 옳다. ■정부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정부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너무 소극적인 것 같다.비전향 장기수들을 ‘공산주의자’가 아닌 ‘인권’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납북자도 남북 화해 무드를 깨는 존재가 아닌 ‘인권’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2차 장관급회담에서는 납북자 대신 ‘행방 불명자’라는 용어를 써서라도 좋으니꼭 의제로 채택해야 한다. 이창구기자 window2@
  • 위안부 관련 日기업 상대 美서 손배소 추진

    [워싱턴 연합] 미국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가운데 당시 위안부 동원에 관계했던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처음으로 소송이 추진되고 있다. 22일 이동우(李東雨·67) 워싱턴지역 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 회장 등 재미 교포들에 따르면,그동안 미국 법원에서는 외국 정부를 상대로소송하기가 불가능해 위안부들이 재판을 청구할 길이 없었으나 위안부들도 강제로 동원됐다는 점에 착안,민사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 이 회장은 “위안부를 수송한 철도·해운회사,수용소를 지은 건설회사,콘돔이나 약품을 제공한 제약회사,자금을 지원한 금융기관 등이대상”이라고 말했다.
  • 매케인 美대통령 꿈 물거품?

    [로스앤젤레스 최철호특파원] 미 2000년 대선 공화당 대통령예비후보로 나섰으나 중도탈락한 존 매케인 상원의원(63·애리조나)이 16일 피부암중 가장 위험한 형태인 흑색소 세포종(흑색종)이 재발했다는진단을 받았다. 매케인 의원의 사무실은 이날 성명을 통해 “매케인 의원에 대한 정기검진에서 왼쪽 관자놀이와 왼쪽 팔에서 2개의 반점이 발견됐다”면서 “이들 반점이 흑색종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병세는 오는 19일 기자회견을 통해 정확히 알려지겠지만,미 언론들은 ‘위험한 상황’이 될 가능성도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그는 며칠전까지 전당대회 이후 유세에 나선 조지 W 부시 대통령후보를 따라 캘리포니아에까지 와 체니 부통령후보 대신 연설을 했기때문에 미국인들에게는 당황스런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베트남 참전 조종사 당시 정글속에서 비행기가 격추돼 5년여 동안포로생활을 하며 갖은 고초를 겪었던 그는 평소에도 후유증으로 종종 병원신세를 져왔었다. 매케인 의원은 예비선거기간중 공개한 건강기록에서 1993년 12월 어깨부위에서흑색종을 제거한 바 있다고 밝혔던 만큼 7년만에 같은 병이 재발한 셈.그는 포로수용소 시설 당시 정글의 뜨거운 햇볕때문에피부암을 얻었다고 말했다. 매케인 의원은 흑색종의 재발로 당장은 치명적이진 않더라도 자칫하면 2004년을 노리는 대권꿈을 완전히 접어야 할지도 모르는 운명의기로에 섰다. hay@
  • 탈북자 탁영철씨 딸 백일잔치

    남한 여성과 백년가약을 맺었던 탈북자 탁영철씨(30 오른쪽·인하대4년 휴학)가 오는 6일 서울 종로에 있는 한 카페에서 딸 수림양의 백일잔치를 연다. 수림양의 백일잔치에는 결혼식날 탁씨의 ‘1일 아버지’를 맡았던 이회창한나라당 총재도 참석,수림양의 ‘1일 할아버지’ 역할을 맡기로 한 것으로알려졌다. 탁씨는 “부모가 돼 딸을 키우다보니 이제서야 북에 두고온 부모님의 심정을 알 것 같다”면서 “부모님에게 귀여운 손녀딸의 재롱을 보여드리고 식구들이 모두 함께 살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탁씨는95년 신의주 경공업대학 재학중 탈북을 기도했다 북한의 기관원에게 잡혀 수용소로 끌려간 뒤 이듬해 5월 탈출에 성공,2년여간의 중국 체류 끝에 지난 97년 귀순했다. 송한수기자 oneko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