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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조영’서 설인귀役 이덕화 “애들이 날보면 울어”

    ‘대조영’서 설인귀役 이덕화 “애들이 날보면 울어”

    “이럴 줄 알았으면 고구려 쪽 인물을 맡을 걸 그랬어요.” KBS1 대하드라마 ‘대조영’에서 거란족 출신 당나라 장수 설인귀 역을 맡은 이덕화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던진 말이다. 설인귀는 발해를 건국하는 대조영에 맞서 고구려 항당세력 토벌에 앞장 서는 인물. 한마디로 대조영과 반대 지점에 서있다. 이덕화는 강원 속초시 한화리조트에서 지난 5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같은 영웅인데 대조영만 부각되고 설인귀는 욕을 먹어 섭섭하기도 하다.”고 털어놓은 뒤 “나를 보고 무섭다고 우는 아이도 있더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중국 쪽에서 보면 설인귀도 국보급 인물인데 고구려가 뜨는 바람에 제대로 평가를 못받아 연기하면서 속상하기도 하다.”며 “우는 아이에게는 나도 예전에는 ‘춘향전’의 이도령 역을 했던 사람이라고 말해줬다.”고 껄껄 웃었다. 이덕화는 ‘악역’ 연기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다. 이번 설인귀 배역도 이덕화가 스스로 선택했다. 그는 “모든 역할이 중요하지만 고구려 쪽에서 평범한 인물을 연기하는 것보다 당나라에서 개성 있는 캐릭터를 맡고 싶었다.”며 악역 캐릭터에 대한 열정을 나타냈다. 지난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군부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전두환 전 대통령 역을 맡았다. 당시 가발을 벗고 출연했으며 전 전 대통령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1994년에는 KBS2 대하드라마 ‘한명회’에서 수양대군의 책사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계유정변을 성공시키는 주인공 한명회 역을 맡았다. 실제 한명회는 죽은 뒤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관을 파내서 시체를 들어내 다시 죽이는 형벌)를 당하기도 했다. 이덕화는 “‘제5공화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설인귀도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며 “대국의 남성상을 보여주는 역할이기도 하고 때로는 해학적인 면도 있어 연기하는 맛이 있다.”고 덧붙였다.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13)儒林 누른 세조의 힘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13)儒林 누른 세조의 힘

    조선 세조(1417∼1468)는 불교대호왕(佛敎大護王)으로 불릴 만큼 전무후무한 불교 후원자였습니다. 양주 회암사와 여주 신륵사, 양평 수종사, 오대산 상원사와 금강산 건봉사·표훈사·유점사, 양양 낙산사, 영암 도갑사, 합천 해인사 등 방방곡곡의 수많은 절을 창건하거나 중수했지요. 세조는 온몸의 종창으로 크게 고생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왕위에 오르고자 조카인 단종을 죽이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으니 자업자득이라고 수군거렸지요. 불교에 의지한 것도 업보(業報)를 씻기 위해서라고들 했습니다. 하지만 세조가 불교 중흥에 힘쓴 가장 큰 이유는 왕권을 제약할 만큼 성장한 신흥사대부를 견제하려는 데 있었던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습니다. 어린 단종이 집권한 뒤 유신(儒臣) 세력이 부각되면서 왕권과 신권(臣權)의 균형이 무너지자 ‘국정의 원상회복’을 외치며 반기를 들었던 이가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입니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 있는 국보 제2호 원각사터10층석탑은 이처럼 세조가 중심에 선 조선 왕실과 사대부들이 벌인 주도권 다툼의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소재구 국립고궁박물관장은 “원각사의 창건과 10층석탑의 조성은 세조가 국왕의 권위를 보여주려던 의도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세조가 자신의 통치력을 과시할 수 있을 만한 권위의 상징물을 만들고 싶은 의도를 원각사로 구현시켰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교국가의 도성 한복판에, 그것도 주변 어디서나 바라보였을 12m짜리 고층불탑이 세조 13년(1467년) 완성됐을 때 신진사대부들의 굴욕감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언제인가 석탑의 8∼10층이 땅에 끌어내려진 뒤 1946년 미군공병대의 크레인이 동원되어서야 제 모습을 찾은 것도 유신들이 가졌던 불쾌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13세에 불과한 성종이 즉위하자 사정은 달라졌습니다. 사림정치의 기반이 공고해지면서 성종 5년(1474년) 불상은 회암사로 옮겨지고, 승려들도 내보내 원각사는 절의 기능을 상실합니다. 조광조 등이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만들겠다며 도학정치를 부르짖던 중종시대에 원각사터는 아예 택지로 분양되었습니다. 하지만 명종시대 잇따라 큰 불이 나고, 임진왜란(1592∼1598)을 거치면서 원각사터에는 다시 10층석탑과 탑비만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이후 대한제국 광무 원년(1897년) 공원으로 지정되기까지 300년 동안이나 원각사터는 왕실과 유신들의 상호견제 속에서 빈터로 남아 있게 됩니다. 원각사탑은 고려 충목왕 4년(1348년)에 세워진 라마불교의 영향이 짙은 원나라풍의 경천사10층석탑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대리석탑이지만, 조선의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 미술품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지요. 하지만 미술사적 시각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적 가치까지 부여했을 때 원각사탑에 대한 온전한 평가는 가능해질 것입니다. dcsuh@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7)안평대군의 집과 별장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7)안평대군의 집과 별장

    ●세종이 당호를 지어준 비해당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이 혼인하면서 경복궁에서 살림을 내어 나간 뒤에, 인왕산에 저택을 짓기 시작했다.1442년 6월 어느날 경복궁에 들어가자 세종이 물었다. “네 당호(堂號)가 무엇이냐?” 안평대군이 대답을 못하자, 세종이 시경에서 증민(蒸民)편을 외워 주었다. 지엄하신 임금의 명령을 중산보가 받들어 행하고, 나라 정치의 잘되고 안됨을 중산보가 가려 밝히네. 밝고도 어질게 자기 몸을 보전하며,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기네. 이 시는 노나라 헌왕(獻王)의 둘째 아들인 중산보(仲山甫)가 주나라 선왕(宣王)의 명령을 받고 제나라로 성을 쌓으러 떠날 때에 윤길보(尹吉甫)가 전송하며 지어준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 원문은 “숙야비해(夙夜匪解) 이사일인(以事一人)”인데, 세종이 여기서 두 글자를 따 “편액을 ‘비해(匪懈)’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재주가 뛰어난 안평대군이 장자가 아니었기에, 자신이 왕위에 있는 동안은 물론, 동궁이 즉위한 뒤에도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으름없이 임금 한 분만을 섬기라.”는 당부를 ‘비해(匪懈)’ 두 글자에 담아 집 이름으로 내려준 것이다. 인왕산 기슭 수성동에 비해당을 지은 뒤에 안평대군은 집 안팎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 연못과 바위 등에서 48경을 찾아냈다. 중국에서 소상팔경(瀟湘八景)을 그림으로 그리고 시를 짓는 문인들의 관습이 유행하자 조선에서도 그런 풍조가 생겼는데, 안평대군은 무려 48가지의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냈다.48경은 다양한 장소와 시간에 따라 “매화 핀 창가에 흰 달빛(梅窓素月)” “대나무 길에 맑은 바람(竹逕淸風)” 등의 네 글자로 명명되었다. 누군가가 그림을 먼저 그리고 안평대군이 칠언 화제시를 지었다. 그 다음에는 당대의 문인학자들을 인왕산 기슭 비해당으로 초청하여 48경을 함께 즐기며 차운시를 짓게 했다. 우리 조상들은 요산요수(樂山樂水)라는 말 그대로 산과 물을 즐겼는데, 안평대군은 한강가에도 담담정(淡淡亭)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동국여지비고’에는 담담정을 이렇게 소개하였다. “마포 북쪽 기슭에 있다. 안평대군이 지은 것인데, 서적 1만권을 저장하고 선비들을 불러모아 12경 시문을 지었으며,48영을 지었다. 신숙주의 별장이다.” 안평대군은 서적만 1만권을 소장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서화·골동품을 수집하였다. 신숙주가 1445년에 쓴 ‘화기(畵記)’를 보면 안견(安堅)의 그림 30점, 일본 화승 철관(鐵關)의 그림 4점, 그리고 송나라와 원나라 명품 188점을 소장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곽희(郭熙)의 작품이 17점이나 되는데, 이 그림은 안견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안평대군이 문인 학자들에게 인심을 얻자, 수양대군은 김종서와 황보인을 죽이고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은 뒤에 안평대군까지 처형하고는 이 정자를 빼앗아 신숙주에게 하사하였다. 안평대군이 주택이나 별장을 아름답게 꾸미고 완상하던 취미는 그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성종 때에는 호화주택과 별장을 금지하라는 명령까지 내릴 정도가 되었다. ●몽유도원도를 인왕산에 실현한 별장 무계정사 1447년 4월20일 밤에 안평대군이 박팽년과 함께 봉우리가 우뚝한 산 아래를 거닐다가, 수십 그루 복사꽃이 흐드러진 오솔길로 들어섰다. 숲 밖에서 여러 갈래로 갈리며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휘어져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桃源)입니다.” 하고 알려 주었다. 말을 채찍질하며 몇 굽이 시냇물을 따라 벼랑길을 돌아가자 신선마을이 나타났다. 안평대군이 박팽년에게 “여기가 바로 도원동이구나.”하고 감탄하면서 산을 오르내리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복사꽃이 우거진 낙원에 다녀온 이야기를 도연명(陶淵明)이 ‘도화원기(桃花源記)’라는 글로 소개한 뒤에, 무릉도원은 중국과 조선 문인들에게 이상향으로 널리 알려졌다. 안평대군은 꿈에서 처음 가본 곳이지만 그곳이 바로 무릉도원임을 깨닫고, 화가 안견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안견이 사흘 만에 그려 바친 그림이 바로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도연명 이후에 많은 문인들이 무릉도원을 꿈꾸었고, 고려시대 문인 이인로는 청학동(靑鶴洞)을 찾아 글을 지었다. 안평대군은 그림이 완성 된지 3년 뒤인 1450년 설날에 치지정(致知亭)에 올라 ‘몽유도원도’라는 제첨(題簽)을 쓰고 시를 지었다.(유영봉 교수 번역) 세간의 어느 곳을 무릉도원으로 꿈꾸었던가? 산관의 차림새가 오히려 눈에 선하더니 그림으로 보게 되니 정녕 호사로다 천년을 전해질 수 있다면 ‘내가 참 현명했구나’ 하리니. 안평대군은 꿈속에 거닐던 복사꽃 동산을 인왕산 기슭에서 실제로 찾아 별장을 지었다. 안평대군과 사육신의 문장은 상당수 없어졌는데, 다행히도 박팽년이 그 별장에서 지은 시 아래에 안평대군의 글이 덧붙어 있어, 별장 지은 사연을 알 수 있다. “나는 정묘년(1447) 4월에 무릉도원을 꿈꾼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9월 우연히 유람을 하던 중에 국화꽃이 물에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는, 칡넝쿨과 바위를 더위잡아 올라 비로소 이곳을 얻게 되었다. 이에 꿈에서 본 것들과 비교해 보니 초목이 들쭉날쭉한 모양과 샘물과 시내의 그윽한 형태가 거의 비슷했다. 그리하여 올해 들어 두어칸으로 짓고, 무릉계(武陵溪)란 뜻을 취해 무계정사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니, 실로 마음을 즐겁게 하고 은자들을 깃들게 하는 땅이다. 이에 잡언시 5편을 지어 뒷날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비하고자 한다.” (유영봉 교수 번역) ●안평대군 죽은뒤 무계정사 철거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집 이름은 글자 그대로 ‘무릉계에 자리한 정사’라는 뜻인데, 한시 5수 뒤에 “경태(景泰) 2년 신미”라고 쓰여 있어 1451년에 창건했음을 알 수 있다. 창건연대는 유영봉 교수가 최근의 논문 ‘비해당 사십팔영의 성립 배경과 체제’라는 논문에서 밝혀냈다. 수성동에 있던 비해당에서 인왕산 기슭을 넘어 무계정사까지 가는 길은 그다지 멀지 않다. 안평대군은 꿈속에 노닐던 곳이라고 하며 별장을 지어 문인학자들을 초청하고 시를 읊거나 활을 쏘며 놀았다. 하지만 단종실록 원년 5월19일 기사에는 이곳을 방룡소흥지지(旁龍所興之地)라고 하며 안평대군을 비난했다. 왕기가 서린 곳인데, 장자가 아닌 왕자가 왕위에 오를 곳이란 뜻이다. 계유정난 직전에도 수양대군 파에선 안평대군이 무계정사 지은 뜻을 왕권탈취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계유정난이 성공한 뒤인 10월12일에는 “처음부터 지을 장소가 아니었으니 무계정사를 철거하라.”고 사간원에서 아뢰었으며,10월25일 의정부에서 안평대군을 처형하자고 아뢴 죄목 가운데 첫번째가 바로 이 자리에 무계정사를 지었다는 점이었다. ‘몽유도원도’에는 김종서, 이개,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서거정 등 당대 최고의 문신 23명이 참여하여 친필로 글을 썼다. 그러나 6년 뒤에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세종과 안평대군이 아꼈던 이들의 운명은 크게 둘로 갈라졌다. 신숙주·정인지 등은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공신에 오르고, 안평대군과 김종서는 목숨을 잃었으며, 성삼문·이개·박팽년 등의 사육신은 3년 뒤에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다가 실패하여 모두 역적으로 처형당하고 집현전까지 폐지되었다. 무계정사는 곧 무너지고, 지금은 안평대군의 예언 그대로 그림만 1000년을 남아 전한다. 자하문터널 위 부암동사무소 뒷길을 따라 올라가다 돌계단을 오르면 무계동(武溪洞)이라 새긴 바위가 나타나고, 그 뒤에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오래된 건물이 서있다. 주소로는 종로구 부암동 329-1, 서울시 유형문화재 22호인데, 이곳이 바로 무계정사 터이다.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5) 숙수사와 소수서원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5) 숙수사와 소수서원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에는 비극적인 속설이 전합니다.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로 알 수 있듯이 이 곳엔 숙수사(宿水寺)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관군(官軍)의 방화로 절은 폐허가 됐고, 그 자리에 서원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세조 3년(1457년) 10월, 단종 복위 거사가 실패하자 본거지였던 순흥도호부 사람들이 토벌군에 떼죽음을 당한 사건을 역사는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고 부릅니다. 소수서원의 지척에 당시 화를 입은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등을 제사지내는 금성단(錦城壇)이 있으니 그럴싸한 추측입니다. 하지만 소수서원에서 발굴된 불상들은 ‘숙수사의 참화’가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김재원 박사에 따르면,1953년 12월1일 소수서원 곁에 고등공민학교를 새로 지으면서 지하 1m 지점에서 작은 불상이 한꺼번에 25구나 나왔습니다. 불상을 인수하러 간 사람은 훗날 한국 고고미술사학의 태두로 대접받는 김원룡 당시 학예연구관이었습니다. 하지만 교장선생님은 “정식 중학교로 승격을 인가해 주어야 유물을 내놓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김 연구관은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하는군요. 결국 몇달이 지나서야 넘겨 받았는데, 이 학교가 이듬해 중학교 설립인가를 받은 것을 보면 교장의 작전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본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지금은 국립대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불상들은 6세기 후반에서 8세기에 이르는 매우 이른 시기의 것입니다. 종류도 여래상, 보살상, 반가사유상, 탄생불, 신장(神將)상, 공양자상 등 다양합니다. 불상들은 지름 60㎝, 높이 75㎝를 넘는 큰 항아리에 넣어져 묻혔습니다. 난리를 만나 서둘러 불상을 땅속에 파묻은 스님들의 긴박한 움직임이 눈에 보이는 듯 하지 않습니까. 통일신라시대 이후 것인 대형 토기의 존재는 이 불상들이 묻힌 시기를 어느 정도 설명해 줍니다. 게다가 묻는다는 것은 피란(避亂)을 전제로 하는데, 복위 운동은 한동안 몸을 숨긴다고 수습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지요. 김 박사는 고려 고종 18년(1231년)부터 40년 동안에 걸쳐 국토를 휩쓸어버린 몽골의 침입이 숙수사의 폐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절은 불에 타서 없어지고, 스님들은 몽골군에 잡혀갔거나 타향에서 죽기도 하여 훗날 불상을 수습할 사람조차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불상이 발굴된 지 50년이 넘었고, 소수고등공민학교에서 승격한 소수중학교가 읍내리로 이전한 지도 40년이 넘게 지났습니다. 그럼에도 ‘관군의 방화설(說)’이 여전히 소수서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것은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에 대한 역사와 민심의 심판이 그만큼 준엄하다는 뜻이겠지요.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TV에도 진출한 최선자(崔仙子)

    TV에도 진출한 최선자(崔仙子)

    TV 「드라마」 『유랑극단』 『수양산맥(首陽山脈)』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최선자(崔仙子·29). 연극밖에 모른다던 그가 최근 TV 「탤런트」 개업(開業). 안방극장의 「호프」로 등장하고 있다. 연극경력 7년만에다가 「아나운서」, 성우 등 다각도의 재능을 발휘해 온 그녀의 TV 「탤런트」개업사를 들어보면. 『TV는 보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어요』 - 어떻게 들으면 최선자(崔仙子)양의 TV 출연은 자의(自意)가 아닌 것으로 표현됐다. 『너무 자신을 펼쳐 놓는 것 같아서 겁이 나요』 「베테랑」연기자인 그녀로서는 최대한의 겸손. 성우로 일 할때는 목소리 만으로 족했다. 목소리 뒤에 숨겨진 어떤 비밀, 신비감을 그녀는 스스로 즐기고 아껴온 것일까? 『연극 무대도 그래요. 개인 최선자의 정체가 그대로 드러나는 건 아니거든요. 객석과 연기자의 거리에서 나대로 감출 수 있는 비밀이 있었거든요』그 비밀을 최선자양은 「신비감」이라고 표현했다. 얼굴, 목소리, 연기력을 모두 드러내게 되는 TV는 그녀에게서 이 신비감을 앗아갔다는, 그래서 약간은 겁나는 출발이다. 그러나 崔양의 이 겸손한 개업사는 문자 그대로 겸손에 불과하다. MBC-TV의 목요연속극 『수양산맥(首陽山脈)』이 인기가 이를 입증했다. 방기환(方基煥) 작·이상현(李相炫) 각색, 이효영(李孝英) 연출의 이 『수양산맥(首陽山脈)』에서 최양의 인기는 이미 압도적이다. 이 작품에서 최양이 맡은 역은 「아마이리」라는 한 산중 야성녀. 수양대군이 집권하기 전에 만난 산속 한 실력파의 아내역이다. 야성적이고 다부지고 그러면서도 여자다운 여자, 강한 개성이 요구되는 이 역할을 최양은 깔끔하게 해내고 있다. 여기서 최양의 연기력을 다시 들추는 건 어쩌면 사족(蛇足). 극단 실험극장 무대에서 출발한 7년간의 연기생활이 바탕이니까 TV「탤런트」로서의 성공도 어쩌면 당연일지 모른다. 20편 가까운 연극무대에 출연하면서 신인예술상·동아연극상 여자주연상을 차지한 관록도 있고. 「라디오」·TV·연극 세 곳을 골고루 뛰게 됐지만 최양은 당초 MBC 성우(1기)로 출발했다. 지금도 DBS의 『우울한 겨울』, TBC의 『네가 좋다』등 「라디오」연속극을 계속하고 있다. 본격적인 성우생활을 시작한게 61년, 20세 때였고 동화낭독등 방송국 출입은 여중 3학년때(58년). 이미 10년이 훨씬 지났다. 『당초 연극을 하게 된 건 좋은 성우가 되려는 거였죠. 연극배우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연극이 본업이 됐다. 『가장 마음에 끌린다는 점에서-』 TV는 자신의 연기에 대한 확인과 「테스트」에 그 목적을 둔단다. 다시 말하면 TV출연은 『좋은 연극을 하기 위해서-』 얼마 전 극단여인극장 공연 『욕망(慾望)이라는 이름의 전차(電車)』에서 최양은 현실적 적응이 불가능해서 정신병원에 가는 「브랑슈」역을 해냈다. 『욕망(慾望)-』속에선 가장 어렵다는 역할이지만 그녀의 열띤 연기는 연기파 배우의 일면을 다시 확인시켜준 셈. 『배우나 「탤런트」가 얼굴 예쁘다는 걸 기준으로 삼는 건 곤란해요. 개성이 있어야죠. 그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연기력이 필요해요』 스스로 미모는 아니라고 강조하지만 정감있는 섬세한 얼굴. 「요부형(妖婦型)」의 「섹스·어필」도 느끼게 한다는게 그녀에 대한 평판. 68년 5월에 구석봉(具錫峰·시인·방송극작가)씨와 결혼해서 5개월 전에 첫딸을 얻었다. 『아빠는 대작가(大作家)가 되고 나는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배우가 되는게』 70연대의 포부. 「아누크·에메」「모니카·비티」가 제일 좋아하는 배우지만 자신이 영화배우가 될 생각은 『아직 안해봤다』-.[선데이서울 70년 1월11일호 제3권 2호 통권 제 67호]
  •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고을… /신정일 지음

    강화도의 한 면인 교동도는 역사의 영욕이 교차된 곳이다. 이규보의 아름다운 시 속에 남아 있는 교동도의 남산포는 송나라 사신들이 줄을 이었던 곳이고, 수양대군에게 밀린 안평대군과 폭군 연산군이 유배를 왔던 곳이지만 읍성은 무너지고 ‘연산군의 적거지’라는 안내판만 남아 길손을 맞고 있다. ‘우리 시대의 김정호’로 불리는 문화사학자 신정일 황토현 문화연구소장이 쓴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고을을 가다’(전3권, 황금나침반 펴냄)는 지난 100년 동안 사라져간 우리 땅의 역사와 문화유산, 아름다운 풍경과 사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자는 지난 25년간 전국에 흩어져 있는 읍, 면, 혹은 그보다 더 작은 마을 터까지 일일이 찾아다니며 답사기를 썼다. 이 책에 소개된 90곳은 1914년 일제의 지방관제 통폐합에 의해 폐현·폐군된 곳들이다. 각권 1만 6000원.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이길로 가면…여름잊고 심신 살찌우고

    이길로 가면…여름잊고 심신 살찌우고

    서울 근교 산으로 숲속여행을 떠나보자. 싱그러운 나무 향기에 취해 야생화와 곤충, 새들을 관찰하다 보면 아이들은 금세 숲속을 탐험하는 재미에 빠져든다. 서울시와 각 자치구는 매주 일요일에 자연탐방 프로그램 ‘숲속 여행’을 서울 근교 산 17곳에서 운영한다. 탐방코스에는 전문 숲 해설가가 동행한다. 코스가 완만해 가족 나들이에 제격이다. 참가비는 없지만 인기가 많아 인터넷 예약(san.seoul.go.kr)을 서둘러야 한다. 지난주 강남지역의 산에 이어 이번 주에는 앵봉산, 안산, 인왕산, 남산, 개운산, 오패산, 초안산, 아차산, 봉화산, 수락산 등 강북지역 10곳을 소개한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앵봉산 꾀꼬리가 많아 앵봉(鶯峯)이란 이름을 얻었다. 해발 230m로 높지 않지만 정상 인근은 경사가 급한 편이다. 온대림 숲의 마지막 천이단계에서 나타나는 서어나무를 비롯한 100여종의 수종과 각종 초본류, 지의류, 버섯 같은 균류가 살고 있다. 다양한 식물 덕에 곤충과 조류, 다람쥐, 청설모 등 야생동물이 터전을 잡았다. 특히 천연기념물 제323호인 황조롱과 맹금류인 말똥가리도 관찰되고 있다. ●탐방코스 3호선 구파발역 4번출구에서 만나 출발한다.7단계로 나뉘어 국수나무, 도토리, 아까시나무, 진달래, 소나무, 팥배나무, 서어나무 등 다양한 수종을 만난다. 정상에 자리한 서어나무 군락지에는 서울에서 보기 힘든 서어나무와 작살나무, 담쟁이덩굴, 물갬나무, 다릅나무 등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코스는 총 연장 2㎞로 3시간 정도 걸린다. 둘째·넷째주 일요일 오전 10시∼오후 1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주변 볼거리 서오릉은 사적 제198호로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있다. 창릉 익릉 명릉 홍릉으로 구성돼 있는데 구리시의 공구릉 다음가는 조선왕실의 왕릉이다. 주변에는 먹을거리도 풍부하다. 통일로변에 위치한 구파발 인공폭포는 통일로의 이정표로 상징적인 공간이라 유명하다. ●가는길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서 내려 4번출구로 나오면 집결지가 보인다. 버스는 7023,7723,7724,7731∼5,9703,9709,9710∼2번 등이 오간다. 탐방신청 및 문의는 강동구청 공원녹지과(350-1395). ■ 안산 무악(毋岳)이라고도 부른다. 산의 모양이 말안장, 즉 길마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쪽에 있는 현저동에서 홍제동을 넘는 고개를 길마재, 즉 안현이라고 했다. 안산은 인왕산에서 서쪽으로 비스듬히 뻗어 무악재를 이루고 솟은 산이다. 해발 295.9m. 조선왕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무악은 궁궐의 주산으로 주목받았다. ●탐방코스 서대문구청에서 출발한 탐방팀은 연흥약수터에서 안산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받는다. 조선시대 기록인 ‘용재총화’에는 무악재 주변에 밤나무와 소나무가 무성했다고 하나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1960년대에 난립한 무허가 집을 철거하고,1970년대부터 인공 수림을 조성하여 지금은 메타세쿼이어, 왕벚나무, 산수유, 모감주나무, 소나무, 당단풍나무, 잣나무 등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자연림으로 보존된 북쪽 비탈에는 진달래, 물오리나무, 노린재나무, 산초나무, 산벚나무 등이 드문드문 자리잡았다. 꿩, 메추라기, 박새, 딱따구리 등도 자주 눈에 띈다. 코스는 총 연장 2㎞로 3시간 정도 걸린다. 둘째 넷째 일요일에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주변 볼거리 안산 정상의 무악봉수대(서울시 기념물 제 13호)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육로 봉화를 남산봉수대로 최종 보고하던 곳이다. 연희동에 있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은 2003년 7월에 개원했다.1층은 인간과 자연관,2층은 생명진화관,3층은 지구환경관으로 구성돼 있다. 서대문형무소도 독특한 볼거리다.1908년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이후 우리의 항일 독립투사들이 옥고를 치른 곳이다. ●가는 길 지하철 3호선 홍제역 3번출구에서 7713,7738,7739번 버스를 타고 서대문구청 앞에 도착. 탐방신청 및 문의는 서대문구청 공원녹지과(330-1395) ■ 인왕산 해발 338.2m. 화강암으로 이뤄져 암반이 유난히 노출된 것이 특징이다. 북악산이나 남산보다 산세가 웅장하고 풍치가 아름답다. 광복 전까지만 해도 서울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던 산이었는데, 서울이 팽창하면서 중심부로 들어왔다. 인왕산에는 실제 사물과 닮은 기묘한 괴석들이 많다. 둥근 모자 모양의 모자바위, 돼지가 코를 들고 있는 듯한 돼지 바위 등이 유명하다. 산을 오르며 바위를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탐방코스 사직공원에서 출발해 단군성전, 황학정, 쉼터, 약수터를 돌아온다. 바위산이라 중턱 이상에는 수목이 별로 없지만, 산등성이에는 때죽나무, 국수나무, 팥배나무, 소나무 등이 오밀조밀 들어차 있다. 쉼터에 앉아 각종 나무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야생 조수와 계곡생태계 등을 배운다. 코스는 총연장 2㎞로 2시간 정도 걸린다. 둘째 넷째주 일요일에 운영한다. ●주변 볼거리 국사당(서울시 중요민속자료 제28호)은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으로 무학동 인왕산 기슭에 있다. 원래는 남산 정상에 있다가 1925년 현 위치로 이전됐다.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신사인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더 높은 곳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당했다. 선바위(서울시 중요민속자료 제4호)는 인왕산 서쪽 기슭에 있는 두 개의 거석이다.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 같다고 ‘선(禪)’자를 따서 선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이라거나,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전설이 있다. 자식 없는 사람이 바위에 빌면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가는 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에서 내려 사직공원까지 도보로 5분 걸린다. 탐방신청 및 문의는 종로구청 공원녹지관(731-1459). ■ 남산 해발 265m로 서울의 중심부에 자리한 서울의 상징이다. 본래 이름은 인경산이었으나 조선왕조 태조가 1394년 도읍지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긴 뒤 궁궐 남쪽에 있다고 해 자연스럽게 남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풍수지리상 남주작, 안산에 해당하는 중요한 산으로 태조는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지금의 팔각정 자리에 국사당을 세웠다. 서울시가 1991년부터 ‘남산 제모습 가꾸기’사업을 실시하여 훼손된 시설물을 철거한 후 야외식물원, 한옥마을 등을 조성했다. ●탐방코스 남산전시관에서 출발하는 탐방코스는 볼거리가 풍성하다. 양생화단지, 팔도소나무림, 야외식물원, 숲속길, 서울성곽, 봉수대 등 숲속여행의 총 결정판이라 부를 만한다. 애국가 2절에 나오는 것처럼 ‘철갑을 두른 듯’ 소나무가 울창했던 곳이지만, 일제 시대와 광복 이후 크게 훼손돼 지금은 아까시나무와 신갈나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다행히도 소나무 탐방로가 있어 아쉬움을 달랜다. 코스는 총 연장 4㎞로 3시간 정도 걸린다. 첫째 셋째 일요일, 둘째 넷째 토요일에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주변 볼거리 1975년에 설치된 서울 N타워(옛 남산타워)는 방송송신탑이다. 최근 리모델링을 끝내 휴식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안중근 의사의 유품과 유물이 전시된 안중근의사기념관(771-4195)과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몸으로 막은 충신들을 기리는 장충단비가 놓인 장충공원도 구경할 만하다. 남산골 한옥마을에는 물이 흐르는 골짜기에 정자를 짓고, 전통한옥 5채를 옮겨 놓아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가는길 지하철 2호선 시청역,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4호선 서울역·회현역에서 15분 걸어가면 전시관 뒤편 맨발보드 앞에 야외식물원이 나온다. 이곳이 집결지다. 탐방신청 및 문의는 남산공원관리사무소(753-7060∼2). ■ 개운산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을 담은 개운사라는 절이 있는 곳이어서 개운산이라고 부른다. 동쪽으로는 정릉천과 월곡산이, 서쪽으로는 성북천과 북악산이 뻗어 있다. 두 물줄기는 용두동에서 만나 청계천에 합류한다. 성북구 중심에 위치한 자연산지형 공원이어서 쾌적한 주거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탐방코스 “대화 없이 힘들게 하는 산행은 어린 두 딸에게 무리지만, 숲 해설가 선생님과 더불어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산책을 하듯 탐방을 마쳤습니다. 집에서 가까워 탐방 후에는 개운산을 둘러보며 휴일 오후를 보냈습니다.” 개운산을 다녀온 정옥씨 가족이 홈페이지에 남긴 글이다. 도심에 있어 수목이 울창하지 않지만, 산책로와 자연생태학습장이 잘 조성돼 있어 가족나들이에 제격이다. 때죽나무, 산딸나무, 국수나무 등 수목과 복수초, 비비추, 옥잠화 등 초화류를 자연학습장에 심어 놓았다. 산책로 주변에는 활엽수림과 침엽수림이 자리하고, 민들레, 제비꽃, 복수초 등이 자란다. 코스는 총 연장 1.5㎞로 약 3시간 소요된다. 첫째, 셋째 일요일에 탐방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주변 볼거리 서울성곽(사적 제10호)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 석축 성곽. 높이 40척(12m)의 돌로 쌓았고 둘레가 5만 9500척으로 서울 장안을 지키던 울타리다. 돌 틈에 노송이 뿌리를 내리고, 이끼와 넝쿨이 뒤덮여 있어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성락원(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378호)은 조선 말 철종 때 이조판서 심상응의 별장이던 것을 의친왕 이강이 별궁으로 사용하다가 그의 아들 이건이 살았다고 한다.6만여 평의 저택에는 소나무·참나무·다래나무·등나무 등 우리 고유의 조경수가 연못가와 산비탈에 우거져 있고 암벽과 폭포, 수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가는 길 지하철 4호선 길음역 2번출구에서 도보로 5분 걸으면 집결지인 개운초등학교를 만난다. 탐방신청 및 문의는 성북구청 공원녹지과 920-3395∼7. ■ 초안산 도봉구 창동, 노원구 월계동에 자리한다. 해발 114.1m로 아담하다. 이곳에는 1000여기에 달하는 조선시대 무덤이 밀집해 있다. 흔히 ‘내시묘’라 부르는데 실제로는 내시의 무덤와 더불어 단장이 잘된 이름 있는 문중의 선산도 있다. 조선시대 ‘공동묘지’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 전쟁 때 국군이 이곳에 ‘청동 저지선’을 치고 북한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 지금도 당시의 방공호가 곳곳에 남아 있다. ●탐방코스 창골어린이공원에서 출발해 초안산 정상에 도착한 뒤 궁인 분묘군으로 내려오는 코스다. 주요 수종은 참나무류이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식생으로 보이지만 노박덩굴, 노린재, 누리장, 물푸레, 참싸리, 굴참, 산사, 산초, 오리, 단풍, 소나무, 상수리 등 다양한 수종이 자라고 있다. 생태육교에선 생태계의 파괴와 복원에 관한 설명이 이어져 자연보호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갖는다. 코스는 총 연장 2㎞로 소요시간은 약 2시간. 둘째·넷째주 일요일에 운영된다. ●주변 볼거리 초안산은 생태육교와 약수터 4곳, 배드민턴장 3곳, 인조잔디 축구장 1곳 등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방학사거리에 있는 방학사계광장에는 환경조형물과 분수 등 수경시설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조선시대 제10대 임금인 연산군(1476∼1506)과 왕비였던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가 주변에 있다. ●가는 길 지하철 1호선 녹천역 2번 출구로 나와 주공 4단지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창골어린이공원, 만남의 광장을 찾을 수 있다. 탐방신청 및 문의는 도봉구청 공원녹지과 2289-1396. ■ 아차산 해발 300m로 서울과 구리시에 걸쳐 있는 야트막한 산이다. 그러나 산 위에 서면 서울시를 둘러싼 모든 산과 시가지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특히 굽이치는 한강의 푸른 물과 강변의 풍광이 장관이다. 삼국시대 전략 요충지로, 특히 고구려 온달장군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학문적 고증과 상관없이 주민들은 온달장군이 신라에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고자 이곳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고 믿는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아차산에는 ‘온달샘’이란 약수터와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고 전해지는 지름 3m의 거대한 공기돌 바위가 있다. ●탐방코스 만남의 광장에서 출발해 생태공원, 소나무숲, 목본·초본식물 관찰대를 거쳐 아차산성에 도착하는 코스다. 총 연장 2㎞로 약 3시간 걸린다. 아차산은 화강암으로 이뤄져 주요 수종은 소나무다. 동부와 북부 산지에는 상수리나무가 많지만, 산의 높이가 낮아 다양한 나무의 경관보다는 아까시나무·물오리나무 등 인공림이 대부분이다. 대체로 멧비둘기·박새·붉은머리오목눈이·뻐꾸기 등이 관찰되고 천연기념물인 새매와 소쩍새도 볼 수 있다. 한여름 숲속에선 참매미의 울음소리가 귀청을 울린다. 첫째·셋째주 일요일 오전 10시 집결지에서 탐방 프로그램이 시작된다. ●주변 볼거리 워커힐 호텔 뒤편에 자리한 아차산성(사적 제234호)은 백제의 유산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 책계왕(286년) 때 쌓은 성으로 삼국시대에는 중요한 요새였다. 용마폭포공원에 자리한 용마폭포는 청룡폭과 백마폭포 등 세 갈래 폭포줄기로 구분된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하다. ●가는 길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 1번출구로 나와 광장중학교 방향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만남의 광장과 만난다. 탐방신청 및 문의는 광진구청 공원녹지과(450-1395). ■ 봉화산 중랑구 상봉동, 중화동, 묵동, 신내동에 접해 있으며 일명 ‘봉우재’라고 불린다.1963년에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에서 서울시에 편입됐다. 봉화산이란 이름만으로도 봉화와 관련이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북쪽의 한이산(汗伊山)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남산으로 전달하는 아차산봉수대가 있던 곳이다. 봉수대 모형은 1994년 11월7일에 설치됐다. 해발 160m로 평지에 돌출된 독립구릉지역이다. 동쪽에 아차산 주능선을 제외하고는 북쪽으로 불암산과 도봉산, 양주 일대까지 조망할 수 있다. 서쪽과 남쪽으로도 높은 산이 없어 한강 이남까지 보인다. ●탐방코스 중랑구청에서 출발해 소나무 숲을 지나 봉수대(서울시 기념물 제15호)에 오른다. 중랑구 전경을 조망한 뒤 참나무숲을 거쳐 초본류 관찰대로 돌아오는 코스다. 총연장 1.5㎞로 길이가 짧고 산이 높지 않아 산책로로 그만이다. 주요 수종은 소나무지만, 태릉중학교로 내려가는 길에는 잣나무 군락이 조성돼 있다. 팥배나무, 국수나무 관찰대가 있고, 박새, 직바구리, 어치 등 텃새가 서식한다. 첫째·셋째주 일요일에 탐방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주변 볼거리 아차산봉수대(서울시 기념물 제15호)는 조선시대 통신 시설이면서 군사 시설이다. 평시에는 횃불 한 번, 적이 나타나면 횃불 두 번, 적이 가까이 오면 횃불 세 번, 지경을 침범하면 횃불 네 번, 적과 접전하면 다섯 번의 횃불을 올렸다.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불을 올린다. 정상에서 약간 남쪽에 봉화산 도당인 산신각이 있다. 이곳은 400년 전에 주민들이 도당굿과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 34호로 주민의 안녕과 결속을 위하고 대동의식을 고취시킨 마을 굿이다. 지금도 매년 음력 3월3일(삼월 삼짇날) 도당제를 지낸다. ●가는 길 지하철 1호선 신이문역이나 지하철 6호선 봉화산역에서 내려 지선버스 1223,2216번을 타고 중량구청 앞에 내린다. 구청 뒤 공원이 집결지다. 탐방신청 및 문의는 중랑구청 공원녹지과(490-3395). ■ 오패산 강북구 미아동과 번동, 성북구 장위동, 월곡동에 위치해 있다. 도심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자연이 잘 보존된 편이다. 일명 빡빡산·벽오산·매봉짜 등으로 불린다. 남북으로 뻗어 동쪽으로 속칭 공주릉과 드림랜드를, 남쪽으로 동덕여대를 품고 있다. 해발 123m 오패산과 115m 봉우리,135m 벽오산 봉우리로 이루어져 나지막한 구릉지 형태다. 산기슭에는 예부터 자두나무가 많이 자생해 봄이 되면 수려한 꽃이 만발한다. 특히 수정 등 보석이 많이 나오고, 맞은편 초안산은 명당이라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고려의 중신들이 자주 다녀갔단다. ●탐방코스 강북구민운동장을 출발해 제1코스,2코스로 나뉜다.1코스는 벌리약수터, 대왕참나무숲, 복자기나무길, 꽃샘길, 참나무숲을 거쳐 정자와 율곡놀이터로 이어진다.2코스는 벌리약수터에서 군수나무 군락지, 야생화단지, 기념식수지, 소나무숲을 거쳐 정자에 닿는다. 아까시나무, 소나무, 참나무류, 팥배나무, 산벚나무 등 중부지방 자연상태의 수림에다 자작나무, 잣나무, 산딸나무 등을 꾸준히 식재해 숲이 울창하다. 산이 낮아 계곡은 없지만, 약수터가 있어 탐방객들이 즐겨 이용한다. 첫째·셋째주 일요일에 탐방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주변 볼거리 1987년에 개장한 드림랜드는 수영장, 골프연습장과 같은 운동시설과 문화시설을 갖추고 있다. 구민운동장은 각종 체육·문화행사를 개최하는 장소. 지난 4월 조깅트랙을 설치했다. 강북문화정보센터는 지하1층, 지상 4층 규모로 2001년 5월에 문을 열었다. 열람실, 정보실, 시청각실, 문화교실 등을 개방한다. ●가는길 지하철 4호선 수유역 3번출구로 나와 마을버스 9번이나 11번을 타고 10분 정도 가다 집결지인 강북구민운동장에 내린다. 탐방신청 및 문의는 강북구청 공원녹지과(901-2386). ■ 수락산 북쪽으로 불암산과 연결되고, 노원구 상계동과 경기도 의정부시, 남양주시 별내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해발 637m로 높은 편이다. 수락산 능선의 암봉이 서울을 향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어 태조 이성계는 서울의 수호산이라 불렀다. ●탐방코스 임간휴게소에서 출발해 냇가와 향토꽃 전시장, 아까시나무숲, 명상의 숲, 숲속 길을 거쳐 바위 밑 샘터에 도착한다. 총 연장 3㎞로 다소 길다. 소요시간은 약 3시간. 향토꽃 전시장에서 야생화를 관찰하고, 꽃과 곤충의 관계를 살펴본다. 아까시나무 숲에선 흙 나무냄새 산림욕 보물찾기 등 숲속 체험거리가 가득하다. 숲속길이 나오면 청진기로 나무 소리를 듣고, 샘터에선 약수를 마신다. 대부분 돌산으로 화강암 암벽이 노출돼 있지만, 산세가 험하지 않다. 수락계곡과 노원골 일대 11㎞ 산책로는 산림욕하기에 좋은 곳이다. 둘째·넷째 일요일에 탐방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주변 볼거리 수락산 유원지는 남양주시 별내면 청학리에 있는 계곡 일대로 웅장한 석벽과 기암괴석이 많고 계곡이 수려하다. 예로부터 시인, 묵객이 즐겨 찾았다. 노원구 상계동에서 남양주시 별내면으로 넘어가는 덕릉고개에는 경기도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된 선조의 생부 덕흥부원군의 묘, 일명 덕릉이 자리한다. 수락산 중턱 남쪽 기슭에는 박세당이 김시습의 명복을 빌기 위해 중창한 석림사가 있다. 그 옆에는 박세당의 묘소와 영정각이 있다. 김시습은 1455년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수락산에 숨어들었다. 박세당은 숙종 때 정쟁에 혐오를 느껴 관직을 포기하고 이곳에 은둔해 농사를 지으며 제자를 길렀다. ●가는길 지하철 7호선 수락산역 2번출구로 나와 도보로 10분 걸어 집결지인 수락산 입구에 도착한다. 탐방신청 및 문의는 노원구청 공원녹지과(950-3896).
  • 장서 570만여권 인터넷으로 본다

    장서 570만여권 인터넷으로 본다

    ‘100년 전 오늘 서울(경성)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일제시대 쓰여진 춘향전은 어떤 내용일까.’ ‘수양대군의 석보상절(보물 523호)은 어떻게 쓰였을까.’…. 이러한 궁금증을 오는 5월부터는 도서관에 가지 않고도 안방에서 인터넷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관장 김태근)은 27일 인터넷 포털 네이버(NHN㈜·대표 최휘영)에 도서관이 소장한 570여만개의 장서에 대한 자료를 제공키로 하는 업무협력 협정을 29일 체결한다고 밝혔다. ●“인터넷에 도서관을 짓는다.” 네이버 검색창에서 해당 검색어를 치면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http:/www.nl.go.kr)에 장서의 유무가 검색된다. 장서가 있을 경우 ‘원문 DB 서비스’를 선택하면 장서의 목차, 표지, 주요 내용, 대출가능 여부 등 기초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특히 1950년 이전에 발행되어 저작권에 문제가 없는 장서 20여만개는 원본을 그대로 열람할 수 있다. 자료를 그대로 스캔한 것이어서 표지·삽화·주석 등이 나오기 때문에 화면을 인쇄하면 원본과 엇비슷한 책이 완성되는 셈이다. 구체적으로는 ▲대한매일신보(옛 서울신문) 등 신문 기사(106만 4482건) ▲도서관에 소장된 문화재, 고서 귀중본(9만 6019건) ▲일제시대 대중소설(915권) ▲옛날 지도(2262면) ▲구한국·조선총독부 관보기사(14만 7133건) 등이다. 이에 앞서 국회도서관(관장 배용수)도 5월 말부터 네이버에 장서 6000여권의 원문과 120만여권의 기초 정보를 제공키고 하고, 지난 23일 관련 협약을 맺었다. ●한국도 ‘사이버 책 전쟁’시대 미국에서는 지난해부터 ‘구글’이 뉴욕공공도서관, 미국국회도서관, 하버드·스탠퍼드·미시간 대학도서관 등 5개 도서관 장서 정보를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있다.2015년까지 미국 전역의 도서관 장서 정보를 연결해 ‘구글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영국국립도서관과, 야후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도서관과 손잡고 장서의 디지털화를 서두르고 있다. 이처럼 ‘디지털 도서관화’ 작업은 이미 세계화하고 있는 추세다. 이용자 입장에서는 정보를 더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도서관 1곳에 인구 11만명꼴로 미국(2만 6000명), 일본(4만 8000명)에 비해 낮은 편이어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사이버 도서관’이 미국에서 벌써 저작권 문제와 출판사의 위기 등이 불거지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주목된다.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22일 20여명이 봄맞이 단장

    “저 향나무는 언제부터 저곳에 있었을까.”“꼭 길 한복판에 둬야 할까.” 누구나 한번쯤은 서울 대법원 옆 서초동사거리를 지나면서 떠올려 보았음직한 의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측정한 서초동 향나무의 나이는 868살이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터줏대감인 셈이다. 서울에서 가장 키가 크고 나이가 많은 나무이기도하다.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이 마무리되고 2년째 되는 1138년에 싹을 틔운 셈이다. 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쓴 시기이기도 하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개국을 지켜봤으며 1457년에는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로 귀양을 가던 모습도 지켜봤다. 단종은 이 길을 지나 영월로 유배를 갔다. 이후 인근에 사는 백성들이 이 나무를 수호신으로 삼아 각별히 관리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 정도면 향나무가 교통에 불편(?)을 주면서도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을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향나무는 측백나무과의 상록침엽수로 높이는 15.5m, 둘레 3.35m이다. 서울시 지정보호수이다. 서초구는 22일 이 향나무의 봄단장을 한다. 나무가 큰 만큼 고가사다리차 등 장비와 20여명의 직원이 동원된다. 청소와 함께 10여병의 수간주사도 놓을 예정이다.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儒林(492)-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14)

    儒林(492)-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14)

    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14) 명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처럼 율곡이 자신의 전생을 김시습으로 보고 이 세상을 가낭선(賈浪仙)으로 보았다는 것은 이 무렵 율곡의 마음 속에 미친 바람과 성난 파도와 같은 인생의 질곡(桎梏)이 얼마나 그를 구속하고 있었던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김시습(金時習).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듣자 그 길로 삭발을 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던 음유시인. 율곡은 자신의 전생을 김시습이라고 노래하면서 현실과 이상에서 방황하고 있는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으며, 또한 한때는 중이 되어 무본(無本)으로 불리었다가 환속하여 시인이 되었던 당나라의 시인 가도(賈島)를 견줌으로써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은유하고 있음인 것이다. 어느 날 시인 가낭선은 늙은 말을 타고 천천히 장안의 거리를 지나면서 시 짓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절친한 친구였던 이응(李凝)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가낭선은 ‘이응의 그윽한 거처에 붙여(題李凝幽居)’라는 시제를 정해 놓고 다음과 같은 오언율시를 짓기 시작한다. “한가로이 거처하니 이웃도 드물고 풀숲 오솔길은 거친 정원으로 통한다. 새는 연못가에 나무 위에서 잠들고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閑居隣竝少 草徑入荒園 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 그런데 시인 가낭선은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고민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가낭선은 ‘중은 달 아래 문을 민다(僧推月下門)’라고 문장을 썼으나 갑자기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僧敲月下門)’로 고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을 민다(推)’로 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문을 두드린다(敲)’로 하는 것이 좋은지 판단이 서지 않았던 가낭선은 늙은 말을 타고 고개를 숙이며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기 시작하였다. “민다로 하는 것이 나은가, 두드린다로 하는 것이 나은가, 그것 참 어려운 일이도다.” 그때였다. 갑자기 길거리에서 벽제소리가 들려 왔다. “비켰거라, 어느 안전이라고 무례하게 길을 막느냐. 네 이놈, 물렀거라.”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고관의 행차 앞을 자신이 타고 있던 말이 길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그 당시 고관대작이 타고 가던 행차를 마주하면 즉시 길을 비키고 타고 있던 말이나 수레에서 내려 땅에 엎드려 부복하는 것이 법도였으므로 가낭선은 불경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더욱이 길을 가던 사람은 당송팔대가의 한사람이었던 한유(韓愈). 그는 뛰어난 유학자였을 뿐 아니라 당의 도읍 장안의 경조윤(京兆尹) 벼슬에 올라 있던 최고의 권신이었던 것이다. 당황한 가낭선이 말에서 내리자 한유는 자신을 막은 사람이 다름 아닌 시인 가도임을 전해 듣고 그를 불러 자신의 곁에 오도록 한 후 그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가도는 시를 짓는 도중 한 문장에서 가로막혀 그것에 신경 쓰고 몰두하느라 벽제소리를 듣지 못하였다고 변명하였다.
  • [지금 그곳은] 삼청각

    [지금 그곳은] 삼청각

    지난달 29일 북악산 자락에 자리한 삼청각(三淸閣)을 찾았다. 위탁운영자가 바뀌어 다시 문을 연 지 꼭 일주일만이다. 광화문에서 셔틀버스를 타니 10분 만에 도착했다. 일화당(一和堂) 처마 밑 나즈막한 풍경소리가 방문객들을 반겼다. 셔틀에서 같이 내린 성미현(32)씨는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도 이렇게 한적한 장소가 있는지 몰랐다.”라고 말했다. 삼청각은 1972년 남북공동성명 발표 때 대표단이 만찬을 열었던 장소로 박정희 정권 때 ‘요정정치’의 산실이기도 했다. 특히 천추당(千秋堂)은 박 전 대통령이 좋아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는 ‘디카족’들의 인기 촬영 장소로 꼽히고 있다. 삼청각은 서울시가 2001년 매입해 세종문화회관·한화개발이 공동 위탁운영했지만 매년 40억원 안팎에 이르는 적자를 감당치 못해 올초 위탁운영자로 ㈜파라다이스를 다시 선정했다. ㈜파라다이스는 50여일 동안 시설 개·보수와 프로그램 마련 등에 20억원을 들여 재개장 작업을 했지만 막상 겉보기에는 그리 달라진 것은 없었다. 삼청각 운영을 총괄하는 ㈜파라다이스 박병룡 전무이사는 “삼청각이 기존에 해왔던 문화사업은 유지하면서 전통·모던을 조화롭게 유지하면서 수익을 창출하겠다.”면서 “파리에는 리도쇼가 있고, 뉴욕에는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이 있듯 서울에는 삼청각의 풍류문화체험이 있다고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삼청각은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힘쓰고 있다. 오는 10월부터 일본의 5대 대형여행사에 속하는 ㈜한큐교통사와 ㈜JTB가 삼청각 풍류문화체험 상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미 지난달 26일 일본 오사카에서 30∼40대 관광객 22명이 삼청각을 다녀갔다. 문화공연을 비롯해 수라상, 다례체험, 산보 등을 반나절 넘게 즐기고 돌아갔다. 이밖에 삼청각이 야심차게 내놓은 작품은 1년동안 장기공연할 한국무용 공연인 ‘바람의 도학’이다. 학춤·선녀춤·궁중춤을 선보이며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의 권력다툼을 통해 조선 선비의 풍류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단기적인 성과에 급급해 전문성이 떨어졌던 기존 공연과는 달리 이번에는 멀리 내다보고 제대로 투자를 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삼청각 운영에 가장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수익창출일 수밖에 없다. 한식당인 ‘이궁’(異宮)은 기존에 비해 가격대를 약간 낮춘 게 특징이다.2만원 대의 점심세트부터 20만원대의 궁중 정식까지 가격대가 다양하다. 찻집인 ‘다소니’는 산을 마주하고 있어 봄에는 진달래꽃이, 가을에는 단풍이 가득하다. 파라다이스 삼청각사업본부 김성열 사업부장은 “한달동안 식당예약이 5000건 접수되는 등 예약 문의가 폭주해 정신이 없다.”면서 “가족들이 주말에 외식을 할 수 있도록 저가의 상품을 마련한데다 자연을 벗삼아 음식을 먹는 게 특이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다만 규방공예, 궁중다례 등 일부 문화강좌의 수강료가 한달에 15만원 안팎에 달해 비용이 부담스러운 것은 아쉬운 점으로 꼽혔다. 삼청각측은 “기존에 삼청각에서 운영하던 문화강좌와 가격대를 비슷하게 책정했다면서 강사가 오히려 비용을 올려달라고 하기 때문에 크게 남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삼청각은 대중교통편이 없어 자가용 또는 셔틀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셔틀버스는 무료이며 삼청각∼경복궁∼인사동 입구∼삼성화재(롯데호텔 건너편)∼교보문고 정문 앞 등에 정차하며 오전 10시부터 30분 간격으로 오후 10시 30분까지 운행한다. 주차비는 차·식사 고객은 무료며 공연관람객은 3000원이다. 이외에는 최초 30분 3000원, 이후 10분당 1000원이다. 문의 (02)765-3700.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청풍영월’에 빠져볼까

    ‘청풍영월’에 빠져볼까

    ■ 코흘리개 삼식이는 어떻게 변했을까 누구에게나 한번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이 있다. 코흘리개 옆집 친구와 마을 앞 개울가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물장난을 치고, 밤하늘을 가득 수놓은 별을 헤아리며 감자를 구워먹던 그 시절. 요즘처럼 목을 죄어오는 아스팔트 복사열과 희뿌연 스모그가 티없이 맑았던 어린 시절의 풍경을 더욱 그립게 만든다. 아이들에게 아빠와 엄마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도 못내 아쉽다. 그렇다면 청정한 강물이 흐르고, 때묻지 않은 자연이 그대로 숨쉬는 강원도 영월군으로 떠나보자. 영월은 잃어버린 어린 시절과 닮은 곳이다. 순박한 시골 풍경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도 가슴에 품을 수 있다. 어린이들에겐 꿈과 희망이, 어른들에겐 동심의 세계가 펼쳐지는 영월에서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되새겨 보는 것은 어떨까.(사진 한반도지형) 영월 글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타임머신을 타고 어린시절로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 영월군 서쪽 끝에 있는 ‘밧도네 마을’은 ‘어린시절’이라는 노래를 절로 흥얼거리게 만든다. 노란 금계화가 길가에 늘어선 마을에 들어서자 30년 전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 가슴이 벅차 오른다. 태기산과 치악산에서 내려온 주천강이 마을을 바깥으로 돈다 해서 붙여진 밧도네 마을. 친숙한 마을 지명만큼이나 예스럽고 아름답다. 폐교를 활용해 만든 이 곳의 비산체험학교(033-374-1251·www.bisanschool.com)는 어린시절 추억을 되살려 주는 곳. 흙내음이 코끝을 간지르는 학교에 들어서자 이승복 동상과 책 읽는 소녀의 동상이 새삼 새롭게 다가온다. 청소시간마다 친구들과 왁스를 칠해 문지르던 교실 나무바닥과 복도에선 잠시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을 만난다. 이 학교는 폐교된 도천초등학교 주천분교를 원용석(47)·김은선(42)씨 부부가 3년 전 교육청으로부터 임대받아 꾸몄다. 원씨는 계절마다 감자캐기, 옥수수따기, 모내기 등 농사체험과 물고기 잡기 등 생태체험을 맡고, 김씨는 꽃누르미(압화)를 가르친다. 꽃누르미는 김씨가 학교 주변에 피어나는 갖가지 들꽃을 따서 말려 두었다가 열쇠고리와 목걸이, 액자, 옆서 등을 만드는 것이다. 벽면을 가득 메운 작품들은 저마다 고운 꽃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작품들은 자연이 만든 한폭의 풍경화다. 학교 앞을 흐르는 주천강에는 반두(양 끝에 막대기를 대어 두 사람이 맞잡고 물고기를 몰아 잡도록 된 그물)를 들고 물고기를 잡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흥겹다. “와∼ 많이 잡혔네!” 이태규·이상용·탁성곤·김찬우(9·주천초 2년)군 등 4명의 아이들이 학교를 마친 뒤 곧바로 강으로 달려왔다. 태규와 상용이가 ‘풍덩 풍덩’ 발로 물을 튕기며 고기를 몰고, 성곤이와 찬우는 반두를 들고 있다가 때를 맞춰 반두를 올린다. 반두에는 영화 제목으로 유명해진 쉬리와 통가리, 피라미 등 10㎝ 남짓한 물고기 5∼6마리가 걸려 오른다. “에이, 쉬리만 잡히네….”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잡을 수 없는 물고기인 쉬리만 연신 올라오자 아쉽다는 듯 놓아 준다. 물고기 잡기에 싫증난 아이들은 곧이어 물놀이를 시작했다. 반두를 내팽개치고 옷을 입은 채 수중보에서 물미끄럼을 타는 데 여념이 없다. 아이들의 고기잡이를 도와주던 원씨는 “차분하게 어린 시절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다양한 체험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이 곳은 아이들도 좋아하지만 어른들이 어린 시절 향수를 느낄 수 있어 더 즐거워한다.”고 전했다. 체험료는 한 가지당 5000원, 여름 방학기간 중에는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 마루에 올라 별을 보다 ●별하나의 추억과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영월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별을 볼 수 있다. 특히 해발 799m의 봉래산 별마로 천문대(374-7463·www.yao.or.kr)에서는 많은 별을 가슴에 품을 수 있다. 별마로천문대는 별과 마루(정상), 로(고요할 로)의 합성어로 ‘별을 보는 고요한 정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시민 천문대다. 인간이 가장 쾌적함을 느낄 수 있다는 ‘해피 700’에 위치한 천문대는 봉래산을 수십여바퀴 휘감으며 곡예운전을 해야 정상에 도착한다.800㎜ 반사망원경으로 낮에는 태양 흑점을 관찰할 수 있고, 밤에는 목성, 달이 떠있는 별천지를 관찰할 수 있다. 이 곳은 연간 관측일수(쾌청일수)가 196일로 우리나라 평균 116일보다 훨씬 많아 국내 최고의 관측 여건을 가지고 있으며, 주변에 광해(방해하는 빛)와 관측의 최대 적인 습기가 없어 최적의 관측 여건을 자랑한다. 특히 망원경으로 별을 보지 않더라도 산꼭대기에 쏟아지는 별을 보며 호젓한 낭만을 즐길 수 있다. 이 곳에서 바라보는 영월시내의 야경 또한 일품이다. 부모와 함께 온 이하민(6·경기 용인시 수지읍 베아제 유치원)양은 “반짝이는 별들이 너무 아름답다.”며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천문대는 월요일과 공휴일 다음달 휴관하며, 입장료는 성인 5000원, 청소년 4000원이다. 영월은 특히 아이들이 좋아하는 박물관이 많다. 대표적인 박물관은 책박물관(372-1713). 폐교에 세워진 이 박물관은 박대헌씨가 사비를 털어 만들었다. 이 곳에선 어디에서도 구하기 힘든 60∼70년대 초등학교 교과서를 비롯해 1925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서적, 한국문학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책 수만권이 빛바랜 모습으로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성인 2000원, 어린이 1000원. 이밖에 곤충박물관(374-5888)과 다음달 개관하는 사진박물관 등도 둘러보면 좋다. ●신비한 천혜비경 자연속으로 영월은 유명한 동강의 어라연 말고도 자연이 만들어낸 갖가지 천혜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인기 명소는 ‘한반도 지형’. 선암마을 건너 숲속의 전망대에서 보면 마을 풍경이 신기할 정도로 한반도 지도를 그대로 닮았다.5년 전 사진작가가 발견해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서강을 끼고 동쪽은 높은 절벽에 나무가 울창한 반면 서쪽은 경사가 완만해 평지에 가까워 ‘동고서저’의 한반도 지형도 그대로이며, 북쪽으로는 백두산, 남쪽으로는 장기곶까지 똑같다. 영월은 무엇보다 조선 6대 임금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고장. 곳곳에서 단종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단종이 유배길에 쉬어간 군등치 고개를 넘어 가면 단종 무덤인 장릉(370-2619)과 유배지인 청령포(370-2620)가 있다. 단종은 1457년 봄에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고 그해 10월 사약을 받고 죽었다. 단종이 죽어도 시신을 거두는 이가 없자 영월 호장 엄흥도가 시신을 거둬 모신 곳이 장릉이다. 장릉 소나무가 모두 장릉을 향해 고개를 숙여 신비롭다. 입장료는 성인 1200원. 장릉에서 남쪽 방향으로 10분만 차를 타면 청령포가 나온다. 청령포는 단종이 유배됐던 창살 없는 감옥. 삼면은 서강이 휘감아 흐르고 육지와 이어진 한쪽면은 수직절벽으로 이뤄져 있다. 섬은 아니지만 배를 타야 도달할 수 있다. 청령포 한가운데에 위치한 관음송은 600살 먹은 30m 높이의 소나무. 당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들어 관음송이라 불렸다. 청령포 숲은 지난해 11월 산림청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천년의 숲’에 뽑혔다. 도선료 400원을 포함해 입장료는 1300원. 이 곳에서 차로 10분쯤 거리에 신선암이라 불리는 선돌이 있다. 선돌은 말 그대로 서있는 돌. 밑에서 굽이굽이 흐르는 서강 줄기와 어우러지면서 동양화를 보는 느낌을 준다. 아침에는 강 안개에 젖어, 오후에는 석양에 잠겨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밖에 태백산 줄기의 험산준령이 빚어낸 태고적 신비를 뽐내는 우리나라 최고의 계곡인 칠랑이계곡과 김삿갓 계곡을 비롯해 고씨동굴 (천연기념물 219호)과 김삿갓 유적지 등에서는 시원한 여름을 느낄 수 있다. ● 알고가세요 영월은 서울에서 승용차로 2시간30분 거리에 있다. 중앙고속도로 제천IC를 빠져나와 38번 국도를 따라 가면 영월읍으로 갈 수 있다. 밧도네 마을은 신림IC에서 88번 지방도를 따라 주천면 방향으로 가면 된다. 먹을거리로는 태백과 정선, 평창 등 해발 700m 이상에서만 자생하는 나물에다 들기름과 콩, 표고버섯 등 각종 재료들이 들어가 독특한 맛을 내는 ‘곤드레밥’이 미식가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읍내 중앙로 농협군지부 맞은편에 자리잡은 청산회관(374-2141)은 모녀가 대를 이어가며 운영하고 있는 한정식집으로 지난 97년부터 곤드레밥을 특색 음식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가격은 1인분 6000원. 가족단위 숙박시설은 다소 부족하지만 읍내 모텔과 여관이 깨끗하다. 민박요금 예고제 마을인 밧도네 마을은 4인실이 성수기에 4만원 정도다. 영월군청 문화관광과 (033) 370-2542.
  • [인간시대] 향토사학자 박희씨

    “지구가 남아 있는 한 ‘핏줄’은 인간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이명박 시장은 역대 2005대 서울 수장” 최근 이명박 시장이 역대 ‘서울 수장(首長)’으로는 꼭 2005대여서 올 연도와 똑같다는 분석 결과를 발표해 눈길을 끌었던 향토사학자 박희(52)씨는 22일 이같이 주장했다. 이날 서울 강동구 길1동 396의10 강동우체국 건너편 한 건물 지하 1층에서 만난 그는 다짜고짜 출입구 쪽에 놓인 캐비닛을 열어 보여줬다. 지난 2003년 10월 당시에 쓰던 공간이 비좁아 새로 마련했다는 35평짜리 연구실은 자료로 가득했다. 사방을 빙 둘러싼 사람 키높이의 책꽂이로도 모자라 의자, 소파 등 발디딜 틈만 빼고는 죄다 논문·잡지 등이 수북이 쌓여 먼지가 펄펄 날릴 듯했다. “석보상절(釋譜詳節·조선 세종 때 수양대군이 왕명으로 편찬한 석가모니의 일대기) 영인본입니다.50권 한정본으로 찍은 것이어서 희귀하지요.” 박씨는 이어 조선시대 규장각본과 해인사 대장경 영인본 등 오래돼 노랗게 탈색한 서적들을 내놓았다. “우리나라에 대대로 내려온 서적들 가운데 오·탈자가 하나도 없는 것을 꼽으라면 이 두가지입니다. ●선조들이 해인사 대장경 엮을 때처럼 정성껏 박씨는 해인사 대장경의 경우 선조들이 ‘1자 3배’(목판에 한 글자 쓰거나, 새긴 뒤 세번 절하는 것)로 믿기 힘든 정성을 쏟았으니 호국정신이 얼마나 강했는지 엿보입니다. 그러니 오·탈자가 있을 리 만무하지요.” 한글학회가 발간한 자료집에 이르자 표정이 심각해졌다. 지명사전 18권을 만들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6·25때 일입니다. 패잔병들이 흩어졌다가 작전지도로 보아 율곡리라는 마을에서 합류하기로 했지요. 그런데 군인들은 율곡리를 찾았지만 마을사람들이 ‘율곡이 아니라 밤실(율곡리의 우리말 지명)’이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발길을 돌렸고, 결국 전사자로 처리된 사례가 많았답니다.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난 것이죠. 보다 못한 유엔사령부가 지명사전 발간에 착수했어요.” 박씨가 소장한 서적 중에는 1953년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만수무강을 빈다는 뜻으로 전국의 한문 작가들이 써 올렸다는 글을 엮어낸 ‘헌수송’(獻壽頌)이라는 책도 있다. ●세태 변해도 문중에 대한 관심은 대단 그는 요즈음 서울의 역대 수장들이 남긴 문학 발자취를 더듬어 자료로 내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문헌에 나오는 얘기들을 다듬고, 그들의 문중을 찾아가 후손들과 만나 구체화한다는 계획이다. 아무리 세태가 달라졌다고 하지만 집안 이야기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다고 덧붙였다. 지금까지 600여년간 1417명인 서울 수장에 얽힌 신문기사가 나가자 전국에서 온갖 성씨(姓氏)들이 ‘우리 조상님도 그 벼슬을 지냈는데 얘기를 자세히 듣고 싶다.’며 연락을 해왔다는 설명이다. 상고를 나와 회사원으로 일하다 대학과 대학원을 거친 그는 보기 드물게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의 문학세계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땄다. 한문소설 종옥전(鍾玉傳) 번역판과 수학·과학 학술용어사전, 고사성어 사전 ‘동양의 향기’ 등의 저서를 펴냈다. 한문학 전문가로 수학·과학 용어사전을 낸 이유를 묻자 “과학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단어가 한자의 간단한 원리만 알면 깨우치기 쉬운데 학생이나 모두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에 안타까워서….”라고 말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석보상절 ‘실물크기’ 영인본 만든다

    석보상절 ‘실물크기’ 영인본 만든다

    국립중앙도서관(관장 김태근)이 소장하고 있는 석보상절(30.0㎝×23.7㎝·보물 제523-1호) 권 제6·9·13·19 등 현재 남아 있는 4책(冊)이 실물 크기의 영인본으로 제작된다. 중앙도서관 귀중본 고전운영실 이귀원 실장은 “일반인들이 문화재급 고서에 쉽게 접근하도록 하는 것은 물론 내년 8월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세계도서관정보대회(WLIC)에 대비해 한국 고인쇄문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석보상절 영인본을 제작 중”이라고 23일 밝혔다. 이 실장은 “최고급 한지를 사용해 300부가량 한정판으로 인쇄될 이 영인본 간행을 위해 도서관 측은 4000여만원의 예산을 배정, 각 분야 장인(匠人)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석보상절은 세종 31년(1449) 수양대군이 아버지인 세종의 명을 받아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 소헌왕후 심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봉명찬(奉命撰)’으로,‘석가보(釋迦譜)’를 골격으로 삼고 여기에 다른 불경에서 가려 뽑은 글을 훈민정음으로 옮겨 산문체로 엮은 석가모니 부처의 일대기이다. 당시 갑인자(甲寅字)라는 금속활자로 찍은 이 석보상절은 훈민정음 창제 직후에 나온 초기 문헌이라는 점에서 판본학은 물론 국어음운학, 고인쇄문화사 분야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 국내 유일본. 조선총독부 시절에 수집돼 ‘조선총독부고서부 古朝21’로 분류돼 있으며, 완질이 아니어서 4책(冊)이 모두 보물로 지정돼 있으나 가치로 보면 국보로도 손색이 없는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기도 하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영화속 수능잡기] 슈퍼스타 감사용

    [영화속 수능잡기] 슈퍼스타 감사용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무얼까. 통념상 프로선수에게는 노고에 대한 대가가 보상으로 주어지지만 아마추어에게는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프로선수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어찌 보면 보상에 대한 기대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자신의 일을 대충 얼버무릴 가능성은 크다. 인간을 비롯한 동물로 하여금 최선의 노력을 이끌어 내려면 적절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보상이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것이 동물들의 생리다. 스포츠의 세계에서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다. 잘하든지 못하든지 똑같은 보상이 주어진다면 유별나게 잘 할 필요가 없다. 적당히 하면 그만이다. 괜히 잘하려다가 부상이라도 입는다면 나만 손해다. 그러나 성과에 따라 차별적인 보상이 주어진다면 문제는 다르다. 소위 ‘반짝세일’을 하는 백화점에 가보라.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뛰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 악물고 뛰는 세계, 그것이 냉정한 프로의 세계다. 잘하면 잘하는 만큼 못하면 못하는 만큼의 보상이 주어진다. 철저히 능력 위주다. 저에게는 딸린 식구가 많습니다. 성과는 얻지 못했지만 저는 남들보다 열 배는 노력했습니다. 개인의 자질구레한 사정은 철저히 무시된다. 오직 누가 얼마만큼의 성과를 이루어 냈느냐만 관심이 된다. 그 성과를 얻기 위한 피나는 노력과 분투의 과정은 간단하게 무시된다. 오직 업적과 성과만이 고려되는 세계가 바로 비정한 프로의 세계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남들보다 강해져야 한다. 강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을 끊임없이 단련해야 한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의 일정 부분을 떼어내어 보약도 먹고, 체력관리도 하면서 재투자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서 왜 자신을 선수로 뽑았느냐는 감사용의 질문에 감독은 답한다.“너는 어떤 상황에 있든, 어떤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해. 그게 프로야.” 최선을 다하는 자는 승리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나 감사용은 번번이 패한다. 그러나 그는 좌절을 모른다. 감사용, 그는 이겨야만 살아남는다는 프로의 세계에서는 형편없는 프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진정성은 그가 달성하는 것에 있지 않고, 그가 보여준 분투와 노력의 과정 속에 있다. 승리는 훔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력만은 훔칠 수가 없다. 성공만이 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유일한 척도라면 십자가에 달려 최후를 맞은 예수도, 수양대군의 횡포에 숨져간 사육신도 한낱 패배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역사의 평가는 세간의 평가와는 다르다. 패배자인 사육신이 승리자가 되고 승리자인 수양대군이 패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역사의 세계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결과로서 한 인간을 평가할지 모르지만 역사는 반드시 결과로서 한 인간을 평가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과 세계를 향한 그의 진정성을 역사는 외면하지 않는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했다. 자신의 할 일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자는 부끄럽지 않다.‘슈퍼스타 감사용’은 결과만으로 한 인간을 평가할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김종현 감독, 이범수·윤진서 출연,2004년작 김보일 서울 배문고 교사 uri444@empal.com
  • 儒林(76)-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선은 건국 이래 두 번이나 쿠데타가 있었다.그 하나는 수양대군이 임금 단종을 몰아내고 정권을 찬탈한 사건이었고,또 하나는 여러 대신들이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왕위에 옹립한 반정이었다. 수양대군의 정권 찬탈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공신이 정난(靖難)공신이며,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들이 정국공신들이었던 것이다.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는 신하가 군주를 죽이는 부도덕한 일이었다.따라서 조광조는 ‘공신을 중하게 여기면 공을 탐하고 이로움을 탐해서 왕을 시해하고 나라를 빼앗는 일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됩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군신유의(君臣有義)의 정의를 바로잡으려 했던 것이다. 유교적 이상주의를 통해 왕조의 도덕성을 재확립하려는 조광조의 의지가 정국공신의 개정으로 나타난 것이었다.그러나 중종은 이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왜냐하면 자신의 즉위를 도와준 공신들이 비록 부당하게 책록되었다 하더라도 삭훈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광조 등 신진세력들의 저항은 의외로 완강하였다.대사성 김식은 중종 앞에 나아가 다음과 같이 극간하고 있었다. “이 일은 갑자기 발의된 것이 아닙니다.정국공신은 그 외람됨이 심하였습니다.이 때문에 실로 무궁한 폐단을 열었으니,지금 이것이 발의된 것은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볼 수 있습니다.이를 고치면 이익을 탐하는 근원이 제거되어 국맥이 영구할 것이니 마땅히 그 이해를 헤아려 결정할 때를 잃어서는 아니 됩니다.” 조광조에 의해서 정국공신의 개정문제가 발의된 이래 조정은 화약고처럼 불붙고 있었다.조광조가 대사헌으로 있는 사헌부와 사간원,홍문관,성균관,의정부 대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종에게 간청을 드리고 있었고,이를 거절하는 왕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의 대립이 보름간이나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10월 25일에 시작된 조광조의 발의가 보름이 지난 11월 9일 조광조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즉 정국공신 103명 중에 3분의 2에 해당하는 78명이 삭훈됨으로써 남은 공신은 25명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조광조의 승리였을까.그로부터 6일 후인 15일 밤.삭훈된 홍경주와 남곤,심정과 같은 훈구세력의 반격으로 한밤중에 숙청극이 일어나 조광조는 붕당죄의 대역 죄인이 되었으니 조광조의 승리는 6일 천하로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이 무렵 흥미로운 비화가 하나 전하고 있다.마침내 중종으로부터 78명의 정국공신을 삭훈한다는 전언을 받은 날,조광조는 승리감에 도취하여 김정과 김식,김구 등 동료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이때 불쑥 나타난 사람은 최수성.최수성은 강릉 출신의 진사로 조광조가 희천에서 한훤당으로부터 글을 배우고 있을 때 동문수학한 옛 친구였다.이러한 인연으로 최수성은 한성에 올라올 때마다 조광조의 집에서 묵고 가고 있었으므로 자연 김식을 비롯한 조광조의 신진사림파들과 안면을 트고 지내고 있는 사이였던 것이다.조광조와 달리 최수성은 벼슬에 관심이 없는 초야의 야인이었으며,특히 시문에 뛰어났다.그래서 그 자신이 시에 능했던 김정이 최수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데,불쑥 나타난 최수성은 조광조에게 말하였다. “이보게 정암,듣자 하니 자네의 기세가 하늘을 찔러 무소불위(無所不爲)라 하니 그게 사실인가?” 조광조는 어릴 때부터의 친구가 하는 말이었으므로 이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며 말하였다. “어찌하여 또 시비를 거시는가.” 이에 최수성이 정색을 하고 대답하였다. “항간에서 듣기를 자네가 아침에 출근하는 중 가마가 앞을 가로막고 늑장을 부리자 가마꾼을 잡아다가 볼기를 쳤다는데 그것이 과연 사실인가?”˝
  • 儒林(76)-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76)-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선은 건국 이래 두 번이나 쿠데타가 있었다.그 하나는 수양대군이 임금 단종을 몰아내고 정권을 찬탈한 사건이었고,또 하나는 여러 대신들이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왕위에 옹립한 반정이었다. 수양대군의 정권 찬탈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공신이 정난(靖難)공신이며,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들이 정국공신들이었던 것이다.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는 신하가 군주를 죽이는 부도덕한 일이었다.따라서 조광조는 ‘공신을 중하게 여기면 공을 탐하고 이로움을 탐해서 왕을 시해하고 나라를 빼앗는 일이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됩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군신유의(君臣有義)의 정의를 바로잡으려 했던 것이다. 유교적 이상주의를 통해 왕조의 도덕성을 재확립하려는 조광조의 의지가 정국공신의 개정으로 나타난 것이었다.그러나 중종은 이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왜냐하면 자신의 즉위를 도와준 공신들이 비록 부당하게 책록되었다 하더라도 삭훈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광조 등 신진세력들의 저항은 의외로 완강하였다.대사성 김식은 중종 앞에 나아가 다음과 같이 극간하고 있었다. “이 일은 갑자기 발의된 것이 아닙니다.정국공신은 그 외람됨이 심하였습니다.이 때문에 실로 무궁한 폐단을 열었으니,지금 이것이 발의된 것은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볼 수 있습니다.이를 고치면 이익을 탐하는 근원이 제거되어 국맥이 영구할 것이니 마땅히 그 이해를 헤아려 결정할 때를 잃어서는 아니 됩니다.” 조광조에 의해서 정국공신의 개정문제가 발의된 이래 조정은 화약고처럼 불붙고 있었다.조광조가 대사헌으로 있는 사헌부와 사간원,홍문관,성균관,의정부 대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종에게 간청을 드리고 있었고,이를 거절하는 왕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의 대립이 보름간이나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10월 25일에 시작된 조광조의 발의가 보름이 지난 11월 9일 조광조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즉 정국공신 103명 중에 3분의 2에 해당하는 78명이 삭훈됨으로써 남은 공신은 25명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조광조의 승리였을까.그로부터 6일 후인 15일 밤.삭훈된 홍경주와 남곤,심정과 같은 훈구세력의 반격으로 한밤중에 숙청극이 일어나 조광조는 붕당죄의 대역 죄인이 되었으니 조광조의 승리는 6일 천하로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이 무렵 흥미로운 비화가 하나 전하고 있다.마침내 중종으로부터 78명의 정국공신을 삭훈한다는 전언을 받은 날,조광조는 승리감에 도취하여 김정과 김식,김구 등 동료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이때 불쑥 나타난 사람은 최수성.최수성은 강릉 출신의 진사로 조광조가 희천에서 한훤당으로부터 글을 배우고 있을 때 동문수학한 옛 친구였다.이러한 인연으로 최수성은 한성에 올라올 때마다 조광조의 집에서 묵고 가고 있었으므로 자연 김식을 비롯한 조광조의 신진사림파들과 안면을 트고 지내고 있는 사이였던 것이다.조광조와 달리 최수성은 벼슬에 관심이 없는 초야의 야인이었으며,특히 시문에 뛰어났다.그래서 그 자신이 시에 능했던 김정이 최수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데,불쑥 나타난 최수성은 조광조에게 말하였다. “이보게 정암,듣자 하니 자네의 기세가 하늘을 찔러 무소불위(無所不爲)라 하니 그게 사실인가?” 조광조는 어릴 때부터의 친구가 하는 말이었으므로 이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며 말하였다. “어찌하여 또 시비를 거시는가.” 이에 최수성이 정색을 하고 대답하였다. “항간에서 듣기를 자네가 아침에 출근하는 중 가마가 앞을 가로막고 늑장을 부리자 가마꾼을 잡아다가 볼기를 쳤다는데 그것이 과연 사실인가?”
  • KCC, 현대 계열사 편입

    KCC(금강고려화학)가 현대그룹을 지원의 차원을 넘어 사실상 계열사로 편입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현정은 현대엘리베이터 회장 등 현대그룹측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력히 반발,양측간 충돌이 예상된다. ▶관련기사 24면 현대상선이 추진해온 대북사업은 이익이 나지 않으면 포기할 수 있다고 밝혀 중대 기로에 서게 됐다. KCC 정종순 부회장은 14일 서울 서초동 KCC 본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신한BNP파리바 투신운용의 사모펀드가 매입한 현대엘리베이터 주식(12.82%)은 정상영 명예회장이 단독으로 사들인 것”이라며 “이로써 KCC에 우호적인 범(汎) 현대가(家)의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은 총 44.39%”라고 밝혔다.이어 “현대중공업 등 다른 현대사까지 포함하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은 50%를 웃돈다.”고 덧붙였다. 정 부회장은 “앞으로 수익이 나지 않을 경우 현대아산의 대북사업은 재고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KCC의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매입은 외부의 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부터 현대그룹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조치”라면서 “현대그룹이 재도약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경영권을 보호하고 경영을 일신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현대그룹 관계자는 “적대적 M&A를 막기 위한 지분이 그렇게 많이 필요하냐.”면서 “KCC로 계열편입을 시키면 현대그룹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데 무슨 발전을 꾀하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안된다.”고 비판했다.현대그룹은 이르면 15일 이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KCC의 의도가 완전히 드러난만큼 이제는 적극 대응하겠다는 것이다.KCC의 현대그룹 편입에 대한 ‘명분’ 논란도 일고 있다.정 명예회장이 경영권 방어라는 당초 입장을 번복한 셈이어서 ‘삼촌이 조카 그룹을 빼앗았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됐다.KCC는 ‘지원군’이 아닌 ‘점령군’이었다는 것이다. 정 명예회장은 정몽헌 회장 사후 지분매입과 관련,“현대그룹을 지키기 위한 것일 뿐 경영권에는 관여할 계획이 없다.”고 강조했다.그러나 뒤로는 실명을 활용하지 않고 사모펀드 등을 통해 익명으로 사들였다. 일각에서는 정 명예회장측이 ‘장자일가’의 그룹 경영권 승계에 제동을 건 것을 두고 그를 ‘수양대군’에 비유하기도 한다.또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면서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위업 중 하나인 대북사업의 정리 가능성을 시사한 것도 논란이 일고 있다. KCC측은 그러나 “그룹을 누가 더 잘 이끌어 갈 수 있느냐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정 명예회장은 ‘수양대군’이 아닌 ‘세조’라는 관점에서 평가돼야 한다.”고 강변했다. 김성곤 김경두기자 sunggone@
  • KCC측 현대엘리베이터 42만주 또 매수 /정상영회장은 수양대군?

    ‘현대판 세조인가,백기사인가.’ 현대그룹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이 점입가경이다. 7일 KCC는 장 마감 15분여 직전에 우리증권 창구를 통해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42만주(전체 지분의 7.5%)를 매수했다.이날 전체 거래량(58만주)의 72%에 해당하는 것으로 매입 금액은 319억 2000만원이다. 현대엘리베이터의 대주주인 김문희 여사는 조만간 기자 간담회를 갖고 현대경영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하는 대신,현정은 회장이 사태에 대응할 것으로 전해졌다. 정상영 명예회장측은 최악의 경우 현 회장 퇴진까지 염두에 둔 듯하다.KCC 고위 관계자는 이날 “(정 명예회장이) 당분간 현 회장 체제를 바꾸지는 않겠지만 계속 뜻이 안맞으면 물러나게 할 수도 있을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압승 노리나 현재 현대엘리베이터의 현정은 회장측 지분은 대주주인 김문희 여사(18.6%) 지분을 포함,27.4%인 반면,정 명예회장측은 지난 8월 ‘범 현대가’ 9개 계열사가 매입한 16.2%에 사모펀드를 통해 매입한 12.82%,이날 장내 매입한 7.5%까지 포함,36.52%로 현 회장측 지분을 압도하고 있다.지분 규모만 놓고 보면 정 명예회장의 의도대로 현대그룹의 경영권이 움직이는 상황이다. ●현대그룹도 대응하나 현대그룹은 최근 김문희 여사가 전면에 나서는 것에 대한 정씨 문중의 비판적인 시각을 감안,2선 후퇴를 선언할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현정은 회장은 정씨 문중 소속이고,상속자인 만큼 당당하게 대응한다는 방침이다.이에 따라 7일 100만주가량의 현대상선 주식을 팔아 100억원가량의 재원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나머지도 팔아서 정몽헌 회장이 정 명예회장에게 진 빚(290억원) 가운데 잔여분 190억원도 갚을 계획이다. ●인터넷에도 뜨거운 논란 정상영 회장이 현대그룹 경영권을 위협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네티즌들 사이에는 ‘조카 기업을 노린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팍스넷의 한 네티즌은 ‘정씨라는 명분을 내세워 작은 할아버지가 손주의 몫을 날로 먹겠다는 심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오죽 가족들간에 이빨을 드러내고 먹이를 노렸으면 현정은씨가 취임했겠습니까.’라는 글이 뜨기도 했다.그는 ‘결국단종과 세조와 같은 결말을 보게 되는 건 아닌지….’라고 끝을 맺었다. 김성곤 김미경기자 sunggone@
  • “사육신 아닌 死七臣”/동작구 이색행사 2건

    국립현충원 등 나라 위해 목숨 던진 이들을 모신 곳이 많아 ‘충절의 고장’으로 일컬어지는 동작구에서 특이한 행사가 잇달아 열린다. 8∼9일에는 1456년 수양대군(세조)이 조카이자 선왕(先王)인 단종을 몰아내고 스스로 임금에 오른 것에 항거하다 참형당한 ‘사칠신’(死七臣)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열린다. 서적에 여섯으로 전해오다 김문기 선생이 세조에 대한 반기(反旗)를 주도했다는 사실을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인정함으로써 7인으로 늘었다.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선생 등은 노량진동 사육신묘에 잠들어 있다. 8일 오후 6시30분 상도2동 동작문화센터에서는 이들 7인을 기리는 무용극과 판소리 한마당,장고춤 등이 어우러진 추모제전을 연다.이튿날 낮 12시부터는 사칠신의 후손들이 참가하는 추모제향이 마련된다. 24일 동작구 노량진2동 동작도서관 옆 장승배기에서는 장승제가 열린다.조선 22대 정조가 어명으로 세운 장승이 있어 흔히 최고를 말할 때 쓰는 ‘대빵’의 원어인 대방(大方)에서 유래한 대방장승을 모시는 행사다. 한국적이면서도 서민적인 장승의 상징성을 알리고 주민 화합도 다질 예정이다.장승배기는 정조가 간신배의 모함으로 뒤주에 갇혀 억울하고도 비참하게 숨진 부친 사도세자의 넋을 달래기 위해 세운 장승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송한수기자 onek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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